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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6_0591_a_01L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 제3권
- 016_0591_a_01L大乘廣百論釋論卷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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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보살 본논 지음
호법보살 주석
현장 한역 -
016_0591_a_02L聖天菩薩本 護法菩薩釋
三藏法師 玄奘奉 詔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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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파아품(破我品) ② - 016_0591_a_04L破我品第二之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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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_0591_b_02L
또 다시 어떤 이는 말하기를 “만일 ‘내’가 없다”면 마음 따위가 생겼다가 이내 사라질 것이다. 숙생염지(宿生念智:전생 일을 아는 지혜)로 전생의 아무 이름이 지금의 이 나라하고 기억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지금과 옛이 다르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는 전생의 딴 몸을 기억해서 지금의 나라고 하는 이가 없다. 그러므로 결정코 항상 머무는 구절의 이치가 있다. 그것을 반연해서 생각을 내고는 그것을 ‘나’라 한다 하는데 이것도 옳지 않다. 나는 이미 인과가 다르나 상속해서 하나인 듯 하나니, 이 하나인 듯한 것을 반연하여 옛이 이제라 한다. 또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만일 전생이란 생각이 있다하여
‘내’가 항상한 것이라 한다면
이미 옛적의 흔적을 보았으니
몸도 항상 머물러야 되리라
논하건대 만일 숙생념지가 비슷한 형상에 의하여 옛이 이제와 비슷한 것을 보고 이제를 옛이라 하여 ‘내’가 하나이며, 항상함이 있는 것이라 한다면 이미 지금의 몸이 비슷한 형상에 의하여 흔적이 옛과 같은 것을 보고 옛이 이제와 같다 하므로 몸도 항상하고 하나라 해야 하리라. 이는 함께 아는 것으로서 차별이 있음을 드러낸다. 물건은 상속하는 거짓 것에 의하나 역시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다른 형상이 없다 하여 ‘내’가 하나이다 하거나 항상하다고 추측해 알 수 없는 것이다.
또 몸의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의 일을 기억하여 지금이 옛이라 하나 역시 무상한 것이르모 지금과 옛의 ‘나’는 다름이 없다 하여도 항상 머물지 않는 것임을 추측해 알 수 있다.
또 지금과 옛은 그 본체가 다르기는 하지만 옛날의 지혜가 반연할 바를 깨달아 받아들임에 의하여 수승한 공능이 생기어 훈습하고, 택식(宅識:아뢰야식)에서 인연을 따라 감각을 일으키어 생각의 힘에 맞추어 옛날에 반연하든 경계와 비슷한 형상을 나타낸다. 이런 것을 전생[宿生:전생]의 일을 기억한다고 한다. 비록 하나이며 항상한 ‘내’가 없으나 전생 일을 기억하는 지혜는 있나니, 세간에서 보건대 약을 먹는 선인들이 약을 먹은지 오래되면 약은 몸에 남아 있지 않으나 그에 의해 일으켜진 우수한 공덕은 남아 있으므로 나중에 익어지면 병도 제하고 수명도 는다. 그러나 ‘나’는 없다. 이것도 그러하여서 만일 생각뿐이라면 누가 생각하는 이이겠는가. 또 생각이 생각하는 이라 하지도 못할 것이니 두 가지가 모두 없다는 허물이 생기기 때문이다.
설사 ‘나’가 있다한들 누가 생각하는 이이겠는가. 또 ‘내’가 생각하는 이라 하지 못하리니, 집착하는바 ‘나’는 지혜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나’의 본체가 비록 지혜의 형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생각함과 합함으로써 생각하는 생각이 있나니, 그렇다면 ‘내’가 생각함과 합할 때에 나와 남의 형상에서 취하고 버릴 것이 있을 것이요, 만일 취하고 버릴 것이 있다면 이는 무상하리라.
만일 취하고 버릴 것이 없다면 앞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생각함과 합할 때에 생각하는 생각도 없으리라. 그렇다면 이 ‘나’는 역시 생각하는 이가 아니리라. 또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만일 ‘내’가 생각함과 합해서
다시 생각하는 생각을 이룬다면
생각함도 생각함이 아니리라
그러기에 ‘나’는 항상치 않다
논하건대 집착하는바 ‘나’의 본 성품이 생각함이 아니었지만 생각함과 합함으로써 생각하는 생각을 이루는 것이 마치 파지가(頗胝迦) 보배의 본체는 푸른 빛 따위가 아니건만 푸른 빛 따위와 합함으로써 푸른빛으로 바뀐다면 이 생각함은 생각함이 아닌 ‘나’와 함께 합쳤으므로 의당 생각함이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
만일 생각함이 생각함이 아닌 것과 합했더라도 본 성품을 버리지 않으므로 생각함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다 한다면 ‘나’도 그러하여서 비록 생각함과 합하나 본성품을 버리지 않으므로 생각하는 생각을 이루지 않는다.
마치 파지가 보배가 푸른 빛 따위와 합할 때에 온 전체가 따로따로 생기므로 다른 빛인 줄로 보거니와 본 성품이 변해서 딴 형상을 이룬 것은 아니니, 파지가는 그 본체가 맑고 윤택한데 딴 빛과 합함으로써 온 전체가 따로 따로 생기매 형상이 앞의 것과 같으면 근본 바탕이라 여기거니와 실제로는 본 성품이 변해서 딴 빛이 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 파지가 보배는 앞과 뒤의 본체가 다르고 형상이 차별되므로 푸른빛과 누른 빛 따위와 같다면 ‘나’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어찌 항상타 하랴.
또 이와 같아서 실제로 ‘나’의 성품은 아닐 것이니 이에 의하여 저들의 딴 소리를 무찌른다.
이른바 어떤 이가 말하기를 “파지가 보배는 그 성품이 청정하여 눈을 가리지 않거니와 딴 빛과 합할 때엔 제각기 딴 곳에 머물러서 근본 형상을 버리지도 않고 딴 형상을 취하지도 않는데 만일 작위 의식이 있었거나 작위 의식이 없음에 따라 근본형상을 보든지 그 빛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다시 어떤 이가 말하기를 “파지가 보배는 그 성품이 맑고 투명하여 마치 밝은 거울 같은데 딴 빛과 합할 때엔 그 안에 나타나는데 보는 이가 어지러우면 딴 빛을 이루었다고 말하나 실제로 이 보배는 변치 않음이 앞과 같다” 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나니, 비량(比量)에 어기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란 거의가 번개나 등불같거늘 어떻게 앞뒤의 본체와 형상이 변하지 않으랴.
도 집착하고 있는 ‘나’와 생각함[思]은 앞뒤의 차별을 내고, 그 형상은 있고 없음이 결정치 못하므로 의당 생각함과 같게 생각생각에 생멸해야 될 것이다.
또 ‘나’와 생각함이 합해서 생각하는 이를 이룬다면 고락(苦樂:괴로움과 즐거움)과 합할 때엔 의당 고락을 이뤄야 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비록 고락과 합하더라도 앞의 지위를 버리지 않나니, 마치 허공이 비나 불에 변함이 없는 것 같아서 의당 받는 이가 아니리라.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즐거움 따위와 합하면
갖가지가 즐거움 따위와 같나니
‘내’가 즐거움 따위와 같으므로
하나도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다
논하건대 즐거움 따위의 성품과 형상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갖가지가 있는데 ‘내’가 그와 합한다면 의당 즐거움 따위와 같이 갖가지 형상을 이루리라. 그러므로 이 ‘나’의 성품은 의당 즐거움 따위와 같이 몸과 몸이 제각기 다르며, 하나도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다. 또 즐거움 따위와 같이 참된 ‘나’의 성품이 아니니, 이 까닭에 생각함을 떠나서 따로 ‘나’의 본체가 있어서 생각함과 합하는 까닭에 생각함의 형상과 같은 것을 생각하는 이라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는다.
생각 그대로의 제 성품이 생각하는 경계의 모습 비슷하게 생길 때에 비록 주체는 없지만 작용이 있는 듯한 것을 생각하는 이라 부르고, 기억과 분별이 분명한 것을 생각이라 한다면 한 법의 이치가 나뉘어져서 둘이 없어지는 허물이 없으리라.
또 다시 수론(數論) 외도가 말하기를 “생각함[思]이 곧 ‘나’이어서, 그 성품이 항상하다. 이러한 생각함과 ‘나’는 마음과 마음의 법을 떠나서 따로 본체와 형상이 있지만 알기가 어렵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생각함과 ‘나’의 본체와 형상은 현량(現量)의경계가 아니니, 그의 제 모습은 세간이 다 같이 아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비량(比量)의 경계가 아니니, 그 생각함의 형상은 오직 나에게만 있을 뿐이요, 다른 이와는 함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저 미량이라 함은 공통한 형상을 추측해서 아는 것이니, 결과 따위의 전체적인 형상으로써 원인의 전체적인 소유를 추측하는 것이다. 세워진 생각함과 ‘나’는 공통하지 않음에 의한 까닭에 동법유(同法喩:원인과 같은 계층의 비유)가 없고, 동법유가 없다면 다른 법도 있지 않으리니, 상대하여 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생각함과 ‘나’는 실제 이치에서 볼 때에 없다.
설사 ‘내’가 있으니 생각함으로써 성품을 삼는다고 허락한다면 그에게 뭇노니, 그러한 나의 성품은 남의 힘에 의하여 생각함이 되는가.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생각함이 되는가. 만일 남의 힘에 의하여 생각함을 이룬다면 의당 무상한 것이어서 눈 알음 따위와 같을 것이요, 만일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생각함을 이룬다면 의당 인연을 기다리지 않음이 마치 허공 따위와 같으리라.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게송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일 ‘나’와 생각함이 항상타하여
반연으로 도우면 삿된 집착이 되리니
불길이 항상 머문다는 말은
장작에 의하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논하건대 마치 어떤 법이 난 뒤에 제 형상에 안정히 머무르면 마침내 다시는 딴 원인이나 뭇 반연에 의존치 않나니, 난 뒤에 다시 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그러하여서 생각함과 본체가 항상하다면 제 형상에 안정히 머물러 남에게 의존치 않고 서거늘 어찌 다시 뭇 반연이 엎치락 뒤치락 하는 뭇 반연이 생각함과 ‘나’를 돕는 것을 기다려서 그를 뒤바뀌게 하여서 갖가지 수용할 기구를 수용하게 하랴.
만일 남에게 의해 변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수용할 것이 있도록 도와줄 반연이 없을 것이다.
만일 변하는 것이라면 무상하리니, 마치 세간의 불길이 그 성품이 무상한데 소락이나 기름 따위를 장작 위에 부어서 불에다 던지면 더욱 성해지고, 그렇지 않으면 불의 세력은 줄어든다.
만일 장작 따위가 없으면 불도 없나니, 이미 장작 따위를 반연한다면 불이 어찌 항상하랴. ‘나’도 뭇 반연에 의하거니 어찌 항상하겠는가.
그대가 또 말하기를 “우리 경론 속에 말하기를 이러한 생각과 ‘나’의 본제는 비록 항상하나 감관과 티끌의 화합에 의해서 환하게 드러남이 마치 병과 독 따위가 광명에 의해 드러나는 것 같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생각함과 ‘나’는 자연적으로 관찰할 수 없고, 반드시 뒤바뀌는 인과의 상응함을 기다려서야 바야흐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뭇 반연에 의존하여도 ‘나’는 항상 머문다”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변한다 하여도 그 허물은 더욱 크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병 따위가 인연이 되어서 드러난 바로서 그의 본체가 항상(恒常)함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진여와 열반은 비록 드러나기는 했으나 세속에 의했을 뿐이요, 으뜸가는 진리에 의거한 것은 아니니, 으뜸가는 진리에는 항상함ㆍ무상함ㆍ끝남ㆍ끝나지 않음 따위 분별과 희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집착하는바 생각함과 ‘나’는 인연으로 드러난 바이기 때문이다. 마치 병 따위와 같이 그 성품도 무상해야 하리라.
만일 그대가 다시 말하기를 “숨었을 때의 생각함과 ‘나’는 비록 생각하는 분별은 없으나 공능(功能)만이 있다”고 한다면 이런 공능은 생각하는 분별과 다르지 않나니, 이미 생각하는 분별이 없다면 무슨 공능이 있으랴.
또 생각함의 공능은 반드시 생각함의 본체에 의존하는 데 본체가 이미 있지 않다면 공능이 어디에 의존하리오.
또 숨었을 때에 ‘나’는 생각함으로써 성품을 삼는데 생각함이 이미 있지 않다면 ‘나’도 없는 것인데 어찌 숨었을 때에 생각함과 ‘나’는 비록 생각하는 분별은 없으나 공능은 있다고 하는가. 설사 숨었을 때에 ‘나’는 생각함이 아니라 한다면 그대는 지금 말해 보라. ‘나’의 형상이 어떠한가. 만일 형상을 말하지 않아도 ‘내’가 이루어진다면 온갖 허망한 집착이 모두 이루어질 것이다. 이와 같이 미루어 따지기는 앞에서 이미 말했다.
또 그대가 집착하기를 “보든 공능과 공능을 부치는 이가 그 성품이 하나라” 한다면 이는 능동적인 이가 공능의 의지할 바가 아니리니 성품이 하나이기 때문이다.
또 이 지위에는 능동적인 이가 없기 때문에 능동은 능동에 의지한다 하지 말아야 하나니, 스스로가 자기의 작용에 대하여 이치를 어기기 때문이다.
또 능동적인 것은 의지한 바 없다고도 말하지 말라. 가장 수승함(最勝:자성)이 있지 않아도 허물은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만일 생각함의 공능이 의지한바 없이 스스로가 선다면 뒤바뀌는 공능도 스스로가 서야 할 것인데 어찌 가장 수승함을 필요로 하랴.
또 그대가 집착하는 생각함과 ‘나’의 공능이 수용하는 바에 따라 한량없는 종류가 있으리라. 이미 공능이 많다고 허락한다면 어떻게 본체가 하나이겠는가. 그대의 종지는 결정코 본체와 공능이 하나라고 집착하기 때문인데 세간에서는 아직 한 법의 본체 위에서 동일치 않은 시기에 여러 개의 결과를 내는 일이 없었다.
동일치 않은 시기라 함은 동일한 시기에 한 법의 본체 위에서 능히 여러 개의 결과를 내는 것을 드러낸다. 시간이 같지 않다면 그 본체는 반드시 다를 것인데 어떻게 그대는 하나의 ‘나’에게 앞뒤의 여러 공능이 있어서 여러 가지 생각하는 분별을 일으키리라고 집착하는가.
또 이 생각함과 ‘나’는 어째서 일시에 온갖 결과를 수용하는 생각의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일 생각하는 분별이 반드시 뒤바뀜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일어난다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나니, 어째서 가장 수승함에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온갖 뒤바뀌어 변하는 변동을 당장 일으키지 않는가. 가장 수승함의 공능은 가리움이 없기 때문이다.
설사 가장 수승함이 일시에 온갖 뒤바뀌어 변하는 작용을 당장 일으킨다 하더라도 이는 가장 수승함의 본체가 아주 없어진다는 말이 될뿐이니, 전체가 모두 변하여 본 성품을 잃기 때문이다. 가장 수승함의 본체와 같아서 ‘나’도 그러하나니, 그성품이 모두 항상하고, 모든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대가 숨을 대는 생각함과 ‘내’가 모든 공능을 갖추고 있으나 생각의 분별이 없다고 집착하면 많은 허물이 있어 끝내 면하기 어렵다. 또 다시 이 밖의 방편으로 이 이치를 변명하기를 ‘내’가 곧 생각하는 이요, 생각함은 ‘나’의 작용이니, 작용이 멸할 때에 작용시키든 이도 따라서 멸하는 것은 아니다.
현재에 보기에 눈 따위가 비록 빛 따위를 비추는 작용은 없으나 그 본체는 있다. 그러므로 숨을 때엔 비록 생각함의 작용은 없으나 생각하는 이는 있으니, ‘나’의 본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거니와 이것도 옳지 못하다.
숨었을 때의 ‘나’의 형상은 생각함과는 다르리니, 의당 앞의 허물과 같아진다. 어찌 작용과 작용하는 이의 본체가 다르지 않으므로 딴 형상이 없는 것이 아니랴. 그대의 말은 마치 어리석은 코끼리가 목욕하는 것 같으니 속으로는 경미한 티를 피하려 했는데 끝내는 겹겹의 때를 불러들였다.
생각함의 작용과 ‘나’의 본체가 이미 다르지 않다면 생각하는 작용이 멸할 때에 ‘나’의 본체도 멸하리니, 이는 생각함과 ‘내’가 모두 결정코 무상하다는 것이 되어서 도리어 자기의 종지를 해친다. 어찌 변명이라 하랴.
또 그대가 말하기를 “현재에 눈 따위에 비록 빛 따위를 비추는 작용은없으나 그 본체는 있다” 하였는데 이것도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움직이든 물건이 사라짐에 이르르면
거기엔 작용 따위가 있지 않나니
논하건대 빛 따위를 비추어 분별하는 작용이 사라짐에 이르기까지 항상 스스로의 경계를 분별해 아는 의식을 따르나니, 이 작용이 곧 의식의 본체이기 때문에 작용이 사라지면 의식의 본체도 없어진다.
눈 따위 모든 감관은 상속함이 끊일 때까지 항상 이 작용이 없나니, 제 성품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눈 따위의 제 성품은 능히 비추는 것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그가 멸할 때에 이것도 따라서 멸하지 않는다. 눈 따위는 지은 바 깨끗한 바탕으로써 성품을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주장하는 ‘나’는 생각함을 떠나서 다로 이 본체가 있지 않나니, 작용이 멸하고서 본체만이 홀로 남을 수는 없다.
어찌 ‘나’는 생각하는 이로써 모습을 삼는 것이 아니랴. 어째서 생각함을 떠나서는 본체가 없다 하는가 하고 그대가 앞에도 말했지만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생각하는 이와 생각함의 작용은 이미 동시에 멸하는 것이 아니므로 의당 딴 본체가 있기 때문이다. ‘나’의 본체는 생각함이 아니므로 허물은 앞에와 같고, 작용은 딴 본체가 없으므로 앞의 비난이 다시 온다.
또 생각함과 생각하는 이는 서로 기다려서야 성립되어 모두가 구족해야 비로소 이루어지나니, 하나가 없어도 되지 않는다. 생각함과 생각하는 이가 동ㄷ일하거나 다르거나 결정코 앞에 말한 두 가지 허물에 저촉된다.
이렇게 해석한 뒤에 다시 딴 해석이 있나니, 예컨대 눈 따위는 사라질 때까지 항상 작용이 있어서 능히 딴 물건을 내지만, 그대가 집착하는 ‘나’와 생각함의 작용은 이러한 딴 물건을 의지로 삼는다고 허락하지 못한다.
빛 따위를 비추는 작용은 곧 눈 따위로서 제각기 스스로의 경계에서 의식의 공능을 낸다. 눈 따위 여러 감관이 낸 의식에 따라 갖가지로 제 모습의 차별을 나타내는 데 원인인 의식을 떠나서는 따로 어떤 본체가 있지 않지만 결과인 의식을 떠나서는 따로 제 모습이 있다.
그대는 ‘내’가 있어 능히 생각함을 낸다고 집착하나 생각함을 떠나서는 따로 제 모습이 있다고 허락지 않노니, 그 까닭에 이끌어서 동유(同喩)로 삼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나’는 있고, 생각함은 없다면
그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논하건대 딴 모습이 있다면 동일한 바탕이 아니므로 하나는 멸하나 하나는 남는다 하겠지만 생각함의 작용과 생각하는 이는 이미 딴 모습이 없으므로 생각함이 멸할 때엔 생각하는 이도 멸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집착하는바 ‘나’는 있고 생각함이 없다고 세운 도리는 결정코 성취되지 않는다.
또다시 어떤 이는 집착하기를 “생각함을 떠나서 따로 이 진실한 ‘내’가 있는데 그 본체가 두루하여 한 부분이 생각함을 내나니, 이른바 ‘나’의 한 부분이 먼저 지혜와 합해서 능히 수긍한 생각함을 내는 활동[行:업]을 일으키고, 나중의 한 부분은 뜻과 합해서 생각함을 낸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따위 잘못은 없다” 하는데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이쪽에서 생각을 일으키며
딴 곳에서 생각을 본다면
논하건대 방향과 장소가 다르면 인과가 성립되지 않나니 세간의 종자와 싹들이 제각기 먼 곳에 있으면서 인과가 성립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가 집착하기를 능히 수긍한 생각함을 내는 활동이 먼저는 먼 곳에서 지혜와 합하여 경전과 재주들을 익히고 닦아서 그들이 익숙해져서 ‘나’ 속에 간직하고, 나중에 딴 곳에서 아무런 장애가 없으면 ‘나’와 뜻이 합해서 현재의 생각함을 일으킨다하니, 이는 분명히 인과가 다른 장소이다. 어찌 활동과 생각함이 합쳐진 ‘나’의 본체는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런 허물이 없다 하겠는가.
만일 그렇다면 온갖 활동 따위의 인과는 모두가 ‘나’와 합했으니, 장소도 모두 같으리니, 이는 그대의 주장인 ‘나’의 본체가 두루하여 한 부분은 지혜와 합쳐서 생각함의 활동을 일으키고, 한 부분은 뜻과 합해서 현재의 생각함을 일으킨다는 것에 어긴다.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마치 무쇠 막대기를 녹이는 것 같아서 그 한 쪽이 불과 합하면 다른 쪽은 아직 불에 닿지는 않았으나 한 물체이기 때문에 차츰 녹는 것 같이, 활동과 생각함도 그러하여서 나는 곳은 다르지만 ‘나’의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에 인과가 이루어진다” 하거니와 이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쇠막대기가 녹는 것 같아서
‘나’의 본체도 녹아지리라
논하건대 무쇠 막대기를 녹일 때에 그 한 끝이 먼저 불에 닿으면 당장 녹다가 차츰차츰 더운 기운이 미치면 나머지 불과 떨어진 곳도 모두 녹아진다.
이와 같이 ‘나’의 본체가 먼저는 한 부분이 지혜와 합해서 생각함의 결과를 변해 내고, 나중에 차츰차츰 세력이 미치면 딴 곳에선 뜻과 합하여 생각함의 결과를 낸다 한다면 이는 ‘나’의 본체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 허망하게도 ‘나’는 항상하다는 주장을 세우는가.
또 그대가 주장하기를 “‘나’는 오직 조그마한 부분에만 의존해서 능히 생각함을 내는 것을 생각하는 이라”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다.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생각은 의량(意量)만큼 작고
‘나’는 허공 같이 크니
오직 제 모습을 볼뿐이요
생각은 보지 못하리라
논하건대 그대가 집착하기를 “‘나’의 본체가 한 부분은 뜻에 합해서 능히 생각함을 내기 때문에 생각하는 이라 한다면, 나머지 부분은 나의 본체가 뜻과 합하지 않아서 생각함을 내지 않기 때문에 생각하는 이라” 하지 못하리라. 뜻은 걸리는 바탕이 있어 미세함이 극미(極微)와 같고, ‘나’의 성품은 비고 툭 트이어 넓기가 허공과 같다. 적은 부분이 뜻과 합해서 능히 생각함을 낸다면 나머지 끝없는 부분은 모두가 생각하는 분별이 없어야 되리라. 그러므로 많은 부분을 좇아서 ‘나’의 모습을 볼지언정 적은 부분을 좇아서 생각함이라 여기지는 말아야 된다.
대저 어떤 자체에다 거짓 이름을 부칠 때에 혹은 많은 형상을 따라 본체를 표현키도 하고, 혹은 물들은 쪽에 의해 그 형상을 드러내기도 하는데 이런 두 가지 일은 나에게는 모두 없다. 그러므로 ‘나’를 생각하는 이라 할 수는 없다.
만일 그대가 다시 말하기를 “생각함은 ‘나’의 형상이 아니다. 생각함은 ‘나’의 공덕이어서 ‘나’는 진실이다. 이 진실ㆍ공덕ㆍ업 세 가지의 제 성품은 서로가 어지럽히지 않거늘 어찌 옳지 못하다 하는가 한다면 그대 자신이 생각함을 떠나서는 따로 ‘나’의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이다.
만일 따로 ‘나’의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끝내 ‘나’에게는 진실한 본체가 있다고 주장하지 못하리니 제 모습이란 끝내 말할 수 없는 것이므로 그대가 세운 바 ‘나’는 곧 ‘나’ 없음[無我]이 된다.
또 그대가 세운 바 ‘내’가 생각하는 이가 아니라 함은 곧 ‘나’의 형상을 잃나니, 생각하는 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빛 따위 법이 ‘나’도 아니요, 생각함도 아닌 것과 같다.
또 생각함을 먼저라 한다면 지어진 모든 업은 응당 ‘나’에게 속하지 않고, 도리어 서로 어기는 허물을 이루나니, 나와 남의 생각함에 모두 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에게 생각함의 분별이 없다면 그가 구하고 있는 인과와 사물이 뜻과 서로 합하지 않으리니, 마치 까막까치가 다라과(多羅果:과일)를 떨어뜨리는 것 같으리라. 이렇듯 갖가지 허물이 있으므로 ‘나’는 흩어져 무너지는 것이요, 끝내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또 다시 어떤 이는 구차하게도 이런 허물의 그물을 피하기 위해 ‘나’의 본체가 적은 부분의 작용을 일으킴은 허락지 않으면서 능동적으로 의지하는 공덕은 의지한바 ‘나’에 두루했다고 집착하나니, 이것도 옳지 않다. 공덕이 만일 ‘나’에게 두루했다면 감관 따위의 화합에는 작용이 없으리니, 감관 따위가 없는 곳엔 즐거움 따위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나’의 한 부분이 감관 따위와 합하기 때문에 두루 즐거움 따위를 내는 것이 마치 한 곳에 있는 등잔의 힘으로 광명을 놓아 여러 곳을 비치는 것 같다” 한다면 다음이 이런 게송을 보라.
‘나’의 공덕이 두루하다면
어째서 남은 수용치 못하랴
논하건대 만일 ‘나’와 공덕의 본체가 모두 두루하다면 한 사람의 즐거움 따위가 응당 여러 ‘나’에 두루해야 할 것인데 어찌 다른 사람을 모두 수용치 못하는가.
차라리 한 부분인 ‘내’가 뜻과 합해서 거기에서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를 내는데 ‘내’가 그를 수용한다 하면 이런 허물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대가 다시 말하기를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은 오직 ‘나’에게 속했으므로 능히 ‘내’가 능히 받아들인다. 한 사람의 즐거움 따위는 비록 모든 ‘나’에 두루했으나 오직 한 사람에게만 속했고, 딴 사람에겐 속하지 않았거늘 어찌 다른 이가 ‘나’의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를 대신 수용할 수 있으랴. 세간에서도 눈앞에 보기에 온갖 재물은 주인만이 수용하고 다른 이는 수용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는데 만일 장소가 다르다면 그럴 수 있거니와 이미 같은 장소에 있다면 어찌 함께 수용함이 방해될 것인가.
온갖 같은 장소에 있는 물건이 자기의 것이 아니면 취하고 버리기를 마음대로수용할 수 없다하더라도 눈으로 구경하면서 수용하는 것이야 누가 막으랴. 현재 세간에서 보기에 자기의 것이 아닐지라도 같은 곳에 있으면 눈으로 구경하는 것은 막는 이가 없나니, 이제 괴로움ㆍ즐거움 따위는 형체와 바탕이 없으므로 눈으로만 볼지언정 취하고 버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변명하는 이론이 되지 못한다.
만일 말하기를 “다른 ‘나’의 괴로움ㆍ즐거움은 간격이 있으므로 받아 수용하지 못하나니, 마치 세간의 물건이 비록 같은 곳에 있으나 눈에 장애가 없는 이는 볼 수 있거니와 눈에 장애가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도 그러하여서 스스로의 괴로움ㆍ즐거움은 막힘이 없기 때문에 능히 받아들이거니와 남의 괴로움ㆍ즐거움 띠우는 비록 같은 장소에 있으나 장애가 있으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하거니와 만일 그렇다면 어두운 장애가 적은 부분에서 바뀌는가. 그가 말하기를 “아니다” 하리니, 두루 굴러 바뀌기 때문이다. 이 장애는 남과 ‘나’의 장소가 같지 않는가 하니, 그가 다시 말하기를 “아니다” 하리니, 장소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장애함이 여러 곳에 통했다면
하나만을 장애하지 않으리라
논하건대 하나의 어두운 장애에 한량없는 ‘내’가 있는 데 장소가 이미 다르지 않으므로 하나의 ‘나’만이 막히어지고 나머지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누가 믿고 이해하겠는가. 어두움의 형상은 차별이 없고, ‘나’의 형상도 같다. 막는 이와 막힌 바와의 장소도 다름이 없고, 받는바 괴로움과 즐거움들도 그러하다. 그렇다면 장애없는 것이나 수용하는 것이나 수용치 않는 것이나 모두가 같으리라. 세간에 있는 온갖 밖의 어두움이 그대의 계교와 같이 안의 어두움과 차별된 것을 보지 못했다.
앞에서는 비록 공덕은 의지한 바에 두루하지 않았으나 ‘나’의 본체만이 두루해서 저 공덕과 합했으니, 의당 수용키도 해야 한다고 집착했으나 허물은 이 말과 같다.
그대가 말하기를 “내 어찌 즐거움 따위와 뜻이 그 장소가 같아야 바야흐로 받아들인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남의 즐거움 따위를 받는다는 허물은 없다 하거니와 그대들 외도들은 스스로의 뜻에 따라 말한 것이니, 뜻에 따르는 말이 바른 진리에 계합되지는 못한다. 아무리 물건을 비칠 수 있는 것이라도 등잔 앞에 두면 등불은 비치지 못하나니, ‘나’도 그러하거늘 어찌 수용치 못하랴.
만일 그대가 다시 말하기를 “비록 온갖 ‘나’의 본체가 모두 두루하나 스스로의 즐거움 따위는 남과 함께 하지 못하나니, 무슨 까닭인가. 즐거움 따위 모든 공덕은 활동의 세력에 의하여 생기기 때문이다. 이 활동의 세력은 법과 법 아닌 것에 의해서 능히 결과를 받나니, 그 까닭에 이 이치가 성립된다” 한다면 이런 방편은 진리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허물은 앞에와 같고, 구제하는 이론이 되지 못한다.
이렇게 변론하는 이가 진리에 의해 추궁하건대 삿된 관법을 으뜸삼아 ‘내’가 항상하고 두루하여 짓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는 주장을 세우나 이치가 이뤄지지 않는다.
또 다시 어떤 이가 말하기를 “살타(薩埵)와 라사(刺闍)와 답마(答摩)와의 세 가지 공덕은 생각함이 아니라 짓는 이[作者]요, ‘나’와 생각함은 짓는 이가 아니라 능히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나니, 이런 이치를 깨뜨리기 위해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만일 공덕이 모두가 생각이 아니면
어떻게 온갖 것을 조작하랴
그는 의당 미치고 어지러우며
어리석어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리
논하건대 집착하는바 세 가지 공덕이 생각함이 아니라면 어떻게 ‘나’를 위해 만 가지 물건을 변화해 내ㄱㅆ는가.
만일 본래부터 생각함이 없이도 조화함이 있다면 그는 어리석고 마친 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설사 미치광이와 같다 한들 무슨 손해가 있으랴 하거니와 만일 미치광이가 된다면 ‘나’를 위해 지어 놓은 수용할 일은 모두 이뤄지지 않으리라. 아직도 세간에서 미치광이 하인이 주인의 뜻에 맞는 물건을 만들어 시중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또 그 모든 공덕이 지은 일에 대하여 좋은 방편이 없으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은 그림을 그리어도 끝을 맺지 못하는 것 같으리라. 짓는 일에 좋은 방편이 있다면 어찌 스스로가 마음껏 수용하지 못하랴.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해 다시 이런 게송을 말했다.
집 따위 여러 물건을 짓는 일
그덕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를 수용할 줄 모른다 하면
이치에 안 맞음이 이보다 더하랴
논하건대 모든 공덕이 마치 재주 있는 사람 같아서 짓기 어려운 일을 거뜬히 만들어서 안팎의 필요한 것을 모두 장만하면서도 수용하는 것으로서 보기 쉬운 것은 잘 알지 못하다 하니, 어쩌면 그다지 씨가 맞지 않는가. 스스로가 어리석음을 지키는 이를 제하고는 뉘라서 이런 소견에 패를 이루랴.
이런 세 가지 공덕은 수용하는 일 가운데서도 능숙한 방편이 있어야 되나니, 그의 본체 때문이다. 마치 솜씨 좋은 이에게 있어서 해야 할 일들과 같기 때문이다. 이는 짓는 이 받는 이가 모두 세 가지 공덕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나’와 생각함을 세워서 받는 이라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만일 말하기를 “수승한 성품은 비록 본체가 생각함은 아니나 인연과 세력에 따라 만물을 조화해서 생각함과 ‘나’로 하여금 마음대로 수용케 하나니 마치 초록 따위가 비록 생각하는 바는 없으나 업력에 의하여 꽃과 열매 따위를 갖가지로 같지 않게 내어 사람들로 하여금 수용케 하는 것 같다 한다면 수승한 성품은 짓는 바도 생각함도 없어서 마치 꽃이나 열매 같이 수용하고서도 끊이지 않으리라. 생각함이 있는 모든 것으로서 결과를 내는 것은 수용하기를 풍족히 한 뒤엔 결과는 곧 쉬어 버린다. 수승한 성품은 생각함이 아니므로 밖의 초목 따위와 같이 항상하여 무너지지 않으리라. ‘내’가 수용한 뒤엔 지은 바는 이내 쉰다 하나 그 이치가 옳지 않다.
만일 말하기를 “세 가지 공덕은 그 성품에 총명하여 온갖 하는 짓이 공교로우며, ‘나’는 자신의 주인이어서 능히 잘 생각하여 그로 하여금 조작케 하고, 자유로이 받아들이게 하나니, 이른바 그 세 가지 공덕은 신아(神我)의 뜻을 잘 알아서 필요로 여기는 것이 있으면 당장에 깨닫는 작용을 일으키고, 작용을 일으킴에 따라 만물을 조화해서 이러한 생각함의 ‘나’에서 마음대로 수용한다 하나니, 그대의 이 말은 다만 자기의 종지를 서술했을 뿐이요, 다투는 이치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또 그대가 세운 바 ‘나’에는 생각함이 있고, 공덕은 깨닫는 지혜가 있나니, 이와 같은 두 가지가 모두 제 경계를 받아들이고 성품과, 형상의 차별을 깨달아 분별하나 알기는 어렵다. 그러므로 허망하게 분별하여 깨닫는 지혜는 공덕에 속하고, 생각함은 나에게 있다고 여기지 말라.
또 공덕은 깨닫는 지혜의 제 모습을 잃으리니, 생각함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빛 따위와 같다. 그대가 말하기를 “세 가지 공덕은 신아의 뜻을 분별해 알아서 필요로 여기는 것이 있으면 당장에 깨닫는 지혜를 일으키고, 작용 따위도 일으킨다” 하나니 이는 옳지 못하다.
제 성품의 지위에서의 깨닫는 짛는 작용이 없거늘 뉘라서 능히 ‘나’의 뜻에 필요한 것이 있음을 알리오, 만일 그럴 때에 깨닫는 지혜가 일어난다면 어찌 ‘나’의 뜻을 알기를 기다려서야 일어나겠는가. 만일 그럴 때에 깨닫는 지혜가 아직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세 가지 공덕[三德]이 처음으로 대(大:깨달음이라고도 함)를 일으키겠는가.
만일 깨달음의 지혜가 없어도 대의 자체가 홀로 일어난다면 온갖 만물도 저절로 일어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깨달음의 지혜는 변해서 달라지는 결과 안에서 도무지 작용이 없다.
또 어떤 이가 비량(比量)을 세워서 변명하기를 깨달음의 지혜는 생각함이 아니니, 이는 무상한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무상한 것은 모두가 생각하는 분별이 아니니, 마치 빛 따위와 같다 하거니와 이런 말은 스스로의 뜻을 해치나니, 생각하여 분별함으로써 깨닫는 지혜라 하거니와 만일 생각지 않는다면 이는 깨달음의 지혜가 아니거늘 어찌 깨닫는 지혜는 생각함이 아니라 하는가 또 먼저 이미 말하기를 “깨닫는 지혜와 생각함은 모두가 제 경계를 깨달아 알아서 성품과 형상의 차별이 없다” 하였는데 어째서 깨닫는 지혜에는 생각함이 없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스스로가 허물이 있다.
또 무상의 원인으로서는 이루지 못하는 허물이 있나니 생멸의 이치에서 본다면 자기의 종지로써 허락지 않고 숨고 드러나는 이치에서 풀이한다면 남ㅣ 종지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원인이란 이치는 분별할 수 없다. 오직 총괄적으로 말할뿐이다”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다. 만일 차별된 것이 모두 성립된다면 총체적인 것에 의해 말할 수 있거니와 따로 보는 것들이야 총체적으로 드러난 따위를 원인으로 삼아야 된다. 차별이 이미 성립되지 못한다면 총체적인 것이 어디에 의지해서 성립되랴.
또 작용에 의해서 숨고 드러남이 있다고 말하고, 이에 의해서 무상의 원인의 이치가 있다고 주장하나 그대는 ‘나’의 생각함에도 작용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각 원인의 이치가 일정치 않은 허물이 있다.
또 그대는 깨달음의 지혜 이외에 따로 ‘나’의 생각함이 있다고 주장하려 하거나 또는 ‘나’의 생각함 이외에 따로 깨달음의 지혜가 있다 주장하려 하나 모두가 이뤄지지 않나니, 이런 종류는 모두 허락할 수 없는 바이다. 이 까닭에 그대의 주장은 이뤄질 이치가 없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하기를 “‘나’의 생각함이 능히 받아들이고 세 가지 공덕을 능히 짓는다”한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하기를 “‘나’의 본체는 항상하고 두루하여 걸림이 없고, 능히 만물을 조작하므로 짓는 이 [作者]라 한다” 하는데 이것도 옳지 못하나니, 이치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만일 그대가 집착하기를 “‘나’에는 동작하는 작용이 있으므로 짓는 이라” 한다면 이는 곧 무상함과 걸리는 바탕과 두루하지 못한 허물이 있다. 눈앞에 보기에 무상하고 두루하지 않고, 걸림이 있어야 비로소 동작이 있고 항상하고 두루하고, 걸림이 없으면 동작하는 작용이 있는 것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집착하고 있는 ‘내’가 동작이 없다면 어찌 능히 조작하는 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반드시 동작이 있다고 허락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응당 ‘나’의 본체는 무상하고, 걸림이 있고, 두루하지 않는다. 이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동작이 있으면 무상하고
비고 통한 곳엔 동작이 없으니
논하건대 바람[風界]의 세력에 의해 능히 동작하는 작용을 내나니, 이른바 바람에 의하여 모든 행동이 변천하여서 딴 곳에서 생겨나서 상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이를 세속의 도리에 의해 말하면 동작이라 하는데 이 동작에 의하여 짓는 이라 부르나니, 이는 반드시 걸림있음과 무상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걸림있음과 무상이면 두루하지 못한다.
그대의 종지에서도 극미(極微)의 동작은 걸림이 있고, 두루하지 못하다 하였고, 벌써 이미 그를 항상하다고 집착하는 이를 무찔렀다. 그러므로 비량에는 결정되지 않았다는 허물이 없다.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나의 종지는 내아(內我:나)에 동작이 있음을 허락지 않으므로 원인이 이뤄지지 않는다”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 반드시 허락해야 되기 때문이다.
만일 동작이 없다면 어찌 짓는 이라 부르겠는가. 그대가 비록 업이란 말의 동작을 허락지 않지만 짓는 이는 있다 한 말도 동작에 의한 것이니, 마치 불꽃의 가고 옴과 같다.
또 반드시 ‘나’에 작용이 있다고 허락해야 하리니, 만일 ‘나’에게 작용이 있단 말을 전혀 허락지 않는다면 ‘나’는 없는 것이어서 토끼의 뿔 따위와 같다.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작용이 없으면 성품없음과 같거늘
논하건대 만일 그대가 집착하기를 “‘나’에 작용이 있으면 짓는 이라는 이름과 말이 의지할 바가 되겠지만 작용이 없다면 있지 않는 것과 같거늘 무엇에 의하여 ‘나’를 짓는 이라” 하겠는가. 이미 작용이 없다면 있는 것이라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말하기를 “있다는 말은 작용에 의하지 않고 다만 같은 성품이나 그에 상응하는 것에 의한 것이라”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 세간의 지혜로운 이는 작용의 가 있음에 의하여 말과 이름이 있다고 말하거니와 만일 작용이 없다면 본체도 없으리라. 본체도 작용도 없으면 이름이 어디에 의해서 성립하겠기에 어떻게 짓는 이로서의 ‘내’가 있다고 말하는가.
만일 그대가 있다는 말의 의지한 바를 모르겠거든 다만 잠자코 받아지니어서 법을 말하지 말아야 되겠거늘 어찌 구태어 말하는가. ‘나’에게 짓는 이가 있다면 있다는 말은 작용 있는 본체에 의지하는 것임을 세간에 지혜있는 이는 모두 허락하니 그대는 반드시 따라야 된다.
만일 그대가 결정코 집착하기를 “‘나’는 작용이 없다”고 한다면 의당 함께 허락하는 끝내 없음의 법 따위와 같게 되리니, 이에 의해 추측하건대 ‘나’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어째 ‘공’과 ‘나’없음의 진리를 좋아하지 않는가. 이런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어째서 ‘나’없음을 기뻐하지 않나
논하건대 과거의 법 따위는 능히 모든 법을 내는 작용이 없으니, 이는 곧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인 까닭에 ‘나’도 그렇다. 세상이 모두 함께 붉곷의 지어감[行] 따위의 작용을 허락함이 없고, 또 가고 오는 작용도 허락지 않으니, 의당 자체가 없으리라. 이와 같이 ‘나’의 자체는 도무지 있는 바가 없으니, 이는 진리에 맞을 뿐 아니라 그대의 마음에도 계합되거늘 어째서 ‘공’과 ‘나’ 없음의 진리를 기뻐하지 않는가. 계교하여 따지면서 믿지 않으려는 것을 분명 무명의 일어난 바로서 삿된 집착의 힘이 강하기 때문일 뿐이다.
만일 그대가 말하기를 “‘나’나는 비록 딴 작용은 없으나 능히 경계에 맞추어 ‘나’라는 소견의 마음을 내기 때문에 짓는 이라” 한다면 이것도 실수가 있나니, 먼저 이미 널리 깨뜨렸는데, 이제 또 왔다.
또 ‘나’는 ‘나’라는 소견의 경계가 되지 못하나니,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토끼의 뿔과 같다. 이 ‘나’라는 소견도 나를 반연치 않나니, 반연할 바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빛을 반연하느 마음 따위와 같다.
만일 진실로 ‘내’가 있어서 ‘나’라는 소견을 낸다면 이 ‘내’가 어찌 솜씨있는 요술쟁이가 자기가 원하는 대로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어 세간을 매혹시키는 것 같이 갖가지 ‘나’라는 소견의 차별을 일으키는가.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혹은 ‘내’가 두루했다고도 하고
혹은 부피가 몸과 같다고도 하고
혹은 극미와 같다고도 하지만
논하건대 한 종류의 외도는 집착하기를 “‘나’는 두루하였으니, 온갖 곳에 두루하여서 고락(苦樂)을 받기 때문이다. ‘나’는 형체도 없고, 동작도 없다. 몸을 따라 왕래하거나 죽고 살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안의 ‘나’는 온갖 곳에 두루하였음을 안다” 하였다.
또 어떤 외도는 말하기를 “‘내’가 두루함이 허공과 같다”면 몸에 따라 모든 고락을 받지는 못하리니 마치 허공이 가고옴이 없는 것 같다. 그 성품은 맑아서 짓거나 받는 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성품은 의당 빛 따위와 같아서 의지하고 있는 몸의 부피에 따라 일정치 않다.
비록 형체는 없더라도 의지하는 바가 있어서 이리저리 변하면서 몸을 따라 고락을 받고, 비록 형체에 의지하여 펴고 오므림이 있으나 ‘나’의 본체의 성품에는 생멸이 없다. 마치 기름을 물에 떨어뜨리면 물의 넓고 좁음에 따라 펴고 오므림은 있으나 부피는 늘거나 줄지 않는 것같다 하고,
또 어떤 외도는 말하기를 “만일 ‘나’의 본체의 성품이 몸의 부피에 따른다면 의당 분단이 있고 변함이 있어야 되리라” 또 그대가 지박하기를 “‘내’가 의지하고 있는 몸이 마치 물이 못에 의지한 것 같고, 기름이 물을 좇는 것 같다면 이는 이 ‘내’가 마치 기름이나 물과 같아서 변화가 많아 하나도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리라”
이것을 이끌어 비유를 삼아서 말하기를 “‘나’의 본체는 항상하고, 하나이다”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본체는 몸 안에 있어서 부피가 지극히 미세함이 마치 극미와 같아 분석할 수도 없다.
본체는 항상 변함이 없거늘 생각을 움직이고 몸을 움직여서 짓고 받는다 함은 더욱 옳지 못하니, 이치에 어기기 때문이다.
뭇 극미가 쌓이고 모여서 지극히 큰 몸을 이루었고, ‘나’는 그 속에 머무러서 부피가 지극히 작거늘 어찌 작은 ‘내’가 능히 큰 몸을 움직이여서 온 몸이 전체가 모두 움직이는 꼴을 보겠는가.
만일 그대가 속으로 말하기를 “‘나’의 부피가 비록 작으나 몸속을 왕래하면서 반동하여 차츰 두루함이 마치 불을 굴리는 바퀴와 같다. 지극히 빠르기 때문에 모두가 움직인다 한다면 ‘나’의 본체가 몸 속을 두루 돌기에 의당 생멸이 있어 중분(衆分:다른 것)과 같은 것 이는 다만 변천해서 딴 곳에 이르렀을 뿐이어서 결정코 생멸에 돌아가서 반드시 중분이 있게 되리라.
이미 말하기를 “‘내’가 굴러서 이르는 바가 항상치 않음이 마치 등잔불 빛과 같다” 했으니, 어찌 항상함과 동일함이 있겠는가.
항상하다면 움직이지 않고 움직인다면 항상치 않을 것인데 ‘내’가 움직이면서 항상하다함은 몹시 이치에 어긋난다.
또 집착하는 바에 ‘나’는 머무름도 있고 다님[行:움직임]도 있거늘 어찌 항상하다 하겠는가. 만일 다닐 때에 ‘내’가 머무름의 성품을 버리지 못한다면 마치 머무른 지위와 같아서 다니는 바가 없을 것이요, 만일 다닐 때에 ‘내’가 머무름의 성품을 버린다면 딴 형체가 생기는 것인데 항상함과 동일함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종류의 아집(我執)이 끝이 없으나 이치로 따지건대 모두가 성립되지 않는가.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지혜로운 이는 없음의 진리를 안다
논하건대 만일 진실로 ‘내’가 있어서 성품과 형상이 모두 동등하게 인연이 되어 ‘나’라는 소견을 낸다면 이런 ‘나’라는 소견은 있을 수 없으니, 갖가지로 차별되고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항상 머무는 진실한 ‘내’가 없음을 알겠다.
다만 오래 익힌 허망한 ‘나’라는 소견이 의식 속에 찌들려 있어 공능(功能)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몸이 업을 따라 변화함이 같지 않는 것 같이, ‘나’라는 소견이 인연을 따르는 것도 그렇다. 오직 마음의 형상이 변화해서 여러 가지를 나타낼 뿐이요. 그 속에는 도무지 하나도 진실한 ‘나’의 본체가 없다. 그러므로 여러 성현들이 뒤바뀜 없는 원인을 쌓아서 방편으로 부지런히 구해 ‘내’가 있지 않는 원리를 증득한다. 또 다시 어떤 이가 집착하기를 “‘내’가 능히 증득하고 해탈한다” 하거니와 다만 어리석은 마음에 순응할 뿐이요, 끝내는 바른 진리에 어긴다. 그 까닭이 무엇이었는가.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항상한 법은 번뇌로움이 아닌데
어째서 번뇌를 떠나 해탈하려는가
그러므로 ‘내’가 항상타 하여
해탈을 증득함은 진리가 아니다
논하건대 만일 계교하기를 “‘내’가 항상하여 변함이 없다. 비록 뭇 고통의 서리ㆍ우박 따위의 재앙을 만나도 마치 허공과 같아서 도무지 손해가 없는 것 가다” 한다면 지혜로운 이들이 세간의 뭇 고통이 닥치는 것을 보고 싫어할 생각을 내어 방편으로 부지런히 구해 해탈을 증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내’가 항상하여 괴롭힐 수 없음을 나타낸 말이다. 그러므로 뭇 고통에 부딪치더라도 깨달아 알지 못해야 한다. 만일 깨달아 알지 못한다면 싫어할 수 없을 것이요, 싫어하지 않으면 부지런히 노력하지 못할 것이요, 부지런히 힘쓰지 않으면 해탈치 못할 것이다.
가엾어라. 외도들은 미쳐 날뛰고 어리석음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서리ㆍ우박ㆍ폭풍ㆍ비ㆍ불 따위 재앙에 망가질까 걱정하여 애써 수호하는 것 같구나.
이미 ‘나’는 번뇌롭힐 수 없어 말끔하다고 집착하면서 어찌 수고로이 허망하게 해탈을 구하는가. 뜻 있는 그 어느 누가 이렇듯 어리석게 까닭없이 스스로가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여기지 않으랴.
외도의 경전에 모두 말하기를 “‘나’의 생사에 집착하면 ‘나’의 열반을 여읜다” 했으니, 이미 ‘나’ 버리는 것을 찬탄하고 열반을 기뻐하라 했거늘 어찌 구태어 진실한 ‘내’가 있다고 고집하는가.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다시 이런 게송을 말했다.
‘내’가 진실로 있는 성품이라면
‘나’ 떠나기를 권하지 않았으리니
논하건대 만일 ‘내’가 진실로 있다면 인연으로 생긴 ‘나’라는 소견은 진실한 것이어서 버리라고 권하지 않았을 것이요, 진실한 ‘나’를 증득하기 위하여는 다시 간곡히 ‘나’라는 소견을 닦아서 더욱 견고히 하라고 했을 것인데 어째서 진실한 ‘나’라는 소견을 버리라 하고 허망하여 ‘나’없는 소견을 닦으라 했겠는가.
또 여러 외도들이 혹은 스승의 가르침에 따르고, 혹은 스스로가 생각하여 온갖 ‘나’라는 생각을 일으키고는 갖가지로 따지고 다투어 서로서로 헐뜯고 거역하거늘 어찌 이것을 집착하여 진실한 소견이라 하는가.
하나의 ‘나’ 위에 다투어 집착하고, 어지럽게 굴면서 자칫자칫 의심을 내거늘 어떻게 진실이라 집착하리오.
만일 ‘나’라는 소견이 없으면 진실한 소견에 계합하지 않는다면, 그대는 능히 열반을 증득한다고 말하지 말라. 진실한 소견에 계합하지 않고도 열반을 증득한 이가 참됨을 알고, 해탈에 나가간다는 것을 거짓말이리라.
이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偈頌)을 말했다.
결정코 진실을 안다 하면
해탈에 나아간다는 말도 거짓이리라
논하건대 ‘나’ 있음이 진실이라면 ‘나’와 ‘내 것’ 없다는 해탈, 방편의 소견은 거짓이오, ‘나’와 ‘내 것’이 있다 하여 열반에 거슬리고 생사에 순응하는 소견은 진실이리라.
만일 뒤바뀐 소견이 열반에 응하고, 뒤바뀜 없는 소견은 생사에 순응한다면 어째서 그대는 말하기를 “결정코 진실을 아는 이가 해탈에 나아간다” 하는가.
이것으로써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공’과 ‘나’ 없음의 소견은 열반을 증득하기 때문에 증득한 바가 헛되지 않고, ‘나’와 ‘내 것’이란 견은 열반을 얻을 때에 버리니, 의당 딴 소견과 같이 뒤바뀐 것이리라.
또 그대의 논(論)에 말하기를 “‘나’라는 소견의 뒤바뀜 없음은 들음[聞]ㆍ생각함[思]의 지위에 있는데 닦음[修]의 지위에 이르러 [나]라는 소견을 버린 뒤엔 다시 뒤바뀜을 이룬다. 그는 이 ‘나’라는 소견에 대략 두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이니, 하나는 있음이요, 하나는 없음이다. 있음은 생사에 순응하고, 없음은 열반에 순응한다. 그러므로 ‘내’가 있다는 소견은 성현의 지위에 들 때에 버린다 하거니와, 그대의 이런 미친 논리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된다. 자세히 살피어서 없는 것이라면 어찌 진실한 있음이 되겠는가. 마치 새끼[繩]가 어둠 속에 있는데 얼른 보기에는 뱀 같지만 자세히 살피건대 진실이 아니었음을 안다. 그대[外道]의 주장도 그리하여서 무명의 어둠 속에서 무상한 몸을 보고 항상한 ‘내’가 있다고 여기지만 거룩한 지혜를 얻어 이 몸을 자세히 관찰하면 ‘공’과 ‘나’ 없음의 이치를 통달하여 해탈을 증득한다. ‘나’있다는 소견은 처음은 진실한 듯 하나 나중에 허망하여, 말에 분명하고, 경계에 계합하나 믿음만 있고, 지혜는 없다.
이미 ‘나’라는 소견이 처음은 진실하고, 나중이 허망하다면 열반을 얻을 때에도 ‘나’ 없음을 허락해야 된다.
나중이 없다면 처음도 없어야 하리니,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해탈이 중간에 없었다면
이전에도 있지 않으리니
논하건대 여기에서 드러내려는 뜻은 해탈의 지위의 ‘내’가 형상이 없다면 해탈키 전에도 있지 않아야 되나니, 성품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몸 따위가 해탈했을 때에 ‘내’가 없었으므로 해탈치 않은 지위에도 ‘내’가 없어야 되리니, 형상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다.
모든 외도들은 지혜가 없이 졸고, 지혜의 눈을 가리웠으므로 모든 지어감이 상속되는 도법 중에서 미세하게 차별됨을 알지 못하고, 허망하게도 ‘내’가 있어 하나다거나 항상하다거나 하나니, 그토록 어리석은 잡된 소견으로써 진리를 증득했다 할 수 없다. 반드시 잡됨이 없는 청정한 지혜와 견해에 의해서야 바야흐로 진리를 증득할 수 있나니, 이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잡됨이 없을 때의 소견은
그것이 진실임을 알아야 한다
논하건대 불이 섞이지 않은 곳에 의례히 물이 있기 때문에 불이 섞였을 때의 따사로움은 물이 아님을 알 수 있나니, 몸 따위의 제 모습도 그런 줄 알라. 해탈을 얻었을 때에 공하여 ‘내’가 없으므로 ‘나’라는 소견이 섞였을 지위에도 ‘내’가 없다.
혹은 ‘나’의 본체도 그런 줄 알아야 하나니, 섞임이 없는 지위에도 형상이 없었으므로 ‘나’의 소견이 섞인 지위에도 형상은 없다. 그러므로 섞임이 없는 소견은 법의 진실한 성품이라 하거니와 섞임있는 소견은 그렇지 못하다.
또 다시 여러 외도들이 모두가 질문하기를 “만일 온갖 법이 공하고 ‘내’가 없다”면 이 마음, 감관 몸은 어째서 아주 없어지지 않는가. 무상한 모든 법칙이 공하고 ‘나’없는 것이라면 모두가 아주 없어짐이 마치 등불이나 소리같다 하는데 이것도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만일 무상이어서 모두 없어진다면
초록 따위는 어째서 안그런가
논하건대 모든 초록 따위가 ‘나’없고 무상한 것이라 하나 인연이 있으면 상속하여 끊이지 않나니, 마음ㆍ감관 따위도 그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세운 바 원인에 결정되지 못하다는 허물이 있다.
또 원인과 이유를 세워서 마음과 감관과 몸에 모두 없어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나, 이 말이 완전치 못하나니, 한 생각이 생겼다가 잠깐 사이에 사라져서 다시는 상속치 않는 것을 없어짐이라 하는가. 아니면 오랫동안 상속하여 끊이지 않다가 나중에야 다하는 것을 없어진다 하는가. 만일 처음의 것이라면 동법유(同法喩)가 모자라니, 등불 따위는 인연에 따라 언제나 일어나기 때문이요, 만일 둘째 것이라면 ‘나’도 그렇다고 허락해야 되리니, 남음 없는 열반엔 생사가 끊였기 때문이다.
앞의 원인(이유)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다시 이런 게송을 말했다.
이 이치가 만일 진실이라면
무명도 있는 것 아니어야 되리라
논하건대 무명의 성품은 ‘나’도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니, 의당 등불과 같이 자연히 없어지는 것이리라. 만일 그렇다면 무명에서 생긴 탐욕 따위 미혹의 장애도 저절로 끊어져야 되리라. 그렇다면 생사의 얽매임도 노력에 의함이 없어 저절로 풀리리라. 이 두 줄의 반 게송은 모두가 앞의 원인에 일정치 않은 실수가 있거늘 안팎이 다르게 여긴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 다시 모든 외도들이 말하기를 “빛 따위 모든 법은 비록 무상하나 ‘나’에 의지하였으므로 상속하여 끊이지 않는다 하는데, 이것도 옳지 못하니, 해탈에 어기기 때문이다.
만일 빛 따위 법이 ‘나’에 의해서 생겼다면 ‘내’가 이미 항상하여서 앞뒤가 다르지 않으니, 끝내 해탈을 증득하지 못해야 될 것이요, 만일 모든 법이 비록 ‘나’에 의해서 생겼으나 인연의 도움에 의한 까닭에 그런 실수가 없다고 한다면 모든 법은 오직 저 뭇 인연에 의해서만 생기거늘 ‘나’는 무엇하러 다시 뭇 인연을 내어서 생겨진 결과들과 같이 수순하면서 같이 존재하고, 같이 없어지는가. ‘나’는 이미 항상하여서 언제나 있거늘 결과는 그렇지 않다면 어찌 그에 의해서 생길 수 있으랴.
‘나’의 작용은 알기 어렵고, 인연의 힘은 모두가 아는 바인데 어째서 ‘나’에게는 짝이 되면서 뭇 인연은 믿지 않는가.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눈앞에 보이는 빛 따위 법칙은
인연 따라 생기고 머물고 사라지니
그러므로 그대가 집착하는 ‘나’는 있지만 작용은 없는줄 알라
논하건대 빛 따위 모든 법칙이 나고 머무르고 멸하는데 분명 인연에 따를지언정 ‘나’에 의하지 않는 것임을 본다. 그대가 집착하기를 “‘나’의 본체는 이미 인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니, 이는 작용이 없는 것이어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또 빛 따위 법의 나고, 머물고, 멸하는 형상은 종류와 때가 모두 동일치 않거늘 어찌 하나의 항상 머무는 ‘나’에 의지할 수 있으랴. 마치 태우고 짓는 따위 일이 의지하는 인연이 다르기 때문에 익어지는 공덕과 빛깔 따위에도 차별이 있나니, 이런 차별은 한 인연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끝없는 예부터 빛 따위 모든 법의 이름과 말로 훈습한 종류의 같지 않음과, 먼저 지은 모든 길의 업이 갖가지로 차별된 공능의 뒤바뀜과 만나는 인연에 따라 익히고 일으키어, 빛과 중생의 종류의 차별됨을 변화해 낸 것들이다.
인연이라 함은 이른바 정(精)과 피 따위는 태어나는 인연이요, 의식과 안정 따위는 사는 인연이요, 독약이나 횡액이나 몸의 뒤틀림 따위는 멸하는 인연인데 모두가 계교하는 ‘나’에는 이런 차별된 작용이 없거늘 외도들은 어리석어서 억지로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게송을 말했다.
인연으로 생긴 싹 따위 같이
인연으로 생긴 종자가 나니
그러므로 무상인 모든 법은
모두가 무상에서 일어났다
논하건대 밖의 종자 따위가 스스로의 인연과 공능의 차별에 의하여 생기고, 다시 밖의 인연의 돕는 힘에 의하여 자기 종류의 싹 따위 모든 결과를 내는 것 같이, 안의 몸과 마음 따위도 그런 줄 알 수 있나니, 모든 변천의 원칙이 상속하면서 같은 종류와 다른 종류가 만나는 인연에 따라 내는 결과가 차별된다.
이는 안의 몸과 마음 따위 법이 본체가 항상치 않으므로 밖의 싹 따위가 반드시 자기 종류인 무상의 원인에서 생김을 나타낸다. ‘나’는 몸과 마음에 대하여 능히 내는 작용이 없으므로 인연으로 생김이 아닌 것이 거북의 털 따위와 같다.
또 다시 모든 법이 비록 ‘내’가 없으나 아주 없음과 항상함 따위 두 가지 허물이 미칠 바 아니니, 그러므로 이 품의 마지막에 다시 이런 게송을 말했다.
법이 인연에서 생긴 까닭에
본체는 아주 없음이 아니요
법이 인연 따라 멸하기 때문에
본체는 항상함도 아니다
논하건대 모든 법이 차츰차츰하여 끝없는 예부터 같은 종류의 원인에 의하여 비슷한 무리의 결과를 나타내나니, 다음다음의 결과를 일으키어 전전(前前)의 원인을 이어서 중간에 끊임이 없다. 그러므로 아주 없음이 아니다.
만일 앞의 원인이 멸하고 다음 결과가 나지 않아서 중간에 끊임이 있다면 아주 없음이라 하겠지만 물리치는 힘이 생김으로써 앞의 원인의 힘이 없어져서 다음의 결과가 계속치 못하므로 항상치 않다.
만일 법이 응연(凝然:움직이지 않는 모양)하여 앞의 형상을 버리지 않고, 그 본체가 변함이 없다면 항상타 하리라. 또 앞의 원인이 멸하므로 항상치 않고, 다음의 결과가 계속해 나므로 아주 없음이 아니다.
또 원인이 나므로 항상치 않고, 능히 결과를 내므로 아주 없음이 아니다.
또 생각생각에 다르므로 항상치 않고 비슷하게 상속하므로 아주 없음이 아니다. 또 법은 있음이 아니므로 항상치 않고, 또 없는 것도 아니기에 아주 없음도 아니니, 있다면 항상함이요, 없다면 아주 없음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불자들이 두 변두리를 멀리 여의어 인연의 생기는 법칙에 깨달아 들고 중도의 묘리에 처하여 온갖 것이 있지도 없지도 않음을 바르게 관찰하나니 법도 오히려 성품이 공했거늘 ‘내’가 어찌 있을 수 있으랴.
살가야(薩迦耶)의 소견과 수면(隨眠:번뇌)과 그리고 이들에서 생긴 것이 이제 와서 영원히 멸하리라.
다시 모든 변천이 평등하여 성품이 공한 것으로 관찰하면 너와 내가 모두 없어지고 나와 남이란 생각이 멸하여 온갖 교화할 유정에 두루하게 변함이 없는 자비를 일으키어 묘한 법 비를 뿌리면서 오는 세상이 다하고, 허공이 끝나도록 유정들을 이롭게 하되 수승한 작용이 다함이 없으리라. 이런 용맹한 이는 ‘공’의 관법의 도움으로 뭇 고통이 무성하여도 모두 다치지 못하고 커다란 생사의 고통을 보아도 마치 공중의 집 같이 여긴다.
망상에 끄달린 이는 걱정과 고통이 많으니, 마치 사나운 불길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한량없는 어리석은 유정들을 태우므로 비원(悲願)의 마음을 얽히어 겁 없이 뛰어들어 목숨을 상하면서까지 구제한다.
이렇게 크게 슬기로운 이는 ‘공’을 관찰하기를 뒤바뀜없이 하여 ‘나’라는 생각을 제하고는 ‘나’와 ‘내 것’의 집착을 여읜다. 두 가지 애욕이 다했으므로 다시는 탐욕 따위 번뇌의 의지할 바를 좋아하지 않으며,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항상 생사 속에 있으면서 그 속에서 물들지 않나니, 이것이 큰 열반이다. 비록 티끌 번뇌 속의 끝없는 괴로움 바다에 있으나 항상 수승한 쾌락을 받아서 두 가지 열반을 뛰어난다. - 016_0591_a_05L復次,有作是言#若無我者,心等生已,無間卽滅。宿生念智憶昔某名,卽是今我,此不應有。所以者何?今昔異故。世閒不見憶昔他身,謂爲今我。是故定有常住句義。緣之生念,言彼卽我,此亦不然。我先已說因果雖殊,相續假一,緣此假一,言昔是今。又說頌曰:‘若有宿生念 便謂我爲常 旣見昔時痕身亦應常住。’論曰:若宿生念依相似相,見昔似今,謂今爲昔,便謂有我,是一是常,旣見今身依相似相,瘡痕似昔,謂昔爲今,身亦應許是常是一。此顯共知有差別物依相續假亦謂無異故不可以謂無異相,比知有我是一是常。又憶昔身苦樂等事,謂今是昔,而是無常,亦應比知雖謂今昔,我無有異,而非常住。又雖今昔其體有異,然由昔智了受所緣,有勝功能,熏在宅識,隨緣覺發,念力相應,似昔所緣境界相現,如是名爲憶宿生事。雖無有我,是一,是常,而有憶念宿生事智,世閒現見服仙藥等,服之經久,藥體雖無,然有所引勝功能,在後時成熟,除疾益壽。然無有我。此亦如是,若唯有念,誰爲念者?亦不可言念爲念者,以有二種俱無過故。設復有我,誰爲念者?亦不可言我爲念者,以所執我非智相故。若言我體雖非智相,與思合故,能有思念,是則此我與思合時,於自他相,應有取捨。若有取捨,便是無常。若無取捨,不異前故,與思合時,亦無思念。是則此我亦非念者。又說頌曰:‘若我與思合 轉成思念者 思亦應非思故我非常住。’論曰:若所執我本性非思與思合故#轉成思念,如頗胝迦,體非靑等,靑等合故,變成靑等,是則此思與非思我而共合故,應成非思。若思雖與非思我合,不捨本性,不成非思,我亦應爾。雖與思合,不捨本性,不成思念。頗胝迦寶靑等合時,擧體別生,故見異色,非卽本性變成餘相。以頗胝迦其體淸潤,餘色合故,擧體別生,形相同前,謂爲本質,實非本性變成餘色。又頗胝迦前後異體,相差別故,如靑、黃等,我亦應爾,云何是常?又應同此,非實我性。由此卽破彼論異說#謂有說言:頗胝迦寶其性淸淨,不障眼目,餘色、合時,各別處住,不捨本相,不取餘相,若有作意,或不作意,還見本相,及近彼色。復有說言:頗胝迦寶其性明徹。猶如明鏡,餘色合時,影現其內,見者目亂,謂成餘色,而實此寶不變如前。此皆非理,違比量故。爲眼所見,如電,如燈,云何前後體相無變?又所執我思生前後,其相有無不決定故,則應同思,念念生滅。又我、思合,轉成思者,與苦、樂合,應成苦樂。若不爾者,雖苦樂合,不捨前位,猶如虛空,雨火無變,應非受者。故說頌曰:‘我與樂等合 種種如樂等 我如樂等故非一亦非常。’論曰:樂等性相更互相違,故有種種,我與彼合,應如樂等,成種種相,故此我性,應如樂等,身身各別,非一非常,亦如樂等,非眞我性。是故離思別有我體,與思合故,同於思相,名爲念者,不應道理。卽念自性似所念境,相狀生時,雖無主宰,似有作用,假名念者,記別分明說名爲念。一法義分,無無二過復次,數論外道作如是言:‘思卽是我,其性常住,如是思、我離心、心法,別有體相,難可了知。所以者何?思、我體相非現量境,以其自相,非諸世閒所共知故。非比量境,以其思相唯在於我,不共餘故。’夫比量者,比知共相,以果等摠相,比因等摠,有,所立思、我由不共故,無同法喩。同法喩旣無,異法亦非有,無待對故。由是思、我理實爲無,設許有我,以思爲性,應當徵問,如是我性,爲由他力,得成思耶?爲由自力,得成思耶?若由他力,得成思者,應是無常,如眼識等。若由自力,得成思者,應不待緣,如虛空等。爲顯此義,又說頌曰:‘若謂我思常 緣助成邪執 如言火常住則不緣薪等。’論曰:如法已生,自相安住,終不更藉因及衆緣,不可生已,復更生故。我亦應爾,思體旣常,自相安住,不依他立,云何復待轉變,衆緣資助思我,令其轉變,受用種種所受用具?若不依他,而轉變者,則無緣助,有所受用。若可轉變,應是無常,如世閒火,其性無常。若以酥油,灌薪草等,投其火中,便增熾盛。若不爾者,火勢衰微。薪等若無,火則非有,旣緣薪等,火豈是常?我旣藉緣,寧容常住?若汝復言:‘我論中,說如是思、我,其體雖常,然藉根、塵和合,顯了,如甁、瓫等,由光明顯。所以者何?思、我不能自然觀察,要待轉變,因果相應,方得顯了。故雖藉緣,而我常住。’如是救義,其過彌增。所以者何?不見甁等爲緣所顯,而體是常。眞如、涅槃雖可顯了,然依世俗,非據勝義。非勝義中,有常、無常、了、不了等分別戲論。所執思我緣所顯故。應如甁等,其性非常。若汝復謂:隱時思、我,雖無思慮,而有功能。如是功能,不異思慮,旣無思慮,何有功能?又思功能必依思體,體旣非有,能何所依?又隱時我,以思爲性,思旣非有,我則是無,云何而言隱時思我,雖無思慮,而有功能?設言隱時我,非思者,汝今應說,我相如何。若不說相,而我成者,則應一切妄執皆成。如是推徵,前已具說。又汝所執,諸有功能與功能者,其性爲一,是則能者,非能所依,性是一故。又於此位,無能者故,不可說言能卽依能。自於自用,理相違故。亦不可說能無所依。勿有最勝,亦無過失。所以者何?若思功能無所依止,而自立者,轉變功能亦應自立,何須最勝?又汝所執思我功能,隨所受用,有無量種,旣許能多,如何體一?汝宗定執體能一故,世閒未有一法體上,不同一時,能生多果。不同時者,顯於一時,一法體上,能生多果。時若不同,其體必異。云何汝執一我前後有多功能,起多思慮?又此思、我云何一時,不起一切受果思慮?若言思慮必待轉變,方得起者,此亦不然。云何最勝具諸功能,而不頓起一切轉變?最勝功能無障㝵故。設許最勝於一時閒,頓起一切轉變作用,是卽最勝,體應斷滅,擧體皆變,失本性故。如最勝體,我亦應然。其性皆常,具諸能故。如是汝執隱時思我,具諸功能,而無思慮,有多過失,終不能免。復次。有餘方便,救此義言:我是思者,思爲我用,非用滅時,用者隨滅。現見眼等雖無能照色等作用,而有其體。是故隱時,雖無思用,而有思者,我體非無,此亦不然。隱時我相,應與思別,還同前過。豈不作用與作用者,體不異故,無別相耶?汝言正似癡象沐浴,意避輕咎,翻招重穢。思用我體,旣無別異,思用滅時,我體應滅。是則思我皆定無常,便害自宗,何名救義?又汝所言,現見眼等,雖無能照色等作用,而有其體,我亦爾者,此亦不然。故次頌曰:‘如至滅動物 作用彼無有。’論曰:如能照了色等作用,乃至滅來,恒隨了別自境界識,由此作用,卽是識體,作用若滅,識體則無,眼等諸根至相續斷,常無此用,自性異故。所以者何?眼等自性非能照等故。彼滅時此不隨滅。眼等所造淨色爲性,汝我離思,無別有體,不可用滅,而體獨存。豈不說我思者爲相?云何乃言離思無體?汝前雖說,然不應理。所以者何?思者思用旣不同滅,應有別體,我體非思,過如前說。用無別體,先難復來。又思、思者相待而立,俱有方成,闕一不可。思與思者,若一若異,定觸如前所說兩過。如是釋已,復有別釋。如他眼等,乃至滅來,常有作用,能生別物,非汝所執我思作用。許爲如此,別物所依照色等用,卽是眼等,各於自境,生識功能,眼等諸根隨所生識,種種自相差別顯現。雖離因識,無別有體,而離果識,別有自相。汝執有我,能生於思,不許離思,別有自相。是故不可引爲同喩。故說頌曰:‘故有我無思 其理不成就。’論曰:有別相者,不同體故,可得說言一滅一在,思用、思者旣無別相,思若滅時,思者亦滅。是故汝執有我,無思,所立道理,定不成就。復次,有執離思,別有實我,其體周遍,一分生思,謂我一分,先與智合,引起能生殊勝思行,後時一分,意合生思,故無如前所說過失。此不應理故,說頌曰:‘餘方起思界 別處見於思。’論曰:方處若異,因果不成。未見世閒種與芽等,各住遠處,因果得成。汝執能生殊勝思行,先於遠處,我與智合,習誦經書工巧等事,令其善巧,熏在我中,後於異方,若無障㝵,我與意合,生起現思。是則分明因果異處。豈不行思所合我體,不別異故,無此過耶?若爾,一切行等因果,悉與我合,處應皆同,便失汝宗我體周遍,一分智合,引起思行,一分意合,生起現思。若汝復謂:如鎔鐵鋌,其鋌一頭先與火合,餘頭雖復不與火合,由體一故,亦漸鎔銷。行思亦然,生處雖別,我體一故,因果成者,此亦不然。故次頌曰:‘如鐵鋌鎔銷 我體應變壞。’論曰:如鎔鐵鋌,其鋌一頭先與火合,當卽銷鎔,於後展轉,熱勢相及,餘離火處,皆復銷鎔。如是我體先於一分,與智和合,變生思果,於後展轉,勢力相通,異處意合,變生思果,是則我體應非常。住。如何妄立我是常耶?又汝執我唯依少分,能生於思,說名思者,此亦不然。故次頌曰:‘思如意量小 我似虛空大 唯應觀自相則不見於思。’論曰:汝執我體一分意合,能生於思,說名思者,餘分我體,不與意合,不生思故,不名思者。意有質㝵,細似極微,我性虛通,廣如空界,少分意合,能發於思,餘分無邊,皆無思慮,故應從多,觀是我相,不應就少,見爲思者。夫於自體。假立名言,或依多相,而表於體,或爲他染,以彰其相。如此二事,我上皆無,故我不應說名思者。若汝復言:思非我相,思是德,我是實,此實德業,三種自性不相雜亂。何爲不可?以汝不能離思。別顯我之自相,是爲不可。若不別顯我之自相,終不能立我有實體,自相畢竟不可說故。汝所立我,則爲無我。又汝所立,我非思者,便失我相。非思者故。如色等法,非我非思。又思爲先所造諸業,應不屬我,則成相違,與自他思,俱不合故。我無思慮,與彼所求因果事物,非意相遇,應如烏鵲厄多羅果。由如是等衆多過失,我便散壞,終不得成。復次,有餘茍避如是過網,不許我體少分起用,執能依德,遍所依我,此亦不然。德若遍我,根等和合,便爲無用,無根等處,有樂等故。若言不爾,由我一分與根等合,遍生樂等,如在一處,炷等行力,發起燈光,明遍多處。若爾,頌曰:‘我德若周遍 何爲他不受。’論曰:若我與德,體俱遍者,一人樂等應遍諸我。何爲餘我皆不受耶?寧許一分我,與意合,卽於是處,生苦樂等,我能領受,無此過失。若汝復言:‘我所有物,唯屬於我,我能領納一人樂等,雖遍諸我,然唯屬一,不繫餘人。’云何令他受我苦樂?世閒現見所有財物,唯主能受,非他所用。若處有別,是事可然。旣是同居,何妨共受?諸同處物若不屬己,雖無取捨,自在受用。見觸受用,誰復能遮?現見世閒非屬己物,若同一處,見觸無遮。今苦樂等無形質故,唯能見觸,不可取捨。是故汝言不成救義。若言:餘我於他苦樂,由有闇障。不能領受,如世閒物,雖復同居,眼無障者,能有所見。眼若有障,卽無所觀。我亦如是,於自苦樂,無闇障故,便能領受,於他苦樂,雖復同居,有闇障故。不能領受。若爾,闇障少分轉耶?彼言不也。周遍轉故。此障彼我處不同耶?復言不也。處無別故。若爾,頌曰:‘能障旣言通 不應唯障一。’論曰:一闇障處,有無量我,處旣無別,一我被障,餘則不然,誰能信解#闇相無別,我相是同,能障、所障,處復無別,所受樂等,其義亦然。是則有障及以無障受與不受一切應同,不見世閒有諸外闇,如汝所計,內闇差別。前雖執德不遍所依,而我體遍,與他德合,應亦能受,過同此言。我豈不說樂等與意,其處要同,方能領受?故無受他樂等過失。汝等外道隨自意言,非隨意言,能契正理。非可照物,處燈明中,而此燈明,不能照了,我亦應爾,云何不受?若汝復言:雖一切我體皆周遍,而自樂等不共於他。何以故?樂等諸德,由行勢力,而得生故。此行勢力,依法、非法,而能受果故,此義成。如是方便,於理無益,過失同前,不成救義。如是論者,依理推徵,邪觀爲先,立我常遍,能作能受,義不得成。復次,有說:薩埵、剌闍、答摩三德,非思,而爲作者,我思非作,而能領受。爲破此義故,次頌曰:‘若德竝非思 何能造一切 彼應與狂亂俱癡無所成。’論曰:所執三德,體若非思,何能爲我,造化萬物?若本無思,而有所造,彼與狂亂,何事不同?設復如狂,斯有何失?若如狂者,爲我造立所受用事,應不得成。未見世閒癡狂僕匠,能爲主等,辦如意物。又彼諸德,於所作事,若無善巧,應似愚人,於雕畫等,不能成辦。於所作事,若有善巧,云何不,能卽自受用?爲顯此義故,復頌曰:‘若德能善解 造舍等諸物 而不知受用非理寧過此。’論曰:若言諸德如工巧者,於難作事,能善施爲,內外所須無不成辦,而於受用易見事中,不善了達,一何非理?除守自愚,誰朋此見?如是三德,於受用中,亦有善巧,爲彼體故。如於善巧諸所作事,此顯作受者,俱依三德成故,不須別立我思爲受者。若言勝性雖體非思,然隨緣勢,造化萬物,爲令思我,自在受用,如草木等,雖無所思,而依業力,生花果等種種不同,爲人受用。若爾,勝性所作無思,應同華果,受已不絕。諸有思惟而生果者,受用足已,果便休廢。勝性非思,如外草木,又常不壞。我受用已,所作便息,其理不然。若言三德其性黠慧,凡所施爲,無不善巧,我爲神主,能善思惟,令彼造作,自在領受,謂彼三德,了知神我,意有所須,方起覺慧,隨起作用,造化萬物,於是思我,自在受用。汝此言說,但述自宗#於諍義中,都無所用。又汝所立我有思惟,德有覺慧,如是二種俱能領納,了別自境,性相差別難可了知。是故不應虛妄分別#覺慧屬德,思惟在我。又德應失覺慧自相,無思惟故。猶如色等。汝言:三德了知神我,意有所須,方起覺慧,起作用等。此則不然。自性位中,無覺慧用,誰能知我意有所須?若於爾時,覺慧已起,何待知我意欲方起?若於爾時,覺慧未起,云何三德初起於大?若無覺慧,大體自起,一切萬物亦應自起。故此覺慧,於變異果,自性因中,都無所用。有餘復立比量,救言覺慧非思,是無常故。諸無常者,皆非思慮。猶如色等。如是自言,違害自意,思惟分別得覺慧名,若不思惟,便非覺慧。云何而說覺慧非思?又先已說覺慧、思惟,俱了自境,性相無別,云何覺慧無有思惟?是故汝言有自違過。又無常因有不成過,就生滅義,自宗不許,隱顯義釋,他宗不成。若言:因義不應分別,但就摠說。此亦不然。若別俱成,可就摠說,如其別見、摠顯爲因,別旣不成,摠依何立?又依作用,說有隱顯,依此立爲無常因義,汝立我思亦有作用。故有因義不定過失。又汝欲立覺慧體外,別有我思,或我思外別有覺慧,皆不得成。如是種類非共所許,由此汝立,無得成義。是故所說我思能受,三德能作,其義不成。復次,有執我體常遍無㝵,能造萬物,名爲作者,此亦不然。義相違故。若汝執我有動作用,名爲作者,卽有無常,及有質㝵不遍過失。現見無常不遍有㝵,方有動作,常遍無㝵,有動作用,曾未見故。若所執我無有動作,云何得名能造作者?是故必應許有動作。若爾,應許我體無常,有㝵不遍。爲顯此義故,次頌曰:‘有動作無常 虛通無動作。’論曰:風界勢力能生動作。謂由風界諸行流轉。於異處生,相續不絕。依世俗理,說名動作:依此動作,說爲作者,此必不越有㝵無常,有㝵無常,卽非周遍。汝宗亦許極微動作#有㝵不遍,前已遮遣執爲常者,顯是無常。是故比量無不定過。若言我宗不許內我體有動作,因不成者,此亦不然。必應許故。若無動作,何名作者?汝雖不許業句動作,而有作者,言依動作,如說火焰來去等言。又必應許我有作用。若全不許我有作用,我則爲無,同兔角等。爲顯此義故,次頌曰:‘無用同無性。’論曰:若汝所執我有作用,可爲作者,名言所依,若無作用,則同非有。依何說我,以爲作者?旣無作用,應不名有。若謂:有言不依作用,但依同性,及彼相應。此亦不然。世閒智者依有用體,說有名言,若無有用,則無有體,無用無體,名依誰立,云何而言有作者我?若汝不了有言所依,但應受持,默不語法,何須强說?我有作者,有言依止有用之體,世智共許,汝必應隨。若汝定執我無作用,應如共許畢竟無法,由此比量,我卽爲無。何不愛樂空、無我理?爲顯此義故,次頌曰:‘何不欣無我。’論曰:如過去法,旣無能生諸法作用,卽無自體。由此同法,我亦應然。無世共許焰行等用,亦無自許往來等用,應無自體。如是我性都無所有,非唯順理,亦稱汝心,何不欣求空、無我理?計不信者,正爲無明所起,邪執力强故耳。若汝謂:我雖無別用,而能爲境,生我見心故,名作者。此亦有失。前已廣破,今復重來。又我不能爲我見境,無作用故,猶如兔角。此我見等亦不緣我,有所緣故。如緣色心,若實有我,能生我見,此我云何如善幻術,隨其所願,現種種相,誑惑世閒,令起種種我見差別?爲顯此義故,次頌曰:‘或觀我周遍 或見量同身 或執如極微。’論曰:一類外道執:我周遍,於一切處,受苦樂故,我無形質,亦無動作,不可隨身往來生死故,知內我遍於一切。一類外道作如是言:‘我若周遍,如虛空者,不應隨身受諸苦樂。’應如空界無所往來,其性湛然,非作受者。是故我性應如色等,隨所依身,形量不定。雖無形㝵,而有所依轉變,隨身受諸苦樂,雖依形質,有卷,有舒,而我體性無生無滅,如油渧水,隨水廣狹,雖有守玄‘卷舒而無增減一類,外道復作是言,若我。’體性隨形量者卽應,如身有分,有變又汝。執我隨所依身似水,依堤如油,逐水是則。此我如彼水油,旣變旣多非常,非一引此。爲喩而言我體爲常,爲一與理,相違是故,我體住於。身內形量,極細如一,極微不可,分析體常。無變動慮。動身能作,能受此亦,不然以違,理故衆微,聚積成極大身我住,其中形量,甚小云何?小我能轉:大身擧體,同時皆見,動作若汝,意謂我量,雖小而於,身中往來,擊發漸次。周帀,如旋火輪以速,疾故謂言,俱動若爾,我體巡歷,身中應有,生滅及成,衆分但是。遷流:至餘處者,定歸,生滅必有。衆分旣言?我轉所至,非恒如彼,燈光豈有,常一常必。非動動卽非常我動,而常深違正理又所?執我有,住有行何得,說爲是常,是一若行。時我不、捨住性應如,住位則無,所行若行?時我捨其住性別體,卽生常一,何在如是等類我執無邊以理推徵皆不成立爲顯此義故次頌曰‘智者達非有。’論曰,若有實我,性相皆同,等以爲緣,生我見者,如是我見不應得有種種差別,更互相違。以此知無常住實我。但由久習虛妄我見,薰在識中,功能成熟。如身逐業,緣變不同,我見隨因,緣別亦爾,唯有心相,變現衆多,於中都無一我實體。故諸賢聖,積無倒因,方便勤求,證我非有。復次,諸有說我能證解脫,但順愚心,終違正理。所以者何?故次頌曰:‘常法非可惱 何捨惱解脫 是故計我常。’證解脫非理。’論曰:若計我常,無有變易,雖遭衆苦霜、雹等災,如太虛空,都無所損。不應智者觀諸世閒,衆苦所逼,發心厭離,方便正勤,以證解脫。此顯我常,不可惱。故雖觸衆苦,應不覺知。若不覺知,則無厭離。若無厭離,則不正勤。若不正勤,則無解脫。哀哉!外道狂亂無知,譬如有人懼諸霜雹、疾風、瀑雨、水火等災,損害虛空,勤加守護。旣執有我,無惱湛然,詎勞自苦,妄求解脫?誰有心者,顧此癡狂,無緣自苦,不深悲愍?外道經中,咸作是說:‘著我生死,離我涅槃。’旣讚捨我,令欣解脫,如何固執有實我耶?爲顯此義故。復頌曰:‘我若實有性 不應讚離我。’論曰:我若實有,緣生我見,卽是眞實。不應勸捨,爲證實我,應更慇懃勸修我見,令其堅固。云何勸捨眞實我見,令修虛妄無我見耶?又諸外道或隨師教,或自尋思,起諸我見,種種諍論,互相違反,云何執此爲實見耶?於一我上,競執紛紜,乍可生疑,如何執實?若無我見,不稱實我,汝不應說能證涅槃。不稱實見,證涅槃者,知眞趣脫,此說應虛。爲顯斯義故,次頌曰:‘定知眞實者 趣解脫應虛。’論曰:有我若實,無我、我所解脫方便見,應成虛,有我、我所,違逆涅槃,隨順生死見,應是實。若顚倒見,隨順涅槃,無顚倒見,隨順生死,云何汝論作如是言定知實者,能趣解脫?以此定知空、無我見,得涅槃故,所證非虛,我、我所見涅槃時捨,應如餘見,是其顚倒。又汝論說我見無倒,在聞思位,至修位中,我見旣捨,復成顚倒。以其我相,略有二種:一有,二無。有順生死,無順涅槃,故有我見,入聖時捨,汝此狂論,爲世所嗤。審察卽無,如何實有?如繩在闇,乍見言蛇,及至諦觀,乃知非實。外道亦爾,無明闇中,見無常身,謂有常我。若得聖智,諦觀此身,達空、無我,而證解脫。知有我見,初實後虛,礭言稱境,有信無智。旣許我見初實後虛,得涅槃時,應許無我,後若無者,前亦應無。爲顯此義故,次頌曰:‘解脫中若無 前亦應非有。’論曰:此中意顯如解脫位,我無有相,未解脫時,亦應非有,性無別故。或復身等於解脫時,旣無有我。未解脫位,亦應無我,相無別故。諸外道等無智睡眠,眯覆慧目,不了諸行,相續道中,微細差別,妄執有我,是一是常,不可以其無智雜見,謂證眞理。要依無雜淸淨智見,方證眞理。爲顯此義故,次頌曰:‘無雜時所見 彼眞性應知。’論曰:以不雜火,自有水相,知雜火時煖非水體,身等自相應知亦爾,得解脫時,空、無我故,雜我見位,亦無有我。或復我體應知亦然。無雜位中,旣無有相,雜我見位,有相亦無。是故應知無雜所見,稱法實性,雜見不然。復次,諸外道等咸設難言,若一切法空、無我者,是心、根、身云何不斷?無常諸行空、無我者,悉皆斷滅,如燈火聲,此亦不然。故次頌曰:‘若無常皆斷 草等何不然。’論曰:雖諸草等無我,無常,然有因緣,相續不斷,心、根、身等,應知亦然。故所立因,有不定過。又立因喩,證心、根、身,皆有斷滅,此言未了,爲一念生,無閒卽滅,更不相續,名爲斷耶?爲經多時,相續不絕,後要當盡,名爲斷耶?若言初者,闕於同法,燈等隨因多時起故。若言第二,我亦許然,無餘涅槃生死斷故,爲破前因,復說頌曰:‘此理設爲眞 無明亦非有。’論曰:無明自性非我非常,應亦如燈,自然斷滅。若如是者,無明所生貪等惑障,應自然斷,若爾,卽應生死繫縛,不由功用,自然解脫。此二半頌俱顯前因,有不定失,內外爲異。復次,諸外道等有作是說:‘色等諸法雖是無常,然依我故,相續無斷。’此亦不然。違解脫故。若色等法依我生者,我旣是常,前後無異,卽應畢竟不證解脫。若言諸法雖依我生,然由緣助故無此失。若爾,諸法唯應由彼衆緣而生。我復何用?能生衆緣與所生果,更相隨順,同有同無。我旣是常,一切時有果,則不爾。豈藉彼生?我用難知,緣力共了,如何黨我不信衆緣?爲顯此義故,次頌曰:‘現見色等行 從緣生住滅 故知汝執我雖有而無用。’論曰:色等諸行生、住、滅時,現見從緣,不依於我。汝執我體,旣非緣生,卽無作用,如前已說。又色等法生、住、滅相種類及時,皆不同故,何得依一常住?我緣如燒煮等,依緣別故,熟德色類亦有差別。如是差別不依一緣。謂無始來,色等諸法,名言熏習種類不同,及先所造諸有趣業種種差別功能轉變#隨所遇緣,成熟發起,變生色等生等差別。所言緣者,謂精血等,是其生緣,衣食定等是其住緣,毒藥、災撗、四大亂等,是其滅緣。諸所計我無此別用,外道愚癡,强立爲有。爲顯此義,復說頌曰:‘如緣成芽等 緣成種等生 故無常諸法皆無常所起。’論曰:如外種等,依自因緣,功能差別而得生起。復待餘緣,助發功力,變生自類芽等諸果。內身心等應知亦然。諸行相續同類、異類,隨所遇緣,生果差別,此則顯示內身心法,體無常故,如外芽等,必從自類無常因生。我於身心,無能生用。非緣生故,如龜毛等。復次,爲顯諸法雖無有我,而非斷常二過所及。故於品後,復說頌曰:‘以法從緣生 故體而無斷 以法從緣滅故體亦非常。’論曰:諸法展轉,從無始來,依同類因,生等流果,起後後果,續前前因,於中無閒,所以不斷。若前因滅,後果不生,於中有閒,可名爲斷。由對治生前因力滅,後果不續,所以非常。若法凝然,不捨前相,其體無變,可名爲常。又前因滅,所以非常,後果續生,所以非斷。又因生故,所以非常,能生果故,所以非斷。又念念別,所以非常,相似相續,所以非斷。又法非有,所以非常,亦復非無,所以非斷,有卽爲常,無便斷故。如是佛子遠離二邊,悟入緣生處中,妙理正觀一切非有非無。法尚性空,我豈爲有。薩迦耶見及以隨眠幷此所生,於斯永滅。復觀諸行平等性空,彼此俱亡,自他想滅,遍於一切所化有情,起無緣慈,澍妙法雨,窮未來際,極太虛空,利樂有情,勝用無盡。此勇猛者空觀所持,衆苦熾然,皆不能觸,見大生死,如空宅中。妄想所牽#衆多憂苦,譬如猛火,騰焰震烈,焚燒無量無智有情,悲願纏心,無所怯憚,投身沒命,而拔濟之。此大慧者觀空無倒,我想旣除,離我所執,二愛盡故,不復樂觀貪等煩惱所依止事,爲饒益他,常處生死,於中不染,卽大涅槃。雖處塵勞無邊苦海,恒受勝樂,過二涅槃。大乘廣百論釋論卷第三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