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추파집(秋波集) / 秋波集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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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파집秋波集 권3
기記
상주 묘적암기
고개 동쪽으로 구불구불 일어났다 엎드리고 엎드렸다 일어나면서 높다랗게 솟은 산을 사불산四佛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높이 열 길 되는 튼튼한 큰 돌이 의지하는 곳 없이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이 누가 떠받치고 있는 것 같다. 4면이 다 부처님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일부러 새기지도 않았는데 닮은 모양이 하늘이 만든 솜씨이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사불석四佛石이라고 부른다.
서쪽 아래 수십 걸음쯤에 묘적암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나옹懶翁 화상이 머리를 깎은 곳이다. 암자 아래 높다란 노송나무 두 그루가 있으니, 십여 아름 정도의 크기로 화상이 손수 심은 나무라 한다. 문 아래의 돌에는 거인의 발자국 둘이 있는데, 속칭 화상의 족적이라고 한다.
내 나이 17세 때에 중형仲兄을 따라 산을 유람하다가 이곳에 와서 하루를 묵었는데, 암자의 탁림卓琳 스님이 나에게 기문記文을 써 주기를 청하였다.
“이 암자는 어느 시대에 건립하였는지 모르나 건물이 기울고 무너져 거의 우거진 숲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기미년에 산인 경수敬珠가 도승과 함께 이곳에 와 살면서 재목을 모으고 기술자를 맞이하여 예전 재목 가운데 괜찮은 것은 그대로 두고 썩은 것은 새것으로 바꾸어서 채 한 달이 안 되어 완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담징 선자淡澄禪子를 청하여 그림과 단청(丹雘)106)을 맡겨 꾸미게 하였습니다. 이 모두는 경수 옹의 공입니다. 옛적 이 암자를 창건한 자도 필시 경수 옹과 같았을 터이나 기록이 없어서 그 공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지금 또 기록하여 나타내지 않는다면 아마도 경수 옹 역시 옛사람과 같이 드러나지 않게 될까 걱정입니다. 그 드러나고 드러나지 않음은 사실 경수 옹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암자에 있어서는 전고(故實)를 전하는 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대는 헤아려 주기를 바랍니다.”

010_0073_c_02L秋波集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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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073_c_05L尙州竗寂庵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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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嶺而東委委蛇蛇起而伏伏而起
010_0073_c_07L有崷然而聳者曰四佛山上有巨石
010_0073_c_08L十丈强另立不倚 若有扶持之者焉
010_0073_c_09L四面皆有佛形不鐫而肖乃天造也
010_0073_c_10L以是世稱四佛石西下數十步許有一
010_0073_c_11L庵曰竗寂迺懶翁和尙所薙髮處庵下
010_0073_c_12L有嵬然二檜樹大可十餘圍和尙手所
010_0073_c_13L植也門下石上有巨人迹二俗稱和
010_0073_c_14L尙足痕余十七從仲兄遊山至此宿
010_0073_c_15L留一日庵之僧卓琳請記於余曰
010_0073_c_16L庵不知何代所建而棟宇傾圮殆爲榛
010_0073_c_17L莽矣歲己未山人敬珠以有道僧
010_0073_c_18L居于此乃鳩材邀工其舊材之完者因
010_0073_c_19L朽者新之不月而成又請淡澄禪
010_0073_c_20L授以繪事丹雘而文之皆珠翁之
010_0073_c_21L功也昔之剏是庵者必如珠翁而無記
010_0073_c_22L其功不著今又不記而揭之則吾恐珠
010_0073_c_23L翁亦如昔人而不著也其著不著固無
010_0073_c_24L與於珠翁而在庵故實之傳不可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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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유가의 선비여서 불가의 문장을 모릅니다.107) 게다가 나이도 어리니 어찌 되지 않은 문장으로 그 청정한 비유를 더럽히겠습니까?”
탁림 스님의 청이 더욱 간절하여 나는 어쩔 수 없이 글을 써서 그 청에 답한다.
운봉 백련암 정루기
운성雲城은 호남의 현으로 마을 앞으로 잔잔히 흐르는 시내를 혈천血川이라 하고 시내 옆에 높이 솟은 산을 방장산이라 부른다. 시내를 건너 산으로 10리쯤 오르면 날개를 펼친 듯 암자 하나가 있으니 백련암이라 한다. 옛적 인조대왕 재위 시에 학정學淨 상인이 세운 암자이다.
내 나이 19세 때에 이곳에 올라 선비 신분을 버리고 가사를 입었다. 이로부터 10여 년을 영남과 호남 사이를 두루 유람하면서도 언제나 그 빼어난 경치를 상상하였다. 신미년 가을 내가 용성龍城에 갈 일이 있어서 이 암자의 계운 공溪雲公을 방문하려고 다시 그 문에 올랐더니 새로 세운 큰 누각 다섯 기둥이 너무나 시원하고 상쾌하였다.
물어보니 일을 주관한 사람은 포일抱一이고, 공양을 맡은 사람은 필순必淳이며, 공사를 감독한 사람은 정특丁特이라 한다. 세 사람이 대중들과 함께 의논하고 전력을 다하여 목공을 청하고 기사년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가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아! 옛 기록에 의하면 여운如運과 원응圓應 두 사문이 강희康熙 병진년에 처음 건립하였다고 한다. 병진년부터 기사년까지 74년이나 흘러 꼿꼿했던 누각은 기울고 말끔했던 서까래는 썩었으나 누구 하나 수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다 포일 공에 이르러 중수하기 시작하였으니 여운과 원응 두 비구가 다시 온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렇게 쉽게 이루면서도 위대한 일을 해냈을까? 석화石火처럼 빠르게 흥폐가 서로 번갈아 찾아오니 오늘 이후에는 몇 십 년이나 지나서 다시 중수하게 될지 모르겠다.

010_0074_a_01L願子圖之余曰吾儒士也不知西敎文
010_0074_a_02L況年未冠矣烏可以未成之文
010_0074_a_03L其淨譬乎琳請益切余不得已書之
010_0074_a_04L酬其請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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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074_a_06L雲峯白蓮庵正樓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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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城迺湖縣縣之前有水潺然曰血川
010_0074_a_08L川之傍有山嶄然曰方丈涉川而登山
010_0074_a_09L步十里許有庵翼然曰白蓮昔我仁廟
010_0074_a_10L在宥之時學淨上人所建也余年十九
010_0074_a_11L登陟于玆舍簪而服田裳自是遍遊
010_0074_a_12L十餘年徃來於嶺湖之間每想像其勝
010_0074_a_13L辛未秋余有事適龍城歷訪溪雲
010_0074_a_14L公於是庵再登其門大樓五楹重新焉
010_0074_a_15L極其蕭爽問其尸事人曰抱一也管饋
010_0074_a_16L人曰必淳也董役人曰丁特也三人與
010_0074_a_17L大衆協謀而戮力邀梓匠己巳春始
010_0074_a_18L至秋告成按諸舊誌如運圓應
010_0074_a_19L二沙門於康熙丙辰始立之自丙辰
010_0074_a_20L至己巳凡七十四年樓之正者欹
010_0074_a_21L之完者朽而無一人葺焉至一公而始
010_0074_a_22L新之無乃運應二比丘重來耶何其成
010_0074_a_23L之易而事之偉也石火遄飛廢興相尋
010_0074_a_24L未知今而後幾十年復有重修之擧乎

010_0074_b_01L또 어떤 포일 공처럼 부지런한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내가 10년 동안 왕래하면서 그 무너짐과 일으킴을 다 눈으로 보았으니 참으로 감동스러울 뿐이다.
내 공문空門에서 발원하기 이미 오래이나 끝내 이룬 것이 없으니 재목과 기와를 다 갖추고 이제 집을 지으려 하지만 언제 빛나는 단청을 보게 될지 모르는 것과도 같다. 거듭 이 누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이에 노래를 부른다.

雲山蒼兮雲水泱       구름 낀 산은 푸르고 구름 비친 물은 깊은데
樓之新兮一公之功      누각을 새로 지었으니 포일의 공이로다.
䓗嶺遠兮恒河靑       총령䓗嶺은 멀고 항하恒河는 푸르니
我之室兮唯願牟尼盧之佑成  나의 집이여, 그저 석가모니 비로자나 부처님의 도움으로 이루소서.
속리산 유람기
계미년 중양절重陽節에 나는 큰형님을 뵈러 서쪽으로 길을 나서 공림空林을 나갔다. 동리 밖으로 수백 걸음을 나가 바라보니 봉우리 몇 개가 하늘에 뾰족하게 들어간 모습이 심히 기이하고 높았다. 내 생각에 그것이 속리산이지 싶었으나 알 수 없었기에 따라오던 보윤普潤 스님을 돌아보며 물어보았다.
“저게 필시 속리산이겠지? 속리산은 내가 한번 가 보고 싶었던 곳이다. 설사 속리산이 아니라 해도 이런 산이라면 오를 만하겠구나. 내가 이 산을 보고 돌아가면 우리 큰형님께서도 반드시 기뻐하실 것이다.”
가다가 낫을 메고 가는 노인 하나를 만나 물어보았다.
“저게 속리산입니까?”
노인이 대답하였다.
“그렇소. 스님은 어떻게 아셨소?”
내가 말하였다.
“사람이 빼어나기가 어디 쉽습니까? 산도 그렇지요. 호서의 산 중에 속리산이 가장 유명한데 이곳이 호서 땅이라 내가 딱 보고 알았지요.”
노인이 말하였다.
“사람은 종류가 아주 많고 산도 그러하니, 그대가 가려야지요. 호서의 산에 속리산보다 높은 게 없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고는 쳐다보며 웃기에 내가 말하였다.
“산속까지는 몇 리나 됩니까?”
그가 대답하였다.
“지름길로 가면 3성成108)이지만 돌아가면 40리나 됩니다. 하지만 지름길은 험한데다 또 높은 고개가 있어서

010_0074_b_01L又未知何人如一公之勤乎余來徃十
010_0074_b_02L年之間其廢其興皆目見之可感也
010_0074_b_03L余之發願空門者已久而卒未有成
010_0074_b_04L如材瓦旣具結搆方將未知何時見丹
010_0074_b_05L雘之煥然耶重有愧於斯樓也乃爲之
010_0074_b_06L歌曰雲山蒼兮雲水泱樓之新兮
010_0074_b_07L公之功䓗嶺遠兮恒河靑我之室兮
010_0074_b_08L唯願牟尼盧之佑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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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_0074_b_10L遊俗離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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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未重陽余爲覲伯氏西行道空林出
010_0074_b_12L洞外數百步望之有數峯岌然入雲
010_0074_b_13L霄間甚奇峻余意其爲俗離山而未
010_0074_b_14L之知顧謂從行僧普潤曰是必俗離也
010_0074_b_15L俗離吾所願一遊雖非俗離有山如此
010_0074_b_16L可不登乎吾見此山而歸吾伯氏聞之
010_0074_b_17L亦必喜矣前遇一老夫荷鎌而過問曰
010_0074_b_18L彼俗離耶老夫曰師何以知之
010_0074_b_19L人而拔萃者其易乎山亦然湖西之
010_0074_b_20L俗離名最高而此湖西地吾見而
010_0074_b_21L知之曰人之類甚多山亦然惟子擇
010_0074_b_22L湖西之山安知無高於俗離者乎
010_0074_b_23L因相視而笑余曰至山中幾里曰就徑
010_0074_b_24L則三成紆行四十里然徑路險又有

010_0074_c_01L도는 길로 가느니만 못합니다.”
나는 큰길로 해서 활목고개(弓項嶺)를 넘었더니 고개 아래는 길이 평탄하였다. 노인이 사람 다니는 길이라고 가르쳐 준 것이 참말이었다. 20리를 가니 큰 시내가 나오는데 이는 속리산 동문에서 흘러나온 물이었다.
다시 십 몇 리를 가서 소리목고개(所里項峙)를 넘어 비로소 동문洞門에 이르렀다. 동문은 넓고 평평하였는데 띠풀이 누렇게 익어 깔고 앉을 만하고 시내가 맑아서 떠 마실 만하였다. 이에 따라오던 보윤 스님과 잠시 쉬면서 마셔 보았다.
잠시 후 천천히 걸어 구불구불 들어서니 무수한 산봉우리가 첩첩으로 싸여 칼과 창이 빽빽하게 벌여 선 듯한 곳이 있었다. 가운데에 평평하고 반듯하며 넓게 트인 터가 있는데 좌우에 여러 뫼들이 구불구불 에워싼 것이 용이 서린 듯, 봉황이 춤추는 듯하였다.
그 가운데 대법주大法住라고 하는 절이 있었다. 그 전각의 크고 우아함과 건축의 기교와 솜씨는 듣던 바와 다르지 않았다. 5층 전각에는 철당鐵幢이 높고 돌항아리와 돌구유의 크기와 동당銅鎕과 화대火臺의 웅장함은 실로 다른 곳에는 없는 것이었다. 해거름에 드디어 선당禪堂에 묵으니 냉기가 뼈를 뚫어서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상봉上峯에 오를 뜻으로 문을 나서서 복천福川109)에 이르렀다. 복천암은 우리 세조世祖대왕께서 축원해 주신 곳으로 터가 반듯하고 시원하며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돌을 깎은 공은 앞의 것보다 나았다. 원실願室을 만들어 세조대왕을 편안히 봉안하였으니 어제御製 친필이 지금도 완연하다. 이에 감탄하여 한 구절을 읊었다.

松帶千年色    소나무는 천년 빛을 띠고
巖開太古顏    바위는 태고의 얼굴을 열었네.
招提聖迹在    절집(招提)에는 성군의 자취가 남아
頻看淚痕斑    눈물 자국 얼룩을 자꾸 보게 된다네.

문밖을 나서니 동쪽 벼랑 위를 따라서 돈대墩臺 하나에 두 개의 탑이 벌여 서 있는데, 하나는 학조學祖의 탑이고 또 하나는 수암秀庵의 탑이다. 수암의 법휘法諱는 신미信眉인데, 세조대왕이 신미 대사에게 보낸 서찰 또한 이 절에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어서 그를 공경하여 대접한 것을 알 수 있다.
잠시 탑 옆에 앉아서 바라보니 문장대文藏臺 한 봉우리만이 뒤의 산등성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010_0074_c_01L峻嶺不若從紆而行余乃就大路而去
010_0074_c_02L踰弓項嶺嶺低而路坦老人之指人路
010_0074_c_03L信矣行二十里有大川是俗離洞門
010_0074_c_04L而流出者也又行十數里越所里項峙
010_0074_c_05L始達洞門洞門寛平茅黃而可坐
010_0074_c_06L淸而可掬乃與從行普潤小憇啜點
010_0074_c_07L旣而徐行委蛇而入無數峯巒矗矗然
010_0074_c_08L若劍戟森列中有基址平正廣濶
010_0074_c_09L右羣巒縈紆擁抱若龍蟠而鳳舞
010_0074_c_10L於其中號曰大法住其殿宇之宏麗
010_0074_c_11L木石之工巧不負所聞層殿五重
010_0074_c_12L幢之高石瓮石槽之大銅鎕火臺之雄
010_0074_c_13L實他處所無日曛矣遂宿禪堂冷氣徹
010_0074_c_14L通宵不成眠黎明出門有登上峯
010_0074_c_15L之意行至福川福川即我世祖大王祝
010_0074_c_16L釐之所也基址端竗爽朗巖屏之圍
010_0074_c_17L斵石之功有過於前剏願室祇奉世
010_0074_c_18L親筆雲漢至今宛然因感歎吟一
010_0074_c_19L絕曰松帶千年色巖開太古顏招提
010_0074_c_20L聖迹在頻看淚痕斑出門外緣東崖
010_0074_c_21L一臺立二塔一學祖塔一秀庵塔
010_0074_c_22L秀庵法諱信眉世祖與眉師書札亦珍
010_0074_c_23L藏是寺其敬待可想少坐塔傍望觀
010_0074_c_24L惟文藏一峯爲後岡所遮不可得

010_0075_a_01L그 나머지 산봉우리를 다 하나하나 가리켜 보니, 마치 봉래산을 유람하는 사람이 정양사正陽寺 헐성루歇惺樓에 오르면 일만 이천 봉이 다 눈 속으로 들어오는 것과 같았다.
다시 복천으로 돌아와서 왼쪽 지름길로 몇 리를 더 가 중사자암中獅子庵에 도착했다. 이 암자는 원종元宗대왕의 명으로 건립하여 지금까지 향을 사르고 있으며, 또한 어서御書와 하사하신 진귀한 보물 등의 물건을 보관하고 있다. 몇 해 전에 재앙을 만나서 집을 지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아직 기와를 덮지 못하였으니, 아 안타깝구나.
이른바 제일 꼭대기 봉우리인 문장대가 여기에서 2성成 거리여서 힘을 다해 오르고 싶었다. 그러나 때마침 하늘이 맑지 않고 바람의 기세도 아주 나빴으며, 또 벼랑길과 잔도棧道가 극히 위태롭고 험하였다. 보윤이 위험한 곳에 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한사코 말렸고, 나도 벌벌 떨려 감히 나아갈 수가 없었다.
보윤을 따라 돌아오니 해는 이미 기울었고, 주지인 향초香初 스님이 점심밥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밥을 먹고 나서도 마음은 오히려 미흡하여 다시 수정봉水晶峯에 올랐다.
봉우리 높이가 만 길이나 되어 절집을 내려다보자니 위태하여 바로 볼 수가 없고 그저 나무를 붙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 감아 얽은 요사채는 작은 장기알이 장기판에 펼쳐진 듯하였다. 위에는 돌거북이 있는데, 새긴 것도 아닌데 형상이 자연적으로 닮은 것이라고 한다. 그 목은 당나라 사람에게 잘렸다고 한다. 아 슬프도다. 오래 노닐고 싶었으나 높은 봉우리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몸이 허공에 있는 듯하여 가슴이 두근거리고 발이 오싹하여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댕댕이넌출을 붙잡고 내려왔다.
밤이 되어 침상에 누워서도 침상이 흔들리는 듯한 것이 아마 두려움이 아직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날 아침 절문을 나가 홍교虹橋 위에 서서 돌아보니 산은 나를 그리는 듯하고 나 역시 산을 잊을 수가 없기에 율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一笻隨意好林泉  지팡이 마음 따라 임천을 즐겨서
到底風光入眼前  이르는 곳마다 풍광이 눈앞에 들어오네.
霜着溪楓疑紫玉  시냇가 단풍에 내린 서리 자줏빛 옥인가
嵐浮岸柳似寒煙  아지랑이 언덕 버들은 차가운 안개인가.

何來玉篴驚人夢  어디서 들려오는 옥피리 소리 꿈을 깨우나
自有黃花伴客眠  국화꽃이 절로 나그네 잠에 짝이 되었네.
寄語空門諸釋子  공문의 여러 불자들에게 말 좀 전해 주소
莫將死句坐多年  죽은 말(死句)을 잡고 여러 해 앉아 있지 마소.

010_0075_a_01L其餘峯巒皆歷歷指點若遊蓬萊
010_0075_a_02L登正陽寺歇惺樓則一萬二千峯
010_0075_a_03L皆入眼中復回福川取左逕行歷數
010_0075_a_04L至中獅子庵庵乃元宗大王命建
010_0075_a_05L至今爇香亦藏御書及下賜珍寶等物
010_0075_a_06L [8] 歲遇灾立屋已數年尙未覆瓦
010_0075_a_07L可惜矣所謂最上峯文藏此距二成
010_0075_a_08L極力欲登而是時天不晴風勢甚惡
010_0075_a_09L且崖逕甚危棧道極險潤以坐不垂堂
010_0075_a_10L之義 [9] 止之余亦惴惴然不敢進
010_0075_a_11L潤而歸日已傾矣主香初頭陀辦午
010_0075_a_12L飯以待之哺訖心猶不厭又登水晶
010_0075_a_13L峯高可萬丈俯視寺宇危不可正
010_0075_a_14L但扶樹而觀之其羅絡寮舍若小
010_0075_a_15L碁列局上上有石龜不鐫而形自肖
010_0075_a_16L其項乃爲唐人所斷噫噫悲哉欲久遊
010_0075_a_17L而高峯入雲若身在虛空心悸足酸
010_0075_a_18L不可久留乃捫蘿以下至夜臥席上
010_0075_a_19L席若動搖盖積畏尙存也翌明出寺門
010_0075_a_20L立虹橋上回看山若戀我我亦不能忘
010_0075_a_21L賦成一律有曰一笻隨意好林泉
010_0075_a_22L到底風光入眼前霜着溪楓疑紫玉
010_0075_a_23L浮岸柳似寒煙何來玉篴驚人夢自有
010_0075_a_24L黃花伴客眠寄語空門諸釋子莫將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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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음 지곡사 유람기
회계현會稽縣 남쪽 10리 땅에 높고 험한 산이 있다. 바라보면 하늘 속으로 들어간 듯한 이 산은 방장산으로 『선경仙經』에서 말하는 삼신산三神山 가운데 하나이다. 이 산에 사는 사람은 처음에는 어리석었더라도 오래 살다 보면 지혜로워지는 이변이 있는 까닭에 지리산智異山이라고도 부른다고 한다.
지리산 한 줄기가 구불구불 동쪽으로 흐르다가 일어나 봉우리를 이룬 것이 취봉鷲峰과 국사봉國師峯인데, 두 봉우리 아래 지은 절이 국태사國泰寺이다. 또 지곡사智谷寺라고도 부르는 것은 그곳 토박이들이 그 골짜기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절의 애초 창건은 신라 때에 응진應眞이 하였고, 중간에는 고려 때 혜월慧月이, 마지막으로 진관眞觀이 또 새로 수리하였는데, 진관도 고려 때 사람이다. 이 세 분 대사들은 다 덕이 중하여 당세에 왕의 스승이 되어 국가를 도운 분들이니, 그 뛰어나고 훌륭한 공훈은 비문에 실려서 절의 동서쪽에 짝으로 세워졌다. 법당 앞에는 돌을 다듬어 섬돌을 만들고 그 면에 이렇게 글을 새겼다. “곡성谷城 군수가 철물鐵物을 감독하고 함안咸安 군수가 섬돌을 쌓았다.” 그 자획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니, 당시에 부처님의 도를 숭상했던 것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세 분 대사가 건립하였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전각과 누각의 체계는 대웅전이 가운데 서고 약사전이 왼쪽에 자리하며 극락전이 오른쪽에 있다. 앞에는 큰 누각이 있으며 누각 밖에는 천왕문과 금강문 두 문이 있다. 앙실鴦室과 회랑 요사채가 기러기처럼 좌우로 펼쳐져 다 법전法殿을 호위하여 지키니, 황상皇上이 조정에 임할 때에 신료들이 앞에 시립侍立한 것과 같은 형상이다. 이것이 영남의 여러 사찰 중에 으뜸인 까닭이고, 선객禪客과 시인들이 오로지 국태사를 꼽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속의 많은 선암仙庵도 때에 따라 생겼다 없어졌다 하였지만

010_0075_b_01L句坐多年

010_0075_b_02L

010_0075_b_03L遊山陰智谷寺記

010_0075_b_04L
會稽縣之南十里地有山望之
010_0075_b_05L若入雲霄間者曰方丈仙經所謂三神
010_0075_b_06L山之一也居是山者始雖愚久則智
010_0075_b_07L有異故亦稱智異云智異一枝逶迤
010_0075_b_08L東流起而爲峯曰鷲峰曰國師峯
010_0075_b_09L峯之下建寺曰國泰寺又稱以智谷者
010_0075_b_10L土人以其谷名名之也盖此寺之剏
010_0075_b_11L於新羅應眞中於高麗慧月終至眞觀
010_0075_b_12L而又新之觀亦麗時人也此三大士
010_0075_b_13L皆德重當世爲王者師以佑國家
010_0075_b_14L卓犖殊勲載在碑面雙立於寺之東西
010_0075_b_15L法堂前伐石爲砌刻書其面曰谷城郡
010_0075_b_16L守監鐵物咸安郡守築砌其字畫尙今
010_0075_b_17L宛然盖當時崇奉佛氏之道可知而三
010_0075_b_18L大士之所建亦明矣至若殿樓制度
010_0075_b_19L大雄殿中立藥師殿居左極樂殿在右
010_0075_b_20L前有大樓樓外有天王金剛二門鴦室
010_0075_b_21L及廊寮鴈列左右皆衛翼法殿狀若
010_0075_b_22L皇上臨朝臣僚侍立於前此所以冠嶺
010_0075_b_23L右諸天而禪客騷人專說國泰者
010_0075_b_24L以此也山中多禪庵亦隨時興廢

010_0075_c_01L지금 남아 있는 것은 여섯이다. 심적암深寂庵과 영당影堂은 강백講伯이 불법을 천명하는 곳이며, 적조암寂照庵과 나한암羅漢庵과 태자암太子庵과 서운암瑞雲庵은 진실로 참선하는 자들이 마음을 밝히는 자리이다.
골짜기에는 돌을 깎아 만든 세진교洗塵橋가 공중에 걸린 무지개처럼 놓여서 장마가 여러 달을 그치지 않아 성난 파도가 계곡 어귀에 넘쳐나도 행인들이 물 건너기를 걱정하며 탄식하는 일은 없었다. 구름이 걷히고 비가 개일 것 같으면 물빛과 하늘빛이 아래위로 서로 이어지고 게다가 무성한 수풀과 긴 대나무까지 좌우에서 비추니, 6월 폭염이라도 이 다리에만 오르면 열기를 씻기에 충분하다. 또한 유람객이 이 다리에 서면 속세의 근심을 씻을 수 있는 까닭에 이렇게 이름 지었다.
그 산수의 기이함과 화초의 아름다움으로 말하면 사계절의 경치가 같지 않으니, 이것은 보고 즐기는 자가 어떤가에 달려 있으므로 군더더기를 붙이지 않겠노라.
지곡사 청련당기
이 절의 청련당靑蓮堂은 신미년 봄에 화재를 만나 가을에 다시 지었다. 3년이 지나 절을 주관하는 장로가 무설헌無說軒으로 나를 찾아와 조용히 도를 묻다가 갑자기 탄식하였다.
“우리 절은 읍의 남쪽에 위치한 방장산의 호법 가람으로 신라 때에 창건되었습니다. 뒤로는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물이 흐르며 산봉우리가 휘감아 돌아 어엿한 금사계(金沙) 도량을 이루었습니다. 또 전각의 많음과 인재의 번성함이 강우江右에서 거의 으뜸가니 원근에서 몰려들어 다투어 오르는 곳입니다. 터를 닦은 이후 천 년을 지내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떨 때는 쇠하고 어떨 때는 성하였으니, 법전과 승방 역시 생겼다 허물어져서 그 수리하고 보수한 사적도 정말 한둘이 아닙니다. 옛사람들은 실상을 귀하게 여기고 이름을 귀하게 생각하지 않은 까닭에 기록을 후세에 남기지 않았는데, 이는 앞사람의 공적을 없애는 일일 뿐 아니라 문사文士로서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연사蓮社가 결성된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는데도 문장 하나 없이 적적하니,

010_0075_c_01L今存者六曰深寂曰影堂乃講伯闡
010_0075_c_02L敎之所也曰寂照曰羅漢曰太子
010_0075_c_03L瑞雲固禪者明心之處也洞有洗塵橋
010_0075_c_04L斮石而爲之若彩虹掛空雖淫雨連月
010_0075_c_05L不開狂波怒濤漲溢溪口行人無病
010_0075_c_06L涉之歎若雲收雨霽則水色天光
010_0075_c_07L下相連更有茂林脩竹暎帶前後
010_0075_c_08L六月之炎登斯橋也足以濯熱遊客
010_0075_c_09L臨斯橋也亦足以洗滌塵慮故名之
010_0075_c_10L若其泉石之奇花卉之美四時之景不
010_0075_c_11L此在觀玩者之如何耳不容贅焉

010_0075_c_12L

010_0075_c_13L智谷寺靑蓮堂記

010_0075_c_14L
寺之靑蓮堂辛未春灾秋復成越三
010_0075_c_15L主寺長老訪余無說軒從容問道
010_0075_c_16L忽喟然歎曰吾寺居邑之南爲方丈護
010_0075_c_17L法伽藍剏在羅朝而背山臨流峰巒
010_0075_c_18L縈回儼成金沙道場又殿之侈人之
010_0075_c_19L殆甲江右遠近輻湊而爭登盖自
010_0075_c_20L開基以來歷千載至于今或衰或盛
010_0075_c_21L法殿僧房亦從而成毁其修補事迹
010_0075_c_22L固非一二古人貴實不貴名故無記
010_0075_c_23L述以示後不唯泯前人功蹟亦豈不文
010_0075_c_24L士之羞乎今蓮社旣成數歲又寂寂無

010_0076_a_01L이 때문에 제가 탄식을 금하지 못합니다. 우리 스님께서는 불교의 이치에 마음을 두신 뒤로 글에 집착하여 곱씹지 않으시나 문채가 세상에 알려졌음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감히 이를 스님께 바라지는 못할 일이나 굳이 구구하게 말씀 드리는 것은 우리 스님께서 남의 좋은 점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스님께서는 부디 사양하지 마십시오.”
나는 합장하고 대답하였다.
“아! 절에서 이 집을 지을 때에 대중들이 상의하여 모아 둔 돈 수백 관貫을 쪼개어 썼는데, 그래도 부족한 것은 학學 스님과 원遠 스님이 모아서 보충하였습니다. 관寛 스님과 선善 스님 두 분이 일을 맡고 해 공海公이 요량하여서 집이 드디어 완성되었으니, 이들 몇 사람은 정말 고생했다 하겠습니다. 나도 이 일을 알고 있으며 게다가 그대가 청하는 그 뜻이 가상하니 기록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금강경』의 ‘응당 머무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應無所住而生其心)’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까? 사람의 공이 가상하다고 벽에 걸어 둔다면 이것이 머무르는 것이지요. 그리고 연꽃은 바탕이 지극히 청정하여 진흙탕에 처해서도 오염되지 않고 물을 뿌려도 달라붙지 않으니, 옛사람이 집 이름을 여기서 취한 뜻은 반드시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저 연꽃처럼 속진에 오염되지 않고 결국에는 무주無住의 경지에 돌아가게 하려는 뜻일 겁니다. 옛사람이 기록하지 않은 그 뜻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대가 청하고 내가 쓰는 것은 무주에 어긋나는 일이며 오히려 여러분들을 상하게 하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말하였다.
“스님이 잘 모르시는 겁니다. 대개 자기 스스로 하면 자신의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됩니다. 만약 그 논리대로라면 다른 사람의 아름다움을 취하여 내가 드날리는 것은 또한 괜찮지 않겠습니까? 남의 공을 자랑하고 또 드날리면서 드날리겠다는 뜻을 갖지 않는다면 또한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나는 웃으면서 글을 쓰노라. 장로의 이름은 광식廣湜이며 회계 사람이다. 오래전에 나와 함께 돌아다니며 가장 친했던 자이다. 앞에서 수고했다고 말한 여러 공들은 다 전에 주지를 했던 사람들이며, 또 어질고 공정하여 사람들 사이에 이름이 났었도다.

010_0076_a_01L一文字此吾所以發嘆不已也吾師旣
010_0076_a_02L志存佛理不著文咀嚼英華取衒於世
010_0076_a_03L吾固已知矣不敢以此望于師獨區區
010_0076_a_04L敢言者亦知吾師好揚人善也師毋辭
010_0076_a_05L余叉手而答曰寺之營是堂也
010_0076_a_06L衆啇議劃藏貯錢數百貫以用之其不
010_0076_a_07L足者學與遠鳩而補之寛善二公
010_0076_a_08L其事海公料量之堂遂成若數子者
010_0076_a_09L可謂勞矣余亦知之況子之請其志
010_0076_a_10L可尙則記可爲之而子豈不聞金剛
010_0076_a_11L經應無所住而生其心乎若人之功
010_0076_a_12L嘉而揭于壁是有住也又蓮之質至
010_0076_a_13L處淤泥而不染水灑不着古人取
010_0076_a_14L而名于堂意必在使人淨心慮不染塵
010_0076_a_15L如彼蓮華畢竟歸無住之域昔人之不
010_0076_a_16L其旨在此然則子請之我述之
010_0076_a_17L乃違於無住而反傷諸子乎曰師迂矣
010_0076_a_18L凡自我爲之而反衒其能果如所論
010_0076_a_19L他人之美我取而揚之不亦可乎
010_0076_a_20L人之功且揚而無意於揚不亦無住乎
010_0076_a_21L余於是莞爾而書長老名廣湜會稽人
010_0076_a_22L舊與我從遊最相善向所言執勞諸公
010_0076_a_23L是皆曾經住持又仁且公有名譽于
010_0076_a_24L

010_0076_b_01L
지곡사 용화당기
고개 남쪽에 많은 군현郡縣이 있어서 일천 바위가 빼어남을 겨루고 일만 개천이 흐름을 다투는 듯한데 회계현만이 우뚝하다. 현의 남쪽으로 약 1성成쯤 되는 곳에 선종 고찰이 있으니, 이는 신라 법흥왕이 세운 것이다. 지금 천여 년이 되었으나 문이 영롱하고 단청도 선명한 것이 그 아름다운 모습은 경상도 안에서 최고이다. 또 용이 서린 듯 호랑이가 웅크린 듯 구름을 토하고 바람을 불어 댄다. 더욱이 한천寒泉과 월용月湧이 있어서 옛날에는 연기에 잠겼었다고 하니 이곳이 이른바 방장산의 명승지이다.
내가 그 산수를 좋아하여 무진년에 이곳에 깃들여 머물며 한가하게 세상을 잊고 지내느라 몇 해가 지난 줄도 깨닫지 못했다. 그런데 계유년 봄에 비월批月과 절운切雲 두 당堂이 불에 타서 검게 그을려 버렸기에 다음 달에 일을 감독하여 두 당을 하나로 합하여 규모가 아주 커졌다. 7월에 낙성하였는데, 낙성하고 며칠 후에 절의 주지 광식 스님이 와서 전각의 이름과 기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
“이 두 당은 경자년에 나란히 세워졌는데, 지금 나란히 재앙을 만났습니다. 이제 작은 것 둘이 큰 것 하나만 못하기에 하나의 당으로 만들었습니다. 옛날 편액을 걸려니 어느 것을 버리고 어느 것을 걸지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스님께서 새로 좋은 이름을 골라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였다.
“옛날 군자들이 사는 집에 이름을 지어 붙이는 것은 대부분 경계를 위해서이니, 큰 글씨를 기둥 사이에 걸어서 항상 눈길을 주며 보고 느껴서 경계하여 깨닫고자 함입니다. 대저 이름이란 실질을 따르는 것이니 그 실질이 없다면 어디에다 그 물건을 쓰겠습니까? 이제 내가 목은牧隱110)과 호정浩亭111) 두 노장의 유지를 본받아 용화龍華라는 두 글자로 편액을 쓸 터이니, 여기에 사는 사람이 앞으로 언젠가 마음을 청정히 하여 욕심을 막아서 사물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다면 미륵보살의 용화 모임에 참가하여 이 이름에 부합할 수 있을 겁니다. 또 용이란 물건은 구름을 타고 비를 내리는 등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데, 혜택이 중생에게 미치면

010_0076_b_01L智谷寺龍華堂記

010_0076_b_02L
嶺以南多諸郡縣若千巖競秀萬壑爭
010_0076_b_03L唯會稽縣獨然自縣而南約一成
010_0076_b_04L有禪宗古伽藍即新羅法興王所建
010_0076_b_05L迄今千有餘載而戶牗玲瓏丹雘
010_0076_b_06L鮮明其美觀爲一道最又龍之蟠
010_0076_b_07L之踞吐雲而嘯風更有寒泉月湧
010_0076_b_08L [10] 煙沉是所謂方丈勝區余愛其泉石
010_0076_b_09L太歲著雍執徐棲止于此優遊忘世
010_0076_b_10L不覺其數歲之過癸酉春批月切雲
010_0076_b_11L堂烘而黔黔之翌月董事合二堂而一
010_0076_b_12L制極宏廣流火月落成旣成數日
010_0076_b_13L寺主廣湜以殿之名與記來索于余
010_0076_b_14L惟玆兩堂並立于庚子今并灾焉
010_0076_b_15L今小而二不如大而一故爲一堂
010_0076_b_16L揭舊額難於取舍願師更擇令名以贈
010_0076_b_17L然曰古君子之於居室命名焉
010_0076_b_18L多寓戒大書懸諸楣間欲常目而
010_0076_b_19L觀感警發也夫名由實也無其實則將
010_0076_b_20L焉用彼物哉今余軆牧隱浩亭二老遺
010_0076_b_21L以龍華二字扁之居此者異日
010_0076_b_22L能淨心窒欲不爲事物所累叅慈氏龍
010_0076_b_23L華之會庶可副是名也且龍之爲物
010_0076_b_24L乘雲行雨變化不測惠澤被於衆生也

010_0076_c_01L처음에는 향기를 풍기다가 마침내는 선과善果를 맺게 되니 또한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듣자 하니 지난 역사役事에는 숭학崇學·최원最元·홍해弘海·약우若愚·이선而善·자안自安·풍정豊凈·무학武學 등 여러 상인이 혹은 밖에서 혹은 안에서 어떤 이는 총괄하고 어떤 이는 감독을 하면서 대중이 힘을 다하며 모두들 집 짓는 일에 수고를 하였다니, 그 공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그들 중에 반드시 이 두 글자의 의미를 참구하여 전진을 멈추지 않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나는 여러 공들에게 이것을 바라니 공이 돌아가 알려 주십시오.”
그러자 광식 스님은 대답하고 물러갔다.
안음112) 영축사기
현의 북쪽 60리쯤에 길게 뻗은 산이 있는데, 북으로는 속리산과 이어지고 남으로는 두류산을 누르고 있다. 이 산의 이름은 덕유산德裕山 또는 여악산廬岳山이라고도 한다. 산 북쪽에 큰 돌이 삐죽하게 서 있는데 그 높이가 몇 천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봉우리 꼭대기에는 독수리 떼 수십 마리가 깃들여 살기에 후인들이 이로써 이름을 지었다. 봉우리 아래에 옛 정사가 둘 있는데 세간에서는 신라 시대에 창건한 것이라고 전한다. 연대가 오래되다 보니 용마루가 기울고 들보가 부러져 거주하는 사람들이 걱정을 하였는데, 병진년 가을에 주지 보안普眼이 새로 중수할 뜻을 갖고 대중들에게 의논하였다.
“전각과 요사채가 이렇게 무너지고 부서졌지만 우리보다 앞선 사람들이 수리하지 않았고 우리보다 뒷사람에게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힘을 합해 새로 지어 상왕의 천수天壽를 축원함으로써 후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절할 곳을 만들어 준다면 이 어찌 스스로 복을 쌓는 때가 되고 후인에게 권면이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여기에 산 지 60여 년이 되지만 그 쇠하는 모습만 보았을 뿐 흥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땅이 그 길함을 얻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요? 나는 새 자리를 찾아서 짓고자 합니다.”
대중들이 모두 그러자고 하였다.
이때에 옛터 남쪽 수십 걸음쯤에 딱 맞는 터가 있었는데, 자리가 높아서 전망이 시원하고

010_0076_c_01L始而發馨香終而結善果不亦美乎
010_0076_c_02L吾聞曏之役也崇學最元弘海若愚而
010_0076_c_03L善自安豊凈武學諸上人或主外或主
010_0076_c_04L或捴管或督役大衆致其力皆有
010_0076_c_05L勞於堂功可懋矣其中必叅究于斯二
010_0076_c_06L字之義而向前不已者矣吾以此望于
010_0076_c_07L諸公公歸而告之湜唯唯而退

010_0076_c_08L

010_0076_c_09L安陰靈鷲寺記

010_0076_c_10L
縣之北六十里許有山邐迤北連俗離
010_0076_c_11L南控頭流名曰德裕又曰廬岳山之
010_0076_c_12L有巨石屹立其高不知其幾千丈
010_0076_c_13L峰顚有鷲數十羣棲其上後人因以名
010_0076_c_14L峰下有古精社二世傳新羅時所
010_0076_c_15L創云年代綿遠棟欹樑摧居者病焉
010_0076_c_16L歲丙辰秋住持普眼有志重新謀於
010_0076_c_17L衆曰殿寮之頹廢如此而先乎吾者
010_0076_c_18L旣不爲修後乎吾者亦不可期吾儕
010_0076_c_19L併力新之以上祝天壽使後之居此者
010_0076_c_20L有稽首之所則其不爲自福之秋而後
010_0076_c_21L人之勸耶吾居於斯積六十餘載
010_0076_c_22L只見其衰未見其興抑地未得其吉而
010_0076_c_23L然耶吾欲占新而營之衆咸曰諾
010_0076_c_24L是於舊址之南數十步許相得一基

010_0077_a_01L샘과 골짜기가 맑고 깊어서 대중의 의논이 비로소 합해졌다. 그 다음 해에 상희尙熈와 법철法哲에게 먼저 선당禪堂을 얽게 하고, 또 다음 해에 위한位閒과 계철戒哲에게 승당僧堂을 짓게 하였으며, 또 다음 해에는 보안 스님이 법삼法森과 함께 향각香閣을 지었다. 또 다음 해에 보안 스님은 다시 학정學淨과 거사 수정守正 등 3, 4인과 함께 재물을 모아 공사를 경영하여 법당을 얽어 올렸는데, 그해 봄 2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여름 4월에 공사가 끝났다. 모두 5년 사이에 빽빽하게 가람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이 절의 중흥 사적이다.
아! 이 절이 창건된 지 몇 백 년이나 되었고 이곳에 산 사람도 몇 백 명이나 되며, 지나간 사람도 도합 몇 백 명은 되거늘 절의 길한 터를 지척에 두고도 어느 한 사람 알아보지 못하였구나. 지금 보안 스님이 알아보았으니 어찌 기다린 것이 있어 그런 게 아니겠는가?
경신년 겨울에 내가 방장산에서 이곳으로 올 때에 소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면서 전각 모서리를 바라보았는데, 봉황이 하늘 한복판에 날아올라 날개를 편 듯하였다. 오래도록 그 자리를 서성거리며 보안 스님의 부지런하고 정성스런 마음 씀씀이와 일을 추진하는 능력을 깊이 치하하면서 묵묵히 가슴속에 담아 두었다.
어느 날 보안 스님이 나에게 기문을 청하는데, 내가 문장이 거칠긴 하나 어찌 감히 사양하겠는가? 또 스님이 공을 차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해도 여러 단월檀越들이 보시한 정성을 어찌 없애버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집을 지은 해와 여러 사람의 성명을 목판에 간략하게 기록하여 영축사의 전고로 삼는다.
삼가 묵방사 유람기
삼가三嘉113)는 옛 기양현歧陽縣으로 현 안에 유명한 산이 많기로 영남에 이름이 났다. 샘이 맑고 바위가 빼어나며 골짜기가 기이하고 숲이 깊어서 유람객들 사이에 칭찬이 자자한 곳이 바로 황매산黃梅山이다. 옛적에는 영준 국사英俊國師114)가 그 아래에 살았고 지금은 영암사靈巖寺의 옛터가 있는데, 잡초가 우거져 황량한 벌판으로 변해서 오직 탑과 섬돌과 갈라진 비석만 남아 있다.

010_0077_a_01L壤爽塏泉壑淸邃衆議始協其明年
010_0077_a_02L使尙熈法哲先搆禪堂又明年使位閒
010_0077_a_03L戒哲建僧堂又明年師與法森造奉
010_0077_a_04L香閣又明年師又與學淨及居士守正
010_0077_a_05L等三四人鳩財董事搆起法堂始於
010_0077_a_06L是年春二月工訖於明年夏四月凡五
010_0077_a_07L年之間蔚然成一伽藍此是寺之中興
010_0077_a_08L事蹟也於戱是寺之剏凡幾百年
010_0077_a_09L者凡幾百人過者凡幾百人寺之吉基
010_0077_a_10L在咫尺之地而未有一人知之者今眼
010_0077_a_11L公得之豈非有待而然乎庚申冬
010_0077_a_12L自方丈來此少憇於松陰仰瞻殿角
010_0077_a_13L翼如若鳳翥于半空徘徊久之深賀
010_0077_a_14L眼公用心之勤辦事之能默默置于懷
010_0077_a_15L一日眼公請余爲記余雖文荒
010_0077_a_16L敢辭且公雖不居於功而諸檀越捨施
010_0077_a_17L之誠豈可泯沒歟遂略叙營建年月
010_0077_a_18L及諸人氏名于板上以爲靈鷲寺故實

010_0077_a_19L

010_0077_a_20L遊三嘉默房寺記

010_0077_a_21L
三嘉古歧陽縣縣多名山名于嶺南
010_0077_a_22L若其泉明而巖秀洞奇而林深稱道於
010_0077_a_23L遊客者即黃梅山古英俊國師居其下
010_0077_a_24L今有靈巖寺舊墟而蓁莽爲荒原獨塔

010_0077_b_01L
현 안에 남아 있는 절은 다섯이나 황매산에 있는 것은 묵방사默房寺뿐이다. 이 절이 신라나 고려 때의 고찰은 아니지만 그 산수가 아름다워서 깃들여 사는 사람이 많다. 법당과 큰 누각의 모습은 구슬을 꿴 듯하고 좌우의 다섯 방과 종실鍾室과 향각香閣은 해질 무렵 갈매기가 모래사장에 내려앉은 것 같으니 그 규모가 볼 만하다.
봉우리에 돌이 포개져 집인 듯 누대인 듯 동굴을 통해 왕래하는 것은 누룩바위(麴巖)이고, 맑은 못이 산꼭대기에 넘실거려서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것은 지령池嶺이다. 구불구불 오르려는 듯 하늘로 올라가는 것은 용암龍巖이며, 물줄기가 날아서 곧장 3천 척을 떨어져 기다란 무지개가 공중에 걸린 듯한 것은 황계黃溪이다.
이 몇 가지만으로도 충분히 기이한 경치이니 산수의 아름다움이 여러 산들 가운데 으뜸이다. 백련암白蓮庵과 법장암法藏庵과 조계암曺溪庵 등의 여러 암자가 중요한 자리를 받치고 있으니 모두 법을 강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곳이로다.
묵방사 조계암기
산은 봉성鳳城의 서쪽에 있다. 그 우뚝한 기세는 방장산이나 덕유산에 견줄 수 없지만 그 기이한 경치는 훨씬 뛰어나서 양양襄陽 낙산洛山과 지평砥平 용문산龍門山과 장흥長興 천관산天冠山과 합천陜川 가야산伽倻山과 남해南海 금산錦山과 우열을 논할 만하니 이것이 『여지지輿地志』에서 황매산黃梅山이라고 한 곳이다.
산속에 묵방사默房寺라고 하는 절이 하나 있다. 절의 창건 연기年紀는 오래지 않았으나 원근에서 모두 그 산수의 아름다움을 연모하여 많은 강장講匠과 선백禪伯이 살고 있다. 금상今上 29년 임술년에 영암 장로暎巖長老가 성산星山에서 이 절로 와서 석장을 쉬다가 빼어난 산수를 아주 좋아하여 여기에 불자를 꽂았다.
두 해가 지난 갑자년 봄에 장로는 심열心悅 상인과 절 남쪽 벼랑에 올라 터 하나를 점찍었는데,

010_0077_b_01L砌及龜碣尙存焉縣之寺存者五而處
010_0077_b_02L黃梅者惟默房也是寺雖未爲羅麗古
010_0077_b_03L而因其山水之美棲息者多矣
010_0077_b_04L堂與大樓狀如貫珠左右五房及鍾室
010_0077_b_05L香閣若暮鷗屯沙渚其制可觀至於
010_0077_b_06L石疊於峯如屋如臺從穴而徃來者
010_0077_b_07L麴巖也有池泱然淸澈于山頂大旱
010_0077_b_08L不渴者池嶺也蜿(足+延)而欲升騰于天
010_0077_b_09L龍巖也飛流直下三千尺若長虹
010_0077_b_10L掛空者黃溪也此數者儘奇勝而以
010_0077_b_11L山水之美冠於諸山者也白蓮法藏曺
010_0077_b_12L溪諸庵鼎足而居皆講法化人之所也

010_0077_b_13L

010_0077_b_14L默房寺曺溪庵記

010_0077_b_15L
山於鳳城之西若其面勢之穹窿雖未
010_0077_b_16L肩於方丈德裕其奇勝過之可與襄陽
010_0077_b_17L之洛山砥平之龍門長興之天冠
010_0077_b_18L川之伽倻南海之錦山評甲乙是輿
010_0077_b_19L地志所謂黃梅山也山中有一寺曰默
010_0077_b_20L寺之剏年紀未古而遠近咸慕其山
010_0077_b_21L水之美講匠禪伯多居之上之二十
010_0077_b_22L九年壬戌暎巖長老自星山憇錫是
010_0077_b_23L深愛泉石之勝仍竪拂焉越二年
010_0077_b_24L甲子春長老與心悅上人登寺之南崖

010_0077_c_01L주변이 단정하여 가운데 작은 암자를 지을 수 있는 곳이었다. 앞의 삼면은 다 막힘없이 환하게 뚫려서 사굴산闍崛山과 비슬산琵瑟山 등 여러 산이 다 궤석几席 아래 합장하는 듯하고 그 나머지 다른 산들은 작은 언덕처럼 얼기설기 이어져 있어서 밭 갈고 김매는 사람과 초동이나 목동까지도 다 가리켜 볼 수 있었다. 장로는 평소에 좋은 일에 용감한 분인데다 그 좋은 땅이 오래 비어 있는 것이 안타까워 절의 대중들과 암자를 짓기로 모의하였다. 맹흡孟冾·신명信明·철능哲能·관호灌湖·자원慈願·자혜慈惠·신보信普 등 여러 스님들은 다 근신謹愼한 사람이며 또 공무公務를 서두르는 사람이었다. 서로 질나팔과 저(塤箎)처럼 화합하여 명明과 준俊은 돈을 내고 호湖와 원願은 물건을 모았다. 공사의 감독은 철능이 하고 일의 관리는 신보가 맡았다. 이때 장로가 또 자신의 재물을 크게 내어 열 공悅公을 청하여 짓도록 하였다. 열 공은 바로 목수일에 솜씨가 뛰어난 사람이었다. 마침내 그가 자를 잡고 막대를 짚고서 여러 장인들을 지휘하여 톱질할 사람은 톱질하게 하고 도끼 든 사람은 도끼질하게 하여 그 제도를 간곡하고 정성스럽게 하였으니,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면서 아주 시원하였다. 그해 6월에 시작하여 다음 해 여름 5월에 일을 마쳤다. 일이 끝난 후에 혜 공惠公이 다시 기와를 덮었다. 이렇게 하여 전에는 여우와 토끼의 마당이었던 곳이 갑자기 선암禪庵이 되었다. 암자 앞에는 작은 시내가 있었는데, 장로가 그 시내에 조계曺溪라는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걸었다. 아마도 황매산 조계에서 따서 지은 것이리라.
내가 이 절에 온 다음 해 무진년에 월암月巖 수 공樹公이 부도浮屠에서 조계암으로 와서 지내면서 나에게 장로의 일을 기록하라고 하였다.
“장로의 공을 들으셨습니까? 요새 사람들은 대부분 욕심에 빠져서 그저 이익 되는 일에만 힘쓰는데 지금 장로는 그렇지 않고 남들이 못하는 큰일을 해냈습니다. 이 암자가 완성되기 전에는 쉬지 않고 부지런히 일하다가 완성된 후에는 공을 차지하지 않고 떠났으니 어찌 어질지 않습니까?

010_0077_c_01L占得一基周遭端竗中可搆一小庵
010_0077_c_02L前三面皆通豁無碍闍崛琵等諸山
010_0077_c_03L皆拱揖於几席之下其餘羣山纍纍如
010_0077_c_04L阜垤耕者耘者樵者牧者皆可指點
010_0077_c_05L長老素勇於善者又惜其勝地之久
010_0077_c_06L乃與寺衆謀結庵孟冾信明哲能
010_0077_c_07L灌湖慈願慈惠信普諸師皆謹愼人
010_0077_c_08L急於公務者也相爲塤箎曰明曰俊
010_0077_c_09L出其財曰湖曰遠 [11] 鳩其物監役則能
010_0077_c_10L公爲之管事則普公司之於是長老
010_0077_c_11L又大傾已 [12] 請悅公搆焉悅乃繩墨善
010_0077_c_12L手者遂執引而持杖指揮衆工使鋸
010_0077_c_13L者鋸斧者斧曲盡其制度不大不小
010_0077_c_14L而極其寛敞始於是歲之季夏至明年
010_0077_c_15L夏五月告功功旣訖 [13] 公又瓦以庇之
010_0077_c_16L於是向之狐兎之場奄然爲一禪庵
010_0077_c_17L之前大一小溪長老名其溪曰曺溪
010_0077_c_18L其額盖取擬黃梅山曺溪也余來㝢
010_0077_c_19L玆寺之明年戊辰月巖樹公自浮屠來
010_0077_c_20L住曺溪以長老之事要誌於余曰
010_0077_c_21L老之功公聞之乎今人多溺於慾
010_0077_c_22L利是務今長老不然爲人之所不能爲
010_0077_c_23L營擧大事當斯庵之未成也黽勉而不
010_0077_c_24L及其旣成不居功而去豈不賢乎

010_0078_a_01L기록으로 밝혀 산문을 빛내지 않는다면 장로의 크나큰 공훈은 사라져 전하지 못할 것이니, 지금의 우리들이 어떻게 후세 군자들의 책망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그대에게 바라는 것이고 산천의 신령들도 반드시 그대에게 바랄 것이니, 그대는 기록하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탄식하였다.
“장로의 공이 대단합니다. 또 장로의 마음이 열심이었다고는 하나 명明과 준俊 등 여러 스님이 일을 돕지 않았다면 어떻게 완성하였겠습니까? 명 스님 등 여러 스님의 도움이 있었다 해도 열 공의 솜씨가 없었다면 집이 어떻게 아름다울 수 있었겠습니까? 열 공의 솜씨가 있었다 해도 혜 공의 기와가 없었다면 아름다움이 어찌 오래갈 수 있었겠습니까? 그 이름을 남김 없이 목판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아! 뒤에 이 암자에 거처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실컷 잠자면서 이러쿵저러쿵 남의 말이나 한다면 이는 장로가 편액을 건 뜻을 모르는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반드시 잘못을 막고 욕심을 눌러서 마음을 밝히어 저 황매黃梅115)와 조계曺溪116) 두 분 조사와 같아진 뒤라야 그나마 우리 장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입니다.”
산음 심적암기
대저 절을 짓는 것은 화려함을 자랑하려고 토목의 일을 일삼는 게 아니라 부처님을 받들고 천수天壽를 축원하여 국가의 복을 빌려는 까닭이니 그 관계하는 바가 중하다고 하겠다. 요사이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들 경전을 강독하거나 묵묵히 앉아 있는 것을 잘하는 일로 여겨서 집이 무너지는데도 팔짱을 낀 채 수리하지 않으면서 “이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라고만 하니, 이 어찌 된 일인가.
이 암자는 현종顯宗 경술년(1670)에 비구 운일雲日이란 자가 땅을 정해 집을 지어 향을 태우고 도를 닦는 도량으로 만들었지만 정당正堂과 익각翼閣뿐이어서 살기에 좁았다. 갑자년에 강씨 선비가 우뚝하게 정루正樓를 세우고 갑술년에 설암雪巖 대사가 정청淨廳을 세웠으며,

010_0078_a_01L若不記而顯之以光山門則長老之茂
010_0078_a_02L將泯焉無傳今吾輩何以免後世君
010_0078_a_03L子之責乎以是望於公山川之靈
010_0078_a_04L必有望於公公可記哉余聞而歎曰
010_0078_a_05L大哉長老之功也且長老之心雖勤
010_0078_a_06L若無明俊諸公之助事何以成雖有明
010_0078_a_07L等諸公之助若非悅公之手堂何以美
010_0078_a_08L雖有悅公之手又非惠公之瓦美何以
010_0078_a_09L久哉悉以其名鏤諸板焉後之居
010_0078_a_10L是庵者若厭飯而飽睡好說人長短而
010_0078_a_11L則是不知長老揭扁之志可乎必防
010_0078_a_12L非窒慾發明靈臺如彼黃梅曺溪二祖
010_0078_a_13L夫然後庶不負我長老矣

010_0078_a_14L

010_0078_a_15L山陰深寂庵記

010_0078_a_16L
凡精舍之作非以誇華麗而事土木之
010_0078_a_17L所以奉佛氏祝天壽以祐國家
010_0078_a_18L其所關可謂重矣觀近世學佛者咸以
010_0078_a_19L講經默坐爲能事至於堂屋之頹皆歛
010_0078_a_20L手而不修則曰此非吾事也是豈得歟
010_0078_a_21L是庵也始於顯廟庚戌有比丘雲日者
010_0078_a_22L卜地結廬爲焚香鍊道之場但正堂及
010_0078_a_23L翼閣而已居者狹之甲子有姜士
010_0078_a_24L立正樓甲戌雪巖大師起淨廳庚戌

010_0078_b_01L경술년에 임자취林自翠가 조실祖室을 다시 보수하였고 계묘년에 이암怡巖 대사가 다시 익각을 수리하여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내며 누워 쉴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으나 아직 넓지는 못했다. 성상 즉위 22년 을축년에 설봉雪峯 화상이 중수의 뜻을 갖고 대중들과 의논하여 우선 나무를 베어다 기와를 구웠으나 마치지 못하고 떠났다. 그 다음 해 의수義修가 관동觀洞과 성열聖悅 두 상인과 마음을 모아 소임을 맡고 그 서까래를 모아 지붕을 이으니 규모가 다 새로워졌다. 다만 기술자를 잘못 구해서 들보와 용마루가 갑자기 기울어 다들 근심하였지만 바로잡을 방법이 없었다.
그러다 기사년 여름에 우리 한암寒巖 스님께서 화림사花林寺에서 오셔서 몇 달을 살면서 갑자기 한숨을 쉬며 개탄하며 말하였다.
“선암禪庵이 다 쓰러져 가는데 어째서 성인의 교화(聖化)를 보수하지 않는가? 청명절은 시절이 온화하고 수확이 풍성한 때라 힘을 합쳐 다시 수리하기엔 딱 좋은 때이다. 너희들 가운데 누가 나와 뜻을 같이 하겠는가?
한閒아! 자네는 마음이 밝고 믿음직하니 재화를 맡도록 하라.
천天아! 자네는 중후한데다 주지를 오래 했으니 여러 가지 모든 사무를 자네가 감독하도록 하라.
종宗과 현玄아! 대중의 일이 심히 고달프니 자네들이 가서 달래 주도록 하라.
흘屹아! 자와 칼과 톱은 자네가 다 지휘하여 새기는 일을 하라.
수修야! 자네는 아주 부지런하고 근신하니 나를 도와 일을 완성하라.”
다음 해 봄에 강도講徒를 해산시키고 친히 힘써 수고를 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다들 다투어 시주를 하였는데 전 통상統相 이언상李彦祥이 수십 관의 돈을 내었고 계봉鷄峯 원愿은 볍씨 여러 말을 심을 수 있는 논을 바쳐 완성을 도왔다. 이때에 여러 소임 맡은 자들과 대중들이 다 그 마음을 다하였다.
터는 그 옛터가 너무 좁다 하여 축대를 보충하여 넓혔으니, 정당은 5가架로 짓고 정청은 3가로 지었으며, 익각과 뒷방은 각각 2가로 지었다. 그해 봄에 시작하여 가을에 완성하였으니 그 규모의 융성함은 옛날보다 조금 못하였지만 창문과 칸살(間架)의 크기는 오히려 나았다.

010_0078_b_01L林自翠重補祖室癸卯怡巖大師
010_0078_b_02L修翼閣令人有優游偃息之所亦未軒
010_0078_b_03L聖上即位之二十二年乙丑雪峯和
010_0078_b_04L以重修爲志謀有衆先伐木以陶
010_0078_b_05L未及竣而去其明年義修與觀洞聖
010_0078_b_06L悅二上人同心任職掇其椽而葺之
010_0078_b_07L䂓模咸新但工匠失宜杗棟俄欹
010_0078_b_08L憂之莫有扶者粤己巳夏我寒巖師
010_0078_b_09L自花林來此居數月忽慨然興歎
010_0078_b_10L禪庵將覆何不爲補聖化淸明時
010_0078_b_11L和而年登併力重新此其時也唯汝
010_0078_b_12L衆人孰諧余志曰閒唯汝明信其司
010_0078_b_13L曰天汝重厚又長住持凡諸事務
010_0078_b_14L汝皆監之曰宗曰玄大衆役甚苦
010_0078_b_15L其徃宜撫之曰屹尋引刀鋸汝皆領
010_0078_b_16L以旣厥事曰修汝甚勤又謹愼
010_0078_b_17L相余以成余績翌年春散講徒親自
010_0078_b_18L執勞旣而人皆爭施前統相李君彥祥
010_0078_b_19L捨錢數十貫鷄峯愿納水田種稻數斗
010_0078_b_20L賛成之於是諸司與大衆咸盡其
010_0078_b_21L基址則因其舊而嫌其窄乃補築而
010_0078_b_22L廣之立正堂五架淨廳三架翼閣後
010_0078_b_23L房各二架是年春始手至秋而告成
010_0078_b_24L其制度之隆稍不及舊房攏 [14] 之軒敞

010_0078_c_01L건물에 기대어 서면 마음이 황홀함을 느끼게 되고 당에 오르면 몸이 편안한 즐거움이 있다. 좌선하는 자들이나 경전을 잡은 자들이 동서에 섞여 있고 새벽과 밤에 향을 사르며 성상의 천수가 만세를 누리도록 축원하니, 팔짱을 낀 채 수리를 하지 않는 것에 비해 도움이 만 배는 되리라.
아! 암자를 세우는 일은 운일이 시작하였고, 운일의 뒤로 두세 사람이 힘을 보태어 보수를 하였다. 아직 그 규모를 얻지 못하였을 때에 우리 스님이 계셔서 집이 비로소 제대로 완성되었다. 이로써 집이 이루어지려면 또한 사람과 때를 기다려야 함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한암 노스님께서 성열을 보내어 나에게 일의 전말을 써 달라고 부탁하기에 내가 문장이 졸렬하다고 사양하였다. 그러자 성열 스님이 말하였다.
“스님은 오랫동안 한암 스님 문하에 있었으면서, 스님께서 이처럼 특별한 공훈을 세우셨는데 어찌 기록으로 드러내어 광채를 드날리지 않으시렵니까? 또 여러 사람들이 힘쓴 공로를 목판에 기록해 나중 사람들이 이를 보고 흥기興起해서 이 암자가 오래도록 썩거나 무너지지 않게 한다면 스님께서 다시 지은 공이 어찌 오늘에 그치겠습니까?”
내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그대 말과 같습니다.”
그리고 기록하였다.
산음 왕산사 동조암기
우리 왕봉王峯 형께서는 계유년 여름에 은선암隱仙庵을 떠나와 왕산사王山寺 동조암東照庵에 주석하시면서 지곡사로 나를 보러 와서는 말씀하셨다.
“자네는 어쩌면 우리 산에서 동조암을 중수한다는 말을 듣지 못했단 말인가? 암자가 세워진 지 오래인데 옛 사람들이 기록해 놓지 않아서 좇아 상고할 수 없다네. 암자의 스님 말로는 마침 옛날 들보에 강희康熙 7년에 중수하였다고 적혀 있다고 하나 몇 번의 중수를 거쳤는지는 알 수 없네. 옛 전각은 기울어 거처하는 사람들이 근심하고 또 정당靖堂은 좁고 뒷방과 부엌도 다 협소하여 대중을 수용하기 어렵기도 하다네. 신미년에 본 암자의 기덕耆德 스님이 개찰開剎하였는데, 자비심을 내어 기운 것은 완전하게 하고 좁은 것은 넓히고자

010_0078_c_01L間架之廣袤有勝凭軒也心有怳然之
010_0078_c_02L升堂也身有晏然之樂坐禪執經
010_0078_c_03L間錯於東西晨昏爇香祝聖壽萬
010_0078_c_04L則較之歛手而不修者有相萬矣
010_0078_c_05L庵之設始於雲日雲日之後有數
010_0078_c_06L三子之力修而未得其制得吾師
010_0078_c_07L始善成是知堂之成亦待人與時也
010_0078_c_08L一日庵老致悅囑余記顚末余辭以文
010_0078_c_09L悅曰師旣久服於寒巖門下而寒巖
010_0078_c_10L翁有如是殊勳何不記而揭之揄揚光
010_0078_c_11L輝乎又諸人黽勉之功記示板上
010_0078_c_12L後之人觀此而興起使是庵永不朽
010_0078_c_13L則斯翁重緝之功何止今日哉
010_0078_c_14L曰有是哉誠若子言遂爲之記

010_0078_c_15L

010_0078_c_16L山陰王山寺東照庵記

010_0078_c_17L
吾王峯兄癸酉夏離隱仙卓錫王山之
010_0078_c_18L東照庵來見我智谷謂曰子豈不聞
010_0078_c_19L吾山重修東照庵乎庵之設尙矣古人
010_0078_c_20L不記無從而稽庵僧言適見舊樑有
010_0078_c_21L云康熙七年重修未知重修歷幾次
010_0078_c_22L古殿欹爲居者憂又靖堂窄後房
010_0078_c_23L厨舍皆狹隘難容大衆辛未本庵耆
010_0078_c_24L德闍棃開刹發慈悲心欲完其欹

010_0079_a_01L직접 화주化主 일을 주관하여 약간의 재물을 얻고서 절에 상의하니 절의 대중들이 기쁘게 응하였다네. 다음 해 봄에 장인을 불러 공사를 맡기고 3개월 만에 일이 끝났으니, 그 정당과 뒷방과 부엌이 가로세로 모두 전보다 넓어졌으며, 익헌翼軒 2가架는 특별히 새로 지었다네. 내가 이곳에 오자마자 그 사적을 보고 절에서의 공을 치하하였으나 그 감궤監饋한 사람은 잘 알 수 없었네. 절에 물었더니 전 주지 최일最日이 감독하고 척선蜴宣이 그 음식을 맡았다 하여 비로소 두 사람의 공 또한 컸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스님께서는 몇 글자 아끼지 말아서 이 암자를 빛내 주시고 여러 스님들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게 해 주시게.”
나는 일어나 말하였다.
“좋습니다. 우리 형께서 남의 아름다움을 드날려 주시길 좋아하시는군요. 절을 짓는 역사에는 대중이 보시하는 노고가 그 사이에 반드시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기록을 하려고 해도 문장이 부족하여 할 수 없습니다. 형께서는 돌아가셔서 대중들을 모아 놓고 저의 이 말을 고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말한다. 암자 이름을 동조東照라고 한 것은 과연 햇빛이 동쪽에서 비춘다(日光東照)는 뜻에서 취한 것인지 달빛이 동쪽에서 비춘다(月光東照)는 뜻에서 취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 뜻이 어디에 있을까? 아! 우리 부처님께서 6년 동안 설산雪山에 앉아 보리과菩提果를 이루시고 영축산靈鷲山에 머물면서 『법화경』을 설하실 때 눈썹 사이의 흰 털(白毫)에서 상서로운 빛을 발하시어 동방의 1만 8천 찰토를 비추시었다. 보시나 지계持戒나 인욕이나 정진이나 선정이나 반야나 갖가지 수행을 하는 중생들이 있으면 두루 이 광명으로 그들을 거두었고, 불상을 만들고 절을 경영하고 탑을 세우는 등의 갖가지 좋은 일을 행하는 자도 이 광명으로 그들을 섭수하였다. 대중이 이를 알고서 이 집에 거하면서 인색함과 욕심을 깨뜨리고 잘못과 악을 막고 온갖 고통을 참으며 날마다 게으르지 않으면서 하루 종일 한마음으로 어지럽게 하지 않아 반야般若가 환해진다면 큰 광명이 동쪽에서 비추는(東照) 곳에 앉은 사람들 하나하나가 당 이름의 뜻을 낱낱이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여기에 살다 여기에서 죽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으리니,

010_0079_a_01L其窄身自幹化得略干物乃詢于寺
010_0079_a_02L寺衆懽應明年春乃命工付役閱三月
010_0079_a_03L功奏其靖堂及後房厨室縱橫並廣於
010_0079_a_04L所謂翼軒二架則特新搆也余方
010_0079_a_05L到此睹其事跡賀功於刹第其監饋
010_0079_a_06L姑未識焉訊于刹曰前寺主最日
010_0079_a_07L監之蜴宣任其饋然後始知二子之功
010_0079_a_08L亦多吾願師不惜數字以光斯庵
010_0079_a_09L使諸子名不泯焉余作而曰善哉
010_0079_a_10L兄好揚人之美也一寺之役衆施之勞
010_0079_a_11L必多於其間而吾欲記無文不能
010_0079_a_12L歸集衆以吾之言告曰庵名東照者
010_0079_a_13L果未知取日光東照乎取月光東照乎
010_0079_a_14L其意安在嗚呼我瞿曇氏六年坐雪
010_0079_a_15L成菩提果住靈鷲山將說法華
010_0079_a_16L眉間白毫祥光照東方萬八千土凡有
010_0079_a_17L衆生若布施若持戒若忍辱若精進
010_0079_a_18L若禪定若般若若種種修行者普以
010_0079_a_19L此光明收之至於造像營寺修塔種種
010_0079_a_20L行善者亦以此光明攝之大衆若了此
010_0079_a_21L而居是堂破慳貪防非惡忍衆苦
010_0079_a_22L日不怠於二六時中一心不亂般若
010_0079_a_23L朗然則一一坐大光明東照處一一知
010_0079_a_24L名堂之義若然則居於斯沒於斯

010_0079_b_01L어느 겨를에 어설픈 문장을 기록하여 자질구레한 일의 형상을 취하겠는가?
야인 이자설기
갑신년 6월에 성산星山 이자李子가 법화암法華庵에 와서 종을 주조하고 돌아가려 할 때에 나에게 말하였다.
“저는 대장장이입니다. 대개 대장장이가 쇠를 다스려 완성할 때에 수백 수레의 두겁쇠와 말의 목사슬을 어찌 수고롭다 여기겠으며 연인涓人117)의 삽이나 역의痬醫의 침인들 어찌 천하다 여기겠습니까? 크게 막야鏌鎁118) 같은 명검을 만들어도 끝내 상서로운 물건이 되지는 못하고, 무겁게 정내鼎鼐119) 같은 솥을 만들어도 날마다 물불을 다투게만 할 뿐이어서 또한 따라서 녹아 닳고 맙니다. 저 쇠라는 것이 대장장이의 은혜나 원한을 알지는 못하지만 대장장이는 기술을 가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이라는 것은 음악의 도구이고 음악이란 즐거운 것입니다. 즐거우면 여기서나 저기서나 싫어하는 법이 없어서 조묘朝廟에 쓰일 때에 거문고나 비파, 경쇠나 관악기보다 높은 곳에 자리하면서 이웃과 화합합니다.
대저 여러 그릇들은 다 형상을 쓰는 것이라 쉽게 닳아 버리지만 종만은 쓰임이 소리에 있습니다. 소리라는 것은 형체가 없어서 고갈되지도 않고 고생스럽지도 않아서 그 수명이 깁니다. 수명이 길기 때문에 종을 주조하는 일이 자주 없고, 자주 없기 때문에 종 만드는 장인이 드뭅니다. 드물기 때문에 먼 곳 사람들이 찾아와 청합니다. 종의 제작이 자주 없으나 종 만드는 장인이 한 해 내내 논 적은 없습니다. 그 그릇이 무겁고 만들기가 어려운 까닭에 값이 높아서 하루 종일 풀무 불 앞에서 고생을 한 적은 없지만 그 수입은 생계를 돕기에 충분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을 업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늦게 태어나서 성조聖祖 개국 초기에 어가御街의 종을 만드는 데 부역하지 못했고, 또 영묘英廟에 음악을 제정할 때에 황종과 협종을 만드는 데 부역하지 못했습니다. 그저 절에서 종을 만드는 데에만 기술을 펼치고 있으니 슬픕니다.

010_0079_b_01L以無愧何暇操觚爲記取屑屑事相乎

010_0079_b_02L

010_0079_b_03L冶人李子說記

010_0079_b_04L
歲甲申林鐘之月星山李子來法華庵
010_0079_b_05L鑄鐘訖將歸謂余曰余冶者也凡冶
010_0079_b_06L之攻金而成者以百數車之釭馬之
010_0079_b_07L何其勞也涓人之鍤痬醫之鍼
010_0079_b_08L其賤也大而爲鏌鎁終非祥器也
010_0079_b_09L而爲鼎鼐日使水火爭而已亦隨而銷
010_0079_b_10L耗焉彼金也雖不知恩怨於冶而爲
010_0079_b_11L冶者術不可不擇也夫鐘者樂之具
010_0079_b_12L樂者樂也樂則在此在彼而無惡斁
010_0079_b_13L用於朝廟其處尊列於琴瑟磬管其隣
010_0079_b_14L凡諸器皆以形爲用故易獘而惟
010_0079_b_15L鐘之用也以聲聲者無形也不竭而
010_0079_b_16L不勞其壽長長故鐘之鑄不數不數
010_0079_b_17L鐘之工希希故遠道之人亦來而
010_0079_b_18L邀之鐘之鑄不數而鐘之工未嘗終
010_0079_b_19L歲遊其器重其成難故其直高未嘗
010_0079_b_20L日勞於韛火之前而其得足以補吾生
010_0079_b_21L是以吾以是業然而吾生也晩不丁於
010_0079_b_22L聖祖開國之初不得鑄御街之鍾又不
010_0079_b_23L丁於英廟制樂之辰不得鑄黃夾之鍾
010_0079_b_24L而顧乃騁技於招提之懸悲夫然而吾

010_0079_c_01L
그러나 저는 희생의 피를 바르지 않습니다. 소와 양에게 차마 못할 일을 하지 않고도 종이 잘 만들어집니다. 저를 찾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명산 승찰勝刹을 다니는 일이 많습니다. 지금 이곳에 와 보니 이곳도 영험한 곳이어서 마음이 깊어지고 높아집니다. 문수암文殊庵과 엄천사嚴泉寺와 왕산사王山寺 등 여러 가람이 다 무릎 아래 있어서 좋은 경치를 모두 갖고 있습니다. 난간을 돌며 바라보자면 세 개의 봉우리가 멀리 아득하게 하늘로 들어가는데 이것이 방장산입니다. 이것이 진나라 황제가 동해를 방황하면서 한번 보고 싶어 했으나 보지 못한 그곳이 아니겠습니까? 또 개인 창 아래 깨끗한 자리를 깔고 여러 사미들이 경전을 잡고 빙 둘러 내려다보고 스님은 의젓하게 그 가운데 앉아 불자를 휘두르며 강설을 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보리菩提라는 것이 나무인지 나무가 아닌지, 개에게 불성이 없는지 불성이 있는지 하는 것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청량한 기운이 뱃속에서 절로 생겨나니 저의 즐거움이 어찌 산수에만 머물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제가 종 만드는 기술을 배운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감탄하였다.
“이야말로 대장간에 숨은 은자로구나.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기록하여 없어지지 않게 한다.
잡저雜著
보화천존 제문
원황元皇이 위에 계시니 만물이 다 자라납니다. 기도가 있는 곳이면 진실로 굽어보시어 덕이 있으면 반드시 복을 받고 완악하면 상해를 받습니다. 드러나지 않는 속에 벌과 상을 명확하게 판단하시니, 어찌 조금이라도 속일 수 있겠습니까? 마치 소리가 울리는 것 같아서 모든 백성들은 떠받들며 우두커니 생각에 잠깁니다.
산신 제문
저 높은 산과 언덕은 신령으로 편안하여 바라보면 순수하게 환히 보입니다.

010_0079_c_01L不用牲血之釁故牛與羊皆無所忍之
010_0079_c_02L而鐘善成人之邀我者多故吾之遊名
010_0079_c_03L山勝刹者多矣今到于此此亦靈區也
010_0079_c_04L心邃而高文殊嚴泉王山諸伽藍
010_0079_c_05L在膝下其勝賞捴而有之巡欄而望
010_0079_c_06L有三峯縹緲入雲霄乃方丈也此非
010_0079_c_07L秦皇帝彷徨東海上欲一見而不得者耶
010_0079_c_08L且晴窓淨筵衆沙彌執經環俯師儼然
010_0079_c_09L中坐揮麈講說所謂菩提是樹耶
010_0079_c_10L樹耶狗子無佛性耶有佛性耶吾固
010_0079_c_11L未之知而淸凉之氣自生於腔內
010_0079_c_12L之樂豈止於山水哉思之吾之學攻
010_0079_c_13L鐘儘幸矣余聞而歎曰是隱於冶者乎
010_0079_c_14L何其言之若是也遂記之使不泯焉

010_0079_c_15L

010_0079_c_16L雜著

010_0079_c_17L祭普化天尊文

010_0079_c_18L
元皇臨上萬彙咸養凡玆有祈允克
010_0079_c_19L俯相德必潤祉頑乃受戕冥冥之中
010_0079_c_20L明斷罰賞毫釐何瞞如聲之響元元
010_0079_c_21L之民咸戴佇想

010_0079_c_22L

010_0079_c_23L祭山神文

010_0079_c_24L
崔彼岡巒于神斯安窅乎無質赫然

010_0080_a_01L밝고 용하니 누구라도 조금인들 속이겠습니까? 거침없이 오가니 널빤지 같았던 것이 환약처럼 바뀝니다. 감응하면 마침내 통하여 근심이 기쁨이 되나니, 이에 깨끗한 땅에 나아가 저 참된 단을 정돈하였습니다. 나의 마음을 걸러서 진실로 너그럽게 드리우시어, 복이 이어지고 재앙은 사라지게 하시고 하늘과 땅처럼 영원히 변하지 않는 복터(福基)를 아름답게 하소서.
불장암 상량문
멀고 먼 옛적 대지가 갈라지니 비로소 산과 바다가 생겼고, 큰 뜻이 중기中棋에 흐르자 이에 찰간刹竿을 세웠다. 무량한 법문을 강설하며 이름난 터를 차지한 이 암자는 신라 초엽에 창건하여 지금 이 성세聖世에 이르렀다. 산 이름은 방장산이라 하는데 해중海中의 삼신산三神山으로 나란히 열거되고, 전각은 불장암佛藏庵이라 하니 이 구역 내에서 제일이다. 운運이 재난(陽九)120)의 액厄을 만나니 신성한 구역에 의지할 수도 없고, 하늘이 불(地二)121)의 재앙을 내렸으니 불타 버린 땅이 가련하다. 재물을 모으고 장인을 불러 들보를 올리려 함에 복을 빌어 대중에 보답하는 노래를 마땅히 올리리라.

兒郞偉拋梁東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면
禪窓已照曉暉紅  선방 창문에 새벽빛 붉게 비치나
日行一日能廻到  해는 하루면 다시 돌아오니
莫謂天長不可窮  하늘이 멀어 궁구하지 못한단 말은 말아라.

拋梁南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면
老檜穉松碧共森  늙은 회나무 어린 소나무 함께 푸른 숲을 이루니
寂寂山深雲宿處  적적하고 깊은 산속 구름이 머무는 곳에서
一聲淸磬禮瞿曇  맑은 경쇠 소리로 부처님께 예를 올리네.

拋梁西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면
層峯疊石自高低  겹겹 봉우리 쌓인 돌이 제각기 높고 낮듯이
工夫自有蓮花路  공부에도 연화蓮花 길이 절로 열려서
繄着心頭使不迷  집착하는 마음을 미혹하지 않게 하리라.

拋梁北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면
夜色沉沉如潑墨  무거운 밤빛은 마치 먹물을 뿌린 듯
靜坐蒲團看碧穹  포단蒲團에 고요히 앉아 창공을 보면
衆星落落環宸極  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 북극성을 에워싸네.

拋梁上      들보를 위로 던지면
一帶銀河光蕩漾  은하수 한 줄기 불빛이 넘실거리니
愽望仙槎一借之  박망愽望122)의 신선배(仙槎)를 빌려서
欲陞兠率恣遊賞  도솔천에 올라가 마음대로 노닐고 싶구나.

拋梁下      들보를 아래로 던지면
數畝煙霞幽興惹  몇 이랑 안개를 아득히 끌고 일어나고
一樹移來圓覺山  나무 한 그루 원각圓覺의 산으로 옮겨 와
滿枝香發無冬夏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가지에 온통 향을 발하네.

상량上樑한 뒤에는 우담화가 거듭 펼쳐져

010_0080_a_01L有觀旣明且聖毫釐誰瞞去來縱橫
010_0080_a_02L如板轉丸感則遂通以憂爲歡爰就
010_0080_a_03L淨堣整伊眞壇瀝予肺肝允希垂寛
010_0080_a_04L有祚是賡有殃是刓天長地久福基
010_0080_a_05L以曼

010_0080_a_06L

010_0080_a_07L佛藏庵上樑文

010_0080_a_08L
大塊剖於邃古始有嶽溟玄猷流乎中
010_0080_a_09L爰置竿刹講無量法占有名墟
010_0080_a_10L庵也剏自羅朝迄于聖世山曰方丈
010_0080_a_11L並列海中之三殿稱佛藏乃是域內之
010_0080_a_12L運値陽九之厄無賴靈區天降地
010_0080_a_13L二之灾可憐焦土鳩財邀工樑欐將
010_0080_a_14L祝釐侑衆詞頌宜呈兒郞偉拋梁
010_0080_a_15L禪窓已照曉暉紅日行一日能廻到
010_0080_a_16L莫謂天長不可窮拋梁南老檜穉松碧
010_0080_a_17L共森寂寂山深雲宿處一聲淸磬禮瞿
010_0080_a_18L拋梁西層峯疊石自高低工夫自
010_0080_a_19L有蓮花路繄着心頭使不迷拋梁北
010_0080_a_20L色沉沉如潑墨靜坐蒲團看碧穹衆星
010_0080_a_21L落落環宸極拋梁上一帶銀河光蕩漾
010_0080_a_22L愽望仙槎一借之欲陞兠率恣遊賞
010_0080_a_23L梁下數畝煙霞幽興惹一樹移來圓覺
010_0080_a_24L滿枝香發無冬夏㑀願上樑之後

010_0080_b_01L혜일慧日이 길이 빛나고, 팔부八部123)가 도량을 에워 호위하며 육화六和가 강석講席에 폭주輻湊하게 하소서. 하늘과 땅처럼 영원히 변치 않고 바다처럼 넓고 산처럼 높게 하소서.
엄천사 종각 상량문
기세가 영남과 호남을 누르고 있는 함양咸陽은 도호부都護府124)의 요지이며 승지이다. 지리산 엄천嚴泉125)에 터를 잡아 대가람의 이름을 얻었으니, 고운孤雲 선생이 살던 곳이며 법우法祐 대사가 창건한 곳이다. 천 봉우리가 조릿대처럼 빽빽이 모이고 한 줄기 물이 감돌아 흐르는데, 산봉우리가 웅장하게 높으니 안탕산雁宕山126)의 풍경도 이만은 못하고, 도량이 맑고 깨끗하니 어찌 영축산(鷲靈)127)만 신령함과 아름다움을 독점하겠는가? 법전의 커다란 규모는 이미 정해지고 이에 이어 누각을 지을 계획을 세워서, 오균과 곽박(筠璞)128)에게 길일을 점치고 공수와 노반(倕般)129)에게 재목을 다듬게 하였다. 대산岱山130)의 좋은 재목을 옮겨 오고 곤륜산(崑丘)의 아름다운 돌을 실어 오니, 모든 일이 다 따라서 순조로워 오래지 않아 완성되었다. 대중들도 즐겁게 여기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누각을 세우는 공이 끝났으니 6위六偉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兒郞偉拋梁東   어영차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면
鏜鏜鞳鞳曙暉中  쩌렁쩌렁 새벽빛 속에 울려서
人間猶作牽情夢  세상은 아직도 정에 끄달려 꿈을 꾸고 있으니
一皷惺惺喚主翁  북을 두드려 정신 버쩍 나도록 주인을 깨우라.

兒郞偉拋梁南   어영차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면
鞳鞳鏜鏜午餉甘  쩌렁쩌렁 맛난 점심 공양을 알려서
莫使木魚鳴飯後  밥 때 지나 목어가 울리게 하지 말고
山中飢客盡來叅  산중의 배고픈 나그네 다 오게 하여라.

兒郞偉拋梁西   어영차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면
鏜鏜鞳鞳日輪低  쩌렁쩌렁 해 떨어지는 곳에 울리네
日輪方向金天去  해는 바야흐로 서쪽 하늘을 향하여
䓗嶺雪山路不迷  총령䓗嶺 설산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하여라.

兒郞偉拋梁北   어영차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면
鞳鞳鏜鏜時夜寂  쩌렁쩌렁 적막한 밤 시간에 울리어
吳質欲消黑業纒  오질吳質131)이 매인 악업을 없애려면
不眠應誦彌陀百  잠도 못 자고 아미타불 백 번을 외워야 하리.

兒郞偉拋梁上   어영차 들보를 위로 던지면
鏜鏜鞳鞳飛淸響  쩌렁쩌렁 맑은 메아리 날아서
隨風散入白雲間  바람 따라 흩어져 흰 구름 속으로 드니
諸佛翩然來髴髣  여러 부처님들 나풀나풀 오시는 것 같아라.

兒郞偉拋梁下   어영차 들보를 아래로 던지면
鞳鞳鏜鏜長不啞  쩌렁쩌렁 오래도록 소리를 내어
三十三天廿八星  삼십삼천과 이십팔성에
晨昏不失鳴蘭若  아침 저녁 때 놓치지 말고 절에 울려라.

상량한 뒤에는 신들이 이 절을 도우시어 이름이 시방세계에 떨치게 하소서. 경쇠와 징을 널리 울려 신령함을 드날리어

010_0080_b_01L花重敷慧日長明八部拱衛於道場
010_0080_b_02L和輻湊於講市天長地久海濶山高

010_0080_b_03L

010_0080_b_04L嚴泉寺鐘閣上樑文

010_0080_b_05L
勢扼嶺湖咸陽爲都護府之鎭勝占智
010_0080_b_06L異嚴泉得大伽藍之名孤雲子之所棲
010_0080_b_07L法祐師之攸創千峯簇攅一水縈紆
010_0080_b_08L巖巒之雄高則鴈宕風斯下道場之明
010_0080_b_09L而鷲靈美豈專旣奠法殿之宏䂓
010_0080_b_10L爰諏鐘樓之繼搆筮陰陽於筠璞勑杗
010_0080_b_11L桷於倕般輸岱山之奇材寫崑丘之美
010_0080_b_12L事皆從而順矣不日成之衆亦樂
010_0080_b_13L而爲焉如雲集也一閣功訖六偉唱騰
010_0080_b_14L兒郞偉拋梁東鏜鏜鞳鞳曙暉中
010_0080_b_15L間猶作牽情夢一皷惺惺喚主翁
010_0080_b_16L郞偉拋梁南鞳鞳鏜鏜午餉甘莫使木
010_0080_b_17L魚鳴飯後山中飢客盡來叅兒郞偉拋
010_0080_b_18L梁西鏜鏜鞳鞳日輪低日輪方向金天
010_0080_b_19L䓗嶺雪山路不迷兒郞偉拋梁北
010_0080_b_20L鞳鞳鏜鏜時夜寂吳質欲消黑業纒
010_0080_b_21L眠應誦彌陀百兒郞偉拋梁上鏜鏜鞳
010_0080_b_22L鞳飛淸響隨風散入白雲間諸佛扇然
010_0080_b_23L來髴髣兒郞偉拋梁下鞳鞳鏜鏜長不
010_0080_b_24L三十三天廿八星晨昏不失鳴蘭若
010_0080_b_25L伏願上樑之後神祐一寺聲聞十方

010_0080_c_01L천 마군이 도망가게 하시고, 범패와 송경을 권해 부처님을 즐겁게 하여 온갖 복록을 많이 받게 하소서.
안정사 상량문
강계疆界를 72구區로 나누었을 때에 철성鐵城132)은 영남의 막강한 요지여서 도움 되는 곳이 수천여 곳이나 나열해 있다. 안정사安靜寺133)는 해동 선문의 보배로운 절이니, 북으로는 높은 산에 의지하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였다. 옥 같은 꽃(琪花)이 온통 떨어져 골짝은 홍류동紅流洞이라고 불리고, 어여쁜 풀(瑤草)이 영원히 피어서 산은 벽방산碧芳山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지도에 분명하게 실려 있어 원근에서 다들 우러러본다. 가조도加助島134)가 치달려 멀리 봉래산의 구름길을 손짓하고, 태을봉太乙峰135)이 뾰족하게 솟아서 방장산의 하표霞標136)와 맞서고 있다. 삼보三寶가 그윽히 도우시어 잠잠히 천 년을 두루 미치고, 종문의 도(宗猷)가 아직 남아 2의儀가 비로소 나뉘었다. 이지러짐과 가득참, 가득참과 이지러짐이 있기에 만물이 따라 정해졌으니, 어찌 일어나고 부서짐, 부서짐과 일어남이 없겠는가?
옛날 임진·정유의 난리에 불탄 것을 병인년(赤虎)137)에 다시 수리하고, 후에 병진년의 화재로 무너진 것을 경오년(白羊)에 수리하였다. 대중들은 역사에 내몰리는 것을 힘들어 하지 않았고 장인들은 집 짓는 일에 솜씨를 다하였으니, 이는 주인의 좋은 계획 때문이었으며 때(運期)를 잘 만난 덕분이었다. 눈앞에 오똑한 백 척짜리가 자연 그대로의 산중에서 사치스런 금과 옥(金碧)138)으로 전부 바뀌었으니 신이 만든 것 같구나. 들보를 다 만들어 올리고서 짧은 말이나마 올리노라.

拋梁東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孤舟出沒海潮中  배 한 척 바다 조수에 오르락내리락한다.
不知寂滅宮何在  적멸궁寂滅宮이 어디에 있는가
試看松顚鶴頂紅  소나무 꼭대기 붉은 학머리를 한 번 보아라.139)

拋梁南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李公遺壘眼中森  이 충무공이 남긴 성채가 눈에 빽빽하다.
慈悲心在刀槍裏  자비심은 칼과 창 안에 있으니
長使邊民夜睡甘  길이 변방 백성들의 밤잠을 달게 하리라.

拋梁西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隱峯庵與白雲齊  은봉암隱峯庵이 흰 구름과 같아지네.
白雲猶在靑天下  흰 구름은 그래도 푸른 하늘 아래에 있으니
莫謂庵高不可躋  암자가 높아 오르지 못하겠다 말하지 말라.

拋梁北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니

010_0080_c_01L匝磬鑼而揚靈千魔辟易侑員誦而娛
010_0080_c_02L百祿多將

010_0080_c_03L

010_0080_c_04L安靜寺上樑文

010_0080_c_05L
伏以分疆界七十二區鐵城是嶺南雄
010_0080_c_06L藩重地列裨輔數千餘所安靜爲海左
010_0080_c_07L禪門寶坊北倚高岡東臨大海琪花
010_0080_c_08L遍落洞有紅流之稱瑤草長榮山帶
010_0080_c_09L碧芳之號圖籍之所昭載遐邇之所共
010_0080_c_10L加助奔馳遙指蓬萊之雲路太乙
010_0080_c_11L尖秀平挹方丈之霞標而三寶冥佑
010_0080_c_12L潜周迨千載宗猷尙在二儀肇分
010_0080_c_13L有缺而盈盈而缺萬彙隨奠寧無興
010_0080_c_14L與廢廢與興前燬於壬丁之亂洎赤
010_0080_c_15L虎而復修後敗於丙辰之灾及白羊而
010_0080_c_16L乃葺衆無倦於趋役匠有技於搆堂
010_0080_c_17L是主人之嘉謀抑運期之良會眼前見
010_0080_c_18L突兀之百尺自天成之山中侈金碧之
010_0080_c_19L一新若神造也脩樑旣擧短詞宜揚
010_0080_c_20L拋梁東孤舟出沒海潮中不知寂滅宮
010_0080_c_21L何在試看松顚鶴頂紅拋梁南李公
010_0080_c_22L遺壘眼中森慈悲心在刀槍裏長使邊
010_0080_c_23L民夜睡甘拋梁西隱峯庵與白雲齊
010_0080_c_24L白雲猶在靑天下莫謂庵高不可躋

010_0081_a_01L億丈危峩隣斗極  억 길만큼 높고 아슬하여 북두성·북극성과 이웃하네.
拔地何能若此高  빼어난 땅 어디가 이처럼 높을까
仰之不覺心懷恧  우러러보면 나도 모르게 부끄러워진다.

拋梁上      들보를 위로 던지니
明河一帶銀波漾  은하수 한 줄기 은빛 파도가 넘실댄다.
山僧夜夜祝君心  산승이 밤마다 임금을 축원하는 마음
壽似斯河橫漭濸  천수天壽가 이 은하수처럼 망망하게 차시라.

拋梁下      들보를 아래로 던지니
結廬深遠無車馬  집 지은 곳이 깊고 멀어 거마車馬가 다니지 않는다.
滿山松蕨足生涯  산에 가득한 소나무와 고사리로 먹고 살기 풍족하니
塵臼營營堪笑也  티끌 세상을 경영하는 일이야 우습다네.

상량한 뒤로는 깨달음의 나무(覺樹)가 더하여 불어나고 경사스런 지팡이 다시 모이게 하소서. 오랑캐를 길이 거두어 영원토록 변방을 놀라게 하는 근심이 없게 하시고, 용상龍象이 다 돌아와서 입실入室하는 기쁨이 있게 하소서.
추파 대사 영찬
그 모습은 크고 그 공적은 화려하게 빛납니다. 한번 공문空門에 들어온 뒤로 푹 빠져 돌아가지 않았으니 그 즐기는 바가 참으로 은둔하여 참선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지 어떻게 인륜을 끊으려는 싫어하는 마음이 있어서였겠습니까?
저는 서역西域의 풍속에 사람이 나면 조문하고 사람이 죽으면 축하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조문하는 것은 그가 고통 바다(苦海)에 난 것을 조문하는 것이고, 축하하는 것은 그가 즐거운 나라(樂國)에 돌아가는 것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심적암深寂庵에서 4대大가 적멸寂滅로 돌아가니 남들이 축하하길 기다릴 것도 없이 대사는 필시 스스로 축하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영정 한 폭이 다시 고통 바다에 나니 저는 실로 계산稽山140) 아래에서 대사를 조문하고 싶습니다.
대사의 이름은 홍유泓宥이고 속성은 이李씨이며, 호는 추파秋波입니다. 대군大君의 후손이며 지현知縣의 손자로 나이 10세에 백 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세상에 나아가 쓰일 때를 기다렸으나 어디를 가도 잘 되지 않자 바로 머리를 깎고 회계산會稽山에 들어갔습니다. 40년 동안 좌선하면서 끝내 어떤 일을 즐거워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으니 나는 그 뜻이 자못 슬픕니다.

010_0081_a_01L梁北億丈危峩隣斗極拔地何能若此
010_0081_a_02L仰之不覺心懷恧拋梁上明河一
010_0081_a_03L帶銀波漾山僧夜夜祝君心壽似斯河
010_0081_a_04L橫漭濸拋梁下結廬深遠無車馬滿
010_0081_a_05L山松蕨足生涯塵臼營營堪笑也伏願
010_0081_a_06L上樑之後覺樹增榮復結蠻蜒
010_0081_a_07L永戢無警邊之憂龍象率歸有入室
010_0081_a_08L之喜

010_0081_a_09L
秋波集卷之三

010_0081_a_10L

010_0081_a_11L秋波大師影贊

010_0081_a_12L
其狀魁梧其閥華顯一投空門有溺
010_0081_a_13L無返豈其所樂眞在逃禪抑有所厭
010_0081_a_14L有甚滅倫吾聞西域之俗人生則吊
010_0081_a_15L人死則賀吊者吊其生於苦海賀者賀
010_0081_a_16L其歸於樂國深寂之庵四大歸寂
010_0081_a_17L待人賀師必自賀之不暇一幅影子之
010_0081_a_18L復生於苦海吾實欲爲師相吊於稽山
010_0081_a_19L之下

010_0081_a_20L
師法名泓宥俗姓李號秋波大君
010_0081_a_21L之裔知縣之孫年十歲讀百卷書
010_0081_a_22L出以需世何適不宜而乃祝髮
010_0081_a_23L會稽山中坐禪四十年而終未知所
010_0081_a_24L樂何事余竊悲其志焉師幼學吾從

010_0081_b_01L대사는 어려서 저의 종조부이신 희암希菴141) 선생을 따라 공부하였고 저의 선친과 주고받은 편지 한 장을 본 적도 있었습니다. 열반에 이르도록 진장珍藏을 잃지 않았으니 그 문장 좋아함을 알 만합니다. 지금 찬영贊影의 시를 짓자니 거듭 마음이 사무칩니다.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42)이 제題합니다.


010_0081_b_01L祖祖父希菴先生又甞得吾先子徃
010_0081_b_02L復書一紙至涅槃珍藏不失其喜
010_0081_b_03L文章可知今於贊影之什重爲之致
010_0081_b_04L意焉

010_0081_b_05L
樊巖蔡濟恭題

010_0081_b_06L
  1. 106)단확丹雘 : 안료를 만드는 광물질인 단사丹沙와 청확靑雘을 붙인 말로 단청丹靑 또는 단벽丹碧, 단록丹綠이라고도 한다.
  2. 107)이 글은 저자가 출가하기 전에 쓰인 것으로 보인다.
  3. 108)성成 : 사방 10리의 땅이다.
  4. 109)복천福川 : 조선 세조 10년(1464)에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온양온천으로 행차하면서, 속리산 복천암의 신미 대사를 찾았다는 기록이 있다.
  5. 110)목은牧隱 : 고려 말의 문신·학자인 이색李穡(1328~1396)의 호이다.
  6. 111)호정浩亭 :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까지 활동한 문신 하륜河崙(1347~1416)의 호이다.
  7. 112)안음安陰 : 경상남도 함양군과 거창군居昌郡의 일부 지역을 관장하던 조선 초기의 행정 구역으로, 고려 때의 이안현利安縣과 감음현感陰縣을 태종 15년(1415)에 합친 것이다.
  8. 113)삼가三嘉 : 경상남도 합천의 옛 이름이다.
  9. 114)영준英俊 : 고려의 승려 적연寂然의 휘諱이다. 태조 15년(932)에 태어났다고 전한다.
  10. 115)황매黃梅 : 황매산黃梅山에서 도를 닦은 중국 선종의 제5조인 홍인弘忍(601~674)을 가리킨다.
  11. 116)조계曺溪 : 중국 선종 제6조인 혜능慧能(638~713)의 별호別號이다. 원래 중국 광동성廣東省 소주부의 동남쪽 30리 쌍봉산雙峰山 아래 있는 땅 이름인데, 혜능 스님이 667년 조숙량曺叔良으로부터 이 땅을 희사받아 보림사寶林寺를 짓고 선풍을 크게 진작하였으며, 입적한 뒤에 이곳에 묻었으므로 육조의 별호가 되었다.
  12. 117)연인涓人 : 궁중에서 소제 같은 일을 하는 환관이다.
  13. 118)막야鏌鎁 : 중국 오吳나라 때 막야가 만든 명검의 이름이다.
  14. 119)정내鼎鼐 : 음식을 익히고 조리하는 데 쓰던 세 발 달린 큰 솥이다.
  15. 120)양구陽九 : 재난災難, 즉 음양도陰陽道에서 말하는 양의 5액과 음의 4액을 가리킨다.
  16. 121)지이地二 : 『주역』에 “천일 지이 천삼 지사天一地二天三地四”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오행五行에 따라 정리하면 “땅에서 불이 난다.(地二生火)”는 뜻이 된다. 그래서 지이는 땅을 가리키며, 또 불을 가리킨다.
  17. 122)박망愽望 : 한漢나라 장건張騫은 무제武帝 때 대월지국大月氏國에 사신으로 갔다가 흉노匈奴에게 포로가 되어 고절苦節을 굳게 지키다가 13년 만에야 돌아왔는데, 서역西域 제국에 국위를 크게 선양한 공으로 박망후博望侯에 봉해졌다. 『한서漢書』 「장건전張騫傳」의 “한나라 사신이 은하수까지 갔다.(漢使窮河源)”는 말에 기인하여, 장건이 뗏목을 타고 은하수에 가서 견우와 직녀를 만나고 신선이 되었다는 전설이 생겼다. 그래서 장건을 선사객仙槎客이라고 한다.
  18. 123)팔부八部 : 부처의 한 권속으로 시주하는 자리에 열 지어 불법을 수호하는 천天·용龍·야차夜叉·건달바乾達婆·아수라阿修羅·가루라迦樓羅·긴나라緊那羅·마후라가摩候羅伽의 여덟 신장을 말한다.
  19. 124)도호부都護府 : 함양군은 조선 영조 5년(1729)에 도호부로 승격하고 정조 12년(1788)에 다시 군으로 환원되었다. 이 글이 지어진 시기는 함양도호부 시절이었다.
  20. 125)엄천嚴泉 : 지금 함양군 휴천면 남호리 절터 마을에 엄천사 터가 있는데, 주춧돌이 남아 있다. 앞에는 엄천강이 흐른다.
  21. 126)안탕산雁宕山 : 안탕산雁蕩山을 말한다.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산 이름인데, 대평흥국太平興國 초에 사문 전료全了가 이 산에 영암사靈巖寺라는 절을 지었다.
  22. 127)축령鷲靈 : 영축산靈鷲山, 즉 부처님께서 설법하셨던 축령鷲嶺을 말한다. 범어梵語의 음을 따 기사굴산耆闍堀山이라고도 한다. 중인도 마갈타의 서울 왕사성王舍城 동북쪽 10리 지점에 있다.
  23. 128)균박筠璞 : 오균吳筠은 당나라 때의 도사이고 곽박郭璞은 진晉나라 때의 술사로 풍수지리학의 창시자이다. 둘 다 점을 잘 쳤다.
  24. 129)수반倕般 : 고대의 유명한 목수인 요임금 때의 공수工倕와 춘추 시대의 노반魯般을 가리킨다.
  25. 130)대산岱山 : 태산泰山의 별칭이다.
  26. 131)오질吳質 : 달 속에 사는 신선인 오강吳剛을 말한다. 전한 시대 사람으로 선술仙術을 배우다가 잘못을 저질러 달 속의 계수나무를 베는 벌을 받았다. 계수나무는 높이가 5백 척이나 되는데 도끼로 찍으면 갈라졌다가 도로 붙어 버렸다. 오질은 잠도 자지 못하고 계속 계수나무를 찍어대고 있다고 한다. 『초학기初學記』 권1에 나온다.
  27. 132)철성鐵城 : 경상남도 고성固城의 옛 이름이다.
  28. 133)안정사安靜寺 : 현재 경상남도 통영시 광도면光道面 안정리 벽발산碧鉢山에 있는 절이다.
  29. 134)가조도加助島 : 경상남도 거제시 사등면沙等面 창호리倉湖里에 딸린 섬이다.
  30. 135)태을봉太乙峰 : 태일봉太一峰이라고도 한다. 방장산이 삼신산의 하나이므로, 천왕봉에는 신선들의 우두머리인 태을 선인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지리산 천왕봉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31. 136)하표霞標 : 진晉나라 손작孫綽이 천태산天台山 자락인 적성산赤城山에 푯말을 세우고 은거 생활을 즐겼다. 손작의 「유천태산부游天台山賦」에 “적성산에 노을이 일어나기에 표기를 세웠다.(赤城霞起以建標)”고 하였기에, 후에 중국 절강浙江 적성산 위에 세운 표기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32. 137)적호赤虎 : 간지로 오행을 배열할 때에 병丙과 정丁은 불에 속하므로 붉은 색(赤)이다. 또 인寅은 호랑이(虎)이다. 따라서 적호는 병인년丙寅年을 가리킨다.
  33. 138)금벽金碧 : ① 금과 옥. ② 금의 노란색과 옥돌의 푸른색.
  34. 139)“겹겹으로 푸른 산은 미타굴이요, 아득하게 넓은 바다 적멸보궁이라. 세상사의 모든 것이 걸림이 없는데, 소나무 위 머리 붉은 학을 몇 번이나 보았는가.(靑山疊疊彌陀窟, 滄海茫茫寂滅宮. 物物拈來無罣碍, 幾看松亭鶴頭紅.)”라는 시에서 나온 말이다.
  35. 140)계산稽山 : 추파 스님이 살던 심적암이 산음 회계산에 있었다.
  36. 141)희암希菴 : 조선 후기의 문신 채팽윤蔡彭胤(1669~1731)의 호이다.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자는 중기仲耆이며, 호는 희암希菴 또는 은와恩窩라고 하였다. 저서로 『희암집』 29권이 있다.
  37. 142)채제공蔡濟恭 : (1720~1799)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번암樊巖 또는 번옹樊翁이라 하고, 자는 백규伯規이며, 시호는 문숙文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