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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9_b_01L법계도기총수록 하권 2(法界圖記叢髓錄 卷下之二)『일승법계도』 원문 四글에 이른다. 두 번째 이익 얻음이다. ‘다라니’라고 하는 것은 모두 지니기(總持) 때문이다. 아래의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 가운데 설하는 것과 같다. ‘실제實際’란 법성을 끝까지 다하기 때문이다. ‘중도’란 두 변邊을 원융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는다(坐床)’란 일체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법계의 열 가지 열반의 광대한 보배자리에 편안히 앉아서 일체를 섭수하므로 ‘자리에 앉는다’라고 이름한 것이다. ‘보배’란 귀하기 때문이며, ‘자리(床)’란 곧 섭수하여 지니는 뜻인 까닭이다. ‘열 가지 열반’은 아래 경의 「이세간품」에서 설한 것1)과 같다.
‘예부터 움직이지 않는다.(舊來不動)’란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열 부처님이니 『화엄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첫째는 무착불無着佛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 둘째는 원불願佛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업보불業報佛이니 믿기 때문이다. 넷째는 지불持佛이니 따라주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열반불涅槃佛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심불心佛이니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이 집착 없기 때문이다. 아홉째는 성불性佛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열째는 여의불如意佛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어째서 열의 수로 설하는가? 많은 부처님을 드러내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 구경의 오묘한 핵심(宗)이어서 매우 깊고 난해하니 깊이 생각해야 한다.
문 얽매여 있는 중생이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아직 복덕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는가?답 번뇌를 아직 끊지 못했으면 부처를 이루었다고 이름하지 않는다. 번뇌를 다 끊고 복덕과 지혜를 이루어 마쳐야, 이로부터 이후로 이름하여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라고 한다.
문 번뇌를 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답 『십지경론』에서 설한 것2)과 같이,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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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9_b_02L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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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9_b_04L[一乘法界圖原文四]1)文云。二 [284] 得益。謂陁羅尼者。摠持故。
006_0829_b_05L如下數十錢法中說。實際者。窮法性故。
006_0829_b_06L中道者。融二邊故。坐2)坐 [285] [200] 者。攝一切故。
006_0829_b_07L安3)坐 [286] 法界十種涅槃廣大寶4)床。 [287] 攝一
006_0829_b_08L切故。名曰坐床。寶者。可貴故。床者。
006_0829_b_09L5)攝持 [288] 義故。十種涅槃者。如下經離世
006_0829_b_10L間品說。舊來不動者。舊來6)成 [289] 佛義故。
006_0829_b_11L所謂十佛。如7)花 [290] 嚴經8)說。 [291] 一無9)着 [292] 佛。
006_0829_b_12L安住世間成正覺故。二願佛。出生故。
006_0829_b_13L三業報佛。信故。四持佛。隨順故。五
006_0829_b_14L10)涅槃 [293] [201] 佛。 11)永 [294] 度故。六法界佛。無處不至
006_0829_b_15L故。七心佛。安住故。八三昧佛。無12)量 [295]
006_0829_b_16L無*着故。九性佛。決定故。十如意佛。
006_0829_b_17L普覆故。何故十數說。欲13)現 [296] 多佛故。此
006_0829_b_18L義。諸法之眞源。究竟之玄宗。甚深難解。
006_0829_b_19L14)且 [297] 可深思。
006_0829_b_20L問。具縛有情。 15)未 [298] 斷16)煩惱。 [299] 未成福智。
006_0829_b_21L以何義故。舊來成佛17)耶。 [300] 答。*煩惱未斷。
006_0829_b_22L不名成佛。 *煩惱斷盡。福智成竟。自此
006_0829_b_23L已去。名爲舊來成佛。
006_0829_b_24L問。斷惑云何。答。如地論說。非初非中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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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29_c_01L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어떻게 끊는가? 허공과 같다. 이와 같이 끊으므로 아직 끊기 이전을 ‘끊었다’라고 이름하지 않고, 이미 끊은 이후를 ‘예부터 끊었다(舊來斷)’라고 이름한다. 마치 꿈을 깸(覺)과 꿈을 꿈(夢), 잠을 잠(睡)과 잠을 깸(悟)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룸(成)과 이루지 않음, 끊음과 끊지 않음 등을 세우지만, 그 참된 도리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 본래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번뇌의 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하며, 청정한 법 가운데 한 법도 늘어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3)라고 한 것이 그 일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와 같은 등의 경문은 이법(理)에 즉함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것이고 현상(事)에 즉하여 설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만약 삼승의 방편 가르침의 문을 기준으로 하면 합당히 이 뜻이 있으나, 일승의 실다운 가르침의 문을 의거하면 그 이치를 다하지 못한다. 이법과 현상이 그윽하여 하나로서 분별이 없으며 체體와 용用이 원융하여 항상 중도에 있으니, 자기의 일 이외에 어디에서 이법을 얻겠는가?
문 삼승의 가르침 가운데 또한 고요하되 항상 작용하고 작용하되 항상 고요함이 있는데, 이와 같은 뜻을 무슨 까닭에 위에서 이법에 즉한 문에 치우치고 현상에 즉하지 않아서 자재롭지 않다고 말하였는가?답 이법과 현상이 상즉하므로 이와 같은 뜻이 있다. 현상과 현상이 상즉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무슨 까닭인가? 삼승의 가르침에서는 분별하는 병을 다스리고자 현상을 모아서 이법에 들어가는 것을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 -
006_0829_c_01L前中後取故。云何斷。如虛空。如是斷
006_0829_c_02L故。未斷已還。不名爲斷。 18)旣 [301] 斷已去。
006_0829_c_03L名爲舊來斷也。猶如覺夢睡悟不同。故
006_0829_c_04L建立成不成斷不斷等。其實道理。諸法
006_0829_c_05L實相。不增不減。本來不動。是故經19)云。 [302]
006_0829_c_06L第下之二第一張 *煩惱法中。不見一
006_0829_c_07L法減。淸淨法中。不見一法增。是其事
006_0829_c_08L也。有人說*云。如是等經文。約即理說。
006_0829_c_09L非即事說。若約三乘方便敎門。合有
006_0829_c_10L此義。若依一乘如實敎門。不盡其理。
006_0829_c_11L理事㝠 [202] 然。一無分別。體用圓融。常在
006_0829_c_12L中道。自事以外。何處得理。
006_0829_c_13L問。三乘敎中。亦有寂而常用。用而常寂。
006_0829_c_14L如是等義。何故上*云。 20)徧 [303] [203] 即理門。不
006_0829_c_15L即事中。不自在耶。答。理事相即故。有如
006_0829_c_16L是義。非謂事事相即。何以故。三乘敎
006_0829_c_17L中。欲治分別病。會事入理爲宗故。若
006_0829_c_18L「文云二」作「二明」{甲}。「坐」作「床」{甲}。
006_0829_c_19L「坐」作「在」{甲}。「床」作「牀」{甲}。「攝持」作
006_0829_c_20L「即攝攝」{甲}。「成」無有{甲}。「花」作「華」{甲}。
006_0829_c_21L「說」無有{甲}。「着」作「著」{甲}次同。「涅槃」
006_0829_c_22L作「化」{甲}。冠註曰永一作求{甲}。冠註曰量一
006_0829_c_23L作碍{甲}。「現」作「顯」{甲}次同。「且」作「宜」
006_0829_c_24L{甲}。「未」作「永」又冠註曰永疑未{甲}。「煩
006_0829_c_25L惱」作「菩薩」又冠註曰菩薩疑煩惱下同{甲}次
006_0829_c_26L同。「耶」作「也」{甲}。「旣」作「現」{甲}。「云」
006_0829_c_27L作「言」{甲}次同。「徧」作「偏」{甲}ㆍ作「遍」{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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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0_a_01L만약 별교일승에 의하면 이법과 이법의 상즉 또한 가능하고, 현상과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이법과 현상의 상즉 또한 가능하며, 각각 상즉하지 않음도 또한 가능하다. 무슨 까닭인가? 중中과 즉卽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이법의 인다라니因陀羅尼와 현상의 인다라니 등의 법문을 구족함이 있기 때문이다.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법계의 집 가운데 이 같은 등의 걸림 없는 법계의 법문이 있어서 매우 자재하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거스름(逆)과 따름(順), 주主와 반伴의 서로 이루는 등의 법문은, 예에 준하여 서로 거두면 뜻에 따라 풀이할 수 있다.
만약 연기의 실상인 다라니법을 관觀하고자 한다면, 먼저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을 배워야 한다. 이른바 한 동전(一錢) 내지 열 동전(十錢)이다. 열(十)을 말한 까닭은 한량없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다. 첫째는 하나 가운데 열이고 열 가운데 하나이다. 둘째는 하나가 곧 열이고 열이 곧 하나이다.
첫째 문 가운데 둘이 있으니, 첫 번째는 위로 향하여 오고(向上來) 두 번째는 아래로 향하여 간다(向下去). 위로 향하여 온다고 말한 가운데 열 문이 있어 같지 않다. 첫째는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니 곧 근본수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 가운데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한 열은 하나가 아닌 까닭이다. 나머지 문 또한 이와 같으니 예에 준하면 알 수 있다.
아래로 향하여 간다고 말한 가운데 또한 열 문이 있다. 첫째는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 가운데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는 곧 이루어지지 않으며 또한 하나는 열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이와 같이 오가며 견주어 맞추어 보면 곧 낱낱의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추어졌음을 안 것이다. 근본과 지말의 두 동전 가운데 열 문이 갖추어진 것처럼, 나머지 여덟 동전 가운데도 예에 준하면 알 수 있다.
문 이미 하나라고 말했다면 어떻게 하나 가운데 열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답 대연기의 다라니법에는 만약 하나가 없으면 일체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이와 같이 그 모습이 어떠한지 알아야 한다. -
006_0830_a_01L依別敎一乘。理理相即亦得。事事相即
006_0830_a_02L亦得。理事相即亦得。各各不相即亦
006_0830_a_03L1)得。 [304] 何以故。中即不同故。亦有具足理
006_0830_a_04L因陁羅 [204] 及事因2)陁 [305] 等法門故。十佛普
006_0830_a_05L賢法界宅中。有如是等無障㝵法界法
006_0830_a_06L門。極自在故。其餘逆順主3)伴 [306] 相成等
006_0830_a_07L法門。准例相攝。隨義消息。若欲觀緣
006_0830_a_08L起實相陁羅尼法者。先應4)學 [307] 數十錢法。
006_0830_a_09L所謂一錢乃至十錢。所以說十者。欲
006_0830_a_10L*現無量故。此中有二。一者一5)中 [308] 十十
006_0830_a_11L中一。二者一即十十即一。初門中有二。
006_0830_a_12L一者向上來。二者向下去。言向上來中。
006_0830_a_13L有十門不同。一者一。何以故。緣成故。
006_0830_a_14L即是本數。乃至十者一中十。何以故。
006_0830_a_15L若無一。十即不成。仍十非6)一。 [309] 餘門亦
006_0830_a_16L如是。第下之二第二張 准例可知。言向
006_0830_a_17L下去中。亦有十門。一者十。何以故。緣
006_0830_a_18L成故。乃至十者十中一。何以故。若無
006_0830_a_19L十。一即不成。仍一非十故。餘亦如是。
006_0830_a_20L7)如是往反 [310] 勘當。即知一一錢中具足
006_0830_a_21L十門。如本末兩錢中具足十門。餘八
006_0830_a_22L錢中。准例可解。
006_0830_a_23L問。8)旣 [311] 言一者。何得一中名爲十9)耶。 [312] 答。
006_0830_a_24L大緣起陁羅尼法。若無一。一切即不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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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0_b_01L말한 바 하나란 자성으로서의 하나가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하나이며, 내지 열이란 자성으로서의 열이 아니라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열이다. 일체의 연緣으로 생겨나는 법은 한 법도 결정코 자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곧 자재하지 않다. 자재하지 않다란 곧 생겨나되 생겨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이다.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이란 곧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다.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란 곧 중도의 뜻이다. 중도의 뜻이란 곧 생겨남과 생겨나지 않음에 통한다. 그러므로 용수龍樹가 이르기를, “인연으로 생겨난 법을 나는 곧 공이라고 설하며, 또한 가명假名이라고 설하며, 또한 곧 중도의 뜻이라고 한다.”4)라고 하니, 곧 그 뜻이다. 중도의 뜻이란 무분별의 뜻이다. 무분별의 법은 자성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연緣을 따라 다함이 없으며 또한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라. 하나 가운데 열과 열 가운데 하나는 서로 용납하여 걸림 없으나 또한 상즉(相是)은 아니다. 이미 하나의 문 가운데 열 문을 갖추므로 하나의 문 가운데 다함없는 뜻이 있음을 분명하게 안다. 하나의 문과 같이 나머지 또한 이와 같다.
문 하나의 문 가운데 열을 포섭하여 다하는가, 다하지 않는가?답 다하기도 하고 다하지 않기도 하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다함을 구하면(須) 곧 다하고, 다하지 않음을 구하면 곧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뜻은 무엇인가? 하나의 일(一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까닭에 곧 다하고, 다른 일(異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까닭에 곧 다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일 가운데 하나와 많음의 뜻은 상즉(相是)하지 않으니 곧 많음이고, 하나의 일인 까닭에 곧 하나이다. 네 구절로 잘못을 막고 틀림을 제거하여 덕을 나타내니,5) 이것에 준하면 이해할 수 있다. 다른 일 또한 준하여 같다.
문 ‘구함(須)’이란 무슨 뜻인가?답 ‘구함’이란 연緣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무슨 까닭인가? 인연법은 하나로서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르고 다른 모든 현상(事)의 부문 가운데도 예에 준하면 이와 같다. 연기의 오묘한 이법(理)은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첫째 문을 마친다. -
006_0830_b_01L10)故。 [313] 定知如是。其相如11)何。 [314] 所言一者。
006_0830_b_02L非自性一。緣成故一。乃至十者。非自
006_0830_b_03L性十。緣成故十。一切緣生法。無有
006_0830_b_04L一法定12)有自 [315] 性。無自性故。即不自在。
006_0830_b_05L13)不自在 [316] 者。即生14)不生 [317] 不生生。不生生
006_0830_b_06L者。即是不住義。不住義者。即是中道
006_0830_b_07L15)義。中 [318] 16)道 [319] 義者。即通生不生。故龍樹
006_0830_b_08L云。因緣所生法。我說即是空。亦說17)是
006_0830_b_09L假名 18)復 [320] 是中道義。即其義也。中19)道 [321]
006_0830_b_10L者。是無分別義。無分別法。不守自性
006_0830_b_11L故。隨緣無盡。亦是不住。是故當知。一
006_0830_b_12L中十。十中一。相容無㝵。仍不相是。旣 [205]
006_0830_b_13L一門中。具足十門故。明20)知 [322] 一門中有
006_0830_b_14L無盡義。如一門。餘亦如是。
006_0830_b_15L問。一門中攝十盡不21)盡。 [323] 答。盡不盡。所
006_0830_b_16L以者何。須盡即盡。須不盡即不盡故。其
006_0830_b_17L義云何。以一事辨一多故。即盡。以異事
006_0830_b_18L辨一多故。即不盡。22)又 [324] 一事中一多義不
006_0830_b_19L相是即是多。一事故 23)即 [325] 是一。四句護
006_0830_b_20L過24)去 [326] 非25)現 [327] 德。准之可解。異事亦准同。
006_0830_b_21L問。須者 [206] 何義。第下之二第三張 答。須者
006_0830_b_22L緣成義。何以故。因緣法一不差26)失。 [328] 別
006_0830_b_23L別諸事門中。准例如是。緣起妙理。應
006_0830_b_24L如27)是 [329] 知故。 28)弟 [330] 一門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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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0_c_01L둘째 문은 이 가운데 두 가지 문이 (있다.) 첫 번째는 위로 향하여 가고(向上去), 두 번째는 아래로 향하여 온다(向下來). 첫 번째 문 가운데 열 문이 같지 않다. 첫째는 하나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하나가 곧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하나가 없으면 열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며,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두 번째 문 가운데도 또한 열 문이 있다. 첫째는 열이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내지 열째는 열이 곧 하나이다. 만약 열이 없으면 하나가 곧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예에 준한다. 이 뜻으로 인한 까닭에 마땅히 알아라. 하나하나의 동전 가운데 열 문을 갖춘다.
문 위와 같은 많은 문이 일시에 함께 원만한가, 앞과 뒤가 같지 않은가?답 곧 원만하기도 하고 곧 앞과 뒤가 같지 않기도 하다. 무슨 까닭에 이와 같은가? 원만함을 구하면 곧 원만하고 앞과 뒤를 구하면 곧 앞과 뒤이다. 무슨 까닭인가? 법성의 집 안에 덕용德用이 자재하여 걸림이 없기 때문이니 연緣으로 이루어지는 까닭에 모두 이와 같다. -
006_0830_c_01L*弟二門。此中二門。一者向上29)去。 [331] 二者
006_0830_c_02L向下來。初門中。十門不同。一者一。何
006_0830_c_03L以故。緣成故。乃至十者一即十。何以
006_0830_c_04L故。若無一。十即不成故。緣成故。第二
006_0830_c_05L門中。亦有十門。一者十。何以故。緣成
006_0830_c_06L故。乃至十者十即一。若無十。一即不
006_0830_c_07L成故。餘者准例。以此義故。當知一一
006_0830_c_08L錢中具足十門。
006_0830_c_09L問。如上多門。一時俱圓耶。前後不同耶。
006_0830_c_10L答。即圓即前後不同。何故如是。須圓即
006_0830_c_11L圓。須前後即前後。何以故。法性家內
006_0830_c_12L德用。自在無障 [207] 㝵故。由緣成故。皆得
006_0830_c_13L如是。
006_0830_c_14L「得」下有「相即」{甲}。「陁」下有「羅尼」{甲}。
006_0830_c_15L「伴」作「半」{甲}。「學」作「覺」{甲}。「中」作
006_0830_c_16L「即」又冠註曰即疑中{甲}。「一」下有「故」{甲}。
006_0830_c_17L「如是往反」作「生變如是」{甲}。「旣」作「現」
006_0830_c_18L{甲}。「耶」作「也」{甲}。「故」無有{甲}。「何」
006_0830_c_19L無有{甲}。「有自」作「相有」{甲}。「不自在」無有
006_0830_c_20L{甲}。「不生」無有{甲}。「義中」無有{甲}。冠註
006_0830_c_21L曰道上疑脫中字{甲}。「是」上有「爲」 又冠註
006_0830_c_22L曰是字疑剩{甲}。「復」作「亦」{甲}。「道」下有
006_0830_c_23L「義」{甲}。「知」作「中智」{甲}。「盡」無有{甲}。
006_0830_c_24L「又」作「文」 又冠註曰文疑又{甲}。「即」下有
006_0830_c_25L「多」{甲}。「去」作「失」{甲}。「現」作「離」又冠
006_0830_c_26L註曰離疑顯{甲}。「失」作「故」{甲}。「是」下有
006_0830_c_27L「可」{甲}。「弟」作「第」{甲}{乙}次同。「去」下有
006_0830_c_28L「之」 又冠註曰一無之字{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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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1_a_01L문 위에서 설한 바와 같은 오고 감의 뜻은 그 모양이 어떠한가?답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항상 오고 간다. 무슨 까닭인가? ‘오고 감’이란 연緣을 따르는 뜻이니 곧 인연의 뜻이다. ‘움직이지 않음’이란 근본을 향하는 뜻이니 곧 연기의 뜻이다.
문 인연과 연기는 어떻게 다른가?답 다르기도 하고 같기도 하다. 이른바 다르다는 뜻은, 인연은 속제俗諦의 차별을 따른다. 곧 인因과 연緣이 서로 바라보아 자성이 없는 뜻을 나타내니, 바로 속제의 체體이다. 연기는 성품의 분별없음을 따른다. 곧 상즉하고 상융하여 평등의 뜻을 나타내니, 바로 제일의제第一義諦의 체體를 따른다. 속제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제일의제를 따른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세제世諦를 따라 관觀하여 곧 제일의제에 들어간다.”6)라고 하니, 곧 그 뜻이다. 다른 뜻은 이와 같다. 같은 뜻은 앞의 용수보살의 해석7)과 같다. 낱낱의 동전에 나아가 동시에 구족함(同時具足) 등의 열 가지 문에 의해서 돌려보면, 그것에 준하여 이해할 수 있다. 열 가지 문은 아래에 설하는 것과 같다.8)
동전 가운데 첫 번째 내지 열 번째가 같지 않으나 상즉하고 상입하여 걸림 없이 서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이, 비록 원인(因)과 결과(果), 이법(理)과 현상(事), 사람(人)과 법法, 앎(解)과 행行, 가르침(敎)과 뜻(義), 주主와 반伴 등의 여러 많은 문이 다르나 한 문에 의탁함을 따라 일체를 다 포섭한다. 나머지 뜻도 이에 준한다.위에서의 동전을 세는 법이란 우선 변계遍計인 현상(事)의 동전에 의지하여 의타依他인 인연과 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한 가리킴에 의지하여 보일 수는 있지만 연으로 생겨난 일체 모든 법은 끝내 얻을 수 없다. 변계의 사물에 집착하여 연기의 법에 미혹하면 법을 나타내어 머무름이 전혀 다르다.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한 보살의 일념一念 공덕이 다할 수 없다.”9)라고 한 것이 첫째 동전과 같다. 무슨 까닭인가?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없음을 나타내는 까닭이다. “어찌 하물며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10)라고 한 것은 둘째 동전 이후와 같다. -
006_0831_a_01L問。如上所說來去義。其相云何。答。自位
006_0831_a_02L不動而恒來去。何以故。來去者。隨緣
006_0831_a_03L義。即是因緣義。不動者。向本義。即是
006_0831_a_04L緣起義。
006_0831_a_05L1)問。 [332] 因緣2)與 [333] 緣起何別。答。亦別亦同。所
006_0831_a_06L謂別義者。因緣者。3)隨 [334] 俗4)差 [335] 別。即是因
006_0831_a_07L緣相望。 *現無自性義。正俗諦體也。緣
006_0831_a_08L起者。5)順 [336] 性無分別。即是相即相融。 *現
006_0831_a_09L平等義。正*順第一義體也。俗諦。無自
006_0831_a_10L性故。順6)弟 [337] 一義。是故經云。隨順觀世
006_0831_a_11L諦。即入*弟一義諦。即7)其 [338] 8)義 [339] 也。別義
006_0831_a_12L如是。同義。如前龍樹釋。就一一錢中。
006_0831_a_13L依同時具足等9)十 [340] 門。以廻轉者。准之
006_0831_a_14L可解。十門。如10)下 [341] 說。第下之二第四張 如
006_0831_a_15L錢中。*弟一乃至*弟十。不同而相即相
006_0831_a_16L入。無㝵相11)成。 [342] 雖因果理事人法解行敎
006_0831_a_17L義主伴等衆多門。別而隨12)托 [343] 一門。盡
006_0831_a_18L攝一切。餘義准之。上來數錢法者。且
006_0831_a_19L依遍計事錢。 *現示依他因緣緣起錢也。
006_0831_a_20L亦可依指示13)緣 [344] 生一切諸法終不可得。
006_0831_a_21L執遍計物。迷緣起法。 *現法逗留全別。
006_0831_a_22L經云。初發心菩薩一念功德。不可盡者。
006_0831_a_23L如*弟一錢。何以故。約一門。*現無盡故。
006_0831_a_24L何況無量無邊諸地功德者。如*弟二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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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1_b_01L무슨 까닭인가?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처음 발심할 때에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11)라고 한 것은, 하나의 동전이 곧 열 (동전)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인가? 수행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문 ‘처음 발심한 보살’이란 믿음의 지위(信地)의 보살이니 곧 제자의 지위이다.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란 부처님의 지위이니, 곧 대사大師의 지위이다. 높고 낮음이 같지 않고 지위가 전혀 다르다. 무엇 때문에 같은 곳에 머리와 다리를 나란히 두는가?답 삼승의 방편법과 원교일승의 법은 법의 작용과 머무름이 각각 달라서 섞어 쓸 수 없다. 그 뜻이 어떠한가? 삼승의 법은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다르고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年月)가 같지 않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모양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기 때문이고, 믿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다. 원교일승의 법은 머리와 다리가 모두 하나이며,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가 모두 같다. 무슨 까닭인가? 연緣으로 이루어짐을 말미암은 까닭이고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
문 ‘하나(一)’란 무슨 뜻인가?답 ‘하나’란 하나로서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또,문 ‘같다(同)’란 무슨 뜻인가?답 ‘같다’란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 분별이 없고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처음과 끝이 같은 곳이며 스승과 제자가 머리를 나란히 한다.문 ‘같은 곳에 머리를 나란히 한다’란 무슨 뜻인가?답 ‘같은 곳에 머리를 나란히 한다’란 서로 알지 못하는 뜻이다. 왜냐면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
또,문 ‘분별이 없다’란 무슨 뜻인가?답 ‘분별이 없다’란 연緣으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곧 처음과 마지막 등이 둘이 없고 다름이 없다. 무엇 때문에 이와 같은가? 일체 연緣으로 생겨나는 법은 짓는 자도 없으며 이루는 자도 없으며 아는 자도 없다. 고요함과 작용함이 한 모양이며 높음과 낮음이 한 맛이니 마치 허공과 같다. 모든 법이 으레 그러하여 예부터 이와 같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법이 생겨남도 없으며 없어짐도 없으나 인연으로 있음을 관한다.”12)라고 한, 이와 같은 등의 문장이 그 뜻이다. -
006_0831_b_01L已去。何以故。約異門說故。初發心時
006_0831_b_02L便成正覺者。如一錢即十故。何以故。
006_0831_b_03L約行體說故。
006_0831_b_04L問。初發心菩薩者。信地菩薩。即是弟子
006_0831_b_05L位。成正覺者佛地。即是大師位。高下
006_0831_b_06L不同。位地14)全 [345] 別。 15)何 [346] 故同處並頭脚耶。
006_0831_b_07L答。三乘方便法。 16)與 [347] [208] 圓敎一乘法。法用
006_0831_b_08L逗留各別。不得雜用。 17)其 [348] 義云何。三乘
006_0831_b_09L法18)者。 [349] 頭脚各別。 19)阿耶 [350] 兒子年月不同。
006_0831_b_10L何故如是。約相說故。生信心故。圓敎
006_0831_b_11L一乘法者。頭脚摠一。阿耶兒子年月皆
006_0831_b_12L20)同。 [351] 何以故。由緣成故。約道理說故。
006_0831_b_13L問。一者何義。答。一者一無分別義。又問。
006_0831_b_14L同者何義。答。同者 [209] 不住義。無分別不住
006_0831_b_15L故。始終同處。師21)弟 [352] 並頭。
006_0831_b_16L問。同處並頭者何義。答。同處並頭者。不
006_0831_b_17L相知義。何以故。無分別故。又問。無分
006_0831_b_18L別者何義。答。無分別者。第下之二第五張
006_0831_b_19L緣生義。即是始終等是無二22)無 [353] 別。何
006_0831_b_20L故如是。一切緣生法。無有作者。無有成
006_0831_b_21L者。無有知者。寂用一相。高下一味。猶
006_0831_b_22L如虛空。諸法法尒。舊來如是。是故經
006_0831_b_23L云。觀一切法 23)不 [354] 生*不滅因緣而有。
006_0831_b_24L如是等文。 24)是 [355] 其義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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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1_c_01L문 믿음의 지위의 보살 내지 부처님이 같은 곳에 머리를 나란히 두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답) 아래의 경에 이르기를, “처음 발심할 때 문득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13)라고 함과 같으며, 또한 『십지경론』에서 해석하기를 ‘믿음의 지위의 보살 내지 부처님이 육상으로 이루어진 까닭이다’14)라고 함과 같으니, 이와 같은 뜻이 있음을 분명하게 안다. 육상은 위와 같으니, 이 말은 법성의 집에 들어가고자 하는 중요한 문이며 다라니의 곳집(藏)을 여는 좋은 열쇠이기 때문이다. 위에서 밝힌 것은 오직 일승다라니의 대연기법을 나타내 보인 것이며, 또한 일승의 걸림 없는 변재辯才의 체體를 논한 것이니 삼승의 분제分際는 아니다.문 초교初敎 이후는 일체 모든 법이 곧 공空하고 곧 여여(如)하여 하나로서 분별이 없으니, 무슨 까닭에 위에서 머리와 다리가 각각 다르다고 말했는가?답 이 뜻이 없지 않으나 아직 원만하지 않은 까닭에 아래로부터 말한 것이다.
문 삼승으로부터 이외에 따로 원교일승의 분제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답) 아래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 세계의 많은 중생(群生)들의 무리가, -
006_0831_c_01L問。所以得知信位菩薩乃至佛同處並
006_0831_c_02L頭。如下經云。初發心時便成正覺。亦
006_0831_c_03L如地論釋。信地菩薩乃至佛。六相成
006_0831_c_04L故。明知有如是義。六相如上。此語。欲
006_0831_c_05L入法性家要門。開陁羅尼藏好25)鑰匙 [356]
006_0831_c_06L故。上來所明者。唯*現示一乘陁羅尼
006_0831_c_07L大緣起法。亦可論一乘無㝵辯26)才 [357] 體。
006_0831_c_08L非三乘分齊。
006_0831_c_09L問。初敎已去。一切諸法。即空即如。一
006_0831_c_10L無分別。何故上言頭脚各別耶。答。非無
006_0831_c_11L此義。未27)圓 [358] 故。從下爲言。
006_0831_c_12L問。所以得知自三乘以外別有圓敎一
006_0831_c_13L乘分齊。如下經28)云。 [359] 一切世界群生類。
006_0831_c_14L「問」作「間」{乙}。「與」作「焉」{乙}。「隨」下
006_0831_c_15L有「隨」 又冠註曰隨一作相{甲}。「差」作「義」
006_0831_c_16L{甲}。「順」作「隨」{甲}次同。「弟」作「第」{甲}次
006_0831_c_17L同。冠註曰其下疑脫義字{甲}。「義」無有{甲}。
006_0831_c_18L「十」作「一」{甲}。「下」作「上」{甲}。「成」
006_0831_c_19L無有{甲}。「托」作「說」{甲}。「緣」作「顯」{甲}次
006_0831_c_20L同。「全」作「今一」又冠註曰今一一作亦{甲}。
006_0831_c_21L「何」下有「以」{甲}。「與」作「焉」{乙}。「其」
006_0831_c_22L下有「其」又冠註曰其字疑剩{甲}。「者」無有
006_0831_c_23L{甲}。「阿耶」作「何耶」 又冠註曰何耶疑阿爺
006_0831_c_24L{甲}。「同」下有「總」又冠註曰總字疑剩{甲}。
006_0831_c_25L「弟」下有「子」{甲}。「無」無有{甲}。「不」作
006_0831_c_26L「無」{甲}次同。「是」作「即」{甲}。「鑰匙」作「
006_0831_c_27L」{甲}。「才」作「大」{甲}。「圓」作「滿」{甲}。
006_0831_c_28L「云」作「言」{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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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2_a_01L성문의 길을 구하고자 하는 자 적고, 연각을 구하는 자는 더욱 적으며, 대승을 구하는 자는 매우 드물다. 대승을 구하는 것은 오히려 쉬우나, 이 법을 믿을 수 있는 것이 매우 어렵다.”15)라고 하고, “만약 중생이 하열하여 그 마음에 싫어하는 자이면 성문도로써 보여 뭇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 만약 다시 어떤 중생이 모든 근기가 조금 밝고 예리하여 인연법을 좋아하면 (그를) 위하여 벽지불을 설한다. 만약 어떤 이가 근기가 밝고 예리하여 큰 자비심이 있어서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그를) 위하여 보살도를 설한다. 만약 위없는 마음이 있어서 결정코 큰 일을 좋아하면 (그를) 위하여 부처님 몸을 보여서 다함없는 부처님의 법을 설한다.”16)라고 한 것과 같다. 성스러운 말씀이 손바닥의 밝은 구슬과 같으니 놀라고 의심할 필요가 없다.
문 일승과 삼승의 분제가 다른 뜻을 무엇으로 인하여 알 수 있는가?답 우선 열 가지 문에 의거하면 곧 안다.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同時具足相應門)이다. 그 가운데 열 가지 문이 있다. 이른바 사람과 법, 이법과 현상, 가르침과 뜻, 앎과 행, 원인과 결과이다. 이들 열 가지 문17)이 상응하여 앞과 뒤가 없다. 둘째, 인드라그물의 경계인 문(因陀羅網境界門)이다. 이 가운데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비유를 따라서 다를 뿐이다. 나머지도 이에 준할 수 있다. 셋째,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난 것이 함께 이루는 문(袐密隱顯俱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연緣을 따라 다를 뿐이다.
넷째, 미세한 것도 서로 용납하여 안립하는 문(微細相容安立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모양을 따라 다를 뿐이다. 다섯째, 십세十世가 법과 나뉘어 달리 이루는 문(十世隔法異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때(世)를 따라 다를 뿐이다. 여섯째, 순수하고 잡박한 것을 모두 갈무리하여 덕을 갖춘 문(諸藏純雜具德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문門을 따라 다를 뿐이다. 일곱째,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나 같지 않은 문(一多相容不同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이理를 따라 다를 뿐이다.
여덟째,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는 문(諸法相卽自在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작용(用)을 따라 다를 뿐이며, 또한 성품을 의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
006_0832_a_01L尠有欲求聲聞道。求緣覺者轉復少。求
006_0832_a_02L大乘者甚1) [360] [210] 有。求大乘者猶爲易。能
006_0832_a_03L信是法甚爲難。若衆生下劣其心猒
006_0832_a_04L沒者。示以聲聞道。令出於衆苦。若復
006_0832_a_05L有衆生。諸根小明利。樂於因緣法。爲
006_0832_a_06L說辟支佛。若2)人 [361] 根明利。有大慈悲心。
006_0832_a_07L3)饒 [362] [211] 益於衆生。爲說菩薩道。若有無上
006_0832_a_08L心。決定樂大事。爲示於佛身。說無盡
006_0832_a_09L佛法。聖言如4)掌 [363] 明珠。不須驚怪。 [212] 第下
006_0832_a_10L之二第六張。
006_0832_a_11L問。一乘三乘分齊別義。因何得知。答。且
006_0832_a_12L依十門即知也。一5)同 [364] [213] 具足相應門。於
006_0832_a_13L中有十6)門。所 [365] 謂人法理事敎義解行因
006_0832_a_14L果。此等十門。相應無有前後。二因陁
006_0832_a_15L羅網境界門。此中具前十門。 7)但 [366] 義從
006_0832_a_16L喩異耳。餘可准之。三秘密隱*現俱成
006_0832_a_17L門。此亦具前十門。 *但義從緣異耳。四
006_0832_a_18L微細相容安立門。此亦具前十門。 *但
006_0832_a_19L義8)從 [367] 相異耳。五十世隔法異成門。此
006_0832_a_20L亦具前十門。 *但義從世異耳。六諸藏
006_0832_a_21L純雜具德門。此亦具前十門。 *但義從
006_0832_a_22L9)門 [368] 異耳。七一多相容不同門。此亦具
006_0832_a_23L前十門。 *但義從理異耳。八諸法相即
006_0832_a_24L自在門。此亦具前十門。*但義從用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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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2_b_01L아홉째, 오직 마음이 회전하여 잘 이루는 문(唯心廻轉善成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마음(心)을 따라 다를 뿐이다. 열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托事顯法生解門)이다. 이 또한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나 다만 뜻이 지혜(智)를 따라 다를 뿐이다. 나머지는 이에 준할 수 있다.
위의 열 가지 현묘한 문은 아울러 다 다르다. 만약 가르침과 뜻의 분제가 이것과 상응한다면 곧 일승원교와 돈교頓敎에 거두어진다. 만약 모든 가르침과 뜻의 분제가 이와 상응하되 구족하지 못하면 곧 삼승의 점교漸敎에 거두어진다. 이와 같이 안다. 이와 같은 열 가지 문이 구족하여 원만한 것은 『화엄경』의 설과 같다. 나머지 넓은 뜻은 경經과 논論과 소疏와 초抄와 『공목孔目』과 『문답問答』 등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일승법계도의 시詩와 하나의 도인圖印을 합한 것은 『화엄경』과 『십지론』에 의거하여 원교의 핵심(宗要)을 나타낸 것이다. 총장總章 원년元年18) 7월 15일에 기록하다.
문 무슨 까닭에 지은 사람(集者)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가?답 연緣으로 생겨나는 모든 법은 주인이 없음을 나타내는 까닭이다.또,문 무슨 까닭에 해와 달(年月)의 이름이 있는가?답 일체 법이 연緣에 의거하여 생겨남을 보이는 까닭이다.또,문 연緣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답 전도顚倒된 마음 가운데로부터 온다.
전도된 마음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비롯함이 없는 무명으로부터 온다.비롯함이 없는 무명은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가?여여如如로부터 온다.여여는 어느 곳에 있는가?여여는 자기의 법성法性에 있다.자기의 법성은 무엇으로 모양을 삼는가?분별이 없음으로써 모양을 삼는다. 그러므로 일체의 법은 보통 중도에 있으니 무분별 아님이 없다. 이 뜻인 까닭에 글 첫머리의 시詩에서 “법성은 원융하여 두 모양 없고,”19) 내지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이름하여 부처라 한다.”20)라고 하였으니 뜻이 여기에 있다.시詩에 의지한 까닭은 헛됨(虛)에 즉하여 참됨(實)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
006_0832_b_01L耳。亦可依性。九10)唯 [369] 心廻轉善成門。此
006_0832_b_02L亦具前十門。*但義從心異耳。十11)托 [370] 事
006_0832_b_03L*現法生解門。此亦具12)前 [371] 13)十門。* [372] 但義
006_0832_b_04L從智異耳。餘可准之。上十14)門玄。 [373] [214] 並皆
006_0832_b_05L別異。若敎義分齊 15)與 [374] 此相應者。即是
006_0832_b_06L一乘圓敎及頓敎攝。若諸敎義分16)齊 [375]
006_0832_b_07L與此相應而不具足者。即是三乘漸敎
006_0832_b_08L17)攝。 [376] 如是知也。如是十門具足圓者。如
006_0832_b_09L18)花 [377] 嚴經說。餘廣義者。如經論䟽抄孔
006_0832_b_10L目問答等分別也。
006_0832_b_11L一乘法界圖合詩一印。依*花嚴經及
006_0832_b_12L十地論。表圓敎宗要。總章元年七月十
006_0832_b_13L五日記。
006_0832_b_14L問。何故不19)着 [378] [215] 集者名字。第下之二第七
006_0832_b_15L張 答。表緣生諸法無有主者故。又問。
006_0832_b_16L何故20)存 [379] 年月名。答。示一21)切 [380] 法依緣生
006_0832_b_17L故。又問。緣從何處來。答。從顚倒心中來。
006_0832_b_18L顚倒心從何處來。從無始無明來。無始
006_0832_b_19L無明從何處來。從如如來。如如在何處。
006_0832_b_20L如如在自法性。 22)自 [381] 法性以何爲相。以
006_0832_b_21L無分別爲相。是故。一切23)法 [382] 尋常在中
006_0832_b_22L道。無非無分別。以此義故。文首詩24)言。 [383]
006_0832_b_23L法性圓融無二相。乃至舊來不動名爲
006_0832_b_24L佛。意在於此。所以依詩。即虛 [216] *現實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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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2_c_01L서원한다. 일승의 보법의 이름과 뜻을 보고 듣고 닦아 모아서 이 선근으로 일체중생에게 돌려 베푸니, 널리 훈습하고 널리 닦아서 온 중생계가 일시에 성불하여지이다.21)주석석문釋文 3 (別解印相 중 釋文意 : 〔4〕 得益)1. 십불十佛‘이른바 열 부처님’부터 ‘매우 깊고 난해하니’까지22)
대기『대기』에 이른다. ‘이른바 열 부처님’이란 만약 ‘부처님(佛)’ 자의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증분의 열 부처님이고, 만약 ‘보普’ 자의 도장으로 도장 찍으면 교분의 열 부처님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첫째는 무착불無着佛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집착 없음이 곧 집착이며 집착하되 집착이 없음이다. ‘세간에 편안히 머무름’이란 삼승에서는 세간을 벗어나 부처님을 이루기 때문에 편안히 머무름이 아니며, 일승에서는 삼세간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기 때문에 ‘세간에 편안히 머무름’이라고 하는 것이다. 깨달은 마음으로 보면 다만 마음일 뿐이니 상대하는 바 경계가 집착할 것임이 없으니 분별하는 의식이 별도의 대상을 취하여 집착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
006_0832_c_01L誓願。見聞修集一乘普法名字及義。以
006_0832_c_02L斯善根。廻施一切衆生。普25)熏 [384] 26)普 [385] 修。盡
006_0832_c_03L衆生界。一時成27)佛。 [386]
006_0832_c_04L[註釋]所謂十佛至甚深難解。大記云。所謂
006_0832_c_05L十佛者。若以佛字印印之。則訂分十
006_0832_c_06L佛。若以普字印印之。則是敎分十
006_0832_c_07L佛也。
006_0832_c_08L法記云。一無28)着 [387] 佛安住世間成正
006_0832_c_09L覺故者。無*着即*着。*着而無*着也。
006_0832_c_10L安住世間者。三乘中。出世成佛。故非
006_0832_c_11L安住。一乘中。以三世間爲自身心。
006_0832_c_12L故云安住世間也。以訂心看。只是心
006_0832_c_13L耳。無所對境是爲*着也。非如分
006_0832_c_14L「」作「希」{甲}ㆍ作「又布」{乙}。「人」作「有」
006_0832_c_15L{甲}。「饒」作「余」又冠註曰全疑樂{甲}。「掌」
006_0832_c_16L作「常」又冠註曰常一作掌{甲}。「同」下有「時」
006_0832_c_17L{甲}。「門所」作「相」{甲}。「但」作「俱」{甲}次同。
006_0832_c_18L「從」下有「緣」{甲}。「門」作「事」{甲}。「唯」作
006_0832_c_19L「隨」{甲}。「托」作「託」{甲}。冠註曰前下疑脫
006_0832_c_20L二字{甲}。「十門」無有{甲}。「門玄」作「玄門」
006_0832_c_21L{甲}。「與」作「焉」{甲}。「齊」無有{甲}。「攝」無
006_0832_c_22L有{甲}。「花」作「華」{甲}次同。「着」作「看」又
006_0832_c_23L冠註曰看一作著{甲}ㆍ作「著」{乙}。「存」作「在」
006_0832_c_24L{甲}。「切」下有「諸」{甲}。「自」無有{甲}。「法」
006_0832_c_25L無有{甲}。「言」無有{甲}。「熏」作「重」 又冠註
006_0832_c_26L曰重疑熏{甲}。「普」無有{甲}。「佛」下甲本有
006_0832_c_27L如下門「法界圖章一乘法界圖終。華嚴宗香鳥大
006_0832_c_28L師末葉非人釋題。頭法師之執筆也。建曆二年三
006_0832_c_29L月三日。子始許於高山以法勝寺仝本一校賢穴
006_0832_c_30L八吁」。「着」作「著」{乙}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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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3_a_01L‘집착 없음이 곧 집착’이란 비록 마음이 경계를 보지 아니하되 일체의 경계가 내 마음 아님이 없는 것이다. ‘집착하되 집착 없음’이란 일체가 내 마음의 태양이 무릇 나아가 향한 바 아님이 없지만, 기준으로 하는 것마다 곁이 없는 것이다.
‘바른 깨달음을 이룸’이란 마치 안식眼識이 안근과 티끌(塵)로 체體를 삼지만 고름과 피와 피부의 깨끗하지 않음에 물드는 바가 되지 않으면서 청정한 안식을 이루는 것과 같다. 만약 귓구멍에 침을 놓아서 고름과 피를 제거하게 하면 청정한 안식을 이루지 못한다. 지혜의 바른 깨달음 또한 이와 같다. 삼세간으로 자기의 몸과 마음을 삼으나 중생의 업과 번뇌에 물드는 바가 되지 않으면서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나 대연기 가운데는 한 법을 제거함을 따라서 일체 모든 법이 전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생의 업으로 인한 미혹과 번뇌에 대해서 만약 하나라도 제거한다면23) 바른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다.
‘둘째는 원불願佛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해인삼매 중에 삼세간의 일체 모든 법을 출생시키고 또 삼세간의 낱낱의 법은 법계의 모든 법을 출생시킨다. 찰나찰나에 새롭고 새로우며 다함없고 다함없기 때문에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출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법과 법은 혹 수행하거나 수행하지 않거나 일체중생의 몸과 마음 가운데 항상 그러하고 항상 그러하다. 그 까닭에 여래가 이 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은 다만 서원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능히 이러한 법을 출생시키는 것이다.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은 다만 능히 서원하지 못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출생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원불’이라고 한다.
‘셋째는 업보불業報佛이니 믿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세간인 육도의 원인과 출세인 성문ㆍ연각ㆍ보살의 원인 등을 업業으로 삼는다. 제9지地의 업행 조림稠林24)의 글25)에서 볼 수 있다. ‘보報’는 육도의 결과와 성문ㆍ연각ㆍ모든 부처님 등의 결과를 보報로 삼는다. 이것이 곧 해인삼매의 두렷하고 밝은 법이니, 그러므로 ‘업보불’이라고 한다. -
006_0833_a_01L別意識取*着別境也。無*着即*着者。
006_0833_a_02L雖心不見境。而一切境。無非我心也。
006_0833_a_03L*着而無*着者。一切無非我心之日
006_0833_a_04L凡所趣向。約約無側也。成正覺者。猶
006_0833_a_05L如眼識。第下之二第八張 以眼根塵
006_0833_a_06L爲體。而不爲膿血皮膚不淨所染。成
006_0833_a_07L淨眼識。若針耳孔。許除膿血。則淨眼
006_0833_a_08L不成。智正覺者。亦復如是。以三世
006_0833_a_09L間爲自身心。而不爲衆生業煩惱
006_0833_a_10L所染。得成正覺。然大緣起中。隨去一
006_0833_a_11L法。一切諸法。擧體不立。故於衆生
006_0833_a_12L業惑煩惱。若云一物。不成正覺也。二
006_0833_a_13L願佛出生故者。海印中。出生三世間
006_0833_a_14L一切諸法。又三世間一一之法。出生
006_0833_a_15L法界諸法。於念念中。新新無盡無盡
006_0833_a_16L故。約此義云。出生也。如是法法。若修
006_0833_a_17L不修。一切衆生身心之中。常然常然。
006_0833_a_18L所以如來現見此法者。只由願故。能
006_0833_a_19L出生如是法也。衆生不見者。只由不
006_0833_a_20L能願故。約此出生義。云願佛也。三業
006_0833_a_21L報佛信故者。世間六道之因。出世聲
006_0833_a_22L聞緣覺菩薩因等爲業。 1)弟 [388] 九地業行
006_0833_a_23L稠林文可見。報者。六道之果。聲聞緣
006_0833_a_24L覺諸佛等果爲報。此乃海印圓明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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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3_b_01L일체 중생이 자신의 참된 부처가 그 몸과 마음에 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다만 믿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믿는 마음만으로 업보불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넷째는 지불持佛이니 따라주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만약 한 티끌을 들면 곁이 남김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곁이 없이 그것을 다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모든 법이 한 티끌을 따르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이 한 티끌이 어찌 일체의 법을 다할 수 있겠는가? 나머지 모든 법에서도 이와 같이 준하여 생각하라. 하나가 곧 일체이고 일체가 곧 하나이다와 주主와 반伴이 구족해서 한량없이 자재하다는 도리는 모두 이 뜻이다. 이와 같이 듦에 따라서 거두어 지니는 뜻을 기준으로 ‘지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다섯째는 열반불涅槃佛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삼승에서는 반드시 생사를 버려야 비로소 열반을 증득하니 이를 말미암아 도리어 생사 가운데 빠지기 때문에 ‘영원히 건너감’이 아니다. 말하자면 둘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고 둘이 없기 때문에 곧 부처이다. 그러므로 만약 생사와 열반 가운데 둘이 있다고 본다면 어찌 생사 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일승에서는 또한 내 몸의 별보別報26)인 하나의 눈동자가 곧 해인의 구경의 경계를 꿰뚫으니 이 이상 다시 옮겨갈 곳이 없다. 그러므로 ‘영원히 건너감’이라고 한다. 다른 일체법도 기준으로 하고 기준으로 하는 것이 모두 그러하다. 이러한 뜻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만약 이 집 위의 용마루 서쪽 끝에 집착하여 서쪽의 분제를 구한다면 서쪽 허공을 다하더라도 그 분제를 얻지 못할 것이다. 동쪽 허공을 다하도록 이 서쪽 끝을 구하여 이르지 않은 곳이 없더라도 그 서쪽 분제는 끝내 얻을 수 없다. 무슨 까닭인가? 법계의 서쪽 끝이기 때문이며 서쪽이 곧 동쪽이기 때문이다. -
006_0833_b_01L法。故云業報佛也。一切衆生。所以
006_0833_b_02L不知自眞佛之在其身心者。只由不
006_0833_b_03L信。唯於信心得成業報佛。故云信也。
006_0833_b_04L四持佛隨順故者。若擧一塵。側無遺
006_0833_b_05L起故。無側而盡之。所以者何。一切
006_0833_b_06L諸法。無不隨順一2)塵 [389] 故。若不隨順。
006_0833_b_07L則此一*塵那得盡一切法乎。餘諸法
006_0833_b_08L中。如是准思。一即一切。一切即一。
006_0833_b_09L主伴具足。無盡自在之道理。皆此義
006_0833_b_10L也。第下之二第九張 約如是隨擧攝
006_0833_b_11L持之義。名爲持佛也。五涅槃佛永度
006_0833_b_12L故者。三乘中。要捨生死。方3)訂涅槃。
006_0833_b_13L由是還沒生死之中。故非永度也。謂
006_0833_b_14L有二故衆生。無二故即佛。是故。若於
006_0833_b_15L生死涅槃之中見有二者。何得不沒
006_0833_b_16L生死中哉。一乘中。且約吾身別報一
006_0833_b_17L眼瞳子。即徹海印究竟之際。於此以
006_0833_b_18L上。更無轉處。故云永度。餘一切
006_0833_b_19L法。約約皆然。約如是義。爲佛名也。
006_0833_b_20L六法界佛無處不至故者。若執此舍
006_0833_b_21L上棟之西4)未 [390] [217] 求西分齊。盡西方虛
006_0833_b_22L空而不得分齊。盡東方虛空。求此西
006_0833_b_23L末。無處不至。其西分齊。終不可得。
006_0833_b_24L所以者何。法界西末故。西方即東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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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3_c_01L나머지 쪽도 모두 그러하다. 이 한 용마루와 같이 일체 모든 법도 다 또한 이와 같다. 하나하나의 법과 법이 들고 들며 잡고 잡음에 곳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법계불’이다.
‘일곱째는 심불心佛이니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만약 마음을 말할 때면 일체 모든 법이 마음 아님이 없다. 이 뜻은 (일체 모든 법이) 식識 가운데 두루하기 때문에 (일체 모든 법을) 마음이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진심이 이루는 바이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허망한 마음이 짓는 바이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마음을 볼 때 단지 마음뿐이기 때문에 ‘심불’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한 법계의 성기심과 조림심 등이다. 삼승 가운데 마음은 반연하고 생각함(緣慮)이며 색色은 질량으로 인한 장애(質礙)이다. 일승 가운데 마음은 여러 가지(種種)라는 뜻이며 색은 질량으로 인한 장애가 없다는 뜻이다. 이미 마음이 여러 가지라는 뜻이기 때문에 마음을 볼 때 마음 아닌 사물이 없고 이미 색이 질량으로 인한 장애가 없다는 뜻이기 때문에 만약 색을 말할 때면 색 아닌 사물이 없다. 만약 습기를 뛰어넘는 바다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이를 밝히면 뛰어넘는 가운데의 진실을 ‘마음’이라고 이름한다. 일체 모든 법이 자신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음이 바로 곧 이 ‘마음’이기 때문에 ‘편안히 머무른다’라고 한다. 이와 같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심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여덟째는 삼매불三昧佛이니 한량없이 집착 없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현수품」 가운데 열 가지 대삼매27)와 모든 모임모임의 모든 대삼매가 다 삼매불이다. 하나의 삼매를 따라서 일체 모든 법이 만족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음’이라고 한다. 한량없음에 나아가 매 하나하나의 법마다 듦에 따라서 곁이 없기 때문에 ‘집착 없음’이라고 한다. 삼매에 의거하여 법을 보는 것이 이와 같기 때문에 ‘삼매불’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성불性佛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는 (다음과 같다.) ‘성性’은 머무름 없는 법성을 일컫는다. -
006_0833_c_01L故。餘方皆然。如此一棟。一切諸法。皆
006_0833_c_02L亦如是。一一法法。擧擧約約。無處不
006_0833_c_03L至。是法界佛也。七心佛安住故者。
006_0833_c_04L若心言時。一切諸法。無不是心。此義。
006_0833_c_05L非謂遍於識中故5)云心 [391] 也。非謂眞
006_0833_c_06L心之所成故。亦非妄心之所作故。但
006_0833_c_07L心見時。只是心耳。故云心佛。謂一
006_0833_c_08L法界性起心稠林心等也。三乘中。心
006_0833_c_09L是緣慮。色是質㝵。一乘中。心是種種
006_0833_c_10L義也。色是無質㝵義也。旣心是種種
006_0833_c_11L義故。以心見時。無物不心。旣色是
006_0833_c_12L無質㝵義故。若色云時。無物不色。
006_0833_c_13L若約濕過海義明之。過中實而名心。
006_0833_c_14L第下之二第一○張 一切諸法。自位
006_0833_c_15L不動。正即是心。故云安住。約如是
006_0833_c_16L義。名爲心佛也。八三昧佛無量無
006_0833_c_17L*着故者。賢首品中。十種大三昧。及
006_0833_c_18L諸會會諸大三昧。皆爲三昧佛也。隨
006_0833_c_19L一三昧。一切諸法。無不滿足。故云
006_0833_c_20L無量。就無量中。每一一法。隨擧無側。
006_0833_c_21L故云無*着。依於三昧。見法如是。故
006_0833_c_22L名三昧佛也。九性佛決定故者。性謂
006_0833_c_23L「弟」作「第」{乙}。「塵」作「坐」{乙}次同。「訂」
006_0833_c_24L通「證」於此書{編}次同。「未」作「末」{乙}。「云
006_0833_c_25L心」作「忘」{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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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4_a_01L일체의 법과 법이 모두 결정코 머무름이 없다는 이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본성과 모습이 항상 머무른다.28) 이와 같은 뜻을 기준으로 하여 부처님의 명호로 삼는 것이다.
‘열째는 여의불如意佛이니 널리 덮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사갈라용왕娑竭羅龍王29)의 궁전에 여의보왕이 있으니 이름이 ‘생겨남이 다함없음’이다. 이 여의보주왕은 바다와 육지 일체의 진귀한 보물과 큰 바다의 물을 능히 생겨나게 한다. 큰 바다의 일체중생 무리는 이 물을 집으로 삼고 이 물을 먹을 것으로 하여 다 태어나 자라난다. 큰 바다로 인하여 큰 땅이 있을 수 있으며 강과 시내와 모든 연못과 우물이 일체 풀과 나무와 모든 곡식과 과일에 물을 주어 더욱 자라게 하고 중생을 기른다. 만약 이 ‘다함없음’ 여의보왕이 없다면 바닷물이 마르고 곡식과 과일이 시들 것이니 물과 육지의 중생들이 무엇으로 성장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 여의보왕은 모든 부처님의 중생을 성장시키려는 본원에 인해서 생겨나는 바이다. 만약 모든 부처님의 본원의 힘이 없다면 이 여의보왕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일체중생이 성장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까닭은 다 여의불이 덮어주고 길러주는 덕德임을 안다.
이와 같은 뜻은 오직 내 몸과 마음인 참 부처가 지니는 도리를 열 가지 이름으로 설하여 보인 것일 뿐이다.
‘이 뜻은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이며’란 (다음과 같다.)문 이 자리에 또한 열 이름이 있는가?답 없다. 말하자면 연기분에 열 이름이 있을 뿐이니, 증분 중에는 열 이름이 없다.문 그렇다면 이 열 부처님의 이름은 증분의 바깥인가?답 증분 가운데 실제 이름이 있다.문 「열 가지 정토의 장(十種淨土章)」에서 이르기를, “분량을 알고자 하면 그 열 부처님에 준하여 곧 알 수 있다.”30)라고 하니 그 뜻이 무엇인가?답 ‘무착’이다, ‘원’이다 등은 -
006_0834_a_01L無住法性也。一切法法。皆是決定無
006_0834_a_02L住之理。有佛無佛。性相常住。約如
006_0834_a_03L是義。而爲佛名也。十如意佛普覆故
006_0834_a_04L者。娑竭羅龍王宮殿之中。有如意
006_0834_a_05L寶王。名出生無盡。此寶珠王。能生海
006_0834_a_06L陸一切珍寶及大海水。大海之中一
006_0834_a_07L切生類。此水爲家。此水爲食。皆得
006_0834_a_08L生長。因於大海。得有大地。若河若
006_0834_a_09L川及諸池井。潤益生長一切草木及
006_0834_a_10L諸1)糓 [392] 菓。養育衆生。如其無此無盡
006_0834_a_11L寶王。則海水乾渴。糓菓焦枯。水陸
006_0834_a_12L衆生。由何能得長養利也。此如意
006_0834_a_13L王。唯因諸佛長養衆生本願所生也。
006_0834_a_14L若無諸佛本願力。則無此寶王。故知
006_0834_a_15L一切衆生所以能得長養利益者。皆
006_0834_a_16L如意佛之蔭焉養焉之德也。如是等
006_0834_a_17L義。唯吾身心眞佛之所有道理。以十
006_0834_a_18L種名說示之耳。此義諸法之眞源者。
006_0834_a_19L問。此處尙有十名耶。答。無也。謂緣起
006_0834_a_20L分有十名耳。第下之二第一一張 訂分
006_0834_a_21L之中無十名也。問。然則此十佛名訂
006_0834_a_22L分外耶。答。訂分之中。有實名也。問。
006_0834_a_23L十種淨土章云。欲知分量。准其十佛。
006_0834_a_24L即可知之。其義云何。答。無*着也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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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4_b_01L다만 이름을 설한 것일 뿐이고, 부처님은 설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름 등은 다만 말의 모습(詮相)을 설한 것일 뿐이다. 국토해는 설할 수 없기 때문에31) ‘준하여 알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모든 법의 참된 근원’은 연기분이고, ‘구경의 오묘한 핵심(宗)’은 증분이다. 이 뜻은 증분과 교분의 둘에 통틀어 열 부처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오직 증분 가운데에만 열 부처님이 있다면, 증분이 교분의 근원이기 때문에 ‘참된 근원’이라고 한 것이다. 또 수업秀業32)의 뜻은 ‘참된 근원’은 지혜(智)이고, ‘오묘한 핵심’은 대상(境)이다. 참 지혜가 보는 대상이라야 비로소 ‘오묘하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니, 그래서 ‘매우 깊고 난해하니’라고 한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의상 화상이 태백산 대로방에 머무를 때 진정 스님과 지통 스님 등을 위하여 설하였다. “수행인이 열 부처님을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안목을 지어야 한다.”지통 스님 등이 여쭈었다. “무엇이 안목입니까?”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화엄경』으로 자신의 안목을 삼는다. 이른바 문장과 문장, 구절과 구절이 모두 열 부처님이니 이 이외에 부처님 보기를 구한다면 세세생생 끝내 보지 못할 것이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이른바 ‘무착불이니 세간에 편안히 머물러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오늘 내 오척 되는 몸을 세간이라고 이름하며, 이 몸이 허공법계에 두루 가득 차서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바른 깨달음’이라고 한다. 세간에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에 열반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바른 깨달음을 이루기 때문에 생사에 대한 집착을 여읜다. 만약 실제를 기준으로 하여 말하면 세 가지 세간이 원만히 밝고 자재하기 때문에 ‘무착불’이라고 한다.
‘원불이니 출생하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백사십원百四十願33)ㆍ십회향원十廻向願34)ㆍ -
006_0834_b_01L也等者。但說名耳。佛則不可說。如
006_0834_b_02L是種種名等。但說詮相耳。土海則不
006_0834_b_03L可說。故云。准可知也。
006_0834_b_04L大記云。諸法之眞源者。緣起分。究
006_0834_b_05L竟之玄宗者。訂分也。此義。訂敎二分。
006_0834_b_06L通有十佛故也。若唯訂分之中有十
006_0834_b_07L佛。則訂分是敎分之源故。云眞源也。
006_0834_b_08L又秀業之意。則眞源則智。玄宗則境
006_0834_b_09L也。眞智所見之境。方得云玄耳。故
006_0834_b_10L云甚深難解也。
006_0834_b_11L古記云。相和尙。住大伯山大蘆房
006_0834_b_12L時。爲眞定智通等說。行人欲見十
006_0834_b_13L佛者。應先作眼目。通等問云。何是
006_0834_b_14L眼目耶。和尙曰。以花嚴經爲自
006_0834_b_15L眼目。所謂文文句句皆是十佛。
006_0834_b_16L自此以外。求觀佛者。生生劫刼。終
006_0834_b_17L不見也。和尙曰。所謂無*着佛安
006_0834_b_18L住世間成正覺故者。今日吾五尺
006_0834_b_19L之身。名爲世間。此身遍滿虛空法
006_0834_b_20L界。無處不至。故曰正覺。安住世
006_0834_b_21L間故。離涅槃之*着。成正覺故。離
006_0834_b_22L生死之*着。若約實而言。三種世
006_0834_b_23L間圓明自在。故曰無*着佛也。願
006_0834_b_24L佛出生故者。百四十願。十廻向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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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4_c_01L초지원初地願35) 및 성기원性起願36) 등이 모두 원불이다. 이 부처님은 머무름이 없음(無住)으로써 몸을 삼기 때문에 한 물건도 부처님의 몸 아님이 없다. 이른바 한 법을 듦에 따라서 일체를 다 거두어 법계에 들어맞아 두루함을 원불이라고 이름한다.
‘업보불이니 믿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22위의 법이 본래 움직이지 아니하며 두렷이 밝게 비추니, 만약 모든 수행인이 능히 이와 같이 믿으면 곧 ‘믿음’이라고 한다. 만약 실제 도리를 들어서 설하면 위로 묘각으로부터 아래로 지옥에 이르기까지 모두 부처님 일(佛事)이다. 그러므로 만약 사람이 이 일을 공경히 믿으면 ‘업보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불持佛이니 따라주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법계의 삼라 모든 법을 비록 다함없다고 하여도 만약 해인삼매로써 도장 찍어 정하면 오직 하나의 해인삼매의 법일 뿐이니, 저가 나를 지니고 내가 저를 지니기 때문에 ‘따라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계로써 부처님을 지니고 부처님으로써 세계를 지니니, 이 이름이 ‘지불’이다.
‘열반불이니 영원히 건너갔기 때문이다’란 생사와 열반이 본래 평등함을 증득하여 보기 때문에 ‘영원히 건너감’이라고 한다. 이른바 생사가 시끄럽게 요동함이 아니고 열반이 평온하게 고요함이 아닌 것이 이 뜻이다.
‘법계불이니 이르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란, 하나의 티끌법계, 소나무법계, 밤나무법계 내지 시방삼세의 허공법계가 모두 부처님의 몸이다. 이른바 진여는 지나간 때에도 없어지지 않으며, 뒤의 때에도 생겨나지 않으며, 현재에도 움직이지 않는다. 여래도 또한 이러하여 과거에도 없어짐이 없으며, 미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현재에도 움직임이 없다. 형태도 없고, 모습도 없어서 허공계와 같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
006_0834_c_01L第下之二第一二張 初地願。及性
006_0834_c_02L起願等。皆願佛也。此佛。以無住爲
006_0834_c_03L身故。無有一物非佛身者。所謂隨
006_0834_c_04L擧一法。盡攝一切。稱周法界。名爲
006_0834_c_05L願佛也。業報佛信故者。二十二位
006_0834_c_06L之法。本來不動。圓明照矚。若諸
006_0834_c_07L行人。能如是信。即云信也。若擧
006_0834_c_08L實道理而說。上自妙覺。下至地獄。
006_0834_c_09L皆是佛事。是以。若人敬信此事。可
006_0834_c_10L噵業報佛也。持佛隨順故者。法界
006_0834_c_11L森羅諸法。雖云無盡。若以海印印
006_0834_c_12L定。則唯一海印定法。彼持我。我持
006_0834_c_13L彼。故云隨順。是故。以世界持佛。
006_0834_c_14L以佛持世界。是名持佛也。涅槃佛
006_0834_c_15L永度故者。訂見生死涅槃本來平
006_0834_c_16L等。故云永度。所謂生死非暄動。
006_0834_c_17L涅槃非寂靜。是此義也。法界佛無
006_0834_c_18L處不至故者。一塵法界。松木法界。
006_0834_c_19L栗木法界。乃至十方三際虛空法
006_0834_c_20L界。摠是佛身。所謂眞如。前際不
006_0834_c_21L滅。後際不生。現在不動。如來亦
006_0834_c_22L爾。過去無滅。未來無生。現今無
006_0834_c_23L動。無形無相。如虛空界。不可量
006_0834_c_24L「糓」作「殺」{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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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5_a_01L백천만 겁 동안 이미 설했고, 지금 설하며, 앞으로 설하여도 끝내 다할 수 없으며, 가장자리가 없기 때문에 ‘법계불’이라고 한다.
‘심불이니 편안히 머무르기 때문이다’란, 마음을 쉬면 곧 부처님이고 마음을 일으키면 부처님이 아니다. 마치 사람이 물로 그릇을 깨끗하게 하나 더러워진 물을 깨끗하게 할 줄은 모르는 것과 같다. 물이 깨끗하면 그림자도 밝고 물이 탁하면 그림자도 어두우니 마음법 또한 그러하여 마음을 쉬면 법계가 두렷이 밝고 마음을 일으키면 법계가 차별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편안하게 머무르면 법계의 모든 법이 내 오척 되는 몸에 나타나는 것이다.
‘삼매불이니 한량없이 집착 없기 때문이다’란, 해인삼매의 법은 들고 들며 잡고 잡음에 머물러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한량없이 집착 없는 삼매불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불이니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란, 법성에 두 가지가 있다. 이른바 큰 법성과 작은 법성이다. 무엇인가? 만약 한 법이 일어나 삼세의 끝까지 다하면 안도 없고 밖도 없으므로 ‘큰 법성’이라고 한다. 한 법의 지위가 일체 가운데 두루하여야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은 ‘작은 법성’이라고 이름한다. 이른바 하나의 기둥이 법계의 끝을 다하도록 다만 기둥인 것은 ‘큰 법성’이라고 이름하고, 이 하나의 기둥 가운데 서까래와 대들보와 기둥 등의 모든 지위가 나타나는 것은 ‘작은 법성’이라고 이름한다.
‘여의불이니 두루 덮기 때문이다’란 (다음과 같다.) 마치 큰 용왕이 큰 보왕寶王을 가지고 있으니 만약 이 보배가 없으면 일체중생이 입고 먹을 것이 없으므로 다섯 곡식과 아홉 곡식과 천 가지 만 가지 모두 이루어지는 것은 오직 이 보왕의 덕인 것처럼, 여의불의 은혜 또한 이와 같다.
정원신역화엄경소37)
『정원경貞元經』38)의 길상운 선지식(吉祥雲知識)39)을 주석하여 이른다.40)문 법문이 한량없는데 왜 첫 선지식이 바로 염불을 가르치는가? -
006_0835_a_01L故。百千萬刼。已說今說當說。終
006_0835_a_02L不可盡。無有邊際。故曰法界佛也。
006_0835_a_03L心佛安住故者。息心即佛。起心非
006_0835_a_04L佛。如人以水淨器。不知能淨濁水
006_0835_a_05L也。水淨影明。水濁影昏。心法亦
006_0835_a_06L尒。第下之二第一三張 息心法界圓
006_0835_a_07L明。起心法界差別。是故。心安住。
006_0835_a_08L則法界諸法現於吾五尺身也。三
006_0835_a_09L昧佛無量無*着故者。海印三昧之
006_0835_a_10L法。擧擧約約。無住*着。故曰無量
006_0835_a_11L無*着三昧佛也。性佛決定故者。
006_0835_a_12L法性有二。所謂大性及與小性。何
006_0835_a_13L者。若一法起。竟三世際。無內無
006_0835_a_14L外。故曰大性。一法之位。遍一切中。
006_0835_a_15L方得成者。是名小性。所謂一柱盡
006_0835_a_16L法界際。但是柱者。名爲大性。此
006_0835_a_17L一柱中。椽栿瓦等。諸位現者。名爲
006_0835_a_18L小性也。如意佛普覆故者。如大龍
006_0835_a_19L王。有大寶王。若無此寶。一切衆生。
006_0835_a_20L無所衣食。故五糓九糓。千種萬種。
006_0835_a_21L並成熟者。唯此1)寶 [393] 王之德也。如
006_0835_a_22L意佛恩。亦如是也。
006_0835_a_23L貞元經吉祥雲知識䟽云。問。法門
006_0835_a_24L無量。何以初友。便敎念佛。答。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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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5_b_01L답 간략히 열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염불삼매가 뭇 수행에 우선하기 때문이다. 둘째, 부처님에 의지해야 비로소 수승한 행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공덕이 높고 쉽게 나아갈 수 있어서 중생들에게 권하기 때문이다. 넷째, 관觀이 깊음과 얕음을 통틀어서 능히 두루 거두기 때문이다. 다섯째, 두터운 장애를 없애서 수승한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여섯째, 사람과 법을 쌍으로 겸하여 쉽게 가호加護하기 때문이다. 일곱째, 십지의 보살이 모두 염불하기 때문이다.
여덟째, 삼보三寶의 길상을 경의 처음에서 설하기 때문이다. 처음 이것은 염불이고, 해운海雲41)은 법을 설하며,42) 묘주妙住43)는 승僧에 의지하는 것44)으로 차례를 삼기 때문이다. 아홉째, 마음에 즉하고 부처님에 즉하여 하나의 경계로 바꾸기 때문이다.45) 열째, 초주初住46)에 부처님을 반연하여 발심해서 즐겁게 공양함을 보이기 위한 까닭이다. 운운.
간략히 세 문이 된다.47) 첫 번째는 염念하는 대상의 차별을 밝힌다. 두 번째는 경문을 모아서 풀이한다. 세 번째는 염念하는 주체로써 모아서 묶는다.이제 처음은 말하자면 십신十身과 삼신三身이니 관觀하는 것이 같지 않은 것이다. 간략히 열 종류가 된다. 운운. 열 종류라고 말한 것은 (다음과 같다.)첫째, 만약 이 관觀을 지음에 부처님은 법으로 몸을 삼아 청정하기가 허공과 같고 염念함이 없는 염念이라면 곧 진여를 염念하는 것이니, 이것은 법신을 염念하는 것이다.둘째, 화장세계해이니 법계에 차별이 없어서 진실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국토에 의지하지 않으니, 이것은 성토性土를 염念하는 것이다.
셋째, 열 연화장의 티끌 수의 모습이니, 이들은 모두 보신報身의 모습을 염念하는 것이다.넷째, 다함없는 덕이 있어서 하나하나 생각하기 어려우니, 보신 안의 덕을 염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의 경에서 이르기를, “일체의 위의 가운데 항상 부처님의 공덕을 염念하여 밤낮으로 잠깐도 끊어짐이 없으니 이와 같은 업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48)라고 한 것이다.다섯째, 화장세계의 한량없는 보배장엄의 양이 법계에 두루함을 관觀하는 것이니, 이것은 보토報土를 염念하는 것이다.
여섯째, 혹은 부처님의 모습이 삼십이상을 갖춘 것을 혹은 총摠으로 혹은 별別로, 혹은 역으로, 혹은 순으로, (혹은) 1장 6척(丈六)으로, (혹은) 천 척千尺으로49) 관觀하는 것이니, -
006_0835_b_01L有十義。一念佛三昧衆行先故。二
006_0835_b_02L依佛方能成勝行故。三功高易就
006_0835_b_03L以2)㢡 [394] [218] 物故。四觀通深淺能遍攝故。
006_0835_b_04L五消滅重障爲勝緣故。六雙兼人
006_0835_b_05L法易加護故。七十 [219] 地菩薩皆念佛
006_0835_b_06L故。八三寶吉祥經初說故。初此念
006_0835_b_07L佛。海雲說法。妙住依僧。爲次3)弟 [395]
006_0835_b_08L故。九即心即佛易一境故。十爲表
006_0835_b_09L初住緣佛發心樂供養故。云云。 略
006_0835_b_10L爲三門。第下之二第一四張 一明所
006_0835_b_11L念差別。二會釋經文。三以能念
006_0835_b_12L4) [396] [220] 束。今初謂十身三身。爲觀不
006_0835_b_13L同。略爲十種。云云。 言十種者。一若
006_0835_b_14L作是觀。佛以法爲身。淸淨如虛空。
006_0835_b_15L無念念者。即念眞如。是念法身。
006_0835_b_16L二花藏世界海。法界無差別。依眞
006_0835_b_17L而住。不依國土。是念性土。三十
006_0835_b_18L蓮花藏塵數相。此等皆是念報身
006_0835_b_19L相。四有無盡德。一一難思。念報
006_0835_b_20L內德。故上經云。一切威儀中。常
006_0835_b_21L念佛功德。晝夜無暫斷。如是業
006_0835_b_22L應作。五觀花藏刹無量寶嚴量
006_0835_b_23L周法界。是念報土。六或觀佛相
006_0835_b_24L具三十二。若摠若別。若逆若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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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5_c_01L이들은 모두 화신의 모습을 염念하는 것이다. 일곱째, 십력十力과 사무외四無畏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이니, 이들은 모두 화신의 모습을 염念하는 것이다. 여덟째, 다른 곳의 정토의 물과 새와 나무숲이니, 이들은 모두 화신의 의보依報를 염하는 것이다. 아홉째, 앞의 둘은 체성(性)이고 뒤의 여섯은 모습(相)이니 모습 밖에 본성이 없고 본성 밖에 모습이 없어서 서로 사무침이 참 부처님이고 참 국토이다. 이것이 아홉째, 체성과 모습이 걸림 없음을 염念하는 것이다.
열째, 체성(性)으로써 모습(相)을 융섭하고 모습이 체성을 따라 융섭되어 앞의 아홉 문이 합해져 하나의 도리가 되게 하기 때문에, 덕과 덕이 다함없고 모습과 모습이 끝이 없으며 티끌과 티끌이 국토에 가득 차니 마치 인드라그물과 같다. 이것이 열째, 거듭거듭 융섭함을 염念하는 것이다. 뒤의 두 문을 얻어야 앞이 모두 진실이니, 경에서 비록 달리 설하나 뜻은 반드시 모두 융섭된다. 운운.
세 번째, 염念하는 주체를 모아 묶음에 간략히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 반연하는 경계를 바로 관觀하는 염불문이다. 혹 법신, 혹 응신과 혹 의보依報, 혹 정보正報가 모두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름만 부르는 것(稱名)은 ‘입에 속함(屬口)’이니, 참된 염念이 아니기 때문에 생략하여 말하지 않는다.둘째, 경계를 거두어 오직 마음뿐인 염불문이다. “이 마음이 부처이고 마음이 부처를 지으니 모든 부처님의 바르고 두루한 지혜의 바다가 마음의 생각(心想)으로부터 생겨난다.”50) 하물며 “마음과 부처와 중생의 셋이 차별이 없다.”51)라는 것이겠는가?
셋째, 마음과 경계가 함께 없는 염불문이다.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은 곧 마음이 아니다. 부처가 곧 마음이니 부처 또한 부처가 아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어서 일체를 멀리 여읜다. 그러므로 염念하는 바가 없어야 비로소 참된 염念이 된다.넷째, 마음과 경계가 걸림 없는 염불문이다. 현상(事)과 이법(理)을 함께 비추어 있음과 없음에 걸림이 없다. 평등한 참된 문이 고요하고 고요하니 무엇이 부처이고 무엇이 마음인가? 차별한 현상과 이법이 밝고 밝으니 -
006_0835_c_01L丈六千尺。此等皆是念化身相。七
006_0835_c_02L十力無畏十八不共。此等皆是念
006_0835_c_03L化身相。八餘方淨土水鳥樹林。此
006_0835_c_04L等皆是念化身依。九前二是性。後
006_0835_c_05L六是相。相外無性。性外無相。交
006_0835_c_06L徹眞佛眞土。是念*弟九性相無㝵。
006_0835_c_07L十以性融相。相隨性融。令前九門
006_0835_c_08L合爲一揆。故德德無盡。相相無窮。
006_0835_c_09L塵塵刹滿。猶如帝網。是*弟十念
006_0835_c_10L重重融攝。得後二門。前皆眞實。
006_0835_c_11L經雖別說。義必該融。云云。*弟三能
006_0835_c_12L念*束。略有五種。一緣境正觀
006_0835_c_13L念佛門。若眞若應。若依若正。皆是
006_0835_c_14L境故。稱名屬口。非眞念故。略而
006_0835_c_15L不言。第下之二第一五張 二攝境唯
006_0835_c_16L心念佛門。是心是佛。是心作佛。
006_0835_c_17L諸佛正遍知海。從心想生。況心佛
006_0835_c_18L衆生三無差別。三心境俱泯念佛
006_0835_c_19L門。心即是佛。心即非心。佛即是
006_0835_c_20L心。佛亦非佛。非心非佛。遠離一
006_0835_c_21L切。故無所念。方爲眞念。四心境
006_0835_c_22L無㝵念佛門。雙照事理。存亡無㝵。
006_0835_c_23L等眞門之寂寂。何佛何心。鑒事
006_0835_c_24L「寶」作「室} {乙}。「㢡」作「將寸」{乙}。「弟」
006_0835_c_25L作「第」{乙}次同。「」作「收」{乙}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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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6_a_01L언제나 마음이고 언제나 부처이다. 쌍으로 잊고 바르게 들어가면 고요함과 비춤이 쌍으로 흐른다.
다섯째, 거듭거듭 다함없는 염불문이다. 이법이 이미 다함없으니 이법으로써 현상을 융섭하면 현상 또한 다함이 없다. 그러므로 한 문을 따라서 일체의 문을 거둔다. 이 다섯 문을 융섭하여 일치되게 하니 곧 이 중에 염念하는 주체인 마음이 앞의 열 부처님의 경계와 합해져서 합함도 아니고 흩어짐도 아닌 것으로 거듭거듭 생각하기 어려운 경계에 좇아 들어간다.
염불의 한 문을 모든 가르침에서 찬탄하는 바이니 이치가 깊고 멀어서 세상에서 많이 함께 행하기 때문에 다시 간략히 서술하니 번쇄함을 마다하지 않고 설한다. 운운.
보현보살 선지식52)을 주석하여 이른다.53) 첫 번째, 모든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이다. 문장의 세 단락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름을 근거로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공경함을 말미암아 몸과 입을 움직여서 두루 예경하기 때문에 아만의 장애를 제거하고 공경하여 믿음의 선善을 일으킨다. 늑나마제 삼장(勒那三藏)54)이 ‘칠종례七種禮’55)를 설했는데 이제 덧붙여서 열 가지로 한다.
말하자면 첫째는 아만례我慢禮이다. 방아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듯이 공경하는 마음이 없다. 둘째는 창화례唱和禮이다. 높은 소리로 시끄럽고 잡되어 말만 어지럽다. 이 둘은 예의가 아니다. 셋째는 공경례恭敬禮이다. 오체(五輪)를 땅에 대고 (부처님의) 발을 받들기를 정성스럽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무상례無相禮이다. 깊이 법성에 들어가 주체와 대상의 모습을 여의는 것이다. 다섯째는 작용을 일으키는 예(起用禮)이다. 비록 주체와 대상이 없지만 널리 몸과 마음을 움직임이 그림자와 같아서 널리 두루 예경할 수 없는 것에 예경하는 것이다.
여섯째는 안으로 관하는 예(內觀禮)이다. 다만 몸 안의 법신인 참 부처님만을 예경하고 밖을 향해서 구하지 않는 것이다. 일곱째는 실상의 예(實相禮)이다. 혹 안과 혹 밖이 동일한 실상인 것이다. 여덟째는 대비의 예(大悲禮)이다. 하나하나의 예를 따라서 널리 중생을 대신하는 것이다. 아홉째는 모두 거두는 예(摠攝禮)이다. 앞의 여섯 문56)을 거두어 하나의 관觀으로 삼는 것이다. 열째는 다함없는 예(無盡禮)이다. 인드라그물의 경계에 들어가서 혹 부처님과 혹 예경이 거듭거듭 다함없는 것이다. -
006_0836_a_01L理之明明。常心常佛。雙亡正入。
006_0836_a_02L寂照雙流。五重重無盡念佛門。理
006_0836_a_03L旣無盡。以理融事。事亦無盡。故
006_0836_a_04L隨一門。攝一切門。融斯五門。以
006_0836_a_05L爲一致。即是此中。能念之心。與前 [221]
006_0836_a_06L十佛境合。非合非散。渉入重重
006_0836_a_07L難思境也。念佛一門。諸敎攸 [222] 讃。
006_0836_a_08L理致深遠。世多共行。故復略叙。無
006_0836_a_09L猒繁說。云云。 普賢知識䟽云。1)弟
006_0836_a_10L一禮敬諸佛。文三段者。 *弟一牒名。
006_0836_a_11L由心恭敬。運於身口而遍禮故。除
006_0836_a_12L我慢障。起敬信善。勒那三藏。說七
006_0836_a_13L種禮。今加爲十。謂一我慢禮。如
006_0836_a_14L碓上下。無恭敬心。二唱和禮。高
006_0836_a_15L聲喧雜。辭句渾亂。此二非儀。三
006_0836_a_16L恭敬禮。五輪2)着地。捧足殷重。四
006_0836_a_17L無相禮。深入法性。離能所相。五
006_0836_a_18L起用禮。雖無能所。普運身心。如
006_0836_a_19L影普遍禮不可禮。六內觀禮。但
006_0836_a_20L禮身內法身眞佛。不向外求。七
006_0836_a_21L實相禮。第下之二第一六張 若內若
006_0836_a_22L外。同一實相。八大悲禮。隨一一
006_0836_a_23L禮。普代衆生。九摠攝禮。攝前六
006_0836_a_24L門。以爲一觀。十無盡禮。入帝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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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6_b_01L추혈기
『추혈문답』에 이른다.57)문 자신의 미래불이 도리어 자신의 현재를 교화한다는 것은 어느 글로써 아는가?답 『영락경』 제8지 보살에 이르기를, “자기 몸의 미래의 과보인 모든 부처님이 정수리를 만지며 법을 설하시는 것을 스스로 본다.”58)라고 한 까닭에 성인의 말씀임을 밝게 알 수 있다. 또 이미 여러 경에 이르기를,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예배하고 공경하기 때문에 모든 죄업이 없어진다.”라고 하니 미래의 모든 부처님이란 누구이겠는가?
문 이것은 남이 이미 이룬 부처님을 예배하는 뜻이니 어떻게 자기의 아직 이루지 않은 부처님이 되는가?답 남의 부처님을 예배하는 뜻이 없지는 않으나 멀고 성글다. 까닭은 무릇 모든 부처님이 중생을 위하여 부처님의 덕을 설하시니, 뜻이 중생 스스로 또한 그 과보를 얻게 하고자 함이기 때문에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자신의 미래에 얻을 과덕을 바라보아 그것을 얻고자 하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수행하는 것이고, 남의 부처님의 과보를 얻기 위해서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바로 내가 발심하여 수행하게 하는 부처님은 다만 나의 미래의 과보이며 이미 이룬 부처님은 남의 부처님이 아니다. 이 뜻은 의심하거나 괴이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또 남이 이미 이룬 부처님이 곧 나의 미래의 과보인 부처님이다. 무슨 까닭인가? 남이 부처님을 이룰 때 곧 삼세 부처님의 평등한 과보를 얻는다. 또 나의 미래의 과보인 부처님은 곧 남이 지금 이룬 부처님이다. 무슨 까닭인가? 내가 미래의 과보인 부처님을 얻을 때 곧 삼세 부처님의 평등한 법을 얻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반복하여 다시 서로 평등하니 평등하여 차별 없는 과덕이다.59) 또 이 나의 부처님이 일체 법계의 유정과 무정 가운데 완전하고 완전히 계시니, 한 사물도 나의 체體로서의 부처님 아님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체불自體佛을 예배할 수 있다면 예배할 바 아닌 사물이 없다. -
006_0836_b_01L境。若佛若禮。重重無盡。
006_0836_b_02L錐穴問答云。問。自未來佛還化自
006_0836_b_03L現在者。以何文知乎。答。纓絡經
006_0836_b_04L*弟八地菩薩云。自見己身當果
006_0836_b_05L諸佛摩頂說法故。則聖說炳然可
006_0836_b_06L知。又旣諸經云。三世諸佛拜敬故。
006_0836_b_07L諸罪業滅。未來諸佛者何乎。問。此
006_0836_b_08L他已成佛拜義。何爲自未成佛乎。
006_0836_b_09L答。拜他佛之義。非無而遠疎。 [223] 所以
006_0836_b_10L者。凡諸佛爲衆生說佛德。意爲欲 [224]
006_0836_b_11L衆生自亦得彼果。故令修行。是
006_0836_b_12L故。衆生望 [225] 自當來所得之果德。爲
006_0836_b_13L欲得彼。不惜身命修行。不爲得他
006_0836_b_14L佛果故修行。是故。正令吾發心修
006_0836_b_15L行佛。但吾當果。已成佛非他佛也。
006_0836_b_16L此義不疑恠也。又他已成佛即是
006_0836_b_17L自當果佛。所以者何。他成佛時。
006_0836_b_18L即得三世佛平等果。又吾當果佛
006_0836_b_19L即是他今成佛。所以者何。吾得當
006_0836_b_20L果佛時。即得三世佛平等法故。如
006_0836_b_21L是轉展。更互平等。平等無差別果
006_0836_b_22L德。 [226] 又此吾佛。於一切法界有情無
006_0836_b_23L情中。全全即作在。 [227] 無一物非吾體
006_0836_b_24L佛故。若能拜自體佛者。無物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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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6_c_01L이것이 매우 큰 핵심이니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자체불관론
『자체불관론自體佛觀論』60)에 이른다.문 무엇이 자성계自性界이며, 무엇이 자체불自體佛인가?답 머무름 없음(無住)이 자성계이며, 실상實相이 자체불이다.문 이 자체불은 어떻게 관觀하는가?게송으로 답하여 이른다.
모든 연緣의 근본은 나이며,
일체법의 근원은 마음이며,
말(語言)은 매우 중요한 근본이니,
진실한 선지식이다.61)
문 이 뜻은 무엇인가?답 ‘일체법의 근원은 마음이다’라는 것은 자체불이다. ‘매우 중요한 근본’은 자체의 원만한 원인이다. ‘진실한 선지식’은 자체의 원만한 결과이다. 세 뜻을 갖춘 까닭에 ‘나(我)’이다. 이것이 곧 자체불이다.문 이 불과佛果는 닦음이 있는가, 닦지 않는가?답 닦음과 닦지 않음을 가려내지 않으며 유정과 무정을 택하지 않으니, 삼세간에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문 이 부처님은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하시는가?답 큰 허공 안에 모든 법이 큰 허공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허공이 허공을 교화하는 것과 같으니, 이 이름이 자체불의 교화이다.어느 본에는 이르기를, “자체불 안에 자체불 아님이 없는 것이, 이 이름이 자체불의 교화일 뿐이다.”라고 한다.
문 알지 못하겠다. 무엇이 ‘말(語言)’인가?답 너의 ‘알지 못하겠다’는 말(語言)과 같으니 이 말이 매우 중요하다.문 이 말은 무엇인가?답 연기제緣起際의 말과 같다.문 무엇이 연기제인가?답 나의 마음은 움직이고 큰 허공은 움직이지 않으니, 움직임과 움직이지 않음을 여의는 것이 연기제가 된다.
문 연기제를 기준으로 하면 그 법은 항상 그러하니, 처음 닦는 사람이 어떻게 그 마음에서 노니는가?답 법을 기준으로 하여 논하면 닦음과 닦지 않음을 여의나, 시험삼아 나의 마음과 나의 몸에 처음 나아가 어느 본에는 ‘처음 일으켜’라고 한다. 서로 말하게 함을 밝힌다. -
006_0836_c_01L所拜。此甚大要。第下之二第一七張
006_0836_c_02L常可思之。
006_0836_c_03L自體佛觀論云。問。何自性界。何
006_0836_c_04L自體佛耶。答。無住自性界。實相
006_0836_c_05L自體佛。問。此自體佛。何觀耶。以
006_0836_c_06L偈答曰。諸緣根本我。一切法源心。
006_0836_c_07L語言大要宗。眞實善知識。問。此義
006_0836_c_08L云何。答。一切法源心。是自體佛。
006_0836_c_09L大要宗。是自體圓因。眞實善知識。
006_0836_c_10L是自體滿果。具三義故我也。此即
006_0836_c_11L自體佛也。問。此佛果。有修耶。不修
006_0836_c_12L耶。答。不簡修不修。不擇情非情。
006_0836_c_13L三世間不動故。問。此佛。化度衆生
006_0836_c_14L耶。答。大虛之內。諸法無不大虛。
006_0836_c_15L是故。如虛空化虛空。是名自體佛
006_0836_c_16L化也。一本云。自體佛內。無不自
體佛者。是名自體佛化耳。 問。不知。
006_0836_c_17L云何語言乎。答。如汝不知語言。此
006_0836_c_18L言甚大也。問。此言云何。答。如緣起
006_0836_c_19L際言也。問。何緣起際耶。答。我心是
006_0836_c_20L動。大虛不動。離動不動。爲緣起
006_0836_c_21L際也。問。約緣起際。其法常然。初
006_0836_c_22L修之人。何遊其心耶。答。約法論。
006_0836_c_23L離修不修也。試明初趣。一本云
初起。 我
006_0836_c_24L「弟」作「第」{乙}。「着」作「著」{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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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7_a_01L말하자면 마음을 가지고 몸을 찾고 몸을 가지고 마음을 찾으니, 마음이 몸에 두루하고 몸이 마음에 두루한다. 그러니 이름하여 ‘말(語言)’이라고 한다.문 서로 두루하기 때문에 다시 말하는 바가 없으니 무엇을 ‘말’이라고 하는가?답 마음을 말할 때에는 말 이외에 말하는 바가 없고, 몸을 말할 때에는 말 이외에 말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말이 없는 말이고, 들음이 없는 들음이다.
문 이것은 다만 나의 마음과 나의 몸인데, 어째서 ‘일체법의 근원’이라고 하는가?답 나의 마음의 끝을 구하는 것은 법계의 끝을 다하는 것이니, 내 몸의 사대四大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문 만약 이와 같다면 오직 나의 몸과 마음인데, 어째서 ‘진실한 선지식’이라고 하는가?답 법계의 모든 법은 나의 몸과 마음 아닌 것이 없으니, 모두 수순함을 이름하여 ‘선지식’이라고 한다.문 만약 그렇다면 미혹과 깨달음의 다름이 없는데, 무엇을 ‘부처’라고 이름하는가?답 둘이 있기 때문에 중생이고 둘이 없기 때문에 곧 자체불이다. 이와 같이 관觀하면 바른 관觀이 된다.
대법계의 연기란, ‘모든 연緣의 근본인 나’는 불보佛寶이고, ‘일체법의 근원인 마음’은 승보僧寶이며, ‘말(語言)이 매우 중요한 근본’인 것은 법보法寶이니, ‘진실한 선지식’이다. 이 대법계 연기의 뜻을 마음에 얻은 사람은 비록 육도六道와 사생四生에 가더라도 결정코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를 자체의 삼보三寶라고 하니, 말하자면 신업身業이 불보이고 구업口業이 법보이며 의업意業이 승보이다. ‘불佛’이란 말하자면 연緣이 합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이고, ‘법’이란 일체법이 솟아나오기 때문이며, ‘승僧’이란 일체법 가운데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 부처님을 섬기는 사람은 삼업의 가사를 입으니, 신업은 오조五條이고 구업은 칠조七條이며 의업은 구조九條이다.62) 이러한 세 가사를 모든 곳에서 입으면, -
006_0837_a_01L心及我身令相語言也。謂將心而
006_0837_a_02L尋身。將身而尋心。心遍於身。身
006_0837_a_03L遍於心。然名爲語言也。問。相遍故。
006_0837_a_04L更無所語。何曰語言耶。答。心言時。
006_0837_a_05L言以外無所語。身言時。言以外
006_0837_a_06L無所語。是故。無言言無聞聞也。問。
006_0837_a_07L此但我心我身。何云一切法源耶。
006_0837_a_08L答。求我心邊際。盡法界際。我身
006_0837_a_09L四大。第下之二第一八張 亦復如是。
006_0837_a_10L問。若如是者。唯我身心。何云眞實
006_0837_a_11L善知識耶。答。法界諸法。無不我身
006_0837_a_12L心。皆順名爲善知識也。問。若尒。則
006_0837_a_13L無迷悟別。何名佛耶。答。有二故衆
006_0837_a_14L生。無二故即自體佛。如是觀者。
006_0837_a_15L爲正觀也。大法界緣起者。諸緣根
006_0837_a_16L本我佛寶。一切法源心僧寶。語言
006_0837_a_17L大要宗法寶。眞實善知識。此大法
006_0837_a_18L界緣起義心得人。雖往六道四生。
006_0837_a_19L決定不疑畏。此云自體三寶。謂身
006_0837_a_20L業佛寶。口業法寶。意業僧寶。佛
006_0837_a_21L者謂緣合成故。法者一切法湧
006_0837_a_22L出故。僧者一切法中無障㝵故。
006_0837_a_23L此佛仕人三業袈1)娑 [397] 着。身業五條。
006_0837_a_24L口業七條。意業九條。如是三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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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7_b_01L이 부처님을 모시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 끝까지 참된 법계의 법을 볼 것이며, 다시 보고 보는 곳곳에 세 종류 세간을 갖추어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세간이 옳지 않음이 없다.2. 구래단舊來斷‘얽매여 있는 유정’부터 ‘뜻에 따라 풀이할 수 있다’까지63)
대기『대기』에 이른다. ‘얽매여 있는 유정은 아직 번뇌를 끊지 못했고 아직 복덕과 지혜를 이루지 못했는데 무슨 뜻으로 예부터 부처를 이루었다고 하는가?’라는 것은, 이 물음을 일으킨 뜻은 (다음과 같다.) 만약 열 부처님을 기준으로 하면 법계의 모든 법이 부처님 아님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 우리들은 눈이 먼 범부이니 어떻게 곧 열 부처님일 수 있는가? 이와 같이 힐난한 것이다. 답의 뜻은 망정을 뛰어넘는 법은 망정을 돌이키면 바로 이것인 것이다. 만약 망정을 돌이켜 보면 법계가 두렷이 밝아서 일체중생이 번뇌를 끊어 다하고 복덕과 지혜를 이루어 마치니 어찌 부처님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답한 것이다. 무릇 이와 같이 묻고 답하는 뜻은 저 삼승의 장애를 끊어서 부처를 이루는 뜻에 기대어, 일승의 예부터 부처를 이룸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문 본래 번뇌를 끊은 것인가, 본래 번뇌가 움직이지 않음을 아는 것인가?답 본래 끊어진 것임을 알 뿐이다. 꿈을 깬 자는 꿈꾸는 사람이 보는 바 오척의 귀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문 그렇다면 인용된 경 가운데 “번뇌의 법 가운데 한 법도 줄어드는 것을 보지 못한다.”라는 뜻에 어긋나는 것인가?답 본래 없으므로 어떻게 ‘줄어드는 것’을 보겠는가?
진수기『진기』에 이른다. ‘처음도 아니고 중간도 나중도 아니니’란 (다음과 같다.) 세 찰나로 나누어서 끊을 바 장애를 구함이니, 저 첫 찰나에 지혜에 의거하여 장애를 구하면 지혜의 체體 아님이 없어서 (장애를) 끊을 수가 없다. 가운데와 뒤의 (찰나도) 또한 그러하기 때문이다.‘앞과 가운데와 뒤에서 취하기 때문이다’란, 끊지 아니하되 끊기 때문이다. ‘허공과 같다. 이 같이 끊으므로’란, -
006_0837_b_01L*娑。*着一切處。此佛仕人。不久窮
006_0837_b_02L實法界法見也。復見見處處。三種
006_0837_b_03L世間具得也。故三種世間無不是
006_0837_b_04L也。
006_0837_b_05L具縛有情 至隨義消息。大記云。具縛
006_0837_b_06L有情。未斷煩惱。未成福智。以何義
006_0837_b_07L故。舊來成佛耶者。起此問意。若約
006_0837_b_08L十佛。則法界諸法。無非是佛。然此
006_0837_b_09L今日。我等盲冥凡夫。何能即是十佛
006_0837_b_10L耶。如是難也。答意。則超情之法。反
006_0837_b_11L情即是。若反情見。法界圓明。一切衆
006_0837_b_12L生。煩惱斷盡。福智成竟。豈非佛耶。
006_0837_b_13L如是答也。凡如是問答意者。寄彼三
006_0837_b_14L乘斷障成佛之義。 第下之二第一九張
006_0837_b_15L欲現一乘舊來成佛也。問。爲是本來
006_0837_b_16L斷煩惱耶。爲知本來煩惱不動耶。答。
006_0837_b_17L知本來斷耳。以覺者不見夢人所
006_0837_b_18L見五尺鬼故。問。然則。違於所引經中。
006_0837_b_19L煩惱法中不見一法減之義耶。答。本
006_0837_b_20L來無故。云何見減。
006_0837_b_21L眞記云。非初非中後者。分三刹那。求
006_0837_b_22L所斷障。如初刹那。擧智求障。無非智
006_0837_b_23L體。不可得斷。中後亦爾故也。前中
006_0837_b_24L後取故者。不斷而斷故也。如虛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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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7_c_01L만약 지위에 기대어 말하면 허공은 사물이 없는 뜻이기 때문에 끊는 주체와 대상이 없는 것이 허공과 같이 끊음이 된다. 일승을 기준으로 하면 허공은 곁이 없는 뜻이기 때문에 지혜와 장애의 체體가 서로 곁이 없다. 곁이 없음의 뜻으로 허공과 같이 이와 같이 끊음이 될 뿐이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마치 꿈을 깸(覺)과 꿈을 꿈(夢), 잠을 잠(睡)과 잠을 깸(悟)이 같지 않은 것과 같다’란 (다음과 같다.) 두 사람이 있어서 함께 한 침상에 있음에, 한 사람은 처음부터 잠을 자지 않은 까닭에 세 때에 꿈을 구해도 첫 때에 얻지 못하고 중간과 뒤에도 또한 그러하였으며, 그 다른 한 사람은 밤이 끝나도록 잔 까닭에 세 때에 항상 꿈을 꾼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승의 장애를 끊고 부처를 이룸을 기준으로 하면, 온전히 남을 자신으로 삼아서 항상 깨어 있는 까닭에 처음부터 잠을 자지 않으며, 온전히 자기를 남으로 삼아서 항상 꿈을 꾸는 까닭에 언제나 항상 깨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삼승의 장애를 끊음은 아직 끊지 않음을 끊는 곳에는 이르지 못하고, 일승은 아직 끊지 않음을 끊는 곳에 이른다. 삼승의 부처님이 끊음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상속 이외의 중생의 장애이고, 일승의 부처님이 끊는 곳에 이름은 자신이 증득한 중생바다(衆生海)의 장애이다. 일체중생이 오늘 발심하여 장애를 끊고 수행하여 증득함은 모든 부처님의 다함없는 문의 덕德이다.
‘그 참된 도리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으며’란 (다음과 같다.) 중생과 부처님이 이미 하나의 법성의 침상에 함께 있으니, 비록 중생이라고 하여도 모자라거나 남는 것이 없고, 비록 모든 부처님이라고 하여도 보태거나 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법과 이법의 상즉’ 등이란, 앞의 세 구는 즉문이고 뒤의 한 구는 중문이다.문 이법과 이법의 상즉은 (이법과 이법) 두 공함이 함께하는가?답 함께하지 않는다.문 만약 그렇다면 상즉하지 않는가? -
006_0837_c_01L如是斷者。若寄位云。則虛空者。無物
006_0837_c_02L義故。無能所斷。爲如虛空斷也。約
006_0837_c_03L一乘則。虛空者。無側義故。智與障體。
006_0837_c_04L互無側也。以無側義。爲如虛空如
006_0837_c_05L是斷耳。
006_0837_c_06L法記云。猶如覺夢2) [398] 悟不同者。如有
006_0837_c_07L二人。共在一床。一人初初不* 故。
006_0837_c_08L三時求夢。初時不得。中後亦爾。其一
006_0837_c_09L人則竟夜* 故。三時恒夢。如是約
006_0837_c_10L一乘斷障成佛。則全他爲自而恒覺
006_0837_c_11L故。初初不。* 全自爲他而恒夢故。
006_0837_c_12L常常不悟。是故三乘斷障者。不及斷
006_0837_c_13L於未斷之處。一乘及斷未斷之處。三
006_0837_c_14L乘之佛不及斷者。自相續外。衆生之
006_0837_c_15L障。一乘之佛及斷之處。是自所訂衆
006_0837_c_16L生海之障也。一切衆生。今日發心。
006_0837_c_17L斷障修訂。即是諸佛不盡門德也。其
006_0837_c_18L實道理。諸法實相。不增不減者。生佛
006_0837_c_19L旣共一法性床。第下之二第二○張 雖
006_0837_c_20L云衆生。無所3)欠 [399] 剩。雖云諸佛。無所
006_0837_c_21L添除故也。理理相即等者。前三句即
006_0837_c_22L門。後一句中門也。問。理理相即者。二
006_0837_c_23L空並耶。答。不並也。問。若爾。不相即耶。
006_0837_c_24L「娑」作「裟」{乙}次同。「」作「睡」{乙}次同。
006_0837_c_25L「欠」作「缺」{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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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8_a_01L답 상즉하기 때문에 함께하지 않는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열 부처님과 보현보살의 법계의 집’이란, 곧 위의 법성의 집(法性家)과 법계다라니의 집 등이니, 바로 밖으로 교화함을 기준으로 하여 안으로 증득함을 통틀은 것이다. ‘그 나머지 거스름(逆)과 따름(順),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룸 등’이란, 거스름은 오열五熱과 아중비(衆鞞)64)이고, 따름은 십바라밀의 바른 수행 등이다. 이것으로써 으뜸으로 삼아 일체 다함없는 법을 통틀어 취하기 때문에 ‘예에 준하여 서로 거두면 뜻에 따라 풀이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3. 수십전법數十錢法‘연기를 관觀하고자 한다면’부터 ‘까닭이 전혀 다르다’까지65)
대기『대기』에 이른다. ‘연기를 관하고자 한다면, 내지 열 개의 동전을 헤아린다’란 (다음과 같다.) 개종開宗이 이르기를, “열 개의 동전을 세는 법(數十錢法)은 집착의 병을 다스리는 제일의 약이고 걸림 없는 덕을 이루는 가장 수승한 문이다.”66)라고 하였다. 풀이하면 혹 이 동전 세는 법을 체달하는 자는 날마다 쓰는 모든 경계에서 듣고 보는 바에 따라서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니, 하나하나의 털구멍과 하나하나의 티끌에서 일체의 부처님을 보고 일체의 법을 듣는다.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며 다리를 올리고 다리를 내림의 무릇 베풀어 행하는 바가 구경 아님이 없어서 부처님의 일을 만족시킨다. 그러므로 ‘병을 다스리는 제일의 약이고 덕을 이루는 가장 수승한 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운화 존자가 이르기를, “하나의 누각이 있으니 안의 장엄은 일승이고 밖의 장엄은 삼승이다. 여기에 문이 있으니 ‘깨달음의 문’이라고 이름한다. 보리수를 향해 있으나 모든 중생의 망상과 번뇌(纏縛)가 이 문을 막아서, 이러함을 말미암은 까닭에 일승의 진귀한 보배장엄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천친보살이 육상의 열쇠로 이 문을 열어 보였으나 천축 사람들이 육상을 이해하지 못한 까닭에 그 익숙한 실담장의 총지법으로 가르쳐서 보인 것이다. 이상.”67)라고 하였다. -
006_0838_a_01L答。相即故。不並也。
006_0838_a_02L大記云。十佛普賢法界宅者。即上法
006_0838_a_03L性家及法界陁羅尼家等。正約外化
006_0838_a_04L而通內訂也。其餘逆順主伴相成等
006_0838_a_05L者。逆則五熱衆鞞。順則十度正行等
006_0838_a_06L也。以此爲首。通取一切無盡之法。
006_0838_a_07L故云。准例相攝。隨義消息。
006_0838_a_08L欲觀緣起至逗留全別。大記云。若欲
006_0838_a_09L觀緣起乃至數十錢者。開宗云。數
006_0838_a_10L十錢法。治執1)着病之2)弟一藥。成無
006_0838_a_11L㝵德之最勝門也。解云。若得體達此
006_0838_a_12L數錢之法者。於諸境界日用之中。隨
006_0838_a_13L所聞見。不取不*着。一一毛孔一一塵
006_0838_a_14L中。見一切佛。聞一切法。起心動念。
006_0838_a_15L擧足下足。凡所施爲。無非究竟。滿足
006_0838_a_16L佛事。故云。治病之*弟一藥。成德之最
006_0838_a_17L勝門也。
006_0838_a_18L古記云。雲華尊者曰。有一樓觀。
006_0838_a_19L內莊一乘。外嚴三乘。此中有門。
006_0838_a_20L名曰覺門。向菩提樹。而諸衆生
006_0838_a_21L妄想纒縛。以障此門。由如是故。
006_0838_a_22L不見一乘珍寶莊嚴。是故。天親菩
006_0838_a_23L薩。以六相鑰匙。示開此門。而天
006_0838_a_24L竺人未解六相故。以其所習悉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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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8_b_01L동쪽 땅의 사람들은 또 그 실담장의 총지법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런 까닭에 운화 존자가 그 익숙한 동전 세는 법으로 가리켜 보인 것이다.
문 이 실담장과 동전 세는 비유는 성스러운 가르침 중에 있는가, 없는가?답 있다. 말하자면 실담의 비유는 「십지품」에서 설하고,68) 수를 세는 법의 비유는 제4회의 정진림보살의 게송에 이르기를, “비유하면 수를 세는 법과 같으니 하나에서 늘어나 무량에 이른다. 수를 세는 법은 체성이 없으니 지혜인 까닭에 차별하다.”69)라고 한다.
문 이 동전 가운데 무엇이 변계이며 무엇이 인연인가?답 이와 같은 열 개의 동전이 첫 번째, 두 번째 내지 열 번째가 모두 자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를 취하면 하나가 없고 둘을 취하면 둘이 없는 것 등은 변계의 동전이다. 인연의 동전은 이 하나의 동전의 지위가 중문과 즉문을 갖추었기 때문에, 만약 나머지 아홉 개가 없으면 곧 이 하나의 동전도 또한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하나의 동전이 곧 다함없는 하나이다.
문 이 열 개 동전의 비유로써 어린이처럼 몽매한 이(童蒙)를 처음 인도하는 방편은 무엇인가?답 의상 화상이 어린이처럼 몽매한 이에게 가르쳐 일렀다. “너는 먼저 열 개의 동전을 세로로 나열해 보아라.” 그 사람이 지시에 따라서 세로로 나열하니,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이 열 개의 동전이 자성의 열인가, 연기로서 자성이 없는 열인가?” 그 사람이 아뢰었다. “이 동전은 실로 자성의 열입니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그런 말을 하지 말라. 이 열은 이에 연緣으로 이루어진 열인 까닭에 하나하나가 열을 갖추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어리석은 사람은 아직 이 뜻을 깨닫지 못하니, -
006_0838_b_01L章摠持之法。所 [228] 誨示也。已上。 東土之
006_0838_b_02L人。第下之二第二一張 又不解其
006_0838_b_03L悉曇章摠持之法。是故。雲華尊者。
006_0838_b_04L以其所習3)數 [400] 錢之法。而指示也。問。
006_0838_b_05L此悉曇章。及數錢之喩。於聖敎中。
006_0838_b_06L有耶。無耶。答。有之也。謂悉曇之
006_0838_b_07L喩。十地品中說之。數法之喩。 *弟四
006_0838_b_08L會精進林菩薩頌曰。比如筭數法。
006_0838_b_09L增一至無量。數法無體性。智惠故
006_0838_b_10L差別。問。此錢之中。何是遍計。何
006_0838_b_11L是因緣耶。答。如是十錢。 *弟一
006_0838_b_12L*弟二乃至*弟十。皆有自性故。
006_0838_b_13L取一則無一。取二則無二等者。是
006_0838_b_14L遍計錢也。因緣錢者。此一錢位。具
006_0838_b_15L中即故。若無餘九。即此一錢。亦
006_0838_b_16L不得成。是故。此一錢即是無盡之
006_0838_b_17L一也。
006_0838_b_18L問。以此十錢之喩。初導童蒙方便
006_0838_b_19L云何。答。和尙告童蒙曰。汝先竪
006_0838_b_20L列十錢。其人應命竪列。和尙曰。
006_0838_b_21L此十錢。爲是自性十耶。爲是緣起
006_0838_b_22L無性十耶。其人白云。此錢實是自
006_0838_b_23L性十也。和尙曰。莫作是說。此十乃
006_0838_b_24L是緣成十故。一一具十耳。然其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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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8_c_01L의상 화상이 가르쳐 일렀다. “만약 이 열 개의 동전이 모두 자성의 열 개 동전이라면 너는 마땅히 그것을 세어 보아라.” 어리석은 사람이 지시에 따라서 그 동전을 세어서 “하나, 둘,……열”이라고 하였다.
그때에 의상 화상이 첫 번째 하나의 동전을 치워 버리고 물었다. “몇 개가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뢰었다. “다만 아홉 개가 있을 뿐입니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너는 다시 세어 보아라.” 그 사람이 세어서 “하나, 둘,……아홉”이라고 하였다. 의상 화상이 말씀하였다. “너는 전에는 이미 말하기를 ‘이 열이 결정코 자성의 열이다’라고 했는데, 어째서 너는 이전의 두 번째 (동전)으로 첫 번째를 삼고 내지 이전의 열 번째로 아홉 번째를 삼는가?” (그 사람이) 아뢰었다. “화상이 하나의 동전을 치워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에 화상이 다시 하나의 동전을 놓고는 물었다. “몇 개가 있는가?” (그 사람이) 답하였다. “열 개가 있습니다.” 화상이 말씀하였다. “너는 마땅히 다시 세어 보아라.” 그 사람이 지시를 받들어 다시 그것을 세어서, “하나, 둘 내지 열”이라 하고는 아뢰었다. “화상이 하나의 동전을 치워 버렸을 때는 두 번째로 첫 번째를 삼았으나 화상이 다시 하나의 동전을 놓으니 또한 다시 첫 번째로써 두 번째 등을 삼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성의 열이 아닙니다. 마땅히 하나를 말미암아 열이 있고 열을 말미암아 하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하나가 연기로서 자성이 없을 뿐입니다.”
법융기『법융(기)』에 이른다. ‘첫 번째는 위로 향하여 옴(向上來)’이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는 “이 문의 첫 번째 동전은 다만 감(去)의 뜻만 있고 옴(來)의 뜻은 없으며, 열 번째 동전에는 다만 옴의 뜻만 있고 감의 뜻은 없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와 반대이다. 말하자면 첫 번째 동전이 힘이 있으면 열 동전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옴’이라고 하고, -
006_0838_c_01L人。未會此意。和尙吿曰。若此十
006_0838_c_02L錢。悉是自性。十箇錢者。汝當數之。
006_0838_c_03L迷人應命。數其錢云。一二乃至十
006_0838_c_04L也。爾時。和尙去却*弟4)一一 [401] 錢。問。
006_0838_c_05L有幾耶。 5)曰 [402] [229] 云。只有九耳。和尙曰。
006_0838_c_06L汝可更數。其人數云。一二乃至九。
006_0838_c_07L和尙曰。汝前旣云。此十定是自性
006_0838_c_08L之十。何故。汝令以前*弟二爲*弟
006_0838_c_09L一。第下之二第二二張 乃至前十爲
006_0838_c_10L九耶。白云。由和尙去却一錢故爾。
006_0838_c_11L於是和尙。還置一錢。問有幾何。
006_0838_c_12L答有十也。和尙曰。汝應復數。彼
006_0838_c_13L人承命復數之云。一二乃至十。白
006_0838_c_14L云。和尙去却一錢時。以*弟二爲
006_0838_c_15L*弟一等。和尙還置一錢。亦得復
006_0838_c_16L以*弟一爲*弟二等。然則非自性
006_0838_c_17L十。應是由一有十。由十有一。是故。
006_0838_c_18L一一緣起無性耳。
006_0838_c_19L法融云。一者向上來者。一云。此門初
006_0838_c_20L錢。但有去義。無來義。 *弟十錢中。
006_0838_c_21L但有來義。無去義。一云。反此也。謂
006_0838_c_22L初錢有力。將十錢來。故云來。 *弟十
006_0838_c_23L「着」作「著」{乙}次同。「弟」作「第」{乙}次同。
006_0838_c_24L「數」作「敎」{乙}。脚註曰一一疑二{乙}。「曰」
006_0838_c_25L作「白」{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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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9_a_01L열 번째 동전이 힘이 있으면 열 동전을 가지고 가기 때문에 ‘감’이라고 한다.”라고 한다.
‘근본수(本數)’라는 것은,문 ‘근본의 하나(本一)’가 ‘근본수(本數)’와 어떻게 다른가?답 지위를 주지 않았을 때에는 ‘하나’를 부르면 열 개가 모두 응하여 “나도 하나이다.”, “나도 하나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첫 번째 내지 열 번째 등의 지위를 줄 때, 첫 번째의 하나가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첫 번째의 지위를 주는 까닭에 ‘근본수인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또 열을 세는 것의 처음 하나이기 때문에 ‘근본의 하나’라고 한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첫째는 하나이다. 내지 곧 근본수이다’에서,문 첫 번째 하나가 ‘근본법’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답 부처님이 스스로 증득하신 법은 하나나 둘이라는 말을 여의어서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연緣을 따라 이룰 때, 만약 ‘하나’를 부르면 온 법계가 하나이다. (그러나) 이미 지위를 주어서 이르기를 ‘하나이다, 둘이다, 내지 열이다’라고 하는 까닭에, 첫 번째 하나가 근본법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름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문 이미 가로로 열 개의 동전을 나열하고, 내가 드는 바를 따라서 첫 번째로 삼아 세기 때문에 열 개가 모두 근본수인가?답 이미 드는 바를 따라서 첫 번째로 삼아 세어야 비로소 근본수가 된다. 드는 바를 따름을 말미암아서 차례로 두 번째, 세 번째 등의 이름을 받기 때문에 지말수(末數)이다.
문 만약 이 (의상) 화상이 하나로 근본을 삼으면, 경 가운데 “비유하면 열을 세는 법과 같으니, 모두 다 근본수이다.”70)라는 문장을 어떻게 회통하는가?답 이 하나의 열이기 때문에 열을 든 것뿐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열이기 때문에 열이 모두 하나이다. 따라서 “모두 다 근본수이다.”라고 한 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마땅히 열이 모두 근본수이어야 하는데, 어째서 그렇지 않은가?답 그 지위를 줄 때에 이미 ‘둘’, ‘셋’ 등이라고 한 까닭에 오직 첫 번째 하나만 근본수이다. 그러나 그 열이 하나의 열이기 때문에 모두 근본수이다. -
006_0839_a_01L錢有力。將十錢1)去。 [403] 故云去也。本數
006_0839_a_02L者。問。本一與本數。何別。答。位不授時。
006_0839_a_03L呼一則十皆應2)口 [404] 云。吾亦一吾亦
006_0839_a_04L一。故授3)弟一乃至*弟十等位時。以
006_0839_a_05L*弟一之一本是一故。授*弟一位
006_0839_a_06L故云本數一也。又以數十之初一故。
006_0839_a_07L云本一也。
006_0839_a_08L大記云。一者一乃至即是本數者。問。
006_0839_a_09L何知初一受本法名耶。答。佛自訂法。
006_0839_a_10L離一二詮。而不守自性隨緣成時。若
006_0839_a_11L呼一則。全法界是一也。旣授位云一
006_0839_a_12L也二也乃至十也。故云初一得受
006_0839_a_13L稱本法名也。問。旣橫列十錢。隨我所
006_0839_a_14L擧。爲初而數故。十皆本數耶。答。旣
006_0839_a_15L隨所擧。爲初而數。方爲本數。由隨
006_0839_a_16L所擧。次*弟受二三等名故。是末數也。
006_0839_a_17L問。若此和尙。以一爲本。則經中比如
006_0839_a_18L數法第下之二第二三張 十皆悉是本
006_0839_a_19L數之文。如何通耶。答。是一之十故
006_0839_a_20L擧十耳。是故。一之十故。十皆是一。
006_0839_a_21L故云。皆悉是本數也。問。若爾。應是十
006_0839_a_22L皆本數。何不爾耶。答。授其位時。旣
006_0839_a_23L云二三等故。唯初一是本數也。然而
006_0839_a_24L其十是一之十故。皆是本數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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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9_b_01L법융기『법융(기)』에 이른다. ‘곧 생겨나되 생겨나지 않고’ 등이란, ‘곧 생겨나되’는 무명의 인연으로 행行의 결과가 생겨나기 때문에 ‘곧 생겨나되’이다. 생겨남에 묶여 있는 것을 설하는 것은 ‘생겨나지 않고’이다.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이란, 무명이 멸하기 때문에 행行이 멸한다는 것은 ‘생겨나지 않되’이다. 멸함에 묶여 있는 것을 설하는 것은 ‘생겨남’이다. ‘머무르지 않음의 뜻’이란, 또한 하나의 티끌이 자기의 자리에 머무르지 않음을 기준으로 하여 법계를 다하는 것이니, 기준으로 하고 기준으로 하는 것이 모두 그렇기 때문이다. ‘중도의 뜻’이란, 듦을 따라서 곁이 없기 때문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자재하지 않다’란, 자기가 공하다는 뜻이다. ‘곧 생겨나되 생겨나지 않고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이다’란 두 가지 뜻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생겨나되 생겨나지 않음’은 중생과 부처님의 법이 없는 증분이다. ‘생겨나지 않되 생겨남’은 연기분이다. 둘째, 연기분에 나아가서 ‘생겨나지 않음’은 연기관이니 힘이 없어서 생겨남이 없기 때문이다. ‘생겨남’은 인연관이니 힘이 있어서 생겨남이 있기 때문이다. ‘용수가 이르기를, 인연으로 생겨난 법’ 등이라는 것은 두 가지 해석이 있다. 어떤 이는, 처음 세 구는 동교이고 뒤의 한 구는 별교라고 한다. 어떤 이는, ‘곧 공이다’는 연기관이고, ‘가명이다’는 인연관이고, ‘중도의 뜻’은 성기관이라고 한다.
법융기『법융(기)』에 이른다. ‘무분별’이란 이 열 개의 동전 가운데 매 하나하나의 동전이 듦을 따라 곁이 없어서 표시하여 가리킬 수 없기 때문이다. ‘자성을 고수하지 않는다’란 둘이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셋과 넷과 열도 또한 자성을 고수하지 않고 하나의 체體를 이루기 때문에 ‘연緣을 따른다’라고 하니, 그러므로 ‘머무르지 않는다’라고 한다.
‘하나의 일(一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한다’란 (다음과 같다.) 하나를 말미암아 열이 있기 때문에 만약 그 하나를 취해 버리면 둘과 셋 내지 열이 다 이루어지지 않으므로, ‘하나’를 부를 때 열이 모두 대답하기를, ‘나도 하나다’, ‘나도 하나다’라고 한다. 하나의 많음이기 때문에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까닭에 곧 다함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
006_0839_b_01L法融云。即生不生等者。即生者。無
006_0839_b_02L明因緣行果生故。即生也。生縛說者
006_0839_b_03L不生也。不生生者。無明滅故行滅。
006_0839_b_04L則不生也。滅縛說者生也。不住義者。
006_0839_b_05L且約一塵不住於自位。盡於法界。
006_0839_b_06L約約皆然故也。中道義者。隨擧無側
006_0839_b_07L故也。
006_0839_b_08L大記云。不自在者。自己空義也。即
006_0839_b_09L生不生不生生者。含有二意。一生不
006_0839_b_10L生者。無生佛法之訂分也。不生生者。
006_0839_b_11L緣起分也。二就緣起分。不生者緣
006_0839_b_12L起觀。無力無生故。生者因緣觀。有力
006_0839_b_13L有生故。龍樹云。因緣所生法等者。
006_0839_b_14L有二釋。一云。初三句同敎。後一句別
006_0839_b_15L敎也。一云。即是空者緣起觀。是假
006_0839_b_16L名者因緣觀。中道義者性起觀也。
006_0839_b_17L法融云。無分別者。此十錢中每一
006_0839_b_18L一錢。隨擧無側。不可摽指故也。不
006_0839_b_19L守自性者。二不守性。三四及十。亦
006_0839_b_20L不守自。成一之體。故云隨緣。故云不
006_0839_b_21L住也。以一事辨一多者。由一有十故。
006_0839_b_22L若取其一。則二三乃至十皆不成故。
006_0839_b_23L呼一之時。十皆口許。吾亦一吾亦一
006_0839_b_24L也。以一之多故。云辨一多故即盡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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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39_c_01L‘다른 일(異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한다’ 등이란, ‘둘’을 부를 때 열이 모두 대답하되, ‘나는 둘이다’ 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일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까닭에 다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둘로써 열을 다하고, 셋으로써 열을 다하고, 내지 열로써 열을 다하는 것이 다 첫 번째 하나의 동전의 다하지 않는 덕德이다.
문 둘의 일(二事)로써 둘의 많음을 변별하는 것은 두 번째 동전의 다함이다. 이 두 번째 (동전)의 다하지 않음은 무엇인가?답 하나의 일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고, 셋의 일로써 셋의 많음을 변별하는 것 등은 모두 두 번째 (동전)의 다하지 않음이다.문 법장 스님이 이르는 바 ‘하나 가운데 열이기 때문에 다한다’71)의 하나가 ‘열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다’72)의 하나와 어떻게 다른가?답 같다.
문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에 열 가운데 하나가 다하지 않음인가?답 하나 가운데 열을 갖추니, 그러므로 ‘하나 가운데 열이기 때문에 다한다’라고 한다. 열을 갖춘 하나는 다만 첫 번째의 하나가 되어서 열을 다할 뿐이고, 두 번째, 세 번째 내지 열 번째가 되어서 열을 다하는 것이 아닌 까닭에, ‘열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다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 가운데 열의 하나는 둘을 갖추고 셋을 갖추고, 내지 열을 갖춘 하나이다. 열 가운데 하나의 하나는 둘이 되어서 열을 거두지 못하며, 셋이 되어서 열을 거두지 못하며, 내지 열이 되어서 열을 거두지 못하는 하나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문 ‘하나의 일(一事)로써 하나의 많음을 변별’하는 것은 열 동전에 통하는가?답 그렇다. 말하자면 동전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또 지위에 따라서 말하면 둘의 일(二事)로써 둘의 많음을 변별하는 것 등도 또한 가능하며, 다른 문도 예에 따라 그러하니 말하자면 동전의 지위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동전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
006_0839_c_01L第下之二第二四張 以異事辨一多等
006_0839_c_02L者。呼二之時。十皆口許。我是二等。
006_0839_c_03L故云以異事辨一多故不盡也。謂以
006_0839_c_04L二盡十。以三盡十。乃至以十盡十。
006_0839_c_05L皆初一錢之不盡德也。問。以二事辨
006_0839_c_06L二多者。是*弟二錢之盡也。此*弟二
006_0839_c_07L之不盡。何耶。答。以一事辨一多。以
006_0839_c_08L三事辨三多等。皆是*弟二之不盡也。
006_0839_c_09L問。藏師所云。一中十故盡之一。與十
006_0839_c_10L中一故不盡之一。何別。答。同也。問。
006_0839_c_11L若爾。何故十中一則不盡耶。答。一中
006_0839_c_12L具十故。云一中十故盡也。具十之一。
006_0839_c_13L但爲*弟一之一而盡十。不爲*弟二
006_0839_c_14L*弟三乃至*弟十而盡十。故云十中
006_0839_c_15L一故不盡也。謂一中十之一者。具二
006_0839_c_16L具三乃至具十之一也。十中一之一
006_0839_c_17L者。不能爲二攝十。不能爲三攝十。
006_0839_c_18L乃至不能爲十攝十之一也。
006_0839_c_19L大記云。問。以一事辨一多者。通十錢
006_0839_c_20L耶。答。爾也。謂約錢體故。又隨位云。
006_0839_c_21L以二事辨二之多等亦得。餘門例爾。
006_0839_c_22L謂約錢位故。此中約錢體云也。此中
006_0839_c_23L「去」作「云」{乙}。「口」無有{乙}。「弟」作「第」
006_0839_c_24L{乙}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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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0_a_01L이 가운데 ‘다른 일(異事)로써’ 등은 (다음과 같다.) 변계의 사람으로 하여금 인연을 익히게 하려는 까닭에 나열된 지위의 이구지離垢地 등의 다른 일을 기준으로 한다. 만약 인연의 사람으로 하여금 연기를 익히게 한다면 하나하나가 열을 갖추기 때문에 그 환희지歡喜地가 갖춘 열 가운데의 이구지 등을 기준으로 하여 다른 일로써 삼을 뿐이고, 나열된 지위의 이구지 등을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래에서 또 해석하는 중에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과 다하지 않음을 변별한 것이다.73) 그러므로 처음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다하지 못하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고, 나중의 뜻을 기준으로 하면 다함이 없기 때문에 다하지 않음이다.74)
문 ‘다른 일로써’는 다만 환희지가 갖춘 이구지 등일 뿐이고, 나열된 지위의 이구지가 아님을 어떻게 아는가?답 법장 스님이 이르기를, “(문) 다만 자기의 하나의 문의 다함없음만을 거두는가, 또한 나머지 다른 문의 다함없음도 거두는가? 답 혹은 함께 거두고 혹은 다만 자기 하나의 문의 다함없음만을 거둔다. 무슨 까닭인가? 만약 자기 하나의 문의 다함없음이 없다면 나머지 일체 문 중의 다함없음도 모두 다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첫 문의 동체同體가 곧 동체와 이체異體 두 문 중의 다함없음과 다함없음을 거두어 그 원만한 궁극의 법계를 다하여 거두어 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이상.”75)라고 하였다. 옛 스님이 이르기를, “‘나머지 다른 문’이란 위에서 이른 하나의 문에 이미 열이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열이 다시 스스로 상즉상입하여 거듭거듭 다함없음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거둔 바를 기준으로 하여 나머지 다른 문을 삼는 까닭에 나열된 지위의 이구지가 아님을 안다.
법융기『법기』에 이른다. ‘또 하나의 일 가운데의 뜻은 상즉(相是)하지 않으니 곧 많음이고’ 등이란, 어떤 이는 “이것은 이 가운데 다함과 다하지 않음의 뜻이다.”라고 한다. 그러나 첫 다함의 구절 가운데 ‘하나의 많음’의 뜻을 거듭 풀이한 것일 뿐이다.‘네 구절로 잘못을 막고’ 등이란,문 만약 하나라고 집착하면 어떤 허물이 있는가?답 단斷과 상常의 허물이다. 말하자면 열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가 있는데 열이 없이 하나를 말하는 것은 단斷이다. -
006_0840_a_01L以異事等者。令遍計人習因緣故。
006_0840_a_02L約列位之離垢等異事。若令因緣人
006_0840_a_03L習緣起。則以一一具十故。約其歡喜
006_0840_a_04L所具十中離垢等爲異事耳。不約
006_0840_a_05L列位之離垢等也。故下又釋中。約一
006_0840_a_06L門辨盡不盡。是故。約初義則不能盡
006_0840_a_07L故不盡也。約後義則以無盡故不盡
006_0840_a_08L也。問何知以異事者。但是歡喜所具
006_0840_a_09L離垢等耳。非列位之離垢耶。答藏師
006_0840_a_10L云。第下之二第二五張 爲但攝自一門
006_0840_a_11L無盡 [230] 1)即。 [405] [231] 爲亦攝餘異門無盡耶。答。
006_0840_a_12L或俱攝。或但攝自一門無盡。何以故。
006_0840_a_13L若無自一門無盡。餘一切門中無盡。
006_0840_a_14L皆悉不成。是故。初門同體。即攝同異
006_0840_a_15L二門中無盡無盡。 [232] 窮其圓極法界。無
006_0840_a_16L不攝盡。已上。 古德云。餘異門者。上
006_0840_a_17L云一門中旣有十。然此十復自相即
006_0840_a_18L入。重重成無盡也。是故。約自所攝爲
006_0840_a_19L餘異門。故知非是列位之離垢也。
006_0840_a_20L法記云。又一事中義不相是即是多
006_0840_a_21L等者。有云。此是此中盡不盡義也。然
006_0840_a_22L重釋初盡句中一多之義耳。四句護
006_0840_a_23L過等者。問。若執爲一有何過耶。答。斷
006_0840_a_24L常過也。謂有十方有一。無十謂一。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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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0_b_01L열이 없이 하나에 집착하기 때문에 상常이다.
‘틀림을 제거하여’란, 문 하나인가? 답 아니다. 하나가 곧 열이기 때문이다. 문 열인가? 답 아니다. 열이 곧 하나이기 때문이다.하나이기도 하고 열이기도 한가? 아니다. 서로 어긋남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열도 아닌가? 아니다. 희론을 여의었기 때문이다.‘덕을 나타내니’란 하나인가? 그렇다. 열이 곧 하나이기 때문이다. 열인가? 그렇다. 하나가 곧 열이기 때문이다. 하나이기도 하고 열이기도 한가? 그렇다. 둘이 존재하는데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도 아니고 열도 아닌가? 그렇다. 상대를 끊고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다른 일 또한 준하여 같다’란, 첫 번째 동전에서 다함과 다하지 않음 그리고 네 구절로 잘못을 막음 등을 논한 것과 같이, 두 번째 동전 등에서도 또한 그러하니 준하여 알 수 있다.
‘구함(須)이란 연緣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은 (다음과 같다.) 어떤 곳에서는 연緣은 구함의 뜻이고 구함은 남(他)이 없다는 뜻이라고 하며, 어떤 곳에서는 구함은 연緣의 뜻이고 연緣은 남(他)이 없다는 뜻이라고 한다.‘첫 번째는 위로 향하여 가고(向上去) 두 번째는 아래로 향하여 온다(向下來)’란 (다음과 같다.) 오직 첫 하나의 동전 전체가 둘이 되며, 내지 열이 되기 때문에 ‘향하여 간다’라고 할 뿐이지, 가지고 감을 기준으로 해서 ‘간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열로부터 하나를 향하여 전체로서 오기 때문에 온다고 할 뿐이지, 가지고 옴을 기준으로 해서 ‘온다’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 즉문은 형체를 빼앗는 문인 까닭에 그 자체의 가고 오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감’이고 ‘옴’이라고 할 뿐이다. 앞의 중문은 모습을 따르는 뜻인 까닭에 가지고 오고 가지고 가는 뜻을 기준으로 하여 ‘간다’, ‘온다’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항상 오고 간다’란,문 앞의 중문은 곧 힘의 문(力門)이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즉문은 체體의 문이기 때문에 자리가 움직이는 문이다. 어떻게 ‘자신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할 수 있는가?답 비록 이르기를, “하나가 곧 둘이다. 하나가 곧 셋이다. 내지 하나가 곧 열이다.”라고 하지만, ‘하나’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고서 -
006_0840_b_01L斷也。無十而執一故。是常也。去非
006_0840_b_02L者。問。一耶。答。不也。一即十故。問。十
006_0840_b_03L耶。答。不也。十即一故。亦一亦十耶。
006_0840_b_04L不也。離相違故。非一非十耶。不也。
006_0840_b_05L離戱論故。現德者。一耶。是也。十即
006_0840_b_06L一故。十耶。是也。一即十故。亦一亦
006_0840_b_07L十耶。是也。雙存無㝵故。非一非十
006_0840_b_08L耶。是也。絕待離相故。異事亦准同
006_0840_b_09L者。如2)弟一錢論盡不盡及以四句
006_0840_b_10L護過等。 *弟二錢等亦爾。准知也。須
006_0840_b_11L者緣成義者。或處云。緣者須義。須
006_0840_b_12L者無他義。或處云。須者緣義。緣者
006_0840_b_13L無他義也。一者向上去。二者向下來
006_0840_b_14L者。唯初一錢擧體。爲二乃至爲十
006_0840_b_15L故。云向去耳。第下之二第二六張 非約
006_0840_b_16L將去云去也。從十向一。擧體而來。故
006_0840_b_17L云來耳。非約將來云來也。謂此即門。
006_0840_b_18L是形奪門。故約其自體去來之義。云
006_0840_b_19L去來耳。前中門。是相順義。故約將來
006_0840_b_20L將去之義。云來去也。自位不動而恒
006_0840_b_21L來去者。問。前中門則是力門故。可
006_0840_b_22L云不動。此即門者。是體門故。位動
006_0840_b_23L門也。何云自位不動耶。答。雖云一
006_0840_b_24L即二一即三乃至一即十。而不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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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0_c_01L열 번째 동전에 이르기 때문에 “자기 자리를 움직이지 아니하되 오고 간다.”라는 것이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오고 감이란 연緣을 따른다는 뜻이니 곧 인연의 뜻이다. 움직이지 않음이란 근본을 향하는 뜻이니 곧 연기의 뜻이다’란 (다음과 같다.) 법장 스님이 이르기를, “가고 옴과 움직이지 않음은 곧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이다. 이상.”76)라고 하였다. 각각 한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또한 서로 허용한다. 평등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연기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근본을 향하는 뜻이니 곧 연기의 뜻이다’라는 것이다.
법융기『법융기』에 이른다. ‘인因과 연緣이 서로 바라보아’ 등이란 (다음과 같다.) 인연의 동전은 하나하나가, 힘이 있어서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온전한 힘을 서로 빌려서 열 개의 동전을 이룬다. 연기의 동전은, 힘이 없어서 생겨남이 없는 공空의 힘을 빌려서 열 개의 동전이 있다. 만약 힘이 없어서 생겨남이 없는 공空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연緣이 흩어지면 곧 없고 연緣이 모이면 곧 있다. 성기의 동전은 자체가 공空하기 때문에 연緣이 모이고 연緣이 흩어짐에 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우선 변계遍計인 현상(事)의 동전에 의지하여 의타依他인 인연과 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한 가리킴에 의지하여 보일 수는 있으나 연으로 생겨난’ 등에서, 첫 구절은 변계의 동전에 의거하여 인연과 연기의 동전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동전으로써 비유를 삼은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삼성의 차례대로 변계의 사물에 의거하여 의타의 법을 나타내고 의타의 법을 기준으로 하여 인연과 연기 등을 나타내는 것이다. 뒤 구절의 뜻은 동전으로써 설명을 한 것이다.
어떤 이는 이른다. 처음은 다시 얕은 곳에서부터 깊은 것을 나타내니, 문장과 같이 알 수 있다. ‘또한 (가리킴을) 의거하여’ 아래에서는 이 세는 법을 밝힌 까닭이 -
006_0840_c_01L一名至*弟十錢。故云自位不動而來
006_0840_c_02L去也。
006_0840_c_03L大記云。來去者。隨緣義。即是因緣
006_0840_c_04L義。不動者。向本義。即是緣起義者。
006_0840_c_05L藏師云。去來不動。即一物故。已上。 各
006_0840_c_06L現一義故。亦互許也。平等不起。故名
006_0840_c_07L緣起。故云向本義即是緣起義也。
006_0840_c_08L法融記云。因緣相望等者。因緣錢者。
006_0840_c_09L一一相資有力能生之全力。而成十
006_0840_c_10L錢。緣起錢者。資無力無生之空力。
006_0840_c_11L而有十錢。若不資無力無生之空力。
006_0840_c_12L則不立故。緣散即無。緣集即有。性
006_0840_c_13L起錢者。自體空故。緣集緣散。不增減
006_0840_c_14L也。
006_0840_c_15L3)大 [406] 記云。且依遍計事錢。現示依他
006_0840_c_16L因緣緣起錢也。亦可依指示緣生等
006_0840_c_17L者。初節則依遍計錢。現示因緣緣起
006_0840_c_18L錢故。不以錢爲喩也。謂如三性次
006_0840_c_19L*弟。依遍計事。現依他法。約依他法。現
006_0840_c_20L因緣緣起等也。後節意則以錢爲詮
006_0840_c_21L也。一云。初復次從淺現深。如文可知。
006_0840_c_22L第下之二第二七張 亦可依下。所以
006_0840_c_23L「即」作「耶」{乙}。「弟」作「第」{乙}次同。「大」
006_0840_c_24L作「六」{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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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1_a_01L미혹하고 어리석은 이를 깨우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거듭 해석하여 이르기를, 연緣으로 생겨난 법은 자성이 없으며 이름과 모습을 여의었기 때문에 끝내 얻을 수 없음을 바로 가리켜 보인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변계의 사물에 집착하여 연기의 법에 미혹한 사람이 이해하는 열 개의 동전에 의거하여서 세는 법을 나타낸 것이 위에서 밝힌 바 모습을 여읜 법과 까닭이 전혀 다르다. 말하자면 또한 이 세속에서 아는 바 동전 세는 법도 오히려 이와 같이 매우 깊고 현묘한데 하물며 저 성스러운 지혜로 깨닫는 바인 말을 여의고 모습을 끊은 법이겠는가? 이와 같이 나타낸 것이다. 다만 ‘의依’의 글자가 앞에 있기 때문에 문장의 모습이 벼줄기의 끝과 같아서 숨어 있을 뿐이다. ‘두류逗留’란 일의 까닭(事由)이다.
남악관공기
『남악관공기』에 이른다. 동전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변계ㆍ의타ㆍ인연ㆍ연기ㆍ성기ㆍ무주ㆍ실상이다.첫째, 변계의 동전에 둘이 있으니 범부와 이승이 보는 바이다. 범부는 단지 이 동전이 모나고 둥근 모습만 볼 뿐 사대四大와 사진四塵77)이 합하여 이루어진 것인지는 보지 않는다. 또한 다만 하나이고 둘이 아니며 셋이 아니라는 등의 차별된 모습만을 볼 뿐 끝내 동전에 자성이 없음을 보지 않는다. 이승은 점차 임시로 모인 공空의 모습을 보지만 이 또한 오히려 변계의 동전일 뿐이다. 이승이 비록 사상四相78)을 보더라도 아직 법공法空의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상을 함께 변계의 동전이라고 이름한다.
삼승의 사람은 이 동전이 다른 인연을 의지하여 일어나니 일어날 때 생겨남이 없음을 비로소 이해하기 때문에 의타라고 이름하지만, 인연에 가까움과 멂의 둘이 없음을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일승에 나아가서 이 인연에 가까움과 멂이 없음을 밝히기 때문에 인연의 동전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나 앞의 병을 따라서 그 병을 다스리기 때문에 인연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삼승도 가까움과 멂이 없는 뜻을 부분적으로 설하지만, 그러나 지금은 일승이 가까움과 멂에 둘이 없는 뜻을 바로 밝히는 것이다. -
006_0841_a_01L明此數法者。欲解迷愚故。重釋云。
006_0841_a_02L直指示緣生之法無有自性離名相
006_0841_a_03L故終不可得。是故。且依執遍計物
006_0841_a_04L迷緣起法者之所解十錢。以現數法。
006_0841_a_05L與上所明離相之法。逗留全別。謂
006_0841_a_06L且此世俗所知數錢之法。尙能如是
006_0841_a_07L甚深玄妙。況彼聖智所訂離言絕相
006_0841_a_08L之法乎。如是現也。但依字在前故。
006_0841_a_09L文相稍似隱耳。逗留者事由也。
006_0841_a_10L南岳觀公記云。錢有七重。謂遍計
006_0841_a_11L依他因緣緣起性起無住實相
006_0841_a_12L也。一遍計錢有二。凡夫二乘所見
006_0841_a_13L也。凡夫但見此錢方圓之相。不見
006_0841_a_14L四大四塵之所合成。亦但見一非
006_0841_a_15L二非三等差別相。終不見錢無自
006_0841_a_16L性。二乘漸見假集空相。此亦猶爲
006_0841_a_17L遍計錢耳。以二乘雖見四相而未
006_0841_a_18L得解法空理故。此上並名遍計錢
006_0841_a_19L也。三乘之人。方解此錢依他因緣
006_0841_a_20L而起起時無生故。名依他。而未解
006_0841_a_21L因緣親疎無二。就一乘中。明此因
006_0841_a_22L緣無親疎故。名因緣錢。然從前
006_0841_a_23L病。治其病故。名因緣耳。三乘分
006_0841_a_24L說無親疎義。然今直明一乘親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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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1_b_01L그런데 오히려 이 문은 다만 연기하여 앞에 나타나면 힘이 있어서 결과를 낳는 뜻을 밝힐 뿐이다.다음은 연기가 본성이 없어서 공空하고 평등한 뜻을 나타내기 때문에 연기의 동전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평등하여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연기라고 이름한다.”79)라고 하였다.다음은 공空과 있음이 둘이 아니니 합하여 일체가 되고 그 자체가 공空하다는 뜻을 밝히기 때문에 성기관이라고 이름한다. 이것들은 십이연생에 대한 열 번의 관觀을 많이 기준으로 하여 세운 것이다. 그래서 혹은 삼승의 뜻에 따른다고도 한다.
문 위 세 문보다 어떤 수승한 곳이 있길래 다시 무주無住와 실상實相 등을 설하는가?답 다시 또한 수승함이 있다. 말하자면 머무름이 없음(無住)을 논할 때에는 공空을 말하면 곧 만족하니 ‘있다(有)’는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있다’를 말함도 또한 그러하다. 그 한 척尺을 말하면 곧 법을 만족시키니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들고 듦에 곧 만족하고 본성과 본성이 함께 원만하다. 본래의 자리를 고치지 않고 만족시키며, 앞의 이름을 바꾸지 않고 원만하게 하며, 좁은 것을 펼치지 않고 넓게 하며, 낮음을 높이지 않고 높게 한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무주는 움직이지 않음의 다른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실상은 처음에 이름 없는 참된 근원의 문에 들어가, 마지막에 연기의 구극의 끝을 없애는 것이다. 앎이 끝나 행에 들어가고 행이 이루어져 깨달음에 들어간다.4. 발심공덕發心功德‘보살의 일념’부터 ‘걸림 없는 변재’까지80)
대기『대기』에 이른다. ‘처음 발심한 보살의 일념一念 공덕 내지 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등은 첫 번째 문의 동체同體이다. ‘하물며 한량없고 가없는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 내지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는 두 번째 문 이후의 동체이다. ‘처음 발심할 때에 내지 수행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는 이체異體의 문이다.81) 그러나 비록 이 뜻이 있으나 지금 해석하는 뜻은, 동체와 이체를 묻지 않고 -
006_0841_b_01L無二之義。然猶此門。但明緣起現
006_0841_b_02L前有力生果義耳。次現緣起無性
006_0841_b_03L空平等義故。名緣起錢。是故經云。
006_0841_b_04L平等不起故名緣起。次明空有
006_0841_b_05L不二第下之二第二八張 混爲一體
006_0841_b_06L自體空義故。名性起觀。此等多約
006_0841_b_07L十二緣生十番觀立。是故。或云
006_0841_b_08L順三乘義。問。於上三門。有何勝處。
006_0841_b_09L復說無住實相等耶。答。更亦有勝。
006_0841_b_10L謂論無住時。語空即足。不加有語。
006_0841_b_11L語有亦尒。語其一尺。即滿足法。
006_0841_b_12L不加餘語。據據即足。性性並圓。
006_0841_b_13L不改本位以令滿。不轉前名而使
006_0841_b_14L圓。不布俠而令寛。不崇卑而令高。
006_0841_b_15L故古人云。無住者。不動之異名也。
006_0841_b_16L實相者。初入無名眞源之門。終消
006_0841_b_17L緣起究竟之際。解終入行。行成入
006_0841_b_18L訂也。
006_0841_b_19L菩薩一念至無㝵辯才。大記云。初發
006_0841_b_20L心菩薩一念功德。乃至約一門等者。
006_0841_b_21L初門同體也。無量無邊諸地功德。乃
006_0841_b_22L至約異門者。*弟二門以去同體也。初
006_0841_b_23L發心時。乃至約行體者。是異體門也。
006_0841_b_24L然雖有是義。今釋之義。無問同異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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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1_c_01L하나의 문을 기준으로 하여 다함없음을 나타내는 것 등은 첫 번째 동전이 다함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동체와 이체를 묻지 않고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하는 것은 두 번째 동전 이후의 뜻이다.
‘하나의 동전이 곧 열인 것과 같고 수행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 까닭이다’란 (다음과 같다.) 위에서부터 비록 하나의 문이 다함없음을 나타내는 것을 밝혔고, 또 ‘다른 문을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고도 말했으나, 그 갖춘바 다함없음의 거듭거듭을 밝히지 않은 까닭에 지금 하나의 문과 다른 문 안에 갖춘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하나의 동전이 곧 열인 것과 같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수행의 체體를 기준으로 하여 설한다’라는 것은, 어떤 이는 이르기를, “처음 발심함이 곧 모든 수행의 체體이기 때문이며, 또 믿음이 원만하여 성불함이 행불行佛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나이가 모두 같다’란, 일념이 곧 구세九世이기 때문에 아들의 나이가 적지 않고, 구세가 곧 일념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나이가 많지 않다. 그래서 옛글(古辭)에 이르기를, “한 살의 여자가 50년 동안 임신하여 출산해서 쉰 살의 대장부를 얻었다.”82)라고 한다. 말하자면 처음 발심한 보살이 50위를 거두어서 곧 묘각妙覺의 지위를 이루는 것이다.‘하나란 분별이 없다는 뜻이다’라는 것은, 모든 법의 체體가 하나이기 때문이다. ‘같다란 머무르지 않는다는 뜻이다’라는 것은, 이것이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것과 같고 저것이 자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과 같은 것이다. ‘같은 자리에 머리를 함께한다란 서로 알지 못한다는 뜻이다’라는 것은, 머리를 들면 머리 외에 다리가 없고 다리를 들어도 또한 그러하여 상대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곧 서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짓는 자도 없으며’란 작용이 없다는 뜻이다. ‘이루는 자도 없으며’란 체體의 본성이 없다는 뜻이다. ‘아는 자도 없다’란 체體와 작용이 함께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연기관이니 체體와 작용이 없음을 말미암아야 비로소 공空한 결과를 이루기 때문이다.‘법성의 집’은 증분이고 ‘다라니의 곳집(藏)’은 연기분이다. 말하자면 머무름 없는 별교의 문에서 법의 도리를 기준으로 하여 육상을 밝히는 것은 증분의 집에 들어가는 중요한 문이다. -
006_0841_c_01L約一門現無盡等者。是*弟一錢現無
006_0841_c_02L盡也。無問同異體。約異門說者。是
006_0841_c_03L*弟二錢以去義。如一錢即十。約行體
006_0841_c_04L說故者。上來雖明一門現無盡。又云
006_0841_c_05L約異門說也。而不明其所具之無盡
006_0841_c_06L重重故。今指一門及異門內所具故。
006_0841_c_07L云如一錢即十故也。約行體說者。一
006_0841_c_08L云。以初發心即萬行體故。又信滿成
006_0841_c_09L佛。是行佛故也。阿耶兒子年月皆同
006_0841_c_10L者。一念即九世故。第下之二第二九張
006_0841_c_11L兒年非小。九世即一念故。父歲非多。
006_0841_c_12L故古辭云。一歲女妊五十年產。得五
006_0841_c_13L十歲大丈夫也。謂初發心菩薩。攝五
006_0841_c_14L十位。即成妙覺位也。一者無分別義
006_0841_c_15L者。諸法體一故。同者不住義者。此
006_0841_c_16L不自在故。同於彼。彼不自在故。同
006_0841_c_17L於此也。同處並頭者不相知義者。
006_0841_c_18L擧頭則頭外無足。擧足亦尒。無可對
006_0841_c_19L故。即不相知也。無有作者。無作用義。
006_0841_c_20L無有成者。無體性義。無有知者。體
006_0841_c_21L用俱無義。此是緣起觀。由無體用。
006_0841_c_22L方成空果故也。法性家者。訂分也。
006_0841_c_23L陁羅尼藏者。緣起分也。謂無住別敎
006_0841_c_24L門中。約法道理。明六相者。是入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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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2_a_01L동교의 문에서 방편인 육상을 설하는 것은 머무름 없는 별교의 곳간을 여는 좋은 열쇠이다.
문 ‘집에 들어가는 좋은 문’과 ‘곳집을 여는 열쇠’는 육상 이외에 별도로 들어가는 곳과 여는 곳 등이 있는가?답 어떤 이는 이르기를, “들어가는 곳은 증분이고 육상은 바로 연기분이기 때문에 다르다.”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르기를, “육상이 곧 법성의 집과 다라니의 곳간이기 때문에 다시 들어가는 곳과 여는 것은 없다. 그러나 ‘육상방편’이라고 하는 것은 법의 체體의 빼어난 모습을 모아 이룬 방편이다.”라고 한다.83)‘걸림 없는 변재辯才의 체體가 삼승의 분제分際가 아니다’라는 것은, 비록 머무름 없는 별교이나 육상방편으로 언설을 삼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별교 중에 비록 뜻이 곧 말이며 말이 곧 뜻이나 말과 뜻이 섞이지 않는 것이다.5. 십현문十玄門‘동시에 구족하여’부터 ‘『화엄경』(의 설)과 같다’까지84)
대기『대기』에 이른다.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한다(同時具足相應)’는 것은 여러 뜻의 해석이 있다. 혹은 대소大䟽(『화엄경탐현기』)의 “같음과 다름이 원만하게 갖추어짐 가운데 말하자면 앞의 아홉 문을 전부 합하여 하나의 대연기의 법으로 삼아서 다양한 종류의 뜻의 문이 동시에 구족하게 한다.”85)라는 글에 의거하여 오직 총상이고 별상이 아니라고 한다. 혹은 강목綱目86)의 “말하자면 이 하나의 티끌이 위의 열 가지 쌍(十對)을 거두고, 동시에 구족함도 또한 뒤의 아홉 문의 현묘한 뜻을 거둔다.”87)라는 글에 의거하여, 앞의 구절은 별상의 동시라는 뜻이고 뒤의 구절은 총상의 동시라는 뜻이라고 한다. 지금은 두 뜻이 모두 그러하니 부분에 집착하지 말라고 이른다. ‘동시’라고 말한 것은, 어떤 이는 해인(삼매)가 두렷이 밝은 때라고 하고, 어떤 이는 세상의 물든 열두 때를 나눈 것 중에 어떤 (때)를 따라 이르는 것일 뿐이라고 한다. 또 이 두 설이 또한 모두 이치가 있는 말이다.
‘그 가운데 열 가지 문이 있다. 이른바 사람(人)과 법法, 이법(理)과 현상(事)’ 등이라고 말한 것은, -
006_0842_a_01L分家之要門也。同敎門中。說方便六
006_0842_a_02L相者。是開無住別敎藏之好鑰匙也。
006_0842_a_03L問。入家之要門。開藏之鑰匙。則六相
006_0842_a_04L以外別有所入所開等耶。答。一云。所
006_0842_a_05L入乃是1)訂分。六相正是緣起分故。
006_0842_a_06L別也。一云。六相即是法性家及陁羅
006_0842_a_07L尼藏故。更無所入所開也。然云六相
006_0842_a_08L方便者。是約法體巧相集成方便也。
006_0842_a_09L無㝵辯才體非三乘分齊者。雖是無
006_0842_a_10L住別敎。而以六相方便爲言說故也。
006_0842_a_11L謂別敎中。雖義即是言。言即是義。
006_0842_a_12L而言義不雜也。
006_0842_a_13L同時具足至如華嚴經。大記云。同時
006_0842_a_14L具足相應者。有多義釋。或依大䟽同
006_0842_a_15L異圓備中第下之二第三○張 謂前九
006_0842_a_16L門摠合爲一大緣起法令多種義
006_0842_a_17L門。同時具足之文。而云唯摠非別也。
006_0842_a_18L或依2)網 [407] [233] 目謂此一塵攝上十對同
006_0842_a_19L時具足亦攝後之九門玄義之文。而
006_0842_a_20L云初節別同時義。後節摠同時義也。
006_0842_a_21L今云二義皆然。不可局執。言同時者。
006_0842_a_22L有云。海印圓明之時也。有云。於世染
006_0842_a_23L分十二時中。隨何云耳。又此二說。
006_0842_a_24L亦皆有理。言於中有十門。所謂人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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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2_b_01L「보법장」88)에 의하면 오직 다섯 쌍의 열 법으로 묶으니, 대소大䟽89) 등의 열 쌍의 이십 법과 같지 않다. 다만 열고 합한 것일 뿐으로 뜻에는 더하고 덜함이 없다. ‘열 가지 문’이라고 말한 것에서, 무슨 까닭에 열 가지 법法인데 ‘문門’이라고 말하는가? 말하자면 지혜로써 들어가는 바의 뜻이 같은 까닭일 뿐이다. ‘상응하여 앞과 뒤가 없다’라고 말한 것에서, 어떤 이는 시간과 법이 상응하는 것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열 보법 가운데 매 하나하나의 법이 서로 알지 못하는 뜻이라고 한다.
‘인드라그물의 경계(因陁羅網境界)’란 (다음과 같다.) 인드라신(帝釋)의 궁전의 오색구슬 그물이 서로 영상을 그려내어(瀉)90) 거듭거듭 끝이 없는 것과 같이, 연기의 법과 법이 으레 그러하여 서로 거두되 거두어진 것이 다시 거두는 것이 되어서 거듭거듭 서로 거두어 다함이 없다. 다함이 없기 때문에 안으로 향하여 중심을 찾음에 들어가고 들어가도 오히려 밖이고, 밖으로 향하여 가장자리를 찾음에 나가고 나가도 오히려 안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이 이르기를,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왕궁에 여러 겹의 문이 있어서 밖으로부터 안으로 들어갈 때에 이 문을 들어가면 곧 안이라고 하나 그 문 안에 다시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전에 들어간 곳이 도리어 밖이며, 또 여기로 들어가면 곧 안이라고 하나 그 문 안에 또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전에 들어간 곳이 도리어 밖이다. 이와 같이 거듭거듭인 까닭에 들어가고 들어가도 도리어 밖이다. 안으로부터 밖으로 나갈 때에 이 문을 나가면 곧 밖이라고 하나 그 문 밖에 또 다른 문이 있기 때문에 전에 나간 곳이 도리어 안이다. 이와 같이 거듭거듭인 까닭에 나가고 나가도 도리어 안이다.”라고 하였다.
‘경계’라고 말한 것은 다른 문을 가려내는 것이니 (다른 문도) 어찌 증득한 지혜의 경계가 아니겠는가? 무슨 까닭에 이 문만 치우쳐 이 말을 얻는 것인가?답 『십지경론』에서 이르기를, “인드라그물의 차별이란 진실한 뜻의 모습이니, 진실한 뜻의 모습은 증득한 자의 경계이기 때문이다.”91)라고 하였다. -
006_0842_b_01L理事等者。依普法章。唯束五對十
006_0842_b_02L法。不同大䟽等十對二十法也。但
006_0842_b_03L開合耳。義無加減也。言十門者。何
006_0842_b_04L故十法而云門耶。謂以智之所入義
006_0842_b_05L同故耳。言相應無有前後者。一云。時
006_0842_b_06L法相應也。一云。十普法中。 3)每 [408] 一一
006_0842_b_07L法。不相知義也。因陁羅網境界者。
006_0842_b_08L如帝釋殿五色珠網。 4)互 [409] 相瀉影。重
006_0842_b_09L重無極。緣起法法。法尒相攝。所攝復
006_0842_b_10L爲能攝。重重相攝無盡。無盡故。向
006_0842_b_11L內尋心。入入猶外。向外尋邊。出出
006_0842_b_12L猶內也。故古人云。比如王宮有多
006_0842_b_13L重門。從外入內之時。謂入此門。即
006_0842_b_14L爲內也。而其門內。復有異門。故前
006_0842_b_15L所入。還是外也。又謂入此。即爲內也。
006_0842_b_16L而其門內。又有異門。故前所入。還
006_0842_b_17L是外也。如是重重故。入入猶外也。
006_0842_b_18L從內出外之時。謂出此門。即是外也。
006_0842_b_19L而其門外。又有異門。故前所出。還
006_0842_b_20L是內也。如是重重故。出出猶內也。
006_0842_b_21L言境界者。簡餘門。豈非訂智境界。
006_0842_b_22L何故此門第下之二第三一張 偏得此
006_0842_b_23L言耶。答。地論云。帝綱差別者。眞實
006_0842_b_24L義相。眞實義相。訂者境界故。從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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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2_c_01L이 논의 글을 따라서 이 문의 이름을 세웠을 뿐이고 나머지 문이 지혜의 경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이 가운데 앞의 열 가지 문을 갖추었으며’란,(문) 한 종류의 열 보법이 되는가, 문을 따라서 각각 따로 세우게 되는가?답 두 뜻 모두 가능하다. 말하자면 문과 문마다 모두 앞의 열(十)을 갖춘다고 하기 때문에 한 종류 또한 가능하다. 그러나 문을 따라서 섞이지 아니하고, 내지 백 문, 천 문에 각각 갖추는 바가 있기 때문에 각각 따로 또한 가능하다.
‘비유를 따라서 다르다’란 법을 기준으로 하면 마땅히 거듭거듭 다함없음을 따라서 다를 뿐이라고 하여야 한다.문 무슨 까닭에 첫 문에는 (‘비유를 따라 다를 뿐이다’와 같은) 이 가려내는 말이 없는가?답 이미 첫 문이므로 나머지와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뒤의 모든 문을 대하여 가려낸다면 “앞과 뒤가 없음을 따라서 다를 뿐이다.”라고 할 수 있다.‘나머지도 준하여 알 수 있다’란 (다음과 같다.) 앞 문의 열 가지 법을 함께 구족하니, 구족하기 때문에 이에 준하면 마땅히 ‘사람(人)과 법法의 인드라(그물) 내지 원인과 결과의 인드라’ 등이라고 해야 하며, 다른 문의 예도 이러하다. 이런 까닭에 열 번째 문의 마지막에 또 이 말이 있는 것이다.92)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난 것이 함께 이룬다(秘密隱現俱成)’란 (다음과 같다.) 어떤 글에서는 이르기를, “하나의 미세한 티끌에서 삼매(正受)에 들어가고 하나의 털 끝머리에서 삼매로부터 일어난다. 이와 같이 자재로이 저기서 숨고 여기에서 나타나 삼매와 삼매로부터 일어남이 동시에 비밀스럽게 이루어진다.”93)라고 한다. 어떤 글에서는 이르기를, “숨음은 비밀이고 나타남은 나타나 드러남이니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난 것이 함께 이루는 문’이라 이름한다.”94)라고 한다. 처음 뜻은 숨음이 나타남과 한 때에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에 비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뒤의 뜻은 비밀스러운 숨음이 나타남과 함께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연緣을 따라 다르다’란 (연緣은) 근기의 연緣이다. 그러므로 『십현장』에 이르기를, “연緣을 따라서 보는 바이기 때문에 늘어남과 줄어듦이 있다.”95)라고 하였다. 또는 구하는 바의 연緣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열 보법 가운데 사람을 구하면 사람이 나타나고 다른 것은 숨으며, -
006_0842_c_01L論文。立此門名耳。非謂餘門非智
006_0842_c_02L境界也。此中具前十門者。爲是一種
006_0842_c_03L十普法耶。爲是隨門各別立耶。答。
006_0842_c_04L二義皆得。謂門門皆云具前十故。
006_0842_c_05L一種亦得。然而隨門不雜。乃至百門
006_0842_c_06L千門。各有所具故。各別亦得。從喩
006_0842_c_07L異者。約法應云。從重重無盡異耳。
006_0842_c_08L問。何故初門無此簡辭。答。旣是初門。
006_0842_c_09L餘不濫故。若對後之諸門簡者。可云
006_0842_c_10L從無前後異耳。餘可准知 [234] 者。前門十
006_0842_c_11L法並具足。具足故。准此應云。人法因
006_0842_c_12L陁羅。乃至因果因陁羅等。餘門例爾。
006_0842_c_13L是故。5)弟十門末。亦有此言也。秘密
006_0842_c_14L隱現俱成者。有文云。於一微塵入正
006_0842_c_15L受。一毛端頭三昧起。如是自在。彼
006_0842_c_16L隱此現。正受起定。同時秘密成矣。
006_0842_c_17L有文云。隱則秘密。現則現著。名爲
006_0842_c_18L秘密隱現俱成門也。初意云。隱與
006_0842_c_19L現。一時俱成。故秘密也。後意云。秘密
006_0842_c_20L隱與現。俱成也。從緣異者。是機緣也。
006_0842_c_21L故十玄章云。隨緣所見故。有增減也。
006_0842_c_22L又云。所須緣也。謂十普法中。須人則
006_0842_c_23L「訂」通「證」於此書{編}次同。「網」作「綱」{乙}。
006_0842_c_24L「每」作「海」{乙}。「互」作「玄」{乙}。「弟」作
006_0842_c_25L「第」{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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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3_a_01L다른 것을 구함도 또한 이와 같기 때문이다.‘미세한 것도 서로 용납하여 안립한다(微細相容安立)’란 (다음과 같다.) ‘미세’는 품는 주체를 지목한 것이고, ‘서로 용납함’은 품는 대상을 지목한 것이며, ‘안립함’은 주체와 대상을 통틀은 것이다. 혹은 이와 반대로 ‘미세’는 품는 대상이고, ‘서로 용납함’은 품는 주체이며, ‘안安’은 안립의 주체이고, ‘립立’은 안립의 대상이라고 한다.아래의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는 문’은 하나가 많음을 용납하고 많음이 하나를 용납하는 등의 두 가지 뜻을 갖추었는데, 이 미세의 문은 하나가 많음을 용납하는 뜻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이 이르기를, “유리병에 담긴 많은 겨자와 같다.”96)라고 하였다.
또 이른다. ‘미세’란 알기 어렵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티끌이 큰 것으로 바뀌지 아니하되 세계를 용납할 수 있고, 세계가 작은 것으로 바뀌지 아니하되 티끌에 들어갈 수 있으니, 이러한 도리는 매우 깊어서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서로 용납함’이란 하나가 많음을 용납할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하나의 법이 모두 또한 이와 같기 때문이다. ‘안립’이란 하나와 많음이 무너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르기를, 만약 신통 변화의 지은 바라면 안립이라고 하지 않는다. 곧바로 연기의 실덕이며 으레 그러하여 서로 용납하기 때문에 ‘안립’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습(相)을 따라 다르다’란, 이것은 모습에 나아가 설한 것이니, 말하자면 작은 모습과 큰 모습, 하나인 모습과 많은 모습 등이다.
‘십세十世가 법과 떨어져서 달리 이룬다(十世隔法異成)’란 (다음과 같다.)문 마땅히 ‘구세九世가 법과 떨어져서’라고 해야 하는데, 무슨 까닭에 총상의 일념을 함께 취하여 ‘법과 떨어져서’라고 하였는가?답 총상과 별상의 시간으로 총상과 별상의 법과 떨어지는 것이 또한 어려움이 없다.‘때(世)를 따라 다르다’란, 하나하나의 때(世)에 각각 열 가지 법을 갖추니 이것이 때의 문이 갖추는 바이기 때문이다.
‘모든 갈무리의 순수하고 잡박한 것이 덕을 갖춘다(諸藏純雜具德)’란 「십무진장품」에 의거하여 세운 것이다. ‘문門을 따라 다르다’란 하나의 행을 오래 닦으면 ‘순수한 문’이라고 하고, 온갖 행을 가지런히 닦으면 ‘잡박한 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되 같지 않다(一多相容不同)’란 (다음과 같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미세하게 서로 용납함과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함의 두 문은 어떻게 다른가? -
006_0843_a_01L人現餘隱。須餘亦如是故也。微細相
006_0843_a_02L容安立者。微細目能含。相容目所含。
006_0843_a_03L安立通能所也。或反此云。微細則所
006_0843_a_04L含。相容則能含。第下之二第三二張 安
006_0843_a_05L則能安。立則所立也。下一多相容門
006_0843_a_06L具一容多多容一等二義。此微細門。
006_0843_a_07L約一容多之義。故古人云。如瑠璃瓶
006_0843_a_08L盛多芥子也。又云。微細者。難知之義。
006_0843_a_09L謂塵不轉大而能容刹。刹不轉小而
006_0843_a_10L能入塵。如是道理。甚深難知故也。相
006_0843_a_11L容者。一能容多故。又一一1)法。 [410] 皆
006_0843_a_12L亦如是故也。安立者。一多不壞故也。
006_0843_a_13L又云。若是神通變化所作。非謂安立。
006_0843_a_14L直是緣起實德法爾相容。故云安立
006_0843_a_15L也。從相異者。此就相說。謂小相大相
006_0843_a_16L一相多相等也。十世隔法異成者。問。
006_0843_a_17L應云九世隔法。何故并取摠一念云
006_0843_a_18L隔法耶。答。以摠別時。隔捴別法。亦無
006_0843_a_19L難也。從世異者。一一世中。各具十
006_0843_a_20L法。此是世門所具故也。諸藏純雜具
006_0843_a_21L德者。依十無盡藏品立也。從門異者。
006_0843_a_22L一行長修則云純門。萬行齊2)修 [411] 則
006_0843_a_23L云雜門也。一多相容不同者。古人云。
006_0843_a_24L微細相容。一多相容。二門何別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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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3_b_01L서로 용납함은 비록 같으나 뜻이 다르다. 말하자면 ‘무엇이 서로 용납하는가’라는 까닭에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는 문이 있고, ‘서로 용납하는 모양이 어떠한가’라는 까닭에 미세하게 서로 용납하는 문이 있다.”라고 한다. ‘이理를 따라 다르다’란 진여의 이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과의 도리이다. 말하자면 원인이 결과를 갖출 수 있고, 하나가 많은 것을 갖출 수 있는 것 등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다(諸法相卽自在)’란 (다음과 같다.) 인연의 당체가 곧 원인이고 곧 결과이니, 이루는 주체인 원인 이외에 따로 이루어지는 대상인 결과의 법이 없다. ‘작용(用)을 따라 다르다’란 덕德의 작용이 자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전체가 상즉하는 작용이다. ‘또한 본성을 의거하는 것이기도 하다’란 머무름 없는 법성이다.문 다른 문은 어째서 머무름 없는 법성에 의거하는 것이 아닌가?답 비록 모두 법성에 의거하지만 멀고 가까움의 다름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중문은 다만 역용을 기준으로 하여 논한 것이고, 여기에서는 머무름 없는 본성의 이루는 바 법이 당체가 곧 공空하여 전체가 상즉함을 밝힌 것이니 법성과 극히 가깝기 때문이다.
‘오직 마음이 회전하여 잘 이룬다(唯心廻轉善成)’란, (마음은) 열하나의 조림심(十一稠林心)97)과 열 가지의 성기심(十種性起心)98) 등이다. ‘마음(心)을 따라 다르다’란 오직 마음이 회전하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낸다(托事現法生解)’란, 의탁되는 현상의 모습이 바로 곧 나타나는 다함없는 법의 체體이니 이것에 의탁하여 달리 드러나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지혜(智)를 따라 다르다’라는 것은 이해를 생겨나게 함을 기준으로 하여 말한 것이다.
대화엄경략책
『화엄략책華嚴略策』99)에 이른다.100) 열 번째는 다함없음을 나타낸다. 하나하나가 현묘함을 지어내어 한 법을 듦에 따라서 곧 열을 갖춘다. 말하자면, 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이다. 바다의 한 물방울이 백 개의 내(川)의 맛을 갖추는 것과 같다. 둘째, 넓음과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 없는 문이다. 직경 한 척의 거울에서 천 리의 영상을 보는 것과 같다. 셋째,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되 같지 않은 문이다. 한 방의 천 개 등이 빛과 빛이 사귀어 들어가는 것과 같다. -
006_0843_b_01L相容雖同而義別也。謂何者相容。故
006_0843_b_02L有一多相容門。相容之皃如何。故有
006_0843_b_03L微細相容門也。從理異者。非謂眞
006_0843_b_04L如之理。是因果道理也。謂因能具果
006_0843_b_05L一能具多等故也。諸法相即自在者。
006_0843_b_06L因緣當體。即因即果。能成因外。無
006_0843_b_07L別所成果法也。從用異者。德用自在
006_0843_b_08L故也。謂擧體相即之用也。亦可依
006_0843_b_09L性者。無住法性也。第下之二第三三張
006_0843_b_10L問。餘門。何不依無住法性耶。答。雖皆
006_0843_b_11L依性。非無遠近之殊。謂中門者。但
006_0843_b_12L約力用而論。此中明無住本性所成
006_0843_b_13L之法當體即空全體相即。與性切
006_0843_b_14L近故也。唯心廻轉善成者。十一稠林
006_0843_b_15L心。及十種性起心等也。從心異者。唯
006_0843_b_16L心廻轉。而不動故也。托事現法生解
006_0843_b_17L者。所托事相。正即所現無盡法體。
006_0843_b_18L非是托此別有所表也。從智異者者。
006_0843_b_19L約生解云也。
006_0843_b_20L花嚴略策云。十表無盡。一一浩玄。
006_0843_b_21L隨擧一法。即具十。謂一同時具足
006_0843_b_22L相應門。如海一滴具百川味。二
006_0843_b_23L廣俠自在無㝵門。如徑尺鏡見千
006_0843_b_24L里影。三一多相容不同門。一室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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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3_c_01L넷째,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는 문이다. 금과 금 색깔이 둘이 서로 여의지 않는 것과 같다. 다섯째, 비밀스럽게 숨은 것과 나타나는 것이 함께 이루는 문이다. 맑은 하늘의 조각달에 어두움과 밝음이 서로 함께하는 것과 같다.
여섯째, 미세하게 서로 용납하여 안립하는 문이다. 유리병에 담긴 많은 겨자와 같다. 일곱째, 인드라그물의 경계인 문이다. 두 거울이 서로 비춤에 빛을 전하여 서로 그려내니 번갈아 나타남이 끝이 없다. 여덟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이다. 서 있는 불상과 들어 올린 팔, 눈 닿는 것이 모두 도道이다. 아홉째, 십세十世가 법과 떨어져서 달리 이루는 문이다. 한밤의 꿈에 백 년을 돌아다니는 것이다. 열째, 주主와 반伴이 두렷이 밝아서 덕을 갖춘 문이다. 북극성이 머무는 곳을 뭇 별들이 받드는 것이다.
원통수좌기
『원통수좌기圓通首座記』101)에 이른다.102) 또 내 몸을 기준으로 하여 열 가지 쌍의 열 문을 논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나의 오척 되는 몸이 중생으로 하여금 깨닫도록 함을 나타내는 것은 가르침(敎)이고, 곧 이것이 설하는 바는 뜻(義)이다. 둘째, 내 오척 되는 몸이 곧 법성과 같은 것은 이법(理)이다. 경에 이르기를, “중생이 곧 법신이고 법신이 곧 중생이다.”103)라고 하기 때문이다. 오체五體104)와 사대가 분명하게 차별되는 것은 현상(事)이다. 셋째, 내 오척 되는 몸이 머리부터 발까지 공空하고 고요하여 걸림 없는 것이 관觀의 대상인 경계(境)이고, 이와 같이 관觀하는 것인 내 마음의 지혜가 관觀의 주체인 지혜(智)이다.
넷째, 내가 짓는 선善ㆍ악惡ㆍ무기 등의 행위가 행行이고, 이 행을 말미암기 때문에 얻는 범부의 지위 등이 지위(位)이다. 다섯째, 내가 짓는 업이 원인(因)이고, 이 업을 말미암기 때문에 불러오는 과보가 결과(果)이다. 여섯째, 내 오척 되는 몸이 8만 마리 벌레들의 의거하는 곳이기 때문이며, -
006_0843_c_01L燈光光渉入。四諸法相即自在門。
006_0843_c_02L如金金色二不相離。五秘密隱現
006_0843_c_03L俱成門。澄空片月晦明相映。 [235] 六
006_0843_c_04L微細相容安立門。如瑠璃瓶盛多
006_0843_c_05L芥子。七因陁羅網境界門。兩鏡
006_0843_c_06L3)互 [412] 照。傳輝相瀉。 [236] 遆出無窮。八托
006_0843_c_07L事現法生解門。立像竪臂。觸目皆
006_0843_c_08L道。九十世隔法異成門。一夕之夢。
006_0843_c_09L翺翔百年。十主伴圓明具德門。北
006_0843_c_10L辰居所。衆星拱之。
006_0843_c_11L圓通首座記云。且約吾身論十對
006_0843_c_12L十門者。一吾五尺身。表令生解爲
006_0843_c_13L敎。即是所詮爲義。二吾五尺身。
006_0843_c_14L即同法性爲理。經云。衆生即法身。
006_0843_c_15L法身即衆生第下之二第三四張 故。
006_0843_c_16L五體 [237] 四大。歷然差別爲事。三吾五
006_0843_c_17L尺身。從頭至足。 [238] 空寂無㝵。爲所
006_0843_c_18L觀境。如是觀者。是吾心智。爲能
006_0843_c_19L觀智。四吾之所造。善惡無記等行
006_0843_c_20L爲行。由此行故。得 [239] 凡夫位等。爲位。
006_0843_c_21L五吾所造業爲因。由此業故。 [240] 所感
006_0843_c_22L之報爲果。六吾五尺身。八萬戶虫
006_0843_c_23L「法」作「皆」{乙}。「修」作「終」{乙}。「互」作
006_0843_c_24L「玄」{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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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4_a_01L또 모든 부처님이 내 털구멍에 두루하면서 법을 설하시고, 또 경에 이르기를, “중생 형태의 세계이다.”라고 하기 때문에 의보(依)이고, 그러면서도 유정이기 때문에 정보(正)이다. 일곱째, 나의 본래 깨달음의 성품이 본래 항상 머물러 옮기지 않고 움직이지 않음이 체體이고, (그 체體가) 완연히 나타남이 작용(用)이다.
여덟째, 내 오척 되는 몸이 사람(人)이고, 연기법에 거두어지는 바이기 때문에 법法이다. 아홉째, 내가 짓는 선하지 않은 법이 진실을 거스르기 때문에 거스름(逆)이고, 지은 바가 선한 행위와 비슷함은 따름(順)이다. 열째, 나의 당래 과보로서의 부처님이 안으로 내 몸을 훈습하여 잠시도 버려둠이 없으니 내가 만약 선善을 지으면 도와서 더욱 늘어나게 하고, 내가 만약 악惡을 지으면 싫어함에 의지해서 벗어나게 함이 응應이고, 이는 나의 미혹한 마음이 얻는 바이기 때문에 감感이다.105)
이와 같이 나의 오척 되는 몸이 본래 스스로 만족하여 원만하거나 부분이거나 곧 가르침(敎) 등의 열 가지 쌍을 갖추니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이 된다. 오척을 움직이지 아니하고 시방삼세에 두루하니 넓음과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 없는 문 등이 된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이 관觀을 닦으면 움직이지 않는 범부의 몸이, 곧 자체의 비로자나불이며 다함없는 법의 바다이며 총상으로서의 보현이며 곧 안으로 깨닫는 국토이며 또한 화장세계이며 또한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규봉 선사圭峯禪師106)의 『행원품초』 가운데 “피부를 벗겨서 종이로 삼고 피를 내서 먹으로 삼고 뼈를 꺾어 붓으로 삼아 경전을 베껴 쓴다.”107)는 등의 문장을 풀이하여 이르기를,108) “둘째, 관觀하는 지혜를 기준으로 하여 풀이한다. 말하자면 이 몸을 관찰하면 피부나 뼈가 도무지 정해진 실체가 없으니 전체가 완전히 공空하여 나와 나의 것이 없다. -
006_0844_a_01L所依處故。又諸佛遍吾毛孔說法。 [241]
006_0844_a_02L又經云。衆生形世界故爲依。而是
006_0844_a_03L有情故爲正。七吾本覺性。本來常
006_0844_a_04L住。不1)迁 [413] 不動爲體。宛然現現 [242] 爲用。
006_0844_a_05L八吾五尺身爲人。以緣起法之所
006_0844_a_06L攝故爲法。九吾所造作不善之法。
006_0844_a_07L逆於眞故爲逆。所造相似善行 [243] 爲
006_0844_a_08L順。十吾當果佛。內熏我身。無暫
006_0844_a_09L捨頃。我若作善。助令增長。我若
006_0844_a_10L作惡。依猒令脫爲應。是我迷心之
006_0844_a_11L所得故爲感。如是吾五尺身。本自
006_0844_a_12L滿足。若圓若分。即具敎等十對。
006_0844_a_13L爲同時具足相應門。不動五尺。周
006_0844_a_14L遍十方三際。 [244] 爲廣2)俠 [414] 自在無㝵門
006_0844_a_15L等。 [245] 是故行者。若修此觀。不動
006_0844_a_16L凡身。即是自體毗蘆。無盡法海。捴
006_0844_a_17L相普賢。即是內訂國土。亦是花藏
006_0844_a_18L世界。亦可謂之大方廣佛花嚴經
006_0844_a_19L也。 [246]
006_0844_a_20L圭峰禪師行願品抄 [247] 中。釋剝皮爲
006_0844_a_21L紙第下之二第三五張 刺血爲黑
006_0844_a_22L折骨爲3)茟 [415] [248] 書寫經典等文云。二
006_0844_a_23L約觀智釋。謂觀察此身。若皮若骨。
006_0844_a_24L都無定實。擧體全空。無我我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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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4_b_01L비록 그러나 눈으로 보면 몸의 모습이 있는 듯하지만, 그것은 마치 거품이 모인 것과 물거품과 불꽃과 파초와 같다. 이미 자체가 없어서 원래로 법계와 같다. 이와 같이 미루어 궁구하면 세 진리(三諦)109)가 구족하여 공空ㆍ가假ㆍ중中의 미묘한 세 관觀을 이룬다. 이 뜻을 설함에 이 앎을 내어서 마음의 기틀에 계합하면 곧 이것이 경전을 베껴 쓰는 것이다. 경전은 설하여 나타내어 앎을 생겨나게 하는 뜻이기 때문이다. 만약 관찰하지 않으면 마음이 미혹하여 모습을 취하니 곧 경전이 없는 것이다. 이상.”라고 하니, 또한 이 뜻에 해당한다.화엄의 학인이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남악관공기
『남악관공기南嶽觀公記』에 이른다.문 열 가지 문이 매우 깊어 보기가 어려우니, 청컨대 우선 문의 모습을 시설하여 주십시오.답 열 가지 연기의 도리가 있다. 말하자면 첫째, 동시에 구족하여 (상응하는 문)은 법계의 상응하는 도리이다. 둘째, 인드라그물의 (경계인 문)은 법계의 다함없는 도리이다. 셋째, 비밀스럽게 숨는 것과 나타나는 것이 (함께 이루는 문)은 법계의 서로 이루는 도리이다. 넷째, 미세하게 서로 용납하여 (안립하는 문)은 법계의 가지런히 나타나는 도리이다. 다섯째, 십세十世가 법과 떨어져서 (달리 이루는 문)은 법계의 흘러 바뀌는 도리이다. 여섯째, 모든 갈무리의 순수하고 잡박한 것이 (덕을 갖춘 문)은 법계의 덕을 갖추는 도리이다. 일곱째, 하나와 많음이 서로 용납하되 (같지 않은 문)은 법계의 인과도리이다. 여덟째, 모든 법이 상즉하여 (자재하는 문)은 법계의 덕의 작용(德用) 도리이다. 아홉째, 오직 마음이 돌아 바뀌어 (잘 이루는 문)은 법계의 모여 일어나는 도리이다. 열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은 법계의 앞에 나타나는 도리이다. 깊이 생각할 것이다.
문 열 가지 현묘한 연기(十玄緣起)의 관법을 어떻게 이룰 수 있습니까? 만약 열 가지 문을 따라서 열 가지 관觀을 이루면 정진하는 마음이 흩어져 비어서 한 관觀도 이루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열 가지 문의 다름을 따라서 그 마음에 노닐기 때문입니다. 만약 열 가지 문을 버린다면 관행이 좁아져서 다함없음에 응하지 못하니 곧 삼승과 같습니다. -
006_0844_b_01L雖然目4)覩。 [416] 似有身 [249] 相。其猶聚沫
006_0844_b_02L泡熖芭蕉。 [250] 旣無自體。元同法界。
006_0844_b_03L如是 [251] 推窮。 [252] 三諦具足。成空假中微
006_0844_b_04L妙三觀。詮於此義。生得此解。契
006_0844_b_05L合心機。即是寫經。以經是詮表
006_0844_b_06L生解義故。若不觀察。 [253] 心迷取相。
006_0844_b_07L即無經也。 [254] 已上。 亦當此義。花嚴學
006_0844_b_08L人。胡不勉旃。 [255]
006_0844_b_09L南岳觀公記云。問。十門甚深。難可
006_0844_b_10L得見。請且施設門相。答。有十種緣
006_0844_b_11L起道理。謂一同時具足者。法界相
006_0844_b_12L應道理。二因陁羅網者。法界無盡
006_0844_b_13L道理。三秘密隱現者。法界相成道
006_0844_b_14L理。四微細相容者。法界齊現道理。
006_0844_b_15L五十世隔法者。法界流轉道理。六
006_0844_b_16L諸藏純雜者。法界具德道理。七一
006_0844_b_17L多相容者。法界因果道理。八諸法
006_0844_b_18L相即者。法界德用道理。九唯心廻
006_0844_b_19L轉者。法界集起道理。十托事現法
006_0844_b_20L者。法界現前道理。深思之矣。問。
006_0844_b_21L十玄緣起觀法。如何可成。若隨十
006_0844_b_22L門而成十觀。進心曠蕩。不成一觀。
006_0844_b_23L何以故。隨十門別。遊其心故。若捨
006_0844_b_24L十門。觀行局促。不應無盡。即同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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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4_c_01L답 이 뜻은 실로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이해를 냄(生解)과 행을 이룸(成行)이다. 혹은 이해를 냄을 기준으로 하여 열 가지 문을 갖추어 설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함없는 이해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혹은 행行을 이룸을 기준으로 하여 열 가지 문을 갖추어 설한다. 말하자면 ‘연기’라는 한마디 말에 모든 법이 둘이 아님이 곧 이미 드러나 있는데 왜 많은 문을 필요로 하겠는가?110) 그러나 하나를 말하는 것이 많음을 어기지 않고, 많음을 말하는 것이 하나를 어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만약 연기법을 보면 곧 노사나불을 뵙는다.”111)라고 하니 이것을 일컫는 것이다. 만약 하나의 연기관을 이룬다면 열 가지 문이 상응한다.
문 그 성해의 과분은 인드라(그물의 경계) 등을 논하지 않으니 마음 지혜의 길이 끊어져서 오직 성해를 관觀하면 족한데, 왜 열 가지 문의 관觀을 이룰 필요가 있습니까?답 다만 성해만을 관觀한다면 그 관觀이 치우침이 있다. 저 삼승의 보살도 오히려 두 진리를 함께 비추어 공空과 있음에 함께 노님을 머무름 없음이라고 이름하는데, 하물며 일승이겠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나, 일어나면 처음과 마지막을 여읜다. 그러므로 일어남이 일어나지 않음과 합하여 하나의 경계(際)가 되어야 비로소 머무름 없는 연기의 중도관이 된다.
문 일승의 행자가 어느 지위에 이르러야 열 가지 문의 걸림 없는 작용이 있습니까?답 해행解行의 지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큰 작용이 있다. 만약 견문見聞의 중생이라면 겨우 금강의 종자를 이룰 뿐이다. 또 견문 가운데 곧 걸림 없는 큰 작용을 일으킨다.
문 넓음과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 없는) 문에서 4구四句와 6구六句를 어떻게 봅니까?답 혹은 넓어서 끝이 없으며, 혹은 분한이 역연하며, 혹은 넓음과 좁음이 함께 있으며, 혹은 넓음과 좁음이 함께 없다. 혹은 앞의 넷을 갖추니, 이해의 경계(解境)이기 때문이다. -
006_0844_c_01L乘。第下之二第三六張 答。此義實難。
006_0844_c_02L然有二義。生解成行。若約生解。
006_0844_c_03L具說十門。不爾。不得生無盡之解
006_0844_c_04L故也。若約成行。具說十門。謂緣
006_0844_c_05L起一言。諸法無二。即現了手。何須
006_0844_c_06L多門。然言一不違多。言多不違一。
006_0844_c_07L故經云。若見緣起法。即見盧舍那。
006_0844_c_08L此之謂也。若成一緣起觀。則十門
006_0844_c_09L相應也。問。其性海果分。不論因陁
006_0844_c_10L羅等。心智路絕。唯觀性海足矣。
006_0844_c_11L何須成十門觀耶。答。但觀性海。其
006_0844_c_12L觀有偏。彼三乘菩薩。尙雙照二諦。
006_0844_c_13L俱遊空有。名爲無住。況乎一乘。不
006_0844_c_14L起則已。起則離始終。故起與不起
006_0844_c_15L合爲一際。方爲無住緣起中道觀
006_0844_c_16L也。問。一乘行者。至於何位。有十門
006_0844_c_17L無㝵用耶。答。至解行位。方有大用。
006_0844_c_18L若見聞生。纔成金剛種耳。又見聞
006_0844_c_19L中。即起無㝵大用。問。廣*俠門中。
006_0844_c_20L四句六句。云何見耶。答。或廣無際。
006_0844_c_21L或分限歷然。或廣*俠俱存。或廣
006_0844_c_22L*俠俱泯。或具前四。是解境故。或
006_0844_c_23L「迁」作「還」{乙}。「俠」作「狹」{乙}次同。「茟」
006_0844_c_24L作「筆」{乙}。「覩」作「觀」{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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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5_a_01L혹은 앞의 다섯을 끊으니, 행의 경계(行境)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앞의 세 구는 연기가 앞에 나타나는 뜻이고, 다음 한 구는 연기가 생겨남이 없는 뜻이다.문 무슨 까닭에 앞의 네 구를 갖추는 것이 이해의 경계입니까?답 이해를 일으킨 사람이 모든 법의 두루함(普)과 개별(別), 본성(性)과 모습(相)을 따로 알아야 비로소 바른 이해를 일으킨다. 만약 따로 알지 못하면 곧 삿된 견해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앞의 두 구는 두루함과 개별이 서로 마주한 것이고 뒤의 두 구는 본성과 모습이 서로 마주한 것이다.
그러므로 「유전장流轉章」112)에 이르기를, “문 한 문113)의 생각 없음(無念)이 바로 충분하거늘 어찌 위와 같이 널리 분별함을 필요로 하는가?답 만약 앞과 같이 그 뜻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견해가 굴복되지 않고 생겨난다. 만약 이해(解)와 행行이 다름을 구별하여 알지 못한다면 곧 망령되게 이해로 행行을 삼아서 망정을 깨뜨리지 못한다. 설령 총체적으로 앎이 없더라도 다만 억지로 마음을 억눌러서 여러 관觀을 짓는다. 아울러 그중에 짓는다고 말하나 참된 행行이 아니니, 끝내는 악한 견해를 늘려서 마魔의 그물에 들어가 이익을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백천의 벙어리 양羊 같은 중(瘂羊僧)114)은 지혜 없이 삼매(精慮)를 닦으니 설령 백천 겁이라도 열반을 얻는 이 하나 없고, 총민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능히 법을 듣고 법을 설하니 바란다고 생각하는 잠깐 사이에 빠르게 열반에 이를 수 있다’115)고 하였다.”116)라고 한다.
문 무슨 까닭에 혹은 앞의 다섯을 끊음이 행의 경계(行境)입니까?답 오직 관법을 총괄하면 한 몸이기 때문에 다섯 구의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운화 존자가 이르기를,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다만 하나를 말할 뿐이기 때문이다.”117)라고 하였다. 또 경에 이르기를, “모든 법에 두 가지 이해를 내지 않는다.”118)라고 하였다.
문 관법을 총괄하면 한 몸이어서, 넒음 등의 4구를 짓지 않는다면 넓음과 좁음이 (자재하여 걸림 없는 문)에 거두어지지 않는 것입니까?답 비록 하나의 관觀을 갖추어도 머무름이 없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 걸림이 없다. -
006_0845_a_01L絕前五。是行境故。此中前三句。
006_0845_a_02L是緣起現前義。次一句。是緣起無
006_0845_a_03L生義。問。何故具前四句是解境耶。
006_0845_a_04L答。起解之人。以別知諸法普別性
006_0845_a_05L相。方起正解。若不別知。即滯邪見。
006_0845_a_06L是故。前二句。是普別相對。後二
006_0845_a_07L句。第下之二第三七張 是性相相對。
006_0845_a_08L故流轉章云。問。一門無念便足。何
006_0845_a_09L須如上廣分別耶。答。若不如前深
006_0845_a_10L思彼義。則見不伏生。若不別 [256] 知解
006_0845_a_11L行別者。即妄以解爲行。情謂不破。
006_0845_a_12L設捴無知。但强伏心而作諸觀。並
006_0845_a_13L謂中作。非是眞行。究竟增惡見。
006_0845_a_14L入於魔網。不能成益。故經云。百千
006_0845_a_15L噁 [257] 羊僧。無惠修靜慮。設於百千刼。
006_0845_a_16L無一得涅槃。聰敏智惠人。能聽法
006_0845_a_17L說法。 1)歛 [417] [258] 念須臾頃。能速至涅槃。
006_0845_a_18L問。何故或絕前五是行境耶。答。唯
006_0845_a_19L是捴觀法是一身故。無五句差別
006_0845_a_20L也。是故。雲華云。莫須多噵。只言
006_0845_a_21L一故。又經云。於諸法中。不生二
006_0845_a_22L解。問。捴觀法是一身。不作廣等四
006_0845_a_23L句者。不爲廣*俠攝耶。答。雖具一
006_0845_a_24L觀。而是無住故。隨須無㝵。如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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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5_b_01L운화 존자가 이르는 바와 같이, “무분별하여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뭇 일을 이룰 수 있다.”119)라고 한 것과 같다.
문 이해(解) 중의 네 구는 어째서 무분별이 아닙니까? 또 행의 경계에서 비록 하나의 관觀이지만 네 구를 방해하지 않는다면 이해와 행行의 차별을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답 (이해와 행의) 둘이 아울러 각각 통하지만 그러나 치우쳐 더함이 있다. 말하자면 이해(解)를 이루고자 하면 하나의 많은 뜻으로써 그 이해가 치우치지 않고, 만약 행行을 이루고자 하면 바로 많음의 하나인 관觀으로 그 행行이 어지럽지 않다.
문 무슨 까닭에 다만 함께 끊음으로 행行을 삼습니까? 마땅히 보현의 행行 가운데에 모든 구절의 걸림 없는 작용을 갖추었다고 해야 합니까?답 운화 존자가 이르기를, “진제와 속제 두 진리는 분별로 아는 것이 아니다. 다만 유정의 견해에 상대하기 때문에 두 모습으로 나눈 것뿐이다. 오직 유정의 견해를 넘는다면 역관과 순관이 상응할 것이다.”120)라고 하였다. 이로써 그 다섯 (구)를 끊는 것은 오직 유정의 견해를 넘게 하고자 할 뿐임을 안다.
문 앞의 다섯 구를 끊어서 그 하나의 관觀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답 만약 넓다고 말하면 다른 말은 필요 없고 좁다고 말하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유정의 견해를 넘으면 넓음과 좁음이 상응한다. 또 옛사람이 이르기를, “걸음을 걷는 것은 이해이고 걸음을 걷지 않는 것은 행行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일리가 있다. 신림 대덕이 이르기를, “별상을 여읜 총상이 있으니 모든 법의 구경의 체體이다.”121)라고 하였다. 넒음 등의 네 구를 끊어야 비로소 넒음 등이 구경이 되는 까닭에 별상인 모든 연을 모두 끊음이 바로 구경의 총상임을 안다. 또 어떤 이는 이른다. 이해란 닦음에 나아가는 사람의 이해이다. 경계란 넒음과 좁음 등의 법이다. 처음 수행하는 사람은 연기분의 걸림 없는 법으로 이해의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행行이란 연기분의 보현의 행行이다. 경계란 열 부처님의 성해性海이다. -
006_0845_b_01L華所云。無分別不住故。能成衆事。
006_0845_b_02L問。解中四句。豈非無分別耶。又行
006_0845_b_03L境中。雖是一觀不防四句者。解行
006_0845_b_04L差別。云何可見。答。二並各通。然
006_0845_b_05L有偏增。謂欲成解。則以一之多義。
006_0845_b_06L其解不偏。若欲成行。便是多之一
006_0845_b_07L觀。其行不亂。問。何故但以俱絕爲
006_0845_b_08L行耶。應云。普賢行中具足諸句無
006_0845_b_09L㝵用耶。答。雲華云。眞俗二諦。非
006_0845_b_10L分別知。但對情見。 [259] 故分二相。 [260] 唯越
006_0845_b_11L情見。第下之二第三八張 逆順相應。
006_0845_b_12L以此故知。絕其五者。唯是令越情
006_0845_b_13L見耳。問。絕前五句成其一觀者。
006_0845_b_14L何耶。答。若言廣不須餘語。言*俠
006_0845_b_15L亦爾。然越情見。廣*俠相應也。又
006_0845_b_16L故人云。行步是解。不行步是行。
006_0845_b_17L此言有在也。林德云。有離別捴相。
006_0845_b_18L是諸法究竟之體也。以絕廣等四
006_0845_b_19L句方爲廣等究竟故。知都絕別
006_0845_b_20L相諸緣。正是究竟捴相也。又有云。
006_0845_b_21L解者是進修者解也。境者廣*俠
006_0845_b_22L等法也。初修之人。以緣起分無
006_0845_b_23L㝵之法爲所解故。行者是緣起分
006_0845_b_24L普賢之行。境是十佛性海。謂緣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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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5_c_01L말하자면 연기분의 행行하는 사람이 저 성해로 행의 경계(行境)를 삼기 때문이다. 저 옛사람이 “일승의 행자는 오직 국토해를 닦는다.”라고 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대기『대기』에 이른다. ‘『화엄경』과 같다’란 (다음과 같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대경』의 제목 중에서 ‘대방大方’은 기세간이다. ‘광불廣佛’은 부처님의 세계이다. ‘화花’는 원인이니 위로 등각等覺에서부터 아래로 육취에 이르기까지 곧 중생계이다. ‘엄嚴’은 이 셋이 연기하여 서로 융섭하고 즉卽해서 두렷이 밝고 자재한 것이다. ‘경經’은 앞의 경계를 육상으로 관觀하는 지혜로써 이해(解)와 행行을 꿰뚫어 지녀서 잃어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관觀하는 지혜에 사이가 있다면 서로 이어져서 꿰뚫어 지니지 못하니 곧 ‘경經’이 아니다. 총상은 일곱 글자의 제목이고, 별상은 다함없는 품과 모임이며, 동상은 품과 모임이 모두 같은 것이고, 이상은 품과 모임이 각각 다른 것이며, 성상은 연기하여 모아 이루는 것이고, 괴상은 품과 모임이 각각 머무는 것이다.
화엄금관초
『화엄금관초花嚴錦冠鈔』122)에 이른다. 첫 번째, 경의 제목을 해석한다. 운운. ‘대大’ 등 일곱 글자를 간략히 일곱 문으로 분별한다. 운운.네 번째 펼쳐서 폄에 끝이 없음은 미세한 것에서 분명한 것에 이르기까지 간략히 여덟 거듭이 있고 자세히는 열 거듭이다. 처음, 가장 청정한 법계를 굳이 이법(理)과 지혜(智)의 두 문으로 나누니 곧 보리와 열반의 다름이다. 둘째, 이법에 체體와 모습(相)과 작용(用)을 열어서 ‘대방광大方廣’으로 삼고, 지혜에 원인과 결과를 열어서 ‘불화엄佛華嚴’으로 삼으니 ‘엄嚴’은 원인과 결과에 통하기 때문이다. 연결하여 합해서 말을 이루니 이에 ‘경經’이라고 이름한다. 곧 제목 중 일곱 글자에서 위의 둘123)은 법을 펼친 것이고 아래는 모두 장소를 펼친 것이다.
셋째, 일곱 글자를 펼쳐서 (『화엄경』의) 첫 모임을 이룬다. -
006_0845_c_01L分行人。以彼性海爲行境故。如
006_0845_c_02L古人言。一乘行者。唯修國土海。
006_0845_c_03L正在玆乎。
006_0845_c_04L大記云。如花嚴經者。古人云。大經
006_0845_c_05L題名中。大方則器界。廣佛則佛界。
006_0845_c_06L花則是因。上從等覺下至六趣。即是
006_0845_c_07L生界。嚴則此三緣起。互相融即。圓
006_0845_c_08L明自在。經則於前境界。以六相觀智。
006_0845_c_09L是解是行。貫持不失故也。若觀智有
006_0845_c_10L間。不得相續貫持。則非經矣。捴則
006_0845_c_11L七字題名。別則無盡品會。同則品會
006_0845_c_12L皆同。異則品會各異。成則緣起集成。
006_0845_c_13L壞則品會各住。
006_0845_c_14L花嚴錦冠鈔云。 2)弟一釋經題目。云
006_0845_c_15L云。 大等七字。第下之二第三九張 略
006_0845_c_16L以七門分別。云云。 *弟四展演無窮
006_0845_c_17L者。從微至著。略有八重。廣則十
006_0845_c_18L重。初於最淸淨法界。强分理智二
006_0845_c_19L門。即菩提涅槃之異。二於理開體
006_0845_c_20L相用爲大方廣。於智開因果爲佛
006_0845_c_21L花嚴。嚴通因果故。連合成詮。乃
006_0845_c_22L名爲經。即題中七字。上二展法。
006_0845_c_23L下皆展處。三展七字以成初會。
006_0845_c_24L「歛」作「欲」{乙}。「弟」作「第」{乙}次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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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6_a_01L첫 모임은 총摠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열 바다124)와 열 지혜가 있다. 열 바다 가운데 체體와 모습(相)과 작용(用)이 있으니 곧 ‘대방광大方廣’이고, 열 지혜 가운데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으니 곧 ‘불화엄佛華嚴’이다. 이것을 말로 풀이하니 곧 이름하여 ‘경經’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이것을 예로 한다.
넷째, 첫 모임을 펼쳐서 뒤의 여덟 모임을 이룬다. 여덟 모임 가운데 네 거듭의 원인과 결과가 있다. 그 관觀의 대상과 증득의 대상이 곧 ‘대방광大方廣’이고 관觀의 주체와 증득의 주체가 모두 ‘불화엄佛華嚴’이다. 다섯째, 펼쳐서 법계의 같은 부류의 세계에 변만하니 모두 아홉 모임이 있다. 여섯째, 같은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 변만하다. 일곱째, 법계의 다른 부류의 세계에 변만하다.
여덟째, 법계의 다른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 변만하다. 혹은 같고 혹은 다름에 각각 주主와 반伴을 겸하여서 곧 열 거듭을 이룬다.125) 혹은 허공의 티끌길126)의 인드라그물 세계(刹土)에 변만함으로써 열 거듭을 삼는다. 이것은 법계 안에는 한 티끌, 한 세계(刹)도 이 경을 설하지 않음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경』에 이르기를, “비로자나불의 원력이 법계에 두루하니, 일체 국토 가운데 항상 위없는 법륜을 굴린다.”127)라고 하고, 또 “이곳에서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일체의 티끌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부처님의 몸은 가심도 없고 또한 오심도 없으나, 있는 바 국토에서 모두 분명하게 본다.”128)라고 한 것이다.
다섯 번째 말아서 거둠이 서로 다함은 (다음과 같다.) 말하자면 다른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서 설하는 바가 다른 부류의 세계 가운데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다른 부류의 세계 가운데 설하는 바가 같은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서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같은 부류의 세계의 티끌에서 설하는 바가 같은 부류의 세계에서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같은 부류의 세계에서 설하는 바는 보광명전 (이후의) 여덟 모임에서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여덟 모임에서 설하는 바는 첫 모임에서 설하는 바와 다르지 않다. 첫 모임에서 설하는 바는 제목의 일곱 글자를 벗어나지 않는다. -
006_0846_a_01L初會摠故。彼有十海十智。十海之
006_0846_a_02L中。有體相用。即大方廣。十智之
006_0846_a_03L中。有因有果。即佛花嚴。詮釋於
006_0846_a_04L此。即名爲經。餘皆例此。四展初
006_0846_a_05L會以成後八會。八會之中。有四
006_0846_a_06L重因果。其所觀所1)訂。即大方廣。
006_0846_a_07L能觀能訂。皆佛花嚴。五展遍於法
006_0846_a_08L界同類刹中。皆有九會。六遍同
006_0846_a_09L類刹塵。七遍法界異類刹中。八遍
006_0846_a_10L法界異類刹塵。若同若異。各兼主
006_0846_a_11L伴。即成十重。或以遍虛空塵道
006_0846_a_12L帝網刹土。以爲十重。斯則法界之
006_0846_a_13L內。無有一塵一刹。不說此經也。
006_0846_a_14L故大經云。毗蘆遮那佛。願力周法
006_0846_a_15L界。一切國土中。恒轉無上輪。又如
006_0846_a_16L於此處見佛坐。一切塵中亦復然。
006_0846_a_17L佛身無去亦無來。所有國土皆明
006_0846_a_18L見。 *弟五卷攝相盡者。謂異類刹
006_0846_a_19L塵所說。不殊異類刹中所說。異類
006_0846_a_20L刹中所說。不殊同類刹塵所說。同
006_0846_a_21L類刹塵所說。不殊同類刹中所說。
006_0846_a_22L同類刹中所說。不殊普光八會所
006_0846_a_23L說。第下之二第四○張 八會所說。不
006_0846_a_24L殊初會所說。初會所說。不出題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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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6_b_01L제목의 일곱 글자는 이법과 지혜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법과 지혜는 청정한 법계를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이 ‘청정한 법계’라는 이름 또한 안립한 것일 뿐이니 체體는 얻을 수 없다. 이것은 곧 자취가 없고 흔적이 끊어졌으니 말과 생각으로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대경』에 이르기를, “법성은 본래 공空하고 고요하여 취함도 없고 또한 봄도 없다. 성품이 공함이 곧 부처이니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다.”129)라 하고, 또 “혹 진실하고 혹 진실하지 않고 혹 허망하고 허망하지 않음이 세간과 출세간에 다만 임시의 말만 있을 뿐이다.”130)라고 한 것이다.
여섯 번째, 펼치는 것과 마는 것이 걸림이 없음은 운운. 펼치는 것과 마는 것이 한 때이니 걸림이 없다. 자세함이 곧 간략함이고 간략함이 곧 자세함이어서 모두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마음을 관觀하는 데로 거두어 돌아감은, 이제까지는 가르침의 말과 뜻을 기준으로 하여 많은 문이 있었으나, 만약 한마음에 거두어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어디에 참예하겠는가. 지금은 마음을 일으켜 수행하게 하는 행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말한 바 ‘대大’란 곧 마음의 체體이니, 마음의 체體는 가없어서 ‘대大’라고 이름한다. ‘방方’은 마음의 모습(相)이니, 마음이 덕 있는 모습의 법을 갖추었기 때문에 ‘방方’이라고 이름한다. ‘광廣’은 마음의 작용(用)이니, 마음에 체體에 걸맞는 작용이 있기 때문에 ‘광廣’이라고 이름한다. ‘불佛’은 마음의 결과이니, 마음이 해탈한 곳을 이름하여 ‘불佛’이라고 한다. ‘화花’는 마음의 원인이니, 마음이 행하는 바의 행行을 ‘화花’로 비유한 것이다. ‘엄嚴’은 마음의 공용功用이니, 마음이 훌륭하고 교묘하게 장엄하고 꾸밀 수 있음을 지목하여 ‘엄嚴’이라고 한다. ‘경經’은 마음의 가르침이니, 마음이 이름과 말을 일으켜서 말이 여기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름하여 ‘경經’이라고 한다.
이것은 ‘대大’ 등의 일곱 글자가 함께 마음을 여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마음(心)’이라는 한 글자는 체體도 아니고 작용도 아니며, 원인도 아니고 결과도 아니며, 뜻도 아니고 가르침도 아니다. 비록 일체가 아니나 일체가 될 수 있다. 무슨 까닭인가? 하나의 법계의 마음은 상대를 끊은 법이기 때문이다. -
006_0846_b_01L七字。題中七字不出理智。理智
006_0846_b_02L不出淸淨法界。只此淸淨法界之
006_0846_b_03L名。亦是安立。體不可得。斯則泯蹤
006_0846_b_04L絕跡言思所不及也。故大經云。
006_0846_b_05L法性本空寂。無取亦無見。性空即
006_0846_b_06L是佛。不可得思量。又云。若實若不
006_0846_b_07L實。若妄若不妄。 [261] 世間出世間。但
006_0846_b_08L有假言說。 *弟六展卷無㝵。云云。 展
006_0846_b_09L卷一時。無有障㝵。廣即是略。略
006_0846_b_10L即是廣。皆無障㝵故。 *弟七攝歸
006_0846_b_11L觀心者。上來約敎詮義。有是多門。
006_0846_b_12L若不攝歸一心。則於我何預。今則
006_0846_b_13L令知有行發意修行。所言大者。即
006_0846_b_14L是心體。心體無邊。故名爲大。方
006_0846_b_15L是心相。心具德相之法。故名爲
006_0846_b_16L方。廣是心用。心有稱體之用。故
006_0846_b_17L名爲廣。佛是心果。心解脫處。名
006_0846_b_18L之爲佛。花是心因。心所行行。喩之
006_0846_b_19L以花。嚴是心之功用。心能善巧嚴
006_0846_b_20L飾。目之爲嚴。經是心敎。心起名言。
006_0846_b_21L詮現於此。故名爲經。斯則大等七
006_0846_b_22L字。並不離心。然心之一字。非體
006_0846_b_23L非用。非因非果。非義非敎。雖非
006_0846_b_24L一切。能爲一切。何以故。以一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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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6_c_01L문 말한 바 관행觀行은 행하는 모습이 어떠한가?답 운운.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는 법계(事事無礙法界)를 마주하여 곧 현상과 현상이 걸림 없음에 대한 관觀을 이루기 때문에 상즉상입하여, 넓음과 좁음, 숨음과 나타남, 주主와 반伴이 서로 참여하여 거듭거듭 다함없음 등도 또한 법을 근본으로 한다. 이와 같이 법에 의거하여 관觀하는 까닭에 이름하여 ‘관觀’이라고 한다. 관觀에 의거하여 행行을 일으키니 행行 또한 이와 같다.
사대상전법륜관
『사대상전법륜관四大常轉法輪觀』131)에 이른다. 이 경의 뜻을 얻고자 하면 합하여 세 단이 있다. 첫째는 ‘대방광불大方廣佛’ 등의 일곱 글자를 설하는 것이고, 둘째는 39품의 큰 뜻(大意)을 해석하는 것이며, 셋째는 도리를 나타냄에 관觀에 의거하여 자세히 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제목을 설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대방광大方廣’은 관觀하는 대상인 경계이고 ‘불화엄佛華嚴’은 관觀하는 주체인 마음이며 ‘경經’은 경계와 지혜에 통한다. 이른바 ‘대大’는 사대이고 ‘방方’은 사대의 띠끌이며 ‘광廣’은 하나하나의 티끌의 모습이 법계허공계와 구세ㆍ십세에 두루하지 않는 바가 없는 것이다. ‘불佛’은 이 이법을 이해하는 마음이다. ‘화花’는 이 마음이 청정하여 맑고 물듦을 여읜 것이다. ‘엄嚴’은 물듦을 여읜 마음에 거스름과 따름의 덕을 갖춘 것이다. ‘경經’은 주체와 대상(能所)에 둘이 없는 것이다.셋째, 도리를 나타냄에 관觀에 의거하여 자세히 해석하는 것은, 먼저 마음의 모습을 융섭하여 이 경의 뜻을 풀이한다. -
006_0846_c_01L界心是絕待法故。問。所言觀行者。
006_0846_c_02L行相如何。答。云云。 對事事無㝵法
006_0846_c_03L界。即成事事無㝵觀故。相即相入。
006_0846_c_04L廣2)俠隱現。主伴交叅。重重無盡
006_0846_c_05L等。亦以法本。如此依法而觀。故
006_0846_c_06L名爲觀。依觀起行。行亦如之。第下
006_0846_c_07L之二第四一張。
006_0846_c_08L四大常轉法輪觀云。欲得此經意。
006_0846_c_09L合有三段。一說大方廣佛等七字。
006_0846_c_10L二釋三十九品大意。三現道理依
006_0846_c_11L觀廣釋。初說題目者。大方廣者。
006_0846_c_12L所觀之境。佛花嚴者。能觀之心。
006_0846_c_13L經者。通於境智。所謂大者。四大。
006_0846_c_14L方者。四大之塵。廣者。一一塵相。
006_0846_c_15L法界虛空界。九世十世中。無所不
006_0846_c_16L周。佛者。解此理心。花者。此心淸
006_0846_c_17L淨。湛然離染。嚴者。離染心中。具
006_0846_c_18L逆順德。經者。能所無二。二釋品
006_0846_c_19L大意。說有摠別。摠者。三毒即三
006_0846_c_20L智。一一智中。具十德故。是爲三十。
006_0846_c_21L又一智中。具三世。具見聞解行
006_0846_c_22L訂。具三世間故。是爲九品。別者。
006_0846_c_23L云云。 三現道理依觀廣釋者。先融
006_0846_c_24L「訂」通「證」於此書{編}次同。「俠」作「狹」{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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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7_a_01L무엇이 마음의 모습을 융섭하는 것인가? 한 생각도 내지 않는 바른 생각으로 마음을 관觀하여 실상의 이법과 상응하는 때에 모든 마음의 모습을 여읜다. 이때 세 가지의 이익을 갖추어 얻는다. 하나는 열 가지 외도가 행하여 짓는 일을 뛰어넘는 것이다. 둘은 열 가지 이익을 얻는 것이다. 셋은 자기의 몸과 마음 중에 모든 법을 갖추어 보는 것이니, 밝은 거울을 집어 얼굴의 모습을 스스로 보는 것과 같다.
열 가지 이익이란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의 몸과 마음에 계戒와 선정과 지혜의 일체 법을 갖춘다. 경에 이르기를, “마음을 한 곳에 제어하니 변별하지 않는 일이 없다.”132)라고 한 것과 같다. 마음을 묶어 한 곳에 두면 지혜의 문을 열 수 있다. 하나를 지켜 옮기지 아니하면 정신이 흩어지지 않고 온갖 영령이 돕고 지킨다. 처음 부사의한 삼매를 배움에 마음을 하나의 연緣에 묶어서 만약 오래 익히는 자이면, 마음을 관觀하는 것을 성취하고 다시 마음의 모습이 없어서 항상 선정과 함께 한다. 일체의 마음의 모습이 곧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부사의한 선정이라고 이름한다. 운운.
경經에 다섯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일체경이고, 둘째는 한마음의 경(一心經)이고, 셋째는 자체의 경(自體經)이고, 넷째는 머무름 없음의 경(無住經)이고, 다섯째는 참모습의 경(實相經)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법계에 한마음의 도장으로써 모든 연緣의 체體에 도장 찍으면 일체의 모든 연緣이 도장의 무늬가 아님이 없기 때문에 일체경이다. 이 일체경이 오직 한마음의 양이기 때문에 한마음의 경이다. 마음의 모든 법이 체體가 있기 때문에 자체의 경이다. 자체가 ‘나’가 없어서 일체에 집착이 없기 때문에 머무름 없음의 경이다. 이 머무름 없음의 경은 맑아서 모습이 없기 때문에 참모습의 경이다. 첫째는 문자의 경이고, 다음은 뜻의 경(義經)이고, 다음은 관의 경(觀經)이고, 다음은 선정의 경(定經)이고, 마지막 하나는 법의 경(法經)이다. -
006_0847_a_01L心相。解此經意。云何融心相。一
006_0847_a_02L念無生正念觀心。與實相理。相應
006_0847_a_03L時中。離諸心相。尒時。具得三種利
006_0847_a_04L益。一者。超過十種外道所爲作事。
006_0847_a_05L二者。獲得十種利。三者。自身心中。
006_0847_a_06L具見諸法。如執明鏡自見面像。
006_0847_a_07L十種利益者。一者。自身心中。具戒
006_0847_a_08L定惠一切法。如經云。制心一處。
006_0847_a_09L無事不辨。繫心在一處。能開智惠
006_0847_a_10L門。守一不移。精神不散。萬靈扶
006_0847_a_11L衛。初學不思議三昧。繫心一緣。
006_0847_a_12L若久習者。觀心成就。更無心相。
006_0847_a_13L恒與定俱。一切心相。即非心故。
006_0847_a_14L是名不思議定。云云。 經有五種。一
006_0847_a_15L一切經。第下之二第四二張 二1)一 [418]
006_0847_a_16L心經。三自體經。四無住經。五實
006_0847_a_17L相經。謂於一法界。以一心印。印
006_0847_a_18L諸緣體。一切諸緣。無不印文故。
006_0847_a_19L一切經也。此一切經。唯一心量故。
006_0847_a_20L一心經也。心之諸法。有體故。自體
006_0847_a_21L經也。自體無我。於一切中。無2)着
006_0847_a_22L故。無住經也。此無住經。湛然無
006_0847_a_23L相故。實相經也。初文字經。次則
006_0847_a_24L義經。次則觀經。次則定經。後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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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7_b_01L심륜초
『심륜초心輪鈔』에 이른다.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룬 부처님이 해인삼매에 들어가 증득하는 바 법문에 간략히 여섯 거듭의 경이 있다. 첫째는 안과 밖을 여읜 경이다. 둘째는 안을 향하는 경이다. 셋째는 밖을 향하는 경이다. 넷째는 안과 밖이 상응하는 경이다. 다섯째는 안에서 간략히 설하는 경이다. 여섯째는 근기를 위하여 장차 설하는 경이다. 이른바 앞의 세 경은 과분果分의 자리自利이기 때문에 과분의 별교이고, 뒤의 세 경은 인분因分의 자리自利이기 때문에 인분의 별교이다.
원통수좌기
『원통수좌기圓通首座記』133)에 이른다. 『화엄경』 첫머리의 ‘여시아문如是我聞’ 네 글자를 해석함에 세 가지 뜻이 있다. 이것에 대하여 아래의 ‘시성정각始成正覺’도 또한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는 말을 여읜 현묘하고 고요한 곳이다. 말하자면 모습이 끊어져 지목할 수 없는 법성이 현묘하고 미세하게 뛰어넘어서 생각 밖(意外)의 곳이다. 지목할 수 없는 법성이란 법계의 법의 이름과 지위가 움직이지 않는 곳이다. 만약 지금 내 오척 되는 몸이라면 오직 오척이 이것일 뿐이다. 이 오척에 다시 부처님의 이름, 법의 이름을 지목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목할 수 없는 법성’이라고 한 것이다. 이 ‘오척이라는 이름이 바로 곧 법의 체體인데 이 이름이 법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하니 이와 같이 헤아리는 자는 미치지 못하는 곳이므로 ‘뛰어넘어서 생각 밖’이라 하고, 또 ‘모습이 끊어져’라고 하는 것이다.
문 ‘오직 오척이 이것일 뿐이다’란, 연기의 경계에서는 이 뜻을 허용할 수 있지만 어째서 성해性海라고 하는가?답 이 ‘오척’이라는 이름의 연緣 가운데 오척의 법을 세우는 것은 연기의 인분이고, 이 이름 이외에 다시 한 법도 세울 수 없는 것은 성해의 과분이다. -
006_0847_b_01L法經也。
006_0847_b_02L心輪鈔云。始成正覺佛。入海印三
006_0847_b_03L昧。所訂法門。略有六重經。一者。
006_0847_b_04L離內外經。二者。向內經。三者。向外
006_0847_b_05L經。四者。內外相應經。五者。內中略
006_0847_b_06L說經。六者。爲機將說經。所謂前三
006_0847_b_07L經。是果分自利故。果分別敎。後
006_0847_b_08L三經。是因 [262] 分自利故。因分別敎。
006_0847_b_09L圓通首座記云。花嚴經首。如是我
006_0847_b_10L聞四字。釋有三義。對此則下始
006_0847_b_11L成正覺。亦有三義也。3)弟一離言
006_0847_b_12L玄寂之處。謂絕相不可目法性。玄
006_0847_b_13L微超出。意外之處也。不可目之法
006_0847_b_14L性者。法界法之名位不動處也。若
006_0847_b_15L今我五尺身者。唯五尺是耳。此五
006_0847_b_16L尺上。不許更目佛名法名。故云不
006_0847_b_17L可目之法性也。此五尺名。正即法
006_0847_b_18L體。而謂此名是法上所立。如是
006_0847_b_19L計者。所不及處故。云超出意外。
006_0847_b_20L又云絕相也。問。唯五尺是耳者。緣
006_0847_b_21L起之際。第下之二第四三張 可許此
006_0847_b_22L義。何云性海耶。答。於此五尺名之
006_0847_b_23L緣中。立五尺法者。緣起因分也。
006_0847_b_24L此名以外。更無一法可立者。性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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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7_c_01L그러므로 법장 스님이 이르기를, “연緣이 별도의 연緣이 없어서 체體로써 연緣을 다하니, 따라서 차별 있는 연기가 곧 매우 깊은 국토의 바다이다.”134)라고 한다. 또 의상 화상이 이르기를, “말이 깨달음에 있으면 근본과 다르지 않다.”135)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분 가운데 말은 설하는 것이고 설해지는 뜻을 설하지만, 지금 이 가운데 말은 곧 깨달음의 체體이기 때문에 설함과 설해짐의 차이가 없다.
문 내 오척에 다시 부처님과 법의 이름을 허용하지 않는 뜻을 무엇으로 증명을 삼아서 알 수 있는가?답 이와 같이 일어난 내 말이 증명이 된다. 그러나 겸하여 증명할 것을 찾으면 「광명각품」에 이르기를, “많음 가운데 하나의 성품이 없고 하나도 또한 많음이 없다.”136)라고 한다. 지상 스님은 이를 인용하여 즉문의 경증으로 삼았다.137) 그러나 말한 바 ‘많음’이란 다만 많음일 뿐이니, 많음 가운데 다시 하나를 이루는 성품은 없다. 말한 바 ‘하나’란 다만 하나일 뿐이니, 하나 가운데 다시 많음을 이루는 성품은 없다. 이런 까닭에 오직 내 오척이 이것일 뿐이니, 여기에 부처님과 법의 이름을 얻을 수 없다.
이 뜻으로써 이 글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여如’는 진여(如)이니 곧 법의 근본인 ‘여如’는 ‘같아서 균등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로 곧 ‘이것이 내가 들은 것’이다. 이 뜻은 오직 내가 들었을 뿐이니, 내가 들은 것인 이상 다시 다른 말을 붙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나’를 기준으로 해서 논한 까닭에 다만 나일 뿐이고 위에 다시 부처님과 보살의 이름이나 지위 등을 붙이지 않는다. 듣는 것은 나에게 국한된 것이다.
문 이미 이름을 끊고 모습을 여의었다면, 어째서 ‘오척’이라는 이름을 거론하는가?답 이 증분에서는 ‘오척’이라는 이름이 곧 참된 법의 체體이다. -
006_0847_c_01L果分也。是故。藏師云。緣無別緣。
006_0847_c_02L以體盡 [263] 緣。是故差別緣起。即是甚
006_0847_c_03L深土海。又相和尙云。言說在訂。
006_0847_c_04L與本不異也。然則敎分之中。言是
006_0847_c_05L能詮。詮所詮義。今此之中。言即訂
006_0847_c_06L體故。無能所詮之異也。問。吾五尺
006_0847_c_07L上。不可更許佛之與法名目之義。
006_0847_c_08L以何爲訂而得知耶。答。如是所發
006_0847_c_09L我言爲訂。然4)不見 [419] [264] 兼訂者。光明
006_0847_c_10L覺品云。多中無一性。一亦無有多。
006_0847_c_11L至相引此爲即門之訂也。然而所
006_0847_c_12L言多者。只是多耳。多中更無成一
006_0847_c_13L之性。所言一者。只是一耳。一中
006_0847_c_14L更無成多之性。是故。唯吾尺是耳。
006_0847_c_15L此上不得佛法名目也。以此義釋
006_0847_c_16L此文者。如者如也。即是法本如
006_0847_c_17L者如均也。是故正即是我聞也。
006_0847_c_18L此意者。唯我聞耳。我聞以上。更
006_0847_c_19L不加餘語也。旣約我論。故但我耳。
006_0847_c_20L上不更加佛與菩薩名位等也。
006_0847_c_21L聞者。局於我也。問。旣絕名離相。
006_0847_c_22L何故擧五尺名耶。答。此訂分中。五
006_0847_c_23L「一」無有{乙}。「着」作「著」{乙}。「弟」作「第」
006_0847_c_24L{乙}。「不見」覔」{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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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8_a_01L이 이름 이외에 다시 법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연기분 중에서는 이름과 뜻의 두 지위가 같지 않기 때문에 상즉하게 하나, 지금 이 증분 중에서는 곧 이와 같지 않다.
두 번째는 닦음을 여의고 깨달음을 여읜 원만하고 지극한 도道이다.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으니 기준으로 하는 것을 따라 부처님이고, 정보(主)와 의보(器)를 구별하지 않으니 현상(事)을 대함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광명각품」에 이르기를, “국토와 중생이 동일함과 다름을 얻을 수 없으니, 이와 같이 잘 관찰함을 부처님 법의 뜻을 안다고 이름한다.”138)라고 한다.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정보와 의보(主器)를 구분하지 않으며 기세간과 중생이 본래 다르지 않으니, 하나의 부처님의 체體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하지도 않으니 각각 자신의 이름과 지위를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말미암아 알 수 있으니, 비록 삼세간이 하나의 부처님의 체體이지만 셋을 융섭하여야 비로소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비록 하나의 부처님의 체體가 삼세간에 즉하나 하나를 나누어서 셋을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런즉 삼세간의 이름과 지위가 움직이지 않음이 곧 부처님이다.
이 뜻으로 이 글을 풀이하면 ‘여如’는 ‘나(我)’와 ‘들음(聞)’이 하나가 되는 때(一時)이니 곧 부처님이다. 이상의 두 거듭의 뜻을 기준으로 하여 그것을 말하면 ‘여시아문’의 네 글자가 바로 곧 구경의 법의 체體이기 때문에, 이로써 머리를 삼아 아래 글의 목표로 하는 바(所目)를 헤아려 가려내는 뜻은 없다.139)
세 번째는 바른 깨달음의 지혜의 해가 보리수(道樹)에 떠오름이다. 말하자면 부처님을 기준으로 부처님을 논하면 법계의 모든 법이 부처님 아님이 없다. 그러나 중생의 연緣을 따라서 부처를 이룸이 있음을 보이고 법을 설함이 있음을 보이기 때문에 보리수에서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룬다.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
006_0848_a_01L尺之名。即實法體。此名以外。更
006_0848_a_02L無法體故也。緣起分中。名之與義。
006_0848_a_03L二位不同。故令相即。今此訂分之
006_0848_a_04L中即不如是。1)弟二離修離訂圓
006_0848_a_05L極至道也。第下之二第四四張 不簡
006_0848_a_06L處之與人。隨約是佛。不別主之與
006_0848_a_07L器。觸事如是。是故光明覺品云。國
006_0848_a_08L土及衆生。一異不可得。如是善
006_0848_a_09L觀察。名知佛法義。處人不簡。主
006_0848_a_10L器不分。器與衆生。本非異也。以
006_0848_a_11L一佛體故。又亦非一。以各各不動
006_0848_a_12L自名位故。由是得知。2)雖 [420] 三世間
006_0848_a_13L是一佛體。而非融三方爲一也。雖
006_0848_a_14L一佛體即三世間。而非分一以
006_0848_a_15L作三也。然則三世間之名位不動。
006_0848_a_16L是即佛也。以此義釋此文者。如者。
006_0848_a_17L我與聞爲一之時。即是佛也。約此
006_0848_a_18L上二重之義。言之則如是我聞四
006_0848_a_19L字。正即究竟法體故。無以此爲首
006_0848_a_20L3)科 [421] 簡下文所目之義也。*弟三正
006_0848_a_21L覺智日出於道樹。謂約佛論佛。
006_0848_a_22L則法界諸法。無非是佛也。然而隨
006_0848_a_23L衆生緣。示有成佛。示有說法故。
006_0848_a_24L於道樹。始成正覺。約此義釋者。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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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_0848_b_01L일곱 장소 여덟 모임의 법은 부처님이 설하신 바인데, 결집한 사람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공목장』을 지은 저자(章主)가 이 뜻에 의거하여 “아래 글의 목표로 하는 바를 헤아려 가려내는 뜻이다.”140)라고 한 것이다.
위의 셋 중에 나아가 첫 번째 부처님은 깨닫는 대상이고, 두 번째 부처님은 깨닫는 주체이다. 이 두 부처님을 갖추는 것이 해인삼매이다. 이 삼매와 깨닫는 주체인 지혜를 함께하여 큰 허공(大空)이라고 이름한다. 이 큰 허공은 근기가 필요로 하는 바를 따라서 갖가지 이름을 이룬다. 이루는 바 법은 티끌의 수처럼 궁구하기 어려우나 중요한 것만 간추려 말하면 열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삼승에서 밝히는 바인 삼과백법三科百法은 이숙식異熟識을 따라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주主와 반伴이 서로 이루는 뜻을 논하지 않는다. 지금 이 열 가지 법은 깨달음의 지혜인 큰 허공을 근본으로 하는 가운데 온전히 완전하게 목표로 하는 바이기 때문에 주主와 반伴이 이루어진 종지(宗)라고 한다. 또 세 부처님 중 처음 두 부처님은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룸의 증분이고, 세 번째 부처님은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룸의 교분이다. 증분에 나아가 첫 번째 뜻은 증득하는 바이고, 두 번째 뜻은 증득하는 주체인 원만한 지혜이다. 교분은 곧 이 원만한 지혜가 연緣과 상응하는 뜻이다.
문 만약 처음의 풀이로써 보면 ‘진여 이것(如是)’이 곧 ‘내가 들은 것(我聞)’이다.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루다(始成正覺)’는 어떻게 풀이하는가?답 아울러 이 예로써 풀이한다. 말하자면 ‘한 때(一時)’란 또한 곧 법성을 만족한 것이니 다시 더하는 것이 없고 장소 또한 그러하다.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루다(始成正覺)’란 또한 예전에 미혹했다가 지금 깨닫는 것이 아니라, 법계에 응하여 들어맞고 삼세의 때를 다하니 곧 구경의 법체를 만족한 것이며, 내지 60권 『(화엄)경』 끝의 “중생의 마음은 미세한 티끌”141) 등의 게송도 또한 이와 같다. -
006_0848_b_01L處八會之法。是佛所說而結集人
006_0848_b_02L言如是我聞也。是故章主。依此義
006_0848_b_03L云。料簡下文所目之義也。就上三
006_0848_b_04L中。*弟一佛所訂。*弟二佛能訂也。
006_0848_b_05L具此二佛。是海印定。與此定俱
006_0848_b_06L能訂之智。名爲大空。此大虛空。
006_0848_b_07L隨機所須。成種種名也。所成之法。
006_0848_b_08L塵筭難窮。要略而言。不出十種也。
006_0848_b_09L三乘所明三科百法。從異熟識之
006_0848_b_10L所生故。不論主伴相成之義。今此
006_0848_b_11L十法。本於訂智大虛空中。全全所
006_0848_b_12L目故。云主伴成宗也。又三佛中。初
006_0848_b_13L二佛第下之二第四五張 則始成正
006_0848_b_14L覺之訂分也。*弟三佛則始成正覺
006_0848_b_15L之敎分也。就訂分中。初義則所訂
006_0848_b_16L也。*弟二義則能訂圓智也。敎分
006_0848_b_17L者。即此圓智。與緣相應之義也。
006_0848_b_18L問。若以初釋見者。如是即我聞也。
006_0848_b_19L始成正覺則如何釋耶。答。並以此
006_0848_b_20L例釋也。謂一時者。亦即滿足法性。
006_0848_b_21L更無所加。處亦爾也。始成正覺者。
006_0848_b_22L亦非古迷今覺。應稱法界。竟三世
006_0848_b_23L際。即是滿足究竟法體。乃至六
006_0848_b_24L十卷經末。衆生心微塵等偈。亦如
-
006_0848_c_01L만약 두 번째 풀이로써 보면 ‘여如’는 ‘나(我)’와 ‘들음(聞)’이 하나가 되는 때(一時)이니 곧 부처님이다. ‘나’는 듣는 주체이고 ‘들음’은 듣는 대상이니 듣는 주체인 내가 듣는 법과 둘이면서 둘이 아니라서 오직 하나의 체體인 것이 곧 부처님의 체體와 같음(如)이다. 장소(處)는 보리도량이 부처님의 체體이다. 원만하게 나타남을 기준으로 하여 본다면 ‘비로소 정각을 이루다’는 세 번째 부처님이다.142) 이러한 뜻 등으로써 (『화엄경』) 한 부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풀이해야 비로소 ‘묘함(妙)’이 될 것이다.
고기
‘고기’에 이른다. 『대경』에 간략히 열 거듭의 해석이 있다. 말하자면 첫 번째는 『영락경』의 삼현십지三賢十地는 삼승이고, 이 경에서 변별하는 삼현십지는 일승이다. 만약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이 경문을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일시에 부처님께서 비로소 바른 깨달음을 이루시고’, 첫째의 적멸도량에서 화장세계를 설하시고, 둘째의 보광법당에서 십신十信을 설하시고, 내지 여덟째의 사위국舍衛國에서 입법계를 설하신다.
두 번째는 이 경에 나아가 항포行布의 차례는 삼승이고 육상원융은 일승이다. -
006_0848_c_01L是也。若以*弟二釋見者。如者是
006_0848_c_02L我與聞爲一之時。即是佛也。我是
006_0848_c_03L能聞。聞是所聞。能聞之我。與所
006_0848_c_04L聞法。二而不二。唯是一體者。即
006_0848_c_05L是如佛體也。處者菩提場。是佛體
006_0848_c_06L也。約圓現而見也。始成正覺者。
006_0848_c_07L*弟三佛也。以此義等。釋一部始
006_0848_c_08L終。方爲妙也。
006_0848_c_09L古記云。大經略有十重解釋。謂
006_0848_c_10L*弟一。瓔珞經三賢十地三乘。此
006_0848_c_11L經所辨三賢十地一乘。若約此義。
006_0848_c_12L釋此經文。則如是我聞。一時佛始
006_0848_c_13L成正覺。於*弟一寂滅場中。說花藏
006_0848_c_14L世界。*弟二普光堂中。說十信。乃
006_0848_c_15L至*弟八舍衛國中。說入法界。*弟
006_0848_c_16L二。就此經中。行布次*弟者三乘。
006_0848_c_17L六相圓融者一乘。約此義釋。如
006_0848_c_18L是我聞。乃至寂滅場中。說花藏世
006_0848_c_19L界。*弟4)一 [422] [265] 寂滅場內普光堂中。說
006_0848_c_20L十信。第下之二第四六張 乃至*弟
006_0848_c_21L八寂滅場內舍衛國中。說入法界。
006_0848_c_22L*弟三。前二是表相故三乘。內則
006_0848_c_23L「弟」作「第」{乙}次同。「雖」作「離」{乙}。「科」
006_0848_c_24L作「料」{乙}。「一」作「二」{乙}。
-
006_0849_a_01L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내지 적멸도량에서 화장세계를 설하시고, 둘째의 적멸도량 내 보광법당에서 십신을 설하시고, 내지 여덟째의 적멸도량 내 사위국에서는 입법계를 설하신다.
세 번째는 앞의 둘은 모습을 표시하기 때문에 삼승이고 안은 일승이다.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내지 첫째의 사위국에서 화장세계를 설하시고, 둘째의 보광법당에서 십신을 설하시고, 셋째의 타화자재천궁에서 십주十住를 설하시고, 넷째의 도솔천궁에서 십행十行을 설하시고, 내지 여덟째의 적멸도량에서는 입법계를 설하신다. 이 뜻은 보현 22위가 지위에 즉하여서 지위를 벗어나기 때문에 수승함과 열등함이 없다. 『명란기明難記』143)에서 밝힌 것과 같다.
네 번째는 앞의 안에서 표시한 것은 함께 삼승이고 보현의 다함없는 법의 수를 나타내는 것은 일승이다. 이 뜻을 기준으로 하여 풀이하면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내지 적멸도량에서는 화장세계를 설하고, 둘째의 적멸도량에서는 십신을 설하고, 내지 여덟째의 적멸도량에서는 입법계를 설한다. 다섯 번째는 앞은 함께 종이와 먹으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삼승이고, 문자가 없는 허공이 일승이다.
여섯 번째는 문자가 없는 허공은 삼승이고 문자가 있는 허공은 일승이다. 일곱 번째는 앞은 함께 교분이니 보현의 인문因門이기 때문에 삼승이고, 부처님의 밖으로 향함은 일승이다. 여덟 번째는 부처님의 밖으로 향함은 삼승이고, 부처님의 안으로 향함은 일승이다. 아홉 번째는 부처님의 안으로 향함은 삼승이고, 향함과 등짐을 여의는 것은 일승이다. 열 번째는 향함과 등짐을 여의는 것은 삼승이고, 법성은 일승이다.
이것은 범체梵體 대덕이 전한 것이며 윤현潤玄 대덕144)이 받은 것이다. 범체 대덕이 이르기를, “옛적에 질응 대덕이 세달사(世達藪)145)에 있으면서 『기신론』을 강의할 때, ‘만약 『화엄경』 중 열 거듭의 해석을 알 수 없다면 -
006_0849_a_01L一乘。約此義釋。則如是我聞乃
006_0849_a_02L至1)弟一舍衛國中。說花藏世界。
006_0849_a_03L*弟二普光堂中。說十信。*弟三他
006_0849_a_04L化天宮。說十住。*弟四兜率天宮。說
006_0849_a_05L十行。乃至*弟八寂滅場中。說入法
006_0849_a_06L界。此義者。是普賢二十二位。即
006_0849_a_07L位脫位。故無勝劣。如明難記所明。
006_0849_a_08L*弟四。前之內表並是三乘。普賢
006_0849_a_09L無盡法數現者是一乘也。約此義
006_0849_a_10L釋。如是我聞乃至寂滅場中。說
006_0849_a_11L花藏世界。*弟二寂滅場。說十信。
006_0849_a_12L乃至*弟八寂滅場。說入法界。*弟
006_0849_a_13L五。前並紙墨所載故是三乘。無文
006_0849_a_14L字之虛空是一乘也。*弟六。無文
006_0849_a_15L字之虛空是三乘。有文字之虛空
006_0849_a_16L是一乘也。*弟七。前並敎分是普
006_0849_a_17L賢因門故是三乘。佛外向是一
006_0849_a_18L乘也。*弟八。佛外向是三乘。佛內
006_0849_a_19L向是一乘也。*弟九。佛內向是三
006_0849_a_20L乘。離向背是一乘也。*弟十。離
006_0849_a_21L向背是三乘。法性是一乘也。
006_0849_a_22L此是梵體德所傳。潤玄德所受也。
006_0849_a_23L梵體德云。昔質應德。在世達藪。
006_0849_a_24L講起信論時。云若不得知花嚴經
-
006_0849_b_01L끝내 『화엄경』의 글의 뜻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또 만약 『기신론』 중 여덟 거듭의 해석을 알지 못하면 또한 이 논의 글의 뜻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라 하였다.”라고 한다.
화엄경행원품소초146)
법장 스님(賢首大師)의 『화엄삼매관문花嚴三昧觀門』147) 중,문 중생이 수행함에 반드시 성인의 가르침을 받아 지녀야 하는가, 가르침을 버려야 하는가?답 열 부류가 있다. 첫째는 스스로 중생이 (가르침을) 알지 못해서 성인의 말씀을 미리 버리고 자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스승으로 삼으며, 또 나쁜 벗을 따라서 가르침에 어긋나게 수행하여 교묘한 거짓으로 속이고 미혹함이 있으니 이는 악인惡人이다. 둘째는 중생이 또한 성스러운 가르침을 등지고 순박하고 곧은 마음으로 (앞의 교묘한 거짓의 사람을 따르며) 벗어나는 중요한 (길)이라고 생각해서 고된 수행을 열심히 하지만 끝내 이익되는 바가 없음이 있다. 이 두 사람은 함께 성스러운 가르침을 버리고 뜻과 이치에 의거하지 않는다.
셋째는 성인의 말씀을 오직 외우기만 할 뿐 뜻과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며 성인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명성을 구하고 이익을 구하면서 자신이 외운 바를 거스르니 또한 악인이다.넷째는 오직 문구만을 좇아서 뜻과 이법을 알지 못하니 다만 곧은 마음으로 읽고 외울 뿐이니, 비록 교묘한 거짓은 없으나 또한 이익되는 바도 없다. 이상의 두 사람은 함께 가르침을 버리지는 않으나 뜻과 이법을 얻지 못한다. 이상의 네 문은 모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다섯째는 성인의 가르침을 읽고 외워서 해解와 행行을 조금 알지만 문구를 많이 읽고 조금 수행함이 있다. 여섯째는 성인의 가르침을 널리 생각하여 해解와 행行을 두루 안다. 성인의 말씀을 점차 간략히 하고 뜻을 취하여 오로지 닦는다. 일곱째는 받아 지님에 뜻을 얻어서 오직 수행에 있고 다시 말을 생각하지 않는다. 여덟째는 가르침을 생각하고 뜻을 얻어서 일체법이 본성에 걸맞지 않음이 없음을 안다. 이런 까닭에 가르침에 대해서도 또한 버림을 기다리지 않는다. 곧 이 말로 된 가르침이 본성에 들어맞아 가르침을 기준으로 하여 수행한다. -
006_0849_b_01L中十重解釋者。終不能得花嚴文
006_0849_b_02L義。又若不知起信論中八重解釋。
006_0849_b_03L則亦不能得此論文義也。第下之二
006_0849_b_04L第四七張。
006_0849_b_05L賢首大師花嚴三昧觀門中。問云。
006_0849_b_06L衆生修行。爲要受持聖敎耶。爲須
006_0849_b_07L捨敎耶。答。有十類。一者。自有衆生
006_0849_b_08L無識。 [266] 懸捨聖言。師自愚心。復隨邪
006_0849_b_09L友。違敎修行。巧僞誑惑。此爲惡
006_0849_b_10L人也。2)二 [423] 有衆生。亦背聖敎。以質
006_0849_b_11L直心。 [267] 謂爲出要。勤苦修行。竟無所
006_0849_b_12L益。此二人。俱捨聖敎。不依義理。
006_0849_b_13L三者。唯誦聖言。不解義意。依傍聖
006_0849_b_14L敎。求名求利。違自所誦。亦爲惡
006_0849_b_15L人。四者。唯逐文句。不知義理。但
006_0849_b_16L以直心讀誦。雖無巧僞。亦無所益。
006_0849_b_17L此上二人。俱不捨敎。不得義理。
006_0849_b_18L此上四門。皆不可依。五者。讀誦聖
006_0849_b_19L敎。分知解行。多讀文句。少有修
006_0849_b_20L行。六者。廣尋聖敎。3)徧 [424] 知解行。漸
006_0849_b_21L略聖言。取意專修。七者。受持得意。
006_0849_b_22L唯在修行。不復尋言。八者。尋敎得
006_0849_b_23L旨。知一切法無不稱性。是故。於
006_0849_b_24L敎亦不持捨。 [268] 即此言敎稱性。約
-
006_0849_c_01L아홉째는 본성에 들어맞는 말을 항상 지니고 버리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말을 끊은 이법을 항상 관觀하여 그만두지도 않고 막혀 있지도 않다. 이상의 다섯 문은 아직 궁극의 경계가 아니다.
열째는 가르침을 생각하여 참된 이법을 얻어서 이법과 가르침에 걸림이 없다. 항상 이법을 관觀하나 가르침을 지니는 데 걸리지 않고 항상 가르침을 지니나 공空을 관하는 데 걸리지 않는다. 이는 곧 가르침과 이법이 함께 융섭되어 합하여 하나의 관觀이 된 것이니 비로소 궁극의 경계라고 이름한다.
이상의 열 가지 문에서 앞의 넷은 전적으로 의지할 수 없다. 다음의 다섯은 얕은 곳에서 깊은 곳으로 나아가 근기에 따라서 깨달아 들어가지만, 범부를 바꾸어 성인을 이루는 방편이니 아직 궁극의 경계가 아니다. 오직 열 번째 문만이 비로소 궁극의 경계가 된다.
또 현수 대사가 이른다.148) 대승경전을 받아 지님에 반드시 다섯 법을 알아야 한다. 첫 번째, 그 문장을 밝힘에 다섯이 있다. 말하자면 문단이 일어나고 다함과, 앞과 뒤가 서로 이어짐과, 차례로 연결되어 합해짐과, 설하는 뜻의 원만함과,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음을 잘 아는 것이다.두 번째, 그 일(事)을 이해함도 또한 다섯이다. 말하자면 설하는 곳과 설하는 주체와 (듣는) 대중과 (설법을) 청하는 위의와 원만한 음성으로 설해지는 바를 아는 것이다.
세 번째, 그 뜻에 다다름도 또한 다섯이다. 말하자면 강요를 간략히 나타냄과, 자세히 풀이하여 의심을 제거함과, 비유하여 이해하게 함과, 일을 들어서 깨달음을 이루게 함과, 이익을 들어서 배우기를 권함이다.네 번째, 그 뜻을 얻음도 또한 다섯이다. 큰 마음을 일으키게 함과, 진리를 관觀함과, 번뇌를 굴복시킴과, 자비로 중생을 구제함과, 부지런히 온갖 행行을 닦음이다.
다섯 번째, 그 행行을 닦음에 스스로 다섯 종류가 있다.첫째, 들은 바 법을 행行함이 몸과 마음에 있어서 일찍이 잠시도 쉬지 않는 것이다. 둘째, 앞의 네 문을 지나면서 차례로 수승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
006_0849_c_01L敎修行。九者。常持稱性之言。不捨
006_0849_c_02L不4)着。恒觀絕言之理。不棄不滯。
006_0849_c_03L此上五門。猶未究竟。十。尋敎得實
006_0849_c_04L理。理敎無㝵。常觀理而不㝵持敎。
006_0849_c_05L常持敎而不㝵觀空。此則敎理俱
006_0849_c_06L融。合爲一觀。方名究竟。此上十
006_0849_c_07L門。前四全不可依。次五從淺轉深。
006_0849_c_08L隨根悟入。然革凡成聖之方便。猶
006_0849_c_09L未究竟。唯*弟十門。方爲究竟也。
006_0849_c_10L第下之二第四八張 又賢首大師
006_0849_c_11L明。 [269] 受持大乘經。須知五法。一明其
006_0849_c_12L文有五。謂善知分段起盡。前後相
006_0849_c_13L續。次*弟連合。詮義圓滿。無增無減。
006_0849_c_14L二解其事亦五。謂說處。說主。徒衆。
006_0849_c_15L請儀。及知圓音所說。三達其義亦
006_0849_c_16L五。謂略摽 [270] 5)網 [425] [271] 要。廣釋除疑。譬喩
006_0849_c_17L令解。引事訂成。擧益勸學。四得
006_0849_c_18L其意亦五。令發大心。觀眞理。伏煩
006_0849_c_19L惱。慈悲救物。勤修萬行。五修 [272] 其行。
006_0849_c_20L自有五種。一於所聞法。行在身心。 [273]
006_0849_c_21L未曾暫息。二歷前四門次 [274] 起勝心。
006_0849_c_22L「弟」作「第」{乙}次同。「二」作「三」{乙}。「徧」
006_0849_c_23L作「遍」{乙}。「着」作「著」{乙}。「網」作「綱」
006_0849_c_24L{乙}。
-
006_0850_a_01L앞의 (첫 번째) 글로 된 가르침에 대해서 만나기 어렵다는 생각을 일으킨다. 앞의 (두 번째) 일의 모습에 대해서 존중하는 마음을 일으켜 부처님을 만나 뵙기 어렵다고 찬탄하며 자기가 복이 적음을 근심한다. 앞의 (세 번째) 뜻과 이법에 대해서는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앞의 (네 번째) 의지에 대해서는 슬픔과 기쁨이 번갈아 모인다.
셋째,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것이다. 말하자면 (앞의) 글로 된 가르침에 대해 서사하여 유통시키고 그 일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부처님의 법회를 나타내고 뜻의 취지를 간략히 취하여 행行하는 사람에게 자세히 보여준다. 넷째, 자신의 행行을 증장하는 것이다. 착한 벗을 가까이하며 생각을 집중하여 사유한다. 다섯째, 걸림 없는 행行을 이루는 것이다. 말하자면 뜻을 얻어 말을 잊기 때문에 (가르침을) 고수할 수 없으며, 말을 잊음이 가르침을 말미암기 때문에 (가르침을) 버릴 수 없다. 이런 까닭에 가르침에 대해 고수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 행行을 낸다.
지금 여기에 비록 열 가지를 열었지만, 법의 행行은 다만 뭇 연緣이 도와 이루고 바른 행(正)과 돕는 행(助)이 서로 겸한 것이니 총괄하여 받아 지녀 닦아 익힘이라고 한다. 이것을 온전히 의거하는 자는 인因을 원만하게 하였다고 할 만하니, 부지런히 닦아서 물러나지 아니하여 모두 원만한 과보를 증득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부터 (지금의) 당唐에 이르기까지 고금에 법에 의거하여 배움을 닦아서 신령스러운 상서로움을 통감한 것은 그 부류가 실로 많으니 갖추어서 『화엄경전기華嚴經傳記』와 『찬영기纂靈記』149)에 설한 바와 같다.
법계도기총수록 하권 2 -
006_0850_a_01L於前文敎。起難遭想。於前事相。
006_0850_a_02L起尊重心。嘆 [275] 佛難逢。傷己 [276] 薄祐。
006_0850_a_03L於前義理。起愛樂心。於前意旨。
006_0850_a_04L悲喜交集。三受持正法。謂於文 [277] 敎。
006_0850_a_05L繕 [278] 寫流通。圖1)畫 [426] [279] 事 [280] 相。表佛法會。
006_0850_a_06L撮略義趣。 [281] 曲示行人。四自行增長。 [282]
006_0850_a_07L爲親 [283] 善友。繫念思惟。五成無㝵行。
006_0850_a_08L謂得旨忘詮故不可守。2)忘 [427] 詮由
006_0850_a_09L敎故不可捨。是故。於敎生無守無
006_0850_a_10L捨行。今此雖開爲十。法行但是。衆
006_0850_a_11L緣資成。正助相兼。摠曰受持修習。
006_0850_a_12L全依此者。可謂圓因。勤修不退。
006_0850_a_13L皆訂滿果。自敎至唐。 [284]
006_0850_a_14L修學。 [285] 通感靈瑞。 [286] 其類實繁。具如
006_0850_a_15L花嚴傳 [287] 及纂靈記 [288] 所說第下之二第
006_0850_a_16L四九張。
006_0850_a_17L法界圖記叢髓錄卷下之二。
006_0850_a_18L「畫」作「盡」{乙}。「忘」作「志」{乙}。
- 1)『육십화엄』 「이세간품」(K8, 299a18~b9; T9, 669a26~b12).
- 2)『십지경론』(K15, 15a4~b17; T26, 133a8~b12).
- 3)『십지경론』(K15, 52b5~6; T26, 158b21~22). 『육십화엄』에서의 해당 위치는 다음과 같다. K8, 173a11~12; T9, 552b13.
- 4)용수龍樹, 『中論』 「觀四諦品」(K16, 392b14; T30, 33b11~12), “뭇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을, 나는 곧 무無라고 설한다. 또한 가명假名이 되며 또한 중도의 뜻이다.(衆因緣生法。 我說卽是無。 亦爲是假名。 亦是中道義。)”
- 5)‘잘못을 막고 틀림을 제거하여 덕을 나타내니(護過去非現德)’에 대해 『법융기』는 세 개의 항목(護過ㆍ去非ㆍ現德)으로 풀이한 반면, 균여는 세 개의 항목으로 보는 풀이를 소개하면서도 두 개의 항목(護過去非ㆍ現德)으로 해석한다. 『총수록』(H6, 840a22~b8), 『일승법계도원통기』(H4, 30c15~20).
- 6)『십지경론』(K15, 68b2; T26, 169a17).
- 7)H2, 6b20~22; H6, 830b7~9.
- 8)뒤의 십현문을 구체적으로 설하는 부분을 가리킨다.(H2, 8a10~b7; H6, 832a12~b10).
- 9)『육십화엄』 「初發心菩薩功德品」(K8, 40c23~24; T9, 432c29~433a3)의 전체 내용을 취한 것으로 보인다.
- 10)『육십화엄』 「현수보살품」(K8, 40c25; T9, 433a4~5)에 있는 다음 구절이 참조된다. “어찌 하물며 한량없고 무수하고 가없는 겁에 모든 바라밀을 갖추어 닦은 모든 지地의 공덕이겠는가?(何況於無量。 無數無邊劫。 具足修諸度。 諸地功德行。)”
- 11)『육십화엄』 「梵行品」(K8, 60a16; T9, 449c14).
- 12)『십지경론』(K15, 52b5~6; T26, 158b21~22).
- 13)『육십화엄』 「梵行品」(K8, 60a16; T9, 449c14).
- 14)『십지경론』(K15, 3a~c; T26, 124c~125a).
- 15)『육십화엄』 「賢首菩薩品」(K8, 51a14~16; T9, 441a14~16).
- 16)『육십화엄』 「十地品」(K8, 187b12~15; T9, 567c13~20).
- 17)人ㆍ法, 理ㆍ事, 敎ㆍ義, 解ㆍ行, 因ㆍ果 : 『수현기』(K47, 2b18~21; T35, 15b2~5)는 다음과 같은 열 가지의 구족을 설하고 있다. ① 가르침(敎)과 뜻(義), ② 이법(理)과 현상(事), ③ 앎(解)과 행行, ④ 원인(因)과 결과(果), ⑤ 사람(人)과 법法, ⑥ 분제와 경계(境位), ⑦ 스승(師)과 제자(弟), 법法과 지혜(智), ⑧ 주主와 반伴, 의보(依)와 정보(正), ⑨ 역逆과 순順, 체體와 용用의 자재, ⑩ 중생의 근기와 욕구에 따라 나타냄.
- 18)총장總章은 당唐 고종高宗의 연호로서 원년元年은 서기 668년이다.
- 19)『일승법계도』(H2, 1a〈반시〉; H6, 768a).
- 20)『일승법계도』(H2, 1a〈반시〉; H6, 768a).
- 21)『韓』ㆍ『卍』ㆍ『大』에는 다음의 내용이 부기되어 있다. “「법계도장」 『일승법계도』 끝.” “화엄종 향조 대사香鳥大師는 말엽의 뛰어난 분으로서 제목을 해석하였고 두 법사頭法師가 집필하였다. 건력建曆 2년(1212) 3월 3일에 고산高山에서 법승사法勝寺의 동본同本으로써 한 번 교감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현혈팔우賢穴八吁.”(H2, 8c1~4)
- 22)『총수록』(H6, 832c4).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5c4~5c11; H6, 829b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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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저본에는 ‘云’으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去’로 바꾸어 ‘제거한다면’으로 번역하였다. 참고로 지정각과 안식의 비유 관계를 도시하면 아래와 같다.
眼識 眼根塵爲體 不爲膿血皮膚不淨所染 成淨眼識 若針耳孔許除膿血 淨眼不成 智正覺 以三世間爲自身心 不爲衆生業煩惱所染 得成正覺 於衆生業惑煩惱若去一物 不成正覺 - 24)조림稠林 : ⓢ gahana. 번뇌를 포함한 중생의 마음의 여러 모습들을 빽빽한 밀림이 무성하고 헤쳐나오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것 등에 비유한 것이다. 세친은 조림을 많다는 뜻과 알기 어렵다는 뜻으로 풀이한다. 『십지경론』(K15, 94c8; T26, 187a2~3).
- 25)『화엄경』 「십지품」 또는 『십지경』 제9선혜지善慧地에서는 11조림稠林을 설하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 조림이 업행조림이다. 『십지경론』(K15, 94b17~21; T26, 186c19~23), 『팔십화엄』(K8, 661b22~25; T10, 202a23~26), 『육십화엄』에는 ‘稠林’이 ‘難’으로 되어 있다.(K8, 187c7~9; T9, 568a12~14) 경에서는 업행조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이 보살은 (다음을) 여실하게 안다. 모든 업의 선ㆍ불선ㆍ무기의 모습, 지음과 짓지 않음의 모습, 마음과 함께 생겨나 여의지 않는 모습, 자성을 인하여 결과를 다 모음에 순서를 잃지 않는 모습, 과보가 있고 과보가 없는 모습, 검은 업과 흰 업과 검기도 하고 희기도 한 업과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업보를 바르게 받는 업의 차별된 모습, 업의 원인이 한량없는 모습, 성인과 세간이 차별된 모습, 현생에 받는 과보ㆍ내생에 받는 과보ㆍ내생 이후에 받는 과보의 모습, 승乘과 승乘 아님에 정해지고 정해지지 않은 모습과 내지 8만 4천의 모든 업의 차별된 모습을 여실하게 안다.(是菩薩如實知。 諸業善不善無記相。 有作未作相。 心共生不離相。 因自性盡集果7不失次第相。 有報無報相。 黑業白業黑白業不黑不白業。 正受業差別相。 業因無量相。 聖世間差別相。 現報生報後報相。 乘非乘定不定相。 乃至如實知八萬四千諸業差別相。)”〔『십지경론』(K15, 95b17~c1; T26, 187b19~24)〕 세친은 이 가운데 ‘모든 업의 선ㆍ불선ㆍ무기의 모습’을 도道의 원인의 차별을 나타낸 것으로 풀이하고〔『십지경론』(K15, 95c2~4; T26, 187b25~26)〕 법장은 이를 업業이 육도六道의 원인이 되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한다.〔『화엄경탐현기』(K47, 702b17~20; T35, 368a7~10)〕
- 26)별보別報 : 과보를 총(總報)과 별(別報)로 구분한 것 가운데 하나이다. 대소승에 따라서 설명이 다르지만, 법상종의 『成唯識論述記』(T43, 299b25~c12)에 의하면 제8식이 총보이고 전6식이 별보이다. 이때 총보(異熟)를 불러일으키는 강력한 업(異熟習氣)을 인업引業이라고 하고 총보가 있어야 생겨나는 별보(異熟生)를 일으키는 약한 업을 만업滿業이라고 한다. 이에 따르면 사람은 총보이고 사람의 사지나 개별 인식 등은 별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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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현수품」 가운데 열 가지 대삼매(총 200頌 半)의 이름과 경에서의 해당 위치를 밝히면 아래와 같다.
대삼매의 이름 게송 수(200頌 半) 해당 경문 해당 위치 一 圓明海印三昧門 5頌 半 或有剎土無有佛~海印三昧勢力故 K8, 42c9~19;T9, 434b25~c6 二 華嚴妙行三昧門 2頌 半 不可思議莊嚴剎~華嚴三昧勢力故 K8, 42c20~24;T9, 434c7~11 三 因陀羅網三昧門 4頌 入微塵數諸三昧~亦無量稱解脫力 K8, 42c25~43a8;T9, 434c12~19 四 手出廣供三昧門 17頌 若欲供養一切佛~大仙三昧自在力 K8, 43a9~b18;T9, 434c20~435a24 五 現諸法門三昧門 8頌 欲安一切衆生類~是自在勝三昧力 K8, 43b19~c10;T9, 435a25~b11 六 四攝攝生三昧門 16頌 1句 出生隨樂勝三昧~如是方便無有量 K8, 43c11~44a19;T9, 435b12~c15 七 窮同世間三昧門 17頌 1句 隨順世間度衆生~是名說法三昧力 K8, 44a19~c5;T9, 435c16~436a20 八 毛光覺照三昧門 89頌 安隱衆生勝三昧~速成無上功德幢 K8, 44c6~47c10;T9, 436a21~438b2 九 主伴嚴麗三昧門 6頌 出生微妙勝三昧~示現三昧自在力 K8, 47c11~22;T9, 438b3~14 十 寂用無涯三昧門 35頌 十方世界有緣故~不思議劫說不盡 K8, 47c23~48c20;T9, 438b15~439a26 - 28)‘부처님이 계시거나 부처님이 계시지 않거나 본성과 모습이 항상 머무른다’에 대한 경전 출전은 하권 1 각주 28) 참조.
- 29)사갈라용왕娑竭羅龍王 : ⓢ Sāgaranāgarāja. 용왕들 가운데 하나. ‘사갈라’는 바다를 뜻한다. 『화엄경』에서는 「세주묘엄품」에 세주로서 등장하며, 또 「여래출현품」에서는 여래음성의 열 번째 모습에서 사갈라용왕이 큰 구름을 일으켜 음성을 비롯한 갖가지 방편으로 중생을 이롭게 한다는 비유를 설한다. 『팔십화엄』(K8, 742b5~743b20; T10, 269b29~270b29). 징관은 사갈라의 뜻을 바다로 해석하면서 다른 용왕도 바다에 머무르지만 이 사갈라용왕이 가장 존귀하기 때문에 이 용왕만 홀로 바다를 이름으로 한다고 풀이한다. 『청량소』(T35, 539b22~23).
- 30)지엄, 『공목장』(T45, 541a25~26).
- 31)법장은 ‘세계해’를 해석하면서 일승에는 설할 수 없는 과분의 열 부처님 자체의 국토해와 중생을 거두어 교화하는 곳을 기준으로 하는 세계해의 두 종류가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첫째, 과분의 열 부처님 자체의 국토해는 설할 수 없지만 연緣에 기대어 열 가지로 설할 수 있으니 제2회에 설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 『화엄경탐현기』(K47, 505c22~506a23; T35, 158a8~b12).
- 32)수업秀業 : 『일승법계도』에 대한 해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상계 승려로 보이지만 생몰 연대나 저서 등은 알려진 바가 없으며 현존 자료에는 이곳에만 이름이 보인다.
- 33)백사십원百四十願 : 『화엄경』 「淨行品」의 백사십일원을 가리킨다. 보살이 어떻게 신身ㆍ구口ㆍ의意 삼업을 수승하게 할 수 있는지 등 지수보살智首菩薩의 질문에 문수보살이 답하면서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 다양한 서원을 일으키도록 권한 것이다.
- 34)십회향원十廻向願 : 『화엄경』 「십회향품」 전체를 가리킨다. 화엄교학에서는 「십회향품」이 원願을 체體로 삼는다고 풀이하여 「십회향품」을 「십회향원」 또는 「십회향대원」으로 불러왔다. 법장, 『화엄경탐현기』(K47, 586a23; T35, 244a6).
- 35)초지원初地願 : 『화엄경』 「십지품」(또는 『십지경』)의 초환희지에 설해진 열 가지 서원(十大願)을 가리킨다. 『육십화엄』(K8, 165c8~166b23; T9, 545b10~546a18), 『팔십화엄』(K8, 636c8~637b17; T10, 181c11~182b11), 『십지경론』(K15, 22c9~26a18; T26, 138b4~140c7).
- 36)성기원性起願 : 『육십화엄』 「보왕여래성기품」 전체를 일컫는다. 지엄, 『수현기』(K47, 16a24~27; T35, 30c11~15)와 법장, 『화엄경탐현기』(K47, 585b7~8; T35, 243a12~13)도 성기법문을 서원으로 풀이하고 있다.
- 37)『貞元新譯華嚴經疏』 : 징관이 『사십화엄』을 풀이한 주석서이다.
- 38)『貞元經』 : 40권본 『화엄경』을 가리킨다. 갖춘 경명은 『大方廣佛華嚴經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다. 『육십화엄』과 『팔십화엄』의 「입법계품」에 해당하며, 제40권의 「보현행원품」이 추가되었다. 당唐 정원貞元 연간(795~798)에 계빈국 반야삼장에 의해 번역되었기 때문에 ‘『정원경』’이라고도 한다.
- 39)길상운 선지식(吉祥雲知識) : 『정원경』에서 선재동자가 처음 문수보살의 권유에 의해 찾아간 비구 선지식이다. 현존 범본에는 ‘Meghaśri’로 되어 있으며, 『육십화엄』에는 ‘공덕운功德雲’, 『팔십화엄』에는 ‘덕운德雲’으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화엄경행원품소』는 길상운 선지식이 그를 찾아온 선재동자에게 스물한 가지 염불해탈문에 대해 설하는 부분에 대한 주석이다. 『사십화엄』(K36, 23a11~b22; T10, 680a12~b19).
- 40)『화엄경행원품소』(卍7, 571a12~573b5).
- 41)해운海雲 : 범어로는 sāgaranegha이며 비구선지식으로서 53선지식 중 세 번째 선지식이다.
- 42)해운 비구가 12년간 바다를 관찰할 때 바다에 큰 연화가 생겨나 그 연화 위의 여래로부터 ‘보안법문普眼法門’을 듣고 이를 여러 중생들에게 설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십화엄』(K36, 24c3~25c22; T10, 681a26~682b3).
- 43)묘주妙住 : 범어로는 supratiṣḥita이며 『육십화엄』과 『팔십화엄』에서는 선주善住로 번역되어 있다. 53선지식 중 네 번째로서 비구선지식이다. 12년간 바다를 관찰하는 것은 12연기관十二緣起觀을 상징하며 연기법을 법보의 대표로 설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 44)징관은 묘주 비구를 풀이하는 곳에서 “또한 비구란 도道에 들어간 지 오래되지 않아서 마땅히 승가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앞 선지식은 법이고 이 선지식은 승가이니 뜻의 차례이기 때문이다.(亦比丘者。 入道未久。 宜依僧故。 前法此僧。 義次第故。)”라고 하여 묘주 선지식의 법문을 승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卍7, 577a12~13).
- 45)『청량소초』(T36, 667b10)는 “아홉째, 마음에 즉하고 부처님에 즉하여 하나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九卽心卽佛爲一境故)”로 설하고 있다.
- 46)징관을 비롯한 화엄교가들은 「입법계품」의 선지식을 화엄계위에 배대할 때 덕운 비구를 십주十住 가운데 초발심주初發心住에 해당시킨다. 『화엄경행원품소』(卍7, 568b6).
- 47)『화엄경행원품소』의 이 세 문은 덕운 비구가 스물한 가지 염불문을 설하는 경문을 주석하는 부분이다. 『사십화엄』(K36, 23a14~b22; T10, 680a15~b19).
- 48)이 구절은 『팔십화엄』 「광명각품」(K8, 499a22; T10, 64a27~28)의 한 게송이다.
- 49)여러 경전에서 석가모니부처님의 키는 1장 6척(丈六), 미륵불은 천척千尺이라 설한다. 『生經』(K19, 983a2~5; T03, 87b2~5), 『佛說彌勒下生成佛經』(K11, 214a5~14; T14, 424b10~18 등). 징관은 이에 대해 이러한 화신불의 키의 차이는 다만 교화의 대상인 중생에 따라서 그런 것일 뿐이라고 풀이한다. 『청량소초』(T36, 197c16~19).
- 50)『佛說觀無量壽佛經』(K11, 180a20~21; T12, 343a21~22).
- 51)『육십화엄』 「夜摩天宮菩薩說偈品」(K8, 74b21; T9, 465c28~29)에서 여래림보살如來林菩薩이 마음을 화가에 비유하며 읊는 게송의 일부분이다. “마음과 같아서 부처 또한 그러하다. 부처와 같아서 중생 또한 그러하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如心佛亦爾。 如佛衆生然。 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
- 52)보현보살 선지식은 『사십화엄』에서 선재동자가 역참하는 선지식 가운데 마지막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인용되어 있는 『화엄경행원품소』는 선재동자와 보현보살이 예경에 대해 문답하는 부분에 대한 주석이다. 『사십화엄』(K36, 225c13~24; T10, 844b29~c11).
- 53)『화엄경행원품소』(卍7, 760a10~b1).
- 54)늑나마제 삼장(勒那三藏) : ⓢ Ratnamati. 북위北魏의 역경승으로 중인도 출신이다. 북위 선무제宣武帝 정시正始 5년(508)에 낙양에 와서 보리류지와 함께 세친의 『십지경론』을 번역하고, 후에 『妙法蓮華經論優波提舍』, 『究竟一乘寶性論』 등을 역출하였다. 『歷代三寶紀』(K31, 553c18~22; T49, 86b26~c2)와 『속고승전』(K32, 913c11~24; T50, 429a5~17) 등에서는 『십지경론』의 이해와 관련하여 보리류지와 늑나마제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고 한다. 『십지경론』 연구를 중심으로 하는 지론종 가운데 혜광慧光을 시조로 하는 남도파는 늑나마제의 『십지경론』 이해를 따르고, 도총道寵에서 시작된 북도파는 보리류지의 입장을 바탕으로 한다는 설이 『속고승전』 「도총전」 등에 전한다.(K32, 990c6~991a24; T50, 482b16~c23).
- 55)칠종례七種禮 : 북위 늑나마제가 번역 또는 설했다고 전해지는 일곱 가지 예경법으로서 도세道世의 『法苑珠林』(K39, 462a09~463b19; T53, 435a8~4367)과 도선道宣의 『釋門歸敬儀』(T45, 865a2~c10) 등에 인용되어 있다. 또한 지엄의 『공목장』 「第二會名號品初禮佛儀式章」에도 칠종예법과 유사한 내용이 설해져 있다.
- 56)앞의 여섯 문 : 예의가 아닌 첫째와 둘째를 제외한 셋째부터 여덟째 예를 가리킨다.
- 57)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화엄경문답』(T45, 604c20~605a17)에도 수록되어 있다.
- 58)『보살영락본업경』(K14, 385c9~10; T24, 1018a20~21).
- 59)『화엄경문답』(T45, 605a7~11)에는 다음 구절도 있다. “이 뜻 또한 없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지금 나의 몸 전체가 여래장불 등인 것이 이것이다. 지금의 나는 곧 나를 반연한 성性으로서의 부처님이나 이에 즉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슬픔과 괴이함을 일으킨다. 지극한 마음으로 수행하여 미혹함을 돌이키고자 하니, 그러므로 나를 교화하는 부처님이 곧 나의 체體로서의 부처님임을 관하는 것이다. 멀리서 남의 부처님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이 뜻이 올바로 관觀하는 행자의 큰 핵심이다.(其義亦非無故也。 或今吾身全體如來藏佛等是也。 今吾卽緣吾性佛。 以卽是而不知故悲怪發。 至心修行欲返迷。 是故其觀化吾佛卽是吾體佛。 非遠求他佛。 此義其正觀行者大要也。)”
- 60)『自體佛觀論』 : 현존하는 자료로는 여기 『총수록』에 1회 인용되어 있는 것이 유일하며 저자나 저술 시기 또한 알 수 없다. 다만 자체불自體佛에 대한 논의를 의상이 그의 제자들에게 설했다는 사구게로써 설명하는 점 등을 볼 때 의상이나 의상계 문헌으로 보인다. 의상의 사구게를 『대기』에서 소개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자체불관론』의 논자가 혹 『대기』의 저자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 61)이 게송은 표훈과 진정 등이 의상 스님에게 움직이지 않는 내 몸이 바로 법신 자체의 뜻임을 어떻게 볼 수 있는지 질문한 것에 답한 의상 스님의 사구게이다. 『총수록』(H6, 775b9~15).
- 62)5조五條와 7조七條와 9조九條는 석가모니부처님 당시부터 인도의 불교승단에서 허용된 세 종류의 가사(三衣, ⓢ trīṇi cīvarāṇi)를 가리킨다. 이 가운데 9조 가사(僧伽梨, ⓢ saṃghāti)는 아홉에서 스물다섯 조각의 천으로 기워 지으며 법석에 오르거나 탁발을 하거나 왕궁에 출입할 때 입고, 대의大衣라고도 한다. 7조 가사(鬱多羅僧, ⓢ uttarāsaṅga)는 일곱 조각의 천으로 기워 지으며 예배ㆍ청강ㆍ포살 등을 할 때 입고, 상의上衣라고도 한다. 5조 가사(安陀會, ⓢ antarvāsa)는 다섯 조각의 천으로 기워 지으며 일상생활이나 취침 때 입고, 내의內衣라고도 한다.
- 63)『총수록』(H6, 837b5).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5c12~6a21; H6, 829b19~830a7.
- 64)오열五熱과 아중비(衆鞞) : 『화엄경』 「입법계품」의 승열 바라문과 바수밀다녀의 법문을 가리킨다. 자세한 내용은 상권 1 각주 127) 참조.
- 65)『총수록』(H6, 838a8).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6a22~7b2; H6, 830a7~831a21.
- 66)‘개종開宗’이 사람 이름인지 문헌의 이름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H4, 25b4~6; 26c13~16)에 「開宗記」라는 이름으로 두 번 인용되어 있는 가운데 처음 인용문이 이와 동일한 내용이다.
- 67)이 인용문 가운데 앞의 누각의 비유는 지엄의 『화엄오십요문답』(T45, 522a18~29)에 보인다. 그러나 세친보살 이하 뒷부분의 실담장에 관련된 부분의 출전은 분명하지 않다.
- 68)실담 비유의 출전과 내용은 상권 2 각주 137), 138) 참조.
- 69)『팔십화엄』의 제4회 설법 중 「夜摩宮中偈讚品」에 나오는 게송이다.(K8, 540b25; T10, 101b17~18) 이에 해당하는 『육십화엄』 「夜摩天宮菩薩說偈品」(K8, 74a10; T9, 465a22~23)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비유하면 열을 세는 법과 같으니 하나에서 늘어나 무량에 이른다. 모두 다 근본수이니 지혜인 까닭에 차별하다.(譬如數法十。 增一至無量。 皆悉是本數。 智慧故差別。)”
- 70)하권 2 각주 69) 참조.
- 71)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c22).
- 72)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3c22~23).
- 73)‘다른 일(異事)로써’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다음의 구절을 가리킨다. “또 하나의 일 가운데 하나와 많음의 뜻은 상즉(相是)하지 않으니 곧 많음이고, 하나의 일인 까닭에 곧 하나이다. 네 구절로 잘못을 막고 틀림을 제거하여 덕을 나타내니, 이것에 준하면 이해할 수 있다.(又一事中一多義不相是卽是多。 一事故卽是一。 四句護過。 去非現德。 准之可解。)”(H2, 6c7~9; H6, 830b18~20)
- 74)처음의 뜻은 변계의 사람을 위하여 나열된 지위 가운데의 이구지 등을 다른 일로 삼아서 변별하여 다하지 못함을, 나중의 뜻은 인연의 사람을 위하여 환희지 하나가 갖추는 열 가운데의 이구지 등을 다른 일로 삼아서 변별하여 다하지 못함을 가리킨다.
- 75)『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c8~14).
- 76)『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4a27~28).
- 77)사진四塵 : 색(형태와 색깔)ㆍ향기ㆍ맛ㆍ감촉을 가리킨다. 지수화풍의 사대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사대소조四大所造라고도 한다. 동전과 같은 색법은 최소한 사대와 사진의 여덟 법(八事 혹은 八物)이 함께해야 이루어진다. 세친, 『아비달마구사론』(K27, 478a13~14; T29, 18b23~25).
- 78)사상四相 :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을 말한다.
- 79)『대반야바라밀다경』(K4, 1223b14~15; T7, 1069a25), “평등하여 일어남이 없기 때문에 연기라고 이름한다.(平等無起故名緣起)”
- 80)『총수록』(H6, 841b19).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7b2~7c12; H6, 831a22~c7.
- 81)이와 동일한 구절을 균여는 『일승법계도원통기』(H4, 33b23~c11)에서 ‘영관덕靈觀德’의 설로서 소개하고 있다.
- 82)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H4, 34a9~11)에서 인용한 옛글(古辭)에는 쉰한 살로 되어 있다. “한 살의 어머니가 50년 동안 임신하여 쉰한 살의 대장부를 낳았다.(一年母懷五十年。 生五十一年大丈夫也。)”
- 83)『총수록』의 『대기』는 육상에 대한 두 입장을 상권 2에서는 융질 대덕과 사유 대덕의 설로서 소개하고 있다. 상권 2 각주 40)과 45) 및 해당 본문 참조.
- 84)『총수록』(H6, 842a13). 이에 해당하는 『일승법계도』 원문은 H2, 8a10~8b6.
- 85)법장, 『화엄경탐현기』(T35, p124c24~26), “열 번째, 같음과 다름이 원만하게 갖추는 뜻이다. 말하자면 앞의 아홉 문을 전부 합하여 하나의 대연기를 삼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뜻의 문이 동시에 구족하게 하기에 이른다.(十同異圓備義。 謂以前九門總合爲一大緣起故。 致令多種義門同時具足也。)”
- 86)강목綱目 : 이름만으로는 법장의 『花嚴經文義綱目』으로 생각되지만 이 문헌에는 이 구절과 유사한 부분이 없다. 아래에 밝혔듯이 이 구절은 징관의 『대방광불화엄경소』의 이른바 「玄談」의 한 구절로부터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 87)『청량소』(T35, 515a26~28), “한 송이 연꽃잎 혹은 하나의 미세한 티끌이 가르침 등의 열 가지 쌍을 갖추고, 동시에 상응하여 구족함이 원만함도 또한 뒤의 아홉 문을 갖춘다.(一蓮華葉。 或一微塵。 則具敎等十對。 同時相應具足圓滿。 亦具後之九門。)”
- 88)「보법장」의 출전은 상권 1 각주 38) 참조.
- 89)대소大䟽(『화엄경탐현기』)의 출전은 상권 1 각주 38) 참조.
- 90)그려내어(瀉) : ‘瀉’는 뒤에 인용되어 있는 『花嚴略策』에도 보이며 그 인용 원문에는 ‘寫’로 되어 있다. 여기서도 ‘寫’로 해석하였다.
- 91)『십지경론』(K15, 24c19~22; T26, 139c14~17), “인드라그물의 차별과 같다는 것은 진실한 뜻의 모습이기 때문이다.……진실한 뜻의 모습은 오직 지혜로만 알 수 있다.(如帝網差別者。 眞實義相故。 〈中略〉眞實義相者。 唯智能知。)”
- 92)십현문 열 번째 문인 현상(事)에 의탁해서 법을 나타내어 이해를 내는 문(托事顯法生解門)의 마지막에도 “나머지는 이에 준할 수 있다.(餘可准之)”라는 구절이 있음을 가리킨다. 『일승법계도』(H2, 8b1).
- 93)법장, 『화엄일승교의분제장』(T45, 506b26~28).
- 94)법장의 『大方廣佛華嚴經金師子章』의 한 구절이다. 이 문헌은 그 주석서에 원문이 실려 있고 다른 화엄관련 문헌에도 인용되어 있다. 정원淨源, 『金師子章雲間類解』(T45, 665c3~5), 승천承遷, 『華嚴經金師子章註』(T45, 669c4~5), 심승審乘, 『華嚴五教章問答抄』(T72, 670b8~9) 등.
- 95)지엄, 『華嚴一乘十玄門』(T45, 516c12).
- 96)징관, 『청량소초』(T36, 10a19) 등.
- 97)열하나의 조림심(十一稠林心) : 『화엄경』 「십지품」의 제9선혜지에 설해진다. 자세한 내용은 하권 2 각주 25) 참조.
- 98)열 가지의 성기심(十種性起心) : 『화엄경』 「보왕여래성기품」에서 여래출현법의 네 번째로 설해지는, 열 가지 여래의 마음을 가리킨다. 하권 1 각주 67) 참조.
- 99)『華嚴略策』 : 청량 징관이 80권 『화엄경』을 주석한 『대방광불화엄경소』를 다시 42개의 항목으로 요약한 것으로서 『大華嚴經略策』이라고도 한다.
- 100)징관, 『대화엄경략책』(T36, 707b12~23).
- 101)『圓通首座記』 : 여기에서는 법장의 『화엄일승교분기』에 대한 균여의 주석서인 『釋華嚴教分記圓通鈔』를 가리킨다.
- 102)균여, 『석화엄교분기원통초』(K47, 233a7~31). 여기의 인용 구절과 『고려대장경』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크게 차이나는 부분은 해당 개소에서 밝히기로 한다.
- 103)『佛說不增不減經』(K13, 1311a9~10; T16, 467b17~18), “중생계가 곧 법신이고 법신이 곧 중생계이다.(衆生界卽法身。 法身卽衆生界。)”
- 104)오체五體 : 사람의 신체 전체를 가리킨다. 구체적인 항목은 머리와 사지四肢를 가리키며, 혹은 근육(筋)ㆍ혈맥(脈)ㆍ살(肉)ㆍ뼈(骨)ㆍ털피부(毛皮)를 가리키기도 한다.
- 105)부처와 중생과의 교화 관계에 대해 감응感應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에 대해서는 상권 1 각주 128) 참조.
- 106)규봉 선사圭峯禪師 : 규봉 종밀圭峯宗密(780~841). 선종 하택계의 선사로도 알려져 있다. 중국 화엄종 제5조이며 당나라 과주果州 서충西充(사천성) 출신으로 속성은 하何이다. 섬서陝西 악현鄠縣의 규봉 초당사草堂寺에 주로 머물러 규봉 대사 또는 규산 대사圭山大師라고도 하며, 시호는 정혜 선사定慧禪師이다. 807년 도원 선사道圓禪師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출가하였으며, 810년 청량 징관淸涼澄觀에게서 화엄의 교의를 배웠다. 교선일치敎禪一致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화엄과 선 관련에 대해 많은 저술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禪源諸詮集』 100권의 서문인 「都序」ㆍ『華嚴經行願品行疏鈔』ㆍ『注華嚴法界觀門』ㆍ『圓覺經大疏』ㆍ『圓覺經大疏鈔』와 『禪源諸詮集』 100권 등이 현존한다.
- 107)보현보살의 십대행원에서 여덟 번째, 항상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겠다는 원(恒隨佛學願) 가운데 한 구절이다. 『사십화엄』(K36, 227a11~12; T10, 845c7~8).
- 108)종밀의 『화엄경행원품소초』의 이 인용 부분은 직접 인용이 아니라 앞에서 인용된 균여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로부터의 간접 인용이다. 저본에서는 앞의 『석화엄교분기원통초』와 『화엄경행원품소초』를 각각 개별의 인용으로 편집하고 있지만 高에는 『원통수좌기』 중의 인용으로 되어 있다. 『화엄경행원품소초』의 해당 부분 출전은 다음과 같다.(卍7, 935a18~b6).
- 109)세 진리(三諦) : 제법실상諸法實相의 진리를 공空ㆍ가假ㆍ중中의 세 가지로 구분한 것을 가리킨다.
- 110)『일승법계도』(H2, 3c1~2; H6. 811a23~24).
- 111)이와 관련하여 다음 구절 등이 참조된다. 『佛說稻芉經』(K11, 605a9~10; T16, 816c24~25), “십이인연을 보는 것이 곧 법을 보는 것이고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見十二因緣。 卽是見法。 卽是見佛。)”, 『대반열반경』(K38, 961a22~b1; T12, 768c9~10), “만약 어떤 사람이 십이인연을 보면 곧 법을 보는 것이고 법을 보는 것이 곧 부처님을 보는 것이다.(若有人見十二緣者。 卽是見法。 見法者。 卽是見佛。)”, 『육십화엄』(K8, 52c4; T9, 442c5~6), “일체법이 모두 다 진실함이 없음을 분별하여 이와 같이 모든 법을 알면 곧 노사나불을 뵙는다.(分別一切法。 皆悉無眞實。 如是解諸法。 則見盧舍那。)”
- 112)법장의 『華嚴經明法品內立三寶章』 중 「流轉章」을 가리킨다. 이 구절은 삶과 죽음의 흘러 바뀜(流轉)을 열 항목으로 나누어 설하는 가운데 열 번째 항목인 관을 이룸(成觀) 중의 구절이다.
- 113)「유전장」의 열 번째 항목인 관을 이룸(成觀)에서 마지막으로 논하는 이해(解)와 행行 가운데 무념을 내용으로 하는 행行에 관한 문을 가리킨다.
- 114)벙어리 양羊 같은 중(瘂羊僧) : 지혜가 없는 승려를 벙어리 양에 비유한 것이다. 『대지도론』(K14, 520c7~11; T25, 80a18~22)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다. “누구를 벙어리 양 같은 중이라고 이름하는가? 비록 계를 파하지 않아도 근기가 둔하고 지혜가 없어서 좋음과 추함을 구별하지 못하고 가벼움과 중대함을 알지 못하고 죄가 있음과 죄가 없음을 알지 못한다. 혹 승가의 일이 있어서 두 사람이 함께 싸워도 결단을 내릴 수 없어서 잠자코 말이 없다. 비유하면 흰 양羊이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도 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를 벙어리 양羊 같은 중이라고 이름한다.(云何名啞羊僧。 雖不破戒。 鈍根無慧。 不別好醜。 不知輕重。 不知有罪無罪。 若有僧事。 二人共諍。 不能斷決。 默然無言。 譬如白羊。 乃至人殺。 不能作聲。 是名啞羊僧。)”
- 115)『本事經』(K20, 1014b2~5; T17, 679b19~22), “백천의 벙어리 양 같은 중은 지혜 없이 삼매를 닦으니 설령 백천 년을 지난다 해도 열반을 얻는 이 하나 없고, 열심히 닦는 지혜로운 사람은 즐겨 법을 듣고 법을 설하니 바란다고 생각하는 잠깐 사이에 열반을 빠르게 증득할 수 있다.(百千瘂羊僧。 無慧修靜慮。 設經百千歲。 無一得涅槃。 勤修智慧人。 樂聽法說法。 歛念須臾頃。 能速證涅槃。)”
- 116)법장, 『화엄경명법품내입삼보장』 「유전장」(T45, 619c11~19).
- 117)『총수록』에 인용된 『도신장』(H6, 783a11~19)에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 118)『팔십화엄』 「범행품」(K8, 526a8; T10, 89a1).
- 119)『수현기』(K47, 14a23~24; T35, 28b13~14).
- 120)『수현기』(K47, 49c9~11; T35, 68a25~27).
- 121)『총수록』의 『대기』(H6, 800b13~c17)는 신림의 설로서 다섯 가지 총상과 별상을 소개하는데 첫째가 별상을 여읜 총상으로서 오중해인 가운데 첫 번째, 모습을 잊은 해인(忘像海印)에 배대하고 있다.
- 122)『花嚴錦冠鈔』 :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67b6)에는 ‘錦冠鈔四卷。或二卷。 傳奧述。’로 되어 있으나 현존하지 않는다. 전오傳奧는 규봉 종밀에게서 화엄을 전해 받았다고 전해지며 속성은 한韓이다. 북경北京 석벽사石壁寺에 머무르며 화엄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다양한 저술을 지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梵網經記』(2권)뿐이다. 『盂蘭盆經疏鈔餘義』(卍94, 826a2~4) 등.
- 123)위의 둘은 『대방광불화엄경』 제목 일곱 글자를 일곱 문으로 분별하는 가운데 첫 번째(理智分別)와 두 번째(體相用因果分別)를 가리킨다.
- 124)열 바다(十海) : 『팔십화엄』 「世界成就品」에서 보현보살이 관찰하는 바다와 같이 한량없고 불가사의한 열 가지 경계를 가리킨다.(K10, 465a13~17; T10, 34b10~14) 구체적으로는, ① 일체 세계(一切世界海), ② 일체중생(一切衆生海), ③ 일체 모든 부처님(一切諸佛海), ④ 일체 법계(一切法界海), ⑤ 일체중생의 업(一切衆生業海), ⑥ 일체중생의 근기와 욕구(一切衆生根欲海), ⑦ 일체 모든 부처님의 법륜(一切諸佛法輪海), ⑧ 일체 삼세(一切三世海), ⑨ 일체 여래의 원력(一切如來願力海), ⑩ 일체 여래의 신통변화(一切如來神變海)이다. 『육십화엄』에서 대응하는 곳은 「盧舍那佛品」(K10, 465a13~17; T10, 34b10~14)에 보이며 열 바다가 아니라 다섯 바다(五海)로 되어 있다. 상권 1 각주 167) 참조.
- 125)같은 부류의 세계가 주主와 반伴을 겸하는 것이 아홉째이고, 다른 부류의 세계가 주主와 반伴을 겸하는 것이 열째가 되어, 합하여 열 거듭을 이룬다는 것이다.
- 126)상권 1 각주 92) 참조.
- 127)『팔십화엄』 「여래현상품」(K8, 462c19; T10, 32c11~12).
- 128)『팔십화엄』 「세주묘엄품」(K8, 450c21~22; T10, 21c23~25), “이 모임에서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것을 보는 것처럼, 일체의 티끌에서도 다 이와 같다. 부처님의 몸은 가심도 없고 또한 오심도 없으나, 있는 바 국토에서 모두 분명하게 나타나신다.(如於此會見佛坐。 一切塵中悉如是。 佛身無去亦無來。 所有國土皆明現。)”
- 129)『팔십화엄』 「수미정상게찬품」(K8, 518b13; T10, 81c15~16).
- 130)『팔십화엄』 「보살문명품」(K8, 501b22; T10, 66b24~25).
- 131)『四大常轉法輪觀』 : 현존하는 불전 목록류에는 이러한 이름의 저술이 보이지 않는다. 또 다른 문헌에 인용된 것도 보이지 않는다.
- 132)『佛垂般涅槃略說敎誡經』〔속칭 『遺敎經』(K13, 1180b19 ~20; T12, 1111a20)〕, “그것을 한 곳에 제어하니 변별하지 않는 일이 없다.(制之一處。 無事不辦。)”
- 133)『圓通首座記』 : 여기 인용문에도 저술의 이름 없이 『圓通首座記』로만 되어 있다. 앞의 『원통수좌기』는 『석화엄교분기원통초』이나(하권 2 각주 102) 참조) 여기의 구절은 현존하는 균여의 저술에 일치하는 부분이 없다. 그런데 인용문 가운데 지엄의 『공목장』의 한 구절을 ‘장주章主’라는 표현과 함께 설하고 있으며, 균여가 그의 현존 저술에서 그가 주석하고 있는 저술의 저자를 ‘장주章主’로 표현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이 인용문은 혁련정이 지은 『균여전』(K47, 260b02)에 소개되어 있는 균여의 저술 중 현존하지 않는 『孔目章記』일 것으로 생각된다.
- 134)『화엄경탐현기』(K47, 517b8~9; T35, 170b6~7).
- 135)『일승법계도』(H2, 4c19~20; H6, 812c3~4).
- 136)『팔십화엄』 「광명각품」(K8, 499c25; T10, 65a10), 『육십화엄』 「광명각품」(K8, 34a24; T9, 425a13)의 해당하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여러 많은 법 가운데 하나의 모습이 없고 하나의 법 가운데 또한 많음이 없다.(衆多法中無一相。 於一法中亦無多。)”
- 137)지엄은 『수현기』(K47, 13a21~b4; T35, 27a27~b11)에서 해당 구절을 진수보살進首菩薩의 제7지 게송으로 주목하지만 이에 대해 즉문, 중문, 수십법 등을 설하지는 않는다. 단 그전의 목수보살目首菩薩의 제6지 게송으로 설해지는, “하나가 능히 한량없음이 되고, 한량없음이 능히 하나가 된다.(一能爲無量。 無量能爲一。)”(K8, 33c19; T9, 424c9~10) 등의 부분을 주석하며 중문과 즉문에 대해서 풀이한다. 또한 지엄의 저술로 전해지지만 위찬설이 제기되는 『화엄일승십현문』(T45, 514b17~19)에서는 「광명각품」(K8, 32b5; T9, 423a1~2)의 “하나 가운데 한량없음을 알고 한량없음 가운데 하나를 안다. 변화하여 생겨나 진실이 아니니 지혜로운 자는 두려운 바가 없다.(一中解無量。 無量中解一。 展轉生非實。 智者無所畏。)”라는 구절을 수십법 가운데 중문의 경증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 138)『팔십화엄』 「광명각품」(K8, 500a2; T10, 65a14~15). 경에는 ‘衆生及國土’이니 ‘衆生’과 ‘國土’의 자리가 전후로 바뀌어 있다.
- 139)지엄의 『공목장』 중 한 구절이다. 출전은 하권 2 각주 140) 참조.
- 140)지엄, 『공목장』(T45, 536c21~22), “初會如是我聞首。 料簡下文。 所目之義。”
- 141)『육십화엄』 「입법계품」(K8, 424c13~14; T9, 788a27~b1)의 가장 마지막 게송을 가리킨다. “중생의 마음은 미세한 티끌과 바다의 물방울 (같아도) 셀 수 있으며 허공 또한 헤아릴 수 있지만 부처님의 덕을 설함은 다함이 없다. 이 법을 듣고 환희하며 믿는 마음에 걸림이 없는 자는 위없는 도를 빠르게 이룰 것이니 모든 여래와 더불어 동등하다.(衆生心微塵。 海水渧可數。 虛空亦可量。 佛德說無盡。 聞此法歡喜。 信心無疑者。 速成無上道。 與諸如來等。)”
- 142)두 번째 뜻에 의하면 ‘如是我聞一時佛’이 첫 번째 부처님, ‘摩竭提國寂滅道場’이 두 번째 부처님, ‘始成正覺’이 세 번째 부처님이 된다.
- 143)『明難記』 : 『육십화엄』의 「보살명란품」의 해석 부분인 것으로 보이나 누구의 어떤 주석서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보현 22위’설은 지엄의 『수현기』에 보인다.
- 144)윤현潤玄 대덕 : 윤현 대덕은 이곳 ‘고기’에서 전하는 것처럼 범체 대덕에게서 『화엄경』의 열 가지 대의를 전해 받았고 ‘윤현덕潤玄德’이라고 호칭되는 것으로 보아 의상계 화엄학승으로 보인다.
- 145)세달사(世達藪) : 『삼국사기』(권50 「열전」 〈궁예〉조)와 『삼국유사』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H6, 331c9~332a1) 등에 의하면, 세달사는 고려 전기에 흥교사興敎寺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新增東國輿地勝覽』이 경기도 풍덕군豊德郡의 백련산(권13)과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태화산 서쪽(권46)에 소재하는 두 곳의 흥교사를 기록하고 있어 논란이 있었으나, 근래에 영월군 태화산 서쪽의 흥교사지가 세달사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균여는 『십구장원통기』(H4, 40a12~13)에서 신림을 ‘세달사문신림世達寺沙門神林’으로 부르고, 의천은 신림에 대해 「興敎寺禮神林祖師影」이라는 찬讚을 남기고 있다.(『大覺國師文集』 권18) 또한 질응과 범체가 세달사에서 강의를 했다는 이 본문의 기록 등을 볼 때 세달사는 의상계 화엄 승려들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에 의하면 세달사는 궁예弓裔(?~918)가 출가하여 수도한 곳이기도 하다.
- 146)아래의 인용문은 종밀의 『화엄경행원품소초』에서 법장의 저술을 인용한 것을 『총수록』의 편자가 재인용한 것이다.(卍7, 955b2~956b4).
- 147)『花嚴三昧觀門』 : 법장의 『화엄경탐현기』(K47, 6다3a26~27; T35, 347c3~4)와 『화엄경전기』(T51, 172b12), 그리고 최치원의 『법장화상전』(T50, 281a5) 등에서는 법장의 저술로 『華嚴三昧觀』 1권을 들고 있다. 이 문헌은 현존 대장경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일본 고산사高山寺에 송宋나라 때의 판본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이 문헌은 법장의 저술로 전해지는 『華嚴發菩提心章』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니, 일례로 여기에 ‘화엄삼매관문’이라는 제목으로 인용되어 있는 부분이 『화엄발보리심장』(T45, 651b28~652a4)에 거의 그대로 수록되어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화엄발보리심장』은 전체 1권으로서, 첫 번째, 마음을 일으킴(發心第一)ㆍ두 번째, 가르침을 가려냄(簡敎第二)ㆍ세 번째, 잘못을 드러냄(顯過第三)ㆍ네 번째, 덕을 표시함(表德第四)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여기 인용된 부분은 그중 두 번째 전체에 해당한다. 그러나 종밀이 이 부분을 ‘네 번째, 가르침을 가려내는 문(第四簡敎門)’이라고 인용하는 점과 『화엄경전기』에 ‘화엄삼매관 1권 열 문(華嚴三昧觀一卷十門)’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 등을 볼 때, 현존 『화엄발보리심장』이 『화엄삼매관』과 동일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아래에서는 종밀의 『화엄경행원품소초』와 법장의 『화엄발보리심장』의 해당 부분과 교감하여 내용상 크게 차이나는 부분만을 밝힌다.
- 148)이곳에 현수 법장의 설로서 인용되는 부분은 현존하지 않는 법장 저술의 일부분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문헌의 이름은 알 수 없다.
-
149)『華嚴經傳記』와 『纂靈記』 : 이 두 문헌의 관계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이견이 있어 왔다. 최치원의 『법장화상전』(T50, 283a3~8)에는 법장의 저술로 『화엄경전기』 5권을 들고 있는데 이를 ‘찬영기’라고도 하며 법장이 스스로 마치지 못하여 그의 제자 혜원慧苑과 혜영慧英이 마쳤다고 전한다. 이에 따르면 『화엄경전기』와 『찬영기』는 같은 책으로서 다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T55, 1167c12~14)에는 법장의 저술로 『화엄경전기』 5권을 소개하면서 동시에 그의 제자 혜원慧苑의 저술로서 『찬영기』 5권을 별도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시기상 앞의 두 기록보다 앞서는 이곳의 인용문, 즉 종밀의 『화엄경행원품소초』에서는 『화엄경전기』 5권과 『찬영기』 2권을 다른 책으로 들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자료에 따르면 『화엄경전기』와 『찬영기』는 서로 다른 저술로 생각된다. 한편 화엄 관련 문헌에 『화엄경전기』 혹은 『찬영기』로 인용되는 내용을 현존하는 『화엄경전기』에서 확인하여 보면 『찬영기』로 인용되는 상당 부분이 현존 『화엄경전기』에서 찾아지지만 일부의 경우 현존 『화엄경전기』에 없는 경우가 있다. 종밀의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略疏』에 ‘찬영기’로 인용되는 부분(T39, 528b29~c1)이 그러하며 또한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에서도 『찬영기』를 인용하여 법장의 전기를 서경西京(長安) 화엄사華嚴寺 승려 천리千里가 지었다는 내용을 전한다. 이 구절은 현존 『화엄경전기』에 없을 뿐만 아니라 내용상으로도 법장이 지은 문헌에 있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법장이 저술하다 마치지 못한 『화엄경전기』의 원형과 후에 혜원과 혜영이 끝마친 『화엄경전기』의 보완본의 두 종류가 있는데 이를 시대와 사람에 따라서 『화엄경전기』와 『찬영기』라는 두 이름으로 구분하거나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여 혼란이 생긴 것으로 추정된다.
- 1)「文云二」作「二明」{甲}。
- 2)「坐」作「床」{甲}。
- 3)「坐」作「在」{甲}。
- 4)「床」作「牀」{甲}。
- 5)「攝持」作「即攝攝」{甲}。
- 6)「成」無有{甲}。
- 7)「花」作「華」{甲}。
- 8)「說」無有{甲}。
- 9)「着」作「著」{甲}次同。
- 10)「涅槃」作「化」{甲}。
- 11)冠註曰永一作求{甲}。
- 12)冠註曰量一作碍{甲}。
- 13)「現」作「顯」{甲}次同。
- 14)「且」作「宜」{甲}。
- 15)「未」作「永」又冠註曰永疑未{甲}。
- 16)「煩惱」作「菩薩」又冠註曰菩薩疑煩惱下同{甲}次同。
- 17)「耶」作「也」{甲}。
- 18)「旣」作「現」{甲}。
- 19)「云」作「言」{甲}次同。
- 20)「徧」作「偏」{甲}ㆍ作「遍」{乙}。
- 1)「得」下有「相即」{甲}。
- 2)「陁」下有「羅尼」{甲}。
- 3)「伴」作「半」{甲}。
- 4)「學」作「覺」{甲}。
- 5)「中」作「即」又冠註曰即疑中{甲}。
- 6)「一」下有「故」{甲}。
- 7)「如是往反」作「生變如是」{甲}。
- 8)「旣」作「現」{甲}。
- 9)「耶」作「也」{甲}。
- 10)「故」無有{甲}。
- 11)「何」無有{甲}。
- 12)「有自」作「相有」{甲}。
- 13)「不自在」無有{甲}。
- 14)「不生」無有{甲}。
- 15)「義中」無有{甲}。
- 16)冠註曰道上疑脫中字{甲}。
- 17)「是」上有「爲」 又冠註曰是字疑剩{甲}。
- 18)「復」作「亦」{甲}。
- 19)「道」下有「義」{甲}。
- 20)「知」作「中智」{甲}。
- 21)「盡」無有{甲}。
- 22)「又」作「文」 又冠註曰文疑又{甲}。
- 23)「即」下有「多」{甲}。
- 24)「去」作「失」{甲}。
- 25)「現」作「離」又冠註曰離疑顯{甲}。
- 26)「失」作「故」{甲}。
- 27)「是」下有「可」{甲}。
- 28)「弟」作「第」{甲}{乙}次同。
- 29)「去」下有「之」 又冠註曰一無之字{甲}。
- 1)「問」作「間」{乙}。
- 2)「與」作「焉」{乙}。
- 3)「隨」下有「隨」 又冠註曰隨一作相{甲}。
- 4)「差」作「義」{甲}。
- 5)「順」作「隨」{甲}次同。
- 6)「弟」作「第」{甲}次同。
- 7)冠註曰其下疑脫義字{甲}。
- 8)「義」無有{甲}。
- 9)「十」作「一」{甲}。
- 10)「下」作「上」{甲}。
- 11)「成」無有{甲}。
- 12)「托」作「說」{甲}。
- 13)「緣」作「顯」{甲}次同。
- 14)「全」作「今一」又冠註曰今一一作亦{甲}。
- 15)「何」下有「以」{甲}。
- 16)「與」作「焉」{乙}。
- 17)「其」下有「其」又冠註曰其字疑剩{甲}。
- 18)「者」無有{甲}。
- 19)「阿耶」作「何耶」 又冠註曰何耶疑阿爺{甲}。
- 20)「同」下有「總」又冠註曰總字疑剩{甲}。
- 21)「弟」下有「子」{甲}。
- 22)「無」無有{甲}。
- 23)「不」作「無」{甲}次同。
- 24)「是」作「即」{甲}。
- 25)「鑰匙」作「」{甲}。
- 26)「才」作「大」{甲}。
- 27)「圓」作「滿」{甲}。
- 28)「云」作「言」{甲}。
- 1)「」作「希」{甲}ㆍ作「又布」{乙}。
- 2)「人」作「有」{甲}。
- 3)「饒」作「余」又冠註曰全疑樂{甲}。
- 4)「掌」作「常」又冠註曰常一作掌{甲}。
- 5)「同」下有「時」{甲}。
- 6)「門所」作「相」{甲}。
- 7)「但」作「俱」{甲}次同。
- 8)「從」下有「緣」{甲}。
- 9)「門」作「事」{甲}。
- 10)「唯」作「隨」{甲}。
- 11)「托」作「託」{甲}。
- 12)冠註曰前下疑脫二字{甲}。
- 13)「十門」無有{甲}。
- 14)「門玄」作「玄門」{甲}。
- 15)「與」作「焉」{甲}。
- 16)「齊」無有{甲}。
- 17)「攝」無有{甲}。
- 18)「花」作「華」{甲}次同。
- 19)「着」作「看」又冠註曰看一作著{甲}ㆍ作「著」{乙}。
- 20)「存」作「在」{甲}。
- 21)「切」下有「諸」{甲}。
- 22)「自」無有{甲}。
- 23)「法」無有{甲}。
- 24)「言」無有{甲}。
- 25)「熏」作「重」 又冠註曰重疑熏{甲}。
- 26)「普」無有{甲}。
- 27)「佛」下甲本有如下門「法界圖章一乘法界圖終。華嚴宗香鳥大師末葉非人釋題。頭法師之執筆也。建曆二年三月三日。子始許於高山以法勝寺仝本一校賢穴八吁」。
- 28)「着」作「著」{乙}次同。
- 1)「弟」作「第」{乙}。
- 2)「塵」作「坐」{乙}次同。
- 3)「訂」通「證」於此書{編}次同。
- 4)「未」作「末」{乙}。
- 5)「云心」作「忘」{乙}。
- 1)「糓」作「殺」{乙}。
- 1)「寶」作「室} {乙}。
- 2)「㢡」作「將寸」{乙}。
- 3)「弟」作「第」{乙}次同。
- 4)「」作「收」{乙}次同。
- 1)「弟」作「第」{乙}。
- 2)「着」作「著」{乙}。
- 1)「娑」作「裟」{乙}次同。
- 2)「」作「睡」{乙}次同。
- 3)「欠」作「缺」{乙}。
- 1)「着」作「著」{乙}次同。
- 2)「弟」作「第」{乙}次同。
- 3)「數」作「敎」{乙}。
- 4)脚註曰一一疑二{乙}。
- 5)「曰」作「白」{乙}。
- 1)「去」作「云」{乙}。
- 2)「口」無有{乙}。
- 3)「弟」作「第」{乙}次同。
- 1)「即」作「耶」{乙}。
- 2)「弟」作「第」{乙}次同。
- 3)「大」作「六」{乙}。
- 1)「訂」通「證」於此書{編}次同。
- 2)「網」作「綱」{乙}。
- 3)「每」作「海」{乙}。
- 4)「互」作「玄」{乙}。
- 5)「弟」作「第」{乙}。
- 1)「法」作「皆」{乙}。
- 2)「修」作「終」{乙}。
- 3)「互」作「玄」{乙}。
- 1)「迁」作「還」{乙}。
- 2)「俠」作「狹」{乙}次同。
- 3)「茟」作「筆」{乙}。
- 4)「覩」作「觀」{乙}。
- 1)「歛」作「欲」{乙}。
- 2)「弟」作「第」{乙}次同。
- 1)「訂」通「證」於此書{編}次同。
- 2)「俠」作「狹」{乙}。
- 1)「一」無有{乙}。
- 2)「着」作「著」{乙}。
- 3)「弟」作「第」{乙}。
- 4)「不見」覔」{乙}。
- 1)「弟」作「第」{乙}次同。
- 2)「雖」作「離」{乙}。
- 3)「科」作「料」{乙}。
- 4)「一」作「二」{乙}。
- 1)「弟」作「第」{乙}次同。
- 2)「二」作「三」{乙}。
- 3)「徧」作「遍」{乙}。
- 4)「着」作「著」{乙}。
- 5)「網」作「綱」{乙}。
- 1)「畫」作「盡」{乙}。
- 2)「忘」作「志」{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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