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阿毘達磨藏顯宗論卷第二 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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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장현종론 제2권


존자 중현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변본사품②

Ⅱ.제법의 분별② - 5온ㆍ12처ㆍ18계

1.색온(色蘊)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색 등의 5온을 유위법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색 등이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이란 오로지 5근(根)과
5경(境), 그리고 무표(無表)이다.
色者唯五根 五境及無表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본송)서 ‘색’이라 함은 색온(色蘊)을 말한다. ‘5근’이란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을 말하며, ‘5경’이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을 말하니, 안 등에 포섭되고 그것에 의해 작용되어지는 것[所行]을 경(境)이라 일렀다.
‘그리고 무표’라고 함은 법처(法處)에 포섭되는 색을 말한다. 그리고 ‘오로지’란 오로지 여기서 언급된 10처(處)와 1처의 일부를 일컬어 색온이라 한다는 말이다.1)

1)5근(根)

이와 같은 온갖 색의 특성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러한 식(識)의 근거가 되는 정색(淨色)을
일러 안(眼) 등의 5근(根)이라고 한다.
彼識依淨色 名眼等五根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그러한’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안 등의 5근을 말하며, ‘식(識)’이란 바로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식(身識)을 말한다. 그리고 ‘근거’라고 함은 안 등 5식의 소의(所依)를 말하니, 이와 같은 소의는 정색(淨色)을 본질로 한다.2) 곧 이와 같은 안 등 5식의 소의가 되는 정색을 안근 등이라고 일렀다. 그래서 박가범(薄伽梵)께서도 계경 중에서 “안 등의 근은 정색을 특징으로 한다”고 설하였으며, 본론에서도3) 역시 “무엇을 일컬어 안근이라고 하는가? 안식의 소의로서, 정색을 본질로 하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등 [여러 경론에서] 이와 같이 널리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성교(聖敎) 중에서는 근으로써 식을 분별하지 경계(즉 대상)로써 분별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송에서] ‘그러한’이라고 하는 말은 근(根)을 나타내는 것이지 경(境)을 나타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만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그러한’이란 바로 경(境)을 의미하는 것이지 근(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의식은 색 등을 소연(所緣)으로 하기 때문에 색 등에 대한 의식이라 이름하고, 그러한 식의 소의를 안근 등이라고 불러도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니, ‘정색’이라는 말에 의해 간택 분별[簡別]되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4)

2)5경(境)

안(眼) 등의 특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색(色) 등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하리라.
게송으로 말하겠다.

색(色)에는 두 가지, 혹은 스무 가지가 있고
성(聲)에는 오로지 두 가지 종류가 있으며
미(味)에는 여섯 가지, 향(香)에는 네 종류가
촉(觸)은 열한 가지를 자성으로 한다.
色二或二十 聲唯有二種
味六香四種 觸十一爲性5)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색에는 두 가지’라고 하는 말은 바로 두 종류가 있다는 뜻으로, 말하자면 현색(顯色)과 형색(形色)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현색에는 다시 열두 종류가 있으며, 형색에는 여덟 종류가 있다. 그래서 [본송에서] ‘혹은 스무 가지가 있다’고 한 것이다.
현색의 열두 종류란, 청(靑)ㆍ황(黃)ㆍ적(赤)ㆍ백(白)ㆍ연기[煙]ㆍ구름[雲]ㆍ먼지[塵]ㆍ안개[霧]ㆍ그림자[影]ㆍ빛[光]ㆍ밝음[明]ㆍ어두움[闇]을 말한다. 이러한 열두 종류 가운데 청색 등의 네 가지는 바로 현색이고, 구름 등의 여덟 가지는 바로 이것들이 차별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 현색 중]그 뜻이 애매한 것에 대해 마땅히 간략히 해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땅으로부터 물의 기운이 비등한 것을 설하여 ‘안개’라고 한다. 광명을 장애하여 생겨난 것으로서, 그 가운데로 여타의 다른 색을 볼 수 있는 것을 ‘그림자’라고 하며, 이와 반대되는 것을 ‘어둠’이라고 한다. 그리고 태양의 불꽃을 일컬어 ‘빛’이라고 하며, 달이나 별ㆍ화약ㆍ보주(寶珠)ㆍ번개 등의 온갖 번쩍임을 일컬어 ‘밝음’이라고 한다.
형색의 여덟 종류란 장(長)ㆍ단(短)ㆍ방(方)ㆍ원(圓)ㆍ고(高)ㆍ하(下)ㆍ정(正)ㆍ부정(不正)을 말한다. 이 중에서 ‘정’이란 형태가 평등함(즉 평평함)을 말하며, 형태의 평등하지 않음을 일컬어 ‘부정’이라고 한다. 그 밖의 다른 색의 경우는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더 이상 해석하지 않는다.
색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성처(聲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능히 부르는 말[呼召]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 혹은 오로지 음향을 설하여 ‘성’이라고 한다. 그래서 선서(善逝,부처님의 다른 이름)의 성교(聖敎)에서는 모두 이렇게 설하고 있는 것이다. “성(聲)이란 바로 이근(耳根)이 취하는 경계로서, 이는 바로 4대종(大種)에 의해 조작된 색의 존재[色性]이다.”
이러한 ‘성’ 즉 소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유집수(有執受)와 무집수(無執受)의 대종에 근거한 소리가 바로 그것이다.
유집수의 대종이란 말하자면 현재의 유정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장양(長養)ㆍ등류(等流)ㆍ이숙지(異熟地) 등의 대종을 말하며,6) 이와 반대되는 것을 무집수의 대종이라고 한다. 곧 소리는 결국 이러한 두 가지 대종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두 종류가 있다고 한 것이다. 색처 등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유집수의 대종과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것이 있다고] 설해야 하겠지만, 성처의 경우 그 자성을 알기 어렵기 때문에 다만 그 근거에 따라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한 것일 뿐이다.7)
그리고 어떠한 소리도 유집수대종과 무집수대종 [두 가지 모두]를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일은 없으니, 유집수와 무집수의 두 가지 4대종은 각기 다른 결과를 갖기 때문이다. 즉 두 가지 4대종이 동일한 결과를 함께 획득하는 경우, [둘 중 하나는] 구유인(俱有因)이 되지 않는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기 때문이다.8) 비록 두 가지 4대종이 서로가 서로를 치고 두드렸다고 할지라도 다 같이 [자신의 결과에 대한] 원인이 되어 각기 별도로 소리를 내는 것이다. 즉 그들의 소리는 각기 자신의 소의(所依)에 근거하기 때문에 세 가지 소리는 생겨날 수 없다.9) 비록 유집수인 손의 대종과 무집수인 북의 대종이 서로 부딪치고, 이를 근거로 하여 두 가지의 소리가 발생할지라도 서로에 덮어 가려짐에 따라 한 가지 소리(북소리)로만 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리의 차별상은 알기 어려우니, 그렇기 때문에 ‘성처에는 오로지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한 것이다.
성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미처(味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그런데 [향처를 먼저 설하지 않고] 차례를 건너뛰어 [미처를 먼저] 설하는 것은, 그러한 대상(즉 맛과 향)에 대한 인식이 낳아지는 것은 결정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미’란 말하자면 씹혀지는 것에 대해 맛본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여섯 종류가 있으니, 달고[甘], 시고[酢], 짜고[鹹], 맵고[辛], 쓰고[苦], 담백함[淡]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미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향처(香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향’이란 말하자면 냄새 맡아 지는 것으로, 여기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호향(好香)ㆍ오향(惡香)ㆍ등향(等香)ㆍ부등향(不等香)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등향과 부등향이라고 함은 소의신(所依身)을 이익되게 하고 감손(減損)시키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미약(微弱)함과 증성(增盛)함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등향과 부등향으로 분별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본론에서는 설하기를, “향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호향과 오향, 그리고 평등향이 그것이다”라고 하였다.10) 곧 능히 제근(諸根)의 대종을 장양(長養)하는 것을 일컬어 호향이라고 하고, 이와 반대되는 것을 일컬어 오향이라고 하였으며, 앞의 두 작용을 갖지 않는 것을 평등향이라고 하였다. 혹은 온갖 복업(福業)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일컬어 호향이라 하고, 온갖 죄업(罪業)의 증상력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일컬어 오향이라고 하였으며, 오로지 4대종의 세력에 의해 생겨난 것을 일러 평등향이라고 하였다.
향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촉처(觸處)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하리라.
‘촉’이란 말하자면 접촉되는 것으로, ‘열한 가지를 자성으로 한다’ 이는 곧 열한 가지의 실체를 그것의 본질로 삼는다는 뜻이니, 말하자면 4대종과 일곱 가지의 조작된 촉[所造觸]—미끄러운 성질[滑性]ㆍ껄끄러운 성질[澁性]ㆍ무거운 성질[重性]ㆍ가벼운 성질[輕性] 그리고 차가움[冷]ㆍ허기짐[飢]ㆍ목마름[渴]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1)
이 가운데 능히 접촉하는 것[能觸]은 무엇이고, 접촉되는 것[所觸]은 무엇인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능히 접촉하는 것도 접촉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즉 서로 접촉한다는 사실 자체가 오류이니, [제법은] 찰나성이기 때문이다.12) 다만 신식(身識)의 소의(所依, 즉 身根)와 소연(所緣,즉 觸境)이 무간(無間)에 생겨날 때, ‘촉’이라고 하는 개념을 설정한 것일 뿐이다.13) 즉 이러한 근에 근거하여 식(識)이 그 대상을 획득할 때, ‘이러한 근이 그 대상과 능히 접촉하였다’고 일시 가설하는 것으로, 촉경은 신식이 소의로 삼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그러한 촉경이 신근과 능히 접촉하였다’고는 설하지 않는 것이다. 이 경우 촉경과 신근은 서로 절대적으로 근접[隣近]하기 때문에 ‘접촉되는 것’과 ‘능히 접촉하는 것’이라고 설한 것이지 다른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색 등이 비록 접촉되는 법은 아니라 할지라도 소의(색의 근거인 4대종)가 허물어지기 때문에 역시 손상됨이 있는 것이다.14)

3)무표색(無表色)

5경의 특성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남은 것은 오로지 무표색(無表色) 뿐이니, 이제 이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조작(행위)할 때 등과는 다른 마음 따위와
아울러 무심의 상태에서 [따라 일어나는], 유기(有記)이며
무대(無對)로서 소조(所造)를 본질로 하는 것
이것을 무표색이라고 이른다.
作等餘心等 及無心有記
無對所造性 是名無表色15)
난심(亂心)과 무심(無心) 등에
따라 유전[隨流]하는 정(淨)ㆍ부정(不淨)으로
대종소조(大種所造)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이에 따라 ‘무표색’이라고 설한 것이다.
亂心無心等 隨流淨不淨
大種所造性 由此說無表


논하여 말하겠다.
‘조작(행위)할 때 등’이라고 말한 것, [조작할 때와 더불어] 조작을 떠났을 때[離作]와 [조작에 따라 일어나는] 무대의 조색(造色)을 모두 취하기 위해서였다. [무표색에는] 간략히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표업에 근거하는 것[依表]이며, 둘째는 마음에 근거하는 것[依心]이다. 표업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에는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말하자면 조작할 때 함께 일어나는 것과 조작이 끝나고서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곧 이와 같은 무표색의 차별되는 특성을 남김없이 포섭하기 위해 ‘조작할 때 등’이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다른 마음 따위’라고 말한 것은 [조작할 때와는 다른 마음과] 동류의 마음을 모두 취하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선심(善心)을 근인등기(近因等起)나 혹은 구유인(俱有因)으로 삼아 그것에 의해 일어난 선한 무대(無對)의 조색(즉 선의 무표색)인 경우,16) 불선심과 무기심이 다른 마음이며, 선심은 동류의 마음이다. 또한 불선심을 근인등기로 삼아 일어난 불선의 무대의 조색인 경우, 선심과 무기심이 다른 마음이며, 불선심은 동류의 마음이다.
‘아울러 무심’에서 [무심]이란 바로 마음이 소멸한 상태로서, 그것은 이를테면 선정의 상태(즉 무상정이나 멸진정)이지 생의 상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생의 상태에서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앞에서 언급한 사실(‘조작할 때 등’과 ‘다른 마음 따위’)과 더불어 이러한 사실(무심의 상태)도 포함한다는 말이지 다른 뜻이 아니다. 즉 무표색은 이러한 세 가지의 상태 중에서 따라 일어날 수 있다[隨轉]는 말이니, 이를테면 무심정에서는 오로지 선의 무표만이 일어나고,17) 불선의 무표는 [앞의] 두 상태(‘조작할 때 등’과 ‘다른 마음 따위’)에서 일어나며, 그 밖의 산선(散善,산심의 선)은 세 상태 모두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유기(무기의 반대)’란 선과 불선을 말하는데, 그와 같이 말한 것은 [무표는] 애호할 만한 것,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것으로 기표(記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무대’라고 말한 것은 [무표는] 극미(極微)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조를 본질로 하는 것[所造性]’이라 함은, [무표색은] 대종은 무대가 아니기 때문에 대종으로 간택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며, 다만 비색(非色)으로 간택한 것은 그럼에도 이러한 [무표]색은 바로 5온 중의 색온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것’이란 바로 앞에서 설한 온갖 특성을 말하는 것으로, 앞에서 언급한 온갖 특성을 갖춘 것을 무표색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4)4대종(大種)

이와 같이 무표색의 특성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그런데 무표색을 논설하는 중에 말한 대종소조(大種所造)의 ‘대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대종이란 이를테면 4계(界)로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을 말하니
능히 보지(保持) 등의 작용을 성취하며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을 본질로 한다.
大種謂四界 卽地水火風
能成持等業 堅濕煖動性

논하여 말하겠다.
이러한 온갖 대종을 어떠한 이유에서 계(界)라고 이름한 것인가?
일체의 색법이 생겨나는 근원[本]이기 때문이다. 대종 역시 대종으로부터 생겨나니, 모든 생겨나는 근본을 세간에서는 ‘계(dhātu)’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를테면 금 등의 광산을 ‘금 등의 계’라고 이르는 것과 같다. 혹은 여러 가지 괴로움이 생겨나는 근본이기 때문에 ‘계’라고 이름한 것이니, 비유하자면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18)
그런데 어떤 이는 설하기를, “능히 대종(大種)의 자상(自相)과 소조색(所造色)을 지녔기 때문에 ‘계’라고 이름하며, 이와 같은 온갖 ‘계’를 역시 대종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19)
어떤 까닭에서 ‘종(種)’이라고 하였으며, 어째서 ‘대(大)’라고 이름한 것인가?
여러 가지 조색(造色)의 차별이 생겨날 때, 그러한 각각의 품류(品類)의 차별을 능히 일으키니, 그렇기 때문에 ‘종’이라고 하였다.20) 그러나 어떤 이는 설하기를, “유정의 업은 뛰어나기[增上] 때문에 무시(無始) 이래로 일찍이 [생사(生死)가]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그래서 ‘종’이라고 한다. 즉 4대종이라는 보편적 특성[總相]의 종류가 중간에 끊어지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혹은 법이 출현하는 것을 일컬어 ‘유(有)’라고 하는데, 이러한 유성(有性)을 낳고 기르기[生長] 때문에 ‘종’이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제법의 유성을 낳고 기른다는 뜻이다. 혹은 유정의 몸을 낳고 기른다는 뜻이다. 혹은 열 가지 종류의 조색(造色, 즉 5근과 5경)을 능히 드러내기 때문에 ‘종’이라고 말한 것이니, 이것(4계)의 세력에 의해 그것들은 드러나기 때문이다.
‘대’라고 말한 것은 크나큰 작용[大用]을 가졌기 때문이다. 여기서 ‘크나큰 작용’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모든 유정의 근본이 되는 것 가운데 이와 같은 네 가지 종(種)이 뛰어난 작용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 때 식(識)과 공(空)을 건립하여 바야흐로 유정의 근본이 된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다른 존재와 구별하기 위해 다시 ‘대’라고 일컫게 된 것이다]. 또는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미혹하게 하는 것 가운데 이 같은 네 가지(지ㆍ수ㆍ화ㆍ풍)가 가장 뛰어나니, 그래서 ‘대’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사기꾼과 도적 중에서 그 사업이 뛰어난 자를 다른 이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큰 사기꾼, 큰 도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이 같은 네 가지는 [그것을 제외한] 다른 일체의 색의 보편적 근거가 되기 때문에 ‘대’라고 일렀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떤 이는 “색(色) 등 일체의 물질적 집합물[聚, 극미대종의 집합]은 견고성[堅] 등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대’라고 일렀다”고 말하고 있다.21) 즉 풍(風)이 강성한 집합물 중에는 색 등이 결여되어 있고, 화(火)가 강성한 집합물 중에는 미(味) 등이 결여되어 있으며, 색계의 온갖 물질적 집합물 중에는 모두 ‘향’과 ‘미’가 존재하지 않는다.22) 또한 청색 등의 집합물 중에는 황색 등이 결여되어 있고, 미끄러움 등의 집합물 중에는 껄끄러움 등이 결여되어 있으며, 성(聲) 등의 경우는 결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적 집합물은 모두 견고성 등을 갖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이러한 네 가지 종(種)만을 ‘대’라고 부른 것이다.
이러한 4대종은 비록 항상 화합해 있고, 항상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지라도 처소가 동일하지 않은데,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입태경(入胎經)』과 『대조경(大造經)』 등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치상으로도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이치상으로는 어떠하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돌[石] 등에서도 능히 [사물이 흩어지지 않게] 포섭하고, 불을 낳으며, 가속하여 낙하하는 등의 세 가지 작용이 있음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도 수(水)와 화(火)와 풍(風)이 항상 불가분의 관계로서 존재함을 알 수 있다.23) 물 가운데서도 배를 띄우는 작용과 따뜻함과 흘러 움직인다는 세 가지 작용이 있음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도 항상 지(地)ㆍ화(火)ㆍ풍(風)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존재함을 알 수 있다.24) 또한 화염(불) 중에서도 [뜨거움뿐만 아니라] 제 형태를 유지[任持]하고, 포섭하여 뭉쳐 있으며[攝聚], 치고 움직이는[激動] 등의 세 가지 작용이 있음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도 항상 지ㆍ수ㆍ풍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바람[風聚] 중에서도 [움직임뿐만 아니라] 능히 제 형태를 유지하고, 차가움과 따뜻함의 감촉을 일으키게 하는 등의 세 가지 작용이 있음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도 항상 지ㆍ수ㆍ화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25)
또한 이와 같은 4계(界)가 이러한 인연에 의해 항상 서로가 서로를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이러한 인연에 의해 능히 제 형태를 지녀 다른 사물에 저항하게 하는 작용[持業] 등을 성취하기 때문이다. 즉 지(地) 등의 4계는 순서대로 보지(保持)ㆍ인섭(引攝)ㆍ성숙(成熟)ㆍ증장(增長)의 네 가지 작용을 능히 성취한다.26) 이러한 인연에 따라 온갖 물질적 집합물[色聚]에서 만약 보지 등의 네 가지 작용이 인식되었다면, 여기에는 지(地) 등의 4계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능히 증장한다’는 말은 이를테면 능히 안포(安布)한다는 말이다.
무엇을 일컬어 안포한다고 함인가?
이를테면 더욱 왕성[增盛]하게 하는 것, 혹은 또한 흘러넘치게 하는 것[流漫]을 말한다.
능히 제 형태를 지니는 것[持] 등의 네 가지 작용을 바로 4계의 자상(自相)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4계의 자상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4계는 그 순서에 따라 견고성[堅]ㆍ습윤성[濕]ㆍ온난성[煖]ㆍ운동성[動]을 자상으로 삼는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이러한 특성[性]을 [4계] 자체의 본질[體]로 나타낸 것은 특성과 그 자체의 본질은 상호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음을 밝히기 위해서였다.27) 그리고 여기서 ‘운동성’이란 능히 대종과 조색을 이끌어 그것으로 하여금 [전 찰나를] 상속하여 생겨나게 하고 다른 곳에 이르게 하는 것을 말한다.
어떠한 까닭에서 허공을 대종이라 이르지 않는 것인가?
그것에는 대종의 특성이 적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능히 손상과 이익을 미치기 때문에 대종이라는 명칭을 설정하였던 것이지만,28) 허공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대종이 아니다. 혹은 [허공은] 제법이 생멸하는 상태 중에서 그 자체 어떠한 차별도 없기 때문에 대종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바로 대종의 경우를 살펴보면, 그것은 씨앗 등의 상태에서 그 양상이 전변(轉變)하여 싹 등의 인연을 성취하며, 바야흐로 싹 등의 온갖 상태로 생기하게 된다. 그렇지만 허공은 무위로서 이와 같지 않으니, 본질과 양상[性相]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허공은] 어떠한 작용도 갖지 않으며, 능히 생겨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대종이 아니다.
또한 온갖 대종은 단일하지 않고 영원하지 않으며, 자상(自相)도 여러 가지이고 그 결과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그러나 허공의 자성은 단일하고 영원하며, 그 양상에 어떠한 차별도 없기에 어떠한 결과도 갖는 일이 없으니, 무차별의 원인이 유차별의 결과를 낳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허공을 대종이라 부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 밖의 다른 원인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능히 허공을 도와 별도의 결과를 낳는다’말한다면, 이는 허공과는 별도의 원인이 능히 별도의 결과를 낳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이 같은 허공이 원인이 된다고 주장하겠는가?

5)가(仮)의 4대와 실(實)의 4대

그렇다면 지(地) 등의 계(界)가 바로 현실의 땅[地] 등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29)
그렇지 않다.
어째서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땅[地]이란 말하자면 현색과 형색으로
세간의 언어적 관념에 따라 설정된 명칭이고
물[水]과 불[火]의 경우도 역시 또한 그러하며
바람[風]은 바로 계(界)이나 역시 그렇다고도 한다.
地謂顯形色 隨世想立名
水火亦復然 風卽界亦爾

논하여 말하겠다.
땅[地]이라고 하는 말은 오로지 현색(색채)과 형색(형태)의 색처(色處)를 의미한다.
어찌 모든 땅을 4처(處, 색ㆍ향ㆍ미ㆍ촉의 4처)가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어떠한 까닭에서 단지 현색과 형색(색처)만을 땅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여기에 비록 향ㆍ미ㆍ촉의 3처가 존재할지라도 세간의 언어적 관념[世想, 世俗名想의 준말]에 따라 그렇게 말한 것이다. 즉 세간의 모든 사람들은 땅의 특성을 나타내고자 할 때 현색과 형색으로써 그 특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30) 비록 세간의 여러 사람들이 향 등에 대해서도 역시 ‘땅’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이를테면 ‘나는 지금 땅을 냄새 맡고, 땅(즉 음식)을 맛보며, 땅을 감촉한다’고 말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현색과 형색은 땅[地]이나 물[水] 불[火] 모두를 능히 표시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땅을] 그것(색처)으로만 설하게 된 것이다.
즉 세상 사람들은 대개 [‘나는 물을 본다’고 말하지] ‘나는 물을 냄새 맡는다’고 말하지 않으며, 또한 대개 [‘불을 본다’고 말하지] ‘불을 냄새 맡는다’ ‘불을 맛본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비록 ‘촉(觸)에는 지(地) 등이 있다’고 말하였을지라도 그것은 바로 [소조촉이 아닌] ‘지’ 등의 계(界)를 말하는 것이었다.31) 그렇기 때문에 땅에 비록 향 등이 있을지라도 현색과 형색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땅을] 그것으로만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현색과 형색은 두 세계(욕계와 색계)의 땅 등을 나타낸 것이나 다름없다.32) 그렇기 때문에 [땅을] 그것으로만 설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현색과 형색으로 옷 등을 나타내는 경우 그것이 향 따위보다 두드러지기 때문에 역시 마땅히 [‘땅’이라는] 말로만 설해야 할 것이다.33)
세상 사람들이 어떤 개념[名想]을 산출함에 있어 본래적으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세간의 [언어적] 차별에 따라 [‘땅’이나 ‘옷’ 등으로] 설한 것일 뿐으로, 이는 대개 세간의 관념에 따라 설정된 명칭이다. 그런데 생(生) 등은 소리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옷 등에] 상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생 등은] ‘땅’ 등이나 ‘옷’ 등[의 본질]이 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이다.34)
‘땅’이 다만 현색과 형색을 본질로 하듯이 물과 불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니, 이 또한 세간의 관념에 따랐기 때문이다. 즉 세간에서 물의 푸른색이나 길이 등을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현색과 형색을 설하여 물의 자성이라고 하였다. 또한 역시 세간에서 불이 붉다거나 길게 타오르는 따위를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현색과 형색을 설하여 불의 자성이라고 하였다. 아울러 색처와 촉처에 변화가 생겨날 때를 화염탄(火焰炭)이라고 이르지만, 이는 [현실 세간에서의] 가설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즉 어떤 실유의 존재[一實物]로서 신근과 안근에 의해 획득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35)
[현실의] 땅[地] 등과 지계(地界) 등의 차별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본송에서] ‘바람[風]은 바로 계(界)이다’라고 함은, 세간에서도 움직이는 것, 즉 운동성[動, 풍계의 자상]에 대해 ‘바람’이라는 명칭을 설정하기 때문에 [바람과] 풍계는 어떠한 차별도 없다.
세간에서는 현색과 형색에 대해서도 역시 ‘바람’이라고 하는 관념을 낳기도 하지 않는가? 즉 세간에서 ‘모래바람[黑風]’이니 회오리바람[團風]이니 하여 [운동성과는] 다른 상(즉 현색과 형색)을 나타내고 있음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이러한 난점을 회통시키 위해 [본송에서] ‘역시’라고 말하였으니, 이는 지(地) 등의 경우처럼 ‘계’와 다르다는 뜻이다. 그리고 옛날의 여러 논사들은 모두 이 같이 설하였다. 즉 ‘땅’에는 [지ㆍ수ㆍ화ㆍ풍의 4계가] 섞여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땅과 ‘지’가 다르다고] 보았던 것이지만, 그러한 바람[風]은 바로 풍계임을 나타내기 위해 다시 ‘그렇다고도 한다’고 말하였던 것이니, 여기서 ‘그렇다’라고 함은 확정의 뜻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의 설 가운데에서 앞의 설이 보다 뛰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변처(遍處)과 부정(不淨)의 차별이 없기 때문으로, 부정은 오로지 색처의 경계만을 조건으로 하기 때문이다.36)
6)10처(處)와 10계(界)의 건립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 가운데 근(根)과 경(境)을
바로 10처(處)ㆍ10계(界)라고 설한다.
此中根與境 卽說十處界37)

논하여 말하겠다.
실유인 [5]근과 [5]경과 무표가 색온의 존재임을 이미 논설하였다. 이 가운데 ‘근’과 ‘경’을 역시 10처(處)ㆍ10계(界)라고도 설한다. 즉 12처의 갈래 중에서는 10처로 설정하니, 이를테면 안처(眼處) 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18계의 갈래 중에서는 10계로 설정하니, 이를테면 안계(眼界) 등이 바로 그것이다.

2.수(受)ㆍ상(想)ㆍ행(行)의 3온(蘊)

색온과, 아울러 그것을 ‘처’와 ‘계’로 설정하는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수(受) 등의 3온과 그것의 ‘처’와 ‘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受)는 촉(觸)에 따른 영납(領納)이고
상(想)은 취상(取像)을 그 본질로 한다.
受領納隨觸 想取像爲體

네 가지 이외의 것을 행온(行蘊)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은 ‘수’ 등의 세 가지와
아울러 무표와 무위를
법처(法處)ㆍ법계(法界)라고 이른다.
四餘名行蘊 如是受等三
及無表無爲 名法處法界

논하여 말하겠다.
‘촉’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서, 참으로 애호(愛護)할 만한 것과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것과 양자 모두에 반대되는 것(애호할 만한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의 촉(觸)을 영납(領納)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수온(受蘊)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영납’이란 바로 능히 수용한다는 뜻이다.
여기(본송)서 ‘수는 촉에 따른 영납이다’라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수’는 바로 촉에 가장 가까운[隣近] 결과를 말하기 때문에 ‘촉에 따른다[隨觸]’는 이 말은 [‘수’의] 원인을 나타내기 위한 말이다. 왜냐하면 능히 [촉에] 따라 수용[順受]하기 때문으로, 수상(隨相)이라는 말과 같다. 여기서 ‘상(相)’이란 나타내어 드러내는 것, 다시 말해 능히 현시하는 것을 말한다. 곧 원인은 능히 결과를 드러내기 때문에 ‘상’이라고 하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수상’이라는 말은 바로 원인에 따른다는 의미이다. 즉 ‘수’는 능히 영납하는 것으로, 촉이라는 원인에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수는 촉에 따른 영납이다’라고 설한 것이니, 세존께서 “순락수촉(順樂受觸)과 순고수촉(順苦受觸), 그리고 순불고불락수촉(順不苦不樂受觸)이 있다”고 말한 바와 같다. 이 말은 바로 ‘[그에] 따라 낙수 등을 낳는 촉’이라는 뜻이다.
[자신이] 따른 ‘촉’을 영납하는 것, (다시 말해 촉에 따른 영납)을 자성수(自性受)라고 한다. 소연(所緣, 대상)을 영납하는 것도 역시 ‘수’의 특성(이를 執取受라 함)이지만, [이것과] 경계가 동일한 법 사이의 차별상은 참으로 알기 어려우니, 일체[의 심ㆍ심소]도 모두 경계대상을 영납하기 때문이다. 즉 심과 심소법이 경계를 취하여 수용[執受]할 때, 그것들은 모두 다 자신의 경계를 영납하였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촉에 따른 영납을 설하여 ‘자성수’라고 이름하였으니, 이는 개별적인 상[別相, 즉 자성]이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38) 그리고 소연(대상)을 영납하는 것을 집취수(執取受)라고 이름하니, 이것에 의해 분별된 상은 불확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두 가지 ‘수’의 차별에 대해서는 『순정리론』(제2권)과 『오사론(五事論)』에서 널리 분별한 바와 같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이러한 수온은 전체적으로 세 가지로 설해지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여섯 가지로 설해지기도 하는데, (3)세와 소의(즉 촉) 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39)
세 번째 상온(想蘊)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는 소연에 대한 취상(取像)을 본질로 하니,40) 일체 모든 존재에 대해 본법(本法)에 따라 시설[安立,安置建立의 준말]하는 것을 말한다. 즉 소연이 되는 대상 중에서 푸르거나 긴 형태 등의 색, 거문고나 고둥 등의 소리, 생련(生蓮) 등의 향기, 쓰거나 매운 등의 맛, 매끄럽거나 거친 등의 감촉, 생멸(生滅)하는 등의 법을 [본법의] 형상대로 취하기 때문에 상(想)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도 (3)세에 근거하여 전체적으로 세 가지로 설하지만, 만약 소의(所依,즉 6근)에 근거하여 개별적으로 설할 경우 여섯 가지가 된다.
네 번째 행온(行蘊)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는 네 가지 온 이외의 나머지 온갖 행[諸行]을 본질로 한다. 즉 앞에서 설한 색ㆍ수ㆍ상의 세 가지 온을 제외하고, 아울러 다음에 설할 식온(識蘊)을 네 번째로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을 일컬어 ‘행온’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상응행(相應行)과 불상응행(不相應行)이 있는데, 순서대로 사(思) 등과 득(得) 등이 바로 그것이다.41) 그럼에도 계경에서 오로지 6사신(思身)이라고만 설하고 있는 것은,42)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사’는 바로 업으로서,43) 원인이 되어 결과를 초래하는 것 중에서 그 힘이 가장 강력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도 “능히 유루와 유위를 조작하는 것, 그것을 행취온(行取蘊)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사’만을 행온이라고 설할 수 없으니,44) 그것(행온)은 법처(法處)ㆍ법계(法界)의 경우처럼 보편적 개념[總名]으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행온을 다만 사온(思蘊)이라고 이름해야 할 것이니, 수온이나 상온의 경우처럼 한 가지 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외적인 제6 법처ㆍ법계라는 말은 보편적 개념으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그 밖의] 11처와 17계에 포함되지 않는 다수의 법을 모두 포섭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듯이,45) 이와 마찬가지로 ‘행’이라는 말도 보편적 개념으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4온에 포함되지 않는 다수의 행을 모두 포섭한다. 그러므로 행온의 본질은 오로지 ‘사’만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온은 유의(有依)를 멸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3)세에 근거하여 전체적으로 세 가지 종류로 설하고 있다.

1)법처와 법계의 건립

앞에서 색온의 본질에 대해 분별하고 나서 다시 처(處)와 계(界)에 근거하여 두 갈래로 설정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수ㆍ상ㆍ행의 세 가지 온의 본질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역시 마땅히 처와 계로 설정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 온과 무표색, 그리고 세 가지의 무위,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처’의 갈래로 설정할 경우 법처(法處)라 하고, ‘계’의 갈래로 설정할 경우 법계(法界)라고 한다.

3.식온(識蘊)과 의처(意處)와 7심계(心界)

다섯 번째 식온(識蘊)의 자성과 그것의 ‘처’, ‘계’의 특성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식(識)이란 말하자면 각기 요별(了別)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의처(意處)로 일컬어지고
아울러 7계(界)로 불리니,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6식(識)이 [과거로] 전이한 것을 의계(意界)라고 함을.
識謂各了別 此卽名意處
及七界應知 六識轉爲意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식(識)이란 말하자면 요별하는 것’이라고 함은 바로 오로지 경계대상의 상(相)을 전체적으로 취한다[總取]는 뜻으로, 그러그러한 경계대상의 상을 각기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을 일컬어 ‘각기 요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46) 다시 말해 ‘식’은 오로지 경계대상의 상을 능히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으로, 그 같은 경계대상의 상을 차별하여 취하는 것이 아니니, 세존께서 “요별하는 것을 일컬어 식이라 한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오로지 법성(法性)에 대해 일시 작자를 가설함은 식을 떠나 ‘요별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막기 위함이다”고 하였다.
다시 어떤 경우에 오로지 법성에 대해 일시 작자를 가설하는 것인가?
지금 바로 보건대 그림자를 설하여 능히 ‘움직임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그림자가 찰나의 간격도 없이[無間] 다른 곳에 생겨날 때 비록 움직임이 없을지라도 작자(즉 ‘움직이는 것’)라고 설하는 것이다. 식의 경우도 역시 또한 이와 같아 다른 경계대상에 상속하여 생겨날 때 비록 움직임이 없을지라도 ‘요별하는 자’라고 설하니, [식은] 능히 경계대상을 요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47)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다른 곳에서도 작자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을 바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존께서 파륵구나(頗勒具那)에게 “나는 능히 요별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끝내 설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바와 같다.48)
또한 어떤 이는 설하여 말하기를, “찰나를 법성(法性)이라 이르고, 상속을 작자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자의에 따라 설정된 생각일 뿐이다. [작자의 문제에 대해서는] 「변연기품(辯緣起品)」(본론 제13권) 중에서 마땅히 다시 드러내어 논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식은 (3)세에 근거하여 전체적으로 세 가지로 설하기도 하지만, 소의(所依)인 근(根)에 따라 개별적으로 분류할 경우 여섯 가지가 된다.49)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논설한 식온을 처(處)의 갈래 중에 설정할 경우에는 의처(意處)가 되고, 계(界)의 갈래 중에 설정할 경우에는 7계(界)가 된다. 즉 [본송 중에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하나의 법(즉 식온)을 두 갈래로 나누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각각의 식 자체를 분별하여 ‘처’와 ‘계’로 나누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7계란 무엇인가?
6식계(識界)과 의계(意界)이다. 말하자면 안식계(眼識界) 내지 의식계(意識界)와, 이러한 6식이 [과거로] 전이한 것이 의계(意界)이므로 이것을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논설한] 온ㆍ처ㆍ계의 갈래는 제법을 모두 두루 포섭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1)특히 의계(意界)에 대하여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식온을 일컬어 7심계(心界)라고 한다면, 앞에서 식온은 소의인 근에 따라 개별적으로 분류할 경우 여섯 가지가 된다고 설하였는데, 이러한 6식을 배제하고서 어떠한 법을 다시 의계(意界)라고 이를 것인가?
[6식을 배제하고서] 더 이상 다른 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바로 6식신이
무간에 멸함에 따라 의계가 되는 것이다.
由卽六識身 無間滅爲意

논하여 말하겠다.
6식신은 무간(無間)에 멸하고 나서 능히 후 찰나의 의식[後識]을 낳기 때문에 ‘의계’라고 이름하였으니,50) [작용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설정하여도 과실이 없다. 비유하자면 여기서는 아들이고 열매였던 것이 다른 곳에서는 아버지가 되고 씨앗이 되는 것과 같다.

4.18계의 성립이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계’ 자체는 응당 마땅히 오로지 열일곱 가지가 되어야 하거나 혹은 오로지 열두 가지뿐이어야 할 것이니, [6식과 의계는] 서로를 포섭하기 때문이다.51) 어떠한 까닭에서 [의계 혹은 6식계를 설하여] 18계를 설정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여섯 번째 소의(所依)를 성취하기 위해서이니
그래서 18계가 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成第六依故 十八界應知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5식계와 같은 것은 안(眼) 등의 5계가 별도로 존재하여 그것을 소의로 삼지만 제6의식의 경우에는 별도의 소의가 없다. 소연을 떠나 식이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소의를 떠나서도 역시 그러하여 식은 생겨날 수 없다. 즉 이것(제6의식)의 소의를 성취하기 위해 의계를 설한 것으로, 이렇게 하여 소의[所依, 즉 根]와 능의[能依, 즉 識]와 경계에 각기 여섯 가지가 있어 계(界)는 열여덟 가지가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이미 소멸해 버린 법을 현행하는 식의 소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현행의 식을 낳는 직접적인 조건[隣近緣]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색이 존재할지라도 요컨대 안근에 의지해야만 안식이 생겨날 수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소연의 경계가 존재할지라도 후 찰나의 의식[後識]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요컨대 무간에 멸한 전 찰나의 의근에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송에서 ‘무간에 멸함’이라고 말한 것은 소멸하고서 시간적 간격을 갖는[有間] 전 찰나의 마음 (다시 말해 전 찰나 이전에 소멸한 마음)도 [현행하는 식의 소의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였으니, 비록 일찍이 개피(開避)하였을지라도 [그것을 근거로 하여서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52)
이렇듯 무간에 이미 멸한 6식은 현행하는 식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의계(意界)라고 하였다. 혹은 현재의 식은 바로 능의(能依)로서의 작용을 성취하고서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데, 이 역시 현재의 식을 능히 결과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식이] 비록 그것(무간에 멸한 전 찰나의 마음)을 근거로 하여 생겨났다 할지라도 그것에 수반되는 것은 아니니, 그래서 마음(전 찰나 마음)에 근거한 마음을 심소(心所)라고 이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소법은 반드시 [현재의] 마음에 수반되기 때문이다.

Ⅲ.온ㆍ처ㆍ계의 3과(科)의 분별

1.일체법과 3과의 상호 포섭관계

온갖 온(蘊)과 취온(取蘊)과 처(處)와 계(界)에 대해 이미 해석하였다.
이제 여기서 그것들의 포섭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모든 온은 일체의 유위법을 모두 포섭하고, 취온은 오로지 일체의 유루법을 포섭하며, ‘처’와 ‘계’는 일체법을 모두 다 포섭하니, 여기서 일체법이란 5온과 무위를 말한다.
개별적인 포섭관계[別攝]는 이상과 같다.
이제 마땅히 전체적인 포섭관계[總攝]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일체법을 전체적으로 포섭함은
하나의 온과 처와 계에 의하는 것으로
자성만을 포섭하고 그 밖의 것은 포섭하지 않으니
타성(他性)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總攝一切法 由一蘊處界
攝自性非餘 以離他性故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하나의 온’이란 색온(色蘊)을 말하고, ‘하나의 처’란 의처(意處)를 말하며, ‘하나의 계’란 법계(法界)를 말한다. 즉 이러한 세 가지가 5온과 무위를 전체적으로 포섭하는 것이다.53) 여기서 ‘전체적[總]’이라 함은 바로 ‘모두[總集]’의 뜻으로, 이와 같이 ‘전체적’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세 가지 모두를 알게 하기 위함이지 각기 하나에 대해 알게 하고자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부파[有餘部]에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포섭한다’고 함은 다른 존재[他性]를 포섭하는 것을 말하니, 다른 어떤 법이 다른 어떤 법을 포섭한다고 [계경] 곳곳에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54)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옳지 않으니, [다른 존재를 포섭하는] 결정적인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결정적인 근거가 있다고 한다면 다른 존재를 포섭하는 것이 아니다.55) 그래서 우리 부파(설일체유부)의 모든 논사들은 ‘자성(自性)만을 포섭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자성만을 포섭한다’는 이 같은 주장은 바로 궁극적인 설이니, 다른 존재에 근거하지 않기 때문이다. 포섭관계로서 다른 어떤 원인에도 근거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실된 포섭이니, 제법은 항상 자성을 포섭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다른 존재[他性]을 포섭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일체의 법은 다른 존재를 배제[離]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안근의 존재는 이(耳) 등의 존재를 배제하고 있다. 즉 그러한 법은 이러한 법을 떠난 것인데 ‘이것에 포섭된다’고 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제법은 오로지 자성만을 포섭한다.
이와 같이 안근은 오로지 [그것과 동류의 성질인] 색온과 안처와 안계와 고(苦)ㆍ집제(集諦) 등에만 포섭될 뿐이니, 이는 바로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이며, 그 밖의 다른 온이나 다른 처, 다른 계 등에는 포섭되지 않으니, 그러한 존재를 배제하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타의 다른 법의 경우에 대해서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2.18계의 조건-안ㆍ이ㆍ비처는 왜 각기 2계가 아닌가?

안근과 이근과 비근은 각각 의지처가 두 곳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계(界)의 수가 더 많아지지 않는 것인가?56)
두 곳을 합하여 하나로 삼았기 때문에 오로지 18계가 된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 두 곳을 합하여 하나의 ‘계’로 삼은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종류와 경계와 인식이 동일하기 때문으로
비록 두 개일지라도 계(界) 자체는 단일하다.
類境識同故 雖二界體一

논하여 말하겠다.
안근과 이근과 비근은 비록 각기 두 곳이 있을지라도 종류 등이 동일하기 때문에 합하여 하나의 ‘계’로 삼은 것이다. 여기서 종류가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안근의 두 곳은] 다 같이 눈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경계(즉 대상)가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다 같이 색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이며, 인식이 동일하다고 말한 것은 다 같이 안식의 소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근과 비근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하나의 ‘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계’ 자체는 이미 하나라고 하였거니와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그것의 소의처(所依處)는 두 곳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그럼에도 단정하고 위엄이 있게 하기 위해
안(眼) 등에 각기 두 곳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然爲令端嚴 眼等各生二

논하여 말하겠다.
소의신의 형상을 단정하고 위엄 있게 하기 위해 계(界) 자체는 비록 하나이지만 두 곳의 소의처가 생겨나게 되었다. 만약 눈(안근)과 귀(이근)가 오직 하나만 있고, 코(비근)에 두 개의 구멍이 없다고 한다면 신체는 단정하지 않고 위엄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옳지 않으니, 낙타나 고양이, 솔개 등도 [두 곳의 소의처를 갖추었지만] 이렇듯 누추하니, 그것들에게 무슨 단정함과 위엄이 있다고 하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온갖 근의 각기 다른 종류가 이와 같이 다르게 배열되어 생겨나게 된 것은 인연에 따른 것으로, 인연에 장애가 있었다면 혹 두 곳으로 생겨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본송에서] ‘단정하고 위엄이 있게 하기 위해 각기 두 곳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설한 데에는 다른 뜻이 있으니, 신체를 장엄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즉 이러한 ‘단정하고 위엄이 있다’는 말은 ‘뛰어나다[增上]’는 뜻을 나타낸다. [세간에서는] 작용이 뛰어난 것을 ‘단정하고 위엄 있다’고 설하고 있다. 만약 안 등의 근에 각기 한 곳이 결여되어 있다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하는 작용은 모두 명료하지 않게 될 것이지만, 각기 두 곳을 갖추었으면 명료한 작용이 생겨난다. 그렇기 때문에 세 근에는 각기 두 곳의 소의처가 생겨나게 된 것으로, 그것은 뛰어난 작용을 위엄 있게 하기 위한 것이지 신체를 위엄이 있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3.3과의 명의(名義)와 가실론(假實論)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알려지는 대상[所知境, 즉 일체법]을 온ㆍ처ㆍ계라는 세 갈래로 설하시게 된 것인가?
이러한 세 갈래의 뜻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온ㆍ처ㆍ계의 개별적인 뜻은 무엇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적취와 생장문(生長門)과 종족
이것이 바로 온ㆍ처ㆍ계의 뜻이다.
聚生門種族 是蘊處界義

논하여 말하겠다.
적취(積聚,rāśi)의 뜻이 바로 ‘온’의 뜻이고, 생장(生長)하는 문(āya-dvara)이라는 뜻이 바로 ‘처’의 뜻이며, 종족(gotra)의 뜻이 바로 ‘계’의 뜻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적취의 뜻이 바로 ‘온’임을 알게 된 것인가?
계경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니, “존재하는 모든 색으로서 혹은 과거의 것이거나, 혹은 미래의 것이거나, 혹은 현재의 것이거나, 혹은 내적인 것이거나, 혹은 외적인 것이거나, 혹은 거친 것이거나, 혹은 미세한 것이거나, 혹은 저열한 것이거나, 혹은 수승한 것이거나, 혹은 멀리 있는 것이거나, 혹은 가까이 있는 것, 이와 같은 일체의 법을 한 무더기[一聚]로 묶어 색온이라 부른다. 나아가 식온에 대해서도 널리 설하자면 역시 그러하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적취의 뜻이 바로 ‘온’임을 알게 된 것이다.
만약 적취라는 뜻으로 ‘온’을 해석할 것 같으면 온은 마땅히 실유(實有)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적취는 바로 가설적 존재[假]이기 때문이다.57)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적취의 소의(所依)에 대해 ‘뜻’이라는 말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적취가 바로 뜻은 아니다. 왜냐하면 ‘뜻’이란 실체[實物]인 단어[名]의 차별이지만 적취는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취의 뜻[聚義]’이라고 함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적취의 뜻[聚之義]이라는 말이다. ‘적취의 뜻’이란 적취의 소의를 말하는 것으로,58) 이러한 해석은 경설(經說)에 크나큰 의미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적취라고 말하였을지라도 적취의 소의를 떠나 별도로 실재하는 적취 자체를 인식할 수 없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자아라고 말하였을지라도 색 등의 온 이외 실유의 자아를 마땅히 별도로 추구해서는 안되니, 5온의 상속을 일시 자아라고 가설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세간의 적취와 마찬가지로 자아도 실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온’이 만약 실유라면 [앞서 인용한] 경은 어떠한 뜻을 나타내는 것인가?
교화되어야 할 중생들은 색 등 제법의 3세의 품류(品類)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차별이 각기 바로 온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온은 가이없는 것[無邊]이다’고 하면 바로 두려움을 낳아 ‘내가 어찌 이러한 가이없는 온을 능히 변지(遍知)하여 영원히 끊을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다. 곧 그들을 책려하기 위해 온이 비록 가이없는 것일지라도 그 특성이 동일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하나로 설한 것이다. 또한 어리석은 범부는 다수의 온에 대해 일합상(一合想, 다수의 개별적 존재를 하나의 전체로 간주하려는 생각)을 낳아 즉시 아집을 일으킨다. 즉 그로 하여금 일합상을 제거하게 하기 위해 하나의 온에 다수의 부분이 있다고 설한 것일 뿐, 색 등의 5온은 다수의 법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가설적 존재이지 실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또한 단일한 극미는 3세 등에 포섭되고 혜(慧)에 의해 분석되는 것으로, 그것을 묶어 하나의 적취[一聚, 즉 聚極微]라고 하였다. 따라서 온이 비록 적취라고 할지라도 실유의 뜻은 성립할 수 있으며, 여타의 다른 법도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온은 일시적 존재가 아닌 것이다.59) 또한 각기 개별적으로 생기하는 법에 대해서도 역시 ‘온’이라고 설할 수 있기 때문에 온은 결정코 일시적 존재가 아니다. 이를테면 [심법과] 동시생기[俱生]하는 수(受)를 수온이라 이르고, 상(想)을 상온이라고 이르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설의 경우는 경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모든 때에 걸쳐 화합 생기하기 때문에 온이 비록 각기 개별적인 존재라 할지라도 적취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문(門)의 뜻이 바로 ‘처’임을 알게 된 것인가?
어원적 해석[訓詞]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즉 ‘처’란 생장하는 문을 말하는 것으로,60) 심과 심소법이 여기서 생장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처’라고 하였다. 이는 바로 능히 그러한 심ㆍ심소법의 작용을 생장시킨다는 뜻으로, 계경에서 “범지(梵志)여,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안근을 문으로 삼아서는 오로지 색만을 보게 된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 경문은 다만 문에 여섯 가지(안 등의 6처)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지만, 그렇지만 심ㆍ심소법은 열두 가지의 문(즉 12처)을 갖는다. 그래서 또 다른 계경에서는 “안(眼)과 색(色)을 조건으로 하여 안식(眼識)이 생겨나며, 이 세 가지의 화합인 촉(觸)은 수(受)ㆍ상(想)ㆍ사(思)를 함께 낳는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근거에서 종족의 뜻이 바로 ‘계’임을 알게 된 것인가?
세간에서의 종족의 뜻과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나의 산 속에 존재하는 웅황(雄黃)과 자황(雌黃, 유황과 비소의 혼합물)과 적토(赤土)와 안선나(安膳那,anjana, 흑색의 토석) 등 여러 가지 종족들을 다양한 [토양의 세계] 즉 다계(多界)라고 이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소의신 혹은 하나의 상속 중에 존재하는 열여덟 가지 종류의 제법의 종족을 18계라고 일렀다. 즉 웅황 등이 생겨나는 것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자체의 본질[體類]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종족이라고 이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안 등이 생겨나는 것을 서로 비교해 보면 그 자체의 본질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종족이라고 이름한 것으로, 그 뜻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동유(同喩)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의계(意界)를 6식계(識界)와 비교해 보면 양자는 별도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달리 설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61)
소의(所依)와 능의(能依)로서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와 같이 [달리 설정할지라도] 아무런 허물이 없다.

4.3과의 건립 이유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일체법을] 온ㆍ처ㆍ계의 세 갈래로 차별하여 설하신 것인가?
불세존께서 그렇게 설하신 뜻은 지극히 알기 어려울지라도 자세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어리석음과 근기 등에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
‘온’과 ‘처’와 ‘계’의 세 종류로 설하게 된 것이다.62)
愚根等三故 說蘊處界三

논하여 말하겠다.
교화될 유정 중에는 어리석음과 근기 등에 세 가지 유형이 있기 때문으로, 부처님께서는 이에 따라 온ㆍ처ㆍ계라는 세 종류의 법문을 설하시게 된 것이다. 여기서 ‘등’이라고 하는 말은 즐기는 것[樂]이나 단계[位], 허물[過], 병 등을 밝히기 위한 말이고, ‘세 가지’란 그 하나하나에 각기 세 가지가 있다는 말이다.
즉 교화될 중생의 어리석음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혹 어떤 이는 심소(心所)에 어리석어 그것을 모두 아(我)라고 집착하며, 혹 어떤 이는 오로지 색에 대해서만 어리석으며, 혹 어떤 이는 색과 심(心)에 어리석기도 한 것이다.63) 근기에도 역시 세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예리함과 중간과 둔함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즐기는 것’이란 승해(勝解,이해)를 [즐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도 역시 세 종류가 있으니, 간략한 글[略文]과 중간의 글[中文]과 자세한 글[廣文]을 즐기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단계라고 함은 이를테면 제자들 중에는 이미 작의(作意)를 초월하여 마음의 평정에 이른 단계[已過作意], 이미 완전하게 익힌 단계[已熟習行], 처음으로 정법의 사업을 닦는 단계[初修事業] 등 세 단계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허물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유정 중에는 아만을 품어 행하는 자[懷我慢行], 아소에 집착하여 따르는 자[執我所隨], 식(識)의 소의와 소연에 미혹한 자[迷識依緣] 등 허물의 세 가지 차별이 있기 때문에, 병이란 이를테면 교화될 유정들에게는 목숨이나 재물이나 친족을 믿고서 교만 방일함을 낳는 등 세 가지 다른 병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등등의 연유로 말미암아 세존께서는 그들을 위해 순서대로 온ㆍ처ㆍ계의 세 가지를 설하시게 된 것이다.
5.심소법 중 수(受)ㆍ상(想)만을 별도로 설정한 이유

어떠한 까닭에서 세존께서는 온갖 심소법 가운데 수(受)와 상(想)만을 따로 설정하여 2온으로 삼으신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쟁근(諍根)과 생사(生死)의 원인이고
아울러 순서상의 이유[次第因] 때문에
온갖 심소법 중에서
수(受)와 상(想)을 별도로 온이라 한 것이다.
諍根生死因 及次第因故
於諸心所法 受想別爲蘊

논하여 말하겠다.
세간에서의 투쟁의 근원[諍根]에는 간략히 두 종류가 있다. 이를테면 욕망[欲]에 탐착하여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과 견해[見]에 탐착하여 그것에 사로잡히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앞의 것은 ‘수’에 의해 일어나고, 뒤의 것은 ‘상’에 의해 생겨난다. 즉 미수(味受)의 힘에 의해 온갖 욕망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고, 도상(倒想, 전도된 관념)의 힘에 따라 온갖 견해에 탐착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생사(生死)의 법은 ‘수’와 ‘상’을 최승의 원인으로 삼는다. 즉 낙수(樂受)에 탐착하기 때문에, 도상(전도된 관념)에 집착하기 때문에 애(愛)와 견(見)의 행자(行者)는 생사를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의 원인과 아울러 뒤에서 설하게 될 ‘순서상의 이유[次第因]’로 말미암아 ‘수’와 ‘상’을 별도로 설정하여 온으로 삼은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순서상의 이유’에 대해서는 차후에 마땅히 분별하게 되리라.
그리고 [본송에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온갖 심소 가운데 오로지 이러한 ‘수’와 ‘상’만이 능히 ‘애’와 ‘견’이라는 두 가지 염오법이 되어 생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각기 별도로 하나의 식주(識住)의 명칭을 나타내기 때문에,64) 이 두 가지의 소멸에 근거하여 멸정(滅定)을 설정하기 때문에 [별도의 온으로 설정되었다는] 이유를 아울러 나타낸 말로서,65) [‘수’와 ‘상’을 별도의 온으로 설정하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은 등의 다양한 종류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6.5온과 무위법

어떠한 까닭에서 처(處)와 계(界)에는 무위가 존재한다고 설하면서도 온(蘊)에는 포섭되지 않는다고 설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온에서는 무위를 설하지 않으니
그 뜻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66)
蘊不說無爲 義不相應故

논하여 말하겠다.
만약 온갖 무위법을 온이라고 설할 경우, 5온 중에 존재한다고 하든지 혹은 여섯 번째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만 이 모두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 뜻이 서로 모순 되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무위법)은 바야흐로 색이 아니고, 내지 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섯 가지 중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적취의 뜻이 바로 온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위법은, 그러한 색 따위처럼 과거 등의 품류의 차별이 있어 그것들을 하나의 무더기[一聚]로 간추려 ‘무위온(無爲蘊)’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섯 번째의 온도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무위법은 전도의 근거[顚倒依]라는 뜻과도, 단멸의 방편[斷方便]이라는 뜻과도 상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도의 근거란 유루온을 나타내고, 단멸의 방편이란 무루온을 나타낸다. 그러나 무위는 이러한 두 가지 뜻 중의 어떠한 뜻도 갖지 않으니, ‘그 뜻이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온으로 설정하지 않은 것이다.67)

7.5온의 순서

온갖 온을 폐(廢)하고 설정하는 것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이제 마땅히 그 순서에 대해 분별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거침[麤]과 염오함[染]과 그릇[器] 등과
3계의 차별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隨麤染器等 界別次第立

논하여 말하겠다.
5온은 거침에 따라, 염오함과 그릇 등과 3계의 차별에 따라 그와 같은 순서로 설정되었다.
먼저 거침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다섯 가지 가운데 가장 거친 것은 이른바 색온이니, 대애(對礙, 공간적 점유성)를 갖기 때문에, 5식의 소의(즉 안 등의 5근)가 되기 때문에, 6식의 경계가 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네 가지 가운데 가장 거친 것은 이른바 수온이니, 비록 형질(形質)을 갖지 않을지라도 행상(行相)의 작용[즉 고(苦)ㆍ낙(樂)ㆍ불고불락(不苦不樂)]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네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세 가지 가운데 가장 거친 것은 이른바 상온이니, 남ㆍ여 등의 행상을 취하는 작용은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 중에서 보다 거친 것은 이른바 행온이니, 탐 등이 일어나는 행상은 분명하여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에 두 가지 중에서 먼저 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식온은 가장 미세하니, 그래서 가장 마지막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염오함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시작도 없는 생(生)과 사(死) 이래로 남녀가 그들의 소의신에 대해 서로 염애(染愛)하게 되는 것은 현색과 형색 따위로 말미암아서이니, 그래서 처음에 ‘색’을 설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색애(色愛)는 수미(受味)에 탐착하였기 때문으로, 그래서 다음으로 ‘수’를 설하였다. 이와 같은 수미에 탐착하게 된 것은 생각[想]이 전도되었기 때문으로, 그래서 다음으로 ‘상’을 설하였다. 이러한 전도된 생각은 번뇌의 힘에 의한 것으로, 그래서 다음으로 ‘행’을 설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번뇌의 힘은 능히 후유(後有)를 낳는 식(識)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그래서 마지막으로 ‘식’을 설하였다.
그릇 등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색’은 그릇과 같으니, ‘수’의 소의(所依)가 되기 때문이다. ‘수’는 음식과 유사하니, 유정의 소의신을 이익되게 하기도 하고 손상시키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은 조미료와 같으니,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평등하게 취하여 ‘수’가 낳아지는 것을 돕기 때문이다. ‘행’은 요리사와 같으니, 사(思)와 탐(貪) 등의 업과 번뇌의 힘으로 말미암아 좋아할 만하거나 좋아하지 않을 이숙과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은 먹는 자에 비유되니, 유정의 근본 가운데 가장 주된 것이고 뛰어난 것이기 때문으로, ‘식’을 상수(上首)로 하여 ‘수’ 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이치에 따라 [계경에서는] 수ㆍ상 등의 수복행(隨福行)에 대해 ‘식’을 다만 수복행자(隨福行者)라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이치에 따라 ‘행(行)을 조건으로 하여 식이 있다’고 설하였으며, 또한 다시 아난타(阿難陀)에게 말하기를, “식이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태(母胎)에도 들지 못하니, 마음이 더러우므로 유정이 더러운 것이며, 마음이 청정하므로 유정이 청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이와 같은 계경에서는 수ㆍ상등의 동시 생기하는 법 가운데 다만 ‘식’을 위주로 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3계의 차별에 따라 [그 순서가] 설정되었다. 즉 욕계 중에서는 색이 가장 수승하니, 온갖 근(根)과 경(境)의 색이 모두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색계에서는 ‘수’가 수승하니, 생사 중에서 온갖 수승하고 미묘한 ‘수’가 모두 획득될 수 있기 때문이다.68) 세 가지 무색계 중에서는 ‘상’이 가장 수승하니, 그러한 경지에서는 상(相)을 취하는 것이 가장 분명하기 때문이다.69) 제일유(第一有, 즉 有頂處인 비상비비상처) 중에서는 ‘행’이 가장 수승하니, 그곳에서의 사(思)는 가장 큰 과보(8만 겁의 수명)를 능히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들(즉 색ㆍ수ㆍ상ㆍ사)은 바로 식주(識住)로서 거기에 ‘식’이 머무니, 이는 세간에서의 밭(앞의 4온)과 종자(식온)의 순서와 유사하다.70)
그래서 제온(諸蘊)의 순서를 이와 같이 설정하게 되었으니, 이에 따라 5온에는 증가하고 감소하는 허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온갖 ‘순서상의 이유[次第因]’로 말미암아 심소 중에서 수ㆍ상만을 별도의 온으로 설정하였으니, 이를테면 ‘수’와 ‘상’은 심소 중에서 그 상이 거칠고, 염오함를 낳으며, 음식과 유사하고 조미료와 같으며, 2계(색ㆍ무색계) 중에서 강력하다. 그래서 별도의 온으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본송에 따라 [5온의 순서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바야흐로 유전문(流轉門)에 근거하여 순서상의 이유를 설할 경우에도 이와 같은 네 가지 종류로 설할 수 있다. 이제 마땅히 환멸문(還滅門)에 근거하여 다시 한 가지 이유를 설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불법(佛法)에 들어가는 데에는 두 가지 긴요한 문이 있으니, 첫째는 부정관(不淨觀)이고, 둘째는 지식념(止息念)이다.71) 곧 부정관은 소조색(所造色, 즉 몸)에 대해 관찰하는 것이고, 지식념은 대종(즉 숨)을 기억[念]하는 것으로, [환멸에 이르는] 긴요한 문의 소연이 되기 때문에 먼저 ‘색’을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관찰력에 의해 색의 특성을 분석하여 찰나찰나에 걸쳐 극미가 전전(展轉) 차별된다고 관찰할 때 몸이 가뿐[輕安]해지기 때문에 마음은 바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다음으로 ‘수’를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수’는 소의신과 결합하여 그것을 결정코 손상시키거나 이익되게 하지만 자아를 손상시킨다거나 이익되게 한다는 것은 이치상 필시 성립하지 않으니, 이러한 관찰과 이해에 의해 아상(我想)은 바로 멸하고 법상(法想)이 바로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다음으로 ‘상’을 설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에 의해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법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통달하면 번뇌는 더 이상 작용하지 않으니, 그래서 다음으로 ‘행’을 설하게 된 것이다.
번뇌가 이미 종식하였다면 마음은 조화되고 부드럽게 되어 능히 [선법을] 감당할 수 있게 되니, 그래서 다음으로 ‘식’을 설하게 된 것이다.
[환멸문에 따라 5온을] 차례대로 이미 논설하였으니, 이 반대로도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하겠지만 번잡한 글을 싫어할까 염려되어 바야흐로 여기서 그만 두기로 한다.
028_0008_c_01L阿毘達磨藏顯宗論卷第二 雅 尊者衆賢造三藏法師玄奘奉 詔譯辯本事品第二之二如上所言色等五薀名有爲法色薀者何頌曰色者唯五根 五境及無表論曰此中色言顯色薀義五根謂眼耳鼻舌身五境謂色聲香味觸眼等名境及無表者謂法處色唯者唯此所顯十處一處少分名爲色薀如是諸色其相云何頌曰彼識依淨色 名眼等五根論曰彼謂前說眼等五根識卽眼耳鼻舌身識依者眼等五識所依如爲體如是卽顯眼等五識所依淨色名眼等根故薄伽梵於契經中說眼等根淨色爲相本論亦說云何眼根眼識所依淨色爲性如是廣說諸聖教中以根別識不以境界故知彼言顯根非境有說彼者是境非根而無意識緣色等故名色等識彼識所依名眼等過由淨色言所簡別故已辯根相當辯境相頌曰色二或二十 聲唯有二種 味六香四種觸十一爲性論曰言色二者是二種義謂顯與形此中顯色有十二種形色有八故或二十顯十二者謂靑於十二中靑等四種是正顯色雲等八種是此差別其義隱今當略釋地水氣騰說之爲霧光明起於中餘色可見名影翻此爲日焰名光火藥寶珠電等諸焰名明形色八者謂長不正此中正者謂形平等形不平等名爲不正餘色易了故今不釋說色處當說聲處能有呼召故名爲或唯音響說之爲聲善逝聖教咸作是說聲是耳根所取境界是四大種所造色性此聲二種謂有執受無執受大種爲因執受大種謂現有情長養等流異熟地等與此相違無執受由此所發爲二種聲色等亦應作如是說然由聲處自性難知故但就因說有二種無一聲性以有執受及無執受大種爲因二四大種各別果故非二四大同得一果爲俱有成過失故雖二大種有相扣擊俱爲因各別發聲據自依故不成三雖有手鼓相擊爲因發生二聲相映奪隨取一種相別難知是故聲處唯有二種已說聲處當說味處次說者顯彼境識生無定故味謂所是可嘗義此有六種淡別故已說味處當說香處香謂所嗅此有四種好香惡香等不等香有差別故不等者增益損減依身別有說微弱增盛異故本論中說有三種好香惡香及平等香若能長養諸根大種名爲好香與此相違爲惡香無前二用名平等香或勝福業增上所生名爲好香若勝罪業增上所生名爲惡香若四大種增上所名平等香已說香處當說觸處謂所觸十一爲性卽十一實以爲體謂四大種及七造觸滑性澀性輕性及冷有差別故此中能所觸者誰應知都無能觸所觸觸則失剎那性故但於身識所依緣無閒生時立觸名想依此根識得彼境時假說此根能觸彼境觸非身識所依止故不說彼觸能觸身根與身根極相鄰近故說所觸能觸色等雖非所觸法性所依壞故亦有損已說境相唯餘無表此今當頌曰作等餘心等 及無心有記 無對所造性是名無表色論曰言作等者等取離作無對造色略有二種一者依表二者依心依表起者復有二種謂與作俱轉及作息隨轉爲攝如是無表差別體相無遺說作等言餘心等者等取同類心謂善心作近因等起或俱有因彼所發善無對造色不善無記名餘心心名同類不善心作近因等起所發不善無對造色善及無記名餘心善名同類及無心者卽心滅位謂定非生生位無故及言乘上及此非餘於三位中此容隨轉謂定唯等不善兼餘散善通於三位轉故言有記者謂善不善可記爲愛非愛品故言無對者非極微故所造性者不簡大種以大種性非無對故但簡非色顯是色性卽五薀中色薀攝故是者是前所說諸相具前諸相名無表色如是已辯無表色相於中所說大種所造大種云何頌曰大種謂四界 卽地水火風 能成持等業堅濕煖動性論曰此諸大種何緣名界一切色法出生本故亦從大種大種出生諸出生本世閒名界如金等鑛名金等界或種種苦出生本故說名爲界喩如前說有說能持大種自相及所造色名爲界如是諸界亦名大種何故言種云何名大種種造色差別生時彼彼品類差別能起是故言種由四大種有差別故造色差別有說有情業增上故無始時來未嘗非有是故言種由四大種摠相種類無閒絕故或法出現卽名爲有生長有性是故言種卽是生長諸法有性或是生長有情身義或能顯了十種造色是故言種由此勢力彼顯了故所言大者有大用故言大用者謂諸有情根本事中如是四種有勝作用依此建立識之與空乃得說爲有情根本又於誑惑愚夫事中此四最勝故名爲大如橋賊中事業勝者別餘故名大橋大賊又此四種普爲一切餘色所依廣故名大有說一切色等聚中堅等具有故名爲大風增聚中闕於色等火增聚中闕於味等色界諸聚香俱無靑等聚中闕於黃等滑等聚中闕於澀等聲等不定是故唯此四種名大此四大種雖常和合恒不相離而非處同云何得知恒不相離入胎大造經等說故又理應然何等爲理謂石等中現有能攝生火增墜三業可得故知於此有水恒不相離於水聚中現有持船煖性流動三業可得故知於此有地恒不相離於火焰中現有任持攝聚擊動三業可得故知於此有地恒不相離於風聚中現有能持起冷煖觸三業可得故知於此有地恒不相離復云何知如是四界由此因緣恒相隨逐由此能成持等業故謂地等界如次能成持長四種事業由此因緣於諸色聚若有持等四業可得卽知此中有地等界互不相離應知此中言能長者謂能安布云何安布謂令增盛或復流漫爲能持等四業卽是界自相耶不爾云何如是四界隨其次第堅濕煖動以爲自相應知此中說性顯體爲明體性不相離故動謂能引大種造色令其相續生餘方何故虛空不名大種彼大種相不成立故能損益故立大種名虛空不然故非大種或於諸法生滅位中性無差別故非大種現見大種種等位中其相轉變成芽等緣方令芽等諸位得起虛空無爲則不如是性相常故作用都無旣不能生故非大種又諸大種非一非常自相衆多果別無量虛空自性是一是常相無差別全無有果非無別因生有別果是故虛空不名大種若謂餘因有差別故能助虛空生別果者卽此別因能生別果何用執此虛空爲因爲地等界卽地等耶不爾云何頌曰地謂顯形色 隨世想立名 水火亦復然風卽界亦爾論曰地言唯表顯形色處豈不摠地四處合成何故但言顯形爲地此中雖有香味觸三而隨世想故作是說由諸世閒相示地者以顯形色而相示故雖諸世閒亦於香等起地言說謂作是言我今嗅地嘗地觸地而顯形色於地火能通表示是故偏世不多言我嗅於水亦不多說嗅嘗於火雖言觸地等而卽地等界是故地中雖有香等而形與顯勝故又顯形色表示二界地等無異故偏說若爾顯形表示衣等勝香等亦應偏說世起名想無有決定隨世閒差別而說此隨多分世想立生等非顯聲非相續故不說爲地衣等如地但用顯形爲體水火亦隨世想故由世現見水靑長等故說顯形爲水自性世亦現見火赤等故說顯形爲火自性然卽色觸轉變生時名火焰炭是假非實無一實物身眼得故如是地等與界差別卽界者世閒於動立風名故風界無豈不世閒於顯形色亦生風想閒現以黑風團風而相示故有通此故說言示是如地等與界別義昔諸師咸作是說地於中雜故見如爲顯其風卽是風界故復言爾者定義此二說中前說爲勝遍處淨無差別故不淨唯緣色處境故頌曰此中根與境 卽說十處界論曰已說實物根境無表爲色薀性此中根境亦卽說爲十處十界於處門中爲十處謂眼處等於界門中立爲十界謂眼界等已說色薀幷立處界當說受等三薀處界頌曰受領納隨觸 想取像爲體 四餘名行薀如是受等三 及無表無爲 名法處法界論曰隨觸而生領納可愛及不可愛俱相違觸名爲受薀領納卽是能受用義云何此受領納隨觸謂受是觸鄰近果故此隨觸聲爲顯因義能順受故如隨相言相謂表彰卽能顯示因能顯果故立相名此隨相言是順因義受能領納能順觸因是故說受領納隨觸如世尊言順樂受觸順苦受觸及順不苦不樂受觸卽是順生樂受等義領納隨觸名自性受領納所緣亦是受相與一境法別相難知一切皆同領納境故以心心所執受境時一切皆名領納自境是故唯說領納隨觸名自性受別相定故領納所緣名執取受非此所辯相不定故二受差別如順正理及五事論廣辯應知此摠說三別說爲六世及所依有差別故第三想薀其體是何此於所緣取像爲體謂於一切隨本安立長等色貝等聲生蓮等香等味澀等觸滅等法所緣境中如相而取故名爲想此想就世摠說爲三若就所依別說爲六第四行薀其體是何此用四餘諸行爲體謂除前說色想三及除當說識爲第四餘有爲法名爲行薀此有相應及不相應思等得等如其次第契經唯說六思身者由最勝故所以者何思是業性爲因感果其力最强故世尊說若能造作有漏有爲名行取薀不可唯說思爲行薀立摠名故如法處界若異此者應但名思一法成故如受想薀此中意顯如外第六法處界聲立摠名故摠攝十一十七處界不攝多法如是行聲立摠名故摠攝四薀不攝多行故知行薀體不唯思如是行薀非盡有依故唯約世摠說三種如前分別色薀體已便約處界二門建立如是此中辯受行三薀體已亦應建立爲處及界謂此三薀及無表色幷三無爲如是七法於處門中立爲法處於界門中立爲法界第五識薀自性界其相云何頌曰識謂各了別 此卽名意處 及七界應知六識轉爲意論曰識謂了者是唯摠取境界相義各各摠取彼彼境相名各了別謂識唯能摠取境相非能取彼境相差別如世尊言了者名識有餘師說唯於法性假說作者爲遮離識有了者計何處復見唯於法性假說作者現見說影能行動故此於異處無閒生時雖無動作而說作者識亦如是於異境界相續生時雖無動作而說了者謂能了境故亦無失云何知然現見餘處遮作者故如世尊告頗勒具那我終不說有能了者復有說言剎那名法性相續名作者自意所立思起中當更顯示此識約世摠說爲三就所依根別分爲六應知卽此所說識薀於處門中立爲意處於界門中立爲七界及聲顯一析爲二門顯一一識體分處七界者何六識及意謂眼識界至意識界卽此六識轉爲意界此別建立界門應知遍攝諸法皆盡此中應思若卽識薀名七心界前說識薀就所依根別分爲六今離六識說何等法復名意界更無異法卽於此中頌曰由卽六識身 無閒滅爲意論曰卽六識身無閒滅已能生後識故名意界時分異故別立無失猶如子果立爲父種若爾界體應唯十七或唯十二更相攝故何緣建立十八界耶頌曰成第六依故十八界應知論曰如五識界別有眼等五界爲依第六意識無別所依如離所緣識無起義離依亦爾識不得生爲成此依說意界如是所依能依境界應知各六界成十八如何已滅名現識依是現識生鄰近緣故如雖有色而要依眼眼識得生如是雖有所緣境界而後識生要依前念無閒滅意是故前言無閒滅者爲遮前念有閒滅心雖先開避而未生故由此無閒已滅六識爲現識依說爲意界或現在識正成依用過去已成等無閒緣亦於現在能取果故雖依彼生而非隨彼心依心不名心所心所品類必隨心故已釋諸薀取薀當於此中思擇攝義諸薀摠攝一切有爲取薀唯攝一切有漏界摠攝一切法盡五薀無爲名一切法別攝如是應辯摠攝頌曰摠攝一切法 由一薀處界 攝自性非餘以離他性故論曰一薀謂色一處謂意一界謂法此三摠攝五薀無爲摠是集義置摠言者令知摠三勿謂各一有餘部執攝謂攝他處處說言餘攝餘故此執非理無定因故若有定因非攝他故我部諸師說自性攝如是所立攝自性言是究竟說不待他故攝不待因是眞實攝諸法恒時攝自性故復云何知不攝他性以一切法離他性故謂眼根性離耳等性彼離於此而言此攝理必不然故知諸法唯攝自性如是眼根唯攝色薀眼處眼界苦集諦等是彼性故不攝餘薀餘處界等離彼性故如是餘法隨應當思鼻根各依二處何緣界體數不成多合二爲一故唯十八何緣合二爲一界耶頌曰類境識同故 雖二界體一論曰鼻根雖各二處類等同故合爲一界言類同者同眼類故言境同者同色境故言識同者眼識依故鼻亦然故立一界界體旣一處何緣二頌曰然爲令端嚴眼等各生二論曰爲所依身相端嚴故界體雖一而兩處生若眼耳根處唯生一鼻無二穴身不端嚴此釋不然鴟等如是醜陋何有端嚴是故諸根各別種類如是安布差別而生此待因緣如是差別因緣有障或不二生言爲端嚴各生二者此有別義非爲嚴身此端嚴聲顯增上義作用增上故端嚴若眼等根各闕一處嗅用皆不明了各具二者明了用生是故三根各生二處爲嚴勝用非爲嚴身何故世尊於所知境以薀界三門說耶由此三門義各別故此薀別義者何頌曰聚生門種族 是薀處界義論曰積聚義是薀義生門義是處義種族義是界義何緣故知聚義是薀由契經說諸所有色若過去若未來若現在若內若外若麤若細若劣若遠若近如是一切略爲一聚名色薀乃至識薀廣說亦然由此故知聚義是薀若以聚義釋薀義者應非實聚是假故此難不然於聚所依立義言故非聚卽義義是實物之差別聚非實故聚義者何謂聚之聚之義者謂聚所依此釋顯經有大義趣謂如言聚離聚所依無別實有聚體可得如是言我色等薀外應別求實有我體薀相續中假說我如世閒聚我非實有薀若實有顯何義勿所化生知色等法三時品無量差別各是薀故薀則無邊便生怯退謂我何能遍知永斷此無邊爲策勵彼薀雖無邊而相同故說爲一又諸愚夫於多薀上生一合現起我執爲令彼除一合想故一薀中有衆多分不爲顯示色等五薀多法合成是假非實又一極微三世等攝以慧分析略爲一聚薀雖卽而實義成餘法亦然故薀非假於一一別起法中亦說薀故薀定非如說俱生受名受薀想名想薀說如經於一切時和合生故薀雖各而聚義成何緣故知門義是處訓詞故處謂生門心所法於中長故名爲處是能生長彼作用義契經說梵志當知以眼爲門唯爲見此經唯證門義有六然心心所有十二門故契經說眼及色爲緣生於眼識三和合觸俱起受想乃至廣何緣故知族義是界與世種族義相似故如一山中有諸雄黃雌黃安膳那等衆多種族說名多界是一身或一相續有十八類諸法種名十八界如雄黃等展轉相望類不同故名種族如是眼等展轉體類不同故名種族由義相似爲同喩若爾意界望六識身無別體不應別立所依能依體類別故斯過失何故世尊說薀界三門差雖佛世尊意趣難解而審思忖頌曰愚根等三故 說薀處界三論曰所化有情愚根等三故佛隨宜爲說薀界三等言爲明樂三言爲顯一一各有三所化有情愚有三種有愚心所摠執爲我有唯愚色有愚色根亦有三謂利樂謂勝解此亦三種謂樂略及廣文故位謂弟子已過作意已熟習行初修事業三位別故過謂有情懷我慢行執我所隨迷識依緣三過別故病謂所化恃命族而生憍逸三病異故由此等緣如其次第世尊爲說界三何故世尊諸心所內別立想爲二薀耶頌曰諍根生死因 及次第因故 於諸心所法受想別爲薀論曰世間諍根略有二種謂貪著欲及貪著見初因受起後由想生味受力故貪著諸欲倒想力故貪著諸見又生死法以受及想爲最勝因耽樂受故執倒想故愛見行者生死輪迴由此二因及後當說次第因故應知別立受想爲薀其次第因次後當辯及聲兼顯諸心所中唯此受想能爲見二雜染法生根本故各別顯一識住名故依滅此二立滅定故諸如是等多品類因何故說無爲在處界非薀頌曰薀不說無爲義不相應故論曰諸無爲法若說爲薀立在五中或爲第六皆不應理義相違故所以者何彼且非色乃至非識故非在五聚義是薀非無爲法如彼色等有過去等品類差別可略一聚名無爲薀故非第六又無爲法與顚倒依及斷方便義相違故說有漏薀顯顚倒依說無漏薀顯斷方便無爲於此兩義都無義不相應故不立薀已辯諸薀廢立因緣當辯次第頌曰隨麤染器等 界別次第立論曰五薀隨麤隨染器等及界別故次第而立隨麤立者五中最麤所謂色薀有對㝵故五識依故六識境故五中初說四中最麤所謂受薀雖無形質而行相用易了知故四中初說三中最麤所謂想薀取男女等行相作用易了知故三中初說二中麤者所謂行薀貪等現起行相分明易了知故二中初說識薀最細故最後說隨染立者謂從無始生死已來男女於身更相染愛由顯形等故初說色如是色愛由耽受味故次說受此耽受味由想顚倒故次說想此想顚倒由煩惱力故次說行此煩惱力依能引發後有識生故後說識隨器等者謂色如器受所依故受類飮食增益損減有情身故想同助味由取怨親中平等相助生受故行似廚人由思貪等業煩惱力非愛等異熟生故識喩食者有情本中爲主勝故識爲上首受等生故卽由此理於受想等隨福行中但說識爲隨福行者又由此理說行緣識由此復告阿難陁曰識若無者不入母胎心雜染故有情雜染心淸淨故有情淸淨於受想等俱起法中如是等經但摽主識隨界別者謂欲界中色最爲勝諸根皆具有故色界受勝於生死中諸勝妙受具可得故三無色中想最爲勝彼地取相最分明故第一有中行最爲勝彼思能感最大果故此卽識住識住其中顯似世閒田種次第是故諸薀次第如是由此五薀無增減過卽由如是諸次第因於心所中別立謂受與想於心所中相麤生染類食同助二界中强故別立薀已隨本頌且就轉門說次第因四種如是當就還門復說一種謂入佛法有二要門一不淨觀二持息念不淨觀門觀於造色持息念門念於大種要門所緣故先說色由此觀力分析色相剎那極微展轉差別如是觀時身輕安故心便覺樂故次說受受與身合定爲損益損益於我理必不成由斯觀解我想卽滅法想便生故次說想由此想故達唯有法煩惱不行故次說行煩惱旣息心住調柔有所堪能故次說識已說順次逆次應說恐厭繁文應且止說一切有部顯宗論卷第二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10처는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5근과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5경. 1처의 일부는 법처에 포섭되는 무표색. 무표색(혹은 무표업)은 신체적 형태(즉 身業)와 말소리(즉 語業)를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잠재 세력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제2권과 제18권에서 자세하게 논의된다.
  2. 2)정색(rūpa prasāda)이란 광명이 차단됨이 없는 맑고 투명한 색이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3. 3)이하 ‘본론’은 본 『현종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비달마의 근본이 되는 논(즉 6족론과 『발지론』)이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품류족론』 제1권(한글대장경117,p.18).
  4. 4)이는 세친의 주장으로, 그는 『구사론』 제1권(권오민 역, 동국역경원, 2002, p.14)에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한’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앞에서 논설한 색 등의 5경을 말하며, ‘식’이란 바로 색ㆍ성ㆍ향ㆍ미ㆍ촉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즉 ‘그러한 식’의 소의(所依)가 되는 5가지 종류의 정색(淨色)을 그 순서대로 바로 안 등의 5근이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그는 『품류족론』에 따른 앞의 유부의 정설을 이설(異說)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이 같은 세친의 주장은 『순정리론』 제1권에서 자세하게 비판되고 있다.
  5. 5)『구사론』에서의 제2구는 ‘성유유팔종(聲唯有八種)’으로, 소리를 여덟 종류—감각이 있는 유집수(有執受)의 대종(大種)에 근거한 소리(즉 유정의 소리)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무정물의 소리)로서 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노랫소리와 환상으로 나타난 변화인의 부드러운 소리), 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이를테면 꾸짖는 소리와 변화인의 꾸짖는 소리), 비언어적인 즐거운 소리(이를테면 장단에 맞춘 손뼉소리와 악기소리), 비언어적인 불쾌한 소리(이를테면 주위를 환기시키는 손뼉소리와 천둥소리)—로 분별하고 있다. 그러나 중현에 의하면, 유집수대종에 근거한 소리는 또한 가행(加行, 노력)에 의해 생겨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가행에 의해 생겨나는 것은 다시 손 등의 가행에 의해 생겨나는 소리와 어표업(語表業, 말)에 의해 생겨나는 소리, 어표업의 가행에 의해 생겨나는 것도 다시 의미를 지닌 말과 그렇지 않은 말에 의해 생겨나는 소리, 의미를 지닌 말에 의해 생겨난 소리도 선악의 의미가 분명한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로 분별되며, 무집수의 대종에 근거한 소리 역시 이와 같이 분별될 수 있다.(자세한 내용은 『순정리론』 제1권을 참조 바람) 나아가 손(유집수대종)과 북(무집수대종)의 화합에 의해 생겨난 소리도 있는 등 소리의 차별상은 쉽게 분별할 수 없기 때문에 단지 두 가지 종류로만 분별하고 있을 뿐이다.(후술)
  6. 6)여기서 장양(완전한 명칭은 所長養)은 음식 등에 의해 길러진 후천적인 대종을, 이숙(완전한 명칭은 異熟生)은 전생의 선악업에 의해 초래되는 선천적인 대종을 말하며, 등류성이란 원인과 동류의 성질을 지닌 결과, 즉 등류과로서의 대종을 말함. 참고로 소리는 이숙생이 아니다. 소리가 만약 이숙생이라면 현재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생겨나야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권을 참조할 것.
  7. 7)색처는 가시적인 것이라 쉽게 그 특성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소리의 경우처럼 두 가지로 분별하여 설하지 않았다는 뜻.
  8. 8)구유인이란 결과와 동시에 존재하는 원인으로, 유집수 대종과 무집수 대종이라는 두 가지 원인에 의해 어떤 하나의 소리가 산출되었다고 한다면, 둘 중의 하나는 구유인이 아니게 된다. 예컨대 손바닥(유집수대종)으로 북(무집수대종)을 쳤을 경우, 이 때 소리의 원인은 손바닥인가, 북인가? 이 경우 사실상 각기 자신의 소리를 내지만 북의 소리만 들리는 것은 손바닥의 소리가 북의 소리에 흡수되어 버렸기 때문이다.(후술)
  9. 9)여기서 세 가지 소리란 유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와 무집수 대종에 근거한 소리, 그리고 양자 모두에 근거한 소리를 말한다.
  10. 10)『품류족론』 제1권(한글대장경117, p.18).
  11. 11)여기서 차가움은 따뜻하기를 바라는 근거[因], 허기짐은 먹기를 바라는 근거, 목마름은 마시기를 바라는 근거로서, 이는 원인에 따라 결과의 명칭을 설정한 것이다. 그리고 조색(造色) 중에 특히 수대(水大)와 풍대(風大)가 증대되면 차갑고, 풍대가 증대되면 허기짐이 있으며, 화대(火大)가 증대하면 목마름이 있게 된다.
  12. 12)즉 대종의 극미(極微)는 순간적으로 출현하는 것(찰나멸성)이기 때문에, 극미가 출현하여 접촉하였다면, 그것은 이미 두 순간에 걸친 것이 된다. 『구사론』 제2권(앞의 책, p.98)에서 이 같은 논의는 세우(世友)에 의해 주장되고 있다. “제 극미가 상호 접촉하게 되면, 이는 즉 응당 마땅히 다음 찰나에 이르도록 지속하는 것이어야 한다.”
  13. 13)무간(無間,nirantaratva)은 근과 경 사이에 어떠한 간격도 없이 절대적으로 근접한다는 뜻이다. 유부에 의하면 물질(색법)의 극소인 극미가 다른 극미와 결합하기 위해 접촉한다면 그것은 면을 지니게 되어 더 이상 극미가 아니어야 한다. 따라서 극미의 접촉은 절대적 근접인 무간을 일시 가설한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극미로 이루어진 신근과 촉경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다만 서로 지극히 가까이하는 경우[隣近], 그것을 일시 ‘접촉되는 것’과 ‘능히 접촉하는 것’으로 가설할 뿐이다. 물질적 존재(5근과 5경)의 접촉과 불접촉의 문제에 대해서는 본론 제4권에서 상론된다.
  14. 14)이는, 신근과 대상(촉경)은 실제적으로 접촉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이유에서 꽃을 손으로 만질 때 꽃의 색이 변하는 것인가? 에 대한 해명이다. 이를테면 어떤 지방의 땅이 기름지고 물이 풍부하면 농부에 관계없이 저절로 풍년이 들지만 가물면 그렇지 않듯이, 색의 소의(所依)인 4대종이 변괴하기 때문에 능의(能依)인 색 등이 변괴하는 것이지 손 때문이 아니라는 뜻.
  15. 15)무표색(avijñapti-rūpa)이란 5근ㆍ5경과는 달리 외부로 표출되지 않은 색이란 뜻으로, 무표업(無表業)이라고도 한다. 유부에 있어 색법은 사실상 행위 즉 업설(業說)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외부로 표출되는 행위[表業]는 5근과 5경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신업(身業)은 신체적 형태를, 어업(語業)은 말소리를 본질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는 행동된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의 또 다른 색법을 낳는데, 이를 무표색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량부나 세친은 이러한 무표색의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구사론』상에서의 논설 역시 정리(正理)에 어긋나기 때문에 본송은 『구사론』의 그것을 완전히 개작한 것이다. 『구사론』의 본송은 다음과 같다.(이에 대한 난점에 대해서는 『순정리론』 제2권을 참조할 것.)
  16. 16)원인이 되어 평등하게 업을 일으키는 마음을 인등기(因等起)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뭔가를 생각하고[審慮思] 결정짓고[決定思] 바야흐로 신체적 행위나 말을 일으키고 발하고자[動發勝思] 할 때, 동발승사의 첫 순간(혹은 결정사의 최후 순간)을 근인등기(近因等起)라 하고, 그 이전을 원인등기(遠因等起)라 한다.
  17. 17)원문에서는 ‘정유등(定唯等)’으로 되어 있으나 『순정리론』 (제2권)에 따라 ‘정유선(定唯善)’으로 고쳐 번역하였다.
  18. 18)‘계(界,dhātu)’란 종족(種族,gotra)의 뜻이다. 여기서 ‘종족’이란 바로 생의 근본[生本]이라는 뜻으로, 하나의 산(山) 중에 다수의 동(銅)ㆍ철(鐵)ㆍ금ㆍ은 등이 있는 것을 다계(多界) 즉 다양한 광물의 세계라고 하듯이 하나의 소의신 중에 열여덟 종류의 제법의 종족이 있는 것을 ‘18계’라고 이름한다.(후술)
  19. 19)이는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2)에서의 논설이다. “지ㆍ수ㆍ화ㆍ풍은 능히 자상(自相)과 소조색(所造色)을 보지하기 때문에 ‘계(dhātu)’라고 이름하며, 이와 같은 4계를 또한 역시 ‘대종(mahābhūta)’이라고도 이르니”. 여기서 대종은 일차적 물질, 소조색[또는 조색(造色)]은 그것이 결합하여 생겨난 이차적 물질을 말한다. 즉 4대종은 일체의 물질의 근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계’이다.
  20. 20)여기서 ‘종(bhūta)’이란 종류의 뜻이 아니라 만물의 근본이 되는 종자의 뜻이다. 곧 이러한 대종의 차별에 따라 이차적 물질인 조색에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대(mahā)’는 보편[遍] 즉 만물에 두루한다는 뜻이다.(후술)
  21. 21)견고성 등이란 4대종의 자상으로, 지(地)는 견고성을, 수(水)는 습윤성을, 화(火)는 온난성을, 풍(風)은 운동성을 본질로 한다.
  22. 22)‘향’과 ‘미’는 단식(段食, 분단되어 섭취되는 물질적 에너지)으로서, 색계에 태어나는 이는 이에 대한 탐욕을 버렸기 때문이다.(본론 제3권 참조) 따라서 색계에는 비식(鼻識)과 설식(舌識)도 존재하지 않는다.
  23. 23)대종이 흩어지지 않게 끌어당겨 포섭[引攝]하는 것은 수대(水大)의 작용이며, 가속하여 낙하하는 운동성(유동성)은 풍대(風大)의 작용이다. 현실에서의 돌은, 제 형태를 유지하여 다른 사물에 저항하는 작용[持用, 즉 견고성]을 갖는 지대(地大)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물을 포섭하는 작용[攝用, 즉 습윤성]을 갖는 수대와, 사물을 성숙시키는 작용[熟用, 즉 온난성]을 갖는 화대와, 사물을 동요하게 하는 작용[長用, 즉 운동성]을 갖는 풍대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로서 존재한다. 이 세 가지는 다만 두드러지지 못하였을 뿐이다.(후설)
  24. 24)물이 배를 띄울 수 있는 것은 제 형태를 유지하여 다른 사물에 저항하는 작용[持用]을 갖기 때문으로, 이는 견고성[堅]을 본질로 하는 지대(地大)의 작용이다.
  25. 25)원문에는 ‘지(地)ㆍ수(水)ㆍ풍(風)’으로 되어 있으나 ‘풍’은 화(火)의 오식(誤植)임.
  26. 26)이를 줄여 지(持)ㆍ섭(攝)ㆍ숙(熟)ㆍ장(長)이라 하며, 이는 다음에 설할 4대의 자상 즉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의 대구(對句)로 항상 함께 일컬어진다.
  27. 27)다음의 본송에서 설하겠지만, 지계(地界)는 우리가 지금 바라보는 땅이 아니라 견고성을 본질로 하는 물질적 요소이다. 따라서 이는 직접 지각되지 않으며, 다만 사물로 하여금 제 형태를 유지하여 다른 사물에 저항하게 하는 작용[持業]을 통해 추리된다. 그래서 앞서 4계의 작용이 바로 자상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자세한 내용은 『순정리론』 제2권을 참조할 것)
  28. 28)즉 대종은 유정의 이익과 손상을 초래하는 근원적인 것이며, 또한 크나큰 작용을 갖기 때문에 ‘대종’이라 하였던 것이다.
  29. 29)이하 우리가 현실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可見] 땅ㆍ물ㆍ불ㆍ바람과 같은 가(仮)의 4대와,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과 같은 자신의 고유한 성질과 작용을 갖는 실(實)의 4대(즉 4계)의 차이에 대해 분별하고 있다.
  30. 30)일반적으로 ‘땅’에 대해서는 생긴 모양(형색)이나 색깔(현색)을 말하지 냄새나 맛을 말하지 않는다는 뜻.
  31. 31)촉처(觸處)의 11가지 중 앞의 네 촉은 지ㆍ수ㆍ화ㆍ풍의 4대종이었다.
  32. 32)향(香)ㆍ미(味)는 색계에 존재하지 않아 오로지 욕계의 그것만을 나타내지만, 현색과 형색은 욕계와 색계의 땅 등을 모두 나타내기 때문에 색ㆍ향ㆍ미ㆍ촉의 4처로 이루어진 땅을 현색과 형색만으로 규정하게 되었다는 뜻.
  33. 33)땅이나 옷은 모두 4대종으로 이루어진 이차적 물질로서, 색채와 형태가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색처에 포섭되는 것이지만, 다만 세간의 언어적 명칭으로서만 차별된다.
  34. 34)‘생’이란 불상응행법의 하나로, 사물을 생겨나게 하는 힘을 말한다. 즉 색ㆍ향ㆍ미ㆍ촉의 4처를 본질로 하는 옷 등이 ‘옷’이라는 말소리에 의해 의식의 상속 상에 생겨난 경우, 소리가 더해져 5처를 본질로 한다고 해야 하겠지만, ‘생’ 자체는 ‘옷’이라는 말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니며, ‘옷’이라는 말이 옷에 상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색 등은 항상 옷에 존재하기 때문에 옷 등은 오로지 4처만을 본질로 한다는 뜻.
  35. 35)다시 말해 실유의 존재는 더 이상 분할 환원할 수 없는 궁극적 존재(이를 ‘법’이라 함)로서, 하나의 본질, 하나의 작용만을 지닌다. 만약 그렇지 않고 다수의 본질을 지닌 것, 그래서 다수의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다수의 법이 결합하여 현상한 가설적 존재일 뿐이다. 곧 본 항에서의 논의의 요지는 여러 감관에 의해 파악되는 현실에서의 땅(혹은 물, 불)이 물질의 질적 궁극으로서의 지대(地大)가 아니라 4대종의 복합물이며, 그럼에도 그것을 현색과 형색을 본질로 하는 ‘땅’ 등이라고 한 것은 다만 세간의 언어적 관습에 따른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36. 36)바람을 색채나 형태로 파악하는 것은 보편적 사실이 아니며, 또한 그렇게 파악된 바람은 부정(不淨)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의 질적 구극인 풍대와는 차별된다. 그래서 본송에서 ‘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시 그러하다고 한다’고 하였지만, 현실에서 경험하는 ‘바람은 바로 풍대이다’라는 주장이 유부의 선설(善說)이라는 뜻.
  37. 37)여기서 ‘이 가운데’란 ‘색온 가운데’라는 뜻으로, 색온 가운데 무표색을 제외한 5근과 5경은, 12처 중에서는 의(意)와 법(法)을 제외한 10처(處)에, 18계 중에서는 ‘의’와 ‘법’과 6식(識)을 제외한 10계(界)에 해당된다.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7)에는 “이 가운데 근과 경을 바로 10처ㆍ10계라고 인정한다[此中根與境 許卽十處界].”.로 되어있다. 여기서 ‘인정한다’(許,iṣṭa)는 말은 ‘전설(傳說)’이란 말처럼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설에 대한 경주 세친의 불신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유부에서는 온(蘊)ㆍ처(處)ㆍ계(界) 3문(門)의 실유(實有)를 주장하고 있는데 반해 경량부에서는 이 중에 ‘온’과 ‘처’의 가유(假有)를 주장하며, 따라서 가유인 ‘처’의 그것으로 실유인 ‘계’의 체(體)로 삼을 수 없기 때문에 유부에서만 ‘인정한다’고 설한 것이라고 하였지만(『구사론기』 제1권 말, 대정장41,p.25상), 중현은 이 말을 삭제하였다.
  38. 38)‘수’의 작용은 대상(所緣)을 영납(수용)하는 것이지만, 그 밖의 다른 심ㆍ심소법도 역시 동일한 대상을 영납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이의 차별을 알기 어렵다. 다시 말해 지각[受]ㆍ표상[想]ㆍ확인[勝解]ㆍ판단[慧] 등은 모두 동일한 대상에 관한 지식작용으로, ‘수’를 다만 대상을 영납하는 것이라고 규정할 경우 다른 심ㆍ심소법과의 변별성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보다 구체적으로 ‘촉을 영납하는 것’으로 규정하여 이를 자성수라고 하였다는 뜻.
  39. 39)과거ㆍ현재ㆍ미래에 따른 3수, 안촉(眼觸) 내지 의촉(意觸)에 근거하여 생겨난 안촉소생수(眼觸所生受) 내지 의촉소생수(意觸所生受)의 6수를 말함.
  40. 40)상(saṃjña)이란 인식의 대상을 취하여 개념화시키는 의식작용을 말한다. 말하자면 표상작용이다.
  41. 41)‘상응’이란 ‘심상응’의 준말로서, 마음에 대해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심소법(마음의 작용)을 말한다. 이러한 상응행법에는 사(思) 등의 46가지가 있으며, 불상응행법에는 득(得) 등의 14가지가 있다. 상응법에 대해서는 본론 제10~11권에서, 불상응행법에 대해서는 본론 제12~14권에 걸쳐 상론된다.
  42. 42)『잡아함경』 제3권 제63경.
  43. 43)업에는 내적 의지작용인 사업(思業)과 그것에 의해 조작되어 외부로 표출된 신(身)ㆍ어(語)의 사이업(思已業)이 있다. 본론 제33권에서 상론함.
  44. 44)행온의 본질을 오로지 ‘사(思)’로 이해한 것은 경량부이다. 세친은 『구사론』 제1권(앞의 책, p.29)에서 “4온을 제외한 그 밖의 유위의 행(行)은 모두 행온에 포섭된다고 마땅히 인정[許]해야 한다”고 하여 불신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에 대해 보광은 “경부(經部)는 경전 상에서 오로지 6사신(思身)을 행온이라 설하였기 때문에 단지 ‘사’만을 행온이라 하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즉 경량부에서는 유부에서 행온에 포함시킨 심소법이나 불상응행법을 모두 마음의 변화차별 내지 개념적 존재[假說]라고 하여 그 실재성을 부정하고, 유위 조작(造作,즉 행)의 본질을 ‘사’로 파악하였다.
  45. 45)법처란 그 밖의 다른 11처(안처 내지 의처, 색처 내지 촉처) 이외의 모든 법을, 법계란 그 밖의 다른 17계(안계 내지 의계, 색계 내지 촉계, 안식계 내지 의식계) 이외 모든 법을 포함한다.
  46. 46)안식(眼識)은 색을, 내지 의식(意識)은 법(비감각적 대상)을 요별(了別)하는 것으로서, 어떤 한 대상의 상을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식’은 대상에 따라 그것과 유사하게 생겨난 것일 뿐이기 때문에 단순히 대상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인식으로 규정될 뿐 지극히 무내용적인 것으로서(『구사론』 제30권, 권오민 역, 동국역경원,2002,p. 1380참조), 대상의 형상을 지각하고 판단ㆍ확인하는 등의 개별적인 작용은 심소(心所)의 역할이다.
  47. 47)이는 식(識)을 요별하는 것이라고 할 때, ‘누가 요별하는 것인가?’ 하는 인식주체에 관한 논설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체(pudgala)를 부정하는 불교에 있어 식을 떠나 ‘요별하는 자’는 별도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불이 탄다’고 할 때, 타는 작용을 일시 ‘불’이라 가설할 뿐 작용을 떠난 실체로서의 불(즉 타지 않는 불)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식의 요별작용에 대해 일시 작자(즉 요별하는 자)를 가설할 수 있다는 뜻.
  48. 48)『잡아함경』 제15권 제372경.
  49. 49)식(識) 즉 마음 자체는 단일하지만, 그것이 발동하게 되는 근거인 안근 내지 의근에 따라 안식(眼識) 내지 의식(意識)으로 나누어진다.
  50. 50)의계(意界, 즉 의근)란 과거로 낙사(落謝)한 전 찰나의 6식을 말하는 것으로, 후 찰나의 식을 낳는 근거(所依)가 된다. 이를테면 찰나찰나의 흐름인 어떤 한 지점의 강물은 거기에 이르는 순간 밑으로 내려감과 동시에 위의 강물을 끌어내리듯이 식(識)이 현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 찰나의 식이 과거로 낙사함과 동시에 미래의 식을 인기(引起)하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데, 이를 개도의(開導依)라고 한다. 그리고 현행식은 소의에 따른 6식의 차별이 있지만, 과거로 낙사한 식은 개도의로서의 작용만을 갖기 때문에 다시 6계(界)로 나누지 않고 1계(즉 의계)로 삼은 것이다.
  51. 51)6식계와 의계는 별체(別體)가 아니기 때문에 6식을 계로 설정하면 의계는 무용하여 17계가 되어야 할 것이며, 의계를 설정하면 6식계는 무용하여 12계가 되어야 한다는 뜻.
  52. 52)여기서 ‘개피’란 후 찰나의 의식을 인기(引起)하기 위해 전 찰나의 식이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길을 열어주는 것을 말함.
  53. 53)즉 일체법(5온과 무위, 즉 5位) 가운데 색법(5근ㆍ5경ㆍ무표색)은 색온에, 심법(6식과 의근)은 의처에, 그 밖의 심소법과 불상응행법과 무위법은 법계에 포섭되기 때문에 일체법은 하나의 온ㆍ처ㆍ계 즉 색온ㆍ의처ㆍ법계에 모두 포섭될 수 있는 것이다.
  54. 54)이는 ‘포섭’이라는 말의 의미에 관한 이설이다. 즉 제법의 상호 포섭관계에 있어 유부의 경우, 이를테면 안근은 그것과 동류의 존재(同性)인 색온과 안처와 안계 등에 포섭되듯이 동일한 자성을 지닌 법만을 포섭한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다른 부파에서는 서로 다른 법(他性) 사이에만 포섭관계가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순정리론』(제3권)에서는 이에 대한 예증으로 ‘8정도 중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은 계온(戒蘊)에, 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은 정온(定蘊)에,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는 혜온(慧蘊)에 포섭된다’고 설한 계경을 들고 있다.
  55. 55)만약 포섭관계가 서로 다른 존재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다시 말해 a가 b를 포섭하는 것이라면, 이를테면 c d 등 그 밖의 다른 모든 존재를 포섭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만약 a와 b 사이에 특성상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뜻.
  56. 56)이는 3과(科)의 포섭관계에 부수하는 문제로서, 18계 중 안(眼)ㆍ이(耳)ㆍ비계(鼻界)는 각기 두 개가 있으므로 18계가 아니라 21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이다.
  57. 57)온ㆍ처ㆍ계 3법에 대해 유부 비바사사(毘婆沙師)들은 실유라고 주장하지만, 경량부에서는 오로지 ‘계’ 만을, 세친은 ‘처’와 ‘계’를 실유라고 하였다.(『구사론기』 제1권말, 대정장41,p.29상: 『구사론소』 제1권 餘, 대정장41,p.489상 참조)
  58. 58)‘차의 부품’이라 할 때, 이는 ‘차가 소유하는 부품’이라거나 ‘차가 바로 부품’이라는 말이 아니라 차를 구성하는, 혹은 차의 근거가 되는 부품이라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적취의 뜻’이라는 말은 ‘적취의 근거가 되는 뜻’이라는 의미로서, 여기서 ‘뜻’은 적취의 근거[所依]를 나타낸다. 따라서 적취는 실재하지 않지만 그 근거가 되는 온은 실재한다는 것이다.
  59. 59)유부에서는 물질[色]의 최소단위인 극미를 단일한 극미[事極微]와 복합의 극미[聚極微]로 나누어, 무방분(無方分)ㆍ무대(無對)인 전자는 오직 관념[각혜(覺慧)]으로써만 알려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단일한 극미는 적취하여 비로소 자상을 갖는 하나의 실제적 극미[一實極微]가 되므로, 적취(rāśi)란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실유의 충족조건이며, 따라서 그것과 같은 뜻인 온 역시 실재한다는 것이다.
  60. 60)처(處,āyatana)란 어원적으로 ‘심(心)ㆍ심소법(心所法)을 낳는 통로(aya) 즉 문(門, āya-dvara)’이라는 뜻에서 파생된 말이라는 뜻. 즉 안처와 색처 등을 통해 안식 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61. 61)앞서 언급한대로 의계 즉 의근은 6식이 과거로 낙사한 의식으로 6식과는 다른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별도의 ‘계’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는 힐난. 유부에 의하면, 전 찰나의 의근은 현행하는 의식 즉 6식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6식과 의근은 능의(能依)와 소의(所依)로서의 차별이 있다.
  62. 62)『구사론』에서 제1구는 ‘어리석음과 근기와 즐기는 것에 세 가지가 있기 때문에[愚根樂三故]’로 되어 있지만, 중현은 보다 자세하게 분별하기 위해 ‘등’이라는 말을 더하였다.
  63. 63)심소에 어리석은 이들에게는 그것을 수ㆍ상ㆍ사로 나누어 상설(詳說)한 5온을 설하였고, 색에 대해 어리석은 이들에게는 그것을 5근과 5경으로 나누어 상설한 12처를 설하였으며, 색과 심에 어리석은 이들에게는 그것을 각기 10가지와 7가지로 나누어 상설한 18계를 설하였다.
  64. 64)식주란 의식이 머물게 되는 근거를 말하는 것으로, 의식은 색ㆍ수ㆍ상ㆍ행온에 머물기 때문에 이를 4식주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12권를 참조할 것.
  65. 65)멸정 [혹은 멸진정(滅盡定)]이란 멸수상정(滅受想定)의 준말로서, 의식 즉 ‘수’와 ‘상’이 끊어진 무심정을 말한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7권을 참조할 것.
  66. 66)『구사론』에서 제1구는 ‘온은 무위를 포섭하지 않으니[蘊不攝無爲]’이다. 그러나 『순정리론』이나 송(宋) 원(元) 명(明)의 3본(本) 및 구송본(舊宋本)의 현장 역 『구사론』에서도 ‘불설(不說)’로 되어있을 뿐더러 원문도 ‘noktam(na uktam)’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불섭(不攝)’은 전승의 착오로 생각된다.
  67. 67)유루온은 염오법의 소의가 되고, 무루온은 청정법(열반)의 소의가 된다. 즉 ‘온’이라는 말은 유루ㆍ무루 모두에 통하지만, 무위에는 이러한 두 뜻이 없기 때문에 ‘온’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68. 68)즉 색계 초정려에서는 희수(喜受)와 낙수(樂受)가 생겨나고, 제2정려에서는 희수가, 제3정려에서는 낙수가, 그리고 제4정려에서는 사수(捨受)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38권에서 상론한다.
  69. 69)세 가지 무색계란 공무변처(空無邊處)ㆍ식무변처(識無邊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로서, 여기서는 공(空)과 식(識) 등의 상(相)만을 취하기 때문에 상(想)의 상이 가장 수승하다.
  70. 70)‘식’을 최후에 설한 까닭은 그것이 마치 밭에 뿌려지는 종자처럼 색ㆍ수ㆍ상ㆍ행 가운데에 머물기 때문이다. 4식주에 대해서는 본권 주64)를 보라.
  71. 71)부정관은 탐욕을 대치(對治)하기 위해 소의신의 부정(不淨)한 모습을 관찰하는 관법(觀法)이며, 지식념은 어지러운 마음을 대치하기 위해 들숨과 날숨을 헤아리는(기억하는) 관법이다. 이에 대해서는 본론 제29권에서 상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