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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16_0639_b_01L대승광백론석론(大乘廣百論釋論) 제8권
- 016_0639_b_01L大乘廣百論釋論卷第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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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천보살 본논 지음
호법보살 주석
현장 한역 - 016_0639_b_02L聖天菩薩本 護法菩薩釋三藏法師 玄奘奉 詔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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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파변집품(破邊執品) - 016_0639_b_04L破邊執品第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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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관과 경계가 모두 허망하다는 사실을 이미 변론하였으니, 다음에는 참되지 못한 이론인 치우친 집착[邊執]의 때를 씻어주리라.
그러므로 이런 게송을 말했다.
모든 법이 진실로 있다면
남을 의지해서 이뤄지지 않을 것이요
반드시 남을 의지해서 이뤄졌다면
실제로 있지 않음을 분명히 안다
논하건대 만일 온갖 법의 형상이 진실로 있다면 의당 남을 의지해서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요, 만일 빛 따위 법들이 반드시 남을 의지해서 성립되었다면 이러이러한 저 언덕도 결정코 실제로 있지는 않으리라.
휴류(鵂鶹) 외도들이 주장하는바 구절들은 있음[有] 따위를 원인으로 삼아 훤하게 드러나고, 있음 따위의 구절은 다시 진실[實] 따위를 원인으로 삼아 스스로의 의지할 바를 삼고서야 비로소 환하게 밝아진다. 또 빛 따위 법은 스스로의 인연이나 광명 따위를 기다려서 훤하게 나타날지언정 조그마한 어떤 법도 자체로써 의지할 바를 삼았음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빛 따위 티끌은 모두가 진실로 있지 않다.
만일 말하기를 “마주 대립해서는 딴 이름을 세울 수 있으나 이 언덕과 저 언덕과 저 언덕 본제는 실제로 있나니 빛 따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같은 비유[同喩]가 성립되지 않는다 한다면 이 말도 옳지 못하다.
빛 따위가 마주 대하면 본체와 형상이 다름이 없거니와 이 언덕과 저 언덕이 마주 대하면 다름이 있다. 그러므로 이 언덕과 저 언덕은 빛 그대로가 아니니, 그 본체는 진실치 않으므로 같은 비유가 성립된다.
또 그들이 숭상하는 진실 따위 구절이 만일 까닭없이 성립되었다면 마치 허공의 꽃 같을 것이요, 까닭 있어 성립되었다면 의당 허깨비 같으리라. 그러므로 그 본체가 실체로 있다고 집착하지 말라.
수론(數論)의 종파에서는 빛 따위 모든 법이 즐거움 따위를 여의지 않고 즐거움 따위를 의지해서야 이뤄진다 하나니, 즐거움 따위도 역시 남에 의해서 성립된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뒤바뀜이 없어야 하리라.
원인 있음과 원인 없음의 종류도 앞의 말과 같다. 그러므로 빛 따위는 그 본체가 진실치 않다.
또 다시 모든 외도의 종파들이 집착하기를 “병 따위가 있다”고 하나 빛(물질) 그대로이건 빛을 여의었건 모두가 성립되지 못하나니, 반드시 병 따위를 의지해서야 비로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앞의 같은 비유와 같아서 그 본체가 진실치 않다.
병 따위가 곧 빛이라고 말하지 말지니, 병은 빛을 의지해야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았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를 밝히기 위해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빛 그대로가 병도 아니요
논하건대 빛의 본체 그대로에 병이 있다고 세우지 말라. 소리 따위도 병의 제 성품을 이루기 때문이다. 빛은 소리 따위로써 제 성품을 삼지 않았거늘 어찌 빛이 곧 병이라고 주장하랴.
소리 따위도 그대로가 병의 본체가 아니니, 이치는 빛에서 부정한 것과 같다. 그러므로 따로 이야기하지 않는가.
또 낱낱 병은 여러 법칙으로써 본체를 삼았고, 빛 따위는 그렇지 않거늘 어찌 그대로가 병이랴. 빛 따위가 그대로가 병이라면 의당 병과 동일할 것이요, 병 그대로가 곧 빛이라면 의당 그들과 같이 많으리라. 그러므로 병과 빛 따위의 본체가 모두 실제로 있는 것으로서 서로 의지하여 성립되었다고 말하지 말라.
만일 말하기를 “빛의 본체가 흩어질 때엔 본체가 병이 아니나 모이면 병으로 변한다” 한다면 또한 빛의 본체가 흩어질 때엔 본체가 빛이었으므로 뒤바뀔 때엔 빛 아닌 것이 되기도 할 것이다.
만일 빛이 모일 때에 병이기도 하고, 빛이기도 한다면 한 법에 두 형상이 있는 것이니, 이는 전에 본체가 많을 것이다 한 대문에서 이미 파했다. 그러므로 병 따위는 빛 따위가 아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빛을 떠나서 병이 있으니, 공덕과 진실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잘못이 없으리라” 하거니와 병은 존재의 형태 따위를 의지해서야 비로소 인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는 거짓이요 참이 아니니, 앞에 이미 말한 바 있다.
또 빛을 떠나서 병이 있다고 집착하지도 몰라.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를 풀기 위해 다음의 게송이 있다.
빛을 떠나서도 병이 있지 않으며
논하건대 빛 따위를 떠나서 따로 어떤 진실한 구절(진리)이 있어 병이나 옷 따위 물건이 빛의 의지할 바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병이나 옷 따위 물건이 만일 빛 따위가 아니라면 마치 허공 따위와 같아서 빛 따위의 의지할 바가 되지 않으리라. 그렇다면 병이나 옷 따위는 의당 병이나 온 따위 물건은 없으리라. 공통하지 않는 공덕이 없으므로 뜻(意:수론외도에서 진실한 것을 말하는 아홉 가지 중의 하나로서 지극히 미세한 물체)과 같으리니, 뜻은 반드시 없는 것이며, 무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앞에서 파한 바 ‘나’와 허공 따위와 같다.
그러므로 병 따위는 빛 따위를 여의지 않았다.
만일 그대로거나 여의었거나에 이치는 모두 성립되지 않고, 병 따위가 모두 허망하여야 이치가 성립되리라.
또 다시 병 따위와 빛 따위가 서로 서로 의지하여서 성립된다 하여도 모두 이치에 맞지 않나니,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병을 의지하여 빛이 있지도 않으며
병이 빛에 의하여 있지도 않다.
논하건대 병 따위와 빛 따위는 본체가 모두 진실치 않거늘 어떻게 의지하는 쪽과 의지할 곳을 설정하겠는가. 여기에서 의지한다는 말은 간혹 원인이란 뜻을 표현하여 진실의 공덕이 인과를 이루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할 뿐이다.
휴류 외도들이 집착하기를 “병 따위의 원인에 의하여 빛 따위의 결과가 있다”고 하거니와 이는 비량(比量)에 어기는 것이다. 이른바 빛 따위는 병 따위를 원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니, 이 빛 따위는 소리에 의해 표현되는 바이며, 빛 따위를 취하는 마음으로 반연할 바 경계이기 때문이며, 빛의 성품 따위가 항상하기 때문에 원인이 없는 것 같다.
수론사(數論師)들은 집착하기를 “빛 따위 원인에 의하기 때문에 병 따위의 결과가 있다”고 하나니, 이것 또한 비량에 어긴다. 이른바 병 따위는 빛 따위로써 원인을 삼지 않나니, 그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며, 즐거움 따위의 성품이기 때문에 그대로가 빛 따위와 같다.
그들은 빛 따위와 있음(유위)의 성품은 그대로도 아니며, 여의지도 않았다고 집착하나니 있음 그대로가 아니기 때문에 토끼의 뿔과 같아서 병 따위의 원인이 아니리라.
만일 말하기를 “빛 따위가 그대로가 있음의 성품이라면 의당 있음의 성품과 같아서 본체에 차별이 없으리라”
만일 말하기를 “빛 따위가 즐거움 따위로써 성품을 삼으니, 이는 이미 본체가 같음을 허락하는 것이라 하면 허물이 없으리라”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니, 그대들의 종파에서 감관과 경계가 다르다는 주장과 어기기 때문이다.
또 다시 큰 허물이 있으니, 괴로움ㆍ즐거움ㆍ어리석음 따위 세 가지 성품도 똑같아서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즐거움 따위가 있음의 성품이 아니라 한다”면 마치 토끼의 뿔과 같아서 그 본체가 도무지 없을 것이며, 빛 따위도 역시 그와 가아서 있지 않으리니, 서로 여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즐거움 따위 세 가지와 같으니, 그렇다면 온갖 것은 모두가 실제로 있지 않다. 그러므로 빛 따위는 병 따위의 원인이 아니다.
또 다시 승론의 무리가 말하기를 “저들(수론)이 주장한바 같음의 성품과 모든 법이 하나라” 하여 그런 허물이 있다면 나는 주장하기를 “같음의 성품과 모든 법이 다르다 하노니, 서로가 다르기 때문에 그런 허물이 없으리라. 모든 법은 서로 견주건대 같음과 다름이 있고, 법의 본체는 국한되고 다르다. 그 까닭에 이름은 다르나 성품은 두루 통한다. 그러므로 같다고 한다. 희통함과 국한됨이 다르기 때문에 형상에 차이가 있고, 형상이 다르므로 다른 이외에 같음이 있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같다 다르다 하는 말은 다른 이외에 따로 같음이 있다고 주장해야 하리라. 같고 다름이 있기 때문에 같아진 법과 같으리라.
만일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이 같고 다름의 성품은 경계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이외에 같음이 없으리라. 그 같아진 법의 경계가 동일하기 때문에 법 밖에 같음이 있으리라. 만일 그렇다면 모든 법은 다름의 성품이 있으리라. 그 까닭이겠는가. 이를 위해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만일 두 형상이 다름을 보고
병을 떠나서도 같음이 있다 하면
두 형상이 이미 다르기 때문에
병을 떠나서 다름도 있어야 하리
논하건대 만일 모든 법에서 같고 다른 형상이 다름을 보면 이는 곧 법 이외에 따로 같음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미 모든 법 같고 다름이 있다고 여긴다면 의당 법 이외에 따로 다름이 있음을 세워야 한다. 같고 다름의 두 형상은 모두가 모든 법에 두루하였으니, 다름은 같음과 같아서 법을 떠나 따로 있어야 하리라.
설사 법 이외에 다름과 같음이 있다고 허락한다면 이는 다시 이 밖의 다름 같고 다름의 성품이 또 있어야 하리라.
이와같이 같고 다름이 끝이 없으면 두 가지 형상의 차별을 알 수 없나니, 두 가지가 모두 두루했기 때문이며, 모두가 끝이 없기 때문에 다름은 같음과 꼭 같아서 같음이라 할지언정 다름이라 하는지 않았을 것이며, 같음은 다름과 같아서 다름이라 할지언정 같음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법 이외에 따로 같고 다름이 있지 않다.
또 만일 진실 따위와 있음의 성품 따위가 다르다면 진실 따위가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하리니, 다른 형상을 지닌 지혜는 살피어 알지 모하기 때문이다.
그 다른 형상의법은 앞서 이미 자세히 변론했거늘 어찌하여 세간 사람들은 있음의 성품이 아닌 진실 따위 법위에서 있다는 지혜를 일으키는가.
만일 말하기를 “진실 따위는 비록 있음의 성품은 아니나 있음과 합하기 때문에 있음의 지혜를 일으킨다 한다면 진실 따위 법은 거짓으로 있음이라 하거니와 본체는 진실로 있지 않으므로 없음이라 해야” 한다.
마치 변두리 사람이 서서 먹고, 서서 마시고, 똥오줌을 눈 뒤에 손을 씻지 않고, 양치질도 하지 않으므로 거짓으로 소라 하지만 참으로 소가 아닌 것 같이, 진실 따위도 그러하여서 거짓으로 있을지언정 실제에는 없다.
또 그대는 의당 말하기를 “어떤 것이 참된 있음으로서 나머지 있음과 합하기에 거짓으로 있다”고 하는가 해야 한다.
만일 말하기를 “있음의 성품이 진실로 있는 것이라 한다”면 그 이치가 옳지 않으니,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있음과 진실 따위는 똑같이 지혜의 반연이 있거늘 어떻게 하나는 참되고 하나는 거짓이라 하겠는가.
또 참으로 있음과 거짓으로 있음은 한 지혜의 반연이 아니니, 참과 거짓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왕과 신하와의 관계와 같다.
또 말하기를 “진실 따위는 그 본체가 제각기 다르거니와 있음의 성품은 같다. 그러므로 있음과는 다르다” 하거니와 이것도 옳지 못하다.
진실 따위의 자체도 다름이 없거늘 다만 공능과 형상 따위에 다름이 있을 뿐이며, 있음의 성품도 그러하여서 공능과 작용에 차이가 있을 뿐이거늘 어찌 진실한 다름 따위가 있다고 결정적으로 집착하랴.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모두가 알아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며, 아울러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함께 작용이 있기 때문에 서로 서로가 비슷해서 모두가 다르고 모두가 같다. 그러므로 있음의 성품은 진실 따위를 여의지 않았다.
또 다시 그들에게 묻노니, 법 밖에 성품이 있다면 무엇으로써 비유를 삼아야 그가 실제로 있음을 알겠는가. 만일 말하기를 “하나가 의지한 바인 진실 따위는 그 형상이 제각기 다르지만 수효의 지혜를 내지 못하는데 하나인 수효는 같으나 능히 수효의 지혜를 낸다. 법과 수효가 합해서 하나의 병 따위라 하나니, 서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진실 따위는 하나가 아니며, 있음과 법은 다르나니, 이것이 같은 비유[同喩]라” 한다면, 병 따위는 한 지혜로써 알 바가 아니니, 본체가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둘, 셋 따위와 같다.
만일 말하기를 “병 따위의 본체는 비록 하나가 아니지만 하나와 합하기 때문에 하나가 된다”고 한다면 이 하나가 비록 병 따위는 아니나 병 따위와 합하므로 병 따위라 해야 하리라.
이런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에 이 게송(偈頌)을 말했다.
만일 하나라면 병이 아닐 것이요
병이라면 하나라 하지 못하리라
논하건대 마치 하나의 수효와 진실 따위가 합쳤을 때에 진실이라 하지 못하는 것 같이 진실 따위가 하나와 합했으나 하나라 하지 못하리니, 서로서로 엇바뀌면서 합하더라도 딴 이치가 없기 때문에 세간 사람들은 하나의 병이라 하지 말아야 되리라.
또는 진실 따위가 하나와 합할 때에 한 형상이 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만일 한 형상을 이룬다면 의당 진실 따위를 버리리니, 하나라는 수효의 형상은 진실 따위의 본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진실 따위를 버린다면 하나인 수효는 없을 것이니, 수효는 반드시 진실 따위를 위해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만일 진실 따위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한 지혜나 한 말로 알 바가 아니리니, 비록 그와 합할지라도 본체는 그가 아니기 때문에 마치 허공과 합한 사람의 지혜와 말이 각각 다른 것과 같다.
만일 방패와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비록 사람과 합하더라도 여전히 사람이라 불리우는 것 같다 하면 그는 이치에 맞지 않나니, 그것은 거짓으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진실 따위를 하나라 하는 것도 역시 거짓으로 하는 망리라” 한다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나니, 참된 하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하나인 수효가 참된 하나라” 한다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지혜와 말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하나인 수효는 진실 따위에 두루했으나 진실 따위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가 아니라” 한다면 또한 이치에 맞지 않나니, 앞서 이미 파했기 때문이다.
한 지혜로 반연하는 바가 아니라 한다면 진실 따위도 그러하여서 참으로 다름이 있지 않으리라.
진실 따위 위에 수효의 지혜로운 말을 일으키는 것을 이미 거짓이라 하였고, 수효 위에다 진실 따위의 지혜로운 말을 일으키는 것도 견주어 보건대 역시 같다.
마주대하는 지혜로운 말은 둘이 모두 차별이 없거늘 어찌 하나는 참이고 하나는 거짓이라 하랴. 그러므로 주장을 세우기를 집착하는바 진실 따위는 참된 진실 따위가 아니라 하노니, 수효의 지혜와 수효의 말로 행할 바 경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와 둘과 같다.
집착하는 바 하나 따위는 참된 수효의 본체가 아니니, 진실 따위의 지혜와 말로 행할 경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진실 따위와 같다. 그러므로 온갖 것은 그 본체가 참되지 않다.
또 수효와 진실은 일찍이 합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병과 하나가 합쳤으므로 병을 하나라 말하는가.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병과 하나는 합한 적이 없으니
병에는 하나라는 이름이 없으리라
논하건대 진실은 허공에 존재하고, 하나는 진실에 있으니 존재하는 장소가 이미 같지 않거늘 어찌 합한다 하겠는가. 그렇다면 하나라는 수효는 하나의 병을 표현하지 못하리라. 장소가 같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둘 따위 수효와 같다.
만일 말하기를 “그렇다면 의지하는 이와 의지할 바의 본체가 서로서로 두루했으므로 합했다 할 수 있으리라”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기에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빛이 진실에 두루했다면
빛은 원소[四大]라 불리울 것이니
상대의 논리가 틀렸다고 따진다면
그대 스스로 종지를 펴보라
논하건대 만일 빛 따위의 공덕이 의지한바 진실에 두루했다면 의당 진실의 본체와 가아서 역시 원소라는 명칭을 얻으리라. 땅 따위가 넓은 장소에 있으면서 요소라는 명칭을 얻었으니, 빛 따위도 그러하리라. 어찌 요소가 아니겠는가.
또 빛 따위의 공덕은 의당 형상과 장애가 있으리니, 땅 따위에 맞기 때문에 땅 따위와 같으리라. 그렇다면 빛 따위는 남을 의지해서 이뤄지지 않았으리니, 형상과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의지한바 진실과 같다. 모두가 형상과 장애가 있으면 장소도 같지 않으리니, 진실과 공덕은 인과의 관계가 아니리라. 이런 종류의 허물이 매우 많으니 그대가 세운 바 종지는 당장 무너지리라.
만일 말하기를 “빛 따위는 공덕의 구절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형상과 장애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도 옳지 않으니, 상대하여 따진 것이 딴 것이 아니니, 스스로의 종지를 펴보라. 남을 대하여 따져 토론한다면 스스로의 주장은 헛일이 되리라.
우리 불법 안에서 총명하고 용맹하여 진리를 발견한 이는 그대들의 종파에서 세우는 여섯 구절에 대하여 미친짓이며, 잠꼬대로 여기어 굴복할 생각이 없거늘 공연히 이끌어 소개한들 무슨 이익이 있으랴.
다음은 빛 따위가 땅 따위에 의할 때에 한 부분만이 움직이는가. 아니면 음악 따위와 같이 두루 움직이는가. 만일 한 부분만이 움직인다면 의당 하나의 진실 위에 공덕 있음. 공덕 없음과 푸른빛 있음 푸른빛 없음 따위 허물이 있을 것이요, 만일 두루 움직인다면 빛 따위 모든 공덕도 역시 요소[大]라 불리워야 되리니, 진실과 곳이 같기 때문이다. 마치 땅 따위와 같다. (그러나) 진실은 허공 속에 있고 공덕은 진실 위에 있으니, 의거한 바가 각각 다르거늘 어찌 곳이 같을 수 있으랴.
나의 뜻은 같은 한 곳에 의지했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공덕과 진실과의 본체가 서로 두루하여 허공과 같기 때문에 곳이 같다고 했을 뿐이라 한다면 공덕을 요소라 불렀기 때문에 따로 공덕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공덕에는 공덕이 없다. 그러므로 요소라 하지 못한다. 마주 상대하여 따진 것이 딴 것이 아니니 의당 스스로의 종지를 펴라. 다른 이와 대항하여 토론할 때에 자기의 종지를 펴면 헛일일 것이다.
혹은 여기에서 말하기를 “공덕은 진실과 같아서 요소라고 이름하나 뜻은 진실이라 할 수 없지 않느냐”고 물으나 같은 공덕은 형상이 없으니, 장소가 같기 때문이다. 마치 빛 따위와 같다 하거니와 우리 종에서의 땅 따위는 모두가 형상과 바탕이 있거늘 어찌 같은 공덕에 형상과 장애가 없으랴. 상대하여 따진 것이 틀렸다 한다면 스스로의 종지를 펴라. 다른 이와 대항하여 토론할 때에 자신의 것을 펴면 헛일일 것이다.
또 다시 빛 따위는 그의 결과의 진실[果實]과 원인의 진실[因實]이 화합해서 생긴다. 모든 원인의 진실에 결과의 본체가 모두 두루했으니, 곳이 따로 없기 때문이라 하나니, 공덕도 진실과 같아서 역시 요소라는 이름을 얻을 것이요, 진실은 공덕과 같아서 요소라는 명칭을 세우지 못하리라.
만일 어떤 이가 말하기를 “우리 종파의 진실과 요소는 공덕이 아니므로 서로 견줄 수 없다”고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는다. 상대하여 따진 것이 틀렸다한다면 스스로의 종지를 펴라. 다른 이와 상대하여 토론할 때에 자신의 것을 펴면 헛일일 것이다.
또 다시 그 종파(수론)의 극미는 그 부리가 작아서 뭇 극미가 화합하여 거친 결과를 일으킬 때에 거친 결과와 원인은 곳이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극미와 빛은 거친 요소를 이룰 것이며, 빛과 거친 결과는 극미를 이루리라 한다.
만일 말하기를 “우리 종지에서의 원인은 적고 결과는 크고 빛은 형상과 부피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상대하여 따진 것이 틀렸다고 한다면 스스로의 종지를 펴라. 다른 이와 대항하여 토론할 때에 자신의 것을 펴면 헛일일 것이다.
이와 같이 있음ㆍ수효ㆍ빛 따위가 진실을 떠나서 본체가 있다고 하면 많은 허물이 생긴다는 것을 이미 설명했다. 그 밖의 가고 다름의 성품은 있음의 경우와 같이 막아라. 그리고 공통한 공덕은 수효와 같이 파하고 공통하지 않은 공덕과 업의 차별은 빛 따위와 같이 파하라. 모든 진실 속에서 제각기 움직이기 때문이다.
승론(勝論)에서 집착하는 바는 오직 그럴만한 마음 부치로 인하여 모든 법이 있음을 드러내지만 이치로써 추궁하건대 모두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또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있음과 수효 따위 능동의 형상으로
피동의 형상을 나타내지 못하고
이를 제하고는 단 원인도 없으니
그러므로 모든 법은 있는 것 아니다
논하건대 있음의 성품과 수효와 빛 따위로는 스스로가 의지한바 법을 나타낼 수 없음을 이미 변론했고, 이를 제하고는 어떤 다른 결정적인 원인도 모든 법이 그 본체가 실제로 있음을 증명하지 못한다. 원인이 없는데 모든 법이 있다고 세우지 못하나니, 세우려는 바는 온갖 것이 모두 성립된다 하지말라.
그러므로 모든 법은 실제로 있다고 할 수 없다. 세속의 거짓말을 따라서 없지 않다고 말한다면 이것만이 허물이 없다. 자세히 추구하건대 이와 다르면 세속이나 자기 종지에 어긴다.
휴류 외도들이 숭상하는바 진실 따위는 있음이 아니니, 있음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 있음의 성품도 없나니, 진실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토끼의 뿔과 같다.
그러므로 모두가 허망하다.
또 다시 수론의 학자가 말하기를 “모든 법은 있음의 성품이나 수효 따위를 기다리지 않아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먼저 지적한 모든 실수는 나에게는 허물되지 않는다” 하나니, 그들의 그런 말을 깨뜨리기 위하여 다시 다음과 같은 게송을 말했다.
차별된 형상을 떠나선 병이 없으니
그러므로 병의 본체는 하나가 아니요
하나하나가 병이 아니므로
병의 본체는 많은 것도 아니다.
논하건대 빛ㆍ향ㆍ맛 따위의 본체와 형상이 같지 않고 제각기 다른 감관의 행할 바요, 딴 감관의 경계는 아니다. 그러한 모든 법을 떠나서는 따로 병이 없다. 그러므로 빛 따위와 같아서 병의 본체도 하나가 아니리라.
이미 하나가 아니라 함을 허락했으니, 병의 본체도 많을 것이언만 하나하나가 병이 아니거늘 어찌 여러 본체가 되랴.
빛 따위의 성품과 형상은 이리저리 따져도 같지 않거늘 어찌 제각기가 한 개의 병을 이루랴.
만일 하나하나의 법이 그 본체가 모두 병이라면 함께 화합할 때에 여러 개의 본체라 하리라. 이미 그럴 이치가 없다면 병의 본체는 많지 않을 것이며, 또 병의 본체가 실제로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하리라. 그리하여 하나이다 많다 하지도 말지니,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과 같이 실제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빛 따위가 합하여 군사ㆍ숲 따위를 이루는 것은 하나이다. 많다 하는데 병도 그럴 것이다 한다면 이는 오직 세속에서 거짓말로 군사ㆍ숲이라 하거니와 그 속에는 전혀 군사ㆍ숲이라 할 실제가 전혀 없다.
만일 진실로 있다고 집착한다면 의당 병의 경우와 같이 파한다.
그대들도 군사나 숲이 따로 있다고 말하지 말라.
또 빛ㆍ향기 따위는 함께 합하는 이치가 없으니, 그러므로 화합해서 병이 된다고 말하지 말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다음의 이 게송을 말했다.
닿임이 없는 본체는
닿임이 있는 본체와 합하지 않으니
그러므로 빛 따위 모든 법은
합해서 병이 될 수 없다
논하건대 합한다 함은 ㄱ본체가 이리저리 서로 닿는 것을 말한다. 오직 이것만이 닿임이 있으니, 이른바 땅물ㆍ따위이다. 빛 ㆍ소리ㆍ향기ㆍ맛은 닿임에 속하지 않거늘 어찌 마주 닿거나 혹은 닿임에 닿으랴.
이미 닿는 일이 없다면 합한다는 뜻도 성립되지 않는다. 마치 닿임이 없는 생각[思]은 끝내 합한다는 이치가 없는 것 같다.
만일 말하기를 “빛 따위는 서로 닿는 이치가 있다” 하면 의당 닿임에 속해야 하려니, 마치 땅 따위와 같다. 그렇다면 오직 닿임의 본체만이 같은 종류끼리 서로 합할지언정 빛 따위모든 티끌은 결정코 합하는 이치가 없다. 합한다면 문득 빛 따위의 본성을 잃기 때문이다.
설사 빛 따위가 모이는 것을 합한다 하더라도 빛 따위의 성품은 끝내 실제의 병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빛은 병의 한 부분이므로
빛의 본체는 병이 아니다
부분이 있어도 없는 것인데
한 부분을 어찌 있다 하리오
논하건대 빛 따위가 모이는 것을 통틀어 병이라 하는데 빛은 한 부분뿐이므로 의당 병의 본체가 아니다. 병의 한 부분이라 하지는 못하리라.
이와 같이 소리 따위도 견주면 역시 그러하다. 하나하나가 병이 아니니, 모두가 병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병의 부분이라 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부분이 있어도 이미 없는 것이 되거늘 부분이란 누구의 부분이라 하랴.
빛 따위의 하나하나도 그 본체는 병이 아니니, 이를 제하고는 따로 진실한 병의 본체가 없다. 병의 본체가 없으므로 병의 부분도 없다.
어찌 빛 따위 티끌이 진실로 병의 부분일 수 있으랴. 군사ㆍ숲 따위는 거짓말로 있다고 할뿐이다. 부분과 부분을 소유한 이는 그대로이건 분리시키건 모두가 생각하기 어려우니 의당 세간의 소견을 따라 말할 것이요, 그 참됨을 애써 추궁하지 말라.
또 만일 빛 따위의 본체가 진실로 병이라면 온갖 것이 병이어야 하리라.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온갖 빛 따위의 성품은
빛 따위의 형상과 차이가 없으니
오직 한 종류만 병이요
나머지는 없다 함은 무슨 이친가
논하건대 병ㆍ옷ㆍ수레 따위가 의지한 일 가운데에 빛 따위 의지한 것의 성품과 형상의 차별이 없나니, 만일 빛 따위의 본체가 모두가 진실로 병이라면 옷 따위도 역시 모두가 병의 본체이어야 하리니, 빛 따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마치 서로가 병임을 인정하는 경우와 같다.
혹은 집착하는바 병은 의당 병의 본체가 아니리니 빛 따위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마치 옷과 수레 따위와 같다. 빛 따위는 같은데 다름이 있어서 그에 의하여 병 따위의 종류가 다르다고 건립하지 말라. 그대의 종지에는 이 밖엔 다시 같고 다름의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미세한 부분이 벌어진 차별에 의하지 않고서 그 병 따위의 형상에 다름이 있게 하는 모두가 빛 따위로 제 성품을 삼기 때문이다.
병 따위는 빛 따위와 다를 수 없다고 한다면, 스스로가 집착하는 바에 어기나니 인과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마치 병과 옷 따위가 다르지 않다고 하는 따위의 실수가 있다. 빛 따위의 경우도 그러하나니, 하나의 병이기 때문이다. 또 말하기를 “빛이 맛 따위와는 다르고 병 따위와는 다르지 않다”고 하지 말라.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만일 빛이 맛 따위와 다르고
병 따위와는 다르지 않다면
병 따위는 그대로가 맛 따위지만
빛이야 어찌 병 따위 그대로이랴
논하건대 병 따위는 맛 따위로서 본체를 삼으니, 의당 맛 따위와 같이 빛과는 차이가 있으리라. 그러므로 빛이 맛 따위와는 다르고 병 따위와는 다르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또 맛 따위의 하나하나는 빛 따위와 다르고, 병 따위와는 다르지 않다고도 말하지 말라. 병 따위는 그대로가 곧 빛 따위 모든 법으로써 스스로의 본체를 삼았으므로 별다른 성품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빛 따위 모든 법이 병 따위와 하나라면 그 이치가 성립되지 않음을 이미 밝혔으니, 이제부터는 병과 다르다 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음을 나타내리라.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을 말했다.
병 따위가 이미 원인이 없다면
본체는 결과를 이루지 못하리니
그러므로 빛 따위와 다르다고 하면
병 따위는 결정코 없는 것이리
논하건대 땅 따위 요소의 본체는 빛 따위를 섞어서 이뤄진 것이니, 그러므로 다섯 가지 요소의 원인은 곧 다섯 가지 유량(唯量:한량) 뿐이다. 이른바 성량(聲量)을 모아서 허공의 요소를 이루고 다시 촉량(觸量)을 모아서 바람의 요소를 이루고, 다섯 가지를 모두 합쳐서 대의요소를 이룬다.
요소로써 병 따위를 바라보건대 같은 본체가 서로 성립시키나니, 위에서 말한 다섯 가지 유량과 같이 성립하나니, 같은 종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만일 빛 따위와 다르고 병 따위는 원인이 없다면 본체는 의당 결과가 아니리니, 온갖 결과가 원인을 기다려서야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 따위가 빛과 다르다면 병 따위는 원인도 결과도 아니리니 빛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거북의 털 따위와 같다.
또 감관의 경계가 아니리니, 인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빛의 감관으로 행하는 바는 인과 아님이 없나니, 이들이 인과가 아니기 때문에 감관이 행할 바가 아니다.
혹은 또 병 따위 모든 법이 없으리니, 인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석녀(石女)의 아기와 같다.
제 성품을 원인이라 허락하고, 생각의 ‘나’를 결과라 허락한다면 감관으로 나타내는 바이기 때문에 일정치 않다는 허물이 없다.
이와 같이 수론에서 세우는 병 따위는 하나이건 다르건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또 다시 승론의 무리가 말하기를 “기와[瓦] 따위의 미세한 부분이 병 따위를 내기 때문에 병 따위는 원인이 있다” 이에 원인이 있다면 본체는 곧 결과이다.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다면 그 본체는 없지 않을 것이라 하나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 게송이 있다.
병 따위의 원인이 있다면
병 따위의 원인이라 하겠지만
병 따위의 원인이 없거늘
어찌 병 따위를 내겠는가
논하건대 기와 따위의 미세한 부분은 다른 법에 의하여 이뤄졌거늘 어찌 나의 원인이 되어서 병 따위를 내랴. 세간에서 남을 의지해 있어서 스스로가 있지 않은 법이 남에게 주는 것을 보지 못했다.
어찌 종자 따위가 비록 남을 의지해서 성립되었으나 능히 원인이 되어서 싹 따위를 내는 것이 아니랴 한다면 이것은 있음이 아니랴 하는 질문과 같을지언정 앞의 허물을 모두 공통하게 용인하는 바이거늘 어찌 쉽사리 질문을 하는가. 그대가 집착하는 바는 세상이 아는 바와 다르다. 그러므로 여기에선 그 있으리라는 질문과 같다.
세상이 아는 법은 남을 의지해서 난 뒤엔 다시는 나지 않는다. 남을 의지해서 서지 않는 것은 스스로에 힘이 있는 까닭에 능히 남에게 원인이 되어 준다. 그러나 그대의 집착은 그렇지 않다. 남을 의지해서 성립된 법이 아직 멸하기 전까지는 항상 남을 의지해서 성립된 법이 아직 멸하기 전까지는 항상 남을 의지해서 머무른다 하고 원인이 멸하면 결과도 따라서 멸한다 하니, 그러므로 그대의 집착은 세상이 아는 바와 다르다. 본체도 능력도 없거늘 어찌 다른 결과를 내랴.
혹 원인있는 법이 본체가 있고 공능이 있으면 능히 다른 원인 있는 법을 낼 수 있으나 그대는 기왓쪽 따위의 극미로서 원인을 삼거나 혹은 그 밖의 것으로 원인을 삼는다고 집착하거니와 이들은 모두가 있지 않나니,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기왓쪽 따위는 본체가 없으니, 본체 없고 능력 없으면 어찌 결과를 내랴.
그 논종(論宗:승론)에서 주장하기를 “원인에 두 가지가 있어 모두가 결과를 내나니, 이른바 항상함과 무상함이다” 온갖 무상의 원인은 반드시 항상함에 의해서 있나니, 항상함은 있지 않기 때문이며 무상 또한 없는 것이다. 무상의 원인이 없거늘 어찌 결과가 있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그들의 인과는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또 다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병이나 기왓쪽 따위 화합된 물건들은 본래부터같은 종류의 인과가 차례차례 상속하면서 종류에 따라 같지 않으나 그 본체는 실제로 있으며, 하나이어서 볼 수 있다” 하거니와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모든 화합된 물건을 차츰 분석하면 빛 따위에도 돌아가니, 빛 따위는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바 있다. 어찌 그에 의해서 화합한 물건이 있을 수 있으랴.
이 화합된 물건이 하나이냐, 볼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모두 이미 과한 것과 같으니 다시 집착하지 말라.
또 빛 따위 법이 공동으로 화합할 때엔 한 본체도 있지 않나니,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빛 따위가 화합할 때에
끝내 향 따위를 이루지 못하니
그러므로 화합된 본체는
병 따위와 같아서 없는 것이리
논하건대 빛 따위가 화합할 때에 끝나 차례차례 변해서 향 따위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화합하지만 한 물체를 이루지 못한다. 차별의 형상을 버리고 빛 따위의 이름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 까닭에 인연으로 화합한 한 물체는 마치 병 따위와 같아서 그 본체가 실제로 없다. 이른바 병 따위가 빛 따위의 법을 여의고는 별다른 본체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본체를 이루지 못하면 화합도 그러하나니 빛 따위를 여의고는 별다른 본체가 없기 때문에 본체는 하나를 이루지 못한다.
또 화합할 때에 낱낱 미세한 부분은 화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마치 화합하기 전과 같아서 합쳐서 하나의 미세한 부분을 이루지 못하리라. 낱낱을 화합이라 하지 못하리니, 하나의 화합 안에 많은 화합의 본체가 있다고도 말라. 그러므로 화합의 본체는 실제로 있지 않다.
또 화합한 물건은 반드시 빛에 의지하는데 빛은 본체도 없거늘 화합이 어찌 있으랴.
빛의 본체가 없다 함은 다음의 게송과 같다.
빛 따위를 떠나서는
병의 본체는 진실로 없나니
빛의 본체도 그러하여서
바람 따위를 떠나서는 있지 않다
논하건대 분명히 알라. 여기에서 네 가지 요소로 지어진 것은 모두를 물질이라 하나니, 변하여 무너지는 형상이기 때문이다. 변하여 무너지는 물질의 요소로 합쳐 이뤄진 것이므로 요소를 떠나서는 진실한 성품이 없다. 여기에서 오직 하나만이 물질일 수 없으니, 오직 이것 하나만이 변하여 무너질지언정 다른 것은 아니라 하지 말라.
또 온갖 것이 모두가 빛일 수는 없으리니, 온갖 빛이 모두가 동일한 본체라 하지 말라. 본체에 다름이 있다면 의당 빛의 성품을 잃으리라. 또 한 성품에 여러 본체가 있을 수도 없으리니, 온갖 법이 모두가 동일한 성품이라 하지 말라. 그러므로 빛이라는 명칭은 진실로 본체가 있지 않다. 오직 바람 따위에 의하여 거짓으로 빛이라는 이름을 세우나니 마치 빛의 본체가 허망한 것 같다.
느낌 따위도 그러하여서 받아들임 따위의 현상을 추궁하건대 본체는 실제로 없다. 오직 세간의 거짓된 이름과 형상이 있을 뿐이다.
만일 요소들이 없다면 어찌하여 세간에 불들이 있어 태우거나 끊이는 작용을 하는가. 또 만일 온갖 것이 모두 있지 않다면 벌려져 있는 온갖 것들은 하나도 성립되지 않으리라 한다면 나는 모든 법의 본체와 작용이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대의 논리에서 세우는 바가 모두 없다고 했을 뿐이다. 이른바 세상이 다 알고 있는 물질ㆍ느낌ㆍ 따위의 본체나 태우고 끊이는 작용은 모두가 없지 않다.
만일 어리석은 범부들의 분별하는 뒤바뀐 소견으로 집착하는 본체와 작용은 나는 없는 것이라 하리라. 성인들은 이것을 보고 있다고 하지는 않나니, 허망한 감정으로 집착하는 바는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또 다시 승론의 무리가 말하기를 “불은 태우는 쪽이요, 땅은 타는 바이니, 그 본체는 진실하고, 태우거나 끓이는 따위 작용도 진실이 있다. 빛 따위를 익히거나 변화시키는 작용을 눈앞에 뻔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하니 이제 다시 따져묻노니, 불은 무엇을 태우는가. 따사롭게 하는가. 그 밖에 다른 일을 하는가. 대답하라.
그들이 대답하되 “두 가지 모두를 허락한들 무슨 실수가 있으랴” 하거니와 두 가지 모두 옳지 못하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기에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더운 것이 불의 성품이니
덥지 않으면 어떻게 태우랴
그러므로 땔감은 본체가 없으니
이 불을 떠나서는 없기 때문이다
논하건대 따사로움은 탈 바가 아니니 그대로가 불의 성품이기 때문에 스스로가 가진 작용과는 동떨어지게 어긴다.
또 그대의 종파에서 주장하기를 “탈 바는 덥지 않다” 하나니, 그러므로 따사로운 것을 타는 것이라 집착하지 말라.
또 타는 바가 땅이라 하지 말라. 따사로움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물이나 바람과 같다.
땔감은 타는 바이라 하나 타는 바가 없기 때문에 땔감의 본체는 있지 않다. 땔감의 본체가 이미 없다면 불이 어디에 의해서 성립하랴. 불은 반드시 땔감에 의해서 일어나는데 탈 바인 땔감이 다하면 불도 없어지기 때문에 태우는 이와 타는 바가 모두 있지 않다. 그렇거늘 익히고 변화시키는 작용들이 어찌 있을 수 있으랴.
그러므로 태우는 것과 타는 바와 태우거나 익히는 작용 따위가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면 모두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이 게송은 승론 외도에서 말하는바 땅이 타는 바라는 주장만을 파한 것이 아니라, 그저 범현히 땅 따위 모든 법은 따사로운 성품이 아니므로 더워질 바 본체가 아니라는 것을 말했을 뿐이라” 하거니와 이 말은 옳지 못하니, 따사로운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라 함은 이미 같은 비유가 없으므로 원인이 성립되지 않으리라.
타기 이전의 지위와 같아서 땅 따위 물질의 무더기는 타는 바가 아니라 하지 말라. 그들 무더기 속에는 항상 따사로운 성품이 있어 다른 형상이 따르기 때문에 역시 탄다할 것이며, 괴로움이나 즐거움 따위, 모든 것이 의지하고 있는 몸이 불에 의하여 변하므로 역시 탄다할 것이며, 무색계(無色界)의 법은 전생이나 낮은 세계의 업에 끄달리기 때문에 역시 탄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원인에다 부칠 같은 비유가 아니다.
설사 같은 비유가 된다 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으니, 탄다거나 타지 않는다는 명칭은 오직 닿음이 있는 물건만을 세간이 함께 허락할지언정 나머지 법에는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타지 않는다는 명칭은 비록 다른 법에도, 통하지만 같은 종류에만 국한되는 진실치 않은 말 따위와 같다.
또 소승의 사람들은 태울 법이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지 않거늘 무찔러서 무엇하랴. 만일 말하기를 “저 세속의 태울 바를 파한다고 한다면 세간을 어기거늘 어찌 비량이 성립되랴”
또 다시 이계외도(離繫外道)가 말하기를 “땅 요소의 극미와 그 밖의 결과들은 비록 불은 아니나 불과 합한다. 불과 섞이기 때문에 따스한 형상 따위가 나타난다. 그러나 그 땅 따위는 진실로 타지 않나니, 따사로움의 성품과 다르기 때문이다. 또 타지 않는 것도 아니니, 따사로운 형상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비록 함께한다 하여도 진실로 타는 바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니,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 게송이 이렇게 말했다.
다른 것이 따사로움과 섞이기 때문에 이뤄진다면
어찌 불을 이루지 못하는가
딴 것이 따사로움을 이루지 못하면
불에 의한다는 법칙은 없어야 하리
논하건대 만일 땅의 요소 따위가 불과 섞이기 때문에 참으로 따사로운 성품을 이뤘다면 의당 불을 이뤄야 하리니, 따사로운 촉감에 속하는 까닭에 진실한 불 요소와 같다.
만일 그 불이 섞이어도 따사로운 성품을 이루지 못한다면 불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진 익어지고 변하는 다른 촉감의 모든 법도 역시 없어야 하리니, 마치 불이 다른 따사로운 촉감은 내지 못하는 것 가다.
만일 익어지고 변하는 빛 따위 모든 법이 없다면 누가 능히 태우거나 지질 것이며, 무엇을 태우거나 지지리오, 그러므로 태우거나 지지는 따위 일은 모두가 실제로 있지 않다.
불이 진실로 태우는 이가 아니니, 닿임에 속하기 때문에 마치 땅 요소 따위와 같고, 땅이 진실로 태우는 바가 아니니, 닿임에 속하기 때문에 마치 불의 요소 따위와 같다.
지지는 쪽과 지져지는 쪽을 모두 이 법칙에 따라 모두 피하라. 그러므로 그들이 집착하는 바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또 다시 식미제종(食米齊宗:승론)의 무리에게 거듭 자세히 묻노니, 모든 불의 극미는 땔감이 있다고 여기는가. 없다고 하여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만일 불의 극미에 땔감이 없다면
땔감을 떠나서도 불이 있으리
논하건대 만일 불의 극미가 땔감을 떠나서 있다면 거친 불도 그와 같아서 의당 땔감에 의탁하지 않아야 하리라. 만일 땔감에 의탁하지 않는다면 의당 태우거나 지지는 따위 작용이 없으리니, 마치 불의 극미와 같다. 만일 그렇다면 의당 불의 성품을 잃어서 태우거나 지지는 작용이 없으니, 마치 땅과 물과 바람 따위 같으려니와 세간에선 이와 같이 태우거나 지지는 작용이 없고, 또 땔감을 여읜 불이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불의 극미는 반드시 땔감에 의해서 있음이 마치 현재에 보는 불이 땔감에 의존해 있는 것 같다.
혹은 극미는 불이 나닌 줄 믿어 알아야 하나니, 불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거북이의 털과 같다.
있다 하여도 옳지 못하니, 그러기에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불의 극미에 땔감이 있다면
불의 극미는 없어야 하리라
논하건대 만일 불의 극미가 항상 땔감과 합한다면 의당 거친 불이라 하리니, 무엇을 극미라 하겠는가. 언제나 땔감과 합하기 때문에 의당 거친 불이어서 극미의 성품을 잃는다.
땅이 저것과 합하여도 역시 극미를 이루지 못하고, 나머지도 역시 그러하니, 종류가 같기 때문에 결정코 하나의 극미도 없으리라.
물질의 법이 이미 그러할진대 마음의 법도 그러하니 마음과 마음의 법은 함께 나고, 함께 멸하기 때문이다.
또 온갖 법이 한 본체라 함이 성립되지 않나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다음 게송에 이렇게 말했다.
모든 법을 자세히 살피건대
하나도 실제로 있는 것 없으니
논하건대 모든 유위의 법은 인연을 기다려서 성립되나니, 싸여서 생기고 싸여서 멸한다. 어떤 한 법도 그 본체가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하나의 본체 안에서 더욱 자세히 쪼개서 지극히 미세한 부분에 이르르더라도 여전히 여러 부분이 있다.
만일 모든 법의 본체가 하나가 아니라면 의당 많으리라 하거니와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한 본체가 있지 않다면
여러 본체도 그렇게 없으리
논하건대 먼저 하나가 있어야 나중에 쌓이고 모여서 많아지는데 하나의 본체도 오히려 없거늘 여러 본체가 어찌 있으리오.
또 그대가 집착하기를 “하나가 인연에 의하여 많음을 낸다 하거니와 하나의 본체도 오히려 없다”면 여러 본체가 어찌 있으랴. 하나의 본체가 있지 않음은 전에 이미 구족히 말했다.
그러므로 진실한 여러 본체는 결정코 없다.
비록 그들이 집착하는바 하나의 ‘내’가 홀로 존재한다 하더라도 본체는 두루 원만하여 여러 ‘나’와 합한다.
또 여러 법이 합하더라도 하나의 본체가 성립되지 않나니, 하나도 성립되지 ㅇ낳거늘 많음이 어찌 성립되리오.
허공 따위는 홀로 하나이어서 둘이 없는 줄 세상이 다 같이 아는데 그것이 어찌 하나의 본체가 아니랴 한다면 세상이 공통하게 아는 바는 거짓이요, 진실이 아니다. 그대가 집착하는바 진실이란 것을 세상이 다 아는 바가 아니거늘 어찌 허공 따위의 한 본체가 오직 거짓으로만 있음을 알랴.
그러므로 다음에 이런 게송이 있다.
법에 딴 것이 없는 것을
그대가 한 본체라 한다면
모든 법은 모두가 세 성품이리니
그러므로 한 본체는 없는 것이리
논하건대 만일 모든 법에 다른 짝이 없이 오직 홀로 존재하는 것을 하나라 한다면 허공 따위 모든 법의 하나 하나에는 모두 세 가지 성품이 있으리니, 이른바 있음[有]과 하나[一]와 물건[物]이다.
있음이란 즉 요소의 존재요, 하나란 즉 하나의 수효요, 물건이란 즉 물건의 종류이니, 이는 곧 진실[實]ㆍ공덕[德]ㆍ업(業)의 세 가지 중의 어느 하나이다. 그러므로 허공 따위 낱낱 법에는 모두 세 가지 성품이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허공 따위 위에 있음과 하나 따위의 지혜로운 말이 일어나지 못하리라. 이 까닭이 한 법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거늘 어찌 실제로 한 본체가 있다고 말하랴.
만일 말하기를 “있음과 하나가 모두 진실 따위를 표현하기 때문에 오직 진실 따위를 있음과 하나와 물건이라 할 수 있으리라” 한다면 이는 있음의 하나이어서 하나가 있을 수 없으므로 있음과 하나라는 지혜로운 말이 일어날 수 없다.
만일 말하기를 “거짓으로 말한 것이어서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것 또한 옳지 않으니, 앞서 이미 파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지혜로운 말이란 어느 것이 거짓이며, 어느 것이 참인가. 모두가 참이든지 혹은 모두가 거짓이리라는 것이다.
또 온갖 법은 그 형상이 비록 다르나 의당 진실이라는 이름이나 혹은 공덕, 혹은 업이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거짓말은 그 허물이 더욱 깊어져서 하나가 셋을 이룬다는 실수를 끝내 제하지 못한다.
하나에 세 성품이 있으면 하나의 본체가 성립되지 않나니, 하나가 이뤄지지 않는다면 셋도 있지 않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하나도 아니요, 많음도 아니다. 그렇거늘 하나다 많다 하는 것은 거짓이요, 진실이 아니다.
혹은 다른 해석이 있으니, 한 법이 셋을 이룬다는 것이다. 이른바 한 법이라는 말은 하나 아닌 것을 가려내는 말이요, 하나 아니라 함은 지극히 간략한 것으로서 이른바 두 종류이다. 둘과 앞의 것을 가려내면 두 성품을 이루고, 근본 법체로써 셋째를 삼는다. 그러므로 온갖 법은 모두가 세 성품이 있다 한다.
이제 따져 묻노니, 둘은 가려내고 하나를 취하는 것은 스스로의 마음에 분별로 차이가 있기 때문이거늘 어떻게 법으로 하여금 세 성품을 이루랴.
또 앞의 둘을 가려내면 더욱 하나가 되나니, 둘도 아니요, 많음도 아니면 하나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나를 성립시키려는 것이 도리어 셋을 파하는 것이거늘 어찌 셋으로써 하나를 피한다 하랴.
또 다른 해석이 있으니, 한 법이 셋을 성립시키는 것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를 가려내면 셋은 있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이름 없다 함은 이름 세우는 것을 가려내는 예와 같다. 이는 셋의 없음을 가려내기 때문에 세 성품을 이룬다 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하면 다른 종류는 끝이 없거늘 어찌 세 가지 뿐이랴. 없음을 가려내고 있음을 세우거니와 없음이란 셋뿐이 아니다. 있음을 가려내고 세워진 이름은 천이 넘거늘 어찌 한법이 셋이 이룬다고만 말하겠는가.
또 서로서로 가려내는 일은 오직 스스로의 마음에 있거나 혹은 이름과 말에 있거늘 어찌 법체에 관계가 되랴. 그러므로 이 해석은 그에 대해 아무런 공능이 없다.
다시 어떤 이는 해석하기를 “항상함은 먼저 이미 파했으니, 이제는 오직 무상함이 있다는 집착을 파하는 것이다. 집착하는바 무상은 모두 세 가지 성품이 있으니, 이른바 남ㆍ머무름ㆍ멸이어서 여러 경전에 분명히 있다” 하거니와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나고 머무르고 멸하는 형상의 시각이 각각 다름이 마치 괴로움ㆍ즐거움ㆍ무감각 따위의 느낌이 반드시 동시가 아닌 것 가다. 시각이 이미 같지 않으면 본체와 형상도 다르거늘 어찌 한 법에 세 성품이 있다 하리오.
또 만일 말하기를 “태어남은 간단 없이 곧 멸한다”면 의당 두 성품이라 해야 되거늘 어찌 셋이라 하리오.
또 생멸할 때가 앞뒤가 각각 다름이 마치 과거와 미래의 세상과 같아서 한 법이라 할 수 없거늘 어찌 한 법이 두 성품이 되리라고 비난하는가. 그러므로 이 해석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다시 어떤 이는 해석하기를 모든 유우의 법은 한 생각에 지극하다니, 한 생각 동안에 많은 찰나의 시분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라바[四臘縛:찰나의 7천2백배 되는 시간 단위] 따위가 같다. 세 성품이라 한 것은 성품이 하나뿐이 아님을 나타냈을 뿐이다. 이 셋뿐이 아니라 하거니와 이 해석도 옳지 못하니, 시각의 앞뒤가 한 법에 셋이 있다 하리오, 그러므로 앞의 해석이 가장 훌륭하다 하노라.
모든 법의 하나하나는 하나도 아니요, 많음도 아니건만 세속의 말을 따라서 많다, 하나다 하나니, 세속의 모든 법은 세속의 정을 따라서 거짓으로 있다 하는 것이므로 추궁해 따질 필요가 없다.
지혜 있는 사람들은 세속의 법에 대하여 말을 따라 있다고 여길지언정 구지 따지고 생각지 말라. 만일 세속의 법을 따지고 생각하여 그의 성품과 형상을 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손에 등불을 들고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어두움의 성품을 구하는 것 같으니,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세속의 모든 법은 마치 꼭두각시나 어두움 같아서 뭇 인연으로 이뤄진 바이니 생각해 구할 필요가 없나니, 구한다면 곧 흩어지고 무너진다.
또 다시 세간에서 집착하는바 모든 법은 모두가 진실이 아님을 드러내고, 또 외도의 집착하는바 모든 법은 모두가 진실이 아님을 드러내고, 또 외도의 집착하는 바와 같지 않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있음[有]ㆍ없음[無]ㆍ함께함[俱]ㆍ모두 아님[俱非]
하나[一]ㆍ다름[非一]ㆍ함께함[雙]ㆍ모두 없앰[俱泯]
차례차례 맞추어 짝을 지으면
지혜로운 사람은 참이 아님을 곧 알리라
논하건대 온갖 세간의 온갖 빛 따위 구절은 말과 이름으로 표현하는 바이며, 마음과 지혜로 알 바로서 망정(妄情)과 집착이 같지 않으니, 대략 네 가지가 있다. 이른바 있음과 없음과 함께 허락함과 함께 부정함이다. 차례에 따라 네 가지 삿됨에 집착할지니, 이른바 하나와 다름과 쌍으로 허락함과 쌍으로 부정함이다.
수론의 도들은 있음 따위의 성품이 모든 법과 하나-통일-라 하나니, 이는 있음의 구절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 집착은 옳지 않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일 푸른빛 따위가 빛의 성품과 하나라 한다면 의당 빛의 성품과 같아서 그 본체가 모두 같을 것이요, 다섯 가지 음악 소리 따위가 소리의 성품과 하나라면 의당 소리의 성품과 같아서 그 본체가 모두 같을 것이요, 냄새ㆍ맛ㆍ닿임 따위도 역시 그러하리라.
눈 따위 여러 감관이 감관의 성품과 하나라면 의당 감관의 성품과 같아서 그 성품이 모두 같을 것이니, 낱낱 감관이 온갖 경계를 취할 것이며, 낱낱 경계가 온갖 감관을 상대할 것이다
또 온갖 법이 있음의 성품과 하나라면 있음의 성품과 같아서 그 본체가 모두 같을 것이다.
또 즐거움ㆍ괴로움ㆍ어리석음과 그리고 생각하는 ‘내’가 있음의 성품과 하나라면 의당 있음의 성품과 같아서 그 본체가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대의 종에서 세운바 차별이 모두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집착은 결정코 참되지 않다.
승론외도들은 말하기를 “있음 따위의 성품은 법과 하나가 아니라” 하나니, 이는 없음[非有]의 구절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일 푸른빛 따위가 빛의 성품과 다르다면 마치 소리 따위와 같아서 눈으로 볼 바가 아니다.
소리 따위도 그러하여서 소리의 성품과 다르다면 의당 빛 따위와 같아서 귀의 경계가 아니리라.
또 온갖 법이 있음의 성품이 아니라면 마치 토끼의 뿔과 같아서 그 본체가 본래 없으리니, 그렇다면 공무아론(空無我論:아무것도 없다는 외도종)과 같거나 혹은 외도나 삿된 종파의 이론과 같으리라.
있음의 성품이 모든 법에 즉(의지)하는 것이 아니어서 법은 비록 있음이 아니라 있음은 여전히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다면 의지한바 법이 없거늘 의지하는 법이 어찌 있으랴.
또 있음의 성품 위에 따로 있음의 성품이 없다면 있음이라 하지 못하리라. 그 밖의 모든 법도 있음의 성품이 있기는 하나 있음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에 그 본체는 없으리라. 그렇다면 온갖 세워진바 구절들이 모두 성립되지 못하리니, 이는 곧 아무 것도 없다는 사견외도(삿된 소견을 가진 외도)와 같아지리라. 그러므로 그들의 집착하는 바는 결정코 참되지 않다.
무참외도(無慚外道:離繫外道와 같음)가 집착하기를 “있음 따위의 성품은 저 모든 법과 하나이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하나니, 이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구절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이것 또한 옳지 못하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일 있음 따위의 성품이 빛 따위와 하나라면 수론의 허물과 같고, 빛 따위와 다르다면 승론의 실수와 같다. 하나와 다름의 두 가지는 성품과 형상이 서로 어기거늘 본체가 같다고 하니,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는 하나가 아니리니, 다름 그대로이기 때문에 다름과 같고, 다름은 다름이 아니니, 하나 그대로이기 때문에 하나와 같다. 하나와 다름이 성립되지 않거늘 있음과 없음이 어찌 성립되랴.
하나와 다름이 서로 다르거늘 본체가 같다고 한다면 온갖 법이 모두 다름이 없어야 되리라. 다름의 형상이 없다면 하나인 형상이 어디에 있으랴. 하나와 다름의 두 형상이 마주 대하기 때문이다.
만일 말하기를 “한 법이 상대하여 대함이 같지 않음을 하나와 다름이라 한다”고 하면 하나와 다름, 두 가지는 모두가 거짓일 것이며, 혹은 어느 하나는 거짓이어서 한 법 위에 두 형상이 서로 어길 것이며, 모두가 참이라 하여도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집착하는 바는 결정코 참되지 않다.
사명외도(邪命外道:말가리 구사리자의 계통으로서 수행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하는 숙명론자)들이 집착하기를 “있음 따위의 성품은 저 모든 법과 하나도 아니요, 다름도 아니라” 하나니, 이는 있지 않고, 있지 않음도 아니라는 구절에 해당하거니와 이것 또한 참되지 않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만일 있음 따위의 성품이 법과 하나가 아니라면 승론(勝論)의 허물고 같고, 법과 다르지 않다면 수론(數論)의 실수와 같다.
또 하나와 다름의 형상은 세상이 다함께 아는 바인데 그대 홀로 없다고 부정하니, 세간과 어긋나는 실수가 있다.
또 그대가 말한바 하나와 다름이 아니란 말이 다만 막기 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치우쳐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인가. 만일 치우쳐 표현하는 것이 있다면 쌍으로 부정하지 못할 것이며, 만일 막기만 한다면 집착할 바가 없어야 하리니, 표현함이 있고 막음이 있다면 이론이 서로 어긋나고, 표현함이 없고 막음도 없다면 장난말이 된다.
그대는 집착하기를 “모든 법의 성품과 형상이 공하지 않다”고 하면서도 쌍으로 부정하니, 다만 허물을 피하기 위할 뿐이어서 이 쌍으로 부정한다는 말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숭상하는바 법의 성품과 형상에 어기기 때문이다.
만일 모든 법의 성품이 낱낱이 모두가 아니라면 이 모두가 아니라는 말도 말하지 말지니, 입을 떼면 반드시 모두 부정하는 성품이 있기 때문이니, 그렇다면 그대들은 항상 혀가 굳어 있어야 되며, 입을 벌리면 스스로의 논리에서 주장하는 바를 어긴다.
잠자코 있어도 이뤄지지 않나니, 모두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말하건 잠자코 있건 모두 실수가 되거늘 무엇하러 그리 애쓰는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뉘라서 가엾이 여기지 않으랴. 그러므로 그들이 집착하는 바는 결정코 참되지 않다.
이와 같이 세간의 네 가지 외도의 삿된 논리와 나쁜 소견이 마음을 흔들고 파괴하니, 허망하게도 모든 법의 성품과 형상을 추궁하고 따져도 모두 이치에 맞지 않고, 앞을 다투어 어지러운 집착을 일으킨다. 모든 법에 대하여 네 가지 비방을 일으키니, 이른바 있음ㆍ없음ㆍ쌍으로 허락함ㆍ쌍으로 부정함으로써 늘거나 줄거나 하면서 서로 어긋나게 희론을 벌린다. 그러므로 세간의 집착은 진실치 않다.
또 다시 외도와 딴 종류의 수행자들은 마와 나쁜 벗과 삿된 논리와 나쁜 소견에 걸려 마음은 흔들리고 파괴된 채 세간의 거짓된 모든 법에 대하여 갖가지 생각으로 구상하여 허망하게도 참이라 집착하고, 상속하는 거짓에 대하여 항상하다 집착하고, 쌓이고 모인 거짓에 대하여 실제로 있다고 여긴다. 이러한 이치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상속되는 거짓 법에 대하여
나쁜 소견들은 참과 항상함이라 하고
쌓이고 모인 거짓 법에서
삿된 집착으로 실제 있다 하네
논하건대 유위의 모든 변천은 앞의 것이 멸하고 뒤의 것이 나는데 끝없는 예부터 끊임없이 상속하였으니, 생멸의 변화는 미세하여 알기 어렵다.
인과가 잇달아 연속함이 마치 하나인 듯 하거늘 어리석은 범부들과 나쁜 소견은 이를 항상함이라 하고, 삿된 집착들은 어지러이 서로 배척한다. 빛 따위 모든 법이 인연에 의해서 이뤄진나니, 허망하고 거짓으로 쌓이고 모여서 이뤄진 바이어서 모두지 진실한 실체가 없다.
미세하게 쌓이고, 긴밀하게 합하여 나누기 어려우니, 뭇 부분이 화합해서 아련히 하나인 듯 하거늘 어리석은 범부는 치우쳐 말하기를 “실제로 본체가 있다 하면서 제각기 한 길 모퉁이에 의거해서 서로가 비방을 일삼는다.
또 상속하고 싸인 거짓 가운데서 모든 부문이 거짓으로 존재하는 줄 통달치 못하고 갖가지로 이치와 종류의 같지 않음을 계교하고는 한 법 안에 여러 진실의 성품이 있다”고 집착한다.
이와 같이 미혹한 제 성품과 차별은 모두가 나쁜 소견과 삿된 집착에 의해서 생기고, 이 까닭에 여러 세계의 여러 가지 중생의 몸을 받아 갖가지 고통을 받기에 벗어날 시기가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나쁜 소견과 삿된 집착을 버리고 모든 법이 인연으로 쌓이고 이뤄진 것이어서 거짓이요, 참이 아니라는 뒤바뀜 없는 진리를 믿어라.
또 다시 모든 법이 뭇 인연으로 이뤄져서 하나도 아니요, 항상함도 아니요, ‘나’도 없고, 법도 없음이 마치 허깨비 같아서 망정으로는 있으나 진리에는 없고, 세속의 법이요, 진리는 아니라 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시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모든 법은 뭇 인연으로 이뤄져서
성품이 약하여 자유로움 없으며
거짓되어 남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나’와 법은 모두가 없는 것이다
논하건대 모든 법은 허망하고 거짓되어 뭇 인연으로 이뤄졌으며, 일어나고 머무는데, 남을 의지해 있으므로 본체가 자유로움이 없으며, 생각생각에 생멸하여 여러 부분으로 쌓여 이뤄졌으며, 하나도 항상함도 아니어서 마치 허깨비 같거늘 어리석은 범부들은 있다고 집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없는 것을 통달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나’도 법도 없거늘 온갖 외도와 그 밖의 무리들은 하나라 항상함이라 계교하거나 법이라 ‘나’라 하거니와 하나와 항상함은 있지 않고 ‘나’와 법도 결정코 없다. 그러므로 인연으로 이뤄졌음을 변론하여 두 가지의 ‘나’였음을 드러낸다.
또 다시 어떤 이가 말하기를 “글자와 이름과 구절이 합하여 자기 마음에서 말하려는 이치를 표현하나니, 따로 따로는 표현할 수 없거니와 화합할 때엔 능히 표현함이 있다”
만일 이치가 없으면 표현하는 일도 없을 것이나 표현함이 있으므로 결정코 이치가 있다 하나니, 이런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결과는 뭇 인연이 합해서 되었으니
인연을 떠나서는 딴 결과가 없다
이러한 합함과 그리고 결과는
여러 성인들 모두가 없는 줄 안다
논하건대 이 게송의 뜻은 모든 무위의 법은 인연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므로 마치 허공의 꽃과 같아서 본체와 작용이 도무지 없나니, 마치 전에 널리 말한바 같고, 모든 유위의 법은 뭇 인연으로 이뤄진 바이어서 마치 요술 속에서 하는 짓 같아서 진실한 본체와 작용이 없나니, 인연이 합하면 결과를 이루므로 결과는 인연을 여의지 않는다. 마치 나무가 숲은 이루나 숲이 나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인연을 모아서 결과를 이룬다 함은 세속을 쫓아서 하는 말이거니와 으뜸가는 진리에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여러 성인들은 모두 없는 것임을 통달한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이름이나 구절은 모두가 글자로서 이뤄진 바요, 글자는 다시 여러 부분을 모아서 본체를 삼고, 글자의 낱낱 부분은 많은 찰나로써 이뤄졌으니, 앞뒤의 찰나는 화합하는 이치가 없다.
반드시 앞생각이 멸해야 뒷생각이 비로소 생기나니 나면 있고, 멸하면 없는 것은 결정적인 이치인데 없음과 있음이 합한다는 이치는 성립되지 못한다.
앞뒤의 두 시간이 있다. 하여도 역시 합하지 못하나니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치 과거와 미래의 경우와 같다. 합하는 이치가 없거늘 글자의 부분이 어찌 있을 것이며, 글자의 부분도 없거늘 글자의 본체가 어찌 이뤄지랴. 글자의 본체가 없다면 이름과 구절도 없을 것이요, 글자와 이름이 없다면 합하는 이치가 성립치 않거늘 어찌 글자와 이름과 구절이 합해 능히 이치를 표현한다 하랴.
그러나 세간 사람들은 자기 마음의 변화에 따라 여러 글자가 화합해서 이름을 이룬다 하고, 또 뭇 이름이 합해서 구절을 이루고, 이 구절이 능히 표현하는 바가 있다고 하거니와 표현하는 이와 표현하는 바가 모두 자기 마음의 변화일 뿐이다.
온갖 마음의 변화는 망정으론 있으나 이치로는 없나니, 성인들은 그것을 여실히 보고 안다. 어떻게 알고 보는가. 이른바 저 법은 모두가 어리석은 범부들의 허망한 마음씨의 분별로 지어진 바이어서 거짓이어서 참이 아니며, 세속의법으로는 있으나 진리에는 없거늘 세간을 수순하여 방편으로 있다고 말할 뿐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표현하는 이와 표현하는 바가 세속으로는 있으나 진리에는 없으니 구지 집착하지 말라.
또 다시 모든 반연할 바에서 공함 ‘나’없음의 소견은 능히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속히 끝낸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어리석은 범부는 경계에서 ‘나’와 ‘내 것[我所]’을 집착하여 생사에 헤매이거니와 성인은 거기에서 공함과 ‘나’ 없음의 진리를 통달하여 항상함과 즐거움을 속히 증득하고, 교묘하게 남을 이롭게 한다. 그러므로 공합 ‘나’없음의 소견을 닦아서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공부가 속히 원만해지고, 묘한 작용이 끝없이 되리라. 이런 소견이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진정한 도임을 드러내기 위하여 다음의 게송을 말했다.
의식은 모든 유위의 종자요
경계는 의식이 행할 바이니
경계에 ‘나’ 없음을 볼 때에
모든 유위의 종자는 사라진다
논하건대 의식은 능히 모든 번뇌의 업을 내고 이에 의하여 삼계의 생사에서 헤맨다. 그러므로 의식과 마음이 모든 유위의 종자라 하고, 능히 뒷세상의 몸을 이끌어내기 때문에 의식밥[識食:의식 그대로가 몸을 유지하는 원동력이란 뜻]이라 하나니, 이와 같이 의식과 마음은 빛 따위를 반연하여 일어나거니와 반연할 경계가 없으면 의식은 반드시 생기지 않는다.
만일 능히 경계를 바르게 관찰하여 ‘나’ 없음으로 알면 반연할 바가 없기 때문에 반연하는 이도 없다. 능동과 수동이 없으면 뭇 고통이 따라서 멸하고, 고요하여 그림자 없는 서늘한 열반을 증득한다. 이 지위에 이르르면 스스로를 이롭게 함이 만족했다 한다.
온갖 근본 서원은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니, 이 지위에 머무러서는 변화의 작용이 다함이 없고, 또한 유정들로 하여금 이런 열반을 증득하게 한다. 그러므로 나와 남에게 훌륭한 이익을 주는 참 방편을 구하고자 하면 반드시 공함, ‘나’ 없음의 지견을 바르게 부지런히 닦으라.
또 다시 다른 해석이 있으니, 의식이 모든 유위의 종자가 된다 함은 이른바 택식(宅識:아뢰야식의 별명) 속에 갖가지로 훈습하여 이뤄진 모든 업의 습기로서 무명과 존재[有]와 애욕에 의해 더해지기 때문에 능히 3계의 생사하는 윤회를 받는데 의식이 의지할 바로 삼기 때문에 의식이라 한다고 한다.
경계가 의식의 행할 바라 함은 의식 속에 있는 습기는 빛 따위 경계를 집착하기 때문에 훈습함에 따라 경계를 속박한다. 그 전에 그것이 의지할 바이기 때문에 행할 바라 한다.
경계에 ‘나’ 없음을 볼 때라 함은 이른바 ‘나’ 없음의 지견으로 온갖 경계의성품과 형상이 공함을 관찰할 때 모든 유위의 종자가 모두 사라진다 함은 ‘나’ 없음의 지견으로 온갖 무명ㆍ존재ㆍ애욕의 두 가지 번뇌를 영원히 끊는 것이니, 이 두 가지가 업을 일으키는 원인이며, 또는 업을 자라게 하여 결과를 내게 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를 끊으면 업과(業果)가 나지 않는다. 그럴 때에 온갖 희론과 번뇌의 종자가 모두 끊어지기 때문에 모두 사라진다 했을지언정 온갖 종류의 의식이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거룩한 도가 일어나면 오직 허망한 분별과 희론과 습기를 멸하고, 유루의 법을 끝내 나지 않거니와 한 부류의 유정들은 모든 무루의 법에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에 역시 모두 사라진다 한다. -그러나-한 부류의 유정은 본래의 서원에 의해 지탱되므로 무루의모든 의식이 상속하여 끊이지 않고, 능히 수승하고 광대하고 심히 깊은 무애변(無碍辯:재변) 따위와 끝없는 공덕의 의지할 바가 된다.
또 의식 따위의 가장 높은 힘에 의하기 때문에 신통작용을 끝내 원만케 하여 오는 세상이 다하도록 걸림없이 상속하나니, 이런 것들은 모두가 근본 서원과 수행의 힘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나와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이 다함이 없으며, 유정들로 하여금 해탈을 성취하여 익게 하고, 오는 세상이 다하도록 묘한 작용이 다함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공함ㆍ‘나’없음의 관법을 닦아서 온갖 치우친 집착을 버려라. - 016_0639_b_05L如是已辨根境皆虛,復爲滌除非眞句義、邊執垢穢,故說頌曰:‘諸法若實有 應不依他成 旣必依他成定知非實有。’論曰:若一切法性相實有,應不依他,而得成立。旣色等法必依他成、如此彼岸,定非實有。鵂鶹所執實等句義,有等爲因,而得顯了,有等句義復因實等,爲自所依,方可了別。又色等法待自因緣及光明等,而得顯現,不見少法自體爲依。故色等塵,皆非實有。若言相待雖立別名,而此彼岸其體實有,卽色等故。同喩不成,此說不然。色等相待,體相無異,此彼兩岸相待、有殊,故此彼岸非卽色等,其體非實,同喩得成。又彼所宗實等句義,若無因立,應似空花。若有因成,應同幻事。故不可執其體實有。數論宗中,色等諸法不離樂等,依樂等成,樂等亦應依他而立。若不爾者,轉變應無。有因、無因,類同前說。是故色等其體非眞。復次,諸外道宗執有甁等,卽色離色,皆不得成,以必依他甁等可了,如前同喩,其體非眞。不可說言甁等卽色,甁依色了,故不依他。所以者何?故次頌曰:‘非卽色有甁。’論曰:非卽色體,可立有甁。聲等亦成,甁自性故。色非聲等爲其自性,如何可立色卽是甁?聲等亦應非卽甁體,義同色破。故不別論。又一一甁多法爲體,色等不爾,如何卽甁?色等卽甁,應如甁一,甁卽色等,應如彼多。故不可言甁與色等體俱實有,相卽而成。若謂:色體散時,體非甁聚,卽轉爲甁。亦應色體散時,體是色聚,轉成非色。若色聚時,亦甁亦色,是則一法,應有二相,此前已破體應成多,是故甁等非卽色等。有作是:說:離色有甁,德實異故。應無此失。甁依有等,方可了知,是假非眞,已如前說。又不可執離色有甁。所以者何?故次頌曰:‘非離色有甁。’論曰:非離色等,別有實句,甁、衣等物,爲色等依。所以者何?甁、衣等物若非色等,應如空等,非色等依。是則應無甁衣等物,以不共德無故,如意,意必是無,非無常故,如先所破我虛空等。是故甁等非離色等,若卽若離,義旣不成,甁等皆虛,理應成立。復次,甁等色等互相依成,理俱不然。故次頌曰:‘非依甁有色 非有甁依色。’論曰:甁等、色等,體皆非實,如何定立能依、所依?此中依言,或表因義,欲顯實德因果不成。鵂鶹子執依甁等因,有色等果。此違比量。謂非色等、甁等爲因,是色等聲所詮表#故#取色等,心所緣境故,如色性等常故無因。數論師執:依色等因,有甁等果。亦違比量。謂非甁等、色等爲因,不離彼故,樂等性故,卽如色等。彼執色等與其有性,非卽非離,非卽有故,應如兔角,非甁等因。若言:色等卽是有性。應同有性。體無差別。若言:色等樂等爲性,旣許體同,無斯過者,此亦不然。違汝自宗根境別故。復大過失,樂、苦、癡三,有性亦同,應無異故。若言樂等非是有性,應如兔角,其體都無,色等亦應同彼非有,不相離故。如樂等三,是卽一切皆非實有,故非色等爲甁等因。復次,勝論者言彼立同性,與諸法一,有斯過者,我立同性,與諸法異,由相異故,應無此失。諸法相望,有同有異,法體局別。所以名異,有性該通。所以名同通局旣殊,故相有異,由相異故,異外有同。若如是者,同異句義應異性外,別立有同。有同異故,如所同法。若言不爾,此同異性境界異故,異外無同。其所同法境界一故,法外有同。若爾,諸法應有異性。所以者何?故次頌曰:‘若見二相異 謂離甁有同 二相旣有殊應離甁有異。’論曰:若見諸法同異相異,卽於法外,別立有同。旣見諸法同異相殊,應於法外,別立有異。同異二相俱遍諸法,異應如同,離法別有。設許法外有異有同,此復應有餘同異性。如是展轉,同異無窮,則不可知二相差別,二皆遍故,俱無窮故,異應如同,名同非異,同應如異,名異非同。是故法外無別同異。又若實等與有性別,應不能知實等是有,帶別相智不能審知。餘別相法,前已具辨,如何世閒於非有性,實等法上,起有智耶?若言:實等,雖非有性,與有合故,起有智者,則實等法假名爲有,體非眞有,應說爲無。如邊鄙人,立飡立溺,便痢不洗,不嚼楊枝,假號爲牛,非眞牛犢,實等亦爾,假有眞無。又汝應言何者眞有,餘與有合,假說有耶?若言有性是眞有者,其理不然,無差別故。有與實等,齊有智緣,如何可言一眞一假?又眞有假有,應非一智緣,眞假相別故。如王與王使。又言實等其體各異,有性是同,故與有別,此亦不然。實等眞體亦無有異,但可功能,相等有別,有性亦爾,功用有殊,云何定執有異實等?所以者何?俱所知故,竝非無故,同有用故,應互相似,皆異皆同。是故有性非離實等。復次,今應問彼,法外有性,以何爲喩,知實有耶?若言:如一所依實等,其相各別,不生數智,一數是同,能生數智。法與數合,名一甁等,由相異故。實等非一,有與法殊,此爲同喩。若爾,甁等非一智知,體非一故。如二、三等。若言甁等體雖非一,而一合故,名爲一者,是則此一雖非甁等,與甁等合,應名甁等。爲顯此義,故次頌曰:‘若一不名甁 甁應不名一。’論曰:譬如一數與實等合,不名實等,如是實等雖與一合,應不名一,更互相合,義無別故,世閒不應名一甁等。或復實等,與一合時,爲成一相,爲當不爾?若成一相,應捐實等,一數相非實等體故。若捐實等,一數應無,以數必依實等成故。若言實等不成一相,應非一智一言所了,雖與彼合,體非彼故,如空合人#智、言各別。若如槊等,與人合故,雖與人異,而得人名,其理不然,彼假說故。若言實等名爲一者,亦是假說,理又不然,無眞一故。若言一數是眞一者,理亦不然,智、言同故。若言一數遍該實等,實等不爾,故非眞一,理亦不然,前已破故。謂不應爲一智所緣,實等亦應非眞有,異於實等上起數智言,旣說爲假,於其數上,實等智言,例亦應爾。相待智言,二無別故,如何可說一假一眞?故立量言所執實等,非眞實等,數智數言,所行境故,如一二等。所執一等非眞,數體實等,智言所行境故,猶如實等。是故一切其體非眞,又數與實,曾無合時,云何乃言甁與一合,說甁爲一?所以者何?故次頌曰:‘甁一曾無合 甁應無一名。’論曰:實居空處,一在實中,處旣不同,豈得名合?則應一數不表一甁。由處不同,如二等數。若作是說:能依、所依,體互相遍,故名爲合,此亦不然,故次頌曰:‘若色遍於實 色應得大名 歒論若非他應申自宗義。’論曰:若色等德遍所依實,應如實體,亦得大名。地等處廣,旣得大名,色等亦然,如何非大?又色等德,應有形㝵,稱地等故,猶如地等。是則色等不依他成,有形㝵故。如所依實。俱有形㝵,處應不同,實之與德,應非因果。如是等類過失衆多,汝所立宗,便爲散壞。若言色等德句所攝,故無形㝵,此亦不然,歒論非他,應申宗義。對他歒論,自敍唐捐。我佛法中,聰睿勇猛,見眞理者,於汝所宗六種句義,如狂寱語,無承敬心,徒引何益?或復色等,依地等時,爲一分轉,猶如樂等,爲遍轉耶?若一分轉,應一實上,有德、無德、有靑、無靑,如是等過。若言遍轉,色等諸德應亦名大,與實處同,猶如地等。實在空中,德居實上,所據各別,如何處同?我意不言同依一處,但言德實,其體相遍,據空量等,故說處同,德若名大,應更有德,然德無德,故不名大。歒論非他,應申宗義。對他歒論,自敍唐捐。或復此中,言雖難德同實,名大而意難實,同德無形,以其處同。猶如色等。我宗地等皆有形質,如何同德,無形㝵耶?歒論非他,應申宗義。對他歒論自敍唐捐。或復色等與其果實,同依因實,和合而生。諸因實中,果體皆遍,處無別故,德應如實,亦立大名,實應如德,不立大稱。若言我宗實大非德,不可相類,其理不然。歒論非他,應申宗義。對他歒論,自敍唐捐。或復彼宗極微量小,衆微和合,起麤果時,麤果與因,處無別故,極微與色,應成麤大,色與麤果,應成極微。若言:我宗因小,果大,色無形量,理亦不然。歒論非他,應申宗義。對他敵論,自敍唐捐。如是已說有、數、色等,離實有體,多諸過難。其同異性如有應遮。共德如數,餘不共德及業差別,如色等破。於諸實中,各別轉故。勝論所執唯有爾所爲心言,因顯諸法有,以理推究#皆不得成,故不應執。又說頌曰:‘有數等能相 顯所相不成 除此更無因故諸法非有。’論曰:已辨有性、數及色等,不能顯有自所依法,除此無有餘決定因,可證諸法其體實有。不可無因立有諸法,勿有所立,一切皆成。故不可言諸法實有。應隨世俗,假說非無,唯此無愆。堪任推究,異此違越世俗己宗。鵂鶹所宗,實等非有,非有性故。猶若空花。有性亦無,非實等故,猶如兔角。是故皆虛。復次,數論者言:諸法不待有性、數等,而可了知,故先諸失,於我無過。爲破彼言,復說頌曰:‘離別相無甁 故甁體非一 一一非甁故甁體亦非多。’論曰:色、香、味等體相不同,別根所行,非餘根境,離彼諸法,無別有甁。故如色等,甁體非一。旣不許一,甁體應多,一一非甁,如何多體?色等性相展轉不同,豈得各成一類甁體?若一一法其體皆甁,共和合時,可名多體。旣無此義,甁體非多,亦不應言甁體實有。而不可說爲一爲多,兔角龜毛非實有故。豈不色等合成軍、林,說名一多?甁亦應爾,此唯世俗假說、軍、林,其中都無軍林實體。若執實有,應如甁破。汝亦不說別有軍、林。又色、香等無共合義,故不可說和合爲甁。所以者何?故次頌曰:‘非無有觸體 與有觸體合 故色等諸法不可合爲甁。’論曰:合謂其體展轉相觸。此唯有觸,謂地水等。色、聲、香、味非觸所攝,如何相觸,或觸觸耶?旣無有觸,合義不成。如無觸思,終無合義。若言色等有相觸義,應觸所攝,猶如地等。則唯觸體同類相合,色等諸塵定無合理,合則便失色等性故。設許色等聚集名合,而色等性終非實甁。所以者何?故次頌曰:‘色是甁一分 故色體非甁 有分旣爲無一分如何有。’論曰:色等聚集,摠說爲甁,色唯一分,理非甁體。不可以甁爲甁一分。如是聲等,例亦應然。一一非甁,皆甁分故#如是甁分,理亦不成。有分旣無,分爲誰分?色等一一其體非甁,除此更無眞實甁體。甁體無故,甁分亦無。豈色等塵實爲甁分?軍、林等物假說爲有,分與有分,卽離難思,應隨世閒所見,而說不可委細推究其眞。又若色等體實是甁,一切應甁。故次頌曰:‘一切色等性 色等相無差 唯一類是甁餘非有何理。’論曰:甁、衣、車等所依事中,色等能依,性相無別。若色等體皆實是甁,衣等亦應皆是甁體,卽色等故,如共許甁。或所執甁應非甁,體卽色等,故如衣、車等。色等不應同而有異,依之建立甁等類殊。汝宗更無同異性故。不由細分,安布差別,令其甁等,其相有異,同以色等爲自性故。甁等不應異於色等,違自所執,因果一故。如甁、衣等有不異失。色等亦然,卽一甁故。又不應說色異味等,不異甁等。故次頌曰:‘若色異味等 不異於甁等 甁等卽味等色何卽甁等。’論曰:甁等卽用味等爲體,應如味等,與色有異。故不可言色異味等,不異甁等。理相違故。亦不應言味等,一一與色等異,不異甁等,甁等卽用色等諸法,以爲自體,無別性故。如是已辨色等諸法,與甁等一,其義不成。今當顯說與甁等異,理亦不成。故次頌曰:‘甁等旣無因 體應不成果 故若異色等甁等定爲無。’論曰:地等大體攬色等成,故五大因卽五唯量。謂攬聲量,成於空大,更加觸量,成於風大,復加色量,成於火大,又加味量,成於水大,摠攬五量,成於地大,大望甁等,同體相成。如量能成,同類果故。若異色等,甁等無因,旣無有因,體應非果,以一切果待因成故。是故若言甁等異色,卽應甁等非果,非因非色等故。如龜毛等。又非根、境非因果故,色根所行無非因果,此非因果,根所不行。或復應無甁等,諸法非因果故,如石女兒。自性許因,思我許果,根所顯故,無不定失。如是數論所立甁等,若一若異,皆不得成。復次,勝論者言:瓦等細分,生甁等故,甁等有因。旣有其因,體卽是果,有因是果,其體非無,此亦不然。故次頌曰:‘甁等因若有 可爲甁等因 甁等因旣無如何生甁等。’論曰:瓦等細分依餘法成,何能爲因,生於甁等?不見世閒依他而立,非自有法,能作他因。豈不種等雖依他立,而能爲因,生於芽等?此同有難,非救前失,世所共知,何容致難?汝之所執異世所知。故於此中,同彼有難。世所知法依他生已,不復重生。不依他立,由自有力,能作他因。汝執不然,依他成法,乃至未滅,恒依他住,因若滅無,果卽隨滅,故汝所執異世所知。無體無能,豈生他果?或有因法,有體有能,可能生他,餘有因法,汝執瓦等極微爲因,或餘爲因,此竝非有,以無因故。瓦等體無,無體無力,何能生果?彼論宗中,因有二種,俱能生果,謂常、無常。諸無常因必依常立,常非有故,無常亦無。無無常因,果由何有?故彼因果皆不得成。復次,有作是言:‘甁等、瓦等,諸和合物,從本以來,同類因果,展轉相續,隨類不同,其體實有,一而可見。’此亦不然。諸和合物漸次分析,歸於色等,色等如前已辨#非有。云何依彼,有和合物?此和合物一及可見,皆如前破,不應重執。又色等法共和合時,無有一體。故次頌曰:‘色等和合時 終不成香等 故和合一體應如甁等無。’論曰:色等合時,終不展轉變成香等,故雖和合,不成一體,勿捨別相,失色等名。由是因緣,和合一體,應如甁等,其體實無。謂如甁等,離色等法,無別體故。一體不成,和合亦然,非離色等,有別體故,體不成一。又和合時,一一細分非和合故,應如未合,不合成一細分。不應各名和合,勿一合內,有多合體。是故和合體,非實有。又和合物必依色成,色體尚無,和合焉有?色體無者,如次頌曰:‘如離於色等 甁體實爲無 色體亦應然離風等非有。’論曰:應知此中四大造色,俱名爲色,變壞相故。變壞色相,大造合成,故離大造,無實有性。不可此中,唯一是色,勿唯此一變壞非餘。又亦不應一切是色,勿一切色皆同一體。體若有殊,應失色性,不可一性,有衆多體,勿一切法皆同一性。是故色名無實有體#唯依風等假立色名,如色體虛,受等亦爾。領納等相推體實無,唯有世閒虛假名相。若無大造,如何世閒有火等物,燒煮等用?又若一切皆無所有,諸所安立,應不得成。我不言無諸法體用,但說汝論所立皆無,謂世所知色受等體,燒煮等用,一切非無。若諸愚夫分別倒見,所執,體用,我說爲無,非諸聖人見此爲有,妄情所執都無有故。復次,勝論者說:‘火是能燒,地是所燒其體眞實,燒煮等用,亦眞實有,熟變色等現可知故。’今應詰問,火何所燒?爲煖,爲餘?汝應審答。竝許何失?二俱不然,所以者何?故次頌曰:‘煖卽是火性 非煖如何燒 故薪體爲無離此火非有。’論曰:煖非所燒,卽火性故,於自有用,現事相違。又汝宗中所燒,非煖故,不應執煖,爲所燒。亦不應言所燒是地。非煖性故,猶如水風。薪是所燒,所燒無故,薪體非有。薪體旣無,火依何立?火必依薪#而得生起,所燒薪盡火便無故,能燒、所燒,旣竝非有,熟變色等豈實有耶?故執實有能燒、所燒、燒煮等用,皆不應理。有說此頌不唯破彼勝論外道,地是所燒,但摠破言地等諸法非煖性故,非所煖體。此說不然,非煖性故,旣無同喩,應不成因。不可說言如未燒位,地等色聚非是所燒。於彼聚中,常有煖性,異相隨故,亦名所燒,苦樂等法隨所依身,由火變異,亦名所燒,無色界法前世下地所牽引故,亦名所燒,故非此因所引同喩。設爲同喩,理亦不然,燒非燒名唯有觸物,世閒共許,非餘法故。此非燒名,雖通餘法,而局同類,如非實言。又小乘人不執實有所燒等法#何用破爲?若言:破彼世俗所燒,便違世閒,何成比量?復次,離繫外道作如是言:‘地大極微及餘果物,雖非是火,而與火合,由雜火故,似煖相現。然彼地等眞實非燒,異煖性故。亦非非燒,似煖相故。雖俱不可說,而實是所燒。’此亦不然。故次頌曰:‘餘煖雜故成 如何不成火 若餘不成煖由火法應無。’論曰:若地大等,由火雜故,眞成煖性,應令成火,煖觸攝故,如實火大。若彼火雜,不成煖性,由火爲因,所生熟變,異觸諸法,亦應無有,如火不能生餘煖觸。若無熟變色等諸法,誰能燒煮,燒煮於誰?故燒煮等皆非實有。火非實能燒,觸所攝故,如地大等。地非實所燒,觸所攝故,如火大等。能煮、所煮,准此應破,故彼所執,其理不成。復次,應重審問食米齊宗,諸火極微爲有薪不?無且非理,故次頌曰:‘若火微無薪應離薪有火。’論曰:若火極微離薪而有,麤火同彼,應不託薪。若不託薪,卽應無有燒煮等用,如火極微。若爾,卽應失於火性,無燒煮用,如地、水、風,不見世閒有如是火,無燒煮用,及離於薪。故火極微必依薪有,如現見火依附於薪。或應信知極微非火,無火用故。猶若龜毛。有亦不然。故次頌曰:惠一火微有薪者 應無火極微論曰若火?極微恒與,薪合應名,麤火何謂,極微於一。切時與薪,合故應如,麤火失極,微性地與,彼合亦不成微餘亦。應然種類,同故則應,決定無一極微色法。旣然心法亦爾心與,心法俱生滅故又一切法一體不成所以者何故次頌曰審觀諸法時 無一體實有論曰諸有。爲法待因緣成積集,而生積集,而滅無有,一法其體,獨存於一。體中復漸分析乃至,極細猶有。衆分若諸法體非一應多此亦不然故次頌曰一體旣非有 多體亦應無論曰要先?有一後積,成多一體,尚無多體,焉有又汝?執一藉緣,生多一體。旣無多體豈有一體。非有前已具論是故,定無眞實,多體雖彼。所執一我,獨存而體,周圓與多。我合又多?法合一體,不成一旣,不成多由,何立豈不?空等獨一無二世咸,共了是一體耶世共所知是假非實汝所執實非世所知,如何得知空等一體唯是假有?故次頌曰:‘若法更無餘 汝謂爲一體 諸法皆三性故一體爲無。’論曰:若謂諸法更無餘伴,唯一獨存,說名爲一,空等諸法一一體上,皆有三性,謂有、一、物。有謂大有,一謂一數,物謂物類卽實德業三中隨一故虛空等一一法上,皆有三性。若不爾者,虛空等上,有、一智言應不得起。由是無有一法獨存,如何可言實有一體?若言有一,皆表實等,故唯實等名有一物,是則有一,無有一故,應不能起有一智言。若言假說無斯過者,此亦不然,前已破故。謂智言等,誰假誰眞?應竝爲眞,或俱是假。又一切法其相雖殊,應得實名,或德,或業。是故假說其過彌深,終不能除一成三失。一有三性,一體不成,一旣不成,三亦非有。是故諸法非一,非多,而言一多,是假非實。或有異釋,一法成三。謂一法言,簡異非一,非一極略,所謂二種。簡二及前,卽成二性,根本法體以爲第三。故一切法皆有三性。今應徵問,簡二取一,乃是自心分別有異,如何令法成三性耶?又簡前二,彌成其一,非二非多,名爲一故,是則立一,反破其三。何名以三而破其一?復有異釋,一法成三。簡去來今,三非有故,如無君等簡異立名,此簡三無,故成三性,此釋非理。所以者何?異類無邊,豈唯三種?簡無立有,無不唯三。簡有立名,有過千數,如何但說一法成三?又相簡別,唯在自心,或在名言,何關法體?是故此釋於破無能。復有釋言:常先已破,今此唯破執有無常。所執無常,皆有三性,謂生、住、滅,顯在諸經,此亦不然。生、住、滅相時分各異,如苦、樂、捨,必不同時,時旣不同,體相亦別,何名一法其性有三?又若說生無閒卽滅,應言二性,何得論三?又生滅時,前後各異,如去來世,不名一法,如何難言一法二性?是故此釋理亦不成。復有釋言:諸有爲法極於一念,於一念中,有多剎那時分性故,如臘縛等。言三性者,顯性非一。不唯有三此亦不然。時分前後,非一法故,如何可說一法有三?是故如前釋爲最勝。諸法一一非一,非多,隨世俗言有多,有一,世俗諸法隨世俗情,假立爲有,不任推究。諸有智人於世俗法,應隨說有,勿固尋思,若有尋思,世俗諸法求其性相不異,有人手執燈炬,入於闇室,求闇性相。所以者何?世俗諸法猶如幻闇,衆緣所成,不任思求,求卽散壞。復次,爲顯世閒所執諸法,皆非眞實,及顯外道所執不同故#次頌曰:‘有非有俱非 一非一雙泯 隨次應配屬智者達非眞。’論曰:一切世閒色等句義、名言所表,心慧所知情執不同,略有四種:謂有、非有、俱許、俱非。隨次應知配四邪執,謂一、非一、雙許、雙非。數論外道執有等性,與諸法一,卽當有句,此執非眞。所以者何?若靑等色,與色性一,應如色性,其體皆同,五樂等聲與聲性一,應如聲性,其體皆同,香、味、觸等類#亦應爾。眼等諸根與根性一,應如根性,其體皆同,應一一根取一切境,應一一境對一切根。又一切法與有性一,應如有性其體皆同。又樂、苦、癡及與思我,與有性一,應如有性,其體皆同。是則汝宗所立差別,皆不成就#故彼所執決定非眞。勝論外道說有等性,與法非一,當非有句,此亦非眞。所以者何?若靑等色與色性異,應如聲等,非眼所行。聲等亦然,異聲等性#應如色等,非耳等境。又一切法非有性者,應如兔角,其體本無,是則應同空無我論,或同餘道邪見師宗。豈不有性非卽諸法?法雖非有,而有有耶?所依法無,能依豈有?又有性上,無別有性,應不名有,所餘諸法,雖有有性,非有性故,其體應無,是則一切所立句義,皆不得成,便同撥無邪見外道。故彼所執,決定非眞。無慚外道執有等性,與彼諸法,亦一亦異,當於亦有,亦非有句,此亦非眞。所以者何?若有等性與色等一,同數論過,與色等異,同勝論失。一異二種,性相相違,而言體同,理不成立。一應非一,卽異故,如異,異應非異,卽一故如一。一異旣不成,有非有焉立?一異相異,而言體同,則一切法皆應無異,異相旣無,一相何有?一異二相相待立故。若謂一法待對不同,名一異者,卽應一異二竝非眞。或隨一假,一法二相,互相乖違,俱言是眞,必不應理。故彼所執決定非眞。邪命外道執有等性,與彼諸法,非一非異,當於非有,非非有句,此亦非眞。所以者何?若有等性,與法非一,同勝論過。與法非異,同數論失。又一異相世共知有,汝獨撥無,違世閒失。又汝所說,非一異言,爲但是遮爲,偏有表?若偏有表,應不雙非,若但是遮,應無所執,有遮有表,理互相違,無表無遮,言成戲論。汝執諸法性相非空,而說雙非,但爲避過,此雙非語,亦不應論。違汝所宗法性相故。若諸法性一一俱非,此俱非言亦不應說,擧言必有俱非性故,是則汝曹應常結舌,發言便壞自論所宗。默亦不成,以俱非故。語默俱失,一何苦哉!誰有智人,而不悲愍?故彼所執決定非眞。如是世閒四種外道邪論惡見,擾壞其心,虛妄推尋諸法性相,皆不中理,競執紛紜。於諸法中,起四種謗,謂有、非有、雙許、雙非,增益損減,相違戲論。是故世閒所執非實。復次,外道餘乘、弊魔惡友、邪論惡見,擾壞其心,於其世閒虛僞諸法,種種思搆,妄執爲眞,於相續假,謂是眞常。積集假中,執爲實有。爲顯此義,復說頌曰:‘於相續假法 惡見謂眞常 積集假法中邪執言實有。’論曰:有爲諸行前滅後生,無始時來,展轉相續,生滅變異,微細難知,因果連緜,其狀如一,愚夫惡見謂是眞常#邪執糾紛,遞相誹斥。色等諸法恃託因緣,虛假集成,都無實體。微細積聚,密合難分,衆分和同,冥然似一,愚夫僻執,言有實體,各據一途,互興諍論。又於相續積集假中,不達諸門分位假有,橫計種種義類不同,執一法中,有多實性。如是所迷自性差別,皆由惡見、邪執而生,緣此輪迴諸趣#諸有,備受衆苦,未有出期。是故應除惡見邪執,信解諸法#因緣集成,是假非眞,無顚倒理。復次,爲顯諸法衆緣所成,非一非常,無我無法,猶如幻化,情有理無,是俗非眞。復說頌曰:‘諸法衆緣成 性羸無自在 虛假依他立故我法皆無。’論曰:諸法虛假衆緣所成,起住依他,體無自在,念念生滅,衆分集成,非一非常,猶如幻化,愚夫執有,智者達無。故於其中,無我無法,一切外道及所餘乘,計一計常,爲我爲法,一常非有,我法定無。故辨緣成,顯二無我。復次,有作是言:字、名、句合,詮表自心,所欲說義,一一各別,雖不能詮,而和合時,能有所表。若義非有,詮亦應無,旣有能詮,定應有義。爲破彼執,故次頌曰:‘果衆緣合成 離緣無別果 如是合與果諸聖達皆無。’論曰:此頌意言諸無爲法,非緣成故,猶若空花,體用都無,如前廣說。諸有爲法衆緣所成,如幻所爲,無實體用,緣合成果,果不離緣。如樹成林,林非異樹。攬緣成果。順世俗言,勝義理中,無如是事。故諸聖者了達皆無。所以者何?名之與句,竝字所成。字復攬於衆分爲體,字一一分多剎那成,前後剎那無和合義。要前念滅,後念方生生有滅無,其理決定,無之與有,合義不成。前後二時有亦不合,時分異故。猶如去來,合義旣無,字分焉有?尚無字分,字體豈成?字體旣無,名句非有,無字名句,合義不成,如何可言字名句合,能詮表義?然諸世閒隨自心變,謂有衆字,和合爲名,復謂衆名和合,爲句,謂此名句能有所詮,能詮、所詮皆自心變。諸心所變,情有理無,聖者於中,如實知見。云何知見?謂見彼法皆是愚夫虛妄識心,分別所作,假而非實,俗有眞無,隨順世閒,權說爲有。是故一切能詮、所詮,俗有眞無,不應固執。復次,於諸所緣,空、無我見,能速成辦自利利他。所以者何?愚夫於境,執我、我所,生死輪迴,聖者於中,達空、無我,速證常樂,能巧利他。是故應修空、無我見,令自利滿,妙用無窮。爲顯此見,是利自他正眞要道。故說頌曰:‘識爲諸有種 境是識所行 見境無我時諸有種皆滅。’論曰:識能發生諸煩惱業,由此三有,生死輪迴,故說識心爲諸有種,能牽後有,得識食名。如是識心緣色等起,無所緣境識必不生。若能正觀,境爲無我,所緣無故,能緣亦無。能所旣亡,衆苦隨滅,證寂無影淸涼涅槃。至此位時,名自利滿。諸有本願爲利益他,住此位中,化用無盡,亦令有識,證此涅槃。是故欲求自他勝利眞方便者,應正勤修空、無我見。復有別釋,識爲諸有種者,謂宅識中,種種熏成諸業習氣,無明、有、愛所隨增故,能感三有生死輪迴,識爲所依,故說爲識。境是識所行者,識中習氣由執色等境界,熏成隨縛境界,是所依故,名曰所行。見境無我時者,謂無我見觀一切境性相空時,諸有種皆滅者,由無我見,永斷一切無明、有愛二種隨眠,由此二種是發業因,及能潤業,令生果故,斷此二種,業果不生。爾時,所有諸戲論事及煩惱事種子俱斷,故名皆滅,非一切種識等皆無。所以者何?由聖道起,但滅一切虛妄分別、戲論、習氣,令有漏法畢竟不生,一類有情諸無漏法無所依故,亦皆斷滅。一類有情由本願力所任持故,無漏諸識相續不斷,能爲殊勝、廣大、甚深無㝵辯等無邊功德所依止處。又由識等增上力故,圓滿究竟神通作用,窮未來際,任運相續,如是皆由本願行力所、引發故,自利利他功德無盡,令諸有情成熟解脫,盡未來際,妙用無窮。是故應修空、無我觀,捨諸邊執。大乘廣百論釋論卷第八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