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高僧傳卷第十三

ABC_IT_K1074_T_013
032_0888_c_01L고승전 제13권
032_0888_c_01L高僧傳卷第十三興福 經師 導師

석혜교 지음
추만호 번역
032_0888_c_02L梁會稽嘉祥寺沙門釋慧皎撰

8. 흥복(興福)
032_0888_c_03L興福第八十四人
釋慧達一 釋慧元二
釋慧力三 釋慧受四
釋僧慧五 釋曇翼六
釋僧洪七 釋僧亮八
釋法意九 釋慧敬十
釋法獻十一 釋法獻十二
釋僧護十三 釋法悅十四

1) 석혜달(釋慧達)
혜달의 성은 유(劉)씨며, 본래 이름은 살하(薩河)이다. 병주(幷州) 서하(西河)의 이석(離石)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사냥을 좋아하였다. 나이 서른한 살 때 문득 잠시 죽었다가, 하루가 지나서 다시 소생하였다. 지옥의 고통스런 과보를 두루 보았다. 그때 한 도인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였다.
“나는 그대의 전생의 스승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설법하고 훈화하여 출가하게 하였다. 단양(丹陽)과 회계(會稽)와 오군(吳郡)에 가서 아육왕(阿育王) 탑과 불상을 찾았다. 예배하고 허물을 뉘우쳐서, 전생에 지은 죄를 참회하게 하였다. 깨어나자 곧 출가하였다.
도를 배우며 이름을 혜달이라 고쳤다. 부지런히 복업을 짓기에 정진하면서, 오직 예참만을 우선으로 삼았다.
032_0888_c_11L釋慧達姓劉本名薩河幷州西河離石人少好田獵年三十一忽如暫死經日還蘇備見地獄苦報見一道人云是其前世師爲其說法訓誨令出家往丹陽會稽吳郡覓阿育王塔像拜悔過以懺先罪旣醒卽出家學道改名慧達精勤福業唯以禮懺爲先
032_0889_a_01L진(晋)의 영강(寧康) 연간(373~375)에 서울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간문황제(簡文皇帝)가 장간사(長干寺)에 삼층탑을 조성하였다. 탑이 이루어진 후로 저녁마다 방광하였다. 혜달은 월성(越城)에 올라가 사방을 돌아보고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이 당간 끝에 홀로 이상한 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곧 그곳을 찾아가 예배드리며 공경하였다. 아침저녁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드렸다. 밤에 당간 아랫녘을 보니, 이때 광명이 나오는 곳이 있었다. 이에 곧 사람들에게 알려서, 함께 그곳을 팠다. 한 길 가량 파내려 가니, 세 개의 돌 비석을 발견하였다.
중앙의 비석은 가운데가 덮여 있었다. 그곳에 쇠 상자가 있었다. 쇠 상자 속에 다시 은상자가 있고, 은상자 속에 금상자가 있었다. 금상자 속에는 세 과의 사리가 있었다. 또한 하나의 손톱과 하나의 머리카락이 있었다. 머리카락을 펴니 길이가 몇 자 가량 되었다. 그러나 말면 소라모양이 되었고, 눈부시게 빛이 났다.
이는 곧 주(周)나라 경왕(敬王) 때(기원전 541~498) 아육왕(阿育王)이 8만 4천 개의 탑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하여 도인과 속인들은 신비함을 찬탄하였다. 옛 탑의 서쪽에 다시 당간을 세워, 사리를 안치하였다. 진(晋)의 태원(太元) 16년(391) 효무황제(孝武皇帝)가 다시 3층의 탑을 더하였다.
032_0888_c_18L晉寧康中至京師先是簡文皇帝於長干寺造三層塔塔成之後每夕放達上越城顧望見此剎杪獨有異便往拜敬晨夕懇到夜見剎下有光出乃告人共掘掘入丈許得三石碑中央碑覆中有一鐵函函中又有銀函銀函裏金函金函裏有三舍又有一爪甲及一髮髮申長數尺卷則成螺光色炫燿乃周敬王時育王起八萬四千塔此其一也旣道俗歎異乃於舊塔之西更豎一剎安舍利晉太元十六年孝武更加爲三層
또한 예전에 단양(丹陽) 수령 고회(高悝)가 장후교(張候橋) 갯벌 안에서, 하나의 금불상을 캐냈다. 빛나는 받침대가 없었으나, 제작 상태는 매우 뛰어났다. 앞에는 범어로 쓰여있었다.
“이는 아육왕의 넷째 딸이 조성한 것이다.”
고회가 이것을 싣고 장간사 골목 입구에 이르렀다. 그러자 소가 다시 더 걸어가지 않았다. 사람의 힘으로는 몰 수 없었다. 이에 소가 가는 데로 맡기니, 곧바로 장간사로 달려갔다.
그 후 1년 가량 지나서 임해(臨海)의 고기잡이 장계세(張係世)가 바다 입구에서, 구리로 만든 연꽃 받침대가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곧 이를 건져서 고을로 보냈다. 고을에서는 표를 대각(臺閣)에 올렸고, 칙명으로 그것을 불상의 발 밑에 안치하였다. 그러자 맞추기나 한 듯이 서로 어울렸다.
032_0889_a_09L又昔晉咸和中丹陽尹高悝於張侯橋浦裏掘得一金像無有光趺製作甚工前有梵書云是育王第四女所造悝載像還至長干巷口牛不復行非人力所御乃任牛所之徑趣長干寺爾後年許有臨海漁人張係於海口得銅蓮花趺浮在水上取送縣縣表上上臺勅使安像足下然相應
032_0889_b_01L그 후 서역의 다섯 승려가 고회를 찾아와서 말하였다.
“예전에 천축국에서 아육왕이 조성한 불상을 가져왔습니다. 업도(鄴都)에 이르러 난리를 만나 강가에 숨겨 두었습니다. 조정의 길이 다시 열리면서 찾아보아도 그 소재를 잃었던 차에, 근간에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알려주었습니다. ‘불상은 이미 강남에서 나와 고회가 얻었다’고 하기에, 짐짓 멀리 산과 바다를 넘고 건너왔습니다. 한 번 보고 예배드리고자 할 따름입니다.”
고회는 곧 그들을 인도하여 장간사에 이르렀다. 다섯 승려는 불상을 보고 흑흑 흐느끼며 울었다. 그러자 불상에서는 곧 빛이 발하여, 법당 안을 비추었다.
다섯 승려가 말하였다.
“본래는 둥근 빛이 나는 광배가 있습니다. 지금은 먼 곳에 있으나, 역시 곧 이곳에 이를 것입니다.”
진(晋)의 함안(咸安) 원년(371)에 교주(交州) 합포현(合蒲縣)에서, 진주를 캐는 동종지(董宗之)가 바다 밑에서 불상의 광배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곳 자사(刺史)가 표를 올렸다. 진(晋)의 간문제(簡文帝)가 칙명으로 이 불상에 베풀게 하였다. 구멍이 꼭 같고, 빛의 색깔도 똑같이 겹쳤다. 무릇 40여 년에 걸쳐 동서에서 상서로운 감응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빛나는 받침대가 비로소 갖추어졌다.
032_0889_a_17L後有西域五僧詣悝云昔於天竺得阿育王像至鄴遭亂藏置河王路旣通尋覓失所近得夢云已出江東爲高悝所得故遠涉山海欲一見禮拜耳悝卽引至長干五人見像歔欷涕泣像卽放光照于堂內五人云本有圓光今在遠處亦尋當晉咸安元年交州合浦縣採珠人董宗之於海底得一佛光刺史表上簡文帝勅施此像孔穴懸同光色一凡四十餘年東西祥感光趺方具
혜달은 당간의 성스런 불상이 신령하고 기이하기에, 발돋움하며 힘쓰기를 두 배나 더하였다. 그 후 동쪽 오(吳)현에 노닐며 돌 불상에 예배드렸다. 이 석상은 서진(西晋)이 끝날 무렵, 건흥(建興) 원년(313) 계유년(癸酉年)에 오송강(吳松江)의 호독(滬瀆) 입구에 떠다니던 것이었다. 고기잡이가 바다의 신이 아닌가 의심하여, 무당을 불러 이를 영접하려 하였다.
이에 바람과 파도가 함께 성하여, 놀라고 두려워서 돌아갔다. 당시 도교(道敎)를 받드는 사람이 천사(天師)의 신이라 생각하였다. 다시 함께 가서 영접하려 하였다. 그러나 바람과 파도가 처음의 경우와 같았다.
그 후 불법을 받드는 거사로 있는, 오현(吳縣)의 백성 주응(朱應)이 이 소문을 들었다. 이에 찬탄하였다.
“혹 부처님께서 감응을 드리우신 것이 아니겠는가?”
곧 깨끗이 목욕재계하였다. 동운사(東雲寺)의 백(帛)비구니와 신자 몇 사람과 함께 호독의 입구에 이르렀다. 머리를 조아리고 공경을 다하여, 범패로 지극한 덕을 노래하였다. 바람과 조수가 가라앉았다. 멀리 두 사람이 나타나, 강물 위에 떠서 그곳에 이르렀다. 곧 그것은 돌 불상으로, 등에 새김글이 있었다.
첫 번째는 ‘유위(惟衛)’라 이름하였다. 두 번째는 ‘가섭(迦葉)’이라 이름하였다. 곧 영접하여 통현사(通玄寺)에 안치하였다. 오현 안의 선비와 서민들이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감탄하여, 마음으로 귀의한 사람이 많았다.
032_0889_b_04L達以剎像靈異倍加翹勵後東遊吳禮拜石像以像於西晉將末達興元年癸酉之歲浮在吳松江滬瀆口漁人疑爲海神延巫祝以迎之於是風濤俱盛駭懼而還時有奉黃老者謂是天師之神復共往接飄浪如初後有奉佛居士吳縣民朱應聞而歎曰非大覺之垂應乎乃潔齋共東雲寺帛尼及信者數人到滬瀆口稽首盡歌唄至德卽風潮調靜遙見二人浮江而至乃是石像背有銘誌一名惟衛二名迦葉卽接還安置通玄寺吳中士庶嗟其靈異歸心者衆矣
032_0889_c_01L혜달은 통현사에 머문, 전후 3년 동안 낮밤으로 경건하게 예배드렸다. 그러기를 잠시도 그만둔 일이 없었다. 얼마 후 회계(會稽)로 가서 등현(鄧縣)의 탑에 예배드렸다. 이 탑도 역시 아육왕이 조성한 탑이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 황량하게 거칠어져, 기단자리만 남은 것을 보았다.
혜달이 마음을 발돋움하고 생각을 한 곳에 모았다. 그러자 곧 신비한 광명의 불꽃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에 인연하여 감실과 섬돌을 수축해서 세웠다. 뭇 새들이 감히 깃들어 둥지를 치지 않았으며, 절 근처에 사는 모든 사냥꾼이나 고기 잡는 사람들도 잡히는 것이 없었다. 도인과 속인들이 감응을 전해 듣고, 믿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 군수인 맹의(孟顗)가 다시 개척을 더하였다. 혜달은 동서로 찾아가서 예배드리는 가운데, 여러 번 징험이 나타났다. 이에 부지런히 정진하고 독실하게 힘써서, 죽을 때까지 고치지 않았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032_0889_b_17L停止通玄寺首尾三年晝夜虔禮嘗暫廢頃之進適會稽禮拜 ((脊*阝)) 塔亦是育王所造歲久荒蕪示存基達翹心束想乃見神光焰發因是修立龕砌群鳥無敢棲集凡近寺側畋漁者必無所獲道俗傳感莫不移後郡守孟顗復加開拓達東西覲屢表徵驗精勤篤勵終年無改不知所之

2) 석혜원(釋慧元)
혜원은 하북(河北) 사람이다. 사람 됨됨이가 성품이 착하였다. 기쁨과 불만을 얼굴빛에 나타내는 일이 없었다. 항상 선(禪)을 익히면서 경을 외웠다. 복된 일을 권유하고 교화하는 것으로 늘상 일삼았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간(376~396) 초기에 무릉(武陵)의 평산(平山)에 절을 세웠다. 20여 명의 승려가 있었으나, 거친 음식을 먹고 깊이 숨어서 오랫동안 속세와 길이 끊었다.
태원 14년(389)에 세상을 떠났다. 죽은 후에 어떤 사람이 무당산(武當山) 아래에서 그를 보았다. 정신과 얼굴빛이 매우 화창하였다. 절의 승려들에게 말을 전하였다.
“절의 일을 폐지하지 않게 해달라.”
이때부터 절 안에는 항상 때를 맞춰, 공중에서 경쇠[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의거하여 대중을 모으면, 한 번도 차질이 없었다.
032_0889_c_03L釋慧元河北人爲人性善喜慍無色常習禪誦經勸化福事以爲恒業太元初於武陵平山立寺有二十餘飱蔬幽遁永絕人途以太元十四年卒卒後有人入武當山下見之色甚暢寄語寺僧勿使寺業有廢是寺內常聞空中應時有磬聲依而集衆未嘗差失

∙축혜직(竺慧直)
사문 축혜직이 그곳에 살았다. 혜직은 고행 정진하며, 계를 지킴에 절조가 있었다. 후에는 곡식을 끊고,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 열매만을 먹었다. 그러다가 산에 올라가, 매미가 허물을 벗듯 화하였다.
032_0889_c_11L沙門竺慧直居之精苦有戒節後絕粒唯餌松柏因登山蟬蛻焉

3) 석혜력(釋慧力)
혜력은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진(晋)의 영화(永和) 연간(345~356)에 서울에 와서 노닐었다. 항상 걸식하며 푸성귀를 먹고, 고행을 하며 두타행으로 복을 닦았다. 진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도자기 굽던 터를 빌어 와관사(瓦官寺)를 열었다.
처음 탑의 터를 표시한 곳은 지금의 탑 서쪽이었다. 저녁마다 표시한 것이 동쪽으로 10여 걸음 옮겨졌다. 아침에 뽑아다 되돌려 놓아도 다시 옮겨졌다. 그러자 몰래 함께 이를 엿보았다. 붉은 옷을 입고 무인의 갓을 쓴 사람이 나타나서 표시를 뽑아 동쪽에 설치하였다. 이에 곧 그곳에 탑을 세웠다. 지금 탑이 있는 곳이 그곳이다.
032_0889_c_13L釋慧力未知何人晉永和中來遊京常乞食蔬苦頭陁修福至晉興寧啓乞陶處以爲瓦官寺初摽塔基是今塔之西每夕摽輒東移十餘步旦取還已復隨徙潛共伺之見一人著朱衣武冠拔標置東方仍於其處起塔今之塔處是也
032_0890_a_01L예언에 의하면, ‘절이 건립된 후 30년이 지나면, 하늘이 내린 불로 불탈 것’이라 하였다. 진(晋) 효무제(孝武帝)의 태원(太元) 21년(396)에 7월 밤에 이르러, 저절로 불이 났다. 절의 승려 수십 명이 아무도 원인을 알지 못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탑은 이미 잿더미가 되었다. 이에 황제가 말하였다.
“이는 나라에 상서롭지 않은 징조이다.”
곧 양법상(楊法尙)ㆍ이서(李緖) 등에게 명령하여, 속히 수복하게 하였다. 9월에 이르러 황제가 죽었다.
032_0889_c_20L記者云寺立後三十年當爲天火所燒至晉孝武太元二十一年七月夜自然火起寺僧數都無知者明旦見塔已成灰聚此國不祥之相也卽勅楊法尚緖等速令修復至九月帝崩
그곳에는 대안도(戴安道)가 제작한 다섯 구의 불상과, 대옹(戴顒)이 주조(鑄造)한 1장 6척의 금불상이 있었다.
예전에 주조한 불상이 처음 이룩되자, 얼굴과 머리가 너무 여위게 보였다. 여러 장인들이 어찌할 수 없어서, 이에 대옹을 맞아 이를 보게 하였다. 대옹이 말하였다.
“얼굴이 여윈 것이 아니라, 팔뚝과 어깻죽지가 살찐 것이다.”
줄로 갈아 팔뚝과 어깻죽지를 줄였더니, 얼굴상이 스스로 원만해졌다. 여러 장인들로서 탄식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이곳에는 사자국(師子國)에 있던, 4척 2촌의 옥으로 된 불상도 나란히 있었다. 예전에 사자국 왕이, ‘진의 효무제가 불법을 받드는 데 정성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짐짓 사문 담마억(曇摩抑)을 멀리서 파견하여 헌납한 것이다. 이 불상은 전해지는 데 10여 년이 걸려,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진나라에 도달하였다.
032_0890_a_02L有戴安道所製五像及戴顒所治丈六金像昔鑄像初成而面首殊瘦諸工無如之何乃迎顒看之顒曰非面瘦也臂胛肥耳旣鑢減臂胛而面相自滿諸工無不歎息又有師子國四尺二寸玉像竝皆在焉昔師子國王聞晉孝武精於奉法故遣沙門曇摩抑獻此佛在道十餘年至義熙中乃達
사도(司徒)인 왕밀(王謐)이 어느 날 대부(臺府)로 들어갔다. 동액문(東掖門)의 입구에 절이 있는 것을 보았다. 거기에서 사람들이 윷을 던져 윷놀이를 하였다. 그 윷가지가 닿는 곳에서 곧 광명이 비쳤다. 이상하게 생각하여 파보게 하니, 금불상 하나가 발견되었다. 빛나는 받침대와 합치면, 길이가 7척 2촌이나 되었다. 왕밀은 곧 전송의 고조(高祖)황제에게 알려, 이를 영접하여 대부로 들어가 공양하게 하였다.
그 후 전송의 경평(景平) 연간(423~424) 말기에 와관사(瓦官寺)로 보내졌다. 그러다가 지금은 용광사(龍光寺)로 옮겼다.
032_0890_a_11L司徒王謐嘗入臺見東掖門口有寺人擲樗戲樗所著處輒有光出怪令掘得一金像合光趺長七尺二寸卽啓聞宋高祖迎入臺供養宋景平送出瓦官寺今移龍光寺

4) 석혜수(釋慧受)
혜수는 안락(安樂) 사람이다. 진(晋)의 흥녕(興寧) 연간(363~365)에 서울에 와서 노닐었다. 푸성귀를 먹으며 고행하여, 항상 복업을 닦았다. 어느 날 왕탄지(王坦之)의 장원을 지나다, 방문하였다.
꿈에 문득 장원 안에 절을 세우는 꿈을 꾸었다. 이와 같은 일이 몇 번 되풀이되자, 혜수는 왕탄지를 찾아가, 한 칸의 집을 지을 땅을 빌리려 하였다. 그러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이전에 장원을 지키던 장원지기인 송기(松期)를 찾아가, 이를 말하였다. 송기가 말하였다.
“왕씨 집안의 장원은 아마도 도모하지 못할 것입니다.”
혜수가 말하였다.
“지성으로 감응하면, 무엇 때문에 얻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는가?”
곧 왕탄지를 찾아가 그의 뜻을 진술하였다. 그러자 왕탄지는 크게 기뻐하여 곧 허가하였다.
032_0890_a_15L釋慧受安樂人晉興寧中來遊京師蔬食苦行常修福業嘗行過王坦之夜輒夢於園中立寺如此數過欲就王乞立一閒屋處未敢發言向守園客松期說之期云王家之園非所圖也受曰若令誠感何憂不得詣王陳之王大喜卽以許焉
032_0890_b_01L처음에는 작은 집을 한 채 세웠다. 저녁마다 다시 꿈에 푸른 용이 나타나, 남쪽에서 와서 당간으로 화하였다. 이에 혜수는 사미를 거느리고 시험 삼아 신정강(新亭江)에 이르러 찾아보았다. 그러니 긴 나무 하나가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 보였다. 혜수는 말하였다.
“반드시 내가 꿈에 본 나무일 것이다.”
이에 사람을 고용해서 끌어올려 바로 세워서, 당간으로 삼아 한 층으로 꾸몄다. 도인과 속인들이 다투어 모여들어, 모두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감탄하였다.
왕탄지는 곧 장원을 희사하여 절로 삼았다. 혜수의 본고향 이름을 따서, 안락사(安樂寺)라 불렀다.
이 절의 동쪽에는 단양(丹陽) 수령 왕아(王雅)의 저택이 있고, 서쪽에는 동연(東燕) 태수 유투(劉鬪)의 저택이 있으며, 남쪽에는 예장(豫章) 태수 범영의 저택이 있었다. 모두 보시하여, 절을 이루었다. 그 후 사문 도정(道靖)과 도경(道敬) 등이 다시 보수하고 꾸미기를 더하여, 지금까지도 크게 아름답다.
032_0890_a_22L初立一小屋每夕復夢見一靑龍從南方來化爲剎柱受將沙彌試至新亭江尋乃見一長木隨流來下受曰必是吾所見者也於是雇人牽上豎立爲架以一層道俗競集咸歎神異之卽捨園爲寺以受本鄕爲名號曰安樂寺東有丹陽尹王雅宅西有東燕太守劉鬪宅南有豫章太守范甯竝施以成寺後有沙門道靖道敬更加修飾于今崇麗焉

5) 석승혜(釋僧慧)
승혜는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복업을 닦기를 좋아하였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장안 사람 행장생(行長生)과 함께, 서울의 파오촌(破塢村) 안에 절을 세웠다.
처음에는 그 지역보다 먼 곳에 거처를 잡아, 초가 몇 칸을 세웠다. 곧 승려들을 모아 재(齋)를 마련하였다. 밤중에 이르자, 법당 안의 두 등불이 문득 자연적으로 앞으로 수십 걸음을 나아갔다. 기름종지가 전과 같아서, 기울어지고 엎질러지는 일은 없었다. 대중들은 놀라고 감탄하였다. 여러 나이 든 승려에게 물어보니, 모두 말하였다.
“등불이 옮겨간 곳은, 예전에 외국의 도인이 탑을 세운 곳이다.”
이에 함께 터를 닦고 절을 세웠다. 등불이 옮겨간 상서로움을 표시하여, 숭명사(崇明寺)라 이름 지었다.
032_0890_b_09L釋僧慧未知何人少來好修福業義熙中共長安人行長生立寺於京師破塢村中始迂域其處起草屋數便集僧設齋至中夜堂內兩燈忽自然行進前數十步油纂如故無所傾覆大衆驚嗟訪諸耆老咸言燈所移處是昔時外國道人起塔之基是就共修立以燈移表瑞因號崇明寺焉

6) 석승익(釋僧翼)
승익은 본래 오흥(吳興)의 여항(餘杭)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믿음과 슬기가 있어, 일찍이 티끌세상과 인연을 끊을 지조가 있었다. 처음 출가하여서는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며, 혜원(慧遠)에게서 수학하였다. 푸성귀를 먹고 검소하게 고행의 절개를 지켜, 문인들로부터 존중을 받았다. 만년에는 관중(關中)으로 갔다. 다시 구마라집에게 사사하여, 경장ㆍ율장ㆍ논리를 따지는 것을 나란히 모두 섭렵하였다. 또한 『법화경』 한 부를 외웠다.
032_0890_b_18L釋僧翼本吳興餘杭人少而信悟有絕塵之操初出家止廬山寺依慧遠修學蔬素苦節見重門人晩適關復師羅什經律數論竝皆參涉誦『法華』一部
032_0890_c_01L진(晋)의 의희(義熙) 13년(417)에 도반인 담학(曇學)과 더불어 회계(會稽)에 노닐었다. 산천을 밟고 찾다가, 진망(秦望)의 서북쪽에 다섯 개의 높은 산봉우리가 나란히 솟은 것을 보았다. 거기에 기사(耆闍: 耆闍崛山)의 기상이 어려 있었다. 이에 풀을 이어 암자를 짓고 법화정사(法華精舍)라 일컬었다.
태수(太守) 맹의(孟顗)와 부자인 진재(陳載)가 나란히 마음을 기울여, 덕에 머리 숙이고 찬조하여 준공을 이루었다.
승익은 푸성귀를 먹고 개울물을 마시길, 30여 년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전송의 원가(元嘉) 27년(450)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0세이다. 산사에 비를 세워서, 그가 남긴 덕을 기렸다. 회계의 공관(孔逭)이 비문을 지었다.
승익과 함께 노닌 사문 담학은 후에 진망령(秦望嶺)의 북쪽으로 옮겨 터를 잡아, 낙림정사(樂林精舍)라 이름 지었다. 소상(韶相)ㆍ관천(灌蒨) 모두가 동악(東岳)의 명망 있는 승려들로서, 다 함께 이곳에서 머물렀다.
032_0890_b_23L以晉義熙十三年與同志曇學沙門俱遊會稽履訪山水秦望西北見五岫騈峯有耆闍之狀乃結草成菴稱曰法華精舍太守孟富人陳載竝傾心挹德贊助成功翼蔬食㵎飮三十餘年以宋元嘉二十七年卒春秋七十立碑山寺旌其遺德會稽孔逭製文翼同遊曇學沙後移卜秦望之北號曰樂林精舍有韶相灌蒨竝東嶽望僧咸共憩焉

∙도경(道敬)
당시 도경은 본래 낭야(瑯琊)의 으뜸가는 족속이다. 진(晋)나라 때 우장군(右將軍)이었던 왕희지(王羲之)의 증손이었다. 그러나 세상을 피해 출가하였다. 심정이 산골짜기를 사랑하여, 약야산(若耶山)에 깃들어 현류정사(縣溜精舍)를 지었다. 도경은 그 후에 대중승려를 공양하기 위하여, 마침내 구족계를 버렸다. 오로지 10계(戒)에만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032_0890_c_09L時有釋道敬者本琅瑘胄族晉右將軍王羲之曾孫避世出家情愛丘壑棲于若耶山立懸溜精舍敬後爲供養衆僧乃捨具足專精十戒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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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석승홍(釋僧洪)
승홍은 예주(豫州) 사람이다. 서울의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몸가짐이 반듯하고 깨끗하였다. 후에 교화에 인연 있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였다. 녹여서 상을 주조하는 일은 비로소 마쳤지만, 아직 미처 모형을 열어보지는 못하였다. 당시는 진(晋)나라의 말기라, 구리의 사용을 매우 엄하게 금지하였다. 이를 범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당시 진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다. 승홍이 죄에 연루되어, 재상의 관부에 묶여 있었다. 그러면서 오직 관세음보살만을 염송하며, 한마음으로 불상에 귀의하였다. 밤 꿈에 자신이 주조한 불상이 찾아와, 손으로 승홍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무섭느냐?”
승홍이 말하였다.
“죽기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불상이 말하였다.
“근심하지 말아라.”
불상의 가슴을 보니, 사방 한 자 가량 구리 빛이 불에 그슬리고 끓은 자국이 있었다. 곧 형을 집행할 때가 되었다. 재상 관부의 참군(參軍)이 죽이는 일을 감독하였다. 죄인을 실은 소가 달려 나가 수레가 허물어져, 이로 인하여 다시 하루를 연기하였다. 그 후 이어 명령이 내려, 팽성(彭城)에서 사자가 와서 말하였다.
“승홍이라는 사람을 아직 죽이지 않았다면, 놓아주어라.”
마침내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돌아와 모형을 열어 불상을 보았다. 가슴 앞에 과연 불에 그슬리고 끓은 자국이 있었다. 그 후 승홍은 고행으로 세상을 마쳤다.
032_0890_c_13L釋僧洪豫州人止于京師瓦官寺而修身整潔後率化有緣造丈六金鎔鑄始畢未及開摸時晉末銅禁甚嚴犯者必死宋武于時爲相國坐罪繫于相府唯誦『觀世音經』一心歸命佛像夜夢所鑄像來手摩洪頭問怖不洪言自念必死像曰無憂見像胸方尺許銅色燋沸會當行刑府參軍監殺而牛奔車壞因更剋日續有令從彭城來云未殺僧洪者可原獲免還開摸見像胸前果有燋沸後以苦行卒矣

8) 석승량(釋僧亮)
승량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어려서부터 계율 있는 행실로 이름이 알려졌다. 1장 6척의 금불상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소용되는 구리가 적지 않았다. 미흡하기만 한 구걸로는 마련할 길이 없었다. 상주(湘州)와 경계를 접한 동계(銅溪)에 있는, 오자서(伍子胥)의 사당에 구리로 만든 기물이 많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나 그 사당은 매우 위엄이 있어, 감히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승량은 이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기로 하였다. 자사(刺史)인 장소(張邵)에게 고하여, 건장한 사람 백 명과 큰 배 열 척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장소가 말하였다.
“그 사당은 영험한 곳이어서, 범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는다고 한다. 또한 오랑캐들이 수호하는데,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승량이 말하였다.
“복덕의 과보가 있다면 시주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나 허물이 있다면 제가 몸소 당하겠습니다.”
장소는 곧 사람과 배를 공급하였다. 사흘 낮 사흘 밤을 가서, 사당이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러자 승량은 수하의 힘깨나 쓰는 이들과 더불어, 일시에 함께 나아갔다.
032_0891_a_02L釋僧亮未知何人少以戒行著名造丈六金像用銅不少非細乞能辦聞湘州界銅溪伍子胥廟多有銅器而廟甚威嚴無人敢近亮聞而造焉告刺史張邵借健人百頭大舩十艘邵曰廟旣靈驗犯者必斃且有蠻人守護詎可得耶亮曰若果福德與檀越共如其有咎躬自當之邵卽給人三日三夜行至廟所
사당에서 20걸음 가량 되는 곳에, 두 개의 구리로 만든 가마솥이 있었다. 용량이 백 섬의 곡식을 담을 수 있었다. 그 속에서 거대한 뱀이, 길이가 10여 길이나 되는 것이 나와, 가는 길을 가로막았다. 이에 승량이 곧 위의를 바로 잡고, 지팡이를 손에 잡았다. 그리고는 수십 자의 주문을 외워 발원하니, 뱀이 문득 숨어버렸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서, 손에 대나무 홀을 잡고 말하였다.
“듣건대 법사께서는 도를 일삼음이 비범하시고 복을 경영하시는 일이 중하다 하오니, 지금 특히 기쁨을 따르고자 합니다.”
이에 사람을 시켜 수레에 구리를 취하였다. 사당의 구리는 많아서, 열에 하나도 취하지 않았건만 배가 이미 가득했다. 신상(神床)의 머리에 하나의 타호(唾壺: 침ㆍ가래를 뱉는 그릇)가 있었다. 그 속에는 길이 두 자 가량의 도마뱀이 있어 나갔다간 들어오곤 하였다.
032_0891_a_11L亮與手力一時俱進未至廟屋二十許步有兩銅鑊容百餘斛中有巨蛇長十餘丈出遮行路亮乃正儀執錫呪願數十言蛇忽然而隱俄見一人秉竹笏而出云聞法師道業非凡營福事重今特相隨喜於是令人輦取廟銅旣多十不取一而舫已滿唯神牀頭有一唾壺中有一蝘蜓長二尺許乍出乍入
모두가 말하였다.
“신(神)이 이 물건을 가장 사랑한다.”
승량은 마침내 그것을 취하지 않고, 이에 그곳을 떠났다. 때마침 바람과 물결이 매우 이로울 때를 만났다. 가까이에 사는 뭇 오랑캐들이 서로 알려, 뒤따라 쫓아왔다. 그러나 배에 미칠 수 없었다.
서울로 돌아와 불상을 주조하여 이루었다. 그러나 오직 빛나는 불꽃 광배만은 미비하였다. 전송의 문제(文帝)가 이를 위하여, 금박의 둥근 빛 광배를 조성하여 팽성사에 안치하였다.
전송의 태시(太始) 연간(465~471)에 이르렀다. 명제가 불상을 상궁사(湘宮寺)로 옮겨, 지금도 그곳에 있다.
032_0891_a_19L議者咸云神最愛此物亮遂不取於是而去風水甚利比群蠻相報追逐不復能還都鑄像旣成唯焰光未備宋文帝爲造金薄圓光安置彭城寺至宋太始中明帝移像湘宮寺今猶在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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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석법의(釋法意)
법의는 강남 사람이다. 복된 일을 경영하기 좋아하여, 53개의 절을 세웠다. 진(晋)의 의희(義熙) 연간(405~418)에 종산(鍾山)의 좨주(祭酒)는 주응(朱應)의 아들이었다. 이에 앞서 손은(孫恩)이 법의를 따르는 무리를 만들어, 이 산에 숨어살았다. 그 바깥의 땅을 조금 나누어주어, 법의에게 주고 절을 짓게 하여 연현사(延賢寺)라 이름 지었다. 그 후 배도(杯度)가 이 절에 오가며, 말하였다.
“이곳에는 곧 여러 가지 변고가 있을 것이나, 나중에는 좋아질 것이다. 천당(天堂)과 마주보는 땅이어서, 복된 일을 하기 쉬우리라.”
갑자기 이 절이 들불 때문에 불타버렸다.
032_0891_b_01L釋法意江左人好營福業起五十三晉義熙中鍾山祭酒朱應子先是孫恩建義之黨竄居此山分其外地少許與意爲寺號曰延賢寺後杯度去來此寺此處尋有諸變後時當地對天堂易爲福業俄爲野火所
그 후 제해(齊諧)와 장인(張寅) 등이 배도의 말에 의지하니, 배도의 전기에 이 말이 실려 있다. 마침내 법의와 더불어 산의 땅으로 가서, 다시 수리하여 세우고자 하였다. 그러나 물이 없어 살 수가 없었다. 이에 법의는 배도의 말을 생각하였다. 곧 정성을 다하여 예참하면서, 서방의 못물을 빌었다.
사흘이 지나도록 간절하고 측은함이 더욱 지극하였다. 그러니 문득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면서, 무엇인가가 때리는 듯 땅에 떨어졌다. 법의는 혹 그것이 금이나 비단이 아닌가 하여, 사람을 시켜 두 자 가량 파내려 갔다. 맑은 물 흐름이 솟아나와, 마침내 개울을 이루어 끊이지 않았다. 이에 그곳에 절을 세웠다. 그 후 법의가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032_0891_b_08L後齊諧及張寅等藉杯度之旨在度傳乃與意共行山地更欲修立而無水不可住意惟杯度之言乃竭誠禮懺乞西方池水經于三日懇惻彌至忽聞空中有聲撲然著地意恐是金帛試令人掘入二尺許泫然淸遂成㵎不絕於是立寺意後不知所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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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혜경(釋慧敬)
혜경은 남해 사람이다. 어려서 형초(荊楚) 지방에서 유학하였다. 또한 경론에 널리 뛰어나고, 항상 복된 일을 짓기를 힘썼다. 그런 까닭에 교리를 이해하는 공부는 완전할 수 없었다. 무릇 가서 이르는 곳마다, 모두 탑과 불상을 일으켜 세워서 대중의 일을 도와 이루었다.
그 후 고향에 돌아와서도, 다시 운봉사(雲峯寺)ㆍ영안사(永安寺) 등 여러 절을 수리하였다. 혜경은 이미 계율 있는 절개에 정밀하고, 지조가 엄숙하고 밝았다. 이 때문에 영외(嶺外)의 비구와 비구니들이 모두 의지하여, 자문 받고 품수 받았다.
그 후 칙명을 받아 승주(僧主)가 되었다. 가르쳐 이끄는 데 공이 있었다. 혜경의 노비 하나가 사미가 되었을 때, 문득 귀신에게 얻어맞은 일이 있었다. 그 후 산의 요정이 모습을 나타내서 혜경을 찾아왔다. 자세히 허물과 실수를 사과하면서 말하였다.
“부하 권속들이 알지 못하여, 엉뚱하게 법사의 권속을 어지럽혔습니다.”
얼마 후 모두가 평상대로 회복되었다. 모든 일으켜 세우는 복된 일을 모두 서방정토에 회향하였다. 임종하던 날에는, 방에 기이한 향기가 감돌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쳤다.
032_0891_b_15L釋慧敬南海人少遊學荊楚亦博通經論而常以福業爲務故義學不得全功凡所之造皆興立塔像助成衆後還鄕復修理雲峯永安諸寺旣精於戒節而志操嚴明故嶺外僧咸附諮稟後被勅爲僧主訓領有敬有一奴子及沙彌忽爲鬼所打後山精見形詣敬具謝愆失部屬不解撗撓法師眷屬有頃悉皆平復凡興造福業皆迴向西方臨終之日有奇香經久乃歇

11) 석법헌(釋法獻)
법헌은 광주(廣州) 사람이다. 처음 북사(北寺)에 머물렀다. 절이 오래되어 조락하고 쇠해졌다. 그러자 법헌은 인연 있는 시주들을 거느리고, 다시 수리하고 지붕을 고쳤다. 이어 절 이름을 연상사(延祥寺)라 하였다.
그 후 장미산(藏薇山)에 들어가 절을 창건하였다. 절이 이룩된 후, 두 동자가 손을 잡고 찾아와 노래하였다.

장미산에 도와 덕이 있어
기쁨과 즐거움이 바야흐로 다하지 않네.
032_0891_c_03L釋法獻廣州人始居北寺寺歲久凋獻率化有緣更加治葺改曰延祥後入藏薇山創寺寺成後有兩童子手來歌云
藏薇有道德
歡樂方未央

말이 끝나자 문득 보이지 않았다. 온 절이 놀라고 감탄하면서, 모두 그 신령하고 기이함에 경탄하였다. 법헌이 그 후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경쇠줄이 끊어지려 하는데, 왜 고치지 않는가?”
법헌이 놀라 일어나서 가서 보니, 드리워진 줄이 곧 땅에 닿으려 하였다. 그가 손을 대어, 경쇠가 부러지고 손상된 것이 없었다.
법헌은 출가한 이래로 항상 복된 일로 시주하기를 권하였다. 마음을 선(禪)과 계율에 깃들어, 한 번도 절개를 이지러뜨린 일이 없었다. 그 후 세상을 마친 곳은 알지 못한다.
032_0891_c_07L忽然不見擧寺驚嗟咸歎神異後入禪忽見一人來云磬繩欲斷不治獻驚起往視垂將委地由其手得無折損獻出家以來常勸化福而棲心禪戒未嘗虧節後不知所終

12) 석법헌(釋法獻)
법헌의 성은 서(徐)씨며, 서해(西海)의 연수(延水) 사람이다. 아버지가 외삼촌을 따라 양주에 이르자 곧 출가하였다. 원가(元嘉) 16년(439)에 이르러, 비로소 서울로 내려와 정림상사(定林上寺)에 머물렀다. 경ㆍ율에 널리 뛰어났다. 뜻하는 일에 굳세고 날래서, 훌륭히 중생들을 구제하고, 절들을 수리하고 다듬었다.
앞서 도맹(道猛)이 서쪽에 노닐며, 두루 신령스럽고 기이한 것을 보았다는 말을 들었다. 몸을 버릴 각오로 서원하여, 그곳에 가서 성인의 자취를 보려 하였다.
전송의 원휘(元徽) 3년(475)에 금릉(金陵)을 출발하여, 서쪽 파촉(巴蜀) 지방에 노닐었다. 길은 하남(河南)에서 출발하여 예예(芮芮)를 경유하였다. 우전국(于闐國)에 도달한 후, 파미르 고원을 넘고자 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벼랑에 가로놓인 다리가 끊어졌다. 마침내 우전국에서 되돌아왔다.
그 사이에 불치아[佛牙]한때, 사리 열다섯 과와 아울러 「관세음멸죄주(觀世音滅罪呪)」및 「조달품(調達品)」을 얻었다. 또 구자국(龜玆國)의 금퇴첩상(金槌鐷像)을 얻었다. 이에 돌아왔다. 그가 경유한 길은 위험하고 막혔음이 그의 별기(別記)에 보인다.
032_0891_c_13L釋法獻姓徐西海延水人先隨舅至梁州乃出家至元嘉十六年方下京止定林上寺博通經律志業强捍善能匡拯衆計修葺寺宇先聞猛公西遊備矚靈異乃誓欲忘身往觀聖以宋元徽三年發踵金陵西遊巴路出河南道經芮芮旣到于闐欲度蔥嶺値棧道斷絕遂於于闐而反佛牙一枚舍利十五身幷「觀世音滅罪呪」及「調達品」又得龜茲國金鎚鍱於是而還其經途危阻見其別記
032_0892_a_01L불치아는 본래 오전국(烏纏國)에 있었다. 오전국에서 예예(芮芮)로 왔고, 예예에서 다시 양(粱)나라 땅으로 왔다. 법헌을 불치아를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15년 동안 비밀히 예배하고 섬겼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였다. 문선왕(文宣王)의 꿈에 감응하여, 비로소 도인과 속인들에게 이 사실이 전해졌다.
법헌은 계율의 행실이 맑고 순수하며, 덕이 남들의 모범이 되었다. 낭야(瑯琊)의 왕숙(王肅)과 왕융(王融), 오국(吳國)의 장융(張融)과 장권(張綣), 사문 혜령(慧令)과 지장(智藏) 등이 모두 몸을 맡겨, 발을 이어 그의 훈계를 숭상하였다.
032_0892_a_01L佛牙本在烏纏國自烏纏來芮芮自芮芮來梁土獻齎牙還京五十有五載自禮事餘無知者至文宣感夢方傳道獻律行精純德爲物範琅瑘王肅王融吳國張融張綣沙門慧令智藏竝投身接足崇其誡訓

∙현창(玄暢)
법헌은 영명(永明) 연간(483~493)에 칙명으로, 장간사(長干寺)의 현창과 더불어 승주(僧主)가 되었다. 양자강의 남북 양쪽 기슭을 나누어서 일을 맡았다.현창은 본래 진주(秦州) 사람이다. 역시 계율을 지킴이 맑고 깨끗하였다. 문혜(文惠)태자가 받들어, 계율을 내려주는 스승으로 모셨다. 그 후 법헌은 칙명을 받고, 삼오(三吳)에서 이부대중[二衆]을 가려내었다. 현창도 역시 동쪽으로 가서, 거듭 수계(受戒)의 법을 폈다.
032_0892_a_07L獻以永明之中被勅與長干玄暢同爲僧主任南北兩岸暢本秦州人亦律禁淸文惠太子奉爲戒師獻後被勅三使妙簡二衆暢亦東行重申受戒之法
당시 법헌과 현창 두 승려는 모두 어려서부터 계율의 금제를 익혀, 당세에 경합할 사람이 없었다. 전송(前宋)의 무제와 함께 이야기하면서도, 매번 이름을 일컬으며 자리에 앉지 않았다.
그 후 중흥사(中興寺)의 승종(僧鍾)이 건화전(乾和殿)에서 황제와 만났다. 황제가 승종에게 안부를 물었다. 승종이 대답하였다.
“빈도는 요즘 괴로운 기(氣)가 있습니다.”
황제가 빈도라는 말을 싫어하였다. 마침내 상서(尙書)인 왕검(王儉)에게 물었다.
“선배 사문들이 제왕과 이야기할 때, 무엇이라 자신을 칭했는가? 정전에 앉았는가? 앉지 않았는가?”
왕검이 대답하였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때는 불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때라서, 그에 관한 전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위국(僞國: 北魏) 때부터 불법이 조금씩 성해지면서, 모두가 빈도(貧道)라고 자신을 칭하고, 또한 앉기도 했습니다.
진(晋)나라 초기에 이르러서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시대가 중간에 이르러 유빙(庾氷)과 환현(桓玄) 등이, 사문도 모두 제왕에게 공경을 다하도록 하고자 하였습니다. 조정의 의론이 분분하였으나, 일이 모두 그냥 가라앉았습니다. 전송의 중엽에도 역시 자못 예법을 갖추게 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대부분 자리에 앉으며, 빈도라 칭합니다.”
032_0892_a_12L時暢與獻二僧皆少習律撿不競當世與武帝共語每稱名而不坐中興僧鍾於乾和殿見帝帝問鍾如鍾答貧道比苦氣帝嫌之乃問尚書王儉先輩沙門與帝王共語何所正殿坐不儉答漢魏佛法未興不見其記傳自僞國稍盛皆稱貧道亦預坐及晉初亦然中代有庾冰桓玄等欲使沙門盡敬朝議紛紜事皆休寢宋之中朝亦頗令致禮而尋竟不行自爾迄今多預坐而稱貧道
032_0892_b_01L황제가 말하였다.
“현창과 법헌은 도의 일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스스로 이름을 칭하였다. 하물며 다른 승려에 있어서랴? 읍배(挹拜)는 너무 심하나, 이름을 쓰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
그때부터 사문(沙門)은 모두 제왕에게 이름을 칭하였다. 이것은 현창과 법헌에게서 비롯되었다.
현창은 건무(建武) 초엽(494)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5세이다. 법헌은 건무 말엽(497)에 세상을 떠났다. 현창과 더불어, 종산(鍾山)의 양지바른 곳에 묻혔다.
법헌의 제자 승우(僧祐)가 그를 위하여, 묘 옆에 비를 조성하였다. 단양(丹陽) 수령인 오흥(吳興)의 심약(沈約)이 비문을 지었다.
032_0892_a_22L帝曰獻二僧道業如此尚自稱名況復餘挹拜則太甚稱名亦無嫌自爾沙門皆稱名於帝王自暢獻始也暢以建武初亡春秋七十有五獻以建武末年卒與暢同窆于鍾山之陽獻弟子僧祐爲造碑墓側丹陽尹吳興沈約製文
법헌이 서역에서 얻은 불치아와 불상은 모두 정림상사(定林上寺)에 있었다. 불치아는 보통(普通) 3년(522) 정월에, 문득 병장기를 잡은 몇 사람이 초저녁에 문을 두드리며 칭하였다.
“임천 전하의 노복이 반역하였다.”
어떤 사람이 그들에게 알렸다.
“불아각(不牙閣) 위에 있습니다.”
누각을 열어 검사해볼 것을 요청하였다. 절의 담당자가 곧 그들의 말에 따라 누각을 열어 주었다. 임천왕의 장수가 불아좌(不牙座) 앞에 이르러, 상자를 열고 불치아를 취하였다. 삼배(三拜)를 올리고, 비단수건에 불치아를 담아 산 동쪽을 돌아 떠났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끝내 그 있는 곳을 알지 못한다.
032_0892_b_06L獻於西域所得佛牙及像在上定林寺牙以普通三年正月有數人竝執仗初夜扣門稱臨川殿下奴叛有人告云在佛牙閣上請開閣撿視寺司卽隨語開閣主師至佛牙座前開函取牙作禮三拜以錦手巾盛牙繞山東而去至今竟不測所在

13) 석승호(釋僧護)
승호는 본래 회계 섬현(剡縣)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였다. 곧 고행의 절개로 의지를 극복하며, 계율의 행실이 엄숙하고 맑았다.
그 후 석성산(石城山)의 은악사(隱嶽寺)에 거주하였다. 절 북쪽에 푸른 절벽이 있어, 곧바로 수십여 길이나 솟았다. 그 중앙에 해당하는 곳에 부처님의 불꽃 광배 같은 모습이 있었다. 그 위로 숲을 이룬 나무들이 있어, 굽은 나무줄기가 그늘을 드리웠다. 승호가 경행(經行) 때마다 절벽이 있는 곳에 이르면, 곧 빛나는 광명이 보였다. 관악기와 현악기에 맞춰, 노래하고 찬양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에 향로를 받쳐 들고 서원을 일으켰다. 널리 산에서 열 길의 돌부처를 새겨 조성함으로써, 미륵불의 천 자에 이르는 모습을 공경하는 것에 견주었다. 인연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용화회상[三會]에서 만나고자 하였다.
032_0892_b_12L釋僧護本會稽剡人也少出家便剋意常苦節戒行嚴淨後居石城山隱嶽寺寺北有靑壁直上數十餘丈中央有如佛焰光之形上有叢樹幹垂陰護每經行至壁所輒見光明煥炳聞絃管歌讚之聲於是擎爐發願博山鐫造十丈石佛以敬擬彌勒千尺之容使凡厥有緣同睹三會
032_0892_c_01L북제(北齊)의 건무(建武) 연간(494~497)에 도인과 속인들을 불러 결속하였다. 처음 조각하기 시작하여, 대충 바위를 뚫는 데 한 해를 보냈다. 겨우 대략의 얼굴 모습이 이룩되자, 얼마 후 승호가 병을 만나 죽었다. 임종 때 서원하였다.
“내가 조성하는 석상이 본래 한 생에 완성되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두 번째 태어나서, 그 서원한 결과를 이루리라.”
그 후 사문 승숙이 그가 남긴 공사를 모아 이어갔다. 그러나 재원[資力]을 마련할 길이 없어 성취하지 못하였다.
032_0892_b_20L以北齊建武中招結道俗初就彫翦鑿移年僅成面樸頃之護遘疾而亡臨終誓曰吾之所造本不期一生成第二身中其願剋果後有沙門僧纂襲遺功而資力莫由未獲成遂
양(梁)의 천감(天監) 6년(507)에 이르러 시풍(始豊) 현령인 오군(吳郡)의 육함(陸咸)이 벼슬살이를 그만두고, 나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밤에 섬계(剡溪)에서 유숙하던 중, 비바람을 만나 하늘이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위태하고 두려워하다가 잠깐 눈을 부친 상태에 빠졌다. 문득 꿈에 세 도인들이 나타나서, 알려 주었다.
“그대는 앎과 믿음이 굳고 바르기 때문에, 자연히 안온해질 것이다. 건안(建安) 전하께서 환후가 아직 낫지 않으셨다. 그대가 만약 섬현을 다스리거든, 승호가 조성하던 돌부처를 성취시킬 수 있는 사람을 얻는다면, 반드시 전하의 병이 나을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치라고 하여 허망한 것은 아니니, 잘 개발함이 좋으리라.”
육함은 서울로 돌아가서, 1년이 지나도록 전에 꿈꾼 일을 거의 잊었다. 후에 문을 나서다가 곧 한 승려를 만났다. 그가 말하였다.
“강론을 듣기 위해 기숙한다.”
이어 말하였다.
“지난해 섬현에서 부탁한, 건안왕의 일을 아직도 기억하는가?”
육함이 당시 두려운 생각이 들어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니, 도인이 웃으면서 말하였다.
“다시 생각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떠나갔다.
032_0892_c_02L至梁天監六年有始豐令吳郡陸咸罷邑還國夜宿剡溪値風雨晦冥危懼假寐忽夢見三道人來告云識信堅正自然安隱有建安殿下感患未瘳若能治剡縣僧護所造石像成就者必獲平預冥理非虛宜相開發也咸還都經年稍忘前夢後出門乃見一僧云聽講寄宿因言去歲剡溪所囑建安王事猶憶此不咸當時懼然答云不憶道人笑曰宜更思之仍卽辭去
육함은 그가 비범함을 깨달았다. 곧 신발을 거꾸로 신고, 묻고 찾고자 뒤따랐다. 백 걸음 거리까지 미쳤으나, 홀연히 보이지 않았다. 육함은 탁 트이면서 그 뜻을 해득하였다. 전에 꾼 꿈을 모두 기억해보니, 그는 곧 섬계에서 꿈에 본 세 번째 승려였다.
육함은 곧 상계[啓]를 올려 건안왕에게 알렸다. 왕은 곧 이것을 주상에게 알려 칙명으로 승우(僧祐) 율사를 파견하여, 석상 조성의 일을 전임하였다. 왕은 곧 깊은 믿음이 더욱 더해, 뛸 듯한 기쁨이 두루 충만해졌다. 금패물을 뽑아 희사하여, 성스런 불상이 성취되기를 맹서하였다.
처음 승우 율사가 채 그곳에 이르지 못한 어느 날이다. 그 절의 승려인 혜정(慧逞)의 꿈에, 검은 옷을 입은 큰 신(神)이 나타났다. 양쪽으로 따라온 시종의 행렬이 매우 웅장하였다. 그 신이 감실이 있는 곳에 서서 분수를 상략하였다. 이튿날 아침이 되자 승우율사가 그곳에 이르렀으니, 그 신이한 응험이 이와 같았다.
032_0892_c_13L咸悟其非凡乃倒屣諮訪追及百步忽然不見咸豁爾意解具憶前夢乃剡溪所見第三僧也咸卽馳啓建安王王卽以上聞勅遣僧祐律師專任像事王乃深信益加喜踊充遍抽捨金貝誓取成畢初僧祐未至一寺僧慧逞夢見黑衣大神翼從甚立于龕所商略分數至明旦而祐律師至其神應若此
032_0893_a_01L승호가 과거에 뚫은 감실은 지나치게 얕았다. 곧 다섯 길을 깎아 들어가, 다시 정수리와 육계(肉髻)를 시공하였다. 몸 모습이 이루어져서, 아름답게 닦는 일이 끝나려 하였다. 밤중에 문득 만자가 있는 곳에서 빛깔이 붉게 솟아나왔다. 지금 불상의 가슴 부분의 만자처(萬字處)는, 아직도 금박을 씌우지 않아서 붉은 빛깔이 남아 있다.
돌부처는 천감(天監) 12년(513) 봄에 착공하여 천감 15년(516) 봄에 끝났다. 앉은 분의 높이가 5장이고, 서 있는 분의 모습은 10장이다. 감실 앞에는 3층의 대를 가설하였다. 또한 문각과 전당을 조성하였다. 아울러 대중의 기업을 세워서 공양에 충당하게 하였다. 사방 먼 곳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향과 꽃을 들고, 만 리 밖에서 찾아와 모여, 공양하고 시주하노라 오갔다. 그들의 발자취가 골짜기를 메웠다.
돌부처가 조성된 후로, 건안왕이 고통 받던 병도 조금씩 치유되었다. 마침내는 건강을 회복하였다. 그 후 건안왕은 다시 봉작을 받았다. 지금의 남평왕(南平王)이 그 사람이다.
032_0892_c_21L初僧護所創鑿龕過淺乃鏟入五丈更施頂髻及身相克成瑩磨將畢夜中忽當萬字處色赤而隆起今像胸萬字處猶不施金鎛而赤色在焉像以天監十二年春就至十五年春竟坐軀高五丈立形十丈龕前架三層臺又造門閣殿堂幷立衆基業以充供養其四遠士庶竝提挾香華萬里來集供施往還迹塡委自像成之後建安王所苦稍本卒已康復王後改封今之南平王是也

14) 석법열(釋法悅)
법열은 계율을 지키는 깨끗한 사문이다. 북제(北齊)의 말엽에 칙명으로 승주(僧主)가 되었다. 서울의 정각사(正覺寺)에 머물렀다. 돈독히 복된 일을 닦아 사부대중이 귀의하였다.
어느 날 법열은 팽성(彭城)의 송왕사(宋王寺)에 1장 8척의 금불상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것은 곧 전송의 거기(車騎)장군인 서주(徐州) 자사 왕중덕(王仲德)이 조성한 것이다. 빛나는 광배의 모습이 빼어나, 강남에서는 가장 뛰어나다고 일컬었다.
고을 경내에 혹 재난과 이변이 있거나, 승려나 비구니에게 허물이나 뒤틀린 일이 있을 경우, 불상에서는 곧 땀이 흘러내렸다. 그 땀의 많고 적은 것이, 곧 재앙이나 근심의 심하고 옅은 정도를 표시하였다.
전송의 태시(泰始) 연간(465~471) 초기에 괭성의 북쪽 부족인 뭇 오랑캐들이 함께 불상을 옮겨가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1만 명이 끌어당겼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였다.
032_0893_a_09L釋法悅者戒素沙門也齊末勅爲僧止京師正覺寺敦修福業四部所歸悅嘗聞彭城宋王寺有丈八金像宋車騎徐州刺史王仲德所造相之工江左稱最州境或應有災崇及僧尼撗延舋戾像則流汗汗之多則禍患之濃淡也宋泰始初彭城北屬群虜共欲遷像引至萬夫竟不能致
032_0893_b_01L북제의 초기에 연주(兗州)의 몇몇 고을에서 의거를 일으켜, 남방에 붙고자 하였다. 대중 승려들을 핍박하고 몰아세워, 그들을 도와 군영과 참호를 지키게 하였다. 당시 오랑캐의 장수 난릉공(蘭陵公)이 이 군영을 공격 함락시켜, 여러 승려들을 노획하였다. 이에 두 고을의 도인을 모두 잡아 포위망 속에 가두어두었다. 표(表)를 위대(僞臺: 北魏의 朝延)에 보내어, 난을 도운 사람들이라 무고하였다. 이때 불상에서 땀이 흘러내려 온 불전이 모두 젖었다.
당시 위양왕(僞梁王: 北魏의 梁王) 원량(元諒)이 팽성에 주둔하였다. 다소 불교를 믿었기에, 친히 불상이 있는 곳에 가서 사람을 시켜 땀을 닦아냈다. 그러나 닦아내면 또 따라 나와서, 끝내 그칠 수가 없었다. 이에 왕은 곧 향을 사르고 예배하며, 지심으로 서약하였다.
“대중 승려들은 무죄입니다. 제자가 스스로 그들을 보호하는 일을 맡아, 화를 입지 않게 하겠습니다. 만약 나의 보이지 않는 정성에 감응이 있다면, 땀을 닦거든 곧 멈춰 주십시오.”
이에 손수 땀을 닦아내니 곧 건조해졌다. 이에 왕이 표를 갖추어 그 일을 나라에 알리니, 모든 승려들이 다 사면되어 풀려났다.
법열은 이와 같은 불상의 신령하고 기이함에 기뻐서, 우러러 예배드리기를 서원하였다. 그러나 관문의 금지로 길이 막히고 격리되어, 소원을 이룰 길이 없었다.
032_0893_a_18L齊初兗州數郡欲起義南附驅逼衆僧助守營塹時虜帥蘭陵公攻陷此營獲諸沙門於是盡執二州道人幽繫圍裏遣表僞臺誣以助亂像時流汗擧殿皆濕時僞梁王諒鎭在彭城亦多小信向親往像所使人拭之隨出終莫能止王乃燒香禮拜至心誓曰衆僧無罪弟子自當營護不使羅禍若幽誠有感願拭汗卽於是自手拭之隨拭卽燥王具表其事諸僧皆見原免悅旣欣睹靈異誓願瞻禮而關禁阻隔莫由克遂
또한 예전에 전송의 명제(明帝)가 1장 8척의 금불상 조성을 경영하였다. 네 번 주조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계획을 바꾸어 1장 4척의 금불상으로 조성하였다. 법열은 마침내 백마사(白馬寺)의 사문인 지정(智靖)과 더불어, 인연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힘을 모았다. 이를 1장 8척의 아미타불로 개조하고자, 그 뜻을 알리고 비로소 금동을 모았다.
당시 시대가 북제의 말기에 속하여, 세상의 도의가 짓밟히고 쇠약해졌다. 또다시 밀려 배척당하였다. 양(梁)나라 초기에 이르러 비로소 이 일을 나라에 상계하였다. 그러자 칙명이 내려 이를 허가하였다. 아울러 빛나는 받침대의 조성을 돕게 하였다. 관에서 보내는 재료와 솜씨 있는 장인에게 필요한 대로 비용을 자급하여서, 양(梁)의 천감(天監) 8년(509) 5월 3일에 소장엄사(小莊嚴寺)에서 주조에 착수하였다.
032_0893_b_07L又昔宋明皇帝經造丈八金像四鑄不成於是改爲丈四悅乃與白馬寺沙門智靖率合同緣欲改造丈八無量壽像以申厥志始鳩集金銅齊末世道陵遲復致推斥至梁初以事啓聞降勅聽許幷助造光趺官工巧隨用資給以梁天監八年五月三日於小莊嚴寺營鑄
장인(匠人)이 본래 헤아리기는, 부처의 몸에 4만 근의 구리가 필요하다고 계산하였다. 녹여서 쏟아 부은 것이 이미 다하였다. 그러나 아직 가슴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백성들이 보내오는 구리도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구리를 용광로 안에 던져도, 모형 안을 채우지 못하는 것이 저절로 앞서의 상태와 같았다. 이에 다시 말을 달려 나라에 알렸다. 칙명으로 공덕으로 쓸 구리 3천 근을 공급하였다.
이때 조정안에서 비로소 양을 헤아려 보내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불상을 주조하는 곳에 이미 양이 모는 수레로 조서가 전달되었다. 또한 구리를 실은 수레가 용광로 옆에 이르렀다. 이에 풀무를 날려 구리를 녹이니, 한 번 주조함에 곧 불상 안이 가득해졌다.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사람과 수레가 함께 없어졌다. 조정안에서 구리를 내온 시간과 비교해보니, 비로소 방금 보내온 구리는 참으로 신령한 감응의 소치임을 알았다. 장인들은 이에 뛸 듯이 기뻐하고, 도인과 속인들은 이를 칭찬하였다.
032_0893_b_14L匠本量佛身四萬斤銅融瀉已竭尚未至胸姓送銅不可稱計投諸爐冶隨鑄摸內不滿猶自如先又馳啓聞勅給功德銅三千斤臺內始就量送而像處已見羊車傳詔載銅爐側於是飛韛消融一鑄便滿甫爾之閒人車俱比臺內銅出方知向之所送信實靈感工匠喜踊道俗稱讚
032_0893_c_01L그 후 모형을 열어 측량하니, 예상보다 뛰어올라 1장 9척의 상이 되었다. 그러나 빛나는 광배의 모습에는 차이가 없었다. 또 거기에는 큰 엽전(葉錢) 두 개가 아직도 옷주름에 남아 있는 것이 보였다. 끝가지 불에 녹지 않은 그 연유를 아무도 헤아리지 못하였다.
이어 예전에 헤아린 구리 4만 근은 쓰임에 기준해 볼 때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그 후 3천 근을 더하여도, 계산이 빠져 가득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상서로운 기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비밀히 저절로 꾀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신의 이치로 그윽이 통하는 일은, 거의가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032_0893_b_22L及至開摸量度乃踊成丈九而光相不差又有大錢二枚猶見在衣條竟不銷鑠莫測其然尋昔量銅四萬准用有餘後益三千計闕未滿而祥瑞冥密自心圖故知神理幽通殆非人事
처음 불상의 바탕이 이룩되자, 비구 도소(道昭)는 항상 밤중에 예참을 하였다. 문득 불상이 있는 곳을 보니 환하게 밝았다. 이 상서로움을 오래 보다가, 곧 그것이 신령스런 빛의 기이함임을 알았다.
주조한 지 사흘이 지나, 이직 미처 모형을 열지 않았다. 도도(道度) 선사는 자신의 칠조 가사를 희사하여, 비용에 보탰던 고결한 승려였다. 그런데 불상의 정수리 부분을 열자, 갑자기 멀리 두 승려가 무릎 꿇고는 불상의 육계를 여는 것이 보였다. 다가가서 보려 하니 문득 보이지 않았다.
당시 법열과 지정 두 승려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칙명으로 불상 조성의 일을 정림사(定林寺)의 승우(僧祐)에게 맡겼다. 그 해 9월 26일에 불상을 광택사(光宅寺)로 옮겼다.
032_0893_c_03L像素旣成比丘道昭常夜中禮懺見素所晃然洞明詳視久之乃知神光之異鑄後三日未及開摸有禪師道度高潔僧也捨其七條袈裟助費開頂俄而遙見二僧跪開像髻逼就觀之倏然不見時悅靖二僧相次遷勅以像事委定林僧祐其年九月二十六日移像光宅寺
이 달에는 비가 내리지 않아 자못 먼지가 일었다. 내일이면 불상을 옮길 때의 밤에, 가벼운 구름이 생겨 위에 두루 퍼지더니, 가랑비가 촉촉이 적셨다. 승우는 불상이 있는 곳을 경행하면서, 날씨를 염두에 두었다.
멀리 불상 언저리에 빛나는 불꽃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다. 등불과 같고 촛불과도 같았다. 아울러 추참(搥懺: 망치 따위를 치며 참회하는 것)하고 예배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 안에 들어가 자세히 보니, 가려진 듯 모두 없어졌다. 절을 방비하는 장효손(藏孝孫)도 역시 같은 것을 보았다.
이 날 밤 회하(淮河) 가운데서 장사꾼들이, 큰 배가 내려오면서 ‘다리를 고치라’고 독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 배 안에는 몇 백 명의 사람이 있는 듯하였다. 곧 신령한 법기의 무거움을 알게 하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소치겠는가?
그 후 다시 빛나는 받침대를 주조하였다. 모두 꽃향기가 나는 상서로움이 있었다. 총하(葱河)의 왼편 지역에서, 금불상으로 가장 뛰어난 것은 오직 이 한 구가 있을 따름이다.
032_0893_c_11L是月不雨有埃塵及明將遷像夜有輕雲遍微雨沾澤僧祐經行像所係念天氣遙見像邊有光焰上下如燈如燭幷聞槌懺禮拜之聲入戶詳揜然俱滅防寺蔣孝孫亦所同是夜淮中賈客竝聞大航舶下督治橋有如數百人聲將知靈器之重豈人致焉其後更鑄光趺竝有風香之瑞自蔥河以左金像之最唯此一耳
032_0894_a_01L
【論】예전에 우전국(優塡國)이 처음으로 전단(栴檀)으로 조각하거나, 파사(波斯: 페르시아)에서 처음으로 금으로 불상을 주조하거나 할 때에는, 모두 현실적으로 부처의 얼굴을 묘사하였다. 솜씨 있게 미묘한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런 까닭에 광명이 흘러 상서로움이 일어나서, 자리를 피하여 경건함을 펼 수 있었다. 여기에 머리카락과 손톱을 봉안한 두 탑과, 옷과 그림자를 안치한 두 대(臺)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이미 그 법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부처님께서 강가에서 자취를 거두어들이시어 숲 밖에서 화장하자, 여덟 임금이 청해서 사리를 나누어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 탑을 세우고, 물병과 재의 두 곳에 탑을 세웠다. 이에 열 곳에서 사찰이 일어났다. 태어난 곳, 득도한 곳, 설법한 곳, 열반한 곳과 육계(肉髻)ㆍ이마뼈ㆍ네 어금니ㆍ발자국ㆍ발우와 지팡이ㆍ타호(唾壺)ㆍ니원승(泥洹僧) 등을 모신 곳에도, 모두 탑을 세우고 새김글을 새겨, 그 신령하고 기이함을 드러내었다.
032_0893_c_20L論曰昔憂塡初刻栴檀波斯始鑄金皆現寫眞容工圖妙相故能流光動瑞避席施虔爰至髮爪兩塔衣影二臺皆是如來在世已見成軌自收迹河邊闍維林外八王請分還國起及甁灰二所於是十剎興焉其生處得道說法涅槃肉髻頂骨四牙雙鉢杖唾壺泥洹僧等皆樹塔勒銘標揭神異
그 후 백여 년이 지나서 아육왕(阿育王)이 사신을 파견하여 바다에 띄웠다. 모든 탑을 허물고 철거하여 사리를 나누어 가지고 돌아오다가, 바다에서 바람과 조수를 만나 자못 잃고 떨어뜨린 것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 바닷물로 살아나가는 종족 가운데는 이를 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 후 8만 4천의 탑을 이로부터 인연하여 세웠다. 아육왕의 딸들도 차례로 청정한 마음이 일어났다. 나란히 돌에 새기고 금을 녹여 신비한 모습을 그리고 묘사하여, 강에 띄우고 바다에 띄우니, 그 그림자가 동쪽 중국을 교화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비록 신령한 자취는 몰래 통하나, 아직도 보고 들을 만큼 뚜렷이 나타나지는 않았다.
032_0894_a_05L爾後百有餘年阿育王遣使浮海壞撤諸塔分取舍利還値風頗有遺落故今海族之中時或遇是後八萬四千因之而起育王諸亦次發淨心竝鐫石鎔金圖寫神至能浮江泛海影化東川雖復靈迹潛通而未彰視聽
032_0894_b_01L그 후 채음(菜愔)과 진경(秦景)이 서역에서 돌아오자, 비로소 모직물에 그린 석가모니 상을 전하였다. 이에 양대(凉臺)와 수릉(壽陵)에서 나란히 그 형상을 그렸다. 이때부터 형상과 탑묘가 시대와 더불어 다투어 줄을 이었으며, 우리 큰 양(梁)나라에 이르러서는 그 남긴 빛이 더욱 성해졌다.
무릇 법신은 형상이 없으나, 감응에 인연하기 때문에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감응이 나타나는 것은 들쑥날쑥 같지 않기 때문에, 형상 또한 당연히 다른 구별이 있다. 만약 마음의 길이 아득하다면, 창된 모습을 대하더라도 거리가 멀어질 것이다. 심정과 지조가 간절하다면, 나무나 돌덩어리라도 마음을 열 것이다.
그런 까닭에 유은(劉殷)의 지극한 정성으로 감응이 일어나 곡식그릇에 새김글이 생겨났으며, 정란(丁蘭)은 온화하고 맑아 정성을 다함으로써 매화나무가 색이 변했다. 노양(魯陽)은 창날을 돌림으로써 해가 바뀌었고, 기부(杞婦)가 눈물을 흘림으로써 성이 무너졌다.
이는 모두가 숨겨진 측은한 마음이 그들의 본성 속에 들어갔기 때문에, 상서로운 징험이 사람들의 이목을 비춘 것이다. 혜달(慧達)이 광명을 당간 끝에 불러들이고, 혜력(慧力)이 탑의 기단에서 상서로움에 감응하며, 혜수(慧受)가 물에 뜬 나무에 정성을 펴고, 승혜(僧慧)는 옮겨가는 등불에서 증명을 드러냈다. 승홍(僧洪)과 승량(僧亮)은 나란히 불상을 주조하느라 자기 몸을 잊었고, 법의(法意)와 법헌(法獻)도 모두 가람을 위해 명이 다하였다. 법헌이 부처의 어금니 뼈에 뜻을 오로지하니, 경릉(竟陵) 문선왕의 꿈에 감응이 나타나고, 승호(僧護)가 석성산에서 포부를 비축하여 남평(南平) 건안왕이 감응을 얻었다.
032_0894_a_11L及蔡愔秦景自西域還至始傅畫㲲釋迦於是涼臺壽陵竝圖其相自茲厥後形像塔廟時競列洎于大梁遺光粤盛夫法身無因感故形感見有參差故形應有殊若乃心路蒼茫則眞儀隔化情志慊則木石開心故劉殷至孝誠感釜庾爲之生銘丁蘭溫淸竭誠木母以之變色魯陽迴戈而日轉杞婦下淚而城崩斯皆隱惻入其性情故使徵祥照乎耳目至如慧達招光於剎抄力感瑞於塔基慧受申誠於浮木慧顯證於移燈洪亮竝忘形於鑄像意獻皆盡命於伽藍法獻專志於牙竟陵爲之通感僧護蓄抱於石城平以之獲應
근간 광택사(光宅寺)의 1장 9척의 금불상이 경기 지방에 뚜렷이 빛나게 된 것 등의 일에 이르러서는, 전송의 황제가 네 번 녹여도 이루지 못한 것을, 우리 양(梁)나라 황제는 한 번 녹여 형상이 갖추었다. 미묘한 형상이 뛰어나서 훼손된 곳이 없고, 상서로운 구리가 적었는데도 다시 충족되었다. 그런 까닭에 도는 사람의 힘을 빌려 넓어지고, 신은 사람으로 말미암아 감응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어찌 허탄하다 하겠는가?
그런 까닭에 신에게 제사드릴 때에 신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하면, 신의 도와 교접하는 것이다. 불상을 공경하기를 부처님을 대하듯 하면, 법신이 감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문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지혜를 근본으로 삼아야 하고, 지혜는 반드시 복덕으로 기초를 삼아야 한다. 비유하면, 새가 두 날개를 갖추어야만 훌쩍 천 길 하늘 위로 올라가고, 수레는 두 수레바퀴가 충족되어야만 한 번에 천 리를 달리는 것과 같다. 어찌 부지런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으리요?
032_0894_b_02L近有光宅丈九顯曜京畿宋帝四鑠而不成梁皇一冶而形備相踊而無虧瑞銅少而更足故知道藉人弘神由物感豈曰虛哉是以祭神如神在則神道交矣敬佛像如佛則法身應矣故入道必以智慧爲本智慧必以福德爲基譬猶鳥備二翼倏擧千尋車足兩輪一馳千里豈不勤哉豈不勖哉
찬하노라.

부처님의 빛나는 모습 사라졌으나
쇠와 돌이 빛남을 전하도다.
여기 탑과 불상 있으니
그리워하는 이들 의지하네.
032_0894_b_10L讚曰
眞儀揜曜
金石傳暉
爰有塔像
懷戀者依

기적이자 지극함으로
상서로움이자 위신력으로
바위에 숨거나 땅에서 솟거나
물 위에 뜨거나 공중을 날도다.
032_0894_b_12L現奇表極
顯瑞旌威
巖藏地踊
水泛空飛

도탑도다, 마음의 길이여.
반드시 들어맞아 어김없으리.
篤矣心路
必契無違

9. 경사편(經師篇)
032_0894_b_13L經師第九
032_0894_c_01L
1) 백법교(帛法橋)
백법교는 중산(中山)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경을 돌려 읽기를 즐겼다. 그러나 소리가 모자라서 늘 유창하지 못한 것을 개탄하였다. 이에 곡식 먹기를 끊고 7일을 밤낮으로 참회하면서, 관세음보살에게 과보가 일어나기를 기원하였다. 동학들이 간절하게 충고하였다. 그러나 서원하여 고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7일째가 되자 목구멍 속이 탁 트이는 느낌이 생겼다. 곧 물을 찾아 씻고 양치질하고 나서 말하였다.
“나에게 감응이 있었다.”
이에 게송을 세 번씩 소리 내어 읽었다. 그러자 목소리가 마을 가까이까지 사무쳤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놀라고 감탄하여, 모두 찾아와 보고 들었다.
그 후 수십만 글자의 경을 외우고, 밤낮으로 소리 높여 읊조렸다. 그 소리가 구슬프고 아름다워 신과 통하였다. 나이가 90에 이르러서도 소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진(晋)의 목제(穆帝)의 영화(永和) 연간(345~356) 하북(河北)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때는 곧 석호(石虎)의 말기였다.
032_0894_b_14L帛法橋一 支曇籥二
釋法平三 釋僧饒四
釋道慧五 釋智宗六
釋曇遷七 釋曇智八
釋僧辯九 釋曇憑十
釋慧忍十一
帛法橋中山人少樂轉讀而乏聲每以不暢爲慨於是絕粒懺悔七日七夕稽首觀音以祈現報同學苦諫誓而不改至第七日覺喉內豁然卽索水洗漱云吾有應矣於是作三契經徹里許遠近驚嗟悉來觀聽爾後誦經數十萬言晝夜諷詠哀婉通神年九十聲猶不變以晉穆帝永和中卒於河北卽石虎末也

∙승부(僧扶)
제자인 승부도 계행이 맑고 높았다.
032_0894_c_05L有弟子僧扶亦戒行淸高

2) 지담약(支曇籥)
지담약은 본래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건업(建業)에 임시 머물렀다. 어려서 출가하여, 맑은 고행으로 푸성귀를 먹었다. 오군(吳郡)의 호구산(虎丘山)에 머물렀다. 진(晋)나라 효무황제(孝武皇帝) 초기에 칙명을 받고 서울로 나왔다.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효무황제가 그로부터 5계를 받고, 스승의 예로 공경하였다.
담약은 특히 묘한 목소리를 타고났으며, 경을 돌려 읽기를 잘하였다. 어느 날 꿈에 천신(天神)이 나타나, 그에게 소리법을 전수하였다. 꿈에서 깨어나자 새로운 목소리가 만들어졌다. 범패(梵唄)의 울림은 맑고 길게 늘어지며, 사방으로 퍼졌다. 그러다가 문득 되돌려 꺾어지면서, 목구멍 안에서 다시 합쳐지면서 거듭 굴렀다.
비록 동아(東阿: 친근한 목소리)의 소리로 먼저 변하는 경우에도, 그 뒤에 강회(康會: 크게 찬미하는 소리)의 소리가 찾아왔다. 시종 순환하는 것이 이제껏 담약과 같이 묘한 목소리는 없었다. 후진들이 전수받아 흉내내는 소리는 그 법 아닌 것이 없었다. 그가 지은 육언범패(六言梵唄)는 그 울림이 지금까지 전한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1세이다.
032_0894_c_06L支曇籥本月支人寓居建業少出家淸苦蔬食憩吳虎丘山晉孝武初請出都止建初寺孝武從受五戒以師禮籥特稟妙聲善於轉讀嘗夢天神授其聲法覺因裁製新聲梵嚮淸靡四飛卻轉反折還喉疊哢雖復東阿先變康會後造始終循環未有如籥之妙後進傳寫莫匪其法所製六言梵唄傳響于今後終於所住年八十一
032_0895_a_01L
3) 석법평(釋法平)
법평의 성은 강(康)씨며, 강거(康居) 사람이다. 건업(建業)에 임시 머물렀다. 아우인 법등(法等)과 함께 출가하여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담약(曇籥)의 제자가 되어 함께 스승의 일을 전수받았다. 울리는 여운이 맑고 우아하며, 굴러 움직임에서 모난 곳이 없었다.
그 후 형제가 함께 기원사(祇洹寺)로 옮겼다. 아우는 모습이 작고 못생겼으나, 소리는 형을 넘어섰다. 전송(前宋)의 대장군이 동부(東府)에서 재를 마련하였다. 일단 그의 모습만 보고 그를 업신여겼다. 그러다가 책을 펴고 3단으로 박자를 나누어 경을 외우는 소리를 듣고는, 곧 팔을 걷어 부치고 그 신비함에 탄복하였다. 이어 탄식하였다.
“공자께서 ‘모습만 보고 사람을 취하다가 제자 자우(子羽)를 잘못 보았다[以貌取人 失之子羽]’고 하신 말씀이 참말이구나.”
그 후 동안사(東安寺)에서 도엄(道嚴)이 강론을 열었다. 법등은 3단으로 박자를 나누어 경을 외우기를 마쳤다. 그러자 도엄 법사가 천천히 털이개를 움직이면서 말하였다.
“이와 같이 경을 읽는다면, 또한 강론을 일으키는 것만 못하지 않구나.”
마침내 강석을 해산하고, 이튿날 다시 범패를 열기로 하였다. 이에 논의하는 사람들이 서로를 이루어주는 도[相成之道]라 말하였다.
형제 모두 원가(元嘉) 연간(424~452)의 말기에 세상을 떠났다.
032_0894_c_15L釋法平姓康康居人寓居建業與弟法等俱出家止白馬寺爲曇籥弟子共傳師業響韻淸雅運轉無方後兄弟同移祇洹弟貌小醜而聲踰於兄宋大將軍於東府設齋一往以貌輕之及聞披卷三契便扼腕神服乃歎曰以貌取人失之子羽信矣後東安嚴公發講等作三契經竟嚴徐動麈尾如此讀經亦不減發講遂散席更開題議者以爲相成之道也兄弟竝以元嘉末卒

4) 석승요(釋僧饒)
승요는 건강(健康) 사람인데, 출가하여 백마사에 머물렀다. 편지를 잘 쓰고 잡기(雜技)에 빼어났다. 특히 음성으로 알려져서, 전송의 무제(武帝)ㆍ문제(文帝) 시대에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메아리 가락은 넉넉하며 느긋하고, 우아한 화음[和雅]은 슬프고도 막힘이 없어[哀亮], 도종(道綜)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도종은 세 가지 본기(本起)와 대나(大拏)에 빼어났다. 한 번 맑은 범패를 들어올릴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마음을 기울였다.
이 절에는 반야대(般若臺)가 있었다. 승요는 항상 이 대를 돌면서 범패를 굴려, 이것으로 공양에 견주었다. 길 가던 사람들이 이 소리를 들으면 가마를 멈추고,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손가락을 튀기며 부처님을 칭송하였다.
전송의 대명(大明) 2년(458)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6세이다.
032_0895_a_03L釋僧饒建康人出家止白馬寺善尺牘及雜技而偏以音聲著稱擅名於宋武文之世響調優游和雅哀亮與道綜齊肩綜善三本起及大挐每淸梵一輒道俗傾心寺有般若臺饒常遶臺梵轉以擬供養行路聞者莫不息駕踟躕彈指稱佛宋大明二年卒八十六

∙초명(超明)ㆍ명혜(明慧)
당시 같은 절의 초명과 명혜도 어려서부터 함께 범패를 하였다. 긴 재를 지낼 때에는 경을 돌려가며 읽어서, 역시 당시 세상에 유명하였다.
032_0895_a_11L時同寺復有超明明慧少俱爲梵唄長齋時轉讀亦有名當世

5) 석도혜(釋道慧)
도혜의 성은 장(張)씨며, 심양(尋陽)의 시상(柴桑) 사람이다. 나이 스물네 살 때 출가하여 여산사(廬山寺)에 머물렀다. 평소 행실이 맑고 깨끗하며, 널리 경전을 섭렵하였다. 특히 천연의 소리를 타고났다. 그런 까닭에 특히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좋아하였다. 일어나는 음향에 기이함이 담겼다. 그러면서 소리를 짓는 데 일정한 기준이 없으면서도, 문장을 조목조목 나누었다. 구절을 꺾어, 소리가 곱고 아름다우며 분명하였다.
그 후 서울로 나가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렀다. 경을 돌려가며 읽는 명성으로 크게 서울에서 성하였다.
만년에는 주방(朱方)의 죽림사(竹林寺)로 옮겼다. 수만 글자의 경을 외우고, 저녁마다 소리 내어 읊조렸다. 문득 어둠 속에서 손가락을 튀기며, 보살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전송의 대명 2년(458)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51세이다.
032_0895_a_12L釋道慧姓張尋陽柴桑人年二十四出家止廬山寺素行淸貞博涉經典特稟自然之聲故偏好轉讀發響含製無定准條章折句綺麗分明出都止安樂寺轉讀之名大盛京邑晩移朱方竹林寺誦經數萬言每夕諷詠輒聞闇中有彈指唱薩之聲大明二年卒年五十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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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석지종(釋智宗)
지종의 성은 주(周)씨며, 건강(建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사사(謝寺)에 머물렀다. 널리 배우고 들은 것이 많았다. 경을 돌려가며 읽기에 더욱 뛰어나, 소리가 지극히 맑고 상쾌하였다. 팔관재(八關齋)를 올리는 긴긴 밤이면, 흔히 사부대중들이 꾸벅거리며 졸음[睡蛇]이 수시로 찾아오기 마련이다. 지종이 법석에 올라가 범패를 울려 구름까지 이르도록 하면, 모두 정신이 열리고 몸이 풀려 툭 트였다. 게다가 졸음에서 깨어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대명(大明) 3년(459)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31세이다.
032_0895_a_20L釋智宗姓周建康人出家止謝寺學多聞尤長轉讀聲至淸而爽快乃八關長夕中宵之後四衆低昂蛇交至宗則昇座一轉梵響干雲不開神暢體豁然醒悟大明三年卒年三十一

∙혜보(慧寶)ㆍ도전(道詮)
당시 혜보와 도전(道詮)도 비록 같은 시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소리 내는 법이 비슷하였다. 매우 성량이 풍부하고 가락이 높았으며, 짓고 부름에 더 취할 것이 없었다. 전송의 명제(明帝)가 문득 도전을 칭찬하니, 논의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그가 때를 만났다[逢時]고 하였다.
032_0895_b_03L時有慧寶道詮雖非同時作法相似甚豐聲而高調製用無取宋明忽賞道詮議者謂逢時也

7) 석담천(釋曇遷)
담천의 성은 지(支)씨며, 본래 월지국(月支國) 사람이다. 건강(建康)에 임시 머물렀다. 독실하게 도교와 유교를 좋아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불교의 이치에 노닐었다. 『장자』와 『노자』의 이야기를 잘하였다. 아울러 『십지론(十地論)』에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
바르게 쓰는 글씨 쓰기에 솜씨가 있어, 항상 경전의 제목을 써서 보시하였다. 경을 돌려가며 읽기에도 뛰어나, 소리의 운율이 끝이 없었다. 또한 범패를 짓는 것이 신기하기가 특히 고금에 뛰어났다. 팽성(彭城)의 왕의강(王義康)ㆍ범엽(范曄)ㆍ왕담수(王曇首)가 나란히 모두 친숙하게 교유하였다.
담천은 처음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다가, 후에 오의사(烏依寺)로 옮겼다. 범엽이 주살(誅殺)되자, 그의 문중에서 열두 사람의 상례를 치렀다. 그런데도 아무도 감히 가까이 가는 사람이 없었다. 담천은 돈과 옷, 물건들을 거두어서 그들 여러 사람의 장례를 치렀다. 효무제(孝武帝)가 이 소식을 듣고 감탄하여 칭찬[歎賞]하면서, 서원(徐爰)에게 말하였다.
“경이 송나라 역사를 지을 때, 이 사람을 빼지 말라.”
왕승건(王僧虔)이 상주(湘州) 및 삼오(三吳)의 태수가 되었을 때, 손잡고 함께 노닐었다.
북제(北齊)의 건원(建元) 4년(482)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99세이다.
032_0895_b_05L釋曇遷姓支本月支人寓居建康好玄儒遊心佛義善談『莊』『老』幷注『十地』又工正書常布施題經巧於轉讀有無窮聲韻梵製新奇特拔終古城王義康范曄王曇首竝皆遊狎初止祇洹寺後移烏依寺及范曄被門有十二喪無敢近者遷抽貨衣悉營葬送孝武聞而歎賞謂徐爰卿著『宋書』勿遺此士王僧虔爲湘州及三吳竝攜共同遊齊建元四年年九十九

∙법창(法暢)ㆍ도염(道琰)
당시 도량사(道場寺)에 법창, 와관사(瓦官寺)에 도염도 모두 소리가 풍부하고 애절하여 아름다웠다. 비록 담천과는 다툴 수 없었지만, 그 다음은 될 수 있었다.
032_0895_b_16L時有道場寺釋法暢官寺釋道琰竝富聲哀婉雖不競遷抑亦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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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석담지(釋曇智)
담지의 성은 왕(王)씨며, 건강(健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동안사(東安寺)에 머물렀다. 성품이 풍류를 좋아하고 행동거지가 착하였다. 『노자』ㆍ『장자』의 담론에 뛰어나고, 대부분의 경론과 역사를 두루 섭렵하였다. 높고 밝은 목소리를 갖자, 자못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좋아하였다. 비록 전대의 종사들에 의거하여 모방하기는 하였지만, 홀로 빼어나게 새롭고 특이한 것이 있었다. 높은 가락은 맑게 사무쳐서 모방을 넘어서는 것이 있었다.
전송의 효무제(孝武帝)와 소사화(蕭思話)ㆍ왕승건(王僧虔) 등이 모두 깊이 그를 알고 존중하였다.
왕승건이 상주(湘州) 태수로 부임할 때, 손잡고 함께 갔다. 소사화가 오군(吳郡)의 태수가 되자, 다시 불러 함께 들어갔다.
북제(北齊)의 영명(永明) 5년(487)에 오(吳)나라에서 죽었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032_0895_b_18L釋曇智姓王建康人出家止東安寺性風流善擧止能談『莊』『老』經論書史多所綜涉旣有高亮之聲雅好轉讀雖依擬前宗而獨拔新異高調淸徹寫送有餘宋孝武蕭思話王僧虔等竝深加識重僧虔臨湘州攜與同行守吳復招同入齊永明五年卒於吳年七十九

∙도랑(道郞)ㆍ법인(法忍)ㆍ지흔(智欣)ㆍ혜광(慧光)
당시 또 도랑ㆍ법인ㆍ지흔ㆍ혜광이 모두가 달리 해득한 것은 없었다. 그러나 경을 돌려가며 읽기에 약간 뛰어났다. 도랑이 잡은 가락은 조금 느리고[小緩], 법인은 부딪쳐 끊어지는[擊切] 소리를 지니며, 지흔은 낮은 가락[側調]에 아주 뛰어나고, 혜광은 날아가는 소리[飛聲]를 좋아하였다.
032_0895_c_03L時有道朗法忍智欣竝無餘解薄能轉讀道朗捉調小法忍好存擊切智欣善能側調光喜騁飛聲

9) 석승변(釋僧辯)
승변의 성은 오(吳)씨며, 건강(建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안락사(安樂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경 읽기를 좋아하여, 담천(曇遷)과 법창(法暢) 두 스승에게서 수업하였다. 처음에는 비록 그들의 기풍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하지만 만년에는 다시 생각을 기울이고, 나름대로 짐작을 더하였다. 그리하여 애절하고 아름다운[哀婉] 소리를 절충하니, 북제의 초기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어느 날 신정(新亭)의 유소(劉紹)의 집에 재(齋)가 있었다. 승변이 초저녁의 경 읽기에서 처음으로 한 번 가락을 바꾸자, 문득 무리를 이룬 학들이 내려왔다. 섬돌 아래에 모여들었다가, 승변이 책 한 권을 마치자 일시에 날라 떠나갔다. 이로 말미암아 그의 명성은 천하에 진동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 이름이 알려져, 후에 찾아온 배우는 이들이 그를 종사로 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032_0895_c_06L釋僧辯姓吳建康人出家止安樂寺少好讀經受業於遷暢二師初雖祖述其風晩更措意斟酌哀婉折衷步齊初嘗在新亭劉紹宅齋辯初夜讀經始得一契忽有群鶴下集階及辯度卷一時飛去由是聲振天遠近知名後來學者莫不宗事
영명 7년(489) 7월 29일에 사도(司徒)인 경릉(竟陵) 문선왕(文宣王)이 꿈에 부처님 앞에서 『유마경』 한 가락을 읊조리다가, 소리와 함께 꿈에서 깨어났다. 이에 곧 일어나 불당 안에 이르렀다. 그러더니 문득 꿈속에서 본 법과 같기에, 다시 옛 『유마경』을 한 가락 읊조렸다. 문득 소리 운율의 흐름이 좋게 느껴지면서, 여느 때보다 솜씨가 났다.
이에 이튿날 아침에 곧 서울에서 좋은 소리를 지닌 사문들을 모았다. 용광사(龍光寺)의 보지(普智)ㆍ신안사(新安寺)의 도흥(道興)ㆍ다보사(多寶寺)의 혜인(慧忍)ㆍ천보사(天保寺)의 초승(超勝)과 승변 등이었다. 그들을 저택에 모아 소리를 짓게 하였다. 승변이 전한 옛 『유마경』 한 가락과 『서응경(瑞應經)』의 7언(言) 게송(偈頌) 한 가락이 가장 뛰어난 작품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혹 때로 전하는 말은 모두 와전된 것으로, 그 큰 바탕을 잃은 말들이다.
승변은 복제의 영명(永明) 11년(493)에 세상을 떠났다.
032_0895_c_13L明七年二月十九日司徒竟陵文宣王夢於佛前詠『維摩』一契同聲發而卽起至佛堂中還如夢中法更詠『古維摩』一契便覺韻聲流好著工恒明旦卽集京師善聲沙門龍光普智新安道興多寶慧忍天保超勝及僧辯等集第作聲辯傳『古維摩』一契『瑞應』七言偈一契最是命家之作後人時有傳者竝訛漏失其大體辯以齊永明十一年卒

∙승공(僧恭)
당시 중흥사(中興寺)의 승공이 승변과 명성을 나란히 하다가, 후에 도에서 물러났다[退道].
032_0895_c_23L中興有釋僧恭當時與辯齊名後遂退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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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석담빙(釋曇憑)
담빙의 성은 양(楊)씨며, 건위(揵爲) 남안(南安) 사람이다. 어려서 서울에 노닐었다.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배우면서,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음성의 가락이 매우 공교로웠다. 아침이 지나도록 스스로 일을 맡았으나, 당시 사람들은 아직 그를 추대하지 않았다. 이에 오로지 규범과 법도에 정성을 쏟았다. 갈고 익히는 공부를 더하여, 만년에는 드디어 무리에서 빼어나니, 모두들 달리 보았다. 『삼본기경(三本起經)』을 외울 때는 그 소리가 더욱 좋았다.
그 후 촉(蜀)으로 돌아가서 용연사(龍淵寺)에 머물렀다. 파한(巴漢: 蜀)에서 소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모두가 그의 소리를 모범으로 숭상하였다. 범패 소리를 한 번 토해낼 때마다 새와 말이 슬피 울고, 길 가던 사람이 발길을 멈추었다. 이어 그는 동종(銅鍾)을 제조하여, 미래 세상에 항상 8음(音)1)과 4변(辯: 四無碍辯)이 있기를 원하였다. 용(庸)과 촉(蜀)에 구리로 만든 종이 있게 된 것은 여기에서 비롯하였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032_0896_a_01L釋曇憑姓楊揵爲南安人少遊京師學轉讀止白馬寺音調甚工而過旦自任時人未之推也於是專精規矩更加硏習晩遂出群翕然改觀誦『三本起經』尤善其聲後還蜀止龍淵寺漢懷音者皆崇其聲範每梵音一吐鳥馬悲鳴行途住足因製造銅鍾願於未來常有八音四辯庸蜀有銅鍾始於此也後終於所住

∙도광(道光)
당시 촉 중에는 승령(僧令)인 도광도 경을 돌려가며 읽기를 약간 잘하였다.
032_0896_a_10L時蜀中有僧令道光亦微善轉讀

11) 석혜인(釋慧忍)
혜인의 성은 궤(蕢)씨며, 건강(建康)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북다보사(北多寶寺)에 머물렀다. 다른 행실이나 이해력은 없고, 오직 음성을 애호하였다. 처음 안락사의 승변(僧辯)에게서 수업하여, 그의 법을 갖추어 터득하였다. 그러나 구슬프고 아름다우며, 가늘고 미묘한 소리에서 특히 승변의 경지를 넘어서려 하였다.
북제의 문선왕이 꿈에 감응한 후에, 여러 경 잘 읽는 승려들을 모았다. 이에 혜인도 함께 옛 소리를 헤아리고 가려내었다. 새롭고 다른 소리를 품평하여, 『서응경(瑞應經)』에 42박자를 만들었다. 혜인이 터득한 소리가 가장 뛰어나고 미묘하였다.
이에 혜만(慧滿)ㆍ승업(僧業)ㆍ승상(僧尙)ㆍ초랑(超朗)ㆍ승기(僧期)ㆍ초유(超猷)ㆍ혜욱(慧旭)ㆍ법률(法律)ㆍ담혜(曇慧)ㆍ승윤(僧胤)ㆍ혜단(慧彖)ㆍ법자(法慈) 등 40명에게 명령하여, 모두 혜인에게 나아가 수업하게 하였다. 드디어 그 법이 지금까지 전한다.
혜인은 융창(隆昌) 1년(494)에 죽었다. 그때 나이는 40여 세이다.
032_0896_a_11L釋慧忍姓蕢建康人少出家住北多寶寺無餘行解止是愛好音聲初受業於安樂辯公備得其法而哀婉細特欲過之齊文宣感夢之後集諸經師乃共忍斟酌舊聲詮品新異『瑞應』四十二契忍所得最長妙於是令慧滿僧業僧尚超朗僧期超猷法律曇慧僧胤慧彖法慈等四十餘皆就忍受學遂傳法于今忍以隆昌元年卒年四十餘
032_0896_b_01L
∙석법린(釋法隣)ㆍ석담변(釋曇辯)ㆍ석혜념(釋慧念)ㆍ석담간(釋曇幹)ㆍ석담진(釋曇進)ㆍ석혜초(釋慧超)ㆍ석도수(釋道首)ㆍ석담조(釋曇調)
석법린은 평조(平調)와 첩구(牒句)에서 궁(宮)ㆍ상(商) 음에 특이하였다. 석담변은 얼핏 보면 기특한 것이 없지만, 오래갈수록 더욱 뛰어났다. 석혜념은 기운찬 가락이 적으나, 가늘고 아름다운 소리가 특이하였다. 석담간은 상쾌한 소리가 잘게 부서지면서 부딪치고[爽快碎磕], 옮겨 베끼는 듯한 법도가 있었다. 석담진도 뛰어난 부류에 들어가며, 특히 「환국품(還國品)」을 잘 읽었다. 석혜초는 3단으로 박자를 나누어 경을 외우는 데 뛰어나지만, 후에는 일컬어지지 않았다. 석도수는 한 번 짧게 읽는 것은 겁을 내지만, 길게 말할 때는 볼 만하였다. 석담조는 있는 그대로 보내는 것이 맑고 우아하지만, 공부가 부족한 것이 한탄스러웠다. 이 사람들은 모두가 북제시대에 이름이 알려졌다.
032_0896_a_21L釋法鄰平調牒句殊有宮商
釋曇辯一往無奇彌久彌勝
釋慧念少氣調殊有細美
釋曇幹爽快碎磕傳寫有法
釋曇進亦八能流編善還國品
釋慧超善於三契後不能稱
釋道首怯於一往長道可觀
釋曇調寫送淸雅恨功夫未足
凡此諸人竝齊代知名

절좌(浙左)ㆍ강서(江西)ㆍ형주(荊州)ㆍ섬주(陜州)ㆍ용(庸)과 촉(蜀)에도 자못 경을 돌려가며 읽는 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오직 당시에만 노래로 읊조려졌을 뿐, 높은 명성은 없었던 까닭에 전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032_0896_b_07L浙左江西荊峽庸蜀亦頗有轉讀然止是當時詠歌乃無高譽故不足而傳也

【論】무릇 책이나 문장을 만드는 것은 가슴에 품은 회포를 유창하게 펴, 감정과 뜻을 드높여 진술하는 데 있다. 시와 노래를 짓는 것은 말의 맛을 막히지 않고 흐르게 하여, 말의 운치가 서로 이어지게 하는 데 있다. 그런 까닭에 『시전(詩傳)』의 서문에 말하였다.
“정이 마음속에서 움직여 말로 표현하는 것이며[情動於中而形於言], 말로는 모자라는 까닭에 읊조리고 노래하는 것이다[言之不足故詠歌之也].”
그러나 동쪽 나라의 노래는 운율을 맺어서 읊조림을 이루고, 서방의 찬(贊)은 게송을 지어서 소리와 화음을 이룬다. 비록 노래와 찬의 게송이 다르기는 하지만, 모두가 음[鍾律]과 일치하고 음계[宮商]와 부합되어야만, 비로소 오묘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쇠와 돌로 노래를 연주하면 이것을 악이라 하고, 관악기와 현악기로 찬탄을 마련하면 이것을 범패(梵唄)라 한다.
032_0896_b_10L論曰夫篇章之作蓋欲申暢懷抱述情志詠歌之作欲使言味流靡韻相屬故『詩序』云情動於中而形於言之不足故詠歌之也然東國之歌也則結韻以成詠西方之贊也作偈以和聲雖復歌讚爲殊而竝以恊諧鍾律符靡宮商方乃奧妙故奏歌於金石則謂之以爲樂設讚於管則稱之以爲唄
032_0896_c_01L무릇 성인이 악을 만든 것에 그 공덕이 네 가지가 있다. 천지와 감응하고, 신명과 통하며, 만 백성을 인정시키고, 만물의 본성을 이루는 것이다. 범패를 들었을 경우 이로움에도 다섯 가지가 있다. 신체가 피로하지 않고, 기억한 것을 잊지 않으며, 마음이 귀찮거나 게으르지 않고, 음성이 허물어지지 않으며, 모든 천신(天神)들이 환희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반차(般遮: 28 대야차의 하나)는 석실에서 거문고를 타며 노래하여, 감로법의 첫 문을 열어 주기를 청하였다. 정거천신[淨居]은 쌍림에서 춤추며 찬송하여, 일대 교화의 은덕을 받들어 갚으려 하였다.
그 사이에 때에 따라 찬탄하고 읊조린 것도 역시 곳곳에서 음악을 이루었다. 억이(億耳)가 깊은 밤중에 가늘게 소리 내고, 제바(提婆)가 범천의 궁전에서 소리를 드높인 것과 같은 경우에 이르러서는, 혹 형상하려야 형상할 수 없는 가르침을 퉁소와 피리로써 천상에서 연주한 것이거니와, 혹 근본 행법의 소리를 거문고와 비파로써 하늘 아래에서 어울린 것이다.
모두가 음조의 억양으로 감응과 통하여 부처님께서도 칭찬하신 일이다. 그런 까닭에 함지(咸池)의 소무(韶武)도 그 솜씨가 짝이 될 수가 없고, 격초(激楚)의 양진(梁塵)도 그 미묘함에 비교할 수가 없다.
032_0896_b_19L夫聖人制樂其德四焉感天地通神明安萬民成性類如聽唄亦其利有五身體不疲不忘所憶心不懈惓音聲不壞諸天歡喜以般遮絃歌於石室請開甘露之初門淨居舞頌於雙林奉報一化之恩德其閒隨時讚詠亦在處成音至如億耳細聲於宵夜提婆颺響於梵宮令無相之旨奏於篪笛之上或使本行之音宣乎琴瑟之下竝皆抑楊通感佛所稱讚故『咸池韶武』無以疋其工『激楚梁塵』無以較其妙
부처님의 교법이 동방으로 들어온 후 글을 번역한 사람은 많았다. 그러나 소리를 전한 사람은 적었다. 범패의 소리는 중복된 것이고, 중국어는 단순하지만 기이하기 때문이다. 만약 범패를 사용하여서 중국어를 읊는다면, 소리는 번거롭고 게송은 급박해질 것이다. 만약 중국의 곡조를 사용해서 범패의 글을 읊는다면, 운율은 짧고 말은 길어질 것이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의 말씀을 번역한 것은 있으나, 범패의 소리는 전수되지 않은 것이다.
처음으로 위(魏)의 진사왕(陳思王) 조식(曺植)이 깊이 소리와 운율을 사랑하여 경의 소리에 뜻을 두었다. 이미 반차(般遮)의 상서로운 음향에 통한 다음, 다시 어산(魚山)의 신비한 지음에 감응하였다. 이에 『서응경(瑞應經)』의 본기(本起)를 줄이고 다듬어 배우는 사람들의 으뜸이 되었다. 그 안에는 소리를 전한 것이 3천여 가지가 있고, 가락의 변조에 있어서는 마흔두 종류가 있다.
032_0896_c_07L自大教東流乃譯文者衆而傳聲蓋寡良由梵音重複漢語單奇若用梵音以詠漢語則聲繁而偈迫若用漢曲以詠梵文則韻短而辭長是故金言有譯梵響無授始有魏陳思王曹植深愛聲律屬意經音旣通般遮之瑞響又感魚山之神製於是刪治『瑞應本起』以爲學者之宗傳聲則三千有餘在契則四十有二
그 후 백법교(帛法橋)ㆍ지담약(支曇籥)도 이 진사왕을 그대로 이어받았다고 한다. 음률을 애호해서 신령에 통하고 따로 신비한 지음에 감응하여 옛 소리를 마름질하여 변화시켰으나, 남겨진 것은 오직 열 가운데 한 가지에서 그칠 뿐이다.
석륵(石勒)이 집권한 건평(建平) 연간(330~333)에 천신(天神)이 안읍(安邑)의 청사(廳事)에 내려와, 불경을 크게 소리 내어 읊으면서 7일이 되어서야 끝냈다고 한다. 때로 이 일을 전하는 사람이 있으나, 모두가 와전되고 버려진 소리다.
전송(前宋)ㆍ북제(北齊)시대 사이에 이르러, 담천(曇遷)ㆍ승변(僧辯)ㆍ태부(太傅) 문선왕(文宣王) 등도 모두 은근히 감탄하여 읊조렸다. 음률에 대한 뜻이 곡진하여 같고 다른 점을 모아, 엮고 분류하는 예를 짐작하여 예전 법을 본따서 보존한 것이, 바로 3백여 소리 가량 되었다.
032_0896_c_16L其後帛橋支籥亦云祖述陳思而愛好通靈別感神製裁變古所存止一十而已至石勒建平中有天神降于安邑廳事諷詠經音日乃絕時有傳者竝皆訛廢逮宋之閒有曇遷僧辯太傅文宣等竝殷勤嗟詠曲意音律撰集異同斟酌科存倣舊法正可三百餘聲
032_0897_a_01L이때 이 후로는 소리가 많이 흩어지고 떨어져서 사람마다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보충하고 엮은 것이 같지 않다. 그런 까닭에 스승마다 법이 다르고 문중마다 지음이 각각이다. 모두가 소리의 취지에 어두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를 마름질하여 바로잡지 못하였다.
무릇 음악에 의한 감동은 예전부터 그러하다. 그런 까닭에 그윽한 승려의 범패 소리에 붉은 기러기가 사랑해서 자리를 옮기지 않았고, 비구에게서 흐르는 소리에 푸른 새가 기뻐서 날아 치솟는 일을 잊었다. 담빙(曇憑)의 운율이 움직이자 새와 말이 몸을 움츠렸고, 승변(僧辯)이 가락을 꺾으니 기러기와 학조차도 날기를 멈추었다.
사람을 헤아리면 비록 얕고 깊은 차이가 있지만, 그 감응을 헤아리면 또한 버금가는 바가 있다. 그런 까닭에 기(夔)라는 짐승이 돌을 치면, 돌을 치는 대로 모든 짐승들이 따라 춤을 추었다. 소소(簫韶: 文王 南巡 때의 음악)의 구성곡(九成曲)에는 봉황이 찾아와 춤추었다. 새와 짐승조차도 또한 감응을 이루거늘, 하물며 사람과 신(神)에 있어서랴?
다만 경을 돌려가며 읽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그 귀함이 소리와 글 두 가지를 모두 터득한 데 있다. 만약 오직 소리가 아름답고 글이 아름답지 않으면, 도의 마음이 생겨날 길이 없다. 만약 글만 오로지 아름답고 소리는 아름답지 않으면, 세속적 감정이 들어갈 길이 없어진다. 그런 까닭에 경에서 말한다.
“미묘한 음성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노래하고 찬탄한다.”
그런데도 요즘 세상의 배우는 자들은 겨우 시작과 끝의 나머지 소리라도 얻기만 할라치면 말한다.
“당세에 이름을 날리노라.”
경문의 일어나서 다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보는 일이 없다. 혹 구절을 허물어 소리에 합치시키기도 하고, 혹 글을 나누어 운율을 충족시키기도 하니, 이것이 어찌 오직 소리만 부족한 것이겠는가? 또한 곧 글이 표현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듣는 사람에게는 오직 황홀한 기분만 불어날 뿐이어서, 듣노라면 다만 졸음만 더해진다.
032_0896_c_23L自茲厥聲多散落人人致意補綴不同以師師異法家家各製皆由昧乎聲莫以裁正夫音樂感動自古而然是以玄師梵唱赤鴈愛而不移比丘流靑鳥悅而忘翥曇憑動韻猶令鳥馬踡跼僧辯折調尚使鴻鶴停飛人雖復深淺籌感抑亦次焉故夔擊石拊石則百獸率舞簫韶九成則鳳凰來儀鳥獸且猶致感況乃人神者哉但轉讀之爲懿貴在聲文兩得若唯聲而不文則道心無以得生若唯文而不聲則俗情無以得入故經言微妙音歌歎佛德斯之謂也而頃世學者裁得首尾餘聲便言擅命當世經文起盡曾不措懷或破句以合聲或分文以足韻豈唯聲之不足亦乃文不成詮聽者唯增怳忽聞之但益睡眠
무릇 이는 8진명주(珍明珠)로 하여금 가리지 않았는데도 빛남을 감추게 하고, 백 가지 맛을 갖춘 순유(淳乳)로 하여금 엷게 희석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맛을 엷게 하는 것이다. 슬프다.
만약 경의 본뜻에 정밀하게 뛰어나고 음률도 훤하게 밝다면, 세 자리[三位]의 일곱 가지 소리가 차례로 순서가 있어 어지러운 일이 없고, 오언사구(五言四句)의 게송이 일치하여 어긋남이 없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일으키고 던지며 휩쓸고 들어올리며, 평탄하고 꺾으며 내치고 줄이며, 노닐고 날며 물러서고 회전하며, 되돌리고 포개며 교태롭고 희롱한다. 운율이 움직이면 흐르고 쓸리는 것이 다함이 없고, 목구멍을 벌리면 변하는 흐름이 끝이 없다. 그런 까닭에 찬란히 8음을 펴고 빛나게 7선을 드날린다.
032_0897_a_18L使夫八眞明珠未揜而藏曜味淳乳不澆而自薄哀哉若能精達經旨洞曉音律三位七聲次而無亂五言四句契而莫爽其閒起擲盪擧平折放殺游飛卻轉反疊嬌弄動韻則流靡弗窮張喉則變態無盡故能炳發八音光楊七善
032_0897_b_01L웅장하면서도 사납지 않으며, 엉키면서도 막히지 않고, 약하면서도 거칠지 않고, 굳세면서도 날카롭지 않으며, 맑으면서도 어지럽지 않고, 흐리면서도 가려지지 않는다. 참으로 미묘한 말씀을 자못 유창하게 일으키고, 정신과 본성을 느긋하게 길러낼 만하다. 그런 까닭에 소리를 들으면 귀가 즐거워질 수 있고, 말을 들으면 흉금을 열 수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범패 소리의 깊고도 미묘한 소리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즐겁게 할 수 있다고 말할 만하다.
천축국의 풍속은 불법의 말씀을 노래하고 읊조리면, 이것을 모두 범패(梵唄)라 한다. 그러나 이 땅에 이르러서는 경을 읊조리면 전독(轉讀)이라 하고, 노래하고 찬탄하면 범패라 부른다. 예전에 모든 천신(天神)들이 찬탄한 범패는 모두가 운율을 거문고 가락에 맞춘 것이다. 오부대중은 이미 속인과는 다르다. 그런 까닭에 마땅히 소리와 곡조로써 미묘함을 삼아야 한다.
032_0897_b_01L壯而不猛凝而不滯弱而不野剛而不銳淸而不擾濁而不蔽諒足以起暢微言怡養神故聽聲可以娛耳聆語可以開襟若然可謂梵音深妙令人樂聞者也然天竺方俗凡是歌詠法言皆稱爲至於此土詠經則稱爲轉讀歌讚則號爲梵唄昔諸天讚唄皆以韻入絃管五衆旣與俗違故宜以聲曲爲
근원적으로 말하면, 무릇 범패가 일어난 것도 진사왕(陳思王)에게서 조짐이 비롯하였다. 처음 태자송(太子頌)과 섬송(睒頌) 등을 지어서, 이것을 위하여 소리를 만든 것이다. 뱉고 마시며 누르고 올림은 모두 신(神)이 전수한 것을 법삼았다. 지금의 ‘황황고유(皇皇顧惟)’는 아마도 그 기풍이 강하게 남은 것이리라.
그 후 거사(居士) 지겸(支謙)도 역시 범패 3계(契)를 전하였다. 그러나 모두 사라지고 없어져서 남아 있지 않다. 세간에 있는 ‘공의(共議)’라는 1장(章)이 혹 지겸이 남긴 법칙인지 모른다. 오직 강승회(康僧會)가 만든 ‘열반범패(涅槃梵唄)’만은 지금까지도 전한다. 곧 경알(敬謁)이라는 한 계문(契文)이 두 권의 『열반경』에 나와 있기 때문에, 이것을 열반범패라 한다.
032_0897_b_10L原夫梵唄之起亦兆自陳思始著『太子頌』及『睒頌』等因爲之製聲吐納抑竝法神授今之皇皇顧惟蓋其風烈也其後居士支謙亦傳梵唄三契皆湮沒而不存世有共議一章恐或謙之餘則也唯康僧會所造『泥洹』梵唄于今尚傳卽敬謁一契文出雙卷『泥洹』故曰泥洹唄也
032_0897_c_01L진(晋)나라 시대에 이르러 도생(道生) 법사가 처음으로 그 자취를 찾아 전수하였다. 지금의 ‘행지인문(行地印文)’이 곧 그 법이다. 담약(曇籥)이 만든 육언(六言)범패는 곧 ‘대자애민일계(大慈哀愍一契)’며, 지금도 때로 이를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근간 서량주(西凉州)의 범패는 근원이 관우(關右)지방에서 나와 진양(晋陽)지방에 흘러 들어온 것으로, 지금의 ‘면여만월(面如滿月)’이 그것이다. 무릇 이 모든 가락은 모두가 이름난 스승들이 제작하여 나온 것인데, 후세 사람들이 이어 부름에 대부분 와전되고 누락되었다. 때로는 사미나 어린아이들끼리 서로 전수하는 경우도 있어서, 예전에 이룩된 규칙은 거의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아쉽다. 이는 이미 다 같이 소리의 예로서 드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논하는 끄트머리의 말미에 갖추어 둔다.
032_0897_b_17L爰至晉世有高座法師初傳覓歷今之行地印文卽其法也公所造六言卽大慈哀愍一契于今時有作者近有西涼州唄源出關右而流于晉陽今之面如滿月是也凡此諸曲竝製出名師後人繼作多所訛漏時沙彌小兒互相傳授疇昔成規無遺一惜哉此旣同是聲例故備之論末

10. 창도편(唱導篇)
032_0897_c_02L唱導第十

1) 석도조(釋道照)
도조의 성은 국(麴)씨며, 평서(平西)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편지를 잘 썼다. 아울러 경전과 역사에 널리 뛰어났다.
열여덟 살 때 출가하여 서울의 기원사(祇洹寺)에 머물렀다. 뭇 경전을 열어 보았으며, 선창(宣唱)을 일삼았다. 토하는 음성은 맑고 밝아, 번뇌에 시달리는 마음을 씻어 깨닫게 하였다. 일을 맡으면 때맞추어 하고 말만 앞세우지 않았다. 전송의 초기에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전송의 무제(武帝)가 어느 날 내전에서 재(齋)를 마련하였다. 도조는 초저녁에 간략히 말하였다.
“사람의 한평생, 백 년이란 세월은 빠르게 흘러 죽음은 갑자기 닥쳐오고, 그 사이 괴로움과 즐거움은 들쑥날쑥 고르지 않으나, 반드시 인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자비는 육도중생에 응하시듯, 폐하는 모든 백성을 쓰다듬어 어여삐 여기소서.”
황제는 말하였다.
“좋다.”
오랜 후에 재가 끝나자, 따로 3만 냥의 돈을 보시하였다. 임천왕(臨川王) 유도규(劉道規)는 그에게서 5계를 받고는, 받들어 가문의 스승으로 모셨다.
원가(元嘉) 30년(453)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66세이다.
032_0897_c_03L釋道照一 釋曇穎二
釋慧璩三 釋曇宗四
釋曇光五 釋慧芬六
釋道儒七 釋慧重八
釋法願九 釋法鏡十
釋道照姓麴平西人少善尺牘兼博經史十八出家止京師祇洹寺披覽群典以宣唱爲業音吐寥亮洗悟塵指事適時言不孤發獨步於宋代之初宋武帝嘗於內殿齋照初夜略百年迅速遷滅俄頃苦樂參差必由因召如來慈應六道陛下撫矜一切言善久之齋竟別䞋三萬臨川王道規從受五戒奉爲門師宋元嘉三十年卒年六十六

∙혜명(慧明)
도조의 제자인 혜명은 성이 초(焦)씨며, 위군(魏郡) 사람이다. 마음이 뛰어나게 걸출하였다. 스승의 도풍을 그대로 이어 익혀서, 역시 당시에 명성이 있었다.
032_0897_c_18L照弟子慧明姓焦郡人神情俊邁祖習師風亦有名當世
032_0898_a_01L
2) 석담영(釋曇穎)
담영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어려서 출가하여 계율의 행실에 삼갔다. 10여만 글자의 경을 외웠으며, 장간사(長干寺)에 머물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하여 오직 좋게 권유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 짐짓 뜻을 선창(宣唱)에 두었다. 목소리가 천연적으로 유독 빼어났기 때문이다. 요청하는 사람들에게는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찾아갔다. 또한 빈부를 막론하고 같은 법에 따랐다. 장창(張暢)이 그의 소리를 듣고 감탄하여 말하였다.
“토해내는 말이 흐르듯 하여, 곧 머나먼 이치를 치솟게 할 만하다.”
담영은 어느 날 부스럼병[癬瘡]을 앓아 오래도록 치료하였다. 그러나 제거되지 않았다. 방안에서 항상 관세음보살상에 공양드리며, 아침저녁으로 예배하면서 이 병이 낫기를 기원하였다.
032_0897_c_19L釋曇穎會稽人少出家謹於戒行經十餘萬言止長干寺性恭儉唯以善誘爲先故屬意宣唱天然獨絕要請者皆貴賤均赴貧富一揆張暢聞而歎曰辭吐流便足騰遠理穎嘗患癬瘡積治不除房內恒供養一觀世音像晨夕禮拜求差此疾
훗날 갑자기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관음상 뒤에서 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갔다. 그러더니 잠시 후 쥐 한 마리가 지붕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뱀이 묻힌 침으로 목욕한 것 같았으며, 모습은 이미 죽은 듯하였다.
담영이 살펴보니, 아직은 살릴 수 있을 듯하였다. 이에 곧 대나무를 갖고 와서 침을 제거하였다. 뱀이 삼킨 쥐는 부스럼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기에, 곧 뱀이 묻힌 침을 닦아내어 부스럼 부위에 발랐다. 바른 것이 두루 퍼지자 쥐도 다시 살아났다. 이틀 밤 사이에 부스럼이 완전히 없어졌다. 비로소 뱀과 쥐가 모두 관세음보살께 기원하여 요청한 덕분에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이에 부지런히 정진하며 교화하였다. 창도하여 굳센 절조가 더욱 굳어졌다. 전송의 태재(太宰)인 강하왕(江夏王) 유의공(劉義恭)이 가장 알아주고 존중하였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81세이다.
032_0898_a_03L異時忽見一蛇從像後緣壁上屋須臾有一鼠子從屋脫地涎唾沐身狀如已死穎候之猶似可活卽取竹刮除涎唾又聞蛇所呑鼠能療瘡疾卽刮取涎唾以傅癬上所傅旣遍鼠亦還活信宿之閒瘡痍頓盡方悟蛇之與鼠皆是祈請所致於是精勤化導厲節彌堅宋太宰江夏王義恭最所知重後卒於所住年八十一

3) 석혜거(釋慧璩)
혜거는 단양(丹陽) 사람이며, 출가하여 와관사(瓦官寺)에 머물렀다. 경론을 읽고 열람하면서 역사를 섭렵하였다. 여러 잡기에도 대부분 능숙하였다. 하지만 더욱 창도(唱導)를 잘하여, 말이 나오면 문장을 이루고, 말이 움직이면 작품이 되었다. 시절에 맞게 다다르고 너르게 채택하였다. 그러니 모두 다 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전송의 태조와 문제(文帝)ㆍ거기(車騎)장군 장질(藏質)이 나란히 손잡고, 좋은 벗으로서 서로 숭상하고 사랑하였다. 그 후 초왕(譙王)이 형주(荊州)에 주둔하자, 요청하여 더불어 동행하였다. 그 후 초왕은 반역하여 조정으로 돌아오다, 양산(梁山)에서 법회를 마련하였다. 얼마 후 초왕이 패배하자, 혜거는 서울로 돌아왔다.
032_0898_a_12L釋慧璩丹陽人出家止瓦官寺讀覽經論涉獵書史衆技多閑而尤善唱出語成章動辭製作臨時採博無不妙詣宋太祖文皇帝車騎臧質竝提攜友善雅相崇愛譙王鎭荊與同行後逆節還朝於梁山設會譙王敗璩還京
그 후 전송의 효무제(孝武帝)가 재를 마련하였을 때, 혜거가 창도의 역을 맡았다. 황제가 혜거에게 물었다.
“오늘의 모임을 양산과 비교하면 어떠한가?”
혜거가 대답하였다.
“하늘의 도는 순리를 돕는 것인데, 하물며 반역을 위하겠습니까?”
황제는 기뻐하여 이튿날 아침 따로 1만 냥의 돈을 보시하였다. 그 후 칙명으로 서울의 도유나(都維那)직을 맡았다.
대명(大明) 말년(464)에 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2세이다.
032_0898_a_19L後宋孝武設齋唱導帝問璩曰今日之集何如梁山璩曰天道助順況復爲逆帝悅之別䞋一萬後勅爲京邑都維那明末終於寺年七十二
032_0898_b_01L
4) 석담종(釋曇宗)
담종의 성은 괵(虢)씨며, 말릉(秣陵) 사람이다. 출가하여 영미사(靈味寺)에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배우기를 좋아하여, 많은 경전에 두루 뛰어났다. 창설(唱說)의 공교함은 당시 세상에서 독보적이었다. 그의 구변은 시절에 알맞아, 변화에 응하는 재능이 끝이 없었다.
어느 날 효무제(孝武帝)를 위하여 창도의 소임을 맡아, 보살의 다섯 가지 법의 예를 행하여 마쳤다. 황제가 웃으면서 담종에게 말하였다.
“짐은 무슨 죄가 있기에, 참회를 해야 하는가?”
담종이 말하였다.
“예전에 우(虞)ㆍ순(舜) 임금은 지극한 성인이었으나, 오히려 ‘나는 그대를 보필하는 공을 어겼다’고 하였습니다. 탕왕(湯王)과 무왕(武王)도 역시 ‘만백성에게 죄가 있으면 그것은 나 한 사람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성왕이 허물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 것은, 무릇 세상을 자신이 본받을 법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폐하의 덕은 지난 시대보다 뛰어나며, 성인인 우(虞)ㆍ은(殷)과 나란하십니다. 도를 실천하여 텅 비움을 생각함에서만, 어찌 홀로 예전의 성군과 다르겠습니까?”
황제는 크게 기뻐하였다.
032_0898_a_23L釋曇宗姓虢秣陵人出家止靈味寺少而好學博通衆典唱說之功獨步當世辯口適時應變無盡嘗爲孝武唱導行菩薩五法禮竟帝乃笑謂宗朕有何罪而爲懺悔宗曰昔虞舜至聖猶云予違爾弼湯武亦云萬姓有罪在予一人聖王引咎蓋以軌世陛下德邁往代齊聖虞殷履道思沖寧得獨異帝大悅
그 후 은숙의(殷叔儀)가 죽었을 때와 21일 동안 재 모임을 마련하였을 때에, 모두 담종을 초청하였다.
담종은 바야흐로 세상의 도는 부초와 같고 거짓되어, 은혜롭고 사랑스런 이와 반드시 헤어지게 됨을 탄식하였다. 은(殷)씨의 맑은 덕을 찬탄하고, 그 영화로움과 행복함을 채 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였다. 당년에 맺을 열매가 스러지고, 꽃다움을 오늘날 거두어들인 것을 아쉬워하였다.
하는 말이 지극히 처량하여, 황제는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남다른 포상이 더욱 깊었다. 그 후 머물던 절에서 세상을 마쳤으며, 『경사탑사기(京師塔寺記)』 두 권을 지었다.
032_0898_b_08L後殷淑儀薨三七設悉請宗宗始歎世道浮僞恩愛必嗟殷氏淑德榮幸未暢而滅實當收芳今日發言悽至帝泫愴良久賞異彌深後終於所住著『京師塔寺記』二卷

∙승의(僧意)
당시 영미사(靈味寺)의 승의도 창설을 잘하였다. 「섬경신성(晱經新聲)」을 지었다. 애달프고도 밝은 소리가 차례가 있었다[哀亮有序].
032_0898_b_13L時靈味寺復有釋僧意者善唱說製『睒經』新聲哀亮有序

5) 석담광(釋曇光)
담광은 회계(會稽) 사람이다. 스승을 따라 강릉의 장사사(長沙寺)에 머물렀다. 성품과 생각이 5경(經)과 시부(詩賦)를 좋아하였다. 아울러 산수(算數)와 복서(卜筮)도 꿰뚫어, 해득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나이가 곧 30세가 되려 하자, 한숨을 쉬며 탄식하여 말하였다.
“내가 종래에 익힌 것은 모두가 세속의 일이다. 불법의 깊은 진리에는 아직 털끝만치도 물들지 못하였다. 이것이 어찌 머리를 깎은 사람으로서 마땅한 일이겠는가?”
곧 예전에 일삼은 것과는 담을 쌓고, 여러 경론의 강의를 들었다. 식견과 깨달음이 보통 사람을 넘어서서, 한 번 들으면 곧 통달하였다.
032_0898_b_14L釋曇光會稽人隨師止江陵長沙寺性意嗜五經詩賦及算數卜筮無不貫解年將三十喟然歎曰吾從來所皆是俗事佛法深理未染一毫豈翦落所宜耶乃屛舊業聽諸經論識悟過人一聞便達
032_0898_c_01L전송[宋]형양(衡陽)의 문왕(文王) 유의계(劉義季)가 형주(荊州)에 주둔하였다. 그러자 뜻과 논리에 뛰어난 사문을 찾아 함께 불법을 이야기하려 하였다. 경계 내에 알리니, 모두가 담광을 추천하여, 큰 임무를 맡을 만하다고 하였다. 담광이 굳게 사양하였다. 왕이 몸소 그의 방을 찾아가 돈독하게 청하자, 마침내 명에 따랐다. 수레와 의복ㆍ인력을 공급하고 한 달에 1만 냥의 돈을 제공하였다.
당시 재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불경을 먼저 읽어주는 승려가 없었다. 왕이 담광에게 말하였다.
“중생들을 인도하려면 오직 덕이 근본이 되어야 하거늘, 상인께서 어찌 이 일을 사양하여서야 되겠는가? 반드시 스스로의 힘으로 하시기 바라네.”
담광은 마침내 마음을 돌려 소리를 익히고, 「예참문(禮懺文)」을 지었다. 향로를 손에 잡고 대중 앞에 설 때마다, 곧 도인과 속인들이 마음을 기울여 우러러보았다.
032_0898_b_20L宋衡陽文王義季鎭荊州求覓意理沙門共談佛法聲境推光以當鴻任光固辭王自詣房敦遂從命焉給車服人力月供一萬設齋會無有導師王謂光曰獎導群唯德之本上人何得爲辭願必自光乃迴心習唱製造懺文每執爐處衆輒道俗傾仰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영미사(靈味寺)에 머물렀다. 의양왕(義陽王) 유욱(劉旭)이 외지로 나가 북쪽 서주(徐州)에 주둔하자, 담광과 손잡고 동행하였다.
그 후 유경화(劉景和)가 덕을 잃자, 의양왕이 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담광이 앞일을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여, 곧 7요(曜: 日ㆍ月과 水火金木土의 다섯 별)로써 담광에게 결택을 하게 하였다. 담광은 입을 다물고 말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일이 편안해져서 재난을 면하였다.
전송의 명제(明帝)는 상궁사(湘宮寺)에서 모임을 마련하였다. 담광이 창도하는 소리를 듣고는 칭송하였다. 곧 칙명으로 옷 세 벌과 물병ㆍ발우를 하사하였다. 그 후 절 안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5세이다.
032_0898_c_04L後還都止靈味寺義陽王旭出鎭北徐攜光同行及景和失德義陽起事以光預見乃齎七曜以決光光杜口無言故事寧獲免宋明帝於湘宮設會聞光唱導帝稱卽勅賜三衣甁鉢後卒於寺中六十五

6) 석혜분(釋慧芬)
혜분의 성은 이(李)씨며, 예주(豫州)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특별한 지조가 있었다. 나이 열두 살 때 출가하여, 곡숙현(穀熟縣)의 상산사(常山寺)에 머물렀다. 학업이 넉넉하고 깊었으며, 고행이 정밀하고 뛰어났다. 재 모임에 갈 때마다, 항상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였다. 양(梁)ㆍ초(楚) 사이에서는 모두가 그의 교화를 받들었다.
북위(北魏)가 불법을 훼멸하자, 곧 남쪽 서울로 돌아왔다. 오강(烏江)에 이르자, 추격하는 말이 곧 그에게 미쳤다. 강기슭에는 건네주는 배가 없었다. 혜분이 일심으로 염불하니, 갑자기 배 한 척이 문득 흘러와 이르렀다. 그것을 타고 재난을 면하였다. 서울에 이르러서는 백마사(白馬寺)에 머물렀다.
당시 어사중승(御史中丞)이었던 원민손(袁愍孫)이 항상 생각하였다.
‘도인은 편벽하고 고집이 있어, 더불어 논의할 만한 대상이 못된다.’
마침내 측근에게 명하여 승려들을 찾기를 기다려, 한 번 이야기해 보고자 하였다.
때마침 혜분이 그곳에 이르렀기에, 원민손이 먼저 삼승사제(三乘四諦)의 논리를 물었다. 문득 노자ㆍ장자와 공자ㆍ묵자의 요점을 말하였다. 혜분은 평소에 이미 경서에 빼어났다. 또한 토해내는 음성이 물 흐르듯 편하여서,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도록 원민손이 그를 궁지에 몰 수 없었다. 이에 그를 공경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자제들 모두가 그에게서 계를 받게 하였다.
032_0898_c_10L釋慧芬姓李豫州人幼有殊操十二出家住穀熟縣常山寺學業優深行精峻每赴齋會常爲大衆說法楚之閒悉奉其化及魏虜毀滅佛法乃南歸京師至烏江追騎將及而渚次無航芬一心念佛俄見流舩忽至乘之獲免至都止白馬寺時御史中丞袁愍孫常謂道人偏執未足與議乃命左右令候覓沙門試欲語之會得芬袁先問三乘四諦之理卻辯老墨之要芬旣素善經書又音吐流便自旦之夕袁不能窮於是敬以爲令子弟悉從受戒
032_0899_a_01L혜분은 또 신령한 주문에 뛰어나, 그가 다스리는 병은 반드시 효험이 있었다. 그 후 병이 위독하여 환약을 복용할 적에, 어떤 사람이 술을 마셔보라고 권하였다. 혜분이 말하였다.
“오랜 세월 계율을 지켜왔거늘, 차라리 죽을지언정 어찌 절개를 허물겠느냐?”
그리고는 곧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떠난다.”
북제의 영명(永明) 3년(485) 흥복사(興福寺)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79세이다. 임종 때, 훈계를 내린 유언장이 있다고 한다.
032_0898_c_23L芬又善神呪治必驗後病篤服丸人勸之以酒積時持戒寧以將死虧節乃語弟子云吾其去矣以齊永明三年卒于興福寺年七十九臨終有『訓誡遺文』云云

7) 석도유(釋道儒)
도유의 성은 석(石)씨며, 발해(渤海) 사람이다. 광릉(廣陵)에 임시 머물렀다. 어려서부터 맑은 믿음을 품고, 출가하기를 그리워하며 즐겨하였다. 전송의 임천왕(臨川王) 유의경(劉義慶)이 남쪽 연주(袞州)에 주둔하는 때를 만나, 도유가 이 일을 알렸다. 왕이 그의 뜻에 찬성하여, 출가의 길을 열어 도첩(度牒)을 내렸다.
출가한 후에는 푸성귀를 먹으면서 경을 읽고 외웠다. 가는 곳마다 모두 사람들에게 권유하여, 악한 마음을 고쳐 선한 길을 닦게 하였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그를 종사로 받들어, 마침내 창도하는 승려가 되었다. 말할 때 미리 준비하는 일이 없고, 소리를 내면 그것이 문장을 이루었다.
원가(元嘉) 연간(424~452) 말기에 서울로 나와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장사왕(長沙王)이 청해서, 계율을 내려주는 스승으로 삼았다. 노승상(盧丞相)ㆍ백중손(伯仲孫) 등이 함께 장경아(張敬兒)의 옛 사당을 사서, 도유를 위하여 절을 세웠다. 지금의 제복사(齊福寺)가 그것이다.
도유는 복제의 영명 8년(490)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81세이다.
032_0899_a_05L釋道儒姓石渤海人寓居廣陵少懷淸信慕樂出家遇宋臨川王義慶鎭南兗儒以事聞之王贊成厥志爲啓度出家出家之後蔬食讀誦凡所之造皆勸人改惡修善遠近宗奉遂成導師言無預撰發嚮成製元嘉末出都建初寺長沙王請爲戒師盧承祖伯仲孫等共買張敬兒故廟爲儒立寺齊福寺是也儒以齊永明八年卒八十一

∙승희(僧憙)
당시 한심사(閑心寺)의 승희(僧憙)도 창설을 잘하였다. 전송 말기와 북제 초기에 명성을 떨쳤다.
032_0899_a_15L時閑心寺有釋僧喜亦善唱振譽於宋末齊初

8) 석혜중(釋慧重)
혜중의 성은 민(閔)씨며, 노국(魯國) 사람이다. 금릉(金陵)에 임시 머물렀다. 일찍부터 슬기로운 믿음을 품고 도를 따를 뜻이 있었으나,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오래도록 재(齋)를 열고 채식을 하였다. 대중을 거느리고 재의 모임을 가질 때마다, 항상 스스로 창도를 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여러 해 거듭하니, 마침내 위로 전송의 효무제(孝武帝)에게 알려졌다. 대명(大明) 6년(462)에 칙명으로 신안사(新安寺)에서 출가하였다. 이에 오로지 창도의 일을 담당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민첩하였다. 식견과 깨달음이 깊고 침착하여, 말을 미리 꾸미지 않았다. 때에 응하여 쏟아 붓는 듯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본 사람들은 모두가 그곳에 머물러, 이틀 밤을 자면서 더욱더 간곡히 찾아갔다.
그 후 자리를 옮겨 와관사(瓦官寺)의 선방에 머물다가, 영명(永明) 5년(487)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나이는 73세이다.
032_0899_a_16L釋慧重姓閔魯國人僑居金陵早懷信悟有志從道願言未遂已長齋菜每率衆齋會常自爲唱導如此累乃上聞於宋孝武大明六年勅爲新安寺出家於是專當唱說稟性淸識悟深沈言不經營應時若瀉預聞者皆留連信宿增其懇詣後移止瓦官禪房永明五年卒年七十三
032_0899_b_01L
∙법각(法覺)
당시 와관사의 법각도 혜중의 일을 도탑게 하였다. 역시 북제시대에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032_0899_b_01L時瓦官復有釋法覺又敦慧重之業亦擅名齊代

9) 석법원(釋法願)
법원의 본래 성은 종(鍾)씨며, 이름은 무려(武慮)이다. 선조는 영천(穎川)의 장사(長社) 사람이다. 조부 대에 난을 피하여 오흥(吳興)의 장성(長城)에 옮겨 살았다. 법원은 항상 매근치감(梅根治監)이 되었는데, 시신민(施愼民)이 와서 교대하였다. 이에 앞서 문서를 교열하지 않아, 시신민이 마침내 홀로 그 책임을 졌다. 법원은 곧 소를 올려 죄를 나누기를 원하였다. 그러자 상부에서 교지가 내려, 시신민은 죽음을 면하고, 법원은 신도(新道)의 수령이 되었다.
집에서 본래 신(神)을 섬겼기에, 몸소 북치고 춤추는 것을 익혔다. 세간의 잡기와 노장들이 하는 점치고 관상 보는 일[耆父占相]들을 모두 갖추어, 그 묘를 다하였다. 어느 날 거울로 얼굴을 비추어보고 말하였다.
“나는 오래지 않아 아마도 천자(天子)를 만날 것이다.”
이에 서울로 나가 침교(沈橋)에 머물면서, 관상 보는 품을 팔아 일삼았다[庸相自業]. 종각(宗殼)과 심경(沈慶)이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 지나다가, 법원에게 상을 보아달라고 청하였다. 법원이 말하였다.
“종군(宗君)은 세 고을의 자사(刺史)가 될 것이고, 심군은 벼슬이 3공(公)까지 다할 것이오.”
이와 같이 돌아가며 많은 사람의 상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일어날 일을 예언하였다. 징험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032_0899_b_03L釋法願本姓鍾名武厲先穎川長社祖世避難移居吳興長城願常爲梅根冶監有施愼民來代之先時文書未挍愼民遂偏當其負願乃訴求分罪有旨免愼民死除願爲新道令家本事神身習鼓舞世閒雜及著爻占相皆備盡其妙嘗以鏡照面云我不久當見天子於是出都住沈橋以庸相自業宗殼沈慶微時經請願相願曰宗君應爲三州刺史沈君當位極三公如是歷相衆人其近事所驗非一
마침내 전송의 태조(太祖)황제에게 알려져 태조가 그를 알현하였다. 동쪽 감옥에 있는 죄수와 얼굴이 아름다운 한 노비를 데려 와서, 의관으로 몸을 장식하게 하였다. 법원에게 관상을 보게 하였다. 법원은 죄수를 가리키며 말하였다.
“그대는 위태하고 어려움이 많은 사람이다. 계단만 내려서면 아마도 곧 쇠사슬을 찰 것이다.”
노비에게는 말하였다.
“너는 하천(下賤)한 사람이다. 이에 잠시 면하였구나.”
황제는 경이롭게 생각하였다. 곧 칙명을 내려 후당(後堂)에 머물면서, 음양비술(陰陽秘術)을 맡게 하였다.
032_0899_b_15L遂有聞於宋太祖太祖見之取東冶囚及一奴美顏色飾以衣冠令願相之願指囚曰多危難下階便應著鎖謂奴曰君是下賤人乃蹔得免耶帝異之卽勅住後知陰陽秘術
032_0899_c_01L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나라에 상계하여 출가하기를 구하였다. 세 번 상계하여 비로소 바람을 이루어, 상정림사(上定林寺) 승원(僧遠)의 제자가 되었다. 그 후 효무제(孝武帝)가 등극하자, 종각(宗殼)이 지방으로 나가서 광주(廣州)에 주둔하였다. 법원과 손잡고 함께 갔으며, 받들어 5계(戒)의 스승으로 삼았다.
때마침 초왕(譙王)이 역모를 꾸며 영남 땅에 격문을 날려 보냈다. 종각이 이 일로 법원에게 물어보니, 법원이 말하였다.
“그대를 따라 왔다가 잘못하면 사람을 죽이겠다. 지금 태백성(太白星)이 남두성(南斗星)을 침범하니, 법으로 미루건대 아마도 대신을 죽일 것이다. 속히 계획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면 반드시 큰 공훈을 얻을 것이다.”
과연 법원의 예언과 같았다. 종각이 예주(豫州)자사로 자리를 옮길 때도, 다시 손잡고 동행하였다. 그 후 경릉왕(竟陵王) 유탄(劉誕)이 거사하려 할 때 법원이 간언(諫言)을 진술하니, 역시 그러하였다. 그 후 법원은 자사와 함께 승려들의 걸상 다리의 높이를 줄여서, 여덟 손가락 정도로 하고자 하였다.
032_0899_b_20L後少時啓求出家啓方遂爲上定林遠公弟子及孝武龍飛宗殼出鎭廣州攜願同往奉爲五戒之師會譙王搆逆羽檄嶺南殼以諮願願曰隨君來誤殺人今太白犯南法應殺大臣宜速改計必得大勳果如願言殼遷豫州刺史復攜同行及竟陵王誕擧事願陳諫亦然願後與刺史共欲減衆僧牀腳令依八指之
당시 사문 승도(僧導)는 강서 지방에서 독보적인 존재였다. 법원이 함부로 승려들을 바로잡으려 한다고 생각하여 자못 불평하는 기색이 있었던 터이다. 마침내 이 사실을 효무제에게 알렸다. 효무제는 곧 칙명을 내려 법원을 서울로 돌아오게 하고, 법원에게 물었다.
“왜 거짓으로 채식을 하는가?”
법원이 대답하였다.
“채식한 지는 이미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황제는 직합(直閤) 심유지(沈攸之)를 시켜 강제로 핍박하여, 고기를 먹이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앞니 두 개가 부러졌으나, 그의 지조를 돌리지는 못하였다. 황제는 크게 노하여 칙명을 내렸다. 도를 그만두고 광무(廣武)장군이 되어 화림불전(華林佛殿)을 지키게 하였다.
법원은 비록 겉모습은 속인과 같았다. 그러나 마음은 선(禪)과 계율에 깃들어 한 번도 훼절한 일이 없었다. 얼마 후 황제가 죽자 소태후(昭太后)가 명령하여, 도문으로 돌아가는 일이 허용되었다.
032_0899_c_05L時沙門僧導獨步江西謂願濫匡其士頗有不平之色遂致聞孝武勅願還都帝問願何詐菜食願答食已來十餘年帝勅直閤沈攸之逼以肉遂折前兩齒不迴其操帝大勅罷道作廣武將軍直華林佛殿願雖形同俗人而拪心禪戒未嘗虧有頃帝崩照太后令聽還道
태시(太始) 6년(470)에 교장생(佼長生)이 자기의 저택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었다. 정승사(正勝寺)라 이름지어, 법원을 초청하여 그곳에 머물렀다.
북제(北齊)의 고조(高祖)황제가 황제 되기 전에 친히 어린 임금을 섬겼다. 그러면서 항상 헤아릴 수 없는 변고가 있을까 근심하여, 늘 법원에게 자문 받았다. 법원이 말하였다.
“일곱 달 뒤가 되면, 결정이 날 것입니다.”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북제의 고조황제는 즉위하자 스승의 예로 섬겼다. 무제(武帝)가 이어받아 일어나서도, 역시 스승으로 공경을 다하였다.
영명(永明) 2년(484)에 형의 상(喪)을 만나, 나라에 상계하여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빌었다. 고향에 이르러 얼마 되지 않았건만, 칙지(勅旨)가 중첩하였다.
그 후 법원은 서울로 나와 상궁사(湘宮寺)에서 쉬었다. 황제가 가마로 친히 납시어, 절로 내려와 문안하고 위로하려 하니, 법원이 말하였다.
“다리의 병이 없어지지 않아서, 만나는 일을 견딜 수 없습니다.”
황제는 마침내 말머리를 되돌려 절을 떠났다.
032_0899_c_12L太始六年佼長生捨宅爲寺名曰正勝願居之齊高親事幼主恒有不測之每以諮願願曰後七月當定果如其言及高帝卽位事以師禮武帝嗣亦盡師敬永明二年願遭兄喪乞還鄕至鄕少時勅旨重疊願後出憩在湘宮鑾駕自幸降寺省慰願云腳疾未消不堪相見帝乃轉蹕而去
032_0900_a_01L어느 날 문혜(文惠)태자가 절에 가서 문안을 드렸다. 법원이 앉으라고 청하지 않았다. 그러자 문혜태자는 절을 하고 서서, 법원에게 말하였다.
“나팔을 성대하게 불며 바라를 맑게 쳐서 공양한다면, 그 복이 어떻습니까?”
법원이 말하였다.
“예전에 보살이 8만의 기악(伎樂)으로 부처님께 공양드려도, 오히려 지극한 마음만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나무 관(管)을 불며 죽은 소가죽을 치는 것이야, 여기에서 어찌 말할 만하겠습니까?”
그의 덕을 지키고 시대에 초연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왕후ㆍ비ㆍ공주 및 사방 먼 곳의 선비와 서민들이 모두 그에게서 계를 받고, 모두가 스승의 예를 따랐다. 법원은 길을 갈 때는 반드시 곧바로 앞으로 나아가서, 속인들과 사귀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하여 하루에 수만 명씩 가득했다.
032_0899_c_21L文惠太子嘗往寺問訊願旣不命令坐文惠作禮而立乃謂願葆吹淸鐃以爲供養其福云何願曰昔菩薩八萬伎樂供養佛尚不如至今吹竹管子打死牛皮此何足道秉德邁時皆此之類其王侯妃主及四遠士庶竝從受戒悉遵師禮願往必直前無有通白感致隨喜日盈萬
법원은 얻는 것에 따라 복업을 닦았다. 한 번도 저축하거나 모으는 일이 없었다. 혹 사람을 고용해서 예불하거나, 혹 사람을 빌려 재를 유지하거나, 혹 쌀과 곡식이 들어오면 물고기와 새들에게 흩어 먹거나, 혹 음식을 사들여와 죄수들의 무리에 베풀어 주었다. 공을 일으키고 덕을 세운 수효는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법원은 또한 창도를 잘하고, 경에 근거하여 설법을 잘하였다. 마음 속 폐부로부터 우러나온 솔직한 음성으로 음률을 일삼지 않았다. 말은 잘못되고 뒤섞여도, 오직 기연에 맞는 것을 잣대로 삼았다. 그러니 “그 지혜에는 미칠 수 있어도[其智可及], 그 어리석음에는 미칠 수 없구나[其愚不可及]”라고 일컬을 만하다.
032_0900_a_06L願隨以修福未嘗蓄聚或雇人禮或借人持齋或收糴米穀散飴魚鳥或貿易飮食賑給囚徒興功立德不可紀願又善唱導及依經說法率自心抱無事宮商言語訛雜唯以適機爲可謂其智可及其愚不可及也
그 후 사흘 동안 입정(入定)하다가 문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들이 밥 소쿠리를 잃는구나.”
갑자기 병으로 누웠다. 이때 절 가까이에서 화재가 났다. 절은 바람이 부는 방향에 있기 때문에, 반드시 연기와 화염이 미칠 수밖에 없었다. 제자들이 법원을 가마에 태워 절 밖으로 나가고자 하였다. 법원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불타게 된다면, 내가 어찌 살 수 있겠느냐?”
곧 간절한 마음으로 귀의하였다. 이에 삼면이 모두 불탔으나, 오직 절만은 잿더미가 되지 않았다.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나이 87세로 세상을 마쳤다.
032_0900_a_11L入定三日不食忽語弟子云汝等失飯籮矣俄而寢疾時寺側遭燒寺在下風煙焰必及弟子欲輿願出寺佛若被燒我何用活卽苦心歸命於是三面皆焚唯寺不燼齊永元二年八十七卒
032_0900_b_01L
10) 석법경(釋法鏡)
법경의 성은 장(張)씨며, 오흥(吳興)의 오정(烏程)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도를 즐겼다. 그러나 아직 도를 따르지는 못하였다.
혜익(慧益)이 몸을 불사르면서 황제에게 스무 사람에게 도첩을 내려 출가시켜달라고 아뢰는 일을 만났다. 법경이 곧 그 중 한 사람에 들어서, 법원(法願)을 스승으로 삼았다.
이미 도에 들어서자, 그가 밟는 지조는 얼음과 서릿발 같았다. 어진 마음으로 베풀 생각을 품고, 널리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에 창도를 갈고 익히니 과거보다 뛰어남이 있었다. 북제의 경릉(竟陵) 문선왕이 후하게 예로 대접하였다.
법경은 도를 널리 펴기로 마음에 맹서하였다. 귀천을 가리지 않아, 초청하면 반드시 그곳에 갔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지 않았다. 사사로이 재물을 저축하지 않고, 항상 복된 일을 일으켰다. 건무(建武) 연간(494~497) 초기에 신도의 보시로 제륭사(齊隆寺)를 세워, 그곳에 머물렀다.
032_0900_a_17L釋法鏡姓張吳興烏程人幼而樂道事未獲從値慧益燒身啓帝度二十鏡卽預其一也事法願爲師旣得入道履操冰霜仁施爲懷曠拔成務於是硏習唱導有邁終古齊竟陵文宣王厚相禮待鏡誓心弘道不拘貴有請必行無避寒暑財不蓄私興福業建武初以其信施立齊隆寺以居之
법경은 성품이 도탑고 아름다웠다. 다른 사람을 칭찬하며 접대하는 것을 일삼았다. 이 때문에 도인과 속인들이 서로 알고, 그를 사랑하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비록 교리를 이해하는 공부는 얕았으나, 하지만 빼어난 깨달음이 자연스러웠다. 그를 비웃고 힐난하는 순간에도,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수작이 있었다.
그는 북제의 영원(永元) 2년(500)에 세상을 마쳤다. 그때 나이는 64세이다.
032_0900_b_03L鏡爲性敦美賞接爲務故道俗交知莫不愛悅雖義學功淺而領悟自然造次嘲難必有酬酢齊永元二年卒年六十四

∙도친(道親)ㆍ보흥(寶興)ㆍ도등(道登)
후에 와관사(瓦官寺)의 도친ㆍ팽성사(彭城寺)의 보흥ㆍ기사사(耆闍寺)의 도등이 나란히 모두 선창하는 것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고상한 운율과 화려한 말솜씨가, 이전의 예에다 덧붙여질 정도는 아니었다[非添前例]. 그러나 대중을 기울게 하고 남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서는, 전대에 뒤진다고 따지기 좋아하는 이들이 말하였다[論者後之].
금상폐하께서는 장사(長沙)의 선무왕(宣武王)을 위해서, 법경이 머물던 절을 수리하였다. 이름을 바꾸어 선무사(宣武寺)라 하였다.
032_0900_b_06L其後瓦官道親城寶興耆闍道登竝皆祖述宣唱韻華言非忝前例傾衆動物論者後今上爲長沙宣武王治鏡所住寺因改曰宣武也

【論】창도(唱導)란 대개 불법의 논리를 먼저 읽어줌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열어 이끄는 일을 말한다. 예전에 불법이 처음 전래되자, 함께 모인 사람들은 다만 부처님의 이름을 먼저 읽으면서 글에 의거하여 예를 드리다가, 밤중이 되면 극도로 피곤해져서 몽매함을 깨우쳐 이끌어 주는 도움이 필요하였다. 이에 따로 노련하고 덕이 있는 이를 초청하여 법좌에 올라가 설법을 하게 하였다. 혹 인연을 뒤섞어서 서술하기도 하고, 혹 한편으로 비유를 인용하기도 하였다.
그 후 여산(廬山)의 혜원(慧遠)이 도업이 곧고 빛나며 재주 있는 풍모가 우뚝 빼어났다. 재(齋)모임에 이를 때마다,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 몸소 도수(導首: 唱導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먼저 3세의 인과를 밝히고, 문득 재 모임의 큰 뜻을 말하였다. 후대가 전수받아 마침내 영원한 법칙을 이루었다. 그런 까닭에 도조(道照)와 담영(曇穎) 등 10여 명이 모두 나란히 차례대로 스승이 되어, 각기 당세에 명성을 독차지하였다.
032_0900_b_10L論曰唱導者蓋以宣唱法理開導衆心也昔佛法初傳于時齊集止宣唱佛名依文致禮至中宵疲極事資啓乃別請宿德昇座說法或雜序因或傍引譬喩其後廬山釋慧遠業貞華風才秀發每至齋集輒自昇高座躬爲導首先明三世因果卻辯一齋大意後代傳受遂成永則故道曇穎等十有餘人竝騈次相師擅名當世
032_0900_c_01L무릇 창도에서 귀중히 여기는 일이 네 가지가 있다. 즉 목소리와 말솜씨와 재능과 박식함이다[聲辯才博]. 목소리가 아니면 대중을 깨우칠 길이 없고, 말솜씨가 아니면 시절에 맞게 할 길이 없으며, 재능이 아니면 채택할 만한 말이 없고, 박식하지 않으면 말에 근거가 없다.
만약 울리는 운율이 종이나 북과 같은 경지에 이르러 사부대중의 마음을 놀라게 한다면, 이것은 목소리의 작용이다. 토해낸 말이 나가서 시절에 적합하여 차질이 없다면, 말솜씨의 작용이다. 아름답게 만들고 빛나게 아로새겨 문장이 자유자재로 빼어나다면, 재능의 작용이다. 경론을 정확히 헤아리고 역사에서 요점을 채택한다면, 박식함의 작용이다. 만약 이 네 가지 일을 훌륭히 해낼 수 있다면, 사람과 시대에 적절히 부합시킬 수 있다.
가령 출가한 오부대중을 위해서는, 모름지기 절실하게 덧없음을 말해 주어서, 간곡하게 참회를 베풀어야 한다. 만약 군왕과 장자(長者)들을 위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세속의 고전까지 아울러 인용하여, 아름답게 말을 모아 문장을 이루어야 한다. 만약 아득히 먼 범부와 서민을 위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사물을 지적하고 형태를 만들어서,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여야 한다. 만약 산중의 백성과 들판에 처한 농민을 위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그에 해당하는 말로써 피부에 닿게 설하여, 죄를 배척하게 하여야 한다.
032_0900_b_20L夫唱導所貴其事四焉聲辯才博非聲則無以警衆非辯則無以適時非才則言無可採非博則語無依據至若響韻鍾鼓則四衆驚聲之爲用也辭吐後發適會無差辯之爲用也綺製彫華文藻撗逸之爲用也商攉經論採撮書史博之爲用也若能善茲四事而適以人時如爲出家五衆則須切語無常苦陳懺悔若爲君王長者則須兼引俗典綺綜成辭若爲悠悠凡庶則須指事造形直談聞見若爲山民野處則須近局言辭陳斥罪目
무릇 이러한 변화는 일과 더불어 일으켜야만, 시절을 알고 대중을 알아, 더욱더 훌륭하게 설법을 하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비록 그렇다고 하더라도, 짐짓 말이 간절함으로써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정성을 기울여서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가장 상등급에 속한다.
예전 초창기의 고승들은 본래 여덟 개로 나누어 전기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이내 경사(經師)와 창도의 두 기능을 더 경영하였다. 비록 이것이 도에 있어서는 끝자리에 속하지만, 속인을 깨닫게 하는 데서는 숭상할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두 조항을 더하여 열 가지로 전기를 충족시킨 것이다.
왜 그런가? 가령 팔관재(八關齋)의 첫날 저녁에 이르러, 선요(旋繞: 부처님의 주위를 도는 일)하여 두루 도는 것이 끝나고, 안개가 덮이며 분위기가 가라앉아 등불만이 홀로 고요히 빛나면, 사부대중이 마음을 한 곳에 모아 두 손을 모으고 입을 다물어 말이 없어진다.
032_0900_c_09L凡此變態與事而興可謂知時知衆又能善說雖然故以懇切感人傾誠動物此其上也草創高僧本以八科成傳卻尋經導二技雖於道爲末而悟俗可崇故加此二條足成十數何者至如八關初旋繞行周煙蓋停氛燈惟靖燿衆專心叉指緘默
032_0901_a_01L그때 창도하는 이는 향로를 받쳐 들고, 강개한 목소리로 머금고 토하며 누르고 드러낸다. 말솜씨가 궁하지 않아야, 말이 마땅히 끝없이 나아간다. 그리하여 덧없음을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전율케 한다. 지옥을 말하면, 공포와 눈물이 바꾸어가며 떨어진다. 전생의 인연을 따지면, 마치 지난날의 일을 보듯 한다. 다가올 과보를 파헤치면, 이미 미래의 과보가 보인다. 느긋하고 즐거운 일을 이야기하면, 정과 포부가 화창하고 흐뭇해진다. 애처롭고 슬픈 일을 서술하면, 눈물을 뿌리며 시린 감정을 머금는다.
이에 모든 대중이 마음을 기울이고 온 법당 안이 측은한 슬픔에 잠기리라. 오체를 자리에다 던지면서 머리가 부서져라 슬픔을 말하고, 각각 손가락을 튀기며 사람마다 부처님을 부르리라.
그리하여 한밤중에서 새벽에 이르러 종루(鍾漏)가 곧 파하면, 별자리와 은하수가 바꾸어 회전하여 거룩한 모임도 더 계속할 수 없다고 말하여서, 더욱더 사람들로 하여금 절박한 회포로 가득하여 연모의 정을 싣게 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를 담당하는 것이 도사의 작용이다.
그 사이에 경사(經師)의 전독(轉讀)에 관한 일은 앞장에서 이미 보였다. 모두가 깨달음을 칭송하고, 시절에 때맞추어 사악한 마음을 뽑아내며, 믿음을 세워서 한 푼이라도 칭송할 만한 일이 있기 때문에, 『고승전』의 말미에 편입한 것이다.
032_0900_c_16L爾時導師則擎爐慷慨含吐抑揚辯出不窮言應無盡談無常則令心形戰慄語地獄則使怖淚交零徵昔因則如見往業覈當則已示來報談怡樂則情抱暢悅敍哀慼則灑淚含酸於是闔衆傾心擧堂惻愴五體輸席碎首陳哀各各彈指人人唱佛爰及中宵後夜鍾漏將罷則言星河易轉勝集難留又使人迫懷抱載盈戀慕當爾之時導師之爲用也其閒經師轉讀事見前章皆以賞悟適時拔邪立信其有一分可故編高僧之末
무릇 모아 익힌 것이 아직 넓지 못하고, 외우고 연구한 시간이 길지 않아, 때에 다다라 민첩한 말재주가 없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마땅히 옛 것을 따라서 써야 한다.
그러나 재능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제작도 다른 사람에게서 이루어진 경우에는, 음률을 붙여서 토하고 들이쉬는 소리에 걸핏하면 허물과 잘못이 나타난다. 그 가운데는 전해서 베껴 쓰는 과정에서 와전되고 틀린 것도 모두 그것에 의거하여 부르고 익히게 된다. 마침내 어(魚) 글자와 노(魯) 글자처럼 잘못 읽어서 뒤섞여 어지러우니, 서박(鼠璞: 無用之物)이라 의심하게 만든다.
혹 때로는 예배드리는 중간에 예참하라는 소(疏)가 문득 이르면, 미리 준비하여 저축한 것이 없으므로, 부끄럽게 머리를 숙인다. 임시로 뽑아내 만든 말은 더듬거리고 껄끄러워 말하기 어렵다. 뜻과 생각이 거칠고 멍해져서, 마음과 입이 서로 어긋나고 뒤틀린다. 앞에서 한 말이 이미 오래 되었는데도, 뒤에 이을 말은 아직도 자리 잡지 못한다. 옷을 추스르고 기침을 하면서 때를 연장시키려는 태도를 보여, 자리에 줄지어 앉은 사람들이 한심해서 보는 도중에 이를 드러내어 웃는다.
시주는 시절에 응한 복을 잃고, 대중승려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어, 착함이 생기는 싹이 끊어진다. 오직 부질없는 의론의 의혹만이 불어나고, 비로소 함부로 나불거린다는 비난을 사므로, 끝내는 종사를 교대시키는 허물을 이루고야 만다. 만약 이와 같다면 어찌 고승이라 할 수 있겠는가?
032_0901_a_05L若夫綜習未廣諳究不長旣無臨時捷辯必應遵用舊本然才非已出製自他成吐納宮商見紕謬其中傳寫訛誤亦皆依而唱致使魚魯淆亂鼠璞相疑或時禮拜中閒懺疏忽至旣無宿蓄恥欲屈臨時抽造謇棘難辯意慮荒忙口乖越前言旣久後語未就抽衣謦示延時節列席寒心觀途啓齒主失應時之福衆僧乖古佛之教絕生善之萌祇增戲論之惑始獲濫吹之譏終致代匠之咎若然豈高僧之謂耶
高僧傳卷第十三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여덟 가지의 악기. 곧 금(金: 鍾)ㆍ석(石: 磬)ㆍ사(絲: 絃)ㆍ죽(竹: 管)ㆍ포(匏: 笙)ㆍ토(土: 壎)ㆍ혁(革: 鼓)ㆍ목(木: 祝敔) 등을 일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