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第二 仁

ABC_IT_K0952_T_002
026_0008_c_01L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김석군 개역


1. 잡온(雜蘊)

1) 세제일법납식(世第一法納息) ①
【論】어떤 것이 세제일법(世第一法)1)인가?2)

이와 같은 장(章)과 장의 뜻을 풀이한 것은 이미 이해가 되었을 것이니, 다음으로 본문을 자세히 해석하겠다.
【문】무엇 때문에 이것을 논(論)하는가?
【답】계경의 뜻을 분별하고자 함이니, 계경에서 세존께서는 “만일 어느 한 무리가 모든 행(行) 가운데서 이치대로[如理] 사유(思惟)하지 못하면서 세제일법을 일으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세제일법을 일으키지 못하면서 정성이생(正性離生)3)에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만일 정성이생에 들지 못하면서 예류(預流)ㆍ일래(一來)ㆍ불환(不還)ㆍ아라한(阿羅漢)의 과(果)를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어느 한 무리가 모든 행 가운데서 이치대로 사유하여 세제일법을 일으킨다는 것은 당연히 있을 수 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계경에서 세제일법의 이름을 말씀하셨다 하더라도 세제일법의 뜻을 자세히는 밝히지 않으셨다. 계경은 이 논이 의거한 곳[依處]이므로 거기서는 드러내 보이지 않았으나 여기에서 자세히 분별함이 마땅하다. 이런 인연으로 이것을 논하는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논을 지을 때 계경에 의거하는가?
【답】그것은 논을 지은 이가 원했던 것이 그렇기 때문이니,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이 논을 지은 것이다. 법성(法性)에 어긋나지 않았거늘 어째서 번거롭게 묻고 따지는가?
또 온갖 아비달마는 모두가 계경의 뜻을 해석하기 위해서이니, 모든 경의 뜻을 자세히 분별하기 때문에 비로소 아비달마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저 존자는 모든 경전 가운데서 갖가지 서로 비슷하지 않은 뜻을 찬집(纂集)하여 분별하고 해석하여 잡온(雜蘊)이란 이름을 붙였고 나아가 갖가지 견해 갈래[見趣]를 찬집하여 분별하고 해석하여 견온(見蘊)이란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리고 이름 붙인 여덟 가지의 온[八蘊]들은 모두가 온갖 법상(法相)을 자세히 분별하고 있다.
【문】무엇 때문에 존자는 논의 첫머리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했는가? 차례에 따라서4) 모든 공덕을 말하기 위해서인가, 차례를 거스르면서 모든 공덕을 말하기 위해서인가?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선후 차례에 의하여 말하기 위해서인가?
가령 그렇다면 무슨 과실이 있는가? 만일 차례에 따라서 모든 공덕을 말한다고 하면 먼저 부정관(不淨觀)이나 지식념(持息念)5) 등을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염주(念住)를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3의관(義觀)을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7처선(處善)을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난(煖)을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정(頂)을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인(忍)을 말해야 하고, 그러한 뒤에야 세제일법을 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만일 차례를 거스르면서 모든 공덕을 말한다고 하면 먼저 아라한과를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불환을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일래를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예류를 말해야 하며, 그 다음에 견도(見道)를 말해야 하고, 그러한 뒤에야 세제일법을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만일 순결택분의 선후 차례에 의하여 말한다고 하면 마땅히 먼저 난을 말해야 하고, 그 다음에 정을 그 다음에는 인을 말해야 하며, 그러한 뒤에야 세제일법을 말하는 것이 마땅하다.
묘음(妙音) 존자는 『생지론(生智論)』에서 “어떤 것이 난인가? 어떤 것이 정인가? 어떤 것이 인인가? 어떤 것이 세제일법인가?”라고 말씀한 것처럼, 만일 이 세 가지의 차례에 의하지 않는다면 지은 논은 뒤섞여서 어지러운 과실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계실 때 대가다연나(大迦多衍那)6) 존자 같은 이는 그지없이 희유한 공덕을 성취하여 한량없는 법의 자상(自相)ㆍ공상(共相)에 대하여 장애 없는 지혜[無障礙智]가 바라는 대로 눈앞에 나타났고 용맹스럽게 정진함이 항상 끊임이 없었으며, 이미 아비달마의 글과 뜻의 큰 바다에 잘 들어가서 끝없는 각혜(覺慧)가 기울어지거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이 묘고산(妙高山) 같았고, 대론왕(大論王)이 되어 다른 이의 이론을 조복하면서 스스로가 세운 이론에는 당할 이가 없었다.
지금 가다연니자(迦多衍尼子) 존자도 그와 같은데 무엇 때문에 논을 지으면서 먼저 세제일법을 말하였는가?
【답】모든 논사들은 이것에 대하여 갖가지로 설명을 달리한다. 어떤 이는 “지금 여기에서는 차례에 따라서 모든 공덕을 말한 것도 아니고, 차례를 거스르면서 모든 공덕을 말한 것도 아니며, 또한 순결택분의 선후 차례에 의하여 말한 것도 아니다. 다만 논을 지은 이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이 논을 지은 것이고 법상에 어긋나지 않는데 어째서 번거롭게 묻고 따지는가?”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아비달마는 성품과 모양[性相]을 드러내는 것이어서 계경과는 같은 것이 아니거늘 어찌 차례를 구하는가? 아비달마는 광대한 논의 도[論道]로써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과 모양을 결택하는 것이어서 이미 번잡한데, 여기에서 그 차례를 구해서는 안 된다. 만일 차례를 구한다면 글은 번잡함이 더할 뿐이고 뜻에는 이익이 없다”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논을 지은 이의 뜻을 힐문(詰問)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경에서 먼저 세제일법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세한 설명은 앞과 같다.) 지금 이 논사는 경에 의거하여 논을 지었기 때문에 역시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문】논을 지은 이는 그만 두고 무엇 때문에 경에서 세존께서는 먼저 세제일법을 말씀하셨는가?
【답】교화 받는 이의 정도[分齊]를 관찰하여 말씀하셨기 때문이니, 부처님은 교화 받을 이를 관찰하여 이미 하품(下品)7)과 중품(中品)의 인(忍)을 얻고서도 아직 상품(上品)의 인과 세제일법을 얻지 못했으면 그것을 얻게 하려고 이런 말씀을 하셨다.
“만일 어느 한 무리가 모든 행 가운데서 이치대로 사유하지 못하고 세제일법을 일으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여기에서 이치대로 사유한다는 것은 상품의 인(忍)을 드러내는 것이니, 세제일법이 지금 막 제 이름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 세존께서는 교화 받을 이의 수행의 정도를 관찰하시여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어떤 이는 “이것에 대한 많은 비방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이니, 다른 이들이 이 세제일법에 대하여 많은 비방을 일으키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많은 비방이란 자성(自性)에 대해서 그리고 이름[名]과 세계[界]와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現前]과 물러나는 것[退]에 대해서 모두 비방을 일으키는 것이다.
자성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신근(信根) 등 5근(根)으로써 자성을 삼는다”고 말한다. 이름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이것은 종성지(種性地)의 법이라 해야 하고 세제일법이라고 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이것은 바로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에 매인 것[繫]이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색계와 무색계(無色界)에 매인 것이다”라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삼계(三界)에 매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삼계에 매인 것이고 매이지 않은 것[不繫]이다”라고 말하며, 또 어떤 이는 “이것은 삼계에 매인 것도 매이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말한다.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이 법은 여러 생각[多念]이 이어지면서 눈앞에 나타나 있다”라고 말하고, 물러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일으킨다 함은 어떤 이는 “이 법은 물러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갖가지의 비방을 그치게 하기 위하여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
어떤 다른 논사는 “모든 유루(有漏)의 법은 모두가 견고하지 않아 똥을 닦은 헝겊[糞掃]이나 흙탕[淤泥]과 같다. 무엇이 여기에서 견고하고 가장 수승하기가 제호(醍醐)와 같으냐고 한다면 세제일법이라고 하리니, 이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무아(無我)에 수순하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 이 논 가운데서 벗어남[出離]ㆍ해탈ㆍ열반을 찬탄하고 무아에 수순한 것이 외전(外典)에서 모든 욕심과 쾌락의 바탕[樂具]을 찬탄하고 수용하면서 아집(我執)에 수순하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다.
세제일법은 법(法)이라는 말이 있기 때문에 이미 무아에 수순하는 이 논과는 동일하지만 난(煖) 등은 법이라는 말이 없어서 이 논이 무아에 수순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세간의 법 가운데서 수승한 것8)이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 모든 논 가운데서 이 논이 가장 뛰어나며 세제일법이 세간의 법 가운데서 뛰어난 것이 이 논과 동일하므로 먼저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부처님께서 세간에 오셔서 진실한 이익을 주신 것이라 한다. 그는 그때에 장애를 받지 않고 뛰어난 뜻[勝義]의 성스러운 법재(法財)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세간에 오시면 중생이 법에 들어가는 두 가지 길이 있으니, 첫째는 세속(世俗)이요, 둘째는 승의(勝義)이다. 세속이란 수염과 머리칼을 깎아 없애고 법복(法服)을 입고서 바른 믿음으로 출가하는 것을 말하며, 승의란 세제일법에서 곧장 고법지인(苦法智忍)을 끌어내는 것을 말한다.
세속에서 들어가는 법에는 두 가지 허물이 있으니, 첫째는 파계(破戒)요, 둘째는 세속으로 돌아가는[歸俗] 것이다. 승의에서 법에 들어가면 이와 같은 허물이 없다. 그의 종성(種性)9)에 따라 자유자재로 자기의 승[自乘]의 공덕을 증득하면서 물러나거나 상실함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성도의 문[聖道門]이 닫혀져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열리고, 일찍이 버리지 못했던 이생의 성품[異生性]을 버리게 되며, 아직 얻지 못했던 모든 성스러운 도를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10)”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이생(異生)의 이름을 버리면서 성자(聖者)의 이름을 얻고, 이생의 수(數)를 버리고 성자의 수를 얻으며, 이생의 위치[分齊]를 버리고 성자의 위치를 얻으며, 이생의 종성을 버리고 성자의 종성을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심(心)은 얻고 심의 인(因)은 얻지 못하며, 명(明)은 얻고 명의 인은 얻지 못하며, 수(受)는 얻고 수의 인은 얻지 못하나니, 그 밖의 심소(心所)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일찍이 익힌 연[曾習緣]을 버리고 일찍이 익히지 못했던 연[未曾習緣]을 얻고11), 공통한[共] 것을 버리고 공통하지 않은[不共] 것을 얻으며, 세간(世間)을 버리고 출세간(出世間)을 얻고, 유애미(有愛味)를 버리고 무애미(無愛味)를 얻으며, 탐기의(耽嗜依)를 버리고 출리의(出離依)를 얻는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의심하는 이생의 성품을 끊기 위한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 의심이 있는 이 이생의 성품은 이미 시작도 없었고 역시 종말도 없어야 하거니와 지금 그의 종말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곧 세제일법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이생으로서의 허물[過患]과 이생으로서의 변이하고 달라짐[變異]과 이생으로서의 거짓[虛誑]과 이생으로서의 억셈[剛强]이 모두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고 난ㆍ정ㆍ인위에서는 혹 일어나는 것이 있기도 하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생이 이 법을 일으키면 반드시 이생이 아닌 지위[非異生位]에 이르러서 비로소 목숨을 마치게 된다.
이생과 이생이 아닌 성품에서처럼 아직 진리를 보지 못한 것[未見諦]과 이미 진리를 본 것[已見諦]ㆍ아직 과를 얻지 못한 것[未得果]과 이미 과를 얻은 것[已得果]ㆍ아직 정성이생에 들지 못한 것[未入正性離生]과 이미 정성이생에 든 것[已入正性離生]ㆍ아직 현관을 일으키지 못한 것[未起現觀]과 이미 현관을 일으킨 것[已起現觀]ㆍ부정취에 머무른 것[住不定聚]과 정정취에 머무른 것[住正定聚]ㆍ성도가 없는 것[無聖道]과 성도가 있는 것[有聖道]ㆍ증정이 없는 것[無證淨]과 증정이 있는 것[有證淨]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한 줄 알아야 하고 난ㆍ정ㆍ인위 등은 곧 결정되지 않은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선근을 일으키면 한 찰나(刹那) 동안이라도 반드시 정체(停滯)함이 없고, 난(煖) 등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으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이생의 몸으로 있는 동안에 염주(念住) 등의 행이 닦여서 구경(究竟)에 이르게 되고, 난 등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최초에 유루의 마음이 끊어지면 무루의 마음이 이어진다고 하고 그 밖의 자리에서는 그렇지 않으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이생으로 하여금 기울이거나 움직일 수 있는 몸인데도 기울이거나 움직이지 않게 하니, 이 때문에 먼저 설명한 것이다. 마치 묘고산이 금륜(金輪) 위에 걸쳐 있으나 사방의 맹렬한 바람이 기울어지게 하거나 움직이게 하지 못하는 것처럼 이러한 이생도 이 법에 편안히 머물러 있으면 네 가지 전도된 나쁜 견해로는 기울이거나 움직이지 못하고 그 밖의 다른 이생의 자리에서는 곧 그와 같지 않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마치 밝은 모양[明相:해]이 처음과 끝을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 밝은 모양은 낮의 시작과 밤의 끝을 드러내는 것처럼 세제일법도 그와 같아서 성자의 길[聖道]의 시작과 이생으로서의 마지막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작과 마지막을 나타내는 것처럼 이와 같이 지금 제도되는[正度] 것과 이미 제도된[已度] 것과 나아가 드는[趣入] 것과 이미 벗어난[已出] 것과 가행(加行)과 구경(究竟)을 나타내는 것에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는데 그 밖의 자리에서는 그렇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는 동일한 법[同法]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다른 모양[異相]이 있을 수 있음을 드러내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 세제일법은 고제(苦諦)에 속한다 하더라도 곧장 처음부터 괴로움을 없애는 도[滅苦道]를 이끌어내며, 세간의 유전(流轉)과 노사(老死)와 살가야(薩迦耶)12)에 속한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것을 없애는 도를 이끌어내지만, 난 등은 그렇지가 못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세간의 연(緣)이라 해도 곧장 처음부터 출세간의 연을 이끌어냄을 드러내고 그 밖의 지위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
세간과 출세간의 연에서처럼 이와 같이 때가 있는[有垢] 것과 때가 없는 것[無垢], 허물이 있는[有過] 것과 허물이 없는[無過] 것, 독이 있는[有毒] 것과 독이 없는[無毒] 것, 흐림이 있는[有濁] 것과 흐림이 없는[無濁] 것, 신견이 있는 일[有身見事]과 신견이 없는 일[無身見事], 뒤바뀜이 있는 일[有顚倒事]과 뒤바뀜이 없는 일[無顚倒事], 탐애가 있는 일[有愛事]과 탐애가 없는 일[無愛事], 수면이 있는 일[有隨眠事]과 수면이 없는 일[無隨眠事] 등의 연에 있어서도 그러한 줄 알아야 하나니, 이 때문에 먼저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만일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기세가 있고 힘이 있어서 하는 일이 있게 됨이 건장한 장부와 같다. 그때에는 곧장 성스러운 첫 지관(止觀)을 이끌어내고 성스러운 견해를 일으키며 지혜의 머리에 비로소 그 밖의 각지(覺支)의 꽃다발을 쓰게 되나 그 밖의 다른 자리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 법은 그 작용이 가장 수승하여 이생의 성품을 버리고 성자의 성품을 얻으며, 삿된 성품을 버리고 바른 성품을 얻으며, 곧장 정성이생에 들어가고 그 밖의 다른 법에서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행하는 이가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가벼이 움직임이 투라솜[妬羅綿]과 유첩솜[柳疊絮] 등보다 더하고 모든 이생의 성품을 버리고 성인의 교법에 편히 머무르며 동요하지 않는 것이 제석천[天帝]의 당기[幢]와 같으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행하는 이가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시작도 없는 과거로부터 심(心)ㆍ심소(心所)로 하여금 질박 정직하지 않음을 이루게 한 번뇌와 나쁜 견해를 버리고 아직 얻지 못한 심ㆍ심소로 하여금 질박 정직한 성품을 이루게 하며 무루의 성도(聖道)를 얻게 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수행하는 이가 이 법에 머물러 있을 때라면 5무간(無間)이란 다섯 가지의 보특가라의 동분(同分)을 버리고 4향(向)ㆍ4과(果)라는 여덟 가지 보특가라 동분을 얻는 것이니13),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세제일법은 세 가지 일을 말미암은 까닭에 논에서 먼저 이것을 말씀한 것이니, 첫째는 경의 말씀에 수순하고, 둘째는 많은 비방을 그치게 하며, 셋째는 이 찰나 동안에 첫 성인의 과[初聖果]를 얻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경에 따르고 비방을 그치게 한다 함은 앞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곧 이 찰나 동안에 첫 성인의 과를 얻는 것은 그것이 세제일법과 함께 곧장 사용과(士用果)가 되는 것이니, 이러한 모든 인연 때문에 이 논에서는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존자는 여기에서 거꾸로 된 차례에 의거하여 모든 법을 널리 펴 설명했다”라고 말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논은 곧 마땅히 먼저 아라한과를 말하고 그 다음에 불환을 말하며 그 다음에 일래를 말하고 그 다음에 예류를 말하며 그 다음에 견도(見道)를 말해야 한다. 그러한 뒤에야 세제일법을 말하는 것이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부터 말했는가?
【답】여기에서는 이생의 몸으로 있는 동안의 청정(淸淨)과 잡염(雜染)의 모든 법을 거꾸로 말했지만 온갖 것을 다 거꾸로 말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 “어떤 것이 세제일법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어떤 것이 난(煖)인가?”라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이생의 몸을 지닌 동안에 청정품(淸淨品)의 법을 거꾸로 말한 것이다.
다음에 “이 20구(句)의 살가야견(薩迦耶見)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만일 견해가 없다면” 하고 말하였으니, 이것은 이생의 몸을 지닌 동안의 잡염품(雜染品)의 법을 말한 것이다.
이 이품(二品)의 법을 분명히 아는 것은 무아의 지[無我智]이다. 이 때문에 제2 지납식(智納息) 중에서 “혹시 하나의 지혜[一智]이면서 온갖 법을 아는 것이 있는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 무아의 지는 어떤 연유로 생기는가? 연기(緣起)를 깨닫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3 납식에서는 “어느 한 보특가라에게서 이 생(生)에서의 12지연기(支緣起)는……(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 연기를 깨닫는 것은 어떤 연유로 생기는가? 사랑[愛]과 공경[敬]이다. 이 때문에 제4 납식에서는 “어떤 것이 사랑인가? 어떤 것이 공경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사랑과 공경은 어떤 연유로 생기는가? 참(慚)과 괴(愧)이다. 이 때문에 제5 납식에서는 “어떤 것이 참인가? 어떤 것이 괴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와 같은 참ㆍ괴는 어떤 연유로 있게 되는가? 법상(法相)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제6 납식에서는 “색법(色法)ㆍ생로(生老)ㆍ무상(無常)……(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이 법상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연유로 얻게 되는가? 이치 없는[無義] 것을 버리고 이치 있는[有義] 것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7 납식에서는 “모든 하열(下劣)한 고행(苦行)을 닦는 것은 이치 없는 것과 함께 함인 줄 알아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다.
무엇을 이치 없는 것은 버리고 이치 있는 것은 닦는다 하는가? 바른 생각[正思]과 바른 사유[正思惟]를 말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8 납식에서는 “어떤 것이 사(思)인가? 어떤 것이 사유인가?……(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했던 것이다.
잡온의 법을 깨달으면 무엇을 말미암아 맑고 깨끗하게 되는가? 결(結)이 끊어짐을 말미암는다. 이 때문에 다음에는 제2 결온(結蘊)을 말한다.
이와 같이 결이 끊어지면 무엇을 말미암아 증득(證)하는가? 모든 지혜를 말미암는다. 이 때문에 그 다음에 제3 지온(智蘊)을 말한다.
누가 결을 끊고 모든 지혜를 일으키는가? 업장(業障)이 없는 보특가라이다. 이 때문에 그 다음에는 제4 업온(業蘊)을 말한다.
모든 업의 대부분은 무엇에 의거하여 생기는가? 4대종(大種)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제5 대종온(大種蘊)을 말한다.
대종으로 만들어진 것 중에 뛰어난 것은 무엇인가? 안근(眼根) 등의 감관이다. 이 때문에 그 다음에는 제6 근온(根蘊)을 말한다.
모든 감관이 청정하게 되는 것은 어떤 세력을 말미암는가? 모든 선정[定]을 얻는 것을 말미암는다. 이 때문에 그 다음에는 제7 정온(定蘊)을 말한다.
선정을 얻고 나서도 삿된 추구(推求)를 일으키면 다시 모든 나쁜 견해 갈래[見趣]를 이끌어 내므로 식상(識相)으로 하여금 빨리 끊어 없애게 하기 위하여 맨 나중에 제8 견온(見蘊)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낱낱 온(蘊) 가운데서 모든 법을 빠짐없이 포섭한다 해도 더욱 나은 것에 따라 온의 이름을 제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꾸로 된 차례를 말미암아 이생의 몸을 지닌 동안의 청정ㆍ잡염의 모든 법을 말하면서도 온갖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니, 이 때문에 먼저 세제일법을 말한 것이다.

【論】어떤 것이 세제일법인가?
【답】만일 심(心)ㆍ심소(心所)의 법(法)이 등무간(等無間)이 되어 정성이생(正性離生)에 들어가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

어떤 이는 “만일 5근(根)14)이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어가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라고 말한다.
【문】누가 그런 학설을 주장하는가?
【답】그것은 구(舊) 아비달마자(阿毘達磨者)의 학설이다.
【문】그들은 무엇 때문에 그런 학설을 주장하는가?
【답】그 밖의 다른 부(部)를 차단하기 위하여 그런 학설을 주장하나 반드시 5근을 성품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분별론자(分別論者)15)는 신근(信根) 등의 5근은 무루(無漏)일 뿐이므로 모든 이생으로서는 모두가 성취하지 못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문】그 부에서는 무엇 때문에 그런 집착을 하는가?
【답】그들은 계경 때문에 그런 집착을 하는 것이다. 계경에서 “만일 5근이 있어서 왕성하여 맹렬하고 날카로우면서 평등하고 원만하게 많이 닦아 익히는 까닭에 아라한이 되어 모든 번뇌가 영원히 다한다. 이로부터 덜하면 아래로 불환을 이루고, 다시 더 덜하면 그 아래로 일래를 이루며, 다시 더 덜하면 그 아래로 예류를 이룬다. 만일 이 신근 등 5근이 전혀 없으면 나는 그를 밖의 이생품[外異生品]에 머무는 이라고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경의 말씀 때문에 그들은 5근은 무루일 뿐이라고 집착한다. 그들의 뜻을 차단하기 위하여 구 아비달마자는 “세제일법은 5근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한 것이다.
세제일법은 이생의 몸에 있으므로 5근은 역시 유루(有漏)의 이생에 통하고 결코 유위(有爲) 무루를 이루지 못하는 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문】만일 5근의 바탕[體]이 무루일 뿐이라고 집착한다면 어떠한 허물이 있는가?
【답】곧 계경에 어긋난다. 계경에 “나는 만일 이 신근 등 5근에 대해서 ‘이것은 모임[集]이다, 이것은 소멸[沒]이다, 이것은 맛[味]이다, 이것은 과환(過患)이다, 이것은 벗어남[出離]이다’라고 사실대로 알지 못하면 이 천상과 인간의 세간과 악마[魔]와 범(梵) 등을 초월하지 못하며 나아가 더할 나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지 못한다고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무루의 법은 이와 같은 품류(品類)의 관찰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분별론자는 “세존께서는 여기에서 자상관(自相觀)을 말씀하신 것이니, ‘나는 이 신근 등 5근에 대하여 모임 등의 자상(自相)을 사실대로 알지 못하면 이 천상과 인간의 세간과 악마와 범 등을 초월하지 못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한다.
“어떻게 무루는 모임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저들은 “이것은 반드시 착한 사람[善士]을 친근하고 바른 법을 들으며 이치대로 사유하고 법답게 따르면서 법답게 행함을 말미암아 모아[集] 일으키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것은 소멸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저들은 “반드시 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16)이 없어지면서[沒] 이지근(已知根)이 일어나고 이지근이 없어지면서 구지근(具知根)이 일어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이것은 맛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저들은 “이것 역시 탐애[愛]의 소연(所緣)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무루는 탐애에 매이게 되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그렇지는 않다. 그대가 무루의 법은 번뇌의 경계이면서도 매이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처럼 우리 종(宗)에서도 탐애는 무루를 반연하면서도 얽맬 수는 없는 것이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어떻게 무루는 과환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무루는 무상(無常)하다고 관찰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떻게 무루는 벗어남의 자상이라고 관찰하는가?”라고 물으면 그들은 “열반할 때에는 반드시 버리기 때문이다. 계경의 말씀에 ‘열반할 때에 온갖 유위를 모두 다 버린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한다.
그들의 말은 도리에 옳지 못하다. 왜냐하면 이 경에 “나는 만일 이 신근 등의 5근에 대해서 ‘이것은 모임이다, 소멸이다, 맛이다, 과환이다, 벗어남이다’고 사실대로 알지 못하면 모든 번뇌를 영원히 다하여 위없는 보리를 증득하지 못한다고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니, 자상관은 모든 번뇌를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그들의 말은 결국 도리에 옳지 못하다.
이를 말미암아 5근은 무루만은 아니다. 또 5근이 무루만이라고 집착한다면 경의 말씀에도 어긋난다. 계경에 “세존께서는 법요(法要)를 연설하여 주소서. 왜냐하면 모든 유정들이 세간에 처해 있으면서 나기도 하고 자라기도 하는데 이근(利根)인 자도 있고 중근(中根)인 자도 있으며 연근(軟根)인 자도 있기 때문입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또 계경에 “비구들이여, 알아야 한다. 나는 옛날 바른 법륜[法輪]을 굴리기 이전에 일찍이 불안(佛眼)으로 보니 모든 유정들이 세간에 처해 있으면서 나기도 하고 자라기도 하는 것을 관했더니 이근ㆍ중근ㆍ연근의 모든 근기의 차별이 있었다. 용모가 잘 생기고 잘 조복하며 티끌과 때[塵垢]가 엷은 이라도 만일 법을 듣지 못하면 수승한 이익을 잃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신근 등의 5근이 만일 무루만이라면 이근인 자는 아라한이요 중근인 자는 불환이며 연근인 자는 일래나 예류이어야 한다.
만일 그렇다면 세존께서 아직 법륜을 굴리기 이전에도 마땅히 법륜이 이미 굴려졌다고 해야 하리니 온갖 성자(聖者)들이 모든 세간에 이미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법륜을 굴린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분별론자는 “여기에서 근기[根]라는 것은 소의처(所依處)를 말한 것이지 근기 자체를 말한 것이 아닌데 내가 어찌 어겼다고 하는가?”라고 말하니, 그들의 이러한 말도 도리에 맞지 않다. 그 밖의 다른 경을 어겼기 때문이다.
다른 경에서 “생문(生聞) 범지(梵志)가 세존에게 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교답마존(喬答摩尊)께서는 근(根)에 몇 가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22근(根)17)을 말하니, 안근(眼根)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셨다.
그 경에서 어찌 근의 소의(所依)를 말씀하셨겠는가? 저 경과 이 경에서 근이라는 말은 다르지 않다. 하나는 근의 바탕을 말씀하셨고, 하나는 소의를 말씀하셨다면 제일 잘 성취한 것은 아니며 스스로의 허망한 고집일 뿐이다. 그러므로 결정코 신근 등의 5근도 유루에 통한다고 인정해야 한다.
【문】만일 유루에 통한다고 하면 그들이 인용한 경은 어떻게 해석해야 마땅하겠는가?
【답】신근 등 5근은 실로 유루에 통하는데도 그 경에서 한결같이 무루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무루의 근에 의하여 이룩된 성자(聖者)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그 경에서는 오직 성자의 도[聖道]를 말할 뿐이다. 왜냐하면 성자로서의 차별은 성자의 도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요, 세속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문】그 경에 또 “만일 이 신근 등 5근이 전혀 없으면 나는 그를 밖의 이생품에 머문다고 말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다시 어떻게 통한다고 말하는가?
【답】선근이 끊어진 이[斷善根者]를 밖의 이생품이라고 한다. 모든 이생에는 통틀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안[內]이요, 둘째는 밖[外]이다. 선근이 끊어지지 않은[不斷善根] 것을 안이라 하고, 선근이 끊어진 것을 밖이라 한다. 그 경의 뜻은 “만일 이 신근 등 5근이 전혀 없으면 나는 선근이 끊어진 사람이라 말하리라”고 하신 까닭에 나는 인용한 경전이 아무런 과실이 없다고 여긴다.
혹 어떤 이는 “이것은 경부(經部)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경부의 논사들도 분별론자의 앞과 같은 집착을 막고 없애기 위한 까닭으로 세제일법은 5근으로 성품을 삼으면서도 오직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어떤 이는 “이것은 독자부(犢子部)의 종(宗)이다. 그 부의 논사들은 세제일법은 신근 등 5근으로 자성을 삼는다. 오직 이 5근만이 바로 자성선(自性善)이나 그 밖의 것은 이것이 섞였기 때문에 역시 선(善)이라 이름한다. 이 5근 때문에 이룩된 온갖 현성(賢聖)의 차별도 다른 근을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고 집착한다. 마치 계경에 “만일 5근이 더 늘어가고 맹렬하고 날카로우면서 평등하고 원만하도록 많이 닦고 익히면 구해탈(俱解脫)18)을 이루게 된다. 이보다 덜하면 아래로 혜해탈(慧解脫)을 이루고, 다시 덜하면 아래로 신증(身證)을 이루며, 또다시 덜하면 아래로 견지(見至)를 이루고, 또다시 덜하면 아래로 신해(信解)를 이루며, 또다시 덜하면 아래로 수법행(隨法行)을 이루고, 또다시 덜하면 그 아래로 수신행(隨信行)을 이룬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문】지금 이 논의 종(宗)과 독자부와는 서로 어떤 관계가 있어서 그의 설명을 서술하는가?
【답】의심하는 이로 하여금 결정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과 여기서 세운 뜻의 종과는 비록 대부분이 동일하다 하더라도 조금의 차이는 있다.
그의 부(部)에서는 “세제일법은 오직 신(信) 등의 5근으로만 성품을 삼는다. 모든 이생의 성품은 한결같이 오염되었으니, 욕계(欲界)에 매인 고제(苦諦)를 보는 것에 의해 끊어질 수 있는 10종의 수면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수면의 체성은 바로 불상응행(不相應行)이다. 열반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학(學)ㆍ무학(無學)ㆍ비학비무학(非學非無學)을 말한다. 아소락(阿素洛)을 세워서 제육취(第六趣)로 삼는다. 보특가라의 본체(體)는 실로 존재[實有]한다”라고 고집한다. 그들의 이와 같은 여섯 가지 또는 일곱 가지는 이것과는 동일하지 않지만 그 밖의 대부분은 서로 비슷하다. 그것과 이것은 모두가 동일하다고 의심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짐짓 그 종을 서술하면서 차단하고 차이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지금 그에게 물어야겠다. 만일 오직 5근만이 자성선이라면 그 밖의 선한 법의 자성은 무엇인가? 만일 그것은 불선(不善)이요 무기(無記)인데도 5근이 섞였기 때문에 역시 선(善)이라 한다면 이와 같은 5근은 그것과 서로 섞여 있거늘 무엇 때문에 불선 또는 무기라고는 하지 않는가?
그리고 신근 등의 다섯 가지와 그 밖의 법과는 동일한 소의(所依)요 동일한 행상(行相)이며 동일한 소연(所緣)이며 동일하게 생기고[起]ㆍ동일하게 머무르고[住]ㆍ동일하게 소멸하고[滅]ㆍ동일한 결과[果]이고ㆍ동일한 등류(等流)이고ㆍ동일한 이숙(異熟)인데도 5근이 자성선이요 그 밖의 것은 서로가 섞였기 때문에 임시로 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면 다만 망정(妄情)을 좇고 있을 뿐이니 바른 도리에 맞지 않는다.
이런 허물이 없게 하기 위하여 “세제일법은 근(根)이면서 근이 아닌[非根] 성품이다”라고 말한다.
법구(法救) 존자는 “모든 심(心)ㆍ심소(心所)는 사(思)의 차별이다. 그러므로 세제일법도 사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셨다.
각천(覺天) 존자는 “모든 심ㆍ심소의 본체는 심(心)이다. 그러므로 세제일법도 심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라고 말씀하셨다.
저 두 존자는 “신(信) 등의 사(思)와 심(心)은 앞뒤가 저마다 다르며 한꺼번에 작용함이 없다. 신 등의 5근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見道)에 든다는 것은 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신 등의 5근이 견도에 든다’는 말을 한 것이고, ‘혹은 신의 사와 신의 심으로써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어간다’고도 하고, ‘혹은 혜(慧)의 사와 혜의 심으로써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어간다’고도 한다”고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상응하지 않는 법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어간다고 해야 한다.
그들은 “인정한다 해도 무엇이 잘못이겠는가? 그대의 종(宗)에서 ‘마음 자체의 전후가 비록 상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연(所緣)이 있으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 수 있다’라고 말한 것처럼 우리의 종도 역시 그러하여 신 등의 사와 심이 비록 자체에는 상응하는 뜻이 없어도 소연이 있으면 무간(無間)이 되어 견도에 든다는 것이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評】큰 허물이 있다. 왜냐하면 만일 신의 사와 심이 등무간이 되어서 견도에 든다고 하면 이미 정진(精進)과 염(念)ㆍ정(定)ㆍ혜(慧)는 없으므로 마땅히 해태(懈怠)ㆍ망념(妄念)ㆍ산란(散亂)ㆍ악혜(惡慧)를 가지고 견도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만일 혜의 사와 심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든다 하면 이미 신ㆍ정진ㆍ염ㆍ정이 없으므로 불신(不信)ㆍ해태ㆍ망념ㆍ산란을 가지고 견도에 들게 된다. 이와 같거늘 어찌 큰 허물이 생기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갖가지 달리하는 집착을 막기 위하여 “이 이치 안에서는 만일 심ㆍ심소의 법이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 이치 안에서라 함은 ‘뒤바뀌지 않은 이 종(宗)ㆍ이 론(論)ㆍ이 온(蘊)ㆍ이 납식(納息)ㆍ이 품류(品類)와 이 계경에 수순하고 나와 모든 그 밖의 범행을 같이하는 이[同梵行者]가 인정하는 이치 가운데에서’라는 말이다.
이와 같이 가다연니자 존자는 자기 종[自宗]의 세제일법이 근(根)과 근이 아닌[非根] 상응(相應)과 구유(俱有)와 심ㆍ심소의 법으로써 자성을 삼는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한 것이다.
【문】세제일법은 고법지인(苦法智忍)19)과 등무간의 연이 되어 견도에 든다고 한다면 이것이 소멸하게 된 뒤에야 든다[入]고 하는가, 이것이 머무르는 자리[住位]를 곧 든다고 하는가? 만일 이것이 소멸한 뒤에야 든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이미 들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만일 머무르는 자리를 곧 든다고 한다면 이생과 성자가 뒤섞여서 어지럽게 되지 않겠는가?
【답】어떤 이는 “소멸한 뒤에야 든다”라고 말했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글에서는 마땅히 ‘이미 들었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때에 견도라는 이름이 이미 생겼기 때문인가?
【답】‘이미 들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든다’고 말한 것은 구경(究竟)에 가행(加行)의 말을 말한 것이다. 마치 지금 ‘온다’는 말은 이미 와버린 사실을 말하는 것과 같다.
마치 세간에서 ‘대왕은 지금 어디서 오십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가 비록 이미 왔다고 해도 ‘지금 온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다.
또 이미 끊었는데도 ‘지금 끊는다’고 말한 것과 같다. 계경에 “즐거움이 끊어졌고 괴로움이 끊어졌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욕염(欲染)을 여의었을 때에 고근(苦根)은 이미 끊어졌다. 지금 제3 정려(靜慮)의 욕염을 여의고 낙근(樂根)이 끊어진 때에 비로소 끊어졌다고 한 것이므로 어찌 이미 끊어졌는데도 ‘지금 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또 이미 해탈하였는데도 ‘지금 해탈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계경에 “마음은 욕루(欲漏)ㆍ유루(有漏)ㆍ무명루(無明漏)를 해탈한다”고 한 것과 같다. 욕염을 여의었을 때에 마음은 욕루에서 이미 해탈하게 되었는데도 지금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염(染)을 여의어 마음이 유루와 무명루에서 해탈할 때에야 비로소 ‘해탈한다’고 하며 또한 이미 해탈했는데도 ‘지금 해탈한다’고 한다.
또 이미 느꼈는데도 ‘지금 느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마치 계경에 “즐거운 느낌[樂受]을 느낄 때에 즐거운 느낌을 느끼는 줄 사실대로 안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한 것과 같다. 그는 또한 이미 느꼈는데도 ‘지금 느낀다’고 말하는 것이니, 느끼는 때에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이미 들었다 하더라도 ‘지금 든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느 다른 논사는 “이 글에서는 마땅히 곧장 정성이생에 든다고 말해야 한다”라고 말하니, 그의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등무간(等無間)으로 드는 것과 곧장 든다는 것의 뜻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이와 같이 말하는 이는 세제일법에 머무른 때를 ‘든다’라고 하는 것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생은 곧 성자이어야 하리니, 성자의 도에 들었기 때문이다.
【답】그와 같은 허물은 없다. 세제일법이 머무르는 지위에 이르렀을 때에는 고법지인은 막 생기는 지위[正生位]에 있는 것이므로 아직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에 성자라고는 하지 않는다.
고법지인은 비록 아직 생기지는 못했다 해도 지금 막 생기는 중에 있으므로 등무간이라 한다. 세제일법은 그때에 그 등무간연이 되었기 때문에 ‘든다’라고 한다.
이를 말미암아 ‘만일 심ㆍ심소의 법이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문】만일 심ㆍ심소의 법이 이미 정생이생에 들었거나 혹은 장차 들게 될 것이면 역시 그것은 세제일법인가?
【답】그렇다.
【문】만일 그렇다면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만일 지금 막 들어간 것을 말하면 이미 들어간 것이고 장차 들어갈 것이라고 말하는 줄 알 것이다. 만일 현재를 말하면 과거와 미래도 말하는 줄 알 것이니, 그 모양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사(思)와 심(心)의 차별을 논하는 이는 “만일 신(信)의 사와 심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면 오직 신의 사와 심만이 동일한 종류의 등무간연이 될 뿐이다. 이렇게 하여 만일 혜(慧)의 사와 심이 등무간이 되어 견도에 들면 오직 혜의 사와 심만이 동일 종류의 등무간연이 될 뿐이다”라고 말한다.
서로 비슷하게 상속(相續)한다고 논하는 이는 “심ㆍ심소의 법은 다만 동일 종류만으로 등무간연이 된다. 심과 심은 심소가 아니요, 심소(心所)와 심소는 심이 아니다. 모든 심소 가운데서 수(受)는 수와 함께하는 것이요 그 밖의 것이 아니며 상(想) 등에 있어서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나 모든 심소는 항상 상응하는 것이 아니어서 다른 연[別緣]을 만나면 일어나는 것이니, 만일 앞의 대경을 기뻐하면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고 만일 앞의 대경을 싫어하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며 또는 대경의 중용(中庸)을 만나면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이 일어난다.
만일 받아들인 바를 가지고 있고 싶어하면 수(受)가 생기고, 만일 형상을 취하고 싶어하면 상(想)이 생기며, 만일 짓는 바를 가지고 있고 싶어하면 사(思)가 생기고, 나아가 만일 결택한 것을 가지고 있고 싶어하면 혜(慧)가 생긴다. 그러므로 모든 심소가 항상 상응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이미 심ㆍ심소의 법이 일어났다 해도 마땅히 모두가 등무간연이 되지는 않아야 한다.
그는 “모두가 등무간연이 될 수 있으나 무간(無間)은 아니다. 마치 그대의 종(宗)에서는 무상(無想)에서 나올 때에 비록 5백 겁(劫) 동안 심ㆍ심소가 없었다 하더라도 드는 지위[入位]의 심ㆍ심소 법으로써 지금 나오는 지위[出位]에서 등무간연이 된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나의 종에서도 역시 그러하여 같은 종류의 법이 오랜 시간 동안 끊어졌다 하더라도 앞의 것이 뒤에 것의 등무간연이 된다.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라고 말한다.
그의 말은 도리에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이 있고[有心] 마음이 없는 이치는 저마다 구별되기 때문이요, 또 상응하는 법에 과(果)를 주는 것이 있고 아직 과를 주지 않는 것이 있어서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며, 또 아직 생기지 못한 마음 등은 등무간이 아닌데 미리 그의 연(緣)이 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저 『품류족론(品類足論)』과도 어긋난다. 거기서 “어떤 것이 마음의 등무간법인가?. 마음의 사이가 틈이 없으면서[無間] 그 밖의 심ㆍ심소의 법이 이미 생겼거나 혹은 지금 막 생기는 것과 무상정(無想定)ㆍ멸진정(滅盡定)이 이미 생겼거나 혹은 지금 막 생긴 것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또 만일 그렇다면 또 다른 허물이 있게 된다. 만일 유심유사지(有尋有伺地)의 심ㆍ심소 법이 무간(無間)한 무심유사지(無尋有伺地)나 혹은 무심무사지(無尋無伺地)의 심ㆍ심소 법의 앞에 나타나 있게 되면 앞의 자리에서 이미 일어났던 심ㆍ심소의 법은 마땅히 뒷자리의 등무간연이 아니어야 하리니, 서로가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아가 만일 무심무사지의 심ㆍ심소의 법이 무간한 무심유사지나 혹은 유심유사지의 심ㆍ심소 법의 앞에 나타나 있는 것에 대한 설명도 그와 같다.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 등의 심ㆍ심소 법이 차츰차츰 무간이 되어도 그 허물은 역시 그러하다. 앞의 것이 만일 뒤의 것의 등무간연이 아니라면 뒤의 것은 이미 연이 없으므로 마땅히 일어날 수 없어야 한다. 만일 뒤에 일어나는 것이 앞의 ‘멀리 떨어졌던[隔越] 것과 같은 종류의 모든 법의 등무간연을 말미암는다’고 하면 이것 또한 옳지 않다. 유심위(有心位)에 있으면서 멀리 떨어졌던 것이 연이 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 최초의 무루와 시작이 없는 때로부터 오늘날까지 아직 일어나지 못했던 뛰어난 유루는 이미 앞에서 일어난 같은 종류의 등무간연이 없으므로 마땅히 일어날 수 없다.
또 그가 한 말에는 큰 허물이 있다. 탐냄[貪]의 무간에는 언제나 탐냄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언제나 탐냄을 조복하거나 부정관(不淨觀)을 일으킴이 없어야 하고, 만일 성냄[瞋]의 무간이면 언제나 성냄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언제나 성냄을 조복하거나 자비관(慈悲觀)을 일으킴이 없어야 하며, 만일 어리석음[癡]의 무간이면 언제나 어리석음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언제나 어리석음을 조복하거나 인연관(因緣觀)을 일으킴이 없어야 한다.
아견(我見) 등이 일어나는데도 그 이치는 같은 줄 알 것이니, 다른 종류[異類]를 잡아 일으키는 가까운 연[近緣]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 수승한 선[勝善]은 아직 일어나지 아니했기 때문에 착한 마음이 일어날 이유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해탈을 얻게 되는 이치가 없으리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허물은 지니고 있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앞에서 생긴 마음 무더기[心聚]는 뒤에 생긴 무더기의 등무간연이 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며, 평등[等]하거나 평등하지 않거나 간에 앞의 것은 뒤의 것에 대하여 열어주면서 피하는 힘[開避力]을 내는 것이 동일함이 마치 곡식의 무더기[穀豆聚]와 같기 때문이다.
【문】세제일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닦을 미래의 심ㆍ심소의 법도 세제일법인가?
어떤 이는 “그것은 세제일법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에서 ‘만일 심ㆍ심소의 법이 등무간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저 미래의 것은 이미 등무간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세제일법이 아니다. 또 그것이 만일 세제일법이라면 세제일법에는 여러 마음[多心]이 있어야 되므로 곧 뒤의 글[後文]에서 ‘세제일법은 한마음[一心]이요 여러 마음이 아니라고 해야 한다’는 데에도 어긋난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말하는 사람[如是說者]20)도 있다. 즉 “저 법도 세제일법이라 한다. 만일 그 법이 세제일법이 아니라면 지온(智蘊)에서 말한 것과는 어긋나게 된다.
지온에 ‘만일 아직 얻지 못했던 도(道)가 목전에 나타나 있다면 그 밖의 미래의 그 종류의 도를 닦는다’라고 말한다. 만일 그것이 세제일법이 아니라고 집착하면 어떻게 그 종류의 도라고 이름하겠는가?”
【문】그것은 등무간연이 될 수 없는데 어떻게 세제일법이라 할 수 있겠는가?
【답】그것이 비록 등무간연은 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잘 수순하여 득(得)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비구가 승가에게 위임하는 욕(欲)의 법21)과 같으니, 마치 승가 대중이 포쇄타(布灑他)를 할 때에 어떤 여러 비구가 비록 대중과 함께 있지 않다 하더라도 욕을 위임[與欲]함을 말미암아 포쇄타를 얻고 모든 그 밖의 승사(僧事)에 있어서도 역시 성립하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아서 미래에 닦아야 할 종류가 비록 등무간연이 될 수 없다 하더라도 스스로 득을 일으켜 드러나는 모양에 수순하는 것이다. 가령 그것이 드러나는 모양에 수순하면서 득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것은 등무간연이 될 수 없다. 이것이 연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수순하는 힘 때문이니, 성자의 도에서 장애하지 않는 힘[不礙力]을 일으킴이 강하기 때문이다.
【문】만일 그것도 세제일법이라면 이 안의 본론(本論)에서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았는가?
【답】마땅히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남겨진 뜻이 있는[有餘]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등무간연이 될 수 있는 것이면 이 가운데에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등무간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세간에 행해지는 것이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세간에서 행해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과위를 취하거나22) 과위를 주는 것이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과위를 취하거나 과위를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장양(長養)을 인하여 얻으면서 또한 몸에 있는 것이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비록 장양을 인하여 얻는다 하더라도 몸에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세력이 있어서 미래를 닦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닦을 힘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마음이 그것의 원인이요 그 마음은 이것의 결과이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법으로 원인에 보답하고 또한 결과를 취하며 몸에 있으면서 경계를 반연하며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또 만일 두 가지 닦음[二修]을 갖추었으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오직 득수(得修)일 뿐이고 행수(行修)의 뜻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작용(作用)이 있다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것은 작용이 없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문】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 뒤의 글[後文]에서 세제일법은 여러 마음[多心]이 아니라고 말했는가?
【답】그것이 현재 세상에서 작용이 있는 것이면 오직 한마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겠지만 온갖 것을 다 말한 것은 아니다. 만일 온갖 것을 다 말하면 실로 여러 마음이 있을 것이니, 미래 세상 가운데는 많은 품류가 있고 종류가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닦을 것이 아니라 해도 오히려 세제일법이란 이름을 얻거늘 하물며 닦아야 할 것인데도 이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그러므로 어떤 이가 “혹시 상응하는 세제일법이면서 고법지인과는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 것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하리니, 이른바 미래에 닦아야 할 종류이다.
【문】세제일법의 수전색(隨轉色)23)과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은 세제일법인가?
어떤 이는 “그것은 세제일법이 아니다. 이 가운데서 ‘만일 심ㆍ심소의 법이 등무간연이 되어 정성이생에 들면 이것을 세제일법이라 한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등무간연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세제일법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의 저 법도 세제일법이다.
【문】그것은 이미 등무간연이 되지 않거늘 어떻게 세제일법이라는 이름을 붙이는가?
【답】그것이 비록 등무간연이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잘 수순하면 그것은 이 심ㆍ심소의 법과 동일하게 일어나고[一起]ㆍ동일하게 머무르고[一住]ㆍ동일하게 소멸[一滅]하며, 동일한 결과[一果]요, 동일한 등류[一等流]며, 동일한 이숙[一異熟]이어서 극히 친근하기 때문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가운데서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마땅히 말해야 하는데도 말하지 않은 것은 남어 있는 뜻이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만일 법이 등무간연이 될 수 있다면 이 가운데서 곧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법이 장양(長養)으로 인하여 얻는데 소연(所緣)이 있다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만일 법과 상응하면서 소의(所依)가 있고 행상(行相)이 있고 소연이 있고 일깨움[警覺]이 있다면 이 가운데서 말했을 것이나 그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혹시 현재 세제일법에서 고법지인의 등무간연이 아닌 것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있다”고 하리니, 이것은 수전색(隨轉色)과 심불상응행이다.
026_0008_c_01L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第二 仁五百大阿羅漢等造三藏法師玄奘奉 詔譯雜蘊第一中世第一法納息第一之一云何世第一法如是等章及解章義旣領會已次應廣釋何故作此論爲欲分別契經義故謂契經中世尊說若有一類於諸行中不能如理思惟能起世第一法無有是處不能起世第一法能入正性離生有是處若不能入正性離生能得預一來不還阿羅漢果無有是處有一類於諸行中能如理思惟起世第一法斯有是處乃至廣說契經雖說世第一法名而不廣辯世第一法契經旣是此論依處彼所不顯示今應廣分別之由是因緣故作斯何故作論依契經耶彼作論者意欲爾故隨彼意欲而作此論違法性何煩徵詰復次一切阿毘達磨皆爲解釋契經中義以廣分別諸經義故乃得名爲阿毘達磨故彼尊者於諸經中纂集種種不相似義別解釋立爲雜蘊乃至纂集種種見分別解釋立爲見薀然於所立八種薀中皆具分別一切法相何故尊者論初先說世第一法爲順次第說諸功德爲逆次第說諸功德爲依順決擇分先後次第而說耶設爾失若順次第說諸功德者應先說不淨觀或持息念等次說念住次說三義觀次說七處善次說煖次說頂說忍然後應說世第一法若逆次第說諸功德者應先說阿羅漢果次說不還次說一來次說預流次說見道然後應說世第一法若依順決擇分先後次第而說者應先說煖次頂然後應說世第一法如尊者妙音生智論說云何煖云何頂云何忍何世第一法若不依此三種次第所造論有雜亂失如佛在世尊者大迦多衍那成就無邊希有功德於無量法自相共相無障礙智隨欲現前勇猛精進恒無斷絕已能善入阿毘達磨文義大海無邊覺慧不可傾動如妙高山爲大論王能伏他論自所立論無能當者今尊者迦多衍尼子亦復如是何故造論先說世第一法諸師於此種種異說謂或有說今於此中非順次第說諸功德非逆次第說諸功德亦不依彼順決擇分先後次第而說但作論者意欲爾故隨彼意欲而作此論不違法相何煩徵詰有作是說阿毘達磨性相所顯非如契經寧求次第阿毘達磨以廣論道決擇諸法眞實性相此旣繁雜不應於中求其次第若求次第文但增繁於義無益復有說者不應詰問作論者意以經先說世第一法廣說如前今此論師依經造論故亦先說世第一法置作論者何故經中尊先說世第一法觀所化者分齊說故謂佛觀所化者已得下中品忍未得上品忍及世第一法欲令得故說如是言若有一類於諸行中不能如理思惟能起世第一法無有是處乃至廣說此中如理思惟顯上品忍世第一法正說自名故佛世尊觀所化者修行分齊作如是說或有說者爲止於此多誹謗故謂他於此世第一法起多誹謗是故先說多誹謗者謂於自性及於名現前退中皆起誹謗於自性起誹謗者謂或有說等五根以爲自性於名起誹謗者或有說此名種性地法不應名世第一法於界起誹謗者謂或有說此是欲界繫或復有說此色無色界繫或復有說此是三界繫或復有說此是三界繫及不繫或復有說此非三界繫亦非不繫於現前起誹謗者謂或有此法多念相續現前於退起誹謗謂或有說此法可退爲止如是種種誹謗是故先說世第一法有餘師諸有漏法皆不牢固如糞掃淤泥誰於此中牢固最勝譬如醍醐謂世第一法是故先說有說此法隨順無是故先說謂此論中讚歎出離涅槃隨順無我非如外典讚歎用諸欲樂具隨順我執世第一法有法聲故旣順無我與此論同非如煖等無有法聲不同此論隨順無我故此先說世第一法有說此法世法中是故先說謂諸論中此論最勝第一法世法中勝與此論同是故先有說若有住此法時名佛出世眞實利益彼於爾時得無障礙受用勝義聖法財故謂佛出世衆生入法有二種一者世俗二者勝義世俗者謂剃除鬚髮被以法服正信出家義者謂世第一法無閒引生苦法智世俗入法有二種過一者破戒者歸俗勝義入法無如是過隨其種自在證得自乘功德無退失故若有住此法時無始時來聖道門今創能開捨未曾捨諸異生性未曾得所有聖道是故先說世第一有說若有住此法時捨異生名聖者名捨異生數得聖者數捨異生分齊得聖者分齊捨異生種性得聖者種性是故先說世第一法有說有住此法時得心不得心因得明得明因得受不得受因餘心所亦爾是故先說世第一法有說若有住此法時捨曾習緣得未曾習緣捨共得不共捨世閒得出世捨有愛味得無愛味捨耽嗜依出離依是故先說世第一法有說斷疑異生性是故先說世第一法或有疑此異生性旣無有始應亦無今顯其有終卽世第一法有說有住此法時異生過患異生變異生虛誑異生剛强悉不復起煖頂忍或有起者是故先說世第一法異生起此法已要至非異生位得命終如異生非異生如是未見諦已見諦未得果已得果未入正性離生已入正性離生未起現觀已起現住不定聚住正定聚無聖道有聖無證淨有證淨應知亦爾卽不決定是故先說世第一法若有起此善根唯一剎那必無停滯煖等不爾是故先說世第一法有若有住此法時異生身中念住等行修至究竟煖等不爾是故先說世第一法有說若有住此法時說名最初有漏心斷無漏心續餘位不爾故先說世第一法有說此法能令異生可傾動身而不傾動是故先說妙高山踞金輪上四方猛風不能傾如是異生安住此法四倒惡見不能傾動餘異生位卽不如是有說法猶如明相能表始終是故先說如明相表晝分始及夜分終世第一法亦復如是顯聖道始及異生終表始終如是能表正度已度趣入已加行究竟應知亦爾餘位不然顯此住同法中能有異相是故先謂世第一法雖苦諦攝而無閒引生初滅苦道雖有世閒流轉老死迦耶攝而能引生初滅彼道煖等不有說顯此雖是世閒緣而能無閒引初出世緣餘位不爾是故先說閒出世閒緣如是有垢無垢有過無過有毒無毒有濁無濁有身見事無身見事有顚倒事無顚倒事有愛事無愛事有隨眠事無隨眠事緣知亦爾是故先說有說若有住此法有勢有力能有所作猶如健夫於爾時無閒引起聖初止觀及起聖見慧首創冠餘覺支鬘餘位不爾故先說世第一法有說此法其用最能捨異生性得聖性捨邪性得正無閒能入正性離生餘法不然故先說世第一法有說行者住此法能捨輕動過妒羅緜柳疊絮等諸異生性能於聖教安住不動如天帝是故先說世第一法有說行者住此法時捨無始來令心心所成不質直煩惱惡見得未曾得令心心所成質直性無漏聖道有說行者住此法捨五補特伽羅同分謂五無閒者得八補特伽羅同分謂四向四果故先說世第一法有作是言世第一法由三事故論先說之一順經說止多謗三此剎那得初聖果順經止如前廣說卽此剎那得初聖果者謂彼與世第一法爲無閒士用果如是等諸因緣故此論先說世第一法有餘師言尊者於此依逆次第宣說諸法若爾此論卽應先說阿羅漢次說不還次說一來次說預流說見道然後應說世第一法何故先說世第一法耶此中逆說異生身中淨染諸法非說一切初說云何世第一法廣說乃至云何爲煖此則逆說異生身中淸淨品法次作是說二十句薩迦耶見廣說乃至若無有此則宣說異生身中雜染品法二品法誰能了知謂無我智是故第二智納息中作如是說頗有一智一切法乃至廣說此無我智何由而謂覺緣起是故第三納息作如是說一補特伽羅此生十二支緣起乃至廣說此緣起覺何由而起謂愛及是故第四納息作如是說云何愛云何敬乃至廣說如是愛敬何因而謂慚及愧是故第五納息作如是云何慚云何愧乃至廣說如是慚愧何由而有爲解法相是故第六納息作如是說色法生老無常乃至廣此解法相何由而得謂捨無義習有義是故第七納息作如是說修劣苦行當知無義俱乃至廣說捨無義修習有義謂能正思正思惟是故第八納息作如是說云何思云何思惟乃至廣說雜薀法覺由何明淨謂由結斷是故次說第二結薀如是結斷由何而證謂由諸智是故次說第三智薀誰能生起斷結諸智謂無業障補特伽羅是故次說第四業薀諸業多分依誰而生謂四大種故次第五說大種薀大種所造勝者是何謂眼等根是故次說第六根薀諸根淸淨由何勢力謂得諸定是故次說第七定薀有得定已起邪推求便復引生諸惡見趣爲令識相能速斷除故最後說第八見薀雖於如是一一薀中具攝諸法而隨增勝制立薀名故作是說由逆次說異生身中淨染諸法非說一切是故先說世第一法云何世第一法若心心所法爲等無閒入正性離#生是謂世第一法作是說若五根爲等無閒入正性離是謂世第一法誰作此說是舊阿毘達磨者說彼何故作此說爲遮餘部故是說不必唯說五根爲性謂分別論者執信等五根唯是無漏一切異生悉不成就彼部何故作此執耶彼由契經故作此執謂契經說若有五根增上猛利平等圓滿多修習故成阿羅漢諸漏永盡從此減下成不還者次復減下成一來者次復減下成預流者若全無此信等五根我說彼住外異生品由此經故彼執五根唯是無漏爲遮彼意故舊阿毘達磨者說世第一法以五根爲自性世第一法在異生身故知五根亦通有漏異生定不成有爲無漏故若執五根體唯無漏有何過失便違契經如契經說我若於此信等五根未如實知是集是沒是味是過患是出離未能超此天人世閒及魔梵等乃至未能證得無上正等菩提乃至廣說非無漏法可作如是品類觀察分別論者作如是言世尊此中說自相觀謂我於此信等五根未如實知集等自相未能超此天人世閒及魔梵等乃至廣說云何觀無漏#是集自相耶謂此必因親近善士聽聞正法如理作意法隨法行而集起故云何觀此是沒自相謂要未知當知根沒已知根起已知根沒具知根起故云何觀此是味自相謂此亦是愛所緣故無漏愛所繫耶不爾如仁許無漏法是煩惱境而非所繫我宗亦然緣無漏而不能繫斯有何失云何觀無漏是過患自相謂觀無漏是無常云何觀無漏是出離自相謂涅槃必棄捨故如契經說般涅槃時切有爲皆悉棄捨彼言非理所以者謂此經說我若於此信等五根如實知是集過患出離未能證得諸漏永盡無上菩提非自相觀能盡諸漏故彼所說決定非理由此五根非唯無漏又執五根唯無漏者違經說如契經說唯願世尊演說法所以者何有諸有情處在世閒生或長有利根者有中根者有軟根乃至廣說又契經說苾芻當知我昔未轉正法輪時曾以佛眼觀諸有情處在世閒或生或長有利軟諸根差別善容貌善調伏薄塵垢若不聞法退失勝利信等五根若唯無漏應利根者是阿羅漢中根者是不還軟根卽是一來預流若爾世尊未轉法輪應已名轉一切聖者於諸世閒已充滿故復轉法輪應成無用分別論者作如是言此中根名說所依處不說根體於我何違彼如是言亦不應理違餘經故謂餘經說生聞梵志往世尊所而白佛言喬荅摩尊說根有幾佛言我說二十二根所謂眼根乃至廣說彼經豈亦說根所依彼此二經根聲不異一謂根體一謂所依非所極成是自妄執故定應許信等五根亦通有漏若通有彼所引經當云何釋信等五根實通有漏彼經一向說無漏者所以者何依無漏根建立聖者有差別故有說彼經唯說聖道所以者何聖者差別依聖道說非世俗故彼經又若全無此信等五根我說彼住外異生品復云何通斷善根者名外異生謂諸異生摠有二種一內二外不斷善根說名爲內斷善根者說名爲外彼經意說若全無此信等五根我說名爲斷善根者故所引經於我無失或說此是經部所說謂經部師亦爲遮遣分別論者如前所執故是言世第一法五根爲性非唯爾所有說此是犢子部宗彼部師執世第一法信等五根以爲自性唯此五根是自性善餘雜此故亦得善名由此五根建立一切聖賢差別不由餘根如契經說若有五根增上猛利平等圓滿多修習故成俱解脫從此減下成慧解脫次復減下成身證次復減成見至次復減下成信解次復減成隨法行次復減下成隨信行今此論宗與犢子部何相關預而敍彼說爲令疑者得決定故謂彼與此所立義宗雖多分同而有少異彼部執世第一法唯以信等五根爲諸異生性一向染污謂欲界繫苦所斷十種隨眠爲自性故隨眠體是不相應行涅槃有三種謂學無學非學無學立阿素洛爲第六趣補特伽羅體是實有彼如是等若六若七與此不同餘多相似勿有疑彼與此皆同故敍彼宗遮顯有異今應問彼若唯五根是自性善所餘善法自性是何若謂彼是不善無記雜五根故亦名善者如是五根與彼相雜何故不名不善無記然信等五與所餘法同一所依同一行相同一所緣一起一住一滅一果同一等流同一異熟而言五根是自性善餘相雜故假立善名但順妄情不應正理勿有此過應說言世第一法根非根性尊者法救作如是言諸心心所是思差別故世第一法以思爲自性尊者覺天作如是說諸心心所體卽是心故世第一法以心爲自性彼二尊者作如是言信等思心前後各異無一竝用信等五根爲等無閒入見道者約容有義故作是言信等五根能入見道謂或有用信思信心爲等無閒入於見道乃至或用慧思慧心爲等無閒入於見道若爾應用不相應法爲等無閒入於見道彼作是言許亦何失如仁宗說心體前後雖不相應而有所緣能爲無閒入於見道我宗亦爾信等思心雖復自體無相應義而有所緣能爲無閒入於見道斯有何失有大過失所以者何若信思爲等無閒入見道者旣無精進及念應有懈怠忘念散亂惡慧能入見道如是乃至若慧思心爲等無閒入見道者旣無有信精進應有不信懈怠忘念散亂能入見道如是豈不成大過失爲遮如是種種異執故復說言於此義中若心心所法爲等無閒入正性離生是謂世第一法於此義中者於此不顚倒此宗此論此薀此納息此品類此順契經我及諸餘同梵行所許義中如是尊者迦多衍尼子欲顯自宗世第一法以根非根相應俱有心心所法爲其自性世第一法與苦法智忍爲等無閒名入見道爲此滅已方名爲入此住位卽名入耶若此滅已方名入何故此中不言已入若此住位卽名入者異生聖者應成雜亂有作是滅已名入若爾此文應說已入爾時見道名已生故應言已入說入者此於究竟說加行聲如今來說已來事如世閒說大王今者從何處來彼雖已來而說今來此亦如又如已斷而說今斷如契經說樂斷苦乃至廣說離欲染時苦根已今離第三靜慮染樂根斷時乃說爲斷豈非已斷而說今斷又如已解而說今解脫如契經說心解脫欲有漏無明漏離欲染時心於欲漏已得解脫今離非想非非想處染於有漏無明漏得解脫時乃說爲解亦於已解脫而說今解脫又如已受而說今受如契經說受樂受時實知受樂受乃至廣說彼亦已受而今受非於受時可了知故此亦是雖是已入而說今入有餘師說此應言無閒而入正性離生彼言理等無閒入無閒而入義有異如是說者世第一法住時名入若爾異生應卽聖者入聖道故無如是世第一法至住位時苦法智忍在正生位未成就故不名聖者苦法智忍雖未已生以在正生名等無閒第一法爾時爲彼等無閒緣故名爲由此故說若心心所法爲等無閒入正性離生是謂世第一法若心心所法已入正性離生或當得入是世第一法不亦是若爾此中何故不說若說正入當知則說已當入若說現在當知則說過去其相一故心差別論者作如是若信思心爲等無閒入見道者信思但爲同類等無閒緣如是乃至若慧思心爲等無閒入見道者慧思但爲同類等無閒緣相似相續論者作如是言心心所法但爲同類等無閒緣謂心與心非心所心所與心所非心諸心所中受與受非餘想等亦爾然諸心所非恒相應遇別緣起謂若欣前境起樂受若厭前境起苦受若於境中庸起不苦不樂受若欲有所領納生受若欲取像生想若欲有所作生思乃至若欲有所決生慧故諸心所非恒相應若爾起心心所法應不皆作等無閒緣作是言一切能作等無閒緣然非無如仁宗許出無想時雖五百劫心所而用入位心心所法爲今出位等無閒緣我宗亦爾雖同類法多時閒斷而前爲後等無閒緣斯有何彼言無理所以者何有心無心義各別故又相應法有卽與果有未與不應理故未生心等非等無閒作彼緣不應理故又彼違害品類足如說云何心等無閒法謂心無閒餘心心所法或已生或正生及無想滅盡定或已生或正生又若爾者復有別過謂若從有尋有伺地心心所法無閒無尋唯伺地或無尋無伺地心心所法現在前前地已起心所法應非後地等無閒緣不相似故乃至若從無尋無伺地心心所法無尋唯伺地或有尋有伺地心所法現在前說亦如是不善無記等心心所法展轉無閒其過亦爾若非後等無閒緣後旣無緣應不得若謂後起由前隔越同類諸法等無閒緣此亦不然在有心位隔越爲不應理故又初無漏及無始來所未起殊勝有漏彼旣無有前起同類等無閒緣應不得起又彼所言有大過失謂貪無閒應常起貪無時伏起不淨觀若瞋無閒應常起瞋時伏瞋起慈悲觀若癡無閒應常起無時伏癡起因緣觀起我見等理應知執異類起無近緣故又此勝善曾未起故是則善心無由得起則無得解脫義勿有如是種種過是故應許前生心聚爲後生聚等無閒緣若等不等前於後生開避力如穀豆聚世第一法現在前時所修未來心心所法彼法亦是世第一法不有說彼非世第一法所以者何以此中說若心心所法爲等無閒入正性離生是謂世第一法彼未來者旣不能作等無閒緣是故彼非世第一法又彼若是世第一法則世第一法應有多便違後文世第一法應言一心衆多心如是說者彼法亦是世第一若彼法非世第一法便與智薀所說相違如說若有未曾得道現在前修餘未來彼種類道若執彼非世第一法云何名爲彼種類道彼不能作等無閒緣如何可名世第一法彼雖不作等無閒緣而能隨順起得故譬如苾芻與僧欲法謂如僧衆布灑他時有諸苾芻雖不在衆與欲故得布灑他諸餘僧事亦得成如是未來所修種類雖不能作等無閒緣而起自得顯相隨順設彼不起顯相順得此不能作等無閒緣能爲緣由彼順力彼於聖道起不㝵力强故若彼亦是世第一法此中本論何故不說應說而不說者知此義有餘復次若有能作等無閒此中卽說彼不能作等無閒緣故不說復次若行世者此中說之不行世是故不說復次若能取果與此中說之彼不能取果與果是故不說復次若因長養得而亦在身者此中說之彼雖因長養得而不在身是故不說復次若有勢力能修未來此中卽說彼無修力故不說之復次若心彼因彼心此果此中卽說彼法不爾故不說之復次若法酬因亦能取果在身緣境此中卽說彼法不爾不說之復次若具二修此中卽說唯得修無行修義故不說之復次有作用此中說之彼無作用是故不若爾何故此後文說世第一法非多心耶彼說現世有作用者有一心非說一切若說一切實有多未來世中有多品類種類同故非所修尚得名爲世第一法況所修而非是耶故有問言頗有相應世第一法而不與苦法智忍作等無閒緣耶謂卽未來所修種類第一法隨轉色心不相應行爲是世第一法不有作是說彼非世第一法由此中言若心心所法爲等無閒正性離生是謂世第一法彼不能作等無閒緣是故不名世第一法如是說者彼法亦是世第一法彼旣不作等無閒緣云何得名世第一法彼雖不作等無閒緣而能隨順由彼與此心心所法一起一住一滅一果一等流一異熟極親近故若爾中何故不說應說而不說者當知此義有餘復次若法能作等無閒緣此中卽說彼法不爾故不說之復次若法因長養得而有所緣此中卽說彼法不爾故不說之復次若法相應有所依有行相有所緣有警覺此中說之彼法不爾是故不說故有問言頗有現在世第一法非苦法智忍等無閒緣耶謂此隨轉色心不相應行說一切有部發智大毘婆沙論卷第二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법상(法相)에 의하면 수행의 진전(進展)에는 먼저 5정심(停心)ㆍ별상념주(別相念住)ㆍ총상념주(總相念住)의 3위(位)가 있는데 이것을 3현위(賢位) 또는 외범위(外凡位)라고 한다. 이로부터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법(世第一法)으로 나아가는데 이것을 4선근위(善根位) 또는 내범위(內凡位)라고 한다. 다 같이 위의 7위(位)는 참 성도(聖道)를 일으키는 방편위(方便位)로 아직은 범부 또는 이생(異生)의 영역[域]을 면하지 못한 지위이다. 여기에서 다시 나아가 무루의 성도를 일으키는 것이 곧 성도인데 여기서는 견도위(見道位)ㆍ수도위(修道位)ㆍ무학위(無學位)로 분류하게 된다. 그런데 발지본론에서는 그 논단(論端)을 일으킴에 있어서 이상하게도 3현위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말하지도 않았고 또 무학도의 나한위(羅漢位)에서 역(逆)으로 나아가는 방법도 취하지 않으면서 그 중도 반단(半端)의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체재(體裁)를 취했는가의 이유를 밝히면서 그것을 일으키게 된 까닭을 논하는 문단이다.
  2. 2)『발지론』을 인용한 부분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의 전체적인 구성은 먼저 『발지론』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 여기에다 주석을 붙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하 『발지론』에서 인용한 부분은 【論】이라고 표시하고 앞뒤로 한 줄씩을 띄우고 글씨체를 달리하였다.
  3. 3)정성이생(正性離生, samyaktva nyāma)은 정성결정(正性決定, samyaktva niyāna)이라고도 하는데 견도위(見道位)를 가리킨다.
  4. 4)차례에 따른다고 함은 5정심(停心)에서 시작하여 무학위(無學位)로 나아가는 것을 말하고 차례를 거스른다고 함은 무학에서 5정심으로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순결택분(順決擇分)의 선후 차례라 함은 특히 난ㆍ정ㆍ인ㆍ세제일법의 4선근 중의 순서를 말하는 것이다. 이 3현위를 순해탈분(順解脫分)이라 하고 4선근위를 순결택분이라고 하는 데에 의거한 것이다.
  5. 5)부정관(不淨觀)과 지식념(止息念)이라 함은 5정심위(停心位)를 의미하며 염주(念住)라 함은 별상(別相)ㆍ총상염주위(總相念住位)를 가리킨다. 3의관(義觀)이라 함은 온(蘊)ㆍ처(處)ㆍ계(界)를 관찰하고 사유(思惟)하는 것을 말하고 7처선(處善)이라 함은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ㆍ애미(愛味)ㆍ과환(過患)ㆍ출리(出離) 등 이 일곱 가지 관법(觀法)을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5온으로 각각 따로따로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7처선에 대하여는 본론 제83권과 『구사론(俱舍論)』 제33권을 참조)
  6. 6)대가다연나(大迦多衍那, Mahākātyāyana 또는 kaccāyana)는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제자이다. 『발지론』의 저자와는 혼동하지 말 것이다.
  7. 7)4선근(善根)의 인위(忍位)를 분류하여 하인위(下忍位)ㆍ중인위(中忍位)ㆍ상인위(上忍位)로 하며 세제일법은 상인위의 직후에 일어나는 지위이다.
  8. 8)세간에서 첫째가는 법[世間第一法]이라는 뜻이며 유루도(有漏道) 가운데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한다. 그러면서 이 『발지론(發智論)』은 세간에서 제일가는 논이기 때문에 맨 처음에 세간에서 제일가는 법을 말한다는 것이다.
  9. 9)기근(機根)의 종류를 말한다. 또 성문(聲聞)ㆍ독각(獨覺)ㆍ불승(佛乘)의 3종성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10. 10)세제일법의 무간(無間)에 견도(見道)에서 첫 무루의 마음[無漏心]이 일어나게 되는 것을 말한다.
  11. 11)세제일법의 무간(無間)에서 비로소 무루의 성도(聖道)를 얻으면서 종래의 범부이생(凡夫異生)으로서의 유루적(有漏的) 경험을 온전히 버리는 것을 일찍이 익힌 연[曾習緣]을 버리고 아직 일찍이 얻지 못했던 연[未曾習緣]을 얻는다고 한다.
  12. 12)범어 sat-kāya의 음역어이다. sat는 유(有, 있다)는 뜻이고 kāya는 신(身, 몸)이라는 뜻으로 합하여 유신견(有身見) 또는 신견(身見)이라고도 한다.
  13. 13)이미 인위(忍位)를 얻으면 악취(惡趣)에도 떨어지지 않게 되거든 하물며 세제일법을 얻은 것이겠는가. 악취는 물론이요 여기에 이르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지는 5역죄(逆罪)를 짓게 가능성(可能性)조차 잃게 된다. 이것을 다섯 가지 보특가라의 동분(同分)을 버린다고 한다. 보특가라(pudgala)는 사람[人]이라는 뜻이요 동분이란 작용태(作用態)라는 뜻이다. 이렇게 5무간의 가능성을 잃음과 동시에 4향(向)ㆍ4과(果)에 이르게 되는 가능성을 얻는 것을 여덟 가지 보특가라의 동분을 얻는다고 한다.
  14. 14)신근(信根)ㆍ정진근(精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을 말한다.
  15. 15)화지부(化地部)의 일파(一派)를 가리킨다.
  16. 16)미리(迷理)의 혹(惑)을 끊는 견도위(見道位)의 무루지(無漏智)를 말하고 이지근(已知根)이란 미사(迷事)의 혹을 끊는 수도위(修道位)의 무루지를 말하며 구지근(具知根)이란 온갖 번뇌를 끊는 무학위(無學位)의 무루지를 말한다.
  17. 17)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의 6근(根)과 남근(男根)ㆍ여근(女根)의 2근과 명근(命根)과 우(憂)ㆍ희(喜)ㆍ고(苦)ㆍ락(樂)ㆍ사(捨)의 5수근(受根)과 신(信)ㆍ근(勤)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5근과 미지근(未知根)ㆍ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의 3무루근(無漏根)을 말한다.
  18. 18)구해탈(俱解脫) 이하로 수신행(隨信行)까지는 무학위(無學位)ㆍ수도위(修道位)ㆍ견도위(見道位)에 걸쳐서 수행자의 근기에 의거한 공덕의 구별이다. 구해탈이란 무학위에서 지혜와 선정에 의하여 해탈장(解脫障)을 여읜 성자(聖者)를 말하고 혜해탈(慧解脫)이란 단순히 지혜에 의하여 번뇌장(煩惱障)을 끊은 성자를 말하며 신증(身證)이란 불환과(不還果)의 성자로서 멸수상정(滅受想定)을 얻은 이를 말하고 견지(見至)란 수도위에서 지혜가 뛰어난 기[勝機]의 성자를 말하며 신해(信解)란 지혜보다도 신앙의 힘[信仰力]이 강한 열기(劣機)의 성자를 말한다. 수법행(隨法行)과 수신행(隨信行)이란 견도위에서의 구별이어서 수법행은 견지보다 얕은 이요 수신행은 신해보다 얕은 이다.
  19. 19)견도(見道) 15심(心) 중의 맨 처음이어서 욕계의 고제(苦諦)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최초의 무루의 마음[無漏心]이다.
  20. 20)이 대비바사론의 편에 서 있는 정의가(正義家)의 뜻이다. 아비달마 논사(論師)라 하기도 하고 응리론자(應理論者)라고 하니 이 사람이 바로 그런 이이다.
  21. 21)포살(布薩)ㆍ설계(說戒)ㆍ수계(受戒) 등을 행할 때 동일한 구역에 속한 비구는 모두 참석하는 것이 규칙이지만 일이 있어 출석할 수 없는 경우, 출석의 희망이 있으면 이것을 욕(欲)이라 하고, 그 희망을 다른 출석하는 비구에게 위탁하는 경우를 여욕(與欲), 그 비구가 위탁을 받으면 수욕(受欲), 또한 이를 석상(席上)에서 대중에게 설하는 것을 설욕(說欲)이라 한다.
  22. 22)결과를 취한다[取果] 함은 원인이 미래의 결과를 취하는 작용을 말하며, 결과를 준다[與果]고 함은 원인이 힘을 주어 결과를 나타나게 하는 작용을 말한다.
  23. 23)수전색(隨轉色)이라 함은 정구계(定俱戒)의 무표(無表)를 말하고 심불상응행(心不相應行)이라 함은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 등을 가리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