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乘廣百論釋論卷第四

ABC_IT_K0583_T_004
016_0600_a_01L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 제4권
016_0600_a_01L大乘廣百論釋論卷第四


성천보살 본논 지음
호법보살 주석
현장 한역
016_0600_a_02L聖天菩薩本 護法菩薩釋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3. 파시품(破時品) ①
016_0600_a_04L破時品第三之一
016_0600_b_02L
또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대의 말에 이미 멸한 것이 아직 나지 않으면 본체가 없으리라”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나니, 모든 유위의 법은 앞뒤의 작용은 없으나 본체는 항상 있어서 분위(分位:부분과 지위)가 다르기 때문에 세 세상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없다면 반드시 나지 않을 것이요, 있다면 결정코 멸함이 없을 것이다. 이런 주장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병 따위가 미래에 있다면
과거나 현재가 있지도 않고

논하건대 빛 따위 모든 법이 미래 세상에 있어서 과거나 현재의 두 세상이 모두 공하다가 나중에 인연을 만나서야 두 형상이 비로소 일어난다 한다면 어찌하여 그대는 말하기를 “없으면 반드시 나지 않는다” 하며, 미래 세상의 형상이 과거나 현재엔 없는 것이라면 어찌하여 말하되 “있다면 결정코 멸함이 없으리라” 하는가. 만일 미래에 두 세상의 모습이 모두 있다고 고집하면 그 이치도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미래에 과거와 현재가 있다면
미래도 있지 않는 것이다

논하건대 만일 미래에 과거 현재의 형상이 있다면 의당 나중의 지위와 같아서 미래의 형상은 잃어서 한 법과 한 시각에 진실로 여러 형상이 있으면서 서로서로가 어긋나나니, 그 이치가 이뤄지지 않는다. 이 이치에 의하여 낱낱 세상에 모두 여러 형상이 있으리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또 다시 만일 빛 따위가 미래의 본체가 있어서 두 세상에 흘러 들므로써 과거와 현재가 있다고 한다면 이런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미래가 사라지면서
미래의 본체가 있다면
이는 항상 미래일 뿐이거늘
어찌 과거 현재를 이루랴

논하건대 만일 빛 따위의 법이 미래의 본체가 있다면 이는 과거ㆍ현재의 두 세상이 없는 것이니, 다른 형상의 법 안에 다른 형상이 있다고 할 수 없음이 마치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와 같기 때문이다.
또 한 법이 세 시각에 흘러서 세 세상이라 한다면 혼란을 이룰 것이다. 또 빛 따위 법이 세 시각에 흘러도 차이가 없다면 세 세상이 없으리라. 만일 차이가 있다면 이는 다른 형상이어서, 본래 없던 것은 나고, 있던 것은 도리어 멸하리니, 온갖 유위의 법도 모두 이러하여서 항상 있다고 주장하는 종파[常有宗]에 빠지게 된다.
또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법이 미래에 있다면
분명 미래의 형상이 있어
그대로가 현재일 것인데
어찌 미래라 하겠는가.

논하건대 빛 따위의 법이 미래에 분명 있다면 의당 현재의 사애와 같아서 미래의 위치를 잃으리라. 이미 미래가 없다면 나머지 두 세상도 있지 않으리니, 그가 먼저이기 때문에 온갖 것도 없다.
도 다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모든 법의 본체는 비록 항상 있으나 등류과(等流果:결과)를 취하는 작용을 따서 현재라 한다. 이와 같이 한 작용이 현재에 두루 있을뿐, 과거와 미래는 결정코 없으니, 서로 섞이어 어지럽지 않기 때문이요, 나머지 작용은 그렇지 않다” 한다니 이런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偈頌)을 말했다.

과거와 미래가 현재와 같이 있다면
결과를 취하는 작용은 왜 없으랴

논하건대 과거와 미래의 빛 따위 모든 법이 현제와 같이 항상 본체와 성품이 있다고 하는 것은 같은 종류의 원인으로 같은 무리의 결과를 치하기 때문인데 이 작용이 어째서 항상 있지 않는가. 결과를 취하는 이 작용이 기다려야 되는 뭇 인연은 언제나 항상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여 모든 법의 본체와 작용이 항상 있다면 온갖 시간을 현재라 해야 되리라. 또 항상 현재라 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나니 반드시 과거 미래를 기다려서야 현재가 성립되기 때문이다.
또 미래의 결과가 현재의법과 같다면 이미 본체가 있었기 때문에 다시 취할 필요가 없다.
또 모든 결과의 법이 인연이 합할 때에 생기는 바가 없다면 결과라 할 수 없고, 생기는 바가 있다면 이는 본래 없는 것이 인연 따라 생긴 것이니, 본체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온갖 것이 본래 없다가 생기고 있던 것은 다시 멸하여 전의 허물과 같으니, 그러므로 상유종(常有宗)에 빠진다 한 것이다.
만일 말하기를 “그 작용은 있기도 없기도 하나 본체는 항상 존재하므로 그런 실수가 없다” 한다면 이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본체가 항상하여 없지 않다면
어째서 항상 머무름이 아니라 하랴.

논하건대 항상 있으면 항상하다 하는데 빛 따위의 모든 법이 본체가 이미 항상 있다면 어찌 항상함이 아니랴. 설사 유우의 본체는 모두가 항상하다고 가정한다 하여도 경에서 말씀하신 모든 법칙은 무상하다 하신 말씀에 어긴다. 만일 다시 말하기를 “모든 법칙이 비록 항상 있으나 유위의 형상과 합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다. 본체가 이미 항상 있거늘 저 형상과 합한들 다시무엇을 이루겠는가. 어찌 스스로의 결과를 취하는 작용을 이루지 않겠는가. 작용은 본체를 여의지 않았으니 본체도 이뤄져야 하리라.
만일 작용은 이뤄져야 되지만 본체는 이뤄지지 않는다면 작용은 생멸하거니와 본체는 항상해야 할 것이요, 만일 빛 따위의 본체는 항상하고 작용은 무상하다면 허공 따위의 본체와 작용은 무상하리라. 또 분체는 항상하고 작용은 무상하기 때문에 이 본체까지도 무상하게 된다면 작용은 무상하나 본체의 항상함에 의하기 때문에 이 작용도 항상해야 될 것이다.
또 이 본체와 작용은 각각 딴 이치에 매어야 되리니 항상함과 무상함의 이치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또 빛 따위의 본체가 인연을 빌리지 않으면서도 유위의모든 행상과 합한다면 허공 따위의 본체도 그러하리라. 그것들이 그렇지 않거늘 이것만이 어찌 그러하랴.
또 다시 과거 세상이란 말은 개별적인 형상을 추리고 온갖 과거의 뜻을 통틀어 말하는 것인가 아니면 전체적인 형상을 간추리고 일부분의 과거의 형상을 말하는 것인가. 사실 그렇다면 무슨 실수가 있으리오마는 만일 개별적인 형상을 간추리고 온갖 과거의 뜻을 통틀어 말한다면 그 이치가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과거가 지나갔다면
어떻게 과거가 되겠는가

논하건대 만일 과거의 법이 온갖 본체나 형상이 모두 지나갔다면 이는 온갖 것이 아주 없거늘 그대는 어찌 과거가 있다고 하는가. 이런 본체와 형상에 의하여 그대의 뜻에 과거가 있다고 말하려 하나 정당한 이유가 없다.
또 과거라는 말은 이미 없어진 것인데 과거의 세상이 역시 과거라 한다면 이는 과거마저 멸했을 것이요, 과거의 세상이 이미 사라졌다면 그대는 어찌 지금 과거가 있다고 집착하는가. 저 현재와 미래가 이미 멸하면 미래와 현재라 할 수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만일 바른 이치에 의하여 말하건대 의당 이렇게 말해야 하나니, 과거 세상이란 말은 따로 진실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있다고 여기는 차별된 이름과 형상을 추리는 것인데 세속에 의지해서 거짓으로 이름과 형상을 세워서 통틀어 과거라 할지언정 별다른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기름을 마신다 한다면 비록 기름은 마시지 않으나 거짓으로 말하는 것인데 이는 어떤 한 가지 일을 지목한 것임을 세상이 모두 같이 인정하는 일이다. 여기의 과거라는 말도 그러하여서 전체적인 형상은 추리고 따로 한 종류의 과거를 말한 것이다” 한다면 이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과거가 지나가지 않으면
어떻게 과거가 되겠는가

논하건대 만일 과거의 법의 온갖 본체와 형상이 모두 지나가지 않는다면 그대는 지금 어찌 과거라고 집착하는가. 그대는 말하기를,
“과거의 빛 따위 모든 법은 본체가 궐함[없어짐]이 없기 때문이라” 하리라.
또 과거라 함은 이미 사라졌다는 뜻인데 만일 과거가 지나가 버리지 않는다면 과거의 본체는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닐 것이요, 과거의 본체가 이미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그대는 지금 어떻게 과거라 집착하겠는가. 저 미래와 현재의 자체도 사라지지 않으리니, 지나가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하기를 “세상의 거짓 이름과 같이 전체적인 형상을 추리고 따로 한 물건을 드러낸다.
과거 세상의 법은 그 본체는 있으나 결과를 취하는 작용은 없으므로 과거라” 한다 하지 않았는가. 그대는 말하기를 “이 작용이 곧 의지하는바 본체라” 하는데 어찌 본체는 있는데 작용만 없어지겠는가. 만일 본체와 작용이 서로 따르지 않는다면 마치 딴 물건과 같아서 본체와 작용을 이루지 못하리라.
또 작용 멸하는 것을 과거라 한다면 그대 혼자의 주장이어서 세상이 다같이 인정하는 바는 아니거늘 어찌 기름을 마신다는 예를 들어 비유를 삼는가. 세간이 같이 허락한다면 더 따져 물을 수 없지만 혼자의 주장은 따져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모든 법이 그 본체가 항상 있다”면 세 세상이 이뤄지지 않나니, 오직 현재에 실제로 있는 본체 위에서만 거짓 세운 이름이기 때문이다. 현재에 실제로 있는 본체 위에 세 가지 이름을 거짓 세우지는 않았다. 곧 현재의 본체를 잃나니, 그러므로 집착하는바 과거가 이뤄지지 않는다.
과거를 부정한 것 같이 미래도 그러하나니, 미래가 오지 않았다면 어찌 미래를 이루겠는가. 전체와 부분으로 따져 물어도 모두 앞의 말과 같아진다.
또 다시 미래의 법이 뭇 인연을 빌려서 생겨졌느냐. 아직 나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만일 뭇 인연을 빌려서 생겨졌다면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미래가 남이 있다면
어째서 현재가 아니랴

논하건대 만일 미래의 법이 이미 인연 따라 생겼고 또 본체와 형상이 있다면 의당 현재라 해야 하리니, 성품과 남이 있으면 현재의 모습인데 현재를 떠나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은 비록 방편으로 현재를 이루려 했으나 뜻으로는 정히 미래가 있다는 생각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또 미래는 현재가 아니기 때문에 과거와 같이 결정코 남이 없으리라.
만일 미래가 아직 나지 않았다 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미래가 남이 없다면
어찌 항상함이 아니랴

논하건대 만일 미래의 법이 아직 인연에 따라 나지 않았으나 본체와 성품만이 있다면 남이 없기 때문에 허공 따위와 같아서 본체가 항상하리라 함이니, 이것 또한 방편으로써 항상 머무름의 이론을 이뤘으나 뜻으로는 미래가 있다는 고집을 깨뜨린 것이다.
이와 같이 따져 묻건대 과거나 미래의 본체가 진실로 있어서 생과 멸이 없다면 허공 따위와 같아서 무상의 성품을 잃어, 경에서 말씀하신 과거와 미래가 무상하다는 주장에 어긴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빛 따위도 무상하거늘 하물며 현재이랴 한 것 같다. 그러므로 과거와 미래의 모든 법은 모두가 실제로 있지 않나니, 현재와 무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거북의 털 따위와 같다.
세속에 포섭되기 때문에 현재의 본체는 실제로 있다하지 말지니, 현재는 실제로 있음일 뿐이 아니기 때문에 같은 비유[同喩]가 성립되지 않고, 원인은 일정치 않거나 혹은 어기기 때문이다.
또 다시 왕래론자(往來論者)는 말하기를 “우리 종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허망하게 이런 허물을 말하는구나.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종에서는 말하기를 ”모든 현실은 네 가지 형상으로 엇바뀌면서 서로 의지하여 세 세상이 왕래하여 서로 여의지 않는다. 나기[生] 따위와 합하므로 무상이 되고, 법의 성품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항상 있다. 그러므로 항상 있어도 무상을 폐하지 않아 경에 부합되고, 바른 진리에 맞는다 하거니와 이는 앞서 이미 무찔렀다. 본체가 이미 항상 있다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남 따위와 합하지 않으리라.
또 빛 따위 모든 법칙을 내는 것을 남의 형상[生相]이라 하는데 이러한 모든 법칙을 내는 작용은 미래에는 있지 않다. 반드시 인연이 화합하는 도움을 받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인연이 화합해도 쓸모가 없다.
만일 나는 작용이 본래 없다가 이제 있고, 있다가는 다시 없어진다 하면 온갖 법칙이 모두가 유지와 같기 때문에 모두가 그래야 되거늘 어째서 본체는 항상 있으나 무상이라 하는가.
왕래론자들은 이런 과실을 피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되 “만일 빛 따위의 법칙이 남 따위와 합함으로써 이런 허물이 있다면 지금 유위의 법은 세 세상에 왕래하는데 어느 세상이 무너지는 형상은 무상이리니, 무너져 없어지는 형상은 무상이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은 모두가 온갖 무상함은 무너져 없어지는 것이 형상이라는 사실을 허락하나니, 이른바 유위의 법은 미래 세상이 무너져서 현재로 들어오고, 현재 세상에 무너져서 다시 과거로 들어간다” 하나니, 만일 그렇다면 다음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미래가 남이 없으나
무너지기 때문에 항상치 않다면
과거는 이미 무너짐이 없거늘
어째서 항상하다 하지 않는가

논하건대 과거 세상은 가장 마지막에 있으므로 다시 다른 세계를 옮겨 갈 세상이 없다. 이미 제 자리를 지키어 항상 무너져버림이 없다면 의당 허공 따위와 같아서 본체가 무상함이 아니리라. 이렇게 말한다면  곧 경전의 말씀에 어긋난다.
만일 말하기를 “과거가 비록 항상 본체가 있어 다시는 사라져버리는 일이 없으나 현재에서 무너져서 옮겨 들어가므로 남이 있다. 남과 멸함의 두 가지는 무상의 형상인데 갖추었거나 갖추지 않았거나 모두가 무상이다. 과거나 미래는 제각기 하나인데 현재에는 둘이 갖추었나니 그러므로 세 세상은 모두가 무상하다” 하지만 이것도 이치에 맞지 않나니, 남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의 종파에서 집착하기를 남[나는 작용]은 미래에 있고, 과거나 현재에는 도무지 남의 작용이 없다 하거늘 어째서 지금은 말하되 “과거에 남이 있다” 하는가.
그대가 집착하기를 과거 현재가 이미 인연에서 생기었으므로 다시 딴 인연을 빌리지 않는다면 남이 어찌 있을 수 있으랴.
만일 과거에 결정코 남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므로 돌아가나니, 일향기(一向記:경정적인 결과)인 때문에 현재로 미래와 같다. 그러므로 다시 사라짐이 있다. 세간 사람들도 미래의 모든 법은 인연에 의해서 생기어 과거나 현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또 과거 세상은 현재나 미래가 아니기 때문에 허공 따위와 같아서 결정코 남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능동적인 형상과 수동적인 법은 제석(帝釋)과 항책가(恒策迦:慘尺迦)와 같아서 동시에 항상함과 무상함의 불길에 들리어, 지위가 본체 같고, 본체가 지위 같기 때문이다.
또 다시 위에서 말하기를 “과거와 미래의 빛 따위도 무상하거늘 하물며 현재이겠는가” 한 것 같으니, 그대들이 비록 이러한 경을 읽기는 하나 뜻은 알지 못하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대는 한 법이 세 세상에 왕래하면서 본체는 생멸이 없거니 어찌 무상하리오 하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또 그대가 집착하는바 현재의 법의 본체가 곧 과거 미래라면 어찌 견줄 수 있으랴. 한 법만으로 비유를 삼지는 못하리니, 세간에서는 이런 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본체는 다름이 없으나 지위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견줄 수 있다 하지도 말지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지위가 본체라면 본체가 다름이 없기 때문에 지위도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지위가 본체를 여의었다면 지위는 무상하고, 본체는 항상하리라.
또 본체는 지위와 같으니, 세간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또는 유위의 법이기 때문에 차별이 있어야 된다.
또 그대가 집착하는바 세 세상이 실재로 있어서 서로가 인하고 기다리지 않는다 함은 모두가 남 따위의 형상과 합해서 앞뒤가 다름이 없고, 현재는 무상하거늘 뭇ㄴ 수승한 형상이 있어 저 과거나 미래와 다르기에 과거나 미래의 빛 따위도 오히려 무상하거늘 하물며 현재이리오, 하는가.
만일 말하기를 “모든 법의 앞뒷 지위가 다르고, 세 세상이 뒤바뀌기 때문에 무상하다. 미래는 앞에 있으므로 남은 없으나, 멸함이 있고, 과거는 나중에 있으므로 멸함은 없고 남이 있으며, 현재는 중간에 있으므로 남도 있고 멸함도 있다면 과거와 미래는 각각 한 부분씩이라도 무상이거늘 하물며 현재이겠는가. 만일 두 가지를 갖추어서 무상함이 아니라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나니, 미래가 남이 없다면 허공 따위와 같거늘 어찌 멸함이 있으며, 과거가 남이 있다면 현재와 같거늘 어찌 멸함이 없으랴.
또 그대의 종파에서 말하기를 “미래는 남이 있고, 현재는 멸함이 있고, 과거는 이 두 가지가 없다” 하는데 어찌하여 지금은 딴 말을 하는가.
또 현재의 세상도 실체가 없어 앞 세상으로부터 굴러 뒷세상으로 들어왔거늘 어찌 이에 의해 생멸의 이론을 건립하리오, 이미 생멸이 없다면 어찌 무상함이겠는가.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 까닭에 다음에 이 게송을 말했다.

현재 세상의 무상함은
과거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니니
이 두 가지 까닭을 제하고는
셋째의 것이 있지 않다

논하건대 현재 세상의 법이 앞 세상에서 오지 않았고, 뒷세상으로 가지도 않거늘 어찌 무상하겠는가. 그대가 말하는 현재는 다른 세상에 의한 까닭에 딴 형상이 된 것을 무상이라 하나니, 다른 세상이란 과거와 미래요, 딴 형상이란 남과 멸함을 말한다. 현재는 다른 세상이 변하여 이뤄진 것 아니며, 또한 다른 세상으로 변해질 수도 없거늘 어찌 현재에다 생멸을 건립하랴.
게송에서 말하기를 “과거 따위라 한 것은 미래까지를 껴잡아 말한 것이니, 현재 세상의 법이 미래로 가지 않고 과거에서 오지 않는다” 함은 그대의 종파에서도 허락하고 있다.
그런데 과거 세상은 현재가 간 것이 아니니,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미래와 같다.
그 미래의 세상은 현재에서 온 것이 아니니,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 세상이 다른 세상에 왕래하고 바뀜이 없는 것 같거늘 어찌 현재가 생멸하여 무상이랴.
만일 현재가 과거에서 와서 미래로 간다면, 이것 또한 그렇게 파할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유위의 모든 법은 앞 시간에서 온 것 아니며, 뒷세상으로 가지도 않는다” 하였다. 그러기에 이런 집착을 깨뜨려야 그 이론이 결정되니, 거룩한 교법에 맞기 때문이다.
또 현재의 법이 다른 세상에서 와서 다른 세상으로 간다면 왕래할 때에 앞의 모습을 버리지 않고, 다른 형상도 이루지 않으리니, 세간에서 눈앞에 보기에 제바달다(提婆達多)가 다른 곳엘 왕래하더라도 형상은 다르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세 세상의 지위가 다르다고 인정하나 형상은 다르지 않기 때문에 어지러움을 이루나니, 지위와 형상이 같은가 다른가에 따라 모두 허물이 있어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숭상하는 왕래론자도 세간의 어지러움을 허락지 않나니, 그러므로 그대가 지금 왕래하여 생멸한다는 주장을 세워도 구제하는 뜻이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이 현재가 왕래한다고 허락하기는 하나 그의 무상한 성품은 성립되지 않나니, 왕래할 때에 형상이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의당 허공의 꽃과 같아서 무상의 성품이 아니리라. 그대도 역시 허공 꽃에 딴 모습의 존재나 무상이 있다고 허락지 않거니와 현재도 그렇다고 한다면 스스로의 종지에 어기고 경전의 말씀에도 어긴다.
만일 그대가 다시 말하기를 “세 세상의 본체와 형상이 차별은 없으나 모든 법칙의 거친 차별을 관찰하여 깨달음의 지혜를 일으키나니, 그러므로 한 법에서 자기 마음으로 분별하여 지위를 벌려 세우고 이 자기 마음으로 지위를 벌려 세운 지위에 차별이 있음을 말미암아 이 한 법을 무상이라” 하나니, 이것도 옳지 않다.
자기마음의 분별로 보이는 경계는 곧 자기의 마음이니, 다만 뭇 인연을 따라 모든 법칙의 종자가 익어져서 자기의 마음이 갖가지 지위로 변해진 것일뿐이다. 제 마음으로 변한 것은 진실한 본체도 형상도 없거늘 어찌 애써서 딴 법을 벌려 세울 필요가 있으랴. 다만 모든 법이 오직 마음뿐임을 믿어라.
깨닫는 지혜 따위 마음과 마음부치의 법은 실제로 있는 모든 법을 따라서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습관을 통해 익혀진 종자나 마음으로 나타난 뭇 인연의 세력에 따라 갖가지 경계의 차별을 변해 냈다.
그러므로 외도들이 그 자기의 마음을 갖가지 법의 성품과 형상을 변해낸다.
만일 법의 성품과 형상이 진실로 있다면 어찌 이 같이 마음을 따라 변하겠는가. 모든 지혜로운 이는 그들이 집착하는바 현재에 진실한 법은 남이 있다 함은 허락하지 말지니, 반드시 과거ㆍ미래의 두 세상에서 생긴 것이 아니며, 다시 셋째 것에서 생길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라짐은 반드시 남에 따르는데 남이 이미 있지 않다면 사라짐도 결정코 없으리니, 반드시 과거(過去)ㆍ미래(未來)의 두 세상에 가지 않고, 다시 셋째 곳에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이치로서 그대들의 종지를 따져 살피건대 세 세상이 무상함을 도무지 볼 수 없거늘 어디에 현재의 수승한 무상이 있기에 경에서 말하기를 “하물며 현재이랴” 하였겠는가.
그대는 한 법을 세워 여러 지위를 지내면서 남 따위를 따라 바뀜이 없을지라도 형상과 의지한 바는 앞뒤가 다름이 없거늘 무슨 뒤바뀜이 있기에 무상하다 하는가.
또 세 세상을 따라 지위가 차별이 있으므로 무상이라 하지도 말지니, 본체가 이미 변함이 없다면 지위가 어떻게 달라지랴. 지위(과거ㆍ미래ㆍ현재의 지위)와 본체가 다르다면 지위는 으레히 무상하고, 본체는 의당 항상하여 허공 따위가 같으리라. 그러므로 세 세상은 세속의 법으로만 있으나 그 안에는 한 법도 진실함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세속의 법 가운데서 현재의 모든 법칙의 생멸이 몸과 함께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이 같이 보는 바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무상한 이치는 가장 수승하다. 이에 의해 거짓으로 과거와 미래의 무상함을 세운다.
그 과거와 미래는 별다른 본체가 있지 않나니, 오직 현재에 의하여 과거와 미래를 거짓으로 세웠을 뿐이다. 그러므로 현재에 의하여 무상함을 분명히 보고, 거짓으로 과거ㆍ미래의 이미 또는 장차의 생멸을 세운다.
과거나 미래의 무상은 현재에 의하므로 현재의 무상함은 과거나 미래보다 수승하나니, 유정들로 하여금 과거나 미래의 보이지 않는 법도 무상하거늘 하물며 현재에 몸과 함께하여 눈앞에 생멸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 무상하지 않겠는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현재의 모든 법은 눈앞에 무상함을 보고, 과거와 미래는 이미 또는 장차 생멸한다. 그러므로 유정들은 세 세상의 일에 대하여 무상함을 관찰하고 싫어할 생각을 깊이 내라” 하였다.
모든 법칙이 본래 없었으나 난 것이어서 애초부터 일정한 본체가 없었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나중에 생기는 모든 법칙이
먼저부터 결정된 본체가 있다하여
결정한 성품이 있다는 사람이라면
삿된 집착이 아니라 하리라

논하건대 어떤 외도가 삿된 집착을 일으키어 말하되 “모든 법칙이 본래부터 결정적으로 매인 곳이 있어 뒤바뀌는 시간에도 변하지 않나니, 기약이나 소원이나 사람의 공력에 의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니, 그대들도 그의 소견과 같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인과의 차별을 빌려 세우고, 본래 매인 곳이 있어 뒤바뀌지 않는다 하기 때문이다.
미래의 모든 법은 네 가지 일이 결정되었나니, 이른바 원인ㆍ결과ㆍ의지한 바ㆍ반연할 바이니, 본래 결정된 형상과 같게 나중에도 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인연을 기다려서 나는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인연에서 생겼으니, 어찌 본래부터 있었으랴.
미래의 모든 법칙은 본체는 있으나 인연은 작용이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어떤 법이 인연에서 생긴다면
먼저부터 본체가 있지 않을 것이요
먼저부터 있든 것이 난다면
난 뒤에 다시 거듭 나야 되리라

논하건대 모든 법칙이 본래부터 있었다면 남[生]과 어긋나나니, 법이 이미 난 뒤엔 다시 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상한 모든 법칙이 남이 없다면 비록 인연을 만나더라도 바뀜이 없고, 무상한 법칙의 성품을 잃으리, 남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만일 남이 있다면 결과를 취하는 작용과 같아서 남의 지위 이전엔 본체가 없어야 된다.
게송에서 말한바 난 뒤에 다시 나야 된다는 말은 허물되는 부문을 말함으로써 다른 비유[異喩]를 말한 것이니, 이른바 유위의 법칙은 먼저부터 성품이 있지 않으니 인연에서 생겼기 때문이다. 마치 결과를 취하는 작용과 같다. 먼저부터 있었던 모든 법칙은 인연에서 생기지 않았으니, 이미 난 법과 같다 함이다.
만일 그대가 다시 말하기를 “내가 말한 모든 법칙은 비록 본래부터 본체가 있어 인연을 기다리지 않으나 결과를 취하는 작용은 본래 없으나 인연을 기다림은 있다”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니, 스스로의 결과를 취하는 작용은 본체를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본체와 같아서 먼저부터 성품이 있을 것이며 혹은 모든 법칙의 본체는 작용을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작용과 같고 먼저부터 있는 성품이 아니리라.
그대들이 집착하는바 본래 있는 모든 법칙은 마치 무쇠 토막 같아서 아무 훌륭한 작용이 없고, 인과의 도리가 전혀 상응치 않나니, 일정한 성품이 있어 항상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상유론(常有論)을 고집하는 이는 이런 만은 허물이 있으니, 이른바 세간에 어기고, 세간 사람이 같이 알고 있는 인과의 이치를 비방하기 때문이요, 또 스스로의 종지에 어기나니, 온갖 인연에서 결과를 내는 이치를 비방하기 때문이요, 또 스스로의 말에 어기나니, 법은 본래 있다고 주장하나 인연에서 생기기 때문이요, 또 비량(比量)에 어기나니, 마치 결과를 취하는 작용이 항상 있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요, 또 현량(現量)에 어기나니, 빛 따위가 항상 있지 않음을 눈앞에 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허물이 있기 때문에 이런 소견을 버려야 한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를 떠나서 따로 진실한 성품이 있지 않은 줄 알아야 하나니, 세간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에 현재와 가아서 오직 현재의 마음이 변해지는 형상에 의하여 거짓으로 있다고 시설했으나 현재도 역시 으뜸가는 진리로서 있는 것은 아니다. 인연에서 생겼기 때문이니, 마치 요술의 일과 같다.
또 세 세상의 법칙은 모두가 상대적으로 성립되나니, 마치 길고 짧음과 같거늘 어디에 진실한 성품이 있으랴.
또 온갖 법칙은 모두가 무상하여 남과 멸함이 있고,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니, 만일에 결정코 없다면 토끼의 뿔 따위와 같아서 나지 않을 것이요, 결정코 있다면 집착하는바 허공 따위와 같아서 결정코 멸하지 않으리라.
만일 생멸이 없다면 거북의 털 따위와 같거늘 어찌 무상이라 하겠는가. 어떤 지혜로운 사람이 있어 온갖 법칙이 모두 생멸이 있음을 알면서도 항상 의지할 법칙이 있어 세상을 성립시킨다 하겠는가. 세상이 어찌 진실하랴. 현재도 참되지 않거늘 과거나 미래가 어찌 진실하랴.
만일 과거나 미래의 세상이 진실로 있지 않는 것이라면 숙명통과 생사통을 얻은들 무엇을 보겠는가. 이 두 가지 신통은 이미 있던 것과 장차 있을 것을 보나니, 이미 현재가 없다면 없음엔 차별이 없다. 신통의 힘으로 보는바의 한계도 없음이리라.
이것은 곧 중생과 3승의 성인들이 과거나 미래 세상을 알면 겁(劫)의 수효가 같은 것이다.
그대는 과거ㆍ미래가 모두 현재에 있다고 주장한다면 역시 이 허물과 같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과거ㆍ미래가 있음이라 본다면
어째서 없음이라고는 보지 않는가

논하건대 과거ㆍ미래에도 한량없는 인과가 있어 다음 다음 바뀌면서 끊이므로 중간은 있지 않나니, 그러므로 없음이라 한다.
또 그대가 다시 말하되 “과거나 미래에는 결과를 취하는 따위 갖가지 작용이 없다” 한다. 과거나 미래에는 이미 있음과 없음의 두 가지 이치의 차별이 있거늘 어찌 두 가지 신통으로는 있음만을 보고 없음을 보지 못하는가.
만일 없음을 보지 못한다면 신통을 얻은 여러 사람들은 과거나 미래의 무수한 겁을 지나면서 텅 비어 부처님이 없음을 보지 못했을 것이매, 그러한 여러 겁에 텅 비어 아무 것도 없음을 보았으랴. 그러므로 있음만을 본다는 것은 옳지 않다.
과거와 미래는 현재에는 없고, 예전과 장래에는 있음이니, 현재에 없기 때문에 현재와는 같지 않고, 예전과 장래에 있음이기 때문에 경계의 차별을 이룬다.
만일 현재의 없음과 같다면 멀음ㆍ가까움ㆍ시간이 차별됨 따위가 없으리라. 그대가 과거나 미래가 모두 현재에 함께 있다고 집착한다면 현재와 같아서 멀음ㆍ가까움ㆍ시간의 차별이 없으리니, 이는 모든 신통이 과거ㆍ미래ㆍ멀음ㆍ가까움ㆍ시간의 차별들을 비쳐 보지 못하리라. 허물이 이미 동일하거늘 어찌 힐난을 하겠느냐. 과거ㆍ미래가 현재와 같이 있으나 법칙에 의하여 세상ㆍ시간에 앞뒤ㆍ멀음ㆍ가까움의 차별이 있다. 그러므로 중생들의 보는 바는 가깝고 멀지 않으며, 없음은 멀고 가까움이 없기 때문에 그 허물이 같지 않다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현재에 이미 과거ㆍ미래가 있다면
멀다고 말하지 말어야 되리라

논하건대 과거ㆍ미래가 이미 현재에 함께 있다면 현재와 같이 가까워서 멀지 않으리라. 만일 과거ㆍ미래가 비록 현재에 본체가 있으나 작용이 없으므로 멀다 한다 하면 이것 또한 옳지 않으니, 작용이 본체를 여의지 않으므로 허물은 앞의 것과 같다.
또 여기의 뜻은 과거ㆍ미래의 빛 따위가 이미 함께 있다면 같은 세상이므로 현재와 같이 앞뒤와 원근(原近)의 차별이 없으리라.
과거와 미래가 원근이 없다면 신통을 얻은 여러 사람은 모두가 장애없이 온갖 과거ㆍ미래를 골고루 볼 수 있으리니, 그렇다면 여래의 아는 바는 한량없고, 2승들의 보는 바는 한량(限量)이 있는데 이런 차별은 모두 없어야 되리라.
그러므로 과거ㆍ미래가 비록 현재에 있지는 않으나 예전과 장래에 인과가 같지 않음이 있어서 차츰차츰 상속하면서 시간이 결정된다. 이 까닭에 예전과 장래에 유위의 방편으로써 어떤 이는 오래도록 지혜의 용맹하게 닦아 익히고, 혹은 종족이 으레히 훌륭함에 의하여 전후에 차츰차츰 상속하여 그가 뜻하는 바를 다 비추어 알며 혹은 습성이 이와 다르나 그의 정도에 따라 조그만큼만 안다.
이는 과거ㆍ미래가 현재에 있는 성품이 아니요, 신통을 얻기만 한 이는 스스로의 인연의 힘이 낫고 열등함이 같지 않으므로 방편의 용심에 차이가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마음이 변하여 예전과 장차에 법이 있어, 본체와 형상이 같지 않고, 멀고 가까움에 차이가 있나니, 이에 의하여 과거ㆍ미래의 시간이 같지 않고 신통의 힘에 우열이 있음을 건립한 것일지언정 실제로 과거ㆍ미래가 있어 이에 의하여 신통을 일으켜 멀고 가까움을 비쳐본다는 것은 아니다.
미래의 법과 법아님 따위가 먼저부터 본체와 성품이 있다는 주장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짓지 않은 법이 있음이라면
계행들을 닦아도 헛일일 것이요

논하건대 만일 아직 짓지 않은 미래의 복된 행이 먼저부터 이미 있었다면 현재에 애써서 보시와 계행 따위 행을 닦는 것은 헛일일 것이다.
또 미래가 먼저부터 법이 있었다면 그른 법도 끊을 수 없을 것이매 나쁜 계행을 버리기 위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여도 공연한 고통으로서 도무지 이익이 없으리라.
이와 같이 미래가 있다고 집착하는 무리는 모든 하는 짓이 모두 공하여 결과가 없으리라. 그러므로 이와 같은 나쁜 소견을 버리고, 미래가 먼저부터 성품이 있지 않다는 진리를 믿어라.
또 다시 미래가 있다고 집착하는 소승들이 말하기를 “모든 법칙이 비록 미래에 먼저부터 성품이 있으나, 아직 결과를 취하는 공능이 없나니, 결과를 취하는 공능을 일으키기 위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여 아무 결과가 없지 않게 한다”고 한다.
수론(數論) 외도는 말하기를 “제 성품 가운데 비록 갖가지 법의 제 본체가 있으나 그 형상이 숨었나니, 그 법의 형상을 드러내기 위하여 아무 결과가 없지 않게 한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을 하는 이는 말하기를 “제 성품 가운데 비록 모든 법의 갖가지 공능이 있으나 본체가 있지 않나니, 그 본체를 이루기 위하여 부지런히 수행하여 아무 결과가 없지 않게 한다” 하니, 이런 세 가지 주장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조그만큼이라도 하는 짓이 있다면
결과는 먼저부터 있었던 것 아니리

논하건대 먼저부터 작용이 없었는데 힘써 수행함으로써 생기게 한다거나, 먼저부터 드러남이 없었는데 방편으로 있게 한다거나, 먼저부터 본체가 없었는데 본체가 있게 한다면 결과가 먼저부터 있었다고 말하지 못하리라. 작용과 드러남과 본체는 힘써 수행하는 가행(加行)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과라 하려니와 본체와 숨음과 공능은 본래 있기 때문에 결과라 하지 못하리라.
또 작용과 드러냄과 본체는 본체와 숨음과 공능과와 잠시도 여의지 않기 때문에 본체와 숨음과 공능이 작용 따위와 같아서 본래 없다가 이제에 있다면, 온갖 것이 모두가 인연에서 생겼으리라. 그대들은 결과가 먼저부터 있었다고 말하지 말라.
혹은 작용과 드러냄과 본체가 본체 따위와 같이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면 온갖 것이 인연에서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들 결과라 하지 못하리라. 그대들 미래가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결과를 비방하는 허물을 범하나니, 항상 있다면 결과가 아니어서 잠시도 서로 여의기 않기 때문이다.
또 그대들이 거짓으로 방편을 써서 말하기를 “법이 비록 먼저부터 있으나 인연에 의하여 달라진 형상이 조그만큼 일어나는 것을 결과라 하노라” 한다면 이는 다만 달라진 형상에 인하여 이뤄진 바로서 결과라 할뿐인데, 본체가 이미 본래부터 있었다면 결과라 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이 달라진 형상은 본래 업다가 이제 있거늘 그대는 어찌 결과가 먼저부터 있다고 말하는가.
만일 그대가 다시 말하기를 “형상은 비록 이제 일어나나 본체를 여의지 않았으니, 본체가 먼저부터 있기 때문에 결과가 먼저부터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고 한다면 형상과 본체가 이미 하나이매 본래부터 있어서 원인은 작용이 없으리니, 그렇다면 원인을 부정하는 외도의 허물과 같게 되리라.
또 다시 만일 결과의 성품이 언제나 있다고 한다면 경에서 말씀하신 바 모든 법칙은 무상하다는 주장에 어긋나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를 설명키 위해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모든 법칙이 이미 무상하다면
결과는 항상 있음이 아닐 것이요
처음이 있고 나중도 있다면
세상은 모두가 무상함을 인정하리

논하건대 성품이 항상 있지 않으므로 무상이라 하는데 온갖 무상한 것은 결정코 생멸한다. 남은 처음이요, 멸함은 나중인데 처음이 있고 나중이 있다면 그것은 무상의 정의이다.
만일 결과의 성품이 언제나 있다고 집착한다면 처음도 나중도 없거늘 어찌 무상함이겠는가.
그들의 경전에 다시 말하기를 “생멸이 있은 것은 거친 무상임을 세상이 다 같이 알기 때문에 세 세상의 미세한 무상의 이치를 나타낸다. 세상 사람들은 인연에서 생긴 안팎의 모든 법칙이 처음에 생기고 나중에 멸하는 것을 눈앞에 보지만 생각생각에 생멸하는 무상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처음과 나중에 생멸하는 것으로 원인을 삼고, 등불 빛 따위로 같은 법의 비유[同法喩]를 삼아서 생각생각에 모두 생멸이 있으되 본래 없다가 이제 있고, 이제 있다가 다시 없어질지언정 언제나 항상 결과가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낸다.
항유론자(恒有論者:항상 있다고 주장하는 이)가 말하기를 “과거ㆍ미래의 모든 법칙이 항상 있어 생멸이 없고, 현재의 모든 법칙도 생멸이 업다” 하면 이는 자기들의 경전에서 말한 무상의 이치에 어긋난다.
만일 다시 말하기를 “모든 법칙의 본체는 비록 항상 있으나 무상의 형상이 항상 상응(相應:따른다)하기 때문에 무상이라”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으니, 앞에 이미 대략 부정하였고, 나중에 다시 널리 무찌르리라.
이 게송 안의 뜻은 정면으론 딴 부류를 무찔렀고, 곁으로는 수론(數論)의 두 가지 딴 소리를 무찔렀으니, 이른바 숨음ㆍ본체ㆍ공능이 비록 항상 있기는 하나 드러남과 본체는 있기도 없기도 한다. 숨음과 본체와 공능에 의하여 결과가 먼저부터 있다 하고, 드러남과 본체에 의하여 무상을 말하는데 결과가 무상하다면 먼저부터 있지 않나니, 온갖 무상함은 결정코 처음과 나중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났다가 나중에 멸하는 것이 무상의 원리인데 숨음과 본체와 공능이 이미 처음과 나중이 없다면 생멸없음이 어찌 무상이겠는가. 이 이치에 의하건대 역시 결과가 아니리라. 서로 여의지 못했으므로 변명할지라도 도리어 앞의 무찌른 것 같으리라.
또 그가 말하기를 “소리 따위와 즐거움 따위가 비록 갖가지 지위의 차별이 있으나 그 인과 관계는 여의지 않고 동일하게 하나의 본체에 의했기 때문이다”
이 뜻은 만일 소리 따위의 제 성품이 앞뒤가 다르지 않으므로 인과 과가 서로 여의지 않는다 하면 아무런 다툼이 없으리니, 소리 따위의 앞생각이 원인이 되어서 뒷생각의 같은 무리의 결과[等流果]를 내기 때문이다.
만일 소리 따위의 인과가 동일하다면 이는 인과가 차별이 없으리니, 혹 소리 따위의 원인이 지위에 결과가 있다 하여도 다툼이 없으리니, 동일한 시간에 앞을 바라보고 뒤를 바라보아 인과를 삼기 때문이다.
만일 소리 따위의 인과의 지위는 다르나 본체는 하나라 한다면 이는 서로 어긋나나니, 본체는 같은데 때가 달라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시간이 같지 않으면 본체는 반드시 다르기 때문이다.
시간은 비록 다르지만 본체는 다름이 없다 한다면 이는 무상이라 하지 못하리라.
또한 본체의 법이 동시에 숨음과 드러남의 두 이치가 있을 수 없나니, 이미 숨음과 드러남의 시간에 차별이 있다면 이는 분명 의지한바 본체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리 따위의 나뉘어진 지위의 차별에 인과를 세울지라도 그 봊본체는 다름이 없다 하지 못하리라.
또 다시, 상유론을 주장하는 이에게 종지를 어기는 허물이 있음을 보이기 위해, 다음의 게송으로 말했다.

수행치 않고도 해탈할 것이며
해탈한다면 과거ㆍ미래가 없으리

논하건대 번뇌의 속박을 영원히 끊으면 뒤바뀜 없는 거룩한 소견이 미래에 있으되 마치 현재에 번뇌를 끊고 열반을 증득하는 것 같으리니, 그렇다면 온갖 것은 공덕을 들임으로써 되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자연히 해탈이리니, 이는 곧 자기의 종지에서 주장하는바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익혀서 거룩한 도를 내어야 비로소 해탈을 얻는다 한 것과 어긴다.
만일 도를 닦아서 해탈을 얻는다 한다면 과거ㆍ미래가 없을 것이며, 번뇌의 속박과 업보에 의한 괴로움이 있으면서도 해탈을 얻으리니, 바른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해탈한 이에게 번뇌의 고통이 없다 한다면 이는 곧 자기의 종파에서 과거 미래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에 어긴다.
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혹 과거ㆍ미래가 있다고 한다면
탐욕은 탐욕내는 이를 떠났어야 하리라

논하건대 앞의 이론의 귀추로는 결정코 과거ㆍ미래가 없거늘 혹 그가 어리석어서 있다고 꽉 집착한다. 그러므로 그의 집착을 거짓으로 순응하기 때문에 ‘혹’이란 말을 첫 머리에 두었다.
해탈을 얻을 때에 과거ㆍ미래, 두 세상의 탐욕 따위가 있으나 해탈의 지위에는 탐욕 따위가 없다면 의지할 바를 떠나서 탐욕 따위가 있으리라. 세간에서는 삶을 물건이 없는데 삶는다는 것을 보지 못하나니, 이것도 그러하다.
어찌 모든 법칙이 이렇게 날 땡 실제로 작용과 작용하는 이가 없겠는가. 다만 거짓으로 두 가지 차별을 벌려 세웠을 뿐이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오직 모든 법이 있고, 오직 인과가 있을지언정 도무지 작용이 없으니, 이치가 진실로 이오 같다” 하였다.
그리하여, 해탈할 때엔 탐욕 따위가 영원히 사라지고, 탐욕 따위 위에 거짓으로 작용을 세운다는 것 또한 있을 수 없다. 작용이 없다는 없음은 마치 허공의 꽃과 같은 데 있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해탈할 때에 여전히 탐욕 따위가 있어서 아직 해탈치 않은 것 같다면 마치 나쁜 사람과 같아서 온갖 나쁜 짓을 하여 해탈이라 하지 못하리라.
만일 말하기를 “그럴 때에 비록 탐욕 따위가 있으나 성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다면, 이미 탐욕 등의 번뇌에 포섭된 것이매 앞의 지위와 같아서 성취하지 않은 것이 아니리라.
또 이 과거ㆍ미래의 탐욕 따위가 있는 것이라면 의당 현재와 가아서 작용이 있을 것이요, 만일 그렇다면 의당 죄악을 지어서 악한 사람이라 불리우리라.
또 이 과거ㆍ미래의 탐욕 따위 번뇌가 작용이 있다면 현재라 해야 되고, 작용이 없다면 허공의 꽃과 같을 것인데 어찌하여 본체는 있는데 작용이 없다 하는가.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과거ㆍ미래ㆍ현재가 진실로 본체가 있다는 말을 믿지 말아야 된다.
또 다시 아직 나지 않은 것이 이미 있다는 말은 쌍 사람들의 상식에 어긋난다. 무슨 까닭이냐.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만일 결과가 먼저부터 있다면
집을 짓는데 치레 따위와
기둥 따위는 헛수고일 것이요

논하건대 집 따위와 빛 따위 모든 법칙이 아직 나기전부터 이미 본체가 있다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짓기 위해 애써 노력하는 것이 헛수고이리라.
혹 어떤 이가 말하기를 “먼저는 비록 본체가 있었으나 작용이 없었고, 먼저는 비록 숨은 본체가 있었으나 형상이 드러나지 않았고, 먼저는 비록 공능이 있었으나 본체가 있지 않았는데 작용과 드러남과 형상이 있게 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을 쓰기 때문에 헛수고가 아니라”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작용ㆍ드러난 형상ㆍ본체와 본체ㆍ숨음ㆍ공능이 여의지 않았기 때문에 모두가 먼저부터 있으리라 함은 앞에 말한 것 같다. 이러한 삿된 집착은 세간과 어긴다.
또 온갖 법이 모두가 먼저부터 있다면 뭇 고통의 벗어나기 위하여 교법을 벌려 주생을 제도하는 일은 모두가 성립되지 않으리니, 이는 스스로의 종지에 어긋난다.
또 다시 결과가 먼저부터 있다고 집착하는 이의 허물을 말함을 인하여 먼저부터 결과가 없다는 허물을 알기 쉽겠기에 간략히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한다.

결과가 먼저부터 없다 함도 그렇다

논하건대 이러한 집착은 세간과 자기의 종파에도 어기나니, 결과가 결정코 먼저 없었다면 세간과 자기 종파에서 모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게송의 뜻은 온갖 인과가 다르다는 집착을 통틀어 깨뜨렸으니, 원인과 결과가 따로 본체와 형상이 있다면 어찌 다른 법에서 다른 법이 나랴. 향과 맛 따위 다른 본체에서 서로 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하나니, 이 말도 옳지 못하다.
만일 본체가 서로 다르고, 인과의 이치가 막혀서 서로 서로 어긴다면 서로 나지 못하거니와 모든 법칙의 본체와 형상이 다르지만 서로가 수순하면서 분명 인과를 이루거늘 어찌 질문하기를 “인과가 다르다면 향과 맛이 다른 것 같아서 서로 내지 못하리라” 하는가.
세간 사람들과 스스로의 종파는 모두가 부자의 업이 다르면서도 함께 태어났음을 인정하나니, 그러므로 인과는 결정코 다르다 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원인 가운데 결과가 없다는 주장을 똑바로 파하는 것이다.
식미제자(食米齊者:승론의 무리)들은 말하기를 “종자 따위는 직접 싹을 내지 못하고, 다만 종자 따위가 같은 종류의 극미(極微)를 끌어들여 그들이 모이게 할 뿐이다. 여여(如如:틀림없게)하게 끌어들인 것같은 종류의 극미는 틀림없게 합쳐서 거친 결과를 낸다 하나니, 이 뜻은 옳지 못하다. 저 모든 극미와 거친 보리 따위는 종류와 본체와 형상이 모두 차별이 있거늘 어찌 같은 종류라 하겠는가.
또 항상하기 때문에 수승한 작용이 없을 것이며, 항상한 법이 작용이 있게 하지도 못할 것인데 어찌하여 말하기를 종자 따위의 힘에 의하여 저 싹 따위 같은 종류의 극미를 끌어들여 그들을 화합해서 거친 싹 따위가 나게 한다 하는가.
또 그 외도들은 빛 따위를 떠나서 따로 진실한 결과인 옷과 병 따위 물건이 있다고 여기거니와 이전 종류는 먼저부터 없었거늘 무슨 원인에 의하여 짓겠는가. 그의 결과를 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힘을 들여 실 따위를 만들어도 모두 작용이 없으니, 그들은 이러한 실 따위로 직접적인 원인을 삼아 같은 종류의 결과를 짓는다는 것을 인정치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딴 종류의 원인에서 딴 종류의 결과를 내는 것을 인정치 않는다면 이는 거친 결과가 결정코 나지 못하는 것이니, 먼저부터 본체가 없기 때문이다.
또 실제의 극미는 거친 같은 종류의 결과를 짓지 못하리니, 그대가 항상하다고 계교하기 때문이니, 허공 따위와 같다.
의지한바 실제의 결과가 이미 있지 않다면 의지한 빛과 법칙 따위의 공덕과 업용도 모두 이뤄지지 않으리니, 그렇다면 모든 감관의 경계가 도무 없는 것이어서 온갖 세운 바를 모두 무너뜨리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딴 종류의 원인 속에 결과가 없다고 집착하지 말라. 세간 사람들도 딴 종류의 원인 속에서 갖가지 딴 종류의 결과를 내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인과의 도리는 가장 미세하여서 결정코 같다거나 다르다 하지 못하며, 먼저부터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지도 말라. 만일 그 가운데서 같다거나 다르다거나 먼저 있다거나 먼저 없었다고 집착하면 모두가 바른 진리를 잃는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인과가 하나이라면 원인이 결과와 같아서 결과요 원인은 아닐 것이며, 결과가 원인 같아서 원인이요 결과는 아니리니, 이와 같이 인과가 어지럽게 되기 때문이다.
또 인과과 결정코 하나이라면 내는 이와 난 바가 차별이 없으리니, 내는 이가 없으므로 원인이라 할 수 없나니, 원인이 이미 없다면 결과도 있지 않을 것이오, 난바가 없다면 결과라 할 수 없으니, 결과가 없다면 원인도 있지 않으리니, 인과 두 종류는 마주 대하여 성립되기 때문이다. 인과가 없다면 무엇을 하나라 하리오, 그러므로 인과는 결정코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인과가 다르다면 의당 스스로의 원인에서 남의 결과를 내리어, 저와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의 결과와 같고, 또 스스로의 결과가 남의 원인에서 생기리니, 저와 다르기 때문에 스스로의 원인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 원인이 온갖 결과를 낼 것이요, 또한 결과가 온갖 원인에서 나리라.
또 스스로의 원인에서 스스로의 결과를 내지 못하리니 저와 다르기 때문에 남의 결과와 같고, 또 스스로의 결과가 스스로의 원인에서 나지 않았으리니, 저와 다르기 때문에 남의 원인과 같다. 그렇다면 온갖 원인은 결과를 내지 못하고, 온갖 결과는 원인에서 나지 않아야 되리라. 그러나 현재에 보건대 스스로의 원인은 오직 스스로의 결과를 내고, 남의 결과를 내지 않으며, 스스로의 결과는 스스로의 원인에서 나고 남의 원인에서 나지 않나니, 그러므로 인과는 결정적으로 다르지도 않다.
만일 원인 가운데 먼저부터 결정코 결과가 있다면 결과는 원인과 같아서 다시 나지 못할 것이요, 원인 가운데 먼저부터 결정코 결과가 없다면 결과 아닌 것 같아서 나지 못하리라. 그러나 현재에 보건대 원인에선 다시 결과를 낼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 결과는 먼저부터 있지도 없지도 않다.
이와 같이 인과는 결정적인 하나이거나 다르지 않으며, 먼저부터 있거나 없지도 않으니, 그 이치가 결정적인 것이다. 곁따른 이론이 끝났으니, 다음에 본론을 말하리라.
또 다시 수론(數論) 외도가 말하기를 “결과는 진실로 나지 않고, 그 본체는 본래 있는데 뒤바뀌는 까닭에 시간ㆍ인과의 차별이 있다고 여긴다” 하나니, 그런 집착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모든 법에 변함이 있는 것으로
지혜 있는 이는 알지 못하지마는
지혜 없는 이는 허망하게도
분별하여 있다고 여긴다

논하건대 묘한 지혜를 가진 모든 사람은 능히 온갖 장애물 ㅣ에나 지극히 먼 곳의 깊고 미세한 법의 이치를 알고 일찍이 이와 같은 모든 법이 변하는 시간ㆍ인과가 차별인 것으로 알지 못했다. 오직 외도만은 제외한다.
캄캄한 밤에 눈 어두운 사람이 허망하게 보이는 바가 있으면 자신도 똑똑히 모르면서 남에게 말하기를 “온갖 법은 진실로 생멸함이 없거늘 다만 시간과 인과가 변함이 있을 뿐이라 한다. 이른바 소리 따위나 혹은 즐거움 따위는 자체를 버리지 않고, 뒤바뀌어 딴 형상을 이루어 시간이 같지 않은 것을 변한다 하고, 변할 때에 시간의 형상에 차별이 있으므로 생멸이 있다 한다. 그대는 무엇을 계교하여 변한다 하는가. 시간의 본체인가. 시간의ㅏ 형상인가.
그러나 시간의 본체가 변한다 하지 못하리니, 변할 때에 그대는 먼저부터 스스로가 집착하기를 제 본체를 버리지 않아 앞의 지위와 같다 하기 때문이다.
또 시간의형상이 변한다고도 하지 말지니, 그대가 시간의 형상에 생멸이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앞뒤가 각각 다르거늘 어찌 변한다 하겠는가.
또 시간의 본체는 변하지 못하고 시간의 형상만이 변함이 있다고 한다면 시간의 본체를 떠나서 따로 시간의 형상이 있어야 될 것이다.
만일 본체와 형상이 결정코 하나와 다름이 아니건만 서로서로 의지하고 서로서로 뒤따르므로 말하기를 “형상이 본체를 말미암기 때문에 앞뒤가 다르지 않고, 본체가 형상에 의하기 때문에 앞뒤가 하나가 아니요, 본체와 형상이 서로 돕기 때문에 모두가 변한다” 한다면 본체가 형상을 말미암기 때문에 생멸이 있고, 형상이 본체에 의하기 때문에 변함이 없으리라.
본체에 생멸이 있다면 허깨비 같아서 진실함도 항상함도 아닐 것이요, 형상이 변함이 없다면 허공의 꽃과 같아서 원인도 결과도 아니어서 문득 스스로의 종지를 잃는다.
또 본체와 형상의 성품은 하나이어서 진실로 인과가 없으나 이치가 다르기 때문에 인과가 있게 되었다 하지도 말지니, 성품이 하나라면 이치가 어찌 다르랴. 하나와 다름이 같지 않다면 의당 딴 물건이 있어야 되리라. 이미 인과의 지위가 같지 않아 앞뒤가 각각 다르다면 의당 변함이 아니리니, 번개ㆍ등불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인과의 지위의 차별이 변하면서 다름이 있을지언정 반드시 앞뒤가 일체이거나 일시에 있는 것은 아니니, 오직 분량 따위 갖가지 지위가 변하여 다르기 때문이다” 한다면 이는 빈 말이 있을 뿐이요, 실제의 이치는 없나니, 한 법이 일시에 남과 머무름과 멸함이 있다면 서로서로 어기면서 큰 허물을 이루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한 법이 일시에 남과 머무름과 사라짐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오직 다른 법이 다른 때에 이 세 가지가 있는 것만을 본다.
또 시간의 본체는 항상 있는 것으로서 생멸은 없으나 변하여 바뀜이 있다고 하지 말라.
그대가 집착하는바 항상 머무는 생각과 ‘나’는 비록 생멸이 없으나 변함은 역시 있다고 하지 말라. 설사 생각과 ‘내’가 변함은 역시 있다고 할지라도 의당 즐거움 따위와 같을지언정 생각과 나의 성품은 아니리라.
시간의 본체에 변함이 있다 한다면 시간의 본체는 곧 즐거움 따위의 제 성품이니, 이는 제 성품이 온 전체가 변하리라. 그렇다면 의당 자기 종지를 잃으리니, 가장 훌륭함은 결정코 변하여 바뀜이 없다. 만일 전체가 변한다면 곧 무상이리라.
또 그대가 시간과 즐거움 따위(괴로움ㆍ어리석음) 세 법이 화합해서 함께 이루었다면 의당 숲 따위와 같아서 본체가 실제로 있지 않으리니, 인과도 그렇다.
만일 말하기를 “즐거움 따위로써 성품을 삼기 때문에 실제로 있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시간 따위는 오직 하나요, 즐거움 따위는 셋이니, 하나와 셋은 같지 않거늘 어찌 서로 의지하랴. 만일 반드시 서로 의지한다면 즐거움 따위는 시간과 같이 하나뿐일 것이며 시간은 즐거움 따위와 같아서 셋이 있으리라.
또 즐거움 따위가 온갖 시간에 두루한 것 같이, 이 낱낱 시간도 온갖 것에 두루했어야 하리니, 이렇다면 시간은 어지러움을 이루리라.
시간이 이미 하나하나가 온갖 것에 두루하지 않으면 즐거움 따위도 온갖 것이 두루하지 않으리라. 이와 같이 즐거움 따위는 한량없는 시간과 함께 성품이 되어 주므로 역시 한량없음을 이루리라.
또 즐거움 따위는 숨을 때에도 있는 것같이, 이 낱낱 시간도 그러하여서 숨고 드러남의 차별이 없으리니, 온갖 시간에 온갖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결정코 서로 의지하지 못할 것이며, 이미 서로 의존치 못한다면 의당 거짓임을 허락해야 된다. 혹은 즐거움 따위로 성품을 삼았음을 허락지 말아야 하리라.
시간을 추구하는 것같이 인과도 그렇다.
또 모든 인과는 열등하거나 수승하거나 깨끗하거나 더럽거늘 어찌 똑같이 하나의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 따위 세 가지 법으로 성품을 삼으랴.
만일 반드시 그렇다면 그대들 외도들은 끝없는 예부터 하지 않은 일이 없는데 모두가 즐거움 따위로써 제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 그대들은 지금 비록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도리어 개 따위 낮은 무리이니, 먹고 있는 맛난 음식은 곧 더러운 똥이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뉘라서 까닭없이 이 외도의 삿된 종지를 집착하여 스스로를 욕되게 하랴.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기를 “결과는 실제로 나지 않으나 그 본체는 본래 있으나 전하여 바뀌는 까닭에 시간과 인과의 차별을 세운다” 하나니, 이는 바른 진리에 어기어서 따져 연구할 것이 못된다.
애석하다. 외도들이여, 예부터 어리석고 미친 법을 익히어 삿된 종지는 보배 같이 아끼고 바른 종지는 미워하고 등져서 소경같이 지혜의 눈이 없고, 시비를 가리지 못하여 미혹한 무리를 뒤따라 갖가지로 허망하게 집착하나.
이와 같이, 시간의 본체는 항상하나 형상은 변하여 바뀜이 있다 함은 바른 이치에 어긴다고 이미 말했으니, 지혜로운 이들은 자세히 관찰해서 버리라.
016_0600_a_05L復次有作是言如說已滅未生無體其理不然諸有爲法前後兩際作用雖無而體恒有分位別故三世不同無必不生有定無滅爲破此義故頌曰甁等在未來 卽非有過現論曰色等諸法在未來世過去現在二世皆空後遇因緣二相方起云何汝說無必不生未來世相在過現無云何而言有定無滅若執未來有二世相此不應理故次頌曰未來過現有 便是未來無論曰若在未來有過現相應如後位便失未來一法一時實有多相互相違反其義不成卽由此理言一一世皆有多相亦不成立復次若謂色等有未來體流趣二世說有過現爲破此執復說頌曰未來若已謝 而有未來體 生則恒未來云何成過現論曰若色等法有未來體是卽應無過現二世以不可說異相法中有別異相如苦樂等又若一法流轉三時說三世者便成雜亂又色等法流轉三時若不異者應無三世若有異者是則異相本無而生有已還滅一切有爲應亦如是便爲退失說常有宗又說頌曰法若在未來 現有未來相 應卽爲現在如何名未來論曰若色等法未來現有應如現在便失未來未來旣 無二世非有彼爲先故一切應無復次有說諸法體雖常有然唯能取等流果用說名現在如是一用現在遍有去來定無不雜亂故餘用不爾爲破此言故次頌曰去來如現有 取果用何無論曰過去未來色等諸法旣如現在常有體性爲同類因取等流果此用何故非常有耶此取果用所待衆緣於一切時亦常有故如是諸法體用常有應一切時名現在世恒名現在義亦不成要待去來立現在故又未來果如現在法已有體故不應復取又諸果法因緣合時若無所生則不名果所生若有此卽本無從緣而生體亦應爾是則一切本無而生有已還滅應同前過謂便退失說常有宗若言其用或有或無法體常存故此失亦不應理故次頌曰若體恒非無何爲不常住論曰恒有名常色等諸法體旣恒有云何非常設許有爲體皆常者便違經說諸行無常若言諸行體雖恒有有爲相合故是無常此亦不然體旣常有與彼相合復何所成豈不能成取自果用用不離體體亦應成若用須體不成者用可生滅體應是常色等體常用無常者卽虛空等體用應無常又若體常用無常故亦令此體成無常者用雖無常由體常故令此用應亦是常又此體用應別諦以常無常義不同故又若色等體不藉緣而與有爲諸相合者太虛空等體亦應然彼旣不然此云何爾復次過去世言爲簡別相摠詮一切過去義耶爲簡摠相別詮一類過去義耶若爾何失若簡別相摠詮一切過去義者其理不成故次頌曰過去若過去如何成過去論曰若過去法一切體相悉皆過去是則一切都無所有如何汝說過去是有依是體相汝意說爲過去有者亦無有故又過去者名爲已滅若過去世亦過去者#是則過去亦應已滅若過去世亦已滅者如何汝今執有過去如彼未來現在已滅不名未來現在世故若依正理應如是說過去世言無別實義簡去實有差別名相依止世俗假立名相摠說過去非有別義若汝意謂如名飮油雖不飮油而假名說世閒共許別目一事此過去言亦復如是簡於摠相別詮一類過去義者理亦不然故次頌曰過去不過去如何成過去論曰若過去法一切體相非悉過去如何汝今執爲過去汝說過去色等諸體無闕故又過去者名爲已滅過去世不過去者是則過去體非已若過去體非已滅者如何汝今執爲過去如彼未來及現在世自體不非過去故豈不前說如世假名於摠相別詮一物過去世法其體雖取果用無故名過去汝說此用卽所依體如何體在而用滅無若體與用不相隨逐應如別物不成體用但用滅說名過去唯汝獨立非世共云何得引飮油爲喩世閒共許可推徵獨所立者應詰問故若說諸法其體常有三世不成唯於現在有體上假立名故非於現在實有體上假立三名卽失現體是故所執過去不成如破過去未來亦爾未來若未來如何成未來未來不未來如何成未來摠別徵難皆同前說復次未來世法爲藉衆緣已#有生耶未有生耶若爾何過若藉衆緣已生者其理不成故次頌曰未來若有生如何非現在論曰若未來法已從緣生及有體性應名現在有性及生是現在相非離現在而可了知言雖方便令成現在而意正爲破有未來又顯未來非現在故應如過去決定無生若言未來未有生者理亦不成故次頌曰未來若無生如何非常住論曰若未來法未從緣生而有體性以無生故如虛空等體應常住此亦方便令成常住而意正爲破有未來如是徵難過去未來體若實有無滅無生應如空等失無常性便違經說去來無常如說過去未來色等尚是無常何況現在是故過去未來諸法竝非實有現在無爲所不攝故如龜毛等不可說言世所攝故應如現在體是實有現在非唯是實有故同喩不成因或不定或相違故復次往來論者作如是言不善我宗妄說此過所以者何我宗中說諸行四相展轉相依三世往來不相捨離由生等合故成無常法性不壞故恒有是故恒有不廢無常符順契經稱當正理此前已破體旣恒有應如太虛非生等合又以能生色等諸行說爲生相如是能生諸行作用未來未有要藉因緣和合資助然後方有若不然者因緣和合便成無用若許生用本無今有有已還無則一切行同有爲故皆亦應爾云何而說體雖恒有而是無常往來論者爲避如是所說過失復作是言若色等行與生等合有此過者今有爲法三世往來有世壞相應是無常以滅壞相是無常故世閒共許一切無常滅壞爲相謂有爲法未來世壞入於現在現在世壞復入過去若爾頌曰若未來無生 壞故非常者 過去旣無壞何不謂爲常論曰過去世體最居後故更無餘世可令轉入旣守自位恒無壞滅應如空等體非無常如是便違契經所說若言#過去雖恒有體更無滅壞而從現在壞已轉入故得有生生滅二種是無常相隨具不具竝表無常去來各一現在具二是故三世皆是無常此不應理生無有故汝宗自執生在未來過去現在都無生用云何今說過去有生汝執過現已從緣生更不藉緣生如何有若執過去定有生者生必歸滅一向記故如現未故復應有滅世閒亦許未來諸法可藉緣生非過現世又過去世非現未故應如空等定無有生是故能相及所相法應如帝釋幷恒策迦一時竝入常無常火以位如體體如位故復次如說過去未來色等尚是無常何況現在汝等雖誦如是經文而不知義所以者何汝執一法往來三世體無生滅云何無常又汝所執現在法體卽是去來云何相況不可一法自爲比況世閒不見如是事故亦不可言體雖無異位差別故得爲比況所以者何位若卽體體無異故位亦無別位若離體位可無常體應常住又體如位世所攝故是有爲故應有差別又汝所執三世實有不相因待皆與生等有爲相合前後無異現在無有何勝相異彼去來而說過去未來色等尚是無常何況現在若言法前後位別三時轉變故是無常來居前無生有滅過去居後無滅有現在居中有生有滅過未各一是無常何況現在具有二種而非無此亦不然未來無生應如空等何有滅過去有生應如現在云何無又汝宗說#未來有生現在有滅去無二云何今者作異說耶又現在世亦無實體從前世來轉入後世何依此建立生滅旣無生滅豈是無所以者何故次頌曰現在世無常 非由過去等 除斯二所趣更無有第三論曰現在世法非前世來不往後世云何無常汝說現在由餘世故轉成異相說爲無常餘世謂去來異相謂生滅現在不可餘世轉成亦復不可轉成餘世云何現在建立生滅頌言非由過去等者等取未來現在世法不往未來非從過去汝宗自許然過去世非現所往以世別故譬如未來其未來世非現所從以世別故猶如過去旣無餘世往來轉變#云何現在生滅無常若說現在從過去來往未來世亦同此破故契經說有爲諸法非前際來不往後際故破此執其理決定順聖教故又現在法若餘世來往餘世者應往來時#不捨前相不成餘相世閒現見提婆達多餘方往來相無異故如是三世位雖許別相無異故便成雜亂由位與相若一若異皆有過失不可免故汝等所宗往來論者亦不忍許世相雜亂是故汝今如此安立往來生滅不成救義如是現在雖許往來其無常性亦不成立於往來時相無異故應似空花非無常性汝亦不許空花異相及無常現在若爾卽違自宗及契經說若汝復言三世體相雖無別異然觀諸行麤位差別開發覺慧故於一法自心分別安立分位由此自心安立分位有差別故說此一法以爲無常此亦不然自心分別所見境界卽是自心但隨衆緣諸行種熟自心變作種種分位自心所變無實體相何爲精勤安立異法但應信受諸法唯心又覺慧等諸心心法非隨實有諸法轉變但隨串習成熟種子及心所現衆緣勢力變生種種境界差別故外道等隨其自心變生種種諸法性相若法性相是實有者豈可如是隨心轉變諸有智者不應許彼所執現在實法有生以必不從去來二世更無第三可從生故滅必隨生生旣非有滅亦定無以必不往去來二世更無第三可往彼故如是以理推撿汝宗三世無常都不可見有何現在殊勝無常而契經言何況現在汝立一法經歷諸位雖生等隨而無變易相及所依前後無異有何改轉而說無常亦不可言隨三世位有差別故說爲無常體旣無變位如何別位體若異位自無常體應常住如虛空等是故三世但世俗有於中都無一法眞實然於如是世俗法中現在諸行所有生滅由與身俱世閒現見是故現在無常義依之假立去來無常以彼去來無別有體但依現在曾當假立故依現現見無常假立去來#曾當生滅來無常依現在故現在無常勝去來欲使有情知去來世不現見法是無常何況現在現與身俱現見生滅而非無常由是契經作如是說在世法現有無常過去未來曾當生是故有情於三世事當觀無常深厭離爲顯諸行本無而生先無定體故復頌曰若後生諸行 先已有定體 說有定性人應非是邪執論曰如有外道起邪執言諸行本來決定相屬轉變時分不可改易不由期願及以人功汝等亦應同彼所見所以者何由說因果安立差別本來相屬不可迴轉未來諸法四事決定所謂因所依所緣如本定相而後生故若爾不應待因緣生旣因緣生云何本有爲顯未來諸行有體因緣無用故次頌曰若法因緣生 卽非先有體 先有而生者生已復應生論曰諸行本有與生相違如法已生不復生故無常諸行若無生者雖遇因緣亦無變易則應退失無常行性以無生故譬如空花若有生者如取果用於生位前應未有體頌言生已復應生者以說過門顯異法喩謂有爲行非先有性從緣生故如取果用諸先有者不從緣生如已生法若汝復言我說諸行雖本有體不待因緣然取果用本無而有待因緣者此亦不然取自果用不離體故應如其體亦先有性或諸行體不離用故應如其用非先有性汝等所執本有諸行如頑鐵鋌都無勝用因果道理皆不相以有定性常無變故執常有論多過失謂違世閒誹謗世閒一切共知因果理故又違自宗誹謗一切諸因諸緣生果理故又違自言立法本有#從緣生故又違比量如取果用非常有故又違現量現見色等非常有故由有多過應捨此見應知去來非離現在別有實性世所攝故如現在世但依現在心變異相假施設有現在亦非勝義諦有從緣生故如幻事等又三世行皆相待立如長短等何有實性又一切行皆悉無常有生有滅非有非無若定是無如兔角等應定不生若定是有如所執空應定不滅若無生滅如龜毛等豈是無常誰有智人知一切行皆有生滅而言常有依行立世世豈是眞現在尚非眞來何有實若去來世實非有者宿住死生通何所見應知二通見曾當有旣現是無無無差別通力所見分限應無是則異生三乘聖衆知去來世劫數應同汝執去來#皆現是有亦同此過故次頌曰若見去來有 如何不見無論曰去來亦有無量因果展轉隔絕中閒非有故說爲無又汝亦說過去未來無取果等種種作用過去未來旣有有無二義差別何故二通唯見其有而不見無若不見無諸得通者不應照見過去未來經爾所劫空無有佛爾所劫中空無物等是故不應唯見其有去來現無曾當是有以現無故不同現在曾當有故爲境差別若同現無則無遠近時差別者汝執去來俱是現有同在一世應如現在無有遠近時分差別是則諸通應不能照去時劫差別過失旣同何得爲難若言去來雖同#現有然由行世時有前後遠近差別故異生等見近非遠無無遠近其過不同此亦不然故次頌曰旣現有去來應不說爲遠論曰過去未來旣同現有應如現在是近非遠若言去來雖現有體而無用故說爲遠者此亦不然用不離體過同前說又此意言去來色等旣同現有同一世故應如現在無有前後遠近差別過去未來旣無遠近諸得通者皆應無㝵等見一切過去未來是則如來所知無量餘二乘等所知有量此等差別一切應無是故去來雖現非有而曾當有因果不同展轉相續時分別定由此曾當有爲方便或有久習智見猛利復由種姓法爾殊勝極前後際展轉相續如其所欲皆能照知或有習性與此相違隨其所應但知少分此顯去來非現有性但得通者自因緣力勝劣不同方便作意有差別故自心變似#曾當有法體相不同遠近有異依此立有過去未來時劫不同通力勝劣非謂實有過去未來緣之起通照知遠近爲破未來法非法等先有體性故說頌曰未作法若有 修戒等唐捐論曰若在未來未作福行先已有者現在加行修施戒等則爲唐捐又若未來先有法者非法亦有不可斷壞爲捨惡戒勤修加行徒自苦身都無所益如是執有未來論者諸有所爲皆空無果是故應捨如是惡見信受未來非先有性復次執未來有小乘人言諸行未來雖先有性然猶未有取果功能爲欲引起取果功能勤修加行不空無果數論外道亦作是言於自性中雖有種種諸法自體而相猶隱爲欲令彼法相顯現勤修加行不空無果卽彼異論復作是言於自性中雖有種種諸法功能而未有體爲成其體勤修加行不空無果爲破此三故說頌曰若少有所爲 果則先非有論曰若先無用加行令生先未有顯方便令有先未有體令有體者則不應言果先是有顯及體由加行成可名爲果功能本來有故不應名果又用與體不相離故功能應同用等本無今有是則一切皆從緣生汝等不應說果先有或用應同體等本來是有則應一切不從緣生皆不名果汝等執有未來論者便爲謗果常有非果不相離又若汝等矯設方便作如是言雖先有然由因故少起異相說名果但此異相由因所成可名爲果旣本有不應名果然此異相本無今如何汝等言果先有若汝復言雖今起然不離體體先有故亦說果相是先有者相體旣一俱應本有則無用便同謗因外道過失復次若執果性一切時有便違經說諸行無常所以者何故次頌曰諸行旣無常 果則非恒有 若有初有後世共許非常論曰性非恒有故名無常一切無常定有生滅生名爲初滅名爲後有初有後是無常義若執果性一切時有無初無後豈是無常彼經復言有生滅者以世共知麤無常相示現三世細無常理世閒現見從緣所生內外諸行初生後滅不知念念生滅無常故以初後生滅爲因用燈光等爲同法喩顯彼念念皆有生滅本無而有有已還無非一切時恒有果性恒有論者過去未來#諸行常有無生無滅現在諸行生滅亦無便違自經說無常義若言諸行體雖恒有而無常相恒共相應名無常者此亦不然前已略非後當廣破此頌義中正破異部兼破數論二種異說謂隱雖復恒有而顯體或有或無就隱說果先有據顯說爲無常果若無常則非先有以諸無常定有初後初生後滅是無常義功能旣無初後無生無滅豈是無常卽以此義亦應非果不相離救還同前破又彼說言聲等樂等雖有種種分位差別然其因果皆不相離同依一體而建立故此意若說聲等自性前後無異言因與果不相離者卽無所諍以許聲等前念爲因能生後念等流果故若說聲等因果位一是則因果應無差別或言聲等因位有果亦無違諍以許一時望後望前爲因果故若言聲等因果位別而體一者是則相違體一時異不應理故時分不同體必異故時雖有別體無異者是則不可說爲無常又一體法於一時中決定無有隱顯二義旣許隱顯時有差別是則分明許所依體亦有差別是故不可說言聲等分位差別建立因果其體無異復次爲欲示現說常有論有違宗過復頌曰應非勤解脫 解脫無去來論曰若能永斷諸煩惱縛無倒聖見未來現有應如現在能斷煩惱能證涅槃是則一切不由功用從本已來自然解脫便違自宗要勤方便修生聖道方得解脫若許修道得解脫者則應無有過去未來有煩惱縛及所招苦而得解脫不應正理若解脫者無煩惱苦則違自宗說去來有又說頌曰或許有去來 貪應離貪者論曰前理所逼定無去來或彼守愚礭執爲有假縱其執故置或言得解脫時去來二世貪等若有在解脫位無貪等者應離所依而有貪等世閒未見無所煮物而有煮等此亦應爾豈不諸行如是生時實無作用及作用者但假安立二種差別故契經言唯有諸法唯有因果都無作用理實如是然解脫時貪等永滅依貪等上假立作用亦不可得無用無者如空花等而言是有理不得成若解脫時猶有貪等如未解脫應名惡人應造諸惡應不解脫若言爾時雖有貪等而不成就故名解脫旣是貪等煩惱所攝應如前位非不成就又此去來貪等若有應如現在能有作用若爾說者應造諸惡應名惡人又此去來貪等煩惱若有作用應名現在若無作用應似空花云何而言有體無用是故智者不應信受過去未來現有實體復次未生已有違世共知所以者何故次頌曰若執果先有 造宮舍嚴具 柱等則唐捐論曰若宮舍等色等諸行於未生位已有體者世間現見爲造彼物勤加功力則爲虛棄諸有或言先雖有體而未有用先有隱體未有顯相先雖有能而未有體爲令有用及顯體故勤加功力亦不唐捐此亦不然相體與體不相離故皆應先有已如前說如是邪執世閒相違又一切法皆先有者爲脫衆苦設教度生如是等事皆不成立此則亦與自宗相違復次因說執果先有者過先無果其過易了爲略破之故復頌曰果先無亦爾論曰如是所執亦違世閒自宗所許#果先定無世閒自宗皆不可故有作是言此頌義意摠破一切因果別執若因與果別有體相云何異法能生異法未見香味別體相生此說不然若體相異因果理隔或相違損可不相生若有諸行體相雖別然相隨順現爲因果如何難言因果若異如香味別應不相生世間自宗皆許父子業果體異而得相生是故因果非定不異如是說者此正爲破定說因中無果者論食米齊者作如是言種等不能親生芽等但由種等引彼芽等同類極微令其聚集如如所引同類極微如是如是合生麤果此義不然彼諸極微與麤麥等種類體相皆有差別云何同類又是常故應無勝用亦不應令常法有用云何而言由種等力引彼芽等同類極微令其和生麤芽等又彼外道計離色等有實果衣甁等物此類先無由何因爲求此果勤加功力造作縷等應無用以彼不許如是縷等能作親造同類果若彼不許從異類因異類果是則麤果定應不生先無體又實極微應不能造麤同類果計常故如虛空等所依實果旣無有能依色等行等德業皆不得成則都無諸根便爲損壞一切所是故不應定執異類因中無果閒亦見從異類因能生種種異類果因果道理最爲微細非定一異先有無若於其中執一執異先有先皆失正理所以者何因果若一應如果是果非因果應如因是因非如是因果便成雜亂又若因果定是一者卽無能生所生差別無能生不名爲因因旣是無果亦非有所生故不名爲果果旣是無因亦非因果二種相待立故因果若無誰爲一故知因果非定是一因果若應從自因生於他果與彼異故如自果亦應自果從他因生與彼異猶如自因是則一因應生一切果亦應一果從一切因生又應從自因不生自果與彼異故猶如他果亦應自果不從自因生與彼異故猶如他因則一切因應不生果應一切果不從因生現見自因唯生自果不生他現見自果從自因生非他因生知因果亦非定異若於因中先定有果則如因應不更生若於因中定無果則如非果應不可生現見從更可生果故知其果非先有無是因果非定一異非先有無其理決傍論已了應復正論復次數論外道作如是言果實不生其體本有由轉變故立有時分因果差別爲破彼執故復頌曰諸法有轉變 慧者未曾知 唯除無智人妄分別爲有論曰諸妙慧者能知一切障外極遠深細法義未曾知有如是諸法轉變時分因果差別唯除外道如陰暗夜有眩瞖人妄有所見自不能了而爲他說言一切法實無生滅但有時分因果轉變所謂聲等或復樂等不捨自體轉成餘相時分不同名爲轉變於轉變時以時分相有差別故說有生滅汝今計何以爲轉變爲時體耶爲時相耶且不應說時體轉變以轉變時汝先自執不捨自體如前位故亦不應言時相轉變汝執時相有生滅故前後各別何名轉變又若時體不可轉變但可時相有轉變者應離時體別有時相若言體相非定一異更互爲依相從而說相由體故前後非異體由相故前後非一體相相資俱名轉變若爾則應體由相故有生有滅相由體故無轉無變體有生滅則同幻事非實非常相無轉變則似空花非因非果便失自宗亦不應言體相性一實無因果由義異故得有因果性若是一#義云何異一異不同應有別物旣有因果分位不同先後各異應非轉變電光燈焰無轉變故若言因果分位差別轉變有異未必先後一體一時有唯量等種種分位轉變異故此有虛言而無實義一法一時有生更互相違成大過故世閒不見一法一時有生唯見異法異時有三又不應言時體常有雖無生滅而有轉變勿汝所執常住我雖無生滅亦有轉變設許思亦有轉變應如樂等非思我性又許時體有轉變者時體卽是樂等自性如是自性擧體應變若爾則應失自宗義最勝定無全體轉變若全轉變卽是無常又汝時分樂等三法和合共成應如林等體非實有因果亦爾若言卽用樂等爲性故是實有此亦不然時等唯一樂等有三一三不同如何相卽若必相卽樂等如時應唯有一時如樂等應有其三又如樂等#遍一切時此一一時應遍一切如是時分應成雜亂時旣一一不遍一切等亦應不遍一切如是樂等與無量爲自性故應成無量又如樂等時亦有此一一時應亦如是則應無有隱顯差別#以一切時有一切故此不應決定相卽旣不相卽應許爲或應不許樂等爲性如推時分果亦然又諸因果或劣或勝或淨或云何同以一樂癡三法爲性必爾者汝等外道無始時來無所不同以樂等爲自性故汝等今者雖得人身而應卽是狗等下類所食甘應卽糞穢誰有智者無緣執此外道邪宗而自毀辱是故汝說果實不其體本有由轉變故立有時分果差別正理相違不任推究哀哉宿習癡狂寶愛邪宗憎背正法無慧目不了是非隨順迷徒種種妄如是已說時體是常相有轉變應正理諸有智人審觀應捨大乘廣百論釋論卷第四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