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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455_b_14L경암집 발鏡巖集跋신라와 고려 시대에 불교가 크게 흥성하고 명승이 배출되었으나, 혹은 빈말에 의탁하여 명리를 훔치고 혹은 이단의 학술을 끼고 보고 듣는 자를 현혹시켜 그 본래면목을 잃지 않은 자가 거의 드물었다. 본조本朝에 이르러 유학을 숭상하고 성인의 도를 높여 양종의 승과를 파하고 승니僧尼의 도첩을 혁파하였다. 이로부터 삭발하여 승복을 입는 자가 대부분 농상을 게을리하고 부역을 회피하여 한가히 노는 무뢰배들이었다. 눈과 귀는 불경의 한 구절도 알지 못하니 부처를 배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그러나 선비로서 세상에 불우한 자가 때때로 불문에 기탁하여 마음에 맹세하고 고행하며 힘써 내전을 연구하여 말이 윤리에 위배되지 않아 이로써 자성을 보고 이로써 대중을 교화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선비의 불행이요 불씨佛氏의 행운이다. 이 때문에 군자는 말하기를, “불씨의 학문이 더욱 높을수록 (성인의 도가) 더욱 무너지고 더욱 굽힐수록 (성인의 도가) 더욱 드러난다.”고 한 것이다. 여와 선생이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추파 스님의 시문은 소순蔬筍의 기미128)가 없고 충군애친의 의리에 대해 정성스러운 마음이 그치지 않으니, -
010_0455_b_14L2)鏡巖集跋 [11]
010_0455_b_15L羅麗之際。竺敎大興。名僧輩出。而或托
010_0455_b_16L空言。而盜竊名利。或挾異術。而眩耀觀
010_0455_b_17L聽。不失其本來面目者幾希。洎本朝崇儒
010_0455_b_18L尊道。罷兩宗科。革僧尼度牒。自是薙髮
010_0455_b_19L被緇者。率多惰農桑逃賦役。無賴遊閒之
010_0455_b_20L輩。耳目不識貝多一葉。其可曰學佛云乎
010_0455_b_21L哉。然而士有不遇於世者。徃徃托迹於斯。
010_0455_b_22L乃誓心苦行。力治內典。爲言不背於倫彜。
010_0455_b_23L以是見性。以是化衆。此固士之不幸。佛
010_0455_b_24L氏之幸也。故君子曰。佛氏之學。愈尊而
010_0455_b_25L愈壞。愈絀而愈顯。餘窩先生。嘗爲余言。
010_0455_b_26L秋波師詩文。無蔬筍氣。於忠君愛親之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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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455_c_01L이는 참으로 불우한 선비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내가 그 글을 읽을 때에 “교목의 한 잎이 기림에 날아 들어갔다.(喬木一葉。 飛入祇林。)”는 말에 이르자, 여러 번 읽으며 탄식하고 한번 만나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지난번에 방장산의 팔관 스님이 그 선사의 유고를 지니고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나의 스승의 이름은 응윤이요 호는 경암으로, 추파의 뛰어난 제자이니 그대가 한마디 말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하니 나는 의리상 사양할 수 없었다.삼가 살피건대, 스님의 속성은 민閔으로 영남의 거족이다. 9세에 경사를 통하고 또 시를 지을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집안의 어려움을 만나 방장산에 들어가 추파에게 배워 일찍 의발을 전수받았다. 늘그막에는 좌선하며 날마다 불경을 송독하고 염불하여 드디어 양종의 영수가 되었다. 세 번 무차대회를 열어 사부대중이 우러르고 예를 올리는 자가 만 명을 헤아리니, 비록 신라·고려의 명승이라도 이보다 나을 수는 없었다. 스님은 이미 이치를 돈오하였으니 문장 또한 이치에 닿았다. 「오효자전」과 「박열부전」은 유가의 문장과 매우 흡사하다. 또 그가 고향 사람에게 준 시편에서 곤궁하고 외로운 모습을 서술한 것은 추파가 척전陟顚에게 고해 준 말이요, 함양 자사子舍에게 준 편지에서 “재주를 지닌 선비는 은둔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은 추파가 김 동자金童子를 격려하는 뜻이었으니, 스님은 추파를 잘 배운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스님과 추파의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전하여 이 문로門路를 열어 대중으로 하여금 마하반야가 이와 같고 다만 공허적멸에 그칠 뿐이 아님을 알게 하였으니, 두 스님이 불씨에 세운 공이 크다. 이 때문에 나는 두 스님의 처한 바를 가만히 슬퍼하고 거듭 불씨를 위하여 축하하는 것이다.통훈대부通訓大夫 이조 좌랑吏曹佐郞 겸兼 실록 기주관實錄記注官 완산完山 이재기李在璣가 발문을 쓰다. -
010_0455_c_01L拳拳不已。此眞不遇士也。及余讀其書。
010_0455_c_02L至于喬木一葉。飛入祗林之語。爲之三復
010_0455_c_03L歎咜。恨未之一見也。日方丈山人八關。
010_0455_c_04L袖其先師遺藳。謁余曰。吾師名應允。鏡
010_0455_c_05L巖其號。秋波高足弟子。子其可無一言乎。
010_0455_c_06L余義不敢辭。謹按師。俗姓閔。亦嶠南鉅
010_0455_c_07L族。九歲通經史。又能作韻語。未幾遭家
010_0455_c_08L難。入方丈山中。從秋波學。早受衣鉢之
010_0455_c_09L托。暮䄵坐禪。日誦經念佛。遂爲兩宗領袖。
010_0455_c_10L三設無遮大會。四衆之瞻禮者。以萬數。
010_0455_c_11L雖羅麗名僧。莫之過也。師旣頓悟於理。
010_0455_c_12L文亦理到。傳吳孝子朴烈婦。酷似儒家語。
010_0455_c_13L且其贈鄕人詩。叙其窮阨孤苦之狀者。秋
010_0455_c_14L波所以告陟顚之語也。貽咸陽子舍書曰。
010_0455_c_15L負才之士。不可隱遯者。秋波所以勉金童
010_0455_c_16L子之義也。師其善學秋波者也。師與秋波
010_0455_c_17L心心相傳。開此門路。使大衆。知摩訶般
010_0455_c_18L若。如是不如是。祗是空虛寂滅而止耳。
010_0455_c_19L二師有功於佛氏大矣。故余竊悲二師所
010_0455_c_20L遇。而重爲佛氏賀焉。
010_0455_c_21L通訓大夫吏曹佐郞兼實錄記注官。完
010_0455_c_22L山李在璣跋。
010_0455_c_23L此影贊。底本在卷頭(序文之後) 編者移置於
010_0455_c_24L此。此跋文。底本在卷頭(影贊之後) 編者移
010_0455_c_25L置於此。
- 128)소순蔬筍의 기미 : 채식을 하는 사람이 지은 시를 말한다. 소식이 일찍이 도잠陶潛의 시를 평하여 “한 점 소순의 기미가 없다.”라고 일컬었다. 『宋人軼事彙編』.
- 1)此影贊。底本在卷頭(序文之後) 編者移置於此。
- 2)此跋文。底本在卷頭(影贊之後) 編者移置於此。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김재희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