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佛性論卷第三

ABC_IT_K0596_T_003
017_0287_b_01L
불성론 제3권
017_0287_b_01L佛性論卷第三


천진보살 지음
진제 한역
송성수 번역
017_0287_b_02L天親菩薩造
陳天竺三藏眞諦 譯


4. 변상분 ④

5) 총섭품(總攝品)
017_0287_b_04L辯相分第四中摠攝品第五

다시, 전체를 포괄하는 이치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포괄하는 것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원인으로 포괄하는 것이고, 둘째는 결과로 포괄하는 것이다. 원인으로 포괄하는 것이란, 이 여래의 청정한 성품에 네 가지 원인이 있으니, 세 가지 법과 세 가지 비유와 비슷하기 때문에 바다를 가지고 비유를 삼은 것이다.
017_0287_b_05L復次摠攝義應知攝有二種一者由二者由果由因攝者是如來性淸有四種因三種法與三譬相似取海爲喩
세 가지 법이란, 첫째 법신의 청정한 원인(法身清淨因)이고, 둘째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이 생겨나는 원인(佛智德生因)이고, 셋째 부처님의 은혜와 공덕의 원인(佛恩德因)이다.
법신의 청정한 원인이란, 대승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이 생겨나는 원인이란, 반야(般若)와 선정을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부처님의 은혜와 공덕의 원인이란, 보살의 대비(大悲)를 닦아 익히는 것이라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대승을 믿고 즐거워하는 것을 닦아 익히는 것은 그릇(器)과 비슷하여 이 가운데 한량없는 선정과 지혜가 있어서 큰 보배가 두루 가득하기 때문에 그릇과 서로 비슷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야와 선정을 닦아 익힘은 보배와 서로 비슷한 것이란, 반야는 분별함이 없기 때문이고 선정은 불가사의한 공덕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야는 청정한 보배와 같고, 선정은 여의주(如意寶)와 같은 것이다.
017_0287_b_09L三法者一法身淸淨因佛智德生因三佛恩德因法身淸淨因者修習信樂大乘應知佛智德生因者修習般若及禪定應知恩德因修習菩薩大悲應知修習信樂大乘者與器相似此中有無量定慧大寶所遍滿故故說與器相似修習般若禪定與寶相似者般若無分別故禪定不可思惟功德所依止故般若如淨寶禪定如如意寶
보살의 대비를 닦아 익히는 것은 청정한 물과 같아서 일체 세간의 중생들에게 윤택하고 매끄러운 한 가지 맛이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큰 바다가 오직 짠 맛 한 가지인 것처럼, 보살의 대비가 모든 중생들을 윤택하게 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때문에 이 세 가지 법이 성불하려고 수행하는 지위(因地)에서 의지의 주체와 객체가 되니,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것이라고 하고 여래의 법 바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원인의 포섭인 것이다.
017_0287_b_18L修習菩薩大如淸淨水於一切世閒衆生潤滑一味故譬如大海唯一鹹味菩薩大潤諸衆生亦復如是故此三法因地中爲所依能依故說摠攝名如來法海是名因攝
017_0287_c_01L다음은, 결과로 포괄하는 것이란, 여래의 법신에 세 가지 법이 있으니 세 가지 비유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포괄할 수 있음을 밝힌 것이다. 마치 해(日)에 세 가지가 있는 것과 같다.. 첫째는 해의 체이고, 둘째는 광명이고, 셋째는 밝음이다. 이것이 세 가지 몸과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법이란 첫째는 신통(神通)이고, 둘째는 유전을 없애는 것이고, 셋째는 청정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017_0287_c_01L次由果攝者明如來法身有三種法與三譬相似故摠攝三譬相似者如日有三一體三明此與三身相似故三法者神通二流滅三顯淨
첫째의 신통은 비유하면, 해에 밝음이 있어서 능히 자기 경계를 막는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제거할 수 있는 기능을 하기 때문에 해가 밝은 것과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둘째 유전을 없애는 것이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말하는 것이니, 능히 업과 번뇌를 태워 없애는 것을 기능을 하기 때문에, 햇빛과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없애는 것이란 이 참된 지혜가 바로 의혹을 제거할 수 있기 때문이고, 없앰과 동시에 다하는 것이란, 의혹이 다 없어지는 그 때를 해탈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다한다고 일컫는 것이다.
셋째 청정함을 나타내는 것이란, 이를테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의 경계를 전의(轉依:염오식에서 청정식으로 바뀌는 것)라 하니, 지극히 청정하고 때가 없고 맑고 고요하기 때문에 일륜과 서로 비슷한 것이다. 청정한 것이란, 해탈의 장애가 없기 때문이고, 번뇌가 없는 것이란, 일체 지혜의 장애가 없기 때문이고, 맑고도 고요한 것이란 객진번뇌(客塵)가 더럽힐 수 없는 그 본래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017_0287_c_05L一神通者譬日有明能除障自境界無明之暗以爲事用故與日明相似二流滅者謂盡無生智能燒除業煩惱令無餘以爲事用故與日光相似所言滅者卽是眞智正能除惑故與滅名盡者卽惑無時名爲解脫故與盡稱三顯淨者謂盡無生境名轉依極淸淨故無垢澄靜故與日輪相似淸淨者解脫障滅故無垢者一切智障滅故澄靜客塵所不能染以本性淸淨故
전의(轉依)란, 성문ㆍ독각ㆍ보살 등 세 사람들의 의지하는 법보다 뛰어나기 때문이다.
또 네 가지 모습(相)이 있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첫째는 생기게 하는 의지처이고, 둘째는 소멸케 하는 의지처이고, 셋째는 잘 숙고하고 사량한 결과이고, 넷째는 법계의 청정한 모양이다.
017_0287_c_15L依者勝聲聞獨覺菩薩三人所依止法故又有四種相應知一者爲生依二滅依三善熟思量果四法界淸淨
017_0288_a_01L첫째의 생기게 하는 의지처란, 부처님의 무분별도를 상속하고 의지하는 것이니, 만약 이 법에 의지하지 않으면, 무분별도가 생겨날 수 없다. 이 법에 의지하고 인연하기 때문에 이 법을 도가 생겨나는 의지처가 된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의 소멸케 하는 의지처란, 일체의 의혹과 습기가 궁극적으로 없어져 다시 나지 않는 것은 그 의지하는 데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전의(轉依)법을 의지하지 않고서도 궁극적으로 의혹을 없앨 수 있다면, 이는 성문ㆍ독각들도 부처님이 의혹을 없애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이 법이 궁극적으로 그 의혹이 의지하는 바를 없애는 것이라고 알라.
017_0287_c_19L一生依者佛無分別道相續依止若不緣此法無分別道卽不得生依緣此故名此法爲道生依二滅依一切諸惑及習氣究竟滅不生所依止故若不依此轉依法究竟滅惑者則聲聞獨覺與佛滅惑不異由不同故故知此法爲究竟滅惑依止
셋째의 잘 숙고하고 사량한 결과란, 올바르게 통달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공경하고, 끊임도 없고 남김도 없이 아는 바의 진여를 닦아 익히는 그것이 바로 전의(轉依)의 결과이다. 만약에 도(道)속에 있다면, 그 전의가 원인이 되고, 도의 뒤(道後)에 있다면 곧 결과가 되나니, 만약에 그 전의가 잘 숙고하고 사량한 결과가 아니라면, 모든 부처님의 자성(自性)은 마땅히 다시 숙고하고 사량하고 다시 소멸케 하고 다시 청정케 해야 할 것이니,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것은 전의가 잘 숙고하고 사량한 결과라는 것을 알라.
넷째 법계의 청정한 모습이란, 일체의 허망한 생각이 여기서 다 없어지기 때문에, 이 법계가 사량(思量)을 벗어나고 언어(言語)가 나타내는 것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계는 청정한 것으로써 모양을 삼는 것이다. 이는 곧 마음이 작용하는 장소가 없어지고 언어의 길이 끊어져서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 바야흐로 이것은 무소득의 진여의 이치를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017_0288_a_02L善熟思量果者善正通達長時恭敬無間無餘等修習所知眞如是轉依若在道中轉依爲因若在道後名爲果若轉依非是善熟思量果者則諸佛自性應更熟思量更滅更淨而不然者故知轉依爲善熟思量之四法界淸淨相者一切妄想於中滅盡故此法界過思量過言說所顯現故故以法界淸淨爲相此卽心行處滅言語道斷不可詮詺方是得無所得眞如理故
다시 여래의 전의(轉依)에 여덟 가지 법이 포함되어 있음을 마땅히 알라. 여덟 가지 법이란, 첫째 사량(思量)할 수 없는 것이고, 둘째 둘이 없는 것이고, 셋째 분별이 없는 것이고, 넷째 청정한 것이고, 다섯째 명확히 아는 원인이고, 여섯째 대치(對治)하는 것이고, 일곱째 욕심을 여읜 (離欲) 것이고, 여덟째 욕심을 여의는 원인(離欲因)이다.
017_0288_a_13L復次如來轉依有八種法攝持應知八法者一不可思量二無二三無分別四淸淨五照了因六對治七離欲八離欲因
017_0288_b_01L이 여덟 가지를 합한 것에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욕심을 여읜 것으로 멸제(滅諦)이고, 둘째는 욕심을 여읜 원인이니 이는 도제(道諦)이다. 앞의 사량(思量)할 수 없는 것 등의 세 구절은 멸제(滅諦)에 섭수하는 것에 속하고, 그 다음의 청정(淸淨)한 것 등의 세 구절은 도제에 섭수되는 것에 속한다.
그리고, 처음에 욕심을 여읨에 세 구절이 있으니, 첫째 사량을 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인가? 있고 없는 것 등의 네 구절에 대하여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의 사량(思量)으로서는 통달할 수 없기 때문이고, 일체 중생의 언어(言語)ㆍ명구(名句)와 자모(味) 등으로는 설명하거나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성인의 무분별지로만 증명하고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량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둘째 다르지 않은 것이란, 경(經)에서 설한 것처럼, “사리불(舍利弗)이여,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두 가지 법이 없고 분별하는 법도 없느니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둘이라고 하는 것은, 번뇌와 업 이것을 둘이라 하는 것이니, 여래의 법신은 이러한 두 가지 법이 없기 때문에 두 가지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017_0288_a_16L此八合有二意一離欲是滅諦二離欲因卽是道諦前不可思量等三句屬滅諦攝次淸淨等三句屬道諦攝初離欲有三句一者云何不可思量於有無等四句覺觀思量不能通達故一切衆生言語名句味等不能詮辯故唯聖人無分別智所證知故故名不可思二無二者如經中說舍利弗!諸佛法身無二法無分別法所言二者惱及業是名爲二如來法身無此二法故名無二
셋째 분별이 없는 것이니, 분별이란, 번뇌와 업의 습기로 인한 바르지 못한 생각이다. 바르지 못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두 가지를 일으키고 자성(自性)을 통달함으로써 두 가지를 없애는 것인 만큼, 이 두 가지와 분별은 서로 상응하지 않고 같이 다니지도 않는 것이다.
상응하지 않는 것이란, 현행하는 번뇌가 상응하거나 공행(共行)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행(不行)이란, 수면(隨眠)과 번뇌는 함께 따라 현행하지 않으니, 이미 이 두 가지는 상응하지도 현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의 법신은 괴로움이 궁극적으로 사라져 영원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 어떻게 그러한가? 어느 법을 제거하여 없애기 위해서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사라짐이라 한다. 본래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을 사라짐이라 하는 것이니, 무상의경(無上依經)에 설하기를, “아난(阿難)이여,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법 가운데에는 심, 의, 식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017_0288_b_04L三無分別分別者煩惱業家習不正思惟由不正思惟故起二由通達自性故滅二是二及分別不應不行不應者上心煩惱不相應共不行者隨眠煩惱不共隨行旣不應不行此二處故故說如來法身滅究竟永無生起云何如此?非爲除滅一法故名爲滅以本來不生故名爲滅如『無上依經』中說阿難!於無生無滅法中意及識決定不生故
017_0288_c_01L≪해석≫ 마음이란, 곧 육식(六識)의 마음이고, 의(意)란, 아타나식(阿陀那識)이고, 식(識)이란, 아리야식(阿梨耶識)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에 생길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중에서 이 세 가지 식이 없다면 분별이 없을 것이고, 분별이 이미 없다면 바르지 않는 생각 등도 없을 것이고, 이미 세 가지 식이 없다면 무명(無明)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법신은 바르지 않는 생각을 여의었기 때문에, 무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무명을 일으키지 않으면, 십이인연의 가지(十二有支)들이 생기는 인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승만경(勝鬘經)에 설하기를, “괴로움의 멸(苦滅)이란 법을 없애고 무너뜨리는 것을 괴로움이 멸했다고 하지 않는다. 무너뜨리는 것이란, 삼계를 깨어뜨리고 진리를 보는 유여열반을 얻는 것을 말하고, 없애는 것이란, 네 가지 종류의 생사에 관한 사유번뇌를 제거하여 무여열반을 얻는 것을 말한다.
때문에 무너뜨리고 없애는 것이라고 한다. 괴로움이 소멸하였기 때문에 무시 이래로 짓지도 생기지도 않았고 모두 소멸하지도 여읜 것도 아니다. 상주하고 항상 고요하고 맑고 자성이 청정하여 모든 번뇌의 껍질에서 해탈하여 공덕이 강가의 모래알 수보다 많은 것을 서로 섭수하고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지혜를 버리지 않고 사유할 수 없는 여래의 법과 상응하는 여래법신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이러한 여래법신을 욕심을 여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017_0288_b_13L釋曰心者卽六識心意者阿陁那識識者阿梨耶識於此三中不得生故此中若無三識則無分別分別旣無亦無不正思惟等旣無三識則不得起無明是以如來法身離不正思惟則不起無明若不起無明十二有分不爲生緣故名不生又『勝鬘經』說是苦滅者非滅壞法名爲苦滅壞者破三界見諦得有餘涅槃滅者除四種生死思惟煩惱得無餘涅槃故言滅壞由苦滅名無始時節非作非生無滅離盡常住恒寂湛然自性淸淨解脫一切煩惱㲉功德過恒沙數攝非相離不捨離智不可思惟與如來法相應如來法身諸佛所說是如來法身說名離欲
둘째의 욕심을 여읜 원인이란, 이 법신을 얻기 위해 견도와 수도에 섭수되는 것을 말한다. 경계에 근거하여 무분별지에는 세 가지 뜻이 있어, 해와 비슷하다고 한다. 번뇌가 없고 청정하기 때문에 일륜과 비슷하고, 능히 모든 경계를 밝게 알기 때문에 해의 밝음과 비슷하고, 능히 오든 참된 견해에 대한 어두운 장애를 제거하기 때문에 태양빛과 비슷한 것이다.
017_0288_c_06L二離欲因者爲得此法身見諦道修道所攝由境界故說無分別智有三義與日相似無流淸淨故與日輪相似能照了一切境界故與日明相似能對治一切眞見暗障故與日光相似
≪해석≫ 참된 견해에 대한 어두운 장애란, 이를테면 구족상(具足想)과 번뇌의 장애와 업의 장애와 과보의 장애를 말하는 것이다.
구족상(具足想)이란, 수면(隨眠)과 번뇌로써 원인을 삼고, 다섯 대경(五塵)에 대한 욕심으로써 그 대상을 삼으며, 부정한 사유로써 함께 일어나는 원인을 삼으니, 이 세가지를 갖추었기 때문에 구족상이라 하는 것이다.
이 어두운 장애는, 탐욕을 여읜 법신은 한 경계임을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 여래법신은 탐욕을 여의었다는 것을 이와 같이 마땅히 보고 알아야 할 것이다.
017_0288_c_11L釋曰眞見暗障者謂具足想煩惱難業難果報難具足想者以隨眠煩惱爲因五塵欲爲緣不正思惟爲俱起具此三故名爲具足想是暗障如實不見不知離欲法身一界故卽得生起如此應見應知如來法身離欲
어떻게 보고 알아야 하는가? 이른바 사실 그대로 사량(思量)하되 생각(想)을 보지도 않고 경계를 보지도 않는 것이다. 경계란 분별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고, 생각이란, 남에게 의지하는 성품을 말하는 것이니, 분별과 의타, 두 가지 성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진실로 하나의 경계를 보고 안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88_c_17L云何見知?謂如實思量不見想及不見境境者名分別性想名依他不見分別依他二性故名爲眞實見知一
017_0289_a_01L또 생각이란 사람이고, 경계란 곧 법이다. 이 사람과 법을 생각과 경계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이를 두 가지 공한 것(二空)이라 한다. 이러한 일체 법을 여래께서 모두 보고 모두 아시는 것은, 평등함에 근거하여 평등함에 진실로 있는 그대로를 통달하셨기 때문이다. 경계와 지혜가 평등하여 더하고 덜함이 없는 것을 평등한 관(觀)이라 한다. 이 관이 능히 진실한 소견에 대한 어두운 장애를 제거한다. 이것은 여래의 법신을 얻을 수 있게 하는 원인(因)으로서 견도위(見道位)와 수도위(修道位)에 포함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욕심을 여의는 원인은 두 가지 닦는 것을 떠나지 않음으로써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두 가지 닦는 것이란 첫째 진리 그대로 닦는 것이고, 둘째 인식 그대로 닦는 것이다. 세간에서 알려지는 것은 다만 두 가지가 있을 뿐이다. 첫째가 사람이고, 둘째가 법이다. 만약에 이 두 가지 공함(二空)에 통달한다면, 마땅히 여실한 때를 얻으니, 때문에 있는 그대로의 진리, 있는 그대로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다.
끝(際)이란, 근원의 궁극적인 성품에 도달하고 법계의 근원을 궁구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끝(際)이라 하는 것이다.
017_0288_c_21L又想者人境者法不見此人法想故名二空如是一切諸法如來悉見悉知由平等平等已通達如眞實故智等無增減是名平等觀此觀能除眞實見暗障是如來法身至得家因見修二道所攝故以是義故此離欲不離二修而得成就二修者一如理修二如量修故世閒所知唯有二一人二法若能通達此二空者爲永得應如實際是故名爲如理量際者窮源達性究法界源故名爲
017_0289_b_01L진리 그대로 닦는 것이란, 사람이나 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람과 법은 그 성품이 본래 지극히 미묘하고 적정(寂靜)하기 때문에, 더함도 없고 덜함도 없고, 있음도 여의고 없음도 여읜다. 이 적정한 모양이란 자성(自性)이 청정하며 온갖 번뇌가 본래 생기는 것이 없으므로, 이 두 가지 공함(二空)을 보는 것을 적정한 모양이라 하는 것이니, 자성이 청정한 마음을 도제(道諦)라고 하고, 의혹이 본래 생기지 않고 청정한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는 것을 멸제(滅諦)라고 한다. 이 마음은 자성의 청정함이 있는 한편, 번뇌와 의혹의 장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두 법은 무류계(無流界)에서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이 독자(獨自)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는 한 찰나에서도 두 마음이 서로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법에 통달하기 어려운 것이니, 승만경(勝鬘經)에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선한 마음은 찰나찰나에 사라져 머물지 않아서 모든 의혹에 더럽혀지지 않고, 악한 마음도 찰나찰나에 사라져 머물지 않아서 모든 의혹이 또한 더럽힐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번뇌가 마음에 닿지 않고 마음이 번뇌에 닿지 않으면, 어떻게 접촉하지 않은 법이 마음을 더럽힐 수 있겠습니까?”라고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아는 것을 진리 그대로 아는 것이라 한다. 인식한 그대로 아는 지혜란 것은 일체의 경계를 끝까지 다 아는 것을 인식 그대로 아는 지혜라 한다. 만약 일체 중생을 보되, 그 경계와 같은 지혜에 어긋난다면, 이는 생사가 성립하는 것이고, 만약에 그 경계를 따르는 지혜에 계합한다면, 이는 열반을 얻는 것이다. 일체 여래의 법이 이런 이치이기 때문에 진리 그대로 아는 지혜라 하는 것이고, 또한 초지(初地)의 보살도 이 두 가지 지혜를 얻어서 법계에 두루 가득한 이치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생사와 열반의 두 법을 함께 아는 것이다.
017_0289_a_09L如理修者不壞人法何以故?如此人法本來妙極寂靜爲性故無增無離有離無寂靜相者自性淸淨惑本來無生見此二空名寂靜相性淸淨心名爲道諦惑本無生淨心不執名爲滅諦是心有自性淸淨有煩惱惑障如此兩法無流界中心惡心獨自行故於一念中兩心不相應故此兩法難可通達如『勝鬘經』世尊!善心念念滅不住諸惑不能惡心念念滅諸惑亦不染世尊!煩惱不觸心心不觸煩惱云何無觸法而能得染心?如此而知名如理智量智者究竟窮知一切境名如量智若見一切衆生乖如境智則成生死若扶從境智則得涅槃一切如來法以是義故名爲如量至初地菩薩得此二智以通達遍滿法界理故生死涅槃二法俱知
또 이 두 지혜는 스스로가 증득하는 지혜로 보는 것이니, 스스로 깨달음을 얻기 때문에 다른 것을 따라서 얻지 않고, 다만 스스로가 증명해 아는 것일 뿐 남을 알게 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스스로 증명하여 알고 보는 것이라 한다.
017_0289_b_04L又此兩智是自證智由自得解不從他得但自得證知不令他知故名自證知見
또 이 두 지혜는 두 가지 모양이 있으니, 첫째는 집착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걸림이 없는 것이다. 집착이 없다는 말은 중생계의 자성이 청정함을 보고 집착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는 진리대로 아는 모습이고, 걸림이 없다는 것은, 능히 한량없고 끝이 없는 경계에 통달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걸림이 없는 것이라 하는 것이다. 이는 있는 그대로의 인식대로 아는 모습이며, 또 이 두 지혜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원인으로 삼고 있는 그대로의 인식으로 결과로 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원인으로 삼는다는 것은, 능히 생사와 열반의 원인을 만들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인식으로 결과로 삼는다는 것은, 이 이치로 말미암아 여래의 진속 등의 법을 알고 구족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017_0289_b_06L又此二智有二種相一者無著二者無㝵言無著者見衆生界自性淸淨名爲無著是如理智相無㝵者能通達觀無量無邊界故是名無㝵是如量智相此二智有二義如理智爲因如量智爲果言如理爲因者能作生死及涅槃因如量爲果者由此理故知於如來眞俗等法具足成就
있는 그대로의 진리로 아는 지혜란 것은 청정한 원인이고, 있는 그대로의 인식를 아는 지혜란 것은 원만한 원인이다. 청정한 원인이란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아는 지혜로 말미암아 세 가지의 의혹(三惑)이 다 없어지고, 원인이란, 있는 그대로의 인식으로 아는 지혜로 말미암아 세 가지 덕(三德)이 원만해지기 때문이다. 앞서 사량(思量)할 수 없다는 것과 둘이 없다는 것과 분별이 없다는 것 등의 이 세 가지를 이름하여 욕심을 여읜(離欲)것이라 한다. 그 다음 청정하다는 것과 명확히 안다는 것과 대치한다는 것 등의 이 세 가지를 이름하여 욕심을 여의는 원인(離欲因)이라 하는데, 이러한 것을 여래의 전의(轉依)한 법신은 여덟 가지 공덕을 포함하고 가진다고 한다.
017_0289_b_14L又如理智者是淸淨因如量智者是圓滿因淸淨因者由如理智三惑滅盡圓滿因者由如量智三德圓滿故前不可思量無二無分別等三名爲離欲以淸淨照了對治等三名離欲因是名如來轉依攝持八種功德
017_0289_c_01L다시 여래의 전의한 법신은 일곱 가지 이름이 있다는 것을 마땅히 알라. 첫째는 침몰(沈沒)이니 오취온에 빠지기 때문이다. 둘째는 적정(寂靜)이니 모든 행(行)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는 버리는 것이니 모든 남아 있는 짝(伴)을 버리기 때문이다. 넷째는 벗어나는 것이니 두 가지 괴로움(二苦)을 벗어나기 때문이다. 다섯째는 제거하는 것이니, 본식(本識)인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뽑아서 제거하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제도하는 것이니, 다섯 가지 두려움(五怖畏)에서 제도하기 때문이다. 일곱째는 끊는 것이니, 육도(六道)윤회의 과보를 끊기 때문이다.
017_0289_b_20L復次轉依法身有七種名應知一沈沈沒取陰故二寂靜諸行無生故三棄捨棄捨諸餘伴故四過度出二苦故五拔除拔除本識故六濟度度五怖畏故七斷斷於六道果報故
≪해석≫ 오취온에 빠진다는 말에서 취(取)는 탐애(貪愛)를 말하는 것으로,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 탐욕에 취착하는 것이요, 둘째 견해(見)에 취착하는 것이요, 셋째 계금(戒禁)에 취착하는 것이요, 넷째 나라는 것(我語)에 취착하는 것이다.
취착하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 느낌에 취착하는 것이고, 둘째 자량을 느끼는 것이다. 취착을 받는 것이란, 그 느낌으로 인하여 애착을 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자량을 느끼는 것은, 이 느낀 것을 탐하기 때문에 네 가지 자량에 취착하는 것이다. 네 가지 자량이란 곧 네 가지 취착이다.
017_0289_c_02L釋曰言沈沒取陰者取名貪愛有四一欲取二見取三戒取四我語取取有二義一受取二受資糧受取者如因受生愛受資糧者爲貪此受故取四種資糧四資糧者卽四取也
그리고 첫째의 탐욕에 취착하는 것이란, 욕계의 여섯 대경(六塵)을 탐하는 것이고, 둘째의 견해(見)에 취착하는 것이란, 욕계에서 계금에 취착하는 것과 상견(常見), 두 가지를 제외한, 그 나머지 네 가지 견해를 견해라 하니,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탐착하는 것을 견취라 한다.
셋째의 계취(戒取)란, 삼계(三界)에서 세간의 삿되고 바른 두 길을 선택하여 괴로움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을 계(戒)라 한다. 이 계에서 금하는 것에 탐착하기 때문에 이것을 취착이라 한다.
넷째의 아어취(我語取)란, ‘아’라는 말은 자신을 인연하기 때문에 관한 것에 탐착하는 것을 자신에 관한 것을 ‘아어(我語)’라고 하고 자신에 것에 대하여 탐착하는 것을 아어취라 한다.
한편 색계(色界)는 무색계(無色界)의 선정은 자신에 대한 것으로 말미암아 성립되기 때문에 ‘아어’라고 하고, 이러한 선정에 탐착하는 것을 취착이라 한다.
017_0289_c_07L欲取者貪欲界六塵二見取者於欲界中唯除戒取與常見二種所餘四名之爲見貪愛此見名爲見取戒取者於三界中取世閒邪正二道爲離苦得樂是名爲戒貪著此戒名爲取四我語取我語者緣內身故一切內法爲我語貪著內法名我語無色界定緣內法成故名我語貪著此定名之爲取
017_0290_a_01L이 네 가지 취착 중, 앞의 두 가지는 단견(斷見)에 속하는 것이니, 단지 현재에만 집착하고 미래는 없다고 한다. 뒤의 두 가지는 상견(常見)에 속하는 것으로, 미래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또 앞의 두 가지는 재가(在家)자가 일으키는 것이요, 뒤의 두 가지는 출가(出家)자가 일으키는 집착이다.
또 앞의 두 가지는 재가자와 출가자가 다투는 원인이고, 뒤의 두 가지는 재가자와 출가자가 수행하는 원인이 된다.
또 앞의 두 가지는 욕취로써 성립되는 것이고, 견취로써 성립케 하는 것이다. 쌓임(陰)이란, 다양한 뜻이 있으니, 별도의 해석과 같다. 이제 대략 밝히면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취착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범부의 오음은 취착의 인연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취착에서 생기는 것이니, 곧 이 오음은 취착의 결과이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취음(取陰)이라 하는 것이다. 침몰이란 말은 법신에 인과(因果)가 함께 없기 때문에 침몰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취는 대치이기 때문에 침(沈)이고, 쌓임은 과보가 다하였기 때문에 몰(沒)이다. 때문에 법신은 오음이 영원이 없는 것에 근거하기 때문에 침몰이라 한다.
017_0289_c_16L此四取前二屬斷見但執現在謂無未來後二屬常執有未來故又前二是在家人起後二是出家人執又前二在家出家鬪諍因後二爲在家出家修行因前二欲取爲所成見取爲能成後二我語爲能成戒取爲所成復次陰者有衆多義如別釋今略明有二義能生取凡夫五陰能爲取因緣故從取生卽此五陰是取家果故故言取陰而言沈沒者於法身中因果俱故稱沈沒取爲對治故沈陰爲報盡稱沒故說法身約取陰永無是名沈沒
둘째의 모든 행에 적정(寂靜)한 것이란, 모든 유위법을 행(行)이라 한다. 사상(四相)과 상응하기 때문이다.
사상(四相)이란, 첫째 생기는 것이고, 둘째 달라지는 것이고, 셋째 머무는 것이고, 넷째 사라지는 것이다.
모든 유위법은 과거세에 근거하면 생상(生相)과 상응하고, 미래세에 근거하면 멸상(滅相)과 상응하고, 현재에 근거하면 이주상(異住相)과 상응한다. 행해지는 역할이 그치지 않기 때문에 행이라고 한다.
여래의 법신은 이와 같지 않다. 과거세에 근거하면 생기는 것이 없었고, 미래세에 근거하면 소멸함이 없으며, 현재에 근거하면 늙거나 병들지 않는다.
항상 편안하게 머물고 생겨나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하고, 소멸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맑다고 하는 것이다. 과거세에 근거하여 다시 생기지 않았던 것은, 의생신(意生身)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미래세에 근거하여 다시 죽지 않을 것은 이미 생각할 수 없는 물러섬과 떨어짐(不可思惟退墮)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과거세와 미래세에 근거하여 손상되거나 더럽혀지지 않는 것은 이미 무명(無明)이 머무는 자리의 번뇌의 병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017_0290_a_06L二寂靜諸行者一切有爲法名與四相相應故四相者一生二異三住四滅一切有爲法約前際與生相相應約後際與滅相相應約中與住相相應行役不息故名爲行來法身則不如是約前無生約後無中無病老湛然常住無生故說寂無滅故說靜約前不更生離意生身約後不更死已過不可思惟退墮約前後際不被損污過無明住地煩惱病故
셋째의 모든 남은 것을 버리는 것이란, 모든 남은 것이란, 곧 2승(乘)의 사람에게 세 가지 남은 것이 있는 것이라, 첫째는 번뇌가 남은 것이니, 무명이 머무는 계위를 말하는 것이고, 둘째는 업이 남은 것이니, 무루업을 말하고, 셋째는 과보가 남은 것이니, 의생신(意生身)을 말한다.
017_0290_a_16L三棄捨諸餘諸餘者二乘人有三種餘一煩惱餘謂無明住地二業餘卽無漏業三果報餘謂意生
017_0290_b_01L첫째 남은 번뇌는 마땅히 없애야 하고, 둘째 남은 도(道)는 마땅히 닦아야 하고, 셋째 남아있는 허망한 것은 마땅히 제거해야 하는 것이다. 여래께서는 이미 허망한 것을 여의셨기 때문에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2승(乘)은 여의지 못했기 때문에 남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여래의 전의(轉依)하신 법신은 이미 네 가지 생사를 건너셨고, 일체의 번뇌와 허망한 것을 다 없애셨고, 일체의 도를 이미 닦았고, 생사를 버리고 도제(眞諦)를 버렸기 때문이고, 이 2 승에게는 이러한 네 가지 덕이 없기 때문이다. 법신만이 홀로 이 네 가지 덕의 원만함에 머물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모든 남아 있는 것을 버렸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90_a_19L一煩惱餘應滅二道餘應修三虛妄餘應除如來已離虛妄說名無餘乘未離故名爲餘如來轉依法身度四種生死故一切煩惱虛妄已滅盡故一切道已修故棄生死捨道諦此二無四德故唯法身獨住四德圓滿故是名棄捨諸餘
넷째의 두 가지 괴로움(二苦)을 벗어나 건너는 것이란, 괴로움은 어긋나고 거슬린다는 뜻이다. 그 어긋나고 거슬리는 것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인(聖人)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다. 이는 성인에 대한 원수로서 능히 성인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성인의 뜻에 어긋나고 거슬리는 것이니, 이는 성인으로서 능히 제거하기 때문이다.
괴로움이란, 첫째는 범부의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두 가지 느낌이 그것이고, 둘째는 성인으로서의 행고(行苦)이니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는 느낌이 그것이다.
또 두 가지 괴로움이란, 첫째는 몸의 괴로움이고, 둘째는 마음의 괴로움이다.
또 두 가지 괴로움이란, 첫째는 정신적인 괴로움이고, 둘째는 물질적 괴로움이다.
또 두 가지 괴로움이란, 첫째는 2승(乘) 경계 안에 있는 괴로움이고, 둘째는 보살 경계 바깥의 괴로움이다.
그러므로 법신의 지위에서는 2승의 거친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벗어남(過)이라 한다. 보살의 네 가지 생사의 세밀한 괴로움이 없기 때문에 이를 이름하여 건넘(渡)이라 하나니, 이것이 이른바 두 괴로움을 벗어나 건너는 것이다.
017_0290_b_02L四過度二苦違逆爲義逆有二一違聖人意是聖人怨能惱聖故二聖意違逆聖能除之故二苦者一凡夫苦樂二受二聖人行苦卽捨受又二者一身苦二心苦又二者一名苦二色苦又二一二乘界內苦二菩薩界外苦法身地中無二乘麤苦故名爲過菩薩四種生死細苦故名爲度是名過度二苦
다섯째 아리야식(阿梨耶識)을 뽑아서 제거하는 것이란, 아리야식은 의지해 숨는다는 뜻이다. 이것은 생사의 근본이어서 능히 네 가지 지말을 생기게 하기 때문이다. 네 가지 지말이란, 번뇌에 두 가지가 있고, 업에 한 가지가 있으며, 과보에 한 가지가 있다.
처음에 번뇌의 근본에 두 가지란, 첫째 모든 견해(見)는 무명(無明)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을 그 대치(對治)하는 길로 삼는다. 둘째 모든 견해를 떠난 그 밖의 일체 번뇌는 탐애(貪愛)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으니, 이것은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을 그 그 대치하는 길로 삼는다.
017_0290_b_11L五拔除阿梨耶阿梨耶者依隱爲義是生死本能生四種末故四末者煩惱有二業一果報一初煩惱本二者一者一切諸見以無明爲無相解脫門爲治道二者離諸見一切煩惱以貪愛爲本無願解脫爲對治道
017_0290_c_01L다음에 업의 근본에 한 가지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범부의 성품으로써 그 근본을 삼는 것이니, 범부의 성품 그것이 바로 신견(身見)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과보의 근본으로서 한 가지란, 일체 생사의 과보는 아리야식(阿梨耶識)에 의지하여 근본을 삼기 때문이다. 아직 이 식(識)을 여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과보가 끊어지지 않고 법신 중의 두 가지 길에 근거하여 현재세와 미래세가 다 없어지는 것이다. 때문에 뽑아 제거한다고 하는 것이다. 두 가지 길이란, 첫째는 분별없는 지혜로써 현재의 허망함을 뽑아 제거하여 능히 법신을 청정케 하는 것으로, 진지(盡智)라고 한다. 둘째는 무분별의 나중의 지혜로써 미래의 허망함을 아주 일어날 수 없게 하여 법신을 원만케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무생지(無生智)이다. 뽑는 것이란, 청정케 하여 현재의 의혹을 없애는 것이다. 제거하는 것이란, 원만케 하여 미래의 의혹을 끊는 것이니, 이 때문에 뽑아서 제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017_0290_b_17L次業本一者以凡夫性爲凡夫性者卽是身見故次果報本一者一切生死果報依阿梨耶識爲本故以未離此識果報不斷於法身由兩道故二世滅盡故說拔除兩道者一無分別智能除拔現在虛能淸淨法身卽名盡智二無分別後智能令未來虛妄永不得起圓滿法身卽無生智拔者淸淨滅現在惑除者圓滿斷未來惑故名拔除
여섯째의 다섯 가지 두려움을 제도하는 것이란 첫째 스스로의 책망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둘째 남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셋째 처벌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넷째 나쁜 업도(惡道)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섯째 많이 사람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017_0290_c_03L六濟五怖畏五怖畏者一自責畏二畏他三畏治罰四畏惡道五畏衆集
첫째의 스스로의 책망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사람이 죄악들을 범했을 경우 밤낮으로 겁내고 두려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둘째의 남으로부터 책망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이미 스스로 죄악을 범했으면, 항상 다른 사람이나 또는 어두움 속의 천신(天神)이 볼까봐 염려되어 두려움을 품는 것이다. 셋째의 처벌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스스로 죄악을 저지른 자는 언제나 국왕의 다스림이 있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넷째의 나쁜 업도를 두려워하는 것이란, 이미 죄악을 저질렀다면, 저절로 그 죄악에 따라 나쁜 업도에 태어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다섯째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란, 세 가지 업(三業)이 청정하지 못한 데다가 아는 것도 깊지 않아서 항상 덕이 있는 대중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건 이미 법의 몸을 증득하여 보았다면, 그는 이 다섯 가지 두려움을 여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법신은 다섯 가지 두려움을 제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017_0290_c_05L自責畏者如人作諸罪惡晝夜怖畏二他責畏者旣自作惡恒恐他及冥中天神見之而懷怖畏三治罰畏者身所作惡恒懼王治四惡道畏者有罪自隨畏生惡道五衆集畏者業不淨兼知解不深恒怖畏德衆人已證見法身則離此五畏故說法爲濟五怖畏
일곱째 육도의 과보를 끊는 것이란, 그 ‘도(道)’의 의미가 많으나, 대략 말하면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행처(行處)이기 때문에 도라고 한다.
오음(五陰)이 소행처(所行處)가 되고, 삼세(三世)가 능행(能行)이다. 또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네 가지 괴로움이 돌아다니는 곳이기 때문에 이것을 길이라 한다. 둘째 여섯 가지가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기 때문에 길이라 하는 것은 마치 사람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처럼 다섯 가지 길과 그 나머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017_0290_c_13L七斷六道果報者義衆多略說二種一行處故名爲道五陰爲所行處三世爲能行又以生死四苦所遊處故名爲道二者六種同異故名爲道如人同人異於五道餘亦如是
또한 이와 같이 같고 다른 종류를 어떻게 길이라고 하는가?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중생들이 윤회 전전하는 곳이고, 둘째는 업이 행해지는 곳이기 때문에, 이러한 두 가지 뜻에서 길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여래의 법신에는 다시 이 러한 길이 없는 것이다. 만약에 유여열반(有餘涅槃)이라면, 그 업은 다 되어도 중생으로서의 윤회 전전하는 과(果)가 다하지 않고,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면, 인과(因果)의 두 가지가 모두 다하였기 때문에 여섯 갈래의 길을 끊어 없앤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어느 곳에서나 여래의 법신을 설하는 이가 있다면, 마땅히 이 일곱 가지 이름과 상응하는 줄 알아야 할 것이니, . 이것을 이름하여 끝이라 한다.
017_0290_c_18L是同異類云何名道?有二一衆生所輪轉處二業所行處以此二義立名爲道如來法身無復此道若有餘涅槃業盡衆生輪轉果未盡無餘涅槃因果二種俱盡名斷滅六道若有處說如來法身知與此七名相應是說名竟
017_0291_a_01L다시 법신의 모습을 설한다면, 모든 괴로움이 고요히 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법신의 모습이 모든 괴로움의 인연을 고요하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법신의 작용을 설한다면, 작용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물러나거나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작용이라 한다. 둘째는 편안하고도 즐겁기 때문에 작용이라 하는 것이다. 중생으로서는 생사 속에 있거나 또는 꿈 속에서도 다 일찍 보지 못하지만, 만약에 바른 행을 한 사람으로서 이 법을 보기를 구한다면, 보게 될 그 때에 가서는 곧 물러나거나 떨어지지 않고 편안함과 즐거움을 얻을 것이다. 이 때문에 편안함과 즐거움으로써 그 맛을 삼는 것이다.
다시 법신의 일을 설하자면, 그 일은 무상(無相)으로써 일을 삼으니, 오음(五陰)의 상이 그 가운데에 모두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희론(戱論)이 없는 것으로써 일을 삼으니, 희론에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탐애(貪愛)이고, 둘째는 아만(我慢)이고, 셋째는 모든 사견(見)이다. 이 세 가지 희론을 여래께서 이미 다 없애셨기 때문에 이 희론들이 없는 것으로써 일을 삼는 것이다.
017_0291_a_01L復次說法身相者諸苦靜息是法身相爲靜苦緣故復次說法身味味者有二不退墮故名爲味二安樂故名爲味衆生在生死中乃至夢中竝未曾見若修正行人求見此法得見之時得不退安樂故以安樂爲味復次說法身事事者以無相爲事五陰相於盡無餘故又以無戲論爲事
그리고, 희론이란,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참다운 이치와 어긋나는 것이고, 둘째는 헛되게 세간을 속이는 것이고, 셋째는 해탈을 장애하고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첫째는 바른 경계와 어긋나는 것이고, 그 다음의 것은 바른 행과 어긋나는 것이고, 나중의 것은 바르게 얻는 것과 어긋나는 것이니, 이 세 가지 뜻을 합하여 희론이라 한다.
017_0291_a_09L戲論有三一貪愛二我慢三諸見是三戲如來滅之已盡故以無戲論爲事戲論者有三義一能違㝵實理二名虛誑世閒三障隔解脫初違正境違正行後違正得合此三義名爲戲
또 희론에 아홉 가지 종류가 있으니, 첫째 전체로서의 나(我)를 계탁하는 것이고, 둘째 이것이 나라고 지적하여 계탁하는 것이고, 셋째 나는 응당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넷째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다섯째 나는 색계(有色)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여섯째 나는 무색계(無色)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일곱째 나는 유상(有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 것이고, 여덟째 무상(無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고, 아홉째 나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다.
017_0291_a_15L又戲論有九種一通計我二的計是我三計我應生四計我不更生計我有色應生六計我無色應生計我有想應生八計我無想應生計我非想非非想應生
017_0291_b_01L첫째의 전체로서의 나(我)를 계탁하는 것이란, 오음(五陰)에 대하여 전체로서의 내가 있다고 집착하여 여의어야 할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다만 부질없는 집착이기 때문이다.
둘째의 이것이 나라는 것은 현세의 오음에 대하여 그 한 가지 음을 취하면서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란, 적시하고 구별한다는 뜻이니, 결정코 이것은 두 가지 곳에 있으니, 하나는 결정코 현재의 존재(有)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한 가지 음에 대한 집착에 있으니, 이 때문에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의 나는 응당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일체의 견해(見)는 유무(有無) 두 가지 견해를 벗어나지 않는다. 있다는 견해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상견(常見)을 고집하는 것이다. 없다는 견해에 또 두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사견(邪見)으로, 이른바 일체는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고 하면서 한꺼번에 삼세(三世)를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단견(斷見)으로, 현세만이 있고 미래세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이다.
넷째의 나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이 계탁은 단견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것이다.
017_0291_a_19L一通計我者於五陰中通執有我而不能分別卽但漫執故二是我者於現世五陰隨取一陰爲我而言是者是的別定是二處一定在現世有二定在一陰上執故名爲是三計我應生者一切諸見不出有無二種由有見故所以執常於無見中復有二種一邪見者謂一切無因無果竝撥三世故二斷見者謂唯有現在不信未來故四計我不更生者此計因斷見起
다섯째의 나는 색계(有色)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욕계와 색계 두 세계에서 물질을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 집착은 상견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여섯째의 나는 무색계(無色)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무색계에서 느낌과 마음과 법을 계탁하여 나라고 하는 것이다. 물질이 무너지고 없어지는 것을 관하면서도 이 세 가지 법이 없어지지 않는 것은 상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일곱째의 나는 유상(有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삼계에서 무상천과 비상비비상처천을 제외한, 그 나머지 모든 곳에서 유상(有想)을 나라고 계탁하는 것이다. 이 또한 상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여덟째의 무상(無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무상(無想)과또는 초목(草木) 등을 계탁하여 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상으로써 마음을 삼기 때문이니, 상견으로 인하여 일어나는 것이다.
아홉째의 나는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천에 태어날 것이라고 계탁하는 것이란, 이는 최상의 곳(有頂處)을 계탁하여 나라고 하는 것이니, 상(想)을 관함으로써 얽매이게 되고 열반을 계탁함으로써 빠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상(想)을 제거하지 않으면 해탈할 길이 없는 것은 얽매임이 있기 때문이고 만약에 상(想)을 아울러 제거한다면, 다시 나를 잃고 열반의 구덩이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와 상(想)이 서로 떠날 수 없고, 버릴 수도 없고, 버리지 않는 것은 얽매임이 있기 때문이다. 상(想)을 제거하려고 하기 때문에 비상(非想)이라고 말하지만, 나를 잃을까봐 두려워하여 감히 상(想)을 아울러 제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비상(非非想)이라고 한다. 이 산란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열반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것을 이름하여 희론이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법신을 관찰하여 증득하면 일체의 희론은 다시 생기지 않을 것이다.
017_0291_b_06L計我有色應生者於欲色二界中色爲我此執則因常見故起六計我無色應生者於無色界中計受心法爲我觀色壞滅此三法不滅因常見故起七計我有想應生者於三界中除無想及非想天所餘諸處竝計有想爲我因常見起八計我無想應生計無想天及草木等爲我以同無想心故由因常見起九計我非想非非想應生者此計有頂處爲我以觀想爲繫縛計涅槃爲坑塹若不除想無由解脫有繫縛故若倂除想復恐失我墮涅槃塹何以故?想與於我不得相離故不得棄及與不棄爲繫縛欲除於想故名非想恐失我故敢倂除故名非非想由此散亂心得涅槃故說此等名爲戲論若能觀證法身一切戲論竝不復生
017_0291_c_01L≪외도의 반문≫ 법신에 대하여 무엇으로써 이러한 상(相) 등의 의미를 세우는가? 그대가 내세우는 것 그대로라면, 법신은 결코 없는 것이니, 집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대상으로서 육식(六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마치 토끼 뿔과 같이 결정코 없는 것이다. 토끼 뿔을 육식으로써 얻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법신도 역시 그러하니, 때문에 법신은 결코 없는 것인데, 어째서 모든 뜻을 내세우는가?
017_0291_c_01L外曰法身中何用立此相等諸義?如汝所法身應決定是無不可執故若物非六識所得決定是無如兔角兔角者六識所得定是無故法身亦爾是故法身決定是無何用諸義?
≪답≫ 그대가 육식으로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법신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방편으로 말미암아 능히 열반을 증득(證)하기 때문이다. 생각이 바른 행에 맞는 것을 방편이라 하고, 이 방편으로 말미암아 알 수도 있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니, 마치 타심통(他心通)으로 말미암아 출세간의 성스러운 마음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017_0291_c_06L答曰汝言非六識所見故法身無者是義不然何以故?以由方便能證涅槃故想稱正行是名方便由此方便是故法身可知可見譬如由他心通故則能得見出世聖心
≪해석≫ 타심통이란, 세 가지 인연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그 두 가지는 방편이니, 첫째는 정도(正道)의 방편이고, 둘째는 천이(天耳)와 또는 천안(天眼)으로 인한 방편이다. 천이로써 듣고 깨달아서 음성을 관(觀)하니 이 음성으로 말미암아 남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천안에 의지하는 것이란, 다른 사람의 육체의 심장 안에 있는 구멍속에 물이 있는 것을 볼 때에, 물의 모습이 만약 검으면, 어리석은 것을 알고, 누런 빛이라면 탐욕스러운 줄을 알고, 붉으면 성내는 줄을 알고, 푸르거나 흰 빛이 나면 선한 줄을 알고, 희미하게 맑은 빛을 볼 때엔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닌 무기(無記)인 줄을 알 수 있으니, 이것은 천이와 천안을 방편으로 남의 마음을 견주어 아는 것이다.
017_0291_c_11L 釋曰他心通者有三種因緣所得兩是方便一是正道方便二者一因天耳二由天眼因天耳聞覺觀聲由此聲故得知他心天眼能見他肉心孔中有水水相黑則知癡生黃則知貪赤則知瞋白則知善見縹色時知是無記因於耳目方便故比知他心
017_0292_a_01L다음 정도의 방편이란, 만약에 타심통을 얻으려면, 반드시 자신의 마음부터 먼저 관하는 행(觀行)을 닦되 현재의 마음으로써 현재세를 관하지 않는 것은 그 마음 자체가 한꺼번에 볼 수 없기 때문에 현재의 마음으로써 능히 과거의 마음을 관하는 것이니, 왜냐하면 그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서 관하기 때문이다. 먼 데로부터 가까운 데에 이르러 차례로 뒤를 향하되 맨 처음엔 한량없는 생각을 관하다가 이와 같이 점점 한 찰나에 이르고 내지 한 찰나도 소멸하여 자신의 마음을 관하는 가운데에서 자유로움을 얻는 것이다. 그러한 연후에 앞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취하여 자신의 경계로 삼아서 관행을 닦는다. 처음 관에 들어갈 때에는 반드시 원심을 세우고 기간을 정해야 할 것이다. 먼저 앞 사람의 몸을 가상(假想)하여 관하는데 그 몸 모양이 갖추고 있는 것을 낱낱이 분석하여 피부ㆍ살ㆍ뼈 세 가지 모양을 모두 다 제외한다. 다만 남아있는 마음만을 세밀히 닦아 익혀 앞 사람의 마음을 인연하여 그 예리하고 둔함과 멀고 가까움과 넉넉하고 좁은 것에 따라 스스로 통찰하는 것이다. 저 대상과 같이, 나는 여러 종류의 모든 마음을 다 볼 수 있다. 때문에 다른 성인의 마음과 같은 것이 비록 육근(六根)의 경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해도 또한 볼 수 있는 것은, 여래의 법신도 그러하여 비록 육식(六識)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방편의 바른 행으로 말미암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있는 것으로, 없는 것과 동일한 것일 수 없다는 것을 알라.
017_0291_c_18L次正道者欲得他心通須緣自心先修觀行用現在心觀現世心自體不得一時見故以現在心能觀過去心何以故?可追緣故從遠至近次第向後初則觀無量念如是漸漸至一剎那乃至滅一剎那於自心觀中而得自在後取前人心作自境界以修觀行初入觀時須作願心起要期意先須假想觀前人身身相具足如是遣扸除皮肉骨三相都盡唯餘心在細細修習前人心隨其利鈍遠近奢促自能徹如彼所緣我皆能見種種諸心故如他聖心雖過六根境亦能得見來法身亦復如是雖非六識所見方便正行所以能見故知是有不得同無
또한 다른 뜻이 있으니, 법신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왜냐하면 만약에 법신이 없는 것이라면, 모든 바른 행이 다 소용이 없으리니, 바른 견해를 먼저 갖추고 계율ㆍ선정ㆍ지혜 등의 선한 법을 섭수하기 때문이다. 바른 행을 닦는 그것이 헛되어 결과가 없지 않는 것으로, 이 바른 행으로 말미암아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신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라.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법신은 결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바른 행이 오음(五陰)과 십이처 등을 멸진에 이르도록 하기 때문에, 그 바른 행은 결과가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열반은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오음등이 없는 것이 열반이라면, 과거ㆍ마래의 두 세상의 음(陰)등이 모두 없어야 열반일 것이다. 이 두 세상이 음 등없는 곳이라면, 음이 없는 곳을 취하여 열반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라.
017_0292_a_11L復次更有別義知法身不無以故?若法身無者則諸正行皆應空以正見爲先行攝戒慧等善法所修正行不空無果由此正行得果故故知法身非無若汝說法身定無而正行能令至五陰入等滅盡當知正行不無果者是義不然以故?涅槃不有故若五陰等無是涅槃者則去來二世陰等竝無應是涅而此二世陰等無處旣非涅槃知不取陰無之處名爲涅槃又若汝取此爲涅槃者狂醉等人應有涅槃而其無者故知陰等無處非涅槃也
017_0292_b_01L또 만약에 그대가 이것을 취하여 열반이라고 한다면, 미치광이와 술취한 사람들도 열반하여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때문에 음 등이 없는 곳에 열반이 없음을 알라. 또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현세의 오음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고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없는 것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법이 현재 존재하는 한다면, 이는 없는 것이 아니어서 서로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만약에 법이 이미 없다면 현재가 아니고, 만약에 현재 존재한다면 없는 것이 아니니, 그 있고 없음이 한꺼번에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현재의 음에 의지하여 성스러운 도(聖道)를 닦을 때에는, 마땅히 열반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017_0292_a_23L又若汝言現世五陰無爲涅槃者義不然何以故?無是無故若法現在則非是無更互相違故若法已滅非現在若現在則不滅以有無不得竝故復次依現在陰修聖道時不應得涅槃故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八聖道)를 현재의 다섯 가지 쌓임에 의지하여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이 때 현세의 오음은 실제 있는 것이고 아직 없는 것이 아니니 여기서는 영원히 열반을 얻는다는 뜻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가? 그대가 계탁하여 말하기를, 현세의 오음이 없는 곳을 열반이라고 하고, 현재에서 오음에 의지하여 여덟까지 성스러운 도를 닦아서 열반을 얻는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그대가 현세에 오음이 없는 것을 열반이라고 집착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때의 번뇌는 현재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또한 그렇지 않다. 또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여덟가지 성스러운 도를 닦을 때, 오음이 현재한다면, 모든 번뇌는 현재하지 않는다. 이때의 번뇌는 생길 수 없기 때문에 팔정도를 통해 증명할 수 있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현세에 열반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그렇지 않다.
017_0292_b_06L八聖道者依現在五陰得成是時現世五陰實有未無此中永無得涅槃義云何如此?汝立計言現世五陰無處名爲涅槃依現五陰修八聖道得於涅槃是故汝執現世五陰名涅槃者是義不然若汝言是時煩惱非現在故無過失者是亦不然若汝言修八聖道時五陰現在者諸煩惱非是現世是時煩惱不得生由八聖道得證得見是故現世涅槃者是義不然
017_0292_c_01L왜냐하면 번뇌가 과거의 것이고 현재세가 아니기 때문에 도를 닦는 것이 소용이 없다. 성스러운 도를 닦을 때에, 이 모든 번뇌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대의 견해는 상응하지 않는 것은 현세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만약에 역류(逆流)를 따라서 처음 수행할 때에, 번뇌가 이미 상응되지 않고 이 상응하지 않는 것은 곧 현세가 아니다. 이것은 곧 네가 계탁하는 열반이다. 만약에 이것을 열반이라고 집착한다면, 성스러운 도가 일어나지 않았을 때, 이미 의혹을 없앴어야 할 것이고, 이미 열반을 얻었기 때문에 뒤늦게 성스러운 도를 닦는 것은 다시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가 능히 모든 의혹을 없앤다거나 열반을 얻는다는 이러한 이치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번뇌가 없는 곳을 열반이라 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라. 또 만약에 그대가 설하기를, “성인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 때문에 탐욕 등이 다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길상경(吉祥經)의 게송(偈頌)에 설한 것과 같다.
017_0292_b_16L何以故?煩惱先非現世故修道則無用修聖道時是諸煩惱未除滅故汝見非相應便言非現世若隨逆流初修行時煩惱已不相應此不相應則非現世此卽是汝所計涅槃若汝執此是涅槃者聖道未起時已應滅惑已得涅槃故後修聖道則無復用是八聖道能滅諸惑及得涅槃者是義不可故知煩惱滅不名涅槃若汝說由聖言故欲等滅盡名爲涅槃如『吉祥經』偈說

다 없어짐과 욕심을 여읨으로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 것과 미묘함
어떤 사람이건 이 경으로 본다면
성불하여 적멸을 얻을 것이다.
017_0292_c_03L滅盡及離欲
無死墮微妙
若人見此經
成佛得寂滅

법으로써 이것과 비교할 만한 것이 없고
만약에 증득한다면 근심이 없으니
이것은 참된 묘법의 보배이다.
이 뜻으로 말미암아 길상(吉祥)인 것이네.
017_0292_c_05L無法與此等
若證則無憂
是眞妙法寶
由是義吉祥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탐욕 등의 모든 번뇌가 현세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없어진 것이라는 이 세 가지 이치로 말미암아 멸제(滅諦)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넷째의 과(第四果)가 이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경에서 설하시기를, “어떤 것을 아라한의 과(阿羅漢果)라 하는가 하면, 삼계(三界)의 번뇌가 멸진한 것을 아라한과라 한다”고 하셨다. 다만 탐욕 등이 없어진 그것만으로 과라고 한다면, 그 과는 실상 이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바로 출세간의 과보인 사음계(四陰戒) 등과 오신(五身)을 아라한과라 하는 것이다. 다만 이 번뇌가 멸진함으로써 아라한의 과를 성취할 수 있기 때문에 과 가운데에 이 인(因)의 이름을 설하는 것이고, 열반도 그러하여 열반으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를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인 가운데 과의 이름을 설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대가, “여덟 가지 성스러운 도로 말미암아 열반을 얻고, 도는 공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017_0292_c_06L若汝言欲等諸惑非現世非有是盡由此三義名滅諦者是義不然何以故?第四果同此義故佛經中說何者名阿羅漢果?以三界惑盡名羅漢果以欲等滅爲果此果實不如此正以出世果報四陰戒等五身爲羅漢果但由此惑滅羅漢果得成故於果中說此因名涅槃亦爾由涅槃故諸惑得滅是故因中說於果名是故汝說由八聖道能得涅槃道不空者是義不然
다시, 법신이 머무는 시간이 짧고 촉박하고 유위법상이며 작용을 얻을 수 없다는, 이것이 세 가지 잘못(過失)이니 곧 그대의 이치가 무너지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탐욕 등의 번뇌가 없어진 것을 법신이라 한다”고 하면, 이는 그대가 내세운 이치 가운데 세 가지 잘못이 있는 것이다.
017_0292_c_17L復次法身住時短促有爲法相非功用得是三過失於汝義則壞汝所說欲等惑滅說名法身汝所立義中則有三失
017_0293_a_01L첫째는 머무는 시간이 짧고 촉박한 것이니, 모든 법이 찰나찰나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멸진이라고 한다. 멸진하기 때문에 잠시도 머물 수 없는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이 멸진의 이치를 세워서 법신이라 하는가? 짧고 촉박한 시간 때문에 법신이 항상하다는 이치를 상실하는 것이다.
둘째는 유위법상의 잘못이란, 만약에 이 멸진이 법신이라면, 법신은 바로 유위법상일 것이다. 법신이 만약 이 유위법상이라면, 이러한 경우는 있을 수 없다.
셋째는 작용으로 얻는 못하는 과실이란, 이 일체 법이 인연을 의지해 없어지는 것이 자성이다. 왜냐하면 사라지는 것으로 근본을 삼기 때문에, 만약에 없어지는 것이 작용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면 법신도 또한 작용으로 인하여 얻는 것이 아닐 것이다. 이미 작용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면, 수면(隨眠)에 빠진 자와 미친 이와 술취한 자들도 다 열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잘못이 있기 때문에 그대의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017_0292_c_20L一是住時短促短促諸法念念不住是名滅盡以滅盡不得暫住汝云何立此滅盡義爲法身耶?以短促時故失法身常義有爲法相過失者若此滅盡是法身法身則是有爲法相法身若是有爲相者無有是處三有非功用過失者此一切諸法依因緣滅則是自性何以故?滅爲本故若滅非功用得身亦不因功用而得旣無功而得者睡眠狂醉等亦應皆得涅槃以此三失故汝義不成
다시 만약 멸진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는 유위의 모든 법과 상응(相應)할 것이다. 멸에는 동일하게 변동되고 괴로운 두 가지 법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유위법이란, 탐욕 등의 번뇌의 불길이 타오르기 때문에, 항상 산란하고 변하며 머물지 않아, 생노사 등이 무너뜨리는 바가 된다. 이 때문에 항상 고통스러운 것이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처럼, “비구여, 생노사 등은 유위법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위법은 항상 불타고 항상 괴롭다.”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죽음이란, 곧 멸진하는 것이고, 이 멸진하는 것이란, 곧 유위이다. 만약에 유위라면, 그대가 세운 법신은 상주함을 얻을 수 없고 상주할 수 없다면 그대의 뜻이 어떻게 성립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그대의 이치는 가장 적정(寂靜)한 것을 계탁하여 변화하는 것이라 하고, 가장 안락한 것을 고통이라 하니 이 때문에 그렇지 않는 것이다.
017_0293_a_08L復次若滅盡爲涅槃則與有爲諸法相應以滅有同動苦二法故夫有爲法皆爲欲等惑火所燃故恒散動不住則爲生老死等所壞是故恒苦如佛說言比丘!生老死等是有爲法故一切有爲恒燃恒是死者卽是滅盡此滅盡卽有爲若是有爲故知汝立法身不得是常旣非常者汝義寧立?何以故?則汝義計最靜爲動最樂爲苦是故不然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한번 없어지는 것으로부터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앞의 모든 잘못을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가 말한 영원히 멸진한 것이란, 생사가 멸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에 이 이치가 옳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한 바 그대로 한번 멸하면 영원히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닌 이러한 법은 없으니, 내가 이제 그대의 뜻을 따라 나 역시 이 멸진이 있기를 원한다고 말하더라도, 만약에 이 멸진 하는 것이 있다면, 마침내 앞의 모든 잘못을 떠날 수 없기 때문이다.
017_0293_a_17L若汝說從此一滅永無復生爲涅槃是義不然何以故?不離前諸過失汝言永滅者生與死滅不異故義不可若汝說永滅爲涅槃者道亦應成涅槃何以故?無有一滅永不復無有此法我今隨汝意說我願有此滅若有此滅終不能離前諸失故
017_0293_b_01L또 도가 없어진 뒤에도 번뇌는 다시 생기지 않는다. 만약에 아주 없어지는 그것을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는 도가 없어짐으로 해서 열반인 것이다. 또 그대가 말하기를, “능히 멸진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면, 이는 아무런 분별없이 없앨 수 있는 그것을 곧 열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만 도는 바른 것을 사용함으로써 없앨 수 있을 뿐이니, 그 도체(道體)가 번뇌를 없앨 수는 있는 것이지만, 만약 그대가 말하기를, “번뇌가 생기지 않는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두 가지 잘못을 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번뇌가 생기지 않는 것이 멸진과 같은 체(體)라면, 이는 앞서 언급한 사멸 등의 다섯 가지 잘못과 같기 때문이다. 이 생기지 않는 것을 도전(道前=實道를 얻기 이전)에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도후(道後)에 있다고 할 것인가? 만약 도전에 있다면 그 도를 닦지 않았을 때에도 이미 얻어야 하리니 도를 닦는 것이 소용이 없겠고, 만약 도후에 있다면 미래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삼세(三世)를 벗어나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017_0293_b_01L又道滅後煩惱亦復不生若謂永滅是涅槃者是道用滅應是涅槃又若汝說能滅爲涅槃者無別涅槃以爲能滅唯以道用正爲能滅故知道體應能爲滅若汝說煩惱不生爲涅槃是義不然何以故?不免二種失故若煩惱不生卽與滅盡同體如前死滅等五難過失故是不生者爲在道爲在道後?若在道前未修道時應得之修道無用若在道後則屬未過三世義則不成立
또 그대가 생기지 않음을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번뇌가 있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가? 번뇌가 없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고 하는가? 만약에 번뇌가 있다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유무(有無), 두 가지 법이 동시에 같은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 마치 어떤 사람이 갈 때에는 머물지 못하고 머물 때에는 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 두 가지 법은 서로 상위하여 가거나 머무는 것을 동시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번뇌가 있을 때에는 성립될 수 없으니,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 만약에 번뇌가 없는데도 생기지 않는 것이 성립된다면, 이 때는 번뇌가 이미 없는데 무엇에 근거하여 생기는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비유하면, 이는 마치 ‘석녀(石女)인 여인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음을 알라.
017_0293_b_12L又汝立無生其義云何?爲是有惑故無生爲是無惑故無生?若煩惱有則無無生何以故?有無二法不得一時同處故譬如一人行時不住住時不行以二法相行住不得俱故故知煩惱在時不得立以無生故若無煩惱立無生是時煩惱旣無約誰而辯無生耶?譬如人說石女之女不能生兒
017_0293_c_01L다시, 그대가 번뇌는 생기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 번뇌라는 것을 있다고 하겠는가? 이 것이 없다고 하겠는가? 이 것이 있는 것이라면, 네 가지 원소(四大)와 같이 실제 법이 있는 것이고, 임시로 명칭이 있다면, 이러한 것들도 있는 것이지만, 이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마치 허공의 꽃과 토끼의 뿔 같은 것이어서 그 자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이것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만약에 이것이 있는 것이라 한다면, 곧 네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성립되는 것이다. 네 가지 인연으로 성립되기 때문에 생기지 않는다는 의미가 성립되지 않으니, 이러한 의미에 의해 유위와 무위의 차별이 없게 되는 것이다.
017_0293_b_20L復次汝立煩惱無生者爲是物有爲非物有?是物有者如四大等有實法有假名此等是有物非物有者如空花兔角了自無故故言非物有若言是有物者則由四緣所成四緣所成故無生義則不立以是義故有爲無爲則無差別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이 것이 있지만 네 가지 인연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곧 삿된 소견을 가진 외도들이 자성과 극미와 때와 방위에 집착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에 있지 않은 것이 열반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명칭만이 있을 뿐이니, 곧 ‘토끼 뿔은 날카롭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만약에 그렇다면 앞에서 논파한 것과 같이 도를 닦는 것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017_0293_c_04L若汝說是物有不爲四緣成者卽同邪見外道所執自性鄰虛方等故若非有物是涅槃者但有名便如人說兔角尖利若爾卽同前則修道無用
≪외도의 반문≫ 만약에 무생(無生)을 가지고 열반이라 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부처님이 설하시기를, “생기는 것이 없이 다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 한다”고 하셨는가?
【답】그것은 도(道)가 열반에 의지하여 번뇌가 미래에 생기지 않게 하고 현재에는 소멸하게 하려는 것이니, 원인 가운데서 결과를 설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없이 다 없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017_0293_c_08L外曰若不取無生爲涅槃者云何佛說無生滅盡爲涅槃耶?答曰道依涅槃能使煩惱未來不生現在者滅因中說果故名涅槃爲無生滅盡
≪외도≫ 무엇 때문에 결과를 원인의 이름으로 설하고 바로 그 결과의 체(體)를 취하여 그것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가?
【답】지극히 미세하기 때문이니 일체 법 가운데 열반보다 더 미세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만약 이 법을 얻으면, 일체의 탐욕 등 모든 번뇌가 사라지고 다시 생기지 않기 때문에 임시로 이 거친 명칭을 빌려 미세한 이치를 나타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이치를 알 수 있으니, 이 때문에 경 속에서 이렇게 설하신 것이다.
017_0293_c_12L外曰何故果說因名而不直取果體自名?答曰極微細故一切法中無有能細涅槃之者是故若得此法一切欲等諸惑滅不更生故假此麤名顯以細理理相可知故此經作此說也
017_0294_a_01L【문】어떻게 이 열반이 지극히 미세한 것이라고 아는가?
【답】대선(大仙)께서는 법을 설하시기를 좋아하지 않고, 분별없는 성스러운 지혜로 알기 때문이다. 대사(大師)께서 열반의 지극히 미세함을 관하시기 때문이고 중생들의 근기가 서로 같지 않다는 것을 관하시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마음을 적정(寂靜)에 회향하고 열반에 들어가서 법을 설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경에 설하기를, “내가 어찌 법을 설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들어가겠느냐.”고 하셨다. 그리고 분별없는 성스러운 지혜로 아는 것이란, 마건지경(摩健持經)에 설한 것과 같다. 그 경에 설하기를, “세존이시여, 만약에 열반이 있는 것이라면, 지금 저 자신이 총명하고 영리한 지혜가 있는데 어째서 볼 수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열반은 진실로 있는 것이지만, 네가 지금 분별없는 성스러운 지혜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미세하기 때문에 듣는 지혜(聞慧)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진실하기 때문에 사변적 지혜(思慧)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017_0293_c_17L問曰云何知此涅槃極微細耶?答曰大仙不樂說法故無分別聖智所知故大師觀涅槃極微細故觀衆生根性不相稱故是故佛心迴向寂靜入於涅槃不欲說法故經言我寧不說法疾入於涅槃故無分別聖智所知者如『摩健持經』說世尊!若涅槃是有我今自有聰明利云何不見?佛言涅槃實有汝今未得無分別聖智故不得見以微細故非聞慧所得以眞實故非思慧所得
사변적 지혜란 진여와 세속의 이치를 쌍으로 통달하기 때문에 미묘한 이치의 무사변적 경계에 미칠 수 없다. 매우 깊기 때문에 세간에서 닦는 지혜(修慧)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 닦는 지혜란 다만 얕은 이치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고, 아주 깊은 이치는 통달할 수 없다. 이 미세한 것을 언어(言語)로써 설할 수 없기 때문에 거친 이름을 빌어서 미묘한 이치를 나타내는 것이고, 분별없는 성스러운 지혜에 근거하여 보기 때문에 그 미묘라고 말하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017_0294_a_04L慧雙能通達眞俗諦故不得周於妙理無思之界以甚深故非世閒修慧所得修慧但得淺理未能通達甚深之理以此微細非言語能說故麤名顯於妙理由無分別聖智所見故言微細得成
≪외도≫ 만약에 이 열반이 도를 닦아서 얻는 것이라면 도를 닦지 못한 사람과는 상응(相應)할 수 없을 것이다. 상응하지 않는다면 이 때문에 공유할 수 없으며, 만약에 공유할 수 없다면, 이는 곧 무상(無常)한 것이 될 것이다.
017_0294_a_10L外曰若涅槃是修道所得者與未能修道之人不得相應旣不相應是故不共若不共則是無常
017_0294_b_01L【답】현재 이전의 과거를 보면 없고, 후에는 이것이 있다면, 무상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이치는 없고, 과거세에도 없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아직 도를 닦지 못했을 때에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무생(無生)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도는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법은 도로 인해 이르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도가 능히 생기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도를 닦지 못했을 때에는 무(無)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무생(無生)의 이치가 성립하는 것이다. 열반은 미래세가 없기 때문에 소멸하지 않고 현세에는 업의 번뇌 등이 없기 때문에 변하여 달라지는 것이 없으며, 생겨나거나 달라지거나 없어지는 것 등의 세 가지 잘못이 없기 때문에 항상 머물러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외도들의 이른바 ‘원인이 없기 때문에 역시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라는 것과는 같지 않다. 바른 이치는 원인을 취하여 상주하는 법으로 삼지 않으니, 열반이 원인으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있지 않는 것과 같다. 그대가 말하기를, “극미(隣虛) 등도 원인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런 이치가 없다. 왜냐하면 열반은 유무를 여읜 것이어서 네 가지 비방(四謗)이 미치지 않고, 원인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항상 있을 수 있는 것이다.
017_0294_a_13L答曰若從此向前是無向後是有者可說無常無此義故前際無故說無生若汝說未修道時不能得故無無生者是義不然何以故?非道所生故此法必須因道得至非道能生是故未修時不得言無是故無生義立無後際故是故無滅中際無業煩惱等故無變異以無生異滅等三失故說常住不同外道以無因故一名常住也正義者不取因爲常住如涅槃不由因故有汝謂鄰虛等亦不由因故有無如是義何以故?涅槃離有離無四謗不及以不由因得是常
그대는 계탁하기를, ‘지극히 작은 물질도 이미 존재(有)가 있기 때문에 원인이 없을 수가 없다’고 하지만, 이 원인 있는 그것이 곧 무상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대가 말하기를, “열반에 세 가지 잘못이 없기 때문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처럼, 지극히 작은 물질들도 세 가지 잘못이 없기 때문에 항상 머물러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이치는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대가 증명하는 이치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열반이 상주하는 것은 지극히 작은 물질과 같은 모양도 아니고 다른 모양도 아니다. 지극히 작은 물질일지라도 이는 분별이 있기 때문에 증명할 이치가 없는 것이고, 열반을 이루게 되는 것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그 열반이 상주하는 것이다. 지극히 작은 물질 등이 상주한다면, 이것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017_0294_b_03L汝計鄰虛旣有有故不得無是有因卽無常故若汝說涅槃無三失故常住鄰虛等亦無三失故常住者是義不然何以故?汝證義相成就故涅槃常住不與鄰虛同相異鄰虛等是有分別故無有證義得涅槃是無分別故涅槃常住鄰虛等常住則不得立
다시, 지극히 작은 물질들도 성취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어떤 물질이고 단독으로 모여서는 성취되지 않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성취되지 않는 이치는 곧 사대(四大)가 서로 떠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에 모이는 것이 또한 성취되지 않는다면, 이는 서로가 거칠기 때문이거나, 또는 모두가 지극히 작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에 열반을 여읜다면, 어떤 법도 상주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열반이 실유로서 항상 머무는 것은 방편에 의지하여 해탈을 얻었기 때문이고, 수도는 헛되이 지나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열반이 있는 것은 과거세 따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알라. 상주하는 것은 물질 따위의 모양을 벗어나기 때문에 물질이 아니라고 설하고, 청량(淸凉)한 물질들의 모양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물질이 아닌 것도 아니라고 설하고, 그 큰 작용은 분별없는 지혜를 얻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있다고 설하고, 또 세간을 뛰어난 위대한 정진으로 인하여 도를 성취하신 부처님만이 얻는 것이기 때문에 진실로 있음을 알라. 경에서 “비구여, 이 법은 실로 있지만 생기지 않고 일어나지 않고 짓지 않고 무위법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열반은 진실로 항상 머무는 것일 줄을 알라.”고 설하신 것과 같다.. 이 법이 곧 여래의 전의(轉依)이니, 이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통틀어 포섭하는 마지막(總攝竟)이라 하고, 또는 상응(相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017_0294_b_10L復次鄰虛等亦不成就何以故?以獨聚不成故獨者義不成以四大不相離故若聚者亦不成就以相麤故竝非鄰虛塵故若離涅槃無有一法是常住故以涅槃實有常住依方便得解脫故修道不空過故故有涅槃前際等無故故知常過色等相故故說非色不離淸涼等色相故故說非非色大功用無分別智所得故故說眞有因出世大精進所成就道佛所得故故知實有經中說比丘!是法實有不生不起作無爲故知涅槃實常住此法是如來轉依是故名摠攝竟亦云相應

4. 변상분 ⑤

6) 분별품(分別品)
017_0294_b_23L佛性論辯相分第四中分別品第六
017_0294_c_01L
다시, 분별상의 의미를 마땅히 알라. 분별이란 것은 이 여래의 성품이 일체 법을 밝힘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의 진리(如如)와 청정한 것이 그 공통된 모양이니, 반야경(般若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 일체법이란 곧 세 가지 성품의 법이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란 세속의 진리가 진여이고 진여가 곧 세속의 진리로서 진속(真俗) 두 가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017_0294_c_01L復次分別相義應知分別者是如來明一切法如如淸淨是其通相般若等經中所說一切法者卽三性如如者俗如卽眞如眞如卽俗如眞俗二如無別異故
청정이란 것은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 원인속의 있는 그대로의 진리는 무구과(無垢果)의 지위를 얻지 못한 있는 그대로의 진리로, 이는 다시 더러운 때가 없기 때문이다. 둘째 원인과 결과가 함께 청정한 것은 이 원인 속에 더러움이 없는 청정한 것이니, 이는 무구과의 지위에 이르러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치가 바로 불성의 공통된 모양이다.
이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 부처님께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등 여러 경에서 설하시기를, “이 불성에서 중생을 분별한다면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 불성을 증득하여 보지 못하는 것을 범부라 하고, 둘째 능히 불성을 증득하여 보는 이를 성인이라 하고, 셋째 불성을 증득하여 보고서 이 이치의 궁극적 청정함에 이른 이는 여래라 한다.”고 하셨다.
017_0294_c_06L淸淨者有二種一者因中如如未得無垢果地如如無復垢穢故二者因果俱淨因中是無染淸淨至果無垢淸淨故如此等是佛性通相爲顯此義故佛說般若波羅蜜等諸經是佛性中分別衆自有三種一者不證見佛性名爲凡夫二者能證見佛性名爲聖人者證至此理究竟淸淨說名如來
다시 이 불성을 요약하건대, 중생으로서의 일삼는 것이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전도(顛倒) 일삼는 것이고, 둘째는 무전도(無顛倒)를 일삼는 것이고, 셋째는 전도됨과 산란함이 없이 분별하는 법으로써 바른 일을 삼는 것이다. 전도란, 일체 범부이고, 무전도란 일체 유학(有學)의 성인들이다. 전도됨도, 산란함도 없음이란 도후(道後)의 법신이다. 분별하는 법으로써 바른 일을 삼는 것이란 응신(應身), 화신(化身)의 두 몸이니 이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다 대비(大悲)와 근본 원력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전도라고 하는 것은 모든 범부를 말하는 것으로 세 가지 전도가 있다.
생각(想)과 견해(見)와 마음을 말한다. 곧 피부와 육체와 마음 등의 세 가지 번뇌 때문이다.
017_0294_c_14L次約此佛性衆生事用有三一者顚倒爲事二者無顚倒爲事三者無顚無散亂有別法爲正事顚倒者切凡夫無倒者一切有學聖人無倒散者道後法身有別法爲正事者應化二身爲度衆生皆由大悲本願力故言顚倒者一切凡夫有三倒想見心卽皮肉心等三煩惱故
017_0295_a_01L둘째의 무전도라는 것은, 의혹도 없고 행(行)도 없는 것이니, 두 가지 전도가 없기 때문에, 곧 일체의 보살인 유학의 성인이다. 번뇌의 전도란, 진여와 배치되고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일체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이름하여 번뇌에 전도된 것이라 한다. 행의 전도란, 2승(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상(常) 등의 네 가지 덕을 닦아서 네 가지 전도를 뒤집고 보리(菩提)의 도를 행해야 할 것이다. 이제 이것을 닦지 않고 다만 무상(無常)과 고(苦) 등 만을 닦아서 해탈의 원인을 삼기 때문에 행의 전도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승(小乘)의 편협된 수행이 없어야 할 것을 밝힌 것이다. 이 두 가지 전도를 여의기 때문에 대승(大乘)의 유학 성인을 설하는 것이다.
017_0294_c_22L二無顚倒者無惑無行二種倒故卽一切菩薩有學聖人惑倒者違逆眞如故起一切煩惱名爲惑倒行倒者二乘人應修常等四德翻四顚倒行菩提而今不修但修無常苦等爲解脫故名行倒此明是無小乘偏修之離此兩倒故說大乘有學聖人
셋째의 전도됨도 없고 산란함도 없이 분별하는 법으로써 바른 일을 삼는 것이란, 선정ㆍ해탈과 일체 지혜 등 세 가지 장애를 제거하는 것으로 법계의 맑고 청정함을 말하는 것이다. 맑기 때문에 고요하고 청정하기 때문에 더러움이 없는 것이다. 대비와 본원의 바른 일을 버리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에 여래라고 한다. 때문에 이 성품에 근거하여 중생을 분별하는 것을 분별상이라 한다.
017_0295_a_06L無倒散有別法爲正事者是滅除禪定解脫一切智等三障故法界澄淨澄故靜寂淨故無垢不捨正事大悲本願恒化衆生名爲如來故約此性分別衆生是名分別相

4. 변상분 ⑥

7) 계위품(階位品)
017_0295_a_11L佛性論辯相分第四中階位品第七

다음으로는 계위상(階位相)에 대한 의미를 마땅히 알라. 계위의 의미란, 갖가지 법문 가운데에서 만약 무류(無流) 법계를 분별하여 자세히 설하면, 여섯 종류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자성(自性)이고, 둘째는 원인이고, 셋째는 결과이고, 넷째는 일이고, 다섯째는 총괄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분별하는 것이다.
017_0295_a_12L復次階位相義應知階位義者於種種法門中若有分別廣說無流法界不出六種一自性二因三果四事摠攝六分別
유전없는 법계, 그 자체를 나타내기 위하여 먼저 자성을 설하는 것이고, 이 자성에 의지하기 때문에 믿고 즐겨하는 등의 네 가지 수승한 원인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 원인으로 말미암아 상주(常住) 등 네 가지 덕의 결과를 얻는 것이다. 불성으로 말미암아 생사를 싫어하고 염오하는 마음을 일으키고 열반을 즐겨 구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자성으로 말미암아 욕심을 여읠 수 있고 욕심을 여의는 원인을 얻는 것을 총섭이라고 한다. 불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세 종류의 중생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여래께서 설하신 8만 4천 법문이 이 여섯 종류에 다 섭수되는 것이다.
017_0295_a_16L爲顯無流界自體故說自性依止此性故起信樂等四種勝因由此因故得常住等四德之果由佛性故起厭惡生死樂求涅槃事用得成由此自性故得離欲得離欲名爲摠攝約佛性故故得分別三種衆生如來所說八萬四千法門六種所攝
017_0295_b_01L그리고 그 차례가 세 가지 계위 가운데에 있으니, 세 가지 계위란 첫째 청정하기 않은 계위이니, 이것은 중생계를 말하고, 둘째 청정한 계위이니, 보살지를 말한다. 셋째 가장 청정한 계위이니 이것은 부처님의 계위이다.
때문에 무상의경(無上依經)에 설하시기를, “아난(阿難)아, 여래의 법계는 무량하고 무변하여 모든 번뇌 내용을 은폐하는 곳으로, 생사의 흐름을 따라 육도(六道)에 떠돌고 빠져 무시이래로 윤회 전전하니, 나는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계(衆生界)라고 말한다. 아난아, 이 중생계가 생사의 괴로움을 염리하여 육진(六塵)에 대한 탐욕을 제거하고 8만 4천의 법문과 모든 바라밀에 섭수되는 것에 의지하여 보리도를 닦으면, 나는 이것을 이름하여 보살이라고 말한다. 아난아, 이 중생계가 이미 모든 번뇌의 내용을 여의고 일체의 괴로움을 벗어나서 더러운 때를 깨끗이 씻어버리고, 궁극적으로 법과 같이 청정하고 맑으며 모든 중생이 원하는 바를 보고 미묘한 상위의 지위, 일체지의 지위,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비교할 수 없는 이 가운데 들어가서 머물러, 능히 이미 법왕의 대자재력을 얻으면, 나는 이것을 이름하여 여래라고 한다.”고 하셨다.
017_0295_a_23L次第在三位中三位者不淨位謂衆生界二者淨位謂菩薩地三者最淸淨位卽是佛地故『無上依經』說阿難!是如來法界無量無邊諸煩惱㲉之所隱蔽隨生死流漂沒六道無始輪轉我說名衆生界阿難!是衆生界於生死苦而起厭離除六塵欲依八萬四千法門諸波羅蜜所修菩提道我說名菩薩阿難!是衆生界已得出離諸煩惱㲉過一切苦洗除垢穢究竟法然淸淨澄潔爲諸衆生之所願見微妙上地一切智地一切無㝵入此中住至無比能已得法王大自在力我說名如來

4. 변상분 ⑦

8) 변만품(遍滿品)
017_0295_b_13L佛性論辯相分第四中遍滿品第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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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편만상에 대하여 마땅히 알라. 편만이란, 범부ㆍ성인과 모든 여래의 무분별성이 차례로 세 가지 계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첫째는 전도의 허망함이며, 둘째는 전도가 없는 성인의 도(聖道)이고, 셋째는 네 가지 덕이 지극히 청정한 것이다. 이 세 가지가 평등하고 통달한 상으로 모두 도리에 따라 편만하기 때문이다. 마치 흙ㆍ은ㆍ금 등의 그릇(器) 속에 허공이 두루 가득하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법계는 세 가지 계위 가운데 두루 가득함도 또한 그와 같다. 이 때문에 계위의 차례에 따라 이 두루 가득함을 설하는 것이다. 무상의경(無上依經)에서 “아난이여, 이와 같이 여래의 법계는 세 가지 계위 가운데에서 모든 곳에서 평등하며 걸림이 없고 본래 적정(寂靜)한 것이 비유하면 마치 허공을 일체의 색 종류들이 덮을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는 것과 같다.”고 하신 말씀과 같다. 흙ㆍ은ㆍ금 그릇에 허공이 담기는 것이 평등하여 모두 걸림이 없는 이것을 이름하여 두루 가득하다고 하는 것이다.
017_0295_b_14L復次遍滿相應知遍滿者凡夫聖人及諸如來無分別性次第三位中顚倒虛妄二無倒聖道三四德究竟淸淨此三處平等通達相竝隨道理遍滿故譬如土銀金等器中虛空遍滿平等無差別如來法界遍滿三位亦復如是是故從位次第說此遍滿如『無上依經』說阿難!是如來界三位中一切處等悉無罣㝵本來寂靜譬如虛空一切色種不能覆不能塞若土銀金器虛空處等悉無罣㝵名遍滿
佛性論卷第三
壬寅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