한국불교전서

사경지험기(四經持驗紀) / 四經持驗紀卷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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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경지험기四經持驗紀 권3
백암 성총 모음(栢庵性聰集)
법화경지험기法華經持驗紀
진晋의 천축 비구 마하라摩訶羅는 마하연摩訶衍(大乘) 경전을 읽었다. 덕행이 크게 드러나자 국왕이 바른 믿음을 일으켜 머리카락을 펼쳐 진흙을 덮고서 그 위를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이 사람은 많은 경전을 염송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크게 공양하십니까?” 하고 여쭙자, 왕이 말하였다.
“내가 언젠가 한밤중에 이 비구를 뵙고 싶은 적이 있었다. 그분이 머무는 곳에 도착했을 때, 그분은 어느 굴속에서 『법화경』을 염송하고 계셨다. 그때 금빛 광명을 내뿜는 어떤 사람이 하얀 코끼리를 타고서 합장 공양하는 것이 보였는데,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사라졌다. 그래서 비구께 ‘제가 와서 금빛을 내뿜던 사람이 사라진 것입니까?’ 하고 묻자, 비구께서 대답하셨다. ‘그분은 변길徧吉보살입니다. 변길보살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법화경』을 염송하는 사람이 있으면 하얀 코끼리를 타고 찾아와 가르쳐 주고 인도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이 경을 염송하기에 변길보살께서 직접 찾아오신 겁니다.’ 변길보살은 곧 경에서 말하는 보현普賢보살이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고 물러났다. 이런 까닭에 내가 지금 열심히 공양을 올리는 것이다.”
진 장안長安의 석발징釋跋澄은 나이 스물에 출가하였다. 그는 근기가 노둔魯鈍하여 『법화경』을 염송하려고 원을 세웠지만 하루에 한 줄 혹은 게송 반밖에는 외우지 못했다. 이렇게 열심히 애를 써 나이 80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 부를 모두 외울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 소䟽를 들고 나타나 “천제天帝께서 대덕을 받들어 모십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이 “평생 지송한 까닭은 오로지 극락에 왕생하기 위함입니다. 도리천忉利天이 비록 수승한 곳이긴 하지만 제가 원하는 곳은 아닙니다.”라고 하자, 신은 이별을 고하고 사라졌다. 또 어느 날 저녁에는 꿈에 칠보탑七寶塔이 나타났고 자신은 제5층에 자리했는데, 멀리 바라보니 칠보성七寶城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또 두 금강신金剛神이 몽둥이를 들고 서 있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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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537_a_02L1)四經持驗紀卷三

008_0537_a_03L

008_0537_a_04L栢庵性聰集

008_0537_a_05L法華經持驗紀

008_0537_a_06L
晋天笁比丘摩訶羅讀摩訶衍德行彌
008_0537_a_07L國王正信當布髮掩泥令蹈其上
008_0537_a_08L或白王此人不多讀經何大供養
008_0537_a_09L曰我曾於夜半欲見此比丘即到其所
008_0537_a_10L見彼在一窟中讀法華經有金色光明
008_0537_a_11L乘白象王合掌供養我方近即不
008_0537_a_12L因問比丘以我來故金色人滅耶
008_0537_a_13L比丘云此是徧吉菩薩徧吉自言若有
008_0537_a_14L人誦法華經當乘白象來敎導之
008_0537_a_15L讀是經徧吉自來矣徧吉即經中普賢
008_0537_a_16L菩薩也我聞是已禮足而退是故我
008_0537_a_17L勤當供養

008_0537_a_18L
晋長安釋跋澄年二十出家根器魯鈍
008_0537_a_19L誓誦法華日記一行或半偈如是勤
008_0537_a_20L苦至八十歲方通一部一日忽見朱衣
008_0537_a_21L持䟽云天帝奉迎大德師曰生來誦
008_0537_a_22L專斯極樂忉利雖勝非所願神乃
008_0537_a_23L辭去又一夕夢七寶塔身居第五層
008_0537_a_24L望見七寶城無有涯際有二金剛神

008_0537_b_01L푸른 옷을 입은 수십 명이 손에 하얀 불자를 들고서 계단을 쓸면서 “서방정토의 보배성에서 발징을 맞이하러 왔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꿈에서 깨어나 대중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지금 천 분의 부처님이 보이는가?”
대중이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자 또 물었다.
“이상한 향기는 느껴지는가?”
모두 느껴진다고 대답하자 말을 마치고 천화하였다.
진 석법의䆁法義는 성이 축竺씨이다. 어린 나이에 도에 입문하여 『법화경』을 정밀하게 연구하였고, 그 후 도성을 나와 강석을 크게 열었으며, 흥녕興寧 연중(363~365)에는 강좌江左1)로 돌아와 회계會稽의 보산정사保山精舍에 주석하였다. 그곳에서 갑자기 병세를 느꼈지만 독경을 쉬지 않았는데 꿈에 한 도인이 나타나 창자와 위를 끄집어내서는 깨끗이 씻어 다시 뱃속에 집어넣었다. 잠에서 깨어나자 병은 곧 치유되었다.
송宋의 석담수釋曇邃는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면서 채식을 하며 베옷을 입고 『정법화경正法華經』을 매일 한 번씩 염송하였다. 그러자 한번은 밤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90일 동안 설법해 주십사 스님께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허락하지 않았지만 하도 간절히 청하여 가게 되었다. 여전히 잠이 든 상태였는데 모르는 사이 몸이 이미 백마오白馬塢 신사神祠 가운데 있었고, 또 제자 한 명도 함께 와 있었다. 이때부터 매일 비밀스럽게 그곳으로 갔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절의 스님이 신사 앞을 지나다가 높은 법좌가 두 개 있고 스승은 북쪽에, 제자는 남쪽에 앉아 있는 걸 보았는데, 강설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였다.
송의 석혜량釋慧亮은 어려서부터 맑은 명예가 있었다. 임치臨淄에 절을 세우고 『법화경』을 강설하자 학도들이 구름처럼 모였고, 천 리 밖에서도 가마를 준비하였다. 그 후 양자강을 건너 하원사何園寺에 머물자 안연지顔延之2)와 장서張緖가 그의 덕을 그리워하여 계속 붙잡아 두었다. 그들은 늘 찬탄하였다.

安汰吐珠玉於前  안安과 태汰3)가 앞에서 옥구슬을 토하고
斌亮振金聲於後  빈斌과 량亮4)이 뒤에서 쇳소리를 떨치니
淸言妙悟     청아한 말씀 오묘한 실마리
將絕復興     끊어지려다 다시 일어났네.

『통현론通玄論』을 지었고, 지금도 세상에 전한다.
송의 석혜익釋慧益은 광릉廣陵 사람이다. 효건孝建 연중(454~456)에 죽림사竹林寺에 머물면서 『법화경』을 염송하며 힘써 정근하다가 소신공양으로 약왕藥王보살의 고사5)를 본받으려 하였다. 하지만 황제가 사신을 파견해 그만두기를 권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대명大明 7년(463) 부처님 탄신일에

008_0537_b_01L執杵而立靑衣數十手執白拂拂階
008_0537_b_02L道云是西方寶城來迎跋澄夢覺問
008_0537_b_03L衆曰汝等此時見千佛否荅云不見
008_0537_b_04L又問覺非常香氣否云咸聞言已化

008_0537_b_05L
晋䆁法義姓竺氏髫齡入道研精法
008_0537_b_06L華後出京大啓講筵興寧中還江左
008_0537_b_07L住會稽保山精舍忽感疾誦經不歇
008_0537_b_08L夢一道人爲出膓胃洗滌還納腹中
008_0537_b_09L覺即愈

008_0537_b_10L
宋釋曇邃止白馬寺蔬食布衣誦正
008_0537_b_11L法華經日一遍嘗夜聞叩戶云請師
008_0537_b_12L九旬說法師不許固請乃赴猶在眠
008_0537_b_13L不覺身已在白馬塢神祠中矣并一
008_0537_b_14L弟子俱在自爾每日密徃人無知者
008_0537_b_15L後寺僧於祠前過見兩高座師在北
008_0537_b_16L弟子在南如有講說聲

008_0537_b_17L
宋釋慧亮少有淸譽立寺臨淄講法
008_0537_b_18L華經學徒雲集千里命駕後過江
008_0537_b_19L何園寺顏延之張緖眷德留連每嘆
008_0537_b_20L安汰吐珠玉於前斌亮振金聲於後
008_0537_b_21L淸言妙悟將絕復興著通玄論行世

008_0537_b_22L
宋釋慧益廣陵人孝建中止竹林寺
008_0537_b_23L誦法華經精勤苦行誓焚身効藥王菩
008_0537_b_24L薩故事帝遣使勸止不聽大明七年

008_0537_c_01L대궐로 찾아가 황제와 이별하고 불법의 보호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종산사鍾山寺에 기름 솥을 설치하고는 길패吉貝(목화)로 온몸을 감고서 손에 직접 촛불을 들고 불을 붙이며 「약왕품藥王品」을 염송하였다. 불길이 눈까지 치솟아 바야흐로 소리가 끊어질 즈음 피리소리가 들리면서 기이한 향기가 그득히 퍼졌다. 황제의 꿈에 스님이 나타나 불법을 보호할 것을 재차 부탁하자, 황제는 다음날 대회를 열어 분신한 곳에 약왕사藥王寺를 건립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송의 석승유釋僧瑜는 여항餘杭 사람이다. 최초로 여산廬山에 초제정사招提精舍를 건립하였고, 항상 『법화경』을 수지하였다. 효건孝建 2년(455)에 대중에게 말하였다.
“삼도三塗에 묶인 까닭은 정식情識과 형해形骸 때문이다. 정식이 장차 완전히 사라지려면 형해 또한 버려야 마땅하다. 약왕보살의 전철을 유독 어찌 멀다 하겠는가?”
드디어 대중과 이별하고 장작더미 속에 들어가 단정히 앉아서는 「약왕연신품藥王然身品」을 염송하고 횃불을 붙여 분신하였다. 이때 자줏빛 기운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대중들이 보았으며, 열흘 후 분신한 곳에서 두 그루 오동나무가 자랐는데, 식자들이 이르기를 사라쌍수娑羅雙樹의 징조6)라 하였다.
송의 비구니 혜옥慧玉은 장안長安 사람이다. 강릉江陵 목우사牧牛寺에 주석하며 『법화경』을 염송하였는데 열흘 만에 모두 통달하였다. 원가元嘉 연중(424~453)에 향을 사르고 부처님께 예배하고는 서원하였다.
“만약 지극한 마음에 감응하신다면 이 몸을 버린 후 부처님 국토를 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7일 안에 부처님의 광명을 보길 원합니다.”
5일째 되는 날 밤, 절 동쪽 숲에 홀연히 그 형태와 빛깔이 불덩어리 같은 광명이 나타나 온 대중들이 희유한 일이라며 감탄하였다.
송 촉도蜀都의 나여羅璵의 아내 비費씨는 어려서부터 『법화경』 염송을 부지런히 하며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 후 심장병을 앓다 혼절하여 속광屬纊7)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녀는 부처님께서 나타나 심장을 쓰다듬어 주시는 꿈을 잠깐 꾸고는 곧바로 병이 나았다. 그때 집안사람 모두 금빛 광명을 목격하였고, 또 기이한 향기를 맡았다.
송 원가元嘉 4년(427) 초의 일이다. 도읍에 사는 손언증孫彦曾 집안은 대대로 부처님을 받들었다.

008_0537_c_01L以佛生日詣闕辭帝囑以佛法乃於
008_0537_c_02L鍾山寺置油鑊以吉貝纒身手自執
008_0537_c_03L燭以然誦藥王品火及眼方聲絕
008_0537_c_04L聞笳管之聲異香芬馥帝夢師更囑付
008_0537_c_05L護法翌日設大會敕於焚身處建藥
008_0537_c_06L王寺

008_0537_c_07L
宋釋僧瑜餘杭人初於廬山建招提
008_0537_c_08L精舍常持法華孝建二年謂衆曰
008_0537_c_09L累三塗情形之故情將盡矣形亦宜
008_0537_c_10L藥王之轍獨何遠哉遂別衆入柴
008_0537_c_11L端坐誦藥王然身品發炬以焚
008_0537_c_12L見紫氣騰空旬日所焚處生雙桐
008_0537_c_13L者謂娑羅雙樹之兆

008_0537_c_14L
宋尼慧玉長安人住江陵牧牛寺
008_0537_c_15L法華經旬日通利元嘉中焚香禮佛
008_0537_c_16L誓曰若誠心有感捨身之後得見佛土
008_0537_c_17L七日之內願見佛光至第五夜寺東
008_0537_c_18L林樹忽現光相形色赫然衆嘆希有

008_0537_c_19L
宋蜀都羅璵妻費氏少誦法華勤至不
008_0537_c_20L後病心痛垂絕屬纊待時俄夢佛
008_0537_c_21L手摩其心應時即愈家衆俱覩金光
008_0537_c_22L亦聞香氣

008_0537_c_23L
宋元嘉四年初都人孫彥曾家世奉佛
008_0537_c_24L此題名及撰者名補入{編}

008_0538_a_01L그의 첩 왕혜칭王惠稱이 항상 『법화경』을 염송했는데 홀연히 강가 포구에서 빛이 감도는 것을 보고는 금불상 한 구를 발굴하였다. 거기엔 예전에 새겨놓은 이름이 있었는데 “건무建武 6년 경자(340)에 관사官寺의 도인道人 법신法新이 조성했다.”고 쓰여 있었다. 아마도 법신이 바로 첩의 전신일 것이다.
제齊 영명永明 연중(483~493)의 일이다. 고좌사高座寺의 석혜진釋慧進은 오흥吳興 사람인데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의협심이 강했다. 나이 40에 홀연히 무상無常을 깨닫고는 이로 인해 출가하여 베옷을 입고 채식을 하였다. 『법화경』을 염송하겠다고 서원을 세우고 마음을 다해 부지런히 애쓰다 책을 손에 든 채로 병이 들었다. 이에 『법화경』 100부를 조성해 지난날의 업장을 참회하겠다고 발원하였고, 소원대로 경의 숫자를 채우자 병 역시 깨끗이 나았다. 그 후 이 염송한 업을 회향하여 정토에 왕생하기를 소원하자 공중에서 “너의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다. 반드시 정토에 왕생하게 되리라.”라는 소리가 들렸다. 나이 여든이 넘어 병 없이 천화하였다.
제 경릉竟陵의 문선왕文宣王 소자량蕭子良은 자字가 운영雲英이다. 신의가 두터우며 옛것을 사랑했고, 여러 경전들을 두루 열람해 세상 사람들이 칭하기를 필해筆海라 하였다. 그는 문혜文慧 태자와 함께 불교의 이치를 정밀히 연구하고 매번 이름난 승려들을 초빙해 여러 경전들을 강의하게 하였으니, 존귀한 법의 흥성함이 강좌江左에 일찍이 없던 일이었다. 간혹 직접 여러 스님들에게 음식을 베풀고 물을 돌리기도 했으며, 『법화경』을 염송해 그 그윽한 감응이 아름답고 컸으며, 동료들과 사상을 진술하여 『정주자淨住子』 20권을 짓고 세상에 유포하기도 하였다. 정주淨住란 범어로는 포살布薩로서, 신身ㆍ구口ㆍ의意를 계율에 따라 삼가며 지낸다는 뜻이다.
북제北齊 임려산林慮山의 석법상釋法上은 조가朝歌 사람이다. 열두 살에 선禪에 투신하여 성스러운 사미라 불렸으며, 『법화경』ㆍ『유마경』 염송을 하여 겨우 20일 만에 두 부를 모두 마쳤다. 또 『법화경』 강의를 개설하여 온갖 의심에 대응하고 비난을 막자 탄복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문선제文宣帝가 조칙을 내려 대통사大統師로 삼고, 머리카락을 풀어헤쳐 땅에 깔고는 스님에게 밟고 지나가게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사해의 승려들이 선망하는 도량은 법상法上이다.”라고 하였다. 무성武成(559~560)에 이르러 병주并州 사람이 땅을 파다 한 물건을 발견했는데,

008_0538_a_01L有妾王惠稱常誦法華忽見江浦有光
008_0538_a_02L之得金佛一先有名曰建武六年
008_0538_a_03L庚子官寺道人法新造盖法新乃妾
008_0538_a_04L之前身也

008_0538_a_05L
齊永明中高座寺釋慧進吳興人少雄
008_0538_a_06L勇任俠年四十忽悟無常因出家
008_0538_a_07L衣蔬食誓誦法華用心勤苦執卷便
008_0538_a_08L乃發願造法華百部以懴先障
008_0538_a_09L願旣滿病亦良已後願廻此誦業
008_0538_a_10L生凈土聞空中聲曰汝願已足必得
008_0538_a_11L徃生凈土年八十餘無疾而化

008_0538_a_12L
齊竟陵文宣王蕭子良字雲英敦義愛
008_0538_a_13L愽覽經籍世稱筆海與文慧太子
008_0538_a_14L並精佛理每招致名僧講諸經乘
008_0538_a_15L法之盛江左未有或親爲衆僧賦食
008_0538_a_16L行水誦法華經冥感雅梵有類陳思
008_0538_a_17L著淨住子二十卷行世淨住者即梵
008_0538_a_18L語布薩謂身口意如戒而住也

008_0538_a_19L
北齊林慮山釋法上朝歌人十二投禪
008_0538_a_20L稱聖沙彌誦法華維摩纔浹二旬
008_0538_a_21L部俱了又創講法華酬抗疑難無不
008_0538_a_22L嘆伏文宣詔爲大統師布髮於地
008_0538_a_23L師踐焉時人語云四海僧望道場法
008_0538_a_24L至武成世并州人見一物

008_0538_b_01L그 형상이 마치 두 입술 같았고, 그 가운데는 혓바닥 같은 것이 있고 선홍빛이 감도는 붉은색이었다. 이 사실이 황제에게 알려져 여러 도인들에게 문의하였지만 아는 자가 없자 스님이 아뢰었다.
“이는 『법화경』을 지송한 자가 육근六根이 파괴되지 않는 과보를 얻은 것입니다. 염송의 횟수가 천 번을 채운 징험입니다. 이에 칙령을 내려 청정한 장소로 옮겨 공양하고 여러 『법화경』을 지송하는 자들을 모아 에워싸고서 경전을 염송하게 하였다. 염송하는 소리가 시작되자마자 입술과 혀가 일시에 요동쳐 이를 본 사람치고 털이 곤두서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에 조칙에 따라 석함에 넣고 산실山室에 봉하였다.
수隋 형주衡州의 석대선釋大善은 어려서부터 임야에 은거하였으며, 항상 『법화경』을 염송하였다. 후에 남악南岳을 참례하고는 관혜觀慧가 열려 몸소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실천하였는데 그 깨달아 들어간 것이 가장 깊었다. 그 후 결가부좌한 채로 서거하자 7일 동안 하늘에서 꽃비가 내리고 기이한 향기가 이슬처럼 맺혔다. 형양령衡陽令 진정업陳正業은 늘 그를 매일같이 찾아가 예배하고 존경하였으며, 내사內史 정승고鄭僧杲를 만나 스님의 덕을 여러 차례 칭송하였다. 한번은 수렵하는 사람들이 한 무리의 사슴을 에워싸자 정승고가 진정업에게 말하였다.
“그대는 대선 선사에게는 자비삼매慈悲三昧의 힘이 있다고 항상 칭송하였는데 오늘 이와 같은 사슴들을 어쩌겠는가?”
진정업이 곧 주변 사람들을 인솔해 한목소리로 “나무대선선사南無大善禪師” 하고 염송하자 사슴 떼가 허공을 날아 달아났다. 이에 대중이 모두 놀라며 감복하였다.
수 형주荊州의 석혜성釋慧成은 풍양澧陽 단段씨이며, 『법화경』 등을 몽땅 염송하였다. 사대思大 선사8)를 뵙고 법화삼매法華三昧에 들어가게 해 주십사 청하며 3년을 의지해 수행하자 마업魔業과 선귀禪鬼가 단박에 흩어지고 자취가 끊어졌다. 후에 지강枝江에 이르러 선혜사禪慧寺를 짓게 되었는데 6월에 강이 넘쳐 어느 날 밤 들보로 얹을 목재를 얻었다. 또 정사주精舍主 단홍段弘이 갑자기 기절한 일이 있었는데 스님이 찾아가자 다시 살아나 말하였다.
“처음에 붙잡혀 명부의 왕이 있는 곳으로 끌려갔다가 스님을 만났습니다. 스님은 대전으로 올라가 ‘이 사람은 공덕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풀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이 일어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고, 스님의 말씀대로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또 상常 율사라는 이가 한밤중에 이를 잡아 땅에 버렸다. 다음날 스님이 말하였다.
“어젯밤에 한 단월檀越이 얼어 죽었으니 참 가엽군요.”
상 율사가 크게 참회하고 영원히 이를 경계警戒로 삼았다.

008_0538_b_01L如兩唇其中有舌鮮紅赤色以事聞
008_0538_b_02L問諸道人無能知者師奏曰此持
008_0538_b_03L法華者六根不壞報耳誦滿千遍
008_0538_b_04L徴驗乎乃敇遷置淨所供養集諸持法
008_0538_b_05L華者圍遶誦經始發聲唇舌一時皷
008_0538_b_06L見者莫不毛竪詔以石凾緘於山室

008_0538_b_07L
隋衡州釋大善幼棲林野常誦法華
008_0538_b_08L後叅南岳得開觀慧躬行法華三昧
008_0538_b_09L所入最深後趺坐而逝七日內天爲
008_0538_b_10L雨花異香凝結衡陽令陳正業每致
008_0538_b_11L禮敬見內史鄭僧杲數稱師德常有
008_0538_b_12L獵人圍一羣鹿杲謂正業曰君常稱
008_0538_b_13L善禪師有慈悲三昧力今日如此鹿何
008_0538_b_14L正業即率左右同聲念南無大善禪師
008_0538_b_15L羣鹿騰空而出衆悉駭服

008_0538_b_16L
隋荆州釋慧成澧陽段氏誦通法華等
008_0538_b_17L見思大禪師令入法華三昧三年
008_0538_b_18L依行魔業禪鬼頓爾散絕後至枝江
008_0538_b_19L造禪慧寺六月江漲於一夜得梁木
008_0538_b_20L有段弘者爲精舍主忽氣絕師至乃
008_0538_b_21L甦曰初被執至王所見師上殿云
008_0538_b_22L人功德未了願赦之王起禮足如言
008_0538_b_23L得釋又有常律師中夜捫虱投地
008_0538_b_24L明師語曰夜來一檀越被凍可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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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천태天台 국청사國淸寺의 석관정釋灌頂은 성이 오吳씨며 임해臨海 장안章安 사람이다. 그는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어머니를 따라 삼보의 명칭을 불렀고, 일곱 살에 세속을 벗어나 매일 1만 단어를 암기했으며, 스무 살에 구족계를 받았다. 지자智者 대사를 알현하고 관법觀法을 전수받았으며 오랫동안 연마하고는 단박에 인가를 받았다. 그 후 지자 대사를 따라 금릉 광택光宅에 이르러 『법화경』 강의를 들었다. 후에 칭심사稱心寺에서 『법화경』을 강설하자 당시 “낭朗을 건너뛰고 기基를 조롱 속에 가두며 운雲을 초월하고 인印을 한참 앞서 갔다.”9)는 말이 있게 되었다. 정관貞觀 6년(632)에 입적하자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풍겼다. 스님의 교화는 흘러넘쳐 세속을 떠들썩하게 하였고, 신비한 묘용은 정해진 방편이 없었으며, 매번 송경하고 좌선할 때마다 항상 그 곁으로 하늘나라 꽃이 표표히 떨어졌다. 마을 사람 우법룡于法龍은 산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살았는데 질환으로 절명하려 하자 그의 아들이 달려와 구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스님이 그를 위해 『법화경』을 전독하고 전단향을 사르자 병자는 멀리서 코로 스며드는 향기를 맡고 곧바로 완치되었다. 또 낙안樂安의 남쪽 고갯마루 안주安洲라는 곳에 푸른 숲에 맑은 개울이 흐르고 샘물이 깊은 곳이 있었는데, 사람이 다니는 길로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스님은 이곳에 머물며 소중히 여기며 완미하였다. 그리고 돌아보며 맹세하였다.
“만약 이 지역을 평탄하게 해 준다면 마땅히 이곳으로 와서 경전을 강설하리라.”
그러고 열흘도 지나지 않아 흰 모래가 온통 솟아올라 평평하기가 옥거울처럼 되었다. 이에 『법화경』과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의해 신령의 은혜에 답하였다.
수 영은靈隱의 남천축사南天笁寺 석진관釋眞觀은 전당錢塘의 범范씨이다. 어려서부터 기이한 상호가 있었으니, 혓바닥에는 자줏빛 그물 문양이 있었고, 좌우 손바닥에는 ‘선인仙人’이란 글자가 있었다. 그는 『법화경』을 염송하면서 하루에 한 권을 떼었다. 개황開皇 14년(594)에 지독한 가뭄이 들어 당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강설하도록 청하였는데, 왕의 뜻을 막 전하자마자 소나기가 퍼부었다. 현縣 서쪽의 영은산靈隱山은 옛날부터 신선들이 산다고 하던 곳으로 스님은 이미 이곳 석실石室에서 두타행을 실천하고 있었다. 대중들이 이곳에 정사精舍를 지어 남천축사南天笁寺라 이름을 짓고는 스님을 초대해 머물도록 하였다. 스님은 항상 『법화경』을 강설하며 심요心要로 삼았다. 스님은 대야에 손을 씻을 때마다 물방울을 흘려도 땅이 젖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겼다.

008_0538_c_01L大慙永以爲戒

008_0538_c_02L
隋天台國淸寺釋灌頂姓吳臨海章安
008_0538_c_03L生甫三月能隨母稱三寶名七歲
008_0538_c_04L出俗日記萬言二十進具謁智者
008_0538_c_05L受觀法硏繹旣久頓蒙印可後隨智
008_0538_c_06L至金陵光宅聽講法華後於稱心
008_0538_c_07L講說法華時有跨朗籠基超雲邁印
008_0538_c_08L之語貞觀六年示寂室有異香師化
008_0538_c_09L流囂俗神用無方每誦經宴坐常有
008_0538_c_10L天花飄墜其側村人于法龍去山三
008_0538_c_11L十里染患將絶其子馳至祈救師爲
008_0538_c_12L轉法華經焚栴檀香病者遙聞香氣入
008_0538_c_13L應時痊愈又樂安南嶺地曰安洲
008_0538_c_14L碧樹淸溪泉流伏溺人逕不通師留
008_0538_c_15L連愛翫顧而誓曰若使斯地坦平
008_0538_c_16L來此講經曾未浹旬白沙遍涌平如
008_0538_c_17L玉鏡乃講法華金光明以荅靈惠

008_0538_c_18L
隋靈隱南天笁寺釋眞觀錢塘范氏
008_0538_c_19L有奇相舌紫羅紋左右手有仙人字
008_0538_c_20L誦法華經日終一卷開皇十四年亢旱
008_0538_c_21L時請講海龍王經序王旣訖驟雨滂注
008_0538_c_22L縣西靈隱山者舊曰仙居師旣頭陀石
008_0538_c_23L衆搆精舍號南天笁延師居止
008_0538_c_24L講法華以爲心要每盥洗遺滴地不

008_0539_a_01L하루는 고정臯亭의 신神이 『법화경』 강설을 청하였고, 감동한 신은 집을 절로 희사하였다.
수의 석법충釋法充은 구강九江 사람이며, 항상 『법화경』을 염송하였다. 여산廬山 화성사化城寺에 머물 때 스님은 승가 대중에게 매일같이 권고하였다.
“여인이 절에 들어오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 위로는 부처님의 교화를 잃고 아래로는 세간의 풍문에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대중 가운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자 스님은 산꼭대기 향로봉香爐峯에서 스스로 몸을 아래로 내던지면서 뼈와 살이 가루가 되어 정토에 왕생하겠다고 서원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공중에서 머리가 위로 향하는 자세가 되더니 나풀나풀 부드럽게 아래로 내려앉아 조금도 몸에 손상된 곳이 없었다. 대중들이 그 기이함에 감복하고는 서로 삼가서 비로소 여인의 발길이 끊어지게 되었다. 개황 말(600)에 앉아서 천화하였는데 찌는 더위에도 시신이 썩지 않았고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
수의 석법태釋法泰는 미주眉州 융산隆山 사람이며, 항상 『법화경』을 염송하였다. 그는 직접 경을 한 부 사경하였는데, 여러 차례 영험한 상서가 있자 책으로 단장하기 위해 익주益州로 향하게 되었다. 가는 길에 어쩌다 착교笮橋 아래의 물로 떨어뜨리게 되었고 살펴보았지만 찾지를 못했다. 스님은 슬피 눈물지으며 강가 아래위를 오르내리다 문득 작은 모래섬에 옷가지 하나가 걸려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명령을 내려 그것을 가져오게 하고 보니 바로 경이었고, 풀과 나무가 위로 떠받쳐 젖은 곳이 조금도 없었다. 스님은 환희를 이길 수 없었다. 곧바로 성도成都로 가서 단장을 마쳤는데, 전단나무 향으로 축軸을 만드는 등 온갖 것을 구비해 극도로 아름답게 꾸몄다. 그리고 본사로 돌아와 받들자 매일 밤 기이한 향기가 온 방에 가득 찼다. 스님은 열심히 지송하며 밤마다 꼭 한 번씩 염송하였다. 당시 표彪 법사라는 분이 그 절에서 경전을 강설하고 있었다. 그는 저녁 무렵 스님이 경을 염송하는 곳으로 갔다가 여러 대중들이 호궤胡跪하고 합장한 모습을 보았다. 표 법사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물러났다.
당唐의 석혜주釋惠主는 시주始州 가賈씨이다. 처음 경사京師의 감로사甘露寺에서 구족계를 받을 때부터 오로지 『법화경』만 염송하였다. 산신山神이 공양을 보내 왔고, 육시六時10)에 행도行道할 때면 새와 짐승들이 따라 걸었는데 마치 소리를 듣고 우러르는 듯하였다. 아울러 숨겼던 덕이 밝게 드러나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무덕武德 연중(618~626)에 향림사香林寺에 거주할 때 일이다. 그때 능양陵陽 공이 익주益州에 부임하며 짐을 진 백여 마리의 짐승을 끌고 절로 들어와 강당에다 두었는데 감히 잘못을 지적하는 자가 없었다.

008_0539_a_01L爲濡人皆異之一日臯亭神請講法
008_0539_a_02L感神捨宅爲寺

008_0539_a_03L
隋釋法充九江人常誦法華住廬山
008_0539_a_04L化城寺每勸僧衆無令女人入寺
008_0539_a_05L損佛化下墜謠俗衆有不從者師於
008_0539_a_06L山頂香爐峯自投而下誓粉身骨
008_0539_a_07L生淨土忽於空中頭自轉上冉冉而
008_0539_a_08L身無少損衆感其異相戒始斷女
008_0539_a_09L開皇末坐化隆暑不腐異香滿室

008_0539_a_10L
隋釋法泰眉州隆山人常誦法華
008_0539_a_11L寫經一部數有靈瑞向益州裝演
008_0539_a_12L墮笮橋水中求之不得師悲泣巡岸上
008_0539_a_13L忽望少洲上有一襆命取之乃經
008_0539_a_14L草木擎之宛無濕處師不勝歡喜
008_0539_a_15L即至成都裝竟以檀香爲軸備極莊
008_0539_a_16L還供本寺每夜異香滿室師勤持
008_0539_a_17L夜必一遍時有彪法師在彼寺講
008_0539_a_18L夕至師誦經所見有諸人衆胡跪
008_0539_a_19L合掌彪流汗而退

008_0539_a_20L
唐釋惠主始州賈氏初至京師甘露寺
008_0539_a_21L受具專誦法華感山神送供六時行
008_0539_a_22L鳥獸隨行似如聽仰仍爲幽顯
008_0539_a_23L菩薩戒武德中居香林寺時陵陽公
008_0539_a_24L臨益州將百餘䭾入寺就講堂安置

008_0539_b_01L스님은 그 더럽고 지저분함을 보고는 곧 방으로 들어가 지팡이와 삼의三衣를 들고 나왔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고 나귀와 노새 떼에게 향하게 하자 일시에 거꾸러졌다. 현의 관리가 크게 놀라 스님을 잡아다 상황을 보고하였다. 그러나 능양은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그저 “스님께서 저의 간탐慳貪을 부수어 주셨으니 진실로 큰 이익입니다.”라고만 말하며, 침향 열 근을 선물하고 서울로 돌아갔다. 그리고 뒤에 스님으로부터 보살계를 받았다.
당 경사京師 대안국사大安國寺의 석지린釋志鄰은 성이 범范씨이고 연兗 사람이다. 어머니 왕王씨가 삼보를 믿지 않아 석지린은 동도東都로 도망가 광수사廣受寺 수修 율사에게 의지해 출가하였다. 개원開元 10년(722)에 부모님이 생각나 고향으로 돌아오자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이미 3년이었다. 이에 악묘嶽廟로 찾아가 좌구를 펴고 『법화경』을 염송하면서 ‘악제嶽帝를 뵙고 어머니가 태어나신 곳을 알아봐야겠다’고 원을 세웠다. 밤에 악제가 나타나 그를 부르며 말하였다.
“그대의 어머니는 지옥에 갇혀 온갖 고초를 겪고 있다.”
스님이 슬피 부르짖으며 풀어 달라고 애원하자 악제가 말했다.
“무산鄮山으로 가서 육왕탑育王墖에 예배하면 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스님은 다음날 아침 절로 찾아가 슬피 울며 예배하였다. 절이 4만 번에 이르자 갑자기 공중에서 석지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쳐다보니 어머니가 “네 덕분에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나게 되었구나.” 하며 고마워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 오군吳郡 포산사包山寺의 석혜인釋慧因은 『법화경』과 『금강경』을 염송하였으며 강설을 잘하였다. 지덕至德 연중(756~758)에 있었던 일이다. 황혼 무렵 한 사람이 방으로 들어와 “왕께서 법사를 청합니다.”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결국 뻣뻣하게 굳었는데 심장과 정수리가 여전히 따뜻했으며, 7일 만에 다시 살아나 직접 말하였다.
“사자를 따라 한 성에 다다랐는데 매우 넓고 아름다웠다. 그 성으로 들어가 왕을 뵙자 왕과 그의 수하 수백 명이 전각에서 내려와 절을 하며 말했다.
‘제자는 불행히도 세상의 명예와 복록을 주관하고 아울러 죄인을 다스리고 있어 너무도 괴롭습니다. 듣기로 상인上人께서 『법화경』 강의를 잘하신다니 자세히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법좌에 올라 강의를 마치자 왕은 비단 300필을 주며 돌아가는 길에 딸려 보냈다. 곁에 보니, 100여 명의 승려들이 각기 손가락에 자란 쇠 손톱으로 서로를 할퀴어 피와 살점이 땅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에 놀라고 두려워하다 다시 살아났다.

008_0539_b_01L無敢違者師見穢雜即入房取錫杖
008_0539_b_02L三衣而出擧杖向諸驢騾一時倒仆
008_0539_b_03L縣官大驚執師申狀陵陽一無所怪
008_0539_b_04L但云蒙師破慳深爲大利贈沉香十斤
008_0539_b_05L還京後從受菩薩戒焉

008_0539_b_06L
唐京師大安國寺釋志鄰姓范氏兗人
008_0539_b_07L母王氏不信三寶鄰逃東都依廣受
008_0539_b_08L寺修律師出家開元十年思親歸寧
008_0539_b_09L母終已三載因詣嶽廟敷具誦法華經
008_0539_b_10L誓見嶽帝求母生處夜見帝召謂曰
008_0539_b_11L汝母禁獄見受諸苦師悲號祈免
008_0539_b_12L徃鄮山禮育王墖庶可救也師詰
008_0539_b_13L朝到寺哀注禮拜至四萬俄聞空中
008_0539_b_14L有呼鄰聲見母謝曰承汝之力得生
008_0539_b_15L忉利天矣倐然不見

008_0539_b_16L
唐吳郡包山寺釋慧因善講誦法華金
008_0539_b_17L至德中黃昏時見一人入云王請
008_0539_b_18L法師遂僵仆唯心頂煖七日乃甦自
008_0539_b_19L隨使者至一城甚宏麗入見王
008_0539_b_20L王從數百人下殿拜曰弟子不幸
008_0539_b_21L世名祿兼治罪人甚爲苦聞上人善
008_0539_b_22L講法華幸爲敷析於是登座講畢
008_0539_b_23L施絹三百疋令送歸傍見百餘僧
008_0539_b_24L上各生鐵爪相拏血肉塗地因驚懼乃

008_0539_c_01L깜짝 놀라 벌떡 일어나니 비단도 이미 방에 있었다.”
당의 석수단釋遂端은 명주明州 장張씨이다. 가정을 버리고 덕윤사德閏寺 스님에게 의지하여 『연화경蓮花經』을 수지하였는데 염송하는 것이 마치 오래 익힌 것 같아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감탄하였다. 12시11) 사이에 항상 외우기를 그치지 않다가 함통咸通 2년(861)에 홀연히 결가부좌하고 천화하였다. 그러자 잠깐 사이에 입에서 푸른 연꽃 일곱 송이가 자라고 그 향기가 그윽하고 청결하여 원근에서 우러러 찾아뵙고 예배하였다. 이에 동산東山에 감실을 만들어 매장하였다. 그리고 20년이 흘러 여러 차례 광명을 놓자 감실을 개봉해 살펴보니 형태와 질감이 살았을 때와 같았다. 그래서 절로 모시고 돌아와 옻칠을 하고 모시옷으로 단장하였으니, 지금 진신원眞身院이라 부르는 곳이다.
당의 석무언釋無言은 성이 이李씨이고, 밀교법密敎法에 조예가 깊었다. 그는 쇠 발우 하나를 들고서 선정에 들곤 하였다. 날씨를 맑게 하고 싶으면 발우 안에서 빛이 하늘을 밝혀 날이 개이게 하였고, 비를 오게 하고 싶으면 발우 안에서 하얀 기운을 위로 올라가게 하여 비가 되어 내리게 하였다. 이에 몽蒙씨가 관정 법사灌頂法師로 봉하였다. 하루는 『법화경』을 강설하는데 어떤 노인이 서서 듣다가 강의가 끝나자 바람과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대중이 놀라며 묻자 이수洱水의 용龍이라 하였다.
당의 석원혜釋元慧는 가흥嘉興 법공왕사法空王寺에 거주하며 평생 『법화경』을 염송하였는데 그 수를 다 헤아릴 수도 없었다. 그는 ‘세 가지 백법(三白法)’을 지키겠다고 뜻을 세웠는데, 세 가지 백법이란 몸으로 망령된 행동을 하지 않고, 입으로 망령된 말을 하지 않고, 마음으로 망령된 반연을 짓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청백한 업을 행하자 세상 사람들이 삼백三白 화상이라 불렀다. 함통咸通 연중(860~874)에 불골사리佛骨舍利를 보내자 봉상鳳翔으로 가서 왼손 엄지손가락을 태우며 『묘법연화경』을 염송하였는데, 그 손가락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다시 생겼다.
당 장안長安 고표인高表仁의 손자는 항상 『법화경』을 염송하였다. 용삭龍朔 3년(663) 정월에 말을 타고 순의문順義門을 나서는데 두 기병이 그를 쫓았다. 자칭 명부의 사자라 하며 “지금 경을 추포하러 왔다.”고 하자 고씨는 놀랍고 두려워 서쪽으로 달아났다. 보광사普光寺로 들어가려 했으나 귀신이 질풍처럼 앞으로 달려 나가 그 문을 막아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고, 다시 서쪽으로 달려 개선사開善寺로 들어가려 했으나 또 귀신이 앞을 막았다. 결국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달리다 예천방醴泉坊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008_0539_c_01L蹷然而起絹已在房中矣

008_0539_c_02L
唐釋遂端明州張氏捨家依德閏寺
008_0539_c_03L師受蓮花經誦猶宿習人皆駭嘆
008_0539_c_04L二時間恒諷不輟咸通二年忽趺坐
008_0539_c_05L而化須臾口中出靑蓮華七莖芬馥香
008_0539_c_06L遠近瞻禮於是造龕窆東山經二
008_0539_c_07L十年屢見光發乃啓視形質如生
008_0539_c_08L迎還寺漆紵飾之今號眞身院

008_0539_c_09L
唐釋無言姓李精密敎法嘗持一銕
008_0539_c_10L鉢入定欲晴則鉢內火光燭天遂霽
008_0539_c_11L雨則鉢內白氣上昇遂雨蒙氏封爲灌
008_0539_c_12L頂法師一日講法華有老翁立聽畢
008_0539_c_13L乘風雲去衆驚問之曰洱水龍也

008_0539_c_14L
唐釋元慧居嘉興法空王寺生平誦法
008_0539_c_15L不計其數立志三白法三白者
008_0539_c_16L身不妄動口不妄語意不妄緣爲三
008_0539_c_17L白業時稱三白和尙咸通中送佛骨
008_0539_c_18L舍利徃鳳翔煉左拇指口誦蓮經
008_0539_c_19L指不踰月復生

008_0539_c_20L
唐長安高表仁之孫常讀法華龍朔三
008_0539_c_21L年正月乘馬出順義門有兩騎逐之
008_0539_c_22L稱是冥使時來追卿高惶怖西走
008_0539_c_23L投普光寺鬼疾前阻門不令入又西
008_0539_c_24L欲入開善寺鬼復前阻遂相從馳

008_0540_a_01L한 기병이 앞에 있기에 고씨가 주먹으로 때려 떨어뜨리자 뒤에 있던 귀신이 노하여 멀리서 고씨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말 아래로 내동댕이쳤다. 집안사람들은 그를 수레에 실어 돌아왔고 저녁이 되어서야 깨어나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부의 왕을 만나자 왕이 말하였다.
‘너는 왜 스님들의 과일을 도둑질하고, 또 삼보의 허물을 발설하였느냐?’
고씨가 죄를 승복하고 감히 말하지 못하자 왕이 말하였다.
‘과일을 도둑질한 죄는 쇠구슬 450개를 삼켜야 합당하며 4년 동안 죗값을 받아야 다할 것이다. 삼보의 허물을 들춘 죄는 그 혓바닥에 쟁기질을 해야 합당하다.’
그리고는 풀어 주며 돌려보냈다.”
이 말을 마치고 다시 혼절하였는데 입으로 어떤 물건을 삼키는 형상이었으며, 온몸에 붉은 포진이 돋고 하루가 경과해서야 깨어났다. 이와 같이 4년을 하고서야 쇠구슬을 삼키는 과보가 다하였다. 홀연히 또 기절하여 정신이 명부의 왕이 있는 곳에 다다르자 왕은 귀신 사자에게 명하여 그의 혀를 뽑아 쟁기질을 하라고 명하였다. 귀신이 든 갈고리와 끌이 매우 예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끝내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왕은 이에 장부를 살피고는 일찍이 『법화경』을 독송했던 힘이 있어 혀를 뽑을 수 없음을 알았다. 결국 그는 죄를 면하고 풀려나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항상 화도사化度寺에서 다섯 가지 참회법을 행하며 지난날의 방자함을 참회하였다.
당 경사京師 사람 번과潘果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부평현富平縣 도수소리都水小吏로 임명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여러 명의 소년들과 함께 야외에서 놀다가 양 한 마리가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보고 번과와 소년들이 그 양을 잡아 돌아오게 되었다. 양이 중도에서 목을 놓아 울자 번과는 주인이 들을까 겁나 양의 혀를 뽑고 죽여서는 잡아먹었다. 그리고 1년 후 번과는 혀가 점점 안으로 말려 들어가 결국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현령 정여경鄭餘慶은 그가 거짓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입을 벌리게 하고 검사하였다. 혓바닥이 겨우 콩알만큼밖엔 남아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는 그 까닭을 묻자 번과가 종이를 가져와 글로 써서 답하였다. 현령이 『법화경』을 사경해 양의 명복을 빌어 주라고 가르쳐 주자 번과는 그 말대로 발심하고는 사경하며 재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리고 1년 후 혀가 점점 자라나 다시 예전처럼 회복되었다. 또 관리에게 찾아가 사실을 밝히는 글을 올리자 현령이 그를 이정里正으로 삼았다.

008_0540_a_01L入醴泉坊一騎在前高以拳擊墜之
008_0540_a_02L後鬼怒遙挽高髮擲下馬家人輿還
008_0540_a_03L至晩乃蘇自云備見冥王王云汝何盜
008_0540_a_04L取僧果復說三寶過高伏罪無敢言
008_0540_a_05L王云盜果之罪合呑銕丸四百五十枚
008_0540_a_06L四年受之乃盡說過之罪合耕其舌
008_0540_a_07L因放還言已復絕口如呑物狀通身
008_0540_a_08L皰赤經日方醒如是四年呑丸報盡
008_0540_a_09L忽復氣絕神至王所王命鬼使拔舌
008_0540_a_10L耕之鬼拈鉤鑿銛利異常終不能及
008_0540_a_11L王乃簡案知曾讀法華力舌不可出
008_0540_a_12L遂免罪放還自後常于化度寺行五悔
008_0540_a_13L以懴前愆

008_0540_a_14L
唐京師人潘果年弱冠任富平縣都水
008_0540_a_15L小吏及歸家與少年數人遊野外
008_0540_a_16L一羊食草果與少年捉之歸羊中路
008_0540_a_17L鳴喚果懼主聞拔其舌殺食之後一
008_0540_a_18L果舌漸消縮陳牒解吏職縣令鄭
008_0540_a_19L餘慶疑其詐使開口驗之見舌根
008_0540_a_20L如豆許不盡問其故取紙書以荅之
008_0540_a_21L縣令敎寫法華經爲羊追福果如言
008_0540_a_22L發心書寫齋戒不怠後一年舌漸得
008_0540_a_23L平復如故又詣官陳牒縣令用爲
008_0540_a_24L里正

008_0540_b_01L
당의 소상백少常伯 최의기崔義起의 장인 소문갱蕭文鏗은 평소 『법화경』을 지송하며 그 횟수가 천 번을 채웠고, 훈채葷菜를 영원히 끊었다. 최의기의 아내 소씨가 용삭龍朔 3년(663) 5월에 죽어 21일 동안 재를 지내는데 시녀 소옥素玉이 갑자기 죽은 부인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살았을 때 삼보를 믿지 않아 저는 지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위해 경을 염송하고 재를 지내 준 덕분에 잠시 풀려나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20일째 되는 날 다시 찾아와 소옥을 데려가 제가 죗값 치르는 것을 보게 하겠습니다.”
약속한 날이 되자 소옥은 정말 죽었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 말하였다.
“큰 성의 관청이 나타났고, 부인이 별원別院으로 들어가자 순식간에 벌건 솥과 쇠로 된 침상이 함께 들이닥쳐 온갖 고초를 골고루 받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연화대에 앉은 소문갱이 나타나 소옥에게 말하였습니다.
‘내 딸은 살아서 성냄과 질투가 많았으며, 내 말을 믿지 않고 인과를 믿지 않았기에 지금 이런 고통을 받는 것이다. 나는 구할 방도가 없으니 네가 돌아가거든 집안사람들에게 공덕을 닦게 하라. 그러면 해탈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범승梵僧을 만났는데 공중에서 내려와 소옥에게 『법화경』 염송을 가르쳐 주고는 말하였습니다.
‘너는 이 경을 기억했다가 염부제 사람들에게 염송한 것을 전해 주거라. 분명 믿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인덕麐德 원년(664) 정월에 설 장군薛將軍 댁에서 재를 열고, 소옥을 초대해 명부에서 들은 경을 염송해 보게 하였다. 그 자리에 있던 어떤 범승이 그것을 듣고는 합장하고 찬탄하였다.
“서쪽 나라의 경본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에 대중이 비로소 놀라며 탄복하였다.
당 황黃씨의 두 딸은 진릉晋陵 사람이다. 어려서 사람들이 『법화경』 염송하는 것을 듣고는 한참을 귀 기울이다 “나는 그 뜻을 안다.” 하였고, 정말 실상實相의 뜻을 깊이 담론할 수 있었다. 그 후 경사京師 안국사安國寺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으니, 첫째는 이름이 지법持法이었고, 둘째는 이름이 혜인慧忍이었다. 함께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고 있을 때, 홀연히 공고空姑라는 비구니가 나타났는데 그 말씨와 모양새가 매우 기이하였다. 그는 예참하는 곳으로 내려와 함께 행도行道하였고, 매일 한밤중이면 몸에서 불덩어리 같은 빛을 뿜었다. 이와 같이 3년을 하다 사라졌다. 혹자는 보현보살의 화현이 아닌가 하였다. 흥원興元 3년(786)에 양숙梁肅이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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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少常伯崔義起妻父蕭文鏗素持法
008_0540_b_02L滿數千遍永斷葷茹妻蕭氏以龍
008_0540_b_03L朔三年五月亡三七日修齋婢素玉忽
008_0540_b_04L作夫人語謂生時不信三寶今受苦不
008_0540_b_05L可言繇汝軰爲我誦經修齋得暫放歸
008_0540_b_06L至第二十日更來將素玉去看我受罪
008_0540_b_07L及期玉果死三日而甦曰見大城宮府
008_0540_b_08L夫人入別院須臾火鑊鐵牀併至備受
008_0540_b_09L楚毒忽見鏗坐蓮華臺語素玉曰
008_0540_b_10L女生多嗔妬不信我言不信因果
008_0540_b_11L受此苦我無能救汝歸可語家人
008_0540_b_12L修功德庶得解脫又見梵僧從空中
008_0540_b_13L敎玉誦法華經謂曰汝當記持此經
008_0540_b_14L爲閻浮提人傳誦當有信者麐德元年
008_0540_b_15L正月薜將軍宅設齋迎玉試誦冥經
008_0540_b_16L有梵僧聞之合掌嘆曰如西國本不異
008_0540_b_17L衆始驚服

008_0540_b_18L
唐黃氏二女晋陵人幼聞人誦法華經
008_0540_b_19L傾聽久之曰吾解此義矣遂能深談實
008_0540_b_20L相之旨後入京師安國寺爲尼長名持
008_0540_b_21L次名慧忍同修法華三昧忽有尼
008_0540_b_22L號空姑詞貌甚異降禮懴所相與行
008_0540_b_23L每至中夜身光赫然如是三年而
008_0540_b_24L或疑爲普賢化現云興元三年

008_0540_c_01L
오대五代 성도成都의 대자사大慈寺에 항상 『법화경』을 지송하는 승려가 있었다. 하루는 청성산靑城山으로 들어가 약을 채취하며 개울을 따라 험난한 곳을 지나는데 홀연히 사방에서 안개와 구름이 일어나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얼마 있자 구름이 흩어지더니 개울 너머로 매우 높고 화려한 집 한 채가 보였다. 스님이 문에 다다르자 하인이 들어가 보고하더니 다시 나와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스님에게 익힌 경을 염송해 주십사 청합니다.”
스님이 낭랑한 목소리로 「보탑품寶塔品」까지 염송하자 양 눈썹이 어깨까지 드리운 선생이 야인의 복장에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서 향을 사르며 읍하고 묵묵히 들었다. 염송이 끝나자 차조기 밥에 구기자와 국화를 차려 주었는데 향기롭기가 감로와 같았다. 또 황금 1환鍰을 베풀며 하인에게 전송하게 하였다. 중도에 스님이 그분의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묻자 하인이 말하였다.
“이분이 손사막孫思邈 선생이십니다.”
스님은 그때서야 아차 하고 탄식하였고 하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스님은 3일 동안 다시 찾아보았지만 끝내 지난번의 그곳을 찾을 수 없었다. 돌아와 살펴보니 선물로 받았던 물품은 바로 금전이었고, 그 한 끼 음식 덕분에 몸이 가볍고 병이 없었다. 『당사唐史』에서 손사막은 150세라 하였는데, 경을 염송해 주십사 청한 때까지는 다시 300년이나 거리가 있다.
오월吳越 항주杭州 용흥사龍興寺의 석가주釋可周는 부傅씨이다. 출가하여 예장豫章을 떠돌며 『법화자은소法華慈恩䟽』를 깊이 연구하였고, 용흥사로 찾아가 『법화경』 강좌를 개설하자 스님들과 속인들이 항상 수백 명을 헤아렸다. 전당錢塘 무숙왕武肅王의 명으로 스님이 천보당天寶堂에서 밤에 명부의 사령들을 위해 경을 강설하자 여러 귀신들이 모습을 드러내 호위하는 모습이 여러 차례 목격되었다. 한번은 무당이 동관사銅官祠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오랫동안 청해도 신이 내려오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 후 무당에게 실려 “내가 대신大神들을 따라 천보당으로 법을 들으러 갔다 이제 돌아왔다.”고 하였다. 무숙왕이 이를 기이하게 여겨 스님에게 원하는 만큼 금과 발우를 가져가게 하고 통명通明이란 호를 하사하였다. 『법화서초法華序鈔』 한 권을 저술하였다.
주周 제주齊州 개원사開元寺의 석의초釋義楚는 일곱 살에 집을 버리고 『법화경』에 예배하였는데 한 글자마다 각각 예배하였다. 이렇게 예배하며 한 부를 모두 끝내고는 『석씨육첩釋氏六帖』을 찬집하였다.

008_0540_c_01L肅記

008_0540_c_02L
五代成都大慈寺有僧恒誦法華經
008_0540_c_03L日入靑城山採藥沿溪越險忽雲霧四
008_0540_c_04L不知所適有頃雲㪚見一閣跨溪
008_0540_c_05L甚崇麗僧至門僕人入報出曰先生
008_0540_c_06L請師誦所業經僧朗聲誦至寶塔品
008_0540_c_07L先生野服藜杖兩眉垂肩焚香揖聽
008_0540_c_08L良久誦已設秫飯杞菊馨若甘露
008_0540_c_09L金一鍰僕送至中途僧問何姓名
008_0540_c_10L曰此孫思邈先生也僧方嗟嘆僕忽不
008_0540_c_11L復尋索三日竟迷舊處歸視所䞋
008_0540_c_12L乃金錢也繇玆一饍身輕無疾唐史
008_0540_c_13L邈百五十歲至請誦經時距前又
008_0540_c_14L三百年矣

008_0540_c_15L
吳越杭州龍興寺釋可周傅氏出家遊
008_0540_c_16L豫章窮究法華慈恩䟽詣龍興寺
008_0540_c_17L演法華緇白恒數百人錢武肅王
008_0540_c_18L師於天寶堂夜爲冥司講經徃徃見諸
008_0540_c_19L鬼神現形扈衛嘗有巫者祭銅官
008_0540_c_20L神久請不下後附巫語云吾從大神
008_0540_c_21L天寶堂聽法方回武肅異之賚師金如
008_0540_c_22L意併鉢賜號通明著法華序鈔一卷

008_0540_c_23L
周齊州開元寺釋義楚七歲捨家禮法
008_0540_c_24L華經字字各拜拜且徹部纂釋氏六

008_0541_a_01L「법왕리견부法王利見部」에서 시작해 「사자수류부師子獸類部」까지 아름다운 장편이 완성되자 현덕顯德 원년(954) 칙령으로 사관史舘에 부속시켰다. 처음 스님이 찬집을 시작했을 때 양쪽 눈이 실명하였는데 의사가 치료할 수가 없었다. 이에 그윽한 마음으로 잘못을 참회하였고, 이와 같이 정성을 다하기를 끊임없이 하자 다음 해에는 시력이 돌아왔다. 이에 사람들이 감응을 징험한 것이라 하였다.
송宋 동액산東掖山 능인사能仁寺의 석본여釋本如는 어려서 법지法智에게 의지하였다. 상부祥符 4년(1011) 동산東山에 이르러 여러 경전을 강의하였으며, 또 백 명의 승려를 모아 법화참法華懺을 1년간 닦았다. 한번은 산 서남쪽에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드러눕자 주장자로 때리며 “여기는 네가 머물 곳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호랑이는 머리를 숙이고 떠났다. 그 후 호랑이가 드러누웠던 곳에 암자를 짓고 그곳에서 살았다. 예전부터 다섯 가지 신통을 갖춘 신선이 그곳에 살고 있었는데, 스님이 좌선할 때마다 문득 평상을 잇대고 공중을 날아다녔다. 스님은 여산廬山의 가풍을 사모하여 순공郇公 장득상章得象을 비롯한 여러 현사들과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였다. 경력慶曆 연중(1041~1048)에 신조神照라는 법호와 자줏빛 방포方袍를 하사하고, 백련白蓮이라는 사액寺額을 내렸다. 그 후에 설법한 다음 대중과 이별하였다. 가정嘉定 4년(1211)에 이장하였는데 이때는 이미 200년 가까이 지났을 때였다. 그런데도 함을 열자 인자한 얼굴이 엄연하였고 수염과 머리카락이 길게 자랐으며 사리가 감실에 가득했다.
송의 석유엄釋有嚴은 임해臨海 호胡씨이다. 열네 살에 동산으로 가서 신조神照에게 의지해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익혔다. 소성紹聖 연중(1094~1098)에 적성赤城 동쪽 봉우리 풀명자나무 아래에다 초가를 짓고는 스스로 사암樝菴이라 하고 그곳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행하였다. 가뭄이 들어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한번 지송하자 기이하게도 메아리처럼 감응하였다. 어머니가 눈병이 나자 스님은 관음대사觀音大士를 마주하고서 해의 정기가 가득한 마니주를 손에 든 모습을 상상하였다. 그러자 어머니는 곧 스님이 해를 받쳐 들고 앞에 서 있는 꿈을 꾸었고, 꿈에서 깨자 눈이 밝아졌다. 하루는 선정에 들었을 때 천신이 나타나 “스님께서는 정토에 태어날 업을 이미 성취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연못에 큰 연꽃이 피어 있고 하늘나라 음악이 사방에서 연주되는 꿈을 꾸었다. 이에 서방정토에 돌아가기로 마음먹고는 스스로를 전송하는 경을 한 번 염송하였다.

008_0541_a_01L始法王利見部終師于 [5] 獸類部
008_0541_a_02L爲巨編顯德元年敕付史舘初師著
008_0541_a_03L兩目表 [6] 醫工莫療遂冥心懴過
008_0541_a_04L如是虔虔無間再歲還明人謂爲徴感
008_0541_a_05L

008_0541_a_06L
宋東掖山能仁寺釋本如幼依法智
008_0541_a_07L符四年至東山講諸經又集百僧
008_0541_a_08L法華懴一年嘗於山西南見一虎臥
008_0541_a_09L以杖擊之曰此非汝住處虎俛首去
008_0541_a_10L後於虎臥處結菴皈其中先有五通神
008_0541_a_11L居此師每禪坐輒連床舁行空中
008_0541_a_12L慕廬山之風與郇公章得象諸賢結白
008_0541_a_13L蓮社慶曆中賜號神照及紫方袍
008_0541_a_14L寺額曰白蓮後說法訣別嘉靖 [7] 四年遷
008_0541_a_15L時已二百年矣發凾慈顏儼然
008_0541_a_16L髮垂長舍利滿龕

008_0541_a_17L
宋釋有嚴臨海胡氏十四徃東山
008_0541_a_18L神照習天台敎觀紹聖中隱居赤城東
008_0541_a_19L結茆樝木之下因自號曰樝菴
008_0541_a_20L法華三昧水旱禳禬一爲持誦奇應
008_0541_a_21L如響母病目師對觀音大士想日精
008_0541_a_22L摩尼手母即夢師擎日當前覺而目明
008_0541_a_23L一日定中見天神告曰師淨業成矣
008_0541_a_24L又夢池中生大蓮天樂四列乃作西歸

008_0541_b_01L대중에게 알린 후 7일째 되는 날 결가부좌한 채로 천화하자 탑 꼭대기에 달빛 같은 광명이 나타나 3일 만에 사라졌다.
송의 석처함釋處咸은 천태天台 왕王씨이다. 구족계를 받은 후 ‘불법은 광대하니 만일 힘써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를 볼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하고는 곧 천봉天封으로 들어가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3년 만에 열람을 끝내고 신조神照 스님을 찾아가 알현하고는 교지敎旨를 깊이 깨달았다. 그 후 백련사白蓮寺의 주인이 되어 천태교학을 전수하고, 법화삼매를 닦았다. 원우元祐 원년(1086) 7월에 대중을 소집하여 옷과 발우를 나눠 주고는 “나는 23일에 정토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시자에게 새벽종이 울리면 알리라고 일러두고, 그 시각이 되자 결가부좌한 채로 입적하였다. 양차楊次 공이 그를 찬양하였다.

遺書封了加趺坐  유서를 봉한 채로 결가부좌하시고선
不住白蓮生白蓮  백련사에 머물지 않고 하얀 연꽃에 태어나셨네.

송의 석사조釋思照는 전당錢塘 양陽씨이다. 신오神悟 스님을 참례하여 계합한 바가 있었다. 그리고 나선 피를 뽑아 『법화경』을 일곱 축이나 사경하였으며, 작은 암자를 짓고 덕운德雲이란 이름을 붙였다. 오로지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닦기 무려 30년을 하였다. 선화宣和 원년(1119) 봄 어느 날 저녁, 금빛 몸을 나타낸 부처님을 뵙고 곧 결인結印한 채로 앉아서 천화하였다. 스님은 『법화경』을 천 부나 염송하였고, 정토칠경淨土七經의 한 글자마다 한 번 예배하였다. 또 『법화경』에는 열 차례가 넘게 예배하였으니, 그 고행은 따를 자가 없다.
송의 석종아釋從雅는 전당錢塘 사람이다. 처음에는 해월海月로부터 지관止觀을 배워 통달하였다. 그리고 결국 남산南山 천왕원天王院으로 들어가 『법화경』을 2만여 부나 염송하고 여러 경전을 염송하였다. 부처님께 예배하기를 100만 배에 이르렀고, 『법화경』 한 글자마다 일 배씩 하기를 세 차례나 하였으며, 마음으로 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약하며 일평생 앉을 때마다 서쪽을 등지지 않았다. 그의 정성이 이와 같아 헌사憲使 양걸楊傑이 『안락국삼십찬安樂國三十讃』을 제작하여 스님에게 보냈다. 그 첫 번째 수에서 말하였다.

淨土周沙界    정토는 사바세계에 두루하건만
何芳獨指西    왜 향기로운 곳으로 꼭 서쪽만 가리킬까.
但能從一入    이 하나를 따라 들어갈 수만 있다면
處處是菩提    곳곳이 바로 보리의 도량이로다.

스님께서 정주사淨住寺에 구품삼매九品三昧를 그리고 돌에다 이 찬문을 새기자 많은 사람들이 감화를 입었다.

008_0541_b_01L自餞一篇示衆後七日跏趺而化
008_0541_b_02L上有光如月三日方隱

008_0541_b_03L
宋釋處咸天台王氏受具後念佛法
008_0541_b_04L廣大若不力學何能見道即入天封
008_0541_b_05L閱藏經三年而畢徃謁神照深悟敎旨
008_0541_b_06L後主白蓮寺傳台敎修法華三昧元祐
008_0541_b_07L元年七月召衆出次孟散之曰吾二
008_0541_b_08L十三日當還凈土戒侍者晨鍾鳴
008_0541_b_09L告知至時趺坐而寂楊次公爲之賛曰
008_0541_b_10L遺書封了加趺坐不住白蓮生白蓮

008_0541_b_11L
宋釋思照錢塘陽氏叅神悟有契
008_0541_b_12L而刺血書法華七軸築小庵曰德雲
008_0541_b_13L修念佛三昧凡三十年宣和元年春
008_0541_b_14L一夕見佛現金色身即結印坐化師誦
008_0541_b_15L蓮華經千部淨土七經一字一禮
008_0541_b_16L禮法華十過苦行無兩

008_0541_b_17L
宋釋從雅錢塘人始從海月學通止
008_0541_b_18L遂入南山天王院誦法華經二萬餘
008_0541_b_19L誦諸經及禮佛至百萬拜禮法華
008_0541_b_20L經一字一拜者三過心期淨土一生坐
008_0541_b_21L不背西其精誠如此憲使楊傑爲製
008_0541_b_22L安樂國三十讃贈師其一云淨土周沙
008_0541_b_23L何芳獨指西但能從一入處處是
008_0541_b_24L菩提師於淨住寺啚九品三昧鐫讃

008_0541_c_01L그 후 병 없이 앉아서 서거하였고, 기이한 향기와 천상의 음악이 감응하자 모두들 서방의 성현들께서 맞이하러 오신 징조라 하였다.
송의 석함형釋含瑩은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이어받았다. 일찍이 은으로 『묘법연화경』을 사경한 적이 있었고, 이 일로 불보살을 만나자 곧 금으로 글씨를 썼다. 이에 세칭 법문法門 최고의 보배라 하였다. 건염建炎 연중(1127~1130)에 도적 떼 금나라가 쳐들어와 절을 몽땅 태워 버렸다. 그때 내려앉은 기왓장과 돌무더기 속에서 이 경을 발견하였는데 한 글자도 손상되지 않았다.
송의 석조남釋祖南은 남악南嶽의 운봉雲峯에 거주하며 피를 뽑아 『아미타경』 500권, 『금강경』 100권, 『법화경』 10부를 27년에 걸쳐 사경하였다. 이 모두를 피로 사경하였기에 말년에는 피가 마르고 뼈가 드러났지만 염불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방장실에 앉은 채로 천화하자 미간에서 사리가 솟아올랐으며, 채취하면 또 생기고 하였다.
송의 유사정喩思淨은 전당錢塘 사람이며 자호를 정토자淨土子라 하였다. 일찍이 영瑛 법사를 모시고 『법화경』을 강의한 뒤로는 항상 지송하며 온 마음으로 염불하였다. 여가가 있을 때면 불상을 그렸는데, 그릴 때면 반드시 깨끗한 방에서 생각을 고요히 하고 아미타불의 광명을 본 다음에야 붓을 댔다. 소흥紹興 정사년(1137)에 단정히 앉아 7일 동안 일심으로 염불한 다음 조용히 천화하였다.
송의 징사徴士 좌신左伸은 임해臨海 사람이며 신조神照로부터 보살계를 받았다. 서방정토 세 성인의 상像을 조성해 아침저녁으로 정성을 다해 섬겼으며, 『법화경』 3,400부, 『반야경』 2만 권을 염송하였다. 소성紹聖 2년(1095) 가을, 사문들에게 『법화경』 첫머리의 제목을 합장하게 하고는 한 번 더 보살계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세 위인이 강 언덕에 서서 배에 타라며 좌신을 부르는 꿈을 꾸었다. 곧 스님들을 청해 『아미타경』을 염송하게 하고는 갑자기 “나는 이미 부처님의 광명을 보았다.” 하더니 단정히 앉아 천화하였다.
송 인화仁和의 범엄范儼은 항상 채식을 하였고 세상 인연에 담박하였다. “나는 본래 잠시 머무는 나그네일 뿐이다.” 하고는 매일 『법화경』을 염송하였고, 또 직접 한 부를 사경하여 매우 아름답게 장식하였다.

008_0541_c_01L於石人多感化後無疾坐逝感異香
008_0541_c_02L天樂咸謂西聖來迎之兆

008_0541_c_03L
宋釋含瑩禀天台敎觀嘗以銀書妙蓮
008_0541_c_04L遇佛菩薩則用金字世稱爲法門
008_0541_c_05L至寶建炎中金冦至院宇焚蕩於瓦
008_0541_c_06L礫中尋獲此經不損一字

008_0541_c_07L
宋釋祖南居南嶽之雲峯刺血書阿彌
008_0541_c_08L陀經五百卷金剛經一百卷法華經十
008_0541_c_09L終二十七年皆用血書末年血乾
008_0541_c_10L骨立念佛聲不絕一日在方丈坐化
008_0541_c_11L眉間迸出舍利隨取隨生

008_0541_c_12L
宋喩思淨錢塘人自號淨土子早侍
008_0541_c_13L瑛法師講法華後常持誦專心念佛
008_0541_c_14L暇則畫佛像凡畫必於淨室寂想見彌
008_0541_c_15L陀光明乃下筆紹興丁巳歲端坐七
008_0541_c_16L一心念佛漠然化去

008_0541_c_17L
宋徴士左伸臨海人從神照授菩薩
008_0541_c_18L鐫西方三聖像旦夜虔事誦法華
008_0541_c_19L三千四百部般若二萬卷紹聖二年秋
008_0541_c_20L命沙門唱法華首題增受菩薩戒尋夢
008_0541_c_21L三偉人立江臯召伸登舟即請僧誦彌
008_0541_c_22L陀經遽曰我已見佛光端坐化去

008_0541_c_23L
宋仁和范儼常時蔬食世緣淡然
008_0541_c_24L我自是旅泊耳日誦法華復手書經一

008_0542_a_01L대관大觀 연중(1107~1110)에 홀연히 여섯 어금니를 가진 흰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나타나 금색 광명을 놓으며 범엄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일찍이 『법화경』을 염송하고 아미타불을 염하여 정토에 왕생하게 되었기에 이렇게 알려 주러 찾아왔다.”
하룻밤 지나 여러 성인들이 손을 내미는 모습을 관하고는 자리에 앉아 합장하고 서거하였다.
송 변경汴京의 장경張慶은 상부祥符 연중(1008~1016)에 사옥司獄이 되었다. 항상 자비심과 진실함으로 스스로를 지키며 매일 직접 죄수들의 시중을 들고 옥사를 청소하였다. 무더운 달일수록 더욱 열심히 하며 음식과 탕약과 와구臥具를 반드시 매우 정결히 하였다. 그리고 매일같이 그의 수하들에게 경계시켰다.
“사람이 불행하여 법의 그물에 걸린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불쌍함을 몰라 준다면 죄인들이 어디 가서 하소연한단 말인가.”
평생 『법화경』을 지송하였고, 중죄를 지은 죄수가 사형 당할 때마다 반드시 깨끗이 재계하고서 경을 염송하였으며, 1개월이 지나야 그쳤다. 그리고 죄수들에게 “죄가 있으면 스스로 인정해야만 한다. 선량한 이를 무고하여 자신의 죄를 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곤 하였다. 그의 아내 원袁씨가 나이 마흔여덟에 역질에 걸려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말하였다.
“나는 처음에 어떤 더러운 곳에 이르렀지만 생각만큼은 맑고 깨끗할 수 있었다. 그때 홀연히 하얀 옷을 입은 대사大士12)께서 나타나시어 ‘그대는 이곳에 와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또 ‘아직도 후손이 없구나. 그대의 남편은 음덕陰德이 많으니 흥하는 자손이 있으리라’ 하시고는 손으로 끌어당겨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과연 다음 해 아들을 낳았고, 삼반차직三班借職13)의 관직을 누렸다. 장경은 나이 여든둘에 병 없이 죽었으며, 6대 모두 관리로 임명되어 다들 세족世族이라 하였다.
송의 무위군사無爲軍使 이우李遇는 평소 『법화경』을 염송하였다. 어느 날 갑자기 어두운 밤길에서 그를 모독하는 여러 귀신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자 곧바로 베옷을 입고 짚신을 신은 한 노인이 나타나 매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이 사람은 항상 『법화경』을 염송한 사람이니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된다.”
그러자 귀신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노인 역시 사라졌다.
송의 대제待制 조열지晁說之14)는 자가 이도以道이다. 언젠가 호남湖南에 갔다가 명지明智를 방문해 삼천경관三千境觀의 말씀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배우기를 원하였다.

008_0542_a_01L備極莊嚴大觀中忽見普賢乘六牙
008_0542_a_02L白象放金色光謂儼曰汝嘗誦法華
008_0542_a_03L念阿彌陀佛得生淨土故來相報
008_0542_a_04L一夕觀衆聖授手就座合掌而逝

008_0542_a_05L
宋汴京張慶祥符中爲司獄常以慈愼
008_0542_a_06L自持日躬侍掃滌暑月尤勤飮食湯
008_0542_a_07L藥臥具必加精潔每戒其徒曰人不
008_0542_a_08L幸䍦於法我軰若不知所恤則罪者何
008_0542_a_09L所赴訴生平持誦法華經每遇重囚就
008_0542_a_10L必爲齋素誦經一月乃止嘗敎獄
008_0542_a_11L有罪當自認毋誣良善以重己孽
008_0542_a_12L妻袁氏年四十八染疫死三日甦曰
008_0542_a_13L我始至一穢所思得淸凉忽見白衣大
008_0542_a_14L謂曰汝不當至此且尙未有嗣
008_0542_a_15L夫多陰德子孫當有興者乃以手挈之
008_0542_a_16L出得甦明年生子亨官三班借職
008_0542_a_17L年八十二無疾終六孫皆顯官號世
008_0542_a_18L

008_0542_a_19L
宋無爲軍使李遇素誦法華忽昏夜
008_0542_a_20L途値羣鬼侮之俄見一老叟布袍草屨
008_0542_a_21L厲聲叱云此人常誦法華不得相犯
008_0542_a_22L鬼遂散老人亦不見

008_0542_a_23L
宋晁待制說之字以道嘗徃湖南
008_0542_a_24L明智聞三千境觀之說欣然願學

008_0542_b_01L만년에는 매일 『묘법연화경』 염송을 과업으로 삼고 그치지 않았으며, 자호를 ‘유수洧水에 사는 노법화(洧上老法華)’라 하였다.
송의 장병張秉은 기주冀州 지사를 지냈다. 한번은 큰 도적이 백성의 재산을 겁탈하고 또 그 딸을 욕보였다. 장병은 분노가 극에 달해 도적을 문에다 횃대를 걸고 못을 박아 3일 동안 매달아 초절임이 되어 죽게 하였다. 그 후 학질에 걸렸고, 어느 날 정오가 될 무렵 열이 극도로 오를 때였다. 홀연히 중사中使가 찾아와 임금의 명을 전했다. 장병이 온 힘을 다해 고삐를 재촉하여 한 침전에 이르자, 선대 황제 진종眞宗의 매서운 목소리가 주렴 너머로 들렸다.
“장병은 왜 법에 따르지 않고 살인을 저질렀느냐? 직접 본인과 대질하여 판결하라.”
침전 서남쪽 모퉁이로 끌려가 감옥 빗장을 열자 잡혀 있는 죄수들이 천태만상이었다. 그때서야 그곳이 인간 세상이 아님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때 한 쇠창살 감옥에 갇힌 죄인이 피와 살이 흐물흐물한 모습으로 울부짖으며 호소하였다.
“당신이 법에 따르지 않고 나를 죽여 사지를 흩어 버린 까닭에 영원히 새 생명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어쩔 것이오?”
장병이 그때서야 기주의 도적을 알아보고 꾸짖었다.
“네가 저지른 범죄를 고려할 때 어찌 한 번의 사형에 그치리오. 네 몸을 만 번이나 가루로 만든다 해도 여인의 수치를 갚기에 부족하다. 감히 더군다나 억울함을 호소한단 말인가.”
곁에 한 서리胥吏가 있었는데 이승에서 장병을 모시던 옛 아전이었다. 그가 말했다.
“다섯 가지 형벌은 본래 법전에 따라야 하는 것이니, 그의 항소에 유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장병이 “어찌해야 하는가?” 하자 서리가 말했다.
“그를 이승으로 보내 새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야만 공께서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장병이 두려워하며 그를 이승으로 돌려보낼 방도를 묻자 서리가 말하였다.
“『법화경』만 한 것이 없습니다. 단 지성으로 하겠다고 약속하십시오.”
장병이 결국 돌아가는 날 스님들을 불러 경을 100부 염송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죄수는 풀려나지 못했다. 숫자를 늘려 천 부에 이르렀지만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병은 더욱 두려웠다. 그러자 서리가 말했다.
“꼭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염송은 오래도록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매일 스님을 한 분 청해 한 부 염송하기를 종신토록 하겠다고 약속하면 그를 이승으로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장병이 그의 말대로 약속하자 과연 사라졌다. 그는 3일 후 정신이 돌아왔고, 매일 스님을 초청해 한 부 염송하기를 죽을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상산야록湘山野錄』에 나온다.
송 수주遂州의 강 학사姜學士는 약관의 나이에 갑자기 죽었다. 명부의 왕이 꾸짖으며 말했다.
“그대는 전생에 선을 지었기에 금생의 수명이 82세이고, 정축년丁丑年엔 진사進士에 등용되어

008_0542_b_01L年日課蓮經不輟自號洧上老法華

008_0542_b_02L
宋張秉知冀州一巨盗刼民財又亂
008_0542_b_03L其女秉忿極設架釘於門三日醢之
008_0542_b_04L後感痁疾一日方午劇發忽見中使來
008_0542_b_05L秉乃力疾促轡至一寢殿聞先帝
008_0542_b_06L眞宗厲聲簾中曰張秉何得非法殺人
008_0542_b_07L自與本人對辨引至殿西南隅啓獄扉
008_0542_b_08L囚繫萬狀始悟非人世也一鐵校罪人
008_0542_b_09L血肉淋漓泣訴曰汝用非法殺我
008_0542_b_10L體零散永無受托奈何秉方認冀盗詬
008_0542_b_11L汝所犯豈止一死雖糜萬軀亦不
008_0542_b_12L足塞女恥敢更訴乎旁有一胥乃秉
008_0542_b_13L從事河陽日故吏也曰五刑自有常典
008_0542_b_14L亦不得憾其訴秉曰奈何吏曰但遣之
008_0542_b_15L托生公可却還秉懼詢遣之之術
008_0542_b_16L曰無如法華經但至誠許之秉遂許歸
008_0542_b_17L日召僧誦經百部囚不捨增及千部亦
008_0542_b_18L秉愈怖吏曰不必多但誦貴長久
008_0542_b_19L日請一僧誦一部許終其身乃可遣也
008_0542_b_20L秉如言許之果不見三日後神方還
008_0542_b_21L乃日召僧誦一部至沒不廢出湘山野
008_0542_b_22L

008_0542_b_23L
宋遂州姜學士弱冠暴亡冥王責曰
008_0542_b_24L汝前生爲善今世該八十二歲丁丑擧

008_0542_c_01L공경公卿의 직위를 역임할 수 있었다. 합당하지 않게 소를 죽여 고기를 먹었기에 수명이 감소하고 복록이 끊어졌구나. 해주海州에 7일 밤낮으로 벼락이 치고 비가 내리더니 하늘에서 돌로 된 북이 내려왔고, 거기에 기문이 있었단 말을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그 기문에 ‘여섯 축생이 모두 전생의 업이로다. 그 가운데 소가 가장 고달프니, 그대는 비명횡사한 자들을 보라. 모두 소고기를 먹은 사람들이다’라고 하였다.”
왕의 말이 끝나자 곁에 있던 한 아전이 말하였다.
“당신은 혼이 돌아가면 잘못을 고치겠다고 빨리 부탁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판결되어 다시는 나올 기약이 없습니다.”
강 학사가 방도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자 아전이 말했다.
“음부陰府에서는 『법화경』과 『금강경』과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을 사경하고 수지하는 사람을 가장 존경합니다. 그대가 만약 발심한다면 방면될 수 있습니다.”
강 학사는 그 말에 따라 혼이 돌아가면 잘못을 고치고 사경하며 양친을 봉양하겠다고 간청하였다. 그는 명부 왕의 윤허로 드디어 다시 태어나게 되었고, 그 뒤로는 양친에게 효도하고 음계와 살계를 받들어 지켰으며 사경하고 주문을 지송하였다. 또 항상 그 일을 기술하여 사람들에게 권계하고 매일같이 대중을 감화시켰다. 후에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직위가 학사學士에 이르렀다.
송 해남南海의 반면潘冕은 거짓으로 미친 척하여 어떤 사람인지 추측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그를 반앙潘盎이라 불렀는데, 속어로 심풍心風을 앙盎이라 하였다. 반앙은 매일 경사京師 사람과 『법화경』의 게송을 설하였고, 매일 몰래 왕래하였다. 어느 이방인은 반앙을 일광불日光佛이라 하였다. 조당趙棠이라는 사람은 처음 막부의 관리로 있었는데 직위를 버리고 반앙을 따라 노닐며 그의 도를 모두 체득하였다. 그리고 반앙이 은거하자 조당 역시 앉아서 천화하였다. 그를 다비하자 사리가 여러 되 나왔다. 소식蘇軾은 조당과 하루 종일 노닐고 사리 마흔여덟 알을 얻고는 「조선생사리기趙先生舍利記」를 지은 적이 있다.
송의 주朱씨 여일如一은 어려서 사명四明의 설薛씨 집으로 시집갔다. 나이 스물 남짓에 청정하게 홀로 살면서 도인 차림새에 하얀 옷을 입었고, 나무 아래에서 조용히 『묘법연화경』 일곱 축을 수놓아 10년 만에 완성하였다. 「화성유품化城喩品」에 이르자 바늘 끝에서 좁쌀만 한 사리가 계속 나와 연이어 수십 알을 획득하였다. 그녀는 한 구절 한 글자마다 소리 높여 읽고 예배하기를 세 차례나 하였다. 또 미타정토 세 성인의 상을 수놓았는데 극히 기묘하였고,

008_0542_c_01L進士位歷公卿不合殺牛食肉以致
008_0542_c_02L算減祿絕汝豈不聞海州七日夜雷雨
008_0542_c_03L天降石皷之記乎記曰六畜皆前業
008_0542_c_04L牛最苦辛君看橫死者盡是食牛人
008_0542_c_05L言畢旁一吏謂曰汝宜急求還魂改過
008_0542_c_06L否則判入地獄無出期矣姜求指示
008_0542_c_07L吏曰陰府最敬人書寫受持法華經及
008_0542_c_08L金剛經太上感應篇汝若發心可得
008_0542_c_09L脫免姜依言乞還魂改過書經養親
008_0542_c_10L冥王允之遂得再生自後孝親奉婬
008_0542_c_11L殺戒書經持呪常述其事勸人感化
008_0542_c_12L日衆後登第仕至學士

008_0542_c_13L
宋南海潘冕者佯狂不測人謂之潘盎
008_0542_c_14L盖俚謂心風爲盎也盎每與京師人
008_0542_c_15L法華偈頌徃來日密一異人云盎即
008_0542_c_16L日光佛有趙棠初爲幕官棄任從盎
008_0542_c_17L盡得其道盎即隱去棠亦坐化
008_0542_c_18L舍利數升蘇軾與棠子昶遊得四
008_0542_c_19L十八粒嘗作趙先生舍利記

008_0542_c_20L
宋朱氏如一幼歸四明薜氏年二十餘
008_0542_c_21L即淸淨自居道裝素服蕭然林下
008_0542_c_22L妙法華經七軸十年而成至化城喩
008_0542_c_23L針鋒綴舍利如粟連獲數十粒一句一
008_0542_c_24L凡唱禮者三及繡彌陀三聖像

008_0543_a_01L여러 대승경전들을 물동이의 물을 쏟듯 수월하게 염송하였다. 나무에 그림을 새겨 사람들에게 염불하도록 권하였으며 교화한 사람 수가 20만 명을 채웠다. 소희紹熙 4년(1193)에 가벼운 질환을 보여 의사가 단사丹砂를 올리자 “나의 왕생은 결정되었다. 단사를 뭐 하러 쓰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붙이고 서거하였다. 귤주橘州의 담曇 선사가 전기를 지었다.
송 덕흥현德興縣 동董씨의 어머니 이李씨는 「보문품普門品」을 30여 년 염송하였다. 그 후 명부에 들어갔는데 관음보살이 나타나 손을 내밀어 끌어 주자 광명이 대낮과 같았다. 그리고 “그대의 수명은 이미 다했으나 선근의 인연이 있기에 이렇게 찾아와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깜짝 놀라는 사이 다시 살아났다.
송 경력慶曆 연간(1041~1048)에 구양수歐陽脩 문충공文忠公이 영주頴州 지사를 지낼 때 노미盧媚라는 관기가 있었는데 자태가 단정하고 수려하였다. 언젠가 입에서 연꽃 향기가 풍겨 좌석을 뛰어넘어 온 자리를 가득 채우자 사람의 전생 일을 알아보던 촉 땅의 스님이 있다가 말하였다.
“이 여인은 전생에 비구니였는데 『법화경』을 30년이나 염송하다가 한 생각 실수로 여기에 떨어진 것입니다.”
문충공이 관기에게 물었다.
“『법화경』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제가 이 처지에 그럴 여가가 어디 있습니까?”
문충공이 경을 가져와 보여주라고 명하자 한번 쭉 훑어보고는 곧바로 염송하는 것이 마치 평소에 익혔던 사람 같았다. 그러나 다른 경으로 바꾸자 곧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문충공은 이에 선근 종자를 닦는다는 말이 허망하지 않음을 비로소 믿었다.
명明 석성천釋性天의 호는 낭연朗然이고 오송吳淞 사람이며 보타사普陀寺로 출가하였다. 태창泰昌 경신년(1620)에 운간雲間 주동연周東淵이 남해南海로 찾아와 대사大士15)에게 참례하고, 스님에게 『법화경』을 염송하여 어머니를 천도해 주십사 청하였다. 스님이 그를 위해 위천韋天16) 앞에서 염송하고 회향하였다. 주동연에게는 매우 힘이 좋은 소가 한 마리 있었는데 바로 이때 갑자기 죽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아내 몸에 붙어 아들을 부르며 말하였다.
“지난날 지은 구업이 막중하여 소가 되었는데 이제 『법화경』을 염송한 공덕으로 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는 예배하고 참회해 곧바로 환생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낭연 스님에게 재차 부탁하였다.

008_0543_a_01L爲奇妙諸大乘經誦若建瓴甞鋟木
008_0543_a_02L爲啚勸人念佛所化之數盈二十萬
008_0543_a_03L紹熈四年示微疾醫進丹砂曰吾徃
008_0543_a_04L生決矣丹砂何爲翛然右脅而逝
008_0543_a_05L州曇禪師作傳

008_0543_a_06L
宋德興縣董母李氏誦普門品三十餘
008_0543_a_07L後入冥見觀音垂手引之光明如
008_0543_a_08L云爾數已盡緣有善根故來相援
008_0543_a_09L豁然而甦

008_0543_a_10L
宋慶曆間歐陽文忠公脩知頴州
008_0543_a_11L官妓盧媚姿貌端秀口中嘗作蓮花香
008_0543_a_12L㪚趙滿座有蜀僧頗知人生前事
008_0543_a_13L此女前身嘗爲尼誦法華經三十年
008_0543_a_14L一念之誤遂至於此公問妓曰曾讀
008_0543_a_15L法華經否曰某失身於此所不暇也
008_0543_a_16L公命取經示之一覽輒誦如素習者
008_0543_a_17L易以他經則不能也公於是始信修種
008_0543_a_18L之言不妄

008_0543_a_19L
明釋性天號朗然吳淞人出家普陀
008_0543_a_20L泰昌庚申雲間周東淵徃南海禮大
008_0543_a_21L請師誦法華薦母師爲誦于韋天前
008_0543_a_22L回向周有牛甚力自是忽斃未幾附婦
008_0543_a_23L呼其子曰向以口業重故爲牛
008_0543_a_24L得法華經功德已脫牛苦再求朗師禮

008_0543_b_01L스님은 그 인연으로 예배하고 참회하며 염구燄口(餓鬼)에게 음식을 베풀었다. 그날 밤 주동연에게 꿈인 듯 생시인 듯 어머니가 나타나 고마워하며 말하였다.
“예배하고 참회해 준 덕분에 이미 동쪽 이웃집에 태어났단다.”
다음날 아침 스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고 동쪽 이웃집을 찾아가 보았더니 정鄭씨가 아들을 하나 낳았다. 서로를 쳐다보며 경악하고는 몇 시에 태어났는지 물어보자 “당신 집에서 참회도량이 끝나자마자 태어났다.”고 하였다. 스님은 일찍이 피를 뽑아 『법화경』을 사경한 적이 있었다. 6만여 단어를 다 쓰고 나자 필체가 물결이 번득이듯 기운찬 것이 마치 오랫동안 익힌 것 같았고, 그가 머무는 깨끗한 방 진흙 벽에 온통 잎과 줄기까지 선명한 연꽃 모양이 나타났다. 보타사에 예배하러 온 사람치고 합장 찬탄하며 따라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명 북경北京 형부가刑部街의 취봉사鷲峯寺는 옛날 전단향으로 조성한 불상에 공양을 올리는 곳이다. 신묘神廟 말년의 일이다. 주지승 제주濟舟는 평생 질직하고 진실하게 부처님을 받들고 공경했으나 주계酒戒만큼은 엄격하게 지키지 못했다. 하루는 양쪽 소매가 없는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찾아와 말하였다.
“저는 지부地府의 무상無常이라고 합니다. 이 늙은이는 전생에 착한 일을 하나도 한 것이 없어 지옥에 머물며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절에 찾아와 부처님께 예배하고 과일을 가져다 노스님께 공양하고는 하였습니다. 이 인연으로 『법화경』 한 부를 크게 풍송해 주십사 원합니다. 그러면 곧 환생할 수 있습니다.”
제주 스님이 믿기지 않아 말했다.
“당신이 이미 귀신이라면 부처님 도량에 들어오기도 어려울 텐데 어찌 우러르며 예배할 수 있겠는가?”
귀신이 말했다.
“도성황都城隍이 도량 안에 있긴 하지만 감히 불전으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제주 스님은 그때 그날 5경에 어떤 사람이 좋은 일을 하려고 성황의 위패를 불전 옆에 세워 둔 것이 생각났다. 그의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었다. 그의 말에 따라 7월 15일에 부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법화경』을 풍송하게 되었다. 제5권에 이르러 날씨는 덥고 갈증은 심해 차를 찾았지만 없었다. 그때 탁자 위에 술병이 하나 보였다. 흔들어 보니 남은 것이 있어 결국 시원한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부처님 전에 무릎을 꿇고 경을 끝까지 염송하였다. 다음날 무상이 다시 찾아와 말하였다.
“이 늙은이가 스님께서 염송해 주신 경을 받들었습니다. 4권까지 완전히 마쳤을 때,

008_0543_b_01L便可託生師因爲禮懴施燄口食
008_0543_b_02L是夜周恍惚見母謝曰賴禮懴力
008_0543_b_03L託生東鄰矣翊晨向師述夢適東隣鄭
008_0543_b_04L氏誕一子相顧驚愕問何時曰爾家
008_0543_b_05L道場纔完耳師曾刺血書法華經書畢
008_0543_b_06L六萬餘言瀾翻如夙習所居淨室
008_0543_b_07L壁皆具蓮華葉梗諸相禮普陀者莫不
008_0543_b_08L隨喜合爪讃歎

008_0543_b_09L
明北京刑部街之鷲峯寺供養古旃檀
008_0543_b_10L佛像之所也神廟末年住持僧濟舟
008_0543_b_11L生平質實奉佛欽肅但於酒戒未嚴
008_0543_b_12L一日有人着兩截衣者來告曰我地
008_0543_b_13L府無常也某老嫗以生前無一善
008_0543_b_14L地獄不得脫每月朔望曾到寺禮佛
008_0543_b_15L携果物供養老師以此因緣望爲渠
008_0543_b_16L諷法華經一部即得託生舟疑而未信
008_0543_b_17L汝旣是鬼難得到佛地盍瞻禮焉
008_0543_b_18L鬼云有都城隍在內不敢入舟因思是
008_0543_b_19L日五更有人欲作善事立城隍位於殿
008_0543_b_20L其言殆不誣也隨於七月十五日
008_0543_b_21L在佛前跪諷法華經至第五卷天暑渴
008_0543_b_22L覓茶不得見卓上一酒壺搖之尙
008_0543_b_23L有存者遂吸冷酒一口仍跪佛前完經
008_0543_b_24L次日無常復來云老嫗承師誦經

008_0543_c_01L음사陰司에 온통 금빛 광명이 비치는 것이 분명 지옥을 벗어나 환생할 징조였습니다. 그런데 홀연히 한바탕 술기운이 명부로 몰아치더니 5권부터 7권까지 계속 그러더군요. 그래서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제주 스님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모골이 송연하였다. 그래서 지성으로 염송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그를 위해 재차 염송하였다. 이 일로 주계酒戒를 엄격히 지키며 감히 범하는 일이 끝내 없었다. 당唐 공이 당시 그 일을 새기게 하여 그 절에다 엄격하고 청정한 도량을 표방하는 비석을 세웠다.
또 옛날에 어떤 고승은 무릎을 꿇고 『법화경』을 30년이나 염송하였는데 홀연히 푸른 옷을 입은 한 동자가 나타나 말하였다.
“스님께서 『법화경』을 매우 오래 염송하긴 하였지만 손을 씻을 때마다 물에 담그기만 했습니다. 법답게 깨끗이 씻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법보法寶를 만졌으니 장차 죗값을 받을 것입니다.”
스님이 두려워하며 “어떻게 죗값을 치르게 되는가?” 하고 묻자, 동자는 “아마 똥통의 구더기로 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곧 사라졌다.
스님은 크게 두려워하며 그 후로는 법답게 깨끗이 씻었다. 세척하는 법을 살펴보면 먼저 고운 흙이나 재를 사용하고, 그런 다음 조두澡豆를 사용해 고루 문지른다. 손을 씻을 때는 정수주淨手呪가 있고, 몸을 씻을 때는 정신주淨身呪가 있으니, 각각 일곱 번 염송해야 한다. 만약 주문을 염송하지 않으면 사대해의 바닷물을 몽땅 사용해 씻더라도 깨끗해질 수 없다. 정수주는 ‘옴 주가라야 사바하(唵主迦刺耶莎訶)’이고, 세신주洗身呪는 ‘옴 하낭밀률뎨 사바하(唵賀曩密栗帝莎訶)’이다.
명 가정嘉靖 연간(1522~1566)의 일이다. 보은사報恩寺의 주지승 영녕永寧은 호가 서림西林이며, 말 한 마리를 키웠다. 매일 자신의 절에서 예부禮部까지 말을 타고 다녔는데, 말에 오르면서 『법화경』을 묵묵히 염송하기 시작해 예부의 문에 도착하여 말에서 내릴 때면 정확히 한 권을 마치곤 하였다. 거의 늘 그랬다. 그 절과 문을 마주한 집에 한 임산부가 있었는데 밤에 이 말이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날이 밝아 절로 찾아가 물었더니 말이 바로 그 시각에 죽었다. 그 집에서는 그 뒤 아들을 서림 스님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그는 극히 우둔하여 글을 가르쳐 주어도 한 글자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말로 전해 준 『법화경』 한 권만은 바로 능숙하게 염송하였으니, 말이 경을 듣고 제도된 것이 분명하다. 『금릉쇄사金陵瑣事』에 나온다.

008_0543_c_01L四卷滿陰司皆射金光正將離獄托生
008_0543_c_02L忽一陣酒氣衝入冥府自五卷至七卷
008_0543_c_03L皆然故仍不得力舟聞之毛骨竦立
008_0543_c_04L發至誠願爲之補誦由此嚴持酒戒
008_0543_c_05L永不敢犯唐公時嘗刻其事於本寺嚴
008_0543_c_06L凈道場之碑陰又昔有高僧跪誦法華
008_0543_c_07L三十年忽見一靑衣童子謂曰師誦法
008_0543_c_08L華甚久但每度洗手蘸水而已不如
008_0543_c_09L法淨洗穢觸法寶且當受罪僧悚然
008_0543_c_10L得何罪報童子曰嘗墮糞蛆言訖
008_0543_c_11L不見僧大恐後乃淨洗如法按洗滌
008_0543_c_12L先用土灰後用澡豆擦抹洗手有
008_0543_c_13L淨手呪洗身有淨身呪各念七遍
008_0543_c_14L念呪雖洗盡四大海水亦不得淨
008_0543_c_15L手呪云唵主迦刺耶莎訶洗身呪云
008_0543_c_16L唵賀曩密栗帝莎訶

008_0543_c_17L
明嘉靖間報恩寺住持僧永寧號西林
008_0543_c_18L蓄一馬每自寺騎赴禮部上馬時
008_0543_c_19L誦法華經至禮部門下馬恰完一卷
008_0543_c_20L率以爲常本寺對門有孕婦夜夢此
008_0543_c_21L馬入室遂生一男天明向寺訪之
008_0543_c_22L死正其時也其家後即以子爲西林徒
008_0543_c_23L極愚蠢授之書一字不易識唯口傳
008_0543_c_24L法華一卷便能熟誦信爲馬聞經得度

008_0544_a_01L
또 호숫가에 사는 어떤 스님이 『법화경』을 염송하였는데 두꺼비 한 마리가 경 읽는 소리를 듣고 갑자기 고개를 쳐들더니 주먹을 모으고 몸을 숙이는 시늉을 하였다. 그리고 잠시 뒤에는 마치 좌선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흔들어 보았더니 이미 호흡이 끊어진 뒤였다. 당唐의 수아修雅 법사는 말하였다.

佛之意兮祖之髓  부처님의 마음이여 조사의 골수요
吾之心兮經之旨  나의 마음이여 경의 종지로다.
合目冥心子細聽  눈을 모으고 고요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으라.
醍醐滴入焦膓裏  제호醍醐는 한 방울만 들어가도 뱃속을 태워 버린다.

이 두꺼비야말로 제호에 취해 깊이 잠든 자가 아니겠는가? 『달관어록達觀語錄』을 보라.
명 용득부龍得孚는 사명군승四明郡丞을 지냈는데 청렴하고 강직하며 도를 좋아하였다. 당시 보타사普陀寺에 두 명의 주지가 있었다. 한 사람은 대지大智로서 계율이 엄정하여 도인과 속인들이 귀의하고 우러렀으며, 한 사람은 진표眞表로서 비록 총림을 통솔하긴 했지만 성정이 사납고 계율을 지키지 않았다. 만력萬曆 임오년(1582)에 승은 감사監司의 명령을 받들어 진표 스님이 작은 잘못을 저지른 사미에게 지나친 매질을 가한 사건을 직접 국문하게 되었다. 산에 도착하여 처분을 내리기를 『묘법연화경』 한 부를 가져다 태우라 명령하고, 대중 스님들 모두 그 위를 뛰어넘으며 다시는 범하지 않겠노라 맹세하게 하였다. 그런 다음 후전後殿에 이르러 예배하였는데 양쪽 넓적다리에 통증이 느껴지더니 힘이 빠져 흐물흐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온몸에 이상한 열이 올라 곧바로 녹초가 되어 버렸는데 혼몽한 가운데 꿈인 듯 생시인 듯 임금의 뜻을 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도道를 받든다면서 도道를 태워 버렸으니 더 엄한 벌을 주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진실로 백성을 사랑한 까닭이었으니, 벌로 삼석우색관三石牛嗇官을 만들어야겠다.”
승은 ‘이건 분명 명부의 관직 이름일 것이다’ 생각하였고, 이렇게 죽게 되었다. 또 악취惡趣에 들어가 말하였다.
“저는 경을 태우는 죄가 이렇게 큰 줄 몰랐습니다. 지금부터는 평생토록 재계를 지키겠습니다. 그리고 곧장 관직을 사임하고 도문道門에 들어가 스스로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대지大智 스님 역시 그를 위해 기도하며 불쌍히 여겼고, 경을 염송하며 예배하고 참회하였다. 그러다 선정에 들자 철벽으로 에워싸인 한 성이 나타났다. 성에는 벌거숭이 시체가 첩첩이 쌓여 있었고 승 역시 그 가운데 있었는데 유독 그만 벌거숭이가 아니었다. 스님이 다가가 온 마음을 다해 참회하며 그를 쓰다듬자 홀연히 공중에서 흰색 광명이 한 줄기 내려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그를 부축해 그곳에서 꺼내자 다시 살아났다. 승이 보니 사문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에게 물었다.

008_0544_a_01L出金陵瑣事又當湖有僧誦法華
008_0544_a_02L一蝦蟇聞經聲忽作昻首拳跽狀者
008_0544_a_03L移時少頃若禪坐撼之已息斷矣唐修
008_0544_a_04L雅法師曰佛之意兮祖之髓吾之心兮
008_0544_a_05L經之旨合目冥心子細聽醍醐滴入焦
008_0544_a_06L膓裏若是虫豈非醉醍醐而熟睡者耶
008_0544_a_07L見達觀語錄

008_0544_a_08L
明龍得孚爲四明郡丞廉直好道
008_0544_a_09L普陀有兩住持一曰大智戒律精嚴
008_0544_a_10L道俗歸仰一曰眞表雖領叢林性悍破
008_0544_a_11L萬曆任午丞奉監司命委鞫眞表
008_0544_a_12L以小過撻沙彌事到山處分命取蓮華
008_0544_a_13L經一部火之令衆僧悉跨其上誓無再
008_0544_a_14L已至後殿禮拜覺兩髀病輭不可
008_0544_a_15L體發奇熱疾遂委頓昏憒中恍惚
008_0544_a_16L聞傳旨云奉道燬道尤當重譴姑以
008_0544_a_17L愛民故罰作三石牛嗇官丞念此必冥
008_0544_a_18L官之號如是死矣且入惡趣某不知
008_0544_a_19L燬經之罪其大乃爾自今而後願齋
008_0544_a_20L戒終身急免官入道自贖大智師亦爲
008_0544_a_21L祈哀誦經禮懴定中見一鐵圍城
008_0544_a_22L中裸尸纍纍丞亦在中獨不裸師至
008_0544_a_23L心懴摩忽見空中下白光一道若有
008_0544_a_24L掖出之而甦丞見沙門雲擁問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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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경을 태워 이런 대계大戒를 범했는가?”
승이 말하였다.
“저의 잘못을 시인합니다. 하나를 백으로 보상하겠습니다. 그리고 그에 앞서 재물을 내어 모든 스님들께 공양을 받들어 올리겠습니다.”
여러 사문들은 그때서야 사라졌다. 그날 저녁 승의 집안 하인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양쪽으로 머리를 묶은 두 명의 옥녀玉女를 보았다. 그들이 손에 깃발과 일산을 들고 평상을 스치며 지나갔는데 획 하는 바람소리가 나면서 깃발의 자루 밑이 하인의 얼굴에 스쳤다. 하인은 깜짝 놀라며 벌떡 일어나 크게 고함을 쳤고, 승의 병은 이미 나아 있었다. 그때 그는 먹지도 못하고 눈도 깜빡이지 않으며 열흘을 누워 있었다. 도의부屠儀部의 융隆이 목격하고 기록하였다.
명의 갈완葛琬은 자가 석평石平이고 곤산崑山 사람이며 성심을 다해 도를 배웠다. 빗장을 걸어 닫고 천축의 경전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면서 오랜 세월 지칠 줄 몰랐고, 『법화경』에 더욱 마음을 쏟아 일과로 삼았다. 그는 ‘흐르는 세월은 번개처럼 빨리 지나가고 오묘한 법은 듣기 어려우니,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하려면 경전을 홍포하는 것이 핵심이다’라고 생각하고는 진晋과 송宋대부터 원元과 명明에 이르기까지 선현 고덕들의 고사를 수집해 『감통록感通錄』 네 권을 편집하였고, 권말에 각각에 대해 논을 달았다. 그러나 여러 해를 끌며 마치지를 못하다가 신묘년 가을에 기운이 쇠하고 피로가 닥치더니 병을 끌어안고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다 임진년 겨울, 신인神人이 편집한 책을 가져다 조각하는 기이한 꿈을 저녁마다 자주 꾸게 되었다. 이에 온 힘을 다해 장인을 모았고, 책이 완성을 알리게 되자 병이 곧 치유되었다.

부목負木 : 계찬彐贊
지전持殿 : 종오宗悟
도감都監 : 석행碩行
연판鍊板 : 김정홍金正弘, 은회隱懷, 단학丹學, 여한呂閑
취반炊飯 : 대종大宗
별좌別座 : 취인翠仁
조연助緣 : 은함隱含, 진웅振雄
교대校對 : 준각雋覺
화사化士 : 인희印熈
강희康熈 25년 병인丙寅(1686) 4월 전라도 낙안군 금화산金華山 징광사澄光寺 개간

008_0544_b_01L故燬經犯此大戒丞曰知罪矣願以
008_0544_b_02L百償一先捐俸齋萬僧衆沙門乃隱
008_0544_b_03L其夕丞家僮於昏黑中見兩玉女
008_0544_b_04L髽髻手携幢葢拂牀而過砉然有聲
008_0544_b_05L幢脚拂僮面僮驚起大呼丞病良已
008_0544_b_06L是時不食不瞬十日矣屠儀部隆目擊
008_0544_b_07L爲之記

008_0544_b_08L
明葛琬字石平崑山人投誠學道
008_0544_b_09L戶蒐討笁墳長年不倦尤歸心法華
008_0544_b_10L用爲日課念流光電逝妙法難聞
008_0544_b_11L報佛恩弘經爲要因取先賢古德事
008_0544_b_12L自晋宋迄元明輯感通錄四卷卷未各
008_0544_b_13L系以論荏苒數載未竟辛卯秋以衰疲
008_0544_b_14L抱疴匝歲至壬辰冬連夕頻感異夢
008_0544_b_15L見神人趣鐫是編乃竭力鳩工書告成
008_0544_b_16L病尋愈

008_0544_b_17L
法華持驗終

008_0544_b_18L
008_0544_b_19L
008_0544_b_20L
負木彐賛持殿宗悟都監碩行鍊板金
008_0544_b_21L正弘隱懹丹學呂閑炊飯大宗別座
008_0544_b_22L翠仁助緣隱含振雄校對雋覺化士
008_0544_b_23L印熈

008_0544_b_24L
康熈二十五年丙寅四月全羅道樂安郡
008_0544_b_25L金華山澄光寺開刊
  1. 1)강좌江左 : 양자강 동쪽 지방.
  2. 2)안연지顔延之 : 중국 육조 시대 송나라의 시인(384~456). 자는 연년延年이다. 유불儒佛에 통달하여 ‘삼세인과’의 설을 주장하였으며, 형식미가 풍부한 시를 썼다. 작품에 〈추호시秋胡詩〉, 〈오군영五君詠〉 등이 있다.
  3. 3)안安과 태汰 : 안安은 도안道安(314~385), 태汰는 축법태竺法汰(320~387)를 지칭한다. 두 사람은 동학하였고, 함께 난을 피하여 신야新野로 가서 도안은 서쪽 지방에서, 축법태는 동남 지역에서 널리 포교하였다.
  4. 4)빈斌과 량亮 : 빈斌은 담빈曇斌, 량亮은 혜량慧亮을 지칭한다. 두 사람 역시 동시대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高僧傳』 권7(T50, 373b)에 “태시太始 초(465)에 장엄사莊嚴寺에서 교학에 정통한 뛰어난 승려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 상수만 천 명이었다. 황제가 칙명으로 혜량과 담빈을 교대로 법주法主로 삼았으니, 이들과 경쟁할 만한 종장은 없었다.(太始之初莊嚴寺大集簡閱義士。 上首千人。 勅亮與斌遞爲法主。 當時宗匠無與競焉。)”고 한 기사가 있다.
  5. 5)약왕藥王보살의 고사 : 『妙法蓮華經』 「藥王菩薩本事品」(T9, 53a)에 고사가 수록되어 있다.
  6. 6)사라쌍수娑羅雙樹의 징조 : 부처님께서는 두 그루 사라나무 아래에서 열반에 드셨다. 두 그루 오동나무가 솟은 것이 이와 유사한 징조라는 의미이다.
  7. 7)속광屬纊 : 코밑에 솜을 대고 숨을 쉬는지, 쉬지 않는지를 검사하는 것. 즉 임종을 말한다.
  8. 8)사대思大 선사 : 남북조 때 활동한 남악 혜사南嶽慧思(515~577) 선사를 말한다. 『法華經』을 공부하고 혜문慧文의 가르침을 받아 일심으로 연구 정진한 끝에 법화삼매法華三昧를 체득하였다. 그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 천태 지의天台智顗에 이르러 크게 융성하였다.
  9. 9) 『불조통기佛祖統紀』 권7(T49, 186c)에 “時人讚之有跨朗籠基超雲邁印”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그 간주에서 “흥황사興皇寺의 낭朗 스님과 제齊 산음山陰의 혜기慧基가 『法華疏』를 찬술하였고, 양梁 광택사光宅寺 법운法雲도 소를 짓고 경을 강설하였다. 이들은 모두 『唐續僧傳』에 나오는 인물들이다. 인 스님은 누군지 자세하지 않다.(興皇朗師。 齊山陰慧基。 撰法華疏。 梁光宅法雲。 製疏講經。 並見唐續僧傳。 印師未詳。)”고 하였다. 이에 따르면 ‘낭朗’은 승랑僧朗 법사, ‘기基’는 혜기慧基 스님, ‘운雲’은 법운法雲을 가리킨다.
  10. 10) 육시六時 : 하루를 낮 6시와 밤 6시로 구분한 것이다.
  11. 11) 12시 : 하루를 12간지에 따라 12시로 구분한 것이다. 즉 하루 종일이라는 의미이다.
  12. 12)하얀 옷을 입은 대사大士 : 관세음보살을 말한다.
  13. 13)삼반차직三班借職 : 무관직에 해당한다.
  14. 14)대제待制 조열지晁說之 : 대제待制는 관직명이다. 조열지는 휘종徽宗 황제 때 중서대제中書待制를 지냈다.
  15. 15)대사大士 : 보타사에 현신한다는 관세음보살을 말한다.
  16. 16) 위천韋天 : 사대천왕 중 남방의 증장천增長天에 속한 여덟 장군의 하나이다.
  1. 1)此題名及撰者名。補入{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