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大唐內典錄卷第四 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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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내전록 제4권


장안[京師] 서명사(西明寺)의 석씨(釋氏:道宣) 지음


1. 역대중경전역소종록 ④

송조(宋朝)ㆍ전제(前齊)ㆍ양조(梁朝)ㆍ후위(後魏)ㆍ후제(後齊)

10) 송조전역불경록(宋朝傳譯佛經錄)
불경(佛經)에서는 처음에 말하기를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자 공덕(功德)의 어머니이고, 지혜는 세속을 벗어나 해탈하는 터전이다”라고 했다. 믿음이 없으면 경쾌한 배[輕舟]에 오를 수 없고, 지혜가 없으면 깊은 미혹을 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생사의 대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6바라밀을 통하지 않으면 건널 수가 없다. 그래서 지혜 있는 사람은 6바라밀을 생사를 벗어나는 근본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배에 올라 크게 구제하여 이 도리를 환하게 드러내었으니, 오직 지혜 있는 자만 해낼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중국 땅에 소개된 이후로 세 번에 걸쳐 핍박을 당했는데, 늦게나마 남쪽으로 와서는 5대에 걸쳐서 널리 선양됐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해서 헤아려 보면 문명이 있는 시대에서는 믿음이나 지혜를 말하지 않더라도 자연히 드러나고, 무력과 용맹만을 주로 하는 국가에서는 인애(仁愛)나 지혜가 개발되지 않았으니,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진ㆍ송 양조에 그 문화가 탁월하고 불도를 크게 선양하여 그 종취(宗趣)를 볼 만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간략히 서술하여 발자취만을 드러내고자 한다.
송대의 기록이다. 유유(劉裕)의 자(字)는 덕여(德輿)이며, 팽성(彭城) 도향(都鄕) 사람이다. 처음 태어난 날에 신령한 빛이 방 안을 비추었다. 자라서 몸이 일곱 자 여섯 치나 되었다. 동진(東晉) 왕조로부터 선양을 받으니 국명을 송(宋)이라고 하고 그대로 건강(建康)에 도읍을 세웠다(420).
세 번째 군주 문제(文帝)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어떤 이가 상소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요즘 사원이나 보탑(寶塔)의 꾸밈이 너무 심하고 복락만을 추구하는 무리의 다툼이 날로 심해집니다.”
이에 문제가 시중(侍中)인 하상지(何尙之)에게 물었다.1)
“범태(范泰)와 사영운(謝靈運)은 모두 ‘육경(六經)은 세속을 구제하는 것이고 성령(性靈)의 진정한 요체이니, 반드시 불경(佛經)으로써 지남(指南)을 삼아야 한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참으로 현자의 바른 말이며, 진실로 곧은 말이 아니겠소. 만약 백성들이 모두 이런 불교의 가르침에 순응하여 교화된다면 짐은 가만히 팔짱을 끼고서도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다.”
하상지가 대답하였다.
“중조(中朝) 이전은 멀어서 다시 알기가 어렵습니다. 강남으로 이주한 이래로 왕도(王導)와 주의(周顗)은 정사를 돌보는 재상 가운데 으뜸이었고, 왕몽(王蒙)과 사상(謝尙)은 인륜(人倫)의 모범이었으며, 치초(郗超)ㆍ왕밀(王謐) 등에 대해서는 혹은 무리 가운데 매우 뛰어난 인물絶群, 혹은 독보적인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약술한 10여 인은 영웅ㆍ준걸이 아닌 이가 없었으니, 청신사(淸信士)가 이때는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혜원법사(慧遠法師)는 말하기를, ‘불교의 교화가 펼쳐지지 못하는 곳이 없다’라고 하였으니, 제 생각에 이 말은 이치의 깊은 곳에 꼭 들어맞습니다. 왜냐 하면 백가(百家)의 마을에서 열 사람이 오계(五戒)를 지니면 열 사람이 삼가고, 천 실(室)의 읍에서 백 명이 십선(十善)을 닦으면 백 명이 화목해집니다. 이런 풍속과 교육을 계속해서 세상에 두루 미치고 천만의 집에 이른다면 어진 사람이 백만에 이를 것입니다. 하나의 선행을 하면 악행 하나를 없애는 것이고, 악행 하나를 없애면 한 번의 형벌을 줄이는 것입니다. 한 가정에 부가되는 형벌을 하나 줄일 수 있다면, 국가로 보자면 만 번의 형벌을 줄이는 것입니다. 폐하의 말씀에 앉아서 태평성대를 이룬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일 겁니다. 그래서 불도징(佛圖澄)이 업(鄴) 땅에 들어오자 석호(石虎)2)의 살육이 반쯤은 줄었고, 승지(澠池)3)의 보탑이 빛을 발할 때 부건(符健)이 잔혹함을 멈추었고, 저거몽손(沮渠蒙遜)이 이를 악물고 주위에 친한 사람 없이 이리나 호랑이 같은 학정을 펴다가 말년에 불법을 깨달아서 선인(善人)이 되었습니다. 법을 체득한 도인[法建道人]은 만 명의 장정과 힘이 맞먹었으나, 하(河)ㆍ위(渭)의 난을 만나서 얼굴을 동여매고 죽음을 달게 받음으로써 모범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불교에 의한 교화에 힘입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이부랑(吏部郞) 양현보(羊玄保)가 앉아 있다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제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진(秦)ㆍ조(趙)는 강병(强兵)의 기술을 이야기했고, 손자(孫子)ㆍ오자(吳子)는 병탄의 계책을 극진히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불교에서)는 취할 게 없는 듯합니다.”
문제가 말하였다.
“이것(불교)은 국가 간 전쟁을 할 때 소용되는 도구가 아니니 진실로 경(卿:하상지)의 말대로다.”
하상지가 말하였다.
“세상을 피하여 숨는 것[隱逸]을 예우하면 전사가 게을러지고, 인애와 덕성만을 귀하게 여기면 병사의 기세가 쇠퇴하게 됩니다. 만약 손자ㆍ오자가 쓴 계책을 심중에 두고 뜻을 다른 나라를 병탄하는 것에 둔다면, 또한 요ㆍ순의 가르침에서도 취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어찌 유독 불교뿐이겠습니까?”
문제가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불문釋門에 경이 있는 것은 공자에게 계로(季路)4)가 있는 것과 같아 이른바 나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구나.”
황제가 중서랑(中書郞) 육징(陸澄)에게 시켜서 『속법론(續法論)』 100여 권을 짓게 했다. 불교의 이치를 찬술했는데, 폭넓고 여유가 있었다. 이런 것들을 기준해서 말한다면 지극하다고 할 만하다. 진리는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고 불법은 제왕에게 의탁하니, 송 왕조로부터 불교는 융성해졌고, 명승(名僧)ㆍ지사(智士)가 벼나 삼[麻]처럼 번창했고, 사찰[寶剎]과 불탑[金輪]이 대나무나 갈대처럼 빼곡했다. 송나라는 여덟 명의 군주가 서로 계승하여 59년간 통치하였다. 그동안 역경한 사람은 중국인과 서역인 승려와 속인 24명이었다. 경(經)ㆍ비니계본(毘尼戒本)ㆍ갈마(羯磨)ㆍ우바제사(優波提舍)ㆍ아비담(阿毘曇)ㆍ논(論)ㆍ전(傳)ㆍ녹(錄) 등 210부 496권을 번역했는데, 묶어서 송대(宋代) 건강(建康)의 목록으로 삼는다.

송조(宋朝) 사문 불타집(佛駄什)3부 36권, 율(律)ㆍ계(戒)ㆍ갈마(羯磨)
사문 석지엄(釋智嚴)14부 36권, 경
사문 석보운(釋寶雲)4부 15권, 경
사문 석혜엄(釋慧嚴)1부 36권, 경
사문 이섭바라(伊葉波羅)1부 10권, 논
사문 구나발마(求那跋摩)7부 38권, 경ㆍ논
사문 승가발마(僧伽跋摩)5부 27권, 논(論)ㆍ집(集)
사문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78부 161권, 경ㆍ집
사문 담마밀다(曇摩蜜多)10부 12권, 경
사문 강량야사(畺良耶舍)2부 2권, 경
사문 담무갈(曇無竭)2부 6권, 경
안양후(安陽侯) 저거경성(沮渠京聲)35부 36권, 경
사문 공덕직(功德直)2부 7권, 경
사문 석혜간(釋慧簡)25부 25권, 경
사문 석승거(釋僧璩)1부 2권, 작법(作法)
사문 석법영(釋法穎)3부 3권, 계법(戒法)
사문 축법권(竺法眷)6부 29권, 경
사문 석상공(釋翔公)1부 2권, 경
사문 석도엄(釋道嚴)2부 3권, 경
사문 석용공(釋勇公)4부 4권, 경
사문 석법해(釋法海)2부 2권, 경
사문 석선공(釋先公)1부 1권, 경
사문 석도엄(釋道儼)1부 2권, 논
사문 축도생(竺道生)7부 7권, 논

(1) 불타집(佛馱什)
미사색률(彌沙塞律) 34권『축도조록』에 보인다. 『송제록(宋齊錄)』ㆍ『별록(別錄)』을 살펴보면 24권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잘못된 듯하다.
미사색계본(彌沙塞戒本) 1권『축도조록』에 보인다.
미사색갈마(彌沙塞竭磨)『축도조록』에 보인다.

이상 3부 모두 36권은 폐제(廢帝) 형양왕(滎陽王) 때, 계빈국(罽賓國)의 삼장율사[三藏毘尼師] 불타집이 번역하였다. 그는 송(宋)나라 말로는 각수(覺壽)라고 하는데, 어려서 미사색부(彌沙塞部)를 수업 받았고, 율품(律品)을 정밀하게 공부했으며, 아울러 선요(禪要)에도 통달했다.
각수(覺壽)는 경평(景平) 원년(423) 7월에 양도(楊都)에 도착했다. 이보다 앞서 법현(法顯)이 사자국(師子國)에서 미사색율(彌沙塞律) 범본(梵本)을 구해서 돌아왔는데, 번역하기 전에 법현이 입적하였다. 경읍(京邑)의 여러 승려들이 불타집이 원래 이 미사색에 뛰어나다는 것을 듣고서 여러 의견을 모아서 그것을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 해 겨울 11월에 용광사(龍光寺)에 모여서 34권을 번역해 냈다. 불타집이 범본을 담당하고, 우전국(于闐國) 사문 지승(智勝)이 전어(傳語)하고, 용광사(龍光寺) 사문 축도생(竺道生)과 동안사(東安寺) 사문 혜엄(慧嚴) 등이 서로 필수하고 문장의 내용을 바로잡았다. 의동시중(儀同侍中)5) 낭야(瑯琊)의 왕연(王練)이 시주자가 되어 3년(425) 12월에 마무리 하였다. 그리고 대부에서 계(戒)의 중요한 것과 갈마(羯磨) 등의 문장을 가려 뽑아서 함께 세상에 유행시켰다.

(2) 석지엄(釋智嚴)
보요경(普曜經) 8권세 번째 번역이다. 촉(蜀)에서 번역한 『보요경』과 축법호(竺法護)가 번역한 것과는 동본이지만 문장이 다르다. 『송제록(宋齊錄)』 및 『승우록』, 혜교의 『고승전』에 보인다. 혹은 6권 또는 4권이다.
무진의보살경(無盡意菩薩經) 6권또한 『아차말경(阿差末經)』이라고도 한다. 『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생경(生經) 5권『별록』에 보인다.
광박엄정경(廣博嚴淨經) 4권원가(元嘉) 4년(427)에 번역했다. 일명 『광박엄정불퇴전경(廣博嚴淨不退轉經)』 혹은 『불퇴전법륜경(不退轉法輪經)』이라고도 한다. 축법호의 『아유월치차경(阿惟越致遮經)』과는 동본인데 문장이 다르다.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駱本業經) 2권
비라삼매경(毘羅三昧經) 2권거사(居士)가 선정에 드는 것을 밝혔는데, 일[事]이 『동록(東錄)』에 보인다. 승우는 의경(疑經)이라고 했다.
아나함경(阿那含經) 2권
사천왕경(四天王經)
선덕바라문문제바달다경(善德婆羅門問提婆達多經)
일음현정법경(一音顯正法經)혹은 『일음연정법경(一音演正法經)』이라고도 한다.
조복중생업경(調伏衆生業經)
선덕우바새경(善德優婆塞經)
법화삼매경(法華三昧經)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이상 14부 모두 36권은 문제(文帝) 원가(元嘉) 4년(427)에 양주(涼州) 사문 석지엄이 번역하였다. 그는 약관(弱冠)의 나이에 출가하여 사방을 유력하면서 폭넓게 공부를 하였다. 마침내 서역에서 위에서 열거한 경전의 범본(梵本)을 구하여 양도(揚都)에 도착했다. 지원사(枳園寺)에서 보운(寶雲)과 함께 번역했다. 지엄의 신덕(神德)은 『고승전(高僧傳)』에 모두 실려 있기 때문에 다시 헛되이 싣지는 않겠다.

(3) 석보운(釋寶雲)
부법장경(付法藏經) 6권『이곽록(李廓錄)』에 보인다.
불소행찬경(佛所行讚經) 5권육합산사(六合山寺)에서 번역했다. 『보창록(寶唱錄)』에 보인다. 일명 『불본행경(佛本行經)』이라고도 하며, 7권이라고도 한다. 혹 마명(馬鳴)이 지은 것이라고도 하는데, 『별록』에 보인다.
신무량수경(新無量壽經) 2권도량사(道장寺)에서 번역했다. 일곱 번째 번역이며 지겸(支謙)ㆍ강승개(康僧鎧)ㆍ백연(白延)ㆍ축법호(竺法護)ㆍ구마라집(鳩摩羅什)ㆍ축법력(竺法力)이 번역한 것과는 같지 않다. 『도혜송제록(道慧宋齊錄)』 및 『고승전』에 보인다.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2권법현이 가져 왔지만 번역하지 못했다. 축도조(竺道祖)의『진세잡록』에 보인다.

이상 4부 모두 15권은 문제(文帝) 때 양주(涼州) 사문 보운이 번역하였다. 그는 어려서 서방(西方)을 유력했으며, 범서(梵書)와 범어(梵語)에 능통하였는데, 천축(天竺) 여러 나라의 문자와 그 음과 뜻풀이 그 전부를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 다시 강남[江左]으로 돌아와 만년에 여러 경전들을 번역했는데, 대부분 보운 자신이 간정(刊定)했다. 중국어와 서역 말에 두루 통하였는데, 말과 소리가 매우 정확하여 대중들이 모두 감복하였다.
처음에 관중(關中)에는 축불념(竺佛念)이 번역에 매우 뛰어나서 부진(符秦)과 요진(姚秦) 2대에 홀로 그 이름을 날렸다. 불경의 문장을 이해시키는 데 으뜸으로 칭송됐다. 강남의 번역을 보면 범본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데 보운보다 뛰어난 이가 없었다. 처음에 지엄(智嚴)과 함께 번역했는데, 지엄이 입적하자 보운 혼자서 번역했다. 그래서 양이 많지 않다.

(4) 석혜엄(釋慧嚴)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36권『보창록』 및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담무참(曇無讖)이 진말(晉末) 고장(姑臧)에서 북량의 저거씨(沮渠氏)를 위해서 번역한 것이다. 본래는 40권인데, 말이 다소 거칠어서 잘 유포되지 못했다. 이 번역본이 송(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처음으로 건강(建康)에 도달하니, 당시 예주(豫州) 사문 범혜엄(范慧嚴)과 청하(淸河) 사문 최혜관(崔慧觀) 그리고 진군(陳郡) 처사(處士) 사영운(謝靈運) 등이 함께 담무참이 번역한 『열반경』은 품수(品數)가 성글고 간략하여 처음 배우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여겨서, 기존 『열반경』에 의거하여 그것에 품목을 첨가하고, 문장이 심하게 질박한 부분은 또한 수정을 가하여 36권으로 완결했다. 나머지 신통력이나 징험의 자세한 것은 『고승전』과 같다.

(5) 이섭바라(伊葉波羅)
잡아비담심(雜阿毘曇心) 11권

이상은 문제 때에 송나라 말로 자재(自在)라고 하는 외국 사문 이섭바라가 팽성(彭城)에서 북서주(北徐州) 자사(刺史) 왕중덕(王仲德)을 위해서 번역한 것이다. 「택품(擇品)」에 이르러 어려움이 많아서 그만두었다.

(6) 구나발마(求那跋摩)
보살선계경(菩薩善戒經) 20권기환사(祇桓寺)에서 두 번째로 번역했다. 지루가참이 번역한 8권본과는 조금 다르다. 『축도조록』 및 『고승전』에 보인다. 나중에 제자가 정림사(定林寺)에서 다시 2품을 번역하여 30권이 되었다.
잡아비담심(雜阿毘曇心) 13권처음 이섭바라가 번역할 때 「택품(擇品)」에서 멈추었는데 계속 번역하여 완결하였다. 『고승전』에 보인다.
사분니갈마(四分尼羯磨)원가(元嘉) 8년(431) 기환사에서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이다. 위(魏)의 담제(曇帝)가 번역한 것과 동본이다. 『고승전』ㆍ『별록』ㆍ『보창록』에 보인다.
우바새오계략론(優婆塞五戒略論)원가(元嘉) 8년 기환사에서 번역했다. 또한 『오계상론(五戒相論)』ㆍ『오계략론(五戒略論)』이라고 하기도 한다. 『고승전』ㆍ『보창록』에 보인다.
선신이십이계(善信二十二戒)또한 『이욕우바새우바이구행이십이계(離欲優婆塞優婆夷具行二十二戒)』ㆍ『삼귀우바새계(三歸優婆塞戒)』라고 하기도 한다. 『고승전』에 보인다.
사미위의(沙彌威儀)
경률분이기(經律分異記)

이상 7부 모두 38권은 계빈국의 삼장법사 구나발마의 번역이다. 구나발마는 송나라 말로 공덕개(功德鎧)라 하는데, 원가 연간에 건업(建業)에 이르니, 문제(文帝)가 불러들여 그간의 노고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질문했다.
“짐은 재계(齋戒)하여 살생을 하지 않으려 하였지만, 몸이 외물(外物)을 따르는지라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구나발마가 대답했다.
“제왕과 범부는 수행하는 것이 각각 다릅니다.”
문제는 팔걸이를 어루만지며 탄식했는데, 그 일은 『고승전』6)에 실려 있다. 그리고 기환사에 머물도록 하고 융숭하고 정중하게 공양을 바쳤다.
구나발마는 앞서 열거한 경론들을 번역했다. 안거를 하는 중에 어떤 사람이 꽃을 그의 자리에 깔았는데 더욱 싱싱해졌다. 구나발마는 나중에 기환사에서 입적하였는데 미리 36행의 게송을 유문(遺文)으로 지어 놓았다. 유문에서는 “이미 이과(二果)를 증득했다”고 했는데, 자세한 것은 『고승전』과 같다.

(7) 승가발마(僧伽跋摩)
잡아비담바사(雜阿毘曇婆沙) 14권원가(元嘉) 10년(433) 장간사(長干寺)에서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인데, 기존 번역본과는 약간 다르다.
마덕륵가비니(摩德勒伽毘尼) 10권일명 『살바다비니(薩婆多毘尼)』이다. 원가 12년에 말릉(秣陵:금릉) 평락사(平樂寺)에서 번역했다. 『도혜송제록(道慧宋齊錄)』에 보인다.
대용보살분별업보집(大勇菩薩分別業報集)어떤 곳에서는 약본(略本)이라고 했다. 『당록(唐錄)』에 보인다.
용수보살권발제왕요게(龍樹菩薩勸發諸王要偈)어떤 곳에서는 구나발마가 번역한 것이라고 했다. 『당록』에 보인다.
청성승욕문(請聖僧浴文)모두 『고승전』과 『별록』에 보인다.

이상 5부 27권은 천축의 삼장법사 승가발마의 번역이다. 승가발마는 송나라 말로는 중개(衆鎧)라고 하는데, 문제 때에 원가 10년(433) 건업(建業)에 도달했다. 그는 율장(律藏)에 뛰어났으며, 『잡심론(雜心論)』에 밝았다.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이 그의 계범(戒範)을 숭상하여 스승이 돼 주길 청했기 때문에 이름이 경읍에 널리 알려졌다. 도량사(道場寺)의 혜관(慧觀)은 승가발마가 『잡심론』을 깊이 이해하고 있으며, 그것을 암송하여 통달하였다고 생각하여, 앞서 삼장이 비록 다시 번역하였으나 아직 책으로 만들지 못했으므로 다시 번역을 청했다. 보운(寶雲)이 전어(傳語)하고 혜관 자신이 필수하여 1년 만에 마무리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마덕륵가비니』 등을 번역했다.

(8) 구나발타라(求那跋陁羅)
잡아함경(雜阿含經) 50권와관사(瓦官寺) 석법현(釋法顯)이 가져 온 것이다. 『도혜송제록』에 보인다.
중사분아비담(衆事分阿毘曇) 12권보리야사(菩提耶舍)와 함께 번역했다.
능가아발다라보경(楞伽阿跋多羅寶經) 4권원가 20년(443) 도량사에서 번역했다. 혜관(慧觀)이 필수했다. 『송제록』ㆍ『승우록』ㆍ『법상록』 등에 보인다.
앙굴마라경(央掘摩羅經) 4권도량사에서 번역했다. 『도혜송제록』과 『승우록』ㆍ『법상록』ㆍ『별록』 등에 보인다.
과거현재인과경(過去現在因果經) 4권형주(荊州) 신사(辛寺)에서 세 번째로 번역됐다. 한(漢)의 축대력(竺大力), 오(吳)의 지겸(支謙)이 번역한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ㆍ『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과는 동본이지만 약간 다르다. 『시흥록(始興錄)』ㆍ『승우록』ㆍ『이곽록』 등에 보인다.
석육십이견경(釋六十二見經) 4권『별록』에 보인다. 『승우록』에서는 1권이라고 했다.
대방광보협경(大方廣寶篋經) 3권『이곽록』에 보인다.
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 3권원가 29년(452) 정월 27일에 형주(荊州)에서 남초왕(南譙王) 유의선(劉義宣)을 위해서 번역했다. 『화부현재불명경(華敷現在佛名經)』이라고도 한다. 『시흥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보살행방편신통변화경(菩薩行方便神通變化經) 3권『이곽록』에 보인다.
정도삼매경(淨度三昧經) 3권『이곽록』에 보인다.
상속해탈료의경(相續解脫了義經) 2권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했다. 『도혜송제록』ㆍ『승우록』ㆍ『이곽록』ㆍ『법상록』 등 4록에 보인다.
대법고경(大法鼓經) 2권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했다. 『송제록』ㆍ『승우록』ㆍ『이곽록』ㆍ『별록』에 보인다.
아란야습선경(阿蘭若習禪經) 2권『이곽록』에 보인다.
승만사자후일승대방편경(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經) 1권주양군(舟陽郡)에서 번역했다. 보운(寶雲)이 전어하고 혜관이 필수했다. 『도혜송제록』ㆍ『승우록』ㆍ『이곽록』등에 보인다.
무량수경(無量壽經)효건(孝建) 연간(454~456)에 번역했다. 여덟 번째 번역으로 『도혜송제록』에 보인다. 강승개ㆍ지겸ㆍ백연(白延)ㆍ축법호ㆍ구마라집ㆍ축법력(竺法力)ㆍ보운(寶雲) 등이 번역한 것과는 대부분 동일하지만 자세하고 간략한[廣略] 차이가 난다.
빈두로돌사라위우타연왕설법경(賓頭盧突闍羅爲優陁延王說法經)
반니원경(般泥洹經)효건(孝建) 원년(454) 신사(辛寺)에서 번역했으며, 두 번째 번역이다. 혹 반(般)자가 없기도 하다. 법호가 번역한 『니원경(泥洹經)』과는 대동소이하다. 『도혜송제록』에 보인다.
팔길상경(八吉祥經)원가(元嘉) 29년(452)에 형주에서 사공(司空) 남초왕(南譙王)을 위해서 번역했는데, 두 번째 번역이다. 오(吳)의 지겸(支謙)이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승우록』과 『보창록』 등 두 목록에 보인다.
무우왕경(無憂王經)이후 열거하는 것은 1권이다. 형주(荊州) 신사(辛寺)에서 번역됐다. 『오록(吳錄)』에 보인다.
출무량지문경(出無量持門經)『오록』에 보인다.
삼소겁경(三小劫經)
식사경(食四經)『별록』에 보인다.
십이유경(十二遊經)두 번째 번역이다. 진(晉)의 가류타가(迦留陀伽)가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구록(舊錄)』에 보인다.
십이두타경(十二頭陀經)
삼인연경(三因緣經)
이처칠처삼관경(異處七處三觀經)두 번째 번역이다. 『잡아함경』에서 나왔다. 혹은 이처(異處)라는 글자가 없다.
십일상사념여래경(十一想思念如來經)혹은 『사유경(思惟經)』이라고도 한다.
십이품생사경(十二品生死經)
십보법삼통략경(十報法三統略經)
죄복보응경(罪福報應經)
육재팔계경(六齋八戒經)
십이두타경(十二頭陀經)
사인출현세간경(四人出現世間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사품학법경(四品學法經)
신도본경(申兜本經)혹은 신일경(申日經)이라고도 한다.
구생경(舅甥經)『생경』에서 나왔다.
나선경(那先經)이본(異本)을 번역한 것이다.
일난경(日難經)한편으로는 『월난경(越難經)』이라고도 한다.
군신경(君臣經)『생경』에서 나왔다.
비마숙경(毘摩肅經)
앵무경(鸚鵡經)『중아함경』에서 나왔다.
부채위우경(負債爲牛經)『생경』에서 나왔다.
나뢰경(那賴經)『생경』에서 나왔다.
이교사경(二僑士經)『출요경』에서 나왔다.
석마남본경(釋摩男本經)
아란나경(阿蘭那經)
노모경(老母經)
수제가경(樹提伽經)
아속달경(阿遬達經)
대의경(大意經)
목련항용왕경(目連降龍王經)
아난견기제곡무상경(阿難見伎啼哭無常經)
사리불등비구득신작증경(舍利弗等比丘得身作證經)
불왕위가섭병경(佛往慰迦葉病經)
청반특비구경(請般特比丘經)혹은 시(時)로 되어 있다.
불명아난예최승장자경(佛命阿難詣最勝長者經)
목련제보시망즉보경(目連弟布施望卽報經)
사리불반니원경(舍利弗般泥洹經)『생경』에서 나왔다.
마하가섭도빈모경(摩訶迦葉度貧母經)
아나율칠념장경(阿那律七念章經)
잡장경(雜藏經)
허공장보살경(虛空藏菩薩經)
보살가욕경(菩薩揀欲經)두 번째 번역이다.
아미타경(阿彌陀經)
제법무행경(諸法無行經)
빈자수뢰경(貧子須賴經)『이곽록』에 보인다.
무량의경(無量義經)
살룡제일국경(殺龍濟一國經)『육도집경』에서 나왔다.
무애제지법문경(無涯際持法門經)
타주착해중경(墮珠著海中經)『생경』에서 나왔다.
당래선택제악세계경(當來選擇諸惡世界經)
아난다목가니가리타경(阿難陀目佉尼呵離陀經)
불입감로조정의경(佛入甘露調正意經)『대십이문경(大十二門經)』에서 나왔다.
과거행단바라밀경(過去行檀波羅蜜經)
본행육바라밀경(本行六波羅蜜經)이상 주(注)를 달지 않은 것은 모두 『별록』에 보이는 것이다.
제일의오상략집(第一義五相略集) 1권동안사(東安寺)에서 번역했다. 『승우록』에 보인다.
삼장법사자술유(三藏法師自述喩) 1권『진세잡록』에 보인다.

이상 77부 모두 161권은 문제 때 중천축국의 삼장법사 구나발타라가 번역하였다. 구나발타라는 송나라 말로 공덕현(功德賢)이라고 하는데, 대승 불교학에 뛰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마하승(摩訶乘), 또는 마하연(摩訶衍)이라고 불렀다.
그는 원가 12년(435) 양도(揚都)에 도착했는데, 황제가 매우 존경하였다. 팽성왕(彭城王) 유의강(劉義康)과 남초왕(南譙王) 유의선(劉義宣)이 모두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칙령으로 기환사(祇桓寺)에 머물게 하였고, 이내 『잡아함경』 등을 번역하도록 요청하였다. 보운(寶雲)이 전어(傳語)하고, 혜관(慧觀)이 필수했다. 나중에 초왕이 형주(荊州)를 평정함에 따라 다시 신사(辛寺)에서 『무우왕경(無憂王經)』 등을 번역했는데, 모두 백여 권으로 대부분 제자 법용(法勇)이 전어(傳語)하였다. 초왕이 『화엄경』을 강의해주기를 청하였는데, 구나발타라는 스스로 아직 송나라 말에 능숙하지 못하다고 여기고서 아침저녁으로 관세음보살에게 간청하였다. 마침내 머리를 바꾸는 꿈을 꾸고 다음날 아침 강의를 했는데, 말솜씨가 흐르는 물과 같았다. “오직 한 가지가 있다”고 말한 것에서 기미를 깨달았다는 일화는 모두 『고승전』과 같다.7) 『승우록』에서는 공덕현(구나발타라)의 번역이 단지 73권뿐이라고 했지만, 여기서는 여러 경록을 살펴서 모두 열거했다.

(9) 담마밀다(曇摩蜜多)
선비요경(禪秘要經) 3권한편으로는 『선법요경(禪法要經)』이라고도 한다. 원가 18년(441) 기환사(祇桓寺)에서 번역했다. 『승우록』에 보인다.
오문선경요용법(五門禪經要用法)『승우록』과 『보창록』에 보인다.
관보현보살법경(觀普賢菩薩法經)『심공덕경(深功德經)』에서 나왔다. 일명 『보현관경(普賢觀經)』이라고도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허공장관경(虛空藏觀經)일명 『관허공장보살경(觀虛空藏菩薩經)』이라고도 하고, 어떤 본에는 관(觀)자가 없다. 『도혜송제록』ㆍ『승우록』에 보인다.
제법용왕경(諸法勇王經)『이곽록』에 보인다.
불승도리천위모설법경(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
전여신경(轉女身經)
상액경(象腋經)
욱가장자소문경(郁伽長者所問經)
허공장보살신주경(虛空藏菩薩神呪經)이상 6경은 모두 『이곽록』과 『위세록』에 보인다.

이상 10부 12권은 문제 때에 계빈국의 삼장선사(三藏禪師) 담마밀다가 번역하였다. 담마밀다는 송나라 말로 법수(法秀)라고 하는데, 태어나면서 눈썹이 붙어 있었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매우 지혜로웠다. 항상 선신(善神)이 모습을 감추고 은밀히 그를 보호했다. 매번 국경에 이르게 되면 선신이 반드시 꿈에 의탁해서 그 나라 왕에게 그가 올 것을 알렸다. 나라를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여러 곳을 다니면서 교화할 것에 뜻을 두었다. 성품을 항상 청정하게 닦았으며 명예나 이익에 구속되지 않았다. 처음 돈황(燉煌)에 도착해서 곧바로 넓은 땅에 선각(禪閣)을 건립했다. 벚나무 천 그루를 심었고, 정원 백 이랑을 조성했다. 수행하는 대중들은 매우 많았고 몰려오는 이가 구름과도 같았다.
원가(元嘉) 초에 건업(建業)에 이르러서 중사(中寺)에 머물렀다. 만년에는 기환사에 머물면서 선경(禪經)과 신주(神呪)를 번역했다. 아울러 가비라신왕(迦毘羅神王) 형상을 그리는 법을 전했는데, 지금에 이르도록 이것을 모범으로 삼고 있다.

(10) 강량야사(畺良耶舍)
관약왕약상이보살경(觀藥王藥上二菩薩經)
무량수관경(無量壽觀經)이상 2경은 모두 『도혜송제록』과 『고승전』에 보인다.

이상은 문제 때 서역 사문 강량야사가 번역하였다. 강량야사는 송나라 말로 시칭(時稱)이라고 하는데, 성격이 강직하고 욕심이 적었다. 삼장학(三藏學)에 뛰어났으며 암송하여 아는 것이 많았으며 선사(禪思)에는 더욱 힘을 썼다. 원가 연간 초에 경읍(京邑)에 도달했는데, 황제가 매우 칭찬하였다. 종산(鍾山)의 도림정사(道林精舍)에 머물렀다. 위의 2경은 장애를 없애는 신비한 방법이고 정토에 나는 훌륭한 업인(業因)이라고 생각하여 항상 수지 독송하였는데, 사문 승함(僧含)이 번역하기를 간청하였다. 승함이 필수했다.

(11) 담무갈(曇無竭)
관세음보살수기경(觀世音菩薩受記經)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의 번역과는 약간 다르다.
외국전(外國傳) 5권담무갈 자신이 서역을 여행하면서 겪은 일들을 직접 기록한 것이다.

이상 2부 6권은 무제(武帝) 영초(永初) 원년(420)에 황룡국(黃龍國)8)의 사문 담무갈이 번역하였다. 담무갈은 송나라 말로 법용(法勇)이라 하는데, 그는 뜻을 같이하는 이들을 모아 석승맹(釋僧猛) 등 25인과 함께 서역 여행을 떠났다. 20년 동안 자신 외에는 모두 죽고, 담무갈만이 다시 계빈국으로 돌아왔다. 앞서 열거한 경전의 범본을 베껴 원가 말년에 강남[江左]에 도달했다. 곧바로 양도(揚都)에서 스스로 번역했다. 『왕종록(王宗錄)』ㆍ『승우록』ㆍ『혜교록(慧皎錄)』ㆍ『이곽록』ㆍ『법상록』 등 경록에 보인다.

(12) 저거경성(沮渠京聲)
치선병비요법경(治禪病秘要法經) 2권효건(孝建) 2년(455) 죽원사(竹園寺)에서 번역했다. 혹은 경(經)자가 없기도 하다. 『축도조록』ㆍ『승우록』ㆍ『보창록』 등에 보인다.
정반왕반열반경(淨飯王般涅槃經)두 번째 번역이다.
팔관재경(八關齋經)이출본(異出本)이다.
보명왕경(普明王經)
불대승대경(佛大僧大經)이상 세 경은 경 이름만 보인다.
생사변식경(生死變識經)
분화단왕경(分惒檀王經)
장자음열경(長者音悅經)
현자율의경(賢者律儀經)일명 『위의경(威儀經)』이라고도 한다.
진학경(進學經)
무바새오계경(優婆塞五戒經)일명 『오상경(五相經)』이라고도 한다.
사기경(邪祇經)
마달경(摩達經)
오백범지경(五百梵志經)
전타월경(栴陀越經)
오반복대의경(五反覆大義經)
가섭금계경(迦葉禁戒經)
제자사복생경(弟子死復生經)
제자사불길흉경(弟子事佛吉凶經)
오고장구경(五苦章句經)
석종문우바새경(釋種問優婆塞經)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중음경(中陰經)
마이비구경(麽夷比丘經)
불모반니원경(佛母般泥洹經)효건(孝建) 2년(455) 종산(鐘山) 정림사(定林寺)에서 번역했다. 『승우록』에 보인다. 또한 『대애도경(大愛道經)』이라고도 한다.
범마황경(梵摩皇經)
우바새오법경(優婆塞五法經)
오공포세경(五恐怖世經)
말라왕경(末羅王經)
관미륵보살상생도솔천경(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도혜송제록』과 『출삼장기집』에 보인다.
관세음관경(觀世音觀經)
간왕경(諫王經)
청신사아이선경(淸信士阿夷扇經)일명 『아이선지부자경(阿夷扇持父子經)』이라고도 한다.
제자만위기역술경(弟子慢爲耆域述經)일명 『제자위기역술만경(弟子爲耆域述慢經)』혹은 『명제자희탄경(明弟子戱誕經)』이라고도 한다. 위에 주를 달지 않은 것은 모두 『별록』에서 나온 것이다.

이상 35부 모두 36권은 효무제 때 북량(北涼)의 저거몽손(沮渠蒙遜)의 사촌 동생인 하서왕(河西王) 안양후(安陽侯) 저거경성(沮渠京聲)의 번역이다. 때마침 저거경성은 북량의 운명이 다해서 원위(元魏)에게 망하자 몰래 도망하여 건강(建康)으로 내려왔다. 그는 뜻을 감추고 신분을 낮추었으며, 세상 사람들과는 교제하지 않았다. 항상 사찰에서 노닐면서 거사의 신분으로 자신을 낮추고는 처자식과의 인연을 끊고 명리를 탐하지 않았으며, 불법의 도반들과 어울리면서 불교를 선양했다. 그래서 승려들이나 속인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였다.
위에서 열거한 여러 경전은 이미 오랫동안 암송하고 익혀온 것이라서 붓을 멈출 때까지 한 번도 막힘이 없었다. 단양(丹陽)의 윤맹의(尹孟顗)가 이것을 훌륭하게 여겨 후하게 상을 내렸다는 사실이 『고승전』에 보인다.

(13) 공덕직(功德直)
보살염불삼매경(菩薩念佛三昧經) 6권혹은 『염불삼매경(念佛三昧經)』이라고도 한다. 『도혜송제록』에 보인다.
무량문파마다라니경(無量門破魔陀羅尼經)혹은 『무량문경(無量門經)』이라 한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 2부 7권은 효무제 때 서역의 사문 공덕직이 대명(大明) 6년(462)에 형주(荊州)에서 사문 석현창(釋玄暢)을 위해서 번역했다. 석현창이 문장의 의미를 바로잡으니 글의 뜻이 매끄럽고 엄밀했다. 그는 손을 펴면 향기가 났고 손바닥 안에서는 물이 흘러 나왔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나중에 성도(成都)로 가서 대석사(大石寺)에 머물렀는데, 바로 아육왕탑(阿育王塔)이 있던 곳이다. 손으로 직접 금강밀적(金剛密迹) 등 16신장상을 조성하였는데 지금까지 전해진다.

(14) 석혜간(釋慧簡)
약사유리광경(藥師琉璃光經)대명(大明) 원년(457)에 번역했다. 일명 『발제과죄생사득도경(拔除過罪生死得度經)』ㆍ『관정경(灌頂經)』이라고도 한다. 『대관정경(大灌頂經)』에서 나왔다. 『승우록』에서는 의경(疑經)으로 보았고 비장방(費長房)은 바라문경이라고 교감하였다. 지금 여기에 범본(梵本)이 있는데, 진언[神言]이 약간 다를 뿐이다.
상인구재경(商人求財經)
승왕오천사경(僧王五天使經)승(僧)자가 의심스럽다.
선생왕자경(善生王子經)『육향배경(六向拜經)』의 이출본(異出本)이다.
해태경자경(懈怠耕者經)『구록(舊錄)』에서는 『해태경견경(懈怠耕見經)』이라고 했다.
석가필죄경(釋迦畢罪經)어떤 본에서는 가(家)자로 되어 있다. 『생경』에서 나왔다.
빈궁로공경(貧窮老公經)혹은 『빈노경(貧老經)』이라고도 한다.
살신제가경(殺身濟賈經)『육도집경』에서 나왔다.
사위성중인상자발광경(舍衛城中人喪子發狂經)『아함경』에서 나왔다.
비유경(譬喩經)
청빈두로법경(請賓頭盧法經)
아난견수광서경(阿難見水光瑞經)일명 『수광경(水光經)』이라고도 한다.
주원경(呪願經)
구담미기과경(瞿曇彌記果經)
학인난의경(學人亂意經)일명 『모자작비구비구니난의경(母子作比丘比丘尼亂意經)』이라고도 한다. 『증일아함경』에서 나왔다.
절위사문경(竊爲沙門經)
불모반니원경(佛母般泥洹經)안양후(安陽侯)가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장자자육과출가경(長者子六過出家經)『출요경(出曜經)』에서 나왔다.
엽사사가학도사경(獵師捨家學道事經)『출요경』에서 나왔다.
구담미경(瞿曇彌經)
전사마포지방불사경(栴闍摩暴志謗佛事經)『출요경』에서 나왔다.
이로남자견불출가득도경(二老男子見佛出家得道經)
진위사문경(眞僞沙門經)혹은 『진위경(眞僞經)』이라고도 한다.
불열반후제비구경(佛涅般後諸比丘經)
대력토출가득도경(大力土出家得道經)일명 『역사발타경(力士跋陁經)』이라고도 한다. 『잡아함경』에서 나왔다. 여기까지 주가 없는 것은 모두 『별록』에 보이는 것이다.

이상 25부 25권은 효무제(孝武帝) 때 사문 석혜간이 녹야사(鹿野寺)에서 번역했다.

(15) 석승거(釋僧璩)
십송승니요사갈마(十誦僧尼要事羯磨) 2권

이상은 폐제(廢帝) 대명(大明) 7년(463) 율사(律師) 석승거가 양도(揚都) 중흥사(中興寺)에서 율(律)에 의거해서 찬출(撰出)했다. 또한 줄여 『약요갈마법(略要羯磨法)』이라고도 한다. 승우의 『출삼장기집』에 보인다.

(16) 석법영(釋法穎)
십송률비구계본(十誦律比丘戒本)대명(大明) 연간(457~464)에 번역했다.
십송률비구니계본(十誦律比丘尼戒本)태시(泰始)9) 연간(465~471)에 번역했다.
십송률갈마잡사(十誦律羯磨雜事)『십송률갈마잡사병요용(十誦律羯磨雜事竝要用)』이라고도 한다. 태시 연간에 번역했다.

이상 3경 3권은 명황제(明皇帝) 때 율사 석법영이 양도(揚都) 장간사(長干寺)에서 율(律)에 의거해서 번역했다. 승우의 『출삼장기집』과 『보창록』에 보인다.

(17) 축법권(竺法眷)
무진의경(無盡意經) 10권
해의경(海意經) 7권
여래은지부사의경(如來恩智不思議經) 5권
보정경(寶頂經) 5권
아술달보살경(阿述達菩薩經)태시(泰始) 연간(465~471)에 광주(廣州)에서 번역했으며, 세 번째 번역이다. 진(晉)나라 축법호가 두 번째 번역한 것과는 대부분 동일하다.
삼밀저야경(三密底耶經)또한 『현인용률경(賢人用律經)』이라고도 한다.

이상 6부 29권은 명황제 때 천축의 사문 축법권이 광주에서 번역했다. 『시흥록』ㆍ승우의 『출삼장기집』ㆍ『보창록』 등 세 경록에 보인다.

(18) 석상공(釋翔公)
유수보살무상청정분위경(濡首菩薩無上淸淨分衛經) 2권일명 『결료제법여환삼매경(決了諸法如幻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은 송나라 때 번역한 것이지만 연대가 드러나지 않았다. 어느 임금 때인지도 알 수 없다. 여러 경록에서는 단지 “사문 상공(翔公)이 남해군(南海郡)에서 번역했다”라고만 주를 달고 있다. 『도안록』ㆍ『시흥록』ㆍ『승우록』 등에 보인다.

(19) 석도엄(釋道嚴)
영락본업경(瓔珞本業經) 2권
불장대방등경(佛藏大方等經)혹은 『문명현경(問明顯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은 송나라 때 번역한 것이지만 연대가 드러나지 않고 어느 임금 때인지도 알 수 없다. 여러 경록에서는 단지 사문 석도엄이 번역했다고만 한다. 『시흥록』과 『법상록』에 모두 실려 있다.

(20) 석용공(釋勇公)
공정삼매경(空淨三昧經)또한 『공정대감응삼매경(空淨大感應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차닉경(車匿經)혹은 『차닉본말경(車匿本末經)』이라고 한다.
권진학도경(勸進學道經)양리(梁吏)와 함께 번역했다. 또한 『권진경(勸進經)』이라고도 한다.
범녀수의경(梵女首意經)일명 『수의녀경(首意女經)』이라고도 한다.

이상 4부는 송나라 때 번역한 것이지만 연대는 드러나지 않고 어느 임금 때인지도 알 수 없다. 여러 경록에서는 단지 사문 석용공이 번역했다고만 했다. 『시흥록』ㆍ『조록(趙錄)』ㆍ『법상록』에 보인다.

(21) 석법해(釋法海)
낙영락장엄방편경(樂瓔珞莊嚴方便經)일명 『대승영락장엄경(大乘瓔珞莊嚴經)』ㆍ『전여신보살경(轉女身菩薩經)』이라고도 한다. 축법호의 『순권방편경(順權方便經)』과는 동본(同本)이다.
적조음소문경(寂調音所問經)일명 『여래소설청정조복경(如來所說淸淨調伏經)』이라고도 한다. 축법호가 번역한 『문수행률경(文殊行律經)』과는 동본이다.

이상 2권은 송나라 때 번역한 것이지만 연대는 드러나지 않고 어느 임금 때인지도 알 수 없다. 여러 경록에서는 단지 사문 석법해가 번역했다고만 주를 달고 있다. 『시흥록』ㆍ『법상록』에 보인다.

(22) 석선공(釋先公)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일명 『문수사리보살십사행경(文殊師利菩薩十事行經)』ㆍ『건혜삼매경(建慧三昧經)』이라고도 한다.

이상 앞과 같이 연대나 임금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여러 경록에서는 사문 석선공이 번역했다고만 주를 달고 있다. 『조록(趙錄)』에 보이며, 『법상록』에도 실려 있다.

(23) 석도엄(釋道儼)
결정사부비니론(決正四部毘尼論) 2권
이상 승명(昇明) 원년 사문 석도엄이 여러 율(律)에 의거해서 찬출한 것이다.

(24) 축도생(竺道生)
선불수보론(善不受報論)
불무정토론(佛無淨土論)
응유연론(應有緣論)
돈오성불론(頓悟成佛論)
불성당유론(佛性當有論)
법신무색론(法身無色論)
이제론(二諦論)

이상은 7부는 송나라 초에 용광사(龍光寺)의 사문 축도생의 번역이다. 그의 사고력은 하늘을 내달렸고 지혜가 뛰어나 따로 스승을 찾지 않았다. 불성이 모든 유정 중생들에게 통하는 것임을 미루어 알았고, 성명(性命)이 법좌(法座)에 다함을 살폈다.10) 저술하여 교화를 열었으니 두루 한 것이 본기(本紀)와 같다.

11) 전제조전역불경록(前齊朝傳譯佛經錄)
제(齊) 왕조는 송(宋)을 이어서 선양을 통했기 때문에 순조로웠다. 도속(道俗)을 통솔하는데도 한 번의 소리에 백성들이 일제히 복종하였다. 그래서 자세하게 기술하지는 않겠다. 남제(南齊)의 고제(高帝) 소도성(蕭道成, 427~482)은 임기(臨沂) 사람이다. 송(宋)의 여업(餘業) 때문에 건강(建康)에 도읍을 했다.
건원(建元) 연간(479~482)에 안성(安成)의 들녘에 불이 나서 골짜기나 연못까지 다 타버렸다. 다만 몇 길쯤 되는 지초(地草)만이 유독 타지 않았다. 가서 살폈는데, 그 가운데서 금상(金像) 하나를 얻었다. 이미 신령스런 조짐을 감응하자 성화(聖化:불교)가 다시 융성했다. 황제는 “내가 10년 동안 천하를 다스린다면 황금의 가치를 토지의 가치와 같게 하겠다”고 했으나, 애석하게도 4년 만에 붕어(崩御)했다. 아들 적(蹟)은 자(字)가 선원(宣遠)이었는데, 그가 보위를 잇자 온 세상이 평안해졌다.
경릉(竟陵)의 문선왕(文宣王) 소자량(蕭子良)은 황제의 둘째 아들로 정치를 보좌하였다. 사도(司徒)의 지위에 있으면서 변고를 바로잡고 혼란을 다스렸으며, 경박한 풍속을 누르고 불교를 널리 선양했다. 그가 지은 서문이나 글들이 많았으며 불교를 홍포하고 보호하는 아름다움을 유독 그에게서 볼만했다. 널리 인재를 찾고 불교의 심오한 이치를 탐구했다. 『정주자(淨住子)』 20권과 『불사법전승록(佛史法傳僧錄)』 10권을 저술했는데 여러 경전을 가려서 뽑으면서 보태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여 두루 미쳤다.
남제는 일곱 임금 23년간 존속하였다. 전역(傳譯) 도속(道俗) 20명이 번역한 경(經)ㆍ율(律)ㆍ전(傳) 등 47부 모두 346권이다. 이를 제(齊) 왕조의 목록으로 삼는다.

사문 담마가타야사(曇摩伽陀耶舍)1부 1권, 경(經)
사문 마하승(摩訶乘)2부 2권, 경ㆍ율(律)
사문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1부 18권, 율
사문 석법의(釋法意)2부 2권, 경
사문 구나비지(求那毘地)3부 12권, 경
사문 석법도(釋法度)2부 2권, 경ㆍ율
사문 석법원(釋法願)2부 2권, 경
사문 석왕종(釋王宗)2부 7권, 경ㆍ목록
사문 석담경(釋曇景)2부 4권, 경
사문 석법니(釋法尼)1부 2권, 경
사문 석도정(釋道正)1부 1권, 경
사문 석도비(釋道備)5부 5권, 경ㆍ율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17부 259권, 경초(經抄)
상시(常侍) 유힐(庾頡)1부 1권, 경
사문 석초도(釋超度)1부 7권, 율례(律例)
사문 석법화(釋法化)1부 1권, 경
사문 석혜기(釋慧基)1부 1권, 주경(注經)
사문 석법원(釋法瑗)1부 3권, 주경(注經)
문선왕(文宣王)의 기실(記室)11) 왕건(王巾)1부 10권, 승사(僧史)
형주(荊州) 은사(隱士) 유규(劉虬)2부 11권, 주경

(1) 담마가타야사(曇摩伽陀耶舍)
제무량의경(齊無量義經)『승우록』ㆍ『법상록(法上錄)』 등에 보인다.

이상 1경은 고제(高帝) 때 건원(建元) 2년(480) 제(齊)나라 말로는 법생칭(法生稱)이라고 하는 천축 사문 담마가타야사가 광주(廣州) 조정사(朝亭寺)에서 손수 번역했다. 전어(傳語)인은 사문 혜표(慧表)이다. 영명(永明) 3년(485)에 양도(揚都)에 가지고 와서 완결 짓고 유포시켰다. 형주(荊州) 은사(隱士) 유규(劉虯)가 무당산(武當山)에서 출경의 서문을 달았다.

(2) 마하승(摩訶乘)
오백본생경(五百本生經)『출삼장기집』에 보인다.
타비리율(他毘利律)타비리(他毘利)는 제나라 말로 숙덕(宿德)이다. 『승우록』에 보인다.

이상 2부는 무제(武帝) 때 외국 사문 마하승이 광주에서 번역했다.

(3) 승가발타라(僧伽跋陀羅)
선견비바사율(善見毘婆沙律) 18권『도혜송제록』과 승우의 『출삼장기집』에 보인다.

이상 1부 18권은 무제 때 제나라 말로 승현(僧賢)이라고 하는 외국 사문인 승가발타라가 번역하였다. 『사자상전(師資相傳)』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처님 열반 후 우바리(優波離)가 율장을 결집하고 나서 그 해 7월 15일에 자자(自恣)12)를 마쳤다. 향과 꽃으로 율장에 공양을 하고 곧 율장의 앞 부분에 점 하나를 찍었고, 해마다 이와 같이 하였다. 우바리가 열반에 들려고 할 때 제자 타사구(陀寫俱)에게 부촉하였다. 타사구가 열반에 들려 할 때 제자 수구(須俱)에게 부촉했고, 수구가 열반에 들려 할 때 제자 실가바(悉伽婆)에게 부촉했다. 실가바가 열반에 들려 할 때 제자 목건련자제수(目犍連子帝須)에게 부촉했고, 목건련자제수가 열반에 들려 할 때 제자 전타발사(旃陀跋闍)에게 부촉했다. 이와 같이 스승이 제자에게 부촉하면서 지금 삼장법사까지 이르렀다. 삼장법사가 율장(律藏)을 가지고 광주에 도착했다. 배에 올라서 다시 돌아갈 때 율장을 제자 승가발타라에게 부촉했다.”
승가발타라는 영명(永明) 6년(488)에 사문 승의(僧猗)와 함께 광주 죽림사(竹林寺)에서 이 『선견비바사(善見毘婆沙)』를 번역했다. 그래서 함께 안거를 하고 영명 7년 경오(489) 7월 중순에 자자(自恣)를 마쳤다. 먼저 법사들과 같이 꽃과 향으로 율장에 공양함으로써 끝냈다. 그리고 점을 하나 찍었는데, 그 해까지 계산해 보면 975개의 점이 있었다. 점 하나가 바로 1년이었다.
조백휴(趙伯休)는 양(梁) 대동(大同) 원년(535) 여산(鏑山)에서 고행율사(苦行律師) 홍도(弘度)를 만나서 부처님 열반 후 여러 성현들이 점을 찍었다는 이런 기록을 보았는데, 연월은 제(齊) 영명 7년(489)에서 끝나 있었다. 조백휴가 홍도에게 묻기를, “영명 7년 이후로는 어찌하여 다시 점이 보이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홍도는 “그 이전은 모두 도를 체득한 성인이었지만 빈도(貧道)는 범부인지라 단지 받들고 정례할 뿐 감히 점을 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조백휴는 이 구점(舊點)에서 양(梁) 대동(大同) 9년 계해년(543)까지를 합치면 1,028년임을 알았다. 비장방(費長房)은 조백휴가 추산한 것을 근거하고 대동 9년으로부터 개황(開皇) 17년 정사년(597)까지 합쳐 1,082년임을 알았다. 만약 그렇다면 여래께서 열반 하신 후 비로소 천년이 지난 것이다. 성인이신 여래와 거리가 더욱 멀어지니 한스러울 뿐이다. 함께 정진하여 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을 선양하기를 바랄 뿐이다.

(4) 석법의(釋法意)
관세음참회제죄주경(觀世音懺悔除罪呪經)영명(永明) 8년(490) 12월에 번역했다. 또한 『관세음소설행법경(觀世音所說行法經)』이라고도 한다. 『보창록』ㆍ『출삼장기집』에 보인다.
묘법연화경제바달다품(妙法蓮華經提婆達多品)사문 법헌(法獻)이 우전국(于闐國)에서 이것의 범본을 구해 가지고 왔다. 『도혜송제록』과 『출삼장기집』에 보인다.

이상 2부 모두 2권은 무제 때에 제나라 말로 법의(法意)라고 하는 외국 삼장법사 달마마제(達摩摩提)가 영명 연간에 사문 법헌(法獻)을 위해서 양주(揚州) 와관사(瓦官寺)에서 번역했다. 법헌은 당시 승정(僧正)이었다. 법헌은 처음에 송(宋) 원휘(元徽) 3년(475)에 서역을 여행하다가 우전국에서 이 경의 범본과 불아(佛牙)를 구해 왔다. 그 경은 번역되어 지금까지 전해진다.
양(梁) 보통(普通) 3년(522) 정월에 불아가 도착했는데, 갑자기 알 수 없는 몇 사람이 지팡이를 쥐고서 초저녁에 와서는 문을 두드리면서 “임천(臨川) 전하(殿下)14)의 노비가 모반을 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불아가 누각 위에 있을 것이니 누각을 열고서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말을 따라서 누각을 열자 우두머리쯤 되는 자가 불아를 모셔둔 곳으로 나아가 함을 열고 불아를 꺼내서 세 번 절한 후 비단에 싸서 산을 돌아 동쪽 방향으로 사라졌다. 지금까지도 끝내 소재를 알 수 없다.

(5) 구나비지(求那毘地)
백구비유집경(百句毘喩集經) 10권외국의 승가사나(僧伽斯那)가 지었고, 영명(永明) 10년(492) 9월에 번역했다. 이것은 두 번째 번역인데, 혹 5권이기도 하다. 『승우록』에 보인다.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네 번째 번역이다.
수달장자경(須達長者經)

이상 3부 모두 12권은 무제 때에 제나라 말로 덕진(德進)이라고 하는 천축국의 삼장법사 구나비지가 영명 연간(483∼493)에 양주(揚州) 비야리사(毘耶離寺)에서 번역했다.

(6) 석법도(釋法度)
회하경(灰河經)『시흥록』ㆍ『고승전』ㆍ『출삼장기집』에 보인다.
비발률(毘跋律)『출삼장기집』에 보인다.

이상 2부는 무제(武帝) 때 양주(揚州)의 사문 석법도가 번역했다. 『보창록』에 보인다.

(7) 석법원(釋法願)
불법유육의제일응지경(佛法有六義第一應知經)
육통무애육근정업의문경(六通無碍六根淨業義門經)

이상 2부는 무제 때에 사문 석법원이 여러 경전을 가려 뽑아서 모으고 의미에 근거해서 찬출했다. 비록 경전의 요지를 선양한 것으로 위조된 것과는 차이가 있다. 경전의 명칭을 표시했으므로 따로 권부를 만들었다. 세간에서는 모두 함께 나열하여 의경(疑經)으로 분류한다. 그래서 다시 실어서 후세에 전하니 근원을 확인해서 분명하게 밝혀주기를 바란다.

(8) 석왕종(釋王宗)
불소제명수경(佛所制名數經) 5권
중경목록(衆經目錄) 2권

이상 2부는 모두 7권이다. 무제 때에 석왕종이 여러 경론을 뽑아서 모으고 사안에 따라 분류하여 편찬하니 빽빽한 숲[數林]과 같이 많았다. 처음에 경명을 달고 경록에 편입시켰는데, 명칭과 사실이 혼돈될까봐 다시 논의를 덧붙였다. 이미 정경(正經)은 아니기 때문에 세간에서 의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대소승경(大小乘經)의 목록을 찬술했다. 모두 『출삼장기집』에 보인다.

(9) 석담경(釋曇景)
미증유인연경(未曾有因緣經) 2권또한 바로 『미증유경(未曾有經)』이라고도 한다. 『시흥록』에 보인다.
마하마야경(摩訶摩耶經) 2권바로 『마야경(摩耶經)』이라고도 한다. 『왕종록(王宗錄)』ㆍ『보창록』ㆍ 『법상록』 등 세 목록에 보인다.

이상 2부 4권은 여러 경록에서는 단지 제(齊) 나라 때의 사문 석담경이 번역했다고만 말하고 있다. 연대는 드러나지 않고 어느 임금 때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10) 석법니(釋法尼)
익의경(益意經) 2권승우는 실역경(失譯經)이라고 했다. 『법상록』에 보인다.

이상 1부는 모두 2권이다. 제나라 때의 사문 석법니가 번역했다. 연대는 드러나지 않고 어느 임금 때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11) 석도정(釋道正)
미륵성불경(彌勒成佛經)

이상은 앞서 장안의 석도표(釋道標)가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 번역이나 구마라집의 번역과는 약간 다르다. 제(齊)나라 때 강주(江州) 사문 도정이 석도표가 완성한 것의 수미(首尾)를 고쳐서 성불이라고 이름을 붙였고, 또한 하생(下生)을 붙이기도 했다. 그 경의 첫머리에는 대지사리불(大智舍利弗)이라고 되어있다. 연대는 드러나지 않고 어느 임금 때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12) 석도비(釋道備)
구상경(九傷經)『별록』에 보인다.
안묘주경(安墓呪經)『별록』에 보인다.
보리복장법화삼매경(菩提福藏法花三昧經)무제 때 번역했다. 『출삼장기집』ㆍ『보창록』에 보인다.
칠불각설게(七佛各說偈)『오록』에 보인다.
심자지신게(深自知身偈)『오록』에 보인다.

이상 5부는 모두 5권이다. 제나라 때 사문 석도비가 번역했다. 석도비는 나중에 도환(道歡)으로 이름을 고쳤다. 비록 여러 경록에 보이지만 모두 의경(疑經)에 편입시켰다.

(13) 소자량(蕭子良)
주유교경(注遺敎經)
주우바새계(注優婆塞戒) 3권
초묘법연화경(抄妙法蓮華經) 59권
초아비담비바사(抄阿毘曇毘婆沙) 59권
초백유경(抄百喩經) 38권
초유마힐경(抄維摩詰經) 26권
권초화엄경(抄華嚴經) 15권
초지지경(抄地持經) 12권
초보살결정요행경(抄菩薩決定要行經) 10권또한 『정행우바새경(淨行優婆塞經)』이라고도 한다.
초성실론(抄成實論) 8권
초승만경(抄勝鬘經) 7권
초아차말경(抄阿差末經) 4권
초마하마야경(抄摩訶摩耶經) 3권
초태경(抄胎經) 3권
초방편보은경(抄方便報恩經) 2권
초앙굴마라경(抄鴦掘魔羅經) 2권
초율두타사경(抄律頭陀事經) 2권
삼보기(三寶記) 10권또한 『불사법전승록(佛史法傳僧錄)』이라고도 한다.
찬정주자(撰淨住子) 20권
잡의기(雜義記) 20권

이상 자주(子注) 및 초경(抄經)은 모두 20부 253권으로 모두 제(齊) 사도(司徒)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 소자량(蕭子良)이 불교를 아끼고 사랑하여 폭넓게 연구하여 직접 편찬한 것들이다. 잊혀졌던 것을 구비하고 역사를 조사하였으나 후세 학인들이 계속 가려서 읽고 세인들이 난잡하게 참고를 하여 경전의 정문(正文)을 미혹하거나 어지럽게 하였으므로, 본 경(經)을 들어서 그 근거를 알게 했다. 그 외에도 20여 경이 있는데 모두 단권이다. 글이 번다해지므로 싣지는 않겠다. 단지 제목 위의 초(抄)자는 모두 그런 부류이다. 부류별로 열거하고 의미를 찾는다면 처음과 끝이 자연히 드러날 것이다. 『출삼장기집』과 『보창록』에 보인다.

(14) 유힐(庾頡)
계과엄경(戒果嚴經)혹 경(經)자가 없는 것도 있다. 여덟 장(章)의 송(頌)이 있다.

이상 1부는 무제 때 영명 5년(489) 상시(常侍)15)인 유힐이 경전의 내용을 채록해서 편찬한 것이다.

(15) 석초도(釋超度)
율례(律例) 7권

이상 무제 때 영명 7년 사문 석초도가 율(律)에 의거해서 찬술했다.

(16) 석법화(釋法化)
복중녀청경(腹中女聽經)두 번째 번역이다. 앞서 번역된 『부장교녀경(不莊校女經)』과 동본이다.

이상 1부는 영원(永元) 연간(499~501)에 사문 석법화가 송출(誦出)했다. 『고록(古錄)』에 보인다. 여러 경록에서는 서로 계승하여 송출한 것이라고 말을 했지만, 송출의 의미가 상세하지 않다. 그것 때문에 모두 열거한 것이다. 앞서 번역이 있었기 때문에 의경(疑經)이나 실역(失譯)을 면할 수 있었다.

(17) 석법원(釋法瑗)
승만자주경(勝鬘子注經) 3권

이상 1부는 양주(揚州) 영근사(靈根寺) 사문 석법원이 주해(注解)했다.

(18) 석혜기(釋慧基)
유교자주경(遺敎子注經)

이상 1부는 산음(山陰) 법화산(法華山) 사문 석혜기가 주해(注解)했다.

(19) 왕건(王巾)
승사(僧史) 10권

이상 1부는 모두 10권이다. 사도(司徒)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의 기실(記室)인 왕건이 찬술했다.

(20) 유규(劉虯)
주법화경(注法華經) 10권
주무량의경(注無量義經)

이상 2부경 11권은 남군(南郡) 무당산(武當山)의 은사(隱士) 유규가 짓고 아울러 서문을 썼다. 유규는 양조(梁祖) 포의(布衣)의 벗이었다. 그의 아들 지린(之遴)은 양(梁) 조정에 투신하여 태상(太常)이 되었다.

12) 양조전역불경록(梁朝傳譯佛經錄)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일은 시대에 따라 융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가장 활발했던 것 중에 양조(梁祖)를 뛰어넘는 것이 없다. 소연(蕭衍)의 자(字)는 숙달(叔達)이고 난릉(蘭陵) 사람이다. 제왕조를 이어서 나라를 건국했으며 건강(建康)에 도읍했다. 황제의 지위에 올라도 성현과 같아지기를 생각하여 함께 등각(等覺) 보살에 계합하니 팔짱을 끼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정사에 임해도 경전의 가르침이 융성해졌다. 옛 가르침을 자세하고 넓게 연구하고 두루 남겨진 글들을 모아 순후한 풍속을 일으켜서 법속(法俗)을 이롭게 했으며, 조상의 제사를 계속 잇게 했다. 도교를 숭배했지만 불교大寶를 접하면서부터 칙령으로 그것(도교)을 멈추게 했다.16) 오직 불종(佛種)으로서만 중생을 개발시키고 임무를 완성하였다.
천감(天監) 7년(508) 황제가 꿈 속에서 불상을 보고서는 미신이 점점 미세해지고 삼장(三藏)이 더욱더 갖추어졌지만 이해하는 이가 드물었다. 그래서 사문 승민(僧旻) 등에게 명령해서 『경률이상(經律異相)』을 찬술하여 부류별로 모으니 모두 50권이었다. 황태자(皇太子) 강(綱)은 『법보연벽(法寶聯璧)』 2백여 권을 지었다. 나머지 여러 잡집(雜集)들이 너무 번잡하므로 칙령으로 사문 승소(僧紹)에게 『화림불전중경목록(華林佛殿衆經目錄)』 4권을 찬술하게 했는데, 황제가 직접 살피고 미흡한 점들을 보충했다. 또한 칙령으로 사문 보창(寶唱)에게 경목(經目)을 짓게 해서 역자의 유무를 밝히고 경전의 진위(眞僞)를 가리게 하니 전체 17과목으로 매우 자세하고 훌륭했다. 전후 두 양(梁)나라에 일곱 황제가 있었고, 87년간 금릉(金陵)에 도읍을 했고 나머지는 강릉(江陵)에 있었다. 역경 도속(道俗) 21명과 번역 경(經)ㆍ율(律)ㆍ전기(傳記) 등 90부는 모두 780권으로 두 양나라의 목록으로 삼는다.

사문니(沙門尼) 승법(僧法)21부 35권 경(經)
사문 석승성(釋僧盛)1부 1권 계법(戒法)
사문 석묘광(釋妙光)1부 1권 경
사문 석승우(釋僧祐)14부 63권 집(集)ㆍ기(記)ㆍ전(傳)
사문 석도환(釋道歡)1부 1권 게(偈)
사문 만다라(曼陀羅)3부 11권 경(經)
사문 승가바라(僧伽婆羅)11부 38권 경ㆍ논ㆍ전
청신사(淸信士) 목도현(木道賢)1부 1권 경
서번왕자(西蕃王子) 월파수나(月婆首那)1부 1권 경
사문 진제(眞諦)16부 46권 경ㆍ논ㆍ소기(疏記)
사문 석승민(釋僧旻)1부 88권 경초(經抄)
사문 석승소(釋僧紹)1부 4권 목록(目錄)
사문 석보창(釋寶唱)9부 107권 잡록(雜錄)
사문 석법랑(釋法朗)1부 72권 주경(注經)
사문 석지장(釋智藏)1부 80권 의림(義林)
무황제(武皇帝)1부 50권 주경(注經)
사문 석혜령(釋慧令)1부 12권 경초(經抄)
사문 석혜교(釋慧晈)1부 14권 승전(僧傳)
청신사(淸信士) 원담윤(袁曇允)1부 20권 논초(論抄)
간문제(簡文帝) 강(綱)1부 200권 법집(法集)
상동왕(湘東王) 문학(文學)17) 우효경(虞孝敬) 1부 30권 내전박요(內典博要)

(1) 승법(僧法)
정토경(淨土經) 7권영원(永元) 원년(499)에 번역했다. 나이 여덟 살이었다.
묘장엄경(妙莊嚴經) 4권
묘음사자후경(妙音師子吼經) 3권천감(天監) 4년(505)에 번역했다. 나이 열여섯 살이었다.
익의경(益意經) 2권천감 3년(504)에 번역했다.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아나함경(阿那含經) 2권천감 4년(506)에 번역했다. 나이 열여섯이었다.
보정경(寶頂經)영원 원년(499)에 번역했다. 나이 여덟 살이었다.
정정경(正頂經)영원 2년(450)에 번역했다. 나이 아홉 살이었다.
법화경(法華經)영원 2년(450)에 번역했다. 나이 아홉 살이었다.
승만경(勝鬘經)영원 2년(450)에 번역했다. 나이 아홉 살이었다.
약초경(藥草經)영원 3년(451)에 번역했다. 나이 열 살이었다.
태자경(太子經)영원 3년(451)에 번역했다. 나이 열 살이었다.
가야바경(伽耶婆經)영원 3년(451)에 번역했다. 나이 열 살이었다.
바라나경(波羅幄經)
우루빈경(優婁頻經)
반야득경(般若得經)천감 원년(502)에 번역했다. 열세 살이었다.
화엄영락경(華嚴瓔珞經)천감 원년(502)에 번역했다. 열세 살이었다.
출승사자후경(出乘師子吼經)천감 3년(504)에 번역했다. 열다섯 살이었다.
유타위경(踰陀衛經)천감 4년(506)에 대내(臺內)18)의 화광전(華光殿)에서 번역했다. 열여섯 살이었다.
우담경(優曇經)
유마경(維摩經)
서칠세경(序七世經)

이상 21부는 모두 35권이다. 태학박사(太學博士) 강필녀(江泌女)는 어려서 출가하였는데, 법명은 승법(僧法)이었다. 나이 여덟 살이 되어 한번은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서 앞에 열거한 경전들을 외워 내었다. 양주(揚州)의 도속(道俗)들은 모두 그를 신이 내려 준 사람이라고 하였다. 비장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불경으로 징험해 볼 경우 이 이치는 분명하였다. 이것은 오직 오랜전생 동안에 익혀 온 것이지 신에게 받은 것만이 아니다. 외전에 근거해 보면 공자는 ‘태어나면서 아는 이를 성인이고, 배워서 아는 이가 버금가는 이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금생의 몸에 국한된 이야기이고, 지나간 과거의 일에는 어두운 이야기일 뿐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안팎의 현성(賢聖)들의 깊고 얕음과 과거와 현재를 가려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고승전』에서는 “석담제(釋曇諦)는 속성(俗姓)은 강씨(康氏)이며 그 선조는 강거인(康居人)이다. 한(漢) 영제(靈帝) 때 이주하여 중국에 부속되었으며, 헌제(獻帝) 말기의 전쟁으로 인해 오흥(吳興)에 이주하여 머물게 되었다. 담제의 아버지 강동(康彤)은 일찍이 기주(冀州)에서 별가(別駕) 벼슬을 지냈다. 담제의 어머니 황씨(黃氏)가 낮잠을 자다가 꿈에 한 스님을 만났는데, 그가 황씨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불자(拂子) 하나와 무늬가 새겨진 쇠로 된 문진(文鎭) 두 개를 주었다. 잠을 깨서 보니 이 두 가지 물건이 모두 남아 있었다. 이어 잉태하여 담제를 낳았다.
담제의 나이 다섯 살 때 어머니가 불자 등을 그에게 보여 주니 담제가 말하였다.
“진왕(秦王)이 보내 온 것입니다.”
어머니가 물었다.
“너는 어디에 두었었느냐?”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열 살이 되자 출가하였는데, 스승을 따라 배우지 않고도 저절로 깨달았다. 그 후 그는 부친을 따라 번주(樊州)와 등주(鄧州) 지방으로 가서 우연히 관중의 승략(僧䂮) 도인을 만나자 갑자기 승략의 이름을 부르니, 승략 도인이 말하였다.
“동자가 어떻게 늙은 스님의 이름을 부르는가?”
담제가 말하였다.
“노스님은 본래 나를 모시던 사미이셨습니다. 대중을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잘못 소리친 것입니다.”
승략은 전에 홍각(弘覺)법사의 제자로서 승단을 위해 나물을 캐다가 멧돼지에게 몸을 다친 일이 있었다. 승략은 처음에는 이 일을 기억하지 못하여 곧 담제의 부친을 찾아갔다. 부친이 담제가 태어났을 때 전후의 사정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아울러 불자와 문진 등을 보여 주니 승략은 마침내 울면서 말하였다.
“이 분은 돌아가신 저의 스승, 곧 홍각법사이십니다. 선사께서는 전에 요장(姚萇)을 위해서 『법화경』을 강의하셨는데, 그때 제가 도강직(都講職)을 맡아 보았습니다. 홍각법사가 입적하신 날을 헤아려 보니 바로 이 물건이 황씨가 기탁받은 날이었습니다.”
또한 나물 캐던 일을 기억해 보니 더욱 깊은 슬픔이 복받쳤다.
담제는 그 후 경전을 두루 편람하며 눈으로 마주치는 것마다 곧바로 기억하였다. 만년에 오군(吳郡)의 호구산(虎丘山)에 있는 절로 들어가 『예기(禮記)』ㆍ『주역(周易)』ㆍ『춘추(春秋)』를 일곱 번씩 강의하였고, 『법화경』ㆍ『대품반야경』ㆍ『유마경』을 각각 열다섯 번씩 두루 강의하였다. 또한 문장이 뛰어나서 여섯 권의 문집을 남겼으니, 역시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송 원가 연간의 말기에 60세의 나이로 입적했다.”라고 하였다.
비장방이 말하였다.
“승략은 홍각법사의 제자이다. 스승이나 제자가 모두 한 시대의 종장(宗匠)이며 길잡이였으며, 그 이름이 전진(前秦)과 후진(後秦) 두 진나라에 떨쳤다. 집물(什物)19)과 삼의(三衣)를 왜 근심하겠는가? 오직 문진과 철루만을 아끼고 품을 뿐이다. 신명(神明)을 옮겨서 다른 생에 의탁하려 할 때 이 두 가지 물건과 함께 왕생하리라. 신명 외에 물질적인 막힘이 있는 것도 오히려 서로 따라 통할 수 있는데 하물며 마음속에서 사려(思慮)의 것[法]들이야 기억을 못하겠는가? 그래서 거울은 닦으면 더욱 맑아지고 칼날은 갈면 더욱 예리해지는 것이다. 물방울이 모여 바다가 되고 티끌이 쌓여 산을 이루며, 세세(世世)로 익히니 한층 늘어나고 생생(生生)으로 배우니 더욱 넓어진다. 가까이는 처음 시작하는 때에서 결국 15단원(團圓)에 이른다. 사람의 몸을 버리고 다시 사람의 몸을 받는 것이 바로 다음 생으로 태어나는 것이기에 기억하여 잊지 않는 것이 어찌 정신의 공력이겠는가?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하면 강필녀가 어리지만 암송하여 상속하였으니 어찌 전생의 자신이 외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신에게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무엇이 어리석은 도리이며 무엇이 지혜로운 도리이겠는가?”

(2) 석묘광(釋妙光)
살바야타권속장엄경(薩婆若陀眷屬莊嚴經)

이상 1경은 천감 9년(510)에 영주(郢州)의 두타도인(頭陀道人) 묘광이 양주치하(揚州治下) 보홍사(普弘寺)에서 번역한 것이다. 대중이 혼란하고 미혹한데도 양조가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분명하게 지적하고 명시하여서 후학들을 경계시켰다.

(3) 석승성(釋僧盛)
교계비구니법(敎誡比丘尼法)

이상 1권은 무제 천감 3년(504)에 양주(揚州) 사문 석승성이 종산(鍾山) 영근사(靈根寺)에서 율(律)에 의거해서 번역했다. 『보창록』에 보인다.

(4) 석승우(釋僧祐)
출삼장집기(出三藏集記) 16권
법원집(法苑集) 15권
홍명집(弘明集) 14권
세계기(世界記) 10권
살바다사자전(薩婆多師資傳) 5권
석가보(釋迦譜) 4권다시 십권본(十卷本)이 있는데 내가 직접 읽었다.
대집등삼경기(大集等三經記)
현우경기(賢愚經記)
집삼장인연기(集三藏因緣記)
율분오부기(律分五部記)
경래한지사부기(經來漢地四部記)
율분십팔부기(律分十八部記)
십송률오백나한출삼장기(十誦律五百羅漢出三藏記)
선견율비바사기(善見律毘婆沙記)

이상 14부 모두 63권이다. 양주 건초사(建初寺)의 율사 석승우가 찬술했다.
그래서 승우의 「출삼장기집서(出三藏記集序)」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대개 진제(眞諦)는 현묘하게 응축되어 있고, 법성(法性)은 공허하면서도 적멸하지만 중생들을 가르치고 세속을 인도하는 데 언어가 아니면 방도가 없다. 그래서 침묵과 언설이 둘이 아니어서 의공(義空)의 문(門)에서 만나고, 부처님의 일음(一音)으로도 떨쳐서 논변하시어 갖가지 중생들의 상황에 호응한다. 우리 스승이신 부처님能仁께서 세상에 나타나시어 녹야원에서 처음 법문을 하였으며, 금하(金河)20)에서 마지막 말씀을 행하셨다. 계경(契經)21)으로 소승의 학인을 인도했고 방전(方典)22)으로 대승의 정신을 권장했다. 불법의 오묘한 법륜을 구별하면 12분교十二惟部가 되며 가르침의 내용의 중요한 것을 총괄하면 8만의 법문이 된다. 부처님[善逝]께서 열반하신 후에 아라한[應眞]들이 결집을 행하였으니, 처음 4아함을 완성하고 나중에 5부 분계(分戒)23)를 완성했는데, 불법의 정수인 훌륭한 보배가 그 안에 있었으며 일체 중생들[含識]이 그것에 의지했다.
도(道)는 사람을 통해서 선양되고 법(法)은 인연을 의지해서 드러나니 도(道)는 있는데 사람이 없다면 비록 경문은 존재하나 깨달음이 없는 것이며, 법은 있고 인연이 없으면 비록 세상에 모두 있지만 듣지를 못한다. 법을 듣는 것은 시대가 도래하는 것에 의지하고, 도를 깨닫는 것은 근기의 수승함에 의지하니, 근기가 수승한 뒤에야 이치를 감득하고 시대가 도래한 이후에야 가르침에 소통한다.
옛날 주(周)나라 때 깨달음이 일어났지만 그 거리가 너무 멀었고, 한(漢)나라 때는 불교를 숭상하여 묘전이 사방으로 유행했으니 법은 인연에 의지해서 드러난다는 것이 진실로 징험이 있었다. 한나라 말에 안세고(安世高)가 번역을 해서 널리 밝혔으며, 위(魏)나라 초에 강승회가 저술을 통하여 더욱 선양했는데, 도가 사람을 통해서 크게 펼쳐짐이 이것에서 증명되었다.
진(晉)나라가 중흥하자 삼장이 더욱 확장되고 외국의 훌륭한 스님들이 앞다투어 몰려들었으며, 중국에서도 뛰어난 이들이 눈부시게 나타났다. 승가제바와 구마라집이 그 크나큰 벼리를 보였으며, 도안과 혜원이 심오한 의미를 떨쳤다. 위수(渭水:장안)24) 지역에서는 소요원(逍遙園)에서 힘을 썼고, 여산(鏑山:동진)은 반야대(般若臺)25)를 결성했다. 상법(像法)이 사람을 만나니 이때 매우 성대해졌다.
원래 불경이 출현한 것은 서역이지만 동방(중국)에까지 흘러 만 리를 와서는 범어를 중국어로 번역했다. 중국에서도 각국의 언어 표현이 달랐기 때문에 번역된 문장에 같고 다름이 있었고, 앞뒤로 여러 번 범본이 도착했기 때문에 신(新)ㆍ구(舊)라는 제목이 붙었다. 후대의 학자들이 과감하게 자르고 그 핵심만을 연구하고 계속해서 베껴냈기 때문에 경전이 번역된 시기를 알지 못했으며, 연이어 강설하였기 때문에 법을 전한 사람을 짐작할 수 없어서 경전이 전수된 과정이 이미 상실되었다. 한때에는 아라한이 결집한 것도 오히려 오사(五事)26)로써 경전을 검증했는데, 하물며 천 년 동안의 역경 과정을 거쳤는데 어찌 사람이나 시대에 어둡지 않겠는가?
예전에 도안법사가 뛰어난 능력으로 깊이 연구하여 경록(經錄)을 찬집하고 보고 들은 것을 바로잡고 분명하게 구분을 하였다. 이 이후로 불전이 사이사이 번역된 것은 모두 대승경전이었으며, 이때 다투어 강습하느라 번역의 연대와 번역한 사람을 정확히 살피지 못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본원은 상실되고 나중에는 의혹만 일으키니 어디에서 정확한 사실을 취할 수 있겠는가?
나 승우(僧祐)는 용렬한 재주와 비천한 학문으로 불문(佛門)에 들어와 현풍(玄風)을 숭상하여 널리 펼칠 것을 서원했다. 매양 낮이나 밤이나 암송하고 수지하였으며, 여름 가을로 강설하였다. 언제나 마음은 암원(菴園)정사에 가 있었고, 그림자는 영취산[靈鷲]으로 뛰어 올랐다. 이에 빈약한 기록들을 검토하고 연원을 조사하여 들었던 것을 꿰맞춰 『출삼장기집』이라고 이름했다. 첫째는 「찬연기(撰緣記)」, 둘째는 「전명록(銓名錄)」, 셋째는 「총경서(總經序)」, 넷째는 「술열전(述列傳)」 등이다.
연기(緣記)를 기술하면 근본이 분명해지고, 명록(名錄)이 확정되면 연대가 혼돈되지 않는다. 경서(經序)를 총괄하면 훌륭하게 경전을 집성한 때가 충분히 징험될 것이고, 열전(列傳)을 기술하면 저 사람들의 기풍을 살펴볼 수 있다. 아울러 불경[內經]을 정밀하게 검토하였고 외전[外籍]을 자세히 연구하였으며, 이전의 지식을 참고하고 예전에 들었던 것을 징험하였다. 만약 전역자와 전역 시대에 근거가 있으면 표준[司南]으로 제시하였고, 말로써 전해진 것이 상세하지 않으면 문장이 빠진 것으로 돌렸다. 부분적으로 남은 것을 가지고 하나하나 조사하면서 믿을 만한 역사에 뜻을 두었다. 세 번 반복하고 아홉 번을 생각했으며, 구체적 사실은 실제 기록에서 찾았다. 증거가 있는 것을 표시한 뒤에는 근원이 없는 것이 저절로 드러나게 마련이니, 길바닥에 흐르는 물이 순유(醇乳)에 섞이지 않으며 연나라 돌[燕石]은 초나라 옥[楚玉]과는 섞이지 않음을 알 것이다.”
『법원집(法苑集)』 등은 모두 서문이 있으니 저술의 도를 모두 뽑아서 싣지는 않겠다.

(5) 석도환(釋道歡)
중경요람법게(衆經要覽法偈) 21수(首)

이상 1권은 무제 천감 2년에 사문 석도환이 찬술했다. 승우는 『출삼장기집』의 주에서 의록(疑錄)에 넣었다. 그래서 구편(舊編)에 의거했다.

(6) 만다라(曼陀羅)
보운경(寶雲經) 7권『송제록』에 보인다.
법계체성무분별경(法界體性無分別經) 2권『이곽록』ㆍ『보창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般若波羅蜜經) 2권혹은 설(說)자가 있다. 『이곽록』에 보인다.

이상 3부는 모두 11권이다. 천감 연간 초에 양(梁)나라 말로는 홍약(弘弱)인 부남국(扶南國)의 사문 만다라가 범본을 가져 와서 바쳤다. 비록 번역에 종사했지만 양나라 말에 서툴러서 그가 번역한 경문은 의미가 잘 드러나지 않고 거칠었다. 승가바라와 함께 양도(揚都)에서 번역했다.

(7) 승가바라(僧伽婆羅)
아육왕경(阿育王經) 10권두 번째 번역이다. 천감 11년(512) 6월 20일에 양도(揚都) 수광전(壽光殿)에서 처음으로 번역되었다. 번역할 때 황제가 친히 필수하였으며 나중에 혜초(慧超)에게 맡겼는데 모두 계속 이어서 마무리했다. 『보창록』에 보인다.
공작왕다라니경(孔雀王陀羅尼經) 2권두 번째 번역이다. 진대(晋代)의 백시리밀다가 번역한 것과는 동본인데 문장이 약간 다르다. 『보창록』에 보인다.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 2권천감(天監) 17년(518) 칙령으로 승가바라(僧伽婆羅)가 점운관(占雲館)에서 번역했다. 원담구(袁曇久)가 필수하고 광택사(光宅寺) 사문 법운(法雲)이 상세하게 교정하였다.
도일체제불경계지엄경(度一切諸佛境界智嚴經)
보살장경(菩薩藏經)
문수사리소설반야바라밀경(文殊師利所說般若波羅蜜經)두 번째 번역이다. 앞서 만다라(曼陀羅)가 번역한 2권(二卷)본 보다는 조금 낫다.
사리불다라니경(舍利弗陀羅尼經)이 신주(神呪)는 큰 위신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 이것을 수지할 수 있는 자는 설산(雪山)의 팔야차왕(八夜叉王)이 항상 와서 보호하여 하고 싶은 것은 마음대로 될 것이다.
팔길상경(八吉祥經)만약 어떤 사람이 이 여덟 개의 부처님 명호(名號)를 들으면 모든 귀신의 온갖 혼란에도 침범을 당하지 않는다.
십법경(十法經)모두 보통(普通) 연간에 번역했다.
해탈도론(解脫道論) 13권천감(天監) 14년(515) 점운관(占雲館)에서 번역했다.
아육왕전(阿育王傳) 5권천감 연간에 두 번째 번역했다. 위대(魏代)의 것과는 약간 다르다.

이상 11부 모두 38권은 정관사(正觀寺)의 부남국(扶南國) 출신 사문 승가바라의 번역이다. 그는 양나라 말로는 승양(僧養) 또는 승개(僧鎧)라고 하였는데, 어려서부터 영특하였다. 15세에 출가하였는데, 오로지 아비담심(阿毘曇心)을 공부하였으며,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널리 율장(律藏)을 익혔다. 그는 제(齊)나라에서 불법이 널리 퍼진다는 것을 듣고 뱃길을 통해서 제나라의 도읍에 도착했다. 정관사(正觀寺)에 머물면서 구나발마(求那跋摩)의 제자가 된 뒤에 다시 구나발타로부터 대승[方等] 경전을 정밀하게 연구하고 두루 섭렵하여 모든 것에다 통하였으며, 여러 나라의 글자와 말을 이해하고 습득했다. 제나라가 말엽에 이르러 불교의 가르침이 쇠퇴하자, 승가바라는 조용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외부 사람들과 교류를 끊었다.
대량(大梁)이 천하를 다스리게 되자 능력 있는 자들을 불러들였는데, 천감(天監) 5년(516)에 임금의 부름을 받아서 양도(揚都) 수광전(壽光殿)과 정관사(正觀寺), 점운관(占雲館) 등 세 곳에서 위에 열거한 경전들을 번역했다. 이러한 경전의 역본은 만다라(曼陀羅)가 부남국(扶南國)에서 가져와 황제에게 바친 것이다. 만다라가 입적한 후에 승가바라는 오로지 번역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황제는 칙령을 내려 사문 보창(寶唱)ㆍ혜초(慧超)ㆍ승지(僧智)ㆍ법운(法雲)과 원담윤(袁曇允) 등에게 필수하도록 했다. 천자가 그를 매우 두텁게 예우하자, 승속[道俗]의 시선이 달라졌다. 승가바라는 사사로이 재물을 모으지 않았고, 재물은 보시하여 거처할 절을 지었다. 태위(太尉)인 임천왕(臨川王)이 매우 존중하였다.

(8) 목도현(木道賢)
우루빈경(優婁頻經)

이상 1권은 『보창록』에 보인다. 천감(天監) 15년(516)에 목도현이 황제에게 바쳤다. 그 경위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9) 월파수나(月婆首那)
대승정왕경(大乘頂王經)『유마아경(維摩兒經)』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번역인데 진대(晉代) 축법호가 번역한 『대방등정왕경(大方等頂王經)』과는 동본이지만 다른 번역으로 문장이 약간 다르다.

이상 1부는 무제 때 대동(大同) 연간에 양나라 말로는 고공(高空)인 우선니국(優禪尼國)의 왕자 월파수나가 북제(北齊)를 떠나서 양(梁)나라에 들어와서 정착한 인연으로 이 경전을 번역했다.

(10) 진제(眞諦)
금광명경(金光明經) 7권승성(承聖) 원년(552)에 정관사(正觀寺)와 양웅(楊雄)의 집에서 번역했으며, 두 번째 번역이다. 양대(梁代)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것은 전체가 4품이다.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승성(承聖) 3년(554)에 예장(豫章) 보전사(寶田寺)에서 번역했다. 두 번째 번역이다.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두 번째 번역이며, 진대(晉代) 축법호가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대동(大同) 3년(537)에 보전사(寶田寺)에서 번역했다. 조비(曹毘)의 「진제전(眞諦傳)」에 보인다.
십칠지론(十七地論) 5권태청(太淸) 4년27) 부춘(富春)에 있는 육원철(陸元哲)의 집에서 사문 보경(寶瓊) 등 20명의 명덕(名德)을 위해서 번역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대동 4년(538) 육원철의 집에서 번역했다.
중론(中論)
여실론(如實論)
십팔부론(十八部論)
본유무론(本有無論)
삼세분별론(三世分別論)이상 모두 4년(538)에 함께 번역했다.
금광명소(金光明疏) 13권태청(太淸) 5년에 번역했다.
인왕반야소(仁王般若疏) 6권태청 3년(549)에 번역했다.
기신론소(起信論疏) 2권
중론소(中論疏) 2권태청 4년 번역했다.
구식의기(九識義記) 2권태청 3년(549) 신오(新吳)의 의업사(義業寺)에서 번역했다.
전법륜의기(轉法輪義記)대동 3년(537)에 번역했다.

이상 16부 모두 46권은 무제(武帝) 말년 승성(承聖) 연간에 서천축의 우선니국(優禪尼國)의 삼장법사 바라말타(波羅末陀)가 번역한 것이다. 그는 양나라 말로 진제라고 한다. 멀리서 양무제簫主가 보살과 같은 행화를 펼치며 명장(名匠)을 선발하고 성현(聖賢)의 가르침을 모범으로 삼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마음 속으로 훌륭한 곳이라고 여기다가 이곳 양나라에 오게 되었다. 가지고 온 나뭇잎[樹葉]으로 된28) 경론은 340상자였다. 만약 그것을 모두 번역한다면 2만여 권은 충분히 됐을 것이다. 대부분 그 이전에는 중국에 전해지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양나라 말기 매우 혼란한 때를 만나서 결국 다 번역되지 못했다. 인연을 만나 번역된 것은 약설(略說)한다면 앞에 열거한 것과 같다. 나중에 번역된 것은 다시 진대(陳代)의 목록에서 밝히겠다. 그러한 구체적 일들은 조비(曹毘)의 「삼장법사전(三藏法師傳)」에 실려 있다. 비장방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승우(僧祐)는 ‘도(道)는 사람을 통해서 선양되고 법은 때에 의지해서 드러난다’고 했는데 진실한 말이다. 옛날에는 사람도 있고 법도 있었지만 인연이 없어서 때를 만나지 못했다. 지금은 좋은 때와 알맞은 인연을 만났지만 사람이 없고 법도 없으니 우리네 중생들이 가여울 뿐이다. 진실로 슬프구나.”

(11) 석승민(釋僧旻)
중경요초일부병목록(衆經要抄一部幷目錄) 88권

이상은 1부이다. 천감 7년(508) 11월 황제는 불법의 바다는 크고 넓어서 얕은 식견으로 엿보거나 탐구해서는 끝내 깨닫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칙령으로 장엄사(莊嚴寺) 사문 석승민 등을 시켜 정림상사(定林上寺)에서 이 부(部)를 편찬하게 했다. 8년(509) 여름 4월에야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보창록』에 보인다.

(12) 석승소(釋僧紹)
화림불전중경목록(華林佛殿衆經目錄) 4권

이상 1록은 천감 14년(515)에 안락사(安樂寺) 사문 석승소에게 칙령을 내려 찬술하도록 한 것이다. 석승소는 승우의 『출삼장기집』의 목록에서 간략히 취해서 네 종류로 나누어 만들었고, 나머지를 거기에 증감하였다. 『보창록』에 보인다.

(13) 석보창(釋寶唱)
경률이상일부병목록(經律異相一部幷目錄) 55권천감 15년(516) 칙령으로 지은 것이다.
명승전병서목(名僧傳幷序目) 31권
중경반공성승법(衆經飯供聖僧法) 5권15년516)에 번역했다.
중경목록(衆經目錄) 4권15년에 번역했다.
중경호국귀신명록(衆經護國鬼神名錄) 3권15년에 번역했다.
중경제불명(衆經諸佛名) 3권15년에 번역했다.
중경옹호국토제용왕명록(衆經擁護國土諸龍王名錄) 3권16년(517)에 번역했다.
중경참회멸죄법(衆經懺悔滅罪法) 3권15년에 번역했다.
출요율의(出要律儀) 20권15년에 번역했다.

이상 9부는 모두 127권이다. 황제는 국토를 조화롭게 하고 재해나 어려움이 없이 다스리려면 위로는 삼보(三寶)의 힘을 빌리고, 다음으로는 사천왕(四天王)에 의지하며, 아래로는 용왕과 많은 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와 같이 부지런히 행하여 세간의 중생들이 비로소 안락하게 되었다. 비록 가르침의 글들이 갖추어 있으나 여러 경론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급하게 찾아 살피려면 모두 제대로 보기가 어렵다. 그래서 천감 연간에 여러 해에 걸쳐 칙령을 내려 장엄사(莊嚴寺) 사문 석보창 등으로 하여금 총괄적으로 집록해서 요긴한 쓰임에 대비하게 하였다. 혹은 복(福)을 세워 재앙을 물리치거나, 혹은 예참(禮懺)으로 장애를 없앴으며, 혹은 귀신[神鬼]에게 공양을 베풀거나, 혹은 용왕(龍王)에게 제사를 지내니, 여러 가지 기도를 황제가 직접 보고서 사안들을 지적하여 제사나 기도를 하게 했는데 감응하는 점이 많았다. 50년간 백성들이 은혜를 입은 것은 이런 힘 때문이다.

(14) 석법랑(釋法朗)
대반열반자주경(大般涅槃子注經) 72권

이상 1부는 천감(天監) 연간(502~519)에 건원사(建元寺) 사문 석법랑이 주(注)를 단 것이다. 『보창록』에 보인다.

(15) 무황제(武皇帝)
마하반야바라밀자주경(摩訶般若波羅蜜子注經) 50권혹은 100권이라고도 한다.

이상 1부는 무제(武帝) 소연(蕭衍)의 번역이다. 그는 나이 서른일곱 살에 천자의 자리에 올라 86세까지 49년간 재위했다. 황제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늘 애통한 감회를 품어 항상 탄식하기를 “비록 사해의 존귀한 위치에 있다고 하나 망극한 슬픔을 누를 길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그래서 마음을 불경에 두어 8부의 반야(般若)는 시방 삼세 여러 부처님의 어머니이며, 여러 가지 장애나 재난을 없애고 갖가지 번뇌를 씻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여러 경전을 채록하고 몸소 주해(注解)를 저술했다. 그리고 친히 강독을 하여 이러한 뛰어난 복락을 구하기를 바랐으며, 부모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승화시킬 수 있기를 바랐다. 자주 삼보를 받들어 사신(捨身)할 적에는 땅이 진동하였다. 끊이지 않고 계속 재(齋)를 올리고 강설을 하니 법륜이 단절됨이 없었다.
종산(鍾山)에 대애경사(大愛敬寺)를 세웠고, 청계(靑溪)에는 지도사(智度寺)를 건립했다. 대내(臺內)에는 지경전(至敬殿)을 짓고 경양대(景陽臺)에 칠묘실(七廟室)을 건립했는데, 한 달에 두 번 그곳에 가서 깨끗한 음식을 진설하였다. 매번 지경전에 이르면 절을 하고 묘실에 이르러서는 불에 타고 불로 지지듯 가슴 아파하며 많은 눈물을 흘리며 매우 슬퍼하니 좌우 따르는 자들도 눈물을 숨길 수가 없었다.
보통(普通) 8년(527)에 동태사(同泰寺)를 조성했는데, 완성된 누각(樓閣)과 대(臺)와 불전(佛殿), 방(房)과 회랑[廊]은 비단으로 장식되었고, 하늘의 구름을 누를 듯 높이 치솟은 9층의 높은 건물들은 수려하고 장엄하였다. 영녕사(永寧寺)에 대통문(大通門)을 세워 동태사(同泰寺)를 마주하게 하고는 연호를 대통(大通)이라고 하였는데, 이 날이 원년(527) 3월 6일이었다.
매번 황제는 이곳에 친히 방문하여 예참하였고, 비록 많은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는 것에만 힘쓰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내외의 경론과 전적을 펼쳐 보면서 늘 새벽까지 공부를 계속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예기(禮記)』ㆍ『고문주서(古文周書)』ㆍ『좌전』ㆍ『장자』ㆍ『노자』 등 제자백가서와 『논어』ㆍ『효경』에서부터 과거의 철인들이 밝히지 못하고 전대의 선비들이 막힌 곳에 모두 훈석(訓釋)을 했다. 또한 국학생의 수에는 한계가 있었고 귀천으로 차별이 있었는데, 황제가 매번 후진들을 불러들여 이 좋은 가르침을 갖추게 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별도로 오관박사(五館博士)를 두어 집안은 가난하지만 재주가 뛰어난 이들[寒俊]을 잘 지도하였으니, 유가와 불가의 두 문하가 삼[麻]이 무성한 것처럼 울창하게 번성하였다. 전후의 문집이 120권이며, 저술은 사(史)ㆍ서(書)ㆍ원(苑) 등을 두루해서 수천 권에 달했다.
황제의 나이는 비록 많았지만 스스로 힘써서 쉬지 않으며 해가 뜨기도 전에 옷을 차려입고 앉아서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경(五更)이 되면 바로 외전(外殿)으로 나아가 등불을 잡고서 정무[萬機]를 살폈다. 황제의 은택은 감옥까지 미쳐서 대부분 큰 관용이 펼쳐졌다. 그 가운데 무거운 법으로 다스려야 할 경우에는 그 근원을 살피는 일을 아까워하지 않았으며, 고칠 때에는 오래도록 분향하고 염불한 이후에 칙령을 내렸다. 백성을 가엾이 여기고 자애로움과 측은해 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다. 간사한 무리들을 살펴서 숨어 있는 악을 적발하니 귀신과 통하는 것 같았다. 스스로는 향연을 베풀지 않았고 음악을 듣지 않았다. 후궁과 비빈들도 모두 비단으로 아름답게 치장하지 못하게 하였다. 의복이나 이부자리도 거칠고 소박했고, 갈포 자리를 펴고 짚신과 갈포 옷을 걸쳤으며, 여벌의 옷이나 노리개가 없었다. 천감 연중(502~519)에는 육식을 완전히 끊고 하루에 오직 한 끼만을 먹되 오직 채소만을 먹었다. 촉(蜀)에서 토란과 부들을 헌상했는데 씹어서 맛을 보고서 “고기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하고는 칙령으로 이를 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제왕의 뛰어남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부사의(不思議)한 보살 임금이로다.

(16) 석혜령(釋慧令)
반야초(般若抄) 12권

위의 경은 천감(天監) 16년(517)에 칙령을 내려 영근사(靈根寺) 사문 석혜령으로 하여금 찬술하게 했다. 『보창록』에 보인다.

(17) 석혜교(釋慧晈)
고승전(高僧傳) 14권목록(目錄)이 첨부되어 있다.

위의 1부는 무제 때에 회계(會稽) 가상사(嘉祥寺) 사문 석혜교가 찬술했다. 그는 내외의 학문을 모두를 꿰뚫었고, 특히 경과 율을 훌륭하게 강설했다. 『열반의(涅般義)』 10권과 『범망계(梵網戒)』 등의 소(疏)를 저술했는데, 모두 세상에서 크게 유행되어 당시의 모범이 되었다.

(18) 원담윤(袁曇允)
성실론유초(成實論類抄) 20권

이상은 천감 연간에 우바새(優婆塞) 원담윤이 찬술했다. 제(齊)나라 문선왕의 초경(抄經)과 비슷하다. 『보창록』에 보인다.

(19) 간문제(簡文帝) 강(綱)
법보집(法寶集) 200권『법보연벽(法寶聯璧)』이라고도 한다.

이상 1부는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이 태자로 있을 적에 직접 불경을 열람하고 과역(科域)이 잘못된 것을 지적해서 여러 학사들에게 편집하고 베껴 이어서 엮도록 하여 이러한 부권(部卷)을 만들었다. 이러한 부류로 『화림편략(華林遍略)』과 동일한 점이 있다. 초학자들이 공부를 하는 데 있어 그 수고를 반 이상 덜 수 있었다.

(20) 석지장(釋智藏)
의림(義林) 80권

이상 1부는 대통(大通) 연간(527~528)에 칙령으로 개선사(開善寺) 사문 석지장 등 20 대덕이 편찬한 것이다. 단지 여러 경론에 중요한 의미가 나열된 곳에서 모두 서로 비슷한 것들을 수록하여 유형대로 나누어서 모았다. 비유하자면 인간의 세상살이[世林]에 아무 까닭 없이 심어진 것은 없는 것과 같다. 매번 법회할 때마다 황제는 반드시 친히 열람하고 강론하는 것을 관람하였다. 강설자와 대론자 사이에 오가는 의미가 마치 손바닥을 보는 듯 알기 쉬웠다.

(21) 우효경(虞孝敬)
내전박요(內典博要) 30권

이상 1부는 상동왕(湘東王:蕭繹)의 기실(記室)이었던 우효경이 찬술했다. 여러 경론을 망라해서 그 속의 중요한 것들을 모두 갖추어서 수록한 것이다. 자못 『황람(皇覽)』29) 같은 동일한 부류끼리 모은 책이다. 우효경은 나중에 출가했는데, 이름을 혜명(慧命)으로 바꿨다. 관중에 들어가서 다시 저술이 있었다. 하지만 이 『내전박요』도 또한 불교의 여러 가지 경권의 길잡이가 될 만하다.

13) 후위원씨번전불경록(後魏元氏飜傳佛經錄)
원씨(元氏)의 선조는 북쪽 대국(代國) 운중(雲中)의 오랑캐로 대대로 호걸이었다. 남하하여 정양(定襄)의 40여 리 거리에 정착했다. 양(梁) 상동왕(湘東王)이 번역한 『공직도(貢職圖)』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본성(本姓)은 탁발(托跋)이고, 선비족(鮮卑族) 호인(胡人)이다. 서진(西晋)의 혼란기에 탁발로(托跋盧)가 나와서 진(晉) 누번(樓煩)30) 지역을 점령하였다. 진(晉) 조정에서는 그를 대왕(代王)에 봉했다. 나중에 부락(部落)이 분산되고 60여 년이 흘러 탁발로의 손자 탁발습익건(托跋拾翼鞬), 혹은 섭규(涉珪)라고도 하는 이에 이르는데, 바로 위사(魏史)에서 말하는 도무황제(道武皇帝)이며, 위(魏)의 태조(太祖)이다. 연호를 고쳐서 신서(神瑞) 원년(414)이라 칭하니, 즉 진(晉) 효무(孝武) 태원(太元) 원년(376)이다.31) 누번(樓煩) 지역을 나와서 삭주(朔州) 동쪽 3백리를 차지하여 성을 쌓고 읍을 세워서 항안(恒安)이라고 했다. 부진(符秦) 호군(護軍) 부견(苻堅)에게 패배한 이후에 곧바로 생지(生知)라고 호칭하고 불교를 믿고 큰 사찰을 건립했다. 항안(恒安)의 교외 서쪽에 큰 골짜기 석벽에 모두 굴을 뚫었는데, 그 높이가 10길[丈] 정도 되었고 동서로 30리였다. 석굴은 즐비하게 서로 연이어 있었으며 그 숫자가 매우 많았다. 골짜기 동쪽에 돌로 된 비석이 보이는데, 그것의 공적을 기록한 것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 비문의 대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나라가 천하의 대통을 이은 이후로 재물은 모두 석감(石龕)을 만드는 데 사용했으므로 그 규모가 광대하다. 그래서 신비한 공력은 더욱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군주인 태무제(太武帝)에 이르러 세상을 복종시켜 다스리면서 사도(도교)에 깊이 빠져 불법을 훼손시켰으며, 승려들을 죽이고 사찰을 파괴했다. 태무제는 7년을 지내고 고약한 병이 몸에 생겨 사망했다.
이후 계속해서 북위에 네 명의 군주가 있었는데, 효문제(孝文帝)에 이르러 국토를 확장하고 수도를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성씨도 탁발씨에서 원(元)으로 바꿨다. 오랑캐의 의복을 버리고 중국식 복장을 채용했으며, 오랑캐 말을 금지시키고 한족의 말(문화)을 존중했다. 효문제는 손수 문장을 짓고 고상한 말을 구사했는데 그야말로 성군(聖君)이었다.
효명제(孝明帝) 희평(熙平) 원년(516)에 영태후(靈太后) 호씨(胡氏)가 영녕사(永寧寺)를 세웠다. 9층의 목탑을 세웠는데, 높이가 90여 길에 달했고, 그 위쪽에는 또 황금 찰간(刹竿)이 있어 그 높이가 10길에 달하였다. 땅에서 천 자나 솟아 있어서 서울에서 거리가 100리나 떨어진 외곽에서도 이를 볼 수 있었다. 처음 터를 닦을 때 땅을 파서 황천(黃泉)에 이르러 금상(金像) 32구를 얻게 되자, 태후는 불법을 받들고 따르라는 징조라고 여겼다. 그런 까닭에 세상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을 모두 다 들여서 조성하였다. 찰간의 밑기둥에 금으로 된 보병을 설치하였는데, 그 병은 스물다섯 섬의 물을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보병 아래에는 이슬을 받는 황금 쟁반이 열한 겹으로 있었고, 바깥을 빙 둘러 황금 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다시 네 갈래의 쇠사슬이 있었고 보찰(寶刹)에서 탑의 모서리로 향했다. 네 모서리의 쇠사슬에는 금방울이 있는데, 그 크기는 한 석(石)의 물을 담을 정도의 항아리와 같았다. 9층 탑신의 모든 모서리에는 큰 방울을 매달아 아래위에 모두 130개의 방울이 있었다. 그 탑의 사면은 세 개의 문과 여섯 개의 창이 있는데, 모두 붉은 칠이 되어 있었다. 문짝 위에 다섯 줄[行]로 금방울을 달았다. 12개의 문과 24개의 문짝에는 모두 5천4백 개의 방울이 있었다. 방울 아래 다시 황금의 고리와 꽃문양을 새겨 넣었다. 새기고 만드는 기술을 최고 수준까지 발휘했으며, 토목을 다루는 솜씨는 지극하기 짝이 없어서 일반인들이 와서 하루아침에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사(佛事)의 정밀하고 교묘함이 불가사의할 뿐이다. 기둥에도 황금 고리와 꽃 문양을 새겨 넣어 사람의 눈과 마음을 함께 놀라게 했다.
긴긴 밤에 바람이 불면 방울과 목탁소리가 뒤섞여 울려 댕그랑 하는 소리가 10여 리 밖에서도 들렸다. 불전(佛殿)이 한 곳 있었는데, 태극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불전의 중앙에는 8길 높이의 불상이 있었고, 사람 키의 금불상이 열 분 있었다. 진주를 두르고 있는 불상이 세 분 있었고, 황금빛 천으로 이루어진 불상도 다섯 분 있었다. 옥불상이 두 분 있었는데, 그 세공의 기법이 당대 최고였다.
승방과 누각이 천여 칸이나 되었는데, 들보에는 무늬를 새기고 벽에는 채색을 했으며, 푸른 옥가루로 비단처럼 장식하여 차마 말로 다하기가 어려웠다. 향나무ㆍ잣나무ㆍ참죽나무ㆍ소나무들이 처마를 떠받치고, 빽빽한 대나무와 향기 나는 풀이 계단과 정원을 둘러 감쌌다. 그래서 상경(常景)에게 사비(寺碑)를 짓도록 했는데, “수미산(須彌山)의 궁전과 도솔천(兜率天)의 청정(淸淨) 궁궐도 이곳보다 훌륭하지 않으리라”고 새겨져 있을 정도였다. 외국에서 헌상한 신이(神異)한 경전과 불상은 모두 이 절에 모셔 두었다. 절의 담장은 모두 짧은 서까래를 올렸고, 그 위에 기와를 이었으니 모습이 마치 왕궁의 담장과 같았다.
절의 네 면에 각각 하나씩 문을 마련했는데, 정남문(正南門)에는 삼중(三重)의 누대(樓臺)를 두어서 세 개의 누각을 거치게 했다. 지상에서 높이가 20길이나 됐으며, 모습이나 형식이 지금의 단문(端門)과 비슷했다. 구름의 기세를 묘사하고 신선의 신령한 기운을 그려 넣었으며, 푸른 사슬을 늘어뜨리니 눈부시게 화려했다. 문짝 양쪽에는 네 명의 역사(力士)와 네 마리의 사자(師子)가 있었고, 금벽(金碧)으로 장식을 하고 그 위에 주옥(珠玉)을 덧붙였다. 그 장엄함과 빛나는 문채는 세인들은 들어 보지도 못한 것이었다. 동서의 양쪽 문도 이와 같았다. 특이한 것은 누각이 이중으로 되어 있는 북문(北門) 일도(一道)였다. 주위에는 전실이 없었는데 오두문(烏頭門)과 비슷했다. 네 개의 문 밖으로는 모두 푸른 홰나무를 심었고 항상 맑은 물을 흐르게 하였다. 그래서 경읍(京邑)의 행인들이 대부분 그 아래 길이 끝나는 곳에서 휴식했다. 수레의 차양이 아니더라도 머무는 구름이 가려서 청량한 바람이 불어 왔다. 어찌 함께하는 즐거움에만 의지하겠는가? 그래서 기원사(祇園寺) 등에 공양하고 사사(四事)를 700명의 범승에게 보시했으며, 보리류지(菩提流支)는 역경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칙령으로 이곽(李廓)이 경록(經錄)을 편찬케 하였다.
영희(永熙) 연간(532~534)이 되어 관중(關中)으로 옮겨와 동ㆍ서ㆍ남ㆍ북 4위(魏) 도합 16명의 임금과 161년을 거쳐서 북주(北周)와 북제(北齊)로 흘러갔다. 조사해 보니 도속(道俗) 14명이 번역한 경(經)ㆍ논(論)ㆍ전(傳)ㆍ녹(錄) 등 87부 도합 302권으로 후위(後魏) 삼대(三代)의 역경 기록으로 삼는다.

북대(北臺) 사문 석담요(釋曇曜)2부 5권 경ㆍ전
사문 석담정(釋曇靜)1부 2권 경
사문 길가야(吉迦夜)5부 25권 경ㆍ론
사문 석담변(釋曇辯)1부 1권 경
사문 담마류지(曇摩流支)3부 8권 경
사문 석법장(釋法奘)1부 1권 경
사문 보리류지(菩提流支)39부 129권 경ㆍ론ㆍ록
사문 늑나마제(勒那摩提)6부 24권 경ㆍ론ㆍ방(方)
사문 불타선다(佛陀扇多)10부 10권 경ㆍ론
업도(鄴都) 바라문(婆羅門) 구담반야류지(瞿曇般若流支)14부 85권 경ㆍ론
왕자(王子) 월파수나(月婆首那)3부 7권 경
기성(期城) 군수(郡守) 양현지(楊衒之)1부 5권 사기(寺記)
청신사 이곽(李廓)1부 1권 경록(經錄)
사문 달마보리(達摩菩提)1부 1권

(1) 석담요(釋曇曜)
원위북대정도삼매경(元魏北臺淨度三昧經)두 번째 번역이다. 보운(寶雲)이 번역한 2권본과는 동본이며 자세하고 간략한[廣略] 차이가 있다. 『축도조록』에 보인다
부법장전(付法藏傳) 4권『보리류지록(菩提流支錄)』에 보인다

이상 2부 모두 5권이다. 송(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23년 병무(丙戊, 446), 즉 북위(北魏) 태평진군(太平眞君) 7년에 태무황제(太武皇帝)가 최호(崔皓)의 사악하고 아첨하는 이야기를 믿고 구겸지(寇謙之)를 존숭하여 천사(天師)라고 불렀다. 불교인들을 탄압하고 사찰과 불탑을 파괴했다. 경인(庚寅)년(450)에 이르러 태무황제가 병에 걸리자 비로소 잘못을 깨달았다. 아울러 백족선사(白足禪師)가 와서 계발하여 부끄럽고 후회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자 곧바로 최호를 주살하였다.
임진년(452)에 태무제가 붕어했다. 손자 문성제(文成帝)가 즉위하자 곧바로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훼불 7년 만에 다시 삼보가 흥성하게 되었다. 화평(和平) 3년(462) 소현통(昭玄統)인 사문 석담요는 앞서 불교가 능멸 당하고 피폐해진 것을 개탄하던 중 지금 다시 일어난 것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북대(北臺) 석굴사(石窟寺)에서 여러 승려들을 모아 여러 경전을 번역하고 후현들에게 유통시켜 불법이 유지 존속되어 끊어지지 않게 하였다.

(2) 석담정(釋曇靜)
제위파리경(提謂波利經) 2권『출삼장기집』에 보인다.

이상은 송(宋) 효무제 때 원위(元魏) 사문 석담정이 북대(北臺)에서 찬술했다. 그 글을 보면 “동방의 태산(太山)은 한(漢)나라 말로는 대악(代岳)이라고 한다. 음양(陰陽)이 교대(交代)하기 때문에 대악(代岳)이라고 한 것이다”고 했다. 태산이라는 말은 위나라 때 나온 명칭인데, 이것을 한나라 말이라고 했으니 시대를 가려내지 못한 것이 첫째 잘못이다. 태산은 곧 이쪽 말인데 이것을 대악이라 번역하였으니, 두 가지 말이 서로 뒤바뀐 말이며 범어와 위나라 말을 모르는 말이니, 이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 그러한 예는 대단히 많아서 모두 기술할 수는 없지만, 이 2권경의 경문에 실려 있다.
『구록(舊錄)』에서는 따로 『제위경(提謂經)』 1권이 실려 있는데, 여러 다른 경과 어구가 같다. 다만 오방(五方)과 오행(五行)을 덧붙여 놓았는데, 이는 돌을 금에 섞는 것과 같은 일이라 의심이 의심을 이루는 것일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는 1권으로 된 것이 정확하다고 여겨진다.

(3) 길가야(吉迦夜)
잡보장경(雜寶藏經) 13권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 2권혹은 4권이다. 『부법장인연경』과는 자세하고 간략한[廣略] 차이가 있다. 담요(曇曜) 자신이 번역한 것이다.
칭양제불경(稱揚諸佛經) 3권두 번째 번역이다. 일명 『집화경(集花經)』ㆍ『현재불명경(現在佛名經)』ㆍ『제불화경(諸佛華經)』이라고도 한다. 네 가지 명칭은 구마라집(鳩摩羅什)과 송(宋)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것과는 동본이출이다.
대방광보살지경(大方廣菩薩地經)두 번째 번역이다. 진(晉)의 축법호가 번역한 『보살십지경(菩薩十地經)』과는 대동소이하다. 『시흥록』에 보인다.
방편심론(方便心論) 2권혹 1권이기도 하며, 모두 4품(品)으로 되어 있다.

이상 5부 25권은 송(宋) 명제 때 위(魏)나라 말로는 하사(何事)인 서역의 사문 길가야가 연흥(延興) 2년(513)에 사문통(沙門統)인 석담요(釋曇曜)를 위해서 북대(北臺)에서 거듭 번역한 것으로 유효표(劉孝標)가 필수하였다. 도혜(道慧)의 『송제록(宋齊錄)』에 보인다.

(4) 석담변(釋曇辯)
보거보살경(寶車菩薩經)일명 『묘호보거경(妙好寶車經)』이라고도 한다.

이상은 제(齊) 무제 때 원위(元魏) 회주(淮州) 사문 석담변이 번역했다. 나중에 청주(靑州) 사문 도시(道侍)가 수정했다. 범본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대부분 의경(疑經)이라고 본다. 『출삼장기집』과 여러 『별록』에 보인다.

(5) 담마류지(曇摩流支)
신력입인문경(信力入印門經) 5권원위(元魏) 남경(南京) 정시(正始) 원년(504)에 번역했다.
여래입일체불경계경(如來入一切佛境界經) 2권경명(景明) 2년(501) 백마사(白馬寺)에서 번역했다. 일명 『여래장엄지혜광명입일절제불경계경(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諸佛境界經)』이라고 한다.
금색왕경(金色王經)정시 4년(503)에 번역했다. 『법상록(法上錄)』에서는 보리류지(菩提流支)가 나중에 다시 거듭 교감했다고 했다.

이상 3부 8권은 위나라 말로는 법희(法希)인 제(齊)ㆍ양(梁) 사이에 남천축국의 삼장법사 담마류지가 낙양(雒陽)에서 선무제(宣武帝)를 위해서 번역했다. 사문 도보(道寶)가 필수했다.

(6) 석법장(釋法場)
변의장자자소문경(辯意長者子所問經)일명 『장자변의경(長者辯意經)』이다.

이상은 양(梁) 무제 때 천감(天監) 연간(502~519)에 위(魏) 사문 석법장이 낙양(雒陽)에서 번역했다. 『법상록』에 보인다.

(7) 보리류지(菩提流支)
불명경(佛名經) 12권정광(正光) 연간(520~525)에 번역했다.
입능가경(入楞伽經) 10권연창(延昌) 2년(513)에 번역했으며, 두 번째 번역이다. 송(宋)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가 번역한 4권 『능가경』과는 자세하고 간략한[廣略] 차이가 있다. 사문 승랑(僧朗)과 도담(道湛)이 필수했다.
대살차니건자수기경(大薩遮尼乾子受記經) 10권정광 원년(520)에 낙양(雒陽)에서 사주목(司州牧) 여남왕(汝南王)을 위해서 그의 집에서 번역했다. 혹 7권이기도 하다.
법집경(法集經) 8권연창(延昌) 4년(515) 낙양(洛陽)에서 번역했다. 승랑(僧朗)이 필수했다. 혹 6권이기도 하며, 『법상록』에 보인다.
승사유범천소문경(勝思惟梵天所問經) 6권신구(神龜) 원년(518) 낙양(洛陽)에서 번역했으며, 세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가 번역한 6권의 『지심경(持心經)』, 구마라집이 번역한 4권의 『사익경(思益經)』과는 동본이다. 『법상록』에 보인다.
심밀해탈경(深密解脫經) 5권연창(延昌) 3년(514) 낙양(洛陽)에서 번역했다. 승변(僧辯)이 필수했다. 『법상록』에서 보인다.
분신왕문경(奮迅王問經) 2권두 번째 번역이다. 진(秦)나라 때 구마라집이 번역한 『자재왕경(自在王經)』과는 동본이다.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2권정광(正光) 연간(520~525)에 낙양(洛陽)에서 번역했으며, 혹 1권이다.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영평(永平) 2년(558)에 호상국(胡相國)의 집에서 번역했으며, 승랑이 필수했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것과는 약간 다르다. 『법상록』에 보인다.
차마파제수기경(差摩波帝受記經)정광 연간에 낙양에서 번역했다.
불어경(佛語經)승랑이 필수했다.
불필정입인경(不必定入印經)각의(覺意)가 필수했다.
무자보협경(無字寶篋經)승랑이 필수했다.
대방등수다라경(大方等修多羅經)두 번째 번역이다. 『전유경(轉有經)』과는 동본이역이다.
미륵보살소문경(彌勒菩薩所問經)『대승요혜경(大乘要慧經)』과는 동본별출(同本別出)이며 조흔(趙欣)의 집에서 번역했다. 각의(覺意)가 필수했다.
제일의법승경(第一義法勝經)
가야정경(伽耶頂經)두 번째 번역이다. 구마라집이 번역한 『보리경(菩提經)』과는 동본이다. 일명 『가야정경론(伽耶頂經論)』인데, 별출이명(別出異名)이다. 승랑이 필수했다.
문수사리순행경(文殊師利巡行經)각의(覺意)가 필수했다.
일체법고왕경(一切法高王經)『제법용왕경(諸法勇王經)』과는 동본별출이다.
호제동자다라니경(護諸童子陀羅尼經)실역본을 점검해 보니 획(獲)자로 되어 있다.
방불경(謗佛經)두 번째 번역이다. 축법호의 『결정총지경(決定總持經)』과는 동본별명(同本別名)이다. 일명 『결정총지경(決定總持經)』이다.
십지경론(十地經論) 12권『이곽록(李廓錄)』에서는 처음 번역할 때 선무(宣武) 황제(皇帝)가 직접 하루 동안 필수했고, 나중에 사문 승변(僧辯)에게 맡겨서 완결했다고 하였다.
승사유경론(勝思惟經論) 10권보태(普泰) 원년(531) 낙양(洛陽)의 원도양(元桃楊)의 집에서 번역했다. 승랑과 승변이 필수했다.
미륵보살소문경(彌勒菩薩所問經) 10권낙양 조흔의 집에서 번역했다.
보적경론(寶積經論) 4권
실성론(實性論) 4권
금강반야경론(金剛般若經論) 3권영평(永平) 2년(558) 호상국(胡相國)의 집에서 번역했다. 승랑이 필수했다.
순중론(順中論) 2권시중(侍中) 최광(崔光)이 필수했다.
묘법연화경론(妙法蓮華經論) 2권담림(曇林)이 필수했고, 아울러 서문을 썼다.
가야정경론(伽耶頂經論) 2권천평(天平) 2년(535) 업성(鄴城) 은주사(殷周寺)에서 번역했다. 일명 『문수사리문보리심경론(文殊師利問菩提心經論)』이다. 승변과 도담이 필수했다.
삼구족경론(三具足經論)정시(正始) 5년(509)에 번역했다. 시중 최광이 필수했다.
무량수우바제사경론(無量壽優波提舍經論)보태(普泰) 원년(531)에 번역했으며, 승변이 필수했다.
보계보살사법론(寶髻菩薩四法論)전법륜경(轉法輪經)담림(曇林)이 필수했다.
십이인연론(十二因緣論)
백자론(百字論)
파외도사종론(破外道四宗論)
파외도열반론(破外道涅槃論)
역중경론목록(譯衆經論目錄)

이상 39부 모두 127권은 양(梁) 무제 때 위나라 말로 도희(道希)인 북천축국의 삼장법사 보리류지가 위(魏) 영평(永平) 2년(509)에서 천평(天平) 연간(534∼537)까지 20여 년간 낙양(洛陽)과 업성(鄴城)에서 번역한 것이다.
『이곽록』에서는 “삼장법사 보리류지의 방 안에 있는 범어로 된 경론은 만 상자는 충분히 되었고, 번역하여 필수한 원고도 한 방을 가득 채울 정도였다. 그의 지혜는 늑나마제(勒那摩提)와 서로 다툴 정도였다. 그리고 그는 신통한 깨달음과 총명하고 빠른 이해력으로 중국 방언까지 훤하게 알았고, 또한 잡술에 능했다. 한번은 우물 입구에 앉아 있었는데, 목욕하는 물통은 비어 있었고 제자는 아직 오지 아니하여 물을 퍼줄 사람이 없었다. 이에 보리류지가 버들가지를 들고 우물 속을 가리키며 가만히 주문을 외우니, 몇 번 주문을 외우자마자 샘물이 위로 솟아올라 우물 턱까지 차올라 평평하게 되었다. 그러자 곧 발우로 물을 떠 세수를 하였다. 옆에 있던 스님들이 모두 성인이라고 칭송하였다. 보리류지가 말하기를, ‘이는 단지 술법(術法)에 지나지 않는다. 외국에서는 함께 행해지고 있는 것인데 다만 이곳에서는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성인이라고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킬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이 잡술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8) 늑나마제(勒那摩提)
비야사문경(毘耶娑問經) 2권
십지경론(十地經論) 12권처음에 이 논을 번역할 때는 위나라 말이 서툴러서 기세간(器世間)을 잔자세간(盞子世間)이라고 했다. 나중에 재(齋)에 참여하여 여러 스님들이 구사하는 기(器)가 발우나 수건 등의 총체적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기(器)가 총체적인 명칭임을 알고는 이내 기세간(器世間)으로 고쳤다.
구경일승보성론(究竟一乘寶性論) 4권일명 『보성분별칠승증상론(寶性分別七乘增上論)』이다. 조흔의 집에서 번역했다. 『보창록』에 보인다.
보적경론(寶積經論) 4권『십지경론(十地經論)』 2론과 더불어 보리류지가 모두 번역을 했다. 또한 늑나마제와 보리류지 두 스님이 사이가 벌어져서 서로 묻거나 대답하는 일이 없었다. 그 사이에 경전의 내용이나 의미가 은폐되거나 사라지기도 하였다. 다시 다른 것을 묶게 되었고 문장에도 다른 부분이 있는데, 후인들이 비로소 합친 것이다. 『보창록』에 보인다.
법화경론(法華經論)시중 최광(崔光)이 필수했다.
용수보살화향방(龍樹菩薩和香方)모두 50법(法)이다.

이상 6부는 모두 24권이다. 양(梁) 무제 때 위나라 말로는 보의(寶意)인 중천축의 삼장법사 늑나마제는 늑나바제(勒那婆提)라고도 하는데, 그는 정시(正始) 5년(508)에 와서 낙양(洛陽)의 궁전 안에 들어가서 번역했다. 처음에는 보리류지를 도와 전역했지만 나중에 서로 다투어 따로따로 번역했다. 사문 승랑(僧朗)과 각의(覺意), 시중(侍中)인 최광 등이 필수 하였다.

(9) 불타선다(佛陀扇多)
금강상미다라니경(金剛上味陀羅尼經)
여래사자후경(如來師子吼經)이상 2경은 정광(正光) 6년(525)에 번역했다.
전유경(轉有經)
십법경(十法經)
은색녀경(銀色女經)
정법공경경(正法恭敬經)혹은 법(法)자가 없고, 또 『위덕다라니중설경(威德陀羅尼中說經)』이라고도 한다.
무외덕녀경(無畏德女經)『아술달보살경(阿術達菩薩經)』과는 동본이출이다. 담림(曇林)이 필수했다.
무자보협경(無字寶篋經)이상 6경은 원상(元象) 2년(539)에 번역했다.
아난다목거니하리다라니경(阿難多目佉尼訶離陀羅尼經)지겸(支謙)의 『무량미밀지경(無量微密持經)』과 일명 『발타라무량문지경(跋陀羅無量門持經)』ㆍ『사리불다라니경(舍利弗陀羅尼經)』ㆍ『공덕직무량문파마다라니경(功德直無量門破魔陀羅尼經)』 등 5경은 동본별출이며, 경명이 다를 뿐이다.
섭대승론(攝大乘論) 2권보태(普泰) 원년(531)에 번역했다.

이상 10부는 모두 11권이다. 양(梁) 무제 때 위나라 말로는 각정(覺定)인 북천축국의 삼장법사 불타선다가 정광 6년(525)에서 원상(元象) 2년(539)까지 낙양의 백마사와 업도(鄴都)의 금화사(金花寺)에서 번역했다.

(10) 구담반야류지(瞿曇般若流支)
정법념처경(正法念處經) 70권흥화(興和) 원년(539) 업성(鄴城)에 있는 대승상(大丞相) 고징(高澄)의 집에서 번역했다. 담림과 승방 등이 필수했다.
성선주의천자소문경(聖善住意天子所問經) 3권흥화 3년(541) 업성의 금화사에서 번역했다. 축법호가 번역한 『여환삼매경(如幻三昧經)』과는 동본별명(同本別名)이다. 담림이 필수했다.
팔불명경(八佛名經)
금색왕경(金色王經)이상 2경은 모두 흥화 4년(542) 금화사에서 역출했다. 담림이 필수했다.
무구녀경(無垢女經)흥화 3년(541)에 번역했다.
무구우바이문경(無垢優婆夷問經)흥화 4년(542)에 번역했다.
보의묘아경(寶意猫兒經)금화사에서 고중밀(高仲密)을 위해서 번역했다.
보살사법경(菩薩四法經)금화사에서 번역했다. 담림과 이희의(李希義) 등이 필수했다.
해탈계본(解脫戒本)흥화 3년(541)에 번역했다. 승방(僧昉)이 필수했다. 『가섭비율(迦葉毘律)』에서 나왔다.
독자도인문론(犢子道人問論)금화사에서 고중밀을 위해서 번역했다. 이희의가 필수했다.
회쟁론(廻諍論)원상(元象) 원년(538)에 번역했다. 담림이 필수했다.
업성취론(業成就論)흥화 3년(541) 금화사에서 번역했다. 담림이 필수했다.
유식무경계론(唯識無境界論)『유식론(唯識論)』이라고도 한다.
이가수로가론(伊迦輸盧迦論)이상 2론은 모두 금화사에서 번역했다.

이상 14부 모두 85권은 양(梁) 무제 때 위나라 말로는 지희(智希)인 동위(東魏) 남천축국의 바라나성 바라문 구담반야류지가 원상(元象) 초에서 흥화(興和) 말년까지 업성에서 번역했다. 당시 보리류지가 있었는데 비록 앞뒤로 동일하게 경전을 번역했지만 여러 경록에서는 거의가 경솔하게 이름을 생략해서 윗 글자를 없애고 오직 유지(流支)라고만 하기 때문에 어느 유지인지 알 수 없다. 지금까지 여러 기록의 번역목록이 서로 섞여 잘못 섞여서 상세하게 역자를 결정하기가 어렵다. 후세 훌륭한 사람들이 나와서 자세히 조사하여 그것을 검토하기를 바랄 뿐이다.

(11) 월파수나(月婆首那)
승가타경(僧伽吒經) 4권원상(元象) 원년(538) 사도(司徒) 공손등(公孫騰)의 집에서 번역했다.
대가섭경(大迦葉經) 2권혹은 대(大)자가 없기도 하다.
빈바사라왕문불공양경(頻婆娑羅王問佛供養經)이상 2경은 모두 흥화(興和) 3년(541)에 번역했다.

이상 3부 7권은 양(梁) 무제 때 위나라 말로는 고공(高空)인 동위(東魏) 중천축의 우선니국(優禪尼國) 왕자(王子) 월파수나가 업성에서 번역했다. 승방(僧昉)이 필수했다.

(12) 양현지(楊衒之)
낙양지가람기(雒陽地伽藍記) 5권혹 7권이기도 하다.

기성군수(期城郡守) 양현지가 찬술했다. 서문에서 말하기를, “삼분오전(三墳五典)32)의 설과 제자백가九流百氏33)의 말은 모두 그 이치는 인간 세계 안에서 통용되고, 그 뜻이 일상세계의 밖天外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일승(一乘)과 이제(二諦)의 근원과 삼명육통(三明六通)의 가르침은 서역에서는 모두 상세하게 갖추고 있지만, 동쪽 땅 중국에서는 이야기되지 않았다. 요즘 매일 같이 꿈에서 보름달이 빛을 광양문(光陽門)에 비추어 불상의 양미간을 장엄하였고, 청량대(淸凉臺)에 검은 머리칼 모양을 한 부처님상이 그려졌다. 이런 꿈을 꾼 뒤로 다투어 그 기풍이 퍼지게 되었다. 진대(晉代) 영가(永嘉) 연간(307~313)에는 오직 사찰이 42개소였던 것이 북위(北魏)가 왕통을 잇고 낙양[嵩洛]34)에 도읍光宅35)을 정하자, 불교에 대한 돈독한 믿음은 더욱 강해지고 불법은 더 한층 융성해졌다. 왕후와 귀족, 신하들은 귀중한 보배[象馬]를 버리는 것을 마치 신발 벗듯이 하고, 일반 선비들과 부호들은 재산을 던지는 것을 발자국 남기듯 하였다. 이때 사찰은 즐비하고 보탑은 빼곡했으니 서울에만도 1천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 아울러 그 중에서 특이한 것만을 가려서 기술하였다”고 하였다.

(13) 이곽(李廓)
중경록목(衆經錄目)

이상은 양(梁) 무제 때 낙양(雒陽)의 청신사 이곽이 위(魏) 영평(永平) 연간(508~512)에 칙령을 받들어 편찬했다. 이곽은 내외의 학문에 두루 통했고 경록을 작성했는데 매우 조리 있고 일관되었다.

(14) 달마보리(達摩菩提)
대열반론(大涅槃論) 1권

이상 『당전록(唐前錄)』을 살펴보면 “달마보리가 번역했다”고 되어 있다. 번역 연대나 당시 임금이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에 의심스러워서 여기에 첨부했다.

14) 후제고씨전역불경록(後齊高氏傳譯佛經錄)
원위(元魏)가 후반에 들어 그 복록[祚]이 붕괴될 때, 송(宋) 효명제(孝明帝)는 불교를 매우 숭상하였다. 태후(太后) 호씨(胡氏)가 국정(國政)을 직접 관할하자 1년 만에 천하가 안정되었다. 황제가 붕어한 이후 용감무쌍한 장군들이 서로 부딪쳤는데, 이주영(爾朱榮)이 호태후[內殿]를 살해하고 전권을 휘두르며 황제를 잡고 있었다. 진양(晉陽)의 고환(高歡)이 임금의 밀명을 받아서 이주(爾朱)씨를 업성에서 격파했다. 우문태(宇文泰)가 연이어 군사를 일으켜서 관내(關內)에서 평양(平陽)을 도왔다.
고환은 낙양의 궁궐과 전각을 모두 불태워 황제의 풍모를 모두 없애고 천평(天平, 534~537)이란 연호를 세우고 북업(北鄴)을 도읍으로 삼았다. 17년간 위(魏)의 왕실을 보좌하다가 양(梁) 태청(太淸) 3년(549) 무제가 이미 죽었고 이보다 앞서 고환이 먼저 죽었다. 세자(世子) 고징(高澄)이 정사를 돕다가 죽었다. 위(魏)의 정제(靜帝)가 고양(高洋)에게 선위(禪位)하니(550), 고양은 바로 상왕(相王:고환)의 셋째 아들이다. 세족(世族)인 우문태武川36)는 타고난 재주가 뛰어났지만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가 뒤섞여 있으며 현성(賢聖)이 그 질서를 상실했기 때문에 연호를 천보(天保, 550~559)라고 하고 업하(鄴下)에 도읍했다. 사독(四瀆) 중에 그 셋을 통치했으며, 구주(九州) 가운데 다섯을 다스렸다. 도교를 압살하고 그 무리를 출가시켰는데, 도사 중에 반항하는 자는 칙령으로 머리를 깎게 하고 참수하였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불교에 귀의하여 10년 만에 불법이 매우 융성해졌다. 승려는 2백여 만 명이었고, 사찰은 4만 개소였다. 모두 불법을 보호하고 부흥시켰다. 북제는 여섯 임금 28년간 이어지다가 북주(北周)에게 멸망했다. 전역을 담당하나 승속[道俗] 2명과 번역한 경론 8부 53권으로 고제(高齊, 北齊)의 목록으로 삼는다.

사문 나련야사(那連耶舍)7부 52권, 경(經)ㆍ논(論)
우바새 만천의(萬天懿)1부 1권, 경

(1) 나련야사(那連耶舍)
보살현실삼매경(菩薩見實三昧經) 14권천통(天統) 4년(568) 천평사(天平寺)에서 번역했다.
월장경(月藏經) 12권천통 2년(566) 천평사에서 번역했다.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 10권천보(天保) 8년(557) 천평사에서 번역했다.
대비경(大悲經) 5권
수미장경(須彌藏經) 2권천보 9년(558) 천평사에서 번역했다.
연등경(然燈經)『시등공덕경(施燈功德經)』이라고도 한다. 이상 2경은 천보 9년(558)에 천평사에서 번역했다.
법승아비담론(法勝阿毘曇論) 7권하청(河淸) 2년(563) 천평사에서 번역했다.

이상 7부 52권은 주(周) 명제(明帝) 때 제(齊)나라 말로는 존칭(尊稱)인 고제(高齊)의 사문통(沙門統)인 북천축의 오장국(烏場國) 삼장법사 나련제야사(那連提耶舍)가 업성(鄴城)에서 번역했다. 소현사(昭玄寺) 사문도통[沙門都]인 구담반야류지(瞿曇般若流支)와 제나라 말로 법지(法智)라고 하는 장자(長子) 달마사나(達摩闍那)가 전어(傳語)했다.

(2) 만천의(萬天懿)
존승보살소문경(尊勝菩薩所問經) 2권일명 『입무량문다라니경(入無量門陀羅尼經)』이다.

이상은 주(周) 무제(武帝) 때 고제(高齊) 거사(居士) 만천의가 업성에서 번역했다. 만천의는 원래 선비족(鮮卑族)이며 성(姓)은 만사씨(萬俟氏)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바라문(婆羅門)을 스승으로 섬겼다. 매우 총명하였으며 범서나 범어를 잘하였고 주술(呪術)이나 의방(醫方)에도 능했다. 그래서 번역에 참가한 것이다.
031_0697_a_01L大唐內典錄卷第四 席京師西明寺釋氏 撰歷代衆經傳譯所從錄第一之四宋朝 前齊 梁朝 後魏 後齊宋朝傳譯佛經錄第十佛經創云信爲道原功德之母智是出世解脫之基無信不可以登輕舟無智不可以斷深惑故生死大海浩汗無涯非夫六舟無以超越是以智士信六度爲超生之本故登舟而大斯道顯然唯智能克自教開中土三被誅除晩移南服五代弘闡以事據量則文明之朝信智不言而自顯武猛之國仁慧不可以開疆可不然可不然乎然則晉宋兩朝斯文卓揚扇釋道宗猷可觀今略敍之顯陳迹宋世錄者劉裕字德輿彭城都鄕人初生之辰神光照室形長七尺六寸受東晉禪稱宋仍都建康第三主元嘉年中有上事者云比寺塔修飾過興樂福之徒奢競日甚帝以問何侍中曰范泰及謝靈運皆稱六經本是濟俗性靈眞要會以佛經爲指南此賢達正言實誠有讜使率土之濱皆純此化則朕垂拱坐致太平尚之對曰中朝以遠難復盡渡江已來王導周顗宰輔之冠蓋王蒙謝尚人倫之羽儀郗超王謐等或號絕群或稱獨步略述數十人靡非英俊淸信之士無乏於時慧遠法師云釋氏之化無施不可臣謂此說有契理奧何者百家之鄕十人持五則十人淳謹千室之邑百人修十則百人和睦傳此風教已遍寰區編戶億千則仁人百萬夫能行一善則去一惡去一惡則息一刑一刑息於家萬刑息於國則陛下之言坐致大平是也故佛啚澄入鄴石虎殺戮減半澠池寶塔放光符健椎鋸用息蒙遜反噬無親虐如豺虎末節改悟遂成善人法建道人力兼萬夫幾亂河渭面縛甘死以赴師厄此豈非是內化之被哉吏部郞羊玄保在坐進曰竊恐秦趙論强兵之術吳盡呑倂之將無取於此也帝曰此非戰國之具良如卿言尚之曰夫禮隱逸則戰士貴仁德則兵氣衰若以孫吳爲心志在呑噬亦無取於堯舜之道豈唯釋教而已哉帝大悅曰釋門有卿猶孔氏之有季路所謂惡言不入於帝使中書陸澄撰續法論百有餘贊述佛理有弘裕焉准此而談謂至矣法由人顯佛囑帝王自是宋朝釋教隆盛名僧智士鬱若稻麻寶剎金輪森如竹葦相承八主五十九年其諸譯人華戎道俗二十有四合出修多羅毘尼戒本羯磨優波提舍阿毘曇論錄等凡二百一十部四百九十六卷結爲宋代建康錄云宋朝沙門佛馱什三部三十六卷律戒羯磨沙門釋智嚴十四部三十六卷沙門釋寶雲四部十五卷經沙門釋慧嚴一部三十六卷經沙門伊葉波羅一部十卷論沙門求那跋摩七部三十八卷經論沙門僧伽跋摩五部二十七卷論集沙門求那跋陁羅七十八部一百六十一卷經集沙門曇摩蜜多一十部十二卷經沙門畺良耶舍二部二卷經沙門曇無竭二部六卷經安陽侯沮渠京聲三十五部三十六卷經沙門功德直二部七卷經沙門釋慧簡二十五部二十五卷經沙門釋僧璩一部二卷作法沙門釋法穎三部三卷戒法沙門竺法眷六部二十九卷經沙門釋翔公一部二卷經沙門釋道嚴二部三卷經沙門釋勇公四部四卷經沙門釋法海二部二卷經沙門釋先公一部一卷經沙門釋道儼一部二卷論沙門竺道生七部七卷論彌沙塞律三十四卷見道整宋齊錄別錄云二十四卷恐誤彌沙塞戒本一卷見道祖錄彌沙塞羯磨見竺道祖錄右三部合三十六卷廢帝滎陽王罽賓三藏毘尼師佛馱什宋言覺壽少受業於彌沙塞部專精律品兼達禪要壽以景平元年七到於楊都先是法顯於師子國得彌沙塞梵本來未及翻譯而顯遷化京邑諸僧聞佛馱什旣善此於是衆議請令出之卽以其年冬十一月集龍光寺譯爲三十四什執梵文于闐沙門智勝傳語龍光寺沙門竺道生東安寺沙門慧嚴等更互筆受參正文理同侍中琅瑘王練爲檀越至二年十二月方訖仍於大部抄出戒心幷羯磨等文竝行於世普曜經八卷第三譯與蜀出竺法護出本同文異見宋齊錄及祐皎傳或六卷四卷無盡意菩薩經六卷亦云阿差末 經見李廓錄生經五卷見別錄廣博嚴淨經四卷元嘉四年出一廣博嚴淨不退轉經一不退轉法輪與法護阿惟越致遮經同本文別菩薩瓔珞本業經二卷毘羅三昧經二卷明居士入定事見東錄祐云疑阿那含經二卷 四天王經善德婆羅門問提婆達多經一音顯正法經或一音演正法經 調伏衆生業經善德優婆塞經 法華三昧經淨度三昧經右一十四部合三十六卷文帝元嘉四年涼州沙門釋智嚴弱冠出遊方博學遂於西域遇得前經梵本齎至揚都於枳園寺共寶雲嚴之神德備高僧傳不復妄載付法藏經六卷見李廓錄佛所行讚經五卷於六合山寺出見寶唱錄一云佛本行七卷或云傳馬鳴撰見別錄新無量壽經二卷於道場寺出是第七譯與支謙僧鎧白延法護羅什法力出不同見道慧宋齊錄及高僧傳淨度三昧經二卷法顯齎來末譯見道祖雜錄右四部一十五卷文帝世涼州沙門寶雲少歷西方善梵書語竺諸國字音訓釋悉皆備解後還復至江左晩出諸經多雲刊定戎兼通言音允正衆咸信服初時關中有竺佛念善於宣譯符姚二代獨擅其名領會眞文最爲稱其江左翻傳譯梵爲宋莫踰於雲初與智嚴恒共同出嚴旣遷化後獨宣故不多載般涅槃經三十六卷見寶唱錄及高僧傳右元曇無讖晉末於姑臧爲北涼沮渠氏譯本有四十卷語小朴質不甚流靡宋文帝世元嘉年初于建康豫州沙門范慧嚴淸河沙門崔慧觀共陳郡處士謝靈運以讖涅槃品數疏簡初學之者難以措懷乃依舊泥洹經加之品目文有過質頗亦改治結爲三十六餘感神徵應廣如高僧傳云雜阿毘曇心十一卷右文帝世外國沙門伊葉波羅言自在於彭城爲北徐州刺史王仲德譯至擇品緣礙遂輟菩薩善戒經二十卷於祇桓寺第二出與讖翻八卷小異見祖錄及高僧傳後弟子定林寺更出二品成三十卷雜阿毘曇心十三卷初伊葉波羅出至擇品停及續譯都訖見高僧傳四分尼羯磨元嘉八年祇桓寺出第二譯與魏曇帝出同見高僧傳別錄寶唱錄優婆塞五戒略論元嘉八年祇桓寺出亦云五戒相亦云五戒略論見高僧傳及寶唱錄善信二十二戒亦云離欲優婆塞優婆夷具行二十二戒亦云三歸優婆塞戒見高僧傳沙彌威儀 經律分異記右七部合三十八卷罽賓國三藏法師求那跋摩宋言功德鎧元嘉年來達于建業文帝引見勞問慇懃因問持齋不殺迫以身殉物不獲從志摩答以帝王與疋夫所修各異乃撫几歎之事在僧傳乃勅住祇供給隆厚譯前經論或有布花座下來鮮更榮摩後終於祇桓預作遺偈三十六行云證二果其文廣如傳雜阿毘曇婆沙十四卷元嘉十年於長干寺出第二譯與前本小異摩德勒伽毘尼十卷一云薩婆多毘尼元嘉十二年於秣陵平樂寺出見道慧宋齊錄大勇菩薩分別業報集一云略者見唐錄龍樹菩薩勸發諸王要偈一云求那跋摩出見唐錄請聖僧浴文竝見高僧傳及別錄右五部合二十七卷文帝世天竺三藏法師僧伽跋摩宋言衆鎧嘉十年屆自建業善律藏明雜心彭城王劉義康崇其戒範請以爲名重京邑道場慧觀以跋摩妙解雜心諷誦通利先三藏等雖復譯出未及繕寫更重請翻寶雲傳觀自筆受一周乃訖其後相續出摩德伽等雜阿含經五十卷瓦官寺釋法顯齎持來見道慧宋齊錄衆事分阿毘曇十二卷共菩提耶舍譯楞伽阿跋多羅寶經四卷元嘉二十年道場寺譯慧觀筆見道慧僧祐法上等錄央掘摩羅經四卷道場寺出見道慧宋齊錄及祐上別錄等過去現在因果經四卷荊州辛寺第三出與漢竺大力吳支謙出本起瑞應等同小異見始興祐廓等錄釋六十二見經四卷見別錄祐云一卷大方廣寶篋經三卷見李廓錄現在佛名經三卷元嘉二十九年正月二十七日荊州爲南譙王劉義宣出亦名華敷現在佛名見始興及高僧傳菩薩行方便神通變化經三卷見李廓錄淨度三昧經三卷見李廓錄相續解脫了義經二卷東安寺出見道慧僧祐李廓法上等四錄大法鼓經二卷東安寺譯見道慧僧祐李廓及別錄等阿蘭若習禪經二卷見李廓錄勝鬘師子吼一乘大方便經一卷丹陽郡出寶雲傳觀筆見道慧祐廓等錄無量壽經孝建年出第八譯見道惠宋齊錄與僧鎧支謙白延法護羅什法力寶雲等出大同廣略異賓頭盧突闍羅爲優陁延王說法經般泥洹經孝建元年辛寺出第二譯或無般字與法護出泥洹大同小異見道惠宋齊錄八吉祥經元嘉二十九年於荊州爲司空南譙王譯第二出與吳支謙出小異見祐唱二錄無憂王經後例一卷於荊州辛寺譯見吳錄出無量持門經見吳錄三小劫經見別錄 食四經見別錄十二遊經第二出與晉迦留陁伽譯小異見舊錄 十二頭陁經三因緣經 異處七處三觀經第二出出雜阿含或無異處字十一想思念如來經或思惟思 十二品生死經十報法三統略經 罪福報應經六齋八戒經 十二頭陁經四人出現世間經出雜含 四品學法經申兜本經或申日舅甥經出生經 那先經異本 出日難經一云越難 君臣經出生經 鞞摩肅經鸚鵡經中含負債爲牛經出生經 那賴經出生經二僑士經出出曜經 釋摩男本經 阿蘭那經老母經 樹提伽經 阿遬達經 大意經目連降龍王經 阿難見伎啼哭無常經舍利弗等比丘得身作證經佛往慰迦葉病經 請般特比丘經一云時佛命阿難詣最勝長者經目連弟布施望卽報經舍利弗般泥洹經出生經摩訶迦葉度貧母經阿那律七念章經 雜藏經虛空藏菩薩經 菩薩訶欲經第二出阿彌陁經 諸法無行經 貧子須賴經見李 廓錄無量義經見李廓錄 殺龍濟一國經六度集無涯際持法門經 墮珠著海中經出生經當來選擇諸惡世界經阿難陁目佉尼呵離陁經佛入甘露調正意經出大十二門經過去行檀波羅蜜經本行六波羅蜜經已上不注諸錄者竝別錄第一義五相略集一卷東安寺譯見僧祐錄三藏法師自述喩一卷見雜錄右七十七部合一百六十一卷帝世中天竺國三藏法師求那跋陁羅宋言功德賢善大乘學人亦稱爲摩訶乘亦云衍元嘉十二年來至揚都帝深崇敬彭城王劉義康南譙王劉義宣竝師事之勅住祇桓寺仍請令譯雜阿含等寶雲傳語慧觀筆受後隨譙王鎭撫荊州復於辛寺復出無憂王等凡百餘卷多是弟子法勇傳語譙王請講華嚴經跋陁自忖未善宋言旦夕請觀世音遂夢易首旦就講辯注若流餘有一載機悟領會具如僧傳祐錄止云賢譯七十三卷今案衆錄悉具列之禪秘要經三卷一云禪法要元嘉十八年於祇桓寺譯見祐錄五門禪經要用法見祐唱錄觀普賢菩薩法經出深功德經一普賢觀經見祐錄虛空藏觀經一觀虛空藏菩薩一無觀字見道惠僧祐等錄諸法勇王經見李廓錄佛昇忉利天爲母說法經 轉女身經象腋經 郁伽長者所問經虛空藏菩薩神呪經已上六經竝見 李廓魏世錄右一十部一十二卷文帝世罽賓三藏禪師曇摩蜜多宋言法秀生而連眉爲人沈邃甚有慧鑑有善神潛形蜜護每之國境神必託夢告其王知去亦如之誓以遊教化爲志習性淸修不拘名利初到燉煌卽立禪閣於閑曠地柰千株開園百畝禪衆濟濟趨者如雲元嘉年初來到建業屆止中晩憩祇桓卽譯禪經及以神呪兼復傳畫迦毘羅神王像形迄至于今是其則也觀藥王藥上二菩薩經無量壽觀經 上二經竝見道慧宋齊錄及高僧傳右文帝世西域沙門畺良耶舍宋言時稱性剛直寡嗜欲善三藏學多所諳知尤工禪思元嘉年初達華京邑帝深加賞勅住鍾山道林精舍上二經是轉障之秘術淨土之洪常受持諷誦故沙門僧含祈請譯出含躬筆受觀世音菩薩受記經第二出與護出少異外國傳五卷竭自述遊西域事右二部六卷武帝永初元年黃龍國沙門曇無竭宋言法勇拪集同志釋僧猛等二十五人共遊西域二十餘年自外竝化唯竭隻還於罽賓寫得前件梵本經來元嘉末年達于江左卽於楊都自譯見王宗僧祐慧皎李廓法上等錄治禪病秘要法經二卷孝建二年竹園寺出或無經字見祖祐唱錄淨飯王般涅槃經第二出 八關齋經異出本普明王經 佛大僧大經三見名生死變識經 分和檀王經 長者音悅經賢者律儀經一威儀 進學經優婆塞五戒經一五相經 邪祇經 摩達經五百梵志經 栴陁越經五反覆大義經 迦葉禁戒經弟子死復生經 弟子事佛吉凶經五苦章句經 釋種問優婆塞經出雜阿含波斯匿王喪母經 菩薩誓經中陰經 𡡉夷比丘經佛母般泥洹經孝建二年鍾山定林寺出見祐錄亦云大愛道經梵摩皇經 優婆塞五法經五恐怖世經 末羅王經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見道慧宋齊錄及三藏記 觀世音觀經 諫王經淸信士阿夷扇經一阿夷扇持父子經弟子慢爲耆域述經一弟子爲耆域述慢或明弟子戲誕經上來不注見處竝出別錄右三十五部合三十六卷孝武帝北涼河西王沮渠蒙遜從弟安陽侯京聲屬涼運終爲元魏滅京聲竄竊南奔建康晦志卑身不交人世常遊止塔寺以居士自絕妻室淡榮利從容法侶宣通正教是以黑白咸加敬焉所譯前件雜要衆經旣諷習久對衆筆綴無滯㝵丹陽尹孟顗善之賞贍隆見高僧傳菩薩念佛三昧經六卷或念佛三昧經見道慧宋齊錄無量門破魔陁羅尼經或無無量門見僧祐錄右二部七卷孝武帝世西域沙門功德直以大明六年於荊州爲沙門釋玄暢譯暢刊正文義詞旨婉而暢舒手出香掌中流水莫之測也後適成都止大石寺卽是阿育王塔所乃手自作金剛密迹等十六神像傳至今焉藥師琉璃光經大明元年出一拔除過罪生死得度一名灌頂出灌頂經祐錄爲疑長房勘婆羅門今有梵本神言小異耳商人求財經 僧王五天使經疑僧字善生王子經亦異出六向拜經懈怠耕者經舊錄懈怠耕見經釋迦畢罪經一本作家字出生經貧窮老公經或貧老 殺身濟賈經出六度集舍衛城中人喪子發狂經出阿含  譬喩經請賓頭盧法經 阿難見水光瑞經一云水光經呪願經 瞿曇彌記果經學人亂意經一母子作比丘比丘尼 亂意經出增一阿含竊爲沙門經 佛母般泥洹經與安陽侯出小異 長者子六過出家經出出曜經獵師捨家學道事經出出曜經瞿曇彌經 栴闍摩暴志謗佛事經出出曜經二老男子見佛出家得道經眞僞沙門經或眞僞經佛涅槃後諸比丘經一云力士跋陁經出雜含自他無法竝見別錄世變大力士出家得道經亦云力士跋陁經出雜含自他無法竝見別錄右二十五部合二十五卷孝武帝沙門釋慧簡於鹿野寺出十誦僧尼要事羯磨二卷右廢帝世大明七年律師釋僧璩於楊都中興寺依律撰出亦云略要羯磨法見僧祐三藏記十誦律比丘戒本大明年出十誦律比丘尼戒本太始年出十誦律羯磨雜事竝要用太始年出右三經三卷明皇帝世律師釋法穎於揚都長干寺依律撰出僧祐三藏記及寶唱錄無盡意經十卷 海意經七卷如來恩智不思議經五卷 寶頂經五卷阿述達菩薩經太始年廣州譯第三出與晉法護再出者大同三密底耶經亦云賢人用律經右六部二十九卷明皇帝世天竺沙門竺法眷於廣州譯見始興僧祐出三藏記及寶唱等三錄濡首菩薩無上淸淨分衛經二卷一決了諸法如幻三昧經右宋世不顯年未詳何帝譯群錄直注云沙門翔公於南海郡出道安始興祐錄瓔珞本業經二卷佛藏大方等經或問明顯經右宋世不顯年未詳何帝譯群錄直云沙門釋道嚴出見始興及法上錄竝載空淨三昧經亦名空淨大感應三昧經 車匿經或車匿本末經勸進學道經與梁吏共出亦名勸進經梵女首意經一首意女經右件四部宋世不顯年帝譯群錄直云沙門釋勇公出見始興趙錄法上錄亦載樂瓔珞莊嚴方便經一名大乘瓔珞莊嚴一名轉女身菩薩經與法護順權方便經同寂調音所問經一名如來所說淸淨調伏經與法護出文殊行律經同本右二卷宋世不顯帝年譯群錄注沙門釋法海出見始興法上錄月燈三昧經 一名文殊師利菩薩十事行經一名建慧三昧經右同前不顯帝年譯群錄注云門釋先公出見趙錄法上錄亦載決正四部毘尼論二卷右昇明元年沙門釋道儼依諸律撰出善不受報論 佛無淨土論 應有緣論頓悟成佛論 佛性當有論法身無色論 二諦論右七部宋初龍光寺沙門竺道生思力天挺智不從師推佛性通於有心考性命窮於法座著論開化廣如本紀前齊朝傳譯佛經錄第十一齊氏宋運交禪因循統御道俗有聲南服故不廣述其高帝蕭道成者臨沂人也因宋餘業仍都建於建元年安成野火洞澤焚燼唯數丈地草獨不然往視其中得一金像旣感靈瑞聖化復隆帝曰使我治天下十年必令黃金與土同不幸四載而崩子賾字宣遠江海晏安有竟陵文宣王子良之次子輔政司徒之位燮諧釐革大偃澆風偏弘釋教多所製述護之美獨以見推廣搜髦彦翼贊玄理撰淨住子二十卷佛史十卷抄集群經增略刪廣有兼濟焉承七主二十三年傳譯道俗二十人所出經傳等四十七部合三百四十六卷爲齊朝錄云沙門曇摩伽陁耶舍一部一卷經沙門摩訶乘二部二卷經律沙門僧伽跋陁羅一部一十八卷律沙門釋法意二部二卷經沙門求那毘地三部一十二卷經沙門釋法度二部二卷經律沙門釋法願二部二卷經沙門釋王宗二部七卷經及目錄沙門釋曇景二部四卷經沙門釋法尼一部二卷經沙門釋道正一部一卷經沙門釋道備五部五卷經律竟陵王蕭子良一十七部二百五十九卷經抄常侍庾頡一部一卷經沙門釋超度一部七卷律例沙門釋法化一部一卷經沙門釋慧基一部一卷注經沙門釋法瑗一部三卷注經文宣王記室王巾一部十卷僧史荊州隱士劉虯二部一十一卷注經齊無量義經見僧祐法上等錄右一經高帝世建元二年天竺沙門曇摩伽陁耶舍齊言法生稱於廣州朝亭寺手自譯出傳授人沙門慧永明三年齎至揚都繕寫流布荊州隱士劉虯在武當山注之出經序五百本生經見三藏記他毘利律他毘利齊言宿德見僧祐錄右二部武帝世外國沙門摩訶乘於廣州譯善見毘婆沙律十八卷見道慧宋齊錄及三藏記右一部一十八卷武帝世外國沙門僧伽跋陁羅齊言僧賢師資相傳佛涅槃後優波離旣結集律藏訖卽於其年七月十五日受自恣竟以香花供養律藏便下一點置律藏前年年如是優波離欲涅槃時付弟子陁寫俱陁寫俱欲涅槃弟子須俱須俱欲涅槃付弟子悉伽婆伽婆欲涅槃付弟子目犍連子帝須目犍連子帝須欲涅槃付弟子旃陁跋闍如是師師相付至今三藏法師三藏法師將律藏至廣臨上舶返還去以律藏付弟子僧伽跋陁羅羅以永明六年共沙門僧猗於廣州竹林寺譯出此善見毘婆沙因共安居以永明七年庚午歲七月半受自恣竟如前師法以香花供養律藏訖卽下一點其年計得九百七十五點點是一年趙伯休梁大同元年於廬山値苦行律師弘度得此佛涅槃後衆聖點記年月訖齊永明七年伯休訪弘度云自永明七年以後云何不復見點弘度答云自此已前皆是得道聖人手自下點貧道凡夫止可奉持頂戴而已不敢輒點伯休因此舊點下推至梁大同九年癸亥合得一千二十八年長房依伯休所推從大同九年至今開皇十七年丁巳歲合得一千八十二年若然則如來滅度始出千年去聖尚邇深可歎慶願共勵誠同宣遺法觀世音懺悔除罪呪經永明八年十二月出亦名觀世音所說行法經見寶 唱錄及三藏記妙法蓮華經提婆達多品沙門法獻於于闐國得此梵本來見道慧宋齊錄及三藏記右二部合二卷武帝世外國三藏法師達摩摩提齊言法意永明年沙門法獻於揚州瓦官寺譯出獻時爲僧正獻初以宋永徽三年遊歷西域於于闐國得此經梵本來佛牙經譯流行相傳至今佛牙到梁普通三年正月忽有數人竝執初夜扣門稱臨川殿下奴叛人告云在佛牙閣上請開閣撿視因卽隨語開閣主帥至佛牙座前開函取牙作三禮以錦手巾盛繞山東而去今竟不測所在百句譬喩集經十卷外國僧伽斯那撰永明十年九月出此卽第二譯或五卷見僧祐錄十二因緣經第四出 須達長者經右三部合一十二卷武帝世天竺國三藏法師求那毘地齊言德進永明於楊州毘耶離寺譯出灰河經見始興錄及高僧傳三藏記等 毘跋律見三藏記右二部武帝世楊州沙門釋法度出見寶唱錄載佛法有六義第一應知經六通無礙六根淨業義門經右二部武帝世沙門釋法願抄集衆經依義撰出雖弘經旨異於僞旣摽名號則別成卷部世皆共列用爲疑經故復載傳後葉識源幸同鑑勖佛所制名數經五卷 衆經目錄二卷右二部合七卷武帝世釋王宗抄集諸經論依事類撰有似數林題經名編預於錄懼亂名實故復委論旣非正經世所疑惑又撰大小乘經目竝見出三藏記未曾有因緣經二卷亦直云未曾有經見始興錄摩訶摩耶經二卷亦直云摩耶經竝見王宗寶唱法上等三錄右二部合四卷群錄直云齊世門釋曇景出旣不顯年未詳何帝益意經二卷祐云失譯見法上錄右一部合二卷齊世沙門釋法尼旣不顯年未詳何帝彌勒成佛經右先是長安釋道摽譯是第二小異護什本齊世江州沙門道政更復刪改摽所定者首尾亦名成佛又云下生而其經首有大智舍利弗者是旣不顯年未詳何帝九傷經見別錄 安墓呪經見別錄菩提福藏法花三昧經武帝世出見三藏記及寶唱錄七佛各說偈見吳錄 深自知身偈見吳錄右五部合五卷齊世沙門釋道備備後改名歡雖見衆錄然竝注入疑經注遺教經 注優婆塞戒三卷抄妙法蓮華經五卷抄阿毘曇毘婆沙五十九卷抄百喩經三十八卷抄維摩詰經二十六卷抄華嚴經一十五卷抄地持經一十二卷抄菩薩決定要行經十卷亦云淨行優婆塞經抄成實論八卷 抄勝鬘經七卷抄阿差末經四卷 抄摩訶摩耶經三卷抄胎經三卷 抄方便報恩經二卷抄鴦掘魔羅經二卷抄律頭陁事經二卷三寶記十卷亦云佛史法傳僧錄 撰淨住子二十卷雜義記二十卷右子注及抄經合二十部凡二百五十三卷竝齊司徒竟陵文宣王蕭子良愛好博尋躬自緝撰備忘擬歷謂傳行後代學人相踵抄讀世人參雜惑亂正文故擧本經庶知由委外猶有二十餘經竝是單卷文繁不復備錄但上題抄字者悉是其類例抽尋始末自別見三藏記及寶唱等錄戒果嚴經或無經字有八章頌右一部武帝世永明五年常侍庾頡採經意撰律例七卷右一部武帝世永明七年沙門釋超度依律撰出腹中女聽經第二出與先不莊挍女經本同右一部永元年中沙門釋法化誦見古錄衆錄相承竝云誦出未誦意依而列之以有先譯免疑失勝鬘子注經三卷右一部揚州靈根寺沙門釋法瑗述注解遺教子注經右一部山陰法華山沙門釋慧基述注解僧史十卷右一部合十卷司徒竟陵文宣王府記室王巾撰注法華經十卷 注無量義經右二部經一十一卷南郡武當山隱士劉虯撰幷製序劉虯卽梁祖布衣之友也其子之遴梁爲太常梁朝傳譯佛經錄第十二弘傳聖教隨代興隆其中高者越梁祖行字叔達蘭陵人也承齊建亦都建康登極思濟同契等覺垂拱臨朝盛弘經教廣延博古採遺文扇以淳風利之法俗祖禰相承尊事老氏及臨大寶下勅斷之以佛宗開物成務天鑑七年帝以正像浸末信重漸微三藏彌綸鮮能該勅沙門僧旻等撰經律異相以類相從凡五十卷皇太子綱撰法寶聯璧二百餘卷諸餘雜集其徒寔繁勅沙門僧紹撰華林佛殿衆經目錄四卷帝具省之周洽未委又勅沙門寶唱更纘經目乃顯譯有無證經眞凡十七科頗爲覶縷前後二梁凡七帝八十七年五十年在金陵餘在江陵譯經道俗二十一人所出經傳記等九十部凡七百八十卷爲二梁錄云沙門尼僧法二十一部三十五卷沙門釋僧盛一部一卷戒法沙門釋妙光一部一卷沙門釋僧祐一十四部六十三卷集記傳沙門釋道歡一部一卷沙門曼陁羅三部一十一卷沙門僧伽婆羅一十一部三十八卷經論傳淸信士木道賢一部一卷西蕃王子月婆首那一部一卷沙門眞諦一十六部四十六卷經論疏記沙門釋僧旻一部八十八卷經抄沙門釋僧紹一部四卷錄目沙門釋寶唱九部一百七卷雜錄沙門釋法朗一部七十二卷注經沙門釋智藏一部八十卷義林武皇帝一部五十卷注經沙門釋慧令一部一十二卷經抄沙門釋慧皎一部一十四卷僧傳淸信士袁曇允一部二十卷論抄簡文帝綱一部二百卷法集湘東王文學虞孝敬一部三十卷內典博要 淨土經七卷永元元年出年八歲妙莊嚴經四卷妙音師子吼經三卷天監四年出年十六益意經二卷天監三年出年十五阿那含經二卷天監四年出年十六寶頂經永元元年出年八歲 正頂經永元二年出年九歲法華經永元二年出年九歲 勝鬘經二年出年九歲藥草經三年出年十歲  太子經三年出年十歲伽耶婆經三年出年十歲 波羅柰經優婁頻經 般若得經天監元年出年十三華嚴瓔珞經天監元年出年十三出乘師子吼經三年出年十五踰陁衛經四年在臺內華光殿出年十六 優曇經維摩經 序七世經右二十一部合三十五卷太學博士江泌女小而出家名僧法年八九歲有時靜坐閉目誦出前經州道俗咸稱神授長房云驗於經論斯理皎然是宿習來非關神授且據外典夫子有云生而知者聖而知者次此局談今生昧於過往若不爾者何以得辯內外賢聖淺深過現乎故高僧傳云釋曇諦者俗姓康氏其先康居人漢靈帝移附中國獻帝末亂移止吳興諦父肜嘗爲冀州別駕母黃氏晝眠夢見一僧呼爲母寄一麈尾幷鐵鏤書鎭黃旣眠覺見二物具存密異之因而懷孕生諦諦年五歲母以麈尾等示之諦曰秦王所餉母曰汝置何處答曰不憶至年十歲出家學不從師悟自天發此卽其事後隨父之樊鄧過見關中僧䂮道人忽然喚䂮䂮曰童子何以呼宿士名諦曰阿上本是諦沙彌曾爲衆僧採菜被野猪傷不覺失今可忘耶然僧䂮經爲弘覺法師弟子爲僧採菜被野猪所傷䂮初不憶此乃詣諦父諦父具說諦生本幷示䂮書鎭麈尾等䂮乃悟而泣曰卽䂮先師弘覺法師也師經爲姚萇講法華貧道爲都講姚萇餉師二物今遂在此追計弘覺捨命正是寄物之日傷憶採菜之事增悲悼諦後遊覽內外遇物斯記晩入吳虎丘山寺講禮春秋各七遍法華大品維摩各十五遍善屬文有集六卷盛行於世年六十餘終宋元嘉末年也房曰弘覺法師弟子僧䂮師徒匠導名重二什物三衣亦復何限唯書鎭麈尾保惜在懷及移識託生此之二物遂得同往神外質礙之像尚得相隨況心內慮知之法而不憶念所以鏡瑩轉明刃砥彌利渧聚爲塵積成山世世習而踰增生生學而益廣近匹初始之月終至十五團圓捨人還受人卽是次生事憶而弗忘其神功乎閉目靜思自是女人情弱暗誦相續豈非前身時諷而論神授何乃愚瞽昧智慧之道乎薩婆若陁眷屬莊嚴經右一經天監九年郢州頭陁道人妙光詣楊州治下普弘寺出此經徒誑惑梁朝擯治故指斥明示誡於後教誡比丘尼法右一卷武帝天監三年楊州沙門釋僧盛於鍾山靈根寺依律撰出見寶唱錄出三藏集記十六卷 法苑集一十五卷弘明集一十四卷 世界記一十卷薩婆多師資傳五卷釋迦譜四卷更有十卷本余親讀之大集等三經記 賢愚經記集三藏因緣記 律分五部記經來漢地四部記 律分十八部記十誦律五百羅漢出三藏記善見律毘婆沙記右一十四部合六十三卷揚州建初寺律師釋僧祐撰故祐三藏記序云夫眞諦玄凝法性虛寂而開物導俗非言莫津是以不二嘿詶會於義空之門一音振辯應乎群有之境自我師能仁之出世也鹿苑唱其初言金河究其後說契經以誘小學方典以勸大心妙輪區別十二惟部法聚摠要八萬其門至善逝晦迹而應眞結集始則四含集經中則五部分戒大寶斯在含識資焉然道由人弘法待緣顯道無人雖文存而莫悟有法無緣雖竝世而弗聞聞法資乎時來悟道藉於機至機至然後理感時來方乃化通矣周代覺興而雲津致隔漢世像教而妙典方流法待緣顯信有徵矣漢末安高宣譯轉明初康會注述漸暢道由人弘於茲驗矣自晉氏中興三藏彌廣外域勝賓稠疊以摠至中原慧士煒曄而秀生什擧其宏綱遠振其奧領渭濱務逍遙之集廬嶽結般若之衆像法得人於斯爲盛原夫經出西域運流東方提挈萬里翻轉梵漢國音各殊故文有同異後重來故題有新舊而後之學者鮮剋硏覈遂乃書寫繼踵而不知經出之歲誦說比肩而莫測傳法之人授受之道亦已闕矣夫一時聖集猶五事證經況千載交譯可昧其人世哉昔安法師以鴻才淵爰撰經錄訂正聞見炳然區分自茲以來妙典間出皆是大乘寶時競講習而年代人名莫有詮歲月逾邁本源將沒後生疑惑奚所取明祐以庸淺預憑法門仰玄風誓弘末化每至昏曉諷持秋夏講說未嘗不心馳菴園影躍靈於是牽課羸志沿波討源綴其所聞名曰出三藏記集一撰緣記銓名錄三摠經序四述列傳緣記撰則原始之本克明名錄銓則年代之目不墜經序摠則勝集之時足徵列傳述則伊人之風可見竝鑽析內經硏鏡外籍參以前識驗以舊聞若人代有據則表爲司南傳未詳則文歸蓋闕秉牘凝翰存信史三復九思事取實錄有證者旣摽則無源者自顯庶行潦無雜於醇乳燕石不亂於楚玉矣法苑等竝皆有序著述指訂復具抄焉衆經要覽法偈二十一首右一卷武帝天監二年沙門釋道歡撰僧祐三藏集記注以爲疑依舊編寶雲經七卷見宋錄法界體性無分別經二卷見李廓及寶唱錄文殊師利般若波羅蜜經二卷或有說字見李廓錄右三部合一十一卷天監年初南國沙門曼陁羅梁言弘弱大梵本經來貢獻雖事翻譯未善梁言其所出經文多隱質共僧伽婆羅於楊都譯阿育王經十卷第二出天監十一年六月二十日於楊都壽光譯初翻日帝躬筆受後付慧超合繼訖見寶唱錄孔雀王陁羅尼經二卷第二出與晉世帛尸利蜜譯本同文少異見寶唱錄文殊師利問經二卷天監十七年勅僧伽婆羅於占雲館譯袁曇允筆受光宅寺沙門法雲詳定度一切諸佛境界智嚴經 菩薩藏經文殊師利所說般若波羅蜜經第二譯小勝前曼陁羅所出二卷者舍利弗陁羅尼經此呪大有神力若能持者雪山八夜叉王常來擁護所欲隨心八吉祥經若人聞此八佛名號不爲一切諸鬼神衆難所侵十法經竝普通年譯解脫道論一十三卷天監十四年於占雲館譯阿育王傳五卷天監年第二譯與魏世者小異右一十一部合三十八卷正觀寺扶南沙門僧伽婆羅梁言僧養亦云僧鎧而穎悟十五出家偏學阿毘曇心具足以後廣習律藏聞齊國弘法隨舶至都住正觀寺爲求那跋摩弟子從跋陁硏精方等博涉多通乃解數國書語値齊氏季末道教陵夷婆羅靜潔身心外絕交故大梁御宇搜訪術能以天監五年被勅徵召於楊都壽光殿及正觀寺占雲館三處譯上件經其本竝是曼陁羅從扶南國齎來獻上陁終沒後羅專事翻勅令沙門寶唱慧超僧智法雲及袁曇允等筆受天子禮接甚厚道俗改婆羅不畜私財以其嚫施成立住寺太尉臨川王所重優婁頻經右一卷唱錄直云天監十五年木道賢獻上更不辯由委大乘頂王經 亦云維摩兒經第二出與晉世竺法護大方等頂王經同本異出文少異右一部武帝世大同年優禪尼國王子月婆首那梁言高空辭齊入仍被留住因譯此經金光明經七卷承聖元年於正觀寺及楊雄宅出是第二譯與梁世曇無讖出者全長四品彌勒下生經承聖三年於豫章寶田寺出是第二譯仁王般若經是第二譯與晉世法護出者少異大同三年在寶田寺譯見曹毘眞諦傳十七地論五卷太淸四年於富春陸元哲宅爲沙門寶瓊等二十名德譯大乘起信論 大同四年在陸元哲宅出 中論 如實論十八部論 本有無論 三世分別論已上竝四年同出金光明疏十三卷太淸五年出仁王般若疏六卷太淸三年出起信論疏二卷太淸四年出 中論疏二卷九識義記二卷太淸三年於新吳美業寺出轉法輪義記大同三年出右一十六部合四十六卷武帝末世至承聖年西天竺優禪尼國三藏法師波羅末陁梁言眞諦遠聞簫主菩薩行化搜選名匠軌範聖賢懷寶本邦來適斯土所齎經論樹葉梵文凡三百四十夾若具足翻應得二萬餘卷多是震旦先所未屬梁季崩離不果宣吐遇緣所出略說如前後之所翻復顯陳錄載序其事多在曹毘三藏傳文長房曰僧祐云道由人弘法待緣信哉有人有法無緣不値時遇良時好緣而闕人無法蒼生可良足悲夫衆經要抄一部幷目錄八十八卷右一部天監七年十一月帝以法海浩博淺識窺尋卒難該究因勅莊嚴寺沙門釋僧旻等於定林上寺緝撰此部到八年夏四月方了寶唱錄華林佛殿衆經目錄四卷右一錄天監十四年勅安樂寺沙門釋僧紹略取祐三藏集記目錄分爲四色餘增減之見寶唱錄經律異相一部幷目錄五十五卷天監十五年勅撰名僧傳幷序目三十一卷衆經飯供聖僧法五卷亦十五年衆經目錄四卷十五年衆經護國鬼神名錄三卷十五年衆經諸佛名三卷十五年衆經擁護國土諸龍王名錄三卷十六年衆經懺悔滅罪法三卷出要律儀二十卷右九部合一百二十七卷帝以國土調適住持無諸災障上資三寶賴四天下藉龍王衆神祐助如是種種世間蒼生始獲安樂雖具有文散在經論急要究尋難得備睹故天監中頻年降勅令莊嚴寺沙門釋寶唱等摠撰集錄以備要須建福攘災或禮懺除障或饗神鬼或祭龍王諸所祈求帝必親覽事祠禱訖多感靈所以五十年間兆民荷賴緣斯力也大般涅槃子注經七十二卷右一部天監年初建元寺沙門釋法朗注見寶唱錄摩訶般若波羅蜜子注經五十卷或一百卷右一部武帝蕭衍年三十七卽位位四十九年年八十六帝以庭蔭早常懷哀感每歎曰雖有四海之無以得申罔極故留心釋典八部般若是十方三世諸佛之母消除災障蕩滌煩勞故採衆經述注解又親講讀冀藉茲勝福得展思慕頻奉代捨身時地爲之震相繼齋講不斷法輪於鍾山起大愛敬寺靑溪起智度寺臺內立至敬殿景陽臺立七廟室月再過設淨饌每至展拜及宗廟蒸嘗未曾不涕泗滂沱哀感左右預從莫不掩淚普通八年造同泰寺成樓閣殿綺飾陵雲九級麗巍永寧開大通門對同泰寺因號大通元年三月六日大駕每親臨幸寺禮懺雖億兆務殷而卷不輟手覽內外經論典墳恒以達曙自禮記古文周書左傳老莊諸子論語往哲未詳前儒所滯悉皆訓釋國學生數有限兼又隔以貴賤每欲招來後進備斯善誘故別置立五館博士以引寒儁致孔釋二鬱然森茂前後有集百二十卷著通史苑等數千卷年事雖自强不息未明求衣坐以待旦五更便出外殿秉燭而省萬機流恩獄市多所弘恕其有應羅重憲可矜原改容久之焚香念佛然後下悲愍黎元慈惻若是察奸摘伏有若通神自非享宴不聽音樂宮妃嬪竝無羅綺內殿小寢衣衾率素布被莞席草履葛巾無餘服玩天監中便血味備斷日唯一食食止菜蔬蜀獻芋蒻噉之覺美與肉何異勅復禁之帝王能然信不思議菩薩君也般若抄十二卷右天監十六年勅靈根寺沙門釋慧令撰見寶唱錄高僧傳十四卷幷錄目右一部武帝世會稽嘉祥寺沙門釋慧皎撰皎學通內外善講經律著涅槃義十卷梵網戒等疏盛行爲時所軌成實論類抄二十卷右天監年優婆塞袁曇允撰與齊文宣抄經相似亦見唱錄法寶集二百卷亦云法寶聯璧右一部簡文帝蕭綱在儲宮日躬覽內經指撝科域令諸學士編寫結連成此部卷以類相從有同華林遍惰學者有省過半之功義林八十卷右一部竝大通年勅開善寺沙門釋智藏等二十大德撰但諸經論有義例處悉錄相從以類聚之同世林無事不植每大法會帝必親覽以觀講論賓主往還理致途如指掌也內典博要三十卷右一部湘東王記室虞孝敬撰羅經論所有要事備皆收錄同皇覽類苑之流敬後出家改名慧命入關亦更有著述云然此博亦是內學群部之要徑也後魏元氏翻傳佛經錄第十三元氏之先北代雲中虜也世爲豪傑南去定襄四千餘里案梁湘東王繹貢職圖云本姓托跋鮮卑胡人也西晉之亂有托跋盧出居晉樓煩地晉卽封爲代王於後部落分散經六十餘年至盧孫拾翼鞬或言涉珪魏史云卽道武皇帝魏之太祖也改號神瑞元年當晉孝武太元元年也據朔州東三百里築城立邑號爲恒安之都爲符秦護軍堅敗後乃卽眞號知信佛興建太寺恒安郊西大谷石壁皆鑿爲窟高餘十丈東西三十里櫛比相連其數衆矣谷東石碑見在紀其功績不可以筭也其碑略自魏國所統貲賦竝成石龕故其規度宏遠所以神功逾久而不朽也至第三主太武帝伏釐世信納邪言毀壞佛法誅僧破寺涉歷七年惡疾災身薨後還復四主在北至孝文帝宏世遷京洛陽改姓稱元去胡衣服冠冕絕虜語尊華風手制文章談述雅誥聖天子也至孝明帝熙平元年太后胡氏造永寧寺起九層木浮圖高九十丈上有寶剎復高十丈去地千尺離京百里卽遙見之初欲築基掘至黃泉下得金像三十二軀太后信爲崇法之祥徵也是以營造窮極世工剎上金寶甁容二十五石寶甁下有承露金盤一十一重周帀輪郭皆垂金鐸復有鐵鎖四道引剎向浮圖角四角鎖上亦有金鐸大小皆如一石甕浮圖九級角角皆懸金銅鈴合上下有百三十鐸浮圖四面別各有三門六窗竝皆朱漆扇上各有五行金鈴其十二門二十四扇合有五千四百枚鈴鈴下復鏤金鐶鋪首造製之巧極土木之工庶人子來匪日而作佛事精妙不可思議繡柱金鋪駭人心目至於秋月永夜高風寶鐸和鳴聲響十里佛殿一所形如太極有丈八金像一軀等身金像十軀眞珠像三軀金織成像五軀玉像二作工奇巧冠於當世僧房樓觀一千餘間雕梁粉壁靑瑣綺疏難得而栝柏椿松扶疏簷霤叢竹香草布護階庭是以常景製寺碑云須彌寶殿兜率淨宮莫尚於斯是也外國所獻神異經像皆在此寺寺之牆院皆施短椽以瓦覆之狀若宮牆寺之四面各開一門其正南門有三重樓三閣道去地二十丈形製似今端門圖以雲氣畫彩仙靈列錢靑鎖赫弈華麗夾門兩傍有四力士四師子以金碧加之珠玉莊嚴煥炳世所未東西兩門悉亦如之所可異者唯樓兩重北門一道上不施屋似烏頭其四門外皆樹靑槐亘以淥水邑行人多庇其下路斷車蓋非由淹雲之潤淸風送涼豈藉合歡之發而供養具與祇園等四事給施七百梵僧菩提流支爲譯經首也勅遣李廓撰經錄云至永熙主遷入關中西東南北四魏合一十六帝歷一百六十一年沠入周齊依撿道俗一十四人所出經傳錄等摠八十七部合三百二卷爲後魏三代之經錄云北臺沙門釋曇曜二部五卷經傳沙門釋曇靜一部二卷經沙門吉迦夜五部二十五卷經論沙門釋曇辯一部一卷經南京沙門曇摩流支三部八卷經沙門釋法場一部一卷經沙門菩提流支三十九部一百二十九卷經論錄沙門勒那摩提六部二十四卷經論方沙門佛陁扇多十部一十卷經論鄴都婆羅門瞿曇般若流支一十四部八十五卷經論 王子月婆首那三部七卷經期城郡守楊衒之一部五卷寺記淸信士李廓一部一卷經錄 沙門達摩菩提一部一卷元魏北臺淨度三昧經第二出與寶雲譯二卷同廣略異見道祖錄付法藏傳四卷見菩提流支錄右二部合五卷宋文帝元嘉二十三年丙戌是北魏太平眞君七年太武皇帝信任崔皓邪佞諂諛重寇謙號爲天師殘害釋種毀破浮啚至庚寅年太武遭疾方始感兼有白足禪師來相啓發生愧悔心卽誅崔皓到壬辰歲太武帝孫文成立卽起浮圖毀經七年還興三寶至和平三年昭玄統沙門釋曇曜慨前陵廢欣今載興於北臺石窟寺集諸僧衆譯諸傳流通後賢使法藏住持無絕提謂波利經二卷 見出三藏記右宋孝武世元魏沙門釋曇靖於北臺撰見其文云東方太山漢言代嶽陰陽交代故云代嶽於魏世只應言魏言乃曰漢言不辨時代一妄太山卽此方言乃以代嶽譯之兩語相翻不識梵魏二妄例甚多不可具述備在兩卷經文舊錄別載有提謂經一卷與諸經語同但靖加足五方五行用石糅疑成疑耳今以一卷成者爲定雜寶藏經十三卷付法藏因緣傳二卷或四卷因緣廣異曜自出者稱揚諸佛經三卷第二出一名集花一見在佛名一諸佛華四名與羅什宋跋陁羅譯者本同出異大方廣菩薩地經第二出與晉法護出菩薩十地大同小異見始興錄方便心論二卷或一卷凡四品右五部二十五卷宋明帝世西域沙門吉迦夜魏言何事延興二年爲沙門統釋曇曜於北臺重譯孝摽筆受見道慧宋齊錄寶車菩薩經一云妙好寶車經右齊武帝世元魏淮州沙門釋曇辯出後靑州沙門道侍改治訪無梵本世多注爲疑見三藏集記及諸別錄元魏南京信力入印門經五卷正始元年出如來入一切佛境界經二卷景明二年白馬寺出一名如來莊嚴智慧光明入一切諸佛境界經金色王經正始四年出法上錄云菩提流支後更重勘右三部合八卷齊梁間南天竺國三藏法師曇摩流支魏云法希雒陽爲宣武帝譯沙門道寶筆受辯意長者子所問經一名長者辯意經右梁武帝世天監年中元魏沙門釋法場於雒陽出見沙門法上錄佛名經一十二卷正光年出入楞伽經一十卷延昌二年譯第二出與宋跋陁羅四卷楞伽廣略爲異沙門僧朗道湛筆受大薩遮尼乾子受記經十卷正光元年於雒陽爲司州牧汝南王於弟出或七卷法集經八卷延昌四年於洛陽出僧朗筆受或六卷見法上錄勝思惟梵天所問經六卷神龜元年於洛陽出第三出與法護出六卷持心經十四卷思益經同見法上錄深密解脫經五卷延昌三年於洛陽出僧辯筆受見法上錄奮迅王問經二卷第二譯與秦世羅什出自在王經同本不增不減經二卷正光年於洛陽譯或一卷金剛般若波羅蜜經永平二年於胡相國第出僧朗筆受與羅什出小異見法上錄差摩波帝受記經正光年洛陽出佛語經僧朗筆受 不必定入印經覺意筆受無字寶篋經僧朗筆受大方等修多羅經第二出與轉有經同本異譯彌勒菩薩所問經與大乘要慧經同本別出於趙欣宅譯覺意筆受第一義法勝經伽耶頂經第二出與羅什菩提經同本一名伽耶頂經論別出異名僧朗筆受文殊師利巡行經覺意筆受一切法高王經與諸法勇王經同本別出護諸童子陁羅尼經撿失本今獲謗佛經第二出與法護決定摠持經同本別名一云決定摠持經十地經論一十二卷李廓錄云初譯宣武皇帝親一日自手 筆受然後方付沙門僧 辯訖了勝思惟經論一十卷普泰元年洛陽元桃楊宅出僧朗僧辯筆受彌勒菩薩所問經一十卷在洛陽趙欣宅出寶積經論四卷 實性論四卷金剛般若經論三卷永平二年於胡相國宅出僧朗筆受順中論二卷侍中崔光筆受妙法蓮華經論二卷曇林筆受幷制序伽耶頂經論二卷天平二年鄴城殷周寺出一云文殊師利問菩提心經論僧辯道湛筆受三具足經論正始五年出侍中崔光筆受無量壽優波提舍經論普泰元年僧辯筆受寶髻菩薩四法論 轉法輪經曇林筆受十二因緣論 百字論 破外道四宗論破外道涅槃論 譯衆經論目錄右三十九部合一百二十七卷武帝世北天竺國三藏法師菩提流支魏言道希從魏永平二年至天平年其間凡歷二十餘載洛及鄴譯李廓錄稱三藏法師房婆羅門經論本可有萬夾所翻經論筆受草本滿一間屋然其慧解與勒那相亞而神悟聰敏洞善方言兼工雜術嘗坐井口澡甁內弟子未來無人汲水三藏乃操柳聊撝井口密心誦呪纔始數遍遂涌上平至井脣三藏卽鉢盌酌傍僧見之竝歎爲聖法師是術法耳外國共行此方不習言是聖懼惑於世遂秘雜法云毘耶娑問經二卷十地經論一十二卷初譯論時未善魏言名器世間爲盞子世間後因入殿齋見諸德索器乃摠授盎幞因悟器是摠名遂改器世間云究竟一乘寶性論四卷一寶性分別七乘增上論趙忻宅出見寶唱錄寶積經論四卷與十地二論菩提流支竝譯且二德乖各不相詢訪其閒隱沒更有不同致綴文言亦有異處 後人始合見寶唱錄載法華經論侍中崔光筆受龍樹菩薩和香方凡五十法右六部合二十四卷梁武帝世中天竺國三藏法師勒那摩提或云婆提魏言寶意正始五年來在洛陽殿內譯初菩提流支助傳後相爭別譯沙門僧朗覺意侍中崔光等筆受金剛上味陁羅尼經如來師子吼經上二經正光六年出轉有經 十法經 銀色女經正法恭敬經或無法字亦云威 德陁羅尼中說經無畏德女經與阿術達菩薩經同本異出曇林筆受無字寶篋經右六經元 象二年出阿難多目佉尼訶離陁羅尼經與支謙無量微密持一跋陁羅無量門持一舍利弗陁羅尼一功德直無量門破魔陁羅尼等五經同本別出異名攝大乘論二卷普泰元年出右一十部合一十一卷梁武帝世天竺國三藏法師佛陁扇多魏言覺定從正光六年至元象二年洛陽白馬寺及鄴都金花寺譯元魏鄴都正法念處經七十卷興和元年鄴城大承相高澄弟譯曇林僧昉等筆受聖善住意天子所問經三卷興和三年 鄴城金華寺出與護出如幻三昧經同本別名曇林筆受八佛名經 金色王經上二經竝興和四年於金花寺出曇林筆受無垢女經興和三年出無垢優婆夷問經興和四年出寶意猫兒經於金華寺爲高仲密出菩薩四法經金華寺出曇林李希義等筆受解脫戒本興和三年出僧昉 筆受出迦葉毘律犢子道人問論於金花寺爲高仲密出李希義筆受廻諍論元象元年出曇林筆受業成就論興和三年於金花 寺出曇林筆受唯識無境界論亦云唯識論伊迦輸盧迦論上二論竝金華寺出右一十四部合八十五卷梁武帝世東魏南天竺國波羅奈城婆羅門瞿曇般若流支魏言智希從元象至興和末在鄴城譯時有菩提流支雖復前後亦同出經而衆錄目相傳抄寫去上菩提及般若字唯云流支譯不知是何流支迄今群交涉相參謬濫相入難得詳定後賢博採幸願討之僧伽咤經四卷元象元年於司 徒公孫騰第譯大迦葉經二卷一無大字頻婆娑羅王問佛供養經上二經竝興和三年出右三部七卷梁武帝世東魏中天竺優禪尼國王子月婆首那魏言高空於鄴城譯昉筆受雒陽地伽藍記五卷或爲七卷右期城郡守揚衒之撰其序云墳五典之說九流百氏之言竝理在人區而義非天外至於一乘二諦之源六通三達之旨西域備詳土靡記自項日感夢滿月流光門飾毫眉之像涼臺圖紺髮之形爾來奔競其風遂廣至於晉室永唯有寺四十二所皇魏受圖宅嵩洛篤信彌繁法教逾盛王侯貴臣棄象馬如脫屣庶士豪家資財若遺迹於是招提擳批寶塔騈羅云云 京城內凡有一千餘寺竝選摘祥異以注述云衆經錄目右梁武帝世雒陽淸信士李廓魏永平年奉勅撰廓通內外學注述經錄甚有條貫大涅槃論一卷右撿唐前錄云達摩菩提譯不顯帝代疑故附此後齊高氏傳譯佛經錄第十四元魏將季其祚分崩肅宗孝明崇信佛理太后胡氏親臨國政一紀之內天下晏然及帝之崩梟鏡相及爾朱榮死於內殿吐萬仁擒帝晉陽高歡承舋破爾朱於鄴下宇文接亂翊平陽於關內歡乃燒洛宮殿殄絕帝圖建號天平徙都北鄴一十七載扶翼魏室梁太淸三年武帝旣崩高歡先世子澄襲相又殂魏之靜帝乃禪位於高洋卽相王之第三子也世族武川神用卓詭愚智混迹賢聖亂倫建號天保仍都鄴下王四瀆之三九州之五誅滅李老其流出家道士抗勅令深剃遂斬之於是竝歸佛法十年之中佛法大盛僧二百餘萬寺出四十千竝通弘護中興大法相承六主二十八年爲周所滅譯人道俗二頭出經論八部五十三卷爲高齊錄云沙門那連耶舍七部五十 二卷經論優婆塞 萬天懿一部一 卷經菩薩見實三昧經十四卷天統四年天平寺出月藏經一十二卷天統二年天平寺出月燈三昧經一十卷天保八年天平寺出大悲經五卷天保九年 天平寺出須彌藏經二卷然燈經亦名施燈功德經上二經同天保九年於天平寺出法勝阿毘曇論七卷河淸二年天平寺出右七部五十二卷周明帝世高齊沙門統北天竺烏場國三藏法師那連提耶舍齊言尊稱於鄴城譯昭玄沙門都瞿曇般若流支長子達摩闍那齊言法智傳語尊勝菩薩所問經一名入無量 門陁羅尼經右周武帝世高齊居士萬天懿於鄴城譯懿元是鮮卑姓萬俟氏而出家師事婆羅門甚聰哲梵書語工呪術醫方故預翻譯焉大唐內典錄卷第四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이하 문제와 하상지의 대화는 『홍명집』 권11에 수록된 「하상지답송문제찬양불교사(何尙之答宋文帝讚揚佛敎事)」에 그대로 실려 있다.
  2. 2)석호(石虎, 295~349, 재위:334~349)는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후조(後趙)의 제3대의 황제이다. 자는 계룡(季龍),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제(武帝)이다. 석호는 석륵(石勒)의 조카로 29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구멱(寇覓)이며, 석륵의 아버지 주갈주(周曷硃)가 석호를 아들로 삼았다. 그래서 석호와 석륵이 형제로 기록되기도 한다. 거섭조천왕(居攝趙天王)이 되어 후조를 통치하게 된 석호는 양국(襄國)과 업(鄴)에 궁궐을 수축하고 황하에 다리를 놓는 등 무리한 토목 공사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3. 3)하남성(河南省) 의양현(宜陽縣)의 서쪽에 있는 연못이다.
  4. 4)공자의 제자인 자로(子路)를 달리 부르는 말이다.
  5. 5)의동(儀同)은 관명으로 원훈자를 우대해서 내리는 직책이다. 의동삼사(儀同三司)의 줄임말이다. 실제로 그 직책을 수행한 것은 아니다.
  6. 6)혜교(慧晈)의 『고승전(高僧傳)』 제3권 「구나발마전」에 나온다.
  7. 7)『고승전』 권3(대정장 50, p.344下)에 따르면 임금이 “마하연은 총명하여 기미를 아는 자인데 단지 늙음이 이미 이르렀다”고 하면서 시험을 했는데, “오직 한 가지가 있다”고 말하자, 마하연은 늙어서 죽음 한 가지만 남았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8. 8)5호 16국 가운데 북연(北燕)은 용성(龍城)을 도읍으로 했는데, 이곳을 남조 송(宋)에서는 황룡(黃龍)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나라를 황룡국이라고 불렀다.
  9. 9)고려대장경과 대정장 모두 태시(太始) 연간(355~363)으로 되어 있지만, 송대의 연호인 태시(泰始)로 바로 잡는다.
  10. 10)『고승전』 권7(대정장 50, p.366下~367上)에서는 서원하기를, “만약 내가 말한 것이 경의 논리에 어긋난다면 청하건대, 현재 이 몸에서 곧 문둥병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고, 만약 나의 말이 실상과 서로 위배되지 않는다면 원컨대, 목숨을 버리는 날 사자좌에 앉게 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다.
  11. 11)후한대에 처음으로 설치한 관직의 명칭이다. 처음에는 중앙 정부에만 설치되었는데 성격이 약간씩 변해서 남북조 시기에는 공부(公俯)나 왕(王)은 모두 이 기실을 두었다. 이들의 역할은 서기(書記)이다. 현재 비서나 서기관에 해당한다.
  12. 12)자자는 안거(安居)를 마치고 서로 자기가 저지른 잘못을 고백하고, 참회하여 용서를 구하는 의식을 말한다.
  13. 475)13)고려대장경과 대정장 모두 “영휘(永徽)”라 하였으나, 이는 “원휘(元徽)”의 오기로 바로잡는다. 『고승전』 권13, 「흥복興福」 제8(대정장 50, p.411中) 참고.
  14. 14)임천왕(臨川王) 굉(宏)을 가리키는데, 그는 불아가 모셔진 정림상사(定林上寺)의 시주자였다.
  15. 15)항상 임금을 곁에서 모시는일을 담당하는 관리의 직명이다.
  16. 16)천감3년(504) 무제가 발표한 「사도귀불문(捨道歸佛文)」을 말한다.
  17. 17)『내전박요』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기실(記室)이라고 했다.
  18. 18)여기서 말하는 대(臺)는 임금이 국정을 관할하고 있는 궁궐을 말한다.
  19. 19)십물(十物)ㆍ십품(十品)ㆍ십보(十寶)라고도 하는데, 집(什)은 잡(雜)의 뜻으로 사원이 소유하고 있는 갖가지 물건을 가리킨다.
  20. 20)범어 Hiraṇyavati의 의역이다. 희련(希連)이라고 음역하기도 하고, 희련선하(熙連禪河)라고도 한다. 이 강은 부처님 열반지를 흐르고 있다.
  21. 21)불교 경전에 대한 통칭이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소승경전을 가리키고 있다.
  22. 22)방등경전(方等經典)의 약칭으로 여기서는 대승경전을 말하고 있다.
  23. 23)법장부(法藏部)ㆍ화지부(化地部)ㆍ대중부(大衆部)ㆍ유부(有部)ㆍ음광부(飮光部) 등 5부가 각각 4분율ㆍ5분율ㆍ마하승기율ㆍ십송률ㆍ가섭유율(迦葉維律)의 계법으로 나뉜 것을 말한다.
  24. 24)구마라집은 요진대에 장안의 소요원에 머물면서 역경에 종사했다.
  25. 25)혜원은 여산의 반야대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했다.
  26. 26)대천(大天)의 오사(五事)를 말한다.
  27. 27)태청(太淸)은 중국 양(梁) 무제(武帝)의 일곱 번째 연호로 547년 5월에서 549년까지 2년 8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태청이라는 연호는 3년까지만 사용하였고, 그 이후에는 대보(大寶, 550~551)를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이후에 나오는 태청 4년, 5년은 그 연원이 정확하지 않다.
  28. 28)이는 패엽경(貝葉經)을 말하는데, 패다라(貝多羅), 즉 나뭇잎이라는 뜻에서 온 말로 패다(貝多), 또는 패다라엽(貝多羅葉)이다. 패엽경이라는 명칭은 패트라(pattra)라고 불리는 식물의 잎을 사용한 것에서 유래한다.
  29. 29) 『황람(皇覽)』 120권은 중국 최초의 유서(類書)로지금의 백과사전과 같은데,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칙령으로 편찬되었다. 오경(五經)과 여러 서적을 모아 부류별로 정리한 책이다. 무복(繆卜) 등이 편찬했다.
  30. 30)산서성(山西省)의 일부 지역에 해당한다. 주로 호족(胡族)들이 거주하던 곳이다.
  31. 31)북위태조(北魏太祖) 도무황제(道武皇帝) 탁발규(拓跋珪)는 재위 386~409년인데, 그가 사용했던 연호는 등국(登國, 386~396), 황시(皇始, 396~398), 천흥(天興, 398~404), 천사(天賜, 404~409) 등이었다. 북위의 제2대 태종(太宗) 명원황제(明元皇帝) 탁발사(拓跋嗣)는 재위 409~423년인데, 그가 사용했던 연호는 영흥(永興, 409~413), 신서(神瑞, 414~416), 태상(泰常, 416~423) 등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동진(東晉) 제9대 열종(烈宗) 효무황제(孝武皇帝) 사마요(司馬曜)는 재위 372~396년으로 그의 연호는 영강(寧康, 373~375), 태원(太元, 376~396)으로 태원 원년은 376년으로 연대가 맞지 않는다. 
  32. 32)삼분(三賁)은 복희ㆍ신농ㆍ황제의 글을 말하고, 오전(五典)은 오제(五帝)의 글을 말한다.
  33. 33)춘추전국시대는 기원전 221년 진나라에 의한 중국 통일 이전의 시기로 이 시대는 중국사상의 개화결실의 시기였다. 이 시대의 사상가들을 제자(諸子)라 하며 그 학파들을 백가(百家)라 부른다.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 음양가(陰陽家), 명가(名家), 종횡가(縱橫家), 법가(法家), 잡가(雜家), 농가(農家) 등의 9유파(流派)로 나뉘었다. 『사기(史記)』에서는 제자백가를 음양가, 유가, 묵가, 명가, 법가, 도가 등의 6가로 분류하였다. 반면, 『한서(漢書)』, 「예문지」에서는 『사기』의 6가에 종횡가, 잡가, 농가, 시부가(詩賦家), 병가(兵家), 수술가(數術家), 방기가(方技家) 등의 8가를 추가하여 14가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한서(漢書)』, 「예문지」에서는 제자백가 중 대표적인 10개의 학파를 구류십가(九流十家)라고 부르고 있다. 구류십가는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등 구류(九流)에 소설가(小說家)를 더한 것이다. 즉, 소설가를 제외한 9학파는 “가(家)”와 “류(流)”모두에 들어가지만 소설가는 “가(家)”에는 들어가지만 “류(流)”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34. 34)숭(嵩)은 숭산(嵩山)을 말하는데 낙양의 동남쪽에 있다. 낙(洛)은 낙수(洛水)를 말하는데 낙양의 남쪽에 있다. 이것 둘을 합쳐서 낙양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35. 35)여기서 광택(光宅)은 즉 “큰 빛이 거처하다[光大所居]”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도읍을 삼는다는 이야기다.
  36. 36)무천(武川)은 우문태가 태어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