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佛地經論卷第二

ABC_IT_K0554_T_002
015_0235_b_01L불지경론 제2권
015_0235_b_01L佛地經論卷第二


친광 지음
015_0235_b_02L親光菩薩等造
현장 한역
이미령 번역
015_0235_b_03L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이 박가범의 가장 청정한 깨달음은 둘이 아닌 현행(現行)으로 무상법(無相法)에 나아가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머물고, 일체불의 평등성을 체득해서 장애 없는 곳에 이르시고, 외도가 법을 퇴전(退轉)시킬 수 없게 해서 행하는 바에 걸림이 없으시며, 그 성립하는 것이 불가사의하며, 3세(世)의 평등한 법의 성품에 노니시며, 그 몸이 온갖 세계에 흘러 퍼지며, 모든 법에 대해 지혜가 의심하거나 머뭇거림이 없고, 모든 행에서 커다란 깨달음[大覺]을 성취하셨고, 모든 법과 지혜에 대해서 의혹이 없고, 나타내신 몸은 분별할 수 없으며, 모든 보살이 올바로 구하는 지혜이고, 부처님의 둘 아님[不二]을 얻어서 뛰어난 피안에 머물고, 서로 짬이나 뒤섞임이 없는 여래의 해탈인 묘한 지혜의 구경(究竟)이며, 중간과 변제(邊際)가 없는 부처님 경지의 평등함을 증득하고, 법계를 극(極)하고 허공의 성품을 다하고 아울러 미래세를 다하였다.
015_0235_b_04L經曰是薄伽梵最淸淨覺不二現行趣無相法住於佛住逮得一切佛平等性到無障處不可轉法所行無㝵其所成立不可思議遊於三世平等法性其身流布一切世界於一切法智無疑滯於一切行成就大覺於諸法智無有疑惑凡所現身不可分別一切菩薩正所求智得佛無二住勝彼岸不相閒雜如來解脫妙智究竟證無中邊佛地平等極於法界盡虛空性窮未來際

다음으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른 대사(大師)와는 차별이 있음을 나타내기 때문에 세존의 공덕이 훌륭하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 다른 이들로 하여금 깨끗한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함이다. 세존의 공덕이 원만함을 나타내 보인 것에는 스물한 가지 뛰어난 공덕이 있어서 박가범의 가장 청정한 깨달음을 나타내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불세존이 널리 모든 유위ㆍ무위에 응해진 깨달음의 경계[所應覺境]에서 올바르게 깨달음을 여셨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응하는바 깨달음의 경계에서 깨끗하고 미묘하며 원만하고 올바르게 깨달음을 여셨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여소유성(如所有性)1)과 진소유성(盡所有性)2)에서 올바르게 깨달음을 여셨기 때문에 ‘박가범의 가장 청정한 깨달음’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015_0235_b_15L論曰次顯諸佛異餘大師故說世尊功德殊勝又爲其餘生淨信故顯示世尊功德圓滿應知此中二十一種殊勝功德顯薄伽梵最淸淨覺謂佛世尊普於一切有爲無爲所應覺境正開覺故又於一切所應覺境淨妙圓滿正開覺故又於一切如所有性盡所有性正開覺故名薄伽梵最淸淨覺
015_0235_c_01L‘둘 아닌 현행’이란 것은 세존의 오롯하고 장애 없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범부와 2승은 두 가지 장애를 현행(現行)하지만 세존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범부는 생사(生死)를 현행해서 온갖 섞임과 물듦[雜染]을 일으켜 생사에 머물며 집착하고, 성문과 독각의 현행은 열반만을 향하느라고 남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일을 등지면서 오로지 열반에 머물며 집착한다. 그러나 세존께서는 저 두 가지 장애를 현행하지 않으므로 “둘 아닌 현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015_0235_c_02L不二現行者顯示世尊一向無障殊勝功德謂凡夫二乘現行二障世尊無故以諸凡夫現行生死起諸雜染住著生死聲聞獨覺現行涅槃一向棄背利樂他事住著涅槃世尊無彼現行二障是故說名不二現行
‘무상법(無相法)에 나아가’라는 것은 세존의 길들이고 교화하는 방편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무상법이란 곧 열반이다. 부처님께서는 능히 3승의 유정을 환히 알아서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에 따라 방편을 조화롭게 교화하고 참답게 설하시어서 그들로 하여금 무상법에 나아가 증득하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015_0235_c_07L趣無相法者顯示世尊調化方便殊勝功德謂無相法卽是涅槃佛善了知三乘有情隨彼堪能調化方便實爲說令彼趣證無相法故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머물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길들이고 교화하실 곳을 관하시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대비(大悲)에 머무시어 밤낮의 여섯 때[時]3)로 세간을 살피시기 때문이다.
015_0235_c_11L住於佛住者顯示世尊觀所調化殊勝功德謂住大悲晝夜六時觀世閒故
‘일체불의 평등성을 체득해서’라는 것은 세존께서 일체불과 비슷한 사업(事業)을 얻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모든 부처님과 비슷한 사업을 지으시므로 그들과의 평등성을 증득하시기 때문이다.
015_0235_c_13L逮得一切佛平等性者顯示世尊得一切佛相似事業殊勝功德謂證諸佛相似事業平等性故
‘장애 없는 곳에 이르시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영원히 끊어서 다스린 바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장애를 해탈한 지혜를 이미 증득하셨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미 온갖 장애를 영원히 끊으셨기 때문이다.
015_0235_c_16L到無障處者顯示世尊永斷所治殊勝功德謂已證得解脫一切煩惱所知二障智故及已永斷一切障故
‘외도가 법을 퇴전시킬 수 없게 해서’라는 것은 세존께서 외도로부터 항복받으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모든 외도들은 부처님의 정법을 능히 퇴전시키지 못하니, 외도들로부터 항복을 받아서 바른 길을 나타내 보이시기 때문이다.
015_0235_c_19L不可轉法者顯示世尊降伏外道殊勝功德謂佛正法一切外道不能退轉降伏彼已顯正道
015_0236_a_01L‘행하는 바에서 걸림이 없으시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악마의 원한을 항복받으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행하는 바’란 곧 색 등의 경계이니, 이 행하는 바의 경계는 마음을 어지럽게 하고 산란하게 하여 선(善)을 장애하기 때문에 악마의 원한[魔怨]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모든 불세존께서는 마음이 잘 안정되어 있으며 지극히 기뻐하는 뜻의 경계도 어지럽힐 수 없어서 모든 공덕이 지극한 선으로 채워져 있다. 모든 사악한 경계가 장애되지 않으며 온갖 경계를 능히 쳐부수고 항복받으심으로써 모든 행하는 곳에서 구속받거나 걸림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하는 바에서 걸림이 없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35_c_22L所行無㝵者顯示世尊降伏魔怨殊勝功德謂所行者卽色等境此所行境擾亂心故障㝵善故說名魔怨諸佛世尊心善安定極悅意境亦不能亂所有功德極善成滿一切惡境不能爲礙以能摧伏一切境界一切所行不能拘礙是故說名所行無礙
‘그 성립하는 것이 불가사의하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법교(法敎)를 안립하시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부처님께서 안립하신 모든 법교는 온갖 거칠거나 미세한 생각의 경계를 뛰어넘었다.
015_0236_a_05L其所成立不可思議者顯示世尊安立法教殊勝功德謂佛安立一切法超過一切尋思境故
‘3세의 평등한 법의 성품에 노니시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3세를 기별(記別)하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현재 기별하시는 것처럼 과거와 미래세의 일이 모두 걸림이 없다.
015_0236_a_08L遊於三世平等法性者顯示世尊記別三世殊勝功德謂如現在記別過去未來世事皆無㝵故
‘그 몸이 온갖 세계에 흘러 퍼지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도사천궁(都史天宮)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오시는 모습을 나투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화신(化身)이 모든 세계의 섬[洲渚]에 두루 나투시는 동시에 아래로 흘러내려가 모태에 드시기 때문이다.
015_0236_a_11L其身流布一切世界者示世尊現從睹史天宮來下殊勝功謂現化身普於一切世界洲渚時流下入母胎故
‘모든 법에 대해 지혜가 의심하거나 머뭇거리는 일이 없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모든 의심을 끊으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으로서 이른바 모든 법에 대해 이미 능히 온갖 의혹을 없애서 결정지(決定智)를 얻으신 것이다.
015_0236_a_14L於一切法智無疑滯者顯示世尊斷一切疑殊勝功德謂於諸法已得能除一切疑惑決定智故
‘모든 행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성취하셨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일체승(一切乘)에서 교화해야 할 유정들을 그 응하는 바에 능히 따르면서 자신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였으니, 이른바 모든 유정의 성품과 행의 차별을 널리 환히 알아서 그 감응하는 바대로 스스로의 몸을 나타내 보이시기 때문이다.
015_0236_a_17L於一切行成就大覺者顯示世尊於一切乘所化有情能隨所應現自身殊勝功德謂遍了知一切有情性行差別如其所應現自身故
015_0236_b_01L‘모든 법과 지혜에 대해 의혹이 없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모든 법과 지혜를 묘하고 훌륭하게 잘 요달(了達)해서 능히 감응하는 바에 따라 항상 바른 깨달음과 꾸짖음을 나타내 보이시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모든 법에 대해 의혹을 품는 자는 감응에 따른 가르침을 감당할 능력이 없다. 오직 불세존만이 모든 법을 증견(證見)하는 지혜가 잘 결정되어 있으므로 능히 감응하는 바에 따라 뒤바뀌는 일이 없이 가르치는 일을 쉬거나 폐하지 않기 때문이다.
015_0236_a_20L諸法智無有疑惑者顯示世尊妙善了達一切法智能隨所應恒正教誨殊勝功德謂於諸法懷疑惑者無有堪能隨應教誨唯佛世尊證見諸法智善決定能隨所應無倒教誨無休廢故
‘나타내신 몸은 분별할 수 없으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능히 물들지 않은 자신의 몸을 올바르게 섭수하시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몸은 허망한 분별로 일어난 것이 아니니, 번뇌의 업이 없고 물듦을 여의어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며, 여래의 몸은 섞이고 물든 분별로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
015_0236_b_03L凡所現身不可分別者顯示世尊能正攝受無染自身殊勝功德諸佛身非是虛妄分別所起無煩惱業生離染故以如來身非是雜染分別起故不可分別
‘모든 보살이 바로 구하는 지혜’라는 것은 세존께서 부처님의 종자[佛種]를 끊지 않는 방편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모든 보살들은 부처님의 종자를 끊어지게 하지 않기 때문에 부지런히 수행하며 가행(加行)하는 것이 성문 등과 다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지혜는 오직 모든 보살들만이 올바르게 구하는 것이다.
015_0236_b_07L一切菩薩正所求智者顯示世尊成就佛種不斷方便殊勝功德謂諸菩薩爲令佛種無斷絕故勤修加行非聲聞等是故佛智唯諸菩薩正所應求
‘부처님의 둘 아님을 얻어서 뛰어난 피안에 머물고’라는 것은 세존의 자성신분(自性身分)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부처님의 법신은 차별상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둘이 아니라고 한다. 부처님의 둘 아님에 머무는 것은 바로 법신(法身)이며 진여이다. 진여는 차별상이 없는 것을 본체로 삼는데, 이 중에서 두 가지 상의 분별이 모두 현행하지 않는다. 그 뛰어난 정(定)을 반연하여 항상 그 속에 머무르므로 이름하여 머물렀다’고 하니, 곧 하나에도 머물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뛰어난 피안이라 하고, 부처님께서 이미 궁극까지 도달하셨으므로 얻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36_b_11L得佛無二住勝彼岸者顯示世尊自性身分殊勝功謂佛法身無差別相故名無二無二住卽是法身眞如爲體無差別於中一切二相分別皆不現行彼勝定常住其中故名爲住卽無二住名勝彼岸佛已窮到故名爲得
‘서로 짬이나 뒤섞임이 없는 여래의 해탈인 묘한 지혜의 구경(究竟)이며’라는 것은 세존의 수용신분(受用身分)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수용신은 서로 짬이 있거나 뒤섞이지 않으니, 모든 여래의 수용신의 몸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여래의 묘한 지혜’는 능히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해탈하게 하므로 이름하여 “여래의 해탈인 묘한 지혜”라고 하며, 부처님께서는 이 지혜에서 이미 구경을 얻으심이 이와 같으므로 곧 여래의 묘한 지혜는 서로 짬이 있거나 뒤섞임이 없다고 한다.
015_0236_b_17L相間雜如來解脫妙智究竟者顯示世尊受用身分殊勝功德謂受用身不相閒雜一切如來受用身體各各別故如來妙智能令一切衆生解脫故名如來解脫妙智佛於此智已得究竟如是卽說如來妙智不相閒雜
015_0236_c_01L 깨끗한 불국토에서 수용신을 나타내셔도 역시 서로 뒤섞이는 일이 없고, 큰 모임 중에 갖가지 몸을 나타내어서 여러 보살들에게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게 하셔도 역시 서로 뒤섞이는 일이 없으니, 여래께서 이 지혜에서 몸을 나타내시는 일 또한 구경에 도달하셨다.
015_0236_b_23L於淨佛土現受用身亦不相雜大集會中現種種身與諸菩薩受用法樂亦不相雜如來於此智所現身亦到究竟
‘중간과 변제가 없는 부처님 경지[佛地]의 평등함을 증득하고’란 세존께서 증득하신 진여의 모습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진여의 모습에는 중간과 변제가 따로 없고, 온갖 유위와 무위의 중간이나 변제의 모습을 멀리 여의었으며, 방위와 처소의 중간이나 변제의 모습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진여가 바로 부처님 경지의 평등한 법성이니, 이 부처님 경지의 평등성을 증득하기 때문에 일체 유위ㆍ무위를 두루 알아서 그 속에 있어도 물들지 않는다.
015_0236_c_04L證無中邊佛地平等者顯示世尊證眞如相殊勝功德謂眞如相無有中邊遠離一切有爲無爲中邊相遠離方處中邊相故如是眞如卽是佛地平等法性證此佛地平等性遍知一切爲無爲等於中不染
‘법계를 극(極)하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과상(果相)을 증득하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궁극적인 청정한 법계를 얻으신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법계는 바로 수도과(修道果)이다. 이후에는 일종의 뛰어난 공덕이 있어서 세존의 공덕이 끝없음을 나타내 보인다.
015_0236_c_09L於法界者顯示世尊證得果相殊勝功德謂得窮極淸淨法界如是法界是修道果次後二種殊勝功德顯示世尊功德無盡
‘허공의 성품을 다하고 아울러 미래세를 다하였다’는 것은 세존의 자리이타의 두 가지 덕이 가없는 뛰어난 공덕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허공이 성겁(成劫)과 괴겁(壞劫)을 지나도 그 성품은 항상하여 가없는 것처럼 여래의 모든 진실한 공덕 또한 마찬가지라서 항상하여 끊어지거나 다하는 일이 없다. 마치 미래세에 다하는 시기가 있지 않은 것처럼 이타의 공덕 또한 그러하니, 미래세가 다하도록 언제나 모든 유정에게 이익되고 안락한 일을 짓기 때문이다.
015_0236_c_13L盡虛空性窮未來際顯示世尊自利利他二德無盡殊勝功德謂如虛空經成壞劫性常無如來一切眞實功德亦復如是常無斷盡如未來際無有盡期利他功德亦復如是窮未來際常作一切有情利益安樂事故
또 다시 여기에서는 세존의 뛰어난 공덕을 전체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으로 나타내 보였는데, 첫 구절은 바로 전체적인 것이며, 나머지 구절은 그 뜻을 열어서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선설법요(善說法要), 즉 ‘법의 요체를 훌륭히 설하셨다’라고 한다.
스물한 가지 뛰어난 공덕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가장 깨끗한 깨달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36_c_19L復次此中摠別顯示世尊殊勝功德初句是摠由所餘句開顯其義如是乃名善說法要由二十一殊勝功德是故說名最淸淨覺
015_0237_a_01L‘둘 아닌 현행’이란 것은 세존께서 소지(所知)의 경계에서 모든 걸림 없는 지혜를 굴리는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성문 등은 모든 경계에서 지혜가 걸림이 있는 탓에 지극히 먼 때와 장소에 한없는 차별이 있으니, 모든 부처님의 법 안에서 지혜가 구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래는 그렇지 않나니, 모든 때와 장소에 끝없는 차별이 있어도 모든 부처님 법 안에서 일체종지(一切種智)가 걸림이 없이 작용한다. 모든 법의 모양에 앎과 알지 못함의 두 가지 현행이 없으므로 ‘둘 아닌 현행’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가장 깨끗한 깨달음이라고 이름하니, 나머지 구절은 모두가 이와 같이 배속되어야 한다.
015_0236_c_23L不二現行者示世尊於所知境一向無障智轉功謂聲聞等於諸境界智有障礙遠時方無邊差別諸佛法中無智轉如來不爾一切時方無邊差別佛法中一切種智無障㝵轉於諸法相無知不知二種現行是故說名不二現行由此故名最淸淨覺餘句皆應如是配屬
‘무상법(無相法)에 나아가신다’는 것은 세존께서 능히 둘이 아닌 것에 들어가시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스스로 능히 일체의 분별자상(分別自相)을 영원히 여의는 곳에 들어가셔서 모든 번뇌와 전(纏)과 구(垢)에서 해탈하시고, 유상(有相)과 무상無相)을 여읜 청정한 진여로서 또한 다른 사람도 들어가게 하신다.
015_0237_a_08L趣無相法者顯示世尊能入無二殊勝功德謂自能入永離一切分別自相解脫一切煩惱纏垢離有無相淸淨眞如亦令他入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에 머문다’는 것은 세존께서 운(運)에 맡겨 부처님의 일을 지으시되 쉬지 않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공용(功用)이 없으셔도 유정을 이익되게 하시는 일에 간격이 있거나 끊어짐이 없이 성스러운 하늘과 범주(梵住)에 안주하는 까닭이다.
015_0237_a_11L住於佛住者顯示世尊任運佛事不休息住殊勝功德謂無功用利有情事無有閒斷安住聖天及梵住故
‘일체불의 평등성을 체득하시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법신 안에서 의거하는 바인 의요(意樂)와 업을 지음에 차별이 없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모든 부처님의 진여는 깨끗한 지혜와 모두를 이익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의요와 수용신과 변화신의 두 가지 이타(利他)의 일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015_0237_a_14L逮得一切佛平等性者顯示世尊於法身中所依意樂作業無別殊勝功德謂一切佛眞如淨智一切利益安樂意樂受用變化二利他事無差別故
‘장애 없는 곳에 이르시어’라는 것은 세존께서 이미 모든 장애되는 법의 대치(對治)를 닦으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이미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을 다스리는 성도(聖道)를 닦고 익혀서 이미 온갖 장애되는 곳을 해탈한 것이다. 의지하는 곳이고 나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곳’이라고 한 것이다.
015_0237_a_18L到無障處者顯示世尊已修一切障法對治殊勝功德謂已修習一切煩惱及所知障對治聖道已到解脫一切障所依所趣故名爲處
‘외도가 법을 퇴전시킬 수 없게 해서’라는 것은 세존께서 모든 외도들에게 굴복되지 않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가르침과 증득하신 법은 모두 다른 자들로 인해 퇴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015_0237_a_22L不可轉法者顯示世尊不爲一切外道所伏殊勝功德謂教證法皆不爲他所退轉故
015_0237_b_01L‘행하는 바에 걸림이 없으시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비록 세간에 태어나셔도 세간의 법에 걸림이 없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세간에 태어나셔도 이익 등의 여덟 가지 법4)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015_0237_b_01L所行無㝵者顯示世尊雖生世閒世法不㝵殊勝功德謂生世閒利等八法不能㝵故
‘그 성립하는 것이 불가사의하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정법을 안립하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12분의 뛰어난 교법은 모든 거칠고 미세한 생각이 행하는 곳을 멀리 여의어서 모든 어리석은 범부들이 능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니, 널리 일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설하시므로 ‘안립’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37_b_04L其所成立不可思議者顯示世尊安立正法殊勝功德謂十二分殊勝教法出過一切尋思所行非諸愚夫所能測度宣說一切自相共相故名安立
‘3세의 평등한 법의 성품에 노니시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능히 올바로 기별하시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3세에 유전한다는 구절의 뜻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생을 전전한다는 기별에 뒤바뀜이 없기 때문이다. 오고 감을 기별함이 모두 현재와 같아서 분명하여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평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37_b_08L遊於三世平等法性顯示世尊能正記別殊勝功德於三世流轉句義曾現當生展轉記別無顚倒故記別去來皆如現在明無倒故名平等
’그 몸이 온갖 세계에 흘러 퍼지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동시에 널리 일체 세계에 수용신과 변화신을 나타내 보이시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이른바 온갖 가없는 세계에 교화할 곳을 따라서 유리 등과 같은 미묘한 색신(色身)을 널리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015_0237_b_12L其身流布一切世界者顯示世尊同時普於一切世界示現受用及變化身殊勝功德謂於一切無邊世界隨所化宜現琉璃等妙色身故
‘모든 법에 대해 지혜가 의심하거나 머뭇거림이 없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모든 의심을 끊으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스스로도 분명하고 밝게 알며 나아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분명하고 밝게 알도록 하기 때문이다.
015_0237_b_16L於一切法智無疑滯者示世尊斷一切疑殊勝功德謂自決定乃能令他生決定故
‘모든 행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성취하셨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갖가지 행에 들어가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니, 이른바 교화할 중생들을 따라서 같은 부류의 몸을 널리 나투시며 그들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015_0237_b_18L於一切行成就大覺者顯示世尊入種種行殊勝功德謂隨所化有情所宜現同類身令彼入故
015_0237_c_01L‘모든 법과 지혜에 대해 의혹이 없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미래의 법을 요달해서 묘한 지혜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기와나 돌에 섞여 있는 세금(細金) 종자와 같은 미세한 선(善)의 종자는 성문 등의 경지를 훌쩍 넘어서 있으니, 이와 같은 경계에는 뒤바뀐 생각이 없음을 모두 두루 알기 때문이다.
015_0237_b_21L於諸法智無有疑惑者示世尊了達當來法生妙智殊勝功謂於出過聲聞等境微細善種如瓦石中細金種子如是等境無顚倒相皆遍知故
‘나타내신 몸은 분별할 수 없으며’라는 것은 세존께서 그 뛰어난 앎[勝解]을 따라 감응한 대로 나타내 보이시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이른바 불세존께서는 비록 마니구슬처럼 분별이 없지만, 모든 여래의 증상의 힘과 자신의 뛰어난 앎의 힘을 말미암기 때문에 금색 등과 같은 여래의 몸을 본다. 그러므로 모든 여래는 분별이 있지 않고 분별을 달리함도 없으니, 경에서 널리 설한 것과 같다. 혹은 그들 부류와 똑같아서 분별할 수 없다.
015_0237_c_02L凡所現身不可分別者顯示世尊隨其勝解如應示現殊勝功德謂佛世尊雖無分別如末尼珠由諸如來增上力故亦由自身勝解力故見如來身如金色等然諸如來無有分別無異分別廣說如經或同彼類不可分別
‘모든 보살이 올바르게 구하는 지혜이고’라는 것은 세존께 한량없이 귀의하고 교화 받는 중생들을 조복하는 방편의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한량없는 보살은 일체 유정을 조복하는 방편에 의거함을 말미암으니, 이는 여래의 증상력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정법을 들을 수 있고 사유와 수행으로 차례로 미묘한 지혜를 얻게 되며, 다른 부류의 보살을 부촉하고 섭수하여 전전 상속하여 끊임없이 구르는 것이다.
015_0237_c_08L一切菩薩正所求智顯示世尊無量所依所化有情調伏方便殊勝功德謂由無量菩薩所一切有情調伏方便此由如來增上力故得聞正法思修次第獲得妙異類菩薩攝受付囑展轉相續無閒而轉
‘부처님의 둘 아님을 얻어서 뛰어난 피안에 머물고’라는 것은 세존의 평등한 법신의 바라밀다를 가장 지극하고 두루 원만하게 성취하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이른바 부처님의 지위에는 둘 아닌 법신이 있어서 온갖 보시 등의 바라밀다가 평등하고 원만한 것이다.
015_0237_c_14L得佛無二住勝彼岸者顯示世尊平等法身波羅蜜多最極成滿殊勝功德謂於佛地無二法身一切施等波羅蜜多平等圓滿
’서로 뒤섞임이 없는 여래의 해탈인 묘한 지혜의 구경(究竟)’이라는 것은 세존께서 그 뛰어난 앎을 따라서 잡되지 않고 청정한 불국토를 나타내 보이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낸 것이다. 이른바 유정들에겐 뛰어난 앎의 차별이 있음을 관조해서 황금 등과 같은 불국토가 서로 뒤섞이거나 어지럽지 않음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015_0237_c_17L不相閒雜如來解脫妙智究竟者顯示世尊隨其勝解示現無雜淸淨佛土殊勝功謂觀有情勝解差別示現種種不相閒雜金等佛土
‘중간과 변제가 없는 부처님 경지의 평등함을 증득하여’라는 것은 세존의 세 가지 몸이 방위와 처소에 제한이 없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처음이나 가운데나 마지막이 없이 평등함을 증득하였으니, 모든 부처님의 세 가지 몸은 그 부처님 경지와 부처님 정토에 있을 뿐 온갖 방위나 처소의 제한이 있지 않다.
015_0237_c_21L證無中邊佛地平等者顯示世尊三身方處無有分限殊勝功德謂證平等無初中後諸佛三身於其佛地佛淨土中無有一切方處分限
015_0238_a_01L‘법계를 극(極)하고’라는 것은 세존께서 생사의 경계를 다하도록 언제나 나타나서 모든 유정의 이익과 안락함을 일으키고 지으시는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이 법계는 아주 청정하므로 생사의 경계를 다하도록 언제나 등류(等流)의 계경 등의 법을 일으켜서 미래세상에 교화할 유정을 위하여 감응하는 대로 때대로[如應如時] 항상 이익과 안락을 일으키고 짓는 것을 나타낸다.
015_0238_a_02L極於法界者顯示世尊窮生死際常現起作一切有情利益安樂殊勝功德謂此法界善淸淨故生死際常起等流契經等法爲當來世所化有情如應如時恒現起作利益安樂
‘허공의 성품을 다하고 미래세를 다하였다’는 것은 세존의 가없고 완전하고 뛰어난 공덕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이른바 허공이 항상 무궁무진한 것처럼 모든 부처님께서 법계에서 일어난 공덕도 마찬가지라서 무궁무진하다. 미래세에 다하는 시기가 있지 않듯이, 모든 유정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가행(加行)에도 쉼이 없다.
015_0238_a_07L盡虛空性窮未來際者顯示世尊無盡究竟殊勝功德謂如虛空常無窮盡諸佛法界所起功德亦復如是無窮盡故如未來際無有盡期利樂一切有情加行無休息故
모든 부처님의 공덕은 그 성품이 항상하고, 다함없는[無盡] 구경(究竟)은 그 성품이 무상(無常)이니, 상속함이 끊이지 않으면 다함없는 구경은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의 법신인 청정법계의 이성(理性:本性)의 공덕은 성품이 항상하기 때문에 수용신과 변화신 두 몸의 공덕도 성품은 비록 무상하지만 끊어지거나 다함이 없으므로 다함없는 구경이다.
015_0238_a_11L諸佛功德爲性是常無盡究竟爲性無常相續不斷無盡究竟不可定說以佛法身淸淨法界理性功德性是常故受用變化二身功德雖性無常無斷盡故無盡究竟
모든 여래께서 본래부터 크나큰 염원을 내셔서 유정을 위하기 때문에 대보리를 구하시는데, 만일 유정이 다하여 멸도를 얻으면 이때 모든 부처님의 유위 공덕은 어떻게 단멸하지 않는가? 모든 유정계는 일체가 다하여 멸도할 때가 있지 않으므로 부처님의 공덕에도 단멸함이 없다. 왜냐하면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015_0238_a_16L一切如來本發弘願爲有情故求大菩提若諸有情盡得滅度爾時諸佛有爲功德何不斷滅諸有情界無有一切盡滅度時故佛功德無有斷滅所以者何由法爾故
015_0238_b_01L무시이래로 일체 유정에게는 다섯 가지 성품이 있다. 첫째는 성문종성(聲聞種性)이고, 둘째는 독각종성(獨覺種性)이고, 셋째는 여래종성(如來種性)이고, 넷째는 부정종성(不定種性)이고, 다섯째는 무유출세공덕종성(無有出世功德種性)이다. 다른 경과 논에서 그 내용을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앞의 네 가지 종성을 분별하여 건립하면, 비록 시간의 제한은 없더라도 끝내 멸도할 시기를 얻게 되는데, 모든 부처님의 자비와 교묘한 방편 때문이다.
015_0238_a_20L無始時來一切有情有五種性聞種性獨覺種性如來種性不定種性無有出世功德種性餘經論廣說其相分別建立前四種雖無時限然有畢竟得滅度期佛慈悲巧方便故
다섯 번째 종성은 무유출세공덕의 원인이므로 끝내 멸도하는 시기가 있지 않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다만 그들을 위하여 방편으로 신통력을 나타내서 악한 갈래를 떠나고 선한 갈래로 나아가는 법을 설하신다. 그들이 비록 가르침에 의하여 부지런히 선인(善因)을 닦아서 사람의 세상에 태어나고 나아가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나게 된다고 해도 반드시 퇴전하여 온갖 악취에 다시 떨어지게 된다.
015_0238_b_03L第五種性無有出世功德因故畢竟無有得滅度期佛但可爲彼方便示現神通說離惡趣生善趣法彼雖依教勤修善因得生人趣乃至非想非非想處必還退下墮諸惡趣
모든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다시 신통을 나투어서 설법 교화하시면, 그들은 다시 선을 닦아서 선한 갈래에 태어나게 된다, 그러나 후에 퇴전하여 떨어져서 온갖 고뇌를 받게 될 때 모든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다시 그들을 구제하시니, 이와 같이 미래세가 다하도록 전전하지만 필경 멸도하게 할 수 없다.
015_0238_b_08L諸佛方便復爲現通說法教化彼復修善得生善趣後還退墮受諸苦惱諸佛方便復更拔濟是展轉窮未來際不能令其畢竟滅
비록 다른 경에서 일체 유정의 부류는 모두가 불성을 지니고 있어서 장래에 부처를 이루리라고 널리 설하지만, 그러나 진여 법신불(眞如法身佛)의 성품에 나아가거나 혹은 적은 부분의 일체 유정에 나아가서 방편으로 설한 것이다. 부정종성의 유정으로 하여금 반드시 무상정등보리과로 신속히 나아가게 하기 위하여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의 유정을 이익되고 즐겁게 하는 공덕에는 끊어짐이나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타(利他)의 덕은 자리(自利)의 덕에 의하여 끊임이 없게 되는 것이니, 여래의 유위공덕은 인(因)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비록 생각마다 멸하지만 끊어지거나 다함이 없는 것은 부처님 공덕의 다함없는 구경을 말미암음이니, 이 때문에 가장 깨끗한 깨달음을 성취하는 것이다.
015_0238_b_12L雖餘經中宣說一切有情之類皆有佛性皆當作佛然就眞如法身佛或就少分一切有情方便而說爲令不定種性有情決定速趣無上正等菩提果故由此道理諸佛利樂有情功德無有斷盡此利他德依自利德乃得無斷是故如來有爲功德從因生故雖念念滅而無斷盡由佛功德無盡究竟是故成就最淸淨覺
이 나머지의 모든 구절은 전부 이와 같이 하나하나 배속되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먼저 모든 부처님의 정토를 말하고 나중에 세존의 이와 같은 공덕을 말하는 것인가?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의 공덕은 정토에 의지함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세존께서는 깨끗한 불국토에 의지하여 이와 같은 덕을 갖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이 경을 설하는 것이다.
015_0238_b_20L其餘諸句皆應如是一一配屬何故先說諸佛淨土後說世尊如是功德爲顯如是諸佛功德依淨土故爲顯世尊依淨佛土具如是德說此經故
015_0238_c_01L다음으로 세존의 권속의 원만함을 나타낸다. 이른바 대성문 및 대보살이니 다른 경전 속에서 설하는 조순(調順:조화하고 순복함)이다, ‘조순’함으로서 권속의 해탈이 되고, 해탈로서 권속이 되니, 이것을 이름하여 ‘여래의 권속이 원만하다’고 하는 것이다.
015_0238_c_01L次顯世尊眷屬圓滿謂大聲聞及大菩薩餘經中說調順調順而爲眷屬解脫解脫而爲眷屬是名如來眷屬圓滿
이것은 한량없는 대성문의 무리와 한량없는 보살마하살이 함께 함을 말한 것이다. 일체를 조순해서 모두가 부처님 자식과 같고 모두가 대승에 머물면서 대승에 노니니, 이와 같은 차례로 성문과 보살 권속이 원만한 것이다.
015_0238_c_05L此說無量大聲聞衆無量菩薩摩訶薩俱一切調順皆佛子等皆住大乘遊大乘等如其次第聲聞菩薩眷屬圓滿
어찌하여 여기에서는 먼저 성문을 말하고 후에 보살을 말하는 것인가? 대승에 대하여 의혹을 일으키는 자를 위하여 그 의혹을 제거하기 위함이며, 부정종성의 보살을 이끌어서 결정된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함이며, 이미 청정해진 모든 대성문들로 하여금 자신이 존귀하다는 교만심을 버리게 하기 위함이니, 이른바 무리들 앞에서 대성문의 무리들은 세존을 가까이 대하고 친히 교화를 받기 때문이다.
015_0238_c_08L何故此中先說聲聞後說菩薩爲於大乘生疑惑者除彼疑故爲引不定種性菩薩生定信故爲已淸淨諸大聲聞捨於自身尊貴慢故謂於衆前大聲聞衆近對世尊親受化故
또 여러 성문들은 언제나 부처님을 모시기 때문이며, 형체가 부처님과 닮았기 때문이며, 내부의 권속이기 때문이다. 또 보살로 하여금 성문의 중생에게 공경심을 내게 하기 때문이니, 계경에서 말한 것처럼 “보살은 성문의 무리에게 공경심을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성문의 공덕을 찬탄함으로 말미암아 그 나머지 자들로 하여금 성문의 무리에게 깨끗한 믿음을 내게 하기 위함이다.
015_0238_c_13L又諸聲聞常隨佛故形同佛故內眷屬故又令菩薩於聲聞衆生恭敬故如契經言菩薩不應於聲聞衆不生恭敬由是讚歎聲聞功德亦令其餘於聲聞衆生淨信故
이 모임 중에는 또한 다른 무리가 있다. 법을 결집하는 자는 그 뛰어남 때문에 간략하게 두 무리로 설하였다. 경의 뒤에서 “세간의 천인, 아수라 등 일체 대중이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을 듣고 크게 환희하며 믿고 받들어 행하였다”고 한 것과 같다.
015_0238_c_17L於此會中亦有餘衆結集法者略說二衆以其勝故如經後言世閒天阿素洛等一切大衆聞佛所說皆大歡喜信受奉行
앞에서는 정토는 가장 지극하고 자재한 정식(淨識)을 상(相)으로 삼는다고 하였는데, 모임 가운데 성문과 같은 무리들이 있다면 서로 어긋나지 않겠는가? 어떤 어긋남이 있는가? 모든 성문 등을 보살과 똑같이 보기 때문에 어긋남이 이루어진다.
015_0238_c_21L前說淨土最極自在淨識爲相云何會中有聲聞等而不相違有何相違諸聲聞等同菩薩見故成相違
015_0239_a_01L만일 성문들도 또한 그렇게 본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 성문들이 비록 이 모임에 참여한다고 할지라도 깨끗하고 미묘한 업을 보는 것이 장애되는 것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앞을 못 보는 사람과 같으니, 이와 같이 깨끗하고 미묘한 경계를 비난하여 말해서는 안 된다.
015_0238_c_23L若聲聞等亦如是見可作是說諸聲聞等雖預此會障見淨妙業所㝵故猶如生盲不見如是淨妙境界不可難言
이미 능히 보지 못하면 그 무리에 있을 수 없다. 비록 이와 같이 깨끗하고 미묘한 세계를 보지 못하였다고 해도 예토(穢土)의 화신(化身)이 설하는 것은 보기 때문이니, 비록 같은 모임이라고 하여도 스스로의 업력으로 인해 보는 것은 각자 다르다. 마치 진금(眞金)을 보더라도 불[火]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한 곳에서 네 종류의 중생들이 각각 다른 것을 보는 것과 같다. 혹은 여래의 신통력의 가피로 잠시 미묘한 법을 설하시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이것은 바로 여래의 불가사의한 힘이기 때문에 논란할 수 없는 것이다.
015_0239_a_04L旣不能見不應在衆以雖不見如是淨妙而見穢土化身說故雖同一會自業力故所見各異如見眞金謂爲火等如於一處四種衆生各別見等或復如來神力加被令蹔得見聞說妙法此是如來不思議力不可
근(根)과 지(地)와 도(度) 등으로 교화하는 것 또한 허물이 아니니, 법을 설하는 모임을 장엄하고자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화작(化作)하거나 혹은 모든 보살이 화작되는 것이다.
015_0239_a_10L以根地度等化亦無過爲欲莊嚴說法會故或佛化作或諸菩薩之所化作

한량없는 대성문중과 함께 하시니, 모두가 조순(調順)해서 바로 부처님의 자식들이다. 마음이 잘 해탈하고 지혜가 잘 해탈하였으며, 계가 아주 청정해서 법의 즐거움을 나아가 구하였다. 많이 듣고 들은 뒤에 지녔으며, 그 들은 것을 쌓아 모았다. 생각해야 할 것은 잘 생각하였고, 설해야 할 것은 잘 설하였고, 지어야 할 것은 잘 지었다.
015_0239_a_12L經曰與無量大聲聞衆俱一切調順皆是佛子心善解脫慧善解脫戒善淸淨趣求法樂多聞聞持其聞積集善思所思善說所說善作所作
첩혜(捷慧)와 속혜(速慧)와 이혜(利慧)와 출혜(出慧)와 승결택혜(勝決擇慧)와 대혜(大慧)와 광혜(廣慧) 및 무등혜(無等慧)의 혜보(慧寶)를 성취하고 3명(明)을 구족하였다. 으뜸가는 현존의 법에 즐거이 머묾[第一現法樂住]을 빨리 얻었으며, 크고 깨끗한 복전이고 위의가 고요했으며, 큰 인욕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움을 성취하되 줄어듦이 없었다. 그리고서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잘 받들어 행하였다.
015_0239_a_16L捷慧速慧利慧出慧勝決擇慧大慧廣慧及無等慧慧寶成就具足三明逮得第一現法樂住大淨福田威儀寂靜大忍柔和成就無減已善奉行如來聖教
015_0239_b_01L
‘한량없는 대성문중’이란 그 수가 매우 많아서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므로 한량없다고 하는 것이며, 부처님의 말씀과 음성을 듣고서 성스러운 길에 들어섰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출가승인 까닭에 중(衆)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두 지극히 예리한 근기[利根]의 바라밀다 종성인 성문이므로 ‘대(大)’라고 하는 것이다.
015_0239_a_21L論曰無量大聲聞衆者其數甚多難可算計故名無量聞佛言音而入聖故名聲聞竝出家僧故名爲衆切皆是最極利根波羅蜜多種性聲故名爲大
어떤 사람은 모두가 무학과위(無學果位)에 있기 때문에 ‘대(大)’라고 한다고 말하며, 참다운 뜻은 모두가 부정종성의 성문이라서 작은 과(果)를 얻은 뒤에 큰 보리로 나아갔으므로 ‘대’라고 하는 것이며, 혹은 무리의 수가 많으므로 ‘대’라고 하니 지금의 대중(大衆)과 같다.
015_0239_b_03L有義皆住無學果位故名爲大如實義者皆是不定種性聲得小果已趣大菩提故名爲大衆數多故名爲大如今大衆
‘모두가 조순해서’라는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유학(有學)이 견(見)을 여의어 백두 가지 분별추중번뇌(分別麤重煩惱)를 끊게 되어서 어긋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마치 훌륭한 말과 같아서 ‘조순(調順:잘 길들여짐)해서’라고 말한다.
015_0239_b_06L一切調順者有義有學離見所斷一百一十二種分別麤重煩惱不𢤱悷故猶如良馬名爲調順
어떤 사람은 무학(無學)이 견(見)을 여의어 백스물여덟 가지 번뇌의 끊음을 닦아서 딱딱하지 않은 것이 마치 순금과도 같으므로 ‘조순해서’라고 말한다고 한다.
참다운 뜻으로는 모두가 바로 보리종성에 회향해서 일체를 잘 감당하고 큰 과보를 향해 나아가면서 부처님의 뜻에 따라 굴러가는 것이 마치 총명한 코끼리와 같으므로 ‘조순해서’라고 하는 것이다.
015_0239_b_09L有義無學離見修斷一百二十八種煩惱不剛强故猶如眞金名爲調順如實義者皆是迴向菩提種性一切堪能發趣大果隨佛意轉如聰慧象故名調順
부처님의 가르침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가 성스러운 길에 태어났으므로 ‘부처님의 자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모두가 세존의 입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바른 법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모두가 대성문에 나아가 능히 부처님의 종자를 끊어지지 않게 하므로 부처님의 자식이라고 말한다고 한다.
015_0239_b_13L由佛教力彼聖道生故名佛子如說皆從世尊口生正法生故有義皆是趣大聲聞能紹佛種令不斷絕故名佛子
‘마음이 잘 해탈하였다’는 것은 삼계의 탐욕을 떠났기 때문이니, 마치 탐욕을 떠나서 마음이 해탈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지혜가 잘 해탈하였다’는 것은 이미 온갖 더럽게 물든 무명을 떠났기 때문이니, 마치 무명을 여의고 지혜가 해탈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015_0239_b_16L心善解脫者離三界貪故如說離貪心得解脫慧善解脫者已離一切染污無明故如說離於無明慧得解脫
‘계가 아주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계경에서 “6지(支)를 모두 갖춘 것을 계가 아주 깨끗해졌다고 한다. 이른바 깨끗한 시라(尸羅:持戒)에 머물러 스스로를 잘 지키고 보호하며, 별해율의궤칙(別解律儀軌則)5)의 행해야 할 것을 모두 다 구족하고, 미세한 죄에 대해서도 커다란 두려움을 보며, 학처(學處)를 익히고 배우는 것이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혹은 다시 모두가 무루계를 얻기 때문에 이름하여 아주 청정하다고 한다.
015_0239_b_19L戒善淸淨者如契經說具足六支名戒善謂住淨尸羅善自防守別解律儀軌則所行皆悉具足於微細罪見大怖畏受學學處或復皆得無漏戒故名善淸淨
015_0239_c_01L참다운 뜻은 무학위에 머물러 대승에 회향하고 스스로 계를 깨끗이 하고 보살계를 닦으므로 아주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법의 즐거움을 나아가 구한다’는 것은 바른 법을 구할 때에 커다란 즐거움으로 나아가고자 하니, 이른바 부처님의 보리는 다른 일을 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구할 때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즐겁게 하고자 함이니, 구하는 것에 허물이 없으며 사악한 위의(威儀)를 여의는 것이다.
015_0239_c_01L如實義者住無學位迴向大乘自分戒淨修菩薩戒故名善淨趣求法樂者求正法時欲趣大樂佛菩提不求餘事或求法時爲令他樂無求過意離惡威儀
참다운 뜻은, 이 대성문이 오로지 법의 즐거움을 구할 뿐 이름을 날리거나 이익이나 공경을 위하지 않고 한량없는 경전의 처음과 중간과 끝을 모두가 능히 들어서 받아들이므로 이름하여 ‘많이 듣는다’고 한다.
들은 뜻에 따라서 모두 능히 기억해 지니면서 잃어버리지 않게 하므로 ‘듣고 지닌다’고 한다.
015_0239_c_05L如實義者大聲聞專求法樂不求名聞利養恭無量經典初中後分皆能聽受名多聞隨所聞義皆能憶持令不忘故名聞持
글과 뜻을 거듭 익혀서 견고하게 머물도록 하므로 ‘그 들은 것을 쌓아 모은다’고 한다.
세간의 어리석은 범부들은 생각해야 할 것을 나쁘게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나쁘게 말하며, 지어야 할 것을 나쁘게 짓는다. 그러나 출세간의 성현들은 그들의 법을 뛰어넘어서 그들과는 서로 어긋나나니, 그러므로 ‘생각해야 할 것을 잘 생각하고, 말해야 할 것을 잘 말하며, 지어야 할 것을 잘 짓는다’고 하는 것이다.
015_0239_c_09L數習文義令其堅住故說名其聞積集世閒愚夫惡思所惡說所說惡作所作出世聖者過彼法與彼相違是故說名善思所善說所說善作所作
세 가지 업이 청정하고 지혜의 행을 따라서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과 비나야의 뜻에 빨리 들어가므로 첩혜(捷慧:민첩한 지혜)라고 한다. 곧 이 법과 비나야의 많은 뜻에 들어가므로 속혜라고 한다. 능히 많이 행하는 것을 속(速)이라고 이름하기 때문이다.
015_0239_c_13L三業淸淨隨智慧行於佛所說法毘奈耶速入其故名捷慧卽於此中多入其義名速慧能多行者說名速故
미세한 뜻에 들어가므로 ‘이혜’라고 한다. 능히 생사를 벗어나는 미묘한 지혜를 얻으므로 ‘출혜’라고 한다. 이 지혜는 능히 열반의 요인(了因)이 되므로 ‘승결택혜’라고 한다. 훌륭하게 결택하기 때문에 승결택이라고 하나니, 이것은 곧 열반이다. 이 지혜가 능히 그것의 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015_0239_c_16L入微細義故名利慧得能出離生死妙慧故名出慧此慧能爲涅槃了因是故說名勝決擇慧勝決擇故名勝決擇卽是涅槃此慧能爲彼了因故
그것에 의지하여 이름을 세우고 문답을 결택하는 것이 끝없으므로 ‘대혜’라고 한다. 깊고 광대하고 원만하며 잘 통달하기 때문에 ‘광혜’라고 한다. 어떤 판본에서는 매우 깊고 미묘한 지혜[甚深妙慧]를 설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은 도저히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음을 일컫는다. 연근(軟根) 등에 비해 모든 성문의 무리는 이 지혜가 뛰어나므로 이름하여 ‘무등혜’라고 한다.
015_0239_c_20L依彼立問答決擇無窮盡故名爲大慧廣圓滿善通達故名爲廣慧有本復說甚深妙慧謂他不能窮其底故軟根等諸聲聞衆此慧勝故名無等
015_0240_a_01L이 지혜는 능히 최상의 뜻을 부르므로 이름하여 혜보(慧寶)라고 하는데, 모든 성문이 이 혜보를 갖추므로 이름하여 ‘혜보를 성취한다’고 한다.
015_0240_a_02L此慧能招最上義故名爲慧寶諸聲聞具此慧寶是故說名慧寶成
‘3명(明)을 구족한다’는 것은 이른바 무학(無學)의 세 가지 신통[明]을 얻는 것이다. 어떤 것을 무학의 3명이라고 하는가? 첫째는 지난 세상을 기억하는 신통력이고, 둘째는 자기뿐 아니라 다른 이의 나고 죽는 것을 아는 신통력이고, 셋째는 번뇌[漏]가 다하는 신통력이다. 무학으로서 근기가 예리한 사람이 얻는 세 가지 신통은 물들거나 물들지 않은 3세의 어리석음을 없애므로 3명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015_0240_a_04L具足三明者謂得無學三種明故云何名爲無學三明宿住隨念智證通明死生智證通明漏盡智證通明無學利根所得三通除染不染三際愚故說有三明
어떤 사람은 “명(明)이란 혜(慧)를 성품으로 삼아서 혜가 능히 어두움을 없애므로 명이라고 한다”고 말하며, 또 어떤 사람은 “어리석지 않은 선근(善根)을 성품으로 삼으니 무명을 뒤엎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015_0240_a_08L有義明者以慧爲性慧能除闇故說爲明有義無癡善根爲性飜無明故
‘으뜸가는 현존의 법에 즐거이 머묾[現法樂住]을 빨리 얻는다’는 것은 물러나지 않는 뛰어난 정려(靜慮)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크고 깨끗한 복전이다’라는 것은 번뇌를 영원히 여읜 것이 마치 세간의 좋은 밭이 커다란 열매를 빨리 생장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위의가 고요하다’라는 것은 모든 위의가 바른 앎에 머물기 때문이다.
015_0240_a_10L逮得第一現法樂住者證得不退勝靜慮故大淨福田者永離煩惱如世良田速能生長廣大果故威儀寂靜者一切威儀正知住故
‘큰 인욕으로 온화함과 부드러움을 성취하되 줄어듦이 없다’는 것은 괴로움을 감내하여 도리어 함께 머물기 때문이다.
‘이미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잘 받들어 행하였다’는 것은 모든 행해야 할 것을 이미 원만히 하였기 때문이다.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본래 유정을 생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함인데, 이 모든 성문의 지위는 무학의 자리에 올랐으므로 생사를 모두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잘 받들어 봉행하는 것이다.
015_0240_a_14L大忍柔和成就無減者苦堪耐易共住故已善奉行如來聖教者諸有所作已圓滿故如來聖教本爲有情出生死苦是諸聲聞位登無學皆出生死故善奉行如來聖教
만약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거듭 법을 설하시는가? 큰 보리로 회향케 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성문들은 전부 무학에 머물고 있어서 이번 한 생(生)의 과보를 다하면, 반드시 영원히 멸하는 무여열반에 들어가서 적정하고 안락한 것이 부처님과 다를 것이 없게 된다. 이는 다른 논에서 설하는 것과 같다.
015_0240_a_18L若爾何故復爲說法爲令迴向大菩提故是諸聲聞皆住無學盡此一報必入永滅無餘涅槃寂靜安樂與佛無異如餘論說
그런데 어찌하여 그를 대보리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서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움을 받게 하는가? 변역위(變易位) 중에서 온갖 괴로움의 느낌[苦受]이 없다면 이것에 어떤 허물이 있는가? 행고(行苦)가 있으므로 이것은 커다란 허물이 된다.
015_0240_a_22L何故引彼趣大菩提長時受苦變易位中無諸苦受斯有何過行苦有故是爲大過
015_0240_b_01L비록 이 괴로움을 거쳐서 여래의 세 가지 몸의 공덕으로 큰 기쁨과 큰 즐거움을 얻게 한다면 허물이 아니다. 모든 큰 즐거움 중에서 열반이 가장 크다. 그가 이미 증득한 뒤에 다시 무엇 때문에 보리열반을 구태여 구하겠는가? 비록 적멸의 안락이 있다고 하여도 즐거움을 받지 않으며, 3보리의 즐거움은 즐거움을 받는 등의 한량없는 공덕을 끊는 것인데, 어찌하여 행고를 가지고 유위의 즐거움을 받겠는가? 유위의 무루는 열반과도 같으니, 이것은 무루이기 때문에 행고에 포섭되지 않는다.
015_0240_b_01L雖經此苦令得如來三身功德大喜大樂故無有過一切大樂不過涅槃彼已證得復何所少更求菩提涅槃雖有寂滅安樂而無受樂三菩提樂斷受樂等無量功德何用行苦有爲樂耶有爲無漏猶如涅槃是無漏故非行苦攝
또 만일 부처를 이루어 능히 교화해서 한량없이 교화 받는 유정이 생사를 벗어나기 때문이라면, 이미 성불한 자는 이것을 능히 하지 못하는가? 무시이래로 중생법이 그러하니 능히 교화하고 교화 받는 종자의 성품이 서로 속해 있다. 서로 속해 있지 않다면 교화할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여래의 갖가지 방편은 모든 유정을 교화하여 부처의 과보를 얻게 하며 저 교화 받을 자를 교화하는 것이다.
015_0240_b_07L又若成佛能化無量所化有情出生死故已成佛者無此能耶無始時來衆生法爾能化所化種性相屬不相屬者卽無化能是故如來種種方便化諸有情令得佛果化彼所化
만약 그렇다면 성문은 일곱 생을 없애거나, 혹은 한 생을 없애거나, 혹은 상계(上界)의 곳곳에서 한 생을 없애거나, 나머지 일체 생에서 비택멸(非擇滅)을 얻거나, 혹은 일체의 생이 모두 비택멸인데, 어찌하여 다시 3무수겁을 거치면서 보리의 인을 닦은 뒤에 부처를 이루는가? 비록 모든 번뇌가 적시는 분단(分段)의 몸이 인을 수행하여 비택멸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원력으로 말미암아 변역(變易)의 생을 받아서 3무수겁 동안 보리의 인을 닦으니 과실이 없다.
015_0240_b_12L若爾聲聞或除七生或除一生或除上界處處一生餘一切生得非擇滅或一切生皆非擇滅云何更經三無數劫修菩提因而得佛耶雖諸煩惱所潤分段得非擇滅而由願力受變易生三無數劫修菩提因無有過失
‘비택멸’이란 온갖 연이 갖추어 있지 않으면 이때에는 끝내 생하지 않지만 영원히 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비록 오랜 시간 동안 생사에 머물러 있어도 정원력(定願力)을 말미암아 생인(生因)을 자량하여 감응함으로서 그 공능으로 하여금 많은 때에 과(果)를 생하게 하니, 곧 이 한 몸이 전전(展轉)하며 더욱 훌륭해지면서 급기야 성불에까지 이른다. 마치 연수법(延壽法:수명을 연장하는 법)은 다시 생을 받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논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015_0240_b_18L非擇滅者衆緣不具於此時中畢竟不生非永不生彼雖長時住在生死由定願力資感生因令其功能多時生果卽此一身展轉增勝乃至成佛如延壽法更不受生故論說言
015_0240_c_01L
문 보리에 회향하는 성문은 무여의열반계에 머물다가 무상정등보리를 발하여 나아가는가, 그렇지 않으면 유여의열반계에 머무르는가?
015_0240_b_23L迴向菩提聲聞爲住無餘依涅槃界發趣無上正等菩提爲住有餘依涅槃界耶

답 오직 유여의열반계에 머무르는 일만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무여의열반계에서는 모든 사업(事業)을 일으키는 것을 멀리 여의어서 모든 공용(功用)이 그치면서 쉬기 때문이다.
015_0240_c_02L唯住有餘依涅槃界中可有此事所以者何以無餘依涅槃界中遠離一切發起事業一切功用皆悉止息

문 만일 오직 유여의열반계에만 머물다가 무상정등보리를 발하여 나아간다면, 어떻게 단지 한 생만을 거쳐서 무상정등보리를 얻는다는 것인가? 왜냐하면 아라한 등은 오히려 한 생도 남아 있지 않거늘 어찌하여 많은 생의 상속이 있겠는가?
015_0240_c_05L若唯住有餘依涅槃界中發趣無上正等菩提者云何但由一生便能證得無上正等菩提所以者何阿羅漢等尚當無有所餘一生何況當有多生相續

답 그가 요컨대 마땅히 온갖 수행(壽行)6)을 늘린다면 능히 이룰 수 있다. 세존께서 다분히 이 보리에 회향하는 성문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써 말씀하시기를 “만약 4신족(神足)을 잘 닦는다면 능히 1겁이나 혹은 나머지 1겁을 머물 수 있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나머지 1겁이란 여기서의 뜻으로 말한다면 1겁을 넘는 것이다.
015_0240_c_10L由彼要當增諸壽行方能成辦世尊多分依此迴向菩提聲密意說言若有善修四神足已住一劫或餘一劫餘一劫者此中意說過於一劫
그가 비록 이와 같이 수행을 늘려서 무상정등보리를 발하여 나아간다고 해도 닦는 행은 지극히 느리고 둔하게 이루어져서 열반을 즐기기 때문에 처음으로 마음을 내어서 업을 닦기 시작한 보살과 같지 않다. 그(보살)는 이미 이와 같이 수명을 늘리는 행을 마쳤으므로 근(根)이 있는 색신에 머물면서도 따로 화신(化身)을 짓는 것이다.
015_0240_c_14L彼雖如是增益壽行趣無上正等菩提而所修行極成遲樂涅槃故不如初心始業菩薩旣如是增壽行已留有根身別作化
동법(同法)이란 무여의열반계 속에서 앞의 방편을 나타내 보여서 반열반하는 것이다.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생각하기를 ‘아무개 존자가 무여의열반계에서 반열반하셨다’고 한다. 그가 남긴 근이 있는 실제의 몸[有根實身]은 바로 이 세계인 섬부주에서 그 즐거워하는 바를 따라 멀리 여의면서 머문다. 모든 하늘도 오히려 능히 볼 수 없거늘 어찌 다른 중생이 능히 보겠는가?
015_0240_c_18L同法者前方便示現於無餘依涅槃界中而般涅槃由此因緣皆作是某名尊者於無餘依涅槃界中已般涅槃彼以所留有根實身卽於此界贍部洲中隨其所樂遠離而住切諸天尚不能睹何況其餘衆生能
015_0241_a_01L 그가 열반에서 매우 즐겁게 머물기 때문이다. 이 세계 저 세계를 두루 유행하며 불보살을 친근히 공양하면서 보리의 자량(資糧)을 닦아 익히는 여러 성도(聖道)에까지 미쳤을 때 만약 방일(放逸)하면 그때 모든 불보살이 거듭거듭 깨우쳐준다. 그가 깨우친 뒤에는 수행에서 더 이상 게을러질 수가 없게 된다.
015_0241_a_01L彼於涅槃多樂住故於遍遊行彼彼世界親近供養佛菩薩中及於修習菩提資糧諸聖道中若放逸時佛菩薩數數覺悟彼覺悟已於所修行能不放逸
또다시 보리에 회향하는 성문은 학위(學位)에서 성문의 서원을 구하던 것을 능히 버리거나 혹은 무학위에서 비로소 능히 버리나니, 그의 근(根)의 성품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기다리는 온갖 연(緣)에도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015_0241_a_05L復次迴向菩提聲聞於學位卽能棄捨求聲聞願或無學位方能棄捨由彼根性有差別故待衆緣有差別故
이와 같이 만약 무학위에 있으면서 보리에 회향하는 것은 정원력(定願力)을 말미암으니, 자주자주 앞 단계를 바탕으로 현재 몸의 인[現身因]을 감응하여 오랜 시간 동안 생(生)의 과(果)를 상속케 함으로서 차츰 더 훌륭해지면서 나아가 성불에까지 이르면 공능도 바야흐로 다한다. 이 과보가 비록 친유루인(親有漏因)의 감응이라고 해도 무루정원(無漏定願)의 도움을 말미암기 때문에 이름하여 부사의변역생사(不思議變易生死)7)라고 한다. 무루정원은 부사의하기 때문이다.
015_0241_a_08L如是若在無學位中迴向菩提由定願力數數資昔感現身因令於長時生果相續漸漸增乃至成佛功能方盡此報雖親有漏因感然由無漏定願資助名不思議變易生死無漏定願不思議故
만일 유학위가 보리에 회향하면 혹은 수번뇌(隨煩惱)가 생(生)의 세력을 감응한다. 그 생을 감응하고 나서는 최후의 생에서 모든 번뇌를 항복시키고 정원력을 일으켜서 다음 생의 몸의 인[後身因]을 돕는데, 앞의 도리와 같이 나아가서 성불에까지 이른다.
015_0241_a_13L有學位迴向菩提或隨煩惱感生勢感彼生已於最後生伏諸煩惱定願力資後身因如前道理乃至成
혹은 회심(廻心)하고 나서는 즉시 번뇌를 조복시키고 정원력을 일으켜서 현재 몸의 인을 돕는데, 앞의 도리와 같이 나아가서 성불에까지 이른다. 모두가 무루정원으로 도움을 받는다.
번뇌가 아닌 것은 모두가 부사의변역신(不思議變易身)에 포섭되지만, 번뇌의 힘으로 감응을 받는 것은 이숙분단신(異熟分段身)에 포섭된다. 만일 성문을 말하면 이것은 화신이 지은 것이니, 이와 같은 문답은 분별할 필요가 없다.
015_0241_a_17L或迴心已卽伏煩惱起定願力資現身因如前道理乃至成佛諸用無漏定願資助非煩惱者皆不思議變易身攝若煩惱力所感異熟分段身若說聲聞是化所作不須如是問答分別
015_0241_b_01L
다시 한량없는 보살마하살이 있으니, 그들은 모든 부처님의 국토로부터 이 모임에 와서 모였다. 모두가 대승에 머물고 있으며 대승법에서 노닐고 있어서 모든 중생들에 대해 그 마음이 평등하며 온갖 분별과 불분별(不分別)과 갖가지 분별을 여의었다. 온갖 악마의 원한을 꺾었고 모든 성문과 독각의 생각에 매인 분별을 멀리 여의었다. 광대한 법 맛의 기쁨과 즐거움을 지녔으며, 다섯 가지 두려움을 넘어섰고 오로지 불퇴전의 지위로 들어갔다. 모든 중생의 온갖 고뇌로 핍박받는 처지를 쉬게 함으로서 현전(現前)하였는데, 묘생(妙生)보살이 우두머리가 되었다.
015_0241_a_22L經曰復有無量菩薩摩訶薩從諸佛土俱來集會皆住大乘遊大乘法諸衆生其心平等離諸分別及不分別種種分別摧諸魔怨遠離一切聲聞獨覺繫念分別廣大法味喜樂所超五怖畏一向趣入不退轉位諸衆生一切苦惱所逼迫地而現在妙生菩薩而爲上首

‘보살마하살’이란 것은 이른바 모든 살타(薩埵)는 보리를 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3승에 통하지만 대(大)를 골라서 취하였기 때문에 반드시 다시 마하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 보리살타를 반연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에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이익뿐 아니라 남의 이익을 구하려는 큰 소원을 모두 갖추고서 큰 보리를 구하며 유정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015_0241_b_07L論曰所言菩薩摩訶薩者謂諸薩埵求菩提故此通三乘爲簡取大故須復說摩訶薩言又緣菩提薩埵爲境故名菩薩具足自利利他大願求大菩提利有情故
또 ‘살타’란 용맹하다는 뜻이다. 용맹하게 정진하여 큰 보리를 구하는 것이므로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든 지위에 통하지만 지금은 지상(地上)의 모든 대보살을 취하기 때문에 다시 마하살이라고 하는 것이다.
어찌하여 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가? 중생의 경솔하고 오만한 마음을 버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015_0241_b_12L又薩埵者是勇猛義精進勇猛求大菩提故名菩薩此通諸位今取地上諸大菩薩是故復說摩訶薩言何故讚說菩薩功德爲捨衆生輕慢心故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성문의 무리가 오래도록 수행함을 찬탄하는 것이니, 모든 보살의 무리는 마땅히 경배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깨끗한 믿음을 일으키게 하기 위함이니, 보살이 오히려 이와 같은 공덕을 갖고 있거늘 하물며 여래이겠는가? 이렇게 보살의 덕을 찬탄하는 가운데 모든 보살에게 세 가지 큰 일[三大]이 있으므로 마하살이라고 이름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첫째는 수대(數大)로서 ‘한량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덕대(德大)로서 이른바 ‘대승에 머물고 대승에 노니는 등등’이라는 것이다. 셋째는 업대(業大)로서 이른바 ‘중생의 모든 고뇌를 쉬게 한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니, 유정을 이익되고 즐겁게 하는 것이 보살의 업이다.
015_0241_b_16L有作是言讚聲聞衆久修梵行諸菩薩衆應當敬禮又令衆生起淨信故菩薩尚有如是功德何況如來於此讚說菩薩德中顯諸菩薩有三大事名摩訶薩一者數大以無量故二者德大謂住大乘遊大乘等三者業大謂息衆生諸苦惱故利樂有情是菩薩業
015_0241_c_01L‘모든 부처님의 국토로부터 이곳에 와서 모였다’는 것은, 이른바 시방의 갖가지 불국토로부터 법을 듣기 위하여 함께 와서 법회에 모였다는 것이다. 또 응당 이 사바세계의 보살도 와서 모였지만 결집(結集)하는 자는 다만 타방(他方)의 보살이 와서 모인 것만을 말하였는데, 이는 모임에 와서 법을 듣기를 구하지 않는 자들의 게으름과 교만함을 대치(對治)하기 위함이다.
015_0241_b_23L從諸佛土俱來集會者謂從十方種種佛土爲聽法故俱來集會亦應有此索訶世界菩薩來集而結集者但說他方菩薩來爲欲對治懈怠憍慢不來集會求聞法故
이와 같이 보살이 타방에서 오는 것은 스스로 법을 구하여 듣는 것이지 다른 이의 이끌림에 의한 것이 아니며, 이들 모두는 전부 큰 위신력을 갖추었다. 아주 멀리 떨어진 다른 세계로부터도 오는데 하물며 가까운 이들이 와서 모이지 않겠는가?
앞에서 성문의 무리가 와서 모였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다른 곳에서 모두 법회에 와서 모였기 때문에 이곳의 보살도 있다는 걸 알지만, 다만 생략하여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015_0241_c_05L如是菩薩從彼方來自求聞法非他所引一切皆具大威神力從他界極遠方來何況其餘而不來前聲聞衆不說來集在此方故說他方俱來集會故知亦有此方菩但略不說
덕대(德大)에 대해서 간략히 말하자면, 아홉 가지 덕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정진대(精進大)이다. 이른바 ‘모두가 대승에 머문다’는 것이니, 정진의 힘을 인하여 대승에 안주해서 유정의 괴로움을 없애주고 제도함으로서 나고 죽음을 여의게 하고 나아가 스스로 위없는 보리로 나아가게 한다.
015_0241_c_10L就德大中應知略說九種德大精進大謂皆住大乘由精進力安住大乘拔濟有情令離生死及自發趣無上菩提
둘째는 인대(因大)이다. 이른바 ‘대승법에 노닌다’는 것이니, 즉 10지(地) 등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등을 인하여 차츰 노닐게 된다.
015_0241_c_13L因大謂遊大乘法卽十地等以聞思修等漸次而
셋째는 소연대(所緣大)이다. 이른바 ‘모든 중생에게 그 마음이 평등하다’는 것이니, 곧 모든 유정에 대하여 자기와 남이 평등함을 얻게 되고 대자(大慈) 등으로써 방편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015_0241_c_15L所緣大謂於諸衆生其心平等卽於一切有情得自他平等以大慈等平等方便故
넷째는 시대(時大)이다. 이른바 ‘모든 분별 및 불분별과 갖가지 분별을 떠났다’는 것이니, 어느 때라도 마치 한 생각인 것처럼 평등하게 전전한다. 겁(劫)을 분별이라고 이름한다.8) 일체에서 겁이거나 겁 아닌 것의 분별을 끊었기 때문이고, 겁과 겁 아닌 것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능히 오랫동안 수행하여도 싫증내지 않는다.
015_0241_c_17L時大謂離諸分別及不分別種種分別卽於一切時猶如一念平等而轉劫名分別以於一切劫與非劫分別斷故以不分別劫與非劫故能長時修行無厭
다섯째는 무염대(無染大)이다. 이른바 ‘온갖 악마의 원한을 꺾는다’는 것이니, 온갖 섭수되는 것을 버리기 때문에 능히 악마의 원한을 꺾을 수 있는 것이다. 설한 바처럼 보살이 만일 모든 섭수되는 일을 견실되지 않다고 알아서 마음으로 탐하고 구하지 않으면 능히 모든 악마의 원한을 꺾을 수 있다.
015_0241_c_21L無染謂摧諸魔怨以捨一切所攝受故能伏魔怨如說菩薩若於一切所攝受事知不堅實心不貪求卽能摧伏一切魔怨
015_0242_a_01L여섯째는 작의대(作意大)이다. 이른바 ‘모든 성문과 독각이 생각에 매인 분별을 멀리 여읜다’는 것이니, 이것은 원분(遠分)이니 모든 2승의 작의(作意)를 끊어 없애는 것이다.
015_0242_a_02L作意大謂遠離一切聲聞獨覺繫念分別卽是遠分斷除一切二乘作意
일곱째는 임지대(任持大)이다. 이른바 ‘광대한 법 맛의 기쁨과 즐거움을 지니고’라는 것이다. 즉 대승법의 맛의 기쁨과 즐거움을 먹이로 삼는다는 것이다.
015_0242_a_04L任持大謂廣大法味喜樂所持卽用大乘法味喜樂爲食
여덟째는 청정대(淸淨大)이다. 이른바 ‘다섯 가지 두려움을 넘어선다’는 것이니, 즉 세 가지 업이 청정하여 모든 두려움을 넘어서는 것이다. 계 등을 범하거나 온갖 악취와 같은 두려움의 원인이 없기 때문이다. 다섯 가지 두려움이란, 첫째는 불활외(不活畏)이고, 둘째는 악명외(惡名畏)이고, 셋째는 사외(死畏)이고, 넷째는 악취외(惡趣畏)이고, 다섯째는 겁중외(怯衆畏)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두려움은 청정의요지(淸淨意樂地)를 얻을 때에 모두 멀리 여의게 된다.
015_0242_a_05L淸淨大謂超五怖畏卽三業淸淨出諸怖畏無犯戒等諸惡趣等怖畏因故五怖畏者一不活畏二惡名畏三死畏四惡趣畏五怯衆畏如是五畏證得淸淨意樂地時皆已遠離
아홉째는 증득대(證得大)이다. 이른바 ‘오로지 불퇴전의 지위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즉 일체지기별지(一切智記別地)를 얻을 때 오로지 퇴전하지 않는 것이다. 앞의 7지9) 중에서는 오히려 가행과 공용의 운전(運轉)이 있어서 아직 불퇴전의 공용이 없는 도[無功用道]를 얻지 못하지만, 그 나머지의 여러 지(地)에서는 가행과 공용의 운전이 없이 오로지 불퇴전의 지위에 들어간다. 불퇴전의 지위인 공용이 없는 도에 오로지 들어가니, 이 때문에 오로지 불퇴전의 지위에 들어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015_0242_a_10L證得大謂一向趣入不退轉位卽得一切智記別地時一向不退前七地中猶有加行功用運轉未得不退無功用道其餘諸地得無加行功用運一向趣入不退轉地以不退地無功用道一向趣入是故說名一向趣入不退轉地
업대(業大)에 대해서는, ‘모든 중생의 온갖 고뇌로 핍박받는 처지를 쉬게 함으로서 현전하였는데’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보살이 능히 온갖 유정의 안팎의 고뇌와 핍박을 쉬게 하는 지위에 현전하였다는 것이다. 이 지위 중에는 대비(大悲)와 대자(大慈)가 있으니, 이 두 가지를 말미암아 능히 온갖 내적인 병 등의 고통과 외적인 가난함 등의 괴로움에 핍박받는 것을 쉬게 하였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는 유정의 이익과 즐거움을 많이 짓기 때문에 이것을 얻은 것을 이름하여 업대라고 한다.
015_0242_a_17L就業大中息諸衆生一切苦惱所逼迫地而現在前者謂諸菩薩能息一切有情內外苦惱逼迫地位現前此地中有大悲大慈由此二種能息一切內病等苦外貧等惱之所逼迫此二多作有情利樂故得此者名爲業大
015_0242_b_01L다시 ‘대승에 머문다’는 것은 이른바 초지(初地)에 머물러서 진법계(眞法界)10)에 두루함을 증득했을 때에 처음으로 진실한 대승법을 얻기 때문에 대승에 머문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대승법에 노닌다’는 것은 이른바 제2지에서 보살의 3취계(聚戒)11)를 수행하는 것이니 대승행법이 바로 3취계이다.
‘모든 중생에 대해 그 마음이 평등하다’는 것은 이른바 제3지에서 온갖 뛰어난 선정을 얻는 것이니, 4무량을 일으켜서 모든 유정을 평등하게 이롭고 즐겁게 하기 때문이다.
015_0242_a_23L復次皆住大乘者住初地證得遍滿眞法界時初得眞實大乘法故名住大乘遊大乘法者謂第二地修行菩薩三聚戒故大乘行法卽三聚戒於諸衆生其心平等謂第三地得諸勝定發四無量平等利樂諸有情故
‘모든 분별 등을 여읜다’는 것은 이른바 제4지에서 37보리분법을 얻어서 온갖 분별과 불분별과 갖가지 분별을 떠나는 것이다. 온갖 분별이란 견도위(見道位)에서 끊어져야만 하는 분별아견(分別我見)12)이니, 초지에서 이미 여의었다. 불분별이란 수도위(修道位)에서 끊어져야만 하는 구생아견(俱生我見)13)이니, 이 지위에서 여읜다. 즉, 이 두 가지에 상응하는 온갖 법들을 이름하여 갖가지 분별이라고 하나니 이해와 실행[解行]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록 앞뒤가 처소를 여의어 다하였다고 하더라도[離盡處] 전체적으로 말하면 제4정(定)에서 괴로움과 즐거움을 여의었다14)고 설하는 것과 같고, 제3의 과보가 5하분결(下分結)15)을 여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015_0242_b_06L離諸分別等者第四地得三十七菩提分法離諸分別及不分別種種分別諸分別者見所斷分別我見初地已離不分別卽修所斷俱生我見此地中離此二種相應諸法名種種分別行解異故雖前後離盡處摠說如第四定說離苦樂如第三果離五下分
어떤 사람은 이 지위가 제7식에 있는 구생번뇌를 전부 멀리 여의었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이 지위가 제6식에 있는 구생아견을 전부 멀리 여읜 것으로서 제7식이 아니라고 한다. 7지(地)에 와서 오히려 미세한 번뇌의 현행이 있는데, 만약 제7식이 없다면 마땅히 물들거나 의거함도 없어야 하며 마땅히 앞의 5식(識)과 비슷하지도 않아야 한다. 제7식의 미세한 혹(惑)을 이미 멀리 여의었다면, 5ㆍ6ㆍ7지에서는 6식의 거친 혹이 마땅히 현행하지 말아야 하니, 곧 유가와 해심밀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015_0242_b_13L有義此地第七識中俱生煩惱一切遠離有義此地第六識中俱生我見一切遠離非第七識以七地來猶有微細煩惱現行若無第七應無染依應不似五第七細惑若已遠離五六七地六識麤惑應不現行卽違瑜伽解深密說
015_0242_c_01L 또 만약 2승(乘)의 금강유정에서 제7식의 혹과 6식의 가장 미세한 번뇌가 일시에 함께 끊어진다면, 어떻게 여기에서 제7식의 미세한 번뇌가 먼저 끊어지고 후에 6식의 거친 번뇌를 여읜다는 것인가? 그러므로 4지(地)는 무아지(無我智)를 얻어서 의식(意識)에 있는 구생아견을 멸하지만, 제7식의 미세한 번뇌 및 6식 중의 다른 수도위에서 끊어야 할 미혹은 아직 여의지 못하였다. 이것은 항복받고 여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영원히 멸하는 것이 아니다. 제10지의 금강심(金剛心)에 이르러 바야흐로 단박에 단멸하게 되는데, 그 종자를 닦아서 끊기 때문이다.
015_0242_b_20L又如二乘金剛喩定第七識惑與六識中最細煩惱一時俱斷云何此中先離第七微細煩惱後離六識麤煩惱耶是故四地得無我智滅意識中俱生我見未離第七微細煩惱及六識中餘修斷惑此說伏離非是永滅至第十地金剛心時方頓斷滅修斷種故
‘온갖 악마의 원한을 꺾는다’는 것은 이른바 제5지에서 4성제가 모두 평등한 성품임을 관해서 집취(執取)16)와 생사와 열반의 차별이라는 악마의 원한을 꺾어서 항복받는 것이다.
‘모든 성문과 독각의 생각에 매인 분별을 멀리 여읜다’는 것은 이른바 제6지(地)에서 12지(支)의 염정연기(染淨緣起)가 모두 평등한 성품임을 관해서 더럽게 물든 것에는 싫어하는 마음을 내고 깨끗한 것에는 기뻐하는 2승의 생각에 얽매인 분별을 멀리 여의는 것이다.
015_0242_c_04L摧諸魔怨者謂第五地觀四聖諦皆平等性摧伏執取生死涅槃差別魔怨遠離一切聲聞獨覺繫念分別者謂第六地觀十二支染淨緣起皆平等性遠離二乘厭患雜染欣樂淸淨繫念分別
‘광대한 법 맛의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다’는 것은 이른바 제7지에서 형상이 없는 이치를 증득하여 공(空)의 지혜 속에서 뛰어난 행[勝行]을 일으켜 커다란 법의 즐거움을 받는 것이다.
‘다섯 가지 두려움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이른바 제8지에서 모든 번뇌가 다시는 현행하지 않고 다섯 가지 두려움의 원인을 여의는 것을 이름하여 다섯 가지 두려움을 뛰어넘는다고 한다. 다섯 가지 두려움의 과보는 초지에서 이미 여의었다.
015_0242_c_09L廣大法味喜樂所持者謂第七地證無相理於空智中起有勝行受大法樂超五怖畏者謂第八地一切煩惱不復現行離五怖因名超五怖五怖畏果初地已離
‘오로지 불퇴전의 지위에 들어간다’는 것은 이른바 제9지에서 반드시 제10지 보살의 온갖 행이 원만해진 불퇴전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모든 중생을 쉬게 한다 등등’이라는 것은 이른바 제10지에서 큰 법신(法身)을 얻고는 대비(大悲)의 구름을 일으켜 큰 법의 비를 내려서 모든 중생의 괴로움과 핍박받는 일을 없애주는 것이다.
015_0242_c_13L一向趣入不退轉位者謂第九地決定趣入第十菩薩衆行圓滿不退轉息諸衆生等者謂第十地得大法起大悲雲雨大法雨息除一切衆生苦惱所逼迫事
다시 이와 같은 열 구절의 경전 문구는 10도피안(到彼岸)17)과 10대원(大願)18) 등에 또한 배속된다. 초지로부터 하나하나의 지위에 모든 지행(地行)이 두루 거두어지기 때문이다.
015_0242_c_18L復次如是十句經十到彼岸十大願等亦應配釋初地上一一地中普攝一切諸地行
015_0243_a_01L‘묘생보살이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것은 이른바 능히 원만한 공덕의 온갖 삼마지를 발하여 일으키므로 묘생(妙生)보살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 삼마지를 얻기 때문에 묘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다. 보살의 이름은 대부분이 법에 의지하기 때문이니, 마치 자씨(慈氏) 등과 같다. 이 무리 가운데에는 묘생보살이 가장 으뜸이기 때문에 우두머리로 삼는 것이다.
015_0242_c_21L妙生菩薩而爲上首者謂能發起圓滿功德諸三摩地名爲妙生菩薩得此三摩地故立妙生號以菩薩名多依法故如慈氏等於此衆中妙生菩薩最第一故名爲上首
그러므로 이하에서는 오직 묘생에게만 고해서 설한 바를 일으켰지만, 이 경에서는 생략했기 때문에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을 들었다. 나머지 무리들의 모임은 다만 그 숫자를 들었을 뿐이니, 법을 결집하는 자의 뜻에 따라 생략했기 때문이다.
015_0243_a_02L是故次下唯告妙生發起所說此經略故唯列一名所餘衆會但擧其數結集法者意在略故
佛地經論卷第二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있는 그대로의 것. 진여에 속하는 성품을 가리킨다. 또는 진여를 의미하기도 한다.『해심밀경』에는 “여소유성에는 다시 일곱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이니, 이른바 모든 행이 앞뒤의 성품이 없는 것이다. 둘째는 상진여(相眞如)이니, 이른바 모든 법의 보특가라무아성(補特伽羅無我性:人無我性)과 법무아성(法無我性)이다. 셋째는 요별진여(了別眞如)이니, 이른바 모든 행이 오직 식(識)의 성품인 것이다. 넷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설한 모든 고성제이다. 다섯째는 사행진여(邪行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설한 모든 집성제이다. 여섯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이니, 이른바 내가 설한 모든 멸성제이다. 일곱째는 정행진여(正行眞如)이니, 내가 설한 모든 도제이다”(大正藏 16.699下)라고 설명하고 있다.
  2. 2)두루 널리 퍼져 있는 것. 모든 현상계의 차별된 모습. 진(盡)이란 모든 일체를 다한다는 뜻이다.『해심밀경』에는 “진소유성이란 이른바 모든 잡염청정법 중에서 모든 온갖 품별변제(品別邊際)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진소유성이라고 하며, 5수온(數蘊)과 6수내처(數內處)와 6수외처(數外處)와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
  3. 3)주야육시(晝夜六時)란, 하루의 시간을 이른 아침[晨朝]ㆍ낮[日中]ㆍ해질 무렵[日沒]ㆍ초저녁[初夜]ㆍ한밤중[中夜]ㆍ늦은 밤[後夜]의 여섯 단계로 나눈 것이다.
  4. 4)세속의 8법(法)은 이(利)와 상(喪), 칭(稱)과 기(譏).예(譽)와 훼(毁), 낙(樂)과 고(苦)인데, 이 여덟 가지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안정되지 못하게 한다.
  5. 5)바라제목차(波羅提木叉)의 한역이다. 그릇된 것을 막고 악한 것을 멈추게 한다는 뜻으로 수계작법에 따라서 많은 계를 실천하여 몸과 입과 뜻의 악업을 떠나는 것이다. 개별적으로 계를 지킴에 의해서 전체적으로 해탈을 얻는다. 많은 계가 완비된 것을 구족계라고 하며, 별해탈율의 또는 별해탈계라고도 한다.
  6. 6)오랜 수명을 갖게 해주는 잠재력을 말한다.
  7. 7)삼계 생사의 몸을 떠난 후 성불에 이르기까지 계외(界外)의 생사를 가리킨다. 이것은 소지장을 조연(助緣)으로 하여 무루의 대원(大願)과 대비(大悲)의 업을 일으켜서 감득하는 미세하고 뛰어난 과보이므로 부사의변역생사라고 한다. 무루의 비원력(悲願力)에 의해서 분단생사(分段生死)의 조잡한 몸을 전(轉)하여 미세하고 무한한 몸을 받으므로 변역이라고 하며, 무루의 정원력(定願力)으로 도움을 받아서 일어나는 뛰어난 작용이 헤아리기 어려우므로 부사의라고 한다.
  8. 8)원측(圓測)『해심밀경소(海深密經疏)』, “범음(梵音)으로 겁갈파(劫羯波)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분별(分別)이 된다. 유위법은 시겁(時劫)에 포섭되며 분분차별(分分差別)한 것을 분별이라고 한다. 무위법은 비시겁(非時劫)에 포섭되며 시겁의 분분차별이 있지 않은 것을 불분별이라고 한다.”(卍續藏 34.4.320左上).
  9. 9)초지에서 7지까지는 수행의 노력[功用]이 필요하므로 공용지(功用地)라고 하며, 8지 이상은 무공용지(無功用地)라고 한다. 또한 7지는 불퇴전지라고 하지만 경론(經論)에 따라서 의견이 분분하다.
  10. 10)생멸하거나 변하고 달라지는 모양을 영원히 여읜 법계이다.
  11. 11)대승의 보살이 지녀야만 하는 계법으로 섭율의계(攝律儀戒)ㆍ섭선법계(攝善法戒)ㆍ요익유정계(饒益有情界)의 세 가지 항목이다. 요익유정계는『범망경』등에서는 섭중생계(攝衆生戒)라고 한다.
  12. 12)후천적인 번뇌로서 사악한 스승이나 그 가르침 또는 그릇된 사유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13. 13)태어날 때부터 항상 따라다니는, 나라고 집착하는 견해이다.
  14. 14)4선(禪) 가운데 괴로움도 즐거움도 없는 생각이 평등한 경지인 제4 선정을 가리킨다.
  15. 15)하분(下分)이란 욕계를 말하고, 결(結)은 번뇌의 다른 이름이다. 욕계에 연결되어 있는 다섯 가지 번뇌, 즉 탐욕ㆍ성냄ㆍ유신견(有身見]ㆍ계금취견(戒禁取見)ㆍ의심이 있는 한 중생은 욕계에서 태어나게 되는데, 이것을 끊으면 욕계에 돌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불환과(不還果)는 사문의 네 가지 과보 가운데 세 번째에 속하므로 제3의 과보라고 하였다.
  16. 16)집취상(執取相). 앞 단계인 상속상(相績相)에 의해서 괴로움이나 즐거움 등의 경계인 인지하고 깊이 집착을 일으키는 것이다.
  17. 17)도피안은 피안에 이른다는 뜻으로 바라밀과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10도피안은 10바라밀다를 말한다.
  18. 18)보현보살의 10대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