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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6_0649_a_01L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 제9권
- 016_0649_a_01L大乘廣百論釋論卷第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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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보살 본논 지음
호법보살 주석
현장 한역 - 016_0649_a_02L聖天菩薩本 護法菩薩釋三藏法師 玄奘 奉 詔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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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파유위상품(破有爲相品) - 016_0649_a_04L破有爲相品第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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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시 전에는 감관과 경계에 ‘나’없음을 이미 분별했거니와 이제는 유위의 형상이 공함을 통틀어 변론하리라. 이른바 물질과 마음 따위 모든 유위의 법이 나기[生]ㆍ머무름[住]ㆍ멸함[滅]의 세 가지 유위의 형상을 갖추었는데 나기가 첫머리에 있기 때문에 먼저 나기를 파하리니, 나기의 형상이 없어지면 머무름ㆍ멸함은 따라서 없어진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결과의 본체는 본래 없었으나 나는 것이라” 하는데 그런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만일 본래 없었는데 생긴다면
먼저 없을 때는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논하건대 종자 따위 모든 원인이 변하여 없어지는 지위에 이르르면 능히 싹 따위 여러 결과를 이끌어서 나게 한다. 만일 모든 원인 속에 본래부터 결과들이 없었다면 무슨 까닭에 싹 따위가 이 지위에서야 나는가. 나중의 지위(이미 난 지위를 아직 나지 않은 지위에 견주어 나중의 지위라 하고, 아직 나지 않은 지위를 이미 난 지위에 견주어 앞의 지위라 한다)도 앞과 같아서 결과가 나지 않을 것이요, 지위도 나중의 지위와 같아서 결과가 역시 나지 않으리라.
또 이 원인에서 저 결과를 낼 것이며, 혹은 이 결과가 저 원인에서 생기게 되리라. 만일 이와 저의 원인에 저와 이의 결과가 없어서 나지 않는다면 저와 이의 원인의 힘도, 나지 않으리니, 똑같이 본래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온갖 인과가 모두 없는 것이어서 문득 자기 종파에서 말하는바 인과에 어긴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결과의 본체가 본래 있다가 나는 것이라” 하나니, 그 말을 파하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본래부터 있어서 생긴다면
나중의 존재[有]가 다시 생기리
논하건대 만일 모든 원인 가운데에 본래부터 모든 결과가 있었다면 무슨까닭에 싹 따위가 나중에 다시는 나지 않는가. 나중의 지위가 지금 같다면 결과는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요, 지금의 지위가 나중 같다면 결과는 나지 않아야 하리라.
또 결과가 본래부터 원인 가운데에 본체가 있었다면 무슨 까닭에 이 지위에서야 난다고 하는가. 만일 말하기를 “지금에야 비로소 드러난다” 한다면 드러남은 본체를 여의지 않았으니, 본래부터 없는 것이 아니라니, 지금의 지위가 먼저와 같아서 역시 드러나지 않으리라.
먼저가 지금의 위의와 같다면 드러남은 없지 않을 것이요, 드러남이 본래 없지 않았는데 이제 다시 드러난다면 나중에 다시 드러나야 하리니, 그렇다면 끝이 없으리라.
본래 있음과 남은 이치가 서로 반대되는데 결과가 본래 있었다면 난다는 이론은 성립되지 않을 것이요, 이미 남이 없다면 결과라는 이치가 없어질 것이요, 결과의 이치가 없어지면 원인도 없어지리니, 이는 자기 종파에서 인과가 있다는 이치에 어긴다.
또 다시 결과는 먼저에 없다는 주장에서 말하기를 “결과는 혹시 원인을 어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두가 있지 않다” 하나니, 이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결과가 원인과 어긋나면
먼저부터 없음이 이치에 맞지 않고
논하건대 승론의 무리가 말하기를 “결과는 혹 원인을 어기기도 하고, 원인을 어기지 않기로 한다”고 한다.
결과가 원인을 어긴다 함은 합함[合]은 업을 어기나니 합하면 결과가 나중에 나고, 앞의 업은 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합한다 함은 어떤 두 가지 사물이나 동작이 한 정점에 합한다는 뜻이요, 업은 동작이니, 날아가는 공을 잡는 경우는 합함이요, 동시에 공의 운동이 멈추는 것은 업이 멸하는 것임.)
또 서로 어기는 법에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능히 장애를 이루고, 둘은 능히 무너뜨리는 것이다. 나중의 것은 합하는 공덕(힘)이 업의 원인을 멸해 없애는 것이요, 처음의 것은 합하는 공덕이 무게 따위를 장애하여서 그가 일으킨 바 떨어지는 따위의 업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합하는 공덕은 그 본체가 아직 있기 전엔 먼저부터 일으킨 바 업을 어기지 못한다.
세간에서도 본체가 아직 없는데 능히 어기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그대는 합하는 공덕과 업은 마치 죄수와 회(膾)와 같아서 서로 어긋난다 하지 말아서 자기 종파에서 인과가 함께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어기지 말라.
만일 한 생각 사이에 업과 합함이 함께한다고 허락한다면 나중도 그러하리니, 차별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의 논리와 세상이 다 아는 바에 어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과는 먼저부터 있는 것 아니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도 다시 결과가 먼저에 있다는 주장의 무리가 말하기를 “온갖 원인 가운데에 결과의 본체가 먼저부터 있었다” 하나니, 이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결과가 성립되면 원인은 쓸모 없으니
먼저부터 있다 함이 맞지 않는다
논하건대 수론의 무리가 말하기를 “온갖 원인 속에 결과의 본체가 먼저부터 있었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니 결과를 내고, 결과를 드러냄으로써 원인이라 하는데 결과의 본체가 본래부터 이미 생겼고, 이미 드러났다면 원인은 당장 아무 쓸모 없으리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본체와 드러냄과 남은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본체와 같아서 본래로부터 없지 않을 것이며, 본래부터 드러내고 남이 있다면 원인의 이치가 있지 않을 것이다.
원인이 있지 않기 때문에 결과의 이치가 이뤄지지 않나니, 이는 자기 종파에서 인과가 있다고 주장하는 뜻에 어긴다.
또 다시 모든 법이 날 때의 이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법이 남이 있다고 결정적으로 집착하지 말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 까닭에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지금에도 남이 있지 않고
저 때에도 남이 있지 않다
지금도 저 때에도 남이 없으니
언제 남이 있겠는가
논하건대 결과가 이미 있을 때엔 그 본체가 있기 때문에 본래 있는 법과 같아서 난다하지 못할 것이요, 결과가 아직 있기 전엔 그 본체가 없기 때문에 결정코 없는 법과 같으리니, 역시 난다 하지 못하리라.
또 모든 결과의 법칙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난다 하는데 그 본체가 이미 없거늘 작용이 어디에 의지해서 성립하랴.
또 능히 결과를 내기 때문에 원인이라 하는데 결과의 본체가 이미 없거늘 원인이 어디서 일어나랴. 이미 일어날 바가 없으면 원인의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원인의 이치가 존재하지 않으면 결과가 어디서 생기랴.
이 두 지위를 제하고는 다시는 날 때가 없나니, 그러므로 결정코 남이 없음이 마치 허공 따위와 같다.
또 만일 법의 본체가 항상 있다고 집착한다면 결정코 난다고 하지 못하리니, 일어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작용이 비록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는 미래에 속하는 것이며, 없기 때문에 나는 것 아니요, 현재 이미 있는 것이라면 자기들의 종파에서도 허락지 않는 바이다.
이 두 지위를 제하고는 따로 날 시기가 없다. 그러므로 남이 없다 함은 결정된 이치이다.
어느 승론의 사람은 많인 진실이 원인이 되어 쌓이고 모인 것이 함께 하나의 합하는 공덕의 결과를 낸다고 집착하나니, 뭇 인연이 궐할 때엔 합하는 공덕이 있지 않다. 이 까닭이 이럴 때에는 남이 없다 하고, 뭇 인연을 갖추었을 때에는 이미 합하는 공덕이 있다. 그러므로 그럴 때에는 남이 없다고 한다.
처음에 합할 때에 합하는 본체가 있기 때문에 의당 나중의 지위와 같아서 난다고 하지 못하리라.
나중의 지위는 이미 나서 다시 나지 못하기 때문에 난다고 하지 못함이 가하거니와 처음의 지위는 그렇지 않으니, 난다고 한들 무슨 허물이 있으랴.
나중의 지위가 나지 않는다면 결과는 진실에 어기거늘 그대는 결과가 진실에 어기는 것을 허락지 않는구나. 서로 어김을 장애하는 합함의 공덕이 업에는 어기나 진실에는 어기지 않음은 전에 이미 간략히 밝혔다. 이를 제하고는 그럴 때에 다시 다른 지위가 없다. 그러므로 합함의 공덕은 결정코 남이 없다. 이와 같이 빛 따위는 진실의 원인에 의탁한다.
진실이 있기 전엔 결과의 본체는 있지 않으니, 이 까닭에 이 때에는 남이 없다고 한다. 진실이 이미 있는 뒤에는 결과의 본체도 이미 있으니, 이 까닭에 그 때에 남이 없다고 말한다.
처음 있을 때에 빛 따위가 있기 때문에 의당 나중의 지위와 같아서 난다 하지 못할 것이요, 이럴 때와 저럴 때를 떠나서는 따로 딴 지위가 없다. 그러므로 빛 따위는 결정코 남이 없다.
이와 같이 합함의 공덕은 무게 따위를 장애하여서 떨어짐 따위의 업을 나지 못하게 한다. 이 장애의 본체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그 업은 나지 않나니, 앞의 말에 준해서 알라. 있거나 없을 때를 떠나서 다시 딴 지위가 없다. 그러므로 떨어짐 따위 업은 결정코 없다.
어느 수론의 사람은 집착하기를 “젖 따위의 원인이 변하여 소락 따위의 결과를 낸다. 그러므로 난다”고 한다. 원인의 본체가 있을 때에 원인의 성품은 변하지 않나니, 이 까닭에 말하기를 “이 때에는 남이 없다”고 한다.
만일 그러할 때에 원인의 성품이 이미 변했다면 당장 원인의 성품을 잃으니, 원인이라 하지 못할 것이요, 결과의 본체가 있을 때에 원인이 곧 결과를 이루나니, 이 까닭에 말하기를 “그 때에 남이 없다”고 한다.
만일 그러할 때에 결과의 본체가 난다면 다른 법이 일어날 때에 당장 원인이 성립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럴 때와 저럴 때를 제하고는 다시 딴 지위가 없다. 그러므로 소락 따위는 결정코 나지 않는다. 제 성품 따위의 원인이 요소[大] 따위의 결과를 이루나니, 이에 준해서 연구하건대 모두가 남이 있지 않다.
또 다시 나는 바가 없으므로 난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다음에 이 게송을 말했다.
만일 제 성품에서 난다면
난다는 이치가 없을 것이요
남의 성품에서 난대도 그러하니
난다는 이치가 어찌 이뤄지랴
논하건대 언제나 있다고 말하는 종파에서의 빛 따위 5온과 수론외도에서의 즐거움 따위의 세 공덕은 모든 법이 날 때에 제 성품이 변해지게 하지 못하므로 난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법이 나기 전엔 온갖 나는 작용이 아직 있지 않았기 때문에 난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고, 모든 법이 날 때에 다른 성품을 변하게 하지 못하므로 난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고, 모든 법이 이미 난 뒤에 온갖 나는 작용이 모두 쉬었으므로 난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빛 따위와 즐거움 따위의 형상과 작용에 변함이 있기 때문에 난다고도 말하지 않을 것이니, 그가 날 때에 성품과형상과 작용이 하나라거나 다르다거나에 허물은 같아서 종지에 어긴다.
또 빛과 즐거움 따위의 제 성품에 변함이 있기 때문에 난다고도 하지 말지니, 날 때에 빛 따위와 즐거움 따위가 변하여 느낌과 괴로움 따위의 제 성품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결과가 먼저부터 있다는 말은 앞의 실수가 있기 때문에 난다는 이치가 없을 수 있거니와 결과가 먼저부터 없다는 말은 인연이 화합해서 결과가 곧 이뤄지려 할 때에 난다”는 이치가 있을 수 있다.
결과가 장차 이뤄지려 할 때에 그 본체가 아직 있지 않거늘 어찌 결과가 인연에서 생긴다고 말하리오 한다면 원인에 능력이 있으므로 결과를 이룰 줄 안다 하리라.
마치 밥을 짓는다고 하는 것과 같으므로 결과가 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난다는 말은 의당 거짓이어서 진실이 아니리니, 빛 따위가 날 때에도 아직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다면 그렇게 거짓으로 말한다 하여도 이치에 어긋남이 없나니, 날 때에는 없었으나 나중에는 바야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보는 지위를 난다고 해야 하리니, 볼 때에 비로소 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다면 어째서 말의 뜻을 알지 못하고 묻는가. 설사 볼 때라고 했으나 볼 때에 나는 것은 아니니, 보는 것을 인하여 난다 할지언정 원인이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날 때엔 그런 봄[보는 작용]이 없는가. 봄이 없기 때문에 나는 시간도 없음을 알겠거늘 어째서 이치도 모르면서 대답을 하는가 한다면 어찌 없음을 보지 못한다 하여 봄이 없다 하겠는가. 어찌 물음으로서 대답으로 삼으려 하는가. 만일 그렇다면 물음과 대답이 끝이 없으리니, 봄이 없다는 것과 없음을 본다 함은 말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없음을 난다고 말하지 말지니, 없음은 허공의 꽃과 같아서 난다는 이치에 어기기 때문이다. 현존해 있는 지위에 이르러서도 역시 남[生]이라 하지 못하리니, 있음이 무위와 같다 함이 남의 이치와 어기기 때문이다. 또 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난다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 다시 남이 있다고 집착하는 어떤 이가 말하기를 “결과는 세 시각이 있으니, 처음과 나중의 차별로써 장차 작용을 이룸과 마지막 시각이다” 그들이 성립되지 않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세 지위가
나기 전에 결정코 이뤄지지 않으니
논하건대 결과가 먼저에 없다는 주장에서는 아직 이뤄지기 전에서의 세 지위가 이뤄지지 않나니, 없음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처음과 중간과 나중의 세 지위는 있음에 의해서 나타난 것인데 아직도 생기지 않은 본체는 없거늘 어찌 성립할 수 있으랴.
혹 어떤 이는 결과가 아직 일어나기 전엔 없지 않다고 허락하리니, 저 세 시각이 오직 있음에만 의지하기 때문이다.
결과가 먼저에 있다는 주장에서는 나기 전에는 세 지위가 성립되지 않나니, 있음[有]이 차별이 없기 때문에 있음의 본체도 차별이 없다 하거니와 형상과 작용이 일어나기 전에야 어찌 세 시점에 차이가 있다 하리오.
또 이 세 지위가 이미 시간이 같지 않다면 남도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둘이라는 둘이 이미 없거늘
하나라는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으랴
논하건대 처음ㆍ중간ㆍ나중의 지위는 서로 대립하여 성립되는데 둘이라는 둘이 이미 없거늘 하나라는 하나가 어찌 있을 수 있으랴.
또한 세 시간이 동시라고 말하지 말지니, 처음ㆍ중간ㆍ나중이란 명칭이 시간에 의해서 세워졌기 때문이다. 또 세 시간이 함께 존재한다고도 하지 말지니, 이 세 형상에 뒤섞이는 허물이 있게 하지 말라. 그대들도 이 세 지위가 동시라고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시간만이 있고 둘은 결정코 있지 않으리라.
만일 말하기를 “깨달음의 지혜가 빛 따위 법에 대하여 둘이라는 둘의 시간을 관찰하여 하나라는 하나의 지위를 세운다” 한다면 이는 세 지위는 거짓으론 있고, 참으론 없는 것이니, 그대들의 스승이 주장하는바 세 시간이 진실로 있다는 것에 어긴다.
그러므로 세 지위는 오직 거짓이요, 참이 아니니, 결과에 세 지위가 있다고 결정적으로 집착하지 말라.
도 다시 빛 따위 모든 법은 결정코 남이 없나니, 능동적으로 내는 인연이 성립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난다 함은 결정코 자기와 남과 그리고 함께하는 인연에 의하는 데 세 가지 모두가 옳지 못하다.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때문에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남의 성품을 떠나서, 오직
제 성품에서 만나는 것 아니요
남이나 함께 함에서 나는 것도 아니니
그러므로 난다 함은 결정코 없네
논하건대 한 법이 한 시간에 제대로 인과를 이룬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나지 않는다.
만일 한 본체 안에 두 형상이 있는 것을 따로따로 말하여 인과라 한다면 자기라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자기라 함은 남을 가려내고 스스로의 형상을 드러내는 것인데 결과는 원인에서 생기거늘 어찌 스스로 난다 하는가.
또 본체가 형상과 같다면 하나를 이루지 못할 것이요, 형상이 본체와 같다면 둘이 되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말한바 한 본체에 두 형상이 있어 인과가 된다고 한다면 이론은 반드시 성립되지 못하리라.
또 스스로 난다는 말은 이치에 의해서 나는 것인가. 이치에 의해서 난다면 스스로 나는 것이 아닐 것이요, 이치에 의해서 나지 않는다면 마치 나무 끝의 메아리 같으리니, 어찌 능히 모든 법이 스스로 난다고 결정적으로 표현하랴.
또 스스로 난다는 말은 지혜에 의해서 나는가 지혜에 의지하지 않고 난다면 이는 곧 다른 이에 의해서 나는 것이요, 지혜에 의해서 나지 않으면 미치고 취한 이의 소리와 같아서 근거가 없으리니 믿기 어렵다.
또 스스로 난다는 말은 다른 지헤를 내는가. 다른 지혜를 내지 않는다면 문득 스스로의 종지를 잃을 것이요, 다른 지혜를 내지 못한다면 말을 해도 아무 이익도 없거늘 무슨 까닭에 구태어 스스로 난다는 이론을 억지로 세우는가. 현전에 보건대 세간의 법이 인연에서 일어나거늘 스스로 난다고 말한다면 이와 서로 어긴다.
또 만일 스스로 난다면 응당 세간 법에 어기나니, 칼이 스스로 베지 못하고 바늘이 스스로 꿰매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스스로 난다 함은 그대를 의해서 나는가. 그대에 의해서 나지 않는다면 스스로 난다고 하지 못할 것이요, 그대에 의해서 나지 않았다면 의당 그대의 말이 아니리라. 딱하도다. 어리석은 무리는 스스로라는 말을 알지 못하는구나.
또 스스로 난다고 말하면 무인론(無因論:원인없다는 논리)과 같아서 온갖 결과를 내는 인연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스스로는 스스로를 내지 못하나니, 나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이미 멸해서 없는 것 같다.
만일 말하기를 “날 때에 그 본체가 이미 있다”고 한다면 마치 현재와 같아서 난다는 작용을 헛일일 것이다. 본체가 드러나는 것을 난다고 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나니, 드러남과 본체가 다르므로 문득 스스로 나는 법칙을 잃을 것이요, 드러남과 본체가 같다면 드러남은 본래 있을 것이요, 드러남이 본래 있다면 나는 작용은 없으리라. 그러므로 스스로 난다는 말은 결정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다른 이에 의해서 난다 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나니, 법이 날 때에는 자체가 아직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자체가 없다면 누구를 상대하여 다른이라 하리오.
인연을 다른 이라 한다면 스스로의 결과에 상대하겠거니와 스스로의 결과가 아직 있지 않거니 다른 이라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말하기를 “날 때에 스스로의 결과가 이미 있었다”고 한다면 인연은 쓸모가 없으리니, 다른 이라는 정의가 성립되지 않으리라.
드러나기 때문에 난다고 하여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나니, 드러남이 본체를 여의지 않았으므로 의당 본래부터 없지 않아야 하리라.
또 원인을 다른 이라 하여 결과와 다른 것에 상대시킨다면 결과가 원인과 다르므로 결과도 다른 이라 해야 하리라. 인과가 모두 다른 이라면 문득 스스로는 없을 것이요, 스스로가 없으므로 다른 이도 없으리니, 다른 이에 의해서 난다는 말은 문득 아무 정의가 없다.
또 지혜로써 결과를 관찰하여 원인을 다른 이라 한다면 결과와 원인은 반드시 함께 존속하지 못하리니, 원인일 때에 결과가 없다면 무엇이 다른 이에 의해서 나며, 결과일 때에 원인이 없다면 무엇에 의해서 남이 일어나랴.
어찌 지혜로써 앞과 뒤를 관찰하는 것 아니랴. 다른 이에 의해서 난다고 하여도 말에 실수가 없나니, 이른바 장래의결과를 관찰하거나 혹은 과거의 원인을 생각하면 인과가 모두 성취됨이 마치 아비와 아들과 같다 한다면 거짓 이름으로는 그럴 수 있거니와 실제에는 그렇지 못하다.
원인과 결과는 시기가 달라서 있음과 없음이 함께하지 못하거늘 어찌 가히 실제로 다른 이에게서 난다고 집착하랴. 부자와 같다는 말도 이치에 맞지 않나니, 세간의 부자는 흔히 동시에 잇으며, 비록 한 쪽이 없더라도 거짓으로 말할 수 있거니와 인과는 그렇지 않기 때문인데 법과 비유가 어찌 같겠는가.
만일 말하기를 “먼저 다른 물체에서 지혜로써 관찰하여 다른 형상을 취하고, 다음에 인과에서 뒤를 관찰하고 앞을 기억하여 나와 남, 두 형상의 차별을 건립하면 나중에 말을 낼 때에 앞의 두 가지에 저촉하지 않고 다만 생각을 따라 법이 다른 이에 의해서 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법과 비유가 같다 하여도 앞의 과실은 없다 한다면 이 변명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딴 물건은 동시에 인과가 될 이치가 없으니 원인과 결과는 반드시 때를 같이하지 않지만 부자 사이는 그렇지 않거늘 어찌 비유로 삼으랴.
또 만일 거짓으로 말한다면 이 이치가 없지 않거니와 그대는 참이라고 집착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맞지 않는다.
만일 말하기를 “어째서 허공을 씹는가. 현재에 보건대 인연이 능히 결과를 내기 때문에 결과의 모습이 저와 다르므로 저를 다른 이라” 한다. 어째서 번거로운 말로써 서로 따지고 질문할 필요가 있으리오. 뜻에 따라 말하지 말라. 다른 이와 다른 이 아닌 것은 반드시 내는 이와 나는 바의 차별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족히 기뻐할 일이다. 어찌 여러 말을 필요하랴. 말이 욕심에 따라 생기나니, 애써 따지고 추궁하지 말라 한다면, 그대 마음대로 항상 기뻐하라. 뉘라서 가로 막으랴. 근심과 기쁨은 자기의 마음에서 망상으로 생기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하기를 “반드시 내는 이와 나는 바가 있다”고 하니, 거짓인가 참인가. 그대 뜻에 따라 대답해 보라. 만일 거짓이라면 그대의 종지에 어기고, 만일 참이라면 따진 들 무슨 잘못이 있으랴. 나는 바가 있지 않거늘 어느 내는 이를 상대하랴. 내는 이가 이미 없다면 나는 바가 무엇을 상대하랴.
그러므로 으뜸가는 진리에서는 다른 이가 난다는 정의가 이뤄지지 않거늘 세속의 진리에 의해서 공여니 이익없는 말을 한다.
도대체 시비를 일으키는 까닭은 소견이 같지 않기 때문임을 온 세상이 다 아는 바인데 어찌 수고로이 공연한 말을 하는가. 그러므로 결정코 다른 이에 의해서 난다고 집착하지 말라.
나와 남 모두에서 난다고 하여도 역시 이치에 맞지 않나니, 앞과 같은 두 가지 실수가 그대의 종파에 쌓여 있기 때문이다.
따로따로의 이론이 이미 성립되지 않거늘 전체가 어찌 이뤄지랴. 이 까닭에 모든 법은 결정코 남이 없나니, 나와, 남 모두에서 난다 하여도 모두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다시 내는 이와 나는 바가 동시라거나 전후라 하여도 모두 이치에 맞지 않나니, 그러므로 결정코 남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를 풀기 위해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전후와 그리고 동시는
모두 말할 수 없나니
그러므로 남[生]과 병(甁)따위는
거짓일뿐이요 진실이 아니다
논하건대 만일 난 바의 법이 내는 이의 앞에 있는 것이라면 이미 내는 이를 여의었거니 난 바가 어디에 있으랴. 이 난 바 법이 내는 이를 여의었다면 내는 이는 문득 쓸모가 없을 것이다.
만일 난 바의 법이 내는 이의 뒤에 있다면 의지할 바가 없거늘 어찌 내는 이가 있으랴. 설사 난 바를 여의었다면 내는 이는 무엇에 쓰랴.
또 이 두 가지 법이 만일 동시가 아니라면 능히 내는 이는 누구의 것이며, 난 바 수동은 누구의 수동인가.
만일 난 바가 내는 이와 함께 존재한다면 이미 동시에 났으므로 의당 서로가 의지하지 않으리니, 마치 소의 두 뿔이 서로가 의지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내는 이와 난 바의 차별이 없으리라.
난 바가 있지 않으면 내는 이도 없을 것이요, 난 바가 있을 때엔 내는 이는 무엇에 쓰리오.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이 앞뒤라거나 동시라 함은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남[生]이 있지않건만 세속을 따라서 내는 이와 난 바가 있다고 말할 뿐이니, 시간의 같고 다름을 따져 묻지 말라.
또 다시 결과가 남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반드시 새롭다 옛날에 의하나니, 새로움과 옛이 없으므로 남이 성립되지 않는다. 이는 두 가지가 모두 모든 법의 제 모습이 아니어서 서로서로 어기어 반드시 동시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 동시라 하여도 의당 법을 떠나서 있을 것이요, 법을 떠나서 있다면 어느 것이 옛이며, 어느 것이 새로움이랴.
그대는 다른 물체끼리 서로 표시한다 하지 말라. 현전에 보이는 법 이외에 따로 옛과 새로움이 없다. 또 같은 본체가 함께 있다고 하지도 말지니, 서로 어기기 때문이다. 마치 선악의 마음과 같다. 앞뒤도 역시 아니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옛이 새로움 앞에 있다면
먼저 난다 함이 이치에 안 맞고
옛이 새로움 뒤에 있다면
나중에 난다 함이 맞지 않는다
논하건대 현재에 보이는 세간에서는 새로움을 앞이라 하고 옛을 나중이라 하나니, 어리석게 집착하여 옛을 먼저라 하고 새로움을 뒤라 하지 말라. 반드시 앞에 새로웠든 것이라 나중에 변하여서 옛 것으로 된다. 옛이 만일 앞에 있다면 새로움은 없을 것이니, 새로움은 앞에 난 것을 이름하고, 옛은 나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새로움이 없다면 옛도 없을 것이요, 새로움과 옛이 없다면 남이 어디에 의지해서 있으랴.
옛이 새로움 뒤에 있다 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나니, 법이 새로 일어날 때에 이미 옛이 없었다면 본체가 다름이 없으므로 나중도 역시 없으리라.
만일에 말하기를 “나중에 따로 옛이 난다”고 한다면, 이는 새로움이 일어나는 것이거늘 어찌 옛이라 하랴. 나중에 난 아이가 붉은 빛도 변하기 전에 늙은이라 한다면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나니, 만일 법이 처음 난 것을 옛 것이라 한다면 온갖 법에는 끝내 새로움이 없으리라. 새로움이 이미 없다면 옛도 역시 없으리니, 옛은 반드시 새로움으로써 앞잡이를 삼기 때문이다.
만일에 말하기를 “모든 법이 생각생각에 따로따로 나는 것을 항상 새로움이라 하여서 옛이랄 것이 도무지 없다” 한다면 옛이 이미 있지 않으므로 새로움도 없어야 된다. 옛을 가려내어 새로움이라 하는데 옛이 없다면 무엇을 가려내랴. 가릴 바가 없으므로 가리는 이도 없다.
그러므로 새로움과 옛이 있다고 집착하지 말라. 이미 새로움과 옛이 없다면 남이 어찌 성립되랴. 그러나 세간 사람들은 유위의법이 비슷하게 상속하는 것을 하나의 본체라 하고, 앞이 성했다가 나중이 쇠퇴함을 새로움과 옛이라 하는데 성현은 그들의 말을 따라서 옛과 새로움이 있다하고, 이에 의하여 남을 성립시키나 거짓이요, 진실은 아니다.
또 다시 결과의 본체가 난다면 반드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원인의 본체에 의해서 난다. 그러나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현재는 현재에 인해 일어나지 않고
과거ㆍ미래에 인함도 아니며
미래도 과거나 미래나
현재로 인해서 일어나지 않는다
능하건대 현재의 결과는 현재를 인하지 않나니, 인과가 동시라면 이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록 형상과 그림자 따위의 인과가 동시이지만 거짓이요, 참이 아니니, 세속을 따라서 말했을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이미 멸했거나 아직 나지 않은 것이다. 본체와 형상은 없는 것이며 원인의 작용도 있는 것 아니다.
또 현재의 법의 본체와 형상이 이미 성립되었거늘 어찌 그 세 세상의 원인을 인하여 일어나리오. 미래의 결과는 과거ㆍ미래에 인하지 않나니, 이미 멸한 것과 아직 나지 않은 것은 원인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어찌 현재가 장차 멸하려 할 때에 본체가 잇어 원인이 되어 미래의 결과를 내는 것이 아니랴 한다면 미래는 본체가 없거늘 난들 어디에 의지하랴.
만일 말하기를 “미래가 날 때에 본체가 있는 것을 현재라 한다” 하면, 무엇을 미래라 하는가. 그대는 남[生]이 곧 있음이라 하지 말라. 또 있음이 곧 남이라 하지도 말라.
만일 있음이 곧 남이라면 남은 곧 현재일 것이요, 남이 만일 있음이라면 있음은 미래일 것이다. 있음이 미래에 존재한다면 미래는 현재일 것이요, 남이 현재에 위치한다면 현재는 미래일 것이니, 그렇다면 그대들의 종파에서 세상 모습이 또렷또렷하다는 주장을 어길 것이며, 또 스스로가 말한바 남이 미래에 존재한다는 말에 어긴다.
그러므로 현재가 장차 멸하려 할 때를 원인으로 삼아서 미래의 결과를 일으킨다고 말하지 말지니, 날 때에 있거나 없거나에 모두 실수가 있기 때문이다.
또 다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미래의 본체와 형상이 구족해 있는데 이에 의해 남의 작용이 의지할 바를 얻게 되고, 남은 미래를 변천해서 현재에 들게 하고, 멸함은 현재를 변천해서 고거에 들게 한다”고 하거니와 그들의 말을 파하기 위해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만일 함께한다면 미래가 없고
멸했다면 가는 것이 아니리라
논하건대 마치 현재는 본체와 형상이 함께하므로 미래는 현재에도 들어오지 못한다. 혹은 미래는 현재 따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본체와 형상은 함께하지 않는다.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또 미래는 현재가 안되리라. 그러므로 과거와 같이 현재에 들지 못한다. 또 미래의 본체와 형상이 이미 갖추었다면 의당 나는 작용이 없으리니, 마치 현재와 같으리라. 혹은 미래 세상은 나는 작용이 없으리니, 현재가 아니므로 마치 과거와 같다. 빛 따위 모든 법은 비록 현재에 있으나 결정코 멸할 것이므로 역시 멸한다 한다. 이 현재의 법은 과러로 가지 못하나니, 시간이 결정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미래와 같다.
또 현재의 법은 과거와같아서 과거에로 가지 못하나니, 미래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과거의 시간은 현재가 갈 바 아니니, 마치 미래 따위와 같이 세간에 속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현재도 미래가 들어갈 바 아니니, 세간에 속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마치 미래와 같다.
과거ㆍ미래는 현재 따위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토끼의 뿔과 같이 본체도 형상도 모두 없으리라. 미래의 실체가 없거늘 남이 어디에 의해 있으리오. 그러므로 빛 따위의 결과가 난다고 집착하지 말라. 남이 이미 없다면 멸함도 역시 있지 않으련만 다만 세속을 따라서 멸함과 남이 있다고 말할 뿐이다. 있는 듯 하되 없음이 마치 꼭두각시 따위와 같다.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게송을 말했다.
법의 본체와 형상이 이러하니
눈흘림 따위 비유가 헛되지 않다
논하건대 빛 따위 모든 법은 앞뒤 시간의 살피가 없고 현재는 오래 머물지 않음이 마치 꼭두각시 따위와 같다.
또 빛 따위 법이 인연에서 났다면 마치 꼭두각시의 짓과 같아서 모두가 실제로 있지 않을 것이요, 인연에서 나지 않았다면 모두가 허공의 꽃과 같아서 성품과 형상이 모두 공하리니, 있다고 말하지 못하리라. 법이 이미 있지 않다면 남 따위는 결정코 없을 것인데 어찌 가히 남이 미래를 옮겨서 현재에 들게 하며, 멸함이 현재를 옮겨서 과거에 들게 한다 하리오.
또 다시 나고 머물고 멸하는 형상이 앞뒤가 동시라면 이치가 모두 성립되지 않나니, 그러므로 고집하지 말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남과 머무름과 사라짐의 셋 형상이
동시에 있다면 이뤄지지 않고
앞과 뒤에도 없거늘
어째서 있다고 집착하는가
논하건대 한 물체가 한 시간에 여러 모습이 있어서 서로 서로 어긴다 함은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만일 동시라고 집착한다면 본체는 각각 다를 것이요, 이미 본체가 하나라고 집착한다면 동시가 아니니라.
동시가 아니라고 집착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나니, 형상하는바 본체가 하나라하면 어찌 다른 때에 머무름과 멸함이 있지 않으랴. 머무름과 멸함의 지위에 이르러선 나는 모습이 이미 없어졌거늘 그래도 본체가 같다고 한다면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만일 말하기를 “앞뒤의형상은 다르나 본체는 같다”고 한다면 선이나 악이나 물질이나 마음의 본체도 하나이리라. 그러나 앞의 형상을 버리고 나중의 형상이 일어날 때에 본체와 형상이 같다면 의당 버리고 얻음이 있어야 되거늘 어찌 앞뒤의 본체가 같다고 집착하랴.
세 가지 본체가 가티 않으면 역시 이치에 맞지 않나니, 남과 머무름과 멸함이 온유위의 세계에 두루했기 때문이니, 세 가지 본체가 어찌 오직 제각기 한 형상일 뿐이랴.
제각기 한 형상이라 허락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나니, 멸함의 본체는 남이 없어서 의당 원인에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요, 남의 본체는 멸함이 없어서 의당 성품이 항상할 것이요, 머무름은 멸함도 남도 없어서 의당 유위의 법에 속하지 않으리라.
만일 하나하나에 다시 세 가지 형상이 있다고 허락한다면 앞에와 같은 허물이 있을 것이요, 혹은 더욱 무궁하리라. 동시라거나 앞뒤라거나의 세 가지 형상이 성립되지 않고 그 밖에 다른 길이 없거늘 어찌 있다고 집착하랴.
또 다시 만일 형상한 바를 여의고 따로 남 따위가 있다면 의당 빛 따위와 같이 남 따위의 형상이 있으리라.(그러나 이런 형상이 없으므로) 남 따위 형상은 의당 다른 실체가 없으리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만일 남 따위 모든 형상 밖에
따로 남 따위 형상이 있다면
머무름과 사라짐이 남고 같거나
남과 머무름이 사라짐과 같으리
논하건대 만일 남 따위의 형상이 스스로가 의지한 바와 함께한다면 스스로가 의지한 바와 같이 따로 남 따위가 있으리니, 이 남 따위 형상의 표시가 이미 같다면 그 본체는 어찌하여 차츰차츰 다름이 있으랴.
만일 말하기를 “남 따위가 빛 따위 법과 같아서 비록 남 따위와 함께하여도 그 본체는 다름이 있다” 한다면 장애 따위의 형상은 다르므로 본체가 다르다 함도 가하겠지만 남 따위는 형상이 같거늘 본체가 어찌 다르랴.
남 따위의 작용이 이미 차별이 있었으므로 의당 빛 따위가 그 본체가 각각 다른 것 같으리라 한다면 이 원인(이유)은 결정적이 아니다. 마치 눈 따위의 작용이 비록 많으나 본체는 하나인 것 같으므로 작용에 차별이 있다 하여 똑같이 예로 들 수 없다.
눈 따위의 작용은 다르나 시간은 같으므로 본체가 하나이거니와 남 따위는 작용이 다르고 시간도 다르므로 본체가 많으리라 한다면 남 따위는 무슨 까닭에 작용과 시간에 다름이 있는가. 자체가 함께 일어날 때엔 다른 시간을 기다리지 않거늘 작용은 어찌하여 시간을 기다림에 차이가 있으랴.
머무름과 사라짐, 두 형상은 처음에 이미 작용이 없었으니, 나중에도 역시 그러하리니, 본체에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남 따위가 모두 법과 함께한다면 증득하게 남이 있기 때문에 의당 서로 비슷해야 하리니, 하나하나가 모두 딴 작용이 있거나 혹은 스스로의 작용은 하나하나에 모두 없으리라. 그러므로 따로 남 따위가 있지 못하리라.
또 다시 빛 따위 모든 법이 남 따위의 형상과 그 본체가 다르다고 여기는가. 다르지 않다고 여기는가. 다르다 하면 옳지 못하니,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피동의 형상[所相]이 능동의 형상[能相]과 다르다면 어찌하여 본체가 항상치 않는가.
논하건대 빛 따위 모든 법이 만일 남 따위와 다르다면 택멸(擇滅:무위) 따위와 같아서 생멸이 없어야 하리라. 그들을 무상하다고 관찰하지 못하리니, 그들을 무상하다고 관찰하면 뒤바뀜이 되리라.
만일 말하기를 “빛 따위가 남 따위와 합하기 때문에 무상하다고 관찰하나 뒤바뀜은 아니다. 마치 지팡이나 뿔에 의하여 사람이나 소라고 하는 것 같다” 한다면 이것 또한 이치에 맞지 않나니, 남 따위와 다르기 때문이다. 의당 무위와 비슷해서 남 따위와 합하지 못하리라.
빛이나 만 따위의 본체와 형상이 다르다면 어찌하여 하나인 마음과 지혜로 관찰하여 빛 따위의 난다거나 빛 따위의 머무르거나 멸함을 말하랴.
그러므로 빛 따위 법은 남 따위와 다르지 않다.
다르지 않다 하여도 역시 그르니, 그러기에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다르지 않으므로 넷이 같을 것이요
아니면 모두가 있지 않음이리라
논하건대 만일 빛 따위 법이 남 따위와 다르지 않다면 의당 남 따위와 같아서 하나를 쪼개어 셋을 이루는 것 같으리니, 남 따위도 역시 셋을 섞어서 하나를 이루리라. 빛 따ㅣ 법과 본체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남 따위의 형상은 각각 자기의 본체를 잃어서 머무름 따위와 본체와 다르지 않으리라. 빛 따위도 그러하여서 역시 자체를 잃으니, 남 따위와 본체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당 피동적인 형상인 빛 따위가 없을 것이요, 피동적인 형상이 없으므로 능동적인 형상도 없어서 유위가 없으리라.
무위도 역시 그러하니, 마주 대하여 성립되었기 때문에 온갖 것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빛 따ㅣ 법은 남 따위와 다르지 않다.
또 다시 인과의 있다 없다가 모두 성립될 수 없으니, 남도 그에 의했기 때문에 역시 성립되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기에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있음은 있음의 법을 내지 않고
있음이 없음의 법도 내지 않으며
없음은 있음의 법을 내지 않고
없음이 없음의 법을 내지도 않는다
논하건대 있음이 있음의 법을 낸다면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남과 있음이 동시라면 서로 어기기 때문이다.
있음이 없음으 ㅣ법을 낸다 하여도 역시 성립되지 않나니, 마치 이미 사라진 것 같아서 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없음이 있음의 법을 내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마치 아직 나지 않은 없음은 능동적으로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없음이 없음의 법을 낸다 하여도 역시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마치 앞의두 없음이 인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혹은 두 없음의 법은 인과가 성립되지 않나니, 마치 끝내 없음은 인과가 아닌 것 같다.
이와 같이 이미 인과가 다른 실체라는 집착을 파했다.
같은 본체라는 집착을 파하기 위해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있음은 있음의 법을 이루지 못하고
있음은 없음의 법을 이루지도 않으며
없음은 있음의 법을 이루지 않고
없음은 없음의 법을 이루지도 않네
논하건대 있음의 법이 있음의 법을 이룬다면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있음의 법이 이미 이뤄졌으므로 이룸은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룸이 다시 이뤄진다면 이룸이 끝이 없을 것이다.
만일 이룸이 서로 다르다면 그 본체도 다르리니, 형상이 다른데 본체가 동일하다 함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형상과 그 본체는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이다.
있음이 없음의 법을 이룬다 하여도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그 형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괴로움과 즐거움 따위와 같다.
혹은 있음과 없음이 차별이 없기도 하리니, 있음과 없음의 본체가 하나라함은 이치에 어긴다.
없음이 있음의 법을 이룬다 하여도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있음이 없음을 이루는 허물과 같기 때문이다. 없음이 없음의 법을 이룬다 하여도 이치가 성립되지 않나니, 앞에서 있음과 없음이 서로 성립시키는 허물과 같기 때문이다.
혹은 없음이라 함은 수론(數論)에서 집착하는바 제 성품이 다른 이에 의해서 이뤄지지 않은 것이므로 비록 숨은 공능은 있으나 드러난 본체는 없다는 것이니, 그들의 집착하는 바에 의하기 때문에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있음ㆍ없음의 인과가 같다거나 다르다 함이 모두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결정코 남이 없다.
또다시 이미 남과 아직 나지 않음은 그 작용이 이미 멸했거나 아직 나지 않은 것이므로 모두 남이 있을 수 없다. 과거와 미래의 남을 계하고서 남이 있을 때에 그의 본체는 알 수 없는 것이르모 역시 남이 있을 수 없다.
만일 날 때에 두 가지의 반을 본체로 삼나니, 이른바 남은 반 부분이요, 반 부분은 나지 않음이라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기에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반 만 나고 반은 나지 않으면
하나가 날 때의 본체가 아니요
혹은 과거나 아직 나지 낳을 적에도
역시 날 때라 할 수 있으리라
논하건대 반은 나고 반은 나지 않으면 날 때의 본체가 아니니, 나기도 하고 나지 않기도 했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에 나는 것 같다.
마치 과거나 미래의남이 두 형상의 차별이 있으면 날 때의 본체가 아닌 것 같이, 날 때도 그러하리니, 난 것과 나지 않은 두 가지 형상의 차이가 있다면 어찌 하나의 날 때가 성립되랴.
혹은(위의 사실을 수긍할 때에) 이미 난 것과 아직 나지 않은 지위가 합하는 것을 하나의 날 때라 하리, 난 것과 나지 않은 두 형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그대가 집착하는바 반은 나고 반은 나지 않다는 것 같으니, 이는 날 때에는 과거나 미래의 남이 모두 제 성품을 잃는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남이 결정코 없다.
어찌 날 때에 두 형상을 갖추고 있지 않는가. 이미 난 것이 반 부분이요, 아직 나지 않은 것이 반 부분이다. 이미 난 것과 아직 나지 않은 것이 각각 한 모습이거늘 어찌 가히 서로서로 성립시키리라고 질문하겠는가 한다면 하나하나를 따로 관찰하면 날 때가 다를 수 있겠지만 통틀어 관찰하건대 두 형상이 어찌 날 때와 다르랴.
만일 말하기를 “날 때의 본체는 하나지만 형상이 둘이라” 하면 이에 난 것과 아직 나지 ㅇ낳은 지위의 본체가 둘이요, 형상이 다르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에 남이 날 때와다르거늘 어찌 본체는 하나인데 두 형상에 서로 어김이 있으랴.
형상이 이미 같지 않다면 본체는 둘이 되려니와, 하나의 부분이 두 부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날 때를 어기면 두 개의 반이 본체가 된닥 여기지 말라.
만일 반이 이미 일어난 것을 날 때라 한다면 아직 나지 않은 반은 의당 나지 않은 것이라 해야 하리라.
또 반이 난 뒤에는 나는 작용은 이미 없어졌고, 아직 나지 않은 반은 나는 작용이 아직 있지 않거늘 어찌 두 개의 반이 합쳐서 나는 때를 성립시키리오.
만일 나는 작용이 없는 것을 나는 때라 한다면 과거나 미래에 나는 지위도 나는 때라 하리니, 그렇다면 자기들의 종에서 세 지위에 차별이 있다는 주장에 어긴다. 그러므로 두 지위를 떠나서는 따로 나는 때가 없다. 나는 때가 이미 없으면 두 지위도 있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결정코 남이 없다.
또 다시 미혹한 무리에게 묻노니, 제 성품은 인연에 의해 일어나는가. 자연으로 일어나는가. 우선 처음의 것이 옳지 않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했다.
날 때가 만일 결과라면
본체는 날 때가 아닐 것이요
논하건대 만일 날 때에 본체가 인연에서 생긴다면 날 때가 아니리니, 이미 본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미래에 곧 일어나기 때문에 일어날 때라 하는데 미래의 본체가 없다면 무엇을 결과라 하랴.
만일 말하기를 “이 지위는 오는 세상을 관찰하여 현재에 이르를 때를 결과라” 한다면 역시 가까운 일을 말할 것인데 어찌하여 먼 이름을 세우는가. 이와 같이 날 때는 이미 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나지 않은 지위와 같으니 실제로 날 때가 아니다.
또 이 날 때라는 때는 먼 것에 속하기 때문에 마치 이미 멸한 지위와 같거늘 어찌 날 때라 하랴.
만일 날 때에 본체는 비록 있지 않으나 뭇 인연이 모이기 때문에 이미 가깝다는 이름을 얻었다 한다면, 똑같이 미래여서 본체는 모두가 있지 않다. 다른 것은 멀고 이는 가깝다면 차별은 무슨 때문이겠는가.
또 그대들의 종파에서 과거나 미래는 모두 멀다는 취지에도 어긴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집착하는 바는 다만 헛말이 있을 뿐이다.
나중의 것(자연으로 생긴다는 주장)도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날 때가 만일 자연이라면
날 때의 제 성품을 잃으리
논하건대 만일 날 때의 본체가 인연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면 의당 무위이어서 날 때의 성품을 잃을 것이요, 만일 인연에 의해서 생기지 않았어도 날 때라 할 수 있다면 온갖 무위의 법이 모두 날 때에 포함되리라.
또 인연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허공의 꽃을 닮았으리니, 본체가 이미 없는 것인데 어찌 날 때에 포함되랴.
만일 본체가 있지 않아도 날 때라 할 수 있다면 온갖 없음이 모두 날 때에 포섭되리라. 그러므로 모든 법은 진실로 날 때가 없다.
또 다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만일 날 때가 없다”면 이미 난 것과 장차 날 것도 있지 않으리라. 날 때가 이미 지난 것과 아직 날 때에 이르지 않은 것에 의하여 이미 난 것과 아직 나지 않은 두 지위를 건립하는 데 날 때가 없다면 두 지위도 역시 없으리라.
또 날 때가 없다면 두 지위가 합하리니, 그러므로 두 지위의 중간에 날 때가 있다고 하거니와 그들의 말을 파하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이미 난 것이 나지 않은 것과 다르면
따로 중간의 지위가 있으리
날 때가 두 지위와 다르면
의당 중간이 따로 있어야 하리라
논하건대 만일 말하기를 “이미 난 것과 나지 않은 것이 합하지 않나니, 날 때의 지위가 중간에 막혀 있기 때문이다. 만일 날 때가 없다면 두 지위가 합하리니, 마치 두 경계의 끝은 반드시 한계가 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날 때가 결정코 있다면 날 때와 두 지위에 중간이 있으리니, 아직 나지 않은 것과 날 때, 그리고 날 때와 난 것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중간에 다시 중간이 있어서 차츰차츰 늘어나서 끝없는 허물이 있으리라. 허물이 끝이 없으므로 날 때를 성립시키기 어렵다.
또 이미 난 것과 아직 나지 않은 것이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빛이나 소리 따위와 같이 별다른 중간이 엇다. 이미 중간이 없다면 날 때가 어찌 있으랴.
또 날 때의 지위가 미래에 있다면 이는 곧 아직 나지 않은 것이라 할 것이니, 미래에 속하기 때문이다. 만일 현재에 있다면 이는 곧 이미 난 것이라 불리우리니, 현재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만일 현재도 미래도 아니라면 날 때라 하지 못하리니, 마치 과거 따위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따로 날 때가 없다.
또 다시 날 때와 과거나 미래의 남 따위 세 지위가 각각 다르다고 허락할지라도 자세히 살피건대 날 때를 버리고서 이미 난 지위를 얻으리라 여기는가. 혹은 버리지 않고서 이 지위를 얻으리라 여기는가. 우선 처음의 것이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만일 날 때를 버리고서야
이미 난 때를 얻는다면
이는 이 밖의 별다른
얻는 때를 볼 수 있으리라
논하건대 만일 날 때를 버리고서 이미 난 지위를 얻는다면 아직 얻지 않은 지위와 이미 얻은 지위의두 중간에 얻을 때가 있음이 마치 날 때의 지위와 같으리라. 만일 그렇다면 나머지 밖에 또 나머지가 있어서 앞의 날 때와 같이 무궁한 허물이 있으리라. 허물이 무궁하기 때문에 얻는 시간을 세우기 어렵다.
만일 날 때를 버리고서 이미 난 지위를 얻는다면 이 두 지위를 떠나서는 따로 얻을 때가 없으리라. 아직 나지 않은 지위로부터 이미 난 지위에 이르는데 이 두 지위를 떠나서 따로 날 때를 얻을 수 없으리라.
또 날 때를 버리고서 이미 난 지위를 얻는다면 본체에 다름이 있으리니, 하나의 법이 나지 않으리라.
나중의 것(버리지 않고 얻음)도 옳지 않으니, 그러기에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만일 이미 난 지위에 이르른다면
반드시 날 때가 없을 것이요
이미 났는데 날 때가 있다면
어떻게 거기에서 일어났으랴
논하건대 이미 난 것과 날 때는 반드시 함께 존재하지 않나니 시간의 분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나 미래와 같다.
만일 이미 난 지위에 날 때가 있다면 혹은 동체이거나 혹은 다른 본체로서 함께 했으리라. 그렇다면 이미 난 것은 날 때에 의해서 일어나지 않았으리니, 스스로가 스스로에서 일어났다 함은 눈앞의 세상에 어긴다 함께 존재하는 것은 원인이 아니니, 마치 소의 두 뿔과 같다.
말일 말하기를 “한 본체에 두 형상이 같지 않으므로 원인이라 하여도 허물이 없으리라” 한다면 두 형상은 앞뒤의 것이므로 본체가 같지 않을 것이요, 두 형상이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과가 아니리라.
또 만일 동체라면 날 때와 이미 난 것이 자기나 다른이의 성품에서 잃기도 얻기도 하리니, 형상이 본체를 여의지 않았으므로 본체와 같을 것이요, 본체가 형상을 여의지 않았으므로 형상과 같으리라. 그러나 본체가 같은 데 형상이 다르다 함은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법과 시간은 법에 다름이 없으므로 시간은 다른데 법만이 같다고 하지 못하리라. 한 법이 한 시각에 같기도 하고 하여 인과가 된다 함은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마치 날 때로부터 이미 난 지위에 이르기까지 엎치락 뒤치락 따져 묻건대 허물됨이 여러 갈래인 것 같이 아직 나지 않은 지위로부터 날 때에 이르기까지 따져 묻는 일은 이치에 맞추어 생각하라.
그러므로 날 때가 따로 실제로 있지 않다.
또 다시 날 때와 이미 난 지위에는 차별이 있다고 주장하거니와 이는 진실한 까닭이 없는 것이어서 다만 헛된 말 만으로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이미 난 지위에 이르르지 않음을
날 때라고 주장한다면
어째서 병(甁)이 없다고 않는가
나지 않기는 같기 때문이다
논하건대 만일 날 때가 이미 난 지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장차 이 지위에 이르르려는 지위를 날 때라 하리라. 병은 이미 난 지위를 이름함인데 날 때는 아직 이미 난지위에 이르르지 못했으므로 병의 정체는 결정코 없다. 병의 정체가 이미 없거늘 남이 어디에 의존하랴. 없는 법을 날 때라 하지는 못하리라. 온갖 없음을 모두 나는 지위라 하지도 말지니, 그러므로 이에 대하여서야 날 때라는 이름을 세울 수 있다.
만일 날 때엔 그 본체가 이미 있으므로 그런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으니 이미 난 지위에 아직 이르르지 않은 것과 아직 나지 않은 지위는 차별이 없기 때문에 있다는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만일 말하기를 “날 때는 오는 세상의 마지막 지위이므로 본체가 전혀 없는 것 아니라”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나니, 동일하게 미래에 속하는 것이며, 동일하게 이미 난 것이 아니니, 앞뒤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미래의 세상이 반은 있고 반은 없다면 있다는 것은 이미 난 것과 같아서 세상이 어지러우리라. 그러므로 날 때의 지위라 함은 다만 헛이름일 뿐이다. 날 때가 이미 없다면 남도 역시 있지 않다.
또 다시 만일 말하기를 “날 때의 본체는 비록 원만치 않으나 작용이 일어나기 때문에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있지 않고 없지 않은 두 지위와 같지도 않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따로 날 때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 게송을 말했다.
날 때의 작용이 있다 하여
나지 않은 때를 추림이 아니며
본체가 원만치 못하다 하여
이미 난 지위를 구별함도 아니다
논하건대 아직 나지 않은 지위와 날 때는 작용 있음과 작용 없음으로서 두 지위가 차별된다 함이 이치에 맞지 않나니, 날 때의 본체가 없으면 작용도 있지 않을 것이요, 날 때의 본체가 있다면 의당 이미 난 것이리라.
설사 날 때에 공능이 있어 작용을 일으킨다 하여도 본체가 있지 않으므로 의당 아직 나지 않음이라 하리라.
아직 나지 않았다는 명칭 밖에 달리 조그만큼의 법도 있지 않나니, 다만 이미 일어난 것을 재외하기 위해 아직 나지 않았다 할뿐이다. 기위 아직 나지 않았다 한다면 어찌 능히 그를 가리랴.
만일 조그만큼의 본체라도 있다면 의당 이미 난 것이라 하려니와 이미 난 지위가 아니었으니, 의당 조그만큼의 본체도 없다.
한 법이 반은 있고 반은 없을 수 없나니, 있음과 없음이 서로 어기어 본체가 같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본체가 다르다고 한다면 있다면 이미 난 것이요, 없다면 아직 나지 않은 것이리니, 날 때가 어찌 있으랴. 그러므로 두 지위를 여의고서 따로 날 때가 없다.
또 다시 혹은 날 때가 곧 이미 난 지위이리니, 작용이 없지 않으므로 이미 난 시간과 같다.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앞 지위엔 날 때가 없었으나
뒷지위에야 바야흐로 있다고 하면
겸하여 이미 난 지위를 이루나니
그러므로 이 지위는 없지 않다
논하건대 아직 작용이 일어나지 않은 때를 앞지위라 하는데 이 앞지위에서는 아직 날 때가 없거니와 바야흐로 작용이 일어날 때를 뒷지위라 하는데 이 뒷지위에서야 비로소 날 때가 있다. 그렇다면 날 때가 이미 난 지위를 이루나니, 앞보다 다름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이미 난 때와 같으니, 본체가 전혀 없는 것 아니어서 가히 앞과 다르다 할 수 있다.
이른바 겸한다는 것은 전혀 없음을 버리는 것이니, 이는 곧 나지 않은 때를 전혀 없는 지위라 하는데 날 때엔 그를 버리기 때문에 그는 있는 것이요, 없는 것은 아니다. 이 까닭에 앞의 것을 겸하여 이미 난 지위를 이룬다.
만일 없음의 지위를 버리면 반드시 있음의 시간에 이르르나니, 있음이란 곧 이미 난 지위여서 중간에 딴지위가 없거늘 어디에 의해서 따로 날 때가 있다고 세우랴. 그러므로 날 때가 곧 이미 난 지위이니, 없지 않기 때문에 이미 난 시간과 같다.
또 이 날 때는 본체가 있다고 허락해야 하리라. 만일 본체가 없다면 나는 작용도 없을 것이니, 본체와 작용이 모두 없으면 날 때가 어찌 있으랴. 만일 본체와 작용이 엇어도 날 때가 있다고 하면 온갖 없음이 모두 몽땅 일어니리니, 없음은 다름이 없기 때문에 이 날 때와 같다.
또 만일 날 때의 본체와 작용이 있지 않다면 인연이 화합해도 쓸모가 없으리라. 있음이없음을 내지 못한다 함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날때의 지위는 있는 것이요, 없는 것 아니다. 있다면 곧 이미 난 것이어서 다시 딴 지위가 없나니, 그러므로 따로 날 때가 있다고 주장하지 말라.
또 다시 따로 날 때가 없다는 이치를 믿고 받아들여라. 어리석어서 여전히 고집한다면 다시 대략 따져 보자. 이와 같은 날 때는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이미 일어난 것이요, 없다면 나지 않은 것이다. 이것을 제하고 다시 무엇이 날 때의 지위의 본체가 되랴. 이전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있을 때를 이미 났다 하고
없을 때를 일어나기 전이라 하니
이런 있음과 없음을 제하고는
무엇을 날 때라 하겠는가
논하건대 집착하는바 날 때란 그 성품을 추구하건대 두 종류에 불과하나니, 이른바 있음과 없음이다. 이와 같은 있음과 없음은 두 지위에 속하는 바이니, 이것을 제하고는 별달리 중간에 날 때가 없다. 그대들은 무슨 까닭에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억지로 고집하는가.
이것은 지극히 거칠고 얕은 일인데도 그대들인 미혹하는데 깊고 미세한 것을 그대들이 생각해서 헤아릴 수 있으랴.
그러므로 따로 날 때가 없음을 믿어라. 이미 날 때가 없다면 남이 어찌 존재하랴. 그러므로 모든 법은 진리에 있어서 실제로 남이 없다. 이미 남이 없으면 머무름과 멸함도 그러하리니, 남을 선두로 하기 때문에 있지 않다는 이치가 성립된다. 그러므로 머무름과 멸함을 따로 막는 것이다.
또다시 이미 결과가 먼저부터 있다거나 없다는 것을 널리 분별하여 파했거니와 통틀어 결과가 먼저부터 있다함을 막기 위하여 품의 마지막에 다시 이런 게송을 말했다.
모든 집착있는 법이 원인을 떠나서는
따로 이뤄진 결과가 없다 하면
옮겨 나기와 변하여 멸하는 일은
원칙적으로 성립되지 않아야 하리
논하건대 수론에서 집착하는바 결과는 원인을 여의지 않았고, 결과는 원인과 같아서 본체가 본래부터 실제로 있다 하거니와 이러한 결과의 본체는 생멸이 성립되지 않는다.
결과가 원인을 여의지 않았으므로 원인의 항상함과 같다. 그러므로 인과의 본체는 하나여서 차별된 까닭이 없다.
모든 법의 성품은 항상 하여서 늘거나 줄지 않나니, 그렇다면 온갖 작위는 그 공력이 헛되리니, 조그만큼이라도 하는 바가 있다면 스스로의 논리에 어긴다 있음은 멸하지 않고 없음은 나지 못하리라.
요소[大] 따위도 생멸의 이치가 없으리니, 이는 곧 제성품이기 때문이다. 마치 괴로움ㆍ즐거움ㆍ어리석음 따위와 같다.
또 요소 따위는 제 성품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니, 스스로가 스스로를 일으킨다면 현실의 세상과 어기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간이 눈앞에 보는 인과와 생멸의 작용은 일체가 모두 없으리라. 세간이 눈앞에 아는 것도 그대들은 헐뜯고 비방하거늘 하물며 깊고 숨은 진리를 믿어 받들겠는가.
이와 같이 관찰하건대 남은 모두가 실제로 있지 않나니, 남이 실제로 없기 때문에 멸함도 실제로 없다. 다만 세간에 따라서 생멸이 있다고 말할 뿐이다. 세간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세속이요, 진리는 아니다. 으뜸가는 진리에는 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온갖 법의 성품은 아주 없음도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다.
생멸이 이미 없다면 법은 항상하리라 한다면 앞에서 이미 항상한 성품이 실제에는 없다고 널리 파한 것 같다.
만일 그렇다면 온갖 법의 성품은 없으리라 한다면 그렇지 않나니, 나는 말하기를 “세속의 법은 없지 않다”한 바 있기 때문이다.
어찌 우리 종파에서도 말하기를 “하나의 제 성품이 굴러 변하는 힘 때문에 되지 않는바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비록 하는 바가 있다 하여도 나거나 멸하거나 아주 없거나 항상함 따위의 허물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결과가 일어나더라도 나지 않나니, 성품이 변하여 이뤄지기 때문이요, 결과가 물러간다 하여도 멸하지 않나니, 본 성품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결과의 성품은 항상함이 아니니, 앞의 변함이 멸하기 때문이요, 결과의 성품은 아주 없음이 아니니, 나중의 변함이 나기 때문이다. 굴러 변함은 항상치 않기 때문에 일정하게 있지 않고 제 성품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하게 없지 않다. 한다면 그것도 옳지 않은 말이니, 모든 법의 생멸하는 이치는 이미 성립되지 않았거늘 그대의 종파에서 집착하는 굴러 변함이 어찌 존재하랴.
또 굴러 변한다는 말과 제 성품 따위는 전에 이미 널리 파했으니, 거듭 집착하지 않기 바란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말하는 바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우리들 경부(經部:소승 부파)에서는 인연이 호합하여 끊임없이 결과를 내고 결과가 일어나면 원인에 맞추어 다시 다음의 것을 낸다” 이와 같이 차츰차츰 바뀌어 시초 없는 예부터 인과가 잇달아 연속하여 끊이지 않으므로 나거나 멸하거나 아주 없거나 항상함의 허물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연속함은 시초가 없으므로 남이 없고, 아직 물리치는 방법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연속함은 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멸함이 있지 않다.
연속은 바뀌어 변하므로 항상함이 아니요, 연속은 잇달았으므로 아주 없음이 아니며, 한 성품이 아니므로 굴러 변함도 아니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옳지 않나니, 생멸이 있다면 연속이 있을 수 있거니와 생멸이 없거늘 연속함이 어찌 존재하랴. 생멸이 없는 이치는 앞서 이미 널리 말한 바 있다.
연속함이 마지막이 있다면 이는 아주 없음이요, 연속함이 시초가 없다면 이는 항상함이니, 연속하는 본체는 하나이면서도 굴러 변함이 있다. 그러므로 연속이 있다고 주장함은 허물이 더욱 많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우리[說一切有部]들은 모든 법이 항상 있다”고 한다. 온갖 유위의 법은 예부터 오늘까지 성품이나 형상이 모두 실제로 있고, 그에 부응하여 뒤의 것을 일으켜 세 세상이 변천해 흐름으로써아주 없음ㆍ항상함ㆍ남ㆍ멸함 따위의 허물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본체가 항상 있으므로 남이 없고 멸함이 없으며, 유위의 형상이 합하기 때문에 항상함이 아니요, 결과가 불어나서 원인에 부응하기 때문에 아주 없음이 아니요, 생각생각에 따르기 때문에 변함도 연속함도 아니라 한다.
그러나 이것도 옳지 못하다. 항상 있다고 말하는 종파는 앞에 이미 널리 파했기 때문이다. 빛 따위 모든 법의 본체가 항상 있다면 의당 무위의 법과 비슷해서 유의의 형상을 여의었으리니, 그렇다면 수론에서 말하는바 온갖 것이 모두 항상하다는 주장과 같으리라.
작용에 생멸이 있다고도 말하지 말지니, 작용이 본체를 여의면 의당 본체와 같아서 항상할 것이요, 본체가 작용을 여의지 않았으므로 항상 있는 것 아니리라.
만일 작용이 본래 있다면 남이라 하지 못할 것이요, 작용이 본래 없다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작용이 아직 나지 않은 지위에는 아직 남의 작용이 없으니, 남이라 하지 못할 것이요, 작용이 이미 난 지위에는 남의 작용이 이미 쉬었으므로 역시 남이라 하지 못하리라.
이 두 지위를 제하고서 따로 날 때가 엇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널리 설명한 바 있다. 그러므로 모든 법의 작용을 낸다고 집착하지 말라. 작용이 이미 없다면 멸함도 역시 있는 것 아니리라.
또 많은 빛 따위가 유위의 형상과 합하기 때문에 무상하다 한다면 이 유위의 형상은 다른 형상과 합하는 일이 엇으면 무상함이 아니리라.
만일 이 형상이 다른 형상과 합한다 하면 끝이 없으리라.
만일 말하기를 “유위의 법은 크고 작은 형상이 있어서 엇갈리므로 형상과 형상이 끝없는 허물이 되지는 않으리라”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니, 빛 따위 법이 다른 형상과 합하기 때문에 능동적인 형상이라 하지 못하는 것 같이(요소의) 남 따위도 그러하여서 다른 형상과 합한다 하여 능동적인 형상은 아니리라.
또 요소의 (큰)모습은 피동적인 형상인 빛 따위 모든 법으로서 그의 능동적인 형상을 삼지 않는 것 같이 작은 형상도 그러하여서 피동적인 형상인 요소의 남 따위로써 능동적인 형상을 삼지 못한다.
만일 따로 형상이 있다면 의당 무궁함에 이르를 것이요, 만일 따로 형상이 없다면 의당 항상 머무름이 될 것이다.
또 유위의 형상은 결정코 실제로 있는 것 아니니, 만일 실제로 있다면 이치에 어긴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무위의 법과 같은 무위의 형상이 있다면 법을 떠나서 실제로 없는데 이것도 그러하리니, 동일하게 세 형상이기 때문이다.
무위의 법이 실제로 있다는 일은 전에 이미 널리 막았는데 온갖 유위의 법도 실제로 있지 않나니, 지혜로써 분별하건대 모두가 ‘공’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또 무위에 상대하여 유위의 법을 세우는데 무위가 없기 때문에 유위도 없다. 유위와 무위가 인연에서 일어났다면 허깨비와 같은 것이요, 만일 인연을 빌리지 않는다면 허공의 꽃과 같으리라. 그러므로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집착하지 말라.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유위와 무위는 모두가 세속의 분별로 거짓 세운 것으로서 그의 본체는 모두가 공하다.
유위와 무위를 제하고는 따로 딴법이 없다. 설사 있다 하여도 빈 말일 뿐이니, 유위와 무위는 온갖 법을 두루 포섭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공하기 때문에 모든 법은 모두가 공하다. 공한 가운데는 전혀 분별과 장난말이 없나니, 비고 통하고 걸림없어서 그대로가 거룩한 지혜의 광명이다.
그러므로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온갖 법은 본래부터 모두가 공하니, 공하면 곧 성품 없다. 성품이 없기 때문에 곧 반야바라밀다이다. 거기에도 도무지 조그만큼의 법도 남이라 멸함이라 아주 없음이라 항상함이라 하나라 다름이라 옴이라 감이라 할 것이 없다.
제석아, 잘 알아야 한다. 만일 어떤 청정한 믿음을 가진 착한 남자나 착한 여인이 능히 이와 같이 말하면 반야바라밀다를 헐뜯지 않는다 하거니와 이와 다르게 말하면 모두가 헐뜯는다” 한다.
만일 항상 공함을 말하면 아주 없음에 떨어지니, 항상 있음을 막기 때문에 이런 치우침에 떨어지지 않거니와 항상하여 공하지 않음을 집착하면 아주 없음에 떨어진다. 항상 인과 없음을 아주 없음이라 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바는 모두가 막는 말이니, 막는다 함은 생멸 따위의 집착을 막는 것이다.
남이 없으면 멸하지 않나니, 다만 남을 막기 위한 것이요, 멸함이 없으면 나지 않나니, 오직 멸함을 막기 위한 것이다. 아주 없음과 항상함 따위도 이에 견주어 알어라.
열반에 들 때에 생사가 끊어져 없어진다 하거니와 이는 방편의 말이어서 참이 아니요 거짓이다. 예컨대 하늘 세계에 항상함과 즐거움 따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오직 세속을 따라서 하는 말일 뿐이요, 진실에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그러므로 앞서 말한 모든 글과 말로써 마땅함에 따라 온갖 집착을 파하라.
우리들이 모두가 허망하거늘 무엇을 참됨으로 복귀한다 하는가. 이른바 끝내 공한 자리이니, 마음과 말의 길이 끊어지고 분별과 희론이 모두 미치지 못한다. 오직 성현들의 속 지혜로써 만이 증득할 바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똑바로 수행하여 이 참 ‘공’을 증득하고 저 허망한 집착을 파하라. - 016_0649_a_05L復次,已別分別根境無我,今當摠辦有爲相空,謂色心等諸有爲法,具生、住、滅三有爲相。生爲首故,先當破生。生相旣亡,住、滅隨遣。有說果體本無#而生,爲破彼言,故說頌曰:‘若本無而生 先無何不起。’論曰:種等諸因至變壞位,能引芽等諸果令生。若諸因中,本無諸果,何故芽等此位方生?後位如先,果應不起。先位如後,果亦應生。又從此因,應生彼果,或應此果從彼因生,若此彼因無彼此果而不生者,彼此因力應亦不生,同本無故。若爾,一切因果皆無,便違自宗所說因果。有說果體本有#而生,爲破彼言,復說頌曰:‘本有而生者 後有復應生。’論曰:若諸因中,本有諸果,何故芽等後不更生?後位如今,果應更起,今位如後,果不應生。又果本來因中有體,何故此位,乃說爲生?若言今時,方得顯者,顯不離體,應本非無,今位如先亦應不顯。先同此位,顯應非無,顯本非無,今復顯者,後應更顯,是則無窮。本有與生義相乖反,言果本有,生必不成。旣無有生,果義便失,果義旣失,便無有因,則違自宗有因果義。復次,果先無論作如是言,果或違因,故非竝有。此言非理,故次頌曰:‘果若能違因 先無不應理。’論曰:勝論者說果或違因,或不違因。果違因者,合違於業,合果後生,前業滅故。又相違法略有二種:一能障㝵,二能壞滅。後謂合德,滅壞業因,初謂合德,障㝵重等,令其所起,墜等業無,如是合德,其體未有,應不能違先所起業。世閒未見無體能違,汝不應言合德與業如囚與膾,俱有相違,勿違自宗因果不竝。若許一念業與合俱,後亦應然,無差別故,便違自論及世共知。故不應言果先非有。復次,果先有論作如是言,一切因中果體先有。此亦非理,故次頌曰:‘果立因無用 先有亦不成。’論曰:數論者說一切因中,果體先有。此亦不然,生果顯果,故說名因,果體本來已生已顯,因便無用。所以者何?體與顯、生不相離故,應如其體,從本非無,本有顯生,因義非有。因非有故,果義不成,便違自宗立有因果。復次,諸法生時,義不成故,不應定執諸法有生。所以者何?故次頌曰:‘此時非有生 彼時亦無生 此彼時無生何時當有生。’論曰:果已有時,其體有故,如本有法,應不名生。果未有時,其體無故,如定無法,亦不名生。又諸果法用起名生,其體旣無,用依何立?又能生果,故說名因,果體旣無,因何所起?旣無所起,因義不成。因義不存,果從何出?除此二位,更無生時,故定無生,如虛空等。又若執法體恒是有,定不名生,無所起故。用雖有起,此在未來,無故非生,現在已有,自宗不許。除此二位,無別生時。是故無生其理決定。或勝論執多實爲因,積集共生,一合德果,闕衆緣時,未有合德。由是故說此時無生,具衆緣時,已有合德,由是故說彼時無生。以初合時,合體有故,應如後位,不得名生。後位已生,不重生故,可不名生,初位不然,名生何咎?後若不生,果應違實,而汝不許果實相違,障破相違,合德違業,不違於實,前已略明。除此彼時,更無異位。是故合德決定無生。如是色等依託實因。實未有時,果體未有,由是故說此時無生,實已有時,果體已有,由是故說彼時無生。以初有時,色等有故,應如後位。不得名生。離此彼時,更無別位。是故色等決定無生。如是合德障㝵重等,令其不生,墜墮等業,此能障體,有時無時,彼業不生,准前應說離有無時,更無異位,故墜等業決定無生。或數論執乳等因變,成酪等果,故說名生。因體有時,因性未變,由是故說此時無生。若於爾時,因性已變,便失因性,應不名因,果體有時,因卽成果。由是故說彼時無生。若於爾時,果體生者,應異法起,非卽因成。除此彼時,更無異位。是故酪等決定無生。自性等因成大等果,准此推究皆非有生。復次,所生無故,生義不成。所以者何?故次頌曰:‘如生於自性 生義旣爲無 於他性亦然生義何成有。’論曰:說常有宗色等五蘊、數論外道樂等三德,諸法生時,不令自性有變異故,生義不成。法未生時,一切生用皆未有故,生義不成,諸法生時,不令他性有變異故,生義不成,諸法生已,一切生用皆已息故,生義不成。不可說言色等、樂等相用有變,故說名生。以於生時,性與相用若一若異,過等違宗。亦不可言色等、樂等自性有變,故說名生,勿於生時,色等、樂等變成受等、苦等自性。有作是言:果先有論,有前失故,生義可無,果先無論,因緣和合,果體將成,生義應有。果將成時,其體未有,如何可說果從緣生?知因有能,當成果體。如言煮飯,故說果生。若爾,生名應假#非實,色等生時,猶未有故,如是假說,理亦無違。以生時無,後方見故。若爾,見位乃可名生,以於見時方說生故,如何不了言理而問?雖見時說,非見時生,說因見生,非因生故。何故生時,無有此見?以見無故,知生時無,如何不知義理而答?豈不見無,名爲無見?何得以問,而作其答?若爾,應有問答無窮,無見見無,言無盡故。又亦不可說無爲生,無似空花,違生理故。至現有位,亦不名生,有似無爲,違生理故,所生無故,生義不成。復次,執有生者作如是言,果有三時,前後差別,將成作用,及究竟時。顯彼不成,故次頌曰:‘初中後三位 生前定不成。’論曰:果先無論於未生時,三位不成,無無別故。初、中、後位依有而彰,未生體無,如何可立?或應許果未起非無,見彼三時唯依有故。果先有論於未生時,三位不成,有無別故,有體無別#相用未興,如何可言三時有異?又此三位旣不同時,生亦不成。故次頌曰:‘二二旣爲無 一一如何有。’論曰:初、中、後位相待而成,二二旣無,一一豈有?亦不可說三位同時,初、中、後名依時立故。又不可說三時竝有,勿有此三相雜亂過。汝亦不許三位同時,故有一時,三定非有。若言覺慧於色等法,觀二二時,立一一位,是則三位假有眞無,違汝師宗,三時實有。是故三位唯假非眞,不應定執果有三位。復次,色等諸法決定無生,能生因緣不成立故。生者決定從自,從他,從俱因緣三皆不可。爲顯此義,故說頌曰:‘非離於他性 唯從自性生 非從他及俱故生定非有。’論曰:一法一時,自爲因果,理不成故,非從自生。若一體中,有二相別,說爲因果,自義不成。自言遮他,顯於自相,果從因起,何謂自生?又體如相,應不成一,相如其體,應不成二。是故所言一體二相,說爲因果,理必不成。又自生言,依義生,不依義生者,則非自生,不依義生,便同樹響,何能定表諸法自生?又自生言依慧生,不依慧生者,則從他生,不依慧生,應同狂醉,言無根系,難可信依。又自生言生他解,不生他解者,便失自宗,他解不生,發言無益,何緣强立自生論耶?現見世閒法從緣起,言自生者,與此相違。又若自生應違世法,刀不自割,鍼不自縫。又自生言,依汝生,不依汝生者,非謂自生,不依汝生,應非汝說。哀哉!愚昧不識自言。又言自生,同無因論,撥無一切生果因緣。有作是言,自不生自,生時無故。如已滅無。若言生時,其體已有,應如現在,生用唐捐。體顯名生,亦不應理,顯與體異,便失自生,顯與體同,顯應本有,顯若本有,生用應無。故自生言,定不中理。言從他起,理亦不然,以法生時,自體未有。旣無有自,熟對名他?因緣名他,對於自果,自果未有,他義不成。若言生時,自果已有,因緣無用,非謂他生顯故名生,亦不應理。顯不離體,應本非無。又因名他,對異於果,果異因故,應亦名他。因果俱他,便無有自,自非有故,他亦應無。從他生言,便無有義,又慧觀果,說因爲他,果之與因,必不俱有,因時無果,誰藉他生,果時無因,從誰他起?豈不以慧觀後觀前?說從他生,言無有失,謂觀當果,或念過因,因果俱成,猶如父子,假名可爾,理實不然。因果異時,有無不竝,如何可執實從他生?如父子言,亦不應理,世閒父子多有同時,雖復一無,而可假說,因果不爾,法喩豈同?若謂:先時,於異體物,以慧觀察,取其異相,次於因果,觀後念前,建立自他二相差別,後發語時,不觸前二,但隨想說法從他生。故法喩同,無前過失,此救非理。所以者何?異物同時無因果義,因之與果,必不同時,父子不然,何得爲喩?又若假說此義非無,汝執爲眞,故不應理。若言何爲咀嚼虛空?現見因緣,能生於果,果相異彼說彼爲他,何假繁詞,固相徵難?隨意勿說。他與非他,必有能生、所生差別,此足爲喜。何藉多言?言隨欲生,無勞窮詰,恣汝常喜。熟與相遮?憂、喜自心妄想生故。汝言必有能生、所生,爲假,爲眞?隨汝意答。若言是假,違汝所宗,若言是眞,難詰何咎?所生未有,對何能生?能生已無,所生何對?故就勝義,他生不成,依世俗論,徒言無益。夫興諍論,爲見不同,擧世咸知,何勞汎說?故不應執定從他生。自他俱生,亦不中理,如前二失積在汝宗。別旣不成,摠如何立?由是諸法決定無生,自他俱生,皆非理故。復次,能生、所生同時前後,俱不應理,故定無生。所以者何?故次頌曰:‘前後及同時 二俱不可說 故生與甁等唯假有非眞。’論曰:若所生法在能生前,旣離能生,所生何有?此所生法設離能生,是則能生便爲無用。若所生法在能生後,無所依止,何有能生?設離所生,能生何用?又此二法若不同時,能是誰能,所爲何所?若所生法與能生俱,生旣同時,應不相待。如牛兩角,互不相依。應無能生、所生差別,所生未有,能生亦無,所生有時,能生何用?如是二法前後同時,理俱不成。故生非有,隨俗說有,能生、所生不可推徵時分同異。復次,執果有生,必依新舊,新舊無故,生不得成。由二俱非,諸法自相互相違反,必不同時。設許同時,應離法有。若離法有,誰舊誰新?汝不應言異體相表。現見法外,無舊無新,亦不應言同體俱有,更相違故,如善惡心,前後亦非。故次頌曰:‘舊若在新前 前生不應理 舊若居新後後生理不成。’論曰:現見世閒前新後舊,不應蔽執前舊後新。要前有新,後轉成舊。舊若前有,新則爲無,新名前生,舊名後故。新若無者,舊亦應無,新舊旣無,生依何有?舊居新後,理亦不然。法新起時,旣無有舊,體無別故,後亦應無。若言後時別生舊體,是則新起,何謂舊生?後生嬰孩,赤色未變,而名耆舊,理必不然。若法初生,而名舊者,則一切法畢竟無新。新旣爲無,舊亦非有,舊必以新爲前導故。若謂:諸法念念別生,恒名爲新,都無舊者,舊旣非有,新亦應無。簡舊名新,舊無何簡?所簡無故,能簡亦無。是故不應執有新舊。旣無新舊,生豈得成?然諸世閒見有爲法相似相續,謂爲一體,前盛後衰,說爲新舊,聖隨彼,說有舊有新,依此立生,假而非實。復次,果體若生,必依過去、未來、現在因體而生,然皆不成,故次頌曰:‘現非因現起 亦非因去來 未來亦不因去來今世起。’論曰:現在果法非現因生,因果同時,理不成故。雖形影等,因果同時,是假非眞,隨俗而說。去來二世,已滅未生。體相是無,因用非有。又現在法體相已成,豈更藉他三世因起?未來果法不因去來,已滅、未生,無因用故。豈不現在將欲滅時,有體爲因,生未來果,未來無體,生何所依?若言未來生時,有體應名現在,何謂未來?汝不應言生卽是有,亦不可說有卽是生。有若卽生,生應現在。生若卽有,有應未來。有在未來,未來應現在。生居現在,現在應未來,則違汝宗,世相揩定,亦違自說生在未來。故不可言現在將滅,爲因引起,未來果生,生時有無皆有失故。復次,有說:未來體相具有,由此生用得有所依,生遷未來,令入現在#滅遷現在,令入過去。爲破彼言,故說頌曰:‘若具卽無來 旣滅應非往。’論曰:猶如現在,體相具故,未來不應來入現在。或應未來非現等故,體相不具。猶若空花。又應未來非現在故,猶如過去,不入現在。又若未來體相已具,應無生用,猶如現在。或未來世生用應無,以非現在,猶如過去。色等諸法雖居現在#定當滅故,亦名爲滅。此現在法不往過去,時定異故。猶如未來。又現在法應如過去,不往過去,由非未來。又過去時,非現所往,如未來等世所攝故。現在亦非未來所入,世所攝故,猶如未來。過去、未來非現等故,應如兔角,體相俱無。未來體無,生依何有?故不應執色等果生。生旣是無,滅亦非有,但隨俗說有滅有生。似有而無,猶如幻等。爲顯此義,復說頌曰:‘法體相如是 幻等喩非虛。’論曰:色等諸法前後際無,現不久停,猶如幻等。又色等法若從緣生,如幻所爲,皆非實有,非緣生者,皆似空花,性相俱空,不應言有。法旣非有,生等定無,如何可說生遷未來,令入現在,滅遷現在,令入過去?復次,生、住、滅相前後同時,理俱不成,故不應執。所以者何?故次頌曰:生住滅三相 同時有不成 前後亦爲無如何執爲有。’論曰:一體一時,有衆多相,互相違反,理必不成。若執同時,體應各異,旣執體一,應不同時。執不同時,亦不應理,所相體一,如何異時,法體生時,住、滅未有,至住、滅位,生相已無,而言體同#極爲迷謬。若言前後相異體同,善、惡、色、心體,應是一。然捨前相,後相起時,體與相同,應有捨、得,如何可執前後體同?三體不同,亦不應理,以生、住、滅遍諸有爲,三體如何各唯一相?許各一相,理亦不然,滅體無生,應非因起,生體無滅,應性是常,住無滅、生,應非蘊攝,若許一一,復有三相,有如前過,或復無窮。同時前後,三相不成,更無異途,如何執有?復次,若離所相,別有生等,應如色等,有生等相。則生等相,應無異體。所以者何?故次頌曰:‘若生等諸相 復別有生等 應住滅如生或生住如滅。’論曰:若生等相自所依俱,如自所依,別有生等,此生等相幖幟旣同,其體如何展轉有異?若言生等如色等法,雖生等俱,而體有異,㝵等相別,體異可然,生等相同,體如何異?生等作用旣有差別,應如色等,其體各異,此因不定。如眼等根,用雖有多,而體一故,用有差別,不可例同。眼等用殊,時同故,體一生等,用別時異故,體多生等,何緣用時有異,自體俱起,不待異時,作用如何待時有異?住、滅二相初旣,用無#後亦應然,體無別故。或復生等同與法俱,等有生故,應互相似,一一皆有他諸作用,或自作用,一一皆無。是故不應別有生等。復次,色等諸法與生等相,其體爲異#爲不異耶?異且不然。故次頌曰:‘所相異能相 何爲體非常。’論曰:色等諸法若異生等,如擇滅等,應無生滅。不應觀彼皆是無常,觀彼無常,應成顚倒。若言:色等與生等合,雖觀無常,而非顚倒。如名杖角,以作人牛。此不應爾,異生等故。應似無爲,非生等合。色等、生等體相若異,如何以一心慧而觀,謂色等生,色等住滅?故色等法非異生等,不異亦非。故次頌曰:‘不異四應同 或復全非有。’論曰:若色等法不異生等,應如生等,析一成三,生等亦應混三成一。與色等法,體不異故。或生等相各失自體,與其住等,體不異故,色等亦然,應失自體,與其生等體爲一故。是則應無所相,色等所相無故,能相亦無,則無有爲。無爲亦爾,相待立故,一切應無,故色等法,非異生等。復次,因果有無皆不可立,生依彼故,亦不得成。所以者何?故次頌曰:‘有不生有法 有不生無法 無不生有法無不生無法。’論曰:有生有法,義不得成,生有同時,遞相違故。有生無法,亦不得成,如已滅無,非所生故。無生有法,理不得成,如未生無,非能生故。無生無法,亦不得成,如前二無,非因果故。或二無法,因果不成,如畢竟無,非因果故。如是已破因果異體。爲破同體,復說頌曰:‘有不成有法 有不成無法 無不成有法無不成無法。’論曰:有成有法,其理不成,有法已成,成無用故。成復成者,成則無窮。若成異相,其體應別,相異體一,理必不然。相與其體,不相離故。有成無法,理亦不成,其相異故,如苦樂等。或復有無,應無差別,有無體一,與理相違,無成有法,其義不成,如有成無,所說過故#無成無法,義亦不成,如前有無,相成過故。或復無者,卽是數論所執自性不依他成,雖有隱能,而無顯體依彼所執故,說爲無。如是有無、因果、同異皆不成故,決定無生。復次已生未生,生用已滅,及未得故,俱無有生,除已未生,有生時體不可知故,亦無有生。若言生時,二半爲體,謂生半分,半分未生,此亦不然。故次頌曰:‘半生半未生 非一生時體 或已未生位應亦是生時。’論曰:半生未生,非生時體,生未生故#如已未生,如已未生,有二相別#非生時體,生時亦然。有生、未生二種相異,如何可立爲一生時?或應已生及未生位亦共合,說爲一生時,有生未生二相異故。如汝所執,半生未生,此顯生時,已未生位皆失自性。故定無生。豈不生時,具有二相?已生半分,半分未生,已生、未生各有一相,如何可難令互相成?一一別觀,可生時異,摠觀二相,豈異生時?若言生時體一相二,已未生位,體二相殊,故已未生,與生時異,如何體一,二相相違?相旣不同,體應成二,非一有分,從二分生,勿違生時,二半爲體。若半已起,名作生時,半旣未生,應名未起。又半生已生,用已無半,復未生生,用未有,如何二半合立生時?若生用無,名生時者,已未生位,應名生時,便失自宗三位差別。故離二位,無別生時,生時旣無,二位非有。是故諸法決定無生。復次,應問迷徒,生時自性爲因緣起,爲是自然?初且不然。故次頌曰:‘生時若是果 體卽非生時。’論曰:若生時體從因緣生,卽非生時,已有體故。未來將起故,名生時,未來體無,說誰爲果?若言此位觀待當來,至現在時,名爲果者,亦應說近,何立遠名?如是生時,非已生故,如未生位,非實生時。又此生時,時遠攝故,如已滅位,何謂生時?若言生時,體雖未有,衆緣會故,已得近名,同是未來,體俱非有,餘遠此近,差別何緣?亦違汝宗去來皆遠。故汝所執但有虛言。後亦不然。故次頌曰:‘生時若自然 應失生時性。’論曰:若生時體,非因緣生,應是無爲,失生時性。若非緣起,得名生時,一切無爲,應生時攝。又非緣起,應類空花,體旣是無,豈生時攝?若體非有,名作生時,卽一切無,應生時攝。是故諸法無實生時。復次,有作是說,若無生時,已生未生,亦應非有。生時已過,未至生時,建立已生、未生二位,生時無者,二位亦無。又無生時,二位應合故,有二位中閒生時,爲破彼言,故次頌曰:‘已生異未生 別有中閒位 生時異二位應別有中閒。’論曰:若謂已生、未生不合,由生時位隔在中閒。若無生時,二位應合,如兩界首,必有封疆。是故生時#定應有者,生時二位應有中閒,未生、生時、生時生已更相異故。如是中閒,復有中閒,展轉增長,有無窮過。過無窮故,難立生時。又已未生種類別故,如色、聲等,無別中閒。旣無中閒,生時何有?又生時位#若在未來,卽名未生,未來攝故。若居現在,卽名已生,現在攝故。若非現未,不名生時,如過去等。是故諸法無別生時。復次,假許生時、已未生位,三分各別,而審推徵,爲捨生時,得已生位,爲當不捨得此位耶?初不應然,故次頌曰:‘若謂生時捨 方得已生時 是則應有餘得時而可見。’論曰:若捨生時,得已生位,未得已得,兩位中閒,應有得時,如生時位。若許爾者,餘復有餘,如前生時,有無窮過。過無窮故,難立得時。若捨生時,得已生位,離此二位,無別得時。從未生時,至已生位,應離二位,無別生時。又捨生時,得已生位,體應有異,非一法生,後亦不然。故次頌曰:‘若至已生位 理必無生時 已生有生時云何從彼起。’論曰:已生生時,必不俱有,時分異故。猶如去來。若已生位,有生時者,或應同體,或異體俱。則非已生,從生時起,自從自起,世現相違,俱有非因,如牛兩角。若言:一體二相不同得,說爲因,無斯過者,二相前後,體不應同。二相俱時,應非因果。又若同體生時已生,於自他性,應失應得,相不離體,如體應同,體不離相,如相應別,體同相別,理必不然。法之與時,體無有異,故不可說時異法同。一法一時,有同有異,說爲因果,理必不成。如從生時,至已生位進退徵責,過難多途,從未生時,至生時位,硏覈詰問,如理應思。是故生時,非別實有。復次,立有生時、已生位別,此無實義,但有虛言。所以者何?故次頌曰:‘未至已生位 若立爲生時 何不謂無甁未生無別故。’論曰:若立生時,非已生位,將至此位,名作生時。甁名已生,生時未至已生位故,甁體定無。甁體旣無,生依何法?不可無法名作生時。勿一切無,皆名生位。故應於有,立生時名。若謂生時,其體已有,無斯過者,此亦不然,未至已生與未生位,無差別故,有義不成。若謂生時,是未來世最後位故,非體全無。此不應理。同未來攝#等非已生,無前後故。若未來世半有半無,有同已生,世應雜亂,故生時位,但有虛言。生時旣無,生亦非有。復次,若謂生時,體雖未滿,而用起故,非是全無。非有非無不同兩位。是故諸法別有生時,此亦不然。故次頌曰:‘非生時有用 能簡未生時 亦非體未圓別於已生位。’論曰:未生生時,無用、有用,二位差別,理不可然,生時體無,用應非有,生時體有,應是已生。設許生時,有能起用,而體未有,應名未生。非未生名,別有少法,但遮已起,名未生時。旣名未生,何能簡彼。若少有體,應名已生,旣非已生,應無少體。不可一法半有半無,有無相違,不同體故。若許體別,有卽已生,無卽未生,生時豈有?故離二位,無別生時。復次,或應生時,卽已生位,非無有故,如已生時。爲顯此因,故說頌曰:‘前位生時無 後位方言有 兼成已生位故此位非無。’論曰:未起用時,名爲前位,於此前位,未有生時,正起用時,名爲後位。於此後位,方有生時。是則生時,成已生位,有異前故,如已生時,非體全無,可與前異。所言兼者,謂捨全無,卽未生時,名全無位,生時捨彼,是有非無,由此兼前,成已生位。若捨無位,必至有時,有卽已生,中無異位,依何而立別有生時?是故生時卽已生位,非無有故,如已生時。又此生時,應許有體,若無有體,生用應無,體用竝無,生時豈有?若無體用,而有生時,則一切無,皆應頓起,無無異故,如此生時。又若生時,體用非有,因緣和合,應無所爲。有不生無,如前已說。故生時位,是有非無,有卽已生,更無異位,故不應立別有生時。復次,無別生時,理應信受。愚猶固執,略復推徵。如是生時爲無,爲有?有卽已起,無卽未生。除此孰爲生時位體?爲顯此理,復說頌曰:‘有時名已生 無時名未起 除茲有無位誰復謂生時。’論曰:所執生時,推徵其性,不過二種:謂有及無。如是有無二位所攝,除此無別中閒生時。汝等何緣,非理撗執?此極麤淺,而汝尚迷,況復幽微,汝能思測?故應信受無別生時。生時旣無,生如何有?是故諸法理實無生,生旣實無#住、滅亦爾,生爲先故,非有義成。故不別遮住、滅二相。復次,已別廣破果先有無,爲摠略遮果先有等故,於品後,復說頌曰:‘諸有執離因 無別所成果 轉生及轉滅理皆不可成。’論曰:數論所執果不離因,果同其因,體本實有,如是果體生滅不成。果不離因,同因常故,因果體一,差別理無。諸法性常,無增無減,是則所作唐設,其功少有所爲,便違自論,有不可滅,無不可生。大等亦應無生滅義,卽自性故,如樂、苦、癡。又大不應從自性起,自能起自,世現相違。是則世閒現見因果生滅作用,一切皆無。世現所知,汝尚誹毀,況能信受深隱義耶?如是觀生,都非實有,生無實故,滅亦實無。但隨世閒,說有生滅,隨世所說,是俗非眞,勝義理中,無生無滅,一切法性非斷非常,生滅旣無,法應常住,如前廣破。常性實無。若爾,應無一切法性,不爾,我說俗法#非無。豈不我宗說一自性轉變力故,無所不爲?雖有所爲,而無生滅,斷常等過。所以者何?果起不生,性變成故,果謝不滅,歸本性故。果性非常,前變滅故,果性非斷,後變生故,轉變非恒故,非定有,自性不易,故非定無,此亦不然。諸法生滅,理旣不立,汝宗所執轉變豈存?又轉變言,及自性等,前已廣破,無宜重執。故汝所說,理必不然。有作是言:我經部等因緣和合,無閒果生,果起酬因,復能生後,如是展轉,無始時來,因果連緜,相續不絕,無有生滅,斷常等過。所以者何?相續無始,故無有生,未得對治,相續不盡,故無有滅,相續改轉,所以非常,相續連緜,所以非斷,非一性故,亦非轉變,此亦不然。若有生滅,可有相續,生滅旣無,相續何有?無生滅義,前已廣論。相續有終,是則爲斷,相續無始,是則爲常,相續體一,卽有轉變。故立相續,過失彌多。有作是言,我說諸法常,有部等,一切有爲從本以來,性相實有,酬前起後,三世遷流,無有斷、常、生滅等過。所以者何?體恒有故,無生無滅,有爲相合,所以非常,果起酬因,所以非斷,念念別故,非變非續,此亦不然。說常有宗先已破故,色等諸法體若恒有,應似無爲,離有爲相,便同數論,一切皆常。不可說言用有生滅,用不離體,應同體常,體不離用,應非恒有。若用本有,應不名生,若用本無,應非可起。用未生位,生用未有,不可名生,用已生位,生用已息,亦不名生。除此二位,無別生時,前已廣說。故不可執諸法用生。生旣是無,滅亦非有。又若色等有爲相合,故是無常,此有爲相無餘相合,應非無常。若言此相與餘相合,是則無窮。若言有爲有大小相,展轉相相,非無窮者,此亦不然,如色等法餘相合故,不名能相,生等亦然,與餘相合,應非能相。又如大相,不以所相,色等諸法爲其能相,小相亦爾,不應所相、大生等法,以爲能相。若別有相,應至無窮。若別無相,應成常住。又有爲相定非實有,若實有者與理相違。所以者何?如無爲法,有無爲相,離法實無,此亦應然,同三相故。無爲實有,前已廣遮,一切有爲亦非實有,以慧分析,便歸空故。又對無爲,立有爲法,無爲無故,有爲亦無,有爲、無爲,若從緣起,卽同幻事,若不藉緣,便似空花。故不應執以爲實有。如契經言:‘有爲、無爲,皆是世俗,分別假立,其體俱空。除爲無爲,更無別法。’設復說有,但是虛言,有爲、無爲,攝一切法。此二空故,諸法皆空。空中都無分別戲論,虛通無㝵,卽聖慧明。故契經言:‘一切諸法從本皆空,空卽無性,由無性故,卽是般若波羅蜜多。其中都無少法可說,爲生,爲滅,爲斷,爲常,爲一,爲異,爲來,爲去。天帝,當知若有淨信諸善男子,或善女人,能如是說,不謗般若波羅蜜多,異此說者,皆名爲謗。’若說常空,應墮斷滅,遮常有故,不墮此邊,執常不空,應墮斷滅,常無因果,名斷滅故。我諸所說皆是遮言,遮謂遮他生滅等。執無生非滅,唯爲遮生,無滅非生,但爲遮滅。非斷常等,類此應知。雖涅槃時,生死斷滅,此方便說,是假非眞。如說天中有常樂等,是隨俗說,非稱實言#應以前說諸句文詞,隨其所應,破諸妄執。我等皆妄,誰復爲眞?謂畢竟空,心言路絕,分別戲論皆不能行,唯諸聖賢內智所證。是故智者應正勤,修證此眞空,捨彼妄執。大乘廣百論釋論卷第九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