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弘明集卷第十三

ABC_IT_K1080_T_013
033_0269_b_01L홍명집 제13권
033_0269_b_01L弘明集卷第十三


52. 봉법요奉法要50)
033_0269_b_02L梁楊都建初寺釋僧祐律師撰
郗嘉賓奉法要
顏延之庭誥二章
王該日月燭
奉法要
[치중서郗中書51)]
郗中書

1) 삼보에의 귀의
삼자귀三自歸52)라는 것은 부처님께 귀의하고, 12부경部經에 귀의하고, 비구승에게 귀의하는 것이다.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에 걸친 시방의 제불과 3세에 걸친 시방의 경법經法과 3세에 걸친 시방의 승가에 대하여 항상 예배하고 참회하며, 이 모두에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여야 한다는 것과 아울러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들로 하여금 해탈하도록 발원하여야 한다.
범어로 나무namas라고 말하는 것은 중국어로 귀명歸命이라 하며, 범어의 불Buddha이란 중국어로 각覺이라 하고, 승sarṃgha이란 중국어로 대중大衆이라 한다.
033_0269_b_07L三自歸者歸佛歸十二部經歸比丘過去見在當來三世十方佛三世十方經法三世十方僧每禮拜懺悔皆當至心歸命幷慈念一切衆生令悉得度脫外國音稱南無漢曰歸佛者漢音曰覺僧者漢音曰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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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계五戒
5계란, 첫째는 죽이지 않는 것이다. 타인으로 하여금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 항상 이 계를 수명이 다할 때까지 굳게 지켜야 한다. 둘째는 도둑질하지 않는 것이다. 타인으로 하여금 도둑질을 하게 해서도 안 된다. 항상 이 계를 수명이 다할 때까지 굳게 지켜야 한다. 셋째는 간음하지 않는 것이다. 타인으로 하여금 간음하게 해서도 안 된다. 항상 이 계를 수명이 다할 때까지 굳게 지켜야 한다. 넷째는 속이지 않는 것이다. 타인으로 하여금 속이게 해서도 안 된다. 항상 이 계를 수명이 다할 때까지 굳게 지켜야 한다. 다섯째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다. 술을 타인에게 주어서도 안 된다. 항상 수명이 다할 때까지 굳게 지켜야 한다. 만약에 술을 약으로 쓸 때는 마땅히 경중輕重을 헤아려 반드시 술에 취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술에 취하게 되면 서른여섯 가지의 과실이 있어 경교에서는 깊이 경계해야 할 것으로 여기고 있다. 죽이지 않는다면 장수하게 되고, 도적질을 하지 않으면 항상 편안하다. 간음을 하지 않으면 청정해지며, 속이지 않으면 남들이 항상 존경하고 신뢰할 것이며, 술에 취하지 않으면 정신이 맑아서 밝게 주위를 보살필 것이다.
033_0269_b_13L一者不殺不得教人殺常當堅持盡形壽二者不盜不得教人盜常當堅持盡形壽三者不婬不得教人婬常當堅持盡形壽四者不欺不得教人欺常當堅持盡形壽五者不飮酒不得以酒爲惠施常當堅持盡形壽若以酒爲藥當㩲其輕重要於不可致醉醉有三十六失經教以爲深誡不殺則長壽不盜則常泰不婬則淸不欺則人常敬信不醉則神理明

3) 연年의 삼재와 월月의 육재
이미 5계를 행하고 나서는 곧 매년 3회의 재와 매달 6회의 재를 행한다.
연삼재年三齋란 매년 정월 1일부터 15일까지, 5월 1일부터 15일까지, 9월 1일부터 15일까지이고, 월육재月六齋란 매달 8일, 14일, 15일, 23일, 29일, 30일이다. 모든 재일齋日에는 모두 마땅히 생선이나 고기를 먹으면 안 되며, 오전 중에 식사를 하고, 정오가 지난 후에는 냄새 좋고 맛좋은 음식 등을 일체 먹어서는 안 된다. 사심邪心을 씻어 버리고 불도만을 생각하여 삼존(三尊:불ㆍ법ㆍ승의 삼보)에 귀의하고, 잘못을 참회하여 자신을 경책하고, 4등심(等心:慈ㆍ悲ㆍ喜ㆍ捨의 四無量心)을 실천하며, 규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6근根의 욕망에 집착하지 않고, 타인을 채찍질하거나 매도하며 우마차에 타거나 혹은 무기를 휴대해서는 안 된다. 부녀자는 거기에 겸하여 향이나 꽃, 연지나 분 등의 치장을 멀리하며, 마음을 단정히 하고 생각을 바르게 하여 유순한 마음가짐을 보존하도록 힘써야 한다.
재齋란 널리 이미 돌아가신 분과 현재 생존하고 있는 지우知友나 친척, 그리고 일체 중생들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니, 모두가 이 지극한 정성으로 인하여 각자가 서로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보리심을 느껴 일으키고 나면, 마침내 죄고罪苦를 면하게 된다. 그러므로 충신ㆍ효자들은 노력하여 더욱더 재에 힘쓰는 것이니, 진실로 모두를 구제하기 위함이요, 단지 나 하나만을 위한 일은 아닌 까닭이다.
033_0269_c_02L已行五戒便修歲三月六齋歲三齋者正月一日至十五日五月一日至十五日九月一日至十五日月六齋者月八日十四日十五日二十三二十九日三十日凡齋日皆當魚肉不御迎中而食旣中之後甘香美味一不得嘗洗心念道歸命三尊過自責行四等心遠離房室不著六不得鞭撻罵詈乘駕牛馬帶持兵婦人則兼去香花脂粉之飾端心正意務存柔順齋者普爲先亡見在知識親屬幷及一切衆生皆當因此至誠各相發心心旣感發則終免罪是以忠孝之士務加勉勵良以兼拯之功非徒在己故也

4) 육종사념六種四念
재일齋日에는 다만 현묘한 관찰을 행하는 것을 전적으로 하고, 경전의 말씀을 외워야 한다. 만일 공空을 실천할 수 없을 때에는 마땅히 여섯 종류의 4념念을 익혀야 할 것이다.
여섯 종류의 4념이란, 부처님을 생각하고, 경經을 생각하고, 스님을 생각하고, 보시를 생각하고, 계를 생각하고, 천天을 생각하는 것이다. 천天을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10선善과 4등等으로 마땅히 천상계에 태어나기 위한 수행을 하는 것이요, 또 마땅히 각자의 능력이 미치는 바에 맞추어서 중생을 구제하도록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033_0269_c_16L齋日唯得專惟玄觀講頌法言若不能行空當習六思六思念者念佛念經念僧念施念天何謂念天十善四等爲應天又要當稱力所及勉濟衆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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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십선十善
10선善이란 몸으로는 살생과 도둑질과 음행을 범하지 않고, 마음으로는 질투하고 성내고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고, 입으로는 망언妄言과 교묘하게 꾸민 말[綺語], 이간질 하는 말[兩舌]과 나쁜 말[惡口]을 하지 않는 것이다. 살생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말하는가? 항상 마땅히 모든 살아 움직이는 생명들을 불쌍히 여겨 비록 곤급困急할 때에 있어도 절대로 그들을 해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또 모든 중생이 재앙을 받고 있을 때에는 모두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구해 주고, 수륙의 구별에 따라 각각 그들이 살 장소에 돌려보내야 한다. 그리고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의심이 들면 모두 마땅히 그 시여를 받아서는 안 된다. 도둑질이란 무엇인가? 대개 자기의 소유가 아닌 물건을 취하는 것으로 물품의 크고 작음에 관계가 없고, 더 나아가서는 관리가 되어 청렴하지 않은 것도 모두 도盜라고 말한다. 음婬이란 무엇인가? 일체 여러 가지에 집착하는 것을 보통 음婬이라 부른다. 색욕色欲으로 음婬을 말할 경우, 정식의 배우자가 아니면 모두 범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033_0269_c_20L十善者身不犯殺盜婬意不嫉不妄言綺語兩舌惡口何謂不殺常當矜愍一切蠕動之類雖在困急終不害彼凡衆生厄難皆當盡心營救其水陸各令得所疑有爲已殺者皆不當受何謂爲盜凡取非己有不問小大及莅官不淸皆謂之盜何謂爲一切諸著普謂之婬施之色欲正匹偶皆不得犯
또 그것은 사적으로 몰래 행하여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또한 도둑질의 죄를 겸하는 것이 된다. 질투라는 것은 투기妬忌하는 것이다. 타인의 선행을 보거나 타인이 덕 있음을 보면 모두 마땅히 그들의 입장이 되어 기뻐해야 하며, 경쟁심이나 미워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성낸다는 것은 마음에 분노를 품고 번뇌를 마음속에 품는 것이다. 어리석다는 것은 불법을 믿지 아니하고 경전의 가르침에 의혹을 가지는 것이다. 망언妄言이란 무엇인가?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거나 허황된 것을 날조하여 진실이 없는 것이다. 교묘하게 꾸민 말[綺語]이란 무엇인가? 교묘한 말로써 화려하게 장식하여 겉만 훌륭하고 내실이 없는 것이다. 이간질 하는 말[兩舌]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얼굴을 마주할 때와 마주하지 않을 때 말을 다르게 하고, 이것에 대하여 저것을 말하는 것이다. 나쁜 말[惡口]이란 무엇인가? 상대를 비방하고 욕하는 것이다.
033_0270_a_06L又私竊不公亦兼盜罪所謂嫉者妒忌也見人之善見人有得皆當代之歡喜不得有爭競憎嫉之心所謂恚者心懷忿恨藏結於內所謂癡者不信大法疑昧經道何謂妄言以無爲有虛造無端何謂綺語文飾巧言華而不實何謂兩舌背向異辭對此說彼何謂惡口謂罵詈也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입으로 좋지 않은 일을 말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뒤따라 죄를 짓게 하는 것도 또한 나쁜 말이 된다”고 한다. 대개 이 열 가지 일 모두를 잠시라도 마음속에 일으켜서는 안 된다.
이것이 10선이며, 또 10계라고도 한다. 5계는 몸을 단속하고, 10선은 마음을 지킨다. 일에는 성글고 조밀함이 있기 때문에 보응에도 가볍고 무거움이 있는 것이다.
033_0270_a_14L或云口說不善之事令人承以爲罪亦爲惡口凡此十事皆不得蹔起心是爲十善亦謂十戒五戒撿形善防心事有疏密故報有輕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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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삼계三界와 오도五道
대개 만물이 윤회전생輪廻轉生하는 일정한 처소가 있는 경계를 통틀어서 삼계라 부른다. 삼계 안에는 대개 다섯 개의 길[五道]이 있다. 첫째는 천天, 둘째는 인人, 셋째는 축생畜生, 넷째는 아귀餓鬼, 다섯째는 지옥地獄이다. 5계를 온전히 하면 사람의 형상이 갖추어지고, 10선을 갖추면 천당天堂에 태어난다. 일계一戒만을 온전히 한 자도 또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 인간에게는 신분의 고귀함과 비천함이 있고, 혹은 장수와 요절의 차이가 있으니, 모두 계戒를 가진 것의 많고 적음에 연유한 것이다. 10선에 반대되는 것을 10악惡이라 부른다. 10악을 전부 범하면 지옥에 떨어진다. 저돌적이고 강하고 사나워 남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내지는 3독毒의 마음이 안에 왕성하여 사욕을 따라 타인을 속여 위태롭게 하는 사람은 모두 축생 속에 떨어지고, 혹 뱀이나 독사로도 태어난다. 아끼고 탐하여 자기의 이익만을 꾀하고 항상 부족함을 원망하는 사람은 아귀도에 떨어진다. 죄가 비록 가볍더라도 사사로이 숨김이 많고, 심정心情이 공정하고 밝지 않은 사람은 모두 귀신에 떨어져서 비록 미미한 복은 받더라도 고통을 면하지 못한다. 이것들도 지옥ㆍ아귀ㆍ축생을 3도塗라 하고, 또는 3악도惡道라고도 말한다.
033_0270_a_18L凡在有方之境摠謂三界三界之內凡有五道一曰天二曰人三曰畜生四曰餓鬼五曰地獄全五戒則人相備十善則生天堂全一戒者則亦得爲人有高卑或壽夭不同皆由戒有多少反十善者謂之十惡十惡畢犯則入地獄抵突强梁不受忠諌及毒心內盛殉私欺殆則或墮畜生或生蛇虺慳貪專利常苦不足則墮餓鬼其罪若轉少而多陰私情不公亮墮鬼神雖受微福不免苦痛此謂三亦謂三惡道

7) 오음五陰
색色ㆍ통양(痛痒:受)ㆍ사상(思想:想)ㆍ생사(生死:行)ㆍ식識을 일러 5음陰이라 한다. 대개 모든 외부의 사물로서 형체가 있어 볼 수 있는 것을 색色이라 한다. 이 색色을 잃고 우뇌優惱하는 것이 통痛이며, 이 색을 얻고 환희하는 것이 양痒이다. 미래의 일을 미리 생각하는 것이 사思이고, 과거의 일을 추억하는 것이 상想이다. 마음의 생각이 처음 일어나는 것이 생生이고, 생각이 지나가고 의식이 소멸하는 것이 사死이다. 일찍이 마음으로 관계를 맺고 거두어들여 잊지 않는 것은 식識이다. 식識이라는 것은 몇 겁劫을 거쳐도 의연하게 흉중에 심어져 있어 비록 그 유래는 분명하지 않으나 마음 바닥에 뿌리를 내려 은밀하게 엉겨서 처음에는 털끝만한 것으로부터 마침내는 못이나 산처럼 거대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불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나날의 생활에 힘써 신중히 해야 한다.
033_0270_b_07L痛痒思想生死謂之五陰凡一物外有形可見者爲色失之則憂惱爲痛得則歡喜爲痒未至逆念爲思過去追憶爲想心念始起爲生想過意識滅爲死曾關於心戢而不忘爲識者經歷累劫猶萌之於懷雖昧其所由而滯於根潛結始自毫釐成淵嶽是以學者務愼所習

8) 오개五蓋
5개蓋53)란, 첫째 탐음貪婬, 둘째 진에瞋恚, 셋째 우치愚癡, 넷째 사견邪見, 다섯째 조희調戱이다. 구별하여 말한다면 물건을 탐하여 구하는 것이 탐貪이고, 탐닉하여 물건에 집착하는 것이 음婬이다. 분노가 밖으로 드러나는 것이 진瞋이며, 안으로 맺혀 있는 것이 에恚이다. 속박과 집착에 묶여서 모든 도리에 어긋나고 미혹한 것이 우치愚癡이다. 생사의 인연은 우치가 근본이 되고, 모든 집착은 모두 우치로부터 시작된다. 또 지옥고地獄苦는 대개 에恚에서 연유한다. 경전에서는 “갑작스러운 다툼으로 사람을 죽인 죄는 오히려 가벼우나 원독怨毒을 품고 음모를 쓰면 그 죄는 몇 겁劫 동안에 더욱 매듭이 해탈을 기약할 수 없다”54)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033_0270_b_15L五蓋一曰貪婬二曰瞋恚三曰愚癡四曰邪見五曰調戲別而言之求欲爲貪耽著爲婬外發爲瞋內結爲恚繫於縛著觸理倒惑爲愚癡生死因緣癡爲本一切諸著皆始於癡地獄苦酷多由於恚經云卒鬪殺人其罪尚輕懷毒陰謀則累劫彌結無解脫之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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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육정六情
6정情이란 일명一名 6쇠衰라 하고, 또 6욕欲이라고도 한다. 눈은 색을 받아들이고,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코는 냄새를 받아들이고, 혀는 맛을 받아들이며, 몸은 섬세하고 매끄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마음은 식을 받아들임을 말한다. 식이란 위에서 말한 5음 중의 식음識陰인 것이다. 5음과 6욕은 대개 생사윤회의 본원이고, 죄와 괴로움의 원인이다. 이것들을 소멸하고 제어하는 방법은 모두 많은 경전 속에 갖추어 실려 있다.
033_0270_b_23L六情一名六衰亦曰六欲謂目受色耳受聲受香舌受味身受細滑心受識識者卽上所謂識陰者也五陰六欲蓋生死之原本罪苦之所由消御之方具載衆經

10) 인과응보의 근본을 이루는 마음의 움직임을 삼가할 것
경에 이르기를, “마음이 하늘을 만들고, 마음이 사람을 만들고,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마음이 축생을 만들며, 또는 나아가 도를 깨달아 얻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라고 하였다. 대개 사려思慮가 마음에서 작동하면 모두 찰나 찰나에 과보를 받는다. 비록 일(행위)이 아직 모습으로 미치지는 못하였지만 눈에 안 보이는 곳에서 과보가 형성되어 간다.
정념情念은 원만하고 빨라서 순식간에 나타나고 끊어짐이 없다. 기(機:과거의 업)의 움직임이 털끝만 해도 드디어는 우주에 충만하다. 응보로서의 재앙과 중생들이 받는 모습과 도정道程은 정념의 움직임을 말미암지 않는 것이 없고, 길吉과 흉凶, 뉘우침과 한탄함이 잠깐 사이에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를 닦는 사람은 반드시 혼자 있을 때의 마음가짐을 삼가하여 마음에서 미세한 사려思慮를 막고 지극한 진리를 성지城池로 삼아 항상 근본을 다스려 지말을 막으며, 일의 형상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 가볍게 마음에 생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어찌 다만 군자가 집에서 말을 하매 선한 말이면 천 리 밖에서도 응한다는 것55)과 은밀한 곳에서는 드러나지 않으니 삼가할 바는 몸에 있다56)고 한 말에 그칠 뿐이겠는가?
033_0270_c_05L經云心作天心作人心作地獄心作畜生乃至得道者也亦心也凡慮發乎心皆念念受報雖事未及形而幽對冥搆夫情念員速倏忽無閒機動毫端遂充宇宙罪福形道靡不由之吉凶悔吝定於俄頃是以行道之人必愼獨於心防微慮始以至理爲城常領本以禦末不以事形未著而輕起心念豈唯言出乎室千里應之莫見乎隱所愼在形哉

11) 허물을 숨기지 말 것
이역異譯의 『십이문경十二門經』57)에, “사람은 선행이 있으면 항상 마땅히 덮어 감추고, 악행이 있으면 마땅히 밖으로 드러나게 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군자의 마음은 오로지 주장하는 일도 없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일도 없으니,58) 허물이 있는데도 참회함이 없으면 마음은 마땅히 편함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스스로의 출처진퇴出處進退를 숙연宿緣에 맡겨야 할 것이니, 어찌 자기의 행위가 세간에 감춰짐과 드러남에 마음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교敎가 시행되는 것은 아마도 일상의 비근한 마음가짐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033_0270_c_15L異出『十二門經』云人有善恒當掩之有惡宜令彰露夫君子之心無適無過而無悔當不自得宜其任行於所遇豈有心於隱顯然則教之所其在常近乎
033_0271_a_01L저 자연의 이법[天理]을 죄와 복의 관계에서 물어보면 자기의 악행을 밖으로 누설하면 그 죄는 더욱 가볍고, 안으로 결집하여 두면 그 죄는 더욱 무거워진다. 이미 행적行蹟이 인간만사에 드러나면 눈에 안 보이는 응보도 반드시 경감이 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선행을 자랑하고 공로를 과시하는 것59)은 인간에게 두루 있는 마음이며, 나쁜 일을 숨기고 허물을 꾸미는 것은 만인에게 공통되는 것이다. 선행이 드러나면 자취가 세상에 나타나고, 자취가 세상에 나타나면 명성이 모인다. 진실로 마음은 악을 그치고 선을 권장하는 데 이어져 있다 하여도, 명성이 밖으로부터 모이게 되면 그것을 품어 아끼는 마음이 반드시 가슴속에 찰 것이다. 또한 인간 사회의 군자는 오히려 절대적인 진리의 세계에서는 소인과 같은데, 하물며 인덕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명성이 실제와 떨어져 있을 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죄를 받는 것은 진실로 반드시 당연한 것이다.
033_0270_c_20L原夫天理之於罪福外泄則愈輕內結則彌重旣迹著於人事必有損於冥應且伐善施勞生之大情匿非文過品物之所同著則迹彰迹彰則譽集茍情係沮勸而譽集於外藏悋之心必盈乎內人之君子猶天之小人況乎仁德未而名浮於實獲戾幽冥固必然矣
진실로 덕을 갖춘 이가 아니면 반드시 두루 미치지 못함이 있는 것이니, 그때 거리낌 없이 잘못을 공개하면 죄는 사적事跡과 함께 흩어진다. 만일 도리를 저버린 마음으로 잘못을 가슴에 품어 새겨 두고 밖으로 감정과 모습을 꾸며서 타인의 책망을 면하고 세간의 명성을 긁어모아 크게 천리天理를 속이면 자연의 죄과(보응의 죄)가 더욱 무거워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장생莊生도 “사람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나쁜 짓을 행하면 귀신이 그를 주륙誅戮할 수 있다”60)고 말하였다.
033_0271_a_04L夫茍非備德必有不周坦而公之與事而散若乃負理之心銘之懷抱而外修情貌以免人尤收集俗譽誣天理自然之舋得不愈重乎是以莊生云爲不善於幽昧之中鬼神得而誅之
더욱이 인간의 마음은 도리에 대하여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도 세간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한다. 허물이 세간에 드러나면 비난을 받고 비난을 받으면 부끄러운 마음이 생긴다. 마음을 돌이키는 데 가까이 두면 병폐가 쌓이는 데까지 이르지 않을 것이나 자기의 잘못이 세간에 드러나지 않는 것을 믿으면 끝내 잘못을 뉘우쳐 고치는 일이 없다. 게다가 자연의 문책(업보)이 안에 가득하면서 그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곧 은밀하게 온갖 방법으로 신경을 써서 교묘하게 방지하여 더욱 감추어 살아 있는 동안 마음에 두는 것은 오직 이 일뿐이니, 하늘의 재앙과 사람의 재화가 마침내 반드시 단번에 몰려들 것이다. 대개 나쁜 일이 시작되는 싹을 막지 못함을 말미암아 잘못을 숨기고 선량함을 과시했기 때문이다.
033_0271_a_10L且人之情也不愧於理而愧乎物愆著則毀至毀至而恥生情存近復則弊不至積恃其不彰則終莫悛革加以天舋內充而懼其外顯則幽慮萬端巧防彌密窮年所存唯此之務天殃物累終必頓集蓋由不防萌謀始而匿非揚善故也

12) 타인의 선을 칭양할 것
『정재경正齋經』에서는 “다만 타인의 백 가지 선은 말하여도 타인의 한 가지 악惡에 대해서는 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타인의 선을 말하면 문득 선심이 생기고, 타인의 잘못을 말하면 문득 화나는 마음이 일어나니, 그 생각이 처음에는 비록 작아도 점점 서로 의지하여 쌓여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선이 거억만巨億萬의 선을 낳고 한 가지 악이 거억만의 악을 낳는 것이다.
033_0271_a_16L『正齋經』云但得說人百善不得說人一惡說人之善善心便生說人之惡便起忿意意始雖微漸相資積是以一善生巨億萬善一惡生巨億萬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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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업보의 주체는 개인
고인古人은 “무장武將의 가문이 번영하는 것은 3대에 지나지 않는다”61)고 하였고, 진평陳平도 “나는 음모를 많이 썼기 때문에 자손이 번창하지 않을 것이다”62)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인용하여 교훈으로 삼으면 진실로 충분히 중국인에게 불교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제나라 왕실이나 초나라 왕실은 악한 일을 행했는데도 불구하고 수대에 걸쳐 자손이 이어짐을 누렸고, 안회顔回나 염백우冉伯牛는 어진 이들이었는데도 자손은 좋은 과보를 받지 못하였다. 그 일은 이미 일의 증험에서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이치를 추구한 후에 밝혀짐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곤鯀은 처형되었지만 그의 아들 우禹는 번영하였고,63) 서魣와 부鮒는 닮았지만 몸은 달랐다. 네 사람의 죄를 벌하여64) 그 죄를 다른 육친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은 백대百代에 통하는 규범이다. 성왕聖王이 세상을 다스릴 때에도 오히려 부정하게 멋대로 형벌을 행함이 없었는데, 하물며 자연의 현묘한 보응의 이법이 조금의 감정도 쓰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와 복을 섞어서 받고 선악이 밝게 구별됨이 없다고 하는 것은 도리를 무시하여 업신여기는 일로 그 무시하는 정도가 아주 심한 것이다.
033_0271_a_20L古人云兵家之興不過三世陳平亦我多陰謀子孫不昌引以爲教足以有弘然齊楚享遺嗣於累葉冉靡顯報於後昆旣已著之於事驗不俟推理而後明也且𩨬殛禹興盻鮒異形四罪不及百代通典哲王御世猶無淫濫況乎自然玄應不以情而令罪福錯受善惡無章其誣理固亦深矣
더욱이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친속까지 잡아 가두는 형법제도를 만들었어도65) 그때도 오히려 범죄자를 제일로 하여 주범을 벌하고 난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미쳐 문책하였다. 만일 죄가 그 몸에 마땅치 않는데 화가 친족에게까지 미치고 더욱이 그것을 법으로 제정하려 한다면 성인의 규정[聖典]으로 용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신불해申不害나 한비자韓非子와 같은 이들도 반드시 없애 버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니원경』에도 “부모가 좋지 않은 일을 행했어도 그 자식이 대신 재앙을 받지 않으며, 자식이 좋지 않은 일을 행했어도 부모가 또한 재앙을 받지 않는다. 선을 행하면 스스로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스스로 재앙을 받는다”66)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말은 참으로 지당하여 마음에도 납득이 가고 도리에도 맞는다.
033_0271_b_06L且秦制牧孥之刑猶以犯者爲主主嬰其罰然後責及其餘若舋不當身而殃延親屬以茲制法豈唯聖典之所不容固亦申韓之所必去矣是以『泥洹經』云父作不善不代受子作不善父亦不受善自獲惡自受殃至矣哉斯言允心應理然

14) 인과응보를 조상과 자손의 사이로 생각할 수 있는 것 은 성인의 방편교方便敎이다
저 조상이 선악의 행위를 하면 그 자손이 복이나 화의 과보를 받는다 하는 세속의 가르침이 일어난 까닭을 살펴보면 아마도 인정상 보응을 받는 소재所在가 자기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보응이 미치는 곳이 넓으면 넓을수록 삼가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진다. 그러므로 세속의 가르침을 만든 성인은 진실한 도리를 마치 미옥을 함 속에 넣어 감추는 것과 같이 깊이 숨기고, 항상 평범한 도리를 설명하여 대중을 교화하여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악을 징계하고 선을 권하는 데에도 결함이 없고 사람들마다의 마땅한 성품에 알맞은 것이다. 불교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일을 간략히 하여 성인이 터득하신 심원한 의도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만일 경전의 글귀만을 고수하여 그 변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가르침만 따르고, 가르침의 진의를 알지 못하면서 이와 같은 것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 도리를 따라가려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멀리 빗나가는 일이 아니겠는가?
033_0271_b_12L原夫世教之興豈不以情受所存不止乎己所及彌廣則誡懼愈深是以韜理實於韞韥每申近以斂麤進虧於懲勸而有適於物宜有懷之流宜略其事而喩深領幽旨若乃守文而不通其變殉教而不達教情以之處心循理不亦外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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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인과응보의 도리가 삼세에 통해야 하는 필연성
죄와 복의 역술의 관계에 대해서는 진실로 필연적인 응보여서 차질이 없다. 만일 이 도리에 어두우면 사邪와 정正은 제자리가 없어지게 되어 마음이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 그 진리를 현세에서만 생각하면 신뢰성이 흐트러지고 징험이 빈약하여 도리로서는 허물이 없는데도 사실이 항상 드러나지 않으니, 어찌 그것을 전세의 여러 인연으로 돌아가게 하고, 내세로 미루어 넓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보응의 도리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그림자나 메아리는 속이기 어려움을 살펴서 일로써 증거함을 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의지할 것이며, 하늘의 그물이 크고 넓은 줄 알기 때문에 새어나감이 없는 공평함을 믿고, 일월日月의 운행이 끊임이 없는 것을 깨달아 한없는 세월을 하루아침과 같이 보고, 3세를 일괄하여 구극究極에는 같다고 하고, 최종적인 귀결을 필연적으로 이르는 것(인과응보)의 도리에서 구한다면, 어찌 눈에 보임과 보이지 않음에 따라 마음을 바꾸고 보응의 더딤과 빠름에 따라 생각을 바꾸겠는가? 이것이야말로 불법을 처음으로 믿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며, 업심業心을 갖는 사람이 깊이 믿는 것이다.
033_0271_b_19L夫罪福之於逆順固必應而無差者茍昧斯道則邪正無位寄心無准至於考之當年信漫而少徵理無愆違而事不恒著豈得不歸諸宿緣推之來世耶是以有心於理者審影響之難誣廢事證而冥寄達天網之宏疏故期之於靡漏悟運往之無閒萬劫於一朝括三世而玄同要終歸於必至豈以顯昧改心淹速革慮哉最始信之根至而業心所深期也

16) 일상생활에서의 불법의 실천
『십이문경』에서는 “때로 자신을 헤아려 올바르고 훌륭하다 생각되면 곧 마땅히 스스로 자신의 몸속에는 있는 것이 없고, 다만 간ㆍ장ㆍ위ㆍ폐ㆍ뼈ㆍ피ㆍ똥ㆍ오줌만이 있을 뿐이며, 어느 것도 훌륭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야 된다”고 하였다. 또 타인의 몸속의 부정한 것도 모두 이와 같은 것이라고 보라. 만일 아끼고 탐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재물이나 진귀한 보물은 태어날 때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죽을 때 함께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니며, 인간의 생명도 변천하고 변화하는 것이어서 아침저녁 사이도 보장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야 한다. 또 이 육체는 오랫동안 살 수 없으며, 물건에는 영구불변한 주인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마땅히 살아 있는 동안 은덕을 베풀고 은혜를 행하여서 궁핍한 이들은 재물을 주어 도와주고 병든 사람들은 약을 주어 구제하여 하루 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힘써 타인을 구제하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한다. 또 만일에 화나는 생각이 일어나면 마땅히 깊이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며 겸하여 10계를 지켜야 할 것이다.
033_0271_c_06L『十二門經』云有時自計我端正好便當自念身中無所有但有肝有何等好復觀他人身中惡露皆如是若慳貪意起當念財物珍寶生不持來死不俱去而流遷變朝夕難保身不久存物無常主及當年施恩行惠贍乏以財救疾以藥終日欣欣務存營濟若瞋恚意起深生平等兼護十戒
『차마갈경差摩竭經』에서는, “보살이 행하는 것 중에는 인욕忍辱이 무엇보다 위대하다. 만일 욕설을 들으면 침묵하고 보복하지 말며, 만약 매로 치면 받아들이고 복수하지 말고, 성내고 노여워하면 자비로운 마음으로 상대를 향하며, 비방하고 헐뜯으면 상대의 악을 생각하지 않는다”67) 하였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다시, “치욕을 당하였을 때에는 마음을 대지와 같이 하고, 인욕을 행할 때에는 문지방처럼 하라”68)라고 말하였다. 대지나 문지방이 대개 더러운 것을 받아들여 쌓아 두고 진흙투성이가 되어 하루 종일 밟히고 있음을 취하여 비유한 것이다.
033_0271_c_15L『差摩竭』云菩薩所行忍辱爲大若罵詈者默而不報若撾捶者受而不挍若瞋怒者慈心向之若謗毀者不念其惡『法句』又云受辱心如地行忍如門閫地及門閫取其藏垢納洿終日受踐也
033_0272_a_01L『성구경成具經』에서는, “타인이 자기에게 4과過를 가해 오면 자기는 그것에 의해 입의 허물을 깨달아 알아서 좋은 말, 온화한 말로써 대답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겉으로 꾸미지 않도록 한다”69)고 하였다. 4과過라는 것은 위에서 말한 이간질 하는 말[兩舌]ㆍ나쁜 말[惡口]ㆍ망언妄言ㆍ교묘하게 꾸민 말[綺語]이다. 타인이 나쁜 말로써 나에게 향해 올 때 나는 그것에 좋은 말로써 응답하는 것이니, 진실로 마음은 목석이 아니므로 이치상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겠지만, 다만 그것에 대처함을 늘 변함없이 하지 못하면 그 선행을 넓혀 쌓지 못하는 것을 근심할 뿐이다. 그리고 만일 어떤 일에나 참을 것을 생각하고 있으면 이 세상에서 후회하고 애석해 하는 일이 없어지고, 행복한 과보가 장래에 확실히 나타날 것이다.
033_0271_c_20L『成具經』彼以四過加己則覺知口之失也報以善言和語至誠不飾四過者之所謂兩舌惡口妄言綺語也夫彼以惡來我以善應茍心非木石理無不感但患處之不恒弘之不積耳能每事思忍則悔悋消於見世福報顯於將來

17) 사등四等
『현자덕경賢者德經』에서는 “마음이 편안하지 않은 것을 항상 다른 사람에게 미치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가까이 일상 윤리의 면에서 말하면 유교의 충서忠恕의 도이며, 미루어 멀리 극한까지 나아가면 불교의 4등等의 뜻이 된다.
그러면 4등이란 무엇인가? 자慈ㆍ비悲ㆍ희喜ㆍ호護이다. 무엇을 일러 자慈라 하는가? 중생을 불쌍히 여기고 나와 만물을 동일하게 보아 자신의 마음을 미루어 타인을 용서하는 마음을 가지며, 모두가 안락하게 되기를 바라 곤충에 이르기까지 애정을 갖되, 마음에 차별이 없는 것이다. 무엇을 일러 비悲라 하는가? 널리 사랑하고 중생을 모두 구제하며 비처럼 내리는 자비의 눈물과 측은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때 반드시 실제의 효과가 남몰래 나타나도록 해야 하고, 단지 마음만 갖고 마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일러 희喜라고 하는가? 언제나 기쁘고 즐거우며 유연하여 타인에게 베풀면서도 후회가 없는 것이다. 무엇을 일러 애호愛護라 하는가? 그때 그때의 적절한 방편에 따라 부딪치는 모든 생명체들을 훌륭하게 구제하며,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수단을 종횡으로 막힘없이 사용하여 힘써 일체 중생을 널리 제도해 나가는 것이다. 이 4등等을 실천할 수 있으면 삼계三界에서 가장 존귀해지지만, 단지 마음을 무조無兆에 명합冥合할 수 없다면, 그 운명은 한계가 있어 반드시 끝이 나고 마는 것이다.
033_0272_a_04L『賢者德經』云心所不安未常加物近而言則忠恕之道推而極之四等之義四等者何護也何謂爲愍傷衆生等一物我推己恕彼令普安愛及昆虫情無同異何謂爲博愛兼拯雨淚惻心要令實功著不直有心而已何謂爲喜歡悅柔施而無悔何謂爲愛護隨其方便觸類善救津梁會通務存弘濟能行四等三界極尊但未能冥心無兆有數必終
그러므로 『본기경本起經』70)에서는 “모든 천상계에 사는 사람들이라도 즐거움과 복덕이 다하면 또한 그것들을 잃는다. 부귀가 극에 이르면 천도도 지옥도地獄道와 서로 마주 대할 만한 곳이 된다”고 하였고, 『성구경成具經』에서는 다시 “복이라는 것에는 고통이 있고 다함이 있으며, 번거롭고 수고로움이 있고, 가고 돌아옴이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니원경泥洹經』에서도 “5도道에는 참다운 안락은 없고 오직 무(無:열반)만이 참다운 안락이다”71)라고 말하고 있다.
033_0272_a_15L是以『本起經』云諸天雖樂福盡亦喪貴極而天道與地獄對門成具又云福者有苦有盡有煩勞有往還『泥洹經』曰五道無安唯無爲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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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열반의 길로서의 무심無心
경經에는 “불도를 수행하는 이들은 먼저 마땅히 세간의 8사事를 버려야 하니, 이利ㆍ쇠衰ㆍ훼毁ㆍ예譽ㆍ칭稱ㆍ기譏ㆍ고苦ㆍ낙樂이 그것이다. 불도를 수행하는 이들은 선을 들어도 좋아하지 않으며, 악을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는다”72)고 하였다. 신심信心은 천성적으로 견고하여 상벌로 그의 뜻을 움직일 수 없으며, 6근을 마음속에 묻어 외부의 대상으로 그의 생각을 어지럽힐 수 없는 것이다. 더욱이 현세에서 만나는 것은 반드시 전세의 인연에 기인하는 것이니, 숙연의 현묘한 운행은 진실로 춘하추동의 사계四季의 운행과도 같아서 그것이 오는 것을 막을 수도 없으며, 가는 것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오로지 그것을 따라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기꺼이 그것을 다 마쳐야만 한다. 부지런히 불도수행을 증가시켜 무심無心이 되어 육체로 받는 과보를 면하게 되고 나서야 크나큰 안온함을 얻는 것이다.
이치는 마음에 근본하고 과보는 일에 모습을 드러낸다고 하는 도리는 마치 사물의 형상이 바르면 그림자도 바르고, 소리가 온화하면 그 울림도 온화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행하여지는 현묘한 보응이니, 어찌 누군가 그것을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겠는가?
033_0272_a_18L經稱行道者先當捨世八事聞善不喜聞惡不懼心天固沮勸無以動其志埋根於中外物不能干其慮且當年所遇必由宿緣宿緣玄運信同四時其來不可其去不能止固當順而安之悅而畢之懃增道習期諸忘心形報旣廢乃獲大安耳夫理本於心而報彰於猶形正則影直聲和而響順此自然玄應孰有爲之者哉
그렇다면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마음을 신도(神道:3세 윤회, 인연업보의 가르침)에 계합契合하여 진실로 마땅히 자신의 행위가 진리에 통하기를 기약하며, 원대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자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여 밖으로부터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비겁하고 어지러운 것들을 가까이하여 밖의 대상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구하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이상 말한 것들은 불도를 수행하는 이들이 마음을 두어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불도를 배우는 이들이 마땅히 잘 생각해야 할 점이다.
033_0272_b_05L然則契心神固宜期之通理務存遠太虛中正而無希外助不可接以卑瀆要以情求此乃厝懷之關鍵學者所宜思

19) 가르침의 필요성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마음의 생각은 반드시 과보를 받고 인과응보의 도리가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이 필연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다만 마땅히 자신에게서 구하면 충분할 것이니, 진실로 유명幽冥의 저 세상에서의 일은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경전의 가르침이 만들어진 사정을 찾아보면, 그 취지는 자신에게서 구하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구하는 방법은 가르침이 아니면 깨달을 수가 없다. 깨달음이 가르침에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면 자기에게서 구하는 일도 신도神道를 말미암는 것이다. 법열의 감정이 일단 마음속에 발생하게 되면, 그 감정은 반드시 구체적인 일로 모습을 나타내니, 마치 시가詩歌의 표현으로써 부족하면 너무 기쁜 나머지 저절로 이어서 손이 춤을 추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경전의 가르침을 받들고 존경하는 것은 이치로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마음으로서는 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자신을 비워서 깊이 가르침의 취지를 체득하여 마음을 잊고 불교를 흠모하는 것이다. 장차 자신으로써 중생을 인도하고 스스로 중생과 같은 입장에 서도록 하여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함으로써 진실로 새로 불교를 믿는 이들의 의지를 견고하게 하여 그들의 마음을 불교에 붙여 의지하는 바가 있도록 해 주려 했던 것이다.
033_0272_b_09L或謂心念必報理同影響但當求己而已固無事於幽冥原經教之設蓋所以悟夫求己然求己之方非教莫悟悟因乎教則功由神道欣感發中必形於事亦由詠歌不足係以手儛然則奉而尊之蓋理所不必須而情所不能廢宜縱己深體教旨忘懷欣將以己引物自同乎衆所以固新涉之志而令寄懷有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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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모든 괴로움의 극복
경經에서는 “생生의 괴로움, 노老의 괴로움, 병病의 괴로움, 사死의 괴로움, 원망스럽고 미운 사람들과 만나는 괴로움, 은혜롭고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괴로움, 구하는데 얻어지지 않는 괴로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괴로움을 만나면 깊이 인연의 대응對應인 것을 생각하고, 겸하여 그것들이 마귀의 속임임을 깨달아 달관으로써 미혹함을 열고 4등심等心으로써 공덕을 넓혀 나가야 한다. 또한 보잘것없는 인간의 일생은 문틈을 지나가는 빛과 같이 허무하고,73) 서로 만나는 경우는 비록 각각 다르지만 끝내는 죽어 썩게 될 몸인 것이다. 득실의 다소 등은 진실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며, 위에서 말한 몇 개의 방법을 겸해서 쓴다면 이러한 마음은 저절로 그치게 될 것이다. 또 만일 불도에 들어가지 않으면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작용하고, 모이고 흩어짐, 가고 옴은 현명한 이나 어리석은 이가 모두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경經에서도 “편안하면 위태로움이 있고 얻으면 잃음이 있으며, 만나면 이별이 있고 태어나면 죽음이 있다”74)고 말하고 있다. 그것은 자연의 변함없는 흐름이며 반드시 찾아오는 확정된 기약이니, 이 도리를 미루어 마음을 편안하게 하면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마음이 편안하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033_0272_b_17L經云生苦病苦死苦怨憎會苦恩愛別離苦所求不得苦遇此諸苦則宜深惟緣對兼覺魔僞開以達觀弘以等心區區一生有同過隙所遇雖殊終歸枯朽得失少多固不足計該以數塗則此心自息又茍未入道則休慼迭聚散去來賢愚同致是以經云則有危得則有喪合會有離生則有蓋自然之常勢必至之定期推而安之則無往不夷
『유마힐경維摩詰經』에서는 “일체 모든 법은 생각을 따라 생겨나는 것이다”75)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음이 움직이는 조짐은 처음에서 움직이고, 결과로서의 일은 끝에서 응대하는 것이니, 생각이 일어나면 그 과보로서 일이 있는 것이고, 사려思慮가 멈추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마음이 안정되면 접촉하는 모든 경우마다 편안할 수가 있으나, 마음에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어디를 가도 막히지 않음이 없다. 이 점을 가지고 말한다면 깨달음과 미혹의 원류는 나에게 있는 것이지, 밖의 대상 경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마음에 두려움이 생기면 재화가 밖에서부터 들어오고, 밖으로부터 재화가 이미 들어오고 나면 안의 마음의 두려움이 더욱 다져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밖의 대상 경계에 집작하여 잃는 것을 걱정한다면 못하는 것이 없게 되는 것이다.76) 그러므로 경에도, “장부丈夫라도 두려울 때에는 비인非人이 파고들 틈을 갖는다”77)고 말하는 것이다. 만일 마음을 불법의 이치에 머무르게 하고, 천연의 방비로 마음을 견고하게 한다면, 타인이나 인괴人鬼가 파고들 틈이 없고, 인연이 만드는 죄보罪報도 스스로 그치게 되어 어떠한 것도 마음을 어지럽힐 수가 없고, 여러 가지 부정不正한 기운들도 침입할 수가 없는 것이다.
033_0272_c_04L維摩詰云一切諸法定意生形然則兆動於始事應乎末念起而有慮息則無意之所安則觸遇而夷情之所㝵則無往不滯因此而言通滯之所由在我而不在物也若乃懼生於心則舋乘於外外舋旣乘內懼愈結患失之無所不至矣是以經稱丈夫畏時非人得其便誠能住心以理關內固則人鬼罔閒緣對自息萬有無以嬰衆邪不能襲

21) 사비상四非常
4비상非常이란, 첫째 무상無常, 둘째 고苦, 셋째 공空, 넷째 비신非身을 말한다. 아이와 어른은 몸이 달라지고, 구릉과 계곡이 처소가 바뀌는 것을 무상無常이라 한다. 성쇠가 서로 이어지고, 기쁨이 극에 이르면 반드시 슬픔이 되는 것을 고苦라고 한다. 모든 만물이 마침내는 무無로 돌아가는 것을 공空이라 한다. 정신이 일정한 육체에 상주하지 아니하고 유전윤회流轉輪廻하며 멈추는 일이 없는 것을 비신非身이라 한다. 경經에서는 “미혹되는 쾌락의 세계에 몸을 두면 반드시 고통스럽다고 하는 보응의 진리를 깨달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033_0272_c_14L四非常一曰無常二曰苦三曰空曰非身少長殊形陵谷易處謂之無盛衰相襲欣極必悲謂之爲苦切萬有終歸於無謂之爲空神無常遷化靡停謂之非身經稱處或樂之地覺必苦之對
033_0273_a_01L대사代謝를 왕복往復에서 미루어 보아 즐거움이 지나면 슬픔이 오는 무상의 이치를 밝게 알기 때문에 편안한 곳에 있어도 위험을 생각하고, 저녁에 몸의 영화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고苦에 대해서 깊이 응시하는 것을 견제見諦, 즉 진리를 본다고 말한다. 즉, 마음에 움직임이 있으면 미혹이 생기고, 미혹이 생기면 고苦가 존재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존귀함이 인간세계나 천상세계의 극치에 도달해 있고, 그 지위는 숭고한 지위를 겸하여 갖고 있다 하여도 그 입장이 중요하면 할수록 교만한 마음이 나타나는 것도 점점 깊어지게 되어 마음에 느끼는 쾌락은 보응의 진리에서는 점점 고통이 늘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도 “삼계三界는 모두 고통의 세계로 즐거워할 만한 것은 없다”78) 하고, 또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ㆍ천의 5도道 중생은 모두 하나의 큰 뇌옥牢獄의 속에 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마음이 유有의 세계에 이어져 있으면 죄와 복은 서로 함께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삼계를 총칭하여 하나의 큰 감옥이라 하는 것이다.
033_0272_c_20L蓋推代謝於往復審樂往則哀來故居安慮危夕惕榮若夫深於苦者謂之見諦達有心則有滯有滯則苦存雖貴極人天位兼崇高所乘愈重矜著彌深情之所樂於理愈苦故經云三界皆苦無可樂者又云五道衆生共在一大獄中茍心係乎有則罪福同貫故摠謂三界爲一大獄
어느 날 부처님께서 여러 제자들에게 물으셨다.79)
“무상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 제자가 답하였다.
“하루 사이에도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을 무상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다음에 또 한 제자가 답하였다.
“식사를 하는 짧은 시간도 생명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 무상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
최후에 다른 한 사람이 답하였다
“내쉰 숨이 돌아오지 않으면 곧바로 후세後世로 나아가는 것을 무상이라 합니다.”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033_0273_a_05L佛問諸弟子何謂無常一人曰一日不可保不可保是爲無佛言非佛弟子一人曰食頃不可保是爲無常佛言非佛弟子一人曰出息不報便就後世是爲無常佛言眞佛弟子
무상의 드러난 증거가 날마다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데도 어느 세계에도 나아가는 바를 하나로 하여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결국 없다. 잠시 동안의 편안함도 없는데 멀리 후세의 계획을 의뢰하고, 두려움이 눈앞에 없으면 만사에 게을러지고 만다. 이러한 일로 덕을 진전시키려고 해도 한 삼태기의 흙만큼의 효과도 오르지 않으며, 이런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려고 하면 자기의 수업修業을 게을리 하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도가 있는 훌륭한 사람은 짧은 시간도 마음을 두어 그것이 지나가는 것을 아쉬워하고 항상 스스로 자기의 부족한 점을 채찍질하여 노력하고 시간을 다투어 수업에 열중하여 오직 날이 부족할 뿐이니, 이렇게 하게 되면 망념이 기인해 생겨날 곳이 없고, 인연에 따르는 과보도 연유해 일어남이 없을 것이다.
033_0273_a_10L夫無常顯證日陳於前萬代同歸終莫之悟無瞬息之安保永世之計懼不在交則每事殆懈之進德則功無覆簣以之治心則惰其所習是以有道之士指寸陰而惜恒自强於鞭後業興時競惟日不足則亂念無因而生緣對靡由而起

22) 육도六度
6도(度:波羅蜜)란, 첫째는 보시, 둘째는 지계, 셋째는 인욕, 넷째는 정진, 다섯째는 일심一心, 여섯째는 지혜를 말한다. 재물을 모아서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고, 모든 중생에게 은택을 베풀어 구제해 가는 것이 시施이다. 10선을 삼가하여 지키고, 진심眞心으로 사심邪心을 막는 것이 계戒이다. 자신에게 잘못을 범하여도 따지지 아니하고, 항상 잘 자기를 낮추는 것이 인욕忍辱이다. 배운 것을 부지런히 실천하여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게을리 함이 없는 것이 정진精進이다. 마음을 오직 하나로 하여 생각을 막아 지켜서 검약함으로써 많은 것을 거두어들이는 것이 일심(一心:선정)이다. 이 다섯 가지 일은 분별지分別知의 입장[有心]으로 행한다면 세속적인 구원의 길[俗度]이라 부르고, 일체를 아울러 잊어버리는 무심無心의 입장[兼忘]으로 터득할 수 있다면 진실한 지혜[道慧]라 부른다.
033_0273_a_16L六度一曰施二曰戒三曰忍辱四曰精進五曰一心六曰智慧積而能散潤濟衆生施也謹守十善閑邪以誠誡也犯而不挍常善下已忍辱也行所習夙夜匪懈精進也專心守意以約斂衆一心也凡此五事行以有謂之俗度領以兼忘謂之道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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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죄복의 응보와 열반
『본기경本起經』에서는 “아흔여섯 종류의 도술이 있어 각각 일삼는 것을 믿고 모두가 편안한 생을 얻는 것을 즐거워하고 있으니, 어느 누가 자신의 미혹을 알 수 있으랴?”라고 말하고 있다. 얻는 것을 기뻐하고 잃는 것을 싫어하며, 살기를 좋아하고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대개 헤매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하는 미혹이며, 중생이 다 같이 느끼는 생각이다.
그러나 눈에 안 보이는 변화의 이법理法이 은밀히 움직이면 애써 연연해하여 없어져 가는 것을 끌어당겨 머물게 할 수는 없으며, 인연에 따른 업[對]이 이루어지면 그 응보를 받으니, 어찌 지혜의 작용으로 제어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불도를 배우는 자는 반드시 마음을 변화의 세계의 근원에 있는 진리에 귀일시켜 현묘한 진리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그 근원의 도를 맛보고 진귀하게 여겨 가면 여러 가지 망심은 스스로 소멸되고, 소멸하면 무심의 경지에 들고, 무심의 경지에 들면 인연 과보는 끊어진다. 인연 과보가 끊어지고 나면 비로소 무생(태어나는 일이 없는 열반의 세계)에 들어 이미 생을 받는 일이 없으므로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033_0273_a_23L『本起經』云九十六種道術各信所事樂安生孰知其惑夫欣得惡失樂存哀亡蓋弱喪之常滯有生所感同冥力潛謝非務戀所留對至而應智用所制是以學者必歸心化本領觀玄宗玩之珍之則衆念自廢廢則有忘有忘則緣絕緣報旣絕然後入於無生旣不受生故能不死
그러므로 『보요경普耀經』에도 “일체 만물은 어디로부터도 생긴 바가 없으나 생기지 않는 곳이 없고, 모든 생긴 바에 대해서도 어디에서도 생긴 바가 없는 것이다”80)라 하였고, 『니원경泥洹經』에서는 “심식心識이 고요히 쉬면 죽음도 없고 삶도 없다”81)고 말하였다. 마음은 종자種子이고, 행위는 그 대지大地이며, 과보는 결실이 되니, 마치 각각의 종자를 심어 때가 이르면 싹이 트고 그것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10선계의 씨앗을 심으면 생을 받는 과보에 대하여 위의 장章에서 상술하였다. 다시 선禪 등의 4공空을 심으면 천계天界에서 가장 귀한 지위가 된다. 4공과 선에 대해서는 『수경數經』에 그 뜻이 상세하게 실려 있다. 제1천第一天으로부터 제28천第二十八天까지는 그 사람이 일을 행한 것에 따라 복은 점점 늘어 보태진다. 비상非常의 선제禪諦를 심어 유有의 세계를 등지고 무無의 세계에서 머물면 나한羅漢의 열반에 들어갈 수 있다. 유위有爲를 꺼리지 않고, 공관空觀에 얽매이지 않으며, 모든 진리와 하나가 되어 어떠한 것에도 집착하는 일이 없고 의존하는 일이 없으면 종자를 심는 바가 없게 된다. 이미 종자를 심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과보를 받지 않으며,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현묘한 무심의 경지에 들어갈 수 있으니, 그것이 곧 부처님의 열반인 것이다.
033_0273_b_08L是以『普耀經』云無所從生靡所不生於諸所生而無所生『泥洹經』云心識靜休不死不生心爲種本行爲其地報爲結實猶如種殖各以其類時至而生不可遏也種十惡戒善則受生之報具於上章加種禪等四空則貴極天道四空及禪『數經』具載其義從第一天至二十八天隨其事行福轉倍增種非常禪皆諦背有著無則得羅漢泥不忌有爲不係空觀遇理而冥無執無寄爲無所種旣無所種故不受報廓然玄廢則佛之泥洹
033_0273_c_01L니원(泥洹, nirvāna)은 중국어로 무위無爲라고 하고, 또 멸도滅度라고도 번역한다. 그런데 『유마경』에는 “저 육사외도六師外道는 기괴한 것을 설하여 도라고 한다. 이러한 외도의 사師를 따르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사견邪見에 사로잡혀 극단에 치우친 경지에 떨어지게 되고, 8난難에 떨어지게 되어 생사의 도를 여읠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깨달음의 심경[玄心]을 되풀이하여 익혔다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마음이 움직인다면 역시 저 육사외도와 같아서 함께 하나의 유한한 존재로서 머물게 되고 마니, 하물며 생生을 탐하고 생각을 사악하게 하며, 자아自我에 집착하여 변화의 이법을 거슬리는 사람은 어떠하겠는가? 비록 복이 산하山河보다도 크고 귀함이 삼계에서 최고일지라도 인연의 기복으로 돌고 돌다가 결국은 죄고罪苦에 떨어지게 될 것이니, 어찌 마음을 크나큰 자연의 이법에 편안하게 하여 고요하게 현묘한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겠는가?
033_0273_b_20L泥洹者漢曰無爲亦曰滅度維摩詰曰彼六師者說倚爲道從是師者爲住諸見爲墮邊際爲歸八難不得離生死道也玄心屢習而介然微動猶均彼六師同滯一有況貪生倚想報我捍化雖復福踰山河貴極三界倚伏旋還終墜罪苦豈獲寧神大造泊然玄夷哉

24) 공空과 실천實踐
살아 있는 사람이 반드시 감정을 가지는 것은 자연의 법칙으로서 모두 당연한 것이며, 그 감정이 선에 고정되어 있지 않으면 반드시 악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으로 불도를 수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마음이 의지할 곳이 있어야 한다. 의지할 곳이 기인하는 바는 반드시 유(존재하는 것)를 원인으로 하여 얻어진다. 유가 의뢰하고 있는 바는 반드시 번쇄煩瑣한 것을 따라 의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경經에서도 “공중에 궁전을 세우려고 하면 끝내 이룰 수가 없다. 그와 같이 불국토를 실현하려고 하는 것도 공만을 깨달아서는 성취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의 세계의 규정이기는 하지만 불국토의 실현에는 불가결한 5도道, 4등等도 결코 폐지해서는 안 되며, 다만 마땅히 일에 따라 적용하여 사심邪心을 없애 나가야 한다.
033_0273_c_04L夫生必有情天勢率至不定於善必在於惡是以始行道者要必有寄寄之所因必因乎有有之所資必資乎煩是以經云欲於空中造立宮室終不能取佛國者非於空也然則五度四等未始可廢但當卽其事用而去其忮
불佛에 귀의하면 불佛을 해탈할 일이 없고, 계戒에 귀의하면 계에 공덕이 없다. 이러하다면 선제禪諦와 5음陰이 함께 명합하고, 지말인 계戒의 효용과 근본인 관법觀法이 함께 힘을 다하여 비록 여러 가지 실천이 병행하여 행하여져도 그것은 진실로 공空 속에서 공空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공하다면 실천할 것이 없고, 실천한다면 공이 아니다. 이미 실천이 있다면 아마 공空을 상실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공이란 자기의 마음을 잊는다는 것의 명칭이며, 관청이나 주택과 같은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無는 진실로 무無인 것이어서 무를 존재화 시키면 유한세계에 걸려 막히고 만다. 유有는 진실로 유有인 것이니, 유무를 둘 다 잊어야 비로소 현묘한 깨달음이 얻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有라든가, 무無라든가 하는 것은 마음[分別知]에서 연유하는 것이며, 바깥 대상 세계와는 무관한 것이다. 모든 형상을 갖는 것[有]이 비록 일상사의 작용에 펼쳐져 있으나 마음의 움직임이 끊어지면 이치[無]와 명합冥合하는 것이니, 어찌 유를 소멸한 후에 무가 되고 차차로 줄여 가면 아무것도 없는 데 이른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겠는가? 이 점으로 말하자면 유有는 본래 미혹이 아니나 유에 집착하기 때문에 도에 위배되는 것이다. 지말의 흐름을 돌려 근원으로 보내어 근본에 맡기면 자유롭게 통달하게 될 것이다.
033_0273_c_11L歸於佛則無解於佛歸於戒則無功於戒則禪諦與五陰俱冥末用與本觀同盡雖復衆行兼陳固是空中行空或以爲空則無行行則非空旣已有所無乃失空乎夫空者忘懷之稱非府宅之謂也無誠無矣存無則滯有誠有矣兩忘則玄解然則有無由乎方寸而無係於外物器象雖陳於事用感絕則理冥豈滅有而後無階損以至盡哉由此言之有固非滯滯有則背宗反流歸根任本則自暢
033_0274_a_01L그러므로 보살[開土]의 심오한 실천행은 미혹과 깨달음을 모두 하나로 관통하여 일체 만상이 항상 명합하는 것을 깨달아 머무르는 바에 따라서 깊은 진리를 이해하고, 눈앞에 다가오는 일체의 사리事理가 본래 공인 것을 알아 항상 그것들을 근원적인 동일성에 두고서 이해하고, 사색四色이 본래 무형인 것을 깨닫고 궁극적인 이법[本諦]에 따라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만상의 자연自然을 알기 때문에 여러 가지 실천을 행하여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이며, 대승의 심원한 경전은 항상 3세世를 일체로 보아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을 유(존재하는 것)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 즉, 공 속에서 공을 실천한다고 하는 취지가 여기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033_0273_c_21L以開士深行統以一貫達萬像之常乘所寓而玄領知來理之先空得之於同致悟四色之無映順本際而偕廢審衆觀之自然故雖行而靡方等深經每泯一三世而未常見在爲有則空中行空旨斯見矣

53. 정고이장庭誥二章82)
033_0274_a_04L庭誥二章
[안연지顔延之]
顏光祿延之

같은 선善을 달견達見하고 이과異果를 통변通辯하는 것에 첫째는 도道로 말하는 방법과, 둘째는 사람의 마음으로 말하는 방법과, 셋째는 일의 도리로 생각하는 방법이 있다. 도에 의하여 말하는 것은 천天에 근본을 두고 말하는 것이고, 마음에 의해 논하는 것은 사람에다 중심을 두고 논의하는 것이며, 도리에 의해 생각하는 것은 물物에서 대상을 취하는 것이다. 각각의 방법에 따라 유儒ㆍ불佛ㆍ도道를 구별하여 방도에 따라 여러 가지로 전하였지만 요점을 정리하여 보면 말하려 하는 것은 결국은 일치한다.
033_0274_a_05L達見同善通辯異科一曰言道二曰論心三曰校理言道者本之於天心者議之於人校理者取之於物而別之由塗參陳要而會之終致可
저 현고하고 신령한 불경, 궁명窮明한 불설과 같은 것은, 세 가지의 의의 意義의 단서를 겸하여 갖추어 가장 뛰어난 극치에까지 이르고 있다. 다만 그 언어가 오랑캐 쪽에서 나온다는 것 때문에 세상의 학자 모두가 싫어하고, 그 일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 일어났다는 것 때문에 우리의 관습에 맞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하늘이 도道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 이민족[胡]과 중국인[華]에 차등을 두지 않았을 것이며, 사람이 영靈을 받는 데 있어서 어찌 중국의 밖과 안의 한계를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이 일을 고려하면 제멋대로 판단을 할 수 없을 것이다.
033_0274_a_10L若夫玄神之經窮明之說義兼三至無二極但語出戎方故見猜世事起殊倫故獲非恒情天之賦道非差胡華人之稟靈豈限外內一以此思可無臆裁
도를 닦는 사람은 대개 그 흐름이 선법仙法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몸을 단련하는 것을 최상으로 하며, 부처님을 숭상하는 사람은 그 근본이 마음의 가르침[神敎]에 있기 때문에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제일로 한다.
몸을 단련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깊고 넓은 곳으로 나아가 비령飛靈을 지주로 하고 단석丹石을 마른 식량으로 하고 지정芝精을 입식粒食한다. 그러므로 나이를 되돌려 늙음을 물리쳐 젊어지고, 아름다움을 연장하여 광채를 오래 가지며, 몸을 분홍 노을에 합치시켜 자취를 하늘에 두루 미치게 하고자 하니, 이러한 것은 장점이 된다. 그러나 바른 도를 행하지 않는 이가 이것을 행함에 이르러서는 재앙을 두려워하고 조잡한 바람을 부과시켜 사녀士女를 구별하지 않고 요妖와 정正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이러한 것은 크게 좀먹는 해독이라 할 수 있겠다.
033_0274_a_14L爲道者蓋流出於仙法故以練形爲崇佛者本在於神教故以治心爲練形之家必就深曠支飛靈餱丹石粒芝精所以還年卻老延華駐彩欲使體合纁霞軌遍天海此其所長及僞者爲之則忌災祟課租願混士女亂妖正此其巨蠹也
033_0274_b_01L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반드시 육친과 배우자를 떠나서 몸과 심성을 지키고, 정각淨覺을 스승으로 삼아 인연과 명(命:인과응보)을 믿는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무생無生으로 돌아가 성스러운 업을 훌륭히 이루니, 지혜는 해와 달보다 더 밝고 뜻은 항겁恒劫도 좁힐 수 있으니, 이러한 것은 귀하게 여겨야 할 점이다. 그러나 정도正道를 벗어난 이가 이것을 행하면 머리를 깎은 것을 빙자하여 훌륭한 이들까지 머리 달린 속인이라 하여 업신여기고, 빛나는 명성에 의지하여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사람이 나오니, 이것은 커다란 속임수인 것이다.
033_0274_a_21L治心之術必辭親偶閉身性師淨覺信緣命所以反一無生剋成聖業智邈大明志狹恒劫此其所貴及詭者爲之則藉髡落狎菁華傍榮聲謀利論此其甚誣也
그러나 만물萬物에는 옳지 못한 것도 있으며, 일에도 폐해가 없지 않다. 예를 들어 저울로 매일 재어 보아도 역시 차이가 있는 것이 염려가 되는데, 더구나 신도神道는 모양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진실로 모든 일의 실마리는 신도神道에게서 빌리는 것이다. 아직 마음을 체득하지 못하고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지 않는 것은, 영성靈性은 은밀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이치를 쌓아 알 수가 있으며, 큰 변화도 갑자기 일어나기 때문에 확실하게 보이지 않지만 대순大順의 작용을 기다려서 알 수가 있다고 여겨서이다. 비치는 것이 거울같이 맑은 하늘과 같고 고요함이 두루 비추는 연못과 같아서, 이치에 순응하는 것을 사람으로 여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진실을 없다고 하여 그 폐해를 책망하는 무리들은 아직 심조心照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033_0274_b_02L物有不然事無終弊衡石日陳猶患差況神道不形固衆端之所假未能體神而不疑神無者以爲靈性密微可以積理知洪變欻怳可以大順待若鏡天蕭若窺淵能以理順爲人者可與言有神矣若乃罔其眞而責其是未加心照耳

54. 일촉日燭
033_0274_b_09L日燭
[왕해王該]
王該

구극근원의 도[至道]를 설명한 경전을 찾아보니, 생사의 근원을 설명해 드러내고 선악의 응보를 나타내 보여 즉시 현세를 건너가는 가르침의 나루를 열고 있다. 그 훈계는 명백하여 상세하게 나열하여 설명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진실한 말은 아름답지 않으며,83) 경전의 문장은 번잡하고 언사는 광대하다. 겹치는 심오한 사리事理는 매우 어둡고 깊은 미혹의 연못은 파도가 있어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불교를 배우는 사람은 아직 그 문門을 찾지 못하거나 혹은 아직 마음에 담지 못하고 있다. 조금이라도 함지咸池84)의 유원幽遠한 음악을 찾아 들으면 때마침 마을의 비근卑近한 곡조가 되고, 작은 것을 빌려다 큰 것에 통하게 하면 우연히 세속에 접근할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늘을 도와서 빛을 발하게 하는 것을 이름하여 일촉(日燭:해와 같이 비춤)이라 한다.
033_0274_b_10L尋夫至道之典暢生死之源標善惡之報啓淩化之津訓戒明白縷羅備然信言不美文繫辭宕累冥絕昧重淵隔浪是以學者未得其門或未之留意聊採咸池之遠音適爲里巷之近曲假小通大儻可接俗助天揚光號曰日燭
선각자(先覺者:佛)의 원대한 가르침을 익혀 현관(玄管:깨달음)을 영부(靈府:마음)의 입구에서 열면 광대한 허공을 두루 유유자적하게 바라보아 망탕莽蕩85)을 다하여 한량이 없다. 지세地勢를 일정한 장소에서 밟고 둥근 하늘을 엎어 놓은 동이에 씌우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 맡기고 삼계의 넓고 넓은 경계를 아득히 생각하여 음양의 이기二氣가 화和하여 융성하게 일어나는 모습을 만나 크나큰 천지자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근원을 찾아 천지 화육化育의 유현幽玄한 근본을 헤아려 보면, 모습(육체)은 4대(지ㆍ수ㆍ화ㆍ풍)가 임시로 성립된 것으로 거품이 되어 흩어지고, 정신(영혼)은 만물 중에서도 영묘한 것으로 항상 존재한다. 저 선량한 백성은 그 분(分:본래)의 것을 통달했기 때문에 생生을 슬프게 여기고 영혼이 항상 있음을 기뻐하는 것이다.
033_0274_b_17L陶先覺之宏誥啓玄管於靈門周大虛以遊眺究漭蕩而無垠履地勢於方局冠圓天於覆盆緬三界之寥廓遘二氣之煙熅尋太造之冥本測化育之幽根形假四大而泡散神妙萬物而常存彼良民之達分故哀生而怡魂
033_0274_c_01L모든 기운을 머금은 무리들은 그 정신(영혼)이 정해진 방향이 없고, 움직이는 무리들은 그 형체가 항상 하지 않는다. 생生을 맡기면 물의 형세와 같고, 생을 의탁하면 불빛과 같다. 가는 데 따라 연연해 여의지 못하며, 번갈아 가며 시들거나 생생하게 피어나서 왕래往來하고 출몰出沒함이 언제까지나 끝이 없다. 생사의 넓은 바다는 돌아 흐르고 자연의 변화는 윤회하여 파도를 타고 멀리 표류한다면, 그 생사의 대해를 건너오는 데 어떠한 계단이 있겠는가? 3악도의 속에 빠져들어서 8난難의 경계에 침체하고 그곳을 뚫고 나아가려고 기약함이 없는 것을 불쌍히 여긴다. 객작(客作:천한 사람)86)이 3악도로 돌아가는 것을 서러워하여 덕을 숭상하는 것은 빨리 되어야 한다고 바라보고, 재앙이 모이는 것은 마땅히 더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는 일을 성취하는 데에서 보기 쉬운 것이며, 장래의 일을 예지하는 마음의 움직임은 작은 것이 아니다. 오복五福은 바른 것을 실천하는 일에서부터 일어나고, 여섯 가지 불행[六極]87)은 그른 것을 실행하는 일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치를 느끼는 것은 자연히 그렇게 되는 것이며, 아득하고 그윽한 가운데 대응하고 있어 현묘하게 응고되어 있다. 복福은 누가 만드는 것일까? 화禍는 누가 일으키는 것일까?
033_0274_c_01L夫含氣之倫其神無方蠢爾之類質無常寄若水勢託若火光隨行繾綣迭枯迭芳往來出沒冥冥茫茫海環流大變輪迴乘波遠漂濟來曷宛轉三塗之中沈滯八難之圍企竅之無期悼容作之有歸瞻崇德之可速鑑聚凶之宜遲斯成務之易匪先見之動微五福起於履是極搆於蹈非理感自然冥對玄凝兮誰造禍兮孰興
물의 흐름은 낮은 곳에서 모이는 것처럼 인도人道는 자랑하는 것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죄는 여유가 있음을 원인으로 하여 쌓이고, 행복은 겸손함을 인연으로 하여 번성하는 것이니, 비록 아이라도 바른 행동을 하면 귀신이 물러가고 어른이라도 사악한 행동을 하면 요괴가 침범하는 것이다.
033_0274_c_11L水運鍾卑人道惡舋因豐積祉緣謙升僮孺正而鬼退丈夫邪而魅淩
형체와 소리의 짝을 이루는 그림자와 메아리를 보거나 행복과 재앙의 두 징표를 고찰해 보면, 그 이치는 생각을 해 보아도 꼭 들어맞고, 그 자취는 눈으로 보더라도 상응하고 있어, 마치 둥근 수레바퀴가 그림쇠(콤파스)를 품고 있는 것과 같으며, 곧은 서까래가 먹줄을 달고 있는 것과도 같다. 창견蒼犬은 제부帝父로부터 나왔으며, 황웅黃熊은 성인(우임금)의 치수를 도왔다88)고 하니, 이에 변화를 징험하여 바로잡지 못하고 어찌 천속天屬89)을 믿고 의지한다 말하겠는가? 참으로 복을 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있으며, 진실로 사람이 되는 것도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아아, 숨 쉬는 사람에게 있어서 항상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홀연히 어디론가 가 버리면 그것이 어디에 멈출지 알겠는가? 그 인연은 사람이 집적集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기氣가 시작되는 곳은 없는 것인가? 젊고 아름다운 이가 요절해 죽은 것을 슬퍼하지만 오히려 그 혼이 가축으로 생生을 의탁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옛날에는 길러 키우고 품에 보듬던 자식이면서도 지금은 변하여 가축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가축을 잡아 가죽을 벗겨 제사의 예를 행하기도 한다. 또 정신은 오묘하게 있어서 나에게 항상 존재하고 있으나 몸은 변화를 수용하여 이체異體로 바뀌어 눈 깜짝할 새도 되지 않는 사이에 잊혀지고 마니, 참으로 길게 한탄하여 눈물 흘리며 울 만할 일이다.
033_0274_c_13L覽形聲之兩偶休咎之雙徵理投思而合契迹望目而相應若圓轉之抱規猶直桷之附蒼犬出於帝父黃熊咨於聖子徵化而不救奚天屬之云恃諒求福之在躬信爲人之在己咨次吸其靡常知忽往其何止彼非人之什岌豈無氣之所始悲婉孌之夭徂還託生於家豕昔鞠育而懷抱今屠刳以爲禮神居妙而恒我形受變而易體未一旬而相忘可長歎而流涕
033_0275_a_01L도리에 어두운 사람들[閘愚]은 모두가 다 그러하며, 그러한 사람만이 홀로 그런 것은 아니다. 훌륭한 생명체에게는 새끼를 잉태함이 적은 도리를 살피고, 벌레와 같은 것들에게는 새끼의 생산이 번창하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은 마치 그치지 않고 내리는 장맛비라도 보는 데 따라서는 오히려 적다고 하는 것과 같다. 자루를 뒤집어 쌀을 밖으로 쏟는 것처럼 날마다 많은 것들을 낳고 있으나 누가 숨어서 무엇을 원인으로 하여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있겠는가? 내 마음으로는 헤아릴 수가 없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033_0274_c_23L夫閘愚其皆然匪伊人之獨爾察寡孕於嘉類悟繁產於虫豸喩零霖其猶希若翻囊之倒米爲囂囂以日日誰識伏而達倚匪余情之能測謬聞之以如是
그 본말을 전도하고 있는 무리나 몽매한 무리로 태어난 사람들과 같은 이들은 전쟁의 풍파가 닥쳐오면 홀연히 숨어 어디론가 가 버린다. 정신의 도[神道]는 비록 확실히 보이지 않지만 귀신의 법은 더욱 분명하다. 그러므로 죽어서 다시 태어날 때까지의 중음中陰의 사이에서 배회하고 저 지옥의 철성鐵城으로 가는데, 하늘에는 달[望舒]이 비추지 않고 낮에도 해[曜靈]가 없고, 몸은 밧줄로 묶여 갇히고 발은 숯불이 타고 있는 마당을 밟고 있다. 칼산은 서릿발과 같이 날카로운 칼날을 쌓아 놓고 있고, 칼 숲은 칼끝을 세워 매우 날카로우며, 동銅을 녹인 것이 넓고 넓어 바다처럼 용솟음 치고 거대한 가마는 파도처럼 끓어 천둥소리를 낸다. 그리고 염왕閻王은 죽은 이를 통솔하여 검열하고 옥졸獄卒이 곁에서 비녀를 손에 잡고 있어 삼륵三扐을 한 번 떨치면 백천 가지가 겹쳐서 나열된다. 그것은 독을 가지고 있는 날카로운 부리이든가, 아니면 붉게 타오르는 불수레이든가, 날카로운 못이나 창과 같고, 교활한 개가 이를 드러내고 오는 것과 같다. 음란한 무리들은 환주幻柱에 그을리고, 굶주린 수인囚人은 진사塵沙에서 말라 야위어 간다. 그리고 가볍고 교묘한 영질(靈質:죽은 자의 몸)을 취해 가져 점점 통륙痛戮을 가加하기 쉬워지며, 길이 고통을 당하여 무수한 겁劫을 거치니, 어디에 이 혹독함보다 더한 것이 있을 것인가? 십팔지옥十八地獄의 엄한 형법을 되풀이하여 말할 수 없으며, 천 가지 조목의 다른 가혹함과 만 갈래의 고통을 숨차게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갑자기 이 지옥에 와서부터는 몸도 세상도 없어지고 만다. 내가 이 지옥에 대해 대략 한 번 말한 것만으로도 장차 일생을 끝낼 때까지 떨치고 마음이 아플 것이다.
033_0275_a_04L夫倒置之族矇矇徒生兵風旣至然潛征神道雖昧鬼法尤明俳佪中陰徂彼鐵城霄絕望舒晝無曜靈造笮萼之檻足蹈炎炭之庭刀嶽霜鋩以積刃劍林翹鋒而嘯精陶銅汪洋以海涌巨鑊波沸而雷鳴閻王領閱卒傍執釵三扐一奮百千累羅鴆利嘴煌煌火車銳釘攙槍狡狗凝淫徒燋於幻柱飢囚枯於塵沙輕妙之靈質益痛戮之易加永煩冤以彌劫安斯酷之可過三六峻罔不可列縷千條殊劇萬端異苦靡喘息而不經俄聿來而忘宇予略一朝以言之將終年而震楚
033_0275_b_01L그러나 5덕(德:戒)을 갖추어 흠이 없고, 10숙(淑:善)의 도를 온전히 하여 저녁 해처럼 가고 경사스럽게 구천에 오를 수가 있다면, 거기에는 보배 궁전이 밝게 빛나고 있고, 높은 건물이 허공에 걸려 있으며, 주방이 몇 백 개나 있고, 아름다운 문은 천千에 가깝다. 또 금문金門은 수정의 밝고 맑은 빛으로 빛나고 있고, 옥으로 된 통로[玉巷]가 유리의 선명함으로 빛나고 있다. 보배 나무가 길옆에 서 있고, 난새와 봉황새가 나뭇가지 사이에서 울고 있다. 향기로운 꽃이 신비하고 특이하여 찬란하게 아름답고, 향기로운 바람이 신령하게 나부껴 연기를 날린다. 그리고 아름답고 신성한 옷을 입고 싶다고 생각만 해도 몸에 입혀지며, 향기로운 음식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면 눈앞에 가득히 차려지는 것이다. 저 태양도 오래도록 지지 않아 하루를 이 세상의 만 년의 길이로 하며, 일이 행해지는 것이 본성을 어김이 없어 항상 자연에 안온하게 조화되어 있다. 그리고 찬란한 꽃순의 빛나는 모습을 비추고, 가볍게 올라가는 것이 경쾌하게 나는 모습을 보며, 오묘한 음조의 지극히 아름다운 음악을 모두 듣고, 생명을 멀리 연장하여 끝까지 다하며, 비루한 이 세상을 버리고 위로 올라가 훌륭한 무리와 짝하여 높게 옮겨 가는 것이다.
033_0275_a_18L爰有五德無玷十淑道全夕陽造逝慶升九天寶殿晃昱高搆虛懸瓊房兼百瑤戶摩千金門煥水精之朗玉巷耀琉璃之鮮珠樹列於路側鸞凰鳴於條閒芳華神秀而粲藻香風靈飄而飛煙想衣斐釁以被軀念食苾芳以盈前彼羲和之長邁永一日而萬年無事爲以干性常從容於自然映光蕊之爍爍眇輕騰之翩翩究妙音之至樂窮有生之遐延捨陋世而上濟伴超倫之高遷
그러나 이 옛 덕德을 받아 먹음은 날마다 옥식玉食을 쓰고 있는 것이고, 이 흙은 불모의 땅이라 농사를 지을 수도 없으니, 비록 쌓아 축적한 것이 많다 하더라도 어찌 고갈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또 수명을 오래 누리는 행복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끝내는 멸망하고 마는 것이다. 또 궁전과 집들도 삼재三災90)가 일어나면 훌륭한 궁전이나 집들도 흩어져 버리고, 칠증七證이 이르면 천인天人의 복록福祿도 없어진다. 대추大秋를 만나 천수를 마치고 조락凋落해 버리면, 명이 짧은 조균朝菌이나 장수를 하는 대춘大椿91)도 구별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여래대성如來大聖께서는 3달(達:천안ㆍ숙명ㆍ누진)로 환히 관조觀照하시어 중생들의 무지몽매함을 불쌍히 여겨 도道의 요체를 밝게 하셨고, 선교방편으로 중생들의 번뇌를 씻어 내어 혹은 추麤하게, 혹은 묘妙하게 마치 광대한 바다가 흐름을 운행하는 것과 같이, 태양이 빛을 드리우는 것과 같이 이끌어 주신다. 그것에 의해 상사上士는 마음을 비워 말을 잊어버리고, 중재中才의 사람은 뜻을 굳게 하여 가르침을 지키려고 한다.
033_0275_b_06L然夫饗茲舊德日用玉食厥土不毛网施稼穡積畜雖多焉有不竭齡祚雖脩終焉歸滅三災起而宮宇七證至而天祿絕會大秋以考落混椿菌之無別是以如來大聖三達洞照哀我困蒙曉了道要善㩲灑落或麤或妙如溟海之運流若天日之垂曜上士虛懷忘其言中才貞志執其教
여래의 가르침에는 일정한 방법이 없고 중생이 말미암는 바에 따라 설해지니, 육지에서 수레를 타고 물에서 배를 사용하라는 등의 이런저런 방편을 부설敷設하여 폭넓게 말하고 있다. 경駉92)에 대해서는 삼백으로써 모든 것을 노래하고 마는 것은 아니겠고, 그 요지要指는 하나의 유幽에 있는 것이다. 현묘玄妙한 강령綱領을 잡아 쥐고서 모목毛目을 창구鬯裘에서 쫓아 광대한 큰 가르침을 싸서 간직하고 나의 지혜의 본래 몫을 펼쳐 나간다. 다스려짐에는 균등하지 않음이 없으나 자질에는 영리하고 둔함이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빈 마음으로 갔던 이가 가득 채워 돌아와93) 각자의 마음에 만족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도, 현명한 사람도 함께 유도誘導되어 용도 귀신도 다 함께 교화되는 것이다. 만 갈래 길을 모아 하나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반야般若를 말미암는 것이다. 비유해 보자면 바다를 건너는 데에 배가 아니면 건너갈 수 없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들을 도량道場으로 몰아가게 한다면, 모든 반야의 지혜를 얻어서 마침내는 무위無爲하여 멍에를 벗고 쉴 수 있는 것이다.
033_0275_b_14L教無定方適物所由宜陸以車應水以舟敷設云云廣術悠悠駧未塞乎三百要指在乎一幽掘累玄之綱領遣毛目於鬯裘宏籠大訓展我智分治無不均質有利鈍虛往實歸各足方寸愚黠竝誘龍鬼俱化萬塗叢歸一由般若譬彼濟海非舩莫過驅萬動於道場畢無爲而息駕
033_0275_c_01L본래 3승乘의 시초는 다 같이 일무一無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재조才照가 각각 다름에 따라 작용을 이룸도 각각 다르게 되는 것이다. 응진(應眞:아라한)은 유有를 잊고 공空을 구하여 드디어 공空에 빠져서 고요히 즐긴다. 연각緣覺은 미미한 것을 아는 곳[知微]94)에서 번뇌[累]를 밝게 알아 현묘한 곳으로 옮겨 한 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리고 현묘한 형적形迹이 다시 없어져도 오히려 자취가 남아 허무虛無한 것이 아니고 사람들에게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개사(開士:보살)는 속박하고 있는 만물에서 모두 해탈하여 보존함이 없는데 무엇을 제거하겠는가? 깨달음은 조감하는 처음까지 활짝 열렸고, 체득體得함은 생각이 일어나는 처음까지 명합冥合하고 있다. 이 보살의 이치는 진중하고 깊어서 말이 끊어지는데, 누가 잘 살펴서 일체를 업業으로 삼겠는가?
033_0275_b_21L本夫三乘之始同歸一無才照各異致用參殊應眞忘有而求空遂耽空而恬緣覺亮累於知微爰遷玄而不居雖妙迹其再喪猶有遣而未虛開士解物於都盡作無存其焉除悟之豁於鑑先體之冥乎意初理重深而絕疇剋諒而業諸
예전부터 옛날 사람들은 당당하게 덮어 비추어 주는 부처님을 만나 몸소 성인의 가르침을 받았고, 윗사람의 덕을 사모하는 만백성들은 이목耳目을 기울이기도 했고 우러러보기도 하였다. 어떤 사람은 한 번의 기침에 의해 몽매함을 깨우쳤으며, 또 어떤 사람은 한 번 먹음에 의해 복종하였다.95) 이러한 일들은 모두 말을 의지한 후에 교화된 것이고, 어떤 사람이라도 제도하지 않음이 없었다.
선서(善逝:불교)는 오늘날에는 도운道運이 점점 쇠퇴하여 가고 있다. 큰 가르침이 비록 존속하고 있다 해도 그 가르침을 맛보는 사람은 드물다. 전단栴檀나무를 요소蓼蘇 풀의 향기와 똑같이 여기고 달빛을 반딧불[燿燿]96)의 광채와 같다고 여기고 있다.
033_0275_c_05L自古在昔先民有堂堂蔭映躬受聖喩喁喁群黎耳目仰注或發矇於一咳或革面於一竝因言而後化未有人而不度逝迄今道運轉衰大教雖存味之者希栴檀與蓼蘇同芬夜光與熠燿齊暉
우씨[于法蘭]는 세간을 뛰어넘어 현묘한 뜻을 모두 체득하여 산택山澤에 은거하였으며, 그 인덕仁德은 호랑이를 감화시킬 정도였다. 호궁[竺法護]은 적정寂靜을 깨달아 도덕은 깊고 훌륭하였으며, 깊은 골짜기의 물이 말라 버리자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작은 혼잣말에 말라 버린 수원水源에서 점점 물이 흘렀다고 할 정도였다. 궐수[厥公則]는 하늘에 올랐고, 위도[衛士度]는 궐공칙의 본보기를 이어받아 모두 무생無生하여 욕심이 적고 꾸밈이 없었으며, 모두 몸을 벗어 버리고도 죽지 않았다.
033_0275_c_10L于氏超世綜體玄指嘉遁山澤仁感虎兕護公證寂道德淵美微吟穹谷枯泉漸水闕叟登霄衛度係軌咸淡泊於無生俱脫骸而不死
지금은 지자[支遁]가 특히 훌륭하여 현표玄標를 깨달아 잡아 쥐고 있다. 그의 위대한 일은 깊고 순수하며, 그 훌륭한 심성은 맑고 고요하다. 그가 한마디 하면 사람들의 마음에 쌓여 막힌 것을 풀어 주고, 세 번 접하면 두터운 마음의 어둠도 밝아질 정도이다. 또 그를 보면 그것만으로 인색한 마음을 씻어 내기에 충분하고, 그 가르침을 들으면 교만한 마음도 충분히 떨어 버릴 수 있다. 그는 탁류를 피하여 은일隱逸하였고, 초지初志를 이루려고 동산東山에 들어가 시를 읊고 지냈으니, 어떤 깊은 맛이 있어 검소한 곳에서 살고 대보大寶를 털끝보다 더 가볍게 여기는 것인가? 도풍道風이 널리 날리는 것이고, 깊은 깨달음이 소요逍遙하게 하는 것이니, 재능 있는 이가 힐책하지 않으면 현자賢者도 귀하게 되지 않고, 어리석은 이가 웃지 않으면97) 성인도 높여지지 않는 것이다. 유원幽遠한 소리는 천박한 이의 귀에는 품격이 낮은 소리로 취급당하는 것인데, 누가 소악韶樂을 듣고 고기의 맛을 잊을 수 있겠는가?98) 어디에 가더라도 도 없는 곳이 있겠으며,99) 어디에 가더라도 신神 없는 곳이 있겠는가?
033_0275_c_14L今則支子特秀領握玄標大業沖梓神風淸肅言發則薀滯披三番著則重冥昭之足以洗鄙吝聞之可以落矜驕濯流以逸契詠遂初於東睾何深味以拪素輕大寶於秋毫道風之所扇深達之所逍遙才不難則賢不貴愚不笑則聖不高遠聲見陋於近耳孰能忘味於聞韶哉奚適非道何之無神
033_0276_a_01L그러나 도리道理에는 정미로움과 거칢이 있고, 사람에는 속됨과 참됨의 구별이 있어서 크게는 세군(細君:諸侯)이 되고, 작게는 훌륭한 신하가 된다. 혹은 날개를 가진 새들도 금시金翅에 예속되고, 갑라甲羅를 갖는 것은 수륜(須倫:아수라)에 속하는 것이다. 또 양의兩儀는 태극에 근본을 두고,100) 뭇 별들은 북극성[北辰]에 매여 있다.101)
033_0275_c_23L理有精麤物有彦眞大居細君小爲碩臣羽族隸乎金翅甲屬屬乎須倫兩儀宗於太極衆星繫於北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흔여섯 종류의 외도들은 근본을 잊어버리고 말단의 가지를 무성하게 치고 있어 중요한 근본을 가볍게 버리고, 정왕(靜王:불교)을 떠들면서 버려 버리고 모두 성스러운 것에 따르고 있다고 말하면서 각각 한쪽 세계에서 멋대로 맹동하고 있다.
그들 중에 어떤 사람은 산을 옮겨 흐름을 막고, 또는 존망存亡에 마음을 조급하게 하고 있다.102) 그리고 천의天衣의 광채 찬란한 사람에게 명령을 한다든가, 영묘한 주방의 좋은 향기가 나는 곳에서 큰소리를 내고 있다. 또 흉포한 무리들도 우禹의 개선凱旋을 장식하며,103) 자갈을 임랑(琳琅:美玉)으로 변화시키며, 변환變幻의 한도를 다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현상계의 일들이 영원성을 갖지 않는 것을 애석해 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한계가 있는 세계 안에서의 달고 진한 술이며, 지극한 도道에서는 술찌꺼기만도 못한 것이다.
033_0276_a_02L是以九十六種枝條繁張輕遺重根躁廢靜王俱曰與聖各擅一方或移山而住流或倏忽於存亡命天衣之采粲嘯靈廚之芬芳曜振旅之兇暴化礫石之琳琅竭變幻之掘奇惜有待之無長斯乃數內之甘醇不如至道之糟糠者也
선仙에 열거되는 사람들이나 몸을 단련하는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목을 길게 늘이듯 몸을 단련하거나,104) 태일(太一:玄氣)을 호흡하거나, 저녁에는 느릅나무 그늘과 밝은 달의 정기를 먹고, 아침에는 아침놀이나 붉은 때의 정기를 잡는다. 그러므로 적부赤斧105)는 단丹을 먹음에 의해 장생하였고, 연자涓子는 삽주[朮]106)를 먹음에 의해 천공을 날 수 있었다. 또 안기安期107)는 송호松毫를 먹고 오래 살았으며, 풍인豐人은 백柏나무 열매를 먹고 가볍게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온화한 영액靈液에 물들어 수명을 보존하고 형질形質을 멈출 수 있게 했다는 것뿐이었다. 마음속은 편안하지 않아서 외형에 의존하고 있었다. 다만 구름에 올랐다 떨어져 죽었을 뿐이니, 모두 주머니에 싸서 동여매고 그것으로 알을 견고하게 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도를 구한다고 하는 의미로는 같은 문에서 함께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이치로는 아직 안회顔回의 당堂에도 오르지 못하는 것인데, 멀리 크게 공자의 방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108)
033_0276_a_09L逮乎列仙之流練形之疋熊經鳥伸呼吸太一夕飡渝陰與素月朝挹陽霞與朱日赤斧長生於服丹涓子飜飛於餌朮安期久視於松毫豐人輕擧於柏實彼和液之所深足支年而住質中不夷而外猗徒登雲而殞卒俱括囊以堅烈固同門而共出理未升於顏堂永封望乎孔室
033_0276_b_01L날 수 있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면 나방이나 나비도 높이 날 수 있다. 늙음을 피하는 것을 진기하게 여긴다면 거북이나 뱀도 긴 수명을 갖추고 있다. 이 임시로 머무는 객사客舍와 같은 세상의 떠도는 기운에서는 오직 마음만이 보배라 할 수 있다. 몸을 보존하는 것만을 원하는 사람과는 함께 마음을 논할 수 없으며, 세속과 가까이 친근한 사람과는 함께 도를 말할 수 없다. 도道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물어볼 수도 대답할 수도 없으니 물어보는 사람이 궁극에까지 이르면 이를수록 응답하는 사람은 더욱 안으로 들어가고 만다. 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통하는 것이 되는 것이어서,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다해 버리는 것이다. 현주(玄珠:道)의 본체와 도를 설명하는 것을 짝으로 한다면, 나는 망상罔象과 무위無謂가 된다고 여긴다. 마음을 집중하여 움직이지 않고 고요히 있으면 그곳에 교차되는 현묘한 응수應酬 속에 훈계訓誡함이 있는 것이다. 울림을 오로지 연구해 보아도 깊고 아득한 소리 깊은 가르침은 깨달을 수 없다. 도를 바라면 더욱 잘못되어 버리고, 찾아 구하면 한층 더 깊이 가라앉고 만다. 영郢 땅의 사람이 죽어 버렸으니, 누가 석공[匠石]이 도끼질[椹質]할 때 밑에 괴는 받침이 되겠는가?109) 통발과 올가미[筌蹄]110)를 연못이나 초목이 무성한 곳에 설치하여 고기나 토끼가 걸리는 것을 강이나 숲에서 기다리고 있어도, 만일 언외言外의 뜻을 깨달았다면 그와 함께 보는 즉시 마음을 버려야 할 것이다.
033_0276_a_17L貴乎能飛則蛾蝶高翬奇乎難則龜蛇脩考伊逆旅之遊氣唯心玄之可寶存形者不足與論神狎俗者未可與言道道乎奚言無問無對諮者叩窮應者負內默之斯通語焉則匱當於玄珠與講道吾成网象與無謂兀然寂泊玄酬有箴宗鑽浮饗莫悟冥音希之彌錯搜之愈沈郢人其逝爲誰匠椹設筌蹄乎淵薈俟魚兔乎川林儻得意於談表共目擊而廢心
잠깐 동안도 움직이지 않고서 갔다가 돌아오는 것처럼, 인립忍立111)의 현자賢者들은 홀연히 머물던 곳을 건너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 스승들이 이 나라에서 교화를 행하여 왔지만, 지금 처음으로 일육一六112)의 한계를 넘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자씨(慈氏:미륵보살)가 지금 마침 융성하여져서 우리들은 우러러 그 인육仁育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실정과 거리가 먼 가르침이라 말하겠는가? 한 번 보고 즉시 눈을 놀라게 할 것임에 틀림없다.
033_0276_b_04L無運睒儵往矣斯復忍立賢達忽如涉宿千師誕化肇過一六慈氏方隆仰期仁育孰云數遼瞥若眴目
신령한 고삐는 비록 빠르지만 인연의 문은 끝이 없다. 연추(緣樞:불교)에는 안의 근본이나 겉의 표면이 없지만, 인간에게는 처음과 끝이 있다. 그러므로 순식간에 번쩍 타 버리는 번갯불 같은 이 세상에 임시로 발걸음을 옮기고, 석화石火처럼 빠른 폭풍 같은 세상에 숨을 의지하고 있다. 길의 험난함을 두려워하고 도둑을 만나 놀라게 될 줄은 아나, 진욕塵欲의 세상이 융(戎:불교)을 불러들이는 것에는 미혹해 있다.
그러나 심오하고 수승한 것을 버리고 천근賤近한 것을 탐하며, 사치함과 검소함을 풍부함의 표리가 교차되어 나타남이라 생각하여 아직 폭풍이 불지 않을 적에 시들어지는 것을 막지 않고, 이미 거센 바람에 떨어지고 나서 망루에 돌아와서 다시 한번 꽃 피우려고 생각해 보지만 온갖 후회만이 맺히니, 어찌 원하는 것을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033_0276_b_06L靈轡雖迅緣樞靡窮彼無本摽我有始終假步灼電之末託息石飆之中知畏塗而驚寇迷塵欲之致戎替遠勝而婪近謂賖儉而交豐不防枯於末飆旣零落於勁風思反蔕而更秀結萬悔其胡充
그러한 이유로서 큰 서원을 한 불교의 무리들은 손가락을 태우거나 돌을 뚫어서 불감佛龕을 만든다든지 하여 드러내지, 마음에 기약하고 기다려 바라는 것을 밖으로 나타내지 않는다. 뜻과 마음에 선행을 쌓고 지력智力의 구덩이를 깊게 하고, 혜심慧心의 벽을 높이고 율律의 칼을 빼어 들고, 계戒의 참을 휘둘러 망상이 막 싹트려 하면 즉시 베어 없애고, 욕정이 조짐을 보이면 즉시 잘라 끊어 버린다. 이렇게 하여 6적(賊:塵)을 가슴속에서 쓸어 내고 5도道의 기나긴 노역勞役을 쉬게 하려고 한다.
033_0276_b_12L是以大誓之徒燒指穿石冥期無待志與心積浚智塹慧壁拔神劍揮戒戟想將萌而夷斬情向兆而翦刺掃六賊於胸中休五道之長役
033_0276_c_01L이렇게 하여 스스로 내치內治를 가지고 법인法忍을 총지하면 3세(과거ㆍ현재ㆍ미래)의 미혹이 모두 적멸寂滅하여 일심一心이 활짝 열려 모든 번뇌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귀를 분명하지 않은 것[無明]에 붙이고, 눈을 견줄 수 없는 것에 붙여 오진汚塵은 각각에 따라 공허하게 떨어져 버리며, 더러운 것도 함께 허무하게 떨어져 버린다. 넓고 넓은 영묘한 깨달음은 여러 가지 방편을 기인하여 참됨을 이루어 사람들을 두루 편안하게 제도하여 가는 것이다. 그 대비大悲를 누가 근심하겠는가? 그리고 몸은 거려(蘧廬:旅舍)에 맡기고 세상과 함께 빛을 동화하여 살고 언제나 여기저기 유거遊居하며 자기의 행적을 남기지 않고 하늘이 행하는 대로 맡겨 만물과 함께 변화하여 가니, 비록 위험한 급류의 물을 헤엄쳐도 근심이 없는 것113)과 같다.
그러한 묘변신기妙變神奇한 이치는 부사의不思議하여 대천세계를 손바닥에 올려놓거나 겨자씨가 수미산을 머금는다거나 사해四海가 털구멍에 들어 앉아 있거나 7보寶가 겁이劫移에서도 영원하거나 하는 것 같은 것은 다만 믿을 수는 있어도 물어 밝혀 낼 수는 없으며, 따를 수는 있으나 알 수는 없는 것이다. 담론談論이나 가영歌詠으로 펼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어찌 종이나 붓으로 열어 볼 수 있는 것이겠는가?
033_0276_b_16L拱己內治摠持法忍三世都寂一心豁盡寄耳無明寓目莫准塵隨空落穢與虛隕廓焉靈悟因㩲作尹普濟安度大悲誰愍託蘧廬以和光常遊居乎冥泯任天行與物化如蹈水之無軫若乃妙變神奇理不思議大千擧於指掌芥子含於須彌四海宅於毛孔七寶永於劫移可信而不可尋可由而不可知非談詠之所宣惡毫素之能披
이 얼마나 훌륭한가? 우타優陀의 말114)은 저 지자智者를 천하에 가득 차게 하고, 그 사람에게는 백 개의 머리가 있고, 머리마다 백 개의 혀가 있고, 그 혀는 백 가지 의미를 알아 변재辯才가 예리하고 뛰어나, 이에 사람을 만나 이 도道를 찬탄하여도 오히려 아직 만분의 일도 되지 않을 정도이다. 오직 깨달은 사람들만이 탄식할 뿐이어서 거기에는 불법의 진리가 넓게 퍼지고 다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이 우매하고 고루하여 나의 한계도 모르고, 광간狂簡에 의탁하여 우러러 서술하고, 반딧불 빛으로써 밝디 밝은 빛에 항거하여 빛을 더하여 태양을 도우려고 하는 사람이겠는가.
033_0276_c_02L善乎優陁之言使夫智者滿於天下人有百頭有百舌舌解百義辯才鋒逸合茲人以讚道猶萬分而未一唯覺覺之相乃敷暢而彰悉矧愚昧之固陋狂簡而仰述抗螢燭之炯炯欲增暉以毘日者歟
아아, 방외方外의 영장靈藏은 너무나 멀고 진실로 방대하며, 모든 영묘한 것의 깊은 근원은 그 심오함을 헤아릴 수 없다. 작은 일을 성취한 이도 그 도를 실천할 수는 없으며, 훌륭한 말을 하는 이도 다만 이제는 자유자재로 설명하던 말을 잊어버릴 뿐이다.
땅의 덕은 두터우니, 거기에 무엇인들 실려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우리들은 거기에 큰 골짜기가 있는 것을 듣고는 놀라고 높은 언덕을 눈으로 보고 놀라는 것이다. 하(夏:중국)의 전적은 그것들을 손에 쥔 것처럼 기재하고 있으며, 황복(荒服:이민족)의 경전은 그것들을 호유戶牖와 같이 열거해 기록하고 있다. 장주莊周는 이미 통달하였으나 그래도 아직 다하지 못해 제해齊諧115)의 보잘것없고 괴이한 말을 믿어서 봉鵬과 곤鯤을 보고 큰 것의 대표라고 하고 있으나 조왕鳥王과 어모魚母116)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033_0276_c_08L嗟乎方外靈藏奢遐誕衆妙淵玄群奧無量小成不藉言撗喪坤德可厚于何不有驚聽洪壑駭目崇阜夏典載其掌握荒經列其戶牖周旣達而未盡信齊諧之小見鵬鵾而標大而睹鳥王與魚母
아아, 아아. 기이하고 걸출한 일들은 아득히 넓으니, 어찌 다 드러내 기록할 수 있겠는가? 저 황람皇覽의 글은 여러 가지를 널리 모아 유원幽遠한 것을 찾거나 기이한 것을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어찌 거기에 수록되어 있는 옥을 자른 칼에 대한 말을 쉽게 의심하고, 또 화직(火織:火浣布)117)에 대한 말을 크게 속이는 것이라 할 수가 있겠는가? 더구나 성인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요제堯帝나 공자의 여러 가지의 훌륭한 방편의 이익을 향하여 항상 오로지 몸을 지키고 단속하며, 자신이 헤아린 것보다 초월해 밟아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여 모두가 도리를 다하여 말을 증명하고 유사한 것으로써 의미를 취하지 않는다. 부질없이 넓기만 하고 번잡하게 얽히면 다시 의심을 더하여 경계를 불러오고, 교묘하게 꾸민 재지才智는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붓을 거두고 생각을 멈추어 일우一隅118)를 경지(梗指:槪要)에 붙여 밝은 식견을 가진 이에게 확실한 이해를 바라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이야 어떻겠는가?
033_0276_c_13L呼噫嘻奇傑之事積籍眇漫焉可稱記伊皇覽之普綜足探幽而體異何近嫌於割王又碩誣乎火織況下斯而束教趣堯孔之權餌常專專而守撿懼越蹈於所伺竝廢理以證言莫觸類以取意徒宏博而繁搆更益猜而致忌悟飾智之愕物故收翰而輟思寄一隅於梗指俟體信於明識者乎
弘明集卷第十三
丙午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50)불교를 신앙하기 위한 요의라는 의미이다.
  2. 51)치초(336~377)를 말하며, 자는 경흥景興, 또는 가빈嘉賓이다.
  3. 52)삼귀 또는 삼귀의tri-śara-nagamana에 대한 중국에서의 고역古譯.
  4. 53)탐욕개貪欲蓋ㆍ진에개瞋恚蓋ㆍ혼침수면개惛沈睡眠蓋ㆍ도거악작개掉擧惡作蓋ㆍ의개疑蓋로서 선정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방해가 되는 다섯 가지 마음의 상태이다.
  5. 54)『불설패경초佛說孛經抄』.
  6. 55)『주역』 「계사繫辭」 상.
  7. 56)『중용』.
  8. 57)『이출십이문경異出十二門經』.
  9. 58)『논어』 「이인里仁」.
  10. 59)『논어』 「공야장公冶長」.
  11. 60)『장자』 「경상초庚桑楚」.
  12. 61)『후한서』 49권 「경개전耿介傳」.
  13. 62)『사기』 56권.
  14. 63)『상서尙書』 「홍범洪範」.
  15. 64)『상서尙書』 「순전舜典」, 요堯가 공공共工ㆍ환도驩兜ㆍ삼묘三苗ㆍ곤鯀의 네 사람의 죄를 벌한 것을 말한다.
  16. 65)『사기』 5권, 10권.
  17. 66)『반니원경般泥洹經』 상권.
  18. 67)『보살생지경菩薩生地經』.
  19. 68)『법구경』 하권.
  20. 69)『성구광명정의경成具光明定意經』.
  21. 70)『태자서응본기경』.
  22. 71)『반니원경』 하권.
  23. 72)『태자서응본기경』 상권.
  24. 73)『장자』 「지북유知北遊」.
  25. 74)『태자서응본기경』 상권.
  26. 75)『유마힐경』 상권.
  27. 76)『논어』 「양화陽貨」.
  28. 77)『유마힐경』 상권.
  29. 78)『태자서응본기경』 상권.
  30. 79)『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
  31. 80)『보요경普耀經』 4권.
  32. 81)『반니원경般泥洹經』 상권.
  33. 82)정고庭誥는 가훈을 뜻하고, 이장二章은 연형練形과 치심治心을 주로 하는 것이다.
  34. 83)『노자』 81장. 신의 있는 말은 아름답지 않고 아름다운 말에는 신의가 없다는 내용.
  35. 84)『장자』 「천운天運」에 나오는 말로 황제黃帝가 작곡했다는 음악.
  36. 85)광대한 모습을 말한다.
  37. 86)『법화경』 「신해품」. 객작客作은 고용당하여 일을 하는 사람. 또 사람을 천시하여 꾸짖는 말로 쓰기도 한다.
  38. 87)『서경』 「홍범洪範」에서 말하는 여섯 가지 큰 불행으로 흉단절凶短折ㆍ질疾ㆍ우憂ㆍ탐貪ㆍ악惡ㆍ약弱을 말한다.
  39. 88)『사기』 9권 「여후본기呂后本紀」와 『좌전』 「소공昭公」 7년 참조.
  40. 89)『장자』 「산목山木」에 나오는 말로 천륜으로 맺어진 사이를 말한다.
  41. 90)화재ㆍ수재ㆍ풍재를 말한다. 또 도병재(刀兵災:전쟁)ㆍ질역재(疾疫災:돌림병)ㆍ기근재(饑饉災:기근)를 말할 때도 있다.
  42. 91)『장자』 「소요유逍遙遊」. 조균朝菌은 아침나절밖에 살지 못하는 생명이 짧은 버섯이고, 대춘大椿은 8천 년을 봄으로 하고 8천 년을 가을로 하는 긴 생명을 가진 나무이다.
  43. 92)『시경』 「노송魯頌」. 참으로 장하고 씩씩하게 달리는 말이라는 뜻.
  44. 93)『장자』 「덕충부德充符」.
  45. 94)『주역』 「계사繫辭」 하.
  46. 95)『주역』 「혁괘革卦」.
  47. 96)『시경』 「유풍幽風」.
  48. 97)『노자』 제41장.
  49. 98)『논어』 「술이述而」.
  50. 99)『장자』 「거협胠篋」.
  51. 100)『주역』 「계사」 상.
  52. 101)『논어』 「위정爲政」.
  53. 102)『장자』 「응제왕應帝王」.
  54. 103)『서경』 「대우모大禹謨」.
  55. 104)『장자』 「각의刻意」.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목을 길게 늘이는 것 같은 모습을 하여 오로지 수명을 길게 늘리려는 것. 불로장생을 위한 도인술導引術의 일종이다.
  56. 105)『사기』 「봉선서열선전封禪書列仙傳」.
  57. 106)『사기』 「봉선서열선전」. 다년초로서 약용식물의 일종이다.
  58. 107)『홍명집』 제2권 주 80 참조.
  59. 108)『논어』 「선진先進」.
  60. 109)말할 상대가 없어졌다는 말. 『장자』 「서무귀徐無鬼」 참조.
  61. 110)『장자』 「외물外物」에 나오는 유명한 말. 물고기를 잡는 통발과 토끼를 잡는 올가미로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편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언어나 문자에 사로잡히는 어리석음을 말한다.
  62. 111)인토忍土, 즉 사바세계로 보인다.
  63. 112)음양의 수이다.
  64. 113)『장자』 「달생達生」. 물을 헤엄쳐 갈 때 물을 잘 알고 물이 갖는 법칙대로 따르고 사심을 없이 하고 물 그대로에 맡겨 헤엄치면 죽을 염려가 없다는 뜻.
  65. 114)『보요경普曜經』 8권 「우타야품優陀耶品」(竺法護 역).
  66. 115)『장자』 「소요유逍遙遊」.
  67. 116)조왕은 불전에서 말하는 금시조金翅鳥로 너비가 360리로서 용을 잡아먹는다고 한다. 어모魚母는 마갈어摩竭魚로서 바다의 대어大魚이다. 몸 길이가 3백 유순에서 7백 유순이고, 눈은 일월과 같고 코는 태산과 같으며 입은 적곡赤谷과 같다고 한다.
  68. 117)『열자列子』 「탕문湯問」.
  69. 118)『논어』 「술이述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