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高僧傳卷第十一

ABC_IT_K1074_T_011
032_0869_a_01L고승전 제11권
032_0869_a_01L高僧傳卷第十一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032_0869_a_02L梁會稽嘉祥寺沙門釋慧皎撰

4. 습선(習禪)
032_0869_a_03L習禪二十一人 明律十三人
竺僧顯一 帛僧光二
竺曇猷三 釋慧嵬四
釋賢護五 釋支曇蘭六
釋法緖七 釋玄高八
釋僧周九 釋慧通十
釋淨度十一 釋僧從十二
釋法成十三 釋慧覽十四
釋法期十五 釋道法十六
釋普恒十七 釋法晤十八
釋僧審十九 釋曇超二十
釋慧明二十一

1) 축승현(竺僧顯)
032_0869_a_15L竺僧顯一
승현의 성은 부(傅)씨이며, 북쪽 나라 사람이다. 그는 올곧은 고행으로 계율과 절조를 훌륭히 지켰다. 푸성귀만을 먹으면서 경을 외우고, 선(禪)을 일삼아 힘썼다. 항상 산림에 혼자 거처하였다. 그리고 인간 세계 밖에서 두타행을 닦았다. 혹 때로는 며칠씩 선정(禪定)에 들었어도, 또한 주린 기색이 없었다.
당시 유요(劉曜)가 서경(西京: 長安)을 침략하여 쓸어버렸다. 조정과 재야가 무너지고 어지러워졌다. 승현은 진(晋)의 태흥(太興) 연간(318~321) 말기에 남쪽 강남에 머물렀다. 다시 이름난 산들을 다니면서, 자신이 항상 닦던 선의 일을 닦았다.
032_0869_a_16L竺僧顯本姓傅氏北地人貞苦善戒蔬食誦經業禪爲務常獨處山林頭陁人外或時數日入禪亦無飢色時劉曜寇蕩西京朝野崩亂顯以晉太興之末南逗江左復歷名山修己恒業
032_0869_b_01L그 후 병이 들어 오래도록 위중하였다. 마침내 서방 세계에 생각을 두고, 마음으로 간절히 희구하였다. 그러자 무량수불(無量壽佛)이 참 모습을 나투어 빛을 비추었다. 그의 몸의 고통 받던 곳이 모두 나았다. 이 날 저녁 일어나 목욕을 하였다. 함께 머물던 이들과 시병하는 이들에게 자기가 본 것을 말해주었다. 아울러 인과에 관한 훈계를 하였다. 매우 정밀하게 분석한 말이었다.
이튿날 맑은 새벽에 편안히 앉아서 돌아가셨다. 방안에 특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10여 일이 지나서야 멎었다.
032_0869_a_22L後遇疾緜篤乃屬想西方心甚苦至見無量壽佛降以眞容光照其所苦都愈是夕便起澡浴爲同住及侍疾者說己所見幷陳誡因果甚精析至明淸晨平坐而化室內有殊香旬餘乃歇

2) 백승광(帛僧光)
032_0869_b_05L帛僧光二
백승광은 혹 담광(曇光)이라고도 하였다.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그는 어려서부터 선(禪)을 익혔다. 진(晋)의 영화(永和) 연간(345~356) 초기에 강동 지방에 노닐어, 섬주(剡州)의 석성산(石城山)에 머물렀다. 산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말하였다.
“이 산 속에는 예전부터 맹수로 인한 재난과 산신의 횡포가 심해,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승광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사람을 고용하여 풀을 베어 길을 열고, 지팡이를 짚고 앞으로 나아갔다. 길을 걸어 몇 리를 들어가니, 갑자기 크게 비바람이 치면서 호랑이 떼가 포효하고 울부짖었다. 승광은 산 남쪽에 한 석실(石室)을 발견하고는 그 속에 머물러 합장하고, 선(禪)에 안주하여 정신을 깃들이는 처소로 삼았다.
032_0869_b_06L帛僧光或云曇光未詳何許人少習禪業晉永和初遊于江東投剡之石城山山民咸云此中舊有猛獸之災及山神縱暴人蹤久絕光了無懼色雇人開翦負杖而前行入數里忽大風雨群虎號鳴光於山南見一石室仍止其中安禪合掌以爲棲神之處
이튿날 아침이 되어 비가 멎었다. 마을로 내려가 음식을 구걸하고, 저녁에는 다시 굴 속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자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 혹 호랑이의 형상을 짓기도 하고, 혹 뱀의 몸이 되기도 하면서, 다투어 찾아와 승광을 위협하였다. 승광은 한결같이 모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시 사흘이 지나자 또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
“저는 자리를 옮겨 장안현(章安縣)의 한석산(寒石山)으로 가서 머물고, 이 석실을 드려 봉양합니다.”
그 후로는 나무 베고 나물 캐러 오는 길이 통하였다. 도인과 속인들이 종사로 섬겼다. 선을 좋아하여 찾아와서 배우는 사람들이, 석실 옆에 띠풀로 집을 세웠다. 그것이 점차로 절을 이루어, 은악사(隱岳寺)라 이름하였다.
032_0869_b_13L至明旦雨息乃入村乞食夕復還中經三日乃夢見山神或作虎形或作蛇身競來怖光光一皆不恐經三日夢見山神自言移往章安縣寒石山住推室以相奉爾後薪採通流道俗宗樂禪來學者起茅茨於室側漸成寺舍因名隱嶽
032_0869_c_01L승광은 선정에 들 때마다, 곧 7일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산에서 거처하기 53년, 나이 110세가 된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 말기에, 옷으로 머리를 덮고 편안히 앉아서 세상을 마쳤다.
이때 대중 승려들은 모두 보통 때와 같이 선정에 든 것이라 생각하였다. 7일이 지난 후에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생각하였다. 곧 함께 가서 보았다. 얼굴빛은 여느 때와 같으나, 오직 코만 숨기운이 없었다. 정신이 떠나간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해골이 썩지 않았다.
전송(前宋)의 효건(孝建) 2년(455)에 곽홍(郭鴻)이 섬주 태수에 임명되었다. 이 산에 와서 예배를 올리고, 시험 삼아 뜻한 대로 짐짓 가슴을 헤쳐 보았다. 그랬더니 시원한 바람이 일어나면서 의복이 삭아 흩어지고, 오직 백골만이 남았다. 곽홍은 크게 부끄러워하고 두렵게 여겼다. 백골을 석실에서 거두어, 벽돌을 바깥에 쌓아 흙을 발랐다. 그러고는 그의 형상을 그림으로 그렸다. 지금까지도 아직 남아 있다.
032_0869_b_20L光每入定輒七日不處山五十三載春秋一百一十歲晉太元之末以衣蒙頭安坐而卒僧咸謂依常入定過七日後怪其不乃共看之顏色如常唯鼻中無氣神遷雖久而形骸不朽至宋孝建二郭鴻任剡入山禮拜試以如意撥颯然風起衣服銷散唯白骨在焉鴻大愧懼收之於室以塼壘其外而泥之畫其形像于今尚存

3) 축담유(竺曇猷)
032_0869_c_06L竺曇猷三
담유는 혹 법유(法猷)라고도 하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고행하여 선정을 익혔다. 후에 강남을 떠돌다가 섬주(剡州)의 석성산에 머물렀다. 음식을 구걸하고 좌선을 하였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남을 해치는 술법을 행하는 어떤 집에 이르러 음식을 구걸하였다. 담유의 축원하는 주문이 끝나자, 문득 지네가 밥 안에서 튀어나왔다. 그러나 담유는 유쾌하게 먹고, 별 탈이 없었다.
후에 시풍(始豊)의 적성산(赤城山) 석실로 자리를 옮겨 앉아, 선을 하였다. 사나운 호랑이 수십 마리가 담유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담유가 경을 외는 소리는 전과 같았다. 한 호랑이가 졸자, 담유는 짐짓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물었다.
“왜 경을 듣지 않느냐?”
이윽고 호랑이 무리가 모두 떠났다. 그러자 얼마 후에는 굵은 뱀들이 다투어 나왔다. 길이가 10여 아름이나 되는 것들이 빙빙 돌면서 오갔다. 머리를 치켜들고 담유를 향하다가, 반나절이 지나자 다시 떠났다.
032_0869_c_07L竺曇猷或云法猷燉煌人少苦行禪定後遊江左止剡之石城山乞食坐禪嘗行到一行蠱家乞食猷呪願忽有蜈蚣從食中跳出猷快食無後移始豐赤城山石室坐禪有猛虎數十蹲在猷前猷誦經如故一虎獨睡猷以如意扣虎頭問何不聽經俄而群虎皆去有頃壯蛇競出大十餘圍循環往復擧頭向猷經半日復
032_0870_a_01L그 후 어느 날 산신이 모습을 드러내어, 담유를 찾아왔다.
“법사의 위엄과 덕이 이미 무겁습니다. 이 산에 오셔서 머무시니, 제자는 문득 이 석실을 드려 봉양하겠습니다.”
담유가 말하였다.
“빈도(貧道)가 산을 찾아온 것은 서로 만날 수 있기를 원하였기 때문이오. 왜 함께 머물지 않으시오?”
산신이 말하였다.
“제자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다만 부하 권속들이 아직 법화에 젖지 못하여, 갑자기 제지하는 말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먼 곳의 사람이 오가면, 혹 서로 침범하고 부딪칩니다. 사람과 신의 길은 다르기도 하여, 그런 까닭에 떠날 따름입니다.”
담유가 말하였다.
“본래 어떤 신이오?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을 터인데, 어디로 옮겨가려 하시오?”
산신이 말하였다.
“제자는 하(夏)임금의 아들로서, 이 산에 자리 잡은 지 2천여 년입니다. 한석산은 집안의 외삼촌께서 다스리는 산이니, 그곳에 가서 머물 것입니다.”
곧 산 음지쪽의 산신묘로 돌아갔다. 헤어짐에 즈음하여 손을 잡고는, 담유에게 향 세 상자를 주었다.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구름을 뛰어넘어 떠나갔다.
032_0869_c_17L後一日神現形詣猷曰法師威德旣重來止此山弟子輒推室以相奉猷曰貧道尋山願得相値何不共住神曰弟子元爲不爾但部屬未洽法卒難制語遠人來往或相侵觸神道異是以去耳猷曰本是何神之久近欲移何處去耶神曰弟子夏帝之子居此山二千餘年寒石山是家舅所治當往彼住尋還山陰廟臨別執手贈猷香三匳於是鳴鞞吹角陵雲而去
산에는 외로운 바위가 구름에 닿을 만큼 빼어나게 홀로 서 있었다. 담유는 돌을 치고 사다리를 만들어 그 바위에 올라가 좌선하였다. 그러면서 대나무를 이어 물을 옮겨, 일상생활에 공급하였다. 선을 배우려고 찾아온 사람이 10여 명이 있었다. 왕희지(王羲之)가 소문을 듣고 짐짓 찾아가, 봉우리를 우러르며 높이 인사하여 경의를 다하고 돌아갔다.
적성암(赤城巖)은 천태산의 폭포와 영계(靈溪) 사명산(四明山)과 나란히 서로 연속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천태산은 까마득한 절벽과 드높은 산마루가 하늘을 끊는다.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이 있다.
“그 위에는 아름다운 정사(精舍)가 있어 득도한 이가 산다. 비록 돌다리가 개울에 걸쳐 있지만, 바위가 가로막아 사람의 접근을 끊는다. 또한 이끼가 푸르고 매끄러워, 먼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곳에 이른 사람은 없다.”
담유는 걸어 다리가 있는 곳에 이르자,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었다.
“그대의 정성이 도타운 것은 알지만, 아직은 득도하지 못하였으니 물러가라. 10년 후가 되면 스스로 이곳에 오리라.”
032_0870_a_04L赤城山山有孤巖獨立秀出千雲猷搏石作梯昇巖宴坐接竹傳水以供常用禪學造者十有餘人王羲之聞而故往仰峯高挹致敬而返赤城巖與天台瀑布靈溪四明竝相連屬天台懸崖峻峙峯嶺切天古老相傳上有佳精舍得道者居之雖有石橋跨㵎而撗石斷人且莓苔靑滑終古以來無得至者猷行至橋所空中聲曰知君誠篤今未得度卻後十年自當來也
담유는 마음으로 한탄하여, 그 날 저녁 그 산 속에서 잠잤다. 밤에 주위를 돌며 보살을 창하는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수염과 눈썹이 하얀 사람이 나타났다. 담유가 가려는 곳을 물었다. 담유가 자세히 대답하니, 그 노인이 말하였다.
“그대는 생사를 윤회하는 몸인데,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 나는 이곳 산신인 까닭에 알려줄 따름이다.”
담유는 마침내 그곳에서 물러났다. 길을 가다 한 석실을 지나갔다. 점심때가 지나 그곳에서 쉬려 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어둡게 깔리면서, 석실 안이 온통 울렸다. 그러나 담유는 정신과 안색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032_0870_a_14L猷心悵然夕留中宿聞行道唱薩之聲旦復欲前見一人鬚眉皓白問猷所之猷具答意公曰君生死身何可得去吾是山神故相告耳猷乃退還道經一石室過中憩俄而雲霧晦合室中盡鳴猷神色無擾
032_0870_b_01L 다음날 아침 홑옷을 입고 머리싸개를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곳은 제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어제는 나가서 집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시끄러운 움직임이 이르렀으니, 크게 깊이 부끄럽습니다.”
담유가 말하였다.
“만약 이것이 그대의 집이라면, 청컨대 되돌려 드리지요.”
신이 말하였다.
“저는 주거지를 이미 옮겼으니, 청컨대 머물러 사시기 바랍니다.”
담유는 얼마 동안 머물렀다. 담유는 늘 돌다리를 건너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후에 여러 날 정결하게 재계를 다한 다음 다시 그곳에 가고자 하였다. 가서 보니, 가로막은 바위가 환하게 열려 있었다. 다리를 건너서 조금 갔다. 정사(精舍)와 신이한 승려가 보이는 것이 과연 종전의 이야기와 같았다. 그리하여 함께 향을 사르고 점심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신승이 그에게 말하였다.
“물러가게. 10년 후면 저절로 이곳에 올 것이야. 지금은 아직 머물 수 없네.”
이에 돌아왔다. 돌아보니 가로막은 바위가 다시 처음과 같이 합쳐졌다.
032_0870_a_20L明旦見人著單衣袷來此乃僕之所居昨行不在家中遂致搔動大深愧怍猷曰若是君室請以相還神曰僕家室已移請留令住猷停少猷每恨不得度石橋後潔齋累日復欲更往見撗石洞開度橋少許精舍神僧果如前所說因共燒香中食畢神僧謂猷曰卻後十年自當來此今未得住於是而返顧看撗石還合如初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에 요사스런 별이 나타났다. 황제는 널리 나라 안의 모든 덕 있는 사문들에게, 재를 올리고 참회하여, 재앙을 물리치도록 영을 내렸다. 이에 담유가 곧 정성으로 기도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감응이 일어났다. 6일째 되는 날 아침에, 푸른 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나타나 지나간 일을 뉘우쳤다.
“잘못하여 법사를 고단하게 하였습니다.”
이 날 저녁, 요사스런 별이 물러갔다.
또 다른 설에서는 말한다.
“별을 물리친 것은 백승광(帛僧光)이다.”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담유는 태원 연간(376~396) 말기에 산의 석실에서 세상을 마쳤다. 시신은 그대로 편안하게 앉아 있었으나, 몸이 온통 녹색이었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 말기에 은둔한 선비 신세표(神世標)가 이 산에 들어가 바위에 올라갔다. 짐짓 담유의 시신을 보았는데 썩지 않았다. 그 후 그곳에 가서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구름과 안개에 헷갈려서 엿볼 수가 없었다.
032_0870_b_06L晉太元中有妖星帝普下諸國有德沙門令齋懺悔攘災猷乃祈誠冥感至六日旦見靑衣小兒來悔過云撗勞法師是夕星退別說云星是帛僧光未詳猷以太元之末於山室屍猶平坐而擧體綠色晉義熙末隱士神世摽入山登巖故見猷屍不朽其後欲往觀者輒雲霧所惑無得窺也

∙혜개(慧開)ㆍ혜진(慧眞)
당시 또 혜개ㆍ혜진 등도 선(禪)의 일을 닦기를 잘하였다. 여요(餘姚)의 영비산(靈祕山)에 들어가, 각기 방장(方丈)과 선 수행하는 감실을 조성하였다. 지금까지 아직 남아 있다.
032_0870_b_14L時又有慧開慧眞等亦善禪入餘姚靈秘山各造方丈禪龕今尚在

4) 석혜외(釋慧嵬)
032_0870_b_16L釋慧嵬四
혜외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장안의 대사(大寺)에 머물렀다. 계율의 행실이 맑고 깨끗하였다. 대부분 산골짜기에 깃들어 머물면서, 선정(禪定)의 일을 닦았다. 어느 머리 없는 귀신이 찾아왔다. 그러나 혜외는 정신과 안색을 바꾸지 않고, 곧 귀신에게 말하였다.
“너는 이미 머리가 없으니, 곧 두통을 앓을 근심도 없겠구나. 얼마나 통쾌한 일이냐?”
귀신이 곧 모습을 숨겼다. 다시 배가 없는 귀신이 되어 찾아왔다. 다만 손과 발만이 있었다. 혜외는 또 말하였다.
“너는 이미 배가 없으니, 곧 오장육부의 근심도 없겠구나.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
잠시 후 다시 다른 형상이 되어 찾아왔다. 그러나 혜외가 모두 형상에 따라 말하여, 모두 이를 쫓아냈다.
032_0870_b_17L釋慧嵬不知何許人止長安大寺戒行澄潔多拪處山谷修禪定之業有一無頭鬼來嵬神色無變乃謂鬼曰旣無頭便無頭痛之患一何快哉便隱形復作無腹鬼來但有手足又曰汝旣無腹便無五藏之憂一何樂須臾復作異形嵬皆隨言遣之
032_0870_c_01L그 후 어느 때 날씨가 매우 춥고 눈이 내리는데, 어떤 여자가 기숙할 곳을 찾았다. 모습과 얼굴이 단정하고 의복도 선명하였다. 자태가 사랑스럽고 부드러우며 우아하였다. 자칭 하늘에서 온 여인네[天女]라 말하였다.
“상인께서 덕이 있기에, 하늘이 나를 보내어 서로 위로하여 달래게 하였습니다.”
욕망을 자극하는 말로 꾀어내 권유하여 그의 뜻을 흔들었다. 그러나 혜외의 지조는 곧고 확고하여, 하나도 마음에 흔들림이 없었다. 곧 그 여자에게 말하였다.
“내 마음은 불 꺼진 재[灰]와 같다. 가죽주머니[革囊]로 시험해 보고자 하지 말아라.”
여자는 마침내 구름을 뚫고 떠나면서 되돌아보며 찬탄하였다.
“바닷물은 마를 수 있고 수미산도 기울 수 있으나, 저 상인(上人)의 지조는 굳고도 곧구나.”
그 후 진(晋)의 융안(隆安) 3년(399)에 법현(法顯)과 함께 서역에서 노닐었다. 어디서 세상을 마쳤는지는 알지 못한다.
032_0870_c_01L又時天甚寒雪有一女子來求寄宿形貌端正衣服鮮明姿媚柔雅自稱天女以上人有德天遣我來以相慰談說欲言勸動其意嵬執志貞礭一心無擾乃謂女曰吾心若死灰以革囊見試女遂陵雲而逝顧而歎海水可竭須彌可傾彼上人者志堅貞後以晉隆安三年與法顯俱遊西域不知所終

5) 석현호(釋賢護)
032_0870_c_10L釋賢護五
현호의 성은 손(孫)씨이며, 양주(凉州) 사람이다. 중국에 와서 광한(廣漢)의 염흥사(閻興寺)에 머물렀다. 항상 선정을 익히는 것을 일삼았다. 또한 계율의 행실도 훌륭하여 실오라기만큼도 범하는 일이 없었다.
진(晋)의 융안(隆安) 5년(401)에 죽었다. 죽음에 즈음하여 입에서 오색의 광명이 나와 절 안을 가득히 비추었다. 유언을 남겨 몸을 불사르게 하였다. 제자가 이를 행하였다. 이윽고 사지의 관절이 다 불탔고, 오직 손가락 하나만은 불타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것을 탑 밑에 묻었다.
032_0870_c_11L釋賢護姓孫涼州人來止廣漢閻興常習禪定爲業又善於律行纖毫無犯以晉隆安五年卒臨亡口出五色光明照滿寺內遺言使燒身弟子行旣而支節都盡唯一指不然因埋之塔下

6) 지담란(支曇蘭)
032_0870_c_17L支曇蘭六
032_0871_a_01L지담란은 청주(靑州) 사람이다. 푸성귀를 먹고 선을 즐기며, 30만 글자의 경을 외웠다. 진의 태원 연간(376~396)에 섬주(剡州)에 노닐다가, 그 후 시풍(始豊)의 적성산(赤城山)에서 쉬었다. 한 곳의 자연 풍광이 깨끗하고 탁 틔어 넓은 것을 보고 그곳에 머물렀다.
며칠이 지나자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났다. 신체가 길고 컸으며, 여러 번 꾸짖어 담란을 떠나게끔 하려 하였다. 또 여러 가지 이상한 형태의 짐승들이 나타나 자주 담란을 위협하였다. 담란이 느긋하게 편안한 것을 보고는, 마침내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며 말하였다.
“주기왕(珠欺王)이 저의 외삼촌입니다. 이제 위경산(韋卿山)으로 가서 그곳에 자리 잡을 터이니, 이곳을 바쳐 봉양합니다.”
032_0870_c_18L支曇蘭靑州人蔬食樂禪誦經三十萬言晉太元中遊剡後憩始豐赤城見一處林泉淸曠而居之經于數忽見一人長大數呵蘭令去又見諸異形禽獸數以恐蘭見蘭恬然自得乃屈膝禮拜云珠欺王是家舅今往韋卿山就之推此處以相奉
3년이 지나서 문득 수레와 말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따라온 사람이 봉우리에 가득하였다. 이윽고 두건을 쓴 사람이 주기왕이라 하면서, 이름을 밝힌 다음 앞으로 나왔다. 따라온 처자와 남녀 등 23인도 모두 모습과 얼굴이 단정하여, 세속 사람을 넘는 풍모가 있었다. 이들은 담란의 처소에 이르러, 요즘 날씨에 지내기가 어떤가 안부를 물었다. 인사를 마치자 담란이 어디에 사느냐고 물었다.
“낙안현(樂安縣)의 위경산에 삽니다. 오래도록 풍문으로만 듣고 감복하였습니다. 이제야 가족들과 함께 우러러 투신하오니, 귀의하는 계를 받고자 합니다.”
담란이 곧 계를 내려주었다. 법을 받은 다음 돈 1만 냥과 꿀 두 단지를 선물하고, 하직인사를 하고는 떠났다. 문득 피리소리가 울리고 나팔소리가 나면서, 메아리쳐 산골짜기가 진동하였다. 이것은 담란과 같이 선을 닦는 무리 10여 명도 함께 보고 들은 일이다.
진(晋)의 원희(元熙) 연간(419~420)에 산에서 죽었다. 그때 나이는 83세이다.
032_0871_a_02L爾後三忽聞車騎隱隱從者彌峯俄而有人著幘稱珠欺王通旣前從其妻子男女等二十三人竝形貌端整有逾於世旣至蘭所暄涼訖蘭問住在何答云樂安縣韋卿山久服風問與家累仰投乞受歸戒蘭卽授之法竟䞋錢一萬蜜二器辭別而去便聞鳴笳動吹響振山谷蘭禪衆十餘共所聞見晉元熙中卒於山春秋八十有三矣

7) 석법서(釋法緖)
032_0871_a_12L釋法緖七
법서의 성은 혼(混)씨이며, 고창(高昌) 사람이다. 덕스런 행실이 맑고 부지런하였다. 푸성귀를 먹으면서 선을 닦았다. 후에 촉(蜀)나라에 들어가, 유사총(劉師塚) 사이에 있는 산골짜기에서 두타행을 하였다. 호랑이와 외뿔소도 그를 해치지 않았다.1)
『법화경』ㆍ『유마경』ㆍ『금광명경』을 외웠다. 항상 석실 안에 거처하면서, 선을 닦기도 하다가 독송하기도 하였다. 무더위가 극심할 때 목숨을 버렸다. 그러나 7일 동안 냄새도 나지 않았고, 시신의 왼편에서는 향기가 감돌았다. 열흘이 지난 뒤에야 멎었다. 저녁마다 시신에서 방광하며 몇 리까지 밝게 비추어, 마을 사람들이 곧 시신 위에 무덤 탑을 세웠다.
032_0871_a_13L釋法緖姓混高昌人德行淸謹蔬食修禪後入蜀於劉師塚閒頭陁山谷虎兕不傷誦『法華』『維摩』『金光明』常處石室中且禪且誦盛夏於室中捨命七日不臭屍左側有香經旬乃歇夕放光照徹數里村人卽於屍上爲起塚塔焉

8) 석현고(釋玄高)
032_0871_a_20L釋玄高八
032_0871_b_01L현고의 성은 위(魏)씨이고, 본명은 영육(靈育)이다. 풍익(馮翊)의 만년현(萬年縣) 사람이다. 어머니 구(寇)씨는 본래 외도를 믿었다. 위씨 가문에 시집와서 처음 딸 하나를 낳았다. 곧 현고의 큰 누님이었다. 그녀는 태어나서 곧 부처님을 믿었다. 어머니를 위하여 기원하면서, 가문에 다른 견해가 없이 불법을 받들 수 있기를 소원하였다.
어머니는 위진(僞秦)의 홍시(弘始) 3년(401)에 꿈속에서, 인도 승려가 꽃을 뿌려 방에 가득한 것을 보고 깨어났다. 곧 임신하여 홍시 4년(402) 2월 8일에 이르러 아들을 낳았다. 집안에 문득 기이한 향기가 감돌았다. 더욱이 광명이 벽을 비추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마침내 멎었다.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날 때 상서로운 징조가 있다고 하여, 영육(靈育)이라 이름 지었다. 당시 사람들이 이를 존중하여 다시 세고(世高)라 일컬었다.
032_0871_a_21L釋玄高姓魏本名靈育馮翊萬年人母寇氏本信外道始適魏氏首孕一女卽高之長姊生便信佛乃爲母祈願願門無異見得奉大法母以僞秦弘始三年夢見梵僧散華滿室便懷胎至四年二月八日生男家內忽有異香及光明照壁迄旦乃息以兒生瑞兆因名靈育時人重之稱世高
나이 열두 살 때 부모님 곁을 떠나, 산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허락을 받지 못했다. 어느 날 어떤 서생(書生)이 현고의 집에 잠시 와서 잠자고는 말하였다.
“중상산(中常山)에 들어가 숨어살고자 한다.”
부모는 곧 현고를 그에게 맡겼다. 이 날 저녁 마을사람들이 함께 이들을 전송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마을 사람들이 다 함께 와서, 현고의 안부를 물었다. 부모가 말하였다.
“어제 다들 같이 전송해 놓고, 지금 와서 다시 찾는가?”
마을 사람들이 말하였다.
“간 것을 전혀 알지 못하거늘, 어찌 이미 전송했다는 말인가?”
부모는 비로소 어제 맞이하고 보낸 사람이 신이한 분임을 깨달았다. 현고는 처음 산에 이르자 곧 출가하려 하였다. 그러나 산승(山僧)이 이를 허락하지 않고 말하였다.
“부모가 허락하지 않으면, 불법을 깨달을[得度] 수 없다.”
이에 현고는 잠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에게 입도(入道)를 허락해 줄 것을 청하였다. 20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앞서 세운 뜻을 이룰 수 있었다.
이미 세속에 등을 돌리고 세상과 어긋나자, 이름을 현고라고 고쳤다. 총명하고 민첩한 데다,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것을 아는 지라, 배움에 생각을 더하지 않았다.
032_0871_b_07L年十二辭親入山久之未許異日有一書生寓高家宿云欲入中常山隱父母卽以高憑之是夕咸見村人共相祖送明旦村人盡來候高父母昨已相送今復覓耶村人云都不知行豈容已送父母方悟昨之迎送乃神人也高初到山便欲出家山僧未許父母不聽法不得度高於是蹔還家啓求入道經涉兩旬方卒先旣背俗乖世改名玄高聰敏生知學不加思
열다섯 살이 되자 이미 산승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이후로는 오로지 선정과 계율에 정진하였다. 관중에 부타발타(浮馱跋陀) 선사(禪師)가 석양사(石羊寺)에 있으면서, 불법을 널리 편다는 소문을 들었다. 현고가 찾아가서 스승으로 섬긴 지 열흘 사이에, 선법에 미묘하게 뛰어났다. 부타발타가 감탄하였다.
“훌륭하구나! 불자여. 너의 깊은 깨달음이 이와 같구나.”
이에 얼굴을 낮추고 겸손히 양보하여 스승의 예를 받지 않았다. 현고는 곧 지팡이를 짚고, 서진(西秦)으로 갔다. 맥적산(麥積山)에 은둔하여 살았다. 이 산에는 백여 명의 학인이 있었다. 그의 교리의 가르침을 숭배하고, 그에게서 선의 도를 품수 받았다.
032_0871_b_17L至年十五已爲山僧說法受戒已後專精禪律聞關中有浮馱跋陁禪師在石羊寺弘法高往師之旬日之中妙通禪法跋陁歎曰善哉佛子乃能深悟如此於是卑顏推遜不受師禮高乃杖策西秦隱居麥 ((艹/積)) 山學百餘人崇其義訓稟其禪道
032_0871_c_01L당시 장안에 사문 석담홍(釋曇弘)이 있었다. 진(秦)나라의 고승으로서 이 산에 은거하면서, 현고와 서로 만나 같은 선의 일을 닦으며 우의 좋게 지냈다. 당시 걸불치반(乞佛熾槃)은 농서(隴西)를 점령하였다. 서쪽으로는 양(凉)나라와 접하였다. 외국 선사 담무비(曇無毘)가 그 나라로 들어왔다. 문도를 거느리고 무리를 이루어 선의 도를 가르쳤다. 삼매를 바르게 닦아, 이미 깊고도 미묘한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농우(隴右)의 승려들 가운데 그에게 품수 받아 계승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에 현고는 곧 자기가 대중을 거느리고, 담무비로부터 법을 전수받고자 하였다. 그런데 열흘이 안 되어, 담무비가 도리어 그러한 뜻을 현고에게 아뢰었다.
032_0871_b_23L時有長安沙門釋曇弘秦地高僧在此山與高相會以同業友善時乞佛熾槃跨有隴西西接涼土有外國禪師曇無毘來入其國領徒立衆訓以禪道然三昧正受旣深且妙隴右之僧稟承蓋寡高乃欲以己率衆卽從毘受法旬日之中毘乃反啓其志
당시 하남(河南)에 두 사람의 승려가 있었다. 비록 형상은 사문이었으나, 권세가 거짓 재상[僞相]과 짝하여 감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계율과 어긋나서 자못 학승들을 꺼려하였다. 담무비가 이미 서쪽 사이국(舍夷國)으로 돌아갔다. 두 승려는 곧 하남 왕세자 사마만(司馬曼)에게 현고를 헐뜯는 말을 꾸며 말하였다.
“대중을 모아 축적하여 모으니, 장차 나라의 재앙이 될 것입니다.”
사마만은 그 헐뜯는 말을 믿고 곧 해치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내 현고를 하북(河北)의 임양(林楊) 당산(堂山)으로 내쫓았다. 그 산의 나이든 늙은이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뭇 신선들이 이곳을 집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032_0871_c_07L河南有二僧雖形爲沙門而㩲侔僞恣情乖律頗忌學僧曇無毘旣西返舍夷二僧乃向河南王世子曼搆玄高云蓄聚徒衆將爲國災曼信讒便欲加害其父不許乃擯高往河北林陽堂山山古老相傳云是群仙所宅
이때 현고의 제자들 3백 명이 산의 집에 가서 살았다. 마음이 태연자약하고, 선정과 지혜가 더욱 새로워졌다. 충정과 정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감응하여, 신령한 이적이 많았다. 경쇠는 치지 않아도 울리며, 향기도 저절로 풍겨났다. 또한 아라한과 신선들도 이따금 찾아와 노닐었다. 맹수도 길들인 듯 복종하며, 벌레와 독물의 피해도 없었다.
현고의 학도 가운데는 6문(門: 六根)을 마음대로 요리하는 사람이 백여 명이었다. 현소(玄紹)는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배움은 모든 선(禪)을 궁구하였다. 신통력이 자유자재하였다. 손가락에서 물이 나와, 그것으로 현고가 씻고 양치질하도록 바쳤다. 그 물의 향기롭고 청정함이 보통 물보다 두 배나 달랐다. 또 늘 세간의 것이 아닌 향과 꽃을 얻어서 삼보에 바쳤다. 신령하고 기이함이 현소와 같은 이가 열한 명이었다. 현소는 후에 당술산(堂術山)에 들어가, 매미가 허물을 벗듯 세상을 떠났다.
032_0871_c_14L高徒衆三百往居山舍神情自禪慧彌新忠誠冥感多有靈異旣不擊而鳴香亦自然有氣應眞仙往往來遊猛獸馴伏蝗毒除害學徒之中遊刃六門者百有餘人有玄紹者秦州隴西人學究諸禪神力自在手指出水供高洗漱其水香淨倍異於常每得非世華香以獻三寶靈異如紹者又十一人紹後入堂術山蛻而逝
032_0872_a_01L예전에 장안의 담홍(曇弘) 법사가 좌천되었다. 민촉(岷蜀: 泗川省)에 유배당하자, 도가 성도(成都)를 흠뻑 적셨다. 하남왕(河南王)이 그의 높은 명성에 기대고자 사신을 보내어 맞아들였다. 담홍은 이미 현고가 쫓겨났다는 말을 들었다. 맹세코 그의 청백함을 알리고자 하였다. 곧 산골짜기에 놓인 구름다리의 어려움을 돌아보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명을 따랐다. 그리하여 하남에 도달하여 손님과 주인의 예를 마치고는, 곧 왕에게 말하였다.
“왕께서는 이미 깊이 비추어보고 멀리 아시는 터에, 어찌하여 헐뜯는 말을 믿고 어진 이를 버리셨습니까? 빈도가 수천 리 길을 멀다 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 한마디를 아뢰고자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왕과 태자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하고 뉘우쳤다. 곧 사신을 보내 현고를 찾아갔다. 자세를 낮추어 공손하게 사과하고, 현고에게 고을로 돌아오기를 청하였다. 현고는 이미 널리 중생들을 구제할 마음을 품었다. 그런 까닭에 분한 생각을 잊고 명에 따라 하남으로 가기로 하였다. 처음 산을 나오려 하였다. 그러자 산중의 초목들이 꺾이고 부러지며, 바위가 무너져 길을 막았다. 현고는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였다.
“나는 맹세코 도를 넓히려는 뜻을 가졌다. 그렇거늘 어찌 한 곳에만 매일 수 있겠는가?”
곧 바람이 멎고 길이 열렸다. 차츰차츰 나아가 나라에 이르렀다. 왕과 신하와 백성들이 길 가까이에서 기다리다가 영접하였다. 안팎이 공경하고 받들어, 그를 높여 나라의 스승으로 삼았다.
032_0871_c_23L昔長安曇弘法師遷流岷蜀道洽成都河南王藉其高名遣使迎弘旣聞高被擯誓欲申其淸白不顧棧道之難冒險從命旣達河南賓主儀畢便謂王曰旣深鑑遠識以信讒棄賢貧道所以不遠數千里正欲獻此一白王及太子然愧悔卽遣使詣高卑辭遜謝請高還邑旣廣濟爲懷忘忿赴命始欲出山中草木槯折崩石塞路高呪願曰誓志弘道豈得滯方乃風息路開還到國王及臣民近道候迎內外敬崇爲國師
그는 하남에서 교화를 마치자, 양(凉)나라로 나아가 노닐었다. 저거몽손(沮渠蒙遜)이 깊이 공경하여 섬겼다. 영준한 손님들의 집회에서 현고의 뛰어난 해설을 펼치게 하였다.
당시 서해의 번승인(樊僧印)도 현고에게서 수학하였다. 뜻이 좁고 도량이 편벽하여, 적게 얻은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였다. 문득 자신이 이미 아라한의 경지를 터득하였음을 알았다. 그리고는 선의 관문을 완전히 다하였다고 일컬었다.
이에 현고는 비밀히 신통력으로써 선정에 든 승인(僧印)으로 하여금, 두루 시방 끝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법문이 같지 않은 것을 보게 하였다. 승인은 한 철 하안거 내내 그가 본 바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영영 다할 수가 없었다. 비로소 선정의 물에는 바닥이 없음을 알았다. 크게 부끄럽고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032_0872_a_12L河南化畢進遊涼土渠蒙遜深相敬事集會英賓發高勝時西海有樊僧印亦從高受學志狹量褊得少爲足便謂已得羅漢頓盡禪高乃密以神力令印於定中備見十方無極世界諸佛所說法門不同印於一夏尋其所見永不能盡方知定水無底大生愧懼
당시 북위(北魏)의 오랑캐 척발도(拓跋燾)가 평성(平城)을 점거하였다. 그 군대가 양(凉)나라 경계를 침범하였다. 척발도의 외삼촌인 양평왕 두초(杜超)가 현고에게 같이, 거짓 나라의 서울로 돌아가자고 청하였다. 평성에 도달하자, 현고는 크게 선에 의한 교화를 펼쳤다.
위태자(僞太子)인 척발황(拓跋晃)은 현고를 스승으로 섬겼다. 그는 한때 거짓 무고를 받아, 그의 부친으로부터 의심을 받았다. 이에 현고에게 말하였다.
“공연히 무고를 겪는데,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현고는 금광명재(金光明齋)를 마련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7일 동안 간절히 참회하였다.
032_0872_a_19L時魏虜拓跋燾僭據平城軍侵涼境燾舅陽平王社請高同還僞都旣達平城大流禪化僞太子拓跋晃事高爲師晃一時被爲父所疑乃告高曰空羅抂苦由得脫高令作金光明齋七日懇懺
032_0872_b_01L 곧 척발도의 꿈에 그의 조부와 부친이 나타났다. 모두 검을 손에 잡고 매서운 위엄으로 물었다.
“너는 무슨 까닭으로 헐뜯는 말을 믿고 태자를 멋대로 의심하느냐?”
척발도는 놀라 꿈에서 깨어나, 크게 뭇 신하들을 모아 자신의 꿈을 알렸다. 그러자 신하들이 모두 말하였다.
“태자에게 허물이 없음은 참으로 황제의 영령들이 내려와 꾸짖은 것과 같습니다.”
척발도는 다시는 태자에 대해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현고의 정성스런 감응에 힘입은 것이다.
032_0872_b_01L燾乃夢見其祖及父皆執劍烈威汝何故信讒言抂疑太子燾驚覺集群臣告以所夢諸臣咸言太子無實如皇靈降誥燾於太子無復疑蓋高誠感之力也
척발도는 이로 인하여 글을 내렸다.
“짐은 조종의 거듭 빛나는 계통을 이어, 큰 기반을 열어 널리 만대에 융성하게 하고자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공(武功)에는 비록 밝으나, 문교(文敎)에는 아직 유창하지 못하다. 그러니 이것은 태평한 정치를 높이는 조건이 아니다. 지금 국내는 편안하고 백성들은 부유하며 창성하니, 마땅히 제도를 정해서 만세의 법으로 삼아야 한다.
무릇 음양에는 가고 옴이 있고, 사계절도 돌아가는 순서가 있다. 그러니 아들에게 물려주고 현인에게 맡기는 것이, 국가의 안전에 서로 부합되는 일이다. 그런 이유로 피로한 몸을 쉬게 하여, 장구한 계책을 굳히는 것이 고금의 바뀌지 않는 훌륭한 방법이다. 짐과 여러 공신들은 오랫동안 부지런히 노력해 왔다. 이제는 벼슬길에서 은퇴하여 집으로 물러나, 얼굴을 화락하게 하고 작위를 높이며, 정신을 수양하여 수명을 기르면서 도를 논하여 꾀를 진술할 뿐, 다시 담당관리로서의 고통스럽고 힘든 직무를 친히 맡을 필요는 없다.
그리하여 황태자로 하여금 천하의 정사를 대신 다스리고 문무백관을 모두 통솔하게 한다. 다시 어질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여서 여러 자리를 갖추고, 사람을 가려 뽑아 임무를 수여하여 쫓아낼 사람은 쫓아내고 들일 사람은 들여야 한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말씀하시기를 ‘후생이 두렵다[後生可畏]’고 하셨다. 미래가 지금만 같지 못할지 어떻게 알겠느냐?”
이에 조정의 관료와 백성들은 태자에게 모두 신(臣)이라 칭하였다. 태자에게 올리는 글은 황제에게 올리는 표(表)와 같이 하였다. 다만 흰 종이를 사용해서 구별하였다.
032_0872_b_06L燾因下書曰承祖宗重光之緖思闡洪基恢隆萬武功雖昭而文教未暢非所以崇太平之治也今者域內安逸百姓富宜定制度爲萬世之法夫陰陽有往復四時有代序授子任賢安全相所以休息疲勞式固長久古今不易之令典也朕諸功臣勤勞日久致仕歸第雍容高爵頤神養壽論道陳謨而已不須復親有司苦劇之職其令 皇太子副理萬機摠統百更擧良賢以備列職擇人授任黜陟之故孔子曰後生可畏焉知來者之不如今於是朝士庶民皆稱臣於太子上書如表以白紙爲別
032_0872_c_01L당시 최호(崔皓)와 구천사(寇天師)가 이전부터 척발도에게서 총애를 얻었다. 척발황이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는 날이면, 그들의 위세의 칼자루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였다. 마침내 거짓으로 무고하였다.
“태자가 전에 사실은 모반할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만 현고의 도술과 인연을 맺은 까닭에, 돌아가신 황제폐하를 꿈에 내려오게 하였을 따름입니다. 이러한 여론과 일의 자취가 차차 그 윤곽이 드러납니다. 만약 죽여서 제거하지 않으면, 큰 해가 될 것입니다.”
척발도는 마침내 이를 받아들여 발끈하여 크게 노하였다. 곧 칙명으로 현고를 수감하게 하였다. 현고는 이에 앞서 어느 날 비밀히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불법이 아마도 쇠할 것이다. 나와 혜숭(慧崇)이 맨 먼저 그 화를 당할 것이다.”
이때 이 말을 듣고 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032_0872_b_20L時崔寇天師先得寵於燾恐晃纂承之奪其威柄乃譖云太子前事實有謀心但結高公道術故令先帝降夢如此物論事迹稍形若不誅除必爲巨害燾遂納之勃然大怒卽勅收高先時嘗密語弟子云佛法應衰吾與崇公首當其禍乎于時聞者莫不慨

∙혜숭(慧崇)
당시 양주(凉州) 사문 석혜숭(釋慧崇)은 위위(僞魏: 北魏)의 상서(尙書)인 한만덕(韓萬德)의 문사(門師)이다. 이미 현고 다음으로 덕이 높았다. 그도 역시 의심과 저지를 받았다.
북위의 태평(太平) 5년(444) 9월에 현고와 혜숭은 함께 감옥에 유폐되었다가 그 달 15일에 화를 입어, 평성의 동쪽 한 귀퉁이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43세이다. 이 해는 전송(前宋)의 원가(元嘉) 21년(444)이다.
그 날 저녁이 되도록 문도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이 날 밤 3경(更)에 문득 광명이 나타났다. 현고가 앞서 머물던 곳의 탑 주위를 세 바퀴 돌고, 다시 선을 닦던 굴 속으로 들어갔다.
이어 광명 속에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미 갔다.”
제자들은 비로소 이미 돌아가셨음을 알고, 끊어지는 아픔으로 슬피 통곡하였다. 이윽고 시신을 성 남쪽 넓은 들에서 맞이하여 목욕시켰다. 아울러 혜숭의 시신도 따로 다른 곳에 수습하였다. 이에 온 도읍의 도인과 속인들이 놀라서 안타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032_0872_c_05L時有涼州沙門釋慧崇是僞魏尚書韓萬德之門師旣德次於高亦被疑阻至僞太平五年九月高與崇公俱被幽縶其月十五日就禍卒於平城之東隅春秋四十有三是歲宋元嘉二十一年也當爾之夕門人莫知是夜三更忽見光繞高先所住處塔三帀還入禪窟中因聞光中有聲云已逝矣諸弟子方知已化哀號痛絕而迎屍於城南曠野沐浴遷殯兼營理崇公別在異處一都道俗無不嗟
제자 현창(玄暢)은 당시 운중(雲中)에 있었다. 북위의 도읍에서 6백 리 떨어진 곳이다. 아침에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변을 알려주었다. 이어 6백 리를 달릴 수 있는 말을 공급해 주었다. 이에 채찍을 휘두르며 돌아왔다. 해가 저물 무렵에 서울에 이르렀다. 스승이 이미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비통하여 숨이 막혔다. 이어 동학들과 함께 울면서 말하였다.
“불법은 이제 멸하였다. 자못 부흥되겠는가? 만일 다시 부흥될 수 있다면, 스승님[和上]께서 일어나 앉으시기를 청해보자. 스승님의 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니, 반드시 이를 비추어보실 것이다.”
말이 끝나자 현고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빛에 기뻐하는 기색이 돌았다. 온몸에서 땀이 나왔다. 그 땀은 매우 향기로웠다.
032_0872_c_16L弟子玄暢時在雲中去魏都六百旦忽見一人告云以變仍給六百里於是揚鞭而返晩閒至都見師已悲慟斷絕因與同學共泣曰法今旣滅頗復興不如脫更興請和上起和上德匪常人必當照之矣言畢高兩眼稍開光色還悅體通汗出汗香甚
032_0873_a_01L잠시 후 그는 일어나 앉아서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불법의 교화는 인연을 따라 성하거나 쇠한다. 인연의 성쇠는 자취가 남으나, 진리는 깊고도 고요하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너희들이 머지않아 다시 나와 같이 되리라는 것이다. 오직 현창(玄暢)만이 남쪽으로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너희들이 죽은 후에 불법은 곧 다시 일어날 것이니, 잘 스스로 마음을 닦아 중도에 후회함이 없게 하라.”
말을 끝마치자 곧 누워 숨이 끊어졌다. 이튿날 관을 옮겨 화장하려 하였으나, 나라의 제도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무덤을 만들어 곧 묻었다. 도인과 속인들은 슬프고 애통하여, 소리 내어 울면서 가슴 에며 바라보았다.
032_0872_c_23L須臾起坐謂弟子曰大法應隨緣盛衰盛衰在迹理恒湛然念汝等不久復應如我耳唯有玄暢當得南度汝等死後法當更興善自修心無令中悔言已便臥而絕也日遷柩欲闍維之國制不許於是營墳卽窆道俗悲哀號泣望斷
사문 법달(法達)은 위국(僞國)의 승정(僧正)으로 있으면서 현고를 흠모한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미처 수업할 기회를 얻지 못하다가, 갑자기 현고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로 인해 울면서 말하였다.
“성인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이젠 다시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여러 날이 되도록 음식을 먹지 않고, 항상 현고의 이름을 불렀다.
“현고 상인은 성인이시라 자유자재하실 터인데, 왜 한 번도 나타나시지 않습니까?”
그 소리에 응하여 현고가 허공을 날아서 그곳에 이르는 것이 보였다. 법달은 이마를 대어 예를 올리며, 애절하게 구호하여 보호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때 현고가 말하였다.
“그대는 업보가 무거워 구해주기 어려우니,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지금 이후라도 대승의 경전에 의지하여 간절하게 참회하면, 업보를 가볍게 받을 수 있으리라.”
법달이 말하였다.
“만약 고통스런 업보를 받게 된다면, 어여삐 여기시어 구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032_0873_a_06L有沙門法達爲僞國僧正欽高日久未獲受忽聞怛化因而哭曰聖人去世復何依累日不食常呼高上聖人自何能不一現應聲見高飛空而至達頂禮求哀願見救護高曰君業重難救當可如何自今以後依方等苦當得輕受達曰脫得苦報願見矜
현고가 말하였다.
“일체 중생을 잊지 않아야 하거늘, 어찌 홀로 그대에게만 그러겠는가?”
법달이 다시 말하였다.
“법사와 혜숭은 모두 어디에 태어나셨습니까?”
현고가 말하였다.
“나는 악한 세상에 태어나 중생들을 구하여 보호하기를 원하여, 이미 염부제주에 환생하였다. 혜숭은 늘상 안양정토를 기원하여 이미 마음의 소원을 이루었다.”
다시 법달이 물었다.
“모르겠습니다만, 법사께서는 이미 어느 경지에 도달하셨는지요?”
현고가 말하였다.
“나의 모든 제자들이 저절로 그것을 아느니라.”
말을 마치자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법달이 몰래 현고의 제자들을 방문하였다. 그러자 모두가 말하였다.
“그 분은 정각을 이루기 직전의 보살[得忍菩薩]입니다.”
032_0873_a_14L高曰不忘一切寧獨在君達又曰法師與崇公竝生何處高曰吾願生惡世救護衆生卽已還生閻浮崇公常祈安養已果心矣達又問不審法師已階何地高曰我諸弟子自有知言訖奄然不見達密訪高諸弟子咸云是得忍菩薩

∙담요(曇曜)
북위(北魏)의 태평(太平) 7년(446)에 이르자, 척발도는 과연 불법을 훼멸하였다. 모두가 현고의 말과 같았다. 당시 하서국(河西國)의 저거무건(沮渠茂虔) 치하에 사문 담요가 있었다. 역시 선 수행의 일로 칭송을 받았다. 위태부(僞太傅) 장담(張潭)이 그에게 엎드려 스승의 예로 모셨다.
032_0873_a_20L至僞太平七年拓跋燾果毀滅佛法悉如高言時河西國沮渠茂虔時有沙門曇曜亦以禪業見稱僞太傅張潭伏膺師禮

9) 석승주(釋僧周)
032_0873_a_23L釋僧周九
032_0873_b_01L승주는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그는 성품이 고결하고 굳세며, 기이한 뜻과 절개가 있었다. 빚을 숨기고 자취를 감추어 아무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항상 숭고산(嵩高山)에서 두타행과 좌선을 하였다. 북위(北魏) 오랑캐가 불법을 멸하려 하자, 승주는 문도들에게 말하였다.
“불법의 큰 어려움이 닥쳐올 것이다.”
곧 권속 수십 명과 함께 한산(寒山)으로 들어갔다. 이 산은 장안에서 서남쪽으로 4백 리 되는 곳에 있으며, 계곡이 험하게 막아 군병이 이를 수 없는 곳이기에, 마침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이윽고 북위 오랑캐는 멋대로 횡포를 부려, 장안에 머물던 승려들은 모두 죽었다. 그 후 곧이어 참회하여 최씨(崔氏: 崔皓)를 죽이고, 다시 불법을 일으켰다.
032_0873_b_01L釋僧周不知何人姓高烈有奇志操而韜光晦迹人莫能知常在嵩高山頭陁坐禪魏虜將滅佛法周謂門人曰大難將至乃與眷屬數十人共入寒山在長安西南四百里溪谷險阻非軍兵所至遂卜居焉俄而魏虜肆停者悉斃其後尋悔誅滅崔氏興佛法
영창왕(永昌王)이 장안을 다스렸다. 이에 황제의 뜻을 받들어, 다시 사찰을 수리하고 건립하려 사문들을 찾았다.
당시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한산에 한 승려가 있는데, 덕스런 일에서 비범합니다.”
왕은 곧 사신을 파견하여 초청하였다. 그러나 승주는 자신은 늙고 병들었다 하여 거절하였다. 제자인 승량(僧亮)에게 명에 응하여 산에서 나가도록 하였다.
그 후 승주는 죽음에 임하여 제자들에게 알렸다.
“나는 곧 세상을 떠날 것이다.”
그 날 저녁 불길이 새끼로 맨 걸상 뒤에서 솟아 몸을 태우는 것이 보였다. 사흘이 지나자 비로소 불길이 다하였다.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가득하나 방은 불타지 않았다. 제자들이 남은 재를 거두어 흙벽돌 탑을 세웠다.
032_0873_b_09L僞永昌王鎭長安奉旨將更修立訪求沙門時有說寒山有僧業非凡王卽遣使徵請周辭以老疾令弟子僧亮應命出山周後將殂弟子曰吾將去矣其夕見火從繩牀後出燒身經三日方盡煙焰漲天房不燼弟子收遺灰架以塼塔
032_0873_c_01L
∙승량(僧亮)
제자 승량은 성이 이(李)씨이며, 장안 사람이다. 승주에게서 수업하였다. 처음 영창왕이 승려를 구해 초청하였을 때 아무도 감히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불법이 처음 부흥되었다고는 하나, 예기치 못할 불상사가 있을까 의심하였다. 승량이 말하였다.
“불법의 운수[像運]가 사람에게 깃대는 것은 바로 오늘에 달려 있다. 만약 주살되어 목이 잘리는 일을 당한다면, 나 자신이 그것을 당하겠다. 그러나 만약 온전할 수 있다면, 도를 다시 떨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게다가 승주의 권고도 있어, 이에 사신을 따라 장안에 이르렀다. 아직 장안에 채 이르지 않았을 무렵, 왕과 백성들은 거리와 마을을 쓸고 물 뿌리며, 집집이 잇대어 기다리며 영접하였다. 왕이 친히 자신을 굽혀 맞으니, 발이 서로 닿을 정도로 몰려나와 공경을 다하였다.
승량은 그들을 위하여 화와 복의 가르침을 베풀고, 인과를 가르쳐 보였다. 말은 간단하나 이치는 궁극으로 나아갔다. 온화하면서도 간절하여, 듣는 사람이 슬픔과 기쁨으로 스스로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옛 절을 수리하고 복구하였다. 그리하여 사문들을 초청해서 맞아들이니, 관중(關中)에서 불법이 다시 일어나게 된 것은 승량의 힘이다.
032_0873_b_15L弟子僧亮姓李長安人受業於僧周初永昌王請僧無敢應者咸以言佛法初疑有不測之慮亮曰像運寄人在今日若被誅翦自身當之如其獲則道有更振之期又僧周加勸是隨使至長安未至之頃王及民人掃灑街巷比室候迎王親自抂道足致敬亮爲陳誡禍福訓示因果約理詣和而且切聽者悲憙各不自於是修復故寺延請沙門關中大法更興亮之力也

10) 석혜통(釋慧通)
032_0873_c_03L釋慧通十
혜통은 관중(關中) 사람이다. 어릴 때 장안의 태후사(太后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주문을 지니고, 『증일아함경(增一阿含經)』을 외웠다. 처음 양주(凉州)의 혜소(慧詔) 선사를 좇아 선의 일을 전수받았다. 불법의 문에서 관하여 닦기를 자유자재로 요리하는 바가 많았다.
항상 마음으로 안양정토를 기원하며, 정신은 그 국토에 깃들고자 하였다. 작은 병이 생기자, 선정(禪定)에 든 상태에서 어떤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 보였다. 모습이 매우 깔끔하고 엄숙하였다. 그가 혜통에게 말하였다.
“좋은 때가 이르렀다.”
잠시 후에 아미타불이 나타났다. 빛나는 모습이 밝게 빛났다. 혜통은 선정에서 깨어나, 동학들에게 본 것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말을 마치자 곧 세상을 떠났다. 기이한 향기가 방에 감돌다가, 사흘이 지나서야 멎었다. 이때 나이는 59세이다.
032_0873_c_04L釋慧通關中人少止長安太后寺食持呪誦『增一阿含經』初從涼州禪師慧詔諮受禪業法門觀行多所遊常祈心安養而欲棲神彼國微疾於禪中見一人來形甚端嚴語通言良時至矣須臾見無量壽佛光相暉通因覺禪具告同學所見言訖便異香在房三日乃歇春秋五十九矣

11) 석정도(釋淨度)
032_0873_c_12L釋淨度十一
정도는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사냥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 새끼 밴 사슴을 쏘았다. 그러자 어미 사슴이 낙태(落胎)하고는 아픔을 참으며, 죽은 새끼에게 다가가 혀로 핥아주었다. 이것을 보고 정도는 마음속으로 깨달았다. 즉시 활을 부러뜨리고 화살을 꺾고는, 출가하여 푸성귀만을 먹었다.
30만여 글자의 경전을 외웠다. 항상 홀로 산과 늪에 거처하며, 좌선을 익히고 경을 외웠다. 만약 고을에 재(齋)모임이 있으면, 곧 몸소 아홉 개의 등에 불을 켜고, 날이 새도록 깔끔하게 앉아 있는 것으로써 공양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그 후 문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향탕(香湯)을 마련하라.”
목욕을 한 다음 수천 장구의 설법을 하였다. 삶과 죽음의 인과를 훈계하고, 말을 마치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퉁소와 북이 울리고 향 연기가 허공으로부터 그곳에 이르렀다. 같은 때에 권속 수십 명이 모두 함께 듣고 본 일이다.
032_0873_c_13L釋淨度吳興餘杭人少愛遊獵嘗射孕鹿墮胎鹿母銜痛猶就地舐子乃心悟因摧弓折矢出家蔬食誦經三十餘萬言常獨處山澤坐禪習誦若邑中有齋集輒身然九燈端然達以爲供養如此者累年後忽告弟子云令辦香湯洗浴說法數千章以生死因果言訖奄然而化蕭鼓香自空而至同時眷屬數十人皆所聞見

12) 석승종(釋僧從)
032_0873_c_23L釋僧從十二
032_0874_a_01L승종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타고난 성품이 텅 비어 고요하였다. 시풍(始豊)의 폭포산(瀑布山)에 은둔하여 살았다. 배움이 불교 안팎의 경전을 겸비하고, 5문(門)을 정밀하게 닦았다. 오곡을 먹지 않고 오직 대추와 밤만을 먹었다. 나이가 거의 백 세가 되어서도, 기력은 아름답고 강하여 예송(禮誦)을 그치지 않았다.
은둔하는 선비 저백옥(褚伯玉)과 은둔하는 숲 속의 사귐을 맺었다. 늘 도를 논하고 교리를 설하였다. 문득 연이어 이틀 밤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후 산중에서 세상을 마쳤다.
032_0874_a_01L釋僧從未詳何人稟性虛靜隱居始豐瀑布山學兼內外精修五門不服五穀唯餌棗栗年垂百歲而氣力休强禮誦無輟與隱士褚伯玉爲林下之交每論道說義輒留連信宿後終於山中

13) 석법성(釋法成)
032_0874_a_06L釋法成十三
법성은 양주(凉州) 사람이다. 열여섯 살에 출가하여 배움이 경전과 율장에 뛰어났다. 오곡을 먹지 않고, 오직 송진만을 먹으면서 바위동굴에 은거하였다. 선(禪)을 익히는 것을 임무로 일삼았다.
전송(前宋) 원가(元嘉) 연간(424~453)에 동해왕 유회소(劉懷素)가 외지로 나와 파서(巴西) 지방을 지켰다. 소문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맞이하여, 부성(涪城)에서 만났다. 하안거(夏安居) 동안 율장을 강의하고, 일을 마치자 하직하여 돌아왔다. 그러고는 광한(廣漢)에 머물면서 다시 선법(禪法)을 널리 펼쳤다.
작은 병이 생기자 곧 대중들에게 알렸다.
“나 법성은 항상 『보적경(寶積經)』을 외웠다.”
그러고는 자신의 힘으로 이를 외웠다. 반 권까지는 외울 수 있었으나, 기운이 모자라 감당하지 못하였다. 다른 사람에게 이를 읽게 하여, 한 차례 두루 끝나자마자 합장하고 세상을 떠났다. 시병하던 10여 명이 모두 공중에 감색 말이, 금으로 된 관을 등에 싣고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032_0874_a_07L釋法成涼州人十六出家學通經律不餌五穀唯食松脂隱居巖穴習禪爲務元嘉中東海王懷素出守巴西聞風遣迎會於涪城夏坐講律事竟辭反因停廣漢復弘禪法後小疾便告衆云成常誦『寶積經』於是自力誦始得半卷氣劣不堪乃令人讀之一遍纔竟合掌而卒侍疾十餘人見空中紺馬背負金棺昇空而逝

14) 석혜람(釋慧覽)
032_0874_a_16L釋慧覽十四
032_0874_b_01L혜람의 성은 성(成)씨며, 주천(酒泉) 사람이다. 어릴 때 현고(玄高)와 더불어 고요하게 관하는 것으로 칭송을 받았다. 혜람은 일찍이 서역에 노닐었다. 부처님의 발우를 머리 위에 받들었다. 이어 계빈국(罽賓國)에서 달마(達摩) 비구로부터 선의 요체를 물어 전수 받았다. 달마는 일찍이 선정에 들었다가, 도솔천에 가서 미륵불로부터 보살계를 받은 일이 있었다.
후에 그 계법을 혜람에게 전수하였다. 혜람은 돌아오다 우전국(于塡國)에 이르렀다. 다시 그 계법을 그곳의 여러 승려들에게 전수하였다. 그 후 곧 돌아오다가, 도중에 하남(河南) 땅을 경유하였다. 하남의 토곡혼(吐谷渾)의 모연(慕延)과 세자 경(瓊) 등이 혜람의 덕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이에 공경하여 사신을 보냈다. 아울러 재물의 도움을 주어, 촉(蜀)에 좌군사(左軍寺)를 세우게 하였다. 혜람은 곧 그곳에 머물렀다.
032_0874_a_17L釋慧覽姓成酒泉人少與玄高俱以寂觀見稱覽曾遊西域頂戴佛鉢於罽賓從達摩比丘諮受禪要摩曾入定往兜率天從彌勒受菩薩後以戒法授覽覽還至于塡復以戒法授彼方諸僧後乃歸路由河南南吐谷渾慕延世子瓊等敬覽德問遣使幷資財令於蜀立左軍寺覽卽居之
그 후 나부산(羅浮山) 천궁사(天宮寺)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전송(前宋)의 문제(文帝)가 초청하여 서울로 내려와, 종산(鍾山) 정림사(定林寺)에 머물렀다. 효무제(孝武帝)가 중흥사(中興寺)를 세우자, 다시 칙명을 내려 그곳에 옮겨 살았다. 이에 서울의 선을 닦는 승려들이 모두 그의 발꿈치를 따라 수업하였다.
오흥의 심연(沈演)과 평창(平昌)의 맹의(孟顗)도 모두 도덕을 흠모하였다. 그를 위하여 절에 선실을 조성하였다.
전송의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0여 세이다.
032_0874_b_03L後移羅天宮寺宋文請下都鍾山定林寺孝武起中興寺復勅令移住京邑禪僧皆隨踵受業吳興沈平昌孟顗竝欽慕道德爲造禪室於寺東大明中卒春秋六十餘矣

15) 석법기(釋法期)
032_0874_b_07L釋法期十五
법기의 성은 향(向)씨며, 촉군(蜀郡) 비현(陴縣) 사람이다. 일찍 양친을 잃고, 형을 아버지처럼 섬겼다. 열네 살 때 출가하여 지맹(智猛)에게서 선의 일을 물어 전수 받았다. 영기사(靈期寺)의 법림(法林)과 함께 관(觀)을 익혔다. 지맹이 익숙히 아는 것은 모두 증득(證得)하였다.
그 후 현창(玄暢)을 만나 다시 그를 따라 공부해 나아갔다. 그러다가 현창이 강릉(江陵)으로 내려가자, 그도 따라갔다. 십주관문(十住觀門) 가운데서 그가 터득한 것은 이미 9관문이었다. 그리고 오직 사자분신삼매(師子奮迅三昧)만을 아직 다 익히지 못하였다. 현창이 감탄하였다.
“나는 서쪽 고비 사막에서부터 북쪽으로는 유주(幽州)사막을 밟았다. 동쪽으로는 우혈(禹穴: 會稽山)을 찾으며, 남쪽으로는 형산(衡山)과 나부산(羅浮山)을 다 돌아다녔다. 그렇지만 오직 여기 자네 한 사람만이 특히 선과의 연분이 있구나.”
그 후 장사사(長沙寺)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2세이다. 신비스런 광명이 시신을 비추고, 몸은 더욱 향기롭고 깨끗하였다.
032_0874_b_08L釋法期姓向蜀都郫人早喪二親兄如父十四出家從智猛諮受禪業與靈期寺法林同共習觀猛所諳知皆已證得後遇玄暢復從進業及暢下江陵期亦隨從十住觀門所得已有師子奮迅三昧唯此未盡暢歎吾自西至流沙北履幽漠東探禹南盡衡羅唯見此一子特有禪分後卒於長沙寺春秋六十有二神光映體更香潔

∙석도과(釋道果)
당시 또 용화사(龍華寺)에 소속된 석도과도 역시 선의 일로 드러났다.
032_0874_b_18L時屬龍花寺又有釋道果者亦以禪業顯焉

16) 석도법(釋道法)
032_0874_b_19L釋道法十六
032_0874_c_01L도법의 성은 조(曺)씨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집을 버리고 도에 들어가서는 오로지 선의 일에만 정진하였다. 때로는 신비한 주문도 행하였다. 그 후 노닐다가 성도(成都)에 이르렀다. 왕휴지(王休之)와 비갱지(費鏗之)의 초청으로, 흥락사(興樂寺)와 향적사(香積寺) 두 절의 주지가 되었다.
그는 대중을 가르치는 데 법이 있었다. 항상 음식을 구걸하여, 따로 초청하는 일이나 승려들의 음식을 받지 않았다. 걸식해서 얻은 음식은 그 몫을 줄여서, 벌레와 새들에게 보시하였다. 저녁마다 옷을 벗고 알몸으로 앉아서, 모기의 먹이가 되었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계속하다가 후에 선정에 들었다. 미륵불이 재(齋)모임 가운데서 방광하여, 3도(途)의 과보를 비추어주는 것을 보았다. 이에 깊이 자신을 도탑게 힘써서, 항상 앉아 있고 눕지 않았다.
원휘(元徽) 2년(474)에 선정에 든 상태에서 돌아가셨다. 새끼로 맨 걸상에 편안하게 앉아, 기뻐하는 모습이 평소보다 더하였다.
032_0874_b_20L釋道法姓曹燉煌人起家入道專精禪業亦時行神呪後遊成都至王休之費鏗之請爲興樂香積二寺主訓衆有法常行分衛不受別請及僧食食所得常減其分以施虫鳥每夕輒脫衣露坐以飴蚊蝱如此者累年入定見彌勒放齊中光照三途果報於是深加篤勵常坐不臥元徽二年於定中滅度平坐繩牀貌悅恒日

17) 석보항(釋普恒)
032_0874_c_06L釋普恒十七
보항의 성은 곽(郭)씨며, 촉군(蜀郡)의 성도(成都) 사람이다. 아이때 늘 햇빛 속에서 성스런 승려가 공중에서 설법하는 것을 보았다. 집안사람들을 향해 이를 말해 주었다. 그러나 모두가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 후 간절하게 출가하기를 구하여, 성도 치하의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렀다. 방에 홀로 머물고 권속을 세우지 않았다. 고요함을 익히며 선을 일삼았다. 선정에 들고 나오며 머무는 일을 훌륭히 하여, 촉의 도(韜) 율사와 뜻을 같이하였다. 그는 스스로 말하였다.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면, 광명이 눈썹에서 곧바로 내려가 금강제(金剛際)에 이른다. 화광 가운데서 여러 가지 색상이 나타나는데, 전생의 업보도 자못 밝게 알게 된다.”
전송의 승명(昇明) 3년(479)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8세이다.
032_0874_c_07L釋普恒姓郭蜀郡成都人也爲兒童時常於日光中見聖僧在空中說法向家人敍之竝未之信後苦求出家止治下安樂寺獨處一房不立眷屬習靖業禪善入出住與蜀韜律師爲同意自說入火光三昧光從眉直下至金剛際於光中見諸色像先身業報亦明了宋昇明三年卒春秋七十有
그가 아직 죽기 전에 문득 친지들과 이별을 고하였다. 말을 마치고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어, 당시 사람들은 농담이라 생각하였다. 세상을 마치는 날에는 미미하게 병든 모습이 있었다. 오직 속가의 한 노복만이 이를 보았다. 이튿날 아침 편안하게 앉아서 세상을 떠났다. 노복은 이를 알지 못하고 억지로 이를 눕히려 하였다. 그러나 시신은 끝내 펴지지 않았다.
대중 승려들이 와서 보고 그대로 앉히게 하였다. 손에는 세 손가락을 굽혔고, 나머지는 모두 펴 있었다. 대중 승려들이 시험 삼아 이를 잡아당겼다. 역시 손 따라서 곧 펴졌다. 그러나 곧 다시 구부러졌다. 살아 있을 때는 몸이 검었는데, 죽고 나서는 오히려 몸이 깨끗하고 희어졌다.
이에 득도한 사람의 법에 근거하여 시신을 화장하였다. 섶을 쌓고 처음 불길이 타오르자, 곧 오색의 연기가 일어났다. 특이한 향기가 자욱하게 감돌았다. 이에 고을의 장군인 왕현재(王玄載)가 그를 위하여 찬탄의 글을 지었다.
032_0874_c_16L未亡月日忽與親知告別竟無慼時人謂是戲言將終之日微有病唯俗家一奴看之明旦平坐而卒奴不解强取臥之屍竟不申衆僧來便令坐之手屈三指其餘皆申僧試取捋之亦隨手卽申申已復更屈生時體黑死更潔白於是依得道法闍維之 ((艹/積)) 始然便有五色煙起香芬馥州將王玄載乃爲之讚曰
032_0875_a_01L
큰 깨달음은 아득히 형상이 없고
높은 응험은 잊어 텅 비움을 귀히 여기네.
한결같은 생각으로 도량에서 만났던들
헛되이 만 겁의 긴 세월 보냈을까.
032_0875_a_01L覺眇無像
懸應貴忘靖
一念會道場
空過萬劫永

신심은 동쪽 나라에 생각을 비워서
성인을 만나 서쪽 나라에 그림자 꾸미노라.
미묘한 다다름은 삼계를 맑게 하고
정신은 4선(禪)의 경지를 전하였다.
032_0875_a_03L信心虛東想
遇聖藻西
妙趣澄三界
傳神四禪境

속물이야 짐짓 들쑥날쑥 하지만
참된 본성이야 진리라 항상 빛나도다.
빛을 숨겨 뜬 세상에 깃드셨으나
남긴 공덕 바야흐로 먼 곳까지 교화하노라.
032_0875_a_04L俗物故參差
眞性理恒炳
韜光寄浮世
遺德方化迥

18) 석법오(釋法晤)
032_0875_a_06L釋法晤十八
법오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집안은 농사와 양잠을 일삼았다. 여섯 명의 아들을 두었다. 두루 모두 성장하였다. 법오는 나이 50세에 상처를 하였다. 온 집안이 울적하였다. 도를 사모하여 부자 일곱 사람이 모두 함께 출가하였다.
남쪽 무창(武昌)에 이르렀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가다가 번산(樊山)의 양지바른 곳을 보았다. 그윽이 살 만한 곳이라 생각하였다. 이곳은 본래 은둔하는 선비인 곽장상(郭長翔)이 머물던 곳이었다. 이에 이곳에서 세상을 마칠 생각을 갖다.
당시 무창(武昌) 태수 진유(陳留)의 완회(阮晦)가 소문을 듣고 기특하게 여겼다. 길을 내고 산을 열어, 승방과 선실을 세웠다.
법오는 멥쌀을 먹지 않고, 항상 보리밥으로 하루에 한 끼만 먹을 따름이었다. 『대품경』ㆍ『소품경』ㆍ『법화경』을 외웠다. 항상 하루 여섯 때마다 도를 수행하였다. 산과 못에서 산림에서 두타행을 할 때는, 호랑이와 외뿔소도 피하지 않았다. 때로는 나무 밑에서 좌선하면서, 혹 하루가 지나도록 일어나지 않기도 하였다.
제(齊)의 영명(永明) 7년(489)에 산 속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032_0875_a_07L釋法晤齊人家以田桑爲業有男六普皆成長晤年五十喪妻擧家鬱然慕道父子七人悉共出家南至武履行山水見樊山之陽可爲幽拪之處本隱士郭長翔所止於是有意終焉時武昌太守陳留阮晦聞而奇之因爲翦逕開山造立房室晤不食粳常資麥飯日一食而已誦『大小品』『法華』常六時行道頭陁山澤不避虎有時在樹下坐禪或經日不起齊永明七年卒於山中春秋七十有

∙도제(道濟)
그 후 사문 도제가 그의 높은 업을 이어갔다. 지금 무창에서는 그가 머물던 곳을 두타사(頭陀寺)라 한다.
032_0875_a_19L後有沙門道濟踵其高業今武昌謂其所住爲頭陁寺焉

19) 석승심(釋僧審)
032_0875_a_20L釋僧審十九
032_0875_b_01L승심의 성은 왕(王)씨며, 태원(太原)의 기현(祁縣) 사람이다. 진(晋)의 표기장군(驃騎將軍) 왕침(王沈)의 후예인데, 할아버지 대에 초군(譙郡)에 임시 머물렀다.
승심은 어려서 출가하여 수춘(壽春)의 석간사(石澗寺)에 머물렀다. 『법화경』과 『수능엄경』을 외웠다. 늘 말하였다.
“선이 아니면 지혜롭지 못하다.”
오로지 뜻을 선에 두었다. 담마밀다(曇摩蜜多)가 서울의 도의 왕이라는 말을 들었다. 곧 옷을 털고 강을 건넜다.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면서 정성껏 부지런히 묻고 전수받았다. 그리하여 심오한 이치를 곡진하게 터득하였다.
어느 때인가 도둑 떼들이 산에 들어왔다. 그러나 승심은 단정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도적들이 마침내 옷을 벗어 그에게 시주하였다. 이에 그는 다시 불법의 가르침을 설하여, 도적 떼들을 도왔다. 도적들이 부끄러워하고 땀을 흘리며, 예를 올리고 떠났다.
032_0875_a_21L 釋僧審姓王太原祁人晉驃騎沈之後也祖世宇居譙郡審少出家止壽春石㵎寺誦『法華』『首楞嚴』常謂非禪不智於是專志禪那聞曇摩蜜多道王京邑乃拂衣過江止于靈曜寺勤諮受曲盡深奧時群劫入山審端坐不動賊乃脫衣以施之又說法訓劫賊慚愧流汗作禮而去
영취사(靈鷲寺)의 혜고(慧高)도 그를 따라 선의 일을 전수받았다. 승심에게 절로 돌아가기를 청하여, 따로 선방을 세웠다. 청하(淸河)의 장진후(張振後)도 그를 초청하여 서현사(栖玄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문혜왕(文惠王)과 문선왕(文宣王)도 모두 공경을 더하여 그를 섬겼다. 부담(傅琰)과 소적부(蕭赤斧)도 모두 경계의 가르침을 자문 받았다. 왕경칙(王敬則)이 선방에 들어가서 승심을 찾았다. 이에 선정에 든 것을 바로 보고 손가락을 튀기면서 밖으로 나와 말하였다.
“성스러운 도인[聖道人]이시다.”
그러고는 곧 쌀 1천 섬을 바치고, 삼귀(三歸)의 계를 받기를 청하였다.
영명(永明) 8년(490)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5세이다.
032_0875_b_06L靈鷲寺慧高從之受禪業乃請審還寺別立禪房淸河張振後又請居拪玄寺文宣竝加敬事傅琰蕭赤斧皆諮戒訓王敬則入房覓審正見入禪因彈指而出曰聖道人卽奉米千斛請受三歸永明八年卒春秋七十有

∙승겸(僧謙)ㆍ초지(超志)ㆍ법달(法達)ㆍ혜승(慧勝)
승겸ㆍ초지ㆍ법달ㆍ혜승도 모두 선을 일삼았다. 역시 각기 기이한 자취가 있었다.
032_0875_b_13L時有僧謙超志法達慧勝竝業禪亦各有異迹

20) 석담초(釋曇超)
032_0875_b_14L釋曇超二十
032_0875_c_01L담초의 성은 장(張)씨며, 청하(淸河) 사람이다. 키가 8척이고 얼굴과 행동거지가 볼 만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베옷을 입었다. 하루에 점심 한 끼만을 먹을 따름이었다. 처음 상도(上都)의 용화사(龍華寺)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원가(元嘉) 연간(424~453) 말기에 남쪽 시흥(始興)에 노닐었다. 두루 산수를 구경하며, 홀로 나무 밑에서 잠잤다. 호랑이와 외뿔소도 그를 해치지 않았다.
대명(大明) 연간(457~464)에 서울로 돌아왔다. 북제(北齊)의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칙명을 받고 요동(遼東)에 가서 선의 도를 도와 널리 폈다. 그곳에 머무는 2년 동안에 크게 불법의 교화를 행하였다. 건원(建元) 연간(479~482) 말기에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갑자기 또 전당(錢塘)의 영원산(靈苑山)으로 갔다. 선정에 들 때마다 여러 날을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어느 때 문득 바람과 우레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홀(笏)을 손에 잡고 앞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자기는 엄진동(嚴鎭東)이라고 밝히면서, 성명을 통하였다.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찾아왔다. 모습이 매우 단정하며 호위하는 사람이 이어졌다. 깃발이 펄럭였다. 그는 자리에서 내려와 절하며 존경을 표하고, 자칭 제자라고 하면서 말하였다.
“제자는 7리 밖에 거주하며, 두루 이 땅을 맡고 있습니다. 법사께서 이곳에 왔다는 말을 듣고 짐짓 찾아와 예를 드리는 바입니다.”
032_0875_b_15L釋曇超姓張淸河人形長八尺容止可觀蔬食布衣一中而已初止上都龍華寺元嘉末南遊始興遍觀山水獨宿樹下虎兕不傷大明中還都至齊太祖卽位被勅往遼東弘讚禪道停彼二年大行法化建元末還京俄又適錢塘之靈苑山每一入禪累日不起時忽聞風雷之聲俄見一人秉笏而進稱嚴鎭東通須臾有一人至形甚端正羽衛連翩下席禮敬自稱弟子居在七任周此地承法師至故來展禮
그가 말하였다.
“부양현(富陽縣) 사람들이 일부러 겨울에 산자락 밑을 파서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땅의 용집을 침범하였기 때문에, 용들이 분개하여 3백 일 동안 비를 내리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지금 이미 1백여 일이 지나, 우물과 못이 고갈되어 밭에 씨 뿌리는 일이 영 어렵습니다. 법사께서는 이미 도덕이 신과 통한 분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몸을 굽혀 앞으로 나가신다면, 반드시 감응이 일어나 창생들을 윤택하게 하여, 그 공덕에 귀의할 것입니다.”
담초가 말하였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는 것은 시주의 힘인데, 빈도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신이 말하였다.
“제자가 맡은 것은 다만 구름을 일으킬 수만 있지, 비를 내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청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이를 허락하니 신은 문득 떠나갔다. 이에 담초는 곧 남쪽으로 갔다. 닷새가 지나 적정산(赤亭山)에 이르렀다. 멀리 용을 위하여 주문을 외우며, 발원하고 설법하였다.
밤이 되자 뭇 용들이 모두 사람으로 변화하여 담초를 찾아와서 예배를 올렸다. 이에 담초가 다시 설법하였다. 그러자 용들은 삼귀(三歸)의 계를 내려달라고 빌면서, 자신들은 용이라고 말하였다. 담초는 그들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요청하니, 그들은 서로 바라보기만 하고 말이 없었다.
032_0875_c_03L富陽縣人故冬鑿麓山下爲塼侵壞龍室群龍共忿作三百日不雨今已一百餘日井池枯涸田種永罷法師旣道德通神欲仰屈前行必能感致潤澤蒼生功有歸也超曰興雲降雨本是檀越之力貧道何所能乎神曰弟子部曲止能興雲不能降雨是故相請遂許之神儵忽而去超乃南行五日至赤亭山遙爲龍呪願說法群龍悉化作人來詣超禮拜超更說法因乞三歸自稱是龍超請其降乃相看無言
그 날 밤 또 담초의 꿈에 용이 나타났다.
“본래 분노로 인하여 맹서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법사께서 착함으로 이끄시니, 감히 명을 어길 수가 없습니다. 내일 해질 무렵이면 곧 비가 내릴 것입니다.”
이튿날 아침 담초는 곧 임천사(臨泉寺)로 갔다. 사람을 보내 현령(縣令)에게 알려서, 강 가운데에 배를 마련하였다. 그곳에서 『해룡왕경(海龍王經)』을 돌아가며 읽게 하였다. 현령은 곧 승려들을 초청하고, 배를 바위 머리에 띄웠다. 그런 후에 경을 돌아가며 읽게 하였다. 읽는 것이 막 끝나자마자, 드디어 큰비가 내렸다. 높은 이나 낮은 이나 모두 만족하였다. 그 해에는 풍년 농사를 수확할 수 있었다.
담초는 영명 10년(49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4세이다.
032_0875_c_15L其夜又與超夢云因忿立誓法師旣導之以善輒不敢違命明日晡時當降雨超明旦卽往臨泉寺遣人告縣令辦舩於江中『海龍王經』縣令卽請僧浮舩石首經裁竟遂降大雨高下皆足歲以獲超以永明十年卒春秋七十有四

21) 석혜명(釋慧明)
032_0875_c_21L釋慧明二十一
032_0876_a_01L혜명의 성은 강(康)씨며, 강거(康居) 사람이다. 조부의 대에 동오(東吳)로 피난하였다. 혜명은 어릴 때 출가하여 장안(章安) 동사(東寺)에 머물렀다.
제(齊)의 건원(建元) 연간(479~482)에 사문들과 함께 적성산(赤城山)에 올라 석실을 보았다. 담유(曇猷)의 시신이 아직 썩지 않았다. 선실은 황폐하여 드높은 발자취를 이어가지 않는 것을 보았다. 곧 사람을 고용하여 나무를 자르고, 길을 열어 다시 법당과 선실을 세웠다. 와불(臥佛)과 담유의 상(像)을 만들었다. 이에 마음을 선과 독송에 두었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마른 고목나무와 같은 생활을 하였다.
032_0875_c_22L釋慧明姓康康居人祖世避地于東吳明少出家止章安東寺齊建元與沙門共登赤城山石室見猷公屍骸不朽而禪室荒蕪高蹤不繼雇人開翦更立堂室造臥佛幷猷公於是拪心禪誦畢命枯槁
후에 선정 중에 한 여신(女神)이 나타났다. 자칭 여노(呂姥)라고 하면서 말하였다.
“항상 보호하고 지켜주겠습니다.”
혹 때로는 흰 원숭이ㆍ흰 사슴ㆍ흰 뱀ㆍ흰 호랑이 등이 섬돌 앞에서 노는 일도 있었다. 길들인 듯 엎드려서 굴러다니며, 사람을 두렵게 하지 않았다.
제의 경릉왕(竟陵王)과 문선왕(文宣王)이 이 소식을 들었다. 공경하여 고개 숙여 자주 세 명의 사신을 파견하였다. 정중하고 돈독하게 초청하여, 마침내 잠시 서울로 나가 왕의 집에 이르렀다. 문선왕이 스승의 예로써 공경하였다. 잠시 그곳에 있다가 하직하고 산으로 돌아왔다.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머물지 않았다. 문선왕은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 물품을 출발할 때 보내 주었다.
건무(建武) 연간(494~497)에 산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032_0876_a_05L後於定中見一女神自稱呂姥云常加護衛或時有白猿白鹿白蛇白虎遊戲階馴伏宛轉不令人畏齊竟陵文宣王聞風祗挹頻遣三使慇懃敦請蹔出京師到第文宣敬以師禮少時辭還山苦留不止於是資給發遣建武之末卒於山中春秋七十矣

【論】‘선(禪)’이란 만물을 미묘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까닭에 인연하지 않는 법이란 없고, 살피지 못하는 경계란 없다. 그러나 법에 인연하고 경계를 살피자면, 오직 고요함으로써만 밝힐 수 있다. 그것은 마치 깊은 못에 물결이 멎으면, 물고기와 돌을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 마음의 물이 이미 맑아지면, 뚫어지게 비추어서 숨겨지는 것이란 없다.
노자(老子)는 말한다.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의 뿌리이고, 고요한 것은 시끄러운 것의 임금이 된다. 그런 까닭에 가벼운 것은 반드시 무거운 것으로 근본을 삼고, 시끄러운 것은 반드시 고요한 것으로 터전을 삼는다.”2)
『대지론(大智論)』에서는 말한다.
“비유하면 약을 복용해서 몸을 유지하는 사람이, 일시적으로 집안 일을 쉬다가 기력이 평상시처럼 건강해지면, 다시 돌아와 집안 일을 닦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선정(禪定)의 힘으로 지혜라는 약을 복용해서 그 힘을 얻으면, 다시 돌아와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4평등심(平等心)ㆍ6신통력(神通力)도 선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며, 8제(除)ㆍ10입(入)도 선정의 힘에 기초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정의 작용이란 크나큰 것임을 알아야 한다.
032_0876_a_12L論曰禪也者妙萬物而爲言故能無法不緣無境不察然緣法察境唯寂迺明其猶淵池息浪則徹見魚石水旣澄則凝照無隱『老子』云重爲輕靜爲躁君故輕必以重爲本躁必以靜爲基『大智論』云譬如服藥將身㩲息家務氣力平健則還修家業是以禪定力服智慧藥得其力已化衆生是以四等六通由禪而起八除十入藉定方成故知禪定爲用大矣
032_0876_b_01L부처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이 동방으로 옮겨온 이래로 선의 도도 역시 전수되었다. 이에 앞서 안세고(安世高)ㆍ법호(法護)선사가 선경(禪經)을 번역하여 출간하였다. 승광(僧光)과 담유(曇猷) 등도 모두 가르침에 근거하여, 마음을 닦아 끝내 거룩한 일을 이룩하였다.
그런 까닭에 안으로는 기쁨과 즐거움을 넘어설 수 있고, 밖으로는 요사함과 상서로움을 꺾을 수 있어서, 겹겹의 암벽에서 귀신과 도깨비를 쫓아내고, 절벽 바위에서 신이한 승려를 만난 것이다.
사문 지암(智巖)에 이르러서는 몸소 서역 땅을 밟아 계빈국(罽賓國)의 선사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를 초청하여, 다시 선의 일을 동쪽 땅에 전하였다. 현고(玄高)과 현소(玄紹) 등도 모두 친히 선 수행시 지켜야 할 법칙을 전수받아, 숨을 들이쉬고 내쉼에서 수(數)와 수(隨)3)를 다하였다. 정신을 보내고 되돌아옴에서 환(還)과 정(淨)을 다하였다. 그 후에 승주(僧周)ㆍ정도(淨度)ㆍ법기(法期)ㆍ혜명(慧明) 등도 기러기가 날 듯이 나란하여 버금갔다.
032_0876_a_23L自遺教東移禪道亦授先是世高法護譯出『禪經』僧先曇猷等竝依教修心終成勝業故能內踰喜樂外折妖祥賓鬼魅於重巖睹神僧於絕石及沙門智嚴躬履西域請罽賓禪師佛馱跋陁更傳業東土玄高玄紹等亦竝親受儀則出入盡於數隨往返窮乎還淨其後僧周淨度法期慧明亦鴈行其次
그러나 선의 작용이 뚜렷해지는 것은 신통력에 속해 있다. 그런 까닭에 삼천대천세계를 털구멍 속에 집 짓게 하고, 사해를 묶어 한 방울의 소락(穌酪)으로 할 수 있으며, 석벽을 통과하더라도 막히는 것이 없으니, 대중이 높이 떠받들면서 버리지 않는 것이다.
무릇 아득히 먼 세속의 도나 용렬하기 만한 선술(仙術)에 이르러서는, 고작 파도를 멈추게 하고 비를 그치게 하며, 주문(呪文)의 불로 나라를 불태우게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바로 현고(玄高)가 저 세상으로 갔다가 다시 일어나고, 도법(道法)이 앉아서 돌아가신 것과 비교한다면, 어찌 기이하다고 하겠는가?
가령 울두람불(鬱頭藍弗)이 마침내 짐승들 때문에 골탕 먹었고, 독각선인(獨角仙人)이 끝내 선타(扇陀) 여인 때문에 어지러워진 것과 같은 것은, 모두가 마음의 도는 비록 거두었다 할지라도, 사랑과 편견과 서로 상응함으로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다. 이는 반딧불이나 부싯돌의 불을 해나 달에 비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일찍이 이것에 짝할 수 있겠는가?
032_0876_b_08L然禪用爲顯屬在神故使三千宅乎毛孔四海結爲凝過石壁而無壅擎大衆而弗遺夫悠悠世道碌碌仙術尚能停波止呪火燒國正復玄高逝而更起法坐而從化焉足異哉若如鬱頭藍竟爲禽獸所惱獨角仙人終爲扇陁所亂皆由心道雖攝而與愛見相比夫螢爝之於日月曾是爲疋乎
이에 찬하노라.

선은 아득하고 고요하며
삼매의 못은 깊고도 깊도다.
생각을 거두는 방법을 빌려야
비로소 두루 그윽한 곳을 찾으리.
032_0876_b_16L贊白
禪那杳寂
正受淵深
假夫輟慮
方備幽尋

악을 물리친 다섯 분
숲에 깃든 아홉 분
번뇌의 산과 바다를 마르고 녹이며
모으고 흩으며 올라가고 가라앉혔네.
032_0876_b_18L五門棄惡
九次叢林
枯鑠山海
聚散昇沈

이야말로 덕의 넉넉함이로다.
어찌 마음에 힘쓰지 않을손가.
茲德裕矣
如不勵心

5. 명률(明律)
032_0876_b_19L明律第五十三人
032_0876_c_01L
1) 석혜유(釋慧猷)
032_0876_b_20L釋慧猷一 釋僧業二
釋慧詢三 釋僧璩四
釋道儼五 釋僧隱六
釋道房七 釋道營八
釋志道九 釋法穎十
釋法琳十一 釋智稱十二
釋僧祐十三
釋慧猷一
혜유는 강남 사람이다. 어릴 때 출가하여 강릉(江陵)의 신사(辛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푸성귀를 먹으면서 지조를 실천하였다. 성품이 지극히 곧고 방정하였다. 구족계를 받은 후에는 오로지 율행에만 정진하였다.
당시 서쪽나라의 율사 비마라차(卑摩羅叉)가 강릉에 와서 크게 율장을 널리 폈다. 혜유는 그를 따라 수업하면서, 생각을 깊이 하여 그때마다 쌓았다. 마침내 『십송률(十誦律)』을 크게 밝혀 강설을 이어갔다. 그러자 섬서(陝西)의 율사들은 그를 종사로 삼았다. 그 후 강릉에서 세상을 마쳤다. 『십송의소(十誦義疏)』 여덟 권을 지었다.
032_0876_c_05L釋慧猷江左人少出家止江陵辛寺幼而蔬食履操至性方直及具戒已專精律禁時有西國律師卑摩羅來適江陵大弘律藏猷從之受業沈思積時乃大明『十誦』講說相續西律師莫不宗之後卒於江陵著『十誦義疏』八卷

2) 석승업(釋僧業)
032_0876_c_12L釋僧業二
승업의 성은 왕(王)씨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워 널리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였다. 후에 장안에 노닐며 구마라집(鳩摩羅什)으로부터 수업하였다.
그 후 새로 번역한 『십송률』을 보았다. 마침내 이 책을 오로지 공부하였다. 하늘이 내린 뛰어남으로 심오한 경지를 훤하게 다 깨달았다. 구마라집이 찬탄하였다.
“후세의 우바리(優波離)로다.”
관중 지방이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만나 서울로 피하였다. 오(吳)나라의 장소(張邵)는 그의 곧고 검소함에 고개 숙여 곧 초청하였다. 고소(姑蘇)로 돌아가서, 그를 위하여 한거사(閑居寺)를 지었다. 지세가 맑고 넓으며 큰 강으로 둘러싸인 곳이다. 승업은 이곳에서 종사의 자리에 앉아 교화를 주도하였다. 그러면서 가르치고 타이르기를 그치지 않았다. 3오(吳)의 학사들이 바퀴살 모여들듯 몰려들었다. 어깨에 어깨를 이었다.
또한 그는 강의하는 여가에 틈만 나면 선문(禪門)에 뜻을 두었다. 한 번 단정하게 앉을 때마다, 기이한 향기가 방안을 가득히 감돌았다. 승업의 가까이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그 향기를 맡아, 그 신이함을 찬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032_0876_c_13L釋僧業姓王河內人幼而聰悟博涉衆典後遊長安從什公受業見新出『十誦』遂專功此部儁發天然洞盡深什歎曰後世之優波離也値關中多難避地京師吳國張邵挹其貞素乃請還姑蘇爲造閑居寺地勢淸曠環帶長川業居宗秉化訓誘無輟吳學士輻湊肩聯又以講導餘隙意禪門每一端坐輒有異香充塞房近業坐者咸所共聞莫不嗟其神
032_0877_a_01L예전에 구마라집이 관중에 있을 때는 아직 『십송률』이 출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곧 먼저 계본(戒本)을 번역하였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진(秦)나라에 들어오면서, 비로소 대부(大部)를 전하였다. 그런 까닭에 계본과 『대부』가 그 뜻에서는 같지만, 말의 표현에 있어서는 혹 다른 것이 있었다. 이에 승업은 이를 개정하여, 한결같이 『대부』에 근거하게 하였다. 지금도 전송되어 두 책이 나란히 행한다.
승업은 원가(元嘉) 18년(441)에 오중(吳中)에서 죽었다. 그때 나이는 75세이다.
032_0877_a_01L昔什公在關未出『十誦』乃先譯戒及流支入秦方傳大部故戒心之與大本其意正同在言或異業乃改正一依大本今之傳誦二本竝行業以元嘉十八年卒於吳中春秋七十有

∙혜광(慧光)
승업의 제자인 혜광이 승업의 도풍과 법규를 이어받아, 역시 자주 강설을 담당하였다.
業弟子慧光襲業風軌亦數當講說

3) 석혜순(釋慧詢)
032_0877_a_06L釋慧詢三
혜순의 성은 조(趙)씨며, 조군(趙郡)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푸성귀를 먹고 고행하였다. 장안을 노닐며 지나다가, 구마라집에게 수업하여 경론을 정밀하게 연찬하였다. 특히 『십송률』과 『승기율(僧祇律)』을 잘하였다. 곧 다시 조장(條章)을 만드니, 그 논리가 오랜 옛날까지 꿰뚫었다.
전송의 영초(永初) 연간(420~422)에 돌아왔다. 광릉(廣陵)에 머물면서 계율의 자리[律席]를 크게 열었다. 원가(元嘉) 연간(424~452)에 서울에 이르러 도량사(道場寺)에 머물렀다. 그 절의 승려인 혜관(慧觀)도 『십송률』에 정밀하게 뛰어났다. 그는 혜순의 덕이 여러 사람의 모범이 된다 하여, 곧 다시 다른 절에서도 위덕을 떨치게 하였다.
이에 자리를 옮겨 장락사(長樂寺)에 머물렀다. 대명(大明) 2년(458)에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4세이다.
032_0877_a_07L釋慧詢姓趙趙郡人少而蔬食苦行經遊長安受學什公硏精經論尤善『十誦』『僧祇』乃更製條章義貫終古永初中還止廣陵大開律席元嘉中至京止道場寺寺僧慧觀亦精於『十誦』以詢德爲物範乃令更振他寺是移止長樂寺大明二年卒於所住春秋八十有四矣

4) 석승거(釋僧璩)
032_0877_a_15L釋僧璩四
032_0877_b_01L승거의 성은 주(朱)씨며, 오(吳)나라 사람이다. 출가하여 승업의 제자가 되었다. 많은 경전을 모두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더욱이 『십송률』에 밝았다. 아울러 역사와 문헌에 대해서도 잘 알았다. 자못 문장도 지을 줄 알았다.
처음 오군(吳郡)의 호구산(虎丘山)에 주석하였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그에 대한 풍문을 듣고 흠모하였다. 칙명을 내려 서울로 나와, 승정(僧正)이 되어 대중을 기쁘게 하였다. 그는 중흥사(中興寺)에 머물렀다.
당시 사문 승정(僧定)이 자칭 불환과(不還果: 阿那含果)를 터득했다고 하였다. 승거는 승려들을 모아 상세하고 단호하게, 그로 하여금 신족통(神足通)을 나타내게 하였다. 승정이 말하였다.
“혹 계율을 범할까 두려워, 나타내지 않는 것이다.”
승거는 율문을 고찰해보았다. 네 가지 인연이 있으면 신족통을 나타낼 수 있었다. 네 가지 인연이란 첫째는 의혹의 그물을 끊는 것이고, 둘째는 삿된 견해를 타파하는 것이며, 셋째는 교만한 마음을 제거하는 것, 넷째는 공덕을 이루는 것이다.
승정은 이미 헛된 거짓말이 폭로되자, 곧 날이 밝는 대로 쫓겨났다. 승거는 곧 『계중론(誡衆論)』을 지어서, 찾아와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보였다.
032_0877_a_16L釋僧璩姓來吳國人出家爲僧業弟摠銳衆經尤明『十誦』兼善史籍製文藻始住吳虎丘山宋孝武欽其風聞勅出京師爲僧正悅衆止于中興寺時有沙門僧定自稱得不還果璩集僧詳斷令現神足定云恐犯戒不現璩案律文有四因緣得現神足斷疑網二破邪見三除憍慢四成功定旣虛誑事暴卽日明擯璩仍著『誡衆論』以示來業
승거는 이미 배움이 불교 안팎의 경전을 겸하였다. 또한 율행에 하자가 없었기에, 도인과 속인들이 귀의하여 수레 자국이 서로서로 이어졌다.
전송(前宋)의 소제(少帝: 劉又符)도 그를 따라 5계를 받았다. 예장왕(豫章王)의 아들 유자상(劉子尙)도 불법의 벗이 되었다. 원찬(袁粲)과 장부(張敷)도 한 번 만나자, 일산을 기울여 이야기 할 만큼 친하게 지냈다.
그 후 장엄사(莊嚴寺)로 옮겨 머물다가, 주석하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58세이다. 『승만경』의 글 뜻을 서술하였다. 아울러 『승니요사(僧尼要事)』 두 권을 지었다. 지금도 세상에 행한다.
032_0877_b_03L璩旣學兼內外又律行無疵道俗歸依車軌相接帝准從受五戒豫章王子尚崇爲法袁粲張敷竝一遇傾蓋後移止莊卒於所住春秋五十有八述『勝鬘文旨』幷撰『僧尼要事』兩卷今行於世

∙도표(道表)
당시 또 도표율사가 있었다. 사람됨이 진솔하고 높은 행실이 있었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진희왕(晋熙王) 유섭(劉燮)에게 명령하여, 계를 청하여 좇게 하였다.
032_0877_b_08L又有道表律師卒眞有高行宋明帝勅晉熙王爽從請戒焉

5) 석도엄(釋道儼)
032_0877_b_10L釋道儼五
도엄은 옹립(雍立) 소황(小黃)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계율의 행실이 있었다. 비니(毘尼)에 뛰어나 4부(部)의 율전을 정밀히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뭇 대가의 주의와 주장을 융합하였다.
또한 율부가 동방으로 전해오면서 범어와 한문의 음이 달랐다. 그러므로 글이 자못 음에 좌우되었기에, 후세 사람들이 묻고 찾으려 해도 어찌 할 바를 모를까 걱정하였다. 곧 글 뜻의 결론을 모아, 『결정사부비니론(決正四部毘尼論)』이라 이름하였다.
그 후 팽성(彭城)에 노닐며 율장을 널리 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5세이다.
032_0877_b_11L釋道儼雍丘小黃人少有戒行善於毘精硏四部融會衆家又以律部東梵漢異音文頗左右恐後人諮訪無所乃會其旨歸名曰『決正四部毘尼論』後遊於彭城弘通律藏遂卒於春秋七十有五

∙혜요(慧曜)
당시 서현사(栖玄寺)의 혜요도 역시 『십송률』에 뛰어났다.
032_0877_b_17L時拪玄寺又有釋慧曜者亦善『十誦』

6) 석승은(釋僧隱)
032_0877_b_18L釋僧隱六
032_0877_c_01L승은의 성은 이(李)씨며, 진주(秦州) 농서(隴西) 사람이다. 집안 대대로 믿음이 올곧았다. 승은은 여덟 살 때 출가하였다. 곧 긴 시간 동안 행하는 재(齋)도 올릴 수 있었다. 열두 살에 이르러 푸성귀를 먹었다. 구족계를 받자 지조를 지키는 것이 더욱 굳었다.
항상 마음을 계율의 뜨락에 노닐었다. 또한 『십송률』에 미묘하게 뛰어나고, 『법화경』과 『유마경』을 외웠다.
서량주(西凉州)에서 현고(玄高) 법사가 선과 지혜를 아울러 드높인다는 말을 들었다. 곧 책 보따리를 지고 그를 따랐다. 이에 배움은 선의 관문을 다하고, 계율의 요체를 깊이 해득하였다.
현고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서쪽 파촉(巴蜀) 땅에 노닐었다. 오로지 불교를 널리 펴는 일을 맡았다. 얼마 후 동쪽으로 내려갔다. 강릉 비파사(琵琶寺)에 머물면서 혜철(慧徹)에게서 공부하였다. 혜철은 명성이 당시에 드높고, 도를 세상 밖에서 떨쳤다.
032_0877_b_19L釋僧隱姓李秦州隴西人家世正信隱年八歲出家便能長齋至十二蔬及受具戒執操彌堅常遊心律苑妙通『十誦』誦『法華』『維摩』聞西涼州有玄高法師禪慧兼擧乃負笈從之於是學盡禪門深解律要高公化後復西遊巴蜀專任弘通頃之東下止江陵琵琶寺諮業於慧徹徹名重當時道扇方外
승은은 도를 갈고 추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두루 경과 율을 궁구하였다. 선과 지혜의 바람으로 형(荊)과 초(楚) 지방을 덮었다. 고을의 장군인 산양왕(山陽王) 유휴우(劉休祐)와 장사(長史) 장대(張岱)도 나란히 계법을 묻고 받았다. 후에 자사(刺史)인 파릉왕(巴陵王) 유휴약(劉休若)과 건평왕(建平王) 유경소(劉景素)도 모두 가마를 선방으로 몰고 왔다. 이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절하였다.
그 후 병으로 누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자에게 물었다.
“점심때가 되었느냐?”
“이미 점심때입니다.”
그러자 물을 찾아 입을 헹구었다. 얼굴 모습을 느긋한 채로 문득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0세이다.
032_0877_c_05L隱硏訪少時備窮經律慧之風被於荊楚州將山陽王劉休祐及長史張岱竝諮稟戒法後刺史巴陵王休若及建平王景素皆稅駕禪房屈膝恭禮後臥疾少時問侍者日中未答云已中乃索水漱口顏㹸怡然忽爾從化春秋八十矣

∙성구(成具)
당시 강릉의 상명사(上明寺) 성구율사도 『십송률』ㆍ『잡심론』ㆍ『아비담』 등에 뛰어났다.
032_0877_c_11L時江陵上明寺復有成具律師亦善『十誦』及『雜心』『毘曇』等

7) 석도방(釋道房)
032_0877_c_13L釋道房七
도방의 성은 장(張)씨며, 광한(廣漢)의 오성(五城) 사람이다. 도의 행실이 맑고 곧았다. 어려서부터 율학에 뛰어났다. 광한의 장락사(長樂寺)에 머물렀다.
예불하여 향을 사를 때마다, 향의 연기가 곧바로 불상의 정수리로 올라갔다. 또 부지런히 문인들을 가르쳐, 악을 고쳐 선을 행하게 하였다. 그 가운데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곧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120세이다.
032_0877_c_14L釋道房姓張廣漢五城人道行淸貞少善律學止廣漢長樂寺每禮佛燒香煙直入佛頂又勤誨門人改惡行善其不改者乃爲之流泣後卒于所住春秋一百二十歲矣

8) 석도영(釋道營)
032_0877_c_19L釋道營八
032_0878_a_01L도영은 어디 사람인지 자세하지 않다. 처음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렀다. 그러면서 선을 익혔다. 만년에 혜관(慧觀)과 혜순(慧詢) 두 율사로부터 비니(毘尼)를 묻고 전수받았다. 특히 『승기율』 1부에 뛰어났다.
『법화경』ㆍ『금광명경』을 외웠다. 푸성귀를 먹으며, 검소하게 절조를 지켰다. 장엄사(莊嚴寺)의 도혜(道慧)와 치성사(治城寺)의 지수(智秀)도 모두 그의 모범적인 계율을 스승으로 삼았다.
장영(張永)이 초청하여 오군(吳郡)으로 돌아갔다. 채흥종(蔡興宗)이 다시 맞아들여 상우(上虞)에 머물렀다. 그 후 장영이 서울의 누호원(婁胡苑)에 한심사(閑心寺)를 세웠다. 다시 초청하여, 돌아가 머물면서 강석을 자주 이어갔다. 그러자 배우는 무리들이 매우 성하였다.
승명(昇明) 2년(478)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3세이다.
032_0877_c_20L釋道營未詳何人始住靈曜寺習禪晩依觀詢二律師諮受毘尼偏善『僧祇』一部誦『法華』『金光明』蔬素守莊嚴道慧治城智秀皆師其戒張永請還吳郡蔡興宗復要住上虞永後於京師婁胡苑立閑心寺復請還居講席頻仍學徒甚盛昇明二年卒春秋八十有三矣

∙혜우(慧祐)
당시에 혜우는 본래 단도(丹徒) 사람이었다. 나이 30세에 출가하였다. 몸을 굳은 절개로 힘써서, 정밀하게 계율의 가르침을 찾았다.
북제의 초기(479~480)에 동산(東山)에 들어가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를 강의하였다. 제의 경릉왕(竟陵王)의 소자량(蕭子良)이 사람을 보내서 영접하였다. 이에 서울로 나와 한심사(閑心寺)에 머물렀다.
032_0878_a_04L時有釋慧祐者本丹徒人年三十出家厲身苦精尋律教齊初入東山講『摩訶僧祇部』齊竟陵王子良遣迎出都止閑心寺焉

9) 석지도(釋志道)
032_0878_a_08L釋志道九
지도의 성은 임(任)씨며, 하내(河內) 사람이다. 성품이 온순하고 신중하였다. 열일곱 살에 출가하여 영요사(靈曜寺)에 머물렀다. 푸성귀를 먹으며 검소하고 욕심이 적었다. 여섯 가지 필수품 이외에는 아무 것도 아울러 비축하는 물건이 없었다. 배움이 삼장에 뛰어났다. 더욱이 율품을 잘 하였다. 하상지(何尙之)가 덕을 흠모하여 예를 갖춰 초청하였다. 자신이 지은 법륜사(法輪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앞서 북위(北魏) 오랑캐가 불법을 멸하였다. 그러나 후에 세자가 황제가 되어 다시 불교를 일으켰다. 계를 내려주는 일에 빠진 것이 많았다. 지도는 이미 불법의 홍통을 서원하였다. 그래서 어려움과 괴로움을 꺼리지 않고, 마침내 함께 약속한 10여 명과 길을 떠나 호뇌(虎牢)에 이르렀다.
낙양ㆍ진주(秦州)ㆍ옹주(雍州)ㆍ회주(淮州)ㆍ예주(豫州) 등 다섯 고을의 도사를 인수사(引水寺)에 불러모았다. 율을 강의하고 계를 밝혀 다시 법을 받도록 펼쳤다. 거짓 나라[僞國: 北魏]에서 승려의 계율이 온전할 수 있던 것은 지도의 힘 덕분이다.
그 후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다가 왕환(王奐)이 상주(湘州)로 나가 주둔하자, 손잡고 더불어 노닐었다.
영명(永明) 2년(484) 상주 땅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032_0878_a_09L釋志道姓任河內人性溫謹十七出止靈曜寺蔬素少欲六物之外無兼畜學通三藏尤長律品何尚之欽德致禮請居所造法輪寺先時魏虜滅佛法後世嗣興而戒授多闕旣誓志弘通不憚艱苦乃攜同契十有餘人往至虎牢集洛豫五州道士會於引水寺講律明戒更申受法僞國僧禁獲全道之力也後還京邑王奐出鎭湘州攜與同遊以永明二年卒於湘土春秋七十有三

∙초도(超度)
당시 서울 와관사(瓦官寺)의 초도도 『십송률』과 『사분율(四分律)』에 뛰어났다. 『율례(律例)』 일곱 권을 지었다고 한다.
032_0878_a_20L京師瓦官寺又有超度者亦善『十誦』及『四分』著『律例』七卷云

10) 석법영(釋法穎)
032_0878_a_22L釋法穎十
032_0878_b_01L법영의 성은 삭(索)씨며, 돈황(燉煌) 사람이다. 열세 살에 출가하여, 법향(法香)의 제자가 되었다. 양주(凉州)의 공부사(公府寺)에 머물렀다. 동학인 법력(法力)과 더불어 모두 율장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법영은 스승에게 배운 이후, 배움을 두 번 청하는 일이 없었다. 한 번 들은 것은 그대로 기억하였다. 율부를 정밀하게 연구하고 경론도 널리 섭렵하였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서울로 내려가 신정사(新亭寺)에 머물렀다.
032_0878_a_23L釋法穎姓索燉煌人十三出家爲法香弟子住涼州公府寺與同學法力俱以律藏知名穎伏膺已後學無再記在一聞硏精律部博涉經論嘉末下都止新亭寺
효무제(孝武帝)가 남쪽으로 내려와, 이 절을 고쳐 수리하였다. 법영은 학업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남까지 밝게 함을 겸했다. 그러므로 칙명을 내려 도읍의 승정(僧正)으로 삼았다. 후에 직책을 내놓고 다보사(多寶寺)로 돌아왔다. 한적한 방에서 항상 선정을 익히고, 때로 계율의 법석도 열었다.
북제의 고조(高祖)황제가 즉위하였다. 다시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일마다 내리는 공양물이 보통 규정된 것의 갑절이나 되었다.
법영은 들어온 보시물로 경전과 불상 및 약장(藥藏)을 만들어 장간사(長干寺)를 채웠다.
북제의 건원(建元) 4년(482)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7세이다. 『십송계본(十誦戒本)』과 『갈마(羯磨)』를 지었다.
032_0878_b_04L孝武南下改治此以穎學業兼明勅爲都邑僧正辭任還多寶寺常習定閑房亦時開律及齊高卽位復勅爲僧主資給事有倍常科穎以從來信施造經像及藥藏鎭於長干齊建元四年卒秋六十有七撰『十誦戒本』幷『羯磨』等

∙혜문(慧文)
당시 천보사(天寶寺)의 혜문율사도 여러 부(部)의 율법에 뛰어났다. 낭야(瑯琊)의 왕환(王奐)이 섬기는 바가 되었다고 한다.
032_0878_b_10L時天寶寺又有慧文律師亦善諸部毘尼爲琅瑘王奐所事云

11) 석법림(釋法琳)
032_0878_b_12L釋法琳十一
법림의 성은 악(樂)씨며, 진원(晋原)의 임공(臨邛)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촉군(蜀郡)의 배사(裵寺)에 머물렀다. 오로지 계품을 좋아하여, 『십송률』로 마음을 갈았다. 항상 촉 땅에는 좋은 스승이 없음을 한탄하였다. 불현듯 승은(僧隱)이 촉에 이르자, 법림은 곧 송곳으로 찌르며 자기를 이겨내기를 낮과 밤을 가리지 않았다.
승은이 섬서(陝西)로 돌아갔다. 다시 몇 해 동안 그를 따르며 공부하였다. 모든 부의 율장을 마음 속 깊이 훤하게 다하였다.
그 후 촉으로 돌아와서 영건사(靈建寺)에 머물렀다. 그러자 익주(益州) 고을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종사로 받들지 않음이 없었다.
032_0878_b_13L釋法琳姓樂晉原臨邛人少出家蜀郡裵寺專好戒品硏心『十誦』常恨蜀中無好師宗俄而隱公至蜀琳乃剋己握錐以日兼夜及隱還陜西隨從數載諸部毘尼洞盡心曲後還止靈建寺益部僧尼無不宗奉
032_0878_c_01L그는 항상 안양정토에 태어나기를 기원하였다. 늘 『무량수경』 및 『관음경(觀音經)』을 독송할 때마다, 문득 한 사문이 나타났다. 모습은 매우 아름답고 컸다. 항상 법림 앞에 있었다.
북제의 건무(建武) 2년(495)에 이르러 병으로 누웠는데 낫지 않았다. 생각을 서방정토에 쏟아 쉬지 않고 예참하였다. 모든 현인과 성인이 다 눈앞에 모이는 것이 보였다. 곧 제자들을 향해서 그가 본 것을 말하였다.
“죽은 후에는 몸을 불사르라.”
말을 마치자 합장한 채로 세상을 마쳤다. 곧 신번로(新繁路) 입구에 나무를 쌓아 시신을 태웠다. 그러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찔러, 사흘 후에야 다하였다. 유골을 거두어 곧 그 자리에 탑을 세웠다.
032_0878_b_19L祈心安養每誦『無量壽』及『觀經』輒見一沙門形甚姝大常在琳前至齊建武二年寢疾不愈注念西方禮懺不見諸賢聖皆集目前乃向弟子其所見令死後焚身言訖合掌而卒卽於新繁路口積木燔屍煙焰衝天三日乃盡收斂遺骨卽於其處而起塔焉

12) 석지칭(釋智稱)
032_0878_c_04L釋智稱十二
지칭의 성은 배(裵)씨이고, 본래 하동(河東)의 문희(聞憙) 사람이다. 위(魏)의 기주(冀州)자사 배휘(裵徽)의 후예이다. 할아버지 대에 난을 피해서 경구(京口)에 임시 머물렀다.
지칭은 어릴 때부터 강개(慷慨)하여, 자못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나이 열일곱 살 때 왕현모(王玄謨)와 신탄(申坦)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험윤(獫狁)을 토벌하였다. 매양 전투가 벌어져 칼에 피가 묻을 때마다, 마음에 측은한 생각을 품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 아픔을 자기 몸의 아픔보다 더 깊이 느꼈다. 이에 문득 탄식하였다.
“남을 해쳐서 자신을 구제함은 어진 사람의 뜻이 아니다.”
일이 안정되자 갑옷을 벗었다. 우연히 『서응경(瑞應經)』을 읽고는 곧 깊이 느끼고 깨달았다.
‘사람의 백 년은 기약할 수 없는 것이며, 나라와 성(城)이 중한 것이 아니로구나.’
곧 남간사(南澗寺) 선방에 있는 승종(僧宗)에게 투신하여, 5계 받기를 청하였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한때 익주(益州)의 앙(仰)선사가 서울로 내려온 것을 맞이하여 공양한 적이 있다. 지칭은 곧 뜻을 모아 그에게 귀의하였다. 앙선사도 도탑게 그를 상대하고 대접하였다. 앙선사가 문강(汶江)으로 돌아가자, 그를 따라 노닐며 거슬러 올라갔다. 촉(蜀)의 배사(裵寺)에서 출가하고, 앙선사를 스승으로 삼았다. 이때 나이는 36세이다.
032_0878_c_05L釋智稱姓裵本河東聞憙人魏冀州刺史徽之後也祖世避難寓居京口稱幼而慷慨頗好弓馬年十七隨王玄謨申坦北討獫狁每至交兵血刃未嘗不心懷惻怛痛深諸己卻乃歎害人自濟非仁人之志也事寧解遇讀『瑞應經』乃深生感悟知百年不期國城非重乃投南㵎禪房宗公請受五戒宋孝武時迎益州仰禪師下都供養稱便來意歸依仰亦厚相將接及仰反汶江因扈遊而上於蜀裵寺出家仰爲之師時年三十有六
032_0879_a_01L오로지 율부에 정진하여 『십송률』을 크게 밝혔다. 또한 『소품경』 1부를 외웠다. 그 후 동쪽 강릉으로 내려가, 은(隱)ㆍ구(具) 두 스승으로부터 다시 선과 율을 전수받았다.
의가(義嘉)가 난리를 일으킨 때를 만나, 곧 자리를 옮겨 서울에 머물렀다. 그러다가 흥황사(興皇寺)에서 율을 강의하는 법영(法穎)을 만났다. 지칭은 겉에 나타나지 않거나, 가까이 하기에 너무나 먼 것에 대해, 의견을 물어 결정 할 때면, 말하는 것마다 중심을 찔렀다. 그러니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이 놀라고 감탄하지 않음이 없었다.
정림사(定林寺)의 법헌(法獻)과는 강석에서 서로 만났다. 법헌은 그의 문답이 맑고 깊이 있음을 들었다. 곧 손잡고 산사에 머물렀다. 이에 『소품경』을 복습하여 외우고, 율을 닦아 구축하였다.
그 후 여항(餘杭) 보안사(寶安寺)의 석승지(釋僧志)가 초청하였다. 그러자 지칭은 고향으로 돌아와 『십송률』 강석을 열었다. 운서사(雲栖寺)에서 다시 허리를 굽혀, 사주(寺主)가 되어 주기를 청하였다. 지칭은 마침내 그 소임을 받아들였다.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그의 기준들을 들어올려 법으로 내보였다.
얼마 후 서울로 돌아왔다. 문선왕이 보홍사(普弘寺)로 초청하여 율을 강의하게 하였다. 수백 명의 승려가 모두들 책을 잡고서 뜻을 이어받았다.
032_0878_c_17L乃專精律部大明『十誦』又誦『小品』一後東下江陵從隱具二師更受禪律値義嘉遘亂乃移卜居京師遇穎公於興皇講律稱諮決隱遠發言中詣一時之席莫不驚嗟定林法獻於講席相値聞其往復淸玄仍攜止山寺於是溫誦『小品』硏搆毘尼後餘杭寶安寺釋僧志請稱還鄕開講『十誦』雲拪寺復屈爲寺主稱乃受任少時擧其綱目示以憲章頃之反都文宣請於普弘講律僧衆數百皆執卷承旨
지칭은 집을 떠나 도에 들어와서는, 번다하게 쌓이는 일을 버리려 애썼다. 항상 경조사(慶弔事)와의 인연을 끊고서 인간관계를 두절하였다. 집안 어른들의 흉한 부고[凶故]가 있을 때마다, 계율을 지키고 슬픔을 절제하였다. 오직 도 닦기를 더욱 부지런히 힘썼다. 그로써 일년 상[朞功之制]을 마쳤다.
주방(朱方)의 사문 혜시(慧始)가 지칭을 초청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 강설하였다. 그러니 친척과 마을의 옛 친구들이 모두 와서 문안하였다. 모두에게 정중하게 훈육하여, 효도와 자애할 것을 당부하였다. 이별에 즈음하여서는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마을 사람들이 굳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곳에 머물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와 안락사(安樂寺)에서 쉬었다.
항상 법륜을 굴려서, 율장의 대본을 30여 차례 두루 강의하였다.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2세이다. 『십송의기(十誦義記)』 여덟 권을 지었다. 세상에 성행한다. 그의 제자 승변(僧辯) 등이 안락사에 비를 세웠다.
032_0879_a_05L稱辭家入道務遣繁累常絕慶弔杜人事有凶故秉戒節哀唯行道加勤以終期功之制末方沙門慧始請稱還鄕講說親里知舊皆來問訊悉慇懃訓示以孝慈臨別涕泣固留不止京憩安樂寺法輪常轉講『大本』三十餘遍齊永元二年卒春秋七十有二著『十誦義記』八卷盛行於世弟子僧辯樹碑于安樂寺

∙총(聰)ㆍ초(超)
지칭의 제자 가운데, 총ㆍ초 두 사람이 가장 율장에 뛰어나, 문도들이 손을 모아 읍하였다.
032_0879_a_14L稱弟子聰超二人最善毘尼爲門徒所挹

13) 석승우(釋僧祐)
032_0879_a_15L釋僧祐十三
032_0879_b_01L승우의 본래 성은 유(兪)씨며, 그의 선조는 팽성(彭城)의 하비(下邳) 사람이다. 그런데 부친의 대에 건업(建業)에 거주하였다.
승우의 나이가 겨우 몇 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건초사(建初寺)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고는 펄쩍 뛰면서, 도를 즐거워하여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부모가 그의 뜻을 가엽게 생각하여, 잠시 도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승범(僧範) 도인을 스승으로 섬겼다.
나이 열네 살 때 집안사람들이 비밀리에 혼인처를 구했다. 승우가 이를 알고 피해서 정림사(定林寺)에 이르렀다. 그리고는 법달(法達) 법사에게 몸을 맡겼다. 법달도 계율과 덕이 정밀하고 엄숙하여 법문의 기둥이 된 이로, 승우는 스승으로 받들어 정성을 다하였다. 나이가 차서 구족계를 받자, 잡은 지조가 굳고 밝았다.
처음 사문 법영(法穎)에게서 수업하였다. 법영은 한 시대의 이름난 이로 율학(律學)의 종사였다. 이에 승우는 생각을 다하여 뚫고 구하며, 새벽에서 밤까지 게으름이 없었다. 마침내 율부에 크게 정밀하게 뛰어나, 선배들을 더욱 힘쓰게 하였다. 북제의 경릉왕(竟陵王)과 문선왕(文宣王)이 늘 초청하여, 율을 강의하게 하였다. 듣는 대중들이 항상 7,8백 명이었다.
032_0879_a_16L釋僧祐本姓兪氏其先彭城下邳人父世居于建業祐年數歲入建初寺禮拜因踊躍樂道不肯還家父母憐其志且許入道師事僧範道人年十家人密爲訪婚祐知而避至定林投法達法師達亦戒德精嚴爲法門梁祐師奉竭誠及年滿具戒執操堅初受業於沙門法穎穎旣一時名爲律學所宗祐迺竭思鑽求無懈昏曉遂大精律部有勵先哲齊竟陵文宣王每請講律聽衆常七八百人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칙명으로 오군(吳郡)에 들어갔다. 시험 삼아 오부대중을 고르고, 아울러 『십송률』 강의를 베풀어, 다시 계를 받는 법을 폈다. 여기서 얻은 보시로 정림사(定林寺)와 건초사(建初寺)를 경영하여, 여러 사찰을 수선하였다. 아울러 차별을 두지 않는 큰 모임[無遮大集]과 사신재(捨身齋) 등을 세웠다.
경장(經藏)을 조성하자, 두루마리 책들을 찾아 비교하였다. 무릇 절을 널리 열고, 진리와 말씀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그의 힘이다.
032_0879_b_04L永明中勅入吳試簡五衆幷宣講『十誦』更申受戒之法凡獲信施悉以治定林建初及修繕諸寺幷建無遮大集捨身齊等及造立經藏搜挍卷軸使夫寺廟開廣法言無墜咸其力也
승우는 천성적으로 생각이 교묘한 데가 있었다. 능히 눈대중으로 가늠하고 마음속으로 헤아릴 수 있었다. 장인들이 와서 표준치[標準]에 근거해서 비교해 보면, 한 자 한 치도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광택사(光宅寺)와 섭산사(攝山寺)의 큰 불상과 섬현(剡縣)의 석불상 등은 모두 승우를 초청하여, 그의 의례 법칙에 기준하여 계획하였다.
금상폐하께서도 깊이 예우하였다. 모든 승려의 일에 관한 큰 의문은, 모두 칙명으로 그를 찾아가 심의하여 결정토록 하였다. 나이가 들어 노쇠하고 다리에 병이 생기자, 칙명으로 가마를 타고 내전에 들어오는 것을 윤허하였다. 여섯 후궁에게도 계를 받게 하니, 그가 조정에서 존중받음이 이와 같았다.
개선사(開善寺)의 지장(智藏)과 법음사(法音寺)의 혜곽(慧廓)도 모두 그의 소박한 덕을 숭배하여, 초청하여 스승의 예로 섬겼다. 양의 임천왕(臨川王) 소굉(蕭宏)과 남평왕(南平王) 소위(蘇偉), 의동(儀同) 진군(陳郡)의 원앙(袁昻), 영강(永康) 정공주(定公主), 귀빈(貴嬪) 정씨(丁氏) 등도 모두 그 모범적인 계율을 숭배하여, 제자로서 예를 다하였다. 무릇 도인과 속인의 제자가 1만 1천여 명이었다.
032_0879_b_09L爲性巧思能目准心計及匠人依摽寸無爽故光宅攝山大像剡縣石佛等竝請祐經始准畫儀則今上深相禮遇凡僧事碩疑皆勅就審決年衰腳疾聽乘輿入內殿爲六宮受戒其見重如開善智藏法音慧廓皆崇其德素請事師禮梁臨川王宕南平王偉同陳郡袁昂永康定公主貴嬪丁氏竝崇其戒範盡師資之敬凡白黑門一萬一千餘人
032_0879_c_01L천감(天監) 17년(518) 5월 26일에 건초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4세이다. 그리하여 개선로(開善路)의 서쪽 정림사의 옛 묘지에 묻혔다. 제자 정도(正度)가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고, 동완(東莞)의 유협(劉勰)이 비문을 지었다.
처음 승우가 경장을 모았다. 그것이 이룩되자, 사람을 시켜 그 가운데서 중요한 일들을 뽑았다. 이에 「삼장기(三藏記)」ㆍ「법원기(法苑記)」ㆍ「세계기(世界記)」ㆍ『석가보(釋迦譜)』 및 『홍명집(弘明集)』 등으로 엮었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032_0879_b_19L以天監十七年五月二十六日卒于建初寺春秋七十有四因窆于開善路西定林之舊墓弟子正度立碑頌德東莞劉勰製初祐集經藏旣成使人抄撰要事爲『三藏記』『法苑記』『世界記』『釋迦譜』及『弘明集』等皆行於世

【論】예의란 성실함과 믿음이 엷어진 데서 나오고,4) 계율도 그릇됨을 막으려 하는 데서부터 일어난다. 그런 까닭에 범하는 연유에 따라서 편목(篇目)을 만들었다. 쌍수(雙樹)에서 호흡이 끝날 때까지가 부처님 생존시의 일대기이다. 금하(金河)에서 그림자가 멸한 이래, 가섭이 뒤를 이어 일어나서, 계율을 잘 지킨 존자인 우바리(優波離) 비구에게 명하여, 율장을 세상에 내놓게 하였다.
이에 우바리 비구는 손에 상아(象牙) 부채를 잡고, 입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외우기를 80번 되풀이하여, 그 글이 마침내 끝났다. 이에 이를 나뭇잎에 써서 『팔십송률(八十誦律)』이라 이름하였다.
032_0879_c_02L論曰禮者出乎忠信之薄律亦起自防非是故隨有犯緣迺製篇目迄乎雙樹在迹爲周自金河滅影迦葉嗣因命持律尊者優波離比丘使出律藏波離乃手執象牙之扇口誦調御之言滿八十反其文迺訖於是題之樹葉號曰『八十誦律』
이후로 가섭ㆍ아난ㆍ말전지(末田地)ㆍ사나바사(舍那波斯)ㆍ우바굴다(優波掘多), 이 다섯 분의 아라한이 차례로 불법을 주지하였다. 우바굴다의 시대에 이르러, 아육왕(阿育王)이 파타리불다성(波吒梨弗多城)에 있었다.
지난 옛날에 부처님과 만난 인연으로, 드디어 철륜왕(鐵輪王)이 되어 세상을 다스렸다. 그러나 시기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가혹하고 포학한 정치를 하며, 경서를 불태우고 여러 득도한 사람을 해쳤다.
그 후 마음을 바꾸어 불도에 귀의하고, 전날의 잘못을 참회하여 멀리 아라한을 모아 다시 삼장을 결집하였다. 이때에는 서로 보고 들은 것에 집착하였다. 각기 스승의 설을 인용하여 의지한 근거가 같지 않아, 마침내 5부의 경전이 이루어졌다.
032_0879_c_09L是後迦葉末田地舍那波斯優波掘多此五羅漢次第住持至掘多之世有阿育王者王在波咤梨弗多城因以往昔見佛遂爲鐵輪御世而猜忌不忍政苛虐焚蕩經書害諸得道其後易心歸信追悔前失遠會應眞更集三於是互執見聞各引師說依據不遂成五部
그러나 그 안에서 제약하는 가볍고 무거움이때때로 혹 같지 않다. 허락하고 차단하며 폐하고 건립하는 면에서도 작은 차이가 없지 않다. 이는 모두 부처님께서 지난 옛날에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알맞게 응하셨음에서 연유한다.
혹 사람에 따라, 혹 근기에 따라, 혹 시절에 따라, 혹 나라에 따라 이곳에서는 허락한다고 하시다가, 다른 지방에서는 제지하시고, 혹 이쪽 사람에게는 제약한다고 하시다가 다른 사람에게는 허락하셨다.
다섯 분의 승려가 비록 다 같이 부처님의 율을 취하였지만, 각기 한 귀퉁이만을 근거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구족계마다, 때로 가볍고 무거움이 죄목을 다룸에 있어서, 넉넉하거나 낮추거나 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이에 근거하여 수학하면 모두 득도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께서는 세상에 계실 때에, 인연의 중첩함을 꿈꾸신 일이 있었다. 이미 경과 율이 5부로 나뉠 것임을 예언하였다.
032_0879_c_17L而所制輕重時或不同開遮廢立不無小異皆由如來往昔善應物機或隨人隨根隨時隨國此處應開餘方則制或此人應制者則開五師雖同取佛律而各據一故篇聚或時輕重罪目不無優降依之修學竝能得道故如來在世夢疊因緣已懸記經律應爲五部
032_0880_a_01L『대집경(大集經)』에서는 말한다.
“내가 죽은 뒤 남겨진 법이 나뉘어져 5부가 될 것이다. 교리 이해가 거꾸로 뒤집혀지고, 법장이 숨겨 가려진 것을 담무국다(曇無鞠多)라 하리라.”
곧 담무덕(曇無德)이 그것이다.
“외도의 책을 읽어 암기하고, 삼세를 있다고 받아들이며, 문답에 뛰어나며, 일체 중생이 모두 계를 받을 수 있다고 설하는 것을 살바야제바(薩婆若帝婆)라 하리라.”
곧 살바다(薩婆多)가 그것이다.
“나는 없다고 설하며 모든 번뇌를 얽어매는 것을 가섭비(迦葉毘)라 하고, 나는 있다고 말하면서 공(空)을 설하지 않는 것을 바차부라(婆蹉富羅)라 하며, 넓고 해박하게 두루 5부를 열람하는 것을 마하승기(摩訶僧祇)라 하리라. 선남자야, 이와 같은 5부가 비록 각기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여러 부처님의 법계 및 대열반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니라.”
032_0880_a_01L『大集經』云我滅度後遺法分爲五部倒解義隱覆法藏名曇無鞠多卽曇無德也讀誦外書受有三世善能問難說一切姓皆得受戒名薩婆若帝婆薩婆多也說無有我轉諸煩惱名迦葉說有我不說空名婆蹉富羅以廣博遍覽五部名摩訶僧祇善男子是五部雖各別異而皆不妨諸佛法界及大涅槃
또한 『문수사리문경(文殊師利問經)』에서는 말한다.
“내가 열반에 든 후 백 년이 되면 아마도 두 부(部)가 일어나리라. 첫 번째는 마하승기부(摩訶僧祇部)이다. 대중부(大衆部)라고도 하며, 늙은이와 젊은이가 다 같이 모여 율장을 내놓을 것이다. 이로부터 흩어져 퍼지면서 다시 7부가 생겨날 것이다. 두 번째는 체비리부(体毘履部)이다. 순전히 불도의 수행을 마친 승려들이 함께 모여 율법을 내놓을 것이다. 이 부로부터는 다시 흩어져 퍼지면서 다시 11부가 생겨날 것이다.”
032_0880_a_10L又『文殊師利問經』云涅槃後百年當有二部起二摩訶僧二大衆老少同會共出律也從此部流散更生七部二者體毘履部純老宿共會出律也從此部流散更生十一部
그런 까닭에 그 경의 게송에서 칭송한다.

18부와 그 근원이 되는 두 부는
모두 대승으로부터 나오리라.
옳지도 않지만 그르지도 않아서
나는 미래에 일어나리라 말하노라.
032_0880_a_15L故彼經偈云
十八及二本
悉從大乘出
無是亦無非
說未來起

또한 주장하는 견해가 같지 않아, 전하는 가운데 역시 18부가 있는데, 언어 표현에서 조금 다르다. 그런 까닭에 5부를 근본으로 삼는다.
살바다부(薩婆多部)에서 4부가 생겨났고, 미사색부(彌沙塞部)에서 1부가 생겨났으며, 가섭비부(迦葉毘部)에서 2부가 생겨났다. 이것은 모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이후 2백 년 안에 생긴 것이다. 승기부(僧祇部)에서 생긴 6부는, 흐르는 물 같이 끊임없이 전한 4백 년 동안, 담무덕부(曇無德部)에게서 생겨난 율장이다.
경전 가운데 혹 다만 다섯 승려만을 말하는 것은 그 우두머리를 들어 말한 것이다. 혹 때로는 18이나 20의 율부를 말하는 것은 다른 논리를 통틀어 줄지어 말한 것이다.
032_0880_a_17L又執見不同傳中亦有十八部而名字小異故以五部爲根本從薩婆多部生四部彌沙塞生一部迦葉毘生二部竝是佛泥曰後二百年內僧祇生六部流傳至四百年中曇無德所生也經中或時止道五師者擧其領䄂而言或時十八二十則通列異論也
032_0880_b_01L불교가 동방에 전해지면서 5부의 율장도 모두 건너왔다. 처음 불야다라(弗若多羅)가 『십송률』의 범본을 외워내자, 구마라집이 이를 번역해서 한문으로 바꾸었다. 다 끝내지 못하고 불야다라가 죽었다. 그 후 담마류지(曇摩流支)가 다시 나머지를 외워내서, 구마라집이 번역하여 모두 끝냈다.
담무덕부(曇無德部)는 불타야사(佛陀耶舍)가 번역한 것으로, 곧 『사분율』이 그것이다. 마하승기부와 미사색부는 모두 법현(法顯)이 범본을 얻은 것이다. 불타발타라(佛馱跋陀羅)가 『승기율』을 번역해 냈으며, 불타집(佛馱什)이 번역해 낸 미사색본은 곧 『오분율』이다.
032_0880_b_01L自大教東傳部皆度始弗若多羅誦出『十誦』梵本羅什譯爲晉文未竟多羅化焉後曇摩流支又誦出所餘什譯都竟曇無德部佛陁耶舍所翻卽『四分律』也訶僧祇部及彌沙塞部竝法顯得梵本佛馱跋陁羅譯出『僧祇律』佛馱什譯出彌沙塞部卽『五分律』也
가섭비부(迦葉毘部)에 대해서는 혹 말한다.
“이미 범본이 건너왔다. 그러나 아직 그것을 번역하지는 못하였다.”
거기에 실려 있는 선견(善見)ㆍ마득륵가(摩得勒伽)ㆍ계인연(戒因緣) 등도 역시 율에 속한 갈래이다.
이처럼 모든 율부가 다 전래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십송률』 한 본이 동쪽 중국에서는 가장 성행하였다.
032_0880_b_08L迦葉毘部或言梵本已度未彼翻譯其『善見』『摩得勒伽』『戒因緣』等亦律之枝屬也復諸部皆傳而『十誦』一本最盛東國
예전에 비마라차(卑摩羅叉) 율사는 본래 서역 나라의 으뜸가는 종사였다. 관중 땅에 들어와 형주와 섬서로 갔다. 그곳에서 모두 『십송률』을 베풀어 유통시켰음이 송(宋)나라의 역사에 나타나 있다. 담유(曇猷)가 친히 소리와 뜻을 이어받고, 승업(僧業)이 발꿈치를 이어 넓게 교화하였다.
승거(僧璩)ㆍ도엄(道儼)ㆍ승은(僧隱)ㆍ도영(道榮) 등은 모두 담유ㆍ승업의 뒤를 그대로 이어받아, 줄지어 송나라를 장식하였다. 글에 의거하여 이해하는 정도이므로, 그렇게 깊이 있게 뚫고 연마하지는 못하였다.
그 후 지칭(智稱) 율사는 깊이 생각하기를 다하여, 펼쳐서 해석한 것마다 모두 문호를 개척하여 다시 과목(科目)을 세웠다. 북제(北齊)와 양(梁)시대에, 천명에 의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명세(命世)’라 불렸다. 그에게서 배운 무리들이 기록을 전하여, 지금까지 숭상한다.
무릇 지혜는 선정에 힘입고, 선정은 지계에 힘입는다. 그런 까닭에 계ㆍ정ㆍ혜는 불교의 교리를 크게 분류한 것이자 차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도문에 들어서면, 곧 계율로 근본을 삼고, 속가에 살면 예의를 우선으로 삼음을.
032_0880_b_11L以昔卑摩羅叉律師本西土元匠入關中及往荊陜皆宣通『十誦』盛見『宋錄』曇猷親承音旨僧業繼踵弘化其間璩榮等竝祖述猷業列奇宋代而皆依文作解未甚鑽硏其後智稱律師竭有深思凡所披釋竝開拓門戶更立科目梁之間號稱命學徒傳記于今尚焉夫慧資於定定資於戒故戒定慧品義次第故當知入道卽以戒律爲本居俗則以禮義爲先
032_0880_c_01L『예기(禮記)』에 이른다.
“도덕ㆍ인의는 예가 아니면 이룩되지 않으며, 교훈으로 풍속을 바로잡는 것은 예가 아니면 갖추어지지 않는다.”
경에서는 말한다.
“계는 평탄한 땅이라 하겠다. 모든 거룩함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삼세의 불도도 계에 의지하여 비로소 머문다.”
그런 까닭에 율에서 해석하는 다섯 가지 법은, 제어함을 먼저 알게 한다. 물적현상 위에 있는 모양[三相]을 풀 베듯 해야 함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다음에야 선정과 지혜의 법문을, 순서에 따라 차례로 수학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잘못에 집착하는 무리들은 서로 다른 논의들을 일으킨다.
032_0880_b_22L『禮記』云道德仁義非禮不成教訓正俗非禮不備經云戒爲平地衆善由生三世佛道藉戒方住故律解五制使先知斬草三相不可不識後定慧法門以次修學而謬執之徒互生異論
율에 치우친 자들은 말한다.
“계율이 모든 것을 지휘하며, 논리를 따지는 것은 허무맹랑한 것이다.”
구족계의 제목이나 이름 정도만 얄팍하게 알면, 이내 말한다.
“해득함이 우바리 비구의 경지에 미친다.”
고작 물을 걸러내고 물주머니를 뒤집을 줄만 알아도 이미 일컫는다.
“행이 아라한과 나란하다. 오직 나만이 승려이고, 다른 사람은 모두 눈으로 불법을 보아 상상으로만 이른다.”
이는 자신을 찬양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는 것으로, 공덕을 쌓더라도 허물을 속죄할 수 없다. “스스로 높은 양하는 교만과 자기가 높다는 긍지에 사로잡힌다”는 것은 무릇 이러한 것을 일컫는다.
032_0880_c_04L偏於律者則言戒律爲指數論虛誕薄知篇聚名目便言解及波離止能漉水翻囊已謂行齊羅唯我曰僧餘皆目想此則自讚毀功不贖過我慢矜高蓋斯謂也
한편 논리를 따지는 데 치우친 자들은 말한다.
“율부는 하나의 치우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논리를 따지는 것은 사방에 두루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 따르기를 등지고, 5음(陰)과 12입(入)만을 오로지 중히 여긴다. 뜻에만 맞으면, 곧 행하여 한 번도 구애받는 일이 없다.
그들은 말한다.
“지옥도 지혜로운 사람을 불사르지 못하고, 끓는 가마솥도 반야를 삶지는 못한다.”
이것은 모두 행동을 단속하는 자루를 잃어서, 도로 자신을 상하는 것이다.“쥐를 점쳐 양(羊)이라고 한다”는 것은, 어찌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032_0880_c_08L於數論者則言律部爲偏分數論爲通方於是扈背毘尼專重陰入得意便曾莫拘礙謂言地獄不燒智人鑊湯不煮般若此皆操之失抦還以自傷相鼠看羊豈非斯謂
찬하노라.

소반과 사발에 마련한 경계나
안석과 지팡이에 베푼 새김글이나
만약 사람들이 힘쓰지 않으면
어떻게 이룰 수 있으리요.
032_0880_c_13L讚曰
盤杅設戒
几杖施銘
人如不勖奚用剋成

누더기 옷 깁고 입으면
구족계 이로 말미암아 생겨나니
입과 생각을 다물고 지키면서
마음과 몸을 마른 고목나무처럼 하라.
032_0880_c_15L納衣旣補
篇聚由生
緘持口意
枯槁心形

기쁨과 슬픔이 거울의 양면이라면
들뜸과 근심은 병의 앞뒤라네.
032_0880_c_16L怡慼兩鏡
欣憂二甁
高僧傳卷第十一
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듣건대, “삶을 잘 기르는 이는 육지에서 외뿔소나 호랑이를 피하지 않고, 전쟁터에서 갑옷을 입거나 무기를 들지 않더라도, 외뿔소가 그 뿔을 박을 곳이 없고, 호랑이가 그 발톱을 찍을 곳이 없고, 무기가 그 칼날을 들이밀 곳이 없다”고 한다. 무엇 때문인가? 그 죽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노자』 50장)
  2. 2)『노자(老子)』 26장.
  3. 3)육묘법문(六妙法門)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수식선(數息禪)의 수(數)ㆍ수(隨)ㆍ지(止)ㆍ관(觀)ㆍ환(還)ㆍ정(淨)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이다.
  4. 4)저 예의바름이라는 것은 성실과 믿음의 얄팍한 상태이자 어지러움을 일으키는 처음이며, 미리부터 아는 것은 도의 꽃이자 어리석음의 시초이다. 이 때문에 대장부는 도타운데 머물러서 얄팍함에 뜻을 두지 않고, 열매에 머물러서 꽃에 뜻을 두지 않는다. (『노자』 38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