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 / 〔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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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附錄]
연담 대사 자보행업蓮潭大師自譜行業
나는 화순和順 사람으로, 개성부開城府 천씨千氏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휘는 만중萬重이며, 어머니는 밀양密陽 박씨朴氏였는데, 숙종 경자년(1720) 4월 30일에

010_0283_c_21L1)〔附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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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283_c_23L蓮潭大師自譜行業

010_0283_c_24L
余和順人也系出開城府千氏先嚴諱
010_0283_c_25L萬重先慈密陽朴氏以肅廟庚子四月
010_0283_c_26L「附錄」二字編者補入

010_0284_a_01L개성 읍내 적천리跡泉里에서 나를 낳으셨다. 『개성읍지開城邑誌』에는 이 적천리에 대해 “고려조 진각眞覺 국사의 어머니가 겨울에 이 샘에서 오이를 구해서 먹고 나서 국사를 잉태했다. 그러므로 마을 이름을 적천跡泉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다섯 살 때에 『천자문』을 배웠다. 아버지께서는 배운 글자를 종이(焃帝)에 써 놓고 묻곤 하셨는데,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기억하여 알았다. 일곱 살 때에는 『사기』 첫 권을 배웠지만, 그해 4월에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시는 바람에 글 배우는 일은 그만두었다. 아홉 살 때에 다시 배움에 입문하여 열 살 때에는 『통감』을 배웠는데, 혼자서 글자의 음과 뜻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문장의 내용만 배우면 되었다. 선생님은 서울에 살던 오 공吳公 시악始岳이라는 분이었는데, 이름난 사대부로 이곳 개성읍에 귀양 온 분이셨다. 우리 어머니께서는 그 댁에 식량을 대 드리며 나를 그곳에서 숙식하면서 공부하게 하였다. 아마도 집에서 혼자 공부하면 잘못 읽게 될까 염려해서 그러셨던 것 같다. 또 어머니는 종종 술과 안주를 선생님에게 갖다 드리면서 부탁을 하시곤 하였다.
“엄히 가르치고 부지런히 읽게 하여서 부디 아비 없는 이 아이를 사람 되게 하여 주신다면 다행이겠습니다.”
선생님은 늘 사람들에게, 나한테 이런 어머니가 계신 것을 칭찬하셨다. [1]
열한 살 되던 해 경술년(1730) 섣달 그믐날에 매일 백 줄의 글을 암송함으로써 『통감』 열다섯 권을 다 마쳤다. 선생님께서는, “비록 양반의 자제라 할지라도 열한 살에 『통감』을 다 읽은 사람은 드물다. 더구나 섣달 그믐날 밤에까지 글을 읽는 사람도 또한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라며 칭찬을 하셨다.
열두 살 때에는 『맹자』를 배우게 되었는데 그때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 슬프다. 공자가 생을 마칠 때에 70명의 제자들이 모두 마음으로 상제 노릇을 하였다는 말을 듣기는 하였지만, 나는 그때 어린아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열세 살 때에는 큰 흉년이 들었던 데다가 또 선생님도 계시지 않아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게다가 이해 5월에는 어머니까지도 생을 마치셨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이때부터 공부를 아주 그만두게 된 일은 그다지 한스러울 것이 못되지만, 다만 어머니를 하늘로 여기고 살아 왔던 우리 형제가 단 하루도 효도와 봉양을 하지 못한 채, 갑자기 돌아가셔서 영결하게 된 것이 너무나 마음 아플 뿐이었다.
그때 나는 열세 살이고 형은 열일곱 살이었다. 우리는 나이가 어려 집안 살림을 보살필 수 없었으므로 이웃에 사시는 숙부께서 때때로 돌보아 주셨다. 사내종 하나와 계집종 하나를 두고 집안 살림을 맡게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계집종이

010_0284_a_01L三十日生余于邑內跡泉里邑誌云
010_0284_a_02L麗朝眞覺國師之母冬月得瓜於此泉
010_0284_a_03L食之孕國師故名跡泉五歲學千文
010_0284_a_04L君於焃蹄書所讀字問之一一皆知
010_0284_a_05L七歲學史紀初卷是年四月先君捐館
010_0284_a_06L輟學九歲再入學十歲學通鑑自知
010_0284_a_07L音釋但學文義先生即京居吳公始
010_0284_a_08L以名士大夫謫于此邑母氏送糧
010_0284_a_09L其宅使余食宿而學焉恐在家誤讀也
010_0284_a_10L母氏徃徃撰酒肴進先生傳辭曰
010_0284_a_11L以敎之勤而讀之使此無父之兒
010_0284_a_12L得成人也先生每對人稱余之有是母
010_0284_a_13L十一歲庚戌之臘月除夜亦誦百行
010_0284_a_14L而終十五卷先生稱之曰雖兩班之子
010_0284_a_15L十一歲讀盡通鑑者罕有除夜讀書者
010_0284_a_16L亦未之有也十二歲學孟子先生易簀
010_0284_a_17L嗚呼余雖聞宣尼之卒也七十子之徒
010_0284_a_18L皆心喪而余以童子故未能也十三歲
010_0284_a_19L年事大無又無先生不學五月慈侍捐
010_0284_a_20L嗚呼痛哉從此永爲廢學不足恨
010_0284_a_21L而吾兄弟以母爲天只未展一日孝養
010_0284_a_22L忽見終天永訣痛切心腑余年十三
010_0284_a_23L兄年十七不能看審家事叔父在隣
010_0284_a_24L時時看護有一奴一婢主家事未幾婢

010_0284_b_01L도망가고 말았으니, 꼭 두 손을 다 잃은 것만 같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복형님 집에 가서 의지하고 살았는데, 과거 공부를 하는 한편 관가에서 심부름을 했다. 내가 비록 공부는 그만두었으나 부지런히 글을 읽었으므로 문사에 대한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침 고을의 수령께서 나를 어여쁘게 보셔서 책방冊房에 있도록 하여 주셨기에, 관가의 자제들과 함께 놀면서 『중용』과 『대학』을 읽을 수 있었다.
열다섯 살 되던 갑인년(1734)에 관가에서 호랑이를 잡았는데, 책방에 ‘착호행捉虎行’이라는 제목을 내려서 글을 지으라는 명령이 있었다. 나도 대고풍大古風으로 〈착호행〉 한 편을 지었는데, 자못 고시체古詩體의 풍격을 갖고 있는 시였다. 수령께서 보시고 아주 기뻐하면서 상하 의복 한 벌을 상으로 내려 주셨다. 내가 잘했다기보다는 내가 입고 있던 옷이 얇았기 때문에 옷을 상으로 주신 것이었다.
수령께서 다른 임지로 돌아가려고 하실 때 나를 데려가려고 하였는데, 마침 그럴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결국 같이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 또한 승려가 되는 운수였던 모양이다. 만약 그때 따라서 떠났더라면 꼭 스님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열여덟 살 때의 일이었다.
은사 스님은 법천사法泉寺 스님이었는데 그때 운흥사雲興寺에 주지로 와 계셨다. 하루는 나를 찾아와 말씀하셨다.
“네가 재주는 있는데 생활이 곤궁하다는 소문을 듣고, 특별히 너를 만나러 왔느니라. 나를 따라 출가出家하면 관가에 있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나는 유서儒書에서 부처를 배척하는 말들만을 읽은 사람이라 이렇게 대답하였었다.
“저는 스님이 되지는 않겠습니다만, 한번 구경은 하러 가겠습니다.”
은사 스님은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셨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난 다음에 고을 수령이 체직遞職되어 떠나가고, 그래서 나는 은사 스님이 사시는 곳을 방문하여 하루를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런데 문득 그곳에 계속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으니, 바로 시절 인연이 도래한 것이리라. 은사 스님께서는 신임 수령이 나를 찾으러 올까 두려워서, 나를 법천사法泉寺 사형이 계신 곳으로 보내 버렸다. 그렇게 열아홉 살에 머리를 깎았고, 안빈安貧 노스님께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당시 은사 스님은 보흥사普興寺 영허靈虛 스님이 계시는 곳에 가 계셨기에 6월에는 은사 스님을 찾아가 스님에게서 『선요禪要』를 배웠고, 겨울이 되었을 때에는 사집四集116)을 다 마칠 수 있었다.
기미년(1739) 봄에 벽하碧霞 큰스님께서 대둔사大芚寺에 계시어 배우러 모여드는 사람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나도 그곳으로 가서 배움에 참여하고 싶었다. 은사 스님께서도 나와 함께 가셨고, 거기서 『능엄경楞嚴經』을 배웠다. 여름이 한창일 때에는 보림사寶林寺 용암龍岩 스님 계시는 곳으로 찾아가서, 『기신론起信論』과 『금강경金剛經』 등의 경전을 배웠다. 『필삭기』와 「간기刊記」에 오자와 탈자가 많았다. 옛날부터 내려온 잘못된 글귀였으나 누구도 바로잡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나같이 처음 글을 배우는 자가 바로잡았다고,

010_0284_b_01L逃去如失左右手徃投異胎兄家依之
010_0284_b_02L入貢生之役侍奉官家余雖廢學
010_0284_b_03L以勤讀故藻思猶存主倅愛之置之
010_0284_b_04L册房與衙子弟同遊讀庸學十五歲
010_0284_b_05L甲寅官家捉虎令册房賦捉虎行題
010_0284_b_06L余亦賦大古風一篇頗有古詩體格
010_0284_b_07L喜以上下衣資賞之爲余衣薄也將欲
010_0284_b_08L率歸臨歸有障未果亦爲僧之數也
010_0284_b_09L若從彼而去爲僧不可定也十八歲恩
010_0284_b_10L老以法泉之人來住雲興寺一日訪余
010_0284_b_11L來言曰聞汝有才而困窮特來相訪
010_0284_b_12L從我出家勝於在家余讀儒書斥佛之
010_0284_b_13L故對曰爲僧不也而當作一玩之
010_0284_b_14L恩老唯唯而歸過數月主倅遞歸
010_0284_b_15L余乃訪恩老之居留一日忽發仍存之
010_0284_b_16L乃時緣到也恩老恐新官來索
010_0284_b_17L余于法泉師兄處十九歲祝髮受戒于
010_0284_b_18L安貧老師時恩老在普興寺靈虛師主
010_0284_b_19L六月徃從之學禪要至冬畢四集
010_0284_b_20L己未春聞碧霞大老在大芚寺學人
010_0284_b_21L多會余欲徃叅恩老從之同行學楞
010_0284_b_22L夏滿向寶林寺龍岩師主處學起信
010_0284_b_23L金剛等削記刊記多訛脫處自古沿
010_0284_b_24L而莫能辨定余以初學能卞之

010_0284_c_01L용암 스님께서 기특하게 여기시고 오래 머물렀으면 하고 바라셨다. 그러나 은사 스님께서는 그 뜻을 따르지 않으시고 축서사鷲栖寺 영곡靈谷 스님을 찾아가 『원각경圓覺經』을 배우게 하셨다. 그때 나이가 스물한 살이었다. 그곳에서 은사 스님은 다시 법천사로 돌아가시고, 그때부터는 나 혼자서 다니기 시작하였다.
신유년(1741) 봄에 동갑인 응해應解와 함께 해인사海印寺 호암虎岩 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찾아갔더니, 스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전에 용암 스님이 편지를 보내 너에게 공부할 근기가 있다고 하더니, 이제야 왔느냐?”
그러고는 나를 시자방侍者房에 있게 하시어, 당신에게 배움을 청하기 편하게 해 주셨다. 그곳에서 『염송拈頌』을 배웠다. 교문敎文을 지나서 선문禪文으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세속의 문장(俗文)을 넘어서 불경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한다. 그런데도 내가 어렵게 생각하지 않자, 스님께서 기특하게 여기셨다.
해인사에서 호암 스님을 모시며 배운 지 3년이 되던 해 을축년(1745) 봄에 백양산白羊山 물외암物外庵에서 십일불공十日佛供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그해 겨울 설파雪坡 스님이 계시는 내장사內藏寺 원적암圓寂庵 법회에 참여하여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을 배우고 「입법계품」까지 마쳤다. 이전에 다른 곳에서 『화엄경』 5회會 분을 도반 몇 사람들과 개인적으로 강론하여 사기私記를 만들어 둔 적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함께 강론해 내려갈 때에 그때의 사기를 참고로 하였더니, 그 내용이 대동소이하였다.
병인년(1746) 겨울에는 또 송광사松廣寺 동암東庵에서 호암 스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정묘년(1747) 봄, 내 나이 28세에 한 도반이 호암 스님께 입실入室117)할 것을 추천하였고 스님도 허락하셨지만, 나는 법회에 두루 참여해 보지 못했기에 사양하였다. 호암 스님은 강론을 파하고 동쪽 방장산에 거처하고 계셨고, 나는 동리산桐裡山으로 가 풍암楓岩 스님을 참방하였다.
무진년(1748) 봄에는 법운암法雲庵으로 가서 상월霜月 스님을 참방하였다.
이해 3월에 강원도 장구산長丘山에 53불佛을 만들고서, 스님을 증명법사의 자리에 앉도록 청한 일이 있었다. 호암 스님께서는 그곳에 가시기로 허락하시고, 떠나는 날 나를 불러 이렇게 당부하셨다.
“가업을 잇는 것118)이 우리를 보존하는 길이니, 너는 학문을 근면히 하고 행업을 착실히 닦아 우리 불가의 대를 이어야 한다. 이번에 가면 1년은 걸릴 터이니, 1년 뒤에 돌아오면 너에게 나의 부자斧子를 물려주겠다.”
그러나, 아, 누가 알았겠는가. 그 당부의 말씀이 마지막 남기신 경계의 말씀이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겠는가. 1년 뒤에 돌아오겠다 말씀하시고서 영원히 천 년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못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내원통암內圓通庵에 들어가 가부좌를 하고 앉아서 그대로 입멸하시었으니, 아, 슬프도다.
기사년(1749) 봄에는

010_0284_c_01L老奇之欲久住而恩老不從訪就栖寺
010_0284_c_02L靈谷師主學圓覺時余年二十一也
010_0284_c_03L恩老歸法泉余從此獨行辛酉春與同
010_0284_c_04L庚應解到海印寺虎岩師主處師主曰
010_0284_c_05L向得龍岩書報汝有學機今來耶
010_0284_c_06L侍者房便於請益也學拈頌由敎文
010_0284_c_07L入禪文如由俗書入佛經之難而余不
010_0284_c_08L爲難師主奇之隨侍三年乙丑春
010_0284_c_09L十日佛供於白羊山物外庵是冬叅雪
010_0284_c_10L坡師主於內藏圓寂庵學十地品至法
010_0284_c_11L界品終以前五會在他處與同袍數人
010_0284_c_12L私自講論亦爲私記至此與講下
010_0284_c_13L記相準多同小異丙寅冬又侍師主於
010_0284_c_14L松廣東庵丁卯春余年二十八同袍推
010_0284_c_15L余入室師主許之余以未能歷叅
010_0284_c_16L辭之師主因罷講居東方丈余徃叅
010_0284_c_17L楓岩師主於桐裡山戊辰春叅霜月師
010_0284_c_18L主於法雲庵三月江原道長丘山造成
010_0284_c_19L五十三佛請先師坐證席師主許赴
010_0284_c_20L臨行招余而囑曰紹箕裘吾保汝能勤
010_0284_c_21L學問謹行業以世吾家此行當期
010_0284_c_22L而還付汝鈯斧子嗚乎誰知此囑
010_0284_c_23L是遺誡期期而還永作千古不還耶
010_0284_c_24L入內圓通趺坐示滅嗚呼痛哉己巳

010_0285_a_01L용담龍潭 스님을 참방하였다.
경오년(1750) 봄에 영해影海 스님께서 주관하시는 송광사 대회에 참가하고, 대회가 끝난 다음에는 개천사開天寺에서 은사 스님을 시봉하였다.
6월 보림사寶林寺 서부도암西浮屠庵의 진선震先 노스님께서 세 번이나 편지를 보내와, 나에게 그 암자에 입실할 것을 청하였다. 찾아온 학인은 10여 명 남짓 되었고, 『반야심경』과 『원각경』을 강론했다. 그때 내 나이 31세였다.
신미년(1751) 봄에는 대중이 20명 남짓 모였고, 『현담玄談』119)을 덧붙여 강론하였다.
갑술년(1754) 봄에는 상월 스님께서 주관하시는 선암사仙岩寺 대회에 참가했다.
병자년(1756) 겨울에는 은사 스님께서 병이 위독해지셔서 내가 가서 병 수발을 들었지만, 섣달에 입멸하셨다.
경진년(1760)에는 대둔사大芚寺에 머물렀는데, 대중이 70명 남짓 되었다.
신사년(1761) 겨울에 함월涵月 노숙老叔께서 환성喚惺 사옹師翁의 비석을 세우려 하시어, 멀리에 있는 우리 사형과 사제들에게 모두 선사의 비석을 세우는 일에 함께 동참할 것을 부탁하셨다. 이런 일은 쓸데없이 재물만 소비할 뿐 아무런 이득도 없는 일이지만, 손윗사람의 명령이라 감히 거절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낭송朗松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비석에 쓸 돌 두 개를 사고, 서울에서 아예 비문까지 새겨 가지고 와서 대둔사에 비를 세웠다. 이때가 임오년(1762) 봄이었다.
무자년(1768)에는 미황사美黃寺에 머물러 있었는데, 법중이 80명 남짓 되었다. 이듬해 기축년까지 이 절에 머물렀는데, 그 1년 동안에 모든 일을 전부 절에서 맡아 담당하였고, 학인에게서는 한 푼도 거두는 일이 없었다.
정유년(1777) 봄에는 영남 종정嶺南宗正을 맡게 되었고, 춘향春享에 가서 참가하였으며, 해인사에서 지냈다. 그런데 그해 겨울에 대둔사에서 내게 계홍戒洪을 보내어, “서산西山 대사의 비석 허리 부분이 손상되었으니, 불가피하게 다시 세워야 하게 되었다.”라고 알려 왔다. 이에 각 도에 통문을 보내어 돈을 거두었다.
무술년(1778) 봄에 영남 종정에서 체임되어 서울로 올라갔기에 임오년에 환성 사옹의 비석을 세울 때처럼 서울에서 비석에 쓸 돌을 사서 비문까지 새겼다.
기해년(1779)에 창평昌平 서봉사瑞鳳寺 주지로 있을 때에 무명으로 날조된 글이 나도는 일이 생겨, 나와 퇴암退庵은 그 일로 여러 날 동안 곤란을 겪었다. 아마 어떤 사람이 사사로운 원한을 가지고 그런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 일은 생각만 하여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래서 그 일의 원인이 밝혀진 뒤에 곧바로 강론을 파했다. 그때 나의 나이 60세였으니, 31년을 소급해 올라갈 것 같으면 입실한 이후 30년 동안 경전을 강론하였던 셈이다.

010_0285_a_01L春叅龍潭師主庚午春叅影海師主之
010_0285_a_02L松廣大會會罷侍恩老於開天六月寶
010_0285_a_03L林寺西浮屠震先老宿三書請余入室
010_0285_a_04L於彼庵學人來會十餘人講般若圓覺
010_0285_a_05L余年三十一也辛未春衆至二十餘人
010_0285_a_06L添講玄談甲戌春叅霜月師主之仙岩
010_0285_a_07L大會丙子冬恩老病革余徃侍病
010_0285_a_08L月入滅庚辰住大芚寺衆七十餘人
010_0285_a_09L辛巳冬涵月老叔將營喚惺師翁之碑
010_0285_a_10L遠囑吾凡 [81] 同營先師之碑此事無益
010_0285_a_11L徒費財物而手上之命不敢拒與朗
010_0285_a_12L松上京買二碑石在京磨刻而來
010_0285_a_13L於大芚寺時壬午春也戊子住美黃寺
010_0285_a_14L法衆八十餘人至己丑一年之間凡干
010_0285_a_15L諸事寺中全當學人無一文收歛也
010_0285_a_16L丁酉春受嶺南宗正之差徃叅春享
010_0285_a_17L海印寺是冬大芚寺送戒洪來告曰
010_0285_a_18L西山之碑腰傷不可不改立乃發文諸
010_0285_a_19L道收錢戊戌春遞任上京買貞珉
010_0285_a_20L京磨刻如壬午事己亥住昌平瑞鳳寺
010_0285_a_21L有無名書諈揑余與退庵數日同在鋃
010_0285_a_22L鐺中盖出於或者之修私嫌也思之凛
010_0285_a_23L然故蒙原後即爲罷講年六十遡三十
010_0285_a_24L入室以來洽爲三十年講經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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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축년(1781)에는 금강산으로 가서, 금강대金剛臺에 들어가 법기보살法起菩薩께 10일 동안 공양을 올렸다. 그러고는 용공사龍貢寺 상선암上禪庵에 있는 퇴암을 찾아갔다. 퇴암이 개강할 것을 청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해 겨울 석 달 동안 『현담玄談』과 『반야경』을 강론하였다.
임인년(1782)에는 산에서 내려와 이리저리 들르면서 남쪽으로 내려갔다.
금년 정사년(1797)은 봄부터 여름이 지나도록 대둔사에서 지냈고, 8월에 이곳 미황사로 와 지내고 있다. 지금 내 나이 78세이다.
요점만 말하면, 내가 일곱 살 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도 열한 살에 『통감』 15권을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어머니께서 엄한 가르침으로 나를 근면하게 공부하도록 가르치신 덕택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 되어 곧바로 불경에 입문하고, 선재동자가 여러 선지식을 참방하였던 것을 본받아 공부하며, 마침내 입실하여 사방에서 공부하러 오는 사람을 맞이하여 가르치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또 모두가 70세 노인인 은사 스님께서 친히 짐을 지고서 나와 동행해 주신 힘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아마도 내가 탁발하는 포대를 지고 다닐 여가가 없었기에 은사 스님께서 직접 짐을 지셨던 것이고, 나를 데리고 함께 길을 다녔던 것은 아마 내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잘못되어 엉뚱하게 어물전으로 들어가게 될까 염려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마땅히 잠자는 것을 잊고 끼니를 거르면서 있는 힘을 다하여 부지런히 수양하는 것으로 어머님과 은사 스님 두 어른께서 베푸신 공덕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나는 시간만 낭비하면서 그냥 어영부영 세월을 보내고 있으니, 참으로 형편없는 제자로다, 유일이여. 너무나 불초한 자식이로다, 유일이여.
그러나 나는 입실한 뒤로 언제나 새벽부터 저녁까지 경을 외우고 진언을 외웠으며, 부처님께 예불하고 불경을 강론하였다. 항상 가사(田衣)120)를 입고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 향불 촛불도 피우지 않은 채 어둠 속에서 칠불七佛 팔보살八菩薩께 절을 하고 예를 올렸다. 이처럼 석자가 예불을 올리는 것은 일상적인 예법이기에, 고행을 하면서도 냉이처럼 달게만 여겨졌다. 그러므로 30년 동안 불경을 강론하면서 한 번도 큰 장애나 질병을 만난 일이 없었던 것이리라. 말년에 창평昌平에서 한 번 크게 놀란 일이 있었으나, 그 일 또한 별다른 우환 없이 결백이 밝혀졌던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으리라.
또 문장과 글귀에 빠져 부지런히 노력하여 공부하였다. 늘 대교大敎와 여러 경전의 어려운 부분을 끝까지 생각하고 세심하게 연구하여 손수 해석을 기록하였다. 그렇게 하여 찾아오는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비록 문하에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라도 또한 베껴 적어 볼 수 있도록 해 주었으니,

010_0285_b_01L丑作金剛之行入金剛臺供養法起菩
010_0285_b_02L十日訪退岩於龍貢之上禪庵退岩
010_0285_b_03L請開講不得已三冬講玄談般若壬寅
010_0285_b_04L下來展轉南下今丁巳春過夏於大芚
010_0285_b_05L八月來住此美黃寺余年七十八也
010_0285_b_06L斷曰余七歲早喪止慈而十一歲讀盡
010_0285_b_07L通鑑者由慈侍之丸熊畫荻助余勤學
010_0285_b_08L之德也息慈之初直入佛經效善財之
010_0285_b_09L叅友終至入室接待方來者由恩師之
010_0285_b_10L七十老人親自負擔與余同行之力也
010_0285_b_11L盖余不閑負擔故親負包帒率余同行
010_0285_b_12L恐余年幼橫入鮑魚之肆也余當忘
010_0285_b_13L寢廢飱勠力勤修以報慈恩二老萬一
010_0285_b_14L之功而因循擔閣悠泛度日無狀哉
010_0285_b_15L有一也不肖哉有一也然有一言
010_0285_b_16L自入室之後每向晨昏誦經誦呪
010_0285_b_17L佛講經常着田衣淸晨早起不點香
010_0285_b_18L暗拜七佛八菩薩釋與焚修常禮
010_0285_b_19L如是此乃苦行而甘之如薺所以三十
010_0285_b_20L年講經一無大端障難疾病末後昌平
010_0285_b_21L之駭機亦無患而蒙白者皆是物以也
010_0285_b_22L又懃懃懇懇於章句之間每大敎與諸
010_0285_b_23L經之難處覃思細究手自記釋開牗
010_0285_b_24L及門之輩雖未及門者亦得展轉傳寫

010_0285_c_01L이것을 본으로 삼아 공부를 하는 자도 간혹 있었다. 북쪽 지방의 여러 스님들도 역시 나의 사기에 의지하여 강경을 한다는 소문까지 들었으니, 이만하면 법시法施가 멀리까지 뻗어 적신 셈이며 교해敎海가 은미하게 흘러갔다고 할 만하리라. 이상 두 가지로 말하자면, 아마도 거의 어머님과 두 분 은사 노인네들의 권장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선지식121)들의 법회에 참가한 일은 많지 않았으나, 내가 첫 번째로 영허 스님을 만났고, 두 번째 벽하 스님을 만났으며, 세 번째 용암 스님을 만났고, 네 번째 영곡 스님을 만났으며, 다섯 번째 선사先師를 만나 일곱 곳을 따라다니며 시봉하면서 5년을 지냈고, 여섯 번째 설파 스님을 만났고, 일곱 번째 풍암 스님을 만났으며, 여덟 번째 상월 스님을 만났고, 아홉 번째 용담 스님을 만났고, 열 번째 영해 스님을 만났다. 이렇게 앞뒤로 열 번이나 대법사의 법회에 참가하여 받들고 주선하면서 감히 불도를 실추하지 않았다.
문장과 시를 잘한다는 칭찬에 이를 것 같으면, 법문에서는 정통이 아닌 일이니 뭐 입에 올릴 일이 되기나 하겠는가. 그러나 만약 평생 동안의 마음 씀씀이로 논할 것 같으면, 원래 억지로 겉치레 꾸밈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무슨 말이건 다 본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았으니, 한 번 만나 본 사람들은 다 나를 질박하고 소탈한 사람이라고 했다.
배우는 자리에 있었던 시절부터 입실한 다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은 나를 좀 맑은 사람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그러나 일찍이 스스로 자랑하는 태도가 있었다거나 가식적인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은 당시 도반들이 잘 알 것이다. 단지 성정이 조급해서 무슨 일에 임할 때에 자세하게 살피지 못해서 늘 실수가 많았다. 그리고 남의 허물을 보면 절대 용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화를 내며 입바른 소리를 하는 상황을 면하지 못했다. 비록 뒤끝은 없는 사람이라 마음속에 오래 두지는 않았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나의 이 화 잘 내는 내 성격을 자주 지적하면서, 이것이 나의 단점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이상을 종합해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어리석음과 영리함이 반반씩 섞인 사람이라, 두루 인격을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이것이 애석한 점이다.
신족神足으로는 학추學湫와 취찬就粲 두 사람이 있으며, 문도 중에는 일찍 죽어 나에게 상을 당하는 아픔을 겪게 한 사람도 여섯이 있었으며, 또 나에게 즐거움을 안겨 준 사람도 십여 명이 있다.
아, 여러 지방의 현명하신 종사는 이제 거의 다 돌아가시고 보잘것없는 이 몸만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으니, 물맛이 단 샘물은 빨리 마르고 맛이 쓴 배가 끝까지 남아 있는 격이 아니겠는가.
또 배우는 사람들을 위하여 저술한 사집수기四集手記 각 1권과 『기신사족起信蛇足』 1권, 『금강하목金剛鰕目』 1권, 『원각사기圓覺私記』 2권,

010_0285_c_01L以爲矜式者或有之聞北方諸師
010_0285_c_02L有依而講授可謂法施之遐霑敎海之
010_0285_c_03L微流也右二節可以蔽余平生庶幾乎
010_0285_c_04L無負慈恩二老勸奬之意也又善友之
010_0285_c_05L叅少如余初逢靈虛二碧霞三龍岩
010_0285_c_06L四靈谷五逢先師七處隨侍經過五年
010_0285_c_07L六雪坡七楓岩八霜月九龍潭十影
010_0285_c_08L前後叅十大法師奉以周旋不敢
010_0285_c_09L失墜至若能文能詩之稱乃法門之閏
010_0285_c_10L何足道乎若論平生心術元無彊
010_0285_c_11L作外餙凡所云爲罔非由中人皆一見
010_0285_c_12L而謂之質直踈蕩也自學地至入室
010_0285_c_13L謂之差淑餘人而未甞有矜持之態
010_0285_c_14L假之意當時同袍知之但性情燥急
010_0285_c_15L事不能詳審每多失處見人有過不能
010_0285_c_16L容恕未免疾言遽色雖即時放下
010_0285_c_17L留胷中而人多以嗔怒數起此其短也
010_0285_c_18L合而論之癡黠相半未能爲周備之人
010_0285_c_19L可惜神足有學湫就粲二人門徒有使
010_0285_c_20L余抱喪予之痛者六人得起余之樂者
010_0285_c_21L十餘人諸方哲匠零落殆盡而唯
010_0285_c_22L余無似尙存不死豈井以甘竭李以苦
010_0285_c_23L存耶又爲學人所述四集手記各一卷
010_0285_c_24L起信蛇足一卷金剛鰕目一卷圓覺私

010_0286_a_01L『현담사기玄談私記』 2권, 『대교유망기大敎遺忘記』 5권, 『제경회요諸經會要』 1권, 『염송착병拈頌着柄』 2권과 『임하록林下錄』의 시 3권과 문 2권 등이 여러 문하생들 사이에 유통되고 있다.
따르던 문도는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들이 모두 너무나 많아서, 누가 먼저인지 전부 몇이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짐짓 나에게 스스로 「자보自譜」를 써 달라고 청하기에 여기 이렇게 쓴다. 내가 대혜大慧 대사와 감산憨山 대사도 다 스스로 연보를 기술하였던 것을 보았으니, 이미 스스로 연보를 기술했던 예가 있으므로 나도 따라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내가 평생 동안 살아온 일들을 고찰하여 이와 같이 사건별로 기록하였다.
정조 21년 정사년(1797)【가경嘉慶 2】 섣달에 연담 노두蓮潭老杜가 쓸데없이 많은 말을 남긴다.
추기追記
선사의 휘는 유일有一이고 자는 무이無二이며, 연담蓮潭은 그의 호이다.
30년 동안 경전을 강론하실 때에는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왔으니, 마치 개미 떼가 비린 냄새를 찾아 달려드는 것 같았으며, 파리가 구린 냄새를 향해 날아오는 것과도 같았다. 큰 문장가로 이름난 사람들도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찾아왔으며, 선사의 문하에 들어 배움을 청하려는 사람들로 문 앞에 벗어 놓은 신이 가득하였다. 『화엄경』 강의로 이름을 드날려 15년을 두루 다니시며 강론하면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찾듯 허虛를 버리고 실實로 귀착하였으니, 선사는 부처님 가르침의 바다를 저어 가는 지혜의 노라고 할 만하고 선림의 목탁이라 할 만하다.
아, 슬프다. 선사는 무오년(1798) 봄에 보림사寶林寺 삼성암三聖庵으로 옮겨 가 계셨는데, 어느 날 숨소리(氣息)가 조금씩 잦아지면서 끊어지려 하였다. 시자侍者들이 울면서 무슨 말씀이라도 해 주실 것을 청하자, 선사는 이렇게 말씀을 남기셨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낮과 밤이 열렸다 닫히는 것과 같은데, 무엇 때문에 그다지도 슬퍼하느냐?”
말씀을 마치자 바로 입멸하셨으니, 이때가 기미년(1799) 2월 3일 미시未時였으며, 선사의 연세 80이셨다.
아! 산이 오열하고 시내가 오열했으며, 구름도 슬퍼하고 달도 조문하였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3일을 계속하여 상서로운 빛이 하늘을 꿰뚫는 듯하더니, 돌아가신 후 칠재七齋를 지낼 때에도 매번 상서로운 기운이 공중에 서리곤 하였다.
아란야阿蘭若122)의 방장方丈께서 홀연히 영결하셨으니, 솔도파率堵婆123)에 윤상輪相124)도 또한 마땅히 봉안해야 하리라.

010_0286_a_01L記二卷玄談私記二卷大敎遺忘記五
010_0286_a_02L諸經會要一卷拈頌着柄二卷
010_0286_a_03L下錄詩三卷文二卷並行於及門諸徒
010_0286_a_04L門徒之相隨有先有後不知始終
010_0286_a_05L全體故請余自譜余觀大慧憨山
010_0286_a_06L自述年譜旣有例可援乃考平生
010_0286_a_07L錄如是

010_0286_a_08L
聖上二十一年丁巳嘉慶
二年
臈月日蓮潭
010_0286_a_09L老杜多述

010_0286_a_10L

010_0286_a_11L追記

010_0286_a_12L
先師諱有一字無二蓮潭其號也
010_0286_a_13L十年講經學者雲集蟻尋腥走蠅向
010_0286_a_14L臭飛大手名曺不遠千里登門請益
010_0286_a_15L屨滿戶庭闡揚華嚴講周十五
010_0286_a_16L渴飮水虛徃實歸可謂敎海智楫
010_0286_a_17L林木鐸先師戊午年春移住寶林
010_0286_a_18L寺三聖庵一日氣息奄奄欲盡侍者涕
010_0286_a_19L泣請敎師曰人之死生如晝夜之開合
010_0286_a_20L何必爲悲仍以示滅乃己未二月初三
010_0286_a_21L日未時也時年八十嗚呼山鳴澗咽
010_0286_a_22L雲愁月弔易簀之前連三日祥光洞天
010_0286_a_23L送終之後各七齋瑞氣盤空阿蘭若
010_0286_a_24L方丈忽見永訣率堵波輪相亦冝奉

010_0286_b_01L이에 달마산 미황사에서 석종石鍾을 새기고 옥 같은 시편으로 문집을 간행하니, 형상은 이렇게 백 년 만에 사라졌어도 그 이름만은 천 년 멀리까지 드리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두륜산 대둔사에 곡탑鵠塔을 봉안하고 귀비龜碑를 세우니, 그 향기 만고 멀리까지 흘러갈 것이고 그 이름 천추 세월 동안 전하게 되리라.
가경 4년 기미년(1799) 4월 어느 날에 문인 계신誡身이 추모하면서 찬하였다.
연담 대사 진영찬(蓮潭大師影賛)
短其眉小其眼            짤막한 눈썹과 자그만 눈은
色即是空              색色이면서 곧 공空이며
仰其鼻尖其口            치켜 올라간 그 코와 뾰족 나온 그 입은
食即是空              식食이면서 곧 공空이로다
蓮花淨淨              연화蓮花처럼 깨끗하고
潭水空空              못물처럼 텅 비었으니
安用相爲              색공色空 식공食空을 어찌 서로 섞을까
相維空空              상相은 공하고 공하다네
遵其戒硏其業            그 계업戒業를 따르고 연마하여
道得於眞              도는 진眞을 터득했으며
鍊其精遊其神            그 정신을 연마하여 노닐었으니
心得於眞              마음이 진眞을 얻었구나
丹靑莫狀              형상을 단청으로 꾸며 그리지 말지니
形外有眞              겉모습 밖에 참모습이 있다네
七分淸和              해맑고 온화한 모습의 진영은
庶幾蓮潭之眞            거의 연담 스님 진짜 모습 그대로구나

정조 17년(1793) 번암樊巖 채蔡 상국相國 백규伯規가 찬하다.
또(又)
듣자 하니 일체의 부처님께서는 최상의 깊고 오묘한 법을 갖추었다는데, 그중에서도 화엄華嚴이 제일이라 하였다.
내가 왕년에 연담 스님과는 일찍이 일면식이 없었고 또 스님의 강론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러나 전에 내가 보개산寶盖山에서 승방의 요사채를 빌려 한여름 결제를 나고 있을 때에, 종종 연담 대사라는 분이 화엄의 종사가 되실 만한 분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지금 상겸尙謙 상인上人을 통해 스님의 작은 진영眞影 하나를 얻어 보니, 과연 도자道者의 기상이 있는 분이시다. 스님은 어째서 상像은 모습을 잃는 것이 많다고 하셨을까. 스님께서는 상 없는 상을 이 한 부의 『화엄경』 속에 갖추고 있으시니, 세간의 문구文句로는 도저히 그 모습을 형용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신묘한 불법은

010_0286_b_01L於是鐫石鍾刊玉篇於達摩山美黃
010_0286_b_02L形盡百年名垂千載安鵠塔建龜碑
010_0286_b_03L於頭崙山大芚寺芳流萬古名傳千秋

010_0286_b_04L
嘉慶四年己未四月日門人誡身追
010_0286_b_05L繼撰

010_0286_b_06L

010_0286_b_07L蓮潭大師影賛 [82]

010_0286_b_08L
短其眉小其眼色即是空仰其鼻尖其
010_0286_b_09L食即是空蓮花淨淨潭水空空
010_0286_b_10L用相爲相維空空遵其戒硏其業
010_0286_b_11L得於眞鍊其精遊其神心得於眞
010_0286_b_12L靑莫狀形外有眞七分淸和庶幾蓮
010_0286_b_13L潭之眞

010_0286_b_14L
上之十七年樊巖蔡相國伯䂓撰

010_0286_b_15L

010_0286_b_16L

010_0286_b_17L
我聞一切佛具無上甚深微妙法華嚴
010_0286_b_18L爲最余徃與蓮潭師未曾識面又未
010_0286_b_19L甞聽其講法而向余借僧寮結夏于寶
010_0286_b_20L盖山徃徃聞其爲華嚴宗師今因尙謙
010_0286_b_21L上人獲覩其小影果有道者氣像也
010_0286_b_22L師何以像爲以貌失之者多矣師有無
010_0286_b_23L像之像於一部華嚴而非世間文句可
010_0286_b_24L得而形容也佛之妙法譬如如意珠

010_0286_c_01L용왕의 궁전 안 사가타娑伽陀125)의 머리 위에 보관되어 있는 여의주와도 같은 것이다. 연담 스님은 나라연那羅延126)만큼 강한 힘으로 견고한 금강심金剛心을 잡고서 크나큰 서원을 발하여, 크나큰 부처님 법의 바다 안으로 들어가 이 크나큰 보주寶珠의 깊은 마음을 찾기 위하여, 무한히 많은 세상 국토를 구름처럼 광대한 자비의 마음으로 법을 전하는 배가 되어 이리저리 두루 돌아다니신 분이시다. 처음에는 원각圓覺의 광명한 세계와 능엄楞嚴의 청정한 세계, 그리고 금강金剛의 반야 바다를 출입하였고, 마지막에는 화엄華嚴의 묘법 바다에 배를 대었다. 수월水月의 광명을 고요히 관觀하시니, 연못에 피어난 오묘한 연꽃잎 고요한 못 속 가타伽陀의 정수리 위에 빛나는 구슬과 같으시며, 원통圓通127)한 경계의 고루 비추는 광명은 마니주 속의 마음 구슬을 비춘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누각과 도솔천의 궁전에서 한번 살짝 손가락을 퉁기는 그 짧은 사이에 불길처럼 거세게 일어난 무설설법無舌說法으로 우레와도 같은 큰 소리를 울리셨다. 그리하여 사방의 법중들이 모두 말하리라.

南無蓮潭大師 摩訶般若波羅密    “나무 연담 대사 마하반야바라밀.”
余何容爲賛偈曰          그런데 내가 다시 무슨 게송을 지어 찬할 필요가 있겠는가.
顱崇于盂             두개골은 발우 엎은 것보다도 높고
額棱而紋             이마는 툭 튀어나와 반짝이고 있네
眞色相是空色相          진색상眞色相128)이 바로 공색상空色相129)이거늘
誰知中藏無量華嚴之法門      마음속에 간직한 무한한 화엄의 법문 뉘라서 알겠는가

정조 17년(1793) 정월 보름날 밤에 원임原任 홍문관 교리 경연 시강관 지제교 염원聃園 이현도李顯道 이순而循이 찬贊하고 아울러 서書한다.
연담 대화상 시집 발문(蓮潭大和尙詩集跋)
위대하다. 우리 선사 연담 대화상이시여!
유교와 불교의 내외 경전에 두루 통달하여 누구보다도 학식이 뛰어났으니, 아름다운 꽃이 만발했다고 하는 표현은 바로 이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그 행각도 두각을 나타내어 마치 달이 강물에 임한 것 같았으니, 곳곳마다 불당을 세워 교화한 사람이 몇 천 명이었던가. 권權과 실實을 아울러 베풀어 제도하였으나 제도함이 없었으니, 이 세상에 그 그림자가 드러나지 않겠는가. 반드시 일무념지一無念智의 경지를 터득했을 것이다.
또 시를 읊고 문장을 저술한 것은 강설과 선교禪敎의 여가에 한 일인데, 어쩌다 바깥에서 찾아온 시객을 만나게 되었을 때 잠시 시를 지어 응답했던 것뿐이었다.

010_0286_c_01L藏于龍王宮娑伽陁頭上師以那延力
010_0286_c_02L秉金剛心發大誓願入大法海求此
010_0286_c_03L大寶珠深心歷于塵刹慈雲法航
010_0286_c_04L右方灘始也出入于圓覺之光明海
010_0286_c_05L楞巖之淸淨海金剛之般若海終焉
010_0286_c_06L艤筏于華嚴妙法之海靜觀水月之光
010_0286_c_07L於一泓妙蓮空潭伽陁頂䯻之珠圓通
010_0286_c_08L普照齊光並明於摩屍方寸之珠毘盧
010_0286_c_09L樓閣兜率天宮一彈指頃熾然建立
010_0286_c_10L無舌說法有聲如雷是以四方法衆咸
010_0286_c_11L南無蓮潭大師摩訶般若波羅密
010_0286_c_12L余何容爲賛偈曰顱崇于盂額棱而紋
010_0286_c_13L眞色相是空色相誰知中藏無量華嚴
010_0286_c_14L之法門

010_0286_c_15L
上之十七年燈夕原任弘文館校理
010_0286_c_16L經筵侍講官知製敎聃園李顯道而循
010_0286_c_17L賛幷書

010_0286_c_18L

010_0286_c_19L蓮潭大和尙詩集跋 [83]

010_0286_c_20L
大矣哉吾師蓮潭大和尙也愽通內外經
010_0286_c_21L知識過人可謂發華者此也而行脚
010_0286_c_22L到頭如月臨江處處建幢敎化幾千人
010_0286_c_23L權實並施度而無度無乃影顯於斯
010_0286_c_24L世耶必得一無念智也又以賦詩述文
010_0286_c_25L則講說禪敎之餘或對唫咏之外客暫以

010_0287_a_01L그러나 시와 문장에 있어서도 비단결 같은 마음에 수를 놓듯 읊은 아름다운 문장이었으며, 신이 놀라고 귀신을 울릴 만큼 빼어난 운율이었으니, 문장마다 주옥같고 구절마다 경옥 같다. 어찌 다만 말에 기댄 채로 그 자리에서 빠르게 장문의 문장을 써 내는 그런 문장 재주(倚馬可待)130)만 있다고 하겠는가. 일곱 걸음 걷는 사이 시 한 수를 지어낼 만큼 시 짓는 재주(七步才)131)도 뛰어났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 이전에도 또 이 이후에도 문집은 아마 많이 있을 것이나, 이 문집에 준할 만한 글을 찾는다면 아마도 따라올 것이 없을 것이다. 진실로 예나 지금이나 아직 한 번도 있었던 적이 없었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설령 소동파와 이태백이 대사를 마주 대했더라도 입이 마르도록 인정하고 칭찬할 것이며, 황산곡과 두보라도 또한 두 손 놓고 말았을 것이다. 어찌 다만 이 두 사람의 문장뿐이겠는가. 응당 팔대가의 문장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나같이 자잘한 재주로 억지로 글을 꾸미는(彫蟲小技)132) 무리들이 어찌 오봉루五鳳樓133)를 짓는 솜씨에 이러니저러니 수식을 할 수 있겠는가.
기미년(1799) 4월 병제病弟 회운 덕활會雲德濶이 삼가 발문跋文을 쓰다.

010_0287_a_01L酬應然詩與文則錦心繡口之文章
010_0287_a_02L神泣鬼之佳律也文文珠玉句句瓊琚
010_0287_a_03L奚啻倚馬之可待哉可謂七步之奇才也
010_0287_a_04L前後文集□□□□或多有之然準於
010_0287_a_05L則無有等及者矣實爲古今未曾有
010_0287_a_06L此也東坡靑蓮倘有相對滿口許稱
010_0287_a_07L山谷杜老亦拱手而已豈但二斗哉
010_0287_a_08L是八斗之文章矣如我蜩虫小技之輩
010_0287_a_09L堪着粉於五鳳樓手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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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四月日病弟會雲德濶謹跋
  1. 116)사집四集 : 『書狀』·『都序』·『禪要』·『節要』를 말한다.
  2. 117)입실入室 : 선종에서 제자가 법사의 방에 들어가 법을 잇는 것이니, 이것을 입실사법入室嗣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교가敎家에서도 행하며 건당식建幢式이라고 한다. 법맥을 상속하는 것, 조사실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3. 118)가업을 잇는 것(克紹箕裘) : 극소기구克紹箕裘는 본래 『禮記』 「學記」 편의 “풀무장이의 아들은 반드시 가죽옷을 만드는 일을 배우고, 활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은 반드시 키 만드는 것을 배운다(良冶之子。 必學爲裘。 良弓之子。 必學爲箕。)”는 말에서 유래하여, 조상의 가업을 잇는다는 말로 사용된다.
  4. 119)『현담玄談』 : 『華嚴經』의 주석서를 말한다. 이 내용으로 볼 때 연담 대사가 『華嚴經玄談演義抄』의 중요한 곳을 해석한 『玄談私記』일 것이나, 동명의 책이 있으므로 그냥 앞과 같이 주석한다.
  5. 120)가사(田衣) : 전의田衣는 가사의 다른 이름으로, 가사의 오조五條 또는 이십오조二十五條의 줄이 마치 밭이랑이 벌여 있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렇게 부른다.
  6. 121)선지식(善友) : 선친우善親友, 친우親友, 승우勝友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정도를 가르쳐 보여 좋은 이익을 얻게 하는 스승이나 친구로서, 나와 마음을 같이하여 선행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7. 122)아란야阿蘭若 : 줄여서 난야蘭若·연야練若라고 하며, 적정처寂靜處·무쟁처無諍處·원리처遠離處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시끄러움이 없는 한적한 곳으로, 수행하기에 적당한 삼림이나 계곡 등의 수행처를 말한다.
  8. 123)솔도파率堵婆 : 탑파塔婆·영묘靈廟 등으로 불리기도 하니, 유골이나 경전을 넣는 탑을 말한다.
  9. 124)윤상輪相 : 또는 상륜相輪, 공륜空輪, 구륜九輪, 노반露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탑의 꼭대기에 장식하여 놓은 둥근 바퀴 모양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 아홉 개의 륜輪으로 되어 있다.
  10. 125)사가타娑伽陀 : 이 존자가 처음 태어날 때에 자태가 너무 사랑스러워 아비가 보고 기뻐하여 ‘선래善來’라고 불렀다고 한다.
  11. 126)나라연那羅延 : 또는 나라연나那羅延那라고도 하며, 번역하여 견고堅固·구쇄역사鉤鎖力士라고도 한다. 천상의 역사로서, 그 힘이 코끼리의 백만 배나 될 만큼 세다고 한다.
  12. 127)원통圓通 : 부처와 보살이 깨달은 경지로, 신묘한 지혜를 증득한 것을 말한다.
  13. 128)진색상眞色相 : 진색眞色은 여래장如來藏 중의 색으로, 진공眞空의 신묘한 색을 말한다.
  14. 129)공색상空色相 : 형상이 없는 것을 공空, 형상이 있는 것을 색色이라 한다.
  15. 130)말에 기댄~문장 재주(倚馬可待) : 의마가대倚馬可待는 글재주가 뛰어나 글을 빨리 잘 지음을 말한다. 원호袁虎가 말에 기대어 즉시 일곱 장에 걸친 장문을 지은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16. 131)일곱 걸음~짓는 재주(七步才) : 칠보재七步才는 일곱 걸음 걷는 사이에 시 한 수를 짓는 재능이라는 뜻으로, 걸작의 시문을 빨리 짓는 재주를 이른다. 위魏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가 그의 아우 조식曹植을 꺼려서 “일곱 걸음 걷는 동안에 시 한 수를 지어라. 만일 못 지으면 처형하겠다.”라고 명하자, 조식이 그 자리에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시를 지었다고 한다.
  17. 132)자잘한 재주로~글을 꾸미는(彫蟲小技) : 조충소기彫蟲小技는 벌레를 새기는 보잘것없는 솜씨라는 뜻으로, 남의 글귀를 토막토막 따다가 맞추는 서투른 재주를 이르는 말이다.
  18. 133)오봉루五鳳樓 : 옛날 누각 이름이다. 당대 낙양洛陽에 오봉루를 세우고 현종이 그 아래 모여서 술을 마실 때에 3백 리 안의 모든 현령과 자사刺史들에게 성악聲樂을 대동하고 참가하도록 하였다. 양梁 태조太祖 주온朱溫이 즉위하여 중건하면서 땅에서 백 길이나 올려 높이가 허공 속으로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新唐書』 「元德秀傳」에 나온다. 후에 문장의 거장을 오봉루를 짓는 솜씨에 비유하게 되었다.
  1. 1)「附錄」二字。編者補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