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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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_0813_b_01L대불정여래밀인수증요의제보살만행수능엄경 제4권
013_0813_b_01L大佛頂如來密因修證了義諸菩薩萬行首楞嚴經卷第四
『중인도나란타대도량경(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이라고도 한다. 관정부(灌頂部)에서 따로 추려내었다.
013_0813_b_02L一名中印度那蘭陁大道場經於灌頂部錄出別行


반랄밀제 한역
현성주 번역
013_0813_b_03L 唐天竺沙門般剌蜜帝譯



이때 대중 속에 있던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옷을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어 합장하고 공손히 부처님께 아뢰었다.
“위덕(威德)이 뛰어나신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중생들을 위하여 제일의제(第一義諦)를 훌륭하게 설해 주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언제나 저를 설법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고 추천하셨으나, 이제 여래의 미묘한 설법을 들으니, 마치 귀머거리가 백보(百步) 밖에서 모기소리를 듣는 듯하여 본래 볼 수도 없는데 어찌 더욱이 들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비록 저에게 밝게 설하시어 미혹을 없애주셨으나, 지금도 아직 이 뜻이 완연하여 의혹이 없는 자리[究竟無疑惑地]를 자세히 밝히지 못했습니다.
013_0813_b_04L爾時富樓那彌多羅尼子在大衆中卽從座起偏袒右肩右膝著地合掌恭敬而白佛言大威德世尊善爲衆生敷演如來第一義諦世尊常推說法人中我爲第一今聞如來微妙法猶如聾人逾百步外聆於蚊蚋所不見何況得聞佛雖宣明令我除今猶未詳斯義究竟無疑惑地
세존이시여. 아난과 같은 부류는 비록 깨달았다고 하나, 익혀 쌓인 번뇌[習漏]를 아직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이 법회 가운데 번뇌가 없는 경계에 오른 저희들도 비록 온갖 번뇌를 다 없앴다고 하나, 이제 여래께서 설하신 법을 들으니, 오히려 의심과 후회만 더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상의 일체 6근과 6진과 5음(陰)과 12처(處)와 18계(界) 등이 다 여래장(如來藏)으로서 본래 그대로 청정하다면, 어째서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의 온갖 유위상(有爲相)이 생겨서 차례로 옮기고 흐르며 끝나고 또 시작하는 것입니까.
또 여래께서는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은 본성(本性)이 걸림 없이 융통하여 법계에 두루 가득 차서 고요히 상주(常住)한다고 하셨습니다.
013_0813_b_12L如阿難輩雖則開悟習漏未除等會中登無漏者雖盡諸漏今聞如來所說法音尚紆疑悔世尊若復世閒一切根界等皆如來藏淸淨本然云何忽生山河大地諸有爲次第遷流終而復始又如來說地風本性圓融周遍法界湛然常
013_0813_c_01L세존이시여, 만일 흙의 성질이 두루 가득 찼다면 어떻게 물을 용납하겠으며, 또 물의 성질이 두루 가득 찼다면 불의 성질은 생기지 않을 텐데, 또 어떻게 물과 불의 두 성질이 허공에 함께 두루 원만하여 서로 빼앗아 쫓아내지 않는 이치를 밝히겠습니까.
세존이시여. 흙은 막히고 걸리는 성질이고 허공은 비어 통하는 성질인데 어떻게 두 성질이 함께 법계에 두루 가득 찰 수 있습니까.저는 이 뜻이 돌아간 곳을 알지 못하오니, 부디 여래께서는 큰사랑을 내리시어 저의 구름처럼 덮인 미혹을 거둬주옵소서.”
이 말을 마치자 대중과 함께 5체(體)를 땅에 던져서 존경을 다하여 더 없는 여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간절하게 기다렸다.
013_0813_b_20L世尊若地性遍云何容水水性周遍火則不生復云何明水火二性俱遍虛空不相𣣋滅世尊地性障㝵性虛通云何二俱周遍法界而我不知是義攸往唯願如來宣流大慈我迷雲及諸大衆作是語已五體投欽渴如來無上慈誨
이때 세존께서 부루나(富樓那)와 법회 대중 가운데 번뇌를 다하고 배움을 초월한 아라한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래가 오늘 널리 이 회상의 대중을 위하여 승의제(勝義諦) 가운데 진승의(眞勝義)의 본질을 밝혀서, 이제 너희들 모임 중에 정성성문(定性聲聞)과 이공(二空)을 얻지 못한 이들과 보살승[上乘]으로 돌아선 아라한들이 모두 다 일승의 적멸한 도량[一乘寂滅場地]인 진실한 아란야(阿蘭若)의 바른 수행 처를 얻게 하리니,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마땅히 너희들을 위하여 설하리라.”
부루나 등은 존경을 다하여 말없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자 하였다.
013_0813_c_04L爾時世尊告富樓那及諸會中漏盡無學諸阿羅漢如來今日普爲此會宣勝義中眞勝義性令汝會中定性聲聞及諸一切未得二空迴向上乘阿羅漢等皆獲一乘寂滅場地眞阿練若正修行處汝今諦聽當爲汝說富樓那等欽佛法音默然承聽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富樓那)여, 네가 말한 바와 같이 본래 그대로 청정하다면 어째서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가 생기겠느냐. 너는 항상 이 여래로부터 ‘성품의 깨달음은 묘하고 밝으며, 본래의 깨달음은 밝고 묘하다’는 말을 들어오지 않았느냐.”
013_0813_c_11L佛言富樓那如汝所言淸淨本然云何忽生山河大地汝常不聞如來宣說性覺妙明本覺明妙
부루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언제나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 뜻을 들어왔습니다.”
013_0813_c_14L富樓那言世尊我常聞佛宣說斯義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깨달음이다 밝음이다라고 말한 것은 성품 자체의 밝은 상태를 깨달음이라고 하느냐. 깨달음이 밝지 않으니 밝혀야할 깨달음이라고 하느냐.”
013_0813_c_15L佛言稱覺明爲復性明稱名爲覺爲覺不明稱爲明覺
부루나가 말했다.
“만일 밝지 않음을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밝힐 대상이 없겠습니다.”
013_0813_c_17L富樓那言若此不明名爲覺者則無無明
013_0814_a_01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밝힐 대상[所明]이 없다면 밝힐 깨달음이 없다고 했는데, 밝힐 대상[所]이 있으면 깨달음이 아니며, 밝힐 대상이 없으면 밝음이 아니니, 밝음이 없으면 또 깨달음의 고요하고 밝은 성품도 아니니라.
성품 자체의 깨달음은 본래 분명히 밝은 자리다. 그럼에도 너는 여기서 허망하게 밝혀야할 깨달음을 생각한 것이다. 깨달음은 밝힐 대상이 아님에도 밝힘으로 인하여 밝힐 대상[所]을 세우고, 밝힐 대상[所]이 이미 허망하게 세워지니, 너의 허망한 능력[妄能]이 생겨서, 같음도 다름도 없는 가운데 불길처럼 성하게 다른 것이 이뤄졌느니라.
저 다른 것을 다르다 하여, 다른 것을 근거로 같은 것을 세워서, 같음과 다름을 환하게 밝히고, 이를 근거로 다시 같음도 없고 다름도 없는 것을 세웠느니라. 이와 같이 어지럽게 흔들리면서 서로 대립하여 수고로움이 생기고, 수고로움이 오래되어 티끌[塵]을 발하여 자체 모양이 혼탁해지니,이로 인하여 진로번뇌(塵勞煩惱)를 이끌어냈느니라.
일어나서는 세계가 되고, 고요해서는 허공이 되니, 허공은 같은 것이고, 세계는 다른 것이며, 저 같음과 다름이 없는 것이 실제의 인연으로 변화하는 법[眞有爲法]이니라.
013_0813_c_18L佛言若無所明則無明覺有所非覺無所非明無明又非覺湛明性性覺必明妄爲明覺非所明因明立所所旣妄立生汝妄無同異中熾然成異異彼所異因異立同同異發明因此復立無同無如是擾亂相待生勞勞久發塵自相渾濁由是引起塵勞煩惱起爲世靜成虛空虛空爲同世界爲異無同異眞有爲法
깨달음의 허망한 밝음과 허공의 캄캄한 어둠이 번갈아 바뀌며 흔들리기 때문에 풍륜(風輪) 있어서 세계를 붙드느니라.
허공으로 인하여 흔들림이 생기고 밝힘을 굳혀서 막힘을 이루니, 저 금보(金寶)는 밝힌 깨달음이 굳혀진 것이므로, 금륜(金輪)이 있어서 국토를 보전하느니라.
깨달음을 굳혀서 보배가 되고 밝힘이 흔들려 바람이 생기니, 바람과 금이 서로 마찰하므로 불빛[火光]이 있어서 변화하는 성질이 되느니라.
보배의 밝음이 물기를 내고 불빛이 위에서 쪼여 삶으니 수륜(水輪) 있어서 시방경계를 둘러싸느니라.
불의 오름과 물의 내림이 번갈아 발하여 굳히니, 젖은 편은 큰 바다가 되고 마른 편은 육지와 섬이 되느니라. 이치가 그러기 때문에 저 큰 바다에서는 항상 불빛이 일어나고, 저 육지와 섬에서는 항상 강이 흐르느니라.
물의 세력이 불보다 약하면 맺혀서 높은 산이 되느니라. 그러므로 산 돌을 치면 불꽃이 일어나고 녹이면 물이 나오는 것이다.
흙의 세력이 물보다 약하면 빼어나서 풀과 나무가 되느니라. 그러므로 숲이 불에 타면 흙이 되고 쥐어짜면 물이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허망함이 얽히고 발생해서 서로 번갈아 종자가 되니, 이러한 인연으로 세계가 끊임없이 상속(相續)하느니라.
013_0814_a_04L覺明空昧相待成故有風輪執持世界因空生搖明立㝵彼金寶者明覺立堅故有金輪保持國土堅覺寶成搖明風出金相摩故有火光爲變化性寶明生火光上蒸故有水輪含十方界騰水降交發立堅濕爲巨海乾爲洲以是義故彼大海中火光常起洲潬中江河常注水勢劣火結爲高是故山石擊則成炎融則成水勢劣水抽爲草木是故林藪遇燒成因絞成水交妄發生遞相爲種是因緣世界相續
013_0814_b_01L또 부루나야, 밝힘을 굳힌 허망함[明妄]은 다른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허망한 밝힘이 허물이다. 대상의 허망[所妄]이 이미 세워지고 나면 진실한 밝은 이치가 뚫고 지나가지 못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듣는 작용은 소리를 떠나지 못하고 보는 작용은 물체를 벗어나지 못하여, 모양[色]과 냄새[香]와 촉감[觸] 등 여섯 허망한 경계를 이루느니라. 이로 인하여 보고 느끼고 맡고 아는 작용이 따로 열리어 같은 업끼리 서로 얽히기도 하고, 합하여 생기기도 하고, 떠나서 변화를 이루기도 하느니라.
보는 작용이 밝아서 색(色)이 환하게 나타나면, 밝은 경계를 환히 보면서 생각을 형성하여, 소견이 다르면 미워하고 생각이 같으면 사랑하면서, 애정을 흘려보내 종자를 이루고 생각을 거둬들여 태(胎)에 드느니라.
이렇게 서로 어울려 생길 때에 같은 업을 빨아들이기 때문에 인연이 있어서 갈라람(羯囉藍)과 알포담(遏蒱曇) 등이 생기느니라.
태로 나고 알로 나고 습기로 나고 변화로 나는 중생[胎卵濕化]은 그 적응할 곳을 따르는데, 알로 나는 중생은 오직 생각[想]만으로 태어나고,태로 나는 중생은 욕정(欲情)으로 존재하며, 습기로 나는 중생은 합해서 감응하고, 변화로 나는 중생은 떠나서 상응(相應)하느니라.
이렇게 번갈아 서로 변하고 바뀌면서, 업으로 받은 과보를 따라 날기도 하고 잠기기도 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중생이 끊임없이 상속하느니라.
013_0814_a_16L復次富樓那明妄非他覺明爲咎妄旣立明理不踰以是因緣聽不出聲見不超色色香味觸六妄成就是分開見覺聞知同業相纏合離成見明色發明見想成異見成憎同想成愛流愛爲種納想爲胎交遘發生吸引同業故有因緣生羯囉藍蒱曇等胎卵濕化隨其所應卵唯想胎因情有濕以合感化以離應想合離更相變易所有受業逐其飛以是因緣衆生相續
부루나야, 생각과 애정이 함께 얽혀서 사랑을 벗어나지 못하면, 세상의 부모와 자손들이 서로 태어남이 끊이지 않는다. 이러 일들은 애정의 탐욕[欲貪]이 근본이니라.
애정을 탐내어 함께 몸을 불리면서 탐욕을 그치지 못하면, 온갖 세상의 알로 나고 변화하여 나고 습기로 나고 태로 나는 중생들이 힘의 강하고 약함을 따라서 번갈아 서로 잡아먹게 된다. 이런 일들은 살생의 탐욕이 근본이니라.
사람이 양을 잡아먹으면 양은 죽어서 사람이 되고 사람은 죽어서 양이 되니, 이렇게 온갖 중생들[十生之類]이 죽고 또 죽고 나고 또 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서로 만나 서로 잡아먹으며 나쁜 업을 짓고 함께 태어나기를 미래가 다하도록 쉬지 않는다. 이러 일들은 투도(偸盜)의 탐욕이 근본이니라.
013_0814_b_04L富樓那想愛同結愛不能離則諸世閒父母子孫相生不斷是等則以欲貪爲本貪愛同滋貪不能止則諸世閒卵化濕胎隨力强弱遞相吞食等則以殺貪爲本以人食羊羊死爲人死爲羊如是乃至十生之類死生生互來相噉惡業俱生窮未來是等則以盜貪爲本
너는 나에게 생명의 빚을 졌고 나는 너에게 진 빚을 갚으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생사(生死)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며, 너는 내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모습을 좋아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번뇌에 얽히는 것이니라. 이것은 오직 살생(殺生)과 투도(偸盜)와 음욕(婬欲)의 세 가지가 근본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업과(業果)가 끊임없이 상속하느니라.
부루나야, 이러한 세 가지 뒤바뀐 상속(相續)은, 다 깨달음의 밝음[覺明; 性覺妙明, 本覺妙明]으로 명료하게 아는 성품[明了知性; 妄明]이 그 아는 작용으로 인하여 모양을 일으키니, 허망한 보는 작용으로 생긴 산과 강과 대지와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諸有爲相]이 차례로 옮기고 흐르면서, 이 허망을 따라 끝나고 또 시작하는 것이니라.”
013_0814_b_12L汝負我命還債汝以是因緣經百千劫常在生汝愛我心我憐汝色以是因緣經百千劫常在纏縛唯殺盜婬三爲根以是因緣業果相續富樓那如是三種顚倒相續皆是覺明明了知性因了發相從妄見生山河大地諸有爲相次第遷流因此虛妄終而復始
부루나가 말했다.
“만일 이 묘각(妙覺)의 본래 묘한 깨달음의 밝음이 여래의 마음과 더불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가운데, 까닭 없이[無狀] 홀연히 산과 강과 대지와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이 생겼다면, 여래께서는 이제 묘하고 공하여 밝은 깨달음을 얻으셨으니, 산과 강과 대지와 인연변화[有爲]의 익혀 쌓인 번뇌[習漏]는 언제 또 생기겠습니까.”
013_0814_b_19L富樓那言若此妙覺本妙覺明與如來心不增不減無狀忽生山河大地諸有爲相如來今得妙空明覺山河大地有爲習漏何當復生
013_0814_c_01L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여 어떤 미혹한 사람[迷人]이 어느 한 마을에서 남쪽을 북쪽으로 헷갈렸다면,이 헷갈림은 헷갈림 때문에 있겠느냐. 깨달음으로 인하여 나왔겠느냐.”
013_0814_b_23L佛告富樓那譬如迷人於一聚落惑南爲北此迷爲復因迷而有因悟所
부루나가 말했다.
“이렇게 미혹한 사람은 헷갈림 때문도 아니고, 깨달음 때문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헷갈림은 본래 근본이 없는데, 어찌 헷갈림 때문에 있겠으며, 깨달음에는 헷갈림이 생기지 않는데, 어찌 깨달음에서 나오겠습니까.”
013_0814_c_03L富樓那言如是迷人亦不因迷不因悟何以故迷本無根云何因迷悟非生迷云何因悟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미혹한 사람이 바로 헷갈려 있을 때, 문득 깨달은 사람이 가리켜줘서 깨닫게 한다면, 부루나여,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비록 헷갈렸다고 하나 이 마을에서 다시 헷갈리겠느냐.”
013_0814_c_05L佛言彼之迷人正在迷時倏有悟人指示令悟富樓於意云何此人縱迷於此聚落更生迷不
부루나가 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不也世尊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부루나여, 시방 여래(十方如來)도 이와 마찬가지다. 미혹은 근본이 없고 성품이 철저히 공하여 옛날부터 본래 미혹한 일이 없느니라. 잠시 본래의 깨달음을 미혹한 듯하나 미혹을 깨달아서 미혹이 없어지면, 깨달음에서는 미혹이 생기지 않느니라.
또 사람이 눈병에 걸렸으면 허공에서 헛꽃을 보겠으나 눈병이 나으면 꽃이 허공에서 사라진 것과 같으니라.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저 허공 꽃이 사라진 빈자리에서 꽃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린다면, 너는 이 사람을 생각해보아라. 어리석겠느냐. 슬기롭겠느냐.”
013_0814_c_08L富樓那十方如來亦復如是此迷無本性畢竟空昔本無迷似有迷覺覺迷迷滅覺不生迷亦如瞖人見空中花瞖病若除花於空滅忽有愚人於彼空花所滅空地待花更生汝觀是人爲愚爲慧
부루나가 말했다.
“원래 꽃이 없는 허공에서 허망하게 생기고 사라짐을 보고, 꽃이 허공에서 사라졌다고 본 자체가 이미 뒤바뀐 일인데, 여기에 다시 꽃이 나오도록 억지를 쓴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미친 짓입니다. 어찌 이런 미친 사람을 두고 어리석다거나 슬기롭다라고 하겠습니까.”
013_0814_c_13L富樓那言空元無花妄見生滅見花滅空已是顚倒勅令更出斯實狂癡云何更名如是狂人爲愚爲慧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알고 있다면 어째서 제불여래(諸佛如來)의 묘한 깨달음이 밝고 공한 자리에서 산과 강과 대지가 언제 다시 나오느냐고 물었느냐.
또 마치 금광(金鑛) 안에서 돌과 섞여 있는 정밀한 금이 한 번 순금이 되고 나면 다시 돌과 섞이지 않는 것과 같고, 또 나무가 타서 재가 되면 다시 나무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제불여래(諸佛如來)의 보리열반(菩提涅槃)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013_0814_c_16L佛言如汝所解云何問言諸佛如來妙覺明空何當更出山河大地又如金鑛雜於精金其金一純更不成雜如木成灰不重爲木諸佛如來菩提涅槃亦復如是
013_0815_a_01L부루나여, 너는 ‘어떻게 흙과 물과 불과 바람의 본성(本性)이 걸림 없이 융통하여 법계에 두루 원만한가’를 물었고, ‘물과 불의 성질이 어째서 서로 밀어내어 없애지 않는가’를 의심하였으며, 또 ‘허공과 모든 대지가 함께 법계에 가득 차려면 마땅히 서로 받아들일 수 없지 않겠느냐’고 따져 물었다.부루나여, 비유하면 허공의 체는 여러 모양이 아니면서 저 온갖 모양의 활동을 막지 않는 것과 같다. 그 까닭을 말하리라. 저 넓은 허공은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둡고, 바람이 흔들면 움직이고, 맑게 개면 깨끗하고, 기가 엉기면 흐리고, 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고, 물이 맑으면 빛나는데,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러한 다른 방면의 온갖 인연작용의 모양[諸有爲相]은 저들 자체에서 생기겠느냐. 아니면 허공 자체에 있겠느냐.
013_0814_c_21L富樓那又汝問言地水火風本性圓融周遍法界疑水火性不相𣣋滅徵虛空及諸大地俱遍法界不合相富樓那譬如虛空體非群相而不拒彼諸相發揮所以者何富樓那太虛空日照則明雲屯則暗風搖則霽澄則淸氣凝則濁土積成霾澄成映於意云何如是殊方諸有爲爲因彼生爲復空有
만일 저들 자체의 원인으로 생긴다면, 부루나여, 해가 비칠 때는 이미 이 해가 밝은 것이니, 시방세계가 한가지로 햇빛이 되어야 하는데, 어째서 허공 가운데 둥근 해를 보는 것이냐. 만일 허공 자체가 밝은 것이라면, 당연히 허공 제 스스로 비춰야 하는데, 어째서 한 밤중에 구름이 끼었을 때는 빛을 내지 못하느냐.
013_0815_a_07L若彼所生樓那且日照時旣是日明十方世界同爲日色云何空中更見圓日若是空明空應自照云何中宵雲霧之時不生光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밝음은 해도 아니고 허공도 아니며, 허공과 해와 다르지도 않느니라.
모양으로 관찰해도 원래 허망하여 지적해서 말할 수 없다. 마치 허공 꽃에서 허공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는 격이니, 어찌 그 서로 밀어내 빼앗지 않는 뜻을 따지겠느냐.
성품으로 관찰해도 원래 진실하여 오직 묘한 깨달음의 밝음뿐이다.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처음부터 물도 불도 아닌데, 어찌 또 서로 용납하지 않는 뜻을 묻겠느냐. 진실하고 묘한 깨달음의 밝음도 이와 마찬가지로, 네가 공으로 밝히면 공이 나타나고,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각각 밝히면 각각 그대로 나타나며, 만일 함께 밝히면 그대로 함께 나타나느니라.함께 나타남이란 무엇이겠느냐.
013_0815_a_11L當知是明非日非空不異空日觀相元妄無可指陳猶邀空花結爲空菓云何詰其相𣣋滅義觀性元眞唯妙覺明妙覺明心先非水火云何復問不相容者眞妙覺明亦復如是汝以空明則有空現地水火風各各發明則各各現若俱發明則有俱現云何俱現
부루나여, 마치 어느 한 강물에 해의 그림자가 나타날 경우, 두 사람이 같이 물 속의 해 그림자를 보다가, 한 사람은 동쪽으로 가고 한 사람은 서쪽으로 가면, 강물의 해 그림자도 두 사람을 따라서 하나는 동쪽으로 가고 하나는 서쪽으로 가는 것과 같이 처음부터 일정한 기준이 없으니, 마땅히 ‘이 해는 하나인데 어째서 각기 따로 가는가. 각기 따로 간 해가 이미 둘인데 어째서 하나씩 나타나는가’라고 따지지 못하리라. 완연히 허망만 더할 뿐 증명할 근거가 없느니라.
013_0815_a_18L富樓那如一水中現於日影兩人同觀水中之日東西各行則各有日隨二人去一東一西無准的不應難言此日是一云何各各日旣雙云何現一宛轉虛妄可憑據
013_0815_b_01L부루나여, 너는 색(色)과 공(空)으로 여래장(如來藏)에서 서로 기울기도 하고 서로 빼앗기도 하니,여래장도 따라서 색과 공이 되어 법계에 두루 가득 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가운데 바람은 흔들리고 허공은 고요하며,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두우니, 중생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깨달음을 등져서 경계[塵]와 합하기 때문에 티끌 번뇌[塵勞]를 일으키니, 세상의 모양이 있는 것이니라.
나는 묘한 밝음의 멸하지도 않고 생기지도 않는 법으로 여래장과 합했으니, 여래장의 오직 묘한 깨달음의 밝음으로 원만하게 법계를 비출 뿐이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하나의 경계가 한량없는 경계가 되기도 하고, 한량없는 경계가 하나의 경계가 되기도 하며, 작은데서 큰 것을 나타내기도 하고, 큰데서 작은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도량에서 움직이지 않고 시방법계에 두루 원만하기도 하고, 몸이 시방의 끝없는 허공을 싸안기도 하며, 한 털끝에서 부처님의 세계[寶王刹]를 나타내기도 하고, 티끌 속에 앉아서 큰 법륜(法輪)을 굴리기도 하느니라. 이렇게 티끌번뇌를 멸하여 깨달음과 합했기 때문에, 진여(眞如)의 미묘한 깨달음의 밝은 성품을 일으키느니라.
013_0815_a_23L富樓那汝以色空相傾相奪於如來而如來藏隨爲色空周遍法界故於中風動空澄日明雲暗衆生迷悶背覺合塵故發塵勞有世閒相以妙明不滅不生合如來藏而如來藏唯妙覺明圓照法界是故於中一爲無量無量爲一小中現大大中現不動道場遍十方界身含十方無盡虛空於一毛端現寶王剎坐微塵裏轉大法輪滅塵合覺故發眞如妙覺明性
여래장의 본래 미묘하고 원만한 마음은 마음도 아니고 공도 아니며, 흙도 아니고 물도 아니며, 바람도 아니고 불도 아니며, 눈도 아니고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아니며, 색도 아니고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도 아니며, 눈의 인식 경계[眼識界]도 아니고 이와 같이 내지 뜻의 인식 경계[意識界]도 아니니라.
또 밝음[明]도 무명(無明)도 아니고 밝음과 무명이 다함도 아니며, 이와 같이 내지 늙음도 아니고 죽음도 아니고 늙음과 죽음이 다함도 아니니라.
또 고제(苦諦)도 아니고 집제(集諦)도 아니고 멸제(滅諦)도 아니고 도제(道諦)도 아니며, 지혜도 아니고 얻음[得]도 아니니라.
또 보시[檀那]도 아니고 지계[尸羅]도 아니며, 인욕[毗梨耶]도 아니고 정진[羼提]도 아니며, 선정[禪那]도 아니고 지혜[般剌若]도 아니며, 바라밀다(波羅蜜多)도 아니니라.
013_0815_b_11L而如來藏本妙圓心非心非非地非水非風非火非眼非耳鼻舌身意非色非聲香味觸法非眼識界如是乃至非意識界非明無明無明盡如是乃至非老非死非老死非苦非集非滅非道非智非得檀那非尸羅非毘梨耶非羼提非禪非鉢剌若非波羅蜜多
013_0815_c_01L이와 같이 내지 달달아갈(怛闥阿竭; 如來)도 아니며, 아라하(阿羅訶; 應供)와 삼야삼보(三耶三菩; 正徧知)도 아니고, 대열반(大涅槃)도 아니며, 상덕[常]도 아니고 낙덕[樂]도 아니며, 아덕[我]도 아니고 정덕[淨]도 아니니라.
이렇게 세간도 출세간도 모두 아니므로, 여래장의 원래 밝고 묘한 마음은 그대로 마음이고 그대로 공이며, 그대로 흙이고 그대로 물이며, 그대로 바람이고 그대로 불이며, 그대로 눈이고 그대로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이며, 그대로 색이고 그대로 소리와 냄새와 맛과 촉감과 법이며, 그대로 눈의 인식 경계[眼識界]이고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뜻의 인식 경계[意識界]이니라.
또 그대로 밝음[明]과 무명(無明)이고밝음과 무명이 다함이며,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늙음이고 그대로 죽음이며, 그대로 늙음과 죽음이 다함이니라.
또 그대로 고제이고 그대로 집제이며, 그대로 멸제이고 그대로 도제이며, 그대로 지혜이고 그대로 얻음이니라.
013_0815_b_18L如是乃至非怛闥阿竭非阿羅訶三耶三菩大涅槃非常非樂非我非淨以是俱非世出世故卽如來藏元明心妙心卽空卽地卽水卽風卽火卽眼卽耳鼻舌身意卽色卽聲香味觸法眼識界如是乃至卽意識界卽明無明無明盡如是乃至卽老卽死老死盡卽苦卽集卽滅卽道卽智卽
또 그대로 보시이고 그대로 지계이며, 그대로 인욕이고 그대로 정진이며, 그대로 선정이고 그대로 지혜이며, 그대로 바라밀다이고 이와 같이 내지 그대로 달달아갈(怛闥訶竭)이며, 그대로 아라하(阿羅訶)와 삼야삼보(三耶三菩)이고 그대로 대열반이며, 그대로 상덕이고 그대로 낙덕이며, 그대로 아덕이고 그대로 정덕이니라.
이렇게 모두 세간과 출세간과 일치하기 때문에 여래장의 묘하게 밝은 마음의 근원은, 일치함[卽]도 떠나고 일치하지 않음[非]도 떠나서 일치하면서도[是卽] 일치하지 않으니[非卽], 세간의 삼계[三有]중생과 출세간의 성문과 연각이 어떻게 그들의 아는 마음으로 여래의 더없이 높은 보리를 헤아려서, 세간의 언어로써 부처님의 지견(知見)에 들어가겠느냐.
013_0815_c_04L卽檀那卽尸羅卽毘梨耶卽羼提卽禪那卽鉢剌若卽波羅蜜多如是乃至卽怛闥阿竭卽阿羅訶三耶三卽大涅槃卽常卽樂卽我卽淨是卽俱世出世故卽如來藏妙明心離卽離非是卽非卽如何世閒三有衆生及出世閒聲聞緣覺以所知心測度如來無上菩提用世語言入佛知見
비유하면 거문고[琴]와 공후(箜篌)와 비파(琵琶)에 묘한 소리가 있을지라도, 묘한 손가락이 없으면 소리를 낼 수 없는 것과 같다. 너와 중생도 마찬가지로 보배로운 깨달음의 참마음은 저마다 원만하지만, 나는 잠시 손가락을 대기만 해도 실상해인(實相海印)이 광명을 발하고, 너희들은 잠깐 마음을 들기만 해도 먼저 번뇌가 일어나느니라. 그것은 더없이 높은 깨달음의 도를 열심히 구하지 않고 소승만을 좋아하여 작은 것을 얻고 만족하기 때문이다.”
013_0815_c_12L譬如琴瑟箜篌琵琶雖有妙若無妙指終不能發汝與衆生亦復如是寶覺眞心各各圓滿如我按指海印發光汝蹔擧心塵勞先起不勤求無上覺道愛念小乘得少爲足
부루나가 말했다.
“저도 여래와 더불어 보배로운 깨달음이 뚜렷이 밝아서, 진실하고 미묘하고 청정한 마음이 둘이 없이 원만하지만, 저는 옛적부터 시작 없는 망상을 만나 오래도록 생사에서 윤회하다가, 이제 거룩한 법[聖乘; 阿羅漢果]을 얻었으나, 아직도 구경의 경지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세존께서는 온갖 망상을 다 원만하게 멸하시어, 홀로 미묘하고 영원한 진리에 드셨으니, 감히 여래께 묻겠습니다.
일체중생은 어떤 원인으로 망상이 있어서, 스스로 미묘한 밝음을 덮고 생사에 빠져 헤매는 것입니까.”
013_0815_c_16L富樓那言我與如來寶覺圓明眞妙淨心無二圓滿而我昔遭無始妄想久在輪迴今得聖乘猶未究竟世尊諸妄一切圓滅獨妙眞常敢問如來一切衆生何因有妄自蔽妙明受此淪溺
013_0816_a_01L부처님께서 부루나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비록 의심을 없앴다고 하나 아직 남은 의혹을 다 없애지 못했으니, 나는 현재의 세상일들을 들어 네게 물으리라. 네가 어찌 듣지 못한 일이겠느냐. 실라벌성(室羅筏城)의 연야달다(演若達多)가 홀연히 어느 새벽에거울로 얼굴을 비추고 거울 속의 머리에서 잘생긴 얼굴[眉目]을 좋아하다가, 자기 머리에서 얼굴과 눈이 보이지 않자, 도깨비라고 성을 내어 꾸짖으며 까닭 없이 미쳐서 달아났다고 한다. 너는 이 사람이 무엇 때문에 까닭 없이 미쳐서 달아났다고 생각하느냐.”
013_0815_c_22L佛告富樓那汝雖除疑餘惑未吾以世閒現前諸事今復問汝豈不聞室羅城中演若達多忽於晨朝以鏡照面愛鏡中頭眉目可見責己頭不見面目以爲魑魅無狀狂於意云何此人何因無故狂走
부루나가 말했다.
“이 사람은 그저 마음이 미쳤을 뿐, 더 이상 다른 까닭이 없습니다.”
013_0816_a_04L富樓那言是人心狂更無他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묘한 깨달음은 밝고 원만하여 본래 원만하게 밝고 미묘할 뿐인데, 여기에 이미 허망이라고 칭한들, 어찌 원인이 있겠느냐. 만일 원인 할 곳이 있다면, 어찌 허망이라고 하겠느냐. 스스로 온갖 망상이 연달아 서로 원인을 이루고 미혹으로 미혹을 쌓으면서 티끌처럼 많은 겁[塵劫]을 지냈으니, 이 여래가 밝힐지라도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느니라.
이렇게 미혹의 원인은 미혹 자체의 원인으로 있을 뿐이니, 미혹에 원인이 없다는 것을 알면, 허망은 의지할 데가 없을 것이며, 더욱이 생기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멸하려고 하겠느냐.
보리(菩提)를 깨달은 사람은 꿈에서 깬 사람이 꿈속의 일을 말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 비록 꿈속의 일이 정교하게 밝을지라도, 무슨 인연이 있기에 꿈속의 물건을 취하고자 하겠느냐. 더욱이 또 원인이 없어서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겠느냐. 저 성안의 연야달다인들 무슨 인연이 있기에 스스로 머리를 겁내어 달아났겠느냐. 홀연히 미친 증세만 쉬어버리면 머리를 밖에서 얻지 않으리라. 비록 미친 증세가 없어지지 않은들 어찌 머리를 잃어버렸겠느냐.
013_0816_a_05L佛言妙覺明圓本圓明妙旣稱爲妄云何有因若有所因云何名妄自諸妄想展轉相因從迷積迷以歷塵劫雖佛發明猶不能返如是迷因因迷自有識迷無因妄無所依尚無有生欲何爲滅得菩提者如寤時人說夢中事心縱精明欲何因緣取夢中物況復無因本無所有如彼城中演若達多豈有因緣自怖頭走忽然狂歇頭非外得縱未歇狂亦何遺失
부루나여, 허망한 성질이 이와 같은데 무엇을 근거로 있겠느냐. 네가 단지 세간(世間)과 업과(業果)와 중생(衆生)의 세 가지 상속(相續)을 따라서 분별하지 않는다면, 세 가지 연(緣)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도 생기지 않으며, 너의 마음속에 자리한 연야달다의 미친 증세도 저절로 쉬리라. 쉬고 나면 곧 보리의 훌륭하고 청정하고 밝은 마음이 본래 법계에 두루 원만하여,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닌데, 어찌 수고롭게 갈고 다듬고[肯綮] 닦아 증득하는 방법을 빌리겠느냐.
013_0816_a_15L富樓那性如是因何爲在汝但不隨分別世業果衆生三種相續三緣斷故三因不生則汝心中演若達多狂性自歇卽菩提勝淨明心本周法界從人得何藉劬勞肯綮修證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자기의 옷 안에 여의주(如意珠)가 매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헐벗은 채 걸식하면서 다른 곳을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 비록 실제로는 가난할지라도 구슬을 잃은 적이 없으니, 홀연히 지혜 있는 사람이 그 구슬을 가리켜줘서 마음속의 소원을 성취하여 큰 부자가 된다면, 비로소 신비한 구슬은 밖에서 얻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리라.”
013_0816_a_20L譬如有人於自衣中繫如意珠不自覺知窮露他方乞食馳走雖實貧窮珠不曾失忽有智者指示其珠所願從心致大饒富方悟神珠非從外得
013_0816_b_01L바로 이때 아난이 대중 가운데 있다가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의 발에 예를 올리고 일어서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방금 세존께서 ‘살생과 투도와 음욕 업의 세 가지 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세 가지 원인도 생기지 않으며, 마음속에 연야달다의 미친 증세도 저절로 쉬고, 쉬고 나면 곧 보리를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신 말씀에서도 인연의 이치가 명백히 밝혀졌는데, 어째서 여래께서는 인연을 가차 없이 버리시는 것입니까. 저는 인연으로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뜻이 어찌 홀로 나이 어린 저희들 유학성문(有學聲聞)들 뿐이겠습니까. 이 법회의 대목건련(大目犍連)과 사리불(舍利弗)과 수보리(須菩提)들도 노범지(老梵志)를 따르다가, 부처님의 인연법(因緣法)을 듣고 발심하여 깨달아서 번뇌가 없는 법을 성취한 것입니다. 지금 말씀하시기를 ‘보리는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왕사성(王舍城)의 구사리(拘舍梨)들이 설한 자연(自然)이 가장 뛰어난 뜻[第一義]이겠습니까. 부디 대비(大悲)를 내리시어 저의 답답한 심정을 시원하게 열어주옵소서.”
013_0816_b_01L卽時阿難在大衆中頂禮佛足起立白佛世尊現說殺盜婬業三緣斷故三因不生心中達多狂性自歇歇卽菩提不從人得斯則因緣皎然明白云何如來頓棄因緣我從因緣心得開悟世尊此義何獨我等年少有學聲聞今此會中大目犍連及舍利弗須菩提等從老梵志聞佛因緣發心開悟得成無漏今說菩提不從因緣則王舍城拘舍梨等所說自然成第一義唯垂大悲開發迷悶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저 성안의 연야달다가 미친 증세의 인연을 없애버린다면, 미치지 않는 성품은 자연히 나올 것이며, 인연이다 자연이다라는 이치도 여기서 끝나게 되리라.
아난아, 연야달다의 머리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 저절로[自] 그런 것[然]이어서, 그런 것이 저절로 아님이 없는데, 무슨 까닭으로 머리를 겁내고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만일 자연의 머리가 인연 때문에 미쳤다면, 어째서 자연의 머리는 인연 때문에 잃지 않았느냐. 본래의 머리를 잃지 않고 미친 두려움만 허망하게 나왔다면, 잠시도 변하여 바뀐 일이 없는데, 어찌 인연을 빌리겠느냐.
미친 증세가 본래 자연이라면, 본래부터 미치고 두려운 증세가 있어야 할 텐데, 미치기 전에는 미친 증세가 어디에 숨어 있었겠느냐. 미치지 않은 것이 자연이라면, 머리는 본래 잘못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미쳐서 달아났겠느냐.
013_0816_b_12L佛告阿難卽如城中演若達多狂性因緣若得滅除則不狂性自然而出因緣自然理窮於是阿難演若達多頭本自然本自其然無然非自何因緣故怖頭狂走若自然頭因緣故狂何不自然因緣故失本頭不失狂怖妄出曾無變易何藉因緣本狂自然本有狂怖未狂之際狂何所潛不狂自然頭本無妄何爲狂走
013_0816_c_01L만일 본래의 머리를 깨닫고 미쳐서 달아난 까닭을 안다면, 인연이나 자연이라는 주장은 다 쓸모없는 논리가 되리라. 그러므로 나는 ‘세 가지 연이 끊어지기 때문에 곧 보리의 마음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에 만일 보리의 마음이 생겨서 생멸의 마음이 멸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단지 생멸일 뿐이다.
생멸이 모두 사라져서 공덕작용이 없는 도에만일 자연이 있다고 하면, 이 경우에도 자연의 마음이 생겨서 생멸의 마음이 멸한다고 밝히는 격이니, 이것 역시 생멸이니라.
생멸이 없는 것을 자연이라고 할지라도, 마치 세상에서 온갖 모양을 뒤섞어 일체(一體)를 만들어서 화합성질이라고 이름하거나, 화합하지 않는 것을 본연의 성질이라고 칭하는 것과 같으리라.
본연이다 본연이 아니다 화합이다 화합이 아니다라고 하는 화합과 본연을 모두 떠나고, 떠났다[離] 떠나지 않았다[合]를 모두 벗어나야만[俱非] 이 구절을 비로소 쓸모없는 논리를 떠난 법이라고 하리라.
013_0816_b_21L若悟本頭識知狂走因緣自然俱爲戲論是故我言三緣斷故卽菩提心菩提心生生滅心滅此但生滅滅生俱盡無功用道若有自然如是則明自然心生生滅心滅 此亦生滅無生滅者名爲自然猶如世閒諸相雜和成一體者和合性非和合者稱本然性本然非和合非合合然俱離離合俱非句方名無戲論法
너는 아직도 보리열반(菩提涅槃)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겁을 지내 부지런히 힘써 닦은 정도로 증득할 단계가 아니다. 비록 또 시방 여래께서 설하신 12부경(部經)의 청정하고 미묘한 이치를 항하강의 모래처럼 많이 기억할지라도, 단지 쓸모없는 논리[戱論]만 더할 뿐이다.
네가 비록 인연과 자연을 담론할 때 명료하게 결정함으로써 사람들이 너를 들은 지식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부르고 있으며, 이렇게 겁을 쌓아 듣는 지식을 많이 닦아 익히고도, 마등가(摩登伽)의 난(難)을 면할 능력이 없다가, 너는 어째서 나의 불정신주(佛頂神呪)를 기다려 마등가의 불꽃같은 음욕을 단번에 끄고 아나함과[阿那含]를 성취하여, 나의 법 가운데 정진의 숲(精進林)을 이루고 애욕의 강물을 말려서 너를 해탈케 한 것이냐.
013_0816_c_07L菩提涅槃尚在遙非汝歷劫辛勤修證雖復憶持十方如來十二部經淸淨妙理如恒河秖益戲論汝雖談說因緣自然決定明了人閒稱汝多聞第一以此積劫多聞薰習不能免離摩登伽難因待我佛頂神呪摩登伽心婬火頓歇得阿那含於我法中成精進林河乾枯令汝解脫
그러므로 아난아, 네기 비록 겁을 지내며 여래의 묘하게 장엄한 비밀 법[祕密妙嚴]을 기억할지라도, 하루 동안 무루업(無漏業)을 닦아서 세상의 미움과 사랑의 두 고통을 멀리 벗어남만 못하리라.
마등가는 지난 세상에 음녀(婬女)였으나, 신비한 주문의 힘으로 그 애욕을 소멸하여, 지금은 법회 가운데 성비구니(性比丘尼)란 이름으로, 라후라(羅睺羅)의 어머니인 야수다라(耶輸陀羅)와 함께 과거 세상의 원인을 깨달았느니라. 여기에 이들은 지내온 세상을 애정의 탐욕 때문에 괴롭게 살아왔음을 알고, 일념으로 번뇌 없는 선행[無漏善]을 닦았기 때문에, 얽힘에서 벗어나기도 하고 수기를 받기도 했는데, 너는 어찌하여 스스로 속아서 아직도 보고 듣는 경계에 멈춰 있는 것이냐.
013_0816_c_15L是故阿難汝雖歷劫憶持如來秘密妙嚴不如一日修無漏業遠離世閒憎愛二苦如摩登伽宿爲婬女由神呪力銷其愛欲中今名性比丘尼與羅睺羅母耶輸陁羅同悟宿因知歷世因貪愛爲苦一念薰修無漏善故或得出纏或蒙授記如何自欺尚留觀聽
013_0817_a_01L아난은 대중들과 함께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으니, 의혹이 사라지고 마음에 실상(實相)을 깨달아서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해졌다. 이전에 듣지 못했던 법을 얻고감격하여 다시 슬피 울며, 부처님의 발까지 이마를 조아려 예를 올리고 길게 끓어 앉아서 두 손 모아 부처님께 아뢰었다.
“더없이 대비(大悲)하시고 청정하신 부처님[寶王]께서는 저의 마음을 잘 깨우쳐주셨으며, 이러한 가지가지 인연과 방편으로 어둠에 잠긴 이들을 타이르고 이끄시어 고해를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013_0816_c_22L阿難及諸大衆聞佛示誨疑惑銷除心悟實相身意輕安得未曾有重復悲淚頂禮佛足長跪合掌而白佛言無上大悲淸淨寶王善開我心能以如是種種因緣方便提獎引諸沈冥出於苦海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비록 이러한 설법을 듣고 여래장의 묘하게 깨달은 밝은 마음이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하여, 여래의 시방 국토에 청정 보배로 장엄한 부처님의 세계[妙覺王刹]를 품어 기르는 줄을 알았으나, 여래께서는 저에게 또 ‘많이 들어 안 지식은 공덕이 없으니, 실제로 닦는 것보다 못하다’고 꾸짖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 저는 지금 마치 집 없는 떠돌이[旅泊之人]가 홀연히 천자로부터 화려한 집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비록 큰집을 얻었을지라도 들어가는 문을 몰라 찾고자 하오니, 부디 여래께서는 대비(大悲)를 버리지 마시고, 이 법회의 어둡고 무지한 저희들이 소승을 버리고, 여래께서 무여열반(無餘涅槃)을 향하여 본래 발심하신 길을 얻게 하시고, 또 배우는 단계의 행자들이 옛날부터 반연(攀緣)해온 경계를 무엇으로 다스리고 굴복시켜야만 다라니(陀羅尼)를 얻고 부처님의 지견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옵소서.”
이렇게 말하고 나서 온 몸[五體]을 땅에 던져 법회 대중과 함께 일심으로 부처님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기다렸다.
013_0817_a_05L世尊我今雖承如是法音知如來藏妙覺明心遍十方界含育如來十方國土淸淨寶嚴妙覺王剎如來復責多聞無功不逮修習我今猶如旅泊之人忽蒙天王賜以華屋雖獲大宅要因門入唯願如來不捨大悲示我在會諸蒙暗者捐捨小乘必獲如來無餘涅槃本發心路令有學者從何攝伏疇昔攀緣得陁羅尼入佛知見作是語已五體投地在會一心佇佛慈旨
이때 세존께서 이 법회 가운데 연각과 성문으로서 보리의 마음이 자재하지 못한 이들을 가엾게 여기시고, 또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 미래에 보리의 마음을 낼 말법(末法) 중생들에게도 더없이 높은 법의 묘한 수행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하여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보리의 마음을 일으켜서 여래의 묘한 삼마제(三摩提)에 고달픈 생각을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마땅히 먼저 깨달음을 일으키는 첫 마음에 두 결정한 뜻을 밝혀야 한다.
첫 마음에 두 결정한 뜻이란 무엇이겠느냐.
013_0817_a_15L爾時世尊哀愍會中緣覺聲聞於菩提心未自在者及爲當來佛滅度後末法衆生發菩薩心開無上乘妙修行路宣示阿難及諸大衆汝等決定發菩提心於佛如來妙三摩提不生疲惓應當先明發覺初心二決定義云何初心二義決定
013_0817_b_01L아난아, 첫째 뜻은 너희들이 만일 성문을 버리고 보살 법[菩薩乘]을 닦아서 부처님의 지견[佛知見]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수행자리에서 일으킨 마음[因地發心]이 결과자리의 깨달음[果地覺]과 같은지 다른지를 자세히 살피는 일이이니라.아난아, 만일 수행자리(因地]에서 생멸심(生滅心)을 가지고 첫 수행의 원인[本修因]을 정하여 생멸을 떠난 불법[佛乘]을 구한다면 옳은 방법이 아니다. 이러한 뜻에서 너는 온갖 물질로 이뤄진 세상을 밝게 비춰보아라. 조작이 가능한 법은 모두 변하여 사라지느니라.
013_0817_a_22L阿難第一義者汝等若欲捐捨聲聞修菩薩乘入佛知見應當審觀因地發心與果地覺爲同爲異阿難若於因地以生滅心爲本修因而求佛乘不生不滅無有是處以是義故汝當照明諸器世間可作之法皆從變滅
아난아, 너는 세상의 조작이 가능한 법을 보아라, 무엇인들 무너지지 않겠느냐. 그러나 끝내 허공이 썩어 문드러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허공은 조작이 가능한 법이 아니니, 처음부터 끝까지 무너져 없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너의 몸 안에 굳은 형태는 흙의 요소이고 젖는 성질은 물의 요소이며, 따듯한 감촉은 불의 요소이고, 흔들리는 성질은 바람의 요소이니, 이 네 가지 요소가 얽혀 짜임에 따라, 너의 고요하고 원만하고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이 나뉘어 보고 듣고 느끼고 살피는 작용으로 변한 상태의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를 다섯 겹쳐 쌓임의 혼탁이라고 하느니라.
013_0817_b_05L阿難汝觀世間可作之法誰爲不壞然終不聞爛壞虛空何以故空非可作由是始終無壞滅故則汝身中堅相爲地潤濕爲煖觸爲火動搖爲風由此四纏分汝湛圓妙覺明心爲視爲聽爲覺從始入終五疊渾濁
혼탁이란 무엇이겠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맑은 물은 본래 청결하고, 저 먼지와 흙과 회 가루의 종류는 본질이 막히고 걸림으로, 두 체는 본질 그대로[法爾] 서로 따르는 성질이 아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이 흙을 집어서 맑은 물에 던지면, 흙은 막히는 성질을 잃고 물은 청결을 잃어서, 모습이 어지럽게 뒤섞인 상태를 혼탁이라고 하며, 너의 혼탁의 다섯 겹쳐 쌓임도 마찬가지니라.
013_0817_b_11L云何爲濁譬如淸水淸潔本然卽彼塵土灰沙之倫本質留㝵二體法爾性不相有世間人取彼土塵投於淨水失留㝵水亡淸潔容貌汨然名之爲汝濁五重亦復如是
아난아, 너는 시방세계에 두루 원만한 허공을 보아라. 허공과 보는 작용은 구분되지 않으리라. 허공은 있으나 실체[體]가 없고 보는 작용은 있으나 감각이 없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妄]을 이뤘으니, 이것을 첫 번째 겹쳐 쌓임의 겁혼탁(劫濁)이라고 한다.
너의 몸은 현재 네 가지 요소를 뭉쳐서 형체[體]가 되었는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을 막아서 걸려 막히게 하며, 물과 불과 바람과 흙을 돌려서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두 번째 겹쳐 쌓임의 견탁(見濁)이라고 한다.
013_0817_b_16L阿難汝見虛空遍十方界空見不分有空無體見無覺相織妄成是第一重名爲劫汝身現摶四大爲體見聞覺知擁令留㝵水火風土旋令覺知相織妄是第二重名爲見濁
013_0817_c_01L또 네가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식별하고 외우고 익힐 때, 성품은 알고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모양은 여섯 경계[六塵]를 나타내고 있으나, 경계를 떠나면 모양이 없고, 지각[覺]을 떠나서는 성품이 없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세 번째 겹쳐 쌓임의 번뇌탁(煩惱濁)이라고 한다.
또 너는 아침저녁으로 생기고 멸함이 멈추지 않아서, 알고 보는 작용은언제나 세상에 머물고자 하고, 업은 운행하여 항상 국토를 옮기려는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네 번째 겹쳐 쌓임의 중생탁(衆生濁)이라고 한다.
그리고 너희들의 보고 듣는 작용은 원래 다른 성질이 없으나, 여러 경계[衆塵; 六塵]가 따로 떨어져 까닭 없이 다른 것이 생기니, 성품 가운데서는 서로 알고, 작용 가운데서는 서로 등져서, 같고 다름이 기준을 잃은 것이 서로 짜여서 허망을 이뤘으니, 이것을 다섯 번째 겹쳐 쌓임의 명탁(命濁)이라고 하느니라.
013_0817_b_21L又汝心中憶識誦習性發知見容現六塵離塵無相離覺無性相織妄成是第三重名煩惱濁又汝朝夕生滅不停知見每欲留於世閒業運每常遷於國土織妄成是第四重名衆生濁汝等見聞元無異性衆塵隔越無狀異生中相知用中相背同異失准相織妄是第五重名爲命濁
아난아, 네가 이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을 여래의 상락아정(常樂我淨)과 깊이 계합하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먼저 생사의 근본을 가려내고, 생멸을 떠난 원만하고 고요한 성품을 의지해서 성취해야 한다. 고요한 자리로 그 허망한 생멸[滅生]을 돌려서 누르고, 원래의 깨달음으로 돌아가서 원래 밝은 깨달음의 생멸이 없는 성품을 얻어 수행자리의 마음[因地心]으로 정한 뒤에, 결과자리의 수증(修證)법을 원만하게 성취해야 하느니라. 이것은 마치 혼탁한 물을 흔들리지 않는 그릇에 담아서 깨끗이 맑히는 것과 같다.
오래도록 가만히 두어 움직이지 않고 모래와 흙이 저절로 가라앉아 맑은 물이 뚜렷이 나타난 상태를 객진번뇌(客塵煩惱)를 처음 누른 경계라고 하며, 탁한 찌꺼기마저 제거하여 순수하게 맑은 물만 남은 상태를 영원히 근본무명(根本無明)을 끊은 경계라고 한다.
이렇게 밝은 모양이 정밀하고 순수하여, 일체의 변화가 나타나서 번뇌에 물들지 않으면 모두 다 열반의 청정한 묘한 덕과 계합하느니라.
013_0817_c_06L阿難汝今欲令見聞覺知遠契如來常樂我淨當先擇死生根本依不生滅圓湛性以湛旋其虛妄滅生伏還元覺得元明覺無生滅性爲因地心然後圓成果地修證如澄濁水貯於淨器深不動沙土自沈淸水現前名爲初伏客塵煩惱去泥純水名爲永斷根本無明明相精純一切變現不爲煩皆合涅槃淸淨妙德
둘째 뜻은 너희들이 반드시 보리의 마음을 내어 보살법[菩薩乘]에 큰 용맹을 일으켜서 온갖 인연으로 변화하는 모양[諸有爲相]을 버리기로 결정했다면, 마땅히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살펴서 ‘이것이 시작 없는 겁에 업을 일으켜서[發業; 發業無明] 태어남을 북돋고 있으니[潤生; 潤生無明] 무엇이 짓고 무엇이 받는가’라고 관찰하는 일이다.
아난아, 네가 보리를 닦으면서 번뇌의 근본을 자세히 관찰하지 못한다면, 허망한 감관과 경계[根塵]가 어느 곳이 뒤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뒤바뀐 곳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번뇌의 근본을 항복시켜서 여래의 자리를 취하겠느냐.
013_0817_c_15L第二義者汝等必欲發菩提心於菩薩乘生大勇猛決定棄捐諸有爲相應當審詳煩惱根本此無始來發業潤生誰作誰受阿難汝修菩提若不審觀煩惱根本則不能知虛妄根塵何處顚倒處尚不知云何降伏取如來位
013_0818_a_01L아난아, 너는 세상의 매듭 푸는 사람을 살펴보아라. 맺힌 곳을 볼 수 없다면, 어떻게 푸는 방법을 알겠느냐. 허공이 너에게 무너뜨림을 당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리라.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이 없어서, 맺히거나 푸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바로 네 앞의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마음의 여섯이 도적의 앞잡이가 되어 스스로 자기 집안의 보배를 겁탈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 인하여 시작 없는 겁 동안 중생세계에 얽히는 일이 생겼기 때문에, 물질세계를 초월할 수 없는 것이니라.
013_0817_c_22L阿難汝觀世閒解結之人不見所云何知解不聞虛空被汝墮裂以故空無相形無結解故則汝現前眼耳鼻舌及與身心六爲賊媒自劫家寶由此無始衆生世界生纏縛故於器世閒不能超越
아난아, 어째서 중생세계(世界)라고 하겠느냐. 세(世)는 옮겨 흐른다는 뜻이며, 계(界)는 방위라는 말이다. 너는 이제 마땅히 알라. 동쪽과 서쪽과 남쪽과 북쪽과 동남쪽과 서남쪽과 동북쪽과 서북쪽과 위아래는 계(界)이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세(世)이다. 방위는 열이고 흐름은 셋이니, 일체중생이 허망을 짜서 서로 이뤄내고 몸 안에서 바뀌고 옮기면서 세와 계를 서로 밟는 것이니라.
이 계(界)의 성질이 비록 열 곳이라 하나, 일정한 방위(方位)가 분명한 것은, 세상에서는 단지 동서남북만 지목할 뿐이다. 위와 아래는 자리가 없고, 사이[中]는 정한 방향이 없기 때문이다. 사방(四方)의 수는 분명하여 세(世)와 서로 밟아서, 세 때가 사방으로 사방이 세 때로 완연히 구르니 열 둘이니라. 이렇게 흘러 변함을 세 차례 포개면, 하나가 열이 되고 백이 천으로 불어난다. 처음과 끝을 다 포함하면 여섯 감관 안에는 각각 공덕이 천 이백이 있느니라.
013_0818_a_04L阿難云何名爲衆生世界世爲遷流界爲方位汝今當知東西南北東南西南東北西北上下爲界過去未來現在爲世位方有十流數有三一切衆生織妄相成身中貿遷世界相涉而此界性設雖十方定位可明世閒秖目東西南北上下無位中無定方四數必明與世相涉三四四三宛轉十二流變三疊一十百千摠括始終六根之中各各功德有千二百
아난아, 너는 또 이 가운데 자세히 헤아려 공덕이 많고 적음[優劣]을 정해 보아라.
눈이 보는 것은 뒤가 어둡고 앞이 밝은데, 앞쪽은 전체가 밝으나 뒤편은 전체가 어둡다. 왼쪽과 오른쪽의 옆으로 보는 것이 세 몫 중에 두 몫이다. 다 합해서 논한다면 짓는 공덕이 완전하지 못하여, 세 몫의 공덕에서 한 몫의 공덕이 없으니, 마땅히 눈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귀는 두루 다 들어서 시방 어디에나 빠짐이 없다. 소리가 움직일 때는 멀고 가까움이 있는 듯하나, 조용할 때는 한계가 없으니, 마땅히 귀의 감관은 천 이백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코로 냄새를 맡을 때는 내쉬고 들이쉬는 숨을 통해서 작용하는데, 내쉬고 들이쉬는 작용만 있고, 중간의 어울림은 빠져 공덕이 없느니라. 코의 감관을 증명하면 세 몫의 공덕 중에 한 몫이 모자라니, 마땅히 코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013_0818_a_14L阿難汝復於中克定優劣如眼觀見後暗前明前方全明後方全暗左右傍觀三分之二統論所作功德不全三分言功一分無德當知眼唯八百功德如耳周聽十方無遺動若邇遙靜無邊際當知耳根圓滿一千二百功德如鼻嗅聞通出入息有出有入而闕中交驗於耳根三分闕一當知鼻唯八百功德
013_0818_b_01L혀로는 모든 세간의 지혜와 출세간의 지혜를 다 설하여 밝힐 수 있음으로, 말은 한계[方分]가 있을지라도, 끝없는 이치를 다해내니, 마땅히 혀의 감관은 천이백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몸은 닿음[觸]을 느껴서 거슬리거나 따르는 경계[違順]를 아는데, 합할 때는 느낄 수 있으나 떼었을 때는 알지 못하니, 떼었을 때는 하나이고 합했을 때는 한 쌍이다. 몸의 감관을 증명하면 세 몫의 공덕 중에 한 몫이 모자라니, 마땅히 몸에는 오직 팔백 공덕만 있는 줄을 알아야 한다.
뜻으로는 묵묵히 시방 삼세(十方三世)의 일체세간과 출세간 법을 받아들여서, 성인과 범부를 다 포용하여 끝까지 다하지 않음이 없으니, 마땅히 뜻의 감관은 천이백의 공덕을 원만하게 갖춰있음을 알아야 한다.
013_0818_a_22L如舌宣揚盡諸世閒出世閒智言有方分理無窮盡當知舌根圓滿一千二百功德如身覺觸識於違順合時能覺離中不知離一合雙驗於舌根三分闕一當知身唯八百功德如意默容十方三世一切世閒出世閒法惟聖與凡無不苞容盡其涯際當知意根圓滿一千二百功德
아난아, 네가 지금 생사애욕의 흐름[生死欲流]을 거슬러 흐르는 근원을 끝까지 다 돌이켜서, 생멸이 없는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이 여섯 가지로 수용(受用)하는 감관에서, 어느 감관과 합해야 하는지 어느 감관을 떠나야 하는지, 어느 감관이 깊은지 어는 감관이 얕은지, 어느 감관이 원통(圓通)한지, 어느 감관이 원통하지 않은지를 체험해야 한다. 만일 여기에서 원통한 감관을 깨닫고 저 시작 없는 옛날부터 망상으로 짜인 업의 흐름을 거슬러서, 원통한 감관을 따를 수 있다면, 원통하지 못한 감관으로 닦은 날과 겁[日劫]보다 그 공덕이 배가되리라.
내가 지금 여섯 감관의 고요하고 원만하고 밝은 본래공덕의 수량을 이와 같이 자세히 밝혔으니, 너는 잘 생각하여 들어가기에 알맞은 감관을 가려보아라. 나는 마땅히 밝혀서 너를 더욱 잘 닦아 나갈 수 있게 하리라.
시방 여래께서는 열여덟의 경계[十八界]를 낱낱이 수행하여 다 더없이 높은 보리를 원만하게 성취하셨는데, 그 중간에 전혀 우열(優劣)이 없었느니라. 단지 너는 근기가 낮아서 그 가운데 자재한 지혜가 원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선양하여 너에게 한 문으로 깊이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니, 한 문으로 들어가서 헛되지 않으면, 저 여섯 감각기관은 일시에 청정하리라.”
013_0818_b_07L阿難汝今欲逆生死欲流返窮流根至不生滅當驗此等六受用根誰合誰離誰深誰淺誰爲圓通誰不圓滿若能於此悟圓通根逆彼無始織妄業流得循圓通與不圓根日劫相倍我今備顯六湛圓明本所功德數量如是隨汝詳擇其可入者吾當發明令汝增進十方如來於十八界一一修行皆得圓滿無上菩提於其中閒亦無優劣但汝下劣未能於中圓自在慧故我宣揚令汝但於一門深入入一無妄彼六知根一時淸淨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흐름을 거슬러 깊이 한 문에 들어가야만, 여섯 감관을 일시에 청정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013_0818_b_19L阿難白佛言世尊云何逆流深入一能令六根一時淸淨
013_0818_c_01L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제 이미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었으니, 3계(界)의 중생세간이 견도(見道)의 자리에서 끊어야할 번뇌[惑]는 멸했으나, 오히려 아직 여섯 감관 가운데[根中] 쌓아온 시작 없는 겁의 허망한 습기를 알지 못하고 있느니라. 저 습기도 반드시 수도(修道)의 자리에서 끊어야 하는데,더욱이 어찌 이 가운데 생기고 머물고 달라지고 사라지는 여러 미세한 종류의 수량[分齊頭數]이겠느냐.
013_0818_b_21L佛告阿難汝今已得須陁洹果已滅三界衆生世閒見所斷惑然猶未知根中積生無始虛習彼習要因修所斷得何況此中生住異滅分劑頭數
이제 너는 또 현재의 여섯 감관이 하나인지 여섯인지를 살펴보아라. 만일 하나라고 한다면, 귀는 어째서 못 보고, 눈은 어째서 듣지 못하며, 머리는 어째서 밟지 못하고, 발은 어째서 말하지 못하느냐.
“만일 여섯 감관으로 결정되었다면, 내가 지금 이 법회에서 너에게 미묘한 법문을 선양하고 있는데, 너의 여섯 감관 가운데 어느 감관이 와서 받아들이는 것이냐.”
013_0818_c_02L今汝且觀現前六根爲一爲六阿難若言一者耳何不見目何不聞頭奚不履足奚無語若此六根決定成六如我今會與汝宣揚微妙法門汝之六根誰來領受
아난이 말했다.
“저는 귀로 듣고 있습니다.”
013_0818_c_07L阿難言我用耳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귀가 제 스스로 듣는다면 너의 몸과 입은 무슨 관계가 있어서 입을 열어 뜻을 묻고 몸을 일으켜 공손히 받드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나가 아니라면 마침내 여섯이라야 하고, 여섯이 아니라면 마침내 하나라야 하니, 결국 너의 감관은 원래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니라.
아난아, 마땅히 알라. 이 감관은 하나도 아니고 여섯도 아니지만, 시작 없는 겁부터 뒤바뀌어 잠기고 무딘 까닭에 원만하게 고요한 자리에서 하나다 여섯이다라는 뜻이 생겼느니라.
너는 수다원(須陀洹)이 되어, 여섯 대상[六; 六塵]을 소멸하였으나, 아직은 하나를 없애지 못했으니, 마치 넓은 허공에 여러 가지 그릇을 섞어놓고, 그릇 모양의 다름을 따라 다른 허공이라고 하다가, 그릇을 치우고 허공을 보면서 허공은 하나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저 한없는 허공이 어떻게 너를 위해서 같기도 하고 같지 않기도 하겠으며, 더욱이 어찌 또 하나라 하거나 하나가 아니라고 하겠느냐. 너의 분별하여 아는 여섯 가지 수용감관도 이와 마찬가지니라.
013_0818_c_08L佛言汝耳自聞何關身口口來問身起欽承是故應知非一終六六終一終不汝根元一元六阿難知是根非一非六由無始來顚倒淪故於圓湛一六義生汝須陁洹雖得六銷猶未亡一如太虛空參合群由器形異名之異空除器觀空說空爲一彼太虛空云何爲汝成同不何況更名是一非一則汝了知六受用根亦復如是
밝음과 어둠 등 두 가지가 서로 형성되어 나타남[相形]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보는 정기가 색(色)을 반영하여 색과 맺어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淸淨四大; 勝義根]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눈의 체[眼體]라고 한다. 여기에 포도 알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浮根四塵; 浮塵根 또는 扶塵根]이 제멋대로 흘러서 색을 좇아 달리느니라.
소리의 움직임과 조용함 등 두 가지가 서로 침[相擊]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듣는 작용을 일으키고, 듣는 정기가 소리[聲]를 반영해서 소리를 말아들여[卷]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淸淨四大]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귀의 체[耳體]라고 한다. 여기에 둥글게 말린 새 잎사귀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浮根四塵]이 제멋대로 흘러서 소리를 좇아 달리느니라.
013_0818_c_17L由明暗等二種相於妙圓中粘湛發見見精映色結色成根根元目爲淸淨四大因名眼體如蒲萄朵浮根四塵流逸奔色動靜等二種相擊於妙圓中粘湛發聽精映聲卷聲成根根元目爲淸淨四大因名耳體如新卷葉浮根四塵流逸奔聲
013_0819_a_01L통함과 막힘 등 두 가지가 서로 열려 드러남[相發]에 따라,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맡는 작용을 일으키고, 맡는 정기가 냄새[香]를 반영해서 냄새를 받아들여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淸淨四大]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코의 체[鼻體]라고 한다. 여기에 드리운 쌍 손톱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냄새를 좇아 달리느니라.
담담한 맛[恬]과 여러 가지 맛[變] 등 두 가지가 서로 어울림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맛보는 작용을 일으키고, 맛보는 정기가 맛을 반영해서 맛과 짜여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혀의 체[舌體]라고 한다. 여기에 활 모양의 초승달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맛을 좇아 달리느니라.
013_0819_a_01L由通塞等二種相發於妙圓中粘湛發嗅嗅精映香納香成根根元目爲淸淨四大因名鼻體如雙垂爪浮根四塵流逸奔香由恬變等二種相參於妙圓中粘湛發嘗嘗精映味絞味成根根元目爲淸淨四大因名舌體如初偃月浮根四塵流逸奔味
뗌과 닿음 등 두 가지가 서로 비빔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촉각[覺]을 일으키고, 촉각의 정기[覺精]가 촉감을 반영하여 촉감을 뭉쳐서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몸의 체[身體]라고 한다. 여기에 허리가 잘록한 북의 이마처럼 생긴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촉감을 좇아 달리느니라.
생겨남과 멸함 등 두 가지가 서로 상속(相續)함에 따라, 미묘하고 원만한 가운데서 고요한 자리에 달라붙어 인식작용을 일으키고, 인식의 정기가 법을 반영하여 법을 끌어당겨 감관을 이뤘으니, 감관의 근원을 청정한 네 요소라고 하며, 이로 인해서 뜻의 생각[意思]이라고 한다. 여기에 깊고 어두운 방에서 보는 것과 같은 네 요소의 부실한 감관이 제멋대로 흘러서 법을 좇아 달리느니라.
013_0819_a_08L由離合等二種相摩於妙圓中粘湛發覺覺精映觸搏觸成根根元目爲淸淨四大因名身體如腰鼓顙浮根四塵流逸奔觸由生滅等二種相續於妙圓中粘湛發知知精映法覽法成根根元目爲淸淨四大因名意思如幽室見浮根四塵流逸奔法
013_0819_b_01L아난아, 이러한 여섯 감관이 저 깨달음이 본래 밝은데서 밝은 것으로 밝히려는 깨달음을 두었기 때문에, 저 정밀한 밝음을 잃고 허망한데 엉겨 붙어 빛을 일으키는 것이니라.
그러기 때문에 너는 어둠을 떠나고 밝음을 떠나면 보는 자체가 없고, 움직임을 떠나고 조용함을 떠나면 원래 듣는 성질이 없으며, 통함이 없고 막힘이 없으면 냄새 맡는 성질이 생기지 않고, 여러 가지 맛이 아니고 담담한 맛이 아니면 맛보는 성질이 나오지 않으며, 떼지도 않고 대지도 않으면 촉감이 본래 없으니, 멸함이 없고 생김이 없으면 분별작용이 어디에 의지하겠느냐.
너는 단지 움직임과 고요함과 닿음과 뗌과 담담한 맛과 여러 다른 맛과 생겨남과 사라짐과 어둠과 밝음 등 이러한 열두 가지 인연변화의 모양[有爲相]에 매어 구르지 않고, 어느 한 감관을 뽑아 엉겨 붙은 자리를 벗겨서 안으로 굴복시키고, 굴복시켜 원래의 진리로 돌아가면, 본래의 밝은 빛을 발하리라. 이렇게 비치는 성품이 환하게 밝아져야만, 나머지 다섯 엉겨 붙은 자리도 뽑힌 한 감관을 따라[應拔] 원만하게 벗겨지느니라. 이것은 앞 경계를 따라 일으킨 지견(知見)이 아니므로, 밝음은 감관을 따르지 않고,감관에 맡겨 밝음이 일어나며, 이로 인해서 여섯 감관이 서로 서로 융통하여 작용하게 되느니라.
013_0819_a_15L阿難如是六根由彼覺明有明明覺失彼精了粘妄發光是以汝今離暗離明無有見體離動離靜元無聽質無通無塞嗅性不生非變非恬嘗無所出不離不合覺觸本無無滅無生了知安寄汝但不循動靜合離恬變通塞生滅暗明如是十二諸有爲相隨拔一根脫粘內伏伏歸元眞發本明耀耀性發明諸餘五粘應拔圓脫不由前塵所起知見明不偱根寄根明發由是六根互相爲用
아난아, 네가 알다시피 이 법회 가운데 아나율타(阿那律陀)는 눈이 없어도 보고, 발난타용(跋難陀龍)은 귀가 없어도 들으며, 긍가신녀(殑伽神女)는 코가 아닌 것으로 냄새를 맡고, 교범발제(驕梵鉢提)는 혀와 다른 것으로 맛을 알며, 또 순야다신(舜若多神)은 몸이 없어도 촉감이 있는데, 여래가 광명 가운데 비춰서 잠깐 나타나게 하였을 뿐, 이미 바람의 성질이니, 그 몸은 원래 없느니라. 그리고 멸진정(滅盡定)으로 고요한 경지를 얻은 성문들 가운데 이 법회의 마하가섭(摩訶迦葉)과 같은 경우는, 뜻 감관[意根]을 멸한 지 오래 되었으나, 마음의 생각을 따르지 않고도 뚜렷이 밝혀서 분별하느니라.
013_0819_b_02L阿難汝豈不知今此會中阿那律陁無目而見跋難陁龍無耳而聽殑伽神女非鼻聞香驕梵鉢提異舌知味舜若多神無身有觸如來光中映令蹔現旣爲風質其體元無諸滅盡定得寂聲聞如此會中摩訶迦葉夂滅意根圓明了知不因心念
아난아, 지금 네가 모든 감관을 뚜렷이 뽑아버린다면, 안으로 밝게 빛이 일어나서, 이와 같은 뜬 경계[浮塵]와 물질 세간의 온갖 변화의 모양은 끓는 물에 얼음 녹듯이 생각을 따라 더없이 높은 깨달음으로 화하리라.
아난아, 세상 사람이 보는 작용을 눈에 집중하고 있다가 갑자기 눈을 감아서 어두운 모양이 앞에 나타나면, 여섯 감관이 캄캄하여 머리와 발도 서로 캄캄하지만[相類], 저 사람이 손으로 몸 둘레를 더듬으면, 비록 보이지는 않을지라도 머리와 발을 단번에 가려내서 밝을 때와 한가지로 깨달아 아느니라. 인연경계를 보는 것이 밝음 때문이라 하여 어두울 때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밝지 않아도 스스로 밝게 아는 작용이 생긴다면, 온갖 어두운 모양이 그 아는 작용을 영원히 어둡게 할 수 없으리라. 이렇게 감관과 경계가 이미 소멸해버린다면, 어찌 깨달음의 밝음이 원만한 미묘함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013_0819_b_09L阿難今汝諸根若圓拔已內瑩發光如是浮塵及器世閒諸變化相如湯銷冰應念化成無上知覺阿難如彼世人聚見於眼若令急合暗相現前六根黯然頭足相類彼人以手循體外繞彼雖不見頭足一辯知覺是同緣見因明暗成無見不明自發則諸暗相永不能昏根塵旣銷云何覺明不成圓妙
013_0819_c_01L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행자리의 깨닫는 마음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를 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결과자리의 명목(名目)과 상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과위(果位) 가운데 보리(菩提)와 열반(涅槃)과 진여(眞如)와 불성(佛性)과 암마라식(菴摩羅識)과 공여래장(空如來藏)과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일곱 가지 이름은, 명칭은 비록 다르다고 할지라도, 청정하고 원만하여 자체의 성품이 견고하니, 금강왕(金剛王)과 같이 영원히 머물러 무너지지 않습니다. 만일 이 보고 듣는 작용이 어둠과 밝음과 움직임과 고요함과 통함과 막힘을 떠나서는 끝내 자체가 없다고 하신다면, ‘생각하는 마음이 앞 경계를 떠나서는 본래 아무것도 없다’고 하신 말씀과 다르지 않습니다.어찌하여 끝내 단절되어 사라질 경계[畢竟斷滅]를 가지고 수행자리의 원인[修因]을 삼아서 여래의 일곱 가지 영원불변한 결과를 얻으려고 하겠습니까.
013_0819_b_17L阿難白佛言世尊如佛說言因地覺心欲求常住要與果位名目相應如果位中菩提涅槃眞如佛性摩羅識空如來藏大圓鏡智是七種名稱謂雖別淸淨圓滿體性堅凝金剛王常住不壞若此見聽離於暗動靜通塞畢竟無體猶如念心離於前塵本無所有云何將此畢竟斷滅以爲修因欲獲如來七常住果
세존이시여, 만일 밝음과 어둠을 떠나서는 보는 작용이 끝내 공하다면, 마치 앞 경계가 없을 때는 생각 자체의 성품도 멸한다는 이치와 같으니, 앞뒤로 반복하여 자세히 추궁할지라도 본래 제 마음 자체도 제 마음의 소재도 없을 텐데, 무엇으로 원인을 세워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구하겠습니까. 따라서 여래께서 먼저 설하신 ‘고요하고 정밀하고 원만하고 영원하다’는 것도 진실한 말과 어긋나서 결국 쓸모없는 논리가 되어버릴 텐데, 어찌 여래를 ‘진실한 말씀을 하시는 분’이라고 하겠습니까. 부디 큰 자비를 내리시어 저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옵소서.”
013_0819_c_03L若離明暗見畢竟空如無前塵念自性滅進退循環微細推求本無我心及我心所將誰立因求無上覺來先說湛精圓常違越誠言終成戲云何如來眞實語者唯垂大慈開我蒙悋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많이 듣고 아는 지식만을 배우고 모든 번뇌를 다하지 못하여 마음속에 한갓 뒤바뀐 원인만 알 뿐, 눈앞의 뒤바뀐 실제를 참답게 알지 못하고 있으니, 네가 오히려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따르지 못할까 염려되어 나는 이제 세속의 일들을 예로 들어[試將塵俗] 너의 의심을 없애 주리라.”
013_0819_c_09L佛告阿難汝學多聞未盡諸漏心中徒知顚倒所因眞倒現前實未能識恐汝誠心猶未信伏吾今試將塵俗諸事當除汝疑
즉시 여래께서는 라후라(羅睺羅)에게 종을 한번 쳐서 소리를 내게 하시고 아난에 물으셨다.
“너희들은 지금 이 소리가 들리느냐.”
013_0819_c_13L卽時如來勅羅睺羅擊鍾一聲問阿難言汝今聞不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예, 들립니다.”
013_0819_c_14L阿難大衆俱言我聞
종소리가 그치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도 들리느냐.”
013_0819_c_15L鍾歇無聲佛又問言汝今聞不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들리지 않습니다.”
阿難大衆俱言不聞
그때 라후라는 또 종을 한번 쳐서 소리를 내었다.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이제 들리느냐.”
013_0819_c_16L睺羅又擊一聲佛又問言汝今聞不
아난과 대중은 함께 말했다.
“예, 들립니다.”
013_0819_c_17L阿難大衆又言俱聞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상태를 들린다 하고 어떤 상태를 들리지 않는다고 하느냐.”
013_0819_c_18L佛問阿難汝云何聞云何不聞
아난과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들린다 하고,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013_0819_c_19L阿難大衆俱白佛言鍾聲若擊則我得聞擊久聲銷音響雙絕則名無聞
여래께서는 다시 라후라에게 종을 치도록 하시고 아난에게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013_0819_c_21L如來又勅羅睺擊鍾問阿難言爾今聲不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했다.
“소리가 납니다.”
阿難言
조금 지나서 소리가 없어지자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013_0819_c_22L少選聲銷佛又問言爾今聲不
아난과 대중이 함께 답했다.
“소리가 없습니다.”
013_0819_c_23L阿難大衆答言無聲
013_0820_a_01L잠시 후에 라후라가 다시 와서 종을 쳤다.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지금 소리가 나느냐.”
013_0820_a_01L有頃羅睺更來撞鍾佛又問言爾今聲不
아난과 대중이 함께 말했다.
“소리가 납니다.”
阿難大衆俱言有聲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너는 어떤 경우에 소리가 난다고 하며, 어떤 경우에 소리가 없다고 하느냐.”
013_0820_a_02L佛問阿難汝云何聲云何無聲
아난과 대중이 함께 부처님께 아뢰었다.
“종을 쳐서 소리가 나면 소리가 난다고 하며, 종을 친지 오래되어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다 끊기면 소리가 없다고 합니다.”
013_0820_a_03L阿難大衆俱白佛言鍾聲若擊則名有聲擊夂聲銷音響雙絕則名無聲
부처님께서 아난과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지금 어째서 스스로 말을 교란(矯亂)하느냐.”
013_0820_a_05L佛語阿難及諸大衆汝今云何自語矯亂
대중과 아난은 함께 부처님께 물었다.
“저희들이 지금 어째서 교란하는 것입니까.”
013_0820_a_06L大衆阿難俱時問佛我今云何名爲矯亂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들에게 들리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들린다 하고, 또 내가 너희들에게 소리가 나느냐고 물으면 너희들은 소리가 난다고 하면서 ‘예, 들립니다. 소리가 납니다’라는 대답이 일정하지 않으니, 이러한 것이 교란이 아니고 무엇이냐.
아난아, 소리가 사라지고 메아리마저 없으면 너는 들리지 않는다고 했으나, 만일 참으로 영 듣지 못한다면, 듣는 성품이 이미 사라져서 마른 나무와 같을 텐데, 종을 다시 쳤을 때 소리가 나는 줄을 네가 어찌 알겠느냐. 나는 줄 알고 없어진 줄 아는 작용은 소리의 경계가 스스로 없기도 하고 나기도 할 뿐인데, 저 듣는 성품이 어떻게 네게 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겠느냐. 또 참으로 듣는 작용이 아주 없다면, 무엇이 없어지는 줄을 알겠느냐.
013_0820_a_08L佛言我問汝聞汝則言聞又問汝聲汝則言聲惟聞與聲報答無定如是云何不名矯亂阿難聲銷無響汝說無聞若實無聞聞性已滅同于枯木鍾聲更擊汝云何知知有知無自是聲塵或無或有豈彼聞性爲汝有無聞實云無誰知無者
그러므로 아난아, 소리가 듣는 가운데 스스로 생기고 사라질지언정, 네가 소리의 생겨남과 소리의 사라짐을 듣는다고 해서, 너의 듣는 성품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이 아니니라.
너는 오히려 뒤바뀌었으니 소리를 헷갈려 듣는 작용으로 여기고 영원[常]을 단멸[斷]로 혼미한들 어찌 괴이한 일이겠느냐 만은, 끝내 마땅히 온갖 움직이고 조용함의 닫히고 막힘과 열리고 통함을 떠나서는 듣는 작용은 성품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되느니라.
마치 잠이 무거운 사람이 평상[床枕]에서 깊이 잠들었을 때, 그 집안 사람이 그가 자는 사이에 비단의 다듬이질을 하면서 방아를 찌면, 그 사람은 꿈속에서 절구질과 다듬이질 소리를 다른 물건의 소리로 여기고 북 소리든지 종소리로 들으면서, 꿈꾸는 동안에 스스로 ‘웬 종이 나무와 돌 소리를 내는 것일까’하고 괴상하게 생각한다. 그러다가 홀연히 잠에서 깨었을 때, 절구소리임을 알고 집안 사람에게 ‘나는 꿈속에서 이 방아 찧는 소리를 북 치는 소리로 잘못 알았구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013_0820_a_14L是故阿難聲於聞中自有生滅非爲汝聞聲生聲滅令汝聞性爲有爲無汝尚顚倒惑聲爲聞何怪昏迷以常爲斷終不應言離諸動靜閉塞開通說聞無性如重睡人眠熟牀枕其家有人於彼睡時擣練舂米其人夢中聞舂擣聲別作他物或爲擊鼓或復撞鍾卽於夢時自怪其鍾爲木石響於時忽寤遄知杵音自告家人我正夢時惑此舂音將爲鼓響
013_0820_b_01L아난아, 이 사람이 꿈속에서 어찌고요하고 흔들리고 열리고 닫히고 통하고 막히는 경계를 기억하겠느냐. 그 형체는 비록 잠들었을지라도, 듣는 성품은 어둡지 않았느니라.
비록 네 형체가 스러지고 그 목숨[命光]이 옮겨서 사라진들, 이 성품이 어떻게 네게서 소멸되겠느냐.
모든 중생이 시작 없는 때부터 온갖 물체[色]와 소리를 따라 생각을 좇아서 흘러 다니는 것은, 일찍이 성품이 맑고 묘하고 영원함을 깨닫지 못하여 영원한 진리를 따르지 않고 생기고 멸하는 작용을 좇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태어날 때마다 번뇌에 물들어 흘러 다니는 것이니라.
만일 생멸을 버리고 영원한 진리를 지킨다면, 영원한 광명이 앞에 뚜렷이 나타나서 대상[塵]과 감관[根]과 인식하는 마음[識心]은 즉시 사라지리라.
생각하는 모양은 티끌 번뇌이고, 인식하는 정은 때 번뇌이니라. 티끌 번뇌와 때 번뇌[二]를 함께 멀리 벗어나면 너의 법눈[法眼]은 바로 맑고 밝아질 텐데, 어찌 더없이 높은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겠느냐.
013_0820_b_01L阿難是人夢中豈憶靜搖開閉通塞其形雖寐聞性不昏縱汝形銷命光遷謝此性云何爲汝銷滅以諸衆生從無始來偱諸色聲逐念流轉曾不開悟性淨妙常不偱所常逐諸生滅由是生生雜染流轉若棄生滅守於眞常常光現前塵根識心應時銷落想相爲塵識情爲垢二俱遠離則汝法眼應時淸明云何不成無上知覺
大佛頂萬行首楞嚴經卷第四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