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 禪門四辨漫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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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전라남도 해남군 두륜산 대흥사에 주석하는 해동사문 초의 중부자 의순 지음.

영남에서 온 어떤 객승이 자신은 목부산 육은六隱1) 노인의 법을 이어받은 제자라고 말했다. 비 때문에 발이 묶여 열흘 정도 묵으며 자기 스승의 선론禪論에 대하여 그가 펼쳐 보인 많은 이야기 속에 전래의 이치와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근거를 인용하여 증명하고 바로잡겠다.
제1편 백파白坡의 삼종선론三種禪論 비판
제1장 삼처전심三處傳心을 바라보는 시각
1. 백파의 설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1)에 담겨 있는 살殺은 오로지 살만 있을 뿐 활活이 없으므로 여래선이라 하고, 꽃을 들어 보인 것2)에 담겨 있는 활은 살도 겸비하고 있으므로 기틀(機)과 활용(用)을 모두 갖추고 있어 조사선이라 한다.
2. 초의의 비판
“삼처전심三處傳心3) 중에서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分座)은 살殺을 전했고, 꽃을 들어 보인 것(拈華)은 활活을 전했으며, 관 밖으로 발을 내어 보인 것(示趺)은 살과 활을 평등하게 보여 주었다.” 이상은 구곡龜谷의 주장이다. (이것에 비추어 볼 때)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에는 오로지 살의 방법만 있고, 꽃을 들어 보인 것에는 활과 더불어 살도 겸비하고 있다’고 한 백파의 말은 구곡의 말에는 없는 내용이다.
살과 활, 기틀과 활용(機用), 비춤과 작용(照用) 등은 본체와 작용(體用)이라는 틀과 함께 그 명칭이 다를 뿐이다. 만일 기틀과 활용을 분명하게 통달한다면, 살과 활이나 본체와 작용 등의 구분도 그것을 기준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기틀과 활용이라는 말은 대기大機와 대용大用4)을 뜻한다. ‘대기란 원만하게 응하는 것을 법도로 삼는 대용의 기틀이며, 대용은 곧바로 근원에 이르는 것을 법도로 삼는 대기의 활용이다.’5) 원만하게 응하는 것은 활용인데 기틀이 그것을 얻어 법도로 삼는다고 한 말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기틀은 활용이 아니면 기틀이 될 수 없으니, 기틀이 기틀이 되는 이유는 원만하게 응하는 활용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곧바로 근원에 이르는 것은 기틀인데 활용이 그것을 얻어 법도로 삼는다고 한 말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활용은 기틀이 아니면 활용이 될 수 없으니 활용이 활용이 되는 이유는 곧바로 근원에 이르는 기틀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가지를 번갈아 가며 말함으로써 서로 의존하고 떨어지지 않는 기틀과 활용의 관계를 나타낸 것이다.

010_0820_c_02L禪門四辨漫語

010_0820_c_03L

010_0820_c_04L全羅南道海南郡頭輪山大興寺

010_0820_c_05L海東沙門草衣中孚子意詢 [1]

010_0820_c_06L
有客自嶺南來者自言木浮山六
010_0820_c_07L隱老之法胤滯雨十餘日盛言其
010_0820_c_08L師之禪論有反古義處引本證正

010_0820_c_09L[本文]
六隱老人云分座之殺但殺無活
010_0820_c_10L故爲如來禪拈華之活兼殺故具足
010_0820_c_11L [2] 而爲祖師禪

010_0820_c_12L
三處傳心中分座傳殺拈花傳活
010_0820_c_13L趺殺活齊示此龜谷老之言今分座之
010_0820_c_14L但殺拈花活之兼殺龜谷說中無之
010_0820_c_15L夫殺活機用照用 [3] 與軆用特其名異
010_0820_c_16L若明達於機用殺活軆用亦可以
010_0820_c_17L例知也所言機用者大機大用大機
010_0820_c_18L以圓應爲義大用之機大用以直截爲
010_0820_c_19L大機之用夫圓應是用也機得而
010_0820_c_20L爲義者何也機非用則不得爲機
010_0820_c_21L以爲機者以有用之圓應也直截是
010_0820_c_22L機也用得而爲義者何也用非機則
010_0820_c_23L不得爲用所以爲用者以有機之直截
010_0820_c_24L故交互而言之以現機用之相資不

010_0821_a_01L기틀과 활용의 관계가 이와 같은 것처럼 살殺과 활活이 서로 의존하며 떨어지지 않는 관계 또한 이와 같다. 그러므로 살을 전하더라도 반드시 활을 겸비하고 활을 전하더라도 반드시 살을 겸비한다는 진실을 알아야 하니, 이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치이다.
여기서 백파가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에 담겨 있는 살殺은 오로지 살만 있을 뿐 활活이 없고, 꽃을 들어 보인 것에 담겨 있는 활은 살도 겸비하고 있다’고 하였지만, 결단코 이러한 이치는 없다. 단독이면 모두 단독이고 겸비하면 어느 편이나 겸비하는 법인데 그 어찌 (분좌의) 살은 활을 겸비하지 않고 (염화의) 활만이 살을 겸비한단 말인가? 비유하자면 사람의 한 몸에서 손발은 작용이고 온몸은 본체인 것과 같다. 손발을 들어 작용이라 말하면 온몸은 저절로 그 작용에 거두어지거늘, 온몸을 들어 본체라고 말한들 어찌 손발을 버리는 것이 되겠는가?
고덕이 말하였다.6) “달마 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전한 소식은 특별히 이 일7)을 펼쳐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다만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송골매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르듯이 깨우치고, 언구의 의미 밖에서 대붕이 날갯짓하듯이 훌쩍 속박을 벗어나고자 할 뿐이다.8) 가장 빠른 길9)로 모든 단계를 뛰어넘으며 어떤 점차적 계급에도 떨어지지 않는다.10) 왕자의 보검을 쥐고 본분의 수단으로써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며 자유자재한 경지를 누린다. 사람을 죽이는 이상 반드시 사람을 살리기도 해야 하고, 사람을 살리는 이상 반드시 사람을 죽이기도 해야 한다.11)
오로지 죽이기만 하거나 살리기만 한다면12) 뛰어난 솜씨가 아니다. 만일 (세존께서)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에 (백파의 말대로) 참으로 살殺만 있다면 세존은 뛰어난 솜씨가 없었던 것이며, 청원靑原이 오로지 살만 전하고 활의 방식을 몰랐다면 청원 또한 뛰어난 솜씨가 없었다는 결과가 되니, 어찌 이러한 도리가 있을 수 있겠는가!13)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에 살만 있고 활이 없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제2장 삼종선三種禪과 임제삼구臨濟三句 배대 논쟁
1. 백파의 설14)
1) 삼종선론 제기
선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조사선이다. 최상의 자질을 갖춘 사람(上根)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므로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마치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그것은 마치 영양이 뿔을 나뭇가지 위에 걸고 자면서 발자국을 숨기는 것과 같아서 더듬을 도리가 전혀 없고 추적할 흔적도 없다.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서 잡고서 분별할 근거를 전혀 남기지 않고 영원히 근본적인 번뇌망상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요근본 기틀 물은 물이며남김 없는 작용, 부처도 안착시키고 조사도 안착시킨다. 이상은 오로지 조사의 문 안에만 있는 언구들이므로 조사선이라 한다.15)
둘째는 여래선이다. 중간의 자질을 갖춘 사람(中根)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므로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마치 물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010_0821_a_01L離也機用如是殺活之相資不離亦復
010_0821_a_02L如是也故知傳殺必兼於活傳活必兼
010_0821_a_03L於殺此必然之理也今言分座之殺
010_0821_a_04L但殺無活拈花之活活兼於殺斷無
010_0821_a_05L是理單則俱單具則同具其何以殺
010_0821_a_06L不兼活活獨兼殺譬如人之一身
010_0821_a_07L足用也全身體也擧手足而言用
010_0821_a_08L全身自收擧全身而言軆手足其捨諸
010_0821_a_09L古德云祖師西來特唱此事只貴言
010_0821_a_10L前鷹突句外鵬搏直拔超昇不落階
010_0821_a_11L持王子寶刀用本分手段殺人活
010_0821_a_12L得大自在旣殺得人須活得人
010_0821_a_13L活得人須殺得人若只單殺單活
010_0821_a_14L非好手也若分座果是單殺是世尊非
010_0821_a_15L好手也淸源 [4] 但傳殺而不知活則淸源
010_0821_a_16L亦非好手也豈有此理哉是故當知
010_0821_a_17L分座之單殺無活無有是處

010_0821_a_18L
六隱老人曰禪有三種祖師禪
010_0821_a_19L對上根故一一言句如印印空
010_0821_a_20L羚精掛角沒義理沒蹤跡和根拔
010_0821_a_21L了沒巴鼻永脫根本頭角故
010_0821_a_22L是山
水是水
佛也安祖也安
010_0821_a_23L但此祖門中所有之言句故名祖師
010_0821_a_24L如來禪對中根故一一言句

010_0821_b_01L현재의 차별(今)과 본래의 무차별(本) 그리고 도리와 흔적 등이 남아 있는 듯하지만16) 방편(權) 그대로 진실(實)을 밝히니 이 두 가지를 분별하여 나눌 수 없기 때문이다. 산은 산이 아니요 물은 물이 아니며, 부처도 물리치고 조사도 물리치지만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 이 또한 조사문 안의 일이지만,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말은 여래가 ‘모든 법을 총괄하여 한 가지 마음을 밝힌다’17)고 설한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므로18) 깎아내려 여래선이라 한다. 본분을 깨달아 저편에 서 있는 사람을 존귀하다고 생각하는 집착에서 벗어난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두 가지 선을 합하여 일반적인 사고의 규격을 벗어났다(格外)고 한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선은 모두 본분을 깨달음과 동시에 본분의 제3구인 “새롭게 경험하여(新熏) 깨닫고 닦아서 궁극적 경지를 얻는다.”는 도리와 규범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셋째는 의리선이다. 이것은 단지 차별된 현재의 상황에서 ‘교화를 위하여 건립한 방편(建化門)’에 따라 가장 낮은 차원의 사람(下根)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마치 진흙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아서 그 흔적이 온전히 드러난다. ‘이理는 이에 맞게 설명하고, 사事는 사에 맞게 설명하여’19) 있음과 없음 또는 본체와 작용이 서로 떨어져 별도로 나누어지므로 비록 선禪이라고 이름은 붙이지만 돈오頓悟와 점수漸修 그리고 도리에 근거한 가르침의 틀(敎格)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의리선이라 한다.
2) 임제삼구에의 적용
이 세 종류의 선을 임제의 삼구20)에 짝지어 보겠다. 첫째 조사선은 제1구에 해당된다. 기틀과 활용을 갖추고 부정적 방법인 살殺과 긍정적 방법인 활活이 모두 온전히 있으므로 제1구에서 알아차리면 조사와 부처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둘째 여래선은 제2구에 해당된다. 살만 있고 활은 없으므로 제2구에서 알아차리면 인계와 천계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다. 셋째 의리선은 제3구에 해당된다. 신훈만 있고 본분이 없으므로 이 구절에서 알아차리면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한다.
2. 초의의 비판
1) 백파 삼종선론의 모순 논파
대체로 부처와 조사가 상근上根을 가르칠 때는 언구言句를 수단으로 삼지 않고, 다만 하나의 기틀을 보여서 가장 빠른 길로 그 기틀에 응하고 더 이상 분별하지 않도록 할 뿐이다.
그런데 백파는 “최상의 자질을 갖춘 사람(上根)에게 전하기 위한 것이므로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마치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만일 언구로써 기틀을 대한다면 그 기틀은 상근上根에 어울리는 기틀이 아닐 것이며,21) 또한 허공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는 비유가 어찌 언구를 말 자체로만 여기는 것이겠는가?

010_0821_b_01L如印印水似有今本義理朕跡而即
010_0821_b_02L權明實了不可辨故山非山水非
010_0821_b_03L佛也打祖也打而法法全眞
010_0821_b_04L亦祖門中事以法法全眞之語完同
010_0821_b_05L如來所說統萬法明一心之言故貶
010_0821_b_06L之云如來禪以未脫本分那人尊貴
010_0821_b_07L頭角故也上二禪合名格外以此二
010_0821_b_08L皆悟本分超出於本分第三句新
010_0821_b_09L熏悟修證之義理標格故也義理
010_0821_b_10L但此今時建化門中對下根故
010_0821_b_11L一言句如印印泥痕縫全彰說理
010_0821_b_12L如理說事如事有無體用互相隔
010_0821_b_13L雖名禪完有頓悟漸修義理敎格
010_0821_b_14L故名義理禪以此三禪配臨濟三句
010_0821_b_15L祖師禪即第一句旣具機用
010_0821_b_16L活兼全故第一句薦得與祖佛爲師
010_0821_b_17L如來禪即第二句但殺無活
010_0821_b_18L第二句薦得與人天爲師義理
010_0821_b_19L第三句但新無本故此句薦得
010_0821_b_20L自救不了

010_0821_b_21L
大凡佛祖之接上根不以言句但示一
010_0821_b_22L直捷應機更不擬議今言對上根
010_0821_b_23L一一言句如印印空苟以言句對
010_0821_b_24L機非上根且如印印空之喩其以

010_0821_c_01L
또한 “이러저러한 언구들은 오로지 조사의 문 안에만 있는 언구들이므로 조사선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조사선은 본래 특정한 언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 말인가?
또한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말은 조사문 안의 일이지만 여래의 말씀과 완전히 일치하므로 깎아내려 여래선이라 한다.”고 하였다.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도록 그 누가 이러한 이름을 세웠다는 이유로 여래를 깎아 내렸던가!
또한 여래선을 (조사선과 함께) 격외선格外禪으로 삼아 분좌分座에 배속하고는 구곡이 세운 뜻이라 하였지만, 구곡의 말에 분좌를 가리켜 여래선이라 지목한 부분이 있던가?
또 “여래선은 (임제삼구에서) 제2구로서 방편(權) 그대로 진실(實)을 밝힌다.”고 하였다. ‘방편 그대로 진실을 밝힌다’는 말은 삼현三玄22)이라는 창과 갑옷을 마련하여 갖추고 편의에 따라 손을 쓰며,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끼면서 격格이 정해진 법도23)를 완성한다는 뜻인데, 이것을 두고 격을 벗어났다고 할 수 있는가?24) 이는 다른 사람이 밖에서 공격을 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한 말로 자신을 공격한 것이다.25)
또 (임제삼구에서) 제3구에는 신훈만 있고 본분이 없다는 뜻을 멋대로 판단하여 의리선이라 하였다. 백파는 “일우一愚의 설에 의지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삼았다.”26)고 했지만, 일우의 말에 의리선이라는 이름이 있었던가? 세상에서 일우의 책을 읽어본 사람이 오로지 이 노인 한 분뿐이었단 말인가? 그런가, 그렇지 않은가? 한번 자세히 따져 보겠다.
2) 임제삼구에 대한 해석과 질의質議
고덕은 “참선하고 도를 공부하는 사람은 다만 활구活句를 참구할 일이며 사구死句를 참구하지 마라.27) 활구로 알아차리면 조사나 부처의 스승이 될 자격이 있지만, 사구로 알아차리면 제 자신도 구제하지 못할 것이다.”28)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말로 내뱉으면 진실한 종지는 숨어 버리고, 명수名數29)로 끌어들이면 미묘한 근본은 어긋난다.”30)라고 하였다.
제1구는 주인과 손님이 나누어지지 않고 말이 나오기 이전의 경계로서 참된 종지만 홀로 드러나 있는 활구31)이다. 이 구절을 깨달은 자는 위음왕불危音王佛32) 이전의 경계33)를 곧바로 꿰뚫고 비로자나불毗盧遮羅佛의 경계로 올라갈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와 조사의 스승이라 한다.
제2구는 언어와 사유가 허용되지 않는 경계34)를 분별하여 해석하는 것이니 말을 일으키자마자 참된 종지는 감춰지기 때문에 이것은 사구도 아니고 활구도 아닌 구절35)이다. 이 구절을 깨달은 자는

010_0821_c_01L言句爲言耶又曰某某等言句是祖門
010_0821_c_02L中所有之言句名曰祖師禪然則祖師
010_0821_c_03L本以言句得名耶以法法全眞之
010_0821_c_04L亦是祖門中事完同如來說故貶
010_0821_c_05L之云如來禪從古以來孰敢貶之如來
010_0821_c_06L以立此名乎又以如來禪爲格外禪
010_0821_c_07L之分座謂之龜谷義龜谷說中有以
010_0821_c_08L分座指爲如來禪之言乎又曰如來禪
010_0821_c_09L即第二句即權明實夫即權明實者
010_0821_c_10L施設三玄戊甲隨宜下手言言堪愛
010_0821_c_11L完成格則是可謂之格外乎此非他人
010_0821_c_12L之外攻還以自語自攻也又於第三句
010_0821_c_13L以但新無本之義獨判之爲義理
010_0821_c_14L言依一愚爲準一愚說中曾有義
010_0821_c_15L理禪之名字乎世間讀一愚書者惟此
010_0821_c_16L老一人耳然耶不耶試詳論之古德
010_0821_c_17L夫參學者但參活句莫參死句
010_0821_c_18L句下薦得與祖佛爲師死句下薦得
010_0821_c_19L自救不了又曰言說出而 [5] 眞宗隱名數
010_0821_c_20L入而妙本乖夫第一句主賓不分
010_0821_c_21L說未出眞宗獨露之活句也薦此句者
010_0821_c_22L直透威音以前毗盧向上所以爲佛祖
010_0821_c_23L之師也第二句分釋未容擬議處
010_0821_c_24L說乍興眞宗將隱此不死不活之句

010_0822_a_01L말로 드러낸 가르침의 방편에 따라 말을 떠난 실상을 깨닫는다. 그런 까닭에 인계와 천계의 스승이라 한다.
제3구는 삼요三要36)의 기틀과 활용을 가리켜 진술하고 삼현의 방편(權)과 진실(實)을 풀이한 구절이니, 이는 명수名數로 끌어들여 미묘한 근본과 크게 어긋나게 되는37) 사구死句이다. 이 구절을 깨달은 자는 단지 저 언구에 막혀서 그 그림자와 같은 말을 실재로 오인한다. 그런 까닭에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한다.
또한 고덕은 “삼구·삼현·삼요에서 모두 ‘삼’이라 한 까닭은 체體·용用·중中 등 세 가지 면목과 같다는 바로 그것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제1구에서는 삼요라 하는데, 삼요란 대기·대용 그리고 기틀과 활용을 평등하게 발휘하는 기용제시機用齊施 등 세 가지이다. 제2구에서는 삼현이라 하는데, 삼현이란 체중현體中玄·용중현用中玄·현중현玄中玄 등 세 가지이다. 제3구에서는 삼구라 하는데, 삼구란 제1구·제2구 그리고 본구本句 등 세 가지가 그것이다.
현玄과 요要의 관계는 마치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자의 형체와 영상이 서로 의지하여 모자라거나 넘치는 부분이 없는 것과 같다. 우리 선가禪家의 종사가 이 세 가지를 제1구에서 활용하면 그 하나하나에 모든 대립하는 짝38)이 끊어지므로 현을 바꾸어 요라 하는데 마치 영상이 형체인 것과 같다. 제2구에서 시설하면 격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하여 요를 바꾸어 현이라 하는데 마치 형상이 영상인 것과 같다. 그러나 그 세 가지는 본래 바뀌지 않는다.

‘제1구에서 활용하면 그 하나하나에 모든 대립하는 짝이 끊어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이 종파의 비조 마 대사馬大師는 백장百丈의 얼굴에 한 번 찍어 버리고39) 한 번의 할을 위엄차게 내질렀다.40) 후대의 설두雪竇와 서원西院은 각각 두 번 ‘틀렸다!’고 말했고,41) 불과佛果42)는 서원이 ‘틀렸다’고 한 말에 ‘삼요의 도장을 찍고 떼었다’고 착어를 달았다.43) 이것이 제1구에서 이 도장(心印)을 온전히 제기한 방식이다. 임제는 이 제1구에 대하여 “삼요의 도장을 찍고 떼니 붉은 무늬점이 분명하고, 분별을 허용하기도 전에 주인과 손님이 나뉜다.”라고 읊었다. 분별을 허용하지도 않고 주인과 손님으로 나누어지는 것도 허용하지 않으니, 이것이 대립하는 짝이 끊어진 경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010_0822_a_01L薦此句者因言敎之方便悟離言之實
010_0822_a_02L所以爲人天之師也第三句指陳
010_0822_a_03L三要之機用開釋三玄之權實此名數
010_0822_a_04L入而妙本大乖之死句也薦此句者
010_0822_a_05L是滯他言句認他光影所以自救之不
010_0822_a_06L了也又古德云凡三句三玄三要之謂
010_0822_a_07L三者如體用中三般面目是也在第一
010_0822_a_08L句中爲三要三要者大機大用機用齊
010_0822_a_09L施也在第二句中爲三玄三玄者體中
010_0822_a_10L用中玄玄中玄在第三句中爲三
010_0822_a_11L三句者第一句第二句並本句爲三
010_0822_a_12L句也夫玄與要如臨鏡者之形影相資
010_0822_a_13L無所欠剩自家宗師將此三者向第
010_0822_a_14L一句中用之則一一絕諸對待故轉玄
010_0822_a_15L名要如影即形向第二句中施設
010_0822_a_16L完成格則轉要名玄如形即影而其
010_0822_a_17L三者本不移易也問第一句中用之
010_0822_a_18L則絕諸對待者其義云何答此宗鼻祖
010_0822_a_19L馬大師把百丈面門一印印破振威
010_0822_a_20L一喝後來雪竇西院各下兩錯佛果
010_0822_a_21L於西院錯下著語云三要印開此第
010_0822_a_22L一句中全提此印臨濟頌此句云
010_0822_a_23L要印開朱點窄 [6] 未容擬議主賓分旣不
010_0822_a_24L許其擬議亦不容分主賓此非絕諸對

010_0822_b_01L이것이 진실로 달마가 전한 문자가 새겨지지 않은 도장44)이요, 여러 조사들이 그것으로 허공에 찍었던 결정적인 소식이다.

‘제2구에서 활용하면 격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뜻은 무엇인가?
이렇게 험하게 치솟고 물줄기가 끊어진 것 같은 기틀45)에서 삼현이라는 창과 갑옷을 마련하여 중생을 가르치는 법도가 됨으로써 본보기를 실현한다. 임제는 이 제2구에 대하여 “묘희(문수보살)가 어찌 무착無著 선사의 물음을 용납할 것인가? 그러나 구화漚和46)가 어찌 번뇌를 끊은 근기(문수보살)와 상충되겠는가!”라고 읊었다. 이는 권權을 열어 실實을 드러낸다는 뜻이니, 묘희의 큰 지혜가 실實이다. 여기에 어찌 무착 선사의 질문을 용납하겠는가? 질문이나 대답이나 모두 사라진 경계라는 뜻이다. 구화는 한역하여 방편이라 하고, 권權에 해당한다. 바로 이럴 때 어찌 번뇌를 끊은 근기를 외면하겠는가! 이 근기는 병존해야 하니 권과 실을 모두 실행한다. 이런 까닭에 격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한다.

제3구에서 활용하면 특별히 ‘삼구’라 하는데, 그 뜻은 어떤 것인가?
제1구에 들어 있는 삼요의 이치와 제2구에 들어 있는 삼현의 이치는 이 제3구에는 적절하지 않으니, 중간이나 낮은 근기의 무리들이 따르면서 듣고 알 수 있는 길이 없기 때문이다. 삼요는 조照가 되거나 용用이 되고, 삼현은 권權이 되거나 실實이 되며, 삼구에는 얕은 뜻도 있고 깊은 뜻도 있다. 나아가 하나의 진실을 세 가지로 펼쳐 놓거나 세 가지를 중첩하여 아홉 가지로 늘리고, 아홉 가지를 세 가지로 묶거나 세 가지를 거두어 하나의 진실로 만들기까지 한다. 대체로 이러한 종류가 모두 제3구에서 이치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설명 방식을 버리고 제3구가 될 방법은 없으며, 제3구가 아니면 위 두 구절의 현과 요를 펼쳐 보일 도리도 없다. 이것이 이 구절(제3구)의 이름을 바꾸어 ‘삼구’라 하는 이유이다. 임제는 이 구절에 대하여 “무대에서 꼭두각시 마음껏 가지고 움직이는 꼴을 보라. 끌고 당기는 움직임이 온전히 안에서 조종하는 사람의 손길에 따라 좌우된다.”라고 읊었다.
3) 종사가들의 설 인증
근본적 기틀(大機)과 온전한 기틀(全機)이 원만히 응하거나 비추며 응하고, 근본적 작용(大用)과 미묘한 작용(妙用)이 가장 빠른 길로 종횡으로 전개되는데, 오로지 종사가 전한 말에 의지하여 그것이 요要라거니 현玄이라거니 하며 구분할 줄밖에 모르니 마치 꼭두각시를 끌고 당기는 움직임이 온전히 안에서 조종하는 사람의 멋대로 움직이는 손길에 의지하는 꼴과 아주 같다. 그런즉 이 제3구에서 이치를 설명하는 방식을 다시 자세히 살펴볼 만하지 않은가?

010_0822_b_01L待而何此實達摩所傳無文字印諸師
010_0822_b_02L將以印空之時也第二句中用之則完
010_0822_b_03L成格則其義云何於此難孤絕濟之
010_0822_b_04L施設三玄戊甲爲物作則規模現
010_0822_b_05L臨濟頌此句云妙喜豈容無著問
010_0822_b_06L漚和爭負絕流機此開權現實妙喜大
010_0822_b_07L是實也這裡豈容無著問葢問答
010_0822_b_08L俱泯也漚和此云方便是權也個時
010_0822_b_09L爭負絕流之機此機應並存權實雙行
010_0822_b_10L所以完成格則也第三句中用之
010_0822_b_11L特名三句其義云何夫第一句中三
010_0822_b_12L要義第二句三玄義非此第三句中下
010_0822_b_13L之流無從而聞知也盖三要之爲照爲
010_0822_b_14L三玄之爲權爲實三句之有淺有㴱
010_0822_b_15L乃至開一爲三疊三爲九束九爲三
010_0822_b_16L收三爲一凡此之類皆第三句之所詮
010_0822_b_17L捨此所詮無以爲第三句非第三
010_0822_b_18L無以宣示上二句之玄要此其所
010_0822_b_19L以轉名此句爲三句者也臨濟頌此句
010_0822_b_20L看取棚頭弄傀儡抽牽全藉裡頭人
010_0822_b_21L凡大機全機之圓應照應大用妙用之
010_0822_b_22L直截縱橫惟憑師家之所說而知其爲
010_0822_b_23L要爲玄正如傀儡之抽牽全藉於裡頭
010_0822_b_24L人之鼓弄也然則此第三句之所詮

010_0822_c_01L“옛날부터 내려온 여러 종사가들의 해석은 갖가지 전적에 널리 실려 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몇 가지만 인용하여 증명해 보겠다.”
(1) 숭제 혜공崇齊惠公의 설 인증
숭제 혜공은 삼요三要를 다음과 같이 해설하였다. “제1요는 대기大機가 원만하게 응하는 것이고, 제2요는 대용大用이 온전히 드러나는 것이다. 제3요는 기틀(機)과 활용(用)을 평등하게 시행하는 것이니, 비춤(照)과 작용(用)이 동시에 발휘되는 것과 비교하면 다만 명칭만 다를 뿐이다. 기機란 기관機關이니, ‘하나의 기機를 건드리기만 해도 모든 관關이 함께 일어난다’는 말이 그 예이다. 건드리지도 않고 일어나지도 않는 바로 그때를 가리켜 대기라 한다. 대기는 원만하게 응하는 것을 법도로 삼는 대용의 기이다. 건드리기도 하고 일어나기도 한 순간을 가리켜 대용이라 한다. 대용은 곧바로 근원에 이르는 것을 법도로 삼는 대기의 용이다. 하나의 요(一要)를 얻음에 따라 곧바로 삼현도 넘어서고 삼구도 넘어선다. 가령 백장百丈이 대기를 터득하고 황벽黃蘗은 대용을 터득했던 사례와 같다.47) 그들 중 누구도 마조馬祖가 내지른 하나의 할喝을 직접 이어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분명하게 (후대에) 임제臨濟의 본래 종지가 되었던 것이니 이것이 그 증거이다.”48)
(2) 분양 선소汾陽善昭의 설 인증
분양 선소 선사가 삼현三玄에 대한 말을 제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옛사람의 뜻을 이해한 다음이라야 자기 마음이 밝혀질 뿐만 아니라 또한 그것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경지를 터득하여 자신의 살림살이를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남전南泉은 ‘왕노사는 18계 어디서나 살림살이를 할 줄 안다’49)고 한 것이다.” 그러자 어떤 학인이 분양에게 물었다. “옛사람은 18계 어디서나 살림살이를 할 줄 안다고 하는데 어떤 살림살이를 하는 것입니까?” “두 마리 물소의 두 뿔을 가두는 우리는 없다. 만일 이 화두를 밝힐 수 있다면 삼현의 취지를 터득하여 비로소 어떤 장애도 없이 마음껏 써먹으며 한평생을 활짝 펼치게 될 것이다. 그대에게 모든 것을 게송으로 읊어 주겠다.

제1현체중현體中玄50)이여,
법계는 끝도 없이 드넓구나.
빽빽이 펼쳐진 만상이,
모두 거울에 원만히 들어 있도다.

제2현용중현用中玄이여,
석존께서 아난에게 묻는구나.
많이 알고 차별에 따라 답하니,51)
그릇 크기와 모나거나 둥근 형상에 응하도다.

제3현현중현玄中玄이여,
옛 황제 앞에 곧바로 드러내는구나.
사구와 백비52)를 벗어난 경지,
여씨閭氏가 풍간豊干에게 물었다네.53)
분양이 이어서 말했다. “이것들이 삼현에 대하여 읊은 게송이다.

010_0822_c_01L可詳聞乎古來諸師之釋布在方冊
010_0822_c_02L今引一二而證之

010_0822_c_03L
崇齊惠公解三要云第一要大機圓
010_0822_c_04L第二要大用全彰第三要機用齊
010_0822_c_05L與照用同時特名異耳機者機關
010_0822_c_06L如云觸一機而百關俱發正當不觸
010_0822_c_07L不發之時謂之大機大機以圓應爲義
010_0822_c_08L大用之機旣觸旣發之時謂之大用
010_0822_c_09L大用以直截爲義大機之用隨得一要
010_0822_c_10L便乃超三玄越三句如百丈得大機
010_0822_c_11L黃蘗得大用莫不親承馬祖一喝赫然
010_0822_c_12L爲臨濟本宗此其證也

010_0822_c_13L
汾陽昭禪師擧三玄語云直須會取故
010_0822_c_14L人意旨然後自心明去更得受用自在
010_0822_c_15L識得自家活計所以南泉云王老師十
010_0822_c_16L八上解作活計僧問古人十八上解 [7]
010_0822_c_17L審作個什麽活計師云兩隻水牯牛
010_0822_c_18L角無欄圈若能於此明得去即得三玄
010_0822_c_19L旨趣始得受用無礙暢快平生與汝
010_0822_c_20L一切頌出第一玄體中
法界廣無邊
010_0822_c_21L森羅及萬像總在鏡中圓第二玄

010_0822_c_22L
釋尊問阿難多聞隨事答應器量方
010_0822_c_23L第三玄玄中
直出古皇前四句百
010_0822_c_24L非外閭氏問豊干師乃曰這個是三

010_0823_a_01L그렇다면 삼현의 취지는 무엇인가?은근히 삼요를 가리키고 있다. 반드시 분명하게 가려내야 한다.”54)
(3) 삼성三聖55)의 문답 인증
“제1현이란 무엇인가?” “온전한 기틀(全機)을 비추어 응하니 하늘과 땅 사이에 만상이 빽빽이 펼쳐진 모습이 마치 인다라망因陀羅網과 같다. 운문雲門의 ‘하늘과 땅 전체를 감싸서 덮는 구절’56)과 짝이 될 만하다.” “제2현이란 무엇인가?” “미묘한 작용이 종횡으로 전개되고 편의에 따라 손을 쓰며 하나하나의 말마다 아끼고 구절마다 온전히 진실하다. 이것은 소양昭陽57)이 제시한 ‘물길이 흐르는 대로 따르고 좇아가는 구절’58)이니, 기틀에 응한다는 뜻이다.” “제3현이란 무엇인가?” “기틀(機)과 활용(用)을 평등하게 시행하고, 주관(人)과 객관(境)을 모두 잊으며, 범부와 성인을 구분하는 분별은 참으로 사라졌다.”59)
이상은 모두 이 구절제3구에 대하여 언급한 내용이고, 위의 두 구절제1구·제2구에 서술된 사항과 결코 혼동하여 착각하지 마라. 이것은 모두 제3구에 대한 언급이다. 만약 그것으로 현玄과 요要를 궁구하여 말한다면 제1구·제2구는 착각이 된다.
이상과 같이 한 줄로 꿰어 늘어놓은 말들은 모두 옛사람의 구절을 끌어들여 현재의 실상을 증명하는 방식이지만 해당 구절 안의 모순도 벗어나지 못하여 여전히 극심한 잘못에 빠져 있는데60) 하물며 자신의 견해를 별도로 내세워 매번 ‘예부터 전해진 법도를 변화시키고 항상 이어져 온 습속을 바꾸고자 하는 시도’61)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백파는) 여래선을 격외格外로 간주하여 분좌分座에 배속하였다. 그것을 격외라 하여 분좌에 배속한다면 더 이상 격외선을 제2구에 배속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제2구에서는 격이 정해진 삼현의 법도를 완성하므로 이는 격을 벗어난 것(格外)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우一愚는 무슨 이유로 여래선을 제2구에 배속하였을까? 여래선으로써 의리義理를 상세히 설명하면 격이 정해진 법도를 완성하는 제2구의 일과 같기 때문에 그것에 배속했던 것이다.62) 격외란 권權과 실實 등 교설의 격을 뚫고 벗어난 경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던가!
앞서 한 말(일우의 설)에 따르면 여래선으로는 본분의 측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이지만, 뒤에서 한 말(백파의 설)에 따르면 여래선으로써 본분을 깨닫고 본분의 이치까지 넘어선다63)는 뜻이다. 이렇게 해당 구절 안에서 앞뒤의 논리가 어긋난다.
또한 앞에서는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말로써 깎아내려 여래선이라 하였지만, 뒤에서는 ‘권權 그대로 실實을 밝힌다’는 공功으로써 치켜세워

010_0823_a_01L玄之頌作麽生是三玄之旨趣暗指
三要

010_0823_a_02L須決擇分明

010_0823_a_03L
三聖問答如何是第一玄全機照
010_0823_a_04L乾坤之內萬像森羅如因陀羅1) [1]
010_0823_a_05L可配雲門凾葢乾坤也第二玄如何
010_0823_a_06L妙用縱橫隨宜下手言言堪愛句句
010_0823_a_07L全眞此乃昭陽隨波應機也第三玄如
010_0823_a_08L機用齊施人境俱忘凡聖情盡
010_0823_a_09L此皆此句第三
所詮上二句第一句
第二句

010_0823_a_10L切莫錯會此皆第三句之所詮若以論玄要
而謂第一句第二句則爲錯解也

010_0823_a_11L如上一絡索皆援古證今而不越當句
010_0823_a_12L之內猶是敗闕極甚況復別立己見
010_0823_a_13L每欲變古易常以如來禪爲格外而配
010_0823_a_14L之分座旣謂之格外而配於分座
010_0823_a_15L更不可以格外禪配第二句以第二句
010_0823_a_16L完成三玄格則非是格外也然則
010_0823_a_17L一愚何故以如來禪配第二句以如
010_0823_a_18L來禪開說義理與第二句完成格則
010_0823_a_19L相同故配之也夫格外者非透脫權
010_0823_a_20L實敎格之謂耶前頭之言以如來禪
010_0823_a_21L未脫本分頭角後頭之言以如來禪
010_0823_a_22L悟得本分超出於本分之義理是當句
010_0823_a_23L前後相違又前以法法全眞之言
010_0823_a_24L而降之名如來禪今以即權明實之功

010_0823_b_01L격외선이라 하였다. 깎아내렸다가 치켜세우며 마음 가는 대로 두고 멋대로 하면서 아무 거리낌도 없고 바라는 대로 하면서 아무 부끄러움도 없다.
괴이하구나! 이 늙은이가 멋대로 지어낸 말이여. 의아스럽구나! 본래의 지위에 이른 어떤 사람에 대하여 번뇌를 벗어났느니 벗어나지 못했느니 하며, 신훈과 본분의 자취가 있다느니 없다느니 하며, 본체와 작용이 서로 뒤섞여 있다느니 떨어져 있다느니 하며, 살과 활이 한편으로 치우쳐 있다느니 이 둘을 다 아우른다느니 하며, 부처와 조사를 물리치느니 안치하느니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돈오를 증득하느냐 점수를 닦느냐의 차이에 따라 남종은 적자이고 북종은 서자라는 구분이 발생한다64)고 하며 갖가지를 번잡하게 끌어들여 짝지우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고 모순되기만 하다. 앞에서는 잡았다가 뒤에서 놓치는 잘못을 모면하지 못하여 마침내 왼쪽을 돕느라 오른쪽은 모자라게 되는 어리석음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또한 “제3구는 단지 차별의 신훈만 있고 무차별의 본분이 없는 도리이므로 의리선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이 말 역시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대체로 제3구 중에는 삼현과 삼요, 방편(權)과 진실(實), 비추어 봄(照)과 드러나 작용함(用) 등 모든 도리가 커다랗게 나타나지 않음이 없다. 그렇거늘 어찌 유독 차별의 신훈만 있고 무차별의 본분이 없는 도리라고 할 것인가! 그런 까닭에 “여래는 49년 동안 중생의 근기에 따라 설법하셨다. 이는 제3구이다.”라 하고, 또한 “이 역시 뛰어난 솜씨를 가진 종사宗師가 이런저런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말한 소식이다. 대체로 부처님과 조사가 중생의 수준에 맞게 한 말,65) 돈오와 점수의 근기를 가르는 것, 깨달음의 다양한 효과와 수행하여 깨달음, 모든 차별된 지위 등이 모조리 이 구절에 속한다.”66)고 하였다. 이것이 일우一愚가 판단한 제3구의 진실한 뜻이다. 어디에 단지 차별의 신훈만 있고 무차별의 본분은 없는 의리선이라는 이름이 있는가! 만일 ‘여래가 49년 동안 근기에 따랐다’는 설은 신훈일 뿐이고 본분이 없으며, ‘뛰어난 솜씨를 가진 종사가 이런저런 상황에 따라 한 말’도 신훈일 뿐이고 본분이 없다고 한다면 ‘저들 모든 차별된 지위는 모조리 이 제3구의 말에 속한다’라고 한 말에 대해서는 또 무슨 말로 진실을 덮어 가릴 것인가!
(4) 임제 의현臨濟義玄의 설 인증
임제는 대중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체로 종지를 풀어서 펼치면 한 구절에 반드시 삼현의 문을 갖추어야 하고 하나의 현문에는 반드시 삼요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는 권權도 있고 실實도 있으며, 조照도 있고 용用도 있다.”67)

010_0823_b_01L褒而昇之爲格外禪貶而降之褒而
010_0823_b_02L升之任意自在肆然無忌憚蘄然無
010_0823_b_03L慚愧異哉斯老之所造也疑矣至於
010_0823_b_04L本位那人頭角之脫與未脫新熏本分
010_0823_b_05L朕跡之有與不有體用之互相隔別
010_0823_b_06L活之偏有兼單佛祖之打之安之至謂
010_0823_b_07L頓漸之修證有差南北之適孼生焉
010_0823_b_08L踏引配支離抵捂不免前捉後失
010_0823_b_09L成左輔右缺又言第三句惟有但新
010_0823_b_10L無本之義理故名曰義理禪此亦大爲
010_0823_b_11L不然葢第三句中三玄三要權實照用
010_0823_b_12L一切義理無不丕 [8] 何獨有但新無本
010_0823_b_13L之義理哉所以道如來四十九年
010_0823_b_14L機說法是第三句亦是大手宗師
010_0823_b_15L說西說之時節大凡佛祖落草之談
010_0823_b_16L漸之機功熏修證一切差別地位
010_0823_b_17L屬此句此一愚所判第三句之義也
010_0823_b_18L處更有但新無本之義理禪名字乎
010_0823_b_19L如來四十九年隨機之說但新無本
010_0823_b_20L大手宗師東說西說但新無本彼一
010_0823_b_21L切差別地位總屬此句之言又能相何
010_0823_b_22L遮障耶

010_0823_b_23L
臨濟示衆云大凡演暢宗乘一句中須
010_0823_b_24L具三玄門一玄門須具三要有權有實

010_0823_c_01L
여기서 말하는 ‘한 구절’은 제3구를 가리킨다. 무슨 근거로 그렇다는 사실을 아는가? 대개 풀어서 펼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풀어서 펼쳤다면 제3구에 해당한다.두 현인의 문답:“제3구란 어떤 것인가?” “지금 내가 그대와 함께 한편은 설명하고 다른 한편은 들으며,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바로 이 상황이 벌써 제3구에 떨어진 것이다. 마치 삼요의 도장을 물렁한 진흙에 눌러 찍어 그 흔적이 온통 드러나 있으므로 이름을 바꾸어 ‘삼구’라 하는데, 현과 요가 모두 그 속에 들어 있다.”68) 그러므로 풀어서 펼칠 때는 삼현이 이 구제3구에 갖추어지니, 이것을 가리켜 ‘한 구절에 삼현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현玄은 요要의 그림자이며, 요는 현의 본래 형체이다. 그림자가 있다면 본래 형체도 반드시 갖추어져 있는 것이므로 하나의 현을 들면 삼요가 갖추어지니, 이것이 “하나의 현문에 삼요를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권도 있고 실도 있다’는 말은 삼현을, ‘조도 있고 용도 있다’는 말은 삼요를 나타낸다. 이것은 현玄과 요要가 제3구에 속한다는 취지를 결론지어 가리킨 말이다. 일우는 “조와 용은 요로서 제1구에 해당하고, 권과 실은 현으로서 제2구에 해당하기도 하고 제3구에 해당하기도 한다.”고 한다.69)
만일 현과 요의 이치를 풀어서 펼치는 방식을 가리켜 의리선이라 한다면, 지난날의 관점에서도옛사람은 제2구인 여래선을 의리선으로 간주했다. 반드시 틀린 주장은 아니다. 하지만 만약 제2구인 여래선을 독립적으로 뽑아내어 격외선으로 간주하고 또한 신훈만 있고 본분이 없는 것을 제3구라 여겨서 이것으로 의리선이라는 명칭을 별도로 세운다면 참으로 타당하지 않은 주장이니, 위에서나 아래서나 모두 들어맞지 않고 한 국면에 치우쳐 말의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제3장 이선二禪과 선문오종禪門五種 배대 논쟁
1. 백파의 설
두 가지 선禪을 다섯 종파에 짝지으면 조사선은 임제종臨濟宗과 운문종雲門宗 등 두 종파에 해당한다. 임제종은 기機와 용用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조사선의 정통이고, 운문종은 번뇌망상의 흐름을 끊는 길70)만 밝힐 뿐 기와 용을 나타내어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임제종에는 미칠 수 없다. 여래선은 조동종曹洞宗·위앙종潙仰宗·법안종法眼宗 등 세 종파에 해당한다. 그중 조동종은 향상의 종지를 밝히고 순금을 남김없이 펼쳐 놓은 점포71)이기 때문에

010_0823_c_01L有照有用此言一句指第三句也
010_0823_c_02L以知其然也葢不演暢則已如其演暢
010_0823_c_03L則便當第三句也二賢問答第三句如何
今吾與子一說一聽一問

010_0823_c_04L一答早落第三句了也如將三要印向爛泥上
踏却痕縫全彰故轉名三句玄要在其中矣

010_0823_c_05L
故演暢之時三玄便具於此句第三

010_0823_c_06L是謂一句中具三玄也玄是要之影
010_0823_c_07L乃玄之形影之所在形必具焉故隨
010_0823_c_08L擧一玄便具三要是爲一玄門具三要
010_0823_c_09L有權有實者三玄也有照有用
010_0823_c_10L要也此結指玄要之在第三句也一愚曰
照用是
010_0823_c_11L當第一句權實是玄
當第二句又當第三句
若以演暢玄要之義
010_0823_c_12L謂之義理禪則近古古人以第二句如
來禪爲義理禪

010_0823_c_13L而未必不可矣若第二句如來禪獨拔
010_0823_c_14L之爲格外禪又以但新無本爲第三
010_0823_c_15L以此別立義理禪之名則最大不可,
010_0823_c_16L於上於下皆不襯 [9] 偏局而不成說也

010_0823_c_17L
六隱老曰二禪若配五宗則祖師禪
010_0823_c_18L則臨濟雲門二宗臨濟宗具足機用
010_0823_c_19L爲祖師禪正脉雲門宗,但明截斷
010_0823_c_20L而未能現說機用故不及臨濟宗也
010_0823_c_21L如來禪即曹洞 [10] 潙仰法眼三宗於中
010_0823_c_22L曹洞宗洞明向上而窮盡眞金鋪故
010_0823_c_23L「綱」疑「網」{編}

010_0824_a_01L여래선의 정통이고, 위앙종은 다만 체體와 용用을 밝혔을 뿐 향상의 종지는 밝히지 못하여 순금을 남김없이 펼쳐 놓은 점포만은 못하므로 조동종에는 미칠 수 없다. 법안종은 다만 ‘모든 것이 마음일 뿐이다’라는 이치만 밝혔으니 용用을 거두어 체體로 돌아갈 뿐이므로 이 또한 위앙종에는 미치지 못한다.
2. 초의의 비판
“두 가지 선을 다섯 종파에 짝지으면 임제종은 기와 용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에 조사선의 정통이고, 운문종은 번뇌망상의 흐름을 끊는 길만 밝힐 뿐 기와 용을 나타내어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임제종에는 미칠 수 없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기와 용을 벗어나서 별도로 번뇌망상의 흐름을 끊는 길이나 물길이 흐르는 대로 따르고 좇아가는 길72)이 있고, 번뇌망상의 흐름을 끊는 길이나 물길이 흐르는 대로 따르고 좇아가는 길 이외에 별도로 기와 용이 있다는 것인가? 이것은 참으로 말에 집착하여 도리를 잃어버린 예인 것이다.
기와 용을 나타내어 말하면 그것이 있고, 나타내어 말하지 않으면 있지 않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세존께서도 기와 용을 나타내어 말씀하신 적이 없으니 세존도 기와 용이 없으며, 33조사들73)도 기와 용을 나타내어 말한 적이 없으니 조사들도 기와 용이 없다는 뜻이 된다. 모두 없는 이상 전승된 종지는 무엇으로 법인法印을 삼는단 말인가? 만약 운문종에 기와 용이 없었던 적이 없지만 그것을 나타내어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임제종에 미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부처님과 조사도 모두 임제종에 미칠 수 없으니 조종祖宗이 되지 못할 것이다.
또한 “위앙종은 체와 용을 밝혔을 뿐 향상의 종지와 순금을 파는 점포는 밝히지 못하여 향상의 종지를 분명히 밝혀서 순금을 남김없이 펼쳐 놓은 점포와 같은 조동종에는 미칠 수 없다.”고 하였다.
향상의 종지를 밝혔다거나 밝히지 못했다거나, 순금을 파는 점포에서 순금을 남김없이 펼쳐 놓았다거나 그렇지 않았다거나 하는 따위의 구별에 대하여 어떤 근거로 그들 사이의 격차를 이처럼 상세하게 안단 말인가? 이후 말세가 닥쳤을 때, 절름발이나 애꾸눈과 같이 불완전한 몸으로 스승을 칭하는 무리가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기機와 용用이 온전하거니 온전하지 못하거니 하는 구별로 일일이 따지며 밝혀서 상세하게 앎을 펼치게 되리라.74)
저들75)은 장차 성불하리라는 예언76)을 은밀하게 받은 이래로 백장고불百丈古佛77)의 가르침을 충분히 알고 일대사를 막힘없이 밝혀

010_0824_a_01L爲如來禪正脉潙仰宗但明體用
010_0824_a_02L未明向上而未盡眞金鋪故不及曹
010_0824_a_03L洞宗法眼宗 [11] 但明惟心則唯攝用歸
010_0824_a_04L體故亦不及潙仰宗也

010_0824_a_05L
以二禪配五宗則臨濟宗具足機
010_0824_a_06L用故爲祖師禪正脉雲門但明截斷
010_0824_a_07L而未能現說機用故未及臨濟宗
010_0824_a_08L則離機用外別有截斷隨波離截斷
010_0824_a_09L隨波外別有機用乎是誠執言而迷
010_0824_a_10L義者也且機用現說則有之不現說
010_0824_a_11L則不有乎然則世尊未曾現說機用
010_0824_a_12L是世尊無機用也州三諸祖未曾現
010_0824_a_13L說機用是祖師無機用也旣皆無之
010_0824_a_14L所傳宗旨以何爲法印乎若言雲門
010_0824_a_15L未曾無乎機用以其不現說故不及
010_0824_a_16L於臨濟云則是佛與祖師皆不及於
010_0824_a_17L臨濟而不足爲祖宗也又言潙仰宗
010_0824_a_18L但明體用而未明向上眞金鋪尙不
010_0824_a_19L及於曹洞宗之洞明向上而窮盡眞
010_0824_a_20L金鋪其向上之明不明眞金鋪之窮
010_0824_a_21L不窮何從而知其層隔之如此詳細
010_0824_a_22L於此後末世時跛脚眇目之阿師
010_0824_a_23L如來禪祖師禪機用之全不全
010_0824_a_24L歷歷洞明而詳悉之彼密受懸記而
010_0824_a_25L飽參百丈古佛洞明大事爲一

010_0824_b_01L천오백 대중에게 존귀하게 받들어졌던 선지식들이거늘 기와 용을 온전히 갖춘 조사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겨우 여래선의 순금 파는 점포 중 반쪽의 진실만 알았단 말인가! 하물며 앙산仰山은 제2조 아난존자의 후신後身78)으로서 서천의 아라한들이 수시로 (문수보살에게) 특별히 법을 물으러 찾아왔다가 (앙산을 만나고는 그를) 소석가小釋迦79)라 부르기까지 하였는데 오히려 여래선의 향상하는 종지를 몰랐다고 하는가! 아, 안타깝다! 보잘것없는 말이 도를 해치는구나. 아난은 세 번 조사의 문에 들어갔으나80) 앙산의 몸을 받고서야 소석가라 불려졌다. 위산潙山은 분명 소석가의 스승이건만 그가 조사선의 기와 용은 알지 못하고 겨우 여래선의 순금을 파는 점포 중 반쪽의 진실만 알았다고 여겨 은근슬쩍 다섯 종파 속에 끼워 넣어 두었다가 걷어차서 조동종의 발밑으로 밀쳐 버리니, 대단히 원통하고 억울한 처사가 아니겠는가!
처음으로 동산 양개洞山良价가 위산을 친견했을 때 무정설법無情說法81)의 이치에 대하여 물었는데, 위산이 불자拂子를 꼿꼿이 세우자 동산이 말했다. “저는 모르겠으니 스님께서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위산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입으로 결코 그대에게 말해 주지 않겠다.”고 하였다.82) 동산이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다가 위산의 지시를 받고 운암 담성雲巖曇晟에게 가서 법을 묻고는 딱 들어맞게 알아차렸다.83) 이 일이 있기 이전에 운암도 위산에게 법을 물으러 갔다가 ‘번뇌망상의 흔적을 끊는다’는 뜻을 듣고서 깨달았다.84) 그는 훗날 동산의 스승이 되었고 동산은 운암으로부터 법을 전수받아 조동종의 종지를 세웠다.
이상은 조동종의 연원이 위산에게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후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인천안목』85) 한 권만 읽고 나서 두 종파의 우열을 헛되게 판정지은 결과로 이처럼 심하게 도치되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1) 위앙종潙仰宗에 대한 오해를 변증함
지금부터 다섯 종파의 어록에 수록된 여러 칙의 인연을 인용하는 까닭은 오로지 위앙종이 뒤집어쓴 이상과 같은 굴욕을 씻어 주기 위해서이다.
(1) 위산과 앙산 부자의 대기대용大機大用
① 논거
위산潙山이 백장百丈 문하에서 전좌典座86) 소임을 맡고 있을 때의 일이다. 사마두타司馬頭陀가 와서 (백장에게)

010_0824_b_01L千五百衆所宗事之善知識者都不
010_0824_b_02L知有具機用之祖師禪僅知得如來
010_0824_b_03L禪眞金鋪之半面乎況且仰山是第
010_0824_b_04L二祖阿難尊者後身西天羅漢時時
010_0824_b_05L特來問法呼謂小釋迦然猶不知如
010_0824_b_06L來禪之向上嗚呼苦哉小言之害道
010_0824_b_07L夫阿難三入祖門而其爲仰山
010_0824_b_08L則號謂小釋迦潙山赫赫爲小釋迦
010_0824_b_09L之師傳以謂不知祖師禪之機用
010_0824_b_10L以如來禪眞金鋪之半面竊吹於五
010_0824_b_11L宗之中打而推之於曹洞宗之脚下
010_0824_b_12L豈不大可寃枉哉始也洞山參潙山
010_0824_b_13L問無情說法之義潙山竪起拂子
010_0824_b_14L山曰學人不會乞師指示潙山曰
010_0824_b_15L父母所生口終不爲子說洞山猶不
010_0824_b_16L因蒙潙山敎往參雲岩而有契
010_0824_b_17L先是雲岩亦參潙山聞悟絕滲漏之
010_0824_b_18L後爲洞山之師洞山受之雲岩
010_0824_b_19L以立曹洞宗旨是則曹洞宗之淵源
010_0824_b_20L濫觴於潙山也後人都不知此而但
010_0824_b_21L看人天眼目一書妄判二宗之優劣
010_0824_b_22L如此倒置無稽之甚也今引五宗語
010_0824_b_23L錄所載數則因緣一爲潙仰宗雪屈
010_0824_b_24L潙山在百丈爲典座時司馬頭陀來

010_0824_c_01L“근래에 호남에서 대위大潙라는 산을 찾았는데 그곳은 천오백 학인을 이끄는 선지식이 거처할 도량이었습니다.”라고 말하고는 전좌를 위산(大潙山)의 주인감으로 지목했다.87)
당시 화림 선각花林善覺이 대중의 우두머리(首座)였는데 백장은 그를 전좌와 함께 불러들여88) “만일 격을 벗어나는(出格) 결정적인 반전의 한마디를 한다면 위산의 주지 자리를 주겠다.”라고 한 뒤 정병淨甁을 가리키며 물었다. “정병이라 부르면 안 된다. 바로 이때 그대는 무엇이라 부르겠는가?”89) 화림이 “나뭇등걸이라 불러도 안 됩니다.”라고 응답했다. 백장이 이어서 전좌에게 묻자 그는 정병을 차서 뒤집어엎고 나가 버렸다.90) 백장이 웃으며 “제일좌第一座91)가 산자山子92)에게 졌다.”라고 판정하고 마침내 전좌에게 대위산에 들어가도록 명했다.
주지가 된 다음에 위산이 어느 날 대중에게 말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근본 기틀인 대기大機를 터득하기만 했지 그것을 온전히 활용하는 대용大用의 경지는 터득하지 못했다.” 앙산仰山이 이 공안을 제기하고 절 아래 사는 암자의 주인에게 물었다. “화상께서 이렇게 말한 속뜻은 무엇입니까?” 암주가 “다시 말해 보라.”고 함에 앙산이 다시 제기하려는 순간 암주에게 걷어차여 나자빠졌다. 앙산이 돌아와서 위산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자 위산은 껄껄대고 크게 웃었다.
② 논거93)
향엄香嚴과 앙산이 위산을 시봉하며 서 있을 때 위산이 손을 들고서 “요즘은 이렇게 하는 자들은 드물고 이렇게 하지 않는 자들이 많다.”고 하자, 향엄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자리를 옮겨 섰고, 앙산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자리를 옮겨 섰다. 위산이 “지금 이 인연이 30년 뒤94)에는 바닥에 던지면 금석의 악기가 울리는95) 듯 아름다운 문장으로 남아 전해지리라.”고 함에 앙산은 “역시 화상께서 제창해 주셔야겠군요.”라고 하였고, 향엄은 “지금도 모자라지 않습니다.”96)라고 하였다. 위산이 말했다. “개 주둥이 닥쳐라!”
후대에 남당 원정南堂元靜 선사가 이 공안을 제기하고 말했다. “코끼리가 하품하고 사자가 포효하는구나. 바닥에 잔뜩 웅크리고는 허공을 타고 오를 기세요, 북두성 위치 바꾸어 별자리 옮기는 솜씨로다. 혀에 눌러앉으니 개 주둥이를 닫는구나. 한 번 바닥에 던지자 금석의 소리가 울리고, 굽이굽이 황하는 밑바닥까지 맑아졌구나.”
③ 논거97)
어떤 학인이 위산에게 물었다. “위산의 삿갓 하나를 만들어 쓰지 않고서는

010_0824_c_01L [12] 在湖南 [13] 一山名大潙是一
010_0824_c_02L千五百人善知識所居處乃指典座
010_0824_c_03L爲潙山主人時花林 [14] 覺首衆百丈並
010_0824_c_04L與師召至而言曰若下得一轉語出
010_0824_c_05L與潙山住持即指淨瓶云不喚
010_0824_c_06L作淨瓶時汝喚作什麽花林云
010_0824_c_07L可喚作木 百丈乃問師師踼倒淨
010_0824_c_08L便出去百丈笑曰第一座輸却
010_0824_c_09L山子遂命師入潙山及後住持
010_0824_c_10L山日謂衆曰如許多人祇得大機
010_0824_c_11L不得大用仰山擧此話問山下庵主
010_0824_c_12L和尙恁麼道意旨如何庵主曰
010_0824_c_13L㪅且喜閑 [15] 師擬再擧被庵主踏倒
010_0824_c_14L仰山歸擧似 [16] 師呵呵大笑又香
010_0824_c_15L嚴仰山侍立次師擧手云如今恁麽
010_0824_c_16L者少不恁麽者多香嚴從東過西立
010_0824_c_17L仰山從西過東立師云這個因緣
010_0824_c_18L十年後如金擲地相似 [17] 仰山云
010_0824_c_19L須是和尙提唱香嚴云即今亦不少
010_0824_c_20L師云合取狗口後來南堂靜禪師
010_0824_c_21L此話云象王嚬呻師子哮吼踞地
010_0824_c_22L盤空移星換斗坐斷舌頭合取狗
010_0824_c_23L一回擲地作金聲九曲黃河徹底
010_0824_c_24L又有僧問不作潙山一頂笠

010_0825_a_01L막요촌莫傜村98)에 도달할 길이 없다고 하는데, 위산의 삿갓 하나란 무엇입니까?” 위산이 “가까이 오라!”고 불렀다. 그 학인이 가까이 다가서자 위산이 한 발 내질러 버렸다.
④ 논거99)
범승梵僧이 허공에서 내려오는 모습을 보고 앙산이 물었다. “어디에서 옵니까?” “서천에서 옵니다.” “언제 그곳을 떠났습니까?” “오늘 아침입니다.”100) “신통한 유희가 없지는 않지만 아사리의 불법은 반드시 나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문수보살에게 예배를 드리러 동토에 왔다가 뜻밖에 소석가小釋迦를 만났군요.” 그 범승이 범어로 쓰인 경전을 꺼내어 앙산에게 주고 절을 올린 뒤 허공으로 올라가 떠났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앙산은 소석가라 불리었다.
⑤ 논거101)
어느 날 앙산이 법당에 앉아 있다가 밖에서 찾아온 학인 하나를 보았다. 그는 인사를 마치고 동쪽에서 차수叉手하고 서서 앙산을 지켜보았다. 앙산이 왼발을 늘어뜨리자 학인이 이번에는 서쪽으로 가서 차수하고 서 있었다. 앙산이 오른발을 늘어뜨리자 학인이 중간에서 차수하고 서 있었다. 앙산이 두 발을 거두자 학인이 절을 올렸다. 앙산이 “이곳에 머문 뒤로 한 사람도 때린 적이 없었건만.”이라고 하더니 주장자를 들고 때리자 그 학인은 허공으로 올라가 떠났다.
⑥ 초의의 변증
이상의 몇 칙에서 이들이 마음껏 써먹은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라. 위산과 앙산 부자102)가 기와 용을 얻었는가, 기와 용을 얻지 못했는가? 향상의 종지를 밝혔는가, 향상의 종지를 밝히지 못했는가? 안목을 갖추었다면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마조馬祖가 내지른 한 번의 할에 백장百丈은 귀가 멀었고 황벽黃蘖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103) 두 선사가 각각 기機와 용用을 얻었다는 평가는 앙산이 처음으로 한 말인데,104) 고금과 천하에 한 사람이라도 그 말을 인정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만일 앙산 스스로 기와 용을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남들이 그것을 얻었는지 얻지 못했는지 알 수 있겠는가?
(2) 위앙종의 선기禪機
① 논거
이보다 앞서 위산이 향엄 지한香嚴智閑의 격죽송擊竹頌105)을 듣고는 “이 사람은 환히 깨우쳤구나.”라고 말했다. 앙산이 그에게 가서 깨달은 경계를 점검하자 향엄은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었다’106)는 게송을 바쳤다. 이것을 들은 앙산이 “여래선如來禪은 지한 사제가 이해했다고 인정하겠다. 그러나 조사선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라고 평가했고,

010_0825_a_01L無緣得到莫傜村如何是潙山一頂
010_0825_a_02L師喚云近前來僧近前師與一
010_0825_a_03L又仰山見一梵僧從空而至
010_0825_a_04L師問曰近離甚處西天幾時離彼
010_0825_a_05L今早師曰神通遊戱則不無
010_0825_a_06L黎佛法須還老僧是 [18] 僧云特來東
010_0825_a_07L土禮文殊却遇小釋迦即出梵書貝
010_0825_a_08L多葉與師作禮乘空而去自此號
010_0825_a_09L小釋迦又一日師在法堂上坐
010_0825_a_10L見一僧從外來問訊了向東邊叉手
010_0825_a_11L目視師師乃垂下左足僧却過
010_0825_a_12L西邊叉手立師垂下右足僧向中
010_0825_a_13L間叉手立師收雙足僧禮拜師云
010_0825_a_14L自住此未曾打著一人拈拄杖便打
010_0825_a_15L僧便騰空而去如上數則受用處
010_0825_a_16L看點將來潙仰父子爲得機用
010_0825_a_17L得機用爲明向上未明向上具眼
010_0825_a_18L自可證明馬祖一喝百丈耳
010_0825_a_19L黃蘖吐舌二師之得機用仰山
010_0825_a_20L始言之古今天下有一人不然其言
010_0825_a_21L者乎若自未得機用安知人之得與
010_0825_a_22L不得乎先是潙山聞香嚴擊竹頌
010_0825_a_23L此子徹也仰山往勘所悟香嚴
010_0825_a_24L去年貧未是貧之頌仰山曰如來
010_0825_a_25L許閑師弟會祖師禪未夢見在

010_0825_b_01L향엄이 다시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박거려 그것을 보이노라. 이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특별히 그를 사미沙彌107)라고 부르리라.”는 게송을 바치자 이를 듣고 앙산이 위산에게 이렇게 알렸다. “기쁩니다! 지한 사제가 조사선을 이해했습니다.”
② 초의의 변증
위앙종에 진실로 조사선이 없다면 이 두 존숙들은 어떻게 이와 같이 마음껏 (조사의 선기를) 나타낼 수 있었겠는가?
법안이 “만일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보면 여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한 말이 바로 조사선이다.108) 이로써 보건대 법안도 조사선을 언급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파는 “법안종은 다만 ‘모든 것이 마음일 뿐이다’라는 이치만 밝혔으니 용用을 거두어 체體로 돌아갈 뿐이고 또한 여래선을 알기만 할 뿐 위앙종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갖가지 주장은 어떤 사람에게 배운 것이며 누가 전수한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증득한 심인心印에서 흘러나온 결과인가? 이것이 어떤 이론에 해당되는 것일까? 두 가지 선禪을 다섯 종파에 짝짓는 방법에 무슨 뛰어나거나 좋은 도리가 있다고 이처럼 시시콜콜 따지고 파고드는가? 설령 약간 이해한 지식으로 어떤 소득이 있더라도 마땅히 전통적인 근거에 비추어 돌이켜 보고 그것과 빈틈없이 들어맞기를 바라야 한다.
그런데 반대로 이렇게 하지 않고서 매번 자신의 견해를 별도로 세워서 기발한 측면을 특별히 드러내 보인다거나 원만히 융합하여 어떤 장애도 없는 경계에서 층차와 마디를 펼치거나 구멍을 뚫는 격이다. 혹은 한 줄 안에 층차와 마디를 겹겹이 포개어 놓거나 몇 구절 사이에 구멍을 송송 뚫어 버리는 꼴이다.
살·활과 기·용이라는 글자를 가지고 구절이란 구절은 그것에 갖다 붙이지 않는 것이 없고, 조·용이 같다거나 같지 않다는 틀로써 구멍의 종류에 상관없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없는 식으로 써먹다가 마침내 모난 것과 둥근 것이 합치하지 않고 굽은 것과 곧은 것이 서로 어긋나는 지경이 되었다.
흩어지고는 끝내 잘린 마디를 붙이지 못했고, 갈라지고는 결국 다시 구멍이 뚫렸다. 이에 (교종) 법문의 온전한 본체는 모두 부스럼의 흉터가 되었고, 선종의 도가 펼치는 활발한 작용은 모조리 죽음의 문에 예속되었다. 비유하자면 꿰맨 흔적이 전혀 없는 한 벌의 천의天衣109)가 기운 자국투성이의 냄새나는 누더기 적삼으로 변한 것과 같다.

010_0825_b_01L嚴又呈頌曰我有一機瞬目視伊
010_0825_b_02L若人不會別喚沙彌於是仰山報潙
010_0825_b_03L山云且喜閒師 [19] 弟會祖禪師 [20] 潙仰
010_0825_b_04L宗中果無祖師禪此二尊宿何以
010_0825_b_05L如此弄現耶又法眼云若見諸相
010_0825_b_06L非相則不見如來者是祖師禪
010_0825_b_07L則法眼亦曾說言祖師禪今言法眼
010_0825_b_08L但明唯心而攝用歸體故亦但知如
010_0825_b_09L來禪而未及於潙仰宗如此諸說
010_0825_b_10L從何人學得來誰之所傳抑復自證
010_0825_b_11L之心印上所流出耶葢是當何之言
010_0825_b_12L大抵以二禪配五宗有何勝善
010_0825_b_13L好道理如此委曲穿鑿耶縱使一知
010_0825_b_14L半解如有所得但當照古而反照之
010_0825_b_15L希令密契而已反此不爲每欲別立
010_0825_b_16L己見特逞神奇於混圓無碍之中
010_0825_b_17L開層節穿生孔竅或於一行之內
010_0825_b_18L層節重重數句之間孔竅礨礨
010_0825_b_19L殺活機用字無節而不貼以照用同
010_0825_b_20L不同無竅而不納終以方圓不合
010_0825_b_21L曲直相背散落而終不粘節離披而
010_0825_b_22L竟還脫竅於是法門之全體都成瘡
010_0825_b_23L禪道之活用摠屬死門譬如一
010_0825_b_24L領之天衣無縫變作百結之鶻臭破

010_0825_c_01L
이 때문에 영명한 지혜를 가진 학인들조차 이러한 갈등110)의 소굴에 한번 나자빠져 버리면 결국 가시나무 밭에서 빠져나오지 못하여 좌로 얽히고설키고 우로 휘감겨 살은 문드러지고 무릎까지 빠지며, 앞에 쌓이고 뒤에서 덮쳐 오는 뒤엉킨 마른 덩굴더미에 머리끝까지 덮이는 지경이 되리라. 창이蒼耳나 질려蒺藜111)가 밟혀 모두 발을 찌르고, 녹상鹿床과 오훼烏喙112)를 삼켜 창자를 썩게 만드는 꼴이다. 신령한 구멍113)은 점차로 막히고 지혜로운 식識은 통하지 않으니, 어찌 대단히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닌가!
2) 전기대용全機大用의 진정한 의미
부처님과 조사들이 남긴 언구로서 이렇게 온전한 기틀(全機)을 남김없이 발휘하는 작용(大用)에 따라 교敎가 되기도 하고 선禪이 되기도 하지 않은 것은 없다. 교학의 경전 십이부115)와 공안 1,700칙116) 중에서 기機와 용用을 떠나서 독립한 글자는 하나도 없다. 만일 수많은 장구章句 안에서 숨거나 드러난 표면적 사실만을 따라 유·무 어느 한편에 확고하게 집착한다면 이는 문구에 걸려서 그 뜻을 잃어버린 예가 된다. 여기서 고칙을 하나의 증거로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① 논거117)
옛날에 용아龍牙 선사가 임제臨濟에게 물었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118)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선판禪板을 건네 다오.” 용아가 선판을 임제에게 건네주자 임제는 받아들자마자 때렸다. 용아가 말했다. “때리시려면 마음대로 때리십시오. 문제는 달마 대사의 뜻은 없다는 것입니다.”
용아가 다시 취미翠微에게 물었다.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포단을 건네 다오.” 용아가 포단을 취미에게 건네주자 취미는 받아들자마자 때렸다. 용아가 말했다. “때리시려면 마음대로 때리십시오. 문제는 달마 대사의 뜻은 없다는 것입니다.”
아가 한 절의 주지가 된 다음에 어떤 학인이 방장실에 들어와 더욱 자세한 가르침을 청하며119) 물었다. “화상께서 행각120)하실 때 두 존숙에게 법을 물었던 인연에서 그분들의 언행을 수긍하십니까?” “수긍하기는 깊이 수긍한다. 문제는 달마 대사의 뜻은 없다는 것이다.”
② 논거
남전南泉이 암자에 살 때에 어떤 사미가 법을 물으러 찾아왔다. 남전이 그에게 말했다. “나는 산에 올라가 일을 할 터이니

010_0825_c_01L於是好個靈慧之學者一被靠倒
010_0825_c_02L於葛藤之窠竟難回轉於荊棘之場
010_0825_c_03L左縈右纒陳爛沒滕 [21] 前堆後積
010_0825_c_04L齊身蒼耳蒺藜皆能刺足
010_0825_c_05L鹿床烏喙呑之便可腐膓靈竅漸塞
010_0825_c_06L慧識難通豈不大可傷惜也哉大凡
010_0825_c_07L佛祖之所留言句莫不由此全機大
010_0825_c_08L而爲敎爲禪敎乘之十二部
010_0825_c_09L案之千七百未有一字離機用而獨
010_0825_c_10L立者若只向許多章句之內隨隱現
010_0825_c_11L而執定有無是滯於文而迷失其義
010_0825_c_12L者也於此未免
引古一證

010_0825_c_13L
昔者龍牙禪師問臨濟如何是祖師 [22]
010_0825_c_14L西來意臨濟云與我過禪板來
010_0825_c_15L牙便過禪板與臨濟濟接得便打
010_0825_c_16L龍牙云打則任打要且無祖師意
010_0825_c_17L又問翠微如何是祖師西來意翠微
010_0825_c_18L與我過蒲團來龍牙便過蒲團
010_0825_c_19L與翠微微接得便打龍牙云打則
010_0825_c_20L任打要且無祖師意及龍牙住院後
010_0825_c_21L有僧人室請益云和尙行脚時參二
010_0825_c_22L尊宿因緣還肯他也無龍牙云
010_0825_c_23L則深肯要且無祖師意又南泉住庵
010_0825_c_24L有沙彌來參泉云我登山作務

010_0826_a_01L그대는 여기 머물다가 밥을 지어 먹고 일부는 나에게 보내라.” 시간이 지나서도 오지 않아 남전이 암자로 돌아와 보니 그 사미는 밥을 해서 혼자 다 먹어 치우고 취사도구는 부수어버린 채 평상에 한가로이 누워 있었다. 남전이 그 곁에 나란히 눕자 사미가 보더니 곧바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남전이 그 뒤 주지가 되고서 이 이야기를 제기하고 대중에게 말했다. “나는 그때 이후로는 더 이상 이와 같이 영리한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121)
③ 논거122)
마조馬祖에게 무업無業이 물었다. “달마 대사가 서쪽으로부터 와서 직접 전한 심인心印이란 어떤 것입니까?” “매우 귀찮게 구는구나. 그만 갔다가 다른 때 오라!” 무업의 한 발이 문턱을 넘어서려는 순간, 마조가 “대덕이여!”라고 부름에 무업이 고개를 돌리자 마조가 말했다. “이것은 무엇인가?” 무업이 그 말에 크게 깨달았다.
④ 초의의 변증
마조 대사가 무업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지극히 간명하게 핵심을 움켜잡았다. 거기에는 후세인들이 방棒을 휘두르거나 할喝을 내지르고, 밟거나 후려치는 따위의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짓거리란 조금도 없었다. 무업 국사無業國師가 고스란히 알아차린 방식 또한 매우 빨랐다. 두 존숙에게 법을 물었던 용아는 결코 깊이 수긍하는 마음에 막혀 있지 않았다. 뿌리박은 터에서 몸을 빼내어 일정하게 주어진 법도(範圍) 밖으로 벗어났던 그가 어찌 그물을 뚫고 나온 황금잉어123)가 아니겠는가!
(그러하기는 하나) 가장 우뚝하고 고결한 자태로 만물 밖으로 훌쩍 넘어선 자124)는 남전의 암자에 왔던 사미이다. 그를 보자 하니, 편안하고 고요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약간의 무기도 쓰지 않고 여유롭게 눈앞의 현실에서 딱 들어맞는 방식으로 남전을 우롱하였다. 남전의 고명한 안목으로도 처음에는 그의 진면목을 알아채지 못했다가 떠난 뒤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미가 어찌 사미였겠는가! 틀림없이 사미의 몸으로 나타나 시험하러 왔던 달마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옛사람들이 온전한 기틀을 남김없이 활용하는 경계에서 한없이 무젖어 노닐었던 까닭이다. 마치 용이 바다에 숨어 있고 붕새가 드넓은 하늘을 운행하는 자태와 같으니, 상황에 들어맞게 격외格外의 도리를 마음껏 희롱하는 본보기이다. 이 안에서 언제 기용機用이라는 글자의 흔적인들 나타내 보인 적이 있는가! 뚜렷하게 드러내는 그 작용으로 또한 은밀하게 숨기도 하니,

010_0826_a_01L你留此炊飯喫與我將一分來
010_0826_a_02L過時不來泉回庵視之僧做飯自喫
010_0826_a_03L打破家具高臥床上泉從傍共
010_0826_a_04L沙彌視之便起行不顧泉後住
010_0826_a_05L擧此謂衆曰我從彼已來更不
010_0826_a_06L逢如此伶利漢又馬祖因無業國師
010_0826_a_07L如何是祖師西來密傳心印
010_0826_a_08L正閙在且去別時來業一足纔
010_0826_a_09L跨門祖曰大德却便回顧祖曰
010_0826_a_10L什麽業大悟看馬師接無業極甚
010_0826_a_11L簡要無復後世人棒喝踏摑惡氣
010_0826_a_12L態半點業師之領荷亦甚徑捷矣
010_0826_a_13L龍牙之參二尊宿終不滯在深肯裡
010_0826_a_14L [23] 根抽身超逸於範圍之外豈非透
010_0826_a_15L1) [2] 金鱗最所介潔而獨超物外者
010_0826_a_16L到南泉之沙彌也看他閑閑靖靖地
010_0826_a_17L始終不施些些戈甲緩緩於實頭上
010_0826_a_18L恰恰鼓弄南泉以南泉之高明初未
010_0826_a_19L領略始得知之於起行之後沙彌豈
010_0826_a_20L沙彌應是達摩現身來試也此乃
010_0826_a_21L古人所以涵瀁遊逸於全機大用之中
010_0826_a_22L如龍潜大海鵬運長空隨宜拈弄於
010_0826_a_23L格外之榜樣也這裏曷嘗見著機用
010_0826_a_24L字之影跡以能堂堂顯露猶復密密

010_0826_b_01L이것은 옛사람이 요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난 이유이기도 하다.
3) 방할棒喝로 펼쳐 보인 인연
고덕은 ‘어떤 학인이 「육조는 스스로 살피고 스스로 깨끗하게 했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서 깨우쳤다’는 것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자세히 점검해 보면 설령 스스로 살피고 스스로 깨끗하게 했더라도 여전히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상태는 아니다.”125)
① 인연
원오圜悟 화상은 외도가 부처님께 물었던 인연126)을 제기하고 이렇게 평가했다. “산승의 견해대로 한다면 그 외도가 ‘말이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이 없는 것도 묻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는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때려 줄 것이다.”127)
② 인연
원오는 또한 백장이 마조에게 법을 물으러 다시 찾아갔을 때의 인연128)을 제기한 다음 불자拂子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누군가 ‘이것 그대로의 작용인가, 이것을 떠난 작용인가?’라고 묻는다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때리고 곧이어 한 소리 크게 내지르리라.” 다시 말했다. “마조와 백장의 경계를 보았는가?”
③ 인연129)
어떤 학인이 방장실에 들어와 운봉 문열雲峯文悅 화상에게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라고 누군가 조주趙州에게 던진 질문을 제기하자마자 운봉은 할을 내질렀고 그 학인은 멍해졌다. 운봉은 “조주가 뭐라고 했다고?”라고 되묻고 그 학인이 머뭇거리자 불자로 곧바로 때렸다.
④ 인연130)
남전南泉·노조魯祖·삼산杉山·귀종歸宗 등 네 사람이 마조의 처소를 떠나 각자 머물 암자를 모색하고자 도중에 서로 헤어지려는데 남전이 주장자를 땅에 꽂고 말했다. “제대로 말을 하더라도 이것에 가로막힐 것이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이것에 가로막힐 것이다.”131) 귀종이 주장자를 끌어다 남전을 한 방 때리고서 말했다. “바로 이것일 뿐인데, 왕노사王老師132)는 가로막힌다느니 가로막히지 않는다느니 따지고 있으니 무슨 말인가?” 노조는 “바로 이 한 구절이 세상에 널리 퍼질 것이다.”133)라고 말했다.134)
⑤ 인연135)
암두岩頭가 덕산德山의 방장실 문턱에 걸쳐 선 채 물었다. ‘성스럽습니까, 범속합니까?’ 덕산이 바로 할을 내지르자 암두가 절을 올렸다.136)
⑥ 인연137)
대혜 종고大慧宗杲 선사가 준박遵璞 선인에게 물었다. “삼성三聖과 흥화興化가 말을 꺼내거나 꺼내지 않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전해 주거나 전해 주지 않는다고 한 공안138)에 대하여 (묻겠으니) 말해 보라! 이 두 노인네들의 말에 얽매인 몸에서 벗어날 통로가 있는가?” 준박이 대혜의 무릎을 주먹으로 한 대 치자 대혜가 말했다. “그대가 먹인 이 한 방의 주먹은 삼성의 막힌 숨통을 트여 준 것인가,

010_0826_b_01L隱潜此古人所大過於今大處

010_0826_b_02L
古德因僧聞六祖自看自淨言下有
010_0826_b_03L仔細點檢將來直饒自看自淨
010_0826_b_04L也未勦絶在圓悟和尙擧外道問佛
010_0826_b_05L因緣云若據山僧見處待他道不問
010_0826_b_06L有言不問無言和聲便打又擧
010_0826_b_07L百丈再參馬祖因緣擧起拂子云
010_0826_b_08L有人問即此用離此用和聲便打
010_0826_b_09L隨後而喝復云還見馬祖百丈麽
010_0826_b_10L雲峯說 [24] 和尙因僧入室 [25] 問趙州
010_0826_b_11L法歸一一歸何所說便喝僧茫然
010_0826_b_12L說問趙州道什麽僧擬議說以拂
010_0826_b_13L子驀口打南泉魯祖 [26] 歸宗四
010_0826_b_14L離馬祖處各謀住庵於中路相
010_0826_b_15L別次南泉揷下拄杖云道得 [27]
010_0826_b_16L道不得破者不 [28] 宗拽拄杖
010_0826_b_17L泉一下云也只是個王老師說什麽
010_0826_b_18L碍與不礙魯祖云只此一句大播
010_0826_b_19L天下岩頭才跨德山門便問是聖
010_0826_b_20L是凡德山便喝岩頭禮拜大慧
010_0826_b_21L杲禪師問遵璞禪人三聖興化出不
010_0826_b_22L爲人不爲人 [29] 且道者兩個老漢
010_0826_b_23L還有出 [30] 身處也無璞於師膝上打一
010_0826_b_24L師云汝者一拳爲三聖出氣

010_0826_c_01L흥화의 막힌 숨통을 트여 준 것인가? 말해 보라, 말해 보라!” 준박이 머뭇거리자 대혜가 등골이 쪼개질 정도로 한 방 때리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 한 방을 잊어서는 안 된다.”139)
이상의 여섯 단락 인연(인연 ①~⑥)은 방을 휘두르거나 할을 내지르거나 하는 인연이다. 말해 보라! 궁극적으로 (그 방과 할은) 어디에 귀착되는가? 낱낱이 가려내 보라.
제2편사변만어- 네 가지 주제를 논함

010_0826_c_01L興化出氣速道速道璞擬議師便
010_0826_c_02L劈脊與一捧 [31] 第一不得忘了這
010_0826_c_03L一捧如上六段或捧或喝之因緣
010_0826_c_04L且道落在什麽處一一辨看

010_0826_c_05L
  1. 1)육은六隱 : 백파 긍선白坡亘璇의 호.
  2. 1)자리를 나누어 앉은 것(分座) : 부처님이 다자탑 앞에서 가섭에게 당신이 앉은 자리의 반을 내주면서 앉게 한 것. 위경僞經인 『大梵天王問佛決疑經』 권상 「初會法付囑品」(X1, 419b1)에 이 일화가 보인다.
  3. 2)염화시중拈華示衆 또는 염화미소拈華微笑 : 교외별전敎外別傳을 나타내는 근원적인 설화이다. 『禪門拈頌說話』 5則(H5, 12c), “세존께서 영산靈山에서 설법하실 때 하늘에서 네 가지 꽃이 비 오듯이 내렸다. 세존께서 마침내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자 가섭이 미소 지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정법안장이 있으니 그것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어떤 본에는 ‘세존께서 청련목으로 가섭을 돌아보시자 가섭이 미소를 지었다’라고 되어 있다.(世尊在靈山說法, 天雨四花. 世尊遂拈花示衆, 迦葉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付囑摩訶迦葉.’一本, 世尊, 以靑蓮目顧視迦葉, 迦葉微笑.)”
  4. 3)삼처전심三處傳心 : 부처님이 가섭에게 마음을 전하여 적통의 제자임을 인증한 세 가지 상황. 부처님의 인가를 받은 가섭을 선종의 전등설傳燈說에서 서천西天 28조 중 초조初祖로 만든 근거가 된다. 분반좌分半座·염화미소拈花微笑·곽시쌍부槨示雙趺를 가리켜 삼처전심이라 한다. 분반좌는 『中本起經』 권하 「大迦葉始來品」(T4, 161a19)·『大梵天王問佛決疑經』 권상 「初會法付囑品」(X1, 419b1), 염화미소는 『大梵天王問佛決疑經』 권상 「初會法付囑品」(X1, 418c19), 곽시쌍부는 『佛般泥洹經』 권하(T1, 174a5) 등에 근거한다.
  5. 4)대기대용大機大用 : ‘대기’는 근본적인 기틀, ‘대용’은 남김없이 드러내는 온전한 활용. 따라서 대기대용은 ‘근본적인 기틀의 온전한 활용’이라는 뜻으로 쓰이지만, 여기서는 ‘기용機用’을 설명하기 위하여 대기와 대용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6. 5)『禪家龜鑑』(H7, 644a)의 글을 인용하면서 ‘대용의 기틀’과 ‘대기의 활용’이라는 말을 덧붙여 개작하였다.
  7. 6)원오 극근圜悟克勤이 한 말이다. 원오의 어록 세 부분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임의로 글자를 고치고 이 글의 논지에 맞추기 위해 윤색을 가했다.
  8. 7)이 일(此事) : 수행자로서의 본분에서 반드시 마쳐야 할 일인 본분사本分事를 가리키는 선종의 용어이다. 손발이 닿는 가장 가까운 곳에 두어야 하는 시급한 일이기 때문에 ‘이 일’이라 한다.
  9. 8)달마 대사가……할 뿐이다 : 『圜悟語錄』 권15 「示諸禪人」(T47, 784b25)의 내용에 해당한다. 뒷부분은 “다만 말의 속박을 벗어나 체득하고, 기틀 밖에서 알아차리고자 할 뿐이다.(只貴言外體取, 機外薦取.)”라고 되어 있다.
  10. 9)가장 빠른 길(直拔) : 경직徑直과 같은 뜻.
  11. 10)가장 빠른……떨어지지 않는다 : 위의 책, 권15 「示遠猷奉議」(T47, 785c16)에 나오는 다음 단락의 대의를 요약 발췌한 내용이다. “예전부터 가로질러 가는 하나의 지름길은 가장 빠른 길로 모든 단계를 뛰어넘었으니 이것보다 나은 방법이 없었다. 곧바로 사람들의 마음을 가리켜 그 본성을 보고 성불하는 길이 그것이다. 다만 이 마음은 아득히 깊어서 성인과 범부 사이에 놓인 계급조차도 벗어나 있을 뿐이다.(從上徑截一路, 直拔超昇無出. 直指人心, 見性成佛. 但此心淵奧, 脫去聖凡階級.)”
  12. 11)왕자의 보검을……해야 한다 : 위의 책, 권14 「示華藏明首座」(T47, 778b6). 살殺과 활活을 겸비해야 한다는 논거가 되는 인증이다.
  13. 12)앞의 마지막 구절에 이어 “만일 오로지 어느 한편만 시행한다면 그곳으로 치우쳐 기울어지게 된다.(若只孤單則偏墮也.)”고 한 원오의 말을 살활殺活이라는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나도록 바꾸었다.
  14. 13)삼처전심 중 자리를 나누어 앉았던 것에서 청원 행사靑原行思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백파의 설에 대한 비판이다. 이 방법을 깨달아 육조 혜능慧能의 비정통 전수자가 되었다고 한다. 『禪文手鏡』 「殺活辨」(H10, 520b), “세 장소에서 마음을 전한 것 중에 첫 번째 가섭에게 자신의 자리를 나누어 앉게 한 것진공은 사람을 죽이는 칼로서 삼구 중 제3구인 본분 및 향상이다. 곧 단지 변하지 않는 진여眞如만을 전한 것으로서 부정적 방법인 살殺만 있고, 긍정적 방법인 활活은 없다. 청원 행사가 이 방법을 깨달아 육조 혜능의 비정통 전수자가 되었다.(三處傳中, 第一分座眞空, 殺人刀, 則三句中第三句本分及向上, 則但傳不變眞如, 唯殺無活故. 靑原得之, 爲六祖傍傳也.)” 반면 정통 전수자는 살과 활을 겸비한 남악南岳이라는 주장이 이어진다.
  15. 14)『禪文手鏡』(H10, 515b) 이하의 요지이다. 초의는 백파가 제시한 삼종선에 대한 해석을 요약하고 부연하여 설명함으로써 그 뜻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여기에는 단지 백파의 견해를 심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삼종선 이해에 대한 초의의 깊은 안목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백파보다 친절하게 삼종선의 차별을 설명하고 있다. 동시에 향후 백파를 비판하면서 그와 구별되는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는 전제들이 암시되어 있다. 즉 일단 백파의 관점에서 핵심이 되는 것을 보다 뚜렷하게 부각하여 놓고 이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방법을 말한다. 김영욱, 「조선말 삼종선 논쟁」, 한국사상연구소 편, 『자료와 해설, 한국의 철학사상』(예문서원, 2001) 참조.
  16. 15)이상의 말과 이하에서 여래선에 대하여 말한 구절들은 각운覺雲이 『禪門拈頌集』 「序」(H5, 1b)에서 밝힌 다음 말에서 계기를 얻은 것이며 다른 문헌에서는 전체적으로 이것보다 적절하게 부합하는 내용을 찾을 수 없다. 백파가 의도적으로 우리나라의 문헌에서 근거를 모색한 결과로 보인다. “여래선이란 산은 산 그대로 좋고 물은 물 그대로 좋으니 하나하나의 법마다 온전히 진실하다는 견해이고, 조사선은 뿌리까지 통째로 뽑아 버려서 잡고서 분별할 수단을 전혀 남기지 않는 선법이다. 가령 『금강경』에서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보면 부처님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운운한 말은 여래선의 안목을 나타내고, 법안이 ‘만약 모든 상을 상이 아니라고 보면 부처님의 뜻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운운한 말은 조사선의 안목을 나타낸다. 또한 불법에 드러낼 측면이 있는 것을 여래선이라 하고, 불법에 드러낼 측면이 조금도 없는 것을 조사선이라 한다.(如來禪者, 山山水水, 法法全眞也;祖師禪者, 和根拔去, 了沒巴鼻也. 如經云,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云云’者, 是如來禪也;如法眼云, ‘若見諸相非相, 卽不見如來云云’者, 是祖師禪也. 又佛法有頭角邊, 謂之如來禪;佛法無頭角邊, 謂之祖師禪也.)”
  17. 16)도장의 흔적이 물에 잠시 남아 있다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사유似有는 있는 듯하지만 없다는 뜻이다.
  18. 17)정확히 일치하는 경전의 구절은 없다.
  19. 18)경전이나 부처님의 말씀 그대로 따르는 방식을 여래선이라 하고, 그와 다르게 보여 주는 방식을 조사선이라 한다는 분별은 각운의 말에 따른다. 각주 15) 참조.
  20. 19)『華嚴經疏鈔』 권17(T36, 130b10), 『金剛經纂要刊定記』 권7(T33, 227c20) 등에 보이는 구절이다.
  21. 20)임제삼구臨濟三句 : 다음 문답에 근거한다. 『臨濟錄』(T47, 497a15), “법좌에 오르자 학인이 물었다. ‘제1구는 어떤 것입니까?’ ‘삼요의 도장을 찍고 떼니 붉은 무늬점이 분명하고, 말도 꺼내기 전에 주객이 나뉜다.’ ‘제2구는 어떤 것입니까?’ ‘문수보살이 어찌 무착 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냐마는, 방편을 펼치는 것이 어찌 망상을 끊어 버린 상근기와 모순되겠는가!’ ‘제3구는 어떤 것입니까?’ ‘무대에서 꼭두각시를 희롱하는 것을 보라. 밀고 당기는 것이 모두 그 배후에서 조작하는 사람에게 달려 있다.’(上堂, 僧問, ‘如何是第一句?’ 師云, ‘三要印開朱點側, 未容擬議主賓分.’ 問, ‘如何是第二句?’ 師云, ‘妙解豈容無著問, 漚和爭負截流機!’ 問, ‘如何是第三句?’ 師云, ‘看取棚頭弄傀儡. 抽牽都來裏有人.’)”
  22. 21)상근은 언어를 깨달음의 수단으로 삼지 않는데, 이미 언어로 표현된 기틀이라면 그에게 적합한 기틀이 아니라는 말.
  23. 22)삼현三玄 : 『臨濟錄』(T47, 497a19), “한 구절의 말에는 삼현의 문을 갖추어야 하고, 하나의 현문에는 삼요三要를 갖추어야 한다. 여기에 방편(權)도 있고 작용(用)도 있으니 그대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一句語須具三玄門, 一玄門須具三要. 有權有用, 汝等諸人, 作麽生會?)”라는 말에 근거한다. 이것을 후대에 임제를 추종하던 무리들이 본체 중의 깊은 도리(體中玄), 구절 중의 깊은 도리(句中玄), 깊은 도리 중의 깊은 도리(玄中玄) 등 임제에게 본래 없던 내용으로 개작했다. 『五家宗旨纂要』 권하 「雲門三句」(X65, 279c11), 『圓頓成佛論』(H4, 728b), 『禪家龜鑑』(H7, 645b) 등에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보인다.
  24. 23)격格이 정해진 법도(格則) : 격외格外를 근본으로 하는 관점에서 보면 ‘격이 정해진 법도’는 속박일 뿐이다. 여기서는 삼현을 중심으로 덧붙여지는 갖가지 관념과 언어가 그것이다. 이것이 경직된 틀이 되면 그것에 예속되므로 부단히 격외를 지시한다. 『曹山語錄』(T47, 527b12), “여러 선문禪門에서 모두들 격이 정해진 법도를 붙들고 있는데, 어째서 그들에게 속박을 벗어나는 반전의 한마디(一轉語)를 말해 주어 그들이 더 이상 의심하지 않도록 만들어 주지 않는가!(諸方盡把格則, 何不與他道一轉語, 令他不疑去!)”
  25. 24)삼현을 창과 갑옷과 같은 수단으로 삼아 방편의 말을 만들어 내고 확고한 법도를 완성하는 방식이라면 격을 벗어났다(格外)고 할 수 없다는 취지. 그런데 백파는 이러한 여래선을 격외선의 범주에 속한다고 했기 때문에 다음 구절에서 자가당착이라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창과 갑옷’에 비유한 삼현은 확고한 법도를 정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이끌어가는 수단의 일종이라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원오 극근圜悟克勤은 삼현이라는 창과 갑옷에 정해진 틀이 없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함정의 말’이라 한다. 세 가지의 분명한 규정이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함정이 되는 것이다. 『圜悟語錄』 권10(T47, 757a29), “오로지 자비를 펼치고자 번뇌하는 중생의 경계에 일부러 떨어져 질문과 대답을 세우며 주인과 손님을 보존하고 시작과 끝을 남겨두며 삼현이라는 수단에서 함정의 말(誵訛)을 던진다.(一向垂慈落草, 立問立答, 存主存賓, 有始有末, 三玄戈甲中論誵訛.)”
  26. 25)초의 자신이 백파의 주장과 다른 이론을 가지고 공격한 것이 아니라 여래선에 대한 백파 자신의 모순된 설을 밝혀내 보여 주었을 뿐이라는 뜻이다.
  27. 26)일우一愚는 『禪門綱要集』의 저자 청풍 법사淸風法師 천책天頙의 자호自號이다. 백파는 임제삼구에 대한 청풍 법사의 풀이를 인용한 뒤 그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붙이는 형식으로 『禪文手鏡』을 서술한다.
  28. 27)사유와 언어의 격에 갇혀 있는 구절은 사구, 언어와 사유의 틀을 남김없이 부수는 구절은 활구이다. 분별할 근거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화두가 활구이며, 갖가지 인식의 근거를 제공하여 안주하도록 하는 구절은 사구가 된다.
  29. 28)『臨濟錄』(T47, 502a5)의 말을 근거로 하여 후대에 사구와 활구의 개념을 덧붙여 재구성한 것이다. 『圜悟語錄』 권11(T47, 765b13), 『大慧語錄』 권14(T47, 870b4), 『看話決疑論』(H4, 737a), 『禪家龜鑑』(H7, 636b) 등에 나오는 구절.
  30. 29)명수名數 : 법수法數와 같은 말. 사성제·팔정도 등과 같이 내외의 모든 존재의 진실을 분류하거나 나누어 4나 8 등의 숫자를 붙여 나타내는 것. 이 글의 대의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명수는 언설과 함께 전형적인 격格에 속한다.
  31. 30)북종北宗의 대통 신수大通神秀(606~706)가 입적했을 때 중서령中書令 장열張說(667~730)이 작성한 비문碑文의 구절. 『佛祖歷代通載』 권12(T49, 586b6).
  32. 31)말이 나오기 이전의 상황 전체를 가리키므로 언어로 표현된 특정한 구절을 가리키지 않는다. 활구의 ‘구절’은 본분을 지시하도록 설정된 언어와 행위 그리고 그때그때마다의 상황 자체를 나타낸다.
  33. 32)위음왕불危音王佛 : 최초의 부처님.
  34. 33)위음왕불危音王佛 이전의 경계 : 세계가 분화되기 이전과 같이 어떤 차별도 나누어지지 않고 언어 등 어떤 실마리도 나타나기 이전의 경계를 나타내는 선종의 상투어.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통한다.
  35. 34)언어와 사유가 허용되지 않는 경계(未容擬議處) : 이 자체는 임제삼구 중 제1구인데, 이렇게 말과 분별이 허용되지 않는 제1구에 대하여 해설을 시도한 끝에 도출하는 구절이 제2구이다.
  36. 35)사구도 아니고 활구도 아닌 구절(不死不活句) : 대혜 종고大慧宗杲는 활구, 사구, 불사불활구 등 세 구절을 모두 속박의 가능성으로 제시하여 화두로 변환시켰다. 『大慧語錄』 권14(T47, 870b9), “말해 보라! 이는 사구인가? 활구인가? 사구도 아니고 활구도 아닌가? 한번 확고하게 살펴보라. 설령 확고하게 살펴서 그중 하나를 집어내더라도 세 구절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且道! 是死句? 是活句? 是不死不活句? 試定當看. 直饒定當得出, 也未免在三句裏.)” 『五燈會元續略』 권3 「竺雲景曇章」(X80, 505b14), “어떤 학인이 물었다. ‘옛사람은 「활구를 참구할 일이지 사구를 참구하지 마라」고 하였는데, 활구란 무엇입니까?’ ‘길에서 죽은 뱀을 마주치더라도 때려죽이려 하지 마라.’ ‘사구란 무엇입니까?’ ‘밑 빠진 바구니에 물건을 가득 담아 돌아온다.’ ‘사구도 아니고 활구도 아닌 구절은 무엇입니까?’ ‘눈에 섞인 가루분은 쉽게 구분할 수 있지만, 먹칠에서 숯먹 색은 가려내기 어렵다.’(問, ‘古人道, 須參活句, 莫參死句, 如何是活句?’ 師曰, ‘路逢死蛇莫打殺.’ 曰, ‘如何是死句?’ 師曰, ‘無底籃兒盛將歸.’ 曰, ‘不死不活句, 又作麽生?’ 師曰, ‘易分雪裏粉, 難辨墨中煤.’)” 마지막 구절에 설정된 ‘쉽다·어렵다’는 구도는 두 편에 실제로 각각 짝을 지을 수 있는 말이 아니며 맞바꾸어도 상관이 없다. 사실상 쉽다·어렵다는 구분이 없는 곳에서 고의로 짜내 제시한 화두인 것이다.
  37. 36)삼요三要 : 임제 의현臨濟義玄이 설정한 기틀 중 하나. 삼현三玄과 필연적인 짝이 된다. 한 구절에는 반드시 삼현을 갖추어야 하고 하나의 현玄에도 반드시 삼요를 갖추는 방식으로 모든 선어禪語에는 삼요와 삼현이 동시에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는 관점이다. 임제의 삼현을 조照와 용用의 관계에서 해석하여 선조후용先照後用·선용후조先用後照·조용동시照用同時 등 세 가지 틀에 배대하여 조요照要·용요用要·동시요同時要로 풀이하기도 하고, 체體·상相·용用 삼대三大로 해석하기도 하는 등 후대에 다양한 해석이 나타난다.
  38. 37)각주 30) 참조
  39. 38)유무, 선악, 대소 등 대립하는 짝들이 사유분별의 기본적인 소재가 된다. 이것이 끊어지면 분별의 근거가 사라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다.
  40. 39)대혜 종고大慧宗杲의 다음 말을 활용했다. 『大慧語錄』 권15(T47, 876c2), “달마 대사가 인도로부터 문양이 없는 도장을 가지고 와서 2조의 얼굴에 한 번 찍어 버렸고, 2조는 이 도장을 얻어 조금도 바꾸지 않은 채 3조의 얼굴에 찍었다. 이로부터 한 사람이 허虛를 전했으나 만인이 그것을 실實이라 잘못 전하며 대대로 도장을 찍어 전하다가 강서의 마조에 이르자 마조는 남악 회양 화상으로부터 이 도장을 얻고 ‘오랑캐의 전란이 있은 뒤 30년 동안 소금과 간장이 부족한 적이 없었다’고 말한 것이다.(達磨從西天, 將得箇無文印子來, 把二祖面門, 一印印破;二祖得此印, 不移易一絲頭, 把三祖面門印破. 自後一人傳虛, 萬人傳實, 遞相印授, 直至江西馬祖, 馬祖得此印, 於南嶽和尙, 便道, ‘自從胡亂後三十年, 不曾少鹽醬.’)”
  41. 40)이 할에는 분별의 근거가 되는 대립의 짝이 전혀 없다. 아래서 ‘틀렸다’고 한 화두도 동일한 본보기로 제시된다. 대립의 짝이 없기 때문에 ‘틀렸다’는 말은 맞다거나 틀렸다거나 하는 대립의 어느 한편이 아니다.
  42. 41)서원 사명西院思明이 ‘틀렸다’고 두 번 제기한 화두에 대하여 설두 중현雪竇重顯이 다시 ‘틀렸다’고 평가한 것. 서원은 천평 종의天平從漪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잘못이다’라고 하여 여기서 말하는 제1구와 상응하도록 하였다. 이 또한 대립의 짝이 없어 어떤 분별도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景德傳燈錄』 권12 「西院思明傳」(T51, 298c25), “종의라는 학인이 법석에 와서 열흘이 되자 비로소 ‘불법을 이해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에 대하여 말하는 사람조차 없구나’라고 하였다. 서원이 듣고서도 묵묵히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종의가 다른 날 법당에 올라가고 있는데 서원이 종의를 부름에 종의가 고개를 들어서 보자 서원이 ‘틀렸다!’고 하였고, 종의가 두세 걸음 앞으로 나오자 서원이 다시 ‘틀렸다!’라고 하였다. 종의가 다시 앞으로 다가섰을 때 서원이 ‘조금 전에 두 번 틀렸다고 했는데 상좌가 틀렸는가, 내가 틀렸는가?’라고 물었고, 종의가 ‘제가 틀렸습니다’라고 하자 서원이 ‘틀렸다!’라고 한 다음 또 ‘상좌는 이곳에서 하안거를 보내면서 두 번 틀렸다고 한 이 말에 대해 함께 상량해 보도록 하자’고 제안했지만 종의는 받아들이지 않고 떠났다. 그 뒤에 상주의 천평산에 주석하면서 매번 이 화두를 제기하고 이렇게 말했다. ‘내가 행각할 때 거센 바람에 날려 여주에 이르렀는데 서원이라는 장로가 연이어 세 차례 틀렸다는 말을 던져 나를 점검하고, 게다가 나를 붙잡아 두고 하안거를 보내며 상량하기를 바랐다. 나는 그때의 틀렸다는 말에 대하여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다가 당시 발걸음을 떼고 남쪽으로 떠나려는 순간 틀렸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수산 성념首山省念 화상이 말했다. ‘천평 종의가 그렇게 이해한 말로 보면 그는 꿈에도 서원의 뜻을 알지 못했다. 왜 그런가?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僧從漪到法席, 旬日乃曰, ‘莫道會佛法人, 覓箇擧話底人也無.’ 師聞而默之. 漪異日上法堂次, 師召從漪, 漪擧首, 師曰, ‘錯!’ 漪進三兩步, 師又曰, ‘錯!’ 漪復近前, 師曰, ‘適來兩錯, 是上座錯, 是西院錯?’ 曰, ‘是從漪錯.’ 師曰, ‘錯!’ 又曰, ‘上座且遮裏過夏, 共汝商量遮兩錯.’ 漪不肯便去. 後住相州天平山, 每擧前話曰, ‘我行脚時, 被惡風吹到汝州, 有西院長老, 勘我連下三箇錯, 更待留我, 過夏商量. 我不說恁麽時錯, 我當時發足, 擬向南去, 便知道錯了也.’首山省念和尙云, ‘據天平作恁麽會解, 未夢見西院在. 何故? 話在.’)” 설두의 말은 다음의 게송에 나타난다. 『頌古聯珠通集』 권37(X65, 711b22), “저 선가의 무리들, 모든 것을 경박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서, 배 가득 채우도록 공부하고도 써먹지 못한다네. 우습고 우습구나, 천평 노인이여! 당초에 행각 떠났던 일을 후회한다고 누가 말하는가? 틀렸다, 틀렸어! 서원의 맑은 바람에 문득 사라져 버렸네. 다시 말했다. ‘만일 납승 하나가 나와서 틀렸다고 말한다면, 「설두가 틀렸다고 한 말이 천평이 한 말과 비교하여 어떤가?」라고 응답하리라.’(禪家流, 愛輕薄, 滿肚參來用不著. 堪笑堪笑天平老! 誰謂當初悔行脚? 錯, 錯! 西院淸風頓銷爍. 復云, ‘忽有箇衲僧出來道錯, 雪竇錯何似天平錯?’)”
  43. 42)불과佛果 : 원오 극근圜悟克勤(1063~1135)의 호.
  44. 43)원오는 서원이 ‘틀렸다’고 두 차례 한 말에 대하여 각각 다음과 같은 착어를 달았다. 『碧巖錄』 98則(T48, 221a24)에 첫 번째 말에 대하여 “그래도 반드시 화로 속에서 단련해야 한다. 배를 갈라서 속을 도려내어 주었군. 삼요의 도장을 찍고 떼니 붉은 무늬점이 분명하고, 분별을 허용하기도 전에 주인과 손님이 나뉘었다.(也須是鑪裏煅過, 始得. 劈腹剜心. 三要印開朱點窄, 未容擬議主賓分.)”라고 하였고, 두 번째 말에 대해서는 “배를 갈라서 속을 도려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이를 (두 번 틀렸다고 한 말에 따라) 양중공안兩重公案이라 하지만, 마치 물이 물에 들어간 것과 같고, 금으로 금을 바꾼 것과 같다는 사실을 그들은 전혀 모른다.(劈腹剜心. 人皆喚作兩重公案, 殊不知, 似水入水, 如金博金.)”라고 착어를 달았다.
  45. 44)문자가 새겨지지 않은 도장(無文字印) : 언어문자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없는 심인心印을 상징한다. 무문인無文印·무자인無字印·불조심인佛祖心印 등과 통한다. 각주 39) 참조.
  46. 45)험하고 높아서 오르기 힘든 산과 같고 모든 물줄기가 끊긴 것처럼 어떤 분별도 통하지 않는 기틀을 가리킨다.
  47. 46)구화漚和 : ⓢⓟupāya. 중생의 근기에 알맞게 교화를 펼치는 방편.
  48. 47)백장과 황벽이 모두 마조의 할에서 대기와 대용을 터득하였다는 구절은 『禪家龜鑑』(H7, 644a)에 나오지만, 본래는 위산과 앙산의 다음 문답에서 비롯한다. 『百丈語錄』 古尊宿語錄1(X68, 5b16)·『仰山語錄』(T47, 587b15), “위산이 앙산에게 물었다. ‘백장이 마조를 다시 찾아갔을 때 서로 간에 불자拂子를 꼿꼿이 세운 인연이 있다. 이 두 존숙의 뜻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대기와 대용을 드러냅니다.’ ‘마조 문하에서 84인의 선지식이 배출되었는데, 어떤 사람이 대기를 얻었고 어떤 사람이 대용을 얻었는가?’ ‘백장이 대기를 얻었고 황벽이 대용을 얻었습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도道를 말로 전하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그렇다, 그래.’(潙山問仰山, ‘百丈再參馬祖, 豎拂因緣. 此二尊宿, 意旨如何?’ 仰山云, ‘此是顯大機大用.’ 潙山云, ‘馬祖出八十四人善知識, 幾人得大機, 幾人得大用?’ 仰山云, ‘百丈得大機, 黃檗得大用. 餘者, 盡是唱道之師.’ 潙山云, ‘如是, 如是.’)”
  49. 48)하나의 요要를 얻어 삼현과 삼구를 모두 넘어설 수 있다는 증거라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의 요란 마조의 할喝을 가리킨다. 숭제 혜공의 이상의 설은 『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1b)에 실려 있다.
  50. 49)『景德傳燈錄』 권28(T51, 445a16). 이에 대하여 조주趙州는 “나는 18계 어디서나 살림을 부수고 집을 무너뜨릴 줄 안다.(我十八上, 便解破家散宅.)”라고 대칭시켰다. 『禪門拈頌說話』 230則 참조.
  51. 50)세주細註는 『汾陽語錄』에는 없고 『禪門四辨漫語』 작자가 붙인 것이다. 이하도 동일하다.
  52. 51)‘많이 안다’는 뜻의 다문多聞은 아난을 가리킨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설법을 가장 많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잘 이해하였기 때문에 다문제일多聞第一이라 부른다. 이러한 다문의 지혜로 현상이나 근기 등 다양한 차별(事)에 적절하게 응하여 대답하는 솜씨를 나타낸다. 다음 구절의 뜻이다.
  53. 52)사구백비四句百非 : 모든 언어 형식. 언어를 총괄적으로 나타낸다.
  54. 53)풍간과 여구윤閭丘胤 사이에 있었던 인연에 기초하여 언어에 예속되지 않고 드러내는 활발한 경지를 나타내었다. 여구윤이 두통을 앓고 있을 때 풍간이 깨끗한 그릇을 구해 그 안에 주문을 불어넣은 물을 담아 뿌려 주었더니 그 자리에서 나았다. 여구윤이 어떻게 이렇게 신통할 수 있는지 묻자, 풍간은 문수文殊와 보현普賢 두 보살을 알현하고 와서 그런 효험을 볼 수 있었다는 뜻을 비쳤다. 두 보살의 소재를 묻는 여구윤에게 풍간은 천태산天台山 국청사國淸寺에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는 한산寒山과 습득拾得이 그들이라고 대답해 주었다. 『景德傳燈錄』 권27 「天台豊干傳」(T51, 433b22) 참조.
  55. 54)『汾陽語錄』(T47, 597b22).
  56. 55)청풍 장로淸風長老, 호월 상인皓月上人, 벽암 노숙碧菴老宿 세 사람을 가리킨다. 『禪門綱要集』 「三聖章」(H6, 851a) 참조.
  57. 56)함개건곤函蓋乾坤 : 운문 문언雲門文偃이 함개건곤·목기수량目機銖兩·불섭만연不涉萬緣 등으로 제시한 삼구를 그의 제자 덕산 연밀德山緣密이 함개건곤·절단중류截斷衆流·수파축랑隨波逐浪 등으로 정리했다. 이것을 보통 ‘운문삼구’라 한다. 『雲門廣錄』 권하(T47, 576b19), 『人天眼目』 권2 「三句」(T48, 312a7), 『五家宗旨纂要』 권하 「雲門三句」(X65, 279c11) 등에 수록되어 있다.
  58. 57)소양昭陽 : 운문 문언雲門文偃(864~949)의 호.
  59. 58)물길이 흐르는……좇아가가는 구절(隨波) : 수파축랑隨波逐浪의 줄임말. 각주 56) 참조.
  60. 59)이상의 문답은 『禪門綱要集』 「三聖章」(H6, 851a)에 실려 있다.
  61. 60)백파가 일우一愚의 설을 끌어들여 자신의 삼종선三種禪을 입증하는 근거로 삼고 있지만, 여래선을 제2구에 배속하는 일우의 잘못을 근거로 삼아 이 제2구를 격외格外와 연결하는 더 큰 잘못에 빠졌다는 논리이다. 뒤에 나온다.
  62. 61)변고역상變古易常 : 과거의 법제法制와 습속習俗을 바꾼다는 말로 『韓非子』 「南面」에 나오는 “다스림의 본질을 모르는 자들은 틀림없이 ‘과거의 법제를 변화시키지 말고 항상 이어져 온 습속을 바꾸지 마라’고 하리라.(不知治者, 必曰 ‘無變古, 毋易常.’)”는 말에 근거한다. 여기서는 백파가 일우의 잘못에 따르면서 그것을 개변하여 더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말로 쓰였다.
  63. 62)애초에 일우는 여래선을 격외의 도리와 연결하지 않았는데, 백파가 일우의 설에 근거한다고 했음에도 의도적으로 여래선을 격외에 배속하기 위하여 이를 벗어났다는 주장이다.
  64. 63)여래선을 격외에 배속하는 맥락.
  65. 64)돈오를 선종의 정통 선법으로 내세우면서 그것을 점수와 구분한 사실을 말한다. 남종의 혜능慧能과 북종의 신수神秀를 가르는 기준도 이것이며, 돈오의 남종이 적자이고 점수의 북종이 서자라는 뜻이다.
  66. 65)낙초지담落草之談 : 번뇌의 숲에 떨어져서 전하는 이야기. 그때마다 마주치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서 본분사를 지시하기 위하여 스스로 수준을 낮추어 말하는 제2의문第二義門. 『雲門廣錄』 古尊宿語錄16(X68, 100b11), “옛날부터 노숙한 종사들은 모두 자비를 베풀 목적으로 번뇌의 숲에 떨어져서 전하는 이야기를 가지고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을 파악했던 것이다. 번뇌의 숲을 벗어나는 이야기라면 이렇지 않으니 만약 이렇다면 아는 말을 거듭하는 결과가 된다.(古來老宿, 皆爲慈悲之故, 有落草之談, 隨語識人. 若是出草之談, 卽不與麽, 若與麽, 便有重話會語.)”
  67. 66)『禪門綱要集』 「一愚說」(H6, 855a). 인용한 두 글 사이에는 향엄과 학인, 그리고 석상의 다음 문답이 실려 있다. “향엄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다. ‘도란 무엇입니까?’ ‘고목 속에서 용이 트림을 한다.’ ‘도 속에 들어가 있는 사람이란 무슨 뜻입니까?’ ‘해골 안의 눈동자이다.’ 그 학인이 석상에게 향엄의 말을 제기하였다. ‘고목 속에서 용이 트림을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전히 정감이 묻어 있구나.’ ‘해골 안의 눈동자란 무슨 뜻입니까?’ ‘여전히 분별을 지니고 있구나.’(僧問香嚴, ‘如何是道?’ 嚴云, ‘枯木裡龍吟.’ 問, ‘如何是道中人?’ ‘髑髏裡眼睛.’ 僧擧問石霜, ‘如何枯木裡龍吟?’ 霜云, ‘猶帶喜在.’ 問, ‘如何是髑髏裡眼睛?’ 云, ‘猶帶識在.’)”
  68. 67)『人天眼目』 권1 「三玄三要」(T48, 301c24). 각주 22)의 『臨濟錄』 참조.
  69. 68)『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2a).
  70. 69)위의 책, 「一愚說」(H6, 854b).
  71. 70)번뇌망상의 흐름을 끊는 길(截斷) : 절단중류截斷衆流의 줄임말. 각주 56) 참조.
  72. 71)마조 도일馬祖道一의 말에 따른다. 『祖堂集』 권4(K45, 262a23), “석두는 순금만 파는 점포이고, 강서(마조)는 잡다한 물건을 파는 점포이다.(石頭是眞金鋪, 江西是雜貨鋪.)” 이 말은 『景德傳燈錄』 권11 「仰山慧寂傳」(T51, 282c24) 등에 인용된다. 순금을 파는 점포는 모든 수단을 끊고 본분을 곧바로 가리키는 선법 또는 부정적 방법인 살殺에 치중하는 선법을 나타내고, 잡화를 파는 점포는 다양한 차별을 모두 긍정하는 활活 위주의 선법을 나타내지만, 백파(육은)는 이 뜻으로 쓰지는 않았다.
  73. 72)물길이 흐르는……좇아가는 길(隨波) : 수파축랑隨波逐浪의 줄임말. 각주 56) 참조.
  74. 73)33조사들(卅三諸祖) : 인도와 중국의 조사를 모두 합한 선종의 33대 조사. 초조 가섭迦葉으로부터 보리달마菩提達磨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28대 조사와 달마를 초조로 하여 혜능에까지 이어지는 중국의 6대 조사를 합하여 부르는 말이다.
  75. 74)백파의 관점이 후세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말.
  76. 75)위앙종의 위산 영우潙山靈祐(771~853)와 앙산 혜적仰山慧寂(803~887).
  77. 76)앙산이 소석가小釋迦가 되리라는 예언(懸記)을 가리킨다. 『臨濟錄』(T47, 506c16)에 보화普化가 그러한 예언을 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78. 77)백장고불百丈古佛 : 백장 회해百丈懷海를 가리킨다. ‘고불’은 선종의 조사에게 붙이는 존칭 중 하나이다. 조주고불趙州古佛도 그 예이다.
  79. 78)앙산은 제2조 아난존자의 후신後身 : 전거는 알 수 없다. 초의의 자의적 평가로 보인다.
  80. 79)앞의 문장은 내용이 압축되어 있어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아래 제시되는 ‘④ 논거’에 그 이야기의 전말이 실려 있다.
  81. 80)아난은 세 번 조사의 문에 들어갔으나 : 전거 미상.
  82. 81)무정설법無情說法 : 돌이나 풀과 같은 무정無情이 법을 말한다는 뜻이다. 본래 남양 혜충南陽慧忠이 제시한 화두가 위산을 거쳐 운암과 동산으로 이어졌다. 혜충의 본래 문답은 다음과 같다. 『祖堂集』 권3 「慧忠章」(K45, 253a10), “남방 선객이 물었다. ‘옛 부처의 마음이란 어떤 것입니까?’ 혜충이 답했다. ‘담장과 기와 조각 같은 무정물이 모두 옛 부처의 마음이다.’ ‘경전의 말과 대단히 어긋납니다. 『열반경』에는 「담장이나 기와 조각 같은 무정물을 여의었으므로 불성이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그대가 만일 무정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확정적으로 주장한다면 경전에 「삼계三界가 오로지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식識일 뿐이다」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화엄경』에 「삼계의 모든 법은 마음이 지은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에게 묻겠다. 무정이 삼계 안에 있는가, 삼계의 밖에 있는가? 그것은 마음인가, 마음이 아닌가? 무정이 마음이 아니라면 경전에서 「삼계가 오로지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을 것이며, 무정이 마음이라면 무정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대 자신이 경전의 뜻을 어긴 것이며, 내가 어긴 것이 아니다.’ ‘무정에게 마음이 있다면 법을 말할 줄 압니까?’ ‘그들은 치열하게 말하고 있으니 늘 말하고 변함없이 말하면서 쉴 틈이 없다.’(有南方禪客問, ‘如何是古佛心?’ 師曰, ‘牆壁瓦礫, 無情之物, 並是古佛心.’ 禪客曰, ‘與經太相違. 故涅槃經曰, 「離牆壁瓦礫, 無情之物, 故名佛性.」’ …… ‘汝若定執無情無佛性者, 經不應言, 「三界唯心, 萬法唯識.」 故華嚴經曰, 「三界所有法, 一切唯心造.」 今且問汝, 無情之物, 爲在三界內? 爲在三界外? 爲復是心? 爲復不是心? 若非心者, 經不應言, 「三界唯心.」 若是心者, 不應言無情無佛性. 汝自違經, 吾不違也.’ 禪客曰, ‘無情旣有心, 還解說法也無?’ 師曰, ‘他熾然說, 恆說常說, 無有間歇.’)”
  83. 82)『洞山語錄』(T47, 507b25). 『景德傳燈錄』 권15(T51, 321c1)에도 수록되어 있지만 『洞山語錄』의 구절이 본서에 더 가깝다.
  84. 83)운암에게 무정설법에 대하여 다시 묻고서 소식을 얻은 이야기를 말하는데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洞山語錄』(T47, 507c4), “동산이 마침내 위산潙山과 작별하고 지름길로 운암雲巖에게 이르러 이전의 인연을 들려준 다음 물었다. ‘무정의 설법은 어떤 사람이 듣습니까?’ ‘무정이 듣는다.’ ‘스님께서도 듣습니까?’ ‘내가 만일 듣는다면 그대는 나의 설법을 듣지 못할 것이다.’ ‘저는 어째서 듣지 못합니까?’ 운암이 불자拂子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들었는가?’ ‘못 들었습니다.’ ‘내가 전하는 설법도 듣지 못하거늘 어찌 무정의 설법을 들을 수 있겠는가?’ ‘무정의 설법은 어떤 경전의 가르침에 들어 있습니까?’ ‘『미타경』에 「흐르는 물과 새들과 나무숲이 모두 염불하고 법을 외운다」고 한 말을 모르는가?’ 이 말에 동산이 깨달은 것이 있어 게송 한 수를 지었다. ‘대단히 기이하고, 대단히 기이하구나! 무정의 설법은 생각으로 미치지 못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만일 귀로 들으려 하면 끝내 알아차리기 어려우니, 눈으로 소리를 들어야 비로소 알 수 있으리라.’(師遂辭潙山, 徑造雲巖, 擧前因緣了, 便問, ‘無情說法, 甚麽人得聞?’ 巖曰, ‘無情得聞.’ 師曰, ‘和尙聞否?’ 巖曰, ‘我若聞, 汝卽不聞吾說法也.’ 師曰, ‘某甲爲甚麽不聞?’ 巖竪起拂子曰, ‘還聞麽?’ 師曰, ‘不聞.’ 巖曰, ‘我說法, 汝尙不聞, 豈況無情說法乎?’ 師曰, ‘無情說法, 該何典敎?’ 巖曰, ‘豈不見, 彌陀經云, 「水鳥樹林, 悉皆念佛念法.」’ 師於此有省, 乃述偈曰, ‘也大奇, 也大奇! 無情說法不思議. 若將耳聽終難會, 眼處聞時方可知.’)”
  85. 84)앞의 각주에 인용한 내용 직전의 이야기에 해당한다. 위의 책, 507c2.
  86. 85)『人天眼目』 권3(T48, 313c7)에서는 조동종만 언급했고, 권4(T48, 321b14)에서는 온전히 위앙종만 언급했다.
  87. 86)전좌典座 : 침소, 음식 등을 담당하는 소임. 도사都寺·감사監寺·부사副寺·유나維那·직세直歲 등과 함께 육지사六知事라 한다.
  88. 87)이 부분에서 『五燈會元』 권9(X80, 185b6) 등의 다음 기사가 생략되어 있다. “백장이 사마두타에게 물었다. ‘노승이 그곳에 주석해도 되겠는가?’ ‘화상께서 거처하실 곳이 아닙니다.’ ‘왜 그런가?’ ‘화상은 골인骨人인데, 위산은 육산肉山이니, 주석하더라도 1천의 무리도 채우지 못할 것입니다.’ ‘나의 대중 가운데 주석할 만한 인물이 있는가?’ ‘두루 살펴보도록 합시다.’(丈曰, ‘老僧住得否?’ 陀曰, ‘非和尙所居.’ 丈曰, ‘何也?’ 陀曰, ‘和尙是骨人, 彼是肉山, 設居徒不盈千.’ 丈曰, ‘吾衆中莫有人住得否?’ 陀曰, ‘待歷觀之.’)”라고 한 뒤 사마두타는 화림은 지나치고 위산을 지목한 것이다. 『景德傳燈錄』 권9(T51, 264b27), 『潙山語錄』(T47, 577b5) 등에도 보인다. 여기서 골인이란 백장의 인상을 가리키는데 척박하여 복덕이 적다고 하는 골산骨山과 상응한다. 골산은 가난한 사찰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이와 반대로 비옥한 이미지가 육산肉山에 들어 있다.
  89. 88)이 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생략되어 있다. 백장이 (사마두타로부터 위산이 적합하다는 말을 듣고 나서) 그날 밤에 전좌인 위산을 방장실로 불러들여 자신이 대중을 교화할 인연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하고 위산에 거처하며 자신의 뒤를 이어 널리 후학을 이끌도록 부탁하였는데, 화림이 그 소리를 듣고는 동의하지 않았다.(是夜召師入室, 囑云, ‘吾化緣在此. 潙山勝境, 汝當居之, 嗣續吾宗, 廣度後學.’ 華林聞之云, ‘某甲, 忝居上首. 典座何得住持?’) 그래서 출격出格 문답으로 위산의 주인을 선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90. 89)이 화두를 좀 더 효과적인 문제로 제기하기 위하여 『潙山警策註』(X63, 224c11)에서는 “정병이라 부르면 그 말에 물들고(觸), 정병이라 부르지 않으면 사실을 등지게 된다(背).”고 설정하였다. 이러면 전형적인 배촉背觸의 관문이 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궁벽한 지경에 몰아넣어 상대가 격格을 벗어날 수 있는지 점검하기에 알맞다.
  91. 90)만봉 시울萬峰時蔚(1303~1381)은 이 파격破格의 대목을 듣는 순간 의단疑團을 타파하였다고 한다. 『萬峰語錄』(J40, 494a7) 참조.
  92. 91)제일좌第一座 : 대중의 우두머리. 승당에서 가장 첫 번째 자리에 배치되기 때문에 제일좌라 하며, 수좌首座라고도 한다.
  93. 92)산자山子 : 위산 영우潙山靈祐의 별호로 바로 이때 붙여진 것이다. 위산의 주인이 될 인물이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94. 93)『潙山語錄』(T47, 579a11)의 온전한 인용이다.
  95. 94)30년 뒤 : 한 세대. 당唐의 권덕여權德輿가 지은 시 「고흥古興」에 “사람의 목숨 아무리 길어도 백년인데, 그중에서 30년을 한 세대라 하노라.(人生大限雖百歲, 就中三十稱一世.)”는 구절이 있다.
  96. 95)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도 악기 소리와 같은 울림이 있을 정도로 뛰어나고 아름다운 문장을 가리킨다. 『世說新語』 「文學」·『晉書』 「孫綽傳」 등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고사에 따르는 말이다. 글 솜씨가 탁월했던 진晉나라의 손작孫綽이 「천태산부天台山賦」를 지어 친구 범영기范榮期에게 주면서 “경이 한번 땅바닥에 던져 보게. 금석(악기) 소리가 날 것이네.(卿試擲地, 當作金石聲.)”라고 말하였다. 그가 처음에는 믿지 않다가 펼쳐서 읽어보고는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본래 척지금성擲地金聲을 성구로 쓰지만 척지擲地, 척금擲金, 척금성擲金聲 등으로 줄여서도 쓴다.
  97. 96)30년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뜻. 앞에서 서 있던 자리를 바꾸었듯이 앙산이 한 말과 반대편에서 말했다. 그러나 이 말 또한 항상 바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는 임시 설정이다.
  98. 97)『景德傳燈錄』 권9(T51, 265c21), 『五燈會元』 권9(X80, 187b4), 『潙山語錄』(T47, 581b13).
  99. 98)막요촌莫傜村 : 『祖庭事苑』 권1(X64, 326b6), “막요塻窑:본래 막요莫傜라 한다. 지명이다. 지금의 위산탑장潙山塔莊이 그것이다.(塻窑:本作莫傜. 地名. 今潙山塔莊, 是矣.)”
  100. 99)『五燈會元』 권9(X80, 189c2), 『仰山語錄』(T47, 586a22).
  101. 100)이 다음에 “‘어찌 이다지 늦었습니까?’ ‘산에서 노닐고 물놀이도 하느라 그렇게 되었습니다.’(師云, ‘何太遲生?’ 云, ‘遊山翫水.’)”라는 문답이 생략되었다.
  102. 101)『五燈會元』 권9(X80, 190a7), 『仰山語錄』(T47, 586c12).
  103. 102)위산과 앙산 부자 : 위산과 앙산의 사제관계는 세속의 부자관계처럼 친밀했기 때문에 ‘위앙부자潙仰父子’라 부른다.
  104. 103)다음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碧巖錄』 11則 「評唱」(T48, 151c2), “백장이 드디어 마조를 다시 찾아가 법을 물은 인연에 대해 말했다. ‘마조께서 내가 오는 것을 보고 불자를 꼿꼿이 세우기에 내가 「이것 그대로의 작용입니까? 이것을 떠난 작용입니까?」라고 물었다. 마조께서 불자를 선상의 모서리에 걸쳐 놓고 잠자코 있다가 내게 「너는 다음에 입술을 나불거리며 어떻게 남들을 가르치겠는가?」라고 물었다. 내가 그 불자를 가져다 꼿꼿이 세우자 마조께서 「이것 그대로의 작용인가? 이것을 떠난 작용인가?」라고 물었다. 내가 불자를 가져다가 선상의 모서리에 걸쳐 놓자 마조께서 위엄 있게 할을 한 번 내질렀는데 나는 당시에 사흘 동안 귀가 먹어 버렸다.’ 이 일화를 들은 황벽은 자신도 모르게 온몸이 오싹해짐을 느끼며 혀를 내둘렀다.(丈遂擧再參馬祖因緣, ‘祖見我來, 便竪起拂子, 我問云, 「卽此用? 離此用?」 祖遂掛拂子於禪床角, 良久, 祖却問我, 「汝已後鼓兩片皮, 如何爲人?」 我取拂子竪起, 祖云, 「卽此用? 離此用?」 我將拂子掛禪床角, 祖振威一喝, 我當時直得三日耳聾.’ 黃檗不覺悚然吐舌.)”
  105. 104)마조의 할로 백장은 대기大機를 얻었고 황벽은 대용大用을 얻었다는 앙산의 평가. 각주 47) 참조.
  106. 105)격죽송擊竹頌 : 향엄이 풀을 베다가 대나무에 돌조각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우친 뒤 지은 게송. 『景德傳燈錄』 권11 「香嚴智閑傳」(T51, 284a14), “부딪치는 한 소리 듣고 알음알이 모두 잊었으니, 더 이상 닦고 고칠 필요 없다네. 활발히 움직이면서 옛 성인이 걸은 길 드러낼 뿐, 고요한 기틀에는 떨어지지 않노라.(一擊忘所知, 更不假修治. 動容揚古路, 不墮悄然機.)”
  107. 106)『景德傳燈錄』 권11 「仰山慧寂傳」(T51, 283b3),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실로 가난이라네. 지난해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었지만, 올해는 송곳조차도 없구나.(去年貧未是貧, 今年貧始是貧. 去年無卓錐之地, 今年錐也無.)”
  108. 107)사미沙彌 : 7세 이상 20세 미만으로서 출가하여 십계十戒를 받았지만 아직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못하여 정식으로 비구比丘가 되지 못한 남자. 여기서는 아직 불도에 입문하지도 못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109. 108)『金剛經』의 구절 자체는 여래선이고, 그와 정반대로 판단한 법안의 말은 조사선이다. 이 평가는 굉지 정각宏智正覺이 내린 것이며, 법안 자신이 조사선이라 하지는 않았다. 『宏智廣錄』 권3(T48, 28c26). 각주 15) 참조.
  110. 109)천의무봉天衣無縫 : 신선 또는 천인天人이 입는 옷은 바느질로 꿰맨 흔적이 전혀 없다는 말. 완결되어 결점이 없는 문장이나 사물 등을 가리킨다. “때마침 불어온 맑은 바람에 차츰 느껴지던 향기가 점차 짙어졌다. 곽한郭翰이 매우 이상타 여기고 허공을 올려다보니 어떤 사람이 둥실둥실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이 곽한 앞에 이르러 보았더니 소녀였다.…… 찬찬히 그 옷을 살펴보니 꿰맨 흔적이 없었다. 곽한이 그 까닭을 묻자 ‘천의는 본디 바늘과 실로 만들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靈怪錄』 「郭翰」. 時有淸風, 稍聞香氣漸濃. 翰甚怪之, 仰視空中, 見有人冉冉而下. 直至翰前, 乃一少女也. …… 徐視其衣幷無縫. 翰問之, 謂翰曰, ‘天衣本非針線爲也.’)”
  111. 110)갈등葛藤 : 칡넝쿨과 같이 복잡하게 뒤얽힌 말. 언어 자체의 본질이 복잡한 분별과 관념을 산출하기에 이 특징을 잡아서 ‘갈등’이라 한다. 여기서는 백파가 설정한 갖가지 문자의 틀을 가리킨다.
  112. 111)창이蒼耳나 질려蒺藜 : 모두 가시를 대표하는 풀의 일종. 창이는 도꼬마리라고도 하는데, 전체에 거친 털이 많이 나 있고 잎 가장자리에 거친 톱니가 있다. 열매는 수과瘦果로 갈고리 모양의 가시와 짧은 털이 있다. 질려는 매우 날카롭게 생겼고 씨앗에 가시가 있으며 모양이 마름쇠 같아서 이것이 무성하게 자란 곳을 다닐 때는 나막신을 신고 다녔다고 한다.
  113. 112)녹상鹿床과 오훼烏喙 : 오훼는 부자附子의 다른 이름. 초오草烏·오두烏頭라고도 한다. 녹상과 함께 독약의 일종. 모두 쓸데없이 조작하는 말을 비유한다.
  114. 113)신령한 구멍(靈竅) : 지혜로운 마음.
  115. 115)십이부 : 경전 전체. 서술 형식과 내용에 따라 12종류로 나눈 것. 계경契經·응송應頌·기별記別·풍송諷頌·자설自說·인연因緣·비유譬喩·본사本事·본생本生·방광方廣·희법希法·논의論議 등이다.
  116. 116)공안 1,700칙 : 공안 전체. 일반적으로 대표적인 전등록인 『景德傳燈錄』에 1,701명의 인물들이 보여 준 기연어구機緣語句를 수록하고 있는 것에서 유래한 말로 본다.
  117. 117)『臨濟錄』(T47, 504b3), 『景德傳燈錄』 권17 「龍牙傳」(T51, 337b28).
  118. 118)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 ‘선종의 종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말.
  119. 119)청익請益 : 법문을 익히 들었지만 더욱 향상된 가르침을 받고자 방장실로 들어오거나 그 밖의 개별적인 통로로 다시 질문을 청하는 것. 『禮記』 「曲禮」 권상에 “스승에게 수업을 청할 때는 일어나서 해야 하고, 더욱 설명해 주기를 청할 때도 일어나서 한다.(請業則起, 請益則起.)”라는 구절에서 유래한다.
  120. 120)행각行脚 : 일정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선지식과 도를 찾아 돌아다니며 수행한다는 말. 『祖庭事苑』 권8(X64, 432c19), “행각:행각이란 살던 곳에서 멀리 떠나 세상을 돌아다니며 인정도 벗어나고 속박도 내던지고서 스승과 벗을 찾아다니며 법을 구하여 깨닫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배움에 특별히 정해진 스승을 두지 않고 두루 찾아 돌아다니는 것을 최선으로 여긴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남쪽으로 선지식을 찾아다녔던 것이나 상제보살常啼菩薩이 동쪽으로 법을 배우러 다녔던 것이 모두 옛 성인들의 구법 활동이다. 영가 현각永嘉玄覺이 강과 바다를 건너고(游) 산천을 돌아다니며(涉) 스승을 찾아 도를 묻고 참선했던 일이 어찌 그런 이유가 아니었겠는가!(行脚:行脚者, 謂遠離鄕曲, 脚行天下, 脫情捐累, 尋訪師友, 求法證悟也. 所以學無常師, 遍歷爲尙. 善財南求, 常啼東請, 蓋先聖之求法也. 永嘉, 所謂游江海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豈不然邪!)”
  121. 121)남전의 이 말에 대하여 『禪門拈頌說話』 228則(H5, 226c)에서 오조 사계五祖師戒는 “이 또한 가난한 사람이 오래 묵은 빚 때문에 괴로워하는 꼴이다.(五祖戒云, ‘也是貧兒思舊債.’)”라고 평가했다. 사미는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고 훌쩍 떠나 버렸지만, 남전은 여전히 그에 대한 일말의 생각이 남아 있다는 평가이다.
  122. 122)『景德傳燈錄』 권8 「無業傳」(T51, 257a12).
  123. 123)투망금린透網金鱗 : 모든 격식과 법도에서 자유로운 납자를 비유한다. 『禪門拈頌說話』 790則(H5, 589a), “삼성이 설봉에게 물었다. ‘그물을 뚫고 달아난 황금빛 잉어는 무엇을 먹이로 삼습니까?’ ‘그대가 그물을 뚫고 나오는 그 순간 바로 말해 주겠다.’ ‘천오백 학인을 이끄는 선지식께서 이야기의 핵심도 알아듣지 못하시는군요.’ ‘노승은 주지 소임이 번거롭다.’(雪峯, 因三聖問, ‘透網金鱗, 未審以何爲食?’ 師云, ‘待汝出網來, 卽向汝道.’ 聖云, ‘一千五百人善知識, 話頭也不識.’ 師云, ‘老僧住持事煩.’)” 『碧巖錄』 49則 「頌」(T48, 185a13), “견고한 그물을 뚫고 나간 황금 잉어로다!천 명의 병사를 얻기는 쉽지만 뛰어난 장수 한 명을 구하기는 어렵다. 그 장수는 어떤 인물일까? 천 명의 성인이라도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透網金鱗!千兵易得, 一將難求. 何似生? 千聖不奈何.)”
  124. 124)독초물외자獨超物外者 : ‘독獨’이란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자유롭다는 뜻을 나타내며, 만물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훌쩍 벗어난 자유로운 경계를 말한다. 이 말은 본래 남전이 마조로부터 받았던 칭송에서 유래한다. 한때 마조는 남전의 경계가 지장이나 백장 등 다른 두 제자보다 높다고 평가한 적이 있다. 『馬祖語錄』(X69, 3c2), “서당 지장西堂智藏과 백장 회해百丈懷海와 남전 보원南泉普願이 마조를 시봉하며 달맞이를 할 때 마조가 물었다. ‘바로 이럴 때는 무엇을 해야 할까?’ 서당이 ‘공양하기 좋을 때입니다’라고 하였고, 백장은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남전은 옷소매를 털고서 자리를 떠났다. 마조가 말했다. ‘경전은 지장에게 들어가고 선禪은 회해에게로 돌아가지만, 오직 보원만이 만물 밖으로 훌쩍 벗어났구나.’(西堂·百丈·南泉, 侍祖翫月次, 祖曰, ‘正恁麽時如何?’ 西堂云, ‘正好供養.’ 百丈云, ‘正好修行.’ 南泉拂袖便去. 祖云, ‘經入藏, 禪歸海, 唯有普願, 獨超物外.’)”
  125. 125)이상의 내용은 전거 미상.
  126. 126)외도가 세존께 물었다. “말이 있는 것도 묻지 않고, 말이 없는 것에 대해서도 묻지 않겠습니다.” 세존께서 아무 말 없이 계시자 외도가 “세존께서 대자대비하신 가르침으로 저에게서 미혹의 구름을 걷어 주시고 저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셨습니다.”라고 찬탄하였다. 외도가 떠난 다음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외도는 무엇을 증득하였기에 깨달았다고 말한 것입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였다. “세상의 뛰어난 말은 채찍 그림자만 보고도 달리는 것과 같다.” 『景德傳燈錄』 권27 「諸方雜擧徵拈代別語」(T51, 434c6) 또는 『禪門拈頌說話』 16則 참조.
  127. 127)위의 책 및 『圜悟語錄』 권17(T47, 793a3).
  128. 128)각주 103) 참조.
  129. 129)『雲峰文悅語錄』 古尊宿語錄41(X68, 269a2).
  130. 130)『頌古聯珠通集』 권11(X65, 538b13), 『拈八方珠玉集』 권중(X67, 657a2).
  131. 131)모든 출구를 틀어막는 배촉관背觸關의 경계를 설정하여 도반들을 시험하고 있다.
  132. 132)왕노사王老師 : 남전 보원南泉普願(748~834)의 별명.
  133. 133)대원지大圓智는 이 구절에 대하여 “맛이 없는 이야기로 남들의 입을 틀어막았다.(無味之談塞人口.)”라고 평가했다. 『拈八方珠玉集』 참조. 노조의 그 말에 특별한 의미가 들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134. 134)공안이 생략되어 있다. 『拈八方珠玉集』(X67, 657a6)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귀종이 ‘퍼뜨리지 못하는 구절도 있는가?’라고 반문하자 노조가 ‘있다’고 말했다. 귀종이 ‘어떤 것이 퍼뜨리지 못하는 구절인가?’라고 물음에 노조가 따귀를 때릴 자세를 취했다.(宗曰, ‘還有不播者麽?’ 祖曰, ‘有.’ 宗曰, ‘作麽生是不播者?’ 祖作掌勢.)”
  135. 135)『從容錄』 22則(T8, 241b16), 『聯燈會要』 권17(X79, 145c9), 『洞山語錄』(T47, 514c9).
  136. 136)천동 정각天童正覺은 다음과 같은 해설을 붙였다. 『從容錄』 22則 「評唱」(T48, 241b25), “이러한 질문을 가리켜 여러 선사들은 문에 걸쳐 선 기틀이라고 하는데, 처음부터 정말로 문턱에 걸쳐 서서 묻는 것은 아니다. 옛날에 어떤 외도가 손에 살아 있는 참새를 움켜쥐고 부처님께 물었다. ‘손 안의 참새가 살겠습니까, 죽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발을 문턱에 걸치시고 되물으셨다. ‘그대가 대답해 보라. 내가 나가려고 하는가, 들어오려고 하는가?’(此問, 諸方謂之跨門之機, 未必當初眞跨門問來. 昔有外道, 手中藏活雀兒, 問世尊曰, ‘手中雀兒, 爲活爲死?’ 世尊以足跨門云, ‘汝道. 吾欲出欲入?’)”
  137. 137)『大慧語錄』 권24(T47, 914a15).
  138. 138)흥화 존장興化存獎과 그 스승인 삼성 혜연三聖慧然이 서로 상반되게 제시한 공안으로 오조 법연五祖法演·원오 극근圜悟克勤·대혜 종고大慧宗杲로 이어지는 간화선에서 화두로 제기된다. 『五祖法演語錄』 권하(T47, 665b13), “법좌에 올라앉아, 흥화가 ‘나는 누군가를 만나면 속마음을 꺼내 보이지 않지만, 꺼내 보였다 하면 그들에게 무엇인가 전해 준다’고 말하자 삼성이 ‘나는 누군가를 만나면 속마음을 꺼내 보이지만, 꺼내 보여도 그들에게 아무것도 전해 주지 않는다’라고 한 문답을 제기하고 말했다. ‘이 두 분 스님 중에 한 스님은 문장文章을 넓고 아득하게 펼쳤고, 다른 한 스님은 무예武藝를 남김없이 보여 주었다. 만약 흥화의 관점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문文도 얻을 수 없고, 만약 삼성의 관점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무武도 얻을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분별해 낼 수 있겠는가? 만일 분별해 낸다면 그대의 온몸이 법도라고 인정해 주겠지만, 만약 분별해 내지 못한다면 그대 스스로 제도하라.’(上堂, 擧, 興化云, ‘我逢人則不出, 出則便爲人.’ 三聖道, ‘我逢人則出, 出則不爲人.’ 師云, ‘此二古德, 一人文章浩渺, 一人武藝全施. 若道興化是, 文亦不得;若道三聖是, 武亦不得. 還於此辨得出麽? 若辨得出, 許爾通身是命;若辨不出, 爾自相度.’)”
  139. 139)대혜는 다른 곳에서 삼성의 말에 대해서는 “칼을 쓰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격이다.”라고 평가했고, 흥화의 말에 대해서는 “사람을 살리는 데 굳이 칼을 쓰겠느냐?”라는 반문으로 평가했다. 『大慧語錄』 권1(T47, 813a14), “問, ‘三聖道, 我逢人卽出, 出則不爲人, 意旨如何?’ 師云, ‘殺人不用刀.’ 進云, ‘興化道, 我逢人卽不出, 出則便爲人, 又作麽生?’ 師云, ‘活人何必劍.’”
  1. 1)「綱」疑「網」{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