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추파집(秋波集) / [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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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跋]
이 『추파집』은 가대인家大人이 받으시어 스님께서 천화遷化하실 때의 반야도般若刀 임종게를 얻어서 우리 무리의 탄식을 돌아보게 하신 것이다. 신 공申公146)은 대사의 이름을 듣고 대사의 뜻을 펼쳐서 그 선공禪工을 밝혔고, 여와餘窩147)는 대사의 뜻을 애달프게 여겼으며, 윤 학사尹學士148)는 대사의 이름을 높였지만 일찍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을 마음에 한으로 여겼다. 대사의 문집을 준비하고 완성한 차에 한마디도 더할 것이 없으나 나만이 그 사람을 보았었다.
나는 기축년에 남쪽 영산靈山을 여행할 때에 청암사靑巖寺 법석에서 대사를 만났다. 하얀 머리에 긴 눈썹을 한 모습은 깎아 놓은 듯 단정하였고, 청초하고 초탈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심을 일으키게 하였다. 대사와 더불어 유가儒家와 석가釋家를 토론하며 서로의 관점을 맞추어 보았는데, 밤이 깊어 종소리 경쇠 소리가 다 고요해지고 여러 선객들이 조용히 잠들었을 때에 대사가 홀연 불자를 꽂으며 말하였다.

人閒桂花落    “사람이 한가하니 계수나무 꽃 떨어지고
夜靜春山空    밤은 깊어 봄 산이 텅 비었네.
月出驚山鳥    달이 나오자 산새가 놀라서
時鳴春澗中    가끔 봄 시내에서 우짖네.149)

이것이 고요한 가운데 움직임(靜中之動)입니다.

山月皎如燭    산 달이 촛불처럼 밝은데
霜風時動竹    서릿바람이 가끔 대나무를 흔드네.
夜半鳥驚棲    한밤중에 새가 놀라 깃들고
窓間人獨宿    창가에는 사람 홀로 잠들었네.150)

이것이 움직임 가운데 고요함(動中之靜)입니다. 고요하면 어쩔 수 없이 저절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까? 움직이면 어쩔 수 없이 고요하게 되는 것입니까? 고요하게 하는 것은 어떤 물건이며 움직이게 하는 것은 어떤 물건입니까?”
내가 대답하였다.
“뭇 선객들은 잠들었는데 대사와 나는 깨어서 움직이는 것은 왜입니까? 대사와 나는 깨어 있는데 뭇 선객들은 잠들어 고요한 것은 왜입니까? 대사와 내가 서로 만났으니 어찌 자겠으며, 뭇 선객들은 한밤중이 되었는데 어찌 깨어 있겠습니까? 대사를 깨어 있게 하는 것은 나이며, 나를 깨어 있게 하는 것은 대사입니다. 뭇 선객들을 잠들게 하는 것은 밤입니다. 그저 이것뿐이니 이것 외에 또 무슨 물건이 있겠습니까?

010_0081_c_07L[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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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秋波集家大人旣受之薦以師之臨
010_0081_c_09L化時般若刀一偈至發回顧吾黨之歎焉
010_0081_c_10L申公聞師之號而演師之意以明其禪工
010_0081_c_11L餘窩悲師之志尹學士高師之名而以
010_0081_c_12L心不曾一當爲恨焉於師之集備且盡
010_0081_c_13L一言可加而獨余得見其人矣歲己丑余
010_0081_c_14L南游靈山遻師於靑巖灋席其霜顱脩眉
010_0081_c_15L貌戌削有秀氣翛然令人起敬試與之
010_0081_c_16L講討儒釋叅錯同異至夜深鐘磬俱寂
010_0081_c_17L衆禪默睡師忽竪拂而言曰人閒桂花落
010_0081_c_18L夜靜春山空月出驚山鳥時鳴春澗中
010_0081_c_19L此靜中之動也山月皎如燭霜風時動竹
010_0081_c_20L夜半鳥驚棲窓間人獨宿此動中之靜也
010_0081_c_21L靜而自不得不動歟動而自不得不靜歟
010_0081_c_22L靜之者是甚麽物動之者是甚麽物
010_0081_c_23L衆禪睡而師與我覺而動者何歟
010_0081_c_24L與我覺而衆禪睡而靜者何歟師與我相
010_0081_c_25L遇矣其可睡乎衆禪到夜分矣其能覺
010_0081_c_26L使師覺者我也使我覺者師也使
010_0081_c_27L衆禪睡者夜也不過是而已是外又何有

010_0082_a_01L이것은 우리 유가에서 말하는 용庸이며 석가에서 말하는 환幻입니다.”
대사가 다시 말하였다.
“이것은 우리 불가에서 말하는 여如이며 자사자子思子가 말하는 비費입니다. 자사는 어그러짐(費)을 말할 때에 또 은거(隱)를 말하였지요.”151)
그렇게 서로 바라보고 웃으며 자리를 파한 것이 어언 6년이 지났는데, 대사가 지금 귀화하셨다고 하니 슬프다. 고귀한 인상의 그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구나. 듣자 하니 대사의 문도가 대사의 모습을 그려서 회계산의 절에 걸었다고 하는데, 과연 7분分이라도 얻었을까? 그 초탈한 아름다운 기운을 누가 그려 낼 수 있겠는가? 눈 속에 핀 난을 그리는 사람이 그 향기와 차가움까지 그린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대사의 청아한 담론은 오히려 이 문집에서 징험할 수 있지만 대사의 모습은 나중 사람들은 알 수 없으리라. 나의 글도 어쩔 수 없구나. 아! 슬프다.
백실白室 거사 유숙지柳肅之가 발문을 쓰다.

010_0082_a_01L甚麽物是者吾儒所謂庸也釋氏所謂
010_0082_a_02L幻也師曰是者吾家所謂如也子思子
010_0082_a_03L所謂費也子思子旣談費而又談隱因相
010_0082_a_04L笑而罷居然已六歲矣師今歸化云
010_0082_a_05L高相之貌不可復見矣聞師之徒畫師之
010_0082_a_06L以懸於會稽山寺果能得七分乎否
010_0082_a_07L其翛然之秀氣孰能畫之畫蘭雪者
010_0082_a_08L聞畫其香與冷也師之淸談猶可徵於是
010_0082_a_09L而師之貌後無以知之余之文亦不
010_0082_a_10L可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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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室居士柳肅之跋
  1. 146)신 공申公 : 이 문집의 권수에 서문을 쓴 신경준申景濬을 말한다.
  2. 147)여와餘窩 : 이 문집의 권수에 제題를 쓴 목만중睦萬中의 호이다.
  3. 148)윤 학사尹學士 : 이 문집의 권수에 서문을 쓴 윤숙尹塾을 말한다.
  4. 149)왕유王維의 ≺조명간鳥鳴澗≻이라는 시이다.
  5. 150)위응물韋應物의 ≺추재독숙秋齋獨宿≻이라는 시이다.
  6. 151)비은費隱은 정치 주장이 다르면 은거하면서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본래 『예기禮記』 「중용中庸」의 “군자의 도는 어그러지면 숨는다.(君子之道, 費而隱.)”라고 한 데서 나왔다. 정현鄭玄의 주에 “숨어 살 수 있는 절조를 말한다. 비는 어그러지는 것이니 도가 어그러지지 않으면 벼슬을 한다.(言可隱之節也. 費猶佹也, 道不費則仕.)”고 하였고,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서는 “군자는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서 도덕이 어그러지면 숨어 살며 벼슬을 하지 않고, 만약 도가 어그러지지 않으면 마땅히 벼슬을 한다.(言君子之人, 遭値亂世, 道德違費, 則隱而不仕. 若道之不費, 則當仕也.)”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