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般若燈論釋卷第十五

ABC_IT_K0578_T_015
016_0515_a_01L
반야등론석 제15권
016_0515_a_01L般若燈論釋卷第十五


용수 게송
분별명 지음
바라파밀다라 한역
이현옥 번역
016_0515_a_02L偈本龍樹菩薩 釋論分別明菩薩
大唐中印度三藏波羅頗蜜多羅譯


25. 관열반품(觀涅槃品)
016_0515_a_04L觀涅槃品第二十五

지금 이 품도 또한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고 열반에는 자체의 뜻이 없음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지은 것이다.
016_0515_a_05L釋曰今此品者亦爲遮空所對治解涅槃無自體義故說
비바사(鞞婆沙)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가 앞에서 ‘만약 일체가 공하지 않다면 곧 생기와 소멸도 없다’고 말했는데, 이것은 자체가 없다는 뜻이다. 자체가 없다면 석녀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과 같이 생기와 소멸이 없고, 번뇌도 또한 자체가 없기 때문에 생기와 소멸이 없다. 번뇌 및 명색(名色)의 원인에도 역시 생기와 소멸이 없다면 앞 품의 게송에서 ‘고(苦)를 끊고 소멸을 증득하는 것도 없는데 다시 누가 열반을 얻겠는가?’라고 설한 것과 같다. 그것을 먼저 이미 말하였지만 나는 지금 끊을 것이 있기 때문에 열반을 증득하기를 원한다.
016_0515_a_07L鞞婆沙人言彼先言若一切非空無有起滅此謂無自體義無自體者如石女兒則無起滅煩惱無自體故非是起滅而煩惱及名色因亦非起滅者如上偈說無斷苦證滅復誰得涅槃彼先已作此說者我今欲得有所斷故證於涅槃
경에서 ‘탐욕과 탐욕에 물든 자는 모두다 번뇌를 일으킨다. 이것이 다 소멸하였으므로 열반이라 이름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열반에서 심해탈(心解脫)을 얻으니, 비유하면 등불이 소멸한 것과 같다. 열반을 얻는 것은 번뇌에 자체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자체가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만약 번뇌에 실체가 없다면 열반도 없으니, 비유하면 석녀의 아이와 같다. 다시 만약 무(無) 자체를 가지고 증험하여 열반의 성취가 없다고 말해도 역시 열반을 얻는다는 뜻을 논파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법체의 차별을 논파한다. 이것을 주장과 이유를 오류가 있는 것이다.”
016_0515_a_14L如經所說染與染者共起煩惱此盡滅故名爲涅槃是涅槃心得解脫譬如燈滅得涅槃由煩惱有自體故如彼上說無自體者若無煩惱體亦無涅槃譬如石女兒復次若以無自體爲驗無得涅槃者亦破得涅槃義卽是破於差別法體是彼立義出因之過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의 말은 옳지 않다. 모든 법에 자체가 없다면 환상과 같고 등불의 꺼짐과 같아서 이것도 역시 세제지(世諦智)의 경계에 위배되지 않는다. 자체가 없다면시작도 없는 인연을 따라 전전(展轉)하여 일어나니, 환상과 같고 불꽃과 같다. 모든 행에 일어남이 없으면 열반이다. 열반을 증득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여 자체가 있지 않다. 나 역시 무체(無體)의 실체를 주장하지 않기에 주장에 오류가 없다.
016_0515_a_21L論者言說不善諸法無自體者如幻燈滅亦不違世諦智境界故無自體者無始因緣展轉而起如幻如焰諸行無起卽是涅槃證得涅槃亦復如是無有自體我亦不立無體體故非立義過
위에서 석녀를 인용하여 비유로 든 것은 제일의제 중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자체가 있다는 주장에 집착한다면 괴멸하기 때문에 끊을 것이 있다면 옳지 않다. 그래서 만약 진실한 이치를 보지 못하여 자체가 있다고 말하면 열반을 얻는다는 뜻은 성립할 수 없다. 법의 자체가 괴멸하기 때문이다. 이 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대는 처음부터 이유와 주장과 비유의 세법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오류가 있게 된다.”
016_0515_b_05L上引石女爲喩者於第一義中得成汝執有自體義者不可壞故所斷者不然以是故若不見眞實理而說有自體者得涅槃義不成法自體壞故是事云何汝向出因立義三法皆不成故有過
또다시 비바사 사람이 말하였다.
“저 게송에서 ‘만약 일체가 공하지 않다면 생기와 소멸도 없네. 고를 끊고 소멸을 증득하는 일이 없는데 다시 누가 열반을 얻겠는가?’라고 설한 것을 옳지 않다. 나는 지금 열반이 있다고 주장한다. 열반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제일의제의 모든 행에는 자체가 있어 모든 번뇌를 끊고, 나아가 명색(名色)을 소멸하여 열반을 얻기 때문에 낙타의 뿔처럼 없다. 열반은 그렇지 않다. 실체가 있고, 단멸이 있으며 소멸이 있고 얻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016_0515_b_10L復次鞞婆沙人言如彼偈說若一切非空則無有起滅無斷苦證滅復誰得涅槃者不我今立有涅槃云何爲涅槃謂第一義中諸行有自體斷諸煩惱及滅名色而得涅槃故非如駝角涅槃不有體有斷有滅有得故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앞 품의 게송에서 ‘만약 일체가 공하지 않다면 생기와 소멸이 없다. 고를 끊고 소멸을 증득함이 없는데, 어떻게 열반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설한 것과 같이 여기에서 자체가 있다고 말하며 괴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체라 하려면 설령 자기의 주장 명제에 이유를 나타내고 비유를 세워 비슷함이 있더라도 이루려는 목적과 이루는 내용에 힘이 있어야 한다. 지금 그 힘이 없으므로 이유와 비유의 뜻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또다시 그대가 앞서 세웠던 주장과도 위배된다. 내가 지금 묻겠다. 네가 세운 열반 이것이 제일의제인가, 세제인가? 만약 제일의제를 얻는 것이라면 나는 이에 대해 지금 답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5_b_16L論者言先偈說若一切非空則無有起滅斷苦證滅云何得涅槃此謂有自不可壞故自體者若是自宗出因立喩有相似者所成能成則爲有力而今無此力故因與喩義亦不成亦違汝先所立義我今問汝所立涅爲是第一義諦爲是世諦若欲得是第一義諦者我今答之如論偈說

물러남도 없고 증득도 없고
단멸도 없고 상주도 없으며
발생도 없고 소멸도 없으면
이것을 열반이라 하네.
016_0515_c_01L無退亦無得,
非斷亦非常,
不生亦不滅,
說此爲涅槃

【釋】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열반은 내가 얻고자 원하는 것임을 말한다. 그대가 설한 대로 ‘단멸하기 때문에’, ‘소멸하기 때문에’고 이유로 들어 모든 번뇌를 끊고 열반을 얻는다고 하면 그러한 이유의 뜻은 모두 옳지 않다. 다시 모든 열반이 있다고 집착하는 자가 “열반은 진실한 법이다”라고 하거나 “열반은 시설법(施設法)이다”라고 말하면 이 두 가지 모두 옳지 않다. 이 뜻으로 인하여 나중에 필히 관찰해야 할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5_c_03L釋曰此謂如是涅槃我所欲得如汝所說斷故滅故爲出因等斷諸煩惱得涅槃者此等因義今皆不成顚倒心故作如是說義皆不然復次諸執有涅槃者或說涅槃是眞實法或說涅槃是施設法二俱不然以是義故次須觀察如論偈說

열반에 자체가 있다면
늙음과 죽음의 상(相)에 떨어지네
열반에 실체가 있다면
이는 유위법(有爲法)이 되네.
016_0515_c_10L涅槃有自體,
卽墮老死相,
涅槃是體者,
卽是有爲法

【釋】이것은 열반에 자체가 있다면 증험으로써 이해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만약 열반에 자체가 있다면 늙음과 죽음에 떨어진다. 왜냐하면 유체(有體)이므로 늙음과 죽음을 떠난 것이 없고 늙음의 모습이나 죽음의 모습에도 실체를 떠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소승인 열반에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증험한 대로 “제일의제의 열반에는 실체가 없다. 늙음과 죽음의 모습이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석녀의 아이와 같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대의 주장은 이유의 뜻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유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바로 뜻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016_0515_c_12L釋曰此謂涅槃有自體者無驗可令信解若令涅槃有體卽墮老死相以故無有體離老死相亦無老相死相離體小乘之人不欲涅槃有老死以是故如我出驗第一義中涅槃非是體無老死相故譬如石女兒故汝宗因義不成因不成故亦與正義相違故
또한 지금 잘못이 있다. 만약 그대가 열반은 유위가 아니고 열반은 무위(無爲)라고만 하면 옳지 않다. 어떤 곳에 어떤 사물도 실체이면서 동시에 무위인 것은 없다. 지금 증험하겠다. 열반은 실체가 아니고 무위이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다시 그 허물을 말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016_0515_c_20L復次今更與過若汝不欲涅槃是有爲而欲得涅槃是無爲者不然無處有一物是體復是無爲者今當立驗涅槃非是體無爲故譬如空華復次更說其過如論偈說

열반에 만약 실체가 있다면
어찌하여 무인(無因)인가?
또한 어떤 법도
원인을 떠나 있지 않네.
016_0516_a_01L涅槃若有體,
云何是無因
亦無有一法,
離因而得有

【釋】여기에서 실체란 모두 원인에 의지하여 시설하는 것임을 말한다. 열반이 곧 실체라면 무인을 얻을 수 없다. 그래서 여기서 증험하겠다. 열반에 실체가 없다면 무인(無因)으로도 능히 시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과 같다.
다마라발(多摩羅跋) 및 경량부[修多羅] 사람 등이 말하였다[다마라발이란 당나라 말로 적동엽(赤銅葉)이라 함].
“비바사 사람처럼 ‘열반은 등불의 꺼짐과 같다’고 설해도 내가 지금 열반이라 설하는 것은 오로지 생기가 없는 것이다. 세제 중에 시설로서 있기에 내가 세운 바는 그 주장에 상응한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지금 이것에 대해 답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6_a_03L釋曰此謂體者皆藉因得有施設槃是體不得無因以是故此中出驗涅槃非是體無因能施設故譬如兔多摩羅跋及修多羅人等言多摩羅跋者唐言赤銅葉如鞞婆沙師說涅槃如燈滅我今說涅槃者但是無起於世諦中施設有故我所立者其義相應論者今答此者如論偈說

그대가 열반에 실체가 없다면
어째서 무체(無體)인가?
만약 열반에 실체가 없다면
어째서 무인(無因)인가?
016_0516_a_11L汝涅槃非體,
云何是無體
若涅槃無體,
云何是無因

【釋】비바사 등은 열반이 곧 제일의제라고 분별하여 번뇌를 잘 제거함을 원인으로 삼는다. 지금 그대의 뜻은 이와 같이 실체가 없기 때문에 “열반에 실체가 없다”고 말하면 옳지 않다. 뜻이 모두 옳지 않다. 비유하면 허공의 꽃과 같다. 만약 열반에 실체가 없어 자체가 없다고 말하면 다음과 같이 증험하겠다. “열반에 실체가 없지 않다”말하는 자는 이해시키기 어렵다.
016_0516_a_13L釋曰鞞婆沙等分別涅槃是第一義以息煩惱爲因今汝義非如是體而言涅槃無體者爲無善等耶皆不然譬如空華若言涅槃無實無自體者無如是驗能令開解涅槃非無體者汝之所說難令人解
또다시 비바사 사람처럼 “열반에 먼저 실체가 있다가 나중에 실체가 없다”고 분별하여 등불로서 비유를 든다면 이것은 세간에서 이해하는 바를 드러내는 것이다. 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을 때는 실체가 있는 것이고, 꺼지면 그것은 실체가 없다. 만약 그대가 실체가 없는 것에 계탁하여 ‘이미 꺼진 등불’과 같다고 헤아리면 게송에서 “만약 열반에 실체가 없으면 어째서 무인(無因)인가?”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등불에 실체가 없어도 원인이 있어시설로써 등불이라 말하는 것과 같고, 이와 같이 5음과 번뇌에 실체가 없어도 원인이 있어 시설로써 열반이라 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6_a_19L復次鞞婆沙分別涅槃先有體後無體以燈爲喩者此是顯示世閒所解以燈未滅時有體滅已是無體若汝計無體同彼已滅燈者如向偈說若涅槃無云何是無因此謂如燈無體而有因施設作燈如是諸陰煩惱無體而有因施設爲涅槃如論偈說

열반에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어도
원인에 의지하지 않네
만약 원인이 없고 연(緣)이 없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 하네.
016_0516_b_03L涅槃非無體,
而不藉因者,
若無因無緣,
是名爲涅槃

【釋】그대가 말한 것처럼 열반에 실체가 없다면 곧 이것이 제일의제이다. 이 때문에 오고가는 유전상(流轉相)의 원인으로 생사와 열반이 있다고 시설한다. 열반에 실체가 있다거나 없다고 말하면 이는 세제 중에 설하는 것이며, 제일의제는 아니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6_b_05L釋曰如汝所說涅槃無體是第一義以是故因有來去流轉相而施設有生死涅槃有體無體者是世諦中所非第一義如論偈說

대사가 존재와 비존재의
단멸을 말하였네
그러므로 열반은
없지도 않고 있지도 않네.
016_0516_b_09L大師所說者,
斷有斷非有,
是故知涅槃,
非無亦非有

【釋】경에서 말한 것처럼 “어떤 사람은 존재로써 존재를 구하고 또 다른 사람은 존재로써 존재를 구하지 않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모두 옳지 않다. 만약 “열반에 실체가 있다”고 말하면 옳지 않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그대가 세운 그 뜻은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6_b_11L釋曰如經說或有人以有求出有有人不以有求出有是皆不然若言涅槃是體者不然犢子部言我今立涅槃者與彼不同有是體義有非體有二義故無如上過是義應爾者言汝所立者其義不然如論偈說

만약 그대가 열반은
실체거나 실체가 아니라고 말하면
열반은 실체이기 때문에
해탈이라는 것은 옳지 않네.
016_0516_b_17L若汝說涅槃,
是體是非體,
涅槃是體故,
解脫者不然

【釋】여기서는 실체와 실체가 아닌 것은 서로 위배되므로 만약 열반이 실체라면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열반이 실체가 아니라면 실체가 아니다. 만약 서로 상대한다면 실체와 실체가 아닌 것의 모습이 있다. 그와 같이 말하면 뜻과 상응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분별 집착의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016_0516_b_19L釋曰此謂體非體相違故若是體則非非體若是非體則不是體若相待則有體非體相如是說者義不相何以故有分別執著過故
독자부(犢子部) 사람이 말하였다.
“열반이란 어찌하여 실체가 아닌가? 이른바 몸 및 여러 근(根)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실체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한 어찌하여 실체인가? 이른바 궁극적인 무상(無上)의 즐거움이 있기 때문에 이름하여 실체라 한다.”
016_0516_b_23L犢子部涅槃者云何非體謂身及諸根無體故名爲非體云何是體謂有畢竟無上樂故名爲是體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말은 옳지 않다. 몸과 여러 근(根) 및 깨달음 등은 이미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것도 무기(無起) 등을 부정한 것이다. 궁극에 무상(無上)의 즐거움이란 유위(有爲)의 생기를 부정하고 또한 즐거움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만약 무위의 즐거움으로 중생들을 이해시킨다면 이것은 증험함 실체는 없고, 그대가 세운 주장과도 상응하지 않는다. 또한 만약 ‘열반에 자체가 있다’고 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6_c_03L論者言此語不身諸根及覺等已遮故亦卽是遮無起等畢竟無上樂者如遮有爲起亦遮彼樂若欲以無爲樂令物解者無此驗體汝之所立義不相應復次若言涅槃有自體者如論偈說

만약 그대가 열반에
두 가지가 동시에 있다고 말하면
열반은 무위이고
두 실체는 유위이네.
016_0516_c_08L若汝說涅槃,
二俱有自體,
涅槃是無爲,
二體是有爲

【釋】이 게송은 어떤 뜻을 밝히는가? 이른바 실체와 실체가 아닌 것 외에 따로 열반의 모습이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만약 그 법과 이 법에 다른 모습이 있어서 이것이 법의 실체라면 옳지 않다. 비유하면 물과 불과 같다. 이와 같이 실체와 실체가 아닌 것이 열반의 모습이라면 옳지 않다.
016_0516_c_10L釋曰此偈顯何義耶謂顯體非體外別有涅槃相若彼法與此法有別相而是法體者不然譬如水與火如是體非體爲涅槃相者不然
다시 경량부 사람이 말하였다.
“열반은 실체가 아니며 실체가 아닌 것도 아니며 동시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것에 대해 ‘두 실체의 오류 및 유위가 되네’라고 말하면 옳지 않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역시 그러한 일은 없다. 지금은 이 말에 대해 답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6_c_14L復次修多羅人言涅槃者非體非非體故俱不可說彼向言有二體過及有爲者不論者言亦無是事今答此語如論偈說

그대가 만약 열반에는
실체가 없고 실체가 아닌 것도 없다고 말하여
실체와 실체가 아닌 것이 만약 성립한다면
두 개의 비실체가 또한 성립하게 되네.
016_0516_c_18L汝若說涅槃,
非體非非體,
體非體若成,
二非體亦成

【釋】이것은 이른바 빛과 어둠이란 빛이 있기에 어둠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실체와 비실체가 있기 때문에 실체가 인고 실체가 아닌 것이 성립할 수 있다. 또다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6_c_20L釋曰此謂如明與闇有明故可說闇如是有體非體故有非體非非體得復次如論偈說

실체가 아니고 실체가 아닌 것도 아닌 것을
만약 열반이라 한다면
이와 같이 두 개의 실체가 아닌 것은
어떤 법으로써 능히 이해할 수 있을까?
016_0516_c_23L非體非非體,
若是涅槃者,
如是二非體,
以何法能了

【釋】이것은 만약 지혜로써 잘 요달한다고 말하면 이 지혜는 앞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7_a_02L釋曰此謂若言以智能了者此智先已遮故如論偈說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네.
존재한다고도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네.
016_0517_a_04L如來滅度後,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여래께서 현재세(現在世)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네
또한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도 말하지 않네.
016_0517_a_06L如來現在世,
不言有與無,
亦不言有無,
非有及非無

【釋】이것은 이른바 몸 중에 신(神)이 있다는 것이다. 신은 몸과 하나인가? 신과 몸은 다른 것인가? 몸을 떠나 신이 있는가? 몸이 곧 신인가에 대하여 불기(不起)로써 전혀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일의제 중에 열반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가 이유를 든 것도 성립하지 않아 그 잘못은 그대에게 있다.
016_0517_a_07L釋曰此謂身中有神神與身一神與身異離身有神卽身是神諸不記中皆不說是故第一義中涅槃不成出因義亦不成其過在汝
비바사 사람이 다시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열반이 있다. 생사를 두려워하는 자는 그것을 구하기 위해 열심히 정진한다. 구하는 자가 무법(無法)을 얻으려 하기 때문에 열심히 정진해도 보지 못한다.”
016_0517_a_11L鞞婆沙人復言第一義中有涅槃怖畏生死者爲求彼故起勤精進不見求者爲得無法故起勤精進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나의 주장대로 사람은 열반의 성취를 보지 못한다. 제일의제 중에 생사 및 열반은 모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7_a_14L論者言如我宗中不見有人得彼涅槃第一義中生死及涅槃俱無差別故如論偈說

생사와 열반에는
조금의 차별도 없네
열반과 생사
또한 조금의 차별도 없네.
016_0517_a_16L生死邊涅槃,
無有少差別,
涅槃邊生死,
亦無少差別

【釋】이것은 생사와 열반에는 모두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며, 또한 분별할 만한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생사와 열반을 모두 얻을 수 없음을 이미 이해시켰다. 그러므로 그대가 설한 것과 같이, “열반을 얻기 위하여 정진을 일으킨다”고 이유를 든 그 뜻은 성립하지 않고, 또한 주장과도 위배된다. 지금 열반과 생사로써 이해시키려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7_a_18L釋曰此謂生死涅槃同無所得是二俱不可得故亦如分別性無故生死涅槃皆不可得已令信解是故如汝所說爲得涅槃而起精進爲因者義不成亦違於義今以涅槃生死令開解者如論偈說

생사제(生死際)는 열반이고
열반제(涅槃際)는 생사이네
둘 사이에
허용할 만한 법은 전혀 없네.
016_0517_b_01L生死際涅槃,
涅槃際生死,
於此二中閒,
無有少許法

【釋】열반이란 진여법계공(眞如法界空)의 다른 이름이다. 진여에는 다름이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허공에 방향의 차이는 있으나 다른 모습이 없는 것과 같다.
비바사 사람이 말하였다.
“일체의 악견의 모두 공으로써 벗어난다. 나아가 열반은 곧 공이라 말하려고, 만약 ‘열반에는 모든 견해의 대치가 없다’고 말하면 옳지 않다. 그래서 열반이 있다. 이는 대치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빛이 어둠과 대치되는 것과 같다.”
016_0517_b_03L釋曰涅槃者眞如法界空之異名如無別異故譬如虛空雖有方之殊別而無異相鞞婆沙人言彼說一切惡見皆以空能出離及欲得涅槃是空者若謂涅槃是無能對治諸見者不然是故有涅槃是對治故譬如明對治闇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여기서는 등불의 비춤 내지 실체가 있다는 것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대의 비유에는 실체가 없어 이 주장하는 내용에 오류가 있다. 공이란 말은 일체 모든 법에 얻을 것이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얻을 것이 있기에 대치라고 말한다. 그러나 얻을 것이 있는 경계는 모든 때에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에는 실체가 있지 않다. 앞서 이미 말한 대로 부정하였기 때문에 공에 집착하면 이 또한 사견(邪見)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이 집착을 버려야 한다. 만약 지혜가 없는 자가 공에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면 공에 실체가 있기 때문에 이익이 없다.
016_0517_b_10L論者言此中燈光能照及有體者不成故汝喩無體是能成立之我言空者謂一切諸法不可得也卽是說有所得對治然彼有所得境一切時不可得故而空非是有體無生故譬如空華亦非是無先已說遮執著空者亦是邪見是故智者應捨此執若無智者執空有體空有體故則無利益
『보적경』에서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공을 본다고 말하면 우리는 그들을 잘 대치할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하신 것과 같이 공의(空義)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대가 대치를 이유로 든다면 이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만약 제일의제 중에 이러한 견해가 있다면 그 대치법은 옳다. 지금 이 모든 견해를 관해도 없기 때문에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7_b_18L如『寶積經』說佛告迦葉若有人言能見空者我說彼人不可治也如是故空義不成汝言對治爲因者因義不成復次若第一義中有此見者彼對治法可然今觀此諸見無故如論偈說

열반하신 뒤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상주(常住) 등의 모든 견해들은
열반의 전후제(前後際)에 관한
모든 견해가 의지하는 곳이네.
016_0517_b_23L滅後有無等,
及常等諸見,
涅槃前後際,
諸見所依止

【釋】이것은 여래께서 열반하신 후에 존재하시는가 존재하지 않으시는가, 또한 여래께서 존재하시면서 존재하지 않으시는가, 여래께서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세간의 유변(有邊)과 세간의 무변(無邊), 유변이면서 무변, 또는 유변도 아니고 무변도 아닌 것, 나아가 세간의 상주, 세간의 무상, 또한 상주하면서 무상한 것,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상주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
016_0517_c_02L釋曰此謂如來滅後爲有如來爲無如來爲亦有如來亦無如來爲非有如來非無如來世閒有邊世閒無邊亦有邊亦無邊非有邊非無邊乃至世閒常世閒無常亦常亦無常非常非無常
그와 같은 네 가지 견해는 열두 가지가 있고, ‘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에’는 열반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세간의 끝’ 등은 미래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세간의 상주’등은 과거에 의지해서 일어난다. 그와 같은 견해들은 어떻게 이러나는가? 허망분별의 습기에 잘못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분별에 자체가 없음을 이미 이해시켰다. 이런 까닭으로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7_c_08L如是四見有十二種如來滅後依涅槃起世閒邊等依未來起閒常等依過去起如是等見云何起由有虛妄分別習氣過故然此分別無有自體已令開解以是故如論偈說

모든 실체가 공한데
어찌 끝이 있거나, 끝이 없겠는가?
또한 끝이 있으면서 없는가?
끝이 있지 않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닌가?
016_0517_c_13L諸體悉皆空,
何有邊無邊,
亦邊亦無邊,
非邊非無邊

어찌하여 이 사물과 저 사물이 있는가?
어찌하여 상주하는가, 무상한가?
또한 상주하면서 무상한가?
상주하는 것도 아니고 무상한 것도 아닌가?
016_0517_c_15L何有此彼物,
何有常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釋】이와 같이 분별하여 의지하는 경계는 실체가 없다. 의지하는 것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분별심 또한 실체가 없다. 왜냐하면 모든 법은 모든 때에 모든 종(種)에 온갖 연의 화합에 따라 발생하며, 필경 공하기 때문이고, 무자성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법 중에 무엇이 끝이 있는 것인가? 무엇이 끝이 없는 것인가, 끝이 있으면서 끝이 없는 것인가. 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닌가? 나아가 무엇이 몸인가, 무슨 몸이 있다고 하는가, 몸과 신은 하나인가, 몸과 신이 다른가 등의 이와 같은 62견해는 반드시 공에서는 모두 성립할 수 없다.
016_0517_c_16L釋曰如是等分別所依止境界無體彼依止無體故分別心亦無體所以者何一切法一切時一切種從衆緣和合生畢竟空故無自性故如是法中何者有邊誰爲有邊亦邊無邊非邊無邊乃至何者是身誰爲有身身一神一身異神異如是等六十二見畢竟空中皆不可得
그래서 경전의 게송에서“분별한 것이 이미 없는데 분별이 어디서 일어나는가? 분별하는 자가 소멸하였기에 분별하는 대상도 또한 허망되네”라고 설한 것과 같다. 『중론』의 머리부분부터 이미 모든 법을 추구해도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있으면서 없는 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이것을 모든 법의 실상이라 말한다. 평등성은 공하여 모든 희론을 소멸하여 안온한 도를 얻는다. 만약 세제 중에 의지하여 이유를 든다면 이미 앞에서 오류를 설한 것과 같다.
016_0518_a_01L以是故如修多羅中偈說所分別旣無分別何處起能分別滅故所分別亦亡論初已來推求諸法有亦無無亦無亦有亦無亦無非有非無亦無是名諸法實相平等性空滅諸戲論得安隱道若依世諦中出因者已如前說過
경량부 사람이 말하였다.
“제일의제 중에 열반이 있다.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증득케 하려고 근(根)관하고 마음을 관하고 법(法)을 관하고 때를 관하여 방향을 관하라고 설법하셨다. 만약 열반에 없다면 부처님께서는 마땅히 이런 설법을 하지 않으셨을 것이며, 나아가 모든 작용의 번뇌를 대치시키는 8만4 천의 법을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열반을 얻도록 설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열반이 있다.”
016_0518_a_07L修多羅人言第一義中有涅槃佛爲令衆生證得故觀根觀心觀法觀時觀方而爲說法若無涅槃者佛不應作此說乃至說八萬四千諸行煩惱對治爲得涅槃而有所說故有涅槃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제일의제 중에 설법으로써 이유를 든다면 그대는 그것을 얻을 수 있는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18_a_12L者言若第一義中以說法爲因汝欲得爾耶如論偈說

얻는 바를 모두 사절하여
희론이 끊겨 상서롭네
여래께서 처하시는 곳 없이
한 법도 말씀하지 않으셨다네.
016_0518_a_14L有所得皆謝,
戲論息吉祥,
如來無處所,
無一法爲說

【釋】“얻은 것을 모두 사절한다”란 얻을 바가 있는 경계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얻는 바가 있는 마음도 또한 실체가 없다. 또한 얻은 바의 경계는 무위이기 때문에 마음을 얻은 바도 역시 일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일체의 얻은 바를 사절한다. “희론을 끊는다”란 얻은 바의 경계에는 실체가 없어 그 경계의 언설상(言說相)도 또한 일어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희론을 끊는다’고 이름한다. “상서롭다”란 이른바 일체 재앙에 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상서롭다고 한다.
016_0518_a_16L釋曰有所得皆謝者謂有所得境界無體故有所得心亦無體復次有所得境界無爲故有所得心亦不起是一切有所得皆謝戲論息者謂有所得境界無體彼境界言說相亦不以是故名戲論息吉祥者謂一切災殃悉無體故名爲吉祥
그 분별성의 생기가 일체법에 성립하지 않고, 나아가 일체 법은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제일의제 중에 설법(說法)으로 이유를 들어 위의 게송에서 “여래께서는 처하신 곳 없이 한 법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네”라고 설한 것과 같다.
016_0518_a_23L由彼所起分別性一切法不成及一切法不可說故第一義中以說法爲因者如上偈說如來無處所無一法爲說
다시 자각하여 얻은 진실한 법은 불가설(不可說)에 원인한다. 그래서 언설은 분별의 경계와 같기 때문에 증득한 진실법은 말로 설할 수 없다. 위의 게송에서 설한 것처럼 “여래께서는 처하시는 곳 없이 한 법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네”라고 한다.
016_0518_b_03L復次因自覺所得眞實法者不可言說此言說者同分別境界故所證眞實法者不可言說如上偈說如來無處無一法爲說
다시 여래의 설법이란 무엇인가? 모든 존재를 섭수하였기에 한없이 천 겁 동안 복덕과 지혜의 모임이 쌓여서 부처님의 몸은 이 복과 지혜의 쌓임에서 발생한다. 비유하면 여의주가 능히 일체의 색과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다. 일체 중생심의 자재한 원력 때문에 여래의 무공용(無功用)에서 소리가 나와 3승(乘)을 포섭한다. 부처님의 위신력 때문이다. 듣는 자가 미혹하여 여래가 우리를 위하여 설법하신 것이라고 한다. “위하여 설법한다”란 오로지 세제에서는 시설하는 것이다.
016_0518_b_07L復次如來說法者云爲攝諸有故無量千劫積集福智佛身從此福智聚生譬如如意珠悉能顯現一切色像以一切衆生心自在願力故如來無功用有聲出攝於三乘佛身力故所有聞者迷故言如來爲我說法爲說法者於世諦中施設而有
다시 5음은 여래가 아니고 또한 5음을 떠나 여래도 없다. 먼저 이를 관하였기에 여래라는 이름은 한 물건도 없으며, 능히 설하는 자도 없고, 또한 듣는 자도 없고, 설하는 곳도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위의 게송에서 “여래께서는 처하시는 곳 없이 한 법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16_0518_b_14L復次陰非如來離陰亦無如來先已觀故如來名者無有一物無能說者亦無聽者亦無說處無實體故如上偈說如來無處所一法爲說
다시 모든 행은 조작된 것이 없고, 또한 모든 행의 모임은 무루(無漏)로써 두 가지 장애를 끊는다. 불공(不共)의 불법(佛法)을 동등하게 의지한다. 이러한 네 가지 법을 갖추기 때문에 여래라 이름한다. 그 모든 행의 쌓임은 조작된 것이 없기에 법을 설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법을 듣는 자는 유루(有漏)의 행이 모인 것이며, 듣는 자와 받는 자라고 말하면 모두 언설로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제일의제 중에 환상과 같고 조작된 것과 같다. 누가 설하고, 누가 듣는가?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처하시는 곳도 없이 한 법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네”라고 말한 것이다.
016_0518_b_18L復次諸行無所造作及諸行聚是無漏二障俱斷爲不共佛法等作依止具此四法故名如來彼諸行聚無所造作故有說法者不然至聽法者是有漏行聚而言聽者受者皆是言說無有實體第一義中如幻如化誰說誰聽以是故如來無處所無一法爲說
다시 여래께서 보살도(菩薩道)를 행하실 때에 여러 숙세의 원력이 종자가 되어 자재하여 4섭법(攝法)으로써 모든 중생을 포섭하신다. 이 모든 중생은 정보(定報)를 종자로 하는 선근(善根)의 인연력으로 신락(信樂)의 모든 근(根)과 심원(心願)이 자재하여 모든 중생을 환희케 하기 때문에 60종(種)으로 구족된 무공용(無功用)으로 법을 설한다. 소리는 여래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여래는 항상 정심(定心)이므로 공용력이 지은 것이 없고 각관(覺觀)의 실체가 없다. 그래서 ‘소리를 냄이 있다’란 말은 모두 옳지 않다. 이리하여 “여래는 처하시는 곳도 없고 한 법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네”라고 한다.
016_0518_c_02L復次如來行菩薩道時種宿願力自在以四攝法攝諸衆生是諸衆生以種定報善根因緣力故由信樂諸根心願自在爲令一切衆生歡喜故六十種具足無功用說法聲依如來起然如來常定無功用力所作無覺觀體而言有聲出者是皆不然以如是故如來無處無一法爲說
또다시 여래께서 설하신 법을 스스로 이해하고 스스로 증득하였고, 일체 모든 법은 모두 선대의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며, 지금 부처님께서 수순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한 글자도 더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처하시는 곳 없이 한 법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네”라고 한다.
016_0518_c_10L復次於先佛所說法自解自證故一切諸法皆先佛已說今佛隨順而說不加一字以是故來無處所無一法爲說
다시 제일의제 중에 모든 법은 반드시 공하기 때문에 한 법도 총상(總相)의 지혜가 되고 별상(別相)의 지혜가 되어 취할 것이 없어 “여래께서는 처하시는 곳 없이 한 법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네”라고 한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에서 설한 것과 같이 여래께서 보살이셨을 때 정광불(定光佛)의 변(邊)에서 한 법도 받을 것이 없다. 왜냐하면 불가취(不可取)ㆍ불가설(不可說)이기 때문이다. 외도들을 아주 불쌍하게 여겨 이제 실체가 없고 자체가 공한 최상승의 도리를 설함으로써 그 삿된 견해를 깰 것이다. 그러나 그 외도는 악한 견해의 도리에 의지하여 자기주장의 잘못을 은폐하고 그 견해에 집착해서 이 게송을 설하였다.
016_0518_c_13L復次第一義中一切諸法畢竟空故無有一法爲摠相智爲別相智可取以是故如來無處所無一法爲說如『金剛般若經』如來爲菩薩時定光佛邊無一法可受何以故不可取不可說故諸外道等甚可憐慜我今以此無體自體空最上乘所說道理破其邪辯然彼外道依止惡見道理而自覆藏己宗之過執其所見說是偈言

제일의제에서
부처님께서는 본래 한 법도 말씀하시지 않으셨네
부처님께서는 무분별이라
대승을 말씀하셨다는 것은 옳지 않네.
016_0518_c_22L彼第一義中,
佛本不說法,
佛無分別者,
說大乘不然

화불(化佛)이 법을 설하면
이 일은 옳지 않네
부처님께서는 무심으로 법을 설하시기에
화불은 부처가 아니네.
016_0519_a_01L化佛說法者,
是事則不然,
佛無心說法,
化者非是佛

제일의제에서
또한 그 법을 설하지 않으셨으니
분별이 없어 성품이 공하므로
자비심이 있다는 것도 옳지 않네.
016_0519_a_02L於第一義中,
彼亦不說法,
無分別性空,
有悲心不然

중생에는 실체가 없으므로
부처님에게도 실체는 없네
저 부처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자비와 연민의 마음도 없네.
016_0519_a_03L衆生無體故,
亦無有佛體,
彼佛無體故,
亦無悲慜心

외도들이 청변에게 말하였다.
“불법에 만약 ‘세제 중에 자비와 연민이 있다’고 말하면 마치 석녀의 아이가 우는 것과 같다.”
016_0519_a_05L外道等謂論者言彼佛法中若言世諦中有悲慜者猶如石女哭兒
논사가 말하였다.
“여기서 제일의제를 밝히는 것은 한 모습이기 때문이니, 이른바 무상(無相)이다. 부처도 없고 대승도 없다. 제일의제란 것은 불이(不二)의 지혜 경계이다. 그대가 게송에서 말한 것은 바로 나의 불법도리이다. 지금 그대를 위하여 여래의 몸을 설하리라.
016_0519_a_07L論者此中明第一義者一相故所謂無無佛亦無大乘第一義者是不二智境界汝說偈者正是說我佛法道今當爲汝說如來身
여래의 몸은 비록 무분별이지만 먼저 이타(利他)의 원력을 종자삼아 큰 서원의 장엄훈수를 삼았기에 일체 중생을 섭수하여 모든 때에 화불의 몸을 일으키고 화신으로 인하여 문자와 문장이 있게 되고 차례로 소리를 낸다. 일체의 외도ㆍ성문ㆍ벽지불과 함께 하지 않아 두 종류의 무아(無我)를 연설 하시고 제일의 바라밀을 성취하고 최상승의 수레를 성취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대승(大乘)이라 한다. 제일의 부처가 계신까닭에 그 부처에 의지하여 화신(化身)이 일어나 이 화신에서 설법을 일으킨다. 제일의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인연으로 내가 세운 뜻은 무너지지 않는다. 또한 세간이 원하는 바도 무너지지 않는다.”
016_0519_a_11L如來身者無分別以先種利他願力爲大誓莊嚴熏修故能攝一切衆生於一切時起化佛身因此化身有文字章句次第出聲不共一切外道聲聞辟支佛而爲開演二種無我爲欲成就第一義波羅蜜故爲欲成就乘最上乘者故名爲大乘有第一義佛故依止彼佛而起化身從此化身起於說法由第一義佛爲說法因故不壞我所立義亦不壞世閒所欲
다시 살바다(薩婆多) 사람이 말하였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다 분별이 있기 때문에 법을 설하신다. 중생을 교화하는 마음이 자재하여 원력이 설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성문 등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과 같다.”
016_0519_a_21L復次薩婆多人言如來所說法者皆是有分別故說法以他衆生心自在願力起說法因故譬如爲聲聞等說法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이 뜻은 옳지 않다. 화불이 법을 설하면 무분별이다. 그대의 말은 한결같이 분별과 같지는 않다.”
살바다 사람이 말하였다.
“부처가 무분별로써 법을 설한다면 옳지 않다. 무분별인 까닭이니, 비유하면 토신과 같다.”
016_0519_b_01L論者言義不然化佛說法者是無分別非如汝語一向分別薩婆多人言佛無分別而爲說法者不然無分別故譬如土塊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화불과 제일의불(第一佛義)이란 달리 설해지지 않는 까닭이다. 세제 중에 부처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세제 중에 그 제일의불이 설법을 원인으로 삼아도 또한 부정한다. 제일의제 중에 여래는 희론이 없기 때문에 여래를 분별하여 만약 자비가 있다거나 자비가 없다고 하면 이는 모두 희론이다. 이와 같이 희론에는 모두 다 실체가 없다. 연민하는 중생과 능히 자비를 일으키는 자에도 모두 실체가 없다. 그대가 ‘먼저 만약 세제 중에 자비가 있다면 석녀의 아이가 우는 것과 같다’고 설한 거 같은 그 비유는 옳지 않다.
016_0519_b_05L論者言化佛與第一義佛不可說異故世諦中有佛者不遮世諦中彼第一義佛爲說法因者亦不遮第一義中如來無戲論故分別如來若有悲若無悲皆是戲論如是戲論悉皆無體所悲慜衆生及能起悲者皆無體如汝先說若世諦中有悲如石女哭兒者是喩不然
자비는 어떤 모습인가? 이른바 다른 이의 괴로움을 보고 근심하는 괴로운 마음이 일어나면, 이것을 자비의 모습이라 이름한다. 비유하면 자비스런 어머니가 아들을 연민하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와 보살이 모든 중생에게 연민심을 일으키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설령 석녀가 비련심을 일으키더라도 나에게 무슨 방해가 있는가? 또한 옳지 않다. 비유하면 거북의 털과 같다. 공(空)과 태허공(太虛空)은 비슷하지 않다.
016_0519_b_12L悲云何相謂見他有苦起憂苦心是名悲相如慈母憐極愛子諸佛菩薩於諸衆生起憐慜心亦復如是縱令石女有悲憐心於我何妨而復不爾譬如龜空與太虛空而不相似
그래서 자비가 있다 해도 모든 부처님의 자비심과 석녀의 슬픈 마음은 비슷하지 않다. 모든 부처님의 자비는 무수한 세월 동안 쌓고 훈수(勳修)되어 마침내 구족하며 일체의 모든 중생세계를 편안케 한다. 만약 석녀에게 이러한 자비심이 없다면 다시 ‘세제에 자비가 있어 석녀의 자비와 비슷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이 품의 초에 비바사 사람 등이 세운 증험에 대해 논주(論主)가 이미 그 잘못을 설하여 열반에 자체가 없음을 드러내어 보였다. 그러므로 아래 경을 인용하여 드러내 보였다.”
016_0519_b_17L是故設有悲者諸佛悲心與石女悲心亦不相諸佛悲者無量劫來積集熏修究竟具足遍滿一切諸衆生界若石女無此悲者更莫復言世諦有悲者與石女悲相似此品初鞞婆沙等所立驗者論主已說其過顯示涅槃無有自體以是故此下引經顯成
『범천왕소문경(梵天王所問經)』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실체로서 열반은 없다’고 여래께서 열반을 설하신 것은 허공에 스스로를 결박하고 허공에서 스스로 풀려나는 것과 같다. 범왕이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만약 분별을 가진 중생이 모든 법의 생기와 소멸을 얻을 수 있다면 부처님도 그를 세간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열반에서 분별상을 일으켜 실체가 있다고 말하면 그 중생은 결코 생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열반이란 무엇입니까? 일체의 상(相)이 모두 적멸하므로 열반이라 이름합니다. 일체의 지어진 것을 다 사절하므로 이를 열반이라 합니다.
016_0519_c_01L如『梵天王所問經』偈言實無有涅槃如來說涅槃如虛空自結如虛空自解梵王白佛言若有分別衆生欲得一切法有起有滅者佛於其人亦不出世於涅槃起分別相言是有體者然彼衆生決定不能出於生死世尊涅槃者其義云何一切相皆寂滅是爲涅一切所作皆已謝是爲涅槃
세존이시여, 어리석은 중생들은 불법 중에 비록 출가를 하더라도 외도의 견해 중에 떨어져 열반의 실체를 구합니다. 마치 참깨에서 기름을 구하려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얻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우유에서 소(酥)를 구하는 것과 다른가? 만약 일체법의 궁극적인 적멸을 구하면, 나아가 삿되고 오만한 외도에 성문이 있고 불법 중에 성문이 있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정견을 성취하는 행자라면 한 법도 일어나지도 소멸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법도 증득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성제(聖諦)의 이치를 보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016_0519_c_09L世尊愚癡衆生於佛法中雖得出家而墮外道見中求涅槃體如於麻中求油指手言得何異乳中求覓生酥若於一切法畢竟寂滅中求涅槃者乃至邪慢外道中聲聞非佛法中聲聞是正見成就行者不作一法有起有亦不欲得證獲一法亦不見聖諦
『마하반야바라밀다경』 중에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이르시기를 ‘열반은 환상과 같고 꿈과 같으며 그림자 같고 불꽃같고 거울 속의 모습과 같으며 물 속의 달과 같고 건달바성과 같으니라’”고 한 것과 같다. 「관열반품」의 해석을 마친다.
016_0519_c_17L如摩訶般若中說佛告須菩提槃者如幻如夢如影如焰如鏡中像如水中月如乾闥婆城
釋「觀涅槃品」竟


26. 관세제연기품(關稅諦緣起品)
016_0519_c_20L般若燈論釋觀世諦緣起品第二十六

【釋】이 품은 또한 공(空)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하여 세제연기에 의해서 말하는 것이다.
자부의 사람이 나에게 말하였다.
“앞에서 여래는 머무는 곳이 없고한 법도 설한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은 옳지 않다.”
016_0519_c_21L釋曰今此品者亦爲遮空所對治以世諦緣起故說
自部人謂我言彼先言如來無處所無一法爲說者其義不然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지금 말하겠다. 여래께서는 놀라 두려워하는 일체 외도 및 인천(人天) 등의 중생들을 악견(惡見)의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연기법(緣起法)을 말씀하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연기법을 깨달으셨기 때문에 그 이름이 높고도 멀리 불리고, 일체 세간에 두루 편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연으로 부처님이라 한다. 그대가 지금 연기법을 따름으로 인해 오류를 짓는다고 말하면 주장하는 바와 스스로 위배되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0_a_02L論者言今當說如來爲欲驚怖一切外道及人天等衆生令息諸惡見過患故緣起法佛由覺了緣起法故名稱高遠遍一切世閒以是因緣故名爲佛汝今與緣起法作過者自違所欲論偈說

무명(無明)으로 덮인 것은
세 가지로
나중 존재[後有]로 일체 행업(行業)들을 조작하여
모든 취(趣)로 나아가네.
016_0520_a_08L無明之所覆,
造作彼三種,
後有諸行業,
由此往諸趣

【釋】명(明)과 대치되는 것을 무명이라 한다. 그러므로 무명은 중생의 지혜를 덮어 나중 존재의 행업들을 조작한다. 나중 존재란 무엇인가? 이른바 아직 생(生)을 받지 못하는 자가 화합의 인과(因果)와 분리되지 않고 더불어 나중 존재로 나아가기 때문에 이름하여 나중 존재라고 한다. 일체의 행이란 무엇인가? 행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른바 무아법(無我法)이고, 둘째는 찰나이며, 셋째는 세 가지 업(業)이다.
016_0520_a_10L釋曰明所對治名爲無明而此無明能覆障衆生智慧造作後有諸行何名後有謂未受生者與不相離和合因果共趣向後有故名爲後有何名諸行行有三種一謂無我法謂剎那三謂三種業
무엇을 3업(業)이라 하는가? 이른바 복(福)과 비복(非福)과 부동(不動) 등이며, 또 다른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른바 몸ㆍ말ㆍ생각이다. 무명(無明)이란 오직 모든 행의 연(緣)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식(識) 등과 더불어 후지(後支)는 전전(展轉)하여 연이 되는 것이다. 실체도 또한 무명만으로 중생을 덮어 방해하지 않는다. 다시 모든 나머지 번뇌의 행이 존재한다면 이른바 유위법(有爲法)을 조작하기 때문이다. 이를 행이라고 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0_a_16L云何爲三業非福不動等復有三種謂身無明者非獨爲諸行緣亦能與識等後支展轉爲緣體亦非獨無明覆障衆生更有諸餘煩惱行者謂造作有爲法故名之爲行如論偈說

모든 행(行)의 인연 때문에
식(識)은 모든 취에 의탁하네
식이 상속하여 의탁하는
그때 명색(名色)이 일어나네.
016_0520_a_21L以諸行因緣,
識託於諸趣,
識相續託已,
爾時名色起

【釋】무엇을 식이라고 하는가? 하나하나의 사물을 분별하고 경계를 취착하므로 식이라고 이름한다.의탁(依託)하는 것을 생(生)이라고 한다. “행을 연한다”란 이른바 행과 식이 연이되므로 행을 연한다고 한다. 또한 모든 행이 오직 식만의 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식(識)이 발생할 때 또한 모든 심수법(心數法)도 함께 발생한다. 이 까닭으로 또한 모든 심수법의 연이 된다.
016_0520_a_23L釋曰云何爲識於一一物分別取境界故名識託者言生行緣者謂行與識爲緣故名行緣亦非獨諸行與識爲彼識生時亦有諸心數法共生是故亦以諸心數法爲緣
다시 행이 식을 연한다는 것은 마치 아라한처럼 또한 모든 행이 있어도 무엇 때문에 나중 존재[後有]에 의탁하여 식과 더불어 연이 되지 않는가? 애(愛)의 끈이 끊어지지 때문이다. 나중 존재에 의탁하여 함께 식이 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까닭으로 애 등의 모든 번뇌는 또한 후세(後世) 및 받는 식과 더불어 연을 짓는다. 무엇 때문에 오직 모든 행만을 말하는가? 모든 행에 뛰어난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전투에서 승리를 얻었을 때 왕만이 승리했다고 하지 않고 일체 군대의 무리도 또한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왕이 주(主)가 되기 때문에 왕이 승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016_0520_b_05L復次行緣識者如阿羅漢亦有諸行何故不與託後有識爲緣以彼愛繩斷故不與託後有識爲緣是故愛等諸煩惱與受後世識作緣何故獨言諸行耶爲諸行有勝力故譬如王者鬪戰得非獨王勝一切兵衆亦名爲勝王爲主故言王勝
다시 어떤 사람이 다음과 같은 생각을 말하였다.
“무명(無明)이 불선(不善)의 모든 행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옳을 수 있다. 단 우치(愚癡)는 불선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선법의 모든 행의 원인이 되는가? 이는 이른바 아직 무명을 끊지 못한 자는 천녀권속(天女眷屬)의 즐거움을 받고자 하므로 모든 복덕의 행을 짓는다. 그러므로 무명 또한 복덕의 행과 더불어 전변의 원인이 된다.
016_0520_b_12L復次或有人起如是意言無明爲不善諸行因可然愚癡者是不善故云何得與善法諸行爲因耶此謂未斷無明者爲欲受天女眷屬樂故而造諸福德行以是故無明亦與福德行爲展轉因
다시 생사(生死)란 제일의(第一義)의 불선으로서 존재하는 복덕의 모든 행도 생사에 계속(繫屬)되는 것을 다 불선이라 이름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무명은 능히 다 모든 행과 더불어 연이 된다. 다시 선취(善趣)와 불선취(不善趣)와 부동취(不動趣) 등 세 가지의 업에는 각각 상ㆍ중ㆍ하의 차별이 존재한다. 이들의 모든 행을 모든 취로 나아가는 업이라고 한다. ‘모든 취로 가는 것’이란 논사들마다 주장하는 것이 같지 않다.”
016_0520_b_17L復次生死者是第一義不善所有福德諸繫屬生死者皆名不善以是故無明能摠與諸行爲緣復次善趣不善不動趣三種業者各有上中下差是等諸行名爲往諸趣業往諸趣者諸師各執不同
마치 살바다 사람이 “저 중음(中陰)은 존재한다. 명색의 상속이 존재하는데, 와서 태어나는 곳[生處]에 의탁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정량부(正量部)와 담무국다부(曇無麯多部)의 사람 등이 말하였다.
“저 중음은 없다. 단지 행을 연으로 삼아 식이 생기하는 그 순간을 이름하여 생에 의탁한다고 한다.”
016_0520_b_23L如薩婆多人說有彼中陰以有名色相續往託生處故正量部人曇無鞠多部人等說無彼中陰但以行爲緣而識得起爾時名爲託生
다시 중음이 존재한다고 계탁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색(有色)의 모든 중생들이 한 곳에서 사멸한다면 이 유색의 중생으로부터 다시 상속이 발생하여 무간(無間)으로 전후에 일어나 저 다른 취에 도달하는 것을 이름하여 생에 의탁한다고 한다. 상속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등불과 같다. 이러한 까닭으로 명색은 음(陰)에 의지하여 상속한다. 죽는 찰나에서 생을 받는 찰나까지 무간으로 발생하므로 이름하여 ‘생을 받는다’고 한다. 비유하면 현재의 사람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도달하는 것과 같다.”
016_0520_c_04L復次計有中陰者言有色諸衆生等於一處滅是有色衆生還相續生無閒前後起至彼異趣名爲託生相續隨生故譬如燈以是故名色依止陰而有相續從死剎那至受生剎那無閒生故名爲受生如現在人從此到彼
다음 중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람이 말하였다.
“색계의 사유(死有)와 생유(生有) 두 존재의 중간에 또한 중유(中有)가 없다. 유루(有漏)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무색계의 사유와 생유가 존재하나 중유는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사유 중간에 유신(有身)이 발생하는 것은 중음이 아니고, 몸은 곧 과보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현재 받은 몸과 같다. 다시 유신이 일어난다는 것은 고제(苦諦)에 섭수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의체(意體)를 몸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처(異處)로 가서 찰나찰나 상속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유가 없다. 결정적으로 음(陰)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대가 세운 5음의 주장은 그 주장이 성립하지 못한다.”
016_0520_c_10L復次無中陰者色界死有生有二有中閒更無中有漏故譬如無色界死有生有而無中有何以故死有中閒有身起者非是中陰身是報故譬如現在所受得身復次有身起者是苦諦所攝故譬以意體爲身往至異處剎那剎那相續隨起故而無中有非一向有陰汝立中陰義者是義不成
다시 중유가 존재한다는 자가 말하였다.
“만약 중음이 없다면 어떻게 다음의 몸을 받는 곳에 도달할 수 있는가?”
016_0520_c_18L復次有中陰者言若無中陰云何得至後受生處耶
다시 중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가 말하였다.
“사유에서 상속하여 생유에 도달할 때까지 경을 지니는 것과 같고, 등불을 전하는 것과 같으며, 인(印)을 행하는 것과 같고, 거울 속의 모습과 같으며, 허공에 소리를 외쳐대는 것과 같고, 물속의 해와 달의 그림자와 같으며, 종자에서 싹이 나는 것과 같고, 마치 사람이 식초를 보고 입 속에 침이 생기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후음이 상속하여 일어날 때에는 중음에 오락가락하면서 이것을 전하고 저곳으로 향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지혜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마치 위의 게송에서 ‘식이 상속하여 의탁하는 그때 명색이 일어나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016_0520_c_20L復次無中陰者言從死有相續至生有時如授經如傳燈如行印鏡像現如空聲響如水中日月影種子生芽如人見酢口中生涎如是後陰相續起時無有中陰往來傳此向彼是故智者應如是解如上偈說識相續託已爾時名色起
무엇을 명색이라 하는가? 명(名)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스스로 모든 취로 가는 것이며, 둘째는 번뇌가 부리는 대로 강하게 모든 취로 들어가는 것이다. 다시 명이란 이른바 무색의 4음(陰)을 총괄적으로 명이라 한다. 무엇이 색인가? 색은 변이할 수 있기 때문에 색이라 한다. 이른바 4대(大) 및 4진(塵) 등이다. 오직 식만이 명색의 연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무명과 행 등도 저 연이 된다.
016_0521_a_03L云何爲名色耶名有二種一謂自往諸趣二謂爲煩惱所使强令入諸趣中復次名謂無色四陰摠名爲名云何爲色色者可變異故名色謂四大及四塵非獨識爲名色緣無明行等亦爲彼緣
다시 식이 명색을 연할 경우 식과 무명 등은 반드시 명색과 더불어 연이 되지는 않는다. 어떤 처(處)에 화생(化生)이 존재할 경우 또한 저 6입(入)과 더불어 연이 된다. 마치 무색계에 태어나는 자처럼 식은 다만 명과 더불어 연이 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1_a_09L復次識緣名色者識及無明等非是定與名色爲緣有處有化生者而亦與彼六入爲緣如無色界生者此識但與名爲緣如論偈說

명색의 실체로부터
차례로 6입을 일으키네
정(情)과 진(塵) 등이 화합하여
6촉(觸)을 일으키네.
016_0521_a_12L從於名色體,
次第起六入,
情塵等和合,
而起於六觸

【釋】무엇이 내(內)의 6입(入)이 되는가? 이른바 안입(眼入)과 이입(耳入)과 비입(鼻入)과 설입(舌入)과 신입(身入)과 의입(意入) 등이다. 안입은 색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저 청정색은 곧 안식(眼識)이 의지하는 곳이므로 청정색이라 이름하고 안입이라 한다. 이와 같이 소리 등을 경계로 삼는 저 청정색 등은 귀 등의 식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에 청정색을 이름하여 귀 등의 입(入)이라한다.
016_0521_a_14L釋曰云何爲內六入謂眼入耳入舌入身入意入等眼入者以色爲境界故彼淸淨色是眼識所依止處名淸淨色以爲眼入如是以聲等爲境界彼淸淨色是耳等識所依止處故名淸淨色爲耳等入
의입은 간격 없이 차례로 소멸하므로 의입이라 한다. 무엇을 입(入)이라 하는가? 이른바 식 및 심과 심수법 등을 말하며, 청정색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입이라 한다. 무엇 때문에 촉(觸)이라 하는가? 이른바 고수(苦受)와 낙수(樂受)와 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 등이 각각 화합하므로 촉이라 이름한다.『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1_a_20L意入者無閒次第滅爲彼意入云何爲入識及心心數法等從淸淨色中起故名之爲入何故名觸謂與苦受樂受不苦不樂受等各和合故名觸如論偈說

눈과 색과
작의(作意) 세 가지는
명색과 더불어 연이 되기 때문에
마침내 식이 발생을 얻게 하네.
016_0521_b_02L因彼眼與色,
及作意三種,
與名色爲緣,
爾乃識得生

【釋】식이 발생을 얻는다는 것은 눈이 색을 연으로 삼는 것과 같다. 식은 색을 연으로 삼기 때문에 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귀는 소리를 연으로 삼아 귀의 식이 발생하는 것이다. 나아가 의(意)는 법을 연으로 삼아 의식이 발생한다. 무엇을 이름하여 촉이라 하는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1_b_04L釋曰識得生者如眼以色爲緣識緣色故而識得生如是耳以聲爲緣識得生乃至意以法爲緣意識得生云何名觸如論偈說

저 색과 식과 눈 등
세 가지가 함께 화합하는 것을
이와 같이 촉이라 이름하네
촉으로부터 수가 일어나네.
016_0521_b_08L彼色識眼等,
三種共和合,
如是名爲觸,
從觸起於受

【釋】경계와 근과 의(意) 등 세 가지가 일체(一體)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촉이라 이름한다. 촉이 연이 되어 세 가지의 수가 일어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1_b_10L釋曰境界與根意等三種爲一體故而名爲觸觸爲緣故起三種受如論偈說

수는 애를 일으키는 연이 되고
수가 되기 때문에 애를 일으키네
애 또한 취착의 연이 되며
취착에는 네 지가 있네.
016_0521_b_13L受爲起愛緣,
爲受故起愛,
愛又爲取緣,
取者有四種

【釋】이는 말하자면 욕망을 구하는 상(相)을 이름하여 애(愛)라고 하는 것이다. 무간범부(無間凡夫)는 낙수(樂受)로 인하여 탐욕의 마음을 일으킨다. 칼에 묻은 꿀을 핥으면서 나중에 혀에 상처 입는 과환(過患)을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다. 낙수로 인하여 탐욕을 일으키는 것도 그러하다. 어떻게 고수와 불고불락수에서 탐욕이 일어나는가? 이른바 고수와 불고불락수도 또한 애의 연이 되기 때문이다. 고수를 받을 때도 여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 또한 애이다. 그러므로 오류가 없다.
016_0521_b_15L釋曰此謂求欲之相而名爲愛無聞凡夫爲樂受故起貪求心如舐刀蜜不覺後時傷舌過患若爲樂受起貪者可爾云何於苦受不苦不樂受而起貪耶謂以苦受不苦不樂受亦爲愛緣故受苦受時亦有求離心生是愛也是故無過
네 가지 취착[取]이란 이른바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취(戒取)ㆍ아어취(我語取)이다. 무엇이 취인가? 이른바 적집(積集)의 뜻이다. 다시 애가 증장하기 때문에 또한 곧 취착이 된다.다섯 욕망의 즐거움을 얻기 위하여 추구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또한 취라 이름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1_b_22L四取者謂欲取戒取我語取云何爲取謂積集義復次愛增長故亦卽是取爲得五欲樂故起追求心亦名爲取如論偈說

취로 인하여 모든 존재가 있기 때문에
취착을 짓는 자를 일으키네
취착을 짓는 자가 없기 때문에
고(苦)를 벗어나 모든 존재[有]를 단멸하네.
016_0521_c_02L由取諸有故,
取者起於有,
以無取者故,
脫苦斷諸有

【釋】존재[有]는 곧 업의 상(相)이다. 다시 존재는 곧 생(生)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생의 원인법을 또한 존재라고 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원인이 결과가 되는가? 지금 현견(現見)하니 원인은 결과의 이름을 받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부처님 출세시(出世時)의 즐거움과 같다. 식 등의 다섯 지(支)는 결과 부분[果分]이다. 이는 현재세(現在世)에 섭수되기 때문에 고락 등의 모든 행에서 능히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ㆍ무아(無我) 등의 행을 볼 것이다.
016_0521_c_04L釋曰有者是業相復次有者是生異而生之因法亦名爲有若爾者何卽因是果耶今現見因受果名故譬如佛出世樂彼識等五支果分是現在世所攝故而言從無明行生得値善知識聽聞正法起正思惟苦樂等諸行能見無常苦空無我等
다시 모든 행은 발생이 없어 자체가 공하다. 저 진실지(眞實智)를 일으키는 자는 다시 애를 일으키지 못한다. 애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시 추구할 것이 없다. 위의 게송에서 “취착을 짓는 자는 없기 때문에 고를 벗어나 모든 존재를 단멸하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취착이 있기 때문에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취착이 없다면 곧 존재도 없다. 존재는 어떤 상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1_c_12L復次諸行無生自體空彼起眞實智者不復起愛不起愛故無復追求如上偈說若無有取者脫苦斷諸有此義云何謂有取故有有若無取則無有有云何相如論偈說

5음은 곧 존재[有]의 실체이며
존재로부터 다음 생과
늙음ㆍ병ㆍ죽음ㆍ우비(憂悲)
애걸[哀泣]ㆍ시름[愁]ㆍ고 등이 일어나네.
016_0521_c_16L五陰是有體,
從有次起生,
老病死憂悲,
哀泣愁苦等

【釋】이는 또한 5음의 원인이 유지(有支)의 실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다시 5음의 원인을 존재라고 이름한다고 해서 이른바 오직 5음의 원인만을 존재라고 이름하지는 않는다. 무색계의 네 음(陰)의 원도 또한 존재라고 이름한다. 생이란 말하자면 먼저 음의 실체가 없다가 지금 음(陰)이 생기하는 것이다. 늙음이란 이른바 변화하여 부숴지는 모습이다. 죽음이란 이른바 음의 실체가 없는 것이다. 병이란 이른바 몸이 괴로움에 핍박당하는 것이다. 우비(憂悲)란 이른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愛別離], 증오하는 자와 만나는 것[怨憎會] 등을안에서 불사르는 유상(有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016_0521_c_18L釋曰此謂亦說五陰因爲有支體次五陰因名有者謂非獨五陰因名無色界四陰因亦名有生者謂先無陰體今有陰起老者謂變壞相者謂無陰體病者謂身爲苦所逼悲者謂從愛別離怨憎會等內被燒然有相起故
애읍(哀泣)이란 이른바 사랑하는 대상과 복덕이 있는 권속을 잃고서 소리를 내서 그 덕행(德行)을 칭송하는 것을 말한다. 고(苦)란 몸이 받는 것[身受]이다. 시름[愁]이란 이른바 마음이 받는 것[心受]이다. 노권(勞倦)이란 몸과 마음이 극도로 피곤한 것이다. 이와 같이 자세히 말하였다. 생 등을 모두 고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2_a_02L哀泣者謂喪失所愛及有福德眷屬因此發聲稱其德行而哀泣之苦謂身受愁謂心受勞倦者謂身心疲極如是廣說生等皆名爲苦者云何如論偈說

시름 및 노권 등은
다 생을 원인으로 삼으니
오로지 이 고음(苦陰)만이 일어나
결국 즐거움은 없네.
016_0522_a_06L愁及勞倦等,
皆以生爲因,
獨此苦陰起,
畢竟無樂相

【釋】“오로지 고음(苦陰)만이 일어난다”는 것은 말하자면 낙과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음이란 이른바 취이다. 생기는 이른바 발생이다. 음상속(陰相續)이란 세제(世諦)를 말하여 신해(信解)시킨 것과 같기 때문에 내가 세운 주장은 논파되지 않는다. 만약 생사의 행이 유전한다고 말한다면 어째서 불기(不起)라고 하는가? 내가 지금 대답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2_a_08L釋曰獨苦陰起者謂不與樂和合故陰者謂聚起者謂生陰相續者是世諦所攝緣起非第一義如先品中已說無起令信解故我所立者不破言生死行流轉者云何是不起耶今答之如論偈說

이는 말하자면 생사는
모든 행의 근본이 되네
무지한 자가 만드는 것으로서
진실을 보는 자를 위한 것은 아니네.
016_0522_a_14L是謂爲生死
諸行之根本,
無智者所作,
見實者不爲

【釋】모든 행은 생사의 근본으로서 무지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말하자면 무지한 자는 모든 행이 무시이래로 전변하여 연으로부터 생기하는 것은 마치 환(幻)과 같고 불꽃과 같아 과환을 보지 않기 때문에 낙을 구하며, 낙을 구하기 때문에 복ㆍ비복ㆍ부동(不動) 등의 모든 행을 조성한다. “진실을 보는 자가 짓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은 이른바 성도(聖道)를 이미 일으켜 진실을 보기 때문에 소지장(所智障)과 번뇌장(煩惱障)의 체인 무명을 이미 끊었기 때문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2_a_16L釋曰諸行生死根無智所作者此謂無智者不見諸行無始已來展轉從緣起如幻如焰過患故而求於樂求樂故造福非福不動等諸行見實不作者謂聖道已起見眞實故智障煩惱體無明已斷故如論偈說

무명이 이미 끊겼다면
모든 행은 다시 발생하지 않네
지혜를 수습하기 때문에
무명에 이에 끊어지네.
016_0522_a_22L無明若已斷,
諸行不復生,
修習智慧故,
無明乃得斷

【釋】이는 말하자면 모든 행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은 없기 때문이다. 종자에 실체가 없기 때문에 싹이 발생하지 않는 것과 같다. 지금 어떤 지혜를 수습하여 무명을 끊을 수 있겠는가? 이 논 중에 말한 대로 연기를 비추는 지혜는 모든 체에 자체가 있다는 것을 부정한다. 사람과 법 두 곳에 자아[我]가 없음을 이해하는 것이 공지(空智)이다. 수(修)란 이른바 자주 익히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2_b_01L釋曰此謂諸行不生闕於緣故如種子無體故芽則不生今修習何智得斷無明如此論中所說照緣起智一切諸體有自體解人法二無我境空智修者謂數數習如論偈說

낱낱의 지(支)가 사멸한다면
각각의 지는 일어나지 않네
오직 홀로 고음의 취만이
바로 영원히 사멸한다고 말하네.
016_0522_b_06L一一支滅者,
彼彼支不起,
唯獨苦陰聚,
名爲正永滅

【釋】이는 말하자면 행 등 낱낱의 유지가 대치도를 일으키므로 곧 사멸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유지(有支)가 거듭 일어나지 않는 것은 행이 사멸되었기 때문이다. 행이 사멸하면 곧 식이 사멸하고, 나아가 늙음ㆍ죽음ㆍ우비 등이 사멸한다. “오직 홀로 고음의 취만이 바로 영원히 사멸한다고 말하네”란 세제에 섭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제일의제 중에 무명 등이 생기하지도 않고 사멸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다시 연기라 말하겠는가? 부처님께서 세제에 의하여 제일의제를 말씀하셨다. 나의 주장은 앞의 게송에서 “세제에 의하지 않고 제일의제를 말할 수 없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이 까닭으로 내가 세운 주장은 허물어지지 않는다.
016_0522_b_08L釋曰此謂行等一一有支對治道起則滅此等有支更不起者由行滅行滅則識滅乃至生老死憂悲等唯獨苦陰正永滅者是世諦所攝若第一義中是無明等無起無滅云何復名緣起耶佛依世諦故說第一義我義如是如前偈說不依於世不能說第一以是故不壞我所立
이 품의 첫머리에서 자부의 사람이 나에게 “주장에는 오류가 있다”고 말한 것은 지금 여기서는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제연기에 의하여 지금 사물을 신해(信解)시키는 것이 이 품이 주장하는 뜻이다. 부처님께서 무기(無起)를 연기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것을 불기(不起)라 함은 연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무기라면 어떻게 사멸하는가? 만약 무멸(無滅)에서 무멸을 깨닫는다면 연기법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016_0522_b_17L此品初自部人謂我言立義有過今說無此過故而以世諦緣起令物信解是品義意如佛說無起者名爲緣起此謂不起者說爲緣起若彼無起云何有滅若能於無滅覺無滅名解緣起法等
釋「觀世諦緣起品」竟


27. 관사견품(觀邪見品)
016_0522_b_23L般若燈論釋觀邪見品第二十七

【釋】지금 이 품도 또한 공과 대치되는 것을 부정하여 모든 견해가 공하다는 것을 이해시키려고 설하는 것이다.
016_0522_c_01L釋曰今此品者亦爲遮空所對治解諸見空故說
자부(自部)의 사람이 말하였다.
“존재의 자체인 5취음(取陰)은 견처(見處)이기 때문이다. 5음이 만약 비존재인데도 견처가 된다는 것은 옳지 않다. 5음이 견처라는 것은 『구사론(俱舍論)』에서 ‘저 5음은 고이며 집(集)이며 세간이며 견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것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옳지 않다. 지금 모든 견해를 관찰할 것이다. 여기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2_c_03L自部人言有自體五取陰是見處故陰若是無而爲見處者不然五陰是見處者如『俱舍論』中說彼五陰者苦是集是世閒是見處如是等是有論者言不然今當觀察諸見此中如論偈說

이전 과거세에
나는 존재하였는가 존재하는 않았는가?
이 상주(常住) 등의 모든 견해는
모두 이전에 세상에 의하여 생기하네.
016_0522_c_09L往昔過去世,
我爲有爲無
是常等諸見,
皆依先世起

【釋】이것은 “내가 과거에 존재하였는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또한 존재하기도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는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닌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든 견해들은 과거세에 의지하여 생기한다. “세간은 상주(常住)하지도 않고 세간은 무상하다. 상주하면서 무상하기도 무상하지도 않다” 등의 네 견해는 현재세의 5음을 원인으로 의존하기 때문에, “과거세의 5음이 상주한다는 등의 모든 견해는 다 이것에 의하여 일어난다”고 말한다. “의지한다”는 것은 이른바 연(緣)을 말한다. 무엇의 연이 되는가? 이른바 모든 견해의 연(緣)이 된다. 견해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취(取) 등에 집착하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2_c_11L釋曰此謂我於過去爲是有爲是無爲亦有亦無爲非有非無如是諸見依過去世起世閒常世閒無常亦常亦無常非常非無常等四見因待現在世陰故說過去世陰常等諸見皆依此起依者謂緣爲誰緣謂諸見緣見有何義謂執著於取等如論偈說

다시 다른 견해가 있으니
미래는 생기하지 않는다.
미래는 생기한다는 등에 집착하는 치우친 견해는
다 미래의 생기에 의지하네.
016_0522_c_18L復有異諸見,
執未來不起,
未來起等邊,
皆依未來起

【釋】이 모든 견해는 과거세의 생기(生起)에 의지한다. 세간이 존재한다는 견해, 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견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는 견해,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견해 등의 네 견해는 현재의 5음을 원인으로 하기 때문이다. 미래에 일어나는 5음을 후변(後邊)이라 이름한다. 지금 다시 관찰하겠다. “이전 세상에 의지하여모든 견해가 생기한다”는 것에 대하여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2_c_20L釋曰此諸見依過去世起世閒有邊世閒無邊亦有邊亦無邊非有邊非無邊等四見因現在陰故未來當起陰者名爲後邊今且觀察依止先世起諸見者如論偈說

과거세에 내가 존재한다는
그 사실은 옳지 않네
전생[先世]은 중생은
현생의 사람이 아니네.
016_0523_a_02L過去世有我,
是事則不然,
彼先世衆生,
非是今世者

【釋】어째서 옳지 않은가? 이른바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고, 다른 업에 의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나머지 중생과 같다. 또한 몸과 모든 근(根)이 또한 다르기 때문이다. 만약 근 등이 비록 다르더라도 자아[我]가 하나라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3_a_04L釋曰云何不然謂時別故異業所生譬如餘衆生復次身及諸根亦別若言根等雖異而我是一者此亦不然如論偈說

다시 전생[昔]의 자아[我]는
다만 취(取)의 자체일 뿐이네
저 모든 취를 떠난다면
다시 어떻게 자아가 존재하리오.
016_0523_a_08L還是昔我者,
但是取自體,
若離彼諸取,
復有何我耶

【釋】이는 마치 제바달다의 과거세의 자아[我]가 다시 현세 [今日]의 자아가 된다고 하는 것처럼 옳지 않다. 취착이 다르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야야달다의 자아와 같다. 이 까닭으로 전세의 생(生)이 다시 현세의 생이라면 옳지 않다. 다시 만약 아상(我相)과 취상(取相)이 다르다고 말하면 위의 게송에서 “저 모든 취를 떠난다면 다시 어떻게 자아[我]가 존재하리요?”라고 말한 것처럼 이와 같이 자아가 없기 때문이다. 음(陰)을 떠나 자아가 존재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자세히 부정하였다. 자아를 헤아려 분별하는 자가 다음과 같이 생각을 지어 “자아에 실체가 없다고 하려면 곧 취착을 아체(我體)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면 이 분별은 무아(無我)를 말하는 것과 비슷하나 취하는 실체는 자아로 삼는 것이다 마치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3_a_10L釋曰此謂如提婆達多過去世我還是今日我者不然取別故譬如耶若達多我以是故前世生還是今日生者不然復次若欲得我相異取相者如上偈說若離於諸取復有何我耶無如是我故離陰有我先已廣遮有我者若作是意不欲令我無體以取爲我體者作是分別如似說無我者亦以取體爲我如論偈說

취착[取]이 자아라면
어느 곳에 다시 자아가 있으리오
취착에 의해서 생기하고 소멸하기 때문에
어떻게 취착을 짓는 주제가 있으리오.
016_0523_a_19L若取是我者,
何處更有我
由取起滅故,
云何是取者

【釋】제일의제 중에 취착은 자아가 아니다. 취에는 기멸(起滅)의 법(法)이 두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앞에서 설한 것은 무아(無我)를 신해(信解)시키기 위함이다. 무엇을 취착한다고 말하는가? 이른바 취착과 취착을 짓는 주체이다. 취착은 업(業)을 말하고 취착을 짓는 주체는 업을 짓는 사람이다.비유하면 장작과 불의 두 가지와 같다. 다시 앞에서 먼저 자아를 부정하였으므로 자아에 관한 주장은 성립하지 못한다. 무엇 때문에 성립하지 못하는가? 앞의 게송에서 “취착은 곧 자아가 아니니, 생기와 소멸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자아는 또한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아니다. 이와 같이 자아는 세제에서 또한 사물을 통해 이해할 수 없게 한다. 지금 다시 “5음을 떠나 자아는 존재한다”고 헤아려 분별한 자에 대하여 답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3_a_21L釋曰第一義中取不是我取有起滅法二體先已說無我令信解故云何爲取謂取及取者取是業取者是作業人譬如薪火二種復次如先已遮我故我義不成云何不成如先偈說取非卽是我以有起滅故我者亦非是有亦非是無如是我者世諦中亦不能令物解今當更答計離陰有我如論偈說

만약 저 취착과 달리
자아가 존재한다면 옳지 못하네
5음을 떠나서 취착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취착할 수 없기 때문이네.
016_0523_b_07L若異於彼取,
有我者不然,
離陰應可取,
而不可取故

【釋】여기에서 자아가 취착을 짓는 자와 다르다면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취착을 떠나 자아가 존재한다면 어떻게 취착이 곧 자아의 상(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취착을 떠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취착을 떠나 자아가 없고, 단지 취착은 자아일 뿐이라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취착을 떠나 자아의 차별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그 밖의 사물과 같다.
016_0523_b_09L釋曰此謂我若異取者不然何以故若離取有我者云何可說取是我相若無相可說則離取無我若謂離取無我但取是我者是亦不然離取無有我異故譬如餘物
여기서 증험하겠다. “취착은 조재하는 자아와 다르지 않은 수 없다. 취착은 곧 취착되는 법이고, 자아는 취착될 수 없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취착의 자체(自體)와 같다. 왜냐하면 취착에는 기별이 존재하고 자아에는 그렇지 않다. 다시 어떻게 취착이 곧 취착을 짓는 자가 되는가? 만약 취착을 떠나 취착을 잣는 자가 존재한다면 마땅히 5음을 떠나서 달리 취착을 짓는 자가 존재해야 할 것이다. 그 뜻도 이와 같다. 지금부터 내가 그 도리에 대해 말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3_b_14L此中立驗不異取有我取是可取法我不可取故如取自體何以故取有起滅我則不復次云何以取卽爲取者若謂離取而有取者是亦不然若不取五陰而有取者應離五陰別有取者彼義如是我今說道理者如論偈說

자아는 취착과 다른 것도 아니고
또한 바로 취착도 아니네
그러나 다시 무취(無取)도
아니고 또한 반드시 없는 것도 아니네.
016_0523_b_20L我不異於取,
亦不卽是取,
而復非無取,
亦不定是無

【釋】여기서는 자아가 취착을 떠난 것도 아니고 또한 곧 취착도 아니고 다시 무취(無取)도 아니고 또한 반드시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물을 통해서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만약 과거세에 자아가 있다고 하면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3_b_22L釋曰此謂我不離取亦不卽取而非無取亦不是無已令物解若言過去世有我者不然如論偈說

금세(今世)에 과거가 있지 않다는
이 사실은 옳지 않네
과거의 전생은
금세와 다르지 않네.
016_0523_c_01L今世無過去,
是事亦不然,
過去前生者,
與今世不異

만약 금생이 전생과 다르다면
전생을 떠나 마땅히 혼자 존재해야 하네
이와 같이 상주(常住)하는 것이라면
현세의 5음의 연(緣)이 되어서는 안 되네.
016_0523_c_03L若今與前異,
離前應獨立,
如是應常住,
不爲現陰緣

【釋】여기서는 묻는 사람이 그와 같은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말하자면 전세(前世)의 5음(陰)이 금세(今世)의 5음의 연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증험하겠다. 제바달다의 금세의 5음이 과거의 5음과 다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상속(相續)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고, 과거의 음이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제바달다와 같다.
016_0523_c_04L釋曰此謂問者不欲得如此云何欲謂欲得前世五陰與今世五陰爲我今立驗如提婆達多今世五陰與過去五陰不得有異相續不異故過去陰爲因故譬如提婆達多
과거의 5음은 다만 전생을 떠나 독립해야 하는 오류일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오류가 있다. 위의 게송에서 “이와 같이 상주(常住)하는 것이라면 현세의 5음의 연(緣)이 되어서는 안 되네”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떻게 연(緣)이 되는가? 이른바 후세의 5음은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죽음으로부터 태어남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저 전세(前世)에 받는 생음(生陰)은 오히려 과거에 존재하고, 금생과 다른 5음이 다시 존재하여 현재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큰 오류가 있다. 무엇이 오류가 되는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3_c_09L過去五陰非但有此離前應獨立過亦更有餘咎如上偈說如是應常住不爲現陰緣云何爲緣耶謂後陰不起故若爾者則不從死有生而彼前世所受生陰仍在過去今別更有異陰於現在生以是故則有大過云何爲過如論偈說

모든 업(業)이 다 단괴(斷壞)하여
이 사람이 지은 업을
저 사람이 과보[報]로 받게 되는
그와 같은 과실을 얻네.
016_0523_c_16L諸業皆斷壞,
此人所造業,
彼人當受報,
得如是過咎

【釋】만약 그와 같다면 단멸의 오류를 얻는다. 모든 업에 대하여 과보(果報)를 잃기 때문에 또한 저 사람이 죄를 짓고 이 사람이 과보를 받는다. 다시 만약 업과 생(生)이 동시에 발생한다고 말하면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3_c_18L釋曰若爾者卽有斷過失於諸業果報故又彼人作罪此人受果復次若言業之與生一時起者不然如論偈說

생(生)이 공업(共業)에서 발생하지 않는 것은
거기에 오류가 있기 때문이네
아(我)를 병(甁)과 같이 만드는 것으로
먼저 없다가 나중에 생기하네.
016_0523_c_21L非生共業起,
此中有過故,
我是作如甁,
先無而後起

【釋】자아가 어째서 조작(造作)인가? 이른바 먼저 없다가 나중에 존재하는 것이다.자아[我]는 먼저 번뇌의 업을 일으키지 못한다. 마땅히 병과 같이 외법(外法)을 생인(生因)으로 삼는 것이지, 전생에 쌓은 업을 생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후음(후음)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면 실체가 없게 된다.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시 과거세에도 또한 앞의 두 경우와 같은 오류가 있다.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라는 것은 이와 같은 법이 없기 때문이다. 과거세의 존재와 비존재 등에 관한 네 구(句)를 관찰하는 것을 마친다. 지금 장차 미래에 관하 네 구를 관찰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3_c_23L釋曰我者云何是造作耶謂先無後我者先不起煩惱業應如甁以外法爲生因不以先世所集業爲生因如是能生後陰因者則爲無體非有非不有復次過去世亦同前二種過非有非不有者無如是法故觀察過去世有無等四句已今當次觀未來四句如論偈說

또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으니
내세(來世)에 아의 생기가 있는가
내세에 아의 생기가 없는가라는 견해는
과거의 경우와 동일한 오류가 되네.
016_0524_a_08L或有如是見,
來世有我起,
來世無我起,
同過去有過

【釋】이는 말하자면 내세는 같은가 다른가, 동시인가 동시가 아닌가 따위인데, 지금 또한 이와 같이 부정하기 때문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4_a_10L釋曰此謂來世一異俱不俱等今亦如是遮故如論偈說

만약 천(天)이 사람과 같다면
자아[我]는 곧 상주의 오류에 떨어지네
천은 이미 무생(無生)인데
상주라면 발생할 수 없기 때문이네
016_0524_a_12L若天與人一,
我則墮於常,
天旣是無生,
常不可生故

【釋】이와 같이 자아라고 주장하면 곧 상주(常住)의 오류에 떨어진다.
자부의 사람이 말하였다.
“같다거나 다르다고 주장하면 무슨 오류가 있는가?”
016_0524_a_14L釋曰如是我者卽墮常過自部人言一異等義有何過耶
청변 논사가 말하였다.
“만약 아직 태어나지 않은 천(天)이 바로 천이라면 자아는 생기하지 않은 것이고, 생기하지 않은 것은 곧 상주(常住)이다. 그러므로 자아가 아직 하늘에 태어나지 않았을 때도 마땅히 하늘에서 지은 업이 생기한다면 이러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자아가 상주하나 아직 하늘에 태어나지 않았을 때도 하늘에서 지은 업이 일어난다고 말한다면 세상 사람이 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만약 자아가 무상(無常)하다면 이 사람의 자아가 하늘 중에 태어날 때 전생 사람의 자아가 현생에 공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의 의도와 다르게 존재하여 위에서 언급한 어떤 오류도 없다고 한다면 그 사실은 옳지 않다. 다르다고 헤아려 분별한다면 오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4_a_16L論者言若未生天卽是天者我則無起無起者卽是以是故我未生天時應能起天所作業而無是事若謂我是常未生天時已能起天所作業者世人所不信復次若我無常此人中我天中生昔人中我今卽壞故若汝意謂得有異而無如上所說一過者是事不然計異者亦有過故如論偈說

만약 천(天)과 사람이 다르다면
자아는 무상(無常)하네
천과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상속한다는 것은 옳지 않네.
016_0524_b_01L若天與人異,
我則墮無常,
天與人異故,
相續者不然

【釋】그 오류는 무엇인가? 이른바 다르게 존재하기 때문이니, 비유하면 제바달다와 야야달다처럼 두 자아가 상속한다는 것은 곧 오류이다.
다시 어떤 사람이 “자아의 상속은 하나인데, 천(天)의 뜻이 있기도 하고 사람의 뜻이 있기도 하다”고 말한 것에 대하여 지금 장차 대답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4_b_03L釋曰其過云何謂有異故譬如提婆達多與耶若達多二我相續則爲有復次若有人言我相續是一有是天義有是人義今當答之如論偈說

만약 하늘이 일부 존재하고
또한 사람이 일부 존재한다면
상주와 무상이 함께 존재하네
한 곳에 존재한다는 것은 옳지 않네.
016_0524_b_07L若天在一分,
人又在一分,
常無常共俱,
一處者不然

【釋】어째서 옳지 못한가? 이른바 천인이 있는 곳에 천(天)이 있다면 곧 상주라 말할 수 있다. 천이 있는 곳에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으면 무상하다. 만약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없으면 무상하다. 만약 사람이 있는 곳에 사람이 존재한다고 하면 곧 상주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천인이 없기 때문이다. 천인이 없다면 곧 무상이다. 마치 한 사물이 한 공간에서 희기도 하고 검기도 하듯이 그 주장은 옳지 않다. 만약 어떤 이가 “자아는 곧 상주하지 않고 또한 무상하지도 않다”고 말한다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4_b_09L釋曰云何不然謂有天處有天卽是天處無人故無人卽是無常若有人處有人卽是常人處無天故無天卽是無常猶如一物一處亦白亦黑其義不然若有人言我非是常亦非無常者如論偈說

만약 상주나 무상이라는
두 주장이 성립한다면
상주도 아니고 무상도 아니라는
그대의 주장 또한 성립하네.
016_0524_b_15L若常與無常,
二義得成者,
非常非無常,
汝意亦得成

【釋】이 주장은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제일의제에서는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4_b_17L釋曰此義難令人解故復次第一義中者如論偈說

어떤 곳에 어떤 이가 왔다가
머물던 곳으로 간다면
생사(生死)는 시작이 없을 것이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네.
016_0524_b_19L有處有人來,
從住處有去,
生死則無始,
而無有是事

【釋】‘어떤 곳’이란 천세(天世)의 처(處)와 인세(人世)의 처이다. ‘어떤 사람’이란 이른바 천인(天人)일 경우와 사람이일 경우이다. ‘머무는 곳’이란 천(天) 등의 세계의 처(處)에 머무는 것이다. ‘간다’는 것은 이른바 어떤 사람이 다른 취처(趣處)로 향해 가는 것이다.만약 그렇다면 이 자아는 무시 이래로 항상 존재하므로 곧 영원하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없다. 어째서 없는가? 이른바 중생 및 사람을 앞에서 이미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이 뜻으로 인하여 영원한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한 자아는 없어도 무상한 자아는 있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4_b_21L釋曰有處者若天世處人世處有人謂若天若人住處者謂住天等世界處有去者謂有人向異趣處去爾者此我無始已來恒有而卽是常而無是事云何無耶謂衆生及人先已遮故以是義故無有常我若言雖無常我而有無常我者是亦不然論偈說

영원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또한 무상한 것
영원하면서 무상한 것
영원하지도 않고 무상하지 않은 것이 존재하는가?
016_0524_c_06L若無有常我,
誰復是無常,
亦常亦無常,
非常非無常

이는 영원한 것[常住]을 상대하므로 무상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본래부터 영원한 것을 상대하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무상하다고 말하는가? 상주와 무상 등은 다 이미 성립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끝[邊] 등에 관한 네 구를 관찰하겠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4_c_08L釋曰此謂待常故說無常本無有常待何說無常復次常無常等皆已不今當觀察邊等四句如論偈說

세간에 끝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다음 세상[後世]이 있는가?
세간에 끝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다음 세상이 있는가?
016_0524_c_11L世閒若有邊,
云何有後世
世閒若無邊,
云何有後世

【釋】끝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궁극적인 장소와 다한 장소 등을 이름하여 끝이라 한다. 마치 아라한의 열반음(涅槃陰)과 같다. 여기에서 후세(後世)의 존재가 있다고 말한다면 전세(前世)의 음(陰)을 원인으로 삼고, 후세의 음을 결과로 삼아 전전(展轉)하여 한계가 없다. 이와 같이 전음(前陰)의 원인에 의하여 후음(後陰)의 결과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모두 5음(陰)은 전전상속(展轉相續)하여 일어난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4_c_13L釋曰邊者云何謂究竟處盡處等名如似阿羅漢涅槃陰而今有後世在者謂前世陰爲因後世陰爲果轉無終如是依前陰因起後陰果故然今有此諸陰展轉相續起如論偈說

모든 음(陰)의 상속(相續)은
마치 등불이 타오르는 것과 같네
그러므로 세간은
유한[有邊]하지도 무한[無邊]하지도 않네.
016_0524_c_18L此諸陰相續,
猶如然燈焰,
以是故世閒,
非有邊無邊

【釋】여기서 증험하겠다. 무명(無明)이 있어 번뇌가 아직 다하지 않고 모든 음은 상속하거나 단멸하지 않는다. 이 음(陰)에 결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니, 마치 등불이 상속하는 것과 같다. 이 까닭으로 세간이 유인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상사(相似)의 결과가 일어나 허물어지지 않는 것은 전세의 음이 허물어지지 않아 후세의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니,비유하면 등불과 등불 이전의 불꽃과 같다. 그러므로 세간이 무한하다는 것은 옳지 않다. 증험한 주장에 대하여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4_c_20L釋曰此中立驗有無明煩惱未盡陰相續不斷此陰有果故譬如燈焰相續以是故世閒有邊者不然此相似果起不壞者非前陰不壞有後果譬如燈前焰以是故世閒無邊者不然如所說驗義者應如論偈說

전세(前世)의 음[陰]이 이미 괴멸(壞滅)하고
후세의 음이 달리 생기한다면
전세의 음은 원인이 아니니,
이를 이름하여 유한[有邊]이라 하네.
016_0525_a_03L前世陰已壞,
後陰別起者,
則不因前陰,
是名爲有邊

【釋】이는 전세의 음이 일어나자마자 곧 사멸하여 후세의 음(陰)이 상속인이 되지 않는다면 곧 유한이라는 것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5_a_05L釋曰此謂前陰起已卽滅不爲後陰相續因者卽是有邊如論偈說

만약 전세의 음이 허물어지지 않아
후세의 음이 생기하지 못한다면
이미 전세의 음은 원인이 아니네
그러므로 곧 무한[無邊]이네.
016_0525_a_07L若前陰不壞,
後陰不起者,
旣不因前陰,
而卽是無邊

【釋】무엇이 무한인가? 이른바 모든 순간에 상주(常住)하기 때문에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5_a_09L釋曰云何無邊謂一切時常住故義不然如論偈說

일부는 유한이고
일부는 무한이라면
저 유한과 무한을 떠나
다시 유한하면서 무한한 것 등은 없네.
016_0525_a_11L一分是有邊,
一分是無邊,
離彼有無邊,
更無俱等邊

【釋】이는 세간의 최후의 한계 등에 관한 네 구(句)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5_a_13L釋曰此謂無世閒最後邊等四句以者何如論偈說

어떻게 한 취착을 짓는 자 가운데
일부는 괴멸하고
일부는 괴멸하지 않는가?
이와 같은 것은 옳지 않네.
016_0525_a_15L云何一取者,
一分是有壞,
一分是無壞,
如是者不然

【釋】어째서 옳지 않은가? 앞의 두 종류의 등불의 비유를 들어 증험한 곳에서 이미 논파하였기 때문에 이는 옳지 못하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5_a_17L釋曰云何不然如前二種燈喩驗中已破故是爲不然如論偈說

유한과 무한
이 둘이 성립한다면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니라는
그 주장 역시 성립하네.
016_0525_a_19L有邊及無邊,
是二得成者,
非有非無邊,
其義亦得成

【釋】여기에서 어떠한 사람이 유한하기도 하고 무한하기도 한 것이 성립한다고 말하면 상대(相待)하기 때문이다. 유한도 아니고 무한도 아니라는 것이 또한 성립한다. 그러나 이런 일은 없다. 마치 제일의제처럼 총괄적으로 일체의 견해가다 옳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물들로써 이해시키려 하는 것은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5_a_21L釋曰此謂若一人是亦有邊亦無邊成者以相待故非有邊非無邊亦成而無是事如第一義中摠說一切見皆不然作如是令物解者如論偈說

제일의제 중에는
일체 법이 공하기 때문에
어떤 곳에서, 어떤 인연으로
어떤 사람이 견해들을 일으키는가?
016_0525_b_02L是第一義中,
一切法空故,
何處何因緣,
何人起諸見

【釋】이는 제일의제 중에 모든 실체가 다 공하다면, 어떤 사람이 있어 어느 경계를 연(緣)으로 하여 무엇으로써 원인을 삼아 어떤 견해를 일으키는가? 저 사람이 공(空)하고 경계가 공하며 원인이 공하고 견해가 공하기 때문에 사람이 존재하고 경계가 존재하며 원인이 있고 견해가 일어난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016_0525_b_04L釋曰此謂若第一義中一切諸體皆空者有何人緣何境以何爲因起何等見以彼人空境空因空見空故有境有因有見起者不然
이 뜻으로 인하여 품은 첫머리에 자부의 사람이 “제일의제에 이와 같이 5취음(取陰)의 자체가 존재하고, 이것이 견처(見處)이다”고 제시한 그 주장은 옳지 않다. 어째서 옳지 못한가? 이미 중생들로 하여금 일체의 견해들이 제일의제 중에 다 공하다는 것을 이해시켰으므로 옳지 않다. 만약 세제에 의하여 원인을 세운다면 스스로 그대의 주장과 어긋난다. 부처님을 세간의 친근한 이[世親]라 하는 것은 일체 중생이 허망분별(虛妄分別)하여 여러 고(苦)의 종자(種子)인 견해들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서 연민을 일으키시기 때문이다. 『중론』의 게송에서 말한 것과 같다.
016_0525_b_08L以是義品初自部人言第一義中有如是五取陰自體是見處者此出因義不云何不然第一義中已令物解一切諸見悉皆空故不然若依世諦中而立因者自違汝義佛婆伽婆爲世親者見一切衆生虛妄分別起種種苦種子諸見故而起憐愍如論偈說

부처님께서는 모든 고(苦)들을 끊으시기 위하여
미묘한 법을 연설하시고
연민(憐愍)을 원인으로 삼으셨네
지금 구담(瞿曇)께 예경 드리네.
016_0525_b_15L佛爲斷諸苦,
演說微妙法,
以憐愍爲因,
我今禮瞿曇

【釋】고(苦)를 끊는다는 것은 이른바 일체 중생의 생사 등의 모든 고들을 끊는 것이다. 미묘한 법이란 이른바 청정하기 때문에 미묘한 법이라 한다. 능히 번뇌훈습(煩惱薰習)의 불을 사멸하기 때문에 청정이라 말한다. 또 일체 공덕의 원인을 증장원만(增長圓滿)하게 하기 때문에 또한 청정이라 이름한다. 미묘한 법이란 대승을 말한다.
016_0525_b_17L釋曰斷苦者謂斷一切衆生生死等一切諸苦妙法者謂淸淨故名爲妙能滅煩惱熏習火故名爲淸淨次一切功德因增長圓滿故亦名淸妙法者所謂大乘
『승만경(勝鬘經)』에서 “세존이시여, 미묘한 법을 섭수하는 자는 이른바 대승을 수호합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일체 성문과 벽지불을 출생시키기 때문입니다.나아가 일체 세간ㆍ출세간의 선법(善法)도 다 대승으로부터 출생하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아욕달(阿耨達)의 연못에서 사대하(四大河)로 나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대승은 능히 성문과 벽지불을 출생시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016_0525_b_22L如『勝鬘經』說攝受妙法者謂守護大乘何以故世尊一切聲聞辟支佛乘皆從大乘中出生故乃至一切世閒出世閒善亦皆從大乘中出生故世尊譬如阿耨達池出四大河如是如是世尊大乘者能生聲聞辟支佛乘
이와 같이 대승은 자비희사(慈悲喜捨)를 원인으로 삼으며 세간의 명리를 원인으로 삼지 않는다. ‘지금 구담께 예경드리네’란 이른바 무상(無上)의 미묘한 법보를 열어 보일 수 있기 때문에 구담이라 한다. 또 성씨가 구담이므로 구담이라 이름한다. 예경이란 무엇인가? 예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입으로 칭탄(稱歎)하는 것이요, 둘째는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는 것이다.
016_0525_c_05L如是乘以慈悲喜捨爲因不以世閒名利爲因今禮瞿曇者謂能開示無上妙法寶故名爲瞿曇復次姓瞿曇故爲瞿曇禮者云何有二種禮一謂口言稱歎二謂屈身頭面著地
『범천왕소문경』의 게송에서 “심오한 인연법을 깊이 이해한다면 곧 모든 삿된 견해가 없네. 법이 모두 인연에 속하여 스스로 결정된 근본은 없네. 인연법은 발생하지도 않고 인연법은 소멸하지도 않네. 만약 이와 같이 이해할 수 있다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항상 현전하시네”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
이 품의 첫머리에서 자부의 사람이 세운 증험에는 오류가 있다고 말하고, 또한 모든 견해가 공함을 개해(開解)시키려 하는 것이 품이 주장하는 뜻이다.
016_0525_c_10L如『梵王所問經』偈言深解因緣法則無諸邪法皆屬因緣無自定根本因緣法不生因緣法不滅若能如是解諸佛常現前此品初說自部人立驗有過又以諸見空故而令開解是品義意
『반야바라밀다경』 중에 “부처님께서 극용맹(極勇猛)보살마하살에게 ‘색은 견해를 일으키는 곳도 없고 또한 견해를 끊는 곳도 없으며, 나아가 수ㆍ상ㆍ행ㆍ식도 견해를 일으키는 곳도 없고 견해를 끊는 곳도 없다면 이를 반야바라밀이라 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지금 생기가 없는 등의 특수[差別]한 연기로써 개해시키려는 것이다. 이른바 일체 희론 및 동일성과 차별성 등의 여러 견해를 끊어 모두 다 적멸케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자각의 법이고, 이는 허공과 같은 법이며, 무분별(無分別)의 법이고, 제일의제의 경계에 속하는 법이다. 이와 같은 진실한 감로(甘露)로써개해(開解)시키는 것이다. 이는 일부 논(論)의 종의(宗意)이다.
016_0525_c_15L如『般若』中說佛告勇猛極勇猛菩薩摩訶薩知色非起見處亦非斷見處乃至受想行識非起見處亦非斷見若色受想行識非起見處亦非斷見處者是名般若波羅蜜今以無起等差別緣起令開解者所謂息一切戲論及一異等種種見悉皆寂滅自覺法是如虛空法是無分別法第一義境界法以如是等眞實甘露而令開解是一部論宗意
【문】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처음ㆍ중간ㆍ나중이 다 진실하다. 이 논 중에 어째서 모든 증험을 자세히 세울 필요가 있는가?
016_0526_a_02L問曰諸佛所說初中後皆眞實此論中何須廣立諸驗耶
【답】 혹은 우둔(愚鈍)한 중생들은 부처님의 아함(阿含)에 대해 바른 믿음을 세울 수 없어 저 중생을 섭수하고자 자세한 증험을 세운 것이다. 이제 용수 논사께 머리를 조아려 예경하려고 게송을 읊는다.
016_0526_a_04L答曰或有愚鈍諸衆生等於佛阿含不能正信爲欲攝取彼衆生故廣立諸驗我今頂禮龍樹阿闍梨故而作頌曰

석가모니법왕의 아들이신
큰 지혜의 논사께서는
반야(般若)의 묘리(妙理)로써
이 중론(中論)을 개연(開演)하셨네.
016_0526_a_07L牟尼法王子,
大智阿闍梨,
以般若妙理,
開演此中論

이타행(利他行)을 잘 이해하여
세상을 비추는 해와 달이 되어
매우 깊은 법을 현료(顯了)하여
불도(佛道)를 얻는 원인을 말씀하셨네.
016_0526_a_09L善解利他行,
爲照世日月,
顯了甚深法,
說得佛道因

논사께서 지은 중론을
이제 모두 해석하여
모든 악견(惡見)을 끊게 하려고
『반야등론(般若燈論)』을 지은 것이네.
016_0526_a_10L闍梨所作者,
我今悉解釋,
息諸惡見故,
造般若燈論

『반야등론』은
깊고 미묘하여 비할 데 없는 법이니
그러므로 내가 지은 것에
조금이라도 복덕이 있으면.
016_0526_a_11L此般若燈者,
深妙無比法,
然我今所作,
若有少福德

『반야등론』으로써
원하옵건대 중생의 부류를 섭수하고
법신여래(法身如來)가
시방의 찰나에 편만함을 보도록 하며
016_0526_a_13L以此般若燈,
願攝衆生類,
見法身如來,
遍滿十方剎

스스로 법을 깨달아
모든 견해와 희론을 끊도록 하소서.
적멸하여 분별이 없고
비할 데 없으니 마치 허공과 같네.
016_0526_a_14L得自所覺法,
息諸見戲論,
寂滅無分別,
無比如虛空

다시 원하옵건대 반야등으로써
세계의 어리석음에 덮인 자를
두루 비추어
열반을 건립(建立)하도록 하소서.
016_0526_a_15L復願般若燈,
普照於世界,
爲闇所覆者,
建立於涅槃

『반야등론』의 제27 「관사견품」의 해석을 마친다.
016_0526_a_17L般若燈論釋第二十七品竟
피안(彼岸)에 도달하는 모든 방법을 논한 자이고, 깊은 큰 지혜를 가진 자이며, 큰 수레[大乘]를 탄 자인 분별을 비추는 대보살이 긴 『중론』의 해석을 마치고 발원을 하였다.
016_0526_a_18L一切論到彼岸者深大智慧者乘於大乘者分別照明大菩薩造此釋『中論』長行訖而發願言

원하옵건대 한순간 선(善)해도
기쁘게 회향하여
중생에게 생명이 마치는 순간
미륵(彌勒)을 보게 하소서.
016_0526_a_21L願以一念善,
隨喜迴向等,
與一切衆生,
命終見彌勒
般若燈論釋卷第十五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