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阿毘達磨俱舍論卷第三十

ABC_IT_K0955_T_030
027_0673_a_01L아비달마구사론 제30권
027_0673_a_01L阿毘達磨俱舍論卷第三十


존자 세친 지음
삼장법사 현장 한역
권오민 번역
027_0673_a_02L尊者世親造
三藏法師玄奘奉 詔譯


9.파집아품②
027_0673_a_04L破執我品第九之二

그러나 만약 오로지 5취온만을 보특가라라고 이름한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계신 것인가? “내 지금 그대들을 위하여 온갖 무거운 짐[重擔]과, 무거운 짐을 취하고 버리는 것과, 무거운 짐을 지는 자에 대해 설하리라.”1)(독자부)
어째서 부처는 이 같은 말을 응당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세친)
‘무거운 짐’이 바로 ‘능히 지는 자’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2)(독자부)
027_0673_a_05L若唯五取薀名補特伽羅何故世尊作如是說吾今爲汝說諸重擔取捨重荷重擔者何緣於此佛不應說不應重擔卽名能荷
그 까닭이 무엇인가?(세친)
그 같은 사실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독자부)
所以者何曾未見故
그렇다면 설할 수 없는 것(즉 불가설 법장인 보특가라) 역시 마땅히 설해서는 안 될 것이니, 왜냐 하면 그것 역시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들의 주장대로라면] ‘무거운 짐을 취하는 것’도 마땅히 온에 포섭시켜서는 안 될 것이니, 무거운 짐(즉 5온)이 스스로를 취한다는 것은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3) 그렇지만 경에서는 애(愛)를 설하여 ‘무거운 짐을 취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애)은 이미 온에 포섭되고 있다. ‘짐을 지는 자’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할 것으로, 제온상에 수취취(數取趣, 보특가라 즉 짐을 지는 자)를 설정한 것일 뿐이다.4)
027_0673_a_09L可說事亦不應說所以者何亦未見又取重擔應非薀攝重擔自取未見故然經說愛名取擔者旣卽薀攝荷者應然卽於諸薀立數取趣
그리고 이러한 보특가라는 바로 불가설(不可說)이고 상주(常住) 실유(實有)의 존재라고 여길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경 후반부에서 스스로 해석하여 “다만 세속(世俗)에 따라 ‘이 구수(具壽, 제자)는 이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고 설한 것일 뿐이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하였던 것으로, 앞에서 인용한 『인경(人經)』에서의 문구과 같다.5)
027_0673_a_13L然恐謂此補特伽羅是不可說常住實有故此經後佛自釋言但隨世俗說此具壽有如是名乃至廣說如上所引『人經』文句
그것은 바로 이러한 보특가라가 설할 수 있는 것이고, 무상하며, 실유의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즉 5취온 스스로가 서로를 핍박하고 해침으로 ‘무거운 짐’이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으며, 전전(前前) 찰나의 5온이 후후(後後) 찰나의 5온을 인기하기 때문에 그것(후후 찰나의 5온)을 일컬어 ‘짐을 진 자’라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보특가라는 실유가 아니다.(세친)
027_0673_a_17L爲令了此補特伽羅可說無常非實有性卽五取薀自相逼害得重擔名前前剎那引後後故名爲荷者故非實有補特伽羅

보특가라는 결정코 마땅히 실유여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화생(化生)의 유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는 모든 이는 사견(邪見)에 포섭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6)(독자부)
027_0673_a_20L補特伽羅定應實有以契經說諸有撥無化生有情邪見攝
027_0673_b_02L누가 화생의 유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던 것인가? 부처님께서 설하였듯이 우리도 화생의 유정이 존재한다고 설하니, 이를테면 온이 상속하여 능히 후세에 이르면서 태(胎)ㆍ난(卵)ㆍ습(濕)에 의하지 않은 것을 화생의 유정이라 이름한다. 곧 이를 부정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기 때문에 사견에 포섭되는 것으로, 화생의 제온은 이치상 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사견은 바로 보특가라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대들은 마땅히 이 같은 사견이 무엇에 의해 끊어지는 것인지에 대해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견ㆍ수소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상 모두 옳지 않으니, 보특가라는 4제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7) 사견은 마땅히 수소단이 아니기 때문이다.(세친)
027_0673_a_22L誰言無有化生有情如佛所言我說有故謂薀相續能往後世不由胎卵濕名化生有情撥此爲無故邪見攝化生諸薀理實有故又許此邪見謗補特伽羅汝等應言是何所斷見修所斷理竝不然補特伽羅非諦攝故邪見不應修所斷故

만약 경에서 “하나의 보특가라가 있어 세간에 태어나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이는 마땅히 온이 아니어야 할 것이라고 한다면,8) 이 역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이는 [5온의] 총합[總]에 대해 일시 ‘하나’라고 설한 것이기 때문으로, 마치 세간에서 하나의 참깨, 하나의 쌀, 하나의 무더기, 하나의 언어라고 설하는 것과 같다.9) 혹은 보특가라는 마땅히 유위에 포섭되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세간에 태어난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세친)
027_0673_b_08L若謂經說有一補特伽羅生在世閒應非薀者亦不應理此於摠中假說一故如世間說一麻一米一聚一言或補特伽羅應許有爲攝以契經說生世閒
여기서 ‘태어난다’고 하는 말은 ‘온이 새로이 일어난다’고 하는 뜻과 같은 것이 아니다.(독자부)
그러면 어떤 뜻에 근거하여 ‘세간에 태어나 존재한다’고 설한 것인가?(세친)
027_0673_b_13L非此言生如薀新起依何義說生在世閒
지금 여기서는 [전찰나의 온과는] 다른 온[別蘊]을 취한다는 뜻에 근거한 것으로, 이를테면 세간에서 ‘능히 제사 지내는 이가 태어났다’ ‘문법학자가 태어났다’고 설하는 것과 같으니, 그들은 명론(明論) 즉 학문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세간에서 ‘필추가 생겨났다’거나 ‘외도가 생겨났다’고 설하는 경우와 같으니, 수계의식(儀式)을 성취하였기 때문이다. 혹은 ‘늙은이가 생겨났다’거나 ‘병자가 생겨났다’고 설하는 경우와도 같으니, [이전과는] 다른 어떤 상태[位]를 성취하기 때문이다.10)
027_0673_b_14L依此今時取別薀義如世閒說能祠者生記論者生取明論故如世說有苾芻生有外道生取儀式或如世說有老者生有病者生別位故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 같은 사실을 부정하셨기 때문에 이러한 해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 즉 『승의공경(勝義空經)』 중에서 설하기를, “업도 존재하고 이숙도 존재하지만, 작자는 인식될 수 없다. 말하자면 능히 이 온을 버리고, 아울러 능히 저 온을 상속하니, 오로지 법가(法假)만은 제외한다”고 하였다.11)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이미 그 같은 사실을 부정하셨던 것이다. 『파륵구나계경(頗勒具那契經)』에서도 역시 “나는 끝내 능히 취하는 자[能取者]가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12) 따라서 세간에서 능히 제온은 취하고 버리는 그 어떤 단일한 보특가라도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027_0673_b_18L佛已遮故此救不成如『勝義空契經』中說有業有異熟作者不可謂能捨此薀及能續餘薀唯除法故佛已遮『頗勒具那契經』亦說終不說有能取者故定無一補特伽羅能於世閒取捨諸薀
또한 그대가 인용한 ‘제사를 지내는 이 등이 태어났다’고 하는 사실에서, 그러한 이의 본질이 무엇이길래 능히 이것(보특가라)의 비유로 삼은 것인가? 만약 그같이 제사 지내는 이가 바로 ‘아’라고 주장한다면 그것(비유)은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며,13) 만약 심ㆍ심소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찰나찰나 소멸하고 새로이 생겨나기 때문에 [후찰나의 온을] 취하고 [전찰나의 온을] 버리는 것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소의신(즉 색신)이라고 인정한다면 역시 심 등의 경우와 같아야 하는 것이다.
027_0673_b_23L又汝所引祠者等生其體是何而能喩此若執是彼不極成若心心所彼念念滅新生故取捨不成若許是身亦如心
027_0673_c_02L또한 명론(明論) 등이 소의신과 다른 것처럼 온 역시 보특가라와 달라야 하는 것이다.14) 또한 늙거나 병든 두 소의신은 각기 앞의 상태(젊거나 건강한 소의신)와는 다르지만 [병든 몸은 젊은 몸의 변화일 뿐이라고 하는 것은] 수론(數論)의 전변설(轉變說)로서,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비판한 바와 같다.15)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인용한 [‘제사 지내는 이가 태어났다’고 하는 등의] 사실은 비유가 되지 않는 것이다.
027_0673_c_04L又如明等與身有異薀亦應異補特伽羅老病二身各與前別數論轉變如前已遣故彼所引爲喩不成
또한 ‘온은 생겨나는 것이지만 수취취(數取趣)는 그런 것이 아니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보특가라는 결정코 온과 다르며, 아울러 영속적인 것이라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보특가라는 오로지 단일한 것이며 온의 본질은 다섯 가지인데, 어찌 이것과 온이 다른 것이라고 설하지 않는 것인가?(이상 세친)
027_0673_c_06L許薀生非數取趣則定許此異薀及又此唯一薀體有五寧不說此與薀有異
만약 그렇다면 대종에는 네 가지가 있고 조색(造色)은 오로지 한 가지인데, 어찌 조색이 대종과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인가?16)(독자부)
이는 그들 종의의 허물이다.(세친)
027_0673_c_09L大種有四造色唯一寧言造色不異大種是彼宗過
무엇이 그들의 종의인가?(독자부)
조색을 바로 대종으로 간주하는 온갖 논(論)이 바로 그들의 종의이다. 그러나 만약 그들의 견해와 같다고 한다면 응당 마땅히 이같이 말해야 할 것이니, 온갖 조색이 바로 4대종이듯이 역시 마땅히 5온이 바로 보특가라라고 해야 할 것이다.(세친)
027_0673_c_10L何謂彼宗計造色卽大種論設如彼見應作是如諸造色卽四大種亦應卽五薀立補特伽羅

만약 보특가라가 바로 제온이라고 한다면 세존께서는 어찌하여 영혼[命者, jīva]이 바로 육신[身]이라고 언표[記]하지 않은 것인가?17)(독자부)
능히 묻는 자의 아세야(阿世耶, 意樂, 즉 의도)를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즉 문자(問者)는 ‘내적으로 작용하는 단일한 사부(士夫, 즉 푸루샤) 자체는 실유로서 허망하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영혼이라 한다’고 주장하여, 이 같은 주장에 의거하여 부처님에게 ‘[영혼은] 육신과 동일한 것인가, 다른 것인가’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혼은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육신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하는 말은 성립할 수 없는데, 어찌 육신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언표할 수 있을 것인가? 이는 마치 거북의 털이 딱딱한가 부드러운가에 대해 언표할 수 없는 것과 같다.
027_0673_c_13L若補特伽羅卽諸薀者世尊何不記命者卽身觀能問者阿世耶問者執一內用士夫體實非虛名爲命者依此問佛與身一異此都無一異不成如何與身可記一異不可記龜毛䩕耎古昔諸師已解斯
옛날의 여러 논사들은 이미 그 같은 문제[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하고 있다. 옛날 용군(龍軍, Nāgasena)이라 이름하는 대덕(大德)이 있었는데, 3명(明)ㆍ6통(通)에 8해탈(解脫)을 갖추고 있었다.18) 그 때 필린타(畢鄰陀, Milinda)라고 하는 왕이 있어 대덕의 처소에 이르러 이와 같이 설하였다. “내가 지금 여기에 온 뜻은 의심나는 바를 청하여 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문들은 많은 말을 하기 좋아하는 성질입니다. 그러니 만약 존자께서 능히 바로 대답하여 주신다면 나는 마땅히 청하여 묻겠습니다.”
027_0673_c_19L昔有大德名曰龍軍三明六通具八解脫于時有一畢鄰陁王至大德所作如是說我今來意欲請所疑然諸沙門性好多語尊能直答我當請問
027_0674_a_02L대덕이 그 청을 받아들이자 왕이 물어 말하였다. “영혼[命者]과 육신은 동일하다고 해야 합니까, 다르다고 해야 합니까?”
대덕이 답하여 말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마땅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왕이 말하였다.“어찌 앞에서 [바로 대답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말을 달리하여 묻는 바에 대답하여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대덕이 물어 말하였다. “나는 의심나는 바를 묻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모든 국왕들은 많은 말을 하기를 좋아하는 성질입니다. 그러니 만약 왕께서 능히 바로 대답하여 주신다면 나는 마땅히 물어보고자 합니다.”
027_0673_c_22L大德受請王卽問言命者與身爲一爲異大德答言此不應記王言豈不先有要耶今何異言不答所問大德質我欲問疑然諸國王性好多語能直答我當發問
왕이 바로 그의 말[敎]을 받아들이자 대덕이 물어 말하였다. “대왕 궁중의 모든 암라수(菴羅樹, āmra)에 맺힌 과실은 그 맛이 시다고 해야 합니까, 달다고 해야 합니까?”
왕이 말하였다. “궁중에는 본래 이 나무가 없습니다.”
대덕이 다시 따져 물었다. “일찍이 다짐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말을 달리하여 묻는 바에 대답하여 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대왕이 말하였다. “궁중에는 본디 이 나무가 없는데, 어찌 그 과실이 달다 시다 말할 수 있겠읍니까?”
대덕이 말하였다. “영혼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데, 어찌 육신과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이상 세친)
027_0674_a_03L王便受教大德問大王宮中諸菴羅樹所生果味爲酢爲甘王言宮中本無此樹大德復先無要耶今何異言不答所問宮內此樹旣無寧可答言果味甘大德誨曰命者亦無如何可言與身一異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째서 영혼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은 것인가?(독자부)
佛何不說命者都無
역시 또한 묻는 자의 아세야를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즉 문자(問者)는 제온의 상속을 영혼이라 하고, 이에 근거하여 물음을 던졌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세존께서 ‘영혼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하셨다면, 그는 사견(邪見)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설하지 않은 것이니, 그는 아직 능히 연기의 도리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정법(무아)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가유(假有)라고도 설하지 않은 것으로, 이치상 필시 그러해야 할 것이니, 세존께서 설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027_0674_a_09L亦觀問者阿世耶故問者或於諸薀相續謂爲命者依之發問世尊若答命者都彼墮邪見故佛不說彼未能了緣起理故非受正法器不爲說假有必應爾世尊說故
이를테면 세존께서는 아난타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벌차(筏蹉, Vatsa)라는 성을 가진 어떤 한 출가외도가 나의 처소에 이르러 ‘자아(나)는 세간에 존재한다고 해야 합니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언급[記]도 하지 않았다. 왜냐 하면 만약 존재한다고 말하였다면 법의 진리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일체의 법은 모두 무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면 그의 우혹(愚惑)은 증가하게 될 것이니, 그는 바로 ‘나는 일찍이 존재하였는데 지금 존재하지 않는구나’라고 말하였을 것이다.19) 자아가 존재한다고 집착하는 어리석음에 비해 이러한 어리석음이 더욱 심한데, 말하자면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상변(常邊)에 떨어지지만,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바로 단변(斷邊)에 떨어지는 것이다.”20) 그리고 이러한 두 변의 경중(輕重)에 대해서는 경에서 널리 분별하고 있는 바와 같다.21)
027_0674_a_14L如世尊告阿難陁有姓筏蹉出家外道來至我所作是問言我於世閒爲有非有我不爲所以者何若記爲有違法眞理以一切法皆無我故若記爲無增彼愚惑彼便謂我先有今無對執有愚此愚更甚謂執有我則墮常邊若執無我便墮斷邊此二輕重如經廣說
나아가 이와 같은 뜻에 근거하여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027_0674_a_21L依如是義故有頌曰

‘견(見)’에 의해 온갖 선업이 손상되고
허물어지는 것을 관찰하시었기에
부처님께서는 마치 암호랑이가
새끼를 다루듯이 정법을 설하신다.
027_0674_a_22L觀爲見所傷
及壞諸善業
故佛說正法
如牝虎銜子

진실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견’의 어금니에 손상을 입게 될 것이고,
세속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하면
바로 선업의 새끼를 죽이게 될 것이다.22)
027_0674_a_24L執眞我爲有
則爲見牙傷
撥俗我爲無
便壞善業子
027_0674_b_02L
다시 게송으로 설하여 말하겠다.
027_0674_b_02L復說頌曰

진실의 영혼[命者]이 존재하지 않기에
부처님께서는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말하지 않은 것이나
가아(假我)마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부정할까 두려워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설하지 않은 것이다.
027_0674_b_03L由實命者無
佛不言一異
恐撥無假我
亦不說都無

말하자면 제온의 상속 중에
업과 과보와 영혼이 존재하는 것으로
만약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한다면
그는 이것(業果)의 존재마저 부정하게 되리라.
027_0674_b_05L謂薀相續中
有業果命者
若說無命者
彼撥此爲無

제온 중에 가명(假名)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은 것은
문자(問者)에게 참된 공(空)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없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027_0674_b_06L不說諸薀中
有假名命者
由觀發問者
無力解眞空

이와 같이 벌차종족(種族)의
의요(意樂)의 차별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그가 자아의 존재유무를 물었음에도
부처님께서는 유무를 답하지 않으신 것이다.
027_0674_b_07L如是觀筏蹉
意樂差別故
彼問有無我
佛不答有無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이유에서 세간의 상(常) 등에 대해서는 언표하지 않은 것인가?23)(독자부)
027_0674_b_09L何緣不記世閒常等
역시 문자의 아세야(阿世耶)를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즉 문자가 만약 자아를 주장하여 그것이 세간이 되었다고 한다면, 자아 자체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네 가지 언표는 모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24) 만약 생사[의 5온]을 주장하여 그것을 모두 세간이라고 말하였다면, 부처님께서 네 가지 종류로 언표하였을지라도 역시 모두 이치에 맞지 않을 것이다.
027_0674_b_10L亦觀問者阿世耶故問者若執我爲世閒我體都無四記皆非理若執生死皆名世閒四種記亦皆非理
즉 만약 [생사의 세간이] 영원[常]하다면 열반을 획득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만약 영원하지 않은 것[非常]이라면 저절로 단멸하여 아무런 공력(功力)을 들이지도 않고서 모두 열반을 획득해야 할 것이다. 만약 영원하면서 역시 또한 영원하지 않은 것이라고 설한다면 결정코 일부의 유정은 열반을 획득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고, 일부의 유정은 저절로 원적(圓寂)을 증득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영원하지도 않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라고 언표한다면, 열반을 획득하는 일도 없고 열반을 획득하지 않는 일도 없다고 해야 하지만, 이는 결정코 상위(相違)하여 희론(戱論)을 성취하게 될 것이다.
027_0674_b_13L謂若常者無得涅若是非常便自斷滅不由功力咸得涅槃若記爲常亦非常者定應一分無得涅槃一分有情自證圓寂記非常非非常者則非得涅槃非不得涅槃決定相違便成戲論
그렇지만 성도에 근거하여 반열반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에 네 가지 결정적인 언표는 모두 이치에 맞지 않으니, 이는 마치 이계자(離繫子)가 참새의 생사를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결정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과 같다.25)
나아가 유변(有邊) 등의 네 가지에 대해 역시 언급하지 않은 것도 상(常) 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모두 과실이 있기 때문이다.(세친)
027_0674_b_18L然依聖道可般涅槃故四定記皆不應理離繫子問雀死生佛知彼心不爲定有邊等四亦不記者以同常等皆有失故
027_0674_c_02L이러한 유변 등의 네 가지의 뜻이 ‘상’ 등의 경우와 동일하다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인가?(독자부)
온저가(溫底迦, Uktika)라는 외도가 있어 일찍이 ‘세간에 끝이 있는가’라고 하는 등의 네 가지를 묻고서,26) 다시 방편을 설하여 세존에게 “온갖 세간이 모두 성도(聖道)에 의해 능히 출리(出離)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일부만이 출리를 획득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라고 고쳐 물었다. 이에 존자 아난(阿難)이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 일에 대해 이미 세존에게 물어 놓고서 지금 어떤 이유에서 말을 바꾸어 다시 묻는 것인가?”라고 하였다.27) 따라서 뒤의 네 가지 분별은 앞의 뜻과 동일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28)
027_0674_b_22L寧知此四義同常等以有外道名嗢底迦先問世閒有邊等四設方便矯問世尊爲諸世閒皆由聖道能得出離爲一分耶尊者阿難因告彼曰汝以此事已問世尊今復何緣改名重問故知後四義與前同
다시 어떠한 연유에서 세존께서는 ‘여래는 사후(死後)에 존재하는가?’ 하는 등의 네 가지 물음에 대해 언표하지 않은 것인가?
역시 문자의 아세야를 관찰하였기 때문이다. 즉 문자는 ‘이미 해탈한 자아를 일컬어 여래라 한다’고 그릇되게 생각하고서 물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여기서 마땅히 자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이에게 힐난하여 물어보아야 할 것이니,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연유에서 ‘현재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언급하였다면서 ‘여래 사후에도 역시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언표하지 않은 것인가?
027_0674_c_04L以何緣世尊不記如來死後有等四耶亦觀問者阿世耶故問者妄計已解脫我名爲如來而發問故今應詰問計有我者佛何緣記有現補特伽羅不記如來死後亦有
그들(독자부)이 말하기를, “상주(常住)에 떨어지게 되는 과실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027_0674_c_09L彼言恐有墮常失故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부처님께서는 “자씨(慈氏, 미륵)여! 그대는 내세에 마땅히 부처가 될 수 있을 것이다”고 기별(記別)하였을 것이며,29) 아울러 제자가 몸이 허물어져 목숨을 마칠 때 ‘아무개[甲某]는 지금 모처에 태어날 것이다’고 언급하였던 것인가?30) 여기에 어찌 상주에 떨어지는 과실이 없다고 하겠는가?
027_0674_c_10L若爾何緣佛記慈氏汝於來世當得作佛及記弟子身壞命終某甲今時已生某處此豈非有墮常過失
만약 부처님께서 일찍이 보특가라를 보았지만 그가 [반]열반에 들고 나서는 더 이상 보지 못하여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언표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면,31) [해탈된 자아에 대해 능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사(大士)께서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혹은 그 같은 자아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마땅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만약 세존께서는 보았지만 설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다면 이온(離蘊)이나 상주(常住)의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이다.32) 또한 만약 [해탈된 자아를] 보았다고도, 보지 않았다고도 다 같이 설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결국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라고도 설할 수 없으며, 일체지가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027_0674_c_13L若佛先見補特伽羅彼涅槃已便不復見以不知故不記有者則撥大師具一切智或應許不記由我體都無若謂世尊見而不說則有離薀及常住過若見非見俱不可說則應漸言不可說佛是一切智非一切智

만약 ‘실로 보특가라는 존재하니, 계경에서 “진실이기 때문에, 지속하기 때문에,33) 결정코 무아(無我)를 주장하는 자는 악견처(惡見處)에 떨어진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경증이 될 수 없으니, 그 경에서는 역시 또한 “결정코 유아를 주장하는 자는 악견처에 떨어진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34)
027_0674_c_18L若謂實有補特伽羅以契經言諦故住故定執無我者墮惡見處此不成證彼經亦說定執有我者墮惡見處故
이에 대해 아비달마 제 논사는 “자아의 유무에 대해 주장하는 것은 다 같이 변집견에 포섭되니, 순서대로 상(常)ㆍ단(斷)의 극단[邊]에 떨어지기 때문이다”고 하였다.35) 그 논사가 설한 바가 참으로 이치에 맞으니,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 상변(常邊)에 떨어지고, 만약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 단변(斷邊)에 떨어진다”고 앞의 『벌차경(筏蹉經)』에서 분명하게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36)
027_0674_c_22L阿毘達磨諸論師言執我有無俱邊見攝如次墮在常斷邊故彼師所說深爲應理以執有我則墮常邊若執無我便墮斷邊前『筏蹉經』分明說故
027_0675_a_02L만약 보특가라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누가 생사(生死)를 유전(流轉)한다고 해야 할 것인가? 즉 생사가 스스로 유전한다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박가범(薄伽梵)께서도 계경 중에서 “온갖 유정으로서 무명에 덮여 있는 이는 탐애에 계박되어 생사로 치달아 헤매인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에 보특가라는 결정코 존재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독자부)
027_0675_a_03L若定無有補特伽羅爲說阿誰流轉生死不應生死自流轉故然薄伽梵於契經中說諸有情無明所覆貪愛所繫馳流生死故應定有補特伽羅
그렇다면 이 같은 보특가라는 다시 어떻게 생사를 유전하게 되는 것인가?(세친)
전찰나의 온을 버리고 후찰나의 온을 취하기 때문에 생사를 유전하게 되는 것이다.37)(독자부)
027_0675_a_07L此復如何流轉生死由捨前薀取後薀故
이와 같은 뜻의 종의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따져 비판하였다. 이를테면 들판을 태우는 불이 비록 찰나에 멸할지라도 [전후로]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유전한다고 설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제온의 취합[蘊聚]을 일시 유정(보특가라)이라고 가설한 것으로, [이 같은 유정이] 애(愛)와 취(取)를 인연으로 하여 생사를 유전하게 되는 것이다.(세친)
027_0675_a_08L如是義宗前已徵遣如燎原火雖剎那滅而由相續說有流轉如是薀聚假說有情愛取爲緣流轉生死

만약 [자아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로지 온만이 존재한다면, 어째서 세존께서는 이와 같이 설하였겠는가? “지금의 나는 옛적에는 세간의 도사(導師)였으니, 이름을 묘안(妙眼)이라고 하였다.”38)(독자부)
이러한 경설에 무슨 허물이 있는 것인가?(세친)
온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39)(독자부)
027_0675_a_11L若唯有薀何故世尊作如是今我於昔爲世導師名爲妙眼說何咎薀各異故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옛적에 세간의 도사였다고 하는] 이 같은 ‘나’는 어떠한 존재인가?(세친)
말하자면 보특가라이다.(독자부)
027_0675_a_13L若爾是何物謂補特伽羅
옛적의 ‘나’가 지금의 ‘나’라면 나(자아) 자체는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어야 한다.40) 그러므로 ‘지금의 나는 옛적에 세간의 도사였다’고 하는 말을 설한 것은 옛날과 지금이 바로 동일한 상속(相續)임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를테면 ‘이 불은 일찍이 그것을 태웠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41)
027_0675_a_14L昔我卽今體應常住故說今昔爲師言顯昔與今是一相續言此火曾燒彼事
만약 진실의 자아가 결정코 존재한다면 오로지 부처님만이 능히 명료하게 관찰할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관찰하고 나서는 견고한 아집(我執, 즉 자아의 관념)을 낳았어야 할 것이며, 그 같은 아집에 따라 아소(我所, 나의 것)의 집착이 생겨났어야 할 것이며, 이에 따라 응당 마땅히 아와 아소에 대한 애착을 낳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박가범께서도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소에 대해 집착하는 것이고, 아소에 집착하기 때문에 제온에 대해 다시 아와 아소에 대한 애착을 낳게 되는 것이다.”
027_0675_a_16L若謂決定有眞實則應唯佛能明了觀觀已應生堅固我執從斯我執我所執生從此應生我我所愛故薄伽梵作如是言執有我便執我所執我所故於諸薀中便復發生我我所愛
그런데 [부처님께서] 살가야견(薩伽耶見, 즉 有身見)과 아애(我愛)에 속박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 되고, 해탈에서도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42) 그럼에도 ‘[부처님께서는] 자아에 대해 아애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다.(세친)
027_0675_a_21L薩迦耶見我愛所縛則爲謗佛去解脫遠若謂於我不起我愛此言無義
027_0675_b_02L그 까닭이 무엇인가?(독자부)
‘내가 아닌 것[非我]을 그릇되게 나[我]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는 아애를 일으킬 수 있지만 진실의 자아에 대해서는 아애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하는 이와 같은 말은 이론적 근거[理證]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이(유아론자)는 부처님의 참된 성교(聖敎)와 인연이 없으며, 견해의 부스럼(즉 악견) 만을 일으키는 자일 뿐이다.43)(세친)
027_0675_a_23L所以者何於非我中撗計爲我容起我愛非實我中如是所言無理爲證故彼於佛眞聖教中無有因緣起見瘡皰
이와 같이 어떤 부류에서는 불가설(不可說)의 보특가라가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또한 어떤 부류에서는 일체의 존재 자체[法體]를 전부 부정하여 그것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또한 외도들은 진실된 자아[我性]가 별도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만,44) 이와 같은 일체의 견해는 참다운 이치가 아니니, 그것들은 모두 해탈을 낳지 못한다는 허물을 능히 면할 수 없다.
027_0675_b_03L如是一類執有不可說補特伽羅復有一類摠撥一切法體皆非有外道執有別眞我性此等一切見不如理皆不能免無解脫過

만약 일체의 존재[類]에 자아 자체가 완전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찰나멸의 마음이 일찍이 감수하였던 것이나 서로 비슷한 경계에 대해 어떻게 능히 기억하여 아는 것인가?45)(독자부)
이와 같은 기억과 앎(재인식)은 어떤 한 상속의 내적으로 경계를 기억하는 생각인 마음의 차별로부터 생겨난다.46)(세친)
027_0675_b_07L若一切類我體都無剎那滅心於曾所受久相似境何能憶知如是憶知從相續內念境想類心差別生
그렇다면 바야흐로 첫 찰나의 기억은 어떠한 마음의 차별로부터 무간에 생겨난다고 해야 할 것인가?(독자부)
027_0675_b_09L初憶念爲從何等心差別無閒生
그것(기억의 대상)을 근거로 하는 작의(作意)와, [과거의 경계와 지금의 그것이] 서로 유사하며 양자가 서로에게 소속된다는 생각 등을 갖고, 의지하는 몸(즉 감관)이 차별되지 않으며, 근심과 산란 등의 인연에 의해 [기억의] 공덕이 손상되거나 괴멸되지 않은 마음의 차별로부터 일어난다.
027_0675_b_10L有緣彼作意相似相屬想等不爲依止差別愁憂散亂等緣損壞功德心差別起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은 작의 등의 인연을 가졌을지라도 만약 그러한 종류의 마음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 같은 기억을 수습할(낳을) 만한 힘이 없을 것이며, 비록 그 같은 종류의 마음의 차별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와 같은 [작의 등의] 인연을 갖지 않았다면 역시 또한 능히 기억을 수습할 리가 없다. 요컨대 이 같은 두 종류의 조건을 갖추어야 비로소 능히 기억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온갖 기억이 생겨나는 것은 다만 이 같은 두 가지 조건에 의한 것일 뿐이니, 이것을 떠나 어떤 [기억의] 공능(예컨대 자아)이 존재한다는 것은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세친)
027_0675_b_13L雖有如是作意等緣若無彼類心差別者則無堪能修此憶念雖有彼類心差別因若無如是緣亦無能修理要具二種方可能修諸憶念生但由於此不見離此有功能故
어떻게 다른 마음이 보았던 것을 그 후 또 다른 마음이 능히 기억할 수 있는 것인가? 천수(天授)의 마음이 일찍이 보았던 경계를 그 후 사수(祠授)의 마음이 기억한다는 것은 이치상 있을 수 없는 것이다.47)(독자부)
027_0675_b_17L如何異心見後異心能憶非天授心曾所見境後祠授心有憶念理
이러한 힐난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에게 소속[相屬]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 같은 두 사람의 마음은 서로에게 소속되지 않으니, 이를테면 동일한 상속 중에 인과적 관계[因果性]로서 존재하는 것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48) 우리는 다른 마음이 대상을 보고 또 다른 마음이 능히 기억한다고는 말하지 않으며, 상속이 동일하기 때문에 [전찰나의 마음과 동류의 마음이 능히 기억한다고 말할 뿐이다].
027_0675_b_19L此難非理不相屬故謂彼二心互不相屬非如一相續有因果性故我等不言異心見境異心能憶相續一故
그렇지만 지금의 능히 기억하는 마음은 과거의 그 같은 경계를 소연으로 하였던 마음으로부터 인기된 것으로, 이를테면 앞(본론 권제4)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 즉 상속(相續)의 전변(轉變)과 차별(差別)의 힘으로 인해 기억이 생겨나니, 여기에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그리고 이러한 기억의 힘으로 말미암아 그 후 앎[記知, 재인식]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세친)
027_0675_b_22L然從過去緣彼境心引起今時能憶念識謂如前說相續轉變差別力故生念何失由此憶念力有後記知生
027_0675_c_02L
자아 자체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기억해 낸다고 해야 할 것인가?(독자부)
‘능히 기억해 낸다’고 함은 무슨 뜻인가?(세친)
기억[念]에 따라 능히 대상을 파악[取]하는 것을 말한다.(독자부)
027_0675_c_02L我體旣無孰爲能憶能憶是何義由念能取境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 어찌 기억과 다를 것인가?(세친)
비록 기억과 다르지 않을지라도 [파악하는 것은] 다만 작자에 의한 것이다.49)(독자부)
027_0675_c_04L此取境豈異念雖不異念但由作者
작자는 바로 앞에서 논설한 기억의 원인이니, 이를테면 그러한 종류의 마음의 차별인 것이다.50) 그런데 세간에서 ‘제달라(制怛羅, Caitra)가 능히 기억하였다’고 말할 경우, 이는 다만 5온의 상속을 제달라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일 뿐이다. 즉 일찍이 보았던 마음으로부터 그 후의 기억이 일어나는 것으로, 이와 같은 이치에 따라 ‘그가 능히 기억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세친)
027_0675_c_05L作者卽是前說念因謂彼類心差別然世間所言制怛羅能憶此於蘊相續立制怛羅名從先見心後憶念起依如是理說彼能憶

만약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누구의 기억인가?(독자부)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누구의’라고 하는] 소유격[第6聲]을 설하게 된 것인가?(세친)
이 같은 소유격은 주체에 소속된다는 뜻에 근거한 것이다.(독자부)
027_0675_c_09L我體若無是誰之念爲依何義說第六聲此第六聲依屬主義
어떠한 존재[物]가 어떠한 주체에게 소속된다는 것인가?(세친)
이는 마치 소 등이 제달라에게 소속된다고 하는 것과 같다.(독자부)
027_0675_c_11L如何物屬何主此如牛等屬制怛羅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소의 주인이 되는 것인가?(세친)
이를테면 그 같은 탈것[所乘, 즉 수레]과 그것에서 짠 것[所搆, 즉 우유]과 일을 시키는 것 등에 대해 그가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독자부)
027_0675_c_12L彼如何爲牛主謂依彼彼所乘所搆所役等中彼得自在
그렇다면 어떠한 처소에서 기억을 [소처럼] 채찍질하여 부리려고 하길래 부지런히 방편을 지어 그 같은 기억의 주인(즉 자아)을 찾아 구하는 것인가?(세친)
기억하고자 하는 대상에서 기억을 채찍질하여 부리려고 하는 것이다.(독자부)
027_0675_c_13L欲於何所驅役於念而勤方便尋求念主於所念境驅役於念
기억을 부리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세친)
이를테면 기억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이다.(독자부)
役念爲何謂令念起
기이하도다. 이치도 없는 말을 마음대로 하는구나. 어찌 이것(기억)이 낳아지도록 하기 위해 이것을 채찍질하여 부린다고 하는 것인가?51) 또한 자아가 기억을 어떻게 채찍질하여 부린다는 것인가? 기억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인가, 기억으로 하여금 작용[行]하게 하기 위해서인가?(세친)
기억에는 [별도의] 작용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기억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독자부)
027_0675_c_15L奇哉自在起無理言寧爲此生而驅役此又我於念如何驅役爲令念起令念行念無行故但應念起
그렇다면 [기억으로 하여금 일어나게 하는] 원인을 주인이라 하고, 결과를 능히 그것에 소속되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즉 [기억의] 원인이 되는 증상의 힘으로 말미암아 [기억이라는] 결과가 생겨나기 때문에 원인을 ‘주인’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이며, 결과가 생겨날 때 이는 바로 원인의 소유이기 때문에 능히 소속되는 것이라고 일컬어야 할 것으로, 기억을 낳는 원인이 기억의 주인이 되기에 충분한데, 어찌 수고스럽게 구태여 자아를 설정하여 기억의 주인이라고 할 것인가?
027_0675_c_18L則因名果名能屬由因增上令果得生因名主果於生時是因所有故名能卽生念因足爲念主何勞立我爲念主耶
제행(諸行)의 취집(聚集)이 동일한 종류로서 상속하는 것에 대해 세간에서는 다 같이 ‘제달라’와 ‘소’라고 시설하고, 제달라를 소의 주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소의 상속이 다른 곳에서 생겨나게 하고(다른 곳으로 끌고 가고) 또한 변화하여 생겨나게 하는(소의 형상을 다르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주인이라고 일컬은 것으로, 여기에 단일한 실체로서의 ‘제달라’라고 하는 주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단일한 실체로서의 소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것의 조건이 되는 5온의 상속을] 일시 시설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소의 주인이라고 하는 말 역시 원인과 관계 없는 것이 아니다.
027_0675_c_22L卽諸行聚一類相續世共施設制怛羅牛立制怛羅名爲牛主牛相續於異方生變異生因故名爲此中無一實制怛羅亦無實牛假施設故言牛主亦不離因
027_0676_a_02L기억이 이미 그렇다고 한다면 기억하여 아는 것[記知, 재인식] 또한 역시 그러하다. 즉 기억의 경우에서 분별한 바와 같이 그러한 앎은 누가 능히 요별하는 것이며, 누구의 앎인가 하는 것 등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그 같은 예로써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니, 바야흐로 근(根)과 경(境) 등의 앎의 인연만 앞의 경우와 다를 뿐이며 [그 밖의 사실은]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52)(세친)
027_0676_a_02L憶念旣記知亦然如辯憶知熟爲能了誰之識等亦應例釋且識因緣與前別謂根境等如應當知

어떤 이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53) “결정코 자아는 존재하니, 사용(事用, bhāva, 현상의 작용)은 반드시 사용자(事用者, bhāvitṛ, 즉 작자)를 근거[待]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천수(天授)의 보행’은 반드시 천수를 근거로 해야 하는 것처럼 온갖 ‘사용’은 ‘사용자’에 근거해야 하는데, 보행이 바로 ‘사용’이며, 천수가 ‘자’(사용의 작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식(識, vijñāna) 등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용은 반드시 그 소의(所依)가 되는 ‘능히 요별하는 자(vijñātṛ)’ 등을 근거로 해야 한다.”(수론)
027_0676_a_05L有作是言定有我事用必待事用者故謂諸事用待事用者如天授行必待天授是事用天授名者如是識等所有事必待所依能了等者
지금 마땅히 그들을 힐난해야 할 것이니, 여기서 ‘천수’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바로 실유(實有)의 자아라고 한다면, 이는 앞에서 논파한 바와 같으며, 만약 가유(假有)의 사부(士夫)라고 한다면 그 자체 단일한 존재가 아니어야 할 것이니, 제행(諸行)의 상속상에 일시 이 같은 명칭을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천수가 능히 간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식이 능히 요별한다’의 경우도 역시 또한 그러하다.(세친)
027_0676_a_09L今應詰彼授謂何若是實我此如先破若假士體非一物於諸行相續假立此名如天授能行識能了亦爾

[만약 사용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이치에 근거하여 ‘천수는 능히 간다’고 설한 것인가?(수론)
이를테면 찰나생멸하는 제행의 불이(不異)의 상속을 ‘천수’라는 이름으로 설정한 것이지만, 어리석은 이들은 이를 단일한 실체[一體]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곧 자상속(自相續)이 다른 처소에 생겨나는 원인이 되는 것으로, 다른 처소에 생겨나는 것을 ‘간다’고 하며, 그 원인을 ‘가는 자’라고 이름할 뿐이다.54) 바로 이 같은 이치에 근거하여 ‘천수는 능히 간다’고 설한 것이니, 마치 불꽃이나 소리가 다른 처소로 상속하는 것을, 세간에서는 이 같은 사실에 따라 ‘불꽃이나 소리가 능히 작용[行]한다’고 설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천수의 [전찰나의] 신(身, kāya, 즉 5온의 집적)이 [후찰나] 식(識)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역시 ‘천수가 능히 요별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성자들도 세간언설의 이치에 따르기 위해 역시 이같이 설하는 것이다.(세친)
027_0676_a_12L依何理說天授能行謂於剎那生滅諸行不異相續立天授名愚夫於中執爲一爲自相續異處生因異處生名行因卽名行者依此理說天授能行焰及聲異處相續世依此說焰聲能如是天授身能爲識因故世閒亦謂天授能了然諸聖者爲順世閒言說理故亦作是說

경에서 설하기를, “온갖 식(識)이 능히 소연을 요별한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식은 소연에 대해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인가?(수론)
어떠한 작용도 하는 일이 없다. 다만 대상과 유사하게 생겨났을 뿐이니, 마치 결과가 원인에 따른 것과 같다. 이를테면 결과가 비록 [원인에 대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을지라도 원인과 유사하게 생겨나는 것을 설하여 ‘원인에 따른다’고 말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식이 생겨나 비록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을지라도 대상과 유사하게 생겨났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대상을 요별한다’고 말한 것이다.55)(세친)
027_0676_a_20L經說諸識能了所識於所緣爲何所作都無所作以境生如果酬因雖無所作而似因說名酬因如是識生雖無所作而似境故說名了境
027_0676_b_02L대상과 어떻게 유사한 것인가?(수론)
이를테면 그 같은 대상의 상(相)을 띠는 것이니,56) 그렇기 때문에 모든 식이 비록 [대상뿐만 아니라] 근(根)에도 역시 의탁하여 생겨날지라도 근을 요별한다고 하지 않고 다만 대상을 요별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혹은 식이 대상에 근거하여 상속 생기할 때 전찰나의 식을 원인으로 삼아 후찰나의 식이 인기(引起)되는 것을 설하여 ‘식이 능히 요별한다’고 하여도 역시 아무런 과실이 없으니, 세간에서는 원인을 작자로 설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종이나 북이 능히 울린다’고 설하는 것처럼, 혹은 ‘등불이 능히 타오른다’고 설하는 것처럼 ‘식이 능히 요별한다’고 하는 경우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세친)
027_0676_a_24L如何似境謂帶彼是故諸識雖亦託根生不名了根但名爲了境或識於境相續生時識爲因引後識起說識能了亦無有世閒於因說作者故如世間說鍾鼓能鳴或如燈能行識能了亦爾
어떠한 이치에 근거하여 ‘등불이 능히 타오른다’고 설한 것인가?(수론)
불꽃의 상속 중에 일시 ‘등불’이라는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등불이 다른 곳에서 상속하여 생겨날 때를 ‘등불이 능히 타오른다’고 설하였으니, 이와는 다른 별도의 ‘능히 타오르는 것’(즉 실체로서의 등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음의 상속을 일시 ‘식’이라 이름한 것으로, 다른 대상에서 생겨날 때를 일컬어 ‘능히 요별한다’고 설한 것이다. 혹은 ‘색이 존재한다’거나 ‘색이 생겨난다’, ‘색이 지속한다’고 하여도 여기에 별도의 ‘존재하는 것’이나 ‘생겨나는 것’, ‘지속하는 것’(즉 운동의 주체)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식이 능히 요별한다’고 설하는 경우의 이치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세친)
027_0676_b_06L依何理說燈能行焰相續中假立燈號燈於異處相續生時說爲燈行無別行如是心相續假立識名於異境生時說名能了或如色有色生色住此中無別有生住者說識能了理亦應然

만약 후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것은 [전찰나의] 식에 따른 것으로,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후찰나의 식은 항상 전찰나의 식과 유사하지 않은 것이며, 아울러 싹이나 줄기, 잎 등의 경우처럼 다음 찰나에 생겨나는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인가?(수론)
027_0676_b_11L若後識生從識非我何緣從識不恒似前及不定次生如芽莖葉等
유위법에는 모두 주이(住異)의 상(相)이 존재하기 때문이니, 이를테면 모든 유위법은 그 본성[自性法爾]상 미세하게 상속하여 후찰나는 반드시 전찰나와 다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의식을 놓아 선정에 들 때, 신심(身心)의 상속이 [전찰나와] 서로 유사하게 생겨나 후찰나의 그것은 초찰나의 그것과 어떠한 차별도 없어야 하기 때문으로, 마땅히 최후 찰나는 자연적으로 선정으로부터 나간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027_0676_b_13L有爲皆有住異相故謂諸有爲自性法爾微細相續後必異前若異此者縱意入定身心相續相似而生後念與初無差別故不應最後念自然從定出
그리고 모든 마음의 상속에도 역시 정해진 순서가 있으니, 만약 이 같은 마음 다음에 그 같은 마음이 마땅히 생겨나야 한다고 할 경우,57) 이 같은 마음 뒤에 반드시 그 같은 마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또한 [온갖 마음의 상속에는] 일부 그 행상(行相)이 평등한 마음이 있어야 비로소 능히 서로를 낳게 되고 [그 밖의 다른 마음을 낳지 않게 되니], 종성(種姓, 종류)이 다르기 때문이다.58)
027_0676_b_17L諸心相續亦有定次若此心次彼心應生於此心後彼必生故亦有少分行相等心方能相生種性別故
이를테면 여인의 마음은 무간에 몸을 장엄하려고 하거나 혐오스럽다는 마음을 일으키고, 혹은 그녀의 남편이나 그녀의 아들에 대한 마음 따위를 일으키며, 그 후 이러한 온갖 마음의 상속의 전변과 차별에 의해 다시 여인의 마음을 낳게 되는 것과 같다. 이처럼 여인의 마음은, 후찰나에 일어날 장엄하려고 하거나 혐오스럽다는 마음에 대해서는 그것을 낳게 하는 공능을 갖지만 이와 다른 마음(이를테면 몸을 아무렇게 내버려 두려는 마음)을 낳게 하는 공능은 갖지 않으니, 그것은 종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027_0676_b_20L如女心無閒起嚴污身心或起彼夫彼子心等後時從此諸心相續轉變差別還生女心如是女心於後所起嚴污心等有生功能異此無功能由種性別故
027_0676_c_02L나아가 여인의 마음은 무간에 다수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다. 그렇지만 다수의 마음 중에서 이전에 자주 일어났던 것과 명료한 것과 가까이서 일어난 것이 먼저 일어나고 그 밖의 것은 뒤에 일어나니, 이와 같은 마음은 닦은 힘[修力]이 강하기 때문이다.59) 그러나 장차 마음을 일으키려는 상태에서 소의신이나 [두드러진] 외적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만은 예외로 한다.(세친)
027_0676_b_24L女心無閒容起多心然多心中若先數起明了近起先起非餘由如是心修力强故唯除將起位身外緣差別
닦은 힘이 가장 강성한 마음이라면 어찌 항상 자신의 결과를 산출하지 않는 것인가?(수론)
[닦은 힘이 강한] 이러한 마음에도 주이(住異)의 상이 존재하여 [점차 미약해지기] 때문이니, 바야흐로 이러한 주이의 상은 닦은 힘에 의해 낳아진 또 다른 과보가 상속하여 생겨나는 중에도 수순하기 때문이다.60)
027_0676_c_04L諸有修力最强盛者寧不恒時生於自果由此心有住異相故此住異相於別修果相續生中最隨順故
온갖 마음의 품류가 순서대로 상생(相生)하는 인연의 일부분에 대해 나는 이미 간략하게 설하였지만, 그 모두를 이해하는 이는 오로지 세존뿐이니, 일체법 중에 대한 지혜가 자재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뜻에 의거하여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027_0676_c_07L諸心品類次第相生因緣方隅我已略說委悉了達唯在世尊一切法中智自在故依如是義故有頌言

한 마리 공작의 꼬리[輪]에 대한
일체 모든 종류의 원인은
그 어떤 다른 지(智)의 경계가 아니니,
오로지 일체지(一切智)께서만이 아실 뿐이네.
027_0676_c_10L於一孔雀輪
一切種因相
非餘智境界
唯一切智知

[구체적 형색을 지닌 공작새의] 차별되는 온갖 색(色)의 원인조차 알기 어렵거늘 하물며 심ㆍ심소라는 온갖 무색법의 인연차별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인가?61)
027_0676_c_12L色差別因尚爲難了況心心所諸無色法因緣差別可易了知

어떤 부류의 외도는 이와 같이 주장하고 있다.“온갖 마음이 생겨날 때 그것들은 모두 ‘아’로부터 생겨난 것이다.”62)(승론)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힐난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적절할 것이니,63) 만약 온갖 마음이 모두 ‘아’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연유에서 뒤의 의식은 항상 이전의 의식과 유사하지 않으며, 아울러 [씨앗으로부터] 싹이나 줄기, 잎 등이 생겨나는 것처럼 다음 찰나에 생겨나는 것이 일정하지 않은 것인가?
027_0676_c_14L一類外道作如是執諸心生時皆從於我前之二難於彼最切若諸心生皆從我者何緣後識不恒似前及不定次生芽莖葉等
만약 [자아가] 의식과 ‘결합’하는 차별에 근거함으로 말미암아 이전과는 다른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을 것이니, 자아와 다른 어떤 것이 결합한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며,64) 또한 [‘결합’의 존재를 인정한다 할지라도] 두 가지 실체가 결합하는 것에는 한계[分限]가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 스스로 ‘결합’의 특상에 대해 해석하여 말하기를, “일찍이 접하지 않은 것[非至]이 그 후 접하게 된 것을 결합이라 이름한다”65)고 하였으므로 자아와 의식의 결합에는 마땅히 한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66)
027_0676_c_18L若謂由待意合差別有異識生理定不然我與餘合非極成故二物合有分限故謂彼自類釋合相非至爲先後至名合我與意合應有分限
또한 그럴 경우 의식이 이전(移轉)하기 때문에 자아도 마땅히 이전해야 할 것이며, 혹은 의식과 함께 괴멸하기도 해야 하는 것이다.67) 만약 부분적으로 결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결정코 그렇지 않으니, 단일한 자아 자체에는 별도의 부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68) 설혹 ‘결합’을 인정할지라도 이미 자아 자체는 상주하는 것이고, 의식도 별도의 다른 점이 없는 것인데, 결합한다고 하여 어찌 [이전과는] 다른 의식이 생겨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69)
027_0676_c_22L意移轉故我應移轉或應與意俱有壞滅若謂一分合理定不然於一我體中無別分故設許有合體旣常意無別異合寧有別
027_0677_a_02L만약 별도의 ‘지각[覺]’을 근거로 하여 [이전과는 다른 의식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역시 동일한 난점이 안게 될 것이니, 이를테면 그 때의 지각은 무엇에 의해 다양한 차별이 있게 되는 것인가?70)
027_0677_a_02L若待別爲難亦同謂覺因何得有差別
만약 ‘행(行)’의 차별에 근거하여 자아와 의식이 결합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단지 마음만이 행의 차별에 근거하는 경우에도 능히 [이전과는] 다른 의식을 낳을 수 있을 것인데 자아가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71) 자아는 [다양한] 의식을 낳는 데 어떠한 작용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온갖 의식은 모두 자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약으로써도 능히 고질병을 제거할 수 있는데 돌팔이 의사[誑醫]가 속임수로서 ‘보사하(普莎訶)’라는 말을 설하는 것과 같다.72)
027_0677_a_03L待行別我意合者則應但心待行差別能生異識何用我爲我於識生都無有用而言諸識皆從我生如藥事成能除痼疾誑醫矯說普莎訶言
만약 ‘이러한 두 가지(마음과 행)는 자아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말일 뿐으로, 그것의 근거가 될 만한 어떠한 이치도 없는 것이다. 또한 만약 ‘자아는 이러한 두 가지의 소의(所依)가 된다’고 한다면, 무엇이 무엇에 대해 소의가 된다는 뜻인가? 마음과 행은 그림과 같고 과일과 같으며, 자아는 그것을 능히 지니는 벽과 같고 그릇과 같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와 같다고 한다면 바로 서로를 장애한다는 과실을 범하게 될 것이고, 아울러 혹 어떤 때에는 개별적으로 머물게 된다는 과실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73)(이상 논주 세친)
027_0677_a_07L謂此二由我故有此但有言無理爲若謂此二我爲所依如誰與誰爲所依義非心與行如畫如果我爲能持如壁如器如是便有更相礙失有或時別住失故
벽이나 그릇의 경우처럼 자아가 그것(마음과 행)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승론)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가?(세친)
이러한 자아는 다만 지(地)가 향(香) 등의 네 실체의 소의가 되는 것과 같을 뿐이다.74)(승론)
027_0677_a_12L非如壁器我爲彼若爾如何此但如地能爲香等四物所依
그들이 그와 같이 말하였다면 이는 바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하여 성취하는 것이기에 나는 이에 대해 참으로 기뻐하는 바이다. 즉 세간의 지(地)가 향 등을 떠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아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할 것으로, 마음과 행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가 능히 향 등을 떠난(배제한) ‘지’를 요별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향 등이 취집(聚集)된 것을 세속에서 ‘지’라고 하는 말로 설정하여 유포한 것일 뿐이다. 자아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여 다만 마음 등의 온갖 온(蘊)의 차별을 일시 ‘자아’라는 명칭으로 설정한 것일 뿐이다.(세친)
027_0677_a_14L彼如是言證成無我故我於此深生喜慰如世閒地不離香等亦應爾非離心行誰能了地離於香但於香等聚集差別世俗流布立以地名我亦應然但於心等諸薀差假立我名
만약 향 등을 떠나 지(地)가 별도로 존재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어째서 ‘지’에 향 등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인가?(승론)
[가설적 존재인] ‘지’ 자체에 향 등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지’에 향 등이 존재한다고 설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이것(‘지’)은 바로 이 같은 향 등일 뿐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한 것으로, 마치 세간에서 목상신(木像身) 등으로 말하는 것과 같다.75) 또한 만약 실재하는 자아가 행(行)의 차별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째서 동시에 일체의 지(智)를 낳지 않는 것인가?76)(세친)
만약 어느 때 이러한 행의 작용이 가장 강력해지면, 이것이 능히 그 밖의 다른 작용을 막아 결과를 낳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77)(승론)
027_0677_a_19L若離香等無別有地何說言地有香等爲顯地體有香等故卽於地說有香等令他了達是此非餘如世閒言木像身等又若有我待行差別何不俱時生一切智若時此行功用最强此能遮餘令不生果
027_0677_b_02L어찌하여 강력한 작용으로부터 그 결과가 항상 낳아지지 않는 것인가?78)(세친)
답:이는 앞서 언급한 반복하여 닦은 힘[修習力, 즉 熏習]의 도리와 같은 것으로서,79) 행은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변이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승론)
027_0677_b_02L寧從强者果不恒生此如前修力道理許行非常漸變異故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자아를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될 것이니, 마음의 차별은 [다양한] 행(行)의 힘에 의해 낳아지기 때문이며, 그러한 행과 이러한 닦은 힘은 본질적으로 어떠한 차이도 없기 때문이다.80)(세친)
027_0677_b_03L若爾計我則爲唐捐行力令心差別生故
자아는 그 자체로서 진실로 존재한다고 결정코 마땅히 믿어야 할 것이니, 기억[念] 등의 속성[德句義]을 갖기 때문이다. 즉 속성은 반드시 실체[實句義]에 의존해야 하기 때문으로, 기억 등이 다른 어떤 존재에 의존한다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81)(승론)
027_0677_b_04L彼行此修體無異故必定應信我體實有以有念等德句義故德必依止實句義故念等依餘理不成故
이러한 논증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기억 등은 속성의 범주에 포섭되는 것으로, 그 자체는 모두 실체가 아니다’고 설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으니,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모두 실체라고 이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며,82) 경에서도 여섯 가지의 실체적인 범주[實句]를 설하여 사문과(沙門果)라고 이름하고 있기 때문이다.83) 그리고 그 같은 기억 등이 실유의 자아에 근거한다고 하는 것도 이치상 역시 이루어질 수 없으니, ‘근거(즉 所依)’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비판하고 부정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84)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승론에서] 주장한 자아는 다만 헛된 말에 지나지 않는다.(세친)
027_0677_b_07L此證非理不極成故謂說念等德句義攝體皆非實義不極成許有別體皆名實故經說六實物名沙門果故彼依實我理亦不成依義如前已遮遣故由此所立但有虛言

만약 자아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무엇 때문에 업을 짓는 것인가?(승론)
내가 응당 고락(苦樂)의 과보를 향수하기 때문이다.(세친)
027_0677_b_12L若我實無爲何造爲我當受苦樂果故
그 때 ‘나[我]’의 본질은 무엇인가?(승론)
이를테면 아집(我執) 즉 자아관념의 대상이다.85)(세친)
027_0677_b_13L我體是何謂我執境
무엇을 아집의 대상이라고 일컬은 것인가?(승론)
이를테면 제온(諸蘊)의 상속이다.(세친)
何名我執境謂諸蘊相續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승론)
그 같은 제온을 탐애(貪愛)하기 때문이며, 희다는 등의 지각[覺]과 더불어 동일한 처소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86) 이를테면 세간에서 ‘나는 희다’, ‘나는 검다’, ‘나는 늙었다’, ‘나는 젊었다’, ‘나는 야위었다’, ‘나는 뚱뚱하다’고 말한다. 즉 세간을 현견(現見)하건대 ‘희다’는 등의 사실을 소연으로 하는 지각과 아집(자아관념)은 동일한 처소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그대가] 주장하는 자아가 이 같은 희다는 등의 지각과 차별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87) 따라서 아집은 다만 제온을 조건[緣]으로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세친)
027_0677_b_14L云何知然貪愛彼故與白等覺同處起故謂世有言我白我黑我老我少我瘦我肥現見世閒緣白等覺與計我執同處而生非所計我有此差別故知我執但緣諸薀
몸(즉 색온)은 자아를 방호하는 은혜가 있기 때문에 몸에 대해서도 역시 ‘나’라고 가설하기도 하니, 이를테면 ‘신하 등이 바로 나의 몸이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88)(승론)
은혜가 있는 것에 대해 실로 ‘나’라고 가설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온갖 자아관념이 취하는 대상은 그렇지가 않다.89)(세친)
027_0677_b_19L以身於我有防護恩亦於身假說爲我如言臣等卽是我身於有恩中實假說我而諸我執所取不然
만약 몸을 근거로 하여서도 역시 자아관념을 일으킨다고 인정한다면, 어찌하여 다른 이의 몸을 근거로 하여서는 자아관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승론)
다른 이의 몸과 자아관념은 서로 관계[相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몸이나 마음은 자아관념과 서로 관계하므로 이러한 자아관념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일어나지만 다른 이의 그것을 근거로 하여서는 일어나지 않으니, 무시(無始) 이래로 그와 같이 익혀 왔기 때문이다.(세친)
027_0677_b_22L若許緣身亦起我執寧無我執緣他身起他與我執不相屬故謂若身若心與我執相屬此我執起緣彼非餘無始時來如是習故
027_0677_c_02L‘서로 관계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승론)
이를테면 인과성을 말한다.90)(세친)
027_0677_c_02L相屬謂何謂因果性
만약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라고 하는 관념[我執]은 누구의 것인가?(승론)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해석하였는데 어찌 다시금 되풀이하여 묻는 것인가? 이를테면 나는 앞에서 이미 “어떠한 뜻에 근거하여 [‘누구의’라고 하는] 소유격을 설하게 된 것인가?”라고 묻고서 원인에 결과가 소속된다는 사실에 대해 분별하였다.91)(세친)
027_0677_c_03L若無我體誰之我執此前已釋寧復重來謂我於前已作是說爲依何義說第六聲乃至辨因爲果所屬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자아관념은 무엇을 원인으로 삼는 것인가?(승론)
이를테면 무시(無始) 이래 자아관념이 [종자로서] 훈습되어 자신의 상속을 소연으로 삼아 더럽고 오염된 마음을 낳으니, [이것이 바로 자아관념의 원인이 된다].(세친)92)
027_0677_c_06L若爾我執以何爲因謂無始來我執熏習緣自相續有垢染心

만약 ‘자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고락(苦樂)을 향유하는 것인가?(승론)
만약 이것(자상속의 몸과 마음)에 근거하여 고락이 생겨났으면 바로 이것이 고락을 향유한다고 설하니, 마치 숲이 과실을 향유하고 나무가 꽃을 향유하는 것과 같다.(세친)
027_0677_c_07L我體若無誰有苦樂若依於此有苦樂生卽說名爲此有苦樂如林有果及樹有花
그렇다면 고락은 무엇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는 것인가?(승론)
이를테면 내(內) 6처(處)이니, 그것에 의해 일어난 고ㆍ낙수에 따라 그러한 고락의 근거가 된다고 설한 것이다.93)(세친)
027_0677_c_10L苦樂依何謂內六處隨其所起說爲彼依
만약 ‘자아’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누가 능히 업을 짓고, 누가 능히 그 과보를 받는 것인가?(승론)
‘짓는다’고 하는 것과 ‘받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세친)
‘짓는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능작자(能作者)를 말하고, ‘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향수자를 말한다.(승론)
이것은 단지 말만 바꾼 것일 뿐 그 뜻을 드러내지는 못한 것이다.(세친)
027_0677_c_11L若我實無誰能作業誰能受果作受何義作謂能作受謂受者此但易名未顯其義
법상(法相)을 분별하는 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94)“능히 자신의 힘[自在力]만으로 행하는 자를 일컬어 ‘작자’라고 하며, 능히 업의 과보를 수령하는 이를 일컬어 ‘향수자’라고 한다. 세간을 현견하건대 이 같은 사업(事業)을 능히 스스로의 힘으로써 할 수 있는 이를 일러 능작자라고 하니, 이를테면 천수(天授)는 목욕과 식사와 보행을 스스로의 힘으로써 할 수 있기 때문에 ‘목욕하는 자’ 등으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다.”(승론)
027_0677_c_13L辯法相者釋此相言能自在爲名爲作者能領業果得受者名現見世閒於此事業若得自在名爲能作如見天授於浴食行得自在故名浴等者
여기서 그대들은 무엇을 ‘천수’라고 설한 것인가? 만약 실유의 자아를 설하여 ‘천수’라고 하였다면 그 같은 비유는 상식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며, 만약 제온을 설하여 천수라고 하였다면 그는 스스로의 힘만으로써 행하는 작자가 아니어야 할 것이다.
027_0677_c_17L此中汝等說何天授若說實我喩不極成說薀便非自在作者
즉 업에는 이를테면 신(身)ㆍ어(語)ㆍ의(意)의 세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바야흐로 신업을 일으킬 때에는 반드시 몸과 마음에 의지하여야 하고, 몸과 마음은 각기 자신의 인연에 근거하여 일어나며, 나아가 이러한 인연도 다시금 자신의 인연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여기에 스스로의 힘만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일체의 유위법은 인연에 계속(繫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대들이 주장하는 자아는 인연을 근거로 하지 않으며, 또한 역시 어떠한 것도 짓는 일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힘으로써 행하는 작자가 아니다.
027_0677_c_19L業有三種謂身且起身業必依身心身心各依自因緣轉因緣展轉依自因緣於中無一自在起者一切有爲屬因緣故汝所執我不待因緣亦無所作故非自在
027_0678_a_02L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대들은 능히 자신의 힘만으로 행하는 자를 일컬어 ‘작자’라 한다고 설하였지만, 그러한 형태의 작자는 인식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제법을 낳는 인연 중에 만약 뛰어난 작용을 지닌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일시 ‘작자’라고 이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대들이 주장한 자아는 어떠한 작용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정코 마땅히 ‘작자’라고 이름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세친)
027_0677_c_24L由此彼說能自在爲名作者相不可得然於諸法生因緣中若有勝用假名作者非所執我見有少用故定不應名爲作者
그렇다면 능히 신업을 낳는 뛰어난 원인은 무엇인가?(승론)
이를테면 기억으로부터 욕락(欲樂)이 낳아지면 욕락은 심(尋)과 사(伺)를 낳고, 심과 사는 노력[勤勇]을 낳으며, 노력은 바람[風, 신업을 인기하는 힘]을 낳으니, 바람이 신업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들이 주장하는 자아가 이 중의 어떤 작용을 한다고 하겠는가? 따라서 자아는 신업의 작자가 아니다. 나아가 어업과 의업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도 이에 준하여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027_0678_a_04L能生身業勝因者何謂從憶念引生樂欲樂欲生尋尋伺生勤勇勤勇生風風起身業汝所執我此中何用故於身業我非作者語意業起類此應思
또한 ‘자아가 능히 업의 과보를 수령한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만약 자아가 능히 과보를 요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결정코 그렇지 않다. 즉 자아는 어떠한 요별의 작용도 갖지 않으니, 이에 대해서는 앞서 의식을 낳는 원인을 분별하면서 이미 부정하고 비판하였기 때문이다.95)(세친)
027_0678_a_08L我復云何能領業果若謂於果我能了別此定不然我於了別都無有用於前分別生識因中已遮遣故

만약 ‘자아’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온갖 비정처(非情處)에 의지하여서는 죄와 복이 생장하지 않는 것인가?96)(승론)
그것들은 수(受) 등의 소의지(所依止)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로지 내(內) 6처(處)만이 바로 그러한 ‘수’ 등의 소의가 될 뿐으로, 자아는 그것의 소의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세친)
027_0678_a_11L若實無我如何不依諸非情處罪福生長彼非愛等所依止故唯內六處是彼所依我非彼依如前已說

만약 ‘자아’가 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업은 이미 괴멸하였는데 어떻게 다시 능히 미래의 과보를 낳을 수 있는 것인가?(승론)
설혹 실유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업은 이미 괴멸하였는데 어떻게 다시 능히 미래의 과보를 낳을 수 있는 것인가?(세친)
자아에 의지하는 법(法)과 비법(非法)으로부터 생겨난다.97)(승론)
027_0678_a_14L若實無我業已滅壞云何復能生未來果設有實我已滅壞復云何能生未來果從依止法非法生
그럴 경우 무엇이 무엇에 의지하는 것과 같은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파하였으니,98) 그렇기 때문에 법과 비법은 응당 자아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성교(聖敎) 중에서는 ‘이미 괴멸한 업으로부터 미래의 과보가 생겨난다’고 하는 이와 같은 내용을 설하고 있지 않다.99)(세친)
027_0678_a_17L如誰依誰此前已破法非法不應依我然聖教中不作是從已壞業未來果生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미래의 과보는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승론)
업의 상속(相續)의 전변(轉變)과 차별(差別)에 의해 생겨나니, 마치 종자가 과실을 낳는 것과 같다. 즉 세간에서 ‘열매는 종자로부터 생겨난다’고 설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열매는 이미 괴멸한 종자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역시 또한 종자가 무간(無間)에 직접적으로 낳는 것도 아니다.(세친)
027_0678_a_19L若爾從何業相續轉變差別如種生果如世閒果從種生然果不從已壞種起亦非從種無閒卽生
만약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승론)
종자의 상속의 전변과 차별로부터 바야흐로 열매가 생겨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종자가 싹과 줄기와 잎 등을 순서대로 낳고 마침내 최후로 꽃을 낳아 비로소 열매를 인기(引起)하게 되는 것이다.(세친)
027_0678_a_22L若爾從何從種相續轉變差別果方得生謂種次生芽莖葉等花爲最後方引果生
027_0678_b_02L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떻게 종자로부터 열매가 생겨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승론)
종자가 계속 발전[展轉]하여 꽃 중에 열매를 낳는 공능을 인기하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으로, 만약 꽃 중의 열매를 낳는 이 같은 공능이 선행한 종자로부터 인기된 것이 아니라면 생겨난 열매의 형상은 마땅히 종자와 달라야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업으로부터 과보가 생겨났다고 말할지라도 그것은 이미 괴멸한 업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역시 또한 업으로부터 무간에 직접적으로 과보가 낳아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업의 상속의 전변과 차별로부터 생겨날 뿐이다.(세친)
027_0678_a_24L若爾言從種生果由種展轉引起花中生果功能故作是說若此花內生果功能非種爲先所引起者所生果相應與種別如是雖言從業生果而非從彼已壞業生亦非從業無間生果從業相續轉變差別生
무엇을 일컬어 ‘상속’과 ‘전변’과 ‘차별’이라 한 것인가?100)(승론)
이를테면 먼저 선행하는 업이 있고서 그 후 색심(色心)이 간단(間斷) 없이 일어나는 것을 일컬어 ‘상속’이라 하고, 이러한 상속의 후후(後後) 찰나가 전전(前前) 찰나와 다르게 일어나는 것을 일컬어 ‘전변’이라고 하며, 이러한 전변의 최후 찰나에 뛰어난 공능이 있어 무간에 과보를 낳음으로써 여타의 다른 전변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차별’이라 이름하게 된 것이다.
027_0678_b_07L何名相續轉變差別謂業爲先後色心起中無閒名爲相續卽此相續後後剎那異前前生名爲轉變卽此轉變於最後時有勝功能無閒生果勝餘轉變名差別
그리고 유취식(有取識)이, 바로 목숨을 마칠 때 비록 후유(後有)를 초래할 만한 다수의 업에 의해 인기된 훈습(熏習, 즉 종자)을 지닐지라도 무거운 업(業)과 가까이서 일어난 업과 자주 익힌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이 명료하며, 그 밖의 다른 업에 의해 인기된 것은 그렇지 않으니,101) 어떤 게송에서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027_0678_b_12L如有取識正命終時雖帶衆多感後有業所引熏習而重近起數習所引明了非餘如有頌言

극중한 업과 가까이서 일으킨 업과
자주 익힌 업과 먼저 지은 업 중에서
앞의 것이 먼저, 뒤의 것이 나중에 익으면서
생사를 윤전(輪轉)하는 것이로다.
027_0678_b_14L業極重近起
數習先所作
前前前後熟
輪轉於生死

여기에 차별이 있다면 이숙인에 의해 인기된 종자에는 이숙과를 낳는 공능이 있지만, 이숙과를 낳고 나서는 바로 낙사(落謝)하여 소멸한다. 또한 동류인에 의해 인기된 종자에는 등류과를 낳는 공능이 있는데, 만약 염오한 것이라면 대치도가 일어날 때 바로 낙사하여 소멸하지만 불염오성일 경우 반열반에 들 때 바야흐로 영원히 낙사하여 소멸하니, 색심의 상속이 그 때 영원히 소멸하기 때문이다.102)(이상 세친)
027_0678_b_16L於此義中有差別者異熟因所引與異熟果功能與異熟果已卽便謝滅同類因所引與等流果功能若染污者對治起時卽便謝滅不染污者般涅槃時方永謝滅以色心相續爾時永滅故

종자의 열매[種果]로부터는 또 다른 열매가 낳아지는데, 어떠한 연유에서 이숙과는 이와 달리 능히 이숙과를 낳지 못하는 것인가?(승론)
바야흐로 비유와 법이 모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에 대해 말하자면] 종자의 열매로부터 또 다른 열매가 생겨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이다.(세친)
027_0678_b_22L何緣異熟果不能招異熟如從種果有別果生且非譬喩是法皆等然從種果無別果生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또 다른 열매는 무엇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인가?(승론)
027_0678_b_24L若爾從何生於後果
027_0678_c_02L뒤의 또 다른 열매는 [종자의 열매가] 그 후 익고 변화하는 숙변(熟變)의 차별에 의해 생겨난다. 이를테면 앞의 종자의 열매가 그 후 물이나 땅 등의 온갖 숙변의 조건을 만나 능히 숙변의 차별을 낳아 바로 싹을 틔우는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종자’라는 명칭을 얻게 되는데, 아직 숙변의 차별을 낳지 않았을 때에는 미래에 얻게 될 명칭[當名]에 따라 그렇게 설한 것일 뿐이다. 혹은 종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세간에서 그것(종자의 열매)을 ‘종자’라고 설하게 된 것이다.103)
027_0678_c_02L從後熟變差別所生謂於後時卽前種果遇水土等諸熟變緣便能引生熟變差別正生芽位方得種未熟變時從當名說或似種故世說爲種
이것(이숙과)도 역시 이와 같으니, 앞의 이숙과가 정(正)ㆍ사(邪) 등의 법을 듣거나 선ㆍ악의 온갖 업을 일으키는 연을 만나 온갖 선한 유루와 온갖 불선의 이숙을 초래하는 마음[有異熟心]을 능히 낳으며, 이것으로부터 낳아진 상속이 전변(轉變)하기를 계속[展轉]하다가 [최후 찰나에 이르러] 능히 전변의 차별(差別)을 인기한다. 곧 이 같은 차별로부터 뒤의 이숙과가 낳아지는 것이지 다른 어떤 것(즉 이숙과)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앞의 비유는 법과 동일한 것이다.104)
027_0678_c_06L此亦如是卽前異熟遇聞正邪等諸起善惡緣便能引生諸善有漏及諸不善有異熟心從此引生相續轉變展轉能引轉變差別從此差別後異熟生非從餘生故喩同法
혹은 또 다른 법(비유)에 의해서도 이러한 사실을 유추하여 알 수 있으니, 이를테면 구연화(拘櫞花)에 자광즙(紫礦汁)을 바를 경우 그 상속의 전변과 차별을 원인으로 하여 그 후 열매를 맺을 때 속씨의 색깔이 붉게 되지만, 이러한 붉은 색의 열매로부터는 더 이상 또 다른 붉은 색의 열매가 생겨나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업의 이숙과로부터 더 이상 또 다른 이숙과가 능히 낳아지지 않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세친)
027_0678_c_10L或由別法類此可知如拘櫞花塗紫鑛汁相續轉變差別爲因後果生時瓤便色赤從此赤色更不生餘如是應知業異熟更不能引餘異熟生

이상은 바야흐로 나(세친) 자신의 각혜(覺慧)의 경계에 따라 온갖 업과 그 과보에 대해 간략하게 그 대충만을 밝힌 것으로, 세부적으로 또 다른 종류의 차별 공능이나 온갖 업에 의해 훈습된 상속이 전변하고, 그러 그러한 상태에 이르러 그러 그러한 과보를 낳게 된다는 것은 오로지 부처님만이 깨달아 아실 뿐 그 밖의 다른 이들이 알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니, 이와 같은 뜻에 따라 어떤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027_0678_c_14L前來且隨自覺慧境於諸業果略顯麤相其閒異類差別功能諸業所熏相續轉變至彼彼位彼彼果生唯佛證知非餘境界依如是義故有頌曰

이러한 업과 이러한 훈습과
이러한 때에 이르러 결과를 낳는다는
일체의 모든 종류의 결정적 이치는
부처님 이외에는 능히 아는 자가 없으리.
027_0678_c_18L此業此熏習
至此時與果
一切種定理
離佛無能知

이러한 청정(淸淨)의 원인인 도에 대해 이미 잘 설하였으니
말하자면 그것은 부처님의 지극한 말씀인 진실의 법성으로,
마땅히 눈먼 온갖 외도들이 주장하는 악견(惡見)과
그에 따른 악행을 버리고서 지혜의 눈을 추구해야 하리라.
027_0678_c_20L已善說此淨因道
謂佛至言眞法性
應捨闇盲諸外執
惡見所爲求慧眼

이러한 열반궁(宮)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넓은 길은
천(千)의 성자들이 거닐었던 무아성(無我性)의 이치로
모든 불일(佛日)의 말씀의 빛[言光]이 비추었던 바인데,
길을 열었음에도 우매한 눈들은 능히 보지 못하도다.
027_0678_c_22L此涅槃宮一廣道
千聖所遊無我性
諸佛日言光所照
雖開殊眼不能睹
027_0679_a_02L
이같이 한 귀퉁이의 말씀을 간략히 설한 것은
지자(智者)의 혜독(慧毒)의 문을 열기 위함이었으니,105)
바라건대 각자 자신의 힘이 감당할 만한 능력에 따라
알아야 할 바를 두루 깨달아 뛰어난 업을 성취해야 하리라.106)
027_0678_c_24L於此方隅已略說
爲開智者慧毒門
庶各隨己力堪能
遍悟所知成勝業
說一切有部俱舍論卷第三十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
  1. 1)『잡아함경』 권제3 제73경 「중담경(重擔經)」(대정장2, p.19상). 여기서 중담 즉 무거운 짐(bhāra)이란 5온을 말하며, 무거운 짐을 취한다(bhārādāna)는 것은 당래의 애탐 등을, 버린다(bhāranikkhepana)는 것은 애탐 등의 영단(永斷)을, 무거운 짐을 진 자(bhārahāra)는 사부(士夫) 즉 푸루샤(puruṣa)를 말한다.
  2. 2)즉 보특가라가 5온의 가명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바로 무거운 짐으로, 무거운 짐이 무거운 짐을 질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같은 법문은 실유의 보특가라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
  3. 3)보특가라(자아)는 능히 짐을 지는 자이기 때문에 온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짐을 취하는 것’ 역시 능히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에 포섭시켜서는 안 된다는 힐난.
  4. 4)‘무거운 짐을 진 자’에서 짐과 진 자가 개별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무거운 짐(온)’과 그것을 ‘취하는 것(애)’도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으로, 무거운 짐이 바로 자신을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취하는 것’을 경에서는 애(愛, 행온에 포섭됨)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5온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거운 짐을 진 자(보특가라)’ 역시 5온에 포섭되는 것으로 제온의 상속(짐을 진다는 경험)상에 일시 설정된 존재(假說, 또는 世俗)일 뿐이다.
  5. 5)본론 권제29 주98)의 『인계경(人契經)』 후반부.
  6. 6)『본사경(本事經)』 권제5(대정장17, p.687) 참조. 『대비바사론』 권제198(한글대장경125, p.515),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화생의 유정도 없다’고 하면, 이것은 원인을 비방하는 사견으로서 견집소단이고, 혹은 결과를 비방하는 사견으로서 견고소단이기다 하다.……” 여기서 화생의 유정이 없다고 함은 그것이 받을 업을 부정하거나 혹은 받게 되는 화생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보광은 화생의 유정을 중유(中有)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부는 화생의 유정을 실유의 자아로 해석하여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7. 7)화생의 유정은 제온의 상속상에 가립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실유의 자아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같은 실유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사견이라고 한다면 그 같은 사견은 어떠한 도에 의해 끊어질 것인가? 사견은 견소단이지만, 실유의 자아는 현실의 괴로움의 결과도 원인도 아니기 때문에(다시 말해 4제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닌 것이다.
  8. 8)『증일아함경』 권제3(대정장2, p.561상), “有一人出現於世 便有一人入道在於世間.”
  9. 9)본론 권제29 주111) 참조.
  10. 10)어떤 이가 제사나 문법에 관한 학문을 학습 성취함으로써 제사 지내는 이[能祠者, yājñikra]와 문법학자[記論者, vaiyākaraṇa]가 되고, 율의 내지는 병을 획득함으로써 필추(비구) 내지는 병자로 태어나는 것으로, 그것은 실유의 보특가라가 존재하여 이전과는 다른 온을 성취함으로써 그러한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11. 11)『잡아함경』 권제13 제33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대정장2, p.92하). 여기서 법가(dharma saketa, 혹은 俗數法) 5온의 상속상에 일시 설정된 자아를 말하는 것으로, 이 경은 본론 권제9(주30)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12. 12)『잡아함경』 권제15 제372경(대정장2, p.102중), “……수(受)를 연으로 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연으로 하여 취(取)가 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누가 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파구나(頗求那)에게 고하기를, 나는 취하는 자가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취하는 자가 있다고 설한다면 그대는 응당 ‘누가 취하는 것인가’라고 묻겠지만, 그대는 마땅히 무엇을 연으로 하여 취가 있는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13. 13)불교에 있어 실유의 자아는 부정되기 때문에(독자부에 있어서도 자아는 非卽蘊인 동시에 非離蘊이다) 자아의 비유란 있을 수 없다.
  14. 14)즉 명론(明論, vidyā vāda, 학문 일반) 등은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명(名)’ 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능히 취하는 제사를 지내는 이나 문법학자의 색신과 달라야 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소취(所取)의 오온(예컨대 병) 역시 능취의 자아(병자)와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오온과 비일비이(非一非異)라는 명제에 어긋나게 된다. 따라서 인용된 비유는 올바르지 않다.
  15. 15)본론 권제20(p.911) 참조.
  16. 16)각천(覺天)에 의하면 ‘색은 오로지 4대종으로 대종 이외에 조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조색은 바로 대종의 차별일 뿐이다. 그리고 심소 역시 마음의 차별일 뿐이다.’(『대비바사론』 권제127, 한글대장경123, p.39-40) 즉 색ㆍ향ㆍ미ㆍ촉의 조색은 4대종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4대종 밖에 따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온과 보특가라는 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하는 힐난. 그러나 후설하듯이 각천의 설은 유부 내의 이설(異說)이다.
  17. 17)부처님께서는 세간의 상(常)ㆍ무상(無常), 변(邊)ㆍ무변(無邊), 신명(身命)의 일(一)ㆍ이(異), 여래 사후의 유무(有無)에 대해 침묵하시고 언급하지 않았다.(본론 권제19 주116 참조) 즉 그렇게 묻는 것은 바로 전도된 견해이기 때문이다.(『잡아함경』 권제24권 제962경, 대정장2, p.245하)
  18. 18)용군(龍軍) 즉 나가세나(Nāgasena, 那先)는 기원전 2세기 무렵 후반에 활약한 논사로, 북인도의 희랍왕국 박트리아의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인도명 Milinda)와 불교 교리에 대해 문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결과로서 편찬된 것이 『밀린다팡하(Milindapañhā)』(한역은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로, 본론에서의 인용은 이에 따른 것이다. 3명과 6통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7, 8해탈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9(p.1326) 참조.
  19. 19)만약 일찍이 존재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상견(常見)이며,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단견(斷見)이다. 여래는 상견과 단견의 두 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하기 때문에 영혼의 유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20. 20)『잡아함경』 권제34 제961경(대정장2, p.245중).
  21. 21)‘수미산과 같은 아견을 일으킬지라도 겨자씨만한 단견도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니, 아견을 일으킬 때에는 능히 온갖 선업을 닦기 때문에 그 허물이 가볍지만, 단견을 일으킬 때에는 온갖 악업을 짓기 때문에 그 허물이 무겁다. 그래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은 것이다.’(『구사론기』)
  22. 22)이는 경부사 구마라다(鳩摩邏多, Kumaralāta)의 게송으로 전해진다.
  23. 23)이하 신명(身命)의 일(一)ㆍ이(異)를 제외한 세간의 상(常)ㆍ무상(無相), 세간의 변(邊)ㆍ무변(無邊), 여래 사후의 유ㆍ무에 대한 무기의 의미를 밝힌다.
  24. 24)여기서 네 가지 언표란 세간은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며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하는 4구(句)를 말한다.
  25. 25)손에 잡은 참새를 죽이겠는가 살리겠는가라고 물었을 경우, 죽일 것이라고 하면 놓아줄 것이고, 살릴 것이라고 하면 죽이려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 같은 물음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예증.
  26. 26)세간은 끝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있으면서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4구의 물음.
  27. 27)『잡아함경』 권제34 제965경(대정장2, p.247하).
  28. 28)세간의 모든 이가 출리하는가, 그 일부만이 출리하는 것인가? 이는 바로 세간의 무변(상)ㆍ유변(무상)과 동일한 문제로서, 세간에 끝이 없다(영원)고 하면 전부 혹은 일부의 세간도 출리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세간에 끝이 있다(영원하지 않다)고 하면 저절로 출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세간의 모든 이가 출리한다고 하면 출리하지 못하는 어떠한 이도 없어야 할 것이며(저절로 출리하게 될 것이며), 일부만이 출리한다고 하면 일부는 결정코 출리하는 일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29. 29)『중아함경』 권제13 「설래경(說來經)」(대정장1, p.510중).
  30. 30)『잡아함경』 권제30 제833경(대정장2, p.213하), “만약 성(聖) 제자로서 4불괴정(不壞淨)을 성취하면 목숨을 구하면 목숨을 얻을 수 있고……명종하여 천상에 태어나면 열 가지의 법을 획득한다.”
  31. 31)즉 반열반에 들지 않았을 때에는 보특가라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였지만, 반열반에 든 이후는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래 사후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뜻.
  32. 32)이는 곧 열반에 들게 되면 온은 소멸하지만 자아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이온아(離蘊我)’의 상주론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33. 33)원문은 ‘제고(諦故) 주고(住故)’. 『바사』(권199, 한글대장경125, p.545)에서는 이를 실의(實義)와 법이(法爾)로 해석하고 있다.
  34. 34)한역 『아함경』 중에서는 출처 불명. 『발지론』 권제20(한글대장경176, p. 497)에 이 같은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유아(有我)라고 하는 것은 변집견 중의 상견(常見)에 포섭되는 것으로 견고소단이며,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은 변집견 중의 단견(斷見)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35. 35)상동『대비바사론』 권제199(한글대장경125, p.546).
  36. 36)본권 주20).
  37. 37)이에 대해서는 본권 주10) 참조.
  38. 38)묘안(Sunetra, 혹은 善眼)에 대해서는 『중아함경』 권제2 「칠일경(七日經)」(대정장1, p.429);『대비바사론』 권제82(한글대장경121, p.159)를 참조할 것.
  39. 39)지금의 온과 옛날의 온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온이 옛날의 도사였다고 설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뜻.
  40. 40)옛적의 나(묘안)가 바로 지금의 나(석가)라고 한다면, 그 때 ‘나’(즉 보특가라)는 상주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독자부에서 주장하는 보특가라는 제5의 법장으로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이기 때문에 찰나멸하는 것도 아니지만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41. 41)‘이 불은 일찍이 그것을 태웠다’는 말은, 지금의 불이 바로 옛날에 그것을 태운 불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만 그것과 동일한 상속상에 있는 불이라는 뜻이다.
  42. 42)만약 진실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하면 부처도 역시 자아관념[我執]을 갖게 될 것이고, 자아관념을 갖는 한 ‘나의 것[我所]’이라는 관념과 그에 따른 애착을 갖는다고 해야 하며(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임), 스스로도 해탈도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43. 43)부스럼이 몸을 훼손하듯이 독자부의 아견 또한 부처의 참된 성교(聖敎)를 어지럽힐 뿐이라는 힐난.
  44. 44)첫 번째는 바로 독자부의 견해이고, 두 번째는 보광에 의하면 공견(空見)외도, 칭우에 의하면 중관론자의 견해(Madhyamaka citta)이며, 세 번째는 뒤에 설하는 수론(數論)과 승론(勝論)의 견해이다.
  45. 45)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은 일찍이 보았던 것을 기억[憶念, smaraṇa]하여 재인식[記知, pratyabhijñāna, 구역은 更知]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럴 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상속된 기억의 주체는 무엇인가?
  46. 46)즉 일찍이 경험하였던 것을 기억하는 생각들이 종자로서 마음상에 상속 전변하다가 공능의 차별을 일으킬 때 기억이라는 결과가 낳아지게 된다.
  47. 47)천수(Devadatta)는 하늘에 빌어 얻었기 때문에 ‘천수’이며, 사수(Yājña󰠀datta)는 제사를 지내 얻었기 때문에 ‘사수’이지만, 보통 ‘갑돌이’처럼 인명(人名)의 일반적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48. 48)마음은 찰나멸하여 전후가 동일하지 않지만 동일한 상속신 중에 인과적 관계로서 상속하기 때문에 일찍이 전찰나의 마음이 본 것을 후찰나의 마음이 능히 기억하여 알 수 있다.
  49. 49)즉 기억에 따라 어떤 대상을 파악하였다고 할 때 그것은 다만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억하였던 작자에 의해 파악된다는 뜻.
  50. 50)기억의 원인이 되는 심상속의 전변과 차별의 힘(즉 종자)이 후찰나의 기억으로 하여금 대상을 파악하게 하기 때문에 전찰나의 기억의 원인이 바로 작자가 된다.
  51. 51)주인이 그에게 소속된 어떤 것을 부린다고 함은 이미 획득되었거나 생겨난 것에 대해서이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 부린다고 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힐난.
  52. 52)기억과 그것을 통한 재인식은, 주체와 소유의 문제는 동일하며 단지 그 생기의 인연만이 다를 뿐이다. 즉 앞서 논설한 대로 기억은 그것(기억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는 작의(作意)와, 과거의 대상과 지금의 그것이 서로 유사하며 양자가 서로에게 소속된다는 생각 등을 갖고, 의지하는 몸이 차별되지 않으며, 근심과 산란 등의 인연에 의해 기억의 공덕이 손상되거나 괴멸되지 않은 마음의 차별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재인식은 식(識)의 종자를 인(因)으로 삼고, 근(根)과 경(境)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게 된다.
  53. 53)여기서 어떤 이는 보광에 따르면 수론(數論, Saṃkhya)이며, 칭우에 따르면 문법학자(Vaiyākaraṇa, 語典家)이지만, 사실상 앞서 독자부와의 대론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54. 54)찰나에 생멸하는 제온의 상속이 다른 처소에 생겨나는 것을 ‘간다’고 말하며, 그 원인이 되는 전찰나의 제온을 ‘가는 자’라고 이름할 뿐 제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실유의 자아(가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55. 55)보리(결과)는 씨앗(원인)에 대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으며 다만 그것에 따라 유사하게 생겨난 것이듯이 식(識) 또한 그것의 원인이 되는 대상에 따라 유사하게 생겨난 것일 뿐 그것에 대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는다. 즉 원인에 따르는 것이 결과의 작용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식이란 다만 대상(色 내지 法)을 전체적으로 취[總取]하는 것으로(본론 권제1, p.30 주61 참조) 어떤 한 대상의 형상을 지각하고 표상 판단 확인 하는 등의 개별적 작용은 심소의 역할이다.
  56. 56)능연인 식(識)상에 소연이 되는 색이나 향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그것을 다만 ‘요별’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57. 57)3계 12심(욕계 선ㆍ불선ㆍ유부ㆍ무부무기의 4심과 상 2계 각각에 불선을 제외한 3심, 그리고 유학ㆍ무학심)의 상생(相生)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7(p.346 이하) 참조.
  58. 58)22심의 상생 관계에서 생겨나야 할 마음과 생겨나지 않을 마음은 그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항상 동류(同類)로서 상속한다.
  59. 59)여기서 ‘닦은 힘[修習力, bhāvanābala]’이란 반복하여 익힌 힘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습관력을 말한다.
  60. 60)즉 이러한 주이(住異)의 상(相)은 닦은 힘이 강력한 마음을 억제하고, 그것에 의해 일어난 중(中)ㆍ하(下)의 힘을 지닌 또 다른 마음에도 수순하여 점차 미약하게 하기 때문에 닦은 힘이 강력한 마음이 항상 자신의 과보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61. 61)이 같은 겸양의 탄식은 본론 권제4(p.163)에서도 언급된다. “제(諸) 심ㆍ심소의 각기 다른 상은 너무나 미세하여 그 하나하나의 상속을 분별하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1찰나에 동시에 존재함에 있어서랴!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유색(有色)의 온갖 약을 색근(色根, 즉 舌根)으로 취하여 그 맛의 차별을 알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어떤 구체적 형태도 갖지 않는 무색의 법을 오로지 각혜(覺慧, 관념)만으로 파악함에 있어서랴!”
  62. 62)여기서 어떤 부류의 외도란 승론(勝論, Vaiśeṣika)을 말한다. 즉 그들은 세계를 해명함에 있어 실체[實, dravya]ㆍ속성[德, guṇa]ㆍ운동[業, karma] ㆍ보편[同, sāmānya]ㆍ특수[異, viśeṣa]ㆍ화합[同, samavāya]의 6범주[句義, padārtha]를 설정하고, 실체를 다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허공ㆍ시간ㆍ방위ㆍ자아[我, ātman]ㆍ의식[意, manas]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자아 즉 아트만이란 ‘나’라고 하는 관념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 지각이나 쾌ㆍ불쾌ㆍ욕구ㆍ혐오ㆍ노력ㆍ행(行, 잠재적 인상)ㆍ공덕ㆍ불공덕과 같은 속성의 기체(基體)가 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속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트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의식(즉 마음)은 지각 등을 일으키는 하나의 조건이 될 뿐 지각의 주체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의식은 그러한 속성과 화합하지 않고서 지식을 일으키는 것으로(『승종십구의론(勝宗十句義論)』, 한글대장경250, p.587 참조), 이를테면 아트만이 감관과 화합을 통해 얻게 되는 우연적 성질로 간주된다. 예컨대 아트만이 신체로부터 분리되거나 깊은 수면 상태에 빠질 때에는 의식의 성질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광(普光)은 “그러한 마음은 바로 자아의 속성[德]이기 때문이다”고 해석하고 있다.(『구사론기』 권제30, 대정장41, p.449중)
  63. 63)앞서 수론이 불교의 무아 상속설에 대해 힐난한 것을 승론의 유아론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는 뜻.
  64. 64)즉 전후 찰나로 상속하는 의식의 다양성은 자아와 의식의 ‘결합’의 다양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결합’이라는 존재의 실재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같은 논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 승론에 있어 결합[合, saṃyoga]이란 실체가 갖는 24속성 중의 하나로서, 서로 분리된 두 존재가 접하게 되는 것을 말하므로(『승론십구의론』, 앞의 책, p.589) 실재하는 자아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불교에 있어 그 같은 자아와 의식 그리고 결합의 실재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참고로 6구의 중의 ‘화합(samāvaya)’이란, 예컨대 항아리는 이미 실체ㆍ속성ㆍ운동ㆍ보편ㆍ특수 등이 화합된 상태로서 지시되는 개물이듯이 단지 개념상으로만 분리될 수 있는 불가분리(不可分離, 즉 內屬)의 원리를 말한다.
  65. 65)『승론십구의론』, 앞의 책, p.589.
  66. 66)자아와 의식이 결합한다고 하는 것은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자아와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의식이 결합한다는 말로서, 그것은 바로 자아의 변만성(遍滿性)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곧 그들 자신의 종의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67. 67)자아와 의식이 결합하였을 경우, 의식이 신체의 특정 부위의 감관으로 옮겨 갈 때 자아도 역시 옮겨 가야 할 것이고, 의식이 소멸할 때 역시 소멸해야 한다. 그럴 경우 자아는 운동을 갖지 않으며, 상주(常住)하는 것이라는 그들 자신의 종의에 위배된다.
  68. 68)즉 자아는 편재(遍在)하지만 전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결합한다고 할 경우에도 역시 자아는 단일한 실체로서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그들 종의에 위배된다.
  69. 69)자아와 의식은 다 같이 단일 상주의 실재인데, 양자의 결합으로써 어떻게 전후 차별되는 다양한 의식의 생기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
  70. 70)승론에서의 지각[覺, buddhi]은 24속성 중의 하나로, 그 같은 지각의 다양한 차별에 의해 의식이 다양하게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의식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다양한 지각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동일한 난점이 지적될 수 있다.
  71. 71)승론의 24속성 중의 하나인 행(行, saṃskāra)은 말하자면 잠재세력과 같은 것으로, 여기에는 반복된 지식의 습득에 의해 생겨나는 인상(印象, bhāvanā)과 반복된 운동에 의해 생겨나는 타성(vega)이 있는데, 전자가 기억이 원인이 되는 행[念因]이라면 후자는 작용의 원인이 되는 행[作因]이다. 곧 이와 같은 다양한 ‘행’의 차별을 전제로 하는 경우, 자아의 설정 없이 의식만으로도 그것의 다양성을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72. 72)즉 다양한 의식의 차별은 ‘행’에 의해 충분히 해명될 수 있음에도 여기에 다시금 자아를 설정하는 것은 약으로도 고질병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음에도 ‘보사하(phūṭ svāhā, 吉祥의 뜻)!’라는 주문을 별도로 외우는 것과 같다는 힐난.
  73. 73)자아는 마치 그림을 지니는 벽처럼, 과일을 담는 그릇처럼 마음과 행을 능히 유지하는 소의(āśraya, 근거)가 된다고 한다면, 양자는 색법의 경우처럼 서로를 장애해야 할 것이며, 그림과 벽처럼 개별적 존재여야 한다. 그렇지만 자아는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으며, 편재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비유는 적절하지 못하다.
  74. 74)지(地)가 색ㆍ미ㆍ향ㆍ촉의 소의가 되듯이 자아 또한 마음과 행의 소의처가 된다는 뜻. 승론에 따르면 9실체 중의 지(地)란 색ㆍ미ㆍ향ㆍ촉의 네 속성을 갖는 것이다.
  75. 75)예컨대 ‘수레에 바퀴 등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바퀴 등을 떠나 수레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퀴 등이 바로 수레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렇게 설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간에서 ‘목상신(나무에 형상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경우, 형상과는 별도의 나무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형상의 재질이 바로 나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76. 76)즉 자아는 단일하지만 행(行)의 다양한 차별에 근거함으로써 다양한 지식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면, 무엇이 장애하여 일시에 일체의 지식을 낳지 않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
  77. 77)행(行)에는 그 세력이 강력한 것과 미약한 것이 있어 강력한 것이 먼저 일어나 미약한 것의 생기를 장애하기 때문에 항상 일시에 일체의 지식(결과)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78. 78)강력한 작용(행)이 먼저 결과를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항상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낳아져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어느 때에는 미약한 작용으로부터도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
  79. 79)앞서 수론과의 대론에서 여인의 다양한 마음을 예로 들면서 그 같은 마음이 전후로 일어나는 것은 반복하여 닦은 힘[修習力]의 강도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주59 참조)
  80. 80)즉 승론의 행(行, saṃskāra)은 반복된 인식과 운동에 의해 형성된 잠재세력으로(주71 참조), 그것에 의해 의식의 다양한 차별을 해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불교에서 말하는 반복된 업의 훈습력(vāsanā, 혹은 bhāvanā)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불교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별도로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
  81. 81)여기서 ‘기억’은 속성의 범주[德句義, guṇa-artha] 스물네 가지 가운데 행(行)에 포섭된다. 즉 ‘행’에는 기억의 원인이 되는 행과 작업(作業)의 원인이 되는 행이 있는데(주71 참조), 기억의 원인이 되는 행이란 반드시 자아와 화합하는 것으로서, 그 밖의 실체 예컨대 마음은 기억의 조건이 될 뿐 주체(즉 所依止)가 아니기 때문에 기억과 화합하지 않는다.(주62 참조) 그리고 그러한 기억의 원인이 되는 행[念因]은 현량과 비량의 지식에 근거한 것으로, 자아와 의식의 결합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다.(『승종십구의론』, 앞의 책, p.602 참조)
  82. 82)유부에 의하는 한 능히 자기만의 상[自相]을 갖는 개별적 존재 즉 법(dharma)은 모두 실체(dravya)로서 실유의 존재이다. 이를테면 기억[念]이란 대상을 명기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작용을 갖는 실체로서, 열 가지 심대지법(心大地法)의 하나이다.(본론 권제4, p.163 참조)
  83. 83)즉 예류과 등 네 가지 사문의 과보는 무루의 5온과 택멸무위를 본질로 한다. 참고로 기억[念]은 심소법으로 행온에 포섭된다.
  84. 84)벽이 그림의 소의가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아가 기억의 소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85. 85)즉 ‘자아’라고 하는 것은 다만 자아관념[我執]의 대상이 되는 것일 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86. 86)즉 ‘나’라고 하는 관념은 제온에 대한 애탐의 결과이며, 또한 반드시 제온에 대한 지각과 관계함으로써, 다시 말해 제온에 대한 지각과 동일한 공간[同處]에서 일어난다.
  87. 87)승론에 의하면 자아는 희다는 ‘색’(24속성의 하나)의 기체(基體, 즉 소의)로서 그것과 분명히 차별되지만, 현실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든 ‘나’ 즉 자아의 관념은 지각과 관계하여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유의 존재가 아니라 가설적 존재[假有]이다.
  88. 88)‘희다’는 등의 지각을 일컬어 ‘나’라고 하는 것은 다만 은유일 뿐 그것이 진실의 자아는 아니다. 예컨대 신하 등이 능히 왕을 지켜 줄 때 왕이 ‘그대는 나의 몸이다’고 말하지만, 그 때 ‘나의 몸’은 다만 은유의 수사일 뿐 신하가 바로 왕의 몸은 될 수 없다는 뜻.
  89. 89)자아관념[아집]은 승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자아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몸 등의 5온을 대상으로 삼을 뿐이다.
  90. 90)즉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원인(몸)과 결과(‘나’라는 관념)로서 서로 관계하지만, 다른 이의 몸에 대해서는 그러한 인과관계가 없다.
  91. 91)이에 관하여서는 독자부와 ‘기억’의 주체에 대해 논란하면서 분별하였다.
  92. 92)아집 즉 ‘나’라고 하는 관념은 염오심으로부터 낳아지는데, 그 같은 염오심은 무시 이래 선행된 아집에 의해 물든 것으로, 지금에 이르러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보다 강화된 새로운 아집을 낳게 되는 것이다.
  93. 93)어떠한 고ㆍ낙수도 안(眼) 등 6근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고락의 근거는 실유의 자아가 아니라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意)의 6내입처라고 설한 것이다.
  94. 94)여기서 ‘법상을 분별하는 자’란 비가라(毘伽羅, Vaiyākaraṇa), 즉 문법학자로서, 언어이론[聲明論]의 해석을 통해 제법의 성상(性相)을 분별하는 자를 말한다.
  95. 95)앞서 논설하였듯이 후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것은 감관과 대상, 혹은 전찰나의 식에 따른 것으로,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다.
  96. 96)여기서 ‘비정처’(즉 非有情數)란 유정처에 상대되는 말로서 나무나 돌과 같은 감수작용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즉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정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존재에 있어서도 죄업이나 복업이 일어나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다.
  97. 97)법(dharma)과 비법(adharma)은 승론의 24속성 중의 하나이다. 『승종십구의론』(앞의 책, p.592)에 따르면 법에는 능히 유전(流轉)하게 하는 법과 능히 환멸(還滅)하게 하는 법이 있는데, 전자는 자아와 화합하여 참으로 애호할 만한 신체 등의 즐거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후자는 염오의 인연을 떠나 정지(正智)의 기쁨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비법은 자아와 화합하여 참으로 애호할 만하지 않은 신체 등의 괴로움과 사지(邪智)를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즉 승론에서는 업이 괴멸할 때 이러한 법과 비법이 자아에 의지하여 미래의 선악의 과보를 낳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본론 권제13(p.596 주22 참조)에서도 찰나의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법과 비법이 언급되고 있다.
  98. 98)즉 자아와 법ㆍ비법의 관계는 세간에서 현견되는 그림과 벽 등의 관계와는 동일하지 않다. 주73) 참조.
  99. 99)유부에서는 과거로 낙사(落謝)한 업, 즉 무표색(無表色)이 미래의 과보를 낳는다고 함으로써 업의 인과상속을 해명하였지만(본론 권제1, p.21), 논주 세친은 ‘종자상속의 전변과 차별’이라는 경량부의 설을 쫓아 이같이 설한 것이다.
  100. 100)종자(bīja) 상속(saṃtati)의 전변(pariṇāma)과 차별(viśeṣa)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 p.197 주115)를 참조할 것.
  101. 101)이는 ‘차별’을 해명하면서 그렇다면 어떠한 업이 먼저 과보를 낳게 되는지에 대해 분별한 것이다. 여기서 유취식(sopādāna vijñāna)이란 ‘취’ 즉 번뇌를 갖는 식으로 유루의 식을 말한다. 즉 유루의 식으로써 명종할 때, 그의 색심(色心) 중에 능히 후유를 초래할 만한 다수의 업에 의해 인기된 훈습의 공능(즉 종자)을 지닐지라도 무거운 업(5역죄와 같은 업)과 목숨을 마치기 직전에 지은 업과 자주 익힌 업에 의해 인기된 종자가 명료하기 때문에 그 순서대로 먼저 과보를 낳게 되고, 그렇지 않은 업, 이를테면 가벼운 업과 일찍이 일어났던 업과 자주 익히지 않은 업은 지은 순서에 따라 나중에 낳게 된다.
  102. 102)불염오성의 종자는 대치도가 일어날 때 능히 속박하는 성질은 끊어지지만 그 자체는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여과(與果)의 공능을 일으키며, 그 후 무여열반에 들 때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103. 103)즉 숙변의 차별을 일으켜 싹을 틔우게 되는 종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열매를 ‘종자’라고 하지만, 모든 열매가 종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열매가 열매를 낳는 것이 아니라 숙변(熟變)의 차별을 일으켜 종자가 된 열매만이 열매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104. 104)열매로부터 또 다른 열매가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일이 없듯이(비유) 이숙과로부터 이숙과가 직접적으로 낳아지는 일은 없다(법).
  105. 105)한 귀퉁이의 말씀[方隅]이란 광대한 아비달마 논 중의 극히 일부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마치 독을 신체의 일부분에 바르면 그 기운이 몸 전체로 퍼지듯이 일부의 말씀으로 조그마한 지혜의 문을 열게 되면 그것은 바로 깊은 깨달음의 지혜로 번져 나가기 때문에 본론이 지혜의 독의 문을 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106. 106)이상의 게송은 본론 전체(혹은 「파아품」)의 유통분(流通分)으로서, 제1송은 청정 열반의 원인이 되는 무루성도를 찬탄하고 외도의 악견을 버릴 것을 권유한 것이고, 제2송에서는 무아법성의 도를 찬탄하면서 우매한 외도는 이를 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제3송에서는 다시금 광대한 아비달마의 한 단면에 불과한 이 논을 인연으로 하여 면학하기를 권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