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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6_0658_c_01L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 제10권
- 016_0658_c_01L大乘廣百論釋論卷第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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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보살 본논 지음
호법보살 주석
현장 한역 - 016_0658_c_02L聖天菩薩本 護法菩薩釋三藏法師 玄奘奉 詔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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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교계제자품(敎誡弟子品) - 016_0658_c_04L教誡弟子品第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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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정당한 논리가 이미 성립되었고, 삿된 주장이 이미 꺾기었으나 비밀한 진리에는 아직도 미세한 티가 있으므로 다시 청정한 이론과 교법으로 참된 종지(宗旨)를 거듭 드러내서 저러한 의혹들을 물리치리라. 그러므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조그마한 인연 때문에
‘공’과 ‘공’ 아니리 여기니
앞의 여러 품(品)의 교리에 따라
거듭 부정해 무찌르리라
논하건대 비록 법의 본 성품이 모두 공하나 처음 배우는 무리가 바로 보지 못하므로 허망한 존재를 추구하여 깊은 ‘공’ 깨닫기를 겁내거나 혹은 다른 인연 때문에 분명히 결단치 못하나니, 바른 교리를 거듭 드러내어 그들로 하여금 의심을 제하고 뒤바뀐 집착을 버리게 하리라.
이미 온갖 법의 본 성품이 모두 공하거니와 이 ‘공’을 깨닫지 못하였을 때엔 무엇으로써 성품을 삼는가 한다면 모든 법은 ‘내’가 없다 하리라.
그것은 다시 무슨 뜻인가 한다면 이른바 제 성품이 없기 때문이라 하리라. 바르게 보여주기 바란다. 어찌 빗대고 하는 말을 가자하리오 한다면 바로 보일 수가 없나니, 본체가 없기 때문이다. 다암 거짓으로 말했을 뿐이다.
모든 법은 ‘내’가 없으며, 취할 만한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공’이라 하나니, 마치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공’이란 모든 법이 ‘나’ 없고, 성품 없고, 잡을 수 없고, 취할 수 없음을 이름함이요, 으뜸가는 진리에는 도무지 조금의 ‘나’라거나 성품이라 할 법도 공하다 할 수 없다” 하신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공’이란 명칭은 말할 수 없으리라 한다면 사실 말할 수 없나니, 다만 거짓으로 세웠을 뿐이다. 마치 허공이라 할 때에 비록 제 성품이 없고, 실제로 말할 수 없으나 거짓으로 이름을 세운 것 같다.
‘공’은 이미 말을 여의었다 하거니와 있음은 의당 말할 수 있으리라 한다면, 역시 말할 수 없나니, 실제로 본체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은 도무지 없다고 말하는 경우와 같다. 성품 없는 이치 안에는 둘도 없고 말도 없다.
만일 그렇다면 말하는 이와 말한 바가 모두 공하니 이제 아무 말도 없어야 하리라. 그러나 이미 말한 바가 있으니, 모두가 공하지 않으리라 한다면 이런 의심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말하는 이와 말한 바가 있으면
‘공’의 이치는 없는 것이리니
논하건대 말하는 이라 함은 말하는 사람을 이름이니, 말과 말해진 것이 모두 말한 바이다. 이 세 가지가 유위와 무위를 통틀어 포섭하나니, 이른바 눈 따위 감관과 빛 따위 경계이다. 이들이 만일 실제로 있다면 어느 법이 공하겠는가. 이런 의혹을 없애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모든 법이 인연으로 되었기에
세 가지 일은 있지 않다
논하건대 말하는 이와 말과 이치와의 세 가지는 성품이 공하니, 뭇 인연에 의하여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종파에서도 모든 법의 이름과 말은 모두가 스스로의 마음인데 세속을 따라 벌려 세운다고 허락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이와 말과 말한 바가 모두 으뜸가는 진리에는 없고, 세속에만 있다. 그렇거늘 어찌 이 세 가지를 공하지 않다 하리오.
어찌하여야 이 세 가지가 있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알리오 한다면 이른바 다른 이에 의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요술 속에서 하는 짓과 같다. 다른 이에 의해서 성립되지 않았다면 모두가 토끼의 뿔과 같으리라. 그러므로 세 가지 일의 제 성품은 모두가 공하거늘 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말이 있을 뿐이다.
또 그대는 어찌하여 진공(眞空)을 의심하고 힐난하는가.(이에 대답하기를) 나는 그래도 옛날에 주장하던 있음의 소견을 성취시키고 싶다 한다면 그런 소견을 버려야 한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남의 종파를 파하는 것이 능히 자기의 소견을 성취시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이가 주장하기를 “걸림없기 때문에 항상하다” 함을 파하는 것이 스스로의 무상하다는 주장을 능히 성취시키는 것은 아니다.
설사 그러한 이치가 있다 하여도 그대의 주장은 역시 성립되지 못하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에 대답하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공’의 허물 만을 말하여도
공하지 않음의 이치가 이뤄지면
공하지 않음의 허물을 밝혔으니
‘공’의 이치가 먼저 성립됐으리
논하건대 만일 ‘공’만을 파하였는데 공하지 않음이 성립된다면 공하지 않음이 이미 파해졌기 때문에 ‘공’의 이치가 성립되리라.
앞의 여러 품에서 온갖 공하지 않음의 이치를 세우는 데 따른 허물을 이미 설명했다. 만일 그대가 공하지 않음의 아치를 성립시키고자 한다면 먼저 방편으로서 앞의 허물들을 제거해야 한다. 앞의 허물을 제하지 않고 다만 ‘공’만을 설명한다면 그대의 공하지 않음의 이치는 끝내 성립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실수 있고 덕망 없음을 드러내는 것이 자기의 실수 없고 공덕 있음을 성취시키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두 가지 공능을 갖추어야 바야흐로 자기의 소견을 성립하나니, 이른바 세움과 파함이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남의 종지를 부수려는 이는
먼저 자기의 정의를 세우라
어째서 남의 잘못 만을 즐기어 말하면서
자기의 종지는 세우지 않는가
논하건대 반드시 세움과 파함을 갖추어야 스스로의 소견이 바야흐로 성립되나니, 세움과 파함, 두 가지 공능은 소견이 의지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오직 남의 허물만을 드러내면서 자기의 종지를 드러내지 않고서도 자기의 정의가 성립된다면 끝내 그럴 이치가 있을 수 없다.
무슨 까닭에 그대들은 오직 ‘공’을 파하는 일만 좋아하며, 자기의 주장인 있음의 이치를 성취시키려는 생각을 않는가. 그러므로 세움과 파함, 두 가지를 균등히 하여야 바야흐로 자기 종지의 있음의 이치가 성립되리라. 그대가 있음을 세우고자 하나 끝내 가능치 못하나니, 그러므로 모든 법이 공하다는 그 이치는 결정적인 것이다.
공하다는 주장에도 그 허물은 이와 동일하지 않겠는가. 자기의 종지는 드러내지 않고 남의 허물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한다면 이 질문은 이치에 맞지 않나니, 공하여 ‘나’없음의 주장은 앞의 여러 품에서 이미 널리 밝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하여 ‘나’ 없음의 주장은 ‘나’있음을 물리치고서 성취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대의 종지를 파하는 동시에 우리의 종지는 이미 성립되었다.
만일 그렇다면 공하다는 주장은 다만 빈 말이 있을 뿐이니, 공하여 ‘나’ 없음이란 명칭은 진실한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한다면 사실 그렇다. 공하여 ‘나’ 없다는 명칭은 거짓이요, 진실이 아니다.
다른 이의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임시로 자기의 종지를 세우거니와 다른 이의 집착이 이미 제하여지면 자기의 종지도 따라서 없어진다.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게송을 말했다.
하나 따위의 집착을 부수기 위해
거짓으로 무찌름을 세워 종을 삼나니
그리하여 세 집착이 없어진 뒤엔
자기의 종지도 따라서 서지 않네
논하건대 하나다 다르다. 또는 (하나와 다름이) 아니다 함은 세 집착이라 하는데 모두가 하나와 다름과 같기 때문에 따로 말하지 않는다. 하나 따위 세 종지를 바로 관찰하면 모두가 성품 없음으로 돌아가서 조그만큼도 존재할 것이 없다.
그의 성품은 본래부터 공하여서 지금 파하는 것을 말미암지 않나니,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가섭이여, 잘 알아라. 보는 바는 본래 공한 것이지 지금에 파하는 것을 말미암지 않는다” 하였다. ‘공’을 닦는 모든 사람은 본 성품의 공함을 증득하나니, 그러므로 온갖 파하는 말은 모두가 거짓으로 세운 것이다. 세움도 역시 그러하여서, 방편으로 시설한 바이요, 진실이 아니다.
모든 법이 공하다는 종지는 무엇에 의하여 성립되었는가 한다면 그대의 집착에 의하기 때문에 내가 종지를 세우거니와 집착하는 바가 이미 없다면 종지도 세워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대는 있음이라 주장하기 때문에 종지는 없음이 되지 못한다.
자기의 종지를 존속시키기 위하여는 의당 상대방의 주장인 있음을 허락해야 되리라 한다면 그대의 집착을 없애기 위하여 나의 종지를 세웠는데 그대의 집착이 없어진다면 나의 종지는 더욱더욱 성립된다.
비록 그렇다 하여도 ‘공’을 세워서 종지를 삼지 못하나니, 현전에 보건대 세간의 병 따위가 있기 때문에 설사 공함ㆍ‘나’없음 따위 비량(比量)이 여러 갈래로 벌어지나 강한 위력이 있는 현량(現量)에게 굴복된다 한다면 그렇지 않나니, 병 따위는 현량으로 알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 까닭에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병이 눈앞에 보이는 것이라면
‘공’의 원인은 공능이 없나니
다른 종의 눈앞에 보이는 원인을
이 종에서는 허락지 않는 바이다
논하건대 내가 만일 병은 현량(現量)으로 얻는 바라고 허락한다면 ‘공’의 원인인 비량은 공능이 없다 하리라. 그러나 나는 병이 현량으로 얻는 바라 하지 않으니, ‘공’의 원인인 비량이 어찌 공능이 없으랴.
병 따위 모든 티끌은 모두가 눈앞에 보는 것이 아니니, 파근경품(破根境品) 따위 여러 품에서 이미 말했다.
다른 종파에서 병은 눈앞에 본다 하지만 이에 대해 벌려 세워서 원인 있다는 증거를 삼으려 해서는 안 된다. 소견이 만일 같으면 이끌어서 증거를 삼을 수 있거니와 소견이 이미 다르거니 누가 긍정하여 따르랴. 그러므로 ‘공’의 원인은 현량에 어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모든 법의 성품과 형상은 모두가 공하다고 세울 수 있다.
병 따위 모든 티끌을 세간은 눈앞에 보는 바인데 만일 비량으로써 모두가 공하다는 주장을 세운다면 이는 세간에는 공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공’은 뒤집어 상대할 것 없기 때문에 아무 것도 성립될 것이 없으리라 한다면, 이런 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만일 공하지 않는 이치가 없다면
‘공’의 이치가 어찌 이뤄지랴
논하건대 ‘공’의 이치를 세우는 것은 공하지 않음을 뒤집어 상대하는 것인데 공하지 않음이 없다면 ‘공’도 있지 않다. 그렇거늘 어찌 모든 법이 공하다는 주장을 세우랴 한다면 이런 의심을 풀기 위하여 다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그대가 ‘공’을 세우지 않으니
공하지 않음도 세우지 않아야 한다
논하건대 공하지 않음을 세우는 뜻은 ‘공’을 뒤집어 상대함인데 이미 ‘공’을 믿지 않으니, 공하지 않음이 어찌 성립되랴. (그렇거늘) 어찌 모든 법이 공하지 않다고 세우랴. 그대는 ‘공’을 믿지 않으면서 있음을 세우려 하는데 나는 있음에 집착되지 않는데 어찌 ‘공’을 세우기를 폐하랴.
만일 말하기를 “공하지 않음도 역시 상대가 있나니, 이른바 서로서로 없음이 존재하거나 혹은 결정코 없는 것이다” 한다면 나의 ‘공’도 그러하여서 세속의 있음에 상대한다. 그들의 허망한 있음을 없애기 위하여 참공[眞空]을 세운다.
또 세우려는 ‘공’은 오로지 집착을 없애기 위한 것이요, 반드시 있음을 상대하여 ‘공’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마치 항상함을 없애기 위해 무상의 교법을 말하는데 항상함이 있는 것은 아니니, 무상함을 세우는 예와 가다.
또 이에 대하여 그대들은 의심하거나 힐난하지 말지니 뒤집어서 상대함은 있음에 존재-해당-할지언정 ‘공’에 존재-해당-하지 않는다. 있음의 현실은 없음이 아니어서 뒤집음이 있고 대함이 있거니와 ‘공’의 이치는 있음이 아니거니 무엇을 대하고 무엇을 뒤집으랴.
만일 말하기를 “그렇지 않나니, ‘공’은 종이기 때문이다. 마치 빛 따위의 무상을 세워서 종을 삼는 것 같다. 이 무상의 종이 이미 결정코 있는 것이라면 이 ‘공’의 종도 그러하여서 반드시 없지 않으리라”한다면 그 말은 참되지 못하니 원인이 일정치 않기 때문이다.
세간에서 현재를 보건대 없음도 종이 된다는 말이 이치에 맞을 수 있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없음의 종이 있다고 한다면
있음의 종도 성립되지만
없음의 종이 있지 않다면
있음의 종도 이뤄지지 않으리
논하건대 없음의 종이 있다면 있음의 종과 상대하여 성립되거니와 없음의 종이 없다면 있음의 종이 무엇을 상대하랴. 만일 말하기를 “상대가 없어도 있음의 종이 성립된다”고 하면 이는 곧 앞에서 ‘공’이 상대가 있으리라고 책망한 것을 스스로 어긴다.
만일 말하기를 “온갖 법이 공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나’ 없고 참된 ‘공’이어서 모두가 똑같은 한 맛이거늘 어찌하여 현재에 보기에 모든 법이 같지 않는가”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세속으로 있고, 으뜸가는 진리에는 없기 때문에 이치가 어기지 않는다. 이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모든 법이 모두가 공하다면
어떻게 불을 뜨거운 것이라 하리
이는 앞에서 이미 부정한 것 같이
불이나 뜨거움은 세속이요 참이 아니다
논하건대 만일 온갖 법의 본 성품이 모두 공하다면 어찌 세간에는 불 따위의 다름이 있는가 한다면 세속의 일은 있으니 모든 법이 같지 않고, 으뜸가는 진리는 공하니 볼 따위의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그대의 트집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불 따위는 앞에서 감관과 경계 따위를 파할 때에 이미 구족히 관찰하여 세속이요, 참이 아님을 알았거늘 어째서 여기서 다시 트집을 하는가.
만일 법이 있음이 아니라면 이란 무엇을 막을 것인가. ‘공’으로써 막을 바가 있기 때문에 법은 있는 것이라 한다면 네 가지 논리로 서로 막을 때에 모두가 참이어야 하리니, 문득 스스로의 뜻에 어긴다.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법이 진실로 있다고 하여
그들 막기 위해 ‘공’이라 하면
네 가지 논리가 모두 참되리니
어떤 허물을 보고서 버리겠는가
논하건대 막을 바를 막기 때문에 막는 이[能遮]를 세우거니와 막는 바가 없다면 막는 이가 어찌 있으랴. 마치 비철[雨期]이 아니라 함으로써 겨울이라 하고, 겨울일 때에 반드시 비철이 아니라 하는 것 같이 ‘공’은 있음을 막기 때문에 있음은 결정코 없지 않다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나니, 원인이 결정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 따위 네 가지 논리는 서로서로 막으므로 모두가 참이리니, 막을 바이기 때문이다. 참이라면 허물이 없을 것인데 그대는 어떤 잘못을 보았기에 삿을 버리고 하나를 집착하는가. 그러므로 실제로 막을 바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만일 온갖 막은 바가 모두 실제로 있다면 스스로의 말에 허물이 없고, 그대의 허물이 참되리라. 그대는 ‘공’을 없다고 무시하는데 이 ‘공’이 진실이랄.
만일 말하기를 “온갖 법의 성품과 형상이 도무지 없다면 세간은 모두 아주 없게 되리라” 한다면 있음도 집착하지 말아야 되거늘 하물며 없음을 집착하랴. 있음을 집착하거나 없음을 집착하거나에 모두 허물을 이루나니,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모든 법이 아주 없다면
생사는 있지 않겠지만
부처님들이 언제 어디서
법이 결정코 없다고 집착하라 하셨나
논하건대 만일 모든 법이 전혀 없다면 생사와 인과가 서로서로 상속하고 윤회함이 없으리라. 결정코 없다고 집착할 것이 아니거늘 어찌 힐난을 하는가.
나는 세속의 인과가 없지 않다고 말했거니와 부처님은 지혜와 소견은 걸림이 없으신데 일찍이 결정코 있다거나 결정코 없다 함을 허락지 않으셨다.
마치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되 ‘모든 법의 성품과 형상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있음은 한 쪽으로 치우침이요, 없음은 둘째의 것이다. 이른바 항상함과 아주 없음이다. 이 두 가지의 사이에는 빛도 없고 소견도 없고 머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표시할 수도 없고, 시설할 수도 없다 하신 것 같으니, 이 뜻은 세속으론 있기 때문에 이에 의하여 생사의 윤회를 건립하고, 으뜸가는 진리에는 공하기 때문에 모든 법의 성품과 형상은 있음도 아니요, 없음도 아니어서 마음과 말의 길이 끊였다”는 것이다.
만일 온갖 법의 참됨이 있음과 없음을 떠났다면 또 무슨 까닭에 세속으론 있다고 하는가. 참됨은 둘이 없다할지라도 세속으로 있음은 어째서 무너지는가. 의당 참됨을 떠나서 따로 세속이 있어야 하리라 한다면 서로 여의지는 않았지만 이치에 다름이 있나니, 세속은 세속 망정에 순응하고 참됨은 진실한 이치를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됨은 둘이 없지만 세속은 여러 까닭이 있다.
또 온갖 종파들은 모두가 둘 없음을 허락하나 갖가지 종류의 같지 않음이 있다. 그러므로 선뜻 의심과 질문을 일으키지 말라. 이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만일 참됨이 있음과 없음을 떠났다면
무슨 까닭에 세속으론 있다하랴
그대의 근본 종지도 역시 그렇거늘
질문을 퍼부은들 무엇하리오
논하건대 만일 빛 따위 법의 참됨이 있음과 없음을 떠났다면 다시 무슨 까닭에 세속으론 있다고 하는가. 인과가 끊이지 않기 때문에 생사에 윤회한다.
세속은 세속 망정에 순응하기 때문에 인연이 거짓으로 있거니와 참됨은 진실한 이치를 말하기 때문에 있음이 아니요, 없음도 아니다.
그대들의 근본 종지는 모두가 둘 없음을 허락하지만 법은 있다고 하면서 선뜻 질문을 일으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모든 구절의 이치는 있음을 주장하지 않았으니, 온갖 법은 그 본체가 다 동일할 수 없다. 또 있지 않지도 않나니, 온갖 법의본체가 다 없다 하지도 말라.[亦非非有勿一切法其體皆無] 있음이 아니요, 없음도 아니어서 모든 법에 두루하였지만 갖가지 구절과 이치를 세움이 같지 않다. 나의 법도 그러하거늘 어째서 번거로이 질문을 일으키는가. 이 도리에 의하여 다른 질문도 통한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모든 법이 모두 없다면
차별은 있지 않을 것이요
모든 법이 모두 있다고 하여도
차별은 역시 없으리라
논하건대 만일 온갖 법으 진실한 성품이 전혀 없다면 온갖 세간의 인과가 차별되어서 눈 따위에서 눈의 의식 따위가 난다는 말은 모두 없어야 하리니, 없음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위의 해석과 같으니 없음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있음이라고 집착하거나 없음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만일 있음이라고 집착한다면 그 허물은 역시 같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만일 온갖 법이 동일하게 성품이 있다면 온갖 세간의 인과가 차별되어서는 눈 따위에서 눈의 의식 따위가 난다고 하는 것도 역시 없으리니, 있음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결정코 있음 위에서 형상의 같지 않음에 따라 세간의 모든 법의 차별을 건립하나니, 나도 역시 그러하여서 참됨이기 때문에 공하지만 세속으로 있는 가운데서 차별을 건립한다. 그러므로 그대가 질문한 바는 헛일이다.
열등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다시 의심을 내되 법이 있음이 아니라면 있음을 능히 파하는 원인은 결정코 없으리라 하거니와 이 비난은 이치에 맞지 않나니 세속으론 있기 때문에 그대의 집착은 있음을 능히 세우는 원인이 없지 않다.
무슨 까닭에 있음이 아니겠는가. 이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법이 있음이 아니라 함으로써
있음의 원인을 무찌를 수 없다 하면
있음의 원인을 무찌르는 방법이 이미 밝혀졌거늘
그대의 종지는 왜 성립되지 않는가
논하건대 만일 모든 법의성품과 형상이 모두 없다면 있음을 능히 파하는 원인도 있지 않으리라 한다면 이는 지혜가 극히 열등한 사람이다. 눈앞의 추하고 거친 일에서도 분명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속에 속하는 것으로서 능히 있음을 파하는 원인은 앞서 이미 널리 밝히었다. 어째서 있음이 아니라 하랴.
그대는 세속의 있음은 원인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으뜸가는 진리에는 세움도 파함도 모두 없기 때문이다.
만일 있음을 능히 파하는 원인을 허락지 않는다면 어찌 원인을 세워서 자기 종의 있음을 증명함이 우리 종에서 있음을 능히 파하는 원인을 널리 말한 것 같을 수 있으랴. 그대가 있음의 원인을 세운 것을 일찍이 하나도 보지 못했거늘 어찌하여 모든 법은 ‘공’이 아니라고 집착하겠는가.
‘공’이라는 말은 파하는 것이니, 남을 파함으로써 자기의 주장은 성립되고, 있음이란 말은 세우는 것이니, 스스로가 세워져야 비로소 성립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장인 ‘공’은 수고로이 따로 세울 필요가 없거니와 그대가 집착하는 있음은 모름지기 따로 원인을 세워야 된다. 따로 원인이 없다면 무엇을 인하여 있음이란 것을 알겠는가.
파하는 원인을 얻기 쉽고 세우는 원인은 이루기 어렵다. 그러므로 있음의 원인을 파하는 것을 그다지 기묘하다 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대의 종은 어째서 ‘공’을 파하지 않는가. 그러한 말을 파하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무찌르는 원인을 얻기 쉽다 한다면
이는 세속의 거짓말이니
그대는 어찌하여
진공의 이치는 무찌르지 못하나
논하건대 파하는 원인은 얻기 쉽다 함은 세속의 허망한 말일뿐이요, 아직도 있음의 원인인 참공을 파하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승과 외도는 참공을 미워하나 아직도 있음의 원인으론 참공의 이치를 파하지 못하거늘 어찌하여 파하는 원인을 얻기는 쉽다고 하겠는가.
모든 법의 성품의 공함은 세우기는 쉽고 파하기는 어려우며, 모든 법의 성품의 있음은 세우기는 어렵고 무너뜨리기는 쉬우니, 참과 거짓이 분명하거늘 어찌하여 굳게 집착하는가.
어떤 이가 세움과 파함의 원인이란 그물에 걸려서 스스로도 벗어날 능력이 엇으면서도 교묘히 말하기를 “소리를 일정한 겨냥으로 삼아 법의 있고 없음을 표사하나니, 이미 있음의 법이 있다”면 법은 있는 것이리라. 법이 만일 있지 않다면 있음의 소리도 없어야 하리라. 하나니, 이런 말을 파하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있음의 이름이 법의 있음을 나타낸다 하여
법이 실제로 없는 것 아니라면
없음의 이름은 법의 없음을 나타내므로
법은 진실로 있지 않으리
논하건대 저들은 온갖 이름을 세우는데 소리로써 성품을 삼거니와 이 세워진 이름 따위는 소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다만 이름만을 들어서 저들의 집착을 파한다.
있음의 소리가 있음을 나타낸다면 그대가 집착하는바 법은 진실로 없지 않을 것이요, 없음의 소리가 없음을 표한다면 의당 나타내는바 법이 실제로 있지 않음을 나타낸 것임을 믿어라.
없음의 소리는 겨냥이 아니니, 이는 문득 스스로의 종지에 어긴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한바는 있음을 증명함이 되지 못한다.
이렇듯 열등한 지혜를 가진 이가 자기의 허물을 벗고자 헛되이 수고를 베풀었으나 능히 면하지 못하리라.
실제로 있는 법에 의하여 실제로 있음의 이름을 세우고 실제로 있음의 이름을 인하여 실제로 있음의 견해를 내나니, 만일 법이 있지 않다면 있음의 이름도 있지 않을 것이요, 있음의 이름이 없다면 있음의 견해도 없어야 하리라. 이미 있음의 견해가 있기 때문에 법도 없지 않으리라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니, 거짓으로 이름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런 를 드러내기 위해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이름에 따라 법의 있음을 알고는
법은 없지 않은 것이라 하거니와
이름에 따라 법의 없음을 알았으니
법의 있지 않음을 믿어라
논하건대 만일 있음의 이름을 듣고 있음의 견해를 내고서 말하기를 “모든 법은 있는 것이요 없지 않다 하면 이미 없음의 이름을 듣고 없음의 견해를 낸다면 모든 법은 있지 않고, 없는 것임을 믿어라” 한다면 이것이 이미 옳지 않거늘 그들은 어찌 그러하랴.
이름에 의하여 견해를 낸다 하여 그것이 ‘공’을 증명하는 원인이다. 그러나 있음의 원인이라 한다면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법의 본체가 만일 있음이라면 어찌 있음의 이름을 기다리랴. 이미 있음의 이름을 기다려서야 바야흐로 있음의 견해를 낸다면 모든 법의 본체가 실제로 없는 것임을 알리라. 다만 거짓을 세워진 이름이 세상에 공통으로 퍼졌을 뿐이니, 있음의 이름은 진실로 나타내는 바가 결정코 없나니, 마치 사람이 소를 부르는 것 같아서 상상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이름은 있음을 능히 없애는데 그래도 있음의 원인을 세우는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밝음을 어두움이라 하는 것 같다. 있음이 만일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는 거짓이요, 참이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세간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어서 참이 아니니
세속의 말과 이름을 여의어야
참이어서 거짓 아니리라
논하건대 세간의 이야기는 모두가 스스로의 마음에 따라 공통하게 퍼지는 거짓 생각에 의하여 세워진 것인데 법이 만일 말할 수 있다면 거짓이어서 참이 아니다. 거짓이 아니요, 참이라면 결정코 말할 수 없으리니, 말할 수 있는 온갖 것은 모두가 세속이요, 참이 아님을 앞의 품에서 이미 널리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집착하는 바 있음이란 거짓이요, 참이 아니니, 집과 같고 군사와 같다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 따위의 네 가지 집착은 앞서 이미 구족히 막았는데, 다시 다른 진실로 있는 법을 세우지 않는다면 이 논리는 없음의 쪽으로 기우리라 한다면 이런 의심을 풀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모든 법이 엇다고 비방하면
없음의 소견에 빠진다 하겠지만
허망한 집착만을 제거하거늘
어째서 없음에 빠진다 하랴
논하건대 모든 있음의 법을 비방했다면 없음 쪽에 치우친다 하겠지만 오직 허망한 생각만을 버리거니 어찌 없음의 집착에 빠지랴. 있음의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우선 없음을 세웠거니와 있음의 집착이 제해지면 없음도 역시 없어진다.
도 세속의 있음은 전에 이미 자주 논했으니, 이는 없음의 집착에 빠지리라 말하지 말라. 오직 세속으로만 있다고 허락한다면 진리도 없을 것이요, 진리가 없음을 허락지 않는다면 진리의 있음도 허락해야 하리라 한다면 이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있음이 참 있음이 아니기에
없음도 참 없음이 아니거니와
참 없음이 이미 없거늘
어찌 참 있음이 있으랴
논하건대 만일 참 있음이 있다면 참 없음도 있을 수 있거니와 참 있음이 이미 없거니 참 없음이 어찌 있으랴. 참 없음이 없기 때문에 참 있음도 없으리라. 진리는 있고 없음이 아님을 전에 이미 누누이 설명했거늘 어찌 다시 진리가 있고 없음이라고 집착하는가.
만일 참됨이 없음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자주 말하기를 “모든 법의 성품과 형상이요, 세속으론 있으나 진리에는 없다”고 하였는가 한다면 이 말의 뜻은 오직 세속으로 있으나 진리에는 이 있음이 없기 때문에 진리에는 없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진리는 세속에 없는 것으로써 본체를 한삼을 것이요, 만일 그렇지 않다면 따로 진리가 있어야 하리라. 만일 따로 진리가 있다면 있음은 세속뿐이 아니리라. 있음이 이미 세속뿐이라면 진리의 본체는 없어야 하리라. 진리의 본체가 만일 없다면 닦고 증득하기를 어찌 좋아하랴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떤 한 무리는 이 힐난을 해석하기를 내가 진리에 없다고 말한 것은 막는 말이요, 표현함은 아니니, 세간의 허망한 소견을 가진 무리는 있음을 진리라 집착하기 때문에 이 있음이 참되다는 주장을 막을지언정 없음의 본체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진리의 본체는 곧 세속에는 없다. 세속의 없음을 떠나서 따로 진리의 본체가 있는 것 아니다. 진리에 없다함은 이른바 세속에는 참됨이 없다는 말이니, 이는 이 진리에 없다 함이 따로 표현하는 바가 없다는 주장을 막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이는 말의 참 뜻을 끝까지 구명하지 못한 것이다. 뉘라서 진리에 없다는 말이 따로 표현하는 바가 있다고 했는가. 만일 다른 법을 막으나 따로 표현하는 바가 있다면 이는 막고 표현하는 말이니, 다른 법을 막은 뒤에 다른 형상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마치 중생이 아니라거나 고녀[黃門]가 아니라하는 경우와 같다.
만일 다른 법을 막고 따로 표현하는 바가 없다면 이는 오직 막는 말이 뿐이니, 막을 바를 막고는 그 힘이 다하나니, 마치 고기를 먹지 말라거나 술을 마시지 말라는 예와 같다.
이 진리에 없다는 말은 오직 그 진리에는 따로 표현할 바가 없다고 막는 것이니, 말하지 않아도 가히 알 것이다. 마치 있음이 아니라는 말은 오직 있음을 막았을 뿐이요, 있지 않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며, 다른 것을 표현하지도 않는 것 같다.
만일 없음을 표현하거나 혹은 다른 법을 표현한다면 이 있지 않다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있지 않다는 말이 있음을 표현한다면 없지 않다는 말은 없음을 표현하여야 하리라.
이와 같이 막는 말은 어리석은이나 지혜로운 사람이 모두 같이 인식하여 그들은 아무런 의심도 질문도 없거늘 거듭 이야기해서 무엇하랴. 그들이 질문하는 뜻은 있음이 만일 세속뿐이라면 참됨은 있지 않을 것이니, 무엇을 닦아 증득하랴. 다만 진리에 없다고 한다면 이는 막는 말이요, 표현함이 아니니, 내지 널리 말할지라도 어찌 질문을 해석함이 되겠는가.
다시 어떤 이가 해석하기를 ‘나’ 업음의 관법을 닦아 방편이 끝까지 이르러 진리를 볼 때에 온갖 세속의 있음은 모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진리에 없다고 한 것이다 한다면 이것도 옳지 못하니, 뜻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만일 세속의 있지 않음을 참이라 한다면 증득할 바가 없을 것이요, 만일 따로 참이 있어서 증득할 바라 한다면 있음이 오직 세속뿐이라 하지 못하리라.
또 경에서 말씀하신 바 도무지 보는 바가 없어야 비로소 참이라 할지언정 조그만큼이라도 보는 바가 있으면 참을 보는 것 아니라 한 것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이 말도 바른 해석이 못된다. 바르게 해석하는 이는 의당 말하기를 참음 있음도 없음도 아니니 마음과 말이 끊이었기 때문이다. 있음의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있음이라 하거니와 있다거나 없다 하는 두 가지는 모두가 세속의 말이요, 으뜸가는 진리에는 있음도 없음도 모두 없다. 거룩한 지혜로 증득할 바는 있음도 없음도 아니나 있음도 없음도 되는 것은 나중에 널리 말하리라.
어떤 이가 질문하기를 “법의 공함을 증득하는 원인은 있음인가 없음인가. 있다면 다른 법도 역시 있을 것이요, 없다면 모든 법의 공함을 증득하지도 못하리라” 하나니, 이런 질문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원인이 있어 법의 공함을 증득한다면
법의 공함은 성립되지 않으리니
논하건대 ‘공’은 반드시 원인에 의해서야 바야흐로 성립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온갖 것이 성립되리라. 원인이 이미 공하지 않으면 다른 것도 역시 그러하리라. 오직 아지랑이 따위와 물 따위의 성품만이 공하다면 세운 바 종지가 모두 성취되지 못하리라 한다면 이런 질문을 풀기 위하여 다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종지[宗]와 원인[因]이 다르지 않으므로
원인의 본체는 진실로 없는 것이다
논하건대 수론(數論)의 종사들은 총(總)과 별(別)이 차이가 없다 한다. 애써 용맹하고 끊임없이 일으키는 따위 원인이 모두 소리이기데 의당 소리의 본체와 같으리니, 다른 것에 통하지 않기 때문에 원인의 본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승론(勝論)의 종사들은 총과 별이 다르기도 하고 다르지 않기도 하다고 하나니 다르지 않다는 것은 허물이 앞의 것과 같고, 다르다면 앞의 여러 품에서 이미 파한 것 같다. 그러므로 다르거나 다르지 않거나에 모두 원인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 까닭에 주장[宗]과 이유[因]는 다르지 않고, 원인의 본체는 진실로 없다 하노라.
또 세운 바 원인의 본체가 만일 실제로 있다면 의당 종지의 본체와 하나이거나 혹은 다르리라. 그러나 원인과 종지의 본체가 하나이거나 다르다 하지 말지니, 하나도 다름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군사와 숲이 거짓이요, 참이 아니니, 세속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간의 허망한 분별을 따라 갖가지 주장과 이유를 같지 않게 세워서 모든 삿된 집착을 없앴거니와 삿된 집착이 없어진 뒤엔 주장도 이유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법은 동일하고 원인은 있다고 말하지 말라. 주장과 원인은 거짓으로 세워진 것이어서 모두가 세속의 법이요, 진리가 아니다.
다시 어떤 이가 따지기를 법의 공함을 증득하는 비유는 없음인가 있음인가. 없다면 모든 법의 공함을 증득하지 못할 것이요. 있다면 모든 법은 비유와 같아서 있어야 하리라 하거니와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공’의 비유가 따로 있으므로
모든 법이 공하지 않음에 견준다면
오직 속의 나[內我]가 까마귀 같이
검으리라는 비유만이 성립되리라
논하건대 비유한 원인의 한 부분에 속하는 바인데 원인이 이미 세속으로 있었기에 비유도 역시 그러하리라. 만일 원인을 떠나서 따로 비유의 본체가 있다고 하여 모든 법은 있는 것이어서 공하지 않다는데 견준다면 이것은 결정코 옳지 못하니, 원인을 떠난 비유는 반드시 세우려는 종지의 이치를 성립시키지 못한다. 마치 세운바 종지가 원인에 속하지 않는 것 같다.
만일 원인의 비유가 아니면서도 능히 종지의 이치를 세운다면 속의 나는 까마귀 같이 검은 성품이 성립되리라.
또 온갖 세운 바가 모두 성립되리니, 원인의 일이 없는 동일한 것은 얻기 쉽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비유의 본체는 반드시 원인을 여의지 않았으니, 그 까닭에 원인이 같다는 것으로써 힐난하지 말라.
만일 온갖 법의 본 성품이 공하다 하고, 이 ‘공’을 증득해 본다 하여도 무슨 훌륭한 공덕이 있으랴 한다면 이런 질문을 풀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법의 본 성품이 공하다면
‘공’에 어떤 공덕이 있다고 보랴
논하건대 ‘나’를 여읜 모든 변천하는 법 안에서 ‘나’의 공함을 증득해 본다 하여도 조그만큼의 공덕도 있지 않나니, 모든 법도 그러하다. 만일 본 성품이 공하다면 이 ‘공’을 증득해본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 만일 이익이 없다면 무엇 때문에 ‘공’을 증득하는 무량한 수행을 애써서 닦는가. 이런 질문을 풀기 위하여 다시 게송을 말했다.
허망하게 분별하는 속박은
‘공’의 소견을 증득해야 제거하리
논하건대 모든 법과 모든 법칙이 비록 공하여 ‘내’가 없으나 어리석은 법부들은 허망하게 분별하여 하나이다. 다르다 집착하나니, 이 허망하게 분별하는 세력에 의하여 탐욕 따위 번뇌와 조으름을 내고, 다시 인연 따라 온갖 착하거나 악한 업을 일으키어 3계의 바다에 빠져서 계속 해매이기에 세 가지 고통(苦痛(에 시달려 벗어나지 못한다.
부지런히 더하는 수행을 닦아 ‘나’ 없음의 ‘고’을 증득하여 차츰차츰 허망한 분별을 끊어 제하고, 그의 알맞은 바에 따라 보리를 증득하여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이 한량이 없다.
허망한 분별이란 그 본체가 무엇인가 한다면 삼계의 마음과 마음의 법이다. 이 법들도 역시 본 성품의 ‘공’이 아니겠는가.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집착하는바 빛 따위가 어찌 괴로움을 이끌어서 중생들을 억압하는가. 만일 이것이 공하지만 괴로움을 이끌어들인다면 빛 따위에도 역시 그런 능력이 있을 것인데 어찌 허망한 분별이라 하는가 한다면, 빛과 마음 따위가 모두 본 성품이 공하지만 반드시 허망한 분별에 의하여 모든 법이 있다거나 없다고 계교한다. 이 까닭에 더러움과 청정함이 생기고, 다시 이를 말미암아 유정들의 더럽고 깨끗함이 같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다만 허망한 분별이라는 말만 한다.
법이 진실로 있다면 그럴 수 있겠지만 법이 이미 없거늘 어찌 있다거나 없다고 계교하여 더럽고 깨끗함이 같지 않게 하랴 한다면, 마치 꿈속에서 빛 따위가 없지만 갖가지 형상이 있어 분명한 것 같다.
이 비유는 옳지 않으니, 꿈 따위의 지위에는 분별이 있기 때문에 작용이 업지 않다 한다면 분별의 의지로 삼아서 모든 경계의 형상을 나타내고 온갖 더럽고, 깨끗함을 일으킨다면 이 일이 옳겠거니와 이제 모두가 공하므로 실제의 분별이 없다. 그렇거늘 뉘라서 능히 이런 작용의 같지 않음을 일으키랴. 본체가 없는게 공능만이 있다는 사실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
만일 본체가 없는데 공능이 있다면 거북의 털과 토끼의 뿔이 모두 작용이 있어야 하리라.
또 번뇌가 없거나 착한 공덕도 없는데 유정들에게 더럽고 깨끗함이 있다면 이미 번뇌를 끊은 이도 다시 헤매는 윤회에 빠지거나 착한 뿌리를 심지 않고도 항상함과 즐거움을 얻어야 하리라. 이에 대해 또 어떤 무리는 질문을 해석하기를 세속이 없지 않기 때문에 그런 허물이 없다 하거니와 그들에게 묻노니, 세속이 참되고 진실하지 않느냐.
그들이 대답하기를 “그렇지 않다. 세속의 생각에 따르건대 실제로 있기 때문에 역시 참되고 진실하다 하거늘 어찌 한 법이 일시에 있고 없음이 서로 어기는 것을 모두 참되고 진실하다” 하는가. 남[生] 따위도 역시 그러하여 한 법이 일시에 남이 있기도 없기도 하고, 멸함이 있기도 없기도 하고, 없어짐이 있기도 없기도 하고, 항상함이 있기도 없기도 하고, 옴[來]이 있기도 없기도 하고, 감[去]이 있기도 없기도 하며, 그리하여 널리 말하건대 서로서로 어기거늘 어찌 모두가 참되고 진실하다 하랴.
그는 다시 말하기를 “한 법이 일시에 이치가 없으면 참이라” 하고, 이치가 있으면 세속이라 하여 이치가 차별되기 때문에 서로 어김이 없다. 마치 세간의 보시 따위의 착한 법은 성품이 유루이기 때문에 착하지 모함이라고도 하고 착한 뿌리에 부합되기 때문에 착하다고도 하는 것 같으니, 모두가 진실하여서 서로 어기지 않는다 하거니와 이것 또한 이칙에 맞는다.
보시 따위의 착한 법은 관찰하여 상대함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어기지 않는다 할 수 있거니와 한 법이 동시에 있음과 없음, 두 진리는 따로 관찰하여 상대할 것이 없거늘 어찌 어김이 없을 수 있으랴.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안락과 화평을 착한 것이라 하는데 착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세간과 세간 밖의 것이다.
세간 밖의 착한 법에는 끝끝내 번뇌의 온갖 얽매임을 물리치고 끝까지 안락하고 화평하므로 으뜸가는 착함이라 하거니와 세간의 착한 법은 잠시는 공능이 있으나 끝끝내는 공능이 없다. 잠시는 번뇌의 얽매임을 굴복시키기 때문에 세속의 착함이라 하고, 번뇌의 얽매임을 영원히 끊지 못하기 때문에 으뜸가는 진리에서는 착하지 못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착함과 착하지 못함은 서로 어기지 않나니, 공능 있음과 공능 잆음의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보시 따위의 착함이 한 찰나에 머무르면 공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지나면 다시는 머무르지 못하므로 공능이 없다 하나니, 공능 있음과 공능 없음이 비록 한 법 위에 있으나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어기지 않는다.
다음 찰나에 보시 따위가 머무르지 않으면 이미 본체가 없거늘 무엇이 공능이 없다고 하랴. 그 본체가 없기 때문에 공능도 결정코 있지 않으며, 공능이 있지 않기 때문에 곧 공능이 없다고 부른다.
혹은 공능과 공능 없음과 시각은 다름이 없으나 바라보는바 경계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어기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잠시 동안 탐욕 따위 얽매임을 능히 굴복시키기 때문에 공능이 있다 하고, 탐욕 따위의 종자를 끊어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공능이 없다 하기 때문이다. 마치 소락을 마시면 풍병(風病)은 제하지만 담(痰)과 심병[症]은 없애지 못하는 것 같다.
공능 있음과 공능 없음은 시각이 비록 같으나 바라보는 경계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서로 서로 어기지 않는다. 한 법이 한 시각에 있고 없는 두 진리의 경계는 차별이 없거늘 어찌 어김이 없으랴.
그들이 다시 구제하기를 마치 한 생각의 의식이 아집(我執)의 의지할 바이기 때문에 세속에서는 ‘나’라 하거니와 으뜸가는 진리에 의하기 때문에 ‘나’ 없음이라고도 하는데 ‘나’와 ‘나’ 없음과는 다르지만 서로 어기지 않는 것 같이 한 법이 한 시각에 있고 없는 것도 그러하여서 비록 경계의차별은 없으나 서로 어김이 없다 하거니와 이것 또한 옳지 않나니, ‘나’와 ‘나’ 없음은 이치가 서로 어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한 찰나의 마음이 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 없음이라 하지만 ‘나’라는 집착이 의지하는 바이라면 역시 ‘나’라고 부른다.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의식이 ‘나’라면 의당 자유로움을 얻고 굴러 변하지 않으려니와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에 의하여 ‘나’라는 집착을 일으키므로 ‘나’라”고 부른다.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과 ‘나’라는 집착이 의지하는 뜻은 비록 한 의식이지만 서로 어기지 않고, 한 법이 한시각에 있고 없음이 서로 반대되는 것 모두를 진실이라 하는 일이 어찌 어김이 있을 수 있으랴.
그대가 지금 있고 없음의 두 진리가 한 곳에 함께 있어도 서로 어기지 않는다는 뜻을 성립시키기 위해 세간의 비유와 갖가지 방편을 인용하나 끝내 성립하지 못하리라.
그들은 거듭 변명하기를 “마치 하나의 푸른빛이 자기에 의하기 때문에 있고, 남에 의지하기 때문에 없는 것 같이, 모든 법도 낱낱 법성(法性)이 세속에 의하기 때문에 있고 진리에 의하기 때문에 없다” 하나니, 이것도 옳지 못하다. 푸르고 누름 따위는 본체가 다르기 때문에 자기에 의하면 있고, 남에 의하면 없다 할 수 있거니와 세속과 진리는 본체가 다르지 않나니, 스스로에 의거하면 있을 수 있거니와 누구를 상대하여 없음이 되랴.
세속을 곰곰히 추궁하건대 진실로 참이 되거니와 저 푸른빛을 연구하여 누른빛이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대가 세운 바 법과 비유는 통일치 못하다.
또 세속과 진리는 본체가 서로 여의지 않았거늘 어찌하여 세속의 본체를 진리에 상대시키건대 없음이 되겠는가. 경전에서 부처님이 선현(善現)에게 말씀하시기를 “세속과 으뜸가는 진리는 제각기 다른 본체가 있지 않나니, 세속의 진여가 곧 으뜸가는 진리이다. 물질을 떠나서 따로 ‘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내지 의식과 ‘공’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다” 하셨거늘 어찌하여 한없이 한 경계 위에 놓였을 때에 두 이치가 서로 어기는 것을 모두 진실이라 하겠는가.
이 까닭에 옛적의 궤범사(軌範師:스승)들은 망정과 사리가 같지 않은 곳에 두 진리를 세웠나니, 세속의 진리라는 말은 세속의 망정을 가깝게 나타냈고, 으뜸가는 진리라는 말은 진실의 일을 멀리 표현했다. 세속의 모든 법은 세속 망정에 맞기는 하나 그 일이 허망하기 때문에 진실이 아니다.
또 눈앞에 보이는 현량(現量)으로 증득하는 연기(緣起)의 빛과 마음은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나니, 세속의 진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세간의 온갖 명칭과 말씨들을 모두 세속의 진리라 한다” 하시니, 이 경의 뜻은 세상이 다 같이 아는 바인 능전(能詮:설명하는 측)과 소전(所詮:표현되는 측)에 상응하는 법과 이치와 그리고 다 같이 아는 바가 아닌 법과 이치를 설명한 경전은 세속의 진리라 하리라 하거니와 눈앞의 현량으로 증득하는 바인 연기(緣起)의 빛과 마음은 말로써 설명할 바가 아니며, 세속의 진리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말하기를 “거짓으로 세운 이름과 말로써설명하는 바이기 때문에 이 빛과 마음도 역시 세속의 진리에 속하는 것이다” 한다면 끝끝내 으뜸가는 진리도 역시 참이 아니리니, 거짓으로 세운 이름과 말도 설명되는 바이기 때문이다.
끝끝내 으뜸가는 진리에는 이런 빛과 마음이 없나니, 진리에는 도무지 없지만 현실[事]에는 법이 있기 때문에 두 진리에 속하지 않는다 하면 이 법은 없는 것 틀린 것이리니, 세간(世間)에서 눈앞에 증득하는 바에 어기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이는 있음[有]이어서 두 진리에 속하지 않는다” 하면 의당 셋째의 진리도 세속도 아닌 진리를 세워야 하리라.
만일 말하기를 “비록 인연으로 생긴 빛과 마음이 있으나 이는 세간의 현량(現量)으로 얻는 바이요, 끝내 으뜸가는 진리에 속하는 것이 아니니, 이를 거짓으로 말하여 세속의 진리에 속한다 한다면 이는 생각에 따라 거짓으로 세속의 이름과 말을 세운 것이다. 진실한 빛과 마음이 있다면 다툼은 없으리라. 이것을 의지로 삼기 때문에 더럽고 깨끗한 이치가 성립된다.
만일 말하기를 “빙과 마음은 세속이기에 있고, 으뜸가는 진리에 의하기 때문에 있지 않고 나지 않는다” 한다면 이런 말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일 말하기를 “저 분별없는 지혜(無分別智)가 운행되는 경지가 끝내 공하여 없는 것 같나니, 그렇게 있지 않기 때문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하거니와,
만일 그렇다면 운행되는 바가 끝내 없기 때문에 분별없는 지혜도 나지 못하리라. 설사 난다고 허락할지라도 참 지혜라 하지 못하리니, 없음[無]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이다. 마치 다른 없음을 인식하는 것 같다. 지혜가 이미 없는 것이며 경계도 역시 세속의 것이리라.
비록 빛과 마음이 이렇게 있지 않다고는 하나 빛과 마음이 실제로 있음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니, 있지 않음[非有]이라고 말한 것이 끝내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다른 형상이 없기 때문에 결정코 있으리라. 이미 결정코 있는 것이라 한다면 이 까닭에 이 빛과 마음도 실제로 남이 있다고 허락해야 하리라.
만일 그대가 생각하기를 “빛과 마음은 있기도 하고 나기도 하지만 으뜸가는 진리가 아니라” 한다면 먼저 으뜸가는 진리란 어떤 것인가를 살피어 결정지어라. 그런 뒤에 이는 으뜸가는 진리가 아니라고 말하라.
만일 말하기를 “으뜸가는 진리를 분별없는 지혜의 행할 바여서 끝내 공하여 없음이라” 한다면 이는 이미 앞에서 다 했나니, 이른바 그가 행할 바는 끝내 없음이기 때문에 분별없는 지혜가 나지 못해야 하리라 했고, 그리하여 널리 말한 것이다.
또 이가 행할 바는 참으로 으뜸가는 진리가 아니니, 없음이기 때문이다. 마치 토끼의 뿔과 같다. 혹은 있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만일 말하기를 “으뜸가는 진리는 연구할 수 있는 것이라”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니 경계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연구하는 이는 세속을 버리지 않는다.
또 세속의 법은 연구할 수 없나니, 이 연구할 수 있는 것은 세속을 여의였어야 하는데 세속을 떠나서 따로 으뜸가는 진리가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를 연구할 수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대의 말은 으뜸가는 진리의형상이 아니다.
만일 말하기를 “다른 종파에서 주장하는 으뜸가는 진리가 도무지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으뜸가는 진리의 형상이라”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니, 그들은 인연으로 생김ㆍ잠시 머무름 따위의 성품을 일러서 으뜸가는 진리라 하는데 이제는 있지 않다고 무시하니 문득 자기의 종지와 현량 따위에 어긴다.
만일 말하기를 “진실함이 으뜸가는 진리의 형상이라 한다”면 이는 세속의 법이요, 진실은 아니거늘 무슨 까닭에 앞에서 말하기를 “세속이 진실이라” 했는가.
설사 있지 않고 나지 않음 만을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허락한다면 있다거나 난다는 말은 오직 거짓인 말로써 허망한 분별로 세워진 것일 뿐이다. 이미 진실이 아니며, 거짓인 말로 허망하게 분별하여 세운 것이라면 어찌 능히 더럽고 깨끗한 작용을 일으키겠는가. 그러므로 그들이 질문에 응답하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거북의 털이 본체가 있다고는 하나 세간을 속박하는 작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시 어떤 스승은 이 질문을 해석하되 분별에 집착되는 법체는 없는 것이요, 인연으로 생긴 법체는 있는 것인데 이에 의하여 번뇌와 졸음을 일으키어 세간에 얽매여 3계에 헤맨다. 이에 어떤 이가 더하는 가행(加行)을 닦아서 ‘나’ 없음의 ‘공’을 증득하여 보리를 얻으면 생사의 고통을 면한다.
인연으로 생긴 법은 비록 빛과 마음에 공통하나 마음이 근원이므로 허망한 분별이 능히 세간을 속박하는 것을 치우쳐 말하나니, 이를 싫어하여 ‘공’을 증득하는 가행을 닦되 경계가 있더라도 무심한 듯이 하면 허망한 분별이 속박치 못하고, 또한 싫어하여 ‘나’ 없음의 ‘공’을 닦거나 보리를 증득하거나 생사를 여의지 못하리라 한다.
이런 이치를 증명하기 위하여 경전에 있는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변계(遍計:두루 계교함)로 집착한 것은 없고
의타(依他:딴 것에 의해 성립되는 것)로 일어난 성품은 있나니
허망하게 분별하면 잃고 파괴되고 잃어서
증감(增減:더한다거나 줄었다고 여기는 고집)의 어느 한 쪽에 빠진다
여기에서 어떤 무리는 이 이치를 해석하되 이름은 변계로 집착하는 바요, 이치는 의타로 일어난 성품이니, 이름이 이치에 대하여는 있지 않기 때문에 없음이요, 이치가 세간을 따를 때엔 없지 않기 때문에 있음이니, 이것을 인용해서 의타가 있음을 증명하지 못하리라 하거니와 이 해석은 옳지 못하니, 이치가 서로 어기기 때문이다. 만일 이름이 이치에 대하여 있지 않기 때문에 없다면 이치도 이름에 대하여 없거늘 어찌 있을 수 있으랴.
이름은 세속을 따라 표현하는 공능이 있는데 그대가 남에 의해 일어나는 성품을 허락지 않는다면 이치도 세속을 따라 공능이 있다고 거짓으로 말해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변계로 집착하는 바임을 허락지 않는가.
세속에서 거짓으로 세운 표현하는 이와 표현된 바가 없다면 모두 없을 것이요, 있다면 똑같이 있을 것인데 어찌하여 경에서 말하기를 “하나는 있고 하는 없다” 하는가. 그러므로 그대의 말한 바는 경의 이치에 부합되지 않는다.
그대들은 변계로 집착하는바 성품이 없는 것임을 믿을지니, 세간의 망정에 의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요, 남에 의해 일어난 성품은 인연에서 생긴 것이요, 망정에서 생긴 것이 아니니, 있는 것임을 믿어라.
그는 자기의 주장을 입증하고는 다시 경을 인용하여 말했다.
이러이러한 이름을 세움으로써
저러저러한 법을 표현한다면
저것들은 모두가 성품이 있지 않니
법의 성품이 모두 그렇기 때문이다
이 게송은 저의 이치를 입증하지 못하나니, 경의 뜻은 이름이 이치에 대하여 없는 것이라 한 것이 아니요, 표현될 법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다. 모든 법의 성품을 분별해보건대 모두가 표현할 수 없나니, 이름과 말로 표현하는 바는 모두가 공통한 형상이다. 모든 법의 제 모습은 모두가 이름과 말이 끊겠나니, 제 모습은 없는 것 아니고, 공통한 형상은 있지 않다.
여기에서는 표현할 성품이 없다는 것을 간단히 말했을 뿐이요,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의 성품이 실제로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게송에서 다만 저가 있지 않다는 말만 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성품이 있지 않다고 말했어야 한다.
그는 이 남에게 의함의 성품[依他性]이 없음을 입증하기 위하여 다시 경에서 간략히 말한 게송을 인용했다.
조그마한 법도 나지도 않고
조그마한 법도 멸하지도 않나니
조촐한 견해로써 모든 법을 관하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이것 또한 남을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이 있음을 입증하지 못하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 게송의 뜻은 변계로 집착하는 제 성품과 차별과 표현하는 것과 표현된 것들의 본체가 모두 공한 것이어서 생과 멸이 없나니, 집착을 여읜 조촐한 견해가 있는 이라야 세간의모든 것이 인연으로 생긴 것이어서 있지도 없지도 않다고 관찰한다는 내용은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게송은 남을 의지해서 일어나는 성품이 없음을 증명하지 못한다.
그가 말하길 “만일 남을 의지해 일어난 성품이 있다”면 어찌하여 경에 말씀하시기를 “온갖 법의 성품은 모두가 공하다” 하였으며,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선현(善現)에게 고하시되 빛 따위 모든 법은 제 성품이 모두 없다”고 하셨고, 또 어떤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대혜(大慧)에게 고하시되 온갖 법성은 모두 나지 않나니 먼저부터 있었거나 없었거나 모두 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였으리오” 한다.
이에 대해 대답하기를 “거기에는 비밀한 뜻이 있으니, 비밀한 뜻이란 무엇인가” 하면 이 여러 경에서는 오직 변계로 집착하는 제 성품만을 파했을 뿐이요, 온갖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일체 것이 없다면 문득 사견(邪見)을 이루게 되리라 하노라.
그가 말하기를 “어떻게 그런 비밀한 뜻이 있음을 알겠는가” 한다면 다른 경에서 분명히 말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부처님[薄伽梵]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오직 상응(相應)하는 제 성품에만 의해서 일체 법의 성품이 모두 없다”고 하노라고 만일 말에 따라 집착을 내어 말하기를 “더러운 법과 조촐한 법의 제 성품이 모두 없다 하면 그는 나쁘게 ‘공’을 취하는 것이니, 그를 사견(私見)이라고 한다.
상응하는 제 성품이란 곧 세간의 변계로 집착하는 것인데 마음이 뒤바뀌었기 때문에 밖에 있는 경계같이 보이고, 이 밖의 경계에 의하여 온갖 뒤바뀐 집착을 일으키고, 이 뒤바뀐 계교에 의하여 나와 남이 있다고 계교하거니와 표현하는 것과 표현한 바의 제 성품에 상응하는 좋고 나쁜 모든 법은 곧 남을 의지해 일어나는 성품이니 그러기에 모든 경전에 그런 비밀한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도피안반야경(到彼岸般若經)에서도 부처님께서 직접 있음과 없음의 이치를 밝히셨는데 변계에 의해 집착하는 바와 모으는 바와 늘리는 바와 취하는 바는 언제나 변하는 법이 없나니, 이런 온갖 것은 모두 없음이라 하고 인연으로 생긴 것은 모두 있음이라 하셨다.
또 다른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변계로 집착하는 바의 제 성품은 남이 없고, 남에 의해서 일어나는 성품에 포섭되는 모든 법은 인연에 의해 생긴다” 하였고, 또 혜도경(慧度經)에 말씀하시기를 “혜도(慧度:혜지)를 행하는 이는 빛의 성품을 잘 알고 빛의 남과 빛의 여실함도 잘 안다” 하여, 널리 말씀하셨다. 또 여러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은 성품이 없고 생멸 따위도 없다”고 하셨으니, 모두 분별하여 말에 따라 집착해서 요의(了義:진리)라 여기지 말라. 또 세속의 모든 법도 없다고 여기지 말지니 문득 악취공(惡取空)에 빠져 큰 사견을 이루리라.
그가 말하기를 “이 말은 옳지 못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요의경에서 다르게 분별했기 때문이다. 만일 세존께서 모든 경전에서 ‘공’ 형상없음ㆍ원없음ㆍ행(行)없음ㆍ생멸없음을 말했거나 제 성품ㆍ유정ㆍ목숨ㆍ주장ㆍ푸르갈라ㆍ해탈【문】따위가 없음을 설명한 것은 여의경이라 밝히신 것이 사실이라면 나의 말이 이치에 맞나니, 다른 경에서 부처님이 직접 판결의 시기를 나는 변계로 집착하는 제 성품에 의하여 여러 경을 말할 때에 온갖 법은 모두가 제 성품이 없고, 생멸도 없어서 본래 고요한 자성의 열반이라 하였고, 남을 의지해 일어나는 제 성품에 의해서는 모든 유정은 마음이 생멸하여 헤매인다 하였고, 내지 널리 말했다” 하셨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경에서 부처님이 구수(具壽) 사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빛의 제 성품이 공하고 제 성품이 공하므로 생멸이 없고, 생멸이 없으므로 변역이 없다.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의식도 그와 가다” 하셨으니, 이는 변계로 집착하는 제 성품에 의하여 제 성품의 ‘공’ 생멸없음 따위를 말한 것인데 범부들이 자기 마음의 변화인 빛 따위 모든 법에 대하여 두루두루 계교하여 진실한 제 성품과 차별이 있다고 여기므로 세존께서 그에 의하여 빛 따위 법의 제 성품이 모두 공하여 생멸 따위가 없다 하셨고, 남을 의지해 일어나는 성품인 의타(依他)는 변계로 집착하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역시 ‘공’이라 말하거니와 제 성품이 공하여 생멸 따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아니라 하거니와, 여래께서 곳곳에서 세 가지 제 성품을 말씀하시어, 언제나 말씀하시기를 “변계로 집착하는 성품은 공하고, 남을 의지함과 원성(圓成)의 두 성품은 있다” 하시니, 이 까닭에 공교(空敎)에는 별다른 취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말에 따라 모든 법이 없다고 무시하지 말라. 말에 따라 이치를 취하는 것은 대승을 비방한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만일 어떤 보살이 말에 따라 이치를 취하면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구하지 않으면 그는 법에 대하여 진리에 맞지 않게 생각한다 하며, 또 틀린 곳에서 대승을 이해하는 사람이라 한다. 만일 어떤 보살이 말에 따라 이치를 취하지 않고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뜻을 구하면 그는 법에 대하여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 하며, 또는 옳은 곳에서 대승을 이해하는 사람이라 한다 하셨느니라.
만일 그렇다면 이 경의 구절을 어떻게 풀이하는가 하거니와 부처님께서 천자(天子:하늘 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들, 잘 알아라. 부처님은 법에 대하여 도무지 얻은 바가 없으며, 조그마한 법도 나거나 멸할 것이 없다고 여기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일체 법은 생과 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 세간에 나타나셨다” 하셨느니라.
이에 대해 어떤 이는 해석하기를 “부처님들이 큰 보리를 증득할 때에 온갖 분별과 희론(戱論:장난말)을 멀리 여의었으나, 비록 세간에 나타나시나 증득함 따위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고, 또 어떤 이는 해석하기를 부처님은 보리로써 성품을 삼기 때문에 얻은 바가 없나니 마치 경에 말씀하시기를 “보리가 곧 부처요, 부처가 곧 보리이니, 그러기에 얻은 바가 없다” 법성 그대로를 깨달아 알기 때문에 나더라도 먼저 없었던 것 아니요, 멸하더라도 먼저 있었던 것 아니다. 모든 법성이 희론을 여의었기 때문에 남도 없고 멸함도 없나니, 위없는 보리가 눈앞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여래께서 세간에 나타나신다 하면 또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선현(善現)아, 잘 알아라. 빛은 모든 빛의 성품없는 성품을 이름한 것이요, 느낌ㆍ생각ㆍ지어감 따위도 널리 말하건대 역시 그렇다 하시니, 이 경의 뜻은 남을 의해 일어난 성품이 변계로 집착한 바 빛 따위의 성품없음으로 나타난 말을 여읜 법성으로써 제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 만일 온갖 법이 도무지 없다면 어떻게 성품없음에서 다시 성품을 말하리오.
만일 말하기를 “빛 따위가 세속의 없는 성품이라” 한다면 빛 따위의 으뜸가는 성품과 진리와는 서로 어기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으뜸가는 진리란 분별하는 희론으로 미칠 수 없기 때문이니, 어찌 없음으로써 그의 제 성품을 삼겠는가. 만일 성품없음으로써 제 성품을 삼는다면 의당 다른 종류와 같아서 으뜸가는 진리라 부르지 못할 것이며, 위 없는 보리를 증득하지도 못하리니, 스스로의 종지에 어기어 큰 허물을 범하는 것이다.
남을 의해 일어나는 의타의 성품이 진실로 있다면 문득 경전의 말씀에 어기나니,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은 인연에서 일어나는데 인연과 법, 두 가지는 모두 없다. 능히 이와 같이 바르게 알면 연기(緣起)의 법칙을 통달했다” 하리라. 법이 인연에서 났다면 이 법은 도무지 성품이 없고, 법이 도무지 성품이 없다면 이 법은 인연에서 나지 않는다 하였다 하거니와, 이 두 경에서 말하는 인연으로 생긴 법이 비록 제 성품은 없으나 서로 어기지 않나니, 인연에서 생기는 것이 두 종류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두루 계교하는 변계로 집착하는 바요, 둘째는 남을 의지해 일어나는 의타기성이니, 여기에서는 변계로 집착하는 바의 제 성품이 있지 않다고 밝힌 것이요, 의타를 말한 것이 아니다. 만일 의타가 도무지 제 성품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염과 정의 두 법이 모두 없다고 부정하는 것이니, 나쁘게 ‘공’을 취한다 하는 것으로서 나와 남을 모두 손상하는 것이다. 이런 허망한 분별을 뉘라서 능히 막으랴. 바른 소견을 얻을 때라야 버리게 되리라.
(그가 말하기를) 이제 다시 묻노니, 남을 의지해 일어나는 성품은 어떤 지혜로 알 바인가 한다며 분별없는 지혜로 일으켜지는 세간의 맑은 지혜에 의한다 하노라.
분별이 없다면 어찌 세간의 지혜라 하겠는가 한다면, 이 지혜가 분별이 없다고 하노니, 만일 분별이 있다면 모든 법의 실상에서 행하지 못하고, 다만 저 변계로 집착하는 바를 반연할 뿐이리라. 비록 분별이 있더라도 모든 실상에 행할 수 있으리라 한다면 허망한 분별도 모든 법의 실상에 행할 수 있어야 하리라.
또 아직껏 분별이 없어진 뒤의 법의 진실한 모습을 아는 지혜를 얻지 못했는데 남을 의지해 일어나는 성품이 있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이 남을 의지해 일어난 성품은 현전에 보는 뱀이란 집착이 의지하는 바와 같지만 않거늘 이 성품이 진실로 있다고 어떻게 결정적으로 말하랴.
오직 분별없는 지혜로 이끌어 내는 세간의 맑은 지혜라야 남에 의지해 일어나는 것을 안다고 하면 논(論)과 어기나니 저 논에 말하기를 “변재로 집착하는 성품은 어느 지혜의 행할 바인가. 범부의 지혜인가. 성인의 지혜인가. 모두의 행할 바가 아니니,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남을 의지해 일어나는 성품은 어느 지혜로 행할 바인가. 모두의 행할 바라고는 하나 그러나 세상을 뛰어난 성인의 지혜로 행할 바는 아니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다섯 가지 일[五事]은 몇이 취할 바이며, 몇이 취하는 쪽이겠는가. 셋(이름ㆍ형상ㆍ진리)은 취할 바요, 분별(망상)과 바른 지혜는 취하는 쪽과 취할 바에 공통하고, 이름ㆍ형상ㆍ분별은 분별로 취할 바이다.
바른 지혜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진여를 반연하고, 둘째의 것은 그에게서 난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껏 여전히 얻지 못한다.
형상 따위는 역시 남을 의지해 일어난 성품이니, 그러므로 그 논에 말하기를 “변계로 집착하는 바는 다섯 가지 일을 포섭하지 못하고, 남을 의지해 일어난 성품은 네 가지 일(형상ㆍ이름ㆍ분별ㆍ바른 지혜)을 포섭한다 하셨다 하거니와 만일 의타기성이 세속 지혜로 반연할 바여서 공하지 않다고 한다면 심히 우스운 일이니, 모든 법의 실상은 세간의 마음이나 지혜로 미치지 못할 바임은 전에 누누이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실제로 의타가 있다고 말하지 말라. 논에는 의타도 범부의 지혜의 경계라 한 것은 스스로가 증득해서 수용하는 바에 의하는 것이므로 어기지 않는다.
의타기성은 마음과 마음의 법이 인연에 따라 일어날 때에 변화하여 갖가지 형상ㆍ이름 따위 티끌 같이 보이는 것을 실제로 스스로가 증득하여 수용하거늘 잘난체하는 무리는 밖의 티끌을 취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모든 밖의 티끌은 변계로 집착하는 바이니, 본체도 형상도 없으므로 소연연(所緣緣)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인이나 범부의 지혜로 행할 경계가 아니다.
온갖 유루의 마음과 마음의 법은 오직 스스로가 나타낸 티끌을 증득하여 받아들일 뿐이요, 다른 마음의 경계를 여실하게 못하거니와 무루의 세속 지혜에 상응하는 마음들은 본 성품이 물들음을 여의었으므로 나와 남을 모두 증득한다. 그러므로 의타는 맑은 지혜로 알 바라 하여도 논에서 말한 이치에 어기지 않는다.
그가 말하기를 “그대가 웃음거리라 한 말은 스스로가 어리석음을 나타냈을 뿐이요, 나의 말이 진리에 어긴다는 것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만일 인연에서 생긴 마음과 마음의 법이 모두가 변계로 집착한 바라면 모두 제 성품이 공하여서 문득 허공의 꽃과 같을 것인데 어떻게 3계의 유정들을 속박하여 생사에 윤회하게 하리오. 그러므로 의타는 본체가 없다함이 진실치 않다 하거니와, 논자(論者:논을 쓴 사람)의 본뜻도 의당 그러했으리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인하여 말하기를 “허망한 분별의 속박은 ‘공’을 증득하여야 계해진다고 했겠는가. 뉘라서 거북의 털이 계교하거나 속박하는 것을 보았으며 뉘라서 토끼의 뿔이 증득하거나 계하는 것을 보았으랴. 이 까닭에 오직 마음과 마음의 법이 있을 뿐이요, 마음밖에 집착될 티끌들은 없음을 알 수 있다.
어찌하여 모든 법이 오직 마음뿐임을 아는가 하면, 그가 대답하기를 “곳곳의 여러 경에서 누누이 말했기 때문이니, 여기서 왜 다시 의심을 내는가”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 선현에게 고하시되 털끝만한 진실한 물건이 의지할 곳이 없거늘 어리석은 범부들은 온갖 언행을 짓나니, 오직 뒤바뀜만이 그들에게 의지할 곳이 되어 준다” 하시니, 뒤바뀜이 곧 허망한 분별이요, 허망한 분별이 곧 마음과 마음의 법이리라.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조그만큼의 법도 제 성품을 얻을 수 없고, 오직 짓는 이[能造]가 있다” 하시니, 젓는 이가 곧 마음과 마음의 법이리라.
또 경에 말씀하시기를 “3계가 오직 마음이라 하시니, 이런 종류의 경전이 한량이 없으니, 그러므로 모든 법이 오직 마음이라는 이치가 성립된다”하거니와, 온갖 법이 진실로 마음뿐이라고 결정적으로 집착하는 것도 역시 뒤바뀜이 되지 않겠는가. 이는 마치 빛 따위 모든 법이 뒤바뀐 경계이기 때문에 그 본체가 실제로 없는 것 같으리라. 또 경계가 없거늘 의식이 어찌 있을 수 있으랴. 한 의식이 두 부분이 합해서 이뤄지지 않았을 것이니, 마음의 한 모습(자체)을 잃지 않게 하라.
(그가 말하기를) 만일 의식의 본체는 진실로 두 부분이 없다면 반연하는 이와 반연할 바의 행상이 공하기 때문에 다만 세속이 함께 인식하는 바에 따라 반연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마음뿐이라 한다면 경계도 없지 않다고 말해야 되리니, 마음과 경계가 있음은 세속이 함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거니와,
만일 조그마한 의식의 실체가 있다고 허락한다면 이의 본체를 말하라. 그 형상이 어떠한가. 이미 아는 이와 알바를 말하지 못하거늘 어찌 오직 마음만이 있다고 결정적으로 말하랴.
여러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오직 마음뿐이라 함은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을 관찰하여 밖의 티끌을 버리게 하기 위한 것인데 이미 밖의 티끌을 버리었으니, 허망한 마음이 저절로 쉬고, 허망한 마음이 쉬면 중도(中途)의 진리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경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경계가 마음뿐임을 알기 전엔
두 가지 분별을 일으키거니와
경계가 마음뿐임을 통달한 뒤엔
분별도 나지 않는다
모든 법이 마음뿐임을 알면
바깥 티끌의 형상을 여의나니
이 까닭에 분별을 쉬고
평등한 진공(眞空)을 깨닫는다
어리석은 범부와 중생들은 경계의 맛에 탐하여 온갖 쾌락을 받으면서 버리는 마음이 없으므로 생사에 헤매면서 3계의 바다에 빠져 온갖 고통을 받아 벗어날 도리가 없다. 이에 여래께서 자비를 베푸시어 방편으로써 모든 법이 마음뿐임을 말씀하셔서 밖의 티끌을 버리게 하시니, 밖의 티끌을 버린 뒤엔 허망한 생각이 저절로 멸하고 허망한 생각이 멸하면 열반을 증득한다. 그러므로 경애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세상의 용한 의원이
묘한 약을 뭇 병에 쓰듯이
부처님도 중생들을 위하여
마음뿐인 진리를 말한다
극미(極微)라 하여도 쪼갤 수가 있나니, 방위와 장소에 의거하기 때문이다. 마치 집이나 병과 같다 한다면, 이는 극미가 가히 많은 조각으로 나눌 수 있나니, 거짓이어서 진실이 아니므로 전혀 없을 수는 없으리라. 만일 그렇지 않다며 마음과 마음의 법칙이 한 찰나 안에 포섭되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세월 따위가 여러 부분이 합해서 이루어졌으므로 전혀 없게 될 수 있다고 하여 큰 허물을 범하는 것과 같다고 비난하는 것이 된다.
이러한 종류로 견해가 같지 않으므로 성인의 말씀을 나누어 집착해서 서로서로 시비를 일으켜 제각기 한 쪽에 치우친다. 이렇듯이 나쁜 소견의 티를 제하지 못했으니, 어찌 부처님들께서 말씀하신 대승의 깊고 묘한 진리에 계합하리오. 진리를 알지 못하고 제각기 자기의소견대로 집착하여 자기만 옳고 남이 그르다 하니, 매우 두려운 일이다. 마땅히 ‘공’과 ‘유’의 두 집착을 버리고 대승의 둘 아닌 중도(中道)의 진리를 깨달을지어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보살이여, 잘 알라. 신견(身見:내 몸이라는 집착)이 뿌리가 되어 생기는 모든 소견은 법을 끊는 업을 일으키어 세간을 결박하나니, 그들을 업신여기고 모든 법이 없다고 무시하는 모든 소견과 또 그런 소견을 찬탄하고 퍼뜨린다. 이렇게 생긴 법을 끊는 업으로 인하여 한량없는 겁을 지내도록 지옥에 떨어져서 나쁜 길을 헤매면서 큰 고통을 받는다.
옛날의 조그마한 선근 때문에 인간에 태어나더라도 어리석고 둔하고 눈멀고 귀먹어 온갖 괴로움을 받고, 생김새가 미워서 사람들이 보기 싫어하고, 말씨가 더듬거려 모두가 듣기 싫어한다. 혹은 전생에 훌륭한 선근을 심었으므로 인간에 태어나서 훌륭한 과보를 받으나 옛날에 법을 비방하는 업을 받아들인 까닭에 여래의 파상공교(破相空敎)를 치우쳐 집착하여 세간 사람들로 하여금 그는 법을 옳은 법이라 하고, 옳은 법을 그른 법이라 하며, 그른 이치를 옳은 이친가 하고, 옳은 이치를 그른 이치라 하여, 자기를 해치고 남도 해치니,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하셨다.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이 모두 심히 깊은데 2제(諦)의 법문이 가장 헤아리기 어렵다. 이제 요의경(了義經)에 이하기를 권하기 위하여 돌아갈 곳을 간략히 설명하여 모든 시비를 쉬게 하리라.
세속의 진리[世俗諦]란 인연 따라 생긴 세간과 세간 밖의 물질과 마음 따위의 법이니, 친히 증득하면 말을 여의거니와 다음다음 말할 수 있다. 친히 증득하는 것이 먼저이니, 그런 뒤에야 바야흐로 설명을 일으켜라. 이 세속의 진리는 남도 있고 멸함도 있어 거짓으로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마치 요술이 분별로 이루어진 것 가다. 꿈속에서 본 일이 형상이 있어 설명할 수 있는 것 같음이 세속의 진리이다.
으뜸가는 진리[勝義諦]란 성현이 알 바이니, 분별의 이름이나 말로는 모두 미치지 못한다. 스스로가 앞으로 증득한 바는 다른 인연에 의하지 않나니, 형상 없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으뜸가는 진리라 한다.
이와 같이 2제의 법문을 대략 설명했으니, 바른 법을 배우는 무리는 모두 다투지 말라. 앞의 세속의 진리에 의하므로 염법과 정법이 나고 나중의 으뜸가는 진리에 의하면 적멸을 증득한다.
그러므로 성인께서 마음과 경계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하셨으니, 첫째는 말이 있고 형상이 있는 마음과 경계요, 둘째는 말이 없고 형상이 있는 마음과 경계요, 셋째는 말이 없고 형상이 없는 마음과 경계라 하셨다.
처음의 것은 이름과 말에 대해 깨달음도 있고 번뇌[睡眠]도 있음이요, 다음의 것은 이름과 말에 대해 번뇌는 있으나 깨달음이 없고, 나중의 것은 이름과 말에 대해 번뇌와 깨달음이 영원히 없어진다. 처음의 둘은 세속의 진리를 반연하고 나중의 하나는 으뜸가는 진리를 반연한다. 또 온갖 이른바 번뇌를 영원히 여읜 뒤에 얻어지는 마음은 두 진리를 두루 반연한다.
만일 세속의 진리에 대해 굳게 집착하는 소견을 일으키거나 세속을 순응하지 않으려는 소견을 일으키면 이 두 가지는 모두 허망한 분별이라 하나니, 이는 온갖 이익없는 법을 내어 유정들을 속박하여 해탈치 못하게 하고, ‘공’의 소견 ‘나’없음의 소견은 모두 끊어버리어 유정들로 하여금 삼계의 결박을 여의고 끝가는 열반을 증하며, 도한 남들도 교화하여 해탈케 하나니, 습기의 장애의 근본을 뽑아 없애기 때문이다.
만일 세속의 진리에 대해 순응치 않으려는 소견을 일으키면 이는 으뜸가는 진리에 대해 결정코 어긋남이 있나니,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해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법은 하나도 되고 없음도 되며
참도 어기고 세속도 어기니
그러므로 있음과 같은가 다른가의
두 가지 모두를 말할 수 없다
논하건대 만일 모든 법이 있음의 성품과 결정코 동일하다면 법은 하나가 될 것이요, 결정코 다르다면 법은 없는 것이리니, 그렇다면 진리에도 어기고 세속에도 어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일 온갖 법이 있음의 성품과 하나라면 빛이 소리와 같아서 소리오 빛이 아닐 것이며, 소리가 빛과 같아서 빛이요, 소리가 아니리니, 있음의 성품에 즉응했기 때문에 법은 하나가 될 것이다.
만일 온갖 법이 있음의 성품과 다르다면 빛 소리 따위의 본체는 없음이 되리니 있지 않는 성품이기 때문에 허공의 꽃과 같다.
만일 모든 법이 하나의 성품 따위와 결정코 하나라거나 다르다고 집착한다면 그 허물은 자연히 알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있음 따위가 법과 하나라거나 다르다 한다면 이 두 가지 망견은 세속과 진리를 모두 어기나니, 모두 옳고 모두 글러서 서로 어기는 장난말이니, 허물은 하나와 다름의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따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으뜸가는 진리에는 있음과 없음이 모두 고요해져서 온갖 질문이 모두 성립되지 않나니, 이런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했다.
있음과 없음이 모두 아니어서
갖가지 주장이 모두 적멸하니
거기서 힐난을 일으키려 하여도
끝끝내 입을 열지 못하게 되리라
논하건대 으뜸가는 진리에는 조그마한 법도 없나니, 온갖 법의 본 성품은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음을 주장하는 종파는 여기에서 적멸해진다.
있음의 소견에 의지한 까닭에 없음의 소견이 생기는데 이 소견이 이미 멸했으므로 저 소견들을 따라서 멸한다. 진리가 없다면 성인의 지혜는 행하지 못할 것이며, 성인의 지혜가 행하는 바는 반드시 없음의 경지는 아니리니, 그러므로 없음의 소견으론 진리를 증득하지 못한다.
성스런 지혜로는 진리를 관찰할지언정 없음을 관찰하지 않나니, 세속의 있음을 가리기 위해 진리의 없음을 말하거니와 진리의 없다는 말은 도리어 세속에 의해서 말한다.
진리가 있지 않다는 교리는 능히 참된 경지에 나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모든 경에서 흔히 있지 않음을 말하니, 있다거나 없다는 소견이 여기에 와서 모두 쉰다. 모두 옳다거나 모두 그르다는 소견도 모두 위의 것을 미루어 없앨지니, 있음 따위는 모두 표현할 수 있거니와 진리는 표현할 길이 끊였기 때문에 있음 따위가 아니다.
온갖 나쁜 소견은 마음을 흔들리게 하여 바른 진리 안에서 삿된 시비를 널리 일으키는 것은 모두가 이런 있음의 소견에 의해 생기는 것인데 이런 소견이 이미 제해지면 저것도 따라서 멸한다. 아무리 애써서 진공(眞空)을 부인하려 해도 의지한 바가 없기 때문에 말을 부치지 못함이 마치 허공이 밑이 없으므로 발붙일 수 없는 것 같다.
마음이 크고 큰 서원을 낸 이가 오는 세상이 다하도록 유정들을 이롭게 하고자 하거든 의당 망견의 티끌을 끊어 버리고 부처님[善逝]의 진공에 묘하게 깨달아 들어가라. 구하는 바를 만족하고자 하거든 부지런히 닦아 배우라.
번뇌 있다는 소견을 이미 제했고
티끌 없다는 소견도 다시 버리어
묘한 중도의 진리를 열어 놨으니
세상 사람들 모두가 적멸에 들라
성천(聖天)보살이 논을 다 짓고 다시 삿됨을 무찌르는 뜻의 게송을 읊었다.
나는 삿된 무리를 태우는 불길에 서서
여래의 바른 교법의 소(蘇)를 부어 주고
겸하여 인명(因明)의 광대한 바람을 부치노니
뉘라서 불나방처럼 불길에 들으리
삼장법사(三藏法師:현장)가 이 논을 축령(鷲嶺) 북쪽에서 처음 들은 뒤에 듣는 대로 번역하여 그 일이 끝나매 스스로 기뻐하면서 다음의 게송을 말한다.
성천과 호법이 자비와 지혜로써
삿된 무리 꺾으려고 지으신 논이
네 구절과 백 가지 허물 모두 없어져
겁화(劫火)가 실 끝을 태우는 듯하네.
그러기에 내가 목숨 바쳐 참 진리 찾아
만난대로 듣는 대로 번역해 마쳤으니
바라건대 이 공덕 유정들과 함께
모두가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소서 - 016_0658_c_05L復次,正論已立,邪道伏膺,於密義中#尚餘微滯,以淨理教,重顯眞宗,遣彼餘疑。故說頌曰:‘由少因緣故 疑空謂不空 依前諸品中理教應重遣。’論曰:雖一切法本性皆空,而初學徒未能見故,追愛妄有,怖達深空,或爲餘緣,未能決了,以正理教,重顯前宗,令彼除疑,捨諸倒執。旣一切法本性皆空,未達此空,以何爲性,諸法無我,此復云何?謂無自性。應正曉示。何假轉音,正示無由,以無體故。但可假說。諸法無我,無性可取,故名爲空#如契經言:空名諸法無我,無性,無執,無取,勝義理中,都無少法,有我,有性,可說名空。若爾,空名應不可說,實不可說,但假立名,如說太虛,雖無自性,實不可說,而假立名。空旣離言,有應可說,亦不可說,實無體故。如說諸法,實性都無,無性理中,無二無說。若爾,說者言及所言,一切皆空,今應無說。旣有所說,應不皆空。爲顯此疑,故次頌曰:‘能所說若有 空理則爲無。’論曰:言能說者,謂能說人,言及所言俱名所說。此三摠攝,有爲、無爲,謂眼等根及色等境。此若實有,何法爲空?爲遣此疑,故復頌曰:‘諸法假緣成故三事非有。’論曰:能說、言、義三事#性空,假託衆緣而成立,故餘宗亦許諸法名言,皆是自心,隨俗安立。如是說者、言及所言,皆勝義無,唯世俗有。如何謂此三事不空?云何定知三事非有?謂依他立,如幻所爲。不依他成,皆如兔角。是故三事自性皆空,爲益世閒,假有言說。又汝何爲#疑難眞空?我意猶望成昔有見,應捨此意。所以者何?非破他宗,能成己見。如破他說無㝵故常,非卽能成自無常性。設有此理,汝亦不成。所以者何?故次頌曰:‘若唯說空過 不空義卽成 不空過已明空義應先立。’論曰:若唯破空,不空成者,不空已破,空義應成。前諸品中,已說一切立不空義所有過失。若汝欲成不空義者,先當方便除前過失,不除前失,但說空過,汝不空義終不得成。非顯他人有失無德,卽能成己有德無愆。要具二能,方成己見,謂立與破。故次頌曰:‘諸欲壞他宗 必應成己義 何樂談他失而無立己宗。’論曰:要具立破,自見方成,立破二能見所依故,唯彰他失,不顯己宗,自義得成,終無是理。何緣汝輩唯樂破空,不念欲成己之有義?故於立破二事,應均方可得成。自宗有義。汝欲立有,畢竟無能,故諸法空,其理決定。豈不空論,此過亦齊?不顯己宗,唯彰他失,此質非理,空、無我宗前諸品中,已廣顯故。然空無我,遣有我成故,破汝宗,我宗已立。若爾,空論但有虛言,空、無我名無實義故,如是如是,誠如所言,空、無我名是假非實。爲破他執,假立自宗,他執旣除,自宗隨遣。爲顯此義,復說頌曰:‘爲破一等執 假立遣爲宗 他三執卽除自宗隨不立。’論曰:一、異及非,名爲三執,俱同一、異,故不別論。一等三宗若正觀察,皆歸無性,無少可存。彼性本空,非由今破,故契經說:迦葉,當知所見本空,非由今破。諸修空者,證本性空,故諸破言皆是假說。立亦應爾,權設非眞。諸法皆空,宗依何立?依汝所執,故我立宗,所執旣無,宗應不立。汝謂爲有,故宗非無。爲存自宗,應許他有,爲遣汝執,故立我宗,汝所執無,我宗彌立。雖爾,不可立空爲宗,現見世閒甁等有故,雖空、無我比量多端,而被强威,現量所伏。不爾,甁等非現量知。所以者何?故次頌曰:‘許甁爲現見 空因非有能 餘宗現見因此宗非所許。’論曰:我若許甁現量所得,空因比量,可說無能。然我說甁非現量得,空因比量何爲無能?甁等諸塵皆非現見,破根境等諸品已論。不可餘宗謂甁現見,對此安立爲證有因。所見若同,可引爲證,所見旣異,誰肯順從?是故空因不違現量。能立諸法性相皆空。甁等諸塵世閒現見,若以比量,皆立爲空,是則世閒無不空法。空無翻對,應不得成,爲擧此疑,故說頌曰:‘若無不空理 空理如何成。’論曰:夫立空理,翻對不空,不空若無,空亦非有,如何可立諸法皆空?爲決此疑,故復頌曰:‘汝旣不立空 不空應不立。’論曰:立不空者,翻對於空,旣不信空,不空焉立?如何可立諸法不空?汝不信空,而得立有,我不執有,何廢立空?若言:不空亦有所對,謂互有無,及定無空,我空亦然,對世俗有。遣彼妄有,故立眞空。又所立空,專爲遣執,不必對有,方立於空。如爲遣常,說無常教,雖常非有,而立無常。又汝此中,不應疑難,翻對在有,不在於空,有事非無,有翻有對,空理非有,何對何翻?若謂:不然,空是宗故。如立色等,無常爲宗,此無常宗旣定是有,空宗亦爾,應必非無。此說非眞,因不定故。世閒現見無亦是宗,理亦應然。故次頌曰:‘若許有無宗 有宗方可立 無宗若非有有宗應不成。’論曰:無宗若有,對立有宗,無宗若無,有宗何對?若言無對,而立有宗,卽自違前責空有對。若一切法無不皆空無我眞空咸同一味,如何現見諸法不同?此亦不然。世俗有故,勝義無故,理不相違。爲顯此義,故說頌曰:‘若諸法皆空 如何火名煖 此如前具遣火煖俗非眞。’論曰:若一切法本性皆空,如何世閒有火等異?世俗事有諸法不同,勝義理空無火等異故,汝疑難,於理不然。火等如前,破根境等已具觀察,是俗非眞,如何此中,復爲疑難?若法非有,空何所遮?空有所遮,故法應有。若爾,四論展轉相遮,皆應是眞,便違自意。爲顯此義,故說頌曰:‘若謂法實有 遮彼說爲空 應四論皆眞見何過而捨。’論曰:遮所遮故,建立能遮,所遮若無,能遮豈有?如言非雨,故說名冬,冬時所遮,雨時必有,空遮有故,有定非無,此亦不然,因不定故。一等四論展轉相遮,皆應是眞,是所遮故。眞卽無過,皆應可宗,汝見何愆#捨三執一?故不可說實有所遮。若諸所遮皆實有者,自言無過,汝過應眞。汝撥無空,此空應實。若一切法性相都無,是則世閒皆應斷滅,尚不執有,況復執無?執有執無皆成過故。爲顯此義,故說頌曰:‘若諸法都無 生死應非有 諸佛何曾許執法定爲無。’論曰:若法全無,應無生死、因果,展轉相續輪迴。非定執無,何得爲難?我說世俗因果非無,諸佛世尊智見無㝵,亦未曾許定有定無。如契經中:佛告迦葉:諸法性相非有非無,有是一邊,無是第二,謂常與斷,此二中閒,無色無見,無住無像,不可表示,不可施設。此意說言世俗有故,依之建立生死輪,迴勝義空故,諸法性相非有非無,心言路絕。若一切法眞離有無,復以何緣而言俗有?眞雖無二,俗有何乖?應離於眞,別有其俗,雖不相離,而義有殊,俗順世情,眞談實理。故眞無二,俗有多途。又一切宗皆許無二,而有種種體類不同。是故不應輒生疑難。爲顯此義,故說頌曰:‘若眞離有無 何緣言俗有 汝本宗亦爾致難復何爲。’論曰:若色等法眞離有無,復有何緣而言俗有?因果不斷,生死輪迴。俗順世情,因緣假有,眞談實理,非有非無。汝等本宗皆許無二,而言法有,輒難何爲?所以者何?如諸句義,非卽是有,勿一切法其體皆同。亦非非有,勿一切法其體皆無。非有非無,雖遍諸法,而立種種句義不同。我法亦然,何煩致難?由此道理,餘難亦通。所以者何?故次頌曰:‘諸法若都無 差別應非有 執諸法皆有差別亦應無。’論曰:若一切法實性都無,所有世閒因果差別,謂從眼等,眼識等生,此皆應無,無無別故。此同上釋,謂不執無。執有執無,皆非理故。又若執有,其過亦同。所以者何?若一切法皆同有性,所有世閒因果差別,謂從眼等,眼識等生,此皆應無,有無別故。定於有上,隨相不同,建立世閒諸法差別,我亦如是,眞故雖空,於俗有中,建立差別。故汝所難,卽爲唐捐。有劣慧人,復生疑難,若法非有,則定應無能破有因,此難非理,世俗有故,汝執非無能立有因。何故非有?爲顯此義,復說頌曰:‘若謂法非有 無能破有因 破有因已明汝宗何不立。’論曰:若謂諸法性相皆無,能破有因亦非有者,此慧極劣。以於現前麤顯事中,不能了故。世俗所攝能破有因,前已廣明。何謂非有?汝不可說俗有非因。勝義理中,無立破故。若不忍許能破有因,何不立因,證自宗有,如我廣說能破有因?汝立有因,一未曾見,如何可執諸法非空?空言是破,破他便立,有言是立,自立方成。是故我空無勞別立,汝所執有須別立因。別因旣無,何緣知有?破因易得,立因難成。故破有因,未爲奇妙,若爾,汝宗何不破空?爲破彼言,故說頌曰:‘說破因易得 是世俗虛言 汝何緣不能遮破眞空義。’論曰:破因易得,是俗虛言,未見有因,破眞空故。小乘、外道雖惡眞空,而未有因,破眞空義,如何可說易得破因?諸法性空易立難破,諸法性有難立易傾,眞僞皎然,如何固執?有被立破,固網所籠,自出無能,矯作是說,聲爲定量,表法有無,旣有有聲,法應定有。法若非有,有聲應無,爲破此言,故說頌曰:‘有名詮法有 謂法實非無 無名表法無法實應非有。’論曰:彼立諸名,以聲爲性,此立名等,非卽是聲。故但擧名,以破彼執。有聲詮有,汝執所詮法實非無,無聲表無應信所詮法實非有。無聲非量,便自違宗。故汝所言非爲證有。此劣慧者,欲脫己愆,徒設功勞,終不能免。依實有法,立實有名,因實有名,生實有解,法若非有,應無有名,有名若無,應無有解。旣有有解,故法非無,此亦不然,假立名故。爲顯此義,故說頌曰:‘由名解法有 遂謂法非無 因名知法無應信法非有。’論曰:若聞有名,生於有解,遂謂:諸法是有非無,旣聞無名,生於無解,應信諸法非有是無。此旣不然,彼云何爾?依名生解#是證空因,謂爲有因,必不應理。法體若有,何待有名?旣待有名,方生有解,故知諸法體實爲無。但假立名,世共流布,有名決定無實所詮,如人號牛,依想立故。名能遣有,而立有因,不異有人以明爲闇。有若可說,是假非眞。所以者何?故次頌曰:‘諸世閒可說 皆是假非眞 離世俗名言乃是眞非假。’論曰:世閒言說皆隨自心,爲共流傳,假想安立,法若可說,是假非眞。非假是眞,定不可說,諸可說者皆俗非眞,前諸品中,已廣成立。故所執有,是假非眞,如舍如軍,可言說故。一等四執前已具遮,更不立餘眞實有法,是則此論應墮無邊。爲釋此疑,故說頌曰:‘謗諸法爲無 可墮於無見 唯蠲諸妄執如何說墮無。’論曰:謗諸有法,可墮無邊,唯遣妄情,豈墮無執?爲破有執,且立爲無,有執若除,無亦隨遣。又世俗有前已數論,故不應言。此墮無執。唯許俗有,眞應是無,不許眞無,應許眞有,此言非理。故次頌曰:‘有非眞有故 無亦非眞無 旣無有眞無何有於眞有。’論曰:若有眞有,可有眞無,眞有旣無,眞無豈有?無眞無故,眞有亦無,眞非有無,如前屢辯,如何復執眞是有無?若眞非無,何意頻說諸法性相俗有眞無?此說意言唯俗是有,眞無此有,故說眞無。若爾,此眞俗無爲體,若不爾者,應別有眞。若別有眞,有非唯俗。有旣唯俗,眞體應無。眞體若無,何欣修證?此中一類釋此難,言#我說眞無,是遮非表,世閒妄見執有爲眞,遮此有眞,不表無體。然其眞體卽是俗無。非離俗無,別有眞體。言眞無者,謂俗無眞,此遮其眞,無別所表。此於言義未究其源。誰謂眞無,別有所表?若遮餘法,別有所詮,是遮表言,遮餘法已,表餘共相。如非衆生,非黃門等。若遮餘法,無別所詮,是唯遮言,遮所遮已,其力斯竭,如勿食肉,勿飮酒等。此眞無言唯遮其眞無別所表,不言可悉。如非有言,唯遮其有,不詮非有,亦不表餘。若詮其無,或表餘法,則不應說此非有。言若非有,言詮於有者,非無之說應表其無。如是遮言愚智同了,彼無疑難,重說何爲?彼難意言有若唯俗,眞卽非有,何所修證?但說眞無,是遮非表,乃至廣說,豈釋難耶?復有釋言,修無我觀,方便究竟,見眞理時,一切俗有皆不顯現,故說眞無,此亦不然,意難了故。若俗非有,說名爲眞,應無所證。若別有眞,是所證者,則不應言有唯是俗。又違經說,都無所見,乃名見眞,少有所見,卽非見眞。是故此言亦非正釋。如是釋者,應作是言,眞非有無,心言絕故。爲破有執,假說爲無,爲破無執,假說爲有,有無二說皆世俗言。勝義理中,有無俱遣。聖智所證非有非無,而有而無,後當廣說。有作是難,證法空因,爲有爲無?有則餘法亦應是有,無則不能證諸法空。爲擧此難,故說頌曰:‘有因證法空 法空應不立。’論曰:空必依因,方可得立。若不爾者,一切應成。因旣不空,餘亦應爾。唯陽焰等、水等性空,則所立宗#皆不成就。爲釋此難,復說頌曰:‘宗因無異故 因體實爲無。’論曰:數論師等摠別無異。勤勇、無閒、所發等因,皆卽是聲,應如聲體,不通餘故,因體不成。勝論師等計摠與別,或異不異,其不異者#過同前師,異卽如前諸品已破,故異不異,皆不成因。由此故,說宗因無異,因體實無。又所立因體若實有,應與宗體或一或異。然不可說因與宗體,或一或異,非一異故。猶若軍林,是假非眞,世俗所攝。隨順世閒#虛妄分別,建立種種宗因不同,遣諸邪執,邪執旣遣,宗因亦亡。故不可言法同因有。宗因假立,皆俗非眞。復有難言,證法空喩,爲無爲有?無則不能證諸法空,有則諸法如喩應有,此亦不 然。故次頌曰:‘謂空喩別有 例諸法非空 唯有喩應成內我同烏黑。’論曰:喩則是因一分所攝,因旣俗有,喩亦應然。若謂離因,別有喩體,以例諸法,是有非空,此定不然。離因之喩必不能證。所立義宗。如所立宗,非因攝故。若非因喩能立義宗,內我如烏,黑性應立,又應一切所立皆成,無因事同,易可得故。由是喩體必不離因,故應同因,不可爲難。若一切法本性皆空,證見此空,有何勝德?爲敍此難,故說頌曰:‘若法本性空 見空有何德。’論曰:非於離我諸行法中,證見我空,少有勝德,諸法亦爾。若本性空,證見此空,何所饒益?若無所益,何用劬勞?修能證空,無量加行。爲釋此難,復說頌曰:‘虛妄分別縛 證空見能除。’論曰:諸法諸行雖空、無我,而諸愚夫虛妄分別,執一、異等,由此虛妄分別勢力,生長貪等煩惱、隨眠,隨緣發生諸善惡業,沒#三有海,相續輪迴,三苦所煎,不能自出。勤修加行,證無我、空,漸次斷除虛妄分別,隨其所應,證三菩提,自利利他功德無盡。虛妄分別,其體是何?謂三界心、心所有法。豈不此法亦本性空?如諸愚夫所執,色等何能引苦,煎迫有情?若此雖空,而能引苦,是則#色等亦有此能。何故但言虛妄分別?雖色心等皆本性空,而要依於虛妄分別,計度諸法爲有爲無。因是發生雜染、淸淨#由斯含識染淨不同。是故但言虛妄分別。法若實有,是事可然,法旣實無,如何計度爲有無等,染淨不同,如夢等中,雖無色等,而有種種相現分明。此喩不然,於夢等位,有分別故,作用非無#分別爲依,現諸境像,起諸染淨,是事可然,今旣皆空,無實分別。誰能起此作用不同?無體有能,曾所未見。若無有體,而有功能,兔角、龜毛應皆有用。又無煩惱,或無善根,而諸有情有染淨者,已斷煩惱,應更輪迴,未種善根,應獲常樂。此中一類,釋此難言,世俗非無,故無此失,應問,世俗非諦實耶?彼答:不然,隨世俗量,是實有故,亦名諦實。如何可說一法一時,有無相違,俱名諦實?生等亦爾,一法一時,有生無生,有滅無滅,有斷無斷,有常無常,有來無來,有去無去,乃至廣說,更互相違,如何可言俱是諦實?彼作是說,一法一時,無義爲眞。有義爲俗,義差別故,互不相違。猶如世閒,施等善法性有漏故,得不善名,善根相應,故亦名善,俱名諦實,而不相違,此理不然,施等善法觀待異故,可不相違,一法一時,有無二諦無別,觀待何得無違?所以者何?安和名善,善有二種:所謂世閒及出世閒。出世善法畢竟能害煩惱諸纏,究竟安和,名勝義善,世閒善法暫時有能,畢竟無能。暫時能伏煩惱纏故,名世俗善,非永能斷煩惱纏故,亦得名爲勝義不善。此善不善互不相違,有能無能,時分異故。如施等善,住一剎那,說名有能,過此已後,必不能住,說名無能,有能、無能雖在一法,時分異故,而不相違。第二剎那,施等不住,旣無有體,誰名無能?由彼體無,能定非有,能非有故,卽名無能。或能無能,時分無異,所望境別,故不相違,所以者何?暫時能伏貪等纏故,名爲有能,不能斷滅貪等種故,名曰無能。如服酥膏,能除風疾,不遣痰癊。有能、無能時分雖同,而所望境有差別故,互不相違。一法一時,有無二諦境無差別,何得無違?彼復救言,如一念識,我執依故,世俗名我,由勝義故,亦名無我,我、無我別而不相違,一法一時,有無亦爾,雖無境別,而不相違,此亦不然,我、無我義不相違故。所以者何?一剎那心不自在故,名爲無我,我執所依亦名爲我。如契經言:若識是我,應得自在,不應轉變,而諸愚夫依發我執,故說名我。不自在義我執依義,雖同一識,而不相違,一法一時,有無相及,俱名諦實,豈得無違?汝今爲成有無二諦,同在一法,互不相違,雖引衆多世閒譬喩、種種方便,終不能成。彼重救言:如一靑色,據自故有,望他故,無諸法,亦然一一法性據俗#故有,望眞故無,此亦不然。靑、黃體異,可據自有,望他爲無,俗之與眞,其體不別,據自可有,望誰爲無?尋究其俗,實卽是眞,非考彼靑,實成黃色。故汝所立法喩不同。又俗與眞體,不相離,如何俗體望眞爲無?如契經中佛告善現:‘世俗、勝義無各別體,世俗、眞如卽是勝義。非離其色,別有於空。乃至識空亦復如是。’如何一法無別境時,二義相違,俱名諦實?由是古昔,軌範諸師情事不同,安立二諦,世俗諦語近顯俗情,勝義諦言遠表實事。世俗諸法雖稱俗情,而事是虛,故非諦實。又現量證緣起色心,言不能詮,應非俗諦。故契經說#所有世閒名句所詮,名爲俗諦。此經意說世共所知能詮、所詮相應法義,及爲詮表#非共所知法義經書名爲俗諦,現量所證緣起色心,非言所詮。亦非俗諦。若言假立名言所詮故,此色心亦俗諦攝。究竟勝義應亦非眞,假立名言所詮表故。究竟勝義無此色心,眞理都無,事有法故,非二諦攝,此法應無,則違世閒現量所證。若言是有,非二諦收,應立第三,非眞俗諦。若言雖有緣起色心,是諸世閒現量所得,而非究竟勝義諦收,假說名爲世俗諦攝,隨意假立世俗名言,有實色心,則無諍論。此爲依故,染淨義成。若謂色心世俗故有,由勝義故,非有非生。如是所言爲有何義?若言:如彼無分別智所行境界,究竟空無,不如是有,故說非有。若爾,所行究竟無故,無分別智應不得生。設許得生,亦非眞智,緣無境故。如了餘無。智旣非眞,境應是俗。雖言色心不如是有,而復彌顯色心實有,由說非有究竟無故,無異相故,定應是有。旣定是有,由是亦應許此色心,實有生等。若汝意謂雖復色心亦有亦生,而非勝義,應先審定勝義是何,然後可言此非勝義。若言勝義是無分別智慧所行,究竟空無,此先已破。謂彼所行究竟無故,無分別智應不得生,乃至廣說。又此所行非眞勝義,以是無故。猶如兔角。或非有故,如彼空花。若言勝義是可硏窮,此亦不然,境無異故。夫硏窮者,不捨世俗。又世俗法不可硏窮,此可硏窮,應離世俗。然非離俗,別有勝義,故不可說此可硏窮。是故汝言非勝義相。若謂餘宗所執勝義,都非有故,是勝義相,此亦不然,彼謂緣生暫住等性名爲勝義,今撥非有,便違自宗及現量等。若言諦實是勝義相,是則世俗,應非諦實。何故前言俗爲諦實,設許唯說#非有非生,名爲諦實,是有是生,唯假言說,妄分別立。旣非諦實,唯假言說,妄分別立,如何能起染淨作用,故彼釋難,其理不成。非說龜毛名爲有體,卽有作用,能縛世閒。復有餘師,釋此難曰:分別所執法體是無,因緣所生法體是有,由斯發起煩惱、隨眠,繫縛世閒,輪迴三有。或修加行,證無我、空,得三菩提,脫生死苦。’因緣生法雖通色心,而心是源,所以偏說虛妄分別,能縛世閒,厭此能修證空加行,雖有境界,若無有心,虛妄尋思終不繫縛,亦不能厭,修無我空,證三菩提,出離生死。爲證此義,引契經言:遍計所執無 依他起性有 妄分別失壞墮增減二邊。此中一類釋此義言,名是遍計所執義,是依他起性,名於其義,非有故無,義隨世閒,非無故有,不可引此證有依他,此釋不然,義相違故。若名於義,非有故無,義亦於名,是無何有?又於其義,所立名言,旣因緣生,如義應有。若妄所執能詮性無,妄執所詮。其性豈有?名隨世俗,有詮表能,汝不許爲依他起性,義亦隨俗,假說有能,何不許爲遍計所執?世俗假立能詮、所詮無,應竝無,有應齊有,如何經說一有一無?故汝所言不符經義。應信遍計所執性無,是諸世閒妄情立故,依他起性從因緣生,非妄情爲,應信是有。彼證己義,復引經言:由立此此名 詮於彼彼法 彼皆性非有由法性皆然。此頌不能證成彼義,經意不說名於義無,但說所詮法性非有。辨諸法性皆不可詮,名言所詮皆是共相。諸法自相皆絕名言,自相非無,共相非有。此中略說所詮性無。非謂能詮,其性實有。故頌但說彼非有言。不爾,應言此性非有。彼爲證此依他性無#復引經中所說,略頌:無有少法生 亦無少法滅 淨見觀諸法非有亦非無。此亦不能證依他起其性非有。所以者何?此頌意明遍計所執自性差別,能詮、所詮其體皆空,無生無滅,離執淨見,觀諸世閒因緣所生,非無非有。故此非證依他起無。若有依他,何緣經說一切法性無不皆空?又契經言:佛告善現:色等諸法自性皆無。復有經言:佛告大慧:一切法性皆無有生,先有先無,不可生故。此有密意,密意如何?謂此諸經唯破遍計所執自性,非一切無。若一切無,便成邪見。云何知有此密意耶?餘契經中,顯了說故。謂薄伽梵說如是言:我唯依於相應自性,說一切法自性皆無。若有如言而生執著,謂染淨法自性皆無,彼惡取空名爲邪見。相應自性卽是世閒遍計所執,由心轉變,似外諸塵,依此諸塵,起諸倒執。因此倒執,計有自他,能詮、所詮相應自性,染淨諸法卽是依他,故知諸經有此密意。又到彼岸般若經中,佛自分明判有無義,遍計所執,所集,所增,所取,常恒,無變易法,如是一切皆名爲無,因緣所生皆說爲有。又餘經說:遍計所執自性無生,依他起性所攝#諸法,從因緣生。又慧度經作如是說:行慧度者,善知色性,善知色生,善知色如,乃至廣說。又諸經說:諸法無性,無生滅等,皆應分別,不可如言,執爲了義,勿世俗諦諸法亦無,便惡取空,成大邪見。此言非理#所以者何?於了義經,異分別故。世尊自說若諸經中,說空、無相、無願、無行、無生、無滅、無有自性,無有有情、命者、主宰、補特伽羅、解脫門等,名了義經,我言合理,以於餘經,佛自決判我依遍計所執自性,於餘經中,說一切法皆無自性,無生,無滅,本來寂靜,自性涅槃,依依他起自性說言:諸有情心生滅流轉,乃至廣說。又餘經中,佛告具壽舍利子言:色自性空,自性空故,無生無滅,無生滅故,無有變易。受、想、行、識亦復如是。此依遍計所執自性,說自性空、無生滅等,以諸愚夫隨自心變色等諸法,周遍計度,執有眞實自性差別,世尊依彼說色等法自性皆空,無生滅等。依他起性由無遍計所執性故,亦說爲空,非自性空,無生滅等。如來處處說三自性,皆言遍計所執#性空,依他、圓成二性是有,故知空教別有意趣。不可如言,撥無諸法。如言取義,名謗大乘。故契經言:‘若有菩薩如言取義,不求如來所說意趣,是名於法非理作意,亦名非處信解大乘。若有菩薩不如其言,而取於義,思求如來所說意趣,是名於法,如理作意,亦名是處信解大乘。’若爾,云何釋此經句?佛告天子:‘汝等當知佛於菩提,都無所得,亦無少法,可生可滅。所以者何?以一切法無生無滅。是故如來出現世閒,有作是釋,諸佛證得大菩提時,遠離一切分別戲論#雖出世閒,而不可說有證得等。’復有釋言佛以菩提,爲其自性。故無所得。如契經言:‘菩提卽佛,佛卽菩提,故無所得。如其法性,而覺知故,不生先無,不滅先有,以諸法性離戲論故,無生無滅,無上菩提現在前故,說名如來出現世閒。’又契經說:‘善現,當知色名諸色無性之性,受、想、行等廣說亦爾。’此經意明依他起性,以其遍計所執色等無性所顯,離言法性,爲其自性。若一切法都無所有,如何無性而復言性?若言色等世俗無性,卽是色等勝義之性,與理相違。所以者何?夫勝義者,分別戲論所不能及,豈得以無爲其#自性?若以無性爲自性者,應類餘無,不名勝義,應不能證無上菩提,則違自宗,成大過失。依#他起性若實有者,便違經說。故契經言:諸法從緣起 緣法兩皆無 能如是正知名通達緣起。 若法從緣生 此法都無性若法都無性 此法非緣生。如是二經說緣生法,雖無自性,而不相違,以從緣生法有二種:一者遍計所執,二者依他起性。此中意明遍計所執自性非有,不說依他。若說依他,都無自性,便撥染淨二法,皆無,名惡取空,自他俱損。此妄分別誰復能遮?得正見時,自當能遣。今且應問:依他起性何智所知?謂無分別智所引生世閒淨智。旣無分別,何名世閒?謂言此智是無分別。若有分別,應不能行諸法實相,但應緣彼遍計所執,雖有分別,而說能行法實相者,虛妄分別應亦能行諸法實相。又今未得無分別後法實相智,如何定知有依他起?此依他起非如現見蛇執所依,如何定言實有此性?唯無分別智所引生世閒淨智,知依他起,與論相違,如彼論言:遍計執性,何智所行,爲凡智耶?爲聖智耶?俱非所行,以無相故。依他起性何智所行?俱是所行,然非出世聖智所行。又言:五事幾是所取,幾是能取?三是所取,分別正智通能、所取,名、相、分別,分別所取。正智有二:一緣眞如,第二是彼所引生。故今猶未得。相等。又是依他起性,故彼論言:遍計所執五事不攝,依他起性,四事所攝。若依他起世智所緣,而說非空,甚可嗤笑,諸法實相非是世閒心智所行,如前屢辨,故不應說實有依他。論說依他亦凡智境,據自證受故,不相違。依他起性卽心、心法,從緣起時,變似種種相、名等塵,實自證受,而增上慢謂取外塵。然諸外遮遍計所執,無體相故,非所緣緣。故,非聖凡智所行境。一切有漏心及心法,唯能證受自所現塵,未能如實證餘心境,無漏世智相應心品由性離染,自他俱證。故說依他淨智所了,與論所說,理不相乖。汝嗤笑言:自呈愚昧,非顯我說,與理相違。若從緣生心及心法,同遍計執,皆自性空,便似空花,何能繫縛三有含識生死輪迴?是故依他非無體實,論者本意決定應然。若不爾者,何緣故說:妄分別縛,證空能除,誰睹龜毛能計能縛,誰見兔角能證能除?由是應知有心、心法,但無心外所執諸塵。云何定知諸法唯識,處處經說於此何疑?故契經言:佛告善現:無毛端量,實物可依,愚夫異生造諸業行,唯有顚倒,與彼爲依,顚倒卽是虛妄分別,虛妄分別卽心、心法。又契經言:無有少法,自性可得。唯有能造,能造卽是心及心法。又契經說:三界唯心,如是等經其數無量。是故諸法唯識理成,豈不決定執一切法實,唯有識,亦成顚倒,是則應如色等,諸法顚倒境故,其體實無。又境旣無識,云何有?不應一識二分合成,勿當失於心自一相。若言識體實無二分,能緣、所緣行相空故,但隨世俗,同所了知,有能緣心故,說唯識,則應亦說境界非無,世俗同知有心境故。若許實有少分識體,應說此體。其相如何?旣不可言能識、所識如何,定說唯有識耶?諸契經言:唯有識者,爲令觀識,捨彼外塵,旣捨外塵,妄心隨息,妄心息故,證會中道。故契經言:未達境唯心 起二種分別 達境唯心已分別亦不生。 知諸法唯心 便捨外塵相由此息分別 悟平等眞空。愚夫異生貪著境味,受諸欲樂,無捨離心,生死輪迴,沒三有海,受諸劇苦,解脫無因,如來慈悲,方便爲說諸法唯識,令捨外塵,捨外塵已,妄識隨滅,妄識滅故,便證涅槃。故契經言:如世有良醫 妙藥投衆病 諸佛亦如是爲物說唯心。雖說極微,亦可分析,據方所故。如舍如甁,此難極微可成多分,是假非實,不可全無。若不爾者,心及心法一剎那中,時分攝故,如歲月等,衆分合成,亦可全無,成大過失。如是等類隨見不同,分隔聖言,令成多分,互興諍論。各執一邊,旣不能除惡見塵垢,誰能契當諸佛世尊所說大乘淸深妙旨?未會眞理,隨己執情,自是非他,深可怖畏,應捨執著,空有兩邊,領悟大乘不二中道。如契經說:菩薩,當知身見爲根,所生諸見,感匱法業,繫縛世閒,輕彼撥無諸法邪見,及於此見,稱讚流通,因是所生,感匱法業,經無量劫,墜那落迦,惡趣輪迴,受大憂苦。昔微善力,來至人中,愚鈍盲聾,多諸憂苦,身形卑陋,人不憙觀,鄙拙言辭,聞皆不悅。或宿曾種增上善根,來生人閒,受殊勝報,由昔攝受謗法業因,偏執如來破相空教,非毀所說,顯實法門,令諸世閒,非法謂法,法謂非法,非義謂義,義謂非義,自損損他,深可悲愍。然佛所說無不甚深,二諦法門最爲難測,今且自勵,依了義經,略辨指歸,息諸諍論。世俗諦者,謂從緣生,世出世閒色心等法#親證離說,展轉可言。親證爲先,後方起說。此世俗諦亦有亦生,假令所成,猶諸幻事,從分別起。如夢所爲,有相可言,名世俗諦。勝義諦者,謂聖所知,分別名言,皆所不及。自內所證不由他緣,無相絕言,名勝義諦。如是略說二諦法門,正法學徒同無所諍。依前世俗,染淨法生,依後勝義,證於寂滅。是故聖說心境有三,一者有言,有相心境,二者無言有相心境,三者無言無相心境。初於名言,能有覺悟,亦有隨眠;次於名言,雖有隨眠,而無覺悟,後於名言,隨眠、覺悟一向永無。初二緣世俗,後一緣勝義。復有永離,言說隨眠,後所得心通緣二諦。若於世俗,起堅執見,及於世俗,起不順見,此二俱名虛妄分別,是生一切無義利門,繫縛有情,令不解脫,空、無我見能悉斷除,令諸有情,離三有縛,自證究竟,寂滅涅槃,亦轉化他,令得解脫,拔除正習,障根本故。若於世俗,起不順見,此於勝義,定有乖違,爲明此見,故說頌曰:‘法成一成無 違眞亦違俗 故與有一異二俱不可言。’論曰:若執諸法,與其有性,定爲一者,法則成一,定爲異者,法則成無,是卽違眞,亦復違俗。所以者何?若一切法與有性一,色應如聲,是聲非色,聲應如色,是色非聲,卽有性故,法應成一。若一切法與有性異,卽色聲等體悉成無,非有性故。如空花等。若執諸法,與一性等,定一異過#如應當知。是故有等與法#一異二種妄見,違俗及眞,俱是俱非,相違戲論,過同一異。故不別論。於勝義中,有無等寂,一切問難皆不得成。爲顯此義,故說頌曰:‘有非有俱非 諸宗皆寂滅 於中欲興難畢竟不能申。’論曰:勝義理中,無少有法,以一切法本性無生。故有見宗於斯寂滅。依有見故,非有見生,此見旣亡,彼見隨滅。眞若非有,聖智不行,聖智所行必非非有,故非有見不證其眞。聖智觀眞,不觀非有,簡俗有故,說眞非有,眞非有言,還依俗說。眞非有教,能順趣眞。是故諸經多說非有,有非有見於此旣除。俱是俱非皆應類遣,以其有等,皆可表詮,眞絕表詮。故非有等一切惡見擾動其心,於正理中,廣興邪難#皆依如是有等見生,此見旣除,彼亦隨滅。雖欲猛勵抗論眞空,由無所依,措言何寄?如空、無底,足不可依。諸有大心發弘誓者,欲窮來際,利樂有情,應正斷除妄見塵垢,應妙悟入善逝眞空,爲滿所求,當勤修學。‘已除見有累 復遣執無塵 善開妙中道願世咸歸寂。’聖天菩薩造論旣周,重敍摧邪,復說頌曰:我在爲燎邪宗火 沃以如來正教酥又扇因明廣大風 誰敢如蛾投猛焰。三藏法師於鷲嶺北,得聞此論,隨聽隨翻,自慶成功,而說頌曰:聖天護法依智悲 爲挫群邪制斯論四句百非皆殄滅 其猶劫火燎纖毫。故我殉命訪眞宗 欣遇隨聞隨譯訖願此速與諸舍識 俱昇無上佛菩提。大乘廣百論釋論卷第十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