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징월대사시집(澄月大師詩集) / 澄月上人詩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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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월대사시집澄月大師詩集
징월 정훈澄月正訓
징월상인시집서문(澄月上人詩集序)
옛날부터 불씨佛氏를 배우는 사람은 진실로 기굴요확奇崛寥廓(우뚝하고 넓고 맑음)한 무리가 많아 외형을 버리고 높이 나아가서 자취를 감추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을 완전하게 끊지는 않아서 때때로 어진 사대부를 따라 서로 어울려 노닐면서 그 도를 보존하고 그 학설에 의지하고자 하였으니, 지둔支遁1)ㆍ혜원惠遠2)ㆍ탕휴湯休3)ㆍ문창文暢4)ㆍ참료자參寥子5)ㆍ혜근慧勤6) 같은 뛰어난 무리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유풍流風은 동방에서 더욱 성대하였고, 그중에서도 영남이 가장 으뜸이었다.
경진년(1820, 순조 20) 여름에 몇몇 선비와 함께 배를 타고 삼강三江7)을 거슬러 오르는데 한 스님이 표연飄然히 모래 위에 서서 사공을 부르며 태워 주기를 요구하였다. 기이하게 여겨 물어보니 바로 서산西山의 종도宗徒인 징월澄月 스님이었다. 대사는 일찍이 시를 잘 쓰기로 어진 사대부들에게 소문나고, 또 사대부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는 자였다. 이번 행각에서는 장차 기달산怾怛山(금강산)을 밟아 동해 바다를 굽어보고 한없는 들판에 소리를 기탁하고자 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른바 기굴요확한 자가 아니겠는가.
수년이 지나서 내가 외직으로 나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낼 적에 석장을 날려 나에게 한번 들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문도가 스님의 입적을 알리고는 남기신 말씀과 글들을 수습하고 출판하기를 발원하였다. 미처 편집되지 못한 (선과 교에 관한) 여러 가지 말씀과 계율과 논을 약간밖에 모으지 못해 비록 매우 적요하긴 했지만 가릉伽陵8)의 한 깃털과 같고 보리수의 한 가지와 같아 또한 안목을 갖춘 자의 보배가 되기에 충분하니 어찌 솥의 고기 한 조각에 그칠 뿐이겠는가.
아, 스님의 상족上足(뛰어난 제자) 여러 분이 광남廣南의 유진留鎭으로 나를 방문하여 한마디 서문을 부탁하기에 이를 써서 증거한다.
기축년(1829, 순조 29) 중하仲夏에 희곡산인希谷散人9)이 쓰다.

010_0486_a_01L[澄月大師詩集]

010_0486_a_02L澄月上人詩集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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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之學佛氏人固多奇崛寥廓之流
010_0486_a_05L隳形而高邁匿跡而不返然而亦未甞
010_0486_a_06L全絕于世以故徃徃從賢士大夫
010_0486_a_07L相翺翔馳逐欲存其道憑其說如遁
010_0486_a_08L遠休暢叅慧之傑然者指不可勝屈
010_0486_a_09L風彌盛於東而東之嶺尤最焉庚辰夏
010_0486_a_10L同數名勝舟溯于三江之干有一衲
010_0486_a_11L飄然沙立招長年求載異而扣之乃西
010_0486_a_12L山之宗澄月師也曾善詩聞於賢士大
010_0486_a_13L而又喜與賢士大夫遊是行也
010_0486_a_14L躡怾怛臨溟渤寄聲於無極之野
010_0486_a_15L所謂奇崛寥廓者耶粤數䄵余出而按
010_0486_a_16L嶺時後飛錫一過無幾其徒告趺化
010_0486_a_17L而拾遺唾掇零墨發願鋟榟未及成
010_0486_a_18L難歧貳戒槖發論如干裒集雖甚寂
010_0486_a_19L伽陵之片羽菩提之一枝亦足備
010_0486_a_20L具眼之寶玩奚止鼎臠而已乎哉
010_0486_a_21L師之上足數輩爲訪于廣南留鎭乞一
010_0486_a_22L言弁卷聊書此以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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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仲夏希谷散人題

010_0486_a_24L{底}壬辰(純祖三十二年)刊本(誠庵文庫所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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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지둔支遁(314~366) : 중국 동진東晋 스님으로 자는 도림道林, 속성은 민閔씨다. 25세에 출가하여 명사들과 사귀었고, 승려들을 가르치며 여러 논을 지었다. 동진 애제哀帝가 즉위하자 동안사에 가서 『道行般若經』을 강의하였고, 태화 1년 오산塢山에서 53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저서로 『卽心遊玄論』ㆍ『聖不辨知論』 등이 있다.
  2. 2)혜원惠遠(335~417) : 중국 동진 때 스님으로 안문雁門 누번樓煩 사람이다. 13세에 육경을 연구하고 특히 노장학에 정통하였으며, 21세에 도안道安을 찾아가 수행정진하였다. 373년(전진 건원 9) 부비苻丕가 양양襄陽을 공격하여 도안을 데려가자 제자 수십 명과 함께 남쪽 형주로 가서 여산廬山에 동림사東林寺를 창건하였다. 이후 30년 동안 여산에서 지내며 번역과 저술에 전념하였으며, 또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해 당대의 명사들과 교유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3. 3)탕휴湯休 : 남조南朝 송宋의 승려 혜휴惠休를 말한다. 시문에 능하여 세조世祖로부터 환속하라는 명을 받고 탕湯이라는 속성을 하사받았다.
  4. 4)문창文暢 : 당唐나라의 스님으로 한유韓愈와 교유하였다.
  5. 5)참료자參寥子 : 송宋나라의 스님으로 시문에 뛰어났고 소동파蘇東坡 등과 교유하였다.
  6. 6)혜근慧勤 : 북송北宋 때의 스님으로 시문에 능하였고 구양수歐陽修ㆍ소동파 등과 교유하였다.
  7. 7)삼강三江 : 조선 시대 물산이 모여들던 한강의 세 나루터, 즉 한남동의 한강漢江, 용산ㆍ원효의 용산강龍山江, 마포의 서강西江을 말한다.
  8. 8)가릉伽陵 : ⓢ kalavika, ⓟ karavīka의 음역이다. 가라빈가歌羅頻伽ㆍ갈라빈가羯羅頻迦ㆍ가릉비가迦陵毘伽로도 음역하며, 줄여서 가릉빈迦陵頻ㆍ가루빈迦累賓ㆍ가릉迦陵ㆍ갈비羯脾ㆍ빈가頻迦라고도 하며, 호성好聲으로 의역하기도 한다. 깃이 아름답고 소리가 맑은 인도의 새다. 상반신은 사람, 하반신은 새로 표현되기도 한다.
  9. 9)희곡산인希谷散人 : 조선 후기 문신인 이지연李止淵(1777~1841)의 호다. 자는 경진景進이고 세종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여璵의 후손으로 공조참의 의열義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판중추부사 홍억洪憶의 딸이다. 1805년(순조 5)에 진사가 되고,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과 예조참판을 거쳐 1823년에 공시당상貢市堂上ㆍ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827년 이후 한성 판윤ㆍ평시서 제조平市署提調ㆍ예조판서ㆍ광주 유수 등을 역임하였다. 1834년에는 호조판서, 1837년에는 우의정을 역임하였다. 1840년에는 대사간 이재학李在鶴, 대사헌 이의준李義準 등에 의해 탄핵되어 함경북도 명천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希谷遺稿』가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1. 1){底}壬辰(純祖三十二年)刊本(誠庵文庫所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