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佛地經論卷第三

ABC_IT_K0554_T_003
015_0243_b_01L불지경론 제3권
015_0243_b_01L佛地經論卷第三


친광 지음
015_0243_b_02L親光菩薩等造
현장 한역
이미령 번역
015_0243_b_03L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이때 세존께서 묘생보살에게 이르셨다.
“묘생이여, 마땅히 알아라. 다섯 가지 법이 대각지(大覺地)를 포섭하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청정법계(淸淨法界)ㆍ대원경지(大圓鏡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성소작지(成所作智)이다.
015_0243_b_04L經曰爾時世尊告妙生菩薩妙生當有五種法攝大覺地何等爲五謂淸淨法界大圓鏡智平等性智觀察智成所作智

이와 같이 교기인연분(敎起因緣分)을 이미 설명하였고, 다음에는 성교소설분(聖敎所說分)을 나타내고자 한다.
015_0243_b_08L論曰如是已說教起因緣分次當顯示聖教所說分
오직 묘생보살 한 사람에게만 이르셨다는 것은 묘생보살이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받은 것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성문의 무리에게는 이르시지 않았는가? 모든 보살들이 오롯한 의지로 일체지(一切智)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이며, 이와 같은 법을 듣고서 뛰어난 앎을 일으켰기 때문이며, 뛰어난 앎을 일으킨 뒤에는 능히 그곳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며, 그곳으로 들어간 뒤에는 능히 올바르게 수행하기 때문이며, 올바르게 수행한 뒤에는 빨리 이루기 때문이다.
015_0243_b_10L唯告妙生一菩薩者由是最勝教所被故何故不告聲聞衆耶以諸菩薩專意悕求一切智故聞如是法生勝解故生勝解已能趣入故旣趣入已能正行故正修行已速成辦故
성문은 능히 일체지를 구하지 못하나니, 비록 능히 구하는 자가 있다고 해도 이와 같은 법을 듣고서 뛰어난 앎을 일으키지 못하며, 비록 뛰어난 앎을 일으킨다고 하여도 능히 올바르게 행하지 않으며, 비록 능히 올바르게 행한다고 해도 빨리 이루지 못하니,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르시지 않는 것이다.
015_0243_b_15L聲聞不能求一切智雖有能求聞如是法不生勝解雖生勝解不能正行雖能正行不速成辦故不告彼
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경을 설할 때에 온갖 무리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는가? 당시의 무리가 가장 높고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유정들을 화작(化作)하였으니, 보리에 회향하는 성문으로 하여금 대승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대중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끈 것이다. 혹은 모든 보살이 이 이름을 나타내서 지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015_0243_b_18L若爾何故說此經時預在衆會爲顯時衆最高大故化作此類爲令迴向菩提聲聞發趣大故引令入衆或諸菩薩現作此名故不相違
015_0243_c_01L간략하게 말하면 4상(相)을 말미암아서 불지(佛地)를 안립하니, 첫째는 숫자를 말미암고, 둘째는 섭수함을 말미암고, 셋째는 이름을 말미암고, 넷째는 결택차별(決擇差別)의 뜻을 말미암는다. 여기에서는 다만 숫자와 섭수함과 이름과 차별을 설한다.
015_0243_b_21L略由四相安立佛地由數故攝故由名故由決擇差別義故今於此中且說數攝及名差別
첫째, 숫자를 말미암는다는 것은 소위 ‘다섯 가지 법이 있는’ 것이니, 나중에 자상(自相)을 설하면 그 숫자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어찌하여 숫자를 말하는가? 결정(決定)하기 위함이다. 오직 다섯 가지 법만이 있을 뿐 늘거나 줄지 않는다. 법이란 곧 자상을 지니는 뜻이지 사랑할 만한 과보의 이숙(異熟)의 뜻은 아니다.
015_0243_c_02L一由數者謂有五種法後說自相數自顯何故說數爲決定故唯有五法不增不減法者卽是持自相義與可愛果異熟義
둘째, 섭수함을 말미암는다는 것은 소위 ‘대각지(大覺地)를 포섭한다’라고 한 것이다. 대각이란 바로 부처로서 세 가지 몸을 갖추었으니,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이요,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이요,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이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015_0243_c_06L二由攝者謂攝大覺地大覺是佛具三種身一者自性二者受用三者變化後當廣說
지(地)란 이른바 대각이 의지하는 바이자 섭수하는 바이자 행하는 바의 경계로서 자상과 소연(所緣)의 차별을 안립하나니 일체법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소연을 안립함은 일체를 포섭하는 걸 말하고, 자상을 안립함은 오직 자체를 거두어서 하나로 합하기 때문이다.
대각지에는 가없는 공덕이 있는데 간략하게 말하면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유위(有爲)이고 둘째는 무위(無爲)이다.
015_0243_c_08L地謂大覺所依所攝所行境界安立自相所緣差別以一切法爲境界故安立所緣言攝一切安立自相唯攝自體合爲一故大覺地中無邊功德略有二種一者有爲二者無爲
무위공덕은 정법계에 포섭된다. 정법계란 바로 진여의 무위공덕이다. 모두가 바로 진여의 체상(體相)이 차별된 것이다. 유위공덕은 4지(智)에 포섭된다. 무루위(無漏位) 중에서 지(智)의 용(用)이 강하기 때문에 지(智)로써 이름을 나타내니, 일체종(一切種)의 심(心)과 심소유법(心所有法)과 그 품류(品類)이다.
만약 진실한 뜻에 대해서 말한다면 하나하나의 지품(智品)은 모든 공덕법문을 두루 포섭한다.
015_0243_c_13L無爲功德淨法界攝淨法界者卽是眞如無爲功德皆是眞如體相差別有爲功德四智所攝無漏位中智用强故以智名顯一切種心心所有法及彼品類若就實義一一智品具攝一切功德法門
만약 거친 모양[麤相]에 대해서 말한다면 묘관찰지는 4념주(念住)를 포섭하나니, 모든 몸 등의 법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평등성지는 4정단(正斷)과 4무량(無量)을 포섭하나니, 4정단이 비록 정진을 그 자성으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여래의 평등성지에 섭수되는 바이기 때문에 높고 낮은 모양의 차별이 없다. 4무량이란 평등하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지혜에 포섭되는 것이다.
015_0243_c_19L若就麤相妙觀察智攝四念住觀察一切身等法故平等性智攝四正斷及四無量以四正斷雖用精進爲其自性而由如來平等性智所攝受故無高下相四無量者平等行故此智所攝
015_0244_a_01L 4여의족(如意足)은 삼마지를 자성으로 삼기 때문에 관찰지에 포섭되는데, 모든 다라니문과 삼마지문을 임지(任持)한다고 아래의 경에서 설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 나머지 정려ㆍ해탈ㆍ등지(等持)1)ㆍ등지(等至)2)ㆍ다라니문ㆍ삼마지문ㆍ무쟁(無諍)ㆍ원지(願智)3)ㆍ통무애해(通無礙解)ㆍ여래의 열여덟 가지 불공불법(不共佛法)과 역무외(力無畏) 등 많은 부분이 묘관찰지에 포섭된다.
015_0244_a_01L四如意足以三摩地爲自性故觀察智攝任持一切陁羅尼門三摩地門下經說故如是其餘靜慮解脫等持等至陁羅尼門三摩地門無諍願智通無㝵解如來十八不共佛法無畏等多分攝在妙觀察智
신경지통(神境智通)의 많은 부분은 성소작지에 포섭된다.
015_0244_a_06L神境智通多分攝在成所作智
누진지통(漏盡智通)과 누진지력(漏盡智力)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누진의 상속 중에 네 가지 지혜에 포섭되는 바가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누(漏)가 다한 열반을 연한다면 많은 부분이 대원경지와 평등성지에 포섭된다고 한다.
015_0244_a_07L漏盡智通漏盡智力若說漏盡相續中有四智所攝若說彼緣漏盡涅槃多分攝在大圓鏡智平等性智
제7 변행(遍行)과 행지력(行智力)은 네 가지 지혜에 포섭된다.
혜(慧) 등의 근(根)들과 혜 등의 역(力)들은 많은 부분이 대원경지와 평등성지에 포섭된다. 각지(覺支)와 도지(道支)는 많은 부분이 평등성지에 포섭된다. 괴로움 등의 10지(智)4)와 진무루(眞無漏)5)는 많은 부분이 대원경지와 평등성지에 포섭된다.
015_0244_a_10L第七遍行行智力者四智所攝慧等諸根慧等諸力多分攝在大圓鏡智平等性智覺支道支多分攝在平等性智苦等十智眞無漏者多分攝在大圓鏡智平等性智
무망실법(無忘失法)은 많은 부분이 대원경지에 포섭된다. 일체 습기(習氣)의 상속을 영원히 끊는 것은 많은 부분이 청정법계와 대원경지에 포섭된다.
바라밀다는 만일 이것이 무루이거나 또는 유루와 비슷하다면 많은 부분이 뒤의 두 가지 지혜(청정법계와 대원경지)에 포섭된다.
온갖 상(相)의 수호(隨好)는 많은 부분이 성소작지에 포섭된다.
015_0244_a_15L無忘失法多分攝在大圓鏡智永斷一切習氣相續多分攝在淸淨法界大圓鏡智波羅蜜多若是無漏若似有漏多分攝在後二智中諸相隨好多分攝在成所作智
나머지 부처님 법은 그 응하는 바에 따라 상응하여 포섭된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지혜는 모든 불지(佛地)에 고루 포섭된다.
무루심과 심법(心法)이 구유법(俱有法)6)이거나 품류의 차별을 변현(變現)한 것이라면 청정법계는 진여 위 모든 상(相)의 공덕(功德)을 포섭한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법은 모든 불지의 공덕을 고루 포섭한다.
015_0244_a_19L其餘佛法如其所應隨相應攝如是四智具攝一切佛地無漏心及心法若俱有法若所變現品類差別淸淨法界攝眞如上諸相功德是故五法具攝一切佛地功德
015_0244_b_01L셋째는 이름을 말미암는 것이다. 이른바 청정법계와 나아가 성소작지까지 자세히 설하고 있다. 청정법계는 이른바 모든 번뇌나 소지(所知)의 객진장구(客塵障垢)를 여의고 온갖 유위ㆍ무위 등의 법이 뒤바뀌지 않는 참다운 성품으로서 모든 성스러운 법이 생장하는 의인(依因:의거하는 요인)이다.
015_0244_b_01L三由名者謂淸淨法界廣說乃至成所作智淸淨法界者謂離一切煩惱所知客塵障垢一切有爲無爲等法無倒實性一切聖法生長依因
모든 여래의 진실(眞實) 자체는 무시이래로 자성이 청정해서 시방계의 극미진수보다 많은 성품과 상(相)의 공덕을 가지가지 갖추고 있고, 생하거나 멸하지 않는 것이 허공과도 같아서 모든 법과 모든 유정에 두루하며 평등하게 공유하고, 모든 법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모든 상과 모든 분별과 모든 명언(名言)을 여의고 있어서 모두가 능히 얻을 수 없다.
015_0244_b_05L一切如來眞實自體無始時來自性淸淨具足種種過十方界極微塵數性相功德無生無滅猶如虛空遍一切法一切有情平等共有與一切法不一不異非有非無離一切相一切分別一切名言皆不能得
오직 이 청정한 성지(聖智)가 증득하는 이공무아(二空無我)에 의해 현양된 진여(眞如)를 그 자성으로 삼는데, 모든 성현은 일부분만을 깨닫지만 모든 부처님께서는 원만히 깨달으신다. 이와 같은 것을 청정법계라고 이름한다.
015_0244_b_11L唯是淸淨聖智所證二空無我所顯眞如爲其自性諸聖分證諸佛圓證如是名爲淸淨法界
‘대원경지(大圓鏡智)’란, 이른바 모든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과 모든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에 대한 분별을 여의는 것이다. 반연된 행상(行相)은 요달해 알 수 없지만 어리석지도 않고 잊지도 않으니, 모든 경계는 분별로는 알 수 없다.
015_0244_b_14L大圓鏡智者謂離一切我我所一切所取能取分別所緣行相不可了知不愚不忘一切境界不分別
경상(境相)의 차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짬이나 끊어짐이 없으며, 모든 번뇌의 장애나 더러움의 유루종자를 영원히 여의어서 모든 청정한 무루공덕 종자의 원만함을 성취하며, 온갖 경계의 모든 지(智)의 영상(影像)을 능히 나투고 능히 낳으며, 모든 신토(身土)7)의 영상이 의지하는 바이며, 온갖 불지의 공덕을 지니어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끓어지거나 다함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대원경지라고 한다.
015_0244_b_17L境相差別一切時方無閒無斷離一切煩惱障垢有漏種子一切淸淨無漏功德種子圓滿能現能生一切境界諸智影像一切身土影像所任持一切佛地功德窮未來際無有斷盡如是名爲大圓鏡智
015_0244_c_01L‘평등성지(平等性智)’란 이른바 자타 모두를 평등하게 관하여 대자대비와 언제나 함께 상응한다. 영원히 짬이나 끊어짐이 없이 불지의 무주열반(無住涅槃)을 건립하며, 모든 유정들이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서 수용하는 신토(身土)의 갖가지 영상을 나타내 보인다. 이는 묘관찰지와는 의지하는(인식대상으로 삼는) 바를 공유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평등성지라고 한다.
015_0244_b_22L平等性智者謂觀自他一切平等大慈大悲恒共相應常無閒斷建立佛地無住涅槃隨諸有情所樂示現受用身土種種影像妙觀察智不共所依如是名爲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란, 이른바 모든 경계의 차별을 관하되 언제나 장애가 없으며, 온갖 다라니문과 삼마지문과 모든 미묘한 선정 등을 섭수하여 갈무리한다. 대중의 모임에서 능히 온갖 자재한 작용을 나투면서 모든 의심을 끊고 대법우(大法雨)를 내리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묘관찰지라고 한다.
015_0244_c_04L妙觀察智者謂於一切境界差別常觀無㝵攝藏一切陁羅尼門三摩地門諸妙定等於大衆會能現一切自在作用斷一切疑雨大法雨如是名爲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란 이른바 능히 모든 세계에 두루하면서 교화해야 할 바를 따라 중생을 성숙시키며, 갖가지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변화사(變化事)를 나타내 보인다. 방편으로 모든 유정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되 영원히 짬이나 끊어짐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성소작지라고 한다.
015_0244_c_08L成所作智者謂能遍於一切世界隨所應化應熟有情示現種種無量無數不可思議佛變化事方便利樂一切有情常無閒斷如是名爲成所作智
다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법을 건립하나니, 인(因)이기 때문이고 과(果)이기 때문이고 과차별(果差別)이기 때문이다.
015_0244_c_12L復次建立如是五法因故果故果差別故
‘인’이란 바로 청정법계이니, 이것은 성스러운 법을 능히 낳고 기르는 인이기 때문이다. ‘과’란 성스러운 지혜이니, 그것을 반연하여 생하고 그것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 성스러운 지혜의 과의 차별에 네 가지가 있다. 일어남을 따라 건립하는 것이 이른바 법계를 반연함이니, 일체를 임지(任持)하여 들은 법을 따르기 때문이고, 모든 유정들을 관하여 자타의 평등성을 증득하였기 때문이고, 올바른 법과 뛰어난 방편을 열어 보이기 때문이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인(因)이기 때문이다.
015_0244_c_14L因者卽是淸淨法界是能生長聖法因故果謂聖智緣彼生故依止彼故此聖智果差別有四隨起建立謂緣法界任持一切隨聞法故於諸有情證得自他平等性故開示正法勝方便故利他因故
015_0245_a_01L다시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법을 건립하나니, 부처님 자체이기 때문이고 인이기 때문이고 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자체’란 것은 청정진여를 체상(體相)으로 삼기 때문이고, 나아가 이 경계를 반연하는 무분별지를 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이란 모든 유정들에게 영원히 짬이나 끊어짐이 없는 한량없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이다. ‘과’란 이른바 일체 유정들을 이익케 하는 두 가지 수승한 지혜이니, 교화할 만하거나 교화할 만하지 못한 유정을 관찰하는 묘관찰지(妙觀察智)와 그 마땅함을 따르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이다.
015_0244_c_19L復次建立如是五法佛自體故因故果故佛自體者淸淨眞如爲體相故及緣此境無分別智爲體相故因謂無量常無閒斷於諸有情平等性智果謂饒益一切有情二殊勝智觀察可化不可化故隨其所宜成所作故
다시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법을 건립하니, 이른바 불지 과위(果位)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니, 즉 지단(智斷)8)의 과는 불지의 체가 된다. 단과(斷果)는 바로 청정법계이니 온갖 장애를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지과(智果)에 네 종류가 있으니 대원경지 등이다. 불과지(佛果地)에서 모든 심(心)ㆍ심법(心法)의 분위(分位)가 나타내는 모든 공덕 중에 지(智)가 가장 훌륭하므로 지로써 이름을 삼으니 온갖 유위의 덕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
015_0245_a_02L復次建立如是五法謂於佛地果位差別卽智斷果爲佛地體斷果卽是淸淨法界於中一切障永斷故智有四種大圓鏡等於佛果地諸心心法分位所現諸功德中智最殊勝以智爲名摠攝一切有爲德故
다시 이와 같이 설한 법문은 다섯 가지 법을 건립한다. 불지(佛地)와 모든 불법을 전부 포섭하고 무위의 온갖 공덕을 다 거두기 때문이고, 들어서 훈습된 것[聞熏習)을 성숙시켜 일체 불지가 거둔 모든 공덕을 임지하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들에게 언제나 부처님의 이익과 안락과 평등한 일을 나타내고 일으키기 때문이고, 다라니문과 삼마지문과 가없고 한량없는 복과 지혜의 장엄이 끝까지 따르기 때문이며, 능히 온갖 유정들을 위한 이익과 안락함의 변화사(變化事)를 이루기 때문이다.
015_0245_a_08L復次如是所說法門建立五法摠攝佛地一切佛法摠攝無爲諸功德故聞熏成熟任持一切佛地所攝諸功德故於諸有情常現起佛利益安樂平等事故陁羅尼門三摩地門無邊無量福智莊嚴所隨逐故能成一切利樂有情變化事故
다시 이와 같이 설한 네 가지 지혜는 어떤 법을 전(轉)하여 얻는가?『섭대승』의 설에 의하면, 식온(識蘊)을 전하여 얻는다고 한다. 어찌하여 심(心)을 전하여 심법(心法)을 얻거나 심법을 얻지 않는 것인가? 네 가지 무루심은 지혜와 상응하기 때문에 임시로 이름하여 지(智)라고 하는 것이다.
015_0245_a_15L復次如是所說四智轉何法得『攝大乘』說轉識薀得何故轉心而得心法非得心法四無漏心智相應故假說名智
그러므로 논(論)의 설명에서 “정지(正智)는 실유(實有)라고 말해야 하는가, 가유(假有)라고 말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니, “둘 다 있다고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여기서의 지(智)란 바로 실유이고, 지의 권속인 온갖 심(心)ㆍ심법(心法)도 지라고 이름하지만 가(假)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두 종류가 있는 것이다.
015_0245_a_19L故論說言問正智當言實有言假有答當言俱有此中智是實有若智眷屬諸心心法亦名爲智說之爲假故有二種
여기에서 무루심ㆍ심법 등은 지(智)를 주체로 삼기 때문에 모두 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식온에 의지함을 전변해서 네 가지 무루지상응심을 얻는 것을 대원경심(大圓鏡心)이라고 하고 나아가 성소작심(成所作心)이라고 한다.
015_0245_a_22L此中無漏心心法等智爲主故皆說名智轉識薀依得四無漏智相應心謂大圓鏡心廣說乃至成所作心
015_0245_b_01L제8식을 전하여 대원경지상응심을 얻으니, 능히 온갖 공덕의 종자를 지니고 모든 신토(身土)와 지(智)의 영상(影像)을 능히 나투고 낳는다.
제7식을 전하여 평등성지상응심을 얻으니, 2집(執)9)의 자타분별을 멀리 여의어서 일체의 평등성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015_0245_b_02L轉第八識得大圓鏡智相應心能持一切功德種子能現能生一切身土智影像故轉第七識得平等性智相應心遠離二執自他差證得一切平等性故
제6식을 전하여 묘관찰지상응심을 얻으니, 능히 일체를 관하되 모두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5현식(現識)을 전하여 성소작지상응심을 얻으니, 능히 바깥의 이루어야 할 일을 모두 이루어 나투기 때문이다.
015_0245_b_06L轉第六識得妙觀察智相應心能觀一切皆無㝵轉五現識得成所作智相應心現成辦外所作故
또 어떤 사람은 제6식을 전하여 성소작지를 얻고, 5현식을 전하여 묘관찰지를 얻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으니 차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법을 설하여 의심을 없애며 두루 관찰하는 것은 5식(識)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사위(生死位) 가운데 네 가지 상응품(相應品)의 심(心)과 심법(心法)을 전거(轉去)하여서 불과(佛果)의 네 가지 상응품의 심과 심법을 전득(轉得)하나니, 이 모두를 지(智)라고 말한다.
015_0245_b_09L復有義者轉第六識得成所作轉五現識得妙觀察不應爾非次第故說法除疑周遍觀察非五用故如是轉去生死位中相應品心及心法轉得佛果四相應品心及心法皆說名智
다시 이와 같이 설한 4지(智)의 상응심품은 무엇을 소연(所緣)으로 삼는가?
015_0245_b_14L復次如是所說四智相應心品爲何所緣
대원경지상응심품은 만약 1상(相)을 말한다면, 오직 진여의 무분별지를 반연할 뿐 후득지에 반연되지 않나니, 그 반연된 행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구상(具相)을 말한다면 일체법을 반연하나니,『장엄론(莊嚴論)』에 의하면 대원경지는 일체의 소지경계(所知境界)에서 보편적으로 어리석거나 혼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한다. 이 경에서 “둥근 거울을 의지하여 온갖 영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으니, 이와 같이 여래의 지혜 거울에 의지(依止)하여 모든 처(處)와 경계와 식(識)의 온갖 영상이 나타난다.
015_0245_b_16L大圓鏡智相應心品若一相說唯緣眞如無分別智非後得智所緣行相不可知故若具相說緣一切法『莊嚴論』說大圓鏡智普於一切所知境界不愚迷故此經中說如依圓鏡衆像影現如是依止如來智鏡諸處境識衆像影現
015_0245_c_01L여기에서 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고, 경계[境]는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며, 식은 여섯 가지의 식별이다. 이와 같이 지 위에 18계(界)의 온갖 영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대원경지가 일체법을 반연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 대원경지를 말미암아 일체시(一切時)에서 일체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여래가 일체지를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015_0245_b_22L言諸處者謂內六處言諸境者謂外六境言諸識者謂六種識如是智上有十八界衆像影現故知此智緣一切法由此鏡智於一切時緣一切法故說如來具一切智
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머지 지는 일체법을 아는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래는 일체지라고 이름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대원경지는 안으로는 자체공덕의 종자를 반연하고 밖으로는 일체를 반연한다.
진(眞)이거나 속(俗)이거나 소지경계(所知境界)와 신토(身土) 등의 일체 그림자를 나투는데, 진의(眞義)의 가장자리를 반연하면 무분별지라고 이름하고, 속의(俗義)의 가장자리를 반연하면 후득지라고 이름한다.
015_0245_c_03L若不爾者餘智不定知一切法如來不應名一切智如是鏡智內緣自體功德種子外緣一切若眞若俗所知境界現身土等一切影像緣眞義邊名無分別智緣俗義邊名後得智
비록 일체를 반연하더라도 행상(行相)이 미세하여 환히 알 수 없으니, 아라야처럼 비록 세 가지 경계[三境]를 반연하더라도 미세하기 때문이며, 또한 경계를 반연한다고 말하니 환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원경지는 불가료지(不可了知)로써 증득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오직 진여의 무분별지를 반연하지 후득지가 아니다.
015_0245_c_08L緣一切行相微細不可了知如阿賴雖緣三境以微細故亦言緣境不可了知故不應以不可了知證此鏡唯緣眞如無分別智非後得智
모든 심(心)과 심법(心法)의 본체[體]는 비록 하나의 뜻이지만 그 작용[用]은 많다. 작용의 차별을 따라 두 개의 지[二智]로 나누어도 또한 허물이 없으니, 요컨대 진(眞)의 이치에 도달하려면 오히려 세속의 일을 요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지(智)는 일심(一心)의 뜻에 소속되지만 그 선후(先後)를 설한 것이니, 마치 나중에 얻는 것과 비슷해서 후득지라고 이름하기도 하니 나머지 또한 마찬가지다.
015_0245_c_12L心心法體雖是一義用有多隨用差別分爲二智亦無有過要達眞理方了事俗故雖一心義說先後或似後得名後得智餘亦如是
평등성지상응심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오직 대원경지를 반연하니 마치 물들고 오염되는[染汚] 뜻처럼 아라야를 반연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오직 진여실제를 반연하니 평등성(平等性)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참다운 뜻은 이 평등성지 역시 일체를 반연하여 경계로 삼나니, 일체의 평등성을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다.
015_0245_c_16L平等性智相應心品有義唯緣大圓鏡智如染污緣阿賴耶爲境界故有義唯緣眞如實際緣平等性爲境界故如實義此智亦緣一切爲境普緣一切平等性故
015_0246_a_01L『장엄론』에 의하면 평등성지는 모든 유정들을 반연하나니, 나와 남이 평등하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들의 뛰어난 앎을 따라서 부처의 영상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한다. 이 경에서는 10상(相)의 평등성을 증득하기 때문이니, 이 평등성은 진속(眞俗)에 통하므로 일체를 반연하여도 또한 과실이 없다고 설한다.
015_0245_c_21L『莊嚴論』說平等性智緣一切有情自他平等故隨諸有情勝解現佛影像故此經中說證得十相平等性故此平等性通眞及俗故緣一切亦無過失
만약 속(俗)을 반연하지 않는다면, 곧 모든 유정들의 뛰어난 앎에 따라 모든 부처님의 영상을 나투지 못할 것이라서 또한 물들여 더러워지는 말나[染汚末那]의 감응이 평등지의 부류가 아니라 오직 대원경지만을 반연할 뿐이니, 범부와 성현이 다르기 때문이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이고 나머지와는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
015_0246_a_02L若不緣俗卽不能隨一切有情勝解示現諸佛影像亦不應以染污末那類平等智唯緣鏡智聖異故違聖教故餘不類故
묘관찰지상응심품은 널리 일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관하되 모두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일체 소지경계를 반연한다.
성소작지상응심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오직 다섯 가지 현전의 경계[現境]를 반연한다고 말한다.『장엄론』에서는 “여래의 5근(根) 하나하나는 모두 5경(境)에서 전전한 것이다”라고 설하였다.
참다운 뜻은 성소작지 또한 일체를 반연하는데, 모든 경계에서 다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015_0246_a_05L妙觀察智相應心品普觀一切自相共相皆無障㝵故緣一切所知境界成所作智相應心品有義唯緣五種現境『莊嚴論』說如來五根一一皆於五境轉如實義者成所作智亦緣一切一切境皆無障故
『장엄론』에 의하면 “성소작지는 일체계(一切界)에서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는데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하면서도 모든 유정들의 온갖 의리(義利)를 짓는다”고 설한다. 이 경에서 “성소작지는 세 가지 업의 여러 변화사(變化事)를 일으켜 지으면서 중생의 8만 4천 가지 심행(心行)의 차별을 결택한다”고 설하였으며,『사기론(四記論)』10)을 지어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 등의 뜻을 수령(受領)하여 대치할 것을 널리 설하였다. 만약 일체 경계를 두루 반연하지 않으면 이런 공능이 없다.
015_0246_a_11L『莊嚴論』說成所作智於一切界起種種化無有數量不可思議作諸有情一切義利此經中成所作智起作三業諸變化事擇衆生八萬四千心行差別宣說對治作四記論受領去來現在等義不普緣一切境界無此功能
또 부처님의 마음은 장애가 없고 자재해서 하나하나가 능히 모든 경계를 비추는데, 다만 작의(作意)의 힘으로써 한 법을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일체를 반연하기도 한다고 설한다. 또 5근(根)이 5경(境)에서 전변한다고 설하는데, 오직 그렇다고만 말하지 못하는 까닭에 증득을 성취할 수 없다.
015_0246_a_17L又說佛心無障自在一一皆能照一切境作意力或緣一法或緣一切且說五根於五境轉不言唯爾故不成證
015_0246_b_01L『집량론』에서 모든 심(心)ㆍ심법(心法)이 자체를 증득하는 것을 현량(現量)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본 적이 없어서 응당 억념(憶念)할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 이런 까닭에 사지상응심품(四智相應心品)은 하나하나가 또한 자체를 환히 비추어 아는데 어떻게 세간법과 차이가 없겠는가? 칼은 스스로를 다치게 하지 못하고, 손가락 끝은 손가락 끝을 능히 만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015_0246_a_20L『集量論』說諸心心法皆證自體名爲現若不爾者如不曾見不應憶念故四智相應心品一一亦能照知自云何不與世法相違刀不自割端不能觸指端故
등불이 능히 스스로 비추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가?
어떻게 등불 등이 스스로 비추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어둠이 없음을 현견(現見)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니, 만약 스스로 비추지 못하면 응당 어둠의 장애가 있으며 응당 현견하지 못한다. 이를 말미암기 때문에 등불 등이 스스로 비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불 등이 어둡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비춰야 하는가?
015_0246_b_02L不見燈等能自照云何得知燈等自照現見無闇分明顯現若不自照應有闇障應不現由此故知燈等自照燈等非闇何須照耶
가령 병이나 옷 등과 같은 본체에는 비록 어둠이 없다고 하더라도 등불 등이 주변을 비춰주지 않으면 어둠의 장애가 있어서 현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등불 등이 비출 때 저쪽의 어둠을 없애서 현견하게 하는데, 이것을 비춤이라고 이름한다. 등불 등도 또한 마찬가지다. 자체가 생겨날 때에 주변의 어둠의 장애를 없애서 현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 비춤이라고 이름한다.
015_0246_b_06L如甁衣等體雖非闇無燈等照邊有闇障不得現見燈等照時除彼邊闇令得現見說名爲照燈等亦自體生時邊闇障除令現得見故名自照
모든 심ㆍ심법은 비록 뛰어나거나 열등함이 있더라도 능히 외연(外緣)을 이루며, 안으로 자체를 증득하는 것은 마치 광명이 이미 능히 다른 것을 비추면서도 능히 스스로를 비추는 것과 같다. 칼 등의 법들과 같지 않아서 법이(法爾)는 가히 한 종류일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심ㆍ심법의 거친 상[麤相]에 각각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의 두 가지 부분이 있는 것에 대해서 설한 것이다.
015_0246_b_10L諸心心法雖有勝劣皆能外內證自體猶如光明旣能照他亦能自照非如刀等諸法法爾不可一此就麤相諸心心法各有相見二分而說
『집량론』에서는 심ㆍ심법을 설명하는데 모두 세 가지 부분이 있다고 하니, 첫째는 소취분(所取分)이고, 둘째는 능취분(能取分)이고, 셋째는 자증분(自證分)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부분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첫 번째는 소량(所量)이고, 두 번째는 능량(能量)이고, 세 번째는 양과(量果)이다. 만약 자세하게 분별한다면 네 가지 부분이 있는데, 그 뜻을 설명하자면 세 가지 부분은 앞서와 같고 거기에 다시 네 번째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있는 것이다.
015_0246_b_14L『集量論』中辯心心法皆有三所取分能取分自證分是三分不一不異第一所量第二能第三量果若細分別要有四分義方成三分如前更有第四證自證
처음의 두 가지는 밖이고 나중의 두 가지는 안이다. 첫 번째 부분은 오직 소지(所知:인식대상)이고, 나머지는 두 종류에 통한다. 이른바 두 번째 부분은 오직 첫 번째를 아는 것이니, 양(量)과 비량(非量)이거나 현량(現量)이거나 비량(比量)이다. 세 번째 자증분은 능히 두 번째와 네 번째를 증득한다. 네 번째 증자증분은 능히 세 번째를 증득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모두가 현량(現量)에 포섭된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비록 하나의 체(體)라도 많은 부분이 합해 이루어지면서 상즉(相卽)도 아니고 상리(相離)도 아니니, 안과 밖을 나란히 알아서 무궁과(無窮過)11)가 없다.
015_0246_b_19L初二是外後二是內初唯所知通二種謂第二分唯知第一或量非或現或比第三自證能證第二及證第四第四自證能證第三第三第四皆現量攝由此道理雖是一體分合成不卽不離內外竝知無無窮
015_0246_c_01L그러므로 경에서 말한다.
是故經言

중생 마음의 두 가지 성품은
안과 밖의 모든 분수가
소취와 능취의 얽매임이라서
갖가지 차별을 본다.
015_0246_c_02L衆生心二性
內外一切分
所取能取纏
見種種差別

이 게송의 뜻을 말하자면, 중생의 마음의 성품은 두 가지 부분이 합하여 안이나 밖을 이루어서 모두가 소취와 능취의 전(纏)에 얽매여 있으니, 양과 비량(非量)이거나 혹은 현량(現量)이거나 혹은 비량(比量) 등으로 많은 부분의 차별이 있음을 본다. 4지심품(智心品)이 비록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어도 모두 무루현량(無漏現量)에 포섭된다. 이 뜻의 자세한 내용은 다른 곳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뜻의 쓰임[義用]은 여러 가지로 많지만 본체에는 다름이 있지 않으니, 하나의 법에서 괴로움과 덧없음 등 갖가지 뜻의 차별이 있지만 본체는 하나이다.
015_0246_c_04L此頌意言衆生心性二分合成若內若外皆有所取能取纏繞見有種種或量非量或現或比多分差別四智心品雖有多分然皆無漏現量所攝此義廣如餘處分別義用分多非體有異如一法上苦無常等種種義別而體是一
다시 이와 같이 설한 4지상응심품(智相應心品)은 상분(相分)과 견분(見分) 등이 있는가?
015_0246_c_11L復次如是所說四智相應心品爲有相分見分等耶
반드시 있으니 견분은 비추어야 할 경계를 비추고, 자증분은 견분과 증자증분을 함께 비추고,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비춘다. 또한 반드시 있으니 이와 같은 세 가지 부분의 차별이 없다면 마땅히 소연(所緣)이 없어서 지(智)라고 이름하지 못할 것이다.
015_0246_c_13L定有見分照所照境自證分通照見分證自證分證自證分照自證分故亦定有若無如是三分差別應無所緣應不名智
상분은 일정하지 않은데, 어떤 사람은 “진실한 무루심품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앞의 경계를 직접 비추되 마음의 변화를 쫓아다니지 않아서[無逐心變] 앞의 경계의 모습과 유사하다. 하지만 무루심으로 무상(無相)이라고 이름하나니 무분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연경(緣境:경계를 반연함)이 부사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015_0246_c_16L相分不有義眞實無漏心品無障㝵故親照前境無逐心變似前境相以無漏心說名無相無分別故又說緣境不思議故
015_0247_a_01L또 어떤 사람은 “진실한 무루심품은 또한 상분이 있어서 모든 심ㆍ심법이 법 그대로[法爾] 유사한 경계[似境]를 현현하는 것을 이름하여 연(緣)이라고 한다. 이는 갈고리 등이 움직여서 사물을 취하는 것이나 등불 등이 빛을 펼쳐서 사물을 환히 비추는 것과 같지는 않다. 마치 밝은 거울 등에 사물을 비춰서 모습을 나투는 것과 같다. 유사한 경계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분명하게 비추어내므로 이름하여 장애가 없다고 하고, 집착하지도 않고 헤아리지도 않으므로 무상(無相)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분별이 없고 묘용(妙用)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므로 부사의라고 이름하니, 영상을 나투지 않음이 없다.
015_0246_c_20L有義眞實無漏心品亦有相諸心心法法爾似境顯現名緣如鉗等動作取物非如燈等舒光照如明鏡等現影照物由似境現分明照了名無障㝵不執不計說名無亦無分別妙用難測名不思議不現影
무상이라고 말한 것은 곧 무상분(無相分)이고 무분별이라고 말한 것은 무견분(無見分)이다. 무상견은 허공과 같거나 혹은 토끼의 뿔과 같아서 마땅히 지(智)라고 이름하지 않나니, 집착의 계교(計較)가 없기 때문에 능취와 소취 등의 상이 없다고 말하지만 유사 경계의 연을 비추는[緣照] 이치와 작용은 없지도 않다. 만약 무루심이 오로지 무상분이라면 모든 부처는 몸이나 국토 등의 갖가지 영상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곳곳마다 경론이 다르다.
015_0247_a_03L若言無相則無相分言無分別應無見分都無相見應如虛空兔角等應不名智無執計故言無能所取等相非無似境緣照義用無漏心全無相分諸佛不應現身土等種種影像如是則違處處經論
색온의(色蘊依)를 전(轉)하여 색(色)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4온의를 전해도 마땅히 식(識) 등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곧 커다란 오류가 된다.
015_0247_a_08L色薀依不得色者轉四薀依應無識則成大過
어떤 사람은 “무루무분별지상응심품(無漏無分別智相應心品)이라면 무분별이기 때문이며, 소연(所緣)의 진여가 체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자체를 비출 뿐 따로 상분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015_0247_a_10L有義無漏無分別智相應心品無分別故所緣眞如不離體如照自體無別相分
만약 후득지상응심품(後得智相應心品)이라면 분별이 있기 때문이며, 소연인 경계가 체를 여의기 때문이니, 마치 유루심이 유사 경계의 모습[相]을 나타내서 분명하게 반연하여 비추는 것과 같다. 만약 무루심이 본체와 경계를 반연함을 여의고 그 상과 유사함이 없더라도 반연을 얻는다면, 이는『관소연론』에서 응당 5식 위에서는 유사한 극미(極微)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소연(所緣)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
015_0247_a_12L若後得智相應心品有分別故所緣境界或離體如有漏心似境相現分明緣照無漏心緣離體境無似彼相而得緣『觀所緣論』不應說言五識上無似極微相故非所緣
이와 같이 경상(境相)은 무루심과 무루종이 함께 일어나므로 비록 유루법과 상사함이 있을지라도 유루가 아니다. 마치 유루심이 무루상과 비슷하여도 무루가 아닌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세한 논의는 그만둔다.
이와 같은 분별은 다만 세속의 언설과 도리에 입각한 것일 뿐 승의(勝義)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만약 승의의 입장인 말과 연려(緣慮)를 여읜 경계에서 말한다면 이미 상견(相見)이 없어서 심과 심법 등을 가히 말할 수 없으니, 모든 희론을 여의어서 불가사의하다.
015_0247_a_17L如是境相同無漏心無漏種起雖有相似有漏法者非有漏如有漏心似無漏相非無漏且止廣論如是分別但就世俗言說道理非就勝義若就勝義離言絕旣無相見不可言心及心法等諸戲論不可思議
015_0247_b_01L또 이와 같이 설한 사지상응심품은 몇 가지의 심법과 함께 상응하는가?
스물한 가지가 있다. 이른바 5변행(遍行)12)과 5각별경(各別境)13)과 11유선(唯善)14)이다.
015_0247_a_23L復次如是所說四智相應心品有幾心法共相應耶有二十一謂五遍行五各別境十一唯善
온갖 곳에 언제나 두루 행하기 때문이며, 여래가 항상 즐거이 소지(所知)의 경계를 환히 알아서 욕심에 줄어듦이 없기 때문이며, 경계를 인지하는[印境] 승해(勝解)가 항상 줄어듦이 없기 때문이며, 일찍이 받은 경계를 환히 알되 기억에 줄어듦이 없기 때문이며, 여래는 부정심(不定心)이 있지 않기 때문이며, 항상 결택하기 때문이며, 지극히 깨끗한 믿음 등이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며,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며, 졸음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며, 악을 짓지 않기 때문이며, 일체 거칠거나 미세한 생각이 없음을 현재 증득하기 때문이다.
015_0247_b_03L於一切處常遍行故如來恒樂了所知境欲無減故印境勝解常無減故了曾受境念無減故如來無有不定心故恒決擇故極淨信等常相應故無染污故無睡眠故無惡作故現證一切無尋伺故
유루심품은 뛰어나거나 열등함이 일정하지 않고 소연(所緣)에 구애되어서 심법이 상응하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지만, 무루심품은 자재하고 걸림이 없어서 심법이 평등하고 서로 장애되지 않는다.
015_0247_b_08L有漏心品勝劣不定所緣拘㝵心法相應或多或少無漏心品自在無㝵心法平等互不相障
또다시 이와 같이 설한 4지상응심품은 어떤 지위에서 처음으로 얻고 어떤 지위에서 현행하는가?
무루종성은 무시이래로 본유(本有)인데 이숙식(異熟識)에 의해 생멸이 상속하며, 발심하고 난 뒤에는 외부의 훈습으로 말미암아 점점 증장한다.
015_0247_b_11L復次如是所說四智相應心品何位初得何位現行無漏種性無始本有依異熟識生滅相續發心已去由外熏習漸漸增長
대원경지상응심품은 금강유정이 바로 앞에 현존할 때에 모든 유루종자의 이숙식 등이 전(轉)하여 소멸한다. 이때 비로소 최초로 모든 불과(佛果)의 무루종자가 현행하게 되는데, 원만하게 의지하고 기대어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언제나 사이가 끊어지지 않는다.
015_0247_b_15L大圓鏡智相應心品金剛喩定現在前時轉滅一切有漏種子異熟識等爾時方得最初現行一切佛果無漏種子圓滿依附盡未來際常無閒斷
015_0247_c_01L평등성지상응심품은 보살의 초지에서 처음으로 현관(現觀)할 때에 최초로 현행하며, 이로부터 이후에는 다음다음의 지위 중에 닦아서 더욱 증장시켜 깨끗하고 원만하게 한다. 무루관(無漏觀) 등이 바로 앞에 나타날 때에 항상 현행하지만, 만약 유루심이 바로 앞에 나타날 때에는 곧 다시 사이가 끊어진다. 이와 같이 전전하여 나아가 10지에 이른다. 최후심(最後心)일 때에 이로부터 이후에는 미래세가 다하도록 항상 사이가 끊어지지 않는다.
015_0247_b_19L平等性智相應心品菩薩初地初現觀時最初現行從此已去後後地中修令增長淸淨圓滿無漏觀等現在前時恒常現行若有漏心現在前時則便閒斷如是展轉乃至十地最後心時自此已後盡未來際常無閒斷
유루위(有漏位)의 아라야식이 항상 말나(末那)라는 하나의 식과 함께 일어나듯이 무루위(無漏位) 중의 대원경지 또한 언제나 항상 평등성지와 함께 한꺼번에 일어나기 때문에 평등성지 또한 사이가 끊어짐이 없다.
015_0247_c_02L如有漏位阿賴耶識恒與末那一識俱起無漏位中大圓鏡智亦應常與平等性智一時而起故平等智亦無閒斷
묘관찰지상응심품 또한 초지에서 처음으로 현관(現觀)15)할 때에 최초로 현행하며 여기서부터 점점 닦아서 증장한다. 만약 유루심이 바로 현전할 때에나 혹은 무심(無心)일 때에는 곧 다시 사이가 끊어진다. 이와 같이 전전하여 나아가 불과(佛果)에 이르는데, 만약 멸진정에 들면 또한 현행하지 않는다.
015_0247_c_05L妙觀察智相應心品亦在初地初現觀時最初現行從此已後漸修增長若有漏心正現前時或無心時則便閒斷如是展轉乃至佛果若入滅定亦不現行
성소작지상응심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초지 이상의 여러 지위에서 모두 현행을 얻으니, 법의 흐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진실한 뜻은 이러하다. 불과가 바야흐로 일어나서 10지 중의 이숙식이 변현한 5근(根)은 무루가 아니므로 능의(能依)인 5식(識) 또한 무루가 아니다. 유루의 5근이 무루식을 발하는 것을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과 위에서는 이 지혜 역시 언제나 바로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작의를 일으키기 때문에 자주자주 사이가 끊어진다.
015_0247_c_09L成所作智相應心品有義初地已上諸位皆得現行墮法流故如實義者佛果方起以十地中有異熟識所變五根非無漏故能依五識亦非無漏有漏五根發無漏識曾未見故於佛果上此智亦不恒現在前作意起故數數閒斷
이와 같이 4지상응심품의 종자는 본유이자 무시이래로 법 그대로[法爾]라서 훈습으로부터 생기지 않으니, 이를 이름하여 본성에 머무는 종성이라고 한다. 발심한 이후에는 외연(外緣)의 훈습이 발해서 점점 증장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훈습으로 이루어진 종성[習所種性]이라고 한다.
015_0247_c_16L如是四智相應心品種子本有無始法爾不從熏生名本性住種性發心已後外緣熏發漸漸增長名習所成種性
015_0248_a_01L초지 이상은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바로 현전하여 일어날 수 있고, 자주 반복적으로 훈습해서 더욱 불어나고 더욱 뛰어나서 금강유정을 증득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 이후로는 비록 여러 번 현행하더라도 다시는 훈습하지 않는다. 이미 공덕을 원만하게 증장케 하여 다시는 불어날 수 없기 때문이며, 종자의 청정한 식[種淨識]을 지닌지라 이미 무기(無記)가 아니라서 훈습할 수 없기 때문이며, 과거세의 부처나 미래세 부처의 공덕이 다소 허물을 이루기 때문이다.
015_0247_c_20L初地已上隨其所應乃得現起數復熏習轉增轉勝乃至證得金剛喩定從此已後雖數現行不復熏習更令增長功德圓滿不可增故持種淨識旣非無記不可熏故前佛後佛功德多少成過失故
이와 같이 4지상응심품은 한결같이 선이며 한결같이 무루의 도제(道諦)에 포섭된다. 모든 부처는 일체 유루종자법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니, 비록 다시 생사의 몸으로 화작하여 업과 번뇌 등의 유사한 고제와 집제를 나툰다고 하여도 실제로 이것은 무루도제에 포섭된다.
015_0248_a_02L如是四智相應心品一向是善一向無漏道諦所攝諸佛無有一切有漏種子法故雖復現化作生死身業煩惱等似苦集諦實是無漏道諦所攝
또 세속의 상(相)을 따르므로 50ㆍ20ㆍ8온(蘊) 등의 이름이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온ㆍ처ㆍ계에 포섭되지 않으니, 희론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모든 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5법은 모두가 거짓과 진실에 통하지만 명언(名言)을 기대하지 않으니, 이 나머지 근과 경은 모두가 실유(實有)이기 때문이다.
015_0248_a_06L隨世俗相名五十二十八薀等而實非是薀處界攝離戲論故離諸相故如是五法皆通假實不待名言此餘根境皆實有故
만약 명언을 의지한다면 이 나머지 근과 경은 모두 가유(假有)이다. 또 청정법계는 진여를 체로 삼는데 이는 실유(實有)이고, 진(眞)에 의지하여 택멸(擇滅) 등의 상을 세우는 것은 가유이다. 모든 심지(心智) 등이나 청색, 황색 등은 모두 실유이고, 불방일(不放逸) 등이나 길고 짧은 색 등은 가유이다.
015_0248_a_09L若待名言此餘根境皆假有故又淨法界眞如爲體是實有故依眞建立擇滅等相是假有故諸心智等靑黃色等是實有故不放逸等長短色等是假有故
자세한 논의는 그만두고 본문을 해석하기로 한다.
네 번째 결택차별의 뜻을 말미암음 중에는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다섯 가지 법의 차별을 결택한다. 둘째는 일미사지(一味事智)의 수용화합을 결택한다. 셋째는 전체적인 게송으로서 정법계(淨法界)의 상(相)이 모든 공덕을 갖춘 것이다.
3신(身)의 차별과 5법의 차별 중에 이와 같은 차례로 하나하나를 결택한다.
015_0248_a_14L且止廣論應釋本文四由決擇差別義中略有三分一者決擇五法差別二者決擇受用和合一味事智三者摠頌淨法界相具諸功德三身差別五法別中如其次第一一決擇

묘생이여, 마땅히 알아라. 청정법계란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서 비록 여러 색의 갖가지 상 속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 갖가지 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체(體)는 오직 한 가지 맛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는 비록 갖가지 상(相)의 부류와 소지(所知)의 경계(境界)에 두루하지만 갖가지 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체는 오직 한 가지 맛이다.
015_0248_a_19L經曰妙生當知淸淨法界者譬如虛雖遍諸色種種相中而不可說有種種相體唯一味如是如來淸淨法雖復遍至種種相類所知境界不可說有種種相體唯一味
015_0248_b_01L 다음에는 정법계의 상을 나타내 보인다. 법계의 차별을 결택하여 의문을 풀이한다. 이른바 의심하여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만일 모든 여래는 법계를 성품으로 삼고, 법계는 진여를 체로 삼으며, 진여는 바로 모든 법의 공상(共相)이며, 모든 법은 이미 갖가지 차별이 있다면, 그것을 수순하는 법계에 어떻게 갖가지 차별이 없다는 것인가? 법계에 만일 갖가지 차별이 있다면 어떻게 청정하겠는가? 파저가(頗胝迦:수정)가 갖가지 의지(依止)와 함께 상응하는 까닭에 갖가지 상(相)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
015_0248_b_01L論曰次當顯示淨法界相釋難決擇法界差別謂有難言若諸如來法界爲性法界則用眞如爲體眞如卽是諸法共相諸法旣有種種差別法界隨彼云何無有種種差別法界若有種種差別云何淸淨非頗胝迦種種依止共相應故無種種相
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 처음에 태허공(太虛空)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서 비록 여러 색의 갖가지 상 속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라는 것은 세간의 허공이 비록 형애색(形礙色)16)의 같은 종류와 다른 종류의 차별상 속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 품류가 차별되어 있으므로 ‘갖가지[種種]’라고 이름한다. 스스로의 체(體)가 모여 있어서 각혜(覺慧)의 균등함 위에 분명하게 현현하므로 이름하여 상이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행상(行相)이다.
015_0248_b_08L爲釋此難故說最初太虛空喩譬如虛空雖遍諸色種種相中者如世虛空雖遍一切有形㝵色等不等類差別相中類差別故名種種自體集在覺慧等上分明顯現故名爲相卽是行相
’그렇더라도 갖가지 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것은, 그렇지만 이 허공이 여러 가지 형체나 장애의 갖가지 색상을 지니고 있다고 널리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니, 이 허공의 성품은 스스로 그러한 까닭에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므로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015_0248_b_13L不可說有種種相者而此虛空不可宣說有諸形㝵種種色相由此虛空其性自爾不應說故名不可說
또는 능히 설할 수 없으므로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른바 이 허공은 그 성품이 이와 같아서 갖가지 능표색상(能表色相)을 지니고 있다고 널리 설할 수도 없고 또한 그 갖가지 소표색상(所表色相)을 지니고 있다고 설할 수도 없다. 그런데 허공을 보면 갖가지 상이 있고 아울러 갖가지 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허공 속의 갖가지 색상을 본 것이지 허공을 본 것이 아니며, 아울러 청황(靑黃) 등이나 길고 짧음 등과 같은 갖가지 색상이 있다고 거짓으로 설한 것은 실답지 않으면서 있는 것이다. 거짓이 아니면서 있다고 말한다면 실다운 일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일체 색 중에 편재하면서 갖가지 상이 없겠는가?
015_0248_b_16L或不能說名不可說謂此虛空其性如是不可宣說有其種種能表色相亦不可說有其種種所表色相而見虛空有種種相及可說有種種相者此見空中種種色相非見虛空及假說有種種色相如靑黃等或長短等非實是有非假說有則有實事云何遍在一切色中無種種相
015_0248_c_01L‘체는 오직 한 가지 맛이다’라는 것은 이 허공이 갖가지 색과 더불어 상응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갖가지 상을 이루면서도 자성을 버리지 않는다. 체는 오직 하나로서 장애가 없는 맛이니 다른 모양[異相]이 없기 때문이다.
015_0248_c_01L體唯一味者此虛空由與種種色相應故成種種不捨自性體唯有一無障㝵味異相故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 등’이란 것은 마치 세간의 허공이 체가 있거나 체가 없거나 비록 일체 형애색(形礙色) 중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 형체나 장애의 차별을 따라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여러 색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 비록 있다고 말하더라도 오직 거짓으로 있는 것이며 실답지 않다. 이 허공을 말미암아 자상(自相)을 버리지 않고 타상(他相)을 취하기 때문이다.
015_0248_c_04L如是如來淸淨法界等者世虛空有體無體雖遍一切形㝵色而不隨成形㝵差別亦不可說有諸色相雖亦說有唯假非實由此虛空不捨自相取他相故
비록 거짓으로 허공, 허공이라고 말하지만 이 허공의 성품은 실제로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와 같이 청정법계 또한 비록 진공(眞空), 진공(眞空)이라고 거짓으로 말하지만 진공의 성품은 실제로 말할 수 없다.
015_0248_c_08L如雖假說虛空虛空而虛空性實不可說淸淨法界亦復如是雖假說言眞空眞空眞空性實不可說
이 허공은 앞에서 설해진 인(因)이 갖가지 의지(依止)와 함께 상응하는 것을 말미암기 때문에 파저가(수정)와 같다. 법계에 마땅히 갖가지 차별이 있다는 것은 부정과(不定過)17)이다.
015_0248_c_11L由此虛空先所說因種種依止共相應故如頗胝迦界應有種種別者有不定過
현재 허공을 볼 때 비록 갖가지 색상과 상응하더라도 여러 색의 갖가지 상은 없기 때문에 마치 연기나 안개 등과 같으며, 함께 상응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허공에 갖가지 상이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자신의 허망한 분별의 힘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만 연기 등의 갖가지 상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일 뿐 허공을 본 것이 아니니, 허공의 성품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허망한 분별이 따로 늘어나는 힘을 말미암기 때문에 다만 색 등의 갖가지 상이 있는 것을 볼 뿐 정법계를 본 것이 아니다.
015_0248_c_13L現見虛空雖與種種色相相應而無諸色種種相故如煙霧等共相應故有時見空有種種相由自虛妄分別力故見煙等有種種相非見虛空以虛空性不可見故如是由自虛妄分別增益力故但見色等有種種相非淨法
015_0249_a_01L정법계 중에는 비록 진실한 갖가지 경계와 언설(言說)과 법의 가르침이 없지만, 갖가지 경계와 법의 가르침의 차별상이 전변[轉]하는 작용이 있다. 정법계는 갖가지 상이 있음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또한 법계로 하여금 갖가지 상이 있게 하나니, 정법계는 이름이나 말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온갖 이름과 말은 모두 분별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경계를 삼는데, 그러나 모든 법의 가르침이 황당하지 않은 것은 법계를 증득하여 전전(展轉)하는 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서책을 보고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015_0248_c_20L淨法界中雖無眞實種種境界言說法教而有種種境界法教差別相非由彼有種種相故亦令法界有種種相以淨法界離名言故一切名言皆用分別所起爲境然諸法教亦不唐捐是證法界展轉因故如見字書解所說義
이 법의 가르침을 말미암는 것이 바로 모든 여래의 대비가 흐르는 것으로서 능히 전전하여 언설을 여읜 뜻을 설한다. 마치 여러 가지 색깔로 허공을 칠하는 것이 참으로 희유한 것과 같아서 만약 언설로써 말을 여읜 뜻을 설한다면 허공을 칠하는 것보다 더 희유하다.
015_0249_a_03L由此法教是諸如來大悲所流能展轉說離言說義如以衆彩彩畫虛空甚爲希有若以言說說離言義復過於彼
마치 “해혜(海慧)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색(色)도 없고 볼 수 없고 상대[對]도 없고 표상도 없는 허공을 갖가지 색깔로 칠하는 것을 마치 담에 색깔을 칠하는 것처럼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모든 불세존께서 깊고 깊은 언설을 여읜 법을 증득하시고 능히 언설로써 모든 유정들과 보특가라를 위하여 널리 설하여 열어 보이심은 그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다”라고 널리 설하는 것과 같다.
015_0249_a_06L如說海慧譬如有人以種種色彩畫無色無見無對無表虛空如牆壁等甚爲希有諸佛世尊證得甚深離言說法能以言說爲諸有情補特伽羅宣說開示復難於如是廣說
또 파저가(수정)도 법계를 성품으로 삼아서 또한 청정하기 때문에 동일한 법의 비유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에 의해 건립된 인의(因義)는 하나를 따라도 성립되지 않고 함께하는 것[俱]을 따라도 성립되지 않는다.
015_0249_a_11L又頗胝迦法界爲性亦淸淨故非同法喩所立因義隨一不成或俱不成

또 마치 허공이 여러 색에 두루하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 그것(색)의 허물로 물들여 더러워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도 비록 일체 중생의 심성에 두루하면서 진실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허물로 물들여 더럽히지 못한다.
015_0249_a_13L經曰又如虛空雖遍諸色不相捨離而不爲彼過所染污如是如來淸淨法界雖遍一切衆生心性由眞實故不相捨離而不爲彼過所染污

또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일체 소지경계에 두루 있다면 또한 탐욕 등의 여러 번뇌의 티끌과 함께 상응하기 때문인데, 어찌하여 다른 유루심심법품과 마찬가지로 불청정(不淸淨)을 이루지 않는가?
015_0249_a_17L論曰復有難言若淨法界遍在一切所知境界亦與貪等諸煩惱垢共相應故云何不如所餘有漏心心法品成不淸淨
015_0249_b_01L이런 의심을 풀기 위하여 두 번째의 태허공의 비유를 설하였다.
‘또 마치 허공이 여러 색에 두루하여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라는 것은 다른 곳에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내행(內行)에 두루 존재하고 밖으로 벗어남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니, 이미 내행에 있고 밖으로 벗어남을 볼 수 없어서 이것을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만약 다른 곳에 있다면 곧 허공에는 형태의 장애가 있게 되고 응당 항상하지 않을 것이다.
015_0249_a_21L爲釋此難故說第二太虛空喩又如虛空雖遍諸色不相捨離無有別處故名不相捨離遍在內不見出外故旣在內行不見出外不可定言是一是異若有別處是則虛空應有形㝵應是無常
‘그런데 그것(색)의 허물로 물들여 더럽혀지지 않는다’라는 것은 마치 태허공이 비록 온갖 형태의 장애를 지닌 색 안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 색의 허물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색의 허물이란 이른바 탐욕과 성냄 등을 길러내는 인(因)을 일컫는 말이니, 여기서는 청황(靑黃) 등의 갖가지 다른 모양[異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공중에 있는 구름이나 안개나 검은 그림자의 색 등은 능히 태허(太虛)로 하여금 깨끗한 상을 버리게 하기 때문에, 그리고 깨끗한 견(見)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색의 허물이라고 한다.
015_0249_b_03L而不爲色過所染污者如太虛空雖遍一切形㝵色內而不爲色過失所染色過失謂是生長貪瞋等因非靑黃等種種異相又於空中所有雲霧黑影色能令太虛捨淨相故及能障㝵淨見生故名色過失
또 마음에서 늘어난 경계의 상[境相]을 이름하여 색의 허물이라고 하니 다른 사람의 뜻을 따르기 때문이다. 앞에서 태허공은 저 여러 색의 허물로 물들거나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015_0249_b_09L又於心上所增境相名色過失爲順他意故作前說太虛空爲彼諸色過失所染自性淨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도 비록 일체 중생의 심성에 두루하면서 진실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허물로 물들여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은 마치 부처 스스로의 마음이 진실하고 청정해서 본성이 빛나고 청결한 것과 같으니, 본성이 청정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심성 또한 그러해서 본성이 진실하고 청정하다.
015_0249_b_12L如是如來淸淨法界雖遍一切衆生心性由眞實故不相捨離者如佛自心眞實淸淨本性光潔本性淨故一切衆生心性亦爾本性眞實本性淸淨
마음의 본성이란 것은 바로 진여이며, 모든 중생들의 마음은 평등한 성품이다. “무엇을 말미암아서 마음이 평등하다고 하는가? 공성(空性)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마음이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널리 설한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마음의 본성이란 것은 바로 마음의 법성(法性)이니, 모든 중생들의 심성에 두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등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마음의 법성을 판별하기 위함이다.
015_0249_b_16L心本性者卽是眞如一切衆生心平等性如說由何說心平等由空性故說心平等如是廣說心本性者卽心法性遍在一切衆生心性是故說名心平等性爲辯如是心法性故
015_0249_c_01L‘진실을 말미암아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 유정은 본래 깨끗한 마음의 성품을 말미암아서 비록 본성은 깨끗하지만, 다시 오늘날 객진(客塵)의 장애나 때[垢]로 더럽게 물드는 것을 멀리 여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래의 진심청정(眞心淸淨)을 안립하는 것과 또 모든 유정들의 마음의 평등성이 바로 진실이니 원성실의 자성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015_0249_b_20L說由眞實不相捨離由是有情本淨心性雖本性淨復由今時客塵障垢新遠離故安立如來其心淸淨又諸有情心平等性卽是眞實是圓成實自性攝故
모든 유정들의 마음의 평등성이 진실상임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유정들의 마음을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을 드러낸다. 또 이 마음의 성품은 진실상이므로 모든 유정들의 마음의 성품을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 구르는[轉] 것이니, 이 뜻을 말하면 두루 구름[遍轉]을 말미암아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
015_0249_c_02L由諸有情心平等性眞實相故表不捨離諸衆生心又是心性眞實相故表不捨離一切有情心性而轉此意說言由遍轉故不相捨離
‘그들의 허물이 물들여 더럽히지 못한다’라는 것은 본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허물이란 탐욕 등이니 능히 마음의 상으로 하여금 허물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고 티끌로 물들게 하기 때문이다. 비록 객진분별(客塵分別)이 구르는 것이지만 그 체(體)는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버릴 수 없고 청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밀의설(密意說)에 의하여 이와 같이 설하나니, 이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빛나고 깨끗하다.
015_0249_c_05L而不爲彼過所染污者本性淸淨故過謂貪等能令心相成過失故成垢染故雖爲客塵分別所轉非彼體故不可全捨可令淸淨依此密意說如是言此心本性淸淨光潔
마음의 법성(法性)을 마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마음의 법성을 여의고는 다른 성품의 청정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정의 마음에 탐욕 등이 있는가? 스스로 분별하는 힘이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뒤바뀜은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 무명의 힘을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015_0249_c_10L心之法性說名爲心非離心法性有異性淨心云何有情心有貪等自分別力所任持故心之顚倒未永斷故此由無明力所起故
이 뜻의 내용을 말하자면, 마치 허공의 본성은 비록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어지럼증이 나거나 눈에 백태가 끼어 육안(肉眼)을 다치면 뒤바뀐 상이 나타나서 청정하지 못한 듯하니, 이와 같이 법계의 본성은 비록 깨끗하여도 스스로의 분별로 일어난 탐욕 등의 온갖 인연의 힘을 말미암아 무명의 어지럼증이나 백태가 끼어서 혜안(慧眼)을 다치기 때문에 뒤바뀐 상이 나타나서 청정하지 못한 듯하다.
015_0249_c_14L此義意言譬如虛空本性雖淨而爲眩瞖損肉眼故顚倒相現似不淸淨如是法界本性雖淨由自分別所起貪等衆因緣力無明眩瞖損慧眼故顚倒相現似不淸淨
만약 온갖 종류의 청정한 혜안이 더러움을 보지 않거나 또한 정법계가 만약 차별이 없다면, 온갖 종류의 깨끗함은 곧 모든 여래의 법신이라고 이름할 것이며, 또한 여래의 진실한 체성이라고 이름하나니, 어느 때라도 항상하며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015_0249_c_18L若一切種淸淨慧眼恒不見穢又淨法界若無差別一切種淨則名一切如來法身亦名如來眞實體性於一切時常無變故
015_0250_a_01L 이 법계를 말미암아 모든 유정들의 심상속(心相續) 중에 평등함이 있으므로 “모든 유정들은 바로 여래장(如來藏)이다. 모든 유정들은 한결같이 부처의 성품을 지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부정종성(不定種性)의 유정을 이끌어서 그 마음으로 하여금 반드시 대승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여래종성의 유정에 대해서는 “모든 유정들은 장차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015_0249_c_22L由此法界一切有情心相續中平等有故說如是言一切有情是如來藏一切有情皆有佛性爲引不定種性有情令心決定趣大乘故就有如來種性有情說如是言一切有情皆當作佛
만약 “모든 것은 덧없고 괴롭다”라고 설하는 것이 있다면 이와 같은 말은 모든 것의 일부분이지 전부는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설한 바와 어긋날 것이니, 다섯 가지 종성의 모든 부처님 공덕은 다함이 있어서 제도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곧 설한 바와 어긋나게 된다. 하지만 여래의 공덕은 항상하여 끊어짐이나 다함이 없어서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언제나 세간에 머물러 본래부터 중생을 제도할 것을 소망하여 부처의 과위[佛果]를 구하기 때문이다.
015_0250_a_04L如有說言一切無常一切皆苦如是皆說少分一切非全一切若不爾者便違所說五種種性諸佛功德應當有盡無所度故則違所說如來功德常無斷盡不應無益常住世閒本期度生求佛果故
이 정법계는 비록 모든 것에 두루 평등하게 있으나 스스로가 지닌 장애의 힘을 말미암기 때문에 선천적인 장님이 해와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게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015_0250_a_09L此淨法界雖遍一切平等皆有而由自障力所持故如世生盲不見日月如有頌言

중생의 죄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마치 깨어진 그릇 속의 달과 같지만
법의 빛은 태양과 같기 때문에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 차 있네.
015_0250_a_12L衆生罪不現
如月於破器
遍滿諸世閒
由法光如日

이런 도리에 의하면, 앞에서 말한 “또한 탐욕 등 모든 번뇌의 티끌이 함께 상응하는 까닭에 나머지 유루의 심(心)ㆍ심법품(心法品)과 같이 청정법계는 깨끗하지 않다”라는 것은 부정과(不定過)이다. 허공이 비록 색의 티끌과 더불어 상응해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심ㆍ심법품이 비록 탐욕 등의 번뇌와 상응한다고 하여도 청정법계를 성품으로 삼아서 깨끗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법유(同法喩)가 아니다.
015_0250_a_14L由此道理如先所說亦與貪等諸煩惱垢共相應故如餘有漏心心法品淸淨法界成不淨者有不定過虛空雖與色垢相應非不淨故心心法品雖與貪等煩惱相應而用淸淨法界爲性非不淨故非同法喩
만약 “의요(意樂)가 깨끗하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보고 그에 따라서 또한 법계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깨끗한 상이 현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015_0250_a_20L如說意樂不淸淨者見心不淨隨彼亦說法界不淨由淸淨相不顯現故
015_0250_b_01L의요가 깨끗한 자는 탐욕 등의 티끌과 상응하여도 마음의 그 본래 성품은 깨끗해서 때나 더러움이 없음을 보기 때문에 법계는 언제나 깨끗하며 그것이 건립하는 인(因)18)은 앞에서와 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법계는 모든 것에 두루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든 유정들의 허물로 더럽게 물들지 않는다. 이렇게 법계가 모든 것에 두루하다고 말하는 것은 소집법(所執法)은 공하면서도 두루 널리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계는 인(因)을 전제로 하지 않고도 성립한다.
015_0250_a_22L意樂淨者見與貪等垢相應心本性淸淨無垢穢故法界常淨彼所立因如前不成由是法界遍一切故譬如虛空非諸有情過所染污此說法界遍一切者所執法空普皆有故不待成立

또 허공이 모든 몸과 입과 뜻의 업을 두루 포용하지만, 이 허공에 기작(起作)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여래의 청정법계도 이와 같아서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포용하지만 청정법계는 기작함이 있지 않다.
015_0250_b_04L經曰又如虛空含容一切身語意業而此虛空無有起作如是如來淸淨法界含容一切智所變化利衆生事淸淨法界無有起作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일 모든 여래의 청정법계가 진여를 체로 삼는다면 곧 희론도 없고 기작도 없을 텐데, 그렇다면 어떻게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의 인연이 되는 지혜가 생겨나서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인가? 만약 지혜가 생겨나서 포용한다면 곧 기작이 있을 것인데, 어떻게 여래가 진여를 상으로 삼는가?”
015_0250_b_08L論曰復有難言若諸如來淸淨法界眞如爲體則無戲論亦無起作云何得容利有情事因緣智生若容智生則有起作云何如來眞如爲相
이런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세 번째의 태허공의 비유를 말한다.
‘또 마치 허공이 모든 몸과 입과 뜻의 업을 두루 포용한다’라는 것은 태허공이 비록 작의는 없어도 능히 유정의 세 가지 업을 수용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몸과 입의 두 업은 형태와 장애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수용할 수 있지만, 뜻의 업은 어떠한가? 형태와 질량이 없으며 유대애(有對礙)19)가 아니기 때문에 모름지기 달리 수용하는 것이니, 곧 이 일로써 수용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른바 그것이 생겨날 때에는 장애가 되지 않으며 유대애물(有對礙物) 또한 생겨날 때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015_0250_b_12L爲釋此故說第三太虛空喩又如虛空含容一切身語意業者如太虛空雖無作意而能容受有情三業身語二業有形㝵故可須容受意業云何非無形質有對㝵故須他容受卽以此事名爲容受謂彼生時不爲障㝵有對㝵物亦以生時無障㝵故
015_0250_c_01L“허공이 받아들이는 바와 같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법 또한 그와 같다. 생겨날 때에는 장애가 없어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허공이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유대물(有對物)이 무대애(無對礙)일 때에는 다른 물질을 받아들여서 왕래할 수 있으므로 이 법에 의지해서 거짓으로 허공을 세운 것이다. 뜻의 업 또한 그러하여 장차 멸하려 할 때에 다른 물질을 받아들여서 생기하게 하는데, 어떻게 그러하지 못하겠는가? 이 법에 의지하여 거짓으로 허공을 세운 것이다.
015_0250_b_19L說言虛空之所容受此法亦爾生時無障而得生故亦得說言虛空容受又有對物無對㝵時容受餘物得往來故依此法上假立虛空意業亦爾將欲滅時容受餘物令得生起何爲不得依此法上假立虛空
만약 이와 다르다면 실유(實有)의 허공이 일체처에 두루한 것인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만약 본체가 실제로 있는데도 장애가 없기 때문에 다른 법을 생할 수 있는 것을 수용이라 이름한다면, 일체의 색은 없으나 실제로 체가 있는 법은 모두가 장애가 없어서 능히 수용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응당 허공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오직 색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한 것은 세간의 공통된 지식으로 거친 상을 분별하여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이 세 가지 업을 두루 받아들인다고 하여도 또한 허물이 없다.
015_0250_c_02L若異此者實有虛空遍一切處云何容受若體實有不障㝵故餘法得生名容受者一切無色實有體法皆無障㝵竝能容受應名虛空餘處說言唯色無故名虛空者就世共知麤相而說是故虛空容受三業亦無過失
‘이 허공에는 기작이 있지 않다’는 이 허공은 이와 같이 분별하여 “나는 이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저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
015_0250_c_08L而此虛空無有起作非此虛空如是分別我容受此不容受彼
비록 작의는 없어도 능히 받아들이니, 해와 달과 등불의 온갖 광명 또한 이와 같다. 비록 피차를 분별하는 작의는 없어도 법 그대로[法爾] 생할 때에는 능히 모든 색을 비춘다.
여의보주 또한 이와 같다. 비록 작의는 없어도 능히 중생의 소망을 만족시켜 준다. 나머지 역시 그러하니, 또한 허공 등이 일체를 현현할 수 있다는 예를 들었다.
015_0250_c_10L雖無作意而能容受日月燈等所有光明亦復如是雖無作意此彼分別法爾生時能照諸色如意寶珠亦復如是雖無作意而能滿足衆生意願所餘亦爾且擧虛空類顯一
‘여래의 청정법계도 이와 같아서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포용한다’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여래의 청정법계가 성품에 맡겨 머물면서 작의 없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을 안립하는 것이다.
015_0250_c_15L如是如來淸淨法界含容一切智所變化利衆生事者謂諸如來淸淨法界任性而住無有作意安立一切利衆生事
‘일체지’라는 것은 대원경지(大圓鏡智) 등이다. ‘변화하여’라는 것은 몸과 입과 뜻이 변화한 것을 말한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란 이른바 능히 모든 유정들의 뛰어나게 이롭고 즐거운 일을 모두 이루는 것이다. 청정법계는 모두 능히 수용한다. 그 법이 생겨날 때에는 그것들이 조인(助因)이 되기 때문이다.
015_0250_c_18L一切智者圓鏡智等一切所變化者身語意化一切利衆生事謂能成辦一切有情勝利樂事淨法界皆能含容彼法生時爲助因
015_0251_a_01L‘청정법계는 기작이 없다’에서 작의를 이름하여 기(起)라고 한다. 능히 그 마음으로 하여금 여타의 경계를 버리고 여타의 연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이름하여 작(作)이라고 한다.
심려가 동요하면 짓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이른바 정법계는 비록 작의가 없다하더라도 심려(心慮)가 동요하여 능히 모든 지(智)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수용한다.
015_0250_c_22L淸淨法界無有起作者作意名起能令其心捨餘境界趣餘緣故心動名作心慮動搖有所作故謂淨法界雖無作意心慮動搖而能容受諸智變化利有情事
다시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수용한다’라는 것은 이른바 정법계는 일체 수용신과 변화신의 두 몸을 수용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짓는 인(因)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요, 지극히 광대하기 때문이며 무대애(無對礙)이기 때문이다. 비록 분별하지 않아도 증상력으로 능히 그것을 생하기 때문이다.
015_0251_a_03L復次含容一切智所變化利衆生事者謂淨法界含容一切受用變化二身所作利有情因無窮盡故極廣大故無對㝵故雖無分別而增上力能生彼故
이 전체적인 뜻은 마치 허공 등이 색을 수용하여 생하는 등의 작용이 있는 때처럼 비록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작의와 희론의 분별이 있지 않아도 법이(法爾)의 힘이 널리 일체의 차별작용을 짓는다. 이와 같이 여래는 무루계에 머물러 비록 일체의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등의 작의와 희론이나 갖가지 분별은 없어도 먼저 닦은 대원력을 말미암아 능히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일으킨다.
015_0251_a_07L此摠義言虛空等容色生等作用轉時雖無有我我所作意戲論分別而法爾力廣作一切差別作用如是如來住無漏雖無一切我我所等作意戲論種種分別而先所修大願力故能起一切智所變化利衆生事
이와 같이 여래는 가장 사유하기 어려움에 안주하는 법신[第一難思安住法身]이니, 앞서의 원력이 임지하는 바를 말미암기 때문에 일체의 상호와 공덕의 장엄이 생사의 끝을 다하도록 겁량(劫量)이 상속해서 비록 분별함이 없어도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익케 하는 일을 짓는다. 여래가 비록 “나는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사업(事業)을 마땅히 짓거나 짓지 않는다”라는 분별은 하지 않지만 본원력으로 일체를 능히 짓나니, 앞서의 발원(發願)과 같다.
015_0251_a_13L如是如來第一難思安住法身由先願力所任持一切相好功德莊嚴窮生死際劫量相續雖無分別而作一切智所變化利衆生事如來雖無如是分別於如是如是事業當作不作而本願力一切能作如先發願
혹은 수면에 들거나 혹은 멸진정에 들더라도 비록 작의하지 않고 필요한 시기에 따라서 각오(覺悟)20)가 선정으로부터 나오니, 마치『해혜경(海慧經)』에서 이렇게 설하는 것과 같다.
“모든 비구들이 종소리를 기해서 멸정(滅定)에 들어가고 종소리를 듣지 않아도 또한 분별이 없으니, 필요한 시기의 힘(力)을 말미암아서 마땅한 때에 선정으로부터 나온다.”
이와 같이 널리 설한다.
015_0251_a_19L或入睡眠入滅定雖無作意隨所要期覺悟出如『海慧經』作如是說如諸苾芻要期鍾聲而入滅定不聞鍾聲亦無分別由要期力應時出定如是廣說
佛地經論卷第三
癸卯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015_0251_b_01L
  1. 1)마음을 하나의 대상에 맡겨서 평등하게 계속해서 유지해가는 것으로 마음을 집중하는 삼매와 같은 의미이다.
  2. 2)삼마발저(三摩鉢底)의 한역으로 몸과 마음이 평등하고 편안한 상태를 말한다.
  3. 3)서원한 대로 생겨나는 미묘한 지혜. 여래가 갖춘 덕 가운데 하나이다.
  4. 4)10지(智)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구사론』에서의 세속지(世俗智)ㆍ법지(法智)ㆍ유지(類智)ㆍ고지(苦智)ㆍ집지(集智)ㆍ멸지(滅智)ㆍ도지(道智)ㆍ타심지(他心智)ㆍ진지(盡智)ㆍ무생지(無生智)와『화엄경』에서의 무애지(無礙智)ㆍ무착지(無著智)ㆍ무단지(無斷智), 무치지(無痴智)ㆍ무이지(無異智)ㆍ무실지(無失智)ㆍ무량지(無量智)ㆍ무승지(無勝智)ㆍ무해지(無懈智)이다. 여기에서는『구사론』의 10지를 말하고 있다.
  5. 5)진무루지(眞無漏智)이며 2승(乘)의 무루지에 대한 불보살의 무루지이다.
  6. 6)심왕(心王)과 심소(心所)의 관계처럼 동시에 존재하여 서로 붙어 있는 것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는 것을 말한다.
  7. 7)범부나 성현이 받는 육신과 국토. 이것은 각기 정보(正報)와 의보(依報)라고 불린다.
  8. 8)지혜와 지혜에 의해서 번뇌를 끊는 것이라는 두 가지 면을 표현한 말로서, 지덕(智德)과 단덕(斷德)이다.
  9. 9)두 가지 그릇된 생각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인집(人執)과 법집(法執)을 말한다.
  10. 10)4기문(記問) 또는 4기(記)라고도 한다. 네 가지 해답하는 방식이 있는 질문의 분류이다. 응일향기문(應一向記問:一向記란 곧바로 긍정하는 방법이다), 응분별기문(應分別記問:分別記란 물음의 뜻을 분별하여 몇 가지의 경우로 나누어서 답하는 방법이다), 응반힐기문(應反詰記問:反詰記는 反問記라고도 하는데 반문하여 물음의 뜻을 정확하게 하여 답하는 방법이다), 응사치기문(應捨置記問:捨置記란 대답할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여 답하지 않는 방법이다)의 네 종류이다.
  11. 11)무궁과(無窮過)란 논리학상의 무한소급을 말한다. 즉, 어떤 것을 기초 짓기 위해서 다른 것을 필요로 하고, 후자는 다시 또 다른 것을 필요로 해서 이와 같이 끊임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갑을 증명하기 위해서 을을 증명하며, 을을 증명하기 위해서 병을 증명하는 등 끝없이 나아가는 방식이다.
  12. 12)일체의 마음이 일체시, 일체처에 두루 일어나는 마음의 작용[心所], 즉 선이나 악으로 성격을 짓지 못하며 모든 경우의 보편적인 마음작용으로 작의(作意)ㆍ촉(觸)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 심소이다.
  13. 13)유식설에서 말하는 쉰한 가지 심소 가운데 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정(定)ㆍ혜(慧)의 다섯 가지 심소는 각기 다른 대상에 대해서 일어난다는 뜻으로 각별경(各別境)이라고 말한다.
  14. 14)선한 마음작용으로서는 신(信)ㆍ참(慚)ㆍ괴(愧)ㆍ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ㆍ근(勤)ㆍ경안(輕安)ㆍ불방일(不放逸)ㆍ행사(行捨)ㆍ불해(不害)의 열한 가지이다.
  15. 15)분명하게 진리를 보는 것, 진리와 하나가 되는 것, 현전에 진리를 관하는 지혜를 가리킨다. 현전에 명료하게 진리를 관찰하는 것이다.
  16. 16)다른 것이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는 물질,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어서 대(對)를 갖고 있는 물질이다.
  17. 17)부정(不定)이란 인명(因明)에서는 어떤 개념이 갑(甲)과 비갑(非甲)의 양쪽에 걸쳐 있는 것을 말한다. 인(因)의 작용범위가 너무나 광범위하여 불확정적인 것이다.
  18. 18)인(因)은 인명(因明)의 논증에서 유(喩)와 함께 종(宗)의 근거가 된다. 여기서 인은 원인 유는 비유, 종은 주장의 뜻이다.
  19. 19)유대(有對)는 장소를 점유하고 있어서 물질적으로 방해를 주고 있는 것이 있다는 뜻이다. 대(對)란 방해, 장애의 뜻이며 유애(有礙)와 의미가 같다.
  20. 20)각오란 진리를 체득하여 진지(眞智)를 개발함을 말한다. 여기서는 불지(佛智)인 각오지(覺悟智)를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