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 / [本文]

ABC_BJ_H0309_T_003

012_0384_b_24L
본문[本文]
1. 대조계종주 불일 보조 국사전1)(大曹溪宗主佛日普照國師傳)
스님의 휘諱는 지눌知訥이고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鄭씨이다. 개경 서쪽 동주洞州

012_0384_b_24L[本文]

012_0384_b_25L大曹溪宗主佛日普照國師傳

012_0384_b_26L
諱知訥 號牧牛子 姓鄭氏 京西洞州

012_0384_c_01L【황해도 서흥군瑞興郡의 서쪽 78리, 서울(京城)에서 거리는 395리】 사람이다. 아버지는 광우光遇이고 어머니는 조趙씨이며 송 고종 소흥 28년 무인【금 태조 정륭 3년(1158, 의종 12)2)】에 태어났다.
8세에 조계曹溪의 운손雲孫 종휘 선사宗暉禪師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았으며 수학하는 데 정해진 스승이 없었다.
금 세종 대정 22년 임인(1182, 명종 12)에 나이 25세로 개경 보제사普濟寺에 올라와 승과 시험(僧選)을 치르고 합격하였다. 창평현 청원사淸源寺에 이르러 『육조단경六祖壇經』을 보고 스스로 터득함이 있었다.
대정 25년 을사(1185, 명종 15)에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읽다가 이 장자李長者의 『화엄론華嚴論』3)을 얻어 앞서의 이해가 더욱 밝아졌고 원돈관圓頓觀을 깨쳤다. 득재 선로得才禪老가 팔공산 거조사居祖寺에 주석하기를 청하자, 널리 뛰어난 이들(高士)을 맞이해 정혜定慧를 균등히 닦았다.【이를 정혜결사定慧結社라고 한다.】
승안 3년 무오(1198, 신종 1)에 이르러 지리산 무주암無住庵을 찾았는데, 법을 깨친 상서로운 모습이 몇 가지 있었다.【이른바 내관內觀으로 얻음이 있다는 것이 이것이다.】 대혜大慧의 『어록語錄』을 얻어 홀연히 눈을 뜨고 혜해慧解가 더욱 높아졌다.
승안 5년 경신(1200, 신종 3)에 이르러 부유현 송광산 길상사吉祥寺로 이주하였는데 문도를 이끌고 법식을 연 것이 11년이었다.【태화 5년(1205, 희종 1) 10월 1일에 왕명(朝旨)으로 경찬회慶讚會를 개설하였다.】 항상 사람들에게 『금강경金剛經』을 지니고 독송하도록 권하면서 의미를 풀어 주었고 『화엄론』과 『대혜어록』을 참고로(羽翼) 삼았으며, 삼문三門4)에 의거해 수행하였다 한다. 임금이 명하여 조계산 수선사修禪社로 고치게 하였는데【왕이 듣고 산 이름과 사찰 명호를 바꾼 것이 이것이다.】, 송광산을 바꾸어 조계산으로 하고【국사가 조계종을 세웠기 때문이라 한다.】 정혜사定慧社를 개칭하여【인근 사찰에 정혜라는 명칭이 있어서 서로 혼동되었기 때문이다.】 수선사라 한 것이다. 뒤에 대승선종大乘禪宗 조계산 송광사라 칭한 것도 바로 왕명을 따른 것이다.
대안 2년 경오(1210, 희종 6) 2월에 재회를 열어 모친을 천도하였으며, 같은 해 3월 20일에 가벼운 병을 보였다. 8일째에 이르러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주장자를 세워서 상당하고 향을 피워 놓고 게송을 설하였다.

這箇眼鼻口舌   이 눈, 코, 입, 혀는
不是祖眼鼻口舌  조사의 눈, 코, 입, 혀가 아니지만

012_0384_c_01L黃海道瑞興郡西七十八里
距京城三百九十五里也
人也 父光遇 妃
012_0384_c_02L趙氏 宋高宗紹興二十八年戊寅金太祖
正隆三
012_0384_c_03L
生 八歲投曹溪雲孫宗輝禪師祝髮
012_0384_c_04L學無常師 金太祖太定二十二年壬寅
012_0384_c_05L以年二十五 上都普濟寺 擧僧選中之
012_0384_c_06L抵昌平縣淸源寺 閱六祖壇經 意自得
012_0384_c_07L太定二十五年乙巳 下柯山普門寺 讀
012_0384_c_08L大藏經 得李長者華嚴論 前解轉明
012_0384_c_09L悟圓頓觀 有得才禪老 請住公山居祖
012_0384_c_10L寺 廣迎高士 習定均慧是爲定惠
結社云尒
至承
012_0384_c_11L安二年戊午 訪智異山無住庵 有得法
012_0384_c_12L瑞相數事所謂內觀
有得是也
得大惠語錄 忽然眼
012_0384_c_13L開 慧解增高 至五年庚申 移住富有
012_0384_c_14L縣松廣山吉祥社 領徒作法 十有一年
012_0384_c_15L泰和五年十月一日
以朝旨設慶贊會
常勸人持誦金剛經 爲
012_0384_c_16L演義 以華嚴論大惠錄 爲羽翼 依
012_0384_c_17L修三門云尒 上命改爲曹溪山修禪社
012_0384_c_18L王聞 改山名
寺號云者是也
改松廣山爲曹溪山師立曹溪
宗故云也

012_0384_c_19L改定慧社隣寺有定惠
名相濫故也
爲修禪社 後以大
012_0384_c_20L乘禪宗曹溪山松廣寺稱云 亦是仍朝
012_0384_c_21L旨也 大安二年庚午二月 設齋薦母
012_0384_c_22L同年三月二十日 示微疾 至八日 盥
012_0384_c_23L浴改服 卓錫上堂 祝香說偈云

012_0384_c_24L這箇眼鼻口舌 不是祖眼鼻口舌

012_0385_a_01L千種萬般     천 가지 만 가지가
揔在這裡     모두 이 안에 있도다
咄        쯧쯧쯧

법상에 걸터앉은 채 조용히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자(闍維) 사리가 큰 것이 30개, 작은 것이 무수히 나왔고 북쪽 봉우리에 탑을 세웠다.【삼일천三日泉 위이다.】 임금께서 이를 듣고 놀라고 슬퍼하였다. 시호는 불일보조佛日普照, 탑호는 감로甘露이며 세수 53세, 법랍(夏) 36년이다.
2. 조계종 진각 원소 국사전曹溪宗眞覺圓炤國師傳5)
스님의 휘는 혜심慧諶이고 자字는 영을永乙이며 호는 무의자無衣子이다. 속성은 최崔씨이며 화순 사람이다. 아버지는 완琬이고 어머니는 배裴씨이며 금 대정 18년 무술(1178, 명종 8)에 태어났다.
승안 6년 신유(1201, 신종 4)【즉 태화 원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다음 해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때 조계의 보조 국사가 결사를 열고 교화를 성대히 하자 곧장 나아가 참례하였다. 재회를 설하여 모친을 천도해 줄 것을 청하고 삭발하기를 빌자 허락하였는데 이때 나이 25세였다. 대사가 오산鰲山에 있으면서 게송을 읊었는데 소리가 10리 정도까지 들렸다. 보조 국사가 억보산億寶山에 있을 때 대사가 방문하여 뵈었는데 암자에서 천여 보 거리에서 국사가 시자를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대사가 게송을 지었다.

未入白雲山下路  백운산 아래 길에 들어가기도 전에
已叅庵內老師翁  암자 안의 노스님을 이미 참배하였네
呼兒聲落松蘿霧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송라 안개에 떨어지는데
煮茗香傳石逕風  차 달이는 향기는 돌길에 바람 타고 전해지네

참례를 마치고 국사가 손수 부채를 주자 대사가 게송을 바쳤다.

昔在師翁手裡   전에는 스승의 손안에 있었지만
今來弟子掌中   지금은 제자의 손바닥 안에 왔구나
若遇熱忙狂走   뜨거운 번뇌가 미친 듯 달려오면
不妨打起淸風   시원한 바람을 일으켜도 무방하리라

태화 무진년(1208, 희종 4)에 법석을 잇기 바란다고 명하였지만 고사하고 지리산에 은거하였다.
대안 경오년(1210, 희종 6)에 국사가 입적하였고 왕명을 받들어 주석하게 하자 대사가 어쩔 수 없이 수선사修禪社에 입원하여 개당하였다. 강종이 사신을 보내어 법을 구하자 대사는 『심요心要』를 지어서 올렸다.
정우 7년 기묘(1219, 고종 6)에 조칙으로 단속사斷俗寺에 머물게 하였다.

012_0385_a_01L千種萬般 揔在這裡 咄

012_0385_a_02L踞床泊然而化 闍維 舍利大者 三十
012_0385_a_03L小者無數 塔于北峰三日
泉上
上聞之 震悼
012_0385_a_04L謚曰佛日普照 塔曰甘露 壽五十三
012_0385_a_05L夏三十六

012_0385_a_06L

012_0385_a_07L曹溪宗眞覺圓照國師傳

012_0385_a_08L
諱惠諶 字永乙 號無衣子 姓崔氏 和
012_0385_a_09L順人也 父琬 母裵氏 金大正十八年
012_0385_a_10L戊戌生 承安六年辛酉卽泰和
元年也
中司馬
012_0385_a_11L試 明年母喪 時曹溪普照 開社盛化
012_0385_a_12L經造叅禮 請營齋薦母 乞剃髮許之
012_0385_a_13L時年二十五 師在鰲山唱偈 聲聞十里
012_0385_a_14L許 國師在億寶山 師訪謁 距庵千餘
012_0385_a_15L步 聞國師喚侍者聲 師作偈云

012_0385_a_16L未入白雲山下路 已叅庵內老師翁

012_0385_a_17L呼兒聲落松蘿霧 煮茗香傳石逕風

012_0385_a_18L及叅禮已 以手扇授之 師呈偈云

012_0385_a_19L昔在師翁手裡 今來弟子掌中

012_0385_a_20L若遇熱忙狂走 不妨打起淸風

012_0385_a_21L泰和戊辰 命欲嗣席固辭 遁智異山
012_0385_a_22L大安庚午 國師示寂 奉勅住席 師不
012_0385_a_23L獲已 入院開堂 康宗遣使求法 師撰
012_0385_a_24L心要 進之 貞祐七年己卯 詔居斷俗

012_0385_b_01L【현재 단성丹城 동쪽 5리쯤이다.】계사년(1233)에 이르러【태종 5년】 11월에 본사本社로 돌아와서 병세를 보였다. 진양공晉陽公6)이 임금께 보고하여 어의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다.
다음 해 봄에 월등사月燈寺로 옮겼고 갑오년(1234)【몽고 태종 6년이다.】 6월에 문인 마곡麻谷 등을 불러서 “늙은이가 오늘 통증이 심하다.”라고 하였다. 마곡이 “어찌하여 이처럼 심하게 되었습니까?”라고 하자 대사가 게송으로 답하였다.

衆苦不到處    온갖 고통이 이르지 않는 곳에
別有一乾坤    또 하나의 세계가 있구나
且問是何處    그것이 어떤 곳인지를 묻는다면
大寂湼槃門    매우 적막한 열반문이로다

가부좌를 하고 입적하니 다비를 하고 영골靈骨을 거두어 본산으로 돌아와서 광원廣原의 북쪽에 탑을 세웠다. 임금께서 듣고는 시호를 진각眞覺, 탑호를 원소圓炤로 내려 주었다. 세수는 57세, 법랍은 32년이다.
3. 조계종 청진 자운7) 국사전曹溪宗淸眞慈雲國師傳
스님의 휘는 몽여夢如이고 자는 소융小融이다.【비명이 확인되지 않아 이 글만 기재한다.】8)선사가 두 시자를 보내어 정이안丁而安9)이 묵죽墨竹 두 줄기를 그린 것을 구하였다. 하나는 설죽雪竹에 죽순이 돋아난 것이고 또 하나는 풍죽風竹 두 떨기였다. 바로 이 공李公 규보奎報10)를 불러서 찬贊을 지었다.
“대나무가 추위를 견디는 것은 그 천성을 따르는 것이지만 죽순이 눈 속에서 돋아난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다. 다만 옛적의 효자는 정성이 천지를 감동시켰으니, 눈물을 흘려서 겨울에 죽순을 돋게 하여 어머니가 드시게 했다.11) 비록 법신法身의 묘체(妙色)로 가득 찬 것(湛然)은 아니지만 시절이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법제자들이 늘어서서 그 체體를 같이하니 이미 그와 같은데 어찌 추위와 더위가 있겠는가.”
또 “큰바람이 부는 곳에는 여러 다른 것들이 함께 바람을 맞는다. 어찌 같은 대나무 중에서 흔들리는 것과 흔들리지 않는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그림에서 한 그루는 바람에 휘둘려 쉴 새 없이 흔들리는데 한 그루는 높이 솟은 채 꼿꼿이 서 있구나.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선禪을 배웠어도 한 사람은 깨우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한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온갖 생각의 움직임이 분분히 이는 것과 같다. 들은 것을 되돌려 본성을 깨우치면(反聞聞性)12) 움직임과 고요함이 비로소 그치게 된다.”

012_0385_b_01L今丹城東
五里許也
至癸巳太宗
五年
仲冬還本社示
012_0385_b_02L疾 晋陽公聞于上 遣御醫診之 明年
012_0385_b_03L春徙月燈寺 甲午蒙太宗
六年也
六月 召門人
012_0385_b_04L麻谷等云 老漢今日痛甚 谷曰爲甚如
012_0385_b_05L此 師以偈答云

012_0385_b_06L衆苦不到處 別有一乾坤

012_0385_b_07L且問是何處 大寂湼槃門

012_0385_b_08L趺坐而化 茶毘拾靈骨 還本山 塔于
012_0385_b_09L廣原北 上聞之 謚眞覺 塔圓照 壽五
012_0385_b_10L十七 夏三十二

012_0385_b_11L

012_0385_b_12L曹溪宗淸眞慈雲國師傳

012_0385_b_13L
諱夢如 字小融未見銘 但
記此書
師遣二侍者
012_0385_b_14L求丁而安 所畫墨竹二幹 一雪竹生笋
012_0385_b_15L二風竹二叢 仍邀李公奎報 贊曰竹之
012_0385_b_16L耐寒 雖則其性 未聞其笋 冒雪亦迸
012_0385_b_17L唯昔孝子 誠感天地 泣出冬笋 以中
012_0385_b_18L母嗜 不爾法身 妙色湛然 不爲時節
012_0385_b_19L卽所能遷 法子森立 一似其體 旣克
012_0385_b_20L似之 安有寒暑 又曰大風所吹 萬殊
012_0385_b_21L同受 何一竹中 有動與不 一叢困風
012_0385_b_22L搖簸不息 一叢自秀 植植其直 如有二
012_0385_b_23L人 同學于禪 一人懸悟 心已熱然 一
012_0385_b_24L猶未爾 群動坌起 反聞聞性 動靜迺

012_0385_c_01L
이규보가 선사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는 다음과 같다.
“높이 아룁니다. 저는 이전에 세속의 번잡하고 번거로운 일로 이頥 선지식(知識)13)에게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는 단지 바리때 하나 가진 승려(浮屠)일 뿐인데 제가 그에게 무슨 바라는 것이 있겠습니까? 감히 대화상大和尙(丈下)14)에게 바로 전달하지 못하고 혹시 그의 혀를 빌려 선사에게 알려지기를 바랐을 뿐입니다. 서생書生이 염치가 없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결국 이노頥老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가 보낸 물건은 기대했던 것 이상입니다. 비록 그 편지에서 자신이 보냈다고 했지만 필시 대화상 방장方丈에게서 나왔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공손히 받아 돌아오면서 감사함(感荷)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가儒家의 경비가 요즘 몹시 많고 커서 아마도 감당하고 버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 세상을 구제하는 큰 법왕法王이 아니라면 누가 이에 미치겠습니까? 편지로는 뜻을 다하지 못하니 황공하고 황공합니다. 오직 법을 위해 몸을 보중하시기를(珍重) 바랍니다.”
몽고 헌종 2년 임자(1252, 고종 39) 8월에 입적하였다.
4. 조계종 진명 보광 국사전曹溪宗眞明普光國師傳15)
스님의 휘는 혼원混元이고 자는 ▣▣, 호는 ▣▣이며 시호는 충경冲鏡이다. 속성은 이李씨이고 아버지는 사덕師德, 어머니는 김金씨이며 수안현 사람이다. 금金의 명창 2년 신해(1191)에 태어났다.
나이 13세에【태화 3년 계해(1203)】 품일品日16)의 먼 후손(雲孫)인 종헌宗軒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선과禪科에 합격하여 처음에 쌍봉의 청우靑牛17)와 조계의 무의자無衣子(眞覺慧諶)를 뵈었다. 또 청진淸眞(夢如)18)을 모셔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골수를 모두 얻었고 설법을 잘하는 재주(樂說辯才)를 얻었다. 진양공(崔瑀)이 승계를 삼중대사三重大師로 높일 것을 주청하였고 정혜사定慧寺19)에 주석하도록 명하였다.
태종 황후 4년 을사(1245, 고종 32)20)에 선원사禪源寺에서 대사에게 낙성회(盟) 주관을 청하였다.
병오년(1246, 고종 33)에 강화(京師, 江都)의 선원사에 갔고 고종(高王)이 비답으로 대선사大禪師를 삼았다. 진양공이 소疏를 지어 올리자 개당하고 법좌에 올라 청진을 이었다. 임금이 행차하여 소를 올려서 법을 청하였고

012_0385_c_01L已 李奎報寄書于禪師 其書曰 右啓
012_0385_c_02L僕曩以塵襍細故 達于頥知識者 特一
012_0385_c_03L鉢浮屠耳 予安有所冀 而乃尒所以顏
012_0385_c_04L厚不得 逕達於大和上之下 庶或藉其
012_0385_c_05L舌 略聞于左右耳 書生之大寡廉耻如
012_0385_c_06L此 果蒙頥老手簡 其所送物件 大過
012_0385_c_07L所望 雖於其簡 以自送爲辭 知必出
012_0385_c_08L於大和上方丈 祗領以還 不勝感荷
012_0385_c_09L不然儒家之經費 比來頗甚繁浩 太不
012_0385_c_10L得堪支也 噫 非救世大法王 疇及是
012_0385_c_11L哉 書意未悉 惶恐惶恐 唯冀爲法 珍
012_0385_c_12L重云 蒙古憲宗二年 壬子八月寂

012_0385_c_13L

012_0385_c_14L曹溪宗眞明普光國師傳

012_0385_c_15L
諱混元 字□□ 號□□ 謚冲鏡 姓李
012_0385_c_16L父師德 妣金氏 遂安縣人 金明昌
012_0385_c_17L二年辛亥生 年十三泰和三年
癸亥也
投品日雲
012_0385_c_18L孫宗軒 披剃受具 中禪科 初謁雙峯
012_0385_c_19L靑牛 曹溪無衣子 又事淸眞 所至相
012_0385_c_20L從 盡得骨髓 得樂說辯才 晋陽公奏
012_0385_c_21L加三重大師 命住定慧寺 太宗后五年
012_0385_c_22L乙巳 禪源寺請師主盟 丙午赴京師
012_0385_c_23L禪源 高王將批爲大禪師 晋陽公撰疏
012_0385_c_24L進 開堂陞座 嗣淸眞 上幸臨呈疏請

012_0386_a_01L임금이 크게 기뻐하였다.
임자년(1252, 고종 39) 8월에 청진 국사가 병이 나자 임금이 명하여 대사를 조계에 머물게 하여 제4세 사주로 삼았다. 중사인中使人에게 명하여 대사를 모시고 조계로 가게 하였다. 12월에 대사가 원院에 들어가서 다시 목우牧牛의 기풍21)을 일으켰다.
무오년(1258, 고종 45)에 임금이 스승의 예(不臣禮)로 대사를 섬겼고 명하여 단속사斷俗寺에 주석하게 하였다. 또 자운사慈雲寺에 맞아들였는데 오래 가물다가 그날 저녁 큰비가 쏟아졌다.
헌종 9년 기미(1259, 고종 46) 5월 11일에 책봉하여 왕사王師로 삼아 스승으로 모시다가 승하(上仙)하였다. 원종(元王)이 즉위하여 예우를 특별히 더하였고 와룡사臥龍寺를 하산소下山所22)로 삼았다. 임금이 대사를 궐내에 맞아들여 친히 스승의 예를 행하고 손수 공양을 올렸다.
경신년(1260, 원종 1) 10월에 하산하여 원院에 들고 당堂에 올랐으며 법을 설하여 중생을 이롭게 한 것이 모두 12년이었다. 왕의 외숙인 경지鏡智 대사23)가 조정의 명을 받아 사굴산闍崛山으로 승적을 옮기고 품일의 후손이 되어 단속사에 주석하였다.
원 지원 8년 신미(1271, 원종 12) 12월 17일에 병이 났고, 열흘째 신시(오후 3~5시)에 게송을 설하고 입멸하였다. 왕이 듣고는 놀라고 슬퍼하였다. 시호는 진명충경국사眞明冲鏡國師이고 탑호는 보광普光이며 세수 81세, 법랍은 68년이다.
5. 조계종 자진 원오 국사전曹溪宗慈眞圓悟國師傳24)
스님의 휘는 천영天英이고 속성은 양梁씨이며 아버지는 택춘宅椿, 어머니는 김金씨이다. 금나라 정우貞祐 3년인 고려 고종 2년 을해(1215) 6월 13일에 태어났다.
나이 15세 때인 기축년에 조계 진각 국사眞覺國師25)의 당하堂下에 찾아가 득도得度하였고 20세에는 선회禪會26)에 나아가 좌원座元(법회의 좌장)이 되었다.
22세 때인 병신년에 선과禪科에 붙었으며 지팡이 하나 짚고 남쪽으로 유람을 떠나 청진 국사淸眞國師27)와 진명 국사眞明國師(混元)를 뵙고는 혜해慧解가 더욱 밝아졌다.
32세 때인 병오년에 진양공28)이 선원사禪源社를 창건하면서 진명 국사를 불러 법주法主로 삼았다. 스님이 법회에 참여하자 공이 더욱 공경하였고 삼중대사三重大師29)를 주청하여 제수하였다.

012_0386_a_01L法 上大悅 壬子八月 淸眞示疾 上命
012_0386_a_02L師住曹溪 爲第四世 命中使人 陪徃
012_0386_a_03L曹溪 十二月師入院 再振牧牛之風
012_0386_a_04L戊午上以不臣禮事之 命住斷俗寺 又
012_0386_a_05L迎入慈雲寺 久旱 是夕霈雨 憲宗九
012_0386_a_06L年己未五月十一日 册爲王師 王行
012_0386_a_07L師事 上仙元王卽祚 禮遇殊加 以臥
012_0386_a_08L龍寺 爲下山所 迎入大內 親行師禮
012_0386_a_09L手自進供 以庚申十月下山 入院上堂
012_0386_a_10L法說利生 凡十二年 王舅鏡智大師
012_0386_a_11L受朝旨 移籍崛山 爲品日孫 住斷俗
012_0386_a_12L寺 元至元八年辛未十二月十七日示
012_0386_a_13L疾 至十日申 說偈示滅 上聞而震悼
012_0386_a_14L謚眞明冲鏡國師 塔寶光 壽八十一
012_0386_a_15L夏六十八

012_0386_a_16L

012_0386_a_17L曹溪宗慈眞圓悟國師傳

012_0386_a_18L
諱天英 姓梁 父宅椿 妣金氏 貞祐三
012_0386_a_19L年麗高宗二年乙亥六月十三日誕 年
012_0386_a_20L十五己丑 詣曹溪眞覺國師堂下得度
012_0386_a_21L二十赴禪會爲座 元二十二丙申中禪
012_0386_a_22L科 一杖南遊 謁淸眞國師眞明國師
012_0386_a_23L慧解增朗 三十二丙午 晋陽公剏禪源
012_0386_a_24L社 迎眞明爲法主 師叅會 公尤敬 奏

012_0386_b_01L
34세가 된 무신년에는 임금께 상주하여 승계를 선사禪師로 높여 주었고 단속사에 주석하게 하였다.
35세 때인 기유년에 공이 창복사昌福寺를 창건하면서 낙성落成 재회를 열고 스님을 주맹主盟으로 청하였다.
36세 때인 경술년에는 선원사의 주지로 임명되었다.
37세가 된 신해년에는 주국柱國30) 최항崔沆31)이 보제원普濟院을 건립하였는데 구산九山【가지산, 사굴산, 사자산, 성주산, 봉림산, 희양산, 동리산, 수미산, 실상산이 그것이다.】의 선종 승려들을 초청하였고 스님을 주맹으로 청하였다.
38세 때인 임자년에 청진 국사가 세상을 뜨자 진명 국사를 조계에 주석하도록 명하였고 스님을 선원사의 법주로 모셨다.
42세 때인 병진년 가을에 진명 국사가 그만두기를 청하자 이에 스님에게 조계(修禪社主)를 계승하도록 명하였고 대선사大禪師를 더해 주었으며 궁궐로 맞아들여 임금이 공양을 올렸다. 8월 28일에는 배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 조계로 들어가니 불일佛日이 다시 퍼졌다.
충렬왕 12년 병술【원 지원 23년】 2월 12일에 불대사佛坮寺의 청을 받고 가서는 장로長老를 불러 “늙은이가 돌아가려 하니 너희들은 잘 있어라. 때가 다가왔으니 많은 말이 필요 없구나. 태어나는 것은 아랫도리를 입는 것과 같고 죽는 것은 속옷을 벗는 것과 같으니 이처럼 입고 벗는 사람은 무엇인가?”라고 하였다. 29일에 고요히 입적하였다. 동쪽 봉우리에서 다비를 하여 유골을 수습하고 3월 6일에 조계로 돌아왔다. 임금께서 소식을 듣고 시호를 자진원오慈眞圓悟, 탑호를 정조靜照라고 하였고 자호는 헌회당軒晦堂이었다. 6월 9일 대원大原의 서쪽 언덕에 봉안하자 두 줄기 상서로운 무지개가 생겼다. 하나는 조계의 남쪽 봉우리에서 일어났고 하나는 탑의 앞쪽 봉우리를 가로질러 탑이 있는 곳에 바로 이르렀다. 세수는 72세, 법랍은 57년이다.
6. 조계종 원감 보명 국사전曹溪宗圓鑑寶明國師傳32)
스님의 휘는 법환法桓 또는 충지冲止이며 자호自號는 복암宓庵이다. 속성은 위魏씨이고 정안定安 사람이며 아버지는 호부戶部 원외랑員外郞 소紹, 어머니는 송宋씨【이부吏部 원외랑 자옥子沃의 딸】이다.
정우 4년 병자(1226, 고종 13) 11월 17일에 태어났고 9세에 학업을 시작하여

012_0386_b_01L授三重大師 三十四戊申 奏加禪師
012_0386_b_02L住斷俗寺 三十五己酉 公剏昌福寺
012_0386_b_03L設落成齋 請師主盟 三十六庚戌 命
012_0386_b_04L住禪源社 三十七辛亥 柱國崔沆 建
012_0386_b_05L普濟院 召九山迦智山 闍崛山 師子山 聖住
山 鳳林山 曦陽山 桐裡山 須
012_0386_b_06L彌山 實相
山 是也
禪侶 請師主盟 三十八壬子
012_0386_b_07L淸眞順世 命眞明住曹溪 以師爲禪源
012_0386_b_08L法主 四十二丙辰秋 眞明乞退 命師
012_0386_b_09L嗣曹溪 加大禪師 迎禁中 御供饌 八
012_0386_b_10L月二十八日 乘舟南下 入曹溪 再張
012_0386_b_11L佛日 忠列王十二丙戌元至元二
十三年也
二月十
012_0386_b_12L二日 受請佛坮寺 喚長老云 老漢欲
012_0386_b_13L歸 汝等好住 時將至矣 不須多說 生
012_0386_b_14L如着袴 死如脫裙 那箇是着脫之人
012_0386_b_15L二十九日泊然而化 茶毘東峰收骨 三
012_0386_b_16L月六日還曹溪 上聞謚慈眞圓悟 塔靜
012_0386_b_17L照軒晦堂 六月九日 奉安于大原西崗
012_0386_b_18L有雙虹瑞 一起曹溪南峯 一跨塔前
012_0386_b_19L峯 貫至塔所 壽七十二 夏五十七

012_0386_b_20L

012_0386_b_21L曹溪宗圓鑑寶明國師傳

012_0386_b_22L
諱法桓 又冲止 自號宓庵 姓魏 定安
012_0386_b_23L人 父戶部員外郞紹 妣宋氏吏部員外
郞子沃女

012_0386_b_24L貞祐四年丙子十一月十七日誕 九歲

012_0386_c_01L경서經書와 자子·사史를 한 번 보고 바로 외웠고 문장을 잘 지었다.
19세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바로 명을 받들어 일본 땅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뜻을 품다가 선원사禪源寺 원오 국사圓悟國師33)를 찾아가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지팡이를 짚고 남쪽을 다니면서 강사講肆에 두루 참예하였다.
나이 41세에 김해현의 감로사甘露社에 처음 주석하였는데,34) 시를 청하는 선덕禪德이 있었다. 스님은 다음과 같이 읊었다.

春日花開桂苑中  봄날 계수나무 동산에 꽃이 활짝 피니
暗香浮動少林風  그윽한 향기 소림의 바람에 떠다니네
今朝果熟沾甘露  오늘 아침 열매 익어 감로를 적시니
無限人天一味同  수없는 중생들이 뛰어난 맛을 함께하네

병술년 2월 원오 국사가 세상을 뜨셨고 대중들이 그 사실을 장계로 보고하자 스님에게 입원入院35)하도록 명하였다. 4월 16일 원오 국사를 이어 입원해 개당하였고 수선사 제6세 사주가 되었으며 7년간 보조普照가 남긴 법도를 다시 빛냈다. 「청전표請田表」36)를 올려서 토지를 전과 같이 회복하였다. 상국上國(元)에서 스님의 덕과 풍모를 듣고 궁사宮使를 파견하여 스님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역마를 타고 중국(中華)에 이르자 세조 황제가 친히 영접하여 빈주賓主의 예로써 대우하였고 사부師傅의 은혜로 받들었으며, 금란가사金襴袈裟, 푸른 수를 놓은 장삼, 흰 불자(白拂), 도구道具를 하사하였다.
임진년 8월 초여드레에 병세를 보였고 지원 30년 계사(1292, 충렬왕 18) 4월 7일에 병이 위중해졌다. 10일 새벽에 머리를 정결히 하고 옷을 갈아입고서 문인들에게 “태어남이 있고 죽음이 있는 것은 사람의 상규이다. 나는 떠날 것이니 너희들은 잘 있어라.”라고 하며 임종게를 읊었다.

閱過行年六十七  돌아보니 67년을 지나와서
及到今朝萬事畢  오늘 아침에야 모든 일이 끝났네
故鄕歸路坦然平  고향 돌아가는 길 평탄히 다져져 있고
路頭分明未曾失  갈 길이 분명해서 잃어버린 적이 없네
手中纔有一枝笻  손안에 겨우 대지팡이 한 자루 있지만
且喜道中脚不跌  도중에 다리를 절지 않게 되어 또한 기쁘구나

말을 마치고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이달 20일에 다비를 하였는데 상서로운 기운이 하늘에 퍼져서 여러 달 동안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듣고는 시호를 원감圓鑑, 탑호를 보명寶明이라 하였다. 조계의 북쪽 골짜기에 탑을 건립하였으며 비는 감로암甘露庵 남쪽 기슭에 세웠다. 세수는 67세이고 법랍은 39년이다.【연표를 고증하면 정우 4년 병자부터 지원 30년 계사까지는 78년인데

012_0386_c_01L就學 經書子史 過目卽誦 善屬文 十
012_0386_c_02L九登壯元 卽奉使日域 爰有出塵志
012_0386_c_03L造禪源寺圓悟國師 零染受具 策杖南
012_0386_c_04L遊 歷叅講肆 年四十一始住金海縣甘
012_0386_c_05L露社 有禪德請詩 師云

012_0386_c_06L春日花開桂苑中 暗香浮動少林風

012_0386_c_07L今朝果熟沾甘露 無限人天一味同

012_0386_c_08L丙戌二月 圓悟順世 大衆狀聞 命師
012_0386_c_09L入院 四月十六日 嗣圓悟 入院開堂
012_0386_c_10L爲第六世 七年更光 普照遺軌 奏請
012_0386_c_11L田表 復土如舊 上國聞師德風 遣宮
012_0386_c_12L使迓師 乘馹至中華 皇帝親自迎待
012_0386_c_13L以賓主禮 褒以師傅恩 授錦欄碧繡白
012_0386_c_14L拂道具 至壬辰八月初八日示疾 至元
012_0386_c_15L三十年癸巳四月七日疾重 十日晨淨
012_0386_c_16L髮更衣 謂門人曰 有生有死 人之常
012_0386_c_17L也 吾當行矣 汝等好住 偈曰

012_0386_c_18L閱過行年六十七 及到今朝萬事畢

012_0386_c_19L故鄕歸路坦然平 路頭分明未曾失

012_0386_c_20L手中纔有一枝笻 且喜道中脚不跌

012_0386_c_21L言訖泊然而逝 是月二十日茶毘 瑞氣
012_0386_c_22L亘空 彌月不已 上聞之 謚圓鑑 塔
012_0386_c_23L寶明 塔于曹溪北洞 碑樹于甘露庵
012_0386_c_24L南麓 壽六十七 夏三十九考年表 自貞祐
四年丙子 至元

012_0387_a_01L지금 67세라고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7. 조계종 자정 국사전曹溪宗慈靜國師傳【휘는 인일印一. 비문碑文을 보지 못하였다.】
8. 조계종 자각 국사전曹溪宗慈覺國師傳【휘는 정열晶悅. 비문을 보지 못하였다.】
9. 조계종 담당 국사전曹溪宗湛堂國師傳【비문을 보지 못하였다.】
10. 조계종 혜감 광조 국사전曹溪宗慧鑑廣照國師傳37)
스님의 휘는 만항萬恒이고 속성은 박朴씨이다. 아버지 경승京升은 진사進士였고 웅진 사람이다. 어릴 때 깨달은 바가 있어 구산九山(禪門)에 들어갔고 승과의 장원으로 뽑혔다. 금강산(楓岳)에 가서 여름을 보냈고 지리산(智異)에 옮겨 거처하였다. 배가 고파도 먹는 것을 중시하지 않았고 추울 때 가죽옷을 입지 않았으며 몇 년 동안 자리에 눕지도 않았다. 충렬왕이 삼장사三藏社에 주석할 것을 명하였고 조계의 원오圓悟(天英) 국사 또한 그에게 권유하니 그곳에 머물렀다. 사대부 중에 삼장사로 들어가 출가한(摳衣) 이들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오중吳中38)의 몽산蒙山 화상39)이 국사의 글과 게송을 들어 본 후 칭찬이 그치지 않았다.
황경皇慶【원 인종의 연호】 2년 계축(1313)에 태위왕太尉王40)이 수레를 마련하고 격식을 갖추어 스님을 원의 수도로 초청하였고 선교禪敎의 명류名流들을 불러 모았다. 스님이 이르자 방棒과 할喝이 바람이 이는 듯하였고 변론이 강물이 흐르는 것과 같아서 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손수 음식을 대접하였다. ‘별전종주別傳宗主 중속조등重續祖燈 묘명존자妙明尊者’라는 법호를 더해 받고 도구道具 50일鎰41)을 하사받아 산으로 돌아왔다.
연우 6년 기미(1319, 충숙왕 6) 7월에 병이 나서 거처를 옮기려 하였는데 하루 전날 저녁 남쪽 봉우리의 큰 나무가 저절로 쓰러졌다. 8월 18일이 되자 머리를 깎고 옷을 갈아입은 후 유서遺書를 가다듬었고 스스로 장지를 점지하였다. 북을 쳐서 대중을 모으고 선상禪床에 기대어 이별의 게송을 고하였다.

廓淸五蘊     오온을 두루 분명히 하니
死生出沒     죽고 태어나고 나오고 사라져도
何處不相逢    어느 곳에서든 서로 만나지 않겠는가
渡河不用筏    강을 건넘에 뗏목이 소용없도다

무릎을 두드리고 손을 모으고는 웃음을 머금으면서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여(闍維) 절의 간방艮方(동북쪽) 산등성이에 탑을 세웠다.

012_0387_a_01L三十癸巳 爲七十八年 而
今六十七云 未詳何是

012_0387_a_02L
012_0387_a_03L
曹溪宗慈靜國師傳諱印一 末見
碑文


012_0387_a_04L曹溪宗慈覺國師傳諱晶悅 末見
碑文


012_0387_a_05L曹溪宗湛堂國師傳碑文
未見

012_0387_a_06L

012_0387_a_07L曹溪宗慧鑑廣照國師傳

012_0387_a_08L
諱萬恒 姓朴 父京升進士 熊津人 幼
012_0387_a_09L頴悟 赴九山 選魁科 徃楓岳夏滿 移
012_0387_a_10L捿智異 飢不重味 寒不襲裘 脇不至
012_0387_a_11L席者 累稔矣 忠列王命住三藏社 曹
012_0387_a_12L溪圓悟亦諭之 乃住 士大夫入社摳衣
012_0387_a_13L者 不能勝紀 吳中蒙山 聞師文偈 歎
012_0387_a_14L賞不已 皇慶元仁宗
年號也
二年癸丑 太尉王
012_0387_a_15L安車卑辭邀師京城 方聚禪敎名流 師
012_0387_a_16L至 棒喝風生 辯若懸河 王嘉甚 手供
012_0387_a_17L饌 加別傳宗主 重續祖燈 妙明尊者
012_0387_a_18L賜道具五十鎰以還山 延祐六年己未
012_0387_a_19L七月遘疾 將移捿前一夕 南峯巨木自
012_0387_a_20L仆 至八月十八日 剃髮更衣 修遺書
012_0387_a_21L自占葬地 撾皷集衆 據禪床吿別偈

012_0387_a_22L廓淸五蘊 死生出沒

012_0387_a_23L何處不相逢 渡河不用筏

012_0387_a_24L拍膝叉手 含笑而化 闍維 塔于寺艮崗

012_0387_b_01L임금께서 이를 듣고 시호를 혜감慧鑑, 탑호를 광조廣照라고 하였다. 세수 71세, 법랍 58년이다.
처음에 어머니 정鄭씨가 하늘에서 비취색 장막이 내려오면서 피부가 옥과 같은 아이가 정씨 품속으로 뛰어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기유년(1259, 고종 46) 8월 6일에 태어났는데 이로 인해 막아幕兒라고 이름을 지었다. 스님이 입적함에 이르러 대방군帶方郡42) 사람들이 백태白太라 이름 붙인 것은 꿈에서 스님이 비취색 장막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것을 기이하게 여기다가 다음 날 절에 달려가 보니 스님이 이미 입적하였다고 해서 나온 것이다.
11. 조계종 묘엄 국사전曹溪宗妙嚴國師傳【휘는 자원慈圓】
12. 조계종 혜각 국사전曹溪宗慧覺國師傳【휘는 도영道英】
13. 조계종 각엄 각진 국사전曹溪宗覺儼覺眞國師傳43)
스님의 휘는 복구復丘이고 자는 무언無言이다. 고성 사람으로 ‘판밀직判密直 우승시右承侍 문한학사文翰學士 승지承旨’ 이 공李公 존비尊庇의 아들이다. 모부인母夫人은 늘 대승불경大乘佛經을 외었는데 일찍이 꿈에서 한 거사가 관복을 차려입고 앞에 나타나 “제가 얼마 후에 올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지원 7년 경오(1270, 원종 11) 9월 15일에 태어났다. 나이 겨우 10세에 조계 국사曹溪國師(圓悟天英)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얼마 안 있어 원오圓悟 국사44)가 입적하면서 대선사 도영道英에게 의촉하였고 그로부터 10년간 배워 통달하였다.
경인년(1290, 충렬왕 16) 가을에 선종의 선과選科에 합격하니 이때 나이 21세였다. 견식이 이미 초탈하였고 도에 뜻을 두고 번거로움을 꺼렸다. 자각慈覺 국사45)가 곧 스님의 두 번째 스승으로서 일찍이 학도學徒를 스님에게 맡겼는데 스님은 “스스로가 얻음이 있은 후에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는 것이니 저는 진정으로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결국 백암사로 가서 동지 10여 인과 함께 밤낮으로 참구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후에 월남月南46)과 송광松廣과 같은 대도량에 주석하였다. 앞뒤로 40여 년 동안에 나라를 복되게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한 것이나 포상과 존숭, 하사받은 은총은

012_0387_b_01L上聞之 謚慧鑑 塔廣照 壽七十一 夏
012_0387_b_02L五十八 初母鄭氏 夢天降翠幕 有童
012_0387_b_03L肥玉子 躍入鄭懷中 以己酉八月六日
012_0387_b_04L誕 仍名幕兒 洎示滅 帶方郡人名白
012_0387_b_05L太者 夢師登翠幕上天去 恠而明日奔
012_0387_b_06L寺見師 已逝云尒

012_0387_b_07L
012_0387_b_08L
曹溪宗妙嚴國師傳諱慈圓

012_0387_b_09L曹溪宗慧覺國師傳諱道英

012_0387_b_10L

012_0387_b_11L曹溪宗覺儼覺眞國師傳

012_0387_b_12L
諱復丘 字無言 固城人 判密直右承
012_0387_b_13L侍文翰學士承旨李公尊庇之子也 母
012_0387_b_14L夫人常誦大乘佛經 嘗夢一居士 盛冠
012_0387_b_15L服而前曰 我已來矣 洎至元七年庚午
012_0387_b_16L九月十五日誕 年甫十歲 就曹溪國師
012_0387_b_17L剃落受具 未幾圓悟順世 依囑從大禪
012_0387_b_18L師道英 學通十年 庚寅秋 中禪選科
012_0387_b_19L時年二十一 見已超然 志道厭煩 慈
012_0387_b_20L覺國師 卽師之二師也 嘗以學徒委師
012_0387_b_21L師曰有得於己然後 傳諸人 吾固不敢
012_0387_b_22L遂徃白嵓寺 與同志十餘人 蚤夜叅究
012_0387_b_23L十又餘年後 住月南松廣大道場 前後
012_0387_b_24L四十餘年 其間福國利生 褒崇賜錫之

012_0387_c_01L스님에게는 또한 껍데기(糟粕)에 불과하였다. 왕명으로 불갑사佛岬寺47)에 주석하도록 하자 문도에게 “지난날 이 산에 머물렀는데 어떤 사람이 절하면서 ‘스님은 여기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그것이 증명되었구나.”라고 하며 곧 게송을 읊었다.

君賜吳城佛岬山  임금께서 오성의 불갑산을 내려 주시니
人言倦鳥已知還  게으른 새가 돌아올 줄 이미 알았다 하네
慇懃薦祝如天壽  공손하고 간절하게 천수 누리기를 축원하오니
從此邦基萬古安  이로부터 나라의 기틀이 만고에 평안하기를

지정 15년 을미(1355)에 백암에 머물렀는데 6월에 작은 병이 났고 7월 27일에 병이 조금 낫자 머리를 깎고 목욕하고는 옷을 갖추어 입고 북을 치며 평상에 앉았다.

卽心卽佛江西老  마음이 곧 부처인 강서의 노인이여
非佛非心物外翁  부처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물외의 늙은이로다
鼯鼠聲中吾獨坐  다람쥐와 쥐 소리 속에 나 홀로 앉았으니
湼槃生死本來空  열반과 나고 죽는 것이 본래부터 공하도다

이와 같이 게송을 읊고는 의연한 모습으로 입적하였다. 다음 날 서쪽 봉우리에서 다비를 하였고 사리함은 불갑사에 모셔졌다. 임금께서 보고를 받고 시호를 각진覺眞, 탑호를 자운慈雲이라 하였다. 세수 86세, 법랍 76년이다.【연표를 살펴보면 6년이 비는데 이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4. 조계종 정혜 국사전曹溪宗靜慧國師傳【자字는 복암復庵】
15. 조계종 홍진 국사전曹溪宗弘眞國師傳
16. 조계종 고봉 화상전曹溪宗高峯和尙傳
스님의 휘는 법장法藏이고 속성은 김金씨이며 신천 사람이다. 어머니 임林씨가 지정 11년 신묘(1351, 충정왕 3)에 낳았다. 어릴 때 출가하여 도를 닦았고 나옹懶翁48)을 찾아뵈어 스승으로 모셨으며 법명은 지숭志崇, 법호는 고봉高峯이다. 머리카락 길이가 몇 치(寸)나 되었으며 단표행單瓢行49)을 하고 피리를 잘 불어서 사람들이 그가 현인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안동부에 청량암을 손수 짓고 녹수청산의 자연과 홍진자맥紅塵紫陌의 세속에서 30여 년을 소요하면서 성인의 성품(聖胎)을 오래도록 길렀다.
홍무 28년 을해(1395, 태조 4) 나이 45세 때에

012_0387_c_01L寵 盖又師之糟粕也 上命住佛岬寺
012_0387_c_02L謂徒曰 徃宿此山 有人拜曰 師宜住
012_0387_c_03L此 今而驗矣 乃頌曰

012_0387_c_04L君賜吳城佛岬山 人言倦鳥已知還

012_0387_c_05L慇懃薦祝如天壽 從此邦基萬古安

012_0387_c_06L至正十五年乙未住白嵓 六月小疾 七
012_0387_c_07L月二十七日疾小間 剃沐具服 擊皷坐
012_0387_c_08L床 偈云

012_0387_c_09L卽心卽佛江西老 非佛非心物外翁
012_0387_c_10L鼯鼠聲中吾獨坐 湼槃生死本來空
012_0387_c_11L儼然而化 翌日茶毘于西峰 凾還佛岬
012_0387_c_12L上聞之謚覺眞 塔慈雲 壽八十六 夏
012_0387_c_13L七十六考年表 六年
欠未詳也

012_0387_c_14L
012_0387_c_15L
曹溪宗靜慧國師傳字復庵

012_0387_c_16L曹溪宗弘眞國師傳

012_0387_c_17L

012_0387_c_18L曹溪宗高峯和尙傳

012_0387_c_19L
諱法藏 姓金 愼川人 母林氏 至正十
012_0387_c_20L一年辛卯生 丱年出家修道 謁懶翁爲
012_0387_c_21L師 名志崇 號高峯 髮長數寸 單瓢行
012_0387_c_22L善吹笛 人不知賢否 手成安東府淸涼
012_0387_c_23L菴 綠水靑山 紅塵紫陌 逍遙三十餘
012_0387_c_24L年 長養聖胎 洪武二十八乙亥年四十

012_0388_a_01L남쪽의 낙안 금화산에 가서 머물렀다. 꿈에 범찰梵刹을 본 후 다음 날 조계산 송광사에 들어가 배회하며 사방을 둘러보니 전날 꿈과 완전히 일치하였다. 탄식하면서 문인에게 “여기에 문지방과 뜰(梱庭)을 내 새롭게 중수해야 되겠다.”라고 하였다.
건문 원년 기묘(1399, 정종 1)에 대궐로 가서 보조普照와 보제普濟50)의 대도량을 중창하길 원한다고 계문啓聞하였다. 주상【정종대왕】께서 이를 허락하시고 ‘겸수서운관 비보안兼受書雲觀裨補案’의 교지를 내렸다.
경진년(1400, 정종 2) 7월에 전준傳准51)이 내려졌고 상제尙濟 등 승려와 속인 30여 명에게 권면하니 옛날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불법승佛法僧의 전당 3, 4개소가 거의 이루어지자 나이가 들었음을 이유로 물러났다.
갑신년(1404, 태종 4)에 김해 신어산의 각암覺庵에 머물렀다. 꿈에 보제(懶翁惠勤)를 만났는데 보제가 대륜물도大倫物刀로 잘라서 마시고 그 반을 허락하면서 “모두 헛된 모습이로다. 모두 헛된 모습이로다.”라고 하였다.
계묘년(1423, 세종 5) 여름 경주 봉서산에 주석하면서 꿈에 존자를 보았고, 갑신년(1404, 태종 4) 울산 불광암에 머물렀을 때도 존자를 만났는데 오래도록 나옹의 삼가三歌를 가지고 고하자 그를 인허(覽許)하였다.
갑오년(1414, 태종 14) 4월 8일 송광사로 돌아와서도 존자가 법을 설하는 것을 보고 조용히 듣고서 얻음이 있었다. 이와 같은 경사스러운 꿈은 세상에서 헤아릴 바가 아니었다. 경자년(1420, 세종 2)에 조계종 중인中印이 이 절에 주석하면서 스님의 문인 상제 등과 자신의 문인 상혜尙惠 등과 함께 당우를 증축하여 높였다.
무신년(1428, 세종 10)에 이르러 공사를 마쳤고 경술년(1430, 세종 12) 겨울에 낙성회를 열면서 겸하여 임금을 축원하는 경상회慶尙會를 설하였다.
스님은 무신년(1428, 세종 10) 7월 11일에 병세를 보였고 21일 인시에 고당古堂 웅 법사雄法師를 청하여 게송 2수를 쓰게 하였다.

淸淨本然極玲瓏  청정한 본래 모습은 영롱함을 다하고
大河大地絶點空  큰 강물과 대지는 창공을 끊어 점을 찍는다
毘盧一體從何起  비로자나 한 몸은 어디에서 일어났는지
海印能仁三昧通  해인삼매와 능인삼매가 통하는구나
七十八年歸故鄕  칠십팔 년 만에 고향에 돌아가는데
大地山河盡十方  대지와 산하가 모든 방향에 걸쳐 있네
刹刹塵塵皆我作  찰나 순간 티끌 공간 모두 내가 만든 것
頭頭物物本眞鄕  각각의 만물들이 본래 진정한 고향이도다


012_0388_a_01L五 南遊樂安金華山宿 夢見梵刹 翌
012_0388_a_02L日入曹溪山松廣寺 徘徊四顧 完如前
012_0388_a_03L夢 慨歎謂門人曰 梱庭於此 某須重
012_0388_a_04L新 建文元年己卯 詣闕啓聞 願欲重
012_0388_a_05L剏普照普濟之大道場 上定宗
大王
許之 下
012_0388_a_06L旨兼受書雲觀裨補案 庚辰七月 傳准
012_0388_a_07L而來 勸諸緇素尙濟等三十餘人 與古
012_0388_a_08L無差 僅成佛法僧殿堂三四所 以老退
012_0388_a_09L甲申住金海神魚山覺庵 夢見普濟 以
012_0388_a_10L大倫物刀截飮之 以半許之曰 一虛樣
012_0388_a_11L一虛樣 癸卯夏住慶州鳳捿山 夢見尊
012_0388_a_12L者 甲申居蔚山佛光庵 亦見尊者 久
012_0388_a_13L而吿以三歌 覽許之 甲午四月八日 還
012_0388_a_14L松廣 又見尊者說法 默然聽受 如斯
012_0388_a_15L慶夢 非世量也 庚子曹溪宗中印 住
012_0388_a_16L玆寺 與師門人尙濟等 自門人尙惠等
012_0388_a_17L增崇堂宇 至戊申訖 庚戌冬落成會
012_0388_a_18L兼祝上設慶尙會 師戊申七月十一日
012_0388_a_19L示疾 二十一日寅時 倩古堂雄法師
012_0388_a_20L書偈二首

012_0388_a_21L淸淨本然極玲瓏 大河大地絕點空

012_0388_a_22L毘盧一體從何起 海印能仁三昧通

012_0388_a_23L七十八年歸故鄕 大地山河盡十方

012_0388_a_24L刹刹塵塵皆我作 頭頭物物本眞鄕

012_0388_b_01L
게송을 마치고는 의연히 입적하였다. 문인 등이 다비(闍維)를 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침실에 봉안하였다.
다음 기유년(1429, 세종 11) 3월 28일에 문인 신준信俊 등이 신이한 향기를 맡고 함을 열어서 사리 두 개를 얻었다.
경술년(1430, 세종 12) 3월 24일에 합산合山 정근精勤하여 또 사리 12개를 얻었고 그믐날에도 정진精進하여 15개를 얻었으며 불성도일佛成道日에도 합산 정근하여 또한 여덟 개를 얻었으니 모두 합쳐 37개였다. 33개는 주석한 곳에 공양하였고 가장 큰 것 네 개는 송광사 북쪽 봉우리에 탑을 세워 안치하였다. 세수 78세, 법랍 68년이다.
17. 조계종 혜소 국사전曹溪宗慧炤國師傳
18. 조계종 정각 국사전曹溪宗靜覺國師傳52)
스님의 휘는 지겸志謙 또는 정인定仁이고 자는 양지讓之이다. 영광 사람으로 속성은 전田씨이며 아버지는 곡縠,53) 어머니는 남궁南宮씨이다. 범승梵僧이 기숙하기를 청하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낳았다. 스님은 항시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 우연히 신이한 승려를 만났는데 그는 “이 아이는 속세에 집착할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나이 9세에 출가를 간절히 바랐고 11세에 사충嗣忠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았으며 다음 해에 금산사 계단戒壇으로 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당시의 공경대부들이 스님의 풍채를 사모하며 우러렀다.
금 명묘(고려 명종) 즉위 원년(1170)에 선종 승과(禪選)를 처음 거행하였는데 내시 정중호鄭仲壺가 그 선발을 담당하였다. 그의 꿈에 신인神人이 와서는 “내일 임금의 스승을 얻을 것이다.”라고 알렸는데 이날 스님이 선과에 합격한 것이다. 스님이 도봉산에서 유숙하는데 꿈에 신이 나타나 “스님의 이름은 지겸志謙이다.”라고 하여 그에 따라 법명을 바꾸었다.54)대정 29년 기유(1189, 명종 19)에 등고사登高寺에 처음 주석하였고 명창 4년 계축(1193)에 삼중대사에 제수되었으며 7년에는 선사가 더해졌다.
태화 4년 갑자(1204, 신종 7)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자

012_0388_b_01L偈畢 儼然而逝 門人等闍維收骨 安
012_0388_b_02L于寢室 越己酉三月二十八日 門人信
012_0388_b_03L俊等 聞異香開凾 得舍利二粒 庚戌
012_0388_b_04L三月二十四日 合山精勤 又得十二粒
012_0388_b_05L晦日又精進 得十五粒 佛成道日 合
012_0388_b_06L山精勤 又得八粒 合三十七粒 卅三
012_0388_b_07L粒隨處供養 㝡大四粒 樹塔于松廣之
012_0388_b_08L北崗 壽七十八 夏六十八

012_0388_b_09L
012_0388_b_10L
曹溪宗慧炤國師傳

012_0388_b_11L

012_0388_b_12L曹溪宗靜覺國師傳

012_0388_b_13L
諱志謙 又定仁 字讓之 靈光人 姓田
012_0388_b_14L父縠 妃南宮氏 夢有梵僧請寄宿 有
012_0388_b_15L娠而生 師常若有思念 忽遇異僧 曰
012_0388_b_16L此子塵中無着 年九歲恳求出家 十一
012_0388_b_17L就嗣忠祝髮 明年就金山寺戒壇受具
012_0388_b_18L一時公卿大夫 想望風彩 金明廟卽祚
012_0388_b_19L元年 始擧禪選 內侍鄭仲壺當選 夢
012_0388_b_20L神人吿曰 明日得王者師 是日師中選
012_0388_b_21L焉 師宿道峰山 夢神吿曰 師名志謙
012_0388_b_22L遂改焉 大定二十九年己酉 始住登高
012_0388_b_23L寺 明昌四年癸丑 批除三重大師 七年
012_0388_b_24L加禪師 泰和四年甲子 加大禪師 旣

012_0388_c_01L사방에 명성이 이미 알려졌고 선회禪會가 열릴 때마다 스님을 반드시 주맹으로 청하였다.
승안 기미년(1199, 신종 2)에 욱금사郁錦寺에 머물렀고 왕명으로 진례군進禮郡(김해)의 선회에 갔는데 현령이 감화되어 기이한 꿈을 꾸었다.
태화 무진년(1208, 희종 4)에 가뭄이 심하여 궐내로 들어와 설법하기를 명하였는데 5일이 지나도 비가 내리지 않았다. 스님이 성을 내며 “불법佛法은 국왕에 의지해야 하는데 지금 만일 비가 오지 않는다면 영험함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곧 단비가 쏟아져서 당시에 이 비를 화상우和尙雨라고 칭하였다. 스님은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는 바로 제석천에 빌면서 “어머니가 만일 수명이 다하였다면 원컨대 아들의 목숨으로 대신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집안 하인이 달려와 “부인께서 소생하셨습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효성이 지극하여 생긴 일이었다.
태안 신미년(1211, 희종 7)에 국청사國淸寺로 이주하였다.
숭경 2년 계유(1213, 강종 2)에 강종康宗이 즉위하여 왕사王師를 봉하고자 하였는데 진강공晉康公(崔忠獻)이 스님을 천거하자 임금이 사신을 보내 이를 행할 것을 청하였다. 스님이 표를 올려 한사코 사양하자 임금이 특별히 상장군을 보내어 보제사普濟寺로 가서 예를 갖추어 대궐로 들게 하였고 친히 스승의 예를 행하였다. 왕명으로 광명사廣明寺55)와 거돈사居頓寺(원주 소재)에 주석하게 하였다. 가을인 8월에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았고 스님 또한 종기가 났는데 왕의 병을 대신하려 하였다. 임금이 승하하자 금상今上(고종)이 스승의 예를 높여 더욱 존중하였다. 진강공 또한 아들을 사신捨身하여 머리를 깎고 문인이 되게 하였고 다른 대부들도 마찬가지여서 문도의 번성함이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정우 5년(1217, 고종 4) 문인에게 “내가 한미한 가문을 일으키고 임금의 스승이 되었으니 분에 넘치는구나.”라고 말하였다. 끝내 표문을 올려 물러나기를 청하자 임금이 어쩔 수 없이 윤허하였다. 화장사華藏寺가 경관이 좋은 곳이므로 내려가서 편히 지내고 싶다고 청하였다. 진강공이 절하며 전별하면서 스님을 부축하였고 또 좋은 말을 선물하였다. 스님은 비록 천 리 밖에 있었지만 임금의 그리워하는 뜻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다음 기축년(1229, 고종 16) 6월 15일에 천둥과 벼락이 갑자기 내리쳤는데 스님 또한 가벼운 병을 얻었다. 7월 2일에 문인을 불러서 편지 세 통을 쓰게 하였는데 주상과 상국相國 진양공(崔瑀)에게 부촉하기를 “고승高僧 송광사주松廣社主는 영원히 떠남을 고합니다.”라고 하였다. 필사가 끝나자 “지금 떠나는 것이 편치 않다.”라고 하고는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8일에 대중들에게


012_0388_c_01L名聞四方 凡開禪會 必請師主盟 承
012_0388_c_02L安己未 住郁錦寺 命赴進禮郡禪會縣
012_0388_c_03L令感異夢 泰和戊辰旱甚 命入內說法
012_0388_c_04L五日不雨 師憤之 佛法須憑國主 今
012_0388_c_05L若不雨 靈應安在 迺甘霈 時號和尙
012_0388_c_06L雨 師至孝 聞母亡 卽禱帝釋曰 母若
012_0388_c_07L算窮 願以子壽代之 未幾家僮馳吿
012_0388_c_08L夫人已甦 是孝所致 泰安辛未 移住
012_0388_c_09L國淸 崇慶二年癸酉 康主卽祚 願封
012_0388_c_10L王師 晋康公薦師 上遣使請行 師上
012_0388_c_11L表固讓 上特遣上將軍 就普濟寺 備
012_0388_c_12L禮入內 親受師禮 命住廣明寺居頓寺
012_0388_c_13L秋八月 上不預 師亦發疽 欲代之 上
012_0388_c_14L升遐 今上崇師禮益重 晋康公亦捨子
012_0388_c_15L剃度爲門人 餘大夫亦爾 門徒之盛
012_0388_c_16L近古未有也 貞祐五年謂門人曰 吾起
012_0388_c_17L寒門 爲王者師 於分足也 遂上表乞退
012_0388_c_18L上不得已允之 以華藏寺境勝 請下安
012_0388_c_19L晋康公拜餞扶掖 又贈寶馬 師雖在千
012_0388_c_20L里 上之眷意不已矣 越己丑六月十五
012_0388_c_21L日 雷震暴作 師亦微疾 七月二日 召
012_0388_c_22L門人栽書三度 囑今上及相國晋陽公
012_0388_c_23L云 高僧松廣社主 吿以長邁 寫訖曰
012_0388_c_24L今行未便 乃就寢 至八日吿衆曰

012_0389_a_01L
定光寂寂     선정의 빛은 고요하고 고요하며
慧日明明     지혜의 해는 밝고도 밝다
法界塵寰     법계와 속세가
臍輪頓現     배꼽 테에 갑자기 나타난다

라고 일렀다. 말을 마치고는 손을 마주 잡아 가슴에 대고 한적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임금이 듣고는 놀라고 슬퍼하였으며 사신을 보내 장례를 돌보게 하였다. 남쪽 봉우리에서 다비를 하고 유골을 수습하여 무덤을 봉하였으니, 시호를 정각靜覺이라 한 국사의 탑이다. 세수는 85세, 법랍은 75년이다.
19. 조계종 중인 조사전曹溪宗中印祖師傳【자세히 알 수 없다.】
曹溪宗中印祖師傳【未詳。】
20. 조계종 원진 국사전曹溪宗圓眞國師傳56)
스님의 휘는 승형承逈이고 자는 영회永廻이며 속성은 신申씨로서 상락上洛의 산양山陽(지금의 문경) 사람이다. 아버지는 통한通漢이고 어머니는 임任씨인데 모두 일찍 세상을 떠서 3세에 고아가 되었고 숙부인 광한光漢에게 길러졌는데 어릴 때도 장난치고 놀지 않았다.
7세에 운문사 연실 선사演實禪師에게 의탁하였고 13세에 희양산 봉암사의 동순洞純 스님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았다. 다음 해 금산사 계단戒壇에 가서 구족계를 받았다.
정사년(1197, 명종 27) 봄에 보제사 선회禪會57)에 참여했다가 순공純公(洞純)이 입적하였다는 부고를 받고 지팡이를 짚고 상喪에 달려갔다. 그해 가을에 종문의 기숙耆宿 대덕들이 광명사 선불장選佛場58)에 참가하기를 권하였다. 당시 명묘明廟(명종)께서 평소 스님의 도행道行을 듣고 유사有司에게 명을 내려 특별히 참가자 명단(抄錄)에 넣었다. 선불장에 있던 석덕碩德들이 상床에서 내려와 합장하며 서 있지 않은 이가 없었고 스님은 승과의 상상품上上品으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원래부터 명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오로지 명산名山을 유력하고자 하였다. 결국 조계산 송광사의 보조 국사(知訥)에게 가서 법의 요체를 물어 해결한 후 오대산에 이르러 문수보살상에 예배하고 깊은 감응을 얻었다. 또 청평산에 가서 진락공眞樂公59)의 유적을 탐방하였고 『능엄경楞嚴經』을 읽고 제상諸相이 환영이며 허망한 것임을 통찰하였다.
태화 8년 무진(1208, 희종 4)에 왕명으로 유점사楡岾寺에 주석하였고, 경오년(1210, 희종 6)에는 상국 청하공淸河公이 문하를 이끌고 도성의 곽주사郭住寺에서 스님을 영접하였는데 기쁘게 받들면서

012_0389_a_01L定光寂寂 慧日明明

012_0389_a_02L法界塵寰 臍輪頓現

012_0389_a_03L言訖 叉手當胸 悠然坐化 上聞震悼
012_0389_a_04L遣使護喪 茶毘于南崗 收骨封塚 謚
012_0389_a_05L靜覺之塔 壽八十五 夏七十五

012_0389_a_06L
012_0389_a_07L
曹溪宗中印祖師傳未詳

012_0389_a_08L

012_0389_a_09L曹溪宗圓眞國師傳

012_0389_a_10L
諱承逈 字永廻 姓申 上洛山陽人 父
012_0389_a_11L漢 母任氏 俱早逝 三歲孤鞠於叔父
012_0389_a_12L光漢 孩未嘗戱 七歲依雲門演實禪師
012_0389_a_13L十三投曦陽山鳳嵓寺洞純師剃髮 明
012_0389_a_14L年就金山寺戒壇受具 丁巳春赴普濟
012_0389_a_15L寺禪會 純公凶訃 策杖赴喪 是年秋
012_0389_a_16L宗門耆德 勸赴廣明寺選佛場 時明廟
012_0389_a_17L素聞師之道行 行詔有司 特加抄錄場
012_0389_a_18L中碩德 莫不下床拱立 擢爲上上品
012_0389_a_19L然師旣名利 但欲遊歷名山 遂徃曹溪
012_0389_a_20L山松廣寺 普照國師 咨決法要後 詣
012_0389_a_21L五坮山禮文殊像 得㝠感 又徃淸平山
012_0389_a_22L訪眞樂公遺跡 閱楞嚴經 洞諸相幻妄
012_0389_a_23L泰和八年戊辰 命住楡岾寺 庚午相國
012_0389_a_24L淸河公 率門下 迎師京師郭住寺 欣

012_0389_b_01L스승의 예로써 섬겼다. 청하공은 이로부터 더욱 선풍을 중시하여 조계의 법유法乳를 동국(東土)에 떨치는 데 힘을 다하였다.
강종께서 즉위한 지 3년 만에 삼중대사의 비답을 내려 주자 스님은 억지로 직책을 맡았다. 이해 겨울에 임금께서 비전祕殿으로 불러들여 선의 어록을 검증하고 독파하였다. 스님은 앞서 금강산(楓嶽) 보덕굴普德窟에 머물 때 이와 관련한 기이한 꿈을 꾸기도 하였다.
계유년(1213, 강종 2)에 금상(고종)께서 즉위하셨고 갑술년(1214, 고종 1)에 곽주사에서 낙성법회落成法會 개설을 명하였으며 선사(僧階)의 비답을 내려 주었다. 이해 봄에 임금께서 내전으로 불러들여 상의직장尙衣直長 동정同正 서치徐稚의 아들을 대신 출가하게 하였다. 다음 해 봄에 또 대선사를 더해 주었고 청하 보경사寶鏡寺에 머물게 하였다. 당시 항적降賊들이 모여들어 우환이 되었는데 스님이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설하자 여러 도적들이 모두 감동하고 깨달아 눈물을 흘리니 그들을 교화하였다.
경진년(1220, 고종 7) 봄 태상왕(희종)이 넷째 아들을 친히 맡겨서 직접 그 머리를 깎았는데 지금 진구사珍丘寺의 주지 경지 선사鏡智禪師가 그분이시다. 칠장사에 오래도록 비가 내리지 않아 우물이 마르고 대중들이 근심하였다. 스님이 마음을 삼가면서 자각 선사慈覺禪師60)가 설한 것을 들어 말하였다. 사가라용왕沙迦羅龍王이 큰 바다의 심궁深宮(龍宮)을 떠나지 않은 것에 비유하며 오직 자비심의 일념으로 자비의 구름을 베풀어 주고 감로甘露를 뿌려 달라는 이야기를 연이어 연설하였다. 어느 날 밤이 되자 많은 비가 내렸다. 또 팔공산 염불암에 주석할 때도 크게 가물었는데 스님은 차 한 잔을 바위 위에 올려 두고 선월화상참문禪月和尙懺文으로 나한에게 기도하였다. 범창梵唱을 불렀는데 미처 끝나기도 전에 비가 갑자기 쏟아져서 농부들이 이제 충분하다고 아뢰었다. 스님의 덕행이 감응시킨 바는 대개 이런 일들이다.
금 정우 9년 신사(1221, 고종 8)61)에 능엄회楞嚴會를 개설하였는데 하루는 갑자기 대중들을 돌아보며 “정법正法은 만나기 어려우며 나 또한 오래 있지 않을 것이다. 바라건대 여러 존숙들은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라고 일렀다. 그해 6월에 이르러 가벼운 증세를 보였지만 강연을 그만두지 않았고 7월에 팔공산 염불암으로 옮겼다. 8월 28일이 되자 머리를 깎고 목욕을 하였다. 9월 2일에 시자를 불러

012_0389_b_01L然傾盖 以禮摳衣 自是尤重禪風 使
012_0389_b_02L曹溪法乳 盡振東土 康廟卽政三年
012_0389_b_03L批授三重大師 師强以就職 是年冬上
012_0389_b_04L召入秘殿 點破禪錄 師嘗寓楓岳普德
012_0389_b_05L窟 有異夢 癸酉今上踐祚 甲戌命設
012_0389_b_06L落成法會 批爲禪師 春上詔入內殿
012_0389_b_07L以尙衣直長同正徐稚之子 代爲剃髮
012_0389_b_08L明年春又加大禪師 因住淸河寶鏡寺
012_0389_b_09L有降賊淵藪爲患 師爲說六祖壇經 群
012_0389_b_10L賊皆感悟 流涕而化之 庚辰春太上王
012_0389_b_11L親囑第四子 手落其髮 今珍丘寺住持
012_0389_b_12L鏡智禪師是也 以七長寺 久無雨 井
012_0389_b_13L渴 衆患之 師齋心談揚慈覺禪師所說
012_0389_b_14L比如沙迦羅龍王 不離大海深宮 唯以
012_0389_b_15L一念慈心 與布慈雲 布灑甘露之話
012_0389_b_16L相續演說 至一夜沛然雨下 又在公山
012_0389_b_17L念佛庵時大旱 師點一琬茶 寘嵓上
012_0389_b_18L禱羅漢 以禪月和上懺文 作梵唱未畢
012_0389_b_19L膏雨忽降 田夫吿足 師德行所感多
012_0389_b_20L類此 金貞祐九年辛巳 設楞嚴會 忽
012_0389_b_21L一日顧衆曰 正法難遇 吾亦不久 請
012_0389_b_22L諸尊宿 毋虛度光陰 季夏示微恙 猶
012_0389_b_23L不撤講 七月移于公山念佛庵 至八月
012_0389_b_24L二十八日 剃頭澡浴 九月二日 喚侍

012_0389_c_01L옷을 갈아입고 선상禪床에 앉아서는 범패를 부르게 하였다. 시자가 게송을 청하자 스님이 한참을 쳐다보다가 “이놈아, 내 일찍이 한 게송도 짓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이냐?”라고 하고는 선상을 세 번 내리친 후 입적하였다. 10월 10일 문인들이 팔공산 남쪽 기슭에서 다비를 하고 영골靈骨을 수습하여 탑을 세웠다. 임금께서 듣고는 놀라고 슬퍼하셨으며 시호를 원진圓眞, 탑호를 혜공慧空으로 지었다. 세수 51세, 법랍 24년이다.
21. 조계종 경지 선사전曹溪宗鏡智禪師傳
22. 조계종 보각 정조 국사전曹溪宗普覺靜照國師傳62)
스님의 휘는 견명見明이고 자는 회연晦然 또는 일연一然이다. 속성은 김金씨이며 경주 장산章山 사람이다. 아버지는 언필彦弼, 어머니는 이李씨인데 해가 방 안에 들어와 그 빛이 사흘 밤 동안 배를 비추는 꿈을 꾸고는 임신하였다. 태화 병인년(1206, 희종 2) 6월 신유일에 태어났는데 몸이 크고 풍만했으며 입은 가지런하고 걷는 모양은 소걸음과 같았으며 눈빛은 호랑이처럼 날카로웠다.
9세 나이에 해양海陽의 무량사無量寺로 가서 학업을 시작하였고 기묘년(1219, 고종 6)에 진전사陳田寺의 장로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선방(禪肆)을 두루 찾아다녔고 많은 이들의 추대로 구산九山 사선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정해년(1227, 고종 14)에 승과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로 합격하였다. 병신년(1236, 고종 23) 가을에 병란이 일어나자 스님은 피하고자 하면서 문수오자주文殊五字呪를 염송하며 감응을 기대하였다. 갑자기 문수보살이 현신하여 “무주無住에 머물라.”라고 하였다. 다음 해 포산包山 묘문암妙門庵에 주석하였는데 암자 북쪽에 무주실無住室이 있기에 스님은 바로 이전의 기억을 떠올려 깨달았다. “중생계(生界)는 줄지 않고 불계佛界는 늘지 않는다.”라는 구절을 참구하다가 어느 날 활연히 통하여 깨우쳤다. 이해에 왕명으로 삼중대사 승계를 받았고 병오년(1246, 고종 23)에 선사로 올랐으며 기미년(1259, 고종 46)에 대선사가 되었다.
신유년(1261, 원종 2)에 왕명을 받들어 도성(京, 江華)으로 가서 선월사禪月社에 주석하며 개당하였으니 목우자(知訥)를 멀리 이었다(遙嗣).지원 원년(1264, 원종 5) 가을에 남쪽으로 돌아올 것을 거듭 요청받아 오어사吾魚寺에 머물렀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인홍사주仁弘社主 만회萬恢가 스님에게 사주 자리를 넘겨주었다.

012_0389_c_01L者 更衣坐禪床 命唱梵 侍者請偈 師
012_0389_c_02L熟視曰 這漢曾不作一偈 今什摩偈耶
012_0389_c_03L叩禪床三下而化 十月十日 門人茶毘
012_0389_c_04L于公山南麓 收靈骨立塔 上聞震悼
012_0389_c_05L謚圓眞 塔慧空 壽五十一 夏二十四

012_0389_c_06L
012_0389_c_07L
曹溪宗鏡智禪師傳

012_0389_c_08L

012_0389_c_09L曹溪宗普覺靜照國師傳

012_0389_c_10L
諱明見 字晦然 又一然 姓金 慶州章
012_0389_c_11L山人 考彥弼 母李氏 夢日輪入室 光
012_0389_c_12L射于腹 凡三夜 因有娠 泰和丙寅六
012_0389_c_13L月辛酉生 準豊口方 牛行虎視 甫九
012_0389_c_14L歲 徃海陽無量寺就學 己卯依陳田長
012_0389_c_15L老剃髮受具 遊歷禪肆 衆推九山四選
012_0389_c_16L之首 丁亥赴 中上上科 丙申秋有兵亂
012_0389_c_17L師欲避 念文殊五字呪 以期感應 忽
012_0389_c_18L有現身曰 無住居 明年居包山妙門庵
012_0389_c_19L庵北有無住室 師乃悟前記 以生界不
012_0389_c_20L減 佛界不增 叅究一日 豁然有悟 是
012_0389_c_21L年批授三重大師 丙午加禪師 己未加
012_0389_c_22L大禪師 辛酉承詔赴京 住禪月社 開
012_0389_c_23L堂遙嗣牧牛子 至元元年秋 累請南還
012_0389_c_24L寓吾魚寺 未幾仁弘社主萬恢 讓師主

012_0390_a_01L
무진년(1268, 원종 9) 여름 왕명으로 운해사雲海寺에서 대장경 낙성회를 설하면서 스님을 주맹으로 청하였다. 낮에는 경전을 읽고 밤에는 강설을 하니 대중들이 모두 공경하며 따랐다. 인홍사를 새로 중건하여 인흥仁興이라 하였고 용천사涌泉寺를 중수하여 불일사佛日社라고 하였는데 모두 왕명에 의해서였다. 정축년(1277)에는 왕명으로 운문사雲門寺에 주석하였는데 임금께서 시를 보내 주었다.

寶傳何必更摳衣  비밀히 전함에 어찌 반드시 스승을 바꾸어 섬기겠습니까
金地逢招亦是奇  쇠와 땅이 만나고 얽히니 이 또한 기이하군요
欲乞璉公邀闕下  연공을 청하여 대궐로 맞이하려 하는데
師何長戀白雲枝  스님은 어찌 흰 구름 걸린 나뭇가지만 그리도 그리워합니까

신사년(1281, 충렬왕 7) 여름 임금이 동쪽으로 향하여 수레가 동도東都(慶州)에 행차하였는데, 스님에게 명하여 행재소에 와서 법좌에 오르게 하였고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을 얻어 제압題押63)하고 불일사에 들도록 하였다. 다음 해 가을 유사有司에게 왕명을 내려 광명사에 주석하게 하였는데 스님이 원院에 들어간 날 밤 어떤 사람이 “잘 왔습니다.”라고 하여 세 번 밖을 살펴보았으나 보지 못하였다.
또 다음 해 봄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지금 운문 화상雲門和尙이 도가 높고 덕이 뛰어나니 마땅히 온 나라 사람들이 공경해야 한다.”라고 이르고 우승右承(右承旨)을 파견하여 국존國尊의 예를 봉행하였다. 스님은 한사코 사양하는 표문을 올렸지만 상장군上將軍에게 거듭 명하여 원경충조국존圓經冲照國尊으로 책봉하였다. 4월 대궐로 맞이해 들였는데 임금이 몸소 백관들을 거느리고 스승의 예를 행하였다. 스님은 어머니가 연로함을 이유로 산에 돌아가기를 청하였고 다음 해에 모친이 나이 9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근시近侍에게 명하여 인각사麟角寺를 고쳐 짓게 하여 스님의 하산지로 삼았고 결結 수 100여 경頃의 토지를 시납하였다. 스님이 재차 구산회九山會를 여니 일찍이 없던 성황을 이루었다.
다음 기축년(1289, 충렬왕 15)에 병이 나자 7월에 임금께 올릴 표문을 직접 써서 멀리 감을 고하였다. 이날 밤 큰 별이 방장方丈(방장실) 뒤편에 떨어졌고 다음 날 을유일에 목욕하고 앉아서 북을 치게 하고는 선법당善法堂에 가서 선상禪床에 걸터앉았다. 도장(印, 印寶)을 봉하고 합장하자 선별감選別監(選軍別監)이 거듭 봉인을 마쳤다. 주장자를 세워 세 번 내리치고는 태연자약하게 말하고 웃었고 입으로 무생인無生忍64)을 설하였다. 금강인金剛印의 수결手結을 한 채 조용히 입적하였다. 다비를 행하고(闍維) 영골을 수습하여 동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다. 임금이 듣고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조靜照라 하였다.

012_0390_a_01L席 戊辰夏 朝旨設大藏落成會於雲海
012_0390_a_02L寺 請師主盟 晝讀夜說 衆皆敬服 改
012_0390_a_03L建仁弘爲仁興 重葺湧泉寺 爲佛日社
012_0390_a_04L皆朝旨也 丁丑詔住雲門寺 上以詩寄
012_0390_a_05L

012_0390_a_06L寶傳何必更摳衣 金地逢招亦是奇

012_0390_a_07L欲乞璉公邀闕下 師何長戀白雲枝

012_0390_a_08L辛巳夏東征駕幸東都 詔師赴行在陞
012_0390_a_09L座 因取佛日結社文題押入社 明年秋
012_0390_a_10L勅有司 住廣明寺 入院夜 有人善來
012_0390_a_11L者 三視之不見也 又明年春 上謂群
012_0390_a_12L臣曰 今雲門和尙 道尊德盛 宜當一
012_0390_a_13L國共之 遣右承奉行國尊禮 師上表固
012_0390_a_14L讓 仍命上將軍 册封圓經冲照國尊
012_0390_a_15L四月迎入大內 躬率百僚 行摳衣禮
012_0390_a_16L師以母老乞還山 明年母卒 年九十六
012_0390_a_17L爲近侍勅葺麟角寺 爲下山地 納結百
012_0390_a_18L餘頃 師再闢九山會 古未有也 越己
012_0390_a_19L丑示疾 七月手寫上表 吿以長徃 是
012_0390_a_20L夜長星殞方丈後 翌日乙酉盥浴而坐
012_0390_a_21L令撾皷至善法堂 踞禪床 封印合掌
012_0390_a_22L選別監重封畢 卓柱杖三下 言笑自若
012_0390_a_23L口談無生忍 手結金剛印 泊然示寂
012_0390_a_24L闍維收骨 塔于東麓 上聞謚普覺 塔

012_0390_b_01L세수 84세, 법랍은 71년이다.
23. 조계종 상제 선사전曹溪宗尙濟禪師傳【고봉高峯의 법을 이었다.】
24. 조계종 보감 묘응 국사전曹溪宗寶鑑妙應國師傳
스님의 휘는 혼구混丘, 자는 구을丘乙이고 아명(小名)은 청진淸珍, 호는 무극無極이다. 속성은 김金씨이며 아버지는 첨의평리僉議平理 홍부弘富로 청풍군 사람이고 어머니는 황려黃驪 민閔씨이다. 복령사의 관음상에 기도하여 충선왕 27년65) 기해(1239) (7월) 27일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 탑을 쌓는 놀이를 하였고 반드시 벽을 바라보고 앉았으며 생각이 바르고 엄정하여 친척들이 보고서 작은 아미타불(小彌陀)이라 하였다.
10세에 무위사 천경天鏡 스님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았고 구산 선과選科에 합격하였다. 보각普覺(一然)을 좇아 배웠는데 깊은 뜻(閫奥)을 분별하지 못하면 그만두지 않겠다고 하였다. 앞서 보각의 꿈에 한 승려가 나타나서 스스로 오조五祖 연演(法演)이라 하였는데, 이튿날 아침 스님이 찾아와 뵙자 혼자 마음으로 기뻐하였다. 충렬왕이 여러 번 법복法服을 내렸고 승계가 대선사에 올랐다. 덕릉德陵(충선왕)이 즉위하여 양가도승통兩街都僧統을 특별히 제수하였고 ‘대사자왕大獅子王 법보장해法寶藏海 국일國一’의 호를 내렸다.
황경 계축년(1313, 충선왕 5)에 덕릉이 왕위를 물려주고 영안궁永安宮에 거처할 때 중사中使를 보내어 수레로 맞이해 청하였고 조용히 도를 담론하였다. 스님을 ‘오불심종悟佛心宗 해행원만解行圓滿 감지왕사鑑智王師’로 책봉하였는데 두 임금이 스승으로 모신 것은 일찍이 없는 일이었다. 스님이 영원사로 물러나 있기를 청하였고 겨울인 10월에 송림사로 이주하여 편지를 고쳐 쓰고 봉인하였다. 30일에 목욕을 하고 이별을 고하는 게송을 읊었다.

荆棘林中下脚   가시나무 숲 안에 발을 내딛고
干戈叢裡藏身   창과 방패 더미 속에 몸을 감추었네
白雲斷處是靑山  흰 구름 끊어진 곳이 바로 청산인데
行人更在靑山外  떠나는 사람은 다시금 청산 밖에 있구나

지리산(方丈 : 영원사)으로 돌아와 평상에 의지한 채 세상을 떠났다. 절의 서쪽에서 다비를 거행하였고 영골을 수습하여 동쪽에 탑을 세웠다.

012_0390_b_01L靜照 壽八十四 夏七十一

012_0390_b_02L
012_0390_b_03L
曹溪宗尙濟禪師傳高峯嗣

012_0390_b_04L

012_0390_b_05L曹溪宗寶鑑妙應國師傳

012_0390_b_06L
諱混丘 字丘乙 小名淸珍 號無極 姓
012_0390_b_07L金 考僉議平理弘富 淸風郡人 母黃
012_0390_b_08L驪閔氏 禱于福靈寺觀音像 忠宣王二
012_0390_b_09L十七年己亥二十七日誕 幼戱聚塔 坐
012_0390_b_10L必面壁 思念端嚴 戚目爲小彌陀 十
012_0390_b_11L年投無爲寺天鏡師祝髮 中九山選科
012_0390_b_12L從普覺學 非睹閫奥不止 嘗普覺夢有
012_0390_b_13L一僧 自謂五祖演 詰朝師謁 心獨喜
012_0390_b_14L之 忠烈王累下法服及大禪師 德陵卽
012_0390_b_15L祚 特授兩街都僧統 加大獅子王法寶
012_0390_b_16L藏海 國一之號 皇慶癸丑 德陵謝位
012_0390_b_17L處永安宮 遣使輿請 從容談道 册師
012_0390_b_18L爲悟佛心宗解行圓滿鑑智王師 兩王
012_0390_b_19L摳衣 前古未有 師乞退住榮源寺 冬
012_0390_b_20L十月移松1)林寺 修書封印 三十日盥
012_0390_b_21L沐吿別偈曰

012_0390_b_22L荆棘林中下脚 干戈叢裡藏身

012_0390_b_23L白雲斷處是靑山 行人更在靑山外

012_0390_b_24L還方丈 據床而逝 茶毘于寺之西 收

012_0390_c_01L임금이 듣고는 애도하고 추모하였으며 시호는 보감寶鑑, 탑호는 묘응妙應이라 하였다. 세수 73세, 법랍은 63년이다.
25. 조계종 천경 선사전曹溪宗天鏡禪師傳【보감寶鑑 스님의 법을 이었다.】
26. 조계종 대감 국사전曹溪宗大鑑國師傳66)
스님의 휘는 탄연坦然이며 속성은 손孫씨이다. 아버지는 숙肅이고 어머니는 안安씨이며 산양현山陽縣 사람이다.
나이 8, 9세에 문리를 깨치고 글을 지었으며 13세에 육경六經에 통달하였고 15세에 명경생明經生이 되었다. 일찍이 속세를 벗어날 뜻을 가져서 도성의 북산 안적사로 바로 가서 사주寺主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았다.
나이 19세에 광명사로 가서 혜소 국사慧炤國師67)를 뵈었고 모친의 연로함을 이유로 멀리 유력하지 않았다.
숙종이 왕위를 계승한 지 10년째【요遼 건통乾統 4년】인 갑신년(1104, 숙종 9)에 대선大選에 합격하였고 이해에 중원中原 의림사義林寺에 주석하도록 명 받았다.
예종이 즉위하여 스님을 더욱 아끼고 중시해서 4년째인 무자년(1108, 예종 3)에 대사大師로 올려 주었고 10년째인 갑오년(1114, 예종 9)에는 삼중대사를 특별히 더해 주고 법복法服을 하사하였다. 13년에 선암사禪巖寺에 주석하였고 경자년(1120, 예종 15)에는 선사에 올랐다.
인종 원년 임인(1122, 예종 17)에 비단 수를 두른 가사袈裟를 하사받았고 5년에 천화사天和寺에 주석하였으며 6년에는 보리사菩提寺로 옮겼다. 7년에 법회를 주청하여 열었는데 평소 많던 뱀들이 이로부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지자 토착민들이 기이한 일이라고 하며 서로 전하였다.
인종 재위 10년째인 신해년(1131, 인종 9)에 대선사를 더해 주었고 14년에 보문사에 주석하였으며 16년에는 왕명으로 도성(京師)에 돌아왔다. 18년에는 광명사로 옮겼는데 스님이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어구上堂語句를 지었다. 24년 을축(1145, 인종 23)에 임금이 스승으로 모시려는 뜻을 전하였고 5월 6일에 청하여 왕사王師로 봉하였다.

012_0390_c_01L骨塔于東 上聞而追悼 謚寶鑑 塔妙
012_0390_c_02L應 壽七十三 夏六十三

012_0390_c_03L
012_0390_c_04L
曹溪宗天鏡禪師傳寶鑑師嗣

012_0390_c_05L

012_0390_c_06L曹溪宗大鑑國師傳

012_0390_c_07L
諱坦然 姓孫 父肅 母安氏 山陽縣人
012_0390_c_08L年八九歲 解屬文 十三通六經 十五
012_0390_c_09L補明經生 蚤有出塵志 徑徃京北山安
012_0390_c_10L寂寺 從寺主落髮 年十九 就廣明 謁
012_0390_c_11L慧炤國師 以母老不得遠遊 肅王踐祚
012_0390_c_12L十年遼乾統
四年也
甲申 中大選 是年命住中
012_0390_c_13L原義林寺 睿王卽政 尤加愛重 四年
012_0390_c_14L戊子 加大師 十年甲午 特加三重大
012_0390_c_15L師 賜法服 十三年住禪嵓寺 庚子加
012_0390_c_16L禪師 仁王元年壬寅 賜帖繡袈裟 五
012_0390_c_17L年住天和寺 六年移菩提寺 七年奏設
012_0390_c_18L法會 素多蛇虺 自是莫知去處 土人
012_0390_c_19L相傳謂異事 十年辛亥 制加大禪師
012_0390_c_20L十四年住普門寺 十六年詔還京師 十
012_0390_c_21L八年移廣明寺 師作四威儀頌上堂語
012_0390_c_22L句 二十四乙丑 上傳宣以致師事 五
012_0390_c_23L底本頭註曰「林疑廣」{編}

012_0391_a_01L오래도록 가물었는데 하늘이 바로 큰비를 내렸다.
즉위 후 2년 정묘(1147, 의종 1)에 스님이 연로함을 이유로 단속사斷俗寺로 돌아가기를 청하였고 이에 환관(中貴)을 파견하여 모시고 가게 해서 9월 3일 절에 들어갔다.
의종 재위 9년째인 갑술(1154)에 병의 증세를 보였고 다음과 같이 게송을 읊었다.

廓落十方界    넓게 흩어진 시방세계가
同爲解脫門    한결같이 해탈문이로구나
休將生異見    다른 생각 내는 것을 그만두고
坐在夢中魂    꿈속 혼백으로 앉아 있으련다

13년 무인(1158, 의종 12) 6월 15일에 또 게송을 마치고는 손을 모으고 입적하였다. 7월 15일 임금이 듣고서 장례를 준비하게 하였으며 시호로 대감大鑑을 추증하였다. 16일에 진주 소남역小男驛 북쪽 언덕에서 다비하였고 28일에 단속사 북쪽 기슭에 영골을 모셨다. 세수 90세, 법랍은 75년이다.
27. 조계종 상혜 선사전曹溪宗尙惠禪師傳【중인부】
28. 조계종 나옹 보제 존자전曹溪宗懶翁普濟尊者傳68)
현릉玄陵(공민왕)이 재위한 지 20년째인 경술년【홍무 3년(1370)】에 왕명으로 스님을 도성에 들게 하였고 광명사에 주석하게 하였다. 스님이 주관하는 대회大會와 공부선工夫選에 임금께서 친히 행차하여 향을 살랐다. 스님이 법좌에 올라 고금의 형식과 틀(窠臼)을 타파하고 범인과 성인의 자취와 흔적을 쓸어버렸다. 이에 대회에 참가한 여러 고덕高德들이 모두 땀을 흘리지 않음이 없었는데 오로지 환암 선사幻庵禪師(混修, 1320~1392)만이 삼구三句와 삼관三關을 문답하였다. 대회가 끝나고 스님은 회암사로 돌아왔다. 신해년(1371, 공민왕 20)에 공부工部(工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을 파견하여 봉인封印을 내리고 왕사로 삼았으며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勤修本智 중흥조풍重興祖風 복국우세福國祐世 보제존자普濟尊者’라 하였다. 또한 송광사를 동방제일도량東方第一道場이라 이르고 그곳에 주석하도록 명하였다.
임자년(1372, 공민왕 21) 가을에 지공指空의 삼산양수三山兩水라는 글이 우연히 떠올라서

012_0391_a_01L月六日 請封王師 久旱 天乃大雨 二
012_0391_a_02L年丁卯 師以老乞歸斷俗寺 乃遣中
012_0391_a_03L貴陪行 九月三日入寺 九年甲戌示疾
012_0391_a_04L偈曰

012_0391_a_05L廓落十方界 同爲解脫門

012_0391_a_06L休將生異見 坐在夢中魂

012_0391_a_07L十三戊寅十五日 又偈畢 叉手而化
012_0391_a_08L七月十五日 上聞備禮 加大鑑 十六
012_0391_a_09L日茶毘于晋州小男驛北崗 二十八日
012_0391_a_10L葬靈骨于斷俗寺北麓 壽九十 夏七十
012_0391_a_11L

012_0391_a_12L
012_0391_a_13L
曹溪宗尙惠禪師傳中印副

012_0391_a_14L

012_0391_a_15L曹溪宗懶翁普濟尊者傳

012_0391_a_16L
玄陵在位二十年庚戌洪武
三年
詔師入京
012_0391_a_17L寓廣明寺 大會 工夫選 上親幸拈香
012_0391_a_18L師陞座 破古今窠臼 掃凡聖蹤由 在會
012_0391_a_19L諸德 莫不流汗 唯幻庵禪師 問三句
012_0391_a_20L三關而罷 還檜嵓寺 辛亥遣工部張子
012_0391_a_21L溫 降印封爲王師 大曹溪宗師禪敎都
012_0391_a_22L揔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
012_0391_a_23L尊者 謂松廣寺東方第一道場 迺命居
012_0391_a_24L之 壬子秋偶念指空三山兩水之記 欲

012_0391_b_01L회암사로 옮겨 주석하려 했는데, 마침 이 절로 오라는 부름을 받고 머물러 달라는 청을 들었다. 이후 영원사瑩原寺로 주석처를 옮기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스님은 병에 걸려서 수레를 내어 삼문三門을 나서서 연못가에 이르렀는데 수레가 열반문을 나가자 대중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실성한 듯 통곡하였다. 스님이 돌아다보면서 “나 때문에 중도에 그만둠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한강에 이르러 호송관 탁첨卓詹에게 “내가 병이 심하니 배를 타고 물길을 거슬러 가자.”라고 하였고 7일째에 여흥에 이르렀다. 탁첨에게 다시 “조금 머물면서 병이 낫기를 기다려 떠났으면 한다.”라고 하였고 탁첨이 마지못해 따라서 신륵사에 머물렀다. 5월 15일 탁첨이 또 갈 길이 급하다고 독촉하자 스님은 “그것은 어렵지 않다. 내 세상을 떠날 것이다.”라고 하고는 이날 진시(오전 7~9시)에 조용히 입적하였다. 군郡의 백성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산을 덮었다가 화장이 끝나자 구름이 없어졌고 비가 내려서 유골을 씻었다. 사리 155개를 얻었는데 기도를 올리자 558개로 나뉘었고 사부대중이 재 안에서 얻은 것도 그 수를 알 수 없었다. 신이한 빛이 밝게 빛나다가 3일 만에 그쳤다. 8월 15일 절의 북쪽 기슭에 부도를 세웠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부도를 안치하였다. 임금이 듣고 시호를 선각禪覺이라 하였고 색穡(李穡)에게 명하여 글을 쓰게 하였다.
스님의 휘는 혜근惠勤이고 호는 나옹懶翁이며 초명初名은 원혜元惠이다. 영해 사람으로 속성은 아牙씨이고 아버지의 휘는 서구瑞俱이다. 어머니 정鄭씨는 금빛 새매가 날아와 머리를 쪼다가 불현듯 다섯 색채가 나는 알을 떨어뜨려 그것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연우 경신년(1320, 충숙왕 7) 1월 15일에 태어났다.
나이 20세에 공덕산 요연了然 스님에게 가서 머리를 깎았다. 요연 스님이 “너는 무슨 일로 출가를 하느냐?”라고 묻자 “삼계를 초탈하고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려 하오니 가르침을 열어 보여 주시기 원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 온 너는 이 무슨 물건인가?”라고 하자 “이렇게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놈이라 올 수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음을 닦고 번뇌를 끊는 방법을 아직 알지 못하니 너는 가서 다른 스승을 구해 보아라.”라고 하였다.
지정 갑신년(1344, 충혜왕 복위 5)에 회암사에 가서 홀연히 깨닫고 스승을 찾으려 뜻을 품었다.
무자년(1348, 충목왕 4) 3월에 연도燕都(大都, 원의 수도)로 가서 지공을 뵈었는데 질문과 대답이 계합하였다.

012_0391_b_01L移錫檜嵓會 以召赴是寺 得請居焉
012_0391_b_02L有旨移住榮源寺 師適疾作輿 出三門
012_0391_b_03L至池邊 輿者從湼槃門出 大衆咸疑
012_0391_b_04L失聲號哭 師顧曰 無以余故中掇也
012_0391_b_05L至漢江 謂護送官卓詹曰 吾疾劇 舟
012_0391_b_06L行遡流 七日方至驪興 又謂卓曰 欲
012_0391_b_07L小留候病間卽行 卓勉從之 寓神勒寺
012_0391_b_08L五月十五日 卓又督行急 師曰是不難
012_0391_b_09L吾當逝矣 是日辰時 默然而逝 郡人
012_0391_b_10L望見 五雲盖山 旣火無雲 雨下洗骨
012_0391_b_11L得舍利一百五十五粒 禱之分爲五百
012_0391_b_12L五十八 四衆得之灰中者 莫知其數
012_0391_b_13L神光炤耀 三日乃已 八月十五日 樹
012_0391_b_14L屠於寺之北崖 頂骨屠于神勒寺 上聞
012_0391_b_15L謚曰禪覺 命穡爲文 師諱惠勤 號懶
012_0391_b_16L翁 初名元惠 寧海人 姓牙 父諱瑞俱
012_0391_b_17L母鄭夢金色隼飛來 啄其頭 忽墜卵
012_0391_b_18L五彩入懷 有娠 延祐庚申正月十五日
012_0391_b_19L生 年甫冠走功德山了然師祝髮 了師
012_0391_b_20L問 汝爲何事出家 對曰超三界 利群
012_0391_b_21L生 願開示 曰汝之來者 是何物 曰此
012_0391_b_22L能言能聽者能來 曰但未知修斷之術
012_0391_b_23L汝徃求餘師 至正甲申 至檜嵓寺 忽
012_0391_b_24L悟尋師之志 戊子三月 至燕都 叅指

012_0391_c_01L
지정 10년인 경인년(1350, 충정왕 2) 정월 모일에 지공이 대중을 모아 법어를 내렸는데 응대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아가 몇 마디 말을 토해 내고 삼배를 하고는 나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인도)의 108대 조사이다. 이해 봄에는 남쪽으로 강제江淛(浙江) 지방을 다녔고 가을인 8월에 평산平山(處林)을 참례하였다. 평산이 “앞서 어떤 사람을 만났는가?”라고 묻자 “지공의 일용천검日用千劍.”이라 답하였다. 평산이 “지공의 천 검은 그만두고라도 네 한 검을 가져와라.”라고 하자 스님은 좌구坐具로 평산을 끌어당겼고 평산이 평상 밑으로 거꾸로 넘어지면서 큰 소리로 “도적이 나를 죽인다.”라고 하였다. 스님은 “이 내 칼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라고 하고는 즉시 평산을 부축해 일으켰다. 평산은 설암雪巖(祖欽)이 전수한 급암及庵(宗信)의 불자拂子를 신표로 주었다.
신묘년(1351, 충정왕 3) 봄 낙가산에 이르러 관음보살에 참배하였고 임진년(1352, 공민왕 1)에는 복룡산에 가서 천암千巖(元長)을 뵈었다. 천암이 “부모가 낳기 이전에는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가?”라고 묻자 스님은 “오늘은 4월 초하루이군요.”라고 하였고 천암이 그를 인정하였다. 북쪽으로 돌아와 다시 지공을 참배하였고 법의法衣와 불자, 범서梵書를 내려 받았다.
무술년(1358, 공민왕 7) 지공에게 하직 인사를 하였고 동쪽으로 돌아간다는 수기를 받았다.
경자년(1360, 공민왕 9) 오대산에 들어갔고 신축년(1361, 공민왕 10)에는 임금이 신광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였다. 11월에 홍적紅賊(紅巾賊)의 난리를 피하려 하였는데 꿈에 한 신神이 절하면서 “대중이 흩어지면 도적들이 반드시 절을 없앨 것이니 원컨대 스님은 뜻을 굳게 가지십시오.”라고 하였고 다음 날 도적들이 과연 오지 않았다.
경술년(1370, 공민왕 19) 봄 원의 사도司徒인 달예達睿가 지공의 영골을 모셔 와서 회암사에 두었고 스님은 스승의 유골에 예를 올렸다. 스님이 거주하던 곳은 강월헌江月軒이라 했으며 세수는 57세, 법랍은 38년이다.
29. 조계종 원규 선사전曹溪宗元珪禪師傳
30. 조계종 태고 원증 국사전曹溪宗太古圓證國師傳69)
스님의 휘는 보우普愚, 호는 태고太古이며 속성은 홍洪씨로 홍주 사람이다. 아버지는 상주국上柱國 연延이고

012_0391_c_01L空 答問契合 十年庚寅正月日 空集
012_0391_c_02L衆下語 無能對者 師出衆吐數語 三
012_0391_c_03L拜而出 空西天百八代祖師也 是春南
012_0391_c_04L遊江淛 秋八月叅平山 問曾見何人
012_0391_c_05L曰指空 日用千釰 山云且寘指空千釰
012_0391_c_06L將汝一釰來 師以坐具提山 山倒在床
012_0391_c_07L下 大叫賊殺我 師曰是吾釰 能殺人
012_0391_c_08L能活人 乃扶起山 以雪嵓所傳及庵拂
012_0391_c_09L子表信 辛卯春抵洛迦山 拜觀音 壬
012_0391_c_10L子至伏龍山 叅千嵓 嵓云父母未生前
012_0391_c_11L從甚麽處來 師曰今朝四月初一日 嵓
012_0391_c_12L許之 北還再叅指空 授以法衣拂子梵
012_0391_c_13L書 戊戌拜辭指空 受東還記 庚子入
012_0391_c_14L五坮山 辛丑上請住神光 十一月欲
012_0391_c_15L避紅賊亂 夢一神拜曰 衆散 賊必滅
012_0391_c_16L寺 願師固志 明日賊果不至 庚戌春
012_0391_c_17L司徒達睿 奉指空靈骨來 厝檜嵓 師
012_0391_c_18L禮師骨 師所居室曰江月軒 壽五十七
012_0391_c_19L臈三十八

012_0391_c_20L
012_0391_c_21L
曹溪宗元珪禪師傳

012_0391_c_22L

012_0391_c_23L曹溪宗太古圓證國師傳

012_0391_c_24L
諱普愚 號太古 姓洪 洪州人 考上柱

012_0392_a_01L어머니는 홍양군부인洪陽郡夫人 정鄭씨이다. 해가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서 임신하였고 원 대덕 5년 신축(1301, 충렬왕 27) 9월 21일에 태어났다.
13세에 회암사 광지 선사廣智禪師에게 의지하여 출가하였고 19세에 만법귀일萬法歸一의 화두를 참구하였다. 원통 원년 계유(1333)에 성의 서쪽 감로사甘露寺에 머물렀는데 하루는 풀리지 않던 의심을 모두 떨쳐 버리고는 8구의 게송을 지었다. “불조佛祖와 산하는 입은 없지만 모두 삼켜 버린다.”라는 것이 그 결구이다.
지원 3년 정축(1337, 충숙왕 복위 6) 나이 37세에 전단원栴檀園에 거처하면서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였다. 다음 해 정월 7일 오경五更(오전 3~5시) 무렵 크게 깨닫고는 게송을 지었다. “울타리의 빗장을 깨부순 뒤에야 청풍이 태고에게 부는구나.”라고 한 구절이 또한 그 결구이다. 3월 양근楊根의 초당으로 돌아와 부모님을 모셨다. 신사년 봄에 삼각산 중흥사에 주석하면서 동쪽 봉우리에 암자를 세우고 편액을 태고太古라 하였다. 영가永嘉70)의 문체를 본 따서 시가 1편(≺태고암가太古庵歌≻)을 지었다.
지정 병술년(1346, 충목왕 2) 46세 때 연도燕都(大都)로 갔는데 축원 선사竺源禪師(竺源永盛)가 이미 입적했다는 사실을 듣고 호주湖州의 하무산霞霧山으로 가서 석옥 공石屋珙(淸珙) 선사를 뵈었다. ≺태고가太古歌≻를 바치자 석옥이 마음속 깊이 그릇이라 여기고 결국 가사袈沙를 신표로 주면서 “노승은 이제 다리를 펴고 잘 수 있겠다.”라고 하니 바로 임제臨濟의 18대 법손이 된 것이다. 헤어질 때 주장자를 주면서 “잘 가라. 잘 가라.”라고 하였고 스님은 절하면서 받았다. 원의 수도에 돌아오니 스님의 도가 높이 칭송되고 명성이 널리 퍼졌다. 원의 황제가 듣고는 영녕사에서 개당하기를 청하였고 금란가사와 불자를 하사하였다.
지정 8년 무자(1348, 충목왕 4) 봄에 동쪽(고려)으로 돌아와서 소설산에 들어갔고 직접 농사를 짓고 산 것이 4년이었다.
임진년(1352, 공민왕 1)에 현릉玄陵(공민왕)이 스님을 불러들였고 가을이 되어서야 절로 되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일신이 난71)을 일으켰다.
병신년(1356, 공민왕 5)에 스님을 청하여 봉은사에서 법을 설하게 하였는데 현릉이 친히 왕림하여 가사와 염주를 내렸고 천자天子가 잡색雜色 단필緞疋과 가사 300벌을 하사하니 이전에 없던 일이었다. 현릉이 봉하여 왕사를 삼고 부府를 세워 원융圓融이라 명했으며 광명사에 머물게 하였다.

012_0392_a_01L國延 母洪陽郡夫人鄭氏 夢日輪入懷
012_0392_a_02L而娠 元大德五年辛丑九月二十一日
012_0392_a_03L生 十三投檜嵓寺廣智禪師出家 十九
012_0392_a_04L叅萬法歸一話 元統元年癸酉 寓城西
012_0392_a_05L甘露 一日疑團剝落 作頌八句 佛祖與
012_0392_a_06L山河 無口悉呑却 卽結句也 至元三
012_0392_a_07L年丁丑 年三十七 寓栴檀園 叅無字
012_0392_a_08L話 明年正月七日五更 大悟作頌曰
012_0392_a_09L打破牢關後 淸風吹太古 亦結句也
012_0392_a_10L三月還楊根草堂侍親也 辛巳春住三
012_0392_a_11L角山重興寺 卓庵東峯 扁曰太古 倣
012_0392_a_12L永嘉體作歌一篇 至正丙戌年四十六
012_0392_a_13L遊燕都 聞竺源禪師已逝 至湖州霞霧
012_0392_a_14L山 見石屋珙禪師 獻太古歌 屋深器
012_0392_a_15L之 遂以袈沙表信曰 老僧今日展脚睡
012_0392_a_16L矣 卽臨濟十八代孫也 臨別贈以柱杖
012_0392_a_17L曰 善路善路 師拜受 廻至燕都 道譽
012_0392_a_18L騰播 元天子聞 請開堂于永寧寺 賜
012_0392_a_19L金欄拂子 至正八年戊子春 東歸入小
012_0392_a_20L雪山 躬耕而養者四年 壬辰玄陵邀師
012_0392_a_21L至秋還寺 未幾日作亂 丙申請師說法
012_0392_a_22L奉恩寺 玄陵親臨 獻袈裟與念珠 天
012_0392_a_23L子賜雜色緞疋袈裟三百領 古所未有
012_0392_a_24L也 玄陵封爲王師 立府曰圓應 留廣

012_0392_b_01L
명 홍무 2년 기유(1369, 공민왕 18) 3월에 청을 올려 소설산으로 돌아갔다. 1382년(우왕 8) 12월 17일 병세를 보였고 24일【혹은 23일】 문인을 불러 “내일 유시(오후 5~7시)에 나는 갈 것이다. 군의 지사(知郡)에게 봉인封印을 임금께 전하라고 청해라.”라고 하고는 옷을 갈아입고 앉아서 임종게 사구四句를 설하였으며 읊는 소리가 끝나자 입적하였다. 임금이 매우 슬퍼하면서 향을 내렸다. 다비를 하자 사리가 무수히 많이 나왔으며 100매를 임금(大內)에게 받들어 올렸다. 시호는 원증圓證, 탑호는 보월寶月이며 세수 82세, 법랍은 69년이다.
31. 조계종 자운 선사전曹溪宗慈雲禪師傳
32. 조계종 환암 보각 국사전曹溪宗幻庵普覺國師傳72)
스님의 휘는 혼수混修, 자는 무작無作이며 호는 환암幻庵이다. 속성은 조趙씨이고 풍양 사람으로 아버지는 숙叔, 어머니는 경慶씨이다. 원元 연우 7년 경신(1320, 충숙왕 7) 3월 13일에 태어났다. 갓난아기 때 병을 앓았는데 점쟁이가 “이 아이는 출가를 해야만 병이 없어지고 큰 그릇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선사 계송繼松에게 보내져서 머리를 깎았고 내외의 전적을 학습하니 총명함과 지혜가 남달랐다. 어머니와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더욱 비감함을 느꼈고 어머니에게 하직하고 떠나려 하는데 꿈에 해가 곧바로 자신의 얼굴을 비추는 것을 보고서 깨달았다. 기쁜 마음으로 금강산으로 가서 마음을 굳게 하여 잠을 자지 않았고 몸을 눕히지 않고 2년을 보냈다. 어머니가 그리워하며 기다린다는 말을 듣고 즉시 돌아가 뵈었고 5, 6년간 멀리 유력하여 다니지 않았다. 모친상을 당하자 대자大字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필사하여 명복을 빌었다. 선원사禪源寺에서 식영息影 감鑑(淵鑑) 화상을 뵈었고 『능엄경』을 배워 깊은 뜻을 터득하였다. 휴휴암주休休庵主(趙雙重)가 스님을 청해 능엄의 요지를 강연하게 하였는데 사람들을 슬프게도 기쁘게도 하였다. 3년을 지내다가 충주 청룡사에 갔는데 시냇가 위에 옛터가 있어 손수 나무와 돌을 옮겨 쌓고 편액을 연회宴晦라 하였다. 현릉玄陵(공민왕)이 회암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였지만 나아가지 않고 바로 금오산金鰲山으로 들어갔다.

012_0392_b_01L明寺 明洪武二年己酉三月 請還小雪
012_0392_b_02L山 十二月十七日示疾 二十四或三

012_0392_b_03L門人 明日酉時吾行 請知郡封印 更
012_0392_b_04L衣坐 說四句 而聲盡而逝 上甚悼降
012_0392_b_05L香 茶毘 舍利無數 百枚奉進于大內
012_0392_b_06L謚圓證 塔寶月 壽八十二 夏七十九

012_0392_b_07L
012_0392_b_08L
曹溪宗慈雲禪師傳

012_0392_b_09L

012_0392_b_10L曹溪宗幻庵普覺國師傳

012_0392_b_11L
諱混修 字無作 號幻庵 姓趙 豊壤人
012_0392_b_12L考叔 妣慶氏 元延祐七年庚申三月
012_0392_b_13L十三日生 少嬰疾 卜者曰 此兒令出
012_0392_b_14L家 終不疾 而作大器矣 令投大禪師
012_0392_b_15L繼松祝髮 習內外典 聦慧異常 忽聞
012_0392_b_16L母隣有暴死者 益自悲感 辭母將行
012_0392_b_17L夢見日輪 直照師面 旣覺 欣然徃金
012_0392_b_18L剛山 心不寐 脇不側 旣二稔 聞母戀
012_0392_b_19L望 卽來覲省 不敢遠遊 凡五六年 及
012_0392_b_20L母喪 寫大字蓮經 資其㝠福 謁息影
012_0392_b_21L鑑和尙于禪源 學楞嚴得深旨 休休庵
012_0392_b_22L主請師演楞嚴要旨 令人悲喜 住三年
012_0392_b_23L徃忠州靑龍寺溪上舊址 手搬木石 扁
012_0392_b_24L以宴晦 玄陵請住檜嵓寺 不就 乃入

012_0392_c_01L또한 오대산 신성암에 머물렀는데 이때 나옹懶翁 근勤(惠勤) 화상도 고운암에 주석하며 수차례 서로 만나 도道의 요체를 질의하였고 나옹 화상이 가사와 불자拂子를 신표로 주었다.
신축년(1361, 공민왕 10) 가을에 자연(山水) 속에 자취를 감추었고 기유년(1369, 공민왕 18)에는 백성군白城郡 사람 김황金璜이 스님을 초청하고 서운사를 원찰로 삼았는데 스님이 가서 선회禪會를 크게 열었다.
홍무 3년【경술庚戌】(1370, 공민왕 19)에 임금이 선禪과 교敎의 선장選場을 열면서 나옹 화상에게 명해 시험을 주관하게 하였고 임금이 친히 행차하였다. 나옹 화상이 간단한 질문을 하자 대답할 수 있는 자가 없었는데 뒤늦게 스님이 도착하여 위의를 갖추고 당문當門, 입문入門 등의 삼구三句73)에 일일이 답변하자 나옹 화상이 이내 고개를 끄떡였다. 임금이 원院에 주석하게 하고자 했지만 스님은 보고도 없이 도성을 빠져나갔고 어봉산圉鳳山에 숨어 지냈다.
홍무 5년 임자(1372, 공민왕 21)에 불호사에 주석하도록 명하였고 다음 해에 왕명으로 대궐에 들게 하였다. 갑인년(1374, 공민왕 23) 입원入院하였고【혹은 을묘년(1365)에 원院에 들어갔고 병진년(1376)에 원에서 물러 나왔다고 한다.】, 9월에 임금이 승하하고 강령군康寧君(우왕)이 즉위하여 ‘광통무애廣通無碍 원묘대지圓妙大智 보제普濟’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을묘년(1375, 우왕 1)에 서운사로 돌아왔고 무오년(1378, 우왕 4)에 연회암으로 되돌아왔다. 계해년(1383, 우왕 9) 2월 조정에서 옛 제도를 따를 것을 논의하였는데 스님이 이를 듣고 은거하려 하였다. 문인인 감로장로甘露長老 경관慶觀이 “임금께서 우리 불법을 일으키려는 뜻이 매우 강하니 스승께서는 불법을 위해서라도 잠시 편안히 계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자 스님은 떠나지 않았다. 이에 임금이 상신相臣 우인열禹仁烈을 파견하여 어서御書와 인장印章, 법의法衣와 예폐禮幣를 받들고 연회암으로 가게 하여 왕사로 책봉하였다.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운비복국이생運悲福國利生 묘화무궁妙化無窮 도대선사都大禪師 정변지正遍智 지웅존자知雄尊者’라 하였고 개천사를 하소下所(下山所)로 삼았다. 가을에 서운사로 갔다.
갑자년(1384, 우왕 10)에 해적이 충주 경계로 들어오자 임금이 불러서 광엄사로 가게 하였다. 스님이 상언하여 “노승은 개천사도 해결하지 못하는데 어찌 광엄사를 겸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임금이 “두 절의 주지를 겸직한들 무슨 해가 되겠는가?”라고 답하였다.
을축년(1385, 우왕 11) 가을에 50일 동안 백산도량白傘道場74)을 개설하도록 명하였다. 병인년(1386, 우왕 12)에 또 보국사에서 불정회佛頂會를 열었고 정묘년(1387, 우왕 13)에 소재회消灾會를 설하였다. 무진년(1388, 우왕 14) 임금이 왕위를 물리고

012_0392_c_01L金鰲山 又五坮山神聖庵 時懶翁勤和
012_0392_c_02L尙 亦住孤雲庵 數相見質道要 翁以
012_0392_c_03L衣拂表信 辛丑秋晦迹山水間 己酉白
012_0392_c_04L城郡人金璜邀師 以願刹瑞雲寺 師至
012_0392_c_05L大張禪會 洪武三年
上設禪敎選場
012_0392_c_06L命懶翁試之 上親臨 翁下一言 無能
012_0392_c_07L對者 師後至 具威儀 而當門入門等
012_0392_c_08L三句一一對之 翁乃頷之 上欲住院 師
012_0392_c_09L不吿出城 隱圉鳳寺 五年壬子 命住佛
012_0392_c_10L護寺 明年詔入內 甲寅入院或乙卯入院
丙辰謝院云

012_0392_c_11L九月上賓于天 康寧君立 賜廣通無
012_0392_c_12L碍圓妙大智普濟之號 乙卯歸捿雲寺
012_0392_c_13L戊午還宴晦 癸亥二月 朝議欲遵舊制
012_0392_c_14L師聞欲隱 門人甘露長老慶觀曰 國主
012_0392_c_15L爲興我法意甚盛 願師爲法小安 師不
012_0392_c_16L行 王遣相臣禹仁烈 奉御書印章 法
012_0392_c_17L衣禮幣 就宴晦庵 册爲王師 大曹溪
012_0392_c_18L宗師運悲福國利生妙化無窮都大禪師
012_0392_c_19L正遍智知雄尊者 以開天寺爲下所 秋
012_0392_c_20L徃瑞雲寺 甲子海賊入忠州界 王邀至
012_0392_c_21L光嚴寺 師上言曰 老僧未解開天 況
012_0392_c_22L兼光嚴乎 王曰兼之何害 乙丑秋命設
012_0392_c_23L五十日白傘道場 丙寅又設佛頂會于
012_0392_c_24L輔國寺 丁卯設消灾會 戊辰王遜位

012_0393_a_01L어린 군주가 그 자리를 계승하자 스님은 개천사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공양왕이 즉위하여 다시 국사國師로 봉하였다. 신미년(1391, 공양왕 3)에 대장경을 교열하였고 다음 해에 노환을 이유로 표를 올려 사직하였다. 임신년(1392, 태조 1)에 청룡사靑龍寺로 옮겼고 9월 18일 문인들에게 “나는 간다. 고을 관원에게 봉인封印을 청해라.”라고 이르고는 저녁이 되자 고요히 앉아서 입적하였다. 8일 동안 평상에 앉은 채였고 그 모습이 평소 때와 같았다. 25일 연회암 북쪽 산기슭에서 다비를 하였고 눈과 같이 하얀 유골을 수습하였다. 임금이 듣고서 애도하였고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 하였다. 조금 지난 12월 갑신일에 청룡사 북쪽 봉우리에 탑을 세웠다. 세수는 75세, 법랍은 60년이다.
33. 조계종 천봉 만우 선사전曹溪宗千峯卍雨禪師傳
34. 조계종 무학 묘엄 존자전曹溪宗無學妙嚴尊者傳
휘는 자초自超이고 호는 무학無學이고 또 헌계월軒溪月이며, 속성은 박朴씨로서 경남 합천 삼기三岐 출신이고, 아버지 이름은 인일仁一이다. 어머니는 고성 채蔡씨인데 꿈속에서 초하룻날의 햇살을 받고 나서 임신을 하였다. 태정 4년 정묘년(1327, 충숙왕 14) 9월 20일에 태어났다. 강보를 벗어나자마자 청소를 하였다. 그리고 학업을 시작하였는데 다른 사람들이 그를 앞서지 못하였다.
18세(1344, 충혜왕 복위 5)에 출가할 마음이 있어서 조계산 혜감 국사慧鑑國師의 상족인 소지 선사小止禪師에 의지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용문산의 혜명慧明과 법장法藏 두 국사에게 나아가서 불법을 묻자 국사들이 말했다. “불법의 바른 길을 터득할 사람은 바로 그대가 아니면 누구이겠는가?” 마침내 정국암淨國庵에 주석하였다. 어느 날 불이 났을 때 선사는 마치 목각 인형처럼 홀로 정좌靜坐하고 있었는데, 불이 저절로 꺼졌다.
병술년(1346, 충목왕 2) 겨울에 『능엄경』을 읽고 깨친 바가 있어서 스승에게 말씀드리자 스승이 칭탄하였다. 이로부터 잠도 자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면서 오직 참구에만 전념하였다.
기축년(1349, 충정왕 1) 진주의 길상사吉祥寺에 나아갔다.
임진년(1352, 공민왕 1) 묘향산의 금강굴金剛窟에 주석하였는데, 혹 졸리면 곧 종과 경쇠로 잠을 쫓았다.
계사년(1353, 공민왕 2)

012_0393_a_01L幼君襲位 師乞歸開天寺 恭讓卽祚
012_0393_a_02L更封國師 辛未校大藏 以老病表辭
012_0393_a_03L壬申移于靑龍 九月十八日 謂門人曰
012_0393_a_04L吾行矣 請州官封印 至晩 儼然坐化
012_0393_a_05L坐床八日 㒵若平時 二十五日 茶毘
012_0393_a_06L于宴晦庵北麓 拾骨白如雪 上聞惻悼
012_0393_a_07L謚普覺 塔定慧圓融 後十二月甲申
012_0393_a_08L窆于靑龍之北峯 壽七十五 夏六十

012_0393_a_09L
012_0393_a_10L
曹溪宗千峯卍雨禪師傳

012_0393_a_11L

012_0393_a_12L曹溪宗無學妙嚴尊者傳

012_0393_a_13L
諱自超 號無學 軒溪月 姓朴 三岐人
012_0393_a_14L考仁一 母固城蔡氏 夢初日射懷有娠
012_0393_a_15L以泰定四年丁卯九月二十日生 免襁
012_0393_a_16L褓行 掃除及就學 人莫敢先 十八有
012_0393_a_17L出塵志 依曹溪慧鑑國師上足小止禪
012_0393_a_18L師 薙髮具戒 至龍門山慧明法藏二國
012_0393_a_19L師諮法 乃曰得正路者 非汝而誰 遂
012_0393_a_20L居淨國庵 一日失火 師獨靜坐 如木
012_0393_a_21L偶人 火仍滅之 丙戌冬看楞嚴有悟
012_0393_a_22L吿其師 師稱歎 自是發枕忘饌 專於
012_0393_a_23L叅究 己丑抵鎭州吉祥寺 壬辰住妙香
012_0393_a_24L山金剛窟 或睡則有鍾磬以警之 癸巳

012_0393_b_01L연도燕都(大都, 원의 수도)에 나아가서 지공 대사를 참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말했다. “삼천팔백 리를 찾아와서 화상의 면목을 뵙니다.” 그러자 지공이 말했다. “고려인이 모두를 죽이는구나.” 이에 대중이 크게 놀랐다.
갑오년(1354, 공민왕 3) 정월에 법천사에 도착하여 나옹 화상을 참문하였다. 나옹이 한번 보고는 무학을 큰 그릇으로 여겼다. 무학은 오대산을 지나 서산의 영암사를 유력하였는데, 수년 동안 선정에 들어가서 공양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나옹이 그것을 보고는 물었다. “그대는 죽었는가?” 그러나 무학은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꿈에 무학 자신이 나옹의 조실에 들어가니 나옹이 말했다. “오늘에야 내가 그대를 속이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중에 무학에게 말했다. “서로 알고 있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또 말했다. “깨침이 사람에 있는 것은 마치 코끼리가 상아를 감출 수 없는 것과 같다.”
병진년(1356, 공민왕 5)에 해동으로 돌아가려고 나옹에게 작별 인사를 드렸다. 이에 나옹은 손수 다음과 같은 게송 하나를 써 주었다.

已信囊中別有天  주머니에는 별천지 있음을 이미 믿지만
東西一任用三玄  해동과 중국서 똑같이 삼현법75) 활용하라
有人問爾叅訪意  그대한테 참방한 뜻이 무어냐고 묻거든
打倒面門更莫言  그 자리에서 때려눕히고는 말하지 말라

무학이 나옹과 지공에게 삼산양수三山兩水의 현기를 받아 가지고 해동에 돌아와서는 천성산 원효암에 주석하였다. 기해년(1359, 공민왕 8)에 나옹 화상을 신광사로 찾아뵈니,76) 나옹 화상이 다음과 같은 시를 주었다.77)

閑僧軰起人我見  게으른 무리는 인견 아견 일으켜서
妄說是非甚不然  시비를 망설함이 그보다 더할 수 없다
分衿別有商量處  헤어진 후로 따로 상량할 도리 있는데
誰識其中意更玄  누가 그 속의 뜻이 현묘함을 알겠는가
任爾諸人皆不可  대중이 다 옳지 않다고 맘대로 말해도
我言透過空刼前  그대가 공겁전78)의 소식 깨친 줄을 안다

무학 대사는 고달산高達山에 들어가서 암자를 세우고 자성을 지켰다.
신해년(1371, 공민왕 20)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은 나옹을 왕사로 책봉하여 송광사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나옹이 의발을 무학에게 부촉하였다.
계유년(1393, 태조 2)에 태조가 땅을 골라서 도읍을 세우려고 계룡산과 신도新都(三角山, 현재의 서울)를 순행하는 길에 대사가 모두 함께 따랐다. 이전 태조 원년(1392)에는 대사를 송악으로 불러 법의法衣를 갖추어 주고 왕사로 책봉하여 ‘대조계종大曹溪宗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전불심인傳佛心印 변지무애辯智無碍 부종수교扶宗樹敎 홍리보제弘利普濟 도대선사都大禪師 묘엄존자妙嚴尊者’라 하였다.

012_0393_b_01L走燕都 叅指空拜云 三千八百里 叅
012_0393_b_02L和尙面目 空云高麗人都殺了 衆乃大
012_0393_b_03L驚 甲午一月 到法泉寺 叅懶翁 翁一
012_0393_b_04L見甚器之 遊歷五坮靈嵓 數載在定
012_0393_b_05L有當食不知 翁見之 汝死了 師笑不
012_0393_b_06L答 一日夜夢 師入翁室 翁云 今日乃
012_0393_b_07L知 吾不汝欺 謂師曰 相識滿天下 知
012_0393_b_08L心能幾人 又曰道之在人 如象之牙
012_0393_b_09L藏之不得也 丙辰欲東還吿辭 翁手書
012_0393_b_10L一偈云

012_0393_b_11L已信囊中別有天 東西一任用三玄

012_0393_b_12L有人問爾叅訪意 打倒面門更莫言

012_0393_b_13L亦以指空三山兩水之記授之 旣還住
012_0393_b_14L天聖山元曉庵 己亥徃見翁於神光寺
012_0393_b_15L翁以詩贈云

012_0393_b_16L閑僧軰起人我見 妄說是非甚不然

012_0393_b_17L分衿別有商量處 誰識其中意更玄

012_0393_b_18L任爾諸人皆不可 我言透過空刼前

012_0393_b_19L師入寺達山 卓菴自守 辛亥前朝恭王
012_0393_b_20L封懶翁爲王師 命住松廣寺 翁以衣鉢
012_0393_b_21L付師 癸亥太祖欲相土建都 巡鷄龍山
012_0393_b_22L及新都三角
山也
師皆從之 太祖元年 召師
012_0393_b_23L至松京 具法衣 封爲王師 大曹溪宗
012_0393_b_24L禪敎都揔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

012_0393_c_01L대사가 향을 들고 말했다. “오늘날 개국의 초기에 형벌을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한번 똑같은 자애심으로 돌아보시어 모든 신하와 백성으로 하여금 다 함께 태평성대(仁壽之域)에 이르도록 해 주신다면, 실로 우리의 국가가 끝없는 복이 될 것입니다.” 태조가 그것을 가상하게 여겼다.
그해 9월에 대사는 광명사에서 지공과 나옹 두 스승의 진영을 모시는 행사에서 다음과 같은 진찬을 지었다.

指空千釰平山喝  지공 보우의 칼날과 평산 처림의 할은
選擇工夫對御前  공부선의 선택으로 어전에서 향하고
最後神光遺舍利  최후로 신광사에서 사리를 남겼는데
三韓祖室萬年傳  삼한의 조실들에게 만년토록 전했네

10월에 연복사에서 국가적인 장경불사藏經佛事79)를 개설하였는데, 무학 대사에게 주관하도록 명하였다. 무학 대사는 무인년(1398, 태조 7)에 사퇴의 뜻을 밝힌 후에 금강산 진불암眞佛庵에 들어갔다. 을유년(1405, 태종 5) 봄에 병환이 있었는데, 대사는 시자가 올린 약을 물리면서 말하였다. “팔십의 나이에 병이 났는데 약은 써서 무엇 하겠는가?” 4월에 금장암金藏庵으로 주석처를 옮겼고, 그해 9월 11일 시적하였다. 세수는 79세이고, 법랍은 61년이다.
35. 조계종 혜명 선사전曹溪宗慧明禪師傳
36. 조계종 대지 혜월 국사전曹溪宗大智慧月國師傳
휘는 찬영粲英이고, 자는 고령古欞이며, 법호는 목암木菴이고, 성은 한韓씨이다. 아버지는 적績으로 양주 사람이고, 어머니는 곽郭씨로서 청주 사람이다. 태정 5년 무진년(1328, 충숙왕 15) 정월 8일에 탄생하였다.
나이 14세(1341, 충혜왕 복위 2)에 한수漢水에서 헤엄치고 놀다가 삼봉이 우뚝 솟아 있는 것을 보고 초연히 출가의 뜻을 품었다. 중흥사 원증 국사圓證國師에게 나아가 머리를 깎았다. 5년 만에 법을 받고 1346년, 충목왕 2년에는 정혜 국사定慧國師를 친견하였고,80) 다시 가지산에 나아갔다. 또한 유점사의 자운 화상慈雲和尙에게 참문하였다.
경인년(1350, 충정왕 2)에 구산선九山選81)의 상과上科에 올랐다. 계사년(1353, 공민왕 2)에는 다시 괴과魁科(문과 중의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에 국일 지엄國一智嚴 존자가 선사의 관상을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왕의 스승이 될 것이다.” 선사는 옷자락을 떨치고 소설산小雪山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삼각산으로 들어가서

012_0393_c_01L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 師拈
012_0393_c_02L香云 今當開國之初 陷刑者非一 願
012_0393_c_03L殿下一視同仁 俾諸臣民 共臻仁壽之
012_0393_c_04L域 實吾家國無疆之福也 上嘉之 九
012_0393_c_05L月師以二師掛眞于廣明寺製贊曰

012_0393_c_06L指空千釰平山喝 選擇工夫對御前

012_0393_c_07L最後神光遺舍利 三韓祖室萬年傳

012_0393_c_08L十月國設藏經佛事於演福寺 命師主
012_0393_c_09L席 師自戊寅辭退 旋入金剛眞佛庵
012_0393_c_10L乙酉春有疾 侍者進藥 師却之曰

012_0393_c_11L八十有疾何用藥 爲四月移金藏庵
012_0393_c_12L九月十一日示寂 壽七十九 夏六十一

012_0393_c_13L
012_0393_c_14L
曹溪宗慧明禪師傳

012_0393_c_15L

012_0393_c_16L曹溪宗大智慧月國師傳

012_0393_c_17L
諱粲英 字古欞 號木菴 姓韓 考績
012_0393_c_18L楊州人 妣郭氏 淸州人 泰定五年戊
012_0393_c_19L辰一月八日誕 年十四游漢濱 望見三
012_0393_c_20L峰屹立 超然有出塵志 投重興圓證國
012_0393_c_21L師祝髮 受法五年 造定慧國師 赴迦
012_0393_c_22L智山 又叅榆岾寺慈雲和尙 庚寅登九
012_0393_c_23L山選上科 癸亥又魁科 國一智嚴尊者
012_0393_c_24L相曰 此子爲王者師矣 師拂衣入小雪

012_0394_a_01L일대사를 구명究明하면서 3년을 지냈다.
기해년(1359, 공민왕 8)에 현릉玄陵(공민왕)이 선사를 초청하여 그 모습을 보고 벽안호碧眼胡82)라고 칭탄하였다. 그리고 양가도승록兩街都僧錄을 맡기자, 대사 곧 찬영 선사는 수년 동안 그 일을 맡았다가 그로부터 벗어났다. 선사는 칙명으로 석남사와 월남사와 신광사와 운문사 등에 주석하였다.
임자년(1372, 공민왕 21) 봄에 조칙으로 궁궐로 맞이하여 ‘정지원명무애淨智圓明無碍 국일선사國一禪師’라는 호를 내렸고, 또 가사와 발우와 불상 등을 하사하였다.83)갑인년(1374, 공민왕 23) 봄에 현릉이 붕어하자 우왕은 칙명을 내려서 가지사迦智寺에 주석하게 하고, 특별히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정지원명淨智圓明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라고 가호加號하였다.
정사년(1377, 우왕 3)에 국사가 되어 달라는 요청을 고사하고 보개산으로 들어가면서 상소를 올려서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이듬해(1378, 우왕 4) 칙지를 받들어 가지산에 주석하였다.
임술년(1382, 우왕 8)에 청량사 방장실에 머물렀다.
계해년(1383, 우왕 9) 3월에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大曹溪宗 불일명변佛日明辨 대지우세大智祐世 이생보제利生普濟 무애도대선사無碍都大禪師 묘변지원응존자妙辯智圓應尊者’라는 호를 내렸다. 그리고 사신을 파견하여 억정사憶政寺에 주석토록 하였다.
갑자년(1384, 우왕 10)에 중흥사 원증국사비圓證國師碑를 건립하였다.
을축년(1385, 우왕 11) 우왕이 광명사로 초청하였고, 무진년(1388, 우왕 14)에 어린 임금 곧 창왕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하자 왕사의 인장을 선사에게 다시 돌려보냈다. 그해 10월에 흥성사로 옮겨서 머물렀다. 이듬해 기사년(1389, 공양왕 1) 2월에 칙명으로 억정사에 주석하도록 하였다. 선사는 그해 6월 28일에 대중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나는 껍데기를 벗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다음과 같은 고덕의 시를 읊어 주었다.

卽此見聞非見聞  이처럼 보고 듣는 것도 곧 보고 듣는 것이 아니므로
無餘聲色可呈君  어떤 소리와 색으로도 그대들에게 보여 줄 것이 없다
箇中若了全無事  이 가운데 온전하게 무사한 도리를 깨달아서 안다면
體用無妨分不分  본체와 작용 나뉨과 나뉘지 않음에 상관이 없다네84)

그리고 “천만 게송을 짓는데도 이 게송을 초월하지 못하리라.(千偈萬偈不越是矣。)”85)라고 하고는 머리를 북쪽으로 두고 오른쪽 옆구리를 대고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여 유골을 수습하여 동쪽 기슭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공양왕이 소식을 듣고 시호를 지감대지智鑑大智라 하고, 탑호를 혜월원명慧月圓明이라 하였다. 세수는 63세이고, 법랍은 49년이다.

012_0394_a_01L山三角 究明一大事三夏 己亥玄陵招
012_0394_a_02L致之 稱其㒵曰 碧眼胡云 以爲兩街
012_0394_a_03L都僧錄大師數年 師解之 命住石南月
012_0394_a_04L南神光雲門等刹 壬子春詔內院 賜號
012_0394_a_05L淨智圓明無碍國一禪師 又賜衣鉢佛
012_0394_a_06L像 甲寅春玄陵賓天 王命住迦智寺
012_0394_a_07L特加禪敎都揔攝淨智圓明國一都大禪
012_0394_a_08L師 丁巳固辭 入寶盖山 抗書辭病 明
012_0394_a_09L年承旨住迦智 壬戌淸凉方丈居焉 癸
012_0394_a_10L亥三月 册爲王師 大曹溪宗佛日明辨
012_0394_a_11L大智祐世利生普濟無碍都大禪師妙辯
012_0394_a_12L智圓應尊者 遣使邀于憶政寺 甲子樹
012_0394_a_13L重興寺圓證國師碑 乙丑王邀廣明寺
012_0394_a_14L戊辰幼君嗣位 封還印章于師 十月移
012_0394_a_15L興聖 明年己巳二月 命安于憶政 六
012_0394_a_16L月二十八日 吿衆曰 吾當脫殻 遂頌
012_0394_a_17L古詩曰

012_0394_a_18L卽此見聞非見聞 無餘聲色可呈君

012_0394_a_19L箇中若了全無事 體用無妨分不分

012_0394_a_20L千偈萬偈不越是矣 北首右脇 寂然而
012_0394_a_21L逝 茶毘收骨 塔于東崖 上聞之 謚智
012_0394_a_22L鑑大智 塔慧月圓明 壽六十三 夏四
012_0394_a_23L十九

012_0394_b_01L
37. 조계종 소지 선사전曹溪宗小止禪師傳【혜감惠鑑의 법사法嗣이다.】
曹溪宗小止禪師傳【惠鑑嗣。】
38. 조계종 구곡 각운 선사전曹溪宗龜谷覺雲禪師傳
휘는 각운覺雲이고 호는 구곡龜谷이며 자는 소은小隱으로 호남 용성龍城(남원) 출신이다. 현릉玄陵(공민왕)이 ≺달마절로도강도達摩折蘆渡江圖≻와 ≺보현육아백상도普賢六牙白象圖≻를 그려서 내려 주었다. 또 구곡 각운龜谷覺雲이라고 손으로 쓴 네 글자와 22자나 되는 법호86)를 내려 주었다. 그리고 이색李穡에게 명하여 구곡과 각운에 대한 찬시87)를 쓰도록 하였다. 그리고 관작을 운운.
39. 조계종 벽계 정심 선사전曹溪宗碧溪淨心禪師傳
휘는 정심淨心이고 호는 벽계碧溪이며 성은 최崔씨로서 금산 출신이다. 명나라에 들어가서【연대가 알려져 있지 않다.】 임제종의 총통 화상에게서 법인法印을 받고 돌아와서 구곡 각운의 법맥을 원사遠嗣하였다. 공양왕 대에 불법사태로 인하여 머리를 기르고 처자를 거느리다가 황악산에 들어가서 고자동古紫洞 물한리物罕里에 은거하였다.【이곳은 물이 많은 마을(水多村)이다.】 족적을 감추고 은둔하였기에 자호를 회은晦隱이라 하였다. 장차 시적하려 할 때 벽송 지엄碧松智嚴 선사에게 선맥을 전승하고, 정련 법준淨蓮法俊 대사에게 교맥을 전승하였다. 벽송 지엄은 태고 보우의 제4세이다.
40. 조계종 경관 선사전曹溪宗慶觀禪師傳【환암 혼수幻庵混修의 법사法嗣이다.】
曹溪宗慶觀禪師傳【幻庵嗣。】
41. 조계종 벽송 지엄 선사전曹溪宗碧松智嚴禪師傳
휘는 지엄智嚴이고 호는 야로野老이며 당호는 벽송碧松이고 성은 송宋씨이다. 아버지 이름은 복생福生이고 부안 사람이다. 어머니는 왕王씨인데 꿈에 범승梵僧이 집에 머물고 간 뒤 임신을 하였다. 천순 8년 갑신년(1464, 세조 10) 3월 15일에 태어났다. 씩씩하고 무예가 남들보다 뛰어났는데

012_0394_b_01L
曹溪宗小止禪師傳惠鑑嗣

012_0394_b_02L

012_0394_b_03L曹溪宗龜谷覺雲禪師傳

012_0394_b_04L
諱覺雲 號龜谷 字小隱 湖南龍城人
012_0394_b_05L玄陵畫達摩折蘆渡江圖普賢六牙白象
012_0394_b_06L圖賜之 又手書龜谷覺雲四字 兼賜二
012_0394_b_07L十二字法號 命李穡爲之贊 云龜谷覺
012_0394_b_08L雲 卽衣冠之冑云云

012_0394_b_09L

012_0394_b_10L曹溪宗碧溪淨心禪師傳

012_0394_b_11L
諱淨心 號碧溪 姓崔 金山人 入明未知
年記

012_0394_b_12L佩臨濟宗下揔統和尙法印而來 遠嗣
012_0394_b_13L1)龜矣 恭王時因沙汰 長髮畜妻孥 入
012_0394_b_14L黃岳山 隱于古紫洞物罕里卽水
多村
晦迹
012_0394_b_15L隱遁 故自號晦隱 將啓手足也 傳禪
012_0394_b_16L于碧松智嚴禪師 傳敎于淨蓮法俊大
012_0394_b_17L師 卽太古下四世云尒

012_0394_b_18L
012_0394_b_19L
曹溪宗慶觀禪師傳幻庵嗣

012_0394_b_20L

012_0394_b_21L曹溪宗碧松智嚴禪師傳

012_0394_b_22L
諱智嚴 號野老 軒碧松 姓宋 父福生
012_0394_b_23L扶安人 母王氏 夢梵僧寄宿有娠 天
012_0394_b_24L順八年甲申三月十五日生 雄武過人

012_0394_c_01L더욱이 글을 좋아하여 칼자루에도 글을 새겨 놓고 읽었다.
홍치 4년 신해년(1491, 성종 22) 5월에 여진족이 북쪽 국경을 침범하자 성종이 허종許琮에게 장수를 명하여 2만 명의 병사로 여진족을 정벌하였는데, 벽송 지엄도 또한 무기를 들고 참여하여 크게 전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나자 지엄은 크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대장부가 마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설령 크게 공을 세운다 할지라도 한낱 헛된 명예만 숭상할 뿐이다.”이에 군복을 벗고 계룡산으로 들어갔다. 거기에서 조징 대사祖澄大師를 참문하여 갓을 벗고 머리를 깎았는데 그의 나이 28세였다.
먼저 연희 교사衍熙敎師를 참방하여 원돈법圓頓法에 대하여 물었고, 다음에 정심 선사淨心禪師에게 참문하여 달마서래達磨西來의 종지를 물었다.
정덕 3년 무진년(1508, 중종 3) 가을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대혜어록大慧語錄』을 읽고는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의심하여 칠통을 타파하였다.88) 또한 『고봉원묘선사어록高峰原妙禪師語錄』을 읽다가 “멀리 타방세계까지 휘날려 버려야 가능하다(颺在他方)”89)라는 말에서 이전의 분별지해를 완전히 탈락하였다. 대혜 종고大慧宗杲는 육조 대사의 17대 적손이고, 고봉 원묘高峰原妙는 임제종 제18대 적손이다. 벽송 지엄은 500년 전에 형성된 임제종파를 은밀하게 전승하였는데, 그것은 마치 정주程朱90)가 태어나서 멀리 공자와 맹자의 계통을 전승한 것과 같았다.
신미년(1511, 중종 6) 48세 때 용문산에 들어가서 두 철을 지내고 계유년(1513, 중종 8)에는 오대산으로 들어가서 다시 한 철을 지냈다. 이후 백운산白雲山과 능가산楞伽山 등지를 유력하면서 한곳에 주석하지 않고 한도인閑道人으로 지냈다.
경진년(1520, 중종 15)에 지리산으로 들어가서 초암을 짓고 두문불출하며 좌선수행을 하면서 지냈다. 어느 날 일선 장로一禪長老를 돌아보고 말했다. “이미 깨침과 하나가 되어 있는데 다시 무엇을 위해서 좌선을 하는가?” 그러고는 잠시 양구良久하고 말했다.

萬片落花隨水去  만 조각 낙화는 물을 따라 흘러가고
一聲長笛出雲來  퉁소의 긴 소리는 구름 속에서 나온다

다시 정련 법준에게 게송으로 말했다.

逢君曾與鏌鎁釰  그대를 만나 일찍이 막야검91)을 주었으나
勿使鋒鋩生綠苔  칼날을 사용하지 않아 이끼가 피어났네
五蕰山前如見賊  오온산 앞에서 도적 떼를 만난다면
一揮能斬箇箇來  한번 크게 휘둘러서 모두를 베어 버려라

가정 13년 갑오년(1534, 중종 29)에 문인들을 수국암壽國菴에 모이도록 명하고는 『법화경法華經』을 강의하여 종지를 거양하였다. 그러고는 시자를 불러서 차를 내어 마시고는 문을 걸어 잠그고 단정하게 앉아서 양구하였다.

012_0394_c_01L尤好書釰 弘治四年辛亥五月 野人寇
012_0394_c_02L朔方 成宗命許琮 帥二萬討之 師亦
012_0394_c_03L杖釰從之 大竪戰功 旣罷 喟然歎曰
012_0394_c_04L大丈夫不守心地 縱有汗馬之功 徒尙
012_0394_c_05L虛名 拂衣入鷄龍山 叅祖澄大師 投
012_0394_c_06L簪落髮 年二十八 先訪衍熙敎師 問
012_0394_c_07L圓頓法 次叅淨心禪師 叩西來旨 正
012_0394_c_08L德戊辰秋 入金剛 看大惠語錄 疑無
012_0394_c_09L字話 打柒桶 又高峯語錄 颺在他方
012_0394_c_10L之語 頓落前解 大惠卽六祖十七代嫡
012_0394_c_11L孫 高峯2)臨十八代嫡孫也 以師密承
012_0394_c_12L五百年前宗派 猶程朱生乎千載之下
012_0394_c_13L遠承孔孟之緖也

012_0394_c_14L
辛未入龍門山 結二夏癸酉入五坮山
012_0394_c_15L又一夏 白雲楞伽無住閑道人也 庚
012_0394_c_16L辰入智異山 結草菴 杜門㝠寂 一日
012_0394_c_17L顧一禪長老曰 旣是一也 喚什麽作禪
012_0394_c_18L良久云 萬片落花隨水去 一聲長笛出
012_0394_c_19L雲來 又偈法俊曰

012_0394_c_20L逢君曾與鏌鎁釰 勿使鋒鋩生綠苔

012_0394_c_21L五蕰山前如見賊 一揮能斬箇箇來

012_0394_c_22L嘉靖甲午 命門人會壽國菴 講法華經
012_0394_c_23L擧揚宗旨 喚侍者點茶訖 閉門端坐
012_0394_c_24L「龜」下疑脫「谷」{編}「臨」下疑脫「濟」{編}

012_0395_a_01L문인들이 창을 열어 선사를 살펴보니 이미 입적하였다. 이때가 10월 초하루 진시(오전 7~9시)였다. 다비를 하자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에 가득하였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진주와 같이 빛이 났다. 영관靈觀·숭인崇仁·설은雪訔·원오圓悟 등이 의신義神의 남쪽 기슭에 부도탑을 세웠다. 세수는 81세92)이고, 법랍은 44년이다.
42. 조계종 탁연 선사전曹溪宗卓然禪師傳
43. 조계종 묘각 수미 왕사전曹溪宗妙覺守眉王師傳
휘는 수미守眉이고 낭주 출신이며 속성은 최崔씨이다. 어머니가 꿈속에서 기인이 준 구슬을 받고 잉태하여 낳았는데 기이한 향기가 방 안에 가득하였다.
13세 때 월출산의 도갑사道岬寺에 나아가서 출가하고 머리를 깎았다. 구족계를 받고 나서 여러 곳의 강원을 거쳤다. 마침내 속리산 법주사에서 사미 신미信眉를 만났는데 같은 이름과 같은 나이로서 그와 더불어 탁마하였다. 대장경을 열람하였고 율律을 익혔는데, 동학들은 그 두 사람을 가리켜서 이감로문二甘露門이라 일컬을 만큼 이미 두각을 나타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동학들에게 말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사本分事를) 저버린 것은, 비록 아무리 잘 그린 그림이라도 결국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닌 것과 같다.”93) 그러고는 마침내 교학을 버리고 선굴禪窟에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구곡 각운 선사를 참문하였지만94) 나중에 등계登階(碧溪淨心)의 조실에 입실하였다. 수미 선사는 판선종사判禪宗事에 임명되어 거침없는 불법사태의 파도를 방호하고 이미 무너진 불법의 둑을 회복하여 종문의 희망이 되었다. 고심 끝에 본사인 도갑사로 돌아와서 도선 국사道詵國師의 도량이 황폐해진 것을 보고 대중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황폐한 상황을 어찌 앉아서만 바라보고 복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물며 임금의 명이 있었음에랴.” 그 문하인 홍월洪月로 하여금 사찰 복구의 간사를 맡도록 하여 복구하여 다시 새롭게 하였다. 또한 영응대군永膺大君은 대단월이 되어 약사여래삼존불을 조성하여(敬塑) 몸소 감전紺殿에 안치하였다. 그때가 천순 원년(1457, 세조 3) 정축년이었다. 사사四事95)가 몰려들고 시절인연이 도래하며 합장하는 손이 둘러싸고 훌륭한 스님들이 모여드니 종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012_0395_a_01L良久 開窓視之 已入寂矣 乃十月一
012_0395_a_02L日辰時也 茶毘 祥光洞天 頂骨舍利
012_0395_a_03L瑩若眞珠 靈觀崇仁雪訔圓悟等 鐫塔
012_0395_a_04L于義神南麓 壽八十一 夏四十四

012_0395_a_05L
012_0395_a_06L
曹溪宗卓然禪師傳

012_0395_a_07L

012_0395_a_08L曹溪宗妙覺守眉王師傳

012_0395_a_09L
諱守眉 朗州人 姓崔 母夢異人遺珠
012_0395_a_10L而孕生 異香滿室 十三投月出山道岬
012_0395_a_11L寺 出家薙髮 旣冠受具 翺翔講肆 抵
012_0395_a_12L俗離山法住寺 遇沙彌信眉 同名同歲
012_0395_a_13L與之硺磨 讀大藏 習毘尼 學者推之
012_0395_a_14L謂二甘露門 已露頭角矣 居無何 謂
012_0395_a_15L同學曰 我所負者 雖曰妙畫 終非活
012_0395_a_16L也 遂棄所學 出入禪窟 初叅龜谷 晩
012_0395_a_17L入登階之室 師被選判禪宗事 防橫決
012_0395_a_18L之波 廻旣倒之瀾 宗門有願焉 尋還
012_0395_a_19L道岬 慨先國師道場荒廢 謂衆曰 吾
012_0395_a_20L儕豈忍坐視而不復耶 況聖上有命 使
012_0395_a_21L其徒洪月 幹其事 復舊重新 且永膺
012_0395_a_22L大君 作大檀越 敬塑藥師如來三 躬
012_0395_a_23L安紺殿 時天順元年丁丑也 四事駢集
012_0395_a_24L天和麕至 千指圍繞 龍象蹴踏 宗風

012_0395_b_01L
왕위에 오른 후 세조 임금(光廟)은 예를 갖추어 수미 선사를 왕사로 책봉하고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묘각존자妙覺尊者’라는 호를 내려 주고 아울러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내려 주었다. 공경公卿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선사에게 불법을 묻고 높이 숭앙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는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날 문인을 불러서 종문의 대사大事를 부촉하고는 조용히 입적하였다. 도갑사의 동쪽 기슭에서 다비를 하고 영골을 수습하여 부도탑에 모셨는데, 상서로운 그 광명에 대하여 태양도 시샘할 정도였고, 오색구름이 허공에 며칠 동안 머무르자 원근에서 모두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흠모하였다. 세수는 63세이고, 법랍은 51년이다.
44. 조계종사 고암 선사전曹溪宗師杲庵禪師傳
45. 조계종사 정련 선사전曹溪宗師淨蓮禪師傳【벽계 정심碧溪淨心의 제자이다.】
46. 조계종사 혜각 선사전曹溪宗師慧覺禪師傳【휘는 신미信眉이다.】
47. 조계종사 석굉 선사전曹溪宗師釋宏禪師傳【나옹 혜근懶翁惠勤의 제자이다.】
48. 조계종사 고경 선사전曹溪宗師古鏡禪師傳【환암 혼수幻庵混脩의 제자이다.】
49. 조계종사 홍월 선사전曹溪宗師洪月禪師傳【묘각 수미妙覺守眉의 제자이다.】
50. 조계종사 함허 선사전曹溪宗師涵虛禪師傳【휘는 득통得通이고 자는 수이守伊이다.】
51. 조계종사 부용 영관 선사전曹溪宗師芙蓉靈觀禪師傳
선사는 영남 진주 출신으로 휘는 영관靈觀이고 자는 은암隱庵이며 자호는 연선도인蓮船道人이다. 성화 21년 을사년(1485, 세조 16) 7월 7일에 태어났다. 8세 때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따라가서 물고기를 잡아넣은 바구니를 지켰는데 살아 있는 것을 보고 가려내어 방생하였다. 이에 아버지가 화를 내고 매를 들어 때리자 선사는 절을 하고 울면서 말했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목숨을 아끼고 고통을 느끼는 것은 동일합니다. 바라건대 아버지께서는 그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아버지는 그 말을 듣고 이에 부끄러워하였다.
집 가까운 곳에 용굴이 있었다. 어떤 때는 알 수 없는 음악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였다. 용이 모습을 나타내자

012_0395_b_01L大振 嗣後光廟備禮 册封王師 賜以
012_0395_b_02L大曹溪宗師妙覺尊者號 及賜法衣拂
012_0395_b_03L子 自公卿以下 西向而問北面禮者
012_0395_b_04L不可殫述也 一日召門人 囑以宗門大
012_0395_b_05L事 泊然而逝 茶毘于東麓 收骨安塔
012_0395_b_06L祥光猜日 彩雲盤空者數日 遠近咸欽
012_0395_b_07L壽六十三 夏五十一

012_0395_b_08L
012_0395_b_09L
曹溪宗師杲庵禪師傳
012_0395_b_10L曹溪宗師淨蓮禪師傳碧溪弟子

012_0395_b_11L曹溪宗師慧覺禪師傳諱信眉

012_0395_b_12L曹溪宗師釋宏禪師傳懶翁弟子

012_0395_b_13L曹溪宗師古鏡禪師傳幻庵弟子

012_0395_b_14L曹溪宗師洪月禪師傳妙覺弟子

012_0395_b_15L曹溪宗師涵虛禪師傳諱得通 字守
012_0395_b_16L

012_0395_b_17L

012_0395_b_18L曹溪宗師芙蓉靈觀禪師傳

012_0395_b_19L
師嶺南晋州人 諱靈觀 字隱庵 自號
012_0395_b_20L蓮船道人 咸化二十一年乙巳七月七
012_0395_b_21L日生 年八歲 父携使負釣魚籃 擇其
012_0395_b_22L生命者而放之 父怒撻之 師拜泣曰
012_0395_b_23L人與物愛命 忍痛則一也 願父恕之
012_0395_b_24L父聞而媿之 家近龍窟 有時唫樂顯形

012_0395_c_01L선사가 준비해 간 상床을 치고 용을 꾸짖자 음악 소리가 그치고 용은 형체를 감추어 버렸다. 사람들은 선사를 가리켜 기이한 아이라고 말하였다. 어떤 기이한 스님이 선사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 아이는 출가할 인물입니다.” 그러더니 보이던 모습을 감추어 버렸다.
나이 13세 정사년(1497, 연산군 3) 가을날 밤에 혼자 문을 나섰는데, 마치 어떤 사람의 안내라도 받은 것처럼 순식간에 10여 리를 갔다. 도사천渡沙川이라는 강에 이르렀는데 기르던 개 한 마리가 뒤를 따라왔다. 이에 개한테 말했다. “집을 잘 지키고 나를 따라오지 말라.” 개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모습이었다. 선사는 곧장 덕이산으로 들어가서 고행 선자苦行禪子를 찾아가서 3년 동안 선법을 익히고 머리를 깎았다.
18세 신유년(1500, 연산군 6)에는 신총 교사信聰敎師를 참문하였고, 또한 위봉 선사威鳳禪師에게 참례하였다. 구천동九泉洞에 들어가 모암矛庵을 짓고 그곳에서 9년을 지냈다.
기사년(1509, 중종 4) 봄에 멀리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서 조우 선사祖愚禪師를 참방하였다. 갑술년(1514, 중종 9)에는 청평산의 학매 선자學梅禪子를 찾아갔다.
기묘년(1519, 중종 14)에는 금강산으로 가서 조운 대사祖雲大師와 더불어 두 철을 지냈다. 더욱더 깊은 미륵봉 내원암으로 들어가서 문에다 다음과 같은 글을 써 붙였다.

空費悠悠憶少林  공연히 소림만 생각하며 세월만 보냈네
因循衰鬂到如今  세월에 나이만 먹어 지금에 이르렀다네
毘耶昔日無聲臭  옛날 비야리성엔 소리와 냄새도 없었고
摩竭當年絶響音  지금의 마갈국엔 소리의 흔적 끊겼다네96)
似杌能防分別意  마치 분별을 완전히 여읜 나무 등걸처럼
如痴必禦是非心  시비분별을 멀리한 어리석은 바보라네
故將妄計飛山外  부산한 번뇌망상 산 밖에 날려 버리려고
終日忘機對碧岑  종일 나를 잊은 듯 푸른 산을 바라보네

이에 붓과 벼루를 태워 버리고 선방에 틀어박혀 묵묵히 좌선에 몰두하기를 9년 동안 지속하였다. 혹자가 질문을 하는 경우에는 손가락으로 자신이 써 놓은 시만 가리킬 뿐이었다.
경인년(1530, 중종 25) 가을에 홀연히 남쪽 지방으로 가서 고향집에 이르렀다. 석양의 강촌에서 슬프게 서 있자니 홀연히 한 늙은이가 소를 이끌고 집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 선사가 그 노인에게 인사를 드리고 물었다. “저희 부모님은 아직 살아 계신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노인이 말했다. “스님의 아버님 성함은 어찌 되고 스님의 아명은 또 무엇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저희 아버님 성함은 원袁 자 연演 자이고 제 아명은 구언九彦입니다.” 노인이 갑자기 소를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감격스러운 듯이 말했다. “오늘에야 비로소 천만다행으로 부자가 만났구나. 내 곁을 떠나간 지 30여 년 만에 갑자기 스스로 찾아오니 드디어 내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아버지와 아들은 각각 기쁨과 회한을 이기지 못하여 그 자리에서 한바탕 통곡하였다.
다음 날 늙은 아버지에게 작별을 고하고 두류산으로 향하였다. 벽송 지엄의 문을 두드리자 지엄이 말했다. “그대의 이름이 영관靈觀이라 하니 영靈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지만 그렇다면 관觀은 또 어디에서 왔는가?” 이에 선사가 20년 묵은 의심이 홀연히 빙하가 녹아 계곡이 되는 듯 분명하고 시원하였다.

012_0395_c_01L師叩床喝之 止樂沒形 人稱奇童 有
012_0395_c_02L異僧謂父曰 此兒出家之物也 視之不
012_0395_c_03L見 年十三丁巳 秋夜出門 似有引人
012_0395_c_04L十餘里渡沙川 所養一狗 追之 謂狗
012_0395_c_05L曰 善護尊堂 勿追我也 狗似有惜別
012_0395_c_06L之態 師直入德異山 尋苦行禪師 三年
012_0395_c_07L學法 落髮焉 十七辛酉 叅信聰敎師
012_0395_c_08L又禮威鳳禪師 入九泉洞 結茅菴度九
012_0395_c_09L年 春己巳遠入龍門山 訪祖愚禪師
012_0395_c_10L甲戌向淸平山學梅禪子 己卯到金剛
012_0395_c_11L與祖雲 結二夏 深入彌勒峯 唫偈書門
012_0395_c_12L空費悠悠憶少林 因循衰鬂到如今

012_0395_c_13L毘耶昔日無聲臭 摩竭當年絕響音

012_0395_c_14L似杌能防分別意 如痴必禦是非心

012_0395_c_15L故將妄計飛山外 終日忘機對碧岑

012_0395_c_16L燒筆硯默坐九年 有問則指此詩而已
012_0395_c_17L庚寅秋忽然南行 至家山 悵然立江村
012_0395_c_18L忽見一牽牛翁 師拜問父母存沒 翁曰
012_0395_c_19L汝父 姓名誰 汝名誰 師曰父袁演 我
012_0395_c_20L九彥 翁放牛執手曰 今日父子的矣
012_0395_c_21L汝走三十餘年 忽自來 甚適願 父子各
012_0395_c_22L不堪悲欣 一場痛哭 又明日吿別老父
012_0395_c_23L向頭流 扣碧松之門 嚴曰靈且不堪
012_0395_c_24L觀從何來 師之二十年宿疑 忽如冰泮

012_0396_a_01L이에 곧 정례하고 연방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이분이야말로 진정 나의 스승이다.”
그러나 곁에서 시봉한 지 3년에 이르러 스승이 입적하였다. 아, 그 스승과 같은 인품으로써 수행을 경력하였고, 그 스승과 같은 자질로써 교화를 경영하였다. 이후로 팔공산八公山·대승동大乘洞·의신동義神洞·연곡동燕谷洞 등에 주석하였는데, 어느 결에 41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융경 5년 신미년(1571, 선조 4) 4월 14일에 이르러 입적하였다. 법융 영응法融靈應 등이 영골을 수습하여 연곡사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세수 87세이고, 법랍 72년이다.
52. 조계종사 경성 선화자 선사전曹溪宗師敬聖禪和子禪師傳
휘는 일선一禪이고 자는 휴옹休翁이며 호는 선화자禪和子이고, 성은 장張씨이며 울산 출신이다. 아버지 이름은 윤胤, 어머니는 박朴씨로, 어느 날 낮잠을 잤는데 명주明珠를 삼키는 꿈을 꾸고는 임신을 하였다. 홍치 원년 무신년(1488, 성종 19) 12월 13일에 태어났다.
13세 때 단석산斷石山에 들어가 해산 법사海山法師에게 의탁하였다. 16세 때 머리를 깎았고, 24세 때 묘향산妙香山에 들어갔다. 다시 지리산에 들어가서 벽송 지엄 대사를 참문하였는데, 지엄은 한번 보고는 선사가 법기임을 알아차렸다.
가정 갑오년(1534, 중종 29)에 다시 묘향산 보현사에 들어가서 관음전에 주석하자 전국의 제방에서까지 납자들이 모여들어 가히 해동의 절상회折床會97)라 할 만하였다.
가정 무술년(1538, 중종 33) 여름에 남방의 조계선원에 들어가서 하안거를 마치고 다음과 같은 게송을 지었다.

一囊松葉一瓶水  바랑 하나에 솔가루와 정병 하나뿐이지만
不動諸緣臥此房  이 방에 누워서 온갖 반연에 개의치 않네
可笑昔人烹佛祖  옛사람들 불조의 뜻 체득했다니 우습구나
聞聲見色有何妨  소리 듣고 색을 봄이 어째서 장애가 되랴

이듬해 다시 지리산 연곡사燕谷寺 서굴암西窟菴에 들어갔는데 거기에서 아만의 산이 무너지고 분별사식分別事識의 바다가 맑게 빛나는 경험을 하였다. 선사의 명성이 중화中華에까지 알려지자 고승전高僧殿의 고승들은 선화자에게 아만의 통桶이 타파되었음을 마음으로 알아차렸다고 한다.
융경 무진년(1568, 선조 1) 2월 20일에 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年逾八十似空花  팔십을 초과하는 생애 허공의 꽃과 같고
徃事悠悠亦眼花  지난 일 아득함이 또한 눈앞의 꽃이라네

012_0396_a_01L卽頂禮歎聲曰 眞吾師也 執侍三年
012_0396_a_02L嚴厭世 吁 厥師經之 厥資營之 自後
012_0396_a_03L或住八公大乘義神燕谷等山 不覺過
012_0396_a_04L四十一年 至隆慶辛未四月十四日入
012_0396_a_05L寂 門人法融靈應等 收靈骨 竪塔于
012_0396_a_06L燕谷 壽八十七 夏七十二

012_0396_a_07L

012_0396_a_08L曹溪宗師敬聖禪和子禪師傳

012_0396_a_09L
諱一禪 字休翁 號禪和子 姓張 蔚山
012_0396_a_10L人 父胤 母朴氏 一日暇寐 呑明珠有
012_0396_a_11L娠 弘治元年戊申十二月十三日生 年
012_0396_a_12L十三入斷石山 投海山法師 十六薙髮
012_0396_a_13L二十四入妙香山 又入智異山 叅智嚴
012_0396_a_14L大師 一見甚器之 嘉靖甲午 還入妙
012_0396_a_15L香普賢寺 住觀音殿 八表雲趂 可謂
012_0396_a_16L折床之會也 嘉靖戊戌夏 南入曹溪禪
012_0396_a_17L院結夏安居 有偈曰

012_0396_a_18L一囊松葉一瓶水 不動諸緣臥此房

012_0396_a_19L可笑昔人烹佛祖 聞聲見色有何妨

012_0396_a_20L明年再入智異山燕谷西窟菴 慢山崩
012_0396_a_21L落 識海澄朗 聲動中華 高僧殿高僧
012_0396_a_22L心知禪和子慢桶破云尒 隆慶戊辰二
012_0396_a_23L月二十日 謂門人曰

012_0396_a_24L年逾八十似空花 徃事悠悠亦眼花

012_0396_b_01L脚未跨門還本國  아직 본국에 돌아올 걸음 떼기 이전인데
故園桃李已開花  고국의 문하생들 이미 활짝 꽃피웠다네

게송을 마치고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던 날 밤에 신령한 광명이 하늘까지 뻗쳐서 100리 밖에서도 사람들이 보고 그 모습에 예배를 드렸는데, 곧 4월 18일이었다. 사리 5과를 수습하여 보현산의 서쪽 기슭에 안치하였다. 세수는 81세이고, 법랍은 65년이다.
53. 조계종사 법융 영응 선사전曹溪宗師法融靈應禪師傳【부용 영관芙蓉靈觀의 제자이다.】
54. 조계종사 삼중 신화 선사전曹溪宗師三重神化禪師傳98) 【비문은 보이지 않는다. 무릇 최자崔滋99)가 저술한 관고官誥를 통해서 전기를 기록한다.】
교하노라.
영취산 염화미소의 마하가섭 이후로 28대손에 해당하는 보리달마에 이르러 불도가 서천으로부터 동토에 전승되었다. 이후 마음을 닦는 선종에서는 백 천의 수많은 문파와 제자가 양성되었는데 그 가풍에 남종과 북종이 있었다. 그 가운데 더욱더 번성한 것은 남종인 돈오의 문파였다.
선사는 첨가되는 대사의 호100)를 가지고서 법호(懿號)를 삼았다. 모든 일에 상황 파악이 빠르고 민첩하였으며 고상한 정취와 도풍을 지녔으며 일찍부터 속진의 인간세계를 등지고 산수 간에 노닐면서 세상 밖으로 편력하였다. 그러다가 각범 혜홍覺範慧洪101)의 글쓰기(翰墨三昧)를 터득하고 번번이 임간林間의 소식을 기록하였다. 그것은 마치 영가 현각永嘉玄覺이 언설과 뜻을 모두 잊고서 깨달음(證道)을 돌아보며 길 위에서 노래로 읊은 경우와 같았다. 몸소 창룡굴蒼龍窟102)에 들어가서 황학루黃鶴樓103)라는 제명을 붙여 두고서 얼마 동안 소래사蘓萊寺에 주석하다 그만두었다. 이에 다시 송광사로 돌아와서 자자自恣104)를 하였다. 청한한 살림살이와 소탈한 행장으로 지내면서 아지랑이 아른거리고 햇살도 비치지 않는 곳에서 본래면목의 수행에 전념하였다. 이에 무성하게 널려 있는 풀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의 나타남이 모두가 자기의 문정門庭이 이미 격외의 진승眞僧임을 널리 비추어 보고서 굳이 성중에 나아가서 방편교화를 바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에 현인의 모습을 반연하여 우리나라를 이롭게 해 주려고 측금잔화側金盞花105)와 같이 작은 정사를 지었는데 솜씨 좋은 잔손재주를 부려서 마무리하고 갑자기 마음을 고쳐먹고 말했다. “장차 이것으로써 칠민七閩106)의 옛 도량으로부터

012_0396_b_01L脚未跨門還本國 故園桃李已開花

012_0396_b_02L偈訖 泊然而逝 闍維之夜 神光洞天
012_0396_b_03L百里外望者拜之 乃四月十八日也 收
012_0396_b_04L舍利五箇 安于普賢西麓 壽八十一
012_0396_b_05L夏六十五

012_0396_b_06L
012_0396_b_07L
曹溪宗師法融靈應禪師傳 芙蓉弟
012_0396_b_08L

012_0396_b_09L

012_0396_b_10L曹溪宗師三重神化禪師傳未見狀銘
但有崔滋
012_0396_b_11L所述官誥
以記之

012_0396_b_12L
敎曰 靈鷲四七代孫 道自西而東矣
012_0396_b_13L牧牛百千門弟 家在南而北焉 擇其尤
012_0396_b_14L者於悟流 加以師哉之懿號 某迅機激
012_0396_b_15L電 逸韻生風 塵埃早謝於人間 山水
012_0396_b_16L遍遊於方外 得覺範翰墨三昧遇事 輒
012_0396_b_17L錄於林間 如永嘉言意兩忘證道 還歌
012_0396_b_18L於路上 入蒼龍窟 題黃鶴樓 暫住蘓
012_0396_b_19L萊而卽辭 還從松廣而自恣 淸閑活計
012_0396_b_20L洒落行藏 煙漠漠日遲遲見 善修本來
012_0396_b_21L面目 草離離花灼灼知 廣鑑自己門庭
012_0396_b_22L旣超爲格外眞僧 不願作城中化佛 迺
012_0396_b_23L緣賢相 欲利我邦 剏側金之精廬 邀
012_0396_b_24L軒釘之妙手 幡然改曰 將以覺斯自七

012_0396_c_01L정精·기氣·신神의 삼화三華를 불러와 바다세계(水國)에 이르기까지 모두 깨우쳐 줄 것이다.”107) 이에 온갖 반연 속에 들어가서 중생을 교화함에 자유로웠고 십자가두에 나가서 장터에서 한바탕 놀아 주면서 제방의 사람들을 기쁘게 교화하였다.
이로써 선사의 일용공부야말로 사해를 평온하고 맑게 해 주어 이미 하안거의 소식이 드러난 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당연하고 당연한 일이고 참으로 잘되고 잘된 일이었다. 그러니 반드시 임금의 은전(寵典)으로 추천하여 그 아름다운 인연을 기려야 할 것이다. 이에 임금이 아끼고 돌봐 주는 마음을 내보여서 여기에 분명한 글로써 반포하니, 출가 승려들에게 널리 은전이 내려지게 될 것이다.
아, 명예는 실제의 손님이다.108) 그러니 비록 건전한 사람이라면 그것은 취해야 할 것이 아니다. 벼슬로써 그 덕을 나타내는 법이다. 그런데 불교의 문중(空門)에서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염치도 없이 허영을 부려서 더욱 복덕만 추구하는 것은 운운.
55. 조계종사 삼중 신정 선사전曹溪宗師三重神定禪師傳109) 【이 경우에도 또한 기록된 글을 볼 수가 없다. 이에 다만 관고官誥에 나타난 것만 기록할 뿐이다.】
교하노라.‘눈빛이 마주치는 곳에 곧 마음이 계합된다.’ 이 말은 조사들끼리 서로 단전單傳하는 소식이다.110) 그러나 선지식의 엄연한 가르침을 거친 연후에야 바야흐로 깨침이 높아지는 법이다. 그런데 어찌 보통의 사람들에게 가볍게 정법안장을 전수하겠는가? 훌륭한 납자를 제대로 가려낸 다음에야 아름다운 이름을 특별히 부여하는 법이다.
선사는 뛰어난 외모에다 체구가 크고 훤칠하였으며 천기를 타고났다. 제방을 유행하면서는 납자들의 수좌가 되었고, 선불장選佛場111)에서는 마음을 비우고 급제하여(心空及第) 인간세계의 흔적을 벗어났으며, 붕새의 날개처럼 격외에 노닐었다. 그러나 비록 100척이나 되는 장대 끝에서 한걸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더라도 아직 고봉정상孤峯頂上에서 안신安身할 겨를이 없다.
선사는 송광사松廣社를 나와서 죽림방竹林坊에 주석하였다. 가령 금봉金鳳이 춤을 추고 옥계玉鷄가 운다고 한들 어찌 대혜 보각大慧普覺(宗杲) 선사의 양중공안兩重公案112)을 찾았다고 할 것인가? 그러나 목마가 울고 철우가 포효하는 경지가 되었으니, 그것은 곧 직접 형남荊南113)의 한 조각 마음 밭(一片田)을 밟은 것이었다. 대신大臣들이 이 정사精舍를 열어서 수행(鉗鎚)의 작용을 빌려 병혁의 재앙을 진압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깨침의 밝은 달빛으로 연못을 비추어 온갖 중생을 교화해 주고, 깨침의 한가로운 마음은 구름으로 산굴에서 나와 중생세계의 연못에 뿌려 주었다.

012_0396_c_01L閩古道場 來三華新水國 萬緣叢裡
012_0396_c_02L應物無妨 十字街頭 逢場作戱 諸方
012_0396_c_03L悅伏 是知日用工夫 四海宴淸 已露
012_0396_c_04L夏安消息 如是如是 善哉善哉 宜推
012_0396_c_05L寵典而褒嘉 以示朕心之眷注 玆頒明
012_0396_c_06L誥 例授緇班

012_0396_c_07L噫 名者實之賓 雖健人所不取也 爵
012_0396_c_08L以旌其德故 空門亦有號焉 無愧虛榮
012_0396_c_09L益勒奉福云云

012_0396_c_10L

012_0396_c_11L曹溪宗師三重神定禪師傳此亦不見
狀 只記
012_0396_c_12L

012_0396_c_13L
敎曰 目擊之下心契 是爲祖祖之單傳
012_0396_c_14L師嚴然後道尊 豈以人人而輕授 精掄
012_0396_c_15L象侶 寵賜1)名某 梵相魁梧 天機俊
012_0396_c_16L壯 遊方路上 爲首座於學流 選佛場
012_0396_c_17L中 作心空之及第 蟬蛻人間之迹 鵬
012_0396_c_18L搏格外之游 雖能進步於百尺竿頭 未
012_0396_c_19L暇安身於孤峯頂上 出松廣社 居竹林
012_0396_c_20L坊 金鳳舞 玉鷄啼 豈尋普覺之兩重
012_0396_c_21L案 木馬嘶 銕牛吼 直踏荊南之一片
012_0396_c_22L田 及乎大臣開此精舍 請借鉗鎚之用
012_0396_c_23L鎭消兵革之灾 明月照潭而應機 閑雲
012_0396_c_24L「▼(丘+鳥)」底本頭註曰「疑鴻」{編}

012_0397_a_01L
그리고 봄바람처럼 걸림 없이 석장을 들고 행각하면서 위령葦嶺114)을 넘어가서는 관중管衆115) 스님이 되었다. 하안거 때는 화산花山에 들어가서 선방의 기율을 크게 진작하여 총림에서 모범이 되었고, 축사竺師처럼 설법을 쏟아 내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구주九州의 유나維那116)라 일컬었으며, 경탈敬脫117)처럼 글에 뛰어나서 사람들은 사해四海의 논주論主라 일컬었다. 총림의 규구規矩가 갖추어지자 수많은 대중이 기꺼이 그를 따랐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차를 마시며, 사치를 금지하고 양생을 이롭게 하였으며, 조용한 곳에서는 좌선을 하고 시끄러운 곳에서는 염불을 하였으며, 대중과 더불어 진리를 수행하였지만 선사 한 사람만 천지에 드러나서 온 세상을 모두 맑게 하였다.
짐이 그 법회에 나아가서 그를 만나 보니 찬탄만으로는 부족한 까닭에 선사를 기리고자 하여 특별한 은전을 내려서 그 고상한 행위를 널리 드날리는 바이다. 그것은 마치 조계대사 혜능惠能이 음덕으로 국가를 도왔을 때 당나라 황제가 아름다운 칭호를 내려 준 것과 같고, 덕흠德歆이 국가의 상서를 예언하였을 때 진나라 조정에서 위대한 칭호를 봉해 준 것과 같다. 이제 짐도 또한 그와 같고 대중의 공론도 그러하므로 공경하여 고신吿身을 내린다. 그러니 이제 다시 그 뛰어난 안목을 국가로 돌려서 운운.
56. 조계종사 청허 휴정 선사전曹溪宗師淸虛休靜禪師傳
휘는 휴정休靜이고 자는 퇴은退隱이며 호는 서산西山 또는 운학雲鶴이다. 속성은 완산 최崔씨이고 안주 출신이며 아버지는 세창世昌이다. 어머니 김金씨는 한 척 남짓한 유리병이 하늘에서 내려와 품속에 날아드는 꿈을 꾸었다. 또 한 노파가 읍하고 ‘태 속의 아이가 대장부의 남아이기 때문에 축하를 드리러 왔습니다.’라는 꿈을 꾸었다. 이로 인하여 임신하였는데 정덕 15년【중종대왕 15년(1520)】 경진년 3월 16일에 낳았다.
박상朴祥이 벼슬을 하여 완산으로 나아갔는데 선사도 또한 그를 따라갔다. 청량산 원암사에서 글을 읽었다. 벼슬 기한이 다 되어 박상이 서울로 돌아가자 선사는 단지 붓과 벼루만 챙겨 가지고 멀리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능인 대사能仁大師에 의탁하여 원통암圓通庵에서 머리를 깎고 부용 대사芙蓉大師에게 참문하여 심법을 전수받았다.
임진왜란 때에 선사가 큰 공을 세우자 조정에서 의논하여 말했다. “가히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절충장군折衝將軍에 봉해졌다. 또한 ‘국일도대선사國一都大禪師 선교도총섭禪敎都㧾攝 부종수교扶宗樹敎 보제등계普濟登階’라는 이름을 내려 주었다.
대조계종사로서

012_0397_a_01L出峀而灑澤 飛錫過春風 葦嶺管衆來
012_0397_a_02L夏日花山 大振綱維 蔚爲模範 竺師馳
012_0397_a_03L辨 時號九州維那 敬脫飛文 人稱四海
012_0397_a_04L論主 叢林之䂓畢擧 稻麻之列悅從
012_0397_a_05L飢飡飰 渴飮茶 禁豊利養 靜坐禪 動
012_0397_a_06L念佛 同力修眞 獨露乾坤 咸淸海宇
012_0397_a_07L我會徃而覯止 嘆不足故褒之 霈然異
012_0397_a_08L恩 旌乃高行 惠能陰翊 王度唐賜 休
012_0397_a_09L稱德歆 預言國祥 奏封大號 令朕亦然
012_0397_a_10L公論則然 秪禀吿身 更回具眼云云

012_0397_a_11L

012_0397_a_12L曹溪宗師淸虛休靜禪師傳

012_0397_a_13L
諱休靜 字退隱 號西山 又雲鶴 姓完
012_0397_a_14L山崔 安州人 父世昌 母金氏 夢一尺
012_0397_a_15L琉璃瓶 從天降 飛入懷中 又夢一老
012_0397_a_16L婆揖曰 脴胎丈夫男子故來賀 因有娠
012_0397_a_17L以正德十五年中宗大王
十五年
庚辰三月十六日
012_0397_a_18L生 朴祥出宰完山 師亦隨去 而讀書
012_0397_a_19L淸涼山圓嵓寺 期年朴祥還京師 師但
012_0397_a_20L持筆硯 遠入智異山 依能仁大師 落
012_0397_a_21L髮於圓通庵 叅芙蓉大師傳心焉 壬辰
012_0397_a_22L之亂 師有大功 朝庭議曰 不可無賞
012_0397_a_23L封折衝將軍 又賜國一都大禪師禪敎
012_0397_a_24L都㧾攝扶宗樹敎普濟登階大曹溪宗師

012_0397_b_01L무릇 동방의 조사이신 태고 보우太古普愚 화상은 중국에 들어가서 석옥 청공石屋淸珙의 정법안장을 이어서 그것을 환암 혼수幻庵混修에게 전수하였고, 환암 혼수는 구곡 각운龜谷覺雲에게 전수하였으며, 구곡 각운은 벽계 정심碧溪淨心에게 전수하였고, 벽계 정심은 벽송 지엄碧松智嚴에게 전수하였으며, 벽송 지엄은 부용 영관芙蓉靈觀에게 전수하였고, 부용 영관은 청허 휴정에게 전수하였다. 석옥 청공은 임제종 제18세손에 해당한다.118) 그러므로 대사는 태고 보우의 7세손이다.
대사의 문하에 33인이 있었는데, 사명 유정四溟惟政(1544~1610)·편양 언기鞭羊彦機(1581~1644)·소요 태능逍遙太能(1562~1649)·영허 해일暎虛海日(1541~1609)·정관 일선靜觀一禪(1533~1608)·경헌敬憲·영월 청학詠月淸學(1570~1654)·중관 해안中觀海眼(1567~?)·진묵 일옥震默一玉(1562~1633)·기허 영규騎虛靈圭(?~1592) 등이 가장 쟁쟁하여 세간에는 서산십걸西山十傑로 일컬어졌다. 그것은 마치 공자 문하에서 일컬어지는 십철十哲119)과 같았다.
만력 32년【선조대왕 37년(1604)】 갑진년 정월 22일에 문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일 해시亥時 초에 나는 갈 것이다.” 이에 시간이 다 되자 붓과 연필을 찾아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썼다.

千計萬思量    천 가지 계탁과 만 가지 분별사량
烘爐一點雪    모두 붉은 화로의 한 점 눈이라네
泥牛水上行    진흙 황소가 물 위로 걸어 들어가니
大地虛空裂    대지와 허공이 모두가 무너지도다

붓을 내려놓고 불전에 들어가 삼배를 드리고 나서 곧 입적하였다. 세수는 85세이고, 법랍은 63년120)이다. 사리 2과를 보현사 나옹懶翁의 계단(級)에 안치하였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유점사의 북쪽 기슭에다 안치하였다. 해남 대흥사 표충원과 회양 표훈사에 비를 세웠다.
57. 조계종사 청하 법융 선사曹溪宗師靑荷法融禪師
58. 조계종사 대선 정원 선사曹溪宗師大選淨源禪師
59. 조계종사 신옹 선사曹溪宗師信翁禪師
60. 조계종사 영지 선사曹溪宗師靈芝禪師
61. 조계종사 부휴 등계 존자전曹溪宗師浮休登階尊者傳

012_0397_b_01L盖東方祖師太古和尙 入中國嗣石屋
012_0397_b_02L淸珙 而傳之幻庵 幻庵傳之龜谷 龜
012_0397_b_03L谷傳之碧溪 碧溪傳之碧松 碧松傳
012_0397_b_04L之芙蓉 芙蓉傳之大師 石屋乃臨濟十
012_0397_b_05L八世孫也 大師乃太古七世孫也 大師
012_0397_b_06L之徒 有三十三人 唯政彥機太能海日
012_0397_b_07L一禪敬憲淸學海眼一玉靈圭等 㝡爲
012_0397_b_08L錚錚 然世稱西山十傑 孔門十哲云尒
012_0397_b_09L萬曆三十二宣祖大王
三十七年
甲辰正月二十二日
012_0397_b_10L謂門人曰 明日亥時初 吾去矣 及期
012_0397_b_11L索筆書偈曰

012_0397_b_12L千計萬思量 烘爐一點雪

012_0397_b_13L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012_0397_b_14L投筆就佛殿禮三拜 卽入寂焉 壽八十
012_0397_b_15L五 臈六十三 舍利二箇 奉安于普賢
012_0397_b_16L寺懶翁之級 頂骨窆于榆岾之北麓 樹
012_0397_b_17L碑于海南之大興寺表忠院 淮陽之表
012_0397_b_18L訓寺

012_0397_b_19L
012_0397_b_20L
曹溪宗師靑荷法融禪師

012_0397_b_21L曹溪宗師大選淨源禪師

012_0397_b_22L曹溪宗師信翁禪師

012_0397_b_23L曹溪宗師靈芝禪師

012_0397_b_24L

012_0397_b_25L曹溪宗師浮休登階尊者傳

012_0397_c_01L
휘는 선수善修이고 속성은 김金씨이다. 옛날 대방帶方(남원)의 오수熬樹 출신이고, 아버지 이름은 적산積山이다. 어머니 이李씨는 아들이 없어서 길가의 남근바위(古石)를 향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저녁 꿈에 신승神僧이 둥근 구슬을 하나 주었는데, 그것을 받아 삼키고는 임신을 하여 가정 22년【중종 38년】 계묘년(1543) 2월 무자일에 낳았다. 어려서부터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8, 9세 무렵에 부모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뜬세상을 헛되게 사느니 저는 장차 세속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부모님을 하직하고 두류산에 들어갔다. 신명 장로信明長老에게서 머리를 깎고, 부용 영관芙蓉靈觀 화상을 참문하여 불학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크고 우람하였지만 오직 왼손만큼은 자유롭지 못하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글씨는 해서체(鍾王法)를 익혔다. 일찍이 어떤 납자가 선사가 쓴 몇 글자를 얻어서 서울을 지나가다가 글씨에 능숙한 중국인을 만나서 선사의 글씨를 보이자 그 사람이 오랫동안 보다가 말했다. “이것은 예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한쪽 팔이 불편한 수행자(道人)가 쓴 것이다.”
선조 25년 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島夷)가 강토를 침범하자 선사는 덕유산으로 칼날을 피하여 주석하였다. 이때 도적 10여 명이 출현하였는데, 선사가 차수하고 서 있으니 도적이 칼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였다. 그럼에도 선사가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도적들은 그것을 무척 훌륭하게 생각하고는 줄지어서 예배를 드리고는 흩어져 버렸다.
선사는 가야산으로 갔다. 그때 마침 명나라의 장군 이종성李宗城이 해인사에 들어와서121) 선사를 언뜻 보고 나서는 쉽사리 그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이별에 즈음하여 시 한 수를 지어 주어 천 리까지 원정을 나온 장군의 면목을 세워 주었다.
선사가 무주 구천동으로 옮겨서 『원각경圓覺經』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 큰 이무기 한 마리가 갑자기 계단에 나타났다. 선사가 다가가서 이무기의 꼬리를 밟았는데, 이무기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곳을 떠나 버렸다. 꿈에 어떤 노인이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는 말했다. “선사의 설법을 듣고는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선사의 신이한 행적이 이와 같았다.
광해군 시대에 선사가 두류산에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미친 승의 무고로 인하여 투옥되었는데, 광해군이 선사의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고서 다음 날 궁궐로 초대를 하였다. 이에 불도의 종요宗要를 묻고는 크게 기뻐하여 자납가사와 염주 등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또한 봉인사奉印寺에서 재를 시설하고는 선사를 명하여 증명법사로 모셨다.
만력 42년 갑인년(1614, 광해군 6) 선사의 나이 72세 때 조계산에서 칠불사로 가서 장차 입적할 곳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듬해(1615, 광해군 7) 가을 7월에 병을 보였고, 상족上足인 벽암 각성碧巖覺性(1575~1660)을 불러서 정법안장을 전수하고 말했다. “내 뜻은 그대한테 있으니 잘 받들어라.”

012_0397_c_01L
諱善修 姓金 古帶方熬樹人 父積山
012_0397_c_02L母李氏 無子禱于路傍古石無竭 一
012_0397_c_03L夕夢有神僧 授一圓珠 呑之有妊 嘉
012_0397_c_04L靖二十二年中宗三
十八年
癸卯二月戊子生 孩
012_0397_c_05L時不喜肉 丱歲啓父母曰 浮生滚冗
012_0397_c_06L吾將出世 辭入頭流山 從信明長老剃
012_0397_c_07L謁芙蓉和尙學 爲人長身豊頰 唯左手
012_0397_c_08L失適 書無不讀 筆鍾王法 嘗一衲者
012_0397_c_09L索師數字 過京都 遇漢人能書者 示
012_0397_c_10L之 久曰 雖古不易得 必手瘢道人揮
012_0397_c_11L也 宣廟二十五年壬辰 島夷侵疆 師
012_0397_c_12L栖德裕山避鋒 有賊十數出 師叉手立
012_0397_c_13L賊作揮刃勢 師怡然 賊大奇之 羅拜
012_0397_c_14L而散 師如伽耶 適天將李宗城 入海
012_0397_c_15L印 一見師 輒忘去 臨別贈一詩 爲千
012_0397_c_16L里面目 師移九千洞 誦圓覺 有一巨
012_0397_c_17L蟒暴階 師跂足㚄其尾 俛首而去 夢
012_0397_c_18L有翁致拜曰 蒙師說法已離苦 其神異
012_0397_c_19L類此 光海時師在頭流 爲狂僧所誣繫
012_0397_c_20L獄 光海洞其非罪 翌招入內 詢道要
012_0397_c_21L大悅 賜紫衲念珠厚賚 又設齋奉恩寺
012_0397_c_22L命師爲證 萬曆四十二年甲寅 師年七
012_0397_c_23L十二 自曹溪之七佛 擬啓手足 翌年
012_0397_c_24L秋七月示疾 召上足碧嵓付法曰 吾意

012_0398_a_01L11월 초하루에 이르러 목욕을 마치고는 시자를 불러서 종이와 붓을 찾아서 다음과 같은 열반게송을 하나 지었다.

七十三年遊幻海  칠십삼 년의 꿈같은 바다에서 노닐다가
今朝脫殻返初源  오늘 아침 몸을 벗고 근원으로 돌아가네
廓然寂空元無物  확연하게 공적하여 본래 일물도 없는데
何有菩提生死根  어찌 깨달음과 생사의 뿌리가 있으리오

게송을 마치고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보령은 73세이고, 법랍은 57년이다. 다비를 마치고 영골을 수습하여 송광사·해인사·칠불사·백장사 등 네 군데에 부도탑을 세우고, 홍각등계弘覺登階122)라는 이름을 가호加號하였다.【비는 송광사에 건립하였다.】
62. 조계종사 벽암 각성 선사전曹溪宗師碧嵓覺性禪師傳
휘는 각성覺性이고 호서 지방 보은報恩 출신이며 속성은 김金씨이다. 어머니는 조曹씨인데 아들이 없어서 북두성에 기도를 드렸다. 고경古鏡을 보는 꿈을 보고 임신을 하였는데, 만력 을해년(1575, 선조 8) 12월 정해시에 낳았다. 선사는 부모에게 효도를 하였고 유희를 즐기지도 않았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상을 마치고 나서 홀연히 지나가던 스님을 뵙고는 온 마음을 기울여 좌선을 공부하였다. 이어서 고모123)까지 돌아가시자 깨침으로 관심을 돌려서 화산으로 가서 설묵雪默 스님에게 참례하였다.
선사 나이 14세 때 머리를 깎고 보정寶晶 스님에게 구족계를 받았고, 부휴 선수浮休善修를 따라서 속리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덕유산과 가야산과 금강산 등을 유력하였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매일 대장경을 열람하였는데, 이로부터 항상 경전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잠시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임진년(1592, 선조 25)에 송운 대사松雲大師 사명泗溟이 의병을 일으켜서 관동 지방으로 나아가 부휴 선수에게 찾아가서 자문을 구하였고, 부휴 선사가 산속에서 왜적을 피하고 있었을 때도 반드시 소식을 전하여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자문을 구하였다.
이듬해 계사년(1593, 선조 26) 송운 대사가 부휴를 조정에 천거하여 진상陣上에 나아가자 선사도 무기를 들고 명나라 장군을 따라서 바다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이에 한인漢人(명나라 장수 李宗城)이 선사를 무척 찬탄하였다.
경자년(1600, 선조33)에 칠불선원七佛禪院에서 여름 안거를 지냈다. 부휴 선수가 병을 얻어 선사에게 논강論講을 미루자 선사가 부득이 사양하지 못하고 법좌에 올라 논강을 하여 깊고 오묘한 불법의 도리(玄風)를 크게 떨쳤다.
병오년(1606, 선조 39)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대중살이에서 물러나 속리산 가섭굴에서 천복薦福을 수재修齋하였다.
선사는 부휴의 문하에서 20여 년을 수행하고 입실하여 정법안장을 전수받았다. 이에 스스로 세 가지 잠언(三箴)을 지어서 말했는데,

012_0398_a_01L在汝 欽哉 至十一月一日 沐浴訖 喚
012_0398_a_02L侍者 索紙筆 書一偈曰

012_0398_a_03L七十三年遊幻海 今朝脫殻返初源

012_0398_a_04L廓然寂空元無物 何有菩提生死根

012_0398_a_05L偈畢 泊然而逝 報年七十三 坐夏五
012_0398_a_06L十七 闍維收靈骨 樹塔于松廣海印七
012_0398_a_07L佛百丈四處 追加弘覺登階者立碑于
松廣寺

012_0398_a_08L

012_0398_a_09L曹溪宗師碧嵓覺性禪師傳

012_0398_a_10L
諱覺性 湖西報恩人 姓金 母曺氏 無
012_0398_a_11L子 齋禱北斗 夢古鏡有娠 萬曆乙亥
012_0398_a_12L十二月丁亥生 孝于親 不喜戱 九歲
012_0398_a_13L失怙 旣沒喪 忽遇過僧 傾心學禪 阿
012_0398_a_14L孃重離 旋感悟 之華山 禮雪默 師十
012_0398_a_15L四薙髮 受具于寶晶 師從浮休 入俗
012_0398_a_16L離山 歷德裕伽耶金剛等山 日閱貝葉
012_0398_a_17L自是相隨不暫離 壬辰松雲倡義 旅軍
012_0398_a_18L關東 爲休徃問 避寇于山 必手經問
012_0398_a_19L難 癸巳松雲薦休于朝 檄致陣上 師
012_0398_a_20L亦杖釰 從天將破賊 海中漢人 盛贊
012_0398_a_21L之 庚子結夏七佛禪院 休病讓講於師
012_0398_a_22L師辭不獲 登座討論 玄風丕振 丙午
012_0398_a_23L喪母謝徒 修齋薦福於俗離迦葉窟 盖
012_0398_a_24L業于休門二十餘年 入室傳法 自撰三

012_0398_b_01L“은혜를 잊지 않는다, 체면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아첨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다. 날짐승과 길짐승도 교화하였거늘 하물며 가장 신령하다는 승가대중(衆園)이겠는가.
선사가 중창하고 중수한 큰 사찰만 해도 화엄사·송광사·쌍계사 등이 있는데, 나머지 것은 생략한다. 광해군 시대에 부휴 선사가 요승妖僧에게 무고를 당하자 부휴 선사와 함께 서울에 올라왔다. 광해군이 두 선사를 보고 훌륭하게 여겨 방면해 주고 선사를 봉은사에 주석하도록 하고, 1624년에는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㧾攝에 제수하였다.
인조 시대에는 선사를 불러서 승려들을 통솔하여 남한산성을 축조하게 하였다. 3년에 걸쳐 공사를 마치자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와 함께 의발衣鉢을 내려 주었다.
병자년(1636, 인조 14)에 지리산에 있다가,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북을 치고 눈물로 대중을 설득하여 군복을 입고 격문을 돌려서 불러 모으자 모여든 사람이 수천 명이었다. 이들을 이끌고 북쪽(남한산성)으로 향하다가 벌써 적군에게 패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면서 다시 남쪽(지리산)으로 내려왔다.124)이후에 일본으로 가는 사신에 임명되자 사양하지 못하였는데 행로에 병이 도져서 산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경진년(1640, 인조 18) 8월에 효종이 즉위하자 총섭으로 제수를 받아서 적상산성赤裳山城의 사각史閣을 지켜 냈고(裨衛),125) 아울러 승려의 가풍을 진작하였다. 또한 같은 해 겨울에는 송광사로 옮겼는데 얼마 안 있다가 다시 화엄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해년(1659) 효종 즉위 10년에 왕이 승하하자 그해 가을 9월에 왕의 죽음(奉諱)에 대하여 슬프게 울음으로써 국은國恩에 보답하였다.
경자년(1660, 현종 1) 정월 12일 문도들에게 경계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제 갈 것이다. 비를 세우지 말라.” 이에 게송을 요청하는 문인들을 위하여 손으로 직접 다음과 같이 써 주었다.

大經八萬偈    대장경 팔만 사천의 게송과
拈頌三千卷    염송 삼천의 게송만 있으면
足爲兼二利    깨침과 교화에 다 충분한데
何須別爲頌    어찌 다른 게송이 필요하랴

그러고는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다비식을 하였는데 삼남 지방의 모든 사찰에서 칠부대중七部大衆이 와서 계곡을 가득 메웠다. 사리 3과와 영골 1매를 수습하였는데 갑자기 허공으로 치솟았고, 결국 네 곳의 석탑에 안치되었다. 저술한 여러 책들은 내용이 번잡하지 않았다. 세수 86세이고, 법랍은 72년이다.

012_0398_b_01L箴云 恩不忘 面不愧 腰不屈也 飛走
012_0398_b_02L猶化 況㝡靈衆園 其剏修大者 華嚴
012_0398_b_03L松廣雙溪也 餘可略也 光海時休師爲
012_0398_b_04L妖所誣 偕入京 光海見二師 奇之放
012_0398_b_05L還 留師奉恩寺 爲判禪敎都㧾攝 仁
012_0398_b_06L祖朝徵師領緇 築南漢城 三年訖 賜
012_0398_b_07L報恩 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號并衣
012_0398_b_08L鉢 丙子在智異山 聞車駕幸南漢 乃
012_0398_b_09L鳴鼓 泣諭衆 衣戎衣 檄召衆 來赴者
012_0398_b_10L數千 相率而北 聞賊退痛哭而南後
012_0398_b_11L命使日東 不敢辭 行中路 以病甚 請
012_0398_b_12L還山 庚辰八月 孝宗卽位 授以㧾攝
012_0398_b_13L印 裨衛赤裳史閣 坐化僧風 同年冬
012_0398_b_14L移居松廣寺 居無何 還栖華嚴 而己
012_0398_b_15L亥夏 孝宗卽位二十年賓天 秋九月奉
012_0398_b_16L諱哀叫 以酬國恩 庚子一月十二日
012_0398_b_17L戒門徒曰 吾當行也 勿樹碑 爲門人
012_0398_b_18L請偈 於是 掇手寫曰

012_0398_b_19L大經八萬偈 拈頌三千卷

012_0398_b_20L足爲兼二利 何須別爲頌

012_0398_b_21L悠然而化 奉而闍維 三南傾寺 七衆
012_0398_b_22L塡谷 三舍利 一靈骨 超然騰空 藏諸
012_0398_b_23L石鍾于四處 所著諸▼(弓*二) 不煩 壽八十
012_0398_b_24L六 夏七十二

012_0398_c_01L
63. 조계종사 대가 선사전曹溪宗師待價禪師傳
휘는 희옥熙玉이고 호는 융묘融妙이며 자는 대가待價인데, 본적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천계 6년 병인년(1626, 인조 4) 11월에 태어났다. 인조가 팔도도승통겸남한도총섭八道都僧統兼南漢都㧾攝이라는 직첩을 내렸지만 선사가 받으러 나아가지 않자, 벽암 각성이 그것을 대신하였다. 선사는 항상 조계에 주석하였지만 문장으로 세간에 명성을 떨쳤다. 그래서 혹 신사(縉紳)나 선비(章甫)가 있다는 말이라도 들으면 몸소 찾아갔는데 그들이 결코 말을 놓지 못하였다.
≺삼청선각三淸126)仙閣 ≻이라는 뛰어난 시가 있는데 다음과 같다.

畫閣臨溪上    계곡에 있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누각
風兼水月奇    바람 물 달빛이 기이하게 어우러졌네
三淸無限景    풍청과 수청과 월청의 무한한 풍경을
塵世幾人知    속세에서 몇 사람이나 알고 있겠는가

보통의 사람들은 그 좋고 나쁨을 평가하지 못하였지만, 오직 퇴어자退漁子127)만큼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시를 보고 그 말미에다 다음과 같이 썼다.
“천추의 시인과 묵객이 이 시를 보고 그 사람에 대하여 훌륭하다고 찬탄할 것이다.”
64. 조계종사 백곡 선사전曹溪宗師白谷禪師傳
휘는 처능處能이고 호는 백곡白谷이며 본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성품이 대단히 민첩하였고, 문장에 탁월하였으며, 널리 배우고 묻기를 좋아하였다. 그리고 온 천하의 신사(縉紳)라는 유명 인사들도 모두 그 밑에 있었다. 당시에 조야의 상소문(章疏)이라면 모두 선사의 손끝에서 나왔다. 세간에서 하는 이야기 가운데 “백곡이 갑자기 죽는다면 글(文章)이 갑자기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으니 선사의 견해가 이로써 증험될 것이다. 벽암 각성에게 의지하여 정법안장을 전수받았다. 『유집遺集』 1권이 세간에 유행하였다.
65. 조계종사 영월 선사전曹溪宗師詠月禪師傳【이 대목은 벽암 각성 선사전의 바로 밑에 위치해야 좋을 것이다.】
휘는 청학淸學이고 자는 현주玄珠이며 호는 영월詠月이다. 속성은 홍洪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선명先明이며 어머니는 강姜씨이다. 관산冠山 유치有耻 출신으로 융경 4년 경오년(1570, 선조 3) 4월(仲呂) 14일에 태어났다.

012_0398_c_01L曹溪宗師待價禪師傳

012_0398_c_02L
諱熙玉 號融妙 字待價 籍未詳 天啓
012_0398_c_03L六年丙寅十一月生 仁祖賜八道都僧
012_0398_c_04L統 兼南漢都㧾攝職帖 師不肯行 碧
012_0398_c_05L嵓代之 師常居曹溪 以文章名於世
012_0398_c_06L或有縉紳章甫 耳風踵門 莫敢下喙
012_0398_c_07L有三淸仙閣詩一關曰

012_0398_c_08L畫閣臨溪上 風兼水月奇

012_0398_c_09L三淸無限景 塵世幾人知

012_0398_c_10L人莫能評其好惡 而唯退漁子 未知何
012_0398_c_11L人 而見以詩繫尻曰 千秋詩墨 奇之
012_0398_c_12L贊云尒

012_0398_c_13L

012_0398_c_14L曹溪宗師白谷禪師傳

012_0398_c_15L
諱處能 號白谷 籍未詳 性甚捷敏 文
012_0398_c_16L章卓越 博學强問 海內縉紳之名流
012_0398_c_17L盡在下風 當時朝野之章疏 皆出師手
012_0398_c_18L俗語云 白谷猝然死 文章勃然起云
012_0398_c_19L師之見解 以此驗矣 依碧嵓受法 遺
012_0398_c_20L集一卷 行於世

012_0398_c_21L

012_0398_c_22L曹溪宗師詠月禪師傳此在碧嵓
下可也

012_0398_c_23L
諱淸學 字守玄 咏月號也 姓洪 父先
012_0398_c_24L明 母姜氏 冠山有耻人也 隆慶二十

012_0399_a_01L
나이 13세 때 세속을 싫어하여 부모 곁을 떠나서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에 들어가 속복을 벗고 승복을 걸치고 머리를 깎았다. 널리 남쪽 지방을 참방하다가 부휴 선수 선사에게 참문하여 선당禪堂에 들어갔다. 이어서 서산에 들어가 청허 노사에게 의지하여 입실入室하였다. 천 가지로 지혜의 불을 정련하였고, 백 가지로 진리의 화로를 단련하였으며, 깨달음의 세계로 통하는 금빛 줄을 놓았고, 미혹한 세계에서는 목탁을 울렸으며, 봉래蓬萊에 주석하여 향적 세계에서 부처님을 모셨으며, 방장方丈에 갓을 걸어 두고, 향로봉으로 학선鶴仙(淸虛休靜)을 참방하였다.
그런 연후에 산청의 금화金華에서 덕을 감추니 신령한 용이 바다 밑바닥에 숨은 것과 같았고, 명예를 해남의 연동蓮洞에서 감추니 문양 있는 표범이 숲속에 숨은 것과 같았다.

依水雲而拪遲    물과 구름에 의지하여 유유자적하게 돌아다니고
鞭銕牛而哮月    철우를 채찍질하니 철우가 곧 달 보고 울부짖네
沼複溪而放曠    두 갈래 흐르는 시내 소에서 호탕하게 살아가고
轡石馬而嘶風    돌로 만든 말고삐 죄니 바람을 가르며 울부짖네

아, 임종게를 마치고 방장실로 돌아가서 제자(神足)들에게 유훈을 마치고 영원한 결별을 하고, 섶이 다하니 불이 재가 되듯이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이에 구름도 슬퍼하고 안개도 서글퍼하며 이따금씩 스쳐 지나갔다. 때는 순치 11년 갑오년(1654, 효종 5) 10월 29일이었다. 세수는 85세이고, 법랍은 73년이다.
66. 조계종사 침굉 선사전曹溪宗師枕肱禪師傳
휘는 현변縣辯이고 자는 이눌而訥이며 속성은 윤尹씨이다. 그 선조는 서화西華의 명문 귀족으로 남쪽으로 내려온 후에 돌아가지 못하였다. 아버지 이름은 흥興이고 어머니는 최崔씨이며, 만력 44년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태어났다. 처음에 호가 총민聰敏이었는데, 그 까닭은 눈으로 본 것은 그대로 입으로 암송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사람들은 금리錦里의 신동128)이라 불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를 받들며 살았는데 어떤 점술가(數者)가 말했다. “어째서 이같이(寧馨) 오랫동안 속세에 머물러 있는가? 장차 불교의 가풍을 크게 내세워야 할 것이다.” 어머니는 울면서 점술가의 말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출가를 허락하였다. 이에 보광葆光을 따라 관산冠山에 들어가서 속세를 벗었다.
13세 때 고창의 방장산方丈山에 들어가서 소요 태능逍遙太能을 참방하여 한 번 뵙고는 곁에서 모셨다. 일찍이 경전을 공부하였는데 청출어람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 명성이 파다하게 퍼지자 출가자와 재가자 모두가 한 번쯤 선사를 만나 보고자 하였다.
19세 때 송계 원휘松溪圓輝129) 선사를 따라서 복현福縣에 노닐었다.

012_0399_a_01L三庚午仲呂十四日生 年甫十三 厭世
012_0399_a_02L辭親 投迦智山寶林寺 脫白衣薙綠髮
012_0399_a_03L於是飽叅南國 訪修公而昇堂 繼登西
012_0399_a_04L山 投靜老而入室 千精智火 百鍊玄
012_0399_a_05L爐 界金繩於覺岸 振木鐸於迷途 憩
012_0399_a_06L錫蓬萊 奉曇佛於香界 掛冠方丈 訪
012_0399_a_07L鶴仙於爐峯 然後匿德金華 神龍隱於
012_0399_a_08L海底 鞱名蓮洞 文豹潛於林中 依水
012_0399_a_09L雲而拪遲 鞭銕牛而哮月 沼複溪而放
012_0399_a_10L曠 轡石馬而嘶風 噫 說終偈臨歸 諭
012_0399_a_11L神足而永訣 薪盡火灰 泊然而化 雲
012_0399_a_12L悲霧慘 偶爾而逝 時唯順治十一甲午
012_0399_a_13L十月廿九 壽九旬五 臈七加三

012_0399_a_14L

012_0399_a_15L曹溪宗師枕肱禪師傳

012_0399_a_16L
諱縣辯 字而訥 姓尹 其先以西華望
012_0399_a_17L族 落南不能歸 父興 母崔氏 以萬曆
012_0399_a_18L四十四丙辰誕 初號聰敏 目寓口誦
012_0399_a_19L人稱錦里神童 齓哭怙奉萱閨有數者
012_0399_a_20L云 此寧馨 豈久在塵埃中 將特立梵
012_0399_a_21L王家 母泣念數者 說許出家 隨葆光入
012_0399_a_22L冠山 卽零染 年十三入方丈 訪逍遙
012_0399_a_23L一見服 早詣經 色茜藍 由是聲振名
012_0399_a_24L播 緇白願一識焉 十九從松溪 遊福縣

012_0399_b_01L이때 복현의 사또가 객사의 상량문을 송계 원휘에게 청하였지만 송계 원휘가 사양하며 선사에게 양보하였다. 이에 선사가 곧바로 상량문을 짓자 복현의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다. 이후에 해남 백련동白蓮洞의 윤선도尹善道130)가 가문의 대를 이으려고 양자로 삼으려고 만류하였다.【당시에 윤선도는 아들을 잃은 상태였다.】 여러 날 동안 선사를 거기에 붙들어 두면서 선사가 떠나려는 것을 한사코 말렸다. 선사의 스승인 보광 선사가 석장을 날려 담장 밖에서 새벽에 불러내자, 선사가 나가서 보광 선사에게 예배하였다. 그러자 윤 공이 눈물을 흘리더니 곧바로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놓고 말했다.131) “스님이 환속하지 않으면 저는 아마 제 목을 벨지도 모릅니다.” 선사가 윤 공에게 말했다. “저는 동진 출가하였는데 어찌 환속하겠습니까?” 그러자 보광 선사가 윤 공에게 하직을 고하며 말했다. “출가승에게 스승과 제자는 곧 속가의 아버지와 아들에 해당합니다. 황천으로 돌아가는 고통이나 속가로 돌아가는 고통이나 매한가지일 뿐입니다.” 그러자 마침내 윤 공은 산으로 돌아가려는 선사의 말을 들어주었다. 선사의 식견이 이와 같았다.
방장산에 오랫동안 주석하다가 송광사를 거쳐 선암사로 갔으며, 다시 연곡사를 거쳐 오봉산으로 갔는데, 그동안 지내 오면서 교화해 준 사람들로서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말년에는 금화산에 주석하였다.
강희 23년 갑자년(1684, 숙종 10) 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여름 4월 12일 가부좌한 자세로 서쪽을 향하여 입적하였는데, 마치 섶이 다 타자 불꽃이 스러지는 것과 같았다. 그때는 바람도 불지 않고 물결도 치지 않았다. 세수는 69세이고, 법랍은 57년이다.
67. 조계종사 홍변 선사전曹溪宗師洪辯禪師傳
휘는 홍변洪辯이고 속성은 조趙씨이며 호남의 순창 출신이다. 어려서 조계산으로 출가하였는데 바로 중급반 과목을 공부하였다. 거제도로 들어가서 산속에다 암자를 짓고 계율을 지키면서 정진하였는데, 한 글자마다 절을 한 번씩 하면서 7권의 『법화경』 전체를 서사하여 그것을 잘 장엄해 놓고 조석으로 예배하면서 지성으로 공양하였다. 또한 선정을 익히고 지혜를 닦으면서 소나무로 사립문을 만들어 놓고 은거하여 속세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 40여 년이었다. 이후에 입적하였다.【선사의 출생과 입적 연대에 대한 기록은 미상이다.】
68. 조계종사 송계 선사전曹溪宗師松溪禪師傳【휘는 성현聖賢이고 부휴 선수浮休善修의 법을 이었다.】

012_0399_b_01L縣請客舍上樑文于松溪 溪讓于師 師
012_0399_b_02L便就焉 縣皆驚歎 後爲白蓮洞尹公善
012_0399_b_03L道之所挽 欲頂冠繼嗣尹公時
喪子故
緊執累
012_0399_b_04L日 師之師葆光 佩刀飛錫 示刀曰 汝
012_0399_b_05L不俗我何剄哉 對曰師在童何俗 吿尹
012_0399_b_06L公曰 僧之師童 卽俗之父子 歸泉之
012_0399_b_07L痛 歸俗之痛一也而已 尹公遂聽還
012_0399_b_08L槩其識見如此 處方丈 舊自松廣而
012_0399_b_09L之仙嵓 由燕谷 而於五峯 所過者化
012_0399_b_10L無思不服 末年捿金華山 實康熙二十
012_0399_b_11L三年甲子歲也 春不預 夏四月十二日
012_0399_b_12L趺坐面西而化 如薪盡而火滅 風息而
012_0399_b_13L浪靜焉 壽六十九 夏五十七

012_0399_b_14L

012_0399_b_15L曹溪宗師洪辯禪師傳

012_0399_b_16L
諱洪辯 姓趙氏 湖南淳昌人 童眞出
012_0399_b_17L家于曹溪山 早中喬科 徃入巨濟山結
012_0399_b_18L庵 精進持戒 一字一拜 書法華經一
012_0399_b_19L部 極侈莊嚴 朝夕禮拜 至誠供養 又
012_0399_b_20L以禪定均慧 隱居松扄 不入塵境者
012_0399_b_21L四十餘而終云始末年
記未詳

012_0399_b_22L
012_0399_b_23L
曹溪宗師松溪禪師傳諱聖賢 浮休
012_0399_b_24L

012_0399_c_01L
69. 조계종사 취미 선사전曹溪宗師翠微禪師傳
휘는 수초守初이고 자는 태혼太昏이며 호는 취미翠微이다. 속성은 성成씨인데 본은 창녕으로 조선 시대 명신인 성삼문의 방계 후손이다. 만력 18년 경인년(1590, 선조 23) 6월 3일에 경성에서 태어났다. 놀이에는 반드시 불사佛事를 흉내 냈고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선정에 들어 있는 스님의 모습과 같았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형과 형수에게 의지하였고, 지학志學의 나이에는 어떤 범승이 “어찌 이리도 늦었는가?”라고 버럭 나무라는 꿈을 꾸었다. 이에 형에게 꿈을 이야기하고 출가의 허락을 구하였지만, 형은 손으로 선사의 입을 막고 “그런 말을 하지 말라.”라고 말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나서 성벽을 넘어 설악산으로 도망가서 경헌敬軒 스님에게 의탁하여 머리를 깎았다.
병오년(1606, 선조 39) 17세 때 남쪽의 두류산에 이르러 부휴 선수浮休善修에게 예배를 드리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때 벽암 각성碧巖覺性은 소장로小長老로서 제일좌로 있었다. 어느 날 부휴가 벽암에게 말했다. “훗날 크게 깨치는 사람이 나온다면 반드시 이 사미가 그 주인공일 것이다. 이 늙은이가 그대에게 부촉하니 잘 이끌고 보호해 주거라.” 20여 세에는 방방곡곡을 두루 참방하였다. 선사에게는 네댓 명의 도반이 있었는데 그들이 오烏라는 글자를 가지고 운을 삼아서 시를 청했다. 선사는 먼저 금唫 자를 내놓더니, 마지막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平生無長物    평생 동안 사치품이란 없었는데
唯有竹枝烏    오로지 하나 대지팡이뿐이라오132)

어느 날 벽암이 법좌에 오르자, 선사가 법좌를 세 바퀴 돌고 나서 예배하고 질문드리니, 벽암이 말했다. “어디에서 한 동이를 얻었기에 베 짜는 노파가 찾아온 것인가?” 선사가 말했다. “내려놓고자 하나 집착거리가 없습니다.” 벽암이 부휴 선수에게서 전승받은 부촉을 은밀하게 지시하고 나서 그것을 설법으로 드러내어 인가하고 말했다. “그대야말로 종문의 표준이로다.”
숭정 2년 기사년(1629, 인조 7)에 대중의 청익을 받아들여 출세하고, 이에 옥천玉川의 영취사靈鷲寺에서 개당하였다. 상국相國 장유張維가 유리주琉璃珠 한 꾸러미를 보내 주었다.133)임신년(1632, 인조 10)에는 관북關北에 초청되어 설법을 하다 『설봉어록雪峯語錄』을 읽고 오도悟道하였는데, 선사에게 있어서 영외嶺外의 선학禪學134)에 대한 관심은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이에 배를 타고 중국으로 유학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 15)에 태백산에 들어갔지만, 이듬해 다시 남쪽으로 돌아와서 벽암을 모셨는데 벽암 선사가 그만 방장산으로 돌아갔다.
계미년(1643, 인조 21)에는 초청을 받아 칠불암으로 옮겼는데 대중이 300명을 넘었다.
임진년(1652, 효종 3)에는 진원珍原으로부터 지리산으로 돌아와서 주석하였다.
병신년(1656, 효종 7)에는 보개산寶蓋山으로부터 반룡산盤龍山으로 갔는데

012_0399_c_01L曹溪宗師翠微禪師傳

012_0399_c_02L
諱守初 字太昏 翠微其號也 姓成 系
012_0399_c_03L出昌寧 本朝名臣成三問之傍裔也 萬
012_0399_c_04L曆十八庚寅六月初三日 生於京城 兒
012_0399_c_05L戱必佛事 坐如入定僧 賦鳩之歲 喪
012_0399_c_06L考妣 依兄嫂 及志學 形未交 忽梵僧
012_0399_c_07L疾呼來何遲 吿兄以夢 求出家 以手
012_0399_c_08L窒口曰 勿出此語 才浹旬 踰城走雪
012_0399_c_09L岳 依敬軒落髮 丙午南抵頭流 首謁
012_0399_c_10L浮休 具尸羅 時碧嵓以小長老 居第
012_0399_c_11L一座 一日休師謂嵓曰 異日大吾道者
012_0399_c_12L必此沙彌 吾耄以付汝 好將護之 旣
012_0399_c_13L冠 遍叅區宇 有靑襟四五 以烏爲韻
012_0399_c_14L請詩 師立唫 其末云 平生無長物 唯
012_0399_c_15L有竹枝烏 一日嵓陞座 師遶三匝 設
012_0399_c_16L禮問難 嵓曰 何處得一擔紝婆子來
012_0399_c_17L師云 欲放下無着處 嵓以休之囑密指
012_0399_c_18L顯說印曰 宗門準的 崇禎己巳 衆請
012_0399_c_19L出世 乃開堂于玉川之靈鷲 相國張維
012_0399_c_20L遣琉璃珠一串 壬申被請關北 悟道雪
012_0399_c_21L峯 嶺外禪學 自此始矣 航海欲西遊
012_0399_c_22L未果 丁丑之太白 明年南還 省碧嵓
012_0399_c_23L嵓罷歸方丈 癸未請移七佛 衆盈三百
012_0399_c_24L壬辰自珎原 回錫智異 丙甲自寶盖

012_0400_a_01L내한內翰 신 공申公이 제자를 자처하였다.
기해년(1659, 효종 10) 겨울에 벽암 노사께서 병에 걸리자 화엄사로 모시고 돌아왔다. 이듬해(1660, 현종 1) 정월에 벽암이 입적하였다. 이에 선사는 조계대도량曹溪大道場으로 옮겨서 전후 12년 동안 주석하였다. 사찰 내에 네 곳의 대전大殿이 있었는데 불상이 없어 장인에게 명하여 주조하도록 하였다. 네 곳의 대전에는 실제로 여섯 구의 불상을 비롯하여 많은 탱화가 있었는데 그 수가 수천 점이었다.【네 곳의 대전은 곧 화엄전·팔상전·약사전·관음전이다.】병오년(1666, 현종 7) 9월에 원정元淨으로부터 강사포絳紗袍를 보시받았다.
이듬해(1667, 현종 8)에 황강黃崗의 심원사深源寺에 주석하였다. 가을 7월에 묘향산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다음과 같은 『염송拈頌』에 수록된 게송을 열람하였다.

承春高下盡嬋妍  봄을 맞은 산과 강은 모두가 아름다운데
雨過喬林叫杜䳌  비가 그친 교목 숲에는 두견새 울어 댄다
如服一杯降氣湯  강기탕을 달여 한 잔을 쭉 들이켜니
胷次灑落     가슴이 상쾌하고 시원해 이내 책을 덮네

이에 탄식하여 말했다. “무릇 모든 문자는 술지게미와 같은 것인데 어찌 다른 맛이 있겠는가?” 이에 이르러 좌선의 자세를 취하고 설법을 하여 문풍이 엄격하였다.
이듬해(1668, 현종 9) 정월에 장차 영북嶺北으로 돌아갈 것이라 고하고, 2월 갑신甲申일에 오봉五峯의 삼장사三藏寺에 들어갔다. 4월 기사己巳일에 병기가 나타나자 부백府伯인 홍 공洪公이 문약問藥하러 찾아오니 선사는 거절하고 말했다. “생과 사는 운명이지요. 그런데 어찌 약을 쓰겠습니까?” 6월 을유乙酉일에 회욕靧浴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서 목탁을 쳐서 대중에게 이별을 고하여 말했다. “나는 79년을 살아왔는데 65년을 출가인으로 살았다. 그런데 무엇이 불만이겠는가? 그러니 탑도 세우지 말고 비명도 새기지 말라.” 어떤 사람이 게송을 요구하자 선사가 말했다. “선정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이후 3일이 지난 정해丁亥일에 재를 마치고서 무량수불을 10성聲 염念하고 가부좌하여 합장한 채로 좌화坐化하였다. 7일이 지나서 다비를 하는 자리에 여섯 고을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정골사리가 튀어나오자 각흘覺屹 등이 이를 받들어 설봉雪峯의 벽송대碧松臺로 모시고 돌아갔다. 21일에 걸쳐 사리 2매枚를 얻었다.
이듬해(1669, 현종 10) 3월 7일에 오봉산과 설봉산과 조계산의 세 곳에 탑을 세우고 안치하였다. 문도 중 해란海蘭·민기敏機·철조喆照·광륵廣泐·성총性聰 등이 상수제자들이다. 세수는 79세이고, 법랍은 65년이다.

012_0400_a_01L之盤龍 有內翰申公 稱弟子云 己亥
012_0400_a_02L冬 以嵓老病 歸侍華嚴 明正月嵓順
012_0400_a_03L寂 移住曹溪大道場 前後一紀 寺有
012_0400_a_04L四大殿 闕像 命工塑之 四殿實六軀
012_0400_a_05L凡諸繪畫 其數幾千華嚴殿 八相殿
藥師殿 觀音殿
丙午
012_0400_a_06L施絳紗于九月元淨 明年憩錫于黃崗
012_0400_a_07L深源 秋七月遷于妙香 閱拈頌偈 承
012_0400_a_08L春高下盡嬋妍 雨過喬林叫杜䳌 如服
012_0400_a_09L一杯降氣湯 胷次灑落 乃掩卷歎曰
012_0400_a_10L凡諸文字糟粕 豈有餘味也 至是據坐
012_0400_a_11L談柄 門風峭峻 明年一月 將歸嶺北
012_0400_a_12L二月甲申 移入五峯之三藏 四月己巳
012_0400_a_13L示疾 府伯洪公問藥 師却之曰 死生
012_0400_a_14L有數 藥安用爲 六月乙酉 靧浴更衣
012_0400_a_15L鳴楗訣衆曰 吾生七十有九 坐六十有
012_0400_a_16L五 何所嫌哉 勿塔勿銘 有索偈者 師
012_0400_a_17L曰勿撓定心 後三日丁亥 齋罷 念無
012_0400_a_18L量壽佛十聲 跏趺合爪而坐化 經七日
012_0400_a_19L闍維 六郡畢集 頂骨爆出 覺屹等 奉
012_0400_a_20L歸雪峯碧松臺 乞三七日 獲舍利二枚
012_0400_a_21L明年三月七日 安塔于五峯雪峯曹溪
012_0400_a_22L三處 門徒海蘭敏機喆照廣泐性聰等
012_0400_a_23L爲之首 壽七十九 夏六十五

012_0400_b_01L
70. 조계종사 숭인 설은전曹溪宗師崇仁雪訔傳【벽송碧松의 법을 이었다.】
71. 조계종사 추월 조능전曹溪宗師秋月祖能傳【벽송碧松의 법을 이었다.】
72. 조계종사 원오 일진전曹溪宗師圓悟一眞傳【벽송碧松의 법을 이었다.】
73. 조계종사 경헌 선사전曹溪宗師敬軒禪師傳【취미翠微의 은사이다.】
74. 조계종사 보광 선사전曹溪宗師葆光禪師傳【침굉枕肱의 은사이다.】
75. 조계종사 혜관 선사전曹溪宗師惠寬禪師傳【무용無用의 은사이다.】
76. 조계종사 득우 선사전曹溪宗師得牛禪師傳【영해影海의 은사이다.】
77. 조계종사 철웅 선사전曹溪宗師哲雄禪師傳【풍암楓巖의 은사이다.】
78. 조계종사 모운 진언 선사曹溪宗師暮雲震言禪師【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79. 조계종사 석실 명안 선사曹溪宗師石室明眼禪師【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80. 조계종사 완화 처해 선사曹溪宗師玩華處解禪師【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81. 조계종사 보광 원민 선사曹溪宗師葆光圓旻禪師【모운暮雲의 법을 이었다.】
82. 조계종사 회암 정혜 선사曹溪宗師晦庵定慧禪師【보광葆光의 법을 이었다.】
83. 조계종사 중봉 우징 선사曹溪宗師中峯宇澄禪師【완화玩華의 법을 이었다. 비碑는 청암사靑巖寺에 있다.】
84. 조계종사 원조 태휘 선사曹溪宗師圓照太輝禪師【석실石室의 법을 이었다.】
85. 조계종사 신암 비현 선사선사曹溪宗師愼庵丕玹禪師【원조圓照의 법을 이었다.】
86. 조계종사 각흘 선사전曹溪宗師覺屹禪師傳【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87. 조계종사 해란 선사전曹溪宗師海蘭禪師傳【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88. 조계종사 민기 선사전曹溪宗師敏機禪師傳【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89. 조계종사 철조 선사전曹溪宗師喆照禪師傳【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90. 조계종사 광륵 선사전曹溪宗師廣泐禪師傳【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91. 조계종사 설명 선사전曹溪宗師雪明禪師傳【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92. 조계종사 돈정 선사전曹溪宗師頓淨禪師傳【묵암默庵의 법을 이었다.】

012_0400_b_01L
曹溪宗師崇仁雪訔傳碧松嗣

012_0400_b_02L曹溪宗師秋月祖能傳碧松嗣

012_0400_b_03L曹溪宗師圓悟一眞傳碧松嗣

012_0400_b_04L曹溪宗師敬軒禪師傳翠微師

012_0400_b_05L曹溪宗師葆光禪師傳枕肱師

012_0400_b_06L曹溪宗師惠寬禪師傳無用師

012_0400_b_07L曹溪宗師得牛禪師傳影海師

012_0400_b_08L曹溪宗師哲雄禪師傳楓嵓師

012_0400_b_09L曹溪宗師暮雲震言禪師碧嵓嗣

012_0400_b_10L曹溪宗師石室明眼禪師栢庵嗣

012_0400_b_11L曹溪宗師玩華處解禪師無用嗣

012_0400_b_12L曹溪宗師葆光圓旻禪師暮雲嗣

012_0400_b_13L曹溪宗師晦庵定慧禪師葆光嗣

012_0400_b_14L曹溪宗師中峯宇澄禪師玩華嗣
012_0400_b_15L碑在靑嵓寺


012_0400_b_16L曹溪宗師圓照太輝禪師石室嗣

012_0400_b_17L曹溪宗師愼庵丕玹禪師圓照嗣

012_0400_b_18L曹溪宗師覺屹禪師傳翠微嗣

012_0400_b_19L曹溪宗師海蘭禪師傳翠微嗣

012_0400_b_20L曹溪宗師敏機禪師傳翠微嗣

012_0400_b_21L曹溪宗師喆照禪師傳翠微嗣

012_0400_b_22L曹溪宗師廣泐禪師傳翠微嗣

012_0400_b_23L曹溪宗師雪明禪師傳栢庵嗣

012_0400_b_24L曹溪宗師頓淨禪師傳默庵師

012_0400_c_01L
93. 조계종사 만리 선사전曹溪宗師萬里禪師傳
94. 조계종사 명진 선사전曹溪宗師明眞禪師傳
95. 조계종사 덕균 선사전曹溪宗師德均禪師傳【응암應庵의 은사이다.】
96. 조계종사 법안 선사전曹溪宗師法顏禪師傳【제운霽雲의 은사이다.】
97. 조계종사 이암 희열 선사曹溪宗師怡庵希悅禪師【회암晦庵의 법을 이었다.】
98. 조계종사 용암 채청 선사曹溪宗師龍庵采晴禪師【회암晦庵의 은사이다.】
99. 조계종사 송암 탈원 선사曹溪宗師松庵脫遠禪師【회암晦庵의 은사이다.】
100. 조계종사 우암 호경 선사曹溪宗師雨庵護敬禪師【회암晦庵의 은사이다.】
101. 조계종사 서악 도태 선사曹溪宗師西嶽道泰禪師【회암晦庵의 은사이다.】
102. 조계종사 문곡 영아 선사曹溪宗師文谷永訝禪師【회암晦庵의 은사이다.】
103. 조계종사 한암 성안 선사曹溪宗師寒嵓性眼禪師【회암晦庵의 은사이다.】
104. 조계종사 추파 홍유 선사曹溪宗師秋坡弘宥禪師【이암怡庵 선사의 법을 이었다. 혹은 한암寒巖의 법을 이었다.】
105. 조계종사 설봉 경오 선사曹溪宗師雪峯景旿禪師【용암龍庵의 법을 이었다.】
106. 조계종사 매곡 경일 선사曹溪宗師梅谷敬一禪師【나암懶庵의 법을 이었다.】
107. 조계종사 섭허 인규 선사曹溪宗師攝虛印圭禪師【나암懶庵의 법을 이었다.】
108. 조계종사 송암 계익曹溪宗師松庵戒益【부휴浮休의 법을 이은 78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109. 조계종사 뇌정 응묵曹溪宗師雷靜應默【부휴浮休의 법을 이었다.】
110. 조계종사 고한 희언曹溪宗師孤閑希彥【부휴浮休의 법을 이었다.】
111. 조계종사 해련 선택曹溪宗師海蓮善澤【부휴浮休의 법을 이었다.】
112. 조계종사 보감 혜일曹溪宗師寶鑑惠日【부휴浮休의 법을 이었다.】
113. 조계종사 환적 인문曹溪宗師幻寂印文【부휴浮休의 법을 이었다.】
114. 조계종사 포허 담수曹溪宗師抱虛談守【부휴浮休의 법을 이었다.】
115. 조계종사 고운 정특曹溪宗師孤雲挺特【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012_0400_c_01L曹溪宗師萬里禪師傳

012_0400_c_02L曹溪宗師明眞禪師傳

012_0400_c_03L曹溪宗師德均禪師傳應庵師

012_0400_c_04L曹溪宗師法顏禪師傳霽雲師

012_0400_c_05L曹溪宗師怡庵希悅禪師晦庵嗣

012_0400_c_06L曹溪宗師龍庵采晴禪師晦庵師

012_0400_c_07L曹溪宗師松庵脫遠禪師晦庵師

012_0400_c_08L曹溪宗師雨庵護敬禪師晦庵師

012_0400_c_09L曹溪宗師西嶽道泰禪師晦庵師

012_0400_c_10L曹溪宗師文谷永訝禪師晦庵師

012_0400_c_11L曹溪宗師寒嵓性眼禪師晦庵師

012_0400_c_12L曹溪宗師秋坡弘宥禪師怡庵嗣
012_0400_c_13L或寒嵓嗣


012_0400_c_14L曹溪宗師雪峯景旿禪師龍庵嗣

012_0400_c_15L曹溪宗師梅谷敬一禪師懶庵嗣

012_0400_c_16L曹溪宗師攝虛印圭禪師懶庵嗣

012_0400_c_17L曹溪宗師松庵戒益浮休嗣七八

012_0400_c_18L曹溪宗師雷靜應默浮休嗣

012_0400_c_19L曹溪宗師孤閑希彥浮休嗣

012_0400_c_20L曹溪宗師海蓮善澤浮休嗣

012_0400_c_21L曹溪宗師寶鑑惠日浮休嗣

012_0400_c_22L曹溪宗師幻寂印文浮休嗣

012_0400_c_23L曹溪宗師抱虛談守浮休嗣

012_0400_c_24L曹溪宗師孤雲挺特碧嵓嗣

012_0401_a_01L
116. 조계종사 동림 혜원曹溪宗師東林慧遠【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17. 조계종사 벽천 정현曹溪宗師碧川正玄【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18. 조계종사 월파 인영曹溪宗師月波印英【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19. 조계종사 무의 천연曹溪宗師無依天然【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0. 조계종사 제하 청순曹溪宗師霽霞淸順【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1. 조계종사 유곡 충경曹溪宗師幽谷冲冏【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2. 조계종사 한계 현일曹溪宗師寒溪玄一【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3. 조계종사 연화 인욱曹溪宗師蓮花印旭【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4. 조계종사 나암 진일曹溪宗師懶庵眞一【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5. 조계종사 침허 율계曹溪宗師枕虛律戒【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6. 조계종사 회은 응준曹溪宗師晦隱應俊【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7. 조계종사 허월 승준曹溪宗師虛月勝俊【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8. 조계종사 회적 성오曹溪宗師晦迹性悟【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29. 조계종사 함화 혜인曹溪宗師含花慧認【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0. 조계종사 반운 상욱曹溪宗師伴雲尙旭【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1. 조계종사 동계 경일曹溪宗師東溪敬一【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2. 조계종사 뇌음 경연曹溪宗師雷音敬演【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3. 조계종사 애운 천홍曹溪宗師靉雲天弘【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4. 조계종사 섭허 인규曹溪宗師攝虛印圭【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5. 조계종사 쌍산 인행曹溪宗師雙山印行【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6. 조계종사 설봉 희안曹溪宗師雪峯希安【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7. 조계종사 영원 담희曹溪宗師靈源曇熙【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8. 조계종사 청담 혜휘曹溪宗師淸潭慧輝【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39. 조계종사 송봉 삼우曹溪宗師松峯三愚【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012_0401_a_01L曹溪宗師東林慧遠碧嵓嗣

012_0401_a_02L曹溪宗師碧川正玄碧嵓嗣

012_0401_a_03L曹溪宗師月波印英碧嵓嗣

012_0401_a_04L曹溪宗師無依天然碧嵓嗣

012_0401_a_05L曹溪宗師霽霞淸順碧嵓嗣

012_0401_a_06L曹溪宗師幽谷冲冏碧嵓嗣

012_0401_a_07L曹溪宗師寒溪玄一碧嵓嗣

012_0401_a_08L曹溪宗師蓮花印旭碧嵓嗣

012_0401_a_09L曹溪宗師懶庵眞一碧嵓嗣

012_0401_a_10L曹溪宗師枕虛律戒碧嵓嗣

012_0401_a_11L曹溪宗師晦隱應俊碧嵓嗣

012_0401_a_12L曹溪宗師虛月勝俊碧嵓嗣

012_0401_a_13L曹溪宗師晦迹性悟碧嵓嗣

012_0401_a_14L曹溪宗師含花慧認碧嵓嗣

012_0401_a_15L曹溪宗師伴雲尙旭碧嵓嗣

012_0401_a_16L曹溪宗師東溪敬一碧嵓嗣

012_0401_a_17L曹溪宗師雷音敬演碧嵓嗣

012_0401_a_18L曹溪宗師靉雲天弘碧嵓嗣

012_0401_a_19L曹溪宗師攝虛印圭碧嵓嗣

012_0401_a_20L曹溪宗師雙山印行碧嵓嗣

012_0401_a_21L曹溪宗師雪峯希安碧嵓嗣

012_0401_a_22L曹溪宗師靈源曇熙碧嵓嗣

012_0401_a_23L曹溪宗師淸潭慧輝碧嵓嗣

012_0401_a_24L曹溪宗師松峯三愚碧嵓嗣

012_0401_b_01L
140. 조계종사 금파 신여曹溪宗師金波信如【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41. 조계종사 고운 설우曹溪宗師孤雲雪祐【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42. 조계종사 제하 정특曹溪宗師霽霞挺特【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43. 조계종사 곤륜 준극曹溪宗師崑崙準極【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44. 조계종사 원응 보문曹溪宗師圓應寶文【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45. 조계종사 고한 희연曹溪宗師高閑希演【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46. 조계종사 환호 유문曹溪宗師煥乎有文【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47. 조계종사 한영 신홍曹溪宗師寒影信弘【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48. 조계종사 선화 경림曹溪宗師禪和敬林【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49. 조계종사 성영 선일曹溪宗師性英禪一【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50. 조계종사 나묵 경눌曹溪宗師懶默敬訥【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51. 조계종사 민성 의현曹溪宗師敏性義賢【벽암碧巖의 법을 이었다.】
152. 조계종사 취암 해란曹溪宗師翠嵓海瀾【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135)
153. 조계종사 설파 민기曹溪宗師雪波敏機【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136)
154. 조계종사 성곡 철조曹溪宗師聖谷徹照【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55. 조계종사 휴암 천해曹溪宗師休嵓天海【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56. 조계종사 채진 각현曹溪宗師採眞覺玄【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57. 조계종사 청담 처신曹溪宗師淸潭處信【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58. 조계종사 현해 각선曹溪宗師懸解覺先【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59. 조계종사 구봉 광륵曹溪宗師龜峯廣泐【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60. 조계종사 설계 천기曹溪宗師雪溪天機【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61. 조계종사 태진 지삼曹溪宗師太眞智森【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62. 조계종사 조계 초화曹溪宗師曹溪楚和【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63. 조계종사 취죽 인정曹溪宗師翠竹仁靜【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012_0401_b_01L曹溪宗師金波信如碧嵓嗣

012_0401_b_02L曹溪宗師孤雲雪祐碧嵓嗣

012_0401_b_03L曹溪宗師霽霞挺特碧嵓嗣

012_0401_b_04L曹溪宗師崑崙準極碧嵓嗣

012_0401_b_05L曹溪宗師圓應寶文碧嵓嗣

012_0401_b_06L曹溪宗師高閑希演碧嵓嗣

012_0401_b_07L曹溪宗師煥乎有文碧嵓嗣

012_0401_b_08L曹溪宗師寒影信弘碧嵓嗣

012_0401_b_09L曹溪宗師禪和敬林碧嵓嗣

012_0401_b_10L曹溪宗師性英禪一碧嵓嗣

012_0401_b_11L曹溪宗師懶默敬訥碧嵓嗣

012_0401_b_12L曹溪宗師敏性義賢碧嵓嗣

012_0401_b_13L曹溪宗師翠嵓海瀾翠微嗣

012_0401_b_14L曹溪宗師雪波敏機翠微嗣

012_0401_b_15L曹溪宗師聖谷徹照翠微嗣

012_0401_b_16L曹溪宗師休嵓天海翠微嗣

012_0401_b_17L曹溪宗師採眞覺玄翠微嗣

012_0401_b_18L曹溪宗師淸潭處信翠微嗣

012_0401_b_19L曹溪宗師懸解覺先翠微嗣

012_0401_b_20L曹溪宗師龜峯廣泐翠微嗣

012_0401_b_21L曹溪宗師雪溪天機翠微嗣

012_0401_b_22L曹溪宗師太眞智森翠微嗣

012_0401_b_23L曹溪宗師曹溪楚和翠微嗣

012_0401_b_24L曹溪宗師翠竹仁靜翠微嗣

012_0401_c_01L
164. 조계종사 혜공 상회曹溪宗師慧空尙懷【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65. 조계종사 설계 처림曹溪宗師雪溪處林【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66. 조계종사 취암 혜영曹溪宗師翠嵓惠英【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67. 조계종사 구련 묘운曹溪宗師九蓮妙雲【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68. 조계종사 옥뢰 양열曹溪宗師玉瀨良悅【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69. 조계종사 적조 경념曹溪宗師寂照敬念【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70. 조계종사 종암 천눌曹溪宗師鍾嵓天訥【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71. 조계종사 금파 옥균曹溪宗師金波玉均【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72. 조계종사 월인 방흠曹溪宗師月印方欽【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73. 조계종사 성우 호련曹溪宗師性宇瑚璉【취미翠微의 법을 이었다.】
174. 조계종사 서암 만훈曹溪宗師瑞嵓萬訓【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75. 조계종사 조봉 준각曹溪宗師祖峯雋覺【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76. 조계종사 우계 준익曹溪宗師友溪雋益【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77. 조계종사 벽오 초경曹溪宗師碧梧初冏【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78. 조계종사 명곡 현안曹溪宗師明谷玄眼【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79. 조계종사 청파 혜영曹溪宗師淸波惠英【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80. 조계종사 송암 위재曹溪宗師松嵓偉哉【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81. 조계종사 설애 성학曹溪宗師雪涯聖學【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82. 조계종사 태고 성수曹溪宗師太古性修【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83. 조계종사 회암 운권曹溪宗師檜嵓雲捲【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84. 조계종사 퇴한 성민曹溪宗師退閑性敏【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85. 조계종사 지족 충면曹溪宗師知足忠勔【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86. 조계종사 벽하 경영曹溪宗師碧霞慶永【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87. 조계종사 삼기 각현曹溪宗師三幾覺玄【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012_0401_c_01L曹溪宗師慧空尙懷翠微嗣

012_0401_c_02L曹溪宗師雪溪處林翠微嗣

012_0401_c_03L曹溪宗師翠嵓惠英翠微嗣

012_0401_c_04L曹溪宗師九蓮妙雲翠微嗣

012_0401_c_05L曹溪宗師玉瀨良悅翠微嗣

012_0401_c_06L曹溪宗師寂照敬念翠微嗣

012_0401_c_07L曹溪宗師鍾嵓天訥翠微嗣

012_0401_c_08L曹溪宗師金波玉均翠微嗣

012_0401_c_09L曹溪宗師月印方欽翠微嗣

012_0401_c_10L曹溪宗師性宇瑚璉翠微嗣

012_0401_c_11L曹溪宗師瑞嵓萬訓栢庵嗣

012_0401_c_12L曹溪宗師祖峯雋覺栢庵嗣

012_0401_c_13L曹溪宗師友溪雋益栢庵嗣

012_0401_c_14L曹溪宗師碧梧初冏栢庵嗣

012_0401_c_15L曹溪宗師明谷玄眼栢庵嗣

012_0401_c_16L曹溪宗師淸波惠英栢庵嗣

012_0401_c_17L曹溪宗師松嵓偉哉栢庵嗣

012_0401_c_18L曹溪宗師雪涯聖學栢庵嗣

012_0401_c_19L曹溪宗師太古性修栢庵嗣

012_0401_c_20L曹溪宗師檜嵓雲捲栢庵嗣

012_0401_c_21L曹溪宗師退閑性敏栢庵嗣

012_0401_c_22L曹溪宗師知足忠勔栢庵嗣

012_0401_c_23L曹溪宗師碧霞慶永栢庵嗣

012_0401_c_24L曹溪宗師三幾覺玄栢庵嗣

012_0402_a_01L
188. 조계종사 덕민 청변曹溪宗師德敏淸卞【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89. 조계종사 원변 응찬曹溪宗師圓卞應贊【백암栢庵의 법을 이었다.】
190. 조계종사 쇄연 인현曹溪宗師灑然仁賢【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191. 조계종사 함영 상징曹溪宗師㴠影尙澄【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192. 조계종사 악서 취심曹溪宗師樂西翠諶【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193. 조계종사 만성 대기曹溪宗師晩成大機【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194. 조계종사 운암 취호曹溪宗師雲嵓就浩【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195. 조계종사 만리 붕척曹溪宗師萬里鵬陟【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196. 조계종사 은봉 지명曹溪宗師隱峯智明【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197. 조계종사 덕봉 회탄曹溪宗師德峯懷坦【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198. 조계종사 무쟁 취적曹溪宗師無爭趣寂【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199. 조계종사 금파 달진曹溪宗師金波達眞【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200. 조계종사 선운 영훈曹溪宗師船運頴訓【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201. 조계종사 금봉 학수曹溪宗師金峯鶴樹【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202. 조계종사 보응 위정曹溪宗師普應偉鼎【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203. 조계종사 두륜 청성曹溪宗師頭崙淸性【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204. 조계종사 빙암 현단曹溪宗師冰庵顯端【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205. 조계종사 정흠 돈오曹溪宗師淨欽頓悟【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206. 조계종사 삼백曹溪宗師三白【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207. 조계종사 서유 축한曹溪宗師西游竺閑【영해影海의 법을 이었다.】
208. 조계종사 벽정 붕민曹溪宗師碧井鵬敏【영해影海의 법을 이었다.】
209. 조계종사 연화 숭신曹溪宗師蓮花崇信【영해影海의 법을 이었다.】
210. 조계종사 홍파 적우曹溪宗師洪波的宇【영해影海의 법을 이었다.】
211. 조계종사 율봉 담정曹溪宗師栗峯湛淨【영해影海의 법을 이었다.】

012_0402_a_01L曹溪宗師德敏淸卞栢庵嗣

012_0402_a_02L曹溪宗師圓卞應贊栢庵嗣

012_0402_a_03L曹溪宗師灑然仁賢無用嗣

012_0402_a_04L曹溪宗師㴠影尙澄無用嗣

012_0402_a_05L曹溪宗師樂西翠諶無用嗣

012_0402_a_06L曹溪宗師晩成大機無用嗣

012_0402_a_07L曹溪宗師雲嵓就浩無用嗣

012_0402_a_08L曹溪宗師萬里鵬陟無用嗣

012_0402_a_09L曹溪宗師隱峯智明無用嗣

012_0402_a_10L曹溪宗師德峯懷坦無用嗣

012_0402_a_11L曹溪宗師無爭趣寂無用嗣

012_0402_a_12L曹溪宗師金波達眞無用嗣

012_0402_a_13L曹溪宗師船運頴訓無用嗣

012_0402_a_14L曹溪宗師金峯鶴樹無用嗣

012_0402_a_15L曹溪宗師普應偉鼎無用嗣

012_0402_a_16L曹溪宗師頭崙淸性無用嗣

012_0402_a_17L曹溪宗師冰庵顯端無用嗣

012_0402_a_18L曹溪宗師淨欽頓悟無用嗣

012_0402_a_19L曹溪宗師三白無用嗣

012_0402_a_20L曹溪宗師西游竺閑影海嗣

012_0402_a_21L曹溪宗師碧井鵬敏影海嗣

012_0402_a_22L曹溪宗師蓮花崇信影海嗣

012_0402_a_23L曹溪宗師洪波的宇影海嗣

012_0402_a_24L曹溪宗師栗峯湛淨影海嗣

012_0402_b_01L
212. 조계종사 죽암 창익曹溪宗師竹庵暢益【영해影海의 법을 이었다.】
213. 조계종사 환원 창규曹溪宗師還源暢奎【영해影海의 법을 이었다.】
214. 조계종사 수월 징혜曹溪宗師水月澄慧【영해影海의 법을 이었다.】
215. 조계종사 백매 재휴曹溪宗師白梅載烋【영해影海의 법을 이었다.】
216. 조계종사 구암 승각曹溪宗師龜庵勝覺【백곡白谷의 법을 이었다.】
217. 조계종사 식암 진명曹溪宗師息庵眞明【백곡白谷의 법을 이었다.】
218. 조계종사 백운 문연曹溪宗師白雲文演【추파秋坡의 법을 이었다.】
219. 조계종사 해운 척제曹溪宗師海雲尺濟【추파秋坡의 법을 이었다.】
220. 조계종사 경암 성일曹溪宗師鏡嵓性一【용암龍巖의 법을 이었다.】
221. 조계종사 옥암 성천曹溪宗師玉嵓性天【무용無用의 법을 이었다.】
222. 조계종사 벽허 탄원曹溪宗師碧虛坦圓【대가待價의 법을 이었다.】
223. 조계종사 침계 삼인曹溪宗師枕溪三忍【대가待價의 법을 이었다.】
224. 조계종사 대지 해연曹溪宗師大池海淵【식영息影의 법을 이었다.】
225. 조계종사 설빈 사순曹溪宗師雪貧思順【식영息影의 법을 이었다.】
226. 조계종사 혹암 현정曹溪宗師惑庵玄挺【모운慕雲의 법을 이었다.】
227. 조계종사 해운 민오曹溪宗師海雲敏悟【모운慕雲의 법을 이었다.】
228. 조계종사 회은 사원曹溪宗師晦隱思遠【모운慕雲의 법을 이었다.】
229. 조계종사 사암 치철曹溪宗師思嵓致哲【이암怡庵의 법을 이었다.】
230. 조계종사 무구 성조曹溪宗師無垢性照【이암怡庵의 법을 이었다.】
231. 조계종사 유영 원철曹溪宗師柳影圓哲【송계松溪의 법을 이었다.】
232. 조계종사 우암 혜림曹溪宗師愚嵓慧林【송계松溪의 법을 이었다.】
233. 조계종사 취은 옥수曹溪宗師翠隱玉修【벽천碧川의 법을 이었다.】
234. 조계종사 구련 선하曹溪宗師九蓮善荷【연화蓮花의 법을 이었다.】
235. 조계종사 구봉 처열曹溪宗師九峯處悅【연화蓮花의 법을 이었다.】

012_0402_b_01L曹溪宗師竹庵暢益影海嗣

012_0402_b_02L曹溪宗師還源暢奎影海嗣

012_0402_b_03L曹溪宗師水月澄慧影海嗣

012_0402_b_04L曹溪宗師白梅載烋碧梧嗣

012_0402_b_05L曹溪宗師龜庵勝覺白谷嗣

012_0402_b_06L曹溪宗師息庵眞明白谷嗣

012_0402_b_07L曹溪宗師白雲文演秋坡嗣

012_0402_b_08L曹溪宗師海雲尺濟秋坡嗣

012_0402_b_09L曹溪宗師鏡嵓性一龍嵓嗣

012_0402_b_10L曹溪宗師玉嵓性天無用嗣

012_0402_b_11L曹溪宗師碧虛坦圓待價嗣

012_0402_b_12L曹溪宗師枕溪三忍待價嗣

012_0402_b_13L曹溪宗師大池海淵息影嗣

012_0402_b_14L曹溪宗師雪貧思順息影嗣

012_0402_b_15L曹溪宗師惑庵玄挺慕雲嗣

012_0402_b_16L曹溪宗師海雲敏悟慕雲嗣

012_0402_b_17L曹溪宗師晦隱思遠慕雲嗣

012_0402_b_18L曹溪宗師思嵓致哲怡庵嗣

012_0402_b_19L曹溪宗師無垢性照怡庵嗣

012_0402_b_20L曹溪宗師柳影圓哲松溪嗣

012_0402_b_21L曹溪宗師愚嵓慧林松溪嗣

012_0402_b_22L曹溪宗師翠隱玉修碧川嗣

012_0402_b_23L曹溪宗師九蓮善荷蓮花嗣

012_0402_b_24L曹溪宗師九峯處悅蓮花嗣

012_0402_c_01L
236. 조계종사 반송 연우曹溪宗師伴松延祐【동계東溪의 법을 이었다.】
237. 조계종사 이곡 효선曹溪宗師梨谷曉善【동계東溪의 법을 이었다.】
238. 조계종사 소연 해천曹溪宗師蕭然海天【동계東溪의 법을 이었다.】
239. 조계종사 금파 성탄曹溪宗師金波星坦【동계東溪의 법을 이었다.】
240. 조계종사 백암 성총 선사전曹溪宗師栢庵性聰禪師傳
휘는 성총性聰이고 속성은 이李씨이며, 아버지 이름은 강棡으로서 남원 출신이고, 어머니는 하河씨이다. 숭정 4년 신미년(1631, 인조 9) 11월 15일에 태어났다.
13세 때 출가하였고, 16세 때 구족계를 받았으며, 18세 때 방장산에 들어가서 취미 수초翠微守初를 찾아뵙고 9년 동안 공부하여 취미 수초의 법을 터득하였다.
30세 때 처음으로 강의를 하였고, 명산을 두루 참방하였다. 조계사, 징광사, 쌍계사 등에서 주석하면서 항상 선과 교학을 널리 천양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치문緇門』 3권에 주해를 달았고, 아울러 외전에도 통달하였는데 특히 시율詩律에 뛰어났다. 당시의 명사였던 김문곡金文谷·정동명鄭東溟·남호곡南壺谷·오서파吳西波 등의 제공이 모두 기꺼이 출가자인 선사의 벗이 되었다.
강희 연간(1681, 숙종 7)에 바닷가(荏子島)에 큰 배가 정박한 것을 보았는데, 『화엄경소초華嚴經䟽抄』·『대명법수大明法數』·『회현기會玄記』·『금강경간정기金剛經刊定記』·『대승기신론소필삭기大乘起信論疏筆削記』·『정토보서淨土寶書』 등 190여 권이었다. 선사가 크게 놀라서 세상에 간행하였다.137) 이로부터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 관심을 쏟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이로써 대종사로 추앙받았다.138)강희 무오년(1678, 숙종 4)에 설명 장로雪明長老로 하여금 무설당無舌堂에 거듭 보조 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오늘날의 설법전說法殿은 예전의 구부舊趺가 있던 지역에 해당한다.
경진년(1700, 숙종 26) 7월 25일에 쌍계사 신흥암新興庵에서 시적하였다. 다비를 마치고 정골사리頂骨舍利 2매枚를 수습하여 송광사와 칠불사에 나누어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이후 제5세 법손인 최눌㝡訥·낭윤朗允 등이 비碑를 세우고 행적을 새겼다.

012_0402_c_01L曹溪宗師伴松延祐東溪嗣

012_0402_c_02L曹溪宗師梨谷曉善東溪嗣

012_0402_c_03L曹溪宗師蕭然海天東溪嗣

012_0402_c_04L曹溪宗師金波星坦東溪嗣

012_0402_c_05L

012_0402_c_06L曹溪宗師栢庵性聰禪師傳

012_0402_c_07L
諱性聰 姓李 父棡 南原人 母河氏
012_0402_c_08L以崇禎四年辛未十一月十五日生 十
012_0402_c_09L三出家 十六受具 十八入方丈 謁翠
012_0402_c_10L微 九年學得其法 三十始講授 遍叅
012_0402_c_11L名山 曹溪澄光雙溪 爲捿息之院 常
012_0402_c_12L以禪敎開闡爲己任 註解緇門三卷 兼
012_0402_c_13L通外典 又喜詩律 當時名士 若金文
012_0402_c_14L谷鄭東溟南壺谷吳西波諸公 皆許爲
012_0402_c_15L空門友 康熙年間 於海浦 見大航來
012_0402_c_16L泊 所載卽華嚴經䟽抄 大明法數 會
012_0402_c_17L玄記 金剛記 起信記 淨土寶書等一
012_0402_c_18L百九十餘卷 師大驚發信 刊行于世
012_0402_c_19L自是學佛者 莫不靡然 推以爲大宗師
012_0402_c_20L也 康熙戊午 使雪明長老 重樹國師
012_0402_c_21L碑于無舌堂 今說法殿 前舊趺處 以
012_0402_c_22L庚辰七月二十五日 示寂于雙溪新興
012_0402_c_23L庵 火浴已 精骨二枚 分塔于松廣七
012_0402_c_24L佛 至五世法孫㝡訥朗允等 樹碑勒銘

012_0403_a_01L세수는 70세이고, 법랍은 57년이다.
241. 조계종사 무용 수연 선사전曹溪宗師無用秀演禪師傳
휘는 수연秀演이고 속성은 오吳씨이며, 용안龍安(전북 익산 용안) 출신으로서 고려 시대 태위문양공太尉文襄公 연총延寵의 후손이다. 아버지의 꿈에 큰 황구렁이 한 마리가 꿈틀거리면서 하늘로 올라가서 잠시 머물다가 땅으로 떨어지더니 집을 여러 바퀴 돌았다. 이로 인하여 잉태되어 순치 8년 신묘년(1651, 효종 2) 3월 13일 경인일에 태어났다.
13세 때 갑자기 부모를 여의었고, 이에 조계산에 들어가 혜관 장로惠寬長老에 의지하여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22세 때 침굉 현변枕肱懸辯을 참문하자 침굉이 말하였다. “원돈의 법문이 모두 그대한테 갖추어져 있다.”
26세 때 침굉 현변의 권유를 받아들여 조계산으로 백암 성총栢庵性聰을 참문하였는데, 성총은 한눈에 선사가 대단히 뛰어난 줄을 알아보고 그곳에 머물도록 하였다. 경전 가운데서 어려운 것을 물어도 결코 틀림이 없었다. 선사의 기품은 우뚝하고 학견은 고고하였으며 신사(縉紳)와 사대부들이 공경하며 탄복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사찰의 동남쪽에 손수 정자 하나를 지어서 수석정水石亭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적어 두었다.

快亭臨水石    시원한 정자 수석에 지어 놓고서
高臥彼哉仙    높이 누우니 이것이 신선이로다
嶺日簷端射    재 넘는 해 처마 끝을 비추는데
溪風檻孔穿    시냇가 바람은 난간을 뚫는다네
躍來魚率性    뛰어오르는 물고기 본능 따르고
飛去鳥能天    날아가는 새는 허공이 자유롭네
觀物還觀我    자연 관찰하고 나를 관찰하나니
物然我亦然    자연도 그러하고 나도 그러하네

그저 생각나는 대로 읊은 것이 모두 이와 같은 부류였다. 선사의 유고집이 세상에 유행하였는데 시인들이 그것을 무척 소중하게 간주하였다.
기해년(1719, 숙종 45) 10월 3일에 가부좌한 자세로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고 영골을 수습하여 북봉北峰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세수는 69세이고, 법랍은 51년이다.
242. 조계종사 영해 약탄 선사전曹溪宗師影海若坦禪師傳

012_0403_a_01L壽七十 夏五十七

012_0403_a_02L

012_0403_a_03L曹溪宗師無用秀演禪師傳

012_0403_a_04L
諱秀演 姓吳 龍安人 高麗太尉文襄
012_0403_a_05L公延寵之裔 父夢一黃章大虫 蜿蜒上
012_0403_a_06L空 小選還墜 繞屋數匝 因有娠 以順
012_0403_a_07L治八年辛卯三月十三日庚寅生 十三
012_0403_a_08L奄違考妣 轉入曹溪 依惠寬長老剃髮
012_0403_a_09L受具 二十二謁枕肱 肱曰圓頓法 全
012_0403_a_10L在汝矣 二十六承枕肱之囑 謁栢庵于
012_0403_a_11L曹溪 一見大奇 因爲住 執經問難 無
012_0403_a_12L不沕合 師之氣宇卓犖 學見孤高 縉
012_0403_a_13L1)縉士夫 莫不敬服 寺之巽隅 手搆一
012_0403_a_14L亭 以水石名焉 揭一律云

012_0403_a_15L快亭臨水石 高臥彼哉仙

012_0403_a_16L嶺日簷端射 溪風檻孔穿

012_0403_a_17L躍來魚率性 飛去鳥能天

012_0403_a_18L觀物還觀我 物然我亦然

012_0403_a_19L率爾口占 皆此類也 遺集行于世 詩
012_0403_a_20L者寶愛之 己亥十月三日 跏趺而逝
012_0403_a_21L茶毘收靈骨 塔于北峯 壽六十九 夏
012_0403_a_22L五十一

012_0403_a_23L

012_0403_a_24L曹溪宗師影海若坦禪師傳

012_0403_b_01L
휘는 약탄若坦이고 자는 수눌守訥이며 호는 영해影海이고 속성은 광산 김金씨이다. 아버지 이름은 중생中生이다. 어머니 서徐씨는 꿈에 범승梵僧을 보고 난 뒤에 임신을 하여 강희 7년 무신년(1668, 현종 9) 10월 1일에 낳았는데, 몸에 포태를 달고 나왔다. 어렸을 때부터 호탕하여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았다. 8세 때 학업을 시작하였는데 배운 것은 반드시 외웠다.
10세 때 고흥高興 능가사楞伽寺의 득우 장로得牛長老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 17세 때 처음 조계산 송광사에서 무용당 화상無用堂和尙을 뵈었는데 자기도 모르는 새에 눈물을 흘렸다. 18세 때 구족계를 받았고, 22세 때 경법을 배웠는데 아무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28세 때 만법유심萬法唯心의 종지를 더욱더 믿었는데, 납자들이 진심으로 귀의하였다.
37세 갑술년(1694, 숙종 20)에 봉산의 초청을 받아 처음 자수암慈受菴에 들어가면서부터 그 명성이 멀리 퍼졌다. 이에 부르지 않아도 스스로 찾아온 대중이 100명을 넘었는데, 그것이야말로 선사가 이룩한 결과였다.
16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18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139)
52세 때 송광사에서 무용당 노사(無用法老)를 위하여 화엄대회를 시설하자 사방에서 천 명 이상의 대중이 줄지어 모여들었다. 그해(1719, 숙종 45) 여름에 무용당 화상이 입적하였다. 선사가 다비를 하여 묘지에 사리를 봉안하였는데, 이것은 곧 선사가 모범으로 삼은 것이었다.
55세 때 공화工畫에게 명하여 53불에 대한 탱화를 그렸다.
계묘년(1722, 경종 2) 여름에 왕의 명을 받들어 국사의 탑을 송광사에 모시고, 이듬해(1723, 경종 3)에는 『무용당문집無用堂文集』을 간행하였다.
81세 때(1748, 영조 24)는 능가사사적비楞伽寺事蹟碑140)를 세우고, 또한 물길을 뚫어 물이 감싸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곧 선사의 주간한 일이었다.141)
61세 무신년(1728, 영조 4)에 수백 명의 납자를 거느리고 방장산의 벽송사로 옮겨 주석하였다. 그 지역에서 난亂이 일어나142) 백성들이 불안해하자 선사가 대중들에게 말했다. “임금의 국토가 이와 같은 변란을 맞이하였는데도 어찌 방책만 세우고 있을 것인가?” 그러고는 이에 대중을 흩어 버리고 난중亂中으로 달려가서 끝내 승리를 보았다. 이것은 곧 선사의 우국충정이었다. 제자가 수십 명이었는데, 오직 풍암楓巖만이 의발을 전수 받은 적자였다. 이것은 곧 선사의 전법 제자였다.
82세 경오년(1749, 영조 25)에 풍암 등의 청을 받아들여 잡화엄대법회를 열었는데,

012_0403_b_01L
諱若坦 字守訥 影海其號也 姓金 光
012_0403_b_02L山 父中生 母徐氏 夢梵僧而娠 康熙
012_0403_b_03L七年戊申十月一日生 身着胞胎 兒
012_0403_b_04L時豪逸不覊 八歲入學 學必輒誦 十
012_0403_b_05L歲出家於高興之楞伽寺得牛長老剃染
012_0403_b_06L十七初見無用和尙於曹溪 不覺涕泣
012_0403_b_07L十八因受具 二十二受經 法類軰莫及
012_0403_b_08L二十八益信萬法唯心之旨 學者歸心
012_0403_b_09L焉 三十七甲寅 受鳳山之請 始入院
012_0403_b_10L於慈受菴 聲薌播遠 衆不召而自至者
012_0403_b_11L盈百 此師之樹立也 十六父喪 十八
012_0403_b_12L母喪 五十二在松廣寺 爲無用法老
012_0403_b_13L設華嚴大會 八表坌集 衆盈千指 其
012_0403_b_14L年夏和尙入寂 師火浴封塚 此師之效
012_0403_b_15L節也 五十五命工畫五十三佛幀 癸卯
012_0403_b_16L夏奉入國師 塔于本址 次年刊無用文
012_0403_b_17L集 八十一楞伽事蹟碑樹立 又穿渠環
012_0403_b_18L水 此師之幹務也 六十一戊申 將數
012_0403_b_19L百衲子 移錫方丈山碧松 亂起蕭墻
012_0403_b_20L民不安堵 師吿衆曰 食君土之毛 逢
012_0403_b_21L此世變 何愛籌策 乃散衆赴亂 終見
012_0403_b_22L凱還 此師之憂國也 弟子數十 唯以
012_0403_b_23L楓嵓 爲傳鉢之嫡子 此師之英育也
012_0403_b_24L八十二庚午 受楓嵓等之請 作襍華大

012_0403_c_01L천여 명의 어른들이 모여들었다. 이것이 곧 선사의 중생 구제였다.
87세 건륭 19년 갑술년(1854, 영조 30) 정월 2일에 가벼운 병을 보이더니, 3일 자시에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는 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작별의 게송을 말하였다.

凝圓一相誰能嗄  분명한 일원상을 누가 전승할 것인가
濶步乾坤露裸裸  맨몸 그대로 하늘과 땅을 활보한다네
踏着自家不壞珎  영원한 보배 그대로인 고향 돌아오니
獨尊獨貴唯稱我  이것을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 말하네
呵呵呵是什麽   하하하 그것은 도대체 무얼 말하던가
淨灑灑沒可把   청정하고 걸림 없어 잡을 수도 없다네

그러고는 단정하게 앉아서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던 날 밤에 열 줄기로 방광放光을 하였다. 2매枚의 사리를 수습하여 조계산 송광사와 팔영산 능가사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이것이 선사의 원적이었다. 세수는 87세이고, 법랍은 77년이다.
243. 조계종사 풍암 세찰 선사전曹溪宗師楓巖世察禪師傳
휘는 세찰世察이고 호는 풍암楓巖이며 속성은 김金씨로서 순천 송광면 장안 출신이다. 어머니 박朴씨는 꿈에 달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강희 27년 무진년(1688, 숙종 14) 12월 16일에 낳았다. 오뚝한 코와 매서운 눈초리를 지녔으며 용모가 훤칠하고 태도가 대범하였다. 동진 출가하여 동화사의 철웅 장로哲雄長老에게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 조계산의 무용 수연無用秀演과 영해 약탄影海若坦 두 대종장의 문하에서 경전을 배웠다. 무용 화상이 입적하자 선사가 복제服制143)하려고 하니, 영해 선사의 지시를 받아 그대로 추진하였다. 선사는 영해 선사의 문하에서 궁극의 깨침(鈯斧)을 터득하고 마침내 전의傳衣의 제자가 되었다. 이로부터 선사의 덕풍은 날개가 없이도 날았고 대중은 부르지 않아도 모여들었으며 조계의 법수法水가 바다 건너까지 적셔 주었고 강론講論과 전경傳經으로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에 설법을 듣지 않고도 스스로 교화한 것이 50여 년 지속되었다.
72세 기묘년(1759, 영조 35) 봄에 최눌㝡訥과 낭윤朗允 등의 청익請益을 받아들여 조계산 송광사 대도량에서 화엄대법회를 시설하였다.

012_0403_c_01L會 千人之長 此師之濟衆也 八十七
012_0403_c_02L乾隆十九甲戌一月二日微恙 三日子
012_0403_c_03L時 沐浴更衣 吿衆訣偈曰
012_0403_c_04L凝圓一相誰能嗄 濶步乾坤露裸裸
012_0403_c_05L踏着自家不壞珎 獨尊獨貴唯稱我
012_0403_c_06L呵呵呵是什麽 淨灑灑沒可把 端坐以
012_0403_c_07L逝 茶毘之夕 十道放光 二枚超骨 塔
012_0403_c_08L于曹溪八影 此師之圓寂也 壽八十七
012_0403_c_09L夏七十七

012_0403_c_10L

012_0403_c_11L曹溪宗師楓巖世察禪師傳

012_0403_c_12L
諱世察 號楓嵓 姓金 順天松光面長
012_0403_c_13L安人 母朴氏 夢月入懷有娠 康熙二
012_0403_c_14L十七年戊辰十二月十六日生 隆準鳳
012_0403_c_15L目 儀狀魁梧 童眞出家於桐華寺哲雄
012_0403_c_16L長老零染 受經於曹溪無用影海二大
012_0403_c_17L宗匠之家 無用和尙之示寂 師欲爲服
012_0403_c_18L制 影海揮而推之 師終得鈯斧於影師
012_0403_c_19L之家 竟作傳衣之子 自玆德飛無翼
012_0403_c_20L衆集不招 曹溪法水 遐沾海隅 講論
012_0403_c_21L傳經 陶養人材 不言而自化者 五十
012_0403_c_22L餘禩矣 至七十二己卯春 受㝡訥朗允
012_0403_c_23L等 所請 設華嚴大會於曹溪大道場
012_0403_c_24L「縉」疑「紳」{編}

012_0404_a_01L이로 인하여 그 깨침(鈯斧)과 신의信依가 묵암 최눌默庵㝡訥(1717~1790)과 응암 낭윤應庵朗允(1718~1794) 두 고족高足에게 전수되었다. 이것은 소위 손이 트지 않는 묘약(不龜手藥)을 아무한테나 팔지 않는 것(不鬻於客)144)으로 항상 전승되어 오는 가풍인데, 그 작용의 차이점을 누가 알아내겠는가.
80세 정해년(1767, 영조 43) 7월 8일에 병 없이 보조암普照庵에서 입적하였다. 가치리加峙里에서 다비를 하였는데 맹렬하게 불타는 속에서도 타지 않는 일물一物이 있었다. 이에 사람들은 그것을 백옥명주白玉明珠와 대함명주臺含明珠라 불렀는데, 그 색깔은 부처님의 미호광명眉毫光明과 같았고 형상은 두 눈처럼 생겼고 빛이 났다고 한다.
선사(大師)는 항상 준제삼매準提三昧에 들어 있었기 때문에 방장실에서도 호랑이의 액난을 모면하였다. 그것은 가히 무상광명無相光明 가운데 유위상有爲相을 드러냈고 무위법無爲法 가운데 대명효大明效를 터득한 것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북쪽 기슭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세수는 80세이고, 법랍은 70년이다.
244. 조계종사 묵암 선사전曹溪宗師默庵禪師傳
휘는 최눌㝡訥이고 자는 이식耳食이며 호는 묵암默庵이다. 속성은 박朴씨로서 본관은 밀양이며 고흥 장사촌長沙村 출신이다. 강희 56년【숙종 43년(1717)】 정유년 4월 18일에 태어났다. 5세 때 부모님을 따라서 낙안의 응계촌에 잠시 머물렀다. 6세 때 땅에 떨어져 있는 글씨를 보고는 곧 주워서 벽에다 붙여 놓고 말했다. “나는 장차 학문을 할 것인데 그것이 어찌 과거에 심어 둔 신령스러운 싹이 아니겠는가?”
14세 때(1730, 영조 6) 징광사澄光寺의 돈정 첨지頓淨僉知에게 출가하였다. 18세 때 만리 대사萬里大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9세 때 조계산의 풍암 세찰楓巖世察 화상한테 경전을 배웠는데 4, 5년 만에 풍암으로부터 모든 가르침을 받았다. 다시 제방의 법어를 배우고자 하여 호암虎巖·회암晦庵·용담龍潭·상월霜月 등 대종장에게 참문하였고, 명진明眞의 문하에서 선법을 깨쳤으며, 영해 약탄의 문하에서 절차탁마하였다.
27세 계해년(1743, 영조 19) 봄에 다시 풍암 화상의 처소로 돌아와서 도반 응암 낭윤과 더불어 영천암靈泉庵에서 풍암의 법인法印을 받았다. 아, 그리고 7, 8년 동안 대여섯 명의 대가들에게 참방하면서

012_0404_a_01L而仍以鈯斧信衣 傳于默庵應庵二高
012_0404_a_02L足 卽所謂不龜手藥不鬻於客 而常傳
012_0404_a_03L自家 誰知所用之異也哉 八十丁亥七
012_0404_a_04L月八日 無恙示寂于普照 茶毘于加峙
012_0404_a_05L得猛火聚中 不燒之一物 人稱白玉
012_0404_a_06L臺含兩個明珠 色如佛眉毫 狀若兩眼
012_0404_a_07L曜云 大師恒入準提三昧故 方丈室中
012_0404_a_08L免山君之厄 可謂無相光中 現有爲相
012_0404_a_09L無爲法中 得大明效也 塔于北麓 壽
012_0404_a_10L八十 夏七十

012_0404_a_11L

012_0404_a_12L曹溪宗師默庵禪師傳

012_0404_a_13L
諱㝡訥 字耳食 號默庵 姓朴 貫密陽
012_0404_a_14L高興長沙村人 康熙五十六年肅宗四
十三年

012_0404_a_15L酉四月十八日生 五歲隨父母 寓樂安
012_0404_a_16L鷹溪村 六歲凡見落地書字 卽拾付壁
012_0404_a_17L曰 我將學 豈非宿種靈芽 十四出家
012_0404_a_18L於澄光寺頓淨僉知 十八受具於萬里
012_0404_a_19L大師 十九受經於曹溪楓嵓和尙 四五
012_0404_a_20L年盡得所受敎 更要諸方語 叅虎嵓晦
012_0404_a_21L庵龍潭霜月等諸大宗匠 而悟禪於明
012_0404_a_22L眞之家 磋磨於影海之門 二十七癸亥
012_0404_a_23L春 復歸楓嵓和尙所 與朗允法友 同
012_0404_a_24L受法印於靈泉庵 噫 七八年間 飽叅

012_0404_b_01L선과 교학의 경론 및 내전과 외전의 서적들을 두루 다 열람하여 이전에 미처 개발하지 못했던 도리를 널리 베푼 곳이 많았다. 이에 법문을 하고 저술을 하여 『화엄과목華嚴科目(華嚴科圖)』과 『제경회요諸經會要』 등을 세간에 간행하였다. 그 밖에 내전과 외전의 다양한 저술 10여 권이 있었지만 간행하여 유포되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33세 때 도반 낭윤과 더불어 금강산으로 갔다. 경오년(1750, 영조 26) 봄에 송광사에서 영해 약탄 옹翁을 위하여 대재회를 시설하였고, 기묘년(1759, 영조 35) 가을에 이르러 다시 송광사(松社)에서 풍암 세찰 부父를 위하여 대재회를 시설하였다.
훌쩍 세월이 지나 을유년(1765, 영조 41) 여름에는 징광사에서 선조先祖 백암 성총의 비문을 창설剏設하였고, 이듬해 여름에는 마침내 송광사松廣社에다 비석을 건립하였다. 곧 문중의 어른들에 대하여 크게 공을 들인 것이 이와 같았는데, 항상 도반 낭윤과 더불어 의기투합(塤箎相和)145)하였다. 그래서 ‘법문 가운데서 덕을 알아주고 은혜에 보답해 주는 형제’라고 누가 말하지 않았던가.
54세 경인년(1770, 영조 46) 봄에 표충사表忠祠의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건륭 55년 경술년【정조 14년(1790)】 4월 27일에 병 없이 조계산 보조암에서 입적하였다. 다비를 마치고 유골을 수습하여 비등碑嶝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세수는 74세이고, 법랍은 54년이다.
245. 조계종사 응암 선사전曹溪宗師應庵禪師傳
휘는 낭윤朗允이고 자는 퇴옹退翁이며 호는 응암應庵으로 곡성 통명리通明里 출신이다. 속성은 초계草溪 최崔씨로서 아버지는 봉의鳳儀이고 어머니는 이李씨이다. 강희 57년【숙종 44년(1718)】 무술년 4월 15일에 태어났다. 숙세에 좋은 싹을 심어 놓은 까닭인지 어려서부터 부친의 가르침을 받았다. 13세 때 부모를 모두 여의고 일신의 곤궁함을 남에게 의탁하였다. 15세 때 삼신산三神山의 청학동靑鶴洞을 방문하여 학선鶴仙의 흔적을 찾아서 칠불암에 올라서 마음속에 품었던 경치를 마음껏 바라보니 진실로 머물기에 좋은 곳이었다. 덕균 장로德均長老를 따라서 머리를 깎았고, 17세 때 용담 대사龍潭大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8세 때 을묘년(1735, 영조 11)에 조계산의 풍암 세찰 강백을 참방하여 4, 5년 동안 그 스승과 함께 숙식을 하였고,

012_0404_b_01L五六大家 禪敎經論 內外書籍 略皆
012_0404_b_02L遍閱 尤宣前所未發處多矣 況吐辭成
012_0404_b_03L章 華嚴科目 諸經會要 刊行于世 其
012_0404_b_04L餘內外雜著十餘卷 恨未刊布 三十三
012_0404_b_05L與允友 作金剛行 庚午春設影海翁之
012_0404_b_06L大會於松廣寺 至己卯秋 又設楓嵓父
012_0404_b_07L之大會於松社 越乙酉夏 剏設栢庵先
012_0404_b_08L祖碑於澄光寺 明年夏終立石於松廣
012_0404_b_09L社 卽大有功於先門若此 而常與允友
012_0404_b_10L塤箎相和 孰不曰法門中知德報恩之
012_0404_b_11L兄弟哉 五十四庚寅春 行表忠之任
012_0404_b_12L乾隆五十五正祖
十四
庚戌四月二十七日 無
012_0404_b_13L疾奄寂於曹溪普照 茶毘收骨 樹塔于
012_0404_b_14L碑嶝 應身七十四 坐夏五十四

012_0404_b_15L

012_0404_b_16L曹溪宗師應庵禪師傳

012_0404_b_17L
諱朗允 字退翁 號應庵 谷城通明里
012_0404_b_18L人 姓草溪崔 父鳳儀 母李氏 康熙五
012_0404_b_19L十七肅宗四
十四年
戊戌四月十五日生 宿挺靈
012_0404_b_20L芽 早蒙庭訓 十三俱喪怙恃 一身難
012_0404_b_21L寄 十五訪三神之靑鶴洞 尋鶴仙之浪
012_0404_b_22L跡 登七佛庵 縱目憑懷 良可捿息 從
012_0404_b_23L德均長老薙髮 十七受具龍潭大師 十
012_0404_b_24L八乙卯 訪曹溪之楓嵓講伯 四五年渾

012_0404_c_01L지기인 묵암 최눌 사형과 더불어 제방을 유행하면서 오대종장五大宗匠을 참방하고, 구준衢樽146)의 술에 만취하기도 하였다.
26세 계해년(1743, 영조 19)에 다시 풍암이 강백으로 있던 영천암靈泉庵으로 돌아와서 최눌 사형과 더불어 한번 건당을 하니, 소위 사자굴 속에 다른 짐승이 없는 것과 같다고들 말하였다. 최눌과 낭윤의 두 사자가 풍암 문하에서 돌연히 출현하자 풍암 노사는 환희하며 크게 말하였다. “팔방의 눈 밝은 납자들이 이들 두 무외無畏147)로부터 나올 것이다.” 이 말이야말로 묵암과 응암의 지혜와 이해가 어떠했는지 이에 의거하여 증험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선사는 문득 교학을 그만두고 아자방亞字房에 들어가 좌선을 하였다. 일곱 번의 하안거를 지내고 지견知見이 드러나자 시주물이 더욱더 늘어났다. 방장산의 사대암四大庵과 영취산의 정수암淨水庵, 쌍봉산의 부도전浮屠殿, 조계산의 보조암普照庵·은적암隱寂庵 등이 모두 선사의 엄격한 지도(拈鎚竪拂)의 도량이 되었다.
32세 때 최눌 사형과 더불어 금강산으로 들어갔다. 경오년(1750, 영조 26) 도반 최눌과 더불어 조계산으로 돌아와 영해 약탄 옹翁을 위하여 대재회를 시설하였고, 기묘년(1759)에 다시 풍암 세찰 법부法父를 위하여 대재회의 예배를 시설하고 신의信衣를 받았다.
을유년(1765, 영조 41)에 선조先祖인 백암 성총의 비문을 세웠고, 선사先師인 풍암 세찰의 비를 세우는 일에 도반(同氣) 묵암과 서로 거들었으며, 도반(同聲)과 서로 힘을 합하였는데, 그들의 믿음에는 거짓이 없었다.
어느 날【호명虎鳴·무봉鵡峯·금봉錦峯】 등의 문인을 불러 놓고 말했다. “세월은 무상하고 신속하게 지나가니 대명大命은 갑자기 끝이 난다. 그대들은 삼가 부지런히 정진하며 속세의 반연에 신경을 쓰지 말라.” 말을 마치고 엄연하게 무성삼매無聲三昧에 들어갔다. 그때가 건륭 59년【정종대왕(정조) 18년(1794)】 갑인년 3월 17일 포시晡時(오후 4시)였다. 문인들이 호곡號哭을 하면서 색신色身을 받들어 염을 한 지 7일이 지나서 다비를 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석축을 쌓아서(層塚) 여법하게 모시고 삼가 유계遺誡를 받들었는데, 단지 진영만 조계산과 칠불암에 걸어 두었다. 세수는 78세이고, 법랍은 62년이다.
246. 조계종사 두월 선사전曹溪宗師斗月禪師傳
휘는 우홍禹洪이고 호는 두월斗月이며 속성은 김金씨로서 본적은 광산光山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원준元俊이고

012_0404_c_01L食其父牛 與知己訥兄遊方 叅五大宗
012_0404_c_02L匠 滿醉衢樽 二十六癸亥 復還楓嵓
012_0404_c_03L講軒於靈泉庵 與訥兄 一場建幢 卽
012_0404_c_04L所謂獅子崛中無異獸 兩箇獅兒 突出
012_0404_c_05L嵓下 嵓老歡喜大言曰 八方靑眼從此
012_0404_c_06L無畏云 兩庵之慧解 憑此可驗也 師
012_0404_c_07L頓捨敎網 歸坐啞房 七夏安居 知見
012_0404_c_08L發露 腥薌益彰 方丈之四大庵 靈鷲
012_0404_c_09L之淨水庵 雙峯之浮屠殿 曹溪之普照
012_0404_c_10L隱寂庵 皆師之拈鎚竪拂之場 三十二
012_0404_c_11L與訥兄 作金剛行 庚午伴歸曹溪 設
012_0404_c_12L影海翁之大會 己卯又設法父之大會
012_0404_c_13L拜受信衣 乙酉樹栢祖碑 先師之剏役
012_0404_c_14L同氣相救 同聲相應 信不誣矣 一日
012_0404_c_15L命門人虎鳴鵡
峯錦峯
等曰 無常迅速 大命俄
012_0404_c_16L遷 爾唯謹愼 勿罹世緣 言訖奄入無
012_0404_c_17L聲三昧 卽乾隆五十九年正宗十
八年
甲寅三
012_0404_c_18L月十七日晡也 門人等 呼奉色身 殯
012_0404_c_19L經七日 茶毘收骨 宜樹層塚 而謹守
012_0404_c_20L遺誡 但掛眞於曹溪七佛 壽七十八
012_0404_c_21L夏六十二

012_0404_c_22L

012_0404_c_23L曹溪宗師斗月禪師傳

012_0404_c_24L
諱禹洪 號斗月 姓金 籍光山 考元俊

012_0405_a_01L어머니는 박朴씨이다. 강희 23년(1684) 숙종 10년 갑자년 3월 5일에 태어났고, 영조 병자년(1756, 영조 32) 11월 20일에 조계산 송광사 천자암天子庵에서 입적하였다. 세수는 73세이다. 15세 때 출가하였고, 법랍은 58년이다. 화청化淸에게서 머리를 깎고, 해담海曇에게서 구족계를 받았으며, 참학한 곳은 풍암楓巖, 약충암若忠庵인데 화봉 장로華峯長老에게 마침내 그 법인을 인가받았다. 부휴 선수로부터 제7세148)이고 태고 보우로부터 제13세149)로서 종풍을 수립하였으며, 보시바라밀에 힘써 가히 보리달마의 마음이고 보현보살의 행원이라 할 만하였다.150) 정사년(1737, 영조 13)에 거듭 천자암을 구축하였고, 이듬해(1738년)에는 만세루萬歲樓를 개창하였다. 그리고 남의 힘을 조금도 빌리지 않고 몸소 양식을 조달하였으며, 도둑의 무리를 교화하여 양민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247. 조계종사 제운 선사전曹溪宗師霽雲禪師傳
휘는 해징海澄이고 호는 제운霽雲이며 속성은 제諸씨이고 본관은 칠원漆原이다. 아버지 이름은 석준碩俊이고 어머니는 배裵씨이다. 강희 58년(1719) 숙종 기해년 10월 13일 부府의 송광면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송광사의 법안 선사法顏禪師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고, 3년 만인 18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그 이듬해 풍암 세찰에게서 경전 공부를 하였다. 배운 경전을 읽고 나서 『화엄경華嚴經』 전부를 필사하는데 일 행一行마다 향을 하나 사르고 일 배一拜를 하였다. 필사를 마치고 그것을 전열展閱하던 날 밤에 붓과 벼루에서 한줄기 광명이 뻗쳤다. 그와 같이 신실하게 공을 들이고 배운 것이 7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출가자로서 종일 거품만 움켜쥐고 있으면 어느 누가 자기의 보배를 인식하겠는가?” 그리고 석장 하나와 발우 하나를 지니고 제방과 명산으로 유행한 지 10년 만에 예전의 사찰로 돌아왔다. 보조암에서 풍암 세찰의 법인을 받고 선종(心宗)의 밀인을 터득하여 마침내 교문의 횃불을 초월하였고, 이후로 이와 같이 50년을 보냈다.
가경 9년(1804) 순조 4년

012_0405_a_01L妣朴氏 康熙二十三年肅宗甲子三月
012_0405_a_02L五日生 英祖丙子十一月二十日 化于
012_0405_a_03L曹溪松廣天子庵 壽七十三 十五出家
012_0405_a_04L臈六十八 所零染者 化淸也 所受具
012_0405_a_05L戒者 海曇也 所叅學者 楓嵓若忠庵
012_0405_a_06L也 於華峯長老 竟佩其法印也 七世
012_0405_a_07L於浮休 而太古爲十四世云 樹宗風
012_0405_a_08L力檀度 可謂達摩心普賢行 丁巳重搆
012_0405_a_09L天子庵 明年剏萬歲樓 不借人一毫
012_0405_a_10L潛與己粮 而化群盜爲良云也

012_0405_a_11L

012_0405_a_12L曹溪宗師霽雲禪師傳

012_0405_a_13L
諱海澄 號霽雲 貫漆原 諸氏 父碩俊
012_0405_a_14L妣裵氏 康熙五十八年 肅宗己亥十月
012_0405_a_15L十三日 生于府之松光面 十五剃度寺
012_0405_a_16L之法顏禪師 三年而受具 翌年受業于
012_0405_a_17L楓嵓 讀所敎經畢 手寫華嚴經全部
012_0405_a_18L一行輙添香一拜 寫訖 展閱之方夕
012_0405_a_19L有一線光明 放筆硯間 其篤工劬學
012_0405_a_20L如是者七年矣 一日喟然曰 出家者
012_0405_a_21L竟日掬泡 孰與認自寶 乃一錫一鉢
012_0405_a_22L訪諸名山者十年 返于舊居 於普照受
012_0405_a_23L楓法印 得心宗密印 薪火敎門 遂以
012_0405_a_24L爲超斑 如是者五十年 嘉慶九年純朝

012_0405_b_01L갑자년 86세 때 뜻밖에 병을 보이더니, 고족인 봉의鳳儀 등을 불러 놓고 말했다. “아득하여라, 허깨비 같은 몸뚱이는 시절을 만나 태어났고 시절을 만나 죽는다네. 그런데 자성의 깨침 바다에는 그런 생사가 있겠는가, 없겠는가? 옛날에는 내 모습을 모사하였고 손으로 『화엄경』을 베꼈는데, 그것들이야 어찌 바깥의 그림자가 아니겠는가? 그대들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명심하여라. 시적하는 날은 무더우면서도 내내 청정할 터인데, 그 또한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10월 6일에 홀연히 입적하니 제자들이 다비를 하고 오랫동안 그 유언을 따르다가 광무 임인년(1902, 고종 39)에 동호東湖와 추파秋波 등이 돌을 쌓고 그 무덤에 봉안하였고, 그 이후 17년째인 무오년(1918)에 문도의 제자들이 남석藍石에 비명을 새겼다. 세수는 86세이고, 법랍은 69년이다.
248. 조계종사 벽담 선사전曹溪宗師碧潭禪師傳
휘는 행인幸仁이고 호는 벽담碧潭이며 본래 성은 장張씨이다. 아버지 이름은 봉수鳳守인데 가문은 인동仁同 장씨이고 어머니는 박朴씨이다. 강희 60년(1721) 경종 원년 신축년 2월 16일에 태어났다.
14세 때(1734, 영조 10) 송광사에 가서 풍암 세찰楓巖世察에게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이듬해 을묘년(1735, 영조 11)에 『화엄경』을 비롯한 제 경전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6년 만에 마쳤다. 이후 기사년(1749, 영조 25)에 대광大光에게서 건당을 하였다. 경오년(1750, 영조 26)에 보조암 강단에 올라서 강의를 하니 출가자와 재가자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기묘년(1759, 영조 35)에 대광 대사를 위해 재회를 주관하였고, 을미년(1775, 영조 51)에 다시 대흥사에서 대재회를 주관하였다.
건륭 20년(1755, 영조 31)에 사암 채영獅巖采永이 『해동불조원류海東佛祖源流』를 간행하였는데, 치우치고 잘못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사암 채영에게 찾아가서 뜨락에서 그것을 따지고는 거듭하여 그 판본을 불구덩이에 던져서 태워 버렸다. 사람들이 덕산 선감德山宣鑑151)과 자백 진가紫栢眞可152)의 유풍이 살아 있다고 말하였다.
정묘 22년(1798, 정조 22) 9월 29일에 시적하였다. 다비를 마치고 나서 당堂에 진영을 모시고 산기슭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또한 100여 년 후에

012_0405_b_01L甲子 年八十六 偶示病 詔高足鳳儀
012_0405_b_02L等曰 邈爾幻軀 適來適去 性覺海中
012_0405_b_03L是有耶 是無耶 疇昔模寫我相 手寫
012_0405_b_04L華嚴 豈不爲景外罔兩乎 汝等須體我
012_0405_b_05L意 示寂之日 并付炎天 例以淸淨 不
012_0405_b_06L亦宜乎 以十月六日 奄忽歸眞 弟子
012_0405_b_07L等 茶毘 遵其命而久之 光武壬寅 東
012_0405_b_08L湖與秋波等 攻石封塚 越十七年戊午
012_0405_b_09L門弟子勒銘于藍石 壽八十六 夏六十
012_0405_b_10L

012_0405_b_11L

012_0405_b_12L曹溪宗師碧潭禪師傳

012_0405_b_13L
諱幸仁 號碧潭 本張氏 父鳳守 家仁
012_0405_b_14L同 母朴氏 康熙六十景宗元年辛丑二
012_0405_b_15L月十六日生 十四投松廣寺 從楓嵓得
012_0405_b_16L度受具 明乙卯修襍花諸經 六年業卒
012_0405_b_17L越己巳建幢于大光 庚午登普照講壇
012_0405_b_18L緇素麋至 又己卯主大光大會 乙未又
012_0405_b_19L主大興寺大會 乾隆二十年間 獅嵓采
012_0405_b_20L永 刊海東佛祖源流 有偏曲之氣 故
012_0405_b_21L師卽赴 而廷詰之 仍投其板本于火坑
012_0405_b_22L而滅沒之 人稱爲德山紫栢之風存焉
012_0405_b_23L正廟二十二戊午九月二十九日 示寂
012_0405_b_24L茶毘已 妥眞于堂 塔于麓 又百餘年

012_0405_c_01L봉욱琫旭 등이 사찰에 그 비문을 건립하였다. 세수는 78세이고, 법랍은 65년이다.
249. 조계종사 해담 선사曹溪宗師海曇禪師【두월斗月의 은사이다.】
250. 조계종사 충암 선사曹溪宗師忠庵禪師
251. 조계종사 화봉 선사曹溪宗師華峯禪師
252. 조계종사 운봉 징안 선사曹溪宗師雲峯澄眼禪師【풍암楓巖의 법을 이은 10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253. 조계종사 백화 팔정 선사曹溪宗師白華八晶禪師
254. 조계종사 송담 신상 선사曹溪宗師松潭信祥禪師
255. 조계종사 정암 사인 선사曹溪宗師靜庵思仁禪師
256. 조계종사 화월 현간 선사曹溪宗師華月玄侃禪師
257. 조계종사 해운 상린 선사曹溪宗師海雲尙璘禪師
258. 조계종사 오봉 은현 선사曹溪宗師五峯隱玄禪師
259. 조계종사 묵암 최눌 선사曹溪宗師默庵㝡訥禪師153)
260. 조계종사 응암 낭윤 선사曹溪宗師應庵朗允禪師154)
261. 조계종사 송파 여심 선사曹溪宗師松坡呂諶禪師
262. 조계종사 제운 해징 선사曹溪宗師霽雲海澄禪師
263. 조계종사 청파 성우 선사曹溪宗師靑坡性宇禪師
264. 조계종사 유악 책현 선사曹溪宗師維嶽策賢禪師
265. 조계종사 선악 간혜 선사曹溪宗師禪嶽侃惠禪師
266. 조계종사 경암 돈화 선사曹溪宗師景庵頓和禪師
267. 조계종사 벽담 행인 선사曹溪宗師碧潭幸仁禪師
268. 조계종사 사월 극원曹溪宗師沙月極願【묵암默庵의 법을 이은 16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봉암 환해鳳巖幻海의 선법은 여기에 나열하지 않는다.】

012_0405_c_01L琫旭等 樹碑于寺 壽七十八 夏六十
012_0405_c_02L

012_0405_c_03L
012_0405_c_04L
曹溪宗師海曇禪師斗月師

012_0405_c_05L曹溪宗師忠庵禪師

012_0405_c_06L曹溪宗師華峯禪師

012_0405_c_07L曹溪宗師雲峯澄眼禪師楓嵓嗣十
012_0405_c_08L


012_0405_c_09L曹溪宗師白華八晶禪師

012_0405_c_10L曹溪宗師松潭信祥禪師

012_0405_c_11L曹溪宗師靜庵思仁禪師

012_0405_c_12L曹溪宗師華月玄侃禪師

012_0405_c_13L曹溪宗師海雲尙璘禪師

012_0405_c_14L曹溪宗師五峯隱玄禪師

012_0405_c_15L曹溪宗師默庵㝡訥禪師

012_0405_c_16L曹溪宗師應庵朗允禪師

012_0405_c_17L曹溪宗師松坡呂諶禪師

012_0405_c_18L曹溪宗師霽雲海澄禪師

012_0405_c_19L曹溪宗師靑坡性宇禪師

012_0405_c_20L曹溪宗師維嶽策賢禪師

012_0405_c_21L曹溪宗師禪嶽侃惠禪師

012_0405_c_22L曹溪宗師景庵頓和禪師

012_0405_c_23L曹溪宗師碧潭幸仁禪師

012_0405_c_24L曹溪宗師沙月極願默庵嗣十六 鳳嵓
幻海有傳不列此也


012_0406_a_01L
269. 조계종사 설곡 관혜 선사曹溪宗師雪谷冠惠禪師
270. 조계종사 모암 도일 선사曹溪宗師母庵道一禪師
271. 조계종사 서암 혜학曹溪宗師西庵慧學
172. 조계종사 신파 행수曹溪宗師信波幸修
273. 조계종사 동곡 치한曹溪宗師桐谷致閑
274. 조계종사 처송 식민曹溪宗師處松湜敏
275. 조계종사 무송 의인曹溪宗師撫松義仁
276. 조계종사 낙암 해정曹溪宗師洛庵海淨
277. 조계종사 보봉 맹척曹溪宗師寶峯孟陟
278. 조계종사 충담 영수曹溪宗師忠潭永守
279. 조계종사 금성 성운曹溪宗師錦性性云
280. 조계종사 팔송 승혜曹溪宗師八松勝慧
281. 조계종사 오운 기령曹溪宗師五雲璣玲
282. 조계종사 성봉 장언曹溪宗師聖峯莊彥
283. 조계종사 해붕 전령曹溪宗師海鵬展令
284. 조계종사 와월 교평曹溪宗師臥月敎萍【봉암鳳巖의 법을 이었다.】
285. 조계종사 죽암 회은曹溪宗師竹嵓會銀
286. 조계종사 완허 성서曹溪宗師翫虛性瑞
287. 조계종사 완월 축행曹溪宗師翫月竺行
288. 조계종사 봉월 광찬曹溪宗師鳳月廣粲【사월沙月의 법을 이었다.】
289. 조계종사 구봉 천유曹溪宗師九峯天有【설곡雪谷의 법을 이었다.】
290. 조계종사 경담 진현曹溪宗師鏡潭振賢【처송處松의 법을 이었다.】
291. 조계종사 영봉 표정曹溪宗師影峯表正【환해幻海의 법을 이었다.】
292. 조계종사 화악 재운曹溪宗師華嶽再芸【오운五雲의 법을 이었다.】

012_0406_a_01L曹溪宗師雪谷冠惠禪師

012_0406_a_02L曹溪宗師母庵道一禪師

012_0406_a_03L曹溪宗師西庵慧學

012_0406_a_04L曹溪宗師信波幸修

012_0406_a_05L曹溪宗師桐谷致閑

012_0406_a_06L曹溪宗師處松湜敏

012_0406_a_07L曹溪宗師撫松義仁

012_0406_a_08L曹溪宗師洛庵海淨

012_0406_a_09L曹溪宗師寶峯孟陟

012_0406_a_10L曹溪宗師忠潭永守

012_0406_a_11L曹溪宗師錦性性云

012_0406_a_12L曹溪宗師八松勝慧

012_0406_a_13L曹溪宗師五雲璣玲

012_0406_a_14L曹溪宗師聖峯莊彥

012_0406_a_15L曹溪宗師海鵬展令

012_0406_a_16L曹溪宗師臥月敎萍鳳嵓嗣

012_0406_a_17L曹溪宗師竹嵓會銀

012_0406_a_18L曹溪宗師翫虛性瑞

012_0406_a_19L曹溪宗師翫月竺行

012_0406_a_20L曹溪宗師鳳月廣粲沙月嗣

012_0406_a_21L曹溪宗師九峯天有雪谷嗣

012_0406_a_22L曹溪宗師鏡潭振賢處松嗣

012_0406_a_23L曹溪宗師影峯表正幻海嗣

012_0406_a_24L曹溪宗師華嶽再芸五雲嗣

012_0406_b_01L
293. 조계종사 호명 약운曹溪宗師虎鳴若運【응암應庵의 법을 이은 9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294. 조계종사 화악 평삼曹溪宗師華嶽評三【응암應庵의 법을 이었다.】
295. 조계종사 영암 등찬曹溪宗師影庵等瓚【응암應庵의 법을 이었다.】
296. 조계종사 무봉 섭화曹溪宗師鵡峯攝化【응암應庵의 법을 이었다.】
297. 조계종사 용운 어종曹溪宗師龍雲語宗【응암應庵의 법을 이었다.】
298. 조계종사 금봉 여옥曹溪宗師錦峯勵玉【응암應庵의 법을 이었다.】
299. 조계종사 몽성 지인曹溪宗師夢惺智仁【응암應庵의 법을 이었다.】
300. 조계종사 벽파 계파曹溪宗師碧波戒坡【응암應庵의 법을 이었다.】
301. 조계종사 인봉 영준曹溪宗師麟峯英俊【응암應庵의 법을 이었다.】
302. 조계종사 지성 선사曹溪宗師智性禪師【봉암鳳巖의 은사이다.】
303. 조계종사 한총 선사曹溪宗師翰聰禪師【환해幻海의 은사이다.】
304. 조계종사 완해 의준曹溪宗師翫海義準【와월臥月의 법을 이은 4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305. 조계종사 인봉 우현曹溪宗師仁峯友玹【와월臥月의 법을 이었다.】
306. 조계종사 응봉 의수曹溪宗師應峯義修【와월臥月의 법을 이었다.】
307. 조계종사 보광 경련曹溪宗師葆光敬璉【와월臥月의 법을 이었다.】
308. 조계종사 운한 장로曹溪宗師雲閑長老【퇴은退隱의 은사이다.】
309. 조계종사 해암 장로曹溪宗師海嵓長老
310. 조계종사 환응 장로>曹溪宗師喚應長老
311. 조계종사 봉곡 선사曹溪宗師鳳谷禪師【기봉奇峯의 은사이다.】
312. 조계종사 궤운 선사
313. 조계종사 성암 정은曹溪宗師聖庵定垠【봉월鳳月의 법을 이었다.】
314. 조계종사 인파 선사曹溪宗師印坡禪師【성암聖庵의 법을 이었다.】
315. 조계종 화운曹溪宗華雲【제운霽雲의 법을 이었다.】
316. 조계종 보광曹溪宗葆光【제운霽雲의 법을 이었다.】

012_0406_b_01L曹溪宗師虎鳴若運應庵嗣九員

012_0406_b_02L曹溪宗師華嶽評三應庵嗣

012_0406_b_03L曹溪宗師影庵等瓚應庵嗣

012_0406_b_04L曹溪宗師鵡峯攝化應庵嗣

012_0406_b_05L曹溪宗師龍雲語宗應庵嗣

012_0406_b_06L曹溪宗師錦峯勵玉應庵嗣

012_0406_b_07L曹溪宗師夢惺智仁應庵嗣

012_0406_b_08L曹溪宗師碧波戒坡應庵嗣

012_0406_b_09L曹溪宗師麟峯英俊應庵嗣

012_0406_b_10L曹溪宗師智性禪師鳳嵓師

012_0406_b_11L曹溪宗師翰聰禪師幻海師

012_0406_b_12L曹溪宗師翫海義準臥月嗣 四人

012_0406_b_13L曹溪宗師仁峯友玹臥月嗣

012_0406_b_14L曹溪宗師應峯義修臥月嗣

012_0406_b_15L曹溪宗師葆光敬璉臥月嗣

012_0406_b_16L曹溪宗師雲閑長老退隱師

012_0406_b_17L曹溪宗師海嵓長老

012_0406_b_18L曹溪宗師喚應長老

012_0406_b_19L曹溪宗師鳳谷禪師奇峯師

012_0406_b_20L曹溪宗師軌雲禪師

012_0406_b_21L曹溪宗師聖庵定垠鳳月嗣

012_0406_b_22L曹溪宗師印坡禪師聖庵嗣

012_0406_b_23L曹溪宗華雲霽雲嗣

012_0406_b_24L曹溪宗葆光霽雲嗣

012_0406_c_01L
317. 조계종 도봉曹溪宗道峯【벽담碧潭의 법을 이었다.】
318. 조계종 송악 투명曹溪宗松嶽透明【금파金波의 법을 이었다.】
319. 조계종 중봉 문성曹溪宗中峯文性【선운船運의 법을 이었다.】
320. 조계종 와암 획린曹溪宗臥嵓獲獜【선운船運의 법을 이었다.】
321. 조계종 악련 등수曹溪宗樂蓮等守【선운船運의 법을 이었다.】
322. 조계종 영송 염화曹溪宗咏松念華【금봉金峯의 법을 이었다.】
323. 조계종 눌암 조훈曹溪宗訥庵照焄【완화玩華의 법을 이었다.】
324. 조계종 중봉 우징曹溪宗中峯宇澄【완화玩華의 법을 이었다.】
325. 조계종 성월 서유曹溪宗聖月瑞薷【영암影庵의 법을 이었다.】
326. 조계종 봉성 위신曹溪宗鳳城偉信【몽성夢惺의 법을 이었다.】
327. 조계종 밀암 경찬曹溪宗密庵敬贊【몽성夢惺의 법을 이었다.】
328. 조계종 호봉 행정曹溪宗護鳳幸正【몽성夢惺의 법을 이었다.】
329. 조계종 남파 각초曹溪宗南波覺初【화월華月의 법을 이었다.】
330. 조계종 퇴암 화일曹溪宗退庵華一【화월華月의 법을 이었다.】
331. 조계종 성암 의수曹溪宗聖庵義修【운봉雲峯의 법을 이었다.】
332. 조계종 대운
333. 조계종 정담曹溪宗靜潭【기봉奇峯의 법을 이었다.】
334. 조계종 금담曹溪宗錦潭【기봉奇峯의 법을 이었다.】
335. 조계종 한담曹溪宗漢潭【기봉奇峯의 법을 이었다.】
336. 조계종 경담曹溪宗鏡潭【기봉奇峯의 법을 이었다.】
337. 조계종사 봉암 선사전曹溪宗師鳳巖禪師傳
휘는 낙현樂賢이고 속성은 김金씨이며 곡성谷城의 석곡石谷 출신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족적을 감추고 돌아다니다가 지리산 화엄사에 도착하였다. 거기에서 지성 장로智性長老에 의지하여 출가하고 구족계를 받았다.

012_0406_c_01L曹溪宗道峯碧潭嗣

012_0406_c_02L曹溪宗松嶽透明金波嗣

012_0406_c_03L曹溪宗中峯文性船運嗣

012_0406_c_04L曹溪宗臥嵓獲獜船運嗣

012_0406_c_05L曹溪宗樂蓮等守船運嗣

012_0406_c_06L曹溪宗咏松念華金峯嗣

012_0406_c_07L曹溪宗訥庵照焄玩華嗣

012_0406_c_08L曹溪宗中峯宇澄玩華嗣

012_0406_c_09L曹溪宗聖月瑞薷影庵嗣

012_0406_c_10L曹溪宗鳳城偉信夢惺嗣

012_0406_c_11L曹溪宗密庵敬贊夢惺嗣

012_0406_c_12L曹溪宗護鳳幸正夢惺嗣

012_0406_c_13L曹溪宗南波覺初華月嗣

012_0406_c_14L曹溪宗退庵華一華月嗣

012_0406_c_15L曹溪宗聖庵義修雲峯嗣

012_0406_c_16L曹溪宗大雲

012_0406_c_17L曹溪宗靜潭奇峯嗣

012_0406_c_18L曹溪宗錦潭奇峯嗣

012_0406_c_19L曹溪宗漢潭奇峯嗣

012_0406_c_20L曹溪宗鏡潭奇峯嗣

012_0406_c_21L

012_0406_c_22L曹溪宗師鳳巖禪師傳

012_0406_c_23L
諱樂賢 姓金 谷城石谷人 早孤遁跡
012_0406_c_24L轉到智異山華嚴寺 依智性長老 零染

012_0407_a_01L석장을 짚고 남쪽 지방을 유행하다가 조계산 묵암당 최눌 문하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4, 5년 동안 스승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고 스승의 밥을 먹고 스승의 법인을 받았다.
경술년(1790, 정조 14) 봄에 신의信衣를 부촉받고 궁극의 깨침을 전수받았는데, 그 법은法恩이 막중하여 혹 은혜에 보답하지 못할까 염려될 정도였다. 다시 화상의 휘하로 돌아와서 수년 동안 시봉한 뒤에 입적하자, 장례를 마치고 부도탑을 건립하는 것도 스스로 경륜經綸하였다. 원시요종原始要終155)한 후에 점차 남쪽 지방으로 유행하여 대흥사 성도암成道庵에 이르러 스스로 소림 가풍을 진작하여 문을 걸어 잠그고 벽관壁觀을 하면서 오로지 무상無常을 참구하느라고 수년을 보냈다.
갑인년(1794, 정조 18) 3월 3일에 병 없이 엄연하게 입적하였다. 다비하던 날 밤에 상서로운 광명이 하늘에 뻗쳤고, 영롱한 구슬이 재 속에서 발견되었지만 고족高足이 무지하여 그것을 파쇄해 버리고 말았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고 안타깝다.
338. 조계종사 환해 선사전曹溪宗師幻海禪師傳
호는 환해幻海이고 휘는 법린法璘이다. 속성은 임林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만창萬昌이며 어머니는 유柳씨이다. 건륭 14년【영조 25년(1749)】 기사년에 고흥 남면 분천리粉川里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는 시詩와 사史에 통달하였다.
16세 때 능가산의 한총 대사翰聰大師를 찾아갔고, 18세 때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승평의 조계산에 유화하면서 묵암 화상默庵和尙을 참방하였는데, 묵암 화상은 대번에 뛰어난 재목임을 알아보았고 삼장을 가르쳐 주었다. 이에 대승보살계(大戒)를 받고 의발衣鉢을 전수받았다.
28세 때 보조암普照庵에서 개당을 하자 수많은 수행납자들이 모여들었다. 이후로 능가楞伽·만경萬景·태안泰安·봉서鳳瑞 등 영호남의 단점壇坫156)에서 올곧게 선지禪旨를 만참晩參하였고, 틈이 나면 선지를 말로 내뱉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글이 되어 유고집으로 남게 되었다.
순조 18년 무인년(1818)에 만경암萬景庵으로 돌아갔고, 이후 경진년(1820) 5월 21일에 병 없이 시적하였다. 다비를 마친 이후에 문인 침명枕溟 등이 사리 3매枚를 수습하여 조계산의 비등碑嶝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이후 101년째에 해당하는 경신년(1920)에는

012_0407_a_01L受具 策杖南遊 至曹溪默庵堂下 四
012_0407_a_02L五年間 盡沾法雨 食其牛 佩其印 庚
012_0407_a_03L戌春付信衣 傳鈯斧 莫重法恩 恐或
012_0407_a_04L難報 還赴于和尙足下 汲侍數年 終
012_0407_a_05L喪葬塔 能自經綸 原始要終後 漸次
012_0407_a_06L南行 至大興成道庵 自作少林家風
012_0407_a_07L杜門壁觀 只求無常者數稔矣 甲寅三
012_0407_a_08L月三日 無疾而奄然 火浴之夕 祥光
012_0407_a_09L亘天 一珠超灰 有高足無知者破碎
012_0407_a_10L嗚呼嗚呼

012_0407_a_11L

012_0407_a_12L曹溪宗師幻海禪師傳

012_0407_a_13L
幻海其號 法璘其諱也 姓林 父萬昌
012_0407_a_14L母柳氏 以乾隆十四英祖二
十五年
己巳 生師
012_0407_a_15L于高興之南面粉川里 幼通詩史 十六
012_0407_a_16L投楞伽翰聰大師 十八祝髮受具 遊昇
012_0407_a_17L平之曹溪 叅默庵和尙 一見許以良驥
012_0407_a_18L涉三藏 受大戒 傳衣鉢 二十八開堂
012_0407_a_19L於普照庵 學者坌集 自後楞伽萬景
012_0407_a_20L泰安鳳瑞 嶺湖之壇坫 屹然晩叅禪旨
012_0407_a_21L暇而吐詞成章 有遺稿 純祖十八年戊
012_0407_a_22L寅 歸萬景庵 越庚辰五月二十一日
012_0407_a_23L無疾示寂 闍維後 門人枕溟等 收舍
012_0407_a_24L利三枚 塔于曹溪之碑嶝 越一百有一

012_0407_b_01L그 4세 후손인 호붕 진홍浩鵬振弘(1863~?)이 그 상족上足 포당布堂과 함께 비문의 건립을 의논하여 비명을 새겼다. 세수는 72세이고, 법랍은 56년이다.
339. 조계종사 회계 선사전曹溪宗師會溪禪師傳
휘는 휘종輝宗이고 호는 회계會溪이다. 속성은 장張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문칠文七이며 어머니는 이李씨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으로 곡성의 서면西面에 살고 있을 때 어머니는 성인의 교훈(聖訓)으로 태교胎敎를 하였다. 건륭 24년【영조 35년(1759)】 기묘년 2월 15일에 태어났다. 골상이 특이하였고 남들과 더불어 놀지 않았다. 8세 때 학교에 들어갔는데 외우지 못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재능이 거리마다 자자하였다. 밖으로는 자선慈善의 가르침을 받고 안으로는 가문의 교훈(庭訓)을 받들었으며 또한 속세를 벗어나는 길을 공부하였으니 어찌 맹모지천孟母之遷의 가르침뿐이었겠는가? 더욱이 양갓집 규수의 서신마저 거절하였다.
14세 임진년(1772)에 조계산으로 가서 벽담 대사碧潭大師의 발에 예배를 드리고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받았다. 16세 갑오년(1774, 영조 50) 봄에 처음으로 경전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8년이 안 되어 경전의 깊은 뜻을 모두 터득하여 마치 쪽(藍)과 꼭두서니(茜)가 본색을 잃는 것과 같았다. 24세 임인년(1782) 봄에 보조암의 조실에 들어가서 은부恩父의 법인을 받고 건당식을 하여 널리 대중을 제접하면서 선종의 종지를 크게 떨친 것이 십수 년이었다.
40세 정조 22년(1798) 무오년 9월 29일에 법부法父의 입적(大行)을 통곡하였는데, 하늘에 닿도록 애통해하였고 땅끝이 울리도록 두드리면서 멈추지 않았다. 3년에 걸친 복제服制를 마친 이후 경신년(1800)에 보조암 북쪽에 있는 풍탑楓塔의 왼쪽에다 법부의 영주탑靈珠塔을 건립하였다.
68세 병술년(1826)157) 봄에 문인들이 조계산에서 대재회를 시설하자 납자들이 전국에서 운집하였고 사부대중이 바람처럼 모여들었다. 이후 도광 15년(1835) 헌종 원년 을미년 11월 9일에 문인들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가려고 한다. 그대들은 잘 삼가라.” 말을 마치고 보조암의 방장실에서 입적하였다. 다비를 하여

012_0407_b_01L年庚申 四世孫浩鵬振弘 與上足布堂
012_0407_b_02L謀竪碑 勒其銘焉 壽七十二 夏五十
012_0407_b_03L

012_0407_b_04L

012_0407_b_05L曹溪宗師會溪禪師傳

012_0407_b_06L
諱輝宗 號會溪 姓張 父文七 母李氏
012_0407_b_07L本南原 寓谷城西面 母有胎敎之聖訓
012_0407_b_08L乾隆二十四英祖三
十五年
己卯二月十五日生
012_0407_b_09L骨相殊特 不與嬉戱 八歲入校 學無
012_0407_b_10L不誦 才譽喧巷 受慈善指噵 多蒙庭
012_0407_b_11L訓 亦以出塵之道敎之 何但孟母之遷
012_0407_b_12L敎 猶切良娘之書囑 十四壬辰 投曹溪
012_0407_b_13L禮碧潭大師之足下 祝髮受具 甲午春
012_0407_b_14L始就經 未及八年 盡得其奥旨 藍茜
012_0407_b_15L壞色 壬寅春入普照之室 佩恩父之印
012_0407_b_16L樹幢普接 大振宗敎者 十數年矣 正
012_0407_b_17L宗二十二年戊戌九月二十九日 哭法
012_0407_b_18L父之大行 終天之痛 叩地之極 無攸
012_0407_b_19L遞及 三年服制後 庚申竪法父靈珠塔
012_0407_b_20L于普照之北楓塔之左 六十六丙戌春
012_0407_b_21L門人等設大會於曹溪 八表雲集 四衆
012_0407_b_22L風馳 越道光十五憲宗元年乙未十一
012_0407_b_23L月九日 謂門人等曰 吾欲行矣 汝等
012_0407_b_24L愼哉 言訖而逝于普照之方丈 茶毘

012_0407_c_01L사리 2매枚를 수습하여 보조암의 서북쪽 모퉁이 그리고 풍탑의 오른쪽에 석총을 건립하였다. 세수는 77세이고, 법랍은 64년이다.
340. 조계종사 퇴은 선사전曹溪宗師退隱禪師傳
선사의 속성은 칠원漆原 제諸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한성漢城이다. 어머니는 강姜씨로서 진해 하구리河口里에서 살았는데, 그 부친과 조부(父祖) 대 이상은 순천에서 살았다. 건륭 32년【영조 43년(1767)】 정해년 5월 17일 을유일에 태어났다. 처음에 어머니가 꿈에 기이한 스님을 보고서 임신을 하였다. 어려서부터 냄새나는 채소를 좋아하지 않았고 또한 유희도 즐기지 않았다.
14세 경자년(1780, 정조 4)에 조계산의 운한 장로雲閑長老를 찾아가서 머리를 깎았고, 해암 선사海巖禪師를 계사로 삼아서 봉의鳳儀라는 법명을 받았다. 정조 6년 임인년(1782)에 묵암默庵의 강헌에 참문하여 5, 6년 동안 머물면서 삼장의 가르침(法乳)을 맛보았다. 24세 경술년(1790, 정조 14)에 남쪽으로 달마산과 두륜산 등을 유행하며 12강사講師에게 참문하였다.
30세 병진년(1796, 정조 20)에 법부 제운 화상霽雲和尙에게서 법의를 받고 호를 퇴은退隱이라 하였으며, 보조실普照室에서 개당하였다. 이후 무오년(1798, 정조 22)에 동리산桐裏山의 대중들로부터 청익을 받고 그것으로 나아가서 봉서암鳳瑞庵에 주석하였다. 이듬해에 혜철암慧徹庵으로 옮겼다. 동지同知(관직명) 의일宜日에게 탁발을 하자, 그가 집안의 재물을 내놓고자 발원하였다. 이로부터 5, 6년 동안에 걸쳐서 사찰을 지었고, 아울러 새롭게 불상과 시왕상十王像을 조성하여 날마다 혁신하였는데, 그것이야말로 모두 선사의 덕풍에서 불어 나온 것이었다.
갑술년(1814, 순조 14)에 조계산의 은적암隱寂庵에서 하안거를 하였고, 을해년(1815, 순조 15)에는 동리산의 미타전彌陀殿에서 안거를 하였다. 정축년(1817, 순조 17)에 환응 장로喚應長老와 더불어 금강산으로 갔다. 그리고 설악산과 낙가산 등 명승지를 유람하고 가을바람이 부는 시기에 다시 주석했던 산으로 돌아왔다. 신사년(1821, 순조 21) 겨울에 조계산으로 옮겼는데, 그때 마침 청나라의 어떤 고승【이름은 미상】이 찾아와서 예배를 하고 물었다. “스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특별히 바라는 것은 없지만, 무릇 자휘字彙라면 우리나라에서 보물이 될 듯합니다.” 그 승은 그렇겠다고 말하고 청국으로 돌아가서는 약속대로 자휘를 보내왔다.
갑신년(1824, 순조 24)에 명적암明寂庵에 주석하였다. 손수 초당 한 동을 짓고

012_0407_c_01L得舍利二枚 封塚于庵乾隅楓塔右 壽
012_0407_c_02L七十七 夏六十四

012_0407_c_03L

012_0407_c_04L曹溪宗師退隱禪師傳

012_0407_c_05L
師姓漆原諸氏 父漢城 母姜氏 世居
012_0407_c_06L鎭海河口里 父祖以上寓順天 乾隆三
012_0407_c_07L十二英祖四
十三年
丁亥五月十七日乙酉生 初
012_0407_c_08L母夢異僧而娠 幼不喜葷 亦不嬉戱
012_0407_c_09L十四庚子 投曹溪雲閑長老薙髮 以海
012_0407_c_10L嵓禪師爲戒師 法名鳳儀 正宗壬寅
012_0407_c_11L叅默庵講軒 費五六星霜 味三藏法乳
012_0407_c_12L二十四庚戌 南遊達摩頭崙 叅十二講
012_0407_c_13L師 三十丙辰 受衣於霽雲法父 號曰
012_0407_c_14L退隱 開堂于普照室 越戊午赴桐山之
012_0407_c_15L請 住鳳瑞庵 明年移慧徹庵 化緣宜
012_0407_c_16L日同知 同知願出家財 五六年間 剏
012_0407_c_17L修佛宇 及新造佛像 十王等像 一一
012_0407_c_18L革新 是皆師之德風所吼也 甲戌曹溪
012_0407_c_19L隱寂庵結夏 乙亥桐山彌陁殿安居 丁
012_0407_c_20L丑與喚應長老 作金剛行 雪嶽洛迦等
012_0407_c_21L名勝遊覽 秋風還山 辛巳冬移曹溪山
012_0407_c_22L有淸國高僧未記
氏名
適謁拜曰 師有願否
012_0407_c_23L別無願而但字彙卽鰈域奇珍也 僧應
012_0407_c_24L之歸國 如約返之 甲申住明寂 手搆

012_0408_a_01L좌선하는 여가에 『법화경法華經』 1부를 필사하였는데, 일 행마다 일 배씩 하여 끝마치고는 그것을 책으로 엮어서 수지독송受持讀誦하였다. 이것을 기타 일상의 글 쓰는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하늘과 땅만큼 현격한 차이가 났다. 계묘년(1843, 헌종 9) 겨울에 송광사 대법당에서 점안불사가 있었을 때 증명법사로 초청되었는데 선사는 사양하며 말했다. “나는 이처럼 큰 불사와는 거리가 멀다. 혹 청정한 불사를 오염시킬까 두렵다.” 그러고는 끝내 증명법사로 나아가지 않았고, 허주 덕진虛舟德眞으로 하여금 그 불사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이듬해(1844, 헌종 10) 2월 11일에 과연 병 없이 시적하였는데, 영감靈鑑(신불神佛의 영묘한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동리산의 기슭에서 다비를 하였다. 세수는 78세이고, 법랍은 64년이다.
341. 조계종사 와월 선사전曹溪宗師卧月禪師傳
선사의 속성은 지池씨이고 곡성군 석곡면 운월리雲月里【오늘날의 운룡리雲龍里】 출신이다. 아버지 이름은 득룡得龍이고 어머니는 이李씨이다. 건륭 25년【영조 36년(1760)】 경진년 4월 15일에 태어났다. 12세 때 고아가 되어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서 산야로 전전하면서 걸식을 하였다. 이에 동리산 태안사의 무성 수좌無性首座가 사랑하여 귀엽게 키워 주고는 머리를 깎아 주고 출가시켜 교평敎萍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주축呪祝과 염송念誦을 하였는데 마치 숙세의 버릇처럼 익숙하였다.
15세 갑오년(1774, 영조 50)에 봉암鳳巖을 따라 경전을 배웠는데 4, 5년도 되지 않아서 능통하였기 때문에 새끼 봉추鳳雛가 도리어 늙은 봉황을 이겼다고들 말하였다. 20세 기해년(1779, 정조3)에 조계산 묵암 선사의 강석에 참문하였는데 수많은 고승들이 다들 그 자리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오직 선사만이 뛰어난 재주에 있어서는 창암蒼巖158)의 묘법妙法을 능가하였고, 지혜와 이해에 있어서는 안광安光의 토론討論을 발현하였다. 이에 묵암 노사는 선법의 전승자로서 선사를 묵묵히 인정하였다.
25세 갑진년(1784, 정조 8) 봉암 노사의 부름을 받고 다시 동리산으로 들어가 혜철 국사慧徹國師159)의 도량에서 건당을 하여 봉암 노사의 조실에서 와월臥月이라는 호를 받았다. 봉암鳳庵에서 개당을 하여 널리 방외자들까지도 제접하기를 수기數紀(紀는 12년) 동안 하였다.

012_0408_a_01L草堂一棟 禪餘手寫法華經一部 每行
012_0408_a_02L一拜 成帙粧䌙 受持讀誦 比諸尋常
012_0408_a_03L翰墨 若天淵懸矣 癸卯冬有松廣大法
012_0408_a_04L堂 點眼佛事 請爲證明 師却曰 吾大
012_0408_a_05L行在邇 恐汚淸淨佛事 竟不赴 以虛
012_0408_a_06L舟德眞代行之 翌年二月十一日 果無
012_0408_a_07L疾示寂 其靈鑑盖如此 茶毘桐山之麓
012_0408_a_08L壽七十八 夏六十四

012_0408_a_09L

012_0408_a_10L曹溪宗師臥月禪傳

012_0408_a_11L
師姓池氏 谷城郡石谷面雲月里今雲
龍里

012_0408_a_12L父得龍 母李氏 乾隆二十五英祖三
十六
庚辰
012_0408_a_13L四月十五日生 年十二孤無托身 轉丐
012_0408_a_14L山野 抵桐山之泰安寺 有無性首座
012_0408_a_15L愛養之 薙髮得度 名敎萍 呪祝念誦
012_0408_a_16L如宿慣焉 十五甲午 從鳳嵓學經 不
012_0408_a_17L四五年 能通之 可謂朝生之鳳雛 反
012_0408_a_18L勝老鳳 二十己亥 叅曹溪之默庵講
012_0408_a_19L下 濟濟開士 多會于此 而唯師之穎
012_0408_a_20L鋒 專奪蒼嵓之妙法 慧解發見 安光
012_0408_a_21L之討論默老 默許爲傳禪之子 二十五
012_0408_a_22L甲辰 爲鳳老之招 還入桐山 建幢於
012_0408_a_23L徹國師之道場 佩印於鳳嵓師之室中
012_0408_a_24L號臥月 開堂鳳庵 普接方外者 數紀

012_0408_b_01L31세 경술년(1790, 정조 14) 봄에 조계산에서 묵암 노사의 입적에 통곡하였고, 다비를 하여 석총에 모셨으며, 그 요종要終을 경륜하여 마쳤다.
갑인년(1794, 정조 18) 2월에 성도암成道庵에서 봉암 노사의 부고를 받고는 밤을 잊고 달려가서 다비를 마치자 영롱한 구슬 하나가 나왔는데 미치광이 승려에 의하여 파괴되어 버렸으니 그 슬픔이 끝이 없다. 무상無相 가운데서 현상現相하였는데 다시 무상으로 돌아갔으니, 그 무無야말로 반본환원返本還源의 흔적이다. 같은 해 4월에 성도암이 무너지는 것을 염려하여 단월들을 불러 모아서 다시 보수를 시작하여 정사년(1797)에 낙성하였는데, 거기에 붙인 시는 다음과 같다.

殿閣重修仍舊墟  예전의 자리에 전각을 거듭 보수하니
煥然不下建新初  빛나는 모습이 신축한 것은 아니라네

가경 6년 신유년(1801, 순조 1)에 묵암 노사가 지은 『화엄품과華嚴品科(華嚴科圖)』와 『제경회요諸經會要』와 『묵암시집默庵詩集』과 『금강경간정기金剛經刊定記』 등을 간행하고, 그 기판記板을 진본사鎭本寺에 소장하였다. 그리고 모아 둔 판본을 조계산으로 옮겨 놓고 다시 다음과 같이 시로 읊었다.

樓上刊經涉兩月  누각에서 간경하는 데 두 달이 족히 걸리니
勞身費財不能形  육신은 피곤하고 또 재물은 충당되지 않네
非唯先集長行世  스승의 책들이 세간에 영원할 뿐만 아니라
亦使金剛萬古明  또한 금강석과 같이 만고에 밝게 빛나리라

묵암 스승이 기울인 처음의 노력은 맨발로 처음 쌓은 공적 아님이 없었으니, 가히 불교의 담악曇蕚이었고 선종의 추기樞機였다고 할 수가 있다. 선업先業이 이미 널리 퍼져 있고 그 공업功業이 좋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어찌 정업淨業의 안락이 될 것인가. 문득 번쇄한 교학(鈆槧)을 내던져 버리고, 청정하게 오롯이 앉아서 한줄기 청향이 다 타도록 네 시간(二時)마다 차가운 차를 들이켜고 밤새도록 경전을 읽고 염불을 하며 오직 무상無常을 추구한 것이 10여 년이 넘었다. 어느 날 문도들을 불러 놓고 게송으로 말했다.

幻身難保     허깨비 같은 몸은 보존하기 어려우니
世緣易謝     세상의 인연이 다하면 다 지나 버리네
吾何久住     그러니 내가 어찌 오랫동안 머무르랴
爾等愼哉     그대들 삼가 진력하여 잘 정진하거라

말을 마치고는 조용하게 입적하였는데, 도광 12년(1832) 임진년 2월 15일이었다. 세수는 73세이고, 법랍은 57년이다.

012_0408_b_01L矣 庚戌春哭默老於曹溪 茶毘封塚
012_0408_b_02L經綸要終 甲寅二月 聞鳳老訃於成道
012_0408_b_03L庵 罔夜馳走 茶毘已 超然一珠 爲狂
012_0408_b_04L僧所壞 嗚呼罔極 無相中現相 還歸
012_0408_b_05L無相 無乃反本還源之迹歟 同年四月
012_0408_b_06L慮本庵之顚仆 叫化檀門 經營剏繕
012_0408_b_07L至丁巳竣功 其詩云

012_0408_b_08L殿閣重修仍舊墟 煥然不下建新初

012_0408_b_09L嘉慶六年辛酉 默老所述華嚴品科 諸
012_0408_b_10L經會要 及詩集 金剛經刊定記 并刊
012_0408_b_11L板而記板 藏鎭本寺 集板移于曹溪
012_0408_b_12L又詩云

012_0408_b_13L樓上刊經涉兩月 勞身費財不能形

012_0408_b_14L非唯先集長行世 亦使金剛萬古明

012_0408_b_15L以其先師之剏役 莫不跣足而倡㘞之
012_0408_b_16L可謂釋苑之曇蕚 宗門之樞機 先業旣
012_0408_b_17L周 功業雖好 何如淨業之安樂哉 頓
012_0408_b_18L掃鈆槧 淨單打坐 一炷淸香 二時冷
012_0408_b_19L茶 書讀夜念 只求無常者 餘十稔矣
012_0408_b_20L一日詔門徒曰

012_0408_b_21L幻身難保 世緣易謝

012_0408_b_22L吾何久住 爾等愼哉

012_0408_b_23L言訖奄然 道光十二壬辰二月十五日
012_0408_b_24L壽七十三 夏五十七

012_0408_c_01L
342. 조계종사 기봉 선사전曹溪宗師奇峯禪師傳
휘는 장오藏旿이고 자는 은옹隱翁이며 호는 기봉奇峯이고, 속성은 최崔씨로서 본관은 전주인데 후에 화순으로 옮겨 살았다. 아버지 이름은 보석寶錫이다. 어머니는 조曹씨인데, 별이 떨어지고 호랑이가 울부짖으며 범승이 석장을 주는 꿈을 꾸고 깨어나서 임신을 하였다. 건륭 41년【영조 52년(1776)】 병신년 10월 2일에 태어났다. 나이 12세 때 경사經史를 널리 읽었다. 정미년(1787, 정조 11)에 부모를 잃고 묘지에서 3년의 복제를 마쳤는데도 맛있는 음식을 보면 문득 울면서 먹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것을 기이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동생과 함께 숙부에게 의탁하였지만 학문에 더욱더 전심하였다. 후에 고향의 현령을 따라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태학에서 공부하였다.
몇 년 후에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개탄하며 불도를 추구하였다. 전주의 봉서사鳳捿寺로 찾아가서 궤운軌雲 법사에 의지하여 머리를 깎고, 봉곡鳳谷 법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유방하다가 조계산의 묵암 선사默庵禪師에게 참문하였고, 두월 선사斗月禪師에게 경전을 배웠으며, 득법한 후에는 보조암에 주석하였다.
4년이 지난 후에 낙안의 징광사澄光寺와 곡성의 태안사泰安寺와 남원의 천은사泉隱寺에 나아가 13년 동안 경전을 강의하였다. 법을 전수한 스님이 시적하자 (본사로 돌아와서) 정토왕생하기를 천도하고 명복을 빌어 주었다. 또한 방장산에서 『화엄경』의 요청을 받고 그곳에 나아가서 3년 동안 경전을 강의하였는데, 어느 날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삼장을 강의하느라고 혀를 내두르면서 일생을 허비하였다.” 그러고는 칠불암의 아자방亞字房에서 침묵수행을 하였고, 삼일선원三日禪院에서 좌선수행(澄心)을 수년 동안 한 연후에 지견知見을 결택받고는 흉금이 시원하였다.
67세 임인년(1842) 3월 본사에 화재가 일어나서 2,152칸이 모두 불에 타 버렸다. 이에 대중이 갈팡질팡하면서 재건하는 데 앞장서서 지휘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자 67세인 선사가 계좌戒佐인 용운龍雲과 함께 서울에 나아가서 당시 재상이던 권돈인權敦仁을 찾아뵙고 재삼 왕복하면서 내막을 상세하게 말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특별히 공명空名의 칙첩勅帖 700장을 받아 가지고 돌아와서 불타 버린 모든 건물을 재건하였다. 그러고는 사찰의 모든 재건은 오직 용운 법사에게 맡겨 두고 선사는 물러나서 좌선을 즐겨하였다. 이에 벽관壁觀과 송념誦念으로 일관하면서도 선사는 오직 사찰의 재건에 장애가 없는 것만 도모하였다. 이에 3년 만에 낙성을 하였다.

012_0408_c_01L曹溪宗師奇峯禪師傳

012_0408_c_02L
諱藏旿 字隱翁 號奇峯 姓崔 本全州
012_0408_c_03L後移和順 父寶錫 母曺氏 夢星落虎
012_0408_c_04L鳴 梵僧授杖 覺有娠 乾隆四十一年
012_0408_c_05L英祖五
十二年
丙申十月二日生 年十二遍讀經
012_0408_c_06L史 丁父母憂 墓終三年服 遇佳饌 輙
012_0408_c_07L泣不食 人莫不異之 與幼弟併托于叔
012_0408_c_08L父 尤專心學問 後隨本縣令 同上京
012_0408_c_09L師 遊太學 踰年還 慨然求道 投于全
012_0408_c_10L州之鳳捿寺 依軌雲祝髮 受戒于鳳谷
012_0408_c_11L遊方叅曹溪之默庵 學經於斗月得法
012_0408_c_12L仍住普照 越四年赴于樂安澄光谷城
012_0408_c_13L泰安南原泉隱 講授十三載 以法傅示
012_0408_c_14L寂還本 薦淨業 資㝠福 而又赴方丈
012_0408_c_15L華嚴之請 三年講授 喟然歎曰 掉舌
012_0408_c_16L于三藏 徒費一生 杜口於七佛啞房
012_0408_c_17L澄心於三日禪院者 有年矣 決擇知見
012_0408_c_18L灑落胸襟也 壬寅三月 本寺回祿 二
012_0408_c_19L千一百五十二間 都入煨燼 大衆罔措
012_0408_c_20L無倡首者 師年六十六 與戒佐龍雲
012_0408_c_21L走京謁時相權公敦仁 備陳情由 徃
012_0408_c_22L返再三 特蒙空名勅帖七百張以歸 凡
012_0408_c_23L諸剏業 專囑龍雲 退坐慈靜 壁觀誦
012_0408_c_24L念 只圖剏事無障 越三年吿竣耳 咸

012_0409_a_01L
함풍 3년 계축년【철종 4년(1853)】 8월 16일에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문인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세상은 본래 무상하다. 나는 이제 떠나간다.” 그러고는 결가부좌를 하고 합장한 채로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법손인 허주虛舟와 덕진德眞 등이 다비를 마치고 나서 기록을 찬술하여 후대에 남겼는데, 제4세손에 해당하는 두성斗性이 돌을 옮겨 놓고 글을 새겼다. 세수는 78세이고, 법랍은 63년이다.
343. 조계종사 침명 선사전曹溪宗師枕溟禪師傳
휘는 한성翰惺이고 호는 침명枕溟이며 속성은 경주 김金씨인데 대대로 고흥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통정通政(문관의 정3품 당상관堂上官의 품계)으로서 이름이 이혁以赫이고 어머니는 신창 맹孟씨이다. 가경 6년(1801, 순조 1) 신유년에 태어났다. 남들보다 총민하고 지혜가 있었으며 세속을 벗어날 상像을 지니고 있었다.
15세 을해년(1815, 순조 15)에 출가하여 입으로는 대운大雲의 경전을 부지런히 배우고 마음으로는 백파白坡160)의 선법을 부지런히 배웠다. 팔영산 영봉당影峯堂에게서 건당하였고, 조계산 보조암의 실중室中에서 개당하였다. 삼일암三日庵과 칠불원七佛院에서 안거를 하였고 사산四山을 유력하면서 수많은 선지식에게 참문하였다.
무술년(1838, 헌종 4) 봄에 태안사 봉서암鳳瑞庵으로부터 조계산 은적암隱寂庵으로 옮겨서 선오善旿와 지효至孝라는 시자를 두었다. 이후에 선암사 대승암大乘菴으로 주석처를 옮기자 설법을 들으려고 출가자는 노을처럼 밀려들었고 신도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30년 동안 강석을 펼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었는데 천하의 문하생이 모두 침명의 문하에 속하였고 성중의 용상龍象들도 모두 이 침명에게서 배출되었다.
마침내 설저雪渚에게 전법한 이후 달마의 종지를 깊이 참구하였는데 나이가 들어 갈수록 더욱더 크게 힘쓴 것이 23년이었다. 노년에 눈이 침침해진 이후에야 문인들이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초상화가 벽에 걸렸는데 손으로 쓰다듬어 만져 보고 알아차리고는 다음과 같이 시로써 교훈을 써 넣었다.

曲肱爲枕臥南溟  팔을 구부려 베개를 삼아 남쪽 바다에 누워서
翰墨場中夢未惺  필묵의 도량에서 꾸는 꿈 아직 깨지도 않았네161)
名號從知非實事  명호는 지해에서 나왔으니 실제 사실 아니건만
出門木像豈眞形  문밖에 벗어난 목상이 어찌 참모습일 것인가


012_0409_a_01L豊三年癸丑哲宗
四年
八月十六日 洗浴更衣
012_0409_a_02L召門人曰 世自無常 吾今行矣 結趺
012_0409_a_03L合爪 寂然而化 法孫虛舟德眞等 茶
012_0409_a_04L毘已 撰錄遺之 四世孫斗性 運石勒
012_0409_a_05L銘 壽七十八 夏六十三

012_0409_a_06L

012_0409_a_07L曹溪宗師枕溟禪師傳

012_0409_a_08L
諱翰惺 枕溟其號 姓金 系慶州 世居
012_0409_a_09L高興 父通政以赫 母新昌孟氏 嘉慶
012_0409_a_10L六年辛酉生 而聰慧過人 有脫塵之像
012_0409_a_11L十五乙亥出家 勤于學 口大雲之經
012_0409_a_12L心白坡之禪 建幢於八影之影峯堂下
012_0409_a_13L開堂於曹溪之普照室中 三日庵七佛
012_0409_a_14L院安居 遊歷四山 參諸知識 至戉戌
012_0409_a_15L春 自泰安之鳳瑞 移于曹溪隱寂庵
012_0409_a_16L率侍者 名善旿 至孝也 後移錫於仙
012_0409_a_17L嵓之大乘菴 聲聞霞蔚 聽徒雲集 三
012_0409_a_18L十年間 無日不講法 天下桃李 盡在
012_0409_a_19L其門 域中龍象 皆出此溟 竟傳法于
012_0409_a_20L雪渚 深究達摩宗旨 老益矻矻 二十
012_0409_a_21L有三年 晩歲眼眩 門人不吿 塑影掛
012_0409_a_22L于壁 乃撫而知之 詩以訓曰

012_0409_a_23L曲肱爲枕臥南溟 翰墨場中夢未惺

012_0409_a_24L名號從知非實事 出門木像豈眞形

012_0409_b_01L
광서 2년(1876, 고종 13) 병자년 9월 30일에 이르러 시적하였다. 세수는 76세이고, 법랍은 62년이다. 다비를 마치고 보조암과 대승암에 진영眞影을 걸어 두었다. 이후 손제자 운악雲岳이 독판獨辦으로 사재를 털어서 돌을 다듬고 비명을 새겼다.
344. 조계종사 이봉 선사전曹溪宗師离峯禪師傳
휘는 낙현樂玹이고 자는 천연天然이며 호는 이봉离峯이다. 그 선조는 가락국의 왕족인데, 아버지는 김원중金願中이다. 어머니는 박朴씨인데 영암으로부터 나주로 옮겨 살았다. 가경 9년【순조 4년(1804)】 갑자년에 태어났다.
13세 때 청계사淸溪寺에서 머리를 깎았고, 제방을 유력하다가 조계산의 회계會溪한테서 경법을 배웠고, 30세 때 승당升堂하여 그 종풍을 진작하였다. 또한 장흥의 보림사로 옮겼다. 중년의 나이에 멀리 금강산과 태백산을 유력하였고, 두류산의 옥보대玉寶臺에서 하안거를 보냈다. 천봉산天鳳山에 주석하다가 만년에 조계산의 보조암으로 옮겼다.
세수 87세 때 2월 12일에 미약한 병을 보이자, 게송을 써 놓고는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이때가 광서 17년【금상인 고종 28년(1891)】 신묘년 2월 12일이었다. 3일 지나서 북봉北峰에서 다비를 마치고 동각東閣에다 진영을 모셨다. 그로부터 28년 후에 문손인 우송友松 등이 조계산 문밖의 새로운 비등碑嶝에다 돌을 다듬고 비명을 새겼다. 법랍은 75년이다.
345. 조계종사 용운 선사전曹溪宗師龍雲禪師傳
휘는 처익處益이고 자는 경암警庵이며 호는 용운龍雲이다. 속성은 완산 이李씨이며 아버지 이름은 춘필春弼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朴씨인데 남원에서 곡성으로 옮겨 살았다. 가경 18년【순조 13년(1813)】 계유년 10월 7일에 태어났다. 어머니 박씨는

012_0409_b_01L至光緖二年丙子九月三十日示寂 壽
012_0409_b_02L七十六 夏六十二 茶毘已 掛眞于普
012_0409_b_03L照菴與大乘庵 後孫雲岳 獨辦自財
012_0409_b_04L攻石勒銘

012_0409_b_05L

012_0409_b_06L曹溪宗師离峯禪師傳

012_0409_b_07L
諱樂玹 字天然 號离峯 其先駕洛王
012_0409_b_08L族 考金願中 妣朴氏 自靈嵓 寓羅州
012_0409_b_09L嘉慶九年純祖
四年
甲子生 十三薙髮於淸溪
012_0409_b_10L寺 遊歷諸方 從曹溪之會溪 學得經
012_0409_b_11L法 三十升堂 振其宗風 又移長興之
012_0409_b_12L寶林寺 中歲遠遊金剛太白 坐夏於頭
012_0409_b_13L流之玉寶臺 自天鳳山 晩至曹溪之普
012_0409_b_14L照 壽八十七歲 二月十二日示微疾
012_0409_b_15L書偈訖 寂然歸眞 卽光緖十七年今上二
十八年

012_0409_b_16L辛卯二月十二日也 越三日茶毘北峯
012_0409_b_17L掛眞東閣 後二十八年 門孫友松等
012_0409_b_18L攻石勒銘于曹溪門外新碑嶝 夏七十
012_0409_b_19L

012_0409_b_20L

012_0409_b_21L曹溪宗師龍雲禪師傳

012_0409_b_22L
諱處益 字警庵 號龍雲 姓完山李 父
012_0409_b_23L春弼 母密陽朴氏 自南原 寓谷城 嘉
012_0409_b_24L慶十八年純廟十
三年
癸酉十月七日生 朴夢

012_0409_c_01L어떤 범승梵僧이 가사를 걸치고 자기에게 예배드리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 자라서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는 배움에 있어 외우지 못한 것이 없었다.
15세 때 조계산으로 찾아가서 남일南日을 은사로 하고, 기봉奇峯에게서 계를 받았으며, 제봉霽峰에게서 선법을 받았다. 침명枕溟과 인파印坡와 성암惺庵에게 참문하여 배우는 즉시 향상사向上事를 알았다.
27세 때 보봉寶峯의 조실祖室에 향을 살랐다.162) 그리고 그해 곧 기해년(1839, 헌종 5)에 해남 표충사表忠祠의 원장으로 나아갔는데, 대인大人(은사 남일)의 병환에 대한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와서 손가락의 피를 내어 갱생시켰다.
때는 임인년(1842, 헌종 8) 3월의 어느 날 밤에 갑자기 사찰의 요사채 2,152칸이 완전히 연기에 휩싸여 사람과 하늘이 모두 슬퍼했다는 안타까운 보고를 받았다. 그때 선사의 나이는 30세였는데, 그것을 복구하려고 단단히 마음을 잡고 계사戒師 기봉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서 당시의 재상 권돈인權敦仁을 찾아뵙고 내막을 상세하게 말하였다. 이에 멀리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찾아와서 복구에 동참한 사람이 그 전후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고 특별히 칙첩勅帖 700장을 받아서 예조禮曹에 권축勸軸으로 보내 놓고 돌아왔다.
계사 기봉 화상이 나이가 들어 물러났지만 선사가 법력을 다하자 시주자들이 모여들었다. 이로써 그해(1842, 헌종 8) 여름부터 갑진년(1844, 헌종 10)에 이르러 보궁寶宮과 법우法宇가 점차 웅장하고 아름답게 제 모습을 갖추고 어지러운 모습이 정리되자 온전히 옛날의 경관이 복구되었다. 그리고 정미년(1847, 헌종 13)에는 모든 불사가 완성되었다. 그 밖의 일곱 전각과 여덟 암자 등 모든 누관樓觀의 흥폐興廢는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해남의 표충사를 비롯하여 산양의 죽원암과 곡성의 길상암과 천태암 그리고 운봉의 백장암과 금산의 장륙상丈六像과 완산 송광사에 이르기까지 삼존불에 도금불사하여 모두 서상을 드러내었다. 통도사 계단戒壇과 해인사 장경각의 팔만경판과 광주 봉은사에서도 인연을 따라 수리하였다.
선사는 기미년에 다시 표충사에 나아가서 총섭의 임무를 맡았다. 이에 도내의 승통이 흐트러진 곳에 대해서는 순영巡營(감사가 직무를 보던 관아)에 보고하도록 하여 인장을 없애고 폐해를 제거하였다.
병인양란(1866, 고종 3) 때는 본도本道에 직접 지시를 내려 의승장義僧將에게 적장의 행보를 살피게 하여 주둔해 있던 배를 퇴각시켰다.

012_0409_c_01L一梵僧 着1)袈而禮有娠 甫髫齕 學無
012_0409_c_02L不誦 十五投曹溪 南日爲師 得戒于
012_0409_c_03L奇峯 受禪于霽峰 叅枕溟印坡惺庵
012_0409_c_04L學卽知向上事 二十七拈香於寶峯室
012_0409_c_05L己亥赴海南表忠祠任 聞大人疾報馳
012_0409_c_06L還 斫指得甦 時日壬寅三月夜半 欝
012_0409_c_07L攸吿警 佛宇僧寮二千一百五十二間
012_0409_c_08L蕩爲煙塵 人天忉怛 師時年三十 銳
012_0409_c_09L意復舊 陪戒師奇峯 走京謁時相權
012_0409_c_10L公敦仁 竭誠吿陳 跋涉塗努者 前後
012_0409_c_11L莫算 特蒙勅帖七百紙 與禮曺勸軸而
012_0409_c_12L還 戒師以老退居 法力所到 檀門歙
012_0409_c_13L集 自同年夏 至甲辰春 寶宮法宇 次
012_0409_c_14L第輪奐 凡繫周章 盡復舊觀 至丁未
012_0409_c_15L無不畢擧 其餘七殿八庵 凡諸樓觀之
012_0409_c_16L興廢者 指不勝2)縷 洎海南之表忠 山
012_0409_c_17L陽之竹原 谷城之吉祥 天台雲峯之百
012_0409_c_18L丈 金山之丈六像 完山之松廣三佛鍍
012_0409_c_19L金 皆現瑞 抑通度之戒壇 海印之經
012_0409_c_20L閣經板 廣州之奉恩寺 隨緣建修 己
012_0409_c_21L未再赴表忠祠㧾攝任 以道內僧統之
012_0409_c_22L瘼 吿于巡營 銷印袪害 丙寅洋亂 本
012_0409_c_23L道直指 使以義僧將 督招將行 以舶
012_0409_c_24L「袈」下疑脫「裟」{編}「縷」疑「數」{編}

012_0410_a_01L어떤 스님이 선사를 가엾게 여겨서 나한전에서 7일 동안 기도를 하니 꿈에 푸른 옷을 걸친 어떤 동자가 말을 전했다. “용운 선사는 소백산의 신령인데 이곳에 내려와서 사문의 모습을 보인 것이 세 번째입니다.”
기묘년(1879, 고종 16) 여름에 가사 81벌(大九品)을 만들어서 생전예수시왕생칠재生前豫修十王生七齋를 지냈는데 회향하던 날에 상서를 보였다.
병술년(1886, 고종 23)에 동방장산東方丈山에 안치했던 세 전각의 패를 중수하였는데, 선사와 같은 사람을 가리켜 진실로 법문法門에서 크게 공을 쌓은 사람이라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광서 14년 무자년(1888, 고종 25) 5월 5일 조용히 입적하였다. 세수는 76세이고, 법랍은 61년이다. 북봉北峯에서 다비를 하고 그 동쪽에 모셨다. 이후 9년째 되는 병신년(1896, 고종 33)에 문손 법선法宣과 영우靈祐 등이 돌을 다듬고 비명을 새겼다.
346. 조계종사 기룡 선사전曹溪宗師麒龍禪師傳
휘는 활해濶海이고 자는 운강雲江이며 호는 기룡麒龍이고, 속성은 황黃씨이고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아버지 이름은 봉수鳳秀이고 어머니는 이李씨이다. 가경 20년【순조 15년(1815)】 을해년 2월 18일에 순천군 황전면 동고리東古里에서 태어났다. 10세에 입학을 하였고, 15세에 경사에 통달하였으며, 배운 것은 반드시 가르쳤고, 본 것은 반드시 그것을 외웠다. 이에 고향 사람들은 선사를 동몽교원童蒙敎員이라 불렀다. 17세와 18세 연속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여의고, 묘지에서 3년의 복제를 마쳤다.
20세 갑오년(1834, 순조 34) 봄에 동리산의 태안사로 찾아가서 낙천 화상樂天和尙에게 머리를 깎고 퇴은 율사退隱律師에게 계를 받았다. 병신년(1836, 헌종 2)에 침명 한성枕溟翰惺의 강헌에 참문하여 경전을 배웠고, 인파印坡를 찾아뵙고 선법을 받았으며, 성암에게서 역사를 배웠고, 기봉에게서 장자(莊文)를 공부하였다. 28세 임인년(1842, 헌종 8) 조계산 화봉의 조실에서 법인을 받고 은적암에 주석하며 개당하여 법문을 강의하였다.
갑인년(1854) 봄에 『화엄경』의 「정행품淨行品」을 읽다가 책을 덮고는 탄식하여 말했다. “삼천대천세계만큼의 경권도 오직 한 줌의 지게미로다. 일생 동안 사구死句만 먹는다면 누구에게 활구를 참구토록 할 수 있겠는가?”

012_0410_a_01L退而止 有僧欲憾師者 祈羅漢七日
012_0410_a_02L夢一靑衣傳曰 龍雲卽小白山靈 降作
012_0410_a_03L沙門示者 三也 己卯夏設大九品 十
012_0410_a_04L王生七齋 回向有瑞 丙戌修東方丈
012_0410_a_05L安三殿牌 如師者 眞可謂大有功於法
012_0410_a_06L門 非過語也 光緖十四年戊子五月五
012_0410_a_07L日 奄然而化 壽七十六 夏六十一 茶
012_0410_a_08L毘北峯掛東 越九年丙申 門孫法宣靈
012_0410_a_09L祐等 攻石勒銘

012_0410_a_10L

012_0410_a_11L曹溪宗師麒龍禪師傳

012_0410_a_12L
諱濶海 字雲江 號麒龍 姓黃 貫長水
012_0410_a_13L考鳳秀 母李氏 嘉慶二十年純廟
十五
乙亥
012_0410_a_14L二月十八日 生於順天郡黃田面東古
012_0410_a_15L里 十歲入學 十五通經史 學必敎 見
012_0410_a_16L則誦之 鄕人謂之童蒙敎員 十七八連
012_0410_a_17L遭怙恃之痛 墓終三年服 二十甲午春
012_0410_a_18L投桐山之泰安寺 剃於樂天和尙 戒於
012_0410_a_19L退隱律師 丙申叅枕溟講軒學經 謁印
012_0410_a_20L波而受禪 檢史於惺庵 讀莊文於奇峯
012_0410_a_21L二十八壬寅 於曹溪華峯之室 佩法印
012_0410_a_22L住隱寂 開堂講法 甲寅春讀大經淨行
012_0410_a_23L品 迺掩卷歎曰 三千經卷 唯一掬糟
012_0410_a_24L粕 一生喫了死句 孰與叅得活句耶

012_0410_b_01L그러고는 표주박 하나와 납의 한 벌로 여러 선지식을 참문하여 10년 동안 하나의 누비로써 몸을 가렸다. 그리고 하루에 두 끼를 먹은 적이 없었지만 주린 배를 잘 위로하였다. 조계산의 은적선원과 삼일선원, 동리산 명적암의 미타선원, 선암사의 칠전선원七殿禪院, 쌍계사의 칠불선원七佛禪院 등은 선사가 30년 동안 참구했던 선실禪室이었다.
천문법과 지리학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섭렵하였고, 유교 경전과 불경에 대해서 본래 유인游刃163)의 경지와 같은 점이 있었다. 향상본분向上本分에 대해서도 말후末後의 일념에 이르기까지 진실하였다.
광서 19년【고종 29년(1893)】 계사년 8월 9일에 가벼운 병을 보이더니, 은적암에서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다비를 마쳤는데 단지 한 벌의 포대만 남아 있었다. 세수는 79세이고, 법랍은 59년이다.
347. 조계종사 허주 선사전曹溪宗師虛舟禪師傳
휘는 덕진德眞이고 호는 허주虛舟이며 속성은 김金씨이다. 태어날 때 아버지는 안 계셨고 어머니는 박朴씨이다. 가경 20년【순조 15년(1815)】 을해년 3월 13일에 태어났다. 광서 14년【이태왕164) 25년(1888)】 무자년 10월 12일【혹 11월 17일】에 입적하였다. 세수는 74세이고, 법랍은 63년이다.
구오驅烏의 나이165)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여러 곳을 전전하면서 걸식을 하며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모하였다. 조계산의 자응방慈應房을 찾아가서 좌선하는 선방에서 제공하는 십시일반에 의탁하였다.
11세 을유년(1825, 순조 25)에 한 벌의 누더기를 걸친 수좌가 선사를 보고는 기쁘게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리도 늦게 왔느냐? 나하고 스승과 상좌의 인연을 맺어 불교 문중에서 사는 것이 어떤가?” 선사가 말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수좌가 말했다. “나한테는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다. 그런데 그대는 또한 송곳조차 없구나. 그러니 어떻게 생활하면 좋겠는가?” 선사가 말했다. “천촌만락千村萬落에 어찌 제가 먹을 양식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남시북전南市北鄽에 어찌 제가 입을 의복이 없겠습니까? 의복과 양식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오직 바라는 것은 지귀指歸166)로 잘 이끌어 주십사 하는 것입니다.”

012_0410_b_01L單瓢一衲 叅諸善知識 十年一縷褐
012_0410_b_02L足遮陋形 一日再不食 能慰飢腸 以
012_0410_b_03L曹溪之隱寂三日庵 桐山之明寂彌陀
012_0410_b_04L殿 仙嵓之七殿 雙溪之七佛 爲三十
012_0410_b_05L年叅究之禪室 於天文法地理學 早已
012_0410_b_06L涉獵 魯誥竺墳 固所游刃 至於向上
012_0410_b_07L本事 在末後一念眞實而已 光緖十九
012_0410_b_08L今上二
十九年
癸巳八月九日示微疾 而奄然
012_0410_b_09L化於隱寂庵 茶毘已 只有一領布袋而
012_0410_b_10L已 壽七十九 夏五十九

012_0410_b_11L

012_0410_b_12L曹溪宗師虛舟禪師傳

012_0410_b_13L
諱德眞 號虛舟 姓金 父失 母朴氏
012_0410_b_14L嘉慶二十純廟
十五
乙亥三月十三日生 光緖
012_0410_b_15L四年李太王
二十五
戊子十月十二日或十一月
十七日

012_0410_b_16L壽七十四 夏六十三 驅烏之年 俱喪
012_0410_b_17L怙恃 無强近之族 轉乞千門 圖生一
012_0410_b_18L命 抵曹溪之慈應房 掛口於居禪十
012_0410_b_19L匙之飡矣 十一歲乙酉 有一樓褐首座
012_0410_b_20L見而喜曰 汝來何暮 與吾結師 佐緣
012_0410_b_21L於佛門可乎 曰然 座曰 吾無立錐之
012_0410_b_22L地 汝亦錐也無 其於生活何如 曰千
012_0410_b_23L村萬落 誰非吾之粮 南市北鄽 何無
012_0410_b_24L我之衣乎 衣粮不足畏 唯願善噵指歸

012_0410_c_01L
이에 삼일선원의 불전佛殿 앞에서 머리를 깎고 속복을 벗어 구족계를 받았다. 그것은 마치 연꽃이 진흙에서 피어난 것과 같았고, 미꾸라지가 용이 된 것과 같았다. 이에 어깨에 바랑을 짊어지고 육환장을 흔들면서 마을마다 돌아다니자 보통의 사람들이 기쁘게 보시를 하였는데, 일일이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로 말미암아 스승과 제자가 입고 먹을 것이 그것으로 충족되었다.
이로부터 계절마다 제방을 유력하였고 다행스럽게도 선방에 앉을 수 있게 되었다. 몸소 강원(講肆)으로 돌아가서 침명枕溟을 참문하고서 경전을 배우고, 인파印坡를 참례하고서 선을 배웠다. 이에 문자를 지게미와 같이 간주하여 불구심해不求甚解167)할 뿐이고, 오로지 소전所詮의 요의了義만 궁구하였는데 남들은 선사의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은부恩傅께서 삼일암에서 동안거를 하던 차에 도적이 양식과 돈을 훔쳐 갔는데 그것을 심히 원통해하는 모습을 보고 선사가 말했다. “돈을 가져간 자는 아마 긴급히 필요해서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근심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이에 눈길을 걷고 서리를 맞고 자면서 화주하여 열흘이 채 안 되어 다시 석 달 안거 동안에 필요한 양식을 조달하여 갖다 바치자 안거를 하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선사가 참기 어려운 것을 잘 참아 낸 것이 무릇 이와 같았다.
30세 때 은적암에서 건당을 하고, 정담당靜潭堂에게서 법을 터득하여 은적암에 주석하니 납자들이 무수하게 모여들었다. 강석에서 어려운 질문에 답변을 할 때는 반드시 눈을 감았는데, 그것이 마치 못을 끊고 무쇠를 자르는 것처럼 과단성이 있었다.
어느 날 학도들이 산을 유람하러 나갔을 때 선사가 대중방에다 큰 글씨로 불佛이라는 글자를 써 놓고 조용히 방장실에 앉아서 그것을 아는지 시험을 하였다. 모든 학도들이 모여들어 그 글씨를 보고 소리 내어 말했다. “이 불佛 자를 누가 쓴 것인가?” 선사가 방장에서 나와 말했다. “그대들이 이미 불 자를 알아차렸으니 내 글씨도 또한 만족한다.”
대중이 각자 본래 자리로 돌아간 즈음에 선사는 7일 동안 지장기도를 하여 꿈에 시루떡 한 사발을 얻었다. 이로부터 자비의 덕이 온몸에 가득하였고, 총명한 지혜가 남을 능가했으며, 불망념지不忘念智(한번 들은 것을 결코 잊지 않는 지혜)를 터득하였고, 선풍이 멀리까지 퍼져 나가자 동방의 명승지마다 그 선풍에 관심을 쏟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물욕이 점차 사라지고, 주석하는 곳이 일정하지 않았다. 팔영산의 서불암, 고산의 화암사, 구례의 오산암, 곡성의 길상암 등은 여름 안거를 지낸 선원이었다. 여염집 여인들까지도 문전성시를 이루자 보광명지普光明智로써 설법을 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찬탄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직접 얼굴을 뵈니 귀로 듣는 것보다 백 배나 더하구나.” 여산厲山의 심곡사深谷寺에 주석하던 어느 날

012_0410_c_01L仍以剃零受具於三日佛前 猶蓮花之
012_0410_c_02L出泥 似鰌魚之成龍 於是肘掛鉢囊
012_0410_c_03L鈴動村閭 張三李四之隨喜捨施 不能
012_0410_c_04L枚擧 由是師佐衣粮 從此豊稔矣 隨
012_0410_c_05L節遊方 恩坐禪房 自歸講肆 叅枕溟
012_0410_c_06L而學經 禮印波而得禪 不求甚解文字
012_0410_c_07L糟粕 只究所詮了義 人莫測其意 恩
012_0410_c_08L傅於三日庵結臈次 見盜粮金 甚痛切
012_0410_c_09L之 師曰 執金者 猶緊用 何足爲憂 更
012_0410_c_10L乞非難 乃踏雪宿霜 未十日 更辦九
012_0410_c_11L旬粮奉呈 無障安居 難忍能忍 凡如
012_0410_c_12L此也 三十竪幢隱寂 得法於靜潭堂下
012_0410_c_13L住本庵 學者坌集 講授答難 必瞑目
012_0410_c_14L而如斬釘截銕焉 一日學徒遊山 師以
012_0410_c_15L大書佛字於房中 隱坐方丈 試其知否
012_0410_c_16L諸生會見唱曰 遮佛字誰書云 師出曰
012_0410_c_17L君等旣知佛字 吾筆亦足云 衆各歸本
012_0410_c_18L之際 祈地藏七日 夢得甑餅一甌 自
012_0410_c_19L是慈德滿身 聰慧過人 得不忘念智
012_0410_c_20L禪風遠播 東方名勝 無所處而不靡
012_0410_c_21L然物欲剝落 所住無定 八影之西佛
012_0410_c_22L高山花嵓 求禮之五山 谷城之吉祥
012_0410_c_23L結夏之院 士女成市 以普光明智說了
012_0410_c_24L莫不嗟咜曰 面謁百倍乎耳聞云 住厲

012_0411_a_01L뜨락에서 배회하다가 세숫대야의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어떤 청신녀가 그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말했다. “얼굴 씻은 그 물을 스님께서는 어찌 마신단 말입니까?” 선사가 말했다. “물맛은 곧 똑같습니다.” 임기응변하는 선사의 법어는 실로 이와 같았다.
무자년(1888, 고종 25) 가을에 초청을 받고 한양성에 들어가서 동별궁에서 보광법회를 시설하여 7일 동안 기도와 축원을 하였다. 귀비와 중신들은 향을 사르고 선사를 섬기며 예배를 드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법회가 끝나자 선사가 말했다. “속세의 번거로운 거리는 곧 신사(縉紳)들이 사는 곳입니다. 푸른 섬돌과 붉은 궁전이 어찌 누더기를 걸친 사람이 오랫동안 기거할 곳이겠습니까? 바라건대 새는 산으로 돌아가고 용은 물로 돌아가도록 작은 성의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동대문 밖의 대원사大原寺를 하산했을 때 머무는 장소로 지정해 주었다. 그리고 중사中舍 일행으로 하여금 수레를 흥국사興國寺에 도착할 때까지 딸려 보내고 그 뒤를 신료臣僚와 궁속宮屬들이 따랐는데 그 왕래가 10여 리에 걸쳤다.
그해(1888, 고종 25) 10월 10일에 가벼운 병을 보였는데, 상궁 천千씨가 친히 곁에서 모시면서 의원을 부르고 약을 달이자 이에 선사는 만류하며 말했다. “태어나면 죽는 것이고 죽으면 또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바다에서 일어나고 스러지는 물거품과 같아서 다가왔다가는 멀어지고 멀어졌다가는 또 다가오는 것입니다. 마치 고갯마루의 구름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열반으로 가는 길이 지금 발밑에까지 와 있는데 약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고는 이어서 탕약을 끊어 버렸다. 이후 이틀이 지난 새벽에 목욕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고 게송을 마치고는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이에 귀비와 신첩들이 소식을 듣고 애통해하면서 말했다. “배를 안내하는 노가 부러져 버렸으니 우리를 누가 건네주겠는가?” 이에 향과 등불과 종이와 초와 삼베와 비단의 시주물이 저자와 거리에 쌓여 있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궁궐의 비妃와 부녀자들은 더불어 청정해지려고 향을 사르고 망참望參하였다. 또한 사람들과 재물이 모여들었는데 국성國城이 기울어질 정도였다.
그때 금상 곧 고종 임금은 그 상황을 기이하게 여기고 묻자, 황문시랑黃門侍郞이 아뢰었다. “허주라는 스님이 입적하였습니다.” 금상이 말했다. “스님의 장례식인데 꼭 인산因山(임금의 장례식) 같구려.”라고 하였다. 무릇 종이와 초와 향불만 가지고 다비를 하였는데 그 불길이 하도 세차게 하늘을 밝혔고 한줄기 상서로운 광명이 허공까지 뻗쳐서 한양성이 훤하니 사람들이 큰 믿음을 일으켰다. 제자인 퇴운退雲과 효오孝𢈪 등이 영골을 수습하여 보석寶石 조계曹溪에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012_0411_a_01L山深谷寺 一日就庭彷徨 飮盥水一口
012_0411_a_02L有信女見而驚曰 此汙水師何吸 師曰
012_0411_a_03L其味則一也 臨機法語 槩此類焉 戉
012_0411_a_04L子秋赴請 入城於東別宮 設普光會
012_0411_a_05L七日祈祝 貴妣重臣 無不拈香 事師
012_0411_a_06L禮 會畢 師曰 紅塵紫陌 是縉紳之所
012_0411_a_07L捿 碧砌朱宮 何褸褐之久居 願許山
012_0411_a_08L鳥海龍之微忱 乃以東門外大原寺 爲
012_0411_a_09L下山所 使中舍陪行 輿至興國 追後
012_0411_a_10L臣僚宮屬 絡繹十許里 至十月十日示
012_0411_a_11L微疾 尙宮千氏 親自侍湯 邀醫點藥
012_0411_a_12L師却曰 生而死 死而生 若海漚之起
012_0411_a_13L沒 來而去 去而來 似嶺雲之聚散 湼
012_0411_a_14L槃路頭 現在足下 藥安用爲 連絕湯
012_0411_a_15L飮 至二日晨 浴衣說偈已 奄然而化
012_0411_a_16L貴妃臣妾 聞而痛悼云 舟楫先折 吾
012_0411_a_17L儕誰渡 香燈紙燭 布帛氈幣 若霧市
012_0411_a_18L雲衢 未叅宮妃婦女 與欲淸淨 投香
012_0411_a_19L望叅 人物注泊 國城震傾 時今上恠
012_0411_a_20L而問之 黃門奏曰 虛舟僧死故也 上
012_0411_a_21L曰 僧葬 便同因山云云 但庸紙燭香
012_0411_a_22L火而茶毘 火尙熾燃而洞宵 一道祥光
012_0411_a_23L亘空洞城 人天廓信也 弟子退雲孝▼(广*吾)
012_0411_a_24L等 收靈骨塔于寶石曹溪云尒

012_0411_b_01L
348. 조계종사 우담 선사전曹溪宗師優曇禪師傳
영남 안동군 출신으로 아버지 권중국權重國과 어머니 조趙씨의 아들이다. 휘는 홍기洪基이고 호는 우담優曇으로 도광 2년【순조 22년(1822)】 임오년 3월 3일에 태어났다.
지학의 나이에 마음으로 다짐하고 출가하고자 하였지만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조용히 부처님이 성을 넘어 출가했다는 고사를 생각하고서, 순흥면의 소백산 희방사希芳寺로 찾아가서 자신 장로自信長老에 의지하여 머리를 깎았으나 세업世業이 청빈하여 취학就學하지 못하였다.
이에 마음이 통하는 도반과 더불어 팔공산으로 가서 혼허 대사渾虛大師에게 참문하여 많은 경전을 공부하여 마쳤다. 그러나 마음을 거기에 매어 두지 않고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서 조계산의 옛 길상사吉祥社에 이르러 지봉 장로智峯長老의 자량위資粮位를 터득하였다. 그리고 인파印坡와 침명枕溟 등 선과 교학의 종장을 참문하였다.
27세 무신년(1848, 헌종 14)에 연월 법부蓮月法父의 조실에서 법인을 받고, 광원암廣原庵에서 향을 사르고 개당하였다. 그리고 설인雪仁과 연묵蓮默의 사봉詞鋒(筆鋒)을 통해서 교학에 대한 안목을 맑게 하였고, 진구眞龜와 백초白草의 엄격한 단련을 통해서 선추禪椎를 두드렸다. 글을 읽고 뜻을 해석하는 것은 마치 콧구멍에서 바람이 발생하고 화살이 발사되는 것과 같았고, 화답하고 토론하는 것은 그 지침指針이 단금斷金과도 같았다.
선사는 『선문증정록禪門證正錄』 1권과 기타 『잡저문집雜著文集』 1권 등을 저술하였는데, 그것이 세간에 유행되었다. 그 법계를 고찰해 보면 부휴 선수의 제11세이고 벽담의 제7세손이다. 광서 7년 신사년(1875, 고종 12)168) 9월 8일에 가벼운 병을 앓자, 문인 관훈寬訓 등을 불러 놓고 말했다. “나는 이제 떠나려고 한다. 그대들은 모름지기 잘들 있거라.” 그러고는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세수는 60세이고, 법랍은 45년이다.
349. 조계종사 화산 선사전曹溪宗師華山禪師傳
휘는 선오善旿이고 속성은 김金씨로서 순천 주암 운곡 출신이다.【부모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도광 3년 계미년(1823, 순조 23)에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다만 형제 둘이서만

012_0411_b_01L曹溪宗師優曇禪師傳

012_0411_b_02L
嶺南安東郡權重國妣趙氏之子也 諱
012_0411_b_03L洪基 號優曇 道光二年純廟二
十二年
壬午三
012_0411_b_04L月三日生 志學之年 盟心出家 父母
012_0411_b_05L不許 竊念踰城古事 投順興之小白山
012_0411_b_06L希芳寺 依自信長老薙髮 世業淸寒
012_0411_b_07L未能就學 與心友道伴 抵八公山 叅
012_0411_b_08L渾虛大師 數經終畢 以不繫爲志 漸
012_0411_b_09L次南行 至于曹溪山古吉祥社 得智峯
012_0411_b_10L長老資粮位 叅仁坡枕溟禪敎匠 二十
012_0411_b_11L七戊申佩法印於蓮月法父之室 拈香
012_0411_b_12L開堂於廣原庵 敎眼澄於雪仁蓮默之
012_0411_b_13L詞鋒 禪椎鼓於眞龜白草之鉗鎚 對格
012_0411_b_14L披文釋義 鼻孔生風 發機酬答討論
012_0411_b_15L指針斷金 所著禪門證正錄一卷 雜著
012_0411_b_16L文集一▼((局-口)*二) 刊行於世 考系則浮休之十
012_0411_b_17L一世 碧潭之七世孫也 光緖七年辛巳
012_0411_b_18L九月八日示微疾 召門人寬訓等曰 吾
012_0411_b_19L當行矣 爾須珎重 奄然化 壽六十 夏
012_0411_b_20L四十五

012_0411_b_21L

012_0411_b_22L曹溪宗師華山禪師傳

012_0411_b_23L
諱善旿 姓金 順天住嵓雲谷人父母
未記

012_0411_b_24L光三年癸未生 早喪怙恃 但弟兄二人

012_0411_c_01L도와 가면서 서로 의지하며 배가 고플 때나 배부를 때나 동고동락하였다. 그때 침명 한성枕溟翰惺 화상이 개당을 하여 크게 교화를 하였는데, 조계산 은적암에까지 그 소문이 났기 때문에 침명 화상의 발아래 참례하였다. 침명 화상은 대번에 선사가 법기임을 알아보고 이에 머리를 깎아 주었다.
17세 때(1839, 헌종 5) 동생이 함명涵溟(太先, 1824~1902)의 제자가 되었는데, 당시에 동생의 나이는 11세이고 이름은 익운益運169)이었다. 형제가 모두 백락伯樂(본래 천상天上의 별자리 이름인데 천마天馬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의 마구간에 들어가서 다리를 펴는 가을이 아니었겠는가. 가히 용이 물을 만난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하며, 형제가 공순하고 조부가 자애하는 것과 같았다. 형이 효행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고 아우가 재덕으로 시대를 울리니, 마치 삼평三平과 이원二遠이 거듭 도래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산에 오르지도 않고 바다에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대보大寶를 얻은 것과 같고,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로 이어지면서 끝까지 가업을 잇는 것과 같았다.
32세 갑인년(1854, 철종 5) 침명 화상의 신의信依를 받고 호를 화산華山이라 하였는데 곧 법이 또한 지중하였다. 동생인 익운도 스승인 함명 태선에게서 법인을 받고 호를 경붕景鵬이라 하였다. 함명은 침명 화상에게서 전강傳講을 받았고, 경붕은 그 사부인 함명에게서 전강을 받아서 개당을 하여 널리 제접하였다. 그것은 마치 옛날부터 전해 오던 이야기 가운데 소위 손이 트지 않는 묘약(不龜手藥)을 아무한테나 팔지 않아(不鬻於客) 가업으로 전승되어 왔다는 것이 진실로 빈말이 아니었음을 말해 준 것이었다.
그때 침명 화상은 시력이 어두워져 침식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에 선사가 만자滿慈(富樓那)의 수행으로 지극정성을 다하여 봉양하면서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털끝만큼의 불평이나 근심을 보이지 않으니, 실로 왕상王祥이 얼음을 깨고 잉어를 잡아 오고 맹종孟宗이 눈 속에서 죽순을 구한 것170)과 같았다. 이와 같이 외모를 부드럽게 보였으며, 음식을 봉양하는 것에 대해서도 또한 전장典章에서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 곧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만면에 자비로운 마음으로 혼신을 다하여 근검을 보여 준 것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몸을 가리고 입에 풀칠하는 것에 있어서도 반드시 해진 옷과 거친 현미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손님을 접대함에 있어서만큼은 성찬盛饌을 갖추어 내놓았다. 일생 동안 경전의 염송을 과업으로 삼았고, 평생에 걸쳐서 믿음으로 부처님을 예경하였으니, 진정으로 본색납자로서 가풍의 궤범이었다.
병자년(1876, 고종 13) 9월에 침명 화상이 입적하였는데, 절에는 솥단지 하나도 없었고, 들에는 한 뙈기 땅도 없었으며, 천 리가 가뭄의 폐해로 황폐화되어 방법이 없어서 다비를 붙이기에도 민망할 정도였다. 마침 그때 송광사의 부의賻儀와

012_0411_c_01L携手相扶 飢飽同苦 時枕溟和尙 開
012_0411_c_02L堂盛化 聞風到曹溪山隱寂庵 禮和尙
012_0411_c_03L足下 一見甚器之 乃爲薙髮 年十七
012_0411_c_04L以弟爲菡溟之子 年十一名益運 兄弟
012_0411_c_05L俱入伯樂之廐 無乃展足之秋歟 可謂
012_0411_c_06L如龍得水 似虎靠山 兄恭弟順 祖愛
012_0411_c_07L父慈 兄以孝行名於世 弟以才德鳴於
012_0411_c_08L時 疑是三平二遠之重來耶 不山不
012_0411_c_09L海 而採得大寶 乃祖乃父 而極紹家
012_0411_c_10L業 三十二甲寅 受和尙之信衣 號華
012_0411_c_11L山 卽法恩兼重 弟亦佩其師菡溟之法
012_0411_c_12L印 號云景鵬 溟受和尙傳講 鵬受其
012_0411_c_13L父傳講 開堂普接 昔所謂不龜手之藥
012_0411_c_14L不鬻於客 而傳於家者 信不誣矣 適
012_0411_c_15L和尙眼眩 未辨枕食 師以滿慈之行
012_0411_c_16L極誠奉供 不離晷刻於側 不見毫末之
012_0411_c_17L憂 實王孟之冰竹 猶是外皃蘭參之像
012_0411_c_18L饌亦非典章 卽非過言也 滿面慈心
012_0411_c_19L渾身勤儉 不欲枚擧 而至於遮身糊口
012_0411_c_20L必不厭麁糲 對客接賓 惟嚴偹盛饌
012_0411_c_21L一生之誦經念課 百年之信佛禮敬 眞
012_0411_c_22L本色衲子軌範家風 丙子九月和尙示
012_0411_c_23L滅 家無斗儲 野無尺壤 千里赤地無
012_0411_c_24L路 茶毘悚且罔極矣 適本山之賻儀

012_0412_a_01L찾아온 문도들이 가져온 음식으로 인하여 뜻밖에도 근심을 떨칠 수 있을 만큼 풍족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침명 화상의 덕풍이었을 것이고, 상제喪制의 효성과 절개였을 것이다.
상족인 취봉翠峯도 또한 지극한 효 상좌였지만, 불행하게도 선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이 안타까웠다. 대정 3년 갑인년(1914) 4월 28일에 선사는 조용히 입적하였다. 다비를 마치고 사리 23매枚를 수습하였는데, 손제자 야운野雲이 남쪽 언덕에다 부도탑을 건립하였다. 세수는 92세이고, 법랍은 78년이다.
350. 조계종사 침연 선사전曹溪宗師枕淵禪師傳
휘는 장선章宣이고 호는 침연枕淵이며, 속성은 윤尹씨이고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아버지 이름은 좌은佐殷이고 어머니는 조趙씨이다. 도광 4년【순조 24년(1824)】 갑신년 정월 5일에 순천 주암 매우리에서 태어났다. 얼굴이 풍부하고 정수리가 높이 솟았으며 입은 바다처럼 넓고 눈은 연꽃처럼 가늘었다. 성품은 예의가 바르고 말하는 데에는 주로 침묵을 지켰다. 어려서부터 통사에 밝았고 필법은 퍽 기특하였다. 세속을 벗어나려는 마음을 품었지만 부모가 그것을 만류하였다.
14세 정유년(1837, 헌종 3) 비밀리에 집을 떠나서 조계산의 추담 대사秋潭大師에게 찾아가서 머리 깎고 먹물 옷을 입었고, 청봉 율사靑峯律師에게서 계를 받았다.
18세 신축년(1841, 헌종 7) 침명 강사枕溟講師에게 참문하여 6, 7년 동안 경전과 율장을 갈고닦았다. 선사는 청진암 염화실拈花室의 편액을 썼다. 사람들이 그 글씨를 보고 시샘을 하자 추담 대사가 선사에게 말했다. “그대는 붓을 놓는 것이 좋겠다.” 선사는 곧 큰 붓을 태워 버리고 끝내 큰 붓을 잡지 않았다. 선사의 뛰어난 필법은 이것으로 증험할 수가 있다.
27세 철종 원년(1850)에 은사로부터 깨침을 인가받고 보조암에서 개당을 하였다. 이후에 은적암과 광원암과 청진암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널리 선종의 종지를 천양하기를 10년 남짓 하였다.
법부法父가 노환으로 병이 들자 친히 간호하면서 나무하고 물 긷는 일을 동자나 노복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 불을 피워서 약탕을 달였다. 예로부터 천륜의 효도라 할지라도 이것을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012_0412_a_01L門徒之香需 逈出望外豊饒而猶餘 倘
012_0412_a_02L是和尙之德風歟 喪制之孝節耶 有上
012_0412_a_03L足翠峯亦至孝 不幸先化師之所大欠
012_0412_a_04L也 大正二年甲寅四月二十八日 師奄
012_0412_a_05L然而化 茶毘已 得舍利二十三枚 孫
012_0412_a_06L弟子野雲 塔于南岸 壽九十二 夏七
012_0412_a_07L十八

012_0412_a_08L

012_0412_a_09L曹溪宗師枕淵禪師傳

012_0412_a_10L
諱章宣 枕淵其號也 姓尹 貫坡平 父
012_0412_a_11L佐殷 母趙氏 道光四年純廟二
十四年
甲申一
012_0412_a_12L月五日 生於順天住嵓埋牛里 面豊而
012_0412_a_13L頂高 海口而蓮目 性恭謹 言沈默 幼
012_0412_a_14L年能通史 筆尤奇 心欲出塵 父母却
012_0412_a_15L之 年十四丁酉 窃投曹溪之秋潭大師
012_0412_a_16L零染 從靑峯律師受戒 十八辛丑 叅
012_0412_a_17L枕溟講師 六七年間 硏得經律 師題
012_0412_a_18L淸眞庵拈花室額 人有鴟嚇 潭曰汝放
012_0412_a_19L筆下可也 師卽燒巨穎 終不把穎 師
012_0412_a_20L之筆妙 於此可驗 二十七哲宗元年
012_0412_a_21L佩恩師鈯斧 開堂於普照庵 後移隱寂
012_0412_a_22L廣原淸眞 廣闡宗敎者 十有餘年 以
012_0412_a_23L法父老恙 親以看護 搬汲不責於童僕
012_0412_a_24L藥餌自點於炭頭 雖古之天孝莫過也

012_0412_b_01L
31세 때 지수智藪라는 상좌를 하나 두었는데 호는 대붕大鵬이었다. 대붕이 보여 준 효는 선사가 그 스승에 대하여 보여 준 효와 같은 그런 효였다. 이것이야말로 어찌 선사가 여력에 얻은 경사慶事가 아니겠는가? 중년에 대붕은 악연에 연루되었지만 어찌 인연을 끊을 수 있었겠는가? 선사가 갑자기 병에 걸려 목숨이 호흡지간에 달려 있을 때 대붕이 소식을 듣고 돌아오자 선사는 곧 병에서 회복되었다. 대붕이 혹 인근의 암자에라도 갔다가 잠시라도 돌아오지 않으면 선사는 반드시 문설주에 기대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수저를 들었다. 선사의 자애가 바로 이와 같았다.
광서 33년【이태왕(고종) 44년(1907)】 정미년 5월 8일에 병이 없이 시적하였다. 세수는 84세이고, 법랍은 70년이다.
351. 조계종사 연봉 선사전曹溪宗師蓮峯禪師傳
휘는 봉린鳳麟이고 속성은 김金씨로서 순천 송광면 출신이다. 도광 13년【순조 33년(1833)】 계사년에 태어나서 임자년(1912) 정월 25일 입적하였다. 세수는 79세이다.171) 조계산의 한담 선사漢潭禪師에게 동진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 숙사叔師인 금담錦潭에게 계를 받고 대승사大乘寺의 침명枕溟 강헌에서 경전을 배웠다.
30세 때 은사인 한담 선사에게서 법을 받고서 자정암慈靜庵과 청진암淸眞庵에 주석하면서 10여 년 동안 추를 잡고 불자를 세웠다.172) 그 외모는 검박하고 수수하였으며 그 마음은 순후하고 자애로웠다. 사람을 상대하여 법담을 나눌 때 일찍이 상대의 마음을 거스른 적이 없었고, 물품을 구하는 사람을 보면 자기에게 없는 것이라도 남에게서 얻어다 구해 주어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게 하였다. 비록 선사는 아침저녁으로 밥을 해 먹지 못할지라도 주린 사람을 보면 반드시 요기할 것을 구해다 주었다. 그와 같이 용심하는 선사의 부지런한 정진은 헤아리기 어려웠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인보살麟菩薩이라 일컬었다.
거주하는 처소도 또한 깨끗하고 더러운 곳을 가리지 않았고, 먹는 음식도 또한 좋고 거친 것을 가림이 없이 다만 배를 채우면 그만이었다. 더욱이 그와 같은 타니대수拖泥帶水173)의 모습은 마치 조백棗栢174)의 가풍과 같았고, 차를 마시고 욕심이 없었던 것은 마치 진묵震默175)의 방편행과 같았다. 부족한 것이라고는 오직 오연五緣176)을 갖추지 못한 것과 육신의 불균형이라는 것뿐이었다.
선사는 본지本地의 풍광風光은 홀연히 동작하면서도 본분本分의 수각手脚은

012_0412_b_01L三十一率養一高足 曰智藪 號大鵬
012_0412_b_02L鵬之孝 孝於師之孝於師 此豈非師之
012_0412_b_03L餘慶得乎 中年鵬爲惡緣所牽 幾離緣
012_0412_b_04L師猝疾 命在呼吸 鵬聞返 師卽甦焉
012_0412_b_05L鵬或徃隣庵 踰時不還 必倚門待還 共
012_0412_b_06L執匙著 其慈愛如此也 光緖三十三

012_0412_b_07L王四十
四年
丁未五月八日 無疾示寂 壽八
012_0412_b_08L十四 夏七十

012_0412_b_09L

012_0412_b_10L曹溪宗師蓮峯禪師傳

012_0412_b_11L
諱鳳麟 姓金 順天松光人 道光十三
012_0412_b_12L純廟三
十三
癸巳生 壬子一月二十五日化
012_0412_b_13L壽七十九 童眞出家於曹溪漢潭禪師
012_0412_b_14L剃染 戒於錦潭叔師 學於大乘枕溟講
012_0412_b_15L軒 三十得法於恩師 住慈靜淸眞 拈
012_0412_b_16L鎚竪拂 餘十年矣 其形質實 其心淳
012_0412_b_17L慈 對人接話 未嘗逆其心 見人求物
012_0412_b_18L非吾所有而從他求得 使不空行 雖朝
012_0412_b_19L夕懸鼎 見飢必餉 難測其用心之磁矻
012_0412_b_20L故世稱麟菩薩云 所居也 不擇淨麁
012_0412_b_21L所食也 不辨侈糲 但充腸而已 尤其
012_0412_b_22L拖泥帶水 如棗栢之家風 喫茶離欲
012_0412_b_23L若震默之權行歟 唯欠五緣不具 四大
012_0412_b_24L莫均 本地風光 忽然動作 本分手脚

012_0412_c_01L끝내 굴신屈伸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좌포단 위에 앉아서 한 덩어리의 덧없는 육신으로 살아갔다. 오호라, 참으로 망극하도다.
352. 조계종사 동명 선사전曹溪宗師東溟禪師傳
휘는 지선智宣이고 호는 동명東溟이며 속성은 김金씨로서 가락국의 왕족이다. 아버지 이름은 생석生石이고 어머니는 박朴씨이다. 도광 19년【헌종 5년(1839)】 을해년 정월 15일에 태어났다. 부드러운 얼굴로 온건한 말씨를 지녔고 귀인의 상인 제비턱을 지녔다. 겨우 6세의 나이에도 변설이 비상하였고, 언문에 능통하였으며, 소리꾼의 재담을 타고났기 때문에 고향의 노인들은 전생부터 익혀 온 신동이라 말하였다. 8세에 아버지를 잃고, 9세에 어머니를 잃었는데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그리하여 인가가 보이는 대로 들어가 잠시 묵어 갔는데, 잠은 반드시 학교 건물에서 자면서 학생들이 독서하는 것을 듣고는 그대로 암송을 하자 동네 노인들이 선사를 사랑하여 그 내용을 가르쳐 주었다. 13세에 이미 경사經史를 열람하였는데 눈으로 한 번 본 것은 반드시 입으로 읊어 내었다. 또 문장을 잘 짓고 운을 띄워 시를 읊조렸는데 이미 지어 놓은 것을 외우는 것과 같았다. 글씨도 빨리 써서 붓을 잡아 한 번 휘두르면 여러 줄을 써 내려갔다.
14세 임자년(1852, 철종 3)에 조계산으로 가서 계월桂月 스님에게 참례하고 득도得度하였고, 운계雲桂 스님에게 계를 받았다.
16세 때 우담優曇의 강단에 나아가서 경전을 배웠고, 함명菡溟과 설두雪竇와 응화應化와 용호龍湖 등 대종장들에게 참문하였는데 쪽(藍)과 꼭두서니(茜)가 본색을 잃는 것과 같았으니 제방에 유력하는 것을 이미 마쳤다.
23세 신유년(1861, 철종 12) 봄에 조계산 보조암에서 건당을 하였고, 용운 대사龍雲大師의 가풍에서 의발을 전수받았다. 이후에 개당하여 불자拂子를 치켜세우자 납자들이 끝없이 모여들었는데, 그것은 마치 청평靑萍·결록玦綠과 같았고, 설변薛卞177)의 문중에서 감정평가를 받은 것과 같았으며, 백락의 마구간에서 녹이騄駬와 제기騠驥와 같은 준마가 채찍의 그림자를 본 것과 같았다.
그러나 항상 표주박의 생각을 잊지 않다가 산을 넘는 구름과 물결의 흔적처럼 초연하게 사산四山의 명승지와 도력이 높은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찾아가서 나뭇가지 하나로 법을 이야기하면서 근기에 따라서 교화를 펼쳤는데, 심지어 신사(縉紳)와 시와 서를 통해서 서로 주고받는 문답에 이르기까지 기쁘게 감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시가 곧 “사람이 헤어져 10년이 지나면 옛 모습이 없어지는데 춘삼월이 돌아오면 꽃은 습관처럼 새로운 얼굴을 내보이네.(人別十年無舊樣。 花逢三月慣新顏。)”라는 구이다.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 급선무인 까닭에

012_0412_c_01L卒未屈伸 竟爲蒲團上一塊幻軀 嗚呼
012_0412_c_02L罔極哉

012_0412_c_03L

012_0412_c_04L曹溪宗師東溟禪師傳

012_0412_c_05L
諱智宣 號東溟 姓金 卽駕洛王族也
012_0412_c_06L父生石 母朴氏 道光十九憲宗
五年
己亥一
012_0412_c_07L月十五日生 緩頰燕頷 纔六歲辯說非
012_0412_c_08L常 能通諺文 明唱里談 鄕老稱爲宿
012_0412_c_09L習神童 八歲孤 九歲哀 亦無强近 望
012_0412_c_10L門投止 寢必學庠 聞人讀輙誦記 父
012_0412_c_11L老愛敎之 十三已閱經史 目一覽 口
012_0412_c_12L必誦 又善屬文 呼䪨口占 如宿搆 筆
012_0412_c_13L又捷 一揮俱下數行焉 十四壬子 抵
012_0412_c_14L曹溪山 禮桂月得度 於雲桂受戒 十
012_0412_c_15L六詣優曇講壇學經 參菡溟雪竇應化
012_0412_c_16L龍湖諸大宗匠 藍茜沮本色 遊方旣畢
012_0412_c_17L二十三辛酉春 建幢於曹溪普照庵 傳
012_0412_c_18L鉢於龍雲大師家 開堂竪拂 學子坌集
012_0412_c_19L靑萍玦綠 定價於薛卞之門 騄駬騠驥
012_0412_c_20L見鞭於伯樂之廐 每念瓢瓠之想 以山
012_0412_c_21L雲浪迹 四山名勝 跡高必尋 一枝談
012_0412_c_22L柄 隨機化演 至於縉紳之酬唱 莫不
012_0412_c_23L悅服 其詩云 人別十年無舊樣 花逢
012_0412_c_24L三月慣新顏之句是也 以渡生爲急務

012_0413_a_01L서울 가까운 산에 석장을 멈추고 남한南漢과 북한北漢 그리고 동방과 서방에서 고삐를 당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오직 광주의 청계사에서는 하산소로 삼으니 당시 궁궐에 속한 신도들이 바람처럼 따르고 구름처럼 분주히 모여들었다. 선사는 고해苦海의 방주芳舟가 되었고, 교문敎門의 법경法鏡이 되었으니, 그 누군들 흠모하고 공경하지 않겠는가?그러나 교화의 인연이 널리 다하고 법운法運이 조만간 지나가서 광서 15년 기축년(1889, 고종 26) 3월 5일에 청계사에서 입적하였다. 오호라, 덕량德良에서 태어났고 조계曹溪에서 강의하였으며 청계淸溪에서 교화하였으니 그런 곳이야말로 선사의 생사보토生死報土일 줄을 그 누가 미리 정해 둘 수 있었겠는가? 청계사 남쪽 기슭에서 다비를 하였다. 세수는 51세이고, 법랍은 37년이다.
353. 조계종사 원화 선사전曹溪宗師圓華禪師傳
휘는 덕주德柱이고 자는 수미守微이며 호는 원화圓華이고, 속성은 정鄭씨로서 담양 출신이며 아버지 이름은 기철基喆이다. 어머니는 오吳씨인데 별이 떨어져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여, 도광 19년 기해년(1839, 헌종 5) 5월 25일에 낳았다.
선사의 나이 7, 8세 무렵에 집안이 가난하여 취학을 하지 못하자 반드시 학교에 가서 놀면서 책 읽는 소리를 몰래 들었고, 책을 읽다가 정해 놓은 시간을 놓쳐 버렸으며, 글을 쓸 때는 꼭 밥 먹는 시간을 잊어버렸다. 낮에는 오직 두 끼만 먹었고 밤에는 오직 한 번만 잤으며, 눈으로 본 것은 반드시 익혔고 귀로 들은 것은 반드시 기억하였다. 동네 노인들이 혀를 차면서도 선사를 사랑하였다. 15세 계축년(1853, 철종 4) 안타깝게도 고애자孤哀子가 되어 3년의 복제服制를 마치고 말했다. “아, 서글프구나. 나는 어디로 돌아가야 할까?”
17세 때(1855, 철종 6) 여러 곳을 떠돌다가 지리산 화엄사에 도착하여 일신의 행각과 호구를 의탁하였다. 서우 장로西藕長老에게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으며, 포허 대덕抱虛大德에게 계를 받았고, 응월應月과 우담優曇과 함명菡溟에게 참문하여 경전을 배웠으며, 우담에게 선법을 받았고, 노장들로부터 역사를 익혔다.
28세 병인년(1866, 고종 3)에 화엄사의 두월 대사斗月大師 문하에서 건당을 하였으니, 부휴 선수의 제12세손이다.178) 금정암에 주석하면서 개당하여 보설普說을 하였다.

012_0413_a_01L憩錫於京山南北兩漢 東西二契 莫不
012_0413_a_02L縻然 而唯以廣州淸溪寺 爲下山所
012_0413_a_03L當時宮屬信徒 風從雲奔 以師爲苦海
012_0413_a_04L芳舟 敎門法鏡 誰無欽敬哉 化緣已
012_0413_a_05L周 法運俄遷 光緖十五己丑三月五日
012_0413_a_06L示寂於淸溪 嗚呼 生於德良 講於曹
012_0413_a_07L溪 化於淸溪 人之生死報土 孰能預
012_0413_a_08L定 茶毘于淸溪之南麓 壽五十一 夏
012_0413_a_09L三十七

012_0413_a_10L

012_0413_a_11L曹溪宗師圓華禪師傳

012_0413_a_12L
諱德柱 字守微 號圓華 姓鄭 潭陽人
012_0413_a_13L父基喆 母吳氏 夢星殞入懷而娠 道
012_0413_a_14L光十九年己亥五月二十五日生 年七
012_0413_a_15L八家貧不就學 遊必庠傍 窃聽弦誦之
012_0413_a_16L聲 讀必移晷 書必忘饌 日唯兩食 夜
012_0413_a_17L唯一宿 目所見必敎 耳所聞必記 父
012_0413_a_18L老▼(言+恣)嗟而愛之 十五癸丑 酷遭孤哀
012_0413_a_19L三年服畢 嗚呼哀哉 我安適歸乎 十
012_0413_a_20L七轉到智異山華嚴寺 托迹行唫 有西
012_0413_a_21L藕長老剃染 戒於抱虛大德 參應月優
012_0413_a_22L曇菡溟學經 受禪於優曇 質史於王老
012_0413_a_23L二十八丙寅 建幢於華嚴之斗月大師
012_0413_a_24L門 卽浮休十二世孫也 住金井庵 開

012_0413_b_01L
30세 무진년(1868, 고종 5)에 어명을 받드는 금부禁府의 순라군에게 붙들려서 수레를 타고 상경하였다. 훈련장에 끌려가서 자신을 붙잡아 온 장교의 질문에 조금의 두려움도 없이 이전의 역사歷事 및 유교와 불교의 경전의 지취旨趣에 대하여 명쾌하게 답변을 하자, 선사의 무고가 분명해졌기 때문에 무사하게 석방되었다. 가히 용의 턱밑에서 여의주를 찾아온 것과 같았고 호랑이의 입속에다 고기를 던져 주는 것과 같다고 말할 만하다. 이로부터 그 이름이 더욱더 드러나게 되어 그 가상한 명성이 멀리까지 퍼졌다. 사대암四大庵과 수도암修道庵과 금보암金寶庵과 구봉암九鳳庵 등으로 항상 도량을 옮겨 다닐 때에도 손에는 대비주大悲呪의 염주(圓珠)를 놓지 않았고, 입으로는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그치지 않았다. 저술로는 『법화기法華記』와 『회경록會鏡錄』이 있고, 서사書寫한 책으로는 사서삼경四書三經으로 불리는 칠서대전七書大典과 『남화경南華經』과 어록 등 도합 100여 권을 모든 책상에 쌓아 두고 상목常目으로 삼았다.
광서 19년 계사년(1893, 고종 30) 5월 25일에 병을 보이자 문인들을 불러 놓고 말했다. “사대는 빈껍데기이고 오온은 실체가 아니다. 명칭이므로 세상에 드러남이 없고 빈껍데기이므로 실체가 없다.” 5월 30일에 이르러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가부좌한 채로 조용히 입적하였다. 화엄사의 남쪽 기슭에서 다비를 하였고, 서당에 진영을 모셨다. 세수는 55세이고, 법랍은 38년이다.
354. 조계종사 남화 선사전曹溪宗師南華禪師傳
휘는 우정宇定이고 속성은 유劉씨로서 곡성 출신이며, 아버지 이름은 한익漢翼이고 어머니는 장張씨이다. 도광 20년 경자년(1840, 헌종 6) 3월 4일에 태어났다. 기개와 도량이 득의양양하고 골상이 탁월하였으며, 오악五嶽은 준풍峻豐하고 삼초三焦는 단합端合하였기 때문에 실로 남아의 체상體像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어떤 점술가가 말했다. “이 아이는 속세에서 살아갈 수가 없고 산속에서 살아갈 인물입니다. 만약 속세에 있으면 혹 중년에 어머니를 잃을지도 모릅니다.” 점술가가 선사의 아버지에게 그 말을 고하자 출가를 허락하였다.
14세 계축년(1853, 철종 4)에 조계산의 순담 장로淳潭長老에게 찾아가서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으며, 추담秋潭 선사에게 참례하여 계를 받았고,

012_0413_b_01L堂普說 三十戊辰 有御命禁府之邏取
012_0413_b_02L乘棚上京 抵訓鍊衙庭 答捕將之問草
012_0413_b_03L小不恐怖 前來歷事 儒釋經趣 對如
012_0413_b_04L燭炤 洞其無辜 無事放還 可謂探珠
012_0413_b_05L於龍頷之下 投肉於虎牙之中 自是聲
012_0413_b_06L薌益彰 令譽遠播 四大庵修道庵 金
012_0413_b_07L寶九鳳 恒爲遊履之場 手不釋大悲呪
012_0413_b_08L之圓珠 口不掇妙蓮花之梖葉 所著法
012_0413_b_09L華記會鏡錄 所寫七書大典南華經語
012_0413_b_10L錄等 合百餘▼((局-口)*二) 藏諸案以爲常目 光
012_0413_b_11L緖十九年癸巳五月二十五日示疾 召
012_0413_b_12L門人曰 四大是假 五蘊非實 無以名
012_0413_b_13L而顯世 無以假而爲實 至三十日 浴
012_0413_b_14L衣趺坐 而奄然示化 茶毘于華嚴南麓
012_0413_b_15L掛眞于西堂 壽五十五 夏三十八

012_0413_b_16L

012_0413_b_17L曹溪宗師南華禪師傳

012_0413_b_18L
諱宇定 姓劉 谷城人 父漢翼 母張氏
012_0413_b_19L道光二十年庚子三月四日生 氣宇軒
012_0413_b_20L軒 骨相卓卓 五嶽峻豊 三焦端合 實
012_0413_b_21L男兒體像也 有數者曰 此非枳棘之所
012_0413_b_22L捿 乃煙雲之物 若在塵俗 恐或中夭
012_0413_b_23L母傷數者言吿父而許出家 十四癸丑
012_0413_b_24L投曹溪之淳潭長老剃染 禮秋潭而得

012_0413_c_01L우담優曇을 따라서 경전을 배웠으며, 함명菡溟과 응화應化 등 여러 대종장에게 5, 6년 동안 참문하면서 스승과 함께 공양을 하면서 그 스승의 본색本色을 잃게 만들고 널리 제방으로 유력하였다.
선사는 계부戒父 추담 선사에게서 선禪을 받았고, 은부恩傅 순담 장로에게서 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선과 계를 아울러 전승하였고, 은부와 법사를 아울러 맺은 사람이었다. 이 때문에 일상의 부담만 해도 더욱 갑절이었는데, 하물며 숙세에 걸친 겁파刼波179)의 기이한 인연이 아니었겠는가? 선사는 지혜와 이해가 재능이 있고 민첩하여 삼우三愚와 십둔十鈍에 필적할 수 있었고, 그 필봉(詞鋒)과 방棒과 할喝은 엄격하기가 서릿발과 같았다. 또한 세상일로는 손재주와 기교가 매우 뛰어나, 전단을 쪼개면 조각조각이 모두 전단이고, 금 그릇을 만들면 빛과 빛이 모두 금이었으니, 이는 진실로 거짓이 아니었다.
52세 신묘년(1891, 고종 28)에 총섭의 인印을 받아서 거듭 천왕상天王像을 보수하였다. 이듬해에는 태안사로 옮겨 주석하며 부처님을 받들면서 안거를 하였다.
갑오년(1894, 고종 31)에 이르러서는 동학의 난리(東匪之亂)로 산야가 시끄러워 승려들도 흩어지고 족적을 감추었기 때문에 보존할 수가 없었다. 선사가 부득이하게 승려를 창솔倡率하여 동학의 무리를 물리쳤기 때문에 사찰이 수호되었고 승려는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소규모의 승려로도 이러했는데 하물며 대규모의 승려이겠는가? 창설된 의승의 담력과 기개는 모두 동일하였다. 이로부터 태안사의 상황은 말 그대로 태안하였다. 태안사로 말하자면 공이 높고 덕이 커서 그 어떤 사찰과 비교해도 제일가는 창업이었다는 것이 과언이 아니었다.
경자년(1900, 고종 37) 3월 2일에 경미한 병을 보이더니 조용하게 귀적하였다. 태안사의 서쪽 기슭에서 다비를 하였다. 세수는 61세이고, 법랍은 47년이다.
355. 조계종사 보명 선사전曹溪宗師葆明禪師傳
휘는 수일守一이고 속성은 장張씨이며 아버지 이름은 한우漢尤이고 어머니는 김金씨로서 곡성군 죽곡면 유봉리 출신이다. 도광 21년【헌종 7년(1841)】 신축년 6월 5일에 태어났다.
14세 때 동리산 명적암의 호월 선사皓月禪師를 찾아가서

012_0413_c_01L戒 從優曇而學經 參菡溟應化諸大
012_0413_c_02L1)匠宗 五六年間 食其父牛 沮其本色
012_0413_c_03L遊方旣周 受禪於戒父 得法於恩傅
012_0413_c_04L禪戒之複傳 恩法之重結者 尤倍尋常
012_0413_c_05L負擔 何尙非刼波之奇緣哉 其慧解才
012_0413_c_06L敏 能敵三愚十鈍 詞鋒棒喝 嚴如霜
012_0413_c_07L風 以其世諦上手藝巧技 可謂如析栴
012_0413_c_08L檀 片片皆檀 如作金器 光光皆金者
012_0413_c_09L信不誣矣 五十二辛卯 以佩㧾攝之印
012_0413_c_10L重繕天王之像 明年移錫泰安寺 奉佛
012_0413_c_11L安居 越甲午以東匪之亂 山野騷動
012_0413_c_12L僧渙遁跡 不能保存故 師不獲已 倡
012_0413_c_13L率僧侶 退熄匪類 寺以安堵 僧以保
012_0413_c_14L命 以小況大 倡義之膽氣一也 泰安
012_0413_c_15L從玆泰安 具於是寺 功高德大 比諸
012_0413_c_16L一番剏業 不爲過言也 至庚子三月二
012_0413_c_17L日 示微疾 庵然歸寂 茶毘于泰安之
012_0413_c_18L西麓 壽六十一 夏四十七

012_0413_c_19L

012_0413_c_20L曹溪宗師葆明禪師傳

012_0413_c_21L
諱守一 姓張 父漢尤 母金 谷城竹谷
012_0413_c_22L留鳳里人 道光二十一年憲宗
七年
辛丑六月
012_0413_c_23L五日生 十四投桐裡山明寂庵皓月禪
012_0413_c_24L「匠宗」疑「宗匠」{編}

012_0414_a_01L먹물 옷을 입고 득도得度하였다. 봉곡鳳谷에게 참문하여 경전에 입문하였고, 침명 강백枕溟講伯에게 참례하여 경전과 불교 전적을 깨쳤다.
27세 때 혜철암慧徹庵에서 건당을 하였고, 충운 화상忠雲和尙의 가풍에서 법을 얻었으며, 호를 보명葆明이라 하고, 혜철암에 주석하니 납자들이 점차 운집하였다.
30세 경오년(1870, 고종 7) 5월 5일에 이르러 혜철암이 참혹하게도 화재의 변을 당하였는데 암자를 중건할 사람이 없었다. 선사가 스스로 원력을 세우고 화주를 하였다. 신미년(1871, 고종 8) 봄에 혜철암을 중건하고 나니 찬연히 화성化城과 같았다. 이것이야말로 선사가 가장 공력을 기울여 노력한 불사였다. 널리 배우고 행위에는 집념이 넘쳤으며 계품이 고결하고 용의가 늠름하였으며 행의行義가 고고하지 않은 사람과는 벗이 되지 않았다.
병자년(1876, 고종 13) 9월에 이르러 병도 보이지 않고 조용히 입적하였다.
오호라, 망극하도다. 위로는 은법恩法이 반백의 눈썹과 하얀 머리털처럼 넉넉하였는데, 선사 앞으로는 봉향奉香하는 상족의 비구도 두지 않았으니, 더욱더 망극하도다. 세수는 36세이고, 법랍은 22년이다.
356. 조계종사 대붕 선사전曹溪宗師大鵬禪師傳
휘는 지수智藪이고 호는 대붕大鵬이며 속성은 김金씨로서 순천 주암 출신이다. 아버지 이름은 만기萬基이고 도광 21년 신축년(1841, 헌종 7)에 태어났다.
13세 때 조계산으로 가서 침연 화상枕淵和尙 밑에 참례하고 머리를 깎았으며 은사에게서 계를 받았다.
18세 때 우담優曇의 강석에 참문하여 경전을 배웠고, 침룡 선사枕龍禪師에게서 선禪을 받았다.
30세 때 은사에게서 법을 받고 청진암淸眞庵에 주석하였다. 선사가 은사에게 보여 준 효는 은사가 그 은사에게 보여 준 효와 같았다. 곧 음식을 봉양하고 물을 길었으며, 몸소 문단속을 하고 아침과 저녁으로 문안 여쭈기를 한시도 빠뜨리지 않았다.
35세 때 선사는 악연으로 해를 받아서 거의 음실婬室에 떨어질 뻔하였다. 그러나 은사가 병에 걸렸다는 급보를 받고는 문득 악연을 끊고 본사로 돌아오니 은사의 병환이 조만간 회복되었다. 세간 사람들의 정애情愛로 그것을 논하자면 이런 경우를 당해서도 선사의 경우처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는가?

012_0414_a_01L師 零染得度 參鳳谷入經 禮枕溟講
012_0414_a_02L伯了經籍 二十七建幢于慧徹庵 得法
012_0414_a_03L於忠雲和尙家 號葆明 住本庵 學子稍
012_0414_a_04L稍雲集 迄三十庚午五月五日 本庵酷
012_0414_a_05L遭回祿之變 無人重起 自願行化 辛
012_0414_a_06L未春重建本庵 煥然如化成 此乃師之
012_0414_a_07L肎綮劬勞之事業也 博學固行 戒器潔
012_0414_a_08L潔 容儀軒軒 非行義高孤者 莫與友
012_0414_a_09L也 至丙子九月 無疾而奄然 嗚呼罔
012_0414_a_10L極哉 上有恩法之尨眉鶴髮 前無奉香
012_0414_a_11L之上足苾芻 尤乎罔極 壽三十六 夏
012_0414_a_12L二十二

012_0414_a_13L

012_0414_a_14L曹溪宗師大鵬禪師傳

012_0414_a_15L
諱智藪 號大鵬 姓金 順天住嵓人 父
012_0414_a_16L萬基 道光二十一辛丑生 十三投曹溪
012_0414_a_17L禮枕淵和尙足下祝髮 受戒於恩師 十
012_0414_a_18L八叅優曇講下學經 受禪於枕龍禪師
012_0414_a_19L三十受法於恩師 住淸眞庵 師之孝於
012_0414_a_20L師 孝於恩師之孝於師 奉饌侍汲 親
012_0414_a_21L自幹檢 晨昏定省 一時無闕矣 三十
012_0414_a_22L五師爲惡緣所害 庶墮婬室 聞恩疾急
012_0414_a_23L報 頓斷惡緣而還寺 恩患頓甦 以世
012_0414_a_24L人情愛論之 犯此境遇 能行此事者

012_0414_b_01L이로 말미암아 본사로 돌아오게 된 것을 감사하게 간주하여 은부恩傅의 권장을 받아서 제방의 선지식을 참방하였다. 그리하여 자취가 높은 곳은 반드시 찾아갔고, 훌륭한 스님이 계신 곳이라면 반드시 참문하였다. 이처럼 사산四山의 명승지를 유람하면서 행각하면서 터득한 지견은 보통 납자들보다 아득히 뛰어났다.
이로부터 은사를 더욱더 부지런히 받들었는데, 혹 이웃 암자에서 특별한 공양청이 들어오는 경우일지라도 은사에게 공양하는 시간에 늦어질까 염려하여 그 공양청에 참여하지 않고 일찍 돌아와서 반드시 은사의 공양을 마치고서 자신의 공양을 하였다. 이 또한 아무나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선사는 범자학梵字學에 능통하여 주련柱聯과 다라니에 대한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에는 흔쾌히 곧바로 붓을 들었다. 그렇지만 한자漢字를 써 달라는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에는 한 번도 붓 잡는 것을 수락하지 않았고, 또한 시율詩律의 경우에도 기뻐하지 않았으니, 실로 본색납자의 본분이라 할 만하였다. 계해년(1923) 7월 9일에 경미한 병을 보이더니 입적하였다. 세수는 83세이고, 법랍은 70년이다.
357. 조계종사 구연 선사전曹溪宗師九淵禪師傳
휘는 법선法宣이고 자는 삼화三和이며 호는 구연九淵이고, 속성은 박朴씨로서 아버지 이름은 만상萬相이고 어머니는 이李씨이다. 도광 24년 갑진년(1844, 헌종 10) 3월 3일에 곡성군 석곡면 운월리에서 태어났다. 기상이 장대하였고 용의가 반듯하고 원만하였으며, 말씨는 맑고 깨끗하였고 심성은 평탄하여 흡사 대인의 그릇을 지니고 있었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3년의 복제를 마친 이후에 어머니를 따라서 외삼촌 댁으로 가서 살았지만 성명性命을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17세 때(1860, 철종 11) 조계산 송광사로 찾아가서 의영 총섭宜映㧾攝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이후 우담 화상이 선사의 설계사說戒師가 되었다.
19세 때 처음으로 우담의 강석에서 경전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거듭하여 선게禪偈를 받았다.
21세 때는 제방을 유력하면서 경붕景鵬·청공靑空·원화圓華 등의 대종장들로부터 진속이제眞俗二諦의 도리를 참문하였는데, 모두 유인游刃180)의 경지와 같았는데 오직 행상行相과 식수識數에 대하여 더욱더 간절하게 공부에 힘썼다. 그리하여 만약 선문의 향상어구向上語句에 대하여 말하자면 우담 노인優曇老人의 골수를 베고도 남을 정도였다.
37세 경진년(1880, 고종 17)에 용운당龍雲堂의 의발을 전수받았고,

012_0414_b_01L有幾人哉 由是感其返本 爲恩傅所勸
012_0414_b_02L參訪知識 迹高必尋 僧眞必詣 四山
012_0414_b_03L名勝 遊覽行脚 所得知見 逈異平品
012_0414_b_04L自是奉師益勤 或有隣庵別供 恐或恩
012_0414_b_05L供晩時 不參其供而還 必設恩供而
012_0414_b_06L自飡 此亦不爲不難也 師善梵字學
012_0414_b_07L有請柱聯及陀羅尼 輙喜而下筆 而至
012_0414_b_08L於漢字所請 一不肎把筆 又不喜詩律
012_0414_b_09L實所謂本色衲子而已 癸亥七月九日
012_0414_b_10L示微疾而化 世壽八十三 夏臈七十

012_0414_b_11L

012_0414_b_12L曹溪宗師九淵禪師傳

012_0414_b_13L
諱法宣 字三和 號九淵 姓朴 父萬相
012_0414_b_14L母李氏 道光二十四年甲辰三月三日
012_0414_b_15L生於谷城石谷雲月里 氣像魁梧 容儀
012_0414_b_16L方圓 語韻淸亮 心性平坦 恰爲大人
012_0414_b_17L之器局也 十三孤 服三年畢 隨母至
012_0414_b_18L舅家 難保性命 十七抵曹溪山松廣寺
012_0414_b_19L宜映㧾攝 爲之剃度 優曇和尙 爲之
012_0414_b_20L說戒 十九始學經於優曇講下 仍受禪
012_0414_b_21L偈 二十一遊方參景鵬靑空圓華諸大
012_0414_b_22L宗匠 眞俗二1)帝 悉游刃如而唯以行
012_0414_b_23L相識數 尤切着力工夫 若其禪門向上
012_0414_b_24L語句 斫得曇老之骨髓 三十七庚辰傳

012_0414_c_01L보조암에서 개당을 하였다. 이에 선사의 덕운이 부드럽게 펼쳐지니 법도들이 무수하게 모여들었다.
무자년(1888, 고종 25) 겨울에 500금을 화주하여 한꺼번에 범종을 주조하여 암자의 동쪽에 내걸었다.
기축년(1889, 고종 26)에 천자암天子庵으로 주석처를 옮겨서 처음으로 사성각四聖閣의 성탱聖幀과 단청(丹雘)을 해 놓으니 암자가 찬연하였다.
은부恩傅를 시봉하여 손수 공양을 지어 드렸는데, 몸을 봉양하는 것보다 뜻을 봉양하는 것에 더 마음을 다하였다. 부처님을 모시고 송념하는 일도 결코 일과로 빠뜨린 적이 없었다. 또한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을 가지고 아침과 저녁으로 발원을 하니 그것이야말로 도솔내원궁으로 상생하는 인연을 맺는 곳이 아니었겠는가?광서 23년 정유년(1897, 고종 36) 가을에 보조암의 별실로 주석처를 옮겼는데 그때 약간의 병을 보였다. 11월 28일에 이르러 보조암에서 조용히 귀적하였다. 북쪽 기슭에서 다비를 하였고, 동각東閣에 진영을 모셨다. 세수는 54세이고, 법랍은 37년이다.
358. 조계종사 경해 선사전曹溪宗師鏡海禪師傳
휘는 관일官一이고 호는 경해鏡海이며, 속성은 엄嚴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노영魯永이고 어머니는 ▣씨로서 순천군 주암면 갈마리 출신이다. 도광 23년 계묘년(1843, 헌종 9) 11월 12일에 태어났다. 집안이 가난하여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20세 때 조계산의 경잠 대사敬岑大師를 찾아가서 출가하였고, 우담 선사에게 참례하여 계를 받았다.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하여 3년여 동안 열심히 공부하였는데 등불로 밤을 밝혔다. 함명菡溟·청공靑空·경붕景鵬·보명葆明에게 참문하여 경학을 마치고 『통사通史』를 세 번이나 열람하였지만 그 맛은 마치 지게미와 같았다.
30세 때 백의대성관음보살에게 100일 기도를 하였는데, 몇 차례나 가피를 받고 자비와 인욕이 증상하였다. 이에 참석하는 법회마다 향을 살라 부처님께 바치니 그 명성이 파다하였다. 비록 지혜와 이해가 명랑明朗하지는 않았지만 살림살이에 점차 여력이 생겼다.
35세 때 응허 대사應虛大師에게 법을 얻고

012_0414_c_01L得龍雲堂之衣鉢 開堂於普照庵 德
012_0414_c_02L雲冉冉 法徒濟濟 戊子冬化緣五百金
012_0414_c_03L鑄銕井一口 掛庵之東 己丑移錫天子
012_0414_c_04L庵 剏始四聖閣聖幀及丹雘 煥然輪焉
012_0414_c_05L奉侍恩傅 手自進供 養志尤勝於養身
012_0414_c_06L以奉佛念誦 宜無闕課 又於彌勒上生
012_0414_c_07L經 爲晨夕發願處 疑是上生內院之結
012_0414_c_08L緣耶 光緖二十三丁酉秋 移錫普照別
012_0414_c_09L室 小有微恙 至十一月二十八日 奄
012_0414_c_10L眞歸寂 茶毘于北麓 掛眞于東閣 壽
012_0414_c_11L五十四 夏三十七

012_0414_c_12L

012_0414_c_13L曹溪宗師鏡海禪師傳

012_0414_c_14L
諱官一 號鏡海 姓嚴 父魯永 母□
012_0414_c_15L氏 順天住嵓渴馬里人 道光二十四年
012_0414_c_16L癸卯十一月十二日生 家貧不能讀書
012_0414_c_17L二十投曹溪之敬岑大師得度 禮優曇
012_0414_c_18L禪師得戒 始入學 2)三餘篤工 以燈繼
012_0414_c_19L晷 參菡溟靑空景鵬葆明經畢 三讀通
012_0414_c_20L史 猶味糟粕 三十祝白衣大聖一百
012_0414_c_21L日 幾蒙加被 慈忍增上 所到會以看
012_0414_c_22L香奉佛 頗得其名 慧解雖不明朗 產
012_0414_c_23L業稍有餘力 三十五得法於應虛大師
012_0414_c_24L「帝」疑「諦」{編}「三」下疑脫「年」{編}

012_0415_a_01L자정암慈靜庵과 광원암廣原庵에 주석하면서 인연을 따라 자비로써 제도하는 것을 행업으로 삼았다. 연후에 민족의 구원을 앞세우느라 자못 많은 재물을 쓰고 끝내 청빈한 선자로 남았다. 무진년(1928) 2월 3일에 입적하였다. 세수는 86세이고, 승랍은 66년이다.
359. 조계종사 원해 선사전曹溪宗師圓海禪師傳
휘는 봉옥鳳玉인데 이후에 문주文周【어떤 노인이 꿈에서 내려 준 이름이다.】라 개명하였고, 자는 어화魚化이며 호는 원해圓海이고, 속성은 음陰씨이며, 아버지 이름은 도황道晃이고 어머니는 김金씨이다. 낙안 출신으로 도광 30년【철종 원년(1850)】 경술년 3월 15일에 태어났다. 골상이 특수했고 얼굴은 길어서 한 길이 넘었으며 누구보다도 힘이 셌다. 집에서는 책을 읽을 수가 없어서 출가하여 배우려고 하자 부모가 허락하며 말했다. “만약 수행을 성취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큰 죄를 짓는 것이다.”
16세 때 조계산의 송광사로 가서 수산 대사守山大師에게 빌어서 머리를 깎았고 응해 선사應海禪師에게 계를 받은 후에 처음으로 공부에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새가 새장을 벗어난 것과 같았고, 호랑이가 산을 버티고 앉은 것과 같았다. 속가의 집에 있으면서 발원했던 것이 여기에 이르러 바야흐로 해결되었다. 이에 좌선과 독서로 날을 보내 땀으로 봄옷을 적시는 줄도 몰랐으며, 붓을 들고 밤을 지새워 엉덩이 살이 썩어서 여름 잠방이를 적시는 줄도 몰랐으며, 잠도 폐하고 밥 먹는 것도 잊었으니, 어찌 옛날의 모범이 아니겠는가?21세 때 우담 화상에게 참문하여 경전을 배웠고, 경붕景鵬·원화圓華·혼해混海 등 여러 대강백들을 찾아가서 삼장의 교해를 배웠으며, 육경六經(시·서·역·춘추·예기·악의 여섯 경전)과 사림詞林(시문을 모아 엮은 책)을 샅샅이 섭렵하였고, 기타 오행과 점술까지도 종합하고 분석하였다.
32세 신사년(1881, 고종 18) 3월에 건당을 하였는데, 은사로부터 법인을 받았으니 곧 부휴 선수 종풍의 제10세손이다. 광원암에 주석하다가 이듬해에 천자암天子庵으로 주석처를 옮겼다.
을유년(1885, 고종 22) 봄에 함명 화상菡溟和尙을 참방하여 『선문염송禪門拈頌』에 대하여 묻고 공부하였다.
병술년(1886, 고종 23) 봄에 남쪽으로 범해 대가梵海大家를 찾아가서 세속제를 배우고 구족계를 받았다. 같은 해 가을에 은적암隱寂庵에 주석하였는데 경전을 공부하는 스님이 좌선하는 것을 싫어하자

012_0415_a_01L住慈靜廣原 隨緣慈濟爲業焉 後以爲
012_0415_a_02L先救族 頗費產物 竟爲淸寒禪子也
012_0415_a_03L戊辰二月三日化 世壽八十六 僧臘六
012_0415_a_04L十六

012_0415_a_05L

012_0415_a_06L曹溪宗師圓海禪師傳

012_0415_a_07L
諱鳳玉 後改文周有老人
夢授云
字魚化 號圓
012_0415_a_08L海 姓陰 父道晃 母金氏 樂安人 道光
012_0415_a_09L三十哲宗
元年
庚戌三月十五日生 骨相殊特
012_0415_a_10L面尺所丈仭餘 膂力過人 家未能讀
012_0415_a_11L求出家學 父母許之曰 學若不成 幽
012_0415_a_12L愆有在 十六投曹溪之松廣 祝守山大
012_0415_a_13L師髮 受應海禪師戒 始入學 如鳥出
012_0415_a_14L籠 似虎靠山 在家結願 到此方解 坐
012_0415_a_15L讀移晷 不知汗沾春衣 把筆經宵 不
012_0415_a_16L卞髀腐夏裩 廢枕忘饌 何專㜫於古哉
012_0415_a_17L二十一參優曇和尙學經 訪景鵬圓華
012_0415_a_18L混海諸大講下 三藏敎海 六經詞林
012_0415_a_19L游泳而涉獵 其餘五行數術 莫不綜劾
012_0415_a_20L三十二辛巳三月建幢 佩恩師法印 卽
012_0415_a_21L浮休宗十世孫也 住廣原庵 明年移錫
012_0415_a_22L天子庵 乙酉春參菡溟和尙 叩問禪門
012_0415_a_23L拈頌 丙戌春南向梵海大家 學世俗諦
012_0415_a_24L受具足戒 同年秋住隱寂庵 執經者嫌

012_0415_b_01L자정암慈靜庵으로 옮겼다. 그리고 도량이 좁은 것을 피하여 정해년 가을에 보조암普照庵으로 옮기자 훌륭한 제자들이 우루루 그를 따랐다.
광서 14년 무자년(1888, 고종 25) 2월 22일에 미미한 병을 보이고서 열반하였다. 오호라, 망극하도다. 상족의 비구로서 찬의贊儀 등이 다비를 하였고, 진영을 그려 모셨다. 세수는 39세이고, 법랍은 23년이다.
360. 조계종사 포우 선사전曹溪宗師布雨禪師傳
휘는 행성幸性이고 자는 운수雲叟, 법자法字는 포우布雨이다. 속성은 강姜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상백嘗百이며 어머니는 김金씨이다. 도광 30년 경술년(1850, 철종 1) 12월 8일에 순천군 송광면 인덕리에서 태어났다. 처음에 어머니 김씨가 어떤 기이한 사람이 붓 한 자루를 주는 꿈을 꾸고는 깨어나서 임신을 하였다.
9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입학하였는데, 맹모삼천의 가르침과 육시六時181)의 교훈이 있었다. 어찌 특별히 맹모孟母일 뿐이겠는가?15세 때(1864, 고종 1) 경전과 불서를 열람하였는데 그 필명이 향리에 파다하였다. 이것이야말로 어머니 김씨의 꿈과 부합된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점술가가 출가를 시키면 연명할 것이라고 말하자, 어머니는 아들이 요절할 것을 두려워하여 출가를 허락하였다.
16세 을축년(1865, 고종 2)에 조계산 인암 대덕印庵大德을 찾아가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고, 연봉 대사蓮峯大師에게 계를 받았으며, 거듭하여 경전 공부에 들어가서 하루를 이틀로 삼아 독서를 하였다. 그것은 마치 비가 모래를 모아 오는 것과 같았고 진홍색 흙이 다른 색을 압도하는 것과 같았다. 뛰어난 재능으로 글을 읽고 문장을 지었고, 더욱이 이두吏讀를 좋아하였으며, 소장訴狀을 써 줄 때마다 반드시 엄제嚴題182)를 얻어 냈다. 이에 사람들이 산중의 아전(山中吏生)이라 일컬었다.
21세 때 제방을 유력하면서 우담과 함명 두 대가에게 참문하여 교학과 경론에 대하여 토론하였는데 도리에 합치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29세 무인년(1878, 고종 15)에 청진암에서 건당하였고, 영허盈虛의 가풍에서 법인을 받고서 보조암의 조실에 주석하였다. 이에 개당을 하고 불자를 치켜세워서 오연五緣183)을 두루 갖추니 사부대중이 모두 모여들었다. 또한 시율詩律을 좋아하여 필묵으로 제목을 붙여서 시를 읊으니 그 문중에서 많은 사람이 배출되었다.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昇仙橋下水東流  승선교 밑의 물은 동쪽으로 흐르는데
點點落花片片浮  점점이 흩어진 낙화 편편이 떠간다네


012_0415_b_01L寂 移錫慈靜庵 又嫌陜窄 丁亥秋移
012_0415_b_02L普照庵 獅徒喬喬而追之 光緖十四戊
012_0415_b_03L子二月二十二日 小疾而湼槃 嗚呼罔
012_0415_b_04L極哉 上足苾蒭贊儀等 茶毘畫眞 壽
012_0415_b_05L三十九 臈二十三

012_0415_b_06L

012_0415_b_07L曹溪宗師布雨禪師傳

012_0415_b_08L
諱幸性 字雲叟 布雨 法字也 姓姜 父
012_0415_b_09L嘗百 母金氏 道光三十庚戌十二月八
012_0415_b_10L日 生於順天松光面仁德里 初金夢有
012_0415_b_11L異人 授毛穎一枚 覺有娠 九歲遭孤
012_0415_b_12L依母敎入學 三遷之敎 六時之訓 何
012_0415_b_13L特孟母而已哉 十五閱經籍 筆名播鄕
012_0415_b_14L里 無乃金夢之符契歟 有相者 令出
012_0415_b_15L家延命 母畏夭許之 十六乙丑投曹溪
012_0415_b_16L印庵大德剃度 於蓮峯大師得戒 仍入
012_0415_b_17L經倍日并讀 如雨聚沙 如絳壞色 才
012_0415_b_18L敏屬文 尤好吏讀 每寫訴狀 必得嚴
012_0415_b_19L題 人稱山中吏生 二十一遊方參優曇
012_0415_b_20L菡溟二大家 討論敎經 莫不沕合也
012_0415_b_21L二十九戊寅竪幢於淸眞庵 佩印乎盈
012_0415_b_22L虛之家 住普照室 開堂竪拂 五緣周
012_0415_b_23L備 四衆畢集 又喜詩律 翰墨題詠 多
012_0415_b_24L出其門 有詩曰 昇仙橋下水東流 點

012_0415_c_01L
일상생활에서 주고받는 시들이 모두 이와 같았다.
신사년(1881, 고종 18)에 광원암으로 주석처를 옮겼는데, 숙환이 병으로 진행되었다. 갑신년(1884, 고종 21) 12월 초이렛날에 숙환이 위중해져 조용하게 시적하였다. 상족인 성학聖鶴이 색신을 받들어 붙들고서 끝없이 애통하게 곡을 하였다. 가치加峙에서 다비를 마쳤다. 세수는 35세이고, 법랍은 19년이다.
361. 조계종사 하담 선사전曹溪宗師荷潭禪師傳
순천군 낙천면 동내리 출신으로 아버지 조석록曹錫錄과 어머니 김金씨의 아들이다. 도광 30년 경술년(1850, 철종 1) 8월 13일에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자당을 모셨는데 살림살이가 무척 가난하였다.
15세 갑자년(1864, 고종 1) 2월 25일 선암사의 선찬 수좌善贊首座를 따라서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고, 설악雪嶽을 참례하고 계를 받았으며, 환월幻月을 친견하고 선禪을 전하였고, 만화萬花와 경붕景鵬 강백을 참방하여 경전을 배웠다.
광서 8년 임오년(1882, 고종 19) 4월 17일에 이르러 조계산의 은담 선사銀潭禪師에게서 법을 받았는데, 곧 묵암 화상의 제5세손이다.
가업이 청빈한 것이야말로 실로 납자의 본색이고, 예술에서 기교를 버리는 것이야말로 곧 교묘한 기술의 재주이다. 일찍이 사산四山의 선지식을 참방하면서 항상 자기의 주인공을 찾아다녔다. 향을 피우면서 부처님을 받드는 것이 곧 일생의 장기長技이고, 물 긷고 나무를 하는 것이 하루 육시의 자비수행이었다. 총명한 지혜는 비록 빼어났지만 언사는 어눌하였다.
휘는 향섭向燮이고 자는 국천掬泉이며 호는 하담荷潭이다. 나이 75세 갑자년(1924)에 이르러 태안사로 가서 주지 임무를 맡았다. 이듬해 을축년(1925) 9월 29일에 병도 보이지 않고 입적하였다. 세수는 76세이고, 법랍은 61년이다.
362. 조계종사 함호 선사전曹溪宗師菡湖禪師傳

012_0415_c_01L點落花片片浮 其尋常酬酌 皆如此
012_0415_c_02L辛巳移錫廣原庵 以宿症爲患 至甲申
012_0415_c_03L十二月初七日 宿患篤重 奄然示寂
012_0415_c_04L上足聖鶴 號奉色身 痛悼罔極 茶毘
012_0415_c_05L于加峙 壽三十五 夏十九

012_0415_c_06L

012_0415_c_07L曹溪宗師荷潭禪師傳

012_0415_c_08L
順天洛川面東內里曺錫錄母金氏之子
012_0415_c_09L也 道光三十庚戌八月十三日生 早孤
012_0415_c_10L奉萱 家道甚薄 十五甲子二月二十五
012_0415_c_11L日 從仙嵓寺善贊首座剃度 禮雪嶽而
012_0415_c_12L得戒 見幻月而傳禪 參萬花景鵬講下
012_0415_c_13L學經 至光緖八年壬午四月十七日 受
012_0415_c_14L法於曹溪之銀潭禪師 卽默庵和尙之
012_0415_c_15L五世孫也 家業淸寒 實衲子本色 藝
012_0415_c_16L術絕巧 是工業餘才 早訪四山之知識
012_0415_c_17L常覓自家之主翁 沾香奉佛 卽一生之
012_0415_c_18L長技 運水搬柴 乃六時之行慈 聦慧
012_0415_c_19L雖絕 言詞若訥 諱向燮 字掬泉 號荷
012_0415_c_20L潭也 年至稀五甲子 行泰安寺住持任
012_0415_c_21L明年乙丑九月二十九日 無疾而化 壽
012_0415_c_22L七十六 臈六十一

012_0415_c_23L

012_0415_c_24L曹溪宗師菡湖禪師傳

012_0416_a_01L
처음 이름은 기현基玄이었지만 이후에 개명하여 완규玩珪라고 하였다. 호는 함호菡湖이다. 순천군 해촌면 덕암리 출신이다. 속성은 장張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필주弼周이고 어머니는 서徐씨이다. 함풍 3년 계축년(1853, 철종 4) 11월 13일에 태어났다. 골상은 미남이었고, 피부는 윤택하였으며, 성품은 무척 뚝심이 있었고, 심지는 금강석과 같았으며, 요사스러운 마귀마저도 동요시키지 못하였다. 조계산 송광사의 승허 대사乘虛大師에게 동진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서주西舟 법사에게 계수예배를 하고 계를 받았다.
20세 때 우담·함명·경붕에게 참문하여 경전을 배웠다.
33세 을유년(1885, 고종 22) 봄에 휴암休庵 법사에게서 법인을 받았는데, 곧 응암 조사應庵祖師의 제5세손이다. 마음은 비록 중생을 구제하는 학문이 간절하였지만 몸은 이미 경제적인 처방이 다급하였기 때문에 썩은 흙조차 아끼기를 보배처럼 하였고, 행위는 검박하여 두타행처럼 하였다. 가옥이 점차 윤택해지자 수도를 위한 활용도 점차 충족되어 갔다. 이에 먼저 법조法祖의 진영을 모셨는데, 항상 선조들의 진영이 없는 것을 한탄스러워하였다. 이에 신해년(1911) 봄에 금명錦溟과 함께 상의하여 땅을 팔아서 선조들의 진영을 모시고, 이어서 불조佛祖의 재수齋需로 활용하도록 봉헌하였다.
계축년(1913) 봄에 송광사에서 생전예수시왕생칠재生前豫修十王生七齋를 지내기 위하여 사산四山에 시왕에 대한 공양을 시설하였다. 연후에 일생 동안 모은 재물로 슬하의 칠부대중七部大衆에게 지속적으로 음식을 제공하였다. 세제世諦가 이미 골고루 미치게 되자 다시 법력의 도모에 힘썼다. 그 일환으로 먼저 관음암과 지장암에서 하안거를 결제하고, 이어서 천은사泉隱寺와 삼일선원三日禪院과 미타전彌陀殿과 칠불방七佛房에서 동안거를 결제하였다.
또한 청진당淸眞堂과 봉서암鳳瑞庵에서는 1년 내내 연중으로 안거를 하였다. 또한 그곳에서 10년 동안 주석하면서 육시염송六時念誦을 하였는데, 언제나 귀신들을 기쁘게 해 주려고 세 숟가락의 음식을 남겨 두었으며, 날짐승까지 불러 보시로 공양하였다. 그리고 지극히 중요한 계획이나 중요한 불사의 경우에 있어서 사람들의 합의가 없으면 설령 목을 자른다 해도 믿음으로써 따르지 않았고, 권속들이 협의하면 설령 살점을 베어 낸다 해도 그것을 애석하게 여기지 않았다. 타고난 성품이 이와 같았는데 그 누가 감히 이러쿵저러쿵하겠는가?무진년(1928) 봄에 토지를 내놓아 마련한 쌀 10석을 관음불전의 공양미로 충당하였고, 다시 중단된 향공양에 충당하였다.

012_0416_a_01L
初名基玄 後改云玩珪 號菡湖 順天
012_0416_a_02L海村德嵓里人 姓張 父弼周 母徐氏
012_0416_a_03L咸豊三年癸丑十一月十三日生 像如
012_0416_a_04L冠玉 膚脊潤澤 性甚固執 心柱如砥
012_0416_a_05L石 妖孽莫能動 童眞出家於曹溪山松
012_0416_a_06L廣寺乘虛大師家剃髮 稽首西舟師服
012_0416_a_07L戒 二十參優曇菡溟景鵬學經 三十三
012_0416_a_08L乙酉春 受休庵之法印 卽應庵祖之五
012_0416_a_09L世孫也 心雖切於濟衆之學 身已急於
012_0416_a_10L經濟之方 惜糞壤如金玉 行儉朴如頭
012_0416_a_11L陀 家屋漸潤 用道稍足 先掛法祖之
012_0416_a_12L影像 常恨先祖之無影 辛亥春與錦溟
012_0416_a_13L議買土封影故也 次獻佛祖之齋需 癸
012_0416_a_14L丑春修生七齋於本寺 設十王供於四
012_0416_a_15L山然後 一生鳩聚之財 膝下七衆 鱸
012_0416_a_16L列而食 世諦旣周 法力更圖 先結夏
012_0416_a_17L於觀音地藏庵 次安居于泉隱三日院
012_0416_a_18L彌陁殿七佛房 亦一臈之掛牌 淸眞堂
012_0416_a_19L鳳瑞庵 并十年之住錫 六時念誦 必
012_0416_a_20L神祗之懽悅 三匙殘飡 招烏鵲而施供
012_0416_a_21L經綸至大 事業必重 人無合意兮 雖
012_0416_a_22L殞首 不足以信從 眷有恊情兮 雖割
012_0416_a_23L肉 不足爲愛惜 賦性如是 孰敢間然
012_0416_a_24L戊辰春納土十石 爲觀音佛粮 更設停

012_0416_b_01L또한 염불당에 쌀 17석을 봉헌하여 영구히 염송이 단절되지 않도록 하였고, 금 30속束을 팔아서 삼신불의 개금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사중과 선원에 쌀 13석을 봉헌하였고, 또한 30석의 토지를 팔아서 700냥이나 되는 재수품을 희사하여 사중과 염불당에 맡겨 두고 무차법회를 개최하도록 하였다. 또한 천도 기타 장례 비용과 문도들이 자생하는 데 필요한 설비 자금 등 갖가지를 마련하여 그들에게 맡겨 둘 것을 붓으로 기록해 두었다.
이후 8월 9일에 개금불사를 시작하여 15일에 마치고 그것을 봉안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오후 4시 무렵에 아무런 병도 없이 음식을 물리치고 조용하게 좌화坐化하였다. 그런데 안색이 엷은 황조를 띠고 있어서 평소와 같이 앉아서 눈을 감고 있는 것과 같았다. 주검을 보관하고 있는 방에 구경하는 이들이 시장처럼 넘쳤는데 어린이들이 찾아와서 “우리 스님께서 주무시고 있다.”라고 하였다. 다비식으로 장례를 마치는 경우에도 여전히 장자長者의 위의와 같았다. 오호라, 세수는 76세이고, 법랍은 61년이다. 문인 종식鍾植과 동수東秀 등이 영골을 수습하여 비등碑嶝에 부도탑을 건립하였고, 영당에 진영을 모셨다.
363. 조계종사 취월 선사전曹溪宗師翠月禪師傳
선사의 휘는 기순琪珣이고 법호는 취월翠月이며, 속성은 장張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염廉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金씨이다. 함풍 2년(1852, 철종 3) 임자년 정월 25일에 동복군 군면184) 하가리에서 태어났다.
8세 때 입학하였고, 봄에는 밭을 갈고 가을에는 책을 읽으면서 다만 가난한 선비의 가풍을 이어갔다. 또한 무속의 말을 목숨을 늘리는 도道로 믿었다.
17세 무진년(1868, 고종 5)에 부모를 떠나 순천군 조계산 송광사로 출가하여 서룡 율사瑞龍律師를 은부로 삼고, 계은 선사桂隱禪師를 계사로 삼았으며, 거듭하여 『치문緇門』 과 사집四集 등을 읽었다. 3년 동안 시봉을 하였는데 이미 삼평三平의 행업으로 간주되었다.

012_0416_b_01L止之香供 又獻十七石于念佛堂 永世
012_0416_b_02L不絕念誦 買金三十束 以銑三佛改金
012_0416_b_03L又獻十三石于寺中及禪院 而又捨三
012_0416_b_04L十石土 賣爲七百兩齋之需 囑于寺
012_0416_b_05L中及念佛堂 使作無遮之會 以資㝠路
012_0416_b_06L其他葬費 及門徒資生之具 色色磨鍊
012_0416_b_07L而言而囑之 筆以記之後 八月初九改
012_0416_b_08L金始役 十五日畢 奉安之 又明日晡
012_0416_b_09L時 無病撤飮 奄然坐化 顏色淡黃 如
012_0416_b_10L常坐眊 尸歛之房 玩者如市 小軰赴
012_0416_b_11L曰 吾師眠矣 茶毘葬式 況如長者之
012_0416_b_12L威儀 嗚呼 世壽七十六 坐夏六十一
012_0416_b_13L門人鍾植東秀等 收拾靈骨 塔于碑嶝
012_0416_b_14L掛眞于影堂

012_0416_b_15L

012_0416_b_16L曹溪宗師翠月禪師傳

012_0416_b_17L
師諱琪珣 翠月 法號也 姓張氏 父諱
012_0416_b_18L廉 母金海金氏 咸豊二年壬子一月二
012_0416_b_19L十五日 生於同福郡郡面下佳里 八歲
012_0416_b_20L入學 春耕秋讀 只不絕寒士之家風
012_0416_b_21L又信巫筮之說 以續命之道 年至十七
012_0416_b_22L戊辰 謝親出家於順天郡曹溪山松廣
012_0416_b_23L寺 以瑞龍律師爲恩父 以桂隱禪師爲
012_0416_b_24L戒師 仍讀緇門四集 三年侍汲 旣做

012_0416_c_01L그러니 세간을 벗어나는 불사의 수행이야 어찌 번뇌를 벗어날 기약이 없겠는가?신미년 19세(1870, 고종 7)에 이르러서 유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 경붕景鵬과 구연九淵의 2대 강백을 참방하여 모든 불경(竺墳)을 열람하였다. 다시 기룡騏龍·응화應化·우담優曇·경봉景峯의 4대 석학을 찾아가서 어언 14년 동안 『춘추』(魯史)를 섭렵하였다. 그동안 답습했던 글방의 방적芳跡을 벗어나서 서감書監의 직책을 맡았다.
33세에 이르러 조계에서 건법당建法幢을 해서는 추파 홍유秋波泓宥의 법수法水를 받아들였고, 청진암淸眞庵에 주석하면서 침연枕淵의 선등禪燈을 계승하였다. 이에 그 법연을 따르고 의기투합한 것이 마치 범종이 종 치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과 같았고, 거울이 피로를 잊은 것과 같았는데, 그것이 10여 년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또한 다시 불전佛殿에서는 향을 받들었고, 혹 유나가 되었는데, 법사法事에 매우 부지런하여 결코 게으름을 피운 적이 없었다.
또한 의술에 있어서도 스스로 그 근원을 터득하였는데, 먼저 허생許生의 고결高訣에 참문하여 공부하였고, 이어서 정안鄭安의 진혈眞穴을 살피며 공부하였다. 이 때문에 사찰과 이웃 마을에서도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반드시 맞아들여 사양하는 법이 없었고, 새벽이나 저녁이나 추우나 더우나 마치 목마른 사람이 물 찾듯이 달려갔는데, 특히 침술에 뛰어났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장의선생張醫先生이라 불렀다.
364. 조계종사 화성 선사전曹溪宗師華性禪師傳
처음의 휘는 성진性眞이었는데 주흔湊炘이라고도 불렀으며, 자는 병연丙淵이며, 처음의 호는 법해法海였는데 또한 화성華性이라고도 하였다. 속성은 김金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이성伊城으로 본래 낙안 사람이었는데 송광면 삼청리로 옮겨 살았고, 어머니는 이李씨이다. 함풍 4년(1854, 철종 5) 갑인년 8월 23일에 태어났다. 10세 때 부모를 여의고 고애자가 되어 맏형에게 몸을 의탁하였지만 보존할 수가 없었다.
12세 을축년(1865, 고종 2) 조계산 은적암에 들어갔다. 14세 때 한운 장로漢雲長老를 참례하여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고, 영담 대사影潭大師에게 수계를 받았으며, 침연 화상枕淵和尙에게 참문하여 경전을 배웠다.
21세 때 제방을 유행하면서

012_0416_c_01L三平之行 出世事業 盍無出籠之期
012_0416_c_02L至辛未十九歲 恣其遊學 初參景鵬九
012_0416_c_03L淵二大講下 閱盡竺墳 更謁騏龍應化
012_0416_c_04L優曇景峯四大碩德 涉獵魯史 於焉十
012_0416_c_05L四年間 出履黌海之芳跡 入作書監之
012_0416_c_06L任斑 至三十三歲 建法幢於曹溪 吸
012_0416_c_07L秋波之法水 掛住錫於淸眞 繼枕淵之
012_0416_c_08L禪燈 於是隨緣唱酬 如鍾待扣 鏡忘
012_0416_c_09L疲者 不是十餘年而已 亦復奉香於佛
012_0416_c_10L殿 或行維那 於法事 唯勤無怠 又於
012_0416_c_11L醫方 自得其源 先參許生之高訣 次
012_0416_c_12L察鄭安之眞穴 所以寺內及隣里 或有
012_0416_c_13L急症 必以邀迎而不辭 晨昏寒暑 奔
012_0416_c_14L臨如渴 最有力於鍼灸 人稱張醫先生
012_0416_c_15L云爾

012_0416_c_16L

012_0416_c_17L曹溪宗師華性禪師傳

012_0416_c_18L
初諱性眞 又名湊炘 字丙淵 初號法
012_0416_c_19L海 又曰華性 姓金 父伊城 本樂安人
012_0416_c_20L寓松光面三淸里 母李氏 咸豊四年甲
012_0416_c_21L寅八月二十三日生 十歲喪孤哀 托身
012_0416_c_22L兄長 莫能保存 十二乙丑投曹溪之隱
012_0416_c_23L寂庵 十四拜漢雲長老祝髮得度 受戒
012_0416_c_24L於影潭大師 參枕淵和尙學經 二十

012_0417_a_01L경붕景鵬·원화圓華·혼해混海·범해梵海 등 여러 대강백을 참례하여 그들의 현오玄奥를 터득하였고, 경붕 화상景鵬和上에게서 선禪을 받았다.
30세 계미년(1883, 고종 20) 조계산 광원암에서 건당을 하고, 은부恩父의 법인을 받아서 개당을 하여 불자를 치켜세워서 사원社院의 가풍을 계승하였다.
무자년(1888, 고종 25) 봄에 보조암으로 옮겼는데 마침 전당이 기울어 무너졌다. 이에 화주로 재물을 모아서 동서東序185)와 북쪽의 건물에 각 한 칸씩을 증축하여 훤하게 일신하였다. 옛날에 청제▼(厂*青)祭 때문에 고충을 겪었는데 그 청▼(厂*青)을 옮기고 제사를 폐지했던 적이 있다. 이것은 곧 오랜 세월 동안의 고질병이 하루아침에 문득 치유된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천성이 산수를 좋아하여 멀리는 옥룡玉龍186)의 비법을 계승하였고, 가까이는 백운白雲187)의 학문을 따라 걸었다. 이에 음양가의 현담과 묘리에 자못 유인游刃188)의 경지와 같은 점이 있었다. 일용생활에서도 손에서 백팔 개의 염주를 놓지 않았고, 입으로는 『천수경千手經』 주문을 그만두지 않았다. 한 개비의 단향을 피워 두고 육시로 예경하면서 무량한 관자재보살을 일생의 과업으로 삼아 염송하여 재앙을 없애고 복을 불러오는 경앙慶殃을 자신의 기쁨으로 누렸다.
임인년(1902)에 섭리攝理의 임무를 맡았다. 이후 사산四山의 유람에 나섰는데 쌍계사의 방장암과 동리산의 명적암과 여수의 향일암 등은 모두 선사의 주석처였다.
신유년(1921) 겨울에 태안사의 선원에 주석하였고, 갑자년(1924)에 다시 향일암으로 갔으며, 을축년(1925) 겨울에 태안사로 돌아와 주석하였고, 병인년(1926) 가을에 조계산으로 돌아갔으며, 정묘년(1927) 봄에 별을 보며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제50일에 이르러 작은 병을 보이고는 4월 8일 저녁에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세수는 74세이고, 법랍은 60년이다.
365. 조계종사 수경 선사전曹溪宗師袖鯨禪師傳
남원 세전細田 출신으로 아버지 김익룡金翼龍, 어머니 김金씨의 아들이다. 함풍 5년(1855, 철종 6) 을묘년 7월 9일에 태어났다.
18세 임신년(1872, 고종 9)에

012_0417_a_01L一遊方禮景鵬圓華混海梵海諸大講伯
012_0417_a_02L盡得其玄奥 受禪於景鵬和上 三十癸
012_0417_a_03L未建幢于曹溪之廣原 受恩父之法印
012_0417_a_04L開堂竪拂 能繼社院之家風 戊子春移
012_0417_a_05L普照庵 適乎殿宇傾頹 倡化鳩財 東
012_0417_a_06L序北廡 各增一間 煥然一新 昔有▼(厂*青)
012_0417_a_07L祭之苦瘼 移其▼(厂*青)廢其祭 是可謂積年
012_0417_a_08L苦疾 一朝頓瘳者也 且性好山水 遠
012_0417_a_09L承玉龍之術 近步白雲之學 陰陽家之
012_0417_a_10L玄談妙理 頗所遊刃也 至於日用 手
012_0417_a_11L不釋百八之珠 口不掇千手之呪 一炷
012_0417_a_12L檀香 六時禮敬 以無量觀自在 爲一
012_0417_a_13L生之課念 其消灾降福之慶殃 只可自
012_0417_a_14L悅而已 壬寅行攝理之任 四山之遊覽
012_0417_a_15L雙溪之方丈 桐山之明寂 麗水之向日
012_0417_a_16L庵 皆是住錫之地 辛酉冬住泰安之禪
012_0417_a_17L院 甲子再赴向日庵 乙丑冬還住泰安
012_0417_a_18L寺 丙寅秋返于曹溪 丁卯春祈星一百
012_0417_a_19L日 至第五十日 示微疾 四月八日夕
012_0417_a_20L奄化 世壽七十四 僧臘六十

012_0417_a_21L

012_0417_a_22L曹溪宗師袖鯨禪師傳

012_0417_a_23L
南原細田人 金翼龍 母金氏之子也 咸
012_0417_a_24L豊五年乙卯七月九日生 十八壬申 投

012_0417_b_01L곡성의 동리산에 나아가서 준화 대사俊華大師에게 참례하고 머리를 깎았고, 호월 선사皓月禪師에게 참문하여 찬민贊玟이라는 계명을 받았으며, 강백 경붕당景鵬堂에게서 경전을 배웠고 또한 향을 사르고 선을 받았으며, 호은 율사虎隱律師에게서 보살계를 받았다.
계미년(1883, 고종 20) 29세 때 조계산 선월 화상禪月和尙에게서 법을 받고, 호는 수경袖鯨이라 하였으며 송광사 동일암東日庵에 주석하였다.
35세 때 16국사의 진영에 대한 개채불사改彩佛事를 하였다.
57세 신해년(1911)부터 3년 동안 송광사 주지를 지냈다. 병진년(1916)에 방장산 천은사에 초청되어 나아갔고, 약사암의 강원에 주석하였다. 이듬해(1917) 경산 봉원사奉元寺에 초청되어 나아갔고, 가을에 금강산에 들어가서 표훈사에서 수개월 동안 머물다가 유점사에 나아가 주석하면서 강의를 하였다.
이듬해(1918) 봄에 송광사로 돌아왔고, 동년 가을에 해인사의 원종가람圓宗伽藍을 참방하였으며, 통도사의 불종계단佛宗戒壇을 참례하였고, 범찰선원에 명패를 걸어 두고 안거를 하고자 하였는데 용주사에서 보내온 초청을 받아들여 용주사로 옮겨서 안거를 하자 수많은 납자들이 모여들어 공경하고 엄숙하게 안거를 지냈다.
이듬해(1919) 가을에 명승지를 방문하며 선지식들을 참방하였다. 용성龍城(남원) 고향으로부터 조계산으로 돌아오니 그 4, 5년 동안에 청산은 옛날 그대로인데 세파는 혁신되어 있었다. 이로써 두구비야杜口毘耶(비야리성에서 유마가 침묵했던 일화)하면서 부처님께 귀심歸心하였는데, 배가 고프면 밥을 찾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좌포단 위에서는 다리를 뻗고 누대의 난간에서는 머리를 치켜드니 소위 일대사를 마친 범부였다.
그 성품은 우직하였고 그 말은 솔직하여 남들의 기탄忌憚을 가리지 않았고, 그 글은 부드럽고 그 재능은 민첩하여 남들이 공능에 둔한 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시율詩律에도 기뻐하지 않았지만 혹 어떤 사우士友가 청하여 운을 부르면 즉시 화답하였는데 이미 지어 놓은 것을 읊는 것과 같았다.
임술년(1922) 겨울에 이르러 중풍에 걸렸는데, 완치하지 못하고 이듬해 계해년(1923) 4월 11일에 입적하였다. 세수는 69세이고, 법랍은 51년이다.
366. 조계종사 혼명 선사전曹溪宗師混溟禪師傳

012_0417_b_01L谷城之桐裡山 禮俊華大師剃 參皓月
012_0417_b_02L禪師戒 名贊玟 於景鵬講伯堂下學經
012_0417_b_03L又拈香受禪 受菩薩戒於虎隱律師 癸
012_0417_b_04L未受法於曹溪山禪月和尙 號袖鯨也
012_0417_b_05L住本寺東日庵 三十五十六尊改彩佛
012_0417_b_06L事 五十七辛亥 本寺住持三年行 丙辰
012_0417_b_07L赴方丈山泉隱寺請 住藥師講院 明年
012_0417_b_08L赴京山奉元寺請 秋入金剛 住表訓寺
012_0417_b_09L未數月 赴榆岾寺憩錫講授 明春還寺
012_0417_b_10L同年秋參海印之圓宗伽藍 禮通度之
012_0417_b_11L佛宗戒壇 掛牌於梵刹禪院 意欲結臈
012_0417_b_12L矣 料表有龍珠寺請 移錫過臈 濟濟
012_0417_b_13L多士 穆穆布列 明秋訪名勝地 參善
012_0417_b_14L知識 自龍城故里 而還山四五年間 靑
012_0417_b_15L山依舊 世波革新 仍以杜口毘耶 歸
012_0417_b_16L心佛陁 飢索飯 困打眠 伸脚蒲團 矯
012_0417_b_17L首華欄 所謂了事凡夫是也 其性愚
012_0417_b_18L其口直 不擇人之忌憚 其筆滑 其才
012_0417_b_19L捷不喜 人鈍工能詩律而亦不喜 或
012_0417_b_20L有士友請 呼韻卽答 如宿搆焉 至壬
012_0417_b_21L戌之冬 偶因風症不完 越癸亥四月十
012_0417_b_22L一日化 世壽六十九 法臘五十一

012_0417_b_23L

012_0417_b_24L曹溪宗師混溟禪師傳

012_0417_c_01L
속성은 황黃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맹복孟卜이며 어머니는 한韓씨이다. 함풍 8년 무오년(1858, 철종 9) 9월 17일에 고흥의 팔영산 아래서 태어났다.
8세 때 고아가 되어 형에게 의탁하였지만 보존하기가 어려웠다. 능가사楞伽寺에 나아갔는데, 조계산에서 온 침송 수좌枕松首座가 선사를 한번 보고는 기뻐하면서 머리를 깎아 주고 출가시켜 키워 주었으며, 남화南華에게서 오계를 받게 하였는데 법명은 성호誠昊였다.
13세 때(1870, 고종 7) 은사를 따라 조계산의 은적암으로 돌아왔다. 인월印月에게서 사미계를 받고 범패를 배웠으며, 침허枕虛를 따라서 사집四集을 배웠다.
20세 때(1877, 고종 14) 제방을 유력하였는데 경붕景鵬·혼해混海·원해圓海 등의 여러 강백 밑에서 경학을 마쳤다. 남쪽으로 대흥사에 가서 범해 선사梵海禪師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원해 대사를 따라서 세간의 학문을 배웠다.
33세 경인년(1890, 고종 27) 봄에 광원사廣原社에서 건당을 하고 은사의 가업을 이었는데 호를 혼명混溟이라 하였다. 청진암에 주석하였지만 세간 업에는 청빈하였다. 향을 사르고 부처님을 받드는 것으로 일생의 정업淨業을 삼으면서 법부를 시봉하였다.
이후 곡성 도림의 태안사로 가서 재삼 주석하였고, 무등산의 원효암에서 마음을 깨쳤다. 이후 복천의 유마정사에서 금륜을 굴렸고, 결사를 하여 10년 이상 안거를 하였다.
63세 경신년(1920)에 능가사의 주지로 나아갔다. 임술년(1922) 봄에 옹성산甕城山 몽성암夢聖庵으로 옮겨 주석하면서 크게 교화를 펼치자 신도들이 수없이 모여들었다.
계해년(1923) 봄에 산속에 족적을 감추더니, 다시 농장의 객이 되었다.
367. 조계종사 경명 선사전曹溪宗師景溟禪師傳
본래는 함평 출신이지만 영광군 기동리로 옮겨서 살았다. 속성은 강姜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재평在平이며 어머니는 주朱씨이다. 이름은 태민泰敏인데, 함풍 8년 무오년(1858, 철종 9) 12월 3일에 태어났다. 심성이 태연하였고, 손재주가 민첩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으리라.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의탁할 곳이 없어서 완산의 통구와

012_0417_c_01L
姓黃 父孟卜 母韓氏 咸豊八年戊午
012_0417_c_02L九月十七日 生於高興之八影山下 八
012_0417_c_03L歲遭孤 托於兄 難可保 抵楞伽寺 有
012_0417_c_04L曹溪來枕松首座 一見而喜 剃度而養
012_0417_c_05L戒受於南華 名曰誠昊 十三隨師還曹
012_0417_c_06L溪之隱寂庵 受戒於印月學梵音了 從
012_0417_c_07L枕虛學四集 二十遊方 參景鵬混海圓
012_0417_c_08L海諸講下經學了 南至大興寺 梵海
012_0417_c_09L禪師受具戒 隨圓海大師 學世間解
012_0417_c_10L庚寅春建幢於廣原社 得恩師家業 其
012_0417_c_11L號曰混溟 住淸眞庵 世業淸寒 以奉
012_0417_c_12L香侍佛 爲一生之淨業 侍法父而追後
012_0417_c_13L谷城之道林泰安 再三憩錫 無等之元
012_0417_c_14L曉澄心 福川之維摩金輪 結社安居
012_0417_c_15L十有稔矣 六十三庚申 行楞伽寺住持
012_0417_c_16L任 壬戌春移住甕城山夢聖庵 敎化大
012_0417_c_17L行信徒坌集云尒 癸亥春隱迹林野 便
012_0417_c_18L作農庄之客

012_0417_c_19L

012_0417_c_20L曹溪宗師景溟禪師傳

012_0417_c_21L
本咸平人 靈光郡基東里寓居 姓姜
012_0417_c_22L父在平 母朱氏 名泰敏 咸豊八年戊
012_0417_c_23L午十二月三日生 心性泰然 手藝敏捷
012_0417_c_24L故名焉歟 早孤無賴 流離浪藉 完山

012_0418_a_01L금구의 원평 등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아침저녁으로 문지방을 넘어들었다.
11세 때(1868, 고종 5) 장성의 백양사에 들어가 수월 장로水月長老에 의지하여 출가하였고, 기봉 법사奇峰法師를 계사로 삼았다. 15세 곧 지학志學의 나이에 경전을 공부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고는 돈을 모으기 시작하였는데, 약간의 저축이 될 때마다 반드시 학사學舍에 이름을 올리면서 백양사와 용흥사의 강원에 수년 동안 다녔다. 점차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조계산 송광사에 나아가서 다행스럽게도 동허 화상洞虛和尙과 결연을 맺고, 원해圓海·월화月和 등 여러 종장들을 참문하여 경전을 배웠다.
29세 병술년(1886, 고종 23)에 범해 선사에게 참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30세 때 건당을 하여 동허 화상의 법의法衣를 받고 호를 경명景溟이라 하였다. 만일당萬日堂에 주석하면서 여름 안거를 보냈다.
무술년(1898, 고종 35)에 해인사에서 안거를 하였고, 신축년(1901)에는 쌍계사에서 하안거를 하는 도중에 법부의 부고를 듣고는 곧바로 밤을 달려서 찾아갔다. 다비를 하던 날 밤에 상서로운 광명이 허공을 훤히 비추는 것을 원근에서 다 보았다. 그러고는 대중들이 선사에게 법부의 자리를 계승할 것을 청하였다.
만일회를 마치고, 이어서 무량회로써 그것을 계속 이어 갔는데, 경술년(1910)에 이르러 그것이 혁신되었고 염불회도 혁파되었다.
을묘년(1915) 봄에는 벌교의 포교당에 나아가서 인연을 따라서 설법하여 교화하였다.
기미년(1919)에는 다시 염불회가 벌교의 포교당에 개설되어 화주로 초청되었다.
임술년(1922) 봄에 염불회를 자정암慈靜庵으로 옮겨서 사분염송四分念誦(하루에 네 차례에 걸쳐 염불하는 수행)을 하면서 일심으로 정진하였다. 선사는 항상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바세계를 나는 반드시 벗어나겠다. 연화정토야말로 곧 내가 돌아갈 곳이다.”
정묘년(1927) 겨울에 주석처를 관음전으로 옮겨서 부처님을 받들고 정진하였다.
무진년(1928) 겨울에는 염불당으로 주석처를 옮기고 입승立繩의 소임을 맡아서 머물렀다.
368. 조계종사 영월 선사전曹溪宗師映月禪師傳
휘는 축문竺文이고 또한 효문孝文이며 자는 화옹花翁이고 호는 영월映月이며, 속성은 양梁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혜갑惠甲이며 어머니는 경주 김金씨이다. 함풍 11년

012_0418_a_01L之通衢 金溝之院坪 卽晨夕門閫 十
012_0418_a_02L一入長城之白羊寺 依水月長老得度
012_0418_a_03L奇峰師爲戒師 志學之年 尙有看經之
012_0418_a_04L心 僅鳩斗儲 必掛牌於學舍 白羊龍
012_0418_a_05L興講肆 出沒數年矣 漸次南行 抵曹
012_0418_a_06L溪山松廣寺 幸結緣於洞虛和尙 參
012_0418_a_07L圓海月和諸宗匠學經了 丙戌禮梵海
012_0418_a_08L禪師 受具足戒 三十建幢 得洞虛和
012_0418_a_09L上法衣 號景溟 住萬日堂 安居解夏
012_0418_a_10L戊戌赴海印寺安居 辛丑結夏於雙溪
012_0418_a_11L寺 聞法父之吿訃 罔夜馳走 茶毘之
012_0418_a_12L夕 祥光洞虛 遠近渾見 仍大衆請繼法
012_0418_a_13L父之席 畢了萬日會 續以無量會做去
012_0418_a_14L至庚戌革新念佛會 亦革罷 乙卯春赴
012_0418_a_15L筏橋布敎堂 隨緣說化 己未念佛會
012_0418_a_16L更設于本所 請爲化主 壬戌春移會于
012_0418_a_17L慈靜庵 四分念誦 一心精進 師常曰
012_0418_a_18L堪忍世界 是吾必離 蓮花淨土 是吾
012_0418_a_19L所歸云 丁卯冬移住觀音殿 奉佛精進
012_0418_a_20L戊辰冬移住念佛堂 住立繩位

012_0418_a_21L

012_0418_a_22L曹溪宗師映月禪師傳

012_0418_a_23L
諱竺文 又孝文 字花翁 映月號也 姓
012_0418_a_24L梁 父惠甲 母慶州金氏 咸豊十一年

012_0418_b_01L【철종 12년(1861)】 신유년 정월 28일에 구례군 간문면 동해리에서 태어났다. 11세 신미년(1871, 고종 8)에 입학하였다.
13세 계유년(1873, 고종 10)에 곡성 태안사의 명적암明寂庵에 나아가서 척허 장로尺虛長老에 의지하여 출가하였다. 14세 갑술년(1874, 고종 11)에 보명葆明에게 계를 받고 사집四集을 배웠다. 17세 정축년(1877, 고종 14) 속가 아버지의 영결식에 곡을 하였다. 무인년(1878, 고종 15)에 제방을 유력하면서 경붕景鵬·경운擎雲·원해圓海 등의 강원에서 참문하면서 7, 8년 동안 모든 경전과 불교 전적을 열람하였다.
27세 정해년(1887, 고종 24)에 건당을 하고 금운 화상錦雲和尙의 법맥을 이었는데, 곧 석존의 제74세손이다. 무자년(1888, 고종 25) 봄에 명적암을 중수하고, 경운 화상에게 나아가서 선법과 참법을 받았다. 경인년(1890, 고종 27) 봄에 사산四山의 명승지로 선지식을 참방하였다. 신묘년(1891, 고종 28) 봄에 자원하여 만일회를 개설하였고, 부도전浮屠殿도 중수하고 개선하였다.
임진년(1892, 고종 29)에는 화엄회를 개설하였고, 을미년(1895, 고종 32)에는 화엄회를 다시 개설하였으며, 정유년(1897)에는 각 부部의 탱화불사를 하면서 영남 지방을 교화하였다. 통도사에서 여름 안거를 보내면서 산청에서 큰솥(鐺鼎) 2좌를 구입하였다.
경자년(1900, 고종 34) 봄에 화주행을 하였는데, 완산 송주상宋柱商 집에서 천 냥을 화주하여 보국사輔國寺의 대종 하나를 구입하였다. 그 무게는 350근이고, 가격은 1,700냥이었다. 부족한 700냥은 보국사의 토지 일곱 마지기를 내놓아 감당하였다.
계묘년(1903)에 명적암으로 주석처를 옮겼다. 이곳은 곧 일찍이 영월 법사가 원답願畓 아홉 마지기를 내놓은 곳이었고, 법부法父가 다시 사찰의 토지 열두 마지기 반을 내놓은 곳이었는데, 법회 대중의 양식은 이것으로 풍족하였다.
갑진년(1904)에 본당을 중수하였고, 아울러 사성각四聖閣의 서각西閣으로 물러나 머물렀다. 6월에 속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곡을 하였다.
을사년(1905) 7월에 법부가 입적하여 곡을 하였다.
무신년(1908)에 병란으로 인하여 만일염불회가 폐지되었는데 18년 동안189) 이어졌다. 이에 지리산에 들어가 은둔하였다.
기유년(1909)에 도림사와 길상사로 옮겨서 매일 저녁 성중에게 백배를 하면서 단지 국가의 태평과 안녕을 축원할 뿐이었다.
경술년(19010)에 태안사로 돌아와서 혜철국사탑 아래에 은둔하였지만

012_0418_b_01L哲宗十
二年
辛酉一月二十八日 生于求禮艮
012_0418_b_02L文東海里 十一辛未入學 十三癸酉
012_0418_b_03L投谷城泰安之明寂 依尺虛長老而得
012_0418_b_04L度 十四甲戌 受戒于葆明 學四集 丁
012_0418_b_05L丑哭嚴君永訣 戊寅遊方 參景鵬擎雲
012_0418_b_06L圓海講下 七八年閱盡經籍 二十七丁
012_0418_b_07L亥建幢 繼錦雲和尙法脈 卽釋尊七十
012_0418_b_08L四世孫也 戊子春本庵修繕 就擎雲和
012_0418_b_09L尙受禪懺 庚寅春訪善知識於四山勝
012_0418_b_10L地 辛卯春自願設萬日會 浮屠殿亦重
012_0418_b_11L修改繕 壬辰設華嚴會 乙未再設華嚴
012_0418_b_12L會 丁酉各部幀佛事 化行嶺南 結夏
012_0418_b_13L於通度 山靑鐺鼎二座買還 庚子春化
012_0418_b_14L行 至完山宋柱商家 得化金一千兩
012_0418_b_15L買輔國寺大鍾一座 重三百五十斤 費
012_0418_b_16L金合一千七百餘 不足金七百餘 放己
012_0418_b_17L土七斗落自當也 癸卯移會于明寂庵
012_0418_b_18L此卽法師願畓九斗落曾納之處 而法
012_0418_b_19L父更納己土十二斗五升落 會中資粮
012_0418_b_20L從此豊足 甲辰重修正堂及四聖閣西
012_0418_b_21L閣退立 六月哭慈母 乙巳七月哭法父
012_0418_b_22L戊申因兵亂 念佛會廢止爲十八年也
012_0418_b_23L入智異山隱遁 己酉移道林吉祥 日夕
012_0418_b_24L百拜聖衆 只祝國界泰安耳 庚戌還本

012_0418_c_01L마음이 안정되지 않자 송광사 장경전으로 옮겨서 향을 살랐다. 여기에서 다리에 병을 얻어 고생하였다.
신해년(1911) 가을에 대웅전에 주석하였다.
임자년(1912) 가을에 태안사로부터 초청을 받고 나아가서 대웅전에 주석하였다.
54세 갑인년(1914) 겨울에 태안사의 주지 임무에 선출되었다.
을묘년(1915) 건물 30칸에 기와불사를 하였다.
병진년(1916)에 대로전大爐殿과 석정石井 일구一口를 신축하여 낙성하였고, 칠성각을 중수하였으며, 대웅전과 응진당의 기와불사를 하였다. 11월에 태안사 주지 제2기에 임명되었다.
정사년(1917) 봄에 선당인 동일암東日庵을 수선하였고, 일주문을 중건하였으며, 응접실을 새로 짓고 사무실을 수리하였고, 사면의 담장을 개축하였다.
경신년(1920) 봄에 봉서암鳳瑞庵을 창건하였다. 11월에 태안사 주지 제3기에 임명되었다.
신유년(1921)에 요사채 30칸에 기와불사를 하였고, 삼천교三川橋를 신축하였다.
임술년(1922) 봄에 선당과 보제루(空樓)와 주방을 신축하였고, 승당의 지대방을 새롭게 수선하여 사무소로 삼았으며, 탑전塔殿으로 물러나 머물면서 사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돌아보지도 않고, 안양국에 태어날 염불수행을 업으로 삼았다.
기사년(1929) 정월 28일에 이르러 이인二寅에게 전법을 하고, 3월 초하루에 병 없이 입적하였다. 세수는 69세이고, 법랍은 56년이다.
369. 조계종사 호붕 선사전曹溪宗師浩鵬禪師傳
휘는 진홍振弘이고 자는 부요扶搖이며 법호는 호붕浩鵬이고, 속성은 김金씨로서 본관은 경주이다. 아버지 이름은 윤언允彥이고, 어머니는 김金씨인데 본관은 김해이다. 고흥군 점암면 두지리 출신으로 동치 2년 계해년(1863, 철종 14) 4월 8일에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특출났는데 자라면서 재주와 이름을 날렸다. 11세에 입학을 하였는데 가정이 너무 어려웠다. 더구나 13세 때 집안에 어려움이 닥치자 가업을 보존할 수가 없어서 아버지와 헤어지게 되었다.
14세 때 팔영산의 능가사에 들어가서 영호 대사影湖大師를 의지하여 머리를 깎았고,

012_0418_c_01L隱國師塔下 心猶未定 移于松廣寺
012_0418_c_02L藏經殿奉香 偶以脚症小患 辛亥秋
012_0418_c_03L住大雄殿 壬子秋赴本寺請 住大雄殿
012_0418_c_04L五十四甲寅冬 被選本寺住持任 乙卯
012_0418_c_05L燻瓦三十間 丙辰大爐殿石井一口新
012_0418_c_06L成 七星閣重修 大雄殿應眞堂飜瓦
012_0418_c_07L十一月本寺住持二期認可行 丁巳春
012_0418_c_08L禪堂東日庵修繕 一柱門重建 應接室
012_0418_c_09L新建 事務室修理 四面墻垣改築 庚
012_0418_c_10L申春鳳瑞庵剏建 十一月三期住持認
012_0418_c_11L可行 辛酉燻瓦三十臥 三川橋新成
012_0418_c_12L壬戌春禪堂空樓厨間新成 僧堂後房
012_0418_c_13L新繕 爲事務所 退居塔殿 不顧事務
012_0418_c_14L安養爲業 至己巳一月二十八日傳法
012_0418_c_15L二寅 同三月一日 無疾化 壽六十九
012_0418_c_16L臈五十六

012_0418_c_17L

012_0418_c_18L曹溪宗師浩鵬禪師傳

012_0418_c_19L
諱振弘 字扶搖 法號浩鵬 姓金 本慶
012_0418_c_20L州 父允彥 母金氏 本金海 高興占嵓
012_0418_c_21L斗池里人 同治二年癸亥四月八日生
012_0418_c_22L生而秀異 稍有才名 十一入學 家道
012_0418_c_23L太難 十三遭內艱 不能保祖業 父子
012_0418_c_24L相離 十四入八影之楞伽 依影湖大師

012_0419_a_01L15세 때 설암 선사雪巖禪師에게서 계를 받고 3년 동안 시봉을 하였다. 19세 때 조계산 구연 화상九淵和尙의 강원에 나아가서 경전을 배웠고, 경운擎雲·원화圓華 등의 제 종사를 참문하여 내전과 외전의 경적經籍을 대략이지만 모두 섭렵하였다.
30세 임진년(1892, 고종 29)에 조계산 감로사甘露社에서 건당을 하고, 은부 영호 대사의 법의를 받았다. 그러나 뛰어난 명안종사(鑑老)의 텃밭을 벗어나서 자신만의 법을 펼치니 뛰어난 납자들이 수많이 모여들었다. 이에 그 향기가 널리 퍼져서 참으로 공석불난孔席不煖190)이었다. 곧 금강산의 신계사, 곡성의 태안사, 방장산의 쌍계사와 대원사, 승평군의 선암사, 조계산의 보제당 등은 모두 선사가 교화를 폈던 지역이다. 조계에서 시작하여 조계에서 끝났지만 선사의 교화가 어찌 조계에만 깊이 국한되었겠는가? 만세에는 청진암淸眞庵에 은거하여 보임하면서 염송을 하여 장차 정토업을 기약하였다.
기미년(1919)에 환해幻海 선조의 비문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야말로 선사의 일생에 걸친 대업이었다. 무진년(1928) 봄에 동리산의 강석에 나아갔고, 기사년(1929) 가을에 태안사로 돌아와서 자정암慈靜庵에 주석하였다.
370. 조계종사 취암 선사전曹溪宗師翠菴禪師傳
속성은 오吳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경주經柱이며 어머니는 장張씨이다. 동치 4년【이태왕 2년】 을축년(1865) 3월 16일에 곡성군 죽곡면 유봉리에서 태어났다. 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따라서 순천군 송광면 오봉리에서 살았다. 10세 때 입학하였는데 재주가 민첩하고 총명하였다.
16세 경진년(1880, 고종 17)에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서 송광사 선월 대선사禪月大禪師에게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그리고 기룡 대사麒龍大師에게 오계를 받고 영은璟恩이라 이름하였고, 자는 귀일歸一이다.
18세 때 구연 강헌九淵講軒을 따라서 처음으로 경전을 배웠고, 경운擎雲·원화圓華 등 제 종장을 참문하여 5, 6년 동안 내전과 외전의 전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인년(1890, 고종 27) 봄에 조계의 수선사修禪社에서 건당을 하여 은부의 신의信依를 받았고

012_0419_a_01L祝髮 十五受雪嵓禪師戒 三年服勤
012_0419_a_02L十九至曹溪山九淵和尙講下學經 參
012_0419_a_03L擎雲圓華諸宗師 內外經籍 略皆涉獦
012_0419_a_04L三十壬辰 建幢于曹溪之甘露社 衣恩
012_0419_a_05L父之法衣 拂鑑老之塵拂 獅徒坌集
012_0419_a_06L腥薌播遠 孔席不煖 金剛之神溪寺
012_0419_a_07L谷城之泰安寺 方丈之雙溪寺大原寺
012_0419_a_08L昇平之仙嵓寺 曹溪之普濟堂 皆師之
012_0419_a_09L化儀之地也 始於曹溪 終於曹溪 師
012_0419_a_10L之化緣 偏深於曹溪歟 晩歲隱淸眞庵
012_0419_a_11L保任念誦 將期淨土業矣 己未竪幻海
012_0419_a_12L先祖碑 是師一生大事業也 戊辰春赴
012_0419_a_13L桐山之講席 己巳秋還本 住慈靜庵

012_0419_a_14L

012_0419_a_15L曹溪宗師翠菴禪師傳

012_0419_a_16L
姓吳 父經柱 母張氏 同治四年李太王
二年

012_0419_a_17L乙丑三月十六日 生於谷城竹谷留鳳
012_0419_a_18L里 五歲孤 隨母寓順天松光五峯里
012_0419_a_19L十歲入學 才敏聦慧 十六庚辰 依慈
012_0419_a_20L訓 出家於松廣寺禪月大禪師祝髮 戒
012_0419_a_21L受猉龍大師 名璟恩 字歸一 十八從
012_0419_a_22L九淵講軒 始入經 叅擎雲圓華諸宗匠
012_0419_a_23L五六年 內外典籍 莫不綜核 庚寅春
012_0419_a_24L建幢于曹溪之修禪社 受恩父之信衣

012_0419_b_01L호를 취암翠菴이라 하였으며, 광원암廣原庵의 조실에 주석하면서 개당하여 교학을 시설하였다. 이곳은 곧 진각 혜심眞覺慧諶 국사가 『선문염송』을 결집한 곳이었으니, 어찌 『염송』에 감응된 업이 아니었겠는가?
광원암에 오랫동안 풍우가 순조롭지 못하여 버텨 나갈 길이 없자 용선 대덕龍船大德과 함께 시주 집으로 화주를 다니면서 암자를 일신하여 중즙重葺하니, 그것은 곧 건당 초기에 세운 원력에서 나온 것이었다.
갑오년(1894)에 동학의 난을 피하여 스승을 모시고 은적암의 초당으로 옮겼다. 초당은 곧 4세조인 경월 조사鏡月祖師가 개창한 곳으로 법부法傅가 거기에서 생을 마치려 한 곳이었기 때문에 모든 관리와 보수는 다 선사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리고 선사는 법부에게 효도하면서 물 긷고 나무 하는 것도 동자에게 떠맡기지 않았고, 밥과 죽도 몸소 자신의 손으로 지었으며, 항상 스승을 받드는 것이 부족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어느 날 홀연히 바위 절벽에 영초靈草가 있음을 보고 그것을 팔아서 스승을 받드는 비용으로 쓰려고 하자 그 말을 들은 사람이 축하하며 말했다. “이것은 반드시 효심이 감응한 것입니다.” 이에 은적암의 사성각四聖閣과 초당草堂을 급히 헐어 내고 곧 수선하여 고쳤다.
경자년(1900) 겨울에 법부의 영결식에서 곡을 하였고, 3년 동안의 복제를 마쳤다.
임인년(1902)에 유마사로 주석처를 옮겼고, 계묘년(1903)에 본사의 총섭인㧾攝印을 받았으며, 병오년(1906)에 보조암의 조실에 주석하였고, 무신년(1908)에 이르러 전쟁으로 인한 재해로 동암과 보암의 두 암자가 불타 버린 가운데서 옥석玉石이 모두 불타 버렸는데191) 더 이상 무엇이 남아 있었겠는가?
경술년(1910)에 이르러 지팡이 하나에 옷 한 벌로 천산만수를 답파하다가 용주사의 요청을 받고서 그곳에 주석하여 불법을 강의하였다. 기타 봉은사와 봉선사와 전등사와 마곡사 등에서 다투어 초청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이에 10년 동안 강의를 다니느라고 ‘공자의 좌석이 따뜻할 새가 없었다는 것을 꾸짖을 정도였고, 묵자의 굴뚝에 검댕이가 낄 틈이 없었다는 것을 나무랄 정도였다(孔席之誚。 墨堗之譏。)’192)고 한다면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선사는 시율詩律에도 뛰어나서 거의 방옹放翁193)의 첫걸음을 터득했다고들 말하였다.
기미년(1919)에 송광사의 요청을 받고 나아가서 도림사 길상암에 주석하였다. 이에 묘길상이 나한의 도량에서 탄생한 곳과 같고, 경치는 뛰어나고 연기 피어나는 인가가 멀리 있으니, 실로 산사람이 살기 좋은 곳으로 천수를 마치기에 좋은 곳이었다.
갑자년(1924)에 백양사 강사의 초청을 받고 그곳에 나아갔다.

012_0419_b_01L號翠菴 住廣原室 開堂設敎 此卽眞
012_0419_b_02L覺國老結集拈頌之社也 何業感頌哉
012_0419_b_03L本庵久病風雨 無路抵撑 與龍船大德
012_0419_b_04L叫化檀門 一新重葺 卽建幢初願力之
012_0419_b_05L流出也 甲午避東匪之亂 奉師移錫隱
012_0419_b_06L寂草堂 堂卽四世祖鏡月祖師之所剏
012_0419_b_07L法傅欲終於此故 凡所周章 盡責於師
012_0419_b_08L師孝於傅 搬汲不任於僮 饌粥唯作於
012_0419_b_09L手 每恨奉師乏資 一日忽見靈草於嵓
012_0419_b_10L崖 售爲奉師之資 聞者賀云 必以孝
012_0419_b_11L心所感云 本庵四聖閣與草堂 急於剝
012_0419_b_12L落 卽修繕而救之 至庚子冬 哭法父
012_0419_b_13L之永訣 三年服終 壬寅移錫維摩寺
012_0419_b_14L癸卯受本寺㧾攝印 丙午住普照室 至
012_0419_b_15L戊己之兵燹 東普兩庵 燒燼之中 玉
012_0419_b_16L石俱焚 有何餘存哉 越庚戌一杖一衣
012_0419_b_17L踏破千山萬水 而爲龍珠寺所挽住錫
012_0419_b_18L講法 其他奉恩寺 奉先寺 傳燈寺 麻
012_0419_b_19L谷等寺 無不競邀 十年覊亭 孔席之
012_0419_b_20L誚 墨堗之譏 倘或免哉 師善詩律 庶
012_0419_b_21L得放翁之初步云 己未赴本寺之請 住
012_0419_b_22L道林寺吉祥庵 卽妙吉祥 生羅漢之道
012_0419_b_23L場 境絕而烟夐 實山人可居地 欲終
012_0419_b_24L天年云尒 甲子有白羊寺講師請赴之

012_0419_c_01L
기사년(1929) 봄에 조계산 송광사의 요청을 받고 나아가서 홀로 산실山室을 지켰다.
371. 조계종사 율암 선사전曹溪宗師栗庵禪師傳
휘는 찬의贊儀이고 자는 남계藍溪이며 법자法字는 율암栗庵이다. 속성은 김金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응식應植이며 어머니는 위魏씨이다. 동치 6년 정묘년(1867, 고종 4) 10월 6일 여수 율촌면 사항리에서 출생하였다. 기상이 특별하게 뛰어났고, 호랑이 이마에 제비턱을 가졌으며, 눈썹이 빼어나고 눈은 늘어졌으며, 코는 오뚝하고 뺨은 풍부하며, 언변이 능란하여 강물과 같고 눈동자는 번개처럼 반짝였으니, 원래부터 용렬한 무리의 국량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丱歲)에 입학을 하였다. 비록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을지라도 반드시 한 번 척 보면 그대로 기억한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총명한 지혜는 짝할 이가 없었는데 기억하는 것이 마치 어제처럼 역력하였다.
15세 무렵(志學) 경전과 불교 전적을 두루 열람하였고 배운 것은 반드시 가르쳤으며 들은 것은 결코 잊지 않았다. 이야말로 신족迅足으로 빨리 달리는 모습이 가히 늦게 출발했으면서도 선인들을 넘어선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로 거짓은 아니었다. 자字를 남계藍溪라고 지은 것은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고 말하는 것에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숙세에 심어 놓은 신령스러운 새싹인들 어찌 선인과의 인연처럼 달갑겠는가? 왜냐하면 은애란 버리기 어려운 줄을 알고 있으며 성을 넘어 출가했다는 부처님의 고사를 들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서 8년 임오년(1882, 고종 19) 가을날 밤중에 집을 버리고 자취를 감추어 선암산에 숨어 들어가 월주 대사月宙大師에게 머리를 깎았다. 그리고 호운 선사浩雲禪師에게 계를 받고 경운 강헌擎雲講軒을 참방하여 경전을 배웠다. 이후 남쪽으로 유향하여 두륜산에서 범해梵海 옹翁에게 참례하여 향을 사르고 구족계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조계산으로 들어가서 원해 법사圓海法師에게 참문하여 불교의 교의를 갈고닦았다. 남쪽으로 유행하다가 갑자기 돌이켜서 북쪽으로 유행하면서 10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진제에 들어갔다 세속에 나왔다 하면서 1만 두斗의 구준衢樽의 술에 만취하기도 하였다.
27세 임진년(1892, 고종 29)에 조계산의 비전碑殿에서 법당法幢을 세우고, 원해 법부法父의 가정家庭(家風 또는 門庭)에서 신의를 걸쳤는데, 곧 임제종의 적손으로 부휴파의 제10세이다. 보조암의 조실에 주석하면서

012_0419_c_01L己巳春赴本山之請 獨守山室

012_0419_c_02L

012_0419_c_03L曹溪宗師栗庵禪師傳

012_0419_c_04L
諱贊儀 字藍溪 法字栗庵 姓金 父應
012_0419_c_05L植 母魏氏 同治六年丁卯十月六日
012_0419_c_06L生於麗水栗村面沙項里 氣像殊特 虎
012_0419_c_07L額燕頷 眉拔目懸 準高頰豊 辯捷河
012_0419_c_08L睛閃電 原非庸流之局 丱歲入學 雖
012_0419_c_09L莫曰聞一知十 必可云一覽輙記 聦慧
012_0419_c_10L絕倫 記歷如昨 1)知學之年 周覽經籍
012_0419_c_11L學必敎授 聞必不忘 是可謂迅足駸駸
012_0419_c_12L後發前至者 信不誣矣 其字云藍溪者
012_0419_c_13L不愧乎靑於藍之謂歟 然宿植靈芽 奈
012_0419_c_14L仙緣之甘心何也 知恩愛難捨 耳踰城
012_0419_c_15L古事 光緖八年壬午秋夜半 辭家遯跡
012_0419_c_16L隱於仙嵓山 祝髮於月宙大師 得戒于
012_0419_c_17L浩雲禪師 叅擎雲講軒學經 南遊頭崙
012_0419_c_18L禮梵海翁 而拈香受具 反入曹溪 叅
012_0419_c_19L圓海師 而叩椎敎義 遊南返北 遽費
012_0419_c_20L一十年之光陰 入眞出俗 滿醉十千斗
012_0419_c_21L之衢樽 二十七壬辰 竪法幢於曹溪山
012_0419_c_22L之碑殿 着信衣於圓海父之家庭 卽臨
012_0419_c_23L濟宗之嫡孫 乃浮休派之十世 住普照
012_0419_c_24L「知」疑「志」{編}

012_0420_a_01L사방에 가풍을 드날리니 이름이 더욱더 현창하였다.
계사년(1893, 고종 30) 봄에 방장의 요청을 받고 나아가서 수도암에 주석하니 수많은 대중이 운집하였는데,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사람만 해도 50명이었다. 이듬해(1894, 고종 31) 봄에 석장을 떨치고 대중을 해산하고는 명승지를 참방하였다. 북쪽으로는 묘향산 보현사를 참방하였고, 동쪽으로는 금강산 법기암法起庵을 참방하였으며, 강동 팔경과 영남 사불산四佛山을 두루 널리 찾아다녔다. 다시 조계사로 돌아와서 다리를 뻗고 잠을 자면서 장차 안심입명을 도모하였다.
갑진년(1904)에 이르러 총섭인㧾攝印을 받았고, 경술년(1910) 봄에 학교를 세우고 한문 교원이 되었다.
임자년(1912)에 행해당行解堂의 강의 교수(講授)로 주석하였다. 그 밖에 가람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아서 선사先師인 월주 대사가 지어 놓은 가람을 보수하려 하자 처음에는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았지만 건물과 사람과 자량이 점차 충족되어 갔다.
임술년(1922) 봄에 선암사 주지 임무를 맡았다.
병인년(1926) 가을에 천금을 출자하여 보조암 국사탑을 보수하였다.
기사년(1929) 봄에 병을 보이더니 4월 29일 조용히 입적하였다. 세수는 63세이고, 법랍은 47년이다. 문인들이 진영을 방장산에 모셨다.
372. 조계종사 용암 선사전曹溪宗師龍嵓禪師傳
속성은 최崔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시선時先이며 어머니는 박朴씨이다. 휘는 진수振秀이고 자는 토정土定이며 호는 용암龍巖으로 순천군 송광면 장안 출신이다. 동치 7년 무진년(1868, 고종 5) 6월 1일에 태어났다. 용모가 깨끗하고 깔끔하였으며 눈썹과 눈동자가 수려하고 맑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옥골미남이라 불렀다. 8세 때 입학하였는데 낮에 배운 것은 밤에 반드시 암송하였다. 13세 때 『통사通史』를 마쳤다. 점술가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부모가 출가를 허락하였다. 14세 때 조계산으로 가서 계월 선사桂月禪師에게 머리를 깎았고, 법운 대사法雲大師에게 계를 받았다. 18세 때 은사가 입적하자 곡을 하고 3년 동안 복제를 하였다.
23세 경인년(1890, 고종 27) 금명 화상錦溟和尙의 강원에 나아가서 경전을 배웠고, 화성華性과 호붕浩鵬에게 참문하면서 6, 7년 동안 모든 경전과 불교 전적을 열람하였다.
30세 정유년(1897, 고종 34) 겨울에

012_0420_a_01L室 譽四飛 名益彰 癸巳春赴方丈之請
012_0420_a_02L憩錫于修道庵 海會雲集 指屈半百
012_0420_a_03L明年春拂錫散衆 叅訪名勝 北叅妙香
012_0420_a_04L山之普賢 東謁金剛山之法起 江東之
012_0420_a_05L八景 嶺南之四佛 周遍叅覔 返本曹
012_0420_a_06L溪 伸脚打眠 將圖安命 至甲辰佩㧾
012_0420_a_07L攝印 庚戌春設學校 行漢文敎員 壬
012_0420_a_08L子住行解堂講授 其餘護茄藍之委任
012_0420_a_09L爲先師之倡㘞 未能一一也 閏屋閏身
012_0420_a_10L資粮位稍足云 壬戌春行本山住持任
012_0420_a_11L擧行 丙寅秋出千金 修普照國師塔
012_0420_a_12L己巳春示疾 四月二十九日奄眞 壽六
012_0420_a_13L十三 臘四十七 門人掛眞于方丈

012_0420_a_14L

012_0420_a_15L曹溪宗師龍嵓禪師傳

012_0420_a_16L
姓崔 父時先 母朴氏 諱振秀 字土定
012_0420_a_17L號龍嵓 順天松光壯安人 同治七年戊
012_0420_a_18L辰六月一日生 容儀素潔 眉瞳秀澄
012_0420_a_19L人稱玉骨美男 八歲入學 日所學夜必
012_0420_a_20L誦 十三通史畢 爲數者所敎 父母許
012_0420_a_21L以出家 十四投曹溪之桂月禪師祝髮
012_0420_a_22L戒受於法雲大師 十八哭恩師 三喪禮
012_0420_a_23L行 二十三庚寅 就錦溟和尙講下學經
012_0420_a_24L叅華性浩鵬 六十七年閱盡經籍 三十

012_0420_b_01L보조난야에서 건당을 하였고, 인월 대사印月大師의 법인을 얻어 광원사廣原社에 주석하였다.
정미년(1907)에 총섭에 나아갔고, 무신년(1908)에는 병란을 피하여 사산四山을 유력하다가 양산 통도사에 있는 불종佛宗의 계단묘戒壇廟에 참례하고서 수개월 동안 결연을 한 후 범어선원梵魚禪院으로 가서 안거를 보냈다.
이듬해 법종法宗 스님의 경각經閣에 참례하였고, 방장산의 아자방亞字房으로부터 화엄사에 나아가서 사리탑에 참례하고 조계산의 감로사甘露社로 돌아왔다. 세간에 있으면서도 염송을 그만두지 않았고, 대중이 많은 시장에 있으면서도 기강을 잃지 않았으며, 마음에는 규승䂓繩을 어기지 않았고, 성품에는 정애情愛에 물들지 않았으며, 일상의 기거동작에서도 항상 출가의 본의를 생각하였고, 아침저녁으로 매일 정토의 불사를 생각하였다. 그리고 먼 후손(雲仍)194)을 교육함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왕생의 길을 닦아 준 사람이었으니, 곧 세간과 출세간에 은거하는 납승이었다.
임술년(1922) 겨울에는 대웅전에 나아가서 향 사르는 소임을 받들었다.
갑자년(1924)에 다시 대웅전에 나아가서 향 사르는 임무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진년(1928) 겨울에는 가벼운 병을 보여 병상에 있으니 해은海隱 상족이 탕약을 시봉하였는데, 삼평三平과 왕상王祥과 맹종孟宗도 그를 능가하지 못할 만큼 부끄러움이 없었다.
경오년(1930) 정월 2일에 조용히 입적하였다. 문도들이 모여 다비를 하고 방장산에 진영을 모셨다.
373. 조계종사 설월 선사전曹溪宗師雪月禪師傳
속성은 이李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병하丙夏이며 어머니는 김金씨이다. 휘는 용섭龍燮이고 호는 설월雪月로서 순천군 주암면 용촌리 출신이다. 동치 7년 무진년(1868, 고종5) 10월 16일에 태어났다. 정수리 가운데가 가라앉았고 얼굴이 넓었으며, 눈썹 언저리가 모나면서 둥글었으며, 손에는 검은 반점이 있었고 재주는 민첩하고 총명하였다. 10세 때 입학하였는데 『통사通史』에 달통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여 독서를 할 수가 없었다.
15세 때 집을 떠나 송광사로 가서 신월 대사信月大師에게 머리를 깎았다. 호산 대사湖山大師에게 오계를 받고

012_0420_b_01L丁酉冬 建幢於普照闌若 得印月大師
012_0420_b_02L法印 住廣原社 丁未行㧾攝任 戊申
012_0420_b_03L避兵亂 遊歷四山 至梁山之通度寺
012_0420_b_04L禮佛宗之戒壇廟 數月結緣 向梵魚禪
012_0420_b_05L院 結臈安居 明年禮法宗之經閣 自
012_0420_b_06L方丈之啞房 抵華嚴 禮舍利塔而還本
012_0420_b_07L住甘露社 而處世間而不廢念誦 處衆
012_0420_b_08L閙而不失綱紀 心不違䂓繩 性不染情
012_0420_b_09L愛 俯仰常恐出家之本意 晨夕每念淨
012_0420_b_10L土之事業 敎育雲仍 勤修㝠路者 是
012_0420_b_11L無乃世出世之隱居衲僧耶 壬戌冬行
012_0420_b_12L大雄殿奉香任 甲子再行之不倦也 戊
012_0420_b_13L辰冬偶以微疾在床 有上足曰海隱 侍
012_0420_b_14L湯擧行 不愧三平及王孟未過云尒 庚
012_0420_b_15L午一月二日奄然歸眞 門徒會集 茶毘
012_0420_b_16L掛眞于方丈

012_0420_b_17L

012_0420_b_18L曹溪宗師雪月禪師傳

012_0420_b_19L
姓李 父丙夏 母金氏 諱龍燮 號雪月
012_0420_b_20L順天住嵓龍村人 同治七年戊辰十月
012_0420_b_21L十六日生 頂低面廣 眉宇方圓 手有
012_0420_b_22L黔瘢 才捷聦敏 十歲入學 能通史 然
012_0420_b_23L遭哀 家貧不能讀書 十五辭家 抵松
012_0420_b_24L廣寺於信月大師髮祝 於湖山大師戒

012_0420_c_01L4, 5년 동안 시봉하다가 제방을 유행할 것을 고하였다.
23세 경인년(1890, 고종 27)에 금명 화상을 참방하여 경전을 배웠고, 화성과 호붕 등 제 종장을 참문하여 6, 7년 동안 모든 경사經史를 열람하였다.
30세 정유년(1897, 고종 34)에 보조암에서 건당을 하고 은부恩父의 신의信依를 받아 염불회에 참여하여 머물렀다.
무신년(1908)에 총섭인㧾攝印을 맡았는데 의병의 난으로 가혹하게도 동암과 보암의 두 암자가 불타 버린 변고를 만나자 곧 총섭인의 임무를 그만두고, 고양의 능가산에 숨었다.
기유년(1909) 겨울에 조계산으로 돌아와서 두 암자를 혁신하는 초기에 송광사 주지에 선출되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거행하게 되었다. 절 안에 학교를 설립하고 승속을 병합하자 수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경술년(1910) 봄에 청계당을 신축하였다.
신해년(1911)에 순천군의 환선정喚仙亭을 수리하여 포교당으로 만들었다.
임자년(1912) 봄에 봉불식을 거행하고, 계축년(1913)에 교당校堂과 교원실敎員室을 보수하였으며, 을묘년(1915)에는 낙안 벌교 포구에 포교당을 설립하였고, 병진년(1916)에는 풍암 세찰楓巖世察의 탑을 보조암으로부터 비등碑嶝으로 옮겨 봉안하였으며, 정사년(1917)에는 비전碑殿의 담장을 신축하였고【그 비용은 세 문중에서 감당하였다.】, 사항홍교獅項虹橋를 신축하였다.【안한붕安漢朋이 혼자 감당하였다.】무오년(1918)에 새로 비전碑田을 개척하였고, 아울러 일주문을 축석築石하였으며, 선조先祖 부휴 선수의 비문을 세웠다.
기미년(1919) 가을에 이르러 관음전을 건립하였고, 교당 사무실 앞의 옹벽 공사를 마쳤으며【이 또한 계명溪明이 혼자 감당하였다.】, 16국사전을 일신하여 중수하였고, 법성루를 보수하였다.
신유년(1921)에 자정암의 지대방을 보수하였다.
경술년(1910)으로부터 임술년(1922)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4기의 주지를 맡아서 고생하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불사 또한 탁월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러나 그동안 동암과 보암이 불에 타서 소멸되었다느니(1908), 일곱 기의 비碑를 새롭게 세우면서 용맥龍脉을 뚫고 잘랐다느니, 재산을 낭비했다느니, 이해를 저울질하여 상벌과 선악을 내렸다느니, 신목神目과 명감冥鑑에 자재했다느니 하는 등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울 정도다. 선사는 즐겨 과일나무를 재배하였는데, 밭에다 묘목지를 설치하여 기르면서 몸소 적막감을 달랬다.

012_0420_c_01L受 四五年侍汲 吿以遊方 二十三庚
012_0420_c_02L寅 訪錦溟和尙入經 叅華性浩鵬諸宗
012_0420_c_03L匠 六七年閱盡經史 三十丁酉 建幢于
012_0420_c_04L普照 受恩父信衣 住念佛會 至戊申佩
012_0420_c_05L㧾攝印 以義兵亂 酷遭東普兩庵燒燼
012_0420_c_06L之變 卽解印謝任 晦隱於高陽之楞伽
012_0420_c_07L己酉冬還山 以革新之初 本寺住持被
012_0420_c_08L選 不得免擧行 而設學校於寺內 僧
012_0420_c_09L俗并合 生徒濟濟 庚戌春聽溪堂新建
012_0420_c_10L辛亥本郡喚仙亭修理 爲布敎堂 至壬
012_0420_c_11L子春奉佛式行 癸丑校堂及敎員室并
012_0420_c_12L修繕 乙卯樂安筏橋浦 設布敎堂 丙
012_0420_c_13L辰楓嵓塔 自普庵隅 奉安于碑嶝 丁
012_0420_c_14L巳碑殿墻垣新築費金自三
門中當
獅項虹橋新
012_0420_c_15L安漢朋
獨當
戊午新碑場所開拓 及一柱門
012_0420_c_16L築石 浮休先祖碑營建 至己未秋 建畢
012_0420_c_17L觀音殿 校堂事務室前石築了此亦溪明
自當云

012_0420_c_18L十六國師殿一新重修 法性樓修治 辛
012_0420_c_19L酉慈靜庵後房修繕 自庚戌至壬戌十
012_0420_c_20L二年間 四期住持擧行 靡不辛苦 事
012_0420_c_21L業亦無非卓犖 而至於二庵之燒滅 七
012_0420_c_22L碑之新基 龍脉之穿斫 財產之浪費
012_0420_c_23L秤量利害 賞罰善惡 自在於神目㝠鑑
012_0420_c_24L不足枚擧也 性好果樹栽培 設圃培養

012_0421_a_01L
병인년(1926)에 대웅전에 불상의 부전 임무를 맡았다. 가히 이理와 사事를 겸비한 납자였다. 기사년(1929) 5월에는 주지 대리를 지내기도 하였다.
374. 조계종사 눌봉 선사전曹溪宗師訥峯禪師傳
속성은 이李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재석載石이며 어머니는 완산 이李씨이다. 동치 8년 기사년(1869, 고종 6) 7월 11일에 순천 낙호리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취학을 하였는데 재명才名이 있었고 글씨는 더욱 기특하였다. 13세 때 아버지를 여의자 어머니는 아들을 불쌍하게 여겨서 출가를 허락하여 몸을 보존하고 글을 읽도록 하였다.
15세 계미년(1883, 고종 20)에 송광사로 가서 월송 대사月松大師에게 출가하였고, 초우草雨 법사를 계사로 하여 정기正基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원해圓海 법사를 따라서 경전을 배웠다.
18세(1886, 고종23)에 제방을 유행하면서 경운擎雲과 월화月華 등 제 종장에게 참문하면서 7, 8년 동안 횡해橫海(교학의 전당)를 찾아다니면서 모든 삼장을 열람하였다. 이미 신근身根이 깊이 갖추어져 있어서 낮에는 정해 놓은 경전을 백 독씩 하였고, 밤에는 불상 앞에서 백 배씩 하였으며, 항상 계를 수지하여 신불의 수많은 가피를 받아 숙세의 업장이 거의 소멸되었다. 담화 대덕曇華大德을 따라서 범패를 배웠고, 대붕大鵬 선사를 참문하여 범자梵字를 배웠다.
29세 정유년(1897, 고종 34) 겨울에 보조암에서 건당을 하고 용선龍船 법사의 법인을 받았는데 호는 눌봉訥峯이다. 금명錦溟 사형에게서 전강을 받고서 대중을 상대하여 널리 제접하였는데 언변이 강물과 같이 거침이 없었다.
기해년(1899)에 해인사의 장경법회에 나아갔다. 천하의 용상龍象들이 모두 모인 그 자리에서 명패를 뒤집고 설법을 하였다(撥牌輪說).195) 어느 날 선사는 가장 젊은 납자로서 승당하여 한바탕 설법을 하였는데 선사를 존경하여 그 어느 누구도 다시는 설법을 하지 않았다. 이로부터 그 명성이 사방에 드날렸는데, 화엄법회와 법화법회와 정토법회 등이 개설되는 경우에는 초청되지 않는 때가 없어 부득이하게 인연을 따라서 설법하고 정진을 행하였는데 신도들이 복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선사가 손수 토굴을 지은 것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곧 무등산의 지장암 석실과

012_0421_a_01L足尉寂莫 至丙寅奉香大雄殿佛尊任
012_0421_a_02L可謂事理兼行也 己巳五月 又住持代
012_0421_a_03L理擧行

012_0421_a_04L

012_0421_a_05L曹溪宗師訥峯禪師傳

012_0421_a_06L
姓李 父載石 母完山李氏 同治八年
012_0421_a_07L己巳七月十一日 生於順天洛湖里 十
012_0421_a_08L歲就學 有才名 筆尤奇 十三孤 母矜
012_0421_a_09L其丁零 許以出家 安身讀書 十五癸
012_0421_a_10L未 投松廣寺月松大師得度 以草雨爲
012_0421_a_11L戒師 名正基 從圓海學經 十八遊方
012_0421_a_12L叅擎雲月華諸宗匠 七八年遊泳橫海
012_0421_a_13L閱盡三藏 信根旣深 日百讀課經 夜
012_0421_a_14L百拜聖像 爲恒戒 多蒙㝠加 庶消宿
012_0421_a_15L障 從曇華大德 學梵音 叅大鵬禪師
012_0421_a_16L學梵字 二十九丁酉冬 建幢於普照庵
012_0421_a_17L佩龍船師之法印 號訥峯 受錦溟兄之
012_0421_a_18L傳講 應機普接 辯若河決 越己亥赴
012_0421_a_19L海印藏經會 天下龍象 畢集于此 撥
012_0421_a_20L牌輪說 一日師以㝡少衲子 陞堂說破
012_0421_a_21L一會肅敬 更無能說者 自是腥塵四飛
012_0421_a_22L若華嚴會法華會淨土會 凡有設會 莫
012_0421_a_23L不請邀 不得已隨緣 說精進行 信徒
012_0421_a_24L無不靡然 手搆土窟 非止一二 或無

012_0421_b_01L모후산의 송광대 병풍암이 그것들이었는데, 그곳은 기성祈聖과 주축呪祝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어떤 신도의 청을 받아서 『화엄경華嚴經』을 사경하였는데, 향을 사르고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고 매 행마다 일 배씩 하고 매 장마다 일 독을 하며 화엄대경의 전체를 아무런 장애가 없이 사경하여 마쳤다. 송광사에는 염불당이 있었는데 화주를 자청하여 3년 동안 정진하였다.
을묘년(1915)에 해남 대흥사의 초청을 받아 나아갔고, 이듬해(1916) 경기도 화장사의 초청을 받아 나아갔으며, 정사년(1917)에 무등산 지장암으로 주석처를 옮겼고, 기미년(1919)에 관음사에서 봉불을 하는데 초청을 받아 나아갔으며, 또한 그해 겨울에는 도림사의 주지가 되어 나아갔다.
도림사는 성 밑에 있었는데 폐허가 된 묘지에다 길가에다 더러 남아 있는 민가 등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빗줄기가 들이칠 만큼 지붕이 열려 있고 해진 빨래가 바람에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선사는 온 마음과 힘을 다하는 지극한 정성으로 원력을 세워 중수하였는데, 다행스럽게도 큰 신도를 만나서 훌륭한 법당과 요사채로 일신하여 중건되었다. 이에 그 지역 사람들은 선사를 가리켜서 창건주가 거듭 도래하였다고들 말하였다.
경신년(1920) 10월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곡을 하였는데 생전의 효도가 사후에 더욱더 간절하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을축년(1925)에 길상암에 주석하면서 불상을 보수하였는데 암자 건물이 불꽃처럼 환하게 빛났다.
기사년(1929) 봄에 완산포교당에 나아갔는데 신도들이 폭주하였다. 그해 가을에 길상암에 주석하면서 금명錦溟 사형과 함께 결사를 하여 백일정토산림百日淨土山林을 수행하자 신도들이 시장과 같이 모여들었는데 자손들의 수복을 기원하는 자는 성취되지 않은 자가 없었다.
375. 조계종 예운 선사전曹溪宗禮雲禪師傳
속성은 조趙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성숙成淑이다. 어머니는 임林씨인데, 사문이 집에 들어와 기숙하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다. 명치 6년 계유년(1873, 고종 10) 9월 3일에 보성군 노동면 영신리에서 태어났다. 전생에 심어 둔 빼어나고 신령스러운 싹이 있었던지 골상이 특수하고 눈썹 언저리가 수려하였으며 남들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012_0421_b_01L等山之地藏菴石室 母后山之松廣臺
012_0421_b_02L屏風嵓 并是祈聖呪祝之處也 有檀氏
012_0421_b_03L請 寫華嚴經 焚香浴衣 每行一拜每
012_0421_b_04L張一讀 一部大經 無障寫了 本寺有
012_0421_b_05L念佛堂 化主請三年精進 乙卯赴海
012_0421_b_06L南大興寺請 明年赴京畿華藏之請 丁
012_0421_b_07L巳移無等山地藏庵 己未赴觀音寺奉
012_0421_b_08L佛請 同年冬赴道林寺住持任 此寺卽
012_0421_b_09L城底 廢幕路傍殘舍 雨脚連天 風襟
012_0421_b_10L撓壁 苦心血誠 願力重修 幸得大檀
012_0421_b_11L信 寶殿紺宇 一新重建 鄕士稱以剏
012_0421_b_12L主重來云 庚申十月哭慈喪 生前孝
012_0421_b_13L死後恳 不足枚道也 乙丑住吉祥庵
012_0421_b_14L銑以佛像修之 菴宇莫不煥然 己巳春
012_0421_b_15L赴完山布敎堂 檀信幅湊云云 同年秋
012_0421_b_16L住吉祥庵 與錦兄結社 修百日淨土山
012_0421_b_17L林 信徒歸向 恰如市門 求壽福乞子
012_0421_b_18L孫者 莫不成就也

012_0421_b_19L

012_0421_b_20L曹溪宗禮雲禪師傳

012_0421_b_21L
俗姓趙氏 父諱成淑 母林氏 夢見沙
012_0421_b_22L門入見寄宿 有娠 明治六年 癸酉九
012_0421_b_23L月三日 生於寶城郡蘆洞面靈新里 宿
012_0421_b_24L挺靈芽 骨相殊特 眉宇淸秀 不喜群

012_0421_c_01L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의탁할 곳이 없어서 나이 16세 무자년(1888, 고종 25) 2월 3일 장성군 백양사로 가서 영안 대사永安大師에 의탁하여 허드렛일을 하면서 1년을 지냈다.
기축년(1889, 고종 26)에 이르러 12월 8일에 먹물 옷을 입고 출가하고 선종禪宗이라는 이름을 받았고, 보봉 선사寶峯禪師에게 계를 받았다.
임진년(1892, 고종 29) 3월에 순창군 구암사의 설유 화상雪乳和尙의 강원에 들어가 사집四集을 수료하였다.
갑오년(1894, 고종 31) 2월에 구암사의 영호 강사映湖講師 밑에서 『능엄경楞嚴經』과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수료하였다. 생활이 곤궁하여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이 정처가 없었고 개구리밥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조계산 송광사 광원암廣原庵의 강사 만성 화상晩惺和尙 밑에서 『반야경般若經』과 『원각경圓覺經』을 마쳤다. 화상께서 해인사의 초청을 받아서 그곳에 나아가자 화상을 따라서 해인사 강헌으로 가서 『화엄경』과 『염송拈頌』 등을 수료하였다.
갑진년(1904) 9월 28일에 보조암에서 건당을 하고 용연실龍淵室에서 인가를 받았는데 호를 예운禮雲이라 하였다.
이듬해(1905) 3월 8일에 회광 율사晦光律師가 조계산에 계단을 세웠다. 이에 거기에서 구족계를 받았는데 이로부터 계주戒珠가 맑고 청정하였다. 이후 홀연히 선풍에 마음이 움직여 마음이 맞는 도반 도량道良과 더불어 초연히 제방을 유행하였다.
무신년(1908)에 일어난 의병의 난을 만나서 풀 속에 은거하며 숲속에다 이름을 감추었다.
경술년(1910) 4월 8일에 간신히 칠불방七佛房을 참방하여 백용성白龍城 조사의 조실에서 여름 안거를 보냈다. 또한 그해 해인사의 제산 선사霽山禪師의 회하에서 겨울 안거를 보냈다.
신해년(1911) 봄에 범어사의 성월 화상惺月和尙을 참방하여 여름 안거와 겨울 안거를 보냈다.
대정 2년(1913) 계축년에 통도사에서 여름 안거를 보내고, 혜월 존숙慧月尊宿에게 참문하여 연속해서 다섯 번의 안거를 보내고, 이어서 병진년(1916) 여름에는 천은사泉隱寺의 호은 선백湖隱禪伯을 참방하였다.
무오년(1918) 봄에 금강산에 들어가 마하연에서 여름 안거를 보냈고, 겨울에는 오대산에 들어가 상원암에서 겨울 안거를 보냈다.
기미년(1919) 봄에 예산군의 정혜사定惠寺로 돌아와서 만공 선사滿空禪師와 보월 선백寶月禪伯에게 참문하였다. 이에 거리를 활보하였는데 삶이 이미 익을 대로 익었고,

012_0421_c_01L戱 早離怙恃 無所可托 年十六戊子
012_0421_c_02L二月三日 投長城郡白羊寺 依永安大
012_0421_c_03L師 負汲周年 至己丑臘月八日 零染
012_0421_c_04L得度名 禪宗寶峯禪師爲戒師 越壬辰
012_0421_c_05L三月 淳昌郡龜嵓寺雪乳和尙講下 四
012_0421_c_06L集修了 甲午二月同寺映湖講師下 楞
012_0421_c_07L嚴起信修了 生活艱草 風燈未定 萍
012_0421_c_08L踪難繫 轉到曹溪山松廣寺廣遠庵晩
012_0421_c_09L惺和尙講下 般若圓覺了畢 和上赴海
012_0421_c_10L印寺請 同隨講軒 華嚴拈頌等修了
012_0421_c_11L甲辰九月二十八日 建幢於普照庵 佩
012_0421_c_12L印於龍淵室 號曰禮雲 明年三月八日
012_0421_c_13L晦光律師 建戒壇於曹溪山 仍受具戒
012_0421_c_14L自是戒珠澄淸 禪風忽動 心友道良
012_0421_c_15L超然遊方 適値戊己之義亂 潛草裡
012_0421_c_16L鞱名林間 庚戌四月八日 僅叅七佛房
012_0421_c_17L白龍城室中結夏 同年結臈於海印寺
012_0421_c_18L霽山禪師會下 辛亥春訪梵魚寺惺月
012_0421_c_19L和尙解夏及過臈 大正二年癸丑 結夏
012_0421_c_20L於通度寺 叅慧月尊宿 連過五際 而
012_0421_c_21L丙辰夏訪泉隱寺湖隱禪伯 戊午春入
012_0421_c_22L金剛山摩衍結夏 冬入五臺山上院庵
012_0421_c_23L過臈 己未春還禮山郡定惠寺 叅滿空
012_0421_c_24L禪師與寶月禪伯 於是路頭活步 生已

012_0422_a_01L방외의 선지식은 이미 참방하여 마쳤다.

葉落必歸根    낙엽은 반드시 뿌리로 돌아가듯이
到家罷問程    집에 도착하고 나서 길을 묻는다네
歸臥臺上     집에 돌아와서는 침대 위에 누워서
伸脚打眠     두 다리를 쭉 뻗고 낮잠을 잔다네
自由保任矣    이처럼 자유롭게 보림을 하였다.

병인년에 이르러 법부法父 영안 대사永安大師가 광원암에서 입적하자 곡을 하였고, 세속법을 따라서 3년 동안 복제의 예를 마쳤다. 기사년(1929) 봄에 다시 산새의 길을 따라서 걸림 없이 떠났다가 되돌아왔다. 그해 겨울 안거는 송광사 삼일암에서 보냈다.
376. 조계종 호명 선사전曹溪宗皓溟禪師傳
곡성군 석곡면 염촌리 김정호金正浩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박朴씨이다. 동치 13년 갑술년(1874, 고종 11) 4월 16일에 태어났다.
14세 정해년(1887, 고종 24) 8월에 순천군 송광사로 출가하였다. 용선 대사龍船大師에 의지하여 득도得度하였고, 경해 선사鏡海禪師에게서 계를 받고 이름을 봉욱琫旭이라 하였다.
22세 을미년(1895, 고종 32)에 호붕浩鵬과 금명錦溟 등 제 종사에게 참문하여 7, 8년 동안 내전과 외전의 학문을 모두 이력하였다.
31세 때 은사의 법의를 받고 호는 호명皓溟이라 하였다.
39세 임자년(1912)에 금명 율사錦溟律師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대정 3년(1914) 중덕中德의 법계에 올랐고, 대정 5년(1916) 조계산 송광사로 가서 법무法務를 맡았다. 이듬해(1917)는 감무監務를 맡았는데, 그 마음과 행동이 순직順直하였고, 말소리는 맑고 깨끗하였으며, 수행으로 범음梵音을 터득하여 부처님을 찬탄하고 축성祝聖하는 것이 몸에 배어들었다. 또한 무릇 법요를 집행할 경우에도 근면하여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이에 사람들이 자선慈善의 가풍이라고 말하였다. 또한 누구라도 응급 환자가 발생하면 반드시 선사를 청하여 기성祈聖하고 주축呪祝하였는데, 그 원인을 보고 밝혀내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에 선사를 가리켜서 신명神明으로도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377. 조계종 대우 선사전曹溪宗大愚禪師傳
아버지의 휘는 한주漢柱로서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는데, 성은 김金씨로서 옛날 가락국왕의 후예이다.

012_0422_a_01L熟矣 方外知識叅已了也 葉落必歸根
012_0422_a_02L到家罷問程 歸臥臺上 伸脚打眠 自由
012_0422_a_03L保任矣 至丙寅哭法父於廣遠庵 隨俗
012_0422_a_04L服制三年終禮 己巳春更發山鳥之行
012_0422_a_05L無碍徃返也 同年冬安居于本三日庵

012_0422_a_06L

012_0422_a_07L曹溪宗皓溟禪師傳

012_0422_a_08L
谷城郡石谷面念村里金正浩之第一男
012_0422_a_09L也 母朴氏 同治十三年甲戌四月十六
012_0422_a_10L日生 十三歲丁亥八月 出家於順天郡
012_0422_a_11L松廣寺 依龍船大師得度 於鏡海禪師
012_0422_a_12L得戒 名琫旭 二十一乙未 叅浩鵬錦
012_0422_a_13L溟諸宗師 七八年間 歷盡內外學 三
012_0422_a_14L十受恩師法衣 號曰皓溟 三十八壬子
012_0422_a_15L受具於錦溟律師戒壇 大正三年陞中
012_0422_a_16L德法階 大正五年行本山法務任 明年
012_0422_a_17L行監務任 以其心行順直 語音淸亮
012_0422_a_18L鍊得梵音 讃佛祝聖爲己能 凡於法要
012_0422_a_19L執行 唯勤不怠 盖稱謂慈善家風云
012_0422_a_20L人有急疾 必請而祈聖呪祝 無不見劾
012_0422_a_21L謂之神明叵測云云

012_0422_a_22L

012_0422_a_23L曹溪宗大愚禪師傳

012_0422_a_24L
父諱漢柱 贈吏曺判書 姓金 故駕洛

012_0422_b_01L어머니는 광산 김金씨로서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는데, 학이 푸른 구슬을 토해 내자 치마를 펴서 그 구슬을 받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곡성군 목사면 유치리에서 낳았다. 이때가 곧 광서 원년 을해년(1875, 고종 12) 8월 8일이었다. 골상은 단정하고 얼굴빛은 선명하고 희었으며 눈썹의 언저리는 순수하였다.
11세 을유년(1885, 고종 22)에 순천군 송광면 낙수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입학을 하고 사서史書 등을 마쳤다.
14세 무자년(1888, 고종 25)에 홀연히 출가할 마음을 내어 부모를 작별하고 송광사에 가서 용호 대사龍湖大師에게 참례하고 먹물 옷을 입었다. 그리고 화성 선사華性禪師에게서 계를 받고 이름을 금추錦秋라 하였다. 그때 부모는 곡성군 석곡면 용두리로 옮겨 살았다.
21세 을미년(1995, 고종 32)에 월화月華와 청호淸昊 법사에게 참문하여 중과中科를 배웠다.
31세 을사년(1905)에 향을 사르고 은사의 조실에서 건당을 하였는데 호를 대우大愚라 하였다.
병오년(1906) 봄에 제방의 유행을 시작하였다. 곧 방장산의 칠불암과 천은사의 삼일선원과 화엄사의 탑전 등이 안거했던 장소이다.
또한 무신년(1908) 여름에 해인선원에 있었다. 그때 꿈을 꾸었는데 하얀 진주 서 말(斗)이 하늘에서 쏟아지자 이에 장삼을 펴서 그것을 받았는데 하나도 땅에 흘리지 않았고, 그것을 물병 속에 감추어 두었는데 아직 실에 꿰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여름 안거를 마치고 삼일선원으로 돌아와서 겨울 안거를 보냈다.
명치 42년 기유년(1909) 의병의 난 때에 수개월 동안 완장을 찼지만 이에 사양하고 말했다. “이것은 불자가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방외에 은거하였다.
신해년(1911) 8월 13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곡을 하였다.
임자년(1912) 4월 8일에 금명 선사錦溟禪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로부터 걸림이 없이 출입하였다.
병진년(1916)에 송광사에서 법무의 소임을 맡았다.
무오년(1918)에 감무의 소임을 맡았다. 이후에 선원으로 물러나 앉았다가 다시 염불수행을 시작하였다.
을축년(1925) 4월에 은부恩父가 병에 걸렸다. 어느 날 큰 소리로 선사(大愚)를 불러서 양손으로 짚는 두 지팡이를 주면서 말했다. “그대는 이것을 알겠는가?” 대우 선사가 답했다. “하나는 심법心法을 전승한다는 것이고,

012_0422_b_01L國王之裔 母光山金氏 贈淑夫人 夢
012_0422_b_02L鶴吐靑珠 布裳受之 娠而生於谷城郡
012_0422_b_03L木寺面酉峙里 卽光緖元年乙亥八月
012_0422_b_04L八日也 骨相端正 面光鮮白 眉宇純
012_0422_b_05L粹 十一歲乙酉 移于順天郡松光洛水
012_0422_b_06L里 仍入學 了史書等 十四戊子 忽有
012_0422_b_07L出家志 辭親投松廣寺 拜龍湖大師零
012_0422_b_08L染 叅華性禪師得戒 名錦秋 于時父
012_0422_b_09L母 寓於谷城郡石谷面龍頭里 二十一
012_0422_b_10L乙未 叅月華淸昊 學中科 三十一乙
012_0422_b_11L巳 拈香竪幢恩室下 號大愚 丙午春
012_0422_b_12L發足遊方 以方丈之七佛 泉隱之三日
012_0422_b_13L華嚴之塔殿 爲安居之所也 又戊申夏
012_0422_b_14L在海印禪院 時有一夢 白眞珠三斗
012_0422_b_15L自天注下 以長杉布而受之 無一枚落
012_0422_b_16L地 藏軍持中 然未能貫線爲恨 解夏
012_0422_b_17L還本寺三日庵過臈 明治四十二年己
012_0422_b_18L酉 義兵之亂 佩印數月 乃辭曰 此非
012_0422_b_19L佛子所行 隱居方外 辛亥八月十三日
012_0422_b_20L哭嚴父喪 壬子四月八日 受具戒於錦
012_0422_b_21L溟禪師 自是無碍出入 丙辰行本山法
012_0422_b_22L務任 戊午行監務任 退居禪院 更提
012_0422_b_23L叅念 乙丑四月恩在病 一日强呼大愚
012_0422_b_24L以雙杖并授之 汝知否 愚答曰 一是

012_0422_c_01L다른 하나는 신법身法을 전한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이에 은부는 무릎을 잡고 껄껄 웃었다. 선사의 지해知解가 모두 이와 같았다.
이후 4월 28일에 은부가 입적하자 곡을 하였다. 그리고 3년 동안 복제를 마쳤다. 이 또한 홀로 계신 어머니의 독거 생활을 잊지 못하여 매번 친히 찾아뵙고 자주 간호를 하면서도 터럭 끝만큼도 고생한다는 생각이 없고 오직 어머니의 옥체가 편안하지 않을까를 염려할 뿐이었다. 이것이야말로 지극한 효심이 온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상의 생활에 있어서는 고요하거나 시끄럽거나 일여一如하였다. 그래서 밤이 되어 고요해지면 불자를 치켜세우고 자신의 주인공을 불러 말했다. “진주 서 말을 언제 꿸 것인가? 이것을 염두에 두고서 절대 잊지 말거라.” 무릇 일상생활에서 잊지 않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종류들이었다.
378. 조계종 용월 선사전曹溪宗龍月禪師傳
속성은 정鄭씨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재홍在洪이며 어머니는 한韓씨이다. 세간에서는 곡성군 석곡면 온수리에서 살았는데, 광서 2년 병자년(1876, 고종 13) 2월 9일에 태어났다. 정골이 솟아났고 얼굴과 눈동자가 풍성하였으며 말소리는 맑고 깨끗하였고 시가를 읊거나 독송을 하면 듣는 사람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11세 때 입학하였는데 다만 사서史書만 읽었다.
17세 임진년(1892, 고종 29) 정월 24일에 순천군 송광사로 출가하였다. 경암 선사警庵禪師에게 정식으로 득도得度하고 계를 받았는데, 이름은 우천佑天이다. 스승을 시봉하느라고 제방을 유력하거나 경전을 배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단지 은부恩傅의 책만 읽을 수 있을 뿐이었다. 아울러 범음梵音을 익히면서 옥천玉泉196)의 유풍을 따라서 단련하였다. 구련九蓮과 월화月華와 호붕浩鵬 등 제 종백을 만참하면서 초등과 중등 과목을 수료하였다.
30세 때(1905) 동호 대사東湖大師에게 법을 받았는데 호를 용월龍月이라 하였고, 은적암에 주석하였다.
계축년(1913) 봄에 제방을 유행하면서 여러 대 선지식을 참문하였다.
경신년(1920) 겨울에 부모를 위하여 생전예수시왕생칠재生前豫修十王生七齋를 봉행하였다.197)병진년(1916)에는 송광사 법무의 소임을 맡았다.
임술년(1922) 가을에는 금명 대사錦溟大師에게 만참하여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정묘년(1927)에는 삼일선원에서 여름 결제를 하였다.

012_0422_c_01L傳心 一是傳產之表也 恩搏膝呵呵
012_0422_c_02L師之知解 皆如此也 後二十八日 哭
012_0422_c_03L恩父 三年服終 亦未忘偏慈之獨居
012_0422_c_04L每每觀親 數數幹護 無毫末之苦念
012_0422_c_05L唯恐慈體之不寧 此乃至孝之心滿身
012_0422_c_06L故也 然所做日用 靜閙一如 每到夜
012_0422_c_07L靜 堅拂喚主曰 眞珠三斗何時貫 着
012_0422_c_08L得心頭切莫忘 盖不忘日用者 此類也

012_0422_c_09L

012_0422_c_10L曹溪宗龍月禪師傳

012_0422_c_11L
俗姓鄭 父諱在洪 母韓氏 世居谷城
012_0422_c_12L郡石谷面溫水里 光緖二年丙子二月
012_0422_c_13L九日生 頂骨秀高 面眸豊厚 語音雄
012_0422_c_14L亮 歌詠讀誦 聞者適悅 十一歲入學
012_0422_c_15L只讀史書 十七歲壬辰一月二十四日
012_0422_c_16L出家於順天郡松廣寺 於警庵禪師得
012_0422_c_17L度而受戒 名佑天 爲師侍供 不能遊
012_0422_c_18L方學經 徒能讀父書 兼習梵音 隨鍊
012_0422_c_19L玉泉遺風 晩叅九蓮月華浩鵬諸宗伯
012_0422_c_20L修了初中等科 三十歲受法於東湖大
012_0422_c_21L師 號曰龍月 住隱寂庵 癸丑春遊方
012_0422_c_22L叅諸大知識 庚申冬爲父母修十王生
012_0422_c_23L七齋 丙辰行本山法務之任 壬戌秋晩
012_0422_c_24L叅錦溟大師 大敎科卒業 丁卯夏結制

012_0423_a_01L안거에서 보여 준 성품과 행실은 신중하였고, 향을 사르면서 정진하여 부지런히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는데 하루에 3회 대지전大持殿(凝香閣)에 들어갔고, 또한 일상의 일과를 잊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납승의 살림살이(行李)였다.
기사년(1929) 봄에 속가의 맏형을 위하여 생전예수시왕생칠재를 봉행하였는데 열흘 동안 정성을 다하여 몸소 정진하였다. 형제애로 보여 준 돈독하고 화목한 믿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경오년(1930) 정월에 퇴전退殿하여 수양하면서 낮에는 경전을 읽고 밤에는 참선을 하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었다.
379. 조계종 우송 선사전曹溪宗友松禪師傳
휘는 선명善明이고 호는 우송友松이며, 속성은 황黃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천석天錫이며 어머니는 박朴씨이다. 명치 12년 기묘년(1879, 고종 16) 11월 1일에 보성군 문덕면 곡천리에서 태어났다. 정골이 넓었고 눈자락(眼堂)이 풍성하였다.
15세 명치 26년 계사년(1893, 고종 30) 6월 모일에 순천군 송광사로 가서 향호 대사香湖大師에게 득도하였고, 함호 선사菡湖禪師에게 계를 받았다.
18세 명치 29년 병신년(1896)에 광원암廣原庵에서 안거를 하였다.
21세 명치 32년 기해년(1899) 4월 8일에 송광사에서 실시한 대선법계大禪法階에 합격하였다.
23세 명치 34년 신축년(1901)에 월화月華와 호붕浩鵬 법사에게 참문하여 초등 과정과 중등 과정 그리고 외전外典과 사서史書 등을 수료하였다.
24세 명치 35년 임인년(1902) 7월에 중덕법계中德法階로 승진하였다. 건당을 하고 임성任性 법사의 조실에서 가사(衣)를 받았는데 곧 소요 태능逍遙太能 조사의 후예였다.
29세 명치 40년 정미년(1907)에 청호淸昊 법사에게 참문하여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35세 대정 2년 계축년(1913)에 송광사에서 감무직을 맡았다.
37세 대정 4년(1915) 7월에 낙안 동화사의 주지직에 취임하였고, 그해 금강암 주지를 함께 맡았다. 대정 7년(1918)에 동화사 주지를 재임하였다. 그간 10년 동안에 사원을 창수하고 불상을 개금했던 사실은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일신하고 중수하였다.

012_0423_a_01L於三日禪院安居 性行愼重 奉香精進
012_0423_a_02L勤以不怠故 三入大持殿 亦不忘日
012_0423_a_03L用之課 眞是衲僧之行李云 己巳春爲
012_0423_a_04L其舍伯 行十王供 十日致誠 躬行精
012_0423_a_05L進 其篤睦信根 皆如此也 庚午一月
012_0423_a_06L退殿修養 晝誦夜叅 心不放逸

012_0423_a_07L

012_0423_a_08L曹溪宗友松禪師傳

012_0423_a_09L
諱善明 號友松 姓黃 父天錫 母朴氏
012_0423_a_10L明治十二年己卯十一月一日 生於寶
012_0423_a_11L城郡文德面曲川里 頂骨廣 眼堂豊厚
012_0423_a_12L明治二十六年癸巳六月日 投順天郡
012_0423_a_13L松廣寺香湖大師爲之度 菡湖禪師爲
012_0423_a_14L之戒 二十九丙申安居廣遠庵 三十二
012_0423_a_15L己亥四月八日 松廣寺選試大禪法階
012_0423_a_16L三十四辛丑 叅月華浩鵬師 修初中
012_0423_a_17L等外典史書等了 三十五年壬寅七月
012_0423_a_18L中德法階昇進 建幢受衣於任性之室
012_0423_a_19L卽逍遙祖之後裔 四十年丁未 叅淸昊
012_0423_a_20L師 大敎科修了 大正二年癸丑 松廣
012_0423_a_21L寺監務職行 四年七月 樂安桐華寺住
012_0423_a_22L持任就職 同年金剛庵住持 兼行七年
012_0423_a_23L桐華寺住持再任 這間十年之內 寺院
012_0423_a_24L之剏修 佛像之改金 未能枚擧 煥然

012_0423_b_01L
380. 조계종 금월 선사전曹溪宗錦月禪師傳
법명은 찬진燦珍이고 호는 금월錦月이며, 속성은 박朴씨인데 본관은 밀양이고, 아버지 이름은 여화如化이며 어머니는 최崔씨이다. 명치 13년 경진년(1880, 고종 17) 8월 8일에 순천군 여수면 서재리에서 태어나 경술년(1910) 11월 21일에 입적하였다.
오호라, 안타깝다. 어린 나이에 재명才名이 있어서 매영梅營이라고들 크게 칭찬하였다. 그러나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가계가 탕진되어 책을 읽을 형편이 못되었다.
15세 갑오년(1894)에 아버지의 권유를 따라서 조계산 송광사에 나아갔는데, 용선 대사龍船大師가 보고는 크게 기뻐하면서 스승과 상좌의 인연을 맺었고, 혼명 대덕混溟大德에게 계를 받았다.
17세 병신년(1896)에는 유학遊學을 떠났는데, 먼저 호붕浩鵬과 금명錦溟의 두 법사의 강당을 참문하였다. 이후에 방장산의 진응 강사震應講師의 강헌을 참방하여 그 말후대사末後大事(최후의 가장 궁극적인 가르침)를 모두 터득하였고, 또한 진응 강사의 조실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5세 갑진년(1904) 9월 10일에 은부 용선 대사의 법당에서 법을 받았는데, 벽담 조사碧潭祖師의 제7세손이다. 보조암의 조실에 주석하자 납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자 명성이 멀리 퍼졌다.
무신년(1908)의 난을 맞아서 방장산 화엄사에 은신하였는데 그곳에서 머물러 줄 것을 요청받았지만 인연을 따라서 송광사로 돌아왔다.
경술년(1910) 봄에 몸에 병이 들어서 송광사로 돌아온 지 수개월 만에 약숟가락에 의존하여 살아갔다. 그해 11월 21일에 이르러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세수는 31세이고, 법랍은 16년이다. 재주가 있는 청년이 무상하게도 어찌 그리 서둘러 갔는지 모르겠다.
381. 조계종 응하 선사전曹溪宗應夏禪師傳
이름은 학수學守이고 호는 응하應夏이며, 속성은 이李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윤식閏植이며 어머니는 한韓씨이다.

012_0423_b_01L輪焉 一新重修云

012_0423_b_02L

012_0423_b_03L曹溪宗錦月禪師傳

012_0423_b_04L
法名燦珎 號錦月 姓朴 貫密陽 父如
012_0423_b_05L化 母崔 明治十三年庚辰八月八日
012_0423_b_06L生於順天郡麗水面西齋里 庚戌十一
012_0423_b_07L月二十一日亡 嗚呼惜哉 齠年才名
012_0423_b_08L梅營之盛稱 而早失慈氏 家道蕩敗
012_0423_b_09L勢不能讀 十五歲甲午 從嚴訓而投曹
012_0423_b_10L溪山松廣寺 龍船大師見而便悅 結師
012_0423_b_11L佐緣 得戒於混溟大德 十七歲丙申
012_0423_b_12L仍遊學 先叅浩錦溟兩師堂下 後訪方
012_0423_b_13L丈山震應講師軒下 盡得其末後大事
012_0423_b_14L又受具於震應之室 二十五甲辰九月
012_0423_b_15L十日 受法於恩父堂下 碧潭祖之七世
012_0423_b_16L孫 住普照室中 衲子雲奔 頗有腥名
012_0423_b_17L當戊己之亂亂身 方丈之華嚴寺 爲
012_0423_b_18L住席之請 隨緣徃返 庚戌春偶以身病
012_0423_b_19L還本數月 刀圭爲事 至十一月二十一
012_0423_b_20L日 奄忽寂然 壽三十一 臈十六 靑年
012_0423_b_21L才子之無常 一何速哉

012_0423_b_22L

012_0423_b_23L曹溪宗應夏禪師傳

012_0423_b_24L
名學守 號應夏 姓李 父諱閏植 母韓

012_0423_c_01L명치 14년 신사년(1881, 고종 18) 4월 8일에 곡성군 석곡면 봉암리에서 태어났다. 7세(1887, 고종 24) 때 아버지를 여의고 위로 할아버지를 모시고 홀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13세 계사년(1893, 고종 30)에 할아버지의 권유로 순천군 송광사로 가서 호연 대사浩然大師를 스승으로 삼았다.
갑오년(1894, 고종 31) 8월 15일에 금명 선사錦溟禪師의 계단에서 계를 받고, 을미년(1895, 고종 32)에 계사에 의지하여 초등 과정을 수료하고 이에 제방을 유행하였다. 호붕浩鵬과 진응震應 등 제 종장에게 참문하여 그 종요를 모두 얻었는데, 특히 진응 강백의 골수를 터득하였다. 마치 빈손으로 갔다가 가득 채워 돌아온 것과 같았고 구준衢樽의 술에 만취한 것과도 같았다.
26세 병오년(1906) 10월 20일에 은부恩父의 법인을 받고 광원암의 조실에 주석하였는데 곧 무의자無衣子(眞覺慧諶)가 결사를 했던 곳이었다. 납자들이 만당하였으니 그 누가 공경하고 우러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정미년(1907) 봄에 알 수 없는 병을 얻었다. 이에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부처님과 신장들에게 기도를 하였지만 효험을 볼 수가 없었다.
무신년(1908) 3월 초나흘에 이르러 홀연히 삼매 속에서 슬프게 울부짖었다. 은부恩傅의 입적으로 상명喪明하여 실성하였다는 것은 더 이상 논하지 않는다. 심지어 할아버지와 늙은 어머니의 경우에는 피눈물과 화천火喘198)은 또 무슨 말로 견뎌 낼 수 있겠는가? 세수는 28세이고, 법랍은 16년이다.
382. 조계종 추강 선사전曹溪宗秋江禪師傳
법명은 봉우鳳羽이고 헌호軒號는 추강秋江이며, 속성은 조趙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익서益西이며 어머니는 ▣씨이다. 명치 15년 임오년(1882, 고종 19) 정월 27일 순천군 별량면 현절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여 언변이 출중했고 재주와 기질이 민첩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모셨는데, 비록 삼천지교三遷之敎는 없었을지라도 또한 두 번이나 이사한 교훈은 보여 주었다. 11세 임진년(1892, 고종 30)에 입학하였다.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독서를 하였는데 사서史書에 능통하였다.
14세 을미년(1895, 고종 33)에

012_0423_c_01L氏 明治十四年辛巳四月八日 生於谷
012_0423_c_02L城郡石谷面鳳嵓里 七歲喪嚴君 上有
012_0423_c_03L祖考與偏母 家勢不能讀書 十三歲癸
012_0423_c_04L巳 依祖訓 投順天郡松廣寺 以浩然
012_0423_c_05L大師爲師 甲午八月十五日 得戒於錦
012_0423_c_06L溟禪師壇 乙未依戒師 初等科修了
012_0423_c_07L仍遊方 叅浩鵬震應諸宗匠 盡得其要
012_0423_c_08L唯切應伯之骨髓 虛徃實歸 滿醉衢樽
012_0423_c_09L矣 二十六丙午十月二十日 佩恩父之
012_0423_c_10L法印 住廣遠庵室中 卽無衣子結社之
012_0423_c_11L處也 衲子滿堂 誰不欽仰哉 丁未春
012_0423_c_12L偶以無何之疾 百方救得 祈聖禱神
012_0423_c_13L不能見効 至戊申三月初四日 忽入三
012_0423_c_14L昧海中 嗚呼哀哉 恩傅之喪明失性
012_0423_c_15L猶在不論 至於祖考老慈之血淚火喘
012_0423_c_16L忍何言哉 壽二十八 夏十六

012_0423_c_17L

012_0423_c_18L曹溪宗秋江禪師傳

012_0423_c_19L
法名鳳羽 軒號秋江 姓趙 父諱益西
012_0423_c_20L母□氏 明治十五年壬午一月二十七
012_0423_c_21L日 生於順天郡別良面玄切里 生而穎
012_0423_c_22L悟 辯口出衆 才質捷足 早孤侍母 雖
012_0423_c_23L無三遷之敎 亦有二趨之訓 十一歲壬
012_0423_c_24L辰入學 日耕夜讀 能通史書 十四乙

012_0424_a_01L조계산 송광사의 천자암으로 가서 만성 대사晩惺大師에 의지하여 먹물 옷을 입었고, 서룡 율사瑞龍律師에게 계를 받았다.
17세 무술년(1898, 고종 37)에 호붕 대사浩鵬大師에게 참문하여 사집四集 과목을 수료하였다.
19세 경자년(1900)에 진응 강사震應講師에게 참문하여 중등 과정을 수료하였다.
21세 임인년(1902)에 호붕 강사에게 재참문하여 고등 과정인 수의과(高等隨意科)를 마쳤다.
29세 경술년(1910) 봄에 은사에게서 법의를 받고 호를 추강秋江이라 하였는데, 벽담 조사의 제6세손이다.
31세 임자년(1912) 4월 8일에 금명 선사錦溟禪師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34세 을묘년(1915)에 은부가 입적하자 곡을 하였고 3년 동안의 복제를 마쳤다.
40세 대정 10년 신유년(1921)에 송광사 감무의 직무에 취임하였고, 이듬해(1922) 그만두었다. 이후로 몸에 병환이 생겨 순천부의 병원으로 오고 가면서 신약神藥과 침과 뜸에 의지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신속하여 잠자는 것과 먹는 것에 대한 자미도 모를 정도였다. 소화 4년 기사년(1929) 여름에 이르러 숙환이 더욱 심해져 호흡이 언제 끊길지 모르는 상황이 자주 있었다. 부처님의 신명과 신통(難思)한 의방醫方으로 겨우 성명을 보존하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383. 조계종 석호 선사전曹溪宗錫虎禪師傳
법명은 형순炯珣이고 호는 석호錫虎이며, 속성은 임林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환상煥相이며 어머니는 ▣씨이다. 명치 20년 정해년(1887, 고종 24) 10월 2일 곡성군 석곡면 온수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얼굴의 모습은 매우 희었으며 눈빛은 밖으로 드러났고 입술과 이는 가지런하고 촘촘하였으며 체질은 적정하였다. 8세 때 온수리의 사립학교에 입학하여 경사經史를 수료하였다.
16세 임인년(1902) 정월 10일에 순천군 송광사로 가서 경해 선사鏡海禪師에게 득도를 하였다. 이듬해(1903) 원봉 대사圓峯大師에게 계를 받았고,

012_0424_a_01L未 投曹溪山松廣寺天子庵 依晩惺大
012_0424_a_02L師零染 受戒於瑞龍律師 十七戊戌
012_0424_a_03L叅浩鵬大師 四集科修了 十九庚子
012_0424_a_04L叅震應講師 中等科了 二十一壬寅
012_0424_a_05L再叅浩鵬講師 高等隨意科了畢 二十
012_0424_a_06L九庚戌春建幢 受恩師法衣 號曰秋江
012_0424_a_07L卽碧潭祖之六世孫也 三十一壬子四
012_0424_a_08L月八日 受具於錦溟禪師壇下 乙卯哭
012_0424_a_09L恩父喪 三年服終 四十歲大正十年
012_0424_a_10L辛酉 本寺監務任就職 明年謝免 自
012_0424_a_11L後身患之痛 出沒府郡之院 刁圭鍼灸
012_0424_a_12L爲業 不知光陰之迅速 寢食之滋味也
012_0424_a_13L昭和四年 至己巳夏 宿症尤甚 幾於
012_0424_a_14L呼吸者 累次矣 以神明之聖力 難思
012_0424_a_15L之醫方 僅保性命于玆而已

012_0424_a_16L

012_0424_a_17L曹溪宗錫虎禪師傳

012_0424_a_18L
法名炯珣 號錫虎也 俗姓林氏 父諱
012_0424_a_19L煥相 母□氏 明治二十年丁亥十月二
012_0424_a_20L日 生於谷城郡石谷面溫水里 生而穎
012_0424_a_21L悟 眉宇端粹 面皃鮮白 眼光發外 唇
012_0424_a_22L齒齊密 體資得中 八歲入學溫水里私
012_0424_a_23L塾 修了經史 十六歲壬寅一月十日
012_0424_a_24L投順天郡松廣寺 依鏡海禪得度 明年

012_0424_b_01L거듭하여 제방을 유행하면서 호붕浩鵬의 강석에서 초등과 중등 과정을 수료하였다.
21세 명치 40년(1907)에 송광사의 중선中選과 대선大禪 법계를 품지하였다.
22세 무신년(1908)에 호은 율사虎隱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25세 임자년(1912) 봄에 송광사에서 설립한 사립학교 보통 과정을 졸업하였다.
명치 44년(1911)에 중덕中德 법계에 올랐다.199)대정 2년(1913) 계축년에 대덕大德 법계에 올랐다.
대정 4년 을묘년(1915)에 금명 강사錦溟講師에게 참문하여 대교과와 수의과에서 선·교·속전俗典 등을 수료하였다.
대정 6년 정사년(1917)에 순천 지방의 과원科員으로 있으면서 은부의 법인을 받고 보제원普濟院에 주석하였는데, 곧 제운 해징霽雲海澄 조사의 제7세손이다.
대정 7년 무오년(1918)에 순천 송광사 지방학림의 학감學監으로 있었으며, 그해 가을에 백양사 강사 겸 순천 지방 교원으로 부임하였다.
대정 9년 경신년(1920)에 송광사 내에서 와세다(早稲田) 중학 강의를 자수自修하였다.
대정 10년 신유년(1921)에 경성의 보성학교 법과를 수료하였다.
대정 13년 갑자년(1924)에 벌교포筏橋浦의 불교포교사 및 사립 송명학관松明學舘의 장을 겸행하였다.
소화 3년 무진년(1928)에 송광사 감무직에 취임하였으며, 곡성군 도림사 주지도 겸행하였다.
384. 조계종 환경 선사전曹溪宗喚鯨禪師傳
아버지 이름은 기성基城이고 어머니는 채蔡씨이며 순천군 별량면 외동리 출신이다. 어머니 채씨는 범승梵僧이 밤에 숙직하며 지켜 주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고, 명치 23년 경인년(1890, 고종 27) 8월 2일에 선사를 낳았다. 정골이 툭 솟았고 얼굴 모습이 얼음처럼 희었으며, 눈동자에서는 빛이 났고 이는 촘촘하며, 입술은 붉었고 말은 빨랐으며, 음성은 낭랑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8세 때 입학을 하여 경서經書와 사서史書 등의 고서를 읽었고, 배운 것은 반드시 암송을 하였다.
11세 경자년(1900)에 모자가 서로 손을 잡고

012_0424_b_01L得戒於圓峯大師 仍遊方於浩鵬講下
012_0424_b_02L初中等科修了 明治四十年 松廣寺中
012_0424_b_03L選大禪法階 戊申受具於虎隱律師 壬
012_0424_b_04L子春松廣寺私立學校普通卒業 四十
012_0424_b_05L四昇中德法階 大正二年癸丑 升大德
012_0424_b_06L階 四年乙卯叅錦溟講師 大敎科隨意
012_0424_b_07L科禪敎俗典等修了 六年丁巳 地方科
012_0424_b_08L員 佩恩父之法印 住普濟院 卽霽祖
012_0424_b_09L之七世孫也 七年戊午 地方林學監
012_0424_b_10L同年秋白羊寺講師 兼地方敎員赴任
012_0424_b_11L九年庚申松廣寺內早稲田中學講議自
012_0424_b_12L修 十年辛酉 京城普成學校法科修了
012_0424_b_13L十三年甲子 筏橋浦佛敎布敎師私立
012_0424_b_14L松明學舘長兼行 昭和三年戊辰松廣
012_0424_b_15L寺監務任就職 谷城郡道林寺住持任
012_0424_b_16L兼行也

012_0424_b_17L

012_0424_b_18L曹溪宗喚鯨禪師傳

012_0424_b_19L
父諱基城 母蔡氏 順天郡別良面外洞
012_0424_b_20L里人 蔡夢有梵僧宿衛娠而誕於明治
012_0424_b_21L二十三年庚寅八月二日 頂骨特秀 面
012_0424_b_22L皃冰潔 眼瞳電發 齒密唇朱 語捷聲
012_0424_b_23L亮 早喪嚴君 從母所訓 八歲入學 書
012_0424_b_24L史墳典 學必立誦 十一歲庚子 母子

012_0424_c_01L전전하다가 송광사에 도착하였다. 영운 대사榮雲大師가 선사를 보고는 기특하게 여겨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 먹물 옷을 입혀 주고 득도시켜 주었다.
이듬해(1901) 중구일重九日에 영운 대사에게 계를 받고 이름을 형관炯寬이라 하였는데, 이에 양식을 짊어지고 제방을 유행하면서 영남 지방의 불보종찰인 통도사 금강계단에 나아갔다.
정미년(1907) 2월 15일에 해담 율사海曇律師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곧 송광사로 돌아와서 호붕 강사浩鵬講師에게 참문하여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명치 43년 경술년(1910)에 송광사에서 설립한 사립학교 보통 과정을 졸업하였다.
신해년(1911) 봄에 경상북도 상주군 남장사에 나아가서 용성 화상龍城和尙에게 참문하여 『시경詩經』·『서경書經』·『남화경南華經』 등 세속에 전승된 책들을 배웠다.
임자년(1912)에 백양사에 나아가서 환응 선로幻應禪老에게 참문하여 선문의 어록 등을 연찬하였다. 그해(1912) 가을에 송광사로 돌아와서 다시 호붕 법사에게 참문하여 대교과를 졸업하였다.
갑인년(1914) 가을에 금명 강사錦溟講師에게 참례하여 『염송拈頌』 등 선문의 어록 등을 참구하였다.
을묘년(1915) 봄에 건당을 하여 은사의 법인을 받고 호를 환경喚鯨이라 하였는데, 곧 제운 해징 조사의 제7세손이다. 이에 송광사 강원에 주석하면서 금명 강백의 전강을 받았다.
병진년(1916)에 대교사大敎師의 법계에 올랐다. 그리고 곧 경성에 올라갔는데 광주군 봉은사의 초청을 받고 나아갔다.
정사년(1917)에 송광사로 돌아왔는데 곧 공자의 좌석이 따뜻할 새가 없었다는 것과 묵자의 굴뚝에 검댕이가 낄 틈이 없었다는 것이 진실로 거짓이 아니었다. 아아, 한탄스럽구나. 무상한 목숨이여,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없는 질병이 무단히도 몸에 침투하니, 만반으로 살길을 구하였지만 백약이 무효하여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였다.
8월 28일에 이르러 조용히 무성삼매無聲三昧에 들어갔으니 어찌 망극하지 않겠는가? 은부가 홀어머니의 실명과 실성을 보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으랴. 세수는 28세이고, 법랍은 17년이다.
385. 조계종 해은 선사전曹溪宗海隱禪師傳

012_0424_c_01L相携 轉到松廣寺 有榮雲大師 見而
012_0424_c_02L奇之 便結師資緣 零染得度 明年重
012_0424_c_03L九 得戒於本師 名炯寬 卽裹粮遊方
012_0424_c_04L抵嶺南之佛宗刹金剛戒壇下 丁未二
012_0424_c_05L月十五日 受具於海曇律師 卽還本寺
012_0424_c_06L叅浩鵬講師 四敎科修了 四十三年庚
012_0424_c_07L戌 本寺私立學校普通卒業 辛亥春走
012_0424_c_08L慶北尙州郡南藏寺 禮龍城和尙 學詩
012_0424_c_09L書南華等世俗傳 壬子奔白羊寺 叅幻
012_0424_c_10L應禪老 硏味禪門語錄等 同年秋還本
012_0424_c_11L寺 更叅浩鵬師 大敎科卒業 甲寅秋
012_0424_c_12L拜錦溟講師 叅拈頌禪門錄要等 乙卯
012_0424_c_13L春建幢 受恩師法印 號喚鯨 卽霽雲
012_0424_c_14L祖之七世孫也 芿住本講院 卽錦溟伯
012_0424_c_15L之所傳云尒 丙辰升進大敎師法階 卽
012_0424_c_16L赴京城廣州郡奉恩寺請 丁巳還本 卽
012_0424_c_17L所謂孔席不暖 墨堗不黔者 信不誣矣
012_0424_c_18L嗚嗚嘻嘻 無常之命 無何之疾 無端
012_0424_c_19L而侵身 萬般救活 百藥無效 呻吟苦
012_0424_c_20L痛 至八月二十八日 奄入無聲三昧
012_0424_c_21L罔極奈何 恩父之於偏慈之喪明失性
012_0424_c_22L忍何言哉 壽二十八 夏十七

012_0424_c_23L

012_0424_c_24L曹溪宗海隱禪師傳

012_0425_a_01L
화순군 외남면 벽송리, 속성은 김金씨이고 본관은 김해이며 휘가 양단良瑞이었던 분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박朴씨인데, 명치 23년 경인년(1890, 고종 17) 10월 27일에 태어났다. 정수리가 높이 솟고 얼굴은 길며, 피부는 검고 키는 보통 사람보다 컸다. 눈동자는 가을 물처럼 맑고 눈썹은 봄날의 안개처럼 엷었으며, 이는 깨끗하고 매우 희었고 음성은 맑고 밝았다. 성정은 완급을 잘 조절하였고 재능은 총명하고 민첩하였다. 어려서 입학하였는데 조운曹雲과 강백崗白과 운흥雲興의 글방에 나아가서 사서史書와 경전의 전적들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3세 때(1902) 아버지를 여의고 곡을 하였으며 3년 동안 복제를 하였다.
이후 18세 정미년(1907) 8월에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출가하였다. 이에 순천군 송광사의 용암 선사龍巖禪師에게 나아가서 머리를 깎고 먹물 옷을 입었다. 혼명 대덕混溟大德에게서 십계를 받았고, 금명 선사錦溟禪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명치 45년(1912)에 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거듭하여 제방을 유행하면서 청운靑雲과 진응震應과 금명錦溟과 호붕浩鵬 등 여러 대강헌들을 5, 6년 동안 참문하여 그 양종兩宗(선종과 교종)의 가르침과 전적을 모두 터득하였다.
대정 6년 정사년(1917)에 대원사大原寺로부터 시작하여 제방을 유행하고 돌아와서, 건당을 하기도 전에 하동 쌍계사 강원으로부터 청을 받아 쌍계사 조실에 주석하면서 7년 동안 안거를 보냈다.
무오년(1918)에 송광사에서 대덕의 법계에 올랐고, 순천 송광사 지방학림의 학감으로 부임하여 8년을 보냈다.
기미년(1919) 봄에 은부의 조실에서 건당을 하고 법을 받았다. 이후 개당을 하여 보제당普濟堂에 주석하면서 금명의 전강을 받았다.
경신년(1920)에는 아울러 순천 지방학림의 교사를 지냈다.
신유년(1921)에 송광사의 법무를 지냈다.
임술년(1922)에 송광사의 감무를 지내면서 긴급히 수리하지 않으면 허물어질 사원을 창건하고 보수하였는데, 곧 천문千門과 만세문萬歲門과 화장루華藏樓와 월조당月照堂과 용화당龍華堂과 문공루門空樓와 공양간(厨堂)과 승당僧堂과 공루空樓와 대장전大藏殿과 노전爐殿과 동변고東便庫와 서변고西便庫 등 도합 37동이었다. 그리고 신축한 것으로는

012_0425_a_01L
和順郡外南面碧松里 姓金 貫金海
012_0425_a_02L諱良瑞之第二男也 母朴氏 生於明治
012_0425_a_03L二十三年庚寅十月二十七日 頂高隆
012_0425_a_04L面尺所 色紺黎體丈餘 眼澄秋水 眉
012_0425_a_05L分春烟 齒潔鮮皓 音徹淸亮 性能緩
012_0425_a_06L急 才兼聦敏 早入學庠 詣曺雲崗白
012_0425_a_07L雲興私塾 史書經籍 無不涉獵 十三
012_0425_a_08L歲哭嚴君 三年侍殯後 十八歲丁未八
012_0425_a_09L月 奉慈訓而出家 投順天之松寺龍嵓
012_0425_a_10L禪師 爲之剃染 受十戒於混溟大德
012_0425_a_11L得具戒於錦溟禪師 明治四十五年 普
012_0425_a_12L通校卒業 仍以遊方 叅靑雲震應錦溟
012_0425_a_13L浩鵬諸大講軒 五六年間 盡得其兩宗
012_0425_a_14L敎海翰墨之粗粕 大正六年丁巳 自大
012_0425_a_15L原寺遊方回路 未建幢 時爲河東雙溪
012_0425_a_16L寺講院請 住室安居七年 戊午松廣寺
012_0425_a_17L中 選昇大德法階 行地方林學監任八
012_0425_a_18L年 己未春建幢受法於恩父之室中 開
012_0425_a_19L堂住室於普濟堂上 受錦溟之傳講也
012_0425_a_20L庚申兼行地方敎師 辛酉松廣寺法務
012_0425_a_21L行 壬戌行監務任 其於剏修寺院 不
012_0425_a_22L緊可壞者 於千門萬歲門華藏樓月照
012_0425_a_23L堂龍華堂門空樓厨堂僧堂空樓大藏爐
012_0425_a_24L殿東便庫西便庫合三十七棟也 其新

012_0425_b_01L화장문華藏門과 명성각明星閣과 당사고堂司庫와 도감고都監庫와 용화당龍華堂과 서우료西隅寮 등 무릇 15동 이상이었다. 그리고 보수한 것으로는 범종루梵鍾樓와 응접실應接室과 하사당下舍堂과 청운당靑雲堂과 백운당白雪堂과 여관사旅舘舍 등이었다. 그리고 옹벽과 담장 등을 화려하게 수선한 것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였다.
계해년(1923) 봄에 범어사 강원의 초청을 받고 나아갔으며, 무진년(1928) 봄에 송광사 강원으로 돌아와서 다시 금명 강백의 강석을 이었다. 그해 여름에 은사恩師를 위하여 월봉月俸을 털어서 『국역동경장경國譯東京藏經』 가운데 『화엄경』 1질을 구입하여 송광사에 법보로 봉납하였다. 12월에 이르러서 법부法父의 병환을 간호하기 위하여 방장실로 퇴거하여 침과 뜸과 약탕의 준비를 일과로 삼으면서 세월을 보냈다.
경오년(1930) 정월 2일에 은부가 입적하자 곡을 하였고 애통을 그치지 않았는데, 정성을 보여 준 도리는 다할 수 없을 정도였다. 또한 송광사의 감무를 맡았다.
386. 조계종 기산 선사전曹溪宗綺山禪師傳
속성은 임林씨이고 아버지 이름은 원오元悟이며 어머니는 김金씨이다. 명치 25년 임진년(1892, 고종 29) 5월 19일 송광면 장안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총민하고, 얼굴 모습이 무척 미남형이었으며, 물 위로 나온 연꽃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를 지녔고, 구름에서 내리치는 번개처럼 재능이 평범한 경지를 초월하였으며, 성품은 혼돈하지 않았으니, 실로 촌로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아이였다. 11세 임인년(1902)에 장안리의 용호재龍虎齋에 입학하고 김찬국金贊國에게 참례하여 사서史書 등을 수료하였다. 12세 때(1903) 아버지를 여의고 곡을 하였는데 점차 가계가 기울어 몸을 보존할 수가 없었다.
14세 을사년(1905) 11월 13일에 어머니 곁을 떠나서 송광사 천자암에 몸을 의탁하여 취월 장로翠月長老를 은사로 모셨다. 호붕 대사浩鵬大師에게서 사미계를 받고 이름을 석진錫珍이라 하였고, 은사에게서 사미과를 수료하였다.

012_0425_b_01L建者 曰華藏門明星閣堂司庫都監庫
012_0425_b_02L龍華堂西隅但十五餘棟 其修理者 曰
012_0425_b_03L梵鍾樓應接室下舍堂靑雲堂白雪堂旅
012_0425_b_04L舘舍等也 其石築及垣墻等 煥然輪焉
012_0425_b_05L者 未能枚擧也 癸亥春赴梵魚寺講院
012_0425_b_06L請 越戊辰春 還本寺講院 再奪錦溟
012_0425_b_07L伯之講席 同年夏爲恩師 捐月俸 輸
012_0425_b_08L國譯東京藏經中華嚴經一帙 奉鎭寺
012_0425_b_09L內法寶 至十二月 爲法父之患憂 退居
012_0425_b_10L方丈 日事鍼灸刀圭 消遣光陰而已 庚
012_0425_b_11L午一月二日 哭恩父喪 哀痛罔極 恳
012_0425_b_12L誠之道 不能煩焉 又以本監務任就職

012_0425_b_13L

012_0425_b_14L曹溪宗綺山禪師傳

012_0425_b_15L
姓林氏 父諱元悟 母金氏 明治二十
012_0425_b_16L五年 壬辰五月十九日 生於本面壯安
012_0425_b_17L里 生而聦敏 鮮妍面皃 如出水之蓮
012_0425_b_18L澄淸眼瞳 若拔雲之電 才超中庸 性不
012_0425_b_19L混沌 實村老之所愛玩者 十一歲壬寅
012_0425_b_20L入本洞龍虎齋 禮金贊國史書等修了
012_0425_b_21L十二哭嚴君 家道漸蕩 未能保存 十
012_0425_b_22L四歲乙巳十一月十三日 辭親 投身於
012_0425_b_23L松廣寺天子庵 以翠月長老爲師 受沙
012_0425_b_24L彌戒於浩鵬大師 名錫珎 依恩師 沙

012_0425_c_01L
16세 정미년(1907)에 이르러 금명 선사錦溟禪師에게 참문하여 사집四集과 초등 과정을 수료하였다.
경술년(1910)부터 임자년(1912)까지 송광사에서 개설한 사립학교의 보통 과정을 졸업하였고, 그해 4월 8일에 금명 선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대정 2년 계축년(1913)에 호붕 법사에게 참문하여 중등 과정을 수료하였다.
24세 을묘년(1915) 봄에 경성의 중앙학림 중학 과정을 졸업하였다.
기미년(1919)에 송광사 지방학림의 교원 및 학감을 겸하였다.
경신년(1920)에 송광사의 중선中選에서 대덕법계로 승진하여 건당을 하여 인봉당印峰堂이라는 이름을 받고, 호를 기산綺山이라 하였는데, 곧 제운 해징霽雲海澄의 제6세손이다.
신유년(1921)에 송광사에서 설립한 보통학교의 교원 및 학감을 맡았다.
계해년(1923)에 송광사 감무를 맡고 있을 때 주지를 대리하여 30본산을 결단하였고, 일본 관람을 다녀왔다.
소화 2년 정묘년(1927) 다시 송광사 감무를 맡았을 때 사원을 창건하고 보수하였는데, 응접실應接室과 해청당海淸堂과 옹벽 공사 등을 마무리하였고, 보조 국사의 감로탑을 개축하였으며, 비석을 새로 건립하였고, 송광사의 사고史庫 3권의 회편會編을 완료하였다.
소화 4년 기사년(1929) 봄에 송광사 전문강원의 강사로 취임하여 내규를 혁신하여 신·구의 편제에서 공부해야 할 교과서를 연구하고 교수하였다.
387. 조계종 인담 선사전曹溪宗印潭禪師傳
속성은 허許씨로서 본관은 김해이고, 아버지 이름은 정禎이며 어머니는 고高씨이다. 명치 30년 정유년(1897, 고종 34) 12월 13일 경남 통영군 서면 서충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지혜가 총명하였다. 8세 때(1904) 입학을 하였는데 자못 재명才名이 있었다. 11세 때(1907)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곡을 하였고, 가계가 어려워져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15세 때(1911) 어머니를 따라서 통영군의 용화사龍華寺로 출가하여 영월 장로永月長老에 의지하여

012_0425_c_01L彌科了 至丁未 叅錦溟師 四集初等科
012_0425_c_02L了 自庚戌至壬子 松廣寺普通科卒業
012_0425_c_03L同年四月八日 受具戒於錦溟禪師 大
012_0425_c_04L正二年癸丑 叅浩鵬師 中等科修了 乙
012_0425_c_05L卯春京城中央學林中學科卒業 己未
012_0425_c_06L松廣寺地方學林敎員及學監兼行 庚
012_0425_c_07L申松廣寺中選 陞大德法1)陛 建幢 佩
012_0425_c_08L印峰堂之印 號綺山 卽霽雲祖之六世
012_0425_c_09L孫也 辛酉 普通校敎員學監兼行 癸
012_0425_c_10L亥松廣寺監務時住持代理 三十本山
012_0425_c_11L結團 日本觀覽行 昭和二年丁卯松廣
012_0425_c_12L寺監務再行 時寺院剏修者 應接室海
012_0425_c_13L淸堂石築等 普照國師甘露塔改築 碑
012_0425_c_14L石新建 本寺史庫三▼((局-口)*二)會編了 四年己
012_0425_c_15L巳春 本寺專門講院講師就任 革新之
012_0425_c_16L䂓 新舊叅詳敎科書硏究敎授云

012_0425_c_17L

012_0425_c_18L曹溪宗印潭禪師傳

012_0425_c_19L
俗姓許氏 貫金海 父諱禎 母高氏 明
012_0425_c_20L治三十年丁酉十二月十三日 生於慶
012_0425_c_21L南統營郡西面西忠里 生而聦慧 八歲
012_0425_c_22L入學 頗有才名 十一哭嚴君 不能讀
012_0425_c_23L書 十五隨母出家於本郡龍華寺 依永
012_0425_c_24L「陛」疑「階」{編}

012_0426_a_01L먹물 옷을 입고 득도하였다. 이에 계를 받고 이름을 정용正鏞이라 하였다.
대정 2년 계축년(1913)에 유학遊學을 하여 전남 구례군 화엄사의 진응 선사震應禪師의 강원에 이르러 사미과를 수료하였고, 거듭하여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대정 3년(1914)에 사교과를 수료하였다.
대정 5년(1916)에 순천군 송광사 금명 화상錦溟和尙의 회하에서 대교과를 비롯한 선문禪文의 제반에 걸쳐 함께 수료하였다. 거듭하여 송광사의 지방학림에 들어가 3년 과정을 졸업하였다.
대정 7년(1918)에 만하 선사萬下禪師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대정 11년 임술년(1922)에 경성부 보성학교 법률과를 졸업하였고, 계해년(1923) 봄 학기에는 보성군 벌교면 송명학교의 교원으로 취직하였다.
대정 14년 을축년(1925)에 은사인 영월당永月堂에게서 건당을 하고, 호를 인담印潭이라 하였는데, 곧 응암 낭윤應庵朗允 조사의 제6세손이다.
소화 4년 기사년(1929) 7월 12일에 낙안의 관제舘第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곡을 하였는데 애통함이 끝이 없었다.
경오년(1930) 정월에 송광사의 불교전문강원 강사로 취임하여 교수하였다.
388. 조계종 용은 선사전曹溪宗龍隱禪師傳
법명은 완섭完燮이고 자는 용은龍隱이며, 속성은 주朱씨로서 본관은 신안이고 아버지의 이름은 종학鍾學이다. 어머니 박朴씨는 명치 30년 정유년(1897) 2월 26일 상서로운 꿈을 꾸고 나서 태교를 하여 무술년(1898) 2월 26일 완산부 방천리에서 낳았다. 7세 때(1904) 아버지의 책을 읽었고, 11세 무신년(1908) 2월 17일에 어머니를 여의고 곡을 하였다.
12세 때(1909) 아버지를 따라서 곡성군 태안사의 영월 대사映月大師를 찾아갔고, 낙안군 하송리에 이르러 형 집에서 탈상을 하였다.
14세 신해년(1911) 여름에 순천군 송광사로 가서 금명 대사錦溟大師에게 득도하였고,

012_0426_a_01L月長老 零染得度 仍受戒 名正鏞 大
012_0426_a_02L正二年癸丑遊學 至全南求禮郡華嚴
012_0426_a_03L寺震應禪師講下 沙彌科了 仍普通科
012_0426_a_04L卒業 三年四敎科修了 五年順天郡松
012_0426_a_05L廣寺錦溟和尙會下 大敎科禪文諸般
012_0426_a_06L并修了 仍入松廣寺地方學林三年卒
012_0426_a_07L業 七年受具戒於萬下禪師壇下 十
012_0426_a_08L一年壬戌京城府普成學校法律科卒業
012_0426_a_09L越癸亥春期 寶城郡筏橋面松明學校
012_0426_a_10L敎員就職 十四年乙丑建幢於恩師永
012_0426_a_11L月堂下 號印潭 卽應庵祖師之六世孫
012_0426_a_12L也 昭和四年己巳七月十二日 哭慈室
012_0426_a_13L於樂安舘第 哀痛何極哉 庚午一月
012_0426_a_14L以本寺佛敎講師赴任敎授

012_0426_a_15L

012_0426_a_16L曹溪宗龍隱禪師傳

012_0426_a_17L
法名完燮 字龍隱 姓朱 貫新安 父諱
012_0426_a_18L鍾學 母朴氏 明治三十年丁酉二月二
012_0426_a_19L十六日胎交有夢瑞 越戊戌二月二十
012_0426_a_20L六日 生於完山府坊川里 年七歲讀父
012_0426_a_21L書 十一歲戊申二月十七日 哭慈室
012_0426_a_22L十二歲隨父 自谷城郡泰安寺 訪映月
012_0426_a_23L大師 抵樂安郡下松里 從兄家解喪
012_0426_a_24L十四歲辛亥夏 投順天郡松廣寺 依錦

012_0426_b_01L그해 7월 15일에 영월 대사에게 계를 받았다.
갑인년(1914) 4월 8일에 이르러 은사인 금명 대사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해 3월에는 보명학교 보통과를 졸업하였다.200) 그해 여름부터는 은사의 강원을 참문하여 불교전문과의 초·중등 과정과 대교 과정을 졸업하였는데, 5, 6년 동안 스승과 숙식을 같이하였다.
경신년(1920) 3월에 순천의 지방학림의 보통과를 수료하였으며, 은사인 금명당錦溟堂에게서 법인을 받고 자를 용은龍隱이라 하였는데, 곧 선조先祖인 응암 낭윤 조사의 제7세손이다. 그해 4월에 거듭하여 일본 학교에 들어가서 계해년(1923) 봄에 이르러 일본대학의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정 13년 갑자년(1924)에 전주군全州郡(전라북도) 서정曙町(익산군 소재) 사립학교 교원으로 임용되어 취직하였다.
대정 14년 을축년(1925)에 순천군 송광사에서 중선中選에서 대덕법계로 승진하였다. 그해 여름에 곡성군 태안사의 총무를 맡았고 그곳에서 임시로 사무를 취급하는 것까지 겸하였다.
대정 15년 병인년(1926)에 태안사 주지의 직에 취임하였다.
정묘년(1927) 병을 얻어 직책을 그만두고 전주병원에 들어가서 치료를 하였지만, 거의 죽을 지경까지 갔다가 살아났다. 그해 겨울에 송광사로 돌아와서 법부法父의 구병시식에 의지하여 겨우 죽음을 모면하였다.
무진년(1928)에 송광사의 사무원이 되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송광사의 사고史庫 1질 3권에 대하여 서사書寫하는 임무를 마쳤다.
기사년(1929) 정월 15일에 송광사 불교강원의 교사로 선발되어 교과목을 신식 교과목과 구식 교과목을 합하여 교수하였다. 『화엄강요華嚴綱要』 1권과 철집綴集201) 등이 세간에 유행하였는데 거의 초학자들의 안목을 열어 주는 것들이었다.
경오년(1930) 정월에 송광사의 법무 직책에 선발되어 활동하였다.

012_0426_b_01L溟大師得度 同年七月十五日 得戒於
012_0426_b_02L映月師 越甲寅四月八日 受具於恩師
012_0426_b_03L壇下 同年三月 普明學校普通科卒業
012_0426_b_04L同年夏以來叅恩師講下 佛敎專門科
012_0426_b_05L初中等大敎科卒業 五六年間 食其父
012_0426_b_06L牛 庚申三月地方科了 佩法印於恩師
012_0426_b_07L堂下 字龍隱 卽應庵先祖七世孫也
012_0426_b_08L同年四月 仍入日本學校 至癸亥春
012_0426_b_09L本校大學宗敎科卒 卽還本鄕 大正十
012_0426_b_10L三年甲子 全州郡曙町私立學校敎員
012_0426_b_11L任就職 四年乙丑順天郡松廣寺中選
012_0426_b_12L大德法階陞進 同年夏谷城郡泰安寺
012_0426_b_13L摠務任 兼行臨時事務取扱者 十五年
012_0426_b_14L丙寅同寺住持任就職 丁卯因病謝免
012_0426_b_15L入全州病院治療 幾見死境而甦矣 同
012_0426_b_16L年冬還于松廣寺 依法父救病 僅免死
012_0426_b_17L地 戊辰在本事務員所請 本寺史庫一
012_0426_b_18L帙三▼((局-口)*二) 書寫役度了 己巳一月十五日
012_0426_b_19L本寺佛敎講院敎師選擧 而敎科以新
012_0426_b_20L舊式叅合敎授 華嚴綱要一卷 綴集行
012_0426_b_21L世 庶開初學之眼目 庚午一月 以本
012_0426_b_22L寺法務職得選行之
  1. 1)이는 김군수金君綏가 찬한 송광사의 「佛日普照國師碑銘」을 요약한 글이다.
  2. 2)금 태조 정륭 3년 : 금의 태조는 1115년부터 1123년까지 재위하였고 정륭 3년(1158)은 제량帝亮의 재위기이다.
  3. 3)『화엄론華嚴論』 : 당나라의 이통현李通玄이 쓴 『華嚴經合論』을 말한다.
  4. 4)삼문三門 : 보조 지눌이 주창한 수행법으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 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을 말한다.
  5. 5)이는 이규보李奎報가 찬한 「眞覺國師碑銘」을 요약한 글이다.
  6. 6)진양공晉陽公 : 최충헌崔忠獻의 아들로 고려의 실권을 장악한 최우崔瑀(?~1249)를 말한다. 그는 강화로 천도를 단행하여 몽골과 항쟁하였고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 간행을 주도하였다. 후에 이怡로 개명하였다.
  7. 7)청진 자운淸眞慈雲 : 청진 국사 몽여夢如는 진각 혜심眞覺慧諶의 제자로 수선사 3세 사주社主이다. 비문은 전하지 않으며 『東文選』 등에 글 일부가 전한다.
  8. 8)여기서 인용한 두 글은 『東國李相國集』 후집 권11 찬贊의 「松廣社主大禪師夢如 遣侍者二人 求得丁而安墨竹二幹 仍邀予爲贊云」과 권12 서書의 「寄松廣社主禪師夢如手書」이다.
  9. 9)정이안丁而安 : 정홍진丁鴻進으로 자가 이안而安이며 묵죽화墨竹畫를 잘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최자崔滋의 『補閑集』에 그의 시문과 묵죽화에 대한 평이 실려 있다.
  10. 10)이 공李公 규보奎報 : 이규보李奎報(1168~1241).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명문장가로 『東國李相國集』을 비롯하여 『白雲小說』 등 많은 저술을 남겼다.
  11. 11)겨울에 죽순을~드시게 했다 : 중국 삼국시대의 오나라에 살던 맹종孟宗이 병든 어머니를 위해 겨울에 대밭에서 슬피 울자 죽순이 돋아났다는 일화가 전한다.
  12. 12)들은 것을~본성을 깨우치면(反聞聞性) : 『楞嚴經』의 25가지 수행법 중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의 단계이다.
  13. 13)선지식(知識) : 벗을 뜻하는데 불교에서 선지식善知識은 선친우善親友, 승우勝友라고도 번역되며 현인이나 스승을 의미하기도 한다.
  14. 14)대화상大和尙(丈下) : 장丈은 주지나 방장이 머무는 장실丈室을 뜻하며 전하殿下, 각하閣下와 마찬가지로 상대에 대한 존칭의 의미로 해석된다.
  15. 15)이는 김구金坵가 찬한 자운사慈雲寺의 「眞明國師碑銘」을 요약한 글이다.
  16. 16)품일品日 : 신라 말의 선종 승려 범일梵日(810~889)로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문闍崛山門의 개조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다시 설산雪山에서 진귀 조사眞歸祖師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진귀 조사설을 말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7. 17)청우靑牛 : 「眞明國師碑銘」에는 쌍봉산의 청우변靑牛辯으로 되어 있는데 지눌의 제자 홍변洪辯을 가리킨다.
  18. 18)청진淸眞(夢如) : 수선사 3세 사주인 몽여夢如이다.
  19. 19)정혜사定慧寺 : 조계산 수선사의 이칭異稱이다.
  20. 20)태종 황후 4년 을사 : 몽골 태종의 황후인 해미실海迷失이 권력을 잡았던 시기이다. 원문에는 태종후太宗后 5년으로 되어 있는데 을사년(1245)은 5년이 아니고 4년이므로 수정하여 번역한다.
  21. 21)목우牧牛의 기풍 : 목우자 보조 지눌의 유풍을 의미한다.
  22. 22)하산소下山所 : 고려 시대에 왕사나 국사가 주석하던 사찰을 말한다.
  23. 23)경지鏡智 대사 : 원정 국사圓靜國師 경지는 고려 희종의 넷째 왕자이며 충명 국사沖明國師 각응覺膺의 형이다.
  24. 24)이는 이익배李益培가 찬한 비문을 요약한 것으로 송광사에 사본이 전한다.
  25. 25)진각 국사眞覺國師 : 조계산 수선사 2세 사주 혜심慧諶이다.
  26. 26)선회禪會 : 고려 시대에 행해진 담선법회談禪法會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27. 27)청진 국사淸眞國師 : 주 18 참조.
  28. 28)진양공 : 주 6 참조.
  29. 29)삼중대사三重大師 : 고려 시대 승계僧階 중 하나이다.
  30. 30)주국柱國 : 고려 시대에 관리에 대한 포상으로 주어지는 훈계勳階의 하나이다.
  31. 31)최항崔沆(?~1257) : 최우의 아들로 부친의 권력을 승계하였고 후에 진평공晉平公으로 추증되었다.
  32. 32)김훈金曛이 지은 비문을 요약한 것으로 『曹溪山松廣寺史庫』에 원문이 전한다.
  33. 33)원오 국사圓悟國師 : 수선사 5세 사주인 천영天英(1215~1286)이다.
  34. 34)감로사甘露社에 처음 주석하였는데 : 원문을 보면 41세에 국왕의 교지를 받았으며 감로사에 주석한 것은 그 이전의 일이다.
  35. 35)입원入院 : 여기서는 수선사의 법주, 즉 사주社主가 됨을 의미한다.
  36. 36)「청전표請田表」 : 원의 세조에게 수선사의 토지를 회복시켜 달라고 올린 표문이다.
  37. 37)이는 이제현李齊賢이 쓴 비문을 요약한 것으로 원문은 『益齋亂藁』에 수록되어 있다.
  38. 38)오중吳中 : 중국 윤주潤州의 별칭으로 현재의 강소성 진강현鎭江縣 일대이다.
  39. 39)몽산蒙山 화상 : 원나라의 임제종臨濟宗 승려 몽산 덕이蒙山德異로서 여말선초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40. 40)태위왕太尉王 : 충선왕이 왕위를 양도하고 상왕으로 원나라에 있을 때의 호칭이다.
  41. 41)일鎰 : 무게를 나타내는 말로 20냥兩, 일설에는 24냥이라고도 한다.
  42. 42)대방군帶方郡 : 전라북도 남원의 옛 이름이다.
  43. 43)전라도 모악산 불갑사佛甲寺에 있던 각진 국사覺眞國師의 비는 현존하지 않으며 이달충李達衷이 지은 비문이 『東文選』에 남아 있는데 그것을 요약한 글이다.
  44. 44)원오圓悟 국사 : 천영天英(1215~1286)으로 수선사 5세 사주이다.
  45. 45)자각慈覺 국사 : 도영道英으로 수선사 8세 사주이다.
  46. 46)월남月南 : 월남사月南寺를 말한다. 월출산 남쪽인 전라남도 강진에 있던 명찰로서 삼층석탑과 「眞覺國師碑」만 전한다.
  47. 47)불갑사佛岬寺 : 전라남도 영광에 소재한 사찰로서 조선 후기부터 현재까지 중창을 거듭하여 왔다. 현재는 불갑사佛甲寺로 표기한다.
  48. 48)나옹懶翁(1320~1376) : 휘는 혜근惠勤이며 공민왕 대에 왕사王師를 지냈다. 제자 무학 자초無學自超는 조선 태조 대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로 유명하다.
  49. 49)단표행單瓢行 : 단표는 ‘일단사일표음一簞食一瓢飮’의 준말로,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뜻한다.
  50. 50)보조普照와 보제普濟 : 보조 지눌과 나옹 혜근을 가리킨다.
  51. 51)전준傳准 : 조선 시대에 정부에서 개인 재산의 소유권을 공증해 준 증서로서 입안立案과 성격이 비슷하지만 특히 국왕이 특별히 하사한 토지·노비나 매득한 재산 등을 대상으로 한다.
  52. 52)원래 비석은 개경 화장사華藏寺에 세워졌지만 현재는 전하지 않으며 이규보가 쓴 비명이 『東國李相國集』에 수록되어 있다.
  53. 53)아버지는 곡縠 : ‘곡縠’은 이규보가 쓴 비명에는 ‘毅’로 되어 있고, 검교 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 태조의 공신 운기장군雲騎將軍 종회宗會의 후손이며 광종 대에 장원 급제하여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오른 공지拱之의 5대손이다.
  54. 54)법명을 바꾸었다 : 이규보의 비명에 의하면 원래 법명은 ‘학돈學敦’이었다고 한다.
  55. 55)광명사廣明寺 : 개경에 있던 선종 사찰로 선종 승과가 시행된 절이다.
  56. 56)이공로李公老가 지은 보경사寳鏡寺 「圓眞國師碑銘」을 요약한 것이다.
  57. 57)선회禪會 : 비명 원문에는 담선법회談禪法會로 되어 있다. 담선법회는 고려 시대의 국가적 행사 중 하나로서 보제사普濟寺를 중심으로 여러 사찰에서 거행되었다.
  58. 58)선불장選佛場 : 승과僧科 시험장을 말한다.
  59. 59)진락공眞樂公 : 학자이자 거사居士로 유명한 이자현李資玄(1061~1125)을 가리킨다. 이자현은 청평산 보현원普賢院을 문수원文殊院으로 개명하고 선禪을 수행하였다.
  60. 60)자각 선사慈覺禪師 : 송대의 종이宗頤 선사이며 『坐禪儀』의 저자이다.
  61. 61)금 정우 9년 신사 : 신사년(1221)은 금 흥정興定 5년이며 정우 연간은 1216년 4년을 끝으로 다음 해에 흥정으로 바뀌었다.
  62. 62)원본은 민지閔漬가 1295년에 지은 인각사麟角寺의 「普覺國師碑銘」이다.
  63. 63)제압題押 : 책이나 글에 도장을 찍거나 수결하는 것을 말한다.
  64. 64)무생인無生忍 : 무생無生의 법을 깨친다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줄임말로,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진여眞如의 깨달음을 의미한다.
  65. 65)충선왕 27년 : 충선왕은 1298년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7개월 만에 충렬왕이 복위하였고, 이후 1308년에서 1313년까지 충선왕이 다시 재위하였다. 따라서 충선왕 27년은 오기이며 1239년 기해년은 고종 26년이다.
  66. 66)이지무李之茂가 쓴 「斷俗寺大鑑國師碑銘」을 요약한 것이다.
  67. 67)혜소 국사慧炤國師 : 송나라에 유학하여 『百丈淸規』 등을 전해 왔고 고려 숙종, 예종 때 국사를 지낸 선종 승려 혜소慧炤를 말한다. 법상종法相宗 승려인 혜소 국사 정현鼎賢(972~1054)과는 다른 인물이다.
  68. 68)이색李穡이 쓴 회암사檜巖寺의 「禪覺王師碑銘」이 원문이다.
  69. 69)이색李穡이 찬한 「圓證國師塔銘」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70. 70)영가永嘉 : 6조 혜능慧能의 제자인 영가 현각永嘉玄覺(665~713)으로 ≺證道歌≻ 찬자로 유명하다.
  71. 71)난 : 공민왕의 일등 공신이었지만 전횡을 일삼아 척살당한 조일신趙日新(?~1352)의 난을 가리킨다.
  72. 72)권근權近이 찬한 청룡사靑龍寺 「普覺國師定慧圓融塔碑」를 요약한 글이다.
  73. 73)삼구三句 : 당문구當門句, 입문구入門句, 문내구門內句를 뜻한다.
  74. 74)백산도량白傘道場 : 오불정五佛頂의 하나인 백산개도량白傘蓋道場으로, 중생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일산日傘을 덮는 것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75. 75)삼현법三玄法 : ‘삼현’은 임제 의현臨濟義玄이 납자를 접득하기 위하여 시설한 세 가지 현묘한 도리이다. 체중현體中玄은 언중言中에 조금의 가식도 없이 사물의 존재 그대로의 진상과 실상을 드러내고 있는 구이다. 구중현句中玄은 분별정식分別情識에 걸리지 않는 실어實語로서 언어에 구애되지 않고 현오玄奧를 잘 깨치도록 해 주는 구이다. 현중현玄中玄은 일체의 상대적 논리와 어구의 질곡을 벗어난 현묘한 구를 말하는데, 달리 용중현用中玄이라고도 한다.
  76. 76)무학은 1356년에 귀국하였고, 나옹 화상은 1358년에 귀국하였다.
  77. 77)신광사로 나옹 화상을 찾아뵈었을 때 그곳의 스님들이 무학을 시기하고 질투하자 이에 내려 준 게송이다.
  78. 78)공겁전空刼前 : 분별이 발생하기 이전의 청정하고 순수한 세계로서 위음왕불이전威音王佛以前 또는 부모미생이전父母未生以前과 동일한 의미이다.
  79. 79)장경불사藏經佛事 : 대장경을 독송하는 불사로서 일정한 부분을 여러 군데 선택하여 정해진 시간 동안 독송한다.
  80. 80)정혜 국사定慧國師를 친견하였고 : 1346년(충목왕 2)의 일이다.
  81. 81)구산선九山選 : 구산선문의 승과고시인 공부선工夫選을 가리킨다.
  82. 82)벽안호碧眼胡 : 푸른 눈은 훌륭한 조사 내지 선지식을 가리킨다. 벽안호는 곧 푸른 눈을 가진 오랑캐, 즉 달마 대사를 가리키는 말이다.
  83. 83)또 가사와~등을 하사하였다 : 이때 공민왕은 선사에게 금루金褸의 비단으로 만든 가사와 발우와 묘필妙筆과 관음대사상觀音大士像 등을 내렸다.
  84. 84)대지 혜월 국사의 임종게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시는 삼평 의충三平義忠의 게송을 운문 문언雲門文偃이 인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雲門匡眞禪師廣錄』 권중(T47, 554b8) 참조.
  85. 85)이 구는 한 제자가 임종게를 청하자 위의 4구 이외에 임종게가 달리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86. 86)법호法號 : 공민왕이 내려 준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숭신진승崇信眞乘 근수지도勤修至道 도대선사都大禪師’를 가리킨다.
  87. 87)찬시贊詩 : 『牧隱文藁』 권12에는 구곡, 법명(각운), 달마, 보현에 대한 찬시가 수록되어 있다.(和氣在天 虛靈在物  화기는 하늘에 있고 허령함은 사물에 있네≺br/≻惟藏神用 弗或天閼  간직한 신령한 작용은 하늘도 막지 못하네≺br/≻疇均此施 六合爲一  누가 고루 베풀어 우주를 하나로 만드는가 ≺龜谷≻≺br/≻≺br/≻是身虛空 天水一色  이 몸은 허공이요 하늘과 물이 한 빛이라네≺br/≻渺然而逝 風淸日白  저 멀리 떠나가는데 바람 맑고 날은 밝네 ≺br/≻芥乎其間 唯一不識  거기에 겨자 하나 있는데 불식일 뿐이라네 ≺達磨≻≺br/≻≺br/≻六牙大象 布武大野  여섯 어금니 큰 코끼리 들판으로 나갔다네≺br/≻富貴風流 見此粲者  부귀와 풍류 저 훌륭한 모습을 잘 살펴라 ≺br/≻哀哉兔逕 方騁吾駕  슬프구나 토끼 길목에 내 가마가 지나가네 ≺普賢≻≺br/≻≺br/≻無心爲心 出入大虛  무심으로 마음 삼아 큰 허공으로 드나드네≺br/≻友風子雨 亦曰勤渠  바람 비를 벗 아들 삼는 것 퍽 부지런하네≺br/≻妙悟所以 非師誰歟  오묘한 깨침을 스님이 아니면 뉘 알겠는가 ≺法名≻)
  88. 88)무자화두無字話頭를 의심하여 칠통을 타파하였다 : 무자화두를 참구하여 깨쳤음을 가리킨다.
  89. 89)『高峰原妙禪師語錄』 권下(X70, 696c18), “若要究竟衲僧向上巴鼻。 直須和座颺在他方世界始得。”
  90. 90)정주程朱 : 정주학파程朱學派를 가리킨다. 송대(960~1279) 철학의 주요 학파로서 이학파理學派라고도 하는데, 정호程顥·정이程頤가 창시하고 주희朱熹가 집대성하였다.
  91. 91)막야검莫耶劒 : 고대 보검寶劍의 하나인데, 전설상 춘추전국시대 오나라의 간장干將이 주조하여 오왕吳王인 합려闔閭에게 바쳤다는 두 자루 칼 중에 자검雌劍을 가리킨다. 선종에서는 일체의 번뇌를 말끔하게 타파하는 뛰어난 지혜를 상징한다.
  92. 92)81세 : 1464년에 탄생하여 1534년에 입적하였으므로 71세이어야 한다.
  93. 93)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靈巖道岬寺妙覺和尙碑」(『朝鮮金石總覽』 下)에 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본분사本分事를 등지고 있는 것은 마치 인물을 기묘하게 잘 그렸던 승요僧繇 화상을 두고 비록 뛰어난 묘화妙畫라고들 말하지만 그것은 마침내 살아 있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我所負者。 其猶僧繇畵人物。 數曰妙畵。 終非活者。)”
  94. 94)구곡 각운 선사를 참문하였지만 : 수미 선사는 1405년을 전후하여 태어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구곡 각운(1318~1382)에게 참문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처럼 수미와 구곡 각운은 활동 시기가 다르지만, 17세기 전반에 확립된 태고 법통에서 태고 보우―구곡 각운―벽계 정심으로 법맥을 연결시켰기 때문에 그에 입각하여 수미가 각운과 정심에게 모두 배웠다는 내용이 비문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도갑사 묘각화상비는 태고 법통이 정립된 후인 1693년에 백암 성총栢庵性聰이 쓴 것이다.
  95. 95)사사四事 : 공양하는 데 쓰이는 네 가지로서 방사房舍·의복衣服·음식飮食·향화香華 등을 가리킨다.
  96. 96)지금의 마갈국엔~흔적 끊겼다네 : 소림少林은 달마의 좌선이고, 비야毘耶는 유마의 침묵이며, 마갈摩竭은 부처님의 성도이다. 좌선과 침묵과 깨침의 소식이 동일한 것임을 말한 것이다.
  97. 97)절상회折床會 : 회 화상會和尙은 동사東寺의 여회 선사如會禪師로서 마조의 법을 이었다. 여회 선사가 설법을 하는데 그 덕망을 흠모하는 대중들이 무수하게 모여들어 평상이 부러지는 일이 있었다. 이로부터 ‘절상여회折床如會’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98. 98)이 글은 『東文選』 권27에 「曹溪宗三重神化爲禪師官誥」(崔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99. 99)최자崔滋(1188~1260) : 고려 시대의 문신·학자. 강종 1년(1212)에 과거에 급제하고 상주의 사록을 거쳐 종9품에 해당하는 국자감의 학유學諭가 되었다. 『補閑集』(1254)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최자의 기록에 의거한다는 것으로 보아 삼중 신화 선사는 고려 시대 중기의 선사로 간주된다.
  100. 100)첨가되는 대사의 호 : 조계종과 천태종의 경우에 승과를 거쳐 대덕―대사―중대사―삼중대사―선사―대선사 등으로 법계가 승진되는데, 이에 삼중대사의 용어로써 법호를 삼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101. 101)각범 혜홍覺範慧洪(1071~1128) : 북송 때 황룡파의 선사. 문필에 뛰어나서 『禪林僧寶傳』·『林間錄』을 비롯하여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102. 102)창룡굴蒼龍窟 : 창룡은 청룡靑龍으로 방위로는 동쪽에 해당하여 동방선東方禪의 유현幽玄한 본분종지本分宗旨를 상징하며, 접물이생接物利生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103. 103)황학루黃鶴樓 : 중국 하북성 무한시에 있는 누각으로서 호남 악양의 악양루岳陽樓와 강서 남창의 등왕각騰王閣과 함께 강남의 3대 명루名樓로 유명하다.
  104. 104)자자自恣 : 선원에서 안거를 마칠 때 모든 승려들이 서로 자기의 죄과를 고백하고 참회하여 다른 승려들에게서 훈계를 받는 일이다.
  105. 105)측금잔화側金盞花 : 복수초福壽草를 가리킨다.
  106. 106)칠민七閩 : 중국 복건성福建省 지방을 가리킨다. 옛날 숙웅叔熊의 자손이 7종種으로 나뉘어 살았기 때문에 유래한 이름이다.
  107. 107)『孟子』 「萬章」 상.
  108. 108)『莊子』 「逍遙遊」 참조. “허유許由가 말하였다. ‘그대가 천하를 다스려 천하가 이미 잘 다스려지고 있는데, 그런데도 내가 오히려 그대를 대신한다면 나더러 장차 명예를 구하라는 것인가? 명예라고 하는 것은 실질의 손님이니, 그러면 나더러 장차 손님이라고 하는 것이 되라는 것인가?’(許由曰。 子治天下。 天下既已治也。 而我猶代子。 吾將爲名乎。 名者實之也。 吾將爲賓乎。)”
  109. 109)이 글은 『東文選』 권27에 「曹溪宗三重神定禪師官誥」(崔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10. 110)조사들끼리 서로 단전單傳하는 소식이다(祖祖之單傳) : 역대 조사들이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서로 단전직지單傳直指한다는 것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소식을 가리킨 말이다.
  111. 111)선불장選佛場 : 부처를 선발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선당, 선원, 승당, 선방 등을 가리킨다. 좌선을 하여 깨침을 터득하는 곳에 해당한다. 단하 천연丹霞天然의 말에 처음 보이며, 동시대 방온龐蘊의 『龐居士語錄』에 나오는 게송으로 널리 알려졌다.
  112. 112)양중공안兩重公案 : 이중의 공안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공안이 재차 제시되는 경우를 말한다. 혹 다른 공안을 가지고 똑 닮았다고 하는 경우라든가 동일한 공안을 다시 내보이는 경우를 야유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大慧語錄』 권1(T47, 813b)에 전거가 있다. “上堂。 僧問。 靈山會上迦葉親聞。 少室峰前神光得髓。 卽今座下誰是知音。 師云。 裂破舌頭。 進云。 可謂卞氏場中多巨璞。 孟嘗門下足高賓。 師云。 瓦礫不勞拈出。 進云。 爭奈鋒前有異。 句裏無私。 師云。 誰是知音者。 進云。 少室巖前金鳳舞。 徑山峰頂玉雞啼。 師云。 兩重公案。 問。 達磨西來單傳心印。 直指人心見性成佛。 只如德山入門便棒。 臨濟入門便喝未審是同是別。 師噓噓。”
  113. 113)형남荊南 : 오대십국五代十國 가운데 강릉江陵에 도읍을 정한 나라의 명칭이다.
  114. 114)위령葦嶺 : 전라도 정읍의 갈재를 가리킨다. 노령蘆嶺이라고도 한다.
  115. 115)관중管衆 : 대중을 책임지는 스님으로, 선원의 원장과 강원의 강주 및 입승 등의 책임자를 말한다.
  116. 116)구주九州의 유나維那 : 구주는 중국 대륙을 가리키고, 유나는 진晉나라에서 구주의 도유나都維那라고 불렸던 축도일竺道壹을 가리킨다.
  117. 117)경탈敬脫(555~617) : 수나라 때 승려. 급군汲郡 출신으로 어려서 출가하였는데,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였으며 경론에 해박하고 문장에 뛰어났다.
  118. 118)임제종의 종조인 임제 의현의 문하인 ① 흥화 존장, ② 남원 혜옹, ③ 풍혈 연소, ④ 수산 성념, ⑤ 분양 선소, ⑥ 자명 초원, ⑦ 양기 방회, ⑧ 백운 수단, ⑨ 오조 법연, ⑩ 원오 극근, ⑪ 호구 소륭, ⑫ 응암 담화, ⑬ 밀암 함걸, ⑭ 파암 조선, ⑮ 무준 사범, ⑯ 설암 조흠, ⑰ 급암 종신, ⑱ 석옥 청공으로 계승되었다.
  119. 119)십철十哲 : 공자 문하의 10대 제자를 일컫는 말로서, 곧 안회·자하·자유·자로·자공·염백우·염유·중궁·재아·민자건 등이다.
  120. 120)법랍은 63년 : 「西山大師表忠祠紀蹟碑」(1791, 정조 15)와 「海南大興寺淸虛堂休靜大師碑文」(1647, 인조 25)에서는 모두 법랍 6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121. 121)1595년 선조 28년 11월의 일이다.
  122. 122)홍각등계弘覺登階 : 광해군은 ‘부휴당浮休堂 부종수교扶宗樹敎 변지무애辯智無礙 추가홍각대사追加弘覺大師 선수등계존자善修登階尊者’라는 시호를 내려 주었다.
  123. 123)고모 : 원문은 ‘阿孃’으로 어머니를 가리킨다. 그러나 뒷부분에는 39세에 어머니를 여읜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여기서는 달리 번역하였다.
  124. 124)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이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국임을 선언하면서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의 일이다. 벽암 각성은 이때 화엄사華嚴寺에 있다가 호남의 승군 3천 명을 일으켜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였다.
  125. 125)1640년 8월에 호남관찰사 원두표元斗杓의 진언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직을 맡아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으면서 사고史庫를 보호했던 사실을 가리킨다. 바로 앞에서 언급된 일본에 가는 사신으로 임명받은 것은 1641년으로서 규정도총섭을 제수받은 다음 해에 해당하기 때문에 행장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다.
  126. 126)삼청三淸 : 일반적으로는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표현하는 명칭으로 최고의 이상향을 의미한다.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이 그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수청水淸·월청月淸·풍청風淸의 삼청을 일컫는다.
  127. 127)퇴어자退漁子 : 김진상金鎭商(1684~1755)인 듯하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여익汝翼·태백太白이고, 호는 퇴어자이다.
  128. 128)금리錦里의 신동 : 금리는 중국 사천성의 성도成都에 옛날 촉한 때의 거리 모습을 재현해 놓은 거리의 이름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두보杜甫가 성도에 머무는 동안 자칭 금리선생錦里先生이라 한 것에 빗댄 것이다.
  129. 129)송계 원휘松溪圓輝 : 원휘 대사圓輝大師 송계松溪(1630~1694)를 가리킨다. 성은 최씨이고, 자는 회백會魄이며, 호는 송계로서 연성連城 출신이다. 아버지는 응준應俊이고, 어머니는 함咸씨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지운智運을 은사로 삼았고, 용문산에 들어가 풍담楓潭의 밑에서 공부하였으며, 그 법을 받았다. 여러 강원에서 공부하여 불경에 통달한 뒤에 묘향산에서 서악西岳의 대종사大宗師가 되었다. 언제나 과묵하여 모든 대중에게 무언승無言僧으로도 불렸다. 만년에는 묘향산 칠엽암七葉庵으로 옮겨 주석하였는데 그곳에서 입적하였다.
  130. 130)윤선도尹善道(1587~1671) : 호는 고산孤山. 조선 중기의 문신이고 시조 작가로서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며,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 생활을 했다.
  131. 131)선사의 스승인~놓고 말했다 : 이 대목은 『枕肱集』의 「行狀」에 의거하여 보완 해석한 것이다.
  132. 132)대지팡이뿐이라오(竹枝烏) : ‘죽지오竹枝烏’를 오죽烏竹으로 만든 지팡이라는 의미 이외에 ‘대나무 지팡이(竹枝)뿐이라오(烏)’라는 시구로 활용한 재치를 보인 글이다.
  133. 133)당시 상국인 장유張維가 희고 상인希古上人으로 하여금 북한산에 절을 짓게 하고 특별히 취미 수초 선사를 강주로 청하였다. 그러나 선사가 이를 굳이 사양하고 춘파春坡를 천거하니, 선사를 더욱 존경하게 된 장유가 자거염주를 선물로 보낸 일화를 말한다.
  134. 134)영외嶺外의 선학禪學 : 선학은 선의 종지宗旨·수행·교화 등을 의미한다. 영嶺은 대유령大庾嶺으로 강서성 임안부 대유현의 남쪽에 있는, 강서와 광동의 경계가 되는 산인데, 예로부터 그 북쪽을 영북이라 하고 남쪽을 영남이라 하였다. 선종사에서 영남은 조계 혜능으로부터 비롯된 남종선을 상징하고, 영외는 현재 자신이 몸담고 있는 문중 내지 종파 이외의 가르침을 나타낸다. 지금 여기에서 영외는 철령鐵嶺 이북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중국을 가리킨다.
  135. 135)취암 해란翠嵓海瀾은 앞에서 이미 소개하였다.(87. 조계종사 해란 선사전) 내용은 없다.
  136. 136)설파 민기雪波敏機는 앞에서 이미 소개하였다.(88. 조계종사 민기 선사전) 내용은 없다.
  137. 137)이때 표착해 온 중국 배에는 가흥嘉興 대장경판 불서들이 실려 있었고 백암 성총이 징관澄觀의 『華嚴經䟽抄』를 비롯한 190권의 책을 대대적으로 판각하여 유통시켰다.
  138. 138)이때 건립된 것은 송광사의 역사 전통을 강조하고 보조 지눌普照知訥 유풍의 계승을 천명한 「松廣寺嗣院事蹟碑」이다.
  139. 139)이 대목은 연대로 보면 선사가 출가했던 전후 대목으로 옮겨야 한다.
  140. 140)능가사사적비楞伽寺事蹟碑 : 흥양興陽 팔영산八影山에 있다. 능가사 승려 투명透明이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오수채吳遂采에게 청문하여 숙종 16년(1690)에 능가사사적비가 건립되었는데, 그 비碑의 음기陰記를 고흥 출신 승려인 영해 약탄影海若坦이 지은 사실을 가리킨다.
  141. 141)이 대목은 연대순으로 간주하면 이하 대목에 위치해야 한다.
  142. 142)난亂이 일어나 : 영조 4년(1728) 4월 3일 소론과 남인이 일으킨 무신란戊申亂을 가리킨다. 경기·충청도의 이인좌李麟佐, 경남의 정희량鄭希亮과 조성좌曺聖佐, 호남의 박필현朴弼顯, 평안도의 이사성李思成, 함경도의 권익관權益寬, 중앙의 남태징南泰徵 등이 주동하여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새로운 임금으로 추대하고 일으킨 반란이다.
  143. 143)복제服制 : 복제는 가족이나 친척이 사망하였을 때 혈연의 친소親疎에 따라 일정 기간을 근신하고 애도를 표하는 제도를 말한다.
  144. 144)손이 트지~않는 것 : 송宋나라 사람 중에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을 잘 만드는 사람이 있어 대대로 세탁업을 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백금百金을 주고 그 약방문藥方文을 사서는 오왕吳王을 찾아가서 유세를 하여 마침내 오나라의 장군이 되어 월越나라와 수전을 벌여서 월나라를 크게 격파함으로써 오왕에게 봉토를 하사받았다. 약방문은 한가지이지만 서로 쓰는 법칙이 달랐기 때문에 한 사람은 이것을 가지고 봉토를 하사받았고, 한 사람은 고작 세탁업을 면하는 데에 그쳤다는 데서 온 말이다.(『莊子』 「逍遙遊」)
  145. 145)의기투합(塤箎相和) : 훈호상화塤箎相和는 형이 질 나팔(塤)을 불면 아우가 저(箎)를 불어 서로 화답하는 것을 가리킨다.
  146. 146)구준衢樽 : 사람마다 실컷 마시도록 대로大路에 놓아둔 술동이라는 뜻으로 임금의 어진 정사를 비유할 때 쓰는 말인데, 여기서는 오대종장五大宗匠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147. 147)무외無畏 : 두려움이 없고 흔들림 없는 자신감을 말한다. 불보살의 덕의 하나로 설법에 있어서 네 가지 흔들림 없는 자신自信을 사무외四無畏라 한다. 어떤 일이든 두려움 없이 자신감을 가지고 안심하고 용감하게 법을 설하는 것이다.
  148. 148)부휴 선수로부터 제7세 : 두월 우홍의 법계는 다음과 같다. 부휴 선수浮休善修―벽암 각성碧岩覺性―취미 수초翠微守初―백암 성총栢岩性聰―우계 준익友溪雋益―화봉 회변華峯懷卞―두월 우홍
  149. 149)태고 보우로부터 제13세 : 그 법계는 다음과 같다. 태고太古―환암幻菴―구곡龜谷―벽계碧溪―벽송碧松―부용芙蓉―부휴浮休―벽암碧岩―취미翠微―백암栢岩―우계友溪―화봉華峯―두월.
  150. 150)종풍을 확립한 것은 마치 보리달마가 중국에 최상승의 선법을 전승하여 중국 선종의 효시가 되었던 것을 가리키고, 보시바라밀에 힘쓴 것은 마치 보현보살이 10원願을 통하여 중생제도에 힘썼던 것을 가리킨다.
  151. 151)덕산 선감德山宣鑑(782~865) : 용담 숭신龍潭崇信(?~?)의 제자이자, 설봉 의존雪峯義存(822~908)의 스승이다. 선법을 만나고서 교학을 초월한다는 뜻에서 그동안 자신이 의거했던 『金剛經』 주석서를 불태웠다 한다.
  152. 152)자백 진가紫栢眞可(1543~1603) : 명대의 4대 고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속성은 심沈씨이고 자는 달관達觀이며 호는 자백으로 오강吳江(江蘇省) 출생이다. 20세 때 출가하여 화엄종華嚴宗의 변융辯融을 사사하고 화엄학에 달통하였다. 또한 염불과 선을 같이 닦을 것을 주창하여 선정일치를 내세웠으며, 선의 중흥에도 힘쓰고 염불을 권하기도 하였다.
  153. 153)묵암 최눌默庵㝡訥은 이미 앞에서 소개하였다.(244. 조계종사 묵암 선사전)
  154. 154)응암 낭윤應庵朗允은 이미 앞에서 소개하였다.(245. 조계종사 응암 선사전)
  155. 155)원시요종原始要終 : 사물이나 일이 발전되어 가는 기원과 결과를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156. 156)단점壇坫 : 본래는 제후가 조령을 내리거나 맹약을 맺는 장소를 의미하는데, 여기에서는 능가楞伽·만경萬景·태안泰安·봉서鳳瑞 등의 사찰을 중심으로 널리 설법하고 전법했던 장소(法壇)를 가리킨다.
  157. 157)68세 병술년(1826) : 66세라면 갑신년 1824년이어야 하고, 병술년이라면 68세 1826년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는 갑자년의 기록에 따라서 68세로 간주한다.
  158. 158)창암蒼巖 : 조선의 명필인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1770~1847)을 가리킨다.
  159. 159)혜철 국사慧徹國師(785~861) : 신라 말기에 전남 곡성의 동리산 태안사를 중심으로 동리산문桐裏山門을 개창한 개산조를 가리킨다.
  160. 160)백파白坡 : 백파 긍선白坡亘璇(1767~1852). 본관은 전주이며, 성은 이李씨이다. 12세에 고창 선운사禪雲寺의 시헌 장로詩憲長老에게서 승려가 되고, 용문암龍門庵을 거쳐 영원암靈源庵에 이르러 상언尙彦에게 서래西來의 종지를 배우고, 구암사龜岩寺에서 회정懷情의 법통을 잇고 백양산 운문암雲門庵에서 개당開堂하였다.
  161. 161)팔을 구부려~깨지도 않았네 : 침명 한성枕溟翰惺이라는 자신의 이름에 대하여 각각 제1구에서는 침枕과 명溟을 드러내고 제2구에서는 한翰과 성惺을 드러내어 시로 읊었다.
  162. 162)보봉寶峯의 조실祖室에 향을 살랐다 : 보봉의 조실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163. 163)유인游刃 : 『莊子』 「養生主」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선사의 탁월한 능력을 의미한다.
  164. 164)이태왕李太王 : 순종 재위 때에 태상왕인 고종을 이르던 말이다.
  165. 165)구오驅烏의 나이 : 3종의 사미 가운데 하나이다. 사미沙彌(ⓢ Sramanera)는 20세 미만의 남자 출가자로서 비구가 되기 이전의 사람을 말하며, 식자息子·식악息惡·행자行慈·근책남勤策男 등으로 번역한다. 구오사미驅烏沙彌는 7~13세의 나이에 해당하는데 음식에 덤벼드는 까마귀를 쫓는 역할을 한다는 뜻이고, 응법사미應法沙彌는 제대로 수행하는 14~19세의 사미이며, 명자사미名子沙彌는 아직 구족계를 받지 못한 사미를 가리킨다.
  166. 166)지귀指歸 :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경지를 말하는데, 깨달음을 가리킨다.
  167. 167)불구심해不求甚解 : 책을 읽어 대강의 큰 뜻을 깨달을 뿐, 지나치게 깊이 자세한 것을 파고들어 세세하게 이해하려 들지 않음을 의미한다.
  168. 168)『東師列傳』에는 생몰 연대가 순조 22년(1822)~고종 17년(1880)으로 기록되어 있다.
  169. 169)익운益運 : 경붕 익운景鵬益運. 함명 태선涵溟太先―경붕 익운―경운 원기擎雲元奇―금봉 기림錦峯基林으로 이어지는 선암사의 4대 강맥을 형성하였다.
  170. 170)왕상王祥이 얼음을~구한 것 : 『四字小學』에 나오는 “雪裡求筍。 孟宗之孝。 叩氷得鯉。 王祥之孝。”의 구절이다.
  171. 171)세수는 79세이다 : 생몰 연대가 1833~1912년이므로 세수가 80세이어야 하지만 여기에서는 세수를 79세라 기록하였다. 1900년 이후는 일반적으로 양력을 기준으로 세수를 계산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사의 입적 날짜를 음력으로 환산하면 1911년에 해당하므로 실제로는 79세에 해당한다.
  172. 172)추를 잡고 불자를 세웠다 : 제자를 지도하고 제접하는 행위인 염추수불拈鎚竪拂을 가리킨다.
  173. 173)타니대수拖泥帶水 : 진흙 속에 발을 담그고 물을 뒤집어쓴다는 뜻으로, 중생과 더불어 살아가는 보살행을 가리킨다.
  174. 174)조백棗栢 : 이통현李通玄(635~730) 장자가 719년(당 현종 7)에 『新華嚴經』을 가지고 태원太原의 우현盂縣에서 고산노高山奴 집의 옆방에 들어가서 3년에 걸쳐 『新華嚴經論』을 저술할 때, 마당에 나오지도 않고 매일 대추 열 개와 손가락만 한 잣나무 잎을 갈아서 만든 떡 하나씩을 먹었기 때문에 그를 가리켜 조백대사棗栢大士라 불렀다고 한다.
  175. 175)진묵震默 : 진묵 대사震默大師 일옥一玉(1562~1633). 1568년(선조 1)에 완주 봉서사鳳捿寺에서 출가하였고 신이한 행적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일정한 주처 없이 천하를 유람하였다. 변산의 월명암月明菴, 전주의 원등사遠燈寺와 대원사大元寺 등에 주석하였다.
  176. 176)오연五緣 : 수행을 여법하게 진행하기 위한 다섯 가지 외연外緣으로 한거정처閒居靜處, 지계청정持戒淸淨, 의식구족衣食具足, 득선지식得善知識, 식제연무息諸緣務 등이다.
  177. 177)설변薛卞 : 칼 감정가인 설촉薛燭과 미옥美玉을 찾아낸 변화卞和를 가리키는데, 감식안이 있고 훌륭한 인재를 발굴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178. 178)부휴 선수浮休善修의 제12세손이라는 점은 의문이다. 왜냐하면 그 법계는 부휴 선수―벽암 각성碧岩覺性―취미 수초翠微守初―백암 성총栢岩性聰―우계 준익友溪雋益―화봉 회변華峯懷卞―두월 우홍斗月禹洪―원화 덕주圓華德柱로 계승되었으므로 제8세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79. 179)겁파刼波 : ⓢ kalpa의 음역으로 겁파劫波·겁파劫簸·갈랍파羯臘波라고도 한다. 장시長時 혹은 대시大時라 의역하기도 한다.
  180. 180)유인游刃 : 『莊子』 「養生主」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선사의 탁월한 능력을 의미한다.
  181. 181)육시六時 : 하루를 신조·일중·일몰·초야·중야·후야의 여섯으로 나눈 시간.
  182. 182)엄제嚴題 : 예전에 백성이 낸 소장이나 원서 따위에 쓰던 관청의 엄한 판결이나 지령이다.
  183. 183)오연五緣 : 주 176 참조.
  184. 184)동복군同福郡 군면郡面 : 원문에는 ‘同福郡’ 다음에 같은 글자를 표시하는 기호 하나가 있어 『韓國佛敎全書』에서 ‘郡’으로 기입했으나, 혹 두 글자(동복)를 반복하라는 의미로 쓰일 가능성도 있다. 이 경우 동복면이 된다.
  185. 185)동서東序 : 서서西序에 상응하는 건물이다. 선사禪寺에서 대중의 일을 보살피는 일을 맡은 소임들로서, 도사都寺·감사監寺·유나維那·부사副寺·전좌典座·직세直歲의 6지사知事를 말한다. 이들은 법당을 기준으로 동쪽에 위치하므로 동서라 말한다.
  186. 186)옥룡玉龍 : 신라 시대 풍수에 뛰어났던 도선 국사道詵國師의 별호.
  187. 187)백운白雲 : 고려 말기 선승으로 무심선無心禪을 실천했던 백운 경한白雲景閑(1301~ 1382)을 가리킨다.
  188. 188)유인游刃 : 『莊子』 「養生主」에 나오는 포정해우庖丁解牛의 이야기를 가리키는데, 여기에서는 선사의 탁월한 능력을 의미한다.
  189. 189)18년 동안 : 1891년에 개설되어 1908년에 폐지되기까지의 기간이다.
  190. 190)공석불난孔席不煖 : 공자의 경우처럼 교화하느라고 편안히 앉아 있을 틈이 없이 바쁘다는 말.
  191. 191)옥석玉石이 모두 불타 버렸는데 :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재해를 입은 것을 가리킨다.
  192. 192)공자의 좌석이~나무랄 정도였다 : “공자가 앉았던 자리는 따뜻해질 틈이 없고, 묵자가 묵었던 집의 아궁이는 검댕 낄 틈이 없다.(孔席不暇暖。 而墨突不得黔。)”라는 한유韓愈의 「爭臣論」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선사가 강의로 분주한 나날을 보낸 것을 찬탄한 것이다.
  193. 193)방옹放翁 : 남송의 시인 육유陸遊(1125~1209)를 가리킨다.
  194. 194)먼 후손(雲仍) : 아래로 8대손인 운손雲孫과 7대손인 잉손仍孫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195. 195)명패를 뒤집고 설법을 하였다(撥牌輪說) : 법회 내지 논강하는 자리에서 특별한 논지 내지 설법에 대항하여 그 의견을 물리치고 새로운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가리킨다.
  196. 196)옥천玉泉 : 옥천사玉泉寺 곧 쌍계사雙磎寺이다. 일찍이 신라 말기에 당나라 창주 신감滄州神鑑의 선법을 계승했던 진감 국사眞鑑國師 혜소慧昭가 옥천사 곧 쌍계사에 머물면서 범패를 만들고 보급했던 것을 가리킨다.
  197. 197)이 대목은 연대순으로 보면 아래의 병진년 뒤에 위치해야 한다.
  198. 198)화천火喘 : 화기가 폐와 위로 떠오르며 나타나는 지속적인 기침 증세. 목이 타는 듯한 느낌을 수반한다.
  199. 199)이 대목은 연대순으로 보아 신해년에 해당하므로 위의 임자년 앞에 위치해야 한다.
  200. 200)이 대목은 연대순으로 보면 구족계를 받은 4월 8일의 앞에 위치해야 한다.
  201. 201)철집綴集 : 일정한 방침 아래 여러 가지 재료를 모아 신문이나 잡지나 책 따위를 만드는 일을 가리킨다.
  1. 1)底本頭註曰「林疑廣」{編}。
  2. 1)「龜」下疑脫「谷」{編}。
  3. 2)「臨」下疑脫「濟」{編}。
  4. 1)「▼(丘+鳥)」底本頭註曰「疑鴻」{編}。
  5. 1)「縉」疑「紳」{編}。
  6. 1)「袈」下疑脫「裟」{編}。
  7. 2)「縷」疑「數」{編}。
  8. 1)「匠宗」疑「宗匠」{編}。
  9. 1)「帝」疑「諦」{編}。
  10. 2)「三」下疑脫「年」{編}。
  11. 1)「知」疑「志」{編}。
  12. 1)「陛」疑「階」{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