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소요당집(逍遙堂集) / 逍遙大師詩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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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대사시집 서문(逍遙大師詩集序)
시가詩家에서는 시도詩道에 깊이 통달한 것을 일컬어 선오禪悟를 얻었다고 한다. 이는 대개 깨달음(悟)이라는 것이 불씨佛氏의 최고 경지를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시가 깨달음의 경지에 나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서는 왕마힐王摩詰(王維)의 시가 선오에 가깝다고 칭해질 뿐이요, 그 밖에 거론되는 사람은 없다. 치류緇流(승려)의 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육조 시대로부터 삼당三唐4)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를 잘한다고 이름난 사람은 많지만 깨달음의 경지를 풀어낸 사람은 볼 수가 없다. 이는 어쩌면 그들이 학문의 차원에서 깨달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춘담 상인春潭上人이 담양의 옥천암玉泉菴에서 800리 길을 달려와 나를 찾아와서는 그의 6세 법조法祖인 소요 대사의 시집에 대한 서문을 부탁하였다. 내가 펼쳐 보았더니, 수록된 시가 오언ㆍ칠언의 절구와 율시 200여 수에 지나지 않았으나, 청공淸空하고 담박澹泊하여 구름이 허공을 지나는 것과 같고 달이 냇물에 비치는 것과 같았으며, 명언名言으로 묘하게 비유하여 색상色相의 한계를 초월하였으니, 대개 깨달은 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대사의 법맥法脈을 물어보았더니, 대사는 바로 서산 대사의 정통 제자라고 대답하였다. 대저 서산 대사로 말하면, 일찍이 선종을 천양闡揚하고 현지玄旨에 묘하게 계합하여 슬기로운 관(慧觀)과 신령한 지혜(靈智)를 갖추었음은 물론이요, 육도六韜ㆍ삼략三略에도 두루 통달하여 왕사王師를 도우며 임진년의 왜란을 구하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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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_0185_b_09L1)逍遙大師詩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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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家以深於詩道謂得禪悟盖悟是佛
008_0185_b_12L氏之極工耳雖然詩造悟境甚難世稱
008_0185_b_13L王摩詰詩近禪悟而其餘無聞焉緇流
008_0185_b_14L之詩亦然自六朝至三唐號能詩者衆
008_0185_b_15L而未見其有悟解豈彼於其學有未甚
008_0185_b_16L悟故歟一日春潭上人自潭陽玉泉菴
008_0185_b_17L飛錫八百里謁余以其六世法祖逍遙
008_0185_b_18L大師詩集屬爲叙閱之則詩止五七言
008_0185_b_19L律絶二百有餘篇而淸空澹泊如雲過
008_0185_b_20L而月印川間以名言妙喩超詣色
008_0185_b_21L相之先盖近於悟者也問師法派
008_0185_b_22L曰師是西山大師之嫡傳弟子也夫西
008_0185_b_23L山師夙闡禪宗妙契玄旨慧觀靈智
008_0185_b_24L旁曉鞱畧左右王師普濟龍蛇之難

008_0185_c_01L만법萬法이 일심一心으로서 상황에 따라 원만하게 통하는 묘리를 밝게 깨달은 분이 아니라면 이와 같이 할 수가 있었겠는가. 법문法門과 의발이 깨달은 사람으로부터 깨달은 사람에게 전해진 것이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하겠는데, 소요 대사의 유희游戲 삼매도 그 깨달음이 시도에 미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대사를 다비茶毘하던 저녁에 사리 두 개의 상서祥瑞가 나타났으므로 탑을 세워서 봉안하였다. 그런데 이 200여 편의 시로 말하면 두 개의 사리와 같은 소중한 보배일 뿐만이 아니라고 할 것이니, 그러고 보면 상인이 나에게 한마디 말을 청하여 길이 전하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나는 일찍이 서산 대사를 위하여 그의 영정을 모신 전각에 기문記文을 쓴 인연도 가지고 있다. 그러니 지금 소요 대사의 시집에 유독 한마디 말을 하는 것을 아끼겠는가.”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대사는 이미 육진六塵을 벗어나 삼계를 초월하였으니, 사대四大를 매미 껍질처럼 여길 것이다. 그러니 시로 남긴 것이 어찌 선사의 존망存亡과 관계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이에 대해서 상인은 “그 말씀이 물론 옳기는 합니다. 하지만 시는 스님이 남긴 자취인데, 우리 스님이 떠나가신 뒤로 20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그래도 비슷한 것을 찾아보려면 오직 남긴 자취밖에는 없습니다. 그 자취를 따라 사모하게 되고 사모함에 따라 스님이 여기에 계시게 되는 것이니, 어떻게 전하는 일을 그만둘 수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내가 그의 생각에 느껴지는 바가 있기에 마침내 이와 같이 말하게 되었다.
성상聖上 19년 을묘년(1795)에 해좌산인 정범조는 짓다.

008_0185_c_01L非洞悟萬法一心隨類圓通之妙能如
008_0185_c_02L是哉法門衣鉢以悟傳悟無恠乎
008_0185_c_03L遙師之游戱三昧悟及詩道也師於茶
008_0185_c_04L毗之夕雙珠現瑞塔而奉之惟是二
008_0185_c_05L百餘篇之詩不翅雙珠之寶重則宜上
008_0185_c_06L人之乞言於余欲垂之窮刼也余甞爲
008_0185_c_07L西山師記其寫照之閣今於師之集
008_0185_c_08L獨靳於言乎雖然師旣脫六塵超三界
008_0185_c_09L視四大如蜩甲咳唾之餘曷足爲師之
008_0185_c_10L有亡哉上人曰是固然矣抑詩師之
008_0185_c_11L跡也去吾師二百餘年之久而求其髣
008_0185_c_12L惟跡而已因跡而慕因慕而師斯
008_0185_c_13L烏可已乎余感其意而爲之言如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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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3] 十九年乙卯海左散人丁範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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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4)삼당三唐 : 당나라 때 시풍詩風을 세 시기로 분류한 것으로, 초당初唐ㆍ성당盛唐ㆍ만당晩唐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