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分別功德論卷第二

ABC_IT_K0973_T_002
029_0491_c_01L
분별공덕론 제2권
029_0491_c_01L分別功德論卷第二


실역인명1)
이태승 번역
029_0491_c_02L失譯人名附後漢錄



‘미륵이 선(善)이라 칭(稱)한다’는 것은, 그것으로써 이 6도(度)의 대법을 모아 하나로 삼는 것으로, 이것은 곧 보살장(菩薩藏)이다.
‘결(結)을 끊는다’는 것은 모든 망견(望見)과 결사(結使)를 끊는 것이다.
‘도과(道果)를 성취한다’는 것은 대승보살이 옳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난이 단지 들었다고 말하고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어찌 가히 여래의 설법을 보지 못한 것이겠는가?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은 까닭은 장래 4부 때문인 까닭에 보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설사 보았다고 말하여 후에 4부중이 또 아난을 받들어 보았다고 말하면, 곧 허망하게 될 뿐이다. 이러한 까닭에 단지 들었다고 할 뿐 보았다고 하지 않는 것이다.
029_0491_c_03L彌勒稱善以其集此六度大法爲一分此卽菩薩藏也斷結斷諸望見結使也成道果大乘薩云然事阿難但云聞不云見者豈可不見如來說法也所以言見爲非者爲將來四部故不得言見也設言見者四部衆復承阿難言見者則爲虛妄以是故但稱聞不言見耳
‘최초의 설법’으로 아야구린(阿若拘隣) 등 다섯 사람을 제도하고, ‘마갈국에서 세 명의 가섭을 항복시켰고’, ‘석시(釋翅)’는 곧 가비라위(迦毘羅衛)이다.
‘만약 경을 말씀할 곳을 얻지 못하시면 다만 사위국에 계신다고 칭한다’라고 한 것은 부처님께서 사위국에 머무신 지 25년이 지나, 여러 나라에 비해 가장 오래 머무셔서이다. 오래 머무신 까닭은 그 나라가 가장 묘하고 갖가지 진귀한 것이 많으며, 인민이 활기에 찼으며, 가장 의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029_0491_c_11L初說法度阿若拘鄰等五人摩竭國降三迦釋翅卽迦毘羅衛若不得說經處但稱在舍衛以佛在舍衛經二十五年比在諸國最久所以久者以其國最妙多諸珍奇人民熾盛最有義理
기수정사(祇樹精舍)에는 기이한 신험(神驗)이 있다. 대중스님의 강의 집회 때에 수천의 원숭이들이 와서 좌우에 모여 보거나 듣는데 조용히 하여 소리를 내지 않는다. 또 갖가지 새들이 찾아 모여들고, 대중스님이 끝내면 각자의 장소로 돌아가며, 건추(揵槌)를 울리면 또 모여든다. 이 나라에는 인자한 사람이 많은 까닭에 이류(異類)들도 뒤따른다. 부처님께서 혹은 잠행(暫行)하시어 청을 받는다. 혹은 능히 신력으로 교화를 받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가신다. 그렇기 때문에 사위(舍衛)라 칭한다. 그 중요성을 알기에 충분하다.
029_0491_c_16L祇樹精舍有異神驗當衆僧在講集諸獼猴有數千來在左右觀聽寂寞無聲及諸飛鳥普皆來集衆僧正罷各還所止揵搥適鳴已復來集由國多仁慈故異類影附佛或能蹔行受請或能神力適化尋還本所以但稱舍衛足知其要也
029_0492_a_01L기원(祇洹)과 고독(孤獨)으로 두 사람의 이름을 달리 칭하는 까닭은, 이 두 사람이 먼저 죽어 지금은 천상에 있으며, 또한 모든 하늘을 모아 설법 교화하기 때문이다. 그때 마음으로 ‘우리들은 본래 대중스님의 단월(檀越)이었다. 처음에 또 우리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성취시켜 주고자 또 달리 두 사람의 이름을 칭했을 뿐이다.
029_0492_a_01L所以別稱祇洹孤獨二人名者此二人先亡今在天上亦集諸天說法教化時心念言我等本是衆僧檀越初不復稱我等名字耶欲適彼所念故復別稱二人名耳
‘마땅히 1법을 닦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은 차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처음 이루어진 설법에 의거한다면 마땅히 바라나(波羅奈)의 녹야원(鹿野苑)으로부터 4제(諦)를 말하는 것을 시작으로 마갈타에서 세 명의 가섭을 항복시키는 것에 이르니, 그 정사(精舍)의 주된 이름을 칭하는 것에 기인한다.
029_0492_a_06L當修一法亦非次第說按初成說法當從波羅奈鹿野苑說四諦爲始次至摩竭降三迦葉因稱其精舍主名
곧 ‘마땅히 1법을 닦는다’라고 하는 것은 그 1법과 4법이 이치상 그 맛이 서로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1법도 결(結)을 끊고, 4법도 결을 끊으며, 함께 열반에 이른다. 길은 다르지만 돌아가는 곳은 같다. 결이 모두 21가지이며, 나아가 36가지가 된다. 숫자는 비록 들고 남이 있지만 모두 이 결이다. 모든 것에 101가지가 있다. 펼치면 다시 8만 4천이 된다. 이로써 1법과 천만이 똑같이 도에 이르는 길이다. 사자가 코끼리를 죽이거나 토끼를 죽이거나 모두 같은 하나의 죽음일 뿐이다. 그 이취(理趣)가 다르지 않은 까닭이다. 곧 1법으로부터 시작한다.
029_0492_a_09L便云當修一法以其一法之與四法其理味不異故也一法亦斷結四法亦斷結俱至涅槃殊途同歸耳都結二十一演爲三十六雖盈縮俱爲是結凡事有百一舒爲八萬四千是以一法之與千萬是至道之徑耳猶師子殺象之殺兔同是一死耳以其理趣不異故便從一法始
‘방일이 없다’는 것은 1법의 종(宗)이다. 혹은 물어 말한다.
“계(戒)는 마땅히 앞에 있어야 한다. 먼저 계를 수지한 뒤에 3존(尊)을 염(念)해야 한다.”
또 말한다.
“이 새로 배우는 자는 먼저 3존을 염해야 한다. 곧 3자귀(自歸)이다. 뜻을 불(佛)ㆍ법(法)ㆍ중(衆)에 둔 후에 계를 받는다. 이것을 계는 마땅히 제4식념(第四息念) 후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029_0492_a_17L無放逸一法之宗也或問戒應在前先當持戒然後念三尊或曰此爲新學者先念三尊卽三自運意在佛法衆以次受戒以是言戒應第四息念後解
풀어 말하면, 몸의 고통을 조용히 생각한다는 것은 몸의 36가지가 부정하며 악로(惡露)인 것을 관하여 스스로 깨달음으로써 가히 성도(成道)하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029_0492_a_21L云閑靜身苦念者謂觀身三十六物不淨惡露自覺悟可以成道何以明之
029_0492_b_01L옛날에 어떤 비구가 아련야(阿練若)를 짓고 걸식을 했다. 걸식하는 중에 한 장자의 여자를 만났다. 비구와 여인 모두 단정했다. 여자는 비구를 보고 곧 욕상(慾想)을 일으켰고, 비구도 여자를 보고 또한 욕심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마음이 움직여 손이 떨려 밥을 발우에 넣지 못하고 땅에 흘렸다. 여자가 이상하게 여겨 웃자, 비구는 여자의 이가 흰 것을 보고 곧 스스로 깨달아 ‘여인의 입 속은 오로지 이 뼈뿐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사람의 몸 가운데에는 320개의 뼈가 있고, 600의 마디가 있고, 70만의 혈관이 있으며, 90만의 모공이 있다. 한 구멍으로 들어가며 아홉 구멍으로 부정한 것이 나온다. 무엇 하나 가히 탐할 것이 없다. 여자 몸의 36가지 물건을 자세히 보면 끔찍하여 소름이 끼친다’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관찰하여 곧 몸의 공(空)함을 이해해 수다원도를 얻었다. 또 스스로 ‘나는 여자로 인하여 법을 보았으므로, 이는 나의 선지식이다. 지금 마땅히 은혜를 갚아야 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여자를 위해 조금 전에 이해한 관신법(觀身法)을 말했다. 여자는 곧 마음이 열려 수다원도를 얻었다. 그러므로 몸을 생각하는 것은 뛰어나다고 하는 것이다.
029_0492_a_23L昔有比丘作阿練若行乞食逢一長者女從乞食比丘女人俱端正女見比丘便起慾想比丘見女亦起慾意意動手投飯於鉢錯注於地女自怪笑比丘見女齒白卽自覺悟曰女人口中純是骨耳如佛語人身中有三百二十有六百節七十萬脈九十萬毛孔一孔入九孔出泄漏不淨無一可貪諦觀女身三十六物慘然毛豎專自惟察卽解身空得須陁洹道復自念我因女見法則是我善知識今當報恩卽復爲女說向所解觀身法卽心開亦得須陁洹道以是言之念爲勝也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란 사람이 복이 다해 목숨이 끊어질 때, 지옥의 조짐을 보고 놀라 똥을 지리는 것이다. 혹은 아귀를 보거나 혹은 축생을 보아 행한 바에 따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두려워한다. 의식이 끊어지려 하며 반대로 대립해 끌리게 된다. 만약 마땅히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부모가 성교할 때를 연(緣)해야 한다. 만약 남자의 태를 받으면 그 어머니를 사랑하고, 만약 여자의 태를 받으면 그 아버지를 사랑한다. 그 질난(疾難)을 제외하면 세 가지에는 차이가 없다. 곧 태에 들어가게 되며, 이미 받고 또 인정하여 자신이 있게 된다. 7일에 일변하며 교풍각활(巧風刻割)하며, 266일에 이르러 그 형상을 이룬다.
029_0492_b_14L死念者念人福盡命終時見地獄瑞驚恐失糞若見餓鬼若見畜生隨行所墮見皆恐怖意欲捨去反爲對所牽若當生人緣父母會受男胎愛彼女人若受女胎愛彼男除其疾難三事不差便得入胎又認以爲己有七日一變巧風刻至三十八七乃成其形
029_0492_c_01L 만약 천상에 태어난다면, 천의 즐거움이 와서 맞이하여 희열에 가득해 곧 오줌을 지린다. 이 5도(道)의 징조는 각각 소견이 있다. 여기에 마땅히 죽는 자를 명계(明戒)로 삼음으로써 깊이 무상을 사유한다. 목숨이 빠른 것은 번개와 같고, 구름이 뜰을 지나가는 것과 같다. 노ㆍ병ㆍ사가 오면 서상(逝喪)하지 않는 바 없다. 항상 이 변화를 생각하여 스스로 깨닫는 까닭에 사념(死念)이라고 말한다.
029_0492_b_21L若生天上天樂來迎不勝喜悅卽失小便此五道瑞各有所見此之死應行者已爲明戒深惟無常命速若電若雲過庭老病死來無不逝喪常念此變以自覺悟故曰死念也
앞에서 열 가지 염불을 스스로 말하였지만 아직 묻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해석하지 않았다. 뒤의 열 가지 염불은 비구가 부처님께 물은 것으로, 다시 설명하여 하나하나 해석한다.
029_0492_c_03L前十念佛自說有問者故不解後十念比丘問佛更爲演說一一析解
‘존제자(尊弟子)’란 소위 500나한으로 각기 잘하는 바가 있다. 혹은 지혜 제일, 혹은 신족, 혹은 변재, 혹은 복덕, 혹은 수계(守戒), 혹은 지족(知足), 혹은 설법 등이 각각 제일이 된다. 맨 위의 형과 막내인 아우를 논하고자 한다면, 아야구린이 최장자가 되고, 수발(須跋)이 제일 막내가 된다. 이것이 불법의 계위에 있어 다음 가는 중요한 것이다. 만약 총명하고 널리 알아 통달한 것을 으뜸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곧 바라문의 법이다.
029_0492_c_05L尊弟子謂五百羅漢各有所便或智慧第一或神足或辯才或福德或守戒或知足或說各據第一欲論先兄而後弟者阿若拘鄰最長以須跋爲最小此佛法階次之大要若以聰哲博達爲元首者此乃是婆羅門法也
1,250인이라 하는 것은 항상 시종한 사람을 말한다. 혹은 500인이라 하는 것은, 부처님께서 아뇩달의 청을 받으셨을 때 뽑힌 500명이 뒤따라서 용왕의 궁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이 아뇩달천(阿耨達泉)은 유루(有漏)의 애형(閡形)으로 가히 주선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029_0492_c_11L云千二百五十者擧其常侍從者或云五百人者佛受阿耨達請時簡五百人可者尋從至龍王宮何者此阿耨達泉非有漏閡形所可周旋也
아난이 경을 송출해 낼 때, 8만 4천의 나한이 모였다. 이것이 말하는 것은 수를 가히 헤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의 때에는 바로 백 명이 나왔으며, 제일로 4부중에 통했으니 220이 각기 제일이다. 그 나머지 사람들을 어찌 또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 사람이 말하였다.
“이 경에는 본래 백 가지 일이 있었다. 아난이 우다라(優多羅)에게 부촉하여 『증일아함』을 송출했다.
그 후 12년이 지나 아난이 반열반에 들 때, 모든 비구들은 각기 좌선을 익히고, 다시는 외우고 익히지 않고 말하기를 ‘부처님께 3업(業)이 있는데 그 중 좌선이 제일이다’라고 하여 마침내 각각 송을 읊는 것을 없애고 12년이 흘렀다.
029_0492_c_15L阿難出經時集八萬四千羅漢以是言之數不可計此經今正出百人第一通四部衆二百二十各第一其餘者豈復可計其人云此經本有百事阿難囑優多羅『增一阿鋡』出經後十二年阿難便般涅槃時諸比丘各習坐禪不復誦習佛有三業坐禪第一遂各廢諷誦經十二年
029_0493_a_01L우다라 비구가 또 반열반하여 이로 인해 90가지의 것을 잃었다. 외국 법사가 서로 입으로 전하고 문장으로 기록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전해진 것이 11가지의 일을 남김없이 전한 것으로, 그 후 서로 전해진 것이 바로 현재의 문(文)이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살바다가(薩婆多家)에는 서(序)와 후(後)의 11사가 없다. 유랑을 거치면서 오랫동안 없어진 것이 많다. 한결같이 이 제자에게 『증일(增一)』을 촉루(囑累)한 까닭은 그 사람이 곧 7불 이래로 한결같이 『증일아함』을 배웠고 앞의 성인도 또한 부촉되어 이 경에 이른 것이다. 이로써 능인(能仁)의 때에 다시 또 이어져 이 비구에게 이른 것이다.
029_0492_c_23L優多羅比丘復般涅由是此經失九十事外國法師徒相傳以口授相付不聽載文時所傳者盡十一事而已自爾相承正有今現文耳雖然薩婆多家無序及後十一經流浪經久所遺轉多所以偏囑累此弟子『增一』者以其人乃從七佛以來偏綜習『增一阿鋡』前聖亦皆囑及此經是以能仁時轉復勤及此比
그때 우다라의 제자 중에 선각(善覺)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스승으로부터 『증일』을 송하는 것을 전수받고, 바로 11가지를 얻었다. 우다라는 곧 반열반하였고, 지금 외국에 3장이 나타난 것은 모두 선각이 전한 것이다. 그래서 스승으로부터 전해져 지금껏 바뀌지 않았다.”
029_0493_a_09L時優多羅弟子名善覺從師受誦『增一』正得十一事優多羅便般涅槃外國今現三藏者盡善覺所傳師徒相授于今不替
가섭이 매번 아난을 소아(小兒)라 부른 까닭은 여러 세대 이래로 아버지의 의도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때 아난의 누이동생이 비구니가 되었는데, 가섭이 말하는 것을 듣고 기분이 몹시 나빠서 “아난은 총명하고 널리 통달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촉망받고 또한 존경받는데 어찌 소아라 합니까?”라고 했다.
029_0493_a_12L所以迦葉每謂阿難爲小兒者故以累世已來父意相加故也於時阿難妹爲比丘尼聞迦葉語大用嫌恨阿難者聰明博達衆人所瞻望而尊謂爲小兒耶
029_0493_b_01L가섭이 비구니에게 말하였다.
“대매(大妹)여, 아난에게는 부끄러워할 만한 두 가지 일이 있는데, 어찌 원망을 하는가? 정좌(正坐)한 아난이 부처님께 권해 이모를 제도해 불법을 천 년이나 줄어들게 한 것이 그 하나이다. 또 아난에게는 60명의 제자가 있는데 근자에 30명의 비구가 도리어 재가인[白衣]이 되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제자를 제도하는 법에 만약 집에 있으며 믿음이 있어 도를 구하는 자는 마땅히 그를 시험하는 데 7일이 걸리며, 만약 외학(外學)으로 와서 도를 구하는 자는 마땅히 그를 시험하는 데 4개월이 걸린다. 어찌하여 같지 않은가? 외도는 더러 악한 마음으로서 장점과 단점을 구하고자 하는 까닭에 먼저 시험하여 지성(至誠)스러운가, 아닌가를 알아야 한다. 아난은 오자마자 곧 그를 제도했는데 이것이 가히 부끄러운 두 번째 일이다.
029_0493_a_16L迦葉謂比丘尼曰大妹阿難有二事可恥何所爲恨也正坐阿難勸佛度母人使佛法減千年是一也阿難有六十弟子日三十比丘還爲白衣佛教度弟子若在家有信來求道者當試之七若外學來求道者當試之四月以不等也以外道家或以惡心欲求長短是以先試知爲至誠不然阿難來便度之是可恥二
30명의 비구가 다시 돌아간 까닭은, 아난이 96종류의 도 가운데에 등지(等智) 제일인 것을 듣고, 아난에게 도를 구한 자는 등지를 청하고자 했다. 하지만 아난이 등지를 말해 주지 않자 이것이 본심과 합치하지 않아 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아난을 비방하며 등지가 없다고 말했다.
029_0493_b_02L此三十比丘所以還者聞阿難於九十六種道中等智第一從阿難求度者欲請等智阿難不與說等智是以不合本心是而還還必誹謗阿難謂無等智
제자를 제도하는 하는 것은 비유하면 물고기가 새끼를 천억만 개를 낳는 것과 같다. 만약 마음으로 생각하면 곧 생기고, 생각하지 않으면 곧 문드러져 부서진다. 제자도 이와 같다. 만약 마음에 담아 가르침을 주면 곧 성취하고, 마음에 담지 않으면 곧 물러나 돌아간다. 어찌 가히 부끄럽지 않은가?”
이 비구니는 성내는 마음으로 가섭을 대한 까닭에 곧 그 몸이 지옥에 들어갔다. 아난에게 이러한 허물이 있는 까닭에 가섭이 소아라고 한 것이다.
029_0493_b_06L弟子喩若魚生子千億萬若心念者便生不念者卽爛壞弟子亦如是留心教詔者便成就不留心者卽退此豈非可恥耶此比丘尼以恚心向迦葉故卽現身入地獄以阿難有此闕故迦葉謂爲小兒耳
아난이 옛적에 전륜성왕이 되었을 때를 기억하며 말하였다. 그때의 이름은 장수(長壽)였다. 부대왕(父大王)의 유교(遺敎)를 받들어 왕위에 올라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그리고 장차 출가하고자 하여 태자인 선관(善觀)에게 국정을 맡겨, 서로 전해져 이어받아 아직껏 바뀌지 않았다. 예전엔 부자(父子)가 서로 계승하였고, 지금은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이어받는다. 옛적에도 오히려 유루(有漏)의 가르침을 잃지 않았는데, 하물며 지금 어찌 지진(至眞:聖人)의 묘법을 잃겠는가? 그 까닭에 인용해 스스로 그 유전(遺典)을 받는 데 충분함을 증명한다.
029_0493_b_12L阿難自引往昔爲轉輪聖王名曰長壽受父大王之遺教登位治化將欲出家復囑太子善觀委以國政展轉相授未曾蹔替昔以父子相承今以師徒相紹尚不失有漏之教況今當失至眞妙法耶故引自證明其必堪受遺典也
‘법을 마땅히 존경스럽게 생각해야 한다’라는 것은 위의 게송 가운데에 3장과 4아함으로 알 수 있으며, 장행(長行)에서 또 ‘한 게송 가운데도 곧 3장의 제법이 갖추어져 있으니, 하물며 『증일』에 제법이 갖추어져 있지 않겠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또 여기에서 일단의 게를 말하고 있는 까닭은, 모든 천자의 마음속에 생각이 일어나 ‘아난도 능히 게를 지어 법을 말하지 못하는데 어찌 또 이 만설(謾說)을 짓겠는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029_0493_b_18L法當念敬上偈中已判三藏阿鋡長行中復云一偈中乃可具三藏諸法況復增一而不具諸法乎以復有此一段偈說者以諸天子心中生念阿難不能作偈說法乎何以復作此謾說耶
029_0493_c_01L 아난이 모든 천자의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알고 모든 천자에게 말하였다.
“바로 8만 4천의 코끼리가 싣고 있는 경을 모두 게송으로 만든다고 해도 나는 능히 게송으로 만들 수 있는데, 하물며 아난이 이 소법(少法)도 능히 짓지 못하느냐고 하는가?”
029_0493_c_01L阿難知諸天子心中所念語諸天子正使八萬四千象所載經皆作偈頌者我盡能作偈頌復阿難此少法而不能作耶
모든 천의 뜻에 맞추고자 한 까닭에 게로써 모든 법을 송(頌)해 모든 하늘과 이근(利根) 중생에게 권해 가르친다.
‘마땅히 게를 듣고 이해를 얻는다’는 것은, 법은 곧 상장(上章)에서 말한 ‘모든 악을 짓지 말며, 갖가지 선을 받들어 행하며, 스스로 그 뜻을 맑게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라고 하는 법이다. 말하자면 이 법은 능히 3승(乘)을 이루며, 3악취(惡趣)를 끊고, 모든 과보의 결실을 갖추며, 2세(世)의 과보를 받는다. 재(才)에 우열이 있는 까닭에 시설하여 그를 권유해 나아가게 한다.
029_0493_c_04L欲適諸天意故復以偈頌諸法勸喩諸天及利根衆生應聞偈得解法卽上章諸惡莫作諸善奉行自淨其意是諸佛教法也言此法能成三乘斷三惡具諸果實二世受報以才有優劣設誘進之
송에서 ‘상(上)은 3장을 지니며, 그 다음에 4아함 혹은 능히 율장을 받는다. 곧 이것은 여래의 보(寶)이다’라고 말했다.
보라고 한 까닭은 비유하면 왕에게 보장(寶藏)이 있어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오직 내신(內臣)과 왕과 마음을 같이하는 자만이 곧 관리할 수 있을 뿐이다.
029_0493_c_10L頌云上者持三藏其次四阿含或能受律藏卽是如來寶以云寶者喩若王有寶藏不使外人唯有內臣與王同心者乃使典掌
계율도 이와 같다. 만약 능히 250이나 500의 것을 지닌다면, 곧 그 사람에게 주며, 외부의 청신사나 청신녀가 가히 돌아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따라서 왕의 보물에 비유한 것이다. 가령 힘이 2장(藏)에 미치지 못하여 단지 아비담만 지닌다면 곧 외도에 항복하는 것이다. 96의 좁은 길은 종(宗)으로 돌아가지 않음이 없다. 왜냐하면 이 비할 바 없는 묘한 지혜는 능히 위의 미체(微滯)를 결정해 활이(豁爾)로서 평등하게 하며, 또 오통주겁(五通住劫)이라 하더라도 4사(駛)가 제어하는 것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외도는 감히 엿보아서는 안 된다.
아난이 이 10게의 묘권(妙勸)을 외우는 것은 실로 3만의 천인을 위한 것이다.
029_0493_c_14L戒律亦如是若能持二百五十及與五百事者乃授其人不可使外部淸信士女所可瞻翫故喩王寶也力不及二藏但持阿毘曇者便可降伏外道九十六逕靡不歸宗何者無比妙慧能決上微滯使豁爾齊直雖復五通住劫未免四駛之所制故外學莫敢闚阿難唱此十偈之妙勸者正爲此三萬天人也
029_0494_a_01L옛적 부처님께서 처음 성도하시어 바라나의 녹야원에 계셨을 때 아야구린 등 다섯 사람을 위하여 4제의 법륜을 굴리셨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구린이여, 마땅히 알아라. 고제(苦諦)와 고집제(苦集諦)와 고진제(苦盡諦)와 고출요제(苦出要諦)가 있다.”
바로 이 4제를 말씀하셨는데 구린은 유(有)에 머물러 있은 지 오래여서 지혜를 들어도 여전히 깨닫지 못했기에 곧 그를 위해 공(空)을 말씀하셨다.
“구린이여, 마땅히 알라. 4혜(慧)가 머무는 일체는 모두 공이며 또한 무상(無常)이다. 비유하면 환화(幻化)가 진실이 아니며, 있지 않은 것과 같다.”
구린은 곧 이해하여 견도적(見道迹)을 얻었다.
029_0493_c_22L昔佛始成道在波羅奈鹿野苑中爲阿若拘鄰等五人轉四諦法輪者佛言拘鄰知苦諦苦習諦苦盡諦苦出要諦說此四諦拘鄰滯有來久聞說智慧意猶不悟便爲說空拘鄰當知四慧所一切皆空亦復無常喩若幻化眞非有拘鄰卽解得見道迹
네 사람은 아직 해득하지 못했다. 여래께서 또 마음의 근본을 보았는데, 두 사람의 병은 상(想)에 있어 갱락(更樂)에 집착하는 것으로, 생각이 재가(在家)에 있으며, 5욕이 난무하고, 연(戀)에 집착하여 버리지 않았다. 병에 따라서 약을 주듯이 곧 무상삼매(無想三昧)를 말씀하셨다.
“그대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멸진으로 돌아간다. 그 까닭에 마음을 방치시켜 즐기는 데에 둔다.”
그러자 생각한 바가 곧 풀려 두 사람도 도적(道迹)을 얻었다.
029_0494_a_06L四人未如來復觀心本二人病在想著更思憶在家五慾自恣戀著不捨病投藥便說無想三昧卿所想者皆歸滅盡故爲馳心放在所樂也所想卽解二復得道迹
다른 두 사람의 마음은 항상 범천에 태어나 범왕(梵王)이 되기를 원했다. 지니고 있는 바를 풀지 못해 또 쌓여졌다. 여래께서는 마음이 머무는 바를 보시고 그를 위해 무원(無願)을 말씀하셨다.
“네가 원하여 구하는 바인 범천왕은 능히 출요(出要)를 하지 못하며, 모두 마멸로 돌아가며,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구하는 바를 버려야 한다. 출요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자 곧 이해를 얻어 도적을 성취했다.
029_0494_a_11L餘二人心常願生梵天於梵作王所滯不釋復以爲累如來見心所在復爲說無願汝所願求梵天王者不能出要皆歸磨滅常存者可捨所求出要爲先卽復得成於道迹
다섯 사람이 가진 바는 각기 다르며, 이해하는 바도 같지 않았다. 소위 삼전사제(三轉四諦)란 공ㆍ무상(無相)ㆍ무원 가운데 모두 4제가 있는 것이다. 제(諦)는 곧 관(觀)이다. 정(定)은 곧 지(止)이다. 지관을 함께 닦아 음지입(陰持入) 가운데 치애병(癡愛病)을 고친다.
029_0494_a_16L五人所滯各異所解不所謂三轉四諦者空無相願中皆有四諦諦卽觀也定則止也止觀雙共治陰入中癡愛病也
‘12’란 12인연을 깨뜨리는 것이다. 옛적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셨을 때, 4부를 위해 법을 말씀하셨는데 혹은 4제를 말씀하시고, 혹은 6도(度)를 설하시며 중생이 응하는 바에 따르셨다. 듣는 자는 각각 많아 그 수는 한량이 없었다. 혹은 국왕ㆍ장자ㆍ범지ㆍ거사 등이 있어 혹은 청하여 공양하고, 혹은 와서 청문했다.
029_0494_a_19L十二破十二因緣也昔佛在世時爲四部說法或說四諦或說六度隨前衆生所應聞者各爲敷演無有常量或有國王長者梵志居士或請供養或來請問
029_0494_b_01L‘모든 소설(所說)을 가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다.
아난이 여쭈었다.
“무엇을 일컬어 마땅히 듣는다고 하며, 본다고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이르셨다.
“후에 이르러 사부대중에게 법을 말할 때, 마땅히 듣는다고 말하며 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만약 본다고 말한다면 곧 허망이다. 왜냐하면 들은 것은 이미 과거이고, 보는 것은 현재이기 때문이다. 과거 7불이 실로 가히 들었다고 말을 하며 보았다고 말하지 않는 것과 같다. 너도 장래에 있어서 또한 이와 같다. 그런 까닭에 ‘이와 같이 들었다’라고 말한다.
029_0494_b_01L諸可所說阿難問曰云何名當言聞耶當言見耶佛告阿難在將來四部說法時當言聞不得言若言見者則爲虛妄何以故聞已過見者現在如過去七佛正可言聞不得言見也汝於將來亦復如是聞如是
내가 은근히 아난에게 부촉하는 까닭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 비록 시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난만큼 부처님의 뜻을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 옛적에 이미 20억의 부처님을 공양하여 항상 시자가 되었고, 누(漏)가 다함을 구하지 않고, 항상 등지(等智)를 얻어 부처님의 뜻을 알고자 원했다. 그런 까닭에 지금 그 과보를 얻어 모든 것을 보며 그 원칙을 잃지 않는다.”
029_0494_b_07L我所以慇懃囑累阿難者過去諸佛雖有侍者無如阿難知佛意趣曩昔已曾供養二十億佛常爲侍者不求盡漏常願得等智知佛意以是故今獲其報睹目達意不失宜則
모든 부처님들 가운데 용맹정진하는 것은 석가문(釋迦文)을 능가하는 자가 없다. 형제 가운데 미륵이 마땅히 앞에 있어야 한다. 지금 도리어 뒤에 있는 것은 어째서인가?
029_0494_b_12L諸佛之中勇猛精進無過釋迦文者兄弟之中彌勒應在前今反在何者
옛적 30겁 전에 세 보살이 있었다. 함께 산에서 유행할 때, 굶주린 호랑이가 그 자식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을 보았다. 한 사람이 생각해 말하였다.
“이 호랑이는 축생이다. 또 그 자식을 먹으면 죽어서 고통이 있게 될 것이다. 어미 또한 자애롭지 못하다. 나의 이 몸은 4대(大)가 합성한 것으로 마땅히 죽음으로 돌아갈 것이니, 곧 이 몸으로써 그 자식의 목숨을 구하리라.”
다른 두 사람은 수긍하지 않고,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서 자식의 목숨을 구하려 하였다. 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돌아오면 자식의 목숨은 온전하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산에서 몸을 던져 그 자식의 목숨을 구하리라.’
029_0494_b_14L昔三十劫前時有三菩薩共在山上遊行時見有餓虎欲食其子一人念曰此虎旣爲畜生復食其子死有痛苦母復不慈我今身者四大合成會當歸死便當以身救彼子命二人不肯方欲詣市買肉用代子命一人思惟曰若此往返子命不全當投身於山下濟其子命耳
029_0494_c_01L그리고 곧 산 위에서 아래로 몸을 던졌다. 호랑이 입에 이르렀지만, 몸은 곧 안온하여 호랑이가 감히 먹지 못했다. 그 까닭은 대저 자비의 삼매에 들어간 자는 사물이 능히 해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나무로 자신을 찔러 호랑이로 하여금 먹게 하였다.
말하자면 “이 용맹은 곧 9겁을 초월하여 지금 미륵 앞에 있는 까닭에 이렇게 그것을 말한 것이다. 도(道)에는 전후가 없고 뜻이 반드시 앞서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지금 성불하며, 그런 까닭에 남겨진 가르침을 아난에게 위촉한다. 너는 마땅히 미래에 이와 같이 들었다고 말해야 한다.”
029_0494_b_21L卽從山上投身來下趣彼虎口身則安隱不敢食所以爾者夫入慈三昧者莫能害也故以竹自刺使虎得食是勇猛卽超九劫今在彌勒前以是言之道無前後意決爲先是故我今成佛故以遺典委付阿難汝於當來稱聞如是
어찌하여 또 일시라고 말했는가? 이것은 일월(日月)의 수인가? 사람의 이름인가? 대답하면 이것은 시절의 수이기도 하며, 또한 사람의 이름에도 있는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또 두 이름이 있으니, 혹은 찰제리, 혹은 바라문이다. 또 두 이름이 있으니, 혹은 장자 종(種), 혹은 거사 종이다. 혹은 천상에 있는 것과 인간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이 한 곳[一處]이 아니다. 따라서 일시라고 말한다.
029_0494_c_05L何以復言一時也爲是日月數爲是人名耶亦是時節數是在人名或曰復有二名或剎帝利或婆羅門復有二名或長者種或居士種或在天上或在人閒如是諸或非是一處故曰一時也
바가바(婆伽婆)란 세존을 칭하는 것이다. 결사(結使)가 모두 다해 능히 그를 뛰어넘는 자가 없는 까닭에 칭하여 존(尊)이라 한다. 삼계의 모든 천이 모두 와서 스승으로 받들며, 8부의 귀신 또한 종경(宗敬)하는 바인 까닭에 세존이라 칭한다. 능히 악마를 항복시키므로 또 존이라 한다. 이와 같이 칭하는 바를 가히 헤아릴 수 없는 까닭에 세존이라 부르는 것이다.
029_0494_c_10L婆伽婆者尊之稱也結使都盡無能過者故稱爲尊三界諸天皆來師仰八部鬼神亦所宗敬故稱世尊能降伏魔卽復是尊如是所稱不可計量故號世尊
기수급고독원의 기타(祇陀) 태자는 바사닉왕(波斯匿王)의 적자이다. 그에게는 원전(園田) 80경(頃)이 있었는데, 땅은 평평하며, 나무는 무성하고, 갖가지 금수(禽獸)가 많았으며, 해가 뜨면 모두 모여들었다. 기타의 마음은 부처님께 있어 항상 정사를 지어 바치고자 하였다. 1년도 되기 전에 수달(須達) 장자가 또 와서 사기를 청했다. 기타는 어려서부터 장자와 친해 매일 서로 즐겁게 놀았었다. 태자가 농담으로 허가한다고 말하였다.
029_0494_c_15L祇樹給孤獨園祇陁太子者波斯匿王之嫡子也有園田八十頃地平木多諸禽獸日來相集祇心存佛欲上佛作精舍未周之頃須達長者復來請買祇少與長者親善每喜調戲言許可
029_0495_a_01L 수달은 뜻을 이루어 몹시 기뻐하며 시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빨리 코끼리에 가마를 달아 금을 싣고 땅에 뿌려라.”
곧 금을 싣고 나와 금을 땅에 뿌렸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40경에 가득 찼다.
기타는 말하였다.
“그만해라. 그만해라. 내가 한번 해본 말일 뿐이었다. 다시 뿌리지 말라.”
수달은 곧 태자와 함께 왕의 처소에 이르러 이 뜻을 말했다. 왕이 말하였다.
“법에는 두말 하는 법이 없다. 이미 허락을 결정했으면, 후회하는 법은 없다.”
기타가 말하였다.
“나는 나무를 가질 테니, 그대는 땅을 취하라. 우리 둘이 함께 정사를 짓도록 하자.”
029_0494_c_20L須達得決意甚欣悅謂侍者速嚴駕象載金布地卽負金出隨集布地須臾滿四十頃祇曰我戲言相可不須復布須達卽與太子共至王所啓白此意王曰法無二言許決已定理無容悔祇曰吾取樹分卿便取地二人會可共立精舍
강당 72개와 방을 1,250개 지었으며, 그곳은 평정(平正)하였으며, 과일 나무가 풍성했으며, 흐르는 샘물과 목욕할 만한 못이 있었고, 추위와 더위가 적절했으며, 네 곳의 전망이 탁 트였고, 겨울과 여름이 다르지 않았다. 그곳을 모두 고쳐 함께 세존을 청했다. 세존은 곧 1,250명의 비구와 함께 그곳에 오셨다. 단월이 네 가지를 공양하기를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아난빈지(阿難邠坻2))는 이 나라의 신하인 까닭에 양보하여 앞에 있게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경(經)에서는 매번 기타를 상수라고 칭한다. 공덕이 서로 이어지는 까닭에 이름도 서로 떨어짐이 없이 항상 합쳐서 부르는 것이다.
029_0495_a_03L有七十二講堂千二百五十房舍中平正果木豐茂流泉浴池寒溫調四望淸顯冬夏不改嚴治都訖共請世尊世尊卽與千二百五十比丘遊止其中檀越供養四事無乏阿難邠坻以是國臣故高讓在先是故諸經每稱祇爲首以功德相連故名不得相離故常合以爲稱耳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에게 고했다’라고 하는데, 어찌하여 청신사와 청신녀에게는 고하지 않았는가? 단지 비구에게 고했다는 것은 4부중에서 비구가 가장 으뜸이 되기 때문이다. 또 비구는 악을 깨뜨리는 주(主)이다. 무루법으로 모든 유루를 끊는 까닭에 먼저 비구에게 고하는 것이다. 또 사문(沙門)이라고도 한다. 사문이란 마음에 휴식을 얻어 그 욕심을 바꿔 적연하고 집착함이 없다. 또 제근(除饉)이라고도 한다. 세인은 색욕에 굶주려 있는데, 비구는 이 애근(愛饉)의 기상(飢想)을 없앤다. 세존의 설법을 비구는 능히 받으며, 생사를 끊어 없애 열반문에 이른다. 이러한 까닭에 비구에게 고한 것이다.
029_0495_a_11L佛告諸比丘何以不告淸信士女但告比丘者於四部衆比丘爲元首復是破惡之主以無漏法斷諸有漏以是故先告比丘亦名沙門沙門者心得休息息移有欲寂然無著亦名除饉世人飢饉於色欲比丘者除此愛饉之飢想世尊說法比丘能受除生死至涅槃門是故告比丘耳
‘마땅히 1법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은 염불(念佛)을 말한다. 염불은 어떠한 것인가? 부처님의 몸은 금강으로서 모든 누(漏)가 없다. 갈 때에는 발이 땅에서 네 치[寸] 정도 떠 있으며, 또 천 폭 정도의 자국이 땅에 나타나 발밑의 모든 벌레와 개미가 7일을 안온히 지내며, 또 만약 그 목숨을 마치는 것들은 모두 천상에 태어나게 된다.
029_0495_a_19L修行一法謂念佛也念佛何等事佛身金剛無有諸漏若行時足離地四寸千輻相文迹現於地足下諸虫蟻七日安隱若其命終者皆得生天
029_0495_b_01L옛적에 한 명의 악한 비구가 있었다. 본래는 외도였는데, 옷을 빌려 입고 비방하고자 하였다. 여래를 좇아가면서 날벌레를 많이 죽여 부처님의 발자국에 놓아두고 말하기를 “벌레를 밟아 죽었다”고 했다. 그런데 죽은 벌레도 부처님의 발자국을 만나면 다시 살아났다.
성읍에 들어가 발로 문지방을 밟으면, 천지가 크게 움직이며 온갖 음악이 연주하지 않아도 저절로 울렸다. 모든 귀머거리ㆍ맹인ㆍ벙어리ㆍ곱사등이ㆍ병자 등은 자연히 그 병이 치유되었다. 32상과 80종호를 보는 자가 있으면, 그 행에 따라 도(度)를 얻었고, 공덕이 생기는 바를 가히 헤아릴 수 없다. 혜명(慧明)이 비치는 바를 어찌 가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부처님은 모든 법의 주인이시며, 총체적으로 만행(萬行)이 모이며, 그것을 행하는 데 제일이다. 소위 염불이란 그 뜻이 이와 같다.
029_0495_b_01L昔有一惡比丘本是外道欲假服誹謗逐如來行多殺飛蟲著佛迹處蹈蟲殺然蟲雖死遇佛迹處尋還得活若入城邑足蹈門閾天地大百種音樂不鼓自鳴諸聾盲瘖瘂癃殘百疾自然除愈三十二相八十種好其有睹者隨行得度功德所濟不可稱計慧明所照豈可訾哉佛者諸法之主摠會萬行以載運爲先謂念佛其義如此
염법(念法)이란 무엇인가? 법이란 소위 무루법ㆍ무욕법ㆍ도법(道法)ㆍ무위법이다. 욕으로부터 무욕에 이르는 것이다. 불(佛)이란 모든 법의 주(主)이며, 법이란 결사(結使)의 주이다. 혹은 물어 말한다.
“법이 먼저 있는가, 불이 먼저 있는가?”
“법이 먼저 있다. 어떻게 그것을 알 수 있는가? 경에서 말하기를 ‘법은 모든 불을 내고, 법은 불도(佛道)를 생기게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법이 먼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029_0495_b_10L念法云何法者謂無漏法無欲法道法無爲法也從欲至無欲也佛者諸法之主法者結使之主或問曰法爲在先佛爲在先法在先何以知之經曰法出諸佛法生佛道以是言之法爲在先
또 말한다.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 염법을 먼저 하지 않고 염불을 먼저 하였는가?”
“법이 미묘하여 능히 알 수 없는 것은, 마치 땅 속에 감추어진 진보(珍寶)가 어느 곳에나 있는데도 사람은 빈곤하여 돈과 물품이 모자란 것과 같다. 신통이 있는 사람은 그 장소를 알아 얻어 스스로 궁핍에서 벗어난다.”
029_0495_b_15L又曰若然者何以不先念法而先念佛耶答曰雖微妙無能知者猶若地中伏藏珍寶無處不有而人貧困乏於資用神通人指示處所得以自供濟於窮
혹은 물어 말한다.
“보(寶)가 더 뛰어난가, 사람이 더 뛰어난가?”
“사람이 더 뛰어나다. 왜 뛰어나다고 하는가 하면, 감추어진 것이 비록 많다고 해도 신통이 아니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인 까닭에 그 자질을 얻지만, 어찌 보장(寶藏)이 땅 속에서 스스로 귀해지겠는가? 법도 이와 같다. 이치가 비록 현묘하더라도 여래가 아니면 말하지 못하며, 세존이 아니면 펴지 못한다. 그러므로 염불이 먼저이고, 법은 그 다음이다.”
029_0495_b_20L或問曰寶爲勝耶人爲勝耶勝也何以言勝伏藏雖多非神通不由人得資生豈寶藏自貴於地中法亦如是理雖玄妙非如來不辯非世尊不暢是以念佛在先以法爲
029_0495_c_01L무엇이 염승(念僧)인가? 승이란 4쌍ㆍ8배(輩)ㆍ12현사(賢士)로서 세상의 탐쟁(貪諍)을 버리고, 복을 여는 길잡이로서 천인의 길에 통해 그것에 의하지 않음이 없으니, 바로 중생의 양우복전(良祐福田)이다. 어떻게 대중 스님이 좋은 복전인 것을 아는가?
029_0495_c_02L云何念僧僧者謂四雙八輩十二賢士捨世貪諍開福導首天人路通莫不由之則是衆生良祐福田也以明衆僧爲良福田也
옛적에 범마달(梵摩達)이라는 박복한 비구가 있었다. 1,250명 가운데 있으면서 대중 스님으로 하여금 식사를 얻지 못하게 하였으나 누구의 허물인지 알 수 없었다. 부처님은 곧 2부로 나누었다. 1부 가운데 있으면서 1부로 하여금 식사를 얻지 못하게 하자, 다시 이 1부를 반으로 나누었지만, 그 반에 따르므로 또 그 반이 식사를 얻지 못하게 했다. 이와 같이 계속하여 반으로 나누어 끝내 두 사람에 이르렀어도 또 식사를 얻지 못하게 했다.
029_0495_c_05L昔有薄福比丘名梵摩達在千二百五十衆中衆僧不得食莫知誰咎佛便分爲二在一部中復令一部不得食復分此一部爲半令從其半復令此半不得食如是展轉分半乃至二人亦不得食
마침내 홀로 남아 비로소 복이 없음을 알았다. 놓인 음식을 먹으려고 다음에 발우가 있는 곳에 이르면 자연히 없어져 버렸다. 부처님께서 그 액(厄)을 불쌍히 여기셔서 손수 식사를 발우 속에 넣어주어 신력으로 제어하시니 다시는 없어지지 않았다. 부처님의 현신(現身)으로 복을 얻게 하고자 한 까닭에 둘을 멸진시킨 비구로 하여금 좌우에 있게 하여, 음식을 이 멸진 비구에게 보시하였다. 무릇 멸진삼매는 모두 즉시에 복을 얻게 한다.
029_0495_c_11L遂至獨身乃知無福所在行食次至在鉢自然消化佛愍其厄自手授食在於鉢中神力所制不復化去佛欲令現身得福故令二滅盡比丘在左右以食施此二滅盡比丘凡滅盡三昧皆卽時得福
다음에 또 입자삼매(入慈三昧)의 비구를 좌우에 있게 하고, 다음에는 2비(悲)로써, 그 다음에는 2희(喜)로써, 그 다음에는 2호(護)로써 각각 두루 이어져 넷을 평등하게 끝내게 했다. 그때 바사닉왕이 이 비구가 박복하여 부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음식을 주신다고 하는 것을 듣고, ‘나는 지금 마땅히 그를 위해 복을 지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곧 시자를 보내어 쌀을 찧게 했다.
029_0495_c_16L次復令入慈三昧比丘在左右次以二悲次以二喜次以二護各各遍代令終四等時波斯匿王聞此比丘薄福佛愍與食今亦當爲其設福卽遣使人%(米*乍)米
029_0496_a_01L 그때 한 마리의 새가 날아와 쌀 한 톨을 물고 날아갔다. 시자가 꾸짖으며 말하였다.
“왕이 범마달을 위해 복을 짓는데, 너는 어찌하여 물고 가는가?”
그러자 새는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왜냐하면 이 비구는 대중 스님의 복력을 입은 까닭에 조수(鳥獸)도 능히 침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증거로 대중 스님이 좋은 복전이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미 스스로 제도하였고, 또 능히 다른 사람도 제도해 3삼승도에 이르게 한다. 염중(念衆)의 법이란 그 뜻이 이와 같다.
029_0495_c_20L有一烏飛來銜一粒米去使人呵曰王爲梵摩達設福汝何以持去耶卽持還本處所以爾者此比丘以蒙衆僧福力是以鳥獸所不能侵害也用是證故知衆僧爲良福田也已旣自度復能度人至三乘道念衆之法其義如此
다음에 염계(念戒)란 그 뜻이 무엇인가? 5계ㆍ10계ㆍ250부터 500계까지 모두가 신(身)ㆍ구(口)를 금제(禁制)하고, 모든 사비(邪非)를 단속하며, 6정(情)을 염어(斂御)하며, 모든 욕심의 생각을 끊는 것이다. 속과 겉이 청정하며, 곧 계성(戒性)에 응한다.
옛날에 두 비구가 있었는데 함께 부처님의 처소에 가다가 넓은 못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마실 물이 부족했다. 그때 조그마한 연못이 있었는데 물속에는 벌레로 가득했다.
029_0496_a_04L次念戒者其義云何從五戒十戒百五十至五百戒皆以禁制身口撿諸邪非斂御六情斷諸欲念中表淸淨乃應戒性昔有二比丘共至佛所路經廣澤頓乏漿水時有小池汪水衆蟲滿中
한 비구는 깊이 금률(禁律)을 생각하여 범하지 않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이 물을 먹으면 살생하는 것이 많을 것이다. 내가 차라리 계를 지키며 목숨을 잃는 것이 후회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는 목숨을 마쳐 곧 천상에 태어났다.
한 비구는 스스로 생각했다.
‘마땅히 물을 마셔야 목숨을 보존해 부처님의 처소에 이를 수 있다. 어떻게 사후에 어디에 태어나는가를 알 수 있겠는가?’
곧 벌레 있는 물을 먹어 매우 많은 벌레를 해쳤다.
029_0496_a_10L一比丘深思禁律以無犯爲首若飮此水殺生甚多我寧全戒殞命沒無以恨於是命終卽生天上一比丘自念宜當飮水全命可至佛焉知死後當生何趣卽飮蟲水蟲大多
그리고는 비록 부처님을 뵐 수 있었으나 가르침에서 아주 멀어졌다. 울면서 부처님을 향해 스스로 말했다.
“친구 따라 목숨을 끊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위의 천을 가리키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이 천을 아느냐? 이 천은 너의 도반이다. 모든 계의 공으로써 곧 천상에 태어나며, 지금 와서 여기에 머문다. 그대는 비록 나를 보았지만 나로부터 크게 멀어졌다. 그가 비록 목숨을 잃었어도 항상 나의 곳에 있다. 그대가 지금 와서 보는 나는 정녕 나의 육신만을 보는 것일 뿐인데 어찌 지극히 참된 묘계(妙戒)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계를 지녀 범하지 않으면, 원하는 바를 얻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029_0496_a_15L雖得見佛去教甚遠啼泣向佛自云同伴命終佛指上天曰汝識此天不此是汝伴以全戒功卽生天今來在此卿雖見我去我大遠雖喪命常在我所卿今來見我者可睹我肉形耳豈識至眞妙戒乎是言之持戒不犯所願者得
029_0496_b_01L10염(念) 중에 계는 앞에 있으며, 6도(度)에서는 시(施)가 앞에 있다. 앞뒤가 같지 않은 것은 10염의 계는 성문가의 계이기 때문이다. 제자의 법은 몸을 단속하는 것을 으뜸으로 삼기 때문에 앞에 있는 것이다. 대사(大士)의 법은 혜시(惠施)를 중요하게 여긴다. 무릇 대사란 천인 가운데 태어나 마음이 이익을 구하는 데 있다. 이익을 구하는 요건은 보시하지 않으면 구해지지 않는 것이다. 무릇 중생이 목숨을 갖는 것은 의식(衣食)을 우선으로 삼는다. 그 까닭에 재시(財施)로써 먼저 그 형(形)을 구하며, 그 후에 법으로써 그 신(神)을 섭어(攝御)한다. 따라서 대사는 보시를 우선으로 삼는다.
029_0496_a_21L十念中戒在前六度言之施在前所以前卻不等者十念戒者聲聞家戒也弟子法以撿身爲先是以在前大士法以惠施爲重何者夫大士者生天人中心存濟益濟益之要非施不救夫衆生存命者以衣食爲先故以財施先救其形然後以法攝御其神故大士以施爲先
대체로 계에 두 가지가 있다. 속계(俗戒)와 도계(道戒)이다. 5계와 10선(善)은 속계를 이루며, 3삼매는 도계를 이룬다. 250계에서 500에 이르는 이것도 속계이며, 4제(諦)의 묘혜는 도계를 이룬다. 단지 계를 행하는 데 안주해서는 삼계(三界)를 벗어나지 못한다. 혜로써 계를 제어하고 무루를 성취시켜야 곧 도계에 합치한다. 성문가의 계는 비유하면 무릎 위의 꽃을 움직이면 흩어지는 것과 같다. 대사의 계는 머리 위에 꽃을 꽂고 가도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있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소승은 형태에 구애되어 움직이면 곧 위의를 벗어나지만, 대사는 마음이 외부의 궤범에 구애되지 않는다. 이는 대소의 규범이 다른 까닭이며 형태와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내외가 비록 달라도 함께 열반에 이른다. 그러므로 염계라 한다.
029_0496_b_06L夫戒有二有俗戒有道戒五戒十善爲俗戒三三昧爲道戒百五十戒至五百戒亦是俗戒四諦妙慧爲道戒也但行守戒不出三界以慧御戒使成無漏乃合道戒聲聞家戒喩若膝上花動則解散大士戒喩若頭插花行止不動何者小乘撿形動則越儀大士領心不拘外軌大小範異故以形心爲殊內外雖俱至涅槃故曰念戒也
염시(念施)로 열반에 이를 수 있는 까닭은 보시에 재시(財施)와 법시(法施)가 있기 때문이다. 재시로 인해 법시를 달성할 수 있으며 단월은 한량없이 제도를 성취하는 까닭에 열반에 이를 수 있다.
029_0496_b_15L念施所以得至涅槃者以施有財施法施也財施得達法施成檀度無極故得至涅槃也
029_0496_c_01L염천(念天)이란 욕계와 색계로부터 무색계천에 이른다. 천에는 두 종류가 있다. 수복천(受福天)이 있으며, 도덕천(道德天)이 있다. 욕계의 모든 수다원천은 영원히 3악취를 떠나 나아가 도당(道堂)에 오른다. 색계와 공계의 8정거천(淨居天)은 지관을 더욱 닦아서 나아가 무루를 성취한다. 곧 그 열반은 세간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범부천(凡夫天)이란 10선(善)ㆍ4선(禪)ㆍ4공이며 그곳에서 복을 받고, 복이 다하면 다시 떨어져 유전해 그치지 않는다. 소위 염천이란 모든 득도한 자를 염하고, 한결같이 그를 본받으며 그의 행위를 사모하여 뜻은 흐트러지지 않고 또한 열반에 이른다. 그 까닭에 염천이라 한다.
029_0496_b_18L念天者欲界色界至無色界天也天有二種有受福天有道德天欲界諸須陁洹天永離三惡趣進升道堂色界空界八淨居天增修止觀進成無漏卽彼涅槃不還世閒凡夫天十善四禪四空於彼受福福盡還流轉不已所謂念天者念彼諸得道者專心效彼慕其所行意不馳散亦至涅槃故曰念天也
염휴식(念休息)이란 심의상(心意想)이 쉬어 5욕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적연(寂然)하여 영원히 안정되어 있는 까닭에 식(息)이라고 한다. 무릇 식(息)에는 두 종류가 있다. 외도 범지가 형태를 단속해 복을 구하는 것 또한 식이라 하지만, 사문이 4과(果)로써 갖가지 결(結)을 영원히 없애는 것이 곧 진식(眞息)이다. 어떻게 그러한 것을 알 수 있는가?
029_0496_c_03L念休息者謂心意想息五欲不起寂然永定故云息也凡息亦有二種道梵志斂形求福亦云息也沙門四果衆結永消乃是眞息何以知其然
옛날에 수라타(須羅陀)라는 비구가 사위성에 이르러 두루 교화를 행했다. 그때 사위성의 서쪽에 앙굴마(鴦掘魔)라고 하는 살인자의 처소가 있었다. 그곳은 평평하고 넓었고 수목이 많이 있었다. 그때 한 범지가 나무 아래에서 좌선을 했다. 5곡을 먹지 않고 단지 과실만을 먹었으며, 만약 과실이 없으면 곧 풀과 나물을 먹고 정기를 이어갔다. 몸에는 나뭇잎 옷을 걸쳤으며, 형체는 야위었지만 스스로를 억제해 지탱했다.
029_0496_c_07L昔有比丘名曰須羅陁至舍衛城周行教化時舍衛城西鴦掘魔可殺人其地平博多諸樹木時有一梵志在樹下坐禪不食五穀但食果蓏無果便噉草菜以續精氣身著樹菜形體羸瘦裁自支拄
그때 수라타가 그곳을 지나다가 보고서 말했다.
“이 도사가 하는 좌선을 시험해 그 마음을 관하자. 정에 든 것을 알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마음의 근본을 보자 곧 이 나라의 왕이 되기를 구하고 있었다. 생각하여 말하였다.
“이것은 곧 대적(大賊)이 아닌가? 바로 없애자니 후에 죄에 떨어질까 두렵고, 바로 교화하자니 반드시 나의 말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마땅히 방편을 세워 이 사람을 제도해야겠다.”
029_0496_c_13L時須羅陁行過逢見是道士坐禪試觀其心知爲定不見其心本乃求作此國王此乃是大賊耶正欲捨去恐後墮正欲教化必不隨我語當設方便度此人耳
곧 한 나무 아래 서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으로 가서 좌선을 했다. 곧 7일이 지나도록 움직이지 않고 흔들림이 없었다. 7일이 지난 뒤에 범지 앞에 이르러 손가락으로 쳐서 깨워 말하였다.
“친구여, 몸은 어떤가?”
범지는 한참 후에 천천히 머리를 들고 대답하였다.
“빈검(貧儉)하여 상(相)을 두는 것이 없다.”
비구가 또 말하였다.
“나는 지금 마땅히 그대에게 한 물건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곧 변화시켜 한 마리의 닭을 만들었다.
“그대는 이 닭을 죽여 먹어야 한다.”
029_0496_c_18L卽便就一樹下坐禪相去不遠乃經七日不動不搖過七日後起至梵志前彈指覺曰同伴體中何如也梵志良久徐乃擧頭答曰貧儉無以相遺如何比丘又曰我今當遺君一物卽化作一鷄君可殺此鷄噉
029_0497_a_01L범지가 놀라 말하였다.
“나는 개미나 이도 죽이지 않는데, 하물며 닭을 죽이겠는가?”
비구가 말하였다.
“너의 본심은 곧 무수한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것인데, 이 닭을 죽이라는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범지가 또 말하였다.
“내가 어찌하여 무수한 사람을 죽인다고 하는가?”
비구가 말하였다.
“너는 본래 여기에서 좌선을 할 때에, 곧 이 나라의 왕이 되고자 하였다. 왕은 다스리는 데 여러 사람을 죽이지만, 죽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닭은 곧 너의 마음속의 식(識)으로, 닭으로 인하여 무위의 대도를 얻을 것이다. 국왕은 뭐 하러 되려고 하느냐?”
029_0496_c_23L梵志驚曰我尚不殺蟣蝨況當殺鷄比丘曰汝本心乃欲殺無數人殺此鷄何足言梵志復曰我云何殺無數人耶比丘曰汝本在此坐禪時乃欲求作此國王王者治化日可殺幾人而言不殺也此鷄卽是汝心中鷄乃可得無爲大道何用國王爲
범지가 곧 생각하였다.
‘이 비구는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안다. 이는 반드시 성인임에 틀림없다. 마땅히 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할 것이다.’
거듭 그를 위해 법을 말해 주자 곧 도적(道迹)을 얻었다. 이 범지는 겉으로는 비록 고요하였지만 마음은 쉼이 없었던 것이다. 스스로 식계(識鷄)를 죽이고 나서야 이에 휴식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후에 풀이하여 ‘심의상(心意想)을 쉰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029_0497_a_07L便思惟此比丘乃知我心中所念是聖人耶當從其教重爲說法卽得道迹此梵志身形雖靜心不休息也自得殺識鷄已乃可名爲休息耳後解曰心意想息
염신(念身)이란 몸의 36가지 부정(不淨)한 것이 드러나는 것을 관하여, 체념하여 흐트러짐이 없고, 또한 열반을 얻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옛날에 한 비구가 있어 아련야를 짓고 항상 걸식을 행했다. 강물 옆에서 식사를 하고, 식사한 뒤에는 발우를 씻었다. 그때 상류의 무덤가에 이제 막 죽은 여인이 있어 그 머리칼이 바람에 날려 홀연히 발우 속에 떨어졌다.
029_0497_a_12L念身者觀身三十六物惡露不淨諦念不亂亦得涅槃何以知之昔有比丘作阿練若常行乞食於江水邊食食訖澡鉢時上流岸邊塚閒有新死女人風吹頭髮忽然墮鉢中
이 비구는 그 머리칼을 집어 들고 그것을 자세히 바라보며 몹시 좋아했다.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하였다.
‘만약 이것이 말의 꼬리라면 너무 가늘고, 만약 남자의 머리칼이라면 너무 부드럽고 가늘다. 만약 서로 얽혀서 풀어지지 않으면 이것은 반드시 여인의 머리칼이다.’
그런데 머리칼은 얽혀 풀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곧 상념을 일으켰다.
‘이 머리칼의 여인은 반드시 아름답고, 얼굴은 복숭아 빛과 같고, 눈은 맑은 구슬과 같고, 코는 대나무 통을 자른 듯하며, 입은 단(丹)을 머금은 듯하며, 눈썹은 유연(蚰蜒:그리마) 같을 것이다.’
029_0497_a_17L比丘手執此髮諦視之甚妙心口獨語若是馬尾此復太細是男子髮復太軟細若繫不解者是女人髮卽便繫之不解便生想念此髮如是人必妙好面如桃花色如明珠鼻如截筒口如含丹眉如蚰
029_0497_b_01L이와 같이 분별하여 곧 욕심을 일으켜 물을 따라 찾고, 얼굴 보는 것을 추구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 한 여인을 보았는데 여우가 이미 그 반을 먹어, 몸뚱이는 냄새가 나고 문드러져 있었지만, 그 머리칼은 아직 남아 있었다. 머리칼을 집어 그것을 비교하자 길고 짧은 것이 서로 비슷했다. 조금 전의 욕상(欲想)이 석연하게 저절로 이해되었다.
029_0497_a_23L作是分別已便起欲心順水尋求想見顏色追求不已見一女人狐狼已噉其半身形臭爛其髮猶存執髮比之長短相似向者欲想釋然自解
또 거듭 그것을 관하여 분별하고 생각하였다.
‘이 사람이 살았을 때는 용모가 단정하고 예뻤지만, 지금은 문드러지고 썩은 사람일 뿐이구나. 내가 조금 전에 생각을 일으킨 것은 단지 몸에 대한 애욕을 탐하여 그러한 생각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 몸이 이와 같으니 나도 또한 무엇이 다르겠는가? 살펴보면 나의 몸도 4대가 합성된 것이다. 복이 다하고 연이 끊어지면 자연히 흩어진다.’
그 변화를 보고 마음을 깨달아 곧 도적(道迹)에 도달했다. 그러므로 염신이란 사문과를 얻는다고 하는 것이다.
029_0497_b_03L復重觀之分別惟察此人生時形容嚴好今者壞敗令人得見我向所起想者但欲貪身愛欲故而生斯念耳彼身如是我復何異諦計我身四大合成福盡緣離自然解散睹變心悟卽達道迹以是言之念身者獲沙門果也
염사(念死)란 행인(行人)이 염하기를, 목숨이 떠나 머물지 않고, 모든 근이 흩어진 것이 나무가 부패한 것과 같이 명근이 단절된 것이다. 마땅히 항상하지 않음[非常]을 염하여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옛날에 바길리(婆吉梨)라는 한 비구가 있었다. 좌선하여 도를 행해 수년이 지났지만, 번뇌가 없어지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의 몸이 큰 번뇌가 된다고 근심하였다.
029_0497_b_10L念死者行人念命逝不停諸根散壞如腐敗木命根斷絕當念非常以自覺悟昔有比丘名婆吉梨坐禪行道經歷年歲而有漏不除自患己身以爲大累
매번 자해를 생각했다.
‘사람이 도에 이르지 못하는 까닭은 실로 정좌하여도 이 몸이 얽히고설켜 유전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해 손으로 칼을 집어 스스로 찌르고자 하면서 다시 거듭 생각하였다.
‘세존께는 가르침이 있다. 모든 제자들도 스스로를 해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 해도 나는 지금 열반을 구하고자 한다. 열반 중에는 몸은 없다.’
029_0497_b_14L每思自害人所以不得至道者正坐此身纏緜流轉何時可卽以手執刀將欲自刎復重思惟世尊有教誡諸弟子不得自殘雖爾我今欲求涅槃涅槃中無身
이런 까닭에 먼저 몸을 없애 무위의 바른 도를 취하고자 칼을 들어 스스로를 찔렀다. 머리가 떨어지고 마음도 흩어져, 곧 아라한을 얻었다. 부처님께서 도를 얻은 것을 아시고, 모든 비구에게 그 시신을 화장하도록 명했다. 이러한 까닭에 염사도 또한 열반을 얻는다.
029_0497_b_18L是故先除身取無爲正爾便擧刀自刎頭亦墮心亦徹卽得阿羅漢佛知已得道勅諸比丘闍維其尸是故念死亦得涅槃也
029_0497_c_01L앞의 10염은 부처님께서 이근(利根) 중생을 위해 총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뒤에 또 말씀하신 것은 둔근(鈍根) 중생을 위해 그 뜻을 해석하신 것이다.
‘명예’란 나중에 전륜성왕을 얻는 것이다.
‘대과보를 얻는다’는 것은 나중에 제석천(帝釋天)을 얻는 것이다.
‘제선(諸善)이 널리 이른다’는 것은 나중에 범천의 과보를 얻는 것이다.
‘감로의 맛을 얻는다’는 것은 나중에 벽지불을 얻는 것이다.
‘무위처에 이른다’는 것은 나중에 아라한과를 얻는 것이다.
029_0497_b_22L前十念佛摠說爲利根衆生後更說者爲鈍根衆生析解其義也名譽後得轉輪聖王得大果報後得天帝釋諸善普至後獲梵天得甘露味後得辟支佛至無爲後獲阿羅漢果
위에서 10염을 설하는 데 이 다섯 구는 없었다. 지금 갖가지 과보를 더하는 까닭은 염불의 뜻과 그 이치의 깊고 묘함을 밝히고자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제자가 반열반하는 데 모두 숙세의 연에 의해 그 대가를 받는 까닭에 열반을 취한다고 말씀하신다. 목련은 얻어맞았고, 신자(身子)는 내장이 터졌다. 이와 같이 500제자는 각기 숙세의 연에 의해 멸도를 취했다. 오직 아난만이 최선(最善)으로 열반을 취했다. 아난이 열반하려고 하자 먼저 서광이 나타났다.
029_0497_c_04L上說十念無此五句今所以益諸報者欲明念佛之義其理深妙佛說諸弟子般涅槃以宿緣償對因取涅槃目連被打子下腸如是五百弟子各以宿緣取滅度唯有阿難最善取涅槃阿難將欲涅槃時先現光瑞
아난으로부터 산술을 배웠던 범지가 아난의 얼굴색이 빛나는 것을 보고, 아사세왕에게 고하였다.
“아난의 안색이 이상합니다. 열반에 들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왕이 사람을 보내 아난을 뒤쫓게 했다. 아난은 이미 500제자를 데리고, 중로항수(中路恒水)의 언덕 가에 이르러 배를 타고 건너려고 했다. 마침 강의 중간에 이르자 왕이 그 언덕에 이르렀다.
029_0497_c_10L有梵志從阿難學算術見阿難顏色發明告阿闍世王曰阿難顏色異常將欲取涅槃耶王卽遣人追尋阿難阿難已將五百弟子至中路恒水岸上上舩欲度至水半王以至岸
비사리에서는 아난이 온다는 것을 듣고 500동자를 보내 맞이했다. 두 나라의 뜻을 맞추려고 신력으로 배를 제어해 강 중간에 머물러 있게 했다. 그때 제자를 제도했다. 한 사람은 마선제(摩禪提)이고 또 한 사람은 마신제(摩呻提)였다. 마선제에게 말하였다.
“너는 갈빈(鞨賓)에 가서 불법을 널리 알려라. 그곳은 아직 불법이 없으니, 잘 유포되도록 하라.”
029_0497_c_15L毘舍離承阿難來亦遣五百童子迎欲適二國意故神力制舩令住中流時度弟子一名摩禪提二名摩呻提告摩禪提汝至羯賓興顯佛法彼土未有佛法好令流布
마신제에게 말하였다.
“너는 사자저국(師子渚國)에 가서 불법을 일으켜라.”
이와 같이 부촉하기를 마치고 18변을 지어 불을 내고 몸을 태웠다. 사리를 반으로 나누어 두 집안으로 하여금 각기 공양하게 하였다. 이것은 염불의 힘에 의해서 자재(自在)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029_0497_c_20L告摩呻提曰汝至師子渚國興隆佛法囑累訖作十八變出火燒身中分舍利令二家各得供養此由念佛之力故得自在也
分別功德論卷第二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㓮造
029_0498_a_01L
  1. 1)역자에 대한 후한(後漢) 시대의 기록이 붙어 있다.
  2. 2)『신수대장경』에서는 ‘저(邸)’와 같은 자라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