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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_0229_a_08L부록附錄태허당 대사 행적太虛堂大師行蹟대사의 법휘는 경일敬一이며, 도명은 태허太虛, 택호는 동계東溪라 하였다. 본래 성은 이씨李氏이니 세조世祖의 후손으로 그 부친은 세주世柱요, 모친은 김씨金氏였다. 한날 어머니 김씨가 꿈에서 한 스님이 나타나 아들 되기를 원하는 꿈을 꾸고는 그를 잉태한 뒤 숭정崇禎 병자년丙子年(1636) 인동부仁同府 약목촌若木村2)에서 태어났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뛰어났으며 누린내 나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일곱 살에 이르러 어머니를 여의자 오랫동안 통곡하며 슬퍼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지리산의 신해信海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곳에 들렀다가 그 문하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신해 스님이 그를 특이하게 여기고는 “이 아이의 깨끗함과 지혜로움을 보니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진인의 얼굴이구나.”라고 하였다. 마침내 대인이 청을 받아들이고 거두어 주었는데, 신해 대사는 먹을 양식을 풍족하게 챙겨서 관동關東 유점사楡岾寺에서 주석하고 있는 벽암碧巖 대사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도록 하였다.벽암 대사의 법제자가 된 그는 널리 깨닫고 막힘이 없으며 만언萬言에 거침이 없었다. 나이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스스로 불교를 생각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에도 두루 미쳤으니 산문을 나서면 당대 명사들과 교류했으며, 한편으로는 백가百家의 학문도 어려움 없이 이해하여 이로써 벼슬아치들 사이에서 명성이 높았다.정유년(1657) 영남 관찰사 조계원趙繼遠의 천거로 그는 금오성장金烏城將이 되었고 2년을 머문 후 -
012_0229_a_08L1)〔附錄〕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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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_0229_a_10L太虛堂大師行蹟
012_0229_a_11L大師法諱敬一。名其道曰太虛。號其居
012_0229_a_12L曰東溪。本姓在璿源系。卽我世祖大
012_0229_a_13L王後裔也。父名世柱。母金氏夢一佛
012_0229_a_14L請爲子而孕。崇禎丙子。生於仁同府若
012_0229_a_15L木村。幼而頴異。不喜羶腥。七齡而喪
012_0229_a_16L母。哭泣哀悲久之。會智異山僧信海
012_0229_a_17L偶經其門。見而異之曰。阿兒淨而慧。
012_0229_a_18L有出世眞人相。遂得請於大人。而提
012_0229_a_19L而去。於是厚奉給資粮。使之受學于
012_0229_a_20L關東之榆店寺碧岩大師門下所在。師
012_0229_a_21L爲之遜席。愽洽貫通。萬言無碍。年未
012_0229_a_22L二十矣。已而自念佛敎如此。儒老盍
012_0229_a_23L亦遍諸。出而謁當世名士。傍通百家。
012_0229_a_24L不勞而解。由此藉甚公卿間。丁酉嶺南
012_0229_a_25L觀察使趙公繼遠。薦爲金烏城將。居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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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_0229_b_01L자헌대부資憲大夫에까지 올랐다. 그러자 그는 “이것이 어찌 산인山人으로 있을 곳인가.”라고 탄식하고는 물러나 해인사海印寺 강주가 되었다. 얼마 후 그는 다시 영정사靈井寺로 자리를 옮겨 그곳에서 3년을 수행하였다. 그 뒤 다시 여러 제자들과 감로사甘露寺 서암西庵에서 법회를 열었는데, 문인 종민宗敏이 스승을 위해 백련사白蓮舍를 지었다. 무진년(1688)에 중봉사中峰寺로 자리를 옮겼을 때는 또한 철민哲敏 스님이 내원內院을 세워 스승을 모셨다. 갑술년(1694) 가을 스승은 다시 해인사에서 문도를 모아 화엄법회를 열었는데, 여러 곳의 승려들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하루 사이에 수백 명이 모여들어 석 달의 하안거에 들어갔다. 스승이 장차 큰 강설을 하다가 절반도 채우지 못하고 병을 얻어 법회를 파하고, 비슬산琵瑟山 용천사湧泉寺 극락암極樂庵으로 갔으나 해가 지나도 차도는커녕 병이 더 위중해졌다. 문도들이 스승을 좌우에서 부축해 일으키고 필연으로 글을 쓰되 “스승님이 지금 돌아가시면 저희들이 가는 바는 어디입니까. 청하건대 게송으로 무궁한 세계를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스승은 즉시 그 말에 응하여 붓을 쥐고는 사람을 시켜 앞에 천을 펼치게 한 뒤 손수 사구四句를 썼으니 “늘 정문안頂門眼3)을 열어 놓되 생사의 길은 관여하지 말라. 맑은 바람 태허太虛로 불어오니 만고에 도가 살아난다.”라고 썼다. 그때까지 대사의 정신은 밝았으며 글씨의 힘도 평소와 같았는데, 쓰기를 마치자 문득 앉은 채로 숨을 거두었다. 때는 을해년(1695) 3월 15일이었다.돌아가신 후 7일 만에 관을 사유대闍維臺로 옮겼는데 상서로운 빛이 관에서 뻗어 나와 원근이 밝게 빛났다. 이를 본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얼굴빛이 환하게 바뀌었다. 그로부터 21일이 지난 후 사중과 스님들이 크게 사유재闍維齋를 올리는데, 흰 비단같이 상서로운 빛이 나와 해와 달도 빛을 잃었다. 그리고 갑자기 정골頂骨 한 조각이 백 보쯤 떨어진 층층 바위 위로 날아갔다. 이에 문인인 운현雲玄 스님이 이를 수습한 뒤 행동거지가 정결한 도인을 불러 단을 깨끗하게 하고 아주 경건하게 꾸몄다. 한참 있다가 갑자기 바람이 일더니 오래도록 불고 산골짝이 울리고 어두워지더니 춥고 깜깜해졌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놀라고 두려워하다가 촛불을 켜고 살핀 끝에 사리 9매를 찾아 하얀 사기그릇에 이를 담았다. 사리의 색깔은 마치 유리와 같았고 -
012_0229_b_01L年。職帖至資憲。嘆曰。此豈爲山人地
012_0229_b_02L耶。去而爲海印寺講主。又移鉢於靈井
012_0229_b_03L寺。結夏三年。又與諸法子。設會甘露
012_0229_b_04L寺西庵。門人宗敏。爲師築白蓮舍。戊
012_0229_b_05L辰移中峰寺。又有哲敏比丘。立內院以
012_0229_b_06L事師。甲戌秋復聚門徒於海印寺。廣設
012_0229_b_07L華嚴法會。諸方釋流。不召而集。日得
012_0229_b_08L數百人。結夏九旬。且大講講未半而
012_0229_b_09L疾作。罷而之琵瑟山湧泉寺極樂庵。經
012_0229_b_10L年不愈。疾且革。諸門徒翼而起。以筆
012_0229_b_11L硏屬曰。師今示寂後。生何所放。請爲
012_0229_b_12L偈語。以詔無窮世界。師卽應聲操毫。
012_0229_b_13L使人伸帋而前。手書四句曰。常開頂門
012_0229_b_14L眼。不關生死路。淸風吹太虛。萬古活
012_0229_b_15L一道。精神朗然。筆勢如常。寫畢奄然
012_0229_b_16L坐化。旹則乙亥三月十五日也。化之七
012_0229_b_17L日。運棺於闍維臺。有祥光。出其中。遠
012_0229_b_18L近晃耀。觀者無不灑然變色。日且三七
012_0229_b_19L衆比丘大設闍維齋。瑞彩如白練。日月
012_0229_b_20L無光。俄而頂骨一片。超卓層岩上相去
012_0229_b_21L百步許。門人雪玄得之。輒募淨行道人。
012_0229_b_22L修壇儀甚盛。久之風忽急。山谷震動。
012_0229_b_23L夜色夾寒而黑。衆心聳惧。明燭而視之。
012_0229_b_24L得舍利九枚。盛之白沙盂中。色如瑠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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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_0229_c_01L크기는 콩알만 했으니 찬란한 것이 눈길을 빼앗았다. 이때에 여러 산의 절에서 이 이적을 듣고 이르는 자가 폭주하였으니, 사리를 맞아다가 탑을 세운 데가 여섯 군데이다. 즉 대흥大興·영정靈井·감로甘露·중봉中峰·흥국興國·용천사湧泉寺가 그것으로 이들 절은 스승이 평생 동안 강법한 장소로 인연이 있어 사리와 진골로서 모두 부도를 세운 곳이다.스승이 진신이나 명사에게 준 시, 주고받은 시와 문장 잡록은 무려 천만 언에 이르나 『동계집東溪集』 네 편만이 세상에서 간행되었다. 스승의 세수는 60세이고 법랍은 45세이다. 세상에 전하는 것으로 우리 스승을 말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데, 기록한 것 역시 만에 하나에도 미치지 못한다.숭정후崇禎後 84년 신묘년(1711) 초여름에 문인인 반운도인伴雲道人 자감慈鑑이 삼가 쓰다. -
012_0229_c_01L其大如豆。離離可賞。於是乎諸山寺刹。
012_0229_c_02L聞而至者輻湊。迎而樹塔者六所。卽大
012_0229_c_03L興靈井甘露中峰興國湧泉諸寺。師之
012_0229_c_04L生平因果講法之場。而舍利眞骨。皆建
012_0229_c_05L浮屠。其所與縉紳名士。酬唱之詞及文
012_0229_c_06L章散錄。無慮千萬言。有東溪集四篇
012_0229_c_07L行于世。師壽六十。法臘四十五。所傳
012_0229_c_08L於世耳者。不足以盡吾師。而記之者。
012_0229_c_09L亦不能萬一云。
012_0229_c_10L崇禎後八十四年辛卯孟夏。門人伴
012_0229_c_11L雲道人。慈鑑。謹識。
012_0229_c_12L「附錄」二字。編者補入。
- 2)약목촌若木村 : 지금의 경북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으로, 구미시 인동동에서 남쪽으로 30리 지점이다.
- 3)정문안頂門眼 :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두 눈 외에 사리를 꿰뚫어 볼 수 있는 외눈이 정수리에 있다는 데서 나온 말.
- 1)「附錄」二字。編者補入。
ⓒ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 김승호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