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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0_b_02L동사열전 제5권(東師列傳 第五)두륜산인 구계 선집 편차頭輪山人 九階 選集 編次벽담선백전碧潭禪伯傳스님의 법명은 도문道文이고 호는 벽담碧潭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경산京山(서울) 영도사永道寺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주상전하主上殿下(고종)의 파계派系를 살펴보면 이러하다.숙종肅宗대왕에게 여섯 아들이 있었다. 첫째는 경종景宗대왕이고,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일찍 죽었다. 넷째 아들이 영조英祖대왕이고, 다섯째 아들은 일찍 죽었으며, 여섯째 아들은 연령군延齡君이다.연령군의 아들은 낙천군洛川君 온薀이고본종本宗은 선조宣祖 임금의 아홉째 아들 경창군慶昌君 유㻥이다., 낙천군의 아들은 은신군恩信君이며본종은 장헌세자莊獻世子 계파로 영조의 둘째 아들이다., 은신군의 아들은 남연군南延君 구球이다본종은 인평대군麟平大君 요㴭 계파로 인조仁祖의 셋째 아들이다..남연군에게 네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는 흥녕군興寧君 응창昌應이고, 둘째는 흥원군興完君 정응晸應이며, 셋째는 흥인군興仁君 최응最應이고, 넷째는 흥선군興宣君 하응昰應이다. 하응에게 세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는 재면載冕이고, 둘째가 현 주상인 재황載晃이니 어릴 때의 이름은 개동開東이었고 아이 때의 이름은 명복命福이었는데, 관례를 올릴 때에 형熒음은 형逈이다.으로 바꾸었다.고종은 함풍咸豊 2년 임자(철종 3, 1852) 7월 25일에 태어나서 동치同治 2년 계해(철종 14, 1863) 12월 17일에 왕위에 오르니, 그 당시의 나이는 12세였다. 이 무렵 고종은 한양 영도사 벽담 대선사 도문道文의 처소에서 주로 양육되고 있었다.소년은 언젠가 영도사에 가서 놀다가 절의 벽에 성명을 써 놓았는데, 뒷날 보위寶位에 오른 다음 그 절의 이름을 개운사開運寺로 고쳤다. 이는 주상의 어서御書인데다 벽담 스님을 존중하는 뜻에서 취한 조치이다.그 뒤에 덕산德山(충남 예산군)의 상왕산象王山에 있는 일명 ‘가야산 보덕사保德寺’를 ‘생왕산生王山 보덕사報德寺’라고 고쳤다.1) 새로 터를 잡아 새 절을 짓고 옛 절터에는 남연군의 묘를 면례緬禮(이장)한 뒤 벽담 대사로 하여금 남연군의 묘를 수호하게 하고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품계를 주었다.벽담 대사가 적멸을 보인 뒤에 스님의 제자들이 계속해서 그 묘를 수호하였다.벽담 스님의 제자는 한 명이 있는데 평택 망한사望漢寺를 -
010_1050_b_02L東師列傳第五
010_1050_b_03L[傳]
010_1050_b_04L頭輪山人九階選集編次
010_1050_b_05L碧潭禪伯傳
010_1050_b_06L師名道文。號碧潭。姓鄭氏。京山永道
010_1050_b_07L寺人。主上殿下派系。肅宗大王。有六
010_1050_b_08L男。一景宗大王。二男三男。早卒。四英
010_1050_b_09L宗大王。五男。早卒。六男。延齡君。子洛川
010_1050_b_10L君薀本宗宣祖第九
子慶昌君㻥。子恩信君本宗莊獻世子
派英宗二男。
010_1050_b_11L子南延君球本宗麟平大君㴭
派仁祖第三子。有四子。一興
010_1050_b_12L寧君昌應。二興完君晸應。三興仁君最
010_1050_b_13L應。四興宣君昰應。有三子。一載冕。二
010_1050_b_14L主上載晃。幼名開東。兒名命福。冠名
010_1050_b_15L㷗音
逈。咸豊二年壬子。七月二十1)六 [1] 日生。
010_1050_b_16L同治二年癸亥。十二月十七日。即位。時
010_1050_b_17L年十二。定養於永道寺碧潭大禪師道
010_1050_b_18L文處。有出遊永道寺。寺壁題姓名。登
010_1050_b_19L寶位。改其寺名。曰開運寺。2)謂 [2] 主上御
010_1050_b_20L書及碧潭尊師故也。其後。德山象王山。
010_1050_b_21L一名伽倻山保德寺。改名曰。生王山報
010_1050_b_22L德寺。移建新基舊寺址。緬禮南延君墓。
010_1050_b_23L使碧潭大師。贈階守護一品大僧大師。
010_1050_b_24L示寂。弟子繼守。弟子一人。平澤望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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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0_c_01L중창하고 남연군의 묘를 수호하기도 하였다. 스님의 어록 2권이 문인들에 의해 전해지고 있다.퇴은선백전退隱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여훈如訓이고 호는 퇴은退隱이며, 머물던 방의 현판은 향적정사香積精舍이다.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정양암正陽庵에 퇴은 스님이 은거하면서 일생을 마친 방이 있으니 바로 향적정사이다.그 뒤 스님이 세상을 떠난 후에도 제자들이 그 방을 지키고 있으면서 무너지면 보수하곤 하였다. 스님은 화문化門 스님·영암靈岩 스님 등과 더불어 금강산 내원통암內圓通庵 및 나한전羅漢殿을 중수하기도 하였다.스님은 한번 금강산에 들어간 뒤로 사방 산의 절을 두루 유람하면서 사찰을 중수하고 흩어진 유물들을 모아 정리 보존하였다. 또한 스님의 문장력은 사적을 기록하는 데 충분하였고 선禪은 미혹한 중생들을 교화하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물질은 하늘로부터 얻지 않아도 낡은 것을 고쳐 새롭게 지을 수 있었고 손수 일을 하지 않아도 성대한 모습으로 다시 지어지곤 하였다.스님은 손수 누에를 치지 않고도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직접 농사를 짓지 않아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멀리서 스님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아무것도 얻은 게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이는 아주 적었다.학문을 배우기 위하여 달밤에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날로 많아졌으며, 삼매三昧에 떨어져서 수행하는 사람들도 자리를 가득 메웠다. 대승의 교리(大空)를 참구하거나 소승의 교리(小空)를 공부하거나 모두들 오라 가라 부르곤 하였다. 스님은 또 상근기上根機이든 중근기中根機이든 모두를 막론하고 앉아서 맞이하고 일어나서 전송하였다. 스님에게 율전律典을 전해 받고 경학經學을 전해 받은 이는 먹물로는 이루 기록할 수 없으며, 법法을 받고 계戒를 전해 받은 제자 역시 손꼽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스님은 온갖 풀과 나무까지도 한 권속으로 여기셨으며, 모든 남자나 여자들까지 나의 부모처럼 생각하였다. 인간의 수명은 한계가 있고, 이 세계도 이룩되고 무너짐이 있거니 죽어서 수고우水牯牛2)가 된다 한들 무엇이 부끄러울 것이며, 또한 김대성金大城처럼 다시 환생할 것을 어찌 바랄 필요가 있겠는가?인곡강백전仁谷講伯傳스님의 법명은 영환永奐이고 호는 인곡仁谷이다.덕룡산 불호사佛護寺에서 출가하였고 혜월 제해慧月濟海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니, 인곡 스님은 연담蓮潭의 손자 법제자이다. 일찍이 두륜산 완호玩虎 스님과 달마산 낭암朗岩 스님을 찾아뵙고 학문을 익혔으며, -
010_1050_c_01L寺。重創守護。師。語錄二卷。在傳門人。
010_1050_c_02L
010_1050_c_03L退隱禪伯傳
010_1050_c_04L師名如訓。號退隱。室曰。香積精舍。金
010_1050_c_05L剛山表訓寺正陽庵。有師隱居終老之
010_1050_c_06L室。曰香積精舍。其後。塵世守補廢。師。
010_1050_c_07L與化門靈岩等。重修內圓通及羅漢殿。
010_1050_c_08L一入金剛。周遊四山寺。補闕拾遺。文
010_1050_c_09L足以記事。禪足以化迷。物不天來。而
010_1050_c_10L改舊營新。手不役作。而輪焉奐焉。不
010_1050_c_11L蚕之衣着身。不耕之食糊口。遠尋者衆。
010_1050_c_12L空去者小。推敲月下之門。日多。落昧修
010_1050_c_13L行之人。滿座。大空小空。喚來喚去。上
010_1050_c_14L根中根。坐迎起送。傳律傳經。無墨可
010_1050_c_15L點。受法受3)大。 [3] 無指可屈。盡草木。爲我
010_1050_c_16L眷屬。擧男女。爲我父母。壽有分限。世
010_1050_c_17L有成壞。何愧水牯牛。何望金大城。
010_1050_c_18L
010_1050_c_19L仁谷講伯傳
010_1050_c_20L師名永奐。號仁谷。出家於德龍山佛護
010_1050_c_21L寺。拈香於慧月濟海禪師。蓮潭之孫。
010_1050_c_22L甞叅於頭輪之玩虎。達摩之朗岩。設大
010_1050_c_23L「六」甲本正誤表作「五」。「謂」下甲本正誤
010_1050_c_24L表有「有」。「大」甲本正誤表作「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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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1_a_01L그 후에 대둔사大芚寺 청풍료淸風寮에서 강경 법회를 크게 열었는데, 참예하여 학문을 배운 사람들의 수효가 100여 명에 달했다.스님은 일봉암日封庵에 주석하면서 사방에서 밀려드는 학인들을 맞아 학문을 가르치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몸을 떨치고 일어나 강론을 중단하고 전국 명산과 옛 도읍지 네 곳을 두루 유람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이래로 낮에는 사천四天에 예배하고 밤에는 구성九聖에 예배하며, 도량을 돌고 어려운 일이나 고달픈 일들은 혼자 도맡아 하곤 하였다.그런 스님을 두고 세속에서는 이렇게까지 말했다.“도량 80리는 인곡당仁谷堂이요, 만경창파萬頃蒼波는 낭암당朗岩堂이로구나.”인곡 스님의 동문同門 형제로는 영파 덕수永坡德壽 선사가 있는데, 선강禪講과 교강敎講으로 명성이 자자하여 그 누구도 까마귀의 암수를 가릴 줄 모르듯이 우열을 분간하지 못했다.스님은 필력筆力도 경간勍幹하여 수많은 서책을 손수 베껴 썼다. 심지어는 옥편玉篇과 자휘字彙까지도 하나하나 베끼곤 하였다. 스님의 글씨는 용과 뱀이 비등飛騰하는 것처럼 힘차고 생동감이 있었으며, 마사麻絲가 가지런하듯이 정연하였다.인곡 스님과 영파 스님이 글씨까지 구비具備하여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었으니 이에 대해서도 가히 숭상할 만한 인물들이었다.스님의 제자 중에서는 성담 수언性潭修彦 스님이 특히 유명하다. 성담 스님은 교학을 배운 뒤에 놓아 버리고 선문禪門에 들어가 하루 한 번만 자고 한 끼니만 먹으면서 행리行李가 엄격하였으니, 푸른 물감이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고 한 말은 이 스님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그 밖의 제자로는 지봉 유홍智峰有洪과 인허 혜한印虛惠閒 등 수레에 실을 만큼, 말로 되어 헤아려야 할 만큼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스님의 문집 1권이 있다.영파 스님에게도 제자가 있었으니 경암 승정鏡庵勝正·백암 정헌白庵正軒·용담 한일龍潭漢日·백인 선길白印善吉이다. 용담 스님 아래에는 백월 태순白月台淳이 있었는데, 백월 스님은 문장과 글씨는 물론 지식까지 아울러 갖춘 스님이었다. 그는 광서光緖 갑오년(고종 31, 1894) 현재 일봉암日封庵에 머물고 있다.남호선백전南湖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영기永奇이고 호는 남호南湖이며, 삼각산 북한北漢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렸을 때부터 속세(火宅)를 싫어하더니, 성장하자 결국에는 영원히 공문空門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계율을 철저하게 지켰고 경전을 열심히 염송하였으며, 게다가 경전을 베끼는 사경과 경전을 큰소리로 읽는 독경으로 소일하였다.스님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섭수攝受하였으며, 겉은 비구의 몸을 나타냈으나 속마음은 보살의 행을 품고 있었다. 또 문방사우文房四友를 구비하여 법신法身 1천 부처님께 찾아가 예를 올리기 위하여 곧 함풍咸豊 임자년(철종 3, 1852) 겨울에 보개산寶盖山(철원에 있는 산)에 들어가서 -
010_1051_a_01L會於大芚淸風寮。叅學之數。百餘人。
010_1051_a_02L住日封庵。提接四來學者。一朝奮身。
010_1051_a_03L周遊四山。四都以來。日禮四天。夜禮
010_1051_a_04L九聖。周匝道場。難行苦會。諺言曰。道
010_1051_a_05L場八十里仁谷堂。萬頃滄波朗岩堂。同
010_1051_a_06L門兄弟。有永坡德壽禪師。禪講敎講。
010_1051_a_07L誰知烏之雌雄。師筆力勍幹。許多書册。
010_1051_a_08L手皆謄書。至於玉篇字彙。一一書寫。
010_1051_a_09L1)披 [4] 師筆畫勍彊。龍蛇飛2)謄。 [5] 麻絲叅差。
010_1051_a_10L此二師3)文 [6] 具備。難兄難弟。於此可尙。
010_1051_a_11L有弟子。性潭守彥。捨敎入禪。一宿一食。
010_1051_a_12L行李嚴冷。靑出於藍。非師而誰。其餘
010_1051_a_13L智峰有洪。印虛惠閒等。車載斗量。不
010_1051_a_14L可勝數者。有文集一卷。永坡。有弟子。
010_1051_a_15L鏡庵勝正。白庵正軒。龍潭漢日。白印善吉。
010_1051_a_16L龍潭下。有白月台淳。白月。有文筆知識。
010_1051_a_17L光緖甲午。在日封庵。
010_1051_a_18L
010_1051_a_19L南湖禪伯傳
010_1051_a_20L師名永奇。號南湖。三角山北漢人。幼
010_1051_a_21L厭火宅。長入空門。薙髮染衣。守律念
010_1051_a_22L經。書寫讀誦。慈悲攝受。外現比丘身。
010_1051_a_23L內含菩薩行。乃具文房四友。徃禮法身
010_1051_a_24L千佛。乃於咸豊壬子冬。入寶盖山。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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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1_b_01L『아미타경』을 사경하였다.자신의 몸을 찔러 피를 내어 먹물에 섞어서 맹세하는 마음으로 붓을 잡고 글자 한 자를 쓸 때마다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 세 번 예배하고 세 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곤 하였다.한 점 한 획에 담긴 극진한 마음은 법계法界 중생의 비원悲願에서 흘러나온 것 같았으며, 한 글귀·한 소절마다 마땅히 온 대지大地의 좋고 나쁜 것 위에서 발현한 것처럼 보였다.스님은 사경을 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옛날 조사님들의 규범을 따랐으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면서도 아픔을 잊었던 일 등은 예전 성념省念 스님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송宋나라 때 원정圓淨 법사가 있었는데 법명은 성념이고, 속성은 안顔씨이다. 17세에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는데 계행이 매우 청청하였다. 송나라 순화淳化(宋 太宗의 연호) 연간(990~994)에 남소경사南昭慶寺에 주석하면서 서호西湖 지역 불자들과 결사結社를 하여 화엄으로 종요宗要를 삼았던 스님이다.이때에 성념 스님은 스스로 제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피를 짜서 먹물에 섞어 경을 베껴 쓰면서 늘 한 글자를 쓸 때마다 세 번 절하고 세 바퀴 돌고 부처님의 명호를 세 번 칭념稱念하곤 했었다. 그렇게 하여 베껴 쓴 경전을 판목에 새겨 1천 권을 간행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그때부터 성념 스님이 머물던 연사蓮社의 이름을 바꾸어 정행사淨行社로 불렀으며, 사경 법회에 참예했던 사람들을 정행淨行의 제자라고 불렀다. 천희天禧(宋 眞宗의 연호) 3년(1019) 정월에 단정하게 앉아서 염불을 하며 입적했는데, 사람들은 성념 스님을 연종蓮宗의 7대 조사로 삼았다. 성념 스님의 꽃다운 발자취는 불법을 위해 육신을 잊은 거룩한 표본이라 하겠다.남호 스님은 계축년(1853) 초여름 삼각산 내원암內院庵으로 들어가 피를 섞어서 쓴 경전을 판목板木에 새겨 간행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배포하는 동시에 『무량수경』도 함께 간행하였다.그 당시 사경대회寫經大會에는 전국의 용상대덕龍象大德들이 많이 참여하였다. 인허 성유印虛性惟·혼성 취선渾性就善·금계 장환錦溪壯渙·대연 수찰大演守察·혜봉 최성慧峰最性·제월 보성霽月寶成·예봉 학윤禮峰學潤·동화 축전東化竺典·중봉 혜호中峰慧皓·성봉 성호聖峰性顥 등 모든 선사들이 모두 증명법사의 자리에 모였다.함풍咸豊 3년 계축(철종 4, 1853) 여름에 삼각산 내원암의 사경불사재寫經佛事齋를 거행하는 데 들어간 비용은 모두 남호 스님이 화주가 되어 시행한 자비의 원력이었다.문암강백전聞庵講伯傳스님의 법명은 영유永愈이고 호는 문암聞庵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린 시절에 출가하여 표운表雲 장로의 문하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현해懸解 조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다. -
010_1051_b_01L寫阿彌陀經。刺血和墨。誓心秉筆。凡
010_1051_b_02L寫一字。三4)統 [7] 匝。三禮拜。三穪佛名。
010_1051_b_03L一點一劃。盡心等。法界悲願中流出。
010_1051_b_04L一句一讀。宜乎盡大地善惡上發現。
010_1051_b_05L一遵古祖師垂範。指血忘痛。實踵省念
010_1051_b_06L者。宋圓淨法師。名省念。5)錢 [8] 顏氏。十七
010_1051_b_07L出家。受6)其 [9] 戒。行嚴謹。淳化中。住錫
010_1051_b_08L昭慶。結社西湖。以華嚴爲宗要。自刺
010_1051_b_09L指血。和墨書之。每書一字。三拜三圍
010_1051_b_10L繞。三穪佛名。刊板印施千卷。易蓮社。
010_1051_b_11L爲淨行社。預會者。皆穪淨行弟子。天
010_1051_b_12L禧三年正月。端坐念佛7)之 [10] 寂。爲8)蓮 [11] 七
010_1051_b_13L祖云。省念師芳躅。爲法忘軀。越癸丑
010_1051_b_14L夏初。三角山內院庵。刊板印布。同時
010_1051_b_15L同刊無量壽經。時會龍象大德。印虛性
010_1051_b_16L惟。渾性就善。錦溪壯渙。大演守察。慧峰最
010_1051_b_17L性。霽月寶成。禮峰學潤。東化竺典。中峰慧
010_1051_b_18L皓。聖峰性顥等。諸禪師。皆會證席。咸豊
010_1051_b_19L三年癸丑夏。三角山內院庵。佛事齋場。
010_1051_b_20L南湖化主慈願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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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1_b_22L聞庵講伯傳
010_1051_b_23L師名永愈。號聞庵。姓李氏。靈岩人。幼
010_1051_b_24L年出家。剃染於表雲長老。拈香於縣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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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1_c_01L그 후에 화담華潭·수룡袖龍·대운大雲 스님을 두루 찾아다니며 참학하였다. 여러 지방을 유람하면서 선지식을 참방參訪하여 공부의 수준을 인정받아 스승의 방에 들어갈 수 있었다.스님은 강당에 앉아 강론을 할 때에는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으며, 대둔사의 상원암上院庵과 북암北庵, 수인사修仁寺의 석문암石門庵, 보림사寶林寺의 동암東庵 등에 인연을 따라 거주했다.말년에는 스님도 비로소 교학은 거두고 선문에 들어가 보림사의 내원암과 송광사의 삼일암三日庵, 태안사의 미타암彌陀庵, 지리산의 칠불암七佛庵과 불일암佛日庵, 대둔사의 만일암挽日庵과 남미륵암南彌勒庵 등의 선방에서 성품대로 소요逍遙하였다.스님은 심적암深寂庵에서 머물러 계시다가 미미한 질병 증세를 보이더니 열반에 드셨다.스님에게 법을 받은 제자로는 기봉 장선奇峰壯善이 있고, 손자 제자로는 남하 성현南河性衒과 환명 경운煥溟敬雲이 있으며, 수은受恩 제자로는 주지의 직을 맡고 있는 회일會日이 있다.동문수학을 한 법형法兄 중에는 화성 도우花城道祐가 있으며, 화성 스님의 제자로는 은곡 봉신銀谷奉信과 학봉 선일鶴峰仙一 등이 있다. 스님에게서 계를 받은 제자로는 보헌普憲 등 21명이 있다.스님은 성품이 본래 유순하였다. 특히 살생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하지 않으며 사음邪婬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계율을 철저하게 지켰으니, 이 네 가지 바라이波羅夷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범한 것이 있는지를 저마다 숨김없이 드러낼 때에 한 가지 죄도 드러나지 않는 이는 백 명에 한 명 정도 있을 정도였다. 선실禪室의 문안에 들어간 이후에도 다른 대중들과 서로 수순隨順(화합)한 예는 근래에는 없었던 일이다.스님이 시작부터 마칠 때까지 손수 쓴 책이나 글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선방에 들어간 이후에 모두 다 흩어지고 잃어버려 남아 있는 게 없으니, 그의 문하생들의 불초不肖함을 짐작할 수 있겠다.영암선백전靈岩禪伯傳 -
010_1051_c_01L祖師。叅學於華潭袖龍大雲。遊方入
010_1051_c_02L室。坐講堂。誨之不倦。大芚之上院北庵。
010_1051_c_03L修仁之石門。寶林之東庵。隨絠居住。
010_1051_c_04L末乃捨敎入禪。寶林之內院。松廣之三
010_1051_c_05L日。太安之彌弛。 [12] 智異之七佛佛日。大
010_1051_c_06L芚之挽日南彌。任性逍遙。住深寂。示
010_1051_c_07L微疾而寂。受法弟子。有奇峰壯善。孫
010_1051_c_08L弟子。南河性衒。煥溟敬雲。受恩業者。有
010_1051_c_09L行住持會日。同門兄。有花城道祐。花城
010_1051_c_10L弟子。有銀谷奉信。鶴峰仙一等。受戒者。
010_1051_c_11L有普憲竺二十一人。性本柔順。不殺
010_1051_c_12L9)庄。 [13] 不偸盜。不邪淫。不妄語。此波羅
010_1051_c_13L夷中。發露之時。無一露罪者。百中之
010_1051_c_14L一也。入禪室門。隨順大衆。近古所無
010_1051_c_15L者也。自初至終。手書之文。數不可筭
010_1051_c_16L而入禪以後。散失無遺。門下人之不肖
010_1051_c_17L可想。
010_1051_c_18L
010_1051_c_19L靈岩禪伯傳
010_1051_c_20L「披」甲本正誤表作「坡」。「謄」甲本正誤表
010_1051_c_21L作「騰」。「文」下甲本正誤表有「筆」。「統」甲
010_1051_c_22L本正誤表作「繞」。「錢」甲本正誤表作「姓」。
010_1051_c_23L「其」甲本正誤表作「具」。「之」甲本正誤表
010_1051_c_24L作「入」。「蓮」下甲本正誤表有「宗」。「庄」甲
010_1051_c_25L本正誤表作「生」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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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2_a_01L스님의 법명은 취학就學이고 호는 영암靈岩이며, 본래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스님은 무정한 세월이 길 위에서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것을 애달프게 생각한 나머지 심지心志에 서원을 세워 산중에 몸을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런 과정은 다른 스님들과 별반 다르지 않으나 스승을 찾아가 은사를 정하고 법을 받은 이후로는 완연히 생불生佛과 같았다.스님은 금강산을 토굴로 삼고 ‘법기法起 보살이 나를 불러 제자로 삼았다’고 하였다. 1만 2천 봉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53부처님이 눈앞에 줄지어 서 있는 가운데, 금강수金剛水·감로수甘露水·장군수將軍水를 마시며 마군의 구름을 씻어 내고 상서로운 기운을 길러 내는 등 청정한 삶을 영위하였다.스님은 주로 금강산에 있었던 불지암佛地庵·정양암正陽庵·영원암靈源庵에 앉아서 뜨거운 번뇌를 녹여 없애고 청량함을 얻는 일에 몰두하였다.스님은 또 수불암須佛庵과 내원통암內圓通庵 등을 중수하였는데, 수불암 중수하는 일은 강명철姜明哲이 화주를 맡았고 내원통암은 퇴은退隱 스님과 힘을 함께하여 일을 잘 성사시켰다.스님은 팔도의 강과 산을 총괄해서 『토굴가土窟歌』 1권을 지었는데, 그것을 베끼느라 시전市廛의 종이가 품절되었고, 산야山野에는 그 노래를 불러 귀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퇴은 스님이 세상을 떠나자 영암 선백도 석실石室에서 세상을 떠나니, 도를 같이 닦던 도반들은 비로소 두 분이 막상막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로봉毘盧峰 중향성衆香城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으니 누구를 칭찬하고 누구를 헐뜯을 것인가?혼성선백전混性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취선就善이고 호는 혼성混性이며, 묘향산 보현사普賢寺 극락전極樂殿 사람이다.스님은 타고난 천품天稟이 호연浩然하여 자질구레한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학문은 구류九流를 골고루 섭렵하여 모든 학문을 한 몸에 지니고 있었다. 삼장三藏과 오교五敎를 두루 열람하였다.다섯 도의 법회도량을 끊임없이 오가면서 교학을 가르치고 사방 산문의 선원禪苑을 두루 다니면서 명패를 걸어 놓고 결제안거를 하였다. 책궤를 짊어지고 배우기 위해 대사를 찾아온 학인들이 바람으로 머리를 빗고 빗물로 목욕을 하면서까지 모여들었다. 보배를 가슴에 품고 그 가치를 점검하려고 찾아오는 이들은 스님을 찾아와서 나무를 하고 물을 긷는 일까지 자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연演 보살비연秘演 스님과 천天 수좌관천觀天 스님는 먼 지방에서 스님을 찾아와서 훌륭한 가치를 인정받은 스님이다. 또 이李 처사이름은 동환東煥이다.와 안 한량安閒良이름은 기선箕仙은 스님 앞에서 재齋를 섭수하여 묘당廟堂에 오른 대표적인 사람이다.하은荷隱구월산, 용선龍船천불산, 낙파洛波금강산, -
010_1052_a_01L師名就學。號靈岩。本是靈岩人。無情
010_1052_a_02L歲月。過去于路上。有願心志。依托於
010_1052_a_03L山中。削髮被緇。元同他人。尋師受恩。
010_1052_a_04L完如生佛。金剛爲我窟宅。法起召我弟
010_1052_a_05L子。萬二千峯。飽藏心中。五十三佛。森
010_1052_a_06L立眼前。喫金剛水甘露水將軍水。洒
010_1052_a_07L1)洗 [14] 濯魔。雲生瑞氣。坐佛地庵正陽庵
010_1052_a_08L靈源庵。消除熱惱。獲淸凉。重修須佛
010_1052_a_09L庵。化主姜明哲。成內圓通。退隱同力。
010_1052_a_10L括盡八垓江巒。作一卷土窟歌。市廛紙
010_1052_a_11L絕。山野耳聒。退隱化門。石室幻空。同
010_1052_a_12L道方知。頡之頏之。誰毁誰譽於毘盧
010_1052_a_13L峰頭衆香城2)理。 [15]
010_1052_a_14L
010_1052_a_15L混性禪伯傳
010_1052_a_16L師名就善。號混性。妙香山普賢寺極樂
010_1052_a_17L殿人。天禀浩然。不拘小節。學覽九流
010_1052_a_18L3)九 [16] 帶。經閱三藏五敎。五道法場。徃復
010_1052_a_19L無際。四山禪苑。掛牌結臘。負笈從師
010_1052_a_20L者。櫛風沐雨而至。懷寶求價者。負薪
010_1052_a_21L汲水而歸。演菩薩秘
演 。天首座觀
天。遠訪而
010_1052_a_22L求善賈與價
同。李處士東
煥。安閒良箕
仙。攝4)齊 [17]
010_1052_a_23L而昇廟堂。荷隱九
月 龍船。千
佛。洛波金
剛。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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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2_b_01L허주虛舟조계산, 환종幻宗고령古寧 등 당대의 선지식들과 막역한 친구 관계였다.청북淸北과 청남淸南청淸은 청천강淸川江을 말한다., 관북關北과 관남關南 지역의 사람들이 한형주韓荊州를 한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것(識荊之願)처럼 스님을 간절히 만나보기를 소원했다.남호南湖 스님법명은 영기永奇이다.이 사경한 경전을 간행하는 법회 자리에 증명법사로 단상에 올랐으며, 쌍월雙月 스님법명은 성활性濶이다.의 법회를 여는 자리에 초청을 받아 멀리서 그 도량에 가서 참예하기도 하였다.삼재三才인 하늘·땅·사람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존귀하며, 사시四時봄·여름·가을·겨울의 순서에서 소임을 다 이룬 것은 물러가는 법이다.『범수전范睢傳』에서 나온 말이다. 귀한 것을 버리고 떠나가는 것은 하늘 법도의 떳떳한 이치이니 반열반般涅槃에 드는 것도 똑같은 이치이다. 부처님을 본받아 반열반에 드셨으니 스님은 틀림없이 안락한 가문에 태어나셨을 것이다.원담선사전圓潭禪師傳스님의 법명은 내원乃圓이고 호는 원담圓潭이다.회운 진환會雲振桓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고 서월 거감瑞月巨鑑의 손자 법제자이며, 규암 낭성圭岩朗誠의 증손 법제자이고 용담 조관龍潭慥冠의 4대 법손이며, 상월霜月의 5대 법손이다. 스님의 제자로는 풍곡 덕인楓谷德仁이 있고 손자 제자로는 함명 태선涵溟太先이 있다.스님은 무등산 원효암元曉庵에 오랫동안 머물렀는데, 그림을 잘 그리기로 이름이 나서 가르침을 받으러 스님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뜰 안을 가득 메웠고 집 안에 가득 찰 정도였다. 이들 중에는 혹 불모佛母(불화를 그리는 사람)로 이름이 난 사람도 있었고, 혹은 병풍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도 있었으며, 혹은 건물·단청·소상塑像·도금塗金 등에 조예가 깊은 사람도 있었다.원담 스님에게 그림을 그려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냇물에 연이어졌으며, 스님에게 학문을 익히려는 사람들은 볏짚처럼, 삼대처럼 열을 이루었다.이는 마치 도덕道德에 있어서는 정자程子3)와 주자朱子4) 같았고, 문장에 있어서는 반고班固5)와 사마천司馬遷6) 같았으며, 병가兵家에 있어서는 손자孫子7)와 오기吳起8) 같았고, 화가畫家에 있어서는 오도자吳道子9)와 미불米芾10) 같았다.풍계風溪 스님은 원담의 스승이고 해운海雲은 그의 벗이며, 풍곡楓谷은 그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금암金庵·용완龍玩·운파雲玻·화담華潭은 모두 서남쪽에 사는 그의 절친한 벗들이다.원담 스님은 「화보畫譜」에 꽃다운 이름이 올라 있으며, 성품이 사람 길러 내기를 좋아하여 많은 법을 받은 자손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있으며, 오이처럼 덩굴이 한없이 뻗어나가 오이가 주렁주렁 열리듯이 배출하였다. 존귀한 불상을 단장하여 장엄한 공덕으로 원담 스님은 대대로 쾌락을 느끼게 될 것이다. -
010_1052_b_01L舟曹
溪。幻空古
寧。以爲莫逆之交。淸北淸南
010_1052_b_02L淸川
江。關北關南。切識荊之願。南湖永
奇之
010_1052_b_03L刊經。貴在證壇。雙月性
濶之設會。遙臨
010_1052_b_04L道場。三5)村 [18] 天地人之中。惟人㝡貴也。
010_1052_b_05L四時春夏
秋冬之序。成功者去矣范睢
傳出。棄貴而
010_1052_b_06L去。天道之常也。般涅悅槃同也。效佛
010_1052_b_07L而般涅槃。必*庄 [19] 安樂家。
010_1052_b_08L
010_1052_b_09L圓潭禪師傳
010_1052_b_10L師名乃圓。號圓潭。會雲振桓之子。瑞
010_1052_b_11L月巨鑑之孫。圭岩朗誠之曾孫。龍潭慥
010_1052_b_12L冠之四世。霜月之五世。弟子有楓谷德
010_1052_b_13L仁。孫有涵溟太先。師。久住無等山元曉
010_1052_b_14L庵。以6)盡 [20] 鳴世。來受業者。滿庭盈室。
010_1052_b_15L或鳴於佛母。或馳騁屏障。或屋或丹雘。
010_1052_b_16L塑像塗金。請之者。影綴岩溪。學之者。
010_1052_b_17L稻麻成列。若道德之程朱。文章之班馬。
010_1052_b_18L兵家之孫吳。畫家之吳米也。楓溪我師。
010_1052_b_19L海雲我友。楓谷我嗣。金庵龍琓。雲玻華
010_1052_b_20L潭。皆我之西南得朋。畫譜聯芳。性好
010_1052_b_21L種樹。子孫綿綿。瓜瓞靚莊。尊像功德。
010_1052_b_22L世世快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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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2_c_01L문담강백전文潭講伯傳스님의 법명은 원장元長이고 호는 문담文潭이며, 한수漢水 이북에서 태어나 자랐다.영허映虛(善影) 스님에게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어릴 적에는 공자와 노자의 학문을 배웠고 성장해서는 불교의 산문으로 들어가 불경과 여타 학문을 탐구한 지 4, 5년이 지나 스승으로부터 자격을 인정받아 깃발을 세우고 강론을 펼친 것이 7, 8년이다. 그 무렵 삼각산三角山에 머물고 있었는데 법문을 듣기 위해 스님을 모셔 가려고 하는 신도들이 많았다.스님은 황주黃州(황해도) 서원사西院寺에 머물며 2년 동안 표충사총섭表忠祠摠攝을 역임하였다. 만년 시절에는 북쪽으로 설봉산 석왕사釋王寺에 들어가 은법사恩法師의 일상생활을 시봉하면서 도량을 소제하고 지내다가 법사인 영허 스님보다 먼저 입적하였다. 이치로 보아서는 거스른 것이지만 천명의 길고 짧음을 어찌하겠는가?문담 스님의 제자들은 마음을 합하여 의논한 나머지 할아버지 스승인 영허 스님과 은사 스님의 비석 두 개를 동시에 세우기로 하였으니, 할아버지인 영허 스님의 비는 생전에 세운 것이고 은사의 비석은 돌아가신 뒤에 세운 것이다. 석왕사 동쪽 산기슭에 두 개의 비석을 나란히 세워 아름다운 인연을 증명해 주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성대한 일인가?은사는 영허 스님의 법을 이어받은 법제자이고 인봉 덕준仁峯德俊의 손자 제자이다. 뇌묵 등린雷默等麟 스님의 증손 제자이고 완월 궤홍玩月軌泓 스님의 4대 법손이며, 함월 해원涵月海源 스님의 5대 법손이고 환성 지안喚醒志安 스님의 6대 법손이다.스님의 제자로는 용연 혜흔龍淵慧昕이 있고 손자 제자로는 경연 철구鏡淵哲球가 있다. 문담 스님의 동문 형제 중 용암 전우庸庵典愚가 있는데 항상 서울 근교의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 살았다. 흥국사는 일명 덕사德寺라고 부르기도 했다. 용암 스님의 제자로는 성곡 유척聖谷惟倜과 취은 기순翠隱奇淳이 있으며, 두 명의 손자 제자가 있으니 영실永實과 의직義直이다.수은受恩 제자로는 정운 채규定雲彩奎가 있으며, 스님의 영정 두 본이 전해진다. 은사 영허 스님은 경진년(고종 17, 1880)에 입적하였다. -
010_1052_c_01L文潭講伯傳
010_1052_c_02L師名元長。號文潭。生長漢北。出家映
010_1052_c_03L虛。幼學孔老。長入佛7)仙。 [21] 通方學人者。
010_1052_c_04L四五秋。建幢大師者。七八歲。住三角山。
010_1052_c_05L迎接檀氏者。多矣。住黃州西院寺。行表
010_1052_c_06L忠祠摠8)攝 [22] 兩9)手。 [23] 晩節。北入雪峯山釋
010_1052_c_07L王寺。恩法師。若侍缾錫。掃道場。先法
010_1052_c_08L師。示寂。理則逆。命之延促。何也。弟子等。
010_1052_c_09L同心10)豎議。 [24] 祖師恩師兩碑。同寺成11)主。 [25]
010_1052_c_10L祖師生前之碑。恩師死後之碑。雙立于
010_1052_c_11L寺之東麓。盛事之大者也。恩師映虛之
010_1052_c_12L嗣。仁峰德俊之孫。雷默等12)仁 [26] 之曾。玩
010_1052_c_13L月軌泓之四世。涵月海源之五世。喚老
010_1052_c_14L之六世。弟子。有龍淵慧昕。孫。有鏡淵哲
010_1052_c_15L球。同門兄弟。庸庵典愚。常居京山水
010_1052_c_16L落山興國寺。一名德寺。其弟子。有聖谷
010_1052_c_17L惟倜。翠隱奇淳。有二孫曰。永實義直。受
010_1052_c_18L恩者。有定雲彩奎。有影子二本。恩師。
010_1052_c_19L後庚辰入寂。
010_1052_c_20L「洗」甲本正誤表曰衍字。「理」甲本正誤表
010_1052_c_21L作「裡」。「九」甲本正誤表作「凡」。「齊」甲本
010_1052_c_22L正誤表作「齋」。「村」甲本正誤表作「才」。
010_1052_c_23L「盡」甲本正誤表作「畵」。「仙」作「山」{甲}。
010_1052_c_24L「攝」下甲本正誤表有「者」。「手」甲本正誤表
010_1052_c_25L作「年」。「豎議」甲本正誤表作「議豎」。「主」
010_1052_c_26L甲本正誤表作「立」。「仁」甲本正誤表作「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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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3_a_01L쌍월선백전雙月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성활性濶이고 호는 쌍월雙月이다.스님은 학식이 넓고 심원深遠하였고 지행知行이 뛰어났다. 그런 스님에게 조정에서는 ‘남북표충수충총섭南北表忠酬忠摠攝’이라는 직첩을 주었다. 쌍월 스님은 산문 밖을 나서면 두타행頭陀行을 실천하였고, 절로 돌아오면 선방에 들어가 선나禪那에 몰입하였다.깊은 산골짜기에 난蘭이 피면 아무도 찾아오는 이가 없다 하여 향기롭지 않을 리가 없고, 소나무가 무성하여 숲을 이루면 소나무와 비슷하게 생긴 혼자 우뚝 솟아 있는 잣나무가 기뻐하는 법이다.임자년(철종 3, 1852) 봄에 재물을 모으고 장인匠人을 불러 『유마경』 3권·『관경觀經』 1권·『아미타경』 등을 유성종劉聖鍾의 집에서 간행했다. 오민수吳旻秀가 경전을 쓰는 일을 맡았으며, 보월 혜소寶月慧昭·혜봉 최성慧峯最性·벽담 도문碧潭道文 등 여러 대존숙大尊宿들께서 증명법사의 자리에 참예하였다.계축년(철종 4, 1853)에 경전 간행불사를 마쳤다. 동화 축전東化竺典과 화은 호경華隱護敬이 지혜를 다투어 서문과 발문을 썼으며, 간행한 경전을 보개산 성주암聖住庵에 간직해 두었으니 훌륭한 일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일이라 하겠다.쌍월 스님의 제자로는 승주 선암사仙岩寺에 머물고 있는 철경鐵鏡 스님이 있는데, 그의 속성은 최씨이고 순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그 나머지 인연을 맺은 일과 법등法燈을 이어간 일 등은 스님의 문집과 일기에 수록되어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호봉선백전虎峰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응규應奎이고 호는 호봉虎峰이며, 서울 인근 광주 봉은사奉恩寺에 거주하였던 사람이다.경오년(고종 7, 1870)에 호남표충사총섭湖南表忠祠摠攝의 직을 수행하였다. 스님은 문장과 글씨 둘 다 갖추었으며, 재주와 덕까지 겸비하였다.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서 손수 『화엄경』 1부를 사경한 뒤에 널리 팔도에 명성이 있는 법사들을 초청하여 모두 증명법사의 자리에 앉게 하고, 이 경전들을 간행하여 인출하는 한편 전각을 짓고 판목을 그 안에 간직하였으니, 해인사에 소장되어 있는 대장경 판목과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영각사靈覺寺의 훌륭했던 업적과는 동일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추사 김정희 공도 호봉 스님이 베낀 『화엄경』 80권을 보고 그의 필력筆力과 공로를 크게 칭찬하고 직접 서문을 쓰고 찬문贊文을 지어 주었으니 그 찬문은 이러하다.“‘수보리須菩提여, 선남자와 선여인이 항하恒河의 모래알처럼 많은 몸을 가지고 보시하되, 이와 같이 -
010_1053_a_01L雙月禪伯傳
010_1053_a_02L師名性濶。號雙月。學識曠遠。知行挺
010_1053_a_03L特。贈南北表忠酬忠揔攝帖。出則頭陀。
010_1053_a_04L入則禪那。蘭開幽谷。無人。不可不芳。
010_1053_a_05L松茂盛林。同類而孤秀栢悅。於壬子
010_1053_a_06L春。鳩集僝功。刊注維摩經三卷。觀經一
010_1053_a_07L卷。彌陀經於劉聖鍾家。吳旻秀書。寶月
010_1053_a_08L慧昭。慧峯最性。碧潭道文。諸大尊宿。來
010_1053_a_09L坐證席。於癸丑告功。東化竺典。華隱護
010_1053_a_10L敬。爭智序跋。藏於寶盖山聖住庵。善事
010_1053_a_11L之首也。有弟子。鐵鏡。在仙岩。姓崔氏。
010_1053_a_12L順天人。其餘結緣續燈者。文集及日記
010_1053_a_13L錄之而傳後。
010_1053_a_14L
010_1053_a_15L虎峰禪伯傳
010_1053_a_16L師名應奎。號虎峰。京山廣州。奉恩寺人
010_1053_a_17L也。庚午。行湖南表忠祠揔攝。文筆具足。
010_1053_a_18L才德兼全。克誠致齋。手書華嚴經一部。
010_1053_a_19L廣募八道。有名法師。並坐證席。開印
010_1053_a_20L出。開閣藏板。海印大藏。不可比肩。而
010_1053_a_21L靈覺勝事。同日而語矣。秋史金1)公。 [27] 虎
010_1053_a_22L峰所書。華嚴經八十卷。筆力功勞。大加
010_1053_a_23L稱贊。作序2)作贊。 [28] 作贊曰。須菩提。善
010_1053_a_24L男子善女人。以恒河沙等身布施。如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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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3_b_01L무량無量 백천억겁百千億劫 동안 몸으로써 보시한다 하자.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의 가르침을 듣고 믿는 마음이 생겨 가르침에 거스르지 않고 따른다면, 그 복은 위에서 몸으로써 보시한 것보다 훨씬 나을 것이다. 하물며 손수 경을 베껴 쓴 것이겠는가?’ 이 말은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에 나오는 말로서 여래께서 이미 증명하신 것이거늘 지금 호봉 스님이 손수 『화엄경』을 베껴 썼으니 그 복이 어떠하겠는가? 승련勝蓮 노인이 강변의 절11)에서 써서 보이노라.”호봉 스님은 전각 안에 있는 판각을 가지고 인쇄 출간하여 산문의 스님들과 세속 신도들에게(山野) 유포하였으니, 그 훌륭한 신심은 남호南湖 스님이 손수 『아미타경』을 써서 세상에 유포한 것과 공덕이 같을 것이다.그 당시 큰 법사들이 모두 그 자리에 와서 증명법사의 자리에 올라 지켜본 것 또한 남호 스님 때와 비슷하다 하겠다. 판각版閣의 액제額題는 김정희 공이 임종할 무렵에 쓰고 나서 붓을 끊어 버렸으니 그 인연 또한 크다고 하겠다.스님에 대한 기연機緣과 어구語句들은 모두 스님의 문집과 행장에 자세히 갖추어 수록되어 있다.철요선백전鐵鷂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사문師文이고 호는 철요鐵鷂이며, 거처하는 방의 당호는 단파檀波이다. 속성은 조趙씨이며, 함남 안변에서 출생한 사람이고 어머니는 문文씨이다.어머니는 일찍이 남편을 여의고 홀로 살면서 아이를 절로 들여보냈다. 그러고는 죽은 남편을 위해 여성으로서의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스님이 이미 장성했으나 어머니의 절개를 잊지 못해 서울로 올라가 주선하던 끝에 김 만호金萬戶12)로 인하여 임금이 거둥하는 길에서 기다렸다가 단자單子를 올렸다. 임금이 특별히 교지를 내려 열녀려烈女閭를 세우게 하였으니, 어머니는 열녀가 되었고 그 자식은 효자가 되었다. 이 두 모자의 이야기는 세상에 아주 드문 일이다.신미년(고종 8, 1871) 봄에 김 만호가 이진梨鎭 만호가 되어 부임하였다. 그가 부임할 때 스님은 그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그때 스님은 그 문적文蹟(임금의 교지)을 가지고 나(梵海)를 찾아와서 숙식을 함께하며 이진으로 가서 진장鎭長을 만나곤 하였다. 그러다가 김 만호가 서울로 올라갈 때 스님도 곧바로 떠나갔다.그 뒤 5년이 지난 을해년(고종 12, 1875) 봄에 내가 석왕사로 가서 내원암의 영허映虛 노덕老德이 계신 곳으로 들어갔는데 그때 조실로 있던 철요 스님을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 2천 리 밖에 떨어져 살고 있다가 여기에서 다시 만났으니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철요 스님이 나에게 절구 한 수를 지어 주기에 나도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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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3_b_01L無量百千億劫。以身布施。若復有人信
010_1053_b_02L聞此經典。信心不逆 3)福其勝彼。何況
010_1053_b_03L書寫。此是金剛般若經。如來之所已證
010_1053_b_04L者。今虎峰之手寫。華嚴經八十卷。其福
010_1053_b_05L當如何。勝蓮老人。書示虎公於江上寺。
010_1053_b_06L閣中板刻。印出流布。山野。其所善信
010_1053_b_07L與南湖。手書彌陁經。同功。時諸大法師。
010_1053_b_08L皆來證席如也。板閣額題。金公臨終。書
010_1053_b_09L而絕筆。其緣大矣。機緣語句。具載文
010_1053_b_10L集行4)裝。 [29]
010_1053_b_11L
010_1053_b_12L鐵鷂禪伯傳
010_1053_b_13L師名師文。號鐵鷂。室曰檀波。姓趙氏。
010_1053_b_14L安邊人。母文氏。早失父獨居。送子于
010_1053_b_15L寺。烈於亡夫。盡於女節。師旣長成。不
010_1053_b_16L忘母節。徃京周旋。因金萬戶。呈單子
010_1053_b_17L于殿下擧動之路。特下敎旨。立烈女閭。
010_1053_b_18L母爲烈女。子爲孝薦。母子之事。世所
010_1053_b_19L稀罕。辛未春。金萬戶。爲梨鎭萬戶。到
010_1053_b_20L任後。師與其下來時。持其文蹟。尋予
010_1053_b_21L宿食。徃見鎭長。上去時直去。後五年
010_1053_b_22L乙亥春。予徃釋王寺。入內院庵映虛老
010_1053_b_23L德處。鐵鷂。在祖室。相距二千里之外。
010_1053_b_24L再逢。稀有之事。贈予一絕。予次贈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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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3_c_01L本是同門千里外 본시 동문인데 천 리 밖에 살고 있어
擧頭北望斗牛淸 고개 들어 북쪽 하늘 두우성斗牛星을 바라봤지
一之爲幸况逢再 한 번 만남도 다행인데 두 번씩이나 만났으니
談罷山空夢寐淸 법담 마치자 산은 맑고 잠자리도 편안하네
그 원운原韻(철요) 스님의 시를 부쳐 넣었으니 이러하다.
三尊一路北風淸 삼존三尊의 한 길 북쪽 바람 맑고
云云 ……운운云云……
뒷날 경연鏡淵 스님이 오니, 피차간에 오고감이 있었다. 그 뒤 추사 김 참판金參判의 시집에 추사가 사문師文(철요)에게 증정한 절구시 한 수가 있었으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五天竺在掌中間 다섯 천축국天竺國 손바닥 안에 있고
八水三峰徃復還 팔수八水와 삼봉三峰을 오고 가네
莫把示趺傳祖印 관 밖에 발 드러낸 것으로 조사의 심인心印 삼지 마시게
金身無善錫蘭山 부처님은 아무 탈 없이 석란산錫蘭山(스리랑카)에 계신다네
또 나중에 추사의 문집을 얻어 보았는데 거기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명나라 이우李祐가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가 사자후국獅子吼國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제자들과 사자좌獅子座에 앉아서 설법을 하고 있었다.”문집의 주석에 “석란산은 사자후국의 옛 이름이다.”라고 되어 있었다.김정희는 철요 스님과 친밀하게 지낸 정이 백파白坡·초의草意·호봉虎峰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교분이 있었다.철요 스님은 영허 노스님으로부터 선법을 전해 받았다.한양선백전漢陽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용주龍珠이고 호는 한양漢陽이며, 또는 붕명 한익鵬溟漢翊이라고도 한다. 양주楊州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스님은 용주사龍珠寺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백양산으로 옮겨 가서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도 다 열람하고, 선종과 교종의 학문까지 참구하였다.스님은 경을 보는 안목이 원만하게 밝아지고 범패를 읊는 소리도 청아해지자 덕운德雲 법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한양 스님은 침송枕松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양악羊岳 스님의 손자 제자이다. 스님의 범궁梵宮 음악이 삼남 지방까지 알려지자 코를 움켜잡고 흉내를 내며 본받으려고 하는 이들이 길을 메우고 문지방이 닳아 빠질 지경이었다.스님은 더욱 부지런히 공부를 하고 영령英靈들에게도 정성을 다해서 어떤 때는 영험을 얻은 적도 있고, 어떤 때는 복을 받은 적도 있다. -
010_1053_c_01L本是同門千里外。擧頭北望斗牛淸。一
010_1053_c_02L之爲幸况逢再。談罷山空夢宣淸。附其
010_1053_c_03L原韻曰。三尊一路北風淸云云。後鏡淵
010_1053_c_04L之來。彼此有徃復。後得見秋史金叅判
010_1053_c_05L詩集。贈師文詩一絕曰。五天竺在掌中
010_1053_c_06L間。八水三峰徃復還。莫把示趺傳祖印。
010_1053_c_07L金身無5)善 [30] 錫蘭山。後得見文集曰。明
010_1053_c_08L李祐。使西域。至獅子吼國。釋迦文佛。與
010_1053_c_09L弟子。坐獅子座說法。注錫蘭山。獅子
010_1053_c_10L吼國古號也。金公。與鐵鷂。情好日密。
010_1053_c_11L與白坡草衣虎峰無異也。師受禪於映
010_1053_c_12L虛老云。
010_1053_c_13L
010_1053_c_14L漢陽禪伯傳
010_1053_c_15L師名龍珠。號漢陽。又鵬溟漢翊。楊州
010_1053_c_16L人。入龍珠寺。祝髮。未幾。移入白羊山。
010_1053_c_17L閱內外典。叅禪敎。師經眼圓明。梵唄
010_1053_c_18L淸雅。拈香於德雲法師。師枕松之子。
010_1053_c_19L羊岳之孫。梵宮音樂。淸徹於三南。掩
010_1053_c_20L鼻而效者。閼路甐閾。尤勤於轉經。誠
010_1053_c_21L於英靈。有時以得驗。有時以受福。應
010_1053_c_22L「公」下甲本正誤表有「見」。「作賛」甲本正
010_1053_c_23L誤表曰衍字。「福其」甲本正誤表作「其福」。
010_1053_c_24L「裝」甲本正誤表作「狀」。「善」甲本正誤表
010_1053_c_25L作「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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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4_a_01L그러니 이것은 응진應眞(아라한)이 영험을 내려 단나檀那(신도)들이 귀의한 것이라 생각된다. 살아 있을 때에는 옷과 음식이 넉넉하여 여유가 있었으며, 죽어서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극락에 왕생할 것이다.스님이 적멸을 보이시던 날 밤에 붉은 광명이 서렸고 사유闍維 의식을 거행하던 날에는 하얀 기운이 하늘까지 뻗쳤다. 이 광경을 본 스님들과 신도들은 찬탄하여 마지않았으며,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나 할 것 없이 이를 보고 감동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스님에게 법을 받은 제자는 보경 응운普鏡應雲 등이 있고, 스님의 영각影閣은 청류암淸流庵에 시설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연담蓮潭 대사 이래로 5대 내지 6대에 이르는 스님들을 봉안하고 봄가을로 제향을 올린다. 여기에는 스님의 진영 1축軸도 봉안되어 있는데, 찬문은 다음과 같다.
氣鍾花山 기운은 화산花山에 모였고
燈續羊山 법등은 양산羊山에 이어졌네
重顯玉泉 옥천玉泉의 영광 되살아나
全移魚山 어산魚山이 그대로 옮겨 왔네
奉事那時 어느 때나 재를 받들어 올려
感應檀那 단나檀那들을 감응케 했네
庵入寂滅 암자에서 적멸에 들어가니
權示漚和 임시 선교방편 보이셨네
克誠誦經 경전 독송에 온 정성 다하고
臨終呈祥 임종을 하고 나니 상서를 드리웠네
白日震雷 밝은 대낮에 우렛소리 들리고
昏夜亘光 캄캄한 밤에 광명이 솟아올랐네
寔繁有徒 이에 제자들은 날로 늘어나고
滿室桂香 방 안엔 계수나무 향기 가득하였네
本無分段 본래는 분단分段이 없건만
人穪漢陽 사람들은 한양漢陽이라 불렀네
誰打丹靑 그 누가 단청에 덧칠을 할 건가?
永見羹墻 영원히 갱장羹墻13)을 보이리라
병술년(1886) 봄 3월에 종제從弟는 삼가 짓는다.서암강사전恕庵講師傳스님의 법명은 선기善機이고 호는 서암恕庵이며, 속성은 조曺씨이고 전남 나주 금마金馬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린 시절 운흥사雲興寺의 대운大雲 스님에게 몸을 의탁하여 스님이 되었다. 그 이후에 불호사佛護寺의 인곡仁谷 스님과 영파永坡 스님, 대둔사大芚寺의 화담華潭 스님·문암聞庵 스님·용연龍淵 스님, 보림사寶林寺의 인암忍庵 스님, 선암사仙巖寺의 침명枕溟 스님, 미황사美黃寺의 붕명鵬溟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을 두루 찾아다니며 학문을 익혔다.서암 스님은 마침내 은사에게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또 은사에게 비구계와 보살계도 받았다.스님은 이어 운흥사雲興寺 동암東庵에서 강석을 열고 찾아와 묻는 학인들을 지도한 지 몇 년이 지나 대둔사로 들어가서 선정禪定을 일생의 중대한 일로 삼아 정진하였다.스님은 본래 성품이 교리敎理를 좋아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유가의 글은 원래 맛을 붙일 곳이 없다.”라고 하면서, 찾아와 유교의 글에 대하여 묻는 이가 있으면 절대로 응대하지 않았으니, 이는 본래 세속적 이익에 대한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스님의 필력은 추사의 글씨 중에 아주 잘 쓴 부분에서 심오한 법을 터득하였으며, 문장 또한 끊어져서 간간이 단절된 곳이 있기는 하지만 반복해서 재삼 음미해 보면 전영雋永14)하고 정중鄭重하여 마치 문자삼매文字三昧에 들어간 듯하였다.스님은 또 지식이 탁월한데다 도의 이치마저 깊이 탐구하였으니, -
010_1054_a_01L眞降靈。檀那歸依。生而衣食有餘。死
010_1054_a_02L而徃生無疑。示寂之夜。有赤光。闍維
010_1054_a_03L之日。亘白氣。緇素賛歎。遠近觀感。受
010_1054_a_04L法弟子。普鏡應雲等。設影閣於淸流庵。
010_1054_a_05L奉蓮潭以來。五六世。春秋時享。有眞影
010_1054_a_06L一軸。賛曰。氣鍾花山。燈續羊山。重顯
010_1054_a_07L玉泉。全移魚山。奉事那時。感應檀那。
010_1054_a_08L庵入寂滅。權示漚和。克誠誦經。臨終
010_1054_a_09L呈祥。白日震雷。昏夜亘光。寔繁有徒。
010_1054_a_10L滿室1)桂 [31] 香。本無分段。人穪漢陽。誰打
010_1054_a_11L丹靑。永見羹墻。丙戌春三。從弟謹撰。
010_1054_a_12L
010_1054_a_13L恕庵講師傳
010_1054_a_14L師名善機。號恕庵。姓曺氏。羅州金馬
010_1054_a_15L人。幼投雲興之大雲。佛護之仁谷永坡。
010_1054_a_16L大芚之華潭聞庵龍淵。寶林之忍庵。仙
010_1054_a_17L庵之枕溟。美黃之鵬溟。拈香於恩師。
010_1054_a_18L又受比丘戒菩薩戒於恩師。開講於雲
010_1054_a_19L興之東菴。接誨來問者。幾年。移入大芚。
010_1054_a_20L以禪定。爲一生2)▼(木+覊) [32] 柄。性好敎理。甞曰。
010_1054_a_21L儒文。元無着味處。有來問者。絕不應對。
010_1054_a_22L本無世利之心故也。筆力。深得秋史眞
010_1054_a_23L好處。文有斬截3)問 [33] 斷處。反復再三。雋
010_1054_a_24L永鄭重。如入文字三味。知識卓越。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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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4_b_01L스님에게서는 참으로 글자나 헤아리는 공부를 한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찍이 양반 선비들이나 벼슬아치들과 교유한 적이 있었는데 언어에 법도가 있고 행동이 항상 여일如一하였으니 산림의 대장부라고 할 만하다.덕언德彥 등은 계를 전해 받은 제자이고, 상운 응혜祥雲應惠·쌍수 송원雙修松源 등은 법등을 전해 받은 제자이다.광서光緖 병자(고종 13, 1876) 가을 8월 28일에 비봉산 낙서암樂捿庵에서 단정하게 앉아 세상을 떠났으니, 세속 나이는 65세이고 법랍은 50년이었다.스님의 문중 아우 자여 범인自如梵寅이 법사의 비석과 부도를 대둔사 왼편 산기슭에 세웠다. 탑명은 송파松坡 이희풍李喜豊이 지었으며, 비명은 양석養石 배헌裵櫶이 지었다. 아직 비석에 새겨 세우지는 못하고 있다.침월선사전枕月禪師傳스님의 법명은 경순景淳이고 호는 침월枕月이며, 속성은 고高씨이고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릴 때에 만덕산萬德山(강진)에 들어가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절의 일에 골몰하였건만, 절은 동쪽이 무너지고 서쪽 벽이 헐리는 등 퇴락해 갔으며, 화살처럼 빠른 세월은 늘 절이 무너지고 스님이 흩어지기를 재촉할 뿐이었다. 스님은 종가宗家가 장차 망하려고 하는 꼴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스님은 마침내 해남 은적사隱跡寺로 옮겨 갔고, 그 후 얼마 안 되어 다시 나주 다보사多寶寺로 옮겨 갔다. 스님은 갑자기 노 행자盧行者(육조 혜능)가 신주新州로 돌아갔던 일을 기억하고 다시 만덕산으로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남은 건물이라곤 오직 노전爐殿만 있을 뿐이었다. 스님은 노전에 기거하면서 수년 동안 절을 지키다가 아무 질병도 없었는데 입적하고 말았다.스님이 열반하자 구름은 골짜기 입구에 가로놓이고, 노을은 옛 전각을 떠나 사라지고 말았다. 스님의 제자 완주 기원玩珠奇元이 삼베옷을 입고 삼년상을 거행하다가 훌쩍 세상을 뜨고 마니 풀과 나무도 빛을 잃고 새들과 짐승들도 슬픔을 머금은 듯하였다.손자 제자인 화산 인선華山仁善 스님은 장례와 제례祭禮 절차를 옛 법에 따라 엄숙하게 거행하였다. 스님은 천불산 화엄암華嚴庵에 살고 있었는데, 절을 나갈 때는 반드시 가는 곳을 알리고, 돌아와서는 꼭 보고하곤 하였다. 그는 절에서 빈둥빈둥 놀면서 아무것도 안하고 밥이나 축낸다는 비방을 면하기 위해 재물을 모아 중수 불사를 시작하였다.열여섯 채의 옛 건물을 넓히고 수리하는 한편 -
010_1054_b_01L究道理。眞無尋行數墨之究工夫處也。
010_1054_b_02L甞遊4)廌 [34] 紳冠帶之門。言語有度。進止
010_1054_b_03L恒一。山林之5)太 [35] 夫也。有德彥等。傳戒
010_1054_b_04L之徒。有祥雲應惠。雙修松源等。傳燈之
010_1054_b_05L流。光緖丙子秋。住飛鳳山樂捿庵。八月
010_1054_b_06L二十八日。端坐而逝。雲鎻洞門。谿咽
010_1054_b_07L斜陽。世壽6)立 [36] 六十五。法臘五十。與其
010_1054_b_08L門弟7)目 [37] 如梵寅。立法師碑。浮屠於大
010_1054_b_09L芚之左麓。塔銘。松坡李喜豊撰。碑銘
010_1054_b_10L養石8)囊 [38] 櫶撰。尙未刻立。
010_1054_b_11L
010_1054_b_12L枕月禪師傳
010_1054_b_13L師名景淳。號枕月。姓高氏。靈岩人。幼
010_1054_b_14L入萬德山。下髮上戒。汨沒寺中事。東
010_1054_b_15L破西壁。年矢每催。寺敗僧散。不忍見
010_1054_b_16L宗家之將亡。移住於海南隱跡寺。復移
010_1054_b_17L於羅州多寶寺。忽念盧行者。歸新州之
010_1054_b_18L事。還入萬德山。但存爐殿。守在數年。
010_1054_b_19L無疾而寂。雲橫谷口。烟消古殿。有弟
010_1054_b_20L子。玩珠奇元。麻衣三年。奄然示寂。草
010_1054_b_21L木無色。飛走含愁。孫弟子。華山仁善。
010_1054_b_22L喪葬祭禮。一遵古道。寄住千佛山華嚴
010_1054_b_23L庵。出必9)顧。 [39] 反必面。欲免尸位素饌之
010_1054_b_24L誹談。鳩聚僝功。廓掃十六舊舍。突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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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4_c_01L나한전을 새로 우뚝하게 지으니, 마치 봉황 한 쌍이 마주 서 있는 것 같았고 원앙 한 쌍이 같이 나는 듯하였다. 그러자 소나무도 무성해지고 잣나무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스님은 천성이 온화하고 단아하였으며 사람을 대할 때에는 자애가 넘쳐흘렀다. 사림들의 초청이 있으면 꼭 나가서 만나 주고 무엇을 빌려 달라고 하면 빚을 내어서라도 꼭 주곤 하였으며, 뒷날 빌려 준 것을 되돌려 주지 않으면 자신이 대신 갚아 주었다. 사람들이 스님을 속이는 말을 해도 반드시 진실이라고 믿어 조금도 의심하는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늘 낭패를 보곤 하였다.세상에 살아 있는 육신보살로서 보살행 때문에 도리어 집안을 망치자 사람들은 말하기를, “남의 재물을 빼앗아 자기 재산을 늘리는 사람들의 자손들은 귀하게 잘되고 영화를 누린다.”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이는 순생順生 순후順後의 업보業報15)라고 하겠다.「백이전伯夷傳」을 숙독하면서도 정작 자기의 행실에 대해서는 깨닫지 못하는 이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 이는 귀를 막고 방울을 훔치는 것이요, 뒷걸음질 치면서 앞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스님의 손자 제자 중에 사심을 극복하고 공적인 일을 봉행하여 그 명성을 멀고 가까운 곳에 떨친 이가 있었으니, “선한 일을 많이 한 집안에는 틀림없이 경사가 있다.(積善之家。 必有餘慶。)”16)라고 한 말을 여기에서 깨달을 수 있다.금월선사전錦月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의관誼寬이고 호는 금월錦月이며, 속성은 송宋씨이고 전남 낭주朗州(영암) 금강錦江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집안에 작은 분량(儋石)의 양식도 없어서 곧장 두륜산으로 들어가 성묵 지원聖默志遠 대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에 만허 색척萬虛賾陟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초의草衣 법사의 선관禪關에서 선법을 받았다. 그 후에도 철선鐵船 화상에게 불교의 경전과 유가·도가의 전적까지 두루 다 배웠다.이어 문암聞庵·화담華潭·용연龍淵 등 여러 강사들로부터 대승경전을 공부했으며, 마침내 먼저 돌아가신 은사 성묵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
010_1054_c_01L羅漢新堂。鳳凰對峙。䲶鴦比翼。松茂
010_1054_c_02L栢悅。從此可覺。師。天性溫雅。見人慈
010_1054_c_03L愛。人有請則期於出。債而應之。後必
010_1054_c_04L失之。自當報給焉。人有詭言。師。必信
010_1054_c_05L實無疑。以此。必見致敗。在世肉身菩薩。
010_1054_c_06L以菩薩行。必見敗家。人之言曰。奪10)之
010_1054_c_07L人 [40] 物肥己者。有子孫。爲貴榮云。此順生
010_1054_c_08L11)順 [41] 之報也。熟讀伯夷傳。而不覺己行
010_1054_c_09L者。世多有之。此掩耳偸鈴。退步求進
010_1054_c_10L者也。孫。有克12)有 [42] 己。奉公。名於近遠者。
010_1054_c_11L積善之家。必有餘慶。於此可覺也。
010_1054_c_12L
010_1054_c_13L錦月禪師傳
010_1054_c_14L師名誼寬。號錦月。姓宋氏。朗州錦江
010_1054_c_15L人。幼失怙恃。家無儋石之貯。徑入頭
010_1054_c_16L輪山。剃染於聖默志遠大師之室。受具
010_1054_c_17L於萬虛賾陟禪師之壇。受禪於草衣法
010_1054_c_18L師之關。受內外典於鐵船和尙。受大乘
010_1054_c_19L經於聞庵華潭龍淵師。拈香於先恩師。
010_1054_c_20L「桂」作「柱」而又正誤表作「炷」{甲}。「▼(木+覊)」甲
010_1054_c_21L本正誤表作「欛」。「問」甲本正誤表作「間」。
010_1054_c_22L「廌」疑「薦」{編}。「太」甲本正誤表作「大」。
010_1054_c_23L「立」甲本正誤表曰衍字。「目」甲本正誤表作
010_1054_c_24L「自」。「囊」甲本正誤表作「裵」。「顧」疑「告」
010_1054_c_25L{編}。「之人」甲本正誤表作「人之」。「順」下
010_1054_c_26L甲本正誤表有「後」。「有」甲本正誤表曰衍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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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5_a_01L스님은 가경嘉慶 16년 신미(순조 11, 1811)에 태어나서 광서光緖 16년 무자(고종 25, 1888) 4월 25일에 적멸을 보이셨으니, 세속의 나이는 78세이고 법랍은 62년이었다.스님은 일에 있어서는 걸림이 없는 법계法界에 들고 나고 하면서 기실記室의 소임을 역임했고 수승首僧의 소임도 역임하였다. 주지의 직첩을 받기도 했고 유나維那의 소임도 보았으며, 도총섭의 직에 임명되어 그 소임을 맡기도 하는 등 어려운 일이나 고달픈 일 할 것 없이 도맡아 하셨다. 또한 이치에 있어서는 걸림이 없는 실제의 자리에 들어가 능오能悟 스님과 문오文悟 스님 등 21명을 득도시켰으며, 염불과 참선에 있어서는 걸림 없는 선문禪門에 들어가 보리암菩提庵 석문石門을 비롯하여 조계산의 삼일암三日庵과 칠전七殿, 두륜산의 만일암挽日庵과 적련암赤蓮庵 등지에서 안거를 거듭하다가 명적암明寂庵에 머물던 중 조용히 적멸을 보이시니, 사람과 귀신들은 눈물을 흘리고 물과 산도 빛을 잃었다.스님은 설곡 윤훤雪谷胤烜의 족손族孫이고 연담蓮潭의 4대 법손이며, 용연 유정龍淵有正·대연 미순大淵美淳·해월 도홍海月道弘은 동문의 형제지간이다. 스님의 제자로는 완파 창기玩坡昶基가 있었으니,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표충사 어서각 수호 겸도내승풍규정 도총섭表忠祠御書閣守護兼道內僧風糾正都摠攝’을 역임하였다. 또 다른 제자 덕언德彦은 성이 조曺씨이고, 손자 제자 인환仁煥 스님은 속성이 정鄭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포운선사전浦雲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응원應元이고 호는 포운浦雲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전남 강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해남에서 타향살이를 하였다. 우연히 대둔사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스님이 되고 싶은 마음이 생겨 은암銀岩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에 연하 간순緣何侃淳 대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학업도 받았으며, 은암 정호 선사의 조실에서 법통을 이어받았다.두루 돌아다니면서 학문 익히기를 비로소 마치고 절의 소임을 맡아보았는데, 혹은 수승首僧과 주지의 문첩文牒을 담당하는 서기의 직책을 맡아보기도 했고, 혹은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고 총섭의 직책으로 정각政閣을 담당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만년에는 곧바로 여래의 자리에 들어가서 금은을 흙덩이처럼 하찮게 여기고 마음을 진상眞常에 부합하는 수행자의 생활을 하였다.병인년(고종 3, 1866) 가을에는 움막을 짓고 홀로 앉아 큰 서원을 세우고 자성 부처를 직시直視하는 선법을 수행했으며, -
010_1055_a_01L嘉慶十六年辛未生。光緖十六年戊子
010_1055_a_02L四月二十五日示寂。世壽七十八。法臘
010_1055_a_03L六十二。出入事無碍之法界。行記室
010_1055_a_04L行首僧。受住持帖。受維1)邦。 [43] 差行揔攝
010_1055_a_05L職。難行苦行。回入理無碍之實地。度
010_1055_a_06L能悟文悟等二十一人。入念佛叅禪無
010_1055_a_07L碍之禪門。結夏於菩提之石門。曹溪之
010_1055_a_08L三日七殿。頭輪之挽日赤蓮。住明寂庵。
010_1055_a_09L泊然示寂。人神含淚。山水變色。雪谷胤
010_1055_a_10L烜之族孫。蓮潭之四世。龍淵有正。大淵
010_1055_a_11L美淳。海月道弘。爲門兄弟。弟子。有玩坡
010_1055_a_12L昶基。姓金氏。靈岩人。贈表忠祠御書閣
010_1055_a_13L守護兼道內僧風糾正都揔攝者。德彥。
010_1055_a_14L姓曹氏。孫弟子。有仁煥。姓鄭氏。靈岩人。
010_1055_a_15L
010_1055_a_16L浦雲禪師傳
010_1055_a_17L師名應元。號浦雲。姓金氏。康津巴尾
010_1055_a_18L人。早年離鄕。作客海南。偶入大芚。忽
010_1055_a_19L發僧心。銀岩禪師室。剃染。緣何侃淳大
010_1055_a_20L師壇。受具受業。師室入室。遊學方畢。
010_1055_a_21L執寺任之柄。或行首僧住持之文牒書
010_1055_a_22L記。或坐嘉善。揔攝之欽差政閣。晩節。直
010_1055_a_23L入如來之地。塊視金銀。心合眞常。丙
010_1055_a_24L寅秋。結幕獨坐。立大誓願。直佛視2)祥。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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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5_b_01L정묘년(1867) 봄에는 월출산 상견성암上見性庵에서 홀로 이리저리 다니면서 두타행頭陀行을 하였다. 그러고는 계룡산 동악東岳에서 하안거 결제에 들어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것이 곧 마음이요 곧 부처라네.(非心非佛。 即心即佛。)”라는 게송을 쓰고는 붓을 던지고 누워서 평온한 모습으로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61세이고 법랍은 45년이었다.사유闍維(다비) 의식을 하던 날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을 떠다니고 붉은 노을이 골짜기를 감쌌다. 이때가 동치同治 6년 정묘(고종 4, 1867) 5월 29일이었다.스님은 태고太古(普愚)의 15대 법손이고 청허淸虛 스님의 9대 법손이며, 의암義庵 스님의 손자 제자이다. 스님에게 법을 받은 제자로는 예암 광준禮庵廣俊이 있으니, 광준 스님은 속성은 최씨이고 낭주朗州에서 출생하였다. 손자 제자로는 육파 기운六波奇雲 스님이 있으니, 속성은 金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스님의 소조小照(眞影) 1축軸이 있는데 소치小癡 허련許鍊17)이 그리고 만휴 자흔萬休自欣이 찬문을 지었다.보운선사전寶雲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석일碩一이고 호는 보운寶雲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청해淸海(완도) 망리望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려서 두륜산에 들어가 풍암 의례豊庵宜禮 선사로부터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경월 영오鏡月寧傲 율사에게서 계를 받았다. 스님은 가선대부嘉善大夫라는 품계를 받고 승통僧統의 직책을 받기도 했다. 주지의 직책을 역임하고 수승의 자리에 앉기도 했다.보운 스님은 공무를 집행하고 사찰 행정을 함에 있어서 일을 잘 해결하고 결함을 잘 보충하였다. 몸집은 우람하고 과묵한 성격이었다.가경嘉慶 18년 순조純祖 13년 계유(1813)에 태어나 광서光緖 9년 계미(고종 20, 1883) 3월 3일에 조용히 세상을 마치니, 세속 나이는 71세이고 승랍은 56년이었다. 스님은 70 평생 동안 덕행을 쌓았고 자비는 구곡九曲(전국)에 흘러 퍼졌다. 조금도 나이를 아끼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스님의 죽음에 슬픔을 머금었다.스님은 철선鐵船 스님의 손자 제자이고, 풍암豊庵 스님의 법제자이다. 남파 교율南坡敎律과 팔굉 관홍八紘寬弘의 동문 법형이고 부헌富憲 화상의 같은 스승을 모신 법형이다. 제자로는 호은 경은虎隱敬恩·해은 처율海恩處律·용은 계언龍隱戒彥이 있고, 손자 제자로는 -
010_1055_b_01L丁卯春。居於月出山上見性庵。獨作遊
010_1055_b_02L方抖擻之行。結夏於鷄龍山東岳。書偈
010_1055_b_03L曰。非心非佛。即心即佛。投筆而臥。怡
010_1055_b_04L然而寂。世壽六十一。夏臘四十五。闍
010_1055_b_05L維之日。祥光騰空。紫氣鎖谷。時同治
010_1055_b_06L六年丁卯五月二十九日也。太古十五
010_1055_b_07L世。淸虛九世。義庵之孫也。受法弟子。
010_1055_b_08L有禮庵廣俊。俊。崔氏。朗州人。孫弟子。
010_1055_b_09L有六波奇雲。金氏。靈岩人。有小照一
010_1055_b_10L軸。小癡許鍊描。萬休自欣贊。
010_1055_b_11L
010_1055_b_12L寶雲禪師傳
010_1055_b_13L師名碩一。號寶雲。姓李氏。淸海望里
010_1055_b_14L人。早投輪山。從豊庵宜禮禪師。剃髮
010_1055_b_15L染衣。向鏡月寧傲律師。受火禀戒。贈
010_1055_b_16L嘉善資。賜僧統職。行住持。令坐首僧
010_1055_b_17L席。行公治政。解事補闕。軀榦茂碩。口
010_1055_b_18L吻默重。嘉慶十八年。純祖十三年癸酉
010_1055_b_19L生。光緖九年。癸未三月初三日。泊然而
010_1055_b_20L逝。世壽七十一。僧臘五十六。德行七
010_1055_b_21L十。慈流九曲。小不惜年。人多含哀。鐵
010_1055_b_22L船之孫。豊庵之子。南坡敎律八紘寬弘
010_1055_b_23L之同門兄。富憲和尙之同3)師 [45] 兄。弟子
010_1055_b_24L有虎隱敬恩。海恩處律。龍隱戒彥。孫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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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5_c_01L응허 성안應虛聖按·능허 계종凌虛戒宗·익환翼煥·재민在敏·근종謹宗이 있으며, 증손 제자로는 취운 혜오翠雲慧悟·정찬 태우晶贊泰祐가 있다. “너의 조상에 염려를 끼치는 일 없으니 그래서 자손이 번성한다.”라고 한 말은 이들 말고 그 누구에게 할 수 있단 말인가?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자연慈演 등 열두 명이 있으며, 스님의 진영 1축이 있는데 화악영각華岳影閣에 배향되어 있다.일여선백전一如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신순信淳이고 호는 일여一如이며, 속성은 이씨이고 전남 청해淸海 망리望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가경嘉慶 12년, 순조 7년 정묘(1807)에 태어나서 16세에 두륜산으로 출가하여 경월 영오鏡月寧傲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스님은 과거 세상에 선근을 심어 그 성품이 자애롭고 스승을 정성으로 모셨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자기 재물을 덜어 그 사람에게 주고 헌 옷 입은 사람을 보면 빨고 꿰매어 갈아입히곤 하였다.19세에 화담華潭 선사의 강석에서 『능엄경』과 『기신론』을 배우고, 20세에 가지산으로 옮겨 가는 화담 스님을 따라가 그곳에서 『원각경』을 배웠다. 인하여 동문수학하던 백인白印 스님과 함께 이름 있는 산들을 돌아다니면서 선지식을 참례하였다.25세 되던 신묘년(1831)에 풍악산으로 들어가 만회암萬灰庵에서 발길을 멈추니, 암자는 텅 비어 있고 눈은 한 길 남짓 쌓여 있었다. 암자 뒤에는 관음봉觀音峰이 있고 암자 앞과 좌우에는 남순봉南巡峰과 해상봉海上峰 두 산이 있었다. 표훈사表訓寺 위쪽 산줄기이고 마하연摩訶衍과는 아주 인접해 있는 곳이었다. 중향성衆香城의 오른쪽 계곡이고 비로봉毘盧峰의 내룡來龍이며, 백운대白雲臺와는 같은 계곡에 있고 금강산의 제일 아름다운 봉우리 중 하나이다. 그런 까닭에 절 이름을 만회암이라고 하였다.스님은 그곳에서 발심하여 서원하였다.“백 일 동안 기한을 정해 놓고 관음봉에서 기도를 하되 불이 없는 차가운 재만 담은 화로를 시설해 놓고 백 일 안에 그 향로에서 연기가 일어나면 기도를 마치고, 연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몸을 태워 부처님께 공양하리라.”스님은 날마다 나무를 베어다가 햇볕에 말려 차곡차곡 쌓아 놓고 -
010_1055_c_01L子。有應虛聖按。凌虛戒宗。翼煥在敏謹宗。
010_1055_c_02L曾孫弟子。有翠雲慧悟。晶贊泰祐等。無
010_1055_c_03L念爾祖。寔繁有徒。捨此誰謂也。受戒
010_1055_c_04L者。有慈演等十二人。有眞影一軸。配
010_1055_c_05L享于華岳影閣。
010_1055_c_06L
010_1055_c_07L一如禪伯傳
010_1055_c_08L師名信淳。號一如。姓李氏。淸海望里
010_1055_c_09L人。嘉慶十二年。純祖七年丁卯生。十
010_1055_c_10L六。出家于頭輪山。薙髮于鏡月寧傲禪
010_1055_c_11L師之室。宿植善根。性本慈愛。侍師典。
010_1055_c_12L座。見人貧竆。損己與人。見人垢衣。洗
010_1055_c_13L縫更着。十九。投華潭禪師講下。學楞嚴
010_1055_c_14L經起信論。二十。從轉山於伽智山。學圓
010_1055_c_15L覺經。仍與同學白印。遊名山。叅知識。
010_1055_c_16L二十五。辛卯入楓岳。止萬灰庵。庵空虛
010_1055_c_17L積雪仭餘。庵後。有觀音峯。前右左。有
010_1055_c_18L南巡海上二峰。表訓寺之上榦。摩訶衍
010_1055_c_19L之隣近。衆香城之右峽。毘盧峰之來龍。
010_1055_c_20L白雲臺之同峽。金剛山之第一。故名曰。
010_1055_c_21L萬灰庵。於此發心誓願。日 [46] 定百日。祈
010_1055_c_22L禱於觀音峰。設冷灰爐。百日內。起烟則
010_1055_c_23L已。不烟則燒身供養。日復日。伐木積
010_1055_c_24L「邦」疑「那」{編}。「祥」甲本正誤表作「禪」。
010_1055_c_25L「師」作「時」{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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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6_a_01L공양을 올리고 정근하였다. 하루는 백인 스님에게 말하였다.“백 일을 가득 채웠는데도 향로에 연기가 일어나지 않으니 내 정성이 부족한 탓이다. 내 마땅히 이 몸을 불로 태워 공양하리라.”백인 스님이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그대에게는 부모님과 스승이 계시지 않은가? 그대는 유독 그대의 부모와 스승이 그대를 끔찍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생각하지 않는가?”신순信淳(일여) 스님은 말하였다.“나는 이미 끝났네.”그러고는 마침내 옷을 추켜올리고 밖으로 나갔다. 백인 스님이 따라가며 만류했지만 힘으로는 그를 말릴 수가 없었다. 백인 스님은 암자로 들어가서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찾아보다가 밖으로 나가 보니 장작더미 위에 불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신순 스님이 그 위에 서서 합장한 채 관음봉을 향하여 낭랑한 목소리로 관세음보살을 외치고 있었다.백인 스님이 큰소리로 불렀다.“그대는 도대체 왜 그러는가?”그러나 신순 스님은 듣지 못한 듯이 염불을 그치지 않았다.백인 스님은 황급하여 두 손으로 눈을 뭉쳐 불을 꺼 보았으나 너무 뜨거워서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신순 스님이 말하였다.“그대는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몸이 각각 흩어지면 마치 꿈과 같다(四大各離如夢中)’는 이 게송을 모르는가? 나는 극락으로 왕생할 것이다.”불길 속에 얼굴은 이미 타서 문드러져 알아볼 수가 없었다. 백인 스님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자 울면서 신순 스님에게 말했다.“그대가 만약 이 산에서 죽는다면 장차 극락세계에 가지 못할 것이다.”신순 스님이 엄숙한 목소리로 되물었다.“어째서 극락세계에 가지 못한다는 건가?”백인 스님이 말했다.“우리 승가의 의상義湘 조사께서도 행여나 큰 도량을 더럽게 할까 봐 이 산에서 죽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대도 속히 불 속에서 나오게.”신순 스님은 비로소 마음이 움직여 백인 스님 쪽을 향하여 몸을 굴렸다. 백인 스님이 신순 스님을 끌어안고 나와서 눈 위에 올려놓고 급히 인근 절로 달려가서 여러 스님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대중들이 급히 달려가서 살펴보니 신순 스님이 눈 위에 앉아 있는데 그 몸뚱이가 먹빛처럼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러나 아직 기도가 막히지는 않아 입속으로 그때까지 중얼중얼 염불하는 소리가 났다.대중 스님들은 크게 놀라서 백인과 신순 두 스님이 화목하지 못해서 백인 스님이 신순 스님을 불구덩이로 밀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백인 스님에게 신랄하게 따지고 들었다. 그러자 신순 스님이 말했다.“내가 스스로 이런 짓을 하게 된 것은 극락세계에 가려고 함일 뿐입니다.”그날 밤 표훈사 스님은, 많은 스님들이 가사를 입고 갖가지 채색 연꽃으로 꾸며진 수레를 메고 가는데 만폭동萬瀑洞 골짜기에 음악 소리가 진동하는 가운데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어떤 스님은 꿈에 오색구름이 만회암 위에 엉겨 있는 광경을 보고 꿈에서 깨어나 서로 이야기를 하였다. 그러던 중 어제 불에 탄 그 스님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이상한 일이라고 한마디씩 했다.그때 모든 절의 스님들이 큰 법회를 열고 -
010_1056_a_01L曝。設供精勤。一日告1)百 [47] 印曰。滿百日
010_1056_a_02L而香不烟起。吾誠不足。吾當燒身作供。
010_1056_a_03L印驚曰。爾有父母及師。獨不念爾父
010_1056_a_04L母師念爾乎。淳曰。吾止矣。遂拂衣而
010_1056_a_05L出。印從而挽之。力不能挽之。入庵覓
010_1056_a_06L索而出。視之。木火大發。淳立其上。合
010_1056_a_07L掌向觀音峰。琅琅誦觀音聲也。印大呼
010_1056_a_08L曰。爾何爲此。淳若不聞者。念佛不已。
010_1056_a_09L印遑急。兩手拱雪撲火。熱不可近。淳
010_1056_a_10L曰。四大各離如夢中。爾不識此2)倡 [48] 乎。
010_1056_a_11L吾欲徃生極樂耳。面目已焦爛。不可相
010_1056_a_12L識也。印無不奈何。泣曰。爾死於此山。
010_1056_a_13L將不徃生。淳厲聲曰。何不徃生。印曰。
010_1056_a_14L吾家義湘祖師。恐汙大道場。不死於此
010_1056_a_15L山。爾速出。淳始心動。轉身向印。印抱
010_1056_a_16L之而出。急走隣寺。乞請衆僧。急趍視
010_1056_a_17L之。淳坐雪上。其黑如墨。氣尙不塞。口
010_1056_a_18L中尙喃喃作聲念佛。衆僧大愕。以爲兩
010_1056_a_19L僧不睦。而印敺之火中也。詰之3)其 [49] 急。
010_1056_a_20L淳曰。吾自爲此。欲徃生極樂耳。是夜。遂
010_1056_a_21L入寂。其夜。表訓寺僧夢。衆僧被袈裟。
010_1056_a_22L荷彩轝鼓。樂聲振萬瀑洞。向上而去。
010_1056_a_23L一僧。夢五色雲。凝萬灰庵上。覺而相告
010_1056_a_24L語。及聞死事。咸大異之。於是。諸寺僧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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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6_b_01L그 스님의 다비식을 하던 날 밤에 산속을 바라보니 마치 산불이라도 난 듯이 환하게 밝아 대낮과 같았다. 이러한 현상은 사흘 밤낮이나 계속되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 전국으로 퍼져 나갔는데 신순 스님이 성불하여 하늘에 태어난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들 입을 모았다.곧 도광道光 12년(순조 32, 1832) 정월 10일 술시戌時(오후 7시~9시)에 금강산 표훈사 만회암에서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26세이고 승랍은 10년이었다.백인 스님은 사유闍維 의식을 마친 뒤에 일여 스님의 기연機緣을 기록하여 표훈사 주지의 인장과 편지를 받아 가지고 와서 고하였다. 또한 오고 갈 때 사례할 선물을 장만하여 일여 스님의 삼촌 되는 스님인 연익 전서演益錢絮 스님으로 하여금 납의衲衣를 입고 가서 일여의 영혼을 위로하고 죽은 후에 호를 내리게 하였으니, 그의 시호는 일여一如라 했다.그의 어머니 김씨는 신순 스님이 와서 공양거리를 갖추어 가지고 가시자고 하는 기이한 꿈을 꾸고 그날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 베를 짜던 일을 멈추고 베틀에서 내려와 자리에 눕더니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산천山泉 거사 김명희金命喜18)가 『행장록行狀錄』 1권을 지었는데 그 문중에 전해지고 있다.종암강사전鍾庵講師傳스님의 법명은 백인白印이고 호는 종암鍾庵이며, 속성은 조趙씨이고 해남 현산방縣山坊 고담古潭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스님은 두륜산에서 출가하여 복한福閒 상인에게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화담華潭 선사로부터 『능엄경』과 『기신론』을 배웠으며, 신순信淳·석훈碩訓 스님과 함께 『원각경』을 익혔다. 백인·신순·석훈 세 스님은 도반이 되어 유학을 떠나 묘향산으로 들어갔다가 석훈 스님은 구월산으로 들어갔고 신순 스님과 백인 스님은 풍악산으로 들어가 표훈사 만회암에 기거하였다. 신순 스님이 자신의 몸을 불살라 소신공양을 하고 나자 백인 스님은 금강산을 내려와 철선鐵船 대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그 후에 지리산으로 들어갔는데 그의 은사도 어떤 사람(철선)에게 건당建幢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환속하여 물러나며 종암 스님을 자기 대신 잇게 하고는 속가로 내려갔다.백인 스님은 태백산으로 들어가서 하루에 한 끼니만 먹고 대중들을 모아 강설을 하는 등 괴로운 수행 절차를 굳게 지켜 나갔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병에 걸려 태백산에서 적멸을 보였으니, 영혼은 옛 절로 돌아갔을 터이나 -
010_1056_b_01L會。其茶毘之夜。見山中。若有火起。晃
010_1056_b_02L朗如晝。如是者。三日盛傳。淳。成佛生天
010_1056_b_03L無疑也。即道光十二年正月初十日戌
010_1056_b_04L時。入寂于金剛山表訓寺萬灰庵。世壽
010_1056_b_05L二十六。僧臘十。白印闍維後。記其機
010_1056_b_06L緣。受表訓寺住張。印簡而來告。即4)辨 [50]
010_1056_b_07L回謝。徃來之物。使其叔師演益錢絮。
010_1056_b_08L衲衣而徃。慰勞而來。贈死號曰。一如。
010_1056_b_09L其母金氏。夢淳來設供具而請徃。其日
010_1056_b_10L巳時。織布而下。仍臥不起。山泉居士
010_1056_b_11L金命喜。作行5)裝 [51] 錄一卷。留傳門中。
010_1056_b_12L
010_1056_b_13L鍾庵講師傳
010_1056_b_14L師名白印。號鍾庵。姓趙氏。海南縣山
010_1056_b_15L坊古潭人。出家於頭輪山。剃染於福閒
010_1056_b_16L上人。從華潭禪師。學楞嚴起信。與信
010_1056_b_17L淳碩訓。講圓覺經。白印信淳碩訓。作
010_1056_b_18L伴遊學。入妙香山。訓入九月。淳印。入
010_1056_b_19L楓岳。居表訓寺萬灰庵。信淳。自己燒散。
010_1056_b_20L師下來。拈香於鐵船大師。後入智異山。
010_1056_b_21L其恩師。亦建幢於何人。未幾。還退。鍾
010_1056_b_22L庵立己代追後。其師下俗。印。入太白山。
010_1056_b_23L一日一食。聚衆設講。執守苦節。未幾。
010_1056_b_24L以經病。示寂於太白山。魂歸古寺。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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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6_c_01L조문할 친한 사람 하나 없어 그 발자취는 일여一如 스님과 같았다.회암선백전悔庵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심훈心訓이고 호는 회암悔庵이며, 속성은 박朴씨이고 옥주沃州(전남 진도) 의신義新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첨찰산尖察山으로 출가하여 평철 동지平哲同知 스님에게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하의荷衣 대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화담華潭 선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초의草衣 율사에게서 대승보살계大乘菩薩戒를 받았다.스님은 가경嘉慶 무진년(순조 8, 1808)에 태어나 광서光緖 13년 정해(고종 24, 1887) 2월 6일에 심적암深寂庵에서 입적하니, 세속의 나이는 80세이고 승려 생활을 한 해는 65년이었다.스님은 화담 스님과 인곡仁谷 스님에게서 학업을 닦고, 불갑사佛甲寺·정방사井芳寺·은적암隱寂庵·대둔사大芚寺와 미황사美黃寺의 미타암彌陀庵·보림사寶林寺의 내원암內院庵·송광사松廣寺의 삼일암三日庵·선암사仙巖寺의 칠전七殿에서 주석하였다. 또한 네 도읍지와 팔방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 가지 관법觀法과 다섯 종파의 종지宗旨를 증득하였고, 세속에 얽매임을 초탈하여 마음의 부처님을 잘 보호하였다.간성의 만일회萬日會에 참예하였고 순천 수선사修禪寺에 있었던 수선결사修禪結社에 참예하기도 했으며, 대둔사의 무량회無量會 결사에도 참예하였고 장춘長春 고을 무량회에도 동참하는 등 수선에 힘쓰니, 나무들도 기뻐하며 영화로운 빛을 발하고 시냇물도 소리 내어 흐르기 시작했다. 스님은 오래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불국토에 나기를 기대하지도 않았다.스님에게서 계를 전해 받은 제자는 경운敬雲 등 21명이고, 선참禪懺을 전해 받은 사람은 승려와 속인을 통틀어 모두 30여 명에 이른다. 대응大應 스님의 사형師兄이고 인파印波 스님의 사숙師叔이며, 득훤 유은得烜遺恩 스님의 상족上足이다.연호대사전烟湖大師傳 -
010_1056_c_01L無親。跡同一如。
010_1056_c_02L
010_1056_c_03L悔庵禪伯傳
010_1056_c_04L師名心訓。號悔庵。姓錦城朴氏。沃州
010_1056_c_05L義新人。出家於尖察山。薙髮於平哲同
010_1056_c_06L知。受具於荷衣大師。拈香於華潭禪師。
010_1056_c_07L受大乘菩薩戒於草衣律師。嘉慶戊辰
010_1056_c_08L生。光緖十三年丁亥。二月初六日。入寂
010_1056_c_09L於深寂庵。世壽八十。僧年六十五。叅
010_1056_c_10L學於華潭師仁谷師。住於佛甲井芳隱
010_1056_c_11L跡大芚。美黃之彌陀。寶林之內院。松
010_1056_c_12L廣之三日。仙岩之七殿。徧行四都八域。
010_1056_c_13L證得三觀五宗。脫6)屐 [52] 世名。精護心佛。
010_1056_c_14L念杆城之萬日會。依順天之修禪寺。結
010_1056_c_15L無量會於大芚之陽。念無量壽於長春
010_1056_c_16L之洞。木欣欣而向榮。川涓7)涓 [53] 始流。壽
010_1056_c_17L命不願。佛國不期。傳戒者。敬雲等二
010_1056_c_18L十一人。傳禪者。緇素。並三十有餘。大
010_1056_c_19L應之兄。印波之叔。得烜遺恩上足。
010_1056_c_20L
010_1056_c_21L烟湖大師傳
010_1056_c_22L「百」甲本正誤表作「白」。「倡」甲本正誤表
010_1056_c_23L作「偈」。「其」甲本正誤表作「甚」。「辨」甲本
010_1056_c_24L正誤表作「辦」。「裝」甲本正誤表作「狀」。
010_1056_c_25L「屐」甲本正誤表作「屣」。「涓」下甲本正誤表
010_1056_c_26L有「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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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7_a_01L스님의 법명은 승정勝正이고 호는 연호烟湖이며, 속성은 강씨이고 보길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릴 때 보리산으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배우고 또 때때로 익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올 지경이 되자 은사의 방에 들어가 호를 받았으며, 성품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으니 이 또한 대사大師가 아니겠는가?스님은 환양 도우喚羊禱祐 선사로부터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환양 선사는 회운 덕윤會雲德潤 스님의 법통을 이은 제자이다. 회운 스님은 도암 복환道庵復還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동연洞然(智演) 스님의 속가 동생이며 또한 출가한 승가의 법제이기도 하다. 도암 스님은 영허 성준靈虛性俊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영허 스님은 원조圓照(碧虛)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며, 벽허 스님은 설암 추붕雪岩秋鵬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고, 설암 스님은 월저 도안月渚道安 스님의 법을 이은 제자이다. 연호 대사의 수은受恩 제자로는 ▣▣▣ 스님 등이 있다.연호 스님은 뜻이 크고 호매豪邁하여 조그만 절차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보림사寶林寺·송광사松廣寺·백양사白羊寺·화엄사華嚴寺·지리산·가야산·계룡산 등지에 머물면서 선참禪懺을 구하는 이에게는 선참을 주고 계를 받고자 하는 이에게는 계를 설해 주었으며, 차를 만나면 차를 마시고 주린 이를 만나면 같이 굶주리며, 힘으로 겨루면 힘으로 이기고 말로 논쟁하면 말로 이겼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연호 스님을 기피하는 경향까지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태연하여 마치 천하가 태평한 봄날과 같았다.스님은 저 천하태평수좌天下太平首座와 일장춘몽선객一場春夢禪客과 더불어 삼한 천지를 나란히 달리는 선객禪客이었다.가경嘉慶 병자년(순조 16, 1816)에 태어났으며 광서光緖 갑오년(고종 31, 1894)에 천은사泉隱寺에 주석하고 있다. 그의 세속 나이는 79세이건만 마치 48세 비구의 모습 같다.영허선백전靈虛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의현義玄이고 호는 영허靈虛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전남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달마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로 마음이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찾아다녔다. 선암사와 송광사를 두루 지나서 운흥사雲興寺와 불호사佛護寺를 오가면서 선재善財동자가 53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학습한 것처럼, 설산雪山동자가 설산에 들어가 수행한 고풍古風처럼 학문과 수행을 겸하여 닦았다.영허 스님은 고로추古老錐19)를 모두 참알參謁하고 찾아드는 학인 도반들을 편안하게 결집하더니 보월寶月 법사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으며, 인암忍庵 율사의 계단에서 선참禪懺을 받았다. 혹은 영침影枕에 주석하면서 강론을 펼치기도 하였고, 혹은 북암北庵에 머물면서 학인들을 맞아 공부를 가르치기도 했다. -
010_1057_a_01L師名勝正。號烟湖。姓姜氏。甫吉人。幼
010_1057_a_02L入菩提山。學而時習之。有朋自遠來。
010_1057_a_03L入室贈號。人不知而不慍。不亦大師乎。
010_1057_a_04L嗣法於喚羊禱祐禪師。喚羊。會雲德潤
010_1057_a_05L之子。會雲。道庵復還之子。洞然之家弟。
010_1057_a_06L亦出家弟。道庵。靈虛性俊之子。靈虛。圓
010_1057_a_07L照之子。碧虛。雪岩秋鵬之子。雪岩。月渚
010_1057_a_08L道安之子。有受恩弟子。曰□□□等。
010_1057_a_09L師。倜儻豪邁。不拘小節。住寶林松廣白
010_1057_a_10L羊華嚴智異伽倻鷄龍。求懺與懺。求戒
010_1057_a_11L與戒。逢茶喫茶。遇飢同飢。力戰力勝。
010_1057_a_12L口爭口勝。人則忌之。泰然。若天下太平
010_1057_a_13L春也。與彼天下太平首座。一場春夢禪
010_1057_a_14L客。并驅三韓天地也。嘉慶丙子生。光
010_1057_a_15L緖甲午。住泉隱。年則七十九。若四十
010_1057_a_16L八化 [15] 丘像然也。
010_1057_a_17L
010_1057_a_18L靈虛禪伯傳
010_1057_a_19L師名義玄。號靈虛。姓朴氏。靈岩人。投
010_1057_a_20L達摩山。剃髮染衣。從心所如。入叅所
010_1057_a_21L意。仙松徧歷。雲佛去來。善財餘習。雪
010_1057_a_22L山古風。盡謁古老錐。稔結來集伴。拈
010_1057_a_23L香於寶月法師之室。1)愛 [54] 禪於忍庵律師
010_1057_a_24L之壇。或住於影沈講論。或住於北庵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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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7_b_01L미타암彌陀庵에서 미타회彌陀會를 개설하니 안온함이 마치 안양국安養國의 세계와 같았으며, 달마사에서 달마선達磨禪을 증명하니 완연하기가 마치 백화도량白華道場 같았다. 그런 소문이 나자 풀숲을 헤치고 불조佛祖의 가풍을 우러러 찾아오는 학도들이 방 안을 빽빽하게 메우고 돈을 내놓고 지팡이 짚고 떠나가는 이들로 길이 좁았다.이 세계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겁劫이 있고 세월은 춘하추동의 변화가 있는 법이다. 스님은 어느 날 대중들을 불러 간단한 법을 설한 다음 문을 닫고 적멸을 보였다. 사유闍維 의식을 거행하던 날 서기가 상서로움을 드리우고 봉송奉送할 때에는 감로의 비가 먼지를 잠재웠다.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가르침을 받은 제자와 선참禪懺을 받고 법을 받은 제자를 하필 누구누구라고 지적할 필요가 있겠는가?스님은 가경嘉慶 병자년(순조 16, 1816)에 태어나 동치同治 갑술년(고종 11, 1874)에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59세이고 승하僧夏는 43년이었다.충파忠波·천학天學·권종權宗은 백어白魚와 같은 법제자이고, 환명幻溟·근정謹定·환봉幻峰·성준性俊은 자사子思와 같은 손자 제자이다.무위선백전無爲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안인安忍이고 호는 무위無爲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청해淸海 세포細浦에서 출생한 사람이다.11세에 보타산으로 출가했다가 16세에 두륜산으로 옮겨가 호의縞衣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완해玩海 대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신월信月·철선鐵船·문암聞庵·용연龍淵·화담華潭·초의草衣·인암忍庵·성담性潭·호의縞衣 등 9대 법사의 법연法筵에서 교학을 배웠다. 이어 호의 스님으로부터 법인을 전해 받고 초의 스님에게 대승보살계를 받음으로써 연꽃 향기 피어오르고 매실도 익었다.스님은 호남총섭湖南摠攝의 직에 올라 표충사 수호 임무를 역임하였으며, 성담 스님과 인암 스님의 선석禪席을 물려받고 초의 스님의 다양한 기능을 배워 익혔다. 스님은 입을 열었다 하면 1천 부처님의 1만 게송이 차례로 흘러나왔고, 손을 움직였다 하면 10목目의 8자字가 부러워하고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스님이 가장 싫어한 것은 점괘(爻象)를 뽑는 것이요, 좋아한 것은 적정寂靜에 드는 것이었다.조신암趙信庵이 스님의 탑명을 짓고 신백파申白坡가 그의 진영에 찬미하는 글을 지었다. 가경嘉慶 21년 -
010_1057_b_01L接。設彌陀會於彌陀。隱然若安養世界。
010_1057_b_02L證達摩禪於達摩。完然如白花道場。跋
010_1057_b_03L草瞻風而來者。密室。腰包手錫而去者。
010_1057_b_04L狹路。世界。有成住壞空之劫。光陰。有春
010_1057_b_05L夏秋冬之變。召衆才訣。閉門示寂。闍
010_1057_b_06L維之日。瑞氣呈祥。奉送之時。甘雨滌
010_1057_b_07L塵。受戒受敎。受禪受法者。何必持某。
010_1057_b_08L嘉慶丙子生。同治甲戌寂。俗年五十九。
010_1057_b_09L僧夏四十三。忠波天學權宗。白魚之子。
010_1057_b_10L幼溟謹定幻峰性俊。子思之孫。
010_1057_b_11L
010_1057_b_12L無爲禪伯傳
010_1057_b_13L師名安忍。號無爲。字眞如。姓金氏。淸
010_1057_b_14L海細浦人。十一。出家於補2)弛 [55] 山。十六。
010_1057_b_15L移入頭輪山。剃染於縞衣禪師室。受具
010_1057_b_16L於玩海大師壇。受敎於信月鐵船聞庵
010_1057_b_17L龍淵華潭草衣忍庵性潭縞衣等。九大法
010_1057_b_18L師法筵。受法印於縞衣師。受大乘菩薩
010_1057_b_19L戒於草衣師。蓮香已矣。梅且熟也。揔
010_1057_b_20L攝湖南。守護表忠。奪性潭忍庵之禪席。
010_1057_b_21L照草衣之工巧。開口則千佛萬偈。次第
010_1057_b_22L而流出。動手則十目八字。健羨而驚怛。
010_1057_b_23L所憎者。爻象。所樂者。寂靜。趙信庵。銘其
010_1057_b_24L號。申白坡。賛其象。嘉慶二十一年。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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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7_c_01L순조대왕 16년 병자(1816) 12월 10일 술시戌時(오후 7시~9시)에 태어나 광서光緖 12년 병술(고종 23, 1886) 8월 15일 축시丑時(오전 1시~3시)에 적멸을 보였으니, 세속 나이는 71세이고 법랍은 55년이었다.법등을 전해 받은 제자는 두 명이니, 복암 관준福庵寬準 스님은 속성이 박씨이고 노호路湖 포전蒲田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표충사도총섭表忠祠都摠攝의 직책을 역임하였으며, 석담 치일石潭致一 스님은 속성은 박씨이고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를 받고 주지의 소임을 역임하였다. 계를 받은 제자는 복헌福憲과 복운福雲 등 15명이고, 스님의 작은 영정 1축軸이 전해 온다.혜봉선사전惠峰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이순爾順이고 호는 혜봉惠峰이며, 속성은 노盧씨이고 낭주朗州(영암) 통호通湖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릴 때 달마산으로 들어가 호기好奇 장로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쌍연雙連(性貫) 대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학문이 원만해지고 도의 경지가 높아지자 쌍연 성관雙蓮性貫 대사의 조당祖堂에 들어가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혜봉 스님은 설봉雪峯 스님의 6대 법손이고 연파蓮坡 스님의 3대 법손이다.가경嘉慶 21년 순조純祖대왕 16년 병자(1816)에 태어나 광서光緖 7년 신사(고종 18, 1881) 정월 17일 해남 대둔사 남미륵암南彌勒庵에서 조용히 적멸을 보이시니, 소나무와 삼나무도 슬픔을 띠고 구름도 노을도 오열하였다. 세속 나이는 66세이고 법랍은 51년이었다.스님에게 계를 받은 제자는 12명이고 법등을 전해 받은 제자로는 지월智月·능환能環·원월圓月·세영世英·보응普應·응오應悟 등이 있다.스님의 천성은 따뜻하고 어질었으며 덕망德望은 멀리까지 알려졌다. 말을 하면 감미로웠고 몸을 움직이면 착한 일을 하였다. 분노에 찬 기색이 전혀 없고 늘 자애롭고 인자한 표정으로 사람을 대하였다. 몸집은 근간이 풍후豊厚하고 모발은 검푸른 빛을 띠었다. “너의 조상에 염려를 끼치는 일이 없으니 이에 자손이 번성한다.(無念爾祖。 寔繁有徒。)”라고 한 옛말을 여기에서 징험할 수 있었다. -
010_1057_c_01L祖大王十六年丙子十二月十日戌時生。
010_1057_c_02L光緖十二年丙戌八月十五日丑時。示寂。
010_1057_c_03L世壽七十一。法臘五十五。傳燈弟子。有
010_1057_c_04L二。福庵寬準。姓朴氏。路湖蒲田人。行
010_1057_c_05L表忠祠都揔攝。石潭致一。姓朴氏。贈
010_1057_c_06L3)資 [56] 大夫。行住持。受戒弟子。福憲福雲
010_1057_c_07L等十五人。有小照一軸。
010_1057_c_08L
010_1057_c_09L惠峰禪師傳
010_1057_c_10L師名爾順。號惠峰。姓盧氏。朗州通湖
010_1057_c_11L人。幼入達摩。剃染於好奇長老之室。
010_1057_c_12L受具於雙連大師之壇。學圓道高。拈香
010_1057_c_13L於雙蓮性貫之堂。雪峯之六世。蓮坡之
010_1057_c_14L三世。嘉慶二十一年。純祖大王十六年
010_1057_c_15L丙子生。光緖七年辛巳正月十七日。海
010_1057_c_16L南大芚寺南彌勒庵。泊然而示寂。松杉
010_1057_c_17L帶愁。雲烟感咽。世壽六十六。法臘五
010_1057_c_18L十一。受戒者。十二人。傳燈者。智月能
010_1057_c_19L環圓月世英普應應悟。師賦性溫良。德
010_1057_c_20L望遠達。言吐則甘。身動則善。無忿怒
010_1057_c_21L之色。每發慈仁之談。軀榦豊厚。毛髮
010_1057_c_22L4)甘 [57] 綠。無念爾祖。寔繁有徒。於斯可驗。
010_1057_c_23L「愛」甲本正誤表作「受」。「弛」甲本正誤表
010_1057_c_24L作「陀」。「資」下甲本正誤表有「憲」。「甘」甲
010_1057_c_25L本正誤表作「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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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8_a_01L스님의 법제자 지월은 만덕산에 머물고 있었고 원월은 금강산에 머물고 있었으며, 보응 스님은 보은報恩에 머물고 있었다. “영리한 토끼는 굴 세 개를 파놓고 위기를 모면한다.”라고 하였는데, 이 세 명의 제자가 우연하게도 저절로 그런 모습을 이루고 있었다.운파선사전雲坡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익화益化이고 호는 운파雲坡이며, 속성은 문文씨이고 청해淸海 장자리長者里에서 출생한 사람이다.14세에 두륜산으로 들어가 속세를 떠날 뜻을 굳히고, 16세에 영철永哲 장로에 의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지허知虛 선사에게서 계를 받았다. 스님은 은사인 영철 스님이 일찍 입적하자 할아버지 스승(祖師)의 양성養性에 전적으로 의지하였으며, 동서로 돌아다니며 공부를 하긴 했지만 그저 성명姓名이나 쓸 정도였다.진불암眞佛庵으로 철선鐵船 스님을 찾아 배알하고 사집四集과 선교禪敎의 연원을 깊이 탐구하고, 북암北庵의 문암聞庵 스님을 참문參聞하고 사교四敎의 깊고 옅은 계제階際를 광범위하게 들었다.다시 이사무애理事無碍의 속제俗諦에 들어갔으니, ‘만약 산중에서 종자기鍾子期를 만났더라면 어찌 누런 나뭇잎을 가지고 산 아래로 내려왔겠는가?’라는 의미와 같은 격이요, 오래도록 사사무애事事無碍의 법계法界에 놀았으니, ‘나고 죽는 고통의 바다에서 자비로 뗏목을 만들고 번뇌의 산 앞에서 지혜로 등불을 만든다’는 격이다.용파 영훤龍坡永烜 스님의 조실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었는데, 용파 스님은 만허 색척萬虛賾陟 스님의 법제자이고 만허 스님은 명진 진봉明眞珎峰 스님의 법제자이며, 진봉 스님은 설봉雪峯 스님의 법제자이다.운파 스님의 제자로는 동화 경운東化敬雲 스님이 있으니 속성은 임林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손자 제자로 원응 계정圓應戒定 스님이 있으니 속성은 허許씨이고 해남 녹산방鹿山坊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손자 제자 원응 스님은 문장과 글씨가 모두 뛰어나고 교화敎化의 문을 활짝 열어 ‘쪽에서 푸른 물감이 나왔으나 그 색이 쪽보다 더 진하다’는 것과 같으니 사람이 어찌 숨길 수 있겠는가?스님은 성품이 엄격하고 냉정하며 고담枯淡하여 삿되고 왜곡된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더욱이 범음을 잘하여 그것을 배우려는 이들이 방 안을 가득 채웠으니, 범음은 자행慈行 스님과 대호大湖 스님의 유풍遺風이다.스님은 주로 서동사瑞桐寺·보적사寶積寺·은적사隱跡寺 등에 주석하였으며, 수인사修仁寺에 머물 때에는 당우堂宇를 보수하였고 낙서사樂捿寺에 머물 적에는 암자와 전당殿堂을 새로 짓기도 하였다. 삼각산에 들어가서 혜봉惠峰 스님과 나이를 잊고 교제하였고 도총섭의 직첩을 받기도 하였다. 익윤翼允 스님이 운파 스님에게 코를 잡고 흉내를 내는 범패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
010_1058_a_01L智在萬德。圓在金剛。普在報恩。狡兎
010_1058_a_02L三穴。偶然自成。
010_1058_a_03L
010_1058_a_04L雲坡禪師傳
010_1058_a_05L師名益化。號雲坡。姓文氏。淸海長者
010_1058_a_06L里人。十四。入頭輪山。堅志厭俗。十六。
010_1058_a_07L染衣於永哲長老。受戒於知虛禪師。早
010_1058_a_08L哭恩師永哲長老。全恃祖師養性。僉知
010_1058_a_09L遊學東西。惟記姓名。尋鐵船師於眞佛。
010_1058_a_10L深探四集禪敎之淵源。叅聞庵師於北
010_1058_a_11L庵。博聞四敎淺深之階際。還入理事無
010_1058_a_12L碍之俗諦。若也山中逢子期。豈將黃葉
010_1058_a_13L下山下之意也。長遊事事無碍之法界。
010_1058_a_14L死生海內悲爲栰。煩惱山前智作燈之
010_1058_a_15L格也。拈香於龍坡永烜之室。龍坡。萬虛
010_1058_a_16L賾陟之子。明眞珎峰之子。珎峰。雪峰之
010_1058_a_17L子。師有弟子。東化敬雲。姓林氏。靈岩
010_1058_a_18L人。孫弟子。有圓應戒定。姓許氏。海南
010_1058_a_19L鹿山坊人。文筆雙運。開敎化門。靑藍
010_1058_a_20L絳茜。人焉1)瘦 [58] 哉。師。性嚴冷枯淡。不忍
010_1058_a_21L邪曲。尤能梵聲。效者盈室。慈行大湖
010_1058_a_22L之遺風。住瑞桐寶積隱跡。住修仁。改
010_1058_a_23L修堂宇。住樂捿。改作庵堂。入三角山。
010_1058_a_24L慧峯爲忘年交。行都揔攝。翼允受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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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8_b_01L정묘년(1867) 겨울에 혜慧 자를 받고 갑술년(1874) 봄에는 민敏 자를 받았다.운파 스님은 가경嘉慶 23년 무인(순조 18, 1818)에 태어나 광서光緖 원년 을해(고종 12, 1875) 12월 20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 조용히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는 58세이고 법랍은 41년이었다. 스님의 작은 진영이 있는데 용완龍玩 스님이 그리고 석치石痴가 색칠을 고쳤으며, 백파白坡가 찬문과 서문을 지었다.보경선사전寶鏡禪師傳스님의 법명은 혜경慧璟이고 호는 보경寶鏡이며, 용담龍潭(진안군 용담면)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가경嘉慶 기묘년(순조 19, 1819)에 태어났다.16세에 불명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으며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에 여러 강당을 참예하며 두루 경학經學을 공부하였으며, 지방으로 돌아다니기를 겨우 마치자마자 춘담 대연春潭大演 선사의 조실에서 법위法位를 이어받았다.스님의 계파를 말하자면 청허淸虛에서 정관靜觀, 정관에서 임성任性, 임성에서 원응圓應, 원응에서 추계秋溪, 추계에서 무경無竟, 무경에서 운봉雲峯, 운봉에서 반룡蟠龍, 반룡에서 낙암樂庵에 이르고 다시 낙암에서 임성 천성任城天性, 임성에서 낙봉 대인樂峰大仁으로 이어졌으니, 춘담 대연은 곧 서산西山 대사의 13대 법손이 된다.스님은 뒷날 불명산 화암사華庵寺로부터 공주 마곡사麻谷寺로 거주처를 옮겨 스승과 제자가 함께 살았으며, 내재內財(學德)와 외재外財(財物)를 구족하였다. 스님은 『식화전殖貨傳』을 많이 읽었다. 갑오년(1894) 현재 보경 스님은 살아 계시며 그의 나이는 76세이다.우담강백전優曇講伯傳스님의 법명은 우행禹行이고 자字는 홍기洪基이며, 호는 우담優曇이고 속성은 권權씨로, 안동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중국重國이고 어머니는 조趙씨이다. 도광道光 임오년(순조 22, 1822) 3월 3일에 태어났다.태어날 때부터 영특하고 숙성하였고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영리하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다. 지학志學(15세)의 나이에 마음으로 출가할 것을 맹세했으나 부모가 선뜻 마음이 내키지 아니하여 허락하지 않으므로 석가모니부처님이 몰래 왕성을 넘어 출가한 인연을 가만히 생각하다가 어느 날 집을 나서 순흥 희방사喜方寺를 찾아가 자신自信 장로에게 의지하여 머리를 깎고 장삼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우담 스님은 스스로 보조普照 스님의 초심장初心章(誡初心學人文)과 -
010_1058_b_01L鼻傳。度慧字於丁卯冬。度敏字於甲戌
010_1058_b_02L春。嘉慶二十三年戊寅生。光緖元玍乙
010_1058_b_03L亥十二月二十日巳時。泊然而寂。世壽
010_1058_b_04L五十八。法臈四十有一。小照龍琓描。
010_1058_b_05L石痴改彩。白坡賛幷書。
010_1058_b_06L
010_1058_b_07L實鏡禪師傳
010_1058_b_08L師名慧璟。號寶鏡。龍潭人。嘉慶己卯
010_1058_b_09L生。十六投2)拂 [59] 明山。剃染受具。叅諸講
010_1058_b_10L堂。遊方才畢。受法位於春潭大演禪師
010_1058_b_11L堂。言其派系。則淸虛靜觀任性圓應秋
010_1058_b_12L溪無竟雲峯蟠龍樂庵。及任城天性樂
010_1058_b_13L峰大仁。春潭大演。乃西山之十三世也。
010_1058_b_14L自佛山華庵寺。移居公州麻谷寺。師子
010_1058_b_15L并居。外內財具足。多讀貨殖傳。甲午
010_1058_b_16L生。存年七十六。
010_1058_b_17L
010_1058_b_18L優曇講伯傳
010_1058_b_19L師名禹行。字洪基。號優曇也。姓權氏。
010_1058_b_20L安東人。父重國。母趙氏。道光壬午三
010_1058_b_21L月三日生。生而頴達夙成。幼而敏悟好
010_1058_b_22L學。志學之年。誓心出家。父母。靳持不
010_1058_b_23L許。窃念踰城之緣。尋順興3)希芳 [60] 寺。依
010_1058_b_24L自信長老。圓頂方袍。自閱普昭初心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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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8_c_01L원효元曉 스님의 발심장發心章(發心修行章)과 야운野雲 스님의 자경장自警章(自警文) 등을 열람하였다. 그러고는 마음이 맞는 도반들과 팔공산으로 혼허渾虛 선사를 찾아가 사교四敎를 배우다가 홀연히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선지식들을 만나 볼 마음이 생겨 고찰과 유적지 등을 두루 돌아보았으니, 호연浩然한 기상이 마치 구름이 용을 좇아 일어나고 바람이 호랑이를 따라 일어나는 것과 같았다.스님은 옛 수선사에 이르러 지봉智峰 선사의 조실에 발길을 멈추고 머물면서 침명枕溟 화상이 강론하는 자리에서 교학을 공부하였다. 인파仁坡 율사의 계단에서 선을 배웠으며, 연월蓮月 선사의 도량에서 향을 사르고 의발을 전해 받은 뒤 개당開堂하고 설법을 시작했다.우담 스님이 강당 문을 열고 앉으니 영동·영서·호서·호남 지방에서 책궤를 짊어지고 자신의 가치를 알아보려고 풀숲을 헤치고 불조佛祖의 가풍을 우러러 찾아오는 학도들이 밀려들었다. 스님은 마치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리는 것처럼, 오랑캐가 거울 앞에 서면 오랑캐가 보이고 한인漢人이 거울 앞에 서면 한인이 보이듯이 상대의 근기에 맞추어 자재自在하게 법을 설했다.고려조에 진정 부암眞靜浮庵이 『선문강요禪門綱要』 1권을 지었는데, 이로 인하여 백파白坡 노장이 『선문수경禪門手鏡』 1권을 지었으며, 다시 이로 인하여 초의草衣 노장이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辯漫語』 1권을 지었고, 이로 인하여 설두雪竇 스님이 『해정록楷正錄』 1권을 지었으니, 이 네 분 스님이 지은 네 권의 책은 장차 이 세상에 크게 드러날 것이다.스님의 문인 제자로는 담화 관훈曇華寬訓이 있다. 스님은 도광道光 2년 임오(순조 22, 1822)에 태어나 광서光緖 6년 신사(고종 18, 1881) 9월 8일에 입적하였으니, 세속 나이로는 60세이고 승랍은 45년이었다.화월선사전化月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숙홍淑葒이고 호는 화월化月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릴 때에 해남 두륜산에 들어가 서주犀舟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
010_1058_c_01L元曉發心章。野雲自警章。與心友道伴。
010_1058_c_02L訪八公山渾虛禪師。受四敎。忽有叅師。
010_1058_c_03L遊方之意。人之眞4)必 [61] 跡之古。必5)諸 [62]
010_1058_c_04L浩然若雲從龍風從虎之氣。依止於古
010_1058_c_05L之修禪社。智峰禪師室中。受敎於枕溟
010_1058_c_06L和尙講筵。受禪於仁坡律師戒壇。拈香
010_1058_c_07L開堂於蓮月禪師道場。開門而坐嶺東
010_1058_c_08L西湖西南。負笈售6)賈 [63] 之人。跋草瞻風
010_1058_c_09L而至。應大小叩。窺胡漢鏡。麗朝眞靜
010_1058_c_10L浮庵。作禪門綱要一卷。因此。白坡老。
010_1058_c_11L作禪文手鏡一卷。因此。草衣老。作四辨
010_1058_c_12L漫語一卷。因此。優曇師。作禪門證正錄
010_1058_c_13L一卷。因此。雪竇師。作楷正錄一卷。此
010_1058_c_14L四師四卷。將顯於世也。門人弟子。曇
010_1058_c_15L華寬訓。道光二年壬午生。光緖六年辛
010_1058_c_16L巳九月初八日。入寂。世壽六十。僧臈四
010_1058_c_17L十五。
010_1058_c_18L
010_1058_c_19L化月禪師傳
010_1058_c_20L師名淑葒。號化月。姓金氏。靈岩人。幼
010_1058_c_21L入海南頭輪山。剃頭於𡱝舟禪師室。受
010_1058_c_22L「瘦」甲本正誤表作「廋」。「拂」甲本正誤表
010_1058_c_23L作「佛」。「希芳」甲本正誤表作「喜方」。「必」
010_1058_c_24L下甲本正誤表有「尋」。「諸」甲本正誤表作
010_1058_c_25L「詣」。「賈」甲本正誤表作「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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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9_a_01L철선鐵船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은 뒤 산내에 있는 암자인 북암北庵·진불암眞佛庵·상원암上院庵의 강석을 돌아다니며 경전을 독송하고 베껴 쓰고 보느라 하루 종일 한가한 틈이 없었다.마침내 은사恩師(犀舟)의 책상 앞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은 후 강진 보리산으로 들어가 솔잎을 먹고 풀옷을 걸친 채 보낸 세월이 30여 년이었다. 스님에게서 많은 신남信男과 신녀信女들도 오디를 먹은 이가 많았으며, 사미와 비구로 계를 받은 이도 많았다.스님은 어진 사람을 친근히 하고 좋은 이들을 이웃으로 하여 그 명성이 널리 퍼졌으니, 이는 가히 ‘명성을 피할수록 명성은 더욱 따르고 이름을 감출수록 이름이 나를 따른다’고 한 말과 같다고 하겠다. 지난 날 솔잎을 양식으로 삼고 지난 날 풀을 엮어 옷으로 삼았던 까닭에 네 가지 인연토지土地(수행 장소)와의 인연, 납자衲子(도반)들과의 인연, 시주施主와의 인연, 외적 시설과의 인연이 구족具足한 것임을 알 수 있겠다.화월 스님은 가경嘉慶 경진년(순조 20, 1820)에 태어나 광서光緖 병술년(고종 23, 1886)에 입적하였으니, 세속의 나이로는 67세이고 승랍僧臘은 51년이었다.스님은 평소 행실과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한결같이 옛 법을 기준으로 삼았으며, 글씨도 잘 썼고 말재주도 뛰어나 닥치는 경계마다 막힘이 없었다. 스님은 사중寺中의 재물을 함부로 쓰지 않았고 옷 또한 화려하게 입지 않았으므로 어릴 때부터 죽는 날까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은 적이 없었다.스님에게 법을 전해 받은 사람은 34명이고 계를 받은 사람은 20여 명 남짓하였으며, 선법을 전해 받은 사람은 31명이고 수은受恩 제자는 한두 명이었으며, 사숙私淑한 이는 매우 많았다.기봉선사전騎峯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장선壯善이고 호는 기봉騎峯이며, 속성은 ▣씨이고 전남 동복同福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일찍이 월출산으로 들어가 자원하여 스님이 되었으며, 침송 회성枕松會聖 대사의 조실에서 구족계를 받고 문암聞庵 강주의 강당에서 법인을 전해 받았다. 스님은 강론 방법에 있어서 깊이 궁리하였고 그림 그리는 솜씨가 정교하였다. 화법畫法은 도현道玄20)과 원장元章21)의 기교를 본받았고, 지혜는 율호律虎 스님과 의룡義龍 스님을 참방參訪하여 터득했다.스님은 혹은 표충사의 수호총섭 직책을 맡아 주관하였으며, 보리산의 전좌典座를 맡아보기도 하였다. 원효암元曉庵·유마사維摩寺·수인사修仁寺·정관암鼎丳庵은 스님이 주석했던 곳이고, 도갑사道甲寺와 대둔사大芚寺는 무구無口의 고향22)이다. -
010_1059_a_01L具於鐵船禪師壇。從遊北庵眞佛上院
010_1059_a_02L講席。讀誦書寫。看經日不暇給。拈香
010_1059_a_03L於受恩師榻。移入於康津菩提山。食松
010_1059_a_04L草衣。送月迎日者。三十餘年。信男信
010_1059_a_05L女之食葚者。多矣。沙彌比丘之受火者。
010_1059_a_06L衆也。親仁善隣。聲名溢高。可謂避聲
010_1059_a_07L聲我隨。逃名名我逐者也。前日之松爲
010_1059_a_08L粟。前日之草爲衣。四緣土地緣衲子緣
施主緣外設緣具
010_1059_a_09L足。以此可覺也。嘉慶庚辰生。光緖丙
010_1059_a_10L戌寂。世壽六十七。僧臘五十一。師行
010_1059_a_11L身處事。一準古法。善筆善談。適當境
010_1059_a_12L界。財不濫用。衣不濫着。自幼至終。人
010_1059_a_13L無至非。傳法人。三四座。傳戒人。二十有
010_1059_a_14L餘。傳禪人。三十一人。受恩者。一二人。
010_1059_a_15L私淑衆多。
010_1059_a_16L
010_1059_a_17L騎峯禪1)師 [64]
010_1059_a_18L師名壯善。號騎峯。姓□氏。同福人。早
010_1059_a_19L入月出山。自願爲僧。受具於枕松會聖
010_1059_a_20L大師之室。得法印於聞庵講主之堂。尋
010_1059_a_21L竆講伯。術精畫法。徃效於道玄元章之
010_1059_a_22L巧。叅訪於律虎義龍之智。或表忠祠之
010_1059_a_23L主管。或菩提山之典座。元曉維摩修
010_1059_a_24L仁鼎丳住錫之地。道甲大芚。無口之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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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9_b_01L스님에게는 제자 두 명이 있는데 남하 성연南河性衍은 불갑사佛甲寺, 환명 경운煥溟敬雲은 도갑사 스님이다. 계를 준 제자와 선법을 준 제자들은 매우 많으니 어떻게 누구누구라고 이름을 들어 말할 수 있겠는가.환허강백전幻虛講伯傳스님의 법명은 봉규奉奎이고 자字는 문일文一이며, 호는 환허幻虛이고 전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린 나이에 불명산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지식이 남보다 뛰어나고 문장이 남보다 월등하였다. 강론하는 자리면 어디든 참예하여 학문을 익혔으며, 뒤에 용선龍船 선사로부터 불조佛祖의 법인을 받았으니, 곧 영파 성규影波聖奎 대사의 6대 법손이다.환허 스님은 대중들을 불러 모으지 않아도 대중들이 저절로 찾아왔으니 유마의 방(維摩之室)은 오히려 좁았고,23) 중향성衆香城의 음식이 부족할 지경이었다.24) 삼장三藏의 가르침을 열어 보였고 삼학三學의 이치를 찾아 보여 주었다. 스님은 고기도 고기를 잡는 통발도 모두 버리고 몸과 마음을 친구로 삼아 마음을 다스려 반려伴侶로 삼았다.스님은 임오년~계미년(1882~1883) 사이에 포련布蓮·용운龍雲·용명龍溟 등 대종사들과 더불어 화주를 하여 돈을 모아 금산사金山寺 장육금신丈六金身의 개금불사를 돕기도 하였다.불명산 화암사華岩寺는 일명 보당산寶幢山 정혜사定慧寺라고도 한다. 지금 환허 스님이 이 절에 있는데, 나이가 63세이다. 스님에게 선등禪燈을 전해 받은 제자들은 그 이름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함명강백전涵溟講伯傳스님의 법명은 대현台現이고 호는 함명涵溟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화순읍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어머니는 동복同福 오吳씨이다. 어머니가 범승梵僧 만나는 꿈을 꾸고 낳았다고 한다.어릴 적부터 비린 음식을 싫어하였고 성장해서는 스님 되기를 소원하더니, 마침내 14세에 장성 백양산으로 출가하여 풍곡 덕인豊谷德仁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도암道菴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침명枕溟 강백이 강론하는 자리에서 선참禪懺을 받았으며, 풍곡 법사의 조당祖堂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 -
010_1059_b_01L弟子有二人。南河性衍。佛甲人。煥溟
010_1059_b_02L敬。道甲人。傳戒傳禪。何必名某。
010_1059_b_03L
010_1059_b_04L幻虛講伯傳
010_1059_b_05L師名奉奎。字文一。號幻虛。全州人。早
010_1059_b_06L入佛明山。剃髮受具。知識卓犖。文章
010_1059_b_07L超等。尋諸名山。叅於講肆。得佛侯印
010_1059_b_08L於龍船禪師。即影坡聖奎大師之六世
010_1059_b_09L孫也。不召衆而衆自至。維摩之室。猶隘
010_1059_b_10L衆香之飯不足。開三藏之敎。覓三學之
010_1059_b_11L理。魚筏俱離。心身作友。治心。爲作伴
010_1059_b_12L侶。壬午癸未之間。與布蓮龍雲龍溟。諸
010_1059_b_13L大宗師。化財補金於金山丈六金身之
010_1059_b_14L事。佛明山華岩寺。一名寶幢山慧定寺。
010_1059_b_15L時師在此寺。年六十三。受戒禪燈者。
010_1059_b_16L未詳名某。
010_1059_b_17L
010_1059_b_18L涵溟講伯傳
010_1059_b_19L師名台現。號涵溟。姓密陽朴氏。和順
010_1059_b_20L邑人。母同福吳氏。母夢梵僧而生。幼
010_1059_b_21L而厭腥。長而願僧。十四。出家於長城白
010_1059_b_22L羊山。剃染於豊谷德仁禪師之室。受具
010_1059_b_23L足戒於道菴禪師之壇。受禪懺於枕溟
010_1059_b_24L講伯之座。拈香於恩師豊谷法師之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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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59_c_01L스님은 천성적으로 똑똑하기가 어느 누구도 비교할 수 없었으며, 경전을 이해하는 지식이 널리 통하였다. 공부를 함에 있어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고 말에 있어서는 남을 속이거나 화려하게 꾸며 대어 말하는 일이 없었다. 새로 제자가 되어 공부를 하겠다는 사람을 만나면 예전부터 알던 사람을 만난 듯이 반겼으며, 다른 곳으로 옮겨 갈 때에는 항상 향등香燈을 보여 주곤 하였다.강의하는 규칙은 엄격하면서도 명백하였으며 재齋를 올리는 법에 대해서도 역시 엄숙하면서도 조용하였다. 학인들을 지도한 지 30여 년이 되자 스님의 명성이 여러 지방에까지 퍼져서 전국에서 많은 스님들이 몰려와 한마음이 되어 공부를 하였다. 이는 아마도 백암栢庵 스님과 무용無用 스님의 유풍遺風인 것 같기도 하고, 설암雪岩 스님과 상월霜月 스님의 여향餘香인 것 같기도 하다.예전에는 왼쪽에는 형암荊庵이요 오른쪽에는 양악羊岳이라 하였고, 중간 시대에는 오른쪽에 백파白坡요 왼쪽에는 침명枕溟이라 하더니, 지금은 오른쪽에는 설두雪竇요 왼쪽에는 함명涵溟이라고들 말한다. 마치 옛날 중국에서 북쪽에는 신수神秀요 남쪽에는 혜능慧能이라고 하던 때를 연상케 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귀가 가렵고 이런 말을 하면 혀가 매끄러우니 어찌 사람들로 하여금 이다지도 흠모하게 한 것인가?스님의 제자로는 경붕 익운景鵬益運이 있다. 석옥石屋 화상이 태고太古 스님에게 의발을 전하면서 말하기를, “늙은 중이 오늘 발을 뻗고 잘 수 있겠구나.”라고 했던 옛일이 생각난다.경붕 스님에게도 제자가 있었으니 경운 원기擎雲元奇이다. 일찍이 일행一行 선사가 말하기를, “골짜기의 물이 거꾸로 흐르면 내가 도를 전해 줄 사람이 올 것이다.”라고 예언을 한 적이 있었는데, 도선道詵 스님이 홀연히 와서 그의 술법術法을 다 배워가지고 가게 되자 일행 스님이 이별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도가 동쪽으로 가는구나.”라고 하였던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인 듯하다.저들이 산문에 들어와서 스님이 된 이래로 단 한 가지도 증득하여 깨달음이 없이 도리어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고 강론을 훼방하는 한편 받기만 하고 전해 주지 못하는 자들은 이러한 법 전한 이야기를 듣고 어찌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백파·침명·응화應化·우담優曇이 차례로 적멸을 보이자 함명·설두·경담鏡潭·연주蓮舟·퇴은退隱·휴암休庵이 두려워하는 것은 향방처向榜處가 없어서이니, 애석한 일이다.스님은 도광道光 4년 갑신(순조 24, 1824) 9월 9일에 태어났다. 그의 계파를 살펴보면 청허 휴정淸虛休靜에서 편양 언기鞭羊彥機, 편양에서 풍담 의심楓潭義諶, 풍담에서 월저 도안月渚道安, 월저에서 설암 추붕雪岩秋鵬, 설암에서 상월 새봉霜月璽篈, 상월에서 용담 조관龍潭慥冠, 용담에서 규암 낭성圭岩朗城, 규암에서 서월 거감瑞月巨鑑, 서월에서 회운 진환會雲振桓, 회운에서 원담 내원圓潭乃圓, 원담에서 풍곡 덕인豊谷德仁, 풍곡에서 함명 태선涵溟太先, 함명에서 경붕 익운景鵬益運, 경붕에서 -
010_1059_c_01L師。性敏悟絕倫。知解博達。工不虛送天
010_1059_c_02L日。言不謾餙綺語。新見請益者。如舊
010_1059_c_03L相識。每送移去者。常見香燈。講䂓嚴
010_1059_c_04L明。齋法2)爾 [65] 靜。三十年開導。聞於諸方。
010_1059_c_05L八方來衆僧。合於一心。栢庵無用之遺
010_1059_c_06L風歟。雪岩霜月之餘香歟。古有左荊庵
010_1059_c_07L右羊岳。中有右白坡左枕溟。今有右雪
010_1059_c_08L竇左涵溟。如昔之北秀南能。聞之耳痒。
010_1059_c_09L言之舌滑。何其令人之欽慕哉。有弟子
010_1059_c_10L曰。景鵬益運。石屋。傳衣於太古曰。老
010_1059_c_11L僧今日。展脚而睡矣。是也。景鵬。有弟
010_1059_c_12L子曰。擎雲元奇。一行甞曰。洞水逆流。
010_1059_c_13L則傳吾道者來。道詵忽來。盡得其術而
010_1059_c_14L去。別曰。吾道東矣。是也。彼入山披緇。
010_1059_c_15L一無證悟。毁敎謗講。有受而不傳者。不
010_1059_c_16L愧夫心哉。白坡枕溟應化優曇。輪次
010_1059_c_17L示寂。涵溟雪竇鏡潭蓮舟退隱休庵。可
010_1059_c_18L畏者。無向榜處。惜哉。道光四年甲申
010_1059_c_19L九月初九日生。派系淸虛休靜。鞭羊彥
010_1059_c_20L機。楓潭義諶。月渚道安。雪岩秋鵬。霜月璽
010_1059_c_21L篈。龍潭慥冠。圭岩朗城。瑞月巨鑑。會雲振
010_1059_c_22L桓。圓潭乃圓。豊谷德仁。涵溟太先。景鵬益
010_1059_c_23L「師」下甲本正誤表有「傳」。「爾」甲本正誤
010_1059_c_24L表作「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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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0_a_01L경운 원기擎雲元奇로 이어져 왔다.설두강백전雪竇講伯傳스님의 법명은 봉기奉琪이고 호는 설두雪竇이며, 속성은 완산完山 이씨이고 옥과玉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17세 때에 장성 백양산으로 출가하여 정관 쾌일正觀快逸 대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이어 백암 도원白岩道圓 율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침명枕溟 강주의 탑상榻床 아래에서 선참禪懺을 받았으며, 백암白岩 계사의 조당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일찍이 속가 서당(黌舍)을 찾아가서 태사사太史史(司馬遷)의 『사기』와 소미서少微書(『通鑑節要』)를 배웠는데, 그때 고추古錐(서당 선생님)에게 사집四集과 삼경三經의 의미를 판별해 달라고 떼를 써 간청하여 스승을 당혹하게 한 적도 있었다. 침명 스님이 강론하는 자리를 찾아가서 사교四敎의 의문점을 증득하였고, 백파 스님의 회상을 참알하고 대교大敎의 관문을 해결하였다. 이 회상에서 한 가닥 담병談柄(화두)을 받고 일곱 자의 포단蒲團(방석)에 앉아 탐구하였다.설두 스님은 불갑사佛甲寺에 머물러 있으면서 황폐한 사찰의 면모를 일신시킨 다음 용흥사龍興寺에 옮겨 가서 사찰의 낡은 곳을 뜯어내고 새롭게 짓는 일을 하였다. 또한 대기대용비大機大用碑(백파 긍선 스님의 비석)를 세우고 어제어필御製御筆의 전각을 지었으며, 큰 글자로 간행한 『기신론起信論』의 예를 본받아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 판목板木을 주선하였다.사계절도 제 할 일을 마치면 물러가는 법인가? 월주越州의 탑이 건립되자 허현도許玄度25)가 세상을 버렸던가? 하늘에서 큰소리로 알려 주지 않았더라면 그 누가 김대성金大城이 다시 온 것과 지안志安 스님이 다시 온 줄을 알겠는가?스님의 저서인 『해정록楷正錄』 1권은 문장이 엄밀하고 그 뜻이 정확하여 일단 대단한 논리임은 분명하나 백옥白玉에도 흠집은 조금 있는 법이다. 자신의 글 중에 잘못된 곳에 자평自評을 달아 놓은 것을 모아 내게(각안) 보내왔으니 “어떻게 하면 다시 스님을 살아나게 하여 마주 앉아서 한바탕 웃어 볼까나?”라고 했던, 추사가 쓴 「백파 선사 비명」 마지막 장의 내용과 정녕 비슷한 심정이구나.스님의 저술인 『통방정안通方正眼』·『선원소류禪門溯流』·『시집詩集』·『사기私記』는 문인들의 처소에 남아 있다.백파의 법맥은 구봉 인유龜峰仁裕에서 도봉 국찬道峰國燦, 도봉에서 정관 쾌일正觀快逸, 정관에서 백암 도원白岩道圓으로 전해 내려왔으며, 설두의 동문형제로는 보월 만익普月萬益과 영월 경문影月鏡文이 있으며, 문인은 어떤 이들이 있는지 자세하지 않다. -
010_1060_a_01L運。擎雲元奇。
010_1060_a_02L
010_1060_a_03L雪竇講伯傳
010_1060_a_04L師名奉琪。字有炯。號雪竇。姓完山李
010_1060_a_05L氏。玉果人。十七。出家於長城白羊山。
010_1060_a_06L剃染於正觀快逸大師室。受具於白岩
010_1060_a_07L道圓律師壇。受禪懺於枕溟講主榻。拈
010_1060_a_08L香於白岩戒師堂。早訪黌舍。學太史史
010_1060_a_09L少微書。强請古錐。辨四集義三經。謁枕
010_1060_a_10L溟席。證四敎之疑。叅白坡會。決大敎
010_1060_a_11L之關。傳一枝談柄。坐七尺蒲團。住佛
010_1060_a_12L甲寺。補闕拾遺。居龍興寺。掃舊迎新
010_1060_a_13L1)主 [66] 大機大用之碑。建2)禦 [67] 製*禦筆之閣。
010_1060_a_14L效起信論之大刊。設拈頌集之板役。四
010_1060_a_15L時之序。成功者去歟。越州之塔。許玄
010_1060_a_16L度去歟。天不唱告。誰知金大城之重來。
010_1060_a_17L志安之重來也。楷正錄一卷。辭嚴義直。
010_1060_a_18L一段大論。而少有白玉之玷。會自評送。
010_1060_a_19L安得再起。師來。相對一笑也。此是碑銘。
010_1060_a_20L卒章意正同也。通方正眼。禪門溯流。
010_1060_a_21L詩集。私記。在門人處。白坡門人。有龜
010_1060_a_22L峰仁裕。道峰國燦。正觀快逸。白岩道圓師。
010_1060_a_23L門兄弟。有普月萬益。影月鏡文師。門人。
010_1060_a_24L未詳誰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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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0_b_01L경담강사전鏡潭講師傳스님의 법명은 서관瑞寬이고 호는 경담鏡潭이다.백양산으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구암사龜岩寺(순창)의 백파 선백白坡禪伯을 찾아가 내전은 물론 외전까지 두루 섭렵하였다. 스님은 또 선암사仙巖寺에 머물러 계시던 침명枕溟 강백을 찾아가 계를 받고 선법을 전해 받았다.스님은 선지식 참방을 마친 뒤부터 선배들보다 도리어 앞 좌석에 앉게 되었고, 찾아오는 학인들이 먼 곳에서까지 몰려들었는데 스님은 항상 즐거워하면서 관대하게 대해 주었다. 나이가 점점 많아지고 힘이 차차 빠져서 학인들을 거절하였으나 그래도 물러가지 않고 남아 있자 마침내 어떤 제자에게 강석을 물려주었다. 제자가 강석을 물려받아 학인들을 제접提接하고부터 찾아오는 이를 거절하지 않고 떠나가는 이를 붙잡지 않아 손님과 주인이 모두 꺼리는 일이 없어졌다.이때부터 예를 올려야 할 때에는 예를 올리고 주문을 독송해야 할 때는 주문을 염송하며 자기의 일을 편안하게 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화목하고 원만하게 되었다. 입고 먹을 것 때문에 애쓰지 않아도 옷과 음식이 저절로 풍족했고 특별히 오래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올리지 않아도 스님의 나이는 고희古稀를 이미 지났다. ‘하늘은 먹고 살 것이 없는 사람을 내지 않는다(天不生無祿之人)’고 한 말을 스님에게서 증험할 수 있다.법손들도 많이 번성하였고 머리는 이미 백발이 되었으며, 몸은 편안하였고 도는 높아졌으니 사람들이 맨발로 따라간다 해도 스님에게는 도저히 미칠 수 없었다. 선법을 전해 주고 법통을 전해 준 제자들에 대해서와 언제 나서 언제 입적했는지에 대해서는 미리 앞서 기록할 수가 없다.용명선사전龍溟禪師傳스님의 법명은 각민覺敏이고 호는 용명龍溟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전주부全州府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스님은 성품이 대범하고 호탕하여 조그만 절차에 구애됨이 없고 마음자리는 호연浩然하며, 기질은 산과 강을 압도하였고 서원이 견고하였으며, 다스리는 기강은 엄격하고 장엄하였다.태산을 옆구리에 끼고 북쪽 바다를 뛰어넘는 일은 불가하나 그래도 해 보려고 노력하였고, 힘으로 산을 뽑고 기운이 세상을 덮는 것 또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나 그래도 해 보려고 애를 썼으니 기이할 정도이다. 우리 태조太祖대왕 이래로 나라는 팔도로 나뉘었고 매 도마다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뉘어 총 16개 지역으로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각 지역마다 십육종정 총섭규정十六宗正摠攝糾正을 두어 상사上司의 뜻을 받들게 하고 승가의 풍속을 바로잡게 하였다.전라도 금구金溝 금산사金山寺에는 여래의 사리를 봉안한 탑이 있었으므로 -
010_1060_b_01L鏡潭講師傳
010_1060_b_02L師名瑞寬。號鏡潭。出家於白羊山。祝
010_1060_b_03L髮受戒。叅龜岩白坡禪伯。學內外典。
010_1060_b_04L住3)仙。 [68] 枕溟講伯。受戒禪。叅訪乃了。反
010_1060_b_05L坐先席。有朋自遠來。樂而寬待之。年
010_1060_b_06L深力亡。拒而不退者。有之。遂傳講於人。
010_1060_b_07L而人受柄而提接之。來者不拒。去者不
010_1060_b_08L追。賓主無憚也。於是。禮之時禮之。呪
010_1060_b_09L之時呪之。自家之事。穩便。爲人之方。
010_1060_b_10L壅容。甚非所以料理。而衣食滋生。別
010_1060_b_11L不所以祝壽。而稀年已過。天不生無祿
010_1060_b_12L之人。從此可驗。諸孫詵詵。頭髮皤皤。
010_1060_b_13L身爲之安。道爲之高。人無脫足而及者。
010_1060_b_14L傳禪傳法。年之始終。不可預先述作。
010_1060_b_15L
010_1060_b_16L龍溟禪師傳
010_1060_b_17L師名覺敏。號龍溟。姓鄭氏。全州府人。
010_1060_b_18L性倜黨豪邁。不拘小節。心地浩然。氣
010_1060_b_19L壓岳凟。志願堅固。經紀嚴莊。挾太山。
010_1060_b_20L超北海。不能而欲爲之。力拔山。氣盖
010_1060_b_21L世。不能而欲爲之。異哉。自我太祖以
010_1060_b_22L來。國分八域。域分左右。每域贈二八。
010_1060_b_23L十六宗正揔攝糾正。所以奉上司。以正
010_1060_b_24L僧風。而全羅道。金溝金山寺。有如來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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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0_c_01L이를 수호하기 위하여 수호승통守護僧統을 두었는데 이를 우규정右糾正이라고 하였다. 광양 옥룡사玉龍寺에는 국사國師(道詵)의 비석과 탑이 봉안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수호하기 위하여 수호공원守護公員을 두었는데 이를 좌규정左糾正이라고 하였다. 이들 승직僧職은 승가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었는데, 세월이 오래됨에 따라 그 법이 느슨해져서 도리어 승려들의 폐단이 되고 있었다. 그러자 전라좌도와 전라우도에서 모의하여 규정소糾正所를 없애고 해남 표충사 승통僧統이 겸하도록 했는데, 겸행하는 승통이 일이 많고 업무가 번거롭다는 이유로 곧바로 예조禮曹에 보고하여 소임을 아예 없애 달라고 하였다.이에 각민 스님은 본도 우어사右御史를 통하여 서울로 올라가 머물면서 앞서 없애 버린 직책의 관인官印을 다시 만들어 가지고 돌아와 스스로 승통이 되어 좌우左右에 영을 시행하였으니 사람 중에 큰 인물이라 하겠다.그러니 누가 감히 용의 비늘을 거스를 것이며, 호랑이의 머리를 감싸 잡을 것인가? 승단에서는 용명 스님의 행위를 처음에는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종내에는 잘한 일이라고 하였다.스승의 법통을 이어받아 입실하면서 받은 호칭이 용명이다. 스님은 그 승통의 관인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물러나 별실別室에 기거하였다. 스님은 뜻을 세워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대종장大宗匠의 권한을 활용하였으니 겉모양만 보고 사람을 취할 일이 아니다. 옛날에 공자도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취하였다면 자우子羽26) 같은 인물을 잃을 뻔했다.”라고 했는데, 이제 여기에서 그 전례를 볼 수 있다.스님에게는 선법과 계를 전해 준 제자들이 많았다. 속인들과 스님들이 우러러 ‘스님 중에 용상龍象’이라고 찬탄했다. 더구나 스님은 국가의 명을 받들어 국태민안을 위하여 금산사金山寺에서 기도를 올렸고, 한라산에서도 기도를 하였으며, 백양사白羊寺에서도 기도를 올렸으니 훌륭하고 위대하다.영월선사전映月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윤영允英이고 호는 영월映月이다.운흥사雲興寺로 들어가 대운大雲 스님 처소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학당學堂을 드나들며 불교의 경전과 논論 등을 열람하였다. 절의 크고 작은 모든 일과 암자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빠짐없이 잘 살펴 처리하였다.스님은 조당祖堂에 올라 스승의 법통을 이어받고 입실한 다음 강당의 문을 열고 후학들을 맞이하여 가르침을 폈다. 행실은 자비로웠으나 위엄을 잃지 않았으며, 기개는 호걸스럽고 몸은 항상 가벼웠다. 그러나 일의 기미를 한번 놓치고 나서는 -
010_1060_c_01L利安塔。置守護僧統。穪右糾正。光陽
010_1060_c_02L玉龍寺。有國師碑塔奉安。置守護公
010_1060_c_03L員。穪左出正。釐正僧風。歲久法弛。還
010_1060_c_04L爲僧弊。左右合謀輩。破糾正所。兼行
010_1060_c_05L於海南表忠祠僧統矣。兼行僧統。事多
010_1060_c_06L蝟務。直報禮曹。鎖印永破。敏公。因本
010_1060_c_07L道右御史。留京周施。鑄印出差。自作
010_1060_c_08L僧統。行令左右。人之巨擘也。誰敢批龍
010_1060_c_09L鱗。扼虎頭哉。始則行螫。終乃食甚。嗣
010_1060_c_10L法入室。號穪龍溟。傳其印於他人。退
010_1060_c_11L處別室。立志行事。務用大宗匠之欛柄。
010_1060_c_12L以貌取人。失之子羽。以今可見。有傳法
010_1060_c_13L禪法戒弟子。緇素歎仰。僧中之龍象。
010_1060_c_14L以此言之。况奉命爲祝金山。爲祝漢拏。
010_1060_c_15L爲祝白羊。善哉偉哉。
010_1060_c_16L
010_1060_c_17L映月禪師傳
010_1060_c_18L師名允英。號映月。入雲興寺。剃染於
010_1060_c_19L大雲師處。出沒學堂。閱盡經4)綸。 [69] 寺中
010_1060_c_20L事。庵中5)寺。 [70] 揔察無遺。入室昇堂。開門
010_1060_c_21L迎賓。行慈振威。氣傑身輕。一失事機。
010_1060_c_22L「主」甲本正誤表作「立」。「禦」甲本正誤表
010_1060_c_23L作「御」次同。「仙」下甲本正誤表有「岩」。
010_1060_c_24L「綸」甲本正誤表作「論」。「寺」疑「事」{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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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1_a_01L지난 발자취를 회복하지 못했다. 텅 빈 산사에 아무도 없는데 냇물만 졸졸 흘러가고 꽃만 활짝 피어 있었다. 사찰의 운세가 막히고 선풍禪風도 고요하기만 했다. 표충사表忠祠를 주관하던 대흥사의 세력이 덕룡산德龍山(운흥사)을 기울게 하면서부터 해월海月 스님은 주석처를 옮겼고 청담淸潭 스님도 다른 산으로 옮겨갔다. 불각不覺에 기미가 미약해져서 후세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으며, 대대로 옛 건물만 지키다가 낙엽처럼 마침내 뿌리로 돌아가고 말았다.운흥사를 지날 때마다 타루비墮淚碑27)와 멸망한 진秦나라 들판의 옹중翁仲28)과 망한 진晋나라 조정의 동타銅駝29)가 생각난다.금곡강사전錦谷講師傳스님의 법명은 장홍壯弘이고 호는 금곡錦谷이며, 전남 나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스님은 쌍계사雙溪寺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염의染衣를 입고 스님이 되어 세속을 버리고 승가의 풍속을 따랐다. 스님이 된 뒤로 머리 위에는 흰 구름을 이고 발아래에는 맑은 냇물을 밟으며 허리에는 공화空花를 차고 다니거나 숨어 있었고, 세월 따라 장춘동長春洞에서 학문 연구에 몰입하였다.스님은 신월 호윤信月好閏과 법문法門의 형제지간이 되어 함께 사부를 찾다가 낭암 시연朗岩示演 스님을 찾아가 법을 이은 제자가 되었다. 완호玩虎 스님에게 경론의 의문점을 풀었고, 백파白坡 스님으로부터 선정의 길을 증득하였다.선대 스님들이 후학들에게 보여 주었던 가르침을 모아 꽃잎 떨어져 붉은빛 아롱진 나무 아래 자리를 잡으니 질문 있는 자들이 와서 의문점을 해결하곤 떠나갔다. 단상에 올라가 설법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왔으며, 반인飯人이 참예하고 강인講人이 돌아가곤 하는 사이에 해가 가고 달이 지나니, 나(금곡)도 게을러지고 학인들도 적어져서 휴강해도 별로 해로움이 없을 정도가 되자 덕 있는 제자에게 강석을 물려주었다.금곡 스님은 이후 참선(打眠)하는 것을 옳게 여기고 진언眞言을 독송하는 것을 서원 삼아 정진을 계속하였다. 많은 제자들에게 법을 전하였으며 득도시킨 스님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인간은 올 때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게 없고 갈 때에 또한 빈손으로 가는 법이다. 그러나 예불을 하고 경전을 독송한 공덕은 세간에 가득하여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보문선사전普門禪師傳스님의 법명은 묘환妙煥이고 호는 보문普門이며, 속성은 문文씨이고 강진에서 출생한 사람이다.달마산으로 출가하였으며 구족계를 받고 여러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학문을 익혔다. 학문의 눈이 통하여 밝아졌고 -
010_1061_a_01L未復覆轍。空山無人。水流花開。寺運
010_1061_a_02L丕泰。禪風寥寂。主管表忠。勢傾德龍。
010_1061_a_03L海月移錫。淸潭轉山。不覺幾微。貽笑
010_1061_a_04L後人。世守舊物。落葉歸根。過雲興寺。
010_1061_a_05L思墮淚碑。秦野之翁仲。晋廷之銅1)馳。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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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1_a_07L錦谷講師傳
010_1061_a_08L師名壯弘。號錦谷。羅州人。出家於雙
010_1061_a_09L溪。剃頭染衣。棄俗從僧。頭上所戴白
010_1061_a_10L雲。足下所履淸溪。腰包行藏空花。歲
010_1061_a_11L月入學長春。與信月好2)閨。 [72] 爲法門兄
010_1061_a_12L弟。徃覓師父。侍朗岩示演。爲嗣法弟
010_1061_a_13L子。解經。疑於玩虎。證禪。路於白坡。集
010_1061_a_14L先師。示後學。基落花斑紅樹底。3)間 [73] 者
010_1061_a_15L來。決者去。上壇了。下壇罷。飯人叅。
010_1061_a_16L講人歸。如是年。如是月。我亦懶。人亦
010_1061_a_17L少。休講無妨。傳講有德。打眠是可。誦
010_1061_a_18L呪是願。傳法有人。度僧無幾。來無一
010_1061_a_19L物來。去亦空手去。猶有禮佛轉經功德。
010_1061_a_20L滿世4)問 [74] 不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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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1_a_22L普門禪師傳
010_1061_a_23L師名5)妨 [75] 煥。號普門。姓文氏。康津人。
010_1061_a_24L出家於達摩。受具而遊方。學眼通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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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1_b_01L하는 일마다 정직하게 되자 영월 성신靈月誠身 스님의 계단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이어받았다.이어서 초의草衣 선백禪伯으로부터 비구 이백오십계와 보살 오십팔계를 받았다. 스님은 낭은 성순朗隱性順·낭운 영밀朗雲永密 등과는 동문이고 각해 재연覺海在演·성해 처진性海處眞 등은 법제자이며, 연담蓮潭(有一) 스님의 손자 제자이다.스님은 대둔사의 만일암挽日庵, 보림사寶林寺의 내원암內院庵, 송광사松廣寺의 삼일암三日庵 등에 주로 주석했으며, 만년에는 담양 보리암菩提庵으로 주석처를 옮겼다가 거기에서 고요히 적멸을 보이시니,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은 순수하게 하얗고 바위틈의 소나무도 다투어 우는 듯했다.스님은 본래 세속 보통 사람들의 격식을 벗어나 세속적인 이익에 연연하지 않았고, 뜻이 한가하고 고요한 데 있어서 스님이 가는 곳이면 어디에나 토굴이 있고 소나무가 있었으며, 행장이라곤 옷 한 벌이요 도반이라곤 새 한 마리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문장과 글씨는 여유가 있었으며 목소리 또한 청아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말하기를, “스님이 소리를 잘하는 것은 인암忍庵 스님의 유풍遺風 때문이고 낭암朗岩 노장님의 경훈警訓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동쪽이 숨으면 서쪽이 드러나고 사람은 없어져도 도는 남는 법이다. 소림少林이 울창하니 어린 계수나무 그늘을 드리우듯 하였다.스님은 가경嘉慶 병자년(순조 16, 1816)에 태어나 광서光緖 임진년(고종 29, 1892)에 입적하였으니, 세속의 나이로는 77세이고 승하僧夏로는 62년이었다.스님이 법을 전해 준 제자와 손제자는 보림선찰寶林禪刹에 뿌리를 내리고 잘 지내고 있다.월여선백전月如禪伯傳스님의 법명은 범인梵寅이고 호는 월여月如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수로왕首露王의 후예이며, 해남 녹산방鹿山坊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도광道光 4년 갑신(순조 24, 1824) 10월 17일에 태어났다.어린 시절에 두륜산에 몸을 던져 양악羊岳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초의 스님의 계단에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았으며, 또한 화담華潭·문암聞庵·용연龍淵·운거雲居·응화應化 등 이름난 강사의 회상에서 경학經學을 공부하였다.구도求道를 위한 참방을 마치고 학문을 위한 유력遊歷을 마친 뒤 일지산방一枝山房에서 향을 사르고 초의 선사로부터 법인을 전해 받았다. 스님은 이후부터 교학을 놓아 버리고 선방에 들어가 곳곳마다 찾아다니면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결제하고 또 해제를 거듭하며 참선 수행에 힘썼다. -
010_1061_b_01L行事正直。拈香於靈月誠身之壇。受比
010_1061_b_02L丘二百五十戒。及菩薩五十八戒於草衣
010_1061_b_03L禪伯之室。與朗隱性順朗雲永密。同門
010_1061_b_04L人。覺海在演。性海處眞等。爲弟子。蓮
010_1061_b_05L潭之孫。住於大芚之挽日。寶林之內院。
010_1061_b_06L松廣之三日。晩居於潭陽之菩提庵。泊
010_1061_b_07L然示寂。天雲精白。岩松爭鳴。師。本出
010_1061_b_08L格6)之 [76] 人。不戀世利。志在閒靖。投之所
010_1061_b_09L向。有窟有松。行裝一衣。道伴一禽。然
010_1061_b_10L文筆有餘。韵曲淸雅。皆曰。忍庵師之
010_1061_b_11L遺風。朗岩老之警訓。東隱西顯。人亡
010_1061_b_12L道存。少林挺茂。嫩桂垂蔭。嘉慶丙子
010_1061_b_13L生。光緖壬辰寂。世壽七十七。僧夏六
010_1061_b_14L十二。傳法弟子及孫弟子。托根於寶林
010_1061_b_15L禪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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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1_b_17L月如禪伯傳
010_1061_b_18L師名梵寅。號月如。姓金氏。首露王之裔。
010_1061_b_19L海南鹿山坊人。道光四年甲申十月十
010_1061_b_20L七日生。幼投頭輪山。剃染於羊岳禪師
010_1061_b_21L之室。受具戒7)於 [77] 菩薩8)戒 [78] 草衣法師之
010_1061_b_22L壇。受經學於華潭聞庵龍淵雲居應化
010_1061_b_23L講師之會。叅訪了。遊歷9)破。 [79] 拈香於一
010_1061_b_24L枝山房。捨10)放 [80] 入禪。結制解夏。在在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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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1_c_01L칠불암에 가서 결제를 마치고 흥국사興國寺에 와서 참학하였으며, 선암사에서 하안거를 하고 송광사에서 동안거를 하였으며, 대둔사 조사전祖師殿에서 무량회無量會 법회를 열었다.미황사美黃寺에 거주하다가 첨찰사尖察寺에 머물기도 하였으며, 일성산日城山에 머물다가 서동사瑞桐寺로 옮겨서 살기도 하였고, 은적사隱跡寺와 비봉산飛鳳山에 살기도 했다. 신남과 신녀들 중 스님의 제자가 되기를 청원한 사람이 부지기수이다.계를 전해 준 제자는 기운奇雲·기은奇隱·성학聖學 등 22명이고 법을 받은 제자와 수은受恩 제자는 운담雲潭과 성환性煥 등이 있다. 스님은 총섭의 직책을 역임하였고, 화주가 되어 왕실의 번영과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천성이 좋고 자비하고 어질었으며, 마음 씀이 온화하고 순박하여 사람들은 “도인 중에 사자왕獅子王이다.”라고 칭송하였다.금허선백전錦虛禪伯傳스님의 법명은 세원世元이고 호는 금허錦虛이며, 속성은 천안 전全씨이고 나주 금마金馬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생계가 구차하고 어려웠다. 그러던 차에 큰아버지가 나주 쌍계사雙溪寺로 출가하여 금주 등혜錦洲等惠 강백의 처소에서 스님이 되었으니 바로 서주 의수犀舟懿修 선사라고 불렀다. 서주 스님이 해남 대둔사로 옮겨가서 살게 되자 소년도 숙부를 따라가서 글을 읽다가 홀연히 출세법出世法을 생각하게 되어 대둔사에 눌러앉아 속가로 돌아가지 않았다.소년은 마침내 하의荷衣 선사의 조당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화운化運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이어 은사인 하의 스님에게서 법인을 전해 받았다. 그리고 다시 범해 각안梵海覺岸 스님의 강의실에서 비구 이백오십계와 대승보살 오십팔계를 받았다. -
010_1061_c_01L處。結徃七佛。叅來興國。結夏仙岩。過
010_1061_c_02L冬松廣。開無量會於大芚之祖師殿。居
010_1061_c_03L美11)美 [81] 12)黃。 [82] 住尖察山。住日城山。住瑞
010_1061_c_04L桐寺。住隱跡寺飛鳳山。信男信女之願
010_1061_c_05L爲師弟者。其數不知。爲傳戒者。有奇
010_1061_c_06L雲奇隱聖學等二十二人。受法受恩弟
010_1061_c_07L子。雲潭性煥等。行揔攝職。就化主權。
010_1061_c_08L主管爲祝。性好慈仁。心行和淳。人稱
010_1061_c_09L道人中之獅子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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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1_c_11L錦虛禪伯傳
010_1061_c_12L師名世元。號錦虛。姓天安全氏。羅州
010_1061_c_13L金馬人。早孤偏侍。生計苟艱。俗伯
010_1061_c_14L叔。出家於羅州雙溪寺。錦洲等惠講伯處。
010_1061_c_15L號曰。犀舟懿修禪師。移居于海南大芚
010_1061_c_16L寺。從叔讀書。忽念出世法。因存不歸。
010_1061_c_17L遂投荷衣禪師堂。剃染。從化運禪師壇。
010_1061_c_18L受具。受恩師傳法印。受比丘二百五十
010_1061_c_19L戒及大乘菩薩五十八戒於梵海覺岸講
010_1061_c_20L「馳」甲本正誤表作「駝」。「閨」甲本正誤表
010_1061_c_21L作「閏」。「間」甲本正誤表作「問」次同。「問」
010_1061_c_22L甲本正誤表作「間」。「妨」甲本正誤表作「妙」。
010_1061_c_23L「之」甲本正誤表作「也」。「於」當在「菩薩
010_1061_c_24L戒」之下{編}。「戒」下甲本正誤表有「於」。
010_1061_c_25L「破」甲本正誤表作「罷」。「放」甲本正誤表作
010_1061_c_26L「敎」。「美」甲本正誤表曰衍字。「黃」下甲
010_1061_c_27L本正誤表有「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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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2_a_01L금허 스님은 성품이 청아하고 인자하였으며 사물을 보면 이해하여 밝게 통달하였다. 수승首僧과 유나維那의 직책을 맡아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자 상하가 통명通明하게 되었으며, 주지와 총섭의 행정을 맡아 승풍의 규정을 바로잡으니 곡직曲直이 환하게 가려졌다.이후 스님은 세속적인 일을 다 놓아 버리고 선의 관문 깊숙이 들어가서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나갔다. 스님은 늘 공적인 일을 우선 처리하고 사적인 일은 뒤에 처리하였다. 스님은 또 세지염불문勢至念佛門에 들어가 관음참선도觀音叅禪道를 실행하였다.스님은 연담蓮潭 스님의 4대 법손이고 백련白蓮 스님의 족손族孫이며, 제자는 두 명이 있었는데 서룡 성윤瑞龍性允 스님은 속성이 임林씨이고 낭주朗州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환운 대은幻雲大隱 스님은 속성이 김씨이고 청해淸海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계를 받은 제자는 준학 경문俊學敬文 스님 등 15명이 있다.스님은 도광道光 4년, 순조대왕 24년 갑신(1824)에 태어나 광서光緖 20년 갑오(고종 31, 1894)에 대둔사 천불전千佛殿에서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71세였다.호월선사전湖月禪師傳스님의 법명은 관례寬禮이고 호는 호월湖月이며, 속성은 김씨이고 청해淸海 두읍斗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려서 해남 두륜산으로 들어가 보해 지영普海志英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 신월 호윤信月好潤 선사의 계단에서 사미계를 받았으며, 범해 각안梵海覺岸 강백의 강당에서 비구계 및 보살계를 받았다.스님은 오랫동안 절 안의 각종 업무를 맡아보았고, 수승과 주지의 직책을 역임하였으며, 조정으로부터 ‘자헌대부資憲大夫’ ‘도총섭’의 직첩을 제수 받았다.
浮沈出沒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나왔다 사라지곤 하는 생활 속에
辛酸苦楚 온갖 신산辛酸과 고초를 다 겪었다
物不受變則不成初 모든 물질은 변화를 겪지 않으면 재목을 이루지 못하고
人不涉難則不知道 사람이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 도를 알지 못하는 법이다
歷盡世諦 세상일을 두루 다 겪었으며
汨沒塵臼 티끌 구덩이 속에 빠져서 살았네
流水歲月 세월은 흐르는 물처럼 흘러가고
幻花身命 몸과 목숨은 헛꽃과 같아라
早溺世利 일찍이 세상 명리에 빠졌다가
晩悟浮漚 뒤늦게 물거품 같은 것인 줄 깨달았다
먼저 작고하신 은사의 영단靈壇에서 향을 사르고 법통을 계승하고 선조의 영정 앞에 법손으로 자처하였으니, 연담蓮潭 조사의 5대 법손이요 치암癡岩 조사의 2대 법손이며, 태고太古 스님의 17대 법손이고 청허淸虛 스님의 11대 법손이다. -
010_1062_a_01L室。雅性慈仁。見解通明。掌判首僧維
010_1062_a_02L那之事。上下通明。糾正住持揔攝之政。
010_1062_a_03L曲直炳煥。放捨世諦。深入禪1)開。 [83] 補闕
010_1062_a_04L拾遺。先公後私。入勢至念佛門。行觀
010_1062_a_05L音叅禪道。蓮潭之四世。白蓮之族孫。
010_1062_a_06L有二弟子。瑞龍性允。林氏。朗州人。幻
010_1062_a_07L雲大隱。金氏。淸海人。受戒弟子。有俊
010_1062_a_08L學敬文等十五人。道光四年。純祖大王
010_1062_a_09L二十四年甲申生。光緖二十年甲午寂。
010_1062_a_10L年七十一。在千佛殿。
010_1062_a_11L
010_1062_a_12L湖月禪師傳
010_1062_a_13L師名寬禮。號湖月。姓金氏。淸海斗邑
010_1062_a_14L人。幼入海南頭輪山。剃染於普海志英
010_1062_a_15L禪師室。受沙彌戒於信月好潤禪師壇。
010_1062_a_16L受比丘菩薩戒於梵海覺岸講伯堂。久
010_1062_a_17L滯寺中事。行首僧住持事。贈資憲大夫
010_1062_a_18L都揔攝帖。浮沈出沒。辛酸苦楚。物不
010_1062_a_19L受變。則不成2)初。 [84] 人不涉難。則不知道。
010_1062_a_20L歷盡世諦。汨沒塵臼。流水歲月。幻花
010_1062_a_21L身命。早溺世利。晩悟浮漚。拈香於先
010_1062_a_22L恩師靈壇。竪尾於先祖師小照。蓮潭祖
010_1062_a_23L之五世。癡岩祖之二世。釋迦文之七十
010_1062_a_24L四世。太古之十七世。淸虛之十一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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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2_b_01L이미 종문의 계파를 이었으면 반드시 종정宗正을 실행해야 한다. ‘종宗’이란 16종을 의미하며 ‘정正’이란 자신의 행동을 규정糾正하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종정을 실행하는 이를 종사宗師라고 말한다. 이미 종문의 계파에 들어왔으면 부처님 법을 곧바로 전해 받은 사람이니 승려가 가야 할 큰 길을 실천해야 한다.스님은 천성이 크고 대범하였으며 행실이 맑고 법도를 잘 지켰다. 행동은 신중하게 천천히 하였고 말은 어눌한 듯이 조심성 있게 하였으니, 참으로 상고上古 시대의 사람과 같다고 하겠다.스님에게 제자가 두 명 있는데 능오能悟는 속성이 정鄭씨이고 해남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수승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또 묘언妙彦은 속성이 최崔씨이고 영암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그 역시 수승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손자 제자도 두 명이 있었으니 근우謹祐와 재익在益이다.원화강백전圓華講伯傳스님의 법명은 덕주德柱이고 호는 원화圓華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전남 담양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기철基喆이고 어머니는 오吳씨이며, 도광道光 19년 기해(헌종 5, 1839) 5월 25일에 태어났다.스님은 전생에 지혜의 종자를 뿌렸던 탓에 도리어 지혜가 총명한 남자의 몸을 받은 모양이다. 우담優曇·포허抱虛·응월應月 등 4대 종사를 참방하여 선교를 공부하였으며, 스님이 저술한 『회경록會鏡錄』 1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자세한 내용들은 스님의 행장에 기록되어 있다.17세가 되던 을묘년(철종 6, 1855) 지리산 화엄사華嚴寺에 들어가서 서우西藕 대사를 은사恩師로 삼고 두월斗月 대사에게 법을 받았으니, 스님은 곧 벽암碧岩 스님의 11세 법손이다.
早入禪園 일찍이 선원禪園에 들어가서
飽聞戒香 계戒의 향기를 실컷 맡고는
東叅西訪 동쪽으로 찾아가고 서쪽을 참방하며
空徃實歸 빈손으로 갔다가 실속을 얻어 돌아왔다
七尺皮囊 일곱 자 가죽 주머니는
芥納須美 겨자씨에 수미산을 수용하였으며
書轉五車 다섯 수레 책을 싣고
經閱八萬 팔만 장경 다 읽었네
開門八字 팔八 자로 문을 열고
看待四山 사방 산을 기다리네
說華嚴於華嚴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강론하여
證昏眼於昏眼 눈 어두운 이 눈 어두운 줄 알게 하였다
隱身蔀屋 작은 집에 몸을 숨겼으나
巴尾先露 그 존재 먼저 드러났다
麝過春山 사향노루 봄 동산을 지나가니
草樹益香 풀과 나무 더더욱 향기롭구나
戒傳吾徒 우리 제자들에게 계를 전해 주고
印封我臣 우리 제자들에게 법인을 전해 주셨다
錦溟熏臭 금명錦溟은 훈습薰習 제자이고
栗庵攝齋 율암栗庵은 입실 제자이다
伯樂憎賈 백악伯樂이 보니 값이 올라가고
可匠石禀材 장석匠石이 지목하니 재목인 줄 알아 준다
爲諸群迷 모든 미혹한 중생들을 위하여
壽躋期頣 일백 세나 장수하게 하였다
스님은 광서光緖 19년 -
010_1062_b_01L已繼宗派。必行宗正。宗者。十六宗。正
010_1062_b_02L者。糾正已行。宗正。必稱宗師。已入宗派。
010_1062_b_03L佛之直傳。爲僧之大道也。師。心性坦盪。
010_1062_b_04L行履淑準。行遲遲。語吶吶。眞上古之人
010_1062_b_05L也。有弟子二人。能悟。鄭氏。海南人。
010_1062_b_06L行首僧。妙彥。崔氏。靈岩人。行首僧。
010_1062_b_07L有孫弟子二人。謹祐在益。
010_1062_b_08L
010_1062_b_09L圓華講伯傳
010_1062_b_10L師名德柱。號圓華。俗姓鄭氏。全□潭陽
010_1062_b_11L人。父基喆。母吳氏。道光十九年己亥
010_1062_b_12L五月二十五日生。夙植智慧之種子。反
010_1062_b_13L受智慧之男形。叅優曇抱虛應月四大
010_1062_b_14L宗師。所著會鏡錄一卷。行於世。詳在行
010_1062_b_15L3)裝 [85] 耳。十七歲乙卯。入智異山華嚴寺。
010_1062_b_16L西藕大師。爲恩師。受法於斗月大師。即
010_1062_b_17L碧岩十一世孫也。早入禪園。飽聞戒香。
010_1062_b_18L東叅西訪。空徃實歸。七尺皮囊。芥納
010_1062_b_19L須4)美。 [86] 書轉五車。經閱八萬。開門八字。
010_1062_b_20L看待四山。說華嚴於華嚴。證昏眼於昏
010_1062_b_21L眼。隱身蔀屋。巴尾先露。麝過春山。草
010_1062_b_22L樹益香。戒傳吾徒。印封我臣。錦溟熏
010_1062_b_23L臭。栗庵攝5)齋。 [87] 伯樂6)憎賈。 [88] 7)可 [89] 匠石禀
010_1062_b_24L材。爲諸群迷。壽躋期頣。光緖十九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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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2_c_01L계사(고종 30, 1893) 5월 30일에 적멸을 보이셨으니, 세속 나이로는 55세이고 법랍은 38년이다.상운선사전祥雲禪師傳스님의 법명은 응혜應惠이고 호는 상운祥雲이며, 속성은 박씨이고 해남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려서 부모를 모두 잃고 홀로 의지할 데 없이 추위와 더위를 다 겪으면서 어렵게 지내다가 두륜산으로 들어갔으나 거기에서도 온갖 곤궁함을 다 겪었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승일勝日 대사의 처소에서 은혜를 받고 물들인 옷을 입고 스님이 되었다.이후 호연浩然 선사의 처소에서 계를 받고, 금계錦溪 선사의 처소에서 법명과 계명戒名을 받았으며, 서암恕庵 선사의 처소에서 향을 사르고 법인을 이어받았다.또한 범해梵海 교주敎主의 처소에서 비구 이백오십계와 보살 오십팔계 즉 대승계大乘戒를 받았으니, 연담蓮潭의 5대 법손이 되고 초의草衣의 손자 법제자이며, 쌍수雙修·송원松源과는 동문 형제가 된다.상운 스님은 이미 주지와 유나維那의 인신印信을 차고 그 소임을 맡아보기도 했으며, 조정으로부터 특별히 ‘자헌대부규정총섭資憲大夫糾正摠攝’의 직첩을 제수받기도 했다.행정은 깨끗하게 하였고 송사는 순리대로 해결하느라 치아는 듬성듬성하였고 머리는 번들번들해지니 창창한 갈대가 서리맞아 하얗구나. 몸을 가리는 도구와 입에 풀칠하는 방책, 나무 하는 무리들과 다리 펴고 의탁하는 일들은 크게 근심할 일 아니며 고생이 끝나면 기쁨이 오는 법이다.스님은 도광道光 정해년(순조 27, 1827)에 태어나 광서光緖 갑오년(고종 31, 1894)에 심적사深寂寺 별실에 있는데, 세속 나이는 68세이다. 제자로는 처흔處欣·묘원妙元·법윤法允 등이 있다. -
010_1062_c_01L癸巳五月三十日。示寂。世壽五十五。法
010_1062_c_02L臈三十八。
010_1062_c_03L
010_1062_c_04L祥雲禪師傳
010_1062_c_05L師名應惠。號祥雲。姓朴氏。海南人。早
010_1062_c_06L失怙恃。獨自伶仃。閱盡寒暑。投入頭
010_1062_c_07L輪。備閱窮困。嘉善大夫。勝日同知處。
010_1062_c_08L受恩染衣。浩然禪師處。受火聽戒。錦
010_1062_c_09L溪禪師處。作名授戒。恕庵禪師處。拈
010_1062_c_10L香受印。梵海敎主處。受比斤二百五十
010_1062_c_11L戒及菩薩五十八大乘戒。蓮潭之五世
010_1062_c_12L草衣之孫。與雙修松源。門兄弟。已佩住
010_1062_c_13L持維那之印信。特贈資憲大夫糾正揔
010_1062_c_14L攝之差帖。政淸訟理。齒豁頭童。蒹葭
010_1062_c_15L蒼蒼。霜露爲雪。遮身之具。糊口之策。
010_1062_c_16L負薪之徒。展脚之托。甚非所以大憂。苦
010_1062_c_17L盡甘來歟。道光丁亥生。光緖甲午。在深
010_1062_c_18L寂別室。世壽六十八。弟子。有處欣妙元
010_1062_c_19L法允等。
010_1062_c_20L「開」甲本正誤表作「關」。「初」甲本正誤表
010_1062_c_21L作「材」。「裝」甲本正誤表作「狀」。「美」甲本
010_1062_c_22L正誤表作「彌」。「齋」甲本正誤表作「齊」。
010_1062_c_23L「憎賈」甲本正誤表作「增價」。「可」甲本正誤
010_1062_c_24L表曰衍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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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3_a_01L덕송선사전德松禪師傳스님의 법명은 호의皓衣이고 호는 덕송德松이며, 속성은 임林씨이고 나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우연히 백양산에 들어갔다가 양개良价 스님이 어버이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출가했던 뜻에 감동하여 그대로 거기에 머물러 있으면서 속가로 돌아가지 않았으며, 단하丹霞 스님이 무명초無名草(머리)를 깎고 귀를 막고 달아났던 일을 본받아 스님이 되었다.덕송 스님은 수월 재인水月在仁 스님의 법인을 받았으니 침송 성순枕松聖詢 스님의 손자 법제자이고, 양악羊岳 스님의 증손 법제자이며, 연담蓮潭 스님의 현손 법제자가 된다.스님은 본래 사대부 가문 출신이며, 문장은 아름답고 언어는 어눌한 듯 조심스럽게 하였으니, 장자長者의 덕행을 갖춘 분이었다. 한양漢陽 스님은 동문 형제이고, 응운應雲은 조카 제자이다.울유欝攸30)가 직무를 수행함으로 인하여 묵은 재를 쓸어버리고 건물을 새로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여덟 사람이 과거에 공장工匠을 독려하여 공사를 마쳤으니 건물이 큰 새가 날개를 펼친 듯 우뚝하였다. 어사御史가 시를 지으니 진사進士가 화답한다. 그 시는 아래와 같다.
生老病死長在遠 생로병사가 길고도 머니
年月日時豈該載 연월일시를 어찌 다 기록하랴
金剛萬二千峰月 금강산 일만 이천 봉우리의 달은
開眼合目照森前 눈을 뜨나 감으나 삼삼하게 눈앞을 비추네
연주강백전蓮舟講伯傳스님의 법명은 극현極玄이고 호는 연주蓮舟이며, 속성은 신申씨이고 해남에서 출생한 사람이다.어린 나이에 두륜산에 들어가 신월信月 선사의 조실에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이후에 무하 시윤無何始允 선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은사인 신월 스님의 조실에서 법인을 전해 받았다.연주 스님은 달마산으로 응화應化 스님과 허령虛靈 스님의 도량을 찾아가 내전과 외전을 다 배우고, 조계산으로 침명枕溟 스님과 용운龍雲 스님의 강석을 찾아가 선교禪敎의 이치를 배웠다. 스님은 비로소 교화의 문을 열고 제자들에게 바른 진리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신의 공부 수준을 평가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오기를 마치 대낮의 시장 바닥과 같았으며, 스님의 명성을 듣고 결하結夏(안거)를 일삼는 선객들이 찾아와 흡사 물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듯 하였다. 그리되자 낭암朗岩의 법등은 다시 빛나고 설봉雪峯 스님의 달은 5대만에 원만해졌다.스님이 계를 설하여 득도得度시킨 제자는 자연 법흔慈演法欣 등 10여 명이다. 스님이 옥리산과 비봉산에 머무니, -
010_1063_a_01L德松禪師傳
010_1063_a_02L師名皓衣。號德松。姓林氏。羅州人。偶
010_1063_a_03L入羊山。有良价辭親之志。因存不歸。
010_1063_a_04L有丹霞除草掩耳之擧。佩水月在仁之
010_1063_a_05L印。枕松聖詢之孫。羊岳之曾。蓮潭之
010_1063_a_06L玄。本士夫之族。文章彬彬。言語訥訥。
010_1063_a_07L長者之德行也。漢陽。爲我之鴒。應雲。爲
010_1063_a_08L我之咸。欝攸行職。掃舊灰而新建。輪
010_1063_a_09L1)焉。 [90] 八人過去。蕫工匠而竣2)狡。 [91] 翼然
010_1063_a_10L3)峳 [92] 然。御史題詩。進士唱和。生老病死
010_1063_a_11L長在遠。年月日時豈該載。金剛萬二千
010_1063_a_12L峰月。開眼合目照森前。
010_1063_a_13L
010_1063_a_14L蓮舟講伯傳
010_1063_a_15L師名極玄。號蓮舟。姓申氏。海南人。幼
010_1063_a_16L入頭輪山。薙髮於信月禪師室。受具戒
010_1063_a_17L於無何始允禪師壇。得傳法印於恩師
010_1063_a_18L信月師之堂。訪達摩山應化虛靈之道
010_1063_a_19L場。受內外典。叅曹溪山枕溟龍雲之講
010_1063_a_20L肆。受禪敎理。通開化門。打弄4)眞 [93] 詮
010_1063_a_21L懷寶售5)賈 [94] 之徒。若日中爲市。聞名結
010_1063_a_22L夏之士。如水流必東 6)郞 [95] 岩之燈。再傳
010_1063_a_23L惘。雪峯之月。五世圓滿。說戒度人者。
010_1063_a_24L慈演法欣等十餘人。住玉理山飛鳳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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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3_b_01L새와 짐승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지금은 진불암眞佛庵을 참알參謁하고 만일암挽日庵을 중수하고는 눈과 귀를 조용히 하고 참선 중이다. 도광道光 7년 정해(순조 27, 1827)에 태어나 광서光緖 20년 갑오(고종 31, 1894) 현재 만일암에 머물고 있는데, 세속 나이는 68세이다.화선전華先傳화선華先은 세속에서의 이름이 성순性淳이고 성은 박씨이며, 황해도 수안遂安 방계방方契坊에서 출생한 사람이다.도광道光 7년 정해(순조 27, 1827)에 태어나 네 살 되던 해에 학당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으며, 열다섯 살에 경서를 모두 열람하였다. 소년은 차례로 부모를 잃고 두 형제는 춥고 배고픈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소년은 홀연히 강산江山의 고적이나 구경하리라 생각하고 구월산과 고달산高達山에 올라 감로甘露와 호암好岩의 유적을 관람하였으며, 송도松都와 한경漢京(서울)으로 들어가 궁궐과 부조府曹의 흥폐를 구경하였다. 서쪽의 나그네로 떠돌기도 하였고 또는 남방을 전전하였으며, 동쪽으로 오르락내리락 돌아다니면서 여덟 분 거룩한 스님이 도를 증득한 높은 발자취를 보았고, 지리산을 드나들면서 일곱 왕자가 득도한 기연機緣을 구경하였다.일봉암日封庵에 들어가 천불탑을 조성한 것을 보고 만일암挽日庵으로 들어가서 두 미륵의 그림을 보기도 하였다. 마한馬韓의 옛 도읍지와 견훤甄萱이 쌓았다고 하는 큰 성곽, 그리고 백마白馬·주룡朱龍·구강九江·사포四浦의 강산을 두루 다니면서 유람하였다.20세에 구곡九曲을 나와 선암사로 들어가서 비상非相의 게송과 ‘부처님의 경계로 즉입卽入한다’는 설법을 들었다. 22세에 밀홍 수좌蜜弘首座에게 출가하였고 침명 좌주枕溟座主에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청공靑空 스님과 우담優曇 스님의 문을 찾아가서 사교四敎를 배우고 화선이라는 법명을 받았다.그 이후에 ‘하루에 한 번 자고 한 끼니만 먹는다’는 계율을 지키고 난행고행難行苦行의 가르침을 따랐다. 밀홍 스님은 전주 장불산으로 들어갔고 화선 스님은 회양 중향성衆香城으로 들어갔는데, 당시 나이가 28세이다.용파선사전龍坡禪師傳스님의 법명은 기홍基弘이고 호는 용파龍坡이며, 속성은 ▣씨이고 낭주朗州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
010_1063_b_01L鳥獸咸樂。叅眞佛。工挽日。耳目虛靜。
010_1063_b_02L道光七年丁亥生。光緖二十年甲午。在
010_1063_b_03L挽日庵。年六十八。
010_1063_b_04L
010_1063_b_05L華先傳
010_1063_b_06L華先者。俗名性淳。姓朴氏。遂安方契
010_1063_b_07L坊人。道光七年丁亥生。四歲入學。十
010_1063_b_08L五。盡閱經書。父母輪次捐舍。兄寒弟薄。
010_1063_b_09L忽念江山之古跡。登九月高達。覽甘露
010_1063_b_10L好岩之遺躅。入松都漢京。觀宮闕府曹
010_1063_b_11L之興廢。迤邐西客。輾轉南方。浮7)枕 [96] 東
010_1063_b_12L京。見入 [97] 聖僧證道之高蹈。出入智異。
010_1063_b_13L玩七王子得道之機8)椽。 [98] 日封而千佛塔
010_1063_b_14L之成。挽日而兩彌勒之畫。馬故之舊都。
010_1063_b_15L㼼萱之大城。白馬朱龍。九江四浦之江
010_1063_b_16L山。周覽而偏行。二十。出九曲9)八 [99] 仙10)岩。 [100]
010_1063_b_17L非相之11)倡 [101] 樂。即佛之說。二十二。出家
010_1063_b_18L於蜜弘首座。受具於枕溟座主。謁靑空
010_1063_b_19L優曇之門。受四敎。名曰華先。從一宿
010_1063_b_20L一食之戒。遵難行苦行之訓。弘入全州
010_1063_b_21L長佛。先入淮陽衆香。時年二十八。
010_1063_b_22L
010_1063_b_23L龍坡禪師傳
010_1063_b_24L師名基弘。號龍坡。姓□氏。朗州人。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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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3_c_01L일찍이 월출산으로 들어가 장선壯善 상인을 은사로 하여 출가 득도하였고, 침월枕月 대사에게서 계를 받았으며, 화암 성옥和岩性玉 스님으로부터 법인을 전해 받았다. 화암 성옥은 환양 팔원喚羊八元의 법을 이었고, 환양 팔원은 낭송 유화朗松有華의 법을 이었으며, 낭송 유화는 설파 상언雪坡常彥의 법을 이었고, 설파 상언은 호암虎岩의 법을 이었다.스님은 두륜산 북암北庵의 운거雲居도갑사道甲寺에 있었던 스님 화사火師와 달마산 중암中庵의 응화 대사, 가지산 동암東庵 대사의 강론 도량에서 경학을 공부하였다.스님은 기골이 준수하였고 덕행이 훌륭하였으며, 항상 자신의 재물을 덜어 내 망가진 절을 보수하여 열세 채의 전각을 세웠다. 그러고는 보타산 도장사道藏寺의 시왕十王을 옮겨 봉안하니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광명을 방출하였다. 기계를 시설하고 군중을 모아 맨땅에 엎어져 있던 불상을 일으켜 세운 일도 있다. 이와 같이 스님은 불사佛事라면 몸이 고달프고 생각이 타들어가도 마음을 다하고 온 힘을 기울였지만, 도리어 무슨 일을 하기만 하면 구설수에 오르곤 했다. 한번은 사찰 소유의 산에 어떤 사람이 묘를 쓴 것을 소송을 하여 파서 옮기게 한 뒤 도리어 횡액을 당하기도 했다. 늘 일의 기미를 잘 살피지 못하여 역풍으로 먼지를 뒤집어쓰는 격이요, 도리어 더러운 오물이 자신의 얼굴에 튀긴 꼴이었다. 때가 이롭지 못하니 일을 성공하지 못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일을 이룩하고 나면 떠나가야 하는 것을 잊었던가? 기미를 보고 나면 그 시기를 넘기지 말아야 하는 법인데 겁劫을 지었던가?이침산전李枕山傳처사의 이름은 동환東煥이고 호는 침산枕山이며, 성은 이李씨이고 경북 상주에서 출생한 사람이다. 도광道光 정해년(순조 27, 1827)에 태어났다.이 처사는 통도사의 관허觀虛 선사에게서 참회계를 받았고, 금강산 해명海溟 대사에게서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
010_1063_c_01L投月出山。受壯善上人之恩。禀枕月大
010_1063_c_02L師之戒。得和岩性玉之印。12)老師主。 [102] 玉。
010_1063_c_03L喚羊八元之嗣。元。朗松有華之嗣。華。雪
010_1063_c_04L坡常彥之嗣。彥。虎岩之嗣。學於頭輪山
010_1063_c_05L北庵雲居火師道甲
人。達摩山中庵應化大
010_1063_c_06L師。伽13)倻 [103] 智山東庵大師之講場。氣骨俊
010_1063_c_07L秀。德行廣長。損己補廢。建十三殿。補
010_1063_c_08L陁山道藏寺十王移安。瑞氣放光。設機
010_1063_c_09L募軍。起立俯佛於露地。勞身焦思。盡
010_1063_c_10L心竭力。動輙得口。寺山。有犯葬者。呈
010_1063_c_11L訟掘移。反被橫厄。不察事機。逆風揚塵。
010_1063_c_12L反汙己面。時不利兮。事不成矣 14)魔 [104] 成
010_1063_c_13L功者去忘歟。見機而作劫歟。
010_1063_c_14L
010_1063_c_15L李枕山傳
010_1063_c_16L處士名東煥。號枕山。姓李氏。尙州人。
010_1063_c_17L道光丁亥生。受懺悔火於通度寺觀虛
010_1063_c_18L禪師。受大乘菩薩戒於金剛山海溟大
010_1063_c_19L「焉」下甲本正誤表有「奐焉」。「狡」甲本正
010_1063_c_20L誤表作「役」。「峳」甲本正誤表作「巋」。「眞」
010_1063_c_21L作「直」{甲}。「賈」甲本正誤表作「價」。「郞」甲
010_1063_c_22L本正誤表作「朗」。「朽」甲本正誤表作「沈」。
010_1063_c_23L「椽」甲本正誤表作「緣」。「八」甲本正誤表作
010_1063_c_24L「入」。「岩」下甲本正誤表有「聽」。「倡」甲本
010_1063_c_25L正誤表作「偈」。「老師主」甲本正誤表曰衍字。
010_1063_c_26L「倻」甲本正誤表曰衍字。「魔」甲本正誤表
010_1063_c_27L曰衍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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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4_a_01L전주 봉서사鳳捿寺에 머물다가 무진년(고종 5, 1868) 8월에 옥주沃州(진도) 쌍계사雙溪寺로 들어갔다.이때 나(각안)는 절구 시 한 수를 지어 이 처사에게 주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尺布行裝何所有 괴나리봇짐 속에 그 무엇이 있는가?
金剛一卷自家珎 한 권 『금강경』이 우리 집 가보라네
龐公事業頭頭現 방공龐公31)의 사업이 곳곳에 나타나니
應是維摩小化身 그대는 필시 유마거사 화신일레라
이 처사는 뒤에 순천 흥국사興國寺 만일회萬日會에 참석하였으며, 월여月如 스님이 찾아오자 보리수 열매로 만든 염주 1목目에 글을 써서 보내왔다. 다시 전주 봉서사로 가서 머물렀으며, 포련布蓮 총섭이 오자 『유마경』 1질을 서사書寫하여 보낸 적도 있다.이 처사는 또 『진불지眞佛志』 1권을 서사하고 그 책 말미에 발문을 직접 짓기도 하였다. 지식이 남보다 뛰어났고 자비의 실천도 구족하였으니, “믿음은 도의 으뜸이 되고 공덕의 어머니이다.”라고 한 게송의 내용에 부합되는 사람인 듯하다. -
010_1064_a_01L師。住全州鳳捿寺。戊辰八月。入沃州
010_1064_a_02L雙溪寺。子贈一絕曰。尺布行裝何所有。
010_1064_a_03L金剛一卷自家珎。龐公事業頭頭現。應
010_1064_a_04L是維摩小化身。後順天興國寺萬日會
010_1064_a_05L居。菩提子念珠一目。月如師來。便作
010_1064_a_06L書送之。後全州鳳捿寺居。布蓮揔攝來。
010_1064_a_07L便作維摩經一秩。書送之。眞佛志一卷。
010_1064_a_08L書之。作跋尾 1)如 [105] 識超等。慈行具足。
010_1064_a_09L以應信爲道元功德母之偈哉。
010_1064_a_10L「如」甲本正誤表作「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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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1064_b_01L
- 1)『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덕산현 서쪽 11리쯤에 가야산이 있고, 북쪽 13리에는 상왕산이 있다. 이 두 산은 덕산현과 해미현海美縣에 걸쳐 있으며 서로 연이어져 있다.”고 하였다. 게다가 절의 당초 이름도 가야산 보덕사가 아니라 가야산 가야사였었는데 흥선대원군이 ‘절이 있는 자리에 묘를 쓰면 2대 왕을 지낼 자리이다’라고 하는 풍수의 말을 듣고 1844년(현종 10) 가야사를 헐고 남연군의 묘를 이장하고, 인근 골짜기에 절을 새로 지어 보덕사라 이름하고 초대 주지에 영도사 주지였던 벽담 선사를 임명하였다.
- 2)수고우水牯牛 : 남전 보원南泉普願(748~834) 선사가 임종에 즈음하여 제자와 나눈 문답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주가 남전에게 묻기를, “유有를 안 사람이 죽은 뒤에 어디로 갑니까?”라고 하자, 남전이 “산 앞의 신도 집에 한 마리의 수고우가 되어 가나니라.”라고 하였다.
- 3)정자程子 : 송나라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頥 형제를 높여 이르는 말.
- 4)주자朱子 : 송나라 유학자. 1130~1200. 주자학을 집대성하였다.
- 5)반고班固 : 후한 초기 역사가. 32~92. 표彪의 아들, 서역도호 초超의 형이다. 『한서』 편집 중, 국사를 개작한다는 중상모략으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나, 20여 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백호통의』를 편집하였다.
- 6)사마천司馬遷 : 전한 시대의 역사가이며 『史記』의 저자이다. 기원전 145~86. 무제의 태사령이 되어 『사기』를 집필하기 시작하여 기원전 91년 완성하였다. 중국 최고의 역사가로 칭송된다.
- 7)손자孫子 : 손무孫武. 춘추 시대 병법兵法의 대가. 저서에 『손자』가 있다.
- 8)오기吳起 : 춘추 시대 병법의 대가. 저서에 『吳子』가 있다.
- 9)오도자吳道子 : 당나라 때의 화가인 오도현吳道玄을 말한다. 도자는 곧 오도현의 자이다.
- 10)미불米芾 : 송나라 때의 서화가. 그는 특히 고서화古書畫를 매우 좋아하여 고서화를 대단히 많이 수집하였으므로, 그를 미가서화선米家書畫船이라고 일컬었다.
- 11)강상사江上寺 : 봉은사를 일컫는다.
- 12)만호萬戶 : 종4품 무관직이다.
- 13)갱장羹墻 : 선왕의 거룩한 업적을 사모하며 좋은 정치에 매진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 요堯임금이 죽은 뒤에 순舜이 3년 동안이나 앙모仰慕한 나머지, “앉아 있을 때에는 담벼락에 요임금이 보이고 식사를 할 때에는 국그릇 속에 보였다.(坐則見堯於墻。 食則覩堯於羹。)”는 고사가 있다. 『後漢書』 「李固傳」에 나온다.
- 14)전영雋永 : 살져 맛이 좋은 고기라는 뜻으로, 의미심장하여 깊은 뜻이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 15)순생順生 순후順後의 업보業報 : 순생의 업이란 현세에 선악의 업을 지어 다음 생에 그 보를 받는 것이고, 순후의 업이란 현세에 지은 업을 제3생 이후에 받는 과보를 말한다.
- 16)『주역』 「坤卦」에 나오는 말이다.
- 17)허련許鍊 : 조선 후기의 서화가. 1809~1893. 추사 김정희의 제자로 글, 그림, 글씨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하경산수도〉 등의 작품이 있다.
- 18)김명희金命喜 : 본관은 경주. 자는 성원性源, 호는 산천山泉. 1788~?. 노경魯敬의 아들이며, 추사 정희의 아우이다. 1810년(순조 10) 진사에 급제하여 홍문관직제학·강동현령 등을 지냈다. 1822년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인 아버지를 따라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연경燕京에 가서, 청나라의 금석학자 유희해劉喜海에게 우리나라의 금석학본을 기증하여 『海東金石苑』을 편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 19)고로추古老錐 : 노고추老古錐를 바꾸어 한 말로 노고는 존경한다는 뜻이고, 추는 송곳처럼 예민함을 뜻하는 말로서, 즉 노대원숙老大圓熟함을 의미한다.
- 20)도현道玄 : 당나라 때의 화가인 오도현吳道玄을 말한다. 궁중에 들어가 인물·산수·초목·조수鳥獸 등을 그렸으며, 제자들을 많이 거느리고 사원과 도관道觀의 벽화를 그리기도 했다.
- 21)원장元章 : 송나라 미불米芾(1051~1107)의 자인데, 천성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였다. 무위군無爲軍을 맡아보게 되어 처음으로 주해州廨에 들어가자 입석立石을 보고 자못 기이하게 여겨 곧 포홀袍笏을 가져오라 하여 그 돌에 절하고 늘 석장石丈이라 불렀다고 한다.
- 22)무구無口의 고향 : 입을 닫고 선지禪旨를 참구하였다는 의미인 듯하다.
- 23)유마의 방(維摩之室)은 오히려 좁았고 : 유마의 방은 여기에서는 방장실方丈室을 의미한다. 옛날 유마 거사가 사방 열 자 되는 방에 3만 2천 사자좌를 시설해 놓았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 24)중향성衆香城의 음식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 담무갈曇無竭이 중향성의 주인이 되어 항상 『般若波羅蜜多經』을 설하니 대중들이 몰려왔고, 심지어는 상제常啼보살도 와서 들었다고 하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 25)허현도許玄度:동진東晋 시대 허순許詢을 말한다. 『續晉陽秋』에 이르기를, “허순의 자는 현도이다. 고양 사람이며 위나라 중령군 윤현의 현손玄孫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여 모두들 신동이라고 말했다. 자라서는 풍정이 간소하고 사도연으로 발탁되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일찍 죽었다.”라고 하였다.
- 26)자우子羽 :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담대멸명澹臺滅明이라는 사람의 호이다.
- 27)타루비墮淚碑 : 진晉나라 양호羊祜가 양양 태수襄陽太守로 있을 때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그가 노닐던 현산峴山에 백성들이 기념비를 세웠다. 그 비문 가운데 “우주가 생기면서 이 산도 생겼을 텐데, 그동안 우리들처럼 이곳에 올라와서 멀리 바라보았던 멋진 인사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마는, 모두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말았으니 생각하면 슬픈 일이다. 백 년 뒤에라도 나에게 혼이 있다면 혼령이라도 여기에 다시 찾아오리라.”라고 했던 양호의 말이 쓰여 있어, 이 비문을 보고는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자, 당양후當陽侯 두예杜預가 ‘타루비’라고 일컬었던 고사가 있다. 『晋書』 「羊祜傳」.
- 28)옹중翁仲 : 옹중은 보통 능묘陵墓 좌우에 서 있는 석물石物을 말한다. 진秦나라 때의 키가 큰 사람이었는데, 뒤에 동상銅像이나 석상石像을 말하기도 한다. 그의 성은 완씨阮氏였는데 키가 12척이나 되었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하고는 그에게 임조臨洮를 지키게 하였다. 뒤에 그가 죽자 동상을 만들어 함양咸陽에 세웠다. 『山堂肆考』.
- 29)동타銅駝 : 진晋나라 색정索靖이 천하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낙양洛陽의 궁문宮門 앞에 세워진 구리로 만든 낙타(銅駝)를 가리키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네가 형극荊棘 속에 묻히는 것을 곧 보겠구나.”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30)울유欝攸 : 울유는 화신火神이다. 그가 직무를 수행했다는 말은 화재가 일어났다는 것을 말한다.
- 31)방공龐公 : 이름은 온蘊, 자는 도현이다. 중국의 형주 형양현 사람. 마조에게 가서 묻기를, “온갖 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는 이가 무슨 사람입니까?”라고 하니, 마조가 “네가 서강의 물을 한 입에 마셔 버린 뒤에야 일러 주마.”라고 하였다. 거사는 이 말에 의심을 가지고 2년 동안 정진하였다. 죽으려 할 즈음에 딸 영조를 시켜 해그늘을 보아서 오시午時가 되거든 말하라고 부탁하였다. 영조가 “지금 오시가 되었는데 일식을 합니다.”라고 하니, 거사가 평상에서 내려와 문밖에 나가 보는 동안에 영조가 거사의 평상에 올라 앉아 죽어 버렸다. 이를 보고 거사는 웃으면서 “내 딸이 솜씨가 빠르구나!”라고 하고는 7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 1)「六」甲本正誤表作「五」。
- 2)「謂」下甲本正誤表有「有」。
- 3)「大」甲本正誤表作「火」。
- 1)「披」甲本正誤表作「坡」。
- 2)「謄」甲本正誤表作「騰」。
- 3)「文」下甲本正誤表有「筆」。
- 4)「統」甲本正誤表作「繞」。
- 5)「錢」甲本正誤表作「姓」。
- 6)「其」甲本正誤表作「具」。
- 7)「之」甲本正誤表作「入」。
- 8)「蓮」下甲本正誤表有「宗」。
- 9)「庄」甲本正誤表作「生」次同。
- 1)「洗」甲本正誤表曰衍字。
- 2)「理」甲本正誤表作「裡」。
- 3)「九」甲本正誤表作「凡」。
- 4)「齊」甲本正誤表作「齋」。
- 5)「村」甲本正誤表作「才」。
- 6)「盡」甲本正誤表作「畵」。
- 7)「仙」作「山」{甲}。
- 8)「攝」下甲本正誤表有「者」。
- 9)「手」甲本正誤表作「年」。
- 10)「豎議」甲本正誤表作「議豎」。
- 11)「主」甲本正誤表作「立」。
- 12)「仁」甲本正誤表作「麟」。
- 1)「公」下甲本正誤表有「見」。
- 2)「作賛」甲本正誤表曰衍字。
- 3)「福其」甲本正誤表作「其福」。
- 4)「裝」甲本正誤表作「狀」。
- 5)「善」甲本正誤表作「恙」。
- 1)「桂」作「柱」而又正誤表作「炷」{甲}。
- 2)「▼(木+覊)」甲本正誤表作「欛」。
- 3)「問」甲本正誤表作「間」。
- 4)「廌」疑「薦」{編}。
- 5)「太」甲本正誤表作「大」。
- 6)「立」甲本正誤表曰衍字。
- 7)「目」甲本正誤表作「自」。
- 8)「囊」甲本正誤表作「裵」。
- 9)「顧」疑「告」{編}。
- 10)「之人」甲本正誤表作「人之」。
- 11)「順」下甲本正誤表有「後」。
- 12)「有」甲本正誤表曰衍字。
- 1)「邦」疑「那」{編}。
- 2)「祥」甲本正誤表作「禪」。
- 3)「師」作「時」{甲}。
- 1)「百」甲本正誤表作「白」。
- 2)「倡」甲本正誤表作「偈」。
- 3)「其」甲本正誤表作「甚」。
- 4)「辨」甲本正誤表作「辦」。
- 5)「裝」甲本正誤表作「狀」。
- 6)「屐」甲本正誤表作「屣」。
- 7)「涓」下甲本正誤表有「而」。
- 1)「愛」甲本正誤表作「受」。
- 2)「弛」甲本正誤表作「陀」。
- 3)「資」下甲本正誤表有「憲」。
- 4)「甘」甲本正誤表作「紺」。
- 1)「瘦」甲本正誤表作「廋」。
- 2)「拂」甲本正誤表作「佛」。
- 3)「希芳」甲本正誤表作「喜方」。
- 4)「必」下甲本正誤表有「尋」。
- 5)「諸」甲本正誤表作「詣」。
- 6)「賈」甲本正誤表作「價」。
- 1)「師」下甲本正誤表有「傳」。
- 2)「爾」甲本正誤表作「肅」。
- 1)「主」甲本正誤表作「立」。
- 2)「禦」甲本正誤表作「御」次同。
- 3)「仙」下甲本正誤表有「岩」。
- 4)「綸」甲本正誤表作「論」。
- 5)「寺」疑「事」{編}。
- 1)「馳」甲本正誤表作「駝」。
- 2)「閨」甲本正誤表作「閏」。
- 3)「間」甲本正誤表作「問」次同。
- 4)「問」甲本正誤表作「間」。
- 5)「妨」甲本正誤表作「妙」。
- 6)「之」甲本正誤表作「也」。
- 7)「於」當在「菩薩戒」之下{編}。
- 8)「戒」下甲本正誤表有「於」。
- 9)「破」甲本正誤表作「罷」。
- 10)「放」甲本正誤表作「敎」。
- 11)「美」甲本正誤表曰衍字。
- 12)「黃」下甲本正誤表有「寺」。
- 1)「開」甲本正誤表作「關」。
- 2)「初」甲本正誤表作「材」。
- 3)「裝」甲本正誤表作「狀」。
- 4)「美」甲本正誤表作「彌」。
- 5)「齋」甲本正誤表作「齊」。
- 6)「憎賈」甲本正誤表作「增價」。
- 7)「可」甲本正誤表曰衍字。
- 1)「焉」下甲本正誤表有「奐焉」。
- 2)「狡」甲本正誤表作「役」。
- 3)「峳」甲本正誤表作「巋」。
- 4)「眞」作「直」{甲}。
- 5)「賈」甲本正誤表作「價」。
- 6)「郞」甲本正誤表作「朗」。
- 7)「朽」甲本正誤表作「沈」。
- 8)「椽」甲本正誤表作「緣」。
- 9)「八」甲本正誤表作「入」。
- 10)「岩」下甲本正誤表有「聽」。
- 11)「倡」甲本正誤表作「偈」。
- 12)「老師主」甲本正誤表曰衍字。
- 13)「倻」甲本正誤表曰衍字。
- 14)「魔」甲本正誤表曰衍字。
- 1)「如」甲本正誤表作「知」。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김두재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