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1080_T_004
- 033_0175_a_01L홍명집 제4권
- 033_0175_a_01L弘明集卷第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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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달성론達性論1)[하승천] -
033_0175_a_02L梁揚都建初寺釋僧祐撰
何承天達性論
顏光祿延之難
達性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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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천지의 양의兩儀2)는 자리가 정해져 있고 제왕이 이를 구획하였으니, 우주에서 이보다 더 존귀한 것이 없습니다. 하늘에는 음과 양의 구분이 있고, 땅에는 강건함과 부드러움의 작용이 있으며, 인간에게는 인仁과 의義의 규범이 있습니다.3) 사람은 천지가 아니면 생겨나지 못하고, 천지는 사람이 아니면 영령하지 못합니다.4) 천ㆍ지ㆍ인 3재才는 한 몸이어서 서로 만나야 완성됩니다. 따라서 천지에서 맑고 조화로운 기를 품부 받아 신명神明5)이 특히 뛰어나고, 감정이 고금을 포괄하며, 지혜가 만물6)에 두루 미치고, 뛰어난 사려가 현묘한 이치7)에 닿고, 제작하는 것이 조물주8)와 동등하고, 인과 능력에 귀착하는 사람, 이러한 사람이 재위자가 됩니다. - 033_0175_a_05L夫兩儀旣位,帝王參之,宇中莫尊焉。天以陰陽分,地以剛柔用,人以仁義立。人非天地不生,天地非人不靈,三才同體,相須而成者也。故能稟氣淸和、神明特達。情綜古今,智周萬物。妙思窮幽賾,制作侔造化。歸仁與能,是爲君長。
- 백성을 위로하고 보양하며 하늘을 도와 덕을 베풀면, 해와 달이 밝게 빛나고, 기린ㆍ봉황새ㆍ거북ㆍ용의 네 가지 신령스러운 동물9)이 나타나며, 상서로운 바람이 음률에 맞고, 네 가지 기氣는 옥처럼 빛나게10) 조화롭고, 아홉 가지 곡식11)ㆍ고기12)ㆍ육지의 생산물ㆍ해산물ㆍ초와 소금 등 온갖 음식13)이 그 식탁14)에 갖추어지게 됩니다. 집ㆍ수레ㆍ금그릇ㆍ토기ㆍ비단실과 모시로 짠 검고 누런 섬유15)가 제기와 복식으로 제공됩니다. 예법에 따라 장식하고, 8음音16)으로 즐거워합니다. 만물을 다스리고 생명을 증식하는 일이 모두 갖추어집니다. 저 백성은 쓰임새가 검소하면 쉽게 풍족해지고, 쉽게 풍족해지면 힘에 여유가 생깁니다. 힘에 여유가 생기면 인간의 마음의 뜻과 감정이 편안해지고, 치세를 즐기는 마음이 비로소 생겨납니다. 일이 간략하게 되면 흔들리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면 신명이 영령해집니다. 신명이 영령해지면 사려가 면밀하게 되고, 세상을 구제하고 다스리는 일이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천지는 검소함으로 백성을 가르치고, 건곤乾坤은 간단하고 쉽게17) 사람을 계도합니다. 이리하여 가르침이 간절하고 은근합니다. 어찌 날아가는 새나 물고기ㆍ뱀ㆍ벌레 같은 중생과 같겠습니까?
- 033_0175_a_12L撫養黎元,助天宣德。日月淑淸,四靈來格;祥風協律,玉燭揚暉。九穀芻豢,陸產水育;酸鹹百品,備其膳羞。棟宇舟車,銷金合土;絲紵玄黃,供其器服。文以禮度,娛以八音。庀物殖生,罔不備設。夫民用儉則易足,易足則力有餘,力有餘則志情泰,樂治之心於是生焉。事簡則不擾,不擾則神明靈,神明靈則謀慮審,濟治之務於是成焉。故天地以儉素訓民,乾巛以易簡示人,所以訓示慇懃若此之篤也。安得與夫飛沈蠉蠕竝爲衆生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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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75_b_01L이러한 중생은 수렵할 때도 적당한 시기가 있고, 이용하는 경우에도 바른 법도가 있습니다. 겨울에 불을 피워18) 잡을 경우에는 강풍이 부는 계절을 기다리고, 물고기를 낚을 때에는 승냥이가 짐승을 제사지내고 수달이 물고기를 제사지내는 계절을 기다리는 것은 하늘의 때를 따르기19) 때문입니다. 대부20)는 사슴새끼나 알을 취하지 않고, 일반 백성은 촘촘한 그물21)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행위行葦22)의 노래로 만들어지고 작은 물고기에까지 은혜를 베푸는 것은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것을 아끼기 위해서입니다. 푸줏간과 부엌23)을 멀리하고, 다섯 가지 범죄[五犯]24)를 삼가하며, 은나라 제후가 축수의 내용을 바꾸고,25) 공자가 낚시질은 하지만 그물로 물고기를 잡지 않은 것26)은 인仁의 도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생명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어서 육신이 사라지고 정신은 흩어집니다. 이것은 봄에는 만물이 소생하고 가을에는 쇄락하며 사계절이 번갈아 되돌아오는 것과 같습니다. 어찌 다시 형체를 받아 태어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시경詩經』에서 “덕있는 군자는 복을 구하기 위하여 비뚤어진 생각을 하지 않는다”27)고 한 것은 도를 넓히는 것28)이 자신에게 달려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시경』에서 “3후后29)가 하늘에 계신다”30)고 한 것은 정령精靈이 승천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으로 욕망을 품고 있으면서도 밖으로 방편의 가르침에 신경쓰며, 깊이 현재의 생[方生]31)만 생각하면서 내세의 응보를 바라는 것은 과거의 스승들도 아직 말해 본 적이 없는 일입니다. 나는 원래 불민하지만32) 이 가르침을 잊지 않고 본받고자 합니다. - 033_0175_b_01L若夫衆生者,取之有時用之有道。行火俟風暴,畋漁候豺獺,所以順天時也。大夫不麛卵,庶人不數罟。行葦作歌,宵魚垂化,所以愛人用也。庖廚不邇,五犯是翼。殷后改祝,孔釣不網,所以明仁道也。至於生必有死,形弊神散;猶春榮秋落,四時代換。奚有於更受形哉?詩云:“愷悌君子,求福不回。”言弘道之在己也。三后在天,言精靈之升遐也。若乃內懷嗜欲,外憚㩲教。慮深方生,施而望報。在昔先師,未之或言。余固不敏,罔知請事焉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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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석하형양달성론釋何衡陽達性論 - 033_0175_b_13L釋何衡陽達性論
- [안연지顔延之33)]
- 顏延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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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앞에서 본 귀하의 논의는 식견이 높고 사고가 넓으며, 인간의 도를 생물 일반에서 멀리 벗어날 정도로 높였습니다. 만사에 명료한 증거와 정확한 이치를 잘 드러내고, 마음으로 유학의 가르침을 도와서 이단을 일소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감화받고자 하는 사람이 어찌 잊을 리 있겠습니까?
다만 음악이 단조롭기만 하면 조화를 잃을까 염려됩니다. 따라서 대략 살펴서 몇몇 의심되는 항목을 열거하였으니, 나중에 편지에서 상세한 설명을 듣고자 합니다. - 033_0175_b_14L前得所論,深見弘慮。崇致人道,黜遠生類。物有明徵,事不愆義。維情輔教,足使異門掃軌。況在蘄同,豈忘所附。徒恐琴瑟專一,更失闡諧。故略廣數條,取盡後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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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75_c_01L
2
귀하가, “천지의 2의儀와 한 몸이고, 3재才가 함께 만난다”고 한 사람은 반드시 덕에 합치하는 사람이고 일반인을 부르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생물류를 똑같이 중생이라고 부르며, ‘심식을 함유한 존재[含識]’34)가 어찌 최상의 현명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겠습니까? 그러므로 3재에 대해 논할 때는 포로와 노예에게서35) 취하지 않습니다. 또 중생이라는 말이 어찌 성인이나 지혜로운 자를 함부로 하는 말이겠습니까? 구별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중생이라고 말해도 결코 질서를 어지럽힐 근심은 없습니다. 만약 두 가지36) 가르침을 모두 들어서 저 번잡한 수식을 없애고 공통된 실질을 찾는다면, 배음倍音과 궁宮이 조화되어 부절을 합치듯이 합치할 것입니다. 어찌 결단코 여呂 음37)에만 집착하여 율律 음을 훼손하겠습니까? - 033_0175_b_19L足下云:同體二儀,共成三才者,是必合德之稱,非遭人之目。然摠庶類同號衆生,亦含識之名,豈上哲之謚。然則議三才者無取於氓隸,言衆生者亦何濫於聖智。雖情在序別,自不患亂倫,若能兩藉方教,俱擧達義,節彼離文,採此共實,則可使倍宮自和,析符復合,何詎怏怏執呂以毀律?
- 또 위대한 덕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38)은 만물의 공통점이고,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명을 얻는 이유가 다를 수 있겠습니까? 다르지 않은 생명은 중衆이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다만 많은 중생들 중 어리석은 것과 지혜로운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다른 생물들을 부려서 자신을 보양하고, 생물은 부려져서 사람을 보양합니다. 처음에는 혹 그대로 따르더라도 결국 그 생명은 잦아들어 죽고 맙니다. 다양한 계기가 일어나서 정욕과 기호를 금지하지 못하면, 생명을 해치고 번다한 사물을 괴롭히며 천리天理를 막아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황성皇聖은 이와 같은 상태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한순간에 막힌 것을 다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사물을 살피는 가르침을 펴서 자연의 때에 따르라는 경서의 가르침을 따르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인仁의 도를 열고 의식[識]을 키우며 극단39)을 멈추고 서서히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도에 뜻을 둔 사람은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그만둘 것입니다.
- 033_0175_c_04L且大德曰生,有萬之所同,同於所萬,豈得生之可異?不異之生,宜其爲衆。但衆品之中,愚慧群差。人則役物以爲養,物則見役以養人。雖始或因順,終至裁殘。庶端萌起,情嗜不禁。生害繁慘,天理鬱滅。皇聖哀其若此,而不能頓奪所滯。故設候物之教,謹順時之經,將以開仁育識,反漸息泰耳。與道爲心者,或不劑此而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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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귀하는 또한 생사를 사물의 번성과 조락으로 보고, 여러 가지 존재하는 것들 모두가 그렇다고 보실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의 존재와 소멸은 마른나무 줄기의 변화와는 다를지도 모릅니다. 만약 정신이 초목과 같다면, 당연히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3후后가 하늘에 계신다고 한 것은 정령精靈이 승천해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정령이 반드시 존재하며 초목과 다르다고 한다면, 육체를 받아 다시 태어난다는 주장은 당신의 말씀에 의하자면 3후의 뛰어난 선행이 하늘에 태어나는 응보를 받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후생後生을 부정하고자 정령이 승천해 있다는 이론을 세웠지만, 훼손하려다 도리어 성립시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억지로 배제할 수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정령이 있을 뿐 어떠한 육체의 상도 없다면, 하늘에 있다는 것은 무엇에 의거하여 성립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함부로 단정하는 것이 겁나서 귀하의 생각을 그대로 따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나아가나 물러가나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아직 타당하다고 여겨지지 않습니다. - 033_0175_c_12L又知大制生死,同之榮落。類諸區有,誠亦宜然。然神理存沒,儻異於枯荄變謝。就同草木,便當煙盡。而復云三后昇遐,精靈在天。若精靈必在,果異於草木,則受形之論,無乃更資來說。將由三后粹善,報在生天耶。欲毀後生,反立昇遐。當毀更立,固知非力所除。若徒有精靈,尚無體狀,未知在天,當何憑以立。吾怯於庭斷,故務求依放。而進退思索,未獲所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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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계[氣]와 운명계[數]에서는 작용하고 감응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베푸는 일과 그 응보는 반드시 일치합니다. 반드시 일치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응보를 바랄 것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베푼 은혜를 잊은 사람은 요구하는 것이 없고, 공적을 보존하는 사람은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기대가 있는 사람은 아직 선하다고 할 수 없고, 은혜를 다 없앤 사람이어야 선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현명함과 어리석음의 차이가 있고, 뜻에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응보를 기대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여 덕을 세우는 것이 모두 응보를 구할 수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40)은 평소 말하기를, 베푸는 것을 중시하는 이는 베푼 것을 기억하지 않고, 선비41)는 의로운 일을 할 때 은혜를 베풀면서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물며 도의 요체를 들은 사람이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욕심을 갖고 행동하면, 하는 일마다 임시방편을 거리낌없이 하게 되지 않습니까? 어째서 귀하께서는 매번 이를 끌어올리려 하지 않고 나쁜 방향으로 타락하게 합니까? 불교도들을 혹독하게 비난하고 꾸짖더라도, 친절한 가르침을 받아 벌받는 일이 없게 하고 싶습니다. 귀하는 평소에 자신의 아성을 굳게 지키시기 때문에 편지 드리기가 어려웠고, 나 역시 칩거하고 있어서 근심하는 마음을 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근에 손수 쓰신 편지를 받고 귀하의 논지를 비평하는 뜻을 펴 보였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 혹 있을 것입니다.
안연지가 삼가 올립니다. - 033_0175_c_22L凡氣數之內,無不感對;施報之道,必然之符。言其必符,何猜有望。故遺惠者無要,存功者有期。期存未善,去惠乃至。人有賢否,則意有公私。不可見物或期報,因謂樹德皆要,且經世恒談,貴施者勿憶,士子服義,猶惠而不有。況在聞道要,更不得虛心,而動必懷嗜、事盡憚㩲耶!曾不能引之上濟,每驅之下淪。雖深誚挍責,亦已厚言不伐。足下嬰城素堅,難爲飛書。而吾自居憂患,情理無託。近辱襃告,欲其布意裁往釋,慮不或値,顏延之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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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영가顔永嘉에게 답하다[하승천] - 033_0176_a_11L答顏永嘉
- 귀하의 편지는 삼가 잘 받아 보았고, 깊은 취지를 다시 따져 보았습니다. 귀하는 3재를 구별하고 실증하는 방법이 정밀하였고, 도심道心을 널리 베풀어 불교도들을 끌어안았으며, 저 세상과 이 세상을 일관되게 성심을 다해 만물에까지 미치게 하였습니다. 아름답게 실천하고 가르침을 널리 펼치니, 끼어들 틈이 거의 없는 듯합니다. 그러나 물러나서 아름다운 가르침을 살펴보니, 북극성을 우러러보는 것 같아서 길을 잃었고, 아직 전적으로 깨닫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033_0176_a_12L 敬覽芳訊,硏復淵旨。區別三才,步驗精粹,宣演道心,襃賞施士,貫綜幽明,推誠及物。行之於己則美,敷之於教則弘殆無所閒退尋嘉誨之來將欲令參觀斗極復迷反逕思或昧然未全曉洽,故復重申本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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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천지의 2의와 한 몸이고 3재가 함께 만난다”고 한 사람은 반드시 덕에 합치하는 사람42)입니다. ‘심식을 함유한 존재[含識]’가 어찌 최상의 현명한 사람을 부르는 호칭이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도를 세울 때는 인의仁義에서 취하였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인의 표시이고, 부끄러움을 알고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이 의義의 단서입니다.43) 우산牛山44)의 나무도 큰 도끼, 작은 도끼로 잘려 나가면 본성이 꺾이고, 맑고 깨끗한 생각45)도 이해 관계에 따라 어지럽혀집니다. 선의 싹을 정성껏 키우고 그 선한 마음을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가지고 있기만 하고 헤아리지 못한다면, 잘못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 033_0176_a_18L足下所謂“共成三才”者,是必合德之稱。上哲之人,亦何爲其然?夫立人之道,取諸仁義,惻隱爲仁者之表,恥惡爲義心之端。牛山之木,翦性於䥸斧;恬漠之想,汨慮於利害。誠直滋其萌孽,援其善心,遂乃存而不筭得無過與?
- 033_0176_b_01L또한 “3재에 대해 논할 때는 포로와 노예에게서 취하지 않습니다. 또 중생이라는 말이 어찌 성인이나 지혜로운 자를 함부로 하는 말이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확실히 듣기는 했지만, 아직 두 가지 길이 어떻게 구분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 이윤伊尹과 안회顔回는 하급의 낮은 사람에 붙는 것입니까, 자산子産과 계찰季札은 높은 성인에 비견되는 사람입니까? 끊임없이 노력하여 깨닫지 못한 부분을 없애고 반드시 양 끝을 들어서 궁宮과 화和를 부절처럼 합치시킨다면, 어찌 선에 이르지 않았다고 하겠습니까?
- 033_0176_b_01L又云:“議三才者,無取於氓隸,言衆生者,亦何濫於聖智?”旣已聞命,猶未知二塗。當以何爲判?將伊顏下麗,寧僑扎上附?企望不倦,以祛未了。必令兩藉俱擧宮和符合,豈不盡善?
- 또한 “위대한 덕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의 공통점이고,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명을 얻는 이유가 다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사람은 태어나 균등하게 위대한 덕을 입지만, 이것을 중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성인도 똑같이 5상常46)을 품부 받지만, 그를 중인衆人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어떻게 서로 다르지 않은 생명을 얻었다고 반드시 중衆이라고 해야 합니까?
- 033_0176_b_06L又曰:“大德曰:生有萬之所同,同於所萬,豈得生之可異?”非謂不然。人生雖均被大德,不可謂之衆生;譬聖人。雖同稟五常,不可謂之衆人,奚取於不異之生,必宜爲衆哉?
- 편지에서 “사람은 다른 생물들을 부려서 자신을 보양하고, 생물은 부려져서 사람을 보양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크게 구분한다면, 돌아보건대 제 논지와 동일합니다. 정욕과 기호를 제어하지 않아 생물을 해치고 괴롭히는 것은 지나치고 교만한 일이므로, 성인도 원래 이를 제거하였습니다.
- 033_0176_b_10L來告云:“人則役物以爲飬,物則見役以飬人。”大判如此,便是顧同鄙議,至於情嗜不禁,害生慘物。所謂甚者泰者,聖人固已去之。
- 또한 “도에 뜻을 둔 사람은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전에 그만둘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물어보겠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기 전 그만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이 죽이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가르침을 받아 모두 죽이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만약 자신이 죽이지 않고 시장47)에서 필요한 것만 사 가지고 온다면, 이것은 원래 군주가 푸줏간과 부엌을 멀리한다는 뜻과 같습니다. 반드시 각 가정까지 적용시키려는 의도라면, 나는 귀하의 논지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 033_0176_b_14L又云:“以道爲心者,或不劑此而止。”請問不止者,將自己不殺耶?令受教咸同耶?若自己不殺,取足市廛,故是遠庖廚,意必欲推之於編戶,吾見雅論之不可立矣。
- 033_0176_c_01L또한 “만약 정신이 초목과 같다면, 당연히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정령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어디에 의거해야 성립되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신백神魄48)은 황홀한 것이고, 떠도는 영혼[魂]49)이 변화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기氣가 위로 발양하고50) 사람이 이를 보고 슬픔을 느낄 때, 어디든지 떠나갑니다. 중유仲有51)는 죽음을 알고자 하였으나 답을 듣지 못하였고, 자공子貢은 본성과 천도에 대해 듣지 못하였습니다.52) 죽었다가 다시 육체를 받아 태어나지 못한다는 것은 앞에서 밝힌 내용 그대로입니다. 정령이 어디에 의거해서 성립하는가는 공자의 대답을 그대로 따르려고 합니다. “베푸는 일과 그 응보는 반드시 일치합니다”라는 점에 대해서 보면, 우씨于氏는 문을 높이 하여 선한 일을 많이 쌓은 집에 경사가 생기기를 기대하였고,53) 박양후博陽侯는 선제宣帝의 어린 시절에 환란에서 구해 준 공을 자랑하지 않아 공후의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들이 어찌 내세의 육체와 관련되겠습니까?
- 033_0176_b_18L又云:“若同草木,便當煙盡,精靈在天將,何憑以立?”夫神魄忽怳,遊魂爲變,發揚悽愴,亦于何否之?仲由屈於知死,賜也失於所問。不更受形,前論之所明言所憑之方。請附夫子之對,及“施報之道,必然之符”,當謂于氏高門,俟積善之慶,博陽不伐,膺公侯之祚,何關於後身乎?
- 또한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은 평소 말하기를, 베푸는 것을 중시하는 이는 베푼 것을 기억하지 않고, 선비는 의로운 일을 할 때 은혜를 베풀면서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참말입니다. 그러나 약간 아쉬운 것은 보답이 있기 때문에 은혜를 베푼다고 하는 것은 설교자들이 이끄는 방법이고, 보답을 기뻐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평소에 힘쓰는 일입니다.
- 033_0176_c_03L又云:“經世恒談施者,勿憶士子服義,惠而不有。”誠哉!斯言,微暢設報,以要惠說徒之所先,悅報而爲惠,擧世之常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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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을 의심하여서 몇 겁의 죄를 받고 보시에 힘써서 몇 배의 응보를 받는 것은 우리들의 도와 다릅니다. 그 때문에 따르지 않았을 뿐입니다. 귀하께서는 이를 위로 끌어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나도 있는 힘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부로서 실질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지혜54)를 저열하다고 보기 때문에 행하지 않습니다. 만약 베풀어서 위급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남겨서 공적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면, 고명한 귀하의 입장에 비추어 보아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항상된 마음恒心55)을 가지라는 가르침에 따랐지만, 오래되어도 변하지 못하였습니다. 내심으로 거백옥蘧伯玉56)에게 부끄러울 따름이니, 남을 비난할 겨를이 없습니다.
삼가 하승천이 씁니다. - 033_0176_c_06L疑經受累劫之罪,勤施獲積倍之報。不似吾黨之爲道者,是以怏怏耳。知欲引之上濟,亦甚所不惜,但丈夫處實者,頗陋前識之華,故不爲也。若乃施非周急,惠存功擧,揆諸高明,亦有恥乎?此吾率其恒心,久而不化,內慚璩子,未睱有所謂也。何承天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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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형양에게 다시 반박하다[안연지顔延之] - 033_0176_c_12L重釋何衡陽
- 잠시 농사일에 종사하여57) 몸소 밭을 가꾸고 있습니다. 농사짓는 동안은 들에서 일하는 노인을 친구 삼아 농사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고, 경작하고 가축 키우는 데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1년의 수확을 이야기하거나 경작을 헤아리느라 훌륭한 논의를 들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지금 다시 심오한 논의를 들으니 위안이 됩니다.58) 편지의 내용이 지극히 정밀하여 제 머리가 둔한 것이 더욱 부끄럽게 생각됩니다. 지금은 지난 편지의 내용은 놓아두고 아직 말하지 않았던 것들을 써 보겠습니다.
- 033_0176_c_13L薄從歲事,躬斂山田,田家節隙,野老爲儔。言止穀稼,務盡耕牧,談年計耦,無聞達義,重獲微辯,得用昭慰。啓告精至,愈慚固結。今復忘書往懷,以輸未述。
- 그런데 제 마음대로 이치를 탐구하기보다는 3재에 대한 성인의 문장에 따라 분석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3재의 논의는 본래 『주역』의 3획畫에 바탕을 두는데, 3획을 나열할 때 중효中爻는 군주의 덕59)을 말합니다. 따라서 태상太上60)을 초치할 만큼 신비스럽고, 원수元首61)와 하나일 정도로 숭고합니다. 그리하여 이전에 천지와 합치하는 덕을 지닌 사람이 아니면 사물에 충분히 감응할 수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점은 맑은 사려로 널리 궁구해 보아도 아직 동의하지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귀하의 입장은 3재를 가진 사람들을 똑같이 포섭하여 버리는 일 없이 폭넓게 받들고, 만물에 돈독히 대하겠다는 뜻이 넉넉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위치를 정리하는 방법이 복잡하고, 양陽을 의심하는 일62)이 많아지는 것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 033_0176_c_18L夫藉意探理,不若析之聖文三才之論,故當本諸三畫。三畫旣陳,中稱君德,所以神致太上,崇一元首。故前謂自非體合,天地無以允應。斯弘硏其淸慮,未肯存同。猶以恐兼容罔棄廣載不遺,篤物之志誠爲優贍,恐理位雜越疑陽遂衆。
- 033_0177_a_01L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測隱之心]이 일어날 때 박애를 베풀고, 남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생길 때 하늘이 정직한 사람을 도와주는 올바른 행위를 극진히 한다면, 최상의 인仁과 의義가 됩니다. 여기에 대해 나는 논박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정을 쓰는 사람은 적고, 이익만 따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인의의 본분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아직 지극하게 되지 못한 사람은 천지의 2의儀에 견주어 짝할 곳이 없습니다.
- 033_0177_a_01L若惻隱所發窮博愛之量。恥惡所加,盡祐直之正,則上仁上義。吾無閒然,但情之者寡。利之者衆豫有其分。未臻其極者,不得以配擬二儀耳。
- 지금 최상의 인의에 다다른 사람을 스승으로 하고, 아직 이러한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그 힘을 빌어서 존경과 사양의 마음을 북돋아 다투는 마음을 없애게 합니다. 큰 도끼와 작은 도끼의 날을 무디게 하여 이해 관계의 다툼이 되는 단서를 없애고, 백 세대의 백성들이 믿음이 돈독한 길로 나아가게 한다면,63) 어떠한 싹이 자라지 않겠으며, 어떠한 선이 이끌어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귀하는 이 점을 생각지 않고 비방하시니, 그 의도를 잘 모르겠습니다. 3재는 동등하게 나열되므로, 한쪽으로 치우친 재주를 가진 사람을 포함할 수 없습니다. 중생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무생無生의 사람과 뒤섞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하여 이쪽(유교)에서는 포로와 노예를 넣지 않았고, 저쪽(불교)에서는 성인과 지혜로운 자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유교와 불교 두 가지를 모두 거론하는 취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 033_0177_a_05L今方使極者爲師,不極者爲資扶其敬讓去其忮爭,令䥸斧鑄刃利害寢端,驅百代之民,出信厚之塗,則何萌不滋,何善不援,而誣以不筭未値其意?三才等列,不得取偏才之器,衆生爲號,不可濫無生之人。故此去氓隸彼甄聖智,兩藉俱擧旨在於斯。
- 자산과 계찰도 아직 도와 일체가 되지 못하였는데, 황왕皇王이 어찌 위의 단계에 붙을 수 있겠습니까? 이윤과 안회64)는 모두 일기一氣의 변화65)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므로, 아래 중생으로 붙이는 것이 당연합니다. 두 길의 구분은 턱66)으로 가리키는 것보다 쉽습니다.
- 033_0177_a_12L若僑札未能道一,皇王豈獲上附?伊顏猶共賴氣化,宜乎下麗。二塗之判易於賾指。
- 또한 “사람은 태어나 균등하게 위대한 덕을 입지만, 이것을 중생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성인도 똑같이 5상常을 품부 받지만, 그를 중인衆人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인을 중인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신명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지금 성인도 중생과 똑같은 생명을 받았는데, 어찌 중생과 동등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뛰어난 영혼으로 구분해야지 그들이 얻은 생명을 다르게 보면 안 됩니다. 다만 ‘중衆’이라는 명칭을 기피하는 것뿐이고, ‘중’의 실질에는 어긋나지 않습니다.
- 033_0177_a_14L又知以“人生雖均被大德,不可謂之衆生,譬聖人雖同稟五常,不可謂之衆人。”夫不可謂之衆人,以茂人者神明也。今已均被同衆,復何諱衆同?故當殊其特靈,不應異其得生。徒忌衆名,未虧衆實。
- 촉나라로 통하는 위험한 길67)을 두려워하여 도망치려고 해도 결국 피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인간이 다른 생물을 부려서68) 자신을 보양하고 다른 생물은 부려져서 사람을 보양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존재와 지혜로운 존재가 경쟁하여69) 어리석은 계산으로 서로 제압하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일은 인간의 지혜에서 나온 것이지 자연의 이치[天理]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그 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났다가 마지막에는 슬픔이 막혀서 사라지고 맙니다. 어찌 귀하가 소ㆍ돼지70) 등의 온갖 존재와 그 취지를 같이하겠습니까?
- 033_0177_a_19L得無似蜀梁逃,畏卒不能避。所謂役物爲養見,役養人者,欲言愚慧相傾,惛筭相制,事由智出,非出天理。是以始矜萌起,終哀鬱滅,豈與足下芻豢百品共其指歸?
- 033_0177_b_01L움직이는 대로 쉽게 흘러가는 것은 아래 백성들의 성품이고, 변화71) 속에서 절도를 지키는 것은 위의 성인의 공덕입니다. 담과 제방을 조심스럽게 쌓아 놓고도 도둑이 넘어올 것을 걱정합니다. 하물며 만물을 비호하는 모든 방법을 갖추어 놓고 바라는 대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극단을 전개하는 것인데, 어찌 아주 심한 것을 제거한다는 논의이겠습니까? 따라서 만물을 걱정한다는 말도 인애가 부족한 사람과 즐거움과 슬픔을 같이할 수 없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살생을 즐긴다는 말은 일부 인간들에게 해당하는 것이고, 생명을 좋아하는 감정이 더 넓습니다. 제가 “도에 마음을 둔다”고 한 것은 생명을 좋아하는 마음이 넓고, 허례를 배격하며, 본성을 따라서 완성하고, 실질을 체험하여 요절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72) 그 이익과 은택은 하늘까지 통하지만, 은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찌 은혜가 새끼 사슴과 알을 취하지 않는 정도에만 한정되고, 행위가 늑대와 수달이때에 맞추어 사냥하거나 물고기를 잡는 정도에 그치겠습니까?
- 033_0177_b_01L凡動而善流,下民之性;化而裁之,上聖之功。謹爲垣防猶患踰溢,況乃罔不備設以充侈志?方開所泰,何議去甚?故知慘物之談,不得與薄夫同憂樂,殺意偏好生情博。所云“與道爲心”者,博乎生情,將使排虛,率遂跖實,莫夭利澤,通天而不爲惠。庸適恩止,麛卵事法豺獺耶?
-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저잣거리와 푸줏간에 죄를 전가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저잣거리와 푸줏간 밖에서도 신체를 제어하여 보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농神農73)과 혜강嵇康74)이 저술한 글에 대해, 중장통仲長統75)은 그 일을 훌륭하게 여겼고, 교신矯愼76)은 그 업적을 정교하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옛날에 전해오는 말이 있었고, 지금 그 사람에 대해 들었다는 것입니다. 어찌 꼭 살을 도려내는 것을 맑고 조화로운 본성이라고 여기고, 고기를 데워 소금물에 담그는 것을 선을 돕는 방법으로 삼겠습니까? 만약 집집마다 똑같이 미루어 나가기 힘들다고 하여 내 논의가 성립되지 못할 것을 걱정한다면, 이것은 관숙管叔과 채숙蔡叔 두 사람이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여77) 주나라의 덕이 먼저 없어진다고 보는 것과 같습니다. 원대한 꿈을 잘 펴서 오랜 시간 동안 성과를 찾아 나아간다면, 날마다의 계획78)이 해마다 다 이루어져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 033_0177_b_08L推此往也,非唯自己,不復委咎市廛乎庖廚,且市庖之外,非無御養。神農所書,中散所述,公理美其事,仲彦精其業。是亦古有其傳,今聞其人,何必以刲刳爲稟和之性,爓瀹爲翼善之具哉?若以編戶難齊憂鄙論未立是見,二叔不 咸慮周德先亡。儻能申以遠圖要之 長世,則日計可滿歲功可期。
- 정령과 초목이 참으로 구별된다면, 떠도는 영혼에 대한 귀하의 답변도 정령을 인정하는 말일 것입니다. 만약 정령이 존재하고 있어도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세상에 어찌 형체가 없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올바른 답변을 해 주셔야 합니다. 공자가 죽음에 관한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은 유有와 무無를 아직 판별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귀하는 이미 정령이 존재한다는 것을 판별하였는데, 어찌 유무를 판별하지 못한다는 공자의 답변에 동조할 수 있습니까? 귀하는 학문을 좋아한다고 말씀하셨지만 누구를 좇아야 좋은지를 아직 모르고 계신 듯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밝은 길과 어두운 길이 멀리 떨어져 있고, 감추어져 알기 어려운 일과 분명히 드러난 일이 현격하게 떨어져 있어서, 마침내 밝은 달79)이 비추는 일을 그치게 하고 세상의 지혜로 마음의 작용을 한정해 버리는 것과 같이 됩니다.
- 033_0177_b_16L精靈草木果已區別,遊魂之答,亦精靈之說。若雖有無形天下,寧有無形之有?顧此惟疑,宜見正定。仲尼不答有無未辯。足下旣辯其有,豈得同不辯之答?雖子嗜學,懼未獲所附。或是曉晦塗隔,隱著事懸,遂令明月廢照世,智限心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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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77_c_01L귀하는 편지에서 “베푸는 일과 그 응보는 반드시 일치한다는 점에서 보면, 우공을 능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을 살펴보면 귀하의 뜻과 반대되는 것으로, 중도에서 그만두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는 세상에서 옥을 가지고만 있는 사람은 옥 파는 시장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서譯胥80)가 세속의 풍속에 이끌려서 자기 나라의 사정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완전히 다 비추었다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최근의 해석을 상세히 다시 서술해 주시기를 청합니다.
앞에서 베푸는 일과 응보를 기氣와 수數라고 칭한 것은 만물에 허망한 것이 없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각자 같은 종류에 감응합니다. 같은 종류에 감응하는 것들 중 사람 마음이 가장 큽니다. 마음의 움직임은 수를 헤아리는 예력隸歷에서도 얻을 수 없는데, 그 진실이 중첩된 내용은 도저히 찾아낼 수 없습니다. 이제 세속의 견해를 근거로 확실한 증거를 삼으려고 생각합니다. - 033_0177_b_23L謂“必符之,言體之極于罔講求”。反意如非相盡。或世人守璞,受讓玉市將譯胥牽俗還說,國情茍未照盡。請復其具申近釋。報施首稱氣數者,以爲物無妄,然各以類感,感類之中,人心爲大。心術之動,隸歷所不能得,及其積致于可勝原,而當斷取世見據爲高證。
- 장주莊周81)는 “밭과 농장의 경작이 조잡하면 보報의 수확밖에 얻을 수 없고, 풀 깎는 방법이 소홀하면 소홀한 보를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순자荀子도 “보응의 형세는 각각의 종류에 따라 이른다”82)고 하였습니다. 내생에 다시 태어날 몸을 위하여 훈계하는 것이지만, 존중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자비가 많은 사람은 그 운명을 깊이 보았기 때문에 근본83)을 바르게 말하는 것이지, 좋은 결과를 맞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 033_0177_c_07L莊周云:“莽鹵滅裂報亦如之。”孫卿曰:“報應之勢各以類至。”後身著戒可不敬與慈護之人,深見此數,故正言其本非邀。
- 장점을 키우고, 악을 막으며, 백성들이 도를 그대로 따르도록 하고, 생명의 부류들을 구제하여 죽음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게 하면, 경사는 만물에 널리 미치고 온갖 신[百神] 중 으뜸으로 존경받을 것입니다. 어찌 조祚는 자윤子胤에서 끝나고 복福은 경상卿相의 벼슬자리에 한정되겠습니까? 항상 선으로 구원하면, 선도 그에 따라 형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그림자와 실물처럼 그대로 두어도 저절로 오는 것이니, 어찌 은혜를 구하고 과보를 즐긴다고 하겠습니까? 불경을 의심하는 죄나 보시에 힘쓰는 것도 가까운 징험으로는 불쌍하다는 감정에서 나온 것이지만, 멀게는 덕교(德敎:불교)를 시기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따라서 공적을 자랑하는 것을 벌주는 것은 좋으나 나무람이 지나치면 현명한 사람을 잃는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버리면 보존하게 된다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고,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차이가 있음은 지난번 편지에서 서술하였으므로 다시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생각건대 실질에 처하면서 영화를 누추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두터운 덕으로 박한 것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위급한 경우를 구휼하지 않는 보시와 명예를 구하고자 하는 은혜를 행하는 사람은 참으로 도를 해치는 사람입니다. 귀하가 부끄럽게 여길 뿐 아니라 저 자신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84)
- 033_0177_c_10L其末長羙遏惡反民大順,濟有生之類入無死之地令慶周兆物尊冠百神,安宜祚極子胤福限卿相而已。常善以救,善亦從之,勢猶影表,不慮自來何言乎?要惠悅報疑罪勤施,似由近驗,吝情遠猜德教。故方罰矜功,而濫咎忘,賢遺存異義,公私殊意已備前白。差不重云,想處實陋華者,復見其居厚去薄耳。若施非周急惠而期譽,乃如之人誠道之蠹,惟子之恥丘亦恥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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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거듭 안영가顔永嘉에게 답하다[하승천] - 033_0177_c_20L重答顏永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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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78_a_01L나는 젊어서 내 좁은 소견85)을 믿었고,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마음속에 담아만 둔다면, 가슴속이 썩어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비늘을 가지고 헤엄치고 날개에 의지해 날고 싶습니다. 후의로써 본래의 생각을 말씀하시고 거듭 설명해 주시니, 은혜가 깊습니다. 고증은 주도면밀하고, 말씀은 유려하며 풍부하였습니다.
훌륭한 옥이라도 때에 따라 흠집이 생기면 천한 사람도 그 흠집을 지적하고, 달도 기울어져서86) 그늘이 지면 야인이라도 그 이지러짐을 바라봅니다. 제가 어찌 논변하기를 좋아하겠습니까마는,87) 어쩔 수 없습니다. 일보 진전된 가르침88)을 청하기 위해 질문하여 모르는 부분을 철저히 연구하고자 합니다. - 033_0177_c_21L吾少信管見老而彌篤,旣言之。難云:將堙腐方寸,故願憑流颺以託鱗翮,厚意垂懷,慧以重釋,稽證周明,華辭博贍,夫良玉時玷,賤夫指其瑕,望舒抱魄,野人睨其缺,豈伊好辯未獲云?已復進請益之問,庶以硏盡所滯。
- 답장에는 “3재의 논의는 본래 『주역』의 3획에 바탕을 두는데, 3획을 나열할 때 중효는 군주의 덕을 말합니다. 따라서 태상을 초치할 만큼 신비스럽고, 원수와 하나일 정도로 숭고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귀하의 논지와 같이 『주역』의 3획을 3재로 본다면, 초효를 땅의 효에 비견하고 3효로 하늘의 위치[位]를 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피하여 마음에 번민하지 않는다”89)는 것은 사물을 두텁게 싣는 땅90)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자는 강건하다”91)는 것은 저 푸르고 푸른92)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양의兩儀가 의탁하는 바가 없는데, 어떻게 사람의 도93)를 세우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다만 효가 중화中和의 위치에 있으므로, 군주의 덕에 대응하는 것이 마땅할 뿐입니다.
- 033_0178_a_04L來告云:“三才之論故當本諸三畫,三畫旣陳中稱君德,所以神致太上,崇一元首。”若如論旨,以三畫爲三才,則初擬地爻三議天位。然而“遁世無悶”,非厚載之目。“君子乾乾”,非蒼蒼之稱,果兩儀罔託,亦何取於立人?但爻在中和,宜應君德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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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날 때 박애를 베풀고, 남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 하늘이 정직한 사람을 도와주는 올바른 행위를 극진히 한다면, 최상의 인仁과 의義가 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말이야말로 인과 의를 체득하는 것이 3재가 된다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자산과 계찰도 위의 단계인 성인이라고 할 수 없고, 이윤과 안회도 아래 중생으로 붙이는 것이 당연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하로서 황상黃裳94)을 입는 사람조차 3재 중 군주의 덕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턱으로 가리키는 것처럼 쉽다고 하지만, 높고 낮음의 표준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미혹한 저는 알기 어렵습니다.
저 음양이 인간의 기氣를 만들고, 강유剛柔가 인간의 본성을 부여합니다. 둥근 머리95)와 네모난 발, 용모가 남다르지 않은 것, 측은한 마음과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같은 것들이 모두 그러합니다.96) 다만 천지 2의儀에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인과 의를 단서로 삼습니다. 그런데도 귀하께서는 사람의 자격을 한정하여 신하에게 명名과 기器를 수여하는 것처럼97)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은혜로운 사람과 청결한 선비98)의 성품까지 짐승의 무리99)에 비견하고, 거의 완전한 현인100)을 어패류와 동일한 기로 간주해 버렸습니다. 『주역』에서 상象을 만든 의도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 033_0178_a_11L又云:“惻隱窮博愛之量,恥惡盡祜直之方,則爲上仁上義。”便是許體仁義者爲三才尋。又云:“僑、札未獲上附,伊、顏宜其下麗。”則黃裳之人其猶不及,雖賾之指高下無准,故惑者未悟也。夫陰陽陶氣,剛柔賦性,圓首方足,霄貇匪殊,惻隱恥惡悠悠。皆是但參體二儀,必擧仁義爲端耳。知欲限以名器,愼其所假,遂令惠人絜士,比性於毛群;庶幾之賢,同氣於介族。立象之意,豈其然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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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78_b_01L또한 “지금 성인도 중생과 똑같은 생명을 받았는데, 어찌 중생과 동등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뛰어난 영혼으로 구분해야지 그들이 얻은 생명을 다르게 보면 안 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뛰어나고 영묘한 정신이 중생과 다르다면, 생명을 얻는 이치가 어찌 잠시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은 이치에 근거하는데 이치가 다르다면, 중생과 동일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에 근거101)한 것인지요? 만약 이 생명을 반드시 중생에게 따르도록 집착한다면, 혼합되어 형성된 사물102)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 033_0178_a_21L又云:“已均被同衆復何諱衆同?故當殊其特靈,不應異其得生。”夫特靈之神旣異於衆,得生之理何嘗暫同,生本於理而理異焉,同衆之生,名將安附?若執此生,名必使從衆,則混成之物亦將在例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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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담과 제방을 조심스럽게 쌓아 놓고도 도둑이 넘어올 것을 걱정합니다. 하물며 만물을 비호하는 모든 방법을 갖추어 놓고 바라는 대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데 있어서이겠습니까? 그것이야말로 극단을 전개하는 것인데, 어찌 아주 심한 것을 제거한다는 논의이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귀하께서는 처음에 “황성皇聖은 동물의 생명을 취할 때에도 그 시기를 살피고, 삼가 하늘의 때에 순응한다는 경서의 가르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극단을 피하고 서서히 나아가는 도道의 입장에 되돌아가려고 한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지금 다시 “그것이야말로 극단적인 것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셨는데, 이것이 제 비천한 견해를 비난한 것인지 성인을 나무라신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033_0178_b_04L又云:“謹爲垣防猶患踰溢,況乃罔不設備,以充侈志,方開所泰何議去甚?”足下始云:“皇聖設候物之教,謹順時之經。將以反漸息泰。”今復“以方開所泰爲難。”未詳此將難鄙議,將譏聖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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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저잣거리와 푸줏간 밖에서도 신체를 제어하여 보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신농神農과 혜강嵇康이 저술한 글에 보이듯이, 어찌 꼭 살을 도려내는 것을 맑고 조화로운 본성이라고 여기고, 고기를 데워 소금물에 담그는 것을 선을 돕는 방법으로 삼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하늘을 제사지내는 인사禋祀103)와 땅에 매장하는104) 희생에는 견율繭栗105)을 사용하고, 종묘사직106)에는 소ㆍ양ㆍ돼지의 3생牲을 사용하며, 야채가 없는 소고깃국과 돼지고깃국,107) 수북이 쌓인 두豆와 희생을 담은 적조108)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70세 노인109)은 고기를 먹어야 비로소 배가 부른데, 어찌 풀뿌리와 약돌만을 진열하여 완전한 음식과 최고의 약을 완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귀하의 논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대의 뛰어난 논의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이 일을 한순간에 없앨 수 없음을 물러나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 033_0178_b_09L又云:“市庖之外,豈無御養?神農所書,中散所述,何必以刲刳爲稟,和爓瀹爲翼善?”夫禋瘞繭栗,宗社三牲,曉薌豆俎,以供賓客。七十之老俟肉而飽,豈得唯陳列草石,取備上藥而已?吾所憂不立者,非謂洪論難持,退嫌此事,不可頓去於世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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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세상에 어찌 형체가 없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의문에 대해서 올바른 답변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의 취지를 살펴보면, 귀신이 있다는 것은 싫어하지 않는 듯합니다. 확실히 귀신에게는 물질적인 증거가 있어야 미혹이 없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인도의 책에서 귀신이 생물의 종류로 되어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옛날 사람들이 귀신을 가르침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경전에 쓰여 있고, 모든 책110)들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정鄭나라 자산子産과 오吳나라 계찰季札도 이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운화雲和의 피리로 6변變의 음악을 연주하면 실제로 하늘의 귀신[天神]이 내려오고, 용문의 거문고로 9변變을 연주하면 사람과 귀신이 함께 이릅니다.111) 귀하는 평소에 『주례周禮』를 늘 잡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내용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형체가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힐난하는 데 지리한 논변을 하려는 것입니까? - 033_0178_b_15L又云:“天下寧有無形之有?顧此惟疑宜見正定。”尋來旨,似不嫌有鬼,當謂鬼宜有質得無惑。天竺之書說,鬼別爲生類故耶?昔人以鬼神爲教,乃列于典經,布在方策。鄭僑吳札亦以爲然,是以雲和六變,實降天神,龍門九成,人、鬼咸格。足下雅秉『周禮』,近忽此義。方詰‘無形之有’,爲支離之辯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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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78_c_01L또한 “내생에 다시 태어날 몸을 위하여 훈계하는 것이지만, 존중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자비가 많은 사람은 그 운명을 깊이 지켜보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귀하가 말씀하신 자비가 많은 사람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유교 경전 이외의 책에 나온 응보의 설에 근거한 것이라면, 모두 임시방편의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최상의 이치를 강구하면서 성인의 말씀을 좇아 해석하지 않고, 많은 이들의 불분명한 말을 좇아 서로 부추기고 함부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물로 물난리를 구제하려는 것112)과 같지 않습니까?
또한 “만물에 허망한 것이 없고, 각자 같은 종류에 감응합니다. 항상 선으로 구원하면, 선도 그에 따라 형세를 갖게 됩니다. 이것은 그림자와 실물처럼 그대로 두어도 저절로 오는 것입니다”라고 하셨습니다. - 033_0178_b_23L又云:“後身著戒可不敬與慈護之人,深見此數。”未詳所謂慈護者,誰氏之子?若據外書報應之說,皆吾所謂㩲教者耳。凡講求至理曾不析。以聖言多採譎怪以相扶翼,得無似以水濟水耶?又云:“物無妄然,必以類感,常善以救,善亦從之,勢猶影表,不慮自來。”
- 이 말이 사실이라면 같은 종류로 감응하는 사물은 반드시 경중이 같고, 그림자와 실물의 형세도 길고 짧은 길이에 일정한 정도가 있을 것입니다. 토목을 장엄하게 수식하는 것도 자애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때에 맞추어 수렵하더라도 잔혹한 성품을 뿌리째 드러낸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상찬賞讚하여 아름답고 화려한 천상계로 올라가고, 무엇을 벌하여 어둡고 고통스런 지옥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좋은 말113)도 사람의 잘잘못을 논할 수 없고, 법을 세울 때 표준이 없는 데114) 한결같이 이르게 됩니다. 게다가 보육하는 사람115)은 사랑을 전할 때 돼지나 개의 창자를 먹지 못하도록 주의시키고,116) 솜씨 좋은 요리사는 소 힘줄과 뼈가 모여 있는 곳117)을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합니다. 하물며 저 성인은 해와 달에 비견할 정도118)로 총명하고, 3통統119)을 열 정도로 교화가 있습니다.
- 033_0178_c_07L斯言果然,則類感之物,輕重必侔,影表之勢脩短有度。致飾土木,不發慈愍之心;順時獀狩,未根慘虐之性。天宮華樂,焉賞而上昇?地獄幽苦,奚罰而淪陷?昌言窮軒輊,立法無衡石。一至於此,且阿保傅愛愼及溷腴,良庖提刀情怵母族。彼聖人者,明竝日月化開三統。
- 만약 보응이 반드시 부합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가르침을 방해하여 복희와 요임금 시대에 대해 입 다물고 말하지 않고, 주공ㆍ공자 시대를 묻어 두고 드러나지 않게 하고, 처음으로 법망을 만들어 수억의 죄를 일으키고, 희생물을 정하고 긴 밤 동안 계속되는 벌을 내려 저 천연의 음식120)을 버리고 이 소ㆍ양ㆍ개ㆍ돼지 고기를 맛있다고 하며,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는 어진 마음도 없이 구덩이에 빠지게 하는 잔혹한 일을 함부로 행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성인의 지혜라고 해도 아직 불완전한 점이 있는데, 귀하가 아무리 기이한 생각을 선호한다고 해도 성인을 멸시할 정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 033_0178_c_15L若令報應必符,亦何妨於教,而緘扃羲唐之紀,埋閉周孔之世?肇結網罟,興累億之罪;仍制牲牢,開長夜之罰。遺彼天廚,甘此芻豢,曾無拯溺之仁,撗成納隍之酷。其爲不然,宜簡淵慮,若謂窮神之智,猶有所不盡,雖高情愛奇想,亦未至於侮聖也。
- 033_0179_a_01L귀하께서는 인의仁義를 논하면서 “인정이 있는 사람은 적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것을 말하면서 현명함을 버리고 응보를 망각한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인정이 있는 사람이 적은데 누가 현명함을 버릴 수 있으며,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응보를 망각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즐겨 보시하는 사람을 추천하여 인을 행하고자 하는 무리를 기대하고, 응보를 망각하는 의도를 부연하여 의로 향하는 마음으로 이끌고 간다면, 의가 바로 여기에 있게 되고 머지않아 인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 “생명의 부류들을 구제하여 죽음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게 하면, 경사는 만물에 널리 미치고 온갖 귀신들[百神] 중 으뜸으로 존경받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에서 귀하의 논거는 근거가 없어서 본 논에서 언급할 내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진秦나라 군대가 도망치려고 할 때 행인이 함부로 말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121) 어찌 서로 접근할 수 있겠습니까? 자리에 앉으십시오.122) 제가 귀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 033_0178_c_21L足下論仁義則云:“情之者少,利之者多。”言施惠,則許其遺賢忘報。在情旣少,孰能遺賢利之者多,曷云忘報?若能推樂施之士,以期欲仁之儔,演忘報之意,別向義之心,則義寔在斯,求仁不遠。“至於濟有生之類,入無死之地,慶周兆物,尊冠百神”,斯旨宏誕,非本論所及,無乃秦師將遁,行人言肆乎?豈其相迫,居吾語子?
- 성인은 지위가 높아서 온갖 귀신들과 우두머리의 위치를 겨루지 않습니다. 처음이 있으면 끝도 있는데, 어찌 죽음이 없는 경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저 유계幽界와 명계明界를 판별하고 만물을 닦아 잘 밝혀서 처음에 끈을 묶어 문자로 쓰던 원시 시대123)에서 마침내 문교文敎가 번창한 현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본성124)을 도로 이끌어서 직접 명예로움을 받는 일125)이 없게 하고, 잘 조화하여 박애의 결실을 상하게 하지 않습니다.126) 밭을 갈고 물고기를 잡아서 현명한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보양하고, 3품品127)의 획득물은 빈객의 푸줏간을 가득 채웁니다. 금종128)과 석경이 아름다운 음악으로 일어나고, 생황과 피리가 장단이 맞고, 술에 취하고 덕으로 배불러서129) 만년 이후까지 큰 은혜를 받고, 재야에 머무는 사람은 학업이 날마다 새로워지고,130) 벼슬을 하는 자는 선왕의 가르침을 펴서 정성이 현명한 임금에게 드러나고 은택이 만물에 미치도록 하며, 용의 문양131)이 훌륭하게 밖을 장식하고 명옥鳴玉132)이 절도를 이루는 것, 이것이 요임금과 공자의 즐거운 경지133)입니다.
- 033_0179_a_07L聖人在上不與百神爭長。有始有卒,焉得無死之地?夫辯章幽明,硏精庶物。及初結繩,終繁文教。性以道率,故絕親譽之名;犯違造化,無傷博愛之量。以畋以漁,養兼賢鄙。三品之獲,實充賓庖,金石發華,笙籥協節,醉酒飽德,介茲萬年。處者弘日新之業,仕者敷先王之教。誠著明君,澤被萬物,龍章表觀,鳴玉節趍,斯亦堯孔之樂地也。
- 033_0179_b_01L불우한 시기에는 아구阿丘134)와 계곡에 은거하면서 자신을 선하게 하고,135) 닭을 잡고136) 기장 농사를 지으면서 뜻을 품고, 또는 솥137)을 등에 지고 음식을 해 먹으며 아득한 후세까지 명성을 날리고, 또는 양을 죽이고138) 칼을 두드리면서 고귀한 뜻을 뜬구름같이 높이 떨치는 것, 이것이 또한 군자가 마음 둘 곳입니다. 어찌 반드시 선을 쌓은 집에서 받는 복139)을 누추하게 보고 징험할 수 없는 내세의 행복을 희구하며, 살아서는 현세140)의 진실한 기쁨을 등지고 오로지 사역에 피곤함을 느끼고 돌아갈 곳도 없어야 하겠습니까? 바람을 묶어 두고 그림자를 붙잡는 것141)은 중용中庸의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오랑캐의 방식을 그리워하여 현혹시키는 것은 통달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고, 사문의 무릎 꿇는 예법142)과 중국의 읍양揖讓143)의 예는 결국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귀하께서는 두 가지를 다 취하려는 생각을 버리시고 한 가지 길144)만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독량獨梁ㆍ이숙二叔ㆍ세인世人ㆍ역서譯胥 등의 비유는 저의 「달성론」의 본뜻과 무관하므로,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 033_0179_a_16L及其不遇,考槃阿㵎,以善其身,殺鷄爲黍,聊寄懷抱。或負鼎割烹,揚隆名於長世。或屠羊鼓刀,凌高志於浮雲,此又君子之處心也。何必陋積善之延祚,希無驗於來世;生背當年之眞歡,徒疲役而靡歸?係風補景,非中庸之美,慕夷眩妖,違通人之致。蹲膜揖讓終不竝立,竊願吾子捨兼而遵一也。及蜀梁、二叔、世人、驛胥之譬,非本義所繼,故不復具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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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형양에게 다시 설명하다[안연지] - 033_0179_b_03L又釋何衡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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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생각은 살피기 어렵고, 신묘한 감응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혜강은 “평범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하여도 그 단서를 얻을 수 없다”145)고 말하였는데, 어찌 천박하고 오만한 사람이 그 단서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다만 위魏나라 문제文帝의 화완포火浣布146) 등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전론典論의 문장은 명제 때 깎여 나가고, 등순縢循147)은 두꺼비 수염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헤아릴 수 있는 영역 밖의 일을 자신의 억측으로 재단하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귀하는 불교의 허실을 자세히 살피셨습니다. 방서方書148)가 불후의 것이고, 독특한 통찰력이 견고하고 정밀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 말하지 못한 내 생각을 귀하의 답변에 비추어 조목조목 해석하고자 합니다. 일은 화복이 뒤섞여 있고 사상은 오랑캐와 중국의 것이 잡다하게 섞여 있어서 간결하게 쓰고자 하나 저절로 번잡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후로는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 033_0179_b_04L聖慮難原神應不測。中散所云“中人自竭,莫得其端”,豈其淺岸所可探抽?徒以魏文火布見刊異世,滕循蝦鬚取愧當時,故於度外之事,怯以意裁耳。足下已審其虛實。方書之不朽,獨鑑堅精,難復疑閒,聊寫餘懷,依答條釋,事緯殃福,義雜胡華。雖存蕳章,自至煩文。過此以往余欲無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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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답변에 “만약 논지와 같이 『주역』의 3획을 3재로 본다면, 초효를 땅의 효에 비견하고 3효로 하늘의 위치를 논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세상을 피하여 마음에 번민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물을 두텁게 싣는 것을 지목하는 것이 아닙니다. ‘군자가 강건하다’라고 하는 것은, 푸르고 푸른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양의兩儀가 기탁하는 대상이 없는데, 어떻게 사람의 도149)를 세우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다만 효爻가 중화中和의 위치에 있으므로, 군주의 덕에 대응하는 것이 마땅할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79_b_12L答曰:“若如論旨,以三畫爲三才,則初擬地爻三議天位。然而‘遁世無悶’,非厚載之目。‘君子乾乾’,非蒼蒼之稱,果兩儀罔託,亦何取於立人。但爻在中和,宜應君德耳。”
- 033_0179_c_01L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전대의 학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순상淳象150)은 3획에서 시작하고, 겸괘兼卦는 6효爻에서 마치고 있습니다. 3획의 기본은 3재의 위치로 정해집니다. 6효가 아직 변화하지 않은 건괘乾卦151)에서는 군룡群龍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괘重卦 뒤는 출처진퇴의 뜻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피한다,’ ‘군자는 종일 건건한다,’ ‘물에 잠긴 용이니 등용하지 말라,’ ‘함께 나아간다’152)고 한 것은 성인이때에 알맞게 적응한다는 뜻으로, 괘를 겹쳐 쓸 때의 방법입니다. 만약 초효가 땅이 아니고, 3위位가 하늘이 아니며, 양의兩儀가 의탁할 곳이 없고, 중효中爻를 사람이 도를 세우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귀하가 앞에서 논한 ‘3재가 동체’라는 주장은 무엇을 근거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게 됩니다.
- 033_0179_b_17L釋曰:聞之前學,淳象始於參畫,兼卦終於六爻,參畫立本三才之位。六爻未變群龍所經,是以重卦之後,則以出處明之。故‘遁世’,‘乾乾’,‘潛藏’,‘偕行’,聖人適時之義,兼之道也。若以初爻非地,三位非天。以爲兩儀罔託立人無取。未知足下前論三才同體,何因而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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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주역』 「계사전繫辭傳」의 학설은 계승하면서 사승師承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째서 유독 복괘復卦의 뜻은 이해하면서 단상單象의 뜻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까? 만약 복희伏羲와 문왕文王 이외에 따로 3재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춘추春秋』의 새로운 해석’153)이므로 나는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세상을 피한다’거나 ‘건건하다’는 것이 비록 만물을 덮고 싣는 천지天地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지만, 한 괘의 전체 중에서는 아직 낮고 높음의 실질을 상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변동하는 말에 따라 근본을 세운 뜻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귀하는 “효가 중화中和의 위치에 있으므로, 군주의 덕에 대응하는 것이 마땅할 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중화의 효만 있고 결국 중화의 사람이 없다면, 효를 장차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 만약 중화의 효는 있으나 중화의 덕을 갖춘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중화의 의미에도 어긋나고 중화의 체體에 부합한다는 논의에도 크게 벗어난 것이 될 것입니다. - 033_0179_c_02L若猶受之繫說不軼師訓,何獨得之複卦喪之單象?如義文之外,更有三才。此自『春秋』新意,吾無識焉。且‘遁世’,‘乾乾’,雖非覆載之名,一體之中,未失卑高之實,豈得以變動之辭,廢立本之義?又“知以爻在中和,宜應君德。”若徒有中和之爻,竟無中和之人,則爻將何放?若中和在德,則不得人背中,和體合之論固未可殊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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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답변은 “최상의 인仁과 최상의 의義, 즉 인의를 체득한 사람만 3재才가 된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자산과 계찰도 위의 단계인 성인이라고 할 수 없고, 이윤과 안회도 아래 중생으로 붙이는 것이 당연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하로서 황상黃裳을 입는 사람조차 3재 중 군주의 덕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턱으로 가리키는 것처럼 쉽다고 하지만, 높고 낮음의 표준이 서 있지 않기 때문에 저는 알기 어렵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79_c_10L答曰:“上仁上義,便是許體仁義者,爲三才尋。又云:僑札未獲上附,伊顏宜其下麗。則黃裳之人其猶不及。雖賾之指高下無准,故惑者未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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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앞서 말한 최상의 인과 최상의 의는 인의를 겸비한 극치로서 천지와 대등한 입장에서 그 덕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일 뿐입니다. 악을 조금 부끄러워하거나 박애가 있다고 하여 곧 3재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또 이렇게 질문하시니 이상합니다. 그 중에서 4대大154)는 왕만이 그 법칙을 체득하여 3재를 파악합니다. 이 양의兩儀는 성인이 아니면 머무를 수 없습니다. 『주역』과 『노자』는 입장이 같습니다. 되풀이하여 의혹을 갖지 않도록 하십시오.
동로東魯의 유교적 계층에서 말하더라도 자산과 계찰은 이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지극한 지위까지 오르도록 하였습니까? 서방 불교의 기준에 의하면, 이윤과 안회는 아직 법신法身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낮은 중생의 단계에 속해야 마땅합니다. 귀하께서 보내 주신 논의는 주공周公의 입장에서 불교를 해석하였기 때문에 그 뜻을 모순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진의를 잘 파악하시기를 바랐는데, 장황한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 033_0179_c_14L釋曰:所云上仁上義,謂兼摠仁義之極,可以對饗天地者耳。非謂少有恥愛便爲三才。前釋已具怪復是問四。彼域中唯王是體知三,此兩儀非聖不居。易、老同歸可無重惑。案東魯階差,僑札理不允備,何由上附至位?依西方准墨,伊顏未獲法身。故當下麗生品。來論挾姬議釋,故兩解此意,冀以取了,反致辭費。
- 033_0180_a_01L성인은 임금이자 스승이고, 현인은 신하이고 제자가 됩니다. 신묘한 공적에 접하여 대업에 영향 받는 것과 같이 실현하고, 출처진퇴出處進退를 함께할 수 있습니다. 침묵과 발언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지의 덕의 일부분을 이처럼 체득하면, 어찌 황상의 사람다워지는 일을 등지겠습니까? 귀하가 헛되이 원도元道와 자리를 하나로 하지 못함을 보고 함부로 비난하고, 3재를 갖춘 사람을 극치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모르는 것은 절도를 지키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보면 어떻게 표준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 033_0179_c_23L聖作君師,賢爲臣資,接暢神功影嚮大業,行藏可共嘿語亦同。體分至此何負黃裳?議者徒見不得等位,元首撗生誚恨,而不知引之極地。更非守節之情,指斷如斯。何謂無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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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저 음양이 인간의 기氣를 만들고, 강유剛柔가 인간의 본성을 부여합니다. 둥근 머리와 네모난 발, 용모가 남다르지 않은 것, 측은한 마음과 부끄러워하는 마음과 같은 것들이 모두 그러합니다. 다만 천지 2의儀에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인과 의를 단서로 삼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0_a_05L答曰:“夫陰陽陶氣剛柔賦性,圓首方足霄貇匪殊,惻隱恥惡悠悠。皆是。但參體二儀,必擧仁爲端耳。”
- 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만약 둥근 머리와 네모난 발을 가졌으면, 측은한 마음과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반드시 똑같이 갖추고 있고, 용모도 특히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모두가 천지 2의에 참여하여 3재를 갖춘 사람이 된다면, 장교莊礄155)와 도척盜跖 같은 사람들도 3재를 갖춘 사람 중에 들어갑니까? 만약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가로로 두 눈이 있는 것156)이 동일하다고 하여 대인과 같은 대열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 아닙니까? 평범한 사람들은 품격이나 사람됨이 대인처럼 되기 어렵습니다. 이미 “어진 사람은 어짊을 편안히 여기고, 지혜로운 자는 어짊을 이롭게 여긴다”157)고 하였고, “힘써 행하는 자는 인仁에 가깝다,”158) “두려워하는 사람은 억지로 인을 행한다”159)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인仁한 사람의 바른 자세와 같이 본다면, 진위의 구별을 해치게 됩니다. 장자는 “세상에 착한 사람은 적고, 착하지 않은 사람은 많다”160)고 하였습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이와 같다면, 어떻게 “사람마다 모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 033_0180_a_07L釋曰:若謂圓首方足必同恥惻之實,霄貇匪殊,皆可參體二儀蹻跖之徒,亦當在三才之數耶?若誠不得,則不可見撗目之同,便與大人同列。悠悠之倫品量難齊。旣云“仁者安仁,智者利仁。”又云:“力行近仁”,“畏罪强仁。”若一之正位,將眞僞相冒,莊周云:“天下之善人寡,不善人多。”其分若此,何謂“皆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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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귀하는 답장에서 “귀하께서는 사람의 자격을 한정하여 신하에게 명名과 기器를 수여하는 것처럼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인하고 은혜로운 사람과 청결한 선비의 성품까지 짐승의 무리에 비견하고, 거의 완전한 현인을 어패류와 동일한 기로 간주해 버렸습니다. 『주역』에서 상象을 만든 의도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0_a_16L答曰:“知欲限以名器順其所假,遂令惠人絜士比性於毛群,庶幾之賢同氣於介族,立象之意豈其然乎?”
- 이에 대해 설명해 보고자 합니다. 명名과 기器를 수여하는 것처럼 사람을 한정하는 것은 실로 천지에 감응하는 바탕이 갖추어져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인의를 모든 사람에게 거짓으로 하여도 의심스러운 것은 어떻게 하겠습니가? 영靈을 내포하고 사람이 된 것은 짐승들과 동일하게 될 수 없으니, 기를 받아서 태어난 것은 청결한 선비임에 틀림없습니다. 3재인 사람은 그 영을 보내는 것을 흉내내면서 그 생을 모방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과 생도 하나로 보아 구별될 수 없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 비평이 아니겠습니까?
- 033_0180_a_19L釋曰:名器有限,良由資體不備。雖欲假之疑陽,謂何含靈爲人,毛群所不能同。稟氣成生,絜士有不得異象。放其靈非象,其生一之而已。無乃誣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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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80_b_01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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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답변에 “이미 한결같이 삶을 받고 있는 것은 중생과 같다. 저 뛰어나고 영묘한 정신이 중생과 다르다면, 생명을 얻는 이치가 어찌 잠시라도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은 이치에 근거하는데 이치가 다르다면, 중생과 동일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디에 근거한 것인지요? 만약 이 생명을 반드시 중생에게 따르도록 집착한다면, 혼합되어 형성된 사물도 그 범주에 들어가는 것입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0_a_23L答曰:“已均被同衆云云,特靈之神旣異於衆,得生之理何嘗暫同?生本於理而理異焉。同衆之生名將安附?若執此生,名必使從衆,則混成之物亦將在例耶?”
- 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저는 앞에서 “위대한 덕을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만물의 공통점이고, 모든 생명체가 공유하는 것입니다. 어찌 생명을 얻는 이유가 다를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귀하께서는 답장에서 그렇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어떻게 다르지 않은 생을 취하여 반드시 중생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논박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생명은 중생이라고 하는 점은 버리고 공통점만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공통이면서 중생이 아니라는 말이 어떻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훌륭한 영을 구별하게 하고, 그 생명을 얻는 이유는 구별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번 답서에는 “생명을 얻는 이치가 어찌 잠시라도 같을 수 있겠습니까? 생명은 이치를 근본으로 하고 이치는 다른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생명을 얻는 이치라는 것이 원래 음양을 말하는 것인지요? 나는 그것이 성인과 범인의 차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잠시라도 같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치가 다르다고 하여 음양이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음양 외에 별도로 생명을 받는 이치가 있다는 것이니,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에 도취塗趣161)하는 것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습니까? 만약 혼합하여 형성된 생명이 중생과 기를 똑같이 한다면, 노자가 말하는 혼성의 뜻이 아닙니다. 만약 생명이라는 명칭만 빌리고 생명의 실질을 보지 못한다면, 앞서 한 말씀과 모순이 됩니다. 생명을 말하면서 생명이 아니라고 한다면, 중생 아닌 중생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자의 학설에는 이 같은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있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을 힐책하는 것은 빗나간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 033_0180_b_05L釋曰:吾前謂“同於所萬,豈得生之可異?”足下答云,非謂不然。又曰:“奚取不異之生必宜爲衆。”是則去吾爲衆,而取吾不異,豈有不異,而非衆哉?所以復云:故當殊其特靈不應異,其得生耳。今答又謂,“得生之理何嘗蹔同?生本於理而理異焉。”請問得生之理,故是陰陽耶?吾不見其異,而足下謂未嘗蹔同。若有異理非復照蒸耶?則陰陽之表更有受生塗趣,三世詎宜豎立?使混成之生與物同氣,豈混成之謂?若徒假生名莫見生實,則非向言之匹。言生非生,卽是有物不物。李叟此說或更有其義,以無詰有,頗爲未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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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의 답변에 “담과 제방을 조심스럽게 쌓아 놓고도 도둑이 넘어올 것을 걱정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황성皇聖은 동물의 생명을 취할 때에도 그 시기를 살피고, 삼가 하늘의 때에 순응한다는 경서의 가르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극단을 피하고 서서히 나아가는 도의 입장에 되돌아가려고 한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극단을 전개하는 것’이라는 구실로 나의 논지를 비난하였는데, 이것이 나의 논지를 비판하신 것인지 성인을 비난하신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 033_0180_b_19L答曰:“謹爲垣防”云云,始云,“皇聖設候物之教,謹順時之經。將以反漸息泰。”“今復以方開所泰爲難。未詳此將難鄙議,爲譏聖人也。”
- 033_0180_c_01L이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앞에서 ‘아홉 가지 곡식’에서 “공자는 낚시질은 하였으나 그물로 물고기를 잡지는 않았다”는 데까지 보고, 귀하의 의론이 주관하여 제작한 것은 모두 성인에게서 나오고, 성인은 백관의 장이 되어 아래 백성에게 솔선수범한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성인이 행하는 것은 만사가 모두 근원이 있어 이에 따라서 절도를 베풀고 법도에서 어긋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귀하와 제 생각의 차이로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입니다. 나는 이 도에 지나침을 절도에 맞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극단을 중지시킨다”고 말하였습니다. 귀하는 성인이 갖추어야 할 여건은 명확히 밝혔지만, 그렇다면 성인은 어찌 아주 심한 것을 제거한다고 하였을까요? 귀하는 답변에서 “모든 심한 것을 성인은 처음부터 이미 제거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뜻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극단’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답변에 “누구를 비난하는지 알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혹 자신의 말씀을 잊으신 것은 아니신지요?
- 033_0180_b_23L釋曰:前觀本論,自‘九穀’以下至“孔釣不網”,始知高議,謂凡有宰作皆出聖人,躬爲師匠,以率先下民也。孤鄙拙意,自謂每所施爲動必有因。聖人從爲之節使不遷越此二。懷之大斷彼我所不同。吾將節其奢流,故有“息泰”之說。足下方明備設,未知於何去甚而中?答又云:“所謂甚者聖人固已去之”,不了此意,故近復以所泰爲問。答云:“未詳誰難”,或自忘前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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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변에서 “저잣거리와 푸줏간 밖에서도……저 하늘을 제사지내는 인사禋祀와 땅에 매장하는 희생에는 견율繭栗을 사용하고, 종묘사직에는 소ㆍ양ㆍ돼지의 3생牲을 사용하며, 야채가 없는 소고깃국과 돼지고깃국, 수북이 쌓인 두豆와 희생을 담은 적조[俎]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것입니다. 70세 노인은 고기를 먹어야 비로소 배가 부른데, 어찌 풀뿌리와 약돌만을 진열하여 완전한 음식과 최고의 약을 완비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귀하의 논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대의 뛰어난 논의가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이 일을 한순간에 없앨 수 없음을 물러나 걱정하는 것뿐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0_c_10L答曰:“市庖之外云云,夫禋瘞繭栗宗社三牲,曉薌豆俎以供賓客。七十之老,俟肉而飽,豈得唯陳草石,取備上藥而已?所憂不立者,非謂洪論難持退兼此事,不可頓去於世耳。”
- 033_0181_a_01L이에 대해 답하고자 합니다. 신농162)이 생활의 도를 정하고 주나라 사람이 예교를 설하였습니다. 곡식을 먹을 것163)을 주창한 다음 다시 상약上藥을 언급하고, 희생犧牲을 쓰는 한편 빈번蘋蘩164) 같은 조촐한 제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제사와 식선食膳의 도에는 원래 정한 방식이 없습니다. 앞에서 저잣거리와 푸줏간 외에도 신체를 제어하여 보양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생명을 연장시키는 도가 여럿 있음을 밝혀서 칼로 다듬고 탕에 삶는 오래된 악습을 버리고자 한 것이지, 세상을 다스리는 것도 풀뿌리와 약돌이 있으면 충분하다는 말이 아닙니다. 더욱이 소와 양, 개와 돼지를 식용으로 하여 그 효용으로 백 세까지 사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영지나 백출같이 좋은 효과가 있는 식물로는 때로 천 년의 수명을 보전합니다. 이렇게 볼 때, 70세의 노인에게 어찌 반드시 육식으로 은혜를 갚아야 합니까? 다만 스스로 한정된 세계에 제약받는 사람은 육식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생각건대 귀하가 이 세상에서 이 일을 한순간에 없앨 수 없다고 한 말씀은, 내가 앞에서 “일거에 오래된 습관을 없앨 수 없다”고 한 말에 해당합니다. 처음에 부합하였더라면, 어떻게 이것을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지요? 이미 한순간에 제거할 수 없다고 알고 계시니, 귀하께서도 도는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계시는지요?
- 033_0180_c_15L釋曰:神農定生周人備教,旣唱粒食。又言上藥旣用犧牢。又稱蘋蘩祭膳之道,故無定方。前擧市庖之外復有御養者,指舊刳瀹之滯,以明延性不一。非謂經世之事,皆當取備草石,然芻豢之功,希至百齡;芝朮之懿,亟聞千歲。由是言之,七十之老何必謝恩於肉食?但自封一域者,捨此無術耳。想不頓去於世,猶是前釋所云:“不能頓奪所滯也。”始獲符同敢不歸美,旣知不可頓去,或不謂道盡於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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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장에서 “세상에 어찌 형체가 없는 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보내 주신 편지의 취지를 살펴보면, 귀신이 있다는 것은 싫어하지 않는 듯합니다. 확실히 귀신에게는 물질적인 증거가 있어야 미혹이 없을 수 있다고 한 것은 인도의 책에서 귀신이 생물의 종류로 되어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옛날 사람들이 귀신을 가르침으로 삼았다는 내용이 경전에 쓰여 있고, 모든 책들에 서술되어 있습니다. 정鄭나라 자산子産과 오吳나라 계찰季札도 이를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운화雲和의 피리로 6변變의 음악을 연주하면 실제로 하늘의 귀신[天神]이 내려오고, 용문의 거문고로 9변變을 연주하면 사람과 귀신이 함께 이릅니다. 귀하는 평소에 『주례』를 늘 잡고 있으면서도 이러한 내용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형체가 없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힐난하는 데 지리한 논변을 하려는 것입니까?”라고 하셨습니다. - 033_0181_a_03L答曰:“天下寧有無形之有云云,尋來旨,似不嫌有鬼,當宜有質得無惑。天竺之書說鬼別爲生類耶?昔人以鬼神爲教,乃列于典經布在方策。鄭僑吳札亦以爲然,是以雲和六變實降天神,龍門九成人鬼咸挌。足下雅秉『周禮』近忽此義。方詰無形之有爲支離之辯乎?”
- 이에 답하고자 합니다. 귀신이 있음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귀신이 있으면 반드시 형체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귀하는 이렇게 나처럼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질문하여 완전히 이해하고자 합니다. 천축의 학설을 버리고 삼가 중국의 경전에 따르기를 청합니다. 또한 별도의 생물류라는 것은 그대로 놓고 정령의 존재 여부를 의논하려고 합니다. 정령은 과연 어떠한 형체를 가지고 있는가, 과연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에 답해야 합니다. 경전과 책들 중에 귀신 이야기는 무수히 많으니, 내가 모르는 것은 귀신의 명칭이 아닙니다. 일전에 세 번의 편지를 받았지만, 편지가 올 때마다 귀신의 수도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온갖 귀신들이 결국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귀하의 편지는 문장의 폭이 넓어서 완전히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형체가 없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한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고, 단지 지리한 것을 통설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만약 바른 견해를 편 것을 지루하게 여긴다면, 부박하고 어설픈 논리를 바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지 않겠습니까?
- 033_0181_a_11L釋曰:非唯不嫌有鬼,乃謂有必有形。足下不無是同處有復異,是以比及質詰,欲以求盡。請捨天竺之說,謹依中土之經。又置別爲生類,共議登遐,精靈體狀有無。固然宜報定。典策之中鬼神累萬,所不了者非其名號,比獲三論每來益衆。萬鬼畢至,竟未片答。雖啓告周博,非解企渴,無形之有,旣不匠立。徒謂支離,以爲通說。若以覈正爲支離者,將以浮漫爲直達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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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81_b_01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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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변에서 “장자와 순자의 응보의 설 등은 내생에 다시 태어날 몸을 위하여 훈계하는 것이지만, 존중하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귀하가 말씀하신 자비가 많은 사람은 누구를 지칭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만약 유교 경전 이외의 책에 나온 응보의 설에 근거한 것이라면, 모두 임시방편의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최상의 이치를 강구하면서 성인의 말씀을 좇아 해석하지 않고, 많은 이들의 불분명한 말을 좇아 서로 부추기고 함부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물로 물난리를 구제하려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1_a_21L答曰:“後身著戒云云。未詳所謂慈護者,誰氏之子?若據外書報應之說,皆吾所謂㩲教者耳。凡講求至理曾不析之,聖言多採譎怪以相扶翼,得無似以水濟水乎?”
- 이에 답하고자 합니다. 자비가 많은 사람이 누구인가는 오랜 기간 듣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고자 하신다면, 문수文殊와 석가釋迦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응보설은 모두 임시방편의 가르침에 불과하다고 답변하신 대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시방편의 가르침은 아주 심오하여 성인이 아니면 다 알 수 없습니다. 귀하께서는 식과 사려에 통하였다고 하지만 그 깊은 뜻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나는 추구하는 일이 피곤하지만 귀하는 유유히 혼자 혜량하고 있다니, 참으로 제가 부끄러워할 일입니다. 만약 임시방편의 가르침이 모두 속임수라면, 자연의 이법 중 보응은 다시없을 것입니다. 나는 소심하여 단적으로 결정하지 않지만, 귀하가 용감히 단언하는 것 또한 걱정스럽습니다. 정신은 고급인데 듣는 일이 저급하다고 어찌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성인의 말씀’이라고 하신 것은 반드시 주공ㆍ공자의 말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현재 말하고 있는 것은 모두 성인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信順]165)인데도, 이것을 분석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또한 상세한 사려가 결여되어 있습니다. 귀하는 주공을 올리고 석가를 폄하하고 있으므로, 나는 석가를 인용하여 주공에 부합시키려고 하였습니다. 답변은 질문의 범위를 넘지는 않았지만, 모르는 사이에 많은 부분을 인용하였습니다. 유여由余ㆍ일제日磾와 같은 현인은 중국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니, 어떻게 9복服166) 외에 이치를 탐구167)한 사람이 없다고 한정할 수 있습니까? 안과 밖을 나누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까? 만약 자신의 척도만 믿고 자기 귀와 눈으로 직접 습득한 지식 외의 것을 모두 이상하다고 본다면, 저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 033_0181_b_03L釋曰:慈護之主計亦久聞,其人責以誰子?將以文殊釋氏,知謂報應之說,皆是權教。權道隱深,非聖不盡。雖子通識慮,亦未見其極。吾疲於推求,而足下逸於獨了,良有恧然。若權教所言,皆爲欺妄,則自然之中無復報應。吾懦於擊決,足下列於專斷,亦又懼焉。神高聽卑,庸可誣哉?想云‘聖言者’,必姬、孔之語。今之所談皆其信順之事,而謂曾不析之。復是未經詳思,來論立姬廢釋。故吾引釋符姬,答不越問,未覺多採。由余日磾不生華壤,何限九服之外,不有窮理之人?內外爲判,誠亦難乎!若自信其度獨師,耳目習識之表,皆爲譎怪,則吾亦已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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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변에서 “만물에 허망한 것이 없고, 각자 같은 종류에 감응합니다.……이 말이 사실이라면 같은 종류로 감응하는 사물은 반드시 경중이 같고, 그림자와 실물의 형세도 길고 짧은 길이에 일정한 정도가 있을 것입니다. 토목을 장엄하게 수식하는 것도 자애로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때에 맞추어 수렵하더라도 잔혹한 성품을 뿌리째 드러낸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상찬賞讚하여 아름답고 화려한 천상계로 올라가고, 무엇을 벌하여 어둡고 고통스런 지옥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까? 아무리 좋은 말도 사람의 잘잘못을 논할 수 없고, 법을 세울 때 표준이 없는 데 한결같이 이르게 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 033_0181_b_18L答曰:“又云:物無妄然,必以類感云云。斯言果然,則類感之物,輕重必侔,影表之勢脩短有度。致飾土木,不發慈愍之心;順時獀狩,未根慘虐之性。天宮華樂,焉賞而上昇?地獄幽苦,奚罰而淪陷?昌言窮軒輊,立法無衡石。一至於此。”
- 이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그림자와 실물에 대한 설로 감응을 일으키는 관계의 징험으로 삼고 있으나, 보내오신 뜻은 인과가 꼭 대응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며 일정한 법도가 없음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복덕의 응보를 제거합니다. 복덕의 응보는 다름 아닌 기수氣數에서 나옵니다. 복덕의 응보가 없다면 기수도 없습니다. 귀하는 천문天文에 종사하면서도 오히려 자신의 지식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훌륭한 토목사업이 자비스러운 마음에서 나오지 않고 때에 따라 살생하는 것보다 잔혹하다면, 부처님의 마음에 크게 어긋나지 않습니까? 황옥黃屋의 수레168)와 옥새가 반드시 요순의 마음이 아닌 것과 같이 숭거崇居와 여양麗養 등도 어찌 석가의 뜻이라고 하겠습니까? 천상계의 상을 나무라고 지옥의 벌을 구하는 것은, 옛날 주아부周亞夫가 장상이 되고 난 뒤 굶어 죽자, 허부가 관상을 보고 “당신과 같이 존귀한 신분이 되더라도 굶어 죽을 수 있는가?”라고 도리어 힐문하자, 영부英夫169)가 “저 관상을 본 손님이 설마 그런 일이야 당하겠습니까?”라고 반문하였다는 예와 같습니다. 이 말은 아주 의미가 깊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문들이 말하고 있으므로, 저는 생략해도 좋을 듯합니다.
- 033_0181_c_02L釋曰:影表之說以徵感報,來意疑不必侔嫌其無度,卽復除福應也。福應非他氣數所生,若滅福應卽無氣數矣。足下功存步驗而還伐所知,想信道爲心者必不至此。若謂不慈於土木之飾,有甚於順時之殺者,無乃大負夫人之心?黃屋玉璽非必堯舜之情,崇居麗養豈是釋迦之意?責天宮之賞,求地獄之罰,頗類昔人亞夫之詰,英布之問?有味乎其言!此蓋衆息心之所詳,吾可得而略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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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변에서 “게다가 보육하는 사람은 사랑을 전할 때 돼지나 개의 창자를 먹지 못하도록 주의시키고, 솜씨 좋은 요리사는 소 힘줄과 뼈가 모여 있는 곳을 두려운 마음으로 조심합니다. 하물며 저 성인은 해와 달에 비견할 정도로 총명하고, 3통統을 열 정도로 교화가 있습니다. 만약 보응이 반드시 부합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가르침을 방해하여 복희와 요임금 시대에 대해 입 다물고 말하지 않고, 주공ㆍ공자 시대를 묻어 두고 드러나지 않게 하고, 처음으로 법망을 만들어 수억의 죄를 일으키고, 희생물을 정하고 긴 밤 동안 계속되는 벌을 내려 저 천연의 음식을 버리고 이 소ㆍ양ㆍ개ㆍ돼지 고기를 맛있다고 하며,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는 어진 마음도 없이 구덩이에 빠지게 하는 잔혹한 일을 함부로 행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성인의 지혜라고 해도 아직 불완전한 점이 있는데, 귀하가 아무리 기이한 생각을 선호한다고 해도 성인을 멸시할 정도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1_c_13L答曰:“且阿保傅愛愼及溷腴良庖提刀情怵母族。彼聖人者,明竝日月化開三統,若令報應必符,亦何妨於教,而緘扃羲唐之紀,埋閉周孔之世?肇結網罟,興累億之罪;仍制牲牢,開長夜之罰。遺彼天廚,甘此芻豢,曾無拯溺之仁,撗成納隍之酷。其爲不然,宜簡淵慮。若謂窮神之智,猶有不盡。雖高情愛奇想,亦未至於侮聖。”
- 033_0182_a_01L이에 대해 답하고자 합니다. 보응설이 복희伏羲 시대와 주나라 때 설해진 것이 아니므로, 이로써 보응이 부합하지 않는 증거라고 삼은 듯합니다. 복희와 요임금 시대는 아득한 옛날이므로, 상세히 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상서尙書』에 기재된 것도 몇 편에 불과합니다. 덕과 형벌의 좋은 점을 말하느라 화복의 근원을 기록하지 못하였습니다. 현재 제왕의 서책에서도 본성[性]과 명命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빠져 있는 문장을 근거로 옛날에는 반드시 없었다고 보는 것도 자신의 마음을 표준으로 한 잘못입니다. 또한 여앙餘殃ㆍ여경餘慶의 설을 믿고 따르는 것은 모두 주공ㆍ공자의 책에도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묻어 두고 드러나지 않게 하였다”고 한 것은 좁은 길과 같지 않습니까? 다만 말에는 멀고 가까움, 가르침에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으므로, 지혜로운 자에게 이것을 주고 저것을 빼앗게 하였던 것입니까?
- 033_0181_c_22L釋曰:知謂報應之義,緘羲周之世。以此推求,爲不符之證,羲唐邈矣。人莫之詳。『尚書』所載不過數篇,方言德刑之失,遑記禍福之源。今帝典王策猶不書性命之事,而徵闕文以爲古必無之。斯亦師心之過也。且信順殃慶,咸列姬孔之籍,謂之埋閉,如小逕乎?但言有遠近,教有淺深。故使智者與此而奪彼耶?
- 살아 있으면 반드시 욕망이 있게 되고, 욕망이 있으면 반드시 구하게 됩니다. 욕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다투게 되고, 구하는 것이 주어지면 만족합니다. 다투면 서로 다치게 되고, 만족하면 서로 안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물이 만들어진 것은 해를 없애고 편안함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까? 또한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는 것과 생제물을 바치는 일은 다르지 않습니다. 귀하는 앞의 답변에서 이미 제물을 바쳤던 것을 지금 한순간에 없앨 수는 없고, 또한 사냥과 물고기를 잡는 일도 옛날에 홀로 버릴 수는 없다고 하셨습니다. 아직 일관된 논의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 033_0182_a_08L夫生必有欲,欲必有求,欲嗛則爭,求給則恬,爭則相害,恬則相安。網罟之設,將蠲害以取安乎?且畋漁、牲牢其事不異,足下前答,已知牲牢不可頓去於今世,復畋漁不可獨棄於古,未爲通類矣。
- 생명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저급한 사람들일수록 더욱 강합니다. 따라서 죽음을 허용하는 것은 그 감정에 따르는 것이고, 생명을 빼앗는 것은 그 본성에 어그러지는 것입니다. 지인至人도 숭상해야 하는데,170) 어떻게 순응함을 범하고 어그러지는 태도를 보일 수 있습니까? 한순간에 오래된 습관을 버릴 수 없으므로, 이러한 한계를 만들게 되었을 뿐입니다. 성인의 정신은 뛰어나지만, 백성의 어두운 마음을 총명하게 할 수 없습니다. 약하고 상한 백성들을 말로 다 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죄와 벌이 찾아오는 것은 중생이 스스로 불러들이는 것이고, 일이 멀면 불러오기가 어렵습니다. 천연의 부엌이 중생을 버려서가 아니라 눈앞의 물건은 탐내기가 쉽기 때문에 항상 소ㆍ양ㆍ개ㆍ돼지 고기를 맛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고 구덩이에서 나오게 하는 것은 많은 철인들이 공통으로 하는 일입니다. 다만 중생의 교화 방법이 차이가 있는 것일 뿐, 도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불충분한 곳이 있다고 책망하시는 것도 당연하지만, 사마천의 호기심171)도 원래 이 같은 종류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 033_0182_a_13L好生惡死惠下愈篤,故有其死者順其情,奪其生者逆其性。至人尚矣,何爲犯順而居逆哉?是知不能頓奪所滯,故因爲之制耳。聖靈雖茂,無以睿懞惛之心,弱喪之民何可勝論?罪罰之來將物自取之,事遠難致,不由天廚見遺物。近易耽故常芻豢是甘,拯溺出隍衆哲所共。但化物不同,非道之異,不盡之讓,亦如遇當。子長愛奇,本不類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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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변에서 “인의仁義를 논하면서 ‘인정이 있는 사람은 적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은혜를 베푸는 것을 말하면서 현명함을 버리고 응보를 망각한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인정이 있는 사람이 적은데 누가 현명함을 버릴 수 있으며,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응보를 망각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즐겨 보시하는 사람을 추천하여 인을 행하고자 하는 무리를 기대하고, 응보를 망각하는 의도를 부연하여 의로 향하는 마음으로 이끌고 간다면, 의가 바로 여기에 있게 되고 머지않아 인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2_a_22L答曰:“足下論仁義,則云:情之者少,利之者多。言施惠則許其遺賢忘報在情旣少,熟能遺賢利之言多,曷云忘報?若能推樂施之士,以期欲仁之儔;演忘報之意,引向義之心,則義寔在斯,求仁不遠。”
- 이에 대해 답하겠습니다. “인의를 정이라고 하는 사람은 적고, 인의를 이용하는 사람은 많다”는 말은 장자의 책172)에서 보았고, 저 혼자만의 말이 아닙니다. 상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갑자기 저를 힐책하셨습니다. “인정이 있는 사람이 적은데 누가 현명함을 버릴 수 있으며,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어떻게 응보를 망각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신 말씀은, 실은 제가 시종일관되게 백성들은 2의儀에 배대할 수 없다고 말해 온 것에 불과합니다. 또한 의론에 근거하여 바르게 해야 할 것은 아닙니다. 만약 베푸는 것을 좋아하여 응보를 망각하는 것이 바로 인을 체득하는 것이고, 응보를 망각하고 베푸는 것이 바로 의에 합당한 것이라면, ‘욕欲’이라는 글자를 없애고, 또 의로 향하는 마음의 ‘향向’이라는 명칭을 없애야 할 것입니다. “의가 바로 여기에 있게 되고 머지않아 인을 구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한다면, 누가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 033_0182_b_05L釋曰:“情仁義者寡,利仁義者衆。”聞之莊書,非直孤說。未獲詳挍遽見彈責。夫“在情旣少,利之者多。不能遺賢,曷云忘報?”實吾前後勤勤,以爲不得配擬二儀者耳。復非篤論所應據正。若樂施忘報,卽爲體仁,忘報而施,便爲合義。可去‘欲’字,幷除‘向’名。在斯不遠,誰不是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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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변에서 “생명의 부류들을 구제하여 죽음이 없는 세계로 들어가게 하면……귀하의 논거는 근거가 없어서 본론에서 언급할 내용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진秦나라 군대가 도망치려고 할 때 행인이 함부로 말하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셨습니다. - 033_0182_b_13L答曰:“濟有生之類云云。斯旨宏誕,非本論所及。無乃秦師將遁,行人言肆乎?”
- 이에 답하고자 합니다. 귀하는 주공과 석가를 빌어서 논의하였지만, 제 답변 역시 오랑캐와 중국 양쪽에 걸쳐 있습니다. 귀하는 이것(중국)으로 저것(오랑캐)을 억제하면서 복은 점차 우공처럼 대문을 높인 집에 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외국의 가르침으로 중국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경사는 만물에 고루 미친다”고 말하였습니다. 귀하는 이러한 견해에 근거하여 행복은 공후公侯에 그칠 뿐이라고 말하였지만, 나는 외국에서 들은 것을 믿고 온갖 신들 중 으뜸으로 존경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논의야말로 논쟁점인데, 어찌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하겠습니까? 저 논란의 근원은 자주 바뀌는 것173)이 바탕이 됩니다. 자신의 손이 미치지 못하면 요령을 잡을 수 없는 것같이 이치를 구하는 방법도 막혀 버리게 됩니다. 진나라 군대가 도망치려고 하여 행인이 함부로 말한다고 해도 여기에서의 일은 아닙니다.
- 033_0182_b_15L釋曰:足下論挾姬、釋,吾亦答兼戎周。足下以此抑彼,謂福極高門。吾申彼釋,此云“慶周兆物。”足下據此所見,謂祚止公侯。吾信彼所聞,云尊冠百神。本議是爭,曷云不及?夫論難之本以易奪爲體。失之已外,輒云宏誕。求理之塗幾乎塞矣?師遁言肆,或不在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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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어찌 서로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이겠습니까? 자리에 앉아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성인은 지위가 높아서 온갖 귀신들과 우두머리의 위치를 겨루지 않습니다. 처음이 있으면 끝도 있는데, 어찌 죽음이 없는 경지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2_b_22L答曰:“豈其相迫,居吾語子?聖人在上,不與百神爭長。有始有卒,焉得無死之地”云云。
- 이에 대해 답하고자 합니다. “어찌 서로 궁지에 몰아넣으려는 것이겠는가?” 하는 말씀은 얼마나 덕을 닦는 말씀입니까? “자리에 앉아 저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한 것도 장중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의 윗사람이 되는 것은 다투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온갖 귀신들[百神] 중 으뜸으로 존경받을 것이다”라고 한 것을 보아도 “온갖 귀신들과 우두머리의 위치를 겨룬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등후縢侯와 설공薛公의 상위 다툼174)을 보아도 인을 체득하는 것을 버린 것이 아닙니까? 귀하는 처음이 있으면 끝도 있는데, 어찌 죽음이 없는 경지를 얻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찾으려고 한다면 확실히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존재는 진실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산해경山海經』의 말과 『열선전列仙傳』의 기록은 세속과 관계된 일이지만 벌써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하물며 도가 항상된 정을 끊고 이치가 평상의 상태와 유리되고 있는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내 경험이 그렇지 않았다고 하여 모든 것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타당하지 않습니다.
- 033_0182_c_02L釋曰:“豈其相迫一”何務德?“居吾語子”,又何壯辭!凡爲物之長,豈爭之所得?非唯不爭,必將下之。不可見“尊冠百神”,便謂“與百神爭長”,無乃取之滕薛,棄之體仁?知謂物有始,卒無不死之地。求之域內,實如來趣。前釋所謂勝類諸區,有誠亦宜然者也。至如『山經』所圖『仙傳』所記,事關世載已不可原,況復道絕恒情理隔,常照必以於我?不然皆當絕棄此,又所不得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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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변에서 “저 유계幽界와 명계明界를 판별하고 만물을 닦아 잘 밝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2_c_12L答曰:“夫辯章幽明,硏精庶物”云云。
- 이에 대해 답하고자 합니다. 이 장을 살펴보면, 역대 문화를 나열하여 문장과 내용이 폭넓고 스승들의 법을 잘 전하고 있습니다. 성인의 시대를 칭송하는 것175)은 매우 화려하지만, 도의道義를 추구하는 것은 아직 요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옛날 젊어서부터 적으나마 다양한 서적들을 섭렵하고 황왕皇王이 갖추어야 할 도와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의 사적에 관하여 대략 들었지만,176) 귀하께서 상세히 밝혀 주신 것에는 미흡합니다. 그러나 열심히 밝혀 주신 가르침을 받아들이기가 참으로 힘이 듭니다.
- 033_0182_c_13L釋曰:逮省此章盛陳列代,文博體周頗善師法。歌誦聖世足爲繁聲,討求道義未是要說耳。昔在幼壯微涉群紀,皇王之軌,賢智之迹,側聞其略。敢辱其詳,惠示之篤實勤執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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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변에서 “어찌 반드시 선을 쌓은 집에서 받는 복을 누추하게 보고 징험할 수 없는 내세의 행복을 희구하며……사문의 무릎 꿇는 예법과 중국의 읍양의 예는 결국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귀하께서는 두 가지를 다 취하려는 생각을 버리시고 한 가지 길만 따라가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033_0182_c_18L答曰:“何必陋積慶之延祚,希無驗於來生?蹲暯揖讓終不竝立,竊願吾子捨兼而尊一”云云。
- 이에 대해 답하고자 합니다. 선을 쌓은 집에서 받는 복을 누추하게 보지 않는 것은 벌써 신순信順의 조항에서 말하였습니다. 내생을 중히 여기고 기원하는 것 또한 보응의 설에서 다 서술하였습니다. 천자의 면류관에 드리우는 승,177) 용을 장식한 천자의 옷,178) 천자의 검은 가죽 옷179) 등은 함께 일체가 되는데, 사문의 무릎 꿇는 예법과 중국의 읍양의 예는 어찌 같은 세상에서 함께 행해지지 못합니까? 이치로 두 가지를 다 겸할 수 있으므로, 한편을 버리는 것이 좋다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 033_0182_c_21L釋曰:不陋積慶,已申信順之條;貫希來生,亦具感報之說。藻衮大裘同用一體,蹲膜揖讓何爲不俱行一世?理有可兼,無謂宜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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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하는 답변에서 “독량獨梁ㆍ이숙二叔ㆍ세인世人ㆍ역서譯胥 등의 비유는 저의 「달성론」의 본뜻과 무관하므로, 여기서는 다시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 - 033_0183_a_01L答曰:“蜀梁、二叔、世人、驛胥之譬,非本論所繼,故不復具云。”
- 이에 대해 답하고자 합니다. 최근 제가 말한 몇 부분은 우스갯소리에 가깝습니다. 월越나라 사람이 포布에 대해 물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듯이 『좌전』의 기록을 그대로 쓴 것이므로 문제삼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나 이숙에 대한 비유를 물으신 것은 집집마다 미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불식하기 위한 것입니다. 답변이 전혀 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쉽습니다. 귀하는 많은 나라들이 구름같이 따르고 있는 위세에, 광대한 논지는 바람처럼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저와 같이 한가로운 사람은 그 말씀에 화답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고,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비판 받고 있습니다. 귀하와 저의 관점상의 차이는 당연하지만, 실제로는 재주 있는 사람이 함께하는 이치에 의거해야 합니다. 번잡하게 해 드린 것을 관대히 잊으시고, 다시 제 마음을 깨우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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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3_0183_a_03L釋曰:近此數條聊發戲端,亦猶越人問布。見採於前談,肆業及之,無想多怪。然二叔爲問,欲以卻編戶之疑,沒而不答誠有望焉。足下連國雲從,宏論風行。吾幽生孤,說每獲竊議。此之不侔事有固然。實由通才所共者理,欻忘其煩貪復悉心。
弘明集卷第四
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주역』 「설괘說卦」에 “順性命之理”라는 말이 있고, 이 「달성론達性論」도 유교 성인의 성명性命을 달성시키는 현세중심주의를 설하는 것이다. 『고승전』 7 「혜엄전慧嚴傳」(대정장 50, 367)에는 “近見顔延之折達性論 宗炳難白黑論 明佛汪汪 尤爲名理”라는 구절이 있다. 원가 12년(435) 말경, 아마도 원가 11, 12년에는 이 논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同 「도연전道淵傳」(대정장 50, 369)에는 송宋 세조문제世祖文帝의 신임을 얻고 있는 혜림慧琳이 하승천과 야합하여 불리佛理를 비난하고 있음이 기록되어 있고, 하승천에 대해서는 “著達性論 竝拘滯一方 詆訶釋敎 顔延之及宗炳檢駁二論 各萬餘言”이라는 구절이 있다.
- 2)『주역』 「계사」 상 “易有大極 是生兩儀,” 또한 「계사」 하 “天地設位 聖人成能 人謀鬼謀 百姓與樂”이라는 구절에서 성인은 왕王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천지인天地人의 인人은 특히 제왕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양梁 원제元帝 『찬요纂要』에 “天地曰二儀 以人參之曰三才,” 또한 『효경』 「삼재장三才章」의 소疏에 “天地謂之二儀 兼人謂三才,” 『효경』 본문에 “子曰 夫孝天之也 地之義也 民之行也”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하승천과 안연지 논쟁의 요점이 보이고 있는 것이다.
- 3)『주역』 「설괘說卦」.
- 4)『상서』 「태서泰誓」, 『예기』 「예운禮運」.
- 5)『상서』 「군진君陳」,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28 ‘왕필전王弼傳’.
- 6)『주역』 「계사」 상.
- 7)상동.
- 8)『주역』 「건괘」 문언文言, 『예기』 「예운禮運」, 『회남자』 「남명覽冥」.
- 9)『예기』 「예운」.
- 10)『이아爾雅』 「석천釋天」.
- 11)『주례周禮』 「천관몽재天官冡宰」.
- 12)『맹자』 「고자」, 『예기』 「월령月令」.
- 13)『예기』 「예운」.
- 14)『주례』 「천관선부天官膳夫」.
- 15)『주역』 「곤괘」 상육上六.
- 16)『주례』 「춘궁대사春宮大師」.
- 17)『주역』 「정의서正義序」.
- 18)『예기』 「왕제」.
- 19)상동.
- 20)『예기』 「곡례曲禮」.
- 21)『맹자』 「양혜왕梁惠王」 상.
- 22)『시경』 「대아생민지십大雅生民之什」.
- 23)『맹자』 「양혜왕」 상.
- 24)『예기』 「왕제」.
- 25)『사기』 「은본기」.
- 26)『논어』 「술이」.
- 27)『시경』 「대아大雅」 한록旱麓.
- 28)『논어』 「위령공」.
- 29)대왕大王ㆍ왕계王季ㆍ문왕文王을 말한다.
- 30)『시경』 「대아」 문왕文王.
- 31)『장자』 「제물론」. 즉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피차의 개념뿐만 아니라 삶과 더불어 죽음이 있고, 죽음과 더불어 삶이 있다는 것이다. 『장자』 「천하天下」에는 ‘혜시惠施’의 뜻으로 쓰인 ‘방생방사方生方死’라는 말이 있다. 삶은 삶일 뿐이고 죽음은 죽음일 뿐,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라는 것이다.
- 32)『논어』 「안연」.
- 33)「안연지전」(384~456)은 『송서』 73에 수록되어 있다. 의희義熙 10년(414)에 처음으로 오국내사吳國內史 유억劉抑의 행참군行參軍이 되었다. 영초永初 원년(420)에는 여릉왕廬陵王 유의진劉義眞(무제의 둘째아들) 밑에서 사령운謝靈運ㆍ혜림慧琳 도인道人과 같이 교류하였다. 이후 서이지(徐羡之, ?~426) 등에게 질시를 받아 시안始安 태수太守로 좌천되었으나 문제文帝 원가 3년(426) 서이지가 주살되자 중서행랑中書行郞으로 입각하여 나중에는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로 전보되었다. 그러나 강건한 성품을 지닌 안연지는 유담劉湛ㆍ은경인殷景仁 등의 미움을 사 다시 영가永嘉 태수太守로 좌천되었다. 이때 지은 「오군영五君詠」이 불손하다 하여 팽성彭城 왕의강王義康ㆍ유담 등의 노여움을 사고 먼 지방으로 좌천될 뻔하였으나 문제의 중재로 광록훈光祿勳 차중원車仲遠이 대신 파견되고, 안연지는 일종의 견책처분을 받았다고 한다. 차중원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안연지는 이후 7년 정도(원가 17년경까지) 세상과 연을 끊고 칩거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편지 중에 “吾自居憂患 情理無託”이라는 말은 당시의 우울함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 하겠다. 문제가 안연지의 「절달성론折達性論」을 보고 탄식하였다는 것[『고승전』 7 「혜엄전」(대정장 50, 367)]과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권3)ㆍ축도생竺道生(권7)ㆍ혜정慧靜(권7)ㆍ혜량慧亮(권7) 등 당대의 명승과 교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34)함령含靈과 같은 유정有情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심식心識을 함유하는 것이라는 뜻이며, 중생의 다른 명칭이다. 후세의 것이지만 『구사론俱舍論』 12에 “於苦暴流 濟諸含識,” 『행지초자지기行持鈔資持記』 상사지일上四之一에 “心依色中 名爲含識 總攝六道有情之衆”이라는 구절이 있다.
- 35)『한서』 「사마상여전司馬相如傳」.
- 36)유교와 불교를 가리킨다. 또는 범凡과 성聖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 37)여呂와 율律은 죽통竹筒의 장단에 의해 청淸ㆍ탁濁ㆍ상上ㆍ하下를 만들고, 그 중에서 양陽 음을 ‘율,’ 음陰 음을 ‘여’라고 한다. 육률육려六律六呂를 합하여 ‘12율’이라고 한다.
- 38)『주역』 「계사」 하.
- 39)『노자』 29.
- 40)『장자』 「제물론」.
- 41)『시경』 「소아小雅」 북산北山.
- 42)『주역』 「건괘」.
- 43)『맹자』 「공손추」 상.
- 44)『맹자』 「고자」 상.
- 45)『한서』 48 「가의전賈誼傳」.
- 46)5상常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 『상서』 「태서泰誓」 “狎侮五常”[공소孔疏 “五常卽五典 謂父義母慈兄友弟恭子孝 五者人之常行”], 둘째 『예기』 「악기」 “道五常之行”[정주鄭注 “五常五行也”], 『장자』 「천운天運」 “天有六極五常”[성현영소成玄英疏 “五常謂五行 金木火水土 人倫常性也”]. 본 논에서는 두 번째의 오행의 뜻으로 쓰인 듯하다.
- 47)『예기』 「왕제」.
- 48)『노자』 21.
- 49)『주역』 「계사」 상.
- 50)『예기』 「제의祭義」.
- 51)중유는 공자 제자인 자로이다. 『논어』 「선진」.
- 52)『논어』 「공야장」.
- 53)『한서』 71 「우정국전于定國傳」.
- 54)『노자』 38.
- 55)『맹자』 「양혜왕」.
- 56)『논어』 「헌문」.
- 57)『상서』 「대전략설大傳略說」.
- 58)『후한서』 「반초전班超傳」.
- 59)『주역』 「건괘」 구이九二.
- 60)『예기』 「곡례」 상.
- 61)『상서』 「익직益稷」.
- 62)『주역』 「곤괘」 문언.
- 63)『맹자』 「양혜왕」 상.
- 64)『주역』 「계사」 상.
- 65)『한서』 「형법지形法志」.
- 66)『한서』 「가의전賈誼傳」.
- 67)『회남자』 「유칭謬稱」.
- 68)『한서』 「형법지」.
- 69)『노자』 21장에 보이는 “상하 신분의 차이로 서로간의 교제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高下相傾]”을 인용한 것이다.
- 70)초식하는 짐승인 소ㆍ양 따위와 곡식을 먹는 짐승인 개ㆍ돼지 따위를 말한다.
- 71)『주역』 「계사」 하.
- 72)『진서晉書』 「장협전張協傳」에서 “上無凌虛之巢 下無跖實之蹠”이라고 하였다. 이것의 근거로는 『회남자』에 보이는 “鳥排空而飛 獸跖實而走”가 있다.
- 73)혜강嵇康의 『양생론養生論』에 “神農曰 上藥養命 中藥養性”이라는 문구가 있다.
- 74)혜강(233~262)의 자字는 숙야叔夜이고, 조조曹操의 증손녀인 장락정주長樂亭主를 아내로 맞이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후 ‘중산대부中散大夫’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죽림칠현의 한 사람으로 유명하였고, 혜강에 대한 논이 아주 많았음이 『진서』 49에 기록되어 있다.
- 75)『후한서』 79 「중장통전仲長統傳」.
- 76)『후한서』 113 「교신전矯愼傳」.
- 77)『시경』 「소아小雅」 상체서정전常棣序鄭箋.
- 78)『장자』 「경상초庚桑楚」.
- 79)불교를 은유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 80)『주례』 「추관秋官」에 보이는 ‘역서譯胥’를 ‘역서驛胥’로 해석하는 설도 있다.
- 81)『장자』 「칙양則陽」.
- 82)『한서』 「형법지」.
- 83)『노자』 78.
- 84)『논어』 「공야장」.
- 85)『장자』 「추수秋水」, 『진서』 「육운전陸雲傳」.
- 86)『초사楚辭』 「이소離騷」, 『후한서』 90 하 「채옹전蔡邕傳」, 『상서』 「무성武成」.
- 87)『맹자』 「등문공縢文公」 하.
- 88)『논어』 「자로」.
- 89)『주역』 「건괘」 문언文言 초구初九.
- 90)『주역』 「곤괘」 상象.
- 91)『주역』 「건괘」 구삼九三.
- 92)『이아爾雅』 「석천釋天」.
- 93)『주역』 「설괘說卦」.
- 94)『주역』 「곤괘」 육오六五.
- 95)『회남자』 「인간훈人間訓」, 『한서』 「형법지」.
- 96)『후한서』 73 「주목전朱穆傳」.
- 97)『좌전』 「성공成公」 2년.
- 98)자산子産과 계찰季札을 지칭하는 듯하다.
- 99)『문선』 4 「촉도부蜀都賦」.
- 100)『주역』 「계사」 상.
- 101)『좌전』 「희공僖公」 14.
- 102)『노자』 25.
- 103)『주례』 「대종백大宗伯」, 『시경』 「주송周頌」.
- 104)『시경』 「대아大雅」.
- 105)『한서』 「교사지郊祀志」, 『국어』 「초어楚語」 하.
- 106)『예기』 「제통祭統」.
- 107)『의례儀禮』 「공식대부예구公食大夫禮九」.
- 108)의례를 지낼 때, 음식물을 담는 그릇을 ‘두豆’라 하고, 고기를 담아 올리는 제향의 그릇을 ‘조俎’라고 한다.(『의례』 「공식대부예구」)
- 109)『맹자』 「진심」 상.
- 110)『예기』 「중용」.
- 111)『주례』 「춘궁대사악春宮大司樂」.
- 112)『장자』 「인간생人間生」, 『회남자』 「병략훈兵略訓」.
- 113)『상서』 「고요모皐陶謨」.
- 114)『후한서』 24 「마원전馬援傳」.
- 115)『사기』 79 「범휴전서范睢傳序」.
- 116)『예기』 「소의小儀」.
- 117)『장자』 「양생주養生主」.
- 118)『주역』 「건괘」 문언.
- 119)원뜻은 『한서』 「율력지律曆志」에 보이는 3대代의 정삭正朔, 즉 하정건인夏正建寅은 인통人統, 상정건축商正建丑은 지통地統, 주정건자周正建子는 천통天統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천天ㆍ지地ㆍ인人을 말하는 듯하다.
- 120)『진서』 11 「천문지天文志」 상.
- 121)『좌전』 「문공文公」 12년.
- 122)『논어』 「양화」, 『예기』 「악기樂記」.
- 123)『주역』 「계사」 하.
- 124)『예기』 「중용」.
- 125)『노자』 17.
- 126)『주역』 「계사」.
- 127)『주역』 「손괘巽卦」 육사六四 .
- 128)『예기』 「악기」.
- 129)『시경』 「대아기취大雅旣醉」.
- 130)『예기』 「대학大學」.
- 131)『예기』 「교특성郊特性」.
- 132)『서경』 「익직益稷」.
- 133)『진서』 「악광전樂廣傳」.
- 134)『시경』 「위풍衛風」 고반考槃, 『시경』 「모전고성毛傳考成」.
- 135)『맹자』 「진심」 상.
- 136)『논어』 「미자微子」.
- 137)『사기』 3 「은본기」, 『맹자』 「만장」 상.
- 138)『사기』 32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
- 139)『주역』 「곤괘」 문언.
- 140)『한서』 「사마천전司馬遷傳」, 『회남자』 「제속훈齊俗訓」.
- 141)『한서』 「교사지」.
- 142)『목천자전穆天子傳』.
- 143)『논어』 「팔일八佾」.
- 144)두 가지란 유교와 불교를 말하고, 한 가지 길은 유교를 말한다.
- 145)『혜강집嵇康集』 8.
- 146)『포박자抱朴子』 「논선論仙」.
- 147)『태평어람太平御覽』 943.
- 148)『사기』 96 「장창전張蒼傳」, 유서劉恕의 『통감외기通鑑外紀』. 즉 의학서의 일종으로 보이나 안연지의 경우에는 이 방서가 불서佛書를 지칭하는 것 같다.
- 149)『주역』 「설괘전說卦傳」.
- 150)『주역』 「건괘」 정의正義.
- 151)『주역』 「건괘」.
- 152)『주역』 「건괘」 문언.
- 153)두예杜預의 『좌전』의 서序.
- 154)『노자』 25.
- 155)『사기』 「서남이전西南夷傳」.
- 156)『장자』 「천지天地」.
- 157)『논어』 「이인里仁」.
- 158)『예기』 「중용」.
- 159)『예기』 「표기表記」.
- 160)『장자』 「거협胠篋」.
- 161)지옥地獄ㆍ아귀餓鬼ㆍ축생畜生의 3도塗와 여기에 수라修羅ㆍ인간人間을 더한 5취趣의 윤회를 말한다.
- 162)『주역』 「계사」 하.
- 163)『상서』 「익직益稷」, 『예기』 「왕제」, 혜강嵇康의 「답향자기난양생론答向子期難養生論」 참조. 안연지顔延之의 반론은 이 혜강의 「양생론」을 따른 것이다.
- 164)『시경』 「소남召南」 채번서采蘩序, 『시경』 채빈서采蘋序.
- 165)『주역』 「계사편」에 보이는 것으로 중국 성인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을 말한다.
- 166)『주례』 「하관직방씨夏官職方氏」 참조. 사방 천 리를 ‘왕기王畿’라 하고, 그 외에 5백 리마다 후복侯服ㆍ전복甸服ㆍ남복南服ㆍ채복采服ㆍ만복蠻服ㆍ이복夷服ㆍ진복鎭服ㆍ번복藩服이라고 한다.
- 167)『주역』 「설괘전」.
- 168)『한서』 1 「고제기高帝紀」.
- 169)『사기』 91.
- 170)『좌전』 「양공襄公」 27년.
- 171)『방언方言』 「군자君子」.
- 172)『장자』 「서무귀徐無鬼」.
- 173)『세설世說』 「풍혜風惠」.
- 174)『좌전』 「은공隱公」 11년.
- 175)『후한서』 「송홍전宋弘傳」과 『곡수시서曲水詩序』 참조.
- 176)『열자』 「천서天瑞」.
- 177)『예기』 「왕제」.
- 178)『주례』 「춘궁사복春宮司服」.
- 179)상동上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