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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문불응배속등사 서문
소미(少微) 지음
저 계혼(鷄渾)가 일(一)을 일으키자 용성(龍聖)이 삼(三)을 열었다. 복희씨(伏羲氏)가 괘효(卦爻)를 긋자 매듭으로 의사를 전하던 시대를 넘었고 헌원씨(軒轅氏)가 문자를 짓자 칼로 새겨서 의사를 표현하던 시대를 초월하였다. 임금이 단정하고 엄숙하게 우주의 가운데에서 드높으니 반사표거(班屣漂裾:臣下)가 빛나게 선달(璿達:帝王의 자리)의 좌우를 보좌하여 넓은 계책이 예악(禮樂)에 남아돌고 빼어난 업적이 인의(仁義)에 오른다. 또 달에 깃들고 노을에 싸여 있는 준걸과 자라 등에 타고 잉어를 거느리는 영준한 벗이 있어 욕망을 막고 매미 같은 모습으로 비밀한 동학(洞壑)에서 단균(丹菌:신선의 버섯)을 먹고 곡식을 그만두고 허물을 벗은 매미 같은 그림자가 푸른 이슬을 신구(神丘:신선이 사는 언덕)에서 마시다가 끝내는 세월이 빠른 것에 놀라며 부질없이 부경(浮輕)한 즐거운 모임만 많이 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능인(能仁:부처님)이 운세를 어루만지며 범전(梵典:불교 경전)이 종문(宗門)을 열어 묘륜(妙輪)을 지어 일찍이 외도를 쳤고 보기(寶騎:보배 말)를 일으켜 높이 인도한 일만 하겠느냐? 생(生) 없는 생을 지극한 진리에서 생생(生生)에 구궁(究窮)하고 멸하지 아니하는 멸(滅)을 그윽한 원천에서 멸멸(滅滅)에 구궁하였다. 삼천대천세계에 빛나는 지혜의 횃불이 통하였고 억만 년이 다하도록 법려(法䗍:법의 지킴)의 메아리를 끌고 가서 번화한 그물 느슨한 끈으로 탕(湯)의 시대에 세 가지 주문이 멀리 행해졌고, 고해(苦海)의 파도에 널리 가라앉은 곳에서 하(夏)의 시절에 사승(四乘)이 앞서 갔다. 그리하여 수많은 지방을 적셔서 혜택을 베풀었고 먼 세월을 건너오면서 그 공훈이 응집되었다. 그 의용(儀容)을 이어받은 사람은 곧 자황(紫皇:玉皇上帝)의 공경도 굴복시켰고 그 도에 들어간 사람은 모든 백성들의 존경의 대상으로 표시되어 사랑하고 익히는 좋은 자산이 되었고 진로(塵勞:번뇌)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의지처가 되었다.
그 후 별빛의 끝이 소명하게 제왕(帝王)의 꿈을 비추게 되자 날아가는 광명이 동방으로 옮겨졌고 부도(浮屠)의 상(像)이 서쪽에서 계빈국(罽賓國)의 교화를 옮겨 와서 고인(高人)이 그 영향을 받고 관계를 맺어 은함(銀函)에서 묘설(妙說)을 부연하였고 무덕(茂德:大德)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패엽(貝葉)에서 진리의 말씀을 베풀었다. 줄지은 높은 벼슬아치가 이로써 불법을 숭봉하게 되었고 면면한 시대에 걸쳐 이로써 불법을 흠모하고 숭상하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부진(符秦:符堅이 세운 後秦)이 삼가는 생각으로 취련(翠輦:임금이 탄 초록빛 큰 가마)을 돌려서 함께 기뻐하였고, 유한(劉漢:劉邦이 세운 漢나라)이 경건한 정성으로 상여(緗輿:임금이 탄 수레)에서 내려서 예(禮)를 이루었다. 오직 우도(牛圖:尋牛圖)가 있어서 늦게 움직였기에 지혜의 빛이 애매하다가 다시 밝아졌고 용서(龍緖:王通)가 쇠잔하던 날 덕수(德水)가 응어리져 응집되었다가 다시 녹아 풀리게 되었다.
우리 대당(大唐)은 태양과 바다에 징비(澄飛)하고 노을진 곤륜산을 치고 밝혔다. 기쁨이 늘어나 길상(吉祥)한 기운이 흐르고 밝고 빛나는 운세가 길조를 바쳤다. 재산은 자주(紫宙:紫微宮)를 이루고, 성대하게 개립(改粒:백성의 식량을 쌀로 바꾸는 것)한 공훈은 백성들을 크게 보호하게 되었고, 천상(遷裳:백성의 옷을 비단옷으로 바꾸는 것)의 업을 자욱이 깔았다.
황제 폐하께서는 우레를 타고 북극을 진동시키며 번갯불을 녹이는 이궁(離宮)에서 구교(九駮)를 몰고 일찍이 달려갔고, 팔익(八翼)에 올라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가니, 그 풍도는 굴산(崛山)을 희구하였고, 신기(神畿)에 학원(鶴苑)을 열고, 교화를 연하(連河: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에 우러러 보았다. 봉대(峰臺)를 뛰어난 땅에 구축하고 섭유(攝誘)의 아름다운 모범을 깔았고 애경(愛敬)의 홍모(洪謨)를 도탑게 하였다. 그리하여 나라를 거느리는 데는 반드시 충성으로 단장되기를 기다렸고, 집안을 거느리는 데는 효도에 바탕을 두기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에 승려와 비구니들에게 명하여 그들도 장차 꿇어 엎드려 절하는 의식을 펴게 하시니, 느긋하던 마음이 응어리져서 충간(忠諫)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회부(會府)에 통고된 규칙은 마음으로 인연하여 염원에 남아 있게 되었고 영준한 관료들에게 여론의 칭송을 주워 모으게 하였다.
비록 시끄러운 논의로 서로 공박하면서 각기 그 뜻을 말하기는 하였으나 황제의 가슴 속에서는 여러 번 선택을 거치면서 마침내 평상시대로 통솔하게 되었다. 특히 다시 되돌아보신 은혜를 품게 되었다. 그리하여 곧 이어 법당에 올라가서 예배를 이루게 되었다.
종상인(悰上人)은 충우(忡宇)가 엄목(淹穆)하시고 빼어난 기량으로 슬기로움을 이어받아 먼 운치가 굳세게 통하였고 가파롭고 높은 가락은 한가롭고 여유가 있었다. 그의 몸의 성곽(城廓)에는 물결이 고요하였고 보배칼을 날려서 하늘을 찌르고 생각의 나무는 분분히 펼쳐져 보배롭고 멀리 특출하게 솟아나 하늘을 스쳤다.
이미 아홉 선비들의 가늠을 흡족케 하였고 다시 두 장경(藏經)의 현미함을 탐구하였으니 스님의 무리들은 그 좋은 구절을 독차지하고 속인의 무리들은 그 아름다운 바람에 고개숙였다.
본래 우연히 발자취가 술잔을 타고 명성과 짝을 이루어 지팡이를 날린 것일 것이다.
장차 헷갈린 중생과 곡학(曲學) 천근(淺近)한 지식과 외로운 들음을 지닌 사람들이 속인에 적합한 방편을 진리를 이해하는 실상이라 생각하고, 봉각(鳳閣)에 소리치려 해도 이룰 수 없을 것이고 난액(鸞掖:봉의 겨드랑이)을 두드려 보려 해도 따라오는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에 호념(護念)할 마음이 일어나 발휘하는 작용을 열게 될지도 모른다.
멀리 진(晋)나라 시대에서 지금의 성대(聖代)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배(禮拜)를 논의한 일을 모두 모아 이를 기록하여 모두 합하니 세 편이었는데 이를 나누어 여섯 권을 이루었다.
이를 위하여 찬론(贊論)을 지어 규격을 정함으로써 길로 통하게 하니 번화하게 장식된 내용은 장장(鏘鏘)한 소리를 머금게 되었고 아로새긴 문장은 오색빛을 떨치게 되었다. 참으로 그윽이 숨은 자취를 격앙(激昻)케 하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나루터를 맑게 씻어내는 원인이 될 것이다.
숨어 사는 나그네는 학업은 적고 재주는 성기고 이름은 황무한 사람이다. 연교(煙郊:郊外)에 앉아서 자취를 숨기고 바람부는 집에 잠자면서 정신을 깃들여 온 사람이라 부질없이 일찍부터 화편(花編:꽃같이 아름다운 문장)을 숭상하고 깊이 엽전(葉篆:나뭇잎 같은 篆書)을 숭상하다가 이 성사(盛事)를 기뻐하여 글을 엮어 이에 서문을 지었다.
가을 개똥벌레의 가벼운 빛이 복희씨의 태양과 같은 빛남을 돕는 것은 아니며, 봄 개구리의 누추한 메아리가 어찌 대악(大樂)의 음률을 돕겠는가마는 잠시 정을 말하였을 따름이니 어찌 아름다운 문장을 지었다고 하겠는가? 나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라면 꾸중을 하지 말았으면 다행으로 생각하겠다.
집사문불응배속등사(集沙門不應拜俗等事) 제1권
석언종(釋彦棕) 지음
이창섭 번역
1. 고사편(故事篇) ①
고사(故事)라 한 것은 수(隋)나라 시대 이상의 스님들이 공경을 다한 등의 일을 밝힌 것이다.
대법(大法)이 동방으로 흘러 들어온 지 6백여 년이 지났다. 그 가운데서 믿는 사람과 훼방(毁謗)하는 사람이 서로 바뀌고 칭송하고 좌절시키는 일이 서로 바뀌어 빠르게 인잔(湮殘)에 물들고 자주 절하고 엎드리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나라를 경륜하는 일이 아니며 이치도 하늘이 내린 상도(常道)를 넘어선다. 이것이 작용하면서 도(道)를 좀먹게 하는 일이 된다. 이 모두는 예전 관습에 따르게 한 것이다.
1) 진(晋)나라 하충(何充) 등이 스님은 왕에게 공경하는 예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상주(上奏)를 아뢴 글[3수]과 서문
동진(東晋) 함강(咸康) 6년(340)에 성제(成帝)1)가 나이가 어렸다. 그때 태후(太后)가 조정에 나아가 사도(司徒)인 왕도(王導)에게 상서(尙書)의 일을 맡기고 상구(上舅:나이가 많은 외삼촌)인 중서령(中書令) 유량(庾亮)2)에게 조정의 정치에 참여하여 보필하게 하였다. 그 후 왕도 등이 죽고 나서는 유빙(庾氷)3)이 정치를 보좌하였다. 유빙이 말하였다.
“스님들도 왕(王)에게 공경을 다해야만 한다.”
하충(何充) 등은 “공경해서는 안 된다.”라고 의론하고 예관(禮官)에게 상세히 검토하라고 하였다. 태상 박사(博士) 등의 논의는 하충과 같았으나 문하성(門下省)은 유빙의 뜻을 이어받아 공박하였다. 하충 등은 이로 인하여 이 상주(上奏)를 하게 되었다.
첫 번째 상주(上奏)
상서령(尙書令) 관군무군도향후(冠軍撫軍都鄕侯) 신 하충(何充)과 산기상시(散騎常侍) 좌복야(左僕射) 장평백(長平伯) 신 삽(翜)과 산기상시 우복야(右僕射) 건안백(建安伯) 신 회(恢)와 상서(尙書) 관중후(關中侯) 신 회수(懷守)와 상서 창안자(昌安子) 신 광(廣) 등은 말씀드립니다.
세조(世祖) 무황제(武皇帝)께서 성대한 밝음으로 혁명을 일으키시고 숙조(肅祖) 명황제(明皇帝)께서 총성(聰聖)ㆍ현람(玄覽)하셨는데, 그때 어찌하여 쉽게 스님들의 무릎을 꿇게 하지 못하였겠습니까? 도리어 사문들이 선을 닦는 방법을 변하지 않게 한 것은 천하 사람들의 뜻을 통하게 하려는 이유에서 였습니다. 어리석은 저희들은 선대 황제들의 옛 일을 따르는 것이 의리로 보아 훌륭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2) 유빙(庾氷)이 성제(成帝)를 위하여 스님들로 하여금 왕을 공경하도록 한 조서(詔書)[2수]
첫 번째 조서(詔書)
무릇 만방(萬方)이 풍속이 다르고 신도(神道)를 가려내서 말하기 어려운 것은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달관(達觀)하고 모든 일에 달통한다면 진실로 기괴한 일은 없어지게 될 것이다. 하물며 무릎을 꿇고 절하는 예법을 따른 것은 무언가 반드시 숭상하는 일이 있어서이니, 이는 마땅히 다시 선왕이 숭상하신 원인을 따져야 할 것이다. 어찌 이렇게 몸을 구부리게 하고 자신은 앉아서 반벽(槃辟)의 예를 받는 것을 좋아한 것이겠는가? 진실로 그렇지 않다.
부자(父子)간의 공경을 인하여 군신(君臣)간의 질서가 세워졌고 법도를 제정하고 예의질서를 숭상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어찌 부질없이 그렇게 한 일이겠는가? 이에는 자못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미 거기에 이유가 있다면 장차 무엇 때문에 이것을 바꾸겠는가? 그렇다면 명분과 예의가 만들어 졌을 때에는 거기에 사정이 없겠는가?
또한 지금 과연 부처가 있다고 해야 하겠느냐, 없다고 해야 하겠느냐? 부처가 있다고 한다면 그 도(道)는 물론 넓혀야 하겠지만, 부처가 없다고 한다면 부처의 논리는 장차 어디에서 그 믿음을 취하여 이어야 하겠는가? 그러나 장차 이것은 세상 밖의 일이다. 세상 밖의 일을 어찌 세상 안의 사람들이 몸담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형체를 고치고 평상시의 업무를 어기고 예법을 바꾸고 명교(名敎)를 버리니 이것은 내가 매우 의아하게 생각하는 바이다.
명교(名敎)에는 유래가 있어 백대에 걸쳐 폐지되지 않는 것이다. 왕조의 처음에 명교가 크게 드러나도 후세가 되면 오히려 위태로워진다. 위태롭게 되는 폐단은 그 이유를 찾지 않고 지금 망연하게 어둡고 희미하여 분간되지 아니한 것을 멀리 사모하고, 하루아침에 예법을 버리고 당세(當世)에 명교를 폐지하여 모든 범부의 무리들로 하여금 국헌과 법도에 오만하고 방일하게 만들어서야 되겠느냐? 또한 이것이 내가 매우 의아해 하는 일이다.
가령 부처를 믿을 수 있고 가령 부처가 있어서 내가 장차 그것을 신명(神明)에 통달할지라도 가슴 속에서 얻을 따름이다. 궤헌(軌憲)과 굉모(宏模)는 본래 바른 조정에서 폐지하여서는 안 되는 일이다.
무릇 이러한 사문의 무리들도 모두 진(晋)나라 백성이다. 그 재목[材]과 지혜를 논한다 하더라도 모두가 보통 사람이다. 그런데도 진위를 가려내기 어려운 불교의 말에 따라 복장의 장식을 빌려서 법도를 넘어서고 풍속이 다른 오만한 예법으로 항거해서 만승(萬乘) 천자 앞에 몸을 꼿꼿하게 세우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이것은 내가 취하지 아니하는 일이다.
여러분은 모두 나라의 그릇이다. 말을 깨닫게 되면 그 깊고 은미한 뜻을 추측할 것이고, 정치를 논하게 되면 나라의 법전을 존중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것이 그렇지 아니하게 된다면 나는 또 무슨 말을 하겠는가?
두 번째 상주
상서령 관군무군 도향후 신 하충과 산기상시 좌복야 장평백 신 삽과 산기상시 우복야 건안백 신 회와 상서 관중후 신 회수와 상서 창안자 신 광 등은 말씀드립니다.
조서(詔書)는 위와 같았으나 신 등은 식견이 어둡고 짧아 성지(聖旨)를 찬양하고 대의(大義)를 선창(宣暢)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엎드려 밝은 조서를 살펴보니 크게 두렵고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곧 함께 소상하게 그 내용을 찾아보았습니다.
부처가 있고 없고는 본래부터 신 등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남긴 글을 찾아보고 그 요지를 뚫어보면 오계(五戒)의 금기(禁忌)는 실로 왕화(王化)를 돕는 일입니다. 밝고 밝은 세속적인 명예로운 행동을 천하게 보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출세간적인 숨은 지조를 귀중하게 보며, 덕을 실천하는 것은 몸을 잊는 데에 있고 하나[道]를 간직하고 있어 마음이 맑고 신묘합니다.
또한 불교가 일어나서 한(漢)나라 시대에서부터 지금 세대에 이르기까지 비록 법은 융성하고 쇠퇴한 변화가 있었지만 그 폐단에 요망함은 없었습니다. 신령스러운 도[神道]는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직 그에 비교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저주하면 손해가 있으나 축원하면 반드시 이익이 있습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정성은 진실로 먼지와 이슬과 같은 미미함으로 숭산이나 태산에 더하거나 윤택하게 하고 구구한 축원으로 위로 황극(皇極)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 번 그들에게 절하기를 명령한다면 마침내 그들의 법을 허물게 하는 것이고, 선(善)을 닦는 풍속으로 하여금 성스러운 세대에서 폐지하게 하는 것이니, 이러한 습속이 항상한 일이 된다면 반드시 근심스럽고 두려운 일을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한 일을 신들의 마음에 감춰두자니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신이 비록 몽매한 사람이긴 하지만 어찌 감히 편견으로 성청(聖聽)을 의아하게 하고 그르치게 하겠습니까? 다만 생각건대 불교가 전래된 지 세대는 3대를 지났고 사람은 밝고 성스러움을 이어오고 있으니, 지금 제도를 만들지 않아도 왕법을 이지러지게 함이 없으며,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그윽한 길에도 엉키고 막히게 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시 어리석은 정성을 진달하오니 성찰(省察)을 드리워 주시옵기 비나이다.
삼가 아뢰나이다.
두 번째 조서
진달한 글을 살펴보니 정지(情旨)를 갖추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어두운 곳의 일은 참으로 말에 담아 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대략은 사람과 신(神)의 상도(常度:항상 행하는 법도)를 과장하여 거기에 다시 분별되는 사례를 더한 것일 뿐이다.
대체적으로 모든 왕이 법을 제정하는 것은 비록 바탕과 문채를 시대에 따른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다른 풍속을 가지고 정치에 참조하고 큰 거짓말을 가지고 교화에 뒤섞는 자는 없었다. 이것은 어찌 지난날의 성인은 달통하지 못하였고, 말세의 성인은 크게 통달할 수 있어서였겠는가? 또한 오계(五戒)라는 작은 선(善)도 대략 견주어 보면 인륜(人倫)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도 다시 사문은 세계의 주인에게 그 예경(禮敬)을 생략하려 하는가?
예(禮)는 중요한 일이며 경(敬)은 큰 일이다. 정치를 하는 강령이 여기에 모두 있다. 만승(萬乘)의 임금은 존대 받는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며, 구역 안의 사람들은 낮은 위치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낮고 높은 위계질서가 베풀어지지 아니한다면 왕교(王敎)는 어지러워진다. 이것이 지난날의 성왕(聖王)들이 예법을 만든 이유이니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은 마땅히 헷갈리지 않아야 할 바이다.
통달한 재능 있는 인물은 널리 모아서 때로 빠짐없이 닦는데, 그것을 자기 몸에서 닦고 가정에서 닦는 일은 좋다. 그러나 이것을 나라와 조정에서 닦는다는 것은 안 된다. 이것이 어찌 멀리하지 아니할 수 있는 일이겠느냐?
진달한 바를 살피니 과연 아직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가령 있는 줄 알았다고 하더라도 정치에 참조할 수는 없는 일인데, 아무 것도 없으면서 이것으로 정치를 행할 수 있겠는가?
세 번째 상주
신 하충 등은 말씀드립니다.
신 등이 참으로 어둡고 눈이 가려져 있는 사람이라 먼 취지에 통달할 수 없다 하더라도 쉬지 아니하고 부지런히 힘쓰며 새벽에서 밤까지 왕의 법도를 따르기를 생각할 따름인데, 어찌 구차스럽게 편관(偏管:대나무 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보는 편견)에 집착하여 큰 인륜을 어지럽히겠습니까? 다만 한(漢)ㆍ위(魏)나라에서 진(晋)나라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에 이의(異議)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으며 높고 낮은 위계의 헌장에는 혹시라도 잠깐 이지러진 일은 없었습니다.
지금 사문(沙門)이 계율을 삼가 오로지 하는 것은 사대부들이 예(禮)를 하는 일과 같을 뿐입니다. 계율을 지키는 데 도타운 사람에게 있어서는 몸을 없애는 일에도 인색하지 아니하는데, 어찌 감히 형해(形骸:몸의 모습)가 스님이라 해서 예경(禮敬)을 업신여기겠습니까? 그들이 향을 사르고 축원을 올리는 것을 볼 때마다 반드시 먼저 국가가 복우(福祐)를 받아 융성해지는 것을 바라는 정이 끝없었으며, 윗사람을 받들고 숭배하며 순종하는 마음은 자연에서 우러나옵니다. 그들의 예의가 간결한 것은 대체로 전일하게 법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선대의 성왕들이 세상을 거느림에도 이로 인하여 그 예법을 고치지 아니하였습니다.
천망(天網)은 넓디 넓어 성기지만 잃는 것이 없습니다. 신 등은 누누이 생각건대 예배를 하지 않아도 법에 이지러짐이 없다고 봅니다. 그 이익 되는 바에 따라 이것을 베풀고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정(情)을 작용하지 않는 이가 없게 한다면, 위로는 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는 베풂이 있고 아래로는 한 법을 지키며 선(善)을 닦는 사람이 있게 될 것입니다.
삼가 다시 어리석고 얕은 소견을 진달하오니, 성찰의 은택을 입기를 원하옵나이다. 삼가 아뢰나이다.
이때 유빙(庾氷)의 논의가 마침내 잠잠하게 잠재워져 공경을 베풀지 아니하게 되었다.
3) 환현(桓玄)이 팔좌(八座)인 환겸(桓謙) 등과 도인도 공경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논한 일에 대한 글[1수]과 서문
진(晋)나라 원흥(元興) 연간(402~404)에 안제(安帝)가 외부 지방으로 피난하게 되었다. 태위(太尉)인 환현이 임금조차 떨게 할 위엄으로 스님들을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게 하는 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여 하충과 유빙의 옛일을 말하면서 이치에 미진한 점이 있다고 하며 팔좌(八座)들에게 글을 보내서 말하였다.
“환현(桓玄)은 두 번 절하며 머리 조아리며 아룁니다. 8일이 되려고 합니다. 예전부터 모든 스님들이 다 임금을 공경하지 아니한 것은 어째서입니까? 유빙이 비록 이미 이 일을 논하기는 하였으나 둘 다 소견만 제시하였을 뿐 이론을 가지고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유빙의 생각은 임금을 존경해야 한다는 데 있었지만 이론의 근거가 아직 미진하였고, 하충은 편벽한 믿음에서 나와 마침내 명분과 바탕을 물 속에 가라앉게 하였습니다.
무릇 부처의 교화는 비록 허탄하고 망망하여 보고 듣는 테두리 밖에서 추측할 수 있는 일이기는 하지만 경(敬)을 근본으로 삼는 일만은 다르지 아니합니다.
무릇 기(期)하는 목적은 다르지만 공경은 폐지되어서는 안 됩니다. 노자(老子)는 왕후를 세 가지 큰 존중의 대상의 하나로 함께 꼽았는데, 그가 존중한 바를 따져보면 모두 생민을 돕고 운을 통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어찌 홀로 성인만이 자리에 있음으로써 나란히 천지(天地)와 함께 일컬어질 수 있겠습니까?
또한 천지의 크나큰 덕을 생(生)이라 하는데 생에 형통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은 임금이 된 사람에게 달려 있기 때문에 그 신기(神器)를 존중하고 거기에 배례(拜禮)를 드리는 것은 그 예법이 융숭한 것입니다. 어찌 이것이 허망하게 서로 숭상하고 존중하면서 그 뜻이 오직 임금으로서 나라를 거느리는 데에만 있는 것이겠습니까?
승려들이 생(生)을 향유하고 있는 원인은 그 생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역시 이치와 천명에서 일용생활을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 덕을 받고 있으면서 그 예법은 버리고, 그 혜택에 젖고 있으면서 그를 공경하는 예는 폐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이치로 보아도 용납되지 아니하는 일이며, 또한 심정에도 편안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는 한 시대의 큰 일이라 마땅히 함께 그 마음 속의 생각을 구하고 다시 더불어 이를 다하도록 연구하여서 가까운 8일 날 상세하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환현(桓玄)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공경하게 말씀드립니다.”
4) 팔좌(八座) 등이 환현에게 회답하여 도인은 공경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 글
중군장군(中軍將軍) 상서령 의양개국후(宜陽開國候) 환겸(桓謙) 등은 죽을 죄를 지어 황송하고 두렵습니다. 가르침을 받들어 보니 사문으로 하여금 왕자(王者)에게 공경을 이루게 하라고 하셨는데, 하충ㆍ유빙 등이 비록 이것을 논하였지만 내용이 아직 다 구궁하지 못하였고, 이는 나라의 큰 일이라 마땅히 그 중용(中庸)을 얻게 하여야 한다고 하신 말씀은 진실로 아론(雅論:상대방의 논리)과 같습니다.
그러나 불법은 요순ㆍ공자와는 나아가는 길이 다르고 예교(禮敎)와도 서로 어긋납니다. 사람이면 머리카락과 피부를 소중히 생각하는 것인데 저 승려들은 민대머리로 머리를 깎고서도 의심하지 아니하고 출가하여 어버이를 버리고 부모의 얼굴빛을 살피며 효양하는 것을 효도로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흙ㆍ나무와 같이 형해(形骸)를 보고 욕망을 끊고 경쟁을 멈추고, 한 생애에 기대를 걸지 아니하고 만 겁(劫)에 복받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일들을 이미 다 물리치고, 예교에서 소중히 여기는 일들을 생각 속에서 모두 끊어버렸습니다.
아비 섬기는 것을 바탕으로 임금을 섬긴다고 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지극한 윤리에 속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어버이의 사랑에서 벗어납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만승천자에게 예를 이루게 할 수 있겠습니까? 형세로 보아 스스로 마땅히 폐하여야 할 것입니다. 멀리 삼대(三代)를 겪어 오면서 불교를 내버려 둔 것은 신명(神明)은 방소가 없어서 규제를 가하지 않고, 보고 들을 수 있는 세계 밖에 행여 다른 이치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곧 그들로 하여금 공경을 이루도록 한다면 아마도 고쳐야 할 것이 많아서 절하고 일어나는 것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왕자(王者)가 법을 받드는 것은 공경에서 나온 것인데 그 이치를 믿고서 그 의식을 바꾸는 것은 납득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대로 용인하는 것이 바로 곧 용서하는 넓은 마음입니다. 왕령(王令:왕밀)은 별도로 답을 하였고 공국장창(孔國張敞)은 저쪽에 있어서 대면하여 품고 있는 생각을 물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도보(道寶) 등 모든 도인들은 모두 고지(高旨)에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관(下官)들은 불교의 이치에 능통하지 못하여 거의가 감정으로 말하게 됨으로써 말은 볼 만한 것이 못되어 부끄럽습니다.
환겸(桓謙) 등은 황공하며 족을 죄를 지었습니다.
5) 환현이 중서령(中書令) 왕밀(王謐)과 사문도 공경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논한 글[1수]
사문(沙門)이 지존(至尊)에게 항례(抗禮)하는 것은 바로 심정이 편안하지 못한 일로 한 시대의 큰 일입니다. 마땅히 함께 토론해서 이를 다하여야 하므로 팔좌(八座)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미 도성으로 보냈고, 이제 이 편지를 보냅니다. 그대는 이 이치를 맡아야 할 사람이니 덕음(德音)을 듣게 되기를 기다립니다.
6) 왕밀이 환현에게 회답하여 사문은 공경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밝힌 글[1수]
영군장군(領軍將軍) 이부상서(吏部尙書) 중서령(中書令) 무강남(武岡男) 왕밀은 황공하옵고 사죄를 빕니다.
가르침을 받들어 보니 도인이 지존에게 항례(抗禮)하는 일에 대해 언급하셨고, 아울러 팔좌에게 보낸 편지도 보았으므로 높은 뜻을 갖추어 듣게 되었습니다. 얼굴과 음성으로 제창하신 말씀은 말과 이론이 아울러 지당합니다. 근래에 또한 대략 들으니 공도(公道)에서도 아직 이 일을 모두 궁구하지 못하였고, 하충과 유빙의 두 뜻도 역시 모든 것을 다 해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습니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 두 논은 편견(偏見)에서 새어 나온 것으로 환하게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없다고 하신 것은 참으로 아회(雅誨)와 같습니다.
무릇 불법이 일어난 것은 천축국(天竺國)에서 나온 것으로 그 종지는 본래 그윽이 멀어 말로 변론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미 교(敎)와 관련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대략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지방이 다르면 풍속이 달라 편안하게 여기는 것은 마냥 어긋나지만 임금이 거느리는 이치에 이르러서는 반드시 같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 사문들은 비록 생각은 공경하는 일에 깊으나 형체로 몸을 굽히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의 예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들의 발자국은 온 국토 안에 가득하지만 그들이 나아가는 길은 인간세계의 테두리를 초월한 곳입니다. 그런 까닭에 외국의 임금은 모두 예를 낮추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이것은 자못 도가 존재하면 귀하게 대접받는 것으로 사람으로서 경중(經重)을 따지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대법이 베풀어져 흐른 역사를 찾아보면 자못 오랜 세월이 지나서 햇수로 따지면 4백 년이 넘었고 거쳐 온 시대도 삼대[漢ㆍ魏ㆍ晋]가 있습니다.
그동안 비록 풍속이 바뀌고 정치가 바뀌었지만 불교가 넓혀졌다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찌 홀로 절대적인 교화가 도점(陶漸:따라가며 옮겨짐)에 작용하는 것이 있었고, 맑고 검약한 기풍이 국가의 융평(隆平)에 해가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임금이 된 사람은 자신을 공손히 하고 승려가 출가하여 호구(戶口) 수가 줄어드는 것을 한하지 않았으며, 사문은 진실을 보전하여 세상에 허탄한 사람이라고 자신을 의심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듣자오니 통생이물(通生異物)은 임금에게 달려 있다고 하셨습니다. 효도를 비롯한 여러 논리의 귀착은 사실 가론(嘉論:상대방의 이론)과 같습니다. 그 덕음을 두 번 세 번 읽어 보면 그치지 못하는 바가 있습니다. 비록 답장을 올리고자 하여도 말을 붙일 곳이 없습니다. 오히려 생각하기로는 공이 높은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지 아니하고 혜택이 깊은 사람에게는 사례를 잊는 법입니다. 비록 다시 한 번 절하고 한 번 일어선다고 하더라도 어찌 제통(濟通)의 은덕에 보답할 만한 일이 되겠습니까?
공께서는 저를 돌보시고 돌아보시어 버리지 아니하시어 분수에 넘치게 물음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곧 솔직하게 좁고 어리석은 소견을 전달하였으니, 이것이 받드는 뜻에 혐의를 이루지 아니하기를 바랍니다. 원컨대 사람으로 해서 그 말까지 버리지 아니하기를 바라옵나이다. 아룀에 임하여 전전반측(展轉反側)하나이다.
황공하옵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7) 환현이 왕밀의 공경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대한 힐난(詰難)[3수]
첫 번째의 힐난
보내오신 글에 “사문은 비록 생각은 공경하는 일에 깊으나 형체로 몸을 굽히지 아니하는 것을 그들의 예법으로 삼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점을 지적하겠습니다.
사문에서 공경이 어찌 모두 형식을 생략하고 마음에만 간직하는 일이겠습니까? 참회하고 예배하는 것도 일에 독실한 것입니다. 예경에 대해서는 스승에서부터 상좌에 미치기까지 다만 세간 사람들이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과 조금 제도가 다를 따름입니다. 이미 그쪽에서 형식을 잊을 수 없는데 어찌하여 이쪽에서의 의식을 소홀히 하시는 것입니까?
또한 스승의 도리란 깨달음에 도움을 주는 것을 공덕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임금의 도리는 생(生)을 통하게 하는 것이니, 그 도리는 마땅히 근본이 됩니다. 세 가지 중요한 도리[임금ㆍ스승ㆍ부모]에 해당한다는 뜻이 어찌 정리(情理)의 극치가 아니겠습니까?
보내 오신 글에 “외국의 임금은 모두 예를 낮추지 아니함이 없다. 이것은 자못 도가 존재하면 귀하게 대접받는 것으로 사람으로서 경중(經重)을 따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문제점을 제기하겠습니다.
외국의 임금은 마땅히 비유로 삼아야 할 대상이 아니며, 또한 불교가 일어난 것도 그 지향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가 일어나게 된 이유는 그것이 어찌 여섯 오랑캐들이 교만하고 강해서 보통의 가르침으로 교화되는 것이 아닌 까닭에, 크게 신령하고 기이한 일들을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굴복하게 하고 두려워해서 굴복한 다음에 법도에 따르게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무릇 모두 귀신의 화복(禍福)의 보응을 두려워한 것이니, 이것이 어찌 현묘한 도를 대종으로 삼은 것이겠습니까?
“도가 존재하면 귀중하게 여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또한 그대의 슬기로운 뜻과는 다른 것입니다. 어찌 그들이 법복을 입었다고 해서 도가 그 가운데 존재하겠습니까? 만약 도가 존재한 다음에야 귀하다고 한다는 그대의 말에 따른다면 성인[孔子]의 도는 도의 극치입니다. 군신의 공경함은 더욱 예(禮)에 도타운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어찌 사문이 임금을 공경하지 아니한다고 해서 도가 있으면 귀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보내 오신 글에 “해를 겪어 온 지 4백 년이고 거쳐 온 시대도 삼대가 있었지만 불교가 넓혀졌다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홀로 절대적인 교화가 도점(陶漸)에 작용하는 것이 있었고, 맑고 검약한 기풍이 국가의 융평(隆平)에 해가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문제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역대에 걸쳐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증거가 될 만한 이유가 아닙니다. 지난날 진(晋)나라 사람들은 거의 부처님을 받든 사람이 없었고 사문의 문도와 대중들은 모두가 여러 오랑캐 종족이었습니다. 또한 임금은 이들과 접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방 풍속에 맡겨두고 이를 검속(檢束)하지 아니하였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상께서 부처님을 받들고 친히 법사(法事)에 접하고 있으니, 일이 예전과는 다릅니다. 어찌 그 예법에 기준이 있게 하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일상생활이 맑고 검약한 것이 교화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모두 그대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릇 불법의 공덕이지 사문의 오만하고 허탄한 것이 도움이 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 독실하게 공경한다면 더욱 그 도움을 깊어지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보내 오신 글에 “공이 높은 사람에게는 상을 내리지 아니하고 혜택이 깊은 사람에게는 사례하는 것을 잊는 법이니 비록 다시 한 번 절하고 한 번 일어선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찌 제통(濟通)하는 은혜에 보답할 만한 일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도 문제점이 있습니다.
무릇 이치가 지극하면 갚음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보내 오신 글의 뜻과 같습니다. 그러나 정이 망극한 곳에 있으면 공경하는 마음은 스스로 이를 따라가는 법입니다. 이것이 성인이 정에 연유해서 예법을 제정한 이유이며, 각기 그 몸담은 곳에 통하게 한 것입니다.
만약 공덕이 깊고 은혜가 무거우면 반드시 그 사례는 생략하게 된다고 한다면 석가모니의 공덕은 깊은 것입니까, 얕은 것입니까? 만약 얕다고 한다면 마땅히 작은 도로 큰 인륜을 어지럽히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고, 만약 깊다고 한다면 어찌 저쪽에서는 그 공손함을 엄숙히 하면서 이쪽에서는 그 공경함을 느슨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8) 왕밀이 환현의 공경을 다해야 한다고 한 비난에 대해 답한 글[3수]
첫 번째 회답
힐난하여 말씀하시기를 “사문들의 공경이라 해서 어찌 모두 형식을 생략하고 마음에만 간직하는 것이겠는가? 참회와 예배도 일에 도타운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에 대하여 회답하겠습니다.
무릇 사문의 도도 나름대로 공경을 위주로 하고 있습니다. 다만 나루터와 길이 이미 다르니 논리로 보아 낮추고 굽힐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비록 천속(天屬:부자간의 관계)의 존중한 자리라도 형식상의 절은 모두 다 없어진 것입니다. 사문들이 스승과 어른을 추종(推宗)하고 나름대로 서로 숭앙하고 존경하는 이유는 자못 종(宗)의 취지가 이미 같으면 어른과 아이의 질서가 이루어지고, 도움 받고 통하는 데에 관련이 있게 되면 일과 마음이 호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불법을 따져 보면 비록 광원(曠遠)하기는 하나 작은 선(善)도 버리지 아니하고, 티끌 하나의 공도 보답이 역시 이에 응하게 됩니다. 티끌을 쌓아 산을 이룬다는 뜻이 이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음 힐난하시기를 “임금의 도리는 생(生)을 통하게 하는 것이니, 그 도리는 마땅히 근본이 된다. 세 가지 중요한 도리[임금ㆍ스승ㆍ부모]에 해당한다는 뜻이 어찌 정리(情理)의 극치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회답을 드리겠습니다.
무릇 임금의 도가 생에 통한다는 것은 그 이치가 천지의 조화와 같습니다.
천지의 형상을 도주(陶鑄:그릇을 굽고 鑄造함)하고 거기에 기(氣)를 펴는 것은 그 공덕이 넓습니다. 그러나 그 품부받은 은혜에 사례한 일은 없었고, 도리의 근본에 감사하는 마음을 그만두는 것은 왜 그렇습니까? 이는 자못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근본은 유절(幽絶)하여 물상(物象)의 들어올리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운용이 통하는 이치는 묘한 것인데 어찌 추한 자취로 능히 응수할 수 있는 대상이 되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백성들로 하여금 따르게 할 수는 있지만 알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이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 힐난하시기를 “외국의 임금은 마땅히 비유로 삼아야 할 대상이 아니다. 불교가 일어난 것도 그 지향을 알 수 있다. 어찌 여섯 오랑캐들이 교만하고 강해서 보통의 가르침으로 교화되는 것이 아닌 까닭에, 크게 신령하고 기이한 일들을 마련하여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고 굴복하게 하고 두려워해서 굴복한 다음에 법도에 따르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회답을 드리겠습니다.
무릇 신도(神道)에서 교를 마련한 것은 참으로 말로 변론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크게 신령하고 기이한 일을 마련하여 이로써 보응을 보여준 것은 가장 영향(影響)이 있는 실상의 이치이며, 불교의 근본 요점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만약 삼세(三世)를 허탄한 것이라 하고 죄와 복은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무섭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석가모니가 밝힌 것은 거의 몸담을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항상 생각하기를 ‘주공(周公)과 공자의 교화는 그 심한 폐단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취는 한 생(生)에서 다하고 만겁에 통하는 길은 열지 아니하였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멀리 그 참뜻을 탐구해 보면 또한 왕왕 찾을 수 있습니다.
효제인의(孝悌仁義)라는 것은 꾀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같아지는 것을 밝힌 것이며, 사시(四時)의 생살(生殺)은 자랑하고 자비하는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또한 여러 번 중유(仲由)의 물음을 억누른 것도 역시 깊은 뜻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교의 바탕이 이미 다른 까닭에 이곳에서는 항상 어두웠을 따름입니다. 고요히 이를 구해 본다면 거의가 장차 그렇게 결론이 날 것입니다.
또 힐난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의 공경은 더욱 예에 돈독해야 한다. 이와 같다면 사문이 공경하지 아니하면서 어찌 도가 존재하는 것을 귀하게 여길 수 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화답을 드리겠습니다.
거듭 높으신 이론을 찾아보니 ‘임금의 도는 천지의 생성화육을 통하게 하고 그 이치는 삼대(三大)와 같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까닭에 앞 조항에서 이미 대략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임금과 사람들 간의 도리는 그대의 높은 뜻과 같습니다. 그러나 군신간의 공경에 이르러서는 그 도리는 명교(名敎)에서 다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사문은 이미 왕후(王侯)의 신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공경하는 일도 이와 더불어 그만두는 것입니다.
다음 또 힐난하시기를 “역대에 걸쳐 바뀌지 않았다는 것은 증거가 될 만한 이유가 아니다. 지난날 진(晋)나라 사람들은 거의 부처님을 받든 사람이 없었고 사문의 문도와 대중들은 모두가 여러 오랑캐 종족이었다. 또한 임금은 이들과 접촉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지방 풍속에 맡겨두고 이를 검속(檢束)하지 아니하였을 따름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회답을 드리겠습니다.
앞에서 제가 겪어 온 연대(年代)가 있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수용하고 길러가는 도리에는 마땅히 그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렇게 된 일이니 고쳐야 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무릇 기세가 이른 곳이 북쪽에서부터라는 사실을 말한 것이며 확연히 근거가 있습니다. 오랑캐 사람들이 임금과 접촉하지 아니한 것도 높으신 제창과 같습니다. 전대에서 이 일을 논하지 아니한 이유도 혹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음 또 힐난하시기를 “이것은 무릇 불법의 공덕이지 사문의 오만하고 허탄한 것이 도움이 된 것은 아니다. 지금 독실하게 공경한다면 더욱 그 도움을 깊어지게 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회답을 드리겠습니다.
공경히 보내오신 논리를 찾아보니 이는 불교의 이치를 비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오만하고 허탄한 자취가 큰 교화를 이지러지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보내오신 가르침과 같습니다.
저는 ‘사문의 도를 이상한 것이라 칭할 수는 있으나 오만하고 허탄한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부처님이 멸도하신 지 천 년 후에 순박한 기풍이 더욱 엷어지고, 멋대로 옷을 입은 무리들은 대부분 거기에 걸맞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찌 감히 부끄러운 마음을 품지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다만 스스로를 다스려 묵묵히 있고 사람에 대해서는 버려두고 도리를 말할 따름입니다. 전에 회답한 말에 “사람으로 경중을 따져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은 나의 미천한 생각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다음 또 힐난하시기를 “만약 공덕이 깊고 혜택이 무겁다고 해서 반드시 그 사례를 생략해야 한다고 한다면 석가모니의 덕은 깊은 것인가, 얕은 것인가? 만약 얕다고 한다면 마땅히 작은 도로 큰 인륜을 어지럽혀서는 안 될 것이며, 만약 깊다고 한다면 어찌 저쪽에서는 그 공손함을 엄숙히 하고 이쪽에서는 그 공경함을 느슨하게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회답을 드리겠습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석가모니의 도는 깊다면 깊습니다. 그러나 이를 우러러보는 무리가 더욱 그 공경하는 마음을 돈독하게 하는 것은 이는 아마도 도를 찾아가는 무리들은 반드시 행공(行功)이 뒷받침이 되어야 하며, 행공의 아름다움은 석가보다 높은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곧 행을 쌓은 객관적인 인연이 미래 세계의 관건(關鍵)이 될 것입니다.
또한 스승과 어른에게 공경을 이루는 것도 그 공덕은 오히려 억누르기 어렵습니다. 하물며 마음을 종극(宗極)에 견주고 있으면서 그 예법을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여러 겁(劫)을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혜택에 사례하는 뜻은 아닙니다.
환현이 거듭 왕밀을 힐난한 글
두 번째의 힐난
주신 글을 살펴도 아직도 여전히 석연치 않고 의문나는 곳이 있습니다. 보내 주신 글에 따라 다시 대략 힐난해 보겠습니다.
무릇 마음과 공경의 도리에 어찌 두 가지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이는 안으로부터 밖으로 미치는 일일 따름입니다. 이미 유정(有情)의 경계에 들어오게 되면 공경이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보내 오신 말씀과 같다면 임금은 천지 조화와 같아서 그 품부 받은 것에 혜택을 사례한 일이 없고 이치의 근본에는 감사의 마음을 두지 않게 되니, 이것이 공덕이 현오하고 이치가 깊은 것으로 이것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처의 교화가 어떻게 이것을 넘어서겠습니까? 또한 보내 오신 논리에 의하면 “나루터와 길이 이미 다르니 논리상 몸을 낮추고 굽힐 이유가 없다”고 하셨고, 또 “종치(宗致)가 이미 같다면 어른과 아이에 질서가 이루어지고 도움이 통하여 관련이 있게 되면 일과 마음이 호응하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도리가 자기의 근본에 있고 덕은 깊이 극치에 자리잡고 있다면 어찌 나루터와 길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으며, 또 어찌 몸을 낮추고 굽힌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한 종치란 무엇입니까? 만약 학업을 종치로 삼는 사람이라면 학문에서 배운 것인 까닭에 이는 그 자연의 성(性)에서 발단한 것일 따름입니다. 만약 자연의 존재를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한다면 자연이 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만물의 생성화육을 도와 운행시키는 깨달음이란 다시 이것은 그 말단에 아름다움이 발사한 것일 따름입니다. 일과 마음이 호응한다는 것은 어떻게 이곳에서는 존재하는데 저곳에서는 존재하지 아니합니까?
또 말씀하시기를 “주공과 공자의 교화는 그 당시의 심한 폐단을 구제한 까닭에 한 생(生)에서 다하여 만 겁의 길을 열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무릇 신비하고 기이한 것으로 교화하면 그 교는 행해지기 쉽습니다. 이는 인의(仁義)로 채찍질하고 사람의 할 일을 다하게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런 까닭에 누런 두건을 쓴 요망하고 미혹하는 무리들이 모두 구름같이 그곳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진실한 진리라면 이를 행하는 것도 쉬운 일인데, 그런데도 성인은 무엇에 연유하여 쉬운 진실한 도를 버리고 행하기 어려운 말단의 일을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그렇지 아니하다는 것이 또한 명백합니다. 장차 다른 풍속을 교화하고 가르치려고 하면 그 이치는 일시적인 제도에 있는 것이니 회탄(恢誕:규모가 넓어 믿기 어려운 것)한 이야기는 그 취향을 알 만합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군신간의 공경은 논리가 명교에서 다하는 것이다. 지금 사문은 이미 왕후들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공경하는 일도 이와 더불어 그만두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것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까? 무릇 공경의 도리라는 것은 앞의 편지에서 소상하게 말씀드렸습니다. 군신간의 공경이란 모두 자연에서 생긴 것이며 그 도리는 정에 돈독한 것인데 근본이 어찌 명교에 얽힌 일이겠습니까?
앞의 논에서 이미 “천지의 큰 덕을 생(生)이라 하고 생에 통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은 임금된 사람에게 있다”고 하였는데 진실로 통하는 곳이 여기에 있다면 어떻게 이것이 자연이 소중히 여기는 바가 아니겠습니까?
또 말씀하시기를 “도를 찾아가는 무리들은 반드시 공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공덕을 쌓은 객관적인 인연은 미래 세계의 관건이 된다. 마음을 종극(宗極)에 견주고 있으면서 그 공경하는 대상을 바꾸겠는가? 누겁(累劫)을 굽어 살펴보고 우러러보아도 혜택에 사례하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청하건대 다시 보내오신 취지에 나아가 한 번 빌려 이를 문제삼기로 하겠습니다.
보내오신 말씀대로라면 공경하는 것을 행의 우두머리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는 공경의 중함을 도탑게 하는 일입니다. 공행이라는 것은 마땅히 그 공덕의 노고를 헤아려야 합니다.
어떻게 곧바로 진중하게 석가모니를 우러러보며 이보다 더 숭상할 대상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혜택에 사례할 바가 없는 것은 통달한 사람이면 의심하지 않습니다. 다만 진리의 뿌리는 극히 깊으면 정과 공경하는 일은 없을 수 없는 것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것이 어찌 혜택에 사례하는 일이겠습니까?
왕밀이 거듭 환현에게 답한 글
두 번째의 회답
알려 주신 말씀과 아울러 거듭 힐난하시는 글을 받들고 갖추어 높으신 취지를 들었습니다. 이 이치는 미세하고도 멀어 말로 표현하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또한 한 시대의 큰 일이기에 시대에 호응하여 모두 다 상세히 밝혀야 합니다. 그러나 저[下官]의 재능은 그윽하고 독특한 연구와 분석에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또한 묘한 것에 정밀하게 도달하기 어려워 더욱 망연한 의혹만이 더해집니다. 다만 높으신 음성이 이미 이곳에 이르렀으니 감히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 없어서 곧 다시 그 짧은 견해를 모아 함부로 보내 오신 가르침에 응수할 따름입니다. 당신의 생각을 열어 확실하게 할 방법이 없어서 단지 근심스럽고 편치 못합니다. 원컨대 다시 여러 도인들과 달통한 재사들에게 물어 보시고 그 미치지 못한 점을 줄여 주십시오.
공(公)은 “종치(宗致)란 무엇인가? 만약 학업을 종치로 삼는 사람이라면 학문에서 배운 것인 까닭에 이는 그 자연의 성(性)에서 발단한 것일 따름이다. 만약 자연의 존재를 말미암아 만물이 존재한다면 자연이 근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저는 ‘종치라는 것은 그 취향하는 바가 지극한 인도처(引導處)를 말하는 것이고, 학업이라는 것은 일용생활의 한 방편이다’라고 여깁니다. 지금 곧 저 지극한 경지에 나아가고자 한다면 부득불 방편의 힘을 빌려서 스스로 운용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빌린 공부는 아직 절대적인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릇 학문을 쌓아서 극치의 경지로 가는 사람은 반드시 거친 계단을 밟아 감으로써 묘한 경지에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물고기를 잡고 나면 물고기를 잡은 발[筌]은 없애는 이치가 여기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공(公)은 생각하시기를 ‘신기(神奇)한 교화는 쉬우나 인의(仁義)의 공부는 어렵다. 성인은 왜 쉬운 실질적인 길을 버리고 행하기 어려우며 아직 이룩되지 아니한 일을 하였겠는가? 그것이 그렇지 아니하다는 것은 역시 명백하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부처의 가르침과 국내의 성인[孔子]는 영원히 다르다고 여깁니다. 이미 이치가 다르다고 말하였으니, 나란히 함께 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불교의 교리는 논하는 까닭에 마땅히 그 종지에 의하여 말을 건립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라야 통하고 막힌 길을 소상하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앞서 올린 답장에서 ‘어질고 착한 행동과 살생하지 아니하는 취지’를 말씀드린 것은 그것이 비슷하여 같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인용하여 여기에 둔 것뿐입니다. 그러나 발언과 항론(抗論)에 이르러서는 그 나루터와 지름길의 귀착점이 물론 같아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저의 소견으로는 아무래도 불교 쪽이 보다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이유로 그렇게 말하는가? 지금 국내의 성인이 밝히신 바로는 상대방에게서 나오는 말이 선(善)한 말이라면 마땅히 그림자나 메아리가 형체와 소리를 따라 호응하는 것처럼 호응하나, 만약 선하지 아니한 말이라면 천 리 밖에서 이를 멀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름다운 것과 허물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호응하고, 화와 복이 눈앞에서 교차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인(仁)을 한다는 것은 자기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를 넓혀 나가는 것이 옳은 일인데도 오히려 바른 길을 버리고 사악한 곳에 몸담고 도를 배반하고 욕망을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물며 불교에서는 일생을 손가락 한 번 튀기는 시간으로 비유하며 영겁의 세월에 끝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신령하고 기이한 무위(無位)의 신을 말하고 아직 조짐도 나타나지 아니한 곳에 보응을 마련하고 있으니, 이를 취해서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교화가 중국에 미쳤으나 이를 깨달은 사람은 아주 적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기경(本起經)』에서 “바른 말은 반대의 말과 비슷하다”라고 한 것은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공은 “행공(行功)이라는 것은 마땅히 그 공부를 행한 노고를 헤아려야 하는 것인데 어떻게 곧바로 석가모니를 보배로 숭앙하는 것만을 이것보다 더 숭상할 일은 없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하셨습니다.
한번 이 문제에 대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생각하기를 ‘불도는 넓고 광원(曠遠)하며 일은 잦고 더욱 번다하여 정신을 연마하여 성도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일만이 아니다. 마음에 간직하여 게으르지 아니하고 일에 있어서 노력할 수 있어서 종극(宗極)을 진앙(珍仰)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이는 행공의 일부분에 지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앞서 드린 답장에서 “이보다 더 숭상할 대상은 없다”고 말씀드린 이유는 나름대로 종(宗)의 수레바퀴에 마음을 견주어도 그 진리로 향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한 것이며, 예배하는 일이 곧 이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미 아직도 미진한 경지에 있기에 마음이 달통하기를 바라는 곳에 있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비록 그것이 한 개의 경미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끝까지 그것이 필요하게 되기를 기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공은 “군신(君臣) 간의 공경은 모두 자연에서 생긴 것으로 도리는 정의 근본에 도탑다. 이것이 어찌 명교(名敎:명분과 가르침)에 얽힌 일이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공경하게 그 높으신 이론에 고개를 숙이며 거기에 이의는 용납되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앞서 올린 답장에서 “임금과 사람의 도리는 공의 높으신 뜻과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뜻이 여기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군신 간의 공경에 이르러서는 일이 읍배(揖拜)에서 다하게 되는 까닭에 이것을 명교(名敎)라 하였을 따름입니다. 결코 서로 더불어 있을 때 자취를 만드는 것에 일이 다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거듭 저의 미의(微意)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무릇 태상(太上)의 시대에는 임금과 신하가 이미 자리를 잡게 되면 자연히 정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의리가 교화의 근본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는 형식상의 공경은 알려진 것이 적고 임금의 도는 허허하게 운용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서로 잊어버리는 도리가 크게 발전하고, 신하의 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도야(陶冶)된 까닭에 일은 분수에 만족하는 데 다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에 인하여 미루어 본다면 형식상의 공경은 마음과 더불어 그림자와 메아리처럼 호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거의 명백합니다. 그 후 친히 칭송하는 일이 생기게 되면서 여기에서 예의라는 것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어찌 후대의 성인이 제작한 일로서 시대와 더불어 호응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이치는 허막(虛邈)해서 자못 변론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약 거기에 충족되지 아니한 내용이 있다면 높으신 충당의 말씀을 기다리고자 합니다.
환현의 세 번째의 왕밀에 대한 힐난과 서문
손수 써서 보내오신 반론은 매우 좋은 내용이며 특별히 아름다워 의문을 풀 수 있으리라 여겼으나 그와 달리 핵심에 이르지 못하였고, 마침내는 서로 공박하고 힐난하여도 그 끝을 아직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다시 요점을 헤아려서 삼재(三才)에 있는 도리를 밝혀서 그 경중을 변대(辨對)한다면 공경하고 하지 아니하는 이치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미세한 진리를 연구하는 공은 반드시 애써 분석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8일 날이 이미 다가왔으니 지금 우복야(右僕射)에게 글을 주어 곧 공경하게 섬기고 임금을 존경하는 도리를 시행하게 하고,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아무도 공경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불도는 더할 수 없이 존귀하지만 어찌 선(善)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일은 이미 행하여진 뒤에 논하는 것도 상관없으니 의당 연구해야 합니다. 여러 사람들 중에 혹 더욱 정밀히 분석하는 이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런 것이 있으면 중문(仲文)에게 제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세 번째의 힐난
얼마 전에 보내오신 편지와 여러 사람이 논한 글도 보았는데, 모두가 아직 그 의아해 하던 것을 풀지 못한 점이 있었습니다. 이 점에 나아가 문제점을 제기한다면 아마 끝이 없을 것입니다. 지금 다시 앞서 말한 뜻을 말하여 이를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백마(白馬)의 고삐를 가지런히 하고 변설의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무릇 불교에서 중히 여기는 것은 오로지 정신을 귀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스승과 문도가 서로 이것을 종(宗)으로 삼고 그에 필적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릇 정신이 밝고 어두운 것은 각기 본분이 있고 그 본래의 분수가 뒷받침하여 품부 받는 자질에 근본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스승이 공덕으로 삼는 것은 깨달음이 발생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비유하면 형산(荊山)의 박석(璞石)을 빛나도록 깎아내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바탕이 아름다운 옥이 아니라면 쪼아 대고 갈아 낸다 하더라도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것이 곧 아름답고 나쁜 것이 자연 속에 존재하며 깊은 덕은 그 타고난 처음의 자질에 있는 것이며, 먼지를 털어 내고 아름다운 옥을 만들게 하는 것은 말단에 해당합니다. 이미 자기의 품 속에 옥을 품고 또 다듬어 그릇을 만듭니다. 임금의 도가 아니면 이 생(生)을 이루고 그 도(道)를 통하게 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임금이 삼재의 중한 자리에 있는 이유이며 스승의 공덕은 끝자리가 됩니다. 무엇으로 이렇게 말하는가? 임금의 도는 스승의 도리를 겸하고 있으나 스승의 도는 임금의 도를 겸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르침으로써 홍보하고 법으로써 고르게 하는 것이 임금의 도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찌 이치의 가벼운 곳에 있으면서 마땅히 존재해야 할 공경심을 빼앗아 갈 수 있겠습니까? 두 번 세 번 그 이치를 생각하니 더욱 의심나고 놀랄 뿐입니다. 예법을 제작한 뜻은 임금에 있고 스승에 있는 것이 아닌데, 이를 착각해서 잘못 쓰는 그 폐단은 더욱 심합니다. 다시 한번 그 취지를 깨달아 그 일을 버린다면 진리를 호상(濠上:莊子와 惠子가 濠上에서 고기의 즐거움에 관해 진리를 토론한 일)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왕밀이 세 번째로 환현에게 회답한 글
세 번째 답장
거듭 아름다우신 가르침을 이지러지게 하였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정신을 귀중히 여기는 것인데 정신의 밝고 어두운 것은 각기 본분이 있다. 스승의 도리는 깨달음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며 임금의 도에 이르게 되면 거듭 이 생을 이루고 그 도를 통하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스승에게는 모든 것에 통하는 아름다움이 없으나 임금은 스승의 덕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임금을 숭배하는 큰 예법을 넓히고 삼재 안에 있는 깊고 얕은 것을 분석하셨으니, 진실로 높으신 논리와 같습니다. 저는 근래 탈언비견(脫言鄙見)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데에 이른 이유는 질문이 쌓여 숨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다시 따로 한 이치의 별론을 이루었지만 보통 곤혹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이미 거듭 묘지(妙旨)를 연구하니 당신의 이치는 실로 광막(曠邈)하여 몽매한 마음을 깨우쳐 주는 것 같습니다.
이미 유환(庾桓)에게 명령하여 그 일을 시행하게 하셨다는 말을 이곳에서 들었으니, 예경하는 일도 때맞추어 정해지게 되어 공사간에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저를 깨우쳐 주신 말씀을 우러러보니 내용은 무릎을 치며 감탄하는 데에 있으나 호상(濠上)의 가르침에 이르러서는 감히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9) 환현이 여산(廬山)법사 혜원(慧遠)에게 편지를 보내 사문이 왕을 공경하지 않는 뜻을 진술하게 한 편지[혜원의 답장과 주고받은 편지 2통 첨부]
사문이 왕을 공경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이미 마음에 이해되지 않고, 또한 이치로도 깨달을 수 없는 일이다. 한 시대의 큰 일을 그 바탕이 옳지 못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근래 팔좌들에게 편지를 하였고 지금 그대에게 보여 주니 그대는 공경하지 아니하는 뜻을 진술하는 것이 좋겠다.
이는 곧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니 하나둘씩 상세히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라. 그대는 반드시 그 의심나는 곳을 풀어 줄 것이 있을 것이다.
왕영군(王領軍)은 큰 임무가 있는 사람인데 근래 이 내용에 뜻을 같이하여 사중(謝中)에 찾아가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이 일을 자문 받았으나 그 근거한 이론이 달라 의문하는 것을 풀지 못하였다. 지금 곽강주(廓江州:강주 자사 廓氏)가 그대의 답장을 취할 것이니 그 뜻을 이 사람에게 부치는 것이 좋겠다.
혜원(慧遠)법사가 환태위에게 보낸 답장 편지
특별하신 알림과 팔좌에게 보낸 편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사문이 왕에게 공경을 표시하지 아니하는 이유를 물어 보셨습니다. 그 내용의 뜻은 주상을 존경하고 윗사람을 숭배하며 멀리는 명분과 체통을 보존하는 데에 있습니다. 노자(老子)를 증거로 인용하여 왕후를 삼대(三大)와 같은 것이라 하며 생(生)을 뒷받침하며 천지의 운용을 통하는 길인 까닭에 마땅히 그 신기(神器)를 존중하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그 근본을 미루어 그 원천을 찾아보면 모두 천지(天地)에서 기(氣)를 품수받고 형체를 부모로부터 받았으니, 생명의 탄생과 운이 통하는 길은 넓고 일용생활의 이치에 존재하는 것은 크기 때문에 그 덕을 받고 있으면서 그 예(禮)를 버리고 그 혜택에 젖고 있으면서 그 공경은 폐한다는 것은 옳지 아니하다 하였습니다.
이는 시주(환현)께서 뜻을 세워 근거로 삼은 논리이며 빈도(貧道)도 그 높으신 생각과 다르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불교에서 구하고 찾아보면 사문의 도리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왜 그런가? 불경에 밝힌 바에 의하면 모두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속세에 처해 있으면서 흥교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출가ㆍ수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속세에 처해 있을 경우에는 윗사람을 받드는 예의와 어버이를 존숭하는 공경과 충효의 의리가 경문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삼재에 존재하는 교훈은 성전에 뚜렷하게 밝혀져 있어, 이것은 왕의 제도와 같은 명(命)으로 마치 부절을 합한 듯합니다. 이 한 조목은 전적으로 시주께서 밝히신 이치와 같아서 이의가 용납되지 아니합니다.
그러나 출가한 스님의 경우에는 세상 밖에 사는 손님으로 그들의 자취는 사물의 세계와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교로 삼는 것은 유(有)의 세계에서 여러 인연에 얽히는 것이 근심[患]이라는 사실에 통달하여 몸을 두지 않는 것으로 근심을 그칩니다. 또 생명이 이어가며 탄생하는 것이 품화(稟化)에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서 이 품화를 따르지 아니함으로써 종지를 구하는 것입니다. 종지를 구하는 것은 품화에 순종하는 것에 말미암지 아니합니다. 그런 까닭에 운용이 통하는 뒷받침을 중히 여기지 아니하고 우환이 멎는 것이 몸을 보존하는 데에 말미암지 아니하는 까닭에 후생(厚生)의 도움을 귀히 여기지 아니합니다. 이 논리가 세속의 논리와 어긋나는 것이 도인과 속인이 반대가 되는 이유입니다. 그런 까닭에 모든 출가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모두가 숨어 살면서 그 뜻을 구하고 풍속을 변경함으로써 그들의 도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속인의 복장에서 변경하였으니 세속의 법전과 예법을 같이할 수 없으며, 숨어 살면 마땅히 그 자취가 고상해야 합니다. 무릇 그런 까닭에 흐름에 가라앉은 중생을 건져 올려 구제할 수 있으며 겹친 겁(劫)의 세월을 통하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인연의 뿌리를 뽑아 낼 수 있습니다. 삼승(三乘)의 나루터에 달통하여 널리 천인(天人)의 길을 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천속(天屬)의 무거운 윤리 속에 있는 사람과 서로 어긋나고 있지만 그 효도는 어기지 아니하며, 밖으로는 주상을 받드는 공손함이 빠져 있지만 그 공경하는 마음은 잃지 아니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자신의 서원을 머리를 깎아 잠홀(簪笏)이 땅에 떨어지면서부터 시작하여 세운 뜻을 늙은 나이에 이룩합니다. 만일 지금 한 사람이라도 덕을 온전한다면 그의 도는 육친(六親)에 흡족하게 되고 그 혜택은 천하에 흘러가게 됩니다. 비록 그가 왕후의 자리에 처해 있지 않으나 진실로 이미 황극(皇極)과 일치하여 크게 생민을 비호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것이 어찌 앉아서 그 덕만 받고 헛되게 그 혜택에만 젖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무릇 벼슬자리에 있는 현명한 사람이 국록만 받아먹고 직책은 다하지 아니하는 사람과 같겠습니까?
시주께서는 얼마 전에 그 복장을 입고는 있지만 그에 걸맞은 사람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투명하고 맑게 하여 맞지 않는 사람은 가려내고 맞는 사람은 용인하여 뒤섞이게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이 명령이 선포되자 모든 사람이 그 정성을 다하여 더욱 깊이 이를 수행하고 있음은 말로 비유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다시 출처(出處:세상에 나가고 집안에 隱居하는 일)하는 자취를 열어서 그것으로 세상 밖의 도를 넓히신다면 마음을 비운 사람은 그 유풍을 뜨고 흐르는 물에 양치질하는 사람은 그 남은 진액(津液)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만약 투명하게 가려낸 후에도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아 그 중에 혹 진실과 거짓이 서로 뒤섞여 맑음과 흐림이 분별되지 않으면 도(道) 때문에 사람을 폐해서는 되지만 진실로 사람 때문에 도까지 폐지해서는 안 됩니다. 도 때문에 사람을 폐한다면 그가 입고 있는 옷을 벗기는 것이 마땅하고 사람 때문에 도를 폐한다면 그 도에 갖추고 있는 예법은 남겨 두는 것이 옳습니다. 예법이 남아 있으면 교(敎)를 제정한 뜻은 찾아볼 수 있지만, 자취까지 없애면 뜻을 이룰 기쁨은 얻을 말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것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밝힐 수 있는가? 무릇 사문의 복장과 법용(法用)은 비록 육대(六代)의 법전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도가(道家)가 속인과 다르다는 것을 명기(名器)로써 표시하는 것입니다. 명기가 세속과 서로 교섭하게 되면 일은 그 근본과 어그러지며, 일이 그 근본과 어그러지면 예(禮)는 그 작용을 잃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 무릇 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 명기(名器:명분을 담는 그릇)를 이지러지게 하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이지러지게 되지 아니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유래가 있습니다.
무릇 멀리 옛 법전에 따른다 하더라도 오히려 고삭희양(告朔餼羊)의 제도가 남아 있었습니다. 희생양으로도 오히려 예법을 존속시킬 수 있었는데 하물며 부처님께서 정하신 법복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이로 미루어 말한다면 비록 그 도가 없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예법만은 남겨 두는 것이 옳습니다. 예법이 남아 있으면 법을 널리 펼 수 있고 법을 널리 펼 수 있으면 도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는 고금을 통해 다 같이 바뀌지 아니한 대법(大法)입니다. 또한 가사(袈裟)는 조종의 옷이 아니며 발우(鉢盂)는 낭묘(廊廟)의 그릇이 아닙니다.
군사(軍士)와 관원은 용모가 다르고 중국 사람과 오랑캐는 뒤섞이지 아니합니다. 머리카락을 깎고 형상을 허문 사람이 홀연히 제후(諸侯)의 예법에 섞인다면 이는 무리가 다른 족속이 서로 교섭하는 상(像)입니다. 이것도 역시 내가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는 일입니다.
시주의 기운(奇韻)은 젊은 나이 때부터 우뚝 나타났었고 풍류는 말세의 풍속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시대의 현명한 사람들에게 참구(參究)하여서 그 중용(中庸)을 구하고 계십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반드시 사람으로 인해서 그의 말마저 버리지는 아니하실 것입니다. 빈도는 해가 거의 서산에 기운 것과 같이 죽음이 멀지 아니한 나이에 세월의 흐름을 빌려서 다하는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의 심정에서 아까워하는 것이 어찌 혼자뿐이겠습니까? 만약 내가 바라고 또 집착하는 것이 있다면 무릇 삼보를 뛰어난 세상의 운세 속에서 중흥시키고 밝은 덕이 그 꽃다움을 백 대 뒤에 흐르게 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만약 하루아침에 이 법을 행한다면 불교는 길이 물 밑에 가라앉고 여래의 대법이 여기에서 사라지며 천인(天人)이 탄식하고 도속(道俗)이 마음을 고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빈도의 그윽한 정성으로 기대한 일은 다시 장차 어디에 부치겠습니까? 돌보시고 지기(知己)를 만난 융숭함에 연유하여 그 품고 있던 생각을 탄탄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붓을 손에 잡으니 슬픔과 번민으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멋대로 흐릅니다.
환현태위가 거듭 혜원법사에게 회답한 편지
세상 밖에서 형상을 버린 까닭에 생(生)을 위한 도움을 귀중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종(宗)을 구함은 교화에 순종하는 것에 말미암지 아니하는 까닭에 운이 통하는 뒷받침을 중히 여기지 아니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안으로 천속(天屬)의 중함과 어긋나지만 그 효도를 어기지 아니하고, 밖으로는 주상을 받드는 공손함이 빠져 있어도 그 존경하는 마음을 잃지 아니한다.”
만약 보내오신 말씀대로라면 이치에 본래 중함이 없다면 효도를 이루려는 정을 가질 인연도 없을 것입니다. 일이 도움이 되고 상통하는 일이 아니라면 마땅히 다시 공경을 이룰 의리도 없을 것입니다.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정을 다하지 아니하였다고 인정한다면 정이 기탁하는 곳을 무엇 때문에 끊습니까?
무릇 쌓인 집착은 마음에 남아 있어 체재하는 것이지 형식상의 공경에 말미암는 것이 아니며, 형식상의 공경은 무릇 마음의 작용일 따름입니다. 만약 그 근본에 있다면 설사 형식상으로 공경한다 하더라도 이는 또한 아직 공경을 이룬 것이 아니라는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불교의 홍법은 두 종류가 있니, 속세에는 가르침이 있고, 혹은 출가의 경우에는 그 혜택이 천하에 흐르고 도는 육친(六親)에 흡족해 진실로 황극(皇極)을 도와서 헛되게 그 은덕에 젖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무릇 불교는 행동을 하는 데 있어 각기 일로 응하고 인연에는 근본이 있어서 반드시 틀림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면 도를 위하는 사람도 어떻게 이를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석가모니의 도는 백정왕(白淨王)을 진량(津梁)에서 뛰어넘게 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수다원과를 얻지 못하였으나 이것은 같은 나라의 사람이 입고 있는 혜택입니다. 나아가 보내오신 말씀대로라면 여기에도 스스로 도가 있고 깊은 덕의 공부가 있어서 본래 지금의 이른바 선교하는 사람들이 견주고 논의할 바가 아닙니다.
보내오신 편지는 아직 함께 그 이치를 구할 수 없어 문득 크게 개연(慨然)한 마음을 이루게 됩니다. 본래 당신의 의견에 납득이 가지 않지만 머뭇거려 지체하다가 인정과 도리의 작용을 어기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 032_0542_a_01L集沙門不應拜俗等事序太原王隱客字少微撰若夫雞渾起一,龍聖䦕三,飛羲畫而踰繩,泛軒文而越契。端宸肅扆,題尊玉宇之中。班屣漂裾,光佐璿達之右。洪猷僅於禮樂,秀業止於仁義。亦有棲月籠霞之儁,乘黿控鯉之英。窒慾蟺姿茹丹,菌於秘洞,休糧蛻影,吸靑露於神丘,終驚迅節之期。徒侈浮歡之會,豈若能仁撫運,梵典䦕宗,撰妙輪而曾擊,俶寶騎而高引?無生之生,究生生於至賾;不滅之滅,窮滅滅於幽源。大千通智炬之輝,盡億曳法蠡之響。繁罝弛紐,邁三呪於湯年。苦浪堙洪,軼四乘於夏序#浸群方而演澤,濟悠劫而凝勳。襲其儀者,便屈紫皇之敬;入其道者,乃標黔首之尊。爲愛習之良資,作塵勞之依止。洎乎星潯禘照,日夢飛光,東徙休屠之像,西漸罽賓之化。高人響係,敷妙說於銀函;茂德肩隨,暢眞詞於貝牒。列辟以之崇奉,緜代以之欽尚。故符秦肅念,紆翠輦而同嬉;劉漢虔誠,下緗輿而致禮。唯有牛圖晩運,慧景曖而還明。龍緖衰辰,德水凝而復渙。我大唐澄飛日海,撲燎霞崑;延喜流禎,昭華獻吉。財成紫宙,葳蕤改粒之勳;大庇蒼黎,茵藹遷裳之業。皇帝乘雷震極,鑠電離宮,驅九駮以曾馳,駕八翼而撗厲。希風崛岫,啓鶴苑於神畿,仰化連河,搆蜂臺於勝壤。敷攝誘之徽範,敦愛敬之洪謨。而以控國,必俟於忠;裝家,寔資於孝。爰命僧尼之輩,將申跪拜之儀,則裕凝懷,誶通規於會府。因心在念,拾輿頌於英寮,雖囂議相攻,各言其志,而宸襟歷選,遂率於常。特懷顧復之恩,仍致昇堂之拜。悰上人沖宇淹穆,秀器韶雅,迥韻遒通,峻調閑綽。身城浪謐,飛寶刃以衝天,意樹紛披,聳珍翹而拂漢。旣洽九儒之要,還探二藏之微,緇徒擅其姱節,素侶挹其徽望。固以偶迹乘杯,侔聲飛錫者矣。將恐迷生曲學,近識孤聞,以適俗之㩲,爲會眞之實。叫鳳閽而莫遂,叩鸞掖而無從,爰興護念之心,載啓發揮之作。粤自晉氏,迄于聖代,凡其議拜事,竝集而錄之,摠合三篇,分成六卷,爲之贊論,格以通途。縟旨含鏘,雕文振綵,信所以激昂幽致,刷盪冥津者也。隱客業寡才疏,名蕪槪淺,坐煙郊而晦迹,泊風戶以棲神,徒以早尚花編,深崇葉篆。欣茲盛事,綴而序之。秋䗲輕光,匪助奔羲之曜;春蛙陋響,寧裨大樂之音?聊以宣情,詎云摛藻?與我同志,幸無誚焉。集沙門不應拜俗等事卷第一弘福寺沙門釋彦悰纂錄故事篇第一上故事者,明隋以上沙門致敬等事也。自大法東流六百餘載,其中信毀交貿,襃挫相傾。亟染湮殘,頻令拜伏。而事非經國,理越天常,用爲蠹道,俱沿舊貫焉。奏 晉尚書令何充等執沙門不應敬王者奏三首幷序詔 車騎將軍庾冰爲成帝出令沙門致敬詔二首書 太尉桓玄與八座桓謙等論道人應致敬事書一首幷序八座等答桓玄明道人不應致敬事書一首桓玄與中書令王謐論沙門應致敬事書一首王謐答桓玄明沙門不應致敬事書一首難 桓玄難王謐不應致敬事三首答 王謐答桓玄應致敬難三首書 桓玄與廬山法師慧遠使述沙門不致敬王者意書一首幷遠答往反二首晉何充等執沙門不應敬王者奏三首幷序東晉咸康六年,成帝幼沖,時太后臨朝,制司徒王導錄尚書事,與上舅中書令庾亮,參輔朝政。後導等薨,庾冰輔政。謂諸沙門應盡敬王者,充等議不應敬。下禮官,詳議博士等議,與充同。門下承冰旨爲駮。充等因爲此奏焉。初奏 尚書令冠軍撫軍都鄕侯臣充、散騎常侍左僕射長平伯臣翜、散騎常侍右僕射建安伯臣恢、尚書關中侯臣懷、守尚書昌安子臣廣等言:世祖武皇帝以盛明革命,肅祖明皇帝聰聖玄覽。豈于時沙門不易屈膝,顧以不變?其修善之法,所以通天下之志也。愚謂宜遵承先帝故事,於義爲長。庾冰爲成帝,出令沙門致敬詔二首初詔: 夫萬方殊俗,神道難辯,有自來矣。達觀傍通,誠當無怪。況阿跪拜之禮,何必尚然?當復原先王所以尚之之意,豈直好此屈折,而坐遘槃辟哉?固不然矣。因父子之敬,建君臣之序,制法度,崇禮祑。豈徒然哉?良有以矣。旣其有以,將何以易之?然則名禮之設,其無情乎?且今果將有佛耶?將無佛耶?有佛耶,其道固弘,無佛耶,義將何取繼其信?然將是方外之事,方外之事,豈方內所體,而當矯形骸,違常務?易禮典,棄名教,是吾所甚疑也。名教有由來,百代所不廢。昧旦丕顯,後世猶殆。殆之爲弊,其故難尋。而今當遠慕茫昧,依俙未分,棄禮於一朝,廢教於當世,使夫凡流,傲逸憲度,又是吾之所甚疑也。縱其信然,縱其有之,吾將通之於神明,得之於胸懷耳。軌憲宏摸,固不可廢之於正朝矣。凡此等類皆晉民也。論其材智,又常人也。而當因所說之難辯,假服飾以凌度,抗殊俗之傲禮,直形骸於萬乘,又是吾所弗取也。諸君竝國器也。悟言則當測幽微,論治則當重國典。茍其不然,吾將何述焉。二奏 尚書令冠軍撫軍都鄕侯臣充、散騎常侍左僕射長平伯臣翜、散騎常侍右僕射建安伯臣恢、尚書關中侯臣懷、守尚書昌安子臣廣等言:詔書如右,臣等暗短,不足以讚揚聖旨,宣暢大義。伏省明詔,震懼屛營。輒共尋詳有佛無佛,固非臣等所能定也。然尋其遺文,鑽其要旨,五戒之禁,實助王化。賤昭昭之名行,貴冥冥之潛操,行德在於忘身,抱一心之淸妙。且興自漢世,迄于今朝,雖法有隆衰,而弊無妖妄。神道經久,未有其比也。夫詛有損也。祝必有益。臣之愚誠,實願塵露之微增潤嵩岱,區區之祝,上裨皇極。今一令其拜,遂壞其法,令修善之俗,廢於聖世,習實生常,必致愁懼隱之。臣心竊所未安,臣雖蒙蔽,豈敢以偏見,疑誤聖聽?直謂世經三代,人更明聖,今不爲之制,無虧王法。而幽冥之路,可無擁滯。是以復陳愚誠,乞垂省察。謹啓。重詔 省所陳,具情旨。幽昧之事,誠非寓言所盡。然其較略,乃大人神之常度。粗復有分例耳。大都百王制法,雖質文隨時,然未有以殊俗,參治恢誕雜化者也。豈曩聖之不達,而末聖而宏通哉?且五戒之小善,粗擬似人倫,而更於世主,略其禮敬耶?禮重矣,敬大矣,爲治之綱,盡於此矣。萬乘之君非好尊也。區域之人,非好卑也。而卑尊不陳,王教則亂,斯曩聖所以憲章體國,所宜不惑也。通才博採,往往備修之,修之身修之家可矣。修之國及朝,則不可,斯豈不遠也#省所陳,果亦未能了有之與無矣。縱其了,猶謂不可以參治。而況都無,而當以南行耶?三奏 臣充等言,臣等誠雖暗蔽,不通遠旨,至於乾乾,夙夜思循王度。寧茍執偏管,而亂大倫耶?直以漢、魏逮晉#不聞異議,尊卑憲章無或蹔虧也。今沙門之愼戒專然,及爲其禮一,而已矣。至於守戒之篤者,亡身不悋,何敢以形骸而慢禮敬哉?每見燒香祝願,必先國家,欲福祐之隆情無極已。奉上崇順,出於自然。禮儀之簡,蓋是專一守法,是以先聖御世,因而弗革也。天網恢恢,疏而不失。臣等屢屢以爲不令致拜,於法無虧,因其所利,而惠之。使賢愚,莫敢不用情,則上有天覆地載之施,下有守一修善之人。謹復陳其愚淺,願蒙省察。謹啓。于時,庾冰議寢,竟不施敬。桓玄與八座桓謙等論道人應致敬事書一首幷序晉元興中,安帝蒙塵於外,太尉桓玄以震主之威,欲令道人,設拜於己,因陳何庾舊事,謂理未盡故,與八座等書云:玄再拜白頓首,八日垂至,舊諸沙門皆不敬王者,何、庾雖已論之,而竝率所見,未是以理相屈也。庾意在尊主,而理據未盡,何出於偏信,遂淪名體?夫佛之爲化,雖誕以茫茫,推乎視聽之外,然以敬爲本,此處不異。蓋所期者殊,非敬恭宜廢也。老子同王侯於三大,原其所重,皆在於資生通運。豈獨以聖人在位,而比稱二儀哉?將以天地之大德曰生,通生理物,存於王者。故尊其神器,而禮寔惟隆。豈是虛相,崇重義存君御而已哉?沙門之所以生生資存,亦日用於理命,豈有受其德,而遺其禮,霑其惠,而廢其敬哉?旣理所不容,亦情所不安,一代大事宜共求其衷想,復相與硏盡之比,八日令得詳定也。桓玄再拜頓首,敬謂。八座等答桓玄明道人不應致敬事書一首中軍將軍尚書令宜陽䦕國侯桓謙等,惶恐死罪,奉誨,使沙門致敬王者,何、庾雖論,意未究盡。此是大事,宜使允中,實如雅論。然佛法與堯孔殊趣,禮教互乖,人以髮膚爲重,而彼髡削,不疑,出家棄親,不以色養爲孝,土木形骸,絕欲止競。不期一生要福萬劫,世之所貴已皆落之。禮教所重,意悉絕之。資父事君,天屬之至。猶離其親愛,豈得致禮萬乘,勢自應廢。彌歷三代,置其絕羈,當以神明無方,示不以涯撿,視聽之外。或別有理,今便使其致恭。恐應革者,多非唯拜起。又王者奉法,出於敬,信其理,而變其儀。復是情所未了,卽而容之。乃是在宥之。弘王令,以別答公,難孔國、張敞,在彼想已,面諮所懷道寶。諸道人竝足酬對高旨。下官等不諳佛理,率情以言,愧不足覽。謙等惶恐死罪。桓玄與中書令王謐論沙門應致敬事書一首沙門抗禮至尊,正自是情所不安。一代大事宜共論盡之。今與八座書,向已送都。今付此信,君是宜任此理者,遲聞德音。王謐答桓玄明沙門不應致敬事書一首領軍將軍吏部尚書中書令武岡男王謐惶恐死罪,奉誨,及道人抗禮至尊,幷見與八座書,具承高旨。容音之唱,辭理兼至。近者亦粗聞公道未獲究盡。尋何、庾二旨,亦恨不悉。以爲二論漏於偏見無曉。然懕心處眞,如雅誨。夫佛法之興,出自天竺,宗本幽遐,難以言辯。旣涉乎教故,可略而言耳。意以爲殊方異俗,雖所安每乖,至於君御之理,莫不必同。今沙門雖意深於敬,不以形屈爲禮,迹充率土,而趣超方內者矣。是以外國之君,莫不降禮,良以道在則貴,不以人爲輕重也。尋大法宣流,爲日諒久,年踰四百,歷代有三。雖風移政易,而弘之不異。豈不以獨絕之化,有用於陶漸;淸約之風,無害於隆平者乎?故王者拱己,不恨恨於缺戶。沙門保眞,不自疑於誕世者也。承以通生理物,存乎王者,孝諸理歸,實如嘉論。三復德音,不能已已。雖欲奉詶,言將無寄。猶以爲功高者,不賞;惠深者,忘謝。雖復一拜一起,亦豈足答濟通之德哉?公眷眄未遺,猥見逮問,輒率陳愚管,不致嫌於所奉耳。願不以人廢言,臨白反側。謐惶恐死罪。桓玄難王謐不應致敬事三首初難 來示云:‘沙門雖意深於敬,而不以形屈爲禮。’ 難曰:‘沙門之敬,豈皆略形存心?懺悔禮拜亦篤於事,爰曁之師逮于上座,與世人揖跪,但爲小異其制耳。旣不能忘形於彼,何爲忽儀於此?且師之爲理,以資悟爲德。君道通生,則理宜在本。在三之義,豈非情理之極哉?’ 來示云:‘外國之君,莫不降禮,良以道在則貴,不以人爲輕重也。’ 難曰:‘外國之君,非所宜喩,而佛教之興,亦其指可知。豈不以六夷驕强,非常教所化,故大設靈奇,使其畏服。旣畏服之,然後順軌。此蓋是大懼鬼神福報之事。豈是宗玄妙之道耶?道在則貴,將異於雅旨。豈得被其法服,便道在其中#若以道在,然後爲貴,就如君言,聖人之道,道之極也。君臣之敬,愈敦於禮。如此則沙門不敬,豈得以道在,爲貴哉?’ 來示云:‘歷年四百,歷代有三,而弘之不異。豈不以獨絕之化,有日用於陶漸,淸約之風,無害於隆平者乎?’ 難曰:‘歷代不革,非所以爲證也。曩者晉人,略無奉佛。沙門徒衆皆是諸胡,且王者與之不接。故可任其方俗,不爲之撿耳。今主上奉佛,親接法事,事異於昔。何可不使其禮有准,日用淸約,有助于教?皆如君言,此蓋是佛法之功,非沙門傲誕之所益也今篤以祗敬將無彌濃其助哉來示云功高者不賞惠深者忘謝雖復一拜一起豈足答濟通之恩難曰夫理至無酬誠如來旨然情在罔極:‘則敬自從之,此聖人之。所以緣情制,禮而各通其,寄也若以功深惠重必略,其謝則釋迦之。德爲是深耶爲,是淺耶若,淺耶不宜以小道而亂,大倫若深耶豈得彼肅其恭而此弛其敬哉王謐答桓玄應致敬難三首初答 難曰沙門之敬豈皆略形存心懺悔禮拜亦篤於事 答曰夫沙門之道自以敬爲主但津塗旣殊義無降屈故雖天屬之重形禮都盡也沙門所,以推宗師長,自相崇敬者,良以宗致。旣同則長幼成,序資通有係。則事與心應,原佛法雖曠,而不遺小善。一介之功報亦應之,積毫成山,義斯著矣。’難曰:‘君道通生,則理應在本。在三之義,豈非情理之極哉?’ 答曰:‘夫君道通生,則理同造化。夫陶鑄敷氣,功則弘矣。而未有謝惠於所稟,措感於理本者何?良以冥本幽絕,非物象之所擧,運通理妙,豈麤迹之能酬?是以夫子云:可使由之。不可使知之。此之謂也。’難曰:‘外國之君,非所應喩。佛教之興,亦其指可知。豈不以六夷驕强,非常教所化。故大設靈奇,使其畏服?’答曰:‘夫神道設教,誠難以言辯意,以爲大設靈奇,示以報應,此最影響之實理。佛教之根要,今若謂三世爲虛誕,罪福爲畏懼,則釋迦之所明。殆將無寄矣。常以爲周孔之化,救其甚弊。故言迹盡乎一生,而不䦕萬劫之塗。然遠探其旨,亦往往可尋。孝悌仁義明不謀而自同,四時之生殺,則矜慈之心見。又屢抑仲由之問,亦似有深旨。但教體旣殊,故此處常昧耳。靜而求之,殆將然乎!殆將然乎!’ 難曰:‘君臣之敬,愈敦於禮。如此則沙門不敬,豈得以道在爲貴哉?’ 答曰:‘重尋高論,以爲君道運通,理同三大。是以前條已粗言意,以爲君人之道,竊同高旨。至於君臣之敬,則理盡名教。今沙門旣不臣王侯,故敬與之廢耳。’難曰:‘歷代不革,非所以爲證也。曩者晉人,略無奉佛。沙門徒衆皆是諸胡,且王者與之不接,故可任其方俗,不爲之撿耳。’ 答曰:‘前所以云歷有年代者,正以容養之道要,當有以故耳#非謂已然之事,無可改之理也。此蓋言勢之所至,非㦎然所據也。胡人不接王者,又如高唱前代之不論,或在於此耶?’ 難曰:‘此蓋是佛法之功,非沙門傲誕之所益。今篤以祗敬,將無彌濃其助哉?’ 答曰:‘敬尋來論,是不誣佛理也。但傲誕之迹,有虧大化。誠如來誨誠。如來誨意,謂沙門之道,可得稱異,而非傲誕。今若以千載之末,淳風轉薄,撗服之徒,多非其人者,敢不懷愧?今但謂自理,而默差可遺人而言道耳。前答云:不以人爲輕重。微意在此矣。’難曰:‘若以功深惠重,必略其謝,則釋迦之德爲是深耶,爲是淺耶?若淺耶,不宜以小道而亂大倫;若深耶,豈得彼肅其恭,而此弛其敬哉?’答曰:‘以爲釋迦之道,深則深矣。而瞻仰之徒,彌篤其敬者,此蓋造道之倫,必資行功。行功之美,莫尚於此。如斯乃積行之所因,來世之關鍵也。且致敬師長,功猶難抑。況擬心宗極,而可替其禮哉?故雖俯仰累劫,而非謝惠之謂也。’桓玄重難王謐二難 省示,猶復未釋所疑。因來告復,粗有其難。夫情敬之理,豈容有二?皆是自內以及外耳。旣入於有情之境,則不可得無也。若如來言王者:同之造化,未有謝惠於所稟,措感於理本。是爲功玄理深,莫此之大也。則佛之爲化,復何以過茲?而來論云:津塗旣殊,則義無降屈,宗致旣同,則長幼成序。資通有係,則事與心應。若理在己本,德深居極。豈得云津塗之異,而云降屈耶?宗致爲是何耶?若以學業爲宗致者,則學之所學,故是發其自然之性耳。茍自然有在,所由而稟。則自然之本居可知矣。資通之悟,更是發鎣其末耳。事與心應,何得在此,而不在彼?’又云:周孔之化,救其甚弊。故盡於一生,而不開萬劫之塗。夫以神奇爲化,則其教易行。異於督,以仁義盡於人事也。是以黃巾妖惑之徒,皆赴者如雲。若此爲實理,行之又易。聖人何緣舍所易之實道,而爲難行之末事哉?其不然也?亦以明矣。將以化教殊俗,理在㩲濟,恢誕之談,其趣可知。又云:君臣之敬,理盡名教。今沙門旣不臣王侯。故敬與之廢,何爲其然?夫敬之爲理,上紙言之詳矣。君臣之敬,皆是自然之所生。理篤於情本,豈是名教之事耶?前論已云:天地之大德曰生,通生理物,存乎王者。茍所通在斯,何得非自然之所重哉?又云:造道之倫,必資功行,積行之所因,來世之關鍵也。擬心宗極,不可替其敬。雖俯仰累劫,而非謝惠之謂。請復就來旨,而借以爲難。如來告以敬爲行首,是敦敬之重也。功行者,當計其爲功之勞耳。何得直以珍仰釋迦,而云莫尚於此耶?惠無所謝,達者所不惑,但理根深極,情敬不可得無耳。臣之敬君,豈謝惠者耶?王謐重答桓玄二答 奉告幷垂重難,具承高旨。此理微緬,至難措言。又一代大事,應時詳盡。下官才非拔幽,特乏硏析,且妙難精詣,益增茫惑。但高音旣臻,不敢默已,輒復率其短見,妄酬來誨。無以啓發,容致祇用反側,願復詢諸道人通才,蠲其不逮。公云:宗致爲是何耶?若以學業爲宗致者,則學之所學,故是發其自然之性耳。茍自然有在所由而稟,則自然之本居可知矣。今以爲宗致者,是所趣之至導,學業者,日用之筌蹄。今將欲趣彼至極,不得不假筌蹄,以自運耳。故知所假之功,未是其絕處也。夫積學以之極者,必階麤以及妙,魚獲而筌廢,理斯見矣。公以爲神奇之化易,仁義之功難,聖人何緣舍所易之實道,而爲難行之末事哉?其不然也,亦以明矣。意以爲佛之爲教,與內聖永殊#旣云其殊,理則無竝,今論佛理,故當依其宗,而立言也。然後通塞之塗,可得而詳矣。前答所以云仁善之行,不殺之旨,其若似可同者,故引以就此耳。至於發言抗論,津徑所歸,固難得而一矣。然愚意所見,乃更以佛教爲難也。何以言之?今內聖所明,以爲出其言,善應若影嚮。如其不善千里違之。如此則美惡應於俄頃,禍福交於目前,且爲仁由已,弘之則是,而猶有棄正而卽邪,背道而從欲者矣。況佛教喩一生於彈指,期要終于永劫,語靈異之無位。設報應於未兆,取之能信,不亦難乎?是以化曁中國,悟之者尟,故本起經云:正言似反。此之謂矣。 公云:行功者,當計其爲功之勞,何得直以珍仰釋迦,而云莫尚於此耶?請試言曰:以爲佛道弘曠,事數彌繁,可以練神成道,非唯一事也。至於在心,無倦於事,能勞珍仰宗極。便是行功之一耳。前答所以云莫尚於此者,自謂擬心宗轍,其理難向#非謂禮拜之事,便爲無最也。但旣在未盡之域,不得不有心於希通。雖一介之輕微,必終期之所須也。公云:君臣之敬,皆是自然之所生,理篤於情本。豈是名教之事耶?敬戢高論,不容閒然。是以前答云:君人之道,竊同高旨者,意在此也。至於君臣之敬,事盡揖拜。故以此爲名教耳。非謂相與之際,盡於創迹也。請復重申,以盡微意。夫太上之世,君臣已位,自然情愛,則義著化本。于斯時也,則形敬蔑聞,君道虛運。故相忘之理#泰,臣道冥陶。故事盡於知足,因此而推#形敬不與心爲影響,殆將明矣。及親譽旣生,茲禮乃興。豈非後聖之制作,事與時應者乎?此理虛邈,良難爲辯。如其未允,請俟高當。桓玄三難王謐幷序來難手筆甚佳,殊爲斐然。可以爲釋疑處,殊是未至也。遂相攻難,未見其已。今復料要,明在三之理,以辯對輕重,則敬否之理,可知。想硏微之功,必在苦愈析耳。八日已及今,與右僕射書,便令施行敬事尊主之道#使天下莫不敬。雖復佛道無以加其尊,豈不盡善耶?事雖已行,無豫所論宜究也。想諸人,或更有精析耳。可以示仲文#三難 比獲來示,幷諸人所論,竝未有以釋其所疑。就而爲難,殆以流遷。今復重申前意,而委曲之想,足有以頓白馬之轡#知辯制之有耳。夫佛教之所重,全以神爲貴。是故師徒相宗,莫二其倫。凡神之明暗,各有本分。分之所資,稟之有本;師之爲功,在於發悟。譬猶荊璞,而瑩拂之耳。若質非美,玉琢磨何益?是爲美惡存乎自然,深德在於資始拂瑩之功寔以未焉旣懷玉自中,又匠以成器,非君道,則無以申,遂此生,而通其爲道者也。是爲在三之重,而師爲之末。何以言之?君道兼師,而師不兼君。教以弘之,法以齊之,君之道也。豈不然乎?豈可以在理之輕而奪宜尊之敬三復其理愈所疑駭#制作之旨,將在彼,而不在此。錯而用之,其弊彌甚。想復領其趣,而遺其事,得之濠上耳。王謐三答桓玄三答 重虧嘉誨云:佛之爲教,以神爲貴;神之明暗,各有本分。師之爲理,在於發悟。至於君道,則可以申遂此生,通其爲道者也。而爲師無該通之美,君有兼師之德,弘崇主之大禮,析在三之深淺,實如高論。實如高論,下官近所以脫言鄙見,至於往反者,爲顧問旣華,不容有隱。乃更成別辯一理,非但習常之惑也。旣重硏妙旨,理實恢邈,曠若發曚#於是乎在。承已令庾桓,施行其事,至敬時定,公私幸甚。下官瞻仰所悟,義在擊節。至於濠上之誨,不敢當命也。桓玄與廬山法師慧遠使述沙門不敬王者意書一首幷 遠 答 往 反 二 首沙門不敬王者,旣是情所不了,於理又是所未喩。一代大事,不可令其體不允。近八座書今示君,君可述所以不敬意也。此便當行之事,一二令詳遣想。君必有以釋其所疑耳。王領軍大有任,此意近亦同,遊謝中面,共諮之。所據理殊,未釋所疑也。今郭江州取君答,可旨付之。遠法師答桓太尉詳省別告及八座書。問沙門所以不敬王者,意義在尊主崇上。遠存名體,徵引老氏,同王侯於三大,以資生運通之道故,宜重其神器,若推其本,以尋其源。咸稟氣於兩儀,受形於父母,則以生生通運之道爲弘,資存日用之理爲大。故不宜受其德,而遺其禮,霑其惠,而廢其敬。此檀越立意之所據,貧道亦不異於高懷。求之於佛教,以尋沙門之道理,則不然。何者?佛經所明,凡有二科:一者處俗弘教,二者出家修道。處俗,則奉上之禮、尊親之敬、忠孝之義,表於經文,在三之訓,彰乎聖典。斯與王制同命,有若符契。此一條全是檀越所明,理不容異也。出家則是方外之賓,迹絕於物。其爲教也,達患累,緣於有身,不存身以息患,知生生由於稟化,不順化以求宗,求宗不由於順化。故不重運通之資,息患不由於存身。故不貴厚生之益。此理之與世乖,道之與俗反者也。是故凡在出家,皆隱居,以求其志,變俗以達其道。變俗服章,不得與世典同禮。隱居則宜高尚其迹。夫然,故能拯溺族於沈流,拔幽根於重劫,遠通三乘之津,廣䦕天人之路。是故內乖天屬之重,而不違其孝;外闕奉主之恭,而不失其敬。若斯人者,自誓始於落簪,立志成於暮歲。如令一夫全德,則道洽六親,澤流天下。雖不處王侯之位,固已恊契皇極,大庇生民矣。如此豈坐受其德,虛霑其惠,與夫尸祿之賢同其素飡者哉?檀越頃者,以有其服,而無其人。故澄淸簡練,容而不雜。此命旣宣,皆人百其誠,遂之彌深,非言所喩。若復䦕出處之迹,以弘方外之道,則虛襟者,挹其遺風,漱流者,味其餘津矣。若澄簡之後,猶不允情,其中或眞僞相冒,涇渭未分,則可以道廢人。固不應以人廢道,以道廢人,則宜去其服。以人廢道,則宜存其禮。禮存則制教之旨可尋,迹廢則遂志之歡莫由。何以明其然?夫沙門服章法用,雖非六代之典,自是道家之殊俗,表之名器。名器相涉,則事乖其本;事乖其本,則禮失其用。是故愛夫禮者,必不虧其名器。得之不可虧,亦有自來矣。夫遠遵古典者,猶存告朔之餼羊。餼羊猶可以存禮,豈況如來之法服耶?推此而言,雖無其道,必宜存其禮。禮存則法可弘,法可弘則道可尋。此古今所同,不易之大法也。又袈裟非朝宗之服,鉢盂非廊廟之器,軍國異容,戎華不雜,剔髮毀形之人,忽廁諸侯之禮,則是異類相涉之像。亦竊所未安,檀越奇韻挺於弱年,風流邁於季俗,猶參究時賢,以求其中,此而推之,必不以人廢言。貧道西垂之年,假日月以待盡,情之所惜,豈存一己?茍吝所執,蓋欲令三寶中,興於命世之運,明德流芳,於百代之下耳。若一旦行此,佛教長淪,如來大法於茲泯滅,天人感歎,道俗革心矣。貧道幽誠所期,復將安寄,緣眷遇之隆,故坦其所懷,執筆悲懣,不覺涕 泗撗流矣。桓太尉重答遠法師書知以方外遺形故,不貴爲生之益;求宗不由順化故,不重運通之資。又云:內乖天屬之重,而不違其孝;外闕奉主之恭,而不失其敬。若如來言,理本無重,則無緣有致孝之情,事非資通,不應復有致恭之義。君親之情許其未盡,則情之所寄,何爲絕之?夫累著在於心滯,不由形敬。形敬蓋是心之所用耳。若乃在其本,而縱以形敬,此復所未之喩。又云:佛教兩弘,亦有處俗之教,或澤流天下,道洽六親。固以恊讚皇極,而不虛霑其德矣。夫佛教存行,各以事應因緣,有本必至無差者也。如此,則爲道者,亦何能違之哉?是故釋迦之道,不能超白淨於津梁。雖未獲須陁,故是同國人所蒙耳。就如來言,此自有道深德之功,固非今之所謂宜教者,所可擬議也。來示未能共求其理,便大致慨然。故是未之喩也。想不惑,留常之滯,而謬情理之用耳。集沙門不應拜俗等事卷第一故事上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성제(321-342)는 동진 제3대 황제이다. 명제(明帝)의 장자로 5세에 즉위하였다.
- 2)유량(289-340)은 명제의 비인 유황후(庾皇后)의 오라버니이다.
- 3)유양의 아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