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상월대사시집(霜月大師詩集) / 霜月先師行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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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월선사행적霜月先師行蹟
선사의 휘는 새봉璽篈이며, 자는 혼원混遠이요, 상월霜月은 그의 호이다. 속성은 손씨孫氏이며, 순천順天 사람이다. 모친 김씨가 꿈에 범승에게서 밝은 구슬 하나를 얻었는데, 꿈에서 깨어난 후 임신하였으니, 이때가 숙종 병인년(1686) 초파일이었으며, 이듬해 정월 18일에 탄생하였다. 어렸을 때 모래를 모아 탑을 만들며 노는 것을 좋아하였으니, 이미 법문의 사자가 될 조짐이었던 것이다. 11세인 정축년 겨울에 조계산 선암사 극준 장로極俊長老에게 가서 15세에 머리를 깎았다. 이듬해 12월 8일,110) 세진당洗塵堂 문신 대사文信大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8세에 설암 화상雪巖和尙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총명한 식견이 무리에서 뛰어났고, 견지見地가 신령스럽고 투철하여 도가 이미 통하였다. 마침내 두루 참배할 생각을 가지고 벽허碧虛·남악南岳·환성喚惺·연화蓮華를 찾아 모두 그 현묘한 관문(玄鍵)을 두드려 그 심인을 얻었다.
이로부터 지혜가 더욱 넓어졌고, 닦음은 더욱 독실해졌으며, 명예는 날로 드러났고, 덕망이 높아졌다. 계사년(1713) 여름에 고향에 돌아가 부모님을 뵈옵고 나서

009_0598_b_11L霜月先師行蹟

009_0598_b_12L
先師諱璽篈字混遠霜月其號
009_0598_b_13L姓孫氏順天人母金氏夢得一顆
009_0598_b_14L明珠於梵僧覺而有妊即肅宗丙寅
009_0598_b_15L四月初八也翌年正月旬八誕幼嬉
009_0598_b_16L戱聚沙石爲窣堵波已兆爲法門獅
009_0598_b_17L子兒也十一歲丁丑冬投曺溪山之
009_0598_b_18L仙巖寺極俊長老十五薙髢明年臈
009_0598_b_19L受具於洗塵堂文信大師十八叅
009_0598_b_20L雪巖和尙聰識絕倫見地靈透
009_0598_b_21L旣通遂有遍叅之思若碧虛南岳喚
009_0598_b_22L惺蓮華皆叩其玄鍵獲其心印
009_0598_b_23L是智益廣修益篤名譽日著德尊
009_0598_b_24L望隆癸巳夏歸覲其親於本鄕仍主

009_0598_c_01L돌아가신 스승의 강석을 주관하였다. 흰 상아 부채(白牙扇)를 잡고 소나무 가지로 된 자루를 흔들며 삼승의 종지를 연설하였는데, 사방에서 공부하러 온 자들이 모여들어 이미 무리를 이루었다. 이때 그의 나이 27세였으니, 그 지혜의 업은 하늘이 이룬 것으로 수많은 승려들의 존숭을 받았다. 29세에 무용 화상을 찾아뵈었을 때 경전을 잡아서 논란을 벌였는데, 사리詞理가 밝게 툭 트였으며, 마치 상자와 뚜껑처럼 딱 들어맞았다. 화상이 이에 감탄하며 말하기를, “지안志安111) 이후에 한 사람이 나왔구나.”라고 하였다.
선사는 신장이 보통 사람을 겨우 넘을 정도였지만 몸이 풍성하고 체구가 후덕하였다. 둥근 얼굴에 귀가 컸으며, 살결은 희고 윤기가 있었다. 음성은 큰 종을 울리는 듯했고, 앉음새는 흙으로 빚은 불상 같았다. 임제 선사 31세 손孫이며, 청허淸虛 대사의 5대 적전嫡傳이다. 청허 후 편양鞭羊·풍담楓潭·월저月渚·설암雪巖이 모두 의발을 이어받았는데, 선사도 설암에게서 의발을 받았다. 나라 안의 명산인 지리산·금강산·구월산·묘향산 등에 선사의 석장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징오憕窹가 선사를 20여 년 따랐는데, 일찍이 의식衣食의 좋고 나쁨과 모든 세상의 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었다. 양식이 다 떨어져도 또한 있다 없다 말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과 친소親踈가 없었으며, 딱한 이를 불쌍히 여기어 사람이 죽은 것을 아뢰면, 반드시 가장 빈궁하고 천한 자를 우선하였다. 화를 내더라도 금방 잊어버려서 마치 처음부터 화를 낸 적이 없는 것과 같았다. 우레 소리가 비록 작더라도 밤에 누워서 듣지 않고, 재齋를 알리는 경쇠 소리를 들으면 아플 때라도 반드시 부축을 받아 일어났다. 일과日課로서 경전을 독송하는 일 외에 매번 자시에 일어나 북두칠성에 절하였고, 매일 1불 5보살을 천 번 외웠으며, 아미타불을 천 번 외웠는데, 모두 염주로 세어 가며 하였다. 일력에 표시를 해 두고, 만약 몹시 아파서 일과를 폐하였으면 후에 아프지 않을 때 숫자를 계산하여 채웠다.
작가作家112)로서 40여 년 동안 온 나라 승려들의 숭상을 받은 것이 또한 30여 년이었다. 항상 강명講明·진해眞解·심천心踐·지증智證을 법문으로 삼았으며,

009_0598_c_01L先師講席執白牙扇搖松枝柄
009_0598_c_02L演三乘宗旨四方負笈者已衆時年
009_0598_c_03L二十七其慧業天成蔚爲緇流所宗
009_0598_c_04L二十九叅無用和尙執經發難詞理
009_0598_c_05L明暢凾盖相投和尙乃歎曰涉安
009_0598_c_06L後一人也先師身長纔逾中人而豊
009_0598_c_07L軀厚幹圓面大耳肥理白澤聲若
009_0598_c_08L洪鐘坐如泥塑臨濟禪師三十一世
009_0598_c_09L耳孫也淸虛法老五代嫡傳也淸虛
009_0598_c_10L後鞭羊楓潭月渚雪巖皆承衣鉢
009_0598_c_11L先師又受衣鉢於雪巖凢域內名山
009_0598_c_12L異金剛九月妙香瓶錫無所不到焉
009_0598_c_13L從先師二十餘年未嘗聞衣食美惡
009_0598_c_14L一切世事粮槖空匱而亦未嘗說有
009_0598_c_15L說無與人無親踈恤隱問死必先
009_0598_c_16L於最窮賤者有怒旋忘若初無怒
009_0598_c_17L聲雖微夜不臥聽齋磬有聞雖病
009_0598_c_18L必扶起日課轉經之外每子夜起拜
009_0598_c_19L北斗日誦一佛五菩薩千聲彌陁佛
009_0598_c_20L千聲皆以數珠筭之標於日曆
009_0598_c_21L若甚病癈課則後於無病1) [2] 計數而足
009_0598_c_22L作家四十餘年爲一國緇流之所
009_0598_c_23L宗者亦三十餃年常以講明眞解心
009_0598_c_24L▣疑「日」{編}

009_0599_a_01L초학자라고 해서 정미한 강론을 빠뜨리지 않았고, 재주 높은 자라고 해서 계율의 강독을 생략하지 않았다. 더욱이 주석하는 말에 구속됨을 근심하여 반드시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문자를 떠나 뜻을 취하고 근본을 꿰뚫어 보게 하였다. 낮에는 강하고, 밤에는 그것을 생각하게 하여 단지 공적함에 헛된 상을 품지 않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내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 되게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인증引證이 곧 질험質驗의 올바른 방법이다. 그러나 주석하는 말이 바르지 못하고 잗달하기 때문에 유가의 비난과 배척을 받게 된 것이다. 사실 유가에서 말하는 미발기상未發氣像은 바로 우리 불가의 여여한 이치(如如理)이다. 그들이 말하는 태극太極은 우리 불가의 한 물건(一物)이며, 그들이 말하는 이일분수理一分殊는 우리 불가의 일심만법一心萬法이다. 이를 말미암아서 전후와 상하를 일관되게 인증하였다면 어찌 일찍이 유교와 불교의 차별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배우는 사람이 만약 돌이켜 보는(返觀) 공부가 없다면 하루에 천 마디를 외더라도 자기 심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또한 “자기에게 전일하는 공부(專己工夫)가 없다면 사람들이 바치는 신심信心을 받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옛사람의 말이다. 내가 하루에도 착실히 공부하지 않았으면 밥을 대하여 부끄러워서 밥숟가락을 덜어 낸다. 여러 도반들이 열심히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였다. 또한 “실속 없이 빈이름만 있는 자는 가장 먼저 하늘의 벌을 받을 것이니, 고금의 인간 세상에서 모두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부처를 배우는 자들에게는 더욱 심하다. 대개 부처의 마음은 등불과 같아서 더욱 스스로 속일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선사에게서 공부한 무리는 나라 안에 거의 두루 있었는데, 모두 빈 마음으로 가서 채워서 돌아오니, 많이 얻은 자는 많이 얻고, 적게 얻은 자는 적게 얻었으나 전혀 얻지 못한 자는 없었다. 이는 종사께서 30여 년 동안 문도門徒에게 교화를 행하신 것이니, 근세에 견줄 자가 없다. 무진년(1748, 영조 24) 가을, 예조禮曹로부터 선교도총섭 규정팔로치류사禪敎都揔攝紏正八路緇流事에 임명되었으며, 경오년(1750)에는 주표충원장 겸 국일도대선사主表忠院長兼國一都大禪師에 임명되었다.

009_0599_a_01L踐智證爲法門不以初學而闕精微之
009_0599_a_02L不以高才而略戒律之講尤以註
009_0599_a_03L說之桎梏爲憂必使學者離文取意
009_0599_a_04L洞見本源晝之所講夜以思之
009_0599_a_05L徒幻相於空寂必以吾心作佛心
009_0599_a_06L曰引證即質驗之義而註語跛屑
009_0599_a_07L致儒家之譏斥其實儒家所稱未發氣
009_0599_a_08L即吾佛家如如理也其所謂太極
009_0599_a_09L即吾佛家一物也其所謂理一分殊
009_0599_a_10L吾佛家一心萬法也由是引證前後
009_0599_a_11L下一貫則何嘗有儒釋之別耶又曰
009_0599_a_12L學者如無返觀工夫雖日誦千言
009_0599_a_13L益於自己心性又曰如無專己工夫
009_0599_a_14L受信心人所供此古語也吾於一日
009_0599_a_15L念頭不着實工則便對食而媿飯匙
009_0599_a_16L亦減幸諸同舟勉之耳又曰無其實
009_0599_a_17L而有虛名者最干天誅古今人世
009_0599_a_18L不皆然而學佛者爲尤甚盖佛心如
009_0599_a_19L尤不可自欺也是故先師之叅徒
009_0599_a_20L殆遍國中而皆虛徃實歸多得者多
009_0599_a_21L少得者少得亦無全然無得者
009_0599_a_22L所以宗師三十餘年門徒之行化近世
009_0599_a_23L無比也戊辰秋自禮曺署禪敎都揔攝
009_0599_a_24L紏正八路緇流事庚午主表忠院長兼

009_0599_b_01L이는 대개 오래도록 맡는 임무로서 죽을 때에야 교체되는 것이니, 진실로 물망物望이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갑술년(1754) 봄, 선암사에 있을 때 화엄강회를 개설하였는데, 대회에 온 자가 1,200여 명이었으니, 대회의 성대함이 근고近古에 없었던 일이었다. 이어 선암사에 주석하면서 교의敎儀를 놓아 버리고 좌선과 염불을 일로 삼았는데, 전후로 문에 이른 자가 몇천 명이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용담 조관龍潭慥冠 형이 앞서 의발을 받았는데, 용담이 입적하려 하자, 문중의 승이 그를 방문하고 상월 대사에게 아뢰었다. 방장산에서 이미 입적하자 선사에게 달려가 보고하니, 선사께서 “잠시 조관의 처소에 두어라.”라고 하였는데, 선사께서 또 입적하였다. 용담의 문도 혜암 윤장惠庵玧藏이 여러 서적을 널리 섭렵하여 우뚝이 자립하였으므로 의발이 또한 그를 따라갔다.
선사께서 일찍이 말하기를, “근세에 사리가 나올 때 간혹 생각지 않은 곳에 있기도 하였는데, 내가 진위를 의심하였다. 우리 서산조西山祖께서는 나면서부터 이촉이 나 있었는데, 돌아가신 후 유골을 경건하게 받들어 사리 5과를 얻었다. 이 이치는 가장 바르고 진실하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나의 유골을 가지고 묘향산에 가서 청하면 응당 감응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정해년(1767) 10월 가벼운 병이 있었는데 문도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 장차 가려고 하니, 그대들은 잘들 있게.” 하고는 마침내 게송 한 수를 읊어 주시기를, “물은 흘러서 원래 바다로 가고, 달은 져도 하늘을 떠나지 않네.” 하시고는 편안하게 세상을 떠나셨다. 세수 81세요, 법랍 70세이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을 가렸는데 7일 만에 사라졌다. 여러 제자들이 그 덕행의 훌륭함을 적고, ‘평진대종사平眞大宗師’라 호를 더하였다. ‘평平’은 실다운 덕(實德)을 취한 것이요, ‘진眞’은 실다운 행(實行)을 취한 것이었다.
다비를 했을 때 끝내 사리를 얻지 못하였고, 문형門兄 탁준卓濬이 유골을 경건히 받들고 영변寧邊의 오도산悟道山에 이르러 서산西山의 영당影堂에 안치하였다. 탁준이 스스로 묘향산에 들어가 흩어져 있는 문도들을 모아서

009_0599_b_01L國一都大禪師此槩長帶之任臨滅
009_0599_b_02L乃遆固知物望之不輕耳甲戌春
009_0599_b_03L仙巖本寺設華嚴講會來會者
009_0599_b_04L千二百餘人會之盛近古未之有也
009_0599_b_05L仍住仙巖放下敎儀安禪念佛爲事
009_0599_b_06L前後及門者固未曉其幾千而龍潭
009_0599_b_07L兄慥冠先受衣鉢龍潭將寂門僧
009_0599_b_08L問之禀于霜月方丈旣寂奔告于
009_0599_b_09L先師先師曰姑置冠所先師又寂
009_0599_b_10L龍潭之門惠庵玧藏愽涉羣典
009_0599_b_11L然自立衣鉢亦隨之先師嘗曰
009_0599_b_12L世舍利之出或在於不意吾有眞贋
009_0599_b_13L之疑吾西山祖生有齒齦之出
009_0599_b_14L後奉骨精虔得五顆此理最正且眞
009_0599_b_15L吾殁須持吾骨以請於香山當有冥
009_0599_b_16L丁亥十月有微疾召門徒曰
009_0599_b_17L將行矣子等珍重遂口授一偈曰
009_0599_b_18L流元去海月落不離天怡然順世
009_0599_b_19L壽八十一法臈七十紫雲翳空
009_0599_b_20L日乃滅群弟子述其德行之美
009_0599_b_21L號曰平眞大宗師平取實德眞取實
009_0599_b_22L行也及其茶毘竟無所得門兄卓
009_0599_b_23L虔奉寒瓊擡至寧邊之悟道山
009_0599_b_24L之西山影堂濬自入香山欲聚門徒

009_0599_c_01L전례에 따라 초제醮祭를 지내려고 하였는데, 탁준이 떠나려 할 즈음에 동행승 낭총朗聰이 꿈에 감응이 있었다. 암주 진허 팔관振虛八關도 신령한 꿈을 꾸었다. 촛불을 밝혀서 보니, 거듭 봉하였는데 구멍이 나 있었고, 안을 들여다보니 신령스런 구슬 3과가 있었다. 마침내 모은 재구齋具로써 오도산에 부도를 세우고, 그중 한 과를 보관하였다. 관서 지방의 승려들이 무리지어 일어나 서원을 발하였으므로 영골靈骨을 그들에게 주었더니, 즉시 묘향산에 석탑을 세웠다. 순천의 선암사와 해남의 대둔사에 또한 각 한 과씩을 안치하였다.
아! 이와 같은 마음, 이와 같은 재능, 이와 같은 덕, 이와 같은 공으로 묘건妙鍵을 이어받고 현비玄篦를 갈고 닦았으니, 승랍도 이와 같이 풍부하시도다. 이것은 대개 하늘이 우리 불가를 위하여 지혜의 광명을 놓아서 천안天眼을 열어 불토佛土를 넓힌 것이다. 내가 여러 해 시봉을 들어 단지 평소에 본 것에 의해 기록한 것이니, 짧은 글이나 감히 지나치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숭정崇禎 기원후 153년 경자년(1780) 초여름에 문인 징오憕窹가 손을 씻고 삼가 기술하다.


009_0599_c_01L之散在者將設醮如例濬將行同行
009_0599_c_02L僧朗聰有感夢庵主振虛八關
009_0599_c_03L得神夢秉燭視之重封有孔內見
009_0599_c_04L三顆神珠遂以所聚齋具起浮屠於
009_0599_c_05L悟道山以藏其一關西之僧羣起
009_0599_c_06L發誓以靈骨與之即起石龕於香山
009_0599_c_07L順天之仙巖海南之大芚又各安一
009_0599_c_08L嗚呼以如是之心如是之才
009_0599_c_09L是之德如是之功承傳妙鍵刮磨
009_0599_c_10L玄篦僧臈又如是富盛此盖天爲佛
009_0599_c_11L放出慧光以開天眼以廣佛土
009_0599_c_12L窹多年執侍但依平日所覩記者
009_0599_c_13L片言隻字不敢過爽云爾

009_0599_c_14L
旹崇禎紀元後百五十三年庚子初夏
009_0599_c_15L門人憕窹盥手謹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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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10)12월 8일 : 음력으로 이날은 납팔臘八이라 하며,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한 날로서 성도재일成道齋日이다. 석존은 마갈타에서 6년 고행한 후 이날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샛별이 뜰 무렵 도를 이루었다.
  2. 111)지안志安 : 환성 지안喚惺志安(1664~1729)을 가리킨다. 조선 후기 대선사로서, 자는 삼낙三諾, 호는 환성喚醒, 속성은 정씨鄭氏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용문사龍門寺에 들어간 뒤 17세에 정원淨源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금강산의 설제雪霽를 찾아 법맥을 이었다. 1690년 직지사直指寺의 화엄법회에 참석하여 모운慕雲에게 그 자리를 물려받은 이후 여러 곳에서 강석講席을 열어 후학을 교도하며 종풍宗風을 떨쳤다. 그의 강설은 뜻이 깊고 특이한 것들이 많아 1725년 금산사金山寺의 화엄 대법회에는 학승 1,400명이 강설을 들었다. 저서로 『선문오종강요禪門五宗綱要』와 『환성시집』 등이 있다.
  3. 112)작가作家 : 선종에서 대기대용大機大用을 쓸 줄 아는 종사를 일컫는 말이다.
  1. 1)▣疑「日」{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