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金剛般若波羅蜜經論卷下

ABC_IT_K0558_T_003
015_0333_a_01L
금강반야바라밀경론 하권
015_0333_a_01L金剛般若波羅蜜經論卷下


천친보살 지음
015_0333_a_02L天親菩薩造
원위(元魏) 보리류지 한역
김두재 번역
015_0333_a_03L元魏天竺三藏菩提流支譯


【經】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육안(肉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육안이 있을 것입니다.”
015_0333_a_04L經曰須菩提於意云何如來有肉眼須菩提言如是世尊如來有肉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천안(天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천안이 있을 것입니다.”
015_0333_a_06L佛言須菩提於意云何如來有天眼須菩提言如是世尊如來有天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혜안(慧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 혜안이 있을 것입니다.”
015_0333_a_08L佛言須菩提於意云何如來有慧眼須菩提言如是世尊如來有慧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법안(法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법안이 있을 것입니다.”
015_0333_a_10L佛言須菩提於意云何如來有法眼須菩提言如是世尊如來有法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에게 불안(佛眼)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에게는 불안이 있을 것입니다.”
015_0333_a_12L佛言須菩提於意云何如來有佛眼不須菩提言如是世尊如來有佛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항하강(恒河江) 가에 있는 모래를 여래는 모래라고 말하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그것을 모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015_0333_a_14L佛言須菩提於意云何如恒河中所有沙說是沙不須菩提言如是世尊如來說是沙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항하강 가에 있는 모래와 같이 많은 항하가 있고 이렇게 많은 모든 항하에 있는 모래알의 수효만큼의 불 세계가 있다면, 이와 같은 세계를 어찌 많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 세계는 매우 많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015_0333_a_17L佛言須菩提1於意云何如一恒河中所有沙有如是等恒河是諸恒河所有沙數佛世界如是世界寧爲多不須菩提言彼世界甚多世尊
015_0333_b_01L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한 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얼마 되지 않는 종류의 마음이 머무는 곳을 여래는 다 알고 계시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말씀하신 모든 마음이 머무는 곳은 다 마음이 머무는 곳이 아니므로 이것을 마음이 머무는 곳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니라.
무슨 까닭이겠는가?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일곱 가지 보배를 보시에 사용한다면, 이 선남자와 선여인은 이러한 인연으로써 얻은 복이 많겠느냐?”
015_0333_a_20L告須菩提爾所世界中所有衆生若干種心住如來悉知何以故如來說諸心住皆爲非心住是名爲心住以故須菩提過去心不可得現在心不可得未來心不可得須菩提於意云何若有人以滿三千大千世界七寶持用布施是善男子善女人以是因緣得福多不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이러한 인연으로 얻은 복이 매우 많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저 선남자와 선여인은 이 인연으로 얻은 복덕의 덩어리가 매우 많을 것이니라.
그렇지만 수보리야, 만약 복덕의 덩어리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는 곧 복덕의 덩어리, 복덕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이니라.”
015_0333_b_06L須菩提言如是世尊此人以是因緣得福甚多佛言如是如是須菩提彼善男子善女人以是因緣得福德聚多須菩提若福德聚有實如來則不說福德聚福德聚
【論】 다시 의심하기를 ‘앞에서 보살은 저들은 곧 중생이라고 보지 않고 나는 보살이라고 보지 않으며 부처님 국토가 청정하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무슨 까닭에 모든 법을 보지 않는 것을 불ㆍ여래라 한다고 할까? 만약 그렇다면 어떤 사람은 모든 불ㆍ여래도 갖가지 법을 보지 않아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할 것이므로 이 아래 경문(經文)에서는 이런 의혹을 끊게 하기 위해서 다섯 가지 눈을 말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3_b_10L論曰復有疑前說菩薩不見彼是衆不見我爲菩薩不見淸淨佛國土何以故以不見諸法名爲諸佛如來若如是或謂諸佛如來不見諸法下經文爲斷此疑故說五種眼偈言

비록 모든 법 보지 않아도
경계를 깨달아 아는 눈 없지 않으니
모든 부처님은 다섯 가지 눈으로써 진실로
저들의 뒤바뀐 견해를 본다.
015_0333_b_15L雖不見諸法
非無了境眼
諸佛五種實
以見彼顚倒

‘무슨 까닭에 저렇게 말할까? 뒤바뀐[顚倒] 것이 아닐까?’라고 의심할 것이므로 이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비유를 들어 밝힌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저 중생들의 가지가지 마음이 머무는 곳을 알고 있다”는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을 보이기 위한 것인가? 저들이 뒤바뀐 것이 아니라, 뒤바뀌게 보는 까닭이다.
어떤 것이 뒤바뀐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3_b_17L何故說彼非顚倒爲顯斷疑譬喩故說我知彼種種心住如是等此示何義彼非顚倒以見顚倒故何者是顚倒偈言

갖가지 뒤바뀐 인식작용이
실상의 염처(念處)를 여의었기 때문에
저 실상의 지혜에 머물지 아니하니
그런 까닭에 뒤바뀐 말을 한다.
015_0333_b_21L種種顚倒識
以離於實念
不住彼實智
是故說顚倒
015_0333_c_01L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갖가지 뒤바뀜’이라고 한 것은, 갖가지 마음의 인연에 머무는 것을 가지가지 인식작용이라고 부르는데, 여섯 가지 인식작용이 각각 차별이 있기 때문에 뒤바뀐 견해가 생겨난다.
무엇 때문에 저 마음이 머무는 곳을 뒤바뀌었다고 부르는가?
015_0333_b_23L此義云何種種顚倒者彼種種心緣是名種種識以六種識差別顚倒何故彼心住名爲顚倒
게송에 이르기를 “실상의 염처를 여의었기 때문에 저 진실한 지혜에 머물지 못하나니 그런 까닭에 뒤바뀐 말을 한다”라고 하였다.
015_0333_c_03L偈言以離於實念不住彼實智是故說顚倒
‘여래께서 말씀하신 모든 마음이 머무는 곳은 모든 마음이 다 머무는 곳은 아니다’라고 한 이 구절은 4념처(念處)를 멀리 여읜 것을 나타내 보이려고 한 것이다.
015_0333_c_04L來說諸心住皆爲非心住者此句示現遠離四念處故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마음이 머문다’는 것은 저 염처에 머무는 것인데 저 염처를 여의었기 때문에 ‘머물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 머문다는 것과 근본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이름은 다르지만 뜻은 같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진실한 지혜에 머물지 않는 까닭에 ‘마음이 머문다’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머물지 않고 계속 이어져서 행인(行因)이 끊어지지 않으므로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데, 저것이 계속 이어져 뒤바뀐 견해가 일어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015_0333_c_06L此以何義心住者住彼念處以離彼念處故云不住不動根本名異義一若如是不住是故說心住此明不住相續不斷行是故不住示彼相續顚倒
경에 “무슨 까닭이겠느냐? 수보리야, 과거의 마음도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얻을 수 없으며 미래의 마음도 얻을 수 없느니라”라고 한 것은 과거와 미래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은 허망한 분별이기 때문에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015_0333_c_10L如經以故須菩提過去心不可得現在心不可得未來心不可得以過去未來故不可得現在心虛妄分別故不可
이와 같은 것은 그 마음이 머물러 뒤바뀐 견해를 일으키므로 모든 인식작용이 허망하여 3세관(世觀)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무엇 때문에 복덕에 의거하여 거듭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3_c_14L如是示彼心住顚倒諸識虛妄以無三世觀故何故依福德重說譬喩偈言

불지혜(佛智慧)의 근본은
뒤바뀐 공덕이 아님을
이 복덕의 모습으로써
비유를 들어 거듭 말씀하셨다.
015_0333_c_15L佛智慧根本
非顚倒功德
以是福德相
故重說譬喩

이 게송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다시 의심하기를 ‘앞에서 마음이 뒤바뀐 망상에 머물고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만약 이와 같다면 복덕을 얻는다는 것도 뒤바뀐 망상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뒤바뀐 망상을 선한 법[善法]이라고 부를까?’라고 하므로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마음이 머무는 것은 비록 뒤바뀐 것이지만 복덕이 뒤바뀐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게송에 이르기를 “불지혜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015_0333_c_17L此說何義復有疑向說心住顚倒如是福德亦是顚倒若是顚倒何名善法爲斷此疑示現心住雖顚倒德非顚倒何以故偈言佛智慧根本
어떻게 그 근본을 나타내 보였는가? 경에 “수보리야, 만약 복덕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는 곧 복덕의 덩어리, 복덕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015_0333_c_22L云何示現根本如經須菩提若福德有實如來則不說福德聚福德聚
015_0334_a_01L이 뜻은 무엇인가?
유루(有漏)의 복덕 덩어리는 그것이 곧 뒤바뀐 것이다. 이 복덕의 덩어리는 곧 유루이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의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또 복덕의 덩어리라는 것은 곧 복덕의 덩어리이니, 왜냐하면 만약 복덕의 덩어리가 아니라면 여래께서는 지혜의 근본이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복덕의 덩어리라고 한 것은 곧 복덕의 덩어리인 것이다.
015_0334_a_01L此義云何明有漏福德聚是其顚以此福德聚是有漏故所以如來不說福德聚又福德聚者卽福德聚何以故若非福德聚者如來則不說爲智慧根本是故福德聚者卽福德聚
【經】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만하게 갖춘 색신(色身)으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015_0334_a_06L經曰須菩提於意云何佛可以具足色身見不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색신으로 여래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원만하게 갖추었다고 하는 색신은 곧 원만하게 갖춘 색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원만하게 갖춘 색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015_0334_a_08L須菩提言不也世尊如來不應以色身見何以故如來說具足色身卽非具足色身是故如來說名具足色身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원만하게 갖춘 여러 가지 상호로 여래를 볼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는 원만하게 갖춘 여러 가지 상호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여러 가지 상호를 원만하게 갖추었다는 것은 곧 원만하게 갖춘 것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여러 가지 상호를 원만하게 갖추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015_0334_a_11L佛言須菩提於意云何來可以具足諸相見不須菩提言世尊如來不應以具足諸相見以故如來說諸相具足卽非具足故如來說名諸相具足
【論】 또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모든 부처님이 무위법(無爲法)으로 인해 그런 이름을 얻었다면, 어째서 모든 부처님은 여든 가지 훌륭한 모습과 서른두 가지 상호를 성취하시고서도 부처라고 말하는가?’라고 하므로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그러므로 색신을 성취한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없으며, 성취한 여러 가지 상호로 여래를 볼 수 없다”라고 말한 것이다.
또한 색신에는 여든 가지 좋은 형색과 서른두 가지 상호가 포함되어 있다.
015_0334_a_15L論曰復有疑若諸佛以無爲法得名云何諸佛成就八十種好三十二相而名爲佛爲斷此疑是故說非成就色身非成就諸相得見如來又色身攝得八十種好三十二相
경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원만하게 갖춘 색신은 곧 원만하게 갖춘 색신이 아니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원만하게 갖춘 색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모든 상호를 원만히 갖추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곧 원만하게 갖춘 것이 아니니,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 모든 상호를 원만하게 갖추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4_a_20L如經何以如來說具足色身卽非具足色身是故如來說名具足色身何以故來說諸相具足卽非具足是故如來說名諸相具足何故如是說偈言
015_0334_b_01L
법신(法身)의 필경체(畢竟體)는
좋은 상호의 몸이 아니요
상호를 성취한 것도 아니니
그것은 법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015_0334_b_01L法身畢竟體
非彼相好身
以非相成就
非彼法身故

법신을 여의지도 않지만
저 두 가지10)도 부처가 아닌 것은 아니니
성취라고 거듭해서 말한 것은
저 두 가지11)는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있다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015_0334_b_03L 不離於法身
彼二非不佛
故重說成就
亦無二及有

이 두 게송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저 법신은 필경의 몸이다. 색신(色身)을 성취한 것도 아니요, 또한 모든 훌륭한 모습을 성취한 것도 아니다.
‘저것은 몸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몸이 아니다’라고 한 것은 법신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도 부처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는 것은 곧 저것도 여래의 몸이기 때문이다.
015_0334_b_04L此二偈說何義彼法身畢竟體非色身成就亦非諸相成就以非彼身故非彼身者以非彼法身相故此二非不佛卽彼如來身有故
무엇이 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색신을 성취함이요, 둘째는 여러 가지 상호를 성취함이니, 이 두 가지 법은 법신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여래의 몸은 상호(相好)를 성취했다는 언설(言說)이 있게 된 것이다.
어째서 그런 말이 있게 된 것인가?
015_0334_b_08L何者是二者色身成就二者諸相成就以此二法不離於法身是故彼如來身成就相好亦得說有云何說有
경에서 “색신을 성취하였고 모든 상호도 성취하였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게송에 이르기를 “저 두 가지도 부처가 아닌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이 두 가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몸을 성취한 것도 아니고 상호를 성취한 것도 아님을 말한 것이며, 또한 있다고 말한 것은 색신과 모든 상호를 성취하였기 때문이니, 게송에 이르기를 ‘두 가지는 있다고 할 수도 있고 없다고 할 수도 있다’라고 한 것이다.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이 말했는가?
저 법신 가운데에는 이러한 상호가 없으므로 곧 이런 이치를 설명한 것이다.
여래는 색신을 성취하였고 모든 상호도 성취하였다고 한다면 그 몸을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법신은 이와 같지 않다고 말했으니, 법신은 그러한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015_0334_b_11L經言色身成就諸相成就是故偈言彼二非不佛是故此二亦得言無故說非身成就非相成就亦得言有故說色身成就諸相成就故偈言亦無二及何故如是說以彼法身中無卽於是義說如來色身成就諸相成以不離彼身故而法身不如是說以法身非彼體故
015_0334_c_01L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여래가 ‘나는 당연히 설법한 것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여래가 설법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며, 내가 말한 뜻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가 법을 말했다, 법을 말했다라고 한 것은 어떤 법도 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법을 말했다고 하느니라.”
015_0334_b_19L經曰佛言須菩提於意云何汝謂如來作是念我當有所說法耶須菩提莫作是念何以故若人言如來有所說法則爲謗佛不能解我所說故以故須菩提如來說法說法者無法可說是名說法
【論】 또 의심하기를 ‘여래가 색신을 성취하여 원만하게 갖춘 것으로서의 부처를 보아서는 안 되고 만약 상호를 성취한 것으로서의 여래를 보아서도 안 된다고 한다면 왜 여래가 법을 말했다고 하는 것일까?’라고 하므로 이 아래 경문에서는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다.
015_0334_c_02L論曰復有疑若如來具足色身成就不可得見若相成就不可得見云何言如來說法自下經文爲斷此疑
경에서 “여래께서 설법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곧 부처를 비방하는 것이요, 내가 말한 뜻을 모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4_c_05L若人言如來有所說法則爲謗佛不能解我所說此義云何偈言

불법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설법하신 두 가지12)에 차별이 있으니
법계를 여의지도 아니하고
설법은 스스로의 모습도 없다.
015_0334_c_07L如佛法亦然
所說二差別
不離於法界
說法無自相

무슨 까닭에 ‘법을 설한다, 법을 설한다’라고 두 번씩이나 거듭해서 말했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설법하신 두 가지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설한 법이요 둘째는 이 경의 뜻이다.
무슨 까닭에 “어떤 법도 말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일컬어 법을 말했다”라고 했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법계를 여의지도 않고 설법은 스스로의 모습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말로 설명한 법은 참다운 법계를 떠난 것이라서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015_0334_c_09L何故重言說法說法者偈言所說二差別何者是二一者所說法二者所有義何故言無法可說是名說法偈言不離於法界說法無自相此以何義所說法離於眞法界不可得自相見故
【經】 그때 혜명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중생이 미래 세계에서 이 법문을 듣고 신심을 낼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그들은 중생도 아니며,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아니라고 하시므로 이를 일컬어 중생이라고 하느니라.”
015_0334_c_15L經曰爾時慧命須菩提白佛言世尊頗有衆生於未來世聞說是法生信心不佛言須菩提彼非衆生非不衆何以故須菩提衆生衆生者如來說非衆生是名衆生
【論】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것이 없다고 말한다면 말씀하신 법도 법신에서 떠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것이 없다면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매우 심오한 법계를 믿을 수 있을까?’라고 할 것이므로 이 아래의 경문에서는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4_c_20L論曰復有疑若言諸佛說者是無所說法不離於法身亦是其無有何等人能信如是甚深法界自下經文爲斷此疑偈言
015_0335_a_01L
말로 설명한 법이나 설명한 사람이 매우 심오하지만
능히 믿는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다.
중생, 중생이 아니요
성인도 아니며 성인이 아닌 것도 아니다.
015_0335_a_01L所說說者深
非無能信者
非衆生衆生
非聖非不聖

무슨 까닭에 “수보리야, 중생도 아니요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중생, 중생도 아니요, 성인도 아니며 성인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이 경을 믿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중생이 아니다. ‘중생이 아니다’라는 것은 성인의 바탕이 없지 않기 때문이요, 성인의 바탕이 없지 않다는 것은 범부의 바탕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성인의 성품이 있기 때문이니, 그 사람은 범부 중생이 아니요 성체(聖體) 중생이 아닌 것도 아니다.
015_0335_a_03L何故言須菩提非衆生非不衆生者偈言非衆生衆生非聖非不聖以何義若有信此經彼人非衆生衆生者非無聖體非無聖體者非凡夫體故非不衆生者以有聖體故人非凡夫衆生非不是聖體衆生
경에 “왜냐하면 수보리야, 중생, 중생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아니라고 하셨으므로 이를 일컬어 중생이라고 하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이 아니라고 하셨다’는 것은 범부 중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생, 중생이라고 말하였으며, 성인 중생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중생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015_0335_a_09L何以故須菩提衆生衆生者如來說非衆生是名衆生如來說非衆生者非凡夫衆生是故說衆生衆生以聖人衆生是故說非衆生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증득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조그마한 법도 여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 것이 없습니다.”
015_0335_a_13L經曰佛言須菩提於意云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須菩提言不也世尊世尊無有少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015_0335_b_01L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물론 나아가 어떤 조그만 법도 증득한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부르느니라.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은 것이 없으므로 이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부르느니라.
중생이라는 것도 없고 남이라는 것도 없으며 수명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평등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며, 모든 선법을 닦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느니라.
수보리야, 선법(善法), 선법이라는 것은 여래께서 선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이것을 선법이라고 부르느니라.”
015_0335_a_17L佛言如是如是須菩提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乃至無有少法可得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復次須菩提是法平等無有高下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以無衆生無人無壽者得平等阿耨多羅三藐三菩提一切善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所言善法善法者如來說非善法是名善法

【論】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여래께서 한 법도 증득한 것이 없는 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부른다 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상상(上上)의 증(證)을 떠나 전전(轉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고 할까?’라고 생각하므로 이 아래 경문에서는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떠한 법도 증득하지 않은 것을 일컬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라고 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5_b_02L論曰復有疑若如來不得一法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云何離於上上證轉轉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自下經文爲斷此疑示現非證法名爲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此義云偈言

그곳엔 작은 법도 없으니
무상보리(無上菩提)인 줄 안다.
법계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으므로
청정하고 평등한 스스로의 모습이라고 한다.
015_0335_b_08L彼處無少法
知菩提無上
法界不增減
淨平等自相

더없이 높은 방편이 있고
유루법(有漏法)도 여의었다.
그런 까닭에 유루법은 청정한 법이 아니요
이것만이 오직 청정한 법이다.
015_0335_b_10L 有無上方便
及離於漏法
是故非淨法
卽是淸淨法

이 두 게송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저 보리가 존재하는 곳도, 한 법도 증명할 수도 없는 것이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부른다.
경에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어떤 조그만 법에서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을 증득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법계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기 때문이다.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은 곧 법이 평등하기 때문이니, 그런 까닭에 무상(無上)이라고 말한 것이다.
015_0335_b_11L此明何義彼菩提處無有一法可證名爲阿耨多羅三藐三菩提如經無有少法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彼復有何義偈言法界不增減不增減者是法平等是故名無
또한 무상상(無上上)이기 때문에 경에 “또 수보리야, 이 법은 평등하여 높고 낮음이 없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모든 불ㆍ여래의 청정한 법신(法身)은 평등하여 차별이 없고, 그곳엔 더 뛰어난 것도 없다. 그런 까닭에 위가 없다고 말한 것이다.
015_0335_b_17L以更無上上故如經復次須菩提是法平等無有高下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又諸佛如來淸淨法身平等無差別於彼處無有勝者故說無上
경에 “중생이라는 것도 없고 남이라는 것도 없으며 수명이라는 것도 없기 때문에 평등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요, 또 그 법은 나라는 것이 없고 자체가 진실하며 또다시 더 이상 높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하는 것이다.
015_0335_b_21L如經以無衆生無人無壽得平等阿耨多羅三藐三菩提又彼法無我自體眞實更無上上故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
015_0335_c_01L또 그 법은 이보다 더 훌륭한 방편이 없고 일체의 선법이 원만하게 갖추어졌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말한다.
그밖에 보리는 선법이 원만하게 갖추어지지는 않았지만 다시 훌륭한 방편이 있기 때문에 경에 “모든 선법을 닦으므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수보리야, 선법, 선법이라고 말한 것은 여래께서 선법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므로 이것을 선법이라고 부르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왜 이런 말을 했는가?
015_0335_c_01L又彼法有無上方便以一切善法滿足故阿耨多羅三藐三菩提餘菩提者法不滿足更有上方便如經一切善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故須菩所言善法善法者如來說非善法是名善法何故如是說
게송에 이르기를 “유루법을 여의었으므로 저 번뇌가 있는 것은 청정한 법이 아니요 곧 이것만이 청정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015_0335_c_07L偈言及離於漏法是故彼漏非是淨法此卽是淸淨法故此以何義
그 법엔 유루의 법이 없기 때문에 선법이 아니라고 하고, 유루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선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니, 그 법은 아주 확실하게 무루의 선법이기 때문이다.13)
015_0335_c_09L彼法無有漏法名非善法以無有漏法故是故名爲善法以決定無漏善法故

【經】 “수보리야,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여러 수미산왕(須彌山王)과 동등한 일곱 가지의 보배 덩어리를 어떤 사람이 가져다가 보시에 사용하고, 또 다른 어떤 사람은 이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과 나아가 4구게(句偈) 등을 받아 지녀서 읽고 외우거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명해 준다면 앞의 복덕은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백천만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가라분(歌羅分)14)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수분(數分)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우파니사다분(優波尼沙陀分)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치지 못할 것이니라.”
015_0335_c_11L經曰須菩提三千大千世界中所有諸須彌山王如是等七寶聚有人持用布施若人以此般若波羅蜜經乃至四句偈等受持讀誦爲他人說前福德百分不及一千分不及一千萬分不及一歌羅分不及一數分不及一優波尼沙陁分不及一乃至筭數譬喩所不能及
【論】 또 의심하기를 ‘만약 모든 선한 법을 원만하게 갖추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한다면 설법하는 것으로는 큰 보리(菩提)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설법하는 것은 무기법(無記法)이기 때문이다’라고 할 것이므로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거듭 뛰어난 복의 비유를 들어 말한 것이다.
어떤 뜻을 나타내 보이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5_c_19L論曰復有疑若一切善法滿足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則所說法不能得大菩提何以故以所說法無記法故爲斷此疑重說勝福譬喩示現何義偈言
015_0336_a_01L
비록 무기법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그 원인을 말한 것이니
그런 까닭에 한 법보(法寶)가
한량없이 많은 귀중한 보배를 보시한 것보다 뛰어나다.
015_0336_a_01L雖言無記法
而說是彼因
是故一法寶
勝無量珍寶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비록 법을 설한 것이 무기라고는 하지만, 큰 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설법한 것을 멀리 여의고서는 큰 보리를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이 법은 보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또 무기라고 말한 것은 그 뜻이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네 법[汝法]은 무기이지만 내 법[我法]은 기(記)이기 때문이다.
015_0336_a_03L此義云何雖言所說法是無記而能得大菩提何以故以遠離所說法不能得大菩提以是義故此法能爲菩提因又言無記者此義不然何以故汝法是無記而我法是記
게송에 이르기를 “이런 까닭에 한 법보가 한량없이 많은 귀중한 보배를 보시한 복보다 더 뛰어나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법을 설한 것이 저 아승기 수미산과 동등하리만큼 많은 귀중한 보배를 보시한 것보다 더 뛰어나다고 한 이유가 된다.
이것은 경에서 “만약 어떤 사람이 이 『반야바라밀경』과 나아가 한 4구게 등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설법한다면 앞의 복덕은 이와 같은 복에 비하여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이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6_a_08L偈言是故一法寶勝無量珍寶是故此所說勝彼阿僧祇須彌等珍寶故如經若人以此般若波羅蜜經乃至一四句偈等受持讀誦爲他人說於前福德百分不及一如是等此示何義偈言

산수의 힘도 이보다 더 뛰어난 것 없고
인과의 그러한 것도 이보다 더 뛰어난 것 없다.
일체 세간의 그 어떤 법으로도
여기에 비유할 만한 것이 없다.
015_0336_a_13L數力無似勝
無似因亦然
一切世閒法
不可得爲喩

이 게송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앞의 복덕보다 이 복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어째서 더 뛰어난가?
첫째는 숫자의 뛰어남이요, 둘째는 힘의 뛰어남이요, 셋째는 어느 것과도 서로 비슷할 수 없는 뛰어남이요, 넷째는 그 원인의 뛰어남이다.
그런 까닭에 게송에 이르기를 “일체 세간의 그 어떤 법으로도 이것에 비유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015_0336_a_15L此說何等義示於前福德此福爲勝云何爲勝一者數勝二者力勝三者不相似勝四者因勝是故偈言一切世閒法不可得爲喩
‘숫자의 뛰어남’이란 경에서 “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아가 어떤 산수의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라고 한 것과 같으니, 숫자는 한계가 없기 때문에 그밖에 모든 숫자의 개념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힘이 뛰어나다’는 것은 경에서 “가라분의 1에도 미칠 수 없다”라고 하였기 때문이요, ‘어느 것과도 서로 비슷할 수 없는 뛰어남’이라는 것은 이 복덕에 대해서 그 수가 서로 비슷하지 못함이니, 이 복덕은 숫자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에서 “어떤 숫자로도 미칠 수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36_a_19L數勝者如經百分不及一乃至筭數譬喩所不能以數無限齊故攝得餘數應知力勝者如經不及一歌羅分無似勝者此福德中數不相似以此福德不可數故如經數不能及
015_0336_b_01L‘그 원인의 뛰어남’이라는 것은 인과(因果)가 서로 비슷할 수 없음이니, 이 인과가 저 인과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경에서 “나아가 우바니사타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이 법은 가장 뛰어나 그 어떤 세간법으로도 이 법에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니, 게송에 이르기를 “일체 세간의 그 어떤 법으로도 여기에 비유할 만한 것이 없다”라고 한 이유가 그것이다.
이와 같아서 이 복덕 가운데 저 복은 너무도 미미하고 적으니, 그런 까닭에 어떤 법으로도 비유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015_0336_b_01L因勝者因果不相似以此因果勝彼因果故乃至優波尼沙陁分不及一此法最勝無有世閒法可喩此法故偈言一切世閒法不可得爲喩是此福德中彼福微少是故無法可喩
【經】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여래께서 스스로 ‘나는 중생들을 제도한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라. 왜냐하면 진실로 어떤 중생도 여래는 제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니라.”
015_0336_b_07L經曰須菩提於意云何汝謂如來作是念我度衆生須菩提莫作是見何以故實無有衆生如來度者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진실로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그 여래에게는 나라는 모습ㆍ남이라는 모습ㆍ중생이라는 모습ㆍ수명이라는 모습이 있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곧 나라는 모습이 아닌데 모도(毛道)15) 범부 중생들이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니라.
수보리야, 여래는 모도 범부 중생을 중생이 아니라고 말하니, 그런 까닭에 모도 범부 중생이라고 말하느니라.”
015_0336_b_10L佛言菩提若有實衆生如來度者如來則有我衆生壽者相須菩提1如來說有我者則非有我而毛道凡夫生者以爲有我須菩提毛道凡夫生者來說名非生是故言毛道凡夫生
【論】 또 의심하기를 ‘만약 법이 평등하여 그 모습에 높고 낮은 것이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여래께서는 중생을 제도한다고 말할까?’라고 할 것이므로 이 아래의 경문에서는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의심을 끊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6_b_15L論曰復有疑若是法平等相無有高下者云何如來名爲度衆生自下經文爲斷此疑云何斷疑偈言

평등한 진법계(眞法界)에서는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지 않으니
모든 이름은 저 음(陰)과 함께 하기 때문에
법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015_0336_b_18L平等眞法界
佛不度衆生
以名共彼陰
不離於法界
015_0336_c_01L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임시로 붙여진 이름인 중생은 5음(陰)과 함께 하기 때문에 그것을 일컬어 그 음과 함께 한다고 하였다.
게송에 이르기를 “법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그것이 법계와 차별이 없기 때문이요, 게송에 이르기를 “부처님께서 중생을 제도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은 경에서 “‘왜냐하면 진실로 어떠한 중생도 여래가 제도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만약 여래가 진실로 제도할 중생이 있다고 한다면 그 여래에게는 나라는 모습ㆍ남이라는 모습ㆍ중생이라는 모습ㆍ수명이라는 모습이 있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6_b_20L此義云何衆生假名與五陰共故名共陰不離於法界偈言不離於法彼法界無差別故偈言平等眞法界是故如來不度一衆生偈言佛不度衆生如經何以故實無有衆生如來度者佛言須菩提若有實衆生如來度者如來則有我壽者相者此明何義偈言

내가 제도한다고 집착하면 허물이 되니
그것은 법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데 집착하는 것은
집착해서는 안 될 것에 집착하는 망집(妄執)인 줄 알아야 한다.
015_0336_c_05L取我度爲過
以取彼法是
取度衆生故
不取取應知

이 게송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만약 여래에게 ‘5음 가운데 제도할 중생이 있다’라는 이와 같은 마음이 있다면, 이것은 곧 모습에 집착하는 허물이 된다. 그것은 법에도 집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송에 이르기를 “중생을 제도한다는 데 집착한다는 것은 집착해서는 안 될 것에 집착하는 망집인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5음 가운데 중생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생을 제도한다는 데 집착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은 모든 중생들을 해탈케 해야겠다는 이와 같은 상(相)이 있기 때문이다.
015_0336_c_07L此義云何若如來有如是心五陰中有衆生可度此是取相過以著彼法故偈言取我度爲過以取彼法以取五陰中是衆生故取度衆生故欲令衆生得解脫有如是相
경에 다시 말하기를 “수보리야, 여래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모습이 있다는 것은 곧 나라는 모습이 아닌데 모도 범부 중생들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이 의미는 무엇인가?
게송에 이르기를 “집착해서는 안 될 것에 집착하는 망집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이 그 이유이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이 있는가?
그것은 진실한 뜻이 아니니, 그런 까닭에 그것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집착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것은 곧 모도 범부에 집착하는 것이니, 이것에 집착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집착해서는 안 될 것에 집착한다고 말한 것이다.
또 ‘수보리야 여래는 모도 범부 중생을 중생이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라고 한 것은 성인의 법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중생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015_0336_c_13L經復言須菩提如來說有我者非有我而毛道凡夫生者以爲有我此義云何偈言不取取應知以何義以彼不實義是故彼不取不取者卽是毛道凡夫取而卽是不取故言不取取故須菩提毛道凡夫生者如來說名非生不生聖人法故言非生
015_0337_a_01L【經】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좋은 모습을 성취한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말하였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에는 좋은 모습을 성취한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니라, 그러하니라. 수보리야, 좋은 상호를 성취한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만약 좋은 상호를 성취한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전륜성왕(轉輪聖王)도 곧 여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좋은 모습을 성취한 것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
015_0336_c_20L經曰須菩提於意云何可以相成就得見如來不須菩提言如我解如來所說義不以相成就得見如來佛言如是如是須菩提不以相成就得見如來佛言須菩提若以相成就觀如來者轉輪聖王應是如來是故非以相成就得見如來
【論】 다시 의심하기를 ‘가령 좋은 모습을 성취한 것으로 여래를 볼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바탕이 여래 법신의 바탕이 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좋은 모습을 성취한 것으로 여래의 법신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비지(比知)는 여래의 법신이 복을 지었기 때문에 그런 좋은 모습을 성취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할 것이므로 아래 경문에서는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그 의심을 끊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7_a_04L論曰復有疑雖相成就不可得見如以非彼體以如來法身爲體而如來法身以見相成就比知則知如來法身爲福相成就自下經文爲斷此云何斷疑偈言

이 색신(色身)의 모습인
비지(比知)는 여래가 될 수 없다.
모든 부처님만이 오직 법신이요
전륜왕은 부처가 아니다.
015_0337_a_09L非是色身相
可比知如來
諸佛唯法身
轉輪王非佛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복덕을 지었기 때문에 이러한 과보(果報)의 모습을 성취한 것이다. 이러한 좋은 상호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곧 복덕의 힘으로 큰 보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이와 같다면 여래도 모습을 성취한 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한 것이리라”라고 할 것이므로 이러한 의심을 차단하기 위한 까닭에 경에서 “만약 좋은 모습을 성취한 것으로써 여래를 볼 수 있다면 마땅히 전륜성왕도 여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좋은 모습을 성취한 것으로는 여래를 볼 수 없느니라”라고 한 것이다.
이 뜻은 또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7_a_11L此義云何有人言福德能成是相果以成是相故則知福德力得大菩若如是如來則以相成就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爲遮此故如經以相成就觀如來者轉輪聖王應是如來是故非以相成就得見如來此義云何偈言

상호(相好)의 과보(果報)는
복덕(福德)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니
참된 법신(法身)을 증득한 것은
방편의 특이한 모습 때문이다.
015_0337_a_18L非相好果報
依福德成就
而得眞法身
方便異相故

이 게송은 무엇을 뜻하는가?
법신은 곧 지혜의 상신(相身)이니, 복덕은 이 상신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015_0337_a_20L此明何義法身者是智相身福德者是異相身故
【經】 그때 세존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015_0337_a_22L經曰爾時世尊而說偈言
015_0337_b_01L
만약 색(色)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
015_0337_a_23L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저 여래의 미묘한 바탕은
곧 법신의 모든 부처님이니
법체(法體)는 볼 수 없는 것
저들의 지식으론 알 수 없으리.
015_0337_b_02L 彼如來妙體
卽法身諸佛
法體不可見
彼識不能知

【論】 이 두 게송은 무슨 뜻을 말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7_b_03L論曰此二偈說何義偈言

오직 색으로 보려 하거나 소리로만 들으려고 하면
이런 사람은 부처를 알지 못하리.
이 진여(眞如)의 법신은
곧 인식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015_0337_b_04L唯見色聞聲
是人不知佛
以眞如法身
非是識境故

이 게송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여래의 법신은 마땅히 이와 같은 견문(見聞)으로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문으로는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이 색을 보고 소리를 듣는 것으로써는 어느 누구도 여래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니, 범부는 볼 수 없음을 말한 것이다.
015_0337_b_06L此示何義如來法身不應如是見聞不應如是見聞者不應如是見色聞聲以何等人不能見謂凡夫不能見故
게송에서 말한 “오직 색으로 보려 하거나 소리로만 들으려고 하면 이런 사람은 부처를 알지 못하리”라고 한 것이 그 까닭이요, 경에서 “이 사람은 삿된 길을 가는 것이니 여래를 볼 수 없으리라”라고 한 것 같은 것들이 다 그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 사람이라고 한 것은 곧 범부의 사람으로서는 진여의 법신을 볼 수 없다는 뜻이니, 경에서 “저 여래의 미묘한 바탕은 곧 법신의 모든 부처님이니, 법체는 볼 수 없는 것이어서 저들의 식견으론 알 수 없으리”라고 한 것이 그 까닭이다.
015_0337_b_09L偈言唯見色聞聲是人不知佛是人行邪道不能見如來是人是凡夫人不能見眞如法身如經彼如來妙體卽法身諸佛法體不可彼識不能知

【經】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래께서 좋은 상호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느냐?
015_0337_b_14L經曰須菩提於意云何如來可以相成就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수보리야, 여래께서 좋은 상호를 성취하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했다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말라.
수보리야, 내가 만약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것은 모든 법의 단멸상(斷滅相)을 말하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면, 수보리야, 너는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아라. 왜냐하면 보살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는 모든 법은 다 끊어져 사라지는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015_0337_b_16L須菩莫作是念如來以相成就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須菩提汝若作是菩薩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說諸法斷滅相須菩提莫作是念何以故菩薩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不說諸法斷滅相故
015_0337_c_01L수보리야, 만약 선남자나 선여인이 항하강의 모래알만큼 많은 수의 세계를 가득 채울 만한 일곱 가지 보배를 보시에 사용하는 이가 있고, 또 다른 어떤 보살은 일체법에는 나라는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생멸이 없는 법인[無生法忍]을 증득했다면, 이 공덕은 앞사람이 얻은 공덕보다 훨씬 뛰어나리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보살들은 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015_0337_b_22L須菩提善男子善女人以滿恒河沙等世界七寶持用布施若有菩薩知一切法無我得無生法忍此功德勝前所得福須菩提以諸菩薩不取福德故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어째서 보살은 복덕에 집착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보살은 복덕을 받더라도 복덕에 집착하지 않으니, 그런 까닭에 보살은 복덕을 취한다고 말하느니라.”
015_0337_c_03L須菩提白佛言世尊菩薩云何不取福德須菩提菩薩受福德不取福德故菩薩取福德
【論】 어떤 사람이 ‘만약 복덕에 의지하는 것으로써는 큰 보리를 증득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모든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이 복덕을 잃어버릴 것이요 과보(果報)도 잃게 되리라’는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게 될 것이므로 아래 경문은 이러한 의혹을 끊게 하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의심을 끊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7_c_06L論曰有人起如是心若不依福德得大菩提如是諸菩薩摩訶薩則失福德及失果報自下經文爲斷此疑云何斷疑偈言

공덕의 원인과
저 뛰어난 과보(果報) 잃지 않고
증득한 거룩한 법인도 잃지 않나니
번뇌 없는 과업[無垢果]을 증득했기 때문이다.
015_0337_c_09L不失功德因
及彼勝果報
得勝忍不失
以得無垢果

뛰어난 복덕의 모습 보이기 위해
그런 까닭에 비유를 들어 설명했다.
이 복덕은 과보 없으니
그러므로 복을 받고도 집착하지 않는다.
015_0337_c_11L 示勝福德相
是故說譬喩
是福德無報
如是受不取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비록 복덕에 의하여 진실한 보리를 얻는 것은 아니지만 복덕과 그 과보 또한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혜의 장엄함과 공덕의 장엄함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저 복덕에 의거하여 거듭 비유로 설명하였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이미 증득한 거룩한 법인도 잃지 않으니 번뇌 없는 과보를 얻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 그 이유이다.
015_0337_c_12L此義云何雖不依福德得眞菩提不失福德及彼果報何以故以能成就智慧莊嚴功德莊嚴故何故依彼福德重說譬喩偈言得勝忍不失得無垢果
이 뜻은 또 무엇인가?
어떤 사람이 ‘모든 보살마하살은 생멸이 없는 법인(法忍)을 얻었으니, 세간을 벗어난 지혜를 얻었을 것이므로 그 복덕과 과보는 잃어버렸을 것이다’는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므로 이런 의심을 차단하기 위하여 복덕을 잃지 않았고 또한 청정하고 수승한 공덕도 얻었기 때문에 잃지 않는다는 것을 보인 것이니, 경에서 “왜냐하면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는 모든 법은 다 끊어져 사라지는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015_0337_c_17L此義云何有人起如是諸菩薩摩訶薩得無生法忍以得出世閒智失彼福德及以果報爲遮此故示現福德不失而更得淸淨殊勝功德是故不失如經何以故菩薩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於法不說斷滅相
015_0338_a_01L“만약 어떤 보살이 일체법에는 나라는 모습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생멸이 없는 법인을 얻었다”라고 한 것에서 두 가지의 무아(無我)가 있는데, 이 두 가지 나라는 것이 없는 모습을 내지 않는 까닭에 복을 받아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015_0337_c_23L若復有菩薩知一切法無我得無生法忍有二種無我不生二種無我相是故受而不取
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보살은 복덕을 받더라도 복덕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이 복덕을 취한다고 말하느니라’라고 하셨다”라고 한 것과 같다.
왜 보살은 복덕을 받더라도 복덕에 집착하지 않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이 복덕은 과보가 없으니 그러므로 복을 받고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 그 이유이다.
015_0338_a_02L佛言須菩提菩薩受福德不取福是故菩薩取福德云何菩薩受福德不取福德偈言是福德無報是受不取故
이 뜻은 무엇인가?
‘취한다’는 것은 그 복덕은 유루의 과보를 얻은 것이니, 유루의 과보이기 때문에 그 복덕은 배척할 만한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취하므로 그것을 일컬어 취한다고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도가 아닌 것을 취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 복덕은 과보가 없는 것이다.
‘과보가 없다’는 것은 저 유루(有漏)의 과보가 없는 것이니, 그런 까닭에 이 복덕을 받아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015_0338_a_06L此義云何取者彼福德得有漏果報以有漏果報故彼福德可訶如是取者名之爲取如取非道此福德無報無報者無彼有漏報是故此福德受而不取
【經】 “수보리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여래가 온다, 간다, 머문다, 앉는다, 눕는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내가 말하는 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여래란 가서 이를 곳도 없고 어디로부터 온 곳도 없는 까닭에 여래(如來)라고 부르기 때문이니라.”
015_0338_a_10L經曰須菩提若有人言如來若去若來若住若坐若臥是人不解我所說義何以故來者無所至去無所從來故名如來
【論】 만약 모든 보살들이 그 과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모든 보살들의 복덕을 중생들은 수용(受用)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8_a_13L論曰若諸菩薩不受彼果報云何諸菩薩福德衆生受用偈言

이 복덕의 보응(報應)은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자연히 이와 같은 업(業)으로써
모든 부처님으로 화현하여 시방에 나타난다.
015_0338_a_15L是福德應報
爲化諸衆生
自然如是業
諸佛現十方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화신(化身)의 작용을 밝힌 것이요 법신(法身)의 모든 부처님은 가고 옴이 없기 때문에 게송에 이르기를 ‘자연히 이와 같은 업으로 모든 부처님께서 시방에 나타나신다’라고 한 것이 그 이유이다.
여기엔 또 무슨 뜻이 담겨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8_a_17L此義云何明諸佛化身有用彼法身諸佛不去不來故偈言自然如是業諸佛現十方此復何義偈言

화신불은 오고 가지만
여래는 언제나 움직이지 않는다.
이 법계의 처소에서
하나도 아니지만 또한 다른 것도 아니다.
015_0338_a_20L去來化身佛
如來常不動
於是法界處
非一亦不異
015_0338_b_01L
이것은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는 뜻을 밝힌 것이니, 그러므로 경에서 “왜냐하면 여래란 가서 이를 곳도 없고 어디로부터 온 곳도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만약 여래가 가고 오는 차별이 있다면, 곧 항상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항상 머무는 것이니, ‘이와 같이 머문다’는 것은 변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015_0338_a_22L此明不去不來義故如經何以故來者無所至去無所從來此義云何若如來有去來差別卽不得言常如是住常如是住者不變不異故
【經】 “수보리야, 만약 선남자와 선여인이 삼천대천세계를 부수어 미세한 먼지로 만들고, 다시 그러한 미세한 먼지처럼 많은 세계를 부수어 아승기의 미세한 먼지로 만들었다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많은 미세한 먼지가 어찌 많지 않겠느냐?”
015_0338_b_03L經曰須菩提若善男子善女人以三千大千世界微塵復以爾許微塵世界碎爲微塵阿僧祇須菩提於意云是微塵衆寧爲多不
수보리가 말하였다.
“저 미세한 먼지의 수효는 매우 많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만약 이 미세한 먼지의 수효가 실제로 있는 것이라면 부처님께서는 이 미세한 먼지의 수효를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미세한 먼지의 수효는 미세한 먼지의 수효가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미세한 먼지의 수효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015_0338_b_07L須菩提言微塵衆甚多世尊何以故若是微塵衆實有者佛則不說是微塵衆何以佛說微塵衆則非微塵衆是故佛說微塵衆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천대천세계는 곧 세계가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삼천대천세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세계가 진실로 존재한다면 곧 이것은 하나로 합쳐진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니, 여래께서 말씀하신 하나로 합해진 형상은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 아니므로 부처님께서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015_0338_b_11L世尊如來所說三千大千世界則非世界是故佛說三千大千世界何以故若世界實有者則是一合相如來說一合相則非一合相故佛說一合相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야,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라는 것은 곧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니라. 그런데 다만 범부의 사람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할 따름이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나라는 견해, 남이라는 견해, 중생이라는 견해, 수명이라는 견해를 말씀하신다면,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말한 것이 올바른 말이라고 생각하느냐?”
015_0338_b_15L佛言須菩提一合相則是不可說但凡夫之人貪著其何以故須菩提若人如是言佛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須菩提意云何是人所說爲正語不
수보리가 말하였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세존 여래께서 말씀하신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수명이라는 견해는 곧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수명이라는 견해가 아니므로 이것을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수명이라는 견해라고 부르기 때문입니다.”
015_0338_b_19L須菩提不也世尊何以故世尊如來說我人見衆生見壽者見卽非我見衆生見壽者見是名我見人見生見壽者見
015_0338_c_01L“수보리야, 보살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낸 이라면 일체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고,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이와 같이 믿어야 하고, 이와 같이 법의 모습에 머물지 않아야 하느니라.
015_0338_b_23L須菩提菩薩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者於一切法應如是知如是見如是信如是不住法相
왜냐하면 수보리야, ‘법의 모양이다, 법의 모양이다’라고 말한 것은 여래께서 법의 모양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으므로 이것을 법의 모양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약 어떤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아승기 세계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일곱 가지 보배를 보시에 사용하고, 또 다른 선남자와 선여인은 보살의 마음을 내어 이 반야바라밀과 나아가 4구게(句偈) 등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설법한다면 그 복은 저 무량 아승기의 보배를 보시한 복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니라. 어떻게 남을 위하여 연설하는가 하면, 설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일컬어 설법이라고 하느니라.”
015_0338_c_02L何以故須菩提所言法相法相者來說卽非法相是名法相須菩提有菩薩摩訶薩以滿無量阿僧祇世界七寶持用布施若有善男子善女人發菩薩心者於此般若波羅蜜經乃至四句偈等受持讀誦爲他人說其福勝彼無量阿僧祇云何爲人演而不名說是名爲說
【論】 부수어서 미세한 먼지로 만든다는 비유는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8_c_10L論曰碎微塵譬喩者示現何義偈言

세계를 미세한 먼지로 만든 것은
여기에 비유하여 저 뜻[法界]을 나타내 보인 것이고,
미세한 먼지를 다시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는 것은
번뇌의 멸진(滅盡)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015_0338_c_11L世界作微塵
此喩示彼義
微塵碎爲末
示現煩惱盡

이 게송은 무슨 뜻을 밝힌 것인가? 게송에 이르기를 ‘이 법계의 처소는 하나도 아니요 다른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저 모든 여래께서 진여의 법계 안에서 한곳에 머무시는 것이 아니며, 또한 각기 다른 곳에 머무시는 것도 아니니,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세계를 부수어 미세한 먼지로 만든 것에 비유한 것이다.
015_0338_c_13L此明何義偈言於是法界處非一亦非異彼諸佛如來於眞如法界中非一處住亦非異處住爲示此義故說世界碎微塵喩
이 비유는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에 이르기를 “미세한 먼지를 다시 부수어 가루로 만든 것은 번뇌의 멸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많은 미세한 먼지를 모아 덩어리가 된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으로써 하나가 아님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비유이다.
이 뜻은 또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8_c_17L此喩示現何義微塵碎爲末示現煩惱盡此喩非聚集微塵衆示現非一喩此義云偈言

모여서 덩어리가 된 것도 아니요, 합하여 모인 것도 아니며
오직 한 덩어리만도 아님을 비유한 것이다.
모여서 덩어리가 된 처소는 저것이 아니요
이것은 차별이 있는 것도 아님을 비유했다.
015_0338_c_20L非聚集故集
非唯是一喩
聚集處非彼
非是差別喩
015_0339_a_01L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미세한 먼지를 부수어 가루로 만든다는 것은 한 장소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비유한 것이요, 모여 덩어리가 된 물건이 없으므로 또한 각기 다른 차별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여서 덩어리가 된 미세한 먼지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을 수도 없고 차별이 없기 때문에 따로따로 머물지도 않는다.
이와 같아서 모든 불ㆍ여래는 번뇌의 장애를 멀리 여의었으니, 머무시는 저 법계 가운데 한 장소에 머무시는 것도 아니요 또한 각기 다른 장소에 머무시는 것도 아니다.
이와 같아서 삼천세계가 하나로 합쳐진 형상의 비유는 모여서 덩어리가 된 것이 아님을 밝힌 것이다.
015_0338_c_22L此義云何如微塵碎爲末非一處住以無有聚集物故亦非異處差別聚集微塵差別不可得故以差別不住故如是諸佛如來遠離煩惱障彼法界中非一處住亦非異處住是三千世界一合相喩非聚集故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경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하나로 합쳐진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 아니므로 여래께서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라고 말씀하셨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39_a_05L此以何義如經如來說一合相則非一合是故如來說一合相
만약 진실로 모여서 이루어진 한 덩어리의 물질이라면 여래께서는 미세한 먼지가 모여서 된 덩어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 같아서 만약 진실로 하나의 세계가 존재한다면 여래께서는 삼천대천세계를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경에서 “만약 세계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곧 이것은 하나로 합해진 형상일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015_0339_a_07L若實有一物聚集如來則不說微塵聚集如是若實有一世界如來則不說三千大千世界如經若世界實有者則是一合相故
다만 범부의 사람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할 뿐이라고 한 것은 저 모여서 이루어진 덩어리엔 어느 물건도 취할 것이 없는데도 허망하게 분별하고 있는 까닭에 범부들이 허망하게 집착한다고 하였다.
015_0339_a_11L但凡夫之人貪著其事彼聚集無物可取虛妄分別是故凡夫妄取
만약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곧 그것은 바른 견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런 까닭에 허망한 집착임을 알 수 있다.
무슨 까닭에 범부는 집착할 만한 물건이 없는데 물질에 집착하는가?
경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보리야, 하나로 합해진 형상이라는 것은 곧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인데 다만 범부의 사람들이 그 일을 탐하고 집착할 뿐이다’라고 하셨다”라고 이와 같은 등의 말을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이려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9_a_13L若有實者卽是正見故知妄何故凡夫無物而取物如經佛言須菩提一合相者則是不可說但凡夫之人貪著其事如是等此示何義偈言

다만 음성만을 따라서
범부는 뒤바뀐 모습에 집착한다.
두 가지가 없는 것이라고 부정한다 하여 도를 얻는 것이 아니니
아집과 법집의 견해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
015_0339_a_17L但隨於音聲
凡夫取顚倒
非無二得道
遠離於我法

경에서 “왜냐하면 수보리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수명이라는 견해를 말한다면 이것을 일컬어 나라는 견해ㆍ남이라는 견해ㆍ중생이라는 견해ㆍ수명이라는 견해’라고 한다”라고 한 것과 같다.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가?
015_0339_a_19L如經何以故須菩提若人如是言說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如是乃至是名我見人見衆生見壽者見此復何義
015_0339_b_01L게송에 이르기를 “두 가지가 없는 것이라고 부정한다 하여 도를 얻는 것이 아니니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의 견해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무엇인가?
나라는 것도 없는 것이요 법이라는 것도 없는 것이니, 이 두 가지 일을 여읜다 하더라도 보리를 얻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보리를 증득할 수 있는가?
저 두 가지 견해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에 보리를 증득하니, 게송에 이르기를 “아집과 법집의 견해를 멀리 여의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9_a_23L偈言非無二得道遠離於我法此義云何非無我無法離此二事而得菩提云何得菩提遠離彼二見故得於菩提偈言遠離於我法此復何義偈言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곧 옳은 견해가 아니니
실제가 없는 것을 허망하게 보는 것이다.
이것은 곧 미세한 장애이니
진여를 깨달음으로써 멀리 여의게 된다.
015_0339_b_04L見我卽不見
無實虛妄見
此是微細障
見眞如遠離

이런 까닭에 견해는 곧 견해가 아니다. 그것은 진실한 이치가 없는 것인데도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니, 나라는 것은 본래부터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저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곧 잘못된 견해라고 말씀하셨으니, 그것은 실상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실상이 없다’는 것은 곧 아무 물질도 없다는 뜻이다.
이런 뜻이 있기 때문에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곧 허망한 견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는 잘못된 견해임을 나타내 보이셨으며 법이라고 집착하는 견해도 역시 잘못된 견해라고 하셨다.
015_0339_b_06L是故見卽不見無其實義以虛妄分以是無我是故如來說彼我見卽是不見以其無實無實者卽是無物以是義故說我見卽是虛妄見如是示現我見不見故見法者亦是不見
경에서 “수보리야, 보살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킨 이라면 모든 법에 대하여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고,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이와 같이 믿어야 하고 이와 같이 법의 모습에 머물지 않아야 한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법의 모습이라고 보는 견해는 곧 모습에 대한 옳지 못한 견해이니, 마치 저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가 곧 옳지 못한 견해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
015_0339_b_11L如經須菩提菩薩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於一切法應如是知如是如是信如是不住法相此復何以見法相卽不見相如彼我見卽非見故
무슨 까닭에 이 두 가지 견해를 옳지 못한 견해라고 말하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이것은 곧 미세한 장애이니 진여를 깨달음으로써 멀리 여의게 된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또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저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와 법이라고 집착하는 견해, 이것은 곧 미세한 장애이다. 저 두 가지를 옳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법을 깨달아야 멀리 여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게송에 이르기를 “진여를 깨달아 멀리 여읜다”라고 말한 것이다.
또 “이와 같이 알아야 하고 이와 같이 보아야 하며 이와 같이 믿어야 한다”라고 한 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인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9_b_16L何故此二見說名不見偈言此是微細障見眞如遠離此復云彼見我見法此是微細障以不見彼二故是以見法而得遠離偈言見眞如遠離又如是知如是見如是信此示何義偈言

두 가지 지혜와 삼매
이러한 것을 얻어 멀리 여의는데
화신(化身)으로 복을 나타내 보였으니
무진(無盡)한 복은 없는 것이 아니다.
015_0339_b_21L二智及三昧
如是得遠離
化身示現福
非無無盡福
015_0339_c_01L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이것은 세간지[世智]와 제일의지(第一義智)와 삼매에 의지하여 저러한 장애를 멀리 여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그런 까닭에 뛰어난 복의 비유를 들어 거듭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나타내 보이려는 것인가?
게송에 이르기를 ‘화신으로 복을 나타내 보였으니, 무진한 복은 없는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이 그 이유이다.
이것은 또 무슨 뜻인가?
015_0339_b_23L此義云何示現世智第一義智及依止三昧得遠離彼障是故重說勝福譬喩此示何義偈言化身示現福無無盡福此復何義
비록 모든 부처님이 자연의 화신으로 업(業)을 짓는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한량없고 다함없는 무루(無漏)의 공덕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어떻게 남을 위하여 연설하는가 하면 설법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을 일컬어 설법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는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9_c_04L雖諸佛自然化身作業而彼諸佛化身說法有無量無盡無漏功德故云何爲人演說而不名說是名爲說者何故如是說偈言

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에
이것은 화신이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이와 같은 말씀을 하지 않으셨으니
그런 까닭에 그 말씀 바른 말씀이라네.
015_0339_c_08L諸佛說法時
不言是化身
以不如是說
是故彼說正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만약 화신의 여러 부처님께서 설법하실 때라면 ‘나는 곧 화신이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저분들이 말씀하신 것은 곧 올바른 말씀이 된다.
만약 이와 다르게 말씀하셨다면 교화시킨 중생들이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중생들에게 이익을 주지 못할 것이요 곧 그 말씀은 바른 말씀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곧 화신불이다’라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015_0339_c_10L此義云何若化身諸佛說法時不言我是化身是故彼所說是正說若不如是說者可化衆生不生敬心何以以不能利益衆生卽彼說是不正是故不說我是化佛

【經】 모든 유위의 법은
별과 눈병[翳], 등불과 환상 같고
이슬과 물거품과 꿈과 번개와 구름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
015_0339_c_15L經曰一切有爲法
如星瞖燈幻
露泡夢電雲
應作如是觀

【論】 다시 의심하기를 ‘만약 모든 불ㆍ여래께서 항상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신다고 한다면, 왜 여래께서는 열반에 드신다는 말씀을 하셨을까?’라고 할 것이므로 이런 의심을 끊게 하기 위하여 여래께서 저러한 게송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이 뜻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39_c_18L論曰復有疑若諸佛如來常爲衆生說法云何言如來入涅槃爲斷此疑是故如來說彼偈喩此義云何偈言

모든 여래의 열반은
유위도 아니요 유위법을 여읜 것도 아니다.
아홉 가지 유위법을
미묘한 지혜로 바르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015_0339_c_21L非有爲非離
諸如來涅槃
九種有爲法
妙智正觀故
015_0340_a_01L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의 열반은 유위법(有爲法)도 아니요, 또한 유위법을 여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열반을 증득하셨으면서도 화신(化身)으로서 설법하시고 세간행(世間行)을 나타내 보이시며 중생들을 이롭게 하셨기 때문이니, 이것은 모든 부처님께서는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세간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015_0339_c_23L此義云何諸佛涅槃非有爲法亦不離有爲法何以故以諸佛得涅槃身說法示現世閒行爲利益衆生故此明諸佛以不住涅槃以不住世閒
무슨 까닭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세간행을 나타내 보이시는데도 유위법에 머물지 않으시는가?
게송에 이르기를 “아홉 가지 유위법을 미묘한 지혜로 바르게 관찰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별과 같은 따위의 아홉 가지 상대법(相對法)에 대하여 바르게 관찰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아홉 가지 일을 바르게 관찰하는 것인가?
아홉 가지 경계에 대하여 어떤 경계라고 관찰해야 할지를 마땅히 아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40_a_05L何故諸佛示現世閒行而不住有爲法中偈言九種有爲法妙智正觀此以何義如星宿等相對法九種正觀故此九種正觀於九種境界應觀何境界偈言

견상(見相)과 인식작용과
기세간에 살고 있는 몸과 수용하는 일들
그리고 과거와 현재의 법과
또한 미래세상을 관찰해야 한다.
015_0340_a_09L見相及於識
器身受用事
過去現在法
亦觀未來世

어떻게 아홉 가지 법을 관찰해야 하는가?
별에 비유한 것은 해가 떠올라서 밝게 비추면 별이 비록 있을지라도 나타나지 못하는 것처럼 마음의 법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눈에 눈병이 있으면 모륜(毛輪)과 같은 헛것이 보이는 것처럼 유위법을 관찰함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사물을 거꾸로 보기 때문이다.
또 등불에 비유한 것은 인식작용도 이와 같아서 탐애법(貪愛法)에 의지하여 머무르기 때문이다.
015_0340_a_11L云何觀九種法譬如星宿爲日所映有而不現能見心法亦復如是又如目有瞖則見毛輪等色觀有爲法亦復如是以顚倒見故又如燈識亦如依止貪愛法住故
또 허깨비에 비유한 것은 사람이 의지하여 머무르고 있는 곳도 역시 이와 같아서 기세간(器世間)의 갖가지 차별상은 한결같이 그 바탕에 실상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슬에 비유한 것은 이 몸도 이와 같아서 짧은 시간을 머무르기 때문이다.
또 물거품에 비유한 것은 수용(受用)하는 일도 이와 같아서 받아들이고[受] 생각하고[想], 인연을 맺는[因] 세 가지 법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꿈에 비유한 것은 과거법(過去法)도 이와 같아서 오직 과거의 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015_0340_a_16L又如幻所依住處亦如是以器世閒種種差別無一體實故又如露身亦如是以少時住又如泡所受用事亦如是以受想因三法不定故又如夢過去法亦如以唯念故
015_0340_b_01L또 번개에 비유한 것은 현재법(現在法)도 이와 같아서 찰나(刹那)도 한곳에 머물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구름에 비유한 것은 미래법(未來法)도 이와 같아서 종자의 위치로 남아 있을 때에 아려야식(阿黎耶識)이 모든 법의 종자와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아홉 가지 법을 관찰하게 되면 어떠한 공덕을 얻으며, 어떤 지혜를 성취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015_0340_a_21L又如電現在法亦如是以剎那不住故又如雲未來法亦如以於子時阿黎耶識與一切法爲種子根本故觀如是九種法得何等功德成就何智偈言

모습과 수용(受用)에 대하여 관찰하고
삼세의 법을 관찰한 까닭에
유위법 가운데에서
때 없이 자재(自在)함을 증득한다.
015_0340_b_02L觀相及受用
觀於三世事
於有爲法中
得無垢自在

이 게송의 뜻은 무엇인가?
유위법을 관찰하는 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위법을 관찰하는 것이니 모습과 인식작용을 관찰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수용을 관찰하는 것이니 기세간 등을 관찰하여 어느 곳에 머물며 어떠한 몸으로서 어떤 것들을 수용하는가 하는 것을 관찰하기 때문이며, 셋째는 유위행(有爲行)을 관찰하는 것이니 어떠한 법이 3세에 변천하여 흐르는 차별이 있는가를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하여 세간법 가운데에서 자재함을 증득하기 때문에 게송에 이르기를 ‘유위법 가운데에서 때[垢] 없이 자재함을 증득한다’라고 하였다.
015_0340_b_04L此義云何觀有爲法三種一觀有爲以觀見相識二者觀受用以觀器世閒等以何處住以何等身受用何三者觀有爲行以何等法三世轉差別如是觀一切法於世閒法中得自在故偈言於有爲法中得無垢自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기를 마치시자 장로(長老) 수보리와 모든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와 보살마하살과 모든 세간의 천상ㆍ인간ㆍ아수라(阿修羅)ㆍ건달바(乾闥婆) 등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듣고 모두들 크게 기뻐하면서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
015_0340_b_11L經曰佛說是經已長老須菩提及諸比丘比丘尼優婆塞優婆夷菩薩摩訶薩一切世閒天阿修羅乾闥婆等佛所說皆大歡喜信受奉行

모든 부처님의 보기 드문 총지법(總持法)과
칭량(稱量)할 수 없는 심오한 네 구의 뜻을
존자(尊者)로부터 듣고 널리 설법하여
이 복덕을 돌려 수많은 중생들에게 베풀겠습니다.
015_0340_b_15L諸佛希有摠持法
不可稱量深句義
從尊者聞及廣說
迴此福德施群生
金剛般若波羅蜜經論卷下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0)색신(色身)으로 화현한 것과 서른두 가지 상호를 성취한 것이다.
  2. 11)보신불(報身佛)과 응신불(應身佛:化身佛)을 말한다.
  3. 12)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과 그 내용을 말한다.
  4. 13)악(惡)도 악이 아니요, 선(善)도 선이 아니니, 그러므로 선악의 본질은 같다는 뜻이다.
  5. 14)가라(歌羅)는 견절(堅折)ㆍ분측(分則)ㆍ계분(計分)이라고 한역하며, 물체나 시간의 아주 적은 부분. 즉 털 하나를 100으로 나눈 그 1분이다.
  6. 15)범부의 다른 이름. 가벼운 털이 바람을 따라 동요하는 것과 같이, 범부의 마음이 어리석어 일정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모두(毛頭)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