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전서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 記楓溪禪師賢正漂海錄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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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총목차總目次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서문
일본표해록日本漂海錄
풍계 선사楓溪禪師 현정賢正의 표해록漂海錄에 서문을 쓰다1)
나는 불교를 알지 못하고 불교의 계율을 지키지도 않는다. 그러나 간혹 선禪을 높이고 석가를 노래하는 자로서 문장을 말하고 이치를 논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와 더불어 글 읽고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며, 혹은 계를 지키고 수행하는 자로서 세속의 인연을 끊고 무리를 떠난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찬탄하기를 즐겨 하였다.
내가 찬탄하고 마음속에 기억하는 자로서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간성杆城2)의 건봉사乾鳳寺 복인福仁 선사의 만일재萬日齋3)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호남의 풍계楓溪 선사의 천석불千石佛이다. 이들은 모두 내가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 특별한 행적과 저서 때문에 기억한다.
나는 계해년(1863년) 봄에 화순현和順縣의 집에서 취양就養4)하고 있었다. 하루는 능주綾州5) 개천사開天寺 인월印月 선사 의관義寬이 소매에서 책 한 권을 꺼내며 말하기를 “이 책은 법명이 현정賢正으로서 돌아가신 스승이신 풍계楓溪 대사의 표해록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받아서 끝까지 읽었다.
대사는 가경嘉慶 정축년(1817년) 가을에 해남 대둔사 완호翫虎 대사 윤우尹佑6)와 함께 경주 불석산佛石山7)에 가서 옥석을 쪼아 1천 개의 불상을 조성하였다. 5개월 걸려 공사를 마치고 11월에 두 대의 배에 나누어 운반하였다. 큰 배에는 760여 좌의 불상을 싣고, 작은 배에는 230여 좌의 불상을 실었다. 대사는 그 무리 10여 명과 함께 큰 배를 타고 갔다. 그런데 다음날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었고, 5~6일 밤낮을 가서 처음에 정박한 곳이 일본의 축전국(筑前國, 치쿠젠노쿠니) 대도포(大島浦, 오시마우라)였다. 일본인들은 평소에 조선을 흠모하고 있었고, 또 불교를 숭상하였으므로 가는 진津마다 호송해 주었다. 정월에 장기도(長崎島, 나가사키)에 이르렀다. 장기長崎에는 당인관唐人館이 있었는데 중국 상인들이 거주하며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었다. 또 조선관朝鮮館이 있었는데 표류선의 선원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또 아란관阿蘭館이 있었는데 아란阿蘭8)의 수자리 하는 사람(戍人)9)들이 와서 기거하는 곳이었다. 전례前例대로 조선관에 3개월 동안 머물렀다.

010_0710_a_01L日本漂海錄

010_0710_a_02L1)記楓溪禪師賢正漂海錄2) [1]

010_0710_a_03L
010_0710_a_04L
余不解釋敎不持釋戒然或遇高禪韻
010_0710_a_05L談文論理亦喜與之唔語或聞戒
010_0710_a_06L行修業絕俗離羣亦樂爲之讃歎
010_0710_a_07L所讃嘆而記之以藏者有二人焉一杆
010_0710_a_08L城乾鳳寺福仁禪師萬日齋一湖南楓
010_0710_a_09L溪禪師千石佛也皆余未見而以其卓
010_0710_a_10L異而特著故記之

010_0710_a_11L
余於癸亥春就養于和順縣齋一日有
010_0710_a_12L綾州開天寺印月禪師義寛袖一册來
010_0710_a_13L此先師楓溪大師法名賢正漂海錄
010_0710_a_14L余受而卒卷大師以嘉慶丁丑秋
010_0710_a_15L與海南大芚寺翫虎大師尹佑入慶州
010_0710_a_16L佛石山琢玉石造千佛歷五月工就
010_0710_a_17L十一月以二船分運大者載七百六十
010_0710_a_18L餘坐小者載二百三十餘坐師與其徒
010_0710_a_19L十餘人登大船行翌日風漂五六晝
010_0710_a_20L始泊于日本之筑前國大島浦日本
010_0710_a_21L人素慕朝鮮又奉佛敎津次護送
010_0710_a_22L月至長崎島島有唐人館商賈所住接
010_0710_a_23L有朝鮮館漂船所依止也有阿蘭
010_0710_a_24L戍人所來寓也留朝鮮舘三朔例也

010_0710_b_01L5월에 대마도(對馬島, 쓰시마)에 이르러 또 전례에 따라 45일을 머물렀다. 6월에 동래를 향하여 출발하였는데, 수백 리를 가다가 또 바람에 표류하여 가덕도加德島에 이르렀다. 다행히 그곳은 우리나라 지방이어서 순풍을 기다렸다가 7월 14일에 해남에 와서 정박하였다. 집안사람들과 절의 승려들은 마치 죽었던 사람이 다시 돌아온 듯이 맞이하였다. 작은 배의 석불은 이미 도착하여 봉안하였는데, 이제 마침내 모두 봉안하게 되어 별도로 ‘천불전’이라 부르게 되었다.
무릇 풍랑과 암초는 지상에 있는 것 중에 매우 위험한 것이거늘 다행히 어려움을 면하였고, 또 때로는 신령스럽고 기이한 자취가 있었으니, 함께 간 사람들이 부처님의 가피력이라고 그 아름다움을 칭송하였다. 이 책은 풍계 대사가 지나간 진津과 도島의 접대하는 자들에게 변방 마을의 풍속과 물산, 거처와 의식衣食 등을 자세히 캐묻고 보고 들은 것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한 것이다. 대사가 함께 배를 탄 수십 인과 더불어 몸의 온전함을 얻고 나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에 지난 일을 회상하여 이역異域의 기이한 광경을 이 책에 다시 펼쳐 놓았으니 ‘그 날의 일을 누워서 즐긴다(他日之臥遊)’고 할 만하다.
나는 정유년(1837년) 가을에 동복同福10)의 감사監司11)로서 대둔사를 유람하다가 만학천봉萬壑千峰의 산에 차나무가 숲을 이루고 불우佛宇가 굉장히 큰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자세히 사찰을 돌아보지 못하고 곧장 북미륵암에 갔기 때문에 천불전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였다. 그때 나는 다만 대중들을 순찰하고 있었고, 사찰 승려들도 나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줄 여가가 없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아쉽기만 하다. 무릇 불가佛家에서는 수리하고 조성造成하는 것으로써 공업功業을 삼는데 오백나한의 조성을 가장 성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지금은 옥석으로 불상을 만들었고 게다가 그 수도 두 배가 되니 어쩌면 그렇게 성대한가! 이렇게 해남 대둔사에 천불전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가상하게 여겨 요약하여 기록하였다. 또 인월 선사가 나와 숙질叔姪 관계인 능주綾州 이李 목사牧使의 시 몇 편을 보여 주며 나에게도 글을 지어 줄 것을 청하였다. 나는 늙고 병들어 시를 제대로 지을 수 없기에 이전에 써 놓은 것을 주었다. 그런데 인월 선사가 또 그 시에서 복인 선사에 관한 내용을 보고서 그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였기 때문에

010_0710_b_01L五月到對馬島又以例留四十五日
010_0710_b_02L月發向東萊行數百里又風漂至加
010_0710_b_03L德島幸亦本國地方候風至七月
010_0710_b_04L十四日來泊海南居人與寺僧若重
010_0710_b_05L逢泉下人小船石佛前已來泊奉安
010_0710_b_06L遂以並奉別稱千佛殿云凡風濤石礁
010_0710_b_07L驚險危難之地幸免偶脫亦或有靈異
010_0710_b_08L之跡宜行中人頌美以佛力也其所
010_0710_b_09L歷津島盤問接侍關防㕓里風俗物產
010_0710_b_10L居處衣食之類聞見所及歷歷備記
010_0710_b_11L師與同舟數十餘人旣獲俱全悸之喘
010_0710_b_12L止之後回想過刼還是異域之奇觀
010_0710_b_13L重展此卷可爲他日之臥遊也余於丁
010_0710_b_14L酉秋同福以監遊大芚寺見萬壑千峯
010_0710_b_15L山茶成林佛宇宏廣未得歷遍惟尋
010_0710_b_16L北彌勒未聞千佛殿時但巡部衆會
010_0710_b_17L寺僧亦未暇歷指遍示也今思之
010_0710_b_18L悵然夫釋家以修造爲功業五百羅漢
010_0710_b_19L稱爲最盛今玉石成佛數又倍之
010_0710_b_20L其盛歟此左海寺刹所剏有也聞而壯
010_0710_b_21L撮以記之印禪又示余以綾州李
010_0710_b_22L牧使叔姪前後題詩請余亦有一文字
010_0710_b_23L余老病未能也仍以前所記置者
010_0710_b_24L印月又見此中福仁禪師事請得

010_0710_c_01L또 오래 전에 써 두었던 것을 주었다.
무자년(1828년) 여름에 나는 관동의 포정사布政司12)에 갔는데, 어떤 늙은 승려가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였다. 사촌 형인 순찰사 경산經山 상공相公13)이 소개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간성 건봉사 승려 석민錫旻일세. 그 무리 중에 복인福仁이라는 승려가 있는데 정성이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훌륭하다네. 경신년(1800년)에 임금께서 등극하실 때14)에 절의 승려들이 서로 말하기를 ‘성상께서는 어린 나이에 어버이를 잃고 단신이 되셨으니 우리가 만일재萬日齋로써 성상의 만수무강을 축원합시다’라고 하며 복인을 주지로 삼고 아침저녁으로 경을 읽으며 산문 밖으로 나가지 않은 지 30년이라네. 석민이 산문을 출입하며 모연募緣하여 만일재의 공양을 돕고 있어서 하나같이 모두 칭찬한다네.”라고 하였다. 나는 그를 오게 하여 2만 전錢을 주며 “그대를 도움으로써 이러한 공업을 이루고자 하니, 내 이를 위해 옷깃을 여미고 찬탄하겠소.”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그에 대해 자세하게 묻자 석민이 말하기를 “복인 스님은 지금 85세이지만 아직 정정하시어(矍鑠)15) 병이 없고, 모범이 되지만 문식文飾이 적으며, 계를 지킴이 매우 엄격하고, 북과 경쇠를 두드리며 고성으로 염불을 하는데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발원을 한 때로부터 지금 9천 700여 일이 되어 마침내 내년 3월 며칠에 기약한 날을 다 채웁니다.”라고 하였다. 다음해 봄에 들으니, 복인 선사의 공덕이 원만하게 끝났다고 한다.16) 도성의 선비들 중에 어떤 이는 벌써 산에 가서 직접 보고 온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근처 사람에게 전해 들어 귀에 익숙한 자도 있었는데, 모두 그의 정성이 한결같음을 찬탄하고 또 그의 공덕이 원만함을 다행으로 여겼다. 어떤 이는 “제왕가帝王家가 국가를 영원토록 향유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정성을 다하고 하늘에 기도하는 데에 달려 있으니, 어찌 부처의 힘에 의지하겠는가?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의 도로써 국가에 충성을 기원한 자이니, 그가 행한 지극정성은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하게 하여 충애忠愛의 정성을 일으키도록 권면하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010_0710_c_01L其祥故又以舊所記留者 贈之

010_0710_c_02L子夏余遊關東之布政司有老衲
010_0710_c_03L拜于前巡察使從兄經山相公指示曰
010_0710_c_04L此扞城乾鳳寺僧錫旻也其徒有福仁
010_0710_c_05L誠力絕異歲庚申聖上嗣位寺僧
010_0710_c_06L相與語曰聖上冲年孤單吾徒請以萬
010_0710_c_07L日齋以祝萬壽相福仁爲住持晨夕
010_0710_c_08L誦經足不出山門者三十年旻出入
010_0710_c_09L募緣以助齋供一路共稱吾使之來
010_0710_c_10L以錢二萬畀之曰以資汝成就此功
010_0710_c_11L業也余爲之歛衽稱嘆伋問其詳
010_0710_c_12L仁師今八十五歲猶矍鑠無病模而
010_0710_c_13L少文持戒甚嚴敲磬念誦3) [2] 宵靡懈
010_0710_c_14L今九千七百餘日旣發此願庶遂此願
010_0710_c_15L明年三月幾日爲滿萬之期也翌年春
010_0710_c_16L聞師功德果圓都下人士或曾有山行
010_0710_c_17L目覩者或近有傳聞耳熟者咸歎其誠
010_0710_c_18L力之壹而又幸其功德之圓也或曰
010_0710_c_19L王家享國永年在諴民祈天何藉於佛
010_0710_c_20L然是盖以其道願忠於國者也
010_0710_c_21L至誠所就亦有以使人感歎而勸起人
010_0710_c_22L{底}壬午(純祖二十三年)騰書本(松廣寺圖書
010_0710_c_23L館所藏)
「序」一字編者補入「書」疑
010_0710_c_24L「晝」{編}

010_0711_a_01L또 어떤 이는 “불씨佛氏에는 인과因果의 설이 있는데 진실하니, 복인 선사는 다음 생에 충효로 세상에 이름난 사람이 될 것이다.”라 하였고, 어떤 이는 시문詩文을 지어 찬탄하기도 하였다. 나도 기록하여 마음에 간직한다.
계해년(1863년) 8월(仲秋)에 수암 산인睡菴散人17)이 오성烏城18) 금소당琴嘯堂에서 쓰다


010_0711_a_01L忠愛之誠者矣或曰佛氏有因果之說
010_0711_a_02L苟然矣仁師其來生忠孝名世之人乎
010_0711_a_03L或爲詩文以賛歎之余亦記以藏之
010_0711_a_04L癸亥仲秋日睡菴散人書于烏城琴
010_0711_a_05L嘯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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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서문은 『한국불교전서』와 송광사 소장본에는 실려 있으나 『고고미술』 통권 42호에 실려 있는 영남대 소장본에는 없다.
  2. 2)간성杆城 : 강원도 고성 지역의 옛 지명. 1389년(공양왕 1년)에 간성·고성高城 두 군으로 분리된 이래, 조선시대에는 거의 변동이 없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성군을 합쳐 새로운 간성군이 되었고, 1919년 고성군으로 개칭되었다.
  3. 3)만일재萬日齋 : 만일염불결사와 같은 말이다. 만일염불결사는 만일 동안 염불할 것을 기약하고 여러 사람들이 결사하는 것이다.
  4. 4)취양就養 : 관리가 부모의 고령으로 일시 사직하고 고향에서 부모를 봉양하는 것을 말한다.
  5. 5)능주綾州 : 현 화순 지역의 옛 지명. 조선 후기에는 능주목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순군에 병합되었다.
  6. 6)윤우尹佑(倫佑) : 1758(영조 34년)∼1826년(순조 26년). 대둔사大芚寺 13대 강사講師 중 10번째 스님이다. 성은 김씨, 자는 삼여三如, 호는 완호玩虎이다. 13세에 두륜산頭輪山 대둔사로 출가하였고, 17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백련白蓮 대사 밑에서 불경을 배워 의발衣鉢을 전수받았다. 1811년(순조 11년) 2월 24일 대둔사에 불이 나서 전각 세 채만 남기고 모두 소실되자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여러 전각을 중건하였다. 스님은 나이 69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스님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는 『대둔사지大芚寺誌』, 『동사열전東師列傳』,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등이 있다.
  7. 7)불석산佛石山 : 불석산의 위치는 불분명하다. 그런데 「대둔사완호대사비명大芚寺玩虎大師碑銘」(『대둔사지』)에서는 “기림사에서 천불상을 완성하였다.(成千佛像祇林寺)”라고 하였고, 오세창(吳世昌, 1864~1953년)이 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석풍계釋楓溪 항목에서는 “천불을 경주 석굴암에서 조상하였다.(千佛造像作於慶州石窟庵)”라고 하였으므로 불석산은 기림사와 석굴암 근처에 있는 산으로 추정된다.
  8. 8)아란阿蘭 : 네덜란드를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 기록에는 아란타阿蘭陀 혹은 화란和蘭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현종 7년(1666년)에 처음 아란타阿蘭陀가 등장하는데, 『현종실록』에는 제주도에 표류했던 하멜 일행이 일본으로 도망간 사건을 계기로 왜와 서신을 주고받았음을 기록하면서 아란타가 일본의 속군屬郡으로 공물貢物을 바친다고 하였다.
  9. 9)수자리 하는 사람(戍人) : 원래 수자리라는 말은 국경을 지키는 일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수자리 하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10. 10)동복同福 : 현 화순 지역의 옛 지명. 조선 후기에는 동복현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화순군에 병합되었다.
  11. 11)감사監司 : 조선시대 각 도에 파견된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인 관찰사觀察使를 말한다. 관찰사의 주된 업무는 임금을 대신하는 지방 장관으로서 도내의 군사와 행정을 지휘 통제하는 것이다. 또한 수령을 지휘·감독하면서 그들의 근무 성적을 평가하여 조정에 보고하는 권한이 주어졌다.
  12. 12)포정사布政司 : 감영監營과 같은 의미이다.
  13. 13)경산經山 상공相公 : 성명은 정원용(鄭元容, 1783∼1873년)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선지善之, 호는 경산經山이다. 1802년(순조 2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가주서를 거쳐 예문관 검열·홍문관 부응교·이조 참의·대사간 등을 지냈다. 1821년 서북 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져 10여 만 명의 사망자를 내는 등 민심이 흉흉하게 되자 관서 위유사關西慰諭使가 되어 이를 진정시켰다. 이어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내다가 1831년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의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1837년(헌종 3년) 예조 판서에 오르고, 이어 이조 판서·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가 1848년 영의정이 되었다. 1863년 철종이 죽자, 원상院相이 되어 고종이 즉위하기까지 국정을 관장하였다. 저서로 『경산집經山集』 40권, 『황각장주黃閣章奏』 21권, 『북정록北征錄』 10권, 『수향편袖香編』 3권, 『문헌촬요文獻撮要』 5권 등이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4. 14)순조의 등극을 말한다.
  15. 15)확삭矍鑠 : 늙어서도 기력이 왕성하고 몸이 재다는 의미이다.
  16. 16)건봉사 만일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문헌으로는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事蹟』에 실려 있는 「신창만일회사적일기新創萬日會事蹟日記」와 「만일원중수기萬日院重修記」 등이 있다. 「신창만일회사적일기」는 건봉사 만일회의 발생 동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만일회를 주도한 사람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만일원중수기」는 1822년에 석민碩旻이 만일원을 중수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건봉사 만일회는 1802년(순조 2년)에 용허 석민聳虛碩旻이 개설하였던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본 글의 서문에서 복인福仁이 발원하여 만일회가 성립되었다고 하였으므로 건봉사 만일회의 주도자가 복인福仁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본 글에 등장하는 석민錫旻은 「만일원중수기」의 석민碩旻과 동일인물로 여겨지며 만일회의 경영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본 글에서 만일회가 완료된 시점을 1829년 3월이라고 하였으므로 만일회의 개설 시기도 1801년(순조 1년)으로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17. 17)수암 산인睡菴散人 : 정원용鄭元容의 사촌 동생으로서 성명은 정윤용(鄭允容, 1792~1865년)이다. 자는 경집景執이고, 호는 수암睡庵이다. 1819년(순조 19년) 성균관에 입학했다. 1829년 종형從兄인 정원용이 회령 부사로 나갔을 때 따라갔다가 함경도 일대를 돌아보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함경도 관방關防에 관한 사적을 모아 『북로기략北路記略』을 지었다. 1831년 의릉 참봉이 되었으며, 공조 참의·밀양 부사·공주 판관 등을 지냈다. 경사經史에 밝아 많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 『수암만록睡庵漫錄』, 『사문편思問編』, 『종선록從先錄』, 『동래가록고東萊家錄稿』, 『가학편家學編』, 『심의고증深衣攷證』, 『자류주석字類註釋』 등이 있다.
  18. 18)오성烏城 : 전라도 화순의 별칭이다.
  1. 1){底}壬午(純祖二十三年)騰書本(松廣寺圖書館所藏)。
  2. 2)「序」一字。編者補入。
  3. 3)「書」疑「晝」{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