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佛性論卷第二

ABC_IT_K0596_T_002
017_0276_c_01L
불성론 제2권
017_0276_c_01L佛性論卷第二


천진보살 지음
진제 한역
송성수 번역
017_0276_c_02L 天親菩薩造
陳天竺三藏眞諦 譯


3. 현체분(顯體分) ①
1)삼인품(三因品)
017_0276_c_04L顯體分第三中三因品第一

다시 불성에 세 가지 종류의 체(體)가 있으니, 세 가지 성품에 포괄되는 뜻을 알아야 한다.
세 가지 종류란, 이른바 세 가지 원인으로 된 세 가지 불성이니, 세 가지 원인이란, 첫째는 응득인(應得因)이요, 둘째는 가행인(加行因)이요, 셋째는 원만인(圓滿因)이다.
응득인이란, 두 가지 공(二空)에서 나타난 진여(眞如)이니, 이 공으로 말미암아 보리심(菩提心)과 또한 가행과 내지 도후(道後=실도(實道)를 증득한 뒤의 위치를 말함)의 법신을 얻기 때문에 얻는 원인이라고 일컫는 것이요, 가행인(加行因)이란, 이른바 보리심이 그것이다. 이 마음으로 말미암아 삼십칠품(三十七品)과 십지(十地)와 십바라밀(十波羅蜜) 등의 도를 돕는 법과 또한 도후의 법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가행인(加行因)이라 일컫는 것이다.
원만인(圓滿因)이란 바로 가행이다. 이 가행으로 말미암아 원인의 원만함과 또는 결과의 원만함을 얻기 때문이다.
원인의 원만함이란, 복덕과 지혜의 행을 말하는 것이고, 결과의 원만함이란, 지덕(智德)과 단덕(斷德)과 은덕(恩德)을 말하는 것이니, 이 세 가지 원인 가운데 앞의 첫 번째 것은 무위 진여의 이치(無爲如理)로써 그 체를 삼고 뒤의 두 가지는 유위의 원행(有爲願行)으로써 그 체를 삼으며, 세 가지 불성이란, 응득인이 갖춘 세 가지 성품으로, 첫째는 주자성성(住自性性)이고, 둘째는 인출성(引出性)이고, 셋째는 지득성(至得性)이다. 기(記: 眞諦의 註記)에 이르기를,
주자성성이란, 도전(道前=실도(實道)를 얻기 전의 자리를 말함)의 범부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고, 인출성이란, 발심으로부터 그 이상 유학(有學)의 성인의 지위이고, 지득성이란, 무학(無學)의 성인의 지위이다.
017_0276_c_05L復次佛性體有三種三性所攝義應三種者所謂三因三種佛性三因一應得因二加行因三圓滿因得因者二空所現眞如由此空故得菩提心及加行等乃至道後法身故稱應得加行因者謂菩提心由此心故能得三十七品十地十波羅蜜助道之法乃至道後法身是名加行圓滿因者卽是加行由加行故因圓滿及果圓滿因圓滿者謂福慧果圓滿者謂智斷恩德此三因前一則以無爲如理爲體後二則以有爲願行爲體三種佛性者應得因中有三性一住自性性二引出性三至得性記曰住自性者謂道前凡夫位引出性者從發心以上窮有學聖位至得性者無學聖位

3. 현체분 ②
2) 삼성품(三性品)
017_0276_c_22L佛性論顯體分第三中三性品第二
017_0277_a_01L
다시 세 가지 성품에 포함되는 것이란, 이른바 삼무성(三無性)과 삼자성(三自性)이다. 삼자성(三自性)이란, 첫째는 무상성(無相性)이고, 둘째는 무생성(無相性)이며, 셋째는 무진성(無真性)이다. 이 세 가지 성품이 여래의 성품을 다 포함한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 성품으로써 통틀어 체(體)를 삼기 때문이다. 무상성이란, 일체의 모든 법이 다만 이름과 말로써 나타내는 것을 뿐, 그 성품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무상성이라 한다. 무생성이란, 일체의 모든 법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기기 때문에 스스로 생길 수 없고 자타(自他)가 다 성취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무생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진성이란, 일체의 모든 법이 진실한 모양을 떠났기 또는 달리 진실한 성품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을 진실성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77_a_01L復次三性所攝者所謂三無性及三自性三無性者一無相性二無生性三無眞性此三性攝如來性盡何以故?以此三性通爲體故無相性者切諸法但名言所顯自性無相貌故名無相性無生性者一切諸法由因緣生故不由自能生自他竝不成就名無生性無眞性者一切諸法離眞相故無更別有實性可得故名無眞實性
다시 세 가지 성품이란, 첫째는 분별이고, 둘째는 의타(依他), 셋째는 진실이다. 분별에 열 가지 뜻이 있는 줄을 알라. 무엇이 열 가지 인가?, 첫째 분별하는 이름이고, 둘째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셋째 포함하여 가지는 것이고, 넷째 체(體)와 상(相)이고, 다섯째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고, 여섯째 일로 인하여 말하는 것이고, 일곱째 대상에 의지하는 것이고, 여덟째 통달하는 것이고, 아홉째 만약 없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이고, 열째 의지하는 것이다.
017_0277_a_11L復次三種性者一分別二依他三眞實別有十種義應知何等爲十?一分別名二緣成三攝持四體相應知六因事說七依境八通達九若無等十依止
첫째 분별하는 이름이란, 이름과 말을 따라 임시로 설하여 분별성을 세우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이름과 말이 없다면, 분별성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이 성품은 단지 이름과 말이 드러내는 것일 뿐이요 실로 체와 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분별성이라 한다. 의타성이란, 십이인연이 드러내는 도리로 분별적인 성품이지만 의지하기 때문에 의타성을 세운 것이다.
진실이란, 일체의 모든 법은 진여이고, 성인(聖人)의 무분별지의 경지에서 그 분별하는 이름과 남을 의지하는 성품, 이 두 가지를 청정케 하기 위해, 또는 세 가지를 해탈하기 위해 혹은 일체 덕(德)을 끌어내기 위해 이 때문에 진실한 성품을 세움이라, 이를 분별하는 이름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017_0277_a_15L一分別名者爲隨名言假說故立分別性若無此名言則分別性不成故知此性但是名言所顯實無體相是名分別性依他性者十二因緣所顯道理爲分別性作依止故故立依他性眞實性者一切諸法眞如聖人無分別智境爲淸淨二爲解脫三或爲引出一切諸德故立眞實性是名分別名
017_0277_b_01L둘째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란,
【문】분별성이란 어떤 인연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까?
【답】모양과 이름이 서로 상응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문】의타성은 무슨 인연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
【답】분별성에 인연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문】진실성은 무엇에 인연하여 성립하는가?
【답】분별성과 의타성 이 두 가지가 전혀 소유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이 때문에 인연으로 성립된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77_a_23L二緣成者問曰分別性緣何因故而得顯現?答曰由緣相名相應故得顯現問曰依他性緣何因故得成耶?答曰緣執分別性故得顯現問曰眞實性緣何因得成?答曰由分別依他二性極無所有得顯現故名緣成
셋째 포함하여 가지는 것이란, 그 성품에 세 가지 종류가 있고 법에 다섯 가지가 있으니, 세 종류의 성품이란, 이른바 분별과 의타와 진실함이 그것이다. 다섯 갈래의 법이란, 첫째 모양이고, 둘째 이름이고, 셋째 분별하는 생각이고, 넷째 성스러운 지혜이고, 다섯째 있는 그대로의 진리가 그것이다. 앞의 세 가지는 세간의 지혜이고, 성스러운 지혜는 곧 출세간(出世間)의 지혜이고,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무위의 경지이니, 이 다섯 가지 법이 앞의 세 성품을 포함하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이다.
【문】그렇다면, 이 다섯 가지 법 가운데에 몇 가지 법을 포함하는 것이 제1 의 성품입니까.
【답】다섯 가지 법 중 그 어느 것도 포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2의 성품은 몇 가지 법을 포함할 수 있는가?
【답】네 가지 법을 포함할 수 있다.
【문】제3의 성품은 몇 가지 법을 포함할 수 있는가?
【답】있는 그대로의 진리, 한 법만을 포함할 수 있다.
【문】만약에 의타성이 성스러운 지혜를 포함하게 된다면, 어떻게 의타성이 분별성에 인연하여 성립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답】의타성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 번째는 염탁의타(染濁依他), 두 번째는 청정의타(清淨依他)이다. 염탁의타는, 분별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고, 청정의타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에 의거하여 성립되는 것이다.
017_0277_b_07L三攝持者性有三法有五分言三性者所謂分別眞實五法者一相二名三分別思四聖智五如如前三是世閒智智是出世智如如是無爲境爲明此五法攝前三性故問曰於五法中幾法攝第一性?答曰五法竝不可何以故?爲無體故問曰第二性幾法能攝?答曰有四法攝問曰第三性幾法能攝?答曰唯如如一法能攝問曰若依他性爲聖智所攝者云何說依他性緣分別性得成?答曰依他有二種一染濁依他二淸淨依他染濁依他緣分別得成淸淨依他緣如如得成故
넷째의 체와 상이란,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체요, 둘째는 부분이다.
017_0277_b_21L四體相者有二一通二別
017_0277_c_01L전체란, 이 세 성품 전체에 근거하여 능히 일체의 모든 진리 혹은 둘ㆍ셋ㆍ넷ㆍ일곱가지 진리 등의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모든 진리가 이 세 성품을 벗어나지 않으니, 그러므로 이 세 성품이 모든 진리 전체의 체가 되는 것이다.
둘째 부분이란, 이 세 성품에 각각 참된 이치가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참된 이치인가? 첫째 분별성의 체가 항상 있지 않으면서도 이 이치가 분별하는 성품에서 참되지 않은 것이 없다. 왜 그런가? 이름과 말에 전도됨이 없기 때문이며, 둘째 의타성의 체가 있으나, 참되지 않아 의식과 감각기관과 인식의 대상에 착란이 있어 진여가 아니고 참되지 않다. 왜 그런가? 인연의 이치가 전도됨이 없기 때문이니, 분별성을 상대하기 때문에 있다고 하며, 나중에 참된 성품을 상대하더라도 참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진실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셋째 진실성의 체는 유무가 모두 참되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체는 있지도 없지도 않기 때문이다.
017_0277_b_22L通者由此三性通能成就一切諸餘眞諦或二七諦等法故諸眞諦不出三性是以三性爲諸眞諦通體二別體者於三性中有實義何者實義?一者分別性體恒無所有而此義於分別性中非不爲實何以故?名言無倒故二者依他性體有而不實由亂識境故是有以非眞如故不實何以故?因緣義無倒故是以對分別性故名爲有對後眞性故非實有是名有不眞實三者眞實性體有無皆眞如如之體非有非無故
017_0278_a_01L【문】이 세 가지 성품의 참된 모습은 어떠한가?
【답】분별성의 실상은, 인ㆍ법(人法)에 증익(增益)되거나 또는 손감(損減)된다. 이 성품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이에 대한 집착이 생기지 않으니, 이것이 분별상이다. 인ㆍ법이란 곧 분별되어진 것으로, 만약 진제의 관점에서 이 인, 법을 있다고 하면 증익에 집착하는 것이라 하고, 만약 속제의 관점에 의지하면 이 인,법이 없다고 한다면 손감에 집착하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이 분별성에 통달하게 되면, 증익과 손감 이 두 가지 집착이 생기지 않으니 이것을 분별실상의 모슴이라고 한다.
다시 의타실성의 모습이란, 집착하는 주체와 집착되는 대상의 그 증익과 손감, 이 성품을 이해하기 때문에 이러한 집착이 생기지 않는 것을, 의타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이 집착하는 주체와 집착되는 대상을 참으로 있다라고 보면, 이것은 증익으로 상견이라 하고, 만약 속제의 입장에서 전혀 없다고 보면 이것은 손감이라고 하고 단견이라 한다. 만약 이 두 가지 성품에 통달하면 단견과 상견 두 가지 견해에 대한 집착을 하지 않으니 이것을 의타실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단지 비슷한 대상과 인식만이 있고 능소가 없기 때문에 증익의 집착이 없고 비슷한 대상과 인식이 있기 때문에 손감의 집착이 없다.
다시 진실성의 모습이란, 유무와 증익, 손감의 집착이 이 성품을 이해함으로써 집착이 생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왜 그런가?
만약에 공에 집착하여 있다고 하면 증익의 잘못이라 하고 만약에 공에 집착하여 없다고 하면 손감의 잘못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만약 이 두 가지 성품에 통달하면, 이 두 가지 집착이 생기지 않으니 이것을 진실성의 모습이라고 한다.
017_0277_c_11L問曰是三性實相云何?答曰分別性實相者人法增益及損由解此性故此執不生是分別相人法者是分別所作若依眞諦觀人法爲有名增益執若依俗諦觀人法是無名損減執若通達此分別則增益減損二執不生是名分別實性相復次依他實性相者能執增益及損減由解此性故故此執不生是名依他性相此能執所執見眞爲有則是增益名爲常見若見俗定無則是損減名爲斷見若通此二性斷常二執竝不得生是名依他實性相唯有似塵識故則無能所能所故無增益執由有似塵識故損減執復次眞實性相者有無及增益損減執由解此性故執不得生所以者何?若執空爲有名增益謗若執空爲無名損減謗若通達此性則二執不生是名眞實性相
다음 다섯째 알아야 하는 것이란,
【문】이 세 성품 가운데에 몇 가지를 알아야만 하고, 몇 가지는 알아서는 안되는가?
【답】일체를 다 알아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이 세 성품을 앎으로써 세 가지 해탈문(三解脫門)에 통달할 수 있고 세 가지 장애(三障)를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별성을 알아야 공(空) 해탈문에 통달할 수 있고 육체적 번뇌를 제거할 수 있다. 의타성을 알아야 무원(無願) 해탈문에 통달할 수 있고 피부의 번뇌를 제거할 수 있다. 진실한 성품을 알아야 상 없는(無相) 해탈문을 통달할 수 있고 마음의 번뇌를 제거할 수 있으니, 또한 처음은 해탈의 장애이고, 다음은 선장의 장애이고, 뒤는 일체 지혜의 장애이기 때문이다.
【문】이 세 성품 가운데에 몇 가지를 없앨 수 없고, 몇 가지를 없앨 수 있는가?
【답】두 성품은 없앨 수 없고, 한 가지 성품은 없앨 수 있나니, 왜냐하면 분별성은 원래 없기 때문에 없앨 수 없고, 진실성은 원래 참된 것이기 때문에 없앨 수 없고, 의타성은 있기는 하지만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없앨 수 있는 것이니, 이러한 이치이므로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017_0278_a_08L五應知等者問曰是三性幾應知?幾不應知?答曰一切應知何以故?由知三性通達三解脫門能除三障故知分別能通達空解脫門能除肉煩惱知依他性通達無願解脫門能除皮煩惱知眞實性能通達無相解脫門能除心煩惱又初解脫障次禪定障後一切智障故問曰三性中幾性不可滅?幾性可滅耶?答曰二性不可滅一性可得滅何以故?分別性本來是無不可滅眞實性本來是眞故不可滅他性雖有不眞實是故可滅以是義說應知等
017_0278_b_01L다음 여섯째 일로 인하여 설하는 것이란, 모든 부처님이 설한 법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 요의경(了義經)이고, 둘째 불요의경(不了義經)이다. 불요의 경은 바로 이 세 성품에 근거한 것으로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불요의경을 설하셨다. 마치 등불이 있기 때문에 물건이 어두움 속에 있는 줄을 알고서 뒤에 등불로 인하여 그 어두움 속에 있는 물건이 분명히 드러날 수 있는 것처럼, 여래께서도 그와 같이 세 성품에 집착하는 자가 있기 때문에 불요의경을 설하신 것이다. 세 성품에 통달하면 자연히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요의경이라 한다. 경에서 설한 바와 같이,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미 무생법인(無生法忍)를 얻었다면, 그는 곧 물러나거나 떨어지지 않는다.
【문】이 말씀이 어떻게 성립되는 것입니까?
【답】세 성품이 있기 때문에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여래께서 분별성에 근거하여 본래 무생인을 설하시고, 의타성에 근거하여 자성(自性)의 무생인을 설하시고, 진실성에 근거하여 번뇌와 괴로움의 본성이 무생인이라 설하신 것이다.
【문】여래께서 어떤 성품에 근거하여 이러한 이치를 설하시면서, 일체 법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본래가 고요함으로써 그 자성이 곧 열반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답】무상성(無相性)에 근거하여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문】여래께서 어떤 법에 근거하여 일체 법은 마치 환상과 같은 것이라고 설하셨습니까?
【답】무생성에 근거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문】여래께선 어떤 법에 근거하여 일체 법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라고 설하셨습니까?
【답】진실성에 근거하여 설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세 가지 성품에 근거하여 설하셨기 때문에 요의, 불요의 경이 있다.
017_0278_a_21L六因事說諸佛說法二種一了義經二不了義經不了義經者由此三性是故佛說不了義經如緣有燈故知物在暗中後時因燈能得了現暗中之物如來亦爾由有著三性者故說不了義經達三性者自然顯了名了義經如經中說若人已得無生法忍則不退墮問曰言云何成立?答曰由有三性故得成立如來約分別性故說本來無生忍約依他性故說自性無生忍眞實性故說惑垢苦本性無生忍問曰如來約何性說如此義一切諸無生無滅本來寂靜自性涅槃耶?答曰約無相性說如是言問曰來約何法說一切諸法譬如幻化耶?答曰約無生性說問曰如來約何說如是言一切諸法譬如虛空?答曰約眞實性說是故佛因三性說有了不了義經
일곱째 대상에 의지하는 것이란,
【문】이 세 성품은 어떤 지혜의 경계인가?
【답】분별성이란, 다만 범부의 의혹의 경계일 뿐 성인의 지혜의 경계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체(體)와 상(相)이 없기 때문이다. 의타성이란, 성인과 범부의 세간적 지혜의 경계가 되니, 이는 세간적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진실성이란, 오직 성인의 무분별지의 경계가 될 뿐이니, 있는 그대로의 인식 (如量)이고 있는 그대로의 이법(如理)이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식은 일체의 것을 섭수하고, 있는 그대로의 이법은 전도됨이 없으니, 이것이 이른바 경계에 의지하는 것이다.
017_0278_b_17L七依境者問曰此三性爲何智境?答曰分別性者唯是凡惑境非聖智境何以故?無體相故依他性者爲聖凡俗智境是俗有故眞實性者唯爲無分別聖智境如量如理故如量則攝一切如理則無顚倒是名依境
017_0278_c_01L여덟째 통달이라는 것은,
【문】관행(觀行)을 닦는 사람이 만약 분별성에 통달하면, 그 사람은 상(相)에 집착하여 행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상에 집착하여 행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까?
【답】만약 세속의 지혜로 분별한다면, 상에 집착하여 행한다고 말할 수 있고, 만약 출세간의 무분별지로 통달한다면, 상에 집착하여 행한다고 말할 수 없다. 때문에 의타성과 분별성은 다 같이 상이 없는 것이니, 분별성과 의타성과 진실성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문】관행을 닦는 사람이 참된 이치 그대로 분별성에 들어가 어떤 성품을
어떠한 성품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까?
【답】진실성을 깨달을 수 있다.
【문】관행을 닦는 사람이 참된 이치 그대로 진실성에 들어간다면, 어떠한 성품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습니까?
【답】의타성을 깨달을 수 있고 그러한 후에 진실성을 얻으니 이것을 통달이라고 한다.
017_0278_b_23L八通達者問曰修觀行人若通達分別性者爲當可說行執相中爲不可說行執相中耶?答曰若由世俗智分別可說行執相若由出世無分別智通達者可說不行於執相中是故依他與分別一無相如分別依他眞實亦如是問曰修觀行人能如眞實理入分別照了何性耶?答曰了眞實性問曰修觀行人如眞實理入眞實性照了何性?答曰了依他性故然後得眞實性是名通達
아홉째 ‘만약 없다면’ 등이란,
【문】만약에 분별성이 없다면, 어떠한 잘못이 있는가?
【답】만약에 분별성이 없다면, 이름과 말이 성립되지 않고 이름과 말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의타성도 성취될 수 없고, 또한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는 것들이 모두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문】만약에 의타성이 없다면, 어떤 잘못이 있습니까?
【답】만약에 의타성이 없다면, 일체 번뇌가 작용하지 않아 마땅히 스스로 사라질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청정한 것도 또한 성립되지 못할 것이다.
017_0278_c_11L九若無等者問曰若分別性無有何過失?答曰若無分別性則名言不立名言不立則依他性不得成就乃至淨不淨竝皆不立問曰若無依他性何過失?答曰若無依他性一切煩不由功用應自能滅若爾淨品亦不得成
017_0279_a_01L【문】만약에 진실성이 없다면 어떤 잘못이 있는가?
【답】만약에 진실성이 없다면, 모든 것과 모든 종류의 청정한 경계가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란 진여와 세속을 별개로 포함하는 것이고, 모든 종류란 진여와 세속을 함께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이 진실성은 청정함을 성립시키는가? 청정하지 못함을 성립시키는가?.
【답】결코 청정하다거나 청정하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 만약에 반드시 청정하다면, 일체 중생이 수행에 힘쓰지 않고서 스스로 해탈을 얻고자 할 것이고,
반드시 청정하지 않다고 한다면, 모든 중생이 도를 닦아도 과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반드시 청정하다면, 범부의 법이 없을 것이고, 만약에 반드시 청정하지 않다면, 성인의 법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정하고 청정하지 않는 종류들이 다 진여를 그 근본을 삼기 때문이다. 또 만약에 반드시 청정하다면, 곧 무명(無明)이 없을 것이고 결코 청정하지 않다면, 곧 반야(般若)가 없을 것이니, 이 두 곳의 진여 성품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진여는 청정한 것도 아니고 청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를 나타내려면 눈(眼) 등의 모든 감관과 다르고, 선정의 마음 등도 다르기 때문이다. 눈 등의 모든 감관과 다른 것이란, 모든 감관이 이미 더러워지지 않았다면 그 감관도 진여의 이치와 같이 청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유루업으로써 원인을 삼기 때문에 본래부터 청정하지 않는 것이지만, 진여는 그렇지 않아 부처님의 지위에서 본래의 성품이 청정하여 본래부터 청정하지 않는 이치가 없기 때문에 모든 감관과 다른 것이다. 또 선정의 마음 등과 다른 것이란, 선정의 체와 본성은 스스로 청정하여 진여와 동일할 수 있으나, 네 가지 의혹에 삼켜지는 바가 되면 바뀌어 청정하지 않게 되니, 진여의 체는 본래 청정하니, 그렇지 않고, 비록 다시 무명 속에 있더라도 끝내 그것이 더러워지지 않을 것이다.
017_0278_c_18L問曰若眞實性無有何過失?答曰若無眞實性則一切一切種淸淨境不得成故一切者別攝眞俗盡一切種者通攝眞俗故問曰是眞實性者爲可立淨爲立不淨?答曰不可得說定淨不淨若定淨者則一切衆生不勞修行自得解脫故定不淨者一切衆生修道卽無果報若定淨者則無凡夫法若定不淨者則無聖人法何以故?淨不淨品皆以如爲本故若其定淨不卽無明若其不淨不卽般若此兩處如性不異此眞如非淨非不淨何以故?欲顯眞異眼等諸根異禪定心等故異眼等諸根者諸根旣不被染亦應得同如理淸淨而不然者以有漏業爲因從本不淨眞如不爾在於佛地性淸淨無有從本是不淨義故異諸異定心等者定體本性自淨可得同眞而爲四惑所噉故轉成不淨如之理本來淸淨則不如是雖復在無明㲉中終不爲彼所污
【문】이 세 성품 가운데 몇 성품이 체(體)가 없으나 체를 생기게 할 수 있는가?
【답】오직 분별성 하나만이 체가 없으나 의타성의 체를 생기게 할 수 있다.
【문】몇 가지 성품이 체가 있어서 체를 생기게 할 수 있는가?
【답】의타성만이 진실하지 않는 체가 있어서 다시 의타성의 체를 생기게 할 수 있으니, 마치 무명이 제행을 생기게 하는 것과 같다.
【문】이 세 가지 성품 가운데 몇 가지 성품이 체가 있어서 체 없는 것을 생기게 할 수 있는가?
【답】진실성 하나만이 의타성을 없앨 수 있고 그 체를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을 ‘만약 없다면’ 등이라 한다.
017_0279_a_16L問曰三性幾性無體能生有體?答曰分別一性無體能生依他性體此幾性有體能生有體?答曰是依他一性有不實體還能生依他猶如無明生諸行等問曰此三幾性有體能生無體?答曰眞實一性能滅依他令其無體故是名若無等
017_0279_b_01L다음 열째 의지란,
【문】분별성은 어떤 법에 의지하여 성립할 수 있는가?
【답】세 가지 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성립된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상이고 두 번째는 명칭이고 세 번째는 사유이다. 이 세 가지에 의지하기 때문에 분별성이 성립하는 것이다.
【문】의타성은 무엇에 의지하여 성립하는 것인가?
【답】네 가지 법에 의지하여 성립되니, 그 네 가지 법이란, 이른바 상과 명칭과 분별과 성스러운 지혜가 그것이다. 이 네 가지 법에 의지하기 때문에 의타기성이 성립되는 것이다.
【문】진실성은 어떤 법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인가?
【답】이 성품은 머무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바도 없고 의지하는 처소도 없으며 경계에도 분별이 없는 것이다.
017_0279_b_01L十依止者問曰分別性依何法得成?答曰依三法故成何者三?一相二名三思惟依此三故分別性問曰依他性依何得成?答曰依四法成四法者謂相分別聖智依此四法故依他性成問曰實性依何法得成?答曰此性無住無著無有依處境無分別

3. 현체분 ③
3) 여래장품(如來藏品)
017_0279_b_08L佛性論顯體分第三中如來藏品第三

다시 여래장(如來藏)의 의미에 세 가지가 있음을 알라. 무엇이 세 가지 인가? 첫째는 소섭장(所攝藏)이고, 두번째는 은복장(隱覆藏)이고, 세 번째는 능섭장(能攝藏)이다.
017_0279_b_09L復次如來藏義有三種應知何者爲三?一所攝藏二隱覆藏三能攝藏
017_0279_c_01L첫째의 소섭장은 부처님이 말씀하시길, “머무는 자성 그대로에 근거하여 일체중생이 다 여래장이다.” 여(如)라는 말에 두 가지 의미가 있으니, 첫째는 있는 그대로의 지혜이고, 둘째는 있는 그대로의 경계다. 이 두 가지가 전도되지 않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라고 말하는 것이다. 내(來)라는 말은 자성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와서 이르고 이르러 얻는 것, 이것을 여래라고 한다. 그러므로 여래의 성품이란, 비록 원인을 얻는다고 하고, 결과에 이르러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 체는 다르지 않다.
다만 청정하거나 혼탁하다는 차이로 말미암아 다름이 있을 뿐이다. 원인에 머무를 때에는 두 가지 공함(二空)을 어기기 때문에 무명을 일으켜서 번뇌에 더럽혀지기 때문에 이것을 염탁이라고 말한다. 비록 아직 드러나지는 않지만 반드시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응득(應得)’이라고 한다. 만약 결과에 이르를 때에는, 두 가지 공과 더불어 화합하여 다시는 의혹에 얽매이지 않고 번뇌에 더럽혀지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청정이라고 한다. 결과가 이미 나타났기 때문에 ‘이르러 얻었다’고 하는 것이다.
마치 물의 성질처럼, 그 본체가 청정하거나 염탁한 것이 아니고 다만 더럽히고 더럽혀지지 않음에 근거하여 청탁의 이름이 있는 것과 같다. 만약에 진흙 찌꺼기가 흐리고 어지럽기 하기 때문에 맑고 깨끗하지 못하다면, 비록 맑고 깨끗하지는 못할지라도 물의 그 청정한 성질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만약에 방편으로 맑고 깨끗하게 한다면, 곧 청정함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깨끗하고 깨끗하지 않는 이름은 더럽히거나 더럽혀지지 않음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이고, 물의 성질, 그 자체가 깨끗하고 더러운 것과는 관계되지 않는 것인 줄 알라. 얻어야 하는 것과 얻음에 이른 이 두 가지 불성도 또한 이와 같다. 동일한 진여는 다른 체가 있지 않고 다만 공의 이치를 어기기 때문에 의혹과 집착을 일으키며, 번뇌로 더럽혀지고 어지럽혀지기 때문에 혼탁하다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두 가지 공한 것을 어기지 않고 진여와 동일한 상(相)이 된다면 무명을 일으키지도 않고 번뇌와 의혹에 더럽혀지지도 않으리니, 그러한 까닭에 임시로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른바 장(藏)이란, 일체 중생은 여래의 지혜가 모두 그들 속에 있기 때문에 ‘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지혜는 있는 그대로의 경계와 부합하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결코 있는 그대로의 경계에서 나오지 못하는 것은 여래가 섭지(攝持)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장(所藏)’이라고 하고, 중생은 여래장이 된다.
다시 장(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바른 경계를 나타냄에 견줄 데가 없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경계를 떠나서 달리 어떤 경계가 이 경계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바른 행을 나타내는 데에 견줄 데가 없는 것이니, 이 지혜를 떠나서 그밖에 달리 뛰어난 지혜가 이 지혜를 능가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바른 과보(果)를 나타내는 데에 견줄 데가 없는 것이니, 달리 어떤 과보가 이 과보를 능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며, 또 이 과보로 말미암아 일체 중생을 거둬 간직할 수 있기 때문에 중생이 곧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017_0279_b_11L所攝名藏者佛說約住自性如如切衆生是如來藏言如者有二義如如智二如如境竝不倒故名如如言來者約從自性來來至至得是名如故如來性雖因名應得果名至得其體不二但由淸濁有異在因時爲違二空故起無明而爲煩惱所雜名染濁雖未卽顯必當可現故名應若至果時與二空合無復惑累惱不染說名爲淸果已顯現故名至譬如水性體非淸濁但由穢不穢有淸濁名若泥滓濁亂故不澄淸雖不澄淸而水淸性不失若方便澄卽得淸淨故知淨不淨名由有穢無穢故得非關水性自有淨穢應得至是二種佛性亦復如是同一眞如無有異體但違空理故起惑著煩惱染亂故名爲濁若不違二空與如一則不起無明煩惑不染所以假號爲淸所言藏者一切衆生悉在如來智內故名爲藏以如如智稱如如境一切衆生決無有出如如境者爲如來之所攝持故名所藏衆生爲如來藏復次藏有三種一顯正境無離如如境無別一境出此境故顯正行無比離此智外無別勝智此智故三爲現正果無比無別一果過此果故故曰無比由此果能攝藏一切衆生故說衆生爲如來藏
두 번째로 은복장(隱覆藏)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께서 스스로 숨어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장’이라고 한다. 여래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진여의 전도되지 않은 이치를 나타낸 것이니, 헛된 생각이기 때문에 이를 전도라고 하고, 헛된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진여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항상 머무는 이치를 나타낸 것이니, 이 진여의 성품이 자성을 따라 머물러 그 성품이 와서 이르고 이르러 얻은 진여의 본체가 변하여 달라지지 않기 때문에 이를 항상 머무는 이치라 하는 것이니, 여래의 성품이 도전(道前)에 머물 때에는 번뇌에 숨겨지고 덮히어 중생들이 보지 못하기 때문에 이를 ‘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017_0279_c_17L二隱覆爲藏者如來自隱不現故名爲藏言如來者有二義一者現如不顚倒由妄想故名爲顚倒不妄想故之爲如二者現常住義此如性從住自性性來至至得如體不變異故是常義如來性住道前時爲煩惱隱覆衆生不見故名爲藏
017_0280_a_01L세 번째로 능섭장(能攝藏)이란, 결과를 얻은 지위(果地)의 일체가 강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공덕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여래가 응득성(應得性)에 머무를 때, 이것을 모두 섭수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결과에 이르렀을 때에 바야흐로 성품을 얻는다고 하면, 이 성품은 곧 무상(無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성품은 처음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있는 것을 아는 것이니, 이 때문에 항상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017_0280_a_01L三能攝爲藏者謂果地一切過恒沙數功德住如來應得性時攝之已盡故若至果時言得性者此性便是無常何以故?非始得故故知本有是故言常

4. 변상분(辯相分) ①
1) 자체상품(自體相品)
017_0280_a_05L佛性論辯相分第四中自體相品第一

다시, 불성의 모든 종류의 모습에 열 가지 의미가 있음을 마땅히 알라. 열 가지란, 첫째 자체상(自體相)이고, 둘째 인상(因相)이고, 셋째 과상(果相)이고, 넷째 사능상(事能相)이고, 다섯째 총섭상(總攝相)이고, 여섯째 분별상(分別相)이고, 일곱째 계위상(階位相)이고, 여덟째 편만상(遍滿相)이고, 아홉째 무변이상(無變異相)이고, 열째 무차별상(無差別相)이다.
첫째 자체상에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부분의 모양이고, 두 번째는 전체의 모양이다. 부분의 모양에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 번째는 여의공덕성(如意功德性)이고, 두 번째는 무이성(無異性)이고 세 번째는 윤활성(潤滑性)이다.
017_0280_a_06L復次佛性一切種相有十義應知十相者一自體相二因相三果相事能相五摠攝相六分別相七階位八遍滿相九無變異相十無差別一自體相者有二種一者別相者通相別相有三種何者爲三?一者如意功德性二者無異性三者潤滑
017_0280_b_01L여의공덕성이라고 하는 것은, 여래장을 말하는 것으로 다섯가지 종류가 있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첫째는 여래장이니, 자성(自性)이 바로 그 ‘장(藏)’의 의미이니, 일체 법이 여래의 자성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무아(無我)로써 그 모양을 삼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일체의 모든 법을 여래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둘째는 정법장(正法藏)이니, 원인이 그 ‘장’의 의미이다. 일체 성인은 사념처(四念處) 등의 정법으로써 이 법을 취하여 경계를 삼기 때문에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은 생기게 되고, 이미 생긴 것은 원만하게 되니, 이 때문에 정법장이라고 한다. 셋째는 법신장(法身藏)이니, 얻음에 이르는 것이 그 ‘장’의 의미이다. 이것은 모든 성인은 바른 성품을 믿고 즐거워하고 믿고 즐거워하며 듣기를 원하는 이 신락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성인으로 하여금 네 가지 덕성에 대하여 강가의 모래알보다 많은 일체 여래공덕을 얻게 하기 때문에 이 성품을 법신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넷째 출세장(出世藏)이니, 진실함이 이 ‘장’의 의미이다. 세간에는 세 가지 잘못이 있으니, 첫째는 대치(對治)하여 아무것도 없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세간이라 하고, 이 법은 대치가 없기 때문에 출세간이라고 한다. 둘째 고요히 머물지 않기 때문에 세간이라 하고 허망한 마음의 과보로 말미암아 찰나찰나에 사라져 머물지 않기 때문에 세간이라 한다. 이 법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출세간이라고 한다. 셋째 전도된 견해 때문에 마음이 세간에 머물과 항상 전도된 견해에 빠져 있으니, 마치 사람이 삼계에 머물면서 마음에 결코 고법인등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허망함 때문에 세간이라 하는 것이다.
이 법은 능히 세간을 벗어났기 때문에 진실하여 세간을 벗어난 장이라고 한다. 다섯째는 자성청정장(五者自性清淨藏)이니, 비밀이 이 장의 의미이다. 만약에 일체 법이 이 성품을 따르면, 이를 곧 안(內)이라 하고, 이것이 바르고 삿된 것이 아니면, 청정이라 하고, 만약에 일체 법이 이 이치를 어긴다면 이것을 바깥(外)이라 하니, 이것은 삿되고 바르지 않기 때문에 오염되고 혼탁하다 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자성청정장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승만경(勝鬘經)에 말하기를, “세존이시여, 불성이란 것이 바로 여래장이고, 정법장이고, 법신장이고, 출세장이고, 자성청정장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다섯 장의 이치를 설함으로 말미암아 여의 공덕이 나타나게 되나니, 부처님께서 이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 여의보배(如意寶)를 설하신 것이다. 마치 사람이 지난 세상의 업 때문에 여의보주를 얻는데, 이 구슬을 얻고 나서는 뜻대로 즐겨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성취되는 것처럼, 불성도 그러한 것이어서 선지식(善知識)을 잘 섬겨 모든 복덕과 지혜를 닦음으로 말미암아 이 성품을 얻어 수행자의 뜻을 따라 각각 스스로 삼승의 과(三乘果)를 얻으니, 이 때문에 여의공덕이 바로 별상(別相)이다.
017_0280_a_14L所言如意功德相者謂如來藏有五種何等爲五?一如來藏自性是其藏義一切諸法不出如來自性無我爲相故故說一切諸法爲如來藏者正法藏因是其藏義以一切聖人四念處等正法皆取此性作境未生得生已生得滿是故說名爲正法藏者法身藏至得是其藏義此一切聖信樂正性信樂願聞由此信樂心令諸聖人得於四德及過恒沙數等一切如來功德故說此性名法身四者出世藏眞實是其藏義世有三失一者對治可滅盡故名爲世法則無對治故名出世二不靜住名爲世由虛妄心果報念念滅不住此法不爾故名出世三由有倒見心在世閒則恒倒見如人在三界心中決不得見苦法忍等以其虛妄故名爲世此法能出世閒故名眞實爲出世藏五者自性淸淨藏以秘密是其藏義若一切法隨順此性則名爲是正非邪則爲淸淨若諸法違逆此理則名爲外是邪非正名爲染濁故言自性淸淨藏故『勝鬘經』言世尊!佛性者是如來藏是正法藏是法身是出世藏是自性淸淨藏由說此五藏義故如意功德而得顯現佛爲顯此義故說如意寶譬如人以宿業感得如意寶珠得此珠已隨其意所樂事自然得成佛性亦爾由伏事善知識修諸福慧感得此性便隨修行者意各各自得三乘之果故如意功德是其別相
017_0280_c_01L둘째의 무별이성(無別異性)이라는 것은, 범부나 성인이나 모든 부처님은 분별적 심성과 과실과 공덕이 없고, 구경청정처에서 평등하게 두루 가득함이 마치 허공과 같고, 또 흙이나 은이나 금 그릇 같기도 하며, 이 세 그릇이 비록 다르지만, 그 성품들은 모두 공한 것이다. 공의 곳에 차이가 없기 때문에 무별이성이라고 한다.
017_0280_b_23L二無別異性者凡夫聖人及諸佛無分別心性過失功德究竟淸淨處平等遍滿譬如虛空又如土金器此三雖異而其性等皆是空空處不別故名無別異性
≪해석≫ 이른바 과실이란, 범부를 말하고, 공덕이란, 곧 유학의 지위에 있는 성인이고, 구경청정이란, 곧 모든 부처님이다. 이 셋이 비록 다르긴 하지만 그 성품은 다르지 않다. 이는 곧 흙으로써 범부에 비유하고, 은으로써 유학의 지위에 있는 이를 비유하고, 금으로써 부처님에 비유한 것이니, 비록 세 그릇이 차이가 있지만, 그 공한 성품은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또 청정하고 편만한 것 등에 세 가지 의미가 있으니, 있다는 것은 무위의 뜻을 나타내고, 청정하다는 것은 더러움이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두루 가득하다는 것은 걸림이 없다는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사리불(舍利弗)에게 말씀하시기를, “중생의 경계가 법신과 다르지 않고 법신이 중생의 경계와 다르지 않다”고 하셨으니, 이러한 의미 때문에 둘이 없고 분별이 없으면서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불성이 세 계위 가운데에 평등하게 두루 가득함은 청정하거나 청정하지 않는 종류들이 다 변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허공과 같은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17_0280_c_04L釋曰言過失者謂凡夫功德者卽有學聖人究竟淸淨者卽諸佛此三處雖殊而其性不異此卽以土喩凡夫銀喩學者金喩諸佛雖復三器有異而其空性一種故又是有淸淨遍滿等三義有者顯無爲義淸淨顯無染義遍滿顯無㝵義故佛告舍利弗衆生界不異法身法身不異衆生界由此義故無二無別唯有名字如是佛性於三位中平等遍滿由淨不淨品變異故故說如虛空性
017_0281_a_01L셋째의 윤활성이란, 여래의 성품이 중생들 속에서 인과(因果)의 이치를 나타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중생에 대한 대비(大悲)로 중생들에게 윤활한 것으로써 그 모양을 삼기 때문이다. 대비란 것이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체(體)이고, 둘째는 큰 것이고, 셋째는 다른 것이다.
첫 번째의 체의 의미는 반야(般若)로써 체를 삼는다. 반야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분별이 없는 참된 지혜이고 두 번째는 분별이 있는 세속의 지혜이다. 이제 분별이 있는 지혜를 취하여 대비의 체로 삼는 것은 대비로써 중생들을 반연하여 일으키기 때문이며, 둘째의 큰 것의 의미에는 다섯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자량(資糧)이고 두 번째는 상이며 세 번째는 행처이고 네 번째는 평등이며 다섯 번째는 최극(最極)이다.
첫 번째 자량이라는 것은 능히 큰 복덕과 지혜 이 두가지 자량을 만들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상이라는 것은, 능히 세 가지 괴로움(三苦)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보고 모두 구제하기 때문이고, 세번째로 행처라는 것은 삼계(三界)의 중생들을 통하여 그 경계를 삼기 때문이고, 네번째로 평등이라는 것은, 모든 중생처에서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이고, 다섯째 최극이란 이 수행을 벗어나서 그 밖에 다시 뛰어난 행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의 별이(別異)란 여덟 가지 뜻이 있으니, 첫 번째 자성차별에 대해 말하면, 자비가 무량한 것은 성냄이 없는 것을 성품으로 삼고, 대비는 무치로써 성품을 삼는다. 두 번째로 상의 차별에 대해 말하면, 자비는 고고(苦苦)로써 상을 삼고 대비는 삼고(三苦)로써 상을 삼는다. 세 번째로 행처의 차별에 대해 말하면, 자비는 욕계를 경계로 삼고, 대비는 삼계 전체로써 경계를 삼는다. 네 번째로 계위의 차별에 대해 말하면, 자비는 사선으로 그 지위를 삼고, 대비는 무류(無流)의 여래과로써 그 지위를 삼는다.
다섯 번째는 경계의 차별이니 자비라는 것은 범부 및 이승(二乘)으로 경계를 삼고, 대비는 오직 보살과 부처로써 경계를 삼는다.
여섯 번째로 덕의 차별에 대해 말하면, 자비는 욕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덕이며, 대비는 삼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덕이다.
일곱 번째는 구제에 차별이 있는 것이니, 자비는 고통을 제거하려는 마음만이 있고 고통을 제거하는 일은 없으며, 대비는 마음도 있고 그러한 일도 있는 것이다.
여덟 번째는 구경(究竟), 불구경(不究竟)의 차별이니, 자비는 잠시는 구제하지만 진실로 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며, 대비는 능히 영원히 구제하여 버리지 않는 것이다.
017_0280_c_15L三潤滑性者辯如來性於衆生中現因果義由大悲於衆生軟滑爲相故大悲者有三一體二大三別異一體義者以般若爲體般若有二一無分別眞智有分別俗智今取有分別智爲大悲以大悲緣衆生起故二大義者一爲資糧二爲相三爲行處四爲平等五爲最極一資糧者能作大福智慧二行資糧故二爲相者能觀三苦衆生悉濟拔故三爲行處者三界衆生爲境界故四爲平等者於一切衆生處起平等心故五最極過此修外無更勝行故三別異義有八種一爲自性差別悲無量者以無瞋爲性大悲者以無癡爲性爲相差別悲者以苦苦爲相大悲者以三苦爲相三爲行處差別悲者欲界爲境界大悲者通三界爲境界四爲地差別悲者以第四禪爲其地大悲者以無流如來果爲其地五境界差別悲者以凡夫及二乘爲境界大悲者唯菩薩與佛爲境界六爲德差別悲者以離欲欲界德大悲者離欲三界德七爲救濟有差別悲者但有拔苦之心無拔苦事大悲者有心有八爲究竟不究竟差別悲者能小暫救濟不能眞實救大悲者能永救恒不捨離故
윤활(潤滑)이란, 윤(潤)으로써 능히 포섭할 수 있다는 뜻을 나타내고 활(滑)은 잘못을 등지고 덕(德)으로 향한다는 뜻을 나타낸 것이니, 마치 물의 경계와 같이 두 가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능히 흩어진 물건을 섭수하고 미끄러워서 깔깔하지 않음이 그것이다. 윤택함으로써 포섭할 수 있고, 미끄럽기 때문에 깔깔하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윤택한 것을 그 원인으로 삼고, 미끄러운 것으로 그 결과를 삼는 것이니, 이 때문에 인과의 이치를 나타낸 것이라 하는 것이다.
017_0281_a_20L潤滑者潤以顯其能攝義滑者顯其背失向德義譬如水界亦有二能一則能攝散物唯滑不澀故由潤故能攝由滑故不澀以潤者爲因以滑者爲果故曰現因果義
017_0281_b_01L다시 자성청정은 바로 그 전체 상의 의미이다, 라는 것은, 앞서 진실과 공과 수계 등의 비유와 같이 자성청정은 그 전체 상이기 때문이다. 여래의 성품은 번뇌 속에 있으면서도 더러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상은 네 가지 번뇌의 장애가 되기 때문에, 네 사람이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네 가지 덕의 근본을 짓기 위해서이고, 네 가지 전도를 여의기 위해서이고, 생사를 멸하고 대치하기 위해서, 때문에 네 가지 상을 설하는 것이다. 전체는 하나이고 부분은 세 가지이니, 전체 상이란, 오직 자성청정의 상이고 세 가지 부분적 상이란, 첫째는 불가사유이고, 두 번째는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무량한 공덕이다. 이것을 자체상이라고 한다.
017_0281_b_02L復次自性淸淨是其通相義者如前實空水界等譬竝自性淸淨其通相故如來性在煩惱中無所染污此四相爲四惑障故爲非四人所得爲四德作本故爲離四倒故爲滅生死對治故故說四相通一別三通相者唯有自性淸淨相三別相者一不可思惟二應得三無量功德名自體相

4. 변상분 ②
2) 명인품(明因品)
017_0281_b_10L佛性論辯相分第四中明因品第二

다시, 네 가지 원인이 있음으로 해서 네 가지 장애를 제거하고 여래의 성품을 얻을 수 있음을 알라. 네 가지 원인이란, 첫째 대승(大乘)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고, 둘째 무분별 반야이고, 셋째 파허공삼매이며, 넷째 보살의 대비이다. 네 가지 장애란, 첫째 대승을 미워하여 배반하고, 둘째 유신견에 계탁하고 집착하며, 셋째 생사를 두려워하고, 넷째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보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의 장애는 잇찬티카(一闡提)이고, 둘째의 장애는 성문(聲聞)이고, 넷째의 장애는 독각(獨覺)이다. 이 네 가지 번뇌때문에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자성청정한 법신을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017_0281_b_11L復次有四種因能除四障得如來性義應知四因者一信樂大乘二無分別般若三破虛空三昧四菩薩大悲四障者一憎背大乘二身見計執怖畏生死四不樂觀利益他事初障闡提二障外道三障聲聞四障獨覺由此四惑能令四人不能得見自性淸淨法身
017_0281_c_01L만약에 세간에 대하여 대략 말한다면, 세 종류의 중생이 있다. 첫째는 생사가 항상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중생이 있고, 둘째는 생사가 있는 것을 없애기를 즐거워하는 중생이 있으며, 세번째는 두 가지를 다 좋아하지 않아 그 있거나 없애는 것을 모든 잊은 중생이다.
첫째의 생사가 존재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자에는 다시 두 가지 가 있으니, 첫 번째는 해탈의 길을 증오하고 등져 열반(涅槃)의 성품이 없는 것으로, 생사를 즐거워하고 열반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이미 결정된 지위에 떨어진 것이니, 이미 결정된 지위라는 것은, 성인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어서 나아가거나 물러서거나 취할 것이 없고 불법 안의 사람으로서 대승의 법을 등진 자이다. 이러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의 스승도 아니고 그도 나의 제자가 아니다. 사리불(舍利弗)아, 이 사람은 얕은 어두움으로부터 짙은 어두움에 들어가고, 다시 짙은 어두움으로부터 깜깜한 어두움에 들어가 그 어두움을 취하여 벗을 삼고, 다시 잇찬티카(闡提)를 취하여 벗을 삼는다. 이 때문에 내가 이 사람이 이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고 하셨다.
017_0281_b_19L若略說世閒有三種衆生一樂生死恒有二樂滅生死有三兩俱不樂有滅竝忘一樂生死有者有二種一憎背解脫道無涅槃性樂生死不樂涅槃二已墮定位定位非聖非凡進退無取而是佛法內背大乘法因此人故佛說是言非是其師其非我弟子舍利弗!此人從輕暗入重暗復從重暗入於盲暗取暗爲友復取闡提爲友是故我說此人如是
017_0282_a_01L둘째의 생사가 있는 것을 없애기를 좋아하는 것에 다시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방편이 아닌 것에 떨어진 것이고, 두 번째는 방편 속에 떨어진 것이다. 방편이 아닌 것에 떨어진 것에 또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아흔 여섯 종류의 외도이고, 두 번째는 불법 안의 사람으로서 외도와 동일한 집착을 하는 사람들이며, 정법에 근거하지만 삿된 집착과 아(我)견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 바른 가르침의 의미에 통달할 수 없다. 이러한 사람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참된 공(眞空)을 믿고 즐거워 하지 않는다면, 이는 외도들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다시 증상만(增上慢)을 가진 사람이 공한 것을 가지고 소견을 삼아 이 진공이 진실한 해탈문(解脫門)이라 한다. 이 진공 해탈문에 근거하여 공에 대한 집착을 일으켜 있고 없는 모든 것이 다 공한 것이라고 하니, 이 공에 대한 집착은, 곧 무소유이고 무소유이기 때문에 인과(因果)의 두 진리와 도리(道理)를 한꺼번에 잃어버리며, 또 이 공을 집착하는 잘못 때문에 곧 삿된 없음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집착은, 공으로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에 삿된 집착을 하게 하고 일체의 삿된 집착은 공에 근거하지 않고는 이 집착을 소멸하고 제거할 수 없으니, 이 집착은 이미 공에 의지해 일어났기 때문에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 때문에 부처님께서 가섭(迦葉)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약에 어떤 사람이 아견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기를 수미산(須彌山)같이 크게 할지라도 그것을 나는 허락하겠다. 왜냐하면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 증상만을 가진 사람이 공에 대한 집착을 일으킨 것이 털끝의 4분의 1정도로 작다 하더라도 이것은 내가 호되게 꾸짖고 절대 허락하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방편 가운데에 떨어진 것이 또 두 가지다. 첫 번째는 성문인이니, 이는 자신의 이로움을 위해 수행하여 단지 자신을 제도할 뿐, 남을 이익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독각의 사람이니, 이타심에 대하여 즐거워하지도 않고 행하는 것도 없이 다만 사심(捨心)만을 일으킬 뿐이다.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란,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고, 행하는 것이 없는 것이란, 전혀 남을 제도하는 일이 없고, 오직 스스로 깨달아 스스로의 이익됨을 위할 뿐이다. 다만 버리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란, 이 평등이 머무는 마음을 버리고 남을 이익되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동시에 남을 해치는 것도 없고 스스로가 홀로 깨닫기 때문에 독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방편에 떨어진 성문도 역시 그러하니, 마치 말전지(末田地)와 아사나(阿斯那) 두 비구와 같으니, 부처님께서 열반하실 때 그들이 다 가지 않았다가 뒤늦게 가섭(迦葉)이 법장(法藏)을 모을 때에 이르러 소환을 받고 비로소 나오거늘, 가섭이 꾸짖으면서 말하기를, “그대들은 부처님으로부터 거룩한 도를 얻지 않았는가?” 그들은 “사실 그러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또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들은 큰 잘못이다. 이제 갈지어다. 부처님의 법으로써 부탁하노니, 그대들은 잘 맡아 간직하여라. 만약에 법답게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죄의 허물이 그대들에게 있으리라”. 그러자 그 사람들은 허물을 달갑게 여기고 참회하면서 뜻을 받들어 행하였다.
017_0281_c_06L二樂滅生死有者有二種一墮非方便二墮方便中就墮非方便復有二一外道謂九十六種二是佛法內人與外道同執約正法起邪執我見故於正教義不能了達因此人故佛說是言若不信樂眞空則與外道無異復次有增上慢人取空爲是眞空實解脫門約此空解脫門起於空執謂一切有無竝皆是空空執者卽無所有無所有故因果二諦道理竝失執此空過故卽墮邪無是等執者由空而起故成邪執一切邪執莫不由空故能滅除此執旣依空起故不可治因此人故故佛語迦若人起我見執如須彌山大我亦許之何以故?以可滅故若此增上慢所起空執猶如髮端四分之一急呵責決定不許二墮方便中有二一聲聞人自利修行但爲自度不爲利他二獨覺人於利他心無樂無事起捨心無樂者不樂利他無事者無度人之事唯爲自覺自利故但起捨心者捨是平等住心不願利人無所損獨自覺悟故言獨覺墮方便聲聞亦爾如末田地及阿斯那二比佛涅槃時其皆不往後至迦葉集法藏時被召方出迦葉呵責之言爲從佛得聖道不?答云實爾又呵責汝大過失今去當以佛法付汝任若不如法罪失屬汝其人甘失懺受旨奉行
017_0282_b_01L다음, 셋째의 두 가지를 다 좋아하지 않는 것이란, 대승(大乘)을 수행하는 가장 뛰어난 근기의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미 잇찬티카처럼 생사가 있는 것도 좋아하지 않고, 또 방편이 아닌 가운데에 떨어진 저 외도들의 집착과 같지도 않고, 또 방편 가운데에 떨어진 이승(二乘)의 사람들과 같지도 않다. 때문에 이 사람은 생사와 열반의 평등한 길을 함께 가, 무주처에 머물고 비록 생사를 행하여도 더럽혀지지 않고, 열반을 행한다 해서 깨끗한 것도 아니며, 다만 대비(大悲)하기 때문에 생사를 버리지 않고, 반야(般若)를 위하여 열반을 버리지 않을 뿐이다. 열반을 여의지 않는 것이란, 성문들이 영원히 무위에 머무는 것에 집착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생사를 버리지 않는 것이란, 일천제들이 생사를 즐거워하는 것과 다른 것이다. 만약에 생사를 좋아하여 집착하는 것을 잇찬티카라고 말한다면, 불법안에 있는 사람으로 결정된 지위에 떨어진 자도 역시 잇찬티카와 같을 것이니, 이러한 두 사람은 사정취(邪定聚) 속에 떨어질 것이다. 만약에 생사가 있는 것을 없애기를 좋아하는 자라면, 이 사람은 방편이 아닌 것에 떨어짐으로써 곧 부정취(不定聚)에 있게 될 것이며, 만약에 생사가 있는 것을 없애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이 방편 가운데에 떨어지거나 또는 두 가지를 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는 앞의 두 가지를 얻어 평등한 도를 닦는 자이다. 이 사람은 정정취(正定聚) 속에 있게 될 것이다.
017_0282_a_13L三俱不樂者謂修行大最利根人旣不同闡提樂生死有亦不墮非方便中同外道執亦不墮方便中如二乘人是故此人具行生涅槃平等之道住無住處雖行生死而不染雖行涅槃亦非淨但爲大悲故不捨生死爲般若故不捨涅槃不離涅槃者異聲聞執永住無爲捨生死者異一闡提樂於生死若樂著生死者名一闡提佛法內人墮定位者亦同闡提如是二人墮在邪定聚中若樂滅生死有者是人墮非方便中則在不定聚若人樂滅生死有人墮方便中及俱不樂得前二者平等道是人在正定聚中
017_0282_c_01L이 대승(大乘)을 행하여 장애없는 도를 닦아 익히는 사람을 제외하고서 그 나머지 잇찬티카ㆍ외도ㆍ성문ㆍ독각 등 네 사람은 네 가지 장애가 있기 때문에 불성을 보지 못한다. 무엇이 네 가지 장애인가? 첫째 대승을 증오하고 등지는 것이니, 이것은 일천제의 장애이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 부처님께서 보살이 닦아 익히고 믿고 즐거워할 만한 대승의 법을 설하신 것이며, 둘째 모든 법에 대하여 아가 있다는 집착을 가진 것이 외도들의 장애다. 이것을 고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보살이 닦아 익히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설하신 것이며, 셋째 생사 중에서 반드시 괴롭다는 생각과 혐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에 집착하는 것은 성문들의 장애이다. 이것을 고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 보살이 닦아 익혀야 할 파공삼매(破空三昧)를 설하셨으니, 공삼매란, 초지(初地)이상부터 능히 이 삼매를 얻을 수 있으니, 허공 등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다. 관(觀)에 들어갈 때 곧 있지도 없지도 않고, 있고 없음을 여의지도 않는다. 비유컨대 팔지(八地)에 있어서 진여와 세속을 쌍으로 관하는 것과 같이, 그 팔지와 다른 것은 팔지 이상은 출입관(出入觀)이 없고 초지에서 들어갈 때는 같지만, 나올 때는 다른 것이다. 넷째 중생에게 이익되는 일을 등지고 중생을 버리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는 독각들의 장애다. 이것을 고치기 위해 부처님께서 보살의 대비를 닦아 익힐 것을 설하신 것이다. 보살의 대비는 남을 이롭게 하는 것으로 일을 삼지만, 독각의 사람들은 다만 스스로가 인연을 관할 뿐, 남을 제도할 뜻이 없기 때문에 대비가 없고, 성문도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네 가지 장애를 없애기 위해 믿고 즐거워하는 등의 네 가지로써 원인을 삼아 모든 보살로 하여금 이러한 원인을 닦고 익혀서 위없는 법신의 청정한 바라밀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을 불성의 청정한 원인이라 하니, 이러한 사람들을 이름하여 불자(佛子)라 하는 것이다.
017_0282_b_04L離發行大修習無障道人之外所餘闡提聲聞獨覺等四人有四種障故見佛性何者四障?一憎背大乘是闡提障爲對治此故佛說菩薩修習信樂大乘之法二於諸法中起我見執外道障爲對治此故佛說菩薩修習般若波羅蜜三於生死中定執苦想及厭怖心是聲聞障爲對治此故說菩薩修習破空三昧空三昧者從初地以上能得此三昧則破虛空等執觀之時不卽有無不離有無喩如八地眞俗雙觀而異八地者八地以上出入觀初地入時則同出時則異背衆生利益事作捨衆生意是獨覺爲對治此故佛說修習菩薩大悲菩薩大悲利他爲事明獨覺人但自觀因緣無度他意故無大悲聲聞亦爲滅此四障故以信樂等四種爲令諸菩薩修習此因得至無上法淸淨波羅蜜是名佛性淸淨因是之人得名佛子
이 때문에 불자에는 네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가 인(因)이고, 둘째가 연(緣)이고, 셋째가 의지하는 것이고, 넷째가 성취하는 것이다. 첫째의 인을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불성이고, 두 번째는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법 중 불성은 무위이고, 믿고 즐거워하는 것은 유위이다. 믿고 즐거워하는 것은 성득불성(性得佛性)에 근거하면 그 요인(了因)이 되니, 이는 능히 정인(正因)의 성품을 명확히 알기 때문에 믿고 즐거워하는 것이요, 가행(加行)에 대하여는 생인(生因)이 되니, 이는 여러 행들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의 연이란, 반야바라밀이 능히 보살의 몸을 생기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 이것은 무위(無為) 공덕가(功德家)의 연이기 때문이다.
셋째의 의지하는 것이란, 허공을 깨뜨리는 선정 등이 그것이니 존재를 좋아하는 사람이 단견(斷)에 집착하는 것은 어느 곳에도 낙(樂)과 정(淨)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이 이 파공삼매(破空三昧)를 닦음으로써 능히 저 집착을 깨뜨릴 수 있고 이 선정의 힘으로 말미암아 보살의 법신이 견고하여, 곧 파리하거나 약하지 않는 것이다.
넷째의 성취하는 것이란, 보살의 대비가 남을 이익되게 하는 일에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가 다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중생이 무수하기 때문에 이익되게 하는 일도 역시 다함이 없으니, 이는 불성이 응득가(應得家)의 인이 되기 때문이다. 첫째의 인은 아버지의 신분(身分)과 같고, 둘째의 연은 어머니와 같고, 셋째의 의지하는 것은 포태(胞胎)와 같고, 넷째의 성취하는 것은 유모(乳母)와 같기 때문이니, 여러 보살들을 이 네 가지 뜻으로 말미암아 불자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017_0282_c_02L是故佛子有於四一因二緣三依止四成就初言因者有二一佛性二信樂此兩法佛性是無爲信樂是有爲信樂約性得佛性爲了因能顯了正因性故信樂約加行爲生因能生起衆行故二緣者謂般若波羅蜜能生菩薩身是無爲功德家緣故三依止者破空定等有之人執斷無處有樂淨等故菩薩修破空三昧能除彼執由此定力故菩薩法身堅固則不羸弱四成就菩薩大悲利益他事無盡故由眞如不盡衆生無數故利益事亦復無是佛性爲應得家因故一因如父身分二緣如母三依止如胞胎四成就如乳母故諸菩薩由此四義名爲佛子

4. 변상분 ③
3) 현과품(顯果品)
017_0282_c_17L佛性論辯相分第四中顯果品第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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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과상(果相)에 대한 의미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과상에는 두 가지 계위가 있으니, 첫째는 지위(地) 이전의 범부와 성인의 두 계위로써 네 가지 덕(四德)을 얻지 못한 것이고, 둘째는 십지(十地)의 모든 계위가 그것이다. 십지 이전에 이러한 믿고 즐거워하는 등의 네 가지 덕이 있어서 청정한 불성의 원인이 되니, 네 가지 전도(四倒)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 바로 여래의 법신 네 가지 모양인 공덕 바라밀이니, 이것이 그 결과인 줄 마땅히 알라. 네 가지 전도란, 물질(色)에 있어서 오음(五陰)이 사실 무상(無常)한 것인데, 항상하다(常)는 소견을 일으키고, 사실 괴로운 것인데, 즐겁다는 소견을 일으키고, 사실 아(我)가 없는 것인데, 아견을 일으키고, 사실 부정한 것인데, 청정하다는 소견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를 네 가지 전도라 한다. 도(倒)에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견소멸(見所滅)이고, 두 번째는 수소멸(修所滅)이고, 세번째는 비이소멸(非二所滅)이니, 진리를 볼 때에 능히 소견의 뒤바뀜을 제거하고 반드시 생각의 의혹을 깨뜨릴 때, 능히 그 생각의 전도를 제거하고 비이소멸은 능히 마음의 뒤바뀜을 제거하나니, 이 네 가지를 대치하기 위해 네 가지 전도를 설하는 것이다. 무엇이 네 가지 인가? 물질(色) 등 오음(五陰)은 미래, 현재, 과거에 마땅히 소멸하기 때문에 사실 무상한 것이니, 사실 그대로 무상하다는 견해를 일으키며, 괴로울 때에도 괴롭기 때문이고, 즐거움이 없어질 때에도 괴롭기 때문이고, 이 두 가지를 버릴 때에도 괴롭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사실 그대로 괴로운 것이니 이 가운데 괴롭다는 견해를 내며, 무상이 원인이 되고, 무상이 결과가 되기도 하는 것은, 그 원인과 결과가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을 의지해 집착하기 때문에 결과가 자유롭지 못하고 원인도 그와 같으니 미래, 현재, 과거도 다시 무가 되니, 이미 앞의 원인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른 것에 의지해도 또한 자유롭지 못하고, 원인과 결과를 떠나서 밖에 다른 법이 ‘아’가 되는 것이 없어서, 이 때문에 나없는 것이 사실이니, 여기에서 무아(無我)라는 이해를 내는 것이다. 그리고 부정한 것에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물질이고 둘째는 물질 아닌 것이다. 물질로서 부정한 것이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를테면 처음과 중간과 나중이다. 처음이란, 처음 태에 들어가 화합할 적에 그 종자가 부정한 것이고, 중간이란, 모태에서 나온 뒤에 음식으로 자양(資養)할 때 모든 것이 부정한 것이고, 나중이란, 몸을 버리고 난 뒤에, 몸이 무너졌을 때, 갖가지가 부정하기 때문이다. 물질이 아닌 것이란, 혹은 기뻐하고, 혹은 근심하고, 혹은 미워하고, 혹은 무기(無記)이고, 혹은 욕심의 모든 얽매임을 여의지 못하기 때문에 물질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법으로 말미암아 부정하기 때문에 성인은 삼계(三界)를 볼 때에 다 부정한 것으로 보고, 이러한 오음이 사실 그대로 부정하기에 부정하다는 견해를 내나니, 이 네 가지가 다 사실이기 때문에 전도가 아닌 것이다.
017_0282_c_18L復次果相義應知果相者有二處者地前凡聖二位不得四德二者十地諸位地前有如是信樂等四德爲淸淨佛性因爲對治四倒如來法身相功德波羅蜜是其果應知四倒者於色等五陰實是無常起於常見苦起樂見實無我起我見實不淨起淨見是名四倒倒者有三義一見所滅二修所滅三非二所滅見眞諦時除見倒定破思惑能除想倒非二所能除心倒爲對治此四說四無倒何者爲四?於色等五陰未有有已有應滅故實無常如實起無常解苦時苦故樂滅時苦故捨三時苦故故實是於中生苦解無常爲因無常爲果由因果得成以依他執故果不自在因亦如是未有有已有還無旣由前是故依他亦不自在離因果外別餘法爲我是故無我爲實生無我不淨有二種一色二非色色不淨有三謂初初者始入胎和合子不淨中者出胎已後飮食資養諸不淨後者捨身已後身體壞時種不淨故非色者或喜或憂或惡無記或不離欲諸繫縛等故非色此等法故不淨是以聖人通觀三界皆是不淨如是五陰如實不淨生不淨解此四皆實是故非倒
017_0283_b_01L만약에 불성은 항상하다(常)는 등의 네 가지 덕(四德)에 근거한다면, 이 네 가지 전도없는 것이 다시 전도되게 될 것이다. 이 전도됨을 대치하기 위해서 여래법신의 네 가지 덕을 세우는 것이니, 이른바 네 가지 덕이란, 첫째 상(常) 바라밀이고, 둘째 낙(樂) 바라밀이고, 셋째 아(我) 바라밀이고, 넷째 정(淨) 바라밀이다. 승만경(勝鬘經)에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이 모든 중생은 전도심을 내어 그 안의 오취음(五取陰)에 대하여 무상한 것을 항상하다고 보고, 괴로운 것을 즐겁다고 보고, 무아를 아라고 보고, 청정하지 않은 것을 청정하다고 보나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성문ㆍ독각들은 헛된 인식으로 말미암아 일체지의 지적 경계인 여래법신을 보지 못하니, 마땅히 닦아야 할 것을 닦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대승의 사람이 세존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여래의 법신에 대해 곧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 등으로 이해한다면, 이 사람은 전도되었다고 하지 않고 정견을 얻었다고 한다. 어떻게 이와 같이 말하는가? 세존이시여, 여래의 법신이 바로 상ㆍ낙ㆍ아ㆍ정의 모든 바라밀이므로 만약에 이렇게 본다면, 정견이라고 하니,, 이것이 여래의 흉자(胸子)입니다.“ 흉자란 항상 부처님의 마음 속에 있기 때문이다.
017_0283_a_23L若約佛性常等四德此四無倒還成顚倒爲對此倒是故安立如來法身四德四德一常波羅蜜二樂波羅蜜三我波羅蜜四淨波羅蜜如『勝鬘經』說世尊!是諸衆生生顚倒心於內五取陰常見常苦中見樂無我見我不淨見世尊!一切聲聞獨覺由空解未曾見一切智智境如來法身應修不修若大乘人由信世尊故於如來法便作常淨等解是人則不名名得正見云何如此?世尊!如來法是常淨諸波羅蜜若人作是見者名爲正見是如來胸子胸子者恒在佛心胸故
017_0283_c_01L다시 여래의 네 가지 덕 바라밀은 그 원인이 차례대로 점점 깊어진다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이것을 반대로 말하여 뒤의 것을 뒤집어 앞의 것으로 한다면, 이른바 정(淨)ㆍ아(我)ㆍ낙(樂)ㆍ상(常)일 것이다. 일천제(一闡提)들이 대승을 증오하고 등짐으로 말미암아 저것을 뒤집어 생사의 부정한 것에 머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보살이 믿고 즐거워하는 대승법을 닦아 익혀서 정(淨) 바라밀을 얻은 이것이 그 결과임을 마땅히 알라. 모든 외도들은 물질 등 오음(五陰)이 무아의 성품을 가진 것인데도 나라고 계탁하고 집착하지만, 이 물질 등의 법이 그대들이 집착하는 아상(我相)과 상위하고 항상 무아이기 때문에, 모든 불, 보살들은 진여의 지혜로 말미암아 일체법 무아바라밀을 얻는다. 이 무아바라밀은 그대들이 보는 무아상과 상위하지 않기 때문에, 여래느 이 상이 항상 무아라고 설한다. 이것이 바로 일체 법의 참된 체성(體性)이기 때문이고, 이 때문에 무아바라밀, 이것이 아라고 설하는 것이다. 경의 게송에서 설한 바와 같다.
017_0283_b_14L復次如來四德波羅由因次第漸深應知逆說翻後爲謂淨由一闡提憎背大乘爲翻彼樂住生死不淨故修習菩薩信樂大乘法得淨波羅蜜是其果應由一切外道色等五陰無我性類計執爲我而是色等法與汝執我相相違故恒常無我諸佛菩薩由眞如至得一切法無我波羅蜜是無我波羅蜜與汝所見無我相不相違故如來說是相恒常無我是一切法體性故故說無我波羅蜜是我如經偈說

두 가지 공이 이미 청정하여
무아라는 뛰어난 아를 얻나니
부처님은 청정한 성품을 얻으셨기에
무아가 바뀌어 아가 되었네
017_0283_c_03L二空已淸淨
得無我勝我
佛得淨性故
無我轉成我
017_0284_a_01L
모든 외도들은 오음에 대하여 아가 있는 것으로 집착하여 보는지라. 그 아에 대한 집착의 허망함을 뒤집기 위해 반야(般若) 바라밀을 닦아 익히고 또한 가장 뛰어난 무아, 즉 아바라밀을 얻게 되니,, 이것이 그 결과임을 마땅히 알라. 모든 성문 사람들은 생사의 괴로움을 두려워하고, 생사의 괴로움이 없는 고요함 속에 머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좋아하는 마음을 바꾸기 위해 파허공(破虛空) 삼매로 일체상인 세간과 출세간의 법을 닦아 익히니, 낙(樂)바라밀이 그 결과인 줄을 마땅히 알라. 독각 성인들은 중생들에게 이익되는 일들을 관하지 않고 다만 홀로 고요한 곳에 머물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마음을 바꾸기 위해 보살의 대비를 닦고 익혀 중생들에게 이로운 일들을 하고 내지 또한 생사를 끝내고 항상 간직하고 보호하나니, 상(常) 바라밀이 그 결과인 줄을 마땅히 알라. 이와 같이 대승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과 반야바라밀과 파허공삼매와 보살의 대비 등 네 가지 원인이 능히 여래의 법신인 네 가지 공덕 바라밀을 성취케 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이 네 가지 공덕으로 말미암아 일체 여래가 오직 법계만을 뛰어난 것으로 삼고, 때문에 허공과 같이 허공을 취하여 끝으로 삼고 최후의 끝까지 이른다”고 하셨다. 이와 같은 사구가 어떠한 뜻을 나타내는가? 믿고 즐거워하는 대승의 법을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이 최극의 청정 바라밀을 얻는 데에 이르셨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 ‘법계만이 뛰어나고 최상인 것이다’라고 설하셨으며, 반야바라밀을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중생 세계와 기(器)세계의 극무아바라밀을 얻는 데에 이르는 것이다. 오음을 중생 세간이라 하니, 이것이 곧 인공(人空)이고 국토와 네 가지 원소(四大)를 기세계라 하니, 이것이 곧 법공(法空)이다. 이것은 두 가지 공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때문에 허공과 같이’라고 설하였으며, 파공삼매를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일체처의 모든 법들이 자재롭게 뜻대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허공을 취하여 변제를 삼는다’고 설하셨으며, 보살의 대비를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중생들에게 항상 자비심을 일으켜서 그 보호하고 간직하는 것이 끝이 없기 때문에 가장 나중에서도 나중이라고 설한 것이다. 미래세의 최후란, 가령 미래세는 최후가 있을지라도 보살의 대비는 이것을 능가하니, 이 때문에 지위(地) 이전의 성인과 범부 두 위치에서는 네 가지 덕을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83_c_05L諸外道等於五取陰中執見有我翻其我執虛妄故修習般若波羅蜜至得最勝無我卽我波羅蜜是其果應知由諸聲聞人怖畏生死苦樂生死苦滅靜中爲翻此樂意故修習破虛空三昧一切相世出世法樂波羅蜜是其果應知由獨覺聖人者觀衆生利益等事但樂獨處靜住爲翻此意故修習菩薩大悲爲利益衆生事乃至窮於生死常所持護常波羅蜜是其果應知如是信樂大乘般若波羅蜜破虛空三昧菩薩大悲等四因能成就如來法身四功德波羅蜜故佛說由此四德一切如來唯法界爲勝由如虛空取虛空爲邊際極後際之後如是四句現何等義?由修習信樂大乘法故諸佛至得最極淸淨波羅蜜故佛說唯法界爲勝爲上修習般若波羅蜜故至得衆生世界器世界極無我波羅蜜五陰名衆生世閒卽人空國土四大名器世界是法空是二空所顯故故說由如虛爲修習破空三昧等故一切處諸法自在如意應得故取虛空爲邊際由修習菩薩大悲故於諸衆生常起悲心護持無有邊際故說極後際之後際之後者假令後際有後菩薩大悲亦能過之是故通辯地前聖凡二位不得四德
017_0284_b_01L다시 십지(十地)는 네 가지 장애로 말미암아 최고의 결과의 네 가지 덕을 얻기 못하고 금강(金剛) 이후의 마음이라야 바야흐로 이것을 얻을 수 있음을 마땅히 알라. 왜 그런가? 삼계(三界)를 벗어난 바깥에 세 종류의 성인이 있으니, 이른바 성문, 독각과 대력보살이니, 무류계에 머물며 네 가지 원장(怨障)이 있다. 이 네 가지 원장 때문에 여래의 법신인 네 가지 공덕 바라밀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네 가지 원장이란, 첫째 방편의 생사이고, 둘째 인연의 생사이고, 셋째 존재(有)가 있는 생사이고, 넷째 존재가 없는 생사이다.
첫째의 방편생사란, 이 무명(無明)의 머무는 계위가 능히 새로운 무루업을 생기게 할 수 있으니, 비유하면 마치 무명에서 행이 생기지만, 혹은 번뇌의 방편으로 인하여 동일한 종류의 결과를 생기게 하는 것을 인연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고,, 무명에서 불선행이 생기지만, 만약에 동일하지 않는 종류의 결과를 생기게 한다면, 다만 방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무명에서 선행과 부동행이 생기는 것과 같다.
때문에 이제 무명이 머무는 지위가 새로운 무루업을 생기게 하는 것도 그와 같아서 혹은 동일한 종류를, 혹은 동일하지 않는 종류의 것을 생기게 하니, 복된 행을 생기게 하는 것을 동일한 종류라고 하는 것은, 다같이 세속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지혜의 행을 생기게 하는 것을 동일하지 않는 종류라고 하는 것은, 이 지혜가 진여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방편의 생사라 한다.
둘째의 인연생사란, 무명이 존재하는 계위에서 생긴 무루업, 이 업을 가리켜 인연생사라 하는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무명에서 생겨난 행, 이 업은 다만 동일한 종류에만 감응하고, 동일하지 않는 종류의 결과를 생기게 하지 않는 것처럼, 선한 행은 다만 즐거운 결과를 낼 뿐이고, 선하지 않은 행은 다만 괴로운 과보를 낼 뿐이다. 이 때문에 인연의 생사라고 하는 것이다. 방편 생사는 범부의 지위에 비유한 것이고, 인연생사는 수타원(首陀洹) 이상의 계위에 비유한 것이니, 이 계위는 다만 지난 업을 사용할 뿐이고 새로운 업을 생기게 하지 않는다.
셋째의 존재가 있는 생사란, 이 무명이 머무는 계위가 방편이 되고, 무루업이 인연이 되어서 세 종류의 성인의 의도하는 대로 생기는 몸(意生身)이다, 마치 네 가지 취착(四取)이 연이 되고, 유루업이 원인이 되어서, 삼계(三界)안에 몸이 생기는 것과 같다. 존재가 있는 것(有有)이란, 미래세에 태어나는 존재로서 다시 한번 태어나기 때문에 이를 존재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 또 상류의 아나함(阿那含)으로서 제2생(生)에서 반열반하는 것과 같이, 한 생이 남았기 때문에 유유(有有)라고 하는 것이다.
넷째의 존재가 없는 생사란, 이 세 성인의 뜻으로 태어나는 최후의 몸에 근거한 것으로, 이것은 사유할 수 없는 퇴타(退墮)이니, 마치 태어남에 인연하여, 늙고 죽는 과실(過失)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무명이 머무는 지위는 일체 번뇌가 의지하는 곳이 되는가 하면, 일체 번뇌를 통틀어 무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무명이 모든 의혹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근본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은 것은 일체 번뇌의 더러운 냄새가 배어들어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佛)과 자재 보살로서도 더럽혀지지 않는 큰 정(淨)바라밀을 얻는데에 이르를 수 없는 것이다. 또 이것에 의지하고 이것을 인연하는, 이 무명이 머무는 지위의 미세한 망상(妄想)의 상이 유행(遊行)하여 쉬지 않기 때문에 아주 행도 없고 망상도 없는 큰 아(我) 바라밀을 얻는데에 이르를 수 없고, 또 이 무명이 머무는 지위를 조건으로 하고, 미세망상에서 일어나는 무루업을 원인으로 하여 세 가지 의생신이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완전한 인과(因果)의 괴로움을 벗어난 큰 낙(樂) 바라밀을 얻는 데에 이르를 수 없다. 만약에 업난(障難)과 생란(生難)이 모두 남김없이 소멸한 여래의 감로계를 아직 얻지 못하고, 아직 불가사의한 퇴타(退墮)의 경계를 증득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다 없애지 못했기 때문에 전혀 차별과 늙고 죽는 것 등이 없는 큰 상(常) 바라밀을 얻는데에 이르를 수 없는 것이다.
017_0284_a_11L復次十地由四障故未得極果四德金剛後心方乃得之應知何以故?以出三界外有三種聖人謂聲聞獨覺大力菩薩住無流界四種怨障由此四怨障故不得如來法身四種功德波羅蜜四怨障者方便生死二因緣生死三有有生死四無有生死一方便生死者是無明住地能生新無漏業譬如無明生行或因煩惱方便生同類果名爲因緣如無明生不善行若生不同類果名方便如無明生善行不動行故無明住地生新無漏業亦爾或生同或不同類生福行名爲同類以同緣俗故生智慧行名不同類以智是眞慧故是名方便生死二因緣生死是無明住地所生無漏業是業名爲因緣生死譬如無明所生行是業但感同類不生不同類果善行但生樂果不善但招苦報故名因緣生死方便生死譬凡夫位因緣生死譬須陁洹以上但用故業不生新業三有有生死者是無明住地爲方便無漏業爲因三種聖人是意所生身譬如四取爲緣有漏業爲因三界內生身有有者未來生有更有一生名爲有如上流阿那含人於第二生中涅槃者餘有一生故故名有有四無有生死者是三聖意生最後身爲緣不可思惟退墮譬如生爲緣老死等爲過失是故無明住地爲一切煩惱所依止處而一切煩惱通名無明者以無明爲衆惑根本根本旣未滅盡由爲一切煩惱垢臭穢熏習故阿羅辟支佛及自在菩薩不能至得無所染污大淨波羅蜜復次依此緣無明住地微細妄想相遊行未息極不能至得無行無想大我波羅蜜因此無明住地爲緣及微細妄想所無漏業爲因得起三種意生身故不能至得極離因果苦大樂波羅蜜若未證得業難生難滅盡無餘如來甘露界及未證得不可思惟退墮界未滅謝故不能至得極無別異老死等大常波羅蜜
017_0285_a_01L다시 마땅히 알라. 무명이 머무는 지위는 번뇌의 장난과 같고, 무루업은 업난과 같고, 세 종류의 의생신(意生身)은 과보난(果報難)과 같고, 불가사의한 퇴타는 과실난(過失難)과 같다. 만약에 세 종류의 의생신에 있을 때는, 이는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의 바라밀이 없기 때문이다. 여래의 법신이 바로 상(常) 등의 네 가지 바라밀인 여래의 법신은 일체 번뇌의 습기를 다 없앴기 때문에 지극히 청정하다고 하는 것이다. 일체의 아와 무아에 대한 허망한 집착이 사라졌기 때문에 대아라고 한다. 뜻으로 생기는 몸의 인과(因果)가 끝까지 다 되었기 때문에 이를 큰 낙(樂) 바라밀이라 하고, 생사와 열반이 평등하다고 통달했기 때문에 이를 큰 상(常) 바라밀이라 하는 것이다.
다시 네 가지 덕에 각각 두 가지 인연의 뜻이 있다고 마땅히 알라. 애초에 두 가지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여래의 법신엔 큰 정(淨) 바라밀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니, 첫째 본성이 청정한 것을 공통된 모습(通相)이라 하고, 둘째 더러움이 없이 청정하기 때문에 차별적 모습(別相)이라고 한다. 본성청정은 성인과 범부를 통하여 다 있는 성품이기 때문에 공통된 모습이라 하고, 더러움이 없이 청정한 것은 불과(佛果)에만 있기 때문에 차별된 모양이라 하는 것이며, 다시 두 인연이 있으므로 해서 여래의 법신엔 큰 아(我) 바라밀이 있다고 설하는 것이다. 첫째 외도의 치우친 소견에 대한 집착을 아주 여의었기 때문에 나라는 집착이 없다. 둘째 이승(二乘)들이 집착하는 무아의 치우침을 아주 여의었기 때문에 무아에 대한 허망한 집착도 없어서 두 집착이 함께 사라졌기 때문에, 큰 아(我) 바라밀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여래의 법신엔 큰 낙(樂) 바라밀이 있다고 설한다. 첫째는 모든 괴로움의 원인(苦集)인 모양을 남김없이 다 없앴기 때문에 또 습기가 상속되는 것을 다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모든 괴로움이 소멸(苦滅)한 모양을 증득했기 때문에, 세 종류의 의생신도 사라져 생기지 않고 괴로움도 남김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이것을 큰 낙(樂)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두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여래의 법신에는 큰 상(常) 바라밀이 있다고 설하니, 첫째 무상한 생사에 손감(損減)되지 않는 것은 단견(斷)에 치우친 것을 아주 여의었기 때문이고, 둘째 항상 열반에 머물되 증익(增益)됨이 없는 것은 상견(常)의 치우침을 아주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 단견과 상견의 두 집착을 여의었기 때문에 이를 큰 상(常)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승만경(勝鬘經)에 설하기를, “만약에 모든 행을 덧없는 것으로 본다면, 이를 단견이라 하고 정견(正見)이라 하지 않으며, 만약에 열반을 상주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것을 상견이라 하고 정견이라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여래의 법신은 이 두 가지 소견을 여의었기 때문에 큰 상(常)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여실한 법계의 도리문(道理門)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열반이고 생사이기도 하여 분별할 수 없다. 또 이것은 불이 법문(不二法門)에 들어갈 수 있고, 같지도 다르지도 않으니. 무주처에 머물기 때문이다. 모든 의혹을 없앴기 때문에 생사에 머물지 않는다. 본원으로 말미암아 열반에 머물지 않으며, 반야로 말미암아 모든 의혹을 소멸할 수 있고, 대비로 말미암아 본원을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불가사량경(不可思量經)의 게송 가운데 다음과 같이 설하였다.
017_0284_c_09L復次應知無明住地如煩惱難無漏業如業難三種意生如果報難不可思惟退墮如過失若在三種意生身中則無常淨波羅蜜故如來法身是常等四波羅蜜以如來法身一切煩惱習氣滅盡故是名極淨一切我無我虛妄執滅息故故名大我意所生身因果究竟盡故故名大樂生死涅槃平等通達故故名大常復次四德各有二緣義應知初有二因緣故說如來法有大淨波羅蜜一者本性淸淨爲通相二者無垢淸淨故名別相性淸淨通聖凡有故名爲通無垢淸但佛果有所以名別復有二種因說如來法身有大我波羅蜜一由遠離外道邊見執故無有我執二由遠離二乘所執無我邊故則無無我妄執兩執滅息故說大我波羅蜜有二種因緣說如來法身有大樂波羅蜜一由一切苦集相滅盡無餘故拔除習氣相續盡故二由一切苦滅相證得故三種意生身滅不更生故苦滅無餘是名大樂波羅蜜復有二種因緣說如來法身有大常波羅蜜一無常生死不損減者遠離斷邊常住涅槃無增益者遠離常邊由離此斷常二執故名大常波羅蜜故『勝鬘經』說若見諸行無常是名斷見不名正見若見涅槃常住是名常見非是正見是故如來法身離於二見名爲大常波羅蜜由此如實法界道理門卽是涅槃卽是生死不可分別是得入不二法門亦不一不二住無住處故由滅諸惑不住生死由本願不住涅槃由般若故諸惑得滅大悲故本願得成故『不可思量經』偈中說
017_0285_b_01L
모든 의혹은 깨달음을 이룩하고
생사는 열반을 이룬다
큰 방편을 닦아 익힌
모든 부처님은 불가사의하시다
017_0285_a_23L諸惑成覺分
生死成涅槃
修習大方便
諸佛叵思議

4. 변상분 ④
4) 사능품(事能品)
017_0285_b_02L佛性論辯相分第四中事能品第四

다시, 사능상(事能相)의 의미를 마땅히 알라. 이 청정한 성품의 사능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생사의 괴로움 속에서 능히 싫어하여 떠나는 것이고, 둘째 열반에 대하여 원하고 구하고 즐거워하고 원하는 것이다. 만약에 청정한 성품에 이와 같은 두 가지 일이 없다면 성취될 수 없다. 그러므로 경(經) 가운데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만약에 여래장(如來藏)이 없다면 생사의 괴로움에 대하여 싫어하여 여위려는 생각이 없고, 또 즐거워하고 원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때문에 부정취(不定聚)의 중생은, 이 두 가지를 일으켜 사용해야 하느니라. 첫째 생사의 괴로움에 대하여 과실(過失)을 관찰하여 의지처로 삼으니, 부정취의 중생으로서 싫어하여 여의는 마음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열반락에 대하여 공덕을 관찰하고 의지처로 삼으니, 이는 부정취의 중생으로 원하고 구하고 즐거워하고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고 구하고 즐거워하고 원하는 것에 네 가지 종류의 마음이 있으니, 어떻게 다른가? 첫째 원한다는 것은 곧 믿음이다. 믿음에 네 가지 있으니, 첫 번째는 (자신에게 불성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이고, 두 번째는 불사의를 믿는 것이고, 세 번째는 마땅히 얻어야 할 것을 믿는 것이고, 네 번째는 무량한 공덕이 있는 것을 믿는 것이다. 네 가지 뜻을 갖추었기 때문에 원한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 구하는 것이란, 이 법을 얻는 데에 이르기 위해 마음으로 항상 애써 구하되 물러나거나 후회하지 않는 것이니, 이를 구하는 것이라 한다.
셋째 즐거워 하는 것이란, 진여와 진여가 아닌 방편을 숙고하여 선택하는 것이니,, 진여의 방편이란, 이른바 열반이고, 진여의 방편이 아닌 것은, 이른바 생사이다. 열반을 숙고하여 선택하되 빠르게 증득할 것을 구하지 않고, 생사를 숙고하여 선택하되, 버리거나 여의는 것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라 한다.
넷째 원하는 것이란, 지금 발원함으로써 미래세가 다할 때까지 항상 발원하여 모든 중생을 섭수하는 것으로, 아직 일찍이 버리거나 여읜 적이 없이, 그 도를 행함에 따라 함께 보리(菩提)에 들어 발원의 바다에 섭수되는 것이다.
017_0285_b_03L復次事能相義應知此淸淨性事能有二一於生死苦中能生厭離二於涅槃欲求樂願若無淸淨之性如是二事則不得成故經中說世尊!若無如來藏於生死苦無厭離意亦無欲樂願之心故不定聚衆生起此二事爲用一於生死苦觀於過失爲依止處生不定聚衆生厭離心故二於涅槃樂觀於功德爲依止處生不定聚衆生欲欲求願樂是四種心云何爲異?初欲者名信信有四種信有二信不可思議三信應可得信有無量功德具是四義故名爲欲二求者爲至得此法心恒勤求無有退悔名之爲求三樂者思擇如不如方便如方便者謂涅槃不如方便謂生死思擇涅槃不求速證思擇生死不求捨離故名爲樂四願者從今發窮未來際恒以願攝一切衆生曾捨離隨所行道竝入菩提願海所
017_0285_c_01L 스스로의 이로움을 위해 열반을 버리지 않고 남을 이롭게 하기 위해 생사를 버리지도 않는다. 때문에 두 가지 관(觀)이 있으니, 첫째 생사에 대하여 괴로움의 과실을 관하는 것이고, 둘째 열반에 대하여 즐거운 공덕을 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부분의 사람은 청정한 성품으로 말미암아 이 관이 성취되니, 이른바 청정한 부분이란, 첫째 복덕의 부분이고, 둘째 해탈의 부분이고, 셋째 통달의 부분이다.
복덕의 부분이란 과거세의 선근(善根)이 능히 이 몸에 감응(感應)됨으로써 모든 선근을 구족하여 법을 받을만한 그릇이 되는 것이고, 해탈의 부분이란, 이미 공덕의 종자를 심은 것이 능히 미래세 가운데 해탈의 과보를 얻는 것이고, 통달의 부분이란, 성스러운 도로 말미암아 능히 진여를 통달하는 것이니, 이를 청정한 부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청정한 부분이 연이 되고 청정한 성품이 원인이 됨으로써 이 관을 이룩하니 인연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이 두 가지 일로 말미암지 않고서도 관을 이룩한다면, 이는 인연이 없는 것이다. 마치 일천제가 열반성이 없이 이 관을 얻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일천제들은 이러한 관이 없기 때문에
인연을 기다려 관하여야 바야흐로 이 청정한 성품이 객진(客塵)번뇌에 더럽혀지지 않음을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삼승(三乘) 가운데 일승(一乘)에 대한 믿음과 즐거워함을 일으키지 못하고, 또 선지식(善知識)들도 친히 섬기지도 못했다. 그리고 네 가지 성스러운 바퀴(聖輪)에 이르지도 못하고 아직 상응하지도 못한다.
이른바 네 가지 바퀴란, 첫째 법다운 국토에 머무는 것이고, 둘째 선지식들에게 의지하는 것이고, 셋째 자신을 조복(調伏)하는 것이고, 넷째 과거세에 선근(善根)을 심은 것이다. 바퀴에 또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는 동시에 이미 얻지 못한 것을 얻게 하는 동시에 이미 얻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고, 둘째 능히 제도하여 여기서부터 저기에이르기까지, 남으로부터 상속해서 자기에까지 상속하고 자기로부터 상속해서는 다시 남에게 이르는 것이고, 셋째 능히 행하여 생사로부터 열반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017_0285_c_01L以自利故不捨涅槃爲利他故捨生死故有二觀一於生死觀苦過失二於涅槃觀樂功德故淨分人由淸淨性此觀得成言淨分者一福德分二解脫分三通達分福德分者宿世善根能感此身具足諸根爲受法器解脫分者已下功德種子能感未來世中解脫果報通達分者由聖道故能通達眞如是名淨分是人由淨分爲緣淨性爲因故成此觀非無因緣若不由於此二事成觀無因緣如闡提人無涅槃性應得此觀而一闡提旣無此觀故知定須因緣觀方可現是淸淨性不爲客塵之所染污隨三乘中未起一乘信樂又復未能親事善知識等乃至四種聖輪亦未相應言四輪者一住如法國土二依善知識三調伏自身四宿植善根輪有三義一者未得令得得令不失二者能度從此至彼從他相續至自相續從自相續復至於他三者能載爲能從生得至涅槃
017_0286_a_01L그리고, 첫째의 선처에 머무르는 것이란, 이곳은 바른 행을 닦는 착한 사람들이 머무르는 곳이다.만약 이 가운데에 머문다면, 항상 이런 사람들을 보기 때문에 깨달음의 뜻을 얻으리니, 깨달음이란, 도리를 깨우치는 것이고, 뜻이란 선한 마음이다. 이것으로 인하여 선한 법 등의 일을 수지하는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께서 게송으로 설하시기를,
017_0285_c_22L一住善處者卽是能修正行善人所住之處若於中住恒見此人故得覺意覺者覺悟意者善心此受持善法等事故佛說偈言

아는 것이 없고 선한 인식이 없는
나쁜 벗은 바른 행을 손상시키나니
거미(蜘蛛)가 우유(乳) 속에 떨어지면
이 우유는 독(毒)으로 바뀐다네
017_0286_a_02L無知無善識
惡友損正行
蜘蛛落乳中
是乳轉成毒

이것을 “마땅히 법다운 국토에 머물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86_a_04L是名應住如法國土

다음, 둘째의 이른바 선한 벗과 친근히 하는 것이란, 그 선한 벗에는 일곱 부분이 있으니, 게송에서 말씀한 것과 같다.
017_0286_a_05L二近善友善友有七分如偈言

능히 보시하고 존중하고 믿을 수 있고
능히 설하고 능히 참아 수용하고
깊은 이치를 설하여 선한 벗을 위하고
제자들을 선한 곳에서 편안케 하는 것이네
017_0286_a_06L能施重可信
能說能忍受
說深爲善友
安弟子善處
017_0286_b_01L
일곱 부분이란, 첫째 능히 보시하는 것이니, 보시함으로 말미암아 남을 가엾이 여겨 사랑할 수 있고, 둘째 사랑하기 때문에 존중할 수 있고, 셋째 존중하기 때문에 믿을 수 있고, 넷째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능히 설할 수 있고, 다섯째 능히 설하기 때문에 바깥의 환란을 참고 수용할 수 있으며, 여섯째 능히 참고 수용하기 때문에 깊은 이치를 설하여 선한 벗을 이롭게 할 수 있고, 일곱째 깊은 법을 설하기 때문에 선한 벗을 편안히 하여 선한 곳에 둘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이 일곱 가지 덕을 갖춘 이가 있다면, 그는 충분히 의지할 수 있는 선지식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를 전체적으로 논하면, 세 가지 뜻에서 벗어나지 않으니, 첫째 가엾게 여기는 것을 좋아하고, 둘째 총명하고, 셋째 견디어 참는 것이니, 이 세 가지 뜻에 하나가 모자라더라도 곧 선한 벗이 아니다. 만약에 가엾게 여기기를 좋아할 뿐, 총명하지 못한다면, 이는 마치 부모가 비록 자식의 병을 염려는 하지만 그 병을 구원하여 다스릴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총명하기만 하고 인자하거나 가엾이 여기는 것이 없다면, 이는 마치 원수의 의사가 남의 병을 치료해 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에 견디어 참지 못한다면, 이는 자신의 수행이 부족하여 가엾이 여기는 것도, 총명한 것도 다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니, 이 때문에 비록 일곱 가지를 합쳐 말하지만, 세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 것이니, 능히 보시하고 존중하고 믿을 수 있는 이 세 가지는 가엾이 여기는 것에 속하고, 능히 설하고, 또 깊은 이치를 설하는 이 두 가지는 총명에 속하고, 능히 참는 것은 참는 것에 속하고, 마지막으로 선한 곳에서 편안케 하는 것은 세 가지에 다 공통되는 것이다. 한편 그 총명이란 어리석음을 여의는 것을 나타낸 것이고, 능히 견디어 참는 것이란 범부와의 차이점을 나타낸 것이고, 세 번째로 가엾이 여기는 것은 2승(乘)과의 차이를 나타낸 것이다. 불ㆍ세존만이 이 세 가지 덕을 구비하셨기 때문에 충분히 중생들의 선지식이 되는 것이다.
017_0286_a_08L七分者一能施由能施故令他怜愛故尊重重故可信可信故能說由能說故能忍受外難能忍受故能說深理利於善友由說深法故能安善友置於善處若有能備此七德者可堪依止爲善知識若摠論此七不出三一樂怜愍二聰明三堪忍三義若少一種則非善友若但怜愍不能聰譬如父母雖念子病不能救治但聰明無慈愍者如怨家師不治他若不能堪忍則自行不足怜愍亦不成就故離雖七種合不出三能施尊重可信此三屬怜愍攝能說及說深理此二屬聰明攝能忍屬堪忍攝安善處竝通三種其聰明者離愚癡能堪忍者表異凡夫三怜愍表異二乘唯佛世尊備此三德堪爲衆生眞善知識
셋째의 자신의 마음을 조복시키는 것이란, 바른 가르침 그대로 행하고 들을 때에는 산란심이 없고, 생각할 때에는 경솔하고 자만한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수행을 할 때에는 전도심이 없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가 조복하지 않는다면, 선한 곳의 선한 벗이란 곧 소용이 없을 것이다.
017_0286_b_03L三調伏自身心如正教行聞時無散亂心思時無輕慢心修時無顚倒心若不自調伏身心者善處善友則無所用
넷째의 과거세에 선근을 심은 것이란, 해탈분으로 삼기 위하여 선근을 닦는 것이다. 선근이란, 믿음과 계행과 들음과 버림과 지혜가 그것이다. 믿음이란, 삼보(三寶)에 대한 바른 생각을 여의지 않는 것이요, 계행이란, 선한 도를 여의지 않는 것이요, 들음이란, 스스로가 듣고 남을 듣게 하고 남을 뒤바뀌게 듣지 않게 하고 남이 듣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 네 가지 들음으로 말미암아 금세에도 듣고 생각하고 닦아서 법 그릇(法器)이 될 수 있는 세 가지 슬기를 구족할 수 있는 것이다., 버림에는 두 가지 버림이 있다. 첫째 옛날에 물자를 버려 남에게 보시했기 때문에 지금 곧 탐욕과 애착을 덜게 되는 것이고, 둘째 옛날에 법을 버려 사람들에게 보시했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곧 무명(無明)을 가볍게 하고 없앨 수 있게 된 것이니, 이렇게 버렸기 때문에 탐욕과 애착과 무명이 다 점차로 가볍고 희박하게 되어 이 인연으로 해탈의 과(果)를 얻는 것이다. 지혜란, 이 사람이 과거세에 이미 세 가지 보배(三寶)와 네 가지 진리(四諦)를 숙고하여 선택하였기 때문에 금생에서 세간의 바른 견해와 또한 모든 지혜(盡知)와 생사 없는 지혜(無生智)를 얻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비록 삼륜(三輪)를 갖추었더라도, 만약에 과거세의 선근이 없으면, 금생에 다섯 가지 감관(五根)이 구족하지 못하여 곧 여덟 가지 환란(八難) 등이 있는 곳에 태어날 것이니, 그러므로 만약에 과거세의 선근이 없으면, 앞의 삼륜이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알라.
017_0286_b_06L四宿植善根者以爲解脫分故修善根善根謂信信者不離三寶正戒者爲不離善道聞者自聞令他不令他倒聞不障他聞因四聞故今世得聞及思修等可爲法器三慧具足捨者有二一由昔捨物施他則損於貪愛二由昔捨法施人今則輕滅無明由此捨故貪愛無明竝稍輕薄以是因緣得解脫果智者是人先世已曾思擇三寶四諦故於此生得世正見乃至盡智及無生智如是之人雖具三輪若無宿善今生五根則不具足便是生於八難等處故知若無宿世善根則前三輪無所復用
017_0286_c_01L이 네 가지 뜻을 통틀어서 바퀴에 비유하면, 만약 네 바퀴에 한 바퀴라도 부족하면 곧 해탈의 이름이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법이 화합됨으로 말미암아 능히 해탈의 길을 얻는 것은 마치 바퀴가 움직이고 구름으로써 해탈에 이르렀을 때에는, 다시 이 바퀴가 움직이고 구르지 않는 것 같이, 마치 전륜성왕의 바퀴는 속바퀴ㆍ덧바퀴ㆍ바퀴통ㆍ바퀴살의 네 가지를 갖춘 것과 같다. 만약 이 네 가지가 없다면, 바퀴가 성립되지 않는 것과 같다.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만약 네 바퀴와 상응하지 않는다면, 이 때에는 생사 싫어하는 견해와 열반의 공덕관(功德觀)을 다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경에서 설하기를, “일천제(一闡提)인으로 사정취(邪定聚)에 떨어진 자에게 두 가지 몸이 있다. 첫째는 본성 법신이고, 두 번째는 뜻을 따르는 몸이다. 부처님의 태양과 같은 지혜 광명이 이 두 가지 몸을 비추신다”고 하였다. 법신이란, 바로 진여의 이치이고, 뜻을 따르는 몸이란, 곧 진여의 이치를 따라 일어나는 몸이다. 부처님의 광명이 이 일천제의 두 가지 몸을 가엾이 여기심은, 첫째 법신이 생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고, 둘째 수행을 더하여 길이 보리(菩提)의 행을 닦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관(觀)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경에서 설하기를, “일천제 중생은 결코 반열반(般涅槃)의 성품이 없다”고 하였으니, 만약에 그렇다면 두 경이 스스로 상충된다. 이 두 말씀을 풀이하건대, 하나는 요의로써 설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요의로써 설한 것이니, 이 때문에 상위되지 않는 것이다. 성품이 있다고 말한 것은 분명하게 설한 것이고, 성품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게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시기를, “만약에 대승(大乘)을 믿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을 일천제라 한다”고 하셨으니, 그들로 하여금 일천제의 마음을 버리게 하고자 ‘일천제일 때에는 결코 해탈할 수 없다’고 설하신 것이다. 만약에 중생으로서 자성(自性)의 청정한 성품이 있는데도 영원히 해탈할 수 없다면, 이럴 이치가 있을 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일체중생은 다 자성이 있기 때문에 뒤에 반드시 청정한 법신을 얻을 것이라고 관하셨다. 그러므로 경의 게송에서 설하기를,
017_0286_b_20L摠此四義譬之爲輪四若少一輪則不成解脫之名無由得立由此四法和合故能得解脫道者如輪能運能至解脫時無復此能如聖王輪有四物所謂轂若無此四則不成以是義故若未與四輪相應是時厭離生死觀及涅槃功德觀竝不得成故經中說一闡提人墮邪定聚有二種身一本性法身二隨意佛日慧光照此二身法身者卽眞如隨意身者卽從如理起佛光明爲怜愍闡提二身者一爲令法身得生二爲令加行得長修菩提行故觀得成復有經說闡提衆生決無般涅槃性若爾二經便自相違會此二說一了一不了故不相違言有性者名了說言無性者是不了說故佛說若不信樂大乘名一闡提欲令捨離一闡提心故說作闡提時決無解脫若有衆生有自性淸淨永不得解脫無有是處故佛觀一切衆生有自性故後時決得淸淨法身故經偈言

총명한 사람은 차례차례로
자주자주 자세히 자세히 닦아서
자신의 때를 제거하고 없애기를
마치 금세공인이 금을 다루듯이 하네
017_0286_c_19L聰明人次第
數數細細修
除滅自身垢
如金師鍊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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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한 사람은 차례로’란 이 사람은 이해가 있어 전도되지 않게 닦고 차례대로 배우는 것을 말한다. ‘자주 자주’라는 것은 잠시도 버리는 때가 없이 항상 스스로가 연마하고 구하는 것이다. ‘자세히 자세히’란, 세세한 것으로부터 현저한 것에 이르기까지 듣고 생각하고 닦는 지혜와 같이 자세히 자세히 익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번뇌를 제거해 없애는 것이란, 그 무명의 무겁고 가벼운 모든 의혹을 점차로 제거하여 청정한 본성이 길이길이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금세공인이 다루듯이 하는 것이란, 모든 찌꺼기와 티끌을 완전히 제거하여 금이 청정한 광명을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017_0286_c_21L聰明人次第者明此人有解不倒修能如次學數數者時無暫捨恒自硏細細者從微至著如聞思修慧細而習除滅自垢者稍除無明重輕諸惑令淸淨本性永得顯現故說猶如金師能鍊於金除諸滓璞金得淨光明
佛性論卷第二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