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五事毘婆沙論卷下

ABC_IT_K0970_T_002
029_0300_c_01L오사비바사론 하권
029_0300_c_01L五事毘婆沙論卷下


법구 지음
현장 한역
029_0300_c_02L尊者法救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1. 분별색품(分別色品) ②
029_0300_c_04L分別色品第一之餘

【문】만들어진 색의 내근(內根)에 대해서 나는 잘 알았다. 이제 다시 감각기관에 포섭되지 않는 것을 듣고자 하니, 그 모양에 대해 말해주기 바란다.
【답】색깔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무표색(無表色)이 있다. 이 가운데 색깔은 좋아하는 현색(顯色) 등을 말한다. 만약 청색ㆍ황색 등의 색이 변하지 않고 깨어지지 않는다면 이를 좋아하는 현색이라고 한다. 만약 청색ㆍ황색 등의 색이 변하고 깨어진다면 이를 싫어하는 현색이라고 한다. 만약 평등하다면 둘 사이의 중간이라고 한다. 비슷하게 나타나는 색이기 때문이다.
029_0300_c_05L所造色內根所攝者我已了知復欲聞非根攝者願說其相色聲香味所觸無表此中色謂好顯色等若靑黃等色不變壞名好顯色此若變壞名惡顯色若平等者名二中閒似顯處色
【문】색처(包處)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현색이고, 둘째는 형색(形色)이다. 무슨 까닭에 이 가운데서 오직 현색만을 말하는가?
【답】지금 이 가운데 마땅히 “색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현색이고, 둘째는 형색이다. 현색은 청색ㆍ황색 등을 말하고, 형색은 길고 짧은 것 등을 말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은 것에 무슨 뜻이 있겠는가? 현색은 거칠고 알기 쉽기 때문이다.
029_0300_c_11L色處有二一顯二形故此中唯辯顯色今於此中應作是說色有二種一顯二形顯色謂靑黃等形色謂長短等而不說者有何意耶謂顯色麤及易知故
이와 같이 모든 색은 6식 가운데서 두 가지 식이 인식하는 것이다. 안식 및 의식이다. 먼저 안식으로 자신만의 모습[自相]을 요별하고, 뒤에 의식으로써 자신만의 모습과 공통된 모습[其相]을 요별한다.
저 모든 색이 현재에 머물 때에 안식은 오직 그 자신만의 모습을 요별하고, 안식이 바로[無間] 분별하는 의식을 일으켜서 거듭 이전의 색에 대한 자신만의 모습과 공통된 모습을 요별한다. 그러나 이 일어난 분별하는 의식은 이전의 안식에 의지하고, 이전의 색의 대상을 반연한다. 이와 같이 의식이 바로 현재 머물 때에 의지하는 것과 반연이 되는 것은 모두 과거에 있다.
029_0300_c_15L如是諸色於六識中二識所識謂眼及意先用眼識唯了自相後用意識了自共相謂彼諸色住現在時眼識唯能了彼自相眼識無閒起分別意識重了前色自相或共相然此所起分別意識依前眼識緣前色境如是意識正現在時所依所緣竝在過去
029_0301_a_01L이로 말미암아 다섯 가지 대상이 현재에 머물 때에 의식은 저들 자신만의 모습을 요별할 수 없다. 이런 까닭에 색의 대상은 두 가지 식이 인식하는 것이다.
모든 안식이 현재 머물 때에는 오직 현재의 자신만의 모습을 요별하고 공통된 모습은 요별하지 못한다. 만약 모든 의식이 현재 머물 때에는 삼세(三世)의 자신만의 모습과 공통된 모습을 다 요별한다. 모든 의식은 대상에 두루하기 때문이고 분별함이 있기 때문이다.
안식 뒤에 바로 의식이 일어나는 것은 정해지지 않았다. 6식신(識身)에서 허용하는 것에 따라 한 종류가 일어난다. 안식이 바로 의식을 반드시 일으킨다면, 괴로움의 뿌리는 괴로움의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아니어야 한다. 괴로움의 뿌리는 오직 5식신(識身)에만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근온(根蘊)에서 말한 것과 어긋나게 된다. 가령 괴로움의 뿌리는 괴로움의 뿌리에게 인연(因緣)과 등무간연과 증상연(增上綠)이 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안식에 의지하여 색을 요별하고, 바로 뒤에 분별하는 의식을 끌어와 일으킨다. 그런 까닭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식이 먼저 인식하고 안식이 받아들인 다음에 의식은 따라서 인식한다.”
029_0300_c_22L由斯五境住現在時意識不能了彼自相是故色境二識所識謂諸眼識現在前時唯了現在自相非共若諸意識現在前時通了三世自相共相以諸意識境界遍故有分別故眼識無閒非定起意識於六識身容隨起一種若眼識無閒定起意識者則苦根不應爲苦等無閒苦根唯在五識身故若爾便違根蘊所說如說苦根與苦根爲等無閒增上然依眼識了別色已無閒引起分別意識故作是言眼識先識眼識受已意識隨識
소리에 두 가지가 있다. 널리 말한 것과 같다.
유집수대종(有執受大種)1)이란 현재 찰나의 유정의 수에 포섭되는 대종을 말한다. 무집수대종(無執受大種)이란 과거ㆍ미래의 유정의 수에 포섭되는 대종을 말한다. 또한 삼세의 유정이 아닌 수에 포섭되는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유집수대종에서 생겨난 소리는 유집수대종을 원인으로 한다고 말한다. 유집수대종이 여기서 생겨난 소리에 대하여 앞에서 말한 생인(生因) 등의 다섯 가지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무집수대종을 원인으로 하는 소리도 역시 이와 같다.
만약 입에서 나는 소리와 손 등을 합쳐서 생기는 소리는 유집수대종을 원인으로 하는 소리라고 한다. 만약 숲의 바람소리나 물소리 등의 소리는 무집수대종을 원인으로 하는 소리라고 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029_0301_a_12L聲有二種乃至廣說有執受大種者謂諸大種現在剎那有情數攝無執受大種者謂諸大種過去未來有情數攝及三世非有情數攝此中有執受大種所生聲名有執受大種爲因有執受大種與此所生聲爲前生等五種因故無執受大種爲因聲亦爾若從口出手等合生名有執受大種因聲若從林水風等所生名無執受大種因聲餘如前釋
029_0301_b_01L모든 냄새를 지닌 것도 널리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즐거운 뜻을 주는 것을 좋은 냄새[好香]라고 한다. 즐겁지 않은 뜻을 주는 것을 나쁜 냄새[惡香]라고 한다. 느낌의 장소를 수순하거나 배제하는 것을 평등한 냄새라고 한다.
코가 냄새를 맡기 때문에 비근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모든 맛을 지닌 것도 널리 말한 것과 같다. 모든 즐거운 뜻을 주는 것을 좋은 맛[可意味]이라고 한다. 즐겁지 않은 뜻을 주는 것을 나쁜 맛[不可意味]이라고 한다. 이 둘과 어긋나는 것을 따르고 버리는 곳[順捨處]의 맛이라고 한다. 혀가 맛을 보기 때문에 설근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029_0301_a_22L諸所有香乃至廣說諸悅意者說名好香不悅意者說名惡香順捨受處名平等香鼻所嗅者謂鼻根境餘如前釋諸所有味乃至廣諸悅意者名可意味不悅意者名不可意味與二相違名順捨處味所嘗者謂舌根境餘如前釋
【문】만약 맛을 보았을 때, 설식(舌識)이 먼저 일어나는가, 신식(身識)이 먼저 일어나는가?
【답】만약 차가움, 따뜻함 등이 더욱 강하다면, 신식이 먼저 일어난다. 만약 짠맛, 신맛 등이 더욱 강하다면, 설식이 먼저 일어난다. 만약 촉감과 맛이 평등하다면, 설식이 먼저 일어난다. 맛보고자 하는 욕망이 더욱 뛰어나기 때문이다.
모든 촉감의 일부분도 널리 말한 것과 같다. 미끄러운 성질이란 부드러운 것을 말한다. 껄끄러운 성질이란 거칠고 강한 것을 말한다. 가벼운 성질이란 무게를 달아서 잴 수 없는 것을 말한다. 무거운 성질이란 달아서 잴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차갑다는 것은 저것에 핍박받아 따뜻해지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배고프다는 것은 먹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갈증이 난다는 것은 마시고 싶은 마을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일곱 가지는 모두 촉처(觸處)에 포섭되나니, 만들어진 색으로 자성을 삼는다. 앞의 4대종은 비록 촉처에 포섭되나, 만들어진 색이 아닌 것으로 자성을 삼는다. 이런 까닭에 촉처에는 열한 가지가 있다. 지금의 일곱 가지는 만들어진 색이기 때문에 일부분이라고 한다. 몸이 접촉하기 때문에 신근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해석한 것과 같다.
029_0301_b_05L若嘗味時爲先起舌識先起身識耶冷暖等增則先起身識若鹹酢等增則先起舌識若觸味平等亦先起舌味欲勝故所觸一分乃至廣說性者謂柔軟歰性者謂麤强輕性者謂不可稱重性者謂可稱冷者謂彼所逼便起暖欲飢者謂食欲渴者謂飮欲如是七種是觸處攝以所造色而爲自性前四大種雖觸處攝非所造色而爲自性是故觸處有十一種今七所造故名一分身所觸者謂身根境餘如前釋
029_0301_c_01L【문】어떤 대종이 더욱 강해지면 미끄러운 성질이 있는가? 나아가 어떤 대종이 더욱 강해지면 갈증이 나는가?
【답】어떤 이가 말한다.
“치우쳐서 더욱 강해지는 것이 없다. 그러나 4대종의 성질과 종류에 차별이 있어 능히 미끄러운 성질을 만들고 나아가 갈증이 생기는 것까지 능히 만든다.”
또한 어떤 이가 말한다.
“수계와 화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미끄러움을 만든다. 지계와 풍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껄끄러움을 만든다. 화계와 풍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가벼움을 만든다. 지계와 수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무거움을 만든다. 수계와 풍계가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차거움을 만든다. 오로지 풍계만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배고픔을 만든다. 오로지 화계만 더욱 늘어나기 때문에 능히 갈증을 만든다.”
여기서 말하는 ‘더욱 늘어난다’는 것은 업과 작용의 늘어남을 말하고, 일과 본체의 늘어남은 아니다. 마치 심과 심소와 같다.
무표색(無表色)은 무엇을 말하고, 나아가 법처(法處)에 떨어지는 색이라고 하는가?
029_0301_b_17L何大種增故有滑廣說乃至何大種增故有渴耶作是說無偏增者然四大種性類差有能造滑性廣說乃至有能造渴復有說者水火界增故能造滑地風界增故能造歰火風界增故能造輕地水界增故能造重水風界增故能造冷唯風界增故能造飢唯火界增故能造渴此言增者謂業用增非事體增如心心所無表云何乃至廣說墮法處色者
떨어짐에는 여섯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계(界)에 떨어짐이요, 둘째는 취(趣)에 떨어짐이요, 셋째는 보특가라(補特伽羅)2)에 떨어짐이요, 넷째는 처(處)에 떨어짐이요, 다섯째는 유루(有漏)에 떨어짐이요, 여섯째는 자체(自體)에 떨어짐이다.
계에 떨어짐이란, ‘결온(結蘊)’에서 말한 것과 같다. 모든 묶임은 욕계에 떨어진다. 저 묶임은 욕계 등에 있다.
취에 떨어짐이란, 만약 이와 같은 6취(趣)에 포섭되어 속한다면, 이를 이름하여 취에 떨어진다고 한다.
보특가라(補特伽羅)에 떨어짐이란, 비나야(毘奈耶)3)에서 말한 것과 같다. 두 가지 보특가라가 있는데, 승수(僧數) 가운데 떨어져서 승가를 화합케 한다.
자체에 떨어짐이란, 여기서 ‘무표색은 무엇을 말하는가? 법처에 떨어지는 색을 말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유루에 떨어짐이란, 이 논에서 ‘무엇을 법에 떨어짐이라고 하는가? 유루법을 말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자체에 떨어짐이란, ‘대종온(大種蘊)’에서 ‘유집수(有執受)란 무슨 뜻인가? 답하자면, 이는 말이 더욱 증가하여 나타나는 바의 자체법에 떨어짐이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029_0301_c_04L墮有六種界墮補特伽羅墮處墮有漏自體墮界墮者如結蘊說諸結墮欲界彼結在欲界等趣墮者謂若攝屬如是趣者名墮是趣補特伽羅墮者如毘奈耶說有二補特伽羅僧數中令僧和合處墮者如此中說無表色云何謂墮法處色有漏墮者如此論說云何墮法謂有漏法自體墮者如大種蘊說有執受是何義此增語所顯墮自體法
‘무표색’이란 선한 계율과 악한 계율이 서로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는 언제나 하나의 식이 인식한 것으로서 의식(意識)을 말하니, 대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색깔 등의 다섯 가지 대상은 현재에 다섯 가지 식이 인식한 것이다. 삼세(三世)의 시간에서는 의식이 인식한 것이다. 이것(무표색)은 항상 의식이 인식한 것이다. 눈 등의 다섯 가지 감각기관도 역시 항상 의식이 인식한 것이다.
이 무표색은 모두 두 가지 증류가 있다. 선(善)과 불선(不善)이다. 무기(無記)가 없는 것은 강한 힘으로 마음이 무표색을 능히 일으켜야 하는데, 무기는 마음의 힘이 약하여 무표색을 일으키지 못한다.
모든 선(善)의 무표에는 모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율의에 포섭되는 것이고, 둘째는 율의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불선(壽)의 무표에도 모두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율의가 아닌 것에 포섭되는 것이고, 둘째는 율의가 아닌 것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다.
029_0301_c_14L無表色者善惡戒相續不斷此一切時一識所謂意識者以無對故色等五境於現在時五識所識於三世時意識所此於恒時意識所識眼等五根亦一切時意識所識此無表色摠有二謂善不善無無記者以强力心能發無表無記心劣不發無表諸善無表摠有二種一者律儀所攝二者律儀所不攝不善無表亦有二種一者不律儀所攝二者不律儀所不攝
029_0302_a_01L율의에 포섭되는 무표색에 또한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이고, 둘째는 정려율의(靜慮律儀)이고, 셋째는 무루율의(無漏律儀)이고, 넷째는 단율의(斷律儀)이다.
별해탈(別解脫)율의란 7중계(衆戒)4)를 말한다. 정려(靜慮)율의란 색계의 계율을 말한다. 무루(無漏)율의란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계율을 말한다. 단(斷)율의란 두 가지 율의, 즉 정려율의와 무루율의의 일부분에 의하여 건립한다. 욕계의 오염을 떠나 아홉 가지 무간도(無間道)에 전전함에 따르는 것에 포섭되는 것을 단율의라고 이름한다. 능히 모든 악한 계율을 다스리기 때문이고, 또한 악한 계율이 일으키는 번뇌를 다스리기 때문에 단율의라고 이름한다. 앞의 여덟 가지 무간도에 전전함에 따르는 것에 포섭되는 것은 오직 악한 계율이 일으키는 번뇌만을 다스리고, 제9무간도에 전전함에 포섭되는 것은 능히 악한 계율 및 악한 계율이 일으키는 번뇌를 다스린다.
029_0302_a_01L儀所攝無表復有四種一者別解脫律儀二者靜慮律儀三者無漏律儀四者斷律儀別解脫律儀謂七衆戒靜慮律儀謂色界戒無漏律儀謂學無學戒斷律儀者依二律儀一分建謂靜慮律儀無漏律儀離欲界染九無間道隨轉攝者名斷律儀以能對治一切惡戒及能對治起惡戒煩故名爲斷前八無閒道隨轉攝者唯能對治起惡戒煩惱第九無閒道隨轉攝者能對治惡戒及能對治起惡戒煩惱
【문】별해탈율의란 어떤 인연 때문에 얻고, 어떤 인연 때문에 버리는가?
【답】다른 사람의 가르침으로 연유하여 얻고, 네 가지 인연 때문에 버린다. 어떤 것들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배운 계율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두 가지 형태[二形]5)의 생김이요, 셋째는 선근을 끊음이요, 넷째는 중동분(衆同分)을 잃어버림이다.
029_0302_a_13L別解脫律儀何緣故得何緣故捨由他教得四緣故捨等爲四捨所學戒二形生根斷失衆同分
【문】정려율의란 어떤 인연 때문에 얻고, 어떤 인연 때문에 버리는가?
【답】색계의 선심을 만약 얻는다면 얻는 것이고, 만약 버린다면 곧 버리는 것이다. 이는 또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러남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둘째는 계(界)와 경지[地]가 바뀌기 때문이다.
029_0302_a_16L靜慮律儀何緣故得何緣故捨色界善心若得便若捨便捨此復二種由退故由界地有轉易故
【문】무루율의란 어떤 인연 때문에 얻고, 어떤 인연 때문에 버리는가?
【답】도(道)와 함께 얻어서 모두 버림이 없는 것이다. 만약 분수에 따라 버린다면 이것은 세 가지 연(緣)으로 말미암는다. 첫째는 물러남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둘째는 과보를 얻기 때문이요, 셋째는 감각기관의 전변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029_0302_a_19L無漏律儀何緣故得何緣故捨與道俱得無全捨若隨分捨則由三緣一由退故由得果故由轉根故
029_0302_b_01L【문】단율의란 어떤 인연 때문에 얻고, 어떤 인연 때문에 버리는가?
【답】정려율의에 포섭되는 것은 정려율의에서 말한 것과 같고, 무루율의에 포섭되는 것은 무루율의에서 말한 것과 같다.
율의에 포섭되는 선한 무표색(無表色)의 경우, 만약 강한 청정한 마음이 일으킨 바의 선한 표색(表色)이라면 이 무표색을 얻고, 만약 열등한 청정한 마음이 일으킨 선한 표색이라면 이 무표색을 얻지 못한다. 이 무표색을 버림은 세 가지 연으로 말미암는다. 첫째는 의근의 즐거움이 멈추는 것이요, 둘째는 가행(加行)을 버림이요, 셋째는 세력의 지나침을 한정하는 것이다.
029_0302_a_22L斷律儀緣故得何緣故捨靜慮律儀所攝如靜慮律儀說無漏律儀所攝者如無漏律儀說律儀所攝善無表者若强淨心所發善表得此無表若劣淨心所發善表不得此無表捨此無由三種緣意樂息捨加行限勢過
불율의(不律儀)에 포섭되는 불선한 무표색(無表色)이란, 양 등을 도살하는 모든 불율의를 말한다. 이 불율의는 두 가지 연으로 얻는다. 첫째는 업을 지음[作業]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둘째는 일을 받음[受事]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이 불율의는 네 가지 연으로 말미암아 버린다. 첫째는 별해탈계(別解脫戒)를 받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둘째는 정려율의를 얻음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셋째는 두 가지 형태의 생김으로 말미암는 것이요, 넷째는 중동분을 잃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029_0302_b_06L不律儀所攝不善無表者屠羊等諸不律儀此不律儀由二緣由作業由受事此不律儀由四緣捨由受別解脫戒由得靜慮律儀由二形生由失衆同分
그러나 모든 색은 간략하게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숙(異熟)이고, 둘째는 더욱 성장함[長養]이요, 셋째는 평등하게 흐름[等流]이고, 넷째는 찰나(利那)이다. 이 가운데 안처(眼處)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만 있으니, 첫째는 이숙이고, 둘째는 더욱 성장함이다. 평등하게 흐름은 따로 없다. 앞의 두 가지를 떠나 다시 평등하게 흐름의 성질이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ㆍ비처ㆍ설처ㆍ신처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색처에는 오직 세 가지 종류만 있다. 첫째는 이숙이고, 둘째는 더욱 성장함이고, 셋째는 평등하게 흐름이다. 향처ㆍ미처ㆍ촉처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성처(聲處)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만 있다. 앞의 세 가지에서 이숙을 제외한 것이다.
법처에 떨어진 색에는 오직 두 가지 종류만 있다. 처음의 무루심과, 함께하는 것은 찰나에 포섭되는 것이고, 나머지는 등류(等流)6)에 속한다.
029_0302_b_10L然一切色略有四種一者異熟二者長養三者等流四者剎那此中眼處唯有二種一者異熟二者長養無別等流以離前二更不別有等流性故耳鼻舌身處應知亦爾色處唯有三一者異熟二者長養三者等流味觸處應知亦爾聲處唯有二種前三除異熟墮法處色唯有二種無漏心俱者剎那所攝餘等流攝

2. 분별심품(分別心品)
029_0302_b_19L分別心品第二

【문】색의 모습은 마치 물거품처럼 미혹에 기만당한 어리석은 범부들이 만지고 더듬을 수가 없음을 알았다. 심법(心法)에 대해 듣고자 한다. 그 모습은 어떠한가?
【답】심(心)ㆍ의(意)ㆍ식(識)을 말한다. 심만을 말하지는 않겠다. 이는 질문한 것이기 때문이다.
029_0302_b_20L已知色相誑惑愚夫不可撮摩猶如聚沫欲聞心法其相云何謂心意識不應說心是所問故
029_0302_c_01L【문】심ㆍ의ㆍ식의 세 가지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이는 차별이 없다. 세간에서 하나를 말하여 여럿이라 하고, 여럿을 하나라고 말하는 경우와 같기 때문이다. 하나를 말하여 여럿이라 하는 것은 사부(士夫)7)를 인(人), 유동(儒童)8) 등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 여럿을 하나라고 말하는 것은 새, 콩 등의 같은 이름으로 말하여 다시 짓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하나에 같이 의지함을 알아야 한다. 심ㆍ의ㆍ식도 또한 이와 같다.
또한 어떤 말에서는 차별이 있다. 과거(過去)를 의(意)라고 이름하고, 미래를 심(心)이라고 이름하고, 현재를 식(識)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계(界)를 시설(施設)한 것을 심이라 하고, 처(處)를 시설한 것을 의라고 하고, 온(蘊)을 시설한 것을 식이라고 한다.
또한 아주 멀리 행한 업에 의한 것을 심이라 하고, 바로 앞에 행한 업에 의한 것을 의라고 하고, 상속이 낳은 업에 의한 것을 식이라고 한다.
또한 채집(採集)의 뜻으로 말미암아 심이라 이름하여 말하고, 취(趣)의 뜻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의라 이름하여 말하고, 요별(了別)의 뜻으로 말미암아 식이라 이름하여 말한다. 이는 다시 무엇을 말하는가? 6식신(識身)을 말한다.
029_0302_b_23L心意識三有何差別此無差別如世閒事一說爲多多說一故一說多者如說士夫爲人儒童等多說一者如說鳥豆等同名再生應知此中同依一事說心意識亦復如是復有說者亦有差別過去名意未來名心現在名識復次界施設心處施設意蘊施設識復次依遠行業說名爲心依前行業說名爲意依續生業說名爲識復次由採集義說名爲心由依趣義說名爲意由了別義說名爲識此復云何謂六識身
【문】이는 어찌하여 오직 여섯 가지만 있고 늘어나지도 줄지도 않는가?
【답】의지하는 것 등이 있기 때문이니, 식이 의지하는 것이 오직 여섯 가지만 있음을 말한다. 만약 식이 줄어서 다섯 가지 식만 있으면, 한 가지 의지하는 것은 식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식이 늘어나서 일곱 가지 식이 있으면, 한 가지의 식은 마찬가지로 의지하는 것 등이 없게 될 것이다.
여섯 가지 소연(所緣)도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식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의지하는 것 등에 따랐을 뿐이다. 식에 신(身)이란 말을 한 것은 하나의 식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안식은 안식신(眼識身)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요컨대 안식이 많이 있어야 안식신이라고 말한다. 한 마리의 코끼리를 코끼리 무리[象身]라고 부르지 않고, 요컨대 많은 코끼리가 있어야 코끼리 무리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것도 이와 같다.
무엇을 안식이라고 말하는가?
눈의 감각기관에 의지한다는 것은 안식의 의지하는 바를 나타내고, 각각의 색을 요별함은 안식의 대상인 소연을 나타낸다.
또한 눈의 감각기관에 의지하는 것은 안식의 원인[因]을 설명하고, 색은 안식의 연(緣)을 설명한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이여, 눈을 원인으로 하고 색을 연으로 하여 안식이 생겨남을 마땅히 알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029_0302_c_12L此何唯六非減非增所依等故謂識所依唯有六種減識至五則一所依無識若增識至七則一識無所依等六所緣應知亦然說識異唯約所依說識爲身者一識有多故非一眼識名眼識身多眼識名眼識身如非一象可名象要有多象乃名象身此亦如是識云何謂依眼根者顯眼識所依了別色者顯眼識所緣復次謂依眼根者說眼識因色者說眼識緣如世尊說苾芻當知因眼緣色眼識得生
029_0303_a_01L【문】눈은 안식에게 어떤 원인이 되는가?
【답】이들은 의인(依因)이 된다. 비유하자면 대종(大種)은 만들어진 색에게 의인의 뜻이 된다.
각각 요별하는 것은 안식의 모습을 설명한다. 식은 요별로써 그 모습을 삼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의(意)을 말한다. 눈에 의지하고 색을 연하여 요별하는 모습이 있음을 안식이라 이름한다. 널리 설하여, 뜻에 의지하고 법(法)을 연하여 요별하는 모습이 있음을 의식이라 이름한다.
029_0302_c_23L眼與眼識爲何等因此爲依因譬如大種與所造色爲依因義各了別者說眼識相識以了別爲其相故此中意說依眼緣色有了別相名爲眼識廣說乃至依意緣法有了別相名爲意識
【문】어찌하여 다만 눈의 감각기관 등에 의지한다고 말하지 않고, 또는 다만 각각 색 등을 요별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답】만약 그런 설에 따른다면. 하나의 뜻이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눈의 감각기관 등에 의지한다고만 말하면, 그들에 상응하는 느낌[受] 등의 모든 법도 역시 눈 등의 감각기관에 의지하므로 마땅히 안식 등으로 말해야할 것이다.
또한 다만 각각 색 등을 요별한다고만 말하면, 이미 의식도 색 등을 요별하였으니, 즉 마땅히 의식을 안식 등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눈의 감각기관 등에 의지한다고 설명한 것은, 능히 색 등을 요별하는 의식을 구분한 것이다. 또한 각각 능히 색 등을 요별한다고 설명한 것은, 안식 등의 식과 상응하는 느낌 등을 구분한 것이다.
029_0303_a_06L何不但說謂依眼根等或不但說各了別色等若隨說一義不成故謂若但說依眼根等則彼相應受等諸法亦依眼根等應名眼等識若復但說各了別色等旣有意識亦了別色等則應意識名眼等識然此中說依眼根等遮能了別色等意識復說各能了別色等遮眼等識相應受等
【문】눈과 색ㆍ밝음ㆍ작의(作意) 등을 연하여 안식이 생긴다. 무슨 까닭에 다만 안식만을 말하고 나머지 것들은 설명하지 않는가?
【답】마치 무염서(無染書)처럼 눈의 감각기관이 가장 중요하기[勝] 때문이다. 눈은 함께 하지 않기[不共] 때문이다. 마치 어떤 종자의 싹과 같다. 눈은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이다. 북소리 등과 같다. 눈과 가깝기 때문이다. 각지(覺支)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안식ㆍ이식ㆍ신식에는 각각 선(善)ㆍ불선(不善)ㆍ유부무기(布覆無記)ㆍ무부무기(無覆無記)의 네 가지가 있다.
불선은 오직 욕계(欲界)에만 있고, 유부무기는 오직 범천의 세계에만 있고, 선과 무부무기는 욕계와 범천의 세계에 모두 통한다. 그 위의 경지에는 있지 않다. 심사(尋伺)9)가 있기 때문이다.
비식ㆍ설식의 두 가지 식에는 각각 세 가지가 있다. 유부무기를 제외한다. 오직 욕계에만 있다. 단식(段食)을 연하기 때문이다.
의식에는 네 가지 종류가 있고, 삼계(三界)에 다 통하고, 묶이지 않는다.
029_0303_a_14L作意爲緣生眼何故但說眼識非餘眼根勝故如儛染書眼不共故如某種芽眼所依故如鼓聲等眼鄰近故如說覺支眼耳身識各有四種謂善不善有覆無記無覆無記不善者唯欲界有覆無記唯在梵世善無覆無記通欲界梵世非在上地有尋伺故鼻舌二識各有三種除有覆無記唯在欲界段食故意識有四種通三界不繫
029_0303_b_01L【문】만약 초정려(初靜慮) 이상의 모든 경지에서라면 안식ㆍ이식ㆍ신식의 세 가지 식신(識身)이 없는데, 그 경지에 이르면 어찌하여 보고, 듣고, 접촉하는 것이 있는가?
【답】수행의 힘으로써, 초정려의 경지에서 세 가지 식신이 현전하여 그들 세 가지 감각기관으로 하여금 보고, 듣고, 접촉함이 있게 한다. 이와 같은 뜻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029_0303_a_23L若初靜慮以上諸地無三識身生彼如何有見聞觸以修力故初靜慮地三識現前令彼三根有見聞觸如是義故有問言
【문】다른 경지의 몸과 다른 경지의 눈과 다른 경지의 색으로 다른 경지에서 안식이 두루 발생할 수 있는가?
【답】발생한다. 제2정려의 경지에 이르면 제4정려의 경지의 눈으로써 제3정려의 경지의 색을 보고, 그 제2정려의 경지의 몸, 제4정려의 경지의 눈, 제3정려의 경지의 색, 초정려의 경지의 안식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 가운데 5식신에는 각각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숙(異熟)이고, 둘째는 등류(等流)이다. 의식신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이숙이고, 둘째는 등류이고, 셋째는 찰나이다. 이 가운데서 찰나는 고법지인(苦法智忍)10)에 상응하는 의식을 말한다.
029_0303_b_04L頗有餘地身餘地餘地色餘地眼識生耶謂生第二靜慮地者用第四靜慮地眼第三靜慮地色彼第二靜慮地身四靜慮地眼第三靜慮地色初靜慮地眼識生此中五識身各有二種者異熟二者等流意識身有三種者異熟二者等流三者剎那此中剎謂苦法智忍相應意識
【문】도(道)가 현재 앞에 있음으로 인하여 한 찰나 사이에 버려진 마음이 하나라도 있는가? 혹은 이것과 같은 종류의 원인[同類因]의 자성이고 같은 종류의 원인이 없는 것이 있는가? 혹은 같은 종류의 원인이 있고 같은 종류의 원인의 자성이 아닌 것이 있는가? 혹은 같은 종류의 원인의 자성이고 역시 같은 종류의 원인이 있는 것이 있는가? 혹은 같은 종류의 원인의 자성이 아니고 같은 종류의 원인이 없는 것이 있는가?
【답】도류지인(道類智忍)11)에서는 그때 마땅히 4구(句)를 지어 설명한다. 제1구는 이미 생긴 고법지인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2구는 미래에 견도(見道)에서 상응할 마음을 말한다. 제3구는 이미 생긴 고법지인에 상응하는 마음을 제외한 모든 나머지의 이미 일어난 견도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4구는 앞에서의 설명을 제외한 것을 말한다.
029_0303_b_12L頗有一因道現在前一剎那頃所捨之心或有是同類因自性非有同類因有有同類因非同類因自性或有是同類因自性亦有同類因或有非同類因自性亦非有同類因道類智忍時應作四句第一句者謂已生苦法智忍相應心第二句者謂未來見道相應心第三句者謂除已生苦法智忍相應心諸餘已生見道相應心四句者謂除前說
029_0303_c_01L【문】도(道)가 현재 앞에 있음으로 인하여 한 찰나 사이에 버려진 마음이 있는가? 혹은 이것은 유루이고, 유루를 연함이 있는가? 혹은 이것은 유루이고, 무루를 연함이 있는가? 혹은 이것은 무루이고, 무루를 연함이 있는가? 혹은 이것은 무루이고 유루를 연함이 있는가?
【답】있다. 도류지인에서는 그때 마땅히 4구를 지어 설명한다. 제1구는 색계ㆍ무색계에 묶인 견도에서 끊는 유루의 연과 수면(隨眠)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2구는 색계ㆍ무색계에 묶인 견도에서 끊는 무루의 연과 수면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3구는 멸도인지(滅道忍智)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제4구는 고집인지(苦集忍智)에 상응하는 마음을 말한다.
029_0303_b_22L頗有一因道現在前一剎那頃所捨之心或有是有漏有漏緣或有是有漏無漏緣或有是無漏無漏緣或有是無漏有漏緣答有道類智忍時應作四句第一句者謂色無色界繫見道所斷有漏緣隨眠相應心第二句者謂色無色界繫見道所斷無漏緣隨眠相應心第三句者謂滅道忍智相應心第四句者謂苦集忍智相應心
【문】사건 없는[無事] 번뇌를 다스려서 도(道)가 현재 앞에 있음에 한 찰나 사이에 버려진 마음이 있는가? 혹은 무루의 연이 있고, 무루의 연의 연이 없는가? 혹은 무루의 연의 연이 있고, 무루의 연이 없는가? 혹은 무루의 연과 또한 무루의 연의 연이 있는가? 혹은 무루의 연이 아닌 것이 있고, 또한 무루의 연의 연이 아닌 것이 있는가?
【답】이와 같은 4구에 준해서 뜻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029_0303_c_08L頗有無事煩惱對治道現在前一剎那頃所捨之心或有無漏緣非無漏緣緣或有無漏緣緣非無漏緣或有無漏緣亦無漏緣緣或有非無漏緣亦非無漏緣緣如是四句准義應思
【문】찰나의 마음이 현재 앞에 있음에 없어진 마음이 있는가? 혹은 그르게 정해진 원인과 그르게 정해진 조건이 있는가? 혹은 그르게 정해진 원인과 옳게 정해진 조건이 있는가? 혹은 옳게 정해진 원인과 올게 정해진 조건이 있는가?
혹은 옮게 정해진 원인과 그르게 정해진 조건이 있는가?
【답】이와 같은 4구에 준해서 뜻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029_0303_c_13L頗有剎那心現在前所滅之心或有非定非定緣或有非定是定緣或有是定是定緣或有是定非定緣如是四句義應思
【문】찰나의 마음이 현재 앞에 있음에 없어진 마음이 있는가? 혹은 이미 발생하였고 이미 발생한 것이 아닌 마음이 원인이 되는 것이 있는가? 혹은 이미 발생한 마음이 원인이 되고 이미 발생한 것이 아닌 것이 있는가? 혹은 이미 발생하였고 또한 이미 발생한 마음이 원인이 되는 것이 있는가? 혹은 이미 발생한 것이 아니고 또한 이미 발생한 것이 아닌 마음이 원인이 되는 것이 있는가?
【답】이와 같은 4구에 준해서 뜻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것이다.
029_0303_c_17L頗有剎那心現在前所滅之心或有已生非已生心爲因或有已生心爲因非已生或有已生亦已生心爲因或有非已生亦非已生心爲因如是四句准義應思

3. 분별심소법품(分別心所法品)
029_0303_c_21L分別心所法品第三
029_0304_a_01L
【문】이미 하나의 주체와 대상이 아님을 알았다. 행상(行相)이 전전하는 것이 마치 환상의 일과 같아 포악하게 날뛰는 코끼리나 말처럼 극히 다스리기 어렵다. 탐욕 등의 차별의 마음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지금 또한 심소법의 모습을 듣고자 한다. 어떤 것들을 심소법이라 하며, 어떻게 차별이 있음을 알겠는가?
【답】느낌 등을 심소법이라고 이름한다. 경전으로써 기준을 삼기 때문에 따로 본체를 가짐을 안다. 가령 부처님께서 “눈과 색의 두 가지 조건은 안식을 발생한다. 이 세 가지가 화합하기 때문에 촉(觸)이 있고, 촉과 함께 수(受)ㆍ상(想)ㆍ사(思)가 일어난다”라고 말씀하셨다.
029_0303_c_22L已知非一所依所緣行相流轉猶如幻事極難調伏如惡象馬由有貪等差別之心今復欲聞心所法相謂心所法如何知別有所有受等名心所法經爲量故知別有體如世尊說眼色二緣生於眼識三和合故觸與觸俱起有受想思乃至廣說
살타벌저계경(薩他筏底戒經) 가운데에서 말씀하셨다.
“또한 사유가 있다. 모든 심소법은 마을에 의지하여 일어나 마음에 속박된다.”
또한 사리자(舍利子)가 구지라(俱胝羅)에게 물었다.
“무슨 까닭에 상상과 생각을 마음의 작용[意行]이라고 하는가?”
구지라가 말하였다.
“이 두 가지 심소법은 마음에 의지하여 일어나고 마음에 속박된다.”
이와 같은 한없는 계경 등으로 말미암아 심소법이 따로 본체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심소법이 만약 따로 본체를 가지지 않는다면, 사마타(奢摩他)12)와 비발사나(毘鉢舍那),13) 선근의 식주(識住), 모든 식념주(食念住), 모든 온(蘊)과 6근ㆍ6경ㆍ7각지ㆍ8정도와 모든 번뇌를 깨뜨리는 법 및 유지(有支) 등이 계경에서 마땅히 감소했을 것이다. 또한 마땅히 대지법(大地法) 등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말씀하신 법문은 감소하지 않았고, 대지법 등도 잘 건립되어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심소법이 따로 있음을 알 수 있다.
029_0304_a_06L他筏底契經中言復有思惟諸心所法依心而起繫屬於心又舍利子問俱胝羅何故想思說名意行俱胝羅此二心所法依心起屬心乃至廣由如是等無量契經知心所法定別有體又心所法若無別體則奢摩毘鉢舍那善根識住諸食念住六六覺支道支諸結學法及有支等契經應減又不應立大地法等經所說法門無減大地法等實可建故知別有諸心所法
【문】어떻게 심소법은 마음과 상응함을 알 수 있는가?
【답】경전으로써 기준을 삼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보는 것이 근본이 되고, 믿음ㆍ지혜의 증득과 상응한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심소법이 상응의 뜻이 있음을 안다.
029_0304_a_17L寧知心所與心相應經爲量故如世尊說爲根信證智相應故知心所有相應
【문】‘상응’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답】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論)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상응이 란 말은 평등의 뜻이다.”
029_0304_a_20L言相應者是何義耶阿毘達磨諸大論師咸作是說言相應者是平等義
029_0304_b_01L【문】마음이 일어나는 지위에 심소법이 많이 있기도 하고, 마음이 발생할 때에 심소법이 적게 있기도 하다. 어찌하여 평등이 상응의 뜻이라고 하는가?
【답】본체의 평등함에 의지하여 이와 같이 말한다. 만약 하나의 마음 가운데 두 가지 느낌과 한 가지 상상이 있다면 평등한 상응의 뜻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마음 가운데는 한 가지의 느낌과 한 가지 상상만이 있다. 생각 등도 역시 이와 같다. 그러므로 평등이 상응의 뜻이라고 말한다.
또한 평등하여 서로 어긋나지 않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평등하여 떨어지지 않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평등하게 운전(運轉)하는 것이 상응의 뜻이다. 마치 수레의 여러 부분과 같기 때문에 상응이라 이름한다.
또한 같은 시간, 같은 인식 주체[所依], 같은 행상, 같은 인식대상, 같은 결과, 같은 평등한 흐름, 같은 이숙(累熟)이 상응의 뜻이다.
이는 또한 무엇을 말하는가? 수ㆍ상ㆍ사 등을 말한다.
029_0304_a_22L有心起位心所法多有心生時心所法少云何平等是相應義依體平等作如是說若一心中二受一想可非平等是相應義然一心中一受一想思等亦爾故說平等是相應義復次等不乖違是相應義不離散是相應義平等運轉是相應如車衆分故名相應復次同一時同一所依同一行相同一所緣一果同一等流同一異熟是相應義此復云何謂受思乃至廣說
【문】무슨 까닭에 수를 먼저 말하고, 상 등을 먼저 말하지 않는가?
【답】행상이 거칠기 때문이다. 수가 비록 장애14)가 없고, 공간에 머물지 않으나 행상이 거칠기 때문에 색처럼 먼저 시설(施設)하였다. 그러므로 세간에서 “나는 지금 손이 아프고, 발이 아프고,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상ㆍ사ㆍ촉 등은 이와 같은 일이 없다.
무엇을 수라고 하는가?
받아들이는 성질을 말한다. 받아들임이 있음으로써 받아들이는 성질이라고 말한다. 즉, 이는 인식대상인 대상을 받아 느낀다는 뜻이다.
029_0304_b_09L故先說受非先說想等行相麤故受雖無礙不住方所而行相麤如色施設故世間說我今手痛足痛頭痛乃至廣說觸等無如是事受云謂領納性有領納用名領納性是領受所緣境義
029_0304_c_01L이것에는 즐거운 느낌[樂受]ㆍ괴로운 느낌[苦受]ㆍ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不苦不樂受]의 세 가지 종류가 있다.
만약 능히 모든 감각기관의 대종을 기르게 하고 평등한 느낌의 성질이라면, 즐거운 느낌이라 말한다. 만약 모든 감각기관의 대종을 감소하게 하고 불평등한 느낌의 성질이라면, 괴로운 느낌이라 말한다. 이 두 가지와 서로 어긋나고 평등한 것도 아니고 불평등한 느낌의 성질도 아닌 것을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또한 만약 이 느낌에서 탐욕과 수면(隨眠)의 두 가지 연을 따라 증가하게 한다면, 이를 인식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혹은 상응하기 때문에, 이를 즐거운 느낌이라고 한다.
만약 이 느낌에서 성냄과 수면의 두 가지 연을 따라 증가하게 한다면, 이를 인식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혹은 상응이기 때문에, 이를 괴로운 느낌이라고 한다.
만약 이 느낌에서 어리석음과 수면의 두 가지 연을 따라 증가하게 한다면, 이를 인식대상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혹은 상응이기 때문에, 이를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비록 어리석음과 수면이 모든 느낌에서 두 가지 연들로 하여금 따라 증가하게 하지만, 어리석음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에 의지하여 발생하고, 자신의 힘으로 전환하여 대부분이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과 함께 한다. 나머지는 명료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029_0304_b_15L此有三種謂樂受苦受不苦不樂受者若能長養諸根大種平等受性名爲樂受若能損減諸根大種不平等受性名爲苦受與二相違非平等非不平等受性不苦不樂受復次若於此受令貪隨眠二緣隨增謂所緣故或相應故名樂受若於此受令瞋隨眠二緣隨謂所緣故或相應故是名苦受於此受令癡隨眠二緣隨增謂所緣或相應故名不苦不樂受雖癡隨眠於一切受二緣隨增而不共癡依而起自力而轉多與不苦不樂受餘明了故不作是說
흔쾌한 것[可意]과 흔쾌하지 않은 것[不可意]으로써 대상을 받아들이고 버림에 차별이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세 가지 받아들이는 성질을 세운다.
이런 까닭에 다만 세 가지 종류의 느낌만을 말하지만, 실제로 느낌의 성질은 무한히 많은 종류가 있다. 어떤 곳에서는 즐거운 느낌과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실제 없다고 하기도 한다.
029_0304_c_05L由可意不可意順捨境有差別故建立如是三領納性是故但說有三種受而實受性有無量種有餘欲令無實樂受及不苦不樂受
【문】그들은 어떤 연으로 즐거운 느낌이 실제로 없다고 말하는가?
【답】경전으로써 기준을 삼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모든 느낌은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다”고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 “그대는 마땅히 괴로움으로써 즐거운 느낌을 관(觀)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만약 즐거운 느낌의 성질이 실제로 있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모든 제자들에게 즐거움이 바로 고통임을 관하게 하였겠는가?
또한 계경에서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것은 뒤바뀐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만약 즐거운 느낌이 있다면, 마땅히 괴로움을 즐거움이라고 말하는 생각의 뒤바뀜, 마음의 뒤바뀜, 견해의 뒤바뀜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또한 계경에서 “모든 유루의 느낌은 고제(苦諦)에 포섭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포섭된다는 것은 이것의 자성(自性)이 포섭되는 것이고, 실제로 즐거운 느낌이 포섭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느낌)은 괴로움이 자성이다.
029_0304_c_09L彼何緣說無實樂受經爲量故爲契經說諸所有受無非是苦又契經說汝應以苦觀於樂受若樂受性是實有者如何世尊教諸弟子觀樂爲苦又契經言於苦謂樂名顚倒故若有樂受應無於苦謂樂想倒心倒見倒又契經說諸有漏受苦諦攝故此中攝者是自性攝非實樂受是苦自性
029_0305_a_01L어찌하여 이것이 고제에 포섭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미 고제에 포섭된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실제 즐거운 느낌이 없다. 또한 모습이 다르기 때문이다. 모습을 핍박하는 것을 괴로움이라 이름한다고 말한다. 즐거운 느낌이 실제하는 것이 아니어서 모습을 핍박한다.
어찌하여 모든 유루의 느낌이 다 고제에 포섭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관하여 나타나기[現觀] 때문이다. 모든 유루가 다 괴로움이라고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관하여 나타난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실제로 즐거운 느낌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아비달마의 모든 위대한 논사들은 말하였다.
“실제로 즐거운 느낌은 있다.”
경전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029_0304_c_17L云何可言是苦諦攝旣說苦諦攝故無實樂受又相異故謂逼迫相說名爲苦非實樂受有逼迫相如何可言諸有漏受皆苦諦攝又現觀故謂觀一切有漏皆苦說名現觀若樂受性是實有者觀樂爲苦成顚倒見應非現觀是故定知無實樂受阿毘達磨諸論師言實有樂受經爲量故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대명(大名)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색이 오로지 고통이고 즐거움이 아니라면 즐거움이 따르지 않으니, 유정은 모든 색에 마땅히 탐닉하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계경에서 “즐거움과 함께 기쁨과 함께 4성제(聖諦)에 대해서 나는 관하여 나타나는 것을 말하였다”고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 “세 가지 느낌이 있으니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계경에서 “모든 즐거운 느낌이 생겨날 때, 즐거움에 머물 때, 즐거움은 무상하기 때문에 허물과 근심이 있다. 모든 괴로운 느낌이 생겨날 때, 괴로움에 머물 때, 괴로움은 무상하기 때문에 허물과 근심이 있다”고 말한다.
만약 즐거운 느낌의 성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괴로움과 같이 한 가지 종류의 설명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이고, 마땅히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 다른 종류의 설명을 하여야 할 것이고, 마땅히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 다른 종류의 설명을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즐거운 느낌의 성질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마땅히 경안(輕安)이 없어야 하리니,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기쁨이 있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가볍고 편안하다[輕安]”고 말한다.
만약 가볍고 편안함이 없다면 마땅히 즐거움도 없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전전하여 마땅히 열반도 없어야 할 것이다.
다음에 순서대로의 원인도 없다. 결과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029_0305_a_02L謂契經說佛告大名若色一向是苦非樂非樂所隨有情不應貪著諸色乃至廣說又契經言幷樂幷喜於四聖諦我說現觀又契經說有三種受謂樂受苦受不苦不樂受又契經言諸樂受生時樂住時樂由無常有過患諸苦受生時苦住時由無常有過患若樂受性非實有者應非如苦作一類說應於樂受作別類說應於苦受作別類說又若樂受非實有性應無輕安以無因故如契經說由有喜故身心輕安若無輕安亦應無樂展轉乃至應無涅槃無漸次因果非有故
그 논사들은 이것에 대해서 뜻을 구하여 반박하는 의미의 말을 한다.
“설사 뛰어난 경지[十地] 가운데 비록 기쁨이 없어도 몸과 마음의 가볍고 편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증거로 제시한 말은 결정적이지 않다.”
그들이 반박하는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가? 뛰어난 경지 가운데는 모두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이 뜻을 관하여야만 할 것이다.
마치 건달박(乾達縛)15)에게 먹는 일[食]ㆍ명색(名色)ㆍ식(識)16)의 세 가지가 화합하는 것과 같다.
또한 계경에서 “부모의 교합이 있어야 건달박이 바로 현재에 존재할 수 있으나, 어떤 때는 부모의 교합이 없어도 건달박이 현재에 존재한다. 가령 습생(濕生) 및 화생(化生)으로 태어나는 것들은 태생(胎生)과 난생(卵生)의 두 가지 유정의 존재들과 달리 부모의 교합을 떠나서 태(胎) 가운데에 들어가는 뜻이 있다”고 말한다.
029_0305_a_15L彼師於此作救義言如上地中雖無有喜而非無有身心輕安故引證言非爲決定彼救非理所以者何以上地中都無喜故應觀此義如健達縛三事和合食名色經如契經言父母交會有健達縛正現在前而見有時無父母會有健達縛亦現在前如受濕生及化生者非受卵二生有情離父母合有入胎義
029_0305_b_01L또한 경전에서 “세 가지가 화합한 것을 목숨[壽]ㆍ따뜻함[暖]ㆍ식(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무색계에는 비록 따뜻함이 없으나 목숨과 식이 있다. 욕계와 색계가 아닌 세계는 따뜻함을 떠난 목숨과 식이 있다”고 말한다.
또한 경전에서 “몸은 식주(食住)에 의지하고, 색계와 무색계의 두 가지 세계가 아닌 것은 세 가지 식[三食]으로 말미암아 머무른다. 욕계 또한 그와 같다. 욕계가 아닌 것 가운데서는 네 가지 식[四食]으로 말미암아 머무른다. 그 위의 세계도 역시 같다”고 말한 것과 같다.
029_0305_a_23L又如經言三事和合謂壽然無色界雖無有暖而有壽識非欲色界壽識離暖又如經說身依食住非上二界住由三食欲界亦然非欲界中住由四食上界亦爾
또한 경전에서 “명색은 식을 연하고, 식은 명색을 연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 무색계가 아닌 것은 비록 색이 없으나 명(名)17)과 식이 전전(展轉)하여 서로 연이 된다. 욕계와 색계 가운데서도 역시 이 뜻이 있게끔 한다.
이 가운데서도 역시 그와 같다.
만약 기쁨이 있는 곳이라면 기쁨이 있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가볍고 편안함이 있음을 얻는다. 만약 기쁨이 없는 곳이라 할지라도 가볍고 편안함이 역시 있다면 나머지 연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틀렸다고 비난받지 않는다.
029_0305_b_05L又如經言名色緣識識緣名色非無色界雖無有色而名與識展轉相緣令欲色中亦有此義此中亦爾若有喜處由有喜故得有輕安若處喜無輕安亦有由餘緣故不應爲責
어떤 것들을 ‘나머지 연’이라고 말하는가?
먼저 욕계에는 수승한 기쁨의 느낌이 있어 미지정(未至定)을 이끌어서 가볍고 편안함이 일어나도록 한다. 초정려(初靜慮)와 제2정려에는 수승한 기쁨의 느낌이 있어 그 위의 경지까지 이끌어서 가볍고 편안함이 일어나도록 한다.
만약 기쁨이 전혀 없다면 가볍고 편안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증거로 말미암아 즐거운 느낌이 결정코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처음의 과보가 위의 두 가지 세계에 있어 비록 그 과보를 얻을 수 없으니, 그들은 아라한(阿羅漢)의 과보를 얻는다. 앞의 힘이 이끌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응당 그러하니 마땅히 틀렸다고 비난받지 않는다.
029_0305_b_10L何謂餘緣謂先欲界有勝喜受引未至定輕安令起初二靜慮有勝喜受引上地中輕安令起若全無喜則無輕安由此證知定有樂受又如初果在上二界雖不能得而彼能得阿羅漢果先力引故此亦應然不應爲責
또한 지팡이로 먼저 수레를 막아두었다가 후에 지팡이를 빼내었을 때 그 수레가 굴러가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이와 같다. 먼저 기쁨의 힘이 뒤의 가볍고 편안함을 이끌어오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가볍고 편안함은 기쁨이 있음으로 생겨남을 알아야 한다. 기쁨은 곧 기쁜 느낌과 즐거운 느낌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즐거운 느낌이 실제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029_0305_b_16L又如以杖先擊於輪後捨杖時其輪猶轉此亦應爾由先喜力引後輕安是故輕安定由有喜喜卽喜受樂受所攝是故定知實有樂受
또한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희망(希望)이 있기 때문이다. 계경에서 “만약 즐거움이 있다면 법(法)에 대해서 희망이 있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법에 대해서 희망이 없다”고 말한다. 이런 까닭에 즐거운 느낌이 실제로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029_0305_b_20L又由樂受有希望故如契經說若有樂者於法希望樂受若無則應於法無希望者是故定知實有樂受
029_0305_c_01L또한 좋아할 만한 업[可愛業]에는 과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모든 좋아할 만한 업은 마땅히 공(空)하여 과보가 없다. 모든 좋아할 만한 업은 반드시 즐거운 느낌을 그 과보로 삼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좋아할 만한 업은 모든 즐거운 도구를 이숙과(異熟果)로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즐거운 도구는 다만 증상과(增上果)이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운 도구는 증상과이지 이숙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029_0305_b_22L可愛業應無果故若無樂受諸可愛業應空無果諸可愛業定以樂受爲其果故亦不應言諸可愛業以諸樂具爲異熟果樂具但是增上果故諸樂具是增上果非異熟果
어찌된 까닭인가?
즐거운 도구는 다른 이들과 함께 받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숨이 끊어져도 깨어져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즐거운 도구를 다른 유정들과 함께 받아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모든 이숙과는 다른 이들과 함께 받아 이용할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없다. 자신의 상속에 떨어져 다른 이들과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029_0305_c_04L所以者所有樂具可有與他共受用故命終已不失壞故謂諸樂具與他有情可共受用諸異熟果定無與他共受用義墮自相續不共他故
또한 모든 즐거운 도구는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마치 코끼리와 말 등과 같이 오히려 깨어져 없어지지 않는다. 모든 이숙과는 몸과 목숨이 함께 한다. 몸과 목숨이 만약 없다면 그들은 반드시 깨어져 없어진다. 그러므로 좋아할 만한 업에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마땅히 공하여 결과가 없다. 이 이치는 결정되어 있다.
029_0305_c_08L又諸樂具自命終已如象馬等猶不失壞異熟果與身命俱身命若無彼定失故可愛業若無樂受應空無果理決定
또 포섭하는 이익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모든 감각기관의 대종(大種)들도 마땅히 포섭하는 이익(攝益)이 없을 것이다. 만약 ‘포섭하는 이익은 모든 유정이 대상인 바깥 경계를 분별하기 때문이고 즐거운 느낌 때문은 아니다’라고 말한다면, 이치 역시 그렇지 않다. 포섭하는 이익은 마치 괴로운 느낌과 같이 손해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029_0305_c_12L又攝益故若無樂受諸根大種應無攝益若謂攝益由諸有情分別境界非由樂受理亦不然應知攝如由苦受有損害故
또한 바른 가행(加行)은 반드시 과보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바로 바른 가행은 마땅히 공하여 결과가 없다. 바른 가행이란 것은 마땅히 괴로운 느낌으로서 이숙과를 삼아야 한다. 즐거운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삿된 가행처럼 반드시 괴로운 느낌으로서 이숙과를 삼기 때문이다. 바른 가행은 마땅히 즐거운 느낌으로서 이숙과를 삼는다. 이들은 다시 밝음과 어둠, 빛과 그림자 등처럼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029_0305_c_15L又正加行必有果故若無樂受則正加行應空無果正加行者應以苦受爲異熟果無樂受故如邪加行必以苦受爲異熟果故正加行應以樂受爲異熟果更相違如明與闇影與光等
또한 즐거운 느낌으로 말미암아 악행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악행도 마땅히 없을 것이다. 모든 유정들이 즐거운 느낌에 탐착하기 때문에 모든 악행을 저지르고 괴로운 느낌의 결과를 감수한다. 악행이 만약 없다면 괴로운 느낌도 마땅히 없을 것이다. 괴로운 느낌이 이미 있으므로 악행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악행이 있으므로 즐거운 느낌도 반드시 있다.
029_0305_c_20L又由樂受起惡行故若無樂受惡行應無由諸有情貪著樂受起諸惡行感苦受果行若無應無苦受苦受旣有惡行非旣有惡行定有樂受
029_0306_a_01L또한 법수(法受) 때문이다. 계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네 가지 법수가 있으니, 혹은 현재는 즐겁지만 뒤에는 괴로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 혹은 현재는 괴롭지만 뒤에는 즐거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 혹은 현재도 즐겁고 뒤에도 즐거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 혹은 현재도 괴롭고 뒤에도 괴로운 법의 느낌이 있는 것이다. 만약 즐거운 느낌이 없다면 법의 느낌도 마땅히 한 가지이고, 네 가지일 필요가 없다.
이와 같은 등등의 갖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즐거운 느낌이 반드시 있다.
029_0306_a_01L又法受故契經說有四法受或有法受現樂後或有法受現苦後樂或有法受現樂後樂或有法受現苦後苦若無樂法受應一不應有四由如是等種種因緣定有樂受
【문】만약 즐거운 느낌이 있다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즐거운 느낌과 어긋남이 있을 것이다. 경에는 어떠한 이치가 있는가?
【답】다른 이치가 있다. 또한 처음 경전에서 “모든 지닌 느낌은 괴로움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그 경전에 의지하여 세 가지 괴로움을 말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떤 것 등을 세 가지 괴로움[三苦]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고고(苦苦)18)이고, 둘째는 괴고(壞苦)19)이고, 셋째는 행고(行苦)20)이다.
만약 모든 괴로운 느낌이라면, 고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괴로움이라고 한다. 모든 즐거운 느낌이라면, 괴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괴로움이라고 한다. 모든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라면, 행고에서 유래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괴로움이라고 한다. 마치 계경에서 ‘영원하지 않기[無常] 때문에 괴롭다’고 말한 것과 같다. 그 경전들은 이러한 이치가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029_0306_a_06L若有樂受世尊所說違樂受經有何理趣有別理且初經說諸所有受無非苦者知彼經依三苦說何謂三苦一者苦二者壞苦三者行苦若諸苦受由苦苦故說名爲苦若諸樂受由壞苦故說名爲苦若諸不苦不樂受由行苦故說名爲苦如契經說無常故苦應知彼經有此理趣
五事毘婆沙論卷下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㓮造
  1. 1)감각을 발생시키는 대종이란 뜻이다.
  2. 2)산스크리트어 pudgala의 음사로 부파불교에서 윤회의 주체로 상정한 존제이다.
  3. 3)vinaya의 음사로 계율을 말한다.
  4. 4)승단을 구성하는 비구ㆍ비구니ㆍ사미ㆍ사미니ㆍ식차마나ㆍ우바새ㆍ우바이 등이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한다.
  5. 5)남녀 두 가지의 성기를 함께 가진 것을 말한다.
  6. 6)원인과 증류가 같다는 것이다. 시간적으로 먼저의 것과 뒤의 것이 인과의 관계를 가지고 맺어져 있고 더구나 둘이 같은 성질일 때, 먼저 것에 대하여 뒤의 것을 등류라고 한다.
  7. 7)산스코리트어 PUDGALA(補特伽羅)를 말한다. 이를 인, 또는 유동 등으로 번역함을 말한다.
  8. 8)앞의 주를 참조바란다.
  9. 9)심은 대상에 대하여 거칠게 관찰하는 것이고, 사는 자세히 분별하고 사찰하는 정신작용을 말한다.
  10. 10)줄여서 고법인(苦法忍)이라고도 하며. 이에 따라 욕계의 고제(苦諦)를 현관(現觀)함으로써 번뇌를 끊는다.
  11. 11)여덟 가지 인[八忍]의 하나로 색계, 무색계의 도제(道諦)를 관한 뒤에 일어나는 마음의 하나이다.
  12. 12)śamathā의 음사로 지(止)로 번역한다.
  13. 13)vipassana의 음사로 관(觀)으로 번역한다.
  14. 14)느낌은 색의 영역이 아니므로 장애가 없음을 말한다.
  15. 15)Gandharva의 음사로 건달바라고도 한다. 향만을 먹는다고 한다. 육신의 죽음 후에 다른 육신을 받아 나기 전의 영혼신인 중유(中有)의 다른 이름이다.
  16. 16)고려대장경에서는 경(經)이라 하였으나 다른 관본에는 식(識)이라고 하였다. 후자를 따른다.
  17. 17)명색에서 색이 없기 때문에 명만 남았다.
  18. 18)탐탁하지 않은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괴로움을 말한다.
  19. 19)좋아하는 대상이 변하여 없어짐으로 받는 괴로움을 말한다.
  20. 20)세상의 일이 바뀌는 것을 보고 느끼는 괴로움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