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 / 二禪來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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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이선래의변二禪來義辨1)
1. 조사선과 여래선으로 나뉘게 된 유래
목우자牧牛子2)는 “선문의 어구들은 다만 집착을 허물어 종지를 드러냄으로써 가장 빠른 길로 깨닫고자 힘쓸 뿐, 번잡한 말로 해설하거나 도리를 시설하여 아는 방법은 허용하지 않는다.”3)고 말했다. 옛사람도 “명수名數로 끌어들이면 미묘한 근본은 어긋나고, 말로 내뱉으면 진실한 종지는 숨어 버린다.”4)라고 하였으니, 언설에서 벗어나 홀로 깨달은 다음에야 진실한 종지를 전할 수 있고, 명수에서 벗어나 곧바로 받아들인 다음에야 미묘한 근본을 스스로 떠맡을 수 있는 것이다.5)
청련목靑蓮目6)으로 고상하게 깜박이는 눈빛과 자금색紫金色 얼굴7)로 짓는 (부처님의) 미소에 대하여 무슨 이름과 언설을 혀를 놀려 묘사할 수 있겠는가! 명수와 언설이 있다면 그것은 교敎의 자취가 있음을 나타낸다. (교의 자취가 있다면) 교의 틀을 벗어나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종지를 어찌 오늘날에 들을 수 있었겠는가!
이것이 인도로부터 중국에 이르기까지 33명의 조사들이 두 선禪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고 또한 그에 대하여 뜻을 풀어 주지도 않았던 까닭이다. 어찌 33명의 조사들만 그러하였겠는가! 남악 회양南岳懷讓과 청원 행사靑原行思 이하로 대단한 수단을 지녔던 종사들8) 역시 두 선의 우열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었다.
훗날 앙산仰山 선사가 향엄香嚴이 대나무에 돌조각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은 인연9)을 듣고 그를 점검하러 갔을 때 향엄이 게송을 지어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실로 가난이라네. 지난해에는 가난해도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건만, 올해는 송곳조차 없구나.”10)라고 하였다. 이에 앙산이 “여래선은 지한 사제가 이해했다고 인정하겠다. 그러나 조사선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향엄이 다시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박거려 그것을 보이노라.

010_0826_c_06L二禪來義

010_0826_c_07L
牧牛子曰禪門語句只貴破執現宗
010_0826_c_08L務要直截悟入不許繁辭註解施設
010_0826_c_09L義理而知之故昔人云名數入而妙本
010_0826_c_10L言說出而眞宗隱離言獨了然後
010_0826_c_11L眞宗可傳離名直荷然後妙本自任
010_0826_c_12L夫靑蓮目之高瞬紫金顏之微哂有何
010_0826_c_13L名言可容於舌頭哉如有名數言說便
010_0826_c_14L是敎跡也其所謂敎外別傳之旨豈有
010_0826_c_15L聞於今日哉此州三諸祖之所以不言
010_0826_c_16L二禪之名字而亦莫與之演義也豈州
010_0826_c_17L三諸祖爲然南岳淸源以下大手宗師
010_0826_c_18L未甞言二禪之優劣後來仰山禪師
010_0826_c_19L香嚴擊竹因緣往勘之嚴有偈曰
010_0826_c_20L年貧未是貧今年貧始是貧去年貧
010_0826_c_21L猶有卓錐之地今年貧錐也無仰山
010_0826_c_22L如來祖 [32] 許閒師弟會祖師禪未夢見
010_0826_c_23L嚴復有頌云我有一機瞬目視伊
010_0826_c_24L「綱」疑「網」{編}

010_0827_a_01L이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특별히 그를 사미沙彌라고 부르리라.”는 게송을 지었다. 앙산은 (이를 듣고 위산에게) “기쁩니다! 지한 사제가 조사선을 이해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두 가지 선이 이름과 뜻을 분명하게 나눈 유래이다.11)
후대에 대혜 선사는 “하나의 무대에 올려진 두 꼭두각시(肉傀儡)를 부리며, 얼굴을 마주보고 손발이 움직이도록 조정하고 있구나. 이야기하는 두 꼭두각시가 바로 (무대 뒤에서) 조정하는 그 사람인 줄 어찌 알겠는가!”12)라고 착어를 달았다. 대혜가 이렇게 한 말은 앙산의 뜻을 인정한 것인가? 인정하지 않은 것인가? 나라면 “때로는 아름다운 달빛을 즐기느라, 모르는 결에 창주13)를 지나치노라.”14)라고 대답하리라.
2. 이선과 삼구 배대에 대한 질의質議
일우一愚는 세존께서 적멸도량15)에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고 비로자나16)의 몸을 나타내신 뒤 41위의 법신보살17)과 과거세에 근기가 성숙한 천룡팔부에게 한순간에 둘러싸여 마치 구름이 달을 감싸는 듯했다는 바로 그 장면18)을 제2구에 짝지으면서 여래선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였다.
또한 세존께서 가섭에게 세 곳에서 마음을 전하시고19) 백장과 황벽이 각각 대기大機와 대용大用을 얻은 경계20)를 제1구에 짝지으면서는 무슨 이유로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직접 붙이지 않고 마침내 풍혈 연소風穴延沼가 법좌에 올라 ‘조사의 마음 도장은 무쇠소의 기봉을 닮았다’21)고 한 말을 인용하였는데, 이것으로써 은근히 조사선을 가리킨 것인가?
종지를 주고받는 방법이 말에 의지하거나(顯) 말 이외의 수단에 의지하거나(密)에 따라 두 선禪의 이름이 나뉘며, 전수하는 법의 본체가 두 가지인 것은 아니다.
가령 『능가경』에서 “무엇을 가리켜 여래선이라 하는가? 여래(佛)의 지위로 들어가 성스러운 지혜의 세 가지 즐거움22)을 스스로 증득하고, 모든 중생에게 불가사의한 일을 만들어 주는 것을 가리켜 여래선이라 한다.”23)라고 한 말과 같다.
그런데 일우가 경전을 인용하면서 ‘세존께서 적멸도량에서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시고’라고 한 바로 그때는 스스로 법을 증득한 시기가 아닌가? ‘법신보살과 근기가 성숙한 천룡팔부에게 한순간에 둘러싸이시어’라고 한 이 말은 스스로 증득한 법을 설하여 불가사의한 일을 만들어 주었다는 뜻이 아닌가? 이상이 일우가 부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곧바로 여래선을 제2구에 짝지은 이유이다.
부처님은 “나는 어느 날 밤에 성불하였고 어느 날 밤에 열반에 들겠지만, 이 중간에 한 글자도 말하지 않으리라.”24)라고 말씀하셨다.

010_0827_a_01L若人不會別喚沙彌仰山曰且喜
010_0827_a_02L師弟會祖師禪此二禪所以分曉名義
010_0827_a_03L之始也後大慧禪師着語云敎得一棚
010_0827_a_04L肉傀儡面面相看手脚動爭知語話是
010_0827_a_05L他人大慧恁麽 [33] 是肯仰山耶不肯
010_0827_a_06L仰山耶余曰有時因好月不覺過滄洲
010_0827_a_07L問曰一愚以世尊在寂滅場中初成
010_0827_a_08L正覺現盧舍那身與四十一位法身大
010_0827_a_09L及宿世根熟天龍八部一時圍繞
010_0827_a_10L如雲籠月配第二句而直名如來禪
010_0827_a_11L以世尊迦葉三處傳心及百丈黃蘗得
010_0827_a_12L機用處配第一句而何不直名祖師禪
010_0827_a_13L遂引風穴上堂祖師心印相似銕牛機
010_0827_a_14L之言以意暗指此禪耶答曰由其授受
010_0827_a_15L之顯密而有二禪之名非所傳之法體
010_0827_a_16L有二也如楞伽經云何名如來禪
010_0827_a_17L佛地位自證聖智三種樂爲諸衆生
010_0827_a_18L作不思議事是名如來禪今一愚所引
010_0827_a_19L世尊在寂滅場中初成正覺云者
010_0827_a_20L此非自證法時耶與法身大士根熟天
010_0827_a_21L一時圍繞云者此非說與自證法
010_0827_a_22L作不思議事耶此一愚所以依佛言
010_0827_a_23L直配如來禪於第二句也佛言我於某
010_0827_a_24L夜成佛某夜涅槃於此中間不說一

010_0827_b_01L이는 말하면서도 아무 말도 없는 것이니, 권權 그대로 실實을 밝히는 제2구의 일이 아닌가? 부처님은 스스로 증득하신 뒤 증득한 그대로 남들을 가르치셨거늘 만일 그것에 뜻도 없고 이치도 없다면 무엇을 증득하고 무엇을 가르치셨단 말인가? 이것은 여래선이 뜻과 이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이름을 드러내 놓고 말하는 까닭이다.
조사선이라면 그렇지 않다. (부처님께서 당신의) 자리를 반으로 나누어 앉도록 하시자 (가섭은) 묵묵히 아무 말 없이 그 뜻을 알아차렸고, (부처님께서) 꽃을 집어 들고 사방을 돌아보시자 (가섭은) 묵묵히 아무 말 없이 그 뜻을 알아차렸으며, (열반에 드셔서) 두 발을 관 밖으로 드러내 보이시자 (가섭은) 묵묵히 아무 말 없이 그 뜻을 알아차렸다.25) 더 나아가 백장은 마조가 내지른 할에 귀가 먹어 아무 말도 못했고, 황벽은 백장이 당한 그 할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고 혀를 내두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26)
이상은 모두 말로 전하는 교법에 따르지 않고서 묵묵히 전수받고도 (전하는 사람과 전수받는 사람의 뜻이) 빈틈없이 들어맞았던27) 예들이다. 하지만 이렇게 묵묵히 전하고 빈틈없이 들어맞는 방식엔들 어찌 의리義理가 없겠는가! 언어로 마음을 전하는 방법이 허용되지 않는데 또한 어떻게 의리라는 말로써 이름을 세우겠는가?
그러므로 조사선은 다만 빈틈없이 서로 들어맞히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세존께서도 이름을 붙인 적이 없었고, 조사도 이름을 붙인 적이 없었으며, 덕이 높은 종사들도 이름을 붙인 적이 없었다. 어떤 이름이건 어쩔 수 없이 붙이는 것이니 하물며 의리를 말하는 경우야 언급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이 교설 밖에서 별도의 방식으로 전하여 홀로 격외格外라는 칭호를 얻은 까닭이다.
일우는 이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는 종지를 임제의 제1구에 짝지었지만 또한 직접 (조사선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은 채 다만 풍혈의 말28)만 인용하여 은근히 가리켰을 뿐이다. 이 방법으로 종문의 법도를 잃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3구에서 풀어 놓은 말은 어떤 선禪에 해당하는가?
이 제3구 중에서는 세 가지 구절을 합하여 설한다. 대체로 제1구 중에 본래 삼현과 삼요를 모두 갖추고 있지만 애초에 그 구체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제2구 중에서는 단지 언어와 사유가 허용되지 않는 경계를 분석할 뿐이다.
제3구에 이르러서 모든 것을 다 말로 푼다. 제1구와 제2구의 도리에 대하여 비로소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며 가로로 집어 들었다 거꾸로 써먹었다 마음껏 부리며

010_0827_b_01L此說而無說非即權明實之第二句
010_0827_b_02L事耶佛旣自證如證敎人若其無義
010_0827_b_03L無理其亦何證何敎歟此如來禪之所
010_0827_b_04L以有義理而現說名字者也若祖師禪
010_0827_b_05L則不然分半座而令坐默無言而承當
010_0827_b_06L擧拈花而顧視默無言而承當露雙趺
010_0827_b_07L而示之默無言而承當乃至百丈因馬
010_0827_b_08L師之一喝而耳聾無語黃蘗因百丈之
010_0827_b_09L傳喝而吐舌無語此皆不因言敎而默
010_0827_b_10L授密契者也然此默傳密契亦豈無義
010_0827_b_11L理哉旣不容于語言而傳心又安得以
010_0827_b_12L義理而立名乎故知此禪但有密契而
010_0827_b_13L世尊也未曾安看名字祖師也未
010_0827_b_14L曾安着名字古德宗師也未曾安着名
010_0827_b_15L名且不可得而安著況其有說於義
010_0827_b_16L理哉此其所以別傳於敎外而獨得格
010_0827_b_17L外之稱焉者也今一愚以此別傳之宗
010_0827_b_18L配臨濟第一句亦不直書名字
010_0827_b_19L引風穴語而暗道之此正不失宗門之
010_0827_b_20L典則也然則第三句之所說當於何
010_0827_b_21L禪耶答曰此句中三句合說盖第一句
010_0827_b_22L本具三玄三要而初不言其狀相
010_0827_b_23L第二句中只分析 [34] 未容議擬處至第三
010_0827_b_24L句都說了上二句之義方堪東說西說

010_0827_c_01L삼요의 도장으로 허공과 물과 진흙에 찍어 공부하는 이들을 점검한다.원오圜悟가 “스스로 삼요의 도장을 가지고 허공에 찍고 물에 찍고 진흙에 찍어서 학인을 점검한다.”29)고 한 이 말은 사가師家의 시점에서 설한 것이다. 세 가지 수준(근기)의 사람들이 깨닫는 것도 마치 허공과 물과 진흙이 도장을 받아들여 찍히는 것과 같다.대혜大慧는 “상사가 도道를 들으면 도장을 허공에 찍는 것과 같고, 중사가 도를 들으면 도장을 물에 찍는 것과 같으며, 하사가 도를 들으면 도장을 진흙에 찍는 것과 같다.”30)라고 말했다. 이것은 학인의 시점에서 한 말로서 이들 모두 제3구와 연관된 일이다. 결코 착각하지 마라.
두 구절제1구와 제2구에 근거하여 그것들을 합하여 이 구절제3구에서 설명하는 것이므로 이름을 바꾸어 이 구절제3구을 삼구三句라 하니, 현과 요는 그 속에 모두 들어 있다청풍 법사의 말이다.31) 제1구와 제2구 두 구절이 이미 이 제3구에서 설명되었다면 그 두 구절을 짝지은 두 선禪여래선과 조사선 또한 제3구에서 설명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제3구에서 두 구절을 해설하였다는 평가는 어느 정도 옳지만 제3구를 어느 하나의 선에 짝짓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010_0827_c_01L橫拈倒用將三要印印空水泥而驗人
010_0827_c_02L圓悟曰自家漢將三要印印空印
水印泥而驗人者此師家邊說也
其三士之薦
010_0827_c_03L亦如空水泥之受搨大慧曰上士聞道
印印空中士聞道
010_0827_c_04L印印水下士聞道如印印泥此就賓家
道云者此皆第三句事也切莫錯會
由其二
010_0827_c_05L第一句
第二句
合說於此句第三
故轉名此句
010_0827_c_06L第三
謂三句玄要在其中矣風法師
言也
二句
010_0827_c_07L旣詮於此句則配二句之二禪如來
祖師

010_0827_c_08L不可謂不詮於此句矣然謂之詮焉則
010_0827_c_09L姑可將以配之則不可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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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저본에는 ‘辨’자가 없으나, 네 가지 주제에 대한 변설(四辨)이라는 제목에 의거하여 역주자가 더하여 넣었다. 제3장의 ‘살활변’도 마찬가지이다.
  2. 2)목우자牧牛子 : 보조 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의 호.
  3. 3)『圓頓成佛論』(H4, 728b)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러므로 선문에서는 다만 집착을 허물어 종지를 드러내는 일을 귀하게 여길 뿐, 번잡한 말과 도리를 시설하는 방법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是以禪門, 只貴破執現宗, 不貴繁辭義理施設故.)”
  4. 4)앞에도 나온 구절. 전거는 제1편 「백파의 삼종선론 비판」 각주 29)·30) 참조.
  5. 5)명수名數와 언설言說이라는 매개체를 거치지 않아야 종지나 근본에 들어맞는다는 취지.
  6. 6)청련목靑蓮目 : 부처님의 32상相 중 하나. 눈이 청련화靑蓮花처럼 감청색紺靑色을 띠는 것. 태어나는 생마다 일정한 덕을 쌓아서 성취하는 상이다. 『法乘義決定經』 권하(T17, 659b14), “언사가 능란하고 반듯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갖가지 세간에서 큰 자비를 행함으로써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이익을 주었다. 이 때문에 감청색 눈과 소와 같은 속눈썹을 지니시게 되었다.(言詞辯雅, 能悅衆意, 於諸世間, 行大慈悲, 憐愍饒益一切有情. 由是, 感得目紺靑色, 睫如牛王.)”
  7. 7)자금색紫金色 얼굴(紫金顔) : 32상 중 금색신상金色身相과 통한다. 『觀佛三昧海經』 권10(T15, 693c11)에 가섭불迦葉佛의 신장은 16장丈이고 몸 전체는 자금색 상호를 갖추었다고 한다.
  8. 8)육조 혜능 이후로는 공식적인 전법傳法 조사는 정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육조의 뛰어난 두 제자를 대표로 내세워 그 이후의 전승을 나타내고 있다.
  9. 9)제1편 「백파의 삼종선론 비판」 각주 105) 참조.
  10. 10)제1편 「백파의 삼종선론 비판」 각주 106) 참조.
  11. 11)이러한 평가와는 달리 『潙山語錄』(T47, 580c4)에 따르면, “현각玄覺은 ‘말해 보라! 여래선과 조사선은 나눌 수 있는가, 나누지 못하는가?’라고 물었고, 장경 혜릉長慶慧稜은 ‘한꺼번에 눌러앉아 버려라!’라고 말했다.(玄覺云, ‘且道! 如來禪與祖師禪, 是分不分?’ 長慶稜云, ‘一時坐却!’)”라는 견해를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은 여래선과 조사선이라는 구분 자체를 하나의 화두로 수용하여 활용한 것이다. 의미상 분명하게 구분하지 않고 미해결의 화두로 제기하는 방식을 나타낸다.
  12. 12)『大慧語錄』에는 보이지 않고 『潙山語錄』(T47, 580c7)과 『宗門拈古彙集』 권21(X66, 127a13) 등에 제시된다. 본문의 인용에는 약간 생략이 있다. 대혜는 위산이 마치 꼭두각시놀음을 하듯이 앙산과 향엄을 조정하며 희롱했고 그 두 사람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앙산이 조사선과 여래선이라는 틀로 향엄의 경계를 점검했던 방식에 대한 비판적 평석이다.
  13. 13)창주滄洲 : 은둔자의 거처를 칭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14. 14)야보 도천冶父道川의 말이다. 이에 대하여 기화己和는 「설의說誼」에서 이렇게 해설한다. 『金剛經五家解說誼』 권하(H7, 75a), “철선鐵船을 띄우고 바다에 들어가니, 낚싯대 던져 놓은 그곳에 달이 둥글게 밝았네. 본래부터 달빛에 싸늘하게 비치는 그림자를 좋아하여, 창주의 바다 지나친 것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네. 다시 알아야 하리라. 도중에야 도리어 청산의 풍경 기억하니, 종일토록 가고 또 가면서도 간다는 사실 모르노라.(駕起鐵船入海來, 釣竿揮處月正明. 性愛蟾光寒照影, 滄溟過來渾不覺. 更知道. 途中卻憶靑山事, 終日行行不知行.)” 『石璞質語錄』 권2(J36, 821c15), “학인이 물었다. ‘허공에 본체가 있지만 반드시 몸소 증명해야 한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때로는 아름다운 달빛을 즐기느라, 모르는 새 창주를 지나친다.’ ‘저는 어째서 허공의 진실을 증명하지 못합니까?’ 석박이 따귀를 때리고 말했다. ‘그대가 머물 경계가 아니니라.’(僧問, ‘虛空有體, 須親證, 意旨如何?’ 師云, ‘有時因好月, 不覺到滄洲.’ 僧云, ‘某甲因甚不證虛空?’ 師掌云, ‘無你棲泊處.’)”
  15. 15)적멸도량 : 적멸장寂滅場. 부처님이 처음으로 정각正覺을 성취한 마가다국의 보리수菩提樹 아래 참선하던 곳.
  16. 16)비로자나 : 비로사나毘盧舍那·비로자나毘盧遮那라고도 쓰고, 노사나盧舍那라고도 한다. 모든 존재를 두루 비추어 관조하는 부처님. 마치 태양과 같이 비추는 작용에 빗대어 광대무변한 지혜를 나타낸다. 보신報身 또는 법신法身이다. 비로자나는 법신, 노사나는 보신, 석가모니불은 응신應身으로 구분하기도 하고, 이 삼신은 분리 불가능한 일체라는 설도 있다. 지혜의 광명으로 만법을 두루 관조한다는 뜻에서 광명변조光明遍照, 허공과 같이 드넓은 세계에 거처하며 그 공덕과 지혜가 조금도 오염되지 않고 청정하다는 뜻에서 광박엄정廣博嚴淨, 시공간적으로 어떤 한계도 없이 일체법과 모든 중생으로부터 떨어져 있지 않다는 뜻에서 변일체처遍一切處 등으로 한역한다.
  17. 17)법신보살(法身大士) : 대사는 보살의 한역어 중 하나. 육신의 속박이 남아 있는 생신보살生身菩薩과는 달리 온전히 열반의 경지에 올라 자유자재로 그것을 누리는 보살을 말한다.
  18. 18)이상은 『天台四敎儀』(T46, 774c23)에서 돈교頓敎인 『華嚴經』의 ‘頓’의 뜻에 대한 묘사를 인용했다.
  19. 19)삼처전심三處傳心 : 제1편 「백파의 삼종선론 비판」 각주 3) 참조.
  20. 20)제1편 「백파의 삼종선론 비판」 각주 47) 참조.
  21. 21)『景德傳燈錄』 권13 「風穴延沼傳」(T51, 302b23), “풍혈이 법좌에 올라 대중에게 설법했다. ‘조사의 마음 도장(心印)은 무쇠소의 기봉을 닮았다. 찍고 떼면 도장 자국이 남아 있고, 찍은 채로 그대로 놔두면 도장이 망가진다. 가령 떼지도 못하고 그대로 두지도 못한다면 찍는 것이 옳을까, 찍지 않는 것이 옳을까? 말해 볼 사람 있는가?’ 그때 노피盧陂 장로가 나와서 물었다. ‘저에게 무쇠소의 기봉이 있습니다. 스님께서는 거기에 도장을 올려놓지 마시기 바랍니다.’(昇座, 示衆云, ‘祖師心印, 狀似鐵牛之機. 去卽印住, 住卽印破. 祗如不去不住, 印卽是, 不印卽是? 還有人道得麽?’ 時有盧陂長老出問, ‘學人有鐵牛之機, 請師不搭印.’)”
  22. 22)『注大乘入楞伽經』 권4(T39, 460b21)에 따르면, 선정락禪定樂·보리락菩提樂·열반락涅槃樂 등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한다.
  23. 23)『大乘入楞伽經』 권3(T16, 602a20).
  24. 24)위의 책, 권4(T16, 608b16).
  25. 25)이상은 조사선에서 전법의 근거로 삼는 삼처전심三處傳心의 내용이다. 제1편 「백파의 삼종선론 비판」 각주 3) 참조.
  26. 26)제1편 「백파의 삼종선론 비판」 각주 103)·104) 참조.
  27. 27)밀계密契 : ‘밀’은 빈틈이 없이 촘촘한 상태(親密)를 형용하고, ‘계’는 두 가지가 하나에서 나누어졌다가 합쳐지듯이(契合) 조금도 어긋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전수의 양쪽 당사자가 지니고 있는 속뜻이 어김없이 하나가 되는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도리이다.
  28. 28)각주 21) 참조.
  29. 29)전거 미상. 원오의 어록에도 보이지 않는다.
  30. 30)『大慧語錄』 권20 「示無相居士」(T47, 894b17).
  31. 31)『禪門綱要集』 「二賢話」(H6, 852a). 제1편 「백파의 삼종선론 비판」 각주 68) 해당 본문 참조.
  1. 1)「綱」疑「網」{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