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解脫道論卷第十一

ABC_IT_K0968_T_011
028_1087_b_01L해탈도론 제11권
028_1087_b_01L解脫道論卷第十一


아라한 우파저사양나라 말로 대광 지음
양 부남삼장 승가바라 한역
이태승 번역
028_1087_b_02L阿羅漢優波底沙梁言大光造
梁扶南三藏僧伽婆羅 譯


11. 오방편품 ②
028_1087_b_04L五方便品之二

【문】무엇이 성제방편(聖諦方便)인가?
028_1087_b_05L云何聖諦方便
【답】사성제를 말하니, 고성제ㆍ고집성제ㆍ고멸성제ㆍ고멸도성제이다.
028_1087_b_06L謂四聖諦苦聖苦集聖諦苦滅聖諦苦滅道聖諦
【문】무엇이 고성제(苦聖諦)인가?
028_1087_b_07L云何苦聖諦
【답】생고(生苦)ㆍ노고(老苦)ㆍ사고(死苦)ㆍ우고(憂苦)ㆍ우비고(憂悲苦)ㆍ뇌고(惱苦)ㆍ고고(苦苦)ㆍ원증회고(怨憎會苦)ㆍ애별리고(愛別離苦)ㆍ구부득고(求不得苦)로서, 줄여서 5수음고(受陰苦)라 한다.
028_1087_b_08L生苦老苦死苦憂悲苦惱苦苦苦怨憎會苦愛別離苦求不得苦以略五受陰苦
생고란 중생 각 종류에게 모든 음이 일어나는 것, 이 일체가 고의 집합이란 의미이다. 노고는 생겨난 모든 계(界)가 성숙함으로써 이 힘[力]ㆍ색(色)ㆍ모든 근[諸根]ㆍ염(念)ㆍ혜(慧)를 잃는다는 의미이다. 사고란 수명이 소멸하며 두려움을 짓는다는 의미이다. 우고란 고처(苦處)에 이르러 마음이 두려워하는 것이니, 이것은 속으로 탄다는 의미이다. 우비고란 고통이 이르러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니, 이것은 안팎으로 탄다는 의미이다. 고고란 몸의 고통으로서, 이것을 원인으로 몸이 고통스럽다는 의미이다.
028_1087_b_10L生苦於衆生種類諸陰起此一切苦集老苦者以生諸界熟此失力色諸根念慧義死苦者壽命滅作畏怖義憂苦者至苦處心畏懼此內燒義悲苦者苦至語言此內外燒義苦苦身苦此因苦身義
뇌고란 마음의 고통으로서, 이것을 원인으로 마음이 고통스럽다는 의미이다. 원증회고란 사랑스럽지 않은 중생과 함께 화합해 이것이 고를 짓는다는 의미이다. 애별리고란 사랑스러운 중생과 흩어지고 이별해 이것이 우고를 짓는다는 의미이다. 구부득고란 사랑스럽지 않은 것과 헤어지고 사랑스러운 것과 화합하는 것을 즐기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여 즐거움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028_1087_b_16L惱苦者心苦因苦心義怨憎會苦者與不可愛衆生共和合此作苦義愛別離苦者可愛衆生共分散離別此作憂苦義求不得苦者樂得與不可愛別離可愛和合彼不得失樂義
줄여서 5수음고라 한다는 것은 5수음고를 떠나지 않는 것으로, 이러한 까닭에 줄여서 5수음고라 한다.
028_1087_b_21L已略說五受陰苦者不離五受陰苦是故以略五受陰苦
【문】무엇이 5수음인가?
云何五受陰
028_1087_c_02L【답】색수음(色受陰)ㆍ통수음(痛受陰)ㆍ상수음(想受陰)ㆍ행수음(行受陰)ㆍ 식수음(識受陰)이다. 음방편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이,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028_1087_c_02L色受陰痛受陰想受陰行受陰識受陰如陰方便廣說如是可知
여기에 두 종류의 고가 있으니, 처고(處苦)와 자성고(自性苦)이다. 여기에서 생고ㆍ사고ㆍ원증회고ㆍ애별리고ㆍ구부득고ㆍ요약한 5수음고 이것을 처고라 한다. 그리고 우고ㆍ우비고ㆍ뇌고, 이것을 자성고라 한다.
028_1087_c_04L於是二種苦自性苦於是生苦死苦怨憎會苦愛別離苦求不得苦以略五受陰苦此謂處苦憂苦憂悲苦惱苦此謂自性苦
세 종류의 고란 고고(苦苦)ㆍ괴고(壞苦)ㆍ행고(行苦)이다. 여기에서 신고(身苦)ㆍ심고(心苦), 이것을 고고라 한다. 유루(有漏)의 낙수(樂受)의 그 처(處)가 파괴되는 것, 이것을 괴고라 한다. 5수음은 행고이다. 이상의 것을 고성제라 한다.
028_1087_c_08L三種苦者苦苦壞苦行苦於是身苦心苦是謂苦苦有漏樂受彼處是謂壞苦五受陰行苦此謂苦聖
【문】무엇이 고집성제(苦集聖諦)인가?
云何苦集聖諦
【답】애(愛)는 다시 태어나게 하고, 욕(欲)과 함께 일어나며, 곳곳에서 일어난다. 이와 같이 욕애(欲愛)ㆍ유애(有愛)ㆍ불유애(不有愛)가 있다.
028_1087_c_11L愛令復生欲共起處處起如是欲愛有愛不有
여기에서 “애가 다시 태어나게 한다”는 것은 애가 있으면 다수의 생이 있게 되는 것이다. “애는 고의 집(集)이다”라고 하는 것은 오직 애가 함께 하지 않는[不共] 까닭에 고의 집이라 설한다. “욕과 함께 일어난다”는 것은 오직 애가 환희시키는 것을 일어남이라 하고, 물들게 하는 것을 염(染)이라 하여, 염과 함께 환희를 일으키는 것이다. “곳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곳곳에서 신성(身性)을 일으키면 그 처를 기뻐하며, 그 처가 좋아하는 색이면 그 처를 기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욕애ㆍ유애ㆍ비유애가 있다”에서 유애와 불유애를 제외한 나머지 애가 욕애이다. 유애는 상견(常見)과 함께 일어나며, 비유애는 단견과 함께 일어난다. 이것을 고집성제라 한다.
028_1087_c_13L此愛令復生者有愛多成令有生苦集者唯愛不共故說苦集與欲共起者唯愛令歡喜名起令染名染共染起喜起者是處處令身性起處歡喜是處可愛色是處歡喜如是欲愛有愛非有愛除有愛及不有愛餘愛是欲愛有愛者與常見共起有愛者與斷見共起此謂苦集聖諦
【문】무엇이 고멸성제(苦滅聖諦)인가?
028_1087_c_20L云何苦滅聖諦
【답】애만 소멸하면 나머지가 없다. 버리고[捨], 멀리 벗어나고[遠離], 해탈하면 처가 없다. 이것을 고멸성제라 한다.
028_1087_c_21L唯愛滅無餘遠離解脫無處此謂苦滅聖諦
【문】그렇지 않다. 이것은 또한 집의 소멸이니,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고의 원인이 소멸한다고 말씀하셨는가?
028_1087_c_22L此亦集滅何故世尊說苦因滅
【답】고의 원인이 소멸하는 까닭에 생멸하지 않게 되니, 작증(作證)의 뜻과 상응한다. 이러한 까닭에 집이 소멸하며, 세존도 고의 소멸을 설하셨다.
028_1087_c_23L因滅故成不生滅應作證義是故集世尊說苦滅
【문】무엇이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인가?
云何苦滅道聖諦
028_1088_a_02L【답】이 8정도분(正道分)이다. 이와 같은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이다.
028_1088_a_02L此八正分道如是正見正思惟正業正命正精進正念正定
정견이란 4제의 지(智)이다. 정사유란 이 3선사유(善思惟)이다. 정어란 4악행을 떠나는 것이다. 정업이란 3악행을 떠나는 것이다. 정명이란 사명(邪命)을 떠나는 것이다. 정정진이란 4정근이다. 정념이란 4념처이다. 정정이란 4선이다.
028_1088_a_04L正見四諦智正思惟者是三善思惟語者離四惡行正業者是離三惡行正命者離邪命正精進者四正勤念者四念處正定者四禪
또 만약 성도(聖道)를 수행하면 니원(泥洹)을 지견(知見)한다. 이것을 정견이라 한다. 오직 니원을 각(覺)하는 것, 이것이 정사유이다. 그가 사어(邪語)를 끊는 것, 이것이 정어이다. 사업(邪業)을 끊는 것, 이것이 정업이다. 그가 사명을 끊는 것, 이것이 정명이다. 사정진(邪精進)을 끊는 것, 이것이 정정진이다. 니원을 염하는 것, 이것이 정념이다. 니원에 온 마음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 정정이다.
028_1088_a_08L復次若脩行聖道於泥洹知見此謂正見唯於泥洹覺是正思惟彼斷邪語是正語斷邪業是正業彼斷邪命是正命邪精進是正精進於泥洹念是正念於泥洹專心是正定
여기에서 혜근(慧根)ㆍ혜력(慧力)ㆍ혜여의족(慧如意足)ㆍ택법각분(擇法覺分)은 내정견(內正見)에 들어가는 것을 성취한다. 정진근(精進根)ㆍ정진력(精進力)ㆍ정진여의족(精進如意足)ㆍ욕여의족(欲如意足)ㆍ정진각분(精進覺分)ㆍ4정근은 내정진(內精進)에 들어가는 것을 성취한다.
028_1088_a_13L於是慧根慧力慧如意足擇法覺分成入內正見進根精進力精進如意足欲如意足精進覺分四正勤成入內精進
염근(念根)ㆍ염력(念力)ㆍ염각분(念覺分)ㆍ4념처는 내정념(內正念)에 들어가는 것을 성취한다. 정근(定根)ㆍ정력(定力)ㆍ심여의족(心如意足)ㆍ신근(信根)ㆍ신력(信力)ㆍ정각분(定覺分)ㆍ희각분(喜覺分)ㆍ의각분(猗覺分)ㆍ사각분(捨覺分)은 내정정(內正定)에 들어가는 것을 성취한다. 이와 같이 37보리법은 8정도 내에 들어가는 것을 성취한다. 이것을 고멸도성제라 한다. 이상의 것을 4성제라 한다.
028_1088_a_16L念根念力念覺分四念處成入內正念定力心如意足信根信力定覺分喜覺分猗覺分捨覺分成入內正定如是三十七菩提法成入八正道內謂苦滅道聖諦此謂四聖諦
【문】어떠한 까닭에 4성제를 설하며, 그것은 세 가지도 아니고 다섯 가지도 아닌가?
028_1088_a_21L何故說四聖諦不三不五
【답】일체는 세간ㆍ출세간의 과(果)와 인(因)이 되는 까닭에 네 가지를 이룬다.
028_1088_a_22L一切疑爲世閒出世閒果因故成四
028_1088_b_02L【문】무엇이 세제(世諦)의 과인가. 고(苦)와 집(集)은 세제의 인과이다. 멸(滅)은 출세제의 과이다. 도(道)는 출세제의 인이다. 이러한 까닭에 네 가지이며, 세 가지도 아니고 다섯 가지도 아니다. 또 “마땅히 알아야 하고, 마땅히 끊어야 하고, 마땅히 깨달아야 하고, 마땅히 닦아야 한다”는 4구(句) 때문에 네 가지를 이룬다.
028_1088_a_23L云何世諦果苦集世諦因果滅出世諦果世諦因是故四不三不五復次應知應斷應證應脩以四句故成四
이 4성제는 11행으로써 뛰어난 바를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구의(句意)로써, 상(相)으로써, 차제(次第)로써, 약(略)으로써, 비유(譬喩)로써, 분별(分別)로써, 수(數)로써, 일(一)로써, 종종(種種)으로써, 차제광(次第廣)으로써, 상섭(相攝)으로써 알아야 한다.
028_1088_b_03L此四聖諦以十一行可勝可知如是以句以相以次第以略以譬喩以分別以一以種種以次第廣以相攝
【문】무엇이 구의로써 아는 것인가?
028_1088_b_06L云何以句義
【답】성제(聖諦)란 성인이 말씀하신 바를 성제라 한다. 그것에 통달하는 까닭에 성제를 이룬다. 제란 여시(如是)의 뜻이며, 불이(不異)의 뜻으로, 자상(自相)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고란 결과의 뜻이며, 집은 원인의 뜻이며, 멸이란 따라서 소멸한다는 뜻이며, 도란 제일의를 본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구의로써 알아야 한다.
028_1088_b_07L聖諦者聖人所說名聖諦通達彼故成聖諦諦者如是義不異義自相不異義苦者果義集者因滅者隨滅義道者見第一義如是以句義可知
【문】무엇이 상으로써 아는 것인가?
云何以相
【답】고는 과환상(過患相)이며, 집은 인상(因相), 멸은 불생상(不生相), 도는 방편상(方便相)이다. 또 고는 핍뇌상(逼惱相)ㆍ우상(憂相)ㆍ유위상(有爲相)ㆍ유변상(有邊相)이다. 집이란 취상(聚相)ㆍ인연상(因緣相)ㆍ화합상(和合相)ㆍ착상(著相)이다. 멸이란 출리상(出離相)ㆍ적적상(寂寂相)ㆍ무위상(無爲相)ㆍ제호상(醍醐相)이다. 도란 승상(乘相)ㆍ영도상(令到相)ㆍ견상(見相)ㆍ의상(依相)이다. 이와 같이 이상(異相)을 알아야 한다.
028_1088_b_11L苦者過患相集者因相滅者不生相道者便相復次苦者逼惱相憂相有爲相有邊相集者聚相因緣相和合相滅者出離相寂寂相無爲相醍醐道者乘相令到相見相依相如是異相可知
【문】무엇이 차제로써 아는 것인가?
云何以次第
【답】추의(麤義) 및 증의(證義)로써 처음에 고제를 설한다. “이 고는 여기에서 생겨난다”는 것이 두 번째인 집이다. “이 집이 소멸하면 이 고도 소멸한다”는 것이 세 번째인 멸이다. “이 방편이 진실로 소멸시킨다”는 것이 네 번째로 설하는 도이다. 마치 명료한 의사가 처음에 병의 근원을 보고, 뒤에 병의 연유를 묻고, 병을 없애고자 하는 까닭에 병에 맞게 약을 설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병은 고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병의 인연은 집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병의 소진은 해탈의 멸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약은 도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차제로써 알아야 한다.
028_1088_b_17L以麤義及證義初說苦諦此苦以此生第二集此集滅是此苦滅第三滅此方便爲實滅第四說道如明了醫初見病源後問病緣爲滅病故如病說藥如是如苦可知如是病因緣如集可知如是病盡如脫滅可知如是藥如道可知如是以次第可知
【문】무엇이 약(略)으로써 아는 것인가?
云何以略
028_1088_c_02L【답】생은 고이다. 생기게 하는 것은 집이다. 고가 그치는 것은 멸이다. 그치게 하는 것은 도이다. 번뇌처는 고이다. 번뇌는 집이다. 번뇌를 끊는 것은 멸이다. 끊는 방편은 도이다. 고는 능히 신견문(身見門)을 열게 하며, 집은 능히 단견문(斷見門)을 열게 하며, 멸은 능히 상견문(常見門)을 열게 하며, 도는 능히 사견문(邪見門)을 열게 한다. 이와 같이 약으로써 알아야 한다.
028_1088_b_24L生是苦令生是集苦止是滅令止是道煩惱處是苦煩惱是集斷煩惱是滅斷方便是道苦能起開身見門集能起開斷見門滅能起開常見門道能起開邪見門如是以略可知
【문】무엇이 비유로써 아는 것인가?
028_1088_c_06L云何以譬喩
【답】독수(毒樹)와 같은 것이 고임을 알아야 한다. 종자와 같은 것이 집임을 알아야 한다. 종자를 태우는 것과 같은 것이 멸임을 알아야 한다. 불과 같은 것이 도임을 알아야 한다.
028_1088_c_07L如毒樹如是苦可知如種如是集可知如是燒種如是滅可知如火如是道可知
이 언덕에 고통이 있고 두려움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 고임을 알아야 한다. 물의 흐름과 같은 것이 집임을 알아야 한다. 저 언덕에 고통이 없고 두려움도 없는 것과 같은 것이 멸임을 알아야 한다. 배로 능히 건너는 것과 같은 것이 도임을 알아야 한다.
028_1088_c_09L如此岸有苦有怖畏如是苦可知如流如是集可如彼岸無苦無怖畏如是滅可知如船能渡如是道可知
짐을 짊어진 것과 같은 것이 고임을 알아야 한다. 짐을 집는 것과 같은 것이 집임을 알아야 한다. 짐을 내려놓는 것과 같은 것이 멸임을 알아야 한다. 짐을 내려놓는 것과 같은 것이 멸임을 알아야 한다. 짐을 내려놓는 방편과 같은 것이 도임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비유로써 알아야 한다.
028_1088_c_12L如擔擔如是苦可知如取擔如是集可知如置擔如是滅可知如置擔方便如是道可如是以譬喩可知
【문】무엇이 분별로써 아는 것인가?
028_1088_c_15L云何以分別可知
【답】네 종류의 제(諦)가 있으니, 어제(語諦)ㆍ각각제(各各諦)ㆍ제일의제(第一義諦)ㆍ성제(聖諦)이다. 여기에서 거짓이 아닌 진실한 말을 설하는 것, 이것을 어제라 한다. 각각의 제에 크게 모든 견해가 들어오는 것, 이것을 각각제라 한다. 그 제의 비구는 망어우치법(妄語愚癡法)이지만, 그것은 불망어우치법(不妄語愚癡法)이다. 이것이 제이다. 니원이 제일의제이다. 이 성인(聖人)이 수행하는 바가 성제이다. 여기에서 즐기는 바는 성제이다. 이와 같이 분별로써 알아야 한다.
028_1088_c_16L四種諦語諦各各諦第一義聖諦於是說實語非不實是謂語於各各諦大入諸見此謂各各諦彼諦比丘妄語愚癡法彼不妄語愚癡法是諦泥洹者是第一義諦是聖人所脩行是聖諦於此所樂聖諦是以分別可知
【문】무엇이 수(數)로써 아는 것인가?
云何以數可知
【답】애를 제외한 3지(地)에서의 선법(善法)ㆍ불선법(不善法)ㆍ무기법(無記法)은 고제이다. 애는 집제이다. 그것을 끊는 것이 멸제이며, 8분도(分道)는 도제이다.
028_1088_c_22L除愛於三地善不善無記法是苦諦愛是集諦斷彼是滅諦八分道是道
028_1089_a_02L또 애를 제외한 나머지 번뇌와 제3지에서의 선법ㆍ불선법ㆍ무기법은 고제이다. 애와 나머지 번뇌는 집제이다. 그것을 끊는 것이 멸제이다. 도는 이 도제이다.
028_1089_a_02L復次除愛餘煩惱於第三地善不善無記法是苦諦愛及餘煩惱是集斷彼是滅諦道者是道諦
또 애를 제외한 나머지 번뇌와 일체의 불선(不善)과 3지에서의 선(善)과 유기법(有記法)은 고제이다. 애와 번뇌, 일체의 불선은 집제이다. 그것을 끊는 것은 멸제이다. 도는 도제이다.
028_1089_a_04L復次除愛餘煩惱一切不善於三地善有記法是苦諦愛及與煩惱一切不善是集斷彼是滅諦道是道諦
또 애를 제외한 번뇌와 일체의 불선, 3지에서의 불선, 3지에서의 무기법, 이것은 고제이다. 애와 나머지 번뇌 및 일체의 불선, 3지에서의 선, 이것은 집제이다. 그것을 끊는 것이 멸제이다. 도는 도제이다.
028_1089_a_07L復次除愛與煩惱及一切不善於三地不善三地無記法是苦諦愛及餘煩惱及一切不善於三地善此集諦斷彼是滅諦道是道諦
여기에서 기미(氣味)를 지닌 것을 찾는다는 의미가 애이다. 집은 결사(結使)를 갖는다는 의미이다. 끊을 수 있다는 뜻에서, 유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나머지 번뇌가 집이다. 존재하게 한다는 뜻에서 일체의 불선이 집이다. 3지에서 선법은 집이다. 여기에서 애 및 나머지 번뇌는 집이다. 일체의 불선과 3지에서의 선은 고제이거나 집제이다. 핍뇌(逼惱)ㆍ우(憂)ㆍ유위(有爲)ㆍ유변(有邊)의 상(相)인 까닭에 고제를 이룬다. 취인연(聚因緣)ㆍ착(著)ㆍ화합(和合)의 상인 까닭에 집제를 이룬다. 이와 같이 수(數)로써 알아야 한다.
028_1089_a_11L於是覓有氣味義是集有結使義餘煩惱是集以可斷以令起有義一切不善是集以令有於三地善法是集於是愛及餘煩惱是集一切不善於三地及善或苦諦或集諦逼惱有爲有邊相故成苦諦聚因緣著和合相故成集諦是以數可知
【문】무엇이 일(一)로써 아는 것인가?
云何以一可知
【답】이 4제는 4행으로써 하나를 이룬다. 즉 제의(諦義)로써, 여의(如義)로써, 법의(法義)로써, 공의(空義)로써 하나를 이룬다. 이와 같이 일로써 알아야 한다.
028_1089_a_18L四諦以四行成一以諦義以如義法義以空義如是以一可知
【문】무엇이 종종(種種)으로써 아는 것인가?
028_1089_a_20L云何以種種可知
【답】2제가 있으니, 세제(世諦)와 출세제(出世諦)이다.
二諦世諦出世諦
세제란 누(漏)가 있고, 결(結)이 있고, 박(縛)이 있고, 유(流)가 있고, 액(厄)이 있고, 개(蓋)가 있고, 접촉되는 것이며, 취(取)가 있고, 번뇌가 있는 것으로 소위 고와 집이다. 출세제란 누가 없고, 결이 없고, 박이 없고, 유가 없고, 액이 없고, 개가 없고, 접촉되지 않는 것이며, 취가 없고, 번뇌가 없는 것으로 소위 멸과 도이다.
028_1089_a_21L諦者有漏有結有縛有流有厄有蓋可觸有取有煩惱所謂苦及集出世諦者無漏無結無縛無流無厄無蓋不可觸無取無煩惱所謂滅道
028_1089_b_02L3제는 유위이고, 멸제는 무위이다. 3제는 무색이고, 고제는 유색ㆍ무색이다. 집제는 불선(不善)이고, 도제는 선(善)고, 멸제는 무기이고, 고제는 선ㆍ불선ㆍ무기이다. 고제는 알아야 하고, 집제는 끊어야 하고, 멸제는 증득해야 하고, 도제는 마땅히 닦아야 한다. 이와 같이 종종으로써 알아야 한다.
028_1089_b_02L三諦有爲滅諦無爲三諦無色苦諦有色無色集諦不善道諦善滅諦無記諦善不善無記苦諦可知集諦可斷滅諦可證道諦應脩如是以種種可
【문】무엇이 차제광(次第廣)으로써 아는 것인가?
云何以次第廣
【답】한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유식신(有識身)은 고이며, 집은 아만(我慢)이며, 그것을 끊는 것이 멸이며, 신념(身念)은 도이다. 두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명색은 고이며, 이 무명과 유애(有愛)는 집이며, 그것을 끊는 것이 멸이며, 사마타ㆍ비바사나는 도이다. 세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소위 3고(苦)1)는 고제이며, 3불선근은 집이며, 그것을 끊는 것은 멸이며, 계ㆍ정ㆍ혜는 도이다. 네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4신성처(身性處)는 고이며, 4전도(顚倒)는 집이며, 전도를 끊는 것이 멸이며, 4념처(念處)는 도이다. 다섯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5취(趣)는 고이며, 5개(蓋)는 집이며, 개를 끊는 것이 멸이며, 5근(根)이 도이다.
028_1089_b_07L以一種有識身是苦集我慢斷彼是滅身念是道以二種名色是苦是無明有愛是集斷彼是滅奢摩他毘婆舍那是道三種成所謂苦苦是苦諦三不善根是集斷彼是滅戒定慧是道以四種四身性處是苦四顚倒是集斷顚倒是滅四念處是道以五種成五趣是苦五蓋是集斷蓋是滅五根是道
여섯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6촉입이 고이며, 6애신(愛身)은 집이며, 애신을 끊는 것이 멸이며, 6출리법이 도이다. 일곱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7식주(識住)는 고이며, 7사(使)는 집이며, 7사를 끊는 것이 멸이며, 7보리분이 도이다. 여덟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8세간법은 고이며, 8사변(邪邊)은 집이며, 8사변을 끊는 것이 멸이며, 8정분(正分)이 도이다. 아홉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9중생거(衆生居)는 고이며, 9애근법은 집이며, 그것을 끊는 것이 멸이며, 9정작의근법(正作意根法)이 도이다. 열 가지 종류로 이루어지는데, 10방행(方行)이 고이며, 10결사(結使)는 집이며, 결을 끊는 것이 멸이며, 10상(想)이 도이다.
028_1089_b_15L以六種成六觸入是苦六愛身是集斷愛身是滅六出離法是道以七種七識住是苦七使是集斷七使是七菩提分是道以八種成八世閒法是苦八邪邊是集斷八邪邊是滅八正分是道以九種成九衆生居是九愛根法是集斷彼是滅九正作意根法是道以十種成十方行是苦十結使是集斷結是滅十想是道
이와 같이 차례로 넓혀가면서 알아야 한다.
028_1089_b_24L是以次第廣可知
【문】무엇이 섭으로써 아는 것인가?
云何以攝
028_1089_c_02L【답】3종섭이 있으니, 음섭(陰攝)ㆍ입섭(入攝)ㆍ계섭(界攝)이다. 여기에서 고제는 5음에 포섭되며, 집제 및 도제는 행음에 포섭되며, 멸제는 음에 포섭되지 않는다. 고제는 12입에 포섭되며, 3제는 법입에 포섭된다. 고제는 18계에 포섭되며, 3제는 법계에 포섭된다. 이와 같이 섭으로써 알아야 한다. 이 행으로써 성제에 대한 지(知)를 일으킨다. 이것을 성제방편이라 한다.[성제방편을 마친다.]
028_1089_c_02L種攝陰攝入攝界攝於是苦諦五陰所攝集諦及道諦行陰所攝滅諦非陰所攝苦諦十二入所攝三諦法入所攝苦諦十八界所攝三諦法界所如是以攝可知以此行於聖諦知令起此謂聖諦方便聖諦方便已竟

12. 분별제품(分別諦品) ①
028_1089_c_08L解脫道論分別諦品第十二之一

그때 좌선인은 이미 음ㆍ계ㆍ입ㆍ인연ㆍ제를 분명히 알고, 이미 계ㆍ두타ㆍ선(禪)을 들었지만 아직 범부로서 악취에 대한 두려움을 해탈하지는 못한다. 이미 악취의 두려움을 관하고, 이미 무시(無始)의 생사에 대한 두려움을 관하고, 이미 한 찰나로 얻을 수 없음을 관하고, 이미 3백 개의 칼로 찌르는 비유를 관하고, 이미 불이 붙은 머리를 아끼듯 하는 비유를 관하였지만 아직 4성제를 분별하지는 못한다. 성제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방편을 짓고, 마땅히 욕심을 내고, 마땅히 용맹 정진하고, 온 마음을 기울여 염(念)을 반연해 구족하고 마땅히 충족시켜야 한다.
028_1089_c_09L爾時坐禪人已明了陰界入因緣諦已得聞戒頭陁禪以凡夫未解脫怖畏惡趣已觀惡趣怖已觀無始生死怖已觀一剎那不可得已觀三百鉾刺已觀燒頭愛喩未分別四聖諦分別聖諦當作方便當作欲當作勇猛精進專心緣念具足應令滿
【문】어떻게 지어야 하는가?
028_1089_c_16L何當作
【답】그 좌선인은 처음에 4성제를 간략하게, 혹은 자세하게, 혹은 간략하고 자세하게 들어야 한다. 그리고 들음[聞]으로써, 뜻[義]로써, 송(誦)으로써 마땅히 수지해야 한다.
028_1089_c_17L彼坐禪人初四聖諦當聞或以略或以廣或以略廣以聞以義以誦當受持
이때 좌선인은 적적에 들어가 앉아 어지럽지 않은 마음으로, 오고 가지 않는 마음으로 사성제를 마땅히 일으켜야 한다. 처음에 고제를 일으켜야 하는데, 혹은 음으로써, 혹은 입으로써, 혹은 계로써 한다. 음법(陰法)은 자상(自相)과 음상(陰相)으로써 일으켜야 한다. 음방편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입은 입상(人相)으로써 마땅히 일으켜야 한다. 입방편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계란 계상(界相)으로써 마땅히 일으켜야 한다. 계방편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028_1089_c_19L是時坐禪人入寂寂坐不亂心不去來心四聖諦應令起苦諦應令起或以陰或以入或以界陰法以自相以陰相應令起如陰方便廣說如是當知入者以入相應令如入方便廣說如是當知界者以界相應令起如界方便廣說如是當
028_1090_a_02L그 좌선인이 이와 같이 하고 나면 “음ㆍ입ㆍ계에는 오직 음ㆍ입ㆍ계만이 있지 중생도 없고, 명(命)도 없다”는 것을 이미 일으키고, 이미 행상(行想)을 얻게 된다. 그때 간략하게 두 가지를 지어 일으키니, 소위 명색(名色)이다. 여기에서 색음ㆍ10입ㆍ10계는 색이고, 4음ㆍ의입(意入)ㆍ7계는 명이다. 법입과 법계는 혹은 명이며, 혹은 색이다. 나머지 명과 나머지 색[餘名餘色]이 있다. 나머지 명과 나머지 색은 색으로써 공이며, 색은 명으로써 공이다. 명은 색과 분리되지 않고 색은 명과 분리되지 않으니, 북소리와 같다. 오직 명에 의지해 색이 생기고 색에 의지해 명이 생기니, 맹인과 절름발이가 먼 길을 가는 것과 같다.
028_1090_a_03L彼坐禪人如是已陰入界唯有陰入界無衆生無命已令起已得行想爾時已略作二種令起所謂名於是色陰十入十界色四陰意入七界是名法入法界或名或色餘名餘色餘名餘色者以色空色者以名空名者以色不離色者以名不離如鼓聲唯依名色生依色名生如盲跛遠行
【문】명과 색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028_1090_a_10L名色者何差別
【답】명은 신(身)이 없으며, 색은 신이 있다. 명은 소지(所知)가 있으며, 색은 소지가 없다. 명은 가볍게 돌지만[輕轉], 색은 더디게 돈다[遲轉]. 명은 취(聚)가 없으며, 색은 취가 있다. 명은 깨닫고[覺], 알고[知], 생각하며[思], 인식하지만[識], 색에는 이것이 없다. 색은 가고, 기대고, 앉고, 눕고, 굽히고, 펴지만 명에는 이것이 없다. 명은 “내가 간다, 내가 기댄다, 내가 앉는다, 내가 눕는다, 내가 굽힌다, 내가 편다”고 알지만, 색에는 이것이 없다.
028_1090_a_11L名者無身色者有身者有所知色者無所知名者輕轉者遲轉名無聚色有聚名者覺知思識色者無此色者行倚坐臥屈申名無此者知我行我倚我坐我臥我屈我申色無此
색은 마시고 먹고 씹고 맛보지만 명에는 이것이 없다. 명은 “내가 마신다, 내가 먹는다, 내가 씹는다, 내가 맛본다”고 알지만, 색에는 이것이 없다. 색은 박수치고, 떠들고, 웃고, 울고, 갖가지 말을 하지만, 명에는 이것이 없다. 명은 “내가 박수친다, 내가 떠든다, 내가 웃는다, 내가 운다, 내가 갖가지 말을 한다”고 알지만, 색에는 이것이 없다. 이것을 명과 색의 차별이라 한다.
028_1090_a_16L色者飮食噉嘗名無此名者知我飮我食我噉我嘗色無此色者拍戲笑啼種種言說名無此名者知我拍我笑我戲我啼我種種言說無此謂名色差別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명색은 오직 명색일 뿐 중생도 없고, 명도 없다”고 이미 일으키고, 행상을 이미 얻게 된다. 그때 일체를 간략하게 하면 “고제는 여실지견의 청정을 일으키고, 명색이 일어나게 한다”이다. 이것이 총어(總語)로, 고제를 일으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028_1090_a_20L彼坐禪人如是名唯以名色無衆生無命已令起得行想爾時一切作略苦諦者令起如實知見淸淨令名色起此摠語苦諦令起可知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고제를 일으키고 나서 중생상(衆生想)을 짓는다. 이로부터 고의 인연을 마땅히 관해야 한다.
028_1090_a_24L彼坐禪人如是已令起苦諦作衆生想從此苦因緣應觀
028_1090_b_02L【문】이 고는 무엇을 인연으로 하고, 무엇이 집(集)인가?
028_1090_b_02L此苦何因緣何集
【답】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안다. 즉 이 고는 생을 인연으로 하고, 생은 유를 인연으로 하고, 유는 취를 인연으로 하고, 취는 애를 인연으로 하고, 애는 수를 인연으로 하고, 수는 촉을 인연으로 하고, 촉은 육입을 인연으로 하고, 육입은 명색을 인연으로 하고, 명색은 식을 인연으로 하고, 식은 행을 인연으로 하고, 행은 무명을 인연으로 한다. 이와 같이 무명에 연하여 행이 있고, 행에 연하여 식이 있고, 나아가 생에 연하여 노ㆍ사가 있으며 우ㆍ비ㆍ고ㆍ뇌를 이룬다. 이와 같이 모든 고음이 일어나게 된다.
028_1090_b_03L彼坐禪人如是此苦生爲因緣生者有爲因緣者取爲因緣取者愛爲因緣愛者受爲因緣受者觸爲因緣觸者六入爲因緣六入者名色爲因緣名色者識爲因緣識者行爲因緣行者無明爲因緣如是無明緣行行緣識生緣老死成憂悲苦惱如是悉苦陰成起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인연으로 얽매인 바를 자세하게 관한다. 그때 간략하게 관하면 “이 수에 연하여 애가 있다”이다. 그것이 그 고의 집을 일으키는 것이다. 법주지(法住智) 혹은 성취인연지(聖取因緣智) 혹은 의심을 벗어난 청정함[離疑淸淨] 등 이런 모든 말들은 집제가 일으키는 지(智)이다.
028_1090_b_10L彼坐禪人如是以因緣所縛以廣觀爾時以作略此受緣愛彼苦集令起或法住智或聖取因緣智或離疑淸淨此衆語言集諦令起智
그 좌선인은 고의 집을 일으킴으로써 삼매에 대해 의문을 해결하고 나서, 그때 “무엇의 소멸을 고의 멸이라 하며, 무엇의 소멸을 이 고의 멸이라 하는가”하고 고의 멸을 관하여,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안다.
“생의 멸로부터 이 고가 멸하고, 생의 멸로부터 유가 멸하고, 유의 멸로부터 취가 멸하고, 취의 멸로부터 애가 멸하고, 나아가 무명의 멸로부터 행이 멸한다. 이와 같이 무명의 멸로부터 행이 멸하고, 행의 멸로부터 식이 멸하며, 내지 생의 멸로부터 노ㆍ사ㆍ우ㆍ비ㆍ고ㆍ뇌가 멸한다. 이와 같이 이 일체 고음이 멸하게 된다.”
028_1090_b_14L彼坐禪人以令起苦集於三昧已度疑爾時觀苦誰滅爲苦滅誰滅爲此苦滅彼坐禪人如是知從生滅此苦滅從生滅有從有滅取滅從取滅愛滅從無明滅行滅如是從無明滅行滅從行滅識滅從生滅老死憂悲苦惱滅如是此一切苦陰成滅
028_1090_c_02L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인연으로 얽매인 바가 소멸하는 것을 자세하게 관하고 나서, 그때 “이 수에 연하여 애가 있다. 그것이 멸하면 고가 멸한다”고 간략하게 관하여 멸제를 일으킨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멸제를 일으키고 나서, 그때 “어떤 도를 어떻게 구족해야 애가 소멸하는가”하고 고의 멸도를 관한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5수음을 알아 그 과환을 관하고, “이 도를 이렇게 구족하면 애가 소멸한다”고 관하여 도제를 일으킨다. 제방편(諦方便)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028_1090_b_21L彼坐禪人如是因緣所縛滅已廣已觀爾時作略此受緣愛從彼滅苦滅令起滅諦彼坐禪人如是已令起滅諦爾時觀苦滅道何道何具足爲愛滅彼坐禪人如是知於五受陰觀過患此道此具足爲愛滅令起道諦如諦方便廣說如是可知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차례대로 4제를 일으키고 나서, 그때 5수음에 대하여 180법으로 차례대로 취(聚)를 분별하여 관한다. 존재하는 색의 과거ㆍ미래ㆍ현재, 혹은 안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크거나 작거나 거칠거나 오묘하거나 멀거나 가까운 일체 색을 무상(無常)으로써 자세하게 관하고, 자세하게 고를 관하며, 자세하게 무아를 관한다.
028_1090_c_05L彼坐禪人如是以次第已令起四諦爾時於五受陰以一百八十法次第以聚分別觀所有色過去未來現在或內或外或大或小或麤或妙或遠或近一切色以無常廣觀以廣觀苦以廣觀無我
이와 같이 존재하는 수(受), 존재하는 상(想), 존재하는 행(行), 존재하는 식(識) 등 낱낱의 음에 12법문이 있으니, 5음에서는 5의 12 즉 60이 된다. 이렇게 60의 무상견, 60의 고견, 60의 무아견으로 180이 된다.
028_1090_c_10L如是所有受所有所有行所有識於一一陰十二法於五陰五十二成六十六十無常六十苦見六十無我見成一百八
또 180법문이 있어 6내입(內入), 6외입(外入), 6식신(識身), 6촉신(觸身), 6수신(受身), 6상신(想身), 6사신(思身), 6각(覺), 6관(觀)으로 이 10의 6이 60이 된다. 60무상견, 60고견, 60무아견으로 3의 60이 180이 된다.
028_1090_c_14L復次一百八十法門六內入六外六識身六觸身六受身六想身思身六愛身六覺六觀此十六成六六十無常見六十苦見六十無我三六十成一百八十
그 구원(久遠)의 연시(年時), 일(日)ㆍ월(月)ㆍ월반(月半)ㆍ낮[日]ㆍ밤[夜]ㆍ시(時)ㆍ염(念)ㆍ찰나(利那)에 법을 회전시킴으로써 행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등불이 상속하며 바뀌는 것과 같다. 무상으로써 행을 분별하여 관한다.
“악취에 태어남으로써 고를 받아 기갈과 두려움이 있고, 사랑을 구하는 까닭에 이별이 있으며, 노ㆍ병ㆍ사ㆍ우ㆍ비ㆍ고ㆍ뇌가 있다. 이것이 행과 상응하는 상속이다.”
028_1090_c_18L彼久遠年時日月月半日夜時念剎那以迴轉法行成新故如燈焰相續成轉以無常於行分別觀以惡趣受苦飢渴怖畏覓愛別離老病死憂悲苦惱此行相應相續
028_1091_a_02L고로써 행을 관하여 분별한다.
“음ㆍ입ㆍ계의 인연으로부터 제(諦)가 있고, 업과 보의 인연이 생길 것을 생겨나게 한다. 동요하지 않는 중생이 없고, 자성의 행으로 일어나게 되는 일은 없다.”
무아로써 행을 관하여 분별한다.
“색은 무상하니 소멸한다는 뜻이고, 고이니 두렵다는 뜻이고, 무아이니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간략하고 자세하게 분별을 짓는다.
“이와 같이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하니 소멸한다는 뜻이고, 고이니 두렵다는 뜻이고, 무아이니 실체가 없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간략하고 자세하게 분별을 짓는다.
028_1090_c_23L以苦於行觀分別從陰入界因緣業果報因緣令生所生無衆不動無事自性行成起以無我於觀分別於行色無常以滅義以苦怖無我不實義以作略廣分別如是受想行識無常滅義苦者以怖義我以不實義如是作略廣分別
여기에서 무상으로써 분별하고 나서 상상(常想)을 없애며, 고로써 분별하여 낙상(樂想)을 없애며, 무아로써 분별하여 아상(我想)을 없앤다.
028_1091_a_06L於是以無常已分別除常想以苦分別除樂想以無我分別除我想
【문】무엇이 무상으로써 자세히 분별하는 것인가?
028_1091_a_08L云何以無常廣分別
【답】여실히 일체 모든 행을 보는데, 유위(有爲)는 변이 없고, 멸은 변이 된다. 무상(無相)에서 마음을 일으키기도 하고, 무상계(無相界)에서 마음을 편안케 한다. 이러한 까닭에 무상으로써 자세히 분별한다.
028_1091_a_09L如實見一切諸行有爲邊滅爲邊於無相或令起心無相界爲安心是故以無常廣分別
【문】무엇이 고로써 분별하는 것인가?
028_1091_a_11L云何以苦分別
【답】일체 모든 행에서 마음을 두렵게 하여, 원(願)을 짓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일으키고, 원을 짓지 않음에서 마음을 편안케 한다. 이러한 까닭에 고로써 널리 분별한다.
028_1091_a_12L於一切諸行令心怖畏從作願令起心於無作願爲心安是故以苦廣分別
【문】무엇이 무아로써 널리 분별하는 것인가?
028_1091_a_14L云何以無我廣分別
【답】일체의 법견(法見)에 있어서 다른 것으로부터, 또 이것으로부터 집(執)은 마음을 일으킨다. 공계(空界)에서 마음을 편안케 하다. 이러한 까닭에 무아로써 널리 분별하는 것이다.
028_1091_a_15L於一切法見從他從此執令起心於空界爲心安是故以無我廣分別
이와 같이 3유(有)ㆍ5취(趣)ㆍ7식주(識住)ㆍ9중생거(衆生居)를 분별하며, 두려움을 소멸함으로써, 무실(無實)로써 그것을 관한다.[분별지를 마친다.]
028_1091_a_17L如是分別三五趣七識住九衆生居以滅怖畏以無實觀之分別智已竟
그 좌선인은 5수음에서 3상(相)2)을 분별하고 나서, 기꺼이 들어가 모든 행(行)을 끊고자 하게 한다. 그때 현재의 내오수음(內五受陰)에서 그 상을 취해 그 일어남과 소멸함에 통달케 한다. 이와 같이 이 법을 생함이 없는 것으로써, 현생(現生)을 생하고 멸하는 것으로써, 이와 같이 통달한다.
028_1091_a_19L彼坐禪人於五受陰已分別於三相令樂入欲斷諸行爾時現在內五受陰取彼相令通達起滅如是此法以無生現生以生滅如是通達
여기에서 상을 취한다는 것에 세 종류가 있으니, 번뇌의 상을 취하는 것[取頗惱相]ㆍ정의 상을 취하는 것[取定相]ㆍ비바사나의 상을 취하는 것[取毘婆舍那相]이다.
028_1091_a_23L於是取相者取相三種取煩惱相取定相取毘婆舍那相
028_1091_b_02L여기에서 어리석은 범부는 보고[見], 듣고[聞], 느끼고[覺], 아는[知] 경계에 대해 낙상(樂想)ㆍ상상(常想)을 이루고, 전도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상을 취하는 것을 좋아해 여기에서 번뇌에 집착한다. 마치 나방이 등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이것을 번뇌의 상을 취하는 것이라 한다.
028_1091_b_02L於是愚癡凡夫於見聞覺知境界以成樂常想顚倒所心以好取相於此著煩惱如蛾投燈此謂取煩惱相
【문】무엇이 정의 상을 취하는 것인가?
云何取定相
【답】여기에서 좌선인은 정을 얻는 것을 즐겨 염(念)ㆍ정지(正智)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38행의 하나하나의 행에 대해 상을 취하여 마음을 묶어 두나니, 어지럽지 않게 하기 위한 까닭이다. 마치 코끼리를 묶는 것과 같다. 이것을 정의 상을 취하는 것이라 한다.
028_1091_b_05L此坐禪人樂得定以念正智所初心三十八行於一一行取相令繫心不亂故如繫象此謂取定相
【문】무엇이 비바사나의 상을 취하는 것인가?
028_1091_b_08L云何取毘婆奢那相
【답】항상 관찰하는 사람[常觀人]은 혜에서 비롯된 마음으로 색ㆍ수ㆍ상ㆍ행ㆍ식 각각에서 그 자상을 분별하고, 사(捨)를 즐겨 그 상을 닦는다. 마치 독사를 잡는 것과 같다. 이것을 비바사나의 상을 취하는 것이라 한다. 여기에서 비바사나의 상을 취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
028_1091_b_09L常觀人以慧所初色受想行識各各分別其自相欲捨脩彼相如捉毒蛇此謂取毘婆奢那相於此取毘婆奢那相可樂
【문】무엇이 수ㆍ상ㆍ행ㆍ식의 상을 취하는 것인가?
028_1091_b_12L云何取受想行識相
【답】그 색(色)에서 상(相)을 인식해 혹은 지계(地界)로써, 혹은 수계(水界)로써, 혹은 화계(火界)로써, 혹은 풍계(風界)로써, 혹은 안입(眼入) 내지 신입(身入)으로써 취하는 것이다.
028_1091_b_13L彼色識相以地界或以水界或以火界或以風或眼入或身入
이와 같이 그 수(受)와 수상(受相)을 관하여 즐겁다고 하거나, 괴롭다고 하거나,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상(想)과 상상(想相)을 관하여 색상(色想)이라 하거나, 내지 법상(法想)이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行)과 행상(行相)을 관하여 접촉한다고 하거나, 생각한다고 하거나, 느낀다고 하거나, 관한다고 하거나, 작의한다고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 식(識)과 식상(識相)을 관하여 안식 내지 의식이라 취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것저것을 관하며 좌선하여, 이와 같이 그 상을 잘 취해 선(善)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상을 취한다.
028_1091_b_15L如是觀彼受受相或爲樂或爲苦或爲不苦不樂如是觀彼想想相或爲色想或爲法想如是觀知行行相或爲觸或爲思或爲覺或爲觀或爲作意如是觀彼識識相或眼識或意識如是觀彼彼坐禪是善取彼相以善令起令起如是色受想行識相
또 2행으로써 마음의 상[心相]을 취하니, 사(事)로써, 작의(作意)로써 취한다.
028_1091_b_22L復次以二行取心相以事以作意
【문】무엇이 사(事)로써 마음의 상을 취하는 것인가?
云何以事取心相
028_1091_c_02L【답】 “이런 사로써 내 마음이 일어난다”고 마땅히 그것을 관해야 한다. “이런 색사(色事)로써, 이런 수사(受事)로써, 이런 상사(想事)로써, 이런 행사(行事)로써, 이 식사(識事)로써 내 마음이 일어난다”고 이와 같이 마땅히 그것을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이 사로써 마음의 상을 취한다.
028_1091_b_23L以此事我心起當觀彼以此色受事以此想事 以此行事以此識事我心如是當觀彼如是以事取心相
【문】무엇이 작의(作意)로써 마음의 상을 취하는 것인가?
028_1091_c_03L云何以作意取心相
【답】“이와 같이 내가 색에 대해 작의하여 이 마음이 일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마땅히 관해야 한다. “이와 같이 내가 수ㆍ상ㆍ행을 작의하여 내 마음이 일어난다”라고 이와 같이 마땅히 관한다. 이와 같이 작의로써 마음의 상을 취한다.
028_1091_c_04L如是我作意色此心起如是當觀如是我作意受想行我心起如是當觀如是已作意取心相
【문】무엇이 그 상을 잘 취한 것인가?
云何彼相成善取
【답】이 행(行)으로써, 이 상(相)으로써,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의 상(想)은 관(觀)을 이룬다. 만약 또 이 행으로써, 이 상으로써, 그 상을 재차 관하는 것을 감당한다면, 이것을 그 상을 잘 취한 것이라 한다.
028_1091_c_07L以是以是相色受想行識想以成觀復堪更觀彼相以此行以此相是謂彼相成善取
생멸(生滅)에 통달한다는 것은 일어남[起]이 있고, 소멸[滅]이 있고, 일어남과 소멸[起滅]이 있음을 통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색은 이미 생겨나 현재한다. 그 생기는 상이 일어남이며, 변화하는 상은 소멸이다. 이 둘을 혜안(慧眼)으로써 보는 것이 일어남과 소멸에 통달하는 것이다. 수는 이미 생겨나 현재한다. 수ㆍ상ㆍ행ㆍ식에서 그 생기는 상은 일어남이며, 변화하는 상은 소멸이다. 이 둘을 혜안으로써 보는 것이 일어남과 소멸에 통달하는 것이다.
028_1091_c_10L通達生滅者有起有滅有起滅通達於是色已生現在彼生相起變相滅彼二句以慧眼見通達起滅受已生現在受想行識彼生相起變相滅彼二句以慧眼見通達起滅
또 3행으로써 일어나는 상[起相]에 통달하며, 3행으로써 소멸하는 상[滅相]에 통달한다. 이와 같이 인(因)으로써, 연(緣)으로써, 자미(自味)로써 통달한다.
028_1091_c_14L次以三行通達起相以三行通達滅如是以因以緣以自味
【문】무엇이 인으로써 일어나는 상에 통달하는 것인가?
028_1091_c_16L云何以因通達起相
【답】애ㆍ무명ㆍ업을 인으로 음(陰)이 일어난다. 이를 혜안으로써 보면 인으로써 일어나는 상에 통달하는 것이다.
028_1091_c_17L愛無明業是因爲陰以慧眼見以因通達起相
【문】무엇이 연으로써 일어나는 상에 통달하는 것인가?
028_1091_c_18L云何以緣通達起相
【답】음식[食]에 연하여 색음이 일어나며, 촉에 연하여 3음이 일어나며, 명색에 연하여 식음이 일어난다. 이를 혜안으로써 보면 연으로써 일어나는 상에 통달하는 것이다.
028_1091_c_19L食緣爲色陰起觸緣爲三陰起名色緣爲識陰起以慧眼見以緣通達起相
【문】무엇이 자미(自味)로써 일어나는 상에 통달하는 것인가?
028_1091_c_21L云何以自味通達起相
028_1092_a_02L【답】등불이 상속하여 간단없는 것과 같이, 앞뒤로 늘 새롭게 행을 일으킨다. 이를 상으로써, 혜안으로써 보면 자미로써 일어나는 상에 통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으로써 일어남으로써 보며, 집제의 상으로써 견을 이룬다. 각(覺)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연으로써, 자미로써, 일어남으로써 고제를 본다. 상으로써 소견(所見)을 이루며, 찰나로써 가히 각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3행으로써 일어나는 상에 통달한다.
028_1091_c_22L如燈焰相續無閒初後新新起行以相以慧眼見以自味通達起相是以因以起見以集諦相成見以令起覺以緣以自味以起見苦諦以相成所見以剎那不可得覺如是以三行通達起相
【문】무엇이 3행으로써 소멸하는 상[滅相]에 통달하는 것인가?
028_1092_a_04L云何以三行通達滅
【답】인(因)의 소멸로써, 연(緣)의 소멸로써, 자미(自味)의 소멸로써 통달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애의 소멸로써, 무명의 소멸로써, 업의 소멸로써 음(陰)은 소멸하게 된다. 이를 혜안으로써 보면 인의 소멸로써 소멸하는 상에 통달하는 것이다.
028_1092_a_05L以因滅以緣滅以自味滅於是以愛滅以無明滅以業滅陰成滅慧眼見以因滅通達滅相
음식의 소멸로써 색음은 소멸하게 된다. 촉의 소멸로써 3음은 소멸하게 된다. 명색의 소멸로써 식음은 소멸하게 된다. 이를 혜안으로써 보면 연의 소멸로써 소멸하는 상에 통달하는 것이다.
028_1092_a_07L以食滅色陰成滅以觸滅三陰成滅以名色滅陰成滅以慧眼見以緣滅通達滅相
등불이 상속하여 간단없는 것과 같이, 최초에 소멸하는 행이 있다. 이를 혜안으로써 보면 자미로써 소멸하는 상에 통달하는 것이다.
028_1092_a_09L如燈焰相續無閒初有滅行以慧眼以自味通達滅相
여기에서 인의 소멸로써 멸제를 보며, 상(相)으로써 소견을 이룬다. 무생상(無生相)의 각(覺)으로써, 연의 소멸로써, 자미로써, 견의 소멸로써, 고제의 상으로써 초견(初見)을 이룬다. 찰나로써는 각(覺)을 얻지 못한다.
028_1092_a_11L於是以因滅見滅諦以相成所見以無生相覺以緣以自味以見滅以苦諦相成初見以剎那不可得覺
【문】만약 일어남과 소멸로써 고제를 보고, 상으로써 견을 얻으면 어떠한 까닭에 상지(上智)가 일어나는가?
028_1092_a_14L若以起滅見苦以相得見何故上智當起
【답】어떠한 이유로 견의 소멸을 일으키는가.
028_1092_a_15L何用起見滅
고제의 상으로써 아직 보지 않은 것을 보게 되며, 그 고(苦)가 가득해지며, 나아가 모든 행의 과환이 없어지며, 여실히 보고 나서 행상(行相)에 따라서 이미 마음을 일으키며, 비행(非行)에서 마음은 도(度)를 이룬다. 여실히 모든 행의 과환을 보고 나서, 행상으로부터 이미 마음을 일으켜, 비행에서 도(度)를 이룬다. 이곳에 고가 가득한 것을 보며, 소위 변(邊)에 이르는 까닭이다.
028_1092_a_16L以苦諦相得見未見彼苦成滿乃至諸行過盡如實已見從行相已令起心於非行心成度如實已見諸行過患從行相已令起心於非行成度是處見苦成滿謂往邊故
마치 나는 새가 불에 둘러싸여 아직 두려움을 면하지 못하고, 아직 허공에 이르지 못했지만, 불에 둘러싸인 과환을 보고 허공으로 날아오른 것과 같다. 그때 그는 두려운 불길에 온통 둘러싸인 것을 본다. 이와 같이 이에 대해 알아야 한다.
028_1092_a_20L猶如飛鳥爲火所圍未免怖畏若未至虛空見火圍過患成飛虛空是時彼見火怖圍成滿如是於此可知
028_1092_b_02L여기에서 인으로써, 연으로써, 일어남을 봄으로써 “이것이 있어 이것이 일어나며, 이것이 일어나는 까닭에 이것이 일어나게 된다”고 인연이 일어나는 상[因緣起相]에 통달하게 된다. 인이 멸하기 때문에, 또 연이 멸하기 때문에, 소멸을 봄으로써 “이것이 없으면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것이 멸하는 까닭에 이것이 멸한다”고 인연이 소멸하는 상[因緣滅相]3)에 통달하게 된다. 자미로써, 일어남과 소멸로써 보고 나서는 일어남에 대해 통달하게 되어 인연법ㆍ유위법의 일어남을 알아 그 일어남을 알게 되고, 그 소멸 또한 알며, 그 머묾 또한 안다.
028_1092_a_23L於是以以緣以起見成通達因緣起相有此起此起故此成起因滅故及緣滅故以見滅因緣生相成通達此無有此不成此滅故此滅以自味以起見已起成通達知因緣法有爲法彼起得知彼滅亦知彼住亦知
이와 같이 일어남과 소멸로써 4법을 보아 알아야 할 바를 성취한다. (4법은) 이와 같은 일상법(一相法)ㆍ종종법(種種法)ㆍ무사법(無事法)ㆍ정법(正法)이다. 여기에서 하나[一]의 상속에 붙어서 모든 행이 일어남을 그는 보기에, 종종(種種)에 대한 집착이 성립하지 않는다. 앞뒤로 전환하는 모든 행에서 그는 소멸을 보기에, 하나에 대한 집착이 성립하지 않는다. 자성을 벗어나 움직임이 없고 모든 행을 앞뒤로 보기에, 아집이 성립하지 않는다. 인연에 의해 전환하는 앞뒤의 모든 행을 이와 같이 법으로써 보기에, 무사에 대한 집착이 성립하지 않는다.
028_1092_b_06L是以起滅見四法成所知如是一相種種法無事法正法於是一相續所著諸行以起彼見不成種種執後轉諸行以彼滅見不成一執自性無動諸行以初後見不成我執緣所轉初後諸行如是以法見不成無事執
하지만 법문을 듣지 못한 범부는 하나임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항상 단(斷)을 설하며, 종종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상(常)을 설하게 되며, 무사를 깨닫지 못함으로써 아(我)를 설하게 되며, 이와 같이 법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무사(無事)를 설하게 된다.
028_1092_b_13L無聞凡夫以一不覺常斷說種種不覺成常說以無事不覺成我如是以法不覺成無事說
여기에서 “평등하다”고 말하며, “일상(一相)이 수승하다”고 말하며, 종종상으로써 일상을 포섭하며, 분별의 뜻으로 종종을 이루며, 번뇌의 뜻으로 일성(一性)을 이루며, 방편의 뜻으로 종종성(種種性)을 이루며, 애과(愛果)로써 일성을 이루며, 업과(業果)로써 종종성을 이룬다.
028_1092_b_15L於是以平等語言以一相勝語言以種種相攝成一相以分別義成種種以煩惱義成一性以方便義成種種性以愛果成一性以業果成種種性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일성을 보고 여기에서 종종견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약 종종성을 보면 여기에서 상견ㆍ일성에 집착하지 않는다. 만약 현재 일성을 보면 여작(餘作)ㆍ여각(餘覺)에서 이 견해를 없앤다. 만약 현재 종종성을 보면 피작(彼作)ㆍ피각(被覺)에서 이 견해를 없앤다. 만약 현재 일성을 보면 이 단견을 없애며, 만약 현재 종종성을 보면 이 상견을 없앤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일어남과 소멸로써 일성ㆍ종종성을 본다.
028_1092_b_19L彼坐禪人如是見一性非於此執種種見若見種種性非於此執常見一性若現見一性餘作餘覺除此見若現見種種彼作彼覺除此見若現見一性此斷見若現見種種性除此常見坐禪人如是以起滅見一性種種性
028_1092_c_02L법명(法明)을 어떻게 일으켜 현재 일어난 모든 행에서 그 무사(無事)를 보는가. 무슨 까닭에 일체 모든 행은 무사(無事)이고, 부동(不動)이며, 달리 일어나 머무는 것이 없는 것인가. 자성에 머무는 인연이 화합하고 모여 인연이 되고, 이와 같이 지법(止法)으로써 생(生)을 일으키는 것이다.
028_1092_c_02L法明何以起現起諸行見彼無事一切諸行無事不動無餘所起住住自性因緣和合集爲因緣如是以止法生令生
여기에서 명(命)이 없다는 뜻,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으로 무사법을 알아야 한다. 자성의 뜻, 연의 뜻으로 이와 같이 지법(止法)을 알아야 한다. 공ㆍ무사를 나타나게 하고, 업ㆍ소작을 나타나게 한다. 이와 같이 지법이 무사를 나타나게 하는 까닭에 법이라 하고, 이와 같이 지법을 나타나게 하는 까닭에 행이라 한다. 여기에서 일성법을 깨달음으로써 고상(苦相)에 통달하게 되며, 종종성을 깨달음으로써 무상상(無常相)에 통달하게 되며, 무사법을 깨닫고 이와 같이 지법을 깨달음으로써 무아상(無我相)에 통달하게 된다.
028_1092_c_06L於是以無命義及不動無事法可知以自性義及緣義是止法可知令現空無事令現業所如是止法令現無事名法如是令現止法名行於是以一性法覺苦相成通達以種種性覺無常相成通以無事法覺如是以止法覺無我相成通達
【문】그 좌선인은 일체 모든 행에서 나머지 처가 없도록 그 일어남과 소멸을 관하는가? 아니면 1처를 관해야 하는 것인가?
028_1092_c_13L彼坐禪人一切諸行以無餘處觀起滅爲一處當觀耶
【답】처음의 모든 행처에서 그 상을 취하며, 일어남과 소멸에 통달하여 나머지 처가 없이 일체 모든 행에 충만하게 한다. 마치 사람이 큰 바다의 한 곳에서 물에 혀를 대면 곧 일체의 물이 짜다는 것을 알듯이, 이와 같이 이것에 대해 알아야 한다.
028_1092_c_14L於初諸行處取其相通達起滅無餘處切諸行令滿如人於大海一處以舌舐水卽知一切水鹹如是於此可知
2행으로써 모든 행에 충만하게 하나니, 사(事)로써, 어리석지 않음[不愚癡]으로써 충만하게 한다. 여기에서 이 모든 행의 그 상을 취해 생멸에 통달하면, 그 모든 행은 그 사로써 충만하게 된다. 여기에서 무지(無智)를 끊는 까닭에 나머지 모든 행이 어리석지 않음으로써 충만하게 된다.
028_1092_c_17L以二行諸行令滿以事以不愚癡是諸行取其相通達生滅彼諸行以其事成滿於是斷無智故餘諸行以不愚癡成滿
028_1093_a_02L여기에서 일어남과 소멸에 대한 지혜[起滅智]는 모든 행을 분별하는 지혜[諸行分別智]이다. 일체 모든 행은 일어남의 초변(初邊)으로써 분별을 이루고, 소멸의 후변(後邊)으로써 분별을 이룬다. 일어남의 초변으로써 적적을 이루며, 소멸의 유변(有邊)으로써 적적을 이룬다. 일어남은 일어남으로부터인 까닭에 처음이 없으며, 소멸은 소멸로부터인 까닭에 뒤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일어남과 소멸에 대한 지혜가 모든 행을 분별하는 지혜를 이룬다.[기멸지를 마친다.]
028_1092_c_21L於是起滅智是諸行分別智一切諸行以起初邊成分別滅後邊成分別以起初邊成寂寂滅有邊成寂寂以起從起無初以滅從滅無後是故起滅智成諸行分別智起滅智已竟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생하고 멸하는 상을 정견(正見)하며, 모든 행을 잘 분별하며, 멸을 얻기를 즐기며, 정(定)을 즐긴다. 그때 작의하지 않은 관이 생겨 오직 마음의 소멸을 본다. 색사(色事)로써, 마음의 생멸로써 그 사(事)에 의지해 마음의 소멸을 본다. 이와 같이 수사(受事)4)로써, 상사(想事)로써, 행사(行事)로써, 식사(識事)로써, 마음의 생멸로써, 그 사에 의지해 마음의 생멸을 본다.
028_1093_a_03L彼坐禪人如是正見生滅相善分別諸行樂得滅樂定爾時不作意觀生唯見心滅以色事以心生滅依彼事見心滅如是以受持以想事以行事以識事以心生滅依彼事見心生滅
또 3행으로써 소멸을 보니, 이와 같이 취(聚)로써, 쌍(雙)으로써, 분별로써 소멸을 본다.
028_1093_a_08L復次以三行見滅如是以聚以雙分別
【문】무엇이 취로써 보는 것인가?
云何以聚
【답】위의(威儀)와 위의로 일어난 심법(心法)ㆍ심수법(心數法)에 대해 그 처에서 취로써 그 소멸을 본다. 또 색의 무상ㆍ수의 무상ㆍ상의 무상ㆍ행의 무상ㆍ식의 무상을 관하고 나서, 그때 무상사(無常事)로 일어난 심법ㆍ심수법을 취로써 그 소멸을 본다. 이와 같이 고사(苦事)ㆍ무아사(無我事)를, 이와 같이 취로써 마땅히 보아야 한다.
028_1093_a_10L於威儀威儀所起心心數法於其處以聚見彼滅次已觀色無常受無常想無常行無識無常爾時以無常事所起心心數法以聚見彼滅如是以苦事無我如是以聚當見
【문】무엇이 쌍으로써 보는 것인가?
云何以雙
【답】이 색의 무상에서 무상을 관하고 나서, 무상을 따라 마음을 일으켜 마음의 생멸을 관한다. 이와 같이 수ㆍ상ㆍ행ㆍ식의 무상을 관하고 나서, 무상사를 따라 마음을 일으켜 생멸을 본다. 이와 같이 고사ㆍ무아사를, 이와 같이 쌍으로써 관해야 한다.
028_1093_a_15L色無常已觀無常隨無常起心見心生滅如是受想行識無常已觀隨無常事起心見生滅如是已苦事已無我事如是以雙當觀
【문】무엇이 분별로써 보는 것인가?
云何以分別
028_1093_b_02L【답】이 색의 무상을 관하고 나서, 무상사를 따라 마음을 일으켜 마음의 생멸을 본다. 이와 같이 분별로써 관하여 많은 마음의 소멸을 본다. 이와 같이 수ㆍ상ㆍ행ㆍ식의 무상을 관하고, 무상사를 따라 마음을 일으켜 마음의 생멸을 보고, 이로써 마음의 소멸을 보고 또 소멸을 본다. 이와 같이 분별로써 많은 마음의 소멸을 본다. 이와 같이 고를 관하고, 무아를 관한다. 이와 같이 분별하고 나서 오직 그 소멸만을 현재 관하면, 그 고멸사(苦滅事)가 오로지 이루어지며, 항상 모든 행을 찾아 찰나에 그 이득을 얻게 된다.
028_1093_a_19L已觀此色無常隨無常事起心見心生滅如是以分別觀見多心滅如是觀受想行識無常隨無常事起心見心生滅以是見心滅復見滅如是以分別見多心滅如是觀苦觀無我是已分別唯現觀彼滅其彼苦滅事成專常覓諸行剎那成得利
그 좌선인은 이 혜(慧)로써, 다른 연(緣)에 의지하지 않고 “일체 세간은 그 자성이 마치 개자(芥子)의 머리에 이르는 것과 같아 일심의 찰나에 생ㆍ노ㆍ사로 변화한다”고 본다. 그때 좌선인은 또 이와 같이 본다. 게송에서 설한 바와 같다.
028_1093_b_03L彼坐禪人以此慧非他緣見一切世閒以自性如到芥子頭於一心剎那生老死爾時坐禪人復如是見如偈所說

이 쌍(雙)의 명색의 성질은
하나의 멸에 전전(展轉)하여
구(句)의 소멸에 연하여 그것이 멸하며
그리고 그것에 인하여 생겨나니
음(陰)은 무상하게 소멸하는 법
고(苦)는 생기고 사라지는 법.
028_1093_b_06L此雙名色性
展轉於一滅
句滅緣彼滅
及彼因所生
陰無常滅法
苦生法滅法

북채로 두들겨 나는 북소리처럼
눈[眼]으로부터 생기지도 않고
빛깔과 향기 등 5법은
빛깔[色]로부터 생기지도 않으며
2구(句)를 벗어나지도 않나니
연에 의지하여 유위를 생한다.
028_1093_b_08L如桴打鼓聲
亦不從眼生
色香等五法
亦不從色生
亦不離二句
依緣生有爲

북채로 두들겨 나는 북소리처럼
귀[耳]로부터 생기지도 않고
빛깔과 향기 등 5법은
소리[聲]로부터 생기지도 않는다.
028_1093_b_10L如桴打鼓聲
亦不從耳生
色香等五法
亦不從聲生

2구를 벗어나지도 않고
코[鼻]로부터 생기지도 않고
빛깔과 향기 등 5법은
향기[香]로부터 생기지도 않는다.
028_1093_b_12L亦不離二句
亦不從鼻生
色香等五法
亦不從香生

2구를 벗어나지도 않고
혀[舌]로부터 생기지도 않으며
빛깔과 향기 등 5법은
맛[味]로부터 생기지도 않는다.
028_1093_b_13L亦不離二句
亦不從舌生
色香等五法
亦不從味生

2구를 벗어나지도 않고
몸[身]으로부터 생기지도 않으며
빛깔과 향기 등 5법은
촉감[觸]으로부터 생기지도 않는다.
028_1093_b_14L亦不離二句
亦不從身生
色香等五法
亦不從觸生

2구를 벗어나지도 않고
처(處)로부터 색(色)이 생기지 않으며
법(法)으로부터 입(入)이 나오지 않고
인연에 의지하고 생에 의지한다.
028_1093_b_16L亦不離二句
不從處色生
不從法入出
依因緣依生

북채로 두들겨 나는 북소리처럼
그 뿌리는 가장 약하고
초인(初因)도 가장 약하고
그 인(因)도 가장 약하다.
028_1093_b_17L如桴打鼓聲
彼根最羸出
初因亦最羸
彼因亦最羸

거기서 일어난 것도 약하고
함께하는 땅 이것이 가장 약하고
상응도 가장 약하고
화합도 가장 약하다.
028_1093_b_18L所起彼亦羸
共地此最羸
相應亦最羸
和合亦最羸

전전하는 이것 항상 약하고
전전하는 법 머물지 않으며
성품도 없이 전전하지만
일으킬 능력도 없고
일으킨 그것도 없는 것이
건달바성과 같다.
028_1093_b_20L展轉此常羸
展轉法不住
亦無性展轉
無有能令起
令起彼亦無
如乾闥婆城

이것을 누가 처음 일으켰을까
자신 스스로 생긴 것도 아니고
자신의 힘으로 머무는 것도 아니고
다른 법을 따름으로써 생겨나
모든 유루법을 생기게 한다.
028_1093_b_22L是誰初令起
不以自身生
不以自力住
由隨他法生
生諸有漏法

자체가 약하고 하열해 스스로 생기지 않고
또한 스스로의 인(因)도 아니요, 스스로의 일도 아니며
유위처도 아니고, 자성도 아니며
자성은 아니지만 행상(行相)은 모두 있다.
028_1093_b_23L自體羸劣不自生
亦不自因不自事
不有爲處不自性
不自性行相諸有
028_1093_c_02L
자신을 위해 살지만 때도 없이 시들어
오는 바도 없고 가는 바도 없나니
처(處)는 생기는 바 없으며, 타국(他國)이 되며
마음에는 아소(我所)ㆍ명(命)ㆍ신성(身性)이 없다.
028_1093_c_02L爲生自身羸無時
無所從來無所行
處無所生爲他國
心無我所命身性

일심의 즐거움과 괴로움 그 상응이 빠르고
찰나에 산해(山海)의 8만겁이 있지만
한 번 머물러 다시 하지 않고 두 마음이 없으면
과거와 미래에 상응하는 것 소멸한다.
028_1093_c_04L一心苦樂相應速
剎那山海八萬劫
一住不再無二心
相應過去及當滅

현재 일체의 그 모든 음(陰)
이것들 이미 과거가 되어 간단없이 사라지고
미래에는 마땅히 잃게 되리니 그 때에는
이미 사라지고 다르지 않은 모습은 일어나지 않는다.
028_1093_c_06L現住一切彼諸陰
此等已去無閒失
未來當失於彼閒
已沒無異相不起

불생인 까닭에 현재의 생은
마음에서 없어지는 것에 따라 세간은 없다.
제일의(第一義) 가운데에 거래(去來)는 없고
미래는 취(聚) 없이 오직 전생(轉生)한다.
028_1093_c_08L以不生故現在生
從於心失世閒無
第一義中無去來
未來無聚唯轉生

개자처럼 머물며 생겨난 모든 법
그 법이 멸하고 나면 이것이 그 처음
세간을 법으로 보아 처음부터 뒤섞이지 않고
오고감을 보지 않고 태어남을 보지 않으면
모든 법은 허공처럼 생겨나는 일 없고
번개처럼 일어났다 잠깐 사이에 소멸한다.
028_1093_c_10L住如芥子生諸法
彼法滅已是其初
世閒以法初不雜
不見去來不見生
諸法不生如虛空
猶如電起須臾滅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소멸이 다함이 없음을 보고 정(定)에 든다. 불을 피우면 연기가 일어나는 것처럼, 보리품이 찰나 찰나에 일어나며, 광명과 지혜가 일어나며, 희(喜)ㆍ의(猗)ㆍ락(樂)ㆍ취해탈(取解脫)ㆍ염처(念處)가 일어나며, 사(捨)로 벗어난다. 여기에서 명료(明了)하지 않으면, 좌선인은 그 법에서 혹은 혼란[亂]을 일으키며, 혹은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킨다.
028_1093_c_13L彼坐禪人如是見滅無盡入定如鑽火煙起菩提品剎那剎那起光明智喜猗樂取解脫念處起捨出離於是不明了坐禪人於彼法或起亂起增上慢
【문】무엇이 그 혼란을 없애는 것인가?
云何爲除亂
【답】그 좌선인은 법에서 희를 일으키고, 그 희로 다시 더욱 편안케 한다. 이와 같이 그가 앉아서 다시 더욱 편안케 하면 그 마음이 법의 조화로움[法調]에 포섭되게 된다. 만약 법의 조화로움에 포섭되어진 마음이라면 멸관정(滅觀定)으로부터 그 마음은 상(常)을 벗어나고, 상을 벗어나는 데 통달한다. 이와 같이 벗어난다.
028_1093_c_18L彼坐禪人於法起喜彼喜復令更安如是彼坐復更令安成其心法調所攝若法調所攝心從滅觀定其心離常難通達如是離去
【문】무엇이 증상만을 일으키는 것인가?
云何起增上慢
【답】그 좌선인이 법에서 최초로 광상(光相)을 일으켜 출세간법을 얻고는, 아직 얻지 않은 것에 대해 얻었다는 상(相)을 이루어 다시는 정진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증상만이 일어난다.
028_1093_c_22L彼坐禪人於法初起光相得出世閒於未得成得相常不更作精進是增上慢起
028_1094_a_02L 명확히 아는 좌선인은 이 번뇌가 정(定)의 혼난[亂]인 것을 알고, 세간법의 행사(行事)인 것을 알며, 이와 같이 출세간법인 니원사(泥洹事)를 안다. 이와 같이 알고 나서, 이와 같은 지혜로 혼란을 없애고, 증상만을 없애며, 오직 소멸만 보면서 이것을 잘 수행하고, 반복해서 닦는다.[소멸을 관하는 지혜[觀滅智]를 마친다]
028_1094_a_02L明了坐禪人知此煩惱是定亂知世閒法行事如是知出世閒法泥洹事如是知已如是智除亂除增上慢唯見滅是善脩行多脩觀滅智已竟
解脫道論卷第十一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1. 1)원문은 “고고(苦苦)”이나 문맥상 ‘삼고(三苦)’의 오자로 추정된다. 수정하였다.
  2. 2)고상(苦相)ㆍ무상상(無常相)ㆍ무아상(無我相)을 말한다.
  3. 3)원문은 “인연생상(因緣生相)”이나 문맥으로 보아 ‘생(生)’은 ‘멸(滅)’의 오자로 추정된다. 수정하여 번역하였다.
  4. 4)원문은 “수지(受持)”나 문맥상 “수사(受事)”라야 옳다. ‘지(持)’는 ‘사(事)’의 오자로 추정되어 수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