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백운화상어록(白雲和尙語錄) / 白雲和尙語錄上

ABC_BJ_H0101_T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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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화상어록 상권(白雲和尙語錄 卷上)
총목차總目次
백운화상어록 상권(白雲和尙語錄 卷上)
신광사神光寺 입원소설入院小說
1. 세상 전체가 해탈로 통하는 문
2. 산은 산, 물은 물, 승은 승, 속은 속
3. 방장 안의 사람
4. 공을 자리로 삼다
5. 다섯 개비의 향
6. 예배는 해서 무엇 하는가
흥성사興聖寺 입원소설入院小說
1. 현재 있는 그대로
2. 몸이 없어야 크다
3. 색과 소리와 언어를 떠나지 마라
4.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5. 너 스스로 깨달아라, 나는 너만 못하다
6. 그것이 추우면 온 천하대지가 춥다
7. 같은가, 다른가
8. 이승二乘은 진실하지 않다
9. 제호醍醐와 독약
10. 향상하는 근본적인 한마디
11. 어떤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
12. 봄은 어디에 있는가
13. 불은佛恩에 보답한다는 의미
14. 평소 가지고 있는 뜻을 등지지 마라
15. 벙어리가 법을 설하고 귀머거리가 듣네
16. 깨달음의 실마리
17. 무엇을 천당이라 하고, 무엇을 지옥이라 하겠는가
18. 큰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사양치 않는다
19. 밑 빠진 그릇을 늘어놓으리라
20. 허공에 핀 꽃
21. 어찌 제도할 중생이 없겠는가
22. 순임금의 덕과 요임금의 인을 알아 무엇 하랴
23. 가고 오는 법이란 없다
24.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가
25. 곧바로 가리킨 마음
26.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27. 시절이 평온하면 태평가 부를 일도 없다
28. 무위無爲의 교화
29. 봄이 되면
30. 여름이 되면
31. 가을이 되면
32. 공자의 효와 석가의 효
33. 학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다
34. 하나의 할
35.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
36. 정도正道란 무엇인가
37. 시절인연
38. 구름에 둘러싸이지 않은 산은 없다
39. 본래면목이란 무엇인가
40. 네 가지 비방
41. 예전 그대로
42. 행각行脚이란
43. 취모검을 들듯이
44. 정혼과 불성이 같은가, 다른가
45. 세존의 삼매를 가섭은 알지 못하였고 가섭의 삼매를 세존은 알지 못하셨다
46. 경전을 꿰뚫어 보는 눈
47. 하나의 그 무엇
48. 정오에 삼경을 알리는 종
49. 대장경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50. 무엇을 부처라 할 것이며 무엇을 조사라 할 것인가
51. 무심無心의 공덕
52. 모두 적정寂靜하므로 삼매는 아니다
53. 일정한 법이 없다
54.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비할 자격이 없다
55. 『금강반야바라밀경』
56. 무쇠와 같은 사람
57. 하안거를 맺으면서
58. 출가란 무엇인가
59. 원래부터 옛날 그대로의 자기
60. 자기 마음속으로부터
61.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62. 진실한 참학參學이란
63. 행각行脚이란
64. 지말枝末을 좇지 마라
65. 공에 떨어지지 않을까 의심하지 말고, 공에 떨어지는 것 또한 싫어하지 마라
66. 무위無爲의 실상實相
67. 세존께서 꽃을 들어 보이신 뜻
68.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노라
69. 실천 수행의 가치
70. 온종일 말하였지만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71. 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
조사선祖師禪
선과 교를 아울러 논함(禪敎通論)
운문 삼구에 대한 풀이(雲門三句釋)
대양 삼구에 대한 풀이(大陽三句釋)
나옹 화상의 삼구와 삼전어에 대한 풀이(懶翁和尙三句與三轉語釋)
삼구
삼전어 1
삼전어 2
나도 모르는 결에 붓을 들어 쓸데없는 몇 마디 말을 암자의 몇몇 형제에게 제시하다(因筆不覺葛藤如許示同菴二三兄弟)
망승을 보내며(送亡僧)
기함起凾
하화下火
홍무 경술년(1370) 9월 15일에 내교(佛敎)의 공부 방편을 여럿 가운데 선별하라는 교지를 받고 어전에 올린 글(洪武庚戌九月十五日 承內敎功夫選取御前呈似言句)
백운화상어록 하권(白雲和尙語錄 卷下)
지정 신묘년(1351) 5월 17일에 백운 선사가 호주 하무산 천호암에 이르러 석옥 화상께 여쭌 문제(至正辛卯五月十七日 師詣湖州霞霧山天湖庵 呈似石屋和尙語句)

006_0637_c_01L

006_0637_c_02L白雲和尙語錄上

006_0637_c_03L

006_0637_c_04L侍者釋璨錄

006_0637_c_05L1)總目次

006_0637_c_06L
卷上

006_0637_c_07L2)神光寺入院小說 [1]

006_0637_c_08L興聖寺入院小說(上堂ㆍ小叅ㆍ示衆)

006_0637_c_09L祖師禪

006_0637_c_10L禪敎通論

006_0637_c_11L雲門三句釋

006_0637_c_12L大陽三句釋

006_0637_c_13L懶翁和尙三句與三轉語釋三句

006_0637_c_14L三轉語二篇

006_0637_c_15L因筆不覺葛藤如許示同菴二三兄弟

006_0637_c_16L送亡僧

006_0637_c_17L起凾

006_0637_c_18L下火

006_0637_c_19L洪武庚戌九月十五日承內敎功夫選

006_0637_c_20L取御前呈似言句

006_0637_c_21L卷下

006_0637_c_22L至正辛卯五月十七日師詣湖州霞霧

006_0637_c_23L目次底本無有編者作成底本缺題目
006_0637_c_24L者補入

006_0638_a_01L백운 선사가 계사년(1353) 정월 17일에 하무산 기행을 기록하고 암자의 몇몇 형제에게 보이다【불각선사에 계시면서 쓰신 글이다.】(師於癸巳正月十七日 記霞霧山行 示同菴二三兄弟【在佛覺禪寺述】)
지정 갑오년(1354) 6월 초나흗날에 법안 선인이 강남 호주 하무산의 천호암에서 석옥 화상의 사세송을 모셔 왔다. 14일에 백운 선사가 해주 안국사에서 재를 베풀고 설하셨다(至正甲午六月初四日 禪人法眼 自江南湖州霞霧山天湖庵 石屋和尙辭世陪來 十四日 師於海州安國寺設齋小說)
신묘년(1351)에 지공 화상에게 올린 송(辛卯年上指空和尙頌)
갑오년(1354) 3월 모일에 안국사에서 지공 화상에게 올린 글(甲午三月日 在安國寺 上指空和尙)
다시 12수의 송을 지어 뜻을 보이시다(又作十二頌呈似)
정유년(1357) 9월 모일에 선지宣旨에 답하여 서신을 올리다(丁西九月日 答宣旨書)
을사년(1365) 8월 모일에 신광사 주지를 사양하는 서신을 올리다(乙巳八月日 神光辭狀書)
기유년(1369) 정월 모일에 고산암에 우거할 때 지공 화상 진영에 찬한 2수의 송(己西正月日 寓孤山菴 指空眞讚頌二)
산속에 살며(居山)
백운이라는 별호를 지어 주심에 감사하며(謝道號白雲)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나옹 화상에게 부침(寄懶翁和尙入金剛山)
사대 화상에게(思大和尙 )
낙가산으로 향하는 이를 전송하며(送人洛迦山 )
마을을 떠나 산으로 돌아오며(出州廻山)
뜻을 읊다(言志 )
신광 장로에게 준 구호(與神光長老口號)
금강산 내산의 석불상(金剛山內山石佛相)
학인에게(示僧)

006_0638_a_01L山天湖庵呈似石屋和尙語句

006_0638_a_02L師於癸巳正月十七日記霞霧山行示

006_0638_a_03L同菴二三兄弟在佛覺
禪寺述


006_0638_a_04L至正甲午六月初四日禪人法眼自江

006_0638_a_05L南湖州霞霧山天湖庵石屋和尙辭

006_0638_a_06L世陪來十四日師於海州安國寺設

006_0638_a_07L齋小說辭世頌

006_0638_a_08L辛卯年上指空和尙頌

006_0638_a_09L甲午三月日在安國寺上指空和尙

006_0638_a_10L又作十二頌呈似

006_0638_a_11L丁酉九月日答宣旨書

006_0638_a_12L乙巳八月日神光辭狀書

006_0638_a_13L己酉正月日寓孤山菴

006_0638_a_14L指空眞讃頌二首

006_0638_a_15L居山

006_0638_a_16L謝道號白雲

006_0638_a_17L寄懶翁和尙入金剛山

006_0638_a_18L思大和尙

006_0638_a_19L送人洛迦山

006_0638_a_20L出州廻山

006_0638_a_21L言志

006_0638_a_22L與神光長老口號

006_0638_a_23L金剛山內山石佛相
006_0638_a_24L示僧

006_0638_b_01L망인을 애도하다(悼亡人)
재상【연안부사】 정설의 시운을 따라 화답함 (答鄭偰宰臣詩韻【延安府使】 )
법을 청함에 오언시로 다시 화답하다(復答請法以五言示之 )
서해 관풍사觀風使 권거중에게 답함(答西海權觀風【居中】 )
예원 선교도총통 찬영에게 올림(上芮院禪敎都摠統【璨英】)
을사년(1365) 6월 신광사로 들어가며 나옹대 시에 차운하여 지음(乙巳六月入神光次懶翁臺詩韻)
사위의송(四威儀頌)
무심가無心歌
태고 화상에게 부치는 편지(寄大古和尙書)
정승 윤환에게 올리는 편지(上尹政承書【桓】)
군수 담당 재신 이구에게 올리는 편지(上軍須李宰臣【玖】書)
재신 인안에게 올리는 편지(上印宰臣【安】書)
다시 편지를 올림(又書)
신광사 총장로께서 보내온 부채에 답하는 편지(答神光聰長老扇子書)
신광사 장로가 『능엄경』을 구함에 답하는 편지(答神光長老求楞嚴經書)
예원 선교총통 찬영에게 답하는 편지(答芮院禪敎摠統【璨英】書)
신광사 장로 축탄에게 올린 편지(上神光長老【竺坦】書)
선 선인에게 주는 편지(示禪禪人書)
요선 선인에게 부치는 편지(寄示了禪禪人書)
희심 사주에게 보내는 편지(示希諗社主書)
승통 공선에게 부치는 편지(寄【公宣】僧統書)
내불당의 감주 천호 장로에게 부치는 편지(寄內佛堂監主長老【天浩】書)
제자 대선사 자원에게 부치는 편지(寄第子大禪師【資遠】書)
이 상공에게 부치는 편지(示李相公書)
나도 모르는 결에 붓을 들어 몇 마디 말을 신광 화상에게 제시하다(因筆不覺葛藤如許示神光和尙)

006_0638_b_01L悼亡人

006_0638_b_02L答鄭偰宰臣詩韻

006_0638_b_03L復答請法以五言示之

006_0638_b_04L答西海權觀風居中

006_0638_b_05L上芮院禪敎都摠統璨英

006_0638_b_06L乙巳六月入神光次懶翁臺詩韻

006_0638_b_07L四威儀頌

006_0638_b_08L無心歌

006_0638_b_09L寄大古和尙書

006_0638_b_10L上尹政承

006_0638_b_11L上軍須李宰臣

006_0638_b_12L上印宰臣安書二篇

006_0638_b_13L答神光聰長老扇子書

006_0638_b_14L答神光長老求楞嚴經書

006_0638_b_15L答芮院禪敎摠統璨英

006_0638_b_16L上神光長老竺坦

006_0638_b_17L示禪禪人書

006_0638_b_18L寄示了禪禪人書

006_0638_b_19L示希諗社主書

006_0638_b_20L公宣僧統書

006_0638_b_21L寄內佛堂監主長老天浩

006_0638_b_22L寄弟子大禪師資遠

006_0638_b_23L示李相公書

006_0638_b_24L因筆不覺葛藤如許示神光和尙

006_0638_c_01L해주의 목백에게(示海州牧伯)
임종게臨終偈
신광사神光寺 입원소설入院小說1)
1. 세상 전체가 해탈로 통하는 문
백운 선사가 을사년(1365) 6월 21일, 해주 신광사에 주지로 취임하는 날(入院日) 산문山門2) 앞에 이르러 주장자를 들고 말했다. “세상 전체가 모두 해탈로 통하는 문이니, 들어가고 들어가고 또 들어가도 안이 없고, 나오고 나오고 또 나와도 밖이 없다.3) 이 경계에 도달하여 무엇을 삼문三門과 중문中門4)이라 하고, 무엇을 부엌과 곳간(廚庫)이라 할 것이며, 무엇을 승僧이라 하고, 무엇을 속俗이라 할 것인가? 말해 보라!5) 어떤 이유로 이와 같은가? 옛사람이 ‘막힘없이 드넓어 밖이 없고, 고요히 텅 비어 안이 없다. 깨끗한 벌거숭이요 한 점의 때도 없는 알몸 그대로 드러났지만 붙잡을 방법은 전혀 없다.’6)라고 한 말을 들어 보지 못했는가!” 주장자를 세웠다가 한 번 내리치고, 한 소리 내지른 다음 곧바로 산문으로 들어갔다.

2. 산은 산, 물은 물, 승은 승, 속은 속
백운 선사가 주장자를 들고 보광명전普光明殿7)을 가리키며, “대중들이여!” 하고 부른 다음 말했다. “조금 전 삼문 앞에서 ‘세상 전체가 하나의 법신’이라고 하여 공연히 불법에 대한 헛된 분별만 일으키고 말았다. 이제 그렇게 하지 않겠다. 불전佛殿을 보고는 다만 불전이라 부르고, 주장자를 보고는 다만 주장자라 부를 것이다.8) 이것은 유나維那9)의 방이고 저것은 전좌典座10)의 방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고 속은 속이다. 말해 보라! 노승은 어떤 도리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했을까? 그 뜻을 잘 알겠는가? 만일 이해하지 못한다면 또한 상방上方11)에 우뚝 높이 솟은 곳이 있으니 내가 그곳에 가서 그대들에게 말해 주겠다.” 주장자를 던지고 옷소매를 털며 곧바로 방장方丈12)으로 갔다.13)

3. 방장 안의 사람
백운 선사가 선상禪床에 걸터앉아 주장자를 세웠다가 한 번 내리치고 말했다. “이 세 칸 방장이여! 암자는 비록 작지만 법계法界를 모두 머금고 있으니,14) 스스로 깨달은 자(自然覺者)가 이 안에 사노라.15) 말해 보라! 스스로 깨달은 자란 어떠한가? 현재의 자리를 떠나지 않으면서 맑고 항상 고요하다. 쳐다보면 앞에 있지만 어느덧 뒤에 있다. 마치 신통한 변화와 같아서

006_0638_c_01L示海州牧伯

006_0638_c_02L臨終偈

006_0638_c_03L

006_0638_c_04L[神光寺入院小說]

006_0638_c_05L
師乙巳六月二十一日海州神光寺入
006_0638_c_06L院日至門首擧拄杖云盡大地解脫門
006_0638_c_07L入入入無內出出出無外到這裏喚什
006_0638_c_08L麽三門中門喚什麽作厨庫喚什麽僧
006_0638_c_09L喚甚麽俗且道緣何如此不見古人
006_0638_c_10L寬廓非外寂寥非內淨裸裸赤酒
006_0638_c_11L沒可把卓拄杖一下喝一喝便
006_0638_c_12L入門

006_0638_c_13L
師擧杖指普光明殿召大衆云適來三
006_0638_c_14L門頭盡大地是箇法身枉作箇佛法知
006_0638_c_15L如今不恁麽見佛殿但喚作佛殿
006_0638_c_16L見拄杖但喚作拄杖者箇維那房
006_0638_c_17L箇典座房山是山水是水僧是僧俗是
006_0638_c_18L且道老僧據箇甚麽道理便伊麽道
006_0638_c_19L還委悉麽若也不會更有上方高絕處
006_0638_c_20L老僧到者裏爲君說擲下拄杖拂袖
006_0638_c_21L便行方丈

006_0638_c_22L
師據禪床上卓拄杖一下云者箇三閒
006_0638_c_23L方丈庵雖小含法界自然覺者處其中
006_0638_c_24L且道作麽生是自然覺者云不離當處
006_0638_c_25L湛然常寂瞻之在前忽焉在後如同

006_0639_a_01L그가 위치한 방위를 결정하지 못한다. 말해 보라! 이것은 어떤 것이기에 이와 같이 기괴한 것일까?” 곧바로 “지난해에는 손님의 입장이었다가 이제야 주인이 되었는데, 특별히 기특한 일은 없으나 당당히 드러난 6척의 몸16) 이 아주 분명하구나.”라고 한 뒤, 주장자를 세웠다가 한 번 내리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4. 공을 자리로 삼다
백운 선사가 법당에 들어가 수미좌須彌座17)를 가리키며 말했다. “ ‘모든 법이 공이라는 이치를 자리로 삼는다.’18)는 말은 무슨 뜻인가?”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한 계단, 두 계단, 세 계단, 네 계단. 무슨 어려움이 있단 말인가?” 법좌에 오르자 임금의 사자(天使)가 소疏를 건넸다. 선사가 소를 받고서 말했다. “자의紫衣19) 걸치신 임금의 사자, 양손으로 조서詔書 한 통을 건네시니 노승은 오신 뜻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대중 가운데 의아해하는 자가 있는 듯하오. 아마도 유나를 번거롭게 만들겠지만, 대중 앞에서 여러 사람이 알 수 있도록 소리 내어 읽음이 좋을 듯합니다.” 유나가 조서를 소리 내어 읽었다.

5. 다섯 개비의 향
백운 선사가 주위를 돌아보고 말했다. “대중이여, 노승은 불도 수행을 등한시하여 우러러볼 만한 덕도 없고 칭송할 만한 행업도 없으니 감히 이러한 명을 받들기 황송하구나. 이에 재삼재사 극력 사양하였으나 임금의 뜻 굳건하시어 사양함(推免)을 허락지 않으시니 마지못해 가까스로 명을 받자와 조사의 도를 선양하노라. 엎드려 바라건대 대중이여,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리라,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어야 하리라.”
향을 피우고 축원하였다. “이 한 개비의 향은 삼천대천 무수한 세계에 깊이 서려 있고 수미산을 뒤덮습니다.20) 이 청정한 계향戒香21)으로 주상 전하께서 만만세토록 장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한 개비의 향은 이전에 무언가를 따라 온 곳도 없고 앞으로 갈 곳도 없습니다.22) 이 청정한 정향定香으로 공주 전하께서 변함없는 산처럼 길이길이 장수하시고 드넓고 깊은 바다처럼 복이 깊고 크시기를23) 기원합니다. 이 한 개비의 향은 세계가 있지 않았을 때에도 이미 이것24)을 갖추고 있었고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이것은 무너지지 않습니다.25) 이 청정한 혜향慧香으로 왕후 전하와 태자께 상서로운 기운 머물고 길이길이 늙지 않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한 개비의 향은 귀한 이를 만나면 귀하게 되어 사바세계 전체에 맞먹을 가치를 가지지만 천한 이를 만나면 천하게 되어 반 푼의 가치도 없습니다.26)

006_0639_a_01L神變莫定方隅且道是甚麽物得恁
006_0639_a_02L麽奇怪便云去年爲客處今日作主人
006_0639_a_03L別無奇特堂堂六尺甚分明卓拄杖一
006_0639_a_04L便下座

006_0639_a_05L
師入法堂指須彌座云諸法空爲座
006_0639_a_06L且作麽生卷上第一張登上胡梯云
006_0639_a_07L級二級三四級有什麽難才登座
006_0639_a_08L使度䟽師接得云紫衣天使兩手
006_0639_a_09L分付一統國䟽老僧已知來意衆中如
006_0639_a_10L有有疑者恐煩維那不妨對衆宣讀諸
006_0639_a_11L人通知也維那宣䟽了

006_0639_a_12L
師顧視左右云大衆老僧道業荒踈
006_0639_a_13L無德可觀無行可稱不敢當此乃力
006_0639_a_14L辭再三上意堅固不容推免勉强承
006_0639_a_15L宣揚祖道伏望大衆無愧於心
006_0639_a_16L愧於心祝香云此一辦香根盤沙界
006_0639_a_17L葉覆彌盧以此淸淨戒香祝延主上殿
006_0639_a_18L下萬萬歲此一辦香無所從來亦無
006_0639_a_19L所去以此淸淨定香祝願公主殿下
006_0639_a_20L山更峻福海彌深此一辦香未有世
006_0639_a_21L界時早有這介世界壞時者箇不壞
006_0639_a_22L以此淸淨慧香祝願王后殿下儲闈凝
006_0639_a_23L後天難老此一辦香遇貴即貴
006_0639_a_24L價直娑婆遇賤即賤則分文不直

006_0639_b_01L이 청정한 지견향知見香으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오신 사신께서 지혜롭게 임금을 모시고 복과 수명이 넘쳐나 안으로는 왕실의 기둥과 들보가 되고 밖으로는 법문을 수호하는 보루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한 개비의 향은 어떤 성인으로부터도 얻을 수 없거늘 어찌 중생들27)에게서 구하리오!28) 자신의 마음속으로부터 흘러나와 천지를 뒤덮어야 하리라.29) 해탈지견심향解脫知見心香을 향로에 사르니, 저 선사先師30)이신 하무산의 석옥 노화상께서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은 기개31)로 법을 베풀어 주신 은혜32)를 갚으려 합니다.”
계속하여 말하였다. “옛사람은 ‘화상의 크고 자비로우신 은혜는 부모의 은혜보다 더하니, 그때 저에게 말씀을 해 주셨다면 어찌 오늘의 깨달음이 있었겠습니까!’33)라고 하였다. 누구의 옛 시구인지 아는가? 지금 나의 심정을 잘 알았구나.” 주위를 둘러보고 한숨 쉬며 크게 탄식하고 말했다. “이!”【당시에 명을 받들고 왔던 사신은 판삼사사 이수산李壽山34)이다.】

6. 예배는 해서 무엇 하는가
백운 선사가 법좌에 올라앉자 유나가 백추白槌35)를 울리며 말했다. “법석에 앉은 대중이여, 마땅히 불법의 근본적인 뜻(第一義)을 꿰뚫어 보시오!”36)
선사가 큰 소리로 종지를 설법했다.37) “제일의여, 제일의여,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진 한 점의 눈과 같구나.38) 이 중에 선다객宣茶客39)이 있다면 유나가 구태여 백추를 칠 필요가 있겠는가! 선다객이 있는가? 나와 보게, 나와 봐.” 이때 한 학인이 나아와 예배하고 물었다. “제일의란 어떤 것입니까?” “그대에게 말해 주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로다.” “화상께서 진심으로 말씀해 주신다면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왜 다시 묻지 않느냐?” “제일의란 어떤 것입니까?” “이것이 제일의이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습니다.” “이해한다면 대단히 기특한 일이로되, 이해하지 못하였더라도 그대로 적합하다.”
또 물었다 “화상께서는 오늘 무엇을 전해 주시려 합니까?” “천고의 종풍을 드날리고 삼한 전체에 복을 고루 열어 주겠다.” “스님께서는 누구의 곡을 제창하시며 종풍은 어느 분의 종풍을 이으셨습니까?” “청풍이 뼛속까지 다 팔기에 백운이 무심하게 사들였다.”40) “임금을 축원하는 한 구절이란 어떤 것입니까?” “만수산41)은 남쪽이 빼어나고, 삼한은 북궐北闕이 높다.”

006_0639_b_01L此淸淨知見香祝願紫衣天使智慧事
006_0639_b_02L福壽益已內作王室之棟樑外作
006_0639_b_03L法門之城壍此一辦香不從千聖得
006_0639_b_04L豈向萬機求從自己胷襟流出盖天盖
006_0639_b_05L解脫知見心香爇向爐中熏他先
006_0639_b_06L師霞霧山石屋老和尙遼天鼻孔用報
006_0639_b_07L法乳之恩繼曰古人云和尙大悲恩逾
006_0639_b_08L父母當時若爲我說何有今日事
006_0639_b_09L是何人舊詩句已能知我此時情顧左
006_0639_b_10L右喟然歎曰其時奉命使判
三司事李壽山
卷上第二張
006_0639_b_11L師陞座維那白槌云法筵龍象衆
006_0639_b_12L觀第一義師高聲提網云第一義第一
006_0639_b_13L如紅爐上一點殘雪介中若有宣茶
006_0639_b_14L何必維那下一槌還有宣茶客麽
006_0639_b_15L出來出來時有僧出禮拜如何是第
006_0639_b_16L一義師云不辭向汝道恐汝不信
006_0639_b_17L和尙誠言焉敢不信師云何不更
006_0639_b_18L其僧更問如何是第一義師云是
006_0639_b_19L第一義進云不會師云會即甚奇特
006_0639_b_20L不會也相冝又問和尙今日當爲何
006_0639_b_21L師云千古宗風扇三韓福酢開
006_0639_b_22L僧問師唱誰家曲宗風嗣阿誰師云
006_0639_b_23L淸風澈骨賣白雲無心買又僧問
006_0639_b_24L何是祝上一句師云萬壽南山秀三韓

006_0639_c_01L“태평함을 드러내는 한 구절이란 어떤 것입니까?” “사방에서 임금의 덕을 노래하며, 배부르고 편안히 잔다네.” “북숭산의 경계는 어떠합니까?” “시냇물 소리가 온통 광장설법이니, 산 빛인들 어찌 청정법신이 아니겠는가!”42)
선사가 이에 제창하였다. “대중이여, 오늘 노승이 그대들에게 드러내 보인 말은 늘 그러한 것이 아니나, 지금 그대들과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산하대지·초목총림·삼라만상은 그대들에게 뚜렷이 그 도가 늘 그러하며 또한 구극究極의 경지임을 드러내 주고 있다. 여기에서 깨달으면 사대오온四大五蘊과 육진육식六塵六識뿐 아니라 산하·허공·대지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대들이 목숨을 던질 만한 경계이다. 무심하고 막힘없음이 해가 두루 비춤과 같고 허공이 끝없는 것과 같아서 천기天機(하늘로부터 받은 본래적인 기능)가 저절로 펴져 구속도 집착도 없으며 머무르지 않고도 편안하고 한가로워 쾌락하지 않은 곳이 없을 것이다. 수많은 경론이 다 단지 이 이치를 설한 것일 뿐이요, 자고이래의 모든 성인이 보인 갖가지 작용과 방편이라는 미묘한 비결도 단지 이 이치를 가리킨 것일 뿐이다. 마치 열쇠로 보배 창고를 여는 것과 같아서 잠겼던 문이 열리면 눈에 마주치는 천차만별의 대상 모두가 자신이 본래 지니고 있는 진귀한 보물 아닌 것이 없으리니, 손 가는 대로 집어도 모두 마음대로 써먹을 수 있다.43) 대중이여, 노승은 어떤 도리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 세존께서 ‘오온사대와 육진육식뿐 아니라 산하·허공·대지·일월·성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미묘하고 밝으며 참된 마음 가운데 드러난 모습’44)이라고 하신 말씀을 들어 보지 못하였단 말인가! 대중이여, ‘이처럼 보는 것을 바른 관찰(正觀)이라 하고 이와 다르게 보는 것을 빗나간 관찰(邪觀)이라 한다.’45) 이 본분사를 알아차리고자 한다면 대단히 세밀하게 살펴야만 할 것이다. 오래들 서서 법문을 들으셨구려, 자애로운 대중이여.” 주장자를 높이 세웠다가 한 번 내리치고는 법좌에서 내려왔다. 법좌에서 내려오자 대중은 법문에 감사하며 예를 표하였다.
선사가 말하였다. “눈앞에는 법문을 듣는 사리闍梨46)도 없고 법좌에는 앉아 있는 노승도 없건만,47) 예배는 해서 무엇 하는가!” 할을 하고 말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면 승당에 가 참구하시게!”

006_0639_c_01L北𨷂 [3] 又問如何是大平一句師云
006_0639_c_02L四方歌聖德飽腹且安眠又問如何
006_0639_c_03L是北嵩境答曰溪聲盡是廣長舌山色
006_0639_c_04L豈非淸淨身師乃提唱云大衆今日
006_0639_c_05L老僧爲你擧唱終是不常即今與你
006_0639_c_06L對現山河大地草本叢林森羅萬相
006_0639_c_07L汝發明其道是常亦能究竟若人於
006_0639_c_08L此薦得四大五藴六塵六識外及山河
006_0639_c_09L虗空大地皆是汝等放身命處等閑蕩
006_0639_c_10L蕩的如日普照如虛空無際天機自張
006_0639_c_11L無拘無執匪住匪着安閑無爲快樂之
006_0639_c_12L千經萬論只說此前聖後聖種種
006_0639_c_13L作用方便妙門只指此如將鑰匙開寶
006_0639_c_14L鎖門旣得開觸目遇緣萬別千差
006_0639_c_15L無非自己本有底珍寶信手拈來皆可
006_0639_c_16L受用大衆老僧擧箇什麽道理便伊
006_0639_c_17L麽道不見世尊云卷上第三張五薀四
006_0639_c_18L六塵六識外及山河虗空大地日月
006_0639_c_19L星宿皆是妙明眞心中所現物大衆
006_0639_c_20L作是觀者名爲正觀若他觀者名爲
006_0639_c_21L邪觀承當者箇事大須甚細久立衆慈
006_0639_c_22L卓拄杖一下便下座下座大衆謝法
006_0639_c_23L禮畢師云目前無闍梨座上無老僧
006_0639_c_24L禮拜箇什麽喝云若也不會叅堂去

006_0640_a_01L한 소리 크게 내지르고 방장으로 돌아갔다.

흥성사興聖寺48) 입원소설入院小說
1. 현재 있는 그대로
법좌에 올라앉아 백운 선사가 대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노승은 오늘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성지聖旨를 널리 알리노니, 사양해도 어쩔 수 없었노라. 조사의 청정한 선풍禪風을 들어 보이고 천자天子의 훌륭한 명령(休命)49)을 널리 알리리라. 마지막 한 구절50)은 소리로 표현되기 이전에 벌거벗은 알몸을 다 드러내어 하늘을 덮고 땅을 덮으며 색과 소리를 마음대로 부린다. 황면노자51)께서 이 한 수를 얻고는 ‘이 법은 평등하여 높거나 낮은 차별이 없으니, 이를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한다.’52)라고 하셨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여기서 평등이라 한 말을 학의 다리를 자르고 오리 다리를 늘이거나, 산의 봉우리를 깎아 골짜기를 메운 다음에 성취하는 평등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53) ‘이 법이 법의 위치에 머무니 세간의 차별상도 변함없이 머문다.’54)라고 하니, 모든 법은 현재 있는 그대로 진실할 뿐이고 현재 있는 그대로 해탈이며 현재 있는 그대로 고요한 것이다. ‘긴 것은 긴 그대로 법신이고 짧은 것은 짧은 그대로 법신이니’,55) 더 이상 지워 없앨56) 만한 것은 하나도 없다.” 주장자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것이 바로 변함없이 머무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노승은 ‘주장자를 보고는 다만 주장자라 부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고 속은 속이다.’라고 했던 것이다. 말해 보라! 노승은 어떤 도리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했을까? 영리한 자는 알겠지만, 영리하지 못한 자는 내 말에 몹시 속을 것이다.”

2. 몸이 없어야 크다
임금의 생신을 맞아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오늘은 임금께서 강탄하신 날이다. 하늘도 경하하고 온 나라 백성들 기뻐 흠모하누나. 요순堯舜과 같은 덕화로 이루신 태평성대57)는 하늘의 해와 달이 세상을 고루 비추어 밝음과 같도다. 금지옥엽 자손들께옵서도 저 산하처럼 길이길이 강건하소서. 아버지는 온 천하를 다스리시고 아들은 삼한을 기르네. 도림桃林의 들판에 소를 풀어 주고 화산華山의 남쪽으로 말을 돌려보내어58) 문교文敎를 닦고 무기를 거두어 전쟁을 종식하셨네. 온 백성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 갈아 밥 먹으니59)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 편안하며

006_0640_a_01L喝一喝歸方丈

006_0640_a_02L

006_0640_a_03L興聖寺入院小說

006_0640_a_04L
上堂師顧大衆云老僧今日承禀宣旨
006_0640_a_05L辭不獲已且擧祖師之淸風對揚天子
006_0640_a_06L之休命末後一句子聲前露裸裸盖天
006_0640_a_07L盖地盖色騎聲黃面1) [2] 得這一着
006_0640_a_08L道是法平等無有高下是名阿耨
006_0640_a_09L多羅三藐三菩提汝等諸人作麽生會
006_0640_a_10L平等者不可截鶴續鳧夷嶽塡壑
006_0640_a_11L後爲平等也是法住法位世間相常住
006_0640_a_12L則一切諸法當處自眞當處解脫
006_0640_a_13L處寂滅長者長法身短者短法身
006_0640_a_14L無一物可雌黃擧杖白者箇不是常住
006_0640_a_15L所以老僧見拄杖但喚作拄杖山是
006_0640_a_16L山水是水僧是僧俗是俗且道老僧
006_0640_a_17L據介甚麽道理便恁麽道靈利者見
006_0640_a_18L不靈利者着 [4] 我熱謾

006_0640_a_19L
聖節上堂云今辰是世主降誕之日
006_0640_a_20L天慶賀率土欽敬堯天舜德同日月
006_0640_a_21L以齊明玉葉金枚共山河而永固
006_0640_a_22L臨四海子育三韓放牛于桃林之下
006_0640_a_23L歸馬于化 [5] 山之陽修文偃武罷息干戈
006_0640_a_24L萬民鑿井而飮百姓耕田而食國泰民

006_0640_b_01L철마다 한가하고 해마다 풍년 들어 이루어지지 않는 일 없다네. 말해 보라! 삼계 내에서는 우리 부처님이 지존이시요 한 나라 안에서는 임금이 제일 높으시니, 이분들을 넘어설 자 있는가?” 잠깐 동안 침묵하다가 말했다. “경전에 ‘몸이 있는 이상 아무리 커도 크지 않으니 몸이 없어야 크다고 한다.’60)라고 한 말씀을 들어 보지 못하였는가!” 법좌에서 내려왔다.

3. 색과 소리와 언어를 떠나지 마라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였다. ‘대도는 항상 눈앞에 있건만, 눈앞에 있음에도 보기는 어렵네. 도의 참된 본체를 깨닫고자 한다면 색과 소리와 언어를 떠나지 마라.’ ”61) 선사가 불자를 꼿꼿이 세우고 말했다.
“이것은 색이다. 어떤 것이 대도의 참된 본체인가?” 선상을 한 번 내려치고 말했다. “이것은 소리다. 어떤 것이 대도의 참된 본체인가? 노승이 지금 지껄여 댄 이 말에서 어떤 것이 대도의 참된 본체인가?62)노승이 이렇게 말한 뜻을 대중은 알겠는가? 여전히 머뭇대며 의심을 떨치지 못한 자가 있다면 노승에게 별도의 다른 방편이 또 있으니 지금 대중이 가지고 있는 온갖 의심과 걱정을 떨쳐 내 주리라. 대중이여, 또렷이 깨어 있어라!” 한 소리 크게 내지르고 말했다.
“알겠는가? 일할一喝63)이라 불러서는 안 된다. 당장에 의심이 얼음 녹듯이 풀려서 바른 눈이 활연히 열리면 바로 여러 부처와 미묘한 본체를 함께하고 보고 듣는 작용도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리라. 이와 같이 대도의 미묘한 본체는 허공처럼 일정한 상相은 없으나 커다란 신통과 밝게 빛나는 기틀과 작용이 있으므로 ‘텅 빈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다’고 하지만,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기에64)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일 뿐이다. 진공眞空은 공空이 아니요 묘유妙有는 실유實有가 아니므로, 어느 한쪽 방위로 그 있는 곳을 지정하여 가리킬 수도 없고 겁의 수로도 그 수명을 다 헤아릴 수 없다.65) 이러한 경계에서 온 대지 전체 가운데 어떤 것이 그대들의 조건이 되고 대상이 되겠는가? 바늘 끝만큼이라도 그대들을 갈라놓거나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나에게 집어 가지고 와 보라! 무엇을 부처라 할 것이요 무엇을 조사라 할 것이며, 무엇을 산하대지요 일월성신이라 할 것이며, 무엇으로써 사대오온을 삼을 것인가? 말해 보라! 노승은 어떤 도리에 근거해서 이렇게 말한 것이겠는가?

006_0640_b_01L時淸歲稔卷上第四張事無不可
006_0640_b_02L三界之中我佛最尊一國之內
006_0640_b_03L王最大還有過此者麽良久云不見敎
006_0640_b_04L中道有身終不大無身是名大便下座
006_0640_b_05L上堂云古人道大道常在目前雖在
006_0640_b_06L目前難覩若欲悟道眞體不離色聲言
006_0640_b_07L師竪起拂子云這箇是色那箇是
006_0640_b_08L大道眞禮擊禪床一下云這箇是聲
006_0640_b_09L那箇是大道眞體老僧即今口2)▼(口+(巛/巴)) [3] ▼(口+(巛/巴))底
006_0640_b_10L是語那箇是大道眞體老僧恁麽道
006_0640_b_11L大衆還會麽若有疑㝵未除者老僧別
006_0640_b_12L有一方便即今爲大衆除諸疑㝵去也
006_0640_b_13L大衆惺惺着喝一喝云會麽不得喚
006_0640_b_14L作一喝直下疑情冰釋正眼豁開便
006_0640_b_15L見得與諸佛同一妙體共一見聞如是
006_0640_b_16L大道妙體無相如空有大神通光明機
006_0640_b_17L故曰不空決定是有視之不見
006_0640_b_18L之不聞謂之不有眞空不空妙有不
006_0640_b_19L方隅不可定其居劫數不可窮其壽
006_0640_b_20L到這裏盡大地有什麽物與汝爲緣爲
006_0640_b_21L若有針鋒許與汝爲隔爲㝵與我
006_0640_b_22L拈將來喚甚麽作佛喚甚麽作祖
006_0640_b_23L甚麽作山河大地日月星辰將甚麽爲
006_0640_b_24L四大五薀且道老僧據箇什麽道理

006_0640_c_01L대중이여,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내뱉으며 이곳에서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니, 모름지기 그럴 만한 안목을 갖춘 자라야만 한다.66)” 법좌에서 내려왔다.

4.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법좌에 올라앉아 주장자를 들고 말했다. “이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대중이여, 주장자라 불러야 할까, 주장자라 불러서는 안 되는 것일까?”67) 다시 주장자를 들고 말했다.
“이것을 범부는 진실로 있다(有)고 여기고, 이승은 분석해 보고 없다(無)고 여기며, 연각은 허깨비와 같이 있는 것(幻有)이라 여기고, 보살은 그 자체를 공(當體卽空)이라 여긴다.68) 말해 보라! 보살이 ‘그 자체를 공’이라 여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혹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와 같고, 이슬이나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하라.’69)고 하였기 때문인가? ‘상相이 있는 것은 무엇이나 허망하니, 모든 상이 상이 아닌 줄 안다면 여래를 보리라.’70)고 하였기 때문인가? 무슨 까닭에 ‘여래를 보리라’고 한 것인가? 옛사람이 ‘관찰하는 지혜가 원만하게 밝고 심식心識이 청정한 자라야 오온이 모두 공이라고 비추어 보고, 또한 일체 세간이나 출세간의 법이 허공과 같다고 알리라.’71)고 한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는가! 또 경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장애 그대로가 궁극적인 깨달음이며, 바른 생각을 얻거나 바른 생각을 잃거나 모두 해탈 아님이 없고, 법을 이루거나 법을 깨뜨리는 것 모두 열반이요, 지혜와 어리석음이 모두 반야이다. 보살과 외도가 성취한 법이 똑같이 보리요, 무명과 진여가 그 경계에 다름이 없고, 모든 계戒·정定·혜慧 및 음욕·분노·어리석음이 모두 청정한 행(梵行)이요, 중생이나 국토나 동일한 법성을 지녔고, 지옥이나 천당이나 모두 정토이며, 자성이 있거나 자성이 없거나 고르게 불도를 성취하며, 일체의 번뇌가 궁극에는 해탈이다. 바다와 같이 드넓은 법계를 비추는 지혜72)로 모든 상相을 비추니 허공과 같다.’73)
이로써 보건대 일체의 모든 법상이 다 허망하며 있는 그대로 적멸하다. 있는 그대로 적멸하므로 평등한 본성이다. 또 ‘망심妄心의 본체는 원래 공74)이어서 온전히 본래 깨달은 마음의 본체(本覺心體)일 뿐이다.’75)라고 하였다.

006_0640_c_01L便恁麽道大衆莫趁口快向這裏亂
006_0640_c_02L須是箇漢始得下座

006_0640_c_03L
上堂擧拄杖云這箇喚作什麽大衆
006_0640_c_04L作拄杖得麽不喚作拄杖得麽更擧杖
006_0640_c_05L這介凡夫實謂之有二乘折爲之無
006_0640_c_06L緣覺謂之幻有菩薩當體即空且道
006_0640_c_07L卷上第五張菩薩當體即空者何也
006_0640_c_08L是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如露亦如
006_0640_c_09L應作如是觀耶凡所有相皆是虛
006_0640_c_10L若見諸相非相即見如來麽何故
006_0640_c_11L即見如來不見古人道若觀智圓明心
006_0640_c_12L識淨者照見五蘊皆空亦見一切世間
006_0640_c_13L出世間法猶如虛空又經云一切障
006_0640_c_14L即究竟覺得念失念無非解脫
006_0640_c_15L法破法皆名涅槃知慧愚癡通爲般
006_0640_c_16L菩薩外道所成就法同是菩提
006_0640_c_17L明眞如無異境界諸戒定慧及婬怒
006_0640_c_18L俱是梵行衆生國土同一法性
006_0640_c_19L獄天宮皆爲淨土有性無性齊成佛
006_0640_c_20L一切煩惱畢竟解脫法界海慧
006_0640_c_21L了諸相猶如虛空以此觀之則一切
006_0640_c_22L諸法相皆虛妄當體寂滅寂滅故平
006_0640_c_23L等本性又云妄體元空全是本覺心體
006_0640_c_24L孝」疑「老」{編}「▼(口+(巛/巴))」疑「嗈」{編}

006_0641_a_01L또 ‘보는 작용과 보이는 대상, 그리고 생각에서 떠오르는 상相은 허공에 핀 꽃과 같아서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보는 작용과 보이는 그 대상은 원래 보리의 미묘하고 바르며 밝은 본체이다.’76)라고 하였다. 또 ‘이 모든 법의 공상空相은 생겨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77)라고 하였다. 모든 법의 공상이 바로 본래 깨달은 마음의 본체이므로 ‘모든 행은 무상하여 일체가 공이라는 이치가 바로 여래께서 깨달으신 대원각인 것이다.’78)라 한다.
비록 그러하나 우리 선가의 종지에 의거하면 노승이 조금 전까지 이와 같이 허다하게 늘어놓은 말들은 교설의 자취(敎跡)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이제 노승은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 ‘주장자를 보고는 주장자라 할 뿐이고 불전을 보고는 불전이라 할 뿐이며,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고 속은 속이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가? 모든 법은 현재 있는 그대로 진실할 뿐이고 현재 있는 그대로 고요할 뿐이며 현재 있는 그대로 해탈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운문雲門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 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79)라고 하였고, 원오圜悟는 ‘드러난 그대로 온전히 진실이다.’80)라고 하였다. 노승의 본분상에서 판단한 견해는 이와 같다. 이 같은 견해가 대중의 마음에도 흡족하신가?” 주장자를 높이 세웠다가 한 번 내려치고는 법좌에서 내려왔다.

5. 너 스스로 깨달아라, 나는 너만 못하다
법좌에 올라앉아 대중에게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누구나 성불하리라.’81)라고 하셨으니, 그 마음이란 세간의 번뇌 망상을 불러일으키는 마음이 아니라, 더 위없는 깨달음을 발하는 마음82)을 말한다. 이 마음을 가진 자로서 성불하지 못하는 이는 없는데, 다만 배우는 이들이 스스로 허다한 장애와 어려움을 만들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決定信)이란 결단코 금생에 마음을 밝혀 곧바로 모든 부처와 조사들의 대해탈 경계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뜻이 없다면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믿음 또한 없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의 모태이니, 일체의 온갖 선법善法을 이루어 내리라.’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또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늘어나게 하며 믿음은 기필코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한다.’83)라고 하셨다. 여래지란 대해탈의 경지를 말한다.84)
예전에 양기 방회楊岐方會85) 선사가 자명慈明86) 화상을 찾아뵈었을 때,

006_0641_a_01L又云見與見緣并所想相如空中花
006_0641_a_02L本無所有此見及緣元是菩提妙正明
006_0641_a_03L又云是諸法空相不生不滅不垢
006_0641_a_04L不淨不增不減則諸法空相即是本
006_0641_a_05L覺心體故云諸行無常一切空即是
006_0641_a_06L如來大圓覺然雖如是據我禪宗
006_0641_a_07L僧適來如許葛藤猶是敎跡如今老
006_0641_a_08L總不恁麽見拄杖但喚作拄杖
006_0641_a_09L佛殿但喚作佛殿山是山水是水
006_0641_a_10L是僧俗是俗何故如此一切諸法
006_0641_a_11L處自眞當處寂滅當處解脫故云
006_0641_a_12L門總不動着圓悟覿體全眞老僧分上
006_0641_a_13L見解如是見解如是還叶衆慈麽
006_0641_a_14L拄杖一下便下座卷上第六張

006_0641_a_15L
示衆上堂云佛言凡有心者定當作佛
006_0641_a_16L此心非世間塵勞妄想心謂發無上菩
006_0641_a_17L提心也若有是心者無不成佛夫學
006_0641_a_18L人多自作障難爲無決定信故也
006_0641_a_19L定信者決欲此生心地發明直到諸佛
006_0641_a_20L諸祖大解脫境界也無此決定之志
006_0641_a_21L無決定信矣故也佛不云乎信爲道
006_0641_a_22L源功德母長養一切諸善法又云信能
006_0641_a_23L增長智功德信能必到如來地如來地
006_0641_a_24L大解脫地也昔楊歧會禪師見慈

006_0641_b_01L방장에 이를 때마다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자명은 ‘너 스스로 깨달아야 할지니, 나는 너만 못하다.’라고 할 뿐이었다. 양기가 간절히 애태우던 중에 하루는 좁은 길에서 (자명을) 기다리다가 큰비까지 만났다. 양기가 자명을 꽉 붙들어 잡고 ‘오늘도 제게 법을 설해 주지 않으신다면 화상을 때리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자명이 큰 소리로 ‘너 스스로 깨달아라, 너 스스로 깨달아! 나는 너만 못하다.’라고 소리치자 양기는 막혔던 것이 활짝 트이며 크게 깨달았다.87)
이 일대사는 남의 말이나 구절에 달린 문제가 아님을 진실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대들이 다만 결정적인 뜻을 간직하고서 가거나 머물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거나 그 어느 때에나 조사의 뜻을 놓치지 않고 들고서 딱 들어맞게 마음을 쓴다면 통 밑바닥이 빠져나가듯이88) 자연스럽게 깨닫게 될 것이다. 간곡히 당부하고 또 당부하노라.” 법좌에서 내려왔다.

6. 그것이 추우면 온 천하대지가 춥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 사이 그 가운데 하나의 무엇(一物)이 있으니, 진실로 깨끗하고 분명하게 빼어나며 텅 빈 듯이 꿰뚫고 신령하게 통하며 우뚝하니 홀로 그 무엇에도 의존치 않는다. 온갖 덕을 통솔하면서도 상相이 없고 어둠을 밝히니 공功이 있다.89) 그 본체는 위로는 머리를 가릴 기와 한 장 없고 아래로는 발 디딜 땅 한 조각 없으며90) 가로로는 끝이 없고 가운데로는 처할 곳이 없다. 이미 처할 그 가운데의 세계도 없는데 어찌 좌우상하가 있겠는가! 이해해도 이럴 것이요 이해하지 못해도 이럴 것이며, 높아도 이럴 것이요 낮아도 이럴 것이며, 옳아도 이럴 것이요 글러도 이럴 것이니,91)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옛사람이 ‘온 세상 천지에 단지 자기 자신 하나뿐이니, 그것이 추우면 온 천하대지가 춥고 그것이 더우면 온 천하대지가 더우며, 그것이 있으면 온 천하대지가 있고 그것이 없으면 온 천하대지가 없으며, 위로는 하늘에 통하고 아래로는 황천에까지 이른다. 말해 보라! 이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기특할 수 있는가?’92)라고 한 말을 알지 못하는가! 석가노자釋迦老子93)가 태어났을 때에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할 뿐이다.’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 홀로 존귀한 그 면목은 온몸에 눈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볼 수 없고, 온몸에 귀를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들을 수 없으며,

006_0641_b_01L明和尙每到方丈請益明云你自會去
006_0641_b_02L我不如汝楊歧切心切心一日伺侯 [6]
006_0641_b_03L狹路兼値大雨楊歧扭住慈明云
006_0641_b_04L日不與我說打和尙去明勵聲云
006_0641_b_05L自會去你自會去我不如汝楊歧豁
006_0641_b_06L然大悟信知此事不在言句上汝等
006_0641_b_07L諸人但用決定之志於行住坐臥
006_0641_b_08L撕祖意恰恰用心則自然契悟如桶
006_0641_b_09L底脫相似至囑至囑便下座

006_0641_b_10L
上堂云乾坤之內宇宙之間中有一
006_0641_b_11L眞淨明妙虗澈靈通卓爾獨尊
006_0641_b_12L萬德而無相爍羣昏而有功其體也
006_0641_b_13L上無其頂下無其底傍無邊際中無
006_0641_b_14L當處旣無當中焉有東西上下會也
006_0641_b_15L恁麽去不會也恁麽去高也恁麽去
006_0641_b_16L低也恁麽去是也恁麽去非也恁麽去
006_0641_b_17L緣何如此不見古人云盡乾坤大地
006_0641_b_18L只是一箇自己寒則普天普地寒熱則
006_0641_b_19L普天普地熱有則普天普地有無則普
006_0641_b_20L天普地無上通霄漢下澈黃泉且道
006_0641_b_21L是什麽物卷上第七張得恁麽奇特
006_0641_b_22L見釋迦老子初生下時一手指天一手
006_0641_b_23L指地云天上天下唯我獨尊是獨尊獨
006_0641_b_24L貴底面目雖是通身眼見不得通身是

006_0641_c_01L온몸에 입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말할 수 없고, 온몸이 곧 마음 자체라 하더라도 감변해 낼 수 없다.94)
온몸은 차치하고 눈이 없다면 어떻게 보며, 귀가 없다면 어떻게 들으며, 입이 없다면 어떻게 말하며,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감변하겠는가? 이 물음에서 핵심을 밝혀 낼 수 있다면 옛 부처와 함께할 수 있으리라. 말해 보라! 함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95)” 법좌에서 내려왔다.

7. 같은가, 다른가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노승이 예로부터 여러 조사들이 사람들을 가르친 방편을 거슬러 올라가 관찰해 보니 한결같이 근본적인 가르침(宗敎)96)을 널리 드날린 내용이었지만 그것을 전하기 위해 고안한 방법은 동일하지 않았다. 산승이 그대들에게 그 하나하나를 점검해 주겠다.
‘곧바로 보이기도 하고 간접적인 방편으로 베풀기도 하며, 때로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라 하고 또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가리키는 뜻은 분명하여 거울과 같이 밝다.’ 이상은 망아지 한 마리(馬祖道一)가 세상 사람들을 모두 짓밟은 소식이다.97)
‘오위五位나 사빈주四賓主를 기틀에 따라 시설하여 자유자재로 자리를 바꾼다. 언어로 모두 표현하는 것을 꺼려 곧바로 눈앞의 현상을 건드리지 않으며,98) 손을 펼쳐 깊은 종지에 통하면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다.’ 이상은 조동종曹洞宗의 오위편정五位偏正을 분별한 것이다.99)
‘군신君臣이나 혹은 부자父子를 범주로 삼아 모나거나 원만한 근기를 헤아리지만 이것과 저것을 차별하지 않고, 어리석은 자와 지혜로운 자 그리고 현명한 자와 호걸 중에서 점차적 수준을 밝힌다.’ 이상은 덮어서 가리는 것이 없는 석상石霜의 종풍이다.
‘한 쌍을 모두 밝히기도 하고 혹은 하나만 말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북을 치고 어떤 때는 노래를 부르며 근기에 따라 문답함으로써 말할 때마다 빈틈없이 진실에 맞는다.’ 이상은 비할 데 없이 기묘奇妙한 위앙종潙仰宗의 선풍이다.
‘남김없이 다 들어 보이기도 하고 혹은 남김없이 활용하기도 하지만, 삼라만상의 개별적 존재들이 진실로 각자의 개성을 유지한다.’ 이상은 석두 희천石頭希遷과 약산 유엄藥山惟儼이 함께 미묘한 본질을 터득한 선풍이다.
‘혹은 방할棒喝 또는 빈주賓主를 수단으로 기틀에 적절히 임하여 빼앗고 기틀에 적절히 임하여 놓아주며 번개가 치듯이 신속한 기봉機鋒을 발휘한다.’ 이상은 임제 의현臨濟義玄과 덕산 선감德山宣鑑이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고 우뚝 넘어선 선풍이다.100)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나의 이곳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세상 전체가 밝디밝게 트여 실오라기 하나도 걸림이 없거늘 그 어떤 것이 그대들의 조건이 되고 대상이 되겠는가! 만약 바늘 끝만큼이라도 그대들을 갈라놓거나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나에게 집어 오라. 무엇을 부처라 할 것이며, 무엇을 조사라 할 것이며, 무엇을 산하대지와 일월성수라 할 것이며, 무엇을 사대四大·오온五蘊이라 할 것인가?

006_0641_c_01L耳聞不得通身是口說不得通身是心
006_0641_c_02L鑑不出通身且置忽若無眼作麽見
006_0641_c_03L無耳作麽聞無口作麽說無心作麽鑑
006_0641_c_04L若向這裏辨得出便與古佛同參且道
006_0641_c_05L叅箇什麽人便下座

006_0641_c_06L
上堂云老僧逆觀從上列祖爲人方便
006_0641_c_07L一等是播揚宗敎其功用不一山僧爲
006_0641_c_08L你諸仁一一點出看或直示或巧施
006_0641_c_09L或說即心即佛或說非心非佛旨趣分
006_0641_c_10L明明似鏡馬駒踏天下人或五位或
006_0641_c_11L四賔主施設隨機巧廻互語忌十聲 [7]
006_0641_c_12L直觸展手通玄無佛祖曹溪 [8] 五位偏正
006_0641_c_13L或君臣或父子量機方圓無彼此
006_0641_c_14L愚智賢豪明漸次石霜宗風不覆藏
006_0641_c_15L雙明或單說有時敲有時唱隨根問答
006_0641_c_16L談諦當潙仰門風又奇絶或全提或全
006_0641_c_17L萬相森羅實不共石頭藥山俱得妙
006_0641_c_18L或捧喝或賔主臨機奪臨機縱迅速機
006_0641_c_19L鋒如電拂臨濟德山獨超越然雖如是
006_0641_c_20L我這裏即不與麽良久云盡大地皎皎
006_0641_c_21L無一絲毫有什麽物與汝爲緣爲對
006_0641_c_22L若有針鋒許與汝爲隔爲碍與我拈將
006_0641_c_23L喚甚麽作佛喚甚麽作祖喚什麽
006_0641_c_24L作山河大地日月星宿將什麽爲四大

006_0642_a_01L내가 이렇게 한 말이 옛날 여러 조사들의 가풍과 같은가, 다른가? 그 말에 잘못이 있는가? 그대들은 말에서 찾거나 구절을 다투며 이해를 구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삼생육십겁三生六十劫101)이 지나더라도 꿈에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꿈에서도 알지 못할 것이다.” 주장자를 세워 놓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8. 이승二乘은 진실하지 않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하늘은 일一을 얻어 맑고 땅은 일을 얻어 안정되며,102) 성인은 일을 얻어 천하를 태평하게 하고 산승은 일을 얻어 만법이 공空인 이치를 밝힌다. 말해 보라! 어떤 것이 일인가? 옛사람이 말하지 않았던가! ‘티끌 하나가 일어나자마자 대지 전체가 그 안에 거두어지고, 꽃 한 송이 피자마자 세계 전체가 일어난다.’103)
이와 같다 하더라도 단지 열에 여덟 정도만을 말한 것일 뿐이다. 덕산 원명德山圓明은 ‘그것이 추우면 온 천하대지가 춥고 그것이 더우면 온 천지가 더우며, 그것이 있으면 온 천하대지가 있고 그것이 없으면 온 천하대지가 없다. 말해 보라! 이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기괴한가?’104)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구지俱胝는 한 손가락을 세웠을 뿐이고105) 비마암祕魔巖은 나무집게 하나로 땅을 치기만 했을 뿐이다.106).”
바로 땅을 한 번 내리치면서 “대중이여, 옛사람이 대단히 깊고 치밀하게 학인들에게 요체를 정통으로 가르쳤다는 사실을 알겠는가? ‘시방세계에는 오로지 일불승一佛乘(一乘)만이 있을 뿐이요 나머지 이승二乘은 진실하지 않다.’107)”라 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9. 제호醍醐와 독약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옛 성인이 제시한 방편의 수는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육조 혜능慧能이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108)라고 한 말을 보자. 이는 종지와 격식을 모두 넘어서는 최상의 진실한 종지이다. 그대들 조사 문하의 선객禪客들은 이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는가? 바람과 깃발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들의 마음이 망령되게 움직인다는 뜻일까? 바람과 깃발을 제외하지 않고 바람과 깃발이 움직이는 바로 그 현상에서 통해야 한다는 뜻일까? 다만 바람과 깃발의 상相은 전혀 있는 것이 아니기에 온통 자신의 마음일 뿐이라는 뜻일까? 다만 마음을 취하여 밝혀야 할 뿐 색상色相이 존재하는 것으로 오인해서는 안 된다는 뜻일까?
이와 같이 이해한 내용들이 조사의 뜻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109) 마치 세상 사람들이 진기하게 여기는 제호醍醐의 뛰어난 맛도

006_0642_a_01L五薀我與麽說與從上列祖門風
006_0642_a_02L同是別還有過也無汝等莫尋言逐句
006_0642_a_03L求覔解會且三生六十劫卷上第八張
006_0642_a_04L未夢見哉未夢見哉卓拄杖便下座
006_0642_a_05L上堂云天得一以淸地得一以寧
006_0642_a_06L人得一天下平山僧得一萬法空且道
006_0642_a_07L作麽生是一古不云乎一塵才擧
006_0642_a_08L地全收一花才發世界便起然雖如
006_0642_a_09L此只道得八成圓明道寒則普天普
006_0642_a_10L地寒熱則普天普地熱有則普天普地
006_0642_a_11L無則普天普地無且道是甚麽物
006_0642_a_12L得伊麽奇怪所以俱胝只竪一指頭
006_0642_a_13L魔只用一木杈打地只打地一下大衆
006_0642_a_14L還知古人有深密爲人省要處麽十方
006_0642_a_15L世閒中唯有一佛乘餘二即非眞便
006_0642_a_16L下座

006_0642_a_17L
上堂云古聖方便數如恒沙只如六
006_0642_a_18L祖云不是風動不是幡動仁者心動
006_0642_a_19L斯乃超宗越格無上眞宗汝等祖門下
006_0642_a_20L合作麽生會莫是風幡不動汝心
006_0642_a_21L妄動麽莫是不撥風幡就風幡而通取
006_0642_a_22L莫是直風幡相了不可得全是自心
006_0642_a_23L莫是但取明心不認色相麽如是
006_0642_a_24L所解與祖師意有甚交渉且如醍醐

006_0642_b_01L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도리어 독약이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지 않다면 조사의 뜻은 어떤 것일까? 대법안大法眼 선사가 ‘옛 성인들이 본 모든 대상 경계는 오로지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그래서 육조 혜능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다만 이렇게 이해할 일이며, 근본과 친밀하게 일치하는 경지에 대하여 특별히 더 친밀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110)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 법좌에서 내려왔다.

10. 향상하는 근본적인 한마디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111) “석가노자께서 보리수112) 아래에서 최정각最正覺113)을 이루신 다음 각수覺樹114)에서 일어나 마갈제국摩竭提國115)으로 돌아가 삼칠일 동안 문을 닫고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채116) 이와 같은 일을 사유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의 적멸상寂滅相은 언어로 드러낼 수 없으니, 나는 차라리 법을 설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들리라.’117) 이 경계에 이르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여지를 찾을 수 없지만 어쩔 수 없이 제이의문第二義門118) 중의 방편력으로 다섯 비구를 위해 사제四諦119)를 설하셨고, 360차례의 법회에 이르기까지 대장경의 교설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서 병에 따라서 그에 적절한 약을 준 것이니, 마치 달콤한 과일을 들고 쓴 오이와 바꾸어 준 것과 흡사하다.120) 그런 까닭에 ‘귀한 신분의 옷을 벗고, 낡고 더러운 옷을 입고서 비천한 입장에 서서 자식을 유인한다.’121)라고 한 것이다. 이는 우리의 업근종자業根種子를 씻어 내어 깨끗하고 한 점의 때도 없게 만들어 주려는 것일 뿐, 일찍이 우리에게 향상하는 근본적인 한마디122)는 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세존께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녹야원鹿野苑에서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발제하跋提河에 이르기까지123) 그사이에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124)
말해 보라! 향상하는 근본적인 한마디는 어떤 것일까? 그대들이 만약 알고자 한다면 다만 위로는 우러러볼 부처가 있다는 견해를 지니지 말고 아래로는 제도할 중생이 있다는 견해를 지니지 말며, 밖으로는 산하와 대지가 있다는 견해를 지니지 말고 안으로는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작용이 있다는 견해를 지니지 마라. 그래서 마치 완전히 죽은 사람이 도리어 살아나는 것과 흡사하게 된 다음에 그 적절한 시기와 방법을 잃지 않고 대상에 응하여 작용하여야 비로소 지푸라기 같은 것이나 사람과 동물 등 삼라만상 가운데

006_0642_b_01L上味爲世所珎遇此等人翻成毒藥
006_0642_b_02L旣不如是且祖師意作麽生不見大
006_0642_b_03L法眼禪師云古聖所見諸境唯見自心
006_0642_b_04L所以六祖云不是風動不是幡動
006_0642_b_05L者心動但且恁麽會別無親於親處也
006_0642_b_06L下座

006_0642_b_07L
上堂云釋迦老子於菩提樹下成最
006_0642_b_08L正覺爰起覺樹歸于摩竭提國三七
006_0642_b_09L日掩關杜詞思惟如是事道諸法寂滅
006_0642_b_10L卷上第九張不可以言宣我寧不說
006_0642_b_11L疾入於涅槃到這裏覔箇開口處
006_0642_b_12L不得事不獲已而向第二義門中方便
006_0642_b_13L力故爲五比丘說四諦已至三百六
006_0642_b_14L十會說一大藏敎只是方便應病與藥
006_0642_b_15L如將密 [9] 換苦葫蘆相似所以云脫珍
006_0642_b_16L御之服著弊垢之衣於淺近處誘引
006_0642_b_17L諸子淘汝諸人業根種子令酒酒落落
006_0642_b_18L而已未甞與你說向上一着子故世尊
006_0642_b_19L自云始從鹿野苑終至跋提河於是
006_0642_b_20L二中間未曾說一字且道作麽生是
006_0642_b_21L向上一着你若要會但上不見有諸佛
006_0642_b_22L下不見有衆生外不見有山河大地
006_0642_b_23L不見有見聞覺知如大死底人却活相
006_0642_b_24L似然後應用不失其冝方見森羅萬相

006_0642_c_01L작거나 크거나 길거나 짧거나 그 하나하나가 모두 온전히 자신의 가풍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법좌에서 내려왔다.

11. 어떤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 ‘옥의 가치는 불로 시험하고 금의 단단함은 돌로 시험하며 칼의 예리함은 털로 시험하고125) 물의 깊이는 지팡이로 시험한다.126)127) 말해 보라! 납승128)의 수행 경지는 무엇으로 시험해야 할까? 납승의 마음은 현악기 줄처럼 곧아 어디에서도 그 마음의 자취를 드러내지 않으며 하늘을 찌를 듯한 장검과 같아 가느다란 터럭조차도 들어서지 못하니129) 온갖 천신天神들이 꽃을 바치려 해도 바칠 길이 없고 마구니와 외도가 몰래 엿보려 해도 엿보지 못한다.130)
다음 문답131)을 들어 보지 못하였는가! 암두가 약산에게 물었다. ‘그대는 여기서 무엇을 하는가?’ ‘아무 일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할 일도 없이 앉아 있는 것이로구나.’132) ‘할 일 없이 앉아 있는 것도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어떤 성인도 알지 못합니다.’ 암두가 게송을 지어 찬하였다. ‘본래부터 함께 살았으나 이름조차 모르고, 마음 가는 대로 서로 도우며 그렇게 해 왔을 뿐이라네. 예로부터 성현들도 알지 못했거늘, 짧은 시간에 얕은 식견의 범부가 어찌 쉽게 밝히겠는가!’133) 말해 보라! 무엇이 ‘어떤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134)는 말뜻인가? 어떤 학인이 운문에게 ‘향상하는 유일한 길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운문이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으로 나타낼 수도 없다.’135)라고 답한 문답을 모른단 말인가!” 법좌에서 내려왔다.

12. 봄은 어디에 있는가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불성의 뜻을 알고자 한다면 그때마다의 시절에 나타난 인연을 관찰해야 한다.136) 시절이 무르익으면 그 이치는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137)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사계절은 운행되고, 땅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만물은 발생한다. 또한 마치 봄이 온 나라에서 시작되면 곳곳이 어느 곳이나 한결같이 봄기운이지만 봄은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는 것과 같고, 달이 포구에 떨어지면 어느 물결에나 동시에 나타나지만 달은 나뉘지 않는 것과 같다.138) 앞에서 ‘봄은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라고 한 말을 통하여 그 본체를 알 수 있고, ‘달은 나뉘지 않는다.’라고 한 말을 통해서는 그 작용을 알 수 있다. 만일 아직도 모르겠다면 내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139) 거듭 그대들에게 들어 주겠다. 춘삼월, 버드나무 늘어선 연못과 꽃 핀 언덕에 따사로운 햇빛 비추고 온화한 바람 부는데, 봄은 어디에 있으며

006_0642_c_01L草芥人畜纎洪長短一一全彰自己家
006_0642_c_02L風耳便下座

006_0642_c_03L
上堂云玉將火試金將石試釰將毛試
006_0642_c_04L水將杖試且道衲僧行李處將什麽
006_0642_c_05L驗試且衲僧之心其直如絃在在處
006_0642_c_06L不露心跡如倚天長劒纎毫不立
006_0642_c_07L得諸天捧花無路魔外潜覷不見不見
006_0642_c_08L巖頭問藥山汝在這裏作什麽山云
006_0642_c_09L一切不爲頭云伊麽則閑坐也山云
006_0642_c_10L若閑坐則爲也頭云汝道不爲且不爲
006_0642_c_11L箇什麽山云千聖亦不識頭以偈讃曰
006_0642_c_12L從來賃屋不知名任運相將只麽行
006_0642_c_13L古聖賢猶不識造次凡流豈易明且道
006_0642_c_14L是甚麽千聖不傳豈不見僧問雲門
006_0642_c_15L何是向上一路答云名不得狀不得
006_0642_c_16L便下座卷上第一○張

006_0642_c_17L
上堂云欲識佛性義當觀時節因緣
006_0642_c_18L時節若至其理自彰且夫天何言而四
006_0642_c_19L時行地何言而萬物生亦如春行萬國
006_0642_c_20L處處同春而春無跡如月落萬浦波波
006_0642_c_21L頓現而月不分向而春無跡處可以見
006_0642_c_22L其體而月不分處可以見其用其或
006_0642_c_23L未然老僧不悟眉毛重爲擧也春三
006_0642_c_24L柳塘花塢暖日和風春在何處

006_0643_a_01L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140)도리는 아주 분명히 드러나 있다.”

13. 불은佛恩에 보답한다는 의미
시주가 청하여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석가여래께서는 과거에 연등불然燈佛141) 처소에서 머리털을 풀어헤쳐 진흙탕 길을 덮고 연등불을 기다리셨다. 연등불께서 이르러 ‘바로 이 터에 절을 지으면 알맞겠구나.’라고 하셨다. 그때 한 천인天人이 한 줄기 풀로 표시를 하고는 ‘절을 이미 세웠습니다.’라고 하였다.142)
말해 보라! 이 소식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그대들에게 묻겠다. 오늘 큰 보시를 베푼 시주가 이 절을 세워 장엄한 것과 저 천인이 한 줄기 풀로 표시하고는 ‘절을 이미 세웠다.’라고 한 것이 같은가, 다른가? 여기에서 차이를 가려낼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큰 보시를 베푼 시주가 절을 장엄하면서 최초에 일으킨 한 생각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큰 보시를 베푼 시주의 그 한 생각을 알고 난 후에라야 석가노자와 연등불 그리고 한 줄기 풀로 절터를 표시한 천인과 만나 볼 자격이 있다. 말해 보라! 도대체 어디에서 만나 볼 수 있다는 것인가? 알겠는가? ‘이 깊은 마음으로 티끌처럼 무수한 불국토를 받드니, 그것을 가리켜 부처님 은혜에 보답한다고 한다.’143)” 법좌에서 내려왔다.

14. 평소 가지고 있는 뜻을 등지지 마라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미륵여래께서 아침에 가람에 들어가 저녁에 정각을 이루시고 ‘삼계 위와 아래의 법에 대해, 나는 오로지 마음뿐이라 설하니, 모든 심법心法을 떠나, 다시 얻을 만한 것은 없다.’144)라고 하셨다. 저 미륵불께서 이렇게 하신 말씀을 보건대 대단히 분명하고 또렷하며 뜻밖에도 기이하긴 하였지만,145) 우리 선문의 종지에 비하면 여전히 어리석음을 끊지 못한 상태일 뿐이다. 왜 그러한가?
천태 덕소天台德韶146) 국사, 향엄 지한香嚴智閑。 영운 지근靈雲志勤 등이 깨달은 경계와 비교해 보면 전 찰나에는 범부와 성인으로 나뉘어 있다가 그다음 한순간에 성불하였으니,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 더 이상 깨달을 일도 없다.147) 원래 무심하여 고요함과 앎(寂知)을 자재하게 운용하니 대상에 대한 망령된 집착도 없다.148) 번뇌의 대상을 쓸어버리는 힘은 종지와 격식을 모두 넘어서게 하여 어떤 동작이나 행위를 하더라도 모두 향상하는 일상의 행동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향엄은 송으로 다음과 같이 읊었다.


006_0643_a_01L何形段道理甚分明

006_0643_a_02L
檀越請上堂釋迦如來昔於然燈佛所
006_0643_a_03L布髮掩泥以待彼佛然燈佛至曰
006_0643_a_04L一片田地冝立梵刹時有一天人
006_0643_a_05L標一莖草云立刹已竟且道這箇消
006_0643_a_06L從那裏得來敢問諸人今日大檀
006_0643_a_07L立此梵刹莊嚴已畢與一天人
006_0643_a_08L標一莖草云立刹已竟是同是別
006_0643_a_09L人於此辨得出便見大檀那莊嚴佛刹
006_0643_a_10L底最初一念起處若了大檀那這一念
006_0643_a_11L然後却與釋迦老子然燈佛標一莖草
006_0643_a_12L天人相見有分且道向什麽處相見
006_0643_a_13L還委悉麽將此深心奉塵刹是即名爲
006_0643_a_14L報佛恩便下座

006_0643_a_15L
上堂云彌勒如來朝入伽藍暮成正
006_0643_a_16L乃云三界上下法我說唯是心
006_0643_a_17L於諸心法更無有可得看他彌勒恁麽
006_0643_a_18L也大殺惺惺靈靈不防奇異若比
006_0643_a_19L吾宗猶是鈍癡未得勦絶何以故
006_0643_a_20L看天台韶國師香嚴靈雲等得入處
006_0643_a_21L那凡聖一念成佛一悟永悟更不復
006_0643_a_22L元自無心任運寂知更無忘緣
006_0643_a_23L蕩之力卷上第一一張便可超宗越格
006_0643_a_24L凡所擧止皆是向上擧措故香嚴頌云

006_0643_b_01L
一擊忘所知         딱 하고 부딪치는 한 소리에 안다는 망념 잊으니,
更不假修治         다시 더 이상 수행의 힘 빌릴 필요 없네.149)
處處無蹤跡         곳곳으로 돌아다녀도 자취 남기지 않고,
聲色外威儀         소리와 색 등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풍모 갖추었네.
諸方達道者         도에 통달한 제방의 이들,
咸言上上機         모두들 최상의 근기라 하누나.

이 어찌 아침에 가람에 들어가 저녁에 정각을 이룬 것만 못하랴! 그대들이 선조의 풍모를 추모하고 평소 가지고 있는 뜻을 등지지 않는다면 다행일 것이다, 다행일 것이다.”
15. 벙어리가 법을 설하고 귀머거리가 듣네
법좌에 올라앉아 다음의 말을 제기했다. “운문 문언雲門文偃이 말했다. ‘주장자가 용으로 변하여 하늘과 땅을 모두 삼켜 버렸고, 부채는 삼십삼천150)에 뛰어올라 제석천帝釋天의 콧구멍을 틀어막고, 동해의 잉어151)는 꼬리로 한 방 쳐서 물동이를 기울인 것과 같이 세찬 비를 쏟아 붓는다. 알겠는가? 알겠는가?’152) 몽산 덕이蒙山德異는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초명蟭螟153) 벌레가 동해의 물을 남김없이 들이마셨으니, 새우·게·물고기·용은 어느 곳에 몸을 두고 목숨을 이어 갈 것인가? 해파리가 색구경천色究竟天으로 날아 올라가 마혜수라摩醯首羅154)의 눈 속에서 춤을 춘다.’ 왜 그럴까? 지공指空 화상이 다음과 같이 한 말을 모르는가? ‘벙어리가 소리 높여 미묘한 법을 설하자, 귀머거리가 먼 곳에서 그 미묘한 말을 듣네. 생명이 없는 만물이 모두 찬탄하며, 허공은 가부좌 틀고 앉아 밤새 그 뜻을 참구하네.’
이는 어떤 말인가? 현상(事)에 의탁하여 근본 도리(理)를 나타내고, 사물에 의지하여 마음을 밝히는 것일까? 말 속에 여운이 남아 있고, 구절 안에 날카로운 뜻을 감추고 있는 것일까? 기이한 말과 절묘한 구절을 특별나게 주장하고 심오하게 제기한 것일까? 여러분! 그대들은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상과 같이 이해하면 모두 잘못된 것이니 옛사람의 뜻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이렇지 않다면 옛사람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여러분! 그대들이 만약 이해하고자 한다면, 다만 바다 밑에서 먼지가 일어나고, 산꼭대기에서 물결이 치며, 허공에 핀 꽃이 열매를 맺고, 석녀가 아기를 낳으며, 진흙 소가 달을 향해 울고, 목마가 바람을 맞으며 울부짖는 경계에서 그 모든 구절을 살펴보라. 범부나 성인이나 이와 같으니 도리는 분명하다.
옛사람이 다음과 같이 한 말을 들어 보지 못했는가! ‘바다 밑에서 먼지가 일어나고, 산꼭대기에서 물결이 치며, 허공에 핀 꽃이 열매를 맺고, 석녀가 아기를 낳는다.’155) 이것이 바로 여래의 대원각大圓覺이다.

006_0643_b_01L一擊忘所知更不假修治處處無蹤跡
006_0643_b_02L聲色外威儀諸方達道者咸言上上機
006_0643_b_03L豈似朝入伽藍暮成正覺耶汝等諸人
006_0643_b_04L追慕先祖之風不辜負平生之志幸甚
006_0643_b_05L幸甚

006_0643_b_06L
上堂擧雲門道拄杖子化爲龍呑却乾
006_0643_b_07L坤了也扇子𨁝跳上三十三天築着帝
006_0643_b_08L釋鼻孔東海鯉魚打一棒雨似盆傾
006_0643_b_09L會麽會麽蒙山云昨夜蟭螟蟲吸乾
006_0643_b_10L東海蝦蠏魚龍向什麽處安身立命
006_0643_b_11L水母飛上色究竟天摩醯首羅眼裏作
006_0643_b_12L爲甚麽不見指空和尙云啞子高
006_0643_b_13L聲說妙法聾人遠處聽微言無情萬物
006_0643_b_14L皆讃歎虛空趺坐夜來叅是甚麽言歟
006_0643_b_15L莫是托事現理 [10] 物明心麽莫是言中
006_0643_b_16L有響麽句裏藏鋒麽莫是奇言妙句
006_0643_b_17L唱玄提麽諸仁者你作麽生會如上
006_0643_b_18L所解盡是邪解與古人意有甚交渉
006_0643_b_19L旣不恁麽且古人意作麽生會諸仁
006_0643_b_20L汝等若欲要會但向海底塵生
006_0643_b_21L頭浪起空花結子石女生兒泥牛吼
006_0643_b_22L木馬嘶風處看取一切凡聖如此
006_0643_b_23L道理分明不見古人云海底塵生
006_0643_b_24L頭浪起空花結子石女生兒此是如

006_0643_c_01L내가 조금 전에 그대들을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와 같이 말했다. 내 눈썹이 몇 가닥이나 남아 있는지156) 살펴보라.” 법좌에서 내려왔다.

16. 깨달음의 실마리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불법의 지극한 이치는 허공과 같이 원만하여 모자라는 것도 남아도는 것도 없이157) 본래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다. 낱낱의 존재에 실현되어 있고, 사물 하나하나에 온전히 드러나 있다. 가령 푸른 산과 맑은 물, 밝은 달과 시원한 바람, 깊고 빽빽한 숲과 새들의 지저귐, 푸른 계곡과 물고기의 도약, 산하와 대지, 초목과 총림, 작거나 큰 것과 길거나 짧은 것, 이와 같은 온갖 다양한 현상의 차별상들이 그대들에게 깨달음의 실마리를 보여 주지 않는 순간이 없다. 그렇거늘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별나게 의심을 일으키며 내게로 와서 깨달음의 실마리를 찾는가?158)
여러분, 모두들 궁구하라! 이와 같은 온갖 법들이 이렇게 기특한 점이 있어 항상 그대들이 기틀을 발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대들이 곧바로 이 도를 이해한다면 불법이 영원히 세간에 머물도록 함으로써 인간계·천계의 수명과 국왕의 장구한 안락과 모든 백성의 즐거운 생활을 더욱 늘리게 될 것이다.159) 안녕히.”

17. 무엇을 천당이라 하고, 무엇을 지옥이라 하겠는가
법좌에 올라앉아 다음의 인연을 제기했다. “제바달다提婆達多160)가 지옥에 떨어져 있을 때, 세존께서 아난을 시켜 물었다. ‘그대는 지옥의 고통을 참고 받아들일 만한가?’ ‘제가 비록 지옥에 있기는 하지만 삼선천三禪天161)과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세존께서 다시 아난을 시켜 물었다. ‘그대는 지옥에서 벗어나고 싶은가?’ ‘세존께서 지옥에 떨어지시면 제가 벗어나겠습니다.’ 아난이 말했다. ‘세존은 삼계三界의 중생을 이끄는 위대한 스승162)이시거늘 어찌 지옥에 떨어질 일이 있겠는가!’ ‘세존께서 지옥에 떨어질 일이 없다면, 저인들 어찌 지옥에서 벗어날 일이 있겠습니까!’ ”163)
(백운 선사가 말했다.) “말해 보라! 제바달다는 어떤 이유로 이렇게 말했을까? 지옥과 천당이 모두 정토라는 뜻일까?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찰해야 하며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다고 알아야 한다164)는 뜻일까? 이 경계에 이르면 무엇을 부처라 하고, 무엇을 마구니라 하겠으며, 무엇을 천당이라 하고, 무엇을 지옥이라 하겠는가?

006_0643_c_01L來大圓覺老僧適來爲你不惜眉毛
006_0643_c_02L便恁麽道看我眉毛有幾莖便下座
006_0643_c_03L上堂佛法至理圓同大虛無欠無餘
006_0643_c_04L本來圓成頭頭現成物物全彰只如
006_0643_c_05L靑山綠水明月淸風幽林鳥噪卷上第
006_0643_c_06L一二張
碧㵎魚跳山河大地草木叢
006_0643_c_07L纖洪長短如是等諸多物相無有
006_0643_c_08L片時不爲你示介入處因什麽不會
006_0643_c_09L特地生疑就我覔箇入處諸仁者大家
006_0643_c_10L究取如是諸法有如是奇特常助汝等
006_0643_c_11L發機汝等直會此道令法久住世間
006_0643_c_12L增益人天壽命國王千秋萬民樂業去
006_0643_c_13L珎重

006_0643_c_14L
上堂擧提婆達多在地獄中世尊令阿
006_0643_c_15L難傳問云汝在地獄中可忍受否
006_0643_c_16L多云我雖在地獄如三禪天樂世尊
006_0643_c_17L又令阿難傳問你還要出地獄麽達多
006_0643_c_18L待世尊入地獄我即出阿難云
006_0643_c_19L尊是三界大道師 [11] 豈有入地獄分達多
006_0643_c_20L世尊旣無入地獄分我豈有出地獄
006_0643_c_21L且道達多因什麽恁麽道莫是地獄
006_0643_c_22L天堂皆爲淨主 [12] 應觀法界性一切
006_0643_c_23L唯心造耶到這裏喚什麽作佛喚什
006_0643_c_24L麽魔喚甚麽天堂喚什麽地獄還委

006_0644_a_01L잘 알겠는가?”165) 법좌에서 내려왔다.

18. 큰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사양치 않는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166) “유정의 중생은 지혜라는 바다에 의지하는 것을 근원으로 삼고, 심식心識을 가진 무리는 법신을 지니는 것을 본체로 삼는다. 다만 번뇌 망상이 일어나 반야의 지혜가 막혀서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고167) 생각이 변하여 본래 모습도 달라졌기 때문에168) 업의 인연에 지배받아 돌아오지 못하는 것이다. 끝없이 드넓은 삼계에서 사생四生으로 나고 죽고를 거듭하며 육도를 오가면서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다. 이런 까닭에 우리 제석천께서는 오래전에 보리를 증득하였지만 고통 받는 중생을 가엾이 여겨 그 큰 지혜로 몸을 신묘하게 변화하여 마침내 수천억으로 몸을 나누어 드러내어 만방에 교화를 드리우셨던 것이다. 삼십이상三十二相을 나타내고 팔십종호八十種好로 장엄하여 79년간 세상에 머무시며 300여 회나 교법을 설하셨다. 자비의 구름을 널리 펴고 법우法雨의 은혜를 고르게 입도록 하여 삼승三乘과 오성五性169)과 상중하 근기의 모든 중생이 각자 점차적으로 수행의 성과를 얻도록 하셨다. ‘비유컨대 큰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사양치 않아 모기와 등에와 아수라에 이르기까지 그 물을 마시는 자들 모두 충족하게 하는 것’170)과 같이 제도해야 할 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마치셨다.
교화의 인연을 마치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고자 하시며 최후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고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나에게 정법을 꿰뚫어 보는 눈과 열반의 현묘한 마음이 있으니 이를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 교설 밖의 별도의 가르침은 상근기에게 전하셨던 것이니, 이 법은 사량으로 분별하여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171) 신통한 수행과 증득으로 깨달아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유심有心으로도 알 수 없고 무심無心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식識으로도 분별할 수 없고 지혜로도 알 수 없다. 깨닫는다면 삼계를 단박에 뛰어넘을 것이나 미혹된다면 만겁토록 번뇌라는 고해에 빠져 있게 될 것이다.
오늘 왕궁에 군신이 두루 모여 엄숙하고 위엄 있게 앉았기도 섰기도 하며 머리에는 하늘을 이고 있고 발은 땅을 밟고 있다. 보고 들은 견해가 또렷하다면 깨달은 것인가, 미혹한 것인가? 영산회상에서의 설법과는 같은가, 다른가? 안목을 갖춘 자는 자세히 살펴보라! 여기에서 분별해 낼 수 있다면

006_0644_a_01L悉麽便下座

006_0644_a_02L
上堂云有情之衆依智海而爲源
006_0644_a_03L識之流擁法身而爲體祗爲情生智隔
006_0644_a_04L於日用而不知想變體殊故被業緣
006_0644_a_05L而莫返茫茫三界出沒四生往來六
006_0644_a_06L受無量苦故我釋天久證菩提
006_0644_a_07L我苦倫以其大智化妙相身遂乃分
006_0644_a_08L身千億垂化萬方示現以三十二相
006_0644_a_09L莊嚴於八十種好住世七十九年敎談
006_0644_a_10L三百餘會慈雲廣布法雨均沾三乘
006_0644_a_11L五性上中下根各得其漸比如大海
006_0644_a_12L不讓小流乃至蚊虻及阿修羅飮其水
006_0644_a_13L皆得充滿卷上第一三張所應度者
006_0644_a_14L皆已度訖化緣旣畢於沙羅雙樹下
006_0644_a_15L將入涅槃於末後靈山會上拈花示衆
006_0644_a_16L吾有正法眼藏涅槃妙心付囑麽訶
006_0644_a_17L迦葉敎外別傳傳于上根是法非思
006_0644_a_18L量分別之所能知亦非神通修證之所
006_0644_a_19L能入不可以有心知不可以無心得
006_0644_a_20L不可以識識不可以智知悟之則頓超
006_0644_a_21L三界迷之則萬劫沉淪只如今日王宮
006_0644_a_22L君臣普會坐立儼然頭戴天脚踏地
006_0644_a_23L見聞不昧爲是悟爲是迷與靈山榜㨾
006_0644_a_24L是同是別具眼者看看於此辨得出

006_0644_b_01L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공행功行을 원만히 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한 찰나에 모든 단계를 뛰어넘어 더 이상 과거와 미래라는 대립적 견해도 없어질 것이다.” 법좌에서 내려왔다.

19. 밑 빠진 그릇을 늘어놓으리라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요즘 천하의 제방에서는 안거일이 되면 대가람에 부처님 형상을 모셔 놓고 갖가지 깃발과 꽃을 달며 향과 촛불 등 온갖 공양 용구를 매만져 올린다. 그러고는 많게는 문하의 대중 삼사오백을 거느리고 마음을 그 형상에 두고서 눈은 실제 형상을 본다고 상상하고 바른 기억을 떠올리며 여래께서 세상에 계시던 때와 같이 여기고 (계를 지키는) 청정한 보살로 머무르며 세 기한의 안거를 맺는다. 불전佛前에서 혹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명호를 부르며 자비를 구하여 참회하며, 혹은 한결같이 전심을 다해 상념을 거두어들이는 것172) 을 일정한 법도로 삼는다.
그러나 나는 이 경우에 전혀 이와 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수월도량173)을 건립하고 밑이 뚫린 그릇을 늘어놓으며, 익히지 않은 밥을 가득 담아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대중174)에게 공양하고, 공화만행空花萬行175)을 닦고 익혀서 거울 속의 마구니를 항복시키고, 꿈속에서 불사를 성취하며176) 환화와 같은 중생을 널리 제도하여 적멸의 과보를 함께 증득하리라.’177) 말해 보라! 제방의 결제와 견주어 같은가, 다른가? 안목을 갖춘 자는 자세히 살펴보라!”

20. 허공에 핀 꽃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백천 가지 무수한 삼매와 한량없이 미묘한 뜻178) 과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공덕과 끝이 없는 지혜의 광명이 모두 마음에 있으며, 일체의 계문戒門·정문定門·혜문慧門과 신통 변화를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다. 온갖 번뇌와 업장이 본래 공적하고 갖가지 인연과 과보가 모두 몽환과 같으니, 벗어나야 할 삼계도 없고 끊어야 할 번뇌도 없으며, 구해야 할 보리도 없고 증득해야 할 열반도 없다.179)
어째서 그러한가? 『원각경』에 ‘생사와 열반, 범부와 부처가 모두 허공에 핀 꽃과 같다.’180)라고 하였고, 대혜도 ‘무명·번뇌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고 보리·열반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으니, 다시 또 어떤 법이 장애가 되며 다시 또 어디에서 깨달음을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181)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궁극적인 경지이다.”


006_0644_b_01L不歷三祗功圓行滿一念超越更無前
006_0644_b_02L便下座

006_0644_b_03L
上堂云在今天下諸方至安居日
006_0644_b_04L大伽藍施設形像懸諸幡花修呈香
006_0644_b_05L種種供具廣領徒衆三百五百
006_0644_b_06L存目想生正憶念還同如來常住之日
006_0644_b_07L當爲淸淨菩薩止住結三期日即於佛
006_0644_b_08L或稽首十方諸佛名字求哀懺悔
006_0644_b_09L或一向攝念以爲常規我這裏總不恁
006_0644_b_10L建立水月道塲排列穿心埦子
006_0644_b_11L滿不濕之飯供養影響之衆修習空花
006_0644_b_12L萬行降伏鏡裏魔軍成就夢中佛事
006_0644_b_13L廣度如幻衆生同證寂滅之果且道
006_0644_b_14L與諸方結制是同是別具眼者看看

006_0644_b_15L
上堂夫百千三昧無量妙義河沙功德
006_0644_b_16L無極光明總在方寸一切戒門定門慧
006_0644_b_17L神通變化本自具足一切煩惱業障
006_0644_b_18L本來空寂一切因緣果報悉如夢幻
006_0644_b_19L無三界可出卷上第一四張無煩惱可
006_0644_b_20L無菩提可求無涅槃可證何故如此
006_0644_b_21L圓覺經云生死與涅槃凡夫及諸佛
006_0644_b_22L同爲空花相亦如大慧云無明煩惱
006_0644_b_23L不可不寂滅菩提涅槃不可不寂滅
006_0644_b_24L更有何法可障更向何處求悟入便是

006_0644_c_01L
21. 어찌 제도할 중생이 없겠는가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보지공寶志公182)이 사람을 시켜 사대思大183) 화상에게 ‘산에서 내려와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184) 무엇 합니까?’라고 말을 전하니, 사대 화상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나의 한입에 모두 삼켰거늘 어디에 다시 제도할 중생이 남아 있겠습니까!’라고 답하였다.185)
나는 대단하신 사대 화상께서 하신 훌륭한 말씀이 마치 용두사미와 같았다고 하겠다. ‘모든 부처님을 삼켜 버렸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그렇다고 어찌 제도할 중생이 없겠는가! 이와 같다고 해도 오늘날 같은 말세의 운에 이러한 근기를 가진 이를 얻기도 어렵다, 이러한 근기를 가진 이를 얻기도 어려워.”

22. 순임금의 덕과 요임금의 인을 알아 무엇 하랴
제야에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이제 금년 섣달도 다 지나가는데186) 대중과 분세分歲187)를 치를 만한 것도 없구나. 노승은 특별히 한 마리 노지백우露地白牛188)를 삶고 불을 지펴 산전山田의 도토리와 조로 밥을 짓고 채소로 국을 끓이고 땔나무 불을 피워 놓고 대중과 화롯가에 둘러 모여 함께 남은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189) 알겠는가? ‘태평성대를 이룬 업적에는 일정한 상相이 없고, 촌 노인의 가풍은 지극히 순박하기만 하다네. 시골 마을에서는 풍년을 기리며 노래하고 춤출 뿐,190) 순임금의 덕과 요임금의 인을 알아 무엇 하랴!’191) 시골 생활의 즐거움이여, 시골 생활의 즐거움이여, 끝이 없구나!”

23. 가고 오는 법이란 없다
제야에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금년 오늘 밤이 지나면 내년 내일이 올 것이요, 추위는 이 하룻밤을 따라 물러가고 봄은 오경을 뒤쫓아 돌아오리라. 그런 까닭에 승조僧肇는 ‘삶과 죽음이 번갈아 사라졌다 나타나고, 추운 계절과 더운 계절이 번갈아 자리를 바꾸니, 무엇이건 항상 옮겨 다닌다는 관념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통의 생각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192)라고 하였다. 봄도 돌아오지 않고 추위도 물러가지 않으니 가고 오는 법이란 없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193) 느닷없이 주장자를 잡고서 말했다.
“이것은 음양에 속하지 않는데 어찌 조화에 속박되겠는가! 해와 달도 비추지 못하고 추위와 더위도 침범하지 못하며, 변함도 없고 오고 감도 없으며, 위로는 하늘에까지 통하고 아래로는 황천에까지 이르며, 멀어서 끝이 없고 터럭만큼의 간격도 없다. 그대들이 여기에서 분명히 밝힐 수 있다면

006_0644_c_01L究竟

006_0644_c_02L
上堂因憶寶志空 [13] 令人傳語思大和尙
006_0644_c_03L何不下山來敎化衆生目視雲漢
006_0644_c_04L甚麽思大和尙答曰三世諸佛被我
006_0644_c_05L一口呑盡何處更有衆生可度我道大
006_0644_c_06L小思大和尙好語一似龍頭虵尾
006_0644_c_07L謂旣有諸佛可呑豈無可度衆生然雖
006_0644_c_08L如是時當末運此根人難得此根人
006_0644_c_09L難得

006_0644_c_10L
除夜上堂今當年窮臘盡無可以大衆
006_0644_c_11L分歲老僧特烹一頭露地白牛炊山田
006_0644_c_12L橡粟飯煑野菜羹燒榾柮火與大衆
006_0644_c_13L圍爐共餞殘生會麽大平事業無相
006_0644_c_14L野老家風至淳只知村家社舞那知舜
006_0644_c_15L德堯仁村田樂村田樂也無極

006_0644_c_16L
除夜上堂今年今夜盡明年明日來
006_0644_c_17L寒隨一夜去春逐五更廻所以肇公云
006_0644_c_18L生死交謝寒暑迭遷有物流動人之
006_0644_c_19L常情予則謂之不然只如春不廻寒不
006_0644_c_20L無去來法諸人又作麽生驀拈拄
006_0644_c_21L杖云這箇不屬陰陽寧拘造化日月
006_0644_c_22L不能照寒暑不能侵無變異無來去
006_0644_c_23L通霄漢下澈黃泉逈無邊際不隔絲
006_0644_c_24L諸人若向這裏明得卷上第一五張

006_0645_a_01L티끌 하나에도 보왕의 국토가 나타나고 미진 속에 앉아서도 대법륜을 굴릴 것이니, 곧바로 변함없는 광명이 눈앞에 드러나고 낱낱이 천 길 높이 절벽처럼 솟아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게 될 것이다.194) 알아차리지 못하였다면 장안으로 가는 길이 혼탁하리니 언제 깨달을 기약이 있겠는가! 또한 그렇다고는 해도 섣달그믐 밤도 새려 하는데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사람이 있는 줄 누가 알랴!” 한 소리 크게 내지르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24.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가
법좌에 올라앉아 불자로 선상을 한 번 내려치고 말했다. “눈이 있어 모든 것을 보고 귀가 있어 모든 것을 듣는다. 듣기도 하고 보기도 하니 말해 보라!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었는가? 나아와 노승에게 말해 보라. 우리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마가다국으로 돌아가시어 이레 동안 문을 걸어 닫고 친히 이 법령을 시행하셨으며, 인도의 28대 조사195)와 중국의 6대 조사가 대대로 이 법령을 서로 전하셨다. 그 뒤의 후손들이 어리석어 그 법령을 제기하기만 할 뿐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여 말과 글귀만 부화하고 아름답게 꾸며 대었을 뿐이다. 노승이 이제 세상에 나와 무너지려는 법고를 두드리고 땅에 떨어진 선종의 현묘한 기강을 바로잡았으니, 그대들은 자세히 살펴보라.” 불자로 선상을 한 번 내려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196)

25. 곧바로 가리킨 마음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진여의 자성은 본래 스스로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으니 천지에 앞서 생겨나 지금에까지 이른 것이다. 본래 원만하고 밝으며 시방 전체를 꿰뚫으니 안도 밖도 없으며 깊은 물처럼 항상 고요하나 미묘한 작용은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무수하다. 이를 정법안장·열반묘심이라 하고 또 본지풍광·본래면목이라고도 한다. 모든 부처님의 아뇩보리요 중생의 근본으로서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으나 중생이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니, 식識으로도 분별할 수 없고 지혜로도 알 수 없는 것이다.197) 그러나 천상계와 인간계의 모든 중생으로부터 불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힘을 받았다. 다만 중생은 그것을 온축하고 있으면서도 우매하여 헛되이 윤회를 받는 것이고, 모든 부처님은 깨달음의 성품이 어둡지 않아

006_0645_a_01L於一塵中現寶王刹坐微塵內轉大
006_0645_a_02L法輪便見常光現前各各壁立千仭
006_0645_a_03L若也不會長安路上輥 [14] 有甚了期
006_0645_a_04L又然則然矣誰知年盡夜更有未歸人
006_0645_a_05L喝一喝便下座

006_0645_a_06L
陞座以拂子擊禪床一下云有眼皆見
006_0645_a_07L有耳皆聞旣聞旣見且道見介什麽
006_0645_a_08L聞箇甚麽出來與老僧說看我佛如來
006_0645_a_09L於菩提樹下成等正覺歸于摩竭陀國
006_0645_a_10L七日掩關親行此令西乾東震四七
006_0645_a_11L二三遞相傳授此令後來兒孫不肖
006_0645_a_12L雖擧其令而不能行但以華詞麗句而
006_0645_a_13L老僧今日出世擊將頹之法皷
006_0645_a_14L已墜之玄網汝等諸人看看以拂子擊
006_0645_a_15L禪床一下便下座

006_0645_a_16L
上堂眞如之性本自圓成先天地而
006_0645_a_17L直至如今合下圓明洞澈十方
006_0645_a_18L內無外湛然常寂妙用恒沙是稱正
006_0645_a_19L法眼藏涅槃妙心亦謂之本地風光本
006_0645_a_20L來面目是諸佛阿耨菩提是衆生之大
006_0645_a_21L亦不離日用衆生日用而不知
006_0645_a_22L可以識識不可以智知然自天人羣生
006_0645_a_23L至於佛祖皆承渠力但以衆生薀此
006_0645_a_24L而冥昧枉受輪廻而諸佛覺性不昧

006_0645_b_01L이미 예전에 보리를 증득하고 등정각을 이룬 것이니, 범부와 성인이 비록 다르다고는 하나 그 부사의함은 하나로 같다.198)
그러므로 우리 불세존 석가여래께서는 오랜 세월 쌓은 원력에 의지해 슬하의 한 자식을 돌보는 듯한 자비심을 내고,199) 어떤 조건도 없는 자비심을 일으키시어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와 돕는 친구200)로서 세상에 출현하셨던 것이다. 갖가지 방편과 비유와 말로써 중생의 근기와 성품에 따라 널리 법요를 설하고 성불하도록 교화하여 생사윤회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으니 성현들이 결집하여 일대장교一大藏敎를 만들었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시고 천 년 후에 그 가르침이 중국으로 전해졌는데, 이 나라 중생들은 그 가르침을 담은 경전을 펼쳐 보며 글줄의 행간이나 뒤지고 문자나 헤아리면서201) 온갖 견해를 지어내고 언외의 가르침은 알지도 못한 채 문자라는 수단에만 골몰하여 마음의 근원이 막혀 버려 마침내 개가 흙덩이나 쫓아가는 꼴이 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가엾고 불쌍하다.
이런 까닭에 달마대사가 정교正敎가 쇠락한 것을 진심으로 가엾고 불쌍해하고, 또한 이 땅의 중생이 교敎라는 그물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언제 깨닫겠는가 하고 안타까이 여겨 이에 3년에 걸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특별히 서쪽에서 와 불립문자·교외별전·직지인심·견성성불의 가르침을 편 것이다. 바로 이 ‘곧바로 가리킨 마음’이란 평상시 그대로 아무 할 일이 없는 마음일 뿐으로서 여타의 허다한 현묘한 이해나 뜻으로 모색할 길은 없으며 무심無心과 무위無爲에 계합하여 천기天機(하늘로부터 받은 본래적인 기능)가 저절로 펼쳐져 구애됨도 머무름도 없다. 천지와 덕을 나란히 하고 일월과 밝음이 합하며 털끝만큼의 모난 생각도 용납하지 않으나 드넓게 트여 모든 것에 통한다. 자그마한 개자만큼이라도 주체와 객체를 내세운다면 나와 남으로 단절되고 장애가 되어 영원토록 훤히 꿰뚫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202)

26.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부처님 탄신일에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시방 어디에도 벽과 울타리가 없으며, 사면 어디에도 문은 없다. 깨끗한 벌거숭이요 한 점의 때도 없는 알몸 그대로 드러났지만 붙잡을 방법은 전혀 없다.203) 말해 보라! 석가노자께서는 무슨 광경을 보았기에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 걸은 다음 사방을 둘러보고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오로지 나만이 홀로 존귀하다.’라고 말씀하셨을까? 대중들이여,

006_0645_b_01L久證菩提成等正覺而凡聖雖殊其不
006_0645_b_02L思議一也故我佛世尊釋迦如來乘宿
006_0645_b_03L願力生一子悲興無緣慈作不請友
006_0645_b_04L出現於世以種種方便比諭言辭隨其
006_0645_b_05L根性廣說法要化令成佛超脫生死
006_0645_b_06L而賢聖結集爲一大藏敎佛入滅度一
006_0645_b_07L千年後卷上第一六張敎流東土此方
006_0645_b_08L衆生披而覽之尋行數墨作種種見
006_0645_b_09L不能見之言外溺於筌蹄返塞心
006_0645_b_10L遂成逐塊深可憐愍是故達摩
006_0645_b_11L心悲愍正敎凌替亦觀此土衆生墮在
006_0645_b_12L敎網之中何時醒悟去乃三年泛海
006_0645_b_13L特特西來不立文字敎外別傳直示
006_0645_b_14L人心見性成佛只這直指底心只是
006_0645_b_15L平常無事底心無許多玄解義路契合
006_0645_b_16L無心無爲天機自張無拘無執靡住
006_0645_b_17L匪着與天地齊德日月合明無容立
006_0645_b_18L毫髮見刺唯蕩蕩然大通之若立纎芥
006_0645_b_19L能所彼我即隔碍永不通透

006_0645_b_20L
佛誕日陞座云十方無碧落 [15] 四面亦
006_0645_b_21L無門淨裸裸赤酒酒沒可把且道
006_0645_b_22L迦老子見箇什麽邊事才生下時
006_0645_b_23L行七步目顧四方一手指天一手指
006_0645_b_24L道天上天下唯我獨尊大衆看他

006_0645_c_01L저 황면노자의 낯가죽이 얼마나 두꺼운지 살펴보라! 그래서 운문은 ‘내가 당시에 만일 그 소리를 들었다면 한 방에 때려죽여 개에게 먹이로 주어서 천하의 태평을 도모했을 것이다.’204)라고 했던 것이다.
말해 보라! 운문이 이렇게 한 말은 어떤 마음의 발로일까? ‘부모는 나와 가깝지 않으니 누가 가장 가까운 사이인가? 모든 부처님이 걸어가신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니 어떤 것이 최선의 길인가?’205)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일까? 법안法眼이 처음으로 운문의 이 말을 듣는 순간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면서 ‘운문이 부처님을 비방한다’고 생각하였으나, 20년이 지나 그 본의를 간파한 끝에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하며 법좌에 올라앉아 운문의 화두를 들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운문 대사의 기개는 왕과 같이 거침이 없었으나 불법의 도리는 전혀 없었다.’206) 나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대단한 법안이여! 비록 운문의 뜻을 간파하기는 했지만 결국 운문을 치켜세우지는 못했다.’207)” 법좌에서 내려왔다.

27. 시절이 평온하면 태평가 부를 일도 없다
임금의 탄신일에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208) “하늘에는 서기가 드리웠고 땅에서는 상서로운 구름이 피어오르네. 온 강 맑아 만 이랑 흰 물결 일며, 사방에선 요순의 풍속과 교화를 하례하네. 산은 푸른 하늘에 닿아 있고 나무에서는 맑은 바람 일어나며, 나뭇가지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흙덩이는 비에 부서지지 않네.209) 경림瓊林210)의 꽃은 요지瑤池211)에 활짝 피었고, 어류御柳는 옥전玉殿212)에서 황금빛 잎 나부끼네. 별들은 대궐에 흩뿌려져 있고 북극성은 천륜을 에워싸고 있네. 삼한이 성상聖上의 탄신일을 경하하고 만민이 임금의 장수를 기원하네. 산천이 든든히 보호하여 지키고 해악海嶽은 상서로운 조짐을 드러내도다. 금계金雞는 하늘 밖 소리를 알리고 성상(玉扆:천자)께서는 탄신일(千秋)에 존경을 받으시도다.
여러분, 바로 이러한 순간에 말해 보라! 군신의 도가 합하여 태평스러운 한 구절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도가 널리 통하면 천자 명령 전할 것 없고, 시절이 평온하면 태평가 부를 일도 없다. 또한 도가 군신 모두에 널리 통하니 온 세상이 고요하며, 시절이 평온하니 요순의 치세를 일제히 경하하노라.”

28. 무위無爲의 교화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대중이여, 오늘 조서를 내리시어 신승臣僧에게 나라를 위해 개당하여 지극한 도를 널리 퍼뜨려 인천人天의 일을 개발하라 하시니 어쩔 수 없이 종승을 드날려

006_0645_c_01L黃面老子面皮厚多少是故雲門云
006_0645_c_02L我當時若見一棒打殺與狗子喫却
006_0645_c_03L貴圖天下大平且道雲門恁麽道
006_0645_c_04L甚麽心行莫是父母非我親誰是最親
006_0645_c_05L諸佛非我道誰是最道者故也麽
006_0645_c_06L不見法眼初聞此語直得通身汗流
006_0645_c_07L將謂雲門謗佛二十年後覷得身心大
006_0645_c_08L乃陞高座擧云雲門大士氣宇如
006_0645_c_09L且無佛法道理我道大小法眼
006_0645_c_10L覷破雲門要且扶他雲門不得便下座
006_0645_c_11L誕日上堂云天垂瑞氣地通祥雲
006_0645_c_12L江澄萬頃煙波四方賀堯風舜化山連
006_0645_c_13L碧漢木起淸風風不鳴條卷上第一七
006_0645_c_14L
雨不破塊瓊林花笑於瑤池御柳
006_0645_c_15L搖金於玉殿星分紫𨷂辰拱天輪
006_0645_c_16L韓賀誕聖之辰萬民祝南山之壽直得
006_0645_c_17L山川擁衛海嶽呈祥金雞報天外之聲
006_0645_c_18L玉扆受千秋之貴諸仁者正當恁麽時
006_0645_c_19L且道君臣道合大平一句作麽生道
006_0645_c_20L良久云道泰不傳天子令時淸休唱大
006_0645_c_21L平歌又道泰君臣淸宇宙時淸齊賀舜
006_0645_c_22L堯年

006_0645_c_23L
上堂云大衆今日詔令臣僧爲國開
006_0645_c_24L流通至道開發人天事不獲已擧

006_0646_a_01L무위無爲의 교화를 도우리라. 물어도 옳고 훌륭하며, 묻지 않아도 진기하다. 설령 달마대사가 인도에서 온 뜻의 근원을 남김없이 묻고 남종의 요체를 모조리 답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건화문建化門213)일 뿐이며 궁극적 경지는 아니다. 지극한 도가 깊고 크며 광달하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텅 비어 미묘하고 순수하며 환히 빛나고 신령하게 밝으니 말로도 설명하지 못하고 지혜로도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214)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어서 시방을 환하게 통하며,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어 삼제三際에 모두 통하여 응하며, 천지를 환히 비추고 고금의 진실을 밝혀 드러내며, 만법과 더불어 짝이 되지 않고 (만상 가운데) 우뚝하니 홀로 드러난다. 성性은 일체의 현상에 드러난 마음이고 법인法印은 모든 법의 차별상이니 법 하나하나마다 치우침이 없으며 모든 대상에 대해 상대하는 차별이 끊어졌다. 이와 같이 미묘한 본체는 허공처럼 정해진 상相이 없어 잡을 수도 볼 수도 닦을 수도 없으며, 사유 분별로도 알 수 없고 증명할 수도 없다. 이처럼 도리에 밝게 통달한 것을 스스로 증득하였다(親證)고 하니, 갚기 어려운 불조의 막대한 은혜를 갚고 그들이 펼친 무위의 교화를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지극한 도를 널리 퍼뜨리고 묘선妙善을 두루 모았으니 위로는 군신의 도가 합하고 바른 교화는 끝이 없어서 사해가 안정되고 황위皇位(皇圖)는 영원토록 탄탄하며, 기후가 순조로워 풍년이 들어 물산이 풍부해지고 백성은 평안하고 건강하기를 빕니다. 해와 달이 비추는 것과 같고 하늘과 땅이 덮고 싣듯 하니 황위는 북극과 같고 천수天壽는 남산과 같습니다. 오랫동안 서 계셨소, 대중이여, 편히 쉬십시오.”215)

29. 봄이 되면
법좌에 올라앉아 ‘대중이여’ 하고 부르고 말했다. “불조의 미묘한 이치는 눈앞에 있을 뿐이다. 절기가 봄이 되면 산에는 꽃이 비단처럼 피고 시냇물은 쪽빛보다 푸르며,216) 버드나무에는 황금빛 새싹이 돋아나고 배나무에는 흰 눈 같은 꽃이 피어나며,217) 벗을 부르는 꾀꼬리 소리 지절대고 둥지를 찾아 제비 날아들며, 맑은 바람은 밝은 달을 스치듯 불고 밝은 달은 맑은 바람을 비춘다.218) 낱낱의 사물이 그 자리에 있고 사물마다 그 본질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있으니, 소리를 듣고 도를 깨우친다느니 색을 보고 마음을 밝힌다느니 하고 다시 말할 것이 무엇인가! 달디단 복숭아와 자두는 던져 버리고 온 산을 돌아다니며 시디신 매실을 따는 것이나 흡사하리라.” 주장자를 세워 놓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30. 여름이 되면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절기가 여름(朱明:夏季。 立夏節)이 되면 산의 꽃은 지고 열매 맺으니 마치 구슬 드리운 듯하고

006_0646_a_01L揚宗乘用助無爲問亦得亦妙不問
006_0646_a_02L亦奇直饒問極西旨之源答盡南宗之
006_0646_a_03L猶是建化門未爲臻極何謂至道
006_0646_a_04L淵曠冲虛妙粹炳煥靈明非言象之所
006_0646_a_05L非知智之所及非中非外洞澈十
006_0646_a_06L無去無來冥通三際輝天爍地耀
006_0646_a_07L古騰今不與萬法爲侶卓然獨露
006_0646_a_08L一切心印諸法相故法法無私緣緣絕
006_0646_a_09L如是妙體無相如空不可取不可
006_0646_a_10L不可修不可思不可證如是明達
006_0646_a_11L是謂親證堪報不報之恩用助無爲之
006_0646_a_12L此日流通至道普集妙善上祝君
006_0646_a_13L臣道合正化無邊四海晏淸皇圖永
006_0646_a_14L風調雨順物阜民康同日月之照
006_0646_a_15L若乾坤之覆載位齊北極壽等南
006_0646_a_16L久立大衆伏惟珎重

006_0646_a_17L
上堂召大衆云佛祖妙理祗在目前
006_0646_a_18L節届春則山花開似錦澗水碧於藍
006_0646_a_19L柳色黃金嫩梨花白雪香喚友黃▼(賏/(鷪-䀠))) [16]
006_0646_a_20L尋巢紫鷰飛淸風拂白月白月照淸風
006_0646_a_21L頭頭現成卷上第一八張物物全彰
006_0646_a_22L說什麽聞聲悟道見色明心大似拋
006_0646_a_23L却甘桃李循山摘醋梅卓拄杖便下座
006_0646_a_24L上堂云節届朱明山花結子似垂珠

006_0646_b_01L언덕의 무성한 나무들은 그늘을 이루어 푸른 휘장을 펼쳐 놓은 것 같으며, 벌과 나비들 다투어 날고 제비와 꾀꼬리 서로 재잘거린다. 이것이 바로 현사 사비玄沙師備 노한老漢이 ‘실상을 깊이 이야기하고, 반야를 잘 설한다.’219)라고 한 시절이요, 또한 농부들이 어린 모종을 옮기고 누렇게 익은 보리를 베는 시절이다. 이와 같은 태평스러운 시절은 눈이 있는 자라면 모두 볼 수 있고 귀가 있는 자라면 모두 들을 수 있다. 말해 보라! 불법은 어디에 있는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이 얼마나 분명한가!” 법좌에서 내려왔다.

31. 가을이 되면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절기가 가을이 되면 장맛비 개어 온 천지 깨끗하고 서늘한 바람은 들판에 불어들며, 꾀꼬리 노랫소리 희미해져 가고 매미는 앞서감(죽음)을 다투며, 가을바람 스산하고 그 풍경 적막하네. 흰 연꽃은 찬 연못가에서 시들어 가고 붉은 여뀌 옛 언덕에 활짝 피어나며, 울타리에는 황금 국화가 금빛을 터뜨리고 모래밭에는 이슬이 구슬처럼 드리우며, 계수나무에서는 향기 나부끼고 나뭇잎은 서리 맞아 시들하다. 요임금 때처럼 벼농사는 풍년이요, 순임금 때처럼 촌 노인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누나. 여러 선덕先德220)께서 이루신 태평성대가 이미 이와 같으니 산승이 다시금 중언부언 설하고 게송을 읊을 필요가 있겠는가!” 법좌에서 내려왔다.

32. 공자의 효와 석가의 효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221) “조사 문하에 불법이란 있지 않으니, 선법당善法堂222)에서 인의仁義를 말하지 말라. 비록 그러하기는 하나 일이란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다. ‘아아, 부모님이시여, 이 몸을 낳느라 고생하셨네.’223)라는 구절을 듣고 그 깊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하나 하늘처럼 넓고 끝이 없구나. ‘(부모로부터 받은) 이 몸을 감히 손상하고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224)라고 하였으니, 이는 노나라 공자의 효이다. ‘삼계에서 생사윤회하는 가운데 은애恩愛를 끊지 못하니, 은애를 버리고 무위無爲에 드는 것이 진실로 은애에 보답하는 길이다.’225) 그런 까닭에 우리 대각세존大覺世尊은 설산에서 고행하고 마가다국에서 깨달음을 얻어 도리천에 올라 어머니를 위해 법을 설하셨으니, 이는 석가모니의 효이다. 대해탈을 얻고 대신통을 발휘해 손에는 석장錫杖을 들고 손바닥에는 용우龍盂226)를 받쳐 들고 지옥문에 이르러 뛰어나게 살펴 찾아 그 어머니를 뵙고는 한량없이 슬피 우셨으니,

006_0646_b_01L巗樹成陰張翠幄遊蜂與胡蝶爭飛
006_0646_b_02L子共黃▼(賏/(鷪-䀠)) [17] 相語正是玄沙老人道深談
006_0646_b_03L實相善說般若底時節也亦乃田父
006_0646_b_04L移靑苗刈黃麥底時節也如是大平事
006_0646_b_05L有眼者皆見有耳皆聞且道佛法
006_0646_b_06L在什麽處良久云多小分明便下座
006_0646_b_07L上堂云節屈秋則積雨霽於天地
006_0646_b_08L凉入於郊墟鶯歌已老蟬嘒爭先
006_0646_b_09L風蕭索秋景蕭條白蓮已謝於寒塘
006_0646_b_10L紅蓼正開於古岸籬邊黃菊披金汀沙
006_0646_b_11L白露垂珠巖桂飄香木葉醉霜堯年
006_0646_b_12L而禾稼豊登舜日而野老謳歌諸禪德
006_0646_b_13L大平事業旣然如是山僧何須重說偈
006_0646_b_14L下座

006_0646_b_15L
上堂云祖師門下佛法不存善法堂
006_0646_b_16L仁義休說然雖如是事無一向
006_0646_b_17L聞哀哀父母生我劬勞欲報深恩
006_0646_b_18L天罔極髮膚身體不敢毁傷此魯仲
006_0646_b_19L尼之孝也輪轉三界中恩愛不能斷
006_0646_b_20L棄恩入無爲眞實報恩者故我大覺世
006_0646_b_21L雪山苦行摩竭成道往忉利天
006_0646_b_22L母說法此釋迦之孝也得大解脫
006_0646_b_23L大神通手擎金錫掌托龍㿻詣地獄
006_0646_b_24L卓然尋省見其慈母悲泣無量

006_0646_c_01L이는 목련존자의 효이다. 이 납승의 효는 어떠한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산승은 이제까지 천당에도 올라가지 못하고 지옥에도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선법당에서 보왕좌에 올라 어머니를 위해 법을 설함으로써 그 고생하신 은혜에 보답하고자 한다. 말해 보라! 내 어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신가?” 이내 말했다. “내 어머니는 생전에 선연善緣을 갖추셨으니 부처에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반드시 천계에 나셨으리라. 인간 세상에서의 장수는 고금에도 드문 일인데, 90세에서 1년이 모자라셨다.” 법좌에서 내려와 “대중을 번거롭게 하오마는 향 한 개비를 살라 산승이 어머니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도와주시오. 산승의 어머니께서 무슨 까닭에 대중들 번거롭게 향을 사르게 하시겠는가? 동쪽 집에 일이 나니 서쪽 집에서 슬퍼한다는 말을 모르는가!227)”라 하고는 손으로 가슴을 치며 “아이고, 아이고!” 하였다.

33. 학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사람마다 갖추고 있고 낱낱의 존재에 원만하게 이루어져 있거늘 어찌 노승의 말을 의심하는가? 노승은 오늘 어쩔 수 없어 형제들에게 결정적인 전기가 되는 한마디 말(一轉語)을 들려주겠다. 듣기를 원하는가? 여러 형제들이여, 학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으며,228) 감초는 달고 황련은 쓰다. 이렇게 한 말이 대중들 마음에 흡족한가?” 법좌에서 내려왔다.229)

34. 하나의 할
법좌에 올라앉아 대중을 돌아보며 말했다. “하나의 할로 손님과 주인을 나누고 관조와 작용을 한꺼번에 시행한다.” 할을 한 번 크게 내지르고 말했다. “이 하나의 할에 손님과 주인이 뚜렷이 나뉘었는가? 비춤을 먼저 하고 작용을 나중에 하였는가?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였는가?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이해한다면 임제의 종풍은 매몰되어 사라질 것이며, 이렇게 이해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헤아리겠는가?”230)
“어떤 것이 비춤을 먼저 하고 작용을 나중에 하는 것입니까?” “임제가 먼저이고 덕산이 나중이다.”231) “어떤 것이 작용을 먼저 하고 비춤을 나중에 하는 것입니까?” “덕산이 먼저이고 임제가 나중이다.” “어떤 것이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는 것입니까?” “임제와 덕산이 뼈와 썩은 살로 돌아갔다.” “어떤 것이 비춤과 작용을 동시에 하지 않는 것입니까?”

006_0646_c_01L目連之孝也作麽生是衲僧之孝也
006_0646_c_02L良久云山僧今日不上天堂不入地獄
006_0646_c_03L於善法堂中登寶王座卷上第一九張
006_0646_c_04L爲母說法以答劬勞且道我母即
006_0646_c_05L今在什麽處乃云我母生前足善緣
006_0646_c_06L勞問佛定生天人間上壽古今少
006_0646_c_07L十春秋減一年下座敢煩大衆燒一
006_0646_c_08L炷香以助山僧報恩旣是山僧之母
006_0646_c_09L爲什麽却煩大衆燒香不見道東家有
006_0646_c_10L西家助哀以手搥胷云蒼天蒼天
006_0646_c_11L上堂云人人具足箇箇圓成爭怪得
006_0646_c_12L老僧老僧今日事不獲已便與兄弟
006_0646_c_13L擧唱一轉語還願樂麽諸兄弟鶴脛
006_0646_c_14L長鳧脛短甘草甜黃蓮苦恁麽道
006_0646_c_15L愜衆慈麽下座

006_0646_c_16L
上堂頋視大衆云一喝分賓主照用一
006_0646_c_17L時行喝一喝云此一喝中莫是賓主
006_0646_c_18L歷然麽莫是先照後用麽莫是照用同
006_0646_c_19L時麽莫是照用不同時麽若恁麽會
006_0646_c_20L臨濟宗風平沉而盡旣不恁麽作麽生
006_0646_c_21L商量如何是先照後用臨濟先德
006_0646_c_22L山後如何是先用後照德山先臨
006_0646_c_23L濟後如何是照用同時答云臨濟德
006_0646_c_24L山歸骼胔如何是照用不同時答云

006_0647_a_01L“그대는 소상瀟湘으로 향하고 나는 진나라로 향하는 것이다.”232) “이 네 가지 비춤과 작용의 관계를 벗어나 또 다른 기특한 일이 있습니까?” 할을 한 번 크게 내지르고 법좌에서 내려왔다.233)

35.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세존께서는 79년간 세상에 머무시며 360회 법회를 통해 중생의 근기와 성품에 따라 병에 알맞게 약을 주시고, 반만半滿·편원偏圓234)·권실權實·돈점頓漸235) 등으로 대장경 전체의 교설을 남김없이 모두 설하셨다. 그런데 어째서 ‘녹야원에서부터 발제하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236)라고 하는가?
부처님께서 반야회상에서 모든 법의 공상空相을 설하셨으니,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모두 공으로서 일체의 법은 단지 가명假名만 있을 뿐 알맹이는 없다고 하신 말을 모르는가. 그러므로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참된 말이며 실다운 말이며 속이지 않은 말이다.237) 반야경에서 부처님께서 ‘상相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238)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꿈·허깨비·물거품·그림자와 같고, 이슬이나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만 한다.’239)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이와 같이 관찰하는 데 이르러서는 이름도 공이요, 공 또한 얻을 수 없다.”

36. 정도正道란 무엇인가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승당 앞 당종240)의 종소리 은은하고 법당에서 치는 북소리 성대하다. 삼세의 모든 부처가 종소리와 북소리 울리는 가운데 대법륜을 힘을 다해 굴리셨다. 여러분, 들었는가? 그 안으로 들어가라. 그 안으로 들어가되 색으로 보려 하고 소리로 구하려 한다면241) 모두 사도邪道일 뿐이다. 말해 보라! 그렇다면 정도正道란 무엇인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그대에게 마다하지 않고 말해 줄 수는 있으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걱정이로다. 내 눈썹이 몇 가닥이나 남아 있는지 보라.242)” 불자로 선상을 한 번 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37. 시절인연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243) “백장 회해百丈懷海는 ‘불성의 도리를 알고자 한다면 그때마다의 시절인연을 관찰해야 한다.244) 시절이 무르익으면 그 불성의 도리는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245)라고 하였다. 봄이 오면

006_0647_a_01L君向瀟湘我向秦離四照用外還有
006_0647_a_02L奇特事麽師喝一喝便下座

006_0647_a_03L
上堂云世尊住世七十九年三百六十
006_0647_a_04L隨衆生根性應病與藥半滿偏圓
006_0647_a_05L權實頓漸一大藏敎說也說盡爲什麽
006_0647_a_06L始從鹿野苑終至跋提河於是二
006_0647_a_07L中間未曾說一字耶不見佛於般若會
006_0647_a_08L說諸法空相謂眼耳鼻舌身意色聲
006_0647_a_09L香味觸法皆空卷上第二○張則一切
006_0647_a_10L諸法但有假名無有貞實故云未曾說
006_0647_a_11L一字是眞語者實語者不誑語者
006_0647_a_12L般若經中佛不云乎凡所有相皆是
006_0647_a_13L虗妄一切有爲法如夢幻泡影如露
006_0647_a_14L亦如電應作如是觀到如是觀處
006_0647_a_15L字亦空空亦了不可得

006_0647_a_16L
上堂僧堂前撞鐘鐘聲隱隱法堂上
006_0647_a_17L擊鼓鼓聲喧喧三世諸佛盡在鐘鼓
006_0647_a_18L聲中轉大法輪汝等諸人還聞麽
006_0647_a_19L這裏入這裏入若以色見聲求皆爲
006_0647_a_20L邪道且道作麽生是正道良久云
006_0647_a_21L不辭向你道恐汝不信看我眉毛有幾
006_0647_a_22L以拂子擊禪床一下便下座

006_0647_a_23L
上堂百丈云欲識佛性義當觀時節
006_0647_a_24L因緣時節若至其理自彰者如春行

006_0647_b_01L온 나라 곳곳 어디나 봄기운을 띠니 온갖 초목에도 시절인연이 도래하여 저마다 꽃을 피우고 잎을 틔운다. 그 본성에 따라 크거나 작고 모나거나 둥글고 길거나 짧으며, 푸르기도 하고 노랗기도 하며 붉기도 하고 초록이기도 하며, 독한 냄새가 나기도 하고 향기가 나기도 하는 등 일제히 봄기운을 발한다. 그러나 봄이 아니라도 크기도 작기도 하며 모나기도 둥글기도 하며 길기도 짧기도 하며, 푸르기도 노랗기도 하며 붉기도 초록이기도 하며, 독한 냄새나 향기가 나기도 하니 모두 본래 가지고 있는 성품(本有之性)인데 다만 인연을 만나 발한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남악 회양南嶽懷讓 화상은 마조馬祖에게 ‘그대들이 마음에 관한 법문(心地法門)246)을 배우는 것은 종자를 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의 요체를 설하는 것은 저 하늘에서 내린 은택에 견줄 만하다. 그대의 인연이 합하였으니 그 도가 드러날 것이다.’247)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 ‘성인이 교법을 베푸는 것은 명성을 구해서도 아니고 공을 차지하려고 해서도 아니며, 단지 학인들이 자신의 본성을 보고 부처를 이루도록 하기 위한 것(見性成佛)일 뿐’이라고 하는 것이다.”

38. 구름에 둘러싸이지 않은 산은 없다
법상에 올라앉아 다음 문답을 제기했다. “운문 대사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지금 나한께 공양물을 바치면 나한이 오실까?’ 그 학인이 말이 없자 스스로 대신하여 대답했다. ‘삼문 앞에서 합장하고, 불전 안에서 향을 사른다.’.”
(백운 선사가 말했다.) “나라면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이란 물은 모두 달을 머금고, 구름에 둘러싸이지 않은 산은 없다. 말해 보라! 운문의 뜻과 같은가, 다른가?” 법좌에서 내려왔다.248)

39. 본래면목이란 무엇인가
법상에 올라앉아 말했다.249) “터럭 하나가 거대한 바다를 삼키고, 개자 하나가 수미산을 거두어들인다. ‘대천세계를 우주 밖으로 내던지고, 수미산을 개자 하나에 거두어들인다.’라는 말도 저 납승의 눈앞에서는 차 마시고 밥 먹는 것과 같은 평상사일 뿐이다. 행각250)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가시나무 숲 안을 큰 도량으로 삼아 앉고, 진흙과 물이 뒤섞인 번뇌의 경계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251)을 알아차려야 뛰어난 솜씨이다. 말해 보라! 본래면목이란 무엇인가?” 마침내 주장자를 잡고 말했다. “설령 본래면목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노승의 주장자에 맞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252) 법좌에서 내려왔다.

40. 네 가지 비방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 ‘모든 부처님들께서 세상에 나타나신 까닭은 바로 일대사인연을 세상에 실현하고’253) 불지견佛知見을 열어 보여 깨닫게 하고자 해서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006_0647_b_01L萬國處處同春一切草木時節因緣
006_0647_b_02L到來各各開花發葉隨其根性大小方
006_0647_b_03L圓長短或靑或黃或紅或綠或臭或
006_0647_b_04L同時發生非春能大能小能方能圓
006_0647_b_05L能長能短能靑能黃能紅能綠能臭
006_0647_b_06L能香皆是本有之性遇緣而發耳
006_0647_b_07L讓和尙謂馬祖曰汝學心地法門
006_0647_b_08L下種子我說法要比彼天澤汝緣合
006_0647_b_09L當見其道所以云聖人設敎不求
006_0647_b_10L名不代功只令學者見性成佛而已

006_0647_b_11L
上堂擧雲門大師問僧今日供養羅漢
006_0647_b_12L羅漢還來不其僧無語自代云 [18]
006_0647_b_13L頭合掌佛殿裏燒香 [19] 老僧即不恁麽
006_0647_b_14L有水皆含月無山不帶雲且道與雲
006_0647_b_15L是同是別便下座卷上第二一張

006_0647_b_16L
上堂云毛呑巨海芥納須彌擲大千
006_0647_b_17L於方外納須彌於芥中者衲僧面前
006_0647_b_18L也是家常茶飯行脚人須是荊棘林內
006_0647_b_19L坐大道場向和泥合水處忍取本來面
006_0647_b_20L是好手 [20]
006_0647_b_21L遂拈拄杖云直饒見得未免老僧拄
006_0647_b_22L便下座

006_0647_b_23L
上堂云諸佛出世皆爲一大事因緣
006_0647_b_24L出現於世開示悟入佛之知見爲甚麽

006_0647_c_01L세존께서는 ‘내 차라리 법을 설하지 않고 속히 열반에 드는 것이 나으리라.’254)라고 하신 것일까?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설하여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요,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설하여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255) 이 되기 때문이다. ‘불성이 있다’고 하면 집착이라는 구실로 비방하고 ‘불성이 없다’고 하면 허망이라는 구실로 비방한다.
예컨대 ‘불성이 있다’고 하면 증익방增益謗에 해당하고, ‘불성이 없다’고 하면 손감방損減謗에 해당하며, ‘불성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면 상위방相違謗에 해당하며, ‘불성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하면 희론방戲論謗에 해당한다.256) 법을 설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중생에게 해탈할 기약이 없기 때문이었고, 법을 설하려고 했던 것은 중생이 표면적인 말에 얽매여 분별을 일으키기 때문이었으니, 이익은 적고 손실은 많다. 그런 까닭에 ‘내 차라리 법을 설하지 않고 속히 열반에 드는 것이 나으리라.’라고 하신 것이다.” 법좌에서 내려왔다.

41. 예전 그대로
해제일에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257) “비목毗目 선인이 선재동자의 손을 잡자 선재는 그 즉시 자신의 몸이 티끌처럼 무수한 불국토를 지나왔음을 보았고, 그 손을 놓자 완연히 예전 그대로 본래 있던 곳에 있게 되었다.258) 노승은 오늘까지 여러 형제들과 이곳에서 도량 밖으로 나가지 않고259) 안거를 하였는데, 이렇게 안거를 마치는 날이 되고 보니 완연히 예전 그대로이구나. 또한 선재동자는 예전 그대로의 곳으로 티끌처럼 무수한 부처님을 하나로 거두어 돌아갔으니, 대중도 예전 그대로의 곳에서 하안거 석 달 90일 동안의 일을 모두 거두어 자취가 남지 않도록 하라. 알겠는가?260)‘끝없는 불국토의 경계에서는 자신과 남 사이에 터럭 끝만큼의 간격도 없고, 십세의 고금은 처음부터 끝까지 현재의 찰나를 떠나지 않는다.’261) 또 ‘하나의 털끝에 모든 세계를 감추고 개자(겨자)씨 하나에 수미산을 거두어들인다.’라고 한다. 대천세계를 우주 밖으로 내던지고 수미산을 개자 하나에 거두어들이는 것 모두 우리가 늘 할 수 있는 본분상의 능력이며 다른 사람의 수단을 빌리는 것이 아니다.262)” 법좌에서 내려왔다.

42. 행각行脚이란
자자일自恣日263)에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이제 해제일을 맞아 때는 초가을 늦여름이다. 장맛비 개어 온 천지 깨끗하고 서늘한 바람은 들판에 불어들며, 꾀꼬리 노랫소리 희미해져 가고 매미는 앞서감(죽음)을 다투며, 가을바람은 푸른 하늘에 부채 바람처럼 시원하게 불고 더위는

006_0647_c_01L世尊云我寧不說法疾入於涅槃耶
006_0647_c_02L說衆生有佛性亦謗佛法僧說衆生無
006_0647_c_03L佛性亦謗佛法僧若言有佛性名執
006_0647_c_04L着謗若言無佛性名虛妄謗如云
006_0647_c_05L佛性有則增益謗說佛性無則損減
006_0647_c_06L說佛性亦有亦無則相違謗說佛
006_0647_c_07L性非有非無則戱論謗始欲不說
006_0647_c_08L生無解脫之期始欲說之衆生又隨語
006_0647_c_09L生解益少損多故云我寧不說法
006_0647_c_10L入於涅槃便下座

006_0647_c_11L
解制上堂云毗目仙人執善財手
006_0647_c_12L財即見自身過微塵數佛刹及其放手
006_0647_c_13L宛然依舊當在本處老僧今日與諸兄
006_0647_c_14L爰於此處結足安居及其解夏
006_0647_c_15L然依舊且善財依舊處微塵諸佛
006_0647_c_16L攝有歸大衆依舊處三月九旬歛收
006_0647_c_17L無跡還知麽無邊刹境自他不隔於
006_0647_c_18L毫端十世古今始終不離於當念
006_0647_c_19L毛端藏刹海芥子納須彌擲大千於方
006_0647_c_20L納須彌於芥中皆吾輩之常分
006_0647_c_21L假於他術也下座卷上第二二張

006_0647_c_22L
自恣日上堂云時當解制秋初夏末
006_0647_c_23L積雨霽於天地新凉入於郊墟鶯歌已
006_0647_c_24L蟬▼(虫+彗)爭先秋風乍扇於長空暑氣

006_0648_a_01L사방 들판에 잦아들었으며, 뜰의 풀에는 이슬이 맺혔고 시냇가 풀은 안개를 머금었다. 요임금 때처럼 벼농사는 풍년이요, 순임금 때처럼 촌 노인은 태평성대를 노래하네.264) 제방으로 유력遊歷하는 선객들 동으로 서로 길 떠나는데, 허리에는 가벼운 봇짐 둘러 묶고 손에는 짧은 지팡이 짚었네. 물가 소나무 아래에 머물러도 구애될 것이 없고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여유롭게 거니니, 자재하여 어느 곳을 가든지 풍류를 값싸게 팔리라.265)
비록 그러하나 앞길에 홀연 어떤 사람이 나타나 ‘행각하는 일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눈 밝은 사람266) 앞에서 어떻게 답할 것인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라면 만에 하나도 의심 따위 없겠지만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후학이라면 자세히 살펴야만 할 것이다. 동산 양개洞山良价가 읊은 송을 듣지 못했는가.

切忌從他覓         절대 다른 사람을 쫓아다니며 찾지 말지니,
迢迢與我踈         아득하여 나의 진면목과는 거리가 멀도다.
吾今獨自往         내 이제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홀로 가니,
處處得逢渠         곳곳에서 그와 만난다네.
渠今正是我         그는 이제 바로 나 자신이나,
我今不是渠         나는 더 이상 그가 아니라네.
應須恁麽會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方得契如如         비로소 여여如如한 진실과 하나 되리라.267)

이 본분사를 알아차리려면 대단히 세밀하게 살펴야만 하리라.”
43. 취모검을 들듯이
결제일에 대중에게 말했다. “여러 형제들이여, 이제 여기에까지 와서 고요함을 함께하며 결제 석 달 90일 동안 도량 밖으로 나가지 않고 안거하는 인연으로 모였으니 기필코 등한히 하지 말고 각자 힘써 노력해야 하리라. 취모검을 들고 칼날을 드러내어 물들고 무젖은 망령된 생각(妄情)을 완전히 베어 없애고, 참되고 바른 공부를 하여 ‘안으로는 망념을 극복하는 공부에 부지런히 힘쓰고 밖으로는 쟁론을 벌이지 않는 덕을 넓히도록 하라.’268)
‘시방에서 이곳에 함께 모여, 사람마다 무위의 도를 배우네. 이곳은 부처를 뽑는 선불장選佛場269)이니, 마음 비우면 급제하여 돌아가리라.’270)라는 바로 그 뜻이다. 이렇게 한 말이 대중 마음에 흡족한가?”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세 단계 거친 폭포 거슬러 올라 용으로 승천할 때 대지를 진동시키는 천둥소리로다.”271)

44. 정혼과 불성이 같은가, 다른가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세존께서는 ‘모든 중생이 사대四大를 자기 몸의 상相이라 잘못 알고 있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를 자기 마음의 상이라고 착각하고 있다.’272)라 하셨고, 조사는 ‘눈에 있을 때는 본다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 하며, 코에 있을 때는 향을 판별한다 하고 혀에 있을 때는 맛을 안다 하고,

006_0648_a_01L潜消於四野庭莎露滴溪草含煙
006_0648_a_02L年而禾糓豊登舜日而野老謳歌遊方
006_0648_a_03L禪客東去西去腰束輕包手携短藤
006_0648_a_04L水邊松下去住無拘解脫逍遙自在
006_0648_a_05L隨方賤賣風流雖然如是前程忽有
006_0648_a_06L人問作麽生是行脚事明眼人前
006_0648_a_07L何祗對若是所得之人萬一無疑
006_0648_a_08L學初心要須甚細不見洞山云切忌
006_0648_a_09L從他覓迢迢與我踈吾今獨自往
006_0648_a_10L處得逢渠渠今正是我我今不是渠
006_0648_a_11L應須恁麽會方得契如如承當這个事
006_0648_a_12L大須甚細

006_0648_a_13L
結制示衆云諸兄弟旣來這裏同甘
006_0648_a_14L𨶑寂三月九旬禁足安居緣會決不
006_0648_a_15L等閑宣各勉力提擧吹毛露刃劒
006_0648_a_16L除妄染情習下淂眞正功夫內勤克念
006_0648_a_17L之功外弘不諍之德所謂十方同共聚
006_0648_a_18L介介學無爲此是選佛場心空及第歸
006_0648_a_19L還愜衆慈麽良久云化龍三級浪
006_0648_a_20L地一聲雷

006_0648_a_21L
上堂世尊云一切衆生妄認四大爲
006_0648_a_22L自身相六塵緣影爲自心相祖師云
006_0648_a_23L在眼曰見在耳曰聞在鼻辨香在舌
006_0648_a_24L知味在手執捉在足運奔識者喚作

006_0648_b_01L손에 있을 때는 움켜잡는다 하며 발에 있을 때는 돌아다닌다고 한다. 아는 자는 이것을 불성이라 부르지만 모르는 자는 정혼精魂이라고 부른다.’라고 하셨다.
그대들은 무엇이라 부르겠는가? 말해 보라! 정혼과 불성이 같은가, 다른가?”273)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두 법(불성과 정혼)이 모두 공이어서 상이 없음을 알아야 하리라.”274)

45. 세존의 삼매를 가섭은 알지 못하였고 가섭의 삼매를 세존은 알지 못하셨다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세존께서 가섭만 알도록 하신 것은 마치 다른 곳에 비를 내린 것과 같았다.’275)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존의 삼매를 가섭은 알지 못하였고 가섭의 삼매를 세존은 알지 못하셨으니, 가섭만 세존의 삼매를 알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세존도 알지 못하셨다. 무슨 까닭인가?276)『원각경』에 ‘실상實相 중에는 실로 보살도 없고 여러 중생도 없다. 무슨 까닭인가? 보살이나 중생이나 모두 헛것에서 나온 변화(幻化)이니 그 환화는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증득할 깨달음도 없다. 비유하자면 마치 눈이 눈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본성은 본래 평등한데 평등하지 못한 까닭은 중생이 미혹하고 전도되어 (온갖 환화를) 송두리째 없애 버리지 못하고, 멸하고 멸하지 못함에 대해 허망한 온갖 작용을 펼치며 차별의 견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래의 적멸을 그대로 따른다면 실로 적멸도 없고 적멸한 자도 없다.’277)라고 하였으니, 이 외에 별다른 도리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향상하는 유일한 길은 어떤 성인도 전하지 못하거늘, 배우는 이들이 몸을 괴롭혀 가며 애쓰는 꼴이 마치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려는 짓과 같다.’278)는 그 뜻이다.”

46. 경전을 꿰뚫어 보는 눈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279) “경전을 보려면 반드시 경전을 꿰뚫어 보는 눈(看經眼)이 있어야 한다.280) 여러분에게 묻겠다. 경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란 무엇인가? 어떤 노숙281)이 경전을 보고 있을 때 학인이 ‘경전을 꿰뚫어 보는 눈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그 노숙이 주먹을 꼿꼿이 세웠다는 일화를 예로 들어 보자. 저 노숙이 이렇게 드러낸 경계를 살펴보면 험준282)하기 이를 데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간경안看經眼이라 부르자니 또한 주먹이기도 하고, 주먹이라 부르자니 또한 간경안을 잃어버리게 되고 만다.283) 이러한 궁지에 이르면 무엇을 판단의 기준으로 의지할 것인가? 만약 분별하여 밝혀낸다면 ‘종일토록 말을 해도 한 글자도 내뱉은 적이 없고, 종일토록 밥을 먹어도 한 톨의 쌀도 씹은 적이 없으며, 종일토록 옷을 입고 있어도 한 오라기의 실도 걸친 적이 없다.’284)라고 한 말이 진실임을 비로소 믿게 될 것이다.

006_0648_b_01L佛性不識者喚作精魂諸仁者喚作
006_0648_b_02L什麽且道精魂與佛性是同是別
006_0648_b_03L久云要知二法空無相

006_0648_b_04L
上堂古人云世尊迦葉知猶如餘處
006_0648_b_05L然世尊三昧卷上第二三張迦葉不
006_0648_b_06L迦葉三昧世尊不知非但迦葉不
006_0648_b_07L知世尊三昧世尊不知何以故如圓
006_0648_b_08L覺經云於實相中實無菩薩及諸衆
006_0648_b_09L何以故菩薩衆生皆是幻化幻化
006_0648_b_10L滅故無取證者比如眼根不自見眼
006_0648_b_11L性自平等無平等者衆生迷倒未能
006_0648_b_12L除滅 [21] 於滅未滅妄功用中便現差別
006_0648_b_13L若得如來寂滅隨順實無寂滅及寂滅
006_0648_b_14L更無第二故也如云向上一路
006_0648_b_15L聖不傳學者勞形如猿捉影

006_0648_b_16L
上堂云看經須具看經眼且問諸人
006_0648_b_17L作麽生是看經眼只如有一老宿看經
006_0648_b_18L有僧乃問如何是看經眼老宿竪
006_0648_b_19L起拳頭看他老宿恁麽用處直得嶮峻
006_0648_b_20L且作麽生領會若喚作看經眼又是拳
006_0648_b_21L若喚作拳頭又失却看經眼到這
006_0648_b_22L如何1) [4] 若辨明得出方信終日
006_0648_b_23L未曾道着一字終日喫飯未曾咬
006_0648_b_24L破一粒米終日着衣未曾掛着一縷絲

006_0648_c_01L이와 같이 믿으면 간경안이 분명해질 뿐 아니라, 그 결과로 얻는 공덕까지도 생각하여도 알 수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산승이 다시 형제들에게 자세한 설명을 달아 주겠다. 학인이 지닌 한 권의 경전은 삼천대천세계와 그 분량이 같지만 반드시 총명한 지혜를 가진 사람의 청정한 눈이라야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법좌에서 내려왔다.

47. 하나의 그 무엇
법좌에 올라앉아, 단월(시주)이 불상을 장엄한 것을 경찬慶讚하여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나의 그 무엇이 말로 표현하기 이전에 벌거벗은 알몸을 모조리 드러내었으니, 하늘과 땅을 뒤덮고 소리와 색을 자유자재로 부린다. 황면노자는 이 결정적인 하나의 소식285)을 얻고서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고, 모태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중생제도를 벌써 마쳤다.≻’286)라고 하였다.287)
그대들에게 묻겠다. 석가노자가 이 결정적인 하나의 소식을 얻고서 어떻게 형상을 장엄하였는가? 여기에서 알 수 있다면 단월이 아미타불과 팔대보살을 장엄할 때에 최초의 일념을 일으킨 경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렇고, 단월이 장엄하겠다는 최초의 일념을 일으키지 않았을 때에는 불보살은 또 어디에 계셨을까? 무명無明이라는 굴속에서나 환화처럼 실체가 없는 몸뚱이에서 기괴한 짓거리 따위는 하지 마라. 이 경계에서 석가노자가 어찌해야 했을까를 묻지 마라.
다만 곧바로 최초의 일념을 알아차려서 ‘도솔천을 떠나기도 전에 이미 왕궁에 강림하였다.’는 말도 옳지 않고, ‘모태에서 태어나기도 전에 중생제도를 벌써 마쳤다.’는 말도 옳지 않으며, 형상을 장엄한 것도 옳지 않고, 최초의 일념도 옳지 않으며, 최초의 일념을 알아차렸다는 것도 옳지 않다288)는 것을 안 연후에라야 단월은 석가노자를 만나 볼 자격이 있을 것이다. 말해 보라! 처음부터 끝까지 죄다 옳지 않다고 했는데, 어디에서 서로 만나 볼 수 있겠는가? 알겠는가? 이렇게 깊은 마음을 가지고서 무수한 국토를 받드는 것을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한다고 한다.” 한소리 크게 내지르고 법좌에서 내려왔다.


006_0648_c_01L如是信得非唯看經眼分明乃至所獲
006_0648_c_02L功德不可思議其或未然山僧更爲
006_0648_c_03L兄弟下介注脚學人一卷經量等三
006_0648_c_04L千界須是聰慧人淨眼悉明見便下座
006_0648_c_05L上堂檀越裝佛慶讃云古人道有一
006_0648_c_06L聲前露裸裸盖天盖地盖色騎聲
006_0648_c_07L黃面老子得這一着子云未離兜率
006_0648_c_08L已降王宮未出母胎度人已畢敢問
006_0648_c_09L諸人只如釋迦老子得底一着字
006_0648_c_10L麽生裝塑耶這裏見得卷上第二四張
006_0648_c_11L便見得大檀越莊嚴彌陁八大菩薩
006_0648_c_12L最初一念起處只如大檀越2) [5] 起莊嚴
006_0648_c_13L最初一念佛菩薩又在什麽處切忌
006_0648_c_14L向無明窠窟裏幻化空身殼子裏揑怪
006_0648_c_15L到這裏莫問釋迦老子如之若何
006_0648_c_16L直下了却最初一念未離兜率已降王
006_0648_c_17L宮也不是未出母胎度人已畢也不是
006_0648_c_18L裝塑底也不是最初一念也不是了却
006_0648_c_19L最初一念也不是然後檀越人却與
006_0648_c_20L釋迦老子相見有分且道旣是從頭
006_0648_c_21L至末俱不是了又向什麽處相見
006_0648_c_22L委悉麽將此深心奉塵刹是則名爲
006_0648_c_23L奉佛恩喝一喝下座

006_0648_c_24L「攴」疑「支」{編}「未」疑「末」{編}

006_0649_a_01L
48. 정오에 삼경을 알리는 종
법좌에 올라 할을 한 번 내지르고 말했다. “하나의 할로 손님과 주인을 나누고, 관조와 작용을 한꺼번에 시행한다.289) 이 말에 담긴 뜻을 알고자 하는가? 정오에 삼경을 알리는 종을 치는 격이로다.290) 그렇다면 하나의 할을 발하기 이전에는 손님과 주인으로 나뉘었는가? 나뉜 뒤에는 어느 것이 손님이고 어느 것이 주인인가?291)여기에서 흑백을 명백히 가려낼 수 있다면 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손님 역할을 하고 주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 역할을 한다는 그 경지일 것이다.292) 그것은 그렇고, 손님은 손님이 아니고 주인은 주인이 아니라면 이 하나의 할은 어디에 귀착되는가? 막야검을 빼어 들고 바른 법령을 남김없이 시행하여 태평성세에 어리석은 자를 해치우라.293)” 법좌에서 내려왔다.

49. 대장경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단월이 대장경을 나누어 줌에 소참 법문을 하였다. “석가노자께서는 ‘녹야원에서 시작하여 마지막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294)라고 하셨다. 말해 보라! 그렇다면 단월이 오늘 대중에게 대장경을 전독轉讀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대장경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부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부처를 비방하는 것(謗佛)이요, 여래께서 설하신 말씀이 없다고 한다면 대장경을 비방하는 것(謗經)295)이니, 누가 이를 분명히 분별해 내겠는가? 여기에서 속속들이 밝혀낼 수 있다면 석가노자의 궁극의 뜻을 알 수 있을 것이며, 그 궁극의 뜻을 알았다면 경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갖춘 것이다. 말해 보라! 경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란 무엇인가? ‘눈썹 아래 한 쌍의 밝고 푸른 혜안으로 경전을 볼 일이지, 어찌 쇠가죽으로 된 책가위가 뚫어지도록 읽어야만 하겠는가!’296)”라 하였다. 법좌에서 내려왔다.

50. 무엇을 부처라 할 것이며 무엇을 조사라 할 것인가
대중에게 말했다. “옛날 조사들의 말씀은 도대체 어떤 일을 위한 것인가?297)산승이 오늘 어쩔 수 없이 그대들에게 말해 주겠다. 세상 전체가 깨끗하게 밝디밝아 실오라기 하나도 걸림이 없거늘, 그 어떤 것이 그대들의 조건이 되고 대상이 되겠는가! 만약 바늘 끝만큼이라도 그대들을 갈라놓거나 가로막는 것이 있다면 나에게 집어 와 보라. 무엇을 부처라 하고 무엇을 조사라 할 것이며, 무엇을 산하대지와 일월성수라 할 것이며, 무엇을 사대·오온이라 할 것인가? 비록 이와 같다고는 하지만, 말해 보라! 어떤 도리에 근거하여

006_0649_a_01L
上堂一喝云一喝分賔主照用一時行
006_0649_a_02L要會介中意日午打三更只如一喝未
006_0649_a_03L發已前還有賓主也無旣分之後
006_0649_a_04L箇是賓那箇是主者裏辨緇素得出
006_0649_a_05L賓則始終賓主則始終主只如賓不是
006_0649_a_06L主不是主且一喝落在什麽處橫按
006_0649_a_07L鏌鎁全正令大平寰宇斬癡頑便下座
006_0649_a_08L檀越散藏小叅云釋迦老子道始從鹿
006_0649_a_09L野苑終至跋提河於是二中間未曾
006_0649_a_10L說一字且道只如今日檀越請衆所
006_0649_a_11L轉藏經從甚麽處得來若言佛說
006_0649_a_12L爲謗佛若言如來無所說即爲謗經
006_0649_a_13L還有人辨得出麽若向這裏覷得澈去
006_0649_a_14L便知釋迦老子落處旣知落處便具看
006_0649_a_15L經眼目且道作麽生是看經眼
006_0649_a_16L底一雙寒碧眼卷上第一五張看經那
006_0649_a_17L得透牛皮下座

006_0649_a_18L
示衆云從上來人且是箇什麽事
006_0649_a_19L僧如今抑不得已且向諸人道盡大地
006_0649_a_20L皎皎底無一絲毫有甚麽物與汝爲緣
006_0649_a_21L爲對若有針鋒許與汝爲隔爲碍
006_0649_a_22L我拈將來喚甚麽作佛喚什麽作祖
006_0649_a_23L喚甚麽作山河大地日月星宿將什麽
006_0649_a_24L爲四大五薀然雖如是且道據箇

006_0649_b_01L이렇게 말한 것일까? 부대사傅大士298)가 ‘눈앞의 참된 대도는 알아보면서도, 가느다란 터럭은 보지 못하니 대단히 신기하구나. 만법은 마음과 어떻게 구분되고 마음은 만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렇거늘 어떤 이유로 애써 되풀이해 경전의 뜻을 찾는가!’라고 한 말을 알지 못하는가. 그대들은 입에서 나오는 그대로 내뱉으며 이곳에서 함부로 말하지 마라. 대단한 선기禪機를 지닌 자라야만 할 것이다.”

51. 무심無心의 공덕
대중에게 말했다. “산승은 이전에 강남과 강북299)을 돌아다니며(遊歷)300) 선지식이 있기만 하면 법을 묻기 위해 친견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모든 선지식 중 어떤 이는 조주趙州의 무자無字,301) 어떤 이는 만법귀일萬法歸一,302) 어떤 이는 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얼굴(父母未生前面目),303) 어떤 이는 마음을 일으켜 밖의 대상을 관조하고 마음을 거두어 안을 관조하는 방법, 어떤 이는 마음을 맑게 하여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것304) 등의 가르침을 내려 주었지만 결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주장은 없었다.
마지막에는 하무산 천호암의 석옥 노화상을 찾아가 친견하고 여러 날 동안 곁에서 시봉하며 다만 무념無念이라는 진실한 종지만 배웠을 뿐인데, 여래께서 지시한 최상의 미묘한 도를 원만하게 깨달았다.305) 이 도는 유심有心으로도 구할 수 없고 무심無心으로도 얻을 수 없으며, 언어로도 이르지 못하고 침묵으로도 통할 수 없다.306) 그러므로 ‘말을 해도 잘못이고 침묵해도 잘못이니, 침묵과 말을 모두 넘어서야 길이 있다. 노승은 이 경계에 이르면 다만 입 구멍이 좁아질 뿐이다.’307)라고 한 것이다. 이 네 구절을 대하고 더 이상 마음을 쓸 여지가 없어야308) 비로소 이 본분의 소식을 들고 공부할 만하다. 부처님께서는 ‘세간과 출세간의 공덕 중 무심의 공덕만 한 것이 없으니, 그것이 가장 뛰어나 생각으로도 포착할 수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不可思議).’309)라고 하셨다.
다음 이야기를 모르는가!310) 석가노자께서 반야회상에서 문수사리보살에게 물으셨다. ‘그대는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에 들어갔는가?’ 문수보살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생각으로도 포착할 수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부사의의 경지에 들면 생각하거나 말할 수 있는 마음을 찾아볼 수 없거늘, 어떻게 부사의삼매에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처음으로 불도를 성취하겠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이 삼매에 들어가고자 했을 때를 지금 생각해 보면, 진실로 마음에 어떤 차별된 생각311)도 없이 삼매에 들어갔습니다.

006_0649_b_01L什麽道理便恁麽道不見傳大士云
006_0649_b_02L若識目前眞大道不見纎毫也大奇
006_0649_b_03L物何殊心何異何勞更用尋經義
006_0649_b_04L等莫趁口快向這裏亂道須是箇漢
006_0649_b_05L始得

006_0649_b_06L
示衆云山僧頃年遊歷江南江北
006_0649_b_07L有善知識無不叅見是諸善知識
006_0649_b_08L示於人或以趙州無字或以萬法歸
006_0649_b_09L或以父母未生前面目或以擧心外
006_0649_b_10L攝心內照或以澄心入定終無異
006_0649_b_11L末上尋叅霞霧山天湖菴石屋老和
006_0649_b_12L許多日侍立左右只學得箇無念眞
006_0649_b_13L圓悟如來無上妙道此道不可以
006_0649_b_14L有心求不可以無心得不可以言語造
006_0649_b_15L不可以寂默通故云語也錯默也錯
006_0649_b_16L語向上有路在老僧到這裏只是口門
006_0649_b_17L則此四句無用心處方始可以提撕
006_0649_b_18L此箇消息佛言世出世間功德無如
006_0649_b_19L無心功德最大而不可思議不見釋
006_0649_b_20L迦老子在般若會上問文殊師利菩薩
006_0649_b_21L汝入不思議三昧否文殊云不也
006_0649_b_22L世尊我即不思議不見有心能思議者
006_0649_b_23L云何而言入不思議三昧我初發心
006_0649_b_24L入此定卷上第二六張如今思惟實無

006_0649_c_01L마치 활쏘기를 배울 때 오랫동안 익히면 정교해져 그 뒤에는 비록 무심하게 하여도 오랫동안 익혔기 때문에 화살을 쏘기만 하면 모두 적중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또한 이와 같았으니, 처음에 부사의삼매를 배우면서 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묶어 두고 이렇게 오랫동안 익히다가 성취하자 어떤 차별된 생각도 없이 항상 삼매와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용龍은 항상 선정禪定에 들어 있으니312) 선정에 들어 있지 않은 순간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부처님이 설하신 무심無心의 공덕은 대단히 뛰어나고, 비교할 대상이 없을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심은 세간의 흙이나 나무나 기와나 돌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은 무심이 아니다. 시작할 때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나중에는 천 리의 차이로 멀어지게 되리니, 곰곰이 깊이 생각하고 또 곰곰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52. 모두 적정寂靜하므로 삼매는 아니다
대중에게 말했다. “예로부터 여러 조사들이 사람들을 가르친 방편은 갠지스강의 모래알만큼이나 무수하다. 육조 혜능 대사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당신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313)라고 하였으니, 이 최상의 심인心印이요 미묘한 법문314)을 우리 조사 문하의 선객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바람도 깃발도 움직인 것이 아니고 그대들 마음이 망령되게 움직였다는 말인가? 바람도 깃발도 치워 없애지 말고 바람과 깃발이 움직이는 바로 그 현상에서 통해야 한다는 말인가? 일에 의탁하여 도리를 드러내고 사물에 의지하여 마음을 밝힌 것인가? 만물은 본래 한가한데 사람 스스로 분주하게 분별한 것인가? 색 그대로 공이요 공 그대로 색이라는 말인가? 바람도 깃발도 움직인 것이 아니니 반드시 미묘하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러한 견해들은 조사의 뜻과 전혀 아무 관계가 없다.315) 이와 같은 견해들이 맞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조사의 뜻에 들어맞을 것인가? 승가난제僧伽難提316) 존자와 동자의 다음 문답317)을 들어 보지 못하였는가! 승가난제 존자가 바람에 요령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물었다. ‘요령이 소리를 낸 것이냐, 바람이 소리를 낸 것이냐?’ 동자가 ‘바람도 요령도 소리를 낸 것이 아니고 제 마음이 소리를 낸 것일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바람도 요령도 소리를 낸 것이 아니라면, 마음은 또한 무엇이란 말이냐?’라고 물으니, 동자는 ‘모두 적정寂靜하므로 삼매는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조사가 말했다.

006_0649_c_01L心想而入三昧如人學射久習則巧
006_0649_c_02L後雖無心以久習故箭發皆中我亦
006_0649_c_03L如是初學不思議三昧繫心一緣
006_0649_c_04L久習成就則更無心想常與定俱得
006_0649_c_05L到這介田地方始可說那加常在定
006_0649_c_06L有不定時所以佛說無心功德
006_0649_c_07L是殊勝直是無較量處今說無心
006_0649_c_08L如世間土木瓦石頑然無知之無心
006_0649_c_09L之毫氂失之千里不可不諦審思之
006_0649_c_10L諦思之

006_0649_c_11L
示衆云從上列祖爲人方便數如恒
006_0649_c_12L且初六祖能大師云不是風動
006_0649_c_13L是幡動仁者心動是無上心印法門
006_0649_c_14L我等祖門下客合作麽生會若言風幡
006_0649_c_15L不動汝心妄動邪若言不撥風幡
006_0649_c_16L風幡處通取耶托事現理付物明心耶
006_0649_c_17L萬物本閑唯人自閙耶若言色即是
006_0649_c_18L空即是色耶若言非風幡動應須
006_0649_c_19L妙會麽如是所解與祖師意有甚交
006_0649_c_20L旣不如是且祖師意作麽生合好
006_0649_c_21L不見僧伽難提尊者因風吹鈴鳴
006_0649_c_22L乃問鈴鳴邪風鳴邪童子答曰非風
006_0649_c_23L鈴鳴我心鳴耳祖曰非風鈴鳴心復
006_0649_c_24L誰乎童子曰俱寂靜故非三昧也

006_0650_a_01L‘훌륭하다, 훌륭해! 나의 도를 이을 자가 네가 아니라면 누구이겠느냐!’
또 법안 문익法眼文益 선사가 말했다. ‘옛 성인들이 갖가지 경계를 드러내었지만 그 모두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대중이여, 다만 이렇게 이해할 뿐이니, 친밀하게 전한 이 말씀보다 특별히 더 친밀한 것은 없다.’318)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한 상相이로다’,319) ‘모든 법은 본래부터 적멸하여 움직임이 없다’,320) ‘억지로 하지도 않고 아무 할 일도 없는 경지이니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는다.’321)라는 등의 말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므로 ‘모두 고요하지만 삼매는 아니다.’라고 한 것이다.”

53. 일정한 법이 없다
대중에게 말했다. “『금강경』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부를 만한 일정한 법(定法)322)이란 없으며,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법도 실로 없다.’323)라 한 말은 최상승最上乘을 추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킨 자를 위하여 설하신 말씀이다. ‘일정한 법이 없다(無有定法)’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옛사람이 말하였다. ‘이것은 바로 영묘한 본체를 드러낸 것이다. 영묘한 본체는 위로는 꼭대기가 없고 아래로는 바닥이 없으며, 가로로는 끝이 없고 가운데로는 처할 곳이 없다. 이미 처할 그 가운데의 세계도 없는데 어찌 좌우상하가 있겠는가! 공적空寂(본체)이라고 말하고자 하나 드넓은 허공과는 같지 않고, 차별상과 작용(相用)이라고 말하고자 하나 인연으로부터 일어나지도 않고, 지견知見이라고 말하고자 하나 분별과는 다르며, 완고함이라고 말하고자 하나 목석과는 다르며, 깨달음이라고 말하고자 하나 본래의 깨달음과는 같지 않고, 밝음이라고 말하고자 하나 일월 등의 밝음과는 같지 않다.’324)
세간이나 출세간에서 견줄 만한 하나의 그 무엇도 없기 때문에 ‘일정한 법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계도』에도 ‘이름도 상도 일체를 넘어섰다.’325)라고 한 것이다. 또한 조사가 말하지 않았던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며 중생도 아니다.’326) 또 ‘그대의 본성은 드넓은 허공과 같아서 끝도 없고, 모나거나 둥긂도 크거나 작음도 없으며, 상하나 장단도 없고, 푸르거나 누르거나 붉거나 흼도 없으며, 선악이나 화내고 기뻐함도 없고, 시비나 범성도 없으며, 머리와 꼬리나 뒤와 앞도 없다.’327)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알겠는가? 여기에서 현묘하고 미세한 이치를 속속들이 꿰뚫어 알 수 있는 자가 있다면

006_0650_a_01L善哉善哉繼我道者非子而誰
006_0650_a_02L法眼禪師云古聖所見諸境唯見自心
006_0650_a_03L大衆但恁麽會別無親於親處不見
006_0650_a_04L諸法從本來常自寂滅相又諸法從本
006_0650_a_05L寂滅無所動又無事無爲寂然不
006_0650_a_06L故云俱寂靜故非三昧也卷上第二
006_0650_a_07L七張

006_0650_a_08L
示衆金剛經云無有定法名阿耨多
006_0650_a_09L羅三藐三菩提實無有法如來可說者
006_0650_a_10L爲發最上乘者說也然無有定法意旨
006_0650_a_11L如何古人云此正顯靈妙之體若是
006_0650_a_12L靈妙之體上無其頂下無其底傍無
006_0650_a_13L邊際中無當處旣無當中焉有東西
006_0650_a_14L上下欲言空寂不似大虛欲言相用
006_0650_a_15L不從緣起欲言知見異於分別欲言
006_0650_a_16L頑㝵異於石木欲言其覺不同醒悟
006_0650_a_17L之初欲言其明不同日月之類世出
006_0650_a_18L世間了無一物可比故云無有定法
006_0650_a_19L法界圖云無名無相絶一切又祖不云
006_0650_a_20L不是心不是佛不是物又云汝之本
006_0650_a_21L猶若大虛無有邊畔無方圓大小
006_0650_a_22L無上下長短無靑黃赤白無善惡嗔喜
006_0650_a_23L亦無是非凡聖亦無頭尾背面汝等諸
006_0650_a_24L還知麽若人到這裏能洞澈玄微

006_0650_b_01L단계를 밟아 올라가지 않고도 단번에 뛰어 여래의 지위로 곧바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금강경』에 ‘참된 말을 하시는 분, 실다운 말을 하시는 분, 여법한 말을 하시는 분, 진실과 다르지 않은 말을 하시는 분, 속이지 않는 말을 하시는 분’328)이라 하여 다섯 가지 요점을 가지고 밝힌 것이니 대단히 은밀한 뜻이 담겨 있다. 그대들은 속히 정신을 차려야 하리라, 속히 정신을 차려야 하리라.”

54.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비할 자격이 없다
대중에게 말했다. “이 일329) 이 만약 언어의 구절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삼승십이분교330)에 어찌 언어가 없단 말인가?331)그런데 무슨 까닭에 세존께서는 복잡하게 얽힌 언어의 보금자리를 뚫고서 다만 꽃을 들어 보이셨으며,332) 달마대사는 인도로부터 와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고 성불하도록 하고 교설의 틀을 벗어나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였는가?333)
다음 문답을 모르는가! 아난이 가섭에게 물었다. ‘세존께서 금란가사334)를 전한 것 말고, 별도로 어떤 법을 전했습니까?’ 가섭이 ‘아난아!’ 하고 부르자 아난이 ‘예!’ 하고 응답했다. 가섭이 말했다. ‘문 앞에 세워둔 찰간335)을 쓰러뜨려라!’ 한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분명했고 그에 호응한 대답도 딱 들어맞았으니,336) 이것이 바로 교설의 틀을 벗어나 별도의 방법으로 전하는 교외별전敎外別傳의 소식이다. 아난은 30년 동안 부처님의 시자 노릇을 하였음에도 많이 듣고 아는 지혜만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꾸짖으며, ‘네가 천 일 동안 배운 지혜가 하루 동안 도를 배우는 것만도 못하다. 만약 도를 배우지 않는다면 물 한 방울도 소비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337)라고 말씀하셨다. 이것 또한 교외별전의 본보기이니, 그대들은 유념하도록 하라.”

55. 『금강반야바라밀경』
대중에게 말했다.338)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당사자의 눈앞에 드러나 있는 일념의 견고한 반야라는 미묘한 마음을 곧바로 가리키고 있다. 이 경전이 어찌 600권본 『반야경』으로 모두 주해하지 못하는 정도에 그치겠는가! 대장경 전체의 교설로도 (이 경전을) 주해하지 못한다.
동인도 국왕이 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 존자에게 재齋에 참석할 것을 청하여 왔을 때의 일화이다.339) 왕이 물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경전을 독송하였는데 존자께서는 어찌하여 독송하지 않습니까?’ 조사가 말했다. ‘노승은 숨을 들이쉴 때도 음계陰界 중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숨을 내쉴 때도 갖가지 대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으면서

006_0650_b_01L不歷階梯一超直入如來地故經云
006_0650_b_02L是眞語者實語者如語者不異語者
006_0650_b_03L不誑語者亦引五眼所見明之深有
006_0650_b_04L密義汝等諸人要須快着精彩快着
006_0650_b_05L精彩

006_0650_b_06L
示衆云此事若在言句上三乘十二分
006_0650_b_07L豈是無言語何故世尊葛藤窠透
006_0650_b_08L但拈花祖師西來不立文字直指人
006_0650_b_09L見性成佛敎外別傳不見阿難問
006_0650_b_10L迦葉世尊傳金襴外別傳何法迦葉
006_0650_b_11L召阿難阿難應諾迦葉云倒却門前
006_0650_b_12L刹竿着喚處分明應處眞 [22] 此是敎外別
006_0650_b_13L傳底消息阿難三十年爲佛侍者只爲
006_0650_b_14L多聞智慧故卷上第二八張如來呵嘖
006_0650_b_15L汝千日學慧不如一日學道若不
006_0650_b_16L學道滴水也難消滴水也難消 [23] 此亦
006_0650_b_17L別傳底榜㨾也汝等善思念之

006_0650_b_18L
示衆云金剛般若波羅密經者直指
006_0650_b_19L當人現前一念堅固般若妙心也此經
006_0650_b_20L豈止六百般若不可詮註直使一大藏
006_0650_b_21L亦詮註不得故東印土國王請二
006_0650_b_22L十七祖般若多羅尊者內齋王乃問
006_0650_b_23L人盡轉經爲什麽尊者不轉經祖曰
006_0650_b_24L入息不居陰界出息不渉衆緣常轉

006_0650_c_01L항상 이와 같이 경전 백천만억 권을 독송하고 있습니다.’340)
이는 학인의 한 권 경전 분량이 삼천대천세계와 같다는 말이다. 말해 보라! 제가諸家에서 갖가지로 주해하여 어떤 제목을 지었는가? 아무 상관없다. 게송으로 읊었다.

般若波羅密         반야바라밀이여,
此經非聲色         이 경전은 소리도 색도 넘어섰으니,
不可以識識         식識으로도 분별할 수 없고,
不可以智通         지혜로도 알 수 없네.
華言謾翻譯         한역에서도 말을 잘못 옮겼고,
梵語强爲名         범어로도 억지로 이름을 붙인 것이로다.
何故心亦是         무슨 까닭에 마음이라 해도 옳고,
强名佛亦是         억지로 이름 붙여 부처라 해도 옳다고 하는가!
稱乎耳           칭호일 뿐인저!
捲箔秋光冷         발 걷어 올리자 가을 달 밝고,
開窓暑氣淸         창문 열자 새벽 공기 맑구나.
若能如是會         만일 이와 같이 알아차린다면,
題目甚分明         제목의 뜻341) 매우 분명해지리라.342)

56. 무쇠와 같은 사람
대중에게 말했다. “예전에 이문화李文和343) 도위가 석문의 자조 온총慈照蘊聦344) 선사에게서 참구하여 임제의 종지를 깨닫고 게송을 읊었다.

學道須是鐵漢        도를 공부하려면 반드시 무쇠와 같은 사람이라야 하니,
着手心頭便判        손대는 것마다 마음 분명해지리라.
直趣無上菩提        곧바로 최상의 깨달음을 낚아채고,
一切是非莫管        어떤 시비에도 얽혀 들지 마라.345)

참으로 옳구나, 이 말이여! 달마가 곧바로 가리킨 요체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곧바로 가리킨 바로 이 마음(直指底心)에는 더 이상 갖가지 현묘한 이해나 뜻으로 모색할 길은 없다. 평상시 그대로 특별히 도모할 일이 없는(平常無事) 마음일 뿐, 천기天機(하늘로부터 받는 본래적인 기능)는 본래 펼쳐져 있으니 구애됨도 없으며 머무름도 없다. 천지와 덕을 나란히 하고 일월과 밝음이 합하며 털끝만큼의 모난 생각도 용납하지 않으나 드넓게 트여 모든 것에 통하니, 무심無心·무위無爲·무사無事와 하나가 된 경지이다. 자그마한 개자만큼이라도 주체와 객체를 내세운다면 시비에 가로막히고 장애가 되어 영원토록 훤히 꿰뚫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346) 이문화 도위가 비록 속세의 사람이기는 하나 완연히 장부의 뜻을 가지고 있구나. 속세의 유자도 오히려 이와 같이 말하는데 하물며 납자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그대들은 마땅히 이 말씀을 본분사로 삼아 하루 중 어느 때나 몸과 마음에 대한 속박을 모두 내던져 버리고 단지 스스로 무심하면 자연히 하늘과 땅을 뒤덮을 만한 기세로 곳곳 어디에서나 성취하리라, 곳곳 어디에서나 성취하리라.”


006_0650_c_01L如是經百千萬億卷此謂學人一卷經
006_0650_c_02L量等三千界且道諸家種種註解
006_0650_c_03L何題目且了沒交渉頌曰

006_0650_c_04L般若波羅密此經非聲色

006_0650_c_05L不可以識識不可以智通

006_0650_c_06L華言謾翻譯梵語强爲名

006_0650_c_07L何故心亦是强名佛亦是

006_0650_c_08L
稱乎耳捲箔秋光冷開窓暑氣淸
006_0650_c_09L能如是會題目甚分明

006_0650_c_10L
示衆昔李文和都尉叅石門慈照聰禪
006_0650_c_11L悟臨濟宗旨有偈曰

006_0650_c_12L學道須是鐵漢着手心頭便判

006_0650_c_13L直趣無上菩提一切是非莫管

006_0650_c_14L
誠哉是語也達磨直指之要無出此也
006_0650_c_15L只這直指底心更無許多玄解義路
006_0650_c_16L是平常無事之心天機自張無拘無執
006_0650_c_17L匪住匪着與天地齊德日月合明
006_0650_c_18L容立毫髮見刺唯蕩蕩然大通之契合
006_0650_c_19L無心無爲無事若立纎芥能所是非即
006_0650_c_20L隔㝵永不通透都尉雖是俗漢宛有丈
006_0650_c_21L夫之志俗儒尙曰如是卷上第二九張
006_0650_c_22L況衲子乎汝等當事斯語二六時中
006_0650_c_23L放捨身心但自無心自然盖天盖地
006_0650_c_24L觸處現成觸處現成

006_0651_a_01L
57. 하안거를 맺으면서
하안거를 맺으면서 대중에게 말했다. “행각하며 수행하는 이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그치고 만사에 상대되는 이견二見을 내는 생각을 그쳐야 한다. 선善과 불선不善。 세간과 출세간 등 모든 법에 대한 분별을 다 놓아 버려야 한다.347) 하물며 비구가 하안거를 맺는 것이 그 기간 동안 여기저기 돌아다녀서는 안 된다는 금족禁足의 계율만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금족뿐만 아니라 금신禁身해야 하며, 금신뿐만 아니라 금구禁口해야 하며, 금구뿐만 아니라 금심禁心해야 한다.348) 사대四大가 본래 공이고 오음五陰은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며349) 몸과 마음 등의 본성이 본래 모두 공이니, 어떻게 출입을 금하겠는가! 여기에서 바르게 가려낼 수 있다면 정해진 격에서 벗어난 뛰어난 수행자(出格高士)라 하겠지만, 가려내지 못한다면 일상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목숨을 해치는 일이 될 뿐이리라. 참!”

58. 출가란 무엇인가
대중에게 말했다. “고암高巖350) 화상은 ‘부모님께서는 그대의 육신을 길러 주시고, 스승과 벗은 그대의 뜻을 성취하도록 해 주셨으니, 굶주림과 추위에서 벗어나고, 조세와 부역의 수고로움을 면하였다. 이러한데 정진하지도 않고 도업을 성취하지도 못한다면 훗날 무슨 면목으로 부모님과 스승과 벗을 만나 볼 수 있겠는가!’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일월과 광영을 다툴 만한 말씀이라 할 만하구나.
출가란 고요함을 구하고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출가란) 배우기 어려운 것을 배우고, 행하기 어려운 것을 행하며, 참기 어려운 것을 참으며,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세속의 인연과 얽혀 있는 번거로운 일들을 놓아 버리고, 인人·아我의 분별을 단번에 지우며, 집중해 정신을 차리고, 조사의 뜻을 면밀하게 들며, 깨달음을 성취해야 할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나 또한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만을 가지고서 깨달을 날이 저절로 이르기를 기다려서는 안 되며 혼침昏沈과 산란散亂이 침범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351) 오로지 진실한 공부를 하여 진실한 경지에 이르도록 힘쓰면 홀연히 (깨달음에 이르러) 탄성이 터져 나오며 비로소 상응하는 결과가 있게 될 것이다.
선겸善謙352) 선사가 대중에게 말했다. ‘사량 분별하며 헤아리는 것도 결단코 옳지 않으며, 온갖 감각 지각으로 판단하는 것도 결단코 옳지 않으며, 일상의 행동거지를 닦는 수행만도 결단코 옳지 않으며, 문답과 언어 문자에서 궁구하는 것도 결단코 옳지 않다. 이러한 네 가지 방도마저 모두 끊어 버리고 옛사람의 공안을 들고서 부지런히 쉬지 않고 정신을 집중하여 힘쓴다면 홀연히 탄성이 터져 나오고 온몸에서는 땀이 흘러나오며 한 단계 오르게 하는 관문의 핵심을 뚜렷이 꿰뚫고

006_0651_a_01L
結夏示衆云行脚高士須要先歇諸緣
006_0651_a_02L休息萬事善與不善世與出世間一切
006_0651_a_03L諸法並皆放下而況比丘結夏謂之
006_0651_a_04L禁足非唯禁足亦要禁身非但禁身
006_0651_a_05L亦要禁口非唯禁口亦要禁心然四
006_0651_a_06L大本空五陰非有身心等性本來皆
006_0651_a_07L如何禁制若於此辨得出可謂出
006_0651_a_08L格高士若未得出擧足下足總是傷
006_0651_a_09L殘性命矣

006_0651_a_10L
示衆高巖和尙云父母養汝身師友
006_0651_a_11L成汝志無飢寒之迫無征役之勞
006_0651_a_12L此不精進不成道業他日有何面目
006_0651_a_13L見父母師友乎此語可與日月爭光
006_0651_a_14L出家非爲求淸閑取快活也難學能
006_0651_a_15L難行能行難忍能忍難捨能捨
006_0651_a_16L下世緣頓忘人我猛着精彩密提祖
006_0651_a_17L以悟爲則又不得將心待悟勿令
006_0651_a_18L昏散但用眞實工夫到眞實地忽然
006_0651_a_19L噴地一聲始有相應分

006_0651_a_20L
善謙禪師示衆云思量分別決定不是
006_0651_a_21L見聞覺知決定不是行住坐臥決定
006_0651_a_22L不是問答語言決定不是且絶此四
006_0651_a_23L箇路頭提古人公案孜孜管取忽然
006_0651_a_24L噴地一聲通身汗流透澈向上關捩

006_0651_b_01L대자유의 경지를 얻어 불조와 손을 맞잡고 함께 길을 가게 되리니, 부지런히 힘쓸진저!’353)

59. 원래부터 옛날 그대로의 자기
대중에게 말했다. “요즘 도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대부분 총명하고 영리한 지혜에 쫓겨 다니며 넓게 배우고 많이 알아 둠으로써 이야깃거리나 벌고자 하는 행태는 마치 누에가 고치를 만들어 스스로 그것에 얽히고 스스로 속박되는 것과 같다. 그들 대부분은 분별 의식(情識)에 치우쳐 헤아리며 언어의 덫을 버리지 못한다.354) 그런 이유 때문에 끝내는 흙덩이를 쫓아가는 개의 신세355)가 되어 마음의 근원을 환하게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각경』에서 ‘사유분별에 얽매인 마음으로 여래의 원만한 깨달음의 경계를 헤아리는 것은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 하지만 결코 불을 붙일 수 없는 것과 같다.’356)라고 한 경우와 다르지 않다.
그대들이 다만 굳고 강인한 의지를 일으키고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 빼어난 생각을 펼치며 걸음을 물려 자기 자신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진실하게 공부함으로써 곧바로 안락의 극치에 이른다면 비로소 조금이나마 근본과 상응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하루 어느 시각에나 어금니를 단단히 물고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서 마음마다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이 어느 찰나에도 화두를 잊지 않아야 번잡한 세속의 경계를 고요한 참선 중에 밝히고, 고요한 참선 중의 문제를 번잡한 세속의 경계에서 알아차려서 갑자기 폭발하듯 한번에 타파되는 순간357) 비로소 원래부터 옛날 그대로의 자기358)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달마대사가 인도로부터 와서 문자를 세우지 않고,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본성을 보고 성불하도록 하였으며, 교설의 틀을 벗어나 별도의 방법으로 전했다.’라는 소리를 듣고, ‘달마대사는 마음 밖에 별도로 전수하거나 깨달을 수 있는 하나의 법을 가지고 왔다.’라고 생각한 끝에 마음 밖에서 법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그는 마음이 곧 법이고 법이 곧 마음이어서 마음을 가지고 다시 마음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359) 옛사람이 읊은 다음 게송을 모르는가!

淸風樓上赴官齋       청풍루淸風樓에 공양하러 갔다가,
此日平生眼豁開       바로 이날 평생의 안목이 활짝 열렸으니,
方信普通年遠事       보통년普通年에 달마가 멀리서 건너왔으나,360)
不從葱嶺付將來       총령葱嶺361)에서 한 법도 가지고 오지 않았음을 알았네.362)

60. 자기 마음속으로부터
대중에게 말했다.
“옛사람이 읊은 게송이다.

萬法何殊心何異       만법은 마음과 어떻게 구분되고 마음은 만법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何勞更用尋經義       그렇거늘 어떤 이유로 애써 되풀이해 경전의 뜻을 찾는가?
心王本自絶多知       마음 자체는 본래 갖가지 분별이 전혀 없으니,
智者只明無學地       지혜로운 자는 다만 배움을 넘어선 자리만 밝힐 뿐이다.363)

006_0651_b_01L得大自在便可與佛祖把手共行
006_0651_b_02L勉諸

006_0651_b_03L
示衆云今時學道人多爲彌明利智所
006_0651_b_04L使廣學多聞以資談柄如蠶作繭
006_0651_b_05L縈自縛多在情識邊卜度不能忘筌
006_0651_b_06L卷上第三○張所以遂成逐塊不能洞
006_0651_b_07L明心源如圓覺經云有思惟心測度
006_0651_b_08L如來圓覺境界如取螢火燒須彌山
006_0651_b_09L終不能着汝等但興決烈之志開特達
006_0651_b_10L之懷退步就己用眞實功夫直造大
006_0651_b_11L安樂之地始有少分相應若不恁麽
006_0651_b_12L於十二時中咬定牙關竪起脊梁骨
006_0651_b_13L心心無間念念不忘閙裏底靜中明
006_0651_b_14L靜裏底閙中薦驀然噴地一下方知元
006_0651_b_15L來舊時人有人聞達磨西來不立文字
006_0651_b_16L直指人心見性成佛敎外別傳將謂
006_0651_b_17L達磨心外別有一法將來可傳可授
006_0651_b_18L取可證遂將心外覔法殊不知心即是
006_0651_b_19L法即是心不可將心更求於心
006_0651_b_20L見古人云淸風樓上赴官齋此日平生
006_0651_b_21L眼豁開方信普通年遠事不從葱嶺付
006_0651_b_22L將來

006_0651_b_23L
示衆古人云萬法何殊心何異何勞
006_0651_b_24L更用尋經義心王本自絕多知智者只

006_0651_c_01L
그러므로 여러 형제들이여! 경전의 교설을 살필 필요도 없고, 도를 수행하거나 부처님께 예배할 필요도 없으며, 육신을 불사르고 뼈를 달구는 공양을 할 필요도 없다. 설령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서 제시한 십이분교十二分敎를 다 깨달아 이해하여서 사자좌師子座364)에 걸터앉아 거침없이 흐르는 물과 같이 유창한 말솜씨를 구사하며 빽빽이 모인 사람들에게 현묘한 법을 널리 설하여 구름으로 덮어 주고 비를 내려 주는 것과 같은 그 은혜에 감득하여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 온 대지는 황금으로 변하며 돌들조차도 고개를 끄덕이며, 더하여 백천 가지 삼매를 얻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미묘한 뜻을 이해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더라도 일념으로 번뇌가 없는 업(無漏業)을 닦는 것만 못하다. 총명한 분별로는 업을 대적할 수 없고, 메마른 지혜로는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365)
그러므로 옛사람은 ‘만약 분별에 얽매인 아주 작은 생각이라도 잊지 못한다면 인천人天의 인과366)에 속박되는 잘못을 벗어나지 못하니, 그들 모두 반드시 돌아가며 다른 윤회에 떨어지게 되고 말리라.’367)라고 했던 것이다. 천경 초남千頃楚南368) 선사가 다음과 같이 한 말을 모르는가! 그는 ‘여러 불제자들이 설령 삼세 부처님들의 교설을 이해하여 병에서 물이 쏟아지듯이 유창하게 설법하고 백천 가지 삼매를 얻었더라도 일념으로 번뇌가 없는 도(無漏道)를 닦아 저 인천의 인과에 속박되는 잘못에서 벗어나는 것만 못하다.’369)라고 했다. 만일 여러 형제들이 나중에 그 언젠가 근본적인 가르침(宗敎)을 널리 드날리고자 한다면 하나하나가 모두 자기 마음속으로부터 흘러나와 하늘과 땅을 뒤덮을 정도가 되어야370) 곳곳 어디에서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61.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들은 나에게 와서 무엇을 구하려 하는 것인가? 그대들이 성불하고자 하면 일체의 어떤 불법도 배울 필요 없으니, 오직 구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無求無着)371) 도리만 배우면 될 뿐이다. 구함이 없으면 마음이 일어나지 않고 집착함이 없으면 마음이 소멸하지 않으니, 일어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경계가 바로 부처이다.372)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하여 마음 그대로가 곧 부처요 부처 그대로가 곧 마음임을 알지 못하고 부처로써 다시 또 부처를 찾으며 강서로 호남으로 또 이렇게 돌아다니는가? 여우가 의심하고 또 의심하듯이373) 남의 집을 찾아다니며 구하는가! 급급히 내달리는 모습이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것과 같으니, 언제나 그것과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374)
노승은 50년 전에 도처에서 한 마리 물소가 우리에 새끼줄로 매여 있는 것을 지켜보았는데,

006_0651_c_01L明無學地然則諸兄弟不用看經敎
006_0651_c_02L不用行道禮拜不用燒身煉骨設使解
006_0651_c_03L得三世諸佛十二分敎踞師子座
006_0651_c_04L懸河之辯對稠人廣說妙法如雲如雨
006_0651_c_05L感得天花落地地變黃金群石點頭
006_0651_c_06L及解得百千三昧無量妙義不如一念
006_0651_c_07L修無漏業且聰明不能於敵業乾慧未
006_0651_c_08L免於生死故古人云若一毫情念未忘
006_0651_c_09L未免人天因果繫縛盡須輪墜不見千
006_0651_c_10L頃楚南禪師曰諸子設使解得三世佛
006_0651_c_11L如瓶注水及得百千三昧不如一
006_0651_c_12L念修無漏道卷上第三一張免被人天
006_0651_c_13L因果繫絆若也諸兄弟他時後日
006_0651_c_14L揚宗敎一一從自己胷襟流出盖天盖
006_0651_c_15L觸處現成矣

006_0651_c_16L
示衆云汝等諸人就我求覔介什麽
006_0651_c_17L汝若欲成佛一切佛法總不用學唯學
006_0651_c_18L無求無着無求則心不生無着則心不
006_0651_c_19L不生不滅即是佛汝等爲甚麽
006_0651_c_20L知心即是佛佛即是心將佛覔佛
006_0651_c_21L西湖南又伊麽去一狐疑了一狐疑去
006_0651_c_22L却傍他門戶求覔馳走怱怱如渴鹿趁
006_0651_c_23L陽熖何時得相應去老僧五十年前
006_0651_c_24L在在處處只看箇一頭水牯牛牢捉繩

006_0652_a_01L어쩌다가 풀밭에라도 들어가면 바로 고삐를 잡아끌고 돌아와 남의 밭작물을 훼손한 적이 없다. 순하게 길들여진 지 오래되어 이제 저 노지백우露地白牛로 변화하여 항상 눈앞에 있으면서 종일토록 분명히 나타나 있으나375)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몸과 마음의 의식 작용은 토목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보고 듣는 것도 장님이나 귀머거리와 같아 보고 들은 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대들 도력道力이 아직 충실하지 못하다 해도 우리에 새끼줄로 매어 남의 밭작물을 훼손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자기의 본분사를 명백하게 밝히지 못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62. 진실한 참학參學이란
대중에게 말했다. “참학參學376)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참학이란, 문화問話377)를 배우는 것이 결코 참학은 아니며, 간화諫話378)를 배우는 것도 반드시 참학이라 할 수 없고, 대어代語379)를 배우는 것이 결코 참학은 아니며, 별어別語380)를 배우는 것도 반드시 참학이라 할 수 없고,381) 경전의 교설을 살피는 것이 결코 참학은 아니며, 논論을 짓고 소䟽를 궁구하는 것도 반드시 참학은 아니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선지식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결코 참학은 아니며,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구하는 것도 반드시 참학은 아니고, 또한 마음을 일으켜 밖의 대상을 관조하거나 마음을 맑게 하여 묵묵히 관조하는 것382) 이 결코 참학은 아니다. 만일 이와 같은 일들에 대하여 그대가 언제 어디서나 막힘없이 통하고 걸림 없이 도달한다 하더라도 참학하는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총명한 분별로는 업을 대적할 수 없고, 메마른 지혜로는 생사를 벗어나지 못한다.’383)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 진실하게 참학하는 자라면 참선은 반드시 진실한 참선이어야 하고 깨달음도 반드시 진실한 깨달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진실한 참선과 진실한 깨달음(實叅實悟)이란 무엇인가? 하루 어느 시각이나 어떤 행위 양상에서도 생사윤회에서 해탈하고자 하는 일대사一大事를 목표로 붙들고 사유 분별하는 심의식心意識을 여읜 채, 범부와 성인이라는 분별에서 벗어나 참구하고, 분별하는 마음도 없고(無心) 억지로 하는 행위도 없는(無爲) 도를 배워서 면밀히 이를 수행하고 언제나 망념 없이 항상 뚜렷하게 깨어 있으며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고 깊고 고요한 경지에 이른다면 자연히 도道와 하나가 될 것이다. 옛사람이 ‘분별하는 마음이 없어야 비로소 본래인本來人384)을 볼 수 있다.’385)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

63. 행각行脚이란
대중에게 말했다.386) “여러 형제들이여, 이제 말세에 맞닥뜨려 성현의 자취는 감춰져

006_0652_a_01L一廻落草去驀鼻曳將回不曾犯人
006_0652_a_02L苗稼調伏已久如今變作箇露地白牛
006_0652_a_03L常在面前終日露逈逈地如癡如兀
006_0652_a_04L身心如土木聞見似盲聾汝諸人
006_0652_a_05L道力未充牢捉繩頭不令犯他苗稼
006_0652_a_06L不患自己事不明白也

006_0652_a_07L
示衆云夫叅學事作麽生叅學者
006_0652_a_08L必學問話是叅學也不必諫話是叅學
006_0652_a_09L不必代語是叅學也不必學別語
006_0652_a_10L叅學也不必看經敎是叅學也不必造
006_0652_a_11L論討䟽是叅學也不必遊州獵縣是叅
006_0652_a_12L學也不必避喧求靜是叅學也亦不是
006_0652_a_13L擧心外照澄心默照是叅學也若於如
006_0652_a_14L是等事任你七通八達於叅學事
006_0652_a_15L沒交渉故云聰明不能敵業乾慧未免
006_0652_a_16L生死若也眞實叅學者叅須實叅
006_0652_a_17L須實悟始得且作麽生是實叅實悟
006_0652_a_18L於二六時中四威儀內以生死大
006_0652_a_19L事爲念離心意識卷上第三二張叅出
006_0652_a_20L凡聖路學以無心無爲綿密養之
006_0652_a_21L常無念常常不昧了無依倚到冥然
006_0652_a_22L自然合道不見古人云無心方見
006_0652_a_23L本來人

006_0652_a_24L
示衆云諸兄弟今當末運賢聖隱伏

006_0652_b_01L삿된 법만 치성하게 늘어나고387) 불법은 쇠하여 끊어지니 사람들은 게으름만 늘고 밖으로만 치달리며 구하는구나. 사방의 형제들이 여기에서 하안거를 지내는가 하면 또 저기에서 동안거를 지내고, 거기에 더하여 북으로는 오대산을 찾아가 문수보살에게 예배하고 남으로는 낙가산을 찾아가 관음보살에게 예배하며 서로는 아미산을 찾아가 보현보살에게 예배하고 동으로는 금강산을 찾아가 법기보살에게 예배한다. 이와 같이 흐르는 물처럼 바삐 돌아다니며 공연히 보시물만 축내고 헛되이 세월을 허비하면서도 수행하고 있다(行脚)고 생각한다. 이러한 무리들이 하는 짓이란 막대기를 휘둘러 달을 따려는 것388) 과 같으니 본분사와는 전혀 아무 관계도 없다. 이런 식으로 수행하러 돌아만 다닌다면 이름만 비구일 뿐 실제 비구로서의 본분은 전혀 없는 것이다.
누군가 ‘행각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 오면 그저 눈이나 껌벅이면서 입을 열지도 못한다. 그저 마음 내키는 대로 시간이나 보내고 있을 뿐이니 설령 도리를 깨달은 사람이 있다 해도 극히 적은 수일 뿐이다. 중도를 깨우치는 법도와 도리로 들어가는 문은 알지도 못하면서 많이 들어 아는 것만 헛되이 흉내 내어 익히고 아견我見만 늘리면서도 세간의 잇속에서 영원히 벗어났다고 생각한다.389) 또는 납의를 걸친 수행자로서 산으로 둘러싸이고 강을 낀 고요한 수행처(空閑)에서 몸가짐을 절제하고 때에 맞게 먹되 부드럽고 맛난 음식390)은 멀리하며 수행을 성취한 이들(上流)을 가벼이 여기니, 그 결과 마음의 번뇌는 없애지도 못하고 이치와 지혜도 밝히지 못하여 부질없이 늙도록 이룬 것도 없이 박복한 업만 짓고 만다. 훗날 염라대왕이 밥값을 계산하여 그 대가를 치르게 할 때391) 에 이르러서야 노승이 그대들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고 말하지 마라. 그대들이 들으려는 마음이 없다면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을 뿐이다.”

64. 지말枝末을 좇지 마라
대중에게 말했다. “그대들 각자 지혜의 빛을 스스로에게 돌이켜 비추어 반드시 본원本源에 도달하고자 하되 그 지말枝末은 좇지 마라. 조사께서도 ‘본원을 얻기만 하면 그 지말은 저절로 이른다.’392)라고 하지 않으셨던가! 영가 현각永嘉玄覺은 ‘곧바로 근원에 도달하는 것(생사윤회의 근원을 즉시 절단하는 것)은 부처님이 인가하신 법이니, 잎이나 따고 가지나 찾는 일은 나는 하지 않으리라.’393)라고 하였다.
그대들이 본원에 이르고자 한다면 본심本心을 깨닫기만 하면 되니, 본심이란 원래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갖가지 모든 법의 근본이요 만법의 근원이므로 ‘법성法性’이라고도 하며, 중생의 가장 큰 근본이므로 ‘여래장의 장식(如來藏藏識)’이라고도 하고,

006_0652_b_01L邪法增熾佛法衰弊人多懈怠向外
006_0652_b_02L馳求四方兄弟這邊過夏那邊經冬
006_0652_b_03L又復北去五臺禮文殊南去洛迦禮觀
006_0652_b_04L西去峨眉禮普賢東去金剛禮法起
006_0652_b_05L如是波波浪走徒消信施虛喪光陰
006_0652_b_06L以爲行脚如此之流正如掉棒打月
006_0652_b_07L於本分事有甚交涉若恁麽行脚
006_0652_b_08L字比丘都無實事問着行脚事但眼
006_0652_b_09L眨眨而開口不得只管取性過時
006_0652_b_10L有悟理之人有一箇半介不知悟中之
006_0652_b_11L入理之門枉學多聞增長我見便
006_0652_b_12L謂永出世利又有衲衣在空閑巡山傍
006_0652_b_13L節身時食去於輕軟輕忽上流
006_0652_b_14L使心漏不盡理智不明空到老而無成
006_0652_b_15L作薄福德業他日閻王老子打筭飯錢
006_0652_b_16L之時莫道老僧不與你說汝若不聽
006_0652_b_17L吾末 [24] 如之何也已矣

006_0652_b_18L
示衆云汝等諸人各自廻光返照
006_0652_b_19L須達本莫逐其末祖不云乎但得本
006_0652_b_20L其末自至故永嘉云直截根源佛所印
006_0652_b_21L摘葉尋枝我不能汝等若欲達本唯了
006_0652_b_22L本心本心元是一切世間出世間種種
006_0652_b_23L諸法之根本是萬法之源故曰法性
006_0652_b_24L亦是衆生之大本故曰如來藏藏識

006_0652_c_01L모든 부처의 본원이므로 ‘불성佛性’이라고도 하며, 보살만행菩薩萬行의 근원이므로 ‘심지心地’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범망경』 「심지법문품」에 ‘모든 부처의 본원이요 보살도를 행하는 근본이요 대중 불자들의 근원이다.’394)라고 한 것이다.395) 이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도 없고 이 마음을 떠나서는 법도 없다. 마음 그대로가 부처이니 부처로써 부처를 구하지 말며, 마음 그대로가 법이니 법으로써 법을 구하지 마라. 부처와 법이 다른 두 가지가 아니니, 승보僧寶 또한 그러하다.”

65. 공에 떨어지지 않을까 의심하지 말고, 공에 떨어지는 것 또한 싫어하지 마라
대중에게 말했다.396) “방거사龐居士는 ‘다만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공空으로 보기 바랄 뿐, 결코 없는 것을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라 여기지 마라!’397)라고 말했다. 이 두 구절을 깨닫기만 한다면 일생 동안 공부할 일을 모두 마칠 것이다. 그러므로 법은 본래 법이 아니고 마음 또한 마음이 아니기에 마음과 법이 모두 공인 것이 바로 참된 실상이다. 그러나 요즘 도를 배운다는 이들 대부분은 공에 떨어지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이와 같은 견해를 일으키는 자들은 옛 성인의 방편을 잘못 알고서 병을 약이라 집착한다. 그들은 공도 본래 공이 아니며 오로지 하나의 참된 법계일 뿐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398)
그러므로 방거사는 또한 ‘그대들은 공에 떨어지지 않을까 의심하지 말고, 공에 떨어지는 것 또한 싫어하지 마라.’399)라고 했던 것이다. 만약 이 한 구절의 뜻을 간파한다면 끝없는 악업과 무명이 바로 그 자리에서 얼음이 녹고 굽지 않은 기와가 부서지듯이 사라질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대장경의 교설 또한 이 한 구절에 대한 해설일 뿐이니, 공이란 깨달음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66. 무위無爲의 실상實相
대중에게 말했다.400) “세존께서 꽃을 들어 보이시고 가섭이 미소 지어 응답한401) 뒤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반복하여 전해지고 등불에서 등불로 끊임없이 이어진 교외별전의 일을 그대들 조사 문하의 선객禪客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그대들이 만약 이해하고자 해도 별달리 도리는 없다. 가령 지금의 대지와 허공, 밝은 태양과 어두운 구름, 모든 산하와 국토 등의 모든 유위법有爲法들이 다 함께 분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과 같이 무위無爲의 실상實相 또한 이와 같다. 공겁空劫 이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눈앞에서 원만히 밝고 환하게 비추며

006_0652_c_01L是諸佛本源故云佛性亦是菩薩萬行
006_0652_c_02L之源卷上第三三張故云心地故梵網
006_0652_c_03L心地法門品云是諸佛之本源行菩
006_0652_c_04L薩道之根本是大衆諸佛子之根源
006_0652_c_05L此心無佛離此心無法心即是佛
006_0652_c_06L可將佛求佛心即是法不可將法求法
006_0652_c_07L佛法無二僧寶亦然

006_0652_c_08L
示衆老龐公云但願空諸所有愼勿
006_0652_c_09L實諸所無只了得這兩句一生叅學事
006_0652_c_10L以故法本無法心亦無心心法兩
006_0652_c_11L是眞實相而今學道之人多怕落
006_0652_c_12L作如是見者錯認古聖方便執病
006_0652_c_13L爲藥殊不知空本無空唯一眞法界耳
006_0652_c_14L故龐公亦云汝勿嫌落空落空亦不惡
006_0652_c_15L若覷破這一句字 [25] 惡業無明當下
006_0652_c_16L冰消瓦解如來所說一大藏敎亦註解
006_0652_c_17L這一句空是覺體故也

006_0652_c_18L
示衆云自世尊拈花迦葉微咲迄至于
006_0652_c_19L轉轉相承燈燈相繼敎外別傳底
006_0652_c_20L汝等祖門下客且作麽生會取
006_0652_c_21L若要會別無道理只如如今大地虛空
006_0652_c_22L日明雲暗一切山河國土諸有爲法
006_0652_c_23L皆悉明現乃至無爲實相亦復如是
006_0652_c_24L自空劫已前直至如今合下圓明朗照

006_0653_a_01L시방 전체를 막힘없이 뚫어 안도 없고 밖도 없으며,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이어지며 단절도 없고 소멸도 없이 마주하고 분명히 나타날 뿐 아니라 약간의 차별도 없으니, 다시 누구에게 전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영산靈山402)에서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법을 전한 본보기이다.
여러 형제들이여! 한순간에 이해해야 한다. 시간을 헛되게 보내지 말고, 신도의 보시를 헛되게 낭비하지 마라! 그대들이 만약 위로 네 가지 큰 은혜403)에 보답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도를 보는 안목을 명백히 하여 함께 해탈문으로 들어가야 한다.”

67. 세존께서 꽃을 들어 보이신 뜻
대중에게 말했다. “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보이시자 인천人天의 백만억 대중이 모두 어리둥절했지만 오로지 대가섭만은 어김없이 알아듣고 파안미소를 지었다.404)
말해 보라! 가섭이 어김없이 알아들은 사안은 무엇일까? ‘부처님께서는 말씀에 집착하지 않고 말씀하셨고, 가섭은 듣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들었다.’405)라거나 ‘부처님에게는 은밀한 말씀이 있었고, 가섭은 그것을 덮어서 가리지 않았다.’406)라고 한 말과 같다고 생각하지 마라. 세존께서 또한 ‘나에게 정법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으니 그것을 마하가섭에게 전한다.’407)라고 하신 말씀은 무슨 뜻일까?
비록 그렇다고는 하지만 나는 ‘영산에서 부처님은 달에 대하여 말씀하셨지만, 조계 혜능慧能은 달을 직접 가리켰다.’408)라고 말하리라.”

68.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노라
대중에게 말했다. “옛사람은 종지를 깨우친 다음, 깊은 산속 으슥한 계곡에서 바위 동굴에 은거하며 하늘만 응시하고 인간 세상의 일은 한꺼번에 잊은 채 품은 생각을 그대로 펼치면서도 번뇌 망상을 완전히 그쳤다.409)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 밭이 되거나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거나 상관하지 않았으니, 그해에 윤달이 있는지도 몰랐고 그 달이 큰달인지 작은달인지도 몰랐다. 사계절도 구별하지 못했거늘 여덟 절기410)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다만 사방의 산들이 연출하는 푸른 봄빛과 시든 가을빛을 바라보며,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고, 추울 때는 불을 쪼이고 더우면 서늘한 곳으로 갔다. 오늘은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마음 가는 대로 맡겨 두고, 내일은 마음 가는 대로 맡겨 두고서 자유자재로 움직였던 것이다.411) 온갖 볼품없고 형편없는 꼴을 하고서 이렇게 세월을 보냈으니, 이러한 경계가 되어야 비로소 도를 품었다(道懷)고 하며,412) 또한 그것은 모든 기교를 잊는 근본이기도 한 것이다.
나찬 화상嬾瓚和尙413)의 말을 모르는가!

悠悠世事 不如山丘    복잡하게 얽힌 세상일이여! 산 풍경만 못하구나.
靑松蔽日 碧澗長流    푸른 소나무가 해를 가리고, 맑은 계곡물은 아득히 흐른다.

006_0653_a_01L洞澈十方無內無外亘古亘今無斷
006_0653_a_02L無滅對現分明並無絲毫差別更付
006_0653_a_03L阿誰此是靈山付囑榜㨾諸兄弟
006_0653_a_04L時會取好莫虛喪光陰莫虛消信施
006_0653_a_05L汝若要上報四重恩應須道眼明白
006_0653_a_06L入解脫門始得

006_0653_a_07L
示衆云世尊於靈山會上拈花人天百
006_0653_a_08L萬億大衆悉皆罔措唯大迦葉親聞
006_0653_a_09L顔微咲且道卷上第三四張迦葉親聞
006_0653_a_10L底事作麽生不可道如來不說說
006_0653_a_11L葉不聞聞且如如來有密語迦葉不覆
006_0653_a_12L世尊亦云吾有正法眼藏付囑摩
006_0653_a_13L訶迦葉又作麽生然雖如是我道靈
006_0653_a_14L山話月曹溪指月

006_0653_a_15L
示衆云古人得意之後向深山幽谷
006_0653_a_16L高棲巗上目視雲漢頓忘人世放懷
006_0653_a_17L履踐大休歇去一任海變桑田從他兎
006_0653_a_18L走烏飛不知年之餘閏不知月之大小
006_0653_a_19L四時不分八節那知但見四山靑靑黃
006_0653_a_20L飢來喫食困來眠寒時向火熱乘
006_0653_a_21L今日騰騰任運明日任運騰騰
006_0653_a_22L醜千拙且恁過時如斯之境方稱道
006_0653_a_23L亦乃忘機之本不見嬾瓉和尙云
006_0653_a_24L悠悠世事不如山丘靑松蔽日碧澗

006_0653_b_01L山雲當幕 夜月爲燈    산 구름을 장막으로 삼고, 밤에 뜬 달을 등불로 삼으며,
臥藤蘿下 塊石枕頭    등나무 아래 누워 돌덩이를 베개로 삼는다.
不朝天子 豈羨王侯    천자에게도 굽히지 않으니, 어찌 왕과 제후를 부러워하랴!
生死無慮 更復何憂    삶과 죽음에 근심이 없거늘, 다시 무엇을 걱정하랴!
水月無容 我常只寧    물에 비친 달그림자는 형체가 없으나, 나는 늘 편안할 뿐이라네.
飢來喫食 困來打眠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노라.
愚人咲我 智乃知焉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그 뜻 알리라.
不是癡頑 法體如然    어리석고 무딘 것이 아니라 법의 본체가 그러한 것이라네.
兀然無事坐 春來草自靑  꼼짝하지 않고 일없이 앉았어도, 봄이 오면 초목은 저절로 푸르리라.414)

69. 실천 수행의 가치
대중에게 말했다.415) “옛날의 노숙은 마음의 눈이 밝지 못하면 바른 지견을 가진 사람에게 화급히 나아가 바로잡으셨다. 하루아침에 마음의 눈이 환히 밝아지고 나면 이 본분사(此事)를 잘 간직하여 잃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경계416)에 이르러 마치 벽촌의 촌사람이 우직하고 어리석은 듯하였다. 이름도 잊고 속세와의 인연도 끊은 채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서 이삼십 년 동안 살림살이417)를 갖춰 쌓으며 심식心識을 갈고닦아 가느다란 터럭만 한 지견이나 허물 그리고 도를 해치는 일체의 불선업不善業을 깨끗이 하였다. 고요한 곳에서 수행하며 마음과 몸을 담박하게 하여 견고한 법신을 성취한 후에는 어떤 대상이나 인연을 만나든 또는 색이 되었건 소리가 되었건 일체의 기거동작에서 하나하나가 모두 막힘없이 자신에게로 귀결되도록 하여 예로부터 투철하게 깨달은 이들이 밟아 간 길과 다름도 없고 차별도 없었다.”

70. 온종일 말하였지만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대중에게 말했다.418) “여러분이여, 세존께서는 79년간 세상에 머무시며 300여 회나 교법을 설하셨다. 남김없이 모두 설하셨는데, 어째서 ‘녹야원에서부터 발제하에 이르기까지의 그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고 하셨는가? 혀에 뼈가 없는 듯이 자유자재하게 설하셨다는 말인가? 말씀에 심오한 뜻이 메아리처럼 여운이 있었다는 말인가? 말하고 있는 때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요, 침묵하고 있는 때가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인가?419)
이러한 도리는 아니다. 운문이 ‘하루 종일 옷을 입고 있고 밥을 먹어도 한 톨 밥알도 씹지 않았고 한 오라기 실도 걸치지 않았으며,

006_0653_b_01L長流山雲當幕夜月爲燈臥藤蘿下
006_0653_b_02L塊石枕頭不朝天子豈羨王侯生死
006_0653_b_03L無慮更復何憂水月無容 [26] 我常只寧
006_0653_b_04L飢來喫食困來打眠愚人咲我智乃
006_0653_b_05L知焉不是癡頑法體如然兀然無事
006_0653_b_06L春來草自靑

006_0653_b_07L
示衆云上古老宿心眼未明火急就
006_0653_b_08L正知見人而正之一旦心眼洞明保任
006_0653_b_09L此事百不知百不會如三家村裏人
006_0653_b_10L頑然癡兀忘名棄世晦跡山林或二十
006_0653_b_11L三十年辦累生計揩磨心識使及之淨
006_0653_b_12L盡纎毫知見過患及害道一切諸不善
006_0653_b_13L怗怗地修行枯淡此心此身成就
006_0653_b_14L堅固法身然後逄境遇緣若色若聲
006_0653_b_15L一切施爲動作一一須敎宛轉歸自己
006_0653_b_16L與從上透澈之士履踐無二無別卷上
006_0653_b_17L第三五張

006_0653_b_18L
示衆云諸仁者世尊住世七十九年
006_0653_b_19L敎談三百餘會說也說盡爲什麽道
006_0653_b_20L始從鹿野苑終至跋提河於是二中間
006_0653_b_21L未曾說一字耶莫是舌頭無骨耶言中
006_0653_b_22L有響耶說時默默時說耶不是這介
006_0653_b_23L道理不見雲門云終日着衣喫飯
006_0653_b_24L曾咬破一粒米未曾掛着一縷絲終日

006_0653_c_01L온종일 말하였지만 한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420)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 그대들은 알겠는가? 깨닫지 못한 자들은 방으로 돌아가 참구하라! 방으로 돌아가 참구하라!”

71. 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
대중에게 말했다. “마음은 자상自相421)이 없어 대상 경계에 의탁하여야 발생한다. 경계의 본성도 본래 공空이기에 마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난다. 인식 기관(根)과 인식 대상(塵)이 화합한 결과로 있는 듯이 보이지만 마음에 따라 나타난 것일 뿐이다. 안팎을 헤아려 볼 때 무엇이 본체인가?422)안의 마음과 밖의 경계는 다만 하나일 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결코 두 토막423)으로 나누어 보지 마라.424)
조사의 다음 말을 모르는가? ‘대상 경계에는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구별이 없으니,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구별은 마음에서 일어난다네. 마음에서 억지로 차별된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망령된 분별(妄情)이 어디서 일어나겠는가? 망령된 분별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진심眞心 그대로 두루 알게 될 것이다.’425)
그대들은 다음 문답을 기억해 두라. 위산潙山이 앙산仰山에게 물었다.426) ‘미묘하고 청정하며 밝은 마음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산하와 대지, 해와 달, 그리고 별들입니다.’ ‘그대는 다만 차별된 현상(事)만 터득했구나.’ ‘화상께서는 조금 전에 무엇에 대하여 물으셨습니까?’ ‘미묘하고 청정하며 밝은 마음이었지.’ ‘그것을 현상이라 불러도 되겠습니까?’ ‘맞다. 맞아!’ ”

조사선祖師禪427)
대혜 종고大慧宗杲 화상의 『종문무고宗門武庫』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428) “원오 극근圜悟克勤 화상이 오조 법연五祖法演 화상을 시봉할 때의 일이다. 때마침 진陳 제형提刑429)이 사직하고 촉蜀으로 돌아오다가 절을 지나는 길에 도를 물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조가 물었다. ‘제형 당신은 소염小艶430)의 시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그중 두 구절이 선지禪旨와 자못 가깝습니다. 곧 ≺자주 소옥이를 부르지만 별다른 뜻은 없고, 다만 담 밖에 있는 낭군에게 목소리를 알리고자 할 뿐이라네.≻431)라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제형이 ‘예, 예.’ 하고 응답하자 오조가 말했다. ‘그래도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원오가 ‘화상께서 제기한 소염의 시를 듣고 제형이 이해했습니까?’라고 묻자 오조는 ‘그는 다만 목소리의 뜻을 알았을 뿐이다.’432)라고 하였다. ‘본래의 글에 ≺다만 담 밖에 있는 낭군에게 목소리를 알리고자 할 뿐이다.≻라고 되어 있고,

006_0653_c_01L說話未曾說着一字汝等還知麽
006_0653_c_02L悟者叅堂去叅堂去

006_0653_c_03L
示衆云夫心無自相託境方生境性
006_0653_c_04L本空由心故現根塵和合似有緣心
006_0653_c_05L內外推之何是其體當知內心外境
006_0653_c_06L只是一箇切忌分作兩橛看不見祖師
006_0653_c_07L境緣無好醜好醜起於心心若不
006_0653_c_08L强名妄情從何起妄情旣不起眞心
006_0653_c_09L任徧知汝等記得潙山問仰山妙淨
006_0653_c_10L明心子作麽生會仰山云山河大地
006_0653_c_11L日月星辰潙山云汝只得其事仰山
006_0653_c_12L和尙適來問什麽潙山云妙淨明
006_0653_c_13L仰山云喚作事得麽潙山云如是
006_0653_c_14L如是

006_0653_c_15L

006_0653_c_16L祖師禪

006_0653_c_17L
大慧和尙宗門武庫云圓悟勤和尙
006_0653_c_18L立五祖演和尙偶陳提刑解印還蜀
006_0653_c_19L山中問道因語話次祖問曰提刑曾
006_0653_c_20L讀少炎 [27] 詩否有兩句頗近禪旨曰頻呼
006_0653_c_21L小玉非他事只要丹郞認得聲提刑應
006_0653_c_22L諾諾祖曰且字 [28] 細看圓悟問曰聞和尙
006_0653_c_23L擧小炎詩提刑會麽卷上第三六張
006_0653_c_24L他只認得聲去圓悟曰本文曰只要

006_0654_a_01L그도 목소리의 뜻을 알았다고 했는데 어째서 틀렸다고 하십니까?’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인가? 뜰 앞의 잣나무!433) 니聻!’434) 이에 원오가 홀연히 크게 깨닫고 불현듯 밖으로 나갔다가 닭이 난간에 날아 올라가 날개를 퍼덕이며 우는 소리를 듣고 다시 스스로 생각했다. ‘이것이 어찌 소리가 아니란 말인가?’ 마침내 향을 소매에 넣고 방장으로 들어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전했다. 오조는 ‘불조佛祖의 일대사一大事는 보잘것없는 근기와 열등한 지혜로는 이를 수 없다. 내가 너의 기쁨을 도왔구나.’라 하고, 다시 절 안의 노스님들에게 ‘저의 시자가 조사선을 참구하여 터득했습니다.’라고 두루 알렸다.”
또한435) 향엄 지한香嚴智閑이 “지난해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요, 올해의 가난이 진실로 가난이라네. 지난해에는 송곳 꽂을 땅이라도 있었건만, 올해는 송곳조차 없구나.”라고 하자 앙산이 말했다. “여래선如來禪은 사형이 이해했다고 인정하겠다. 그러나 조사선祖師禪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라고 비판했다. 향엄이 다시 “나에게 하나의 기틀이 있으니, 눈을 깜박거려 그것을 보이노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특별히 그를 사미沙彌436)라고 부르리라.”라는 게송 한 수를 들려주자 앙산이 말했다. “기쁘다! 사형이 조사선을 이해했구나.”
또한 보지공寶誌公437)은 “대도大道는 항상 눈앞에 있다. 비록 눈앞에 있지만 보기 어렵다. 만약 도의 참된 본체를 깨닫고자 한다면, 색과 소리와 언어를 떠나지 마라.”438)라고 했다. 또한 선덕先德은 “색과 소리도 떠나지 않은 채 부처님의 신통력을 보라.”439)라고 했고, 또한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하는가? 이 말소리가 바로 그것이다.”440)라고 했다. 이러한 언구들을 살펴보면 곧 그것이 선지禪旨이다. 조사선은 색과 소리와 언어를 떠나지 않는다. 뜰 앞의 잣나무,441) 삼 세 근,442) 마른 똥막대기,443) 신상神像 앞의 술 받침대!444) 본분을 깨우친 종사들이 본분에 근거하여 답한 이들 화두는 색과 소리와 언어를 갖추었으니, 이것이 바로 조사선이다. 그러므로 “말을 하려거든 한 구절에 세 구절을 갖추어야 한다.”445)라고 하는 것이다. 가령 어떤 학인이 도오道吾446) 선사에게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묻자 “강남의 이삼월 풍경을 떠올려 보자니, 자고새 우는 곳에 온갖 꽃이 향기로웠다네.”447)라고 대답한 것과 같다.

006_0654_a_01L丹郞認得聲他旣認得聲爲什麽却不
006_0654_a_02L祖曰如何是祖師西來意庭前柏樹
006_0654_a_03L圓悟忽然大悟遽出去見雞飛
006_0654_a_04L上欄干鼓翼而鳴復自謂曰此豈不
006_0654_a_05L是聲遂袖香入室通所悟祖曰佛祖大
006_0654_a_06L非小根劣智所能造詣吾助汝喜
006_0654_a_07L復徧請山中耆舊曰我侍者叅得祖師
006_0654_a_08L禪也

006_0654_a_09L
又香嚴云去年貧未是貧今年貧始是
006_0654_a_10L去年有卓錐之地今年錐也無
006_0654_a_11L山云如來禪即許師兄會祖師禪
006_0654_a_12L夢見在嚴云我有一機瞬目示伊
006_0654_a_13L人不會別喚沙彌仰山云且喜師兄
006_0654_a_14L會祖師禪

006_0654_a_15L
又寶誌公云大道常在目前雖在目前
006_0654_a_16L難覩若欲悟道眞體不離色聲言語

006_0654_a_17L
又先德云亦不離色聲見佛神通力

006_0654_a_18L
又云欲知佛去處只這語聲是此等言
006_0654_a_19L看之則禪旨祖師禪不離色聲言語
006_0654_a_20L庭前柏樹子麻三斤乾屎橛神前酒
006_0654_a_21L臺盤本分宗師本分答話具色聲言
006_0654_a_22L正是祖師禪也故云凡欲下語一句
006_0654_a_23L具三句如僧問道吾如何是祖師西來
006_0654_a_24L答曰遙憶江南三二月鷓鴣啼處百

006_0654_b_01L또한 어떤 학인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나른한 봄날448) 강산은 아름답고, 봄바람에 화초는 향기롭다.”449)라고 대답했고, 또 “산에 꽃이 피니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계곡물은 쪽빛보다 푸르다.”450)라고 했다. 이러한 언구들 모두 조사선에서 색과 소리와 언어를 갖춘 예이다.
종사들 중 어떤 이들은 언어(대화 문답)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치는데, 그 예는 다음과 같다. 조주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아침은 먹었느냐?” “먹었습니다.” “발우나 씻어라!” 이 말에 그 학인은 깨달았다.451) 또한 운문 문언雲門文偃이 동산 수초洞山守初에게 물었다. “요즘 어디 있다가 왔는가?” “강서의 사도査渡에서 왔습니다.” “하안거는 어디서 보냈는가?” “호남의 보자사普慈寺에 있었습니다.” “언제 그곳을 떠났는가?” “8월 25일입니다.” “이 밥자루야!452) 강서로 호남으로 그렇게 돌아다녔단 말이냐!” 동산이 그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달았다.453)
어떤 이들은 말과 소리(대화 문답과 자연의 소리)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친다. 현사 사비玄沙師備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느냐?” “들립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라!”454) 또한 경청 도부鏡淸道怤가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문 밖에 무슨 소리가 나느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입니다.” “중생이 전도되어 자신을 잃어버리고 밖의 대상을 좇는구나.”455)
어떤 이들은 자연의 소리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친다. 까마귀가 울고 까치가 지저귀며,456) 나귀가 울고 개가 짖는 것457) 모두 여래께서 큰 법륜을 굴리시는 소리이다. 또한 제비는 실상實相을 깊이 이야기하고,458) 꾀꼬리는 반야般若를 잘 설한다. 또한 “두견459)이 하늘까지 닿도록 울고도, 피를 토하며 밤새도록 또 우는구나. 원통문圓通門460)이 활짝 열렸거늘, 무슨 까닭에 하늘과 땅만큼 떨어졌을까?”461)라고 한다.
어떤 이들은 모습과 소리(色聲)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친다. 건추犍槌를 잡거나 불자拂子를 세우고, 손가락을 퉁기거나 눈썹을 찡그리며, 방棒을 휘두르거나 할喝을 내지르는 등 이런 갖가지 작용이 모두 조사선이다. 그러므로 “소리를 들을 때가 깨달을 순간이며, 색을 볼 때가 깨달을 순간이다.”462)라고 하는 것이다. 영운 지근靈雲志勤이 색을 보고 깨달은 것463) 과 향엄 지한이 소리를 듣고 깨달은 것,464) 그리고 운문 문언이 다리를 다치고 아픔을 참지 못하다가 깨달은 것465) 과 현사 사비가 발가락을 다쳐 통증을 느끼다가 깨달은 것466) 등의 기연에 대하여 이름을 붙이자면 결국 하나(조사선)인 것이다.


006_0654_b_01L花香又僧問如何是祖師西來意答云
006_0654_b_02L遅日江山麗春風花草香又云山花開
006_0654_b_03L似錦澗水碧於藍此等言句皆是祖
006_0654_b_04L師禪具色聲言語宗師家或以言語
006_0654_b_05L示法示人者如趙州問僧喫粥了未
006_0654_b_06L僧云喫粥了州云洗鉢㿻去其僧悟去
006_0654_b_07L又雲門問洞山卷上第三七張近離什
006_0654_b_08L麽處山云査渡又問夏在什麽處
006_0654_b_09L湖南普慈又問幾時離彼中山云
006_0654_b_10L月二十五門云飯袋子江西湖南又恁
006_0654_b_11L麽去也山於言下大悟

006_0654_b_12L
或以言聲示法示人者玄沙問僧還聞
006_0654_b_13L偃溪水聲麽僧云沙云從意裏入
006_0654_b_14L又鏡淸問僧門外是什麽聲僧云雨滴
006_0654_b_15L師云衆生顚倒迷己逐物

006_0654_b_16L
或以聲示法示人者鴉鳴鵲噪驢鳴犬
006_0654_b_17L皆是如來轉大法輪又鷰子深談實
006_0654_b_18L黃鶯善說般若又蜀魄連霄呌
006_0654_b_19L流終夜啼圓通門大啓何事隔雲泥

006_0654_b_20L
或以色聲示法示人者拈搥竪拂彈指
006_0654_b_21L揚眉行棒下喝種種作用皆是祖師
006_0654_b_22L故云聞聲時證時見色時證時
006_0654_b_23L靈雲從色悟入香嚴從聲悟入乃至雲
006_0654_b_24L門痛脚玄沙痛足良遂稱名一也

006_0654_c_01L
선과 교를 아울러 논함(禪敎通論)
우리의 본사本師이신 석가모니불께서 마지막에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백만억 대중이 모두 어찌할 줄 몰라 하였으나 오로지 대가섭만은 활짝 웃어 보였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정법을 꿰뚫어 보는 눈과 열반의 미묘한 마음이 있으니 그것을 대가섭에게 당부하여 맡기노라.”467) 또한 “(부처님께서) 교敎의 바닷물은 아난의 입에 쏟아 부었고, 선禪의 등불은 가섭의 마음에 붙였다.”468)라고 했다. 먼저 가섭에게 전하여 초조初祖로 삼았고, 이로부터 인도의 28대 조사와 중국의 6대 조사가 대대로 전승하여 등불에서 등불로 이어졌으니 이들 모두 석가여래의 제자인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오로지 본사의 말씀으로써 대중에게 가르침을 주어 그 말씀을 근거로 도道를 증명하고 법을 드러내어 종지를 밝힐 뿐 밖으로 내달리면서 구하지 않는다. 부처님의 뜻을 직접 전하고 부처님의 종자를 이어서 융성하게 하면 조사의 지위로 들어가더라도 교를 기준으로 삼을 것이니, 어찌 선과 교의 차별이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님의 말씀은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정해진 문이 없는 것469) 을 법문으로 삼으니’470)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말씀은 결코 서로 어긋나지 않으니, ‘한 부처가 다른 부처에게 직접 건네준 것도 이 종지를 건네준 것이며, 한 조사가 다른 조사에게 전해 준 것도 이 마음을 전해 준 것이다.’471) 각자 다른 이름과 구절을 따르기에 동일하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선과 교는 명칭만 다를 뿐 본질은 같으므로 본래 평등하다고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472)은 근기에 적절하게 교를 설하므로 권權과 실實 그리고 돈頓과 점漸의 차별을 나누고, 궁극의 경지에 통달한 사람473)은 이치와 하나가 되어 말에 대한 집착을 잊으니, 어찌 그에게 부처와 조사 그리고 선과 교의 차이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입에 올리면 교라 하고, 마음에 전하면 선이라 한다.”474)라고 하는 것이다. 그 근원에 통달한 자에게는 선도 없고 교도 없지만, 그 갈래를 나누는 자는 선이나 교 중 어느 한편에 집착한다. 몰라서 어두우면 양편 모두 잃고, 어느 한편에 집착하면 양편이 다 상한다. 선과 교를 융합하여 서로 통하게 하면 통하지 못할 것이 없고, 서로 소통시켜 바로잡으면 바로잡지 못할 것이 없으니, 바르거나 바르지 못한 차이는 오로지 사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다만 한 찰나에 기틀을 돌리기만 한다면 자연히 만법이 모두 사라져

006_0654_c_01L禪敎通論

006_0654_c_02L
我本師釋迦牟尼佛於末後靈山會上
006_0654_c_03L拈花示衆百萬億大衆悉皆罔措
006_0654_c_04L大迦葉破顔微咲世尊云吾有正法
006_0654_c_05L眼藏涅槃妙心付囑摩訶大迦葉
006_0654_c_06L敎海瀉阿難之口禪燈點迦葉之心
006_0654_c_07L首傳迦葉以爲初祖以此西天四七
006_0654_c_08L震二三轉轉相承燈燈相繼皆是釋
006_0654_c_09L迦如來弟子迄至于今唯以本師之語
006_0654_c_10L訓示徒衆因言證道見法明宗不外
006_0654_c_11L馳求親傳佛意紹隆佛種即入祖位
006_0654_c_12L以敎爲指南豈有禪敎之別然佛語心
006_0654_c_13L爲宗無門爲法門則敎是佛語禪是
006_0654_c_14L佛意然諸佛心口必不相違則佛佛手
006_0654_c_15L受斯旨祖祖相傳傳此心各隨名句
006_0654_c_16L卷上第三八張似有差殊當知禪敎名
006_0654_c_17L異體同本來平等平等 [29] 何故至人隨機
006_0654_c_18L說敎則分權實頓漸之殊達士契理忘
006_0654_c_19L則豈有佛祖禪敎之異故云登之於
006_0654_c_20L謂之敎傳之於心謂之禪達其源
006_0654_c_21L無禪無敎列其派者禪敎各執
006_0654_c_22L之則皆失執之則兩傷融而通之則無
006_0654_c_23L不通決而正之則無不正正邪唯在人
006_0654_c_24L但得一念廻機自然萬法俱泯矣

006_0655_a_01L선과 교의 차별도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사문佛事門475) 중에서 방편을 베푸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납승 문하의 입장에 따른다면, 본래 부처도 없고 중생도 없으며 명名도 없고 상相도 없으니 아무 걸림도 없이 드넓게 펼쳐져 생각과 말의 한계를 훌쩍 넘어설 것이거늘, 무엇을 가지고 선이라 할 것이며 무엇을 가지고 교라 할 것인가?

운문 삼구에 대한 풀이(雲門三句釋)476)
하늘과 땅 전체를 감싸서 덮는 구절:하늘과 땅 그 어디에나 있고, 이理와 사事가 원만하게 융합한다.
번뇌 망상의 흐름을 끊어 없애는 구절:티끌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조짐과 자취가 전혀 없다.
물결의 흐름을 따르고 쫓아가는 구절:자신의 본성을 고수하지 않고, 상황과 조건(緣)에 따라 성립한다.

대양 삼구에 대한 풀이(大陽三句釋)477)
평상시에 어떤 생성도 없는 구절:평상심이 도이니,478) 생성도 없고 소멸도 없다.
미묘하고 깊고 사사로움이 없는 구절:미묘한 법은 본래 사사롭게 치우침이 없으나, 그것이 정황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感應)은 생각하여 알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본체가 끝이 없이 밝은 구절:신령하고 밝은 본체는 텅 비고 고요하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용은 끝이 없다.

나옹 화상의 삼구와 삼전어에 대한 풀이(懶翁和尙三句與三轉語釋)479)
삼구
입문구:불문으로 향할 때(向時) 좌측에도 떨어지지 않고 우측으로도 기울지 않으며 정면을 향해 들어간다.
당문구:불법을 받들어 행할 때(奉時) 기틀(機)과 지혜(智)가 상응하여 겹겹의 심오한 이치로 깊이 들어간다.
문리구:불법을 깨닫고 그것을 활용할 때(共功時) 마땅히 주인 중의 주인을 깨달아 오랫동안 문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480)

삼전어 1
작은 산들의 기세는 어째서 큰 산 가에서 그치는가?:최상의 법왕法王은 가장 높고 두드러지니, 마치 뭇 봉우리의 기세가 큰 산 가에서 그치는 것과 같다.
가는 물줄기들은 어째서 큰 물을 이루는가?:원만한 깨달음의 청정한 성품은 중생의 다양한 종류에 따라 차별되게 응하니, 마치 여러 물줄기가 바다에 이르러 큰 물을 이루는 것과 같다.

006_0655_a_01L了無禪敎之別然此是佛事門中施設
006_0655_a_02L若據衲僧門下本來無佛無衆生無名
006_0655_a_03L無相蕩蕩焉恢恢焉逈出思議之表
006_0655_a_04L喚什麽作禪敎也

006_0655_a_05L

006_0655_a_06L雲門三句釋

006_0655_a_07L
凾盖乾坤句普天普地理事圓融

006_0655_a_08L絕斷衆流句不受一塵了無朕迹

006_0655_a_09L隨波逐浪句不守自性隨緣成立

006_0655_a_10L

006_0655_a_11L大陽三句釋

006_0655_a_12L
平常無生句平常心是道無生亦無滅

006_0655_a_13L妙玄無私句妙法本無私感應難思議

006_0655_a_14L躰明無盡句靈明體空寂恒沙用無盡

006_0655_a_15L

006_0655_a_16L懶翁和尙三句與三轉語釋三句

006_0655_a_17L
入門句向時不落左不落右正面而入
006_0655_a_18L當門句奉時機智相應深入重玄

006_0655_a_19L
門裏句共功時當證主中主長年不出
006_0655_a_20L

006_0655_a_21L

006_0655_a_22L三轉語卷上第三九張

006_0655_a_23L
山何岳邊止無上法王最高勝如羣峰
006_0655_a_24L勢岳邊止

006_0655_a_25L
水何到成渠圓覺淨性隨類應知濕流
006_0655_a_26L海到成渠

006_0655_b_01L
밥은 어째서 흰쌀로 만들어지는가?:심성은 오염되지 않고 본래 원만히 이루어져 있으니, 마치 흰밥이 원래 흰쌀에서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삼전어 2
법왕의 법령481)은 가장 높고 두드러지니, 마치 온갖 봉우리의 기세가 큰 산 가에 이르러 그치는 것과 같다.
지혜로운 임금의 은혜는 바다와 같이 드넓으니, 땅 밑을 흐르던 지류가 바다에 이르러 큰 물을 이루는 것과 같다.
금세에 이르러 희황羲皇482)의 치세를 만나니, 구로俱盧483)보다 많은 밥을 흰쌀로 만드노라.

나도 모르는 결에 붓을 들어 쓸데없는 몇 마디 말을 암자의 몇몇 형제에게 제시하다(因筆不覺葛藤如許示同菴二三兄弟)
여러 형제들이여, 이제 이곳에 와서 고요함을 함께하는 인연으로 만났으니 기필코 등한히 하지 말고 각자 힘써 노력해야 할 것이다. 물들고 무젖은 망령된 생각(妄情)을 완전히 쓸어 없애고 기꺼이 인내하며 참되고 바른 공부를 해야 한다. 공자는 “어느 누가 문을 거치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 도를 따르는 자가 없는 것일까!”484)라고 하였다. 속세의 유자도 오히려 이와 같이 말하는데 하물며 납자는 어떠해야 하겠는가!485) 옛사람들은 이 일대사一大事를 위해 잠도 자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목숨을 바쳐 오래도록 부지런히 힘쓴 끝에 비로소 성취하였던 것이다. 세존께서는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고,486) 상제常啼보살은 묘향성妙香城의 법용法涌보살을 찾아가 뼈를 부수고,487) 혜가慧可는 눈 속에서 팔을 끊었으며,488) 혜능慧能은 돌을 지고서 방아를 찧었던 일화를 모르는가!489) 암두 전활岩頭全奯과 설봉 의존雪峰義存과 흠산 문수欽山文邃는 총림에서 함께 지내며 각자 한 가지 일을 맡아 어떤 사람은 밥을 짓고 물을 긷고 어떤 사람은 밭을 갈고 채소를 재배하였다.490) 설봉은 아홉 차례나 동산 양개洞山良价의 회하를 찾아가고 세 차례나 투자 대동投子大同의 회하를 찾아갔으니,491) 가는 곳마다에서 더없이 부지런히 힘썼다.
또한 장경 혜릉長慶慧稜은 15년 동안 일고여덟 개의 부들방석을 닳아 떨어뜨렸고,492) 영운 지근靈雲志勤은 30년,493) 용천 경흔涌泉景欣494)은 40년, 더 나아가 임제 의현臨濟義玄과 덕산 선감德山宣鑑과 백장 회해百丈懷海 화상에 이르기까지 그러하였고, 영명 연수永明延壽는 하루에 108건의 방편을 행하는495) 등 모두들 조사 문하에 의지한 세월이 대단히 오래였다. 이 더 위없는 최고의 현묘한 도를 어찌 경솔한 마음이나 거만한 마음으로 깨달아 얻을 수 있겠는가!496) 그 종지宗旨를 고취하여 생사대사를 해결하리라는 일념을 가지고

006_0655_b_01L
飯何白米造心性無染本圓成如白飯
006_0655_b_02L元來米造

006_0655_b_03L

006_0655_b_04L
法王法令最高勝如千峯勢岳邊止

006_0655_b_05L聖君德澤如大海潜流過海到成渠

006_0655_b_06L當今世到羲皇上飯勝俱盧白米造

006_0655_b_07L

006_0655_b_08L1) [6] 不覺葛藤如許示同菴二三
006_0655_b_09L兄弟

006_0655_b_10L
諸兄弟旣來這裏同甘𨶑寂緣會決不
006_0655_b_11L等閑冝各勉力除去妄染情習下得
006_0655_b_12L眞正功夫孔丘曰誰能出不由戶
006_0655_b_13L莫由斯道也俗儒尙曰如是況衲子乎
006_0655_b_14L古人爲此一大事廢寢忘飡捐𨈬捨命
006_0655_b_15L久受辛勤乃可得成不見雪山捨身
006_0655_b_16L香山敲骨立雪斷臂負石舂碓只如
006_0655_b_17L巖頭雪峰欽山同歷叢林各執一務
006_0655_b_18L或飯頭擔桶或事園種菜九到洞山
006_0655_b_19L三上投子凡所至處効勤不已抑亦陵
006_0655_b_20L師十五載坐破七八介蒲團靈雲三十
006_0655_b_21L涌泉四十年乃至臨濟德山百丈海
006_0655_b_22L和尙延壽禪師一日百八件事皆依門
006_0655_b_23L歲月甚久盖此無上妙道豈可以輕心
006_0655_b_24L慢心而趣入哉鞠其旨趣皆以生死

006_0655_c_01L불조의 혜명慧命497)을 이어 펼쳐 일으켜 뜻을 굳건히 하고 스스로 힘쓰며 목숨마저 내던지고 각고면려하기를 이와 같이 한 뒤에라야 마침내 수행의 공을 이루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한 법도 게으르고 나태함에서 생겨난 것은 없다.’498)는 말일진저!
그대들 형제들이여, 다행히 한창 혈기 왕성한 때499)이고 굶주림과 추위에서도 벗어나 있으며 조세와 부역의 노고도 없는데 이런 중에도 부지런히 힘쓰지 않는다면 도업道業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옛사람을 본받을 모범으로 삼아야 하리니 안연顏淵을 갈망하고 인상여藺相如를 앙모할 것이며, 세월을 허비하지 말며 선조의 유풍을 욕되게 하지 마라. 또한 어떤 나이 어린 사미들은 부처의 가사袈裟를 걸쳐 입고 망령되이 석가의 제자라 칭하며 오계도 수지하지 않고 육근도 깨끗이 하지 않으면서 외람되이 수행승입네 사칭하고 종지宗旨(宗敎)를 덮어 버리는 짓을 하는데, 오늘 이후로는 혹 계율에서 한두 가지 계만 범하더라도 함께 머무는 것을 허락지 않겠다. 혹 서로 쟁론을 벌이고 주먹다짐하며 다투는 자가 있다면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떠나 모두 절에서 쫓아낼 것이다. 그대들은 이미 이곳에 들어왔으니 깨달음을 얻을 기연을 등한히 하지 말라. 각자 한 가지씩의 소임을 맡아 하고, 뜻을 굳건히 하여 스스로 힘쓰며, 목숨마저 내던질 마음으로 더없이 부지런히 하여 끝내 공업을 이룬다면 참으로 다행일 것이다, 다행일 것이다.

망승을 보내며(送亡僧)
“60년 세월이 일장춘몽이러니, 행장을 거두어 고향으로 돌아갔네. 말해 보라! 어느 곳이 고향인가?” 주장자를 들고 말했다. “해는 서쪽으로 지고, 홍련 향기 연못 가득하네.”500)

기함起凾501)
붉은 해는 분명코 서쪽으로 지려니와, 영혼은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 없네.502) 말해 보라! 이 무상無常한 일은 오지만 온 곳이 없고 가지만 이르는 곳도 없다. 어째서인가?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으므로 여래라 한다.”503)라는 말을 모르는가!

006_0655_c_01L大事爲念紹隆佛祖慧命抗志自强
006_0655_c_02L放捨身命勤苦如是終成功業者
006_0655_c_03L謂無一法從懶墮懈怠中生者歟汝等
006_0655_c_04L兄弟幸自春秋鼎盛無飢寒之迫
006_0655_c_05L征役之勞卷上第四○張於此不勤
006_0655_c_06L成道業固冝以古爲儔希顔慕藺
006_0655_c_07L虛喪光陰忝先祖之風亦有年少沙彌
006_0655_c_08L假佛形服妄稱釋子五戒也不持
006_0655_c_09L根也不淨濫厠僧流大懷宗敎自今
006_0655_c_10L日爲始或於戒律犯一二戒不許共
006_0655_c_11L或相爭爭打拳手相交者有理無理
006_0655_c_12L並皆黜菴汝等旣來這裏緣不等閑
006_0655_c_13L各執一務抗志自强放捨身命效勤
006_0655_c_14L不已終成功業幸甚幸甚

006_0655_c_15L

006_0655_c_16L送亡僧

006_0655_c_17L
六十年光一夢場收拾行裝返古鄕
006_0655_c_18L古鄕在什麽處擧拄杖云金鵝西
006_0655_c_19L沒處紅藕滿池香

006_0655_c_20L起凾

006_0655_c_21L
紅輪決定沉西去不知魂靈往那方
006_0655_c_22L只此無常之事來無所從去無所
006_0655_c_23L是什麽不見無所從來亦無所去
006_0655_c_24L「茟」疑「筆」{編}次同

006_0656_a_01L그러므로 ‘아는 자는 이를 불성이라 하지만 모르는 자는 이를 정혼情魂(精魂)이라 한다.’504)

하화下火505)
횃불을 들고 말했다. “세 가지 인연이 화합하여506) 이루어진 사대四大가 흩어져 허공으로 돌아갔다. 말해 보라! 어떤 것이 이 침琛 상좌의 주인공인가?” 불을 붙이고 말했다. “이 가운데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을 알고자 하는 이 있는가? 불 속의 날벌레가 호랑이를 삼켰다.”507) “대중이여, 오늘 땔나무를 나르는 울력을 한 것은 돌아가신 스님을 다비하기 위해서이다. 말해 보라! 그 가운데 불로 살라도 변화하지 않은 것이 있다. 대중이여, 보았는가? 보았는가?” (자신이 말했다.) “ ‘오온이라는 뜬구름은 부질없이 오간다.’508)라 하였는데, 한 점 신령하고 밝은 것은 살라도 변화하지 않네.509)

홍무 경술년(1370) 9월 15일에 내교(佛敎)의 공부510) 방편을 여럿 가운데 선별하라는 교지를 받고 어전에 올린 글(洪武庚戌九月十五日 承內敎功夫選取御前呈似言句)
제 견해로는 학인들의 공부를 점검하는 방편으로 선사들은 화두話頭를 제시하기도 하고 수어垂語511)를 하기도 하며 색과 소리와 언어를 활용하기도 합니다.
화두로는 조주의 ‘무자’。 만법귀일’ 그리고 ‘부모미생전면목’ 등이 있습니다.512) 이를 두고 ‘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닫는다.’,513) ‘마음에 의단疑團이 없으면 이리저리 마음으로 헤아리는 길 또한 끊어지지 않는다.’514)라고 합니다.
수어에는 ‘정전백수자’。 마삼근’。 간시궐’ 등이 있습니다.515) 이는 본분종사가 본분에 대해 답한 말(本分答話)들로서 활구活句로 대도의 근본을 설한 예이며, 이것이 바로 조사선인 것입니다.
다음은 색과 소리와 언어로 점검하는 방편입니다. 먼저, 색으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친 방편으로는 건추犍槌를 잡거나 불자拂子를 세우는 것,516) 눈썹을 치켜세우거나 눈을 깜박이는 것,517) 주먹을 세우는 것,518) 풀(茟)519)을 들거나 주장자를 세우는 것520) 등이 있으며, 영운 지근靈雲志勤이

006_0656_a_01L故名如來故云識者謂之佛性不識
006_0656_a_02L謂之情魂

006_0656_a_03L下火

006_0656_a_04L
擧火云三緣和合成有四大分散還
006_0656_a_05L且道作麽生是琛上座主人公
006_0656_a_06L火云箇中欲識西來意火裏蝍䗜呑
006_0656_a_07L大蟲

006_0656_a_08L
大衆今日普請般柴只爲亡僧燒化
006_0656_a_09L且道中間有燒不化者大衆見麽
006_0656_a_10L五薀浮雲空去來一點靈明燒不
006_0656_a_11L卷上第四一張

006_0656_a_12L

006_0656_a_13L洪武庚戌九月十五日承內敎功
006_0656_a_14L夫選取御前呈似言句

006_0656_a_15L
據我所見驗人功夫者或以話頭
006_0656_a_16L垂語或以色聲言語

006_0656_a_17L
話頭則或趙州無字或萬法歸一或父
006_0656_a_18L母未生前面目此如大疑之下必有大
006_0656_a_19L如云心若無疑心路不絶故也

006_0656_a_20L
垂語則或庭前柏樹子麻三斤乾屎橛
006_0656_a_21L此本分宗師本分答話如活句道得大
006_0656_a_22L道本此是祖師禪也具色聲言語

006_0656_a_23L
以色示法示人則或拈槌竪拂揚眉瞬
006_0656_a_24L竪起拳頭擧*茟擧起杖子如靈雲

006_0656_b_01L복숭아꽃을 보고 깨달은 예521) 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소리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친 방편으로는 주장자를 내려치며 할을 하거나 선상을 세 번 두드리거나 솥뚜껑을 세 번 두드리는 것,522) 시자를 세 번 부른 것,523) ‘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느냐’ 물은 것,524) ‘나지막이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들리느냐’고 묻고 학인이 ‘들린다’고 하자 ‘그 안으로 들어가라’고 한 예525) 등이 있으며, 향엄 지한香嚴智閑이 돌조각이 대나무에 부딪혀 난 소리를 듣고 마음을 밝힌 예526) 가 바로 그 경우입니다. 언어로써 법을 제시하여 학인들을 가르친 방편으로는 ‘밥을 먹었느냐’라는 조주의 물음에 학인이 ‘먹었다’고 답하자 조주가 ‘발우나 씻어라’고 말해 주어 그 학인이 깨달은 예527) 가 있습니다. 또 천태 덕소天台德韶 국사가 법안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데 어떤 학인이 법안에게 ‘조계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물 한 방울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법안이 ‘이것이 바로 조계의 근원에서 흘러나오는 물 한 방울이다.’라고 답해 줌에 덕소 국사가 언하에 대오하였다는 일화528)가 있습니다.
또한 대단히 미묘한 방편을 사용한 예가 있으니, 혹은 무심無心으로 혹은 무념無念으로 법을 제시하여 가르친 경우가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육조 혜능은 ‘선이라고도 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으면 자연히 청정한 마음의 본체에 들어설 것이니 항상 고요하지만 묘용은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을 것이다.’529)라고 하였습니다. 황벽 희운黃蘗希運530)은 ‘도를 배우는 사람이 바로 그 자리에서 무심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무수히 오랜 겁 동안 수행하더라도 끝내 도를 이루지 못하리라.’531)라고 하였고, 장졸張拙532) 상공은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전체 드러나리라.’533)라고 하였으며, 이문화李文和 도위는 ‘곧바로 최상의 깨달음을 낚아채고, 어떤 시비에도 얽혀 들지 마라.’534)라고 하였습니다.


006_0656_b_01L因見桃花悟道是

006_0656_b_02L
以聲示法示人則或行杖下喝歊禪床
006_0656_b_03L三下歊鼎盖三下三喚侍者門外是
006_0656_b_04L什麽聲還聞偃溪水聲麽僧云
006_0656_b_05L從這裏入如香嚴擊竹明心是

006_0656_b_06L
以言語示法示人則趙州問僧喫粥了
006_0656_b_07L僧云喫粥了州云洗鉢㿻去其僧
006_0656_b_08L悟去

006_0656_b_09L
又韶國師侍側法眼次有僧問法眼
006_0656_b_10L如何是曹源一滴水法眼即答云是曹
006_0656_b_11L源一滴水國師言下大悟是

006_0656_b_12L
又有最妙一方便或以無心或以無念
006_0656_b_13L如六祖云一切善惡都莫思量自然得
006_0656_b_14L入淸淨心體湛然常寂妙用恒沙
006_0656_b_15L蘗云學道人若不直下無心累劫修
006_0656_b_16L行終不成張拙相公云一念不生全體
006_0656_b_17L李文和都尉云直趣無上菩提
006_0656_b_18L切是非莫管卷上第四二張

006_0656_b_19L
白雲和尙語錄卷上
  1. 1)입원소설入院小說 : 주지로 취임하는 입원入院의 형식에 따라 삼문·불전·방장·법좌 등의 순서로 돌면서 설한 법문. 『禪林象器箋』 권9 「叢軌類」(禪藏, p.590), “입원:득법한 후에 세상에 나와 어떤 절에 처음 들어가는 것이다.(入院:出世入某院也.)”; 『百丈淸規』 권3 「入院」(T48, 1125b13), “옛사람들의 입원 절차는 다음과 같다. 허리에 바랑을 두르고 머리에는 삿갓을 쓰고, 산문 앞에 당도하면 쓰고 있던 삿갓을 벗는다. 산문에 들어서면 향을 사르고 법어를 내린다. 승당 앞으로 나아가 바랑을 풀고, 가려진 곳(屛廁 등)에서 손과 발을 씻고 가사를 입는다. 승당에 들어가면 향을 사른 다음 성승聖僧 앞에서 좌구坐具를 펼치고 삼배를 올리는데, 시봉하며 따르는 제자들도 함께 절을 올린다. 이렇게 하여 괘탑掛搭(掛錫)을 마친다. 불전에 도달하면 향을 사른 다음 법어를 내리며, 좌구를 펼치고 삼배를 올린다. 다음에는 토지당과 조사당에서 향을 사르고 각각의 장소에서 법어를 내린다. 방장에 들어서면 자리를 잡고 앉아 법어를 내린다. 다음으로 주지 취임 후 처음으로 법문을 하고(開堂) 축원한다.(古人, 腰包頂笠, 到山門首下笠. 入門炷香, 有法語. 就僧堂前, 解包, 屛處濯足取衣披搭. 入堂炷香, 聖僧前大展三拜, 參隨人同拜, 掛搭已. 到佛殿, 拈香, 有法語, 大展三拜. 次土地堂祖堂, 炷香, 各有法語. 入方丈, 據室, 有法語. 次第開堂祝聖.)”
  2. 2)산문山門 : 절 가장 앞에 세운 정문. 삼문三門이라고도 하는데,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의 삼해탈문三解脫門에 빗대어 해탈에 이르기 위해 들어서는 문이라는 뜻을 상징한다. 주지로 취임하는 입원의 일반적 절차에 따라 첫 번째로 산문에서 법문을 한다.
  3. 3)출입出入하는 문을 비유로 삼아 들어가도 들어갈 곳이 없고 나와도 나올 곳이 없는 무출무입無出無入·무내무외無內無外의 선지禪旨를 나타낸 말.
  4. 4)중문中門 : 산문과 불전佛殿 사이에 위치한 문.
  5. 5)말해 보라(且道) : 앞에서 하던 말을 멈추고, 화두로 전환하거나 문제를 제기할 때 하는 말.
  6. 6)이 말 전체와 정확히 일치하는 문헌은 없어서 누구의 말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막힘없이 드넓어 밖이 없고, 고요히 텅 비어 안이 없다.(寬廓非外, 寂寥非內.)”라는 구절은 남전 보원南泉普願이 수유茱萸에게 보낸 편지에 나온다. 『南泉語要』 古尊宿語錄12(X68, 69a21), “남전이 수유에게 ‘이理는 사事를 따라 다양하게 변화하니 막힘없이 드넓어 밖이 없고, 사는 이를 얻어 하나로 융합하니 고요히 텅 비어 안이 없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부쳤다.(師寄書與茱萸云, ‘理隨事變, 寬廓非外;事得理融, 寂寥非內.’)” 또한 그 뒤의 구절은 관계 지한灌溪智閑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서, 이 법문 전체의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聯燈會要』 「灌溪志閑章」 권10(X79, 95c9), “대중에게 ‘시방 그 어디에도 벽과 울타리가 없고, 사면 그 어느 편에도 문이 없다. 깨끗한 벌거숭이요 한 점의 때도 없는 알몸 그대로 드러났지만 붙잡을 방법은 전혀 없다.’라 설법하고 법좌에서 내려왔다.(示衆云, ‘十方無壁落, 四面亦無門. 露倮倮, 赤洒洒, 沒可把.’ 便下座.)”
  7. 7)보광명전普光明殿 : 비로자나불毘盧遮羅佛을 봉안한 법당. 원래 부처님께서 80권본 『華嚴經』을 설했던 곳이며, 인도의 마가다국 보리도량菩提道場 옆에 있었던 법당 이름이다. 보광법당普光法堂이라고도 한다.
  8. 8)운문 문언雲門文偃의 법문을 활용한 말이다. 『雲門廣錄』 권2(T47, 559a15), “나는 평상시에 ‘모든 소리는 부처님의 소리이고 모든 색은 부처님의 색이니, 세상 전체가 바로 법신이다.’라고 말하여 공연히 불법에 대한 헛된 견해만 일으키고 말았다. 이제는 주장자를 보면 다만 주장자라 부르고 집을 보면 다만 집이라 부를 것이다.(我尋常道, ‘一切聲是佛聲, 一切色是佛色, 盡大地是法身.’ 枉作箇佛法中見. 如今見拄杖但喚作拄杖, 見屋但喚作屋.)”
  9. 9)유나維那 : 총림에서 대중의 수행을 감독하고, 절의 여러 가지 소임을 총괄하여 맡아보는 직책. 독경 때는 경의 제목이나 회향문을 읽는 일 등을 맡아 한다. 『百丈淸規』 권4 「維那條」(T48, 1132b4)에 그 소임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다.
  10. 10)전좌典座 : 대중의 식사를 담당하는 직책.
  11. 11)상방上方 : 주지가 거처하는 방장. 절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므로 이렇게 부른다.
  12. 12)방장方丈 : 사방 일장一丈 길이의 작은 방. 일장은 3m 정도이다. 방장실方丈室 또는 장실丈室이라고도 한다. 선종의 사원에서 주지가 거처하는 방을 일컫는 말로서 함장函丈·정당正堂·당두堂頭 등과 같은 말이다.
  13. 13)옷소매를 털며~방장方丈으로 갔다(拂袖便行) : 보통은 있던 자리에서 결연하게 떨치고 떠날 때의 모습을 표현한다. 여기서는 선사로서의 선기禪機를 보여 준 행위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14. 14)석두 희천石頭希遷의 ≺草庵歌≻에 나오는 구절이다. 『景德傳燈錄』 권30 「石頭和尙草庵歌」(T51, 461c11), “세상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 나는 머물지 않고,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곳을 나는 좋아하지 않노라. 암자는 비록 작지만 법계를 모두 머금고 있으니, 방장의 노인은 이 도리를 자세히 안다네.(世人住處我不住, 世人愛處我不愛. 庵雖小含法界, 方丈老人相體解.)”
  15. 15)자연각자自然覺者라는 말은 『華嚴經』에 나오는 구절이며, 대혜 종고大慧宗杲가 이 말을 간화선看話禪의 안목으로 활용했다. 누구의 가르침에도 의지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스스로 성취한 지혜, 곧 무사지無師智·자연지自然智 등의 맥락과 관련된 말로서 ‘스스로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華嚴經』 권5(T10, 24a27), “여래의 궁전은 끝이 없으니, 자연각자가 그 안에 산다.(如來宮殿無有邊, 自然覺者處其中.)”; 『大慧語錄』 권17(T47, 885b25),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 안에서는 세간의 총명한 말솜씨를 한 점도 써먹을 수 없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몸을 던지고 목숨까지 버린 자재한 경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경계는 반드시 당사자가 스스로 증명하고 스스로 깨달아야만 한다. 그런 까닭에 『華嚴經』에서도 ‘여래의 궁전은 끝이 없으니, 자연각자가 그 안에 산다.’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옛날부터 온갖 성인들이 성취한 대해탈의 법문이다.(這裏, 世間聰明辯才, 用一點不得. 到得恁麽田地, 方始是放身捨命處. 這般境界, 須是當人自證自悟始得. 所以華嚴經云, ‘如來宮殿無有邊, 自然覺者處其中.’ 此是從上諸聖大解脫法門.)”
  16. 16)6척의 몸 : 석가모니불의 크기를 보통 일장육척一丈六尺이라 하는 말에 따른다. 『大智度論』 권10(T25, 127c14),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몸(佛身)이 일장육척이라 주장하고, 어떤 이는 1리나 10리 또는 백천만억 또는 끝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 허공을 가득 채울 정도의 크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신밀身密이라 한다.(有人見佛身, 一丈六尺, 或見一里十里, 百千萬億, 乃至無邊無量, 遍虛空中. 如是等名身密.)”
  17. 17)수미좌須彌座 : 주지住持가 법당에서 여러 스님들에게 설법하는 자리. 곧 법좌法座를 수미산에 견주어 이르는 말. 수미단須彌壇이라고도 한다.
  18. 18)『法華經』 권4 「法師品」(T9, 32a21), “대자비를 방으로 삼고, 순하게 인욕하는 마음을 옷으로 삼으며, 제법이 공이라는 이치를 자리로 삼으니, 이에 의거하여 법을 설하리라.(大慈悲爲室, 柔和忍辱衣, 諸法空爲座, 處此爲說法.)”
  19. 19)자의紫衣 : 자색의 가사. 자색은 공이 큰 사람에게 하사하는 복장의 색 중에 가장 귀한 복색으로서 측천무후가 법랑法朗에게 하사한 데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20. 20)『佛眼語錄』 古尊宿語錄27(X68, 175b2) 참조.
  21. 21)계향戒香 : 오분법신五分法身 하나하나를 들고 향을 사르는 오분법신향五分法身香(또는 五部法身香) 가운데 하나. 나머지 네 가지는 이하의 글에도 나오듯이, 정향定香·혜향慧香·해탈향解脫香·해탈지견향解脫知見香이다. 이 소향행사燒香行事에 의해 만덕의 법신을 성취하므로 심향心香 또는 일심향一心香이라고도 한다. 『壇經』에 부처님의 오분법신을 향에 비유하여 설한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인다. 宗寶本 『壇經』 「懺悔品」(T48, 353c6), “첫째 계향. 자기 마음속에 그릇됨이나 악함이 없고, 질투, 탐욕과 성냄, 위협하여 해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을 계향이라 한다. 둘째 정향. 온갖 선하거나 악한 상相을 보고도 자기 마음이 어지러워지지 않는 것을 정향이라 한다. 셋째 혜향. 자기 마음에 장애가 없어 항상 지혜로 자성을 관조하며 어떤 악행도 짓지 않으며 갖가지 선을 닦더라도 그에 집착하지 않으며,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끔찍이 생각하며 외롭고 가난한 이들을 가엾게 여겨 도와주는 것을 혜향이라고 한다. 넷째 해탈향. 자기 마음에 반연하는 마음이 없고 선이라고도 생각지 않고 악이라고도 생각지 않으며 걸림 없이 자재함을 해탈향이라고 한다. 다섯째 해탈지견향. 자기 마음에 이미 반연하는 마음도 없고 선악이라는 분별도 없으며 텅 비어 고요하기만 한 경계에 침몰해 있지도 않으니, 널리 배우고 많이 알아 자신의 본심을 깨닫고 온갖 불도의 이치에 달통하여 지혜의 빛으로 중생제도에 힘쓰며, 나라는 것도 남이라는 것도 없으며 곧장 보리에 이르러 참된 본성을 바꾸지 않음을 해탈지견향이라 한다. 선지식이여, 이 향은 각자 내면에서 훈습할 일이니, 밖에서 구하지 마라.(一, 戒香. 卽自心中, 無非無惡, 無嫉妬, 無貪瞋, 無劫害, 名戒香. 二, 定香. 卽覩諸善惡境相, 自心不亂, 名定香. 三, 慧香. 自心無礙, 常以智慧觀照自性, 不造諸惡, 雖修衆善, 心不執著, 敬上念下, 矜恤孤貧, 名慧香. 四, 解脫香. 卽自心無所攀緣, 不思善不思惡, 自在無礙, 名解脫香. 五, 解脫知見香. 自心旣無所攀緣善惡, 不可沈空守寂, 卽須廣學多聞, 識自本心, 達諸佛理, 和光接物, 無我無人, 直至菩提, 眞性不易, 名解脫知見香. 善知識, 此香各自內熏, 莫向外覓.)”
  22. 22)『大般若經』 권387 「不可動品」(T6, 1001c21), “그러나 본성本性이 공이라는 이치는 무너뜨릴 수 없고, 상주常住하는 것도 아니요 단멸斷滅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러한가? 본성이 공이라는 이치는 정해진 방위도 처소도 없으며, 이전에 무언가를 따라 온 곳도 없고 앞으로 갈 곳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의 이치를 법주法住라 한다.(然本性空理不可壞, 非常非斷. 所以者何? 本性空理, 無方無處, 無所從來, 亦無所去. 如是空理, 亦名法住.)”
  23. 23)변함없는 산처럼~깊고 크시기를 : 수산복해壽山福海라고 한다. 수명이 산처럼 오래고, 복이 바다처럼 드넓기를 기원하는 말.
  24. 24)이것(這介) : 저개這箇(者个·者箇)·차개遮箇로도 쓴다. 다른 것 아닌 바로 그것 또는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 등을 지시하는 말로 쓰인다. ‘這介’ 자리에 ‘此性’ 또는 ‘此段大事因緣’ 등으로 실려 있는 책도 있다.
  25. 25)『趙州語錄』 古尊宿語錄14(X68, 87c11), “조주가 대중에게 말하였다. ‘세계가 있지 않았을 때에도 이 성품은 있었으며,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이 성품은 무너지지 않는다.’ 학인이 물었다. ‘이 성품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오온사대이니라.’(師示衆云, ‘未有世界, 早有此性, 世界壞時, 此性不壞.’ 僧問, ‘如何是此性?’ 師云, ‘五蘊四大.’)”; 『大慧語錄』 권17(T47, 884c23), “세계가 있지 않았을 때에도 이 일단의 일대사인연은 이미 있었으며, 세계가 무너질 때에도 이 일단의 일대사인연은 실오라기 터럭 끝만큼도 움직인 적이 없다.(未有世界, 早有此段大事因緣, 世界壞時, 此段大事因緣, 不曾動著一絲毫頭.)”
  26. 26)『大慧語錄』 권1(T47, 811b19), “또 향을 사르며 말하였다. ‘이 하나의 향은 쳐다보면 눈동자가 마르고 냄새 맡으면 머리가 찢어진다.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사바세계보다 그 값이 더 나가겠지만 천하게 여기는 사람에게는 반 푼의 가치도 없다.(又拈香云, ‘此一瓣香, 覰著則眼睛枯, 嗅著則腦門裂. 遇貴則價重娑婆, 遇賤則分文不直.’)”
  27. 27)중생들(萬機) : 다양한 근기根機 또는 그것을 가진 중생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 선종에서는 개개의 사람이 처해 있는 온갖 상황이나 마음의 작용을 뜻하기도 한다.
  28. 28)참된 깨달음의 경지는 자기 자신이 체득해야 하는 것이지 불조佛祖도 전해 줄 수 없다(千聖不傳)는 의미이다. 『景德傳燈錄』 권16 「上藍令超傳」(T51, 332a26), “ ‘어떤 것이 저, 상람上藍 자신의 본분사입니까?’ ‘온갖 성인에게서도 빌리지 못하거늘 어찌 중생들에게서 구하랴!’(僧問, ‘如何是上藍本分事?’ 師曰, ‘不從千聖借, 豈向萬機求!’)”
  29. 29)암두 전활巖頭全奯의 말. 『大慧語錄』 권22(T47, 906b13), 『密菴語錄』(T47, 980a21) 등 참조. 천지를 뒤덮는다는 ‘개천개지盖天盖地’는 온 천하를 제압한다는 뜻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불법이 없는 곳이 없음을 나타낸다. 또는 불법이라는 진리가 현성한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진시방세계盡十方世界’, ‘진천진지盡天盡地’, ‘보천보지普天普地’라고도 한다.
  30. 30)선사先師 : 입적한 스승에 대한 호칭.
  31. 31)하늘에 닿을~높은 기개(遼天鼻孔) : 비공요천鼻孔撩天이라고도 한다. 요천撩天은 조천朝天이라고도 하는데 하늘을 향해 있다는 뜻이다. 코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이 솟아 있다는 말로, 기개와 도량이 대단히 높고 큰 상태를 뜻한다. 자부심이 크고 오만한 태도 또는 기세가 대단히 충천하고 자부심에 넘쳐 득의양양한 모습을 형상화한 말이다. 『祖庭事苑』 권1(X64, 319c11), “비공요천:요遼 자는 응당 요撩로 쓰는 것이 맞으므로 이 요撩 자를 취하였다. 우러러보는 모양인데, 요遼 자는 멀다는 뜻이므로 맞지 않다.(鼻孔遼天:遼當作撩, 撩取也. 昂視之貌, 遼遠也, 非義.)”
  32. 32)법을 베풀어 주신 은혜(法乳之恩) : 법이라는 젖을 먹여 주신 은혜. 어머니가 젖을 먹여 자식을 기르고 키우듯이 불조佛祖가 법을 가르쳐 준 은혜를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말. 『雪峰語錄』 「刻雪峰語錄緣起」(X69, 70a13), “어리석은 내가 스승이 내려 주신 법을 직접 계승했으니, 넘쳐흐르는 법의 젖을 베풀어 주신 그 은혜 지극하여 갚기 어렵다.(愚蒙, 乃承師付囑, 津津法乳, 恩極難酬.)”
  33. 33)향엄 지한香嚴智閑이 깨달음을 얻고서 그 스승 위산 영우潙山靈祐를 찬한 말 중에 나온다. 『景德傳燈錄』 권11 「香嚴智閑傳」(T51, 284a12) 참조.
  34. 34)이수산李壽山(?~1376) : 고려 말 문신.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여진족女眞族을 평정하였으며, 1365년 삼사우사三司右使를 거쳐 삼사판사三司判事에 올랐다. 신돈辛旽에 의해 정적政敵으로 한때 숙청된 적도 있으나, 공민왕 사후에 우왕을 옹립하려는 세력에 반대하여 공양왕으로부터 그 충의를 인정받았다.
  35. 35)백추白槌 :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건추犍槌를 울려서 행사를 알리는데 이러한 의식을 명추백사鳴槌白事라고 한다. 또는 그렇게 알리는 용도로 쓰이는 건추 자체를 백추라 하기도 한다. ‘白’은 고백告白, ‘槌’는 율원律院에서 대중에게 정숙을 알리기 위해 치던 건추에서 비롯한 명칭이다.
  36. 36)백추를 울리고 의식을 선언하는 뜻에서 하는 일종의 의례적인 말. 『百丈淸規』 권3 「開堂祝壽條」(T48, 1126a19), “모든 산문의 상수上首 중에서 백추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나와 건추를 한 번 울리고 ‘법석에 앉은 대중이여, 마땅히 제일의를 관찰하시오.’라고 말한다.……설법을 마치면 백추를 담당하는 스님이 다시 건추를 한 번 울리고 ‘법왕의 법을 자세히 관찰하시오. 법왕의 법은 이와 같습니다.’라고 말한다.(諸山上首, 出白椎, 鳴椎一下云, ‘法筵龍象衆, 當觀第一義’……結座, 白椎人, 復鳴椎一下, 白云, ‘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
  37. 37)종지를 설법했다(提綱) : 종지의 핵심을 제기하는 것 또는 불법의 대의를 설법하는 것을 이름.
  38. 38)붉게 타는~눈과 같구나(紅爐上一點殘雪) : 그 어떠한 흔적이나 자취도 남기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 몰종적沒蹤跡의 경지를 뜻한다. 『應菴語錄』 권5(X69, 523b12), “가사를 정제하고 법좌에 앉으니 보령 화상이 백추를 울리고 ‘법석에 앉은 대중이여, 마땅히 불법의 근본적인 뜻(第一義)을 꿰뚫어 보시오!’라고 하였다. 응암 담화應庵曇華 선사가 말하였다. ‘불법의 근본적인 뜻을 논함은 마치 붉게 타는 화로에 떨어진 한 점의 눈과 같아서 듣는 작용은 소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보는 작용은 색을 벗어나지 못한다. 대중 앞에 나아와 의심을 푸는 데 방해될 것이 무엇이리오!’(遂斂衣就坐, 保寧和尙白槌云, ‘法筵龍象衆, 當觀第一義!’ 師云, ‘若論第一義, 如紅爐上一點雪相似, 若也聽不出聲, 見不超色. 何妨出衆決疑!’)”
  39. 39)선다객宣茶客 : 선타객先陀客·선타파仙陁婆(禪陀婆·先陀婆)라고도 한다. 상황에 따라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 잘 아는 사람을 뜻하는 말. 『大般涅槃經』 권9(T12, 662b18), “선타파란 하나의 이름에 들어 있는 네 가지 실물을 말한다. 첫째는 소금, 둘째는 그릇, 셋째는 물, 넷째는 말이다. 이와 같은 네 사물의 이름이 하나로 같지만 지혜로운 신하는 이 이름이 무엇을 지칭하는지 잘 안다. 왕이 씻을 때 선타파를 찾으면 물을 바치고, 왕이 음식을 먹을 때 선타파를 찾으면 소금을 바치며, 왕이 식사를 마치고 무언가 마시고 싶어 할 때 선타파를 찾으면 그릇을 바치고, 왕이 유람할 때 선타파를 찾으면 말을 바친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신하는 대왕이 내린 네 종류 은밀한 말을 잘 이해한다.(先陀婆者, 一名四實. 一者鹽, 二者器, 三者水, 四者馬. 如是四物, 共同一名, 有智之臣, 善知此名. 若王洗時, 索先陀婆, 卽便奉水;若王食時, 索先陀婆, 卽便奉鹽;若王食已, 欲飮漿時, 索先陀婆, 卽便奉器;若王遊時, 索先陀婆, 卽便奉馬. 如是智臣, 善解大王四種密語.)”
  40. 40)석옥 청공이 열반에 들기 전에 지은 게송을 인용하여 한 말. ‘이구 온보李玖溫甫의 서문’ 참조.
  41. 41)만수산萬壽山 : 북경 서쪽 이화원頤和園 내에 위치. 원래 이름은 옹산甕山인데, 청 건륭 연간에 이름을 바꾸었다. 남쪽으로는 곤명호昆明湖를 마주하고 있고 산 위에는 불향각佛香閣과 배운전排雲殿 등이 건립되어 있으며 풍경이 수려하기로 이름난 명승지이다.
  42. 42)소동파蘇東坡(1036~1101)의 다음 오도송悟道頌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續傳燈錄』 권20 「東坡居士傳」(T51, 601b14), “시냇물 소리가 곧 광장설법廣長說法이니, 산 빛인들 어찌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아닐 것인가! 한밤에 팔만사천의 게송을 들었으니, 훗날 어떻게 그것을 사람들에게 제시해 줄까!(溪聲便是廣長舌, 山色豈非淸淨身! 夜來八萬四千偈, 他日如何擧似人!)”
  43. 43)모두 그대들이~수 있다 :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나, 『圜悟心要』 권하 「示英上人」(X69, 483b24~c2), 같은 책 「示魏學士」(X69, 479a9~14)의 구절과 흡사하다.
  44. 44)『首楞嚴經』 권2(T19, 110c21), “선남자들아, 나는 항상 ‘색과 마음과 모든 대상 경계와 마음에 의해 부림받는 것과 반연하는 모든 법이 다 오직 마음에서 드러난 것’이라고 말해 왔다. 너희 몸과 너희 마음은 모두 미묘하고 밝으며 참으로 정묘한 마음에서 드러난 모습이거늘, 어찌하여 너희들은 본래 미묘하여 원만 융통하고 밝은 마음과 보배처럼 밝고 미묘한 성품을 잃어버리고서는 깨달음 속에서 미혹되었다고 잘못 아는가!……끊임없이 미혹을 마음이라 여기고 미혹은 색신 안에 있다고 결정하면 색신 밖의 산하·허공·대지 등이 모두 미묘하고 밝으며 참된 마음 가운데 있는 것임을 알지 못한다. 비유하자면 맑고 깊은 수많은 대해는 저버리고 오로지 한 물거품의 체體만을 중시해서 그것을 전체 바다라 여기면 너른 바다는 없어져 버리는 것과 같다.(諸善男子, 我常說言, ‘色心諸緣, 及心所使, 諸所緣法, 唯心所現.’ 汝身汝心, 皆是妙明眞精妙心中所現物, 云何汝等, 遺失本妙, 圓妙明心, 寶明妙性, 認悟中迷!……一迷爲心, 決定惑爲色身之內, 不知色身外, 洎山河虛空大地, 咸是妙明眞心中物. 譬如澄淸百千大海棄之, 唯認一浮漚體, 目爲全潮, 窮盡瀛渤.)”
  45. 45)다수의 경전과 어록 등에 보이는 상용구.
  46. 46)사리闍梨 : 본래 고승대덕을 가리키지만, 선 문헌에서는 스승이 제자를 높여 부르는 말로 ‘사리’라는 호칭이 빈번하게 쓰인다.
  47. 47)협산 선회夾山善會의 법어 등에 보이는 구절. 『聯燈會要』 권21(X79, 179b14) 참조.
  48. 48)흥성사興聖寺 : 공민왕의 왕비 노국공주魯國公主의 원당願堂. 백운 경한은 공민왕 17년(1368)에 이 절의 주지로 취임했다고 알려져 있다.
  49. 49)훌륭한 명령(休命) : 아름답고 선한 명령. 천자나 신명神明의 뜻. 『周易』 「大有」, “군자는 악을 막고 선을 드날려 하늘의 휴명을 따른다.(君子以遏惡揚善, 順天休命.)” 임금의 명을 받들어 그 뜻을 널리 백성에게 알리고 드높이는 것을 ‘대양휴명對揚休命’이라고 한다.
  50. 50)마지막 한 구절(末後一句子) : 진리를 나타내는 궁극적인 한 구절. 최초의 한 구절, 즉 최초일구자最初一句子·최초구最初句와도 똑같은 뜻이다. 『無門關』 13則 「德山托鉢」(T48, 294c7), “최초구를 안다면, 말후구도 알리라. 그러나 말후구와 최초구여!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인 한 구절은 아니로다.(識得最初句, 便會末後句. 末後與最初! 不是者一句.)”
  51. 51)황면노자黃面老子 : 부처님을 가리킨다. 황면구담黃面瞿曇·황면노黃面老·황두대사黃頭大士·황두노黃頭老·황두黃頭 등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의 몸은 황금색의 금색신金色身으로 인식되는 까닭에 붙은 칭호이다.
  52. 52)『金剛經』(T8, 751c24) 참조.
  53. 53)『莊子』에서 비롯된 말이며, 그것을 승조僧肇가 활용하여 만들어 낸 비유이다. 『莊子』 「騈拇」, “긴 것이라고 하여 남아돌지 않으며 짧은 것이라고 하여 부족하지 않다. 그러므로 오리 다리가 비록 짧지만 늘이면 괴로워하고, 학 다리가 비록 길지만 자르면 슬퍼하는 것이다.(長者, 不爲有餘;短者, 不爲不足. 是故鳧脛雖短, 續之則憂;鶴脛雖長, 斷之則悲.)”; 『肇論』 「般若無知論」(T45, 154c10), “경에 ‘모든 법이 다르지 않다’라고 한 말이 어찌 ‘오리 다리를 늘이고 학 다리를 자르며, 산을 깎아 골짜기를 메운 다음에 서로 다른 점이 없다’고 하는 뜻이겠는가! 진실로 차별된 것들을 다르다고 집착하지 않으므로 비록 달라도 다르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다.(經云, ‘諸法不異者’, 豈曰, 續鳧截鶴, 夷嶽盈壑, 然後無異哉! 誠以不異於異故, 雖異而不異也.)” 큰 것은 큰 것대로 작은 것은 작은 것대로 각각의 본분을 간직하고 있으며 대소라는 차별로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의 ‘대저대소저소大底大小底小’라는 말과도 통한다.
  54. 54)『法華經』 권1 「方便品」(T9, 9b10)에 나오는 구절. 앞서 나온 승조의 비유를 들어 보일 때에 운문 문언이 이 구절도 함께 인용했다. 『雲門廣錄』 권중(T47, 560b4) 참조. 백운 경한은 전체적으로 운문의 이러한 평가에 기초하고 있다.
  55. 55)양기 방회楊岐方會의 말. 『楊岐語錄』(T47, 641c29).
  56. 56)지워 없앨(雌黃) : 자황雌黃은 황색의 안료顔料. 옛날에 황색의 종이에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잘못된 부분을 고치기 위해 지우는 데 사용하던 물품. 이로부터 글이나 시문을 고치는 것 또는 품평·평론하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57. 57)요순堯舜과 같은~이루신 태평성대(堯天舜德) : 요천순일堯天舜日이라고도 하며, 태평성대를 비유한다. 『論語』 「泰伯」의 “높디높구나, 오직 하늘이 크거늘 요임금만이 이를 본받으셨네.(巍巍乎, 唯天爲大, 唯堯則之.)”라는 구절에서 요임금이 하늘을 본받아 교화를 행하여 제왕의 크고 훌륭한 덕을 펴고 태평성대를 이루었음을 칭송한 데서 태평성대를 요천堯天이라 일컫게 되었다.
  58. 58)도림桃林의 들판에~말을 돌려보내어 : 주周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紂를 친 이후에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뜻에서 전쟁에 사용되던 우마를 모두 풀어놓았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 『書經』 「武成」 참조.
  59. 59)온 백성~밥 먹으니 : 요堯임금 때에 한 노인이 지었다는 ≺격양가擊壤歌≻에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쉬며,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밭을 갈아 밥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와 무슨 상관있으리오!(日出而作, 日入而息, 鑿井而飮, 耕田而食, 帝力於我何有哉!)”라 한 데에서 유래한 구절이다.
  60. 60)다음 책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보인다. 『金剛般若波羅蜜經破取著不壞假名論』 권상(T25, 890c10), “부처님께서는 ‘몸이 아닌 것을 몸이라고 하고 몸이 있는 것을 대신大身(無相身)이라 하지 않는다’라고 하셨다.(佛說非身是名爲身, 非謂有身名爲大身.)” 경전의 이러한 문구를 빌려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61. 61)『景德傳燈錄』 권29 「梁寶誌和尙大乘讚」(T51, 449b1), “대도는 항상 눈앞에 있건만, 눈앞에 있음에도 보기는 어렵네. 도의 참된 본체를 깨닫고자 한다면 색과 소리와 언어를 피하려 마라. 언어가 곧 대도이니, 번뇌를 끊어 없앨 필요 없다네. 번뇌는 본래 공적한데, 망령된 생각이 갈마들며 서로 얽어매는 것일 뿐이니라.(大道常在目前, 雖在目前難覩. 若欲悟道眞體, 莫除色聲言語. 言語卽是大道, 不假斷除煩惱. 煩惱本來空寂, 妄情遞相纏繞.)”
  62. 62)이것은 색이다~참된 본체인가 : 『大慧語錄』 권1(T47, 812a28~b2)의 내용과 흡사하다.
  63. 63)일할一喝 : 말로는 미칠 수 없는 뜻을 나타내는 한 소리.
  64. 64)『老子』 14장,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夷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希라 하고, 잡아도 얻지 못하는 것을 미微라 한다.(視之不見, 名曰夷;聽之不聞, 名曰希;搏之不得, 名曰微.)”
  65. 65)『宏智廣錄』 권4(T48, 38c24), “진공은 공이 아니요 묘유는 실유가 아니다. 이는 삼라만상이 생성하는 근본이요 이의二儀(陰陽)가 조화하는 모태이다. 어느 한쪽 방위로 그 있는 곳을 지정하여 가리킬 수도 없고 겁의 수로도 그 수명을 다 헤아릴 수 없다.(眞空不空, 妙有不有. 是萬象生成之根, 卽二儀造化之母. 方隅不可定其居, 劫數不可窮其壽.)”
  66. 66)이러한 경계에서~자라야만 한다 : 『雲門廣錄』 권상(T47, 552b25~c4)의 상당 법문 내용과 흡사하다.
  67. 67)무엇이라 불러도 잘못인 진퇴양난의 관문을 설정할 때 선사들이 주로 쓰는 문제 제기의 한 방식이다. 수산 성념首山省念이 죽비를 소재로 제기한 다음의 공안이 널리 알려져 있다. 『禪門拈頌說話』 1331則(H5, 870c19), “수산 성념이 죽비를 집어 들고 어떤 학인에게 물었다. ‘죽비라 부르면 그 말에 물들고,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등지게 된다. 말해 보라!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首山, 拈起竹篦子, 問僧云, ‘喚作竹篦卽觸, 不喚作竹篦卽背. 且道! 喚作什麽?’)” 물들거나(觸) 등지는(背) 두 가지를 모두 부정하는 방식으로 설정한 이러한 화두의 관문을 배촉관背觸關이라 한다. 그러나 모두 내치고 부정하는 것만이 정답인 것은 아니다. 이 문제는 어디로든 열려 있다. 즉 반대로 죽비라 부르거나 죽비라 부르지 않거나 모두 옳으며, 백운과 같이 죽비를 다만 죽비라 부르겠다는 견해도 통한다. 선사들은 자신의 안목을 드러내고 펼치거나 상대를 시험하는 수단으로 공안을 활용할 뿐이며 그 안에 만고불변의 답은 들어 있지 않다.
  68. 68)『雲門廣錄』 권중(T47, 555c3), “운문이 하루는 주장자를 집어 들고 ‘교가敎家에서는 ≺범부는 진실로 그것을 있다(有)고 여기고, 이승은 분석하여 그것을 없다(無)고 여기며, 연각은 허깨비와 같이 있는 것(幻有)이라 여기고, 보살은 그 자체를 공이라 여긴다.≻고 한다.’라는 말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주장자를 보고는 다만 주장자라고 부를 뿐이고 걸을 때는 단지 걸을 뿐이며 앉을 때는 단지 앉아 있을 뿐이니, 어떠한 경우에도 그 자리에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師一日, 拈起拄杖擧, ‘敎云, ≺凡夫實謂之有, 二乘析謂之無, 緣覺謂之幻有, 菩薩當體卽空.≻’ 乃云, ‘衲僧見拄杖, 但喚作拄杖, 行但行, 坐但坐, 總不得動著.’)”
  69. 69)『金剛經』(T8, 752b28) 참조.
  70. 70)위의 책(T8, 749a24) 참조.
  71. 71)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찾지 못하였으나, 다음의 글과 대의가 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圓覺經略疏』 권상(T39, 544c5), “관찰하는 지혜가 원만하게 밝고 심식이 청정한 자 또한 이와 같으니, 세간이나 출세간이나 또는 성인이나 범부나 모두 공이라 본다. 공은 깨달음의 본체(覺體)이다. 그러므로 이하의 문구에서 ‘부처님의 세계를 허공에 핀 꽃과 같이 보고 생사·열반을 지난밤 꿈처럼 보라’고 한 것이다.(觀智圓明心識淨者, 亦復如是, 見世出世若聖若凡, 一切皆空. 空是覺體. 故下文云, ‘見佛世界, 猶如空華, 生死涅槃, 猶如昨夢.’)”
  72. 72)바다와 같이~비추는 지혜(法界海慧) : 바다와 같이 깊고 넓은 법계를 비추는 지혜. 『圓覺經』(T17, 917b7), “바다와 같이 깊고 넓은 법계를 비추는 지혜로 모든 상相을 환히 비춤이 허공과도 같으니, 이를 여래가 원각圓覺의 성품에 수순하는 것이라 한다.(法界海慧, 照了諸相, 猶如虛空, 此名如來隨順覺性.)”; 『圓覺經略疏註』 권하(T39, 556b9), “법계해혜:법계는 깊고 넓으므로 바다와도 같다. 지혜는 작용이요 법계를 칭량하기 때문에 법계혜라 한다.(法界海慧:法界深廣, 故如海也. 慧則是用, 稱法界故, 名法界慧.)”
  73. 73)『圓覺經』(T17, 917b2) 참조.
  74. 74)망심妄心의 본체는 원래 공(妄體元空) : 망체본허妄體本虛와 같은 말. 『宗鏡錄』 권6(T48, 447c24), “묻는다. ‘망상을 일으킨 마음으로는 원래 자신의 본체가 없음을 깨닫지 못하지만 이제 그 망심이 일어날 때 최초의 상相도 없음을 깨달았다면 참된 깨달음을 온전히 이룬 것인데, 이 참된 깨달음이라는 상도 다시금 망심을 따라 모두 떨쳐 버려야 하는가, 처음부터 다시 건립해야만 하는가?’ 답한다. ‘망으로 말미암아 진을 설하는 것이니 진도 자체의 독립적인 상은 없으며, 진으로부터 망을 일으키는 것이니 망의 본체도 본래 허망한 것이다. 망이 이미 공으로 돌아갔다면 진도 건립하지 않는다.’(問, ‘不覺妄心, 元無自體, 今已覺悟妄心起時, 無有初相, 則全成眞覺, 此眞覺相, 爲復隨妄俱遣, 爲當始終建立?’ 答, ‘因妄說眞, 眞無自相;從眞起妄, 妄體本虛. 妄旣歸空, 眞亦不立.’)”
  75. 75)『圓覺經略疏』 권상(T39, 529b21), “모든 중생이 청정한 깨달음의 경계에 있으나 진여의 실상에 미혹되어 망령된 경계를 일으켜 망령되이 중생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망심妄心의 본체는 원래 공이어서 온전히 본래 깨달은 마음의 경지일 뿐이다. 망령되이 물들지 않으므로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논서에서 일체중생이 본래 상주하며 열반에 들어가 있다고 한 것이다.(是諸衆生, 淸淨覺地, 迷眞起妄, 妄見衆生. 妄體元空, 全是本覺心地. 妄不能染, 故云淸淨. 故論云, 一切衆生, 本來常住, 入於涅槃.)”
  76. 76)『楞嚴經』 권2(T19, 112b19) 참조.
  77. 77)『般若心經』(T8, 848c10) 참조.
  78. 78)『證道歌』(T48, 395c19) 참조.
  79. 79)주 68 참조.
  80. 80)드러난 그대로 온전히 진실이다(覿體全眞) : 온통 드러나 있는 그 자체 그대로 진실하다는 말. 보이는 그대로, 나타나 있는 그대로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는 뜻이다. 물물전진物物全眞·물물적체物物覿體·처처전진處處全眞 등과 같은 말이다. 『圜悟語錄』 권9(T47, 753c5), “바로 그 자리에서 알아차려 철저히 분명해지고 심지가 또렷해져야 ‘걷는 것도 선이요 앉아 있는 것도 선이며, 말하거나 침묵하거나 움직이거나 고요한 것 모두가 바른 본체’라 할 만하다. 그러므로 운문은 ‘화상들이여, 망령되이 생각하지 마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며, 승은 승이고 속은 속이다’라 하였고, 또 ‘주장자를 보고는 다만 주장자라 할 뿐이고 집을 보면 다만 집이라 부를 뿐이다.’라 하였으니, 이를 ‘드러난 그 모습 그대로 모두 진실하다.’라고 한다.(直下了得, 徹底分明, 心地了了, 可謂‘行亦禪, 坐亦禪, 語默動靜, 皆爲正體.’ 是故雲門道, ‘和尙子, 莫妄思! 山是山水是水, 僧是僧俗是俗.’ 又道, ‘見拄杖子但喚作拄杖子, 見屋但喚作屋.’ 謂之‘覿體全眞.’)”
  81. 81)『大般涅槃經』 권27 「師子吼菩薩品」(T12, 524c5), “선남자야, 비유컨대 집에 유락乳酪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어떤 이가 ‘당신은 소酥를 가지고 있느냐?’라고 물음에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낙酪이 소酥는 아니지만 선교방편善巧方便으로 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소를 가지고 있다’고 답할 수 있는 것이다. 중생 또한 이와 같아서 모두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이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항상 ‘일체의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라고 설한 것이다.(善男子, 譬如有人家有乳酪, 有人問言, ‘汝有蘇耶?’ 答言, ‘我有.’ 酪實非蘇, 以巧方便定當得故, 故言有蘇. 衆生亦爾, 悉皆有心, 凡有心者, 定當得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以是義故, 我常宣說, ‘一切衆生, 悉有佛性.’)”; 『起信論疏筆削記』 권2(T44, 307a12), “결정성決定性이 평등하다는 것은 삼취오성의 일체 중생에게는 다 여래장심이 있으니 모두 성불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涅槃經』에 ‘마음이 있는 자는 반드시 누구나 성불하리라.’라고 하였고, 『圓覺經』에서도 ‘자성이 있거나 없거나 다 같이 불도를 이룬다.’라고 한 것이다.(定性等者, 三聚五性, 一切衆生, 皆有如來藏心, 總皆成佛. 故涅槃經云, ‘凡有心者, 定當作佛.’ 圓覺云, ‘有性無性, 齊成佛道.’)”
  82. 82)『無量壽經宗要』(H1, 558a16), “무상보리심을 발하는 마음이란, 세간의 부귀와 즐거움 및 이승의 열반에 이르기까지 돌아보지 않고, 한결같이 삼신의 깨달음에 뜻을 두는 것이니, 이것을 무상보리심이라 한다.(言發無上菩提心者, 不顧世間富樂, 及與二乘涅槃, 一向志願三身菩提, 是名無上菩提之心.)”; 『無量壽經優婆提舍願生偈註』 권하(T40, 842a17), “이 무상보리심이란 곧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요, 부처가 되고자 하는 마음은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마음이요,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마음은 중생을 모두 받아들이고 제도하여 불국토에 태어나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저 안락한 정토에 태어나기를 소원하는 이라면 무상보리심을 발하고자 해야 한다.(此無上菩提心, 卽是願作佛心;願作佛心, 卽是度衆生心;度衆生心, 卽攝取衆生, 生有佛國土心. 是故願生彼安樂淨土者, 要發無上菩提心也.)”
  83. 83)바로 앞의 구절과 이 구절은 80권본 『華嚴經』 권14 「賢首品」의 게송에 나온다. 『華嚴經』 권14 「賢首品」(T10, 72b17), “무상대보리를 믿어, 보살이 이로써 초발심을 일으키도다. 믿음은 도道의 근원이요 공덕의 모태이니, 일체의 온갖 선법善法을 이루어 내리라.……믿음은 보시를 베풀게 하니 마음에 인색함이란 없고, 믿음은 환희의 마음으로 불법에 들게 한다. 믿음은 지혜의 공덕을 늘어나게 하며, 믿음은 기필코 여래지如來地에 이르게 한다.(及信無上大菩提, 菩薩以是初發心. 信爲道元功德母, 長養一切諸善法.……信能惠施心無吝, 信能歡喜入佛法. 信能增長智功德, 信能必到如來地.)”
  84. 84)이러한 결정적인~경지를 말한다 : 『大慧語錄』 권22 「示妙智居士」(T47, 904c15~21)의 내용과 흡사하다.
  85. 85)양기 방회楊岐方會(992~1049) : 임제종 양기파의 개조. 석상 초원石霜楚圓의 법을 이었다.
  86. 86)자명慈明(986~1039) : 석상 초원石霜楚圓을 가리킨다. 광서성廣西省 전주全州 출신. 분양 선소汾陽善昭의 법을 이어받았다.
  87. 87)이 일화는 『續傳燈錄』 권25(T51, 636b28), 『五燈會元』 권19(X80, 398c12) 등에는 용문 불안龍門佛眼과 태평연太平演의 문답으로 실려 있다.
  88. 88)통 밑바닥이 빠져나가듯이(桶底脫) : 온갖 장애나 번뇌가 통 밑바닥이 빠진 듯이 해소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89. 89)『圓覺經略疏』 「序」(T39, 523b10), “무릇 혈기를 가진 부류는 반드시 지知가 있고, 지가 있는 부류는 반드시 체體를 함께하니, 이를 ‘진실로 깨끗하고 분명하게 빼어나며 텅 빈 듯이 꿰뚫고 신령하게 통하며 우뚝하니 홀로 그 무엇에도 의존치 않는 것’이라 한다.……온갖 덕을 통솔하여 완전히 갖추고 어둠을 밝혀 홀로 빛나는 것을 원각이라 하니 그 실체는 모두 일심이다. 이를 등지면 범부요 이를 따르면 성인이며, 이에 미혹하면 생사의 번뇌가 시작되고 이를 깨달으면 윤회가 그친다.(夫血氣之屬必有知, 凡有知者必同體, 所謂, ‘眞淨明妙, 虛徹靈通, 卓然而獨存者也.’……統衆德而大備, 爍群昏而獨照, 故曰圓覺, 其實皆一心也. 背之則凡, 順之則聖, 迷之則生死始, 悟之則輪迴息.)”
  90. 90)보통 ‘上無片瓦蓋頭, 下無寸土立足’이라는 어구로 쓰인다. 『死心悟新語錄』(X69, 228b13), “위로는 머리를 가릴 기와 한 장 없고 아래로는 발 디딜 땅 한 조각 없으니, 이 사람에게 집이 있는 것일까, 없는 것일까?(上無片瓦遮頭, 下無寸土立足, 此人有家無家?)”
  91. 91)이해해도 이럴~이럴 것이니 : 『碧巖錄』 19則(T48, 159a20)에도 같은 구절이 보인다.
  92. 92)덕산 연밀德山緣密의 말을 활용하여 한 말이다. 대체로는 『碧巖錄』의 내용과 유사하다. 『聯燈會要』 권26(X79, 227c17), “대중에게 말했다. ‘구지 화상은 문답할 일이 있기만 하면 그저 손가락 하나를 세웠다. 추울 때는 온 천하대지가 춥고 더울 때는 온 천하대지가 덥다.’(示衆云, ‘俱胝和尙, 凡有扣問, 只竪一指. 寒則普天普地寒, 熱則普天普地熱.’)”; 『碧巖錄』 19則(T48, 159a24), “원명이 말했다. ‘추울 때는 온 천하대지가 춥고 더울 때는 온 천하대지가 덥다.’ 산하대지는 아래로 황천에까지 이르고 삼라만상은 위로 하늘에 통한다. 말해 보라! 이것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기괴한가?(圓明道, ‘寒則普天普地寒, 熱則普天普地熱.’ 山河大地, 下徹黃泉;萬象森羅, 上通霄漢. 且道! 是什麽物, 得恁麽奇怪?)”
  93. 93)석가노자釋迦老子 : 석가모니부처님을 가리킨다. 이름 뒤에 붙이는 ‘노자’는 존칭의 뜻을 나타낸다. 황면노자黃面老子도 부처님에 대한 또 다른 칭호이며, 유마거사維摩居士를 유마노자維摩老子라 하거나, 염라대왕閻羅大王을 염라노자閻羅老子(『龐居士語錄』 X69, 131b11) 또는 염노자閻老子(『傳心法要』 T48, 383b21)라 부르거나, 조주 종심趙州從諗을 조주노자趙州老子(『正法眼藏』 X67, 584b16)라 하는 따위가 모두 같은 용법이다.
  94. 94)온몸에 눈을~수 없다 : 원오 극근圜悟克勤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圜悟語錄』 권1(T47, 717b1) 참조.
  95. 95)온몸에 눈을~사람이 누구인가 : 『大慧語錄』 권2(T47, 816c15), 『碧巖錄』 89則 「垂示」(T48, 213c13)의 내용과 흡사하다.
  96. 96)근본적인 가르침(宗敎) : ‘대교大敎’와 같은 말. 종지宗旨, 종승宗乘, 근본 진리를 뜻한다.
  97. 97)망아지는 마조 도일馬祖道一(709~788)을 가리킨다. 『馬祖語錄』(X69, 2b2), “처음에 육조 혜능慧能이 남악 회양南嶽懷讓에게 ‘인도의 반야다라삼장般若多羅三藏이 ≺그대의 문하에서 망아지 한 마리가 나와 세상 사람들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릴 것이다.≻라고 예언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마조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회양의 제자 여섯 명 중에서 오직 마조만이 심인心印을 친밀하게 전수받았다.(初六祖, 謂讓和尙云, ‘西天般若多羅讖, ≺汝足下出一馬駒, 蹋殺天下人.≻ 蓋謂師也.’ 讓弟子六人, 惟師密受心印.)”; 『景德傳燈錄』 권5 「南嶽懷讓傳」(T51, 240c16)에도 이와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98. 98)언어로 모두~건드리지 않으며 : ‘십성十成’은 완전한 것을 뜻한다. 말을 다하여 완전함을 얻으려 하면 오히려 그 참됨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선문에서는 말로써 다하려는 것을 꺼리고, 전체의 여덟아홉으로써 그 자체를 제시하는 것을 높이 산다. 『智證傳』(X63, 177a19), “조동종의 종지는 말로 다 표현하고자 하는 것을 꺼린다. 십분 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범하는 것이다. 범하는 것을 촉휘라고 한다.(洞上宗旨, 語忌十成. 十欲犯. 犯則謂之觸諱.)”
  99. 99)『曹洞五位顯訣』 권하 「汾陽昭廣智歌」(X63, 212c19)에서는 이것을 동상종洞上宗 곧 조동종曹洞宗의 종지로 서술하고 있다. “혹은 오위五位 혹은 삼로三路를 기틀에 따라 시설하여 자유자재로 자리를 바꾼다. 곧바로 눈앞의 현상을 건드리지 않는 것이 본래의 종지이며, 손을 펼쳐 깊은 종지에 통하면 부처도 없고 조사도 없다. 이상은 조동종을 설한 것이다.(或五位或三路, 施設隨機巧回互. 不觸當今是本宗, 展手通玄無佛祖. 右敍洞上宗.)” 오위는 정중편正中偏·편중정偏中正·정중래正中來·편중지偏中至·겸중도兼中到, 삼로는 조도鳥道·현로玄路·전수展手를 각각 가리킨다.
  100. 100)곧바로 보이기도~넘어선 선풍이다 : 분양 선소汾陽善昭가 각 종파의 선풍禪風을 찬미한 「十五家宗風歌」의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 이를 토대로 취암 수지翠巖守芝가 각각의 내용을 어느 한 종파에 배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汾陽語錄』 「廣智歌一十五家門風」(T47, 621a23~b28), 『禪林僧寶傳』 권16 「翠巖守芝傳」(X79, 525b20), 『大光明藏』 권하(X79, 720b24), 『聖箭堂述古』(X73, 453c17) 등에 수록되어 있다.
  101. 101)삼생육십겁三生六十劫 : 성문聲聞이 깨달을 때까지 필요한 수행 시기. 최고 빠른 자는 삼생三生이며, 가장 느린 자는 육십겁六十劫의 수행 기간을 경과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게 된다.
  102. 102)『老子』 39장, “옛날에 일을 얻음이여! 하늘은 일을 얻어 맑고 땅은 일을 얻어 안정되며, 신은 일을 얻어 신령하고 골짜기는 일을 얻어 가득 찼으며, 만물은 일을 얻어 생성하고 임금은 일을 얻어 천하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이들이 이른 것은 일로 인해서이다.(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其致之一也.)”
  103. 103)미세한 티끌 하나에 광대한 우주 세계의 움직임이 드러난다는 의미. ‘일즉만법一卽萬法, 만법즉일萬法卽一’이라는 화엄의 법계연기法界緣起 사상이 엿보이는 구절을 활용하여 화두로 제시한 말. 『碧巖錄』 19則(T48, 159a22), “티끌 하나가 일어나자마자 대지 전체가 그 안에 거두어지고, 꽃 한 송이 피자마자 세계 전체가 일어난다. 한 터럭 끝에 있는 사자가 백억 개의 터럭 끝에서 일시에 나타난다.(一塵纔起, 大地全收, 一花欲開, 世界便起. 一毛頭獅子, 百億毛頭現.)”
  104. 104)「흥성사 입원소설」 6번 상당 법문 및 주 92 참조.
  105. 105)『禪門拈頌說話』 552則(H5, 428b9), “무주 금화산 구지 화상은 어떤 물음에나 단지 한 손가락을 세워 들었다. 구지 화상이 입적에 즈음하여 대중에게 말하였다. ‘나는 천룡의 일지두선을 터득하여 한평생 써먹었지만 다함이 없었다.’ 말을 마치고는 입적하였다.(務州金華山俱胝和尙, 凡有詰問, 只竪一指. 師將順世, 謂衆曰, ‘吾得天龍一指頭禪, 一生用不盡.’ 言訖示滅.)” 이 본칙 설화에 공안을 처리하는 관점이 요약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손가락 끝에만 집착하여 전도된다면 흡사 제호를 독약으로 만들어 버리는 꼴과 같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현사는 ‘손가락을 비틀어 꺾어 버렸어야 했다.’라고 한 것이니,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하는 말을 듣고서 이를 진실이라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무지한 자이다. 그렇다면 구지는 무슨 까닭에 ‘한평생 써먹었지만 다함이 없었다.’라고 한 것일까? 대혜가 ‘허리에 엽전 십만 꿰미를 차고, 학을 타고 양주에 오른다.’라고 한 말을 모르는가!(若向指頭上着倒, 大似將醍醐作毒藥也. 故玄沙云, ‘拗折指頭.’ 如有人聞伊麽說以爲實, 然此正是無智人也. 俱胝何故, ‘一生用不盡.’ 不見大慧道, ‘腰纒十萬貫, 騎鶴上楊州.’)” 구지가 세워 들곤 했던 한 손가락에 무슨 깊은 의미나 있는 듯이 집착해서도 안 되지만 여기에서 떠나 무조건 부정해서도 안 된다는 데에 공안의 묘미가 있다. 또 본칙 설화의 평석처럼 ‘구지는 무슨 까닭에 한평생 써먹었지만 다함이 없었다라고 한 것일까?’라는 의문에도 공안의 요점이 담겨 있다. 다만 여기서 백운은 ‘하나(一)’라는 초점에 맞추어진 법문에 따라 구지의 이 기연을 든 것이다. 마지막 대혜의 말은 재물, 장수, 높은 지위를 탐하던 세 사람의 소망을 일거에 모두 성취하였다는 의미로서 백운이 이 기연을 든 이유가 잘 표현되어 있다. 다음 비마암의 기연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한 것이다.
  106. 106)비마암祕魔巖 상우常遇(817~888)가 끝이 둘로 갈라진 나무집게(木叉)를 가지고 있다가 찾아오는 학인들의 목을 잡고 상대를 점검했던 다음 기연을 변형하여 한 말이다. 『頌古聯珠通集』 권21(X65, 601b6), “오대산의 비마암祕魔巖 화상은 항상 나무집게 하나를 지니고 있다가 학인들이 찾아와서 절을 하는 순간 바로 목을 집으면서 말했다. ‘어떤 마구니가 그대를 출가하게 했으며, 어떤 마구니가 그대를 수행하도록 하였는가? 제대로 말해도 집어서 죽일 것이요, 말하지 못해도 집어서 죽일 것이다. 빨리 말하라, 빨리 말하라!’(五臺山祕魔巖和尙, 常持一木杈, 每見僧來禮拜, 卽杈却頸曰, ‘那箇魔魅, 敎汝出家, 那箇魔魅, 敎汝行脚? 道得也杈下死, 道不得也杈下死. 速道速道!’)” 이 공안의 핵심은 ‘제대로 말해도 집어서 죽일 것이요, 말하지 못해도 집어서 죽일 것’이라고 하여 상대를 진퇴양난의 지경으로 몰아넣고 있는 대목에 있으나, 여기서는 이러저러한 수단을 쓰지 않고 언제나 하나의 수단으로 점검했던 점에 백운이 초점을 맞춘 것이다.
  107. 107)진실한 교법은 일승법一乘法뿐이라는 뜻. 『法華經』 권1 「方便品」(T9, 8a17), “시방 불국토 가운데 오직 일승법이 있을 뿐, 이승도 없고 삼승도 없네. 부처의 방편설은 버릴지니, 단지 가명으로써 중생을 인도하신 것일 뿐이라네. 부처의 지혜 설하고자 모든 부처 세상에 출현하신 것이니, 오직 이 하나의 일만이 진실할 뿐 나머지 이승과 삼승은 참된 것이 아니라네.(十方佛土中, 唯有一乘法, 無二亦無三. 除佛方便說, 但以假名字, 引導於衆生. 說佛智慧故, 諸佛出於世, 唯此一事實, 餘二則非眞.)”
  108. 108)『壇經』(T48, 349c9), 『禪門拈頌說話』 110則(H5, 116c15) 참조.
  109. 109)이상의 평가는 법안 문익法眼文益의 제자인 천태 덕소天台德韶 선사의 말을 인용하여 약간 변형시킨 형태이다. 『景德傳燈錄』 권25 「天台德韶傳」(T51, 407c10), 『禪林僧寶傳』 권7(X79, 505c23), 『列祖提綱錄』 권11(X64, 82b3) 등에 수록되어 있다. 『景德傳燈錄』, 『列祖提綱錄』 등의 문장은 “바람과 깃발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의 마음이 망령되게 움직인다고 생각하지 마라.(莫道風幡不動, 汝心妄動.)”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고, 『禪林僧寶傳』에는 “어떤 이들은 바람과 깃발은 움직이지 않고 그대의 마음이 망령되게 움직인다고 말한다.(若言風幡不動, 汝心妄動.)”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110. 110)『景德傳燈錄』 권28 「法眼文益傳」(T51, 448b15) 참조. 법안 문익의 이 말을 자칫 오해하여 결국에는 ‘마음이 움직인 것’이라고 단정한다면 앞에서 열거한 갖가지 이해 분별로 회귀하는 격이다. 법안의 취지는 어떤 분별도 덧붙지 않고 자취도 남지 않은 상태에서 혜능의 이 말만이 오롯이 화두로 들려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111. 111)이 법문은 『碧巖錄』 6則(T48, 146b27~c5)의 내용, 그리고 “다만 위로는 우러러볼 부처가 있다.” 이하의 구절은 위의 구절에 이어서 같은 책 146c8~c14의 내용을 약간 변형한 것이다. 다만 문장에 약간의 첨가된 부분이 있고, 중간의 무업無業 선사의 말은 『碧巖錄』 87則(T48, 212a18)에 실린 내용을 끼워 넣은 것이다.
  112. 112)보리수菩提樹 : 부처님께서 마가다국의 부다가야에서 최정각을 성취한 장소에 있었던 나무. 불수佛樹·도수道樹라고도 한다.
  113. 113)최정각最正覺 : 최상의 궁극적 깨달음.
  114. 114)각수覺樹 :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루었으므로 ‘각수’라 한다. 보리수와 같은 말.
  115. 115)마갈제국摩竭提國 : 부처님 재세 시 인도 16대국 중 하나로, 비하르주州 남부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왕국. 마가다국摩伽陀國·마갈다국摩竭陀國(摩羯陀國) 등으로 음사하고, 무뇌해국無惱害國·무해국無害國 등으로 한역한다.
  116. 116)부처님께서 마가다국에서 성도한 후에 문을 닫고 삼칠일 동안 설법하지 않은 인연을 ‘마갈엄실摩竭掩室’ 또는 ‘마갈엄관摩竭掩關’이라 한다. 유마거사가 불이不二의 법에 대하여 침묵한 것을 나타내는 ‘두구비야杜口毘耶’와 함께 침묵을 대표하는 관용구로 쓰인다.
  117. 117)인용구는 『法華經』 권1(T9, 10a4 및 9c16)의 구절을 합한 것이며, ‘삼칠일 동안’이라 한 말은 경전에는 근거가 없는 선종의 상용구이다.
  118. 118)제이의문第二義門 : 근본에서 한 단계 떨어진 수준에서 설정하는 다양한 방편. 향상向上의 제일의문第一義門에서 향하向下의 차별문으로 내려와 아직 번뇌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그들의 수준에 맞도록 기준을 낮추어서 여러 가지 방편으로 그들의 미혹과 번뇌를 깨뜨리고 제거하여 깨달음의 도로 이끄는 것. 근본 자체인 제일의문第一義門·입리심담入理深談 등과는 상대되는 말이며, 제이기第二機·제이두第二頭·문정시설門庭施設·낙담초落草談·노파심절老婆心切 등과 같은 말이다.
  119. 119)사제四諦 : 고집멸도苦集滅道 네 가지의 진실불허眞實不虛한 진리. 사성제四聖諦·사진제四眞諦라고도 한다.
  120. 120)무업無業 선사의 말이다. 『景德傳燈錄』 권28 「大達無業傳」(T51, 444b15)에 유사한 의미와 비유가 있다. “부처님들은 세상에 나타나신 적이 없고, 또한 하나의 법도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다. 다만 병에 따라 처방을 베풀어 마침내 십이분교가 생기게 된 것일 뿐이니, 그것은 마치 달콤한 과일을 들고 쓴 오이와 바꾸어 준 것과 같았다.(諸佛不曾出世, 亦無一法與人. 但隨病施方, 遂有十二分敎, 如將蜜果, 換苦葫蘆.)”
  121. 121)『法華經』 권2 「信解品」(T9, 16b25) 이하에 큰 부자인 장자長者가 집을 나가 타국으로 돌아다니며 가난하게 사는 그의 아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스스로 비천한 모습을 하였다는 이야기에 기초한 말이다. 부처님은 아득히 먼 과거에 이미 성불했지만(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들이 지금 볼 수 있도록 보리수 아래에서 다시 성불하는 모습을 보여 준 것(迹)이라는 『法華經』의 구원성불久遠成佛 사상에 따른다. 『法華玄論』 권1(T34, 368a3), “석가모니부처님은 비록 아득한 과거에 이미 성불했지만 이 중생들의 근본적인 근기가 장차 성숙하여 실현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다시 성도하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 ‘한 성城에 머물며 귀한 신분의 옷을 벗고 낡고 더러운 옷을 입기에 이른다.’라고 한 것이니, 이것을 두고 본本을 숨기고 적迹을 드러내 보이신 은혜라 한다.(釋迦, 雖久已成佛, 爲此衆生大機將熟起故, 更示成道. 是故經云, ‘中止一城, 乃至脫珍御服, 著垢膩衣.’ 謂隱本示迹恩.)”
  122. 122)근본적인 한마디(一着子) : 바둑을 둘 때 승부를 결정짓는 결정적인 ‘한 수’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이것을 비유로 삼아 ‘근본적인 한마디 말’을 가리키고 있다.
  123. 123)녹야원에서 행한 최초의 법문 곧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부터 최후에 열반에 드셨던 장소인 발제하를 가리킨다. 발제하는 열반 장소인 사라쌍수 부근을 흐르는 갠지스강의 지류이다.
  124. 124)『大乘入楞伽經』 권4 「無常品」(T16, 608b15), “그때 대혜보살마하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어느 새벽에 최고의 정각을 이루었고 또 어느 밤에 열반에 들기까지 그사이에 어떠한 글자도 설하지 않으리라. 이미 설하지도 않았고, 또한 설하지도 않을 것이니 설하지 않아야 바로 불설佛說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존께서는 어떤 비밀한 뜻에 근거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겁니까?’(爾時, 大慧菩薩摩訶薩, 復白佛言, ‘世尊! 如世尊說, ≺我於某夜成最正覺, 乃至某夜當入涅槃, 於其中間, 不說一字, 亦不已說, 亦不當說, 不說, 是佛說.≻ 世尊依何密意, 作如是語?’)”; 『楞伽阿跋多羅寶經』 권3 「一切佛語心品」(T16, 498c17); 『入楞伽經』 권5 「佛心品」(T16, 541c2) 등 참조. 경전에서의 근거는 이러하나 이 뜻을 세존의 말씀으로 수용하고 전파하기 위함이 아니라 선종의 관점에서 주로 문제 제기의 수단으로 상용하는 구절이다. 『白雲守端廣錄』 권1(X69, 311b3), 『大慧語錄』 권15(T47, 873a16), 『開福道寧語錄』(X69, 329c7), 『兀菴普寧語錄』 권상(X71, 7a3) 등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백운은 이하에서도 이 문장을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未曾說一字)’는 데에 백운이 말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을 통해 부처의 교설은 단지 방편상 설해진 것일 뿐으로서 설할 법도 전해 들을 법도 없다는 취지를 전한다. 향상하는 도리 곧 일대사一大事(本分事)를 깨우치는 일은 참구하는 당사자에게 달려 있으며, 모든 분별상을 깨뜨렸을 때 비로소 자신만의 가풍을 드러낼 수 있다고 백운은 본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한 글자도 설한 적이 없다’는 말을 참구할 문제로 곳곳에서 제시하고 있다.
  125. 125)칼날에 터럭을 놓고 바람을 불어 잘려 나가는가로 칼날이 섰는지를 시험하는 것을 이른다. 이로부터 예리한 명검을 취모검吹毛劍이라 한다. 선 문헌에서는 어떤 말이나 행위도 받아들이지 않는 본분의 수단을 이로써 표현하기도 한다.
  126. 126)지팡이 아래로 2척쯤 내려간 옆에 작은 가지를 휘어지게 하여 물을 건널 때 그 작은 가지의 위치로 물의 깊이를 측정했다고 한다. 『禪林象器箋』 권19 物類上 「探水」(禪藏, p.1502), “도충이 말하였다. 주장자 아래 2척쯤에 별도의 작은 가지가 있는데 구부려서 주장자 본체를 휘감아 아래로 늘어뜨린 것을 ‘탐수探水’라고 한다. 길을 가다 물을 만나면 먼저 주장자를 물속에 넣어서 시험해 보는데 물이 작은 가지의 위나 아래에 이르는 것으로 물의 깊이를 측량한 후에 건넜다. 그런 까닭에 ‘탐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碧巖錄』에 ‘옥의 가치는 불로 시험하고, 금의 단단함은 돌로 시험하고, 칼의 예리함은 털로 시험하고, 물의 깊이는 지팡이로 시험한다.’고 한 말이 바로 이것이다.……그러나 『祖庭事苑』에 따르면 단지 약한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물의 깊이를 재는 용도는 없었던 듯하다.(忠曰. 拄杖下頭可二尺, 別存小枝, 撓纏繞本榦, 向下, 名爲探水. 蓋路行遇水, 則先下杖驗之, 水到小枝上下, 而量其深淺, 然後敢渡, 故名探水. 碧巖錄云, ‘玉將火試, 金將石試, 劍將毛試, 水將杖試.’ 止此, 是也.……依此, 只爲護細弱也, 無復探水之用.)”
  127. 127)『碧巖錄』 23則(T48, 164a25) 참조.
  128. 128)납승衲僧 : 납자衲子라고도 한다. 납의衲衣를 입은 스님이라는 말. 납의는 누덕누덕 기운 옷으로, 낡은 헝겊을 모아 빨아서 바늘로 기운 옷이다. 조사선에서는 본분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수행자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129. 129)『應菴曇華語錄』 권7(X69, 536b8), “도인의 마음은 그 곧음이 현악기 줄과 같고 어디에서나 하늘 끝까지라도 닿을 듯한 기세의 장검과 같으니, 세간의 부귀·교만·사치나 오욕과 팔풍 등이 들어설 문이 없고, 명리·시비나 사생·구유도 붙들어 가두어 두지 못한다.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다면 이것이 바로 황면노자의 목숨 그 자체를 얻은 시절인 것이다.(道人之心, 其直如絃, 在在處處, 若倚天長劒, 世間富貴驕奢, 五欲八風, 入作無門, 名利是非, 四生九有, 籠罩不住. 得到這田地, 便是取黃面老子命根時節也.)”; 『禪家龜鑑』(H7, 636a18), “모든 부처님께서는 활등처럼 설하셨고 조사들은 활시위처럼 설하셨다.(諸佛說弓, 祖師說絃.)”
  130. 130)『圜悟語錄』 권11(T47, 765c20), “이것이 바로 납승가이다. 손을 내밀어 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하며 사람들에게 일상의 수행 방법을 가르쳐 그들 스스로 깨닫고 실천할 수 있도록 하며, 온갖 성인이 그를 찾아도 찾지 못하고 온갖 천신들이 꽃을 바치려 해도 바칠 길이 없으며 마구니와 외도가 몰래 엿보려 해도 엿보지 못하도록 한다. 두루 돌아다니다 돌아와도 시방 어디에도 장애가 없으며 찰나마다 두루 잘 대응하여 과거와 미래라는 대립적 견해도 끊었다.(此猶是衲僧家. 垂手應機爲人邊行履, 若使他獨照獨運, 乃至千聖覓他不著, 諸天捧華無路, 魔外潛觀不見. 周旋往返, 十方無礙, 一念普應, 前後際斷.)”
  131. 131)여기에는 암두와 약산의 문답으로 실려 있으나, 『景德傳燈錄』 권14 「藥山惟儼傳」(T51, 311b16), 『禪門拈頌說話』 325則(H5, 281b24) 등에는 약산과 석두 희천石頭希遷의 문답으로 되어 있다.
  132. 132)『禪門拈頌說話』 325則(H5, 282c1) 본칙 설화에서는 이 말에 대해 “애써 하지도 않고(無爲) 더 이상 할 일도 없는(無事) 경계에 의지하려 하다가는 넘어지니 그것을 고려하여 대응한 말이다.(無爲無事處靠到, 看他支對也.)”라고 평석하였다.
  133. 133)『景德傳燈錄』 권14 「藥山惟儼傳」(T51, 311b24)에는 “從來共住不知名, 任運相將只麽行. 自古上賢猶不識, 造次凡流豈可明.”과 같이 실려 있다.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도 누군지 알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하고도 이름을 알지 못한다.(相逢不相識, 共語不知名.)’는 상용구의 맥락과 통한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일 뿐 덧붙일 필요가 전혀 없는 평온무사한 소식을 뜻하기도 하고,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현상임에도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안목이 없음을 뜻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전자의 뜻에 가깝다. 『臨濟語錄』(T47, 501c13), “차라리 아무 일 없어서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도 누군지 알지 못하고 함께 이야기 나누었으나 이름도 알지 못함만 못하다.(不如無事, 相逢不相識, 共語不知名.)”
  134. 134)보통 향상일로向上一路와 짝을 이루어 ‘향상하는 한길은 어떤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向上一路, 千聖不傳.)’는 구절로 쓰인다. 부처와 조사가 스스로 깨달은 경지(自證)는 말이나 문자로는 미칠 수 없는 것이므로 누구도 이것을 전할 수 없다는 뜻으로 실참실구實參實究해야 함을 말한다. 『汾陽無德語錄』 권상(T47, 601c24), “학인이 물었다. ‘향상하는 유일한 길은 어떤 것입니까?’ ‘어떤 성인도 전하지 못한다.’(問, ‘如何是向上一路?’ 師云, ‘千聖不傳.’)”; 『楊岐方會語錄』(T47, 644b3), “향상하는 유일한 길은 어떤 성인도 전하지 못하거늘, 배우는 이들이 몸을 괴롭혀 가며 애쓰는 꼴이 마치 원숭이가 물에 비친 달그림자를 잡으려는 짓과 같다.(向上一路, 千聖不傳, 學者勞形, 如猿捉影.)”
  135. 135)두 곳에서의 문답이 섞여 제시되어 있다. 『雲門廣錄』 권상(T47, 545c4), “ ‘향상하는 유일한 길은 어떤 것입니까?’ ‘9 곱하기 9는 81이다.’(問, ‘如何是向上一路?’ 師云, ‘九九八十一.’)”; 같은 책, 권중(T47, 558a8), “동산洞山이 ‘부처의 경지 이상으로 향상하는 일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 말에 대해 학인이 물었다. ‘부처의 경지 이상으로 향상하는 일이란 어떤 것입니까?’ 동산이 말했다. ‘부처의 경지도 아니다.’ 운문은 이 말에 대하여 ‘이름을 붙일 수도 없고 형상으로 나타낼 수도 없다. 그런 까닭에 부처의 경지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擧洞山云, ‘須知有佛向上事.’ 僧問, ‘如何是佛向上事?’ 山云, ‘非佛.’ 師云, ‘名不得狀不得. 所以言非.’)”
  136. 136)불성은 현상의 저편에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에 드러나 있는 구체적인 대상들 속에 있다는 『涅槃經』의 설에 기초한 말이다. 곧 ‘시절형색時節形色을 관찰해야 한다.’라고 한 말에 근거한다. 『大般涅槃經』 권26(T12, 777a3), “우유 중에 수락酥酪이 있는 것과 같이 중생과 불성의 관계 또한 이와 같다. 불성을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시절의 형색을 관찰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진실로 허망하지 않다.’라고 설한다.(乳中有酪, 衆生佛性, 亦復如是. 欲見佛性, 應當觀察時節形色. 是故我說, 一切衆生, 悉有佛性, 實不虛妄.)”
  137. 137)이상의 구절은 조사선의 상용구로서 『圜悟語錄』 권8(T47, 749b5), 『大慧語錄』 권6(T47, 835c25), 『續傳燈錄』 권31 「鳳棲慧觀傳」(T51, 684b22), 『嘉泰普燈錄』 권15 「圓通秀章」(X79, 383a5) 등에 나오며 대체로 법문을 시작하는 도입부에 나온다.
  138. 138)이 부분은 『禪林僧寶傳』 권2 「雲門文偃傳」(X79, 496b2)의 “如月臨衆水, 波波頓見而月不分. 如春行萬國, 處處同至而春無跡. 蓋其妙處, 不可得而名狀.”이라는 구절을 따르고 있다. 문장의 앞뒤 순서가 다를 뿐 내용은 거의 같다. 이것은 저자 혜홍惠洪이 운문 문언雲門文偃을 찬미한 말이다.
  139. 139)부끄러움을 무릅쓰고(不惜眉毛) : 눈썹을 아끼지 않는다는 말. 불법을 잘못 이해하여 말하면 눈썹과 수염이 모두 떨어진다는 설에 따른다. 잘못 말하거나 보잘것없는 견해를 담은 한마디일지라도 피력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또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혹은 부끄러움을 무릅쓴다는 말로 결정적인 말을 할 때 겸손하게 표현하는 상용구이다.
  140. 140)『從容錄』 54則(T48, 262a12)에 나오는 구절.
  141. 141)연등불然燈佛 : 과거세에 석가모니불이 인행할 때 수기를 주었던 부처님. 제화갈라提和竭羅·제원갈提洹竭 등으로 음사하고, 등광여래燈光如來·보광불普光佛·정광불錠光佛 등으로 한역한다.
  142. 142)『大乘本生心地觀經』 권1(T3, 295c18)에 나오는 인연담을 화두로 제시한 법문이다. “과거세 (부처님이) 마납선인摩納仙人이었던 시기에 머리털을 풀어 헤쳐 연등불께 공양을 올렸다. 이러한 정진의 인연 때문에 8겁 동안 생사의 바다를 뛰어넘었다.(昔爲摩納仙人時, 布髮供養然燈佛. 以是精進因緣故, 八劫超於生死海.)” 『禪門拈頌說話』 26則(H5, 38a24)에도 실려 있다. 이 책 본칙 설화에서는 “머리털은 미세한 만행萬行을 비유한 말이고, 진흙탕 길은 번뇌의 음습하고 탁한 기운을 비유한 말이다. 여래는 수행하는 단계에서 미세한 만행을 쌓았기 때문에 번뇌의 음습하고 탁한 기운을 덮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공덕을 드러내고자 머리털을 풀어 헤쳐 진흙탕 길을 덮었던 것이다. 번뇌의 음습하고 탁한 기운이 맑아지자 여래의 궁전이 그 자리에 나타났다. 이러한 뜻을 끌어와서 공안의 뜻으로 삼았다.(髮喩微細萬行, 泥喩煩惱濕濁. 如來因地積集微細萬行, 能掩於煩惱濕濁. 欲表如是功德故, 布髮掩泥. 煩惱濕濁旣淨, 如來宮殿, 當處現前. 引以爲話義.)”라고 평하였다.
  143. 143)『楞嚴經』 권3(T19, 119b15) 참조. 『首楞嚴義疏注經』 권3(T39, 872c26), “앞의 구절은 부처님 교화와 같으니 위로는 불도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자비와 지혜라는 두 마음이다. 그 하나하나에서 묘각妙覺의 밝은 본성을 먼저 깨달아 깊은 이치로부터 생겨나므로 ‘깊은 마음’이라 한다. 이 두 마음으로 티끌처럼 무수한 불국토에서 펼치는 부처님의 교화를 전승하여 따르니 그것과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으므로 ‘받든다’고 한다. 그다음 구절은 은혜에 대한 보답을 결론지었다.(上句, 同佛化, 上求下化, 悲智二心. 一一先悟妙覺明性, 從深理生, 故名深心. 以此二心, 承順塵剎諸佛化行, 無二無別, 故名爲奉. 下句結報恩.)”
  144. 144)『入楞伽經』 권7 「無常品」(T16, 554c3) 참조.
  145. 145)『景德傳燈錄』 권12 「道巘傳」(T51, 297a12) 참조.
  146. 146)천태 덕소天台德韶(891~972) : 속성은 진陳씨. 법안 문익法眼文益의 법을 이어받았다.
  147. 147)『馬祖語錄』(X69, 3b18), “자성은 다르지 않으나 작용이 같지 않을 뿐이다. 미혹한 것이 업식이요, 깨달은 것이 지혜이다. 이理를 따르는 것이 깨달음이요, 사事를 따르는 것이 미혹이다. 미혹하다는 것은 자기의 본심이 미혹한 것이요, 깨달았다는 것은 자기의 본성을 깨달은 것이다. 한 번 깨달으면 영원히 깨달아 더 이상 미혹되지 않으니, 마치 해가 뜰 때 어두움과 함께하지 않듯이 지혜라는 일출은 번뇌라는 어두움과 함께하지 않는다.(性無有異, 用則不同. 在迷爲識, 在悟爲智. 順理爲悟, 順事爲迷. 迷卽迷自家本心, 悟卽悟自家本性. 一悟永悟, 不復更迷, 如日出時不合於暗, 智慧日出不與煩惱暗俱.)”
  148. 148)『修心訣』(T48, 1008b10), “자성문이란 다음과 같다. ‘고요함과 앎(寂知)을 자재하게 운용하면서 원래 스스로 조작하는 일이 없는 것(無爲)이다. 티끌만큼도 대상으로 조작하는 일이 없으니 어찌 대상을 쓸어 없애는 공을 들일 필요가 있겠으며, 한 찰나에도 망정을 일으킴이 없으니 망상의 대상을 잊는 힘도 빌릴 필요가 없다.’ 판정한다. ‘이것은 돈문이며, 자성의 정과 혜에서 벗어나지 않고 평등하게 지니는 것(等持)이다.’(自性門則曰, ‘任運寂知, 元自無爲. 絕一塵而作對, 何勞遣蕩之功, 無一念而生情, 不假忘緣之力.’ 判云, ‘此是頓門, 箇者不離自性定慧等持也.’)”
  149. 149)이 구절 다음에 두 구절이 생략되었다. 『景德傳燈錄』 권11 「香嚴智閑傳」(T51, 284a14), “움직이는 가운데 옛 도(古路)를 드날리며, 고요한 기틀에 떨어지지 않는다네.(動容揚古路, 不墮悄然機.)”
  150. 150)삼십삼천三十三天 : 육욕천六欲天의 하나로서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하늘. 도리천忉利天이라고도 한다.
  151. 151)동해의 잉어(東海鯉魚) : 선禪의 세계에서 큰 역량을 펼치는 선사禪師를 비유한다. 곧 탁월한 법력을 가지고 자신의 선기禪機를 걸림 없이 발휘하는 선사를 말한다.
  152. 152)『雲門廣錄』 권중(T47, 555a3 및 558b23) 두 곳에 실린 내용을 합한 것이다.
  153. 153)초명蟭螟 : 전설상의 미세한 벌레의 일종. 모기의 눈썹에 산다고 하며, 초명焦螟이라고도 쓴다. 『抱朴子』 「刺驕」, “초명은 모기 눈썹에 둥지를 틀고 살면서 하늘을 뒤덮는 대붕大鵬을 비웃는다.(蟭螟屯蚊眉之中, 而笑彌天之大鵬.)”
  154. 154)마혜수라摩醯首羅 : 대자재천大自在天이라 한역한다. 일체 만물의 주재자. 그가 거처하는 색구경천色究竟天이란 최상품의 사선자四禪者가 태어나는 곳으로 색계色界에서 가장 뛰어난 과보果報이다.
  155. 155)성수 법안聖壽法晏의 말. 『續傳燈錄』 권19 「聖壽法晏傳」(T51, 593c19) 참조. 이상의 법문은 그 전체적인 형식과 취지 그리고 비유가 다음의 법문과 유사하다. 『景德傳燈錄』 권26 「光慶遇安傳」(T51, 424c1), “고금에 걸쳐 종지를 전승한 자들이 모두들 ‘먼지가 우물 밑에서 일어나고, 물결이 산꼭대기에서 친다. 열매를 맺는 허공 꽃이요, 아기를 낳는 석녀로다.’라고 한다. 어떻게 이 말을 이해할 것인가? 소리와 함께 현상을 실어 보내고, 사물 존재에 의지하여 마음을 드러내며, 구절 안에 날카로운 뜻을 감추고, 소리로 나오기 이전에 온전히 드러낸 것일까? 이름만 있고 실체는 없는 것을 특별나게 주장하고 심오하게 이야기한 것일까? 상좌가 스스로 이해한다면 옛사람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이미 이와 같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상좌여, 이해하고자 하는가? 다만 진흙 소가 걸어가는 곳에서 아지랑이가 물결치고 목마가 울부짖을 때 허공 꽃이 그림자를 떨어뜨리는 광경을 살펴보라. 성인이나 범부나 이와 같으니, 그 도리는 분명하다.(古今相承皆云, ‘塵生井底, 浪起山頭. 結子空華, 生兒石女.’ 且作麽生會? 莫是和聲送事, 就物呈心, 句裏藏鋒, 聲前全露麽? 莫是有名無體, 異唱玄譚麽? 上座自會, 卽得古人意旨. 不然, 旣恁麽會不得, 合作麽生會? 上座, 欲得會麽? 但看泥牛行處, 陽焰翻波, 木馬嘶時, 空華墜影. 聖凡如此, 道理分明.)”
  156. 156)내 눈썹이~남아 있는지(眉毛有幾莖) : ‘눈썹이 몇 가닥이나 남아 있을까?’라고 반문하는 말. 불법의 진실을 잘못 이해하여 말하거나 비방하면 눈썹과 수염이 다 떨어진다는 설에 근거하여 던지는 선어禪語. 진실에 어긋나는 언행을 보고서 비판조로 하는 말. 여기서는 백운이 한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헤아려 보라는 뜻이다.
  157. 157)『信心銘』(T48, 376b24), “둥근 그것은 허공과도 같아,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다네. 취하거나 버리는 간택 따라, 진실 그대로 드러나지 않네.(圓同太虛, 無欠無餘. 良由取捨, 所以不如.)”
  158. 158)서록 본선瑞鹿本先의 다음 법문과 비유나 취지 면에서 유사하다. 『聯燈會要』 권28 「瑞鹿本先章」(X79, 244a22), “깊고 빽빽한 숲과 새들의 지저귐, 푸른 계곡과 물고기의 도약, 조각구름 펼쳐진 하늘, 폭포 소리의 울림! 그대들은 이렇게 수많은 경계의 현상들이 그대들에게 깨달음의 실마리를 보여 준다는 사실을 아는가? 만약 안다면 참구하기 아주 좋을 것이다.(幽林鳥叫, 碧澗魚跳, 雲片展張, 瀑聲嗚咽! 你等還知許多境象, 示汝入處麽? 若也知得, 不妨參取好.)”
  159. 159)이 부분은 천태 덕소天台德韶의 다음 법문을 재구성한 것이다. 『景德傳燈錄』 권25 「天台德韶傳」(T51, 409c27), “원숭이의 울음소리와 새의 지저귐, 그리고 초목과 총림에 이르기까지 항상 상좌들이 기틀을 발현하는 데 도움을 주며 한순간도 상좌들을 위해 주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와 같이 기특한 점이 있는 것이다. 안타깝다, 여러 상좌들이여! 모두들 이 뜻을 궁구한다면 불법이 영원히 세간에 머물도록 함으로써 인간계·천계의 수명과 국왕의 안락과 무사를 더욱 늘리게 될 것이다.(乃至猿啼鳥叫, 草木叢林, 常助上座發機, 未有一時, 不爲上座, 有如是奇特處. 可惜許, 諸上座! 大家究取, 令法久住世間, 增益人天壽命, 國王安樂無事.)”
  160. 160)제바달다提婆達多 : 조달調達이라고도 한다. 부처님 재세 시, 부처님께 대적하고 악행을 저지른 비구. 부처님에게서 교단을 빼앗아 장악하고자 하는 욕심을 품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부처님을 해치는 악행을 범하였다. 특히 부처님께서 기사굴산에 계실 때 바위를 굴려 떨어뜨려 그 파편으로 부처님 몸에 상처를 입혀 피를 흘리게 한 죄(出佛身血), 코끼리에게 술을 먹여 사나워진 코끼리로 하여금 부처님을 해치게 하려고 한 죄(放狂象), 제바달다의 죄를 꾸짖는 연화색비구니를 때려죽인 죄(殺蓮華色比丘尼), 부처님의 수행을 모욕하고 승단의 파괴를 꾀한 죄(破和合僧), 독약을 바른 자신의 열 손톱으로 부처님 발을 찔러 부처님을 해하고자 한 죄(十爪毒手) 등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면적으로 거역하고 해친 오역죄五逆罪를 저지른 것으로 유명하다.
  161. 161)삼선천三禪天 : 색계色界 사선천四禪天 중에서 제3천. 심사尋思가 없는 즐거움을 누린다.
  162. 162)중생을 이끄는 위대한 스승(大導師) : 인천人天의 중생을 열반과 보리로 이끄는 스승.
  163. 163)『禪門拈頌說話』 17則(H5, 31a9), 『宗門拈古彙集』 권2(X66, 13b14), 『禪林類聚』 권12(X67, 77a23) 등의 공안집公案集에 수록되어 있다. 부처님의 몸에서 피가 나게 하는 등의 오역죄를 지어 지옥에 떨어진 내용은 『大方便佛報恩經』 권4(T3, 148b8) 등에 전하지만, 이 문답은 그것을 소재로 하여 하나의 화두로 창안된 것이다. 『禪門拈頌說話』 17則 본칙 설화(H5, 31b2)에서는 “이 공안의 대의는 선이라면 (부처님이나 조달이나 양편 모두) 속속들이 선이고 악이라면 (양편 모두) 속속들이 악하여, 선을 벗어나서 악이 없고 악을 벗어나서 선도 없다는 것이다.(此話大義, 善到底, 惡到底, 善外無惡, 惡外無善.)”라고 평석하였다.
  164. 164)『華嚴經』 권19(T10, 102b1) 참조.
  165. 165)이 공안에 대한 백운 경한의 평가는 대혜 종고大慧宗杲의 그것과 유사하다. 『大慧語錄』 권7(T47, 839c12), “벗어날 일이 없고 또한 떨어질 일이 없다면 무엇을 석가노자라 하고, 무엇을 제바달다라 하며, 무엇을 지옥이라 할 것인가? 잘 알겠는가? 스스로 병甁을 들고 막걸리를 사러 가더니, 도리어 적삼을 입고 나타나 주인 행세를 하는구나.(旣無出分, 又無入分, 喚甚麽作釋迦老子, 喚甚麽作提婆達多, 喚甚麽作地獄? 還委悉麽? 自攜甁去沽村酒, 卻著衫來作主人.)”
  166. 166)이 상당 법문은 『黃龍慧南語錄』(T47, 631c7~23)의 내용과 흡사하다.
  167. 167)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하고(日用而不知) : 매일같이 쓰고 있으면서도 알지 못한다는 말. 자기가 가지고 노는 물건의 이름도 모른다는 뜻의 농물부지명弄物不知名이라는 말과 같다. 자신의 본분 또는 본래 갖추고 있는 불성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뜻한다. 『周易』 「繫辭傳」 上에서 비롯한 말. “일음일양을 도라 하니, 그것을 계속함이 선이요, 그것을 갖추고 있는 것이 성이다. 어진 이는 이를 보고 인이라 하고, 지혜로운 이는 이를 보고 지라 하지만, 백성들은 날마다 쓰면서도 알지 못한다.(一陰一陽之謂道, 繼之者善也, 成之者性也. 仁者見之, 謂之仁;知者見之, 謂之知;百姓日用而不知.)”
  168. 168)유정의 중생은~달라졌기 때문에 : 『新華嚴經論』 권1(T36, 721a6) 참조.
  169. 169)오성五性 : 중생의 근기를 다섯으로 나눈 무종성無種性(闡提性), 부정성不定性, 성문성聲聞性, 연각성緣覺性, 보살성菩薩性.
  170. 170)『圓覺經』(T17, 921c23), “이 경을 ‘돈교대승頓敎大乘’이라 한다. 단박에 깨달을 수 있는 근기의 중생은 이 경에서 깨우치고 또한 점차로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어 가는 일체중생(一切群品)도 받아들여 제도하리니, 비유컨대 큰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사양치 않아 모기와 등에와 아수라에 이르기까지 그 물을 마시는 자들 모두 충족하게 하는 것과 같다.(是經名爲頓敎大乘. 頓機衆生, 從此開悟, 亦攝漸修一切群品, 譬如大海不讓小流, 乃至蚊虻及阿修羅, 飲其水者, 皆得充滿.)”; 『圓覺經略疏』 권하(T39, 575b20), “ ‘비유컨대 큰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사양치 않아.’라고 한 말은 점교는 돈교와 괴리가 있으므로 돈문은 반드시 점문을 갖추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기와 등에’는 이승이 받아서 간직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고, ‘아수라’는 보살이 받아서 간직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譬如大海不讓小流, 謂漸敎則乖頓敎, 頓門必具漸門. 乃至蚊虻, 此喻二乘受持, 及阿脩羅, 此喻菩薩受持.)”
  171. 171)『法華經』 권1 「方便品」(T9, 7a20), “이 법은 사량으로 분별하여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 제불만이 알 수 있다.(是法非思量分別之所能解, 唯有諸佛乃能知之.)”
  172. 172)부처님 형상을~거두어들이는 것 : 『圓覺經』의 내용을 인용하여 설한 것이다. 『圓覺經』(T17, 921a15),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라면 마땅히 바른 생각으로 대해야 할 것이요, 부처님께서 입멸하신 후라면 형상을 모셔 놓고 마음을 그곳에 두고서 눈은 실제 형상을 본다고 상상하고 바른 기억을 떠올리며 여래께서 세상에 계시던 때와 같이 한다. 갖가지 깃발과 꽃을 달고 삼칠일 동안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머리를 조아리고 명호를 부르며 자비를 구하여 참회를 구한다. 좋은 경계를 만나 마음이 경쾌하고 평안해지리니 삼칠일이 지난 뒤에도 한결같이 상념을 거두어들여야 한다.(若佛現在, 當正思惟, 若佛滅後, 施設形像, 心存目想, 生正憶念, 還同如來常住之日. 懸諸幡花, 經三七日, 稽首十方諸佛, 名字求哀懺悔. 遇善境界, 得心輕安, 過三七日, 一向攝念.)”
  173. 173)수월도량水月道場 : 달이 모든 물에 평등하게 비치듯이 평등한 불도가 실현된 도량 또는 모든 곳에 구현되어 있는 도량을 뜻하기도 하고, 물에 비친 달처럼 실체가 없는 허망한 도량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여기서는 후자의 뜻에 가깝게 쓴 것으로 보인다.
  174. 174)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대중(影響之衆) : 대고중對告衆과 같은 의미. 설법을 듣는 상대. 여기서는 앞의 비유와 마찬가지로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일시적으로 생겼다 사라지며 실체가 없는 대상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175. 175)공화만행空花萬行 : 공화는 눈병 등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허공의 꽃. 물에 비친 달(水月)이나 거울에 비친 영상(鏡像) 등과 같이 실체가 없는 존재를 비유한다. 만행은 팔만사천의 세부적인 행위를 뜻하며, 이 또한 실체가 없는 행위로서 이것에 집착해서도 안 된다.
  176. 176)꿈속에서 불사를 성취하며(夢中佛事) : 꿈속에서도 생시와 마찬가지로 일대사를 잊지 않는 것을 말한다.
  177. 177)다음 『萬善同歸集』에 실린 송을 인용하였다. 『萬善同歸集』 권3(T48, 992c25), “수월도량을 건립하고, 성공性空 세계를 장엄하며, 허깨비 같은 공양구를 펼쳐 놓고,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이 여래를 따르며 공양 올리노라.……거울에 비친 마구니를 항복시키고, 꿈속에서도 불사를 크게 행하며, 한결같이 중생을 널리 제도하여, 적멸의 보리를 함께 증득하리라.(建立水月道場, 莊嚴性空世界, 羅列幻化供具, 供養影響如來.……降伏鏡像魔軍, 大作夢中佛事, 廣度如化含識, 同證寂滅菩提.)”
  178. 178)홍주 수료洪州水潦가 마조를 친견하여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의 뜻을 물었다가 마조에게 가슴을 걷어차이고는 박장대소하며 한 말 가운데 나온다. 『景德傳燈錄』 「洪州水潦傳」(T51, 262c10), “대단히 신기하도다! 무수한 삼매와 한량없이 미묘한 뜻을 단지 한 터럭 끝에서 바로 그 근원을 알아차렸네.(大奇! 百千三昧, 無量妙義, 只向一毛頭上, 便識得根原去.)”
  179. 179)『景德傳燈錄』 권4 「牛頭法融傳」(T51, 227a18), “무수히 많은 법문 어느 것이나 마음으로 귀착되고,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는 미묘한 덕이 모두 마음의 근원에 의존한다. 일체의 계문戒門·정문定門·혜문慧門과 신통 변화를 본래 스스로 갖추고 있으니, 너의 마음을 떠나 있지 않다. 온갖 번뇌와 업장이 본래 공적하고 갖가지 인연과 과보가 모두 몽환과 같으니, 벗어나야 할 삼계도 없고 구해야 할 보리도 없다.(夫百千法門, 同歸方寸, 河沙妙德, 總在心源. 一切戒門定門慧門, 神通變化, 悉自具足, 不離汝心. 一切煩惱業障, 本來空寂, 一切因果, 皆如夢幻, 無三界可出, 無菩提可求.)”; 『眞心直說』(T48, 1003a15) 참조.
  180. 180)『圓覺經』(T17, 916a11) 참조.
  181. 181)『大慧語錄』 권26(T47, 921b5), “이미 일어날 때를 알고 있다면 바로 이 지해知解가 해탈의 장인 것이요, 생사윤회를 벗어날 경계인 것입니다. 이미 해탈의 장이요 생사윤회에서 벗어날 경계에 있다면 지知도 해解도 그 자리에서 적멸할 것이며, 지와 해가 이미 적멸하다면 지와 해를 알고 있는 당사자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요, 보리와 열반 그리고 진여와 불성도 적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다시 더 이상 무엇에 장애를 입을 것이며 또 어디에서 깨달음을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旣識得起處, 卽此知解, 便是解脫之場, 便是出生死處. 旣是解脫之場, 出生死處, 則知底解底, 當體寂滅, 知底解底旣寂滅, 能知知解者, 不可不寂滅, 菩提涅槃眞如佛性, 不可不寂滅, 更有何物可障, 更向何處求悟入!)”
  182. 182)보지공寶志公(418~514) : 남조南朝 때 선사. 보지寶誌(保志·保誌) 또는 지공誌公·보공寶公이라고도 한다. 양 무제가 달마와의 문답에서 달마의 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보낸 뒤에 양 무제에게 “달마는 관음대사로서 폐하에게 부처님의 심인을 전하였다.”라고 일러 준 일화가 전한다. 시호는 광제대사廣濟大師이다.
  183. 183)사대思大 : 천태종의 제2조인 남악 혜사南岳慧思(515~577)를 달리 부르는 명칭.
  184. 184)하늘만 쳐다보고 있으면(目視雲漢) : 방편의 교화를 펼치지 않고 오로지 본분의 고원한 경계만을 지키며 부처도 조사도 허용하지 않는 입장 또는 그러한 사람을 표현한 말.
  185. 185)이 문답에 대해서는 『景德傳燈錄』 권27(T51, 435a14) 참조. 『從容錄』 73則(T48, 256c5), “사대는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나의 한입에 남김없이 삼켰으니 어디에 또다시 제도할 중생이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는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이 틀어막는 수법이니, 범부의 길도 성인의 길도 모두 끊어진 경계를 나타낸다.(思大云, ‘三世諸佛, 被我一口吞盡, 何處更有衆生可度!’ 此水洩不通, 凡聖路絕也.)”
  186. 186)섣달도 다 지나가는데(年窮臘盡) : 12월의 마지막 날. 납臘은 세歲와 같은 뜻.
  187. 187)분세分歲 : 섣달그믐에 한 해의 마지막 날을 기념하여 치르는 향연의 일종.
  188. 188)노지백우露地白牛 : 각자의 본래면목을 상징한다. 원래 『法華經』 권2 「譬喩品」(T9, 12c13)에서 일승一乘의 묘법妙法을 백우白牛에 비유한 데서 한 점 번뇌의 더러움도 없는 청정한 경계를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노지露地는 사방이 막히지 않고 훤히 드러난 안온한 곳을 이르는 말로서 장애가 사라진 불지佛地를 비유한다.
  189. 189)북선 지현北禪智賢의 분세分歲 일화를 화두로 제기한 상당 법문이다. 『頌古聯珠通集』 권37(X65, 709c8), 『建中靖國續燈錄』 권3 「北禪智賢章」(X78, 657b9) 등에 전한다.
  190. 190)시골 마을에서는~춤출 뿐(村家社舞) : 촌가사음村家社飮·신가사무神歌社舞라고도 한다. 농사짓는 사람들이 풍년을 기리며 사전社殿에 모여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으로 태평 무사함을 상징한다.
  191. 191)천동 정각天童正覺의 송을 인용하였다. 『宏智廣錄』 권2(T48, 18c29) 참조.
  192. 192)『肇論』 「物不遷論」(T45, 151a8) 참조. 『肇論疏』 권중(X54, 72b20), “ ‘삶과 죽음이 번갈아 사라졌다 나타나고, 추운 계절과 더운 계절이 번갈아 자리를 바꾼다.’라고 한 말은 생사라는 변화가 겨울과 여름이 때에 맞게 운행하는 현상과 같다는 뜻이다. ‘무엇이건 항상 옮겨 다닌다는 관념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보통의 생각’이라 한 말을 푼다. 모든 법은 유동하지만 무위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생각은 보통 이하의 사람들도 누구나 알고 있는 관념이라는 뜻이다. 이상으로써 종지를 표방하였다.(夫生死交謝, 寒暑迭遷者, 生死之變, 猶冬夏而時行也. 有物流動, 人之常情者, 唯有法流動, 不及無爲者, 中人以下, 皆共知之. 此是標宗也.)”
  193. 193)이 단락까지에서 승조僧肇의 말을 제외한 부분과 이하에서 주장자를 잡고서 “터럭만큼의 간격도 없다.”라고 한 부분까지와 마지막에 “섣달그믐 밤도~누가 알랴!”라고 한 말은 『虛舟普度語錄』(X71, 92b12~19)의 내용과 흡사하다.
  194. 194)티끌 하나에도~될 것이다 : 다음 글의 대의와 통한다. 『圜悟語錄』 권4(T47, 729b7), “온갖 성인은 같은 길을 밟으며 가지 않았으나 바른 본체를 우뚝하니 드러내었고, 모든 현상은 가려진 것이 없으니 미묘한 작용이 항상 진실하다. 법은 법의 흐름을 따르니 두루 펼쳐지지 않는 곳이 없고, 마음은 마음의 작용을 따르니 두루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위로는 잡고 올라갈 수단이 끊어지고, 아래로는 내던질 자신의 몸마저 없다면 사람마다 꺼지지 않는 광명이 눈앞에 발하여져 각각이 어디에도 걸림 없이 또렷이 드러나리니, 하나의 티끌 속에 부처의 국토가 나타나고 터럭 끝에 앉아서도 대법륜을 굴릴 수 있을 것이다. 굴려도 굴림에 집착하지 않으니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굴러가고, 몸을 드러내도 몸에 얽매이지 않으니 어느 곳에서나 몸 아닌 것이 없다.(千聖不同轍, 正體獨露;萬象無所覆, 妙用常眞. 法隨法行, 無處不遍;心隨心用, 無處不周. 若能上絶攀仰, 下絶己躬, 放出人人常光目前, 各各獨露, 便可以於一塵中, 現寶王剎, 坐毛端裏, 轉大法輪. 以無轉而轉, 卽一切皆轉, 以無身現身, 一切處無不是身.)”
  195. 195)가섭을 초조로 하여 대대로 이어져 보리달마에 이르기까지 28대 조사가 있었다는 설은 801년(정원 17) 성립된 선종 최초의 전등록 『寶林傳』에서 완성되었고, 그 뒤의 전등록들도 대체로 이 설을 따르고 있다.
  196. 196)전체적인 내용과 구성이 『黃龍慧南語錄』(T47, 634b18~27)의 내용과 흡사하다.
  197. 197)식識으로도 분별할~없는 것이다 : 선 문헌에서 상용하는 어구로서 공안을 제기하는 문답에서 활용하기도 한다. 『注維摩詰經』 권9 「阿閦佛品」(T38, 411a17), “지혜로도 알 수 없고 식識으로도 분별할 수 없다:승조가 말한다. ‘지혜와 식의 발생은 차별상 안에서 일어나지만, 법신은 상이 없으므로 지혜와 식으로 미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도생이 말한다. ‘이미 이것과 저것이 구별되는 경계에 있지 않고, 또한 이것과 저것을 가르는 분별로도 접근할 수 없거늘 어찌 지혜로 알고 식으로 분별하여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不可以智知, 不可以識識:肇曰, ‘夫智識之生, 生於相內, 法身無相故, 非智識之所及.’ 生曰, ‘旣不在此彼, 又不以此彼, 豈可以智知識識言其爾哉!’)”; 『大慧語錄』 권18(T47, 889a10), “진실한 이치는 지혜로도 알 수 없고 식으로도 분별할 수 없다.(蓋眞實之理, 不可以智知, 不可以識識.)”
  198. 198)『圜悟心要』 권하 「示蔣待制」(X69, 482a6), “이 하나의 본분사는 천상계와 인간계의 모든 중생으로부터 불조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 힘을 입은 것입니다. 다만 뭇 중생은 그것을 온축하고 있으면서도 우매하여 헛되이 생사의 굴레에 빠지는 것이고, 불조는 이를 통달하여 깨달음조차 뛰어넘은 것입니다. 미혹과 깨달음이 다르다고는 하나 그 부사의함은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불조께서 깨달음을 곧바로 지시하여 주신 것은 모든 중생 각각이 자기가 본래 원만히 구족하고 있는 청정하고 미묘하며 밝은 참된 마음을 또렷이 깨달아 다시는 번뇌 망상과 이리저리 헤아리며 분별하는 지견을 남겨 두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此段事, 天人群生, 至於佛祖, 皆承威力. 但以群靈, 雖蘊此而冥昧, 枉受沈溺;佛祖, 達此而超證. 迷悟雖殊, 其不思議一也. 是故佛祖開示直指, 莫不令一切含靈, 各各獨了自己本來圓具淸淨妙明眞心, 更不留如許塵勞妄想計念知見.)”
  199. 199)슬하의 한~자비심을 내고(極愛一子地) : 또는 줄여서 ‘일자지一子地’라고도 한다. 평등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자신이 낳은 단 하나의 자식처럼 여기는 계위를 가리킨다.
  200. 200)도움을 청하지도~돕는 친구(不請友) : ‘불청친우不請親友’·‘불청승우不請勝友’라고도 한다. 중생이 요청하지 않아도 언제나 중생을 도와주므로 불보살을 이와 같이 부른다.
  201. 201)글줄의 행간이나~문자나 헤아리면서(尋行數墨) : 또는 심항수묵尋行數墨이라고도 읽는다. 글귀에만 매달려 몰두하느라 참된 의미를 놓친다는 뜻.
  202. 202)평상시 그대로~못할 것이다 : 『圜悟心要』 권하 「示英上人」(X69, 483b23~c3)의 내용과 흡사하다.
  203. 203)이 구절은 관계 지한灌溪智閑의 말로서 『雲門廣錄』 권하(T47, 574c19), 『雪竇語錄』 권2(T47, 679c24) 등에 널리 인용되고 있다.
  204. 204)『雲門廣錄』 권중(T47, 560b16) 참조.
  205. 205)『景德傳燈錄』 권1 「佛陀難提傳」(T51, 208c11) 참조.
  206. 206)『法眼語錄』(T47, 592b19) 참조.
  207. 207)운문을 평가한 법안의 말에 대해 백운이 다시 자신의 비판적 견해를 더한 것이다. 운문이 세존을 부정한 뜻만 보고 그 속에 담긴 긍정의 뜻은 간과했다는 말이다. 다름 아닌 비판이야말로 공안의 터전임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이다. 금산 요원金山了元은 이 세존의 기연을 두고 연이어 가해진 비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禪門拈頌說話』 2則(H5, 8c13), “나, 금산이 말하겠다. ‘사마귀는 (매미를 잡으려고) 앞에서 뛰는데 참새가 그 뒤를 쫓고, 장원莊園에 활을 멘 사람은 사냥하느라 서리에 옷 젖는 줄을 모른다. 누군가 이 말을 바르게 점검해 낸다면, 나 역시 방망이 30대를 맞을 잘못이 있으리라.’(金山道, ‘螗蜋前頭走, 黃雀續後隨, 園中挾彈漢, 不覺露濕衣. 有人檢點得, 金山, 也有三十棒分.’)” 세존을 사마귀에, 그것을 잡고자 하는 참새를 운문에, 또 그 참새를 노리는 사냥꾼을 법안에 빗대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를 비판한 금산 자신의 견해도 그대로 긍정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밝혔다. 선사들은 ‘나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겠다.(山僧卽不恁麽)’ 또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山僧卽不然)’라는 말을 꺼내들며 자신의 견해가 해법인 듯이 내놓지만 이 또한 다른 사람에게 비판받을 소재로 제공하는 것일 뿐이다. 그 어떤 탁월한 안목에서 가해진 비판일지라도 다시금 비판의 장에 오르지 않는다면 그 공안은 생명력을 잃고 화두는 사구死句로 떨어지고 말기 때문이다. 확정된 결론과 경직된 관념으로 공안을 간직한다면 이미 공안으로서의 생명은 멈춘 것이고, 이는 곧 선사로서의 선기가 무뎌지고 꺾였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208. 208)이 상당 법문은 내용이나 구성 면에서 투자 의청投子義靑의 어록에 실린 것과 흡사하다. 『投子義靑語錄』 권상(X71, 735b22~c4) 참조.
  209. 209)왕충王充의 말에서 유래한 말로 태평성대를 뜻한다. 『論衡』, “바람은 나뭇가지를 흔들지 않고 비는 흙덩이를 깨지 않으니, 닷새에 한 번 바람 불고 열흘에 한 번 비 내리네.(風不鳴條, 雨不破塊, 五日一風, 十日一雨.)”
  210. 210)경림瓊林 : 아름다운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 불국토나 선경의 아름다운 경치를 형용하는 말로도 쓴다.
  211. 211)요지瑤池 : 궁궐 안에 있는 아름다운 연못. 전설상에 곤륜산昆侖山에 있었다는 연못을 뜻하기도 하는데 서왕모西王母가 살았다고도 한다.
  212. 212)어류御柳와 옥전玉殿은 버드나무와 궁궐을 아름답게 칭하는 말이다.
  213. 213)건화문建化門 : 교화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설정한 문. 어떤 방편도 용납하지 않는 본분사本分事의 입장과는 상대되는 뜻이다.
  214. 214)물어도 옳고~것이 아니다 : 『建中靖國續燈錄』 권12 「東林常總章」(X78, 713c20~23)의 내용과 흡사하며, 중간중간에는 『眞心直說』의 구절이 섞여 있다. 『眞心直說』 「眞心妙體」(T48, 1000a24), “규봉 종밀이 말했다. ‘마음은 텅 비어 미묘하고 순수하며 환히 빛나고 신령하게 밝으니,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어 삼제三際에 모두 신명하게 통하며,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어서 시방을 환하게 통하며, 사라지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으니 어찌 사산四山(생로병사)인들 이를 해칠 수 있으리오!’(圭峯云, ‘心也者, 沖虛妙粹, 炳煥靈明, 無去無來, 冥通三際, 非中非外, 洞徹十方, 不滅不生, 豈四山之可害!’)”; 『圓覺經略疏』 권상 「序」(T39, 524a18~20) 참조.
  215. 215)오늘 지극한~편히 쉬십시오 : 『建中靖國續燈錄』 권9 「覺海若沖章」(X78 695a23~b2)의 내용과 흡사하다.
  216. 216)『碧巖錄』 82則(T48, 208a26), “대룡 지홍大龍智洪에게 학인이 물었다. ‘색신은 부서져 없어지니 무엇이 견고한 법신입니까?’ ‘산에 핀 꽃은 비단을 펼쳐 놓은 듯하고 시냇물은 쪽빛처럼 맑다.’(僧問大龍, ‘色身敗壞, 如何是堅固法身?’ ‘山花開似錦, 澗水湛如藍.’)”; 『頌古聯珠通集』 권35(X65, 696a24) 참조.
  217. 217)학인이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묻자 조주가 동지에 일양一陽이 생한다고 답한 문답을 소재로 용문 청원龍門淸遠이 읊은 송에 나오는 구절. 『頌古聯珠通集』 권20(X65, p.599b8) 참조. 『人天眼目』 권6(T48, 331b18), “ ‘법신이란 무엇입니까?’ ‘버드나무에는 황금빛 새싹이 돋아나고 배나무에는 흰 눈 같은 꽃이 피어난다.’(‘如何是法身?’ ‘柳色黃金嫩, 梨花白雪香.’)”
  218. 218)『請益錄』 권상(X67, 473c20), “손님이 주인에게 말하니 맑은 바람이 밝은 달을 털어내는 격이요, 주인이 손님에게 말하니 밝은 달이 맑은 바람을 비추는 격이다.(賓向主說, 則淸風拂白月;主向賓言, 則白月照淸風.)”
  219. 219)『玄沙廣錄』 권하(X73, 19b19), “법좌에 올라앉아 제비가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실상을 깊이 이야기하고, 법의 요체를 잘 설하는구나.’라고 한 뒤 법좌에서 내려왔다.(上堂, 聞燕子叫云, ‘深談實相, 善說法要.’ 便下座.)”
  220. 220)선덕先德 : 깨우친 도가 높아 후대의 본보기가 되는 앞서간 인물. 고인古人·선배先輩·고덕古德 등과 같은 말이다.
  221. 221)이 상당 부분은 『建中靖國續燈錄』 권14 「興化紹淸章」(X78, 730c2~16)의 내용과 거의 흡사하다. ‘興化’라 자칭한 부분을 ‘衲僧’, ‘山僧’ 등으로 바꾼 부분 외에 다르지 않다.
  222. 222)선법당善法堂 : 제석천이 거처하는 수미산 정상의 희견성喜見城 안에 있는 설법처. 제석천이 설법을 행한다고 하는 강당을 가리킨다.
  223. 223)『詩經』 「小雅」 ≺蓼莪≻에 나오는 구절.
  224. 224)『孝經』에 나오는 구절.
  225. 225)『盂蘭盆經疏孝衡鈔』 권상(X21, 524b10), “故律頌云, 流轉三界中, 恩愛不能捨, 棄恩入無爲, 眞是報恩者.”
  226. 226)용우龍盂 : 나제가섭那提迦葉은 석존에게 귀의하기 전에 불을 섬기는 외도(事火外道)였다. 어느 날 석존이 그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 머물기를 청하였는데, 그들은 석존을 화룡火龍이 살고 있는 석굴에 묵게 하였다. 밤에 화룡이 불을 토하며 석존을 해치려 하자 석존은 자비심을 일으켜 삼매화三昧火를 드러내셨고, 화룡은 이를 피하려다 석존의 발우가 청량하고 광대하므로 그 속에 몸을 숨겼다. 이를 본 나제가섭은 오백 제자와 함께 석존에 귀의했다고 하는 고사가 전한다. 여기서는 지옥 불을 끄는 발우라는 의미와 함께 ‘자비심’을 상징하는 뜻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227. 227)‘동가인사東家人死 서가인조애西家人助哀’라는 상용구로 흔히 쓰인다. 동쪽 집 사람이 죽었는데 서쪽 집 사람이 슬프게 운다는 말로 아무런 보람 없는 일을 뜻한다.
  228. 228)차별성 그대로 진실이라는 이치를 나타낸다. 『肇論新疏』 권중(T45, 220a29), “모든 법의 차별을 뜻한다. 오리 다리는 짧고 학 다리는 긴 것과 같다. 그러나 본성은 공空이 아닌 것이 없으며 공이므로 서로 다르지 않으니, 늘이거나 자르거나 깎거나 메우는 등으로 조작한 다음에 평등해지는 것이 아니다.(意云, 諸法差別. 如鳧短鶴長等. 然性無不空, 空故不異, 不待續截夷盈然後平等.)”
  229. 229)이 법문은 나한 수인羅漢守仁의 다음 법문과 통한다. 『景德傳燈錄』 권25 「羅漢守仁傳」(T51, 412a22), “나는 여기서 누구에게도 화두를 가려내 준 적이 없었으나, 오늘 여러 상좌들에게 한두 칙의 화두를 가려내 주겠다. 듣기를 원하는가? 여러 상좌들이여, 학 다리는 길고 오리 다리는 짧으며, 감초는 달고 황벽은 쓰다. 이렇게 분별한 말이 마음에 흡족한가?(報恩遮裏不曾與人揀話, 今日與諸上座, 揀一兩則話. 還願樂麽? 諸上座, 鶴脛長鳧脛短, 甘草甛黃蘗苦. 恁麽揀辨, 還愜雅意麽?)”
  230. 230)이 부분까지는 『建中靖國續燈錄』 권3 「雲蓋志顒章」(X78, 655c15~18)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231. 231)『建中靖國續燈錄』 권3 「上方齊岳章」(X78, 656b16~21)에는 “臨濟先鋒, 德山殿後.”로 되어 있고, 다음 문답의 답도 “德山先鋒, 臨濟殿後.”와 같이 되어 있다.
  232. 232)그대는 소상瀟湘으로~향하는 것이다 : 소상瀟湘은 호남성湖南省 부근의 소수瀟水와 상수湘水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진秦나라보다는 상대적으로 남쪽에 위치해 있다. 이 구절은 당나라 때 정곡鄭谷의 시 ≺淮上與友人別≻ 중에 마지막 4구이다. 상대는 남쪽의 소상으로, 자신은 북쪽의 진나라로 떠나며 이별의 아쉬움을 노래한 시이다.
  233. 233)이 단락은 『建中靖國續燈錄』 권3 「上方齊岳章」(X78, 656b16~21)의 문답을 인용한 것이다. 다만 마지막 물음의 답으로 할喝을 한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 봄날 늦도록 자고, 병이 오래되어 산 밖을 나간 지도 오래전이다.(年高春睡晚, 病久出山遲.)”라고 답한 점이 다르다.
  234. 234)반만半滿·편원偏圓 : 교리 또는 교설의 우열을 판석判釋하는 용어. 반만은 반자교半字敎와 만자교滿字敎를 아울러 일컫는 말. 반자는 글자를 생성하는 근본, 즉 자음과 모음을 가리키고, 만자는 이 자음과 모음이 모여 이루어진 문자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교설을 통해 아직 완전히 드러내지 않은 가르침을 반자에, 완전히 드러낸 가르침을 만자에 비유한다. 『涅槃經』 권5(T12, 390c29), “반자는 구부경을, 비가라론은 방등대승경전을 가리킨다. 성문들은 지혜의 힘이 없기 때문에 여래께서 그들에게 반자 구부경전을 설하였고, 비가라론인 방등대승은 설하지 않았다.(半字者, 謂九部經, 毘伽羅論者, 所謂方等大乘經典. 以諸聲聞, 無有慧力, 是故如來爲說半字九部經典, 而不爲說毘伽羅論方等大乘.)” 편원은 편교와 원교를 아울러 일컫는 말로서 편교는 편벽된 가르침을, 원교는 일체를 원만하게 구족한 가르침을 뜻한다. 교판의 대상에 따라 반만과 편원으로 어떻게 갈리느냐는 다르지만, 소승과 대승만 놓고 본다면 소승은 반자교이며 편교이고, 대승은 만자교이며 원교이다.
  235. 235)권실權實·돈점頓漸 : 권權은 상대방의 근기에 맞추어 시설하는 방편, 실實은 궁극적인 불변의 진실을 말한다. 돈점頓漸은 돈속頓速과 점차漸次라는 뜻이며, 돈오점수頓悟漸修의 줄임말로도 쓰인다.
  236. 236)『入楞伽經』 권5 「佛心品」(T16, 541c22)에 ‘보리를 증득하고 열반에 들 때까지의 사이에 한 글자도 설하지 않았다.’는 문구가 보일 뿐, 위의 구절과 정확히 일치하는 경전의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 ‘한 구절도 설하지 않았다.’는 구절은 여러 전등사서와 공안집 등에서 공안으로 자주 활용되는 소재이다. 『景德傳燈錄』 권12 「道巘傳」(T51, 297a20), 『頌古聯珠通集』 권2(X65, 487a3), 『禪門拈頌說話』 34則(H5, 48b10) 참조.
  237. 237)법좌에 올라앉아~않은 말이다 : 『大慧語錄』 권19 「示妙證居士」(T47, 893c18~27)의 내용과 흡사하다.
  238. 238)『金剛經』(T8, 749a23), “존재하는 상들은 모두 허망하다. 만약 모든 상이 상이 아닌 줄 안다면 부처님의 뜻을 알 것이다.(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則見如來.)”; 『金剛經五家解說誼』 권상(H7, 37c19), “눈앞에 정해진 법이 없으니, 눈에 마주치는 것마다 모두 여여한 실상이다. 다만 이와 같이 안다면 곧 부처를 볼 것이다.(目前無法, 觸目皆如. 但知如是, 卽爲見佛.)”
  239. 239)『金剛經』(T8, 757a7), “일체의 유위법은 마치 별·백태·등불·허깨비·이슬·물거품·꿈·번개·구름 등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만 한다.(一切有爲法, 如星翳燈幻, 露泡夢電雲, 應作如是觀.)”
  240. 240)당종撞鐘 : 범종梵鐘. 대중을 모을 때 쳐서 알리는 종.
  241. 241)『金剛經』(T8, 752a17), “색신色身으로써 나를 보려 하거나 음성으로써 나를 찾으려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자이니 여래의 진면목을 보지 못할 것이다.(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
  242. 242)내 눈썹이~있는지 보라 : 주 156 참조.
  243. 243)이 상당 법문은 『大慧語錄』 권28 「答汪狀元」(T47, 933a1~12)의 내용과 흡사하다.
  244. 244)『大般涅槃經』 권26(T26, 777a3) 참조.
  245. 245)『禪林類聚』 권14(X67, 89a12), 『聯燈會要』 권7 「潙山靈祐章」(X79, 64a16), 『潙山靈祐語錄』(T47, 577a14) 등 참조.
  246. 246)마음에 관한 법문(心地法門) : 대지가 온갖 초목과 곡식의 씨앗을 품어 키워 내듯이 마음이라고 하는 터전에서 일체의 것이 발생하므로 마음을 이 대지에 비유하여 심지心地라고 한다. 심지법문이란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전하는 법문 또는 마음을 깨달은 경계를 전하는 법문 정도의 뜻이다.
  247. 247)『景德傳燈錄』 권5 「南嶽懷讓傳」(T51, 240c29) 참조.
  248. 248)이 상당 법문은 『黃龍慧南語錄』(T47, 638c15)의 법문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운문의 문답이 잘못 인용되어 있다. 운문이 학인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이다. 어록 편찬상의 착오이거나 황룡의 창안으로 추정된다. 운문이 장향裝香이라 한 것은 향을 사르기 위해 향로香爐에 향을 집어넣는 것이며, 본 어록에서의 소향燒香은 향에 불을 붙여 사르는 의식이다. 『雲門廣錄』의 문답은 다음과 같다. 『雲門廣錄』 권상(T47, 552b18), “어떤 학인이 물었다. ‘지금 나한께 공양물을 바치면 나한이 오실까요?’ 운문이 대답했다. ‘그대가 묻지 않았다면 나 역시 대답하지 않아도 될 터인데.’ ‘스님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문 앞에서 합장하고, 불전 안에서 향로에 향을 넣는다.’(問, ‘今日供養羅漢, 羅漢還來也無?’ 師(雲門)云, ‘汝若不問, 我卽不道.’ 進云, ‘請師道.’ 師云, ‘三門頭合掌, 佛殿裏裝香.’)”
  249. 249)이 상당 법문 전체는 『黃龍慧南語錄續補』(T47, 636b12)의 내용과 같다. 다만 “납승의 눈앞에서는” 이전 부분은 “거대한 바다를 마음껏 삼키고 수미산을 뒤집어 세운다.(橫呑巨海, 倒卓須彌.)”라고 약간 달리 되어 있지만 취지는 같다.
  250. 250)행각行脚 : 스승을 찾아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도를 배우고 수행하는 일. 유섭游涉(遊涉)도 ‘먼 곳으로 돌아다닌다’는 뜻으로 유력遊歷·유람遊覽과 같은 말이지만 행각과 동일한 맥락으로 쓰인다. 『祖庭事苑』 권8(X64, 432c19), “행각:행각이란 살던 곳에서 멀리 떠나 세상을 돌아다니며 인정을 벗어나고 속박도 내던지고서 스승과 벗을 찾아다니며 법을 구하여 깨닫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배움에 특별히 정해진 스승을 두지 않고 두루 찾아 돌아다니는 것을 최선으로 여긴다.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남쪽으로 선지식을 찾아다녔던 것이나 상제常啼보살이 동쪽으로 법을 배우러 다녔던 것이 모두 옛 성인들의 구법 활동이다. 영가 현각永嘉玄覺이 강과 바다를 건너고(游) 산천을 돌아다니며(涉) 스승을 찾아 도를 묻고 참선했던 일이 어찌 그런 이유가 아니었단 말인가!(行脚:行脚者, 謂遠離鄕曲, 脚行天下, 脫情捐累, 尋訪師友, 求法證悟也. 所以學無常師, 遍歷爲尙. 善財南求, 常啼東請, 蓋先聖之求法也. 永嘉, 所謂游江海涉山川, 尋師訪道爲參禪, 豈不然邪!)”
  251. 251)본래면목本來面目 : 각자가 본래 갖추고 있는 모습. 본래의 자기. 부모미생전면목父母未生前面目, 공겁이전소식空劫已前消息, 천지미개이전天地未開以前, 본지풍광本地風光 등과 같은 말. 宗寶本 『壇經』(T48, 349b24), “혜능이 말했다. ‘선이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악이라고 생각하지도 마라. 바로 이럴 때 혜명 상좌의 본래면목은 어떤 것인가?’(慧能云, ‘不思善, 不思惡. 正與麽時, 那箇是明上座本來面目?’)”
  252. 252)어떤 훌륭한 결과를 성취하더라도 주장자로 맞을 잘못을 모면하지는 못한다는 뜻. 『續傳燈錄』 권33 「退菴休傳」(T51, 696c29), “설령 어디로나 자유롭게 통한다고 할지라도 산승의 주장자에 맞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直饒七穴八穿, 未免山僧拄杖.)”라는 형식은 조사선에서 최종적 성과도 허용하지 않는 일반적 방식이다.
  253. 253)『法華經』 권1 「方便品」(T9, 7a21) 참조.
  254. 254)위의 책(T9, 9c16) 참조.
  255. 255)『大般涅槃經』 권36 「迦葉菩薩品」(T12, 580b14), “선남자야, 일체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결정하거나 불성이 없다고 결정하여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또한 불법승을 비방하는 자라 하겠다.(善男子, 若有說言一切衆生, 定有佛性, 定無佛性, 是人亦名謗佛法僧.)”
  256. 256)앞에 제시된 이 네 가지 언어 형식을 ‘비방하는 네 가지 말(四謗)’이라 한다. 『攝大乘論釋』 권12(T31, 244a1), “모든 보살은 일체법一切法을 분별하지 않으며 위없는 보리에 이르기까지도 분별하지 않는다. 어째서인가? 모든 법은 말로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말로 나타낼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말로 나타내는 것을 ‘희론’이라 한다. 여기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이를 ‘사방四謗’이라 한다. ‘유有’라 하면 증익방增益謗, ‘무無’라 하면 손감방損減謗, ‘유이기도 하고 무이기도 하다’라고 하면 상위방相違謗,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라고 하면 희론방戲論謗에 해당한다.(諸菩薩不分別一切法, 乃至不分別無上菩提. 何以故? 諸法無言說故. 於無言說中強立言說, 故名戲論. 言說有四種, 卽是四謗. 若說有卽增益謗, 若說無卽損減謗, 若說亦有亦無卽相違謗, 若說非有非無卽戲論謗.)”
  257. 257)선재동자가 친견한 53선지식 가운데 비목 선인과의 인연을 소재로 한 상당 법문. 『華嚴經』 권64 「入法界品」(T10, 345c20) 참조.
  258. 258)『禪門拈頌說話』 74則 본칙 설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禪門拈頌說話』 74則(H5, 83b6), “본래 있는 곳을 떠나서 별도로 화장세계가 있는 것은 아니며, 화장세계를 떠나서 별도로 본래 있는 곳도 없다. 곧 평상의 경계와 부사의한 세계(화장세계)는 하나의 길로 함께 간다.(非離本處, 別有華藏世界, 非離華藏世界, 別有本處. 所謂平常不思議, 一途而行.)”
  259. 259)도량 밖으로 나가지 않고(結足) : 금족禁足과 같은 말. 안거 기간 동안 외출을 금하는 규정이다.
  260. 260)해제일에 법좌에~하라. 알겠는가 : 불안 청원佛眼淸遠의 해하解夏 상당 내용과 흡사하다. 『龍門佛眼語錄』 古尊宿語錄27(X68, 177c9~13) 참조.
  261. 261)이통현李通玄의 설. 『新華嚴經論』 권1(T36, 721a18) 참조.
  262. 262)『注華嚴法界觀門』 「裴休序」(T45, 683c13), 『大慧語錄』 권18(T47, 887a7) 등에 나오는 구절.
  263. 263)자자일自恣日 : 자자는 ‘수의隨意’라고도 한다. 하안거 마지막 날에 행하는 의식으로서 안거 기간 동안의 서로의 잘못을 기탄없이 제기하여 참회하고 복을 닦는다.
  264. 264)가을바람은 푸른~태평성대를 노래하네 : 『建中靖國續燈錄』 권6 「北禪慧雲禪院昇禪師章」(X78, 678b2~4)의 상당 내용과 일치한다.
  265. 265)풍류를 값싸게 팔리라(賤賣風流) : 고아한 덕을 이해하기 쉽게 설하는 것.
  266. 266)눈 밝은 사람(明眼人) : 사물의 도리에 정통하여 밝게 보고 아는 능력을 갖춘 사람. 명안종사明眼宗師라고도 한다.
  267. 267)『禪門拈頌說話』 680則 본칙 설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禪門拈頌說話』 680則(H5, 519c6), “ ‘그는 이제 바로 나 자신이나’라는 것은 그림자가 그림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나는 더 이상 그가 아니라네.’라는 것은 귀천을 분별하고 존비를 나눈다는 뜻이다. ‘마땅히 이렇게 알아야, 비로소 여여如如한 진실과 하나 되리라.’라는 것은 물에 비친 그림자 그대로가 진면목이란 뜻이다.(渠今正是我者, 當影不是影也. 我今不是渠者, 分貴賤辨尊卑也. 應須伊麽會云云者, 卽影而眞也.)” 『洞山良价語錄』(T47, 520a20), 『景德傳燈錄』 권15 「洞山良价傳」(T51, 321c21) 참조.
  268. 268)『緇門警訓』 권1 「潙山大圓禪師警策」(T48, 1042b29)에 나오는 구절.
  269. 269)선불장選佛場 : 부처를 뽑는 시험장. 불조佛祖에 걸맞은 스승을 뽑는 자리. 선불장은 승당僧堂·선당禪堂·좌당坐堂 등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270. 270)방거사龐居士의 게송. 방거사가 마조 도일馬祖道一에게 ‘만법萬法과 짝이 되지 않는 사람’에 대하여 물었다가 ‘한입에 서강의 물을 모두 들이켜면 말해 주겠다’라고 한 대답에서 깨달음을 얻고 지은 게송이다. 『聯燈會要』 권6 「龐蘊居士章」(X79, 55b20) 참조.
  271. 271)등용문登龍門의 의미를 빌려 표현한 말. 등용문은 줄여서 용문이라고도 하며 우禹임금이 이것을 조성했다고 하여 우문禹門이라고도 하는데, 스승이 제자를 단련하고자 설정한 관문關門을 상징한다. 『碧巖錄』 7則(T48, 147c18), “세 단계 거친 폭포 거슬러 올라 잉어는 용이 되어 사라졌건만, 어리석은 사람 한밤에 연못물을 퍼내고 있네.(三級浪高魚化龍, 癡人猶戽夜塘水.)”
  272. 272)『圓覺經』(T17, 913b21), “모든 부처님께서는 본래 인지因地에서 일으키시어 모두 원만히 비추는 청정한 깨달음의 상에 의지하여 영원히 무명을 끊고 불도를 이루셨다. 무명이란 무엇인가?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무시이래로 갖가지 상에 전도된 것이 마치 길을 잃은 사람이 사방의 방위를 잘못 착각하는 것과 같다. 사대四大를 자기 몸의 상相이라 잘못 알고 있고 육진六塵의 그림자를 자기 마음의 상이라고 착각하니, 비유하자면 저 병든 눈으로 허공의 꽃이나 제이월을 보는 것과 같다.(一切如來, 本起因地, 皆依圓照淸淨覺相, 永斷無明, 方成佛道. 云何無明? 善男子, 一切衆生, 從無始來, 種種顚倒, 猶如迷人四方易處. 妄認四大爲自身相, 六塵緣影爲自心相, 譬彼病目見空中華及第二月.)”
  273. 273)바라제존자婆羅提尊者와 이견왕異見王 간의 문답에 나오는 말. 이견왕이 ‘불성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자 바라제는 ‘바로 지금 작용하고 있는데 왕 자신이 보지 못할 뿐’이라고 하였고, 왕이 다시 ‘몇 곳에서 작용하는가?’ 묻자 바라제는 ‘여덟 곳’이라며 다음과 같이 답했다. 『景德傳燈錄』 권3 「菩提達磨傳」(T51, 218b18), “태에 있을 때는 신身이라 하고 세상에 나와서는 사람이라 하고, 눈에 있을 때는 보고 귀에 있을 때는 들으며, 코에 있을 때는 향을 판별하고 혀에 있을 때는 말을 하고, 손에 있을 때는 움켜쥐고 발에 있을 때는 돌아다닙니다. 두루 나타내면 갠지스강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를 모두 갖추고, 거두어들이면 티끌 하나에 있습니다. 아는 자는 이것이 불성임을 알지만 모르는 자는 정혼精魂이라고 부릅니다.(在胎爲身, 處世名人, 在眼曰見, 在耳曰聞, 在鼻辨香, 在口談論, 在手執捉, 在足運奔. 遍現俱該沙界, 收攝在一微塵. 識者知是佛性, 不識喚作精魂.)” 낭야 혜각瑯瑘慧覺은 마지막 구절을 “중생이라 불러서도 안 되고 불성이라 불러서도 안 된다.(亦不喚作衆生, 亦不喚作佛性.)”라고 하였다. 『聯燈會要』 권12 「瑯瑘慧覺章」(X79, 111c8) 참조.
  274. 274)『禪門拈頌說話』 104則 본칙 설화에서는 위의 바라제존자의 말을 듣고 왕이 도리를 깨우쳤다고 한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禪門拈頌說話』 104則(H5, 112c17), “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불성을 깨달은 것인가? 정혼을 깨달은 것인가? 정혼을 떠나서 불성을 깨닫는다면 깨달음이 아니며, 깨닫는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또한 깨달음이 아니다.(心卽開悟者, 悟得佛性耶? 悟得精魂耶? 離精魂而悟佛性, 非開悟也, 又有開悟地佛性, 亦非開悟也.)”
  275. 275)앙굴마라央掘魔羅의 게송 중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보인다. 『央掘魔羅經』 권2(T2, 529b15), “가섭만 알도록 하시니, 마치 다른 곳에 비를 내린 것 같네. 그러므로 세상에 부처가 없으면, 중생은 스스로를 구제하지 못하니, 여래를 직접 뵙고서야, 해탈을 얻는다네.(但令迦葉知, 猶如餘處雨. 是故世無佛, 衆生不自度, 面覩諸如來, 然後得解脫.)”
  276. 276)『聯燈會要』 권12 「瑯瑘慧覺章」(X79, 111b23), 『天聖廣燈錄』 권15(X78, 493a2), 『住廬山歸宗語錄』 古尊宿語錄43(X68, 286c22) 등에 보인다.
  277. 277)『圓覺經』(T17, 917a10~16) 참조.
  278. 278)주 134 참조.
  279. 279)응암 담화應菴曇華의 법문에도 약간의 문장 출입이 있을 뿐 동일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다만 마지막에 “자세한 설명을 달아 주겠다.”라고 한 이후에 “비로자나불의 청정한 세계가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찼다.(毗盧遮那淸淨海, 充滿三千與大千.)”라고 한 구절만 다르다. 『應菴曇華語錄』 권6(X69, 530c19) 참조.
  280. 280)운문 문언雲門文偃의 말. 『雲門廣錄』 권하(T47, 572c3), “운문 선사가 학인이 경전을 읽고 있는 모습을 보고 말했다. ‘경전을 보려면 반드시 경전을 꿰뚫어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등롱과 노주에도 대장경의 교설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 주장자를 잡아 들고서 말했다. ‘대장경의 교설이 모두 주장자 끝에 있거늘, 다른 어디에서 한 점이라도 남은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교설을 모두 펼쳤느니라. 이와 같이 나는 들었으니, 시방의 국토와 드넓게 터져 어디에나 있는 모래알처럼 무수히 많은 세계가 모두 그것이다.’(師因見僧看經, 乃云, ‘看經須具看經眼. 燈籠露柱, 一大藏敎無欠少.’ 拈起拄杖云, ‘一大藏敎, 總在拄杖頭上, 何處見有一點來? 展開去也. 如是我聞, 十方國土, 廓周沙界.’)”
  281. 281)노숙老宿 : 노년숙덕老年宿德의 줄임말.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수행자. 장로長老·존숙尊宿·노덕老德·기숙耆宿 등이라고도 한다. 『翻譯名義集』 권1(T54, 1074c14), “체비리體毘履는 노숙이라 한역한다.(體毘履, 此云老宿.)”
  282. 282)험준險峻 : 가파르고 높이 치솟은 산을 오르기 힘든 것과 같이 분별할 방법을 찾기 어렵다는 뜻.
  283. 283)석림 행공石林行鞏 선사가 이 공안에 대하여 『五燈會元續略』 권3(X80, 502b20)에 “등지고(背) 물드는(觸) 양편으로 나누지 못하는 경계와 분별의 기미가 나타나기도 전에 관조의 작용을 잃는 순간을 마주하면, 허공도 꿰뚫거늘 어찌 문드러진 쇠가죽에 그치겠는가!(背觸難分處, 機先失照時, 虛空也穿透, 何止爛牛皮!)”라고 한 평가는 간경안이라고도 부르지 못하고 주먹이라고도 부르지 못하는, 온전히 실현된 화두의 궁지窮地를 가리킨다.
  284. 284)『雲門廣錄』 권상(T47, 545c29), 『傳心法要』(T48, 384a12) 등에 나오는 말.
  285. 285)결정적인 하나의 소식(一着子) : 일착一着(一著)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바둑 용어로서, 승부의 요처에 두는 ‘결정적인 한 수’를 가리킨다. 선종에서는 스승이 제자에게 향상하는 결정적인 한마디를 해 주는 것을 가리킨다. 그때그때마다 핵심을 찌르는 말이나 행위를 나타낸다.
  286. 286)세존이 직접 이러한 말을 한 것은 아니다. 『禪門拈頌說話』 1則 본칙 설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禪門拈頌說話』 1則(H5, 5c16), “이 공안은 『華嚴經』 「離世間品」에 제시된 십종미세취十種微細趣의 문장을 받아들여 화제話題로 삼은 것이다.(此話, 華嚴經離世間品, 十種微細趣散文, 述而爲詮(話)也.)” 공안집과 어록 등에서 이 구절을 공안으로 삼아 제시한 예는 무수히 많다.
  287. 287)하나의 그~라고 하였다 : 대혜 종고大慧宗杲가 욕불시중浴佛示衆에서 제기한 말과 흡사하다. 다만 “末後一句子”를 “有一物”로 바꾼 점이 다르다. 『大慧語錄』 권8(T47, 842c8) 참조.
  288. 288)그대들에게 묻겠다~옳지 않다 : 단월 장자명張子明이 불상을 장엄하고 청한 소참 법문에서 응암 담화應菴曇華가 말한 내용과 유사하다. 『應菴曇華語錄』(X69, 532a12~21) 참조.
  289. 289)『圜悟語錄』 권17(X66, 118b19), 『宗鑑法林』 권22(X66, 419a22) 등에 임제 의현臨濟義玄의 말로 실려 있다.
  290. 290)정오에 삼경을~치는 격이로다(日午打三更) : ‘한밤에 뜨는 샛별인 명성이 대낮 오시에 나타나다.(明星當午現)’라는 말이나, ‘한밤에 해가 뜨고 정오에 한밤중을 알리는 신호가 울린다.(半夜日頭出, 日午打三更)’, ‘한낮에 달이 비추다.(日午月照前)’라는 등의 말과 같은 맥락이다. 분별이나 사려를 초월한 세계의 소식을 뜻한다. 『五家正宗贊』 권2(X78, 592a7), “임제의 삼현삼요, 사료간 그리고 하나의 할에 손님과 주인이 나뉘고 관조와 작용을 동시에 행한다는 말에 담긴 뜻을 알고자 하는가? 정오에 삼경을 알리는 종을 치는 격이로다.(臨濟三玄三要, 四料揀, 一喝分賓主, 照用一時行, 要會箇中意? 日午打三更.)”
  291. 291)『大慧語錄』 권3(T47, 821c12), “법좌에 오르니 학인이 예배하고 일어나 문득 할을 함에 대혜도 할을 하니 학인이 대중의 자리로 돌아갔다. 대혜가 말했다. ‘한 수가 모자랐다.’ 이내 ‘하나의 할로 손님과 주인을 나누니 관조와 작용을 한꺼번에 시행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에 담긴 뜻을 알고자 하는가? 정오에 삼경을 알리는 종을 치는 격이로다. 말해 보라! 조금 전 그 학인의 할과 산승의 할에서 어떤 할이 손님이요 어떤 할이 주인이며, 어떤 할이 관조요 어떤 할이 작용인가? 여기에서 분변해 낸다면 삼천대천세계에서 독보적인 자라 인정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발우 안에서는 결코 수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하고 다시 할을 한 번 크게 내질렀다.(上堂, 僧禮拜起便喝, 師亦喝, 僧歸衆. 師云, ‘猶欠一著在.’ 乃云, ‘一喝分賓主, 照用一時行, 要會箇中意? 日午打三更. 且道! 適來這僧一喝, 與山僧一喝, 那箇是賓, 那箇是主, 那箇是照, 那箇是用? 於此辯得, 許爾大千獨步, 其或未然, 鉢盂裏切忌失却匙箸.’ 復喝一喝.)”
  292. 292)『聯燈會要』 권11 「首山省念章」(X79, 103b17), “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손님 역할을 하고 주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 역할을 하니, 손님에는 두 가지 손님이란 없고 주인에는 두 가지 주인이란 없다. 두 손님과 두 주인이 있다면 두 경우 모두 눈먼 놈이리라.(賓則始終賓, 主則始終主, 賓無二賓, 主無二主. 若有二賓二主, 只是兩箇瞎漢.)”; 『頌古聯珠通集』 권17(X65, 578a8), “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손님 역할을 하고, 주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 역할을 하네. 결연히 소매를 떨치고 거짓 가려내면, 예전 그대로 저절로 화두가 들릴 것이다. 화두가 다시 들리고, 백암당에 꽃비가 내리리라.【月菴善果의 頌】(賓則始終賓, 主則始終主. 拂袖辨誵訛, 依前還自擧. 還自擧, 栢巖堂上雨花雨.【月菴果】)”
  293. 293)선교방편善巧方便을 시행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 『人天眼目』 권1(T48, 303b20), 『五家宗旨纂要』 권상(X65, 259a11) 등에 당나라 때 임제종 스님인 극부克符의 시로 실려 있다. 『圜悟語錄』 권1(T47, 716b11), “방행도 학인을 가르치는 좋은 수단이요, 파주도 학인을 가르치는 좋은 수단이다. 막야검을 빼어 들고 바른 법령을 남김없이 시행하여, 태평성세에 어리석은 자를 해치우라.(放行爲人好, 把住爲人好. 橫按鏌鎁全正令, 太平寰宇斬癡頑.)”
  294. 294)「흥성사 입원소설」 10번과 35번 상당 법문 참조.
  295. 295)부처님의 말씀이라고~비방하는 것(謗經) : 대주 혜해大珠慧海와 어느 좌주의 문답에서 대주가 한 말이다. 『金剛經』 강설에 능하다고 답한 좌주에게 대주가 던진 물음으로서 등져서도 안 되고 물들어서도 안 된다는 배촉관背觸關 형식의 공안으로 활용되고 있다. 『景德傳燈錄』 권6 「大珠慧海傳」(T51, 247a4), 『頌古聯珠通集』 권12(X65, 546a2), 『禪門拈頌說話』 271則(H5, 248b5) 참조.
  296. 296)천동 정각天童正覺의 송에 나오는 구절. 『宏智廣錄』 권2(T48, 18c16), 『頌古聯珠通集』 권6(X65, 507b8) 참조.
  297. 297)「흥성사 입원소설」 3번, 7번 상당 법문에서 제기한 내용을 총체적으로 가리키고 있는 말로 보인다. 이 말 다음의 “세상 전체가 깨끗하게 밝디밝아”라고 한 부분부터 “무엇을 사대·오온이라 할 것인가?”라고 한 부분까지 이들 상당 법문의 내용과 동일하다.
  298. 298)부대사(善慧大士)가 아니라 포대布袋 화상의 송이다. 『景德傳燈錄』 권27 「布袋和尙傳」(T51, 434b12), “若覩目前眞大道, 不見纖毫也大奇. 萬法何殊心何異, 何勞更用尋經義.”
  299. 299)강남과 강북 : 중국 장강長江을 중심으로 남쪽 일대를 강남이라 하고, 북쪽 일대를 강북이라 한다.
  300. 300)돌아다니며(遊歷) : 행각行脚과 같은 뜻.
  301. 301)조주趙州의 무자無字 : 조주가 제시한 공안. ‘개에게도 불성이 있느냐?’라는 물음에 조주가 ‘없다(無)’라고 답한 공안. 『趙州語錄』 古尊宿語錄13(X68, 81a4) 참조.
  302. 302)만법귀일萬法歸一 : 조주가 제시한 공안. 차별된 만법은 하나의 평등한 근원으로 귀착된다는 말. ‘모든 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萬法歸一)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라는 물음에 조주가 ‘내가 청주에 있을 때 베적삼 한 벌을 지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我在靑州, 作一領布衫重七斤.)’라고 답한 공안. 『趙州語錄』 古尊宿語錄13 (X68, 83a23) 참조.
  303. 303)부모로부터 태어나기 이전의 얼굴(父母未生前面目) :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같은 말이며, 자기 본분의 소식을 나타내는 선종의 일반적인 어구이다. 어떤 언어나 사유의 방식으로도 나타내거나 알아차릴 수 없는 경지를 가리킨다. ‘부모미생이전父母未生以前’, ‘부모미생시소식父母未生時消息’이라고도 한다.
  304. 304)마음을 일으켜~들어가는 것 : 이 방법은 북종선北宗禪의 선법禪法으로 간주된다. 신회神會가 이것을 비판의 대상으로 제기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壇語』(神會和尙遺集, p.239), “혜慧가 발휘될 때는 정定이 없고, 정에 들어가면 혜가 없다. 이와 같이 아는 자는 번뇌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마음을 고요히 하여 선정에 들어가고, 마음을 멈추어 청정함을 살피며, 마음을 일으켜 밖의 대상을 관조하고, 마음을 거두어들여 안에서 깨닫는 것 등은 해탈을 성취한 마음이 아니라 이 또한 법에 속박된 마음이므로 마음을 쓰는 온당한 방법이 아니다.(慧時則無定, 定時則無慧. 如是解者, 皆不離煩惱. 凝心入定·住心看淨·起心外照·攝心內證, 非解脫心, 亦是法縛心, 不中用.)”
  305. 305)이어지는 “이 도는 유심有心으로도 구할 수 없고”라는 구절부터 마지막까지의 법문은 그 중간에 인용된 하당 의단下堂義端의 말을 제외하고는 『大慧語錄』 권22 「示張太尉」(T47, 905c23~906a9)의 내용과 일치한다.
  306. 306)보령 인용保寧仁勇, 원오 극근圜悟克勤, 대혜 종고 등으로 이어지며 두루 활용되는 구절이다.
  307. 307)남전 보원南泉普願의 제자 하당 의단의 말을 약간 바꾸었다. 『景德傳燈錄』 권10 「下堂義端傳」(T51, 276b29), “어느 날 스님이 대중에게 ‘말은 비방이고 침묵은 거짓이니 침묵과 말을 모두 넘어서야 길이 있다. 노승은 입 구멍이 좁아 그대들에게 말해 줄 수 없다.’라고 한 뒤 곧 법당에서 내려왔다.(一日, 師謂衆曰, ‘語是謗寂是誑, 寂語向上有路在. 老僧口門窄, 不能與汝說得.’ 便下堂.)”
  308. 308)더 이상~여지가 없어야(無用心處) : 모든 분별이 떨어져 나가서 어떤 대상에 대해서나 마음이 작용할 여지가 없는 상태. 간화선에서 공부하는 데 최적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말이다. 『禪林僧寶傳』 권23 「黃龍慧南傳」(X79, 536c9), “만일 내가 그대로 하여금 이와 같이 궁구하며 찾다가 ‘마음을 쓸 수 없는 곳에 이르러’ 스스로 알고 스스로 수긍하도록 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를 매몰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若不令汝如此究尋, ‘到無用心處’, 自見自肯, 吾卽埋沒汝也.)”; 『大慧語錄』 권19 「示智通居士」(T47, 893b22), “세간의 일을 배울 경우에는 마음 쓰는 것이 충분하지 못하면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법을 공부함에는 우리가 마음을 쓸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마음을 써서 추구하려고 하자마자 천 리 만 리의 거리로 멀어져서 본래의 목표와 전혀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러하지만 마음을 쓸 여지가 없고, 모색할 수도 없으며, 힘을 붙일 도리가 없는 경계에서 바로 힘을 붙이십시오!(學世間事, 用心不到, 則學不成;學出世間法, 無爾用心處. 纔擬用心推求, 則千里萬里, 沒交涉矣. 雖然如是, 無用心處, 無摸索處, 無著力處, 正好著力!)”
  309. 309)이 구절과 일치하는 경전적 근거는 없으며, 바로 이어서 제시한 『文殊般若經』의 부사의삼매不思議三昧가 지니는 취지를 미리 암시한 것이다. 또한 『大般若經』 권507(T7, 587b27)에도 유사한 맥락이 있다. “세간과 출세간의 공덕과 진기한 보배는 이것에 의지하여 나타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선현아, 마땅히 알아라! 깊고 깊은 반야바라밀다의 거대한 보배 창고 중에는 생성과 소멸, 오염과 청정,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 등의 차별에 대하여는 말할 약간의 법조차도 없다. 왜 그런가? 이 중에는 생성하거나 소멸하고, 오염되거나 청정하게 되며, 취하거나 버릴 수 있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世出世間功德珍寶, 無不依此而出現故. 善現當知! 甚深般若波羅蜜多大寶藏中, 不說少法, 有生有滅, 有染有淨, 有取有捨. 所以者何? 此中, 無法可生可滅, 可染可淨, 可取可捨.)”
  310. 310)『文殊般若經』 권하(T8, 729b27) 참조.
  311. 311)마음에 어떤 차별된 생각(心想) : 『文殊般若經』에는 ‘心相’으로 되어 있다. 생멸生滅·염정染淨·취사取捨 등 차별로 형성된 관념이 상相 또는 상想이다.
  312. 312)용龍은 항상~들어 있으니(那伽常在定) : ‘나가(nāga)’의 한역어는 용龍이며, 코끼리(象)·불래不來 등으로도 한역한다. 불보살·아라한 등을 용·코끼리에 비유하고, 그들이 성취한 깨달음은 선정禪定 곧 삼매에 의지하므로 이렇게 의미가 확장되었다. ‘상재정常在定’은 ‘행주좌와行住坐臥 등 모든 행위 양태에서 항상 삼매에 들어 있다.’라는 뜻이다. 『翻譯名義集』 권2(T54, 1087c7), “『本行集經』에서 부처님을 용이라 하면서 ‘세간의 애착을 모두 멀리 여의었고, 온갖 속박을 풀어서 벗어났으며(解脫), 모든 번뇌가 이미 사라졌으므로 용이라 한다.’(T3, 834c13)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용은 항상 선정에 들어 있으니, 선정에 들어 있지 않은 순간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다.(本行集經, 稱佛爲龍者, ‘謂世間有愛皆遠離之, 繫縛解脫, 諸漏已盡, 故名爲龍.’ 故曰, ‘那伽常在定, 無有不定時.’)”; 『中阿含經』 권29(T1, 608c14), “용의 행동거지는 어느 것이나 삼매이니, 앉는 것도 삼매요 눕는 것도 삼매이다. 용은 어느 때나 삼매에 들어 있으니 이것을 가리켜 ‘용의 변함없는 법(龍常法)’이라 한다.(龍行止俱定, 坐定臥亦定. 龍一切時定, 是謂龍常法.)”
  313. 313)주 108, 109 참조.
  314. 314)『禪林僧寶傳』 권7 「天台德韶傳」(X79, 505c23)에는 “是爲無上心印, 至妙法門.”이라고 되어 있다. 번역은 이에 따랐다.
  315. 315)육조 혜능~관계가 없다 : 『禪林僧寶傳』 권7 「天台德韶傳」(X79, 505c23~506a5)의 내용과 흡사하다.
  316. 316)승가난제僧伽難提 : 전등사傳燈史의 인도 28조 중 17조.
  317. 317)『景德傳燈錄』 권2 「僧伽難提傳」(T51, 212b20), 『傳法正宗記』 권3(T51, 729b29) 참조.
  318. 318)『景德傳燈錄』 권28 「法眼文益傳」(T51, 448b14), “무심히 넘길 문제로 여기지 마라. 권하건대, 옛 성인의 자비의 문에 의거해야 하리라. 옛 성인들이 갖가지 경계를 드러내었지만 그 모두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육조는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했으니, 다만 이 말 그대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친밀하게 전한 이 말씀보다 특별히 더 친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莫將爲等閑. 奉勸且依古聖慈悲門好. 他古聖所見諸境, 唯見自心. 祖師道, ‘不是風動幡動, 仁者心動.’ 但且恁麽會好. 別無親於親處也.)”
  319. 319)『法華經』 권1 「方便品」(T9, 8b25), “모든 법은 본래부터 항상 스스로 적멸한 상이로다. 불자로서 누구나 이 도리를 수행하면 내세에는 성불하리라.(諸法從本來, 常自寂滅相. 佛子行道已, 來世得作佛.)”
  320. 320)『圓覺經略疏』 권상(T39, 535a17), “항상 움직이지 않으므로 일체법이 고요하여 가거나 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니, 이미 간 것도 아니고 아직 오지 않은 것도 아니며 현재 일어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도 ‘모든 법은 본래부터 적멸하여 움직임이 없다.’라 하였고, 『法華經』에서도 ‘항상 스스로 적멸한 상’이라 한 것이다.(常不動故, 一切法寂不來去也, 非已去非未來非現起故. 故法句云, ‘諸法從本來, 寂滅無所動.’ 法華亦云, ‘常自寂滅相.’)”
  321. 321)『周易』 「繫辭傳」, “역易에는 억지로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없다.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다가 감응하여 마침내 천하의 일에 통한다.(易無思也, 無爲也. 寂然不動, 感而遂通, 天下之故.)”
  322. 322)일정한 법(定法) : 상주불변하는 가르침. 이에 반해 일정하게 결정되어 있지 않은 법을 부정법不定法이라 하는데, 이는 또 무상법無常法·차별법差別法이라고도 한다. 정법과 부정법을 소재로 한 문답을 소재로 공안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建中靖國續燈錄』 권28(X78, 813b2)에 그 문답이 처음 보이며, 『頌古聯珠通集』 권2(X65, 484c24), 『禪門拈頌說話』 13則(H5, 22c21) 등에 공안으로 제기되어 있다.
  323. 323)『金剛經』(T8, 749b12), “ ‘수보리야,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여래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여래가 설한 법이 있느냐?’ ‘제가 부처께서 설하신 뜻을 이해하기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고 할 만한 정법도 없으며 또한 여래께서 설하셨다고 할 만한 정법도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취할 수도 없고 설할 수도 없으며, 법도 아니고 법이 아닌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슨 까닭에 그러한가 하면 모든 성현께서는 모두 무위법으로 차별상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須菩提, 於意云何? 如來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如來有所說法耶?’ 須菩提言, ‘如我解佛所說義, 無有定法, 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 亦無有定法, 如來可說. 何以故? 如來所說法, 皆不可取, 不可說, 非法, 非非法. 所以者何? 一切賢聖, 皆以無爲法而有差別.’)”
  324. 324)『圓覺經略疏』 권중(T39, 558c27~559a5) 참조.
  325. 325)『華嚴一乘法界圖』(H2, 1a), “법성法性은 원융하여 다른 상이 없으며, 모든 법은 움직임 없이 본래 고요하다. 이름도 없고 상도 없으며 일체를 넘어섰으니, 오직 증득한 지혜로 아는 것이지 다른 분별로 알 수 있는 경계 아니라네.(法性圓融無二相, 諸法不動本來寂. 無名無相絶一切, 證智所知非餘境.)”
  326. 326)마조 도일馬祖道一이 “卽心卽佛”이라 한 말에 대하여 남전 보원南泉普願이 제기한 말. 『頌古聯珠通集』 권10(X65, 533c17), 『禪門拈頌說話』 226則(H5, 225a13) 참조.
  327. 327)『壇經』(T48, 350a22~25) 참조. ‘汝之本性, 猶若大虛.’가 ‘心量廣大, 猶如虛空.’으로 되어 있으며, 이하 구절의 앞뒤 배열이 다르고 문자의 출입은 있으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328. 328)『金剛經』(T8, 750b27~28) 참조.
  329. 329)이 일(此事) :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바로 이 일. 곧 ‘일대사一大事’ 또는 ‘본분사本分事’.
  330. 330)삼승십이분교三乘十二分敎 : 부처님의 교설 전체.
  331. 331)운문 문언雲門文偃의 말. 『雲門廣錄』 권상(T47, 545c24) 참조.
  332. 332)부처님께서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 지은 염화미소拈花微笑를 가리킨다. 교외별전의 취지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선종의 설화이다. 동시에 이것은 가섭을 인도 전법의 초조初祖로 내세우는 조통설祖統說의 근거가 되었다. 선 문헌으로서는 『聯燈會要』 권1(X79, 14a6~8)에서 ‘완성된’ 형태로 만들어졌다.
  333. 333)불립문자不立文字·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교외별전敎外別傳. 이 네 구절이 선종의 종지를 나타내는 말로 온전히 짝이 되어 나타난 것은 『祖庭事苑』 권5(X64, 379a2)라는 것이 정설이다.
  334. 334)금란가사金襴袈裟 : 금란가사는 선종사적으로 불법을 정통으로 계승한 자에게 전한다는 뜻을 지닌다. 『景德傳燈錄』 권1 「釋迦牟尼佛傳」(T51, 205c3)에 따르면, 부처님께서 금루승가리의金縷僧迦梨衣를 가섭에게 전해 주면서 자씨불慈氏佛(彌勒佛)이 세상에 출현할 때까지 잘 간직하도록 당부했다고 한다.(復告迦葉, ‘吾將金縷僧迦梨衣, 傳付於汝, 轉授補處, 至慈氏佛出世, 勿令朽壞.’) 또한 같은 책 「摩訶迦葉傳」(T51, 206b5)에 “가섭이 승가리의를 지니고 계족산雞足山에 들어가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다렸다.(持僧伽梨衣, 入雞足山, 候慈氏下生.)”라고 하는 기사들이 그러한 풍속의 근거가 되었다.
  335. 335)찰간刹竿 : 조사의 법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절 문 앞에 세워 두는, 깃발을 건 장대.
  336. 336)『禪門拈頌說話』 81則 본칙 설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禪門拈頌說話』 81則(H5, 88c11), “ ‘아난아 하고 부르자 아난이 예 하고 응답한 것’은 이전의 성인들이 법을 드러내는 방편은 비록 다양했지만 부르고 응답한 그것이 가장 법에 잘 들어맞았음을 보여 준다. 불렀던 심경이 분명했고 응답한 마음도 진실했다고 하겠다. ‘문 앞의 찰간을 쓰러뜨려라’라고 한 것은……여기서는 ‘쓰러뜨려라’고 하였으니 법을 전한 일도 없고 받은 일도 없다는 뜻이다.(召阿難阿難應諾者, 先聖示法, 方便雖多, 喚應最親切. 則喚處分明, 應處眞也. 倒却門前刹竿着者,……今云倒却著, 則無傳無得也.)”
  337. 337)달마대사는 인도로부터~없을 것이다 : 『傳心法要』(T48, 384a6)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338. 338)이 시중의 전체 내용은 『禪門拈頌說話』 97則(H5, 98a2), “崇寧琪, 心經注法曰~”에 실린 내용과 흡사하다. 『心經注法』은 정확히 어떤 책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339. 339)『頌古聯珠通集』 권6(X65, 507a24), 『宗門拈古彙集』 권4(X66, 29a1), 『禪門拈頌說話』 97則(H5, 98a2) 참조.
  340. 340)『禪門拈頌說話』 97則 본칙 설화에서는 다음과 같이 평석하였다. 『禪門拈頌說話』 97則(H5, 99b4), “ ‘항상 이와 같이(如是) 경전을 독송한다.’는 것은 상황에 적합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여如라 하고 이치가 이와 같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시是라 한다. 또한 더 이상 위가 없는 이 마음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을 근본으로 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 가므로 글자의 뜻을 들어서 ‘이와 같은(如是)’이라 한 것일 뿐이다. ‘경經’이란 어느 한 대장경이 중생에게 더할 나위 없이 널리 이익을 주는 데까지 이른다는 뜻에서 든 말이다.(常轉如是經者, 事無不是曰如, 理無不如曰是. 又惟此無上心, 宗以心傳心, 心心相續故, 擧義而言如是而已. 經者, 有一大經卷, 至普饒益衆生也.)”
  341. 341)‘금강반야바라밀경’이라 제목을 붙인 뜻.
  342. 342)『禪門拈頌說話』 97則에 실린 숭령기崇寧琪의 송은 다음과 같다. 『禪門拈頌說話』 97則(H5, 98b20), “반야바라밀이여! 이 경은 색과 소리가 아니네. 한역에서도 말을 잘못 옮겼고, 범어에서도 억지로 이름 붙였다네. 발 걷어 올리자 가을 달 밝고, 창문 열자 새벽 공기 맑구나. 만일 이와 같이 알아차린다면, 제목의 뜻 매우 분명해지리.(般若波羅蜜! 此經非色聲. 唐言謾翻譯, 梵語强安名. 卷箔秋光冷, 開窓曙氣淸. 若能如是會, 題目甚分明.)”
  343. 343)이문화李文和 : 송 태종의 부마駙馬이자 『天聖廣燈錄』의 편자인 이준욱李遵勗을 가리킨다.
  344. 344)자조 온총慈照蘊聦(965~1032) : 주석했던 산 이름을 붙여 석문 온총石門蘊聦, 곡은 온총谷隱蘊聦이라고도 한다. 출가한 후에 백장 도상百丈道常에게서 참구하였고, 후에 수산 성념首山省念의 인가를 받았다. 그 밖에도 대양 경연大陽警延, 지문 사계智門師戒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참구하였으며 1006년에는 양주襄州 석문산石門山에 머무르다 1020년에 곡은산谷隱山 태평흥국선사太平興國禪寺로 옮겼는데 대중 1천 명이 운집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자조慈照이며, 이준욱李遵勗이 비문을 지었다. 어록에 『石門山慈照禪師鳳巖集』이 있다.
  345. 345)이 부분까지는 『大慧語錄』 권19 「示淸淨居士」(T47, 890c14~17)의 내용과 흡사하다. 대혜는 “광명의 종자로 마음의 기틀을 발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할 만하다.(可以爲光明種子發機之助也.)”라고 평하였다.
  346. 346)평상시 그대로~못할 것이다 : 권상 25번 상당 법문 말미의 내용과 유사하다.
  347. 347)백장 회해百丈懷海의 다음 말과 대의가 통한다. 『景德傳燈錄』 권6 「百丈懷海傳」(T51, 250a17), “학인이 물었다. ‘대승의 돈오법문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대들은 우선 모든 대상에 대한 집착을 그치고 만사에 상대되는 이견二見을 내는 생각을 그쳐야 한다. 선善한 것과 선하지 않은 것, 세간과 출세간 등 모든 법에 대하여 기억에 담아 두지 말고, 그것을 대상으로 삼아 망상을 피우지 말며, 몸과 마음에 대한 속박을 모두 내던져 버리고 자재하도록 하면 마음은 목석과 같이 분별할 여지가 없어지고 마음이 갈 곳이 없어져 허공처럼 확 트일 것이니, 지혜라는 해가 저절로 드러나 구름 걷히고 해가 나타나는 것과 같으리라.’(僧問, ‘如何是大乘頓悟法門?’ 師曰, ‘汝等先歇諸緣, 休息萬事. 善與不善, 世出世間, 一切諸法, 莫記憶, 莫緣念, 放捨身心, 令其自在, 心如木石, 無所辯別, 心無所行, 心地若空, 慧日自現, 如雲開日出.’)”
  348. 348)『慈受懷深廣錄』 권1(X73, 107b18), “하안거를 맺으면서 법좌에 올라앉아 말했다. ‘금족禁足뿐만 아니라 금구禁口해야 하며, 금구뿐만 아니라 금수禁手해야 하며, 금수뿐만 아니라 금심禁心해야 한다. 금심하되 금구하지 않으면 날마다 부처의 추함을 불평할 것이요, 금구하되 금수하지 않으면 미혹함이 눈썹에 주름지게 할 것이요, 금수하되 금심하지 않으면 죄과가 깊어질 것이다. 금족하고 금구하면 개미가 먹이를 물고 달려가는 것 같을 것이요, 금구하고 금수하면 늘어진 수양버들이 모르는 사이 왼쪽 팔꿈치에서 돋아날 것이요, 금수하고 금심하면 대지가 온통 황금으로 변하리라. 하안거를 잘 보내고자 한다면 이렇게 이중으로 풀어낸 말을 자세히 살펴야 하리라. 산승이 이렇게 한 말은 흡사 겨울에 손 트지 않도록 하는 약과 같다.’(結夏上堂云, ‘不唯禁足, 亦乃禁口;不唯禁口, 亦乃禁手;不唯禁手, 亦乃禁心. 禁心不禁口, 日日嫌佛醜;禁口不禁手, 累及眉頭皺;禁手不禁心, 罪過轉彌深. 禁足更禁口, 蟻子銜椀走;禁口更禁手, 垂楊生左肘;禁手更禁心, 大地是黃金. 要得一夏安樂, 細看兩重註脚. 山僧恁麽說話, 大似不龜手之藥.’)”
  349. 349)달마대사가 입적에 즈음하여 도부道副·니총지尼總持·도육道育·혜가慧可 등 네 명의 제자에게 각자 자신의 견해를 말해 보라 하였을 때, 도육이 ‘사대는 본래 공이고 오음五陰은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니, 제 견해로는 실정에 들어맞는 하나의 법도 없습니다.’라고 하였고 이에 달마는 ‘너는 나의 뼈를 얻었다.’라고 한 문답이 전한다. 『景德傳燈錄』 권3 「菩提達磨傳」(T51, 219c3) 참조. 『投子語錄』 古尊宿語錄36(X68, 235c3), “ ‘어떤 것이 법왕의 주인이란 뜻입니까?’ ‘사대는 본래 공이고 오음은 실재하는 실체가 아니다.’(問, ‘如何是法王主?’ 師云, ‘四大本空, 五陰非有.’)”
  350. 350)고암高巖 : 고암高菴 또는 고암高庵으로 쓰기도 한다.
  351. 351)이 부분까지는 무견 선도無見先覩가 한 말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無見先覩語錄』 권상 「示自省新戒」(X70, 582b20~c1), 『禪林寶訓』 권2(T48, 1026c5~10), 『列祖提綱錄』 권14(X64, 108c3~6) 참조.
  352. 352)선겸善謙 : 개선 도겸開善道謙 또는 겸선謙禪이라고도 한다. 원오 극근圜悟克勤을 찾아가 참학하여 깨달음의 계기를 얻었다고 한다. 『續傳燈錄』 권32 「開善道謙傳」(T51, 688b23), 『聯燈會要』 권17 「開善道謙章」(X79, 152b11) 참조.
  353. 353)대체로 『無見先覩語錄』 권상 「示道昌禪人」(X70, 582c6~9)에 실린 내용과 다르지 않다. “옛사람의 공안(古人公案)”이라 한 부분이 이 책에는 구체적으로 ‘조주趙州의 무자無字’ 공안으로 제시되어 있는 점이 다르다. 『指月錄』 권32(X83, 765b4~8) 참조.
  354. 354)여기까지는 무견 선도無見先覩의 법어에서 인용하였다. 『無見先覩語錄』 권상 「示徐提點」(X70, 581b5~7) 참조.
  355. 355)흙덩이를 쫓아가는 개의 신세 : 개에게 흙을 던지면 흙덩이를 쫓아가고 그것을 던진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속담에서 나온 말. 말이나 행위에 미혹되어 그것이 나타내는 진실을 파악하지 못한다는 뜻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大般涅槃經』 권25(T12, 516b13), “모든 범부가 결과만 보고 그 발생의 조건이 되는 인연을 살필 줄 모르니, 마치 개가 자기에게 던져진 흙덩이를 쫓아가고 던진 사람을 쫓아가 물지 못하는 것과 같다.(一切凡夫, 惟觀於果, 不觀因緣, 如犬逐塊, 不逐於人.)”
  356. 356)『圓覺經』(T17, 915c24) 참조.
  357. 357)번잡한 세속의~타파되는 순간 : 무견 선도無見先覩의 말이며, 그의 조부祖父 단교 묘륜斷橋妙倫의 영향도 보인다. 『無見先覩語錄』 권상 「示顯禪人」(X70, 583a24), 『斷橋妙倫語錄』 권상(X70, 556c13) 등 참조.
  358. 358)원래부터 옛날 그대로의 자기(元來舊時人) :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그 사람. 본래의 자기 곧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같은 뜻이다. 수행하여 깨달아도 새롭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예전 그대로라는 뜻을 가진다. 예전과 달라진 현재의 사람을 금시인今時人이라 하는데, 둘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기 때문에 ‘원래부터’라 한다. 『曹山語錄』(T47, 530b1), “원래 옛날 그대로의 사람이지만 옛날에 가던 길로 가지 않을 뿐이다.(元是舊時人, 只是不行舊時路.)”
  359. 359)달마대사는 마음~있는 것이다 : 『傳心法要』(T48, 380c7)의 내용을 취했다.
  360. 360)보통 7년(526)에 달마대사가 중국에 들어왔다는 설에 기초한 말. 남천축으로부터 바다를 건너 중국 광주에 도착했다는 기록에 따른다.
  361. 361)총령葱嶺 : 입적한 뒤 달마를 웅이산熊耳山에 매장했는데 동위사東魏使 송운宋雲이 총령에서 신 한 짝을 들고 서쪽으로 가는 달마를 만났다고 보고하여 관을 열어 보았더니 신 한 짝만이 남아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景德傳燈錄』 권3 「菩提達磨傳」(T51, 220b4) 참조.
  362. 362)월산 사내越山師鼐가 민왕閩王의 초청으로 청풍루에서 마련한 재齋에 가서 앉아 있다가 햇빛을 보고 활연히 깨달은 소식을 전한 게송. 『景德傳燈錄』 권19 「師鼐鑒眞傳」(T51, 356a14) 참조.
  363. 363)포대布袋 화상의 게송 중 일부. 『景德傳燈錄』 권27(T51, 434b13), 『五燈會元』 권2(X80, 68a22) 등 참조.
  364. 364)사자좌師子座 : 불조佛祖가 앉아서 설법하는 자리. 예좌猊座라고도 한다. 『大智度論』(T25, 111b2), “이는 부르기를 사자라 하는 것이지 실제의 사자는 아니다. 부처님은 사람 중의 사자와 같은 지위이므로 부처님이 앉는 곳은 평상이건 맨바닥이건 모두 사자좌라 한다.(是號名師子, 非實師子也. 佛爲人中師子, 佛所坐處, 若床若地, 皆名師子座.)”; 『一切經音義』 권36(T54, 546a14), “사자좌란 진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사람(설법하는 사람)이 앉는 자리로서 세속에서는 고좌高座라고 한다.(師子座者, 轉法輪人所坐之座, 俗名高座.)”
  365. 365)분주 무업汾州無業의 말에 기초한다. 『景德傳燈錄』 권28 「大達無業傳」(T51, 444c17), “총명한 분별로는 업을 대적할 수 없고, 메마른 지혜로는 괴로움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다.(且聰明不能敵業, 乾慧未免苦輪.)” 메마른 지혜란 간혜乾慧를 말한다. 『大乘義章』 권14(T44, 755c12), “비록 지혜가 있지만 선정禪定의 물에 의해 윤택함을 얻지 못했으므로 간혜라 한다. 또한 이러한 견해에서 아직 이치의 물(理水)을 얻지 못한 것을 또한 간혜라 한다.(雖有智慧, 未得定水, 故云, 乾慧. 又此事觀, 未得理水, 亦名乾慧.)”
  366. 366)인천人天의 인과 : 육도윤회六道輪廻 중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과 하늘에 태어나게 되는 것의 인과관계. 비록 인계人界와 천계天界가 지옥·축생·아귀·아수라 등 다른 윤회 방식보다 상대적으로 낫다고 해도 이것 역시 근본적인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367. 367)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으나 대체로 다음 글과 의미가 통한다. 『景德傳燈錄』 권28 「大達無業傳」(T51, 444c24), “임종에 이르러서도 터럭 끝만큼이라도 범부와 성인이 다르다는 망상분별이 없어지지 않고 미세한 먼지만큼이라도 사념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 남은 염念을 따라 생生을 받게 될 것이다.(臨終之時, 一豪凡聖情量不盡, 纖塵思念未忘, 隨念受生.)”
  368. 368)천경 초남千頃楚南(813~888) : 복건성 민중閩中 출신. 황벽 희운黃檗希運의 법을 이어받았다. 회창會昌 연간에 파불破佛을 만나 임야에 숨어 지내다 배휴裵休의 부름을 받고 강소성 고소姑蘇의 보은사報恩寺에 20여 년 머무르다 후에는 보림사寶林寺, 지형산支硎山, 절강성 항주杭州의 천경산千頃山 등에 머물렀다. 887년 전왕錢王의 부름을 받고 궐내에 들어가 법을 설하고 자의紫衣를 하사받았다.
  369. 369)『景德傳燈錄』 권12 「千頃楚南傳」(T51, 292c3) 참조.
  370. 370)나중에 그~정도가 되어야 : 암두 전활巖頭全奯의 말. 『頌古聯珠通集』 권28(X65, 649b14), 『大慧語錄』 권22(T47, 906b13), 『密菴語錄』(T47, 980a21) 등 참조.
  371. 371)구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無求無着) : 구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것. 불도를 실천하는 가장 근본적인 주제 중 하나이다.
  372. 372)그대들이 성불하고자~바로 부처이다 : 『傳心法要』(T48, 381a6~8)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373. 373)여우가 의심하고 또 의심하듯이(狐疑) : 의심이 많은 여우에 빗대어 의심이 많은 것 또는 그러한 사람을 이르는 말. 『漢書』 「文帝紀」 안사고顏師古 주注에 “여우라는 짐승은 그 본성이 의심이 매우 많아서 매양 얼음이 언 강을 건널 때마다 물이 흐르는지 귀 기울여 듣고 확인하고서야 건넌다. 그래서 의심이 많은 사람을 ‘호의狐疑’라고 부르게 되었다.(狐之爲獸, 其性多疑, 每渡冰河, 且聽且渡. 故言疑者而稱狐疑.)”라고 한다. 『碧巖錄』 21則(T48, 162b23), “마치 여우가 의심이 많아 빙판 위를 갈 때에 물소리가 나는지 들어 보고 소리가 나지 않아야 비로소 강을 건너는 것과 같다.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여우가 의심하고 또 의심하듯이 한다면 언제 평온해질 수 있겠는가!(如野狐多疑, 氷凌上行, 以聽水聲, 若不鳴方可過河. 參學人, 若一狐疑了一狐疑, 幾時得平穩去!)”
  374. 374)『景德傳燈錄』 권9 「長慶大安傳」(T51, 267c1), “그대들 모두 나를 찾아와 무엇을 구하는 것인가? 성불하고자 한다지만, 그대 자신이 부처인데도 도리어 남의 집을 찾아다니는구나. 급급히 내달리는 모습이 마치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쫓아가는 것과 같으니, 언제나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으리오!(汝諸人總來就安求覓什麽? 若欲作佛, 汝自是佛而却傍家走. 怱怱如渴鹿趁陽焰, 何時得相應去!)”
  375. 375)한 마리~나타나 있으나 : 다음 글에서 인용하였다. 『景德傳燈錄』 권9 「長慶大安傳」(T51, 267c6), “나는 위산에 있던 30년 동안 위산의 밥을 먹고 위산의 똥을 누었을 뿐 위산의 선禪을 배우지 않았다. 다만 한 마리 물소를 지켜보았으니 그것이 길에서 벗어나 풀숲으로 들어가면 곧장 끌고 나오고, 남의 논밭을 침범하면 채찍질하여 조복시켰을 뿐이다. 이렇게 길들이기 오래되어 기특하게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게 되어 지금은 한 마리 노지백우露地白牛로 변하여 항상 눈앞에 있으면서 종일토록 분명히 나타나 있으나 쫓아도 가지 않는다.(安在潙山, 三十年來, 喫潙山飯, 屙潙山屎, 不學潙山禪. 只看一頭水牯牛, 若落路入草, 便牽出, 若犯人苗稼, 卽鞭撻調伏. 旣久可憐生受人言語, 如今變作箇露地白牛, 常在面前. 終日露逈逈地, 趁亦不去也.)”
  376. 376)참학參學 : 참선하고 도를 배운다는 뜻의 참선학도參禪學道를 줄여서 부르는 말.
  377. 377)문화問話 : 전해지는 이야기나 공안에 대하여 질문하는 것. 대답하는 것은 답화答話라 한다.
  378. 378)간화諫話 : 간화揀話와 같다. 공안 또는 화두의 시비를 가려내어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것.
  379. 379)대어代語 : 질문을 받은 사람이 대답하지 못할 경우에 그를 대신하여 질문을 던진 사람이 대답하는 말. 또는 어떤 문답으로 이루어진 공안에서 한편의 대답이 없을 때 후대에 그 공안을 제기한 선사가 대신하여 답하는 경우도 대어라고 한다.
  380. 380)별어別語 : 다른 선사들이 나눈 문답 중에서 이미 대답한 내용과는 별도로 자신의 견해로 대답하는 것. 그 질문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현장에서 대답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해진 문답을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자신의 선기禪機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대어와 별어를 아울러 써서 ‘대별代別’이라고도 한다.
  381. 381)여기까지는 참학에 대한 서록 본선瑞鹿本先의 말을 인용한 것이며, 그 이후도 일부는 그대로 인용하고 일부는 같은 맥락으로 백운 경한이 활용한 것이다. ‘불필不必’ 다음에 ‘학學’이라는 글자가 생략된 형태이며, 서록의 말에는 ‘미필未必’로 되어 있다. 『景德傳燈錄』 권26 「瑞鹿本先傳」(T51, 426b18~c3) 참조.
  382. 382)마음을 일으켜~관조하는 것 : 주 304 참조.
  383. 383)총명한 분별로는~벗어나지 못한다 : 주 365 참조.
  384. 384)본래인本來人 : 타고난 그대로 어떤 조작도 가하지 않은 사람. 수행한다고 청정하게 변하지도 않고 번뇌에 휩싸였다고 오염되지도 않는 본질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같은 말이다.
  385. 385)정확히 일치하는 문구는 찾을 수 없으나 다음 글을 참조할 만하다. 『闢妄救略說』 권2(X65, 126b6), “5조 제다가提多迦가 미차가彌遮迦에게 법을 부촉하며 전법게를 주었다. ‘본래 갖추고 있는 심법心法에 통달하면, 법도 없고 법 아닌 것도 없네. 온전히 깨달아도 깨닫지 않았을 때와 같으니, 마음도 없고 법도 없노라.’ ‘온전히 깨달아도 깨닫지 않았을 때와 같다’라고 한 말은 본래인을 가리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마음도 없고 법도 없다’라고 한 것이니, 본래인 외에 별도로 무슨 심법의 광대함이 있겠는가! 6조 미차가가 바수밀婆須蜜에게 법을 부촉하며 전법게를 주었다. ‘마음이 없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으니, 얻었다고 하면 법이라 할 수 없네. 마음이 마음 아님을 깨닫는다면, 비로소 마음과 심법을 진실로 알리라.’ ‘마음이 마음 아님을 깨닫는다면’이라 한 말은 본래인을 가리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비로소 마음과 심법을 진실로 알리라’라고 한 것이니, 일체의 사물과 현상이 모두 본래인이요 본래의 심법이 아니겠는가!(又如五祖付彌遮迦曰, ‘通達本法心, 無法無非法. 悟了同未悟, 無心亦無法.’ 據‘悟了同未悟’, 非指本來人而何! 故曰, ‘無心亦無法’, 又豈於本來人外, 別有心法廣大乎! 六祖付婆須蜜偈曰, ‘無心無可得, 說得不名法. 若了心非心, 始解心心法.’ 據‘若了心非心’, 非本來人而何! 故曰, ‘始解心心法’, 又非塵塵盡是本來人, 爲本心法乎!)”
  386. 386)이 시중示衆의 내용과 의미는 운문 문언雲門文偃의 상당 법문과 대체적으로 일치한다. 『景德傳燈錄』 권19 「雲門文偃傳」(T51, 357c27~358a7), 『雲門廣錄』 권상(T47, 548c8~16) 참조.
  387. 387)『圓覺經』(T17, 920a28) 참조.
  388. 388)막대기를 휘둘러~따려는 것(掉棒打月) : 부질없는 짓을 뜻한다. 당치도 않은 방법으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어리석음 또는 어떤 수단으로도 접근할 수 없는 경지를 비유하기도 한다.
  389. 389)중도를 깨우치는~벗어났다고 생각한다 : 분주 무업汾州無業의 말을 인용한 것이다. 『景德傳燈錄』 권28 「汾州無業傳」(T51, 444c14) 참조.
  390. 390)부드럽고 맛난 음식(輕軟) : 식삼덕食三德의 하나. 식삼덕은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하는 음식에 갖추어야 할 세 가지 덕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정결淨潔과 여법如法이다.
  391. 391)염라대왕이 밥값을~할 때 : ‘반전飯錢’은 밥값을 뜻하는 말. 수행자가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죽은 다음에 염라대왕이 그에게 수행 기간 동안 얻어먹은 밥값을 갚으라고 할 날이 온다(索飯錢有日在)고 한다. 『碧巖錄』 66則(T48, 196c7), “이런 잘못된 행각이나 하고 돌아다닌다면 염라대왕이 그대에게 밥값을 내라고 따질 것이다.(似恁麽行脚, 閻羅老子問爾, 索飯錢在.)”
  392. 392)『景德傳燈錄』 권7 「大梅法常傳」(T51, 254c2) 참조.
  393. 393)『證道歌』(T48, 395c21) 참조.
  394. 394)『梵網經』 권2(T24, 1004b4) 참조.
  395. 395)그대들이 본원에~한 것이다 : 이 부분은 『都序』 권상(T48, 399a29~b5)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景德傳燈錄』 권13 「圭峯宗密傳」(T51, 306a20~24) 참조.
  396. 396)이 시중은 『大慧語錄』 권23 「示陳機宜」(T47, 908b16~b22)의 내용과 동일하다. 다만 방거사의 구절에 대한 배치를 달리했고, 끝부분에 “공이란 깨달음의 본체”라고 한 구절을 덧붙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397. 397)입적을 앞두고 친구인 절도사 우적于頔이 문병 왔을 때 남긴 임종게臨終偈. 『景德傳燈錄』 권8(T51, 263c15), 『龐居士語錄』 권상(X69, 134b11) 등 참조.
  398. 398)『大慧語錄』 권23(T47, 908b18)에는 “그들은 공도~모르는 것이다.”라고 한 말이 “대단히 애처롭다.(深可憐愍)”라고 되어 있다.
  399. 399)정확히 일치하는 구절은 없지만, 『龐居士語錄』 권중(X69, 137c10), “공에 떨어지는 것을 두렵다고 생각하지 말고, 공을 얻는 것 또한 싫어하지 마라.(莫道怕落空. 得空亦不惡.)”라는 구절을 대혜가 약간 변형한 것으로 보인다.
  400. 400)『景德傳燈錄』 권25 「天台德韶傳」(T51, 409b23)의 내용에 기초한다.
  401. 401)세존께서 꽃을~지어 응답한 : 주 332 참조.
  402. 402)영산靈山 :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곳. 일반적으로 영취산靈鷲山이라 한다. 중인도 마가다국 왕사성王舍城의 동북쪽에 위치한 산이다. 산 모양이 독수리(鷲) 머리와 같고 독수리가 많이 서식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403. 403)네 가지 큰 은혜(四重恩) : 『大乘本生心地觀經』 권2(T3, 297a12)에는 “부모은父母恩·중생은衆生恩·국왕은國王恩·삼보은三寶恩”, 『正法念處經』 권61(T17, 359b14)에는 “모은母恩·부은父恩·여래은如來恩·설법사은說法師恩” 등으로 되어 있다.
  404. 404)2권본 『大梵天王問佛決疑經』(X1, 418c18)과 1권본 『大梵天王問佛決疑經』 「拈華品」(X1, 442a7)에 이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선종의 설화가 유행한 뒤에 그것을 경전에도 근거 짓기 위하여 만들어 낸 위경僞經이다.
  405. 405)여기까지는 『景德傳燈錄』 권18 「玄沙師備傳」(T51, 346a6)의 내용과 일치한다.
  406. 406)운거 도응雲居道膺의 문답에 보인다. 『景德傳燈錄』 권17 「雲居道膺傳」(T51, 335c2) 참조.
  407. 407)『聯燈會要』에 이 말의 완성된 형태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聯燈會要』 권1(X79, 14a6), “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니 대중이 모두 말이 없었으나, 오직 가섭만이 파안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나에게 정법을 꿰뚫어 보는 눈, 열반의 현묘한 마음, 형상을 벗어난 진실한 상, 미묘한 법문이 있다.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교설 밖에 별도로 전하니 그것을 마하가섭에게 부촉하노라.’(世尊, 在靈山會上, 拈花示衆, 衆皆黙然, 唯迦葉, 破顔微笑. 世尊云, ‘吾有正法眼藏, 涅槃妙心, 實相無相, 微妙法門. 不立文字, 敎外別傳, 付囑摩訶迦葉.’)” 주 332 참조.
  408. 408)이 역시 위의 말에 이어지는 현사 사비玄沙師備의 법문을 축약한 것이다. 현사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玄沙語錄』 권상(X73, 32b1), “부처님께서 ‘나에게 정법을 간직한 눈이 있으니 그것을 마하가섭에게 전하노라.’라고 하신 것을 나는 달에 대하여 말씀한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조계 혜능이 불자를 꼿꼿이 세운 것은 또한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은 것이라고 본다.(且如道, ‘吾有正法眼, 付囑大迦葉.’ 我道猶如話月, 曹谿竪拂子, 還如指月.)”
  409. 409)『圜悟心要』 卷下始(X69, 487a19), “옛사람은 종지를 깨우친 다음, 깊고 후미진 바위 동굴이나 띠풀로 엮은 집이나 석실에서 번뇌 망상을 완전히 그친 채 품은 생각을 그대로 펼치며 명예도 잊고 이익도 버리고서 세상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古人得意之後, 向深巖僻洞, 茅茨石室, 大休大歇, 放懷履踐, 忘名棄利, 與世不相關涉.)”
  410. 410)여덟 절기(八節) : 입춘立春, 춘분春分, 입하立夏, 하지夏至, 입추立秋, 추분秋分, 입동立冬, 동지冬至.
  411. 411)오늘은 자유자재로~움직였던 것이다 : ≺了元歌≻에 나오는 구절. 숭악 혜안崇岳慧安의 법제자인 복선 인검福先仁儉은 득법한 후에 시골 마을과 저잣거리를 이리저리 돌아다녀 등등화상騰騰和尙이라고도 불렸는데, ≺了元歌≻를 지어 임운등등任運騰騰의 경지를 노래하였다. 『景德傳燈錄』 권30 「騰騰和尙了元歌」(T51, 461b13) 참조.
  412. 412)서암 영각瑞岩永覺의 법문과 같은 기조이다. 『續傳燈錄』 권14(T51, 562a17), “납승의 본분에 따른다면 사계절도 구별하지 못했을 것인데, 여덟 절기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바위 동굴에 은거하며 나왔다 사라졌다 거두었다 펼쳤다 하며 바다가 변하여 뽕나무 밭이 되거나 세월이 어떻게 흘러가거나 상관하지 않았다. 이불이 따뜻해지면 비로소 봄이 온 줄 알았고, 시든 잎이 섬돌에 휘날리는 모습을 보고서야 가을빛을 제대로 알았다. 이와 같은 경계가 되어야 비로소 도를 품었다고 한다.(若據衲僧分上, 四時不別, 八節安知? 高棲巖上, 出沒卷舒, 一任桑田海變, 從他兎走烏飛. 布衾煖處始知春, 黃葉飄階委秋色. 如斯境界, 方稱道懷.)”
  413. 413)나찬 화상嬾瓚和尙 : 당나라 때 스님 명찬明瓚. 숭산 보적嵩山普寂(651~739)의 법을 이은 뒤 남악南岳(湖南省) 형산衡山에서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살았다. 신통력이 뛰어나 신승神僧으로도 불렸지만, 대중이 울력을 하고 있어도 동참하지 않고 빈둥거리며 지내는 등 평소 탈속하고 나태한 모습 때문에 ‘나찬’이라 불리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으며 지냈다고 하여 ‘나잔懶殘’이라고도 불린다. 시호는 대명선사大明禪師이다.
  414. 414)≺南嶽懶瓚和尙歌≻의 일부이다. 『景德傳燈錄』 권30(T51, 461c3) 참조. “배고프면 밥 먹고~그러한 것이라네.”라는 구절은 이 책 p.461b21의 내용이 삽입된 것이다. 『佛祖歷代通載』 권14(T49, 606c4) 참조. 마지막 두 구절은 억지로 애써 무엇인가 하지 않아도 시절에 따라 흐르고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를 통해 무사無事·무심無心의 경계를 표현하였다.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은 ‘춘래초자생春來草自生’으로도 많이 쓰인다.
  415. 415)『應菴曇華語錄』 권9 「示曇禪人」(X69, 547a4~11)의 내용과 유사하다.
  416. 416)아무것도 알지도~못하는 경계(百不知百不會) : 모든 분별이 떨어져 나간 경지를 표현한 말. ‘백불百不’은 강한 부정을 나타낸다.
  417. 417)여기서 ‘살림살이(生計)’는 음식이나 세간 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선기禪機 또는 수단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활계活計, 별유생애別有生涯, 본분초료本分草料 등의 말과도 통한다. 『禪門拈頌說話』 16則(H5, 28b13), “만일 상서로운 짐승 기린과 같이 걸출한 사람이라면 반드시 자기 자신만의 살림살이를 가져야 한다.(若是瑞獸麒麟, 須別有箇生涯處, 始得.)”; 『圜悟語錄』 권14 「示華藏明首座」(T47, 777c14), “만일 본색本色을 추구하는 진정한 수행자라면 반드시 남들이 남긴 분별을 넘어서고 견해도 벗어나 자신만의 살림살이를 가져야 하는 법이다.(若是本色眞正道流, 要須超情離見, 別有生涯.)”
  418. 418)「흥성사 입원소설」 35번 상당 법문과 비슷한 내용이다.
  419. 419)『證道歌』(T48, 396b14), “침묵하고 있는 때가 말하고 있는 것이요, 말하고 있는 때가 침묵하고 있는 것이다.(默時說說時默.)”; 『禪門拈頌說話』 125則(H5, 133b14), “범천기梵天琪의 주석은 다음과 같다. 침묵할 때의 설법이란 침묵할 때도 항상 설법한다는 말이다.……설법할 때의 침묵이란 대장경의 모든 가르침이 부처님의 입으로 설해진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글자도 설하신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처음 성도한 새벽부터 마지막 열반에 드신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사이에 어떠한 글자도 설하신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 말해 보라! 결국 설한 가르침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琪注云, 默時說者, 卽是默時常說也.……說時默者, 一大藏敎, 金口所說, 未曾說一字. 故經云, ‘始從成道夜, 終至拔提河, 於是二中間, 未曾說一字.’ 且道! 畢境是有所說, 無所說也?)”
  420. 420)무엇에도 구애되거나 속박되지 않는 상태를 일상사를 빌려 역설적으로 표현한 말. 『雲門廣錄』 권상(T47, 545c29), “종일 일에 대하여 말해도 입술과 이빨에 걸어 둔 적이 없고 한 자도 말한 적이 없으며, 종일 옷을 입고 있고 밥을 먹어도 한 톨 밥알도 입에 대지 않았고 한 오라기 실도 걸친 적이 없다. 비록 이러하지만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말에 불과하며 모름지기 실참實參하여 이와 같이 터득해야 한다.(終日說事, 未嘗挂著脣齒, 未曾道著一字;終日著衣喫飯, 未曾觸著一粒米, 挂著一縷絲. 雖然如此, 猶是門庭之說, 須是實得與麽始得.)”
  421. 421)자상自相 :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독립적 특징. 다른 것과 공유하는 특징인 공상共相과 대칭된다.
  422. 422)이상은 『圓覺經略疏』 권상(T39, 540c23~25)의 내용을 인용하였다.
  423. 423)두 토막(兩橛) : 나무토막을 두 개로 나눈 것. 유무, 시비, 선악 등 모든 상대적인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여기서는 인식 기관(根)과 인식 대상(塵), 내심內心과 외경外境,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또는 좋음과 나쁨, 산하대지山河大地와 묘정명심妙淨明心 등을 열거하며 이 상대적인 대상들이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있다.
  424. 424)『大慧語錄』 권21 「示妙淨居士」(T47, 901a8) 참조.
  425. 425)4조 도신道信의 말. 『景德傳燈錄』 권4 「牛頭法融傳」(T51, 227b1) 참조.
  426. 426)『潙山語錄』(T47, 579b19)에 나오는 문답. 묘정명심妙淨明心은 『楞嚴經』 권1(T19, 109a6)에 나오는 용어이다. 이 마음을 근본적인 이理로 설정하고, 구체적인 차별 현상인 사事를 대비시켜 궁극적으로 두 가지가 다른 것이 아니라는 취지로 유도하고 있는 문답이다.
  427. 427)조사선祖師禪 : 이 부분은 조사선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소재를 모아 백운 경한이 간명하게 평가를 붙인 형식의 글이다. 원론적인 교설에 의존하지 않고 소리와 색과 언어 등으로 종지를 구체화하고, 감각적 통로로 깨달음에 이르는 사례들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428. 428)『宗門武庫』(T47, 946a25) 이하의 내용.
  429. 429)제형提刑 : 지방에서 형벌이나 옥사獄舍의 일을 맡아보던 관직명. 송나라 때의 관직명으로서 ‘제점형옥사提點刑獄司’를 줄여서 이르는 말이다. 오늘날의 법무부 부장과 같은 직위이다.
  430. 430)소염小艶 : 소염小豔으로도 쓴다. 꽃봉오리가 막 터져 산뜻하고 고운 꽃송이를 뜻한다.
  431. 431)양귀비楊貴妃가 담 밖에 있는 애인 안녹산安祿山에게 자신의 목소리라도 전하기 위해 “소옥아, 소옥아!” 하고 몸종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이다. 소옥이 달려가 보지만 매번 별일이 없어 어리둥절할 뿐이다. 조사선에서 쓰는 언어의 본질적 기능 또는 간화선看話禪의 화두가 지니는 전략적 특징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이다. 화두의 말뜻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소옥이 양귀비의 부름에 속은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화두는 어떤 분별도 용납되지 않고, 지시하는 어떤 뜻도 담기지 않은 경계로 유도하는 말이 될 때 비로소 활구活句로서의 효용을 얻게 된다. 소염의 시 앞의 두 구절은 다음과 같다. “저 큰 저택의 아름다운 정취도 화폭에 담지 못하니, 낭군 없는 허전한 방 깊은 곳에서 슬픈 정감을 펼치노라.(一段風光畵不成, 洞房深處暢予情.)”
  432. 432)진 제형은 그 목소리가 지시하는 어떤 숨은 내용이 진짜 있는 것으로 오해했다는 뜻. 곧 그 목소리가 소옥을 부른 것이 아니라 안녹산에게 들리도록 했다는 뜻이고, 제형은 이렇게 알았으나 오해라는 말이다. 선지禪旨의 비유로 볼 때 그 목소리는 안녹산에게 전한 것도 아니고 그 밖의 어떤 지시 대상도 없기 때문이다.
  433. 433)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 조주 종심趙州從諗의 화두. 『趙州語錄』 古尊宿語錄13(X68, 77c1), “그때 어떤 학인이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 ‘화상께서는 경계를 가지고 지시하지 마십시오.’ ‘나는 경계를 가지고 지시한 것이 아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입니까?’ ‘뜰 앞의 잣나무니라.’(時有僧問,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學云, ‘和尙莫將境示人.’ 師云, ‘我不將境示人.’ 云, ‘如何是祖師西來意?’ 師云, ‘庭前栢樹子.’)”
  434. 434)니聻 : 따져 묻거나 앞의 말을 강조하고 주의를 환기하기 위하여 끝부분에 여운으로 남기는 소리.
  435. 435)이하는 『景德傳燈錄』 권11 「仰山慧寂傳」(T51, 283b3), 『潙山語錄』(T47, 580b28) 등에 수록되어 있다. 초의 의순草衣意詢(1786~1866)은 『禪門四辨漫語』 「二禪來義」(H10, 827a2)에서 “이 문답이 두 가지 선禪의 명칭과 뜻을 분명하게 나눈 유래이다.(此二禪所以分曉名義之始也.)”라고 평가했다. 『潙山語錄』(T47, 580c4)에 “현각玄覺은 ‘말해 보라! 여래선과 조사선은 나눌 수 있는가, 나누지 못하는가?’라고 말했고, 장경 혜릉長慶慧稜은 ‘한꺼번에 눌러앉아 버려라!’라고 했다.(玄覺云, ‘且道! 如來禪與祖師禪, 是分不分?’ 長慶稜云, ‘一時坐却!’)”라고 했는데, 이러한 평가는 이 내용 자체를 하나의 화두로 수용하면서 여래선과 조사선도 화두의 소재로 활용한 것일 뿐, 의미상으로 구분한 것은 아니다.
  436. 436)사미沙彌 : 7세 이상 20세 미만으로서 출가하여 십계十戒를 받았지만 아직 구족계具足戒를 받지 못하여 정식으로 비구比丘가 되지 못한 남자 수행자.
  437. 437)보지공寶誌公 : 주 182 참조.
  438. 438)『景德傳燈錄』 권29 「梁寶誌和尙大乘讚」(T51, 449b1) 참조.
  439. 439)『華嚴經』 권23(T10, 121c14) 참조.
  440. 440)부대사傅大士(善慧大士)의 말이다. 『善慧大士錄』 권3(X69, 115c18) 참조. 『雪竇語錄』 권1(T47, 671b27), “현사 사비玄沙師備가 말했다. ‘대단한 부대사여! 밝디밝고 신령한 마음(昭昭靈靈)이 있다고 오인하였을 뿐이로구나.’ 설두 중현雪竇重顯이 핵심을 집어내어 말한다. ‘현사는 풀을 쳐서 뱀을 잠에서 깨우려 한 것이다.’(玄沙云, ‘大小傅大士! 只認得箇昭昭靈靈.’ 師拈云, ‘玄沙也是打草蛇驚.’)” 현사는 사람들이 부대사의 말을 듣고 ‘말소리가 곧 부처’라는 식으로 일면적으로 생각할 것을 우려하여 ‘밝디밝고 신령한 마음이 있다’고 집착하는 생각을 깨우쳐 주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소리 자체가 부처 또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것 또한 부대사의 뜻이 아니라는 경계이다. 설두도 ‘말소리’를 ‘부처가 간 곳’으로 귀착시키는 일면적 방식을 다시 부각하여 부정함으로써 그 몽상에서 사람들을 깨워 준 것이다.
  441. 441)뜰 앞의 잣나무(庭前柏樹子) : 주 433 참조.
  442. 442)삼 세 근(麻三斤) : 동산 수초洞山守初(910~990)의 화두. 『洞山守初語錄』 古尊宿語錄38(X68, 246b11), “ ‘부처란 무엇입니까?’ ‘삼 세 근이니라.’(問, ‘如何是佛?’ 師云, ‘麻三斤.’)”
  443. 443)마른 똥막대기(乾屎橛) : 운문 문언雲門文偃의 화두. 『無門關』 21則 「雲門屎橛」(T48, 295c6), “운문에게 어떤 학인이 물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른 똥막대기!’(雲門因僧問, ‘如何是佛?’ 門云, ‘乾屎橛!’)”
  444. 444)신상神像 앞의 술 받침대(神前酒臺盤) : 경조 현자京兆蜆子의 화두. 『景德傳燈錄』 권17 「京兆蜆子傳」(T51, 338b3), “화엄 휴정華嚴休靜이 현자 선사를 꼭 붙들고 물었다.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인가?’ 현자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신상神像 앞의 술 받침대이다.’(靜把住問曰, ‘如何是祖師西來意?’ 師遽答曰, ‘神前酒臺盤.’)” 『禪門拈頌說話』 922則(H5, 666a24)에는 신상 앞의 술 받침대에 대하여 “어떤 맛도 없이 대답한 말(無味答話也)”이라 하였는데, 몰자미沒滋味한 화두라는 뜻이다.
  445. 445)운문 문언을 평가하는 말로 자주 등장하는 어구이다. 『碧巖錄』 14則(T48, 154c9), “운문은 평소 한 구절에 반드시 삼구를 갖추었으니, 함개건곤구·수파축랑구·절단중류구가 그것이다. 놓아주었다 거두어들였다 하며 자연스럽게 기특한 묘미를 발휘하고 단칼에 잘라 버리듯이 명쾌한 수단을 써서 사람들로 하여금 지적인 분별로 헤아리지 못하도록 한다.(雲門尋常一句中須具三句, 謂之函蓋乾坤句, 隨波逐浪句, 截斷衆流句. 放去收來, 自然奇特, 如斬釘截鐵, 敎人義解卜度他底不得.)”; 같은 책, 27則(T48, 167c19), “저 운문은 한 가지를 들어 세 가지를 밝히고, 세 가지를 들어 한 가지를 밝히는 수단을 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대가 만약 운문의 세 구절에서 터득한다면 뒤통수에 박힌 번뇌 망상이라는 화살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운문은 한 구절 중에 반드시 세 구절을 갖추었으니 함개건곤구·수파축랑구·절단중류구가 자연스럽게 딱 들어맞았다.(須會他擧一明三, 擧三明一. 爾若去他三句中求, 則腦後拔箭. 他一句中須具三句, 函蓋乾坤句, 隨波逐浪句, 截斷衆流句, 自然恰好.)”
  446. 446)도오道吾 : 도오 종지道吾宗智·도오 원지道吾圓智라고도 부른다.
  447. 447)전거를 알 수 없다. 풍혈 연소風穴延沼의 말로 알려져 있으며, 앞 구절은 “늘 강남의 3월 풍경을 기억한다.(長憶江南三月裏)”라고 표현한 예가 더 많다. 『景德傳燈錄』 권13 「風穴延沼傳」(T51, 303b22), 『大慧語錄』 권10(T47, 853c27), 『密菴語錄』(T47, 969a1), 『虛堂語錄』 권2(T47, 999a7) 등 참조.
  448. 448)나른한 봄날 : 지일遲日은 낮이 길고 해가 늦게 진다는 말로 봄날을 가리킨다. 『詩經』 「小雅」 ≺出車≻, “봄날 해 길어지니 초목은 무성하고 꾀꼬리(鶬鶊)는 꾀꼴꾀꼴 우네.(春日遲遲, 卉木萋萋, 倉庚喈喈.)”
  449. 449)두보杜甫의 시 ≺絶句≻에 나오는 구절. 3, 4구는 “얼었던 땅 녹고 제비 날며, 따뜻한 모래사장에서 원앙은 조누나.(泥融飛燕子, 沙暖睡鴛鴦.)”이다. 『金山退菴道奇禪師語』 續古尊宿語要6(X68, 508a10), 『如淨語錄』 권상(T48, 122b2), 『介石智朋語錄』(X69, 793b16), 『五燈全書』 권49 「雪巖祖欽章」(X82, 153a5) 등에 나오지만, 본 어록과 같은 문답 형식은 아니다.
  450. 450)대룡大龍의 화두. “색신色身은 부서져 없어지는데 견고한 법신法身이란 어떤 것입니까?(色身敗壞, 如何是堅固法身?)”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碧巖錄』 82則(T48, 208a26) 참조.
  451. 451)『趙州語錄』 古尊宿語錄14(X68, 84c4) 참조.
  452. 452)밥자루야(飯袋子) : 자신의 본분을 모르고 밥만 축내는 쓸모없는 수행자라는 비판의 말.
  453. 453)『景德傳燈錄』 권23 「洞山守初傳」(T51, 389b13), 『雲門廣錄』 권하 古尊宿語錄18(X68, 118a7), 『洞山守初語錄』 古尊宿語錄38(X68, 252b6) 등 참조.
  454. 454)『景德傳燈錄』 권18 「玄沙師備傳」(T51, 347a29), 『玄沙廣錄』 권상(X73, 5a7) 등에 따르면, 질문한 학인은 경청 도부鏡淸道怤이다.
  455. 455)『景德傳燈錄』 권18 「鏡淸道怤傳」(T51, 349c12), 『碧巖錄』 46則(T48, 182b19) 등 참조.
  456. 456)『續傳燈錄』 권25 「香山道淵傳」(T51, 641b16), “술집들과 어물전 하나하나가 보배가 있는 장소요, 까마귀 울음소리와 까치 지저귐 하나하나가 진리를 전하는 소리이다.(酒市魚行, 頭頭寶所;鴉鳴鵲噪, 一一妙音.)”
  457. 457)『圜悟語錄』 권12(T47, 768a25), “하루 어느 시각에나 눈에 들어오고 귓전에 울리는 것들, 종소리와 북소리 그리고 나귀가 울고 개가 짖는 것에 이르기까지 이 본분의 소식이 아닌 것이 없다.(二六時中, 眼裏耳裏, 乃至鐘鳴鼓響, 驢鳴犬吠, 無非這箇消息.)”
  458. 458)현사 사비玄沙師備의 말. 주 219 참조.
  459. 459)두견(蜀魄) : 『祖庭事苑』 권5(X64, 382c16), “촉백은 두견(杜宇)이다. 『華陽國志』에 ‘두견이라는 새는 그 크기가 까치만 하고, 그 소리는 슬퍼서 입에서 피를 토하는 듯하다.’라고 하였다.(蜀魄, 卽杜宇也. 華陽國志云, ‘鳥有名杜宇者, 其大如鵲, 其聲哀而吻有血.’)”
  460. 460)원통문圓通門 : 걸림 없이 모든 것을 포용하고 낱낱의 존재들이 막힘없이 서로 통하는 세계.
  461. 461)천의 의회天衣義懷의 게송. 『嘉泰普燈錄』 권2(X79, 298b14), 『續傳燈錄』 권6(T51, 501c26) 참조. ‘血流’는 ‘鵽鳭’ 또는 ‘鵽鳩’로 되어 있다.
  462. 462)『達磨大師悟性論』(X63, 6c14), “다만 찰나 찰나 어느 순간에도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살아서는 무여열반을 증득할 것이요, 죽어서는 무생법인에 들 것이다. 눈으로 색을 보아도 색에 물들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들어도 소리에 물들지 않는다면 이것이 모두 해탈인 것이다. 눈이 색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눈이 곧 선문禪門이요, 귀가 소리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귀가 곧 선문인 것이다.(但念念之中, 不得妄想, 則生證有餘涅槃, 死入無生法忍. 眼見色時, 不染於色;耳聞聲時, 不染於聲, 皆解脫也. 眼不著色, 眼爲禪門;耳不著聲, 耳爲禪門.)”; 『佛眼語錄』 「示禪人心要」 古尊宿語錄34(X68, 225b20), “깨달음이란 깨달음의 주체와 그 대상을 끊어 버린 것이니 별도의 현묘한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며 평상시에 매일 하는 그대로일 뿐이다. 예컨대 색을 볼 때가 깨달을 순간이며 소리를 들을 때가 깨달을 순간이다.(證者, 絶能所也, 非別有玄理在, 尋常日用處. 如見色時是證時, 聞聲時是證時.)”; 『少室六門』(T48, 371c16) 참조.
  463. 463)『潙山語錄』(T47, 580c14), “영운이 위산 문하에 있을 때 복숭아꽃을 보고 도를 깨우치고는 게송을 지었다. ‘30년 동안 검객을 찾아다니는 동안, 얼마나 많은 잎이 떨어지고 다시 새 가지가 돋았던가! 복숭아꽃을 한 번 보고 알아차린 다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더 이상 의심이 남아 있지 않노라.’(靈雲, 初在潙山, 因見桃花悟道, 有偈云, ‘三十年來尋劍客, 幾回落葉又抽枝! 自從一見桃華後, 直至如今更不疑.’)”
  464. 464)『景德傳燈錄』 권11 「香嚴智閑傳」(T51, 284a9), “어느 날 산에서 초목을 베다가 던진 돌조각이 대나무에 부딪혀 나는 소리를 듣고는 문득 웃는 순간 확연히 깨달았다.(一日, 因山中芟除草木, 以瓦礫擊竹作聲, 俄失笑間, 廓然省悟.)”
  465. 465)『碧巖錄』 6則(T48, 145c16), “목주睦州는 평소 학인을 대할 때에 문지방을 넘어서자마자 바로 멱살을 움켜쥐고는 ‘말해 보라! 말해 보라!’라고 하였으며 머뭇머뭇하며 말하지 못하면 바로 밀쳐 내면서 ‘진나라의 탁력찬같이 쓸모없는 놈이로다.’라고 하였다. 운문이 목주를 만나러 간 지 세 차례 되었을 때의 일이다. 문을 두드리자마자 목주가 ‘누구냐?’고 물었다. ‘문언文偃입니다.’ 하고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목주는 운문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말해 보라! 말해 보라!’라고 하였다. 운문이 머뭇거리자 곧바로 (목주가 그를) 문 밖으로 밀쳤는데 (운문이 미처 발을 떼어 다 나오지 못하여) 한쪽 발이 문지방 안쪽에 그대로 있던 상황에 목주가 문을 급하게 닫는 바람에 운문의 다리가 문틈에 끼어 부러지고 말았다. 운문이 아픔을 참지 못하고 소리소리 지르다가 홀연 크게 깨쳤다.(尋常接人, 纔跨門便搊住云, ‘道! 道!’ 擬議不來, 便推出云, ‘秦時轢鑽.’ 雲門凡去見, 至第三回. 纔敲門, 州云, ‘誰?’ 門云, ‘文偃.’ 纔開門便跳入, 州搊住云, ‘道! 道!’ 門擬議, 便被推出門, 一足在門閫內, 被州急合門, 拶折雲門脚. 門忍痛作聲, 忽然大悟.)”
  466. 466)『從容錄』 81則(T48, 279b19), “세상에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현사는 거처하던 산을 떠나지 않았고 보수保壽는 강을 건너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고 한다. 현사는 떠나다가 넘어져 발가락을 다치고는 한탄하며 생각했다. ‘이 몸은 실재하지 않는 것인데 고통이 어디서 온단 말인가? 이 몸과 이 고통은 궁극적으로 발생하지 않는다. 그만두자, 그만둬! 달마대사는 동토(중국)에 오지 않았고 2조 혜가慧可도 서천(인도)에 가지 않았다.’ 마침내 가던 길에서 돌아와 『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았다.(世傳, 玄沙不出嶺, 保壽不渡河. 因蹶傷足指, 歎曰, ‘是身非有, 痛自何來? 是身是苦, 畢竟無生. 休休! 達磨不來東土, 二祖不往西天.’ 遂廻, 復因閱楞嚴而發明.)”; 『正法眼藏』 권2(X67, 607a24) 참조.
  467. 467)주 407 참조.
  468. 468)『禪門寶藏錄』 「序文」(H6, 469c2) 참조.
  469. 469)정해진 문이 없는 것(無門) : 구체적인 상황과 근기에 따라 교설을 달리하는 방편문方便門을 가리킨다.
  470. 470)마조 도일馬祖道一의 말. 『景德傳燈錄』 권6 「馬祖道一傳」(T51, 246a8)에 『楞伽經』의 글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4권본 『楞伽經』 전체가 「一切佛語心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정확하게 이와 일치하는 구절은 없다. 그래서 대혜 종고는 “이 두 구절은 모두 마조가 경의 근본 취지를 가리킨 말이며 경의 말 자체는 아니다.(此二句, 皆馬祖指經大旨, 非經語也.)”라고 했던 것이다. 『正法眼藏』 권1(X67, 573b5) 참조.
  471. 471)『宗鏡錄』 권1(T48, 417c2) 참조.
  472. 472)지극한 경지에 이른 사람(至人) : 보통은 노장이나 도가에서 범속凡俗을 초탈하여 도의 극치에 이른 사람을 일컬으나 여기서는 교敎의 본질을 꿰뚫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473. 473)궁극의 경지에 통달한 사람(達士) : 선禪의 종지를 체득한 사람.
  474. 474)『華嚴論節要』 「序」(H4, 768a6), “세존이 말로 설하신 것이 교이고, 조사가 마음을 전한 것이 선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이 결코 서로 어긋나는 것이 아니니 어찌 근원을 궁구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世尊說之於口, 卽爲敎;祖師傳之於心, 卽爲禪. 佛祖心口, 必不相違, 豈可不窮根源!)”
  475. 475)불사문佛事門 : 불법을 펼치기 위하여 다양한 차별의 방편을 베푸는 입장. 반면 어떤 분별도 허용하지 않는 무차별의 궁극적 경지는 ‘실제이지實際理地’라 한다. 『臨濟語錄』(T47, 502a16), “가령 여러 선문의 선사들은 ‘육도만행을 불법으로 삼는다.’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은 진리를 장엄하는 문이며 불법을 펼치기 위한 문에 불과할 뿐 불법 자체는 아니다.’라고 말한다.(秖如諸方說, ‘六度萬行, 以爲佛法.’ 我道‘是莊嚴門, 佛事門, 非是佛法.’)”; 『天童遺落錄序』(T48, 133b27), “불조는 이렇게 말한다. ‘실제이지는 본래 언어의 차별된 표현을 벗어나 있다.’ 그러나 불사문 중에서 중생을 위하여 자비를 베풀면 비록 유위有爲는 아니지만 또한 말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夫佛祖道, ‘實際理地, 本離言語相.’ 然佛事門中, 爲物垂慈, 則雖非有爲, 又非無語.)”; 『天聖廣燈錄』 권19 「廬山護國章」(X78, 517a9), “실제이지에서는 하나의 티끌도 용납하지 않지만, 불사문에서는 하나의 법도 버리지 않는다.(實際理地, 不受一塵;佛事門中, 不捨一法.)”
  476. 476)엄밀히 말하면 운문 문언雲門文偃(864~949)의 제자 덕산 연밀德山緣密이 제시한 삼구에 대한 풀이이다. 삼구는 ‘삼종어三種語’라고도 하며, 선禪의 종지를 세 구절의 시로 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 운문 삼구의 각 구절에 백운 경한이 또 하나의 시를 붙여 그 뜻을 해석한 것이다. 운문은 ① 하늘과 땅 전체를 감싸서 덮고(函蓋乾坤), ② 한눈에 핵심을 헤아리며(目機銖兩), ③ 모든 인연과 교섭하지 않는다(不涉萬緣) 등의 세 구절의 뜻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지 문제로 제시했다. 이에 대해 덕산 연밀은 자신의 안목에 입각하여 함개건곤函蓋乾坤·절단중류截斷衆流·수파축랑隨波逐浪 등의 삼구로 바꾸어 확정했다. 첫 번째 구절은 진리 그 자체, 두 번째 구절은 번뇌 망상을 끊는 것, 세 번째 구절은 구체적인 현상의 조건에 알맞게 펼치는 적절하고 자유자재한 활용을 나타낸다. 『人天眼目』 권2 「三句條」(T48, 312a7) 참조.
  477. 477)대양 경현大陽警玄(943~1027)이 세 구절로 요약한 종지에 대한 풀이. 대양 삼구는 ‘명안 삼구明安三句’라고도 한다. 『五燈會元』 권14(X80, 288b10) 참조.
  478. 478)『馬祖語錄』(X69, 3a13), “평상심이 도이다. 평상심이란 무엇인가? 조작이 없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분별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리는 마음도 없고, 완전히 사라졌다(斷)거나 영원히 변함이 없다(常)거나 하는 관념도 없으며, 범부와 성인을 차별하지 않는 마음이다.(平常心是道. 何謂平常心? 無造作, 無是非, 無取捨, 無斷常, 無凡無聖.)”
  479. 479)나옹의 삼구는 불문佛門에 입문하여 깨달음에 이르기까지를 세 단계로 나눈 것이며, 분양 선소汾陽善昭가 학인의 다섯 가지 질문에 대해 대답한 구절(入門句·門裏句·當門句·出門句·門外句) 중 세 가지를 선별한 것이다. 백운 경한은 이 삼구에 대하여 조동종의 공훈오위功勳五位(向·奉·功·共功·功功) 중 향向·봉奉·공공共功 등 세 가지를 선별하여 활용했다. 『人天眼目』 권6 「汾陽五門句」(T48, 329a10) 참조. 삼전어란 깨달음의 결정적 전기가 되는 세 가지 뜻을 세 가지 비유를 들어 밝힌 것이며, 이에 대한 백운 경한의 두 가지 풀이가 있다. 『懶翁語錄』에도 「入門三句」와 「三轉語」를 소재로 한 글이 실려 있다.
  480. 480)오랫동안 문~나오지 않는다(長年不出戶) : 동산의 오위五位 가운데 정중래正中來를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 『洞山語錄』(T47, 508c26), “동산洞山이 물었다. ‘주인 중의 주인이란 어떤 것입니까?’ 용산龍山이 대답했다. ‘오랫동안 문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師曰, ‘如何是主中主?’ 山曰, ‘長年不出戶.’)”
  481. 481)법왕의 법령 : 법왕인 부처님께서 지엄한 법령과 같이 내리는 근본적인 진리. 언어나 행위로 드러내기 이전의 경계, 어떤 수단으로도 알 수 없는 경지, 한 치의 분별도 허용치 않는 조사선의 종지 등을 나타낸다. 문수 백추文殊白椎의 화두와 관련된 술어이다. 부처님께서 사자좌에 오르자마자 문수보살이 건추를 울려 대중에게 “법왕의 법은 이와 같다.(法王法如是)”라고 하자 부처님께서 아무 말씀도 없이 사자좌에서 내려오신 이야기를 화두로 삼은 내용이다. 『碧巖錄』 92則(T48, 216b18) 참조. 『佛眼語錄』 古尊宿語錄34(X68, 219c4), “부처님께서 사좌자에 오르시고 문수보살이 건추를 울려 대중에게 알리니, 법왕이 내려 주신 법령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늙어 꼬부라진 문수보살이 억지로 머리를 내밀고 나와, 부처님을 등에 업고서 여전히 섬길 만하다고 하니, 지금껏 천고의 세월 동안 시끄럽게들 재잘거리는구나.(世尊陞座, 文殊白槌, 法王法令若爲酬? 潦倒文殊强出頭, 負累釋迦猶可事, 至今千古鬧啾啾.)”
  482. 482)희황羲皇 : 복희씨伏羲氏를 가리킨다. 복희는 삼황三皇 중 한 사람으로서 희황이라 불린다. 8괘卦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또 그물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고기 잡는 기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여기서는 태평성대를 이끈 인물로 상징된다.
  483. 483)구로俱盧 : 인도 고대의 척도. 구로사俱盧舍·구루사拘摟賖 등으로 음사하고, 역성譯聲·명환鳴喚 등으로 의역한다. 소의 울음소리 또는 북소리가 들리는 거리, 또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서 수행처까지의 거리를 가리킨다.
  484. 484)『論語』 「雍也」에 나오는 구절.
  485. 485)『圓覺經略疏』 권하(T39, 568b10), “ ‘말세의 중생이 이와 같은 사람을 본다면 응당 목숨을 아끼지 말고 공양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설산에서 사신捨身하겠다고 한 것이나 묘향성의 법용보살을 찾아뵙고자 뼈를 부순 것과 같은 예이다. 유가의 경전에서도 온 힘을 다해 부모를 섬기고 신명을 바쳐 임금을 섬기라 하거늘, 하물며 불법을 닦음에야 어떠해야 하겠는가!(‘末世衆生見如是人, 應當供養不惜身命.’ 如雪山捨身香城破骨之類. 儒典尙令竭力事父致身事君, 何況爲法!)”; 『圓覺經大疏釋義鈔』 권12(X9, 731a21), “『圓覺經略疏』에서 ‘설산에서 사신捨身하겠다’라 한 일화는 『涅槃經』에, ‘묘향성의 법용보살을 찾아뵙고자 뼈를 부수었다’는 일화는 『大般若經』에 나오며, ‘유가의 경전에서도~’라 한 말은 『論語』의 ‘부모를 섬기되 그 힘을 다하고 임금을 섬기되 신명을 바쳐야 한다.’라고 한 말을 가리킨다.(疏卽雪山捨身者, 涅槃經, 香城敲骨者, 大品般若, 疏儒典尙令者, 論語云, 事父母能竭其力, 事君能致其身.)”
  486. 486)“세존께서는 설산雪山에서 고행을 하고” 이하 부분부터는 『圜悟心要』 권4 「示詔副寺」(X69, 490a10~b18)의 내용을 기초로 취하였다. 세존이 과거세에 설산에서 수행하신 일을 가리킨다. 과거세에 보살행을 할 당시에 제석천에게 반게半偈를 듣고자 자신의 몸을 제석천에게 바치기로 약속한 고사에 근거한다. 이때 나찰羅剎로 변한 석제환인釋提桓因이 “모든 현상(行)은 무상하니 생겨났다가는 없어지는 법이다.(諸行無常, 是生滅法.)”라 읊은 게송을 듣고는 나머지 구절을 마저 청하며 말해 준다면 몸을 공양하겠다(汝但具足說是半偈, 我聞偈已, 當以此身, 奉施供養.)라고 하여 “생겨났다가 소멸하는 법이 없어지고 나면, 고요함이 즐거움이리라.(生滅滅已, 寂滅爲樂.)”라는 두 구절을 들었다고 한다. 이를 ‘야차설반게夜叉說半偈’ 또는 ‘설산반게雪山半偈’라고 한다. 『大般涅槃經』 권14 「聖行品」(T12, 450a12~451a1) 참조.
  487. 487)상제보살이 반야바라밀다를 구하기 위해 법용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묘향성 안의 궁전을 찾아가면서 법용보살에게 공양할 재물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고자 한 일. 제석帝釋이 상제보살의 이러한 진심을 시험하기 위해 소바라문小婆羅門으로 변하여 상제보살의 몸을 사겠다고 하자 상제보살은 날카로운 칼로 자신의 왼팔을 찔러 피를 내고 오른쪽 넓적다리 살을 베어 냈으며 뼈를 부수어 골수를 꺼내 주고는 심장마저 꺼내 주려고 하였다.(申右手執取利刀, 刺己左臂令出其血, 復割右髀皮肉置地, 破骨出髓與婆羅門, 復趣牆邊欲剖心出.) 이를 본 한 장자의 딸이 제석의 정체를 알아보고 상제보살을 만류하였고, 상제보살에게 감화받아 자신의 재물을 공양하여 법용보살을 함께 찾아갔다고 한다. 『大般若經』 권398 「常啼菩薩品」(T6, 1063a4~c4) 참조. 공양의 의미를 밝히며 상제보살의 일화를 든 『梵網經菩薩心地品下略疏』 권4(X38, 720b12~16) 참조. 세존과 상제보살의 일화를 함께 제기하고 있는 예로는 『圓覺經疏鈔隨文要解』 권12(X10, 147c5~17) 참조. 『證道歌註』(X63, 278c20), “분골粉骨이란 상제보살이 향성에서 반야바라밀다를 배우고자 할 때의 일화에서 나온 말이요,……쇄신碎身은 석가모니께서 수행하실 때에 온몸을 바쳐 반게를 구하고자 한 일화에서 나온 말이다.(粉骨者, 如常啼菩薩, 於香城學般若時也.……碎身者, 如釋迦因中, 捨全身求半偈也.)”
  488. 488)혜가慧可가 달마 앞에서 자신의 팔을 잘라 구도의 의지를 보인 일화. 『景德傳燈錄』 권3 「菩提達磨傳」(T51, 219b11~20) 참조.
  489. 489)혜능慧能이 처음 5조 홍인弘忍을 찾아갔을 무렵에 방앗간에서 8개월여를 주야로 쉬지 않고 절구를 찧었던 일화. 몸무게가 나가지 않아 허리에 돌덩어리를 매달고 찧었다고 한다. 宗寶本 『壇經』(T48, 349a12), 『景德傳燈錄』 권3(T51, 222c14) 참조.
  490. 490)『請益錄』 권2(X67, 496c5), “예주 흠산 문수 선사는 대단히 자애롭고 용모가 아름다우며 담론을 잘하였다. 항상 재봉 가위와 눈금자를 가지고 바느질을 익혀 대중과 함께 옷을 만드는 일을 하였다. 설봉은 항상 칠통과 나무 주걱을 놓지 않고 행주를 두르고는 대중을 위해 반두 소임을 맡아보았으며, 암두는 항상 호미를 들고 대중을 위해 밭일을 하는 소임을 맡아보았다. 함께 유력하였고 해를 거듭하여 두 사람은 기연이 덕산의 법에 계합하였고, 흠산만이 동산 양개의 법을 이었다.(澧州欽山文邃禪師, 大慈受業, 美咨容, 善譚論. 常以剪刀星尺針線隨身, 與衆裁縫. 雪峰常以漆桶木杓護布隨身, 爲衆作飯頭;巖頭常以把钁隨身, 爲衆治蔬圃. 相與遊方, 積歲二人緣契德山, 欽山獨嗣洞山.)”
  491. 491)설봉 의존雪峰義存이 조금의 흔들림이나 굴함 없이 면밀하고 착실하게 깨달음을 궁구한 일화에서 나온 말. 이를 가리켜 ‘삼등구상三登九上’, ‘삼도구지三到九至’, ‘삼등구지三登九至’, ‘삼도투자구상동산三到投子九上洞山’이라고 한다. 세 차례 투자산으로 대동을 찾아갔고 아홉 차례 동산에 올라 양개를 찾아 법을 물었으나 기연이 계합하지 못하다가 후에 법형法兄 암두 전활岩頭全奯과 함께 예주澧州의 오산鰲山(湖南省 常德縣 북쪽에 위치)을 지나다 암두와의 문답에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雪峰語錄』 권2 「年譜」(X69, 87a12~18), 『聯燈會要』 권21(X79, 184a9~10) 참조.
  492. 492)장경 혜릉이 10여 년이 되도록 하루같이 좌선하여 부들방석 일고여덟 개를 닳아 떨어뜨렸다고 하며, 이를 ‘장경포단長慶蒲團’, ‘좌파칠개포단坐破七箇蒲團’ 등이라 일컫는다. 이로부터 밤낮으로 참선하며 불도에 정진하는 것을 비유하여 파포단破蒲團이라 한다. 『圜悟語錄』에는 설봉 의존과 현사 사비를 오가며 15년을 참구하였다 하고, 『五燈會元』에는 20년간 참구하였다고 한다. 『圜悟語錄』 권9(T47, 753c14~16), 『五燈會元』(X80, 152c15~21) 참조.
  493. 493)『介石智朋語錄』(X69, 785b5), “영운 지근은 30년 동안 더 이상 의심이 남아 있지 않은 경지에 대해 말할 줄만 알았을 뿐, 복숭아꽃이 눈앞에 있음은 알지 못했다.(靈雲三十年, 只道得箇不疑, 未曾識桃花面在.)”
  494. 494)용천 경흔涌泉景欣 : 천주泉州 선유僊遊 출신. 백운산白雲山에서 수행하다가 석상의 가르침을 받아 깨닫고 난 이후로 단구丹丘 용천난야涌泉蘭若에 거하였다.
  495. 495)『佛祖統紀』 권43(T49, 395a9), “오월왕 전홍숙錢弘俶이 연수 선사에게 영명사【지금의 전당 정자사】에 주석할 것을 청하였다. 연수 선사는 매일 108가지 일을 가르쳤는데, 학인들이 물어오면 마음을 근본으로 삼고 깨달음을 준거로 삼으라고 하였다.(吳越王俶, 請延壽禪師, 主永明寺【今錢唐淨慈寺】. 師日課一百八事, 學者參問, 以心爲宗, 以悟爲則.)”; 『初學記』(X63, 730a14), “불도에 정진하는 사람은 삼승 십지뿐 아니라 백행을 아울러 수행하였으니 모두 도업을 이루는 것을 돕기 위해서였다. 이를테면 연수 선사가 날마다 108건의 방편을 행한 경우와 같다.(精進之人, 除此三乘十地之外, 兼修百行, 皆爲助道. 如壽禪師, 一日行百八件方便等也.)”
  496. 496)『圜悟心要』 권4 「示詔副寺」(X69, 490b3), “남악 회양南嶽懷讓은 조계 혜능慧能 휘하에 있은 지 8년 만에야 비로소 ‘하나의 그 무엇이라고 말해도 딱 들어맞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였고, 장경 혜릉은 설봉에게로 가서 15년 동안 좌선하며 부들방석을 일곱 개나 닳아 떨어뜨렸고, 영운 지근은 30년, 용천 경흔은 40년, 덕산과 임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조사 문하에 의지하여 오랜 세월 참구하였다. 이 도는 온갖 성인들도 전하지 못한 미묘한 도인데, 어찌 경솔한 마음이나 거만한 마음으로 깨달음에 들 수 있겠는가! 영가 현각은 ‘분골쇄신해도 그 은혜 갚기에 부족하나, 한 구절(活句)을 진실로 깨달으면 다른 무수한 구절을 꿰뚫으리라.’라고 하였다.(如讓祖之於曹溪八年, 始道得箇說似一物卽不中;稜師至雪嶺十五載, 坐破七箇蒲團;靈雲三十年, 涌泉四十祀, 德山臨濟, 皆依師門, 歲月甚久. 蓋此道迺千聖不傳之妙, 豈可以輕心慢心而趣入哉! 永嘉云, ‘粉骨碎身未足酬, 一句了然超百億.’)”; 『宗範』 권상(X65, 301a21), “향림 징원香林澄遠은 40년 동안 한 분만을 본받았고, 용천은 40년을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찾아다녔으며, 남전은 18년 동안 꾸준히 공부하였으니, 옛사람 중에 이처럼 끊임없이 실천하지 않은 분이란 없다. 어떤 인연이나 경계를 마주하든지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부지런히 참구하지 않은 이가 없다.(香林四十年方一片, 涌泉四十年尙自走作, 南泉十八年能作活計, 古人無不如此密密踐履. 但逢緣遇境, 無不管帶.)” 『圜悟心要』 권2 「示良蘆頭禪人」(X69, 465a14~18)의 내용도 예로 든 선사의 일화는 다르나 같은 맥락이다.
  497. 497)혜명慧命 : 육신(色身)이 음식물로써 생명을 유지하듯이 법신法身은 지혜를 생명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법신의 지혜를 생명에 비유한 말.
  498. 498)『石屋珙禪師語錄』 권상(X70, 662b24) 참조.
  499. 499)한창 혈기 왕성한 때(鼎盛) : 장년 곧 삼사십 대를 가리킨다.
  500. 500)『無文道燦語錄』 권4 「題蓮社題名集」(X69, 816b14), “고향은 십항하사처럼 무수한 세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자만이 알 수 있을 뿐이라네. 시방 어디도 문 없이 활짝 열려 있으니, 고향은 과연 어디에 있는가?……해는 서쪽으로 지고 금상金相이 현전하니 고향의 주인이요, 홍련 꽃 피어나고 물 맑고 모래 깨끗하니 본래 집에서 이전부터 해 오던 일이라네.(故鄉不在十恒河沙外, 惟懷歸者能知之. 然十方無壁落, 故鄉果安在?……落日沈西, 金相現前, 鄉關主人也;紅藕放花, 水淸沙白, 故家舊業也.)”
  501. 501)기함起凾 : 기감起龕이라고도 한다. 묘소로 관을 들어 옮기는 것. 이 의식을 기감불사起龕佛事라고 한다.
  502. 502)『禪門拈頌說話』 248則(H5, 235a19), “반산 보적盤山寶積 선사가 하루는 절을 나섰다가 만가를 부르는 상두꾼이 요령을 흔들며 ‘붉은 해는 틀림없이 서쪽으로 지려니와 혼령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네.’라고 하자 막하幕下에서 상주가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하는 소리를 듣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돌아가 마대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고) 인가를 받았다.(師又一日出門, 見挽歌郎振鈴云, ‘紅輪決定沉西去, 未委魂靈往那方.’ 幕下孝子哭云, ‘哀哀!’ 師身心踊悅, 歸求馬大師印可.)”; 『蓮邦詩選』 「淨土詩」(X62, 812a7), “붉은 해는 틀림없이 서쪽으로 지려니와, 혼령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네. 반산이 깨달은 경계는 별다른 것이 아니니, 상주는 알고 보면 맏아들이었다는 사실이라네.(紅輪決定沈西去, 未審魂靈在那方. 盤山悟處非他物, 孝子原來是大郞.)” 이미 드러나 있는 익숙하고 명백한 사실을 새롭게 보게 된 경계를 읊었다.
  503. 503)『金剛經』(T8, 752b3~5) 참조.
  504. 504)바라제波羅提의 송에 나오는 구절. 『景德傳燈錄』 권3 「菩提達磨傳」(T51, 218b22), “아는 자는 이것이 불성임을 알지만 모르는 자는 정혼精魂이라고 부릅니다.(識者知是佛性, 不識喚作精魂.)”
  505. 505)하화下火 : 하거下炬·병거秉炬라고도 한다. 횃불을 들어 다비茶毘(火葬)한다는 뜻을 나타내는 장례 의식. 본래는 횃불을 사용해야 하나, 일반적으로는 횃불 모양으로 나무를 깎아 붉은색을 칠하거나 붉은색 종이로 횃불 모양을 본떠 사용하기도 한다. 『禪林象器箋』 권14 「秉炬條」(禪藏, p.1068) 참조.
  506. 506)세 가지 인연이 화합하여(三緣和合) : 삼사화합三事和合이라고도 한다. 부친과 모친 그리고 중음中陰(乾闥婆)의 세 인연이 화합해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는 조건이 된다고 한다. 『大般涅槃經』 권34 「迦葉菩薩品」(T12, 566b28), “세 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이 몸을 받았으니, 첫째는 아버지요 둘째는 어머니요 셋째는 중음이다. 이 세 가지 인연이 화합하여 이 몸을 얻은 것이다.(三事和合, 得受是身, 一父, 二母, 三者中陰. 是三和合, 得受是身.)”
  507. 507)『柏堂雅和尙語』 續古尊宿語要5 「爲僧下火」(X68, 492b14), “33년을 꿈속이라는 집에 살다가, 이제 꿈에서 깨어나 공이라는 집으로 돌아왔네. 설령 허공의 체와 딱 들어맞는다 하더라도, 예전 그대로 꿈속일 뿐이리라. 꿈속에서도 또렷또렷한 구절, 어떻게 전할까!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취를 가리켜 보이노라. 구름 사이로 목마는 바람에 애타게 울고, 불 속의 날벌레는 호랑이를 삼켰다.(三十三年居夢宅, 而今夢破宅還空. 直饒合得虛空體, 未免依前在夢中. 惺惺句, 若爲通! 不惜眉毛爲指蹤. 雲間木馬嘶風急, 火裏蝍蟟吞大蟲.)”
  508. 508)『證道歌』(T48, 395c11), “오온의 뜬구름은 부질없이 오고 가며, 삼독의 물거품은 헛되이 일어났다 가라앉았다 하는구나.(五陰浮雲空去來, 三毒水泡虛出沒.)”
  509. 509)『丹霞子淳語錄』 권상(X71, 758b20), “망승을 다비하며 말했다. ‘출가자여, 쉬지 마라. 종일토록 바쁘게 다비할 대 얽어 놓았으나, 떠나보내는 방법 대단히도 보잘것없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백골이 낭자하니 어찌 뿌리리오! 울력으로 나른 땔나무는 다비하는 불을 태우는 데 쓸 것이다. 말해 보라! 그 가운데 불로 살라도 변화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여러 선덕이여, 뭉게뭉게 피어나는 흰 구름은 공연히 오가고, 아득히 높은 저 맑은 하늘은 꿰맨 흔적 하나 없구나. 흠향歆饗하소서.’(爲亡僧下火云, ‘出家兒, 無休暇. 終日忙忙空搆架, 臨行一著太區區. 眼見耳聞爭不怕! 百骸狼藉撒奚爲! 普請般柴用燒化. 且道! 中間有燒不化者麽? 諸禪德, 白雲靉靆空去來, 渺邈淸虛無縫罅. 尙嚮.’)”
  510. 510)공부功夫 : ‘工夫’로도 쓴다. 수행에 전심전력을 다해 정진하는 것. 공안 참구나 좌선 수행 모두에 두루 쓰이는 말.
  511. 511)수어垂語 : 스승이 학인들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것. 시중示衆·수시垂示·수계垂誡 등과 같은 뜻이다. 『禪林象器箋』 권11 「垂說類」(禪藏, pp.841~843) 참조.
  512. 512)주 301, 302, 303 참조.
  513. 513)원오 극근圜悟克勤(1063~1125)과 대혜 종고大慧宗杲(1089~1163)가 주로 했던 말이다. 『大慧語錄』 권17(T47, 886a28) 참조. 여기에서 의심이란 어떤 대상을 믿지 못하거나 이리저리 사량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이 아니라, 화두에 대한 갖가지 분별이 사라질 때까지 불태워 없애는 화로 같은 기능을 하는 핵심적 작용을 말한다. 안팎의 모든 현상을 화두 하나에 통일시켜 의심덩어리로 만들고 다른 생각은 전혀 끼어들지 못하게 만든다는 뜻에서 이러한 의심을 ‘의단疑團’이라 한다. 『禪家龜鑑』에는 몽산 덕이蒙山德異의 말로 되어 있으나 『禪家龜鑑』 외의 다른 책에서는 몽산이 말했다는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禪家龜鑑』(H7, 636c14), “몽산이 말했다. ‘참선하는 수행자가 어떤 말과 구절이 되었건 의심하지 않는다면 이는 가장 근본적인 병통이다.’ 또 ‘크게 의심하면 반드시 크게 깨닫게 된다.’라고 하였다.(蒙山云, ‘參禪者, 不疑言句, 是爲大病.’ 又云, ‘大疑之下, 必有大悟.’)”
  514. 514)『天目明本雜錄』 권2 「示海東淵首座」(X70, 731c22), “예로부터 부처와 조사들 모두 이 의심으로 말미암으셨던 것이다. 의심이 그치지 않는다면 자연히 이리저리 마음으로 헤아리는 길 또한 끊어질 것이요, 망정은 소멸되고 지해 분별은 민절되며 주객을 구분하는 생각도 단절되어 모르는 새 홀연히 상응하리니, 바로 이때가 의정이 타파된 때이다. 옛사람 중에 화두를 궁구하고 공안을 참구하는 것을 저버린 예는 없다.(從上佛祖, 皆從此疑. 疑之不已, 自然心路絶, 情妄消, 知解泯, 能所忘, 不覺忽然相應, 便是疑情破底時節也. 在前古人也, 不曾去看話頭參公案.)”
  515. 515)주 441, 442, 443 참조.
  516. 516)건추犍槌를 잡거나~세우는 것(拈槌竪拂) : 스승이 제자를 지도할 때 흔히 쓰던 수단. 법문을 시작하기 전에 건추犍槌를 울려서 행사를 알리는 의식을 백추白椎라 하고 법문을 마치면서 행하는 의식은 결추結椎라 한다. 시작을 알리는 건추를 울리고 나서는 ‘법석에 앉은 대중이여, 마땅히 제일의를 관찰하시오.(法筵龍象衆, 當觀第一義.)’라 하며 마칠 때에는 ‘법왕의 법을 자세히 관찰하시오, 법왕의 법은 이와 같습니다.(諦觀法王法, 法王法如是.)’라고 하는데, 이는 『華嚴經』 권4 「世主妙嚴品」(T10, 21b4), “그대는 마땅히 법왕을 관찰하라! 법왕의 법은 이와 같으니라. 색상(화신)이 끝이 없어서 세간 어디에나 두루 나타나노라.(汝應觀法王! 法王法如是. 色相無有邊, 普現於世間.)”라는 구절에 근거한 말이다. 선사들은 건추를 울리거나 잡는 행위를 문답의 소재로 활용하기도 하는데 그 일례로 방거사와 단하 천연丹霞天然의 문답을 참조할 만하다. 『龐居士語錄』 권상(X69, 131c11~16) 참조. 불자를 세워 가르침을 전한 예로는, 육조 혜능慧能이 불자를 세우고서 ‘보이는가?’라고 물은 문답(『祖堂集』 권3 「慧能章」 K45, 249a17), 청원 행사靑原行思와 석두 희천石頭希遷의 문답에서 청원이 석두에게 ‘어디서 오는가?’라고 묻자 석두가 ‘조계에서 오는 길’이라 답함에 청원이 불자를 세우고서 ‘조계에도 이것이 있는가?’라고 한 문답(『景德傳燈錄』 권5 T51, 240b13~18), 백장 회해百丈懷海가 마조 도일馬祖道一을 다시 찾아가 서로 불자를 세워 보이면서 나눈 문답(『碧巖錄』 11則 T48, 151c2~8), 어떤 학인이 영운 지근靈雲志勤에게 ‘부처가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어떠하냐?’고 물었을 때도 ‘세상에 나타난 후에는 어떠하냐?’고 물었을 때도 모두 불자를 세워 보인 일화(『聯燈會要』 권10 X79, 91b18~19) 등이 대표적이다.
  517. 517)눈썹을 치켜세우거나~깜박이는 것(揚眉瞬目) : 평상시에 언제 어디서나 일어나는 작용 또는 미세한 마음의 작용을 비유한다. 마조 도일이 양미순목의 방편을 써서 약산 유엄藥山惟儼을 깨달음에 이르게 한 공안이 유명하다. 이를 ‘마조양미순목馬祖揚眉瞬目·대적양미순목大寂揚眉瞬目’이라고 한다. 『馬祖廣錄』(X69, 5a24~b5) 참조.
  518. 518)주먹을 세우는 것 : 귀종 지상歸宗智常이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祖師西來意)’에 대해 물어 온 이발李渤(?~831)에게 주먹을 들어 보인 귀종수기권두歸宗竪起拳頭 공안이 대표적이다. 『禪門拈頌說話』 261則(H5, 244a3), 『宗鑑法林』 권11(X66, 353a16~19) 참조.
  519. 519)『楞嚴經摸象記』(X12, 505a5), “이 율茟 자를 사람들이 흔히들 필연筆硯의 필로 쓰는데 잘못이다. 필筆은 대나무에서 만들어진 것이고 율茟은 풀에서 나온 것으로서 필筆의 음은 필畢이고 이 글자의 음은 위委이다. 율茟은 초목에서 꽃이 피어 나오는 풀대이다. 그러므로 ‘초목과 풀대와 같은 것’이라 한 말은 뜻이 대단히 분명하여 의심할 만한 점이 조금도 없다.(此茟字, 人多作筆硯之筆, 訛也. 筆從竹, 茟從草, 彼音畢, 此音委. 茟者, 草木華始生也. 故曰, ‘若草木及茟’ 文義極明無可疑者.)”
  520. 520)주장자를 세우는 것 : 이 예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으나 일례만 들면 다음 상당 법문이 참조할 만하다. 『天聖廣燈錄』 권20 「東禪秀章」(X78, 527b4), “동선수東禪秀 선사가 법상에 올라앉아 주장자를 집어 들고 ‘미륵부처님께서는 선봉에 서고 석가모니부처님은 불전 뒤에 계시나, 두 부처님 모두 나의 주장자 끝에 있다. 여러분은 보았는가?’라고 하였다.(師上堂, 拈起拈杖云, ‘彌勒先鋒, 釋迦殿後, 總在祖峯拄杖頭上. 儞諸人, 還見麽?’)”
  521. 521)『景德傳燈錄』 권11 「靈雲志勤傳」(T51, 285a23), 『聯燈會要』 권10(X79, 91a16) 참조.
  522. 522)『景德傳燈錄』 권7 「歸宗智常傳」(T51, 256a2), “다시 말했다. ‘가라! 여기에는 그대가 마음 쓸 여지가 없다.’ ‘학인을 깨닫도록 할 방편이 어찌 없겠습니까!’ ‘관음보살의 신묘한 지혜의 힘이라야 세간의 고통을 구제하리라!’ ‘관음보살의 신묘한 지혜의 힘이란 어떤 것입니까?’ 귀종이 솥뚜껑을 세 번 두드린 뒤 ‘들리는가?’라고 묻자 ‘들립니다.’라고 함에 귀종은 ‘나는 어찌하여 들리지 않지?’라고 하였다. 이에 학인이 아무 말이 없자 귀종이 때려 쫓았다.(又云, ‘去! 無汝用心處.’ 僧云, ‘豈無方便門令學人得入!’ 師云, ‘觀音妙智力, 能救世間苦.’ 僧云, ‘如何是觀音妙智力?’ 師敲鼎蓋三下云, ‘子還聞否?’ 僧云, ‘聞.’ 師云, ‘我何不聞?’ 僧無語. 師以棒趁下.)”
  523. 523)남양 혜충南陽慧忠 국사가 세 번 시자를 부르고 시자가 세 번 응답한 일화가 있다. 이로부터 선종에서는 시자를 가리켜 ‘삼응三應’이라 부르기도 한다. 『景德傳燈錄』 권5 「南陽慧忠傳」(T51, 244a24~26) 참조.
  524. 524)설봉 의존雪峰義存의 법을 이은 경청 도부鏡淸道怤가 한 학인에게 ‘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가?’라고 물은 문답에서 비롯한 공안. 이를 ‘경청우적성鏡淸雨滴聲’이라 한다. 『碧巖錄』 46則(T48, 182b19), “경청이 학인에게 물었다. ‘문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가?’ ‘빗방울 소리입니다.’ ‘중생이 전도되어 자기를 잃어버리고 객관 경계를 좇는구나.’ ‘화상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마터면 나를 잃어버릴 뻔했다.’ ‘하마터면 나를 잃어버릴 뻔했다는 말씀은 어떤 뜻입니까?’ ‘속박된 몸에서 벗어나기는 그래도 쉽지만 드러난 현상 그대로를 말하기는 어렵다.’(鏡淸問僧, ‘門外是什麽聲?’ 僧云, ‘雨滴聲.’ 淸云, ‘衆生顛倒, 迷己逐物.’ 僧云, ‘和尙作麽生?’ 淸云, ‘洎不迷己.’ 僧云, ‘洎不迷己意旨如何?’ 淸云, ‘出身猶可易, 脫體道應難.’)”
  525. 525)경청 도부가 현사 사비玄沙師備와의 문답에서 깨달음을 얻은 인연. 『景德傳燈錄』 권18 「玄沙師備傳」(T51, 347a28~b1), 『玄沙語錄』 권중(X73, 34c24~35a1) 참조.
  526. 526)주 464 참조.
  527. 527)주 451 참조.
  528. 528)『景德傳燈錄』 권25 「天台德韶傳」(T51, 407b23), 『聯燈會要』 권27(X79, 237c2) 참조.
  529. 529)宗寶本 『壇經』(T48, 360a13), 『景德傳燈錄』 권5 「慧能傳」(T51, 236a21) 등 참조.
  530. 530)황벽 희운黃蘗希運 : 당나라 때 스님. 복건성福建省 복주福州 민현閩縣 출신. 백장 회해百丈懷海에게서 현지玄旨를 얻었다. 제자에 임제 의현臨濟義玄이 있다. 배휴裴休가 집록集錄한 법어집에 『傳心法要』가 있다. 시호는 단제선사斷際禪師이다.
  531. 531)『傳心法要』(T48, 380b1~4) 참조.
  532. 532)장졸張拙 : 오대五代 송초宋初 때의 거사居士. 선월대사禪月大師 덕은 관휴德隱貫休(832~912)의 지시를 받고 석상 경저石霜慶諸를 찾아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533. 533)『聯燈會要』 권22 「秀才張公拙章」(X79, 190b14), “석상 경저가 물었다. ‘그대의 성은 무엇인가?’ ‘성은 장씨이고 이름은 졸입니다.’ ‘뛰어난 면모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더니 그 졸렬한 꼬락서니는 어디서 왔는가?’ 공이 그 말을 듣자마자 깨우침이 있어 게송 한 수를 지었다. ‘광명이 고요하게 무수한 세계 두루 비추니, 범부와 성인과 모든 중생이 함께 내 가족이로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으면 전체 드러나지만, 육근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번뇌의 구름에 가려진다네. 번뇌 끊으려 하면 거듭 병이 늘어나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려 하면 이 또한 잘못이로다. 온갖 인연 그대로 따르고도 걸림이 없으면, 열반도 생사도 모두 허공에 핀 꽃과 같으리라.’(霜問, ‘秀才何姓?’ 公云, ‘姓張名拙.’ 霜云, ‘覔巧了不可得, 拙自何來?’ 公言下有省, 乃述偈云, ‘光明寂照徧河沙, 凡聖含靈共我家. 一念不生全體現, 六根纔動被雲遮. 斷除煩惱重增病, 趣向眞如亦是邪. 隨順世緣無罣礙, 涅槃生死是空華.’)”
  534. 534)「흥성사 입원소설」 56번 시중 참조.
  1. 1)目次底本無有。編者作成。
  2. 2)底本缺題目。編者補入。
  3. 1)孝」疑「老」{編}。
  4. 2)「▼(口+(巛/巴))」疑「嗈」{編}。
  5. 1)「攴」疑「支」{編}。
  6. 2)「未」疑「末」{編}。
  7. 1)「茟」疑「筆」{編}次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