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彌勒菩薩所問經論卷第九

ABC_IT_K0551_T_009
015_0174_c_01L미륵보살소문경론 제9권
015_0174_c_01L彌勒菩薩所問經論卷第九


후위 보리류지 한역
015_0174_c_02L後魏天竺三藏菩提流支譯



【문】지어감[行]은 이름과 물질[名色]의 두 가지 원인으로써의 의식[識]에 반연된다고 거듭하여 말하는데, 여기에 어떠한 훌륭한 것이 있는가?
015_0174_c_03L問曰行以名色二因緣識而重說者此有何勝
【답】처음 태 안에 의탁한 의식은 지어감이 인연이 되어 그것이 종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며, 이미 종자를 심었으므로 이름과 물질이 인연이 되어 화합하여 일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며, 두 가지 인연은 머물러 지니고 성취하며 의지하여 경계를 쫓아 자세히 살필 수 있기 때문이다.
015_0174_c_05L答曰初託胎識行爲因緣以彼能作種子義故已種種子名色爲因緣以能和合成就事故以二因緣住持成就依止能取境界觀故
또 지어감의 인연을 업이라 이름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업의 원인[因]은 날 수 있는 원인이 되느니라”고 하셨다. 이름과 물질의 인연으로 욕망[愛]이라 이름할 수 있나니,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저 욕망의 연(緣)은 날 수 있는 연이 되느니라”고 하셨으므로, 두 가지 인연은 경계 중에서 경계에 의하여 머무른다.
015_0174_c_08L行因緣而業得名是故經中說諸業因爲能生因名色因緣而愛得名故經中說彼愛緣爲能生緣以二因緣於境界中依境界住
또, 지어감의 인연은 처음 날 적의 마음이라 할 수 있고, 이름과 물질의 인연은 이미 났으며, 여섯 가지 감관[六入]은 아직 성취되지 못했지만 여섯 가지 감관이라 하게 된다.
또, 지어감의 인연은 1문(門)에 의한 행이니, 이는 무슨 뜻인가? 저 지어감의 인연은 오직 의문(意門)만의 행이다.
015_0174_c_12L又行因緣初生心得名名色因緣已生六入未成就六入得名又行因緣依一門行以何義彼行因緣唯意門行
이름과 물질의 인연은 2문에 의한 행이니, 이는 무슨 뜻인가? 이름과 물질은 몸의 감관[身根]과 뜻의 감관[意根]의 2문에 의한 행이므로, 두 가지 인연은 6문(門)에 의한 행이다.
015_0174_c_15L名色因緣依二門行此以何義名色依於身根意根二門而行以二因緣依六門
또, 지어감의 인연은 오직 나쁜 갈래 중에서만 죄업에 의하여 껴잡아 머무를 수 있기 때문이니,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저 중생들이 나쁜 갈래 중에서는 나쁜 업이 다하기 전에는 죽지 않으며, 업이 다하여야 비로소 죽느니라”고 하신 것과 같은 이러한 것이다.
015_0174_c_18L又行因緣唯惡道中以依罪業能攝住故如經中說彼諸衆生於惡道中乃至惡業未盡不死業盡乃死
이름과 물질의 인연은 사람과 하늘 길인 욕심세계와 형상세계 중에서이니, 그곳에 이름과 물질의 두 가지 일이 있고 무형세계 중에는 두 가지 인연이 없다.
015_0174_c_20L是等名色因緣人及天道欲色界中以彼處有名色二事無色界中無二因緣
015_0175_a_01L【문】여래께서는 저『성유경(城喩經)』과 대인연(大因緣) 등의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이름과 물질의 원인에 의하여 의식에 반연하느니라”고 하셨거늘, 무엇 때문에 이 수다라에서는 “의식의 원인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에 반연된다”고 하셨는가?
015_0175_a_01L問曰如來於彼『城喩經』中『大因緣』等修多羅中說依名色因緣於識何故於此修多羅中而說依識因緣名色
【답】이름과 물질의 인연은 의식에 의하여 존재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실로 의식이 있는 것은 이름과 물질이 의식과 함께 갈마들며 서로가 원인이 되며 의식의 존재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의 존재가 있다. 마치 의지할 것에 의지하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의지함이 있다.
015_0175_a_04L答曰名色因緣依識而有此以何義以實有識名色與識迭共相因而依識有有名色有如依所依是故有依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왕과 신하가 갈마들며 서로 의지하지만 왕이 더 훌륭하므로 왕이 떠나가면 신하도 따라 떠나가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의식은 이름과 물질이 함께 서로 갈마들며 의지하지만 의식이 더 훌륭하므로 그 때문에 의식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이 있다.
015_0175_a_07L此以何義如王及臣迭共相依而王爲勝以王去時臣亦隨去此亦如是識與名色迭共相依而識爲勝是故依識而有名色
만약 의식의 인연이 어머니의 태 안에 의탁하지 아니하면 모든 딸린 마음[心數]의 법은 곧 있을 수가 없으며, 의식이 태 안에 의탁하므로 모든 딸린 마음의 법이 모두 역시 따르게 된다. 또, 근본의 마음으로 인하여 가라라(歌羅邏)7)가 형성되니, 붉고 흰 것 따위가 화합하여 곧 가라라를 이룰 수 있고 중생을 이루게 되므로 그곳에는 의식의 마음이 근본 원인이 된다.
015_0175_a_11L若識因緣不託母胎諸心數法則不得有以識託胎諸心數法皆亦隨從又因根本心成歌羅以赤白等和合則能成歌羅邏成衆生彼處識心爲根本因
마치 대인연법문(大因緣法門) 중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 저 의식의 마음이 어머니 태 안에 의탁하지 않으면, 저 가라라와 이름과 물질 등이 역시 성취되지 않느니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의식은 모든 고통의 종자가 되는 근본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의식은 이름과 물질에 반연한다고만 말하고, 이름과 물질의 원인은 의식에 반연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015_0175_a_15L如大因緣法門中說佛告阿難若彼識心不託母胎彼歌羅邏及名色等亦不成是故識爲諸苦種子爲欲示現根本義故是故唯說識緣名色不說名色因緣於識
【문】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12인연은 시절에 있다고 하였으니, 그 사람은 의식의 원인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에 반연한다는 이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인연이 없기 때문이다.
015_0175_a_20L問曰有人說言十二因緣有於時節彼人依識因緣名色義則不成何以無因緣故
015_0175_b_01L 이는 무슨 뜻인가 하면 의식이 없어지게 된 연후에 이름과 물질의 인연을 지을 수 있고 의식이 없어지지 않게 되어도 인연을 지을 수 있으므로, 만약 의식이 없어진 뒤에 이름과 물질의 인연을 짓는다면 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러한가? 없어지게 된 종자로써는 싹이 나는 인연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015_0175_a_23L此以何義爲識滅已然後能作名色因緣爲識不滅能作因若識滅已作名色因緣此義不成何以故以滅種子不能與芽作生因緣故
또 다시, 허물이 있다. 중간이 끊어진 중생의 몸이기 때문이다. 만약 의식이 없어지지 않고 이름과 물질에게 인연을 지어줄 수 있다면, 한 중생의 한 생각 동안에 나란히 두 개의 의식이 있으리라. 이런 이치 때문에 의식은 이름과 물질의 인연을 지을 수 없다.
015_0175_b_04L又復有過中閒斷絕衆生體故若識不滅能與名色作因緣者一衆生身於一念中竝有二識以是義故識不能作名色因緣
【답】서로가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는 인연은 마치 등잔의 불꽃이 서로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불꽃이 서로 이어져서 끊어지지 않으면 켜져 있을 수 있고 먼저의 불꽃이 꺼졌으면 뒤의 불꽃이 켜져 있지 않는 것과 같다. 만약 먼저의 불꽃이 꺼졌는데 불꽃이 살아있다고 하면, 이는 곧 꺼진 뒤에 다시 켰으리라.
015_0175_b_08L答曰相續不斷不絕因緣如燈焰體相續不斷此以何義如焰相續不斷不絕而能有用非先焰滅而後焰生若先焰滅後焰生者是則滅已後時更生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뒤의 불꽃이 켜져 있을 적에는 원인이 없이 켜져 있으리라.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만약 원인 없이도 켜졌다면 으레 언제나 켜졌어야 한다. 역시 이는 먼저 켰던 불꽃이 머무른 것이며, 뒤에 따른 불꽃이 켜진 것이 아니다. 만약 먼저의 불꽃이 머물러 있는데 뒤의 불꽃을 켠다고 하면, 먼저의 불꽃은 곧 둘째의 생각에서 머물러야 하지만 부처님 법 중에서는 이러한 이치가 없다.
015_0175_b_12L又復有過後焰生時無因而生又復有過若無因生則應常生又亦非是先生焰住後餘焰生若先焰住後焰生者先焰便應第二念住而佛法中無如是義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먼저 켜진 불꽃이 원인이 없이 켜진다.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불꽃은 으레 더욱 자라나야 하리라.
또 다시 허물이 있다. 으레 많은 불꽃이 켜져 있어야 하리라. 역시 먼저의 불꽃이 있을 때에 다시 다른 불꽃을 켠 것이 아니리라. 왜 그런가 하면, 용납하여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015_0175_b_16L又復有過先生之焰無因而生又復有過焰應增長又復有過應多焰生又亦非卽先焰住時更生餘焰何以故容受故
이는 무슨 뜻인가? 먼저 켜진 불꽃을 따라 그대로에 어떤 곳의 어떤 인연으로써 하는가? 곧 그 켜는 곳과 곧 그 인연은 곧 먼저 켜진 불꽃을 즉시 함께 물리치리니, 그 때문에 다른 불꽃과 다른 인연을 용납할 수 있으리라.
015_0175_b_20L此以何義隨先生焰以何等何等因緣卽彼生處卽彼因緣先生焰卽時俱謝是故得容餘焰餘因緣
015_0175_c_01L또 다시 허물이 있다. 앞의 등잔불이 꺼지고 뒤의 등잔불이 켜짐이 불 없는 인연으로부터 켜진 것이 아니리니, 이 이치가 그렇지 않다면 어떠한 심지의 불꽃이 앞뒤에 차례로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면서 켜져 있는가?
015_0175_b_23L又復有過前燈焰滅後燈焰生不從無火因緣而生此義不然何以燈炷焰前後次第不斷不絕相續而
이와 같이 의식과 이름과 물질 등이 차례로 나고 없어짐이 인과를 이루는 줄 알아야 하리니, 이런 이치 때문에 의식의 인연에 의하여 이름과 물질이 날 수 있으며, 인과의 이치가 이루어진다.
015_0175_c_03L如是識名色等次第生滅能成因果應知以是義故依識因緣能生名因果義成
【문】이름과 물질의 인연으로 여섯 가지 감관이 있다 함은 어떠한 원인인가?
【답】그 인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물질의 깨끗한 인연은 다섯 가지 감관[五入]이며, 이름의 깨끗한 인연은 뜻의 감관[意入]이기 때문에 이름과 물질의 인연이 여섯 가지 감관이라고 말한다.
015_0175_c_05L問曰名色因緣有六入者以何等因答曰以彼因故何以故以色淸淨因緣五入以名淸淨因緣意入故說名色因緣六入
【문】만약 이름과 물질이 여섯 가지 감관에 반연한다 하면,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으리라. 왜 그러한가. 비록 저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가라라(歌羅邏) 등일 때에 비록 이름과 물질이 있다 하더라도 여섯 가지 감관 등은 없다. 이런 이치 때문에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015_0175_c_09L問曰若以名色緣六入者此義不成何以故以雖有彼而無彼故此以何歌羅邏等時雖有名色無六入等以是義故此義不成
또, 이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 까닭은 중생에게는 소경과 귀머거리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만약 이름과 물질이 여섯 가지 감관의 원인이 될 수 있다면 소경과 귀머거리인 중생이 있지 않아야 하며, 모두가 다 모든 감관을 두루 갖추어야 하리라.
015_0175_c_13L又復所以此義不成以衆生有盲聾等故此以何義若名色能作六入因者則不應有盲聾衆生一切悉應具足諸根
【답】그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저것을 여의고서 이루어짐이 없는 것은 마치 구름과 비와 같다. 이는 무슨 뜻인가? 그대는 하늘의 비가 만약 구름이 있은 뒤에 내린다고 하면 구름을 떠나서 비가 있다고 하거나 구름이 있는데도 비가 없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섯 가지 감관도 만약 이름과 물질이 있어서 여섯 가지 감관이 있다고 하면 이름과 물질을 떠난다고 하거나 다시 이름과 물질이 있는데도 여섯 가지 감관이 없는 것이 아니리라.
015_0175_c_16L答曰義不然何以故不離彼有成猶如雲此以何義如汝天雨若先有雲後時雨者非離雲雨亦有有雲而無有如是六入若有名色有六入者非離名色復有名色而無六入
015_0176_a_01L【문】무슨 이치 때문에 저 이름과 물질이 있는데도 여섯 가지 감관이 없겠는가?
【답】모든 인연을 두루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안식(眼識)과 같나니, 실제로 눈은 있지만 모든 인연이 두루 갖추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안식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과 같다.
015_0175_c_21L問曰以何義故有彼名色而無六入答曰以諸因緣不具足故此以何義猶如眼識如實有眼以諸因緣不具足故不成眼識
또, 마치 실제로 종자는 있지만 모든 인연이 화합되지 않았기 때문에 싹을 낼 수가 없는 것처럼, 이것도 그러하여 가라라 등일 때에 인연이 두루 갖추지 못하였기 때문에 눈 따위의 모든 감관도 두루 갖추어지지 않는다.
015_0176_a_02L又復猶如實有種子以諸因緣不和合故不能成芽此亦如是歌羅邏等時中因緣不具足故眼等諸入亦不具足
【문】저 모든 인연은 어떻게 두루 갖추어지는가?
【답】번뇌의 업과 이름과 물질이 화합하여 순수하게 완숙되기 때문에 이루어진다.
015_0176_a_05L問曰彼諸因緣云何具足答曰以煩惱業名色和合淳熟故成
【문】어떻게 번뇌 역시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인 줄 알게 되는가?
【답】아라한에게는 다시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아라한은 비록 업은 있다 하더라도 번뇌가 없다. 그러므로 나지 않으며, 나지 않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관이 없다.
그러므로 번뇌 또한 여섯 가지 감관의 먼 원인이며, 업 또한 저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인 줄 알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소경 따위를 이루기 때문이다.
015_0176_a_07L問曰云何得知煩惱亦是六入因緣答曰以阿羅漢不復生故此以何義以阿羅漢雖復有業而無煩惱是故不生以不生故無有六入是故得知煩惱亦是六入遠因業亦是彼六入因緣何以故以成盲等故
그러므로 비록 실제로는 번뇌가 있어서 종류를 따라서 난다 하더라도 여섯 가지의 업을 갖추어 소경과 귀머거리 등이 있나니, 그 때문에 업 또한 여섯 가지 감관의 원인임을 알게 된다.
015_0176_a_13L是故雖復實有煩惱隨種類生具六種業有盲聾等是故知業亦六入因
또, 열두 가지 감관은 가지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감관은 가지가지에서 서로가 같지 않다. 하나의 중생에게 하나의 몸 가운데서도 가지가지여서 같지 않거든, 하물며 갖가지 중생의 몸 안에 모든 업의 같지 않은 것이겠는가? 집[家]과 힘과 빛깔과 목숨이 다 같지 않다.
015_0176_a_15L又以十二入有種種故此以何義以入種種迭共不同但一衆生一身體中種種不何況種種衆生身中諸業不同力色命皆悉不同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의 집ㆍ힘ㆍ빛깔 등은 모두가 차별되며 이는 모두가 업에 의하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저 업도 역시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이며 이름과 물질도 역시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이다.
015_0176_a_19L如是等以諸衆生家力色等一切差別此皆依業以是義故彼業亦是六入因緣名色亦是六入因緣
015_0176_b_01L저 여섯 감관은 종자에 의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비록 다시 번뇌와 업이 있다 하더라도 이름과 물질의 종자는 여섯 가지 감관을 낸다. 이름과 물질을 여의고서 여섯 가지 감관을 낼 수 없다고 함은, 마치 종자를 여의고서 싹을 낼 수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015_0176_a_22L以彼六入依種子故此以何義以雖復有煩惱業等名色種子生於六入不離名色能生六入如不離子而能生芽
그러므로 가까운 원인으로서 이름과 물질은 여섯 가지 감관을 내며 역시 그 업에 의하여 여섯 가지 감관을 낸다 함을 알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비록 저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015_0176_b_02L是故得知近因名色生於六入亦依彼業生於六入何以以雖有彼而無彼故
이는 무슨 뜻인가? 비록 번뇌와 업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이름과 물질이 완전히 성취되지 못함은 마치 가라라일 동안에 눈 등의 감관은 없지만 그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여섯 가지 감관이 성취되는 것과 같다. 마치 처음 씨를 맺어서 끝내는 열매를 이루게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번뇌와 업 등이 이름과 물질로 완숙하여 저 여섯 가지 감관의 인연을 짓게 되는 줄 알 수 있다.
015_0176_b_04L此以何義雖復有煩惱業等而彼名色不具成如歌羅邏等時中無眼等入而依彼故成就六入如始結子終能成果故得知煩惱業等名色淳熟而能作彼六入因緣
【문】그대의 말하는 인연은 오히려 완전하지 못하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중에서 바깥의 인연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오직 소리의 감관을 제외한 이름과 물질 등의 인연이 여섯 가지 감관과 함께 생긴다. 만약 그렇다면, 여섯 가지의 인연만을 말씀했을 뿐이며, 이름과 물질의 인연을 두루 갖추어서 말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바로 허물이다.
015_0176_b_09L問曰汝說因緣猶不具足何以故中不說外因緣故此以何義唯除聲名色等緣共六入生若如是者說六入因緣不具足說名色因緣是過失
【답】그것은 설명할 필요가 없다. 왜 그런가 하면, 두 가지 곳에서 보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저 바깥에서 받아들임은 두 가지 곳에서 보기 때문이니, 중생에 의하여 포섭되는 것과 중생이 아닌 것에 의하여 포섭되는 것이다.
015_0176_b_14L答曰彼不須說何以故以二處見故此以何義以彼外入二處見以依衆生攝依非衆生攝
이는 무슨 뜻인가? 이 안에서는 다만 중생에 의하여 차례로 저 열두 가지 인연을 말한 것이 저 중생이 아닌 것에 의하여 열두 가지 인연을 말한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중생에 의하여 포섭하여 받아들이는 것만을 말하고 중생이 아닌 것에 의하여서는 말하지 않았다. 이런 이치 때문에, 이 중에서는 다만 중생에 의하여 포섭되는 안[內]의 인연을 말했을 뿐이며, 저 바깥의 인연에 의하여 말한 것이 아니다.
015_0176_b_16L此以何此中但依衆生次第說彼十二因而不依彼非衆生說十二因緣故但依衆生所攝入說不依非衆生以是義故此中但依衆生所攝內因緣說而非依彼外因緣說
【문】만약 그렇다면, 이름과 물질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만약 그렇다면 이름과 물질의 갈래 중에서는 이름과 물질을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물질[色]은 두 곳에서 보기 때문이다.
015_0176_b_21L問曰若爾不應說於名色此以何義若如是者名色有支中不應說名色以色二處見故
015_0176_c_01L【답】실은 힐난한 것과 같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만약 저곳에 이름과 물질을 말하지 않고 다만 이름이 여섯 가지 감관에 반연한다고만 말하여 이와 같이 다섯 가지의 물질의 감관을 말하지 않는다면, 저 여섯 가지 감관 중에 물질 또한 깨끗한데 다만 이름과 물질의 감관만이 깨끗한 것이 아니리라.
015_0176_c_01L答曰實如所難雖然若於彼處不說名色但言以名緣六入者如是不說五種色入彼六入中色亦淸淨非但名色入淸淨
이는 무슨 뜻인가? 볼 수 있는 물질 등의 감관의 인연[緣]을 말해야 하리니, 그러므로 그곳에서도 물질이라는 이름을 말한다. 이 때문에 의식의 인연이라는 이름을 말하면서 이름은 뜻의 감관[意人]에 반연한다고 이렇게 한다.
이와 같이 세 가지 때는 분별이 없나니,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이 중에서 말씀하셨으며, 이것을 바른 말씀이라 한다.
015_0176_c_04L此以何應說可見色等入緣是故彼處亦說色名以是故說識因緣名名緣意入如是等如是三時無有分別是故如來於此中說是名正說
【문】무엇 때문에 바깥에서 받아들이는 인연을 말씀하지 않는가?
【답】눈 따위를 설명하면, 이것이 곧 설명이 성립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이 수다라에서 완전히 중생의 몸을 말씀하셨다. 이는 또 무슨 뜻인가? 어떠한 처소에서 눈 따위의 모든 감관을 따르면, 그곳에서는 반드시 물질 따위의 바깥에서 받아들임이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물질 등의 경계를 멀리 여의고서 안식 등이 없기 때문이다.
015_0176_c_08L問曰何故不說外入因緣答曰說眼等者是卽成說此以何義此修多羅中具足成就說衆生體此復何義何等處眼等諸入彼處必有色等外何以故以不遠離色等境界有眼識等
이런 이치 때문에, 눈 등의 감관을 말하면 이미 바깥 물질 등의 받아들임이 포섭되어 있다. 그러므로 따로 바깥에서 받아들임 따위를 말하지 않는다.
또, 안의 감관에 의하여 이름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안의 감관에 의하기 때문에 중생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바깥에서 받아들임에 의한 것이 아니니, 이런 이치 때문에 안의 감관만을 말하고 바깥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말하지 않았다.
015_0176_c_14L以是義故說眼等入則已攝得外色等入是故不別說外入等又以依內入得名字故此以何義依內入故得衆生名非依外入以是義故說內入不說外入
【문】무엇 때문에 닿음이라 하는가?
【답】마주 닿는 것을 닿음이라 한다.
015_0176_c_18L問曰何故名觸答曰對到名觸
【문】그것은 무슨 뜻인가?
【답】생각하는 경계 중에서 의식과 상대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안식(眼識) 등은 그 빛깔 등의 모든 경계 중에서 피차에 상대하나니, 이를 닿음이라 한다.
또 닿음이 있다 함은 가깝게 마주 합쳐서 한 군데에 이르는 것 등이니, 이름은 다르나 뜻은 하나다.
또, 화합하여 의지를 내는 법이기 때문에 닿음이라 한다.
015_0176_c_19L問曰此以何義答曰於念境界中識相對法故以眼識等於彼色等諸境界中彼此相對是名爲觸復有觸者近對和合到一處等名異義一又和合生意地法故名爲觸
015_0177_a_01L【문】닿음의 인연을 설명하였으나 오히려 만족하지 않나니, 세 가지 법이 화합한 인연으로 닿음이 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세 가지 법의 화합이 있고서 닿음이 난다”고,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중에서는 다만 여섯 가지 인연으로 닿음을 낸다고만 말하므로, 그 때문에 이 중에서는 닿음이 나는 인연을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였다. 그것이 바로 허물이다.
015_0177_a_01L問曰說觸因緣猶不滿足以三種法和合因緣而生觸故此以何義以有三法和合生觸佛如是說此中唯說六入因緣而生於觸是故此中不具足說生觸因緣此是過咎
【답】안의 인연을 말하면 바깥 것이 포섭되기 때문이니, 마치 저 북소리와 같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사람과 북과 북채가 합쳐서 소리가 나지만 다만 북 소리라고만 말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세 가지 법도 합쳐서 닿음이 나니, 비록 안에 의지하여 말한다 하더라도 바깥을 포섭하게 된다. 그러므로 허물이 없다.
015_0177_a_06L答曰以說內因緣攝得外故如彼鼓聲此以何如人鼓桴和合生聲唯說鼓聲是三法和合生觸雖依內說而攝得是故無過
또, 같지 않은 이치는 마치 종자와 싹과 같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때[時]와 땅과 물 등이 화합하여 싹을 내는 인연이 있지만 종자가 훌륭한 원인이라 하여 종자는 싹을 낼 수 있다 하고 이 싹은 훌륭한 원인이어서 이것이 바로 벼 싹이다, 이것이 바로 보리의 싹이다 라고만 말하면서 함께 내는 원인은 말하지 않는 것처럼, 닿음 또한 그와 같아서 같지 않은 이치를 지녀서 비록 세 가지의 법의 화합함이 있기 때문에 나지만 오직 안의 감관만을 말하고 함께 내는 원인은 말하지 않는다.
015_0177_a_10L又不同義如種子芽以何義如雖有時及地水等和合能作生芽因緣而說種子名爲勝因能生芽是芽勝因此是稻芽此是麥芽不說共因觸亦如是有不同義有三法和合故生唯說內入不說共
또, 훌륭한 원인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비록 세 가지 일이 화합하여 닿음이 난다 하더라도 근본되는 것에 의하여 나게 되므로 안의 원인을 말하나니, 그것은 훌륭하기 때문이며 근본되는 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의식이 날 수 있다.
015_0177_a_16L又以勝因故此以何義雖有三事和合生觸以依根能生而說內因彼勝故以依根故諸識能生
소경과 귀머거리 등은 의식 등이 없기 때문이며 빛깔 등의 법은 의식의 경계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근본되는 것에 의한 세 가지 법이 화합함으로써 그 법을 낼 수 있다. 비록 세 가지 법으로 난다 하더라도 근본되는 것이 더 훌륭한 것이므로 여래께서는 더 훌륭한 법만을 말씀하셨나니, 마치 여섯 가지 감관을 말씀한 것과 같다.
015_0177_a_18L以盲聾等無識等故以色等法識境界故故依根三法和合能生彼法雖三法生而根是勝是故如來唯說勝法如說六入
015_0177_b_01L또, 비록 여섯 가지 감관을 말한다 하더라도 세 가지 법이 화합하여 닿음이 나는 것을 포섭하게 된다. 감관의 이름을 말하면 곧 여섯 가지 식(識)을 말한 것이니, 그것은 서로가 따르는 것이다. 눈 등의 감관을 말하면 곧 빛깔 등의 받아들임이 포섭되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빛깔 등의 받아들임을 여의고서 눈 등의 감관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마치 여섯 가지 감관을 말씀하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러하다.
015_0177_a_22L又雖說六入而攝得三法和合成觸以說入名卽說六識以彼相以說眼等入卽攝色等入何以故不離色等入有眼等入以是義故說六入此亦如是
【문】여섯 가지 감관은 닿음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015_0177_b_03L問曰六入緣觸此是何因
【답】소경 등의 사람에게는 눈 등의 닿음이 없지만 그 밖의 사람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눈 등의 감관이 있으면 눈 등의 닿음이 있지만 눈 등의 감관을 여의면 눈 등의 닿음이 없나니, 마치 소경인 사람에게는 다만 의식만이 있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여섯 가지 감관은 닿음에 반연한다.
015_0177_b_04L答曰以盲等人無眼等觸餘者有故此以何義以有眼等根有眼等觸離眼等根無眼等觸如盲等人唯有意識此亦如是六入緣觸
【문】닿음은 느낌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즐거움의 느낌[樂受] 등의 경계가 화합하여 즐거움의 느낌 등이 있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사람이 열병을 앓으면 열에 의하여 괴로움을 받으므로 눈[雪]과 찬 마니주(摩尼珠) 따위와 그들의 시원함을 구하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어떤 사람이 추위에 의한 괴로움을 받으면 불을 구하고 옷을 구하고 따끈한 물 등의 온갖 따스한 닿음을 구하는 것과 같다.
015_0177_b_08L問曰依觸緣受此是何因答曰以樂受等境界和合有樂受等此以何義如人患熱依熱逼惱求於雪冷摩尼珠等及以蔭涼又如有人依寒逼惱求火求衣求溫水等一切暖觸
【문】닿음은 느낌에 반연한다 함은 그 이치가 옳지 않다. 왜 그런가 하면 닿음과 함께 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닿음은 느낌과 함께 난다. 이런 이치 때문에, 닿음은 느낌에 반연한다는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마치 두 뿔이 같이 날 적에 오른쪽 뿔은 왼쪽 뿔이 나게 하는 원인이 아니고 왼쪽 뿔은 오른쪽 뿔이 나게 하는 원인이 아닌 것처럼 이것 역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다른 인연에 의하여 나야 하고 닿음의 인연은 아니다.
015_0177_b_13L問曰觸緣受者此義不然何以故觸生故此以何義觸共受生以是義故觸緣受者此義不成如兩角共生右角不作左角因緣左角不作右角因緣此亦如是是故應依餘因緣生非觸因緣
또, 만약 함께 난다 하면 닿음은 느낌을 짓는 인연일 수 있다. 어떠한 이치 때문인가? 느낌은 닿음에 인연이 되어 줄 수 없나니, 느낌과 닿음은 서로 응하는 원인을 내기 때문이다.
015_0177_b_19L又若共生而觸能作受因緣者以何義故受不能與觸爲因緣以受觸生相應因故
015_0177_c_01L【답】비록 또 함께 난다 하더라도 하나가 원인이면 하나는 원인이 아니다. 이는 무슨 뜻인가? 두 가지 법이 있어서 비록 같이 난다 하더라도 하나의 법은 저것의 원인이 될 수 있지만 둘째 번의 법은 그 법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광명과 불꽃이 비록 함께 난다 하더라도 불꽃은 바로 광명의 원인이지만 광명은 불꽃의 원인이 아닌 것과 같다.
015_0177_b_21L答曰雖復共生而一是因一非是因此以何義有二種法雖復共生而有一法能作彼因非第二法作彼法因如明與焰雖復共生焰是明因明非焰因
또, 마치 해와 광명의 두 가지 법은 함께 나지만, 해는 광명의 원인이 되어 주고 광명은 해의 원인이 되어 주지 못한다.
또, 마치 싹은 함께 나서 그림자를 만드는 원인이 되지만 그림자는 싹의 원인이 아닌 것처럼, 닿음도 그와 같아서 비록 느낌과 함께 나지만 닿음은 느낌의 원인이 되고 느낌은 닿음의 원인이 아니다.
015_0177_c_02L又如日與光二法共生而日能與光明作因明不能與日作因又如芽共生芽作影因影非芽因觸亦如是雖共受生觸爲受因受非觸因
이 의심은 끊어졌으나, 또 다시 다른 뜻이 있다. 우리의 이 법 중에는 닿음은 함께 나지 않는 차례의 인연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우리의 이 법 중에는 느낌과 닿음이 한꺼번에 같이 나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나는가? 과거의 시기에 의하여 곧 뒤의 때를 부여하나니, 느낌의 법이 원인을 지어서 차례로 반연이 생긴다.
015_0177_c_06L是疑已斷復有異義我此法中非觸共生次第因緣此以何義我此法中非受與觸一時俱生云何而生依過去時卽與後時受法作因次第緣生
이를 어떻게 아는가? 하나의 원인을 말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닿음의 인연에 의하여 느낌을 낸다고 말하고 느낌의 원인에 의하여 닿음을 낸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만약 이 두 가지 법이 한꺼번에 같이 난다고 하면 서로의 인연을 말해야 하리라. 이런 이치 때문에 차례의 인연임을 말하고 한꺼번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015_0177_c_10L此云何知以說一因此以何義以說依觸因緣生受不說依受因緣生觸此以何義若此二法共俱生者應說迭因以是義故說次第緣不說一時
【문】느낌은 욕망[愛]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느낌은 하고 싶음으로 인하여 즐거움을 따르게 되기 때문에, 욕망을 낸다.
【문】만약 그렇다 하면, 괴로움은 나지 않아야 하리라.
【답】여의려고 하기 때문이다.
015_0177_c_14L問曰依受緣愛此是何因答曰以受爲因欲取樂故而生於愛問曰若如是者苦不應生答曰以求離故
【문】즐거움의 느낌을 구하는 이는 즐거움을 당하기 때문에 구하며, 괴로움을 구하지 않아야 함은 쓸데없기 때문이다.
【답】비록 괴로움을 구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욕망이 있으며, 얻으려 하지 않아도 그 고통은 느껴지기 때문에 괴로움을 여의려고 하면 그것은 곧 바로 욕망이니, 그러므로 괴로움의 느낌[苦受] 또한 욕망의 인연이다.
015_0177_c_18L問曰求樂受者見樂故求不應求苦以不用故答曰雖不求苦而亦有愛以不欲得彼苦受故求欲離苦彼卽是愛是故苦受亦愛因緣
015_0178_a_01L또, 즐거움을 느끼는 이는 애욕을 바라는 인연이며, 괴로움을 느끼는 이가멀리 여의는 것도 애욕이 있는 인연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사람이 괴로움이 있어서 괴로움에 의하여 시달리면 모르는 결에 힘도 없이 몸을 살해하게 되는 것과 같나니, 괴로움을 구하지 않고 즐거움을 구하지 아니하여도 욕망의 인연이다.
또, 광명이 없는 소경이기 때문에 괴로움을 받나니, 마치 저 목마른 사람이 어두운 밤에 똥이 섞인 물을 마시는 것처럼 이것도 역시 그와 같다.
015_0177_c_21L又樂受者欲愛因緣苦受遠離有愛因緣此以何義如人有苦依苦逼惱不知無力爲殺害身以不求苦以不求樂而愛因緣又依無明盲故取苦如彼渴人闇夜飮於糞和合水此亦如是
【문】빛깔 등의 경계는 모두가 욕망의 인연이거늘 무엇 때문에 느낌은 욕망에 반연하게 된다 함만을 말하는가?
【답】즐거움의 느낌을 위하여 저 빛깔 등을 구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즐거움의 느낌으로 나는 것은 반드시 짝이 있다. 이런 이치 때문에 빛깔 등의 법에서 모두가 욕망의 마음을 내나니, 느낌이 더 나은 원인이 되고 빛깔과 향기 따위는 아니다. 그러므로 느낌은 욕망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빛깔 등은 말하지 않는다.
015_0178_a_03L問曰色等境界皆是愛緣何故但說受爲愛緣答曰爲樂受故求彼色等此以何義樂受之生必有伴侶以是義故於色等法皆生愛心受爲勝因非色香等是故但說受爲愛因不說色等
【문】잡음[取]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가?
【답】가까이 하면서 물들고 집착함을 모두 잡음이라 한다. 존재하는 것과 자량을 구하는 것 따위가 모두 물들고 집착함이며 물들고 집착하게 되어서 서로가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니, 그의 이름을 잡음이라 한다.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욕심의 잡음[欲取]과 소견의 잡음[見取]과 계율의 잡음[戒取]과 나의 잡음[我取]이다.
015_0178_a_09L問曰取有何義答曰取近染著皆名爲取求於有支及資生等一切染著以得染著不相捨離名之爲取此有四種何者爲四欲取見取戒取我取
또, 욕심의 잡음이라 함은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와 공덕을 탐냄이며, 계율의 잡음으로 접촉하는 것은 계율을 지님으로써 세 가지의 소견인 소견의 잡음과 몸에 대한 소견[身見], 나라는 소견[我見]이 따른다.
또, 나[我]에 집착함을 나의 잡음이라 하며, 그 사람은 나에 집착하여 나를 위하여 즐거움을 구한다. 그 때문에 저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구하고 여러 하늘의 즐거움을 구하며, 혹은 여러 하늘들을 보려고 하여 고행을 하는 이러한 법들을 소견의 잡음이라 한다.
015_0178_a_13L又欲取者貪於五欲境界功德戒取觸者謂以持戒取三種見取身見及以我見又執著我名爲我取彼人著我爲我求樂是故求彼五欲境界求諸天樂或取欲見諸天苦行如是等法是名見取
만약에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구하여 얻고서 그 법을 탐착한다면 이를 욕심의 잡음이라 한다.
미래세상의 욕심 경계가 되는 원인에 집착하여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멀리 여읠 수 없으면서 그와 같은 것 때문에 계율을 지니면, 이를 계율의 잡음이라 한다.
015_0178_a_19L若已求得五欲境界貪著彼法是名欲取著未來世欲境界因不能遠離五欲境界如是持戒是名戒取
015_0178_b_01L또, 자기 몸에 집착하여 두 가지 치우친 소견을 따르면, 이를 소견의 잡음이라 한다.
이 뜻은 무엇인가? 만약 아주 없음[斷]의 치우친 소견에 떨어져서 곧 다섯 가지 욕심 경계에 굳게 집착되면 이를 욕심의 잡음이라 하며, 만약 항상하다[常]는 치우친 소견에 떨어져서 다섯 가지 욕심을 탐내고 집착하며 훌륭한 데에 나기를 위하면서 그와 같은 것 때문에 계율을 지니면 이를 계율의 잡음이라 한다.
015_0178_a_22L又著己身隨順二邊是名見取此義云何若墮斷邊卽便堅著五欲境界是名欲取若墮常邊貪著五欲爲勝生處如是持戒是名戒取
【문】욕망은 잡음[取]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욕망[愛]이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 구하면서 더 자라게 하는 것이니, 마치 짠 물을 마시면 더욱 더 갈증이 남과 같다.
015_0178_b_02L問曰愛緣取者此是何因答曰不足愛故更求增長如飮醎水轉增長渴
또, 욕망에 의하기 때문에 네 가지의 잡음이 있다. 이는 무슨 뜻인가? 욕망의 인연에 의하여 현재에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구하나니, 경전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015_0178_b_04L又依愛故有四種取此以何義依愛緣故求於現在五欲境界如經中說
“욕망의 인연에 의하여 모든 욕심을 구하는 것을 욕심의 잡음이라 한다. 또, 욕망에 의하여 미래세상의 다섯 가지 욕심 경계를 구하고 그 욕망 때문에 계율을 지니게 되면 이를 계율의 잡음이라 하며, 그것은 다만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만을 구하는 것이다. 만약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얻으려 하면서 버리거나 떠나려 하지 않고 여러 하늘을 구하며 좋은 날에 제사지내면서 이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라 하여 이와 같이 나[我]에 집착하면 나의 잡음이라 하느니라.”
이를 욕망의 원인에 의하여 잡음에 반연한다고 한다.
015_0178_b_06L依愛因緣求於諸欲是名欲取又依愛故求未來世五欲境界爲彼愛故起於持戒是名戒取以彼但求五欲境界若以求得五欲境界不欲捨離求諸天故好日祭祀是我所欲如是著我名爲我取是名依愛因緣於取
【문】어떠한 욕망이 어떠한 잡음에 반연하는가?
【답】사랑하려 하고 잡으려고 하여 지니는 욕망은 계율의 잡음과 나의 잡음을 취득할 수 있고, 존재하는 것을 여의면서 하는 욕망은 소견의 잡음을 취득할 수 있다.
015_0178_b_12L問曰以何等愛緣何等取答曰欲愛欲取有愛能取戒取我取離有支愛能取見取
또 다시 중생에게 나[我]는 소견의 잡음을 사랑하고 낢[生]은 계율의 잡음을 사랑하고 느낌[受]은 욕심의 잡음을 사랑하나니, 온갖 잡음에서 소견의 잡음을 탐내며 집착한다.
또, 네 가지 잡음 중에서 욕심의 잡음과 계율의 잡음의 두 가지 잡음은 바로 사랑함[愛]이지만 나머지 두 가지는 무명이 근본이 된다.
015_0178_b_15L又復衆生我愛見取生愛戒取受愛欲取於一切取貪著見取又四取中欲取戒取二取是愛餘二以爲無明根本
【문】존재[有]라는 뜻은 무엇인가?
【답】이것은 낼 수 있기 때문이니, 이것에 의하여 낼 수가 있고 이것으로 부지런히 닦을 수 있으며 이 법에 의하기 때문에 다른 법을 낼 수 있으므로 존재라 한다.
015_0178_b_18L問曰有義云何答曰此能生故依此能生此能勤修依此法故能生餘法是故名有
【문】존재는 나기에 반연한다 하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답】업에 의하여 낢이 있음은 먼저 말한 것과 같으며 지어감에 의하여 의식이 있는 이 가운데서도 역시 그러하므로 두루 갖추어서 말하여야겠다.
015_0178_b_21L問曰依有緣生此是何因答曰依業有生如向前說依行有識此中亦爾應具足說
015_0178_c_01L【문】번뇌가 또한 낢의 인연이므로 경전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욕망의 원인으로 태어날 수 있거늘, 무엇 때문에 존재의 원인이 나기에 반연한다고만 말하고 잡음의 인연은 말하지 않는가?
015_0178_c_01L問曰煩惱亦是生支因緣如經中說愛因能生何故唯說有因緣生不說取緣
【답】더 나은 낢의 원인에 의하여 짐짓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이 중에서는 다만 낢의 법으로서 더 나은 원인만을 말한다. 무엇이 더 나은 것인가? ‘이것이 바로 지옥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하늘이다’라고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따위의 갖가지 몸의 업은 가까운 원인으로 된 것이며 번뇌가 아니다.
015_0178_c_04L答曰依勝生因故如是說此以何義此中唯說生法勝因云何爲勝此是地獄此是人此是天如是等此種種身業爲近因而非煩惱
그 갖가지 원인은 또 이미 낢이 있었고, 같은 류[同類]의 낢 중에서도 저마다 차별이 있나니, 이른바 집ㆍ힘ㆍ빛깔과 오래 삶, 짧게 삶이며 병이 있고 병이 없음과 받아쓰는 자량의 온갖 것이 차별이다.
이 중에서도 역시 그러하며 업이 갖가지이기 때문이니 이는 가까운 원인이며, 번뇌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존재의 인연으로 낢이 있고 잡음의 인연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015_0178_c_07L彼種種因復有已生同類生中各有差別家力色長壽短壽有病無病受用資生一切差別此中亦爾業種種故是近因非煩惱也是以說有因緣有非取因緣
【문】만약 존재가 낢의 인연이 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존재의 인연으로 난다고만 말하고 낢의 원인이 존재에 반연한다고는 말하지 않는가?
015_0178_c_12L問曰若有能作生因緣者何以故說有因緣生而不說生因緣於有
【답】일정함과 일정하지 아니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존재의 갈래가 있으면 반드시 낢의 갈래가 있지만 낢의 갈래가 있다 하여도 반드시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저 둘째의 진리에 의하기 때문에 반드시 처음의 진리가 있지만 반드시 처음의 진리가 있기 때문에 둘째의 진리가 있지 아니함과 같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침내 해탈의 인연이 없으리니, 그러므로 존재 갈래의 인연에 의하여 반드시 낢의 갈래가 있지만, 낢은 존재에 반연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015_0178_c_14L答曰以有定不定故此以何義以有有支必有生支有生支者不必有有猶如依彼第二諦故必有初諦而不必因有初諦故有第二諦若不爾者畢竟無有解脫因緣是故說依有支因緣必有生支非生緣有
015_0179_a_01L【문】늙음이라 함은 무슨 뜻인가?
【답】소멸하고 쭈그러져서 힘이 줄어짐을 늙어진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른바, 늙음이란 변하여 달라지기 때문이다”라고 하는데,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하면,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함이 있는 행은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나니, 만약 함이 있는 행이 찰나에도 머무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여 변하여 달라짐을 늙음이라 하게 되는가?
015_0178_c_20L問曰老者何義答曰消皺力減名之爲老有人說言所謂老者以變異故此義不成何以故以不住故以有爲行剎那不住若有爲行念念不住者何而言變異名老
또 다시, 허물이 있다. 법이 만약 변한다면 곧 둘째의 찰나 동안에서는 머물러야 하고, 법이 만약 둘째의 찰나 동안에 머무른다면 부처님 법의 이치가 아니다.
또, 허물이 있다. 변하여 달라진다고 하면 실제의 몸을 버리는 것이니, 만약 곧 앞의 법이 변하여 달라짐이 있다면 그 법은 곧 응당 본래의 몸을 버려야 한다.
015_0179_a_02L又復有過法若變者便應第二剎那中住法若第二剎那住者非佛法義又復有過言變異者捨於實體若卽前法有變異者法便應卽捨本體
또, 만약 그 법이 변하여 달라지지 않는다면 변함이 있고 달라짐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만약 법이 그 본래 몸을 버리지 않는 것이라면 역시 변하여 달라짐을 늙음이라 한다고 말할 수 없으리니, 그러므로 바뀌고 변함이 있는 것을 늙음이라 할 수 없으며 먼저 설명한 늙음의 모습이 바로 늙음의 뜻이다.
015_0179_a_06L又若彼法不變異則不得言有變有異若法不捨彼本體者亦不得言變異名老是故不得言有轉變名爲老也先說老相是老義
【문】임자마음[心王]과 딸린 마음[心數]의 법에서는 어떻게 늙음을 아는가?
【답】마음의 법을 봄으로써 법의 달라짐에 의지하고 머무르나니, 이른바 모든 감관과 네 가지 원소가 줄어지고 생각과 기억이 없어져서 온갖 법문 등에 소리를 들어도 분명하지 못하고 경계를 보아도 보기가 어렵다. 이와 같은 등은 마음에서 늙음이 있음을 알게 된다.
015_0179_a_10L問曰心心數法云何知老答曰以見心法依止法異所謂諸根四大損減思惟念薄忘失所有諸法門等聞聲不了見境界難見如是等知心有老
【문】죽음이라 함은 어떠한 뜻이 있는가?
【답】죽음이라 함은 목숨을 버리고 마침내 없어지며 다른 세상으로 떠나감을 바로 죽음이라 한다. 이와 같은 죽음과 먼저 설명한 늙음의 이 두 가지가 합쳐지기 때문에 늙어 죽음[老死]의 갈래라 한다.
또 다시, 말이 있다. 감관과 네 가지 원소 등이 뒷날 줄어져서 아주 작아 구별하기 어려움을 바로 늙음이라 하고 파괴되는 것을 죽음이라 하나니, 마치 줄기가 점차로 다하여지는 것과 같다.
015_0179_a_14L問曰死有何義答曰死者捨命終亡謝滅異世去等是名爲死如是此死及先說老此二合故名老死支又復有言根四大等後時損減微細難別是名爲老破壞名死如柯漸盡
또, 네 가지 원소가 파괴됨을 바로 늙음이라 하고 흩어져 없어짐을 죽음이라 하는데, 마치 썩은 헌 수레가 파괴되어 흩어져 없어지는 것과 같다.
또, 다섯 가지 쌓임[五陰]이 없어짐을 따르기 때문에 늙음이라 하고 없어지면 죽음이라 하나니, 마치 헌 집이 무너지는 것과 같다.
015_0179_a_19L又四大破壞是名爲老散盡名死如朽故車破壞散盡又於五陰隨順滅故名爲老滅名爲死如故舍壞
015_0179_b_01L【문】나기는 늙어 죽음에 반연한다 하는 이것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가?
【답】저 법이 무너지기 때문에 이 법이 있게 되며, 만약 저 법이 없으면 역시 이 법이 없다. 이는 무슨 뜻인가? 마치 처음 만들어진 병이 뒷날에는 헐어지고 또 먼저 만들어진 병이 뒷날에 깨지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중생에게 낢이 있으면 뒤에는 늙어 죽음이 있어서 이는 낢이 아닌 것이 아니니, 그러므로 낢은 늙어 죽음에 반연한다고 설명한다.
015_0179_a_22L問曰生緣老死此有何義答曰壞彼法故得有此法若無彼法亦無此法此以何義如初作甁後時朽故又先作甁後時破壞此亦如是有衆生生後有老死非是不生是故說依生緣老死
【문】만약 낳자마자 즉시 죽게 되면, 그 동안을 어떻게 낢이 늙어 죽음에 반연하겠는가?
【답】목숨이 없어진 것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그곳에서 목숨이 있다가 앞에 나타난 목숨이 줄어져서 다섯 가지 쌓임이 없어지기 때문에 이를 늙음이라 하며, 마치 저 비는 구름이 있기 때문에 내리고 구름이 없으면 비도 없지만 역시 구름이 있어도 비가 없기도 하는 것처럼 그것도 역시 그러하다.
015_0179_b_05L問曰若生念中卽時死者彼中云何生緣老死答曰命滅此以何義彼處有命損現前命五陰滅故是名爲老猶如彼雨有雲故雨無雲無雨亦有有雲而無有雨彼處亦爾
【문】무엇 때문에 함이 있음의 세 가지 형상인 법 중에서 한 곳에서만 오직 나기는 나기의 갈래임을 말하고 한 곳에서는 늙음은 늙음의 갈래가 됨을 말하는가?
015_0179_b_09L問曰何故有爲三相法中一處唯說生爲生支一處說老以爲老支
【답】이치를 따르기 때문이다. 법이 나려고 할 적에는 낢이 따르고, 법이 없어지려 할 때에는 늙음의 갈래가 따른다.
또, 늙어 죽음의 갈래는 무너짐의 법을 따르므로 낢의 갈래와 저 늙어 죽음은 서로가 어긋나며, 늙어 죽음의 두 가지 법은 서로가 함께 따르게 된다.
따른다고 함은 파괴됨을 따르기 때문이면 늙음이라 하며 죽음도 역시 그와 같나니, 그러므로 늙어 죽음을 합쳐서 한 갈래로 삼았지만 낢은 다른 갈래이다.
015_0179_b_11L答曰隨順義故法欲生時生能隨順法欲滅時老支隨順又老死支隨順壞法生支與彼老死相違老死二法迭共隨順言隨順者隨順破壞故名爲老死亦如是是故老死合爲一支生者別支
【문】무엇 때문에 근심 따위는 갈래로 삼아서 말하지 않는가?
【답】온갖 중생들에게 두루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근심 등의 모든 법은 세 가지 세계에 두루하지 않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갈래로 삼아서 말하지 않는다.
015_0179_b_17L問曰何故不說憂等爲支答曰不遍一切諸衆生故此以何義憂等諸法不遍三界以是義故不說爲支
015_0179_c_01L【문】무명이 사라지면 지어감이 사라진다 함은 어떠한 차례가 있는가?
【답】여래께서는 무명 등의 12인연은 있음[有]을 낼 수 있다고 차례로 말씀하셨나니, 중생들이 12인연을 잘 모르고서 아주 없다는 소견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여래께서는 무명이 사라지면 나머지 것도 모두가 사라진다고 차례로 말씀하셨나니, 중생들이 무명의 인연을 보고 알지 못하고서 항상하다는 소견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015_0179_b_20L問曰無明滅則行滅者有何次第如來次第說無明等十二因緣能生於有以諸衆生不能識知十二因墮斷見故如來次第說無明滅餘亦皆滅以諸衆生不能見知無明因墮常見故
또, 먼저 말씀한 것과 같이 ‘어떻게 세간이 있는가?’ 함은 12인연을 보고 알지 못하고서 없다[無]는 치우친 소견에 떨어지므로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께서는 말씀하셨으며, ‘어떻게 세간이 없어지는가?’ 함은 어떠한 법을 보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있다[有]는 치우친 소견에 떨어지므로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께서 차례로 말씀하셨다.
015_0179_c_03L又如先說云何世閒有以不見知十二因緣墮於無邊以是義故如來說云何世閒滅以不見知何等法故墮於有邊以是義故如來次說
마치, 여래께서『가전연경(迦旃延經)』에서 말씀하심과 같나니, “또, 이미 몸에 대한 소견의 쌓임의 진리[集諦]와 도의 진리[道諦]를 말하였으나 아직 몸에 대한 괴로움의 진리[苦諦]와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말하지 못했나니, 그러므로 말하려 하느니라.
015_0179_c_07L如如來『迦旃延經』中說又已說身見集諦道諦未說身見苦諦滅諦是故欲說
또, 이미 물듦의 진리[染諦]를 말하였으나 아직 깨끗함의 진리[淨諦]를 말하지 못하였으며, 또 이미 속박의 진리[縛諦]를 말하였으나 아직 해탈의 진리[解脫諦]를 말하지 못했나니, 이제 말하려 하기 때문이니라”고 하시면서, 그 때문에 “무명이 사라지면 지어감도 사라진다”고 하는 이와 같은 것 등을 말씀하셨다.
015_0179_c_09L又已說染諦未說淨諦已說縛諦未說解脫諦今欲說故故說言無明滅行亦滅如是等
【문】이 모든 인연은 몇 가지에 있는가?
【답】간략히 말하면 네 가지이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 때[時]의 열두 가지 인연이 있으며, 둘째 찰나(刹那) 동안이며, 셋째 차례[次第]이며, 넷째 끊어지지 아니함[不斷絶]이다.
때라 함은 때가 이르는 것으로서 인연의 때라 한다. 이는 무슨 뜻인가? 무명의 때라 함은 과거의 때이며, 번뇌가 난다 함은 바로 무명의 때이다.
015_0179_c_11L問曰此諸因緣有於幾種答曰略說四種何者爲四一者有時十二因緣二者剎那三者次第四者不斷絕到時名因緣時此以何義無明時謂過去時生煩惱者是無明時
지어감의 때라 함은 과거 때의 업이니, 이를 지어감의 때라 한다. 의식의 때라 함은 의탁하여 마음이 생기고 같은 권속으로 생긴 것이니, 이를 의식의 때라 한다. 이름과 물질의 때라 함은 아직 화합하여 이루어지지 못한 가라라(歌羅邏)와 안부타(安浮陀)와 폐시(閉尸)와 건남(健南)8) 따위여서 이러한 동안에는 아직 눈 등 다섯 가지 감관들이 생기지 못하고 여섯 가지 감관이 만족하지 못한 그때에 생겨 있는 몸이니 이름과 물질의 때라고 한다.
015_0179_c_16L行時者過去時業是名行時言識時謂託生心共眷屬生是名識時色時者未和合成卽歌羅邏安浮陁枇尼堅支等如是時中未生眼等五情諸根六入未滿彼時生體是名名色時
015_0180_a_01L여섯 가지 감관의 때라 함은 눈 등의 모든 감관이 만족하게 생겼지만 여섯 가지 감관들이 아직은 힘을 지닐 수 없고 저 임자마음과 딸린 마음의 법에 의지가 되어 줄 뿐이니, 이를 여섯 가지 감관의 때라고 한다.
닿음의 때라 함은 언제든지 모든 감관이 저 임자마음과 딸린 마음의 법에 대해 의지하여 머무르게 하여 주지만 괴로움과 즐거움을 분별할 수 없고 또한 좋고 나쁜 일들도 지을 수 없어서 아직은 훌륭한 행이 없나니, 이를 닿음의 때라고 한다.
015_0179_c_22L六入時者以生眼等諸根滿足六入諸根未能有力作彼心心數法依止是名六入時言觸時者隨何等時諸根於彼心心數法能作依止不能作分別苦樂亦不能作好惡諸未有勝行是名觸時
느낌의 때라 함은 괴로움과 즐거움을 느끼고 괴로움과 즐거움을 분별하여 좋고 나쁜 일을 껴잡고 음식을 사랑하지만 애욕과 자량 따위는 아니며 아직은 힘을 지니지 못했나니, 이를 느낌의 때라고 한다.
욕망의 때라 함은 애욕과 자량의 행이 그릇되고 있고 없음을 분별하나니, 이를 욕망의 때라고 한다.
015_0180_a_04L言受時者受苦樂分別苦樂攝好惡事愛食非欲資生等未有取力是名受時愛時者愛欲資生行非分別有無名愛時
잡음의 때라 함은 있고 없음을 알아서 분별하고 이와 같은 것을 구하며 일으키나니, 이를 잡음의 때라고 한다.
존재의 때라 함은 이 세상과 미래의 세상 동안에 구할 다섯 가지 욕심의 경계를 추구하고 있으면서 미래에 낢을 위하여 갖가지 업을 일으키나니, 이를 존재의 때라고 한다.
015_0180_a_08L言取時者知有無分別求如是起是名取時言有時者求於此世未來世中五欲境界追求推覓爲未來生起種種業是名有時
낢의 때라 함은 이 생(生)에서 이미 물러나 바로 다음의 생에 의탁하여 태어나는 것이니, 이를 낢의 때라고 한다.
늙어 죽음의 때라 함은 이로부터 모든 감관이 파괴됨을 늙어 죽음의 때라고 한다.
015_0180_a_11L言生時者此生已退卽次後生所託生處是名生時老死時者自此以後破壞諸根名老死時
찰나 동안이라 함은 이름과 물질 등의 갈래를 찰나 동안이라 하는데, 한 생각 동안에 모든 열두 가지 인연을 완전히 갖춘다. 이 뜻이 무엇인가? 마치 사람이 탐내는 마음에 의지하여 산 것을 죽인다면,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헷갈림과 어리석음 따위를 무명이라고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생각과 서로 응하는 마음을 지어감이라고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뜻과 서로 응하는 법을 의식이라고 하며,
015_0180_a_14L言剎那者名色等支名爲剎那以一念中具足一切十二有支此義云何如人依止貪心殺生彼處所有迷愚癡等名爲無明彼處所有相應思心是名爲行彼處所有相應意法是名爲識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의식과 함께 나는 법의 모습 등인 네 가지 원소와 네 가지 원소에 의하여 나는 네 가지 티끌[四塵] 등의 이와 같은 법을 이름과 물질이라고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감관에 의하여 업을 짓되 감관을 여의지 아니함을 여섯 가지 감관이라고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마주 대하는 것과 서로 응하는 법을 닿음이라고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깨달음과 서로 응하는 것을 느낌이라고 하며,
015_0180_a_19L彼處所有共識生法相等四大及依四大所生四塵如是等法名爲名色彼處所有依入作業而非離入名爲六入彼處所有相應對法是名爲觸彼處所有相應覺者是名爲受
015_0180_b_01L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탐욕과 서로 응하는 마음을 욕망이라고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욕망을 버리지 않는 마음을 잡음이라고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존재라고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이러한 법들로써 일어나게 되는 법을 낢(生)이라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모든 법이 변하고 달라짐을 늙음이라 하며, 그곳에서 지니게 되는 모든 법이 흩어져 없어짐을 죽음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015_0180_b_01L彼處所有相應貪心是名爲愛彼處所有不捨愛心是名爲取彼處所有身口意業是名爲有彼處所有如是等法所起之法是名爲生彼處所有諸法變異是名爲老彼處所有諸法散滅是名爲死
차례가 있다 함은 비롯한다는 이치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저 인과는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니, 이런 이치 때문에 그 비롯함을 모른다.
끊어지지 않음이라 함은 저 원인으로 인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멀리서 왔다는 이치이기 때문이다.
또, 다만 열두 가지의 갈래로써 인연을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 온갖 함이 있는 모든 법도 인연이라고 한다.
015_0180_b_06L有次第者無始義故此以何義以彼因果不斷絕故以是義故不知其始不斷絕者以彼因因不斷絕故此以何義遠來義故又復非但十二有支能生因緣以彼一切有爲諸法名爲因緣
【문】깊은 마음[深心] 등의 법에는 어떠한 차례가 있는가?
015_0180_b_11L問曰深心等法有何次第
【답】온갖 훌륭한 공덕을 성취하기 때문이며, 온갖 법 중에서 보리심을 잃지 않고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인가? 모든 보살마하살이 공덕을 수행하는 가운데서 저 깊은 마음을 말하여 근본으로 삼고, 모든 보살마하살은 깊은 마음을 성취하여 보리심을 잃지 않는 원인으로 삼으며, 깊은 마음과 같이 모든 행도 그러하여 자연히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수행하나니, 이로써 여래께서는 실답게 수행하는 차례의 이치를 나타내 보이려고 깊은 마음을 말씀한 뒤에 다음으로 행의 마음[行心]을 말씀하셨다.
015_0180_b_12L答曰以成就一切勝功德故以一切法中不失菩提心以爲根本故此以何義於諸菩薩摩訶薩修行功德中說彼深心以爲根本以諸菩薩成就深心以爲不失菩提心因如深心諸行亦爾然爲欲利益一切衆生修行是以如來爲欲示現如實修行次第義故深心後次說行心
015_0180_c_01L또, 보살은 깊은 마음을 성취하고 행의 마음을 성취한 연후에 다른 이의 이익을 수행하나니, 이와 같은 훌륭한 이치를 나타내 보이려고 수행을 말씀한 뒤에 다음으로 버림의 마음[捨心]을 성취함을 말씀하셨다.
또, 보살은 계율을 지니고 보시하는 등의 실다운 수행의 형상을 훌륭한 법에 회향하므로 이러한 이치에 의하여 보살의 도를 수행하고 돕는 것을 나타내 보이나니, 그러므로 다음에는 회향을 성취함을 말씀하셨다.
015_0180_b_20L又以菩薩成就深心成就行心然後於他利益修行爲欲示現如是勝義說修行後次說成就捨心又以菩薩持戒布施等如實修行相迴向勝法依如是義示現修行助菩薩道是故次說成就迴向
또, 계율을 지니는 것으로부터 회향에 이르기까지는 정하여진 선한 뿌리가 아니므로 다음에는 훌륭한 삼매의 법을 나타내 보이려 하고, 중생들에게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등의 모든 선한 뿌리 중에 머무르게 하려 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 회향을 말씀한 뒤에 다음으로 크게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등을 성취함을 말씀하셨다.
015_0180_c_03L又從持戒乃至迴向非定善根次欲示現勝三昧法欲令衆生住慈悲等諸善根中以是義故說迴向後次說成就大慈悲等
이미 정하여진 법의 미묘한 즐거움과 선한 뿌리는 차치하고, 저 탐내고 집착하는 마음을 여의게 하려고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을 말씀한 뒤에 다음으로 방편을 말씀하셨다. 방편이 있기 때문에 지혜가 있어서 모든 법을 분명히 보며, 이런 이치 때문에 성문과 벽지불 지위에 떨어지지 않고 보살의 자리에 드나니,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방편을 말씀한 뒤에 다음으로 반야바라밀을 성취함을 말씀하셨다.
015_0180_c_06L已置定法妙樂善根爲欲離彼貪著心故說慈悲後次說方便以有方便故有智慧明見諸法以是義故不墮聲聞辟支佛地入菩薩位是故如來說方便後次說成就般若波羅蜜
또 간략하게 말하면, 깊은 마음을 성취하는 데서 방편에 이르기까지는 도를 돕는 공덕을 성취함을 나타내 보이고, 마지막의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는 데는 도를 돕는 지혜를 성취함을 나타내 보이셨다.
또, 깊은 마음을 성취하는 데서 방편에 이르기까지는 보리 공덕의 도를 성취함을 나타내 보이고, 마지막의 반야바라밀을 성취하는 데는 보리 지혜의 도를 성취함을 나타내 보이셨다.
015_0180_c_11L又復略說成就深心乃至方便示現成就助道功德究竟成就般若波羅蜜者示現成就助道智慧又成就深心乃至方便示現成就菩提功德道究竟成就般若波羅蜜現成就菩提智慧道
또, 깊은 마음을 성취하는 데서 회향에 이르기까지는 계율의 몸을 성취함을 나타내 보이고,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의 두 가지 법은 선정의 몸을 성취함을 나타내 보이고, 방편과 반야는 지혜의 몸을 성취함을 나타내 보이셨다.
또, 깊은 마음을 성취하는 데는 바로 곧은 마음을 성취함을 나타내 보이고, 그 나머지 일곱 구절은 수행을 성취함을 나타내 보이셨다.
015_0180_c_17L又成就深心乃至迴向示現成就戒慈悲二法示現成就定身方便般若示現成就慧身又成就深心卽是示現成就直心餘七句示現成就修行
015_0181_a_01L또, 깊은 마음을 성취하고 행의 마음을 성취함은 계율의 집[戒家]을 나타내 보이고, 버림의 마음을 성취하고 회향을 성취함은 보시의 집[施家]을 나타내 보이고, 크게 인자함을 성취하고 크게 가엾이 여김을 성취함은 적멸의 집[滅家]을 나타내 보이고, 방편을 성취하고 반야바라밀을 성취함은 지혜의 집[智家]을 나타내 보이셨나니, 이와 같이 걸림이 있거나 걸림이 없는 온갖 법을 다른 모든 수다라 중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줄 알아야 한다.
015_0180_c_22L又成就深心成就行心示現戒家就捨心成就迴向示現施家成就大慈成就大悲示現滅家成就方便成就般若波羅蜜示現智家如是有㝵無㝵等一切諸法諸餘一切修多羅中廣說應知
이 수다라는 모든 보살마하살의 계율 배우는 이치에 의하여 말씀하셨나니, 이와 같아서 모든 보살마하살의 8만 4천의 한량없고 그지없는 모든 법문들이 모두가 유사한 줄 알아야 한다.
015_0181_a_05L此修多羅依諸菩薩摩訶薩學戒義說如是諸菩薩摩訶薩八萬四千無量無邊諸法門等皆應類知
彌勒菩薩所問經論卷第九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7)범어 kalala의 음역으로 태내 5위의 첫째이다. 태아가 모태에서 생긴 지 일주간을 말한다.
  2. 8)모태 내에 있는 266일간의 생장 차례에 의해 5가지의 상태로 나눈 것이다. 수태 후 7일간은 범어로 kalalaṃ이며 응활(凝滑)로 한역되며, 제2의 7일간은 arbudaṃ이며 포포결(皰皰結)로 한역되며, 제3의 7일간은 peśī이며 응결(凝結)ㆍ육단(肉段)으로 한역되며, 제4의 7일간은 ghana이며 응후(凝厚)ㆍ경육(硬肉)으로 한역되며, 나머지 제5의 단계는 praśākhā이며 지절(支節)ㆍ지지(枝枝)로 한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