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第二百 逸

ABC_IT_K0952_T_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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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대비바사론 제200권


오백 아라한 지음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김석군 개역
8. 견온(見蘊)

5) 견납식 ③
후제를 분별하는 견해[後際分別見] 중 열여섯 가지 유상론(有想論)이라 함은 처음의 네 가지는 세 가지의 견해[見]에 의거하여 세운다.461)
“어느 한 무리의 보특가라(補特伽羅)는 이러한 견해를 일으키고 이러한 이론을 세우되 ‘명(命)이 곧 몸[身]이다’라고 하고, 또 어느 한 무리의 보특가라는 이러한 견해를 일으키고 이러한 이론을 세우되 ‘명이란 몸과는 다르다’고 하며, 또 어느 한 무리의 보특가라는 이러한 견해를 일으키고 이러한 이론을 세우되 ‘이것은 통틀어 아(我)로서 두루 가득히 찼고 둘이 없으며 차이가 없고 결함도 없다’ ”라고 말한 것과 같다.
첫 번째 견해에 의하여 제1의 아(我)는 색이 있으면서[有色]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다[有想]는 이론을 세운다. 그 외도(外道)는 색온(色蘊)을 고집하여 아를 삼고 그 나머지의 4온(蘊)을 고집하여 아소(我所)로 삼는다.
그가 고집하는 아는 색(色)을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색이 있다[有色]고 하며,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는 것을 생각[想]이라고 하는데, 이 색이 있는 아는 그것의 생각이 있기 때문에 생각이 있다[有想]고 하는 것이니, 4온을 고집하여 아소로 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색이 있는 아는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으며, 이것은 욕계(欲界)와 무상천(無想天)을 제외한 색계(色界)의 일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색계(無色界)에도 색(色)이 있다고 인정한 이462)면 “이것은 또한 그 앞의 세 가지 무색(無色)에 있다”고 한다. 이것은 생각이 있기 때문에 뒤의 한 가지에는 있지 않다.
두 번째 견해에 의하여 제2의 아는 색이 없으면서[無色]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다[有想]는 이론을 세운다. 그 외도는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여 아(我)로 삼고 색온과 혹은 그 나머지의 4온을 고집하면서 그로써 아소(我所)를 삼는다.
만일 상온(想蘊)을 제외한 그 나머지 3온의 전체[總] 또는 따로따로[別]를 고집하여 아로 삼으면 상온과 색온을 아소로 삼으며, 만일 상온을 고집하여 아로 삼으면 그 나머지의 온을 고집하여 아소로 삼는다.
그가 고집한 아는 색이 없는 것을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색이 없다[無色]고 한다.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는 것을 생각이라 하는데, 이 색이 없는 아는 혹은 생각을 성품으로 삼아 혹은 생각의 작용[用]이 있는 것을 생각이 있다[有想]고 하기도 하고 혹은 그것의 생각이 있는 생각이 있다[有想]고 하는 것이니, 상온을 고집하면서 아소로 삼기 때문이다.
그는 ‘이 색이 없는 아는 죽은 뒤에 생각이 있으며, 이것은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있고 무상천(無想天)은 제외된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견해에 의하여 제3의 아는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면서[亦有色亦無色]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다[有想]는 이론을 세운다. 그 외도는 색과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다. 마치 체어외도(諦語外道) 등과 같아서 통틀어 5온에 대해 하나의 아[一我]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에 의거하면 저마다 따로따로 모든 온을 분별하면서도 실아(實我)를 얻지 못하는 것은 마치 저마다 따로따로 달고ㆍ시고ㆍ짜고ㆍ맵고ㆍ쓰고ㆍ싱거운 것을 분별하면서도 통틀어 실제로 있는 하나의 맛[一味]을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는 모든 온에 대하여 하나라는 생각을 일으킨 뒤에 통틀어 고집하여 아로 삼고, 그가 고집한 아는 색과 색이 없는 것을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다고 한다.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는 것을 생각이라고 하는데, 이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한 아는 혹은 생각을 성품으로 삼아 혹은 생각의 작용이 있기에 생각이 있다[有想]고 하고 혹은 그것의 생각을 가지기에 생각이 있다[有想]고 하는 것이니, 자기 몸의 모든 온을 고집하여 아로 삼고 다른 이의 모든 온을 고집하면서 아소로 삼기 때문이다.
어느 다른 외도는 색이 있는 아[有色我]에 대하여 허물을 보고 나서 색이 없는 아[無色我]에 의지하여 머무는데 색이 없는 아에서도 허물을 보고 나서는 다시 색이 있는 아에 의지하여 머무른다.
그 외도는 아견(我見)을 아직 끊지 못하여 비록 아가 있다고 고집한다 하더라도 결정코 고집한 아가 색이 있을 뿐이라거나 혹은 색이 없을 뿐이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한 아는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으며, 이것은 욕계의 전부와……(그 알맞은 바에 따라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 아는 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非有色非無色]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다는 이론이다. 곧 세 번째 견해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따로 의지하는 견해는 없다.
그는 ‘아는 실제로 존재하면서도 반드시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실아(實我)이면서 반드시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한다면 다 같이 허물이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 아는 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으며”라고 하며,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심사(尋伺)에 의하기도 하고 혹은 등지(等至)에 의하기도 하면서 모두 일으키게 된다.
아(我)는 끝이 있고[有邊]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다고 고집하는 이론으로서, 만일 색을 고집하면서 아를 삼는 이면 그가 고집한 아의 체[我體]에는 정해진 한계가 있어서 혹은 마음속에 있다면 손가락 마디만큼 광명이 치성하며 몸속에 있다면 체구에 알맞게 안팎으로 밝게 사무친다고 한다.
마치 “아와 아의 형상은 단정하고 엄숙하면서 광명이 치성하며 청정하기가 제일인데 교답마존(喬答摩尊)은 어째서 아가 없다[無我]고 말할까?”라고 한 것과 같다.
만일 색이 아닌 것[非色]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가 고집한 아에도 정해진 한계가 있다. 색이 아닌 법에 의지하는 것과 그 인연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역시 끝이 있다고 하며, 그는 심사에 의하여 이와 같은 고집을 일으켰지만 만일 등지에 의하여 이와 같은 고집을 일으킨 이면 반드시 아직 변처정(遍處定)을 얻지 못한 이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에서는 다 같이 ‘아는 반드시 끝이 있으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으며, 이것은 욕계의 전부와 무상천을 제외한 색계의 일부에 있다’고 생각한다.
무색계에도 색이 있다고 인정한 이면 ‘이것은 또한 그 앞의 세 가지 무색에도 있다’고 한다.
아는 끝이 없고[無邊]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다고 고집하는 이론으로서, 만일 색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가 고집하는 아는 온갖 곳에 두루하다고 한다.
명론(明論)에서 “아(我)의 사부(士夫)가 있는데, 그의 양은 광대하여 맨 끝[邊際]을 헤아리기 어렵고 광명의 빛은 해와 같지만 눈이 어두운 이[冥闇者]들은 비록 그의 앞에 머문다 하더라도 보지 못한다. 반드시 이 아(我)를 알아야만 비로소 생ㆍ노ㆍ병ㆍ사를 초월할 수 있고 이와 다른 것으로는 초월하게 된다는 이치가 없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이는 “지(地)는 곧 아(我)요, 아는 곧 지로서 그의 분량은 끝이 없다”고 한다.
만일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아(我)로 삼는 이면, 그는 ‘마치 불이 붙지 않으면 끝내 태울 수 없고 칼이 닿지 않으면 끝내 벨 수 없으며 물이 이르지 않으면 끝내 적실 수가 없는 것처럼 그와 같이 아가 이르지 않으면 마침내 끝없는 분량을 취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심사(尋伺)에 의하여 이와 같은 고집을 일으키지만 등지(等至)에 의하여 이런 고집을 일으킨 이면 반드시 이미 변처정을 얻은 이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에서는 다 같이 ‘아는 반드시 끝이 없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으며, 이것은 욕계의 전부와……(그의 알맞은 바에 따라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我)는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면서[亦有邊亦無邊]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다고 고집하는 이론으로서, 만일 색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가 고집한 아는 의지하는 몸에 따라 혹은 말려져[卷] 있기도 하고 혹은 펴져[舒] 있기도 하여 그 분량이 일정하지 않다고 한다.
그는 ‘몸이 분량이 있으면[有量] 아는 곧 끝이 있으며 몸이 분량이 없으면[無量] 아는 곧 끝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만일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만일 분량이 있는 의지하는 바와 인연하는 바에 따르면 아는 곧 끝이 있으며, 만일 분량이 없는 의지하는 바와 인연하는 바에 따르면 아는 곧 끝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에서는 다 같이 ‘아는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으며, 이것은 욕계의 전부와……(그의 알맞은 바에 따라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我)는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非有邊非無邊]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다고 고집하는 이론은 곧 세 번째 견해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제4가 된다. 세 가지의 문(門)과 다르게 설명하는 것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463)
이와 같은 네 가지는 혹은 심사(尋伺)에 의하기도 하고 혹은 등지(等至)에 의하기도 하면서 모두 일으키게 된다.

생각과 느낌의 차이에 의거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니, “아(我)는 하나의 생각[一想]을 가지고, 아는 갖가지의 생각[種種想]을 가지며, 아는 작은 생각[小想]을 가지고, 아는 한량없는 생각[無量想]을 가지며, 아는 순수하게 즐거움[樂]을 가지고, 아는 순수하게 괴로움[苦]을 가지고, 아는 괴로움도 가지고 즐거움도 가지고, 아는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다[有想]”고 한다.
이 가운데서 아는 하나의 생각을 가진다고 함은 앞의 세 가지 무색에 있는 이를 말한다. 그의 모든 생각은 하나의 문(門)에서 구르기 때문에 하나의 생각이라고 한다.
아(我)는 갖가지의 생각을 가진다고 함은 욕계와 무상천을 제외한 색계에 있는 이를 말한다. 그의 모든 생각은 여섯 가지 문(門)과 네 가지 문에서 구르기 때문464)이며 갖가지의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갖가지의 생각이라고 한다.
심사에 의하는 이면 아(我)에도 차별이 있는 것이니, 한 가지의 공교지(工巧智)를 가진 이면 하나의 생각을 가진다고 하며, 만일 갖가지의 공교지를 가진 이면 갖가지의 생각을 가진다고 한다.
아(我)는 작은 생각을 가진다고 함은 적은 색[少色]을 고집하며 아로 삼거나 혹은 적은 색이 없는 것[少無色]을 고집하며 아로 삼는 이를 말한다.
만일 적은 색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색이 있는 아는 그 분량이 적고 작은 것이 손가락 마디만하다고 고집하고 그는 생각[想]을 고집하여 아소로 삼는다. 작은 몸[小身]에 의거하기 때문에, 또한 적은 경계[少境]를 반연하기 때문에 작은 생각이라고 하고, 아가 그것과 합하는 것을 작은 생각을 가진다고 한다.
이것은 욕계의 전부와 무상천을 제외한 색계의 일부에 있다고 하며, 무색계에도 색이 있다고 인정하는 이면 이것은 또한 그 앞의 세 가지 무색에도 있다고 한다.

만일 적은 색이 없는 것[少無色]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혹은 느낌[受]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고 생각[想]을 아소로 삼는다. 작은 몸에 의거하기 때문에, 또 적은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작은 생각이라고 하고, 아가 그것과 합한 것을 작은 생각을 가진다고 한다.
지어감[行]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고 의식[識]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것에서도 자세한 설명은 그러하다.
만일 생각을 고집하며 아로 삼으면 그 생각은 작은 몸에 의거하기 때문이고 또 적은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작은 생각[小想]이라고 하며, 그는 작은 생각을 고집하면서 아의 성품을 삼기 때문에 혹은 생각의 작용[用]이 있는 것을 작은 생각을 가진다고 한다.
이것은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있으며 무상천(無想天)은 제외된다.
아(我)는 한량없는 생각[無量想]을 가진다 함은, 한량없는 색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거나 혹은 한량없는 색이 없는 것[無色]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를 말한다.
만일 한량없는 색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색이 있는 아는 온갖 처소에 두루하다고 고집하고 그는 생각을 고집하여 아소로 삼는다. 한량없는 몸[無量身]에 의거하기 때문에, 또한 한량없는 경계[無量境]를 반연하기 때문에 한량없는 생각이라 하고, 아가 그것과 합친 것을 한량없는 생각을 가진다고 한다.
이것은 욕계의 전부와 무상천을 제외한 색계의 일부에 있다 하며, 무색계에도 색이 있다고 인정하는 이면 또 그 앞에 세 가지의 무색에도 있다고 한다.
만일 한량없는 색이 없는 것[無色]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혹은 느낌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고 생각을 아소로 삼는다. 그의 생각은 한량없는 몸에 의거하기 때문에, 또한 한량없는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한량없는 생각이라고 하고, 아가 그것과 합친 까닭에 한량없는 생각을 가진다고 한다.
지어감[行]을 고집하며 아로 삼거나 의식[識]을 고집하며 아로 삼는 것에서도 자세한 설명도 그러하다.
만일 생각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으면 그의 생각은 한량없는 몸에 의거하기 때문에, 또한 한량없는 경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한량없는 생각이라고 하며, 그는 한량없는 생각을 고집하면서 아의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혹은 생각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한량없는 생각을 가진다고 한다.
이것은 욕계와 나아가 무소유처에 있으며 무상천은 제외된다고 한다.
이와 같은 네 가지는 심사에 의거하기도 하고 혹은 등지에 의거하기도 하면서 모두 일으키게 된다.
아(我)는 순수하게 즐거움[樂]을 가진다고 함은, 앞의 세 가지 정려에 있으면서 모든 정(定)을 얻은 이가 천안통(天眼通)으로써 세 가지 정려에서 항시 즐거움을 받은 뒤에 거기에서 죽어 이 세간에 와 태어나는 이를 보고 곧 ‘아는 순수하게 즐거움을 가진다’라고 생각하는 이를 말한다.
모든 심사가 있는 이면 유정들이 항시 쾌락거리[樂具]와 합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순수하게 즐거움을 가진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다른 세상에서도 그러하다’라고 한다.
아(我)는 순수하게 괴로움[苦]을 가진다 함은, 지옥에 있으면서 모든 정(定)을 얻은 이가 천안통으로써 지옥에 있으면서 항시 괴로움을 받은 뒤에 거기에서 죽어 이 세간에 와 태어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순수하게 괴로움을 가진다’라고 생각하는 이를 말한다.
모든 심사(尋伺)가 있는 이면 유정들이 항시 고통거리[苦具]에 합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순수하게 괴로움을 가진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저 세상에서도 그러하다’라고 생각한다.
아(我)는 괴로움도 가지고 즐거움도 가진다고 함은, 방생(傍生)과 귀계(鬼界)와 인간 세상과 욕계천(欲界天)에 있으면서 모든 정(定)을 얻은 이가 천안통으로써 그 유정들이 고락을 섞어 받은 뒤에 거기에서 죽어 이 세간에 와 태어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괴로움도 가지고 즐거움도 가진다’고 생각하는 이를 말한다.
모든 심사가 있는 이면 유정들이 어떤 때는 고통거리와 합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쾌락거리와 합하기도 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괴로움도 가지고 즐거움도 가진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저 세상에서도 그러하다’라고 한다.
아(我)는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고 함은, 제4 정려와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에 있으면서 모든 정(定)을 얻은 이가 그의 유정들이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으면서 뒤에 거기에서 죽어 이 세간에 와 태어나는 것을 보고 곧 ‘아에는 괴로움도 없고 즐거움도 없다’고 생각하는 이를 말한다.
모든 심사가 있는 이면 ‘아의 체(體)는 항상 있는 것이면서도 명료하게 나타나지 않으며, 비록 잠시 동안은 고락과 상응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스치는 것과 같아 아(我)가 그것을 가진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이 열여섯 가지의 후제를 분별하는[後際分別] 모든 유상론(有想論)은 앞에서 말한 열여섯 가지의 일[事]에 의거하여 일으킨다.
여덟 가지의 무상론(無想論)이라 함은 유색(有色) 등의 네 가지와 유변(有邊) 등의 네 가지이다.465)
유색 등의 네 가지에서, 첫째는 “아(我)는 색이 있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그는 색을 고집하여 아라고 하는 이로서 무상정(無想定)을 얻었고 이와 다른 이로서 그 정(定)을 얻은 이가 무상유정천(無想有情天)에 가 태어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색이 있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 장차 태어날 무상유정천에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모든 심사(尋伺)가 있는 이로서 색을 고집하며 아로 삼는 이가 풍간(風癎)이거나 깊은 잠이 들었거나 기절했거나 하여 괴로운 느낌[苦受]이 절박할 때에도 전혀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보고 곧 ‘아는 비록 색이 있다 하더라도 그 생각은 없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다른 세상에서도 그러하다’라고 한다.

둘째는 “아(我)는 색이 없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그는 명근(命根)을 고집하며 아로 삼는 이로서 무상정을 얻었고 또한 다른 이로서 그 정(定)을 얻은 이가 무상유정천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색이 없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 장차 태어날 무상유정천 중에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모든 심사가 있는 이로서 명근을 고집하여 아로 삼는 이가 풍간이거나 깊이 잠이 들었거나 기절했거나 하여 괴로운 느낌이 절박할 때에도 전혀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보고 곧 ‘아는 색이 없고 또한 생각도 없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다른 세상에서도 그러하다’라고 한다.
어떤 심사가 있는 이로서 상온(想蘊)을 제외한 그 밖의 3온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도 “아는 색이 없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라고 고집하게 된다.
셋째는 아(我)는 색이 있기도[亦有色] 하고 색이 없기도[亦無色] 하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無想]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그는 색과 명근(命根)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으며 그는 이 두 가지에 대하여 하나의 아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그는 저마다 따로따로 이 두 가지를 분별함으로 말미암아 실아(實我)를 얻지 못하는 것은 마치 저마다 따로따로 단것[甘] 등을 분별하면서도 전체의 맛[總味]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그는 이 두 가지를 고집하며 하나의 아로 삼고 이미 얻은 무상정(無想定)과, 그리고 다른 이가 그 정(定)을 얻고서 무상유정천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 장차 태어날 무상유정천 중에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모든 심사가 있는 이로서 색과 명근을 고집하여 아로 삼는 이가 풍간이거나 잠이 깊이 들었거나 기절했거나 하여 괴로운 느낌이 절박할 때에도 전혀 생각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을 보고 곧 ‘아는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면서 전혀 생각이 없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다른 세상에서도 그러하다’라고 한다.
어떤 심사가 있는 이로서 상온을 제외한 나머지의 4온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도 “아는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라고 고집하게 된다.
넷째는 아(我)는 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곧 세 번째 견해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여기는 제4가 된다. 세 가지의 문(門)과 다르게 설명하는 것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유변(有邊) 등의 네 가지에서, 첫째는 아(我)는 끝이 있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만일 색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색의 아[色我]는 그 분량이 좁고 작은 것이 마치 손가락 마디만하다고 고집한다. 만일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명근(命根)을 아로 삼아 몸 안에 두루 있고 몸의 형량(形量)과 알맞다고 고집한다.
이와 같이 고집하는 이가 이미 무상정을 얻었고 다른 이가 그 정(定)을 얻어서 무상유정천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끝이 있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 장차 태어날 무상유정천 중에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모든 심사(尋伺)가 있는 이로서 또한 그것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가 풍간이거나 있는 것을 보고……(그 알맞은 바에 따라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둘째는 아(我)는 끝이 없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만일 색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색의 아[色我]는 온갖 처소에 두루하다고 고집하며, 만일 색이 없는 것[無色]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명근을 아로 삼으면서 역시 온갖 처소에 두루하다고 고집한다.
이와 같이 고집하는 이가 이미 얻은 무상정과 다른 이가 그 정(定)을 얻고서 무상유정천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끝이 없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 장차 태어날 무상유정천 중에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모든 심사가 있는 이로서 역시 그것을 고집하여 아로 삼는 이가 풍간이거나 있는 것을 보고……(그 알맞은 바에 따라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셋째는 아(我)는 끝이 있기도[亦有邊] 하고 없기도[亦無邊] 하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만일 색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색의 아[色我]는 말려져[卷] 있기도 하고 혹은 펴져[舒] 있다고 고집하며, 만일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명근을 아로 삼으면서 역시 색신과 같이 혹은 말려져 있기도 하고 혹은 펴져 있기도 하다고 고집한다.
이와 같이 고집하는 이가 이미 무상정을 얻었고, 다른 이가 그 정(定)을 얻고서 무상유정천에 태어나는 것을 보고 곧 ‘아는 끝이 있기도 하고 또한 없기도 하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 장차 태어날 무상유정천 중에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모든 심사가 있는 이로서 또한 그것을 고집하며 아로 삼는 이에 대해서도 그의 알맞은 바에 따라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넷째는 아(我)는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非有邊非無邊] 죽은 뒤에는 생각이 없다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곧 세 번째 견해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여기서는 제4가 된다. 세 가지의 문(門)과 다르게 설명한 것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여덟 가지 후제(後際)를 분별하는 무상론(無想論)은 앞에서 말한 여덟 가지 일[事]에 의거하여 일으킨다.
여덟 가지 비유상비무상론(非有想非無想論)이라 함은 유색(有色) 등의 네 가지와 유변(有邊) 등의 네 가지이다.466)
유색 등의 네 가지라 함은, 첫째는 아(我)는 색이 있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심사가 있는 이로서 색을 고집하면서 아(我)로 삼는 이면 그는 유정의 생각[有情想]이 명료하지 않은 것을 보고 곧 ‘아는 색이 있으면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다른 세상에서도 그러하다’라고 생각한다.

그 정(定)을 얻은 이면 이런 고집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왜냐하면 반드시 이미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염(染)을 여읜 이라야 비로소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의 모든 온[諸蘊]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것인데 그것은 이미 색이 없는 것이라 이런 고집은 이치로 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 다른 뜻[別義]에 의거하여 말하면 “그 정을 얻은 이에게도 이런 고집은 있다”라고 한다. 욕계와 색계에 태어나서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온을 고집하면서 아(我)로 삼는 것이니, 그가 고집한 아의 체(體)는 비록 색은 아니라[非色] 하더라도 색과 합하는 것이므로 색이 있는 아[有色我]라고 한다. 마치 상투 있는 사람이라 말하면서도 사람의 몸은 상투가 아닌 것과 같다.
그는 비록 색을 고집하면서 아소(我所)를 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고집하는 아는 아직 색신(色身)에서 여의지 않았고 나아가 목숨을 마치기까지 오히려 몸을 따르기 때문에 아는 색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들어가는 비상비비상처정의 생각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아는 현재에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며 죽은 뒤에도 그러하다”라고 고집한다.
무색계에도 색이 있다고 인정한 이면 그는 “비상비비상처를 고집하면서 아는 실로 색은 있으면서도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인정한다.
둘째는 아(我)는 색이 없고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그 정(定)을 얻은 이가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무색온(無色蘊)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고 혹은 아소로 삼는 이이다. 그가 고집한 아는 색이 없는 것으로써 성품을 삼으며 혹은 색이 없는 것을 보유하기 때문에 색이 없는 아[無色我]라 한다.
그는 들어가는 비상비비상처정의 생각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아의 현재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므로 죽은 뒤에도 그러하다”라고 고집한다.
모든 심사(尋伺)가 있는 이로서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유정의 생각이 명료하지 않은 것을 보고 곧 ‘아는 색이 없으면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다른 세상에서도 그러하다’라고 생각한다.
셋째는 아(我)는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면서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심사가 있는 이로서 색과 색이 없음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이면 그는 유정의 생각이 명료하지 않은 것을 보고 곧 ‘아는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면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 세상에서와 같이 다른 세상에서도 그러하다’라고 생각한다.
그 정(定)을 얻은 이면 이런 고집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반드시 이미 무소유처의 염(染)을 여읜 이라야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온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을 수 있는 것인데, 그는 이미 색이 없으므로 이런 고집은 이치로 보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와는 다른 뜻[別義]에 의거하여 설명하면 그 정을 얻은 이에게도 이런 고집이 있게 된다. 욕계와 색계에 태어나서 이미 무소유처의 염을 여읜 이로서 비상비비상처의 모든 온을 고집하며 아로 삼는 이면 그가 고집한 아의 체(體)가 색은 아니라 하더라도 색과 합한 것이므로 색이 있는 아[有色我]라 한다. 마치 상투 있는 사람이라 말하면서도 사람의 몸이 상투가 아닌 것과 같다.
그는 비록 색을 고집하면서 아소(我所)로 삼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고집하는 아가 아직 색신(色身)을 여의지 않았고 나아가 목숨을 마치기까지도 오히려 몸을 따르기 때문에 아는 또한 색이 있다고 말하며,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기 때문에 아는 또한 색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들어가는 비상비비상처정의 생각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아는 현재에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며 죽은 뒤에도 그러하다”라고 고집한다.
무색계에도 색이 있다고 인정한 이면 그는 비상비비상처를 고집하면서 “아는 실로 색이 있기도 하고 색이 없기도 하면서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있다”고 인정한다.
넷째는 아(我)는 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색이 없는 것도 아니며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곧 세 번째 견해를 부정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제4가 된다. 세 가지 문(門)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유변(有邊) 등의 네 가지라 함은, 첫째는 아(我)는 끝이 있으며[有邊]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想非無想]라고 고집하는 이론이요, 둘째는 아는 끝이 없으며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는 이론이며, 셋째는 아는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며[亦有邊亦無邊]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는 이론이요, 넷째는 아는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며[非有邊非無邊] 죽은 뒤에는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고집하는 이론이다.
이와 같이 모두 다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아로 삼는 것이니, 이미 비상비비상처의 정(定)을 얻은 이에게는 모두가 이런 고집이 있게 된다.
또 이 온갖 것은 모두 비상비비상처의 네 가지 무색온을 고집하면서 아와 아소를 삼게 된다.
첫째는 그 정(定)의 시분(時分)이 촉박하기 때문에 하나하나의 온을 소연(所緣)으로 삼기 때문에 아는 끝이 있다고 고집한다.
둘째는 그 정의 시분이 길기 때문에 통틀어 네 가지의 온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아는 끝이 없다고 고집한다.
셋째는 그 정의 시분이 촉박하기도 하고 혹은 길기도 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하나의 온을 혹은 통틀어 네 가지의 온을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아는 끝이 있기도 하고 또한 끝이 없기도 하다[亦有邊亦無邊]고 고집한다.
곧 세 번째 견해를 부정하는 것으로 제4를 삼는다. 세 가지의 문(門)과 다르게 설명하는 것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의 온갖 것은 모두가 들어가는 비상비비상처정의 생각이 명료하지 않기 때문에 “아는 현재에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생각이 없는 것도 아니며 죽은 뒤에도 그러하다”라고 고집한다.
모든 심사(尋伺)가 있는 이와 무색계에도 색이 있다고 인정하는 이가 색과 색이 없는 것을 고집하면서 아(我)로 삼는 것에 대해서도 그 알맞은 바에 따라 자세한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여덟 가지의 후제를 분별하는[後際分別] 비유상비무상론(非有想非無想論)은 앞에서 설명한 여덟 가지의 일[事]에 의거하여 일으킨다.
【문】 무엇 때문에 무상론(無想論)과 비유상비무상론 가운데서 “아(我)는 하나의 생각[一想]을 보유한다”는 등의 여덟 가지는 말하지 않는가?
【답】 만일 말하면 온갖 것은 모두가 유상론(有想論)이라고 해야 하니, 생각[想]과 느낌[受]이 있는 것은 무상(無想) 등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온갖 유상(有想) 등의 이론은 죽은 뒤를 말하고 있기 때문에 모두 이것은 후제를 분별하는 견해에 속한다.
일곱 가지의 단멸론(斷滅論)467)이라 함은, 첫째는 ‘이 아(我)는 색이 있으면서 두드러진 4대종(大種)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성품으로 삼으며, 죽은 뒤에 끊어지고 소멸하면 결국에는 없다. 여기에 이른 것을 아(我)는 바르게[正] 단멸한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이 생(生)에서 아이를 배는 것[受胎]이 처음이 되고 죽는 때[死時]가 나중이 되는 것을 보고 곧 ‘아(我)가 수태할 때에는 본래부터 없는[本無] 데서 있게 되었고 만일 죽는 자리[死位]에 이르면 있은 뒤에 다시 없게 되는 것이므로 잘[善] 단멸한다’고 생각한다.
둘째는 ‘이 아(我)는 욕계천에서 죽은 뒤에는 끊어지고 소멸하여 결국에는 없다. 여기에 이른 것을 아는 바르게 단멸한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는 산문(産門)으로 인하여 생겨나지 않았고 본래부터 없는 데서 있게 되었으며 있은 뒤에 도로 없어지는 것이 마치 혜성(彗星) 등과 같은 것이므로 잘 단멸한다’고 생각한다.
셋째는 ‘이 아(我)는 색계천에서 죽은 뒤에는 끊어지고 소멸하여 결국에는 없다. 여기에 이른 것을 아는 바르게 단멸한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는 이미 산문으로 인하여 생겨나지 않았고 본래부터 없는 데서 있게 되었으며 등지(等至)의 힘으로 말미암아 있은 뒤에 다시 없게 되는 것이므로 잘 단멸한다’고 생각한다.

혹 어떤 이는 “이 세 가지 단견(斷見)은 모두가 이미 초정려(初靜慮)의 염(染)을 여읜 유정을 반연하면서 일으킨다. 그 단견을 지닌 이는 비록 이미 정(定)을 얻었다 하더라도 아직 초정려의 염을 여의지 못했으므로 일으킨 천안(天眼)은 하지(下地)만을 볼 뿐인데, 앞의 세 가지 유정은 이미 목숨을 마친 뒤에 모두가 상지(上地)에 태어나서 받는 중유(中有)와 생유(生有) 등의 몸은 그의 경계가 아니어서 곧 ‘정려(靜慮)를 얻은 이는 목숨을 마치고 나면 모두가 다 단멸한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넷째는 ‘이 아(我)는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에서 죽은 뒤에는 끊어지고 소멸하여 결국에는 없다. 여기에 이른 것을 아는 바르게 단멸한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다섯째는 ‘이 아(我)는 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에서 죽은 뒤에는 끊어지고 소멸하여 결국에는 없다. 여기에 이른 것을 아는 바르게 단멸한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여섯째는 ‘이 아(我)는 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에서 죽은 뒤에는 끊어지고 소멸하여 결국에는 없다. 여기에 이른 것을 아는 바르게 단멸한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일곱째는 ‘이 아(我)는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에서 죽은 뒤에는 끊어지고 소멸하여 결국에는 없다. 여기에 이른 것을 아는 바르게 단멸한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이 가운데서 나중의 네 가지는 어떤 이는 공무변처를 고집하면서 생사(生死)의 꼭대기로 삼으며, 나아가 어떤 이는 비상비비상처를 고집하면서 생사의 꼭대기로 삼는다.
만일 공무변처를 고집하면서 생사의 꼭대기로 삼는 이면 그는 공무변처에서 죽은 뒤에는 없다고 고집하면서 잘[善] 단멸한다고 하며, 나아가 만일 비상비비상처를 고집하면서 생사의 꼭대기로 삼는 이면 그는 비상비비상처에서 죽은 뒤에는 없다고 고집하면서 잘 단멸한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 후제를 분별[後際分別]하는 모든 단멸론(斷滅論)은 앞에서 설명한 일곱 가지 일에 의거하면서 일으킨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는 모두가 죽은 뒤를 말하기 때문에 이것은 후제를 분별하는 견해에 속한다.
다섯 가지의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468)이라 함은, 외도(外道)는 “만일 현재에 아(我)가 안락함을 받으면 열반을 얻었다고 하지만 만일 아에 고통이 있으면 그때에는 열반을 얻었다고 하지 않는 것이니, 안락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고집한다.
첫 번째는 ‘이 아(我)는 청정하게 해탈하면서 온갖 재앙[災橫]을 벗어나는 것이니, 현재 묘한 5욕의 낙[欲樂]을 수용하는 때를 현법열반을 얻는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는 모든 욕락의 허물을 보고서 그는 ‘욕락에서 생기는 즐거움에는 뭇 괴로움이 따르게 되고 여러 가지 원한과 손해[怨害]가 많으나 정(定)에서 생기는 즐거움은 미묘하고 고요하면서 뭇 괴로움의 따름이 없고 여러 가지 원한과 손해를 여읜다’고 생각하고, 또 ‘이 아(我)는 청정하게 해탈하면서 온갖 재앙을 벗어나는 것이니, 현재에 최초의 정려(靜慮)에 편안히 머무르는 때를 현법열반을 얻는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는 모든 욕심[欲]과 심사(尋伺)는 다 같이 허물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이 아(我)는 청정하게 해탈하면서 온갖 재앙을 벗어나는 것이니, 현재에 제2 정려에 편안히 머무르는 때를 현법열반을 얻는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네 번째는 모든 욕심과 심사와 기쁨[喜]의 허물을 보고 그는 ‘이 아(我)는 청정하게 해탈하면서 온갖 재앙을 벗어나는 것이니, 현재에 제3 정려에 편안히 머무르는 때를 현법열반을 얻는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는 모든 욕심과 심사와 기쁨과 들숨ㆍ날숨에는 모두가 허물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이 아(我)는 청정하게 해탈하면서 온갖 재앙을 벗어나는 것이니, 현재에 제4 정려에 편안히 머무르는 때를 현법열반을 얻는다고 한다’고 생각한다.
【문】 어찌하여 이 다섯 가지 현법열반론은 후제를 분별하는 견해에 속하는가?

【답】 이 다섯 가지는 비록 현재를 반연한다 하더라도 과거에 상대하면서 후(後)라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후제를 분별한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이 다섯 가지는 ‘아(我)는 현재에도 이미 즐거움[樂]이 있고 그 뒤에도 즐거움이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에 후제를 분별하는 견해에 속한다”고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현법열반의 논(論)이라 하는가?
【답】 현재의 즐거움을 우선으로 삼아 뒤의 즐거움을 고집하는 것이며, 현재 있는 것[居]이 먼저이기 때문에 그로써 논이라는 이름을 표시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후제를 분별하는 현법열반론은 앞에서 설명한 다섯 가지의 일에 의거하여 일으킨다.
계경에서 “필추여, 알아야 한다. 세간의 사문이나 바라문 등이 의지하는 모든 견해는 다 두 가지의 견해에 들어가는 것이니, 있다는 견해[有見]와 없다는 견해[無有見]이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469)
이제 분별하겠다.
【문】 어찌하여 모든 견해는 다 이 두 가지의 견해에 들어가는가?
【답】 이 들어간다[入]는 말은 그것의 체(體)를 포섭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것이 두 가지 견해의 품류[二見品] 중에 들어간다는 것을 나타낼 뿐이다. 왜냐하면 있다는 견해는 곧 상견(常見)이요, 없다는 견해는 곧 단견(斷見)이니, 모든 나쁜 견해의 갈래[惡見趣]에는 비록 여러 가지가 있다 하더라도 모두가 이 두 가지 품류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품(品)의 처음에 보랄나(補剌拏)가 “베풀어 줄 것이 없다[無施與]”고 하는 등의 다섯 가지 종류의 사견(邪見)은 단견의 품류[斷見品]에 들어가는 것이니, 없다[無]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는 항상 있다고 고집함으로 말미암아 원인 등을 비방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다음에 “나아가 살아 있는 명자(命者)는 죽은 뒤에 끊어지고 파괴되어 없다”고 하는 등은 단견에 속하기 때문에 곧 단견의 품류이다.
어떤 이는 “이 4대종(大種)의 사부의 몸[士夫身]과 나아가 지혜로운 이[智者]가 받는 것을 칭찬한다고 함은 두 가지의 품류 중에 들어간다”고 한다.
다음에 “인도 없고 연도 없다[無因無緣]”고 하는 등은 말색갈리(末塞羯梨)의 견해이고, 다음에 “짓는 이[造]와 짓게 하는 이[敎造]”라고 하는 등은 산사이(珊闍夷)의 견해이다.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단견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없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는 항상 있다고 고집함으로 말미암아 원인 등을 비방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다음에 “이 7사신(士身)”이라고 하는 등은 상견(常見)에 속하기 때문에 곧 상견의 품류이다.
다음에 “14억(億)이 있다”고 하는 등은 무승발갈(無勝髮褐)의 견해이며, 다음에 “온갖 사부(士夫)가 받는 모든 것은 다 전생에 지은 것으로서 인(因)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 등은 이계친자(離繫親子)의 견해이다.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가 있고 뒤에는 단멸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온갖 사부가 받는 바는 모두 인도 없고 연도 없다”고 하는 등은 봉가다연나(犎迦多衍那)의 견해로서 단견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없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는 항상 있다고 고집하고 원인이 없다고 비방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다음에 “스스로가 고락(苦樂)을 짓는다”고 하는 등은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는 있다고 하고 뒤에는 단멸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다음에 “받는 바 고락은 자기 자신이 짓는 것이 아니다”고 하는 등은 단견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없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는 항상 있다고 고집하고 원인은 없다고 비방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다음에 “아(我)와 세간은 항상 있다”고 하는 등은 상견에 속하기 때문에 곧 상견의 품류이다.
다음에 “진리[諦]이기에, 또한 머무르기[住] 때문에, 아(我)는 유아(有我)이다”고 하는 등은 상견에 속하기 때문에 곧 상견의 품류이다.
다음에 “진리이기에, 또한 머무르기 때문에 아는 무아(無我)이다”고 하는 등은 단견에 속하기 때문에 곧 단견의 품류이다.
다음에 “아(我)는 아를 관한다[觀我]”고 하는 등은 상견의 품류에 들어간다.
다음에 “묘(妙)한 5욕(欲)을 받는다”고 하는 등은 상견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는 항상 있어서 열반을 얻는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가 있고 뒤에는 단멸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다음에 “바람은 불지 않는다”고 하는 등은 상견에 속하기 때문에 곧 상견의 품류이다.
다음에 “중생은 아에 집착하여 짓는다[執我作]”고 하는 등은 두 가지 견해의 품류에 들어간다. 아(我)가 있고 뒤에는 단멸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뒤에서 “모든 욕심[諸欲]은 깨끗하고 묘한 것이므로 유쾌한 뜻으로 받아 써도 허물이 없다”고 하는 등은 상견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는 항상 있으면서 뛰어난 욕심을 받는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가 있으며 뒤에는 단멸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계경 중에서 말씀한 아의 유상견(有想見)과 아의 무상견(無想見)과 아의 비유상비무상견(非有想非無想見)과 단멸견(斷滅見)과 현법열반견(現法涅槃見)의 이 다섯 가지는 두 가지 견해의 품류에 들어간다. 앞의 세 가지는 상견의 품류에 들어가고 제4는 단견의 품류에 들어가며, 제5에 대해서 어떤 이는 “상견의 품류에 들어간다”고 하고,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간다”고 한다.
『범망경』 중에서 말씀한 62견(見)도 전체적으로는 이 두 가지 견해의 품류 중에 들어간다. 전제를 분별하는 견해 중 네 가지 변상론(遍常論)은 상견의 품류에 들어가고, 네 가지 일분상론(一分常論)에서 어떤 이는 “상견의 품류에 들어간다”고 하고,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상(常)의 것이 있고 무상(無常)의 것이 있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두 가지 무인론[二無因論]은 단견의 품류에 들어간다.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는 항상 있다고 고집하며 원인[因]이 없다고 비방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유변(有邊) 등의 네 가지 이론과 불사교란(不死矯亂)의 네 가지 이론은 상견의 품류에 들어간다. 어떤 이는 “두 가지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는 항상 있고 뒤에는 역시 단멸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후제를 분별하는 견해 중 유상론ㆍ무상론ㆍ비유상비무상론은 모두가 상견(常見)에 속하기 때문에 곧 상견의 품류이며, 일곱 가지의 단멸론(斷滅論)은 단견에 속하기 때문에 곧 단견의 품류이다.
다섯 가지의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은 상견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가 항상 있으면서 열반을 얻는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의 품류에 들어가는 것이니, 아(我)가 있으면서 현재에는 열반을 얻고 뒤에는 단멸한다고 고집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가다연나계경(迦多衍那契經)』에서 “세간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있다는 견해요, 둘째는 없다는 견해이다”라고 말씀한 것은 차례대로 상견과 단견의 품류에 섭수하여 들어간다.
『사자후경(師子吼經)』에서 “온갖 견해는 모두가 두 가지 견해에 의거한다. 있다는 견해와 없다는 견해이다. 있다는 견해에 의거한 이는 있다는 견해에 탐착하여 없다는 견해를 미워하며, 없다는 견해에 의거한 이는 없다는 견해에 탐착하여 있다는 견해를 미워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두 가지는 차례대로 역시 곧 상견과 단견의 품류에 섭수하여 들어간다.
계경에서 “상견외도(常見外道)는 혹은 바뀌고 변한다고 고집하기도 하고 혹은 숨고 드러난다고 고집하기도 하며, 혹은 가고 오며[往來]ㆍ의계(意界)는 항상 있다는 등을 고집하기도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와 같은 온갖 것은 상견에 속하기 때문에 상견의 품류이다.
계경에서 “어떤 외도로서 명자(命者)는 곧 몸[身]이라 하고, 명자는 몸과 다르다 하며, 명자는 곧 몸이 아니라고 하고, 명자는 몸과는 다른 것이 아니라고 고집하는 이가 있다”고 말씀한 것과 같다.470)
【문】 외도는 무엇 때문에 명자는 곧 몸이라고 고집하는가?
【답】 세우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는 세간에서 몸이 생겼을 때에 유정이 생겼다고 말하고 몸이 파괴되었을 때에 유정이 죽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세간에서 색근(色根)이 있는 몸을 명자가 있다고 말하고 색근이 없는 몸을 명자가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세간에서 몸의 모양의 차별에 대하여 남자요, 여인이라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세간에서 몸의 힘의 강약(强弱)에 대하여 강한 이요, 약한 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세간에서 몸의 형상이 길고 짧은 것과 거칠고 미세한 것과 살찌고 파리한 것과 희고 검은 것 등의 차이에 의하여 길고 짧다는 등을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세간에서 몸의 일부를 손상하고 해를 당하는 일이 있을 때에는 온몸이 모두 안온하지 못한 고통을 받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세간에서 근심하거나 기뻐하는 때에 눈물을 흘리고 털이 곤두서며 얼굴빛이 기뻐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또 그는 세간에서 모두 몸에 대하여 아(我)라는 이름과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다른 논사는 “그는 세간에서 수궁(守宮)이나 도마뱀 등이 꼬리가 잘렸을 때에도 저마다 움직이며 도망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대덕(大德)이 “그는 세간에서는 색근이 있는 몸에 대하여 유정의 형상과 유정의 말소리와 유정의 아름다움과 추함과 유정의 위의(威儀)와 유정의 하는 일 등을 말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외도들은 “명자는 곧 몸이다”라고 말한다.
【문】 외도는 무엇 때문에 명자(命者)는 몸과 다르다고 고집하는가?
【답】 세우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 외도들은 색(色)을 고집하면서 몸으로 삼고 심ㆍ심소를 고집하면서 명자로 삼는다. 색과 심 등의 상속(相續)이 각각 다르므로 그는 색신(色身)의 앞뒤의 바뀌고 변한 것은 깨달으면서도 마음 등의 앞뒤의 다른 모양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견해를 일으킨다.
또 그는 몸은 거칠고 심ㆍ심소는 미세한 것인데 명자는 미세한 것이므로 몸과는 다르다고 본다.
또 그는 위의(威儀)는 의욕(意欲)에 따라 움직이므로 곧 의욕을 고집하며 명자라 여기면서 위의는 곧 몸이라 바뀌고 변하면서 차별이 있다고 본다.
또 그는 죽는 이의 몸 모양에 차별이 없는 것을 보고 곧 ‘명자가 몸을 떠나는 것을 죽는다고 하는 것이므로 몸과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또 그는 색신(色身)과 심ㆍ심소는 분위(分位)와 앞뒤와 바뀌고 변하는 것이 저마다 다른 것을 보고 그는 마음 등이 곧 명자라고 고집하기 때문에 몸과는 다르다고 한다.
또 그는 색신에는 많은 부분이 있으면서도 명자는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몸과는 다르다고 한다.
또 그 외도들은 앞[前]의 유(有)의 몸을 버리고 중간[中]의 유의 몸을 받으며 다시 중간의 유의 몸을 버리면서 지금의 유의 몸을 받은 것이니, 이와 같이 차츰차츰 몸에는 비록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명자는 하나[一]라고 보기 때문에 몸과는 다르다.”
다른 논사는 “그는 잠을 잘 때에도 몸은 역시 움직이는 것이 있음을 보기 때문에 그 중에 따로 명자가 있는 것으로 안다.
또 그는 꿈을 꿀 때에 몸은 본래 그 자리에 있는데도 명자는 다른 지방을 돌아다니며 놀고 있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몸과는 달리 따로 명자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그는 정(定)에 의지하여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여러 몸[多身]의 차별을 아는 것을 보고 곧 ‘몸은 비록 여럿이 있다 하더라도 명자는 하나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저마다 다른 것으로 안다.
또 그는 세간에서 몸은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아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몸을 떠나서 따로 명자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한다.
어떤 이는 “그는 세간에서 전에 했던 일과 겪었던 일을 기억하면서도 몸은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몸을 떠나서 따로 명자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한다.
혹 어떤 이는 “그는 몸 형상의 앞뒤 자리[位]는 달라지면서도 공교지(工巧智) 등은 따라 구르며 다르게 됨이 없는 것을 보기 때문에 몸을 떠나서 따로 명자가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한다.
대덕(大德)은 “그는 세간에서 자재하지 않은 이와 자재한 이를 보아도 몸은 다 같이 동요하기 때문에 그의 몸은 명자로 말미암아 움직이는 것으로 안다”고 말씀하셨다.
【문】 외도는 무엇 때문에 명자(命者)는 곧 몸이 아니라고 고집하는가?
【답】 세우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는 세간에서 몸의 많은 부분이 달라지는데도 명자는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에 곧 몸은 아니라고 한다.
또 그는 세간에서 몸은 연(緣)을 따라 구르는데도 명자는 그렇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에 곧 몸은 아니라고 한다.
또 그는 세간에서 몸에는 더하거나 덜하는 것과 손해나 이익 등의 차이가 있는데도 명자는 그렇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에 곧 몸은 아니라고 한다.”
대덕(大德)은 “그는 세간에서 한 몸이면서도 갖가지의 모양이 있어 서로가 다르지만 명자는 그렇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에 곧 몸이 아니라고 한다”고 말씀하셨다.
【문】 외도는 무엇 때문에 명자(命者)는 몸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고집하는가?
【답】 세우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는 몸과 다른 별도의 실체로서의 명자는 얻을 수 없다고 보기 때문에 명자는 몸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고집한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 ‘곧 몸이다’라고 한 것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대덕(大德)은 “그는 세간에서 자기의 신상(身上)에 대해서는 아애(我愛)를 일으키면서도 그와 다른 법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한 것을 보기 때문에 명자는 몸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고집한다. 그 밖의 나머지는 앞에서 ‘곧 몸이다’라고 한 것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어리석은 범부들은 색(色)과 심(心) 등의 찰나(刹那)와 상속(相續)에 대하여 분명히 잘 알지 못하기에 명자는 곧 몸과는 다름이 있다는 등으로 말한다. 만일 곧 몸이라거나 또는 몸과 다른 것이 아니라고 말하면 단견의 품류에 들어가고, 만일 몸과 다르다거나 또는 곧 몸이 아니라고 말하면 상견의 품류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외도들의 모든 나쁜 견해의 갈래[惡見趣]는 모두가 단견ㆍ상견의 품류 안에 들지 않는 것이 없다.
온갖 여래ㆍ응공ㆍ정등각께서는 그것을 대치(對治)하기 위하여 중도(中道)를 널리 말씀하셨으니, 색(色)ㆍ심(心) 등은 아주 없는 것[斷]도 아니요, 항상 있는 것[常]도 아니다.
【문】 어떻게 죽은 뒤에는 아주 없는 것이 아닌 줄 아는가?471)
【답】 세우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지금의 마음이 여러 생각[多念]으로 상속하는 것을 보건대, 앞과 앞[前前]의 것의 소멸로 말미암아 뒤와 뒤[後後]의 것이 생겨나고, 뒤의 마음은 반드시 앞의 마음에 의지하면서 일어나며 앞의 마음에 힘이 있으면서 반드시 뒤의 마음을 이끌어 온다. 지극히 싫어하는 연(緣)을 만나면 뒤의 것은 곧 일어나지 않는다.
이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처음 생(生)을 받을 때의 마음은 반드시 앞의 마음이 있으면서 인(因)이 되어 끌어 일으켜지며, 장차 목숨을 마치는 자리[位]에서 극히 싫어하는 연이 없으면, 바로 죽으려 할 때의 마음은 반드시 뒤의 것을 이끈다. 전생의 몸[前身]이 이미 금생의 몸[今身]을 끌어 일으켰는데 금생 몸이 무엇 때문에 후생 몸[後身]을 이끌지 못하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아주 없는 것[斷]이 아닌 줄 알 것이다.
또 지금의 근(根)의 감각[覺]은 이미 생겼던 근에 의지하고 다시 인(因)이 되어서 뜻[意]의 감각을 끌어 일으키는 것이니, 그러므로 태(胎) 안에 최초의 뜻의 감각은 반드시 과거의 근의 감각으로 인하여 이끌어 낸 것인 줄 알아야 한다. 전생이 이미 금생을 끌어 일으켰는데 금생이 무엇 때문에 후생을 이끌지 못하겠는가. 이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아주 없는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다.”
대덕(大德)은 “다른 마음[餘心]을 여의고서 그 밖의 다른 마음을 굴리는 것이 아니니 또한 어떤 색(色)은 마음을 따르면서 생기는 것이 있음을 보기도 하고 다시 어떤 마음은 색에 의지하면서 생기는 것이 있음을 보기도 하며 번뇌로 말미암아 색과 마음이 생겨남이 있다. 이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아주 없는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다.
또 앞의 생각[前念]에 번뇌가 있으면 몸은 반드시 뒤의 생각[後念]의 마음과 색을 끌어 일으키는 것을 현실에서 보게 되므로 목숨을 마치는 자리[命終位]에서 번뇌가 있는 이면 반드시 뒤의 마음과 색을 이끌어서 생기게 하는 줄 알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죽은 뒤에는 아주 없는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문】 모든 색(色)ㆍ심(心) 등은 무엇 때문에 항상 있는 것이 아닌가?
【답】 바뀌고 변하면서 한결같은 것이 아닌데 어찌 항상 머물러[常住] 있겠는가.
【문】 어찌 바뀌고 변하면서도 숨고 드러나는 것을 연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며 그러면서도 그 체(體)에 생겨나고 없어짐[生滅]이 있다고 고집하는가?
【답】 세우 존자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만일 바뀌고 변하는 것이 다만 숨고 드러나는 것만을 연유한다 하면 태 안[胎藏]에 있거나 젖먹이거나 어린아이거나 소년이거나 중년ㆍ노년의 자리이거나 간에 모두가 단번에 생겨야 한다. 그러나 점차로 생기기 때문에 바뀌고 변하는 체에는 생겨나고 없어짐이 있으면서도 숨고 드러나는 것을 연유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바뀌고 변하는 것이 다만 숨고 드러나는 것만을 연유한다 하면 태 안에 있거나 젖먹이거나 어린아이이거나 소년이거나 중년ㆍ노년의 자리이거나 간에 마땅히 간단(間斷)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간단이 없기 때문에 바뀌고 변하는 체에는 생겨나고 없어짐이 있으면서도 숨고 드러나는 것을 연유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대덕(大德)은 “세간의 현실에서 보건대, 뭇 연[衆緣]이 합할 때에 모든 법의 생기는 것이 있고 연(緣)이 만일 등지고 떨어지게[乖離] 되면 모든 법은 곧 파괴된다. 숨고 드러나고 하는 것에는 이런 차별이 있는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바뀌고 변하면서도 숨고 드러나는 것을 연유하지 않으면서 다만 그 체(體)로 말미암아서만 생겨나는 것이 있고 없어지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법이 바뀌고 변할 때에 앞뒤의 모양[相]이 구별되면 체(體)도 구별되어야 하니, 모양과 체는 하나[一]이기 때문이다. 만일 법이 항상 머무른다면 비록 숨고 드러나는 분위(分位)에 차별이 있다 하더라도 모양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바뀌고 변하는 체에 나고 없어짐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타납식(伽他納息)의 모든 의미는 글 그대로여서 알기 쉽기 때문에 다시 해석하지 않는다.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이 이 논의 번역을 마치면서 두 개의 게송을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4백 년 뒤에
가니색가왕(迦膩色加王)이 섬부주(贍部洲)에서
5백의 응진사(應眞士)를 불러모아
가습미라(迦濕彌羅)에서 삼장(三藏)을 해석했다.

그 중의 대법(對法) 비바사(毘婆沙)를
본문(本文)을 다 얻어 이제 번역을 마쳤으니
이들이 모든 함식(含識)을 적셔 주어
빨리 원적(圓寂)의 묘한 보리[妙菩提]를 증득하게 하소서.
027_0205_c_01L阿毘達磨大毘婆沙論卷第二百 逸五百大阿羅漢等造三藏法師玄奘奉 詔譯見薀第八中見納息第五之三後際分別見中十六有想論者謂初四種依三見立如說一類補特伽羅起如是見立如是論命者卽身復有一類補特伽羅起如是見立如是論命者異身復有一類補特伽羅起如是見立如是論此摠是我遍滿無二無異無缺依第一見建立第一我有色死後有想論謂彼外道執色爲我執餘四薀以爲我所彼所執我以色爲性故名有色取諸法相說名爲想此有色我有彼想故說名有想以執四薀爲我所故彼作是念此有色我死後有想此在欲界全色界一分無想天許無色界亦有色者此亦在彼前三無色此有想故不在後一第二見建立第二我無色死後有想謂彼外道執無色爲我執色或餘四薀以爲我所謂若除想執餘三薀摠別爲我卽執想色薀爲我所若執想薀爲我卽執餘薀爲我所彼所執我無色爲性故名無色取諸法相名爲想此無色我或想爲性或有想說名有想或有彼想說名有想執想薀爲我所故彼作是念此無色我死後有想此在欲界乃至無所有除無想天依第三見建立第三我亦有色亦無色死後有想論謂彼外道執色無色爲我如諦語外道等於五薀起一我想由彼各別分別諸不得實我猶如各別分別甘無摠實有一味可得彼於諸起一想已摠執爲我彼所執我無色爲性故名亦有色亦無色諸法相說名爲想此亦有色亦無色我或以想爲性或有想用說名有想或有彼想說名有想以執自身諸薀爲我執他諸薀爲我所故有餘外道於有色我見過失已依無色我而住於無色我見過失已復依有色我而彼諸外道我見未斷雖執有我不決定說所執我唯是有色或唯是無色然作是念此亦有色亦無色死後有想此在欲界全隨其所應至廣說第四我非有色非無色死後有想論卽遮第三無別依見彼作是我雖實有而不可說定亦有色無色彼見實我定亦有色亦無色有過失故作是說此我非有色非無色死後有想餘如前說如是四種或依尋伺或依等至皆容得起執我有邊死後有想論者若執色爲我所執我體有分限或在心中如指節量光明熾盛或在身中稱身形量外明徹如說我我形相端嚴光明熾淸淨第一喬答摩尊寧說無我執非色爲我彼所執我亦有分限非色法所依所緣有分限故亦名有彼依尋伺起如是執若依等至此執者必未得遍處定如是二種俱作是念我定有邊死後有想此在欲界全色界一分除無想天許無色界亦有色者此亦在彼前三無色執我無邊死後有想論者若執色爲我所執我遍一切處如明論說有我士夫其量廣大邊際難測光色如日諸冥闇者雖住其前而不能見要知此我方能越度生老病死異此更無越度理趣又如有說地卽是我我卽是地其量無邊若執無色爲我彼作是念如不至火終不能燒若不至刀終不能割若不至水終不能潤如是若有不至我者終不能取無邊分量彼依尋伺起如是執若依等至起此執者必已得遍處定如是二種俱作是念我定無邊死後有想此在欲界全隨其所應乃至廣說執我亦有邊亦無邊死後有想論者若執色爲我彼所執我隨所依身或卷或舒其量不定彼作是念身若有量我卽有邊身若無量我卽無邊若執無色爲我彼作是若隨有量所依所緣我卽有邊隨無量所依所緣我卽無邊如是二種俱作是念我亦有邊亦無邊死後有想此在欲界全隨其所應乃至廣執我非有邊非無邊死後有想論卽遮第三爲此第四三門異說前應知如是四種或依尋伺或依等皆容得起依想受異故作是說我有一想我有種種想我有小想我有無量想我純有我純有苦我有苦有樂我無苦無樂死後有想此中我有一想者謂在前三無色由彼諸想一門轉故說名一我有種種想者謂在欲色界除無想天由彼諸想六門四門轉故及緣種種境故名種種想依尋伺者我亦有差別謂有一種工巧智者名有一若有種種工巧智者名有種種想我有小想者謂執少色爲我或執少無色爲我若執少色爲我彼執色我其量狹小如指節等彼執想爲我依小身故緣少境故說爲小想我與彼合名有小想此在欲界全色界一除無想天許無色界亦有色者亦在彼前三無色若執少無色爲我彼或執受爲我想爲我所依小身故緣少境故說爲小想我與彼合名有小想執行爲我執識爲我廣說亦爾若執想爲我彼想依小身故緣少境說爲小想彼執小想爲我性故有想用名有小想此在欲界乃至無所有處除無想天我有無量想者謂執無量色爲我或執無量無色爲我執無量色爲我彼執色我遍一切處彼執想爲我所依無量身故緣無量境故名無量想我與彼合名有無量此在欲界全色界一分除無想天許無色界亦有色者此亦在彼前三無色若執無量無色爲我彼或執受爲我想爲我所彼想依無量身故無量境故名無量想我與彼合故有無量想執行爲我執識爲我廣說亦爾若執想爲我彼想依無量身故緣無量境故名無量想彼執無量想爲我性故或有想用故名有無量想此在欲界乃至無所有處除無想天如是四種或依尋伺或依等至皆容得起我純有樂者謂在前三靜慮諸得定者以天眼通見三靜慮恒時受後從彼歿來生此閒便作是念純有樂諸尋伺者見諸有情於一切與樂具合便作是念我純有樂於此世他世亦爾我純有苦者謂在地獄諸得定者以天眼通見在地獄恒時受苦後從彼歿來生此閒便作是念我純有苦諸尋伺者見諸有情於一切時與苦具合便作是念我純有苦如於此世他世亦爾我有苦有樂者謂在傍生鬼界人及欲界天得定者以天眼通見彼有情苦樂雜後從彼歿來生此閒便作是念有苦有樂諸尋伺者見諸有情有時與苦具合有時與樂具合便作是念我有苦有樂如於此世他世亦爾無苦無樂者謂在第四靜慮乃至無所有處諸得定者知彼有情無苦無樂後從彼歿來生此閒便作是念無苦無樂諸尋伺者作如是念我體是常不明了轉雖有蹔與苦樂相應而彼是客我非有彼此十六種後際分別諸有想論依前所說十六事起八無想論者謂有色等四有邊等四有色等四者一執我有色死後無想謂彼執色爲我得無想定及見他得彼定生無想有情天便作是念我有色死後無想當生無想有情天中不起故諸尋伺者執色爲我見有風熟眠悶絕苦受所切似全無想便作是念我雖有色而無其想如於此他世亦爾二執我無色死後無想謂彼執命根爲我得無想定及見他得彼定生無想有情天便作是念無色死後無想當生無想有情天中想不起故諸尋伺者執命根爲我有風癇熟眠悶絕苦受所切似全無便作是念我無色亦無想如於此他世亦爾有尋伺者除想執餘三薀爲我亦容執我無色死後無想執我亦有色亦無色死後無想謂彼執色命根爲我彼於此二起一我想由彼各別分別此二不得實我猶如各別分別甘等不得摠味彼執此二爲一我已得無想定及見他得彼定生無想有情天便作是念我亦有色亦無色死後無想當生無想有情天想不起故諸尋伺者執色命根爲見有風癇熟眠悶絕苦受所切似全無想便作是念我亦有色亦無色而全無想如於此世他世亦爾有尋伺者除想執餘四薀爲我亦容執我亦有色亦無色死後無想四執我非有色非無色死後無想卽遮第三此第四三門異說如前應知有邊等四者一執我有邊死後無想謂若執色爲我彼執色我其量狹小如指節若執無色爲我彼執命根爲我在身中稱身形量如是執已得無想定及見他得彼定生無想有情天便作是念我有邊死後無想當生無想有情天中想不起故諸尋伺者亦執彼爲我見有風癇隨其所應廣如前二執我無邊死後無想謂若執色爲我彼執色我遍一切處若執無色爲我彼執命根爲我亦遍一切處是執已得無想定及見他得彼定生無想有情天便作是念我無邊死後無想當生無想有情天中想不起故諸尋伺者亦執彼爲我見有風癇其所應廣如前說三執我亦有邊無邊死後無想謂若執色爲我彼執色或卷或舒若執無色爲我彼執命根爲我亦如身色或卷或舒如是執得無想定及見他得彼定生無想有情天便作是念我亦有邊亦無邊死後無想當生無想有情天中想不起故諸尋伺者亦執彼爲我隨其所廣如前說四執我非有邊非無邊死後無想卽遮第三爲此第四三門異說如前應知如是八種後際分別諸無想論依前所說八種事起八非有想非無想論者謂有色等四有邊等四有色等四者一執我有色死後非有想非無想謂尋伺者執色爲我彼見有情想不明了便作是念我有色非有想非無想如於此世世亦爾非得彼定可有此執所以者要已離無所有處染者方可執非想非非想處諸薀爲我彼旣無色執理無有依別義說得彼定亦有此謂生欲色界已離無所有處染者執非想非非想處諸薀爲我彼所執我體雖非色而與色合名有色我有髻人而人體非髻彼雖不執色爲我所而所執我未離色身乃至命終猶隨身故說我有色彼由所入非想非非想處定想不明了故執我現在非有想非無想死後亦然許無色亦有色者彼許有執非想非非想我實有色而非有想亦非無想執我無色死後非有想非無想謂得彼定者執非想非非想處諸無色薀爲我或爲我所彼所執我以無色爲或有無色故名無色我彼由所入非想非非想處定想不明了故執我現在非有想非無想死後亦然諸尋伺者執無色爲我彼見有情想不明便作是念我無色非有想非無想如於此世他世亦爾三執我亦有色亦無色死後非有想非無想謂尋伺者執色無色爲我彼見有情想不明便作是念我亦有色亦無色非有非無想如於此世他世亦爾非得彼定可有此執所以者何要已離無所有處染者方可執非想非非想處諸薀爲我彼旣無色此執理無有依別義說得彼定亦有此執謂生色界已離無所有處染者執非想非非想處諸薀爲我彼所執我體非色而與色合名有色我如說有髻人而人體非髻彼雖不執色爲我所而所執我未離色身乃至命終猶隨身故說我亦有色執無色爲我故我亦無色彼由所入非想非非想處定想不明了故執我現在非有想無想死後亦然許無色界亦有色者彼許有執非想非非想處我實亦有亦無色而非有想亦非無想四執我非有色非無色死後非有想非無卽遮第三爲此第四三門異說前應知有邊等四者一執我有邊死後非有想非無想二執我無邊死後非有想非無想三執我亦有邊亦無邊死後非有想非無想四執我非有邊非無邊死後非有想非無想如是一切皆執無色爲我已得非想非非想處定皆容有此執又此一切皆容執非想非非想處四無色薀爲我我所由彼定時分促故以一一薀爲所緣執我有邊二由彼定時分長故以四薀爲所緣故執我無邊三由彼定時分或促或長故或一一薀或摠四薀爲所緣故執我亦有邊亦無邊卽遮第三爲其第四三門異說如前應知此中一切皆由所入非想非非想處定想不明了故執我現在非有想非無想死後亦然諸尋伺者及許無色界亦有色者執色無色爲我隨其所應廣如前說如是八種後際分別非有想非無想論依前所說八事而起何故無想論及非有想非無想論中不說我有一想等八耶亦說者一切皆應名有想論以有想受者非無想等故如是一切有想等論說死後故皆是後際分別見攝七斷滅論者一作是念此我有色麤四大種所造爲性死後斷滅畢竟無齊此名爲我正斷滅彼見此生受胎爲初死時爲後便作是念我受胎本無而有若至死位有已還無善斷滅二作是念此我欲界天死後斷滅畢竟無有齊此名爲我正斷滅彼作是念我旣不因產門而生本無而有有已還無如彗星等名善斷滅三作是念此我色界天死後斷滅竟無有齊此名爲我正斷滅彼作是我旣不因產門而生本無而有等至力有已還無名善斷滅或有說此三斷見皆緣已離初靜慮染情而起彼斷見者雖已得定而未能離初靜慮染所發天眼唯見下地三有情旣命終已皆生上地所受中有生有等身非彼境界便作是念靜慮者旣命終已悉皆斷滅四作是此我空無邊處天死後斷滅畢竟無有齊此名爲我正斷滅五作是念此我識無邊處天死後斷滅畢竟無齊此名爲我正斷滅六作是念我無所有處天死後斷滅畢竟無有齊此名爲我正斷滅七作是念此我非想非非想處天死後斷滅畢竟無齊此名爲我正斷滅此中後四有執空無邊處爲生死頂乃至有執非想非非想處爲生死頂若執空無邊處爲生死頂彼執空無邊處死後無名善斷滅乃至若執非想非非想處爲生死頂彼執非想非非想處死後無有名善斷滅如是七種後際分別諸斷滅論依前所說七事而起如是七種皆說死後故是後際分別見攝五現法涅槃論者謂外道執若於現我受安樂名得涅槃若我有苦時不名得涅槃者不安樂故初作是此我淸淨解脫出離一切災撗現受用妙五欲樂爾時名得現法涅第二能見諸欲過失彼作是念所生樂衆苦所隨多諸怨害定所生微妙寂靜無衆苦隨離諸怨害作是念此我淸淨解脫出離一切災謂現安住最初靜慮爾時名得現法涅槃第三能見諸欲尋伺俱有過彼作是念此我淸淨解脫出離一切災撗謂現安住第二靜慮爾時名得現法涅槃第四能見諸欲尋伺及喜過失彼作是念此我淸淨解脫離一切災撗謂現安住第三靜慮時名得現法涅槃第五能見諸欲尋伺喜入出息皆有過失彼作是念我淸淨解脫出離一切災撗謂現安住第四靜慮爾時名得現法涅槃云何此五現法涅槃論是後際分別見攝此五雖緣現在而待過去是故說爲後際分別復有說者五執我現旣有樂後亦有樂故是後際分別見攝若爾何故說爲現法涅槃論者現樂爲先而執後樂現居先故用摽論名如是五種後際分現涅槃論依前所說五事而起契經說苾芻當知世閒沙門婆羅門等所依諸見皆入二見謂有見無有今應分別云何諸見一切皆入此二見中非此入言顯攝彼體但顯彼入二見品中所以者何有見者常見無有見者卽斷見諸惡見趣雖有多種無不皆入此二品類如此品初補剌拏說無施與等五類邪見斷見品以執無故有說入二品由執我常謗因等故次說乃至活有命者死後斷壞無有等斷見攝故卽斷見有作是說此四大種士夫身乃至智者讚受入二品中次說無因無緣等是末塞羯梨見次說造教造等是珊闍夷見此二俱入斷見品以執無故有入二品由執我常謗因等故次說此七士身等常見攝故卽常見品次說有十四億等是無勝髮褐見次說一切士夫諸有所受無不皆以宿作爲因等是離繫親子見此二俱入二品以執有我後斷滅故次說一切士夫所受皆是無因無緣等是犎迦多衍那見入斷見品以執無故有說入二以執我常謗無因故次說自作苦樂等此入二品以執有我後斷滅故次說所受苦樂非自作等入斷見品以執無故有說入二品以執我常謗無因故次說我及世閒常等常見攝卽常見品次說諦故住故我有我等常見攝故卽常見品次說諦故住故我無我等斷見攝故卽斷見品說我觀我等入常見品次說受妙五欲等入常見品執有我常得涅槃故有說入二品以執有我後斷滅故說風不吹等常見攝故卽常見品說衆生執我作等入二見品以執有後斷滅故後說諸欲淨妙快意受而無過失等入常見品執有我常受勝欲故有說入二品以執有我後斷滅故契經中說我有想見我無想見我非有想非無想見斷滅見現法涅槃見此五入二見品謂前三入常見品四入斷見品第五有說入常見品說入二品梵網經中所說六十二見亦摠入此二見品中謂前際分別見中四遍常論入常見品四一分常論有說入常見品有說入二品以執有常有無常故二無因論入斷見品說入二品以執我常謗無因故有邊等四論及不死矯亂四論入常見品有說入二品以執我常後亦斷故際分別見中有想無想非有想非無想皆常見攝故卽常見品七斷滅論斷見攝故卽斷見品五現法涅槃論入常見品執有我常得涅槃故有說入二以執有我現得涅槃後斷滅故多衍那契經中說世有二見一者有見二者無見如次攝入常斷見品師子吼經說一切見皆依二見謂有見無有見依有見者耽著有見憎無有見依無有見者耽著無有見憎有見此二如次亦卽攝入常斷見品如契經說見外道或執轉變或執隱顯或執往來意界常等如是一切常見攝故常見品如契經說有外道執命者卽命者異身命者非卽身命者非異外道何故執命者卽身耶尊者世友作如是說彼見世閒身生時有情生身壞時說有情死故復次見世閒於有色根身說有命者於無色根身說無命者故復次彼見世閒於身相差別起男女想故復次彼見世閒於身力强說强弱者故復次彼見世閒身形長短麤細肥瘦白黑等異說長短等者故復次彼見世閒於身一分有被損害時遍身皆受不安隱苦故復次彼見世閒憂及喜時流淚毛豎顏色怡悅故復次彼見世閒皆於身起我名想故有餘師說見世閒守宮蜥蜴等尾若斷時各能動轉故大德說曰彼見世閒於有色根身說有情形相有情言音有情好有情威儀有情作業等故由如是等種種因緣諸外道說命者卽身外道何故執命者異身耶尊者世友作如是說彼諸外道執色爲身執心心所以爲命者色與心等相續各異彼覺色身前後轉變不覺心等前後異相故起此見復次彼見身麤心所細命者是細故異於身復次彼見威儀隨意欲轉卽執意欲以爲命者威儀卽身轉變差別復次彼見死者身相無異便作是念命者離身說名爲死故與身異復次彼見色身與心心所分位前後轉變各異彼執心等卽是命者故異於身復次彼見色身有多分而命者是一故異於身復次彼諸外道見捨前有身受中有身捨中有身受今有身如是展轉身雖有異而命者一故異於身有餘師說彼見睡眠時身亦有動轉故知其中別有命者復次彼見夢時身在本處而有命者遊歷他方故知異身別有命者復有說者彼見依定能憶過去及知未來多身差別便作是念身雖有多而命者一故知各異復次彼見世閒身無動轉能憶過去及知未來知離身別有命者有作是說彼見世閒憶先所作及所更事而身不動知離身別有命者或有說者彼見身形前後位異工巧智等隨轉無別知離身別有命者大德說曰彼見世閒不自在者及自在者身俱動搖知彼身由命者轉外道何故執命者非卽身尊者世友作如是說見世閒身多分異命者不異故非卽復次彼見世閒身隨緣轉命者不爾故非卽身復次彼見世閒身有增損益等異命者不爾故非卽身德說曰彼見世閒一身而有種種相命者不爾故非卽身外道何故執命者非異身尊者世友作如是說彼見異身無別實物命者可得故命者非異於身所餘如前卽身中說大德說曰彼見世閒於自身上而起我愛不於餘法故執命者非異於身所餘如前卽身中說然諸愚夫於色心等剎那相續不善了知說有命者卽異身等若說卽身及非異身入斷見品若說異身及非卽身入常見品諸外道諸惡見趣無不皆入斷常品中一切如來應正等覺對治彼故宣說中道謂色心等非斷非常云何應知死後非斷尊者世友作如是言見今時心多念相續由前前有後後生後心必依前心而起前有力必引後心遇極厭緣後方不由斯此世初受生心定有前心因引起將命終位無極厭緣正死時心定能引後前身旣能引今身起今身故不引後身由是應知死後非斷見今根覺依已起根復能爲因引意覺起故知胎中最初意覺必因過根覺引生前生旣能引今生起今何故不引後生由是應知死後非德說曰非離餘心有餘心轉亦見有色隨心而生復見有心依色而起由煩惱故有色心生由是應知死後非斷復次現見前念有煩惱身必能引生後念心色知命終位有煩惱者定能引後心色令生由是應知死後非斷諸色心等何故非常轉變非恒豈是常住寧知轉變不由隱而執彼體有生滅耶尊者世友作如是說若彼轉變但由隱顯則處胎藏嬰孩童子少老位皆應頓起漸次起故知轉變體有生滅不由隱復次若彼轉變但由隱顯則處胎藏嬰孩童子少老位應有閒斷無閒斷故知轉變體有生滅不由隱大德說曰世閒現見衆緣合時諸法起緣若乖離諸法便壞非隱顯有此差別故知轉變不由隱顯但由彼體有生有滅復次法轉變時後相別體亦應別相體一故若法常雖有隱顯分位差別而相無異故知轉變體有生滅伽他納息所有義趣如文易了故不復釋三藏法師玄奘譯斯論訖說二頌言佛涅槃後四百年 迦膩色加王贍部召集五百應眞士 迦濕彌羅釋三藏其中對法毘婆沙 具獲本文今譯訖願此等潤諸含識 速證圓寂妙菩提說一切有部發智大毘婆沙論卷第二百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461)본절은 62견(見) 중 후제분별 44견(見) 중의 16유상론(有想論)을 논술하는 문단이다. 그리고 후제분별의 44견은 다섯 가지 종류로 크게 나누니, 첫째 16유상론(有想論), 둘째 무상론(無想論), 셋째 비유상비무상론(非有想非無想論), 넷째 단멸론(斷滅論), 다섯째 현법열반론(現法涅槃論)이다. 여기는 바로 그 첫 번째의 종류이다.
  2. 462)무색계(無色界)에도 역시 색(色)이 있다고 인정하는 논자(論者)는 분별론자(分別論者)의 주장을 말한다. 이것에 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83권을 참조할 것.
  3. 463)세 가지 문(門)과 다른 설명을 하는 것은 앞에서와 같은 줄 알아야 한다고 함은, 이 제8의 견[見]이 제5ㆍ제6ㆍ제7의 견과 다른 것은 제4의 견이 제1ㆍ제2ㆍ제3의 견과 다른 것과 같기 때문에 제4의 견의 경우에 준하여 미루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4. 464)생각[想]이 여섯 가지 문[六門]에서 구른다[轉]고 함은 욕계의 유정에게는 안식(眼識) 등의 6식(識)이 있어서 생각은 그것으로 말미암기 때문임을 말하며, 네 가지 문(門)에서 구른다고 함은 무상천(無想天)을 제외한 색계의 유정에게는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의 네 가지 식[四識]의 문(門)에서 모든 생각이 구른다는 것을 가리킨다.
  5. 465)본절은 62견(見)의 후제분별(後際分別) 44견(見) 중의 두 번째 종류로서 여덟 가지의 사후무상론(死後無想論)을 논급하는 문단이다. 이 8무상론을 또 크게 구별하여 두 가지로 나누니, 첫째 유색(有色) 등의 네 가지 사후무상론이요, 둘째 유변(有邊)ㆍ무변(無邊) 등의 사후무상론이다.
  6. 466)본절은 62견(見)의 후제분별견(後際分別見)의 다섯 가지 종류 중 세 번째인 여덟 가지 비유상비무상론(非有想非無想論)을 논구하는 문단이다. 여기서도 역시 첫째 유색(有色)ㆍ무색(無色) 등의 것과, 둘째 유변(有邊)ㆍ무변(無邊) 등의 네 가지로 나눈다.
  7. 467)본절은 62견(見) 중 후제분별견(後際分別見) 다섯 가지 종류 중 네 번째 종류인 일곱 가지의 단멸론(斷滅論)에 대하여 논술하는 문단이다.
  8. 468)본절은 62견(見) 중 후제분별견의 다섯 번째 종류인 다섯 가지 현법열반론에 대하여 논구하는 문단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대비바사론』 제199권의 다섯 가지 열반론을 참조할 것.
  9. 469)본장은 맨 처음부터 사견(邪見)ㆍ변집견(邊執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 등의 모든 이학외도(異學外道)의 견을 논하여 제시했으므로, 이어서 본절은 이들의 모든 견을 계경에서 “세간의 사문(沙門) 바라문(婆羅門) 등이 의지하는 모든 견은 다 두 가지의 견[二見]에 든다”고 단정한 것에 의거하여, 만일 유견(有見:常見)과 무유견(無有見:斷見)으로 나뉜다 하면 어떠한 것인가를 논구하는 문단이다.
  10. 470)먼저 62견(見)의 후제분별견(後際分別見) 16유상론(有想論)의 처음 네 가지 견을 논술하면서 그 네 가지 견이 건립되는 근거로서의 세 가지 견, 즉 첫째 명자(命者)는 곧 몸이라는 견과, 둘째 명자는 몸과는 다르다는 견과, 셋째 온갖 것은 다 아(我)로서 이는 두루 가득 차며 둘도 없고[無二] 다름도 없다[無異]는 견을 열거하여 보이면서, 본절에서는 목숨과 몸과의 즉(卽)ㆍ이(異)ㆍ비즉(非卽)ㆍ비이(非異)의 4구(句)를 짓는 외도의 설을 기록한 경문(經文)을 상세히 해설하며, 다시 이 견을 단(斷)ㆍ상(常)의 두 가지 견에 의하여 분별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11. 471)전절의 마지막에서 여래께서는 “단(斷)ㆍ상(常)의 두 가지 변견(邊見)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中道)를 설명한다”고 말씀하신 까닭에 이제 본절에서는 “그렇다면 모든 색심(色心) 등은 무엇 때문에 단도 아니고 상도 아니라고 하는가, 그 이유는 어떠한 것인가?”를 논구하면서 그로써 본장의 대단원을 삼으려는 문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