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唐內典錄卷第三 席

ABC_IT_K1057_T_003
031_0681_b_01L
대당내전록 제3권


장안[京師] 서명사(西明寺)의 석씨(釋氏:道宣) 지음


1. 역대중경전역소종록 ③

동진(東晉)ㆍ전진(前秦)ㆍ후진(後秦)ㆍ서진(西秦)ㆍ북량(北涼)

5) 동진조전역불경록(東晉朝傳譯佛經錄)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경전에서는 “삼계(三界)는 항상하지 않으며, 유위(有爲)의 것은 영원하지 않다”고 했다. 진(晉) 왕조의 기틀은 멀리 위(魏)24)을 연계했다. 고표(高標)2)는 조상(曹爽)3)을 주살(誅殺)하여 조위(曹魏)의 왕실을 무너뜨리고 천자의 지위에 올라 왕조를 열었다. 금(金)이 토(土)의 운수를 계승하여 역수(曆數)가 자신에게 이르게 되자, 촉(蜀)나라를 평정하고 오(吳)나라를 항복시켰다. 태평 시대로 나아가 관정(寬政)이라 하였으니, 학문은 이미 훌륭하게 완비되었고 무예는 창을 거두어 싸움을 끝내게 했다. 그런데 106환관(宦官)들이 왕에게 나아가는 차단하고 관리들은 지킬 것을 잃어버리자 세상이 크게 혼란하여 이것을 막을 이가 없었다. 이때 승려나 속인 할 것 없이 무너져 뿔뿔이 흩어져서 아침에 저녁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강남지역江表에 정권을 의지하니4) 불법도 정치를 따라 일어나 사문과 청신사가 이에 경전을 수집하였기 때문에 「동진록(東晉錄)」이라고 하는 것을 기록해 나아갔다.
진(晉)의 원제(元帝)는 선제(宣帝:司馬懿)의 증손이고 낭야(瑯琊:하비성) 지역 무왕(武王:司馬佃)의 손자이며, 공왕(恭王:司馬觀)의 아들로서 이름은 예(睿)이고 자(字)는 경문(景文)이다. 처음 태어날 때 몸 안에서 신령스런 광채가 있어서 방 안을 환하게 밝혔다. 일각(日角)5)의 왼쪽에 하얀 털이 났으며, 눈에는 정미한 빛이 나서 곁눈질에도 반짝거리며 빛을 냈다. 안동장군(安東將軍)ㆍ도독(都督), 양주(楊州) 등 여러 곳의 군사(軍事)ㆍ좌승상(左丞相) 등을 두루 거쳤다.
회제(懷帝)ㆍ민제(愍帝)의 패배 후에 모든 관리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어떤 이는 강남(江南)으로 달아나고 어떤 이는 살륙당하기도 했다. 장안(長安)은 그 거점을 잃고 황제는 평양(平陽)에 유폐(幽閉)되었다.6) 이때 강동(江東) 지역에서 갑자기 다섯 해가 나타나자 백성들이 모여들어 사마예(司馬睿)에게 마땅히 진왕(晉王)으로 오르기를 권청하니, 천하의 정사萬機를 두루 정비하여 억조창생을 다스렸다. 민제가 붕어(崩御)(317)한 이후 이어서 곧바로 천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연호를 건무(建武)라 하고 건업(建業)을 수도로 삼았는데, 민제(愍帝)7)의 이름을 피하여 건강(建康)이라고 개칭하였다.
선대(先代)인 태강(太康)8) 2년(281)에 오나라의 구장(舊將) 관공(管恭)이 난을 일으켰는데, 이때 건업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점술가가 “관공은 이미 멸하였다. 그러나 다시 38년이 지나면 양주(楊州)에서 천자가 나오리라”라고 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과연 그 말처럼 되었다.
또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 때 천기를 보는 이가 “오(吳)나라 땅의 금릉산(金陵山)에서 5백 년 후에 반드시 천자가 날 것이다”라고 하자, 시황제가 그것을 경계하여 병사를 일으켜 금릉산을 파내어 절단해버리고는 말릉(秣陵)9)이라고 개칭하여 왕이 날 기세를 끊으려 했다. 이때부터 사마예에 이르기까지 526년 만에 비로소 진(晉) 왕조[金行]가 일어나 사해(四海)를 통치하게 되었으니, 금릉의 상서로운 기운이 여기에 있었다. 또한 당시에 항간에 떠도는 노래에 “다섯 마리의 말이 헤엄쳐서 양자강을 건너는데, 한 마리 말이 용이 되었다”라고 했다.
영가(永嘉)10) 연간에 일어난 상란(喪亂) 때문에 천하는 혼란하고 도탄에 빠졌는데, 오직 낭야(瑯琊)ㆍ서양(西陽)ㆍ여남(汝南)ㆍ남돈(南頓)ㆍ팽성(彭城) 등 다섯 왕만이 양자강 이남지역江表으로 건너왔다. 사마예가 먼저 기틀을 세워 원제(元帝)가 되었다. 장차 천명을 받을 것을 알려면 위로 하늘의 신령함에 감응해야 하고, 천하[輿圖]11)를 차지하려면 아래로 땅의 기세(氣勢)에 힘입어야 한다. 땅은 그것의 세력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시황제가 금릉산을 파내버리려고 했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하늘이 그것의 신령함을 내렸기 때문에 유요(劉曜)12)가 서진을 멸망시켰지만 진의 국운을 완전히 끝내지는 못했다.
원황제(元皇帝) 건무(建武) 원년 정축년(317)에 도읍을 세운 이래로 공제(恭帝) 원희(元熙) 원년 기미년(419)에 송(宋)에 선양되었는데, 그 기간은 104년이었다. 중국과 외국의 승려와 속인 27명이 번역한 경전과 아울러 기존의 실역경(失譯經)은 모두 263부 585권이다. 이들을 모아서 동진(東晉) 12명 군주와 건강(健康)의 목록으로 삼는다.

동진(東晉) 백시리밀다라(帛尸利蜜多羅)3부 11권, 경(經)ㆍ주(呪)
사문(沙門) 지도근(支道根)2부 7권, 경
사문 강법수(康法邃)1부 10권, 경
사문 축담무란(竺曇無蘭)110부 192권, 경(經)ㆍ주(呪)ㆍ계(戒)
사문 지도림(支道林)7부 7권, 논(論)ㆍ지귀(指歸)
사문 축승도(竺僧度)1부 1권, 지귀
사문 강도화(康道和)1부 3권, 경
사문 가류타가(加留陀伽)1부 1권, 경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5부 117권, 경ㆍ논
사문 비마라차(卑摩羅叉)2부 5권, 율(律)ㆍ잡사(雜事)
사문 담마(曇摩)1부 2권, 율요(律要)
사문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15부 115권, 경ㆍ계ㆍ논
사문 법현(法顯)6부 24권, 경ㆍ계ㆍ논ㆍ전(傳)
사문 기다밀(祇多蜜)25부 46권, 경
외국 거사(居士) 축난제(竺難提)3부 3권, 경
사문 석법력(釋法力)1부 1권, 경
사문 석숭공(釋嵩公)3부 3권, 경
사문 석퇴공(釋退公)1부 1권, 경
사문 석법용(釋法勇)1부 1권, 경
사문 석혜원(釋慧遠)14부 35권, 논ㆍ찬(讚)
사문 석승부(釋僧敷)1부 1권, 논
사문 담선(曇詵)2부 6권, 법(法)ㆍ논
사문 석도조(釋道祖)4부 4권, 목록(目錄)
사문 지민도(支敏度)1부 1권, 목록
사문 강법창(康法暢)1부 1권, 논
사문 축법제(竺法濟)1부 1권, 전(傳)
사문 석담미(釋曇微)2부 2권, 논ㆍ지귀(指歸)
제실역경(諸失譯經)53부 56권, 경(經)ㆍ주(呪)

(1) 백시리밀다라(帛尸利蜜多羅)
관정경(灌頂經) 9권『진세잡록(晉世雜錄)』13)에 보인다.
대공작왕신주경(大孔雀王神呪經)1권 『축도조록(竺道祖錄)』과 『출삼장기집(出三藏記集)』에 보인다.
공작왕잡신주경(孔雀王雜神呪經)1권 『축도조록』과 『출삼장기집』에 보인다. 모두 번역이 완전하지 않다.

이상 3부 모두 11권은 원제(元帝) 때 서역의 사문 백시리밀다가 번역하였다. 그는 진나라 말로는 길우(吉友)라고 하는데 국왕의 아들로서 마땅히 왕위를 계승했어야 했지만 나라를 동생에게 양보하고 조용히 태백(太伯)14)의 모습을 따랐다. 본성을 깨닫고 마음을 계발하려고 마침내 사문이 되었다. 타고난 자태가 고상하고 밝으며 기풍이 준수하고 뛰어났다. 단지 언뜻 그를 대하더라도 매우 탁월하여 여러 사람들 중에서 출중하였으니, 하물며 그의 총명함이나 뛰어난 말솜씨에 있어서겠는가.
승상(丞相) 왕도(王導)가 한번 보고 그를 뛰어나다고 여기고서 “우리들의 도반(徒伴)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에 이름이 드러났다. 일찍이 왕도가 백시리밀다에게 “외국에도 임금이 오직 한 명뿐일 텐데요”이라고 하였다. 그러자 백시리밀다는 웃으면서 “만약 빈도(貧道)가 단월(檀越:시주자, 재가자)로서 오늘날까지 있었다면, 어떻게 이곳까지 흘러들어 왔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훌륭한 대답이라고 여겼다. 주술(呪術)을 잘하여 구하는 것마다 영험이 있었기 때문에 건강(建康)에서 매우 성행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고좌법사(高座法師)라고 불렀다. 또 제자 역멱(歷覓)에게 고아한 소리의 범패(梵唄)를 전수했는데, 그 소리가 지금까지 전해 온다.

(2) 지도근(支道根)
방등법화경(方等法華經) 5권함강(咸康) 원년(335)에 번역되었다.
아촉불찰제보살학계품경(阿閦佛刹諸菩薩學戒品經) 2권태강(太康) 연간(280~289)에 번역되었다. 두 번째 번역이며 지루가참(支婁迦讖)의 번역과 대동소이하다.

이상 2부 모두 7권은 성제(成帝) 때 사문 지도근(支道根)이 번역했다. 모두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3) 강법수(康法邃)
비유경(譬喩經) 10권『구록(舊錄)』15)에서는 『비유경(譬喩經)』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상 1부 10권은 성제 때 사문 강법수가 여러 경전을 분류하여 모아서 번역한 것이다. 이 부(部)는 내용이 매우 요약되어 좋다.

(4) 지도림(支道林)
즉색유현론(卽色遊玄論)
변삼승론(辯三乘論)
석몽론(釋曚論)
성불변지론(聖不辯知論)
본업경서(本業經序)
본기사론서(本起四論序)
도행지귀(道行指歸)

이상 7부 모두 7권은 애제(哀帝) 때 사문 지둔(支遁)이 찬술한 것이다. 지둔의 자(字)는 도림(道林)이다. 어려서 재주가 뛰어났고 명리(名理)를 잘 담론(談論)하였다. 사안(謝安)ㆍ왕흡(王洽)ㆍ유회(劉恢)ㆍ은호(殷浩)ㆍ허순(許詢)ㆍ치초(郗超)ㆍ손작(孫綽)ㆍ환언표(桓彦表)ㆍ왕경인(王敬仁)ㆍ하차도(何次道)ㆍ왕문도(王文度)ㆍ사장하(謝長遐)ㆍ원언백(袁彦伯) 등 일대의 모두 저명한 명사들이 속세를 벗어난 도우들이었다. 그리고 늘 산에서 사는 것을 본성을 깨닫는 것이라고 여겼다. 빈번히 왕에게 초대를 받았지만, 나중에는 수도를 벗어났다. 치초(郗超)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지도림법사는 그 신명(神明)이 모든 것에 통하고 현묘함이 뛰어나서 홀로 깨달았다. 수백 년 이래에 불법을 환하게 밝혀서 진리를 끊어지지 않게 할 사람은 그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나머지는 『고승전』에서 기술하는 것과 같다. 저술은 모두 10권이며, 세상에서 성행했다.

(5) 축승도(竺僧度)
비담지귀(毘曇指歸) 1권

이상 1권은 애제(哀帝) 때 사문 축승도가 찬술했다. 나머지 내용은 『고승전』과 같다.

(6) 축담무란(竺曇無蘭)
의족경(義足經) 2권『오록(吳錄)』16)에 보이는데, 또한 다르게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백육십계삼부합이(二百六十戒三部合異) 2권태원(太元) 6년(381) 6월 20일에 사진서사(謝鎭西寺)에서 승려들의 번역을 모아 거듭 교감하였다. 『구록』과 『보창록』17) 등 두 목록에 보인다.
삼십칠품경(三十七品經) 1권태원 연간(376~396)에 번역했다. 도안(道安)은 율경(律經)에서 나왔다고 했다. 나중에 1권을 나열했다.
현겁천불명경(賢劫千佛名經)이상 두 경전은 『승우록(僧祐錄)』에 보인다.
팔사경(八師經)
옥야경(玉耶經)혹은 『옥야녀경(玉耶女經)』이라고도 한다.
하조아나함경(荷鵰阿那含經)『구록』에서는 아조(阿鵰)라고 했다. 혹은 가(苛)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계덕경(戒德經)혹은 『계덕향경(戒德香經)』이라고도 한다.
칠몽경(七夢經)『구록』에서는 『아난칠몽경(阿難七夢經)』이라고 했다.
수말소표경(水沫所漂經)
비구청경(比丘聽經)
치선법경(治禪法經)
사행법경(蛇行法經)『아함경』에서 나왔다.
폭상경(暴象經)
군양천두경(群羊千頭經)
구살국오왕경(拘薩國烏王經)간혹 라(羅)자가 있기도 하다. 『생경(生經)』에서 나왔다.
부부경(夫婦經)『생경』에서 나왔다.
독우경(犢牛經)혹은 자(字)자로 되어 있기도 하다.
야계경(野鷄經)『생경』에서 나왔다.
여타경(驢駝經)
고호조경(蠱狐鳥經)혹은 오(烏)자로 되어 있기도 하다. 『생경』에서 나왔다.
공작경(孔雀經)『생경』에서 나왔다.
오고경(五苦經)혹은 『정제죄개오락불경(淨除罪蓋娛樂佛經)』, 혹은 『오도장구경(五道章句經)』, 혹은 『오고장구경(五苦章句經)』이라고도 한다. 모두 네 가지 명칭이 있다.
십선십악경(十善十惡經)두 번째 번역이다. 『오록』에서는 다르게 번역되었다고 했다.
자애경(自愛經)혹은 『자애부자애경(自愛不自愛經)』이라고 하였다. 『구록』에 보인다.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혹은 리(離)자로 되어 있기도 하다.
국왕불려선니십몽경(國王不黎先尼十夢經)
마천국왕경(摩天國王經)『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미련경(彌蓮經)『구록』에 보인다. 혹은 『미란(彌蘭)』, 혹은 『미련(彌連)』이라고도 한다. 『육도집경』에서 나왔다.
범지알바라연문종존경(梵志頞波羅延問種尊經)
적지과경(寂志果經)
나바조위응소착경(羅婆鳥爲鷹所捉經)나바는 진나라 말로는 반치(半雉)이다.
대어사경(大魚事經)
견수세계경(見水世界經)『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신세경(新歲經)
불견범천정경(佛見梵天頂經)
별미후경(鼈獼猴經)『생경』에서 나왔다.
적취오유경(赤▼(口+隽)烏喩經)
무오아경(無吾我經)
계상응경(戒相應經)
아뇩풍경(阿耨風經)아뇩은 진나라 말로는 의차(依次)이다.
아난다원라운모경(阿難多洹羅云母經)
아육왕공양도량수경(阿育王供養道場樹經)
채연화위왕경(採蓮花違王經)혹은 『채연화위왕상불수결호묘화경(採蓮花違王上佛授決號妙花經)』이라고도 한다.
사천왕안행세간경(四天王案行世間經)
제석자심전승경(帝釋慈心戰勝經)
삼십삼천원관경(三十三天園觀經)『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
비구문불석제환인연경(比丘問佛釋提桓因緣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천어수라욕투전경(天於修羅欲鬪戰經)
천제수계경(天帝受戒經)
석제환인예목련방광경(釋提桓因詣目連放光經)
범천책수경(梵天策數經)『구록』에서는 『제천사경(諸天事經)』이라고 했다.
제천지경(諸天地經)이본(異本)을 번역한 것이다.
비구욕우천자방광경(比丘浴遇天子放光經)
제천문여래경계불가사의경(諸天問如來警戒不可思議經)『의족경(義足經)』에서 나왔다.
죄업보응경(罪業報應經)
구호신명경(救護身命經)
집수사행경(集修士行經)
권행유과경(勸行有果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선사만족경(禪思滿足經)『아함경』에서 나왔다. 두 번째 번역이다.
충심정행경(忠心正行經)『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혹은 『충심경(忠心經)』이라고도 한다. 『구록』에서는 『대충심경(大忠心經)』ㆍ『소충심경(小忠心經)』이라고 하였다.
견정경(見正經)
사대니리경(四大泥梨經)『별록(別錄)』18)에 실려 있다. 『출삼장기집』에서는 실역경(失譯經)이라고 했고, 대(大)자가 없다.
불위비구설대열지옥경(佛爲比丘說大熱地獄經)
지옥중생상해경(地獄衆生相害經)
십법성취악업입지옥경(十法成就惡業入地獄經)
중생정유철마성화치연경(衆生頂有鐵磨盛火熾然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견일중생거체분예도신경(見一衆生擧體糞穢塗身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철성니리경(鐵城泥犁經)
니리경(泥犁經)혹은 『중아함니리경(中阿含泥犁經)』이라고도 한다.
목련견대신중생연철전신경(目連見大身衆生然鐵纏身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비구성취오법입지옥경(比丘成就五法入地獄經)『아함경』에서 나왔다.
학인의란경(學人意亂經)
병사왕오원경(洴沙王五願經)
반니원시대가섭부불경(般泥洹時大迦葉赴佛經)혹은 『마하가섭경(摩訶迦葉經)』이라고도 한다.
오안문경(五眼文經)
제자명과경(弟子命過經)
공작왕주경(孔雀王呪經)앞서 길우(吉友:백시리밀다)가 번역한 것과는 다르다.
용왕결원오룡신주경(龍王結願五龍神呪經)
마니라단신주경(摩尼羅亶神呪經)
용왕주수욕경(龍王呪水浴經)
대신장군주경(大神將軍呪經)
이원법원신주경(伊洹法願神呪經)
대용대신주경(大龍大神呪經)
마니라단신주안마경(摩尼羅亶神呪案摩經)
약주경(藥呪經)
대신모결서주경(大神母結誓呪經)
주독경(呪毒經)
지구신주경(持句神呪經)
마유술주경(麻油術呪經)
단특라마유술신주경(檀特羅麻油術神呪經)
칠불소결마유술주경(七佛所結麻油術呪經)
해일액신주경(解日厄神呪經)
주수경(呪水經)
친수경(嚫水經)
청우주경(請雨呪經)
지우주경(止雨呪經)
환사발타라신주경(幻師跋陀羅神呪經)발타는 파타(波陀)라고도 한다.
타린발주경(陀隣鉢呪經)
주시기병경(呪時氣病經)
주소아경(呪小兒經)
주치경(呪齒經)
주안통경(呪眼痛經)
주아통경(呪牙痛經)
육신명신주경(六神名神呪經)
환사아추이신주경(幻師阿鄒夷神呪經)
의왕유루연신주경(醫王惟婁延神呪經)혹은 아난소문(阿難所問)을 덧붙이기도 한다. 나머지는 앞에 나열한 것과 같다.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戒本)태원(太元) 6년(381)에 승순(僧純)ㆍ담마지(曇摩持)ㆍ축승서(竺僧舒) 3가(家)의 본을 합쳐서 이 한 권을 만들었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욕우바새우바이계문(離欲優婆塞優婆夷戒文)또한 『구행이십이계문(具行二十二戒文)』이라고도 한다.

이상 109부 모두 112권은 효무제(孝武帝) 때 진나라 말로는 법정(法正)이라고 하는 서역 사문 축담무란이 양도(揚都)의 사진서사(謝鎭西寺)에서 경전을 간략히 뽑고 대부(大部)의 경전을 요약하여 두 개의 경만을 번역한 것이다. 이것이 『승우록』에 실려 있고, 이것 외에 여러 경은 『별록』에 보인다. 19) 비록 모두 정본이 있지만 이미 다시 별도로 간행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열거하고 의거한 바가 있으므로 제시해 둔다.

(7) 강도화(康道和)
익의경(益意經) 3권

이상 1부 3권은 효무제 때 사문 강도화가 태원(太元, 376~396) 말에 번역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주사행한록(朱士行漢錄)』20)에서는 2권이라고 했으며 번역자를 밝히지 않았다.

(8) 가류타가(加留陁伽)
십이유경(十二遊經)두 번째 번역이다. 강량야사(畺良耶舍)가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이상 1권은 효무제 때 진나라 말로 시수(時水)라 하는 외국 사문 가류타가가 태원 17년(392)에 번역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과 『보창록』 등에 보인다.

(9) 승가제바(僧伽提婆)
중아함경(中阿含經) 60권융안(隆安) 원년(397) 11월에 동정사(東亭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해서 융안 2년 6월에 마쳤다. 축도조가 필수(筆受)했으며, 두 번째 번역이다. 담마난제(曇摩難提)의 번역과는 같지 않다. 『축도조록』에 보인다.
증일아함(增一阿含) 50권융안(隆安) 원년(397) 정월에 번역되었으며, 두 번째 번역이다. 담마난제의 번역본과는 조금 다르다. 축도조가 필수했으며, 권수는 혹은 42권 혹은 33권이라고 하는데 확정된 것이 없다. 『축도조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아비담심(阿毗曇心) 4권태원 16년(391)에 여산(鏑山)에서 번역했다. 도자(道慈)가 필수했다. 『승우록』에 보인다.
삼법도론(三法度論) 2권태원 6년(381)에 여산에서 번역했다. 『별록』에서는 1권이라고 했다. 진(秦)의 담마난제가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혹은 삼법도(三法度)라고만 하여 논(論)자가 없으며, 어떤 경우는 경(經)자를 붙이기도 한다.
교수비구니법(敎授比丘尼法)『별록』에 보이며, 또한 여산에서 번역되었다고 한다.

이상 5부 모두 117권은 효무제(孝武帝) 및 안제(安帝) 때에 진나라 말로는 중천(衆天)이라고 하는 계빈국(罽賓國)의 삼장법사 구담(瞿曇) 승가제바가 번역한 것이다. 그는 후진(後秦) 요씨(姚氏)가 다스리던 때에 양자강을 건넜다. 이보다 앞서 여산의 석혜원(釋慧遠)은 오묘한 불전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였는데, 승가제바가 왔다는 말을 듣고 여산으로 오기를 청하여 번역했다. 번역할 때 화려한 수식을 배제하고 실질적인 내용만을 담았다. 지금 전해지는 것을 살펴보면 대개 그런 문장이다. 융안(隆安) 말년(402) 봄에 건강(建康)에 머무를 때 동진(東晉) 시대의 왕공(王公)과 풍류명사가 참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겨울이 되자 위군장군(衛軍將軍) 동정후(東亭侯) 왕순(王珣)을 위하여 다시 『중아함경』과 『증일아함경』 등을 번역했다. 수도의 이름 있는 대덕(大德)인 석혜지(釋慧持) 등 40명의 사문을 모아서 함께 번역문을 살폈는데,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 끝났다. 그가 양자강 이남과 낙양에 있으면서 앞뒤로 번역한 경론은 100여만 언인데 모두 오묘하게도 깊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다.

(10) 비마라차(卑摩羅叉)
비니송(毗尼誦) 3권이것은 『십송률(十誦律)』 후반의 선송(善誦)이다.
잡문율사(雜問律事) 2권여러 율에 요긴하게 쓰인다. 모두 『이진록(二秦錄)』에 보인다.

이상 2부 모두 5권은 안제 때 진나라 말로는 무구안(無垢眼)이라고 하는 계빈국의 삼장율사(三藏律師) 비마라차가 번역한 것이다. 그는 요진(姚秦) 홍시(弘始) 8년(406)에 장안에 도달하였다. 그는 구마라집이 입적한 이후 수춘[壽春:현재 안휘성 수현(壽縣)]으로 가서 석간사(石澗寺)에 머물렀다. 율장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율장을 성대하게 드날렸다. 앞서 불야다라(弗若多羅)가 구마라집과 함께 번역한 『십송률(十誦律)』 58권이 있었는데, 비마라차가 그 뒤에 나누어 61권으로 만들고, 선송(善誦)을 고쳐서 비니송(毗尼誦)이라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두 가지 명칭이 있다. 나중에 강릉(江陵)에 가서 『율잡사(律雜事)』를 번역했는데,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이 필수하였다. 세상에서 매우 성행하여 지금까지 전해진다.

(11) 담마(曇摩)
잡문율사(雜問律事) 2권번역한 사람과 장소는 다르지만 문장은 다르지 않다. 『별록』에 보인다.

이상 1부 2권은 안제 융안(隆安) 4년(400) 3월 2일에 사문 석승준(釋僧遵) 등 20여 대덕이 양주(楊州) 상서령(尙書令) 왕법도(王法度)의 정사(精舍)에서 진나라 말로는 법택(法澤)이라고 하는 삼장율사 담마에게 요청하여 번역했다. 각권 첫머리에 서(序)를 달아서 불(佛)ㆍ법(法)ㆍ승(僧) 삼보와 중생이 상호 교섭하지만, 그 영역[分齊]의 차이가 매우 심하니 반드시 훌륭하게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임을 밝혔다.

(12)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화엄경(華嚴經) 50권의희(義熙) 14년(418) 도량사(道場寺)에서 번역하기 시작해서 송(宋) 영초(永初) 2년(421)에 마쳤다. 혹은 60권이라고도 한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8권어떤 본에는 해(海)자를 더 붙였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혹은 송(宋)대의 번역이라고 한다.
과거인과경(過去因果經) 4권『별록』에 보인다.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 2권영초(永初) 2년(420) 도량사에서 번역했다. 『보창록』에 보인다.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 2권일명 『부정관경(不淨觀經)』이라고도 하고, 일명 『수행도지경(修行道地經)』이라고도 한다.
대방등여래장경(大方等如來藏經)원희(元熙) 2년(406) 도량사에서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이며,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법립(法立)이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문수사리발원게경(文殊師利發願偈經)원희 2년(406) 투량사(鬪場寺)에서 번역했다. 경전을 번역하고 나서 그 해가 경신년(庚申年)임을 기록했다. 혹 게(偈)자가 없기도 하다. 『보창록』에 보인다.
출생무량문지경(出生無量門持經)일명 『성도항마득일체지경(成道降魔得一切智經)』이라고도 한다. 여산(鏑山)에서 번역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본업경(本業經)
신미밀지경(新微密持經)융안(隆安) 2년(398)에 두 번째로 번역되었다. 지겸이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며, 『축도조록』에 보인다.
정육바라밀경(淨六波羅蜜經)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세 번째 번역이다.
승기율(僧祇律) 40권의희(義凞) 12년(416) 11월에 법현(法顯)과 함께 번역했다. 『축도조록』과 『별록』에 보인다. 어떤 경우는 30권으로 되어 있다.
승기대비구계본(僧祇大比丘戒本)도량사에서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이며, 『보창록』에 보인다.
방편심경(方便心經)법업(法業)과 함께 번역했다.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 15부 모두 115권은 안제 때 진나라 말로는 각현(覺賢)이라고 하는 북천축국 삼장법사 불타발타라가 양도(揚都)와 여산 두 곳에서 번역했다. 사문 법업(法業)ㆍ혜의(慧義)ㆍ혜엄(慧嚴) 등이 상세하게 함께 필수하였다. 『고승전』에는 “각현이 『니원경』 및 『수행방편심론』 등 15부 117권을 번역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보창록』에 근거해 보면 『신무량수경』과 『승기대비구계본』을 보충시키면, 부수는 비록 완전하지만 오히려 권수는 두 권이 적은데, 어떤 경전인지 알지 못하겠다. 앞으로 나올 훌륭한 인재가 자세히 연구하여 행여 기쁘게도 계속 이어서 빠진 부분을 보충해서 불법이 가득히 흘러갔으면 하는 바람뿐이다.내가 『별록』을 검토해 보니 『방등경』과 『니원경』 2권은 법현과 함께 번역했다고 했는데 아마도 법현의 기록에 들어간 것 같다
.

(13) 석법현(釋法顯)
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 6권의희(義凞) 6년(410) 사사공(謝司空)과 사석(謝石)이 도량사에서 번역했다. 『구록』에서는 각현(覺賢)이 번역하고 보운(寶雲)이 필수했다고 했다. 이것은 대본(大本)의 전반부 10권인 「대중문품(大衆問品)」이다. 『축도조록』에 보인다. 혹은 10권이라고 했다.
방등니원경(方等泥洹經) 2권『축도조록』에 보인다.
잡장경(雜藏經)이것은 『귀문목련경(鬼問目蓮經)』ㆍ『아귀보응경(餓鬼報應經)』ㆍ『목련설지옥아귀인연경(目蓮說地獄餓鬼因緣經)』 등 네 본과 같은 본인데 이름만 달리하여 따로 번역된 것이다. 『보창록』에 보인다.
승기니계본(僧祇尼戒本)각현과 함께 번역했으며 두 번째 번역이다. 위(魏)의 담가가라(曇柯迦羅)가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잡아비담심(雜阿毗曇心) 13권각현과 함께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이며 진(秦)의 승가발징(僧伽跋澄)이 번역한 것과 거의 같다.
역유천축기전(歷遊天竺記傳)

이상 6부 모두 24권은 평양(平陽) 사문 석법현이 번역한 것이다. 그는 안제(安帝) 융안(隆安) 3년(399)에 장안을 출발해서 천축국을 두루 여행했다. 멀리 부처님의 유적을 살피고 진(晉)에는 없던 여러 경(經)ㆍ율(律)ㆍ논(論)을 구하였다. 그곳 여러 나라를 거치면서 범어(梵語)와 범서(梵書)를 배우고, 자신이 손수 앞서 열거한 범본(梵本)을 베꼈다. 인도의 북부에서 남쪽으로 가서 사자국(師子國:현재의 스리랑카)에 머물렀다.
그 나라에는 부처님의 치아사리가 있었는데, 매년 3월이 되면 그 나라의 국왕이 10일 전에 미리 흰 코끼리를 장엄하고, 말 잘하고 지혜로운 귀중한 신하를 한 명 보내서 왕의 옷을 입고 코끼리 위에서 북을 치면서 큰 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치게 한다.
“여래께서 45년간 설법하시어 제도하신 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중생들과의 인연이 다하여 반열반(般涅槃)에 드셨도다. 이 이후로 1,497년이 지나 세간의 사람들은 오래도록 혼미하니 중생들이 불쌍할 뿐이다. 이제부터 10일 동안 부처님의 치아사리는 불치정사(佛齒精舍)를 나와서 무외정사(無畏精舍)로 향할 것이다. 향과 꽃을 가지고 와서 공양할지어다.”
이때가 바로 진(晉) 의희(義熙) 원년(405)에 해당된다. 법현은 다시 바다를 항해해서 양도(揚都)에 도착했다. 도량사(道場寺)에서 경(經)ㆍ계(戒)ㆍ논(論)을 번역했다. 유력(遊歷)한 것에 대해서는 별전(別傳)에 잘 갖추어 기록해 놓았다. 의희(義凞) 원년 을사(乙巳, 405)에서 개황(開皇) 17년 정사(丁巳, 597)까지를 계산하면 다시 1,681년이 된다.

(14) 기다밀(祇多蜜)
영락경(瓔珞經) 12권혹은 14권이다.
유마힐경(維摩詰經) 4권세 번째 번역이다.
선경(禪經) 4권
대지도경(大智度經) 4권이상 4부 모두 24권은 『남래신록(南來新錄)』에 보인다.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 2권두 번째 번역이다. 한(漢)의 지루가참(支婁迦讖)21)이 번역한 『반야삼매경(般若三昧經)』22) 2권과는 약간 다르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아술달경(阿術達經) 1권여기서부터 열거하는 것은 모두 단권(單卷)이다.
무소희망경(無所希望經)
보현관경(普賢觀經)혹은 『관보현보살경(觀普賢菩薩經)』이라고도 한다.
무극보삼매경(無極寶三昧經)두 번째 번역이다.
오개의결실행경(五蓋疑結失行經)두 번째 번역이다.
소욕치환경(所欲致患經)두 번째 번역이다.
여래독증자서삼매경(如來獨證自誓三昧經)23)두 번째 번역이다.
법몰진경(法沒盡經)두 번째 번역이다.
보살재경(菩薩齋經)두 번째 번역이다.
조명삼매경(照明三昧經)두 번째 번역이다.
분위경(分衛經)
위혁장자육향배경(威革長者六向拜經)어떤 본에는 위화(威華)로 되어 있다.
보살십주경(菩薩十住經)두 번째 번역이다.
마조왕경(摩調王經)
지만경(指膵經)혹은 지계(指髻)로 되어 있다.
부광경(浮光經)혹은 『유광경(乳光經)』이라고도 한다.
미륵소문본원경(彌勒所問本願經)
십지경(十地經)
보녀시경(寶女施經)
보문품경(普門品經)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가 번역한 것과는 대부분 같다. 『축도조록』과 『출삼장기집』에 보인다.

이상 25부 모두 46권은 진나라 말로 가우(揀友)라고 하는 서역 사문 기다밀이 번역했다. 여러 경록(經錄)에서는 모두 기다밀이 진대(晉代)에 번역했다고 했다. 이름이 대부분 동일하니 아마도 허황된 명칭은 아닌 것 같다. 만약 경수(涇水)와 낙수(落水)의 지역(중국 북부)이 아니라면 마땅히 강남일 것인데, 어느 황제 때인지 알지 못한다. 1부는 승우(僧祐)의 『출삼장기집』에 보인다. 그 외에는 모두 잡별제록(雜別諸錄)에 실린 것을 나타낸 것이다.

(15) 축난제(竺難提)
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 2권원희(元熙) 2년(420)에 번역했다. 세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ㆍ승가타의 번역과는 약간 다르다. 『혜상보살소문경(慧上菩薩所問經)』과는 동본별역(同本別譯)이며, 『시흥록(始興錄)』24)에 보인다.
청관세음보살소복독해다라니경(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陀羅尼經)두 번째 번역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위화장자육향배경(威華長者六向拜經)진(晉)ㆍ송(宋) 연간에 광주(廣州)에서 번역되었으며, 세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와 기다밀의 『위혁장자육향배경』과 동일하다. 『시흥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 3부 모두 4권은 진나라 말로 희법(喜法)라고 하는 외국의 거사 축난제가 번역한 것이다. 『법상록(法上錄)』에서는 진대(晉代)에 번역했다고 하였는데, 어느 황제 때인지는 알 수 없다. 『당록(唐錄)』에서는 송대(宋代)라고 했다.

(16) 석법력(釋法力)
무량수지진등정각경(無量壽至眞等正覺經)일명 『불토락경(佛土樂經)』이라고도 하고, 일명 『극락토경(極樂土經)』이라고도 한다.

이상 1경 1권은 공제(恭帝) 원희(元熙) 원년(419) 2월 외국 사문 축법력이 번역한 것이다. 여섯 번째 번역이다. 지겸(支謙)ㆍ강승개(康僧鎧)ㆍ백연(白延)ㆍ축법호(竺法護)ㆍ구마라집(鳩摩羅什) 등이 번역한 것과는 대부분 같은데 문장이나 명칭이 약간 다를 뿐이다. 『석정도록(釋正度錄)』25)에 보인다.

(17) 석숭공(釋嵩公)
가섭결집계경(迦葉結集戒經)
병사왕오원경(洴沙王五願經)일명 『불사왕경(弗沙王經)』이다.
왈난경(曰難經)바로 『월난경(越難經)』인데 후반부 사건이 약간 다를 뿐이다.

이상 3부 3권은 여러 경록에서는 모두 진(晉) 말엽이라고 하였는데 어느 황제 때인지 알 수 없지만, 사문 석숭공(釋嵩公)이 번역했다. 숭공은 혹은 고공(高公)이라고 했다. 『조록(趙錄)』26)과 『시흥록』에 실려 있는 것이 보인다.

(18) 석퇴공(釋退公)
가섭금계경(迦葉禁戒經)일명 『마하비구경(摩訶比丘經)』이라고도 하고, 일명 『진위사문경(眞僞沙門經)』이라고도 한다.

이상 1경 1권은 진나라 말기에 번역되었으나 어느 황제 때인지 알지 못한다. 비장방의 『역대삼보기(歷代三寶記)』에는27) 사문 석퇴공(釋退公)이 번역했다고 했다. 『시흥록』에 보인다.

(19) 석법용(釋法勇)
불개해범지발경(佛開解梵志颰經)

이상 1경 1권은 진대(晉代) 말엽의 것인데 어느 황제 때인지는 알 수 없다. 비장방의 『역대삼보기』에서는 석법용이 번역했다고 했으며, 『조록(趙錄)』에 보인다.

(20) 석혜원(釋慧遠)
대지론요약(大智論要略) 20권또한 『석론요초(釋論要鈔)』라고도 한다.
문대승중심의십팔과합(問大乘中深義十八科合)3권인데 모두 구마라집의 답변이다.
아비담심서(阿毗曇心序)
묘법연화경서(妙法蓮華經序)
수행방편선경서(修行方便禪經序)
삼법도서(三法度序)
법성론(法性論)
명보응론(明報應論)
석삼보론(釋三報論)
변심식론(辯心識論)
불경왕자론(不敬王者論)
사문단복론(沙門袒服論)
대지론서(大智論序)후진(後秦)의 군주 요흥(姚興)의 요청에 의해서 저술했다.
불영찬(佛影讚)

이상 14부 모두 35권은 효무제(孝武帝)와 안제(安帝) 때 여산(廬山)의 사문 석혜원이 짓거나 서(序)를 쓴28) 것이다. 혜원은 안문(鴈門) 사람이며 속성은 가(賈)씨이다. 21살 때 석도안(釋道安)을 만나고는 진정한 자신의 스승이라고 생각했다. 도안의 『반야경』 강의를 듣고 “유도(儒道) 등 구류(九流)29)는 모두 쌀겨와 쭉정이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벼슬을 내놓고[投簪] 머리를 깎고는 불교의 강유(綱維)를 모두 거두고자 대승법[大法]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구마라집이 관중(關中)에 왔다는 말을 듣고서 곧 편지를 띄워 인사를 하면서 말하였다.
“석혜원은 머리를 조아려 아룁니다. 지난해 요좌군(姚左軍)의 편지를 받고 대덕께 문안을 올립니다. 법사께서는 지난날 다른 지역에 계셔서 왕래가 없었는데 외국의 국경을 넘어오셨습니다. 의사[音譯]가 아직 교류되지 않은 때지만 소식만 듣고도 매우 기뻤습니다. 이제 법보를 품고 오신다는 소식을 들으니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달려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대사의 고매함과 훌륭함을 기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서 뵐 수 없으니 눈을 들어 멀리 길만 뚫어지게 바라보며 우두커니 서서 괴로움만 더할 뿐입니다.
대개 전단향(栴檀香)을 옮겨 심으면 다른 것들도 모두 향기가 나며, 마니보주(摩尼寶珠)가 그 광채를 뿜어내면 여러 보배들이 자연히 빛을 더한다고 했습니다. 또한 부루나존자[滿願]만 오로지 세상에 비길 수 없이 아름다울 수 있겠으며, 용수(龍樹)보살만이 유독 앞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어림짐작으로 마름한 옷을 보내오니 법좌[高座]에 오르실 때 이것을 입어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구마라집이 회답하였다.
“저는 삼가 합장하여 인사드립니다. 아직 말을 건네거나 면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글로 왕래하기에도 너무나 멀어, 마음을 인도할 길도 통하지 않고 뜻을 주고받을 인연도 단절되었는데, 역마(驛馬)를 통해서 전해 온 이야기로 대략 법사의 풍모와 덕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하나를 들으면 반드시 백 가지를 포괄하는 재능을 갖추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경전에서는 말세 동방에 반드시 불법을 수호할 보살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딱 들어맞게도 법사께서 힘써 그 일들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습니다.
대개 재능에는 다섯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으니, 복덕(福德)ㆍ계행(戒行)ㆍ박문(博聞)ㆍ변재(辯才)ㆍ심지(深智) 등 다섯입니다. 이것을 겸비한 자는 불도가 융성할 것이고, 갖추지 못한 자는 의심하여 머뭇거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사께서는 그것을 모두 갖추셨습니다. 그래서 글에 의지해서 인사를 전하고 역마에 의지해서 마음을 전합니다만, 어찌 완전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성글게나마 보내신 뜻에 보답할 뿐 그 정성을 해치지나 않았나 걱정입니다. 어림잡아 마름하신 옷은 법좌에 오를 때 입고자 합니다. 이것이 보내 주신 뜻에 합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물건에 어울리지 않아서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지금이나 예전에 항상 사용하는 유석(鍮石)30)으로 된 주둥이가 둘인 주전자[雙口澡灌]가 제가 갖추어야 할 물건[法物]의 전부라고 생각됩니다.”
아울러 한 수의 게송을 지어 보냈다. 게송은 다음과 같다.

이미 더러움과 즐거움을 여의었으니
그 마음도 훌륭하게 거두어들였는가?
만약 마음이 흩어져 달아나지 않는다면
깊이 실상에 들어갔는가?

필경공의 상[空相] 중에는
그 마음 즐거워할 곳이 없으니
만일 선정의 지혜를 즐긴다면
법성(法性)을 관조하지 못함이라.

허망한 거짓에는 진실이 없는 것과 같아
또한 마음 둘 곳이 아니어라.
그대가 증득한 법
그 요체를 보여 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오.

혜원은 다시 한 수의 게송으로 회답했다.

근본과 끝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유ㆍ무 사이에서 일어나고 또 사라지는 사이로다.
한 티끌이라도 흔들리는 경계와 교섭하면
이것은 산을 무너뜨릴 기세를 이루네.

미혹한 생각이 다시 서로 일어난다면
부딪치는 이치마다 저절로 막힐 것이로다.
인연에는 비록 주체가 없다 하더라도
길이 여는 것은 단지 한 세상만으로는 될 일이 아니어라.

이 시대 깨달은 종장(宗匠)이 없다면
그 누가 장차 현묘한 불법의 이치[玄契]를 깨닫겠는가?
찾아가 물을 것 아직도 아득하고 아득한데
서로 함께 남은 생을 기약할 뿐이네.

나머지 구마라집에 대한 흠모나 후진(後秦)의 임금 요흥(姚興)의 편지, 환현(桓玄)의 찬탄, 사영운(謝靈運)의 감복 등 문장은 대부분 『고승전』(제6권)과 같다. 혜원의 시(詩)나 편지[書] 등의 문집은 10권 50여 편인데 세상에서 존중을 받았다.

(21) 석승부(釋僧敷)
신무형론(神無形論)

이상 논(論) 1권은 원제(元帝) 때 양도(揚都) 와관사(瓦官寺) 사문 축승부(竺僧敷)가 지었다. 당시 외도의 학문을 추종하는 무리들은 모두 “심신(心神)31)도 형체를 가지는데, 오직 사물보다는 오묘할 뿐이다”라고 하면서 말재주를 부리며 서로 다투어 논쟁하였다. 옳고 그름을 판별하지 못하고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찾지 못했다. 승부가 이런 것 때문에 이 논을 저술했다. 그 논의 요점은 대략 이러하다.
“형이 체가 있으면 한정된 수량이 있게 되고, 한정된 수량이 있으면 다함이 있다. 하지만 심신(心神)은 원래 다함이 없다. 그래서 정신[神]은 형체를 가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말재주에 굴복하던 무리들이 이런 이치를 보고는 흔쾌히 복종하였다.

(22) 석담세(釋曇洗)
유마힐자주경(維摩詰子注經) 5권
궁통론(窮通論) 1권

이상 2부 모두 6권은 여산(廬山) 동림사(東林寺) 사문 석담선이 지었다. 담선은 혜원의 제자로서 재주와 학식이 훌륭했다.

(23) 석도조(釋道祖)
위세잡록(魏世雜錄)
오세잡록(吳世雜錄)
진세잡록(晉世雜錄)
하서록목(河西錄目)

이상 네 가지 경목록 모두 4권은 여산 동림사 혜원공의 제자 석도류(釋道流)가 처음 찬술했지만 끝내지 못하고 입적하는 바람에 동학인 축도조(竺道祖)가 완성해서 세상에 유포시켰다.

(24) 지민도(支敏度)
경론도록(經論都錄)

이상 경목록 1권은 성제(成帝) 때 예장산(豫章山) 사문 지민도가 여러 경전을 총괄해서 교감하고 고금의 목록과 합쳐서 이 『도록(都錄)』을 만들었다.

(25) 강법창(康法暢)
인물시의론(人物始義論)

위의 논은 성제 때 사문 강법창이 지었다. 그는 늘 주미(塵尾:拂子)를 손에 쥐고 걸어 다녔는데, 명류(名流)를 만날 때마다 청담으로 하루 해를 다 보냈다. 나머지는 『고승전』(제4권)과 같다.

(26) 축법제(竺法濟)
고일사문전(高逸沙門傳)

위의 전기(傳記)는 효무제 때 염동(剡東) 앙산(仰山) 사문 축법제가 지었다.

(27) 석담휘(釋曇徽)
입본론(立本論) 9편
육식지귀(六識指歸) 12수

이상 2권은 효무제 때 형주(荊州) 상명사(上明寺) 사문 석담휘가 지었다. 담휘는 본래 도안공(道安公)의 제자였다. 도안공의 모습을 그려서 예배하고 강설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강릉(江陵)의 선비와 여인들이 모두 서쪽을 향하여 인수보살(印手菩薩:도안의 별칭)에게 공경을 표시하였다.

(28) 제실역경(諸失譯經)
유교삼매경(遺敎三昧經) 2권혹은 『유교삼매법률경(遺敎三昧法律經)』이라고도 한다.
미증유인연경(未曾有因緣經) 2권혹은 『미증유경(未曾有經)』이라고도 한다.
아나함경(阿那含經) 2권
나선경(那先經) 2권혹은 3권이다.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
삼세삼천불명경(三世三千佛名經)나머지는 모두 1권이다.
천불인연경(千佛因緣經)
오십삼불명경(五十三佛名經)
팔부불명경(八部佛名經)
시방불명경(十方佛名經)
현겁천불경(賢劫千佛經)오직 불명(佛名)만 있다. 담무란(曇無蘭)이 번역한 『사제경(四諦經)』의 천불(千佛) 명호와는 다르다.
칭양백칠십불명경(稱揚百七十佛名經)간혹 다만 『백칠십불명경(百七十佛名經)』이라고만 하기도 한다.
남방불명경(南方佛名經)
멸죄득복불명경(滅罪得福佛名經)
비구제금률경(比丘諸禁律經)혹은 경(經)자가 없다.
마하승기율비구요집(摩訶僧祇律比丘要集)혹은 『승기부수용요집법(僧祇部隨用要集法)』이라고도 한다.
우바리문불경(優婆離問佛經)
사미위의(沙彌威儀) 1권
비구니십계경(比丘尼十戒經)
수십선계법(受十善戒法)
사미니계경(沙彌尼戒經)
현자오복경(賢者五福經)
현자오계경(賢者五戒經)혹은 『현자위의경(賢者威儀經)』이라고도 한다.
우바새오계경(優婆塞五戒經)
우바새위의경(優婆塞威儀經)
바야득경(波若得經)
관세누탄경(觀世樓炭經)
본행육바라밀경(本行六波羅蜜經)
정의삼매경(定意三昧經)
반주삼매염불장경(般舟三昧念佛章經)
유가삼마사경(庾伽三磨斯經)수(隋)나라 말로는 수행략(修行略)이다. 일명 『달마다라법(達磨多羅法)』이라고도 하고, 일명 『마다라보살찬선법요집(摩多羅菩薩撰禪法要集)』이라고도 한다.
선정방편차제법경(禪定方便次第法經)
선요가욕경(禪要呵欲經)
칠만삼천신왕호비구주경(七萬三千神王護比丘呪經)
십이만신왕호비구주경(十二萬神王護比丘呪經)
삼귀오계대패호신주경(三歸五戒帶佩護身呪經)
백결신왕호신주경(百結神王護身呪經)
궁택신왕수진좌우주경(宮宅神王守鎭左右呪經)
총묘인연사방신주경(塚墓因緣四方神呪經)
복마봉인대신주경(伏魔封印大神呪經)
마니라단대신주경(摩尼羅亶大神呪經)
소오방용왕섭역독신주경(召五方龍王攝疫毒神呪經)『칠만삼천신왕호비구주경』부터 여기까지 모두 관정(灌頂)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지금은 총괄하여 『대관정경(大灌頂經)』이라고 한다.
범천신책경(梵天神策經)
보광경(普廣經)이상 2권과 『약사경(藥師經)』을 합쳐서 1부가 된다. 앞의 것과 합쳐 『관정경』이 되는데 모두 12권이다.
칠불소결마유술주(七佛所結麻油術呪)이역본을 번역한 것이다.
칠불신주(七佛神呪)결루법(結縷法)이 있다. 다르게 번역된 본이다.
다라니장구경(陀羅尼章句經)
마니라단신왕주안마경(摩尼羅亶神王呪按摩經)혹은 왕(王)자가 없기도 하다.
오룡주독경(五龍呪毒經)
우치주경(齵齒呪經)혹은 『주우치경(呪齵齒經)』ㆍ『주치경(呪齒經)』이라고도 한다.
칠불안택신주경(七佛安宅神呪經)
안택경(安宅經)
삼귀오계신왕명(三歸五戒神王名) 1권도안과 축법호의 경목(經目)32)에 『신주(神呪)』 3권이 있는데, 이 『삼귀오계신왕명』은 이미 그 안에 들어갔다. 그래서 실역(失譯)은 아니다.

이상 53경 모두 57권은 승우의 『출삼장기집』의 「실역잡경록(失譯雜經錄)」33)에 새롭게 수록된 것이다. 경본이 있다고 보이는 것은 846부 도합 895권인데, 나머지는 여러 대의 세록(世錄)에 흩어져서 편입되어 있다. 나머지 여기에 첨부된 것은 진대(晉代) 이하의 실원경(失源經)이 된다.

6) 전후이진전역불경록(前後二秦傳譯佛經錄)
진(晉) 왕조가 통치력을 상실하자 천하는 분열되고 붕괴되었고 흉노족이 낙읍(雒邑)34)을 불태웠다. 저 이수(伊水)ㆍ전수(瀍水)ㆍ경수(涇水)ㆍ위수(渭水)의 지역35)을 영원한 수도常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공자가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四夷]가 서로 침입해오니 중국(中國)은 쇄약해지는구나”36)라고 했는데, 바로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는 두 개의 해가 있지 않으니, 도가 있으면 임금이 될 만하다.
16국 가운데 두 진(秦)이 패자(霸者)가 되었다. 부씨(苻氏:전진의 부견)는 광활한 8주를 소유하고서도 그 마음은 천하를 가지려는 데 있었고, 요주(姚主:후진의 요흥)는 마음이 삼보(三寶)에 있어 불법을 보호하고 널리 전파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다. 그래서 풍문을 쫓아 만리 길을 가니 이인(異人)이 그 사이에서 출현했다. 이에 대부(大部)를 번역하니 지금에야 성대하게 모이게 되었다. 이것이 동량(棟梁)이자 근간(根幹)이 되니 이때부터 불법이 더욱 융성해져서 혼미한 것을 널리 구제하고 소리 높여 앞의 일들을 찬양하였다.
전진 부씨에 대해 기록한 사람은 그 선조 포건(蒲健)씨는 무도(武都) 사람이라 하였다. 이조(二趙)의 소란을 틈타 관서(關西)를 차지하였다. 자손이 기회를 타고 황제로 칭했다. 국호를 진(秦)이라고 하고 장안(長安)을 수도로 삼았다. 세 번째 임금은 휘(諱)가 견(堅)이고, 자(字)는 영고(永固)이다. 태어날 때 신령한 빛이 있었는데 하늘에서부터 땅에 닿았다. 그곳에서 비석[銘]이 발견되었는데, 후면에 초부신(草付臣)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래서 포(蒲)를 부(苻)씨로 고쳤다. 부견(苻堅)이 즉위하고 나서 16년에 당시 태사(太使)가 상주(上奏)하기를, “덕성(德星)이 나라 밖의 별자리에서 나타났습니다. 반드시 성인이 있어서 나라를 도울 것입니다. 그를 얻는 자는 제왕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견이 장수 여광(呂光)을 파견하여 구자국(龜玆國)에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을 데려 오도록 했다. 그리고 다시 장수 부비(苻丕)를 보내서 양양(襄陽)을 공격해서 함락시키고 미천(彌天) 석도안(釋道安)과 습착치(習鑿齒) 등을 얻었다.
부견이 그들을 포획하고 즐거워하면서 복야(僕射) 권익(權翼)에게 “짐은 주옥(珠玉)을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다만 현철(賢哲)만을 보배로 삼을 뿐이다. 지금 10만의 병사로 양양을 공격하여 한 사람 반을 얻었다”고 하였다. 권익이 “누구를 말합니까?”라고 묻자, 부견은 “도안공이 한 사람이고 습착치가 반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늘 도안과 함께 수레를 타고 다니다가 동정(東征:강남 정벌)에 대해서 언급하니, 도안은 “동남 지역은 땅이 척박하고 기후가 사나워서 중화(中華)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임금이나 순임금 때에도 순행을 나가서 돌아오지 못했고, 진시황 때에도 가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지금 백만의 군사로 토지 등급이 가장 낮은[下下] 땅을 얻으려 한다는 것은 감히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하면서 극구 말렸다. 나머지의 말들은 싣지 않는다.
이때부터 도안에게 정치를 물었고 아울러 불전을 널리 홍포했다. 서쪽을 정벌하여 구마라집을 얻었을 때는 부견이 이미 사망했다. 여섯 임금이 다스린 것은 44년간이었다. 갑자에 의거해 보면 부건(苻健) 황시(皇始) 원년은 진(晉)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6년 경술년(350)에 해당하며, 부견 건원(建元) 21년은 진 효무제 태원(太元) 10년 을유년(385)에 해당한다. 중국과 외국 승속[道俗] 8인이 번역한 경(經)ㆍ계(戒)ㆍ논(論)ㆍ집(集)ㆍ지(志)ㆍ해(解)ㆍ전(傳)은 40부로 도합 239권인데 이들을 묶어서 전진(前秦)의 목록으로 삼는다.

부진(苻秦) 사문 담마특(曇摩特)2부 2권, 계본(戒本)ㆍ단문(壇文)
사문 석혜상(釋慧常)1부 1권, 계본
사문 담마비(曇摩蜱)1부 1권, 경(經)
사문 구마라불제(鳩摩羅拂提)1부 2권, 경
사문 담마난제(曇摩難提)5부 114권, 경ㆍ집(集)ㆍ논(論)
사문 승가발징(僧伽跋澄)3부 27권, 경
사문 승가제바(僧伽提婆)3부 60권, 아비담(阿毗曇)
사문 석도안(釋道安)24부 28권, 주해(注解)ㆍ지(志)ㆍ녹(錄)

(1) 담마특(曇摩特)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戒本)
교수비구니이세단문(敎授比丘尼二歲壇文)승순(僧純)이 구자국(龜玆國)에서 얻어 왔는데, 축불념(竺佛念)이 글을 모아 번역하였고 혜상(慧詳)이 필수하였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 2부 모두 2권은 진(晉) 간문제(簡文帝) 때 진나라 말로는 법혜(法慧)라고 하는 서역의 삼장율사 담마특이 축불념과 함께 장안에서 번역했다. 혜상이 필수하였다.

(2) 혜상(慧常)
비구니대계본(比丘尼大戒本)

이상 1권은 진(晉) 간문제 때 율사 석혜상(釋慧常)이 담마특ㆍ축불념 등과 함께 장안에서 번역했다. 경록에는 번역한 것의 명칭을 싣지 않았지만 아마 대부분 『십송계본(十誦戒本)』이었을 것이다.

(3) 담마비(曇摩毗)
마하발라반야바라밀경(摩訶鉢羅般若波羅蜜經)건원(建元) 18년(382)에 번역되었다. 혹은 7권이다. 승예(僧叡)의 『이진록(二秦錄)』37)에 보인다.

이상 1경 5권은 진(晉) 효무제(孝武帝) 때 진나라 말로 법애(法愛)라고 하는 천축 삼장사문 담마비가 『대품(大品)』38)의 범본(梵本)을 모아 축불념이 진나라 말로 번역했다. 장안에서 경전의 출처를 따라서 그것을 『외국경초(外國經抄)』라고 했다.

(4) 구마라불제(鳩摩羅拂提)
사아함모초경(四阿含暮抄經)건원(建元) 14년(378)에 번역했다.

이상 1경 2권은 진 효무제 때 진나라 말로 동각(童覺)이라고 하는 서역의 사문 구마라불제가 업사(鄴寺)에서 번역했다. 구마라불제가 범본을 모으고 축불념ㆍ축불호 등이 진나라 말로 번역했다. 사문 승도(僧導)ㆍ담구(曇究)ㆍ승예(僧叡) 등이 필수했다.

(5) 담마난제(曇摩難提)
중아함경(中阿含經) 59권건원(建元) 21년(385)에 번역했으며 첫 번째 번역이다. 축불념이 필수하였고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 50권건원(建元) 20년(384) 4월 1일에 진(秦)의 무위(武威) 태수(太守) 조업(趙業)을 위하여 번역했다. 첫 번째 번역이다. 혜숭(慧嵩)과 축불념이 필수했다. 승예(僧叡)의 『이진록』ㆍ『승우록』ㆍ『보창록』에 모두 실려 있다.
아육왕태자괴목인연경(阿育王太子壞目因緣經)또한 『왕자법익괴목인연경(王子法益壞目因緣經)』이라고도 한다. 건초(建初) 2년(387) 6월 8일에 안정성(安定城)에서 상서령(尙書令) 요민(姚旻)을 위해서 번역했다. 『이진록』에 보이며, 어떤 본에는 경(經)자가 없다. 이것은 마땅히 후진(後秦)의 목록에 넣어야 하지만 많은 쪽을 따라서 여기에 첨가했다.
승가라찰집(僧伽羅刹集) 2권불멸 후 7백 년에 승가라찰이 지었다. 『보창록』에 보인다.
삼법도론(三法度論) 2권진(晉)나라 때 승가제바가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이상 5부 모두 114권은 진(晉) 효무제(孝武帝) 때 진나라 말로는 법희(法喜)라고 하는 도거륵국(兜佉勒國)의 삼장법사 담마난제가 번역하였다. 담마난제는 건원(建元) 초에 장안에 와서 사아함(四阿含)의 범본(梵本)을 암송하여 입으로 전하자 축불념이 범문으로 받아 적었다. 건원 20년(384)에 부주(苻主:전진의 임금)를 위해 번역하여 59권을 만들었다. 당시는 모용충(慕容沖)과 요장(姚萇)의 반란으로 관중(關中)이 매우 위험하여 의탁할 수가 없어 담마난제는 서쪽으로 떠났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불법을 선양하기 매우 어렵고, 인연 만나기 또한 어렵구나. 마음이 무겁고 슬플 뿐이다.

(6) 승가발징(僧伽跋澄)
바수밀경(婆須蜜經) 10권건원(建元) 20년(384)에 번역했다. 혹은 『시집론(是集論)』이라고도 한다.
아비담비바사(阿毗曇毗婆沙) 14권건원 19(383)년에 번역했다. 혹은 11권이기도 하다.
승가라찰집경(僧伽羅刹集經) 3권건원 20년(384) 11월 30일에 번역했다.

이상 3부 모두 27권은 진(晉) 효무제(孝武帝) 때 진나라 말로는 중현(衆現)이라고 하는 계빈국의 삼장법사 승가발징이 번역하였다. 승가발징은 옛부터 바라문(婆羅門) 범본을 외우고 있었는데 익숙하고도 매우 정확했다. 담마난제가 먼저 그것을 범문으로 기록하였고, 불도라찰(佛圖羅刹)이 전역(傳譯)했다. 사문 혜숭(慧嵩)ㆍ지민(智敏)ㆍ비서랑(秘書郞) 조문업(趙文業) 등이 필수하여 진나라 글로 만들었다.

(7) 승가제바(僧伽提婆)
아비담팔건도(阿毗曇八犍度) 30권건원 19년(383)에 번역했다. 또한 다른 이름으로는 『가전연아비담(迦旃延阿毗曇)』이라고도 한다. 축불념이 전역하고 사문 혜력(慧力)ㆍ승무(僧茂) 등이 필수했다. 부처님 입멸 후 3백여 년 만에 가전연(迦旃延) 아라한(阿羅漢)이 지었다. 혹은 20권이기도 하다.
아비담심(阿毗曇心) 16권건원(365~385) 말에 낙양에서 번역했다. 승예의 『이진록』에 보인다.
비바사비담(毗婆沙毗曇) 14권또한 『광설(廣說)』이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낙양에서 번역했다. 『이진록』에 보인다.

이상 3부 모두 60권은 계빈국의 삼장법사 승가제바가 번역한 것이다. 승가제바는 혹 승가제화(僧伽提和)라 하는데 이것은 범어의 사투리[楚夏]일 뿐으로 진나라 말로 중천(衆天)이라고 한다. 진(晉)나라 간문제(簡文帝) 때, 부씨(苻氏:前秦) 건원(建元) 연간(365~385)에 장안에 들어와 불법을 선양하였다. 처음에 승가발징이 『바수밀경(婆須蜜經)』을 번역했고, 그리고 담마난제가 『중아함경』ㆍ『증일아함경』ㆍ『삼법도론(三法度論)』 등을 번역했다. 당시는 오랑캐들이 발호하던 때라 번역이 정밀하거나 완전하지는 못했다. 도안도 세상을 떠난 뒤라서 바르게 고치지도 못하였다. 나중에 산동(山東)이 평정을 되찾자 승가제바가 도안(道安)의 동학인 석법화(釋法和)와 함께 낙양에 가서 4~5년 동안 앞서의 경전을 연구하고 강설하였다. 그들은 중국에 머무는 기간이 점차 오래되자 진나라 말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먼저 번역된 것이 많은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법화(法和)가 법의 본뜻과 만나기 어렵게 된 것을 개탄하여 새롭게 번역했지만 훌륭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다시 승가제바에게 부탁하여 기존의 경전을 거듭 번역하였다. 조금 지나서 요흥(姚興)의 불법의 교화가 매우 성대해지자 법화는 서역으로 되돌아가고 승가제바는 양자강을 건너 남쪽으로 갔다. 그래서 앞뒤 본문에 다소 같지 않은 점이 있다.

(8) 석도안(釋道安)
반야석의략(般若析疑略) 2권
대십이문주해(大十二門注解) 2권
음지입주해(陰持入注解) 2권
답법태난(答法汰難) 2권
광찬석중해(光贊折中解)
광찬초해(光讚抄解)
반야석의준기진해(般若析疑准起盡解)
도행집이주(道行集異注)
소십이문주해(小十二門注解)
요본생사주해(了本生死注解)
밀적지심이경견해(密迹持心二經甄解)
현겁제도무극해(賢劫諸度無極解)
인본육생주촬해(人本欲生注撮解)
안반수의해(安般守意解)
대도지주해(大道地注解)
중경십법련잡해(衆經十法連雜解)
의지주해(義指注解)
구십팔결련화통해(九十八結連幻通解)
삼십이상해(三十二相解)
삼계혼연제잡위록(三界混然諸雜僞錄)
답법장난(答法將難)
서역지(西域志)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

이상 24건(件) 모두 28권은 진(晉)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연간(324~346)에 전진(前秦)의 사문 석도안이 찬술한 것이다. 도안은 본래 상산(常山)의 부류(扶柳) 사람이며, 속성은 위(衛)씨이다. 대대로 이름난 선비 집안이었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외사촌인 공(孔)씨가 도안을 양육했다. 일곱 살에 책을 읽었으며 두 번 보면 외울 수 있어서 이웃 사람들이 그의 남다름에 감탄하였다.
열두 살이 되자 출가하였는데 머리는 총명하였지만 외모가 몹시 누추하여 스승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도 부지런히 노역을 하면서도 한 번도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고, 독실한 성품으로 정진하여 재계(齋戒)에도 모자람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스승에게 아뢰어 경전을 구하였더니 스승이 『변의경(辯意經)』 1권을 주었는데, 분량이 5천 언 정도 되었다. 도안은 경전을 가지고 논에 들어가 쉬는 틈에 모두 읽었다. 저녁에 돌아와 그 경전을 돌려주며 다시 다른 경전을 구하였다. 이에 스승이 물었다.
“어제 준 경전도 읽지 못했을 텐데 지금 또 다시 다른 것을 찾는가?”
도안이 대답하였다.
“이미 모두 암송했습니다.”
스승이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믿지 않았다. 다시 『성구광명경(成具光明經)』 1권을 내주었는데, 1만 자에 조금 모자라는 분량이었다. 도안은 이 경을 가지고 갔다가 처음처럼 저녁에 돌아와 스승에게 되돌려 주었다. 스승이 경전을 들고는 도안에게 그것을 암송하게 했다. 도안이 한 자도 틀리지 않자 스승은 크게 놀라고 감탄하며 그를 달리 생각하게 되었다.
그 후 도안은 구족계를 받고 나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했다. 진(晉) 회제(懷帝)와 민제(愍帝) 때에 난리를 피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처음 불도징(佛圖澄)을 만났는데, 불도징이 그를 보자 감탄하고는 하루 종일 함께 이야기하니 대중들이 그때서야 공경하고 복종하였다. 나중에 양양(襄陽)에 도착하여 불법을 크게 선양하였다.
처음 경전이 번역된 지 오래되자 옛날 번역이 지금과 달라서 깊은 뜻이 감추어진 채 소통되지 않게 되었다. 도안은 매번 강설할 때마다 오직 대의(大意)만을 이야기하고 전독(轉讀)39)할 뿐이었다. 도안은 경전들을 모두 열람하고는 깊은 의미와 끝까지 깨달아 앞서 열거한 20여 부(部)를 주해(注解)하기도 하고 짓기도 하였다. 그 서술이 깊고 풍부하며 심오한 종지를 훌륭하게 드러냈다. 조리 있고 일관되게 순서를 정하고 문장의 맥락이 잘 통하니 경전의 의미가 극히 명료해진 것은 도안으로부터 시작됐다. 미천(彌天)이라는 말로 습착치(習鑿齒)를 다스렸고40)를 쪼개어 대중들을 남김없이 먹였다.41) 치초(郗超)가 쌀을 보낸 것에 대해 답변하기를 “기다리는 사람을 번거롭게 할 뿐입니다”라고 했다.42)
또 한(漢)나라와 위(魏)나라로부터 진(晉)에 이르기까지 경전이 전해진 것은 꽤 많지만 경전을 전역하거나 그것에 대해 기술한 사람의 이름은 이야기 되지 않았다. 나중에 태어나는 사람들은 추측하고 연구해도 그 연대를 알 수 없었는데, 도안이 기존의 경전 목록과 전역자의 이름을 전체적으로 수집하고 그 전역 시기를 표시하고 전역의 신(新)ㆍ구(舊)를 가려서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을 편찬했다. 여러 경전이 근거를 가지게 된 것은 진실로 그의 공적에서 연유했다.
부견(苻堅)은 멀리서 도안을 흠모하였다. 그래서 부비(苻丕)에게 명령을 내려 10만 군사를 데리고 가서 양양(襄陽)을 공략하고 도안을 데려오게 했다. 도안은 장안에 이르러 오중사(五衆寺)에 머물렀는데, 승려 대중이 수천 명에 달하여 크게 불법을 펼쳤다. 부견은 항상 성 밖을 나갈 때 도안이 수레에 올라 함께 타기를 명했는데, 이것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다.43) 부견이 말하였다.
“짐(朕)이 천하를 다 바쳐도 도안과 바꾸지 않을 텐데 하물며, 천자의 수레에 함께 타는 영예[榮] 정도가 어떻게 그의 덕에 비교될 수 있겠는가?”
부견은 도안의 간언을 듣지 않고 강남을 정벌하였다. 황제는 따르지 않다가 결국 패하고 말았다. 도안은 언제나 번역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인도어胡語를 중국어로 옮기는 데 다섯 가지의 본 모습을 잃은 것[五失本]는 점이 있고, 세 가지 쉽지 않은 점[三不易]이 있다.44) 첫째, 인도어는 모두 순서를 거꾸로 해야 중국말에 맞다. 이것이 첫 번째 본 모습을 잃는 것이다. 둘째, 인도의 경전은 질박함을 숭상하는데 중국인은 문장의 수식을 좋아하므로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려면 문장의 수식이 없으면 합당하지 않다. 이것이 두 번째 본 모습을 잃는 것이다. 셋째, 인도 경전은 매우 상세하여 찬탄하는 문장에 이르면 정성껏 반복하여 세 번 또는 네 번이나 되풀이하면서 그 번거로움을 싫어하지 않는데, 지금에 이르러 배척하고 삭제했으니, 세 번째 본 모습을 잃는 것이다. 넷째, 인도 경전에는 의설(義說)45)이 있으니 마치 난사(亂辭)46)와 비슷하다. 설한 것을 살피고 말을 따라가면 문장에는 이상한 점이 없는데도 혹 천 구 아니면 백 구를 지금 모두 삭제하여 남아 있지 않다. 이것이 네 번째 본 모습을 잃은 것이다. 다섯째, 이야기가 이미 완전히 종결되었는데도 다시 부연설명하고 싶을 때는 앞의 문장을 반복하고 나서 다음 내용을 설명하는데 이것을 모두 삭제했다. 이것이 다섯 번째 본 모습을 잃은 것이다.
하지만 『반야경』의 삼달(三達)47)의 신통력은 부처님만 연설하시는 것이다. 성인은 반드시 때를 따라야 하고 시속(時俗)은 변화가 있다. 고아한 것을 없애고 지금의 시속에 맞추는 것은 첫 번째 쉽지 않은 것이다. 어리석은 이와 지혜로운 이의 차이가 하늘과 땅처럼 차이가 나서 성인의 경지에 오르기는 어려운데, 천 년 전의 미묘한 말씀을 전하여 백 대가 지난 지금의 말세 중생들에게 맞추는 것은 두 번째 쉽지 않은 것이다. 아난이 경을 송출했던 때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음에도, 존자 대가섭이 육신통을 얻은 500인의 아라한에게 서로 살펴보고 번갈아 경전을 결집하도록 했는데, 지금은 천 년이 지나서 부처님의 생각에 접근하려고 하니, 저 아라한은 삼가 공경한 것이 저와 같고 우리 생사 속의 범부들은 무사태평하기가 이와 같으니, 어찌 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의 무모함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세 번째 쉽지 않은 것이다.
이런 다섯 가지 본 모습을 잃어버린 것과 세 가지 쉽지 않은 것을 거쳐야 인도어를 중국어로 번역할 수 있으니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들은 적이 없는 다른 언어를 번역하여 이해하고 소통하려 할 뿐이지 어찌 득실(得失)을 싫어해서이겠는가? 이것이 바로 감히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말하였다.
“옛 사람이 경전을 번역할 때 지루가참과 안세고는 범본의 번잡함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자였고, 승가라차(僧伽羅叉)와 지월(支越)은 생략하고 다듬는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저 성현(聖賢)들이 인도(引導)하여 도달하도록 한 경지는 진실로 힘써 권장할 모범이자 거울이니, 띠에 적어서 영원히 모범으로 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단지 범어(梵語)를 호어(胡語)라고 한 것은 본래의 의미를 약간 해쳤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계승하지 않을 뿐이다.”
도안공이 출가한 시점을 살펴보면 서진(西晉) 민제(愍帝) 건흥(建興) 말년이며, 부처님의 도를 진작시킨 것은 동진(東晉)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의 만년에 해당한다. 지금은 주석을 하고 저술을 한 시기를 취하여서 그 일들을 여기에 실어 놓았다.

7) 후진전역불경록(後秦傳譯佛經錄)
패주(霸主)가 왕통을 계승할 때는 사방으로 이익을 보여야 하며, 사방 각각에 벼슬아치司存를 둔다. 정삭(正朔)48)이 바뀌는 시점에서 나라가 오래 갈 것인가를 안다. 그래서 시대를 따라서 왕노릇하며 오랑캐나 중국을 모두 통괄한다. 옛날의 역사를 참고하여 쫓아 계승해야 한다. 후진(後秦)의 요장(姚萇)은 서쪽 오랑캐인 강족(羌族)이다. 부견에게 정벌을 당해 이를 갈며 원한을 키워 오다가 드디어 옹관(雍關)에 도읍을 하고 장안(長安)을 상안(常安)으로 개명했다.49) 즉위한 지 8년에 부견이 귀병(鬼兵)을 이끌고 대낮에 궁궐로 들어와 그의 음부를 잘랐는데, 피가 한 섬이나 났다고 한다. 맺힌 원한은 없애기가 어렵고 그것을 푸는 실마리 또한 찾기 힘들구나. 요장이 죽자(393) 그의 아들 요흥(姚興)이 즉위하였다. 홍시(弘始) 3년(401) 봄에 이르러 묘당廟庭에 있는 나무가 서로 연이어서 가지가 나란히 났고, 소요원(逍遙園)에서는 푸성귀[葱]가 변해서 염교[薤]50)가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상서로운 일이니 마땅히 지혜 있는 분이 입국할 조짐이라고 했다. 겨울에 구마라집이 옹주(雍州:後秦)에 도착했다. 요흥이 예를 갖추어서 국사(國師)로서 대우하였는데 숭상함이 매우 융숭했다. 그는 불교 경론을 크게 선양하였고 중국의 역경은 이 왕조에서 성대해졌다. 그러자 사방의 사문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앞서 장안은 전한(前漢)이 망한 이후로 부진(苻秦)이 흥기할 때까지 331년 동안 도시는 황량해지고 백성들의 풍속은 황폐했다. 비록 몇몇 가람이 있었지만 귀의하는 신도는 드물었다. 3천의 덕 있는 승려들이 한 곳에 함께 모여서 요진(姚秦)의 임금이 공양하는 것을 받았다. 일반적으로는 대사(大寺)라고 하지만 본래 명칭은 아니었다. 그 대사 중앙에 당 하나를 조성했는데, 임시로 풀로써 지붕을 올렸다. 그곳과 소요원, 두 곳에서 번역이 이루어졌다. 법보가 멀리까지 유포될 상서로운 단서가 이와 같았다. 그리고 승관(僧官)을 설치하여 시중(侍中)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불했다. 양도(兩都)51)를 설치하고 오부(五部)의 승려를 관리하니 승소현(僧昭玄)52)의 발생이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북위(北魏) 말에서 북주(北周) 초에 도로가 더욱 정비되었는데, 대사(大寺)는 이것 때문에 네 개의 가람이 조성되었다. 초당(草堂)의 본래 이름은 일사(一寺)이고, 초당(草堂)의 동쪽에 상주사(常住寺)가 있고, 상주사 남쪽에 경조왕사(京兆王寺)가 있었다. 경조왕사는 그뒤 안정국사(安定國寺)로 고쳤고, 안정국사 서쪽이 대승사(大乘寺)였다. 안정국사 주변 좌우에는 천가동반(天街東畔)이 있었으며, 여덟 귀퉁이에 큰 우물이 있었다. 옛날 대사의 동쪽 주방이었으며, 3천 명의 승려를 공양했던 감로의 샘이었다.
자신과 아들 손자 세 임금 32년 만에 동진(東晉)에게 멸망당했다. 요장(姚萇)이 개원한 건초(建草) 원년 병술년(389), 즉 진(晉) 태원(太元) 11년에 시작해서 요홍(姚泓) 영화(永和) 2년 병신년(416), 즉 진(晉) 안제(安帝) 의희(義熙) 12년에 마감했다. 몸은 건강(建康)에서 죽고 나라는 원위(元魏)에 복속됐다. 전역(傳譯)한 사문은 모두 8명이었고, 번역한 경(經)ㆍ율(律)ㆍ계(戒)ㆍ논(論)은 124부 도합 665권으로 후진 요씨 시대의 전역 목록으로 삼는다.

사문 축불념(竺佛念)13부 86권, 경(經)ㆍ논(論)
사문 담마야사(曇摩耶舍)2부 21권, 아비담(阿毗曇)
사문 불야다라(弗若多羅)1부 58권, 율(律)
사문 구마라집(鳩摩羅什)98부 425권, 경ㆍ논ㆍ전(傳)
사문 불타야사(佛駄耶舍)4부 69권, 경ㆍ율(律)ㆍ계(戒)
사문 석승조(釋僧肇)4부 4권, 논
사문 석승예(釋僧叡)1부 1권, 목록(目錄)
사문 석도항(釋道恒)1부 1권, 논

(1) 축불념(竺佛念)
출요경(出曜經) 19권건원(建元) 10년(374)에 번역했다. 『이진록』ㆍ『고승전』ㆍ『보창록』 등에 보인다. 간혹 『출요론(出曜論)』이라고 한다.
보살영락경(菩薩瓔珞經) 14권건원 12년(376) 7월에 번역했다. 『이진록』과 『고승전』에보인다. 혹은 12권이기도 하다.
십주단결경(十住斷結經) 12권두 번째 번역이다. 한(漢) 축법란(竺法蘭)이 번역한 8권과는 약간 다르다. 『이진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혹은 10권이기도 하다.
비나야율(鼻奈耶律) 10권혹은 『계인연경(戒因緣經)』이라고 한다. 사문 담경(曇景)이 필수했다. 석도안(釋道安)의 경서(經序)에 보인다.
십지단결경(十地斷結經) 10권두 번째 번역이다.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 5권바로 『태경(胎經)』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진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대방등무상경(大方等無相經) 5권혹은 4권이다. 또한 『대운경(大雲經)』이라고도 한다.
지인보살경(持人菩薩經) 3권
보살보처경(菩薩普處經) 3권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 2권
중음경(中陰經) 2권『이진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왕자법익괴목인연경(王子法益壞目因緣經)두 번째 번역이다. 담마난제가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또한 『아육왕식괴목인연경(阿育王息壞目因緣經)』이라고도 한다.
십송비구니계소출본말(十誦比丘尼戒所出本末)승순(僧純)이 구이국(拘夷國)에서 구해온 범본을 축불념이 번역했다. 나중에 축법태(竺法汰)가 삭제하여 개정했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 13부 모두 86권은 진(晉) 효무제(孝武帝) 때 양주(涼州) 사문(沙門) 축불념이 번역하였다. 그는 식견이 밝고 머리가 민첩하였고 어려서부터 여행하기를 좋아했다. 집안이 대대로 서하(西河)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범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했다. 전진(前秦) 부씨(苻氏) 건원(建元) 초에 장안에 왔다. 당시 비서랑(秘書郞) 조정(趙正)이 승가발징과 담마난제 등에게 청하여 여러 경론을 번역했다. 당시의 이름난 스님들 가운데 전역(傳譯)할 수 있는 이가 없었기 때문에 모두 축불념을 추천하였다. 두 개의 『아함경』이 문장이 분명해진 것은 축불념이 번역한 공력 때문이다. 한(漢) 말에 중국에 온 안세고나 지겸 이후로 축불념보다 뛰어난 이는 없었다. 그래서 전진(前秦)ㆍ후진(後秦) 2대의 번역하는 사람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관내(關內) 명승(名僧)이 모두 존경하였다. 이후로 번역한 것은 앞과 같다. 『고승전』 가운데는 오직 다섯 건만 있는데, 그 외 8부는 『별록(別錄)』ㆍ『잡록(雜錄)』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모두 갖추어서 그것을 나열했다.

(2) 담마야사(曇摩耶舍)
사리불아비담(舍利弗阿毗曇) 30권혹은 20권이다. 『승우록』에서는 『비바사론(毗婆沙論)』에서 나왔다고 했다. 『비장방록』에서는 전하는 것을 검토했는데 이것은 담마야사(曇摩耶舍)가 『비바사론』은 개정한 것이라고 했다. 『보창록』에 보인다.
차마경(差摩經) 1권담마야사(曇摩耶舍)가 진(晉) 융안(隆安) 연간에 광주(廣州)에 도달하여 백사사(白沙寺)에 머물러 청신녀 장보명(張普明)을 위하여 번역했다. 이것은 마땅히 진세(晉世)의 목록에 넣어야 하지만, 사람을 따라서 진(秦)의 목록에 넣었다.

이상 2부 모두 31권은 진(晉) 안제(安帝) 때 계빈국의 삼장법사 담마야사가 번역했다. 그는 진나라 말로는 법칭(法稱)이다. 야사(耶舍)는 이름[稱]이라는 말인데, 『고승전』에서는 법명(法明)이라고 했다. 소리를 따라서 이름을 지은 것으로 이치로 보자면 궁색하다. 의희(義熙) 연간에 장안에 들어와 진나라 말로 법장(法藏)이라고 하는 천축 사문 담마굴다(曇摩掘多)와 함께 홍시(弘始) 9년(407) 초에 요흥(姚興)을 위해서 범문(梵文)을 써냈는데, 16년(414) 가을에 이르러서야 번역을 마쳤다. 진(秦)의 태자 요홍(姚泓)이 친히 이치와 의미를 관장했고, 사문 석도표(釋道標)가 서문을 썼다.

(3) 불야다라(弗若多羅)
십송률(十誦律) 58권홍시(弘始) 6년(404) 10월 17일 중사(中寺)에서 번역했다. 『이진록』에 보인다.

진(晉) 안제(安帝) 때 진나라 말로는 공덕화(功德華)라고 하는 계빈국의 삼장 율사 불야다라는 계행(戒行)이 높기로 칭송을 받았다. 여러 곳을 다니면서 불법을 폈는데 불야다라가 도착하자 요흥이 곧바로 장안의 명승과 대덕 6백여 명을 불러서 불야다라에게 요청하니, 중사(中寺)에서 『십송률』 범본(梵本)을 송출했다. 이것을 구마라집이 진나라 말로 옮겼다. 3분의 2를 끝냈을 때 불야다라가 갑자기 쓰러져 입적했다. 대중들이 매우 슬퍼하였다. 구마라집은 나중에 진나라 말로 법희(法希)라고 하는 담마류지(曇摩流支)와 함께 번역을 계속해서 모두 끝냈다.

(4) 구마라집(鳩摩羅什)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30권혹은 40권이고, 구본(舊本)은 27권이다. 승예(僧叡)의 『이진록』에서는 요흥(姚興)이 구본을 잡고 구마라집이 범본을 잡고 축불념이 전어하였으며, 승예(僧叡)ㆍ승조(僧肇)가 필수하고 아울러 서(序)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앞선 번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지금은 두 번째 번역이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30권두 번째 번역이다. 지루가참이 번역한 27권과는 약간 다르다. 『이곽록(李廓錄)』53)에 보이며, 지금 『별록』과 『이진록』에는 모두 신(新)자를 달았으니, 이전에 번역된 적이 있음이 분명하다. 지금은 60권이다.
방광반야바라밀경(放光般若波羅蜜經) 20권두 번째 번역이다. 『별록』에 보인다.
소품반야바라밀경(小品般若波羅蜜經) 10권홍시 10년(408)에 두 번째로 번역됐다. 혹은 7권이기도 하며, 승예(僧叡)가 필수했다. 『이진록(二秦錄)』에 보인다. 7권의 『보리경(菩提經)』과는 동본(同本)인데 경명만 다르게 번역됐으며, 승예가 서를 지었다.
화수경(華首經) 10권일명 『섭선근경(攝善根經)』이라고 한다. 홍시 8년(406)에 번역됐으며, 『이진록』에 보인다.
검제죄복경(檢諸罪福經) 10권『별록』에 보인다.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7권홍시 8년(406) 대사(大寺)에서 번역했다. 승예가 필수하고 서문까지 썼으며 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의 『정법화경(正法華經)』과는 동본인데 시차가 백 년이나 되며, 『이진록』에 보인다.
현겁경(賢劫經) 5권홍시 4년(402) 3월 5일에 번역했다. 축법호의 번역과는 조금 다르다. 담공(曇恭)이 필수했으며 『이진록』에 보인다. 일명 『현겁삼매경(賢劫三昧經)』, 일명 『현겁정의경(賢劫定意經)』이라고도 한다.
십주경(十住經) 5권구마라집이 불타야사(佛陀耶舍)와 함께 번역했다. 혹은 4권이며, 『이진록』에 보인다.
사익경(思益經) 4권일명 『사익범천소문경(思益梵天所問經)』이라고도 한다. 홍시 4년(402) 10월 1일에 소요원(逍遙園)에서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이며, 축법호가 번역한 『승사유경(勝思惟經)』과는 동본이출(同本異出)이다. 『이진록』에 보이는데 승예가 서(序)를 지었다.
대수긴나라경(大樹緊那羅經) 4권두 번째 번역이다. 지루가참의 『둔진타라경(屯眞陀羅經)』과는 동본(同本)인데, 문장에 광략(廣略)의 차이가 있다.
지세경(持世經) 4권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의 『지인보살소문경(持人菩薩所問經)』과는 동본(同本)인데, 좀더 자세하다. 『이진록』에 보인다.
유마힐경(維摩詰經) 3권홍시 8년(406) 대사(大寺)에서 번역했다. 네 번째 번역인데 엄불조ㆍ지겸ㆍ축법호의 번역과는 약간 다르다. 도생(道生)이 필수하고 구마라집이 주(注)를 달고 승예가 서(序)를 썼다. 『이진록』에 보인다.
불장경(佛藏經) 3권『선택제법경(選擇諸法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4권이다. 『이진록』에 보인다. 홍시 7년(405) 6월 12일에 번역했다.
보살장경(菩薩藏經) 3권일명 『부루나문경(富樓那問經)』이라고도 하고, 일명 『대비경(大悲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2권이다. 홍시 7년(405)에 번역했다. 『이진록』에 보인다.
칭양제불공덕경(稱揚諸佛功德經) 3권홍시 7년(405)에 번역됐다. 『이진록』에 보인다. 일명 『집화경(集華經)』이라고도 한다.
선경(禪經) 3권홍시 4년(402) 정월 5일에 번역했다. 『이진록』 및 『보창록』에 보인다. 일명 『보살선법경(菩薩禪法經)』이라고도 한다.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과는 동본이다.
선비요경(禪秘要經) 3권『별록』에 보인다. 혹은 경(經)자가 없다.
선법요(禪法要) 3권
아사세경(阿闍世經) 2권『별록』에 보인다.
아란야습선법경(阿蘭若習禪法經) 2권『별록』에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좌선삼매경』과는 동본이역(同本異譯)이다.
선요경(禪要經) 2권일명 『선법요해경(禪法要解經)』이다. 『별록』에 보인다.
발보리심경(發菩提心經) 2권『이곽록』에 보인다.
자재왕경(自在王經) 2권홍시 9년(407)에 상서령(尙書令) 상산공(常山公) 요현(姚顯)의 집[第]에서 번역했다. 승예(僧叡)가 필수하고 서(序)를 썼다. 「대집자재품(大集自在品)」과는 같지 않다. 다섯 장이나 더 길고 문장이나 글귀가 상당히 들쑥날쑥 한다. 『이진록』에 보인다.
선신마하신주경(善信摩訶神呪經) 2권『이곽록』에 보인다.
수릉엄경(首楞嚴經) 2권일곱 번째 번역이다. 지겸ㆍ지루가참ㆍ백연ㆍ축법호ㆍ축숙란과 용복(勇伏)이 번역한 2경과 동본별역(同本別譯)이다. 그리고 촉(蜀)과 나중에 번역된 2본을 합치면 9역인데, 문장이 각각 다르다.
범망경(梵網經) 2권홍시 8년(406) 초당사(草堂寺)에서 삼천학사(三千學士)와 함께 마지막으로 이 1품을 번역했다. 범본은 12권 61품이다. 번역을 마치고 도융(道融)과 담영(曇影) 등 3백 명이 일시에 보살 10계를 받았다는 것이 경의 앞 서문에 보인다. 승조(僧肇)가 필수했다.
대선권경(大善權經) 2권『이곽록』에 보인다.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2권혹은 1권이기도 하며, 『이진록』에 보인다.
무량수경(無量壽經) 1권일명 『아미타경(阿彌陀經)』이라고 한다. 홍시 4년(402) 2월 8일에 번역했으며, 다섯 번째 번역이다. 지겸ㆍ강승개ㆍ백연ㆍ축법호가 번역한 2권과는 약간 다르다. 『이진록』에 보인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또한 『미륵수결경(彌勒受決經)』이라고도 한다. 『이진록』에 보인다.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홍시 4년(402)에 번역했으며, 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가 번역한 것과는 대동소이하다. 『이진록』에 보인다.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계실 때 설하신 것이다. 『이진록』에 보인다.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별록』에 보인다. 두 번째 번역이다. 진(晉)의 축법호가 번역한 것과는 문장이 약간 다르다.
보리경(菩提經)일명 『문수사리문보리경(文殊師利問菩提經)』이라고도 하고, 일명 『가야정경(伽耶頂經)』이라고도 하며, 『보리무행경(菩提無行經)』이라고도 한다.
유교경(遺敎經)일명 『불수반열반약설계경(佛垂般涅槃略說誡經)』이라고 한다.
십이인연관경(十二因緣觀經)
보살가색욕경(菩薩訶色欲經)
잡비유경(雜譬喩經)홍시 7년(405) 10월에 번역했으며 비구 도략(道略)이 모았다.
수마제보살경(須摩提菩薩經)
문수회과경(文殊悔過經)
비구응법행경(比丘應法行經)『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 나왔다. 『승우록』에서는 「의록(疑錄)」에 넣었다.
무사의광해동보살경(無思議光孩童菩薩經)또한 『부사의광보살소설경(不思議光菩薩所說經)』이라고도 한다.
대방등정왕경(大方等頂王經)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가 번역한 『대왕경(大王經)』과는 대동소이하다.
대금색공작왕경(大金色孔雀王經)소요원(逍遙園)에서 번역했다. 아울러 결계장법(結界場法)을 모두 갖추었다.
장엄보리심경(莊嚴菩提心經)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가 번역한 『보살십지경(菩薩十地經)』과는 동본이출(同本異出)이다.
불제자화마자게송경(佛弟子化魔子偈頌經)『대집경(大集經)』에서 나왔다.
대백마왕견신경(大白魔王堅信經)『대집경』에서 나왔다.
개화마경(開化魔經)
마업경(魔業經)
과마법계경(過魔法界經)『대집경』에서 나왔다.
불문아수륜대해유감경(佛問阿須輪大海有減經)『장아함경』에서 나왔다.
마왕변신경(魔王變身經)
동방선화세계불좌진동경(東方善花世界佛座震動經)
다라니법문육종동경(陀羅尼法門六種動經)
불적견천복륜상경(佛跡見千輻輪相經)
불제화보살경(佛齊化菩薩經)
왕고생화불국원행법전경(往古生和佛國願行法典經)
불경해철시방경(佛謦咳徹十方經)『대집경』에서 나왔다.
과거무변광정불토경(過去無邊光淨佛土經)
불변시회신경(佛變時會身經)
무량락불토경(無量樂佛土經)
왕후위강랑경(王后爲蜣猪經)
불심총지경(佛心總持經)『생경(生經)』에서 나온 『심총지경(心總持經)』과는 약간 다르다.
미후여비공희치변경(獼猴與婢共戱致變經)
수우왕경(水牛王經)『생경(生經)』에서 나왔다.
작왕경(雀王經)
토왕경(兎王經)『생경』에서 나왔다.
보살신위합왕경(菩薩身爲鴿王經)『육도집경(六度集經)』에서 나왔다.
불석위녹왕경(佛昔爲鹿王經)
목우경(牧牛經)
허공장보살문지경공덕경(虛空藏菩薩問持經功德經)
관세음경(觀世音經)『신묘법련화경(新妙法蓮華經)』에서 나왔다.
미륵보살본원대시성불경(彌勒菩薩本願待時成佛經)이상 42경은 모두 『별록』에 보이는데 구마라집이 다시 번역한 것이다.
등지인연경(燈指因緣經)
관보현보살경(觀普賢菩薩經)
섬본기경(睒本起經)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보망경(寶網經)
낙영락장엄경(樂瓔珞莊嚴經)
청관세음경(請觀世音經)이상 7경은 『이곽록』에 보이는데, 구마라집이 번역했다고 하였다.
사유요략법경(思惟要略法經)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지지경(持地經)
보살계본(菩薩戒本)
십송비구계본(十誦比丘戒本)두 번째 번역이다. 담마지(曇摩持)가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대지도론(大智度論) 100권용수(龍樹)보살이 지었다. 홍시 6년(404) 5월에 소요원(逍遙園)에서 번역했고, 승예(僧叡)가 필수하고 서문까지 썼다. 『이진록』에 보인다. 구마라집은 “모두 번역하면 천 권인데 중국인은 인식력이 박약하여 그것을 간략히 10분의 1로 줄였다”고 말했다.
반야경론집(般若經論集) 20권『오록(吳錄)』에 보인다.
십주비바사론(十住毗婆沙論) 12권용수보살이 지었다.
성실론(成實論) 20권혹은 16권이다. 홍시 8년(406)에 번역했으며 담략(曇略)이 필수하였다. 『이진록』에 보이며 부처님 입멸 후 8백여 년에 하리발마(揀梨跋摩)가 지었다. 승예(僧叡)가 강설하고 서문을 지었다.
대장엄론(大莊嚴論) 10권마명(馬鳴)보살이 지었다.
십주론(十住論) 10권용수보살이 지었다. 홍시 연간(399~415)에 번역했는데 다 끝내지 못했으며, 권말(卷末)은 『육도집경(六度集經)』과 비슷하다. 『이진록』에 보인다.
중론(中論) 8권혹은 4권이다. 용수보살이 지었다. 홍시 연간에 번역했다. 『이진록』에 보인다. 승예(僧叡)가 서(序)를 썼다.
백론(百論) 2권제바(提婆)보살이 지었다. 홍시 6년(404)에 번역했다. 『이진록』에 보인다.
십이문론(十二門論)용수보살이 지었다. 『보창록』에 보인다. 서(序)는 승예공(僧叡公)이 썼다.
마명보살전(馬鳴菩薩傳)
용수보살전(龍樹菩薩傳)
제바보살전(提婆菩薩傳)
실상론(實相論)구마라집 자신이 저술한 것이다.

이상 98부 모두 425권은 진(晉) 안제(安帝) 때에 진나라 말로 동수(童壽)라고 하는 천축국의 삼장법사 구마라집이 번역하였다. 그는 홍시 3년(401) 겨울에 상안에 도착했다. 진주(秦主) 요흥(姚興)이 정중하게 예우하였다. 서명각(西明閣)과 소요원(逍遙園)에 머물기를 요청하여 별관(別館)에다 그를 모셨다. 칙령으로 승략(僧䂮)에게 사문 8백여 명을 모으게 하여 구마라집에게 경문의 뜻을 묻고 다시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을 번역하게 했다. 구마라집은 범본을 가지고 요흥은 구경(舊經)을 가지고서 서로 대조하고 교정하였다. 새로 번역한 문장은 구역과는 달리 의미가 완전하고 원만하게 통하였다. 대중들이 모두 마음으로 우러르고 기뻐하며 찬탄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 『이진록(二秦錄)』에서는 “구마라집이 바로잡은 것이 『신대품반야경(新大品般若經)』이 된다”고 했으니, 구역본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것 외에 20여 부가 있는데, 모두 제목 위에 신부(新部)라는 글자를 표시했다. 후대의 사람들은 연대가 멀어지면서 대부분 신(新)자를 생략하여 지금은 거의 없다.
이런 뒤에 요진(姚秦)의 시대가 되어 불교가 크게 선양되고 역경이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요흥은 천자의 지위萬乘之心54)를 비루하다 여기고 불교의 가르침을 숭상하였다. 이미 마음을 비우고 불법을 숭앙했으며 항상 대사(大寺)의 초당(草堂)에서 3천의 승려와 함께 했고 신구의 여려 경전을 교정하고 수정하였다. 정밀하게 연구하여 경전의 깊은 뜻을 깨닫지 못한 것이 없었다. 당시 승예(僧叡)법사가 있었는데 요흥에게 매우 존대를 받았다. 구마라집이 변역한 경전을 승예가 교정하고 수정하였다. 옛날 축법호가 번역한 『정법화경(正法華經)』 「수결품(受決品)」에 “하늘은 사람을 보고 사람은 하늘을 본다”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구마라집이 이 경을 번역할 때 여기에 이르자 말하기를, “이 말은 서역의 말뜻과 같지만 말이 지나치게 질박하다”고 하였다. 승예가 한마디 하기를, “장차 사람과 하늘이 서로 접촉하여 양쪽이 서로 만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구마라집이 크게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실로 그러하다”고 하였다. 그들이 서로 개발(開發)함이 모두 이런 정도였다. 구마라집이 요흥을 위해서 『실상론(實相論)』과 『주유마경(注維摩經)』을 지었다.
구마라집은 대승을 훌륭하다고 여기고 좋아해서 그것을 널리 펴는 데 뜻을 두었다. 일찍이 탄식하기를, “내가 붓을 들어 『대승아비담론(大乘阿毗曇論)』을 저술한다면 가전연자(迦旃延子)에게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지금 이 중국 땅에는 학식이 깊은 사람이 없어 여기에서 붓을 꺾으니 논을 지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했다. 일찍이 진승(秦僧) 도융(道融)이 『신법화경(新法華經)』을 강설하는 것을 듣고서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불법을 일으킬 사람은 도융(道融) 바로 그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갑자기 나타난 사자국(師子國)의 바라문(婆羅門)을 굴복시킨 일은 『고승전』에 실려 있다.

(5) 불타야사(佛駄耶舍)
장아함경(長阿含經) 22권홍시 15년(413)에 번역했다. 축불념이 필수했다. 『이진록』에 보인다.
허공장경(虛空藏經)불타야사가 후에 계빈국에 들렀다가 이 경을 얻어 양주(涼州)의 여러 승려들에게 전했다. 도혜(道慧)의 『송제록(宋齊錄)』55)에 보인다.
담무덕률(曇無德律) 45권진나라 말로는 법장(法藏)이며, 이것은 인명(人名)이다. 바로 사분율주(四分律主)이다. 지금은 60권이다.
담무덕계본(曇無德戒本)위의 율(律)ㆍ계(戒) 두 가지는 『진세잡록(晉世雜錄)』에 보인다.

이상 4부 모두 67권은 진(晉) 안제(安帝) 때에 진나라 말로 각명(覺明)이라고 하는 계빈국의 삼장법사 불타야사가 번역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외도(外道)였으며 불교를 신봉하지 않았다. 한 사문이 그의 집에 와 구걸하자 불타야사의 아버지는 성을 내며 사문을 구타하였는데, 갑자기 아버지의 수족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에 무당에게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성현을 범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구타한 사문을 초청하여 진심으로 참회하니 며칠 만에 병이 나았다. 이 때문에 불타야사를 출가시켜 그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15세 때에는 하루에 2, 3만 언이나 되는 경전을 암송하였다. 어떤 나한이 걸식하여 그를 공양하였다. 19세가 되자 대소승(大小乘) 경전 수백만 언을 암송하였다. 그러나 타고난 성품이 오만하여 구족계를 받을 나이가 되었음에도 계단에 임하지 않았다. 외삼촌에게 오명(五明)56)과 세상의 여러 술수를 배웠고, 27세가 되어서야 구족계를 받았다. 항상 독송하고 탐구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삼았고 낮이나 밤이나 부지런히 힘썼으며 손에서 경전을 놓지 않았다. 언제나 경전의 의미를 생각할 때는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그의 오로지 집중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나중에 구마라집과 사륵국(沙勒國)에서 만났는데, 구마라집이 그를 스승의 예로써 대하였다. 구마라집이 앞서 장안에 도착하였고, 나중에 불타야사가 고장(姑臧)에서 도달했다. 구마라집은 요흥에게 신성(新城)에다 소요원(逍遙園)을 세우고 사사(四事)57)로 그를 공양하도록 했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때가 되면 탁발하여 하루에 한 끼니를 공양할 뿐이었다. 불타야사는 붉은 콧수염이 있고 『비바사론(毗婆沙論)』에 능숙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붉은 콧수염의 비바사”라고 불렀으며, 구마라집의 스승이었기 때문에 대비바사(大毗婆沙)라고 호칭했다. 네 가지의 공양이 세 칸의 집에 가득하였지만 불타야사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요흥은 그 공양물을 팔아서 성 남쪽에 절을 지었다. 앞서 『사분율』을 송출하였는데, 그것이 빠지거나 오류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을 하여 불타야사에게 강적(羌籍)의 약방문(藥方文) 5만 언 가량을 시험삼아 암송하게 하고는 이틀 후에 그것을 다시 외워 보게 했는데,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대중들은 모두 그의 기억력이 뛰어남에 탄복하였다. 홍시 12년(410)에 『사분율』 등을 번역했고, 15년(413)에 역장(譯場)을 해산했다. 요흥은 불타야사에게 비단 만 필을 보시하였지만 모두 받지 않았다. 사문 도함(道含)과 축불념 두 사람이 필수를 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각각 천 필씩을 주고, 그 외 명덕 5백 사문에게 모두 후하게 보시하였다. 나중에는 서역으로 돌아갔는데 어디에서 입적했는지는 알 수 없다.

(6) 석승조(釋僧肇)
반야무지론(般若無知論)
부진공론(不眞空論)
물불천론(物不遷論)
열반무명론(涅槃無名論)

이상 4부 모두 4권은 진(晉) 안제(安帝) 때 사문 석승조가 지은 것이다. 그의 행장(行狀)의 자세한 부분은 본전(本傳)과 같다.

(7) 석승예(釋僧叡)
이진중경록(二秦衆經錄)

이상은 사문 석승예(釋僧叡)가 찬술한 것이다. 승예는 위군(魏郡)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나이 22세에 여러 경전을 두루 통달하였다. 승랑(僧朗)법사의 『방광반야경(放光般若經)』 강의를 듣다가 여러 차례 어려운 문제로 따져 물은 적이 있었다. 승랑이 승예의 스승 승현(僧賢)에게 말하기를, “요즘 승예가 어려운 질문을 해왔는데 제가 여러 번 생각을 거듭하였으나 대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과연 승현스님의 현명한 제자라 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나중에 구마라집을 만나서 번역하는 데 참여하였다. 또한 요숭(姚嵩)에게 매우 존경을 받았으며, 요흥 또한 찬탄하였다. 구마라집이 후에 『성실론』을 번역하고 나서 승예에게 그것을 강의하게 했는데, 문장이 굴절되어 의미가 숨어 있는 것들을 시원하게 풀어내었다. 구마라집이 “내가 경론을 번역하면서 그대를 만났으니 진실로 여한이 없구려”라고 하면서 찬탄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서방에 태어나기를 소원으로 삼았으며, 임종할 때에도 서방을 향해 합장하면서 세상을 마쳤다고 한다. 이때 상서로운 빛이 났다.

(8) 석도항(釋道恒)
석박론(釋駮論)

이상은 사문 도항이 지었다. 도항은 경조(京兆) 사람이다. 나이 9세에 은사(隱土)인 장충(張忠)이 찬탄하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보통 사람보다 뛰어난 관상을 갖추고 있다. 그가 속세에 있게 되면 반드시 정치를 보좌하는 공로가 있을 것이고, 불도에 몸담으면 반드시 불법을 빛나게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도항은 어려서부터 계모를 봉양하였는데, 효자로 소문이 났다. 손수 비단을 짜고 수를 놓아서 봉양했다. 20세에 불교 이론을 칼로 자른 듯 잘 분별하였고, 내외의 경전에 해박하였다. 구마라집이 역경하는 곳에 참여하여 그를 도와 자세하게 살펴서 바로잡았다. 동학 중에는 도표(道標)가 있었는데 상당히 재능이 있었다. 요흥은 도항과 도표 두 사람이 나라를 경영할 만한 역량이 있음을 알고 글을 내려 환속하라고 압박하였다. 도항과 도표가 조서에 회답하였다. 요흥이 다시 구마라집과 승략에게 편지를 보내서 이야기하였다. 구마라집과 승략도 그것에 회답하였다. 요흥이 나중에 계속해서 교서를 내렸지만, 온 성 안의 사람들이 구제하여 겨우 면할 수 있었다. 도항과 도표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옛 사람의 말에 ‘나에게 돈을 보태 주는 이는 나의 정신을 손상시키고, 나의 명예를 살려 주는 이는 내 몸을 죽인다’고 하더라”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그 자취를 숨겼다. 이 『석박론』과 『백항잠(百行箴)』을 지었다.

8) 서진걸복씨전역불경록(西秦乞伏氏傳譯佛經錄)
대체로 시대를 타고서 세간의 사람을 구하고자 하면 진리를 열어서 중생들을 가르쳐야 하며, 나라에 귀의할 만한 가르침이 있으면 중국인이나 오랑캐나 할 것 없이 귀향하게 된다.
걸복국인(乞伏國仁)은 농서(隴西) 지역의 선비족(鮮卑族)이다. 대대로 원천(苑川)에 거주하여 남선우(南單于)가 되었는데 전진(前秦)의 패배 후에 창업하였다. 자성(子城)을 도읍으로 삼고 국호를 서진(西秦)이라고 하였다. 사문을 존경하고 섬겼는데, 당시 성견대덕(聖堅大德)의 불법 교화가 그곳까지 미쳤다. 걸복국인이 그런 은혜를 받들고 공경하니 그 예의가 더욱 융성했다. 불교의 기풍을 퍼트린 뒤에는 일에 따라 번역사업을 했다. 다섯 임금 44년간 이어지다가 하(夏)의 혁련(赫連)씨에게 멸망당했다. 하(夏)는 또한 북위(北魏)에게 멸망했다. 어떤 이는 걸복국인의 동생인 걸복건귀(乞伏乾歸)가 스스로 왕이라고 칭하고 건국하여 남량(南涼)이라고 했다고 한다. 태초(太初) 원년은 진(晉) 효무(孝武) 태원(太元) 13년 무자년(戊子年)(388)에 해당한다. 태초(太初) 12년(399)에 이담(李曇)에게 항복했는데, 9년이 지나서 걸복건귀가 다시 갱시(更始)로 칭원하였는데, 걸복모말(乞伏暮末)이 즉위 2년, 즉 송(宋) 원가(元嘉) 7년(430)에 하(夏)의 혁련씨에게 멸망했다. 도합 37년간이었다. 지금 총괄해 보면 번역된 경전과 실역경은 따로 표시한 것과 같으니, 번잡하게 열거하지는 않겠다.

(1) 성견(聖堅)
방등주허공장경(方等主虛空藏經) 8권『허공장소문경(虛空藏所問經)』이라고도 한다. 혹은 5권이다. 두 번째 번역인데, 법현(法賢)이 번역한 『나마가경(羅摩伽經)』과 동본이다. 『진세잡록』에 보이며, 『대집경』에서 나왔다.
연도속업경(演道俗業經)두 번째 번역이며, 지겸이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뒤에 1권을 예시하였다.
패경(孛經)두 번째 번역이다. 오(吳)의 지겸이 번역한 것과는 동본이역(同本異譯)이다.
태자수대나경(太子須大拏經)강릉(江陵)의 신사(辛寺)에서 번역했다. 유상(庾爽)이 필수하였으며, 『시흥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마땅히 진세(晉世)의 목록에 들어가야 하지만 사람을 따라 진(秦)의 목록에 넣었다.
섬자경(睒子經)일명 『효섬경(孝睒經)』ㆍ『보살섬경(菩薩睒經)』ㆍ『불설섬경(佛說睒經)』ㆍ『효자은경(孝子隱經)』 등이라고도 한다. 모두 여섯 가지의 명칭이 있다. 두 번째 번역인데,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과는 조금 다르다. 『시흥록』에 보인다.
무애제지법문경(無涯際持法門經)일명 『무제경(無際經)』이다. 『시흥록』에 보인다. 일명 『금광수녀소문경(金光首女所問經)』이라고도 한다.
제공재환경(除恐災患經)두 번째 번역이다. 위(魏)의 백연(白延)이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시흥록』과 『보창록』 두 목록에 보인다.
부인우고경(婦人遇辜經)『시흥록』에 보인다.
아난문사불길흉경(阿難問事佛吉凶經)일명 『아난분별경(阿難分別經)』, 혹은 『분별경(分別經)』이라고도 한다. 『제자만다기술경(弟子慢多耆述經)』과는 동본이출(同本異出)이다. 『시흥록』에 보인다. 이상 9경은 『법상록(法上錄)』에서는 『별록(別錄)』에서 나왔다고 했다.
보살소생지경(菩薩所生地經)일명 『마갈소문경(摩竭所問經)』이라고 한다. 『조록(趙錄)』에 보이는데, 전조(前趙)인지 후조(後趙)인지 알 수 없어서 사람을 따라 서진(西秦)의 목록에 첨가했다. 『시흥록』에 보인다.
현수경(賢首經)일명 『현수부인경(賢首夫人經)』이다. 『시흥록』에 보인다.
동가섭해난경(僮迦葉解難經)두 번째 번역이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가섭경(迦葉經)』과는 동본이다. 유상(庾爽)이 필수했다. 『시흥록』ㆍ『왕종록(王宗錄)』58)ㆍ『보창록』ㆍ『지민도록(支敏度錄)』 등 네 목록에 모두 실려 있다.
관불경(灌佛經)별역(別譯)인 『마하찰두경(摩訶刹頭經)』과는 대동소이하다. 『시흥록』에 보인다.
칠녀본경(七女本經)두 번째 번역이다. 지겸이 번역한 것과는 대동소이하다. 일명 『여본심명경(女本心明經)』이라고도 한다.
나가마경(羅伽摩經) 3권『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의 별역(別譯)이다. 『당록(唐錄)』에 보인다.

이상 15경 모두 22권은 진(晉) 효무제(孝武帝) 때 사문 성견(聖堅)이 하남국(河南國)에서 걸복건귀(乞伏乾歸)를 위해서 번역한 것이다. 혹은 견공(堅公)이나 법견(法堅)이라고도 하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정확하지 않다. 그래서 모두 열거한다.
여러 경록을 검토해 보면 1경은 강릉(江陵)에서 번역했고, 1경은 『조록(趙錄)』에 보이며, 10경은 『시흥록』에 보인다. 『시흥록』은 바로 『남록(南錄)』59)이다. 혹은 축도조의 『진세잡록』, 혹은 지민도의 『경론도록(經論都錄)』, 혹은 『왕종록』, 혹은 『보창록』 등 여러 경록의 경명과 역인(譯人)을 조사해 보니 여러 곳을 다니면서 가는 곳마다 경전을 번역한 것이다. 가는 곳에 정해진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어느 세록(世錄)에 넣어야 옳은지 알 수 없다. 지금 여기서는 『법상록(法上錄)』60)에 의거해서 전체적으로 걸복(乞伏)씨의 서진(西秦)시대 목록에 넣는다.

(2) 제실역경(諸失譯經)
호본경(胡本經) 4권장안에서 번역된 듯하다.
살화살왕경(薩惒薩王經)
아다삼매경(阿多三昧經)혹은 아타(阿陀)로 되어 있기도 하다.
타현왕경(陀賢王經)
발타회과경(颰陀悔過經)
사미라경(沙彌羅經)
방등결경(方等決經)
비구이사경(比丘二事經)

이상 8부 모두 11권은 모두 사문 승우의 『출삼장기집』에 기록되어 있는 석도안이 기술한 「관중이경록(關中異經錄)」61)에 나온다. 지금 여기서는 다시 삼진(三秦)의 기록에 넣는다. 모두 역경인ㆍ역경시기ㆍ역경장소를 알 수 없는 것이다.

9) 북량저거씨전역불경록(北涼沮渠氏傳譯佛經錄)
서(序)에서 말하였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은 임송(臨松) 노수(盧水)62) 지역의 오랑캐이다. 대대로 북흉노(北匈奴)의 좌대(左大)였으며, 저거(沮渠)는 관직명으로 부족의 성씨를 삼은 것이다. 전량(前涼)이 창업했던 곳을 근거지로 해서 진(晉) 안제(安帝) 융안(隆安) 5년 신축(辛丑, 401)년에 스스로 북량(北涼)이라고 하고, 승건(承乾)으로 개원(改元)했다. 12년(408)에 이르러 고장(姑臧)에서 현시(玄始)로 개원했다. 담무참(曇無懺)법사를 만나서 대부(大部)를 번역하고, 불교를 크게 홍포했다. 바로 송(宋) 무제(武帝) 초의 일들이다. 처음에는 저거몽손이 담무참을 받들면서 매우 존경하였다. 원위(元魏)63)가 담무참이 도술을 한다는 것을 듣고서 동쪽(위나라)으로 데려오도록 했다. 저거몽손은 담무참이 위나라를 위해 계책을 마련하여 행여나 도리어 서쪽(저거몽손의 북량)을 도모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다. 담무참은 그런 저거몽손의 마음을 알고는 다시 사양하고 서역으로 경전을 구하러 가고자 하였다.64) 또한 그는 수명業期65)이 다했음을 알았다. 저거몽손은 거짓으로 여행 물자를 마련해 주면서 여러 차례 말렸지만 결국 길을 떠났다. 저거몽손이 그것에 분노하여 자객을 보내서 길에서 담무참을 살해하도록 했다. 옛 사람의 말에 “지식인을 상봉할 때 길하지 않으면 흉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정말 새겨둘 만하다. 이후에 저거몽손은 자신을 학대하고 진심으로 그 일을 괴로워했다. 대낮에도 귀신이 칼로 자신을 찌르는 것을 보더니, 이내 사망했다. 북량은 두 명의 임금 43년 만에 위나라에게 멸망했다. 역경을 한 도속(道俗)은 모두 9명이며, 번역한 것은 32부 266권이다. 아울러 실역경(失譯經)과 함께 북량(北涼)의 목록으로 삼는다.

저거북량(沮渠北涼) 사문 석도공(釋道龔)2부 12권, 경(經)
사문 석법중(釋法衆)1부 4권, 경
사문 승가타(僧伽陀)1부 2권, 경
사문 담무참(曇無讖)24부 151권, 경ㆍ계(戒)ㆍ단문(壇文)
안양후(安陽侯) 저거경성(沮渠京聲)1부 2권, 선법(禪法)
사문 불타발타(佛陀跋陀)1부 60권, 논(論)
사문 석지맹(釋智猛)1부 20권, 경
사문 석담각(釋曇覺)1부 15권, 경
사문 석도태(釋道泰)1부 2권, 경
제실역경(諸失譯經)5부 17권, 경ㆍ불명(佛名)

(1) 석도공(釋道龔)
비화경(悲華經) 10권『고록(古錄)』에 보이는데, 아마도 기존의 번역본을 석도공이 삭제하여 개정한 듯하다.
보량경(寶梁經) 2권축도조(竺道祖)의 『하서경록목(河西經錄目)』에 보인다.

이상 2부 모두 12권은 진(晉) 안제(安帝) 때에 사문 석도공이 장액(張掖)에서 하서왕(河西王) 저거(沮渠)씨를 위해서 번역했다.

(2) 석법중(釋法衆)
대방등단특다라니경(大方等檀特陀羅尼經) 4권『방등다라니경(方等陀羅尼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은 진(晉) 안제 때에 고창군(高昌郡) 사문 석법중이 장액(張掖)에서 하서왕 저거씨를 위해서 번역했다. 축도조의 『진세잡록』에 보인다.

(3) 승가타(僧伽陁)
혜상보살문대선권경(慧上菩薩問大善權經) 2권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가 번역한 『선권방편경(善權方便經)』과는 동본(同本)이다. 『시흥록』에 보이는데, 일명 『대선권경(大善權經)』ㆍ『대승방편경(大乘方便經)』ㆍ『혜상보살경(慧上菩薩經)』 등이라고도 한다. 모두 다섯 가지 경명이 있지만 모두 동본이다.

이상은 진(晉) 안제 때에 진나라 말로는 요선(饒善)이라고 하는 서역의 사문 승가타가 장액에서 하서왕 저거씨를 위해서 번역한 것이다. 『법상록(法上錄)』에 보인다.

(4) 담무참(曇無讖)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40권현시(玄始) 3년(414) 고장(姑臧)에서 번역하기 시작해서 10년(421)에 끝냈다. 이 경은 모두 3만 5천 개의 게송이며, 중국[凉]에서 거의 백만 언을 줄여서 지금 여기서는 만여 게송에 그치기 때문에 3분의 1 정도의 분량이 됐다. 축도조의 『양록(涼錄)』에 보인다.
대방등대집경(大方等大集經) 31권세 번째 번역이다. 한(漢)의 지루가참(支婁迦讖)이 번역한 27권본과 구마라집이 번역한 30권본과는 그 광략(廣略)이 조금 다를 뿐이다. 간혹 29권 또는 32권이다. 처음에는 감정(勘定)을 하지 않고 대략 베낀 것을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동일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번역은 검증한 것이다. 『축도조록』에 보인다.
비화경(悲華經) 10권두 번째 번역이다. 축도조의 『하서경록목(河西經錄目)』에 보인다. 또 『고록(古錄)』에도 실려 있다. 이것은 석도공(釋道龔)이 이미 번역한 것인데 비록 연대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로 양대에 번역한 것이다. 아마도 앞서 번역이 정밀하지 못했기 때문에 분분한 의견이 발생해서 다시 번역한 듯하다.
보살지지경(寶薩地持經) 10권혹은 논(論)이라고 부른다. 또 8권으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축도조의 『하서경록목』에 보인다.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 10권승현(承玄) 원년(428) 2월 22일에 양주성[凉城]에서 번역했다. 승속[道俗] 5백여 명이 함께 듣고 도태(道泰)가 필수하였다. 혹 6권이라고도 하는데 대소가 정확하지 않다.
보살계경(菩薩戒經) 8권
방등대운경(方等大雲經) 6권일명 『방등대운무상경(方等大雲無想經)』ㆍ『대운무상경(大雲無想經)』ㆍ『대운밀장경(大雲密藏經)』이라고도 한다. 양주(涼州) 내원사(內苑寺)에서 번역했다. 승예의 『이진록』과 『이곽록』ㆍ『오록』에 보인다.
허공장보살경(虛空藏菩薩經) 5권두 번째 번역이다. 서진(西秦)의 성견(聖堅)이 번역한 『방등왕허공장경(方等王虛空藏經)』과는 동본이다. 『대집경』에서 나왔다.
불본행경(佛本行經) 5권두 번째 번역이다.
금광명경(金光明經) 4권첫 번째 번역이다. 18품이다. 축도조의 『하서경록목』에 보인다.
해룡왕경(海龍王經) 4권현시(玄始) 7년(418)에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의 번역과는 동본이다. 축도조의 『하서경록목』에 보인다.
능가경(楞伽經) 4권
신선경(信善經) 2권어떤 경우에는 『선녀경(善女經)』이라고도 했다. 승우는 의경(疑經)이라고 했다.
무위도경(無爲道經) 2권세주(世注)에서는 의경(疑經)이라고 보았다.
승만경(勝鬘經)일명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經)』이라고 한다.
나마가경(羅摩伽經) 1권두 번째 번역이다. 위(魏) 때에 안법현(安法賢)이 번역한 것은 3권인데, 광략의 차이가 있다.
수진천자경(須眞天子經)『오록』에 보인다. 또 구마라집이 다시 번역했다.
거사청승복전경(居士請僧福田經)『별록』에 보인다. 『승우록』에서는 의경(疑經)이라고 했다.
문타갈왕경(文陀竭王經)
공덕보일광보살경(功德寶一光菩薩經)
복중녀청경(腹中女聽經)일명 『부장교녀경(不莊挍女經)』이다.
결정죄복경(決定罪福經)
보살계본(菩薩戒本)두 번째 번역이다.
보살계단문(菩薩戒壇文)일명 『우바새단문(優婆塞壇文)』이다. 『보창록』에 보인다.

이상 24부 모두 151권은 진(晉) 안제(安帝) 때에 중천축국의 삼장법사 담마참(曇摩讖)이 번역하였다. 담마참은 담무참(曇無懺)이라고도 하며, 진나라 말로는 법풍(法豊)이라고 한다. 그는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앞부분 10권과 『보살계경(菩薩戒經)』 등을 가지고 고장(姑臧)에 도착하여 여관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경을 잃어버릴까 염려하여 그것을 베개 삼아 잠을 잤다. 밤에 어떤 사람이 그를 끌어내어 땅에 내동댕이쳤다. 담무참은 놀라서 깨고는 도둑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일이 사흘 밤 동안 계속되자 공중에서 “이것은 여래 해탈의 보고(寶庫)인데, 어찌 그것을 베개로 삼는가?”라는 소리가 들렸다. 이내 부끄러워하며 깨우치고 경본을 특별히 높은 곳에 보관했다. 정말로 도둑이 들어 밤 내내 여러 차례 그것을 들어 올리려고 했지만, 도저히 들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 담무참이 그것을 들어 올릴 때 전혀 무거워하지 않았다. 도둑들은 담무참을 성인이라고 여기고는 모두 몰려와서 엎드려 사죄하였다.
이때 저거몽손이 양(涼)나라 영토를 점거하고 하서왕(河西王)을 참칭하고 있었는데, 담무참의 덕망과 명성을 듣고 불러서 대면하고는 한 번 말을 나누는 것으로 매우 후하게 대접하고 경전의 번역을 간청하였다. 양나라의 뛰어난 사문인 혜숭(慧嵩)이 직접 필수하였다. 서주(西州)의 승속 수백 명이 그의 명철하고 재주 있음을 보고 기뻐하면서 의문점들을 종횡으로 질문하였다. 담무참이 막힌 것을 풀어내니 그 청아한 변론이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았다. 그리고 보방(寶坊)의 여러 경전을 번역했는데 60여 만 언에 달했다. 『열반경(涅槃經)』이 3분의 1정도의 분량이라 앞부분과 뒷부분을 이곳저곳 다니면서 찾았다. 8년이 걸려 모두 경 3질을 번역하여 마무리하였다. 비록 40권으로 빠진 것이 상당히 많으니, 부처님을 널리 선양하고 중생들을 만족하게 하고, 한 번이라도 원만한 가르침[圓敎]을 보면 다시 불법이 융성해지기를 바란다.(양나라에서 역경을 마친 것은 송(宋) 무제(武帝) 영초(永初) 2년(421)이다.)

(5) 저거경성(沮渠京聲)
선법요해(禪法要解) 2권

이상은 진(晉) 안제 때에 저거몽손의 사촌 동생인 안양후(安陽侯) 경성(京聲)이 번역한 것이다. 그는 사람됨이 박식하고 책이나 역사를 두루 섭렵하였다. 담무참이 불법을 선양하는 것을 인연으로 불경[內典]에 뜻을 두고는 오계[五禁]를 받들어 지키고, 육정(六情)을 두루 잘 지켜서 담무참이 번역한 것을 읽고는 곧바로 암송할 수 있었다.
서쪽으로 나아가 우전국(于闐國)에 도착하여 양(涼)나라 말로는 불장(佛將)이라고 하는 천축의 삼장 선사(禪師) 불타사나(佛駄斯那)에게 불교의 교의를 질문하였다. 불타사나는 타고난 재질이 총명하고 하루에 5천 만 게를 암송하였고 선법(禪法)을 환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서역의 여러 나라 사람들은 그를 보고 사람들 가운데 사자(師者)라고 불렀다. 저거경성은 선요(禪要)와 여러 가지 기술을 배웠고, 입으로 범본을 암송했다. 양나라에 돌아와서 번역을 하고는 널리 유포시켰다. 다시 양자강을 건너 강남 지역으로 전해졌다. 구체적 일들은 『고승전』에 실려 있다.

(6) 불타발타(佛陁跋陁)
아비담비바사론(阿毗曇毗婆沙論) 60권

이상은 부처님 입멸 후 6백여 년에 가전연(迦旃延) 나한(羅漢)과 제자(弟子) 5백 명이 지은 것이다. 『보창록』에 보인다. 송(宋) 문제(文帝) 때에 양(涼)나라 말로는 각개(覺鎧)라고 하는 서역의 사문 부타발마(浮陀跋摩) 또한 불타(佛陀)라고도 하는 이가 양성(涼城) 한예궁사(閑豫宮寺)에서 승화(承和) 5년(437)에 저거몽손의 아들인 목건(牧虔)을 위하여 번역했다. 사문 도태(道泰)가 필수했다. 혜숭(慧嵩)ㆍ도랑(道朗)이 명덕(名德) 3백여 명과 함께 경문의 내용을 바로잡고, 다시 교정하여 마무리하였다. 모두 1백 축이었고, 사문 도연(道挻)이 서를 썼다. 위(魏)가 북량(北涼)을 멸망시킨 때라 경법(經法)이 불에 타서 30여 권이 소실되었다. 지금 여기서는 마땅히 60권이어야 옳지만 『왕종록(王宗錄)』에서는 100권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경본에 근거했을 뿐이다. 오늘날 유포된 것을 보면 109권인데 근래 후인들이 나누었기 때문이다.

(7) 석지맹(釋智猛)
반니원경(般泥洹經) 20권

이상은 송(宋) 문제 때에 옹주(雍州)의 사문 석지맹이 서역을 여행하며 이경(異經)을 찾아 천축국에서 범본을 가지고 옥문을 거쳐서 양주(涼州)에서 번역했고, 원가(元嘉) 14년(437)에 양도(楊都)에 들어갔다. 법현(法顯)이 번역한 것과 동본이다. 『송제록(宋齊錄)』에 보인다.

(8) 석담각(釋曇覺)
현우경(賢愚經) 15권

이상은 송(宋) 문제 때에 일명 혜각(慧覺)인 양주(涼州)의 사문 석담각이 승위덕(僧威德)과 함께 우전국(于闐國)에서 이 경의 범본을 구해서 돌아와 원가 22년(445)에 고창국(高昌國) 천안사(天安寺)에서 번역한 것이다. 『송제록(宋齊錄)』에 보인다.

(9) 제실역경(諸失譯經)
대인욕경(大忍辱經) 10권
불퇴전경(不退轉經) 4권일명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이라고 한다.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금륜왕경(金輪王經)
현겁오백불명(賢劫五百佛名)

이상 5부 모두 17권은 사문 승우의 『출삼장기집』에 있는 『신집초경록(新集抄經錄)』의 『신집안공양토이경록(新集安公涼土異經錄)』에 실려있는데, 지금 여기서는 다시 「양세목록(涼世目錄)」에 편입시켜 실역원(失譯源)으로 삼았으니, 시대와 역자의 유무, 권부(卷部)의 많고 적음, 번역 장소는 거의 알 수 없다.

(10) 석도태(釋道泰)
입대승론(入大乘論) 2권견의(堅意)보살이 지었다.

이상 1부는 북량(北涼) 때에 석도태가 번역한 것이다. 당(唐) 『구록(舊錄)』에 보인다.
031_0681_b_01L大唐內典錄卷第三 席京師西明寺釋氏撰歷代衆經傳譯所從錄第一之三東晉 前秦 後秦 西秦北涼東晉朝傳譯佛經錄第五序曰經云三界無常有爲非久晉氏之基魏室遠係高標誅曹爽而絕其設帝策而陳其績及金承土運曆數在躬平蜀而降大吳升平而曰寬文旣允備武亦戢戈百六奄臻官失守天下大亂莫匪斯焉于時俗崩離朝不謀夕寄政江表法隨政沙門信士於是攸集故就錄之東晉錄者宣帝曾孫琅瑘武王後恭王之子名睿字景文初生之辰內有神光一室盡明白毛生於日角之左眼有精曜睇眄煒如也累官使持節安東將軍都督楊州諸軍事左承懷愍敗後百官分離或走江南爲曜戮長安失據帝幽平陽江東于忽見五日群下勸睿宜稱晉王攝萬機以臨億兆愍帝崩後遂卽居號建武年因都建業避愍帝諱改爲建康先太康二年吳舊將管恭作于時建業伍振筮曰恭已滅矣更三十八年揚州當有天子至是果如其言又秦始皇世望氣者云吳金陵山五百年後當出天子始皇忌焉發兵因鑿金陵山斷改稱秣陵冀絕其王自正于睿五百二十六年迺有晉金行奄君四海金陵之瑞其在於斯又謠云五馬浮渡江一馬化爲龍嘉喪亂天下淪覆唯琅瑘西陽汝南南頓彭城等五王獲濟江表而睿首基爲元帝矣將知受命上感天靈跨輿圖下資地勢地負其勢始皇鑿之弗亡天降其靈劉曜殲而莫盡元皇建武元年丁丑創都至恭帝元熙元年己未禪宋其間一百四載戎道俗二十七人而所出經幷舊失合二百六十三部五百八十五卷集爲東晉一十二主建康錄云東晉帛尸利蜜多羅三部十一卷經呪沙門支道根二部七卷經 沙門康法邃一部十卷經沙門竺曇無蘭一百一十部一百九十二卷經呪戒沙門支道林七部七卷論指歸沙門竺僧度一部一卷指歸沙門康道和一部三卷經 沙門加留陁伽一部一卷經沙門僧伽提婆五部一百一十七卷經論沙門卑摩羅叉二部五卷律雜事沙門曇摩一部二卷律要沙門佛陁跋陁羅一十五部一百一十五卷經戒論沙門釋法顯六部二十四卷經戒論傳沙門祇多蜜二十五部四十六卷經外國居士竺難提 三部三卷經沙門釋法力一部一卷經 沙門釋嵩公三部三卷經沙門釋退公一部一卷經 沙門釋法勇一部一卷經沙門釋慧遠 一十四部三十五卷論讚沙門釋僧敷一部一卷論 沙門釋曇詵二部六卷法論沙門釋道祖四部四卷目錄 沙門支敏度一部一卷都錄沙門康法暢一部一卷論 沙門竺法濟一部一卷傳沙門釋曇微二部二卷論指歸諸失譯經五十三部五十六卷經呪灌頂經九卷見雜錄大孔雀王神呪經一卷見道祖及 三藏記孔雀王雜神呪經本見道祖及三藏記然俱譯未盡右三部合一十一卷元帝世西域沙門帛尸梨蜜多羅晉言吉友國王之子當承世位以國讓弟暗軌太悟心內啓遂爲沙門天姿高朗風神俊邁直爾對之便已卓然出於物表況其聰辯言晤者乎承相王導一見而奇之以爲吾之徒也由是顯名導嘗謂蜜曰外國有君一人而已耳蜜笑而曰若使貧道檀越爲今日豈得歷遊至此以爲佳對善持祝術所向皆驗行建康時人呼爲高座法師又授弟子歷覓高聲梵唄傳響迄今方等法華經五卷咸康元年譯阿閦佛剎諸菩薩學戒品經二卷太康年出第二譯與支讖譯大同小異右二部合七卷成帝世沙門支道根出竝見竺道祖晉世雜錄譬喩經十卷 舊錄云出譬喩經右一部合十卷成帝世沙門康法邃類集衆經撰出此部事甚要好卽色遊玄論 辯三乘論 釋曚論聖不辯知論 本業經序 本起四論序道行指歸右七部合七卷哀帝世沙門支遁撰字道林幼而才拔善談名理王洽劉恢殷浩許詢郗超孫綽桓彦表王敬仁何次道王文度遐袁彦伯等一代名流皆著塵外之狎每以山居爲得性之所被勅召後出帝京郗超與親友書道林法師神理所通玄拔獨悟數百年來紹明大法令眞理不絕者一人而已餘如傳述有集十卷盛行於世毘曇指歸一卷右一卷哀帝世沙門竺僧度撰如高僧傳義足經二卷見吳錄亦云異出二百六十戒三部合異二卷太元六年六月二十日於謝鎭西寺合僧譯重挍見舊唱二錄三十七品經一卷太元年譯道安云出律經後例一卷賢劫千佛名經上二經見祐錄八師經玉耶經或云玉耶女經荷雕阿那含經舊錄阿雕或作苛字戒德經或云戒德香經七夢經舊錄阿難七夢經水沫所漂經 比丘聽經 治禪法經蛇行法經出阿含暴象經 群羊千頭經拘薩國烏王經或有羅字出生經夫婦經出生經犢牛經或作字野鷄經出生經驢駝經蠱狐鳥經或作鳥出生經孔雀經出生經五苦經或淨除罪蓋娛樂佛經或五道章句經或五苦章句經凡四名十善十惡經第二譯吳錄云異出自愛經或自愛不自愛經見舊錄阿難念彌經或作離字國王不黎先尼十夢經摩天國王經出六度集彌蓮經見舊錄或彌蘭或彌連出六度集梵志頞波羅延問種尊經寂志果經羅婆鳥爲鷹所捉經晉言半雉大魚事經見水世界經出大集新歲經佛見梵天頂經 鼈獼猴經出生經赤嘴烏喩經 無吾我經 戒相應經阿耨風經晉言依次 阿難多洹羅云母經阿育王供養道場樹經採蓮花違王經或採蓮花違王上佛授決號妙花經四天王案行世間經 帝釋慈心戰勝經三十三天園觀經出增一阿含比丘問佛釋提桓因緣經出雜阿含天於修羅欲鬪戰經 天帝受戒經釋提桓因詣目連放光經梵天策數經舊錄云諸天事經諸天地經異本出比丘浴遇天子放光經諸天問如來警戒不可思議經出義足經罪業報應經救護身命經集修士行經勸行有果經出雜阿含 禪思滿足經出阿含第二譯忠心正行經出六度集或忠心經舊錄大忠心經小忠心經見正經四大泥梨經別錄載三藏記云失譯無大字佛爲比丘說大熱地獄經地獄衆生相害經十法成就惡業入地獄經衆生頂有鐵磨盛火熾然經出雜阿含見一衆生擧體糞穢塗身經出雜阿含鐵城泥犂經 泥犂經或中阿含泥犂經目連見大身衆生然鐵纏身經出雜阿含比丘成就五法入地獄經出阿含學人意亂經 洴沙王五願經般泥洹時大迦葉赴佛經或云摩訶迦葉五眼文經 弟子命過經孔雀王呪經異前吉友出者龍王結願五龍神呪經摩尼羅亶神呪經 龍王呪水浴經大神將軍呪經 伊洹法願神呪經大龍大神呪經 摩尼羅亶神呪案摩經藥呪經 大神母結誓呪經 呪毒經持句神呪 經麻油術呪經檀特羅麻油術神呪經七佛所結麻油術呪經 解日厄神呪經呪水經 嚫水經 請雨呪經止雨呪經 幻師跋陁羅神呪經亦云波陁陁鄰鉢呪經 呪時氣病經呪小兒經 呪齒經 呪眼痛經呪牙痛經 六神名神呪經幻師阿鄒夷神呪經醫王惟婁延神呪經或加阿難所問餘如上列十誦比丘戒本太元六年合僧純曇摩持竺僧舒三家本以爲此一卷見寶唱錄離欲優婆塞優婆夷戒文亦云具行二十二戒文右一百九部合一百十二卷武帝世西域沙門竺曇無蘭言法正於揚都謝鎭西寺簡取世要略大部出唯二經是僧祐錄自餘雜見別錄雖竝有正本旣復別行故悉列之示有所據益意經三卷右一部合三卷孝武帝世沙門康道和太元末譯見竺道祖晉世雜錄朱士行漢錄云二卷不顯譯人十二遊經 第二出與畺良譯者小異右一卷孝武帝世外國沙門迦留陁伽晉言時水太元十七年譯見竺道祖晉世雜錄及寶唱等錄中阿含經六十卷隆安元年十一月於東亭寺出至二年六月訖道祖筆受第二譯與曇摩難提出不同見祖錄增一阿含五十卷隆安元年正月出是第二譯與難提本小異道祖筆受卷或四十二三十三無定見道祖寶唱錄阿毘曇心四卷太元十六年在廬山出道慈筆受見僧祐錄三法度論二卷太元六年於廬山出別錄云一卷與秦曇摩難提出者小異或云三法度無論字或注經者教授比丘尼法見別錄亦云在廬山出右五部合一百一十七卷孝武及安帝世罽賓國三藏法師瞿曇僧伽提婆晉言衆天後秦姚世渡江先是廬山釋慧遠翹心妙典聞提婆至止卽請入廬嶽出之去華存今見所傳蓋其文也隆安末年遊建康晉朝王公風流名士莫不造席至冬爲衛軍將軍東亭侯王珣重出中增阿含等集京都名德釋慧持等四十沙門詳共翻譯來夏方訖其在江洛前後所出經論百餘萬言皆妙得深旨毘尼誦三卷 是十誦 後善誦雜問律事二卷 衆律要用竝見二秦錄右二部合五卷安帝世罽賓國三藏律師卑摩羅叉晉言無垢眼姚秦弘始八年至長安羅什去世乃適壽春止石㵎寺律徒雲聚闡毘尼先弗若多羅共羅什所譯十誦有五十八卷羅叉後開爲六十一卷改善誦爲毘尼誦故今有兩名後之江陵出律雜事道場慧觀筆受盛行於世相傳迄今雜問律事兩卷人處不同文亦不異見別錄右一部合二卷安帝世隆安四年三月二日沙門釋僧遵等二十餘於楊州尚書令王法度精舍三藏律師曇摩晉言法澤出序具卷首明佛法僧物互相交涉分齊差殊甚要須善防護華嚴經五十卷義熙十四年於道場寺出至宋永初二年方訖或六十卷見竺道祖晉世雜錄觀佛三昧經八卷一加海字見道祖晉世錄或云宋世出過去因果經四卷見別錄新無量壽經二卷永初二年道場寺出見唱錄達摩多羅禪經二卷一名不淨觀經一名修行道地經大方等如來藏經元熙二年於道場寺出是第二譯見道祖晉錄與法立出者小異文殊師利發願偈經元熙二年於鬪場寺出出經後記其歲庚申或無偈字見唱錄出生無量門持經一名成道降魔得一切智經於廬山譯見竺道祖錄本業經新微密持經隆安二年第二出與支謙出小異見祖錄淨六波羅蜜經菩薩十住經第三出僧祇律四十卷義熙十二年十一月共法顯譯見道祖及別錄或三十卷僧祇大比丘戒本於道場寺譯第二出見唱錄方便心經共法業出見高僧傳右一十五部合一百一十五卷帝世北天竺國三藏禪師佛陁跋陁羅晉言覺賢於揚都及廬山二處譯沙門法業慧義慧嚴等詳共筆受高僧傳云賢出泥洹及修行等一十五部凡一百一十七依寶唱錄足無量壽及戒本數雖滿尚少兩卷未詳何經來哲博尋或希續繼冀補遺漏庶滿法流焉余撿別錄云方等泥洹經二卷與顯公共譯疑入顯傳是大般泥洹經六卷義熙六年於謝司空謝石道場寺出舊錄云覺賢出寶雲筆受是大本前分十卷大衆問品見祖錄或十卷方等泥洹經二卷見竺道祖錄雜藏經與鬼問目連餓鬼報應目連說地獄餓鬼因緣等四本同體異名別譯見寶唱錄僧祇尼戒本共覺賢譯第二出與魏柯迦羅出小異雜阿毘曇心十三卷共覺賢譯第二出與秦僧伽跋澄出者大同歷遊天竺記傳右六部二十四卷平陽沙門釋法以安帝隆安三年發趾長安遊歷天竺遠尋靈迹求晉所無衆經經涉諸國學梵書語自手抄寫前件梵本從北之南次師子國中有佛齒每年三月彼之國王預前十日莊嚴白象遣一貴重辯說智臣著王衣裳象上擊鼓大聲唱言如來在世四十五年說法度人無量億數生緣盡乃般泥洹自爾已來一千四百九十七載世間長昏衆生可卻後十日佛齒當出無畏精舍可辦香花各來供養正當晉義熙元年顯還汎海達到楊都於道場寺譯經別傳備委所履歷計從義熙元年太歲乙巳至開皇十七年歲次丁巳便成一千六百八十一載矣瓔珞經十二卷或十四卷維摩詰經四卷第三出禪經四卷大智度經四卷已上四部二十四卷見南來新錄如幻三昧經二卷第二出與漢支謙出般若三昧二卷小異見道祖晉錄阿術達經一卷已下列單卷無所悕望經普賢觀經或觀普賢菩薩見道慧錄 無極寶三昧經第二出五蓋疑結失行經第二出所欲致患經第二出如來獨自誓三昧經第二出法沒盡經第二出菩薩齊經第二出照明三昧經第二出分衛經 威革長者六向拜經 一作威華字菩薩十住經第二出 摩調王經指鬘經或作指髻字 浮光經或乳光經彌勒所問本願經 十地經 寶女施經普門品經第二出與法護出者大同見道祖及三藏記右二十五部合四十六卷西域沙門祇多蜜晉言訶友譯諸錄盡言多蜜晉世出譯名多同計不應虛若非涇洛應是江南未詳何帝一部見僧祐出三藏記已外竝彰雜別諸錄所載大乘方便經二卷元熙二年譯是第二出與法護僧伽陁譯小異與慧上菩薩所問經同本別譯見始興錄請觀世音菩薩消伏毒害陁羅尼經第二出見法上錄威華長者六向拜經晉宋間廣州譯第三出與法護多蜜 六向拜同見始興錄及寶唱錄右三部合四卷外國居士竺難提言喜法上錄云晉世譯未詳何帝年代唐錄云宋時無量壽至眞等正覺經一名佛土樂經一名極樂土經右一經一卷恭帝元熙元年二月國沙門竺法力譯是第六出與支謙康僧鎧白延竺法護鳩摩羅什等所出本大同文名少異見釋正度錄迦葉結集戒經 蓱沙王五願經一名弗沙王經日難經卽是越難經後說事小異右三部三卷群錄竝云晉末不知何帝年沙門釋嵩公出或云高公見趙錄及始興錄載迦葉禁戒經一名摩訶比丘經一名眞僞沙門經右一經一卷晉末末詳何帝沙門釋退公出見始興錄佛開解梵志颰經右一經一卷晉末未詳何帝云沙門釋法勇出見趙錄大智論要略二十卷亦云釋論要鈔問大乘中深義十八科合三卷幷羅什合阿毘曇心序 妙法蓮華經序修行方便禪經序 三法度序法性論 明報應論 釋三報論辯心識論 不敬王者論 沙門袒服論大智論序秦主姚興遙請述佛影讚右十四部合三十五卷孝武及安帝世廬山沙門釋慧遠述制鴈門人姓賈氏年二十一遇釋道以爲眞吾師也聽安講波若乃曰儒道九流皆糠粃耳便投簪落䰂卽以綱維大法持爲己任聞羅什入關便致書通好釋慧遠頓首去歲得姚左軍書具承德問仁者曩日殊域越自外境音譯未交聞風而悅頃承懷寶來遊則一日九馳徒情欣雅味無由造盡寓目望途增其勞佇栴檀移植則異物同薰摩尼吐曜則衆珍自積且滿願不專美於絕龍樹豈獨善於前蹤今往比景衣裁願登高座爲著之什答曰摩羅耆婆和南旣未言面又文詞殊隔導心之路不通得意之緣圯傳譯來說粗述風德比如必備聞一途可以蔽百經言末後東方當有護法菩薩勖哉仁者善弘其事夫才有五備博聞深智兼之者道隆未具者疑仁者備之矣所以寄言通好譯傳心豈其能盡粗酬來意耳所致比景衣裁欲令登法座時著當如來意但人不稱物以爲愧耳今往常所用鍮石雙口澡灌可以備法物數也幷遺偈一章曰旣已捨染樂心得善攝不若得不馳散深入實相不畢竟空相中其心無所樂若悅禪智慧是法性無照虛誑等無實亦非停心處仁者所得法幸願示其要遠重答以報偈一章曰本端竟何從起滅有無際一微涉動境成此頹山勢惑想更相乘觸理自生滯因緣雖無主開途非一世無悟宗匠誰將握玄契來問尚悠悠相與期暮歲爲什欽重姚主致書桓玄雅歎靈運崇服文多如傳遠有詩書等集十卷五十餘篇見重於世神無形論右論一卷元帝世揚都瓦官寺沙門竺僧敷撰于時異學之徒咸謂心神有形但妙於萬物耳隨其能更相摧壓邪正莫辯取捨靡從僧敷緣茲故著斯論其論略云形便有數有數則有盡神旣無盡故知無形伏辯之徒見理愜服維摩詰子注經五卷 窮通論右二部六卷廬山東林寺沙門釋曇詵撰詵卽慧遠弟子甚有才學魏世錄目 吳世錄目 晉世雜錄 河西錄目右四錄經目合四卷廬山東林寺遠公弟子釋道流創撰未就而卒同學竺道祖成之行世經論都錄右錄一卷成帝世豫章山沙門支敏度摠挍群經合古今目撰此都錄人物始義論右論成帝世沙門康法暢常執麈尾行每値名賓輒淸談盡日如傳高逸沙門傳右傳孝武帝世剡東仰山沙門竺法濟撰立本論九篇 六識指歸十二首右二卷孝武帝世荊州上明寺沙門釋曇徽作徽本安公弟子圖形禮拜講利爲業故江陵士女咸西向致敬印手菩薩云遺教三昧經二卷或遺教三昧法律經未曾有因緣經二卷或未曾有經阿那含經二卷 那先經二卷或三卷觀無量壽佛經三世三千佛名經 餘例 一卷千佛因緣經  五十三佛名經八部佛名經  十方佛名經賢劫千佛名經唯有佛名與曇無蘭所出四諦經千佛名異稱揚百七十佛名經或直云百 七十佛名南方佛名經  滅罪得福佛名經比丘諸禁律經或無經字摩訶僧祇律比丘要集 或云僧祇部隨用要集法優波離問佛經 沙彌威儀一卷比丘尼十戒經 受十善戒法沙彌尼戒經 賢者五福經賢者五戒經 或云賢者威儀經優婆塞五戒經優婆塞威儀經 波若得經觀世樓炭經 本行六波羅蜜經定意三昧經般舟三昧念佛章經庾伽三磨斯經隋言修行略一名達磨多羅法一名摩多羅菩薩撰禪法要集禪定方便次第法經 禪要呵欲經七萬三千神王護比丘呪經十二萬神王護比丘呪經三歸五戒帶佩護身呪經百結神王護身呪經宮宅神王守鎭左右呪經塚墓因緣四方神呪經伏魔封印大神呪經摩尼羅亶大神呪經召五方龍王攝疫毒神呪經自七萬三千神王已下至此竝有灌頂字今總爲大灌頂經梵天神策經普廣經右二卷幷藥師合成一部合前爲灌頂經凡十二卷七佛所結麻油術呪異本出七佛神呪有結縷法異出本 陁羅尼章句經摩尼羅亶神王呪按摩經或無王字五龍呪毒經齲齒呪經或云呪齲齒或云呪齒七佛安宅神呪經 安宅經三歸五戒神王名一卷道安法護經目有神呪三卷此神王名旣入中卽非失譯右五十三經合五十七卷竝是僧祐三藏集記新錄失譯見有經本者百四十六部合八百九十五卷已外散入諸代世錄所餘附此爲晉下失源前後二秦傳譯佛經錄第六自晉氏失御天下分崩匈奴焚雒瀍涇渭非曰帝京夫子有云四夷交侵中國微矣其在斯乎然則天無二日有道則可君人十六國中二秦爲霸得矣符氏富有八州意在兼幷區宇姚主情存三寶志在弘護法城故使萬里追風異人間出翻傳大部盛集于是則棟幹由茲增隆匡救不爽稱言前秦苻氏錄者其先蒱健氐武都人也因二趙亂據有關西子孫乘機繼立稱帝號秦都長安至第三主字永固生有神光從天屬地銘見其背曰草付臣遂改蒱爲苻氏堅立十有六年時太史奏有德星見外國分野當有聖人輔中國得之者王堅乃使將呂光求龜茲國鳩摩羅什又使將苻丕攻取襄陽彌天釋道安幷習鑿齒等堅旣獲之欣然謂僕射㩲翼曰朕不以珠玉爲珍但用賢哲爲寶今以十萬之師攻襄陽獲一人有半翼曰誰堅曰安公一人鑿齒半每與安同輦言及東征安極諫曰東南土卑氣厲非曰中華且虞舜遊而不返秦皇適而不歸今以百萬之求厥田下下之土未敢聞也餘云云不載自爾詢安政術兼敷釋典西得什而堅已沒六主四十四年甲子推苻健皇始元年當晉穆帝永和六年庚戌之歲至堅建元二十一年當晉孝武太元十年乙酉之歲華夷道侶凡八人所出經四十部合二百三十九卷結爲前秦之錄苻秦沙門曇摩特二部二卷戒本壇文沙門釋慧常一部一卷戒本沙門曇摩蜱一部五卷經沙門鳩摩羅拂提一部二 卷經沙門曇摩難提五部一百一十四卷經集論沙門僧伽跋澄三部二十七卷經沙門僧伽提婆三部六十卷阿毘曇沙門釋道安二十四部二十八卷注解志錄十誦比丘戒本教授比丘尼二歲壇文僧純於龜茲國得來佛念執文譯語慧詳筆受見寶唱錄右二部合二卷晉簡文世西域三藏律師曇摩特秦言法慧共竺佛念等於長安譯慧詳筆受比丘尼大戒本右一卷晉簡文帝世律師釋慧常共曇摩特竺佛念等於長安譯錄乃不載所出部名計應多是十誦戒本摩訶鉢羅般若波羅蜜經建元十八年譯或七卷見僧睿二秦錄右一經五卷晉孝武帝世天竺三藏沙門曇摩蜱秦言法愛執大品梵竺佛念譯爲秦文亦云長安品從所出處爲名是外國經抄四阿含暮抄經建元十四年出之右一經二卷晉孝武世西域三藏沙門鳩摩羅佛提秦言童覺於鄴寺佛提執梵本竺佛念佛護等譯爲秦文沙門僧導曇究僧睿等筆受中阿含經五十九卷建元二十一年出是第一譯竺佛念筆受見竺道祖晉世雜錄增一阿含經五十卷建元二十年四月一日爲秦武威守趙業出第一譯慧嵩佛念筆受見僧睿二秦錄祐唱錄竝載阿育王太子壞目因緣經亦云王子法益壞目因緣經建初二年六月八日於安定城爲尚書令姚旻出見二秦錄一本無經字此應入後從多附此僧伽羅剎集二卷佛後七百年僧伽羅剎造見唱錄三法度二卷與晉世僧伽提婆出者小異右五部合一百一十四卷晉孝武帝世兜佉勒國三藏法師曇摩難提秦言法喜以建元初至長安誦四阿含梵本口授竺佛念寫爲梵文到二十年爲苻主譯作五十九卷屬慕容沖及姚萇反亂關中危阻未過委悉難提西出不知所之弘法也多艱遇緣也勤就可重可悲婆須蜜經十卷建元二十年出或云是集論阿毘曇毘婆沙十四卷建元十九年出或十一卷僧伽羅剎集經三卷建元二十年十一月三十日出右三部合二十七卷晉孝武帝世罽賓三藏法師僧伽跋澄秦言衆舊誦婆羅門梵本甚熟利難提先錄爲梵文佛圖羅剎傳譯沙門慧嵩智敏秘書郞趙文業等筆受爲秦文阿毘曇八犍度三十卷建元十九年出亦名迦旃延阿毘曇佛念傳沙門慧力僧茂等筆受佛滅後三百餘年迦旃延阿羅漢或二十卷阿毘曇心一十六卷建元末於洛陽出見僧睿二秦錄毘婆沙毘曇一十四卷亦云廣說同洛陽出見二秦錄右三部六十卷罽賓三藏法師僧伽提婆或云提和此蓋梵之楚夏秦言衆天晉簡文帝世苻氏建元年中入乎長安宣流法化僧伽跋澄出婆須蜜及曇摩難提譯中增二舍及三法度等時屬戎難譯未詳悉道安去世未及改正山東淸帖提婆乃與道安同學釋法和俱適洛陽四五年間硏講前經居華稍久博洞秦言方知先出多有乖失法和慨難遭之法出而未乃更屈提婆重譯前經如是少後姚興法事甚盛法和西歸婆南度故前後本文有小不同般若析疑略二卷 大十二門注解二卷陰持入注解二卷 答法汰難二卷光贊折中解 光讚抄解般若析疑准起盡解 道行集異注小十二門注解 了本生死注解密迹持心二經甄解 賢劫諸度無極解人本欲生注撮解 安般守意解大道地注解 衆經十法連雜解義指注解 九十八結連幻通解三十二相解三界混然諸雜僞錄答法將難西域志 綜理衆經目錄右二十四件合二十八卷晉孝武帝太元中前秦沙門釋道安撰安本常山扶柳人俗姓衛氏家世英儒失覆蔭爲外兄孔氏所養年七歲讀書再覽能誦鄕鄰嗟異至年十二出家神性聰敏而形貌甚陋不爲師之所重執勞作役曾無怨色性精進齋戒無闕數歲之後方啓師求經師與辯意經一卷可五千言安齎經入田因息就覽暮還以經歸師更求餘者師曰昨經未讀復求耶安答已誦訖師雖異之未信也復與成具光明經一卷萬言齎之如初暮復還師師執經覆之不差一字師大驚嗟而大異後爲受具戒恣其遊學晉懷愍避難西東初遇佛圖澄澄見嗟與語終日衆方敬伏後至襄陽大宣佛法初經出已久而舊譯時致使深義隱而未通安每至講說唯敍大意轉讀而已安乃窮覽經典鉤深致遠注述前件二十餘部敍致淵富妙盡奧旨條貫旣文理會通經義克明自安始也抑習郁以彌天分梨盡衆答郗超之遺米有待爲繁又以漢魏至晉經來稍多其傳述經人名字弗說後生追尋莫測年代安乃摠集目名表其時代詮品新舊撰爲經錄經有據實由有功苻主遠承故命苻丕將十萬衆攻取襄陽獲安返長安住五重寺僧衆數千大弘法化苻主常出命安升輦同載譏者帝曰朕以天下不易而治輿之榮豈稱其德安諫不聽南征帝不從果敗之安每稱譯胡爲秦有五失本三不易也一者胡言盡而使從秦一失本也二者胡經尚質秦人好文傳可衆心非文不二失本也三者胡經委悉至於嘆詠丁寧反覆或三或四不嫌其而今裁斥三失本也四者胡有義說正似亂詞尋說向語文無以或一千或一百今竝刈而不存四失本也五者事以合成將更傍及反騰前詞已乃後說而悉除此失本也然智經三達之心覆面所演聖必因時時俗有易而刪雅古以適今時一不易也愚智天隔聖人叵階乃欲以千載之上微言傳使合百王之下末俗二不易也阿難出經去佛未久尊大迦葉令五百六通迭察迭書今離千年而以近意量彼阿羅漢乃兢兢若此此生死人而平平若此豈將不以知法者猛乎斯三不易也涉茲五失經不易譯胡爲秦詎可不愼乎正當以不關異言傳令知會通耳何復嫌於得失乎是乃未所敢知也前人出經支讖世高審得胡本難繼者也羅叉支越斲鑿之巧者夫聖賢導達正可勖勵龜鏡書諸紳永爲鑑誡但稱梵爲胡言小傷本據竊所未承耳依撿安公出家之始西晉愍帝建興之末德王道振乃居東晉孝武太元之晩紀今取注述之時故在斯列後秦傳譯佛經錄第七霸主承統隨方利見各有司存正朔接運知之久矣故因時而王事通夷眄望前古繼踵相從後秦姚萇西戎羌也因苻堅征亂卽而締搆仍都雍關改長安爲常安登位八年苻堅領鬼兵白日入宮刺其陰出血一石計論怨結難可淪亡可不鏡諸旣崩其子興立弘始三年春有樹連理於廟庭逍遙一園蔥變爲薤咸稱嘉應有智人來入國瑞冬什到雍興加禮遇待以國師崇敬甚隆大闡經震旦宣譯盛在此朝四方沙門雲犇湊集先是長安自前漢廢到苻秦興其間三百三十一載曠絕朝市民俗荒蕪雖數伽藍歸信尟寡三千德僧同止一處共受姚秦天王供養稱大寺非是本名中構一堂權以草卽於其內及逍遙園二處翻譯法遠被瑞驗若茲因立僧官俸侍中置兩都錄緝五部僧昭玄之興自此起魏末周初衢術稍整大寺因成四伽藍草堂本名卽爲一寺堂東常住寺常住南京兆王寺兆後改安定國寺安定國西爲大乘邊安定左天街東畔八隅大井卽舊大寺之東廚供三千僧之甘泉也孫三主三十二年爲晉所滅始於姚萇初元元年歲在丙戌卽晉太元之十一年終於姚泓永和二年太歲丙卽晉安義熙之十二年也身死建國入元魏沙門譯傳凡有八人所出經律戒一百二十四部合六百六十五卷爲後秦姚氏錄云沙門竺佛念十三部八十六卷經論沙門曇摩耶舍二部二十一卷阿毘曇沙門弗若多羅一部五十八卷律沙門鳩摩羅什九十八部四百二十五卷經論傳沙門佛馱耶舍四部六十九卷經律戒沙門釋僧肇四部四卷論沙門釋僧睿一部一卷錄目沙門釋道恒一部一卷論出曜經一十九卷建元十年出見二秦錄及高僧傳寶唱錄或云論菩薩瓔珞經十四卷建元十二年七月出見二秦錄及高僧傳或十二卷十住斷結經一十二卷第二出與漢法蘭出八卷小異見二秦錄高僧傳或十卷鼻奈耶律一十卷或云戒因緣經沙門曇景筆受見道安經序十地斷結經一十卷第二出菩薩處胎經五卷亦直云胎經見秦錄高僧傳大方等無相經五卷或四卷亦 大雲經持人菩薩經三卷 菩薩普處經三卷瓔珞本業經二卷 中陰經二卷見二秦錄高僧傳王子法益壞目因緣經第二出與曇摩難提譯者小異或云阿育王息壞目因緣經十誦比丘尼戒所出本末僧純於拘夷國得本佛念譯文後竺法汰刪改正見唱錄右一十三部合八十六卷晉孝武帝涼州沙門竺佛念識朗通敏好遊方家世西河洞華戎語前秦苻氏建元年初來入長安秘書郞趙正請僧伽跋澄及曇摩難提出衆經論當世名僧莫能傳譯衆咸推念二含文顯念之譯功漢末來安高支謙之後莫踰於念故苻姚二代爲譯人之宗關內名僧咸共嘉尚其後目出所件如前僧傳中唯載五件其外八部彰別雜錄故備列之舍利弗阿毘曇三十卷或二十卷祐云毘婆沙出長房撿傳乃是耶舍故改正之見寶唱錄差摩經一卷晉隆安年達廣州在白沙寺爲淸信女張普明出此應入晉世隨人附秦右二部合三十一卷晉安帝世賓三藏法師曇摩耶舍秦言法稱耶舍是名稱而高僧傳乃云法明從聲爲字於理小僻義熙中入長共天竺沙門曇摩掘多秦言法以弘始九年初爲姚興書出梵文至十六年秋譯訖秦太子泓親管理味沙門釋道摽製序十誦律五十八卷弘始六年十月十七日於中寺出見二秦錄右晉安帝世罽賓三藏律師弗若多羅秦言功德華以戒節見稱歷遊行化羅旣至止姚興卽召常安名六百餘僧延請多羅憩於中寺誦出十誦律梵本羅什度爲秦文分獲二未竟而多羅卒衆咸痛惜什後又共曇摩流支秦言法希譯都訖摩訶般若波羅蜜經三十卷或三十卷舊二十七卷僧睿二秦錄云姚執舊本什執梵文念傳睿肇筆幷制序故知先譯今第二出大方等大集經三十卷第二出與支讖出二十七卷小異見李廓今別錄及二秦錄竝題新字如舊明矣今六十卷放光般若波羅蜜經二十卷第二出見別錄小品般若波羅蜜經十卷弘始十年重出或七卷睿筆見二秦錄與七卷菩提經同本名異出睿制序華首經一十卷一名攝善根經弘始八年出見二秦錄撿諸罪福經一十卷見別錄妙法蓮華經七卷弘始八年於大寺出睿筆制序第二出與護正法華同本相去垂百年見二秦錄賢劫經五卷弘始四年三月五日出與護譯小異曇恭筆見二秦錄一名賢劫三昧經一名賢劫定意經十住經五卷什共佛陁耶舍譯或四卷見二秦錄思益經四卷一名思益梵天所問經弘始四年十月一日逍遙園出第二譯與護出勝思惟經本同異出見二秦錄睿制序大樹緊那羅經四卷第二出與支讖屯眞陁羅同本文有廣略持世經四卷第二出與護持人菩薩所問經同本小廣見二秦錄維摩詰經三卷弘始八年於大寺出第四譯與佛調支謙法護出小異生筆什注睿序見二秦錄佛藏經三卷亦名選擇諸法經或四卷見二秦錄弘始七年六月十二日出菩薩藏經三卷一名富樓那問經一名大悲經或二卷弘始七年出見二秦錄稱揚諸佛功德經三卷弘始七年出見二秦錄一名集華經禪經三卷弘始四年正月五日出見二秦及唱錄一名菩薩禪法經與坐禪三昧經同禪秘要經三卷見別錄或無經字 禪法要三卷阿闍世經二卷見別錄阿蘭若習禪法經二卷見別錄或無經字與坐禪三昧經同本異譯禪要經二卷一名禪法要解見別錄發菩提心經二卷見李廓錄自在王經二卷弘始九年於尚書令常山公姚顯第出睿筆制序與大集自在品不同長五紙文句出沒互多少見二秦錄善信摩訶神呪經二卷見李廓錄首楞嚴經二卷第七出與讖謙白延法護蘭公及勇伏定二經等本同別譯又蜀及後出二本合九譯文各異梵網經二卷弘始八年於草堂寺三千學士最後出此一品梵本一十二卷六十一品譯訖融影等三百人一時受菩薩十戒見經前敍肇筆受大善㩲經二卷見李廓錄諸法無行經二卷或一卷見二秦錄無量壽經一卷一名阿彌陁弘始四年二月八日出第五譯與支謙僧鎧白延法護出兩卷小異見二秦錄彌勒下生經亦云彌勒受決經見二秦錄彌勒成佛經弘始四年出第二譯與法護出者大同小異見二秦錄金剛般若經佛在舍衛國者見二秦錄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見別錄第二出與晉法護出者文少異菩提經一名文殊師利問菩提經一名伽耶頂經一名菩提無行經遺教經一名佛垂般涅槃略說誡經  十二因緣觀經菩薩訶色欲經雜譬喩經弘始七年十月出道略集須摩提菩薩經 文殊悔過經比丘應法行經長阿含中祐注入疑錄無思議光孩童菩薩經亦云不思議光菩薩所說經大方等頂王經第二出與法護譯大王經同文少異大金色孔雀王經在逍遙園幷結界場法悉備具莊嚴菩提心經第二出與護譯菩薩十地同本異出佛弟子化魔子偈頌經出大集太白魔王堅信經出大集 開化魔經魔業經 過魔法界經出大集佛問阿須輪大海有減經出長阿含魔王變身經東方善花世界佛座震動經陁羅尼法門六種動經佛迹見千輻輪相經佛齊化菩薩經往古生和佛國願行法典經佛謦咳徹十方經出大集過去無邊光淨佛土經佛變時會身經 無量樂佛土經王后爲蜣蜋經佛心摠持經與生經所出心摠持少異獼猴與婢共戲致變經水牛王經出生經 雀王經 兔王經出生經菩薩身爲鴿王經出六度經 佛昔爲鹿王經牧牛經 虛空藏菩薩問持經功德經觀世音經出新妙法蓮華經彌勒菩薩本願待時成佛經已上四十二經竝見別錄云什重譯燈指因緣經 觀普賢菩薩經睒本起經 觀佛三昧經 寶網經樂瓔珞莊嚴經請觀世音經已上七經見李廓錄云什譯思惟要略法經或無經字 持地經菩薩戒本 十誦比丘戒本第二出與曇摩特出者小異大智度論一百卷龍樹造弘始六年五月逍遙園出睿筆制序見二秦錄什云具翻千卷秦人識弱略之十分一般若經論集二十卷見吳錄十住毘婆沙一十二卷龍樹菩薩造成實論二十卷或十六卷弘始八年出曇略筆見二秦錄佛滅後八百餘年訶梨跋摩造睿講序大莊嚴論一十卷馬鳴菩薩造十住論一十卷龍樹造弘始年譯未訖卷末似六度集經見二秦錄中論八卷或四卷龍樹造弘始年出見二秦錄睿序百論二卷提婆菩薩造弘始六年出見二秦錄十二門論龍樹造見寶唱錄序睿公馬鳴菩薩傳龍樹菩薩傳提婆菩薩傳實相論什自著右九十八部合四百二十五卷晉安帝世天竺國三藏法師鳩摩羅什秦言童壽弘始三年冬到常安秦主姚興厚加禮遇乃請入西明閣及逍遙園別館安置勅令僧䂮集諸沙門八百餘人諮受什旨更出大品使什持梵本興自執舊經以相讎挍新文異舊義悉圓通衆心愜伏故二秦錄稱什所定者爲新大品卽知有舊明矣諸此例有二十餘部竝摽新部字在於題首後人年遠多省新字今竝悉無然後秦之世大盛宣譯卑萬乘之心尊三寶之教興旣虛襟崇仰佛法恒於大寺草堂之中供三千僧與什參定新舊諸經莫不精究洞其深旨有僧睿法師甚爲興知什所譯經睿竝參正昔竺法護出正法華受決品云天見人人見天什譯至言曰此語與西域義同但在言過睿應聲曰將非人天交接兩得相見乎什大喜曰實然故相開發皆此類也什又爲著實相論及注維什雅好大乘志存敷演嘗歎曰吾操筆著摩訶衍阿毘曇非迦旃延子比也今此秦地深識者寡折翮於此將何所論嘗聽秦僧道融講新法華乃嘆曰佛法之興其人也俄伏師子國婆羅門事在別傳云長阿含經二十二卷弘始十五年出佛念筆見二秦錄虛空藏經後反罽賓得此經寄與涼部諸僧見道慧宋齊錄曇無德律四十五卷秦言法藏此是人名卽四分律主今六十卷曇無德戒本上二律戒見晉世雜錄右四部合六十九卷晉安帝世罽賓三藏法師佛馱耶舍秦言覺明家世外道不信奉佛沙門從乞父怒打之父因遂攣問巫坐犯乃請所打沙門竭誠懺悔數日便瘳令耶舍剃落爲其弟子至年十五日誦經得二三萬言有羅漢乞食供之年十九諷誦大小乘經數百萬言頗以簡傲年及進戒莫爲臨壇乃從舅學五明世術至二十七方受具戒恒以讀誦披尋爲昏曉勤劬手不釋卷每思惟義尚不覺虛過良時其精專例此與羅什於沙勒國相見什待以師禮什後前至常安耶舍後來姑臧什令興請別立新省逍遙園四事供養竝不受至分衛一食而已舍爲人赤髭善毘婆沙人因號之奉什師爲大毘婆沙四事滿三間不以關心興爲貨造寺舍先嘗誦四分律疑其遺謬乃試誦羌籍藥可五萬言二日覆之不誤一字衆咸揖服弘始十二年譯四分等十五年解座興施耶舍萬匹悉不受沙門道含竺佛念二人筆受各施千匹已外名德五百沙門皆重䞋施後還西域不知所終般若無知論 不眞空論物不遷論 涅槃無名論右四部四卷晉安帝世京兆沙門釋僧肇作其行狀精理具如本傳二秦衆經錄右沙門釋僧睿撰睿魏郡人少出年二十二博通經論聽僧朗法師講放光屢有譏難朗謂其師僧賢曰睿比格難吾累思不能通謂賢賢弟子也後與羅什相遇參預翻譯又爲姚嵩所重興又賞歎後出成實命睿講之文迂義伏者皆釋滯懸會什歎曰吾傳譯値子眞無恨矣後常以西方爲任臨終合掌瑞光出云釋駮論右沙門道恒撰恒京兆人年九歲爲隱士張忠嗟曰此小兒有出人之相俗有輔政之功道有光顯佛恒少事後母以孝聞手自書繢供奉二十遊刃佛理學該內外羅什譯經竝助詳定有同學道雅有才力姚興以恒標二人有經國之量下書逼令罷道云云 恒摽答詔云云興又致書於什䂮什䂮又答之云云興後頻復下書境救免乃嘆曰古人有言益我貨者損我神生我名者殺我身緬迹人外故著論及百行箴云西秦乞伏氏傳譯佛經錄第八若夫乘時拯俗開道化生有國之歸宗華夷所同志有乞伏國仁者隴右鮮卑也代居苑川爲南單于前秦敗後接統創業都於子城號爲西秦尊事沙門時聖堅大德行化達彼國仁崇敬恩遇其禮彌隆旣播釋風因事陳譯相承五主四十四年爲夏赫連所滅夏又爲魏所呑一云仁弟乞伏乾歸稱王建號南涼太初元年當晉孝武太元十三年戊子之歲至太初十二年降於李曇經於九年乾歸子立稱元更始至暮未立二年當宋元嘉七年爲夏勃所擒其實合三十七年矣今摠會之所出經及失譯等如別所顯不繁摽列方等主虛空藏經八卷一云虛空藏所問經或五卷第二出與法賢譯羅摩伽同本見晉雜錄出大集演道俗業經第二出與支謙出小異後例一卷孛經第二出與吳 支謙異譯太子須大拏經於江陵寺出庾爽筆見始興寶唱錄應入晉世隨人附秦睒子經一孝睒經一菩薩睒經一佛說睒經一睒本經一孝子隱經凡六名第二出與羅什譯者小異見始興錄無涯際持法門經一名無際經見始興錄一名金光首女所問經除恐災患經第二出與魏世白延出小異見始興寶唱二錄婦人遇辜經見始興錄阿難問事佛吉凶經一名阿難分別經一分別經與弟子慢多耆域述經同本見始興錄上九經法上錄云出別錄菩薩所生地經一摩竭所問經見趙錄未知前後趙逐人附西秦見始興錄賢首經一名賢首夫人 經見始興錄僮迦葉解難經第二出與什譯迦葉經同庾爽筆見始興王宗寶唱支敏度四錄同載灌佛經與別譯摩訶剎頭經大同小異見始興錄七女本經第二出與支謙出太同小異亦名女本心明經羅伽摩經三卷入法界品見唐錄右一十五經合二十二卷晉孝武沙門聖堅於河南國爲乞伏乾歸譯或云堅公或云法堅未詳孰是故備列之依撿群錄一經江陵一經見趙錄十經見始興錄始興卽南錄或竺道祖晉世雜錄或支敏度都錄或王宗或寶唱勘諸錄名人似遊涉諸處隨處出經旣適無停所弗知附見何代世錄爲正今依上摠注入乞伏西秦世錄云胡本經四卷似是長安中出薩和薩王經阿多三昧經或作阿陁陁賢王經 颰陁悔過經沙彌羅經 方等決經 比丘二事經右八部合一十一卷竝是沙門僧祐三藏集錄釋道安所記關中異今還附入三秦之錄摠爲失譯代處云北涼沮渠氏傳譯佛經錄第九序曰沮渠蒙遜臨松盧水胡也代爲北匈奴左大沮渠卽官爲氏因藉前涼改業所基至晉安帝隆安五年歲辛丑自號北涼改元承乾至十二年從於姑臧改元玄始遇曇無懺法師翻譯大部弘扇佛教卽宋武之初運初遜奉懺欽重難倫元魏聞懺道術將延東謁遜懼懺爲魏設計或反西圖執固不許懺知遜情便辭西出求經又知業期將及詐爲行調累以終事旣爾果行遜忿之令刺客於路害懺古人諺曰知識相逢不吉則凶斯言可錄於後遜行虐己心愧其事白日見鬼以劍刺之遂崩二主四十三年爲魏所滅凡譯經道俗九人出三十二部二百六十六卷幷失譯經爲北涼之錄沮渠北涼沙門釋道龔二部一十 二卷經沙門釋法衆一部四 卷經沙門僧伽陁一部二卷經沙門曇無讖二十四部一百五 十一卷經戒壇文安陽侯沮渠京聲一部二卷禪法沙門佛陁跋陁一部六十卷論沙門釋智猛一部二十卷經沙門釋曇覺一部一十五卷經沙門釋道泰一部二卷經諸失譯經五部一十七 卷經佛名悲華經十卷見古錄似是先譯龔更刪改寶梁經二卷見竺道祖河西錄右二部合一十二卷晉安帝世門釋道龔於張掖爲河西王沮渠氏出大方等檀特陁羅尼經四卷亦云方等陁羅尼經右晉安帝世高昌郡沙門釋法衆於張掖爲河西王沮渠氏譯竺道祖晉世雜錄慧上菩薩問大善㩲經二卷第二出與法護譯善㩲方便經同見始興錄一名大善㩲經一名大乘方便經一名慧上菩薩經凡五名本竝同右晉安帝世西域沙門僧伽陁涼言饒善於張掖爲河西王沮渠氏見法上錄大般涅槃經四十卷玄始三年於姑臧出至十年訖此經凡三萬五千偈於涼減百萬言今止萬餘偈三分始一見道祖涼錄大方等大集經三十一卷第二出與漢出二十七卷什出三十卷廣略小殊或二十九或三十二由初未勘定卽抄寫致本不同今翻驗矣見道祖錄悲華經十卷第二出見道祖河西錄又古錄載此道龔已出雖歲不同等是涼世出疑前譯未善故有兩分異似再翻實菩薩地持經十卷或稱論亦八卷見道祖河西錄優婆塞戒經十卷永玄元年二月二十二日涼城內出道俗五百餘同聽沙門道泰筆或六卷大小不定菩薩戒經八卷方等大雲經六卷一方等大雲無想一大雲無想一大雲密藏於涼內苑寺出見睿二秦錄及李廓錄吳錄又載虛空藏菩薩經五卷第二出與西秦聖堅譯方等王虛空藏經同出大集佛本行經五卷第二出金光明經四卷第一出十八品 見道祖河西錄海龍王經四卷玄始七年出第二譯與法護出同本見道祖河西錄楞伽經四卷 信善經二卷或云善女經祐云疑無爲道經二卷世注爲疑勝鬘經一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經羅摩伽經一卷第二出與魏世安法賢出者三卷廣略異須眞天子經見吳錄又云 什公再譯居士請僧福田經見別錄祐云疑 文陁竭王經功德寶一光菩薩經腹中女聽經一名不莊挍女 決定罪福經菩薩戒本第二出 菩薩戒壇文一優婆塞壇文見唱錄右二十四部合一百五十一卷晉安帝世中天竺國三藏法師曇摩讖或云無懺涼言法豐齎大涅槃前分十卷幷菩薩戒等到姑臧止於傳舍慮失經本枕之而寢有人牽讖墮地驚覺謂盜如此三夕乃聞空中聲曰此如來解脫之藏何爲枕之讖乃慚悟別安高果有盜者夜數擧竟不能勝明旦讖持不以爲重盜謂聖人悉來拜謝沮渠蒙遜僭據涼土稱河西王聞讖德名呼與相見一面交禮遇甚厚仍請宣譯涼土英俊沙門慧嵩親承筆受西州道俗將數百人欣睹明能縱撗問難釋疑滯淸辯若流仍出寶坊諸經等六十餘萬言涅槃三分之一後首尾來往追尋涉歷八年凡經三度譯乃周訖雖四十卷所闕尚冀弘法王咸令滿足一睹圓教再隆化哉涼譯經竟宋 武永初二年禪法要解二卷右晉安帝世蒙遜從弟安陽侯京聲爲人博識涉獵書史因讖弘乃閱意內典奉持五禁守攝六請讖譯經卽能諷誦西至千闐從天竺三藏禪師佛馱斯那涼言佛將諮問道義斯那天才聰明誦半億偈經明了禪法故西方諸國號爲人中師子安陽從學禪要諸口誦梵本歸涼翻譯傳示流行後南度江事在別傳阿毘曇毘婆沙六十卷右佛滅度後六百餘年迦旃延羅漢弟子五百人造見寶唱錄宋文帝世西域沙門浮陁跋摩或云佛涼言覺鎧於涼城內閑預宮寺承和五年爲遜子虔譯沙門道泰筆受慧嵩道朗與名德僧三百餘人考正文義再周方訖凡一百軸沙門道挻製序屬魏滅涼法被焚失三十卷至今應有六十卷是而王宗錄云一百此據本耳今日見行有一百九卷當是近代後人分之般泥洹經二十卷右宋文帝世雍州沙門釋智猛遊歷西域尋訪異經從天竺國梵本來道經玉門於涼州譯元嘉十四年流至楊都與法顯同見宋齊錄賢愚經十五卷右宋文帝世涼州沙門釋曇覺一云慧覺與僧威德於于闐得此經梵本來當元嘉二十二年於高昌國天安寺譯見宋齊錄大忍辱經十卷 不退轉經四卷一名不退轉法輪金剛三昧經金輪王經賢劫五百佛名右五部合一十七卷是沙門僧祐新集釋道安涼土異經今還附入涼世目錄爲失譯源庶知時代顯譯有無卷部少多出之處所入大乘論二卷堅意菩薩撰右一部北涼世釋道泰譯見唐舊錄大唐內典錄卷第三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24)여기서는 조조(曹操)로부터 시작하는 조위(曹魏) 정권을 말한다.
  2. 2)고표는 인품이 높고 뛰어남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조위(曹魏) 정권을 무너뜨리고 진(晉)을 건국한 사마의(司馬懿)를 가리킨다.
  3. 3)조상(曹爽, ?-249)은 조위(曹魏)의 대신이다. 대장군 조진(曹真)의 아들로 자는 소백(昭伯)이다. 조위 폐제 때 황제의 친족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사마의를 견제하였는데 이후 사마의에 의해서 살해당한다.
  4. 4)동진 정권의 수립을 말한다.
  5. 5)이마 중앙의 뼈가 해 모양으로 돌출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왼쪽 이마를 가리키기도 한다.
  6. 6)서진(西晉) 말 흉노족 유총(劉聰)이 평양(平陽)으로 데려가는데, 이후 혼란 중에 살해된다.
  7. 7)민제(愍帝, 300~317)의 이름은 업(業, 鄴)이고 자(字)는 언기(彦旗)이다.
  8. 8)태강은 서진(西晉)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세 번째 연호이다.
  9. 9)말(秣)은 말이나 소가 먹는 꼴을 가리키는데 금릉의 의미를 격하시키려 한 것이다.
  10. 10)서진 말 회제(懷帝) 사마치(司馬熾)의 연호로 307~312년 사이이다.
  11. 11)여도(輿圖)는 여지도(輿地圖)의 준말인데 세계의 지도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변화하여 보통 천하나 세계의 영토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
  12. 12)흉노족 출신의 장수로서 서진을 무너뜨린 전조(前趙)의 군주이다.
  13. 13)동진(東晉) 혜원의 제자 도류(道流)가 『중경록』 4권을 찬술했는데, 나중에 『위세경록목(魏世經錄目)』ㆍ『오세경록목(吳世經錄目)』ㆍ『진세잡록(晉世雜錄)』ㆍ『하서경록목(河書經錄目)』 4부 각1권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이것은 도류가 완전히 끝을 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동학 축도조(竺道祖)에 의해 완성된다. 그래서 보통 『축도조록』이라고 한다. 여기서 나오는 『진세잡록』 또한 마찬가지다.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14. 14)주(周)나라 태왕(太王)의 큰아들로서 태백(泰白)이라고도 한다. 그는 왕위를 사양하고 막내인 공계(公季)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공자도 『논어』에서 이러한 덕을 찬양하였다고 한다.
  15. 15)『구록(舊錄)』은 전한(前漢) 유향(劉向)이 수집한 장서에 보이는 불교 경록이라고 하는데 근거는 희박하다.
  16. 16)축도조의 『오세경록목(吳世經錄目)』을 말한다.
  17. 17)양대(梁代) 장엄사(莊嚴寺) 사문 보창(寶唱)이 승소(僧紹)가 천감(天監) 14년(515)에 칙명(勅命)으로 찬술한 『화림불전중경목록(華林佛殿衆經目錄)』 4권의 기록에기초해서 천감 17년(518) 칙명을 받들어 찬술한 『양세중경목록(梁世衆經目錄)』 4권이다. 그 가운데 권1이 대승인데 이 아래 유역인다권(有譯人多卷), 무역인다권(無譯人多卷), 유역인일권(有譯人一卷), 무역인일권(無譯人一卷)의 네 가지로 나누었다. 권2는 소승인데 또한 앞서 대승에 의거해서 네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권3은 그 아래에 선이경록(先異經錄), 선경(禪經), 계율(戒律), 의경(疑經), 주경(注經), 수론(數論), 의기(義記)의 일곱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권4는 그 아래 수사공명(隨事共名), 비유(譬喩), 불명(佛名), 신주(神呪)의 다섯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총괄하면 20가지 분류인데 수록된 불전은 1, 433부 3, 741권이다.
  18. 18)동진(東晉) 초기 성제(成帝) 때 예장(豫章) 사문 지민도(支敏度)가 여러 경전들을 망라해서 교감하고 고금의 목록들을하나로 합쳐서 『경론도록(經論都錄)』과 『별록(別錄)』 각각 1권을 편찬했다. 앞의것은 동한 이래로 각 시대 역경의 총목록으로 동한(東漢)의 지참(支讖), 안세고(安世高), 서진(西晉)의 축법호, 지민도 등이 번역한 서적을 수록하였고, 아울러 동진대에 번역된 서적을 계속해서 보충한 것이고, 『별록』은 이러한 번역 서적들의 분류 목록이며 또한 그 내용이 사람들에게 크게 중시되지 않았던 것들을 편집했다.
  19. 19)동진(東晉) 초기 성제(成帝) 때 예장(豫章) 사문 지민도(支敏度)가 여러 경전들을 망라해서 교감하고 고금의 목록들을 하나로 합쳐서 『경론도록(經論都錄)』과 『별록(別錄)』 각각 1권을 편찬했다. 앞의 것은 동한 이래로 각 시대 역경의 총목록으로 동한(東漢)의 지참(支讖), 안세고(安世高), 서진(西晉)의 축법호, 지민도 등의 인물들이 번역한 서적을 수록하였고, 아울러 동진대에 번역된 서적을 계속해서 보충한 것이다. 『별록』은 이러한 번역 서적들의 분류목록이며 또한 그 내용이 사람들에게 크게 중시되지 않았던 것들을 편집했다.
  20. 20)『주사행한록』은 조위(曹魏) 사문 주사행이 찬술한 것이라고 이야기된다. 『역대삼보기』 권15에 보인다.
  21. 21)고려대장경에는 지겸(支謙)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송ㆍ원ㆍ명 판본에는 지참으로 되어 있다. 한(漢)대라고 한다면 지참이 옳다. 번역에서는 이것을 따랐다.
  22. 22)이것은 지루가참의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을 가리킨다.
  23. 23)고려장본에는 증(證) 자(字)가 없지만 다른 송ㆍ원ㆍ명본에서는 모두 존재한다. 그것에 근거해서 첨가했다.
  24. 24)시흥(始興:현재 광동성 韶關)에서 동한에서부터 남제(南齊) 때까지의 역본을 기록한 『시흥록』이 나왔다. 『남록(南錄)』이라고도 한다.
  25. 25)『출삼장기집』의 찬술자인 양나라 석승우의 제자 정도(正度)가 건초사(建初寺)에 소장하고 있던 경전을 기록한 목록을 것을 『석정도록(釋正度錄)』이라고 한다. 하지만 원명은 정확하지 않다.
  26. 26)『지민도록』이 찬록될 시기에 북방 16국 중 아마도 조대(趙代)에 편찬된 듯한 『조록(趙錄)』이 출현했다.(『역대삼보기』 권15에 보이며, 이미 일실됐다.) 이 목록은 최초로 석조(石趙, 後趙) 통치 지역에서 유행한 불전을 기록한 것이며, 후인들의 증익 때문에 현존하는 경록은 그것에 대한 전주(轉注)로 보인다. 기록된 사실은 진ㆍ송 시대에 이른다.
  27. 27)『대당내전록』의 주된 근거 자료는 수대(隋代)에 이루어진 비장방의 『역대삼보기』이다. 그래서 상당 부분 그것의 내용을 그대로 싣고 있는데, 특별한 언급이 없이 인용하는 것은 대부분 비장방의 기록이다.
  28. 28)경전이나 논서의 서(序)를 쓰는 것을 제(製)라고 한다. 원문에서는 술(述)과 제(製)를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29. 29)선진(先秦)에서 한초에 이르기까지 발생한 학파를 총칭하는 말이다.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종횡가(縱橫家), 법가(法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등을 가리킨다.
  30. 30)동(銅)과 노감석(爐甘石)을 합하여 정련한 쇠붙이.
  31. 31)이것은 신식(神識)ㆍ신명(神明)ㆍ식신(識神) 등으로 불리는데, 중국에 불교가 유입되고 나서 윤회의 주체와 육체와 대비되는 정신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의 육체가 사멸하더라도 정신은 남아서 그것이 내생까지 윤회한다고 하는 주장을 펼친다.
  32. 32)도안의 『종리중경목록(綜理衆經目錄)』과 축법호의 『중경목록(衆經目錄)』을 가리킨다.
  33. 33)『출삼장기집』 제4권의 「신집속찬실역잡경록(新集續撰失譯雜經錄)」을 말한다.
  34. 34)진(서진)의 수도였던 낙양(洛陽)을 말한다.
  35. 35)모두 낙수(洛水)의 지류들로서 낙양을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36. 36)『시경(詩經)』, 「소아(小雅)」, 「유월서(六月序)」에 나오는 말이다. 이때 중국을 사방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말하고 있다.
  37. 37)요진(姚秦) 홍시(弘始, 399~415) 말년에 부진(苻秦)과 요진(姚秦) 2대의 역경을 위주로 해서 북량(北涼) 등의 것을 아울러 『이진중경목록(二秦衆經目錄)』 1권(『역대삼보기』 권8에 보임)을 편성했다.
  38. 38)여기에서 『대품』은 『대반야경』을 말한다.
  39. 39)불경(佛經)을 요긴한 곳만 추려서 읽는 것을 말한다.
  40. 40)습착치가 도안을 찾아가 자신을 소개하면서 “나는 사해(四海)에 알려진 습착치요.” 하자, 도안이 “나는 하늘에 닿은彌天 석도안이다”라고 했다. 이것으로 습착치의교만한 마음을 다스렸다는 유명한 일화이다.
  41. 41)습착치가 배 열 꾸러미를 선물로 보냈는데 바로 대중들의 식사 시간이었다고 한다. 도안은 손수 배를 쪼개서 나누어 주었는데 배가 다 없어져도 사람들에게 고루 분배되었다고 한다.
  42. 42)극초가 심부름꾼을 시켜서 천 섬의 쌀을 보내고 여러 장의편지를 묶어 깊이 은근한 마음을 전하자 “쌀을 희사하시니 기대함이 있는 사람의 번거로움을 느끼게 됩니다”라고 했다.
  43. 43)『고승전』 제5권에 따르면 복야(僕射) 권익(權翼)이 “신이 듣기로는 천자의 법가(法駕)에는 시중이 함께 타서 주상을 모시게 되어 있습니다. 도안은 사람의 형상을 허물어 승려가 된 자인데 어떻게 천자 옆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44. 44)인용문은 도안이 지은 「마하발라야바라밀경초서(摩訶鉢羅若波羅蜜經抄序)」의 절반 이상을 옮겨 놓고 있는데, 여기서 ‘오실본삼불이(五失本三不易)’의 견해가 나온다. 이것은 후대 중국 역경의 하나의 원칙과도 같이 사용되었다.
  45. 45)범어 원전에는 장행체(長行體) 뒤에 중송(重頌)이 있는데 이것을 의설이라고 말한다.
  46. 46)중국의 운문에서 마지막으로 총결하는 운문 단어이다.
  47. 47)아라한에게 있는 신통력을 삼명(三明)이라고 하고, 부처님에게 있는 것을 삼달(三達)이라고 한다. 천안통(天眼通)ㆍ숙명통(宿命通)ㆍ누진통(漏盡通)이다.
  48. 48)옛날 제왕이 새로 나라를 세우면 세수(歲首)를 고쳐서 신력(新曆)을 공포하는데 이것을 말한다. 정월 초하루를 가리키기도 한다.
  49. 49)요장(姚萇)의 이름이 장(萇)이기 때문에 그것을 피휘(避諱)하여 장안(長安)의 장(長: 장구하다)을 비슷한 의미의 상(常:항상하다)으로 고친 것이다.
  50. 50)백합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
  51. 51)도승록(都僧錄), 또는 도록은 중국 후진(後秦) 때 불교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한 기관인 승록사(僧錄司)의 책무를 맡은 벼슬이다.
  52. 52)국가의 중앙권력이 불교를 관리하기 위해서 생긴 제도이다. 전국 승려의 대표격인 사문통을 중앙에서 선발하면이가 불교를 관장하게 된다.
  53. 53)북위시대 낙양의 거사인 이곽(李廓)이 영희(永熙) 연간(532~534)에 칙명을 받아 찬술한 『위세중경록목(魏世衆經錄目)』 1권을 말한다. 이 목록은 그 아래 대승경목록(大乘經目錄), 대승론목록(大乘論目錄), 대승경자주목록(大乘經子注目錄), 대승미역경론목록(大乘未譯經論目錄), 소승경률목록(小乘經律目錄), 소승론목록(小乘論目錄), 유목미득경목록(有目未得經目錄), 비진경목록(非眞經目錄), 비진론목록(非眞論目錄), 전비경우인망칭경목록(全非經愚人妄稱經目錄)의 열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수록한 진위 경ㆍ율ㆍ논은 모두 427부 2,053권이다.
  54. 54)중국에서는 만 대의 수레를 가질 수 있는 이는 천자밖에 없었다. 수레의 숫자로 그 신분을 나타내기도 했다.
  55. 55)남제(南齊) 장엄사(莊嚴寺) 사문 도혜(道慧)가 찬술했는데, 이 『송제록(宋齊錄)』 1권(『역대삼보기』 권15에 보인다.)은 동진 말년에서 남제(南齊) 초기까지의 역경을 기록한 것으로 유송(劉宋) 일대를 위주로 했다.
  56. 56)성명(聲明)ㆍ인명(因明)ㆍ교명(巧明:공예, 역수)ㆍ의방명(醫方明)ㆍ내명(內明:불교이론)을 가리킨다.
  57. 57)수행자가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네 가지 물품을 말한다. 음식ㆍ의복ㆍ와구ㆍ탕약을 가리킨다.
  58. 58)사문 왕종(王宗:『고승전』 권7에는 曇宗이라고 되어 있다.)이 남제(南齊) 무제(武帝)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찬술한 『중경목록』 2권(『역대삼보기』 권11에 보인다.)을 가리킨다. 제(齊) 이전의 각 시대의 역본을 통괄해서 기록한 것이다.
  59. 59)『시흥록』이 완성된 시흥은 현재 광동성 소관(韶關)이다. 그래서 『남록』이라고도 했다.
  60. 60)북제(北齊)의 소현통(昭玄統, 또한 沙門統이라고도 한다.)인 법상(法上)이 무평(武平), 연간(570~575)에 찬술한 『제세중경목록』 1권을 말한다. 전체 책이 잡장록, 수다라록, 비니록, 아비담록, 별록, 중경초록, 집록, 인작록 등의 여덟 가지 부류로 나뉘어 있다. 수록된 진위(眞僞) 경ㆍ율ㆍ논은 787부 2,333권이다.
  61. 61)『출삼장기집』 제3권에 나온다.
  62. 62)현재의 감숙성(甘肅省) 장액현(張掖縣)이다.
  63. 63)탁발(拓拔)씨가 세운 위(魏)를 조위(曹魏)와 구분하기 위해서 원위(元魏)라고 하는데, 이것은 탁발씨의 위왕조 효문제 때 한화(漢化) 정책을 펴면서 성씨를 원(元)씨로 고쳤기 때문이다.
  64. 64)『고승전』에 따르면 『열반경』 뒷부분을 구하려 했다고 한다.
  65. 65)생사윤회하면서 한 번 태어나서 가지는 기간을 말한다. 타고난 수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66. 428)66)고려대장경 대정장 모두 “영현 원년 永玄元年”이라 하였으나, 이는 “승현 원년 承玄元年”의 오기이므로 바로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