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佛地經論卷第四

ABC_IT_K0554_T_004
015_0251_c_01L불지경론 제4권
015_0251_c_01L佛地經論卷第四


친광 지음
015_0251_c_02L親光菩薩等造
현장 한역
이미령 번역
015_0251_c_03L大唐三藏法師玄奘奉 詔譯



또 허공 중에 갖가지 색상의 생함이나 멸함이 나타나도 이 허공에는 생하거나 멸함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서도 온갖 지(智)의 변화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의 생함이나 멸함이 나타나지만 정법계에는 생멸이 없다.
015_0251_c_04L經曰又如空中種種色相現生現滅而此虛空無生無滅如是如來淨法界中諸智變化利衆生事現生現滅而淨法界無生無滅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모든 소지경계(所知境界:인식대상의 영역)에 두루 존재하면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며 한결같이 수전(隨轉)1)한다면, 그렇다면 법계에도 생멸이 있을 것이다. 만약 생멸이 없다면 소지경계에 두루 존재하면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도 않을 것이며 한결같이 수전하지도 않을 것이다.
015_0251_c_08L論曰復有難言若淨法界遍在一切所知境界不相捨離一向隨轉是則法界應有生滅若無生滅不應遍在所知境界不相捨離一向隨轉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네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설한다.
‘또 허공 중에 갖가지 색상의 생함이나 멸함이 나타나도 등등’이라는 것은 이런 뜻을 말하고 있다. 마치 태허공에는 여러 색이 두루 존재하며 색상을 수용하되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고 한결같이 수전하는데, 여러 색이 비록 생멸을 나타내도 허공의 성품에는 생멸함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는 모든 경계에 두루하여 일체지가 변화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포용하되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며 한결같이 수전하니, 지혜 등은 비록 생했다 멸했다 하지만 정법계에는 생멸이 없는 것이다.
015_0251_c_12L爲釋此難故說第四太虛空喩又如空中種種色相現生現滅等者此義意言如太虛空遍在諸色容受色相不相捨離一向隨轉諸色雖復現生現滅而虛空性無生無滅如是如來淸淨法界遍一切境含容一切智所變化利衆生事不相捨離一向隨轉智等雖有現生現滅而淨法界無生無滅
여기에는 밀의(密意)가 있어서 계경 중에서 “만수실리여,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을 이름하여 여래라고 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라고 말하였다.
015_0251_c_20L就此密意契經中說曼殊室利不生不滅故名如來乃至廣說
015_0252_a_01L승의제(勝義諦)에서는 색 등의 법들도 또한 생멸함이 없지만, 세속제(世俗諦)에서는 생멸을 시설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 뜻은 세속상(世俗相)에 대해서는 생멸함이 있음을 나타내지만, 승의의 본체에는 실제로 생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정법계 중에 온갖 지혜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 또한 이와 같다.
015_0251_c_22L就勝義諦色等諸法亦無生滅就世俗諦施設生滅是故言現此意說言就世俗相現有生滅非勝義體實有生滅淨法界中諸智變化利衆生事亦復如是

또 허공 중에 갖가지 색상의 증가나 감소가 나타나지만 이 허공에는 증가나 감소가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서도 여래의 감로인 성스러운 가르침[甘露聖敎]의 증가나 감소가 나타나지만 정법계에는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다.
015_0252_a_04L經曰又如空中種種色相現增現減而此虛空無增無減如是如來淨法界中顯示如來甘露聖教有增有減而淨法界無增無減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일체에 두루 존재하여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데,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현재에는 증가함이 있다가 후에는 마땅히 감소하여 없어지는 것으로 보인다면, 법계도 그와 똑같아서 반드시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법계는 청정하지 못할 것이다.
015_0252_a_08L論曰復有難言若淨法界遍在一切不相捨離如來聖教現見有增後當減滅法界同彼應有增減若爾法界應不淸淨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섯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말하는 것이다.
‘또 허공 중에 갖가지 색상의 증가나 감소가 나타나지만 등등’은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온갖 외도들과 일체 세간의 그릇되고 저열한 가르침들에 비해 가장 진실하고 뛰어나고 청정해서 마치 제호(醍醐)와도 같고 감로와도 같다는 것이니, 열반을 얻어서 영원토록 죽음을 없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고 증성(證聖)하면 무학과(無學果)를 얻는다. 불멸후 천 년 이전에는 많은 부분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정법이 다만 천 년을 경과했다고 말하는 것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만 천 세(千歲) 동안만 머문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015_0252_a_12L爲釋此難故說第五太虛空喩又如空中種種色相現增現減等者如來聖教於諸外道一切世閒邪劣教中最爲眞實殊勝淸淨猶如醍醐亦如甘露令得涅槃永不死故如是聖教奉行證聖得無學果千載已前多分有故說佛正法但經千載非佛教法但住千歲
또 성문장(聲聞藏)은 부처님께서 떠나신 지 겨우 백 년이 지난 후에 여러 부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보살장은 천 년 이전에는 청정하여 한 가지 맛이었으며 서로 어긋나거나 말다툼이 있지 않았다. 천 년 이후에 이르러 공(空)과 유(有)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논의가 일어났으니, 이 때문에 여래의 정법은 다만 천 년을 경과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015_0252_a_19L又聲聞藏雖佛去世百年已後卽分多部而菩薩藏千載已前淸淨一味無有乖諍千載已後乃興空有二種異論是故說言如來正法但經千載
015_0252_b_01L‘그렇지만 정법계에는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다’라는 것은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세속의 이치로 말하면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있지만, 이는 승의의 뜻에 입각한 것이 아니니 법계가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는 것을 성품으로 삼기 때문이다. 색 등도 마찬가지라서 법계는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음을 성품으로 삼으니, 승의의 이치에 입각한다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상이 없다. 그러므로 ‘나타낸다’라고 말하여 세속제의 측면에서 식 등이 변현(變現)하여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있는 듯하다[似有]고 한 것이지 참다운 성품(眞性:즉 승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니, 정법계 중의 색 등의 모든 법은 다 희론과 분별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015_0252_a_23L而淨法界無增無減者如來聖教就世俗理有增有非就勝義法界爲性無增減故等亦爾法界爲性無增無減就勝義理猶如虛空無增減相是故言現就世俗識等變現似有增減非就眞性淨法界中色等諸法皆離戲論分別相故

또 허공 중에 있는 시방의 색상(色相)처럼 가없고 다함도 없는 것이 바로 허공계의 가없고 다함없기 때문이지만, 이 허공에는 오고 감도 없고 움직이거나 구르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여래의 정법계 중에 시방의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고 안락케 하는 일을 건립하여 갖가지로 작용하되 가없고 다함이 없으니, 청정법계도 가없고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법계에는 오고 감도 없고 움직이거나 구르는[轉] 것이 없다.
015_0252_b_07L經曰又如空中十方色相無邊無盡是虛空界無邊盡故而此虛空無去無來無動無轉如是如來淨法界中建立十方一切衆生利益安樂種種作用無邊無盡淸淨法界無邊盡故而淨法界無去無來無動無轉

다시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여래가 법계를 체로 삼는다면 여래가 일체 유정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베풀면서 가거나 올 때 법계가 그와 더불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법에서도 당연히 오고 감이 있고 생겨남 등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법계는 청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계가 오고 가는 등의 일이 없다면 시방의 모든 유정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
015_0252_b_13L論曰復有難言若諸如來法界爲體如來施與一切有情利益安樂或去或來法界與彼不相離故如所餘法應有去來應有生等若爾法界應不淸淨法界若無去來等事不應十方施諸有情利益安樂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여섯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드는 것이다.
‘또 허공 중에 있는 시방의 색상은 가없고 다함도 없으니 등등’은 마치 허공계가 가없고 다함이 없는 것처럼 시방세계 또한 가없고 다함이 없으니, 이 때문에 그 속의 갖가지 색상 또한 가없고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한 방향의 가[邊]가 없고 온갖 방향의 다함[盡]이 없어서 때와 장소를 성취하므로 말하기를 ‘가없고 끝이 없다’고 한다.
015_0252_b_19L爲釋此難故說第六太虛空喩又如空中十方色相無邊無盡等者如虛空界無邊無盡十方世界亦無邊盡是故其中種種色相亦無邊盡無一方邊無諸方盡或就時處是故說名無邊無盡
015_0252_c_01L‘이 허공에는 오고 감도 없고 움직이거나 구르는 것이 없다’라는 것은 태허공이 일체를 포용하며 일체에 두루하는 까닭이고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 중에 시방의 일체 중생들을 건립한다’ 등은 이익되고 즐겁게 하는 작용이 가없고 끝이 없다는 것이니, 뜻은 앞에서와 같다.
015_0252_c_01L而此虛空無去無來無動無轉者以太虛空含容一切遍一切故無作用故是如來淨法界中建立十方一切衆生等者利樂作用無邊無盡義如前
‘청정법계도 가없고 다함이 없는 것이다’라는 것은 정법계가 가없고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행하거나 움직임이 없어도 증상력으로 인하여 능히 시방의 가없는 세계의 가없는 유정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굴린다.
‘정법계는 오고 감 등등이 없다’라는 것은 이쪽을 버리고 저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간다’라고 하고, 저쪽을 버리고 이쪽으로 오는 것을 ‘온다’라고 하는 것이다. 움직임도 없고 구름[轉]도 없다는 것은 처음 것은 표(標)이고 나중 것은 석(釋)이다.
015_0252_c_06L淸淨法界無邊盡故者以淨法界無邊盡故雖無行動而增上力能於十方無邊世界無邊有情利樂事轉而淨法界無去無來等者捨此就彼名去捨彼就此名來無動無轉初摽後釋
‘법계가 없다’라는 것은 변제(邊際)가 없기 때문이며 형태와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변제와 형태와 장애가 있다면 모든 법은 가히 다른 방향으로 오고가며 움직이고 구른다고 말할 수 있어서 변제와 형태와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니다. 법계는 허공과 동등해서 오고 감과 움직이고 구르는 일이나 업을 짓는다고 말할 수 있다.
015_0252_c_11L法界無者無邊際故無形㝵故若有邊際形㝵諸法可說異方去來動轉非無邊際形㝵法界如虛空等得說去來動轉作業
이 총체적인 뜻을 말하면 청정법계란 바로 모든 여래의 승의(勝義) 자체이다. 법계가 모든 유정들의 상속 속에서 두루 존재하고 저 모든 유정들은 스스로 선한 종자를 성숙케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정법계의 증상연력(增上緣力)을 말미암아 그 식이 생할 때에 이와 같은 작용이 변현하여 구르니[轉], 여래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짓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작용을 제외하면 증상연력은 다시 여래법신이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일의 작용을 짓지 않는다.
015_0252_c_14L此摠義言淸淨法界是諸如來勝義自體法界遍在一切有情相續中有彼諸有情自善種子成熟力故由淨法界增上緣力彼識生時如是作用變現而轉說名如來作諸衆生利益安樂除此作用增上緣力更無如來法身能作有情利益安樂事用
계경에서 “선남자여, 여래는 도무지 오고 감 등의 일이 없지만, 여래의 오고감 등을 말한다면 이것은 수용신과 변화신에 대해서 하는 말이라서 서로 어긋나는 허물이 없다”고 설한 바와 같다.
015_0252_c_21L如契經言善男子來都無去來等事而言如來去來等就受用身及變化身無相違過
015_0253_a_01L
또 허공 중에는 삼천세계가 무너지고 이루어짐을 나타내지만 허공계에는 무너지고 이루어짐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서도 무량한 상을 나투고 등정각을 이루시거나 혹은 다시 대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지만 정법계에서는 등정각을 이룸도 없고 적멸에 드심도 없다.
015_0252_c_23L經曰又如空中三千世界現壞現成而虛空界無壞無成如是如來淨法界現無量相成等正覺或復示現入大涅槃而淨法界非成等覺非入寂滅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오고 감 등을 여의어 있다면 어떻게 방향과 처소[方所]를 오고 가서 정각(正覺)을 얻고 반열반(般涅槃)하는 등의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오고 감이 있다면 도리어 앞서 한 말이 허물을 얻을 것이다.
015_0253_a_04L論曰復有難言若淨法界離去來等云何無有方所去來而得正覺般涅槃等若有去來還得前過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곱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든 것이다.
‘또 허공 중에는 삼천세계가 등등’이란 것은 이 의문은 그렇지 않으니, 비유하면 세계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과 같지만 허공계는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없기 때문이다. 정법계 중에서 비록 모든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시고 반열반하는 모습 등을 나투심이 있다고 하여도 정법계에는 진실로 등정각을 이룬다거나 열반 등의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일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오고 감 등이 있다. 허공중에 모든 세계의 멸괴와 생성이 나타난다는 것은 세속의 이치로 설한 것이지 진실한 뜻[眞實義:즉 승의]은 아니다. 그것은 태허의 성품이 모두 공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015_0253_a_07L爲釋此難故說第七太虛空喩又如空中三千世界等者此難不然譬如世界現壞現成而虛空界無成壞故淨法界中雖有諸佛現成正覺般涅槃等而淨法界眞實無有成等正覺涅槃等事若有此事可爲此故有去來等如虛空中現諸世界滅壞生成就世俗理非眞實義彼如太虛皆性空故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거나 혹은 다시 반열반하는 등의 한량없는 모습을 나타내지만, 이 또한 세속의 이치로 말미암는 것이지 진실한 뜻은 아니다. 정각을 이룬다는 것과 열반에 드는 것 모두가 있지 않기 때문이며, 여러 온(蘊)이 반연하여 생긴 탓에 나[我]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정법계의 진실한 뜻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법은 자상(自相)을 버리고 다른 상을 취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계가 정각 아닌 것을 버리고 등정각을 이루는 것을 인정하고, 열반 아닌 것을 버리고 반열반 얻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
015_0253_a_15L如是如來淸淨法界現無量相成等正覺或復涅槃亦由世俗非眞實義成正覺者入涅槃者皆無有故緣生諸薀非我性故若淨法界就眞實義有此二者應非眞實以眞實法不捨自相取餘相故若許法界捨非正覺成等正覺捨非涅槃得般涅槃則非眞實
015_0253_b_01L어떤 사람은 “바로 이런 뜻으로 인하여 진실하다고 하는 것이다. 등정각이란 것은 일찍이 있지 않았을 때에는 등정각이 아니었고, 반열반이란 것도 일찍이 있지 않았을 때에는 반열반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실하다”라고 말한다.
015_0253_a_22L若有意謂卽以此義名爲眞實等正覺者曾無有時不等正覺般涅槃者曾無有時不般涅槃是故眞實
만약 그렇다면 나머지 일 또한 반드시 그와 같아야 한다. 괴겁(壞劫)은 항상 무너지기만 해서 무너지지 않을 때가 없고, 성겁(成劫)은 항상 이루어지기만 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없다. 병(甁) 등이 없을 때에는 이것을 병 등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일들은 모두 진실해야 한다.
015_0253_b_02L若爾餘事亦應如是壞劫恒壞無時不壞成劫恒成無時不成甁等無時不是甁等如是等事皆應眞實
만약 그렇다면 관행(觀行)을 닦지 않는 자는 불이 치성하게 타올라 가득 찬 세계를 건너 다른 세계로 갈 때 반드시 그 속에서 불에 탈 것이며, 증상의 뛰어난 이해력을 얻은 자는 그 지위 등에서 반드시 자재하게 전변하여 작용하지 못할 것이다. 뛰어난 선정의 자재력을 얻지 못한 자는 등정각이 나타나도 등정각이 아니고 반열반이 나타나도 반열반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전에는 정각위(正覺位)에 있었고 지금은 열반위(涅槃位)에 있다고 하지만, 정진여(淨眞如)는 자상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정법계는 정등각을 이루지도 않고 열반에 들지도 않는다.
015_0253_b_05L若爾不應修觀行者度熾火等遍滿世界往餘世界應被其中火所燒等獲得增上勝解力者於其地等應無自在轉變作用非得勝定自在力者現等正覺非等正覺現般涅槃非般涅槃是故雖有先正覺位今涅槃位而淨眞如不捨自相故淨法界非成等覺非入涅槃
여기에서 두 종류는 모두 증익으로서 자상을 삼기 때문에 진실유(眞實有)가 아니다. 작자(作者)와 작용(作用)은 모두 바로 변계소집상인 까닭에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체법을 수순하여 깨닫기 때문에 보리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출세간의 무분별지로서 등정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015_0253_b_13L此中二種皆是增益爲自相故非眞實有作者作用皆是遍計所執相故俱無所有而言隨覺一切法故名菩提者此是出世無分別智成等正覺
여기에서 또한 진여를 반연하는 지(智)는 두 가지(즉 정등각과 반열반)의 분별을 현행하지 않는 까닭에 등정각도 아니고 반열반도 아니다. 즉, 이와 같은 것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써 “천자여, 마땅히 알아라. 일체법이 모두 생함이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생함을 나타내는 것도 얻을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다. 나아가 자세히 설한다”고 설하였다.
015_0253_b_17L此中亦以緣眞如智二種分別不現行故非等正覺非般涅槃卽依如是密意說言天子當知以一切法皆無生故諸佛現生無得無證乃至廣說
변계소집이 있지 않기 때문에 생함 등의 분별 또한 있지 않다. 세속의 이치를 말미암아 두 가지를 시설하고 변화신을 말미암아 두 가지를 나타내나니, 교화할 유정의 마음[意]에 수순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일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또 두 가지를 예로 들어서 그것들과 비슷한 종류의 일체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015_0253_b_20L遍計所執無所有故生等分別亦無有故由世俗理施設二故由變化身示現二故隨順所化有情意故如來示現如是二事且擧二事類顯一切
015_0253_c_01L 또 허공을 의지하여 갖가지 색상이 무너져 문드러지거나 불에 타 마르면서 변이(變異)할 수는 있지만, 허공계는 그것에 의해 변하는 바가 없고 또한 피로함이 없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정계(淨界)에 의지하면 중생계 안의 갖가지 학처(學處:계율)는 몸과 말과 뜻의 업으로 훼손하거나 범할 수 있지만, 정법계는 그것에 의해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으며 또한 피로함이 없다.
015_0253_c_01L經曰又如依空種種色相壞爛燒燥變異可得而虛空界非彼所變亦無勞弊如是依止如來淨界衆生界內種種學處身語意業毀犯可得而淨法界非彼變異亦無勞弊

다시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모든 유정들의 부류에 따라 두루 존재한다면, 어떻게 유정이 훼손하거나 범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법계 속에는 온갖 훼손하거나 범하는 일이 존재하지 않으니,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학처를 제정하고 세우는 일 또한 가치 없는 일일 것이니, 모든 유정들은 훼손하거나 범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훼손하거나 범함이 있다면 반드시 피로함이 있을 것이니, 당연히 2승(乘)의 지극히 청정하지 못함과 같을 것이다.
015_0253_c_06L論曰復有難言若淨法界遍在一切有情之類云何有情得有毀犯非法界中有諸毀犯性淸淨故制立學處亦應唐捐以諸有情無毀犯故若有毀犯應有勞弊應同二乘非極淸淨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덟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든 것이다.
‘또 허공을 의지하여 갖가지 색상 등등’이란 것은 이런 의문은 그렇지 않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에 의지하여 온갖 초목 등의 갖가지 색상이 무너지는 등 다양한 변이가 생기지만 정허공(淨虛空)은 그런 사물에 변이되는 바가 없다. 비록 그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변이되는 일이 없고 피로함이 없으니, 무너지는 등의 괴로움에 의해 핍박받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015_0253_c_11L爲釋此難故說第八太虛空喩又如依空種種色相等者此難不然如虛空故譬如依空諸草木等種種色相壞等變異種種可得而淨虛空不爲彼物之所變異雖在其中而無變異亦無勞弊無有壞等苦所逼故
이와 같이 여래의 정계에 의지하여 중생계 안은 비록 갖가지 훼손하거나 범함이 있게 되지만, 정법계는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고 또한 피로함이 없다. 비록 정법계 속에서 유정이 스스로 분별을 일으켜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두 가지 훼손이나 범함을 나타내 보인다고 하더라도, 즉 이른바 재가인은 부모를 해치는 등 갖가지 선하지 않은 일을 범한다.
015_0253_c_17L如是依止如來淨界衆生界內雖有種種毀犯可得而淨法界無有變異亦無勞弊雖淨界中現見有情自分別起身語意業二種毀犯謂在家者害父母等種種不善毀犯可得
015_0254_a_01L 출가자는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또한 갖가지 범함을 짓더라도 그것을 막기 위하여 갖가지 학처를 제정하고 세우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세속의 어기고 범하는 것일 뿐 정법계는 그런 어기고 범하는 일에 의해 변이하지 않으니 다른 성품[異性]이 없기 때문이고, 또한 피로함이 없으니 핍박받지 않기 때문이다.
015_0253_c_22L諸出家者隨其所應亦有種種毀犯可得及爲遮止制立種種學處可得此皆世俗有所違犯而淨法界非彼違犯之所變異無異性故亦無勞弊無逼切故
만약 괴로움의 핍박을 받아서 감내하지 못한다면 곧 피로함이 있을 것이니, 성문 등은 정법계가 아니어서 능히 온갖 괴로움의 핍박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피로함이 없음은 마치 허공과도 같다. 또한 허공 속에 있는 색 등의 여러 법처럼 비록 무너지는 일 등이 있어도 이것은 다만 세속의 이치이지 진실한 이치가 아니다. 이와 같이 여래의 정법계 중에는 비록 훼손하고 범함이 있어서 학처를 세우고 제정하여도 이것은 다만 거짓으로 안립하는 것이지 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
015_0254_a_03L若爲苦逼不堪耐故則有勞弊如聲聞等非淨法界不能堪耐一切苦逼故無勞弊猶如虛空又如空中色等諸法雖有壞等但是世俗而非眞實如是如來淨法界中雖有毀犯制立學處但假安立而非實有
왜냐하면 몸 등의 세 가지 업이 불선(不善)하다는 등의 성품은 모두가 이들과 상응하는 발기세력(發起勢力)을 말미암아 거짓 이름을 세우는 것이지 자성으로 말미암는 것은 아니다. 돌멩이 등은 발기의 힘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건립될 수 있어서 불선 등이 되지는 않는다.
015_0254_a_09L所以者何身等三業不善等性皆由相應發起勢力假名建立不由自性非塊石等由發起力可實建立爲不善等
몸의 업 또한 그와 같으니 땅 등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성품이기 때문이다. 입의 업 또한 마치 종치는 소리 등이 불선이 아닌 것과 같다. 여러 무표업(無表業)은 오직 부작(不作)을 그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역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뜻의 업 또한 상응하는 세력을 말미암아 불선 등을 세우니, 만약 다른 것과 상응하면 역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인(因)이 이미 실답지 않으니 과(果) 역시 반드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법계 중의 업이나 과보나 일체는 모두 분별에 의해 일으켜진 것으로서 세속의 식 등이 변현하여 생겨난 것이다. 변현상(變現相)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건립된 것은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015_0254_a_12L身業亦爾地等和合所成性故語業亦如鍾鼓聲等非不善等諸無表業唯以不作爲其性故亦非實有意業亦由相應勢力立不善等如餘相應亦非實有因旣非實果亦應爾故法界中若業若果一切皆是分別所起世俗識等變現而生如變現相如是建立皆非眞實
015_0254_b_01L
또 허공에 의지하여 대지와 큰 산과 광명과 물과 불과 제석천과 권속, 나아가 해와 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를 얻을 수 있어도 허공계에는 그 모든 상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계(淨界)에 의지하여 계온(戒蘊)과 정온(定蘊)과 혜온(慧蘊)과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智見)의 여러 온을 얻을 수 있지만 정법계에는 그 모든 상이 없다.
015_0254_a_20L經曰又如依空大地大山光明水火帝釋眷屬乃至日月種種可得而虛空界非彼諸相如是依止如來淨界戒薀定薀慧薀解脫解脫智見諸薀可得而淨法界非彼諸相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일체법에 두루 존재한다면 반드시 계(戒) 등의 무루온상(無漏蘊相)이 없어서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응당 법계와 같아서 온의 성품이 아니다.
015_0254_b_02L論曰復有難言若淨法界遍一切法應無戒等無漏薀相不相離故應如法界亦非薀性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홉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드는 것이다. ‘또 허공에 의지하여 대지와 큰 산과 광명과 물과 불 등’이란 것은 이 의문은 그렇지 않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에 의지하여 땅 등을 얻을 수 있지만 땅 등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에 허공이 온의 성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여래의 정계(淨界)에 의지하여 비록 계(戒) 등의 여러 온을 얻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정법계는 계 등의 온이 아니다.
015_0254_b_05L爲釋此難故說第九太虛空喩又如依空大地大山光明水火等者此難不然如虛空故譬如依空地等可得非與地等共相應故空成薀性如是依止如來淨界雖有戒等諸薀可得而淨法界非戒等薀
마땅히 알아라. 이 중에서 무루정계(無漏淨戒)를 이름하여 계온(戒蘊)이라고 하고, 무루정혜(無漏定慧)를 이름하여 정혜온(定慧蘊)이라 하고, 무학승해(無學勝解)를 이름하여 해탈온(解脫蘊)이라 하고, 무학정견(無學正見)을 이름하여 해탈지견온(解脫智見蘊)이라고 한다. 앞의 셋은 인이고 뒤의 둘은 과보이다.
015_0254_b_10L當知此中無漏淨戒名爲戒薀無漏定慧名定慧薀無學勝解名解脫薀無學正見名解脫智見薀前三是因後二是果
어떤 사람은 “일체가 모두 무학이니 해탈혜(解脫慧)를 반연하는 것을 이름하여 해탈지견이라고 하고, 나머지 혜(慧)는 ‘혜(慧)’라고 이름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일체가 학(學)과 무학(無學)에 통해 있으며, 학위(學位)는 단계적으로 나누어 얻지만 무학은 원만하다. 모든 불ㆍ보살들은 모두 다섯 가지를 구족하고 있다”고 말한다.
015_0254_b_14L有義一切皆是無學緣解脫慧名解脫智見餘慧名慧有義一切通學無學學位分得無學圓滿佛菩薩皆具五故
이와 같이 5온은 비록 법계에 의지하고 있지만 정법계는 5온의 상과 같지 않으며 5온 또한 5온의 자상을 잃지 않는다. 여기에서 또한 마땅히 5취온을 설하나니, 계(戒) 등의 무루는 법계와 같기 때문이다. 또한 정법계 중에는 비록 계 등의 여러 일의 공덕은 없으나 진리공덕의 법문은 존재한다고 간략하게 설하신 것이다.
015_0254_b_17L如是五薀雖依法而淨法界不同彼相彼亦不失五薀自相此中亦應說五取薀戒等無漏同法界故且略宣說淨法界中雖無戒等諸事功德而有眞理功德法
015_0254_c_01L 저 증상연이 모든 유위공덕을 생장하는 것이 허공법계의 진리공덕 법문과 같지 않은 것은 바로 무위이기 때문에 온에 포섭되지 않고 그것에 의지하여 모든 공덕을 생장하는 것이다. 유위생멸은 바로 온에 포섭되어서 끊어지거나 다함이 없기 때문에 또한 항상한다고 이름한다. 그 법은 영원하거나 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서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함으로 돌아가나니, 일향기(一向記)이며 온에 포섭되는 바이기 때문에 무위법이 아니다. 연려(緣慮) 등의 작용의 뜻이 있기 때문이자 그 작용이 훌륭하기 때문에 또한 5온의 법계는 실로 이 모든 3승의 공덕이 의지하는 바라고 설하는 것이다.
015_0254_b_22L彼增上緣生長一切有爲功德同虛空法界眞理功德法門是無爲非薀所攝依之生長一切功德爲生滅是薀所攝無斷盡故亦說名非永不滅生必歸滅一向記故所攝故非無爲法有緣慮等作用義以其勝故且說五薀法界實是一切三乘功德所依

또 허공 가운데 갖가지 인연이 전전하여 생기하면서 삼천대천의 무량한 세계가 두루 굴러갈 수 있어도 허공계는 기작(起作)하는 바가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도 무량한 상을 구족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대중의 모임에서 두루 법을 윤전하실 수 있지만 정법계는 기작하는 바가 없다.
015_0254_c_06L經曰又如空中種種因緣展轉生起三千大千無量世界周輪可得而虛空界無所起作如是如來淨法界中具無量相諸佛衆會周輪可得而淨法界無所起作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법계를 체로 삼으면 반드시 저것과 이것을 수용하는 차별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대중의 모임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수용하는 바에 차별이 있다면, 어떻게 모든 부처님의 법계가 청정할 수 있단 말인가?
015_0254_c_11L論曰復有難言若一切佛法界爲體應無彼此受用差別云何得有衆會不同若所受用有差別者云何諸佛法界淸淨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열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드는 것이다.
‘또 허공 가운데 갖가지 인연이 전전하여 생기하면서 등등’은 이런 의문은 그러하지 않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허공 가운데 인연이 생기하여 삼천계(三千界) 등을 빙 둘러 풍륜(風輪)이 둘러쌀 수 있는 것과 같다.
015_0254_c_15L爲釋此難故說第十太虛空喩又如空中種種因緣展轉生起等者此難不然如虛空故如虛空中因緣生起三千界等周帀風輪圍遶可得
허공이 비록 내 것이라는 차별이나 분별이나 사려 등이 없을지라도 능히 갖가지 차별 세계를 수용하여 두루 굴러갈 수 있나니, 이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서도 자업(自業)의 증상(增上)이 일으키는 갖가지 온갖 상이 원만하여 일체지를 얻고 관정보살(灌項菩薩)의 동일한 집회에서 두루 굴러감을 얻을 수 있다.
015_0254_c_19L虛空雖無我所差別分別思慮而能容受種種差別世界周輪如是如來淨法界中自業增上所起種種衆相圓滿得一切智灌頂菩薩同一集會周輪可得
015_0255_a_01L 갖가지 별도의 인연으로 생기하는 것은 한 부처님의 대중 모임의 인연과는 같지 않으니, 제2, 제3 또한 이와 같다. 다른 계경 중에서는 이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 정토를 가지가지로 얻을 수 있다고 설하며, 모든 부처님의 대중 모임의 가지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설한다. 그렇지만 정법계는 나와 내 것이라고 수용하는 차별과 나아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분별을 조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015_0254_c_23L別別因緣之所生起非如一佛衆會因緣第二第三亦復如是餘契經中依此故說諸佛淨土種種可得諸佛衆會種種可得而淨法界無我我所受用差別及以造作能取所取分別可得
총체적인 뜻을 말한다면, 여래의 법신은 비록 차별이나 희론이나 색상(色像)이 없지만, 수용신과 변화신은 본원력과 스스로의 뛰어난 힘의 행[勝行力]을 말미암아 갖가지의 상들이 원만한 모든 부처님의 정토를 일으켜서 모든 부처님의 대중 모임에서 다양하고 차별적인 모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정식(淨識)이 이와 같이 변현한 것이므로 갖가지 차별은 진실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
015_0255_a_05L此摠義言如來法身雖無差別戲論色像而受用身及變化身由本願力自勝行力生起種種衆相圓滿諸佛淨土諸佛衆會差別可得皆是淨識如是變現種種差別非眞實有
마치 전륜왕이 지난 세상의 원력을 말미암아 모든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뛰어난 행[勝行]을 지어서 여보(女寶) 등의 여러 미묘한 즐거움을 주는 갖가지 차별을 갖추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 또한 마찬가지라서 모든 유정들을 요익하게 하기 위하여 뛰어난 행을 짓고, 자업(自業)의 증상(增上)으로 갖가지 깨끗한 국토를 생기하고, 온갖 모임이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도록 온갖 차별을 갖추지만, 다만 무분별한 것은 앞의 경우와 다르다.
015_0255_a_10L如轉輪王由宿願力亦爲饒益諸有情故造作勝行生女寶等諸妙樂具種種差別諸佛亦爾爲欲饒益諸有情故造作勝行自業增上生起種種淨國衆會受用法樂衆具差別但無分別與前有異
또한 다시 이와 같이 이미 설하였으니, 법계의 여러 상(相)들은 참으로 깊고 깊으며, 업용(業用) 또한 깊고 깊으며, 처소도 깊고 깊다.
상이 깊고 깊다는 것은 이른바 열 가지 청정하지 못한 허물을 여의는 것이니, 마땅히 알라, 이것이 바로 열 가지 청정상(淸淨相)이다. 청정하지 못한 허물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차별의 허물이고, 둘째는 더러움에 물드는 허물이고, 셋째는 유행(有行)의 허물이고, 넷째는 유위(有爲)의 허물이고, 다섯째는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허물이고, 여섯째는 행동의 허물이고, 일곱째는 단상(斷常)의 허물이고, 여덟째는 피로함의 허물이고, 아홉째는 업을 쌓는 허물이고, 열째는 섭중(攝衆)의 허물이다.
015_0255_a_15L復次如是已說法界諸相甚深業用甚深處所甚深相甚深者謂離十種不淸淨過當知卽是十淸淨相不淸淨過有十種者差別過雜染過有行過有爲過增減過動過斷常過勞弊過積聚過攝衆過
015_0255_b_01L열 가지 청정상이란 이른바 차별이 없는 상,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상, 유행이 아닌 상, 유위가 아닌 상,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 상, 행동이 아닌 상, 단상이 아닌 상, 피로함이 없는 상, 업을 쌓지 않는 상, 내 것이 없다는 상의 차례이다. 업용이 참으로 깊고 깊은 것은 바로 변화 등의 업임을 알아야 한다.
015_0255_a_22L十淸淨相者謂無差別相無雜染相非有行相非有爲相無增減相無行動相非斷常相無勞弊相非積聚相無我所相如其次第業用甚深當知卽是變化等業
처소의 깊고 깊음은 행동이 없이도 온갖 상이 모든 여래 정토의 대중들의 모임을 원만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일체처에서 모두가 허공으로 비유를 삼은 것은 법계의 모든 거친 상[麤相]이 허공과 같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015_0255_b_03L處所甚深當知卽是無有行動衆相圓滿一切如來淨土衆會於一切處皆以虛空爲譬喩者爲顯法界一切麤相同虛空故
계경에서 “나아가 모든 시설(施設)과 비유로써 모든 여래의 계(戒) 등의 공덕을 설하는 것은 모두 바로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나, 오직 하나의 비유만은 제외하나니 이른바 허공의 비유이다. 여래의 계 등의 무량한 공덕은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라고 설한 것과 같다.
015_0255_b_07L如契經言乃至所有施設譬喩喩諸如來戒等功德一切皆是謗諸如來唯除一喩謂虛空喩如來戒等無量功德同虛空故乃至廣說

또한 묘생이여, 대원경지(大圓鏡智)란 마치 원만한 거울에 의지하여 온갖 형상들의 영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라는 거울에 의지하여 모든 처(處)와 경(境)과 식(識)의 온갖 형상들의 영상이 나타난다. 오직 원만한 거울로써 비유를 삼은 것은 원만한 거울과 여래의 지혜라는 거울은 평등하고 평등하나니, 그러므로 지혜라는 거울을 이름하여 원경지(圓鏡智)라고 한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15_0255_b_10L經曰復次妙生大圓鏡智者如依圓鏡衆像影現如是依止如來智鏡處境識衆像影現唯以圓鏡爲譬喩當知圓鏡如來智鏡平等平等故智鏡名圓鏡智

단(斷)을 이미 건립하였으니, 이제 지(智)를 건립해야 한다. 이에 의지하는 까닭에 말한다.
‘또한 묘생이여, 대원경지 등등’이란 여기에서는 비유로써 대원경지가 바로 모든 법의 영상을 평등하게 낳는 인연을 나타낸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모든 여래의 제8 정식(第八淨識)이 능히 지 등의 영상을 낳아서 나투는 것이 대원경이 능히 세간의 모든 영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 지(智)가 상응하기 때문에 가명(假名)으로 지(智)라고 한다.
015_0255_b_15L論曰已建立斷當建立智依此故言復次妙生大圓鏡等應知此中以喩顯示大圓鏡智是能生現諸法影像平等因緣謂諸如來第八淨識能現能生智等影像如大圓鏡能現世閒一切影像智相應故假說名智
‘모든 처(處)’라는 것은 이른바 내6처(內六處)이니 곧 눈 등이고, ‘모든 경(境)’이라는 것은 이른바 외6처(外六處)이니 곧 색 등이다. 이 내6처와 외6처가 바로 12처(處)이니, 이 12처를 반연하여 3지품(智品:평등성지와 묘관찰지와 성소작지)의 심(心)과 심법(心法)이 생겨나는 것이다.
015_0255_b_21L言諸處者謂內六處卽是眼等言諸境者謂外六境卽是色等此內六處外六境界卽十二處緣此十二生三智品心及心法
015_0255_c_01L식(識)을 주인으로 삼기 때문에 통틀어 ‘모든 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인데, 이 모든 식을 온갖 영상이라고 이름하나니 갖가지 행상(行相)의 차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뒤의 경에서 “대원경지는 일체시(一切時)에 모든 연에 의지하는 까닭에 갖가지 지의 영상과 모양이 생기한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문구에서 모두 설하였다.
015_0255_c_02L識爲主故摠名諸識卽此諸識名衆像影種種行相差別現故此後經言大圓鏡智於一切時依諸緣故種種智影相貌生起如是等文皆說
능히 지혜의 영상이 생겨나는 인[生因]이 되기 때문에 경지(鏡智)라고 이름한다. 평등성지는 중생의 일을 반연하여 원경지 등을 경계로 삼으며, 묘관찰지는 일체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경계로 삼고, 성소작지 또한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015_0255_c_06L能爲智影生因故名鏡智平等性智以緣生事圓鏡智等爲境界故妙觀察智以一切法自相共相爲境界故成所作智應知亦爾
이와 같이 3지상응심품(智相應心品)은 내6처와 외6의 경계인 모든 소연(所緣)과 소취(所取)의 경계에서 모든 자상과 공상이 변현하는 듯[變似] 갖가지 영상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영상은 모두가 여래의 대원경지를 인하여 생기한 것인데, 분명하게 드러나는 까닭에 ‘나타난다[現]’라고 이름한다.
015_0255_c_09L如是三智相應心品於內六處外六境界一切所緣所取境上變似一切自相共相種種影像分明顯現如是影像皆因如來大圓鏡智而得生起分明顯了故名爲現
이것은 오직 여래지 등이 나타나는 바이니, 여래의 과위(果位)는 평등지 등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지(智) 등이 생기할 때에는 마치 스스로 소유한 행상의 차별을 모두 능히 증지(證知)하는 것과 같다. 오직 여래의 각혜(覺慧)만이 그 모양을 분석하여 설명해 보이니, 나머지는 이런 능력이 없다.
015_0255_c_14L此唯如來智等所現如來果位平等智等爲自性故智等生時如自所有行相差別皆能證知唯有如來覺慧分析說示其相餘無此能
대원경지를 능현(能現)이라고 이름한다. 이 지혜를 반연함을 말미암아 저 영상을 생하는 것이 마치 밝은 거울에 모든 영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처(處)와 경(境)과 식(識)의 세 가지가 각각 다르니, 처는 6근(根)이고, 경은 6진(塵)이며, 식은 6식(識)으로서 이른바 18계(界)의 온갖 영상이 나타난다. 이 온갖 영상은 그것이 응하는 3지품을 따라 나타나는데, 묘관찰지 등은 진소유성(盡所有性)2)과 여소유성(如所有性)3) 등을 모두 능현하기 때문이다.
015_0255_c_17L大圓鏡智說名能現由此爲緣生彼影像猶如明鏡現諸影故又處三事各別處謂六根境謂六塵識謂六識卽十八界衆像影現此衆像影隨其所應三智品現觀察智等盡所有性如所有性皆能現故
015_0256_a_01L여래경지(如來鏡智)가 상응하는 정식(淨識)을 반연하여 이 세 가지 지혜의 영상을 낳는 까닭에 ‘현(現)’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오직 여래지(如來智) 등만이 나타내는 것을 널리 설하고, 나아가 오직 여래의 각혜(覺慧)만이 그 모양을 분석하여 설명해 보이니, 나머지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015_0255_c_23L如來鏡智相應淨識爲緣生此三智影像故名爲現亦唯如來智等所現廣說乃至唯有如來覺慧分析說示其相餘如前說
또한 18계는 모두 여래의 대원경지가 상응하는 심품이 영상을 현현한 것이니, 모든 여래의 경지(鏡智)가 생길 때에 능히 일체 경계를 비추기 때문이다. 모든 처와 경과 식은 마치 영상과 같아서 이 지(智) 중에 있으면서 분명하게 현현한다.
015_0256_a_04L又十八界皆在如來大圓鏡智相應心品影像顯現以諸如來鏡智生時皆能照了一切境故諸處境識猶如影像在此智中分明顯現
이 대원경지는 그 상을 섭수하여 생하기 때문에 대원경지에는 비록 소취와 능취, 동일성과 차이성의 분별이 없지만 모든 소지(所知)의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대원경과 같다. 이 지혜가 생할 때에는 이와 같은 행상(行相)이 자성이 되기 때문이다.
015_0256_a_07L由此鏡智攝受彼相而生起故鏡智雖無所取能取一異分別而有一切所知影現如大圓鏡此智生時如是行相爲自性故
여래는 비록 소취와 능취, 동일성과 차이성의 분별이 없지만, 자심(自心)이 나타낸 자상과 공상의 모든 법의 영상을 능히 현증(現證)하며, 증지(證知)를 말미암기 때문에 능히 뒤바뀌지 않으면서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설한다. 이 영상을 말미암아 여래는 무망실법(無忘失法)을 성취하니, 모든 소지경계의 영상은 일체시에 경지(鏡智) 위에서 분명하게 현현하여 망실되지 않기 때문이다.
015_0256_a_11L如來雖無所取能取一異分別而能現證自心所現自相共相諸法影像由證知故能無顚倒說一切法自相共相由此影像如來成就無忘失法一切所知境界影像於一切時鏡智等上分明顯現無忘失故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여래를 일체지라고 이름하겠는가? 경지 등이 없으면 언제나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나타내 증지(證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른바 상속4)이 감당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일체지라고 이름한다면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015_0256_a_16L若不爾者云何如來名一切智無鏡智等不能恒時於一切法自相共相現證知故若謂相續有堪能故名一切智如有頌曰

상속이 감당할 능력이 있으니
불[火]이 일체를 삼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체지는
단박에 일체를 아는 것이 아니다.
015_0256_a_20L相續有堪能
如火食一切
如是一切智
非頓知一切
015_0256_b_01L
이것은 다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타심지(他心智) 등은 한 가지 일을 취할 때에 다른 일을 취하지 않고 나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체지가 아니다. 그 상속의 측면에서는 또한 현재를 취하여 알 수 없기 때문에 너의 종파는 일념(一念)에 다만 모든 법의 공상을 1분(分)만 알 뿐이다.
015_0256_a_22L此但虛言他心智等取一事時不取餘事不知餘故非一切智就其相續亦不能取知現在故汝宗一念但知一分諸法共相
만약 그렇다면 여래는 반드시 가명(假名)으로 일체지라고 설한 것이지, 일체지가 아닌 것을 가명으로 일체지라고 설한 것은 아니다. 이는 곧 진실한 일체지를 이룬다는 것이다.
015_0256_b_03L若爾如來應假名說爲一切智不可假說非一切智爲一切智卽成眞實一切智者
또 여래의 경지(鏡智)가 반연이 되고 나머지 상속 중에서 세간과 출세간의 선(善)과 여러 처와 경과 식의 온갖 영상이 나타난다.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선은 만약 경지가 없다면 모두 생겨날 수 없으니, 그 법이 생겨날 때에 모두 이 힘을 말미암아서 또한 능히 증지한다.
015_0256_b_05L又以如來鏡智爲緣餘相續中世出世善諸處境識衆像影現以諸世閒世出世善若無鏡智皆不得生彼法生時皆由此力亦能證知
이 뜻을 말한다면 여래 경지의 증상연력(增上緣力)으로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선과 모든 처와 경과 식이 모두 생기할 수 있다. 마치 맑은 거울 속에 온갖 영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비록 모든 유정들이 각각 인(因)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경지가 증상연이 됨으로써 바야흐로 생기하게 된다.
015_0256_b_09L此義意言如來鏡智增上緣力一切世閒世出世善諸處境識皆得生起如明鏡中衆像影現雖諸有情各有因力而由鏡智爲增上緣乃得生起
그런데 비록 씨앗이 있다고 할지라도 땅이 없으면 박 등이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비록 형체가 있어도 거울이 없다면 온갖 영상 등이 나타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반드시 망견(妄見)과 똑같을 터이니, 자재천 등이 세간의 인(因)이 되어서 세간의 모든 과를 생하는 평등한 인을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허물은 없다. 그것이 생겨날 때에 오직 능히 증상연을 짓기 때문이며, 짓는 자[作者]가 아니기 때문이며, 덧없기[無常] 때문이며, 무량한 겁 동안에 복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닦고 모아서 생겨난 바이기 때문이다.
015_0256_b_13L如雖有種若無地等芽等不生如雖有質若無鏡等衆影不現若爾世尊應同妄見自在天等爲世閒因立爲世閒一切果生平等因故無此過失以彼生時唯能爲作增上緣故非作者故是無常故於無量劫修集福智二種資糧所生起故
모든 중생들의 선(善)과 선의 연[善緣]은 이것을 말미암아 생겨나게 된다. 외도의 허망한 견해는 자재천 등이 모든 세간을 능히 짓는 자가 되어서 그 성품이 상주한다고 하기 때문에 대원경지를 반연하여 증상연으로 삼는 것과는 같지 않다.
015_0256_b_19L一切衆生善及善緣由此得生外道妄見自在天等與諸世閒爲能作者其性常住故不相似
만약 실재하지 않는 영상이 원경 속에 생겨난다면 어떻게 비유되겠는가? 질(質)이 있고 거울이 있어서 서로 화합하여 연이 되니, 이와 같이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비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015_0256_b_22L若無實影圓鏡中生云何爲喩有質有鏡和合爲緣如是相現故得爲喩
015_0256_c_01L이른바 모든 유정들의 뒤바뀜과 집착에 의한 영상은 훈습의 성숙력 때문에 마치 거울의 표면[鏡面]이 연이 되어서 스스로의 식[自識]이 변이하여 흡사 거울의 표면에 영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 세간은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킴을 말미암아서 소위 내가 거울 속에서 그 표면의 영상을 보는데, 별도의 영상이 거울 속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경에서는 단지 온갖 영상이 나타난다고 말하였지 생기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015_0256_c_01L謂諸有情顚倒執著影像熏習成熟力故鏡面爲緣自識變異似面影現由是世閒起增上慢謂我鏡中見其面影以無別影鏡中生故經但說言衆像影現不言生起
이처럼 모든 경계의 모습[境相]은 모두 스스로의 식(識)이 변이하여 현현했을 뿐 별개의 실체가 있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식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만 유식(唯識)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심법(心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오직 하나의 식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니, 모든 유정들에게는 각기 8식과 심법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색 등은 비록 각각 다른 종류가 있을지라도 이 모두는 스스로의 식이 변이한 것으로 훈습식(熏習識) 위의 공능의 차별을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변현할 때 도리어 식을 여의지 않는다.
015_0256_c_06L如是應知一切境相皆是自識變異顯現非別實有以識勝故但言唯識非無心法亦不說言唯有一識以諸有情各有八識及心法故一切色等雖各有種皆是自識變異熏習識上功能差別爲性故變現時還不離識
세속제의 측면에서는 별도로 심법이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는 진실한 뜻이 아니고, 승의제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모든 법은 다 정해지거나 개별적인 성품이 없다. 나아가 진여에 이르기까지 비록 식이 변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한 식을 여의지 않나니, 식은 참다운 성품[實性]이기 때문이며, 식상(識上)에서 2공무아(空無我)의 공상(共相)이 현시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유식(唯識)이라고 말한다.
015_0256_c_12L就世俗說別有心法非眞實義以就勝義諸法皆無定別性故乃至眞如雖非識變亦不離識識實性故識上二空無我共相所顯示故此唯識言
다만 어리석은 범부가 제멋대로 헤아려 모든 심ㆍ심법 밖에 일정한 성품의 색 등이 있다고 변계소집함으로서 모든 심ㆍ심법 및 색 등의 온갖 법을 버리지 않고 여의지 않는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없지 않기 때문이며 평등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 둘은 평등하니, 그러므로 평등하고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간의 원경(圓鏡)과 여래지경(如來智鏡)은 둘 다 분별함이 없어서 모두가 능히 영상을 나투되 차별이 없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원경지(圓鏡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5_0256_c_16L但遮愚夫橫計一切心心法外定性色等遍計所執不遣不離諸心心法色等諸法依他起性圓成實性非無有故由平等故此二平等是故說言平等平等世閒圓鏡如來智鏡俱無分別皆能現影無有差別由是因緣名圓鏡智
015_0257_a_01L
대원경(大圓鏡)을 어떤 복 있고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높고 훌륭한 곳에 흔들리지 않게 내걸면, 오고 가는 무량한 중생들이 이 거울로 자신의 득과 잘못을 관찰하여 득은 있게 하고 여러 잘못은 버리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래는 원경지를 내걸고서 깨끗한 법계에 처해 짬이나 끊임이 없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무량하고 무수한 중생들로 하여금 깨끗하거나 더러움을 관하게 해서 깨끗한 것은 취하고 온갖 더러움은 버리게 한다.
015_0256_c_22L經曰如大圓鏡有樂福人懸高勝處無所動搖諸有去來無量衆生於此觀察自身得失爲欲存得捨諸失故如是如來懸圓鏡智處淨法界無閒斷故無所動搖欲令無量無數衆生觀於染淨爲欲取淨捨諸染故

‘높고 훌륭한 곳’이란 이른바 높은 깃대이거나 혹은 다른 훌륭한 곳이다. ‘깨끗한 법계’란 티끌 없는 진여이다. ‘처한다’는 것은 편안히 처한다[安處]는 의미이니, 의지하거나 반연하는 것이 사이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이 경지(鏡智)를 말미암아 법계에 의지해 반연해서 생사제(生死際)가 다하도록 항상 뒤따르면서 상속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다.
015_0257_a_05L論曰高勝處者所謂高幢或餘勝處淨法界者無垢眞如處謂安處或依或緣無閒斷故無動搖者由此鏡智依緣法界窮生死際恒常隨逐相續無斷故無動搖
이 말이 뜻하는 것은 대원경지는 온갖 분별과 동요를 영원히 여의어서 한번 얻으면 미래세가 다하도록 상속하며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나머지 3지(智)는 비록 허망한 계교가 없다고 할지라도 무집작의분별(無執作意分別)이 있어서 증득한 이후에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므로 동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멸정(滅定)의 평등성지 역시 현행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멸정은 제7식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논하여 말한다.
015_0257_a_10L此義意言大圓鏡智永離一切分別動搖一得已後盡未來際相續無斷其餘三智雖無妄計而有無執作意分別證得已後或行不行非不動搖有義滅定平等性智亦不現行論說滅定無第七故
또 “역시 1분(分)의 항상 행(行)하는 심ㆍ심법을 멸했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만약 그렇게 3위(位) 중에는 모두 제7식이 없다고 설한다면, 이는 곧 초지(初地) 이상에서 무루현관행(無漏現觀行)을 할 때와 나아가 여래지(如來地)에서는 응당 이런 지혜가 없게 될 것이니 곧 커다란 허물이 된다. 경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015_0257_a_15L又說亦滅一分恒行心心法故若爾論說於三位中皆無第七是則初地已上無漏現觀行時及如來地應無此智卽爲大失違經論故
그런데 없다고 말하는 자의 뜻은 염오(染汚)의 제7식이 없으면 일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설한다. 아직 법이 공하여 무아(無我)라는 지혜(智)를 얻지 못해서 법을 분별하는 집착[分別法執]이 항상 이를 의지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보특가라가 공하여 무아라는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면 그 집착은 항상 현행한다.
015_0257_a_19L然說無者意無有染污第七非一切無未得法空無我智來法分別執常現依故如未證得補特伽羅空無我智彼執恒行
015_0257_b_01L 이 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결택분(決擇分)」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반드시 말나(末那)라는 하나의 식과 함께 구른다(여기서는 전변의 작용을 일으킨다는 의미)고 설한다. 만약 의식(意識)이 일어나면 반드시 두 개의 식(아뢰야식과 말나식)과 함께 일시에 구른다. 만약 5식(識) 중에서 하나의 식이 따라서 일어나면 반드시 세 개의 식(아뢰야식, 말나식, 의식)과 함께 일시에 구르고, 나아가 만약 일시에 5식이 일어나면 반드시 일곱 개의 식과 함께 일시에 구른다.
015_0257_a_22L依此識故「決擇分」說阿賴耶識定與末那一識俱轉若起意識定與二識一時俱轉若五識中隨起一識定與三識一時俱轉乃至一時若起五識定與七識一時俱轉
그러므로 성도(聖道)와 멸정(滅定)과 무학(無學)에도 역시 물듦이 없다는 걸 안다. 법을 분별하는 집착과 평등성지는 둘 다 제7식 등의 행상이 미세하기 때문에 멸정과 어긋나지 않으니, 이 멸정을 말미암아 무루도가 인발(引發)하기 때문이다. 본체가 무루이기 때문에 염오의(染汚意)와 더불어 나의 집착은 서로 어긋난다.
015_0257_b_04L故知聖道滅定無學亦有無染法分別執平等智俱第七識等行相細故不違滅定由此滅定是無漏道所引發故體無漏故與染污意我執相違
이는 일부분이 멸하는 것이지 일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평등성지는 불과(佛果)에서는 비록 항상 현행하지만 10지(地)에서 증득한 이후 번뇌의 유루심이 일어날 경우에는 일어나지 않으니, 짬이나 끊어짐이 있기 때문이라서 동요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 나머지 두 개의 지(智)도 불과 위에서 또한 항상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동요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015_0257_b_08L此一分滅非滅一切故平等智於佛果上雖恒現行而十地中證得已後或起煩惱有漏心時此智不起有閒斷故非不動搖其餘二智於佛果上亦不常行故不動搖
어찌하여 대원경지를 정법계에 안정되게 처해 두는가? 무량하고 무수한 중생들로 하여금 물들거나 깨끗함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어찌하여 그들로 하여금 관찰하게 하는가? 깨끗한 것은 취하고 물든 것은 버리게 하기 위함이다. 물듦이란 이른바 번뇌와 업이 생성한 상(相)이다. 버린다는 것은 이른바 끊고 항복받는 것이니, 세간도와 출세간도를 통해서 잠깐 동안에 그것을 완전히 조복 받고 끊기 때문이다. 깨끗함이란 이른바 모든 선(善)이니 능히 중생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취한다는 것은 임지(任持)하여 안립함을 말하나니, 종자를 오래 길러 성숙시켜서 원하고 바라는 바에 따라 해탈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015_0257_b_13L何故安處大圓鏡智在淨法爲令無量無數衆生觀染淨故故觀彼爲欲取淨捨諸染故染謂煩惱及業生相捨謂伏斷由世閒道及出世道暫時畢竟伏斷彼故淨謂諸能令衆生心淸淨故取謂任持立長養成熟種子隨所願求證解脫
015_0257_c_01L이 가운데의 뜻을 말한다. 모든 여래가 과거 보살의 지위에 계실 때 모든 유정들의 온갖 종상(種相)의 이익되고 즐거운 일을 판별해서 모든 유정들의 이익과 안락함의 의요(意樂)를 이루고자 항상 정법계에 따라 의지하면서 닦아 모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에 따라 대원경지를 상속하기를 회향해 구하였다. 그리하여 방편의 선교(善巧)를 부지런히 닦아 익혔기 때문에 이 지혜를 증득해서 연법계(緣法界)를 의지해 상속하면서도 움직임이 없었다.
015_0257_b_20L此中意說一切如來昔菩薩位欲成辦一切有情一切種相利樂事一切有情利益安樂意樂常隨依淨法界隨所修集福智資糧迴求相大圓鏡智方便善巧勤修習故得此智依緣法界相續無動
비록 작의(作意)와 분별과 희론이 없다고 하여도 상속의 구름[轉]이 증상연이 되어서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구하고 원하는 바에 따라서 무량한 선근종자를 안립하고 크게 길러서 성숙케 하며 세간의 즐거움과 출세간의 해탈을 얻게 하였다. 이것은 여래의 대원경지를 말미암아 화하여 낳는 작용을 일으킨 것이니, 모든 유정들을 위하여 널리 법의 요체를 설하여 물들고 깨끗함을 알게 함으로서 깨끗함은 취하고 물듦은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정을 이익되고 즐겁게 하는 근본이다.
015_0257_c_02L雖無作意分別戲論而相續轉爲增上緣諸有情隨所求願安立長養成熟無量善根種子得世閒樂出世解脫由如來大圓鏡智起化生用爲諸有情宣說法要令知染淨取淨捨染是利樂有情根本

또 원경(圓鏡)이 지극히 잘 닦인지라 맑고[鑒] 깨끗하고[淨] 티끌[垢]이 없어서 광명이 널리 비추는 것처럼, 여래의 대원경지도 그와 같아서 불지(佛智) 위에서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의 티끌을 영원히 벗어나고 여의었기 때문에 지극히 잘 닦이고 맑아서 의지정(依止定)에 의해 섭지(攝持)되어 있다. 그래서 밝고 깨끗하고 티끌이 없이 모든 중생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일을 짓기 때문에 광명이 널리 비춘다.
015_0257_c_08L經曰又如圓鏡極善摩瑩鑑淨無垢光明遍照如是如來大圓鏡智於佛智上一切煩惱所知障垢永出離故極善摩瑩爲依止定所攝持故鑑淨無垢作諸衆生利樂事故光明遍照

‘맑음’이란 이른바 자성이 지극히 청정한 것이다. ‘깨끗함[淨]’이란 이른바 객진(客塵)을 차별하여 여의는 것이다. ‘티끌이 없다’는 것은 통틀어서 앞의 두 가지가 두루 원만히 티끌을 여의어 지극히 청정한 것이다.
빛[光]은 맑음[鑒]을 말미암고 밝음[明]은 깨끗함[淨]을 말미암으며, ‘널리 비춘다’는 것은 티끌이 없음을 말미암는다.
015_0257_c_13L論曰鑑謂自性極淸淨故淨謂差別離客塵故言無垢者摠前二種周圓離垢極淸淨故光者由鑑明者由淨言遍照者由無垢故
‘불지(佛智) 위에서 등등’은 곧 번뇌장과 소지장을 함께 이름하여 티끌이라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끊기 때문에 ‘영원히 벗어난다’고 한다. 모든 장애와 티끌을 영원히 벗어난다는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경지(鏡智)가 ‘지극히 잘 닦여서 맑다’고 하는 것이다.
015_0257_c_17L於佛智上等者卽煩惱障及所知障俱名爲垢究竟斷故名永出離由有永出諸障垢義故說鏡智極善摩瑩
015_0258_a_01L또 번뇌란 이른바 탐욕과 성냄 등 모든 번뇌와 전(纏)은 수면위(隨眠位)에서 행하든 행하지 않든 모두가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성도(聖道)에 태어나는 것을 장애하고 열반을 얻는 것을 장애하며 심신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번뇌장이라고 한다. 소지장(所知障)이란 소지경계에 대하여 물들지는 않으나 무지(無知)해서 일체지를 장애하지만 열반을 장애하지는 않는다. 비록 이런 장애가 있어도 성문 등이 열반을 얻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015_0257_c_20L又煩惱者謂貪瞋等一切煩惱纏隨眠位若行不行皆有勢力障生聖道障得涅槃亂身心故名煩惱障所知障者於所知境不染無知障一切智不障涅槃雖有此障見聲聞等得涅槃故
이 두 가지 장애는 또 구애(垢礙)라고 이름한다. 청정지를 생겨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정지(淨智)를 물들이기 때문이다. 객진장구(客塵障垢)를 대치할 수 있음으로 인해 필경 생겨나지 않는 것을 ‘영원히 벗어나 여읜다’고 이름한다. 영원히 장애를 여의어 대원경지가 언제나 지극히 청정하니, 이런 까닭에 ‘지극히 잘 닦여서 맑다’고 한다.
015_0258_a_02L卽此二障亦名爲垢㝵淸淨智令不生故染淨智故由得對治客塵障垢畢竟不生名永出離由永離障大圓鏡智恒時極淨是故說爲極善摩瑩
‘의지정(依支定)에 의해 섭지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의지하는 바가 되므로 의지라고 이름하는데, 대원경지가 이것에 의지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의지가 곧 정(定)이므로 의지정이라고 이름하고, 혹은 지(智)가 정에 의지하므로 의지정이라고 이름한다. 이로부터 무간해탈도가 생겨나니 지극히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 소의정(所依定)은 바로 수승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이니, 그 선정의 힘으로 인해 장애를 영원히 끊기 때문에 이 지는 그것을 의지한다.
015_0258_a_06L爲依止定所攝持故者是所依止故名依止圓鏡智依此生故依止卽定名依止或智依定名依止定從此無閒解脫道生極淸淨故此所依定卽是殊勝金剛喩定由彼定力障永斷故智爲彼所依止
선정의 힘에 의해 섭지되는 바이기 때문에 ‘섭지’라고 이름하는데, 그 선정이 끊임없이 이 지를 낳기 때문이다. 그 선정의 힘으로 인해 지극히 청정하여 모든 분별을 여의어서 분별함이 없다. 경지를 낳기 때문에 이 지가 이미 의지하는 바가 되니, 선정에 의해 섭지되기 때문이다.
015_0258_a_12L定力所攝持故名攝彼定無閒此智生故由彼定力最極淸淨離諸分別無有分別鏡智生此智旣爲所依止定所攝持故
‘맑고[鑒] 깨끗하고[淨] 티끌[垢]이 없다’라는 것은 자체가 청정하기 때문에 맑고 밝다고 이름하고, 번뇌장을 여읜 것을 깨끗함이라고 이름하며, 소지장을 여읜 것을 티끌이 없다고 이름한다.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일을 짓기 때문이다.
015_0258_a_15L淨無垢自體淸淨故名爲鑑離煩惱故名爲淨離所知障故名無垢諸衆生利樂事故
‘광명이 두루 비춘다[光明遍照]’라는 것은 이 지(智)가 선정에 의해 섭지되기 때문이다. 또한 능히 모든 유정들의 온갖 이롭고 즐거운 일을 일으키고 지으니, 이것을 지음으로 인해 광명이 두루 비추는 것이다. 자성이 청정하고 맑은 것을 이름하여 빛[光]이라고 하며, 번뇌장과 소지장을 여읜 이와 같은 차제(次第)를 밝음[明]이 두루 비춘다고 한다.
015_0258_a_18L光明遍照者此智爲定所攝持故亦能起作一切有情諸利樂事由作此故光明遍照自性淸淨鑑故名光離煩惱障及所知障如其次第名明遍照
015_0258_b_01L여기에서의 뜻을 설한다면, 대원경이 지극히 잘 닦인지라 맑고 밝고 깨끗하여 티끌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거울의 표면을 통해 깨끗한 행위와 잘못된 행위를 보게 함으로서 이익되는 일을 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런 까닭으로 광명이 두루 비춘다고 하는 것이다. 대원경지는 자성이 청정하여 두 가지 장애를 멀리 여의어서 맑고 깨끗하며 티끌이 없다. 비록 볼 수 없지만 수용신과 변화신을 일으켜서 능히 모든 지(智)를 낳아 중생의 온갖 이로운 일을 이루어내는 것이니, 이런 까닭으로 광명이 두루 비춘다고 하는 것이다.
015_0258_a_22L此中意說如大圓鏡極善摩瑩鑑淨無垢爲令他見面之得失爲饒益事是故說名光明遍照大圓鏡智自性淸淨遠離二障鑑淨無垢雖不可見而起受用及變化身能生諸智成辦衆生諸饒益事是故說名光明遍照

또 원경(圓鏡)이 본질(本質)에 의거하고 반연해서 갖가지 영상의 모습을 생기하는 것처럼, 여래의 대원경지도 마찬가지로 일체시에 여러 연(緣)에 의지하는 까닭에 갖가지 지혜의 영상의 모습을 생기하는 것이다.
015_0258_b_05L經曰又如圓鏡依緣本質種種影像相貌生起如是如來大圓鏡智於一切時依諸緣故種種智影相貌生起

만약 원경지가 바로 모든 유정들의 일체지 등이 영상을 생하는 인(因)이라면, 어떻게 영상의 모습에는 차별이 있고, 어떻게 이 지의 본체[智體]에는 차별이 없는가? 또 일체시에 항상 능히 인이 된다면, 어찌하여 일체 중생과 자지(自智) 등의 영상이 항상 단박에 생겨나지 않는가?
015_0258_b_08L論曰若圓鏡智是諸有情一切智等影像生因云何影像相有差別云何此智體無差別又一切時常能爲因何不恒時頓生一切衆生及自智等影像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말한다.
‘또 원경(圓鏡)이 본질에 의거하고 반연해서 갖가지 영상의 모습을 생기한다’라는 것은 영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 거울의 본체에 차별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항상 단박에 생하지 않는 것은 온갖 연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경지는 일체시에 온갖 연을 기다리기 때문에 지(智)를 생하는 등의 영상에는 갖가지 차별이 있는 것이며, 그것과 다르지 않은 까닭에 지(智)가 청(靑) 등의 갖가지 본체의 차별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일체 중생 및 자성지[自智] 등의 영상을 항상 단박에 생기하는 것이 아니며 때를 기다리고 연을 기다려야 비로소 능히 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015_0258_b_13L釋此難言又如圓鏡依緣本質種種影像相貌生起非影異故鏡體差別亦非恒時頓生影像待衆緣故如是鏡智於一切時待衆緣故生智等影種種差別非彼異故智成靑等種種體別亦非恒時頓生一切衆生及自聖智等影待時待緣乃能生故
여기서의 뜻을 설한다면, 대원경지상응정식(大圓鏡智相應淨識)에 두 종류의 용(用)이 있다.
첫째는 인연용(因緣用)이다. 이른바 정식(淨識) 중에는 모든 능현능생(能現能生)의 신토경지(身土境智)의 정법종자(淨法種子)가 갖추어져 있어서 만약 외연(外緣)을 우연히 만나면 곧 신토경계의 갖가지 영상을 변현한다. 그리고 평등지 등의 상응심품의 행상차별을 능히 생기한다.
015_0258_b_19L此中意說大圓鏡智相應淨識有二種用因緣用謂淨識中具有一切能現能生身土境智淨法種子若遇外緣卽便變現身土境界種種影像及能生起平等智等相應心品行相差別
015_0258_c_01L둘째는 증상연용(增上緣用)이다. 이른바 부처님의 정식은 선근과 원력에 의해 생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중생들이 스스로 인연을 갖춘다면, 이때 정식이 문득 자량(資糧)하고 도와서 능히 장애 없이 자라나 원만히 이루어지게 한다. 그런 까닭에 경지(鏡智)의 본체는 비록 하나이지만 모든 법의 영상을 능히 나투고 낳으며, 외연을 기다리는 까닭에 단박에 현기(現起)하는 것은 아니다.
015_0258_c_02L增上緣用謂佛淨識善根願力所生起故若諸衆生自因緣具時淨識卽便資助令得無障生長成滿是故鏡智體雖是一能現能生諸法影像待外緣故非頓現起

원경 상에서 하나가 아닌 많은 영상들이 일어나지만 원경 상에는 모든 영상이 없고 이 원경도 움직임이나 지음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래의 원경지 상에도 하나가 아닌 수많은 온갖 지(智)의 영상이 일어나지만 원경지 상에는 온갖 지의 영상이 없으며, 그러면서도 이 지경(智鏡)에는 움직임이나 지음이 없다.
015_0258_c_06L經曰如圓鏡上非一衆多諸影像起而圓鏡上無諸影像而此圓鏡無動無作如是如來圓鏡智上非一衆多諸智影起圓鏡智上無諸智影而此智鏡無動無作

만약 온갖 지의 영상이 경지 상에서 이미 본체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경지가 연이 되어 생겨난다는 말인가? 만약 먼저 본체가 없다면 어떻게 온갖 지의 영상을 생하고도 움직임이나 지음이 없다는 것인가? 도사(陶師:옹기장이)가 움직이거나 짓는 일 없이 먼저 없었던 항아리 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볼 수 없다.
015_0258_c_11L論曰若諸智影於鏡智上先已有體云何鏡智爲緣而生若先無體云何能生諸智影像而無動作不見陶師無有動作而能生起先無甁等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말한다.
‘원경 상에서 하나가 아닌 많은 영상들이 일어난다 등등’은 대원경이 능히 온갖 영상을 일으킬 때 같은 종류의 수가 많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며, 다른 종류가 무수하기 때문에 ‘많다’고 한 것이다. 같은 종류에 의존하여 관찰해서 하나의 종류를 선택하였으므로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다른 종류에 의존하여 관찰했을 때 무수하게 나타나는 까닭에 많다고 말하는 것이다.
015_0258_c_15L釋此難言如圓鏡上非一衆多諸影像等如大圓鏡能起諸影同類數多故名非一異類無數故名衆多觀待同類簡一種故說言非一觀待異類顯無數故說言衆多
015_0259_a_01L이와 같이 거울에서는 비록 먼저의 영상이 없지만 많은 영상을 일으키며, 그러면서도 사려분별의 동작이 없다. 경지(鏡智) 또한 그러하여 비록 먼저의 지(智) 등의 영상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능히 지 등의 갖가지 모든 법의 영상을 일으킨다. 같은 종류에 의존하여 관찰함으로써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종류에 의존하여 관찰함으로써 ‘수많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이와 같이 지 등의 영상을 일으키지만 사려분별의 동작은 없다.
015_0258_c_20L如是鏡上雖先無影而起多影而無思慮分別動作鏡智亦爾雖先無有智等影像而能生起智等種種諸法影像觀待同類說言非一觀待異類說言衆多雖生如是智等影像而無思慮分別動作
여기서의 뜻으로 말한다면, 마치 대원경이 비록 분별함이 없다고 하여도 능히 갖가지 영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경지도 그러해서 비록 아집이나 아소집의 소취와 능취와 작의분별이 없지만 능히 갖가지 지 등의 모든 법의 영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015_0259_a_02L此中意言如大圓鏡雖無分別而能生起種種影像鏡智亦爾雖無我執及我所執所取能取作意分別而能生起種種智等諸法影像

또 원경은 온갖 영상과 합한 것도 아니고 여읜 것도 아니니 쌓아 모으지 않기 때문이자 그 연(緣)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래의 대원경지도 이와 같아서 온갖 지의 영상과 더불어 합한 것도 아니고 여읜 것도 아니니 쌓아 모으지 않기 때문이며 흩어져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015_0259_a_06L經曰又如圓鏡與衆影像非合非離不聚集故現彼緣故如是如來大圓鏡智與衆智影非合非離不聚集故不散失故

만약 원경지(圓鏡智)가 온갖 지 등의 영상과 화합한다면 어떻게 그것들로 말미암는 차별이 없겠는가? 따라서 이것은 차별을 이룬다. 만약 화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이 되겠는가? 씨앗 등이 여러 싹의 열매와 화합하지 않으면서도 능히 인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햇빛 등은 석회(石灰) 등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으면서도 모습을 비추어 드러낸다.
015_0259_a_10L論曰若圓鏡智與諸智等影像和合云何不由彼差別故此成差別若不和合云何爲因不見種等與諸芽等果不和合而能爲因非日光等與石灰等不共和合而相顯照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말한다.
‘또 원경은 온갖 영상과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다 등등’은 마치 세간의 원경이 비록 능히 인(因)이 되어서 온갖 영상을 일으키지만 그 영상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으니, 그것이 생겨나기 전에는 일찍이 본체가 있지 않았으므로 쌓아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것과 함께 있든 있지 않든지 간에 가히 화합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015_0259_a_15L釋此難言又如圓鏡與衆影像非合離等如世圓鏡雖能爲因起衆影像而不與彼影像和合彼未生前由未有體不聚集故非此與彼或俱不俱可名和合
원경이 영상과 더불어 또한 서로 여의지 않으면서 그 연을 나타내기 때문에 곧 이런 뜻으로 인해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것은 영상과 더불어 현생인(現生因)이 되지만 영상에 차별이 있다고 해서 거울이 차별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015_0259_a_19L圓鏡與影亦非別離現彼緣故卽由此義非不和合要由此有彼得有故雖與影像爲現生因而非影像有差別故鏡成差別
015_0259_b_01L대원경지 또한 이와 같다. 비록 능히 인이 되어서 지(智) 등의 영상을 낳지만 지와 더불어 합하는 것도 아니고 여의는 것도 아니니, 쌓아 모으지 않기 때문이고 흩어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015_0259_a_23L大圓鏡智亦復如是雖能爲因生智等影而與智等非合非離不聚集故不散失故
합하는 것도 아니라 함은 그것이 아직 생겨나기 전에는 일찍이 본체가 있지 않아서 쌓아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의는 것도 아니라 함은 요컨대 경지가 있어서 지 등의 영상이 생기고, 없다면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은 여의고 무너져서 있지 않은 것을 흩어져 없어진다고 이름하고, 그것에 위배되는 것을 흩어져 없어지지 않는다고 이름하나니 그것을 거두어 생하기 때문이다. 혹은 소연경상(所緣境相)을 망실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015_0259_b_02L言非合者彼未生前由未有體不聚集故言非離者要有鏡智智等影生無則不生不散失故離壞無有名爲散失與彼相違名不散失攝生彼故或不忘失所緣境相名不散失
경지 가운데 일체 소지상(所知相)이 현현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3세지(世智) 등과 모든 중생들이 경지(鏡智)의 불생(不生)을 두루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요컨대 일체는 이 지혜가 낳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지는 모든 소연경상을 잊지 않기 때문에 이름하여 흩어져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015_0259_b_07L由鏡智中顯現一切所知相故三世智等及諸衆生若不遍知鏡智不生要知一切此智乃生是故此智不忘一切所緣境相名不散失
흩어져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여의지 않는 것이니, 비록 능히 인을 이루어지 등의 영상을 일으켜도 그것을 말미암아 차별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차별을 이룬다. 이는 마치 대원경이 차별 없이 작용하는 것과 같다.
015_0259_b_11L不散失故所以非離雖能爲因起智等影而不由彼有差別故此成差別如大圓鏡無差別轉
여기서의 뜻을 설한다면, 마치 세간의 원경이 비록 능히 인이 되어서 온갖 영상을 일으키지만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아서 영상의 차별이 원경을 저촉하지 않는 것처럼, 경지 또한 마찬가지라서 비록 능히 인을 이루어 지 등의 영상을 일으키지만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아서 그 영상의 차별이 원경지를 저촉하지 않는다.
015_0259_b_13L此中意說如世圓鏡雖能爲因起諸影像而非合離差別所觸鏡智亦爾雖能爲因起智等影而非合離差別所觸
씨앗 등이 비록 능히 싹의 인이 되지만 합한다거나 여읜다거나 하는 것을 둘 다 말할 수 없다. 광명의 미세한 부분 역시 색(色) 등과 공상(共相)으로 화합하여 함께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식(識) 상에서 흡사 색 등과 더불어 화합하고 상생함으로써 세간의 모든 인과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처럼 한다. 비록 합하거나 여의지 않아도 능히 인이 되므로 인과의 두 가지 상이 결코 화합하는 것도 아니다.
015_0259_b_16L種等雖能爲芽等因而亦合離俱不可說光明細分亦非色等共相和合以俱有故令其識上似與色等和合相生以世現見一切因果雖非合離而能爲因是故無有因果二相決定和合
佛地經論卷第四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1. 1)부수하여 일어나는 것. 부수하여 존재하는 것 따라서 일어나는 것. 일치하는 것. 따라서 일어나게 하는 것. 수순하는 것이다.
  2. 2)두루 널리 퍼져 있는 것. 모든 현상계의 차별의 상태. 진(盡)은 모든 일체를 두루 다한다는 뜻이다.
  3. 3)있는 그대로의 것. 진여에 속하는 성품을 말한다. 또는 진여 그 자체를 가리키기도 한다.
  4. 4)여기서의 의미는 5온이 상속하여 존재하게 되는 중생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