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C_IT_K1071_T_010
- 032_0726_a_01L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 제10권
- 032_0726_a_01L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卷第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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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립 언종 한역
김영률 번역 -
032_0726_a_02L沙門慧立本 釋
彦悰 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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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현경 3년 1월 거가를 따라 낙양에서 서경으로 돌아와 서부터 인덕(麟德) 원년 2월 옥화궁(玉華宮)에서 사 화(捨化)하기까지 - 032_0726_a_03L起顯慶三年正月隨車駕自洛還西京至麟德元年二月玉華宮捨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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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경 3년(658) 1월에 천자는 동도(東都)에서 서경(西京)으로 돌아왔는데, 법사도 역시 따라왔다. 가을 7월에 다시 조칙이 있어서 법사는 서명사(西明寺)로 옮겨갔다.
이 절은 현경 원년(655) 가을 8월 무자(戊子) 19일에 건립된 것인데, 앞서 이런 칙명이 있었다.
“연강방(延康坊)의 한왕(漢王)의 옛집에 황태자를 위해 관사(觀寺)1)를 각각 하나씩을 세워라.”
그리고 법사에게 명하여 그 땅을 살펴보게 하였다. - 032_0726_a_05L顯慶三年正月,駕自東都還西京,法師亦隨還。秋七月,再有 勅法師徙居西明寺。寺以元年秋八月戊子十九日造。先有 勅曰:“以延康坊澲王故宅爲皇太子分造觀、寺各一。”命法師案行其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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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가 보고 돌아와서 상주하였다.
“땅이 협소하여 도관(道觀)과 불사(佛寺)를 둘 다 지을 수는 없겠습니다.”
그래서 한왕의 옛집에는 모두 절만 짓게 하고, 도관은 보령방(普寧坊)에다 짓게 하였다.
그래서 먼저 절을 짓기 시작하여 그해 여름 6월에 준공되었다. - 032_0726_a_11L還奏地窄不容兩所,於是摠用營寺,其觀改就普寧坊。仍先造寺,其年夏六月營造功畢。
- 그 절은 한 면이 350보로서 둘레는 수 리나 되었다. 좌우로는 도로가 있고 앞뒤로는 가게가 모인 부락[廛落]이 있으며, 바깥쪽에는 푸른 회나무[靑槐]가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맑은 물이 흐르고 있어서, 장안의 절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웠다. 그리고 낭전(廊殿)과 누대(樓臺)는 날을 듯이 높이 치솟아 하늘에 닿을 것 같았고, 문고리[金鋪]2)와 화려한 용마루[藻棟]는 눈이 부실만큼 빛을 뿜고 있었다. 무려 10원(院)에 방이 4천여 칸이나 되어서 장엄하기 그지없다. 비록 양(梁) 나라 때의 동태사(同泰寺)3)나 위(魏) 나라 때의 영녕사(永寧寺)4)라 하여도 이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 032_0726_a_13L其寺面三百五十步,周圍數里。左右通衢,腹背廛落。靑槐列其外,淥水亘其閒,亹亹眈眈,都邑仁祠此爲最也。而廊殿樓臺,飛驚接漢,金鋪藻棟,眩日暉霞。凡有十院,屋四千餘閒。莊嚴之盛,雖梁之同泰、魏之永寧,所不能及也。
- 황제는 먼저 유사(有司)에게 조칙을 내려 대덕 50명과 시자(侍者) 각 1명씩을 선발하게 하고, 뒤에 다시 학업과 행실을 시험해서 동자 150명을 득도(得度)하게 하였다. 그 달 13일에 서명사에서 재(齋)를 올리고 승려가 되게 했는데, 법사에게 명하여 감독을 하게 하였다.
- 032_0726_a_19L勅先委所司簡大德五十人、侍者各一人,後更令詮試業行童子一百五十人擬度。至其月十三日,於寺建齋度僧,命法師看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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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26_b_01L가을 7월 14일에 이르러 승려를 맞이하여 절에 들게 했는데 그 위의(威儀)나 당개(幢蓋)와 음악 등은 한결같이 자은사(慈恩寺)에 들어갈 때와 비(碑)를 맞이할 때의 법식과 똑같이 했다.
황제가 조칙을 내려 서명사에 법사가 거처할 상방(上房) 한 채를 주고, 새로 득도한 사미 해회(海會) 등 10명을 제자로 삼게 하였다. - 032_0726_b_01L至秋七月十四日,迎僧入寺,其威儀、幢蓋、音樂等,一如入慈恩及迎碑之則。 勅遣西明寺給法師上房一口,新度沙彌海會等十人充弟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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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선조(先朝) 때부터 법사를 중히 여겼기 때문에 제위에 오른 뒤에도 더욱 더 예의와 존경을 다하였다. 중사(中使)와 조정의 신료[朝臣]들의 위문이 끊이지 않았으니, 면백(綿帛)과 능금(綾錦) 등을 하사한 것이 모두 합해서 만여 단(段)이나 되었으며, 법복과 납가사(納袈裟) 등도 수백 벌이나 되었다.
그러나 법사는 이런 것들을 받으면 모두 나라를 위해 탑을 세우거나 경전이나 불상을 만드는데 쓰고, 또 가난한 사람이나 외국의 바라문 손님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들어오는 대로 나누어 주어서 쌓아두는 일이 없었다. - 032_0726_b_05L大帝以法師先朝所重,嗣位之後禮敬逾隆,中使朝臣問慰無絕,䞋施緜帛、綾錦前後萬餘段,法服、納、袈裟等數百事,法師受已,皆爲國造塔及營經像,給施貧窮幷外國婆羅門客等,隨得隨散,無所貯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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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서도 10구지(俱胝)5)나 되는 불상을 조성할 것을 발원해 왔었다. 1구지는 백만을 말하는데 결국 모두 조성하였다.
중국에서는 『반야경』을 중히 여기는데, 전대(前代)에서 비록 번역했다고 하나 모두 다 번역된 것이 아니라서 사람들은 법사에게 다시 번역해 줄 것을 요청했다. - 032_0726_b_11L發願造十俱胝像,百萬爲一俱胝,竝造成矣。東國重於『般若』,前代雖翻,不能周備,衆人更請委翻。
- 그러나 반야부(般若部)는 워낙 방대한데, 황제가 있는 수도[京師]에 있으면 잡무가 많을 뿐 아니라 또 인명(人命)이 무상한 것이어서 완료하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그래서 법사는 옥화궁(玉華宮)에 가서 번역할 것을 주청(奏請)하였고, 황제는 이를 허락하였다.
- 032_0726_b_14L然『般若』部大,京師多務,又人命無常,恐難得了,乃請就於玉華宮翻譯。帝許焉。
- 그래서 현경 4년(659) 겨울 10월에 법사는 경사를 출발하여 옥화궁으로 가게 되었는데, 경을 번역하는 대덕들과 문도(門徒)들도 함께 갔다. 모든 생활필수품에 대한 공급은 경사에서와 같았으며, 그곳에 가서는 숙성원(肅誠院)에서 거처하였다.
- 032_0726_b_16L卽以四年冬十月,法師從京發向玉華宮,幷翻經大德及門徒等同去,其供給諸事一如京下,至彼安置肅誠院焉。
- 현경 5년(660) 봄 1월 1일에 『대반야경』의 번역을 먼저 시작했다. 이 경의 범본(梵本) 원전은 모두 20만 송(頌)이나 된다. 글이 워낙 광대하였으므로 학도들은 매번 생략하기를 청했고, 법사는 대중들의 뜻에 따라서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것처럼 번잡한 것은 빼고 중복된 것은 생략하기로 하도록 하였다.
- 032_0726_b_19L至五年春正月一日,起首翻『大般若經』。經梵本摠有二十萬頌,文旣廣大,學徒每請刪略,法師將順衆意,如羅什所翻,除繁去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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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26_c_01L그런데 이렇게 생각을 했던 날 밤이면 꿈속에서 너무나 공포스런 일을 겪게 됨으로써 서로 경계를 하게 되었다. 즉 어떤 때는 위험한 곳에 오르기도 하고 험준한 길을 밟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맹수가 사람을 덮치는 것을 보고는 땀을 흘리며 벌벌 떨고 있다가 가까스로 탈출하는 때도 있었다. 꿈에서 깨어나자 놀라움과 두려운 마음으로 여러 대중들에게 말했다.
“도로 전체를 번역하기로 합시다.” - 032_0726_b_22L作此念已,於夜夢中卽有極怖畏事以相警誡,或見乘危履嶮,或見猛獸搏人,流汗戰慄,方得免脫。覺已驚懼,向諸衆說,還依廣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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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밤중에 모든 불보살의 미간(眉間)에서 빛이 나와서 법사의 몸을 비추었고, 그 빛이 몸에 닿자 마음이 상쾌해졌다. 또 법사가 몸소 화등(花燈)을 들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혹은 높은 자리에 올라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둘러싸며 칭찬하고 공경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또는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이름난 과일을 바치는 꿈을 꾸기도 하였다.
그런 꿈에서 깨어나자 기쁘고 경하스러운 마음에 감히 더 이상 생략할 수가 없었으므로 산스크리트 원본대로 번역하기로 했다. - 032_0726_c_03L夜中乃見諸佛菩薩眉間放光,照觸己身,心意怡適。法師又自見手執花燈供養諸佛,或昇高座爲衆說法,多人圍遶,讚嘆恭敬。或夢見有人奉己名菓,覺而喜慶,不敢更刪,一如梵本。
-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신 곳은 대개 네 곳이었다. 첫째는 왕사성(王舍城)의 취봉산(鷲峯山)에서이고, 둘째는 급고독원(給孤獨園)에서이며, 세 번째는 타화자재천왕궁(他化自在天王宮)에서이고, 네 번째는 왕사성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인데, 모두 16회를 설하셨던 것을 합하여 1부(部)로 만든 것이다.
- 032_0726_c_08L佛說此經凡在四處:一,王舍城鷲峯山;二,給孤獨園;三,他化自在天王宮;四,王舍城竹林精舍。摠一十六會,合爲一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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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법사는 서역에서 세 가지 판본을 얻어왔으므로, 번역할 때에 글의 내용 중에 의심스러운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이 있을 때는 이 세 가지 원본을 비교하여서 교정을 보았다. 이렇게 신중히 살펴 가면서 번역을 하였기 때문에, 조심하고 삼가는 그 마음은 자고이래로 견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혹 글이 이상하거나 뜻이 너무 오묘하여 주저하는 마음이 생기거나 반드시 다른 경계[異境]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마치 다른 사람이 있기나 한 것처럼 명쾌하게 해결해 주어 마음이 활짝 열리게 해 주어 흡사 구름을 걷어 내고 햇빛을 보는 것과 같이 해 주었다. - 032_0726_c_11L然法師於西域得三本,到此翻譯之日,文有疑錯,卽挍三本以定之,慇懃省覆,方乃著文,審愼之心,古來無比。或文乖旨奧,意有躊躕,必覺異境,似若有人授以明決,情卽豁然,若披雲睹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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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법사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이와 같은 깨달음의 자리[悟處]가 현장 같이 생각이 얕은 사람에게 어찌 통할 수 있는 일인가? 이는 모두 불보살의 가피를 입은 것일 뿐이다.” - 032_0726_c_16L自云:“如此悟處,豈奘淺懷所通,竝是諸佛菩薩所冥加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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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전의 첫머리에 「엄정불토품(嚴淨佛土品)」이 있는데, 그 품 가운데 다음과 같은 설이 있다.
“모든 보살마하살중(菩薩摩訶薩衆)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위해서 신통원력(神通願力)으로써 대천계(大千界)의 가장 훌륭한 진보(珍寶)와 온갖 묘향화(妙香花), 온갖 맛있는 음식, 의복과 음악, 그리고 마음에 따라 생겨나는 5진(塵)의 묘경(妙境)과 같은 가지가지의 공양을 성대히 하여서 설법하는 자리[說法處]를 엄숙하게 하였다.” - 032_0726_c_18L經之初會有嚴淨佛土品,品中說諸菩薩摩訶薩衆爲般若波羅蜜故,以神通願力,盛大千界上妙珍寶、諸妙香花、百味飮食、衣服、音樂、隨意所生五塵妙境種種供養,嚴說法處。時玉華寺主慧德及翻經僧嘉尚。”
- 032_0727_a_01L그날 밤 마침 옥화사의 주지 혜덕(慧德)과 번역승 가상(嘉尙)은 같은 꿈을 꾸었다. 즉 옥화사 경내가 넓고 엄숙하며 깨끗했는데, 비단으로 장엄되고 당장(幢帳)과 보여(寶與)와 화번(花幡)과 기악(伎樂)이 절 안에 가득 넘쳤고, 또 수많은 승려들이 손에 화개(花蓋)를 들고 전과 같이 공구(供具)를 가지고 함께 와서 『대반야경』에 공양을 하는 것이었다. 절 안과 거리의 담장과 벽은 모두 비단으로 장식되었고, 땅에는 아름다운 꽃[名華]이 쌓여 있어서 대중들은 그것을 밟으며 역경원(譯經院)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 032_0726_c_23L其夜同夢見玉華寺內廣博嚴淨,綺飾莊嚴,幢帳、寶輿、花幡、伎樂盈滿寺中,又見無量僧衆手執花蓋,如前供具,共來供養『大般若經』,寺內衢巷牆壁皆莊綺錦,地積名華,衆共履踐。至翻經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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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원(院)은 더욱 수승함과 미묘함을 더했는데, 마치 경전에서 말한 보장엄토(寶莊嚴土)와도 같았다. 또 원(院) 안에는 세 곳의 강당에서 강설(講說)이 열리고 있는데, 법사는 그 중 중당(中堂)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런 광경을 보고 기뻐하다가 꿈을 깼기에, 두 사람은 함께 법사에게 가서 꿈속에서 본 일을 이야기하였다. 그러자 법사가 말했다.
“나는 지금 바로 그 대목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모든 보살들이 반드시 공양을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본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 032_0727_a_06L其院倍加勝妙,如經所載,寶莊嚴土。又聞院內三堂講說,法師在中堂敷演。旣睹此已,歡喜驚覺,俱參法師說所夢事。法師云:“今正翻此品,諸菩薩等必有供養。諸師等見信有此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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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전(殿) 옆에 두 그루의 능금나무[柰樹]가 있었는데, 때도 아닌데 홀연 종종 꽃을 피우곤 하였다. 꽃은 모두 여섯 잎이 나왔는데, 붉고 하얀 아름다운 색깔이 범상치가 않고 매우 사랑스러웠다.
이때 대중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반야(般若)를 다시 밝힐 징조이다. 또 여섯 개의 잎이 나온 것은 6도피안(到彼岸)6)을 나타낸 것이다.” - 032_0727_a_10L時殿側有雙柰樹,忽於非時數數開花,花皆六出,鮮榮紅白,非常可愛。時衆詳議,云是『般若』再闡之徵。又六出者,表六到彼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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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법사는 이 경전을 번역하면서 때로 조급한 마음을 가졌으며, 항상 생명의 무상을 생각하면서 여러 승려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현장은 금년에 65세가 되었으니, 반드시 이 가람에서 목숨을 마치게 될 것이오. 그런데 경부(經部)는 매우 광대하기 때문에 다 끝내지 못할까 봐 항상 걱정이 되오. 아무튼 모두가 노력하고 더욱 힘써서 노고를 아끼지 말기 바랄 뿐이오.” - 032_0727_a_14L然法師翻此經時,汲汲然恒慮無常,謂諸僧曰:“玄奘今年六十有五,必當卒命於此伽藍,經部甚大,每懼不終,努力人加勤懇,勿辭勞苦。”
- 용삭(龍朔) 3년(663) 겨울 10월 23일에 드디어 번역을 끝내고 붓을 놓았다. 도합 6백 권으로, 『대반야경』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법사는 합장하고 기뻐하며 여러 대중들에게 말했다.
- 032_0727_a_18L至龍朔三年冬十月二十三日,功畢絕筆,合成六百卷,稱爲『大般若經』焉。合掌歡喜,告徒衆曰:
- 032_0727_b_01L“이 경전은 우리 중국과는 인연이 많은 책이오. 현장이 이 옥화궁으로 온 것도 다 이 경전의 힘이었소. 지난 날 경사(京師)에 있을 때에는 모든 인연들이 어지럽게 얽혀 있었으니 어찌 번역이 완료되기를 바랄 수 있었겠소. 지금 이렇게 번역을 종결하여 마치게 된 것은 모두 여러 부처님의 가호와 용수(龍樹)보살과 천친(天親)보살의 도움 덕분일 것이오. 이 경전은 그야말로 나라를 지키는[鎭國] 중요한 경전(要典)이며, 인간과 하늘[人天]의 크나큰 보배이니 대중들은 기뻐하고 축하해 주기 바라오.”
- 032_0727_a_20L“此經於漢地有緣,玄奘來此玉華者,經之力也。向在京師,諸緣牽亂,豈有了時。今得終訖,竝是諸佛冥加,龍天擁祐,此乃鎭國之典,人天大寶,徒衆宜各踊躍欣慶。”
- 이때 옥화사의 도유나(都維那)7) 적조(寂照)는 번역이 완료 된 것을 경하하여 재를 올리고 공양하였다. 이날에는 숙성전(肅誠殿)에 있던 경전을 가수전(嘉壽殿)의 재 지내는 장소로 옮겨 가서 강독(講讀)했는데, 경전을 영접할 당시에 『반야경』은 빛을 내고 모든 하늘은 꽃비를 내렸고 동시에 하늘에서는 음악이 울리고 이상한 향기가 퍼졌다.
- 032_0727_b_02L時玉華寺都維那寂照,慶賀功畢,設齋供養。是日請經從肅誠殿往嘉壽殿齋所講讀。當迎經時,『般若』放光,諸天雨花,幷聞空中音樂、非常香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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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신령한 상서의 기운을 보고 법사는 기쁨이 더욱 더하여 여러 문인(門人)에게 말했다.
“이 경전에 이런 말이 있소.
‘여기에 응당 대승(大乘)을 좋아하는 자가 있어서, 국왕이나 대신(大臣), 사부대중(四部大衆)이 이 경을 베껴서 수지(受持)하고 독송(讀誦)하여 유포하면, 모두 하늘에 나고 구경(究竟)의 해탈을 얻는다.’
이런 글이 이미 실려 있으니 여러분들은 잠자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오.” - 032_0727_b_06L旣睹靈瑞倍增嘉慰,謂門人曰:“經自記此方當有樂大乘者國王、大臣、四部徒衆,書寫受持,讀誦流布,皆得生天究竟解脫。旣有此文,不可緘默。”
- 11월 22일, 법사는 제자 규기(窺基)에게 표문을 받들어 상주하게 하여 황제에게 경전의 서문을 지어 줄 것을 청하게 하였다. 그러자 12월 7일에 통사사인(通事舍人)8) 풍무(馮茂)가 조칙을 전하면서 윤허를 알려 왔다.
- 032_0727_b_10L至十一月二十日,令弟子窺基奉表奏聞,請御製經序。至十二月七日,通事舍人馮茂宣勅垂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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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는 『반야경』을 번역한 뒤로 스스로 체력이 쇠잔해지는 것을 깨닫고 곧 죽음이 닥쳐올 것을 알고 문인들에게 말했다.
“내가 옥화궁에 온 것은 본래 『반야경』과의 인연 때문이오. 이제 경전의 일도 이미 끝났고 나의 생애 역시 다 되었소. 만약 내가 죽거든 그대들은 마땅히 나의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도록 하시오. 그저 거적에 싸서 산간의 벽지를 택해서 안장해 주고, 궁궐이나 절에는 가까이 두지 말도록 해주시오. 깨끗하지 못한 몸은 마땅히 벽지의 먼 땅에 묻혀야 하오.” - 032_0727_b_12L法師翻『般若』後,自覺身力衰竭,知無常將至,謂門人曰:“吾來玉華,本緣『般若』,今經事旣終,吾生涯亦盡,若無常後,汝等遣吾宜從儉省,可以蘧蒢裹送,仍擇山㵎僻處安置,勿近宮寺。不淨之身宜須屛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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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말했다.
“화상(和尙)의 기력은 아직 괜찮으십니다. 존안(尊顔)도 옛날과 다름이 없는데 어찌하여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법사가 말했다.
“내 스스로가 아는 것이오. 그대들이 어찌 알 수 있겠소.” - 032_0727_b_18L門徒等聞之哀鯁,各抆淚啓曰:“和上氣力尚可,尊顏不殊於舊,何因忽出此言?”法師曰:“吾自知之,汝何由得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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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덕(麟德) 원년(664) 봄 1월 1일, 역경(譯經)의 대덕들과 옥화사의 대중들은 법사에게 『대보적경(大寶積經)』을 번역해줄 것을 은근히 요청하였다.
법사는 대중의 뜻이 한결같고 지성으로 바라는 것을 보고는 몇 줄을 번역하였다. 그러다가 문득 산스크리트 원본을 거두고는 대중에게 말했다. - 032_0727_b_21L麟德元年春正月朔一日,翻經大德及玉華寺衆慇懃啓請翻『大寶積經』。法師見衆情專至,俛仰翻數行訖,便攝梵本停住,告衆曰:
- 032_0727_c_01L“이 경전의 부수는 『대반야경』과 같소. 내가 스스로의 기력을 헤아려보니 더 이상은 이 일을 해내지 못하겠소. 죽을 때가 이미 임박하여 그리 멀지 않았소. 나는 이제 난지(蘭芝) 등의 골짜기로 가서 예배하고, 구지불상(俱胝佛像)에게 하직을 아뢰어야겠소.”
- 032_0727_c_01L“此經部軸與『大般若』同,玄奘自量氣力不復辦此,死期已至,勢非賖遠。今欲往蘭芝等谷禮拜辭俱胝佛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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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법사는 문인들과 함께 떠났는데, 여러 승려들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침통해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예배를 마치고 절로 돌아오자 법사는 행도(行道)에 전념할 뿐 번역하는 일은 완전히 놓고 말았다.
8일에 제자인 고창(高昌)9)에서 온 승려 현각(玄覺)은 꿈을 꾸었는데, 단엄하고 높고 큰 하나의 부도(浮圖)가 갑자기 넘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 꿈을 보고 놀라 깨어나 법사에게 아뢰니 법사가 말했다.
“그대 신상에 관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사라질 징조이니라.” - 032_0727_c_04L於是與門人同出,僧衆相顧莫不潛然。禮訖還寺,專精行道,遂絕翻譯。至八日,有弟子高昌僧玄覺,夢見有一浮圖端嚴高大,忽然崩倒,見已驚起,告法師。法師曰:“非汝身事,此是吾滅謝之徵。”
- 9일 저녁 때, 방 뒤쪽에 있는 냇물을 건너다가 발을 잘못 짚어 넘어져서 다리에 작은 상처를 입었다. 이로 인해 병상에서 앓게 되었고 기운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 032_0727_c_09L至九日暮閒,於房後度渠,腳跌倒,脛上有少許皮破,因卽寢疾,氣候漸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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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16일에는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이 이렇게 말했다.
“나의 눈앞에 하얀 연꽃[白蓮華]이 있다. 쟁반보다 더 큰 꽃이 맑고 깨끗하여 사랑스럽구나.” - 032_0727_c_11L至十六日,如從夢覺,口云:“吾眼前有白蓮華,大於槃,鮮淨可愛。”
- 17일에는 또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다. 모습이 위엄 있고 거대한 백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두 비단옷을 입고는, 여러 가지 기수(綺繡)와 묘화(妙花)와 진보(珍寶)를 들고 법사가 누워 있는 방을 장식하였다. 그리고 다시 또 역경원 안팎을 두루 장엄하여, 마침내 원(院)의 뒷산 숲속에 이르기까지 다 번당(幡幢)을 세워 여러 가지 빛깔로 장식하고 아울러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 032_0727_c_13L十七日,又夢見百千人,形容偉大,俱著錦衣,將諸綺繡及妙花珍寶,裝法師所臥房宇以次裝嚴遍翻經院內外。爰至院後山嶺林木,悉豎幡幢,衆彩間錯,幷奏音樂;
- 문 밖에는 또 수없이 많은 보배로 장식한 수레[寶輿]가 보였는데, 그 안에는 백 천(百千) 종류나 되는 향기로운 음식과 맛좋은 과일이 있었으며, 그 모두가 인간 세계의 물건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각각 그것들을 들고 와서 법사에게 공양했다.
- 032_0727_c_18L門外又見無數寶輿,輿中香食美菓色類百千,竝非人中之物,各各擎來供養於法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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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법사가 말하였다.
“이와 같은 진미(珍味)는 신통을 얻은 자만이 먹을 수가 있소. 현장은 아직 그런 지위에 오르지 못했으니 어찌 감히 받을 수가 있겠소.” - 032_0727_c_20L法師辭曰:“如此珍味,證神通者方堪得食。玄奘未階此位,何敢輒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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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28_a_01L비록 이렇게 사양했으나 사람들은 음식 바치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때 시자가 기침을 하는 바람에 법사는 꿈에서 깨어났다. 그래서 법사는 주지인 혜덕(慧德)에게 가서 앞의 일을 자세히 말한 다음, 다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일생 동안 닦아온 복혜(福慧)는 그 형상과 모습에 따라 공(功)이 없어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진실로 불교의 인과란 헛된 것이 아니다.” - 032_0727_c_22L雖此推辭而進食不止。侍人謦欬,遂爾開目,因向寺主慧德具說前事。法師又云:“玄奘一生以來所修福慧,准斯相貌,欲似功不唐捐,信如佛教因果竝不虛也。”
- 드디어 가상(嘉尙) 법사에게 명하여 번역한 경전을 모두 기록하게 했는데, 모두 74부 1,338권이나 되었다. 또 구지(俱胝)의 화상(畵像)과 미륵상을 각 1천 정(幀) 만들고, 또 소상(塑像) 10구지, 그리고 『능단반야(能斷般若)』ㆍ『약사(藥師)』ㆍ『육문다라니(六門陀羅尼)』 등의 경전을 베껴 쓴 것이 각 10부가 되었다. 그리고 비경(悲敬) 이전(二田)을 공양한 사람이 각 1만여 명, 백천등(百千燈)을 태워 속죄한 사람 수만 명을 기록했다.
- 032_0728_a_03L遂命嘉尚法師具錄所翻經、論,合七十四部,摠一千三百三十八卷。又錄造俱胝畫像、彌勒像各一千幀,又造塑像十俱胝,又抄寫『能斷般若』、『藥師』、『六門陁羅尼』等經各一十部,供養悲、敬二田各萬餘人,燒百千燈,贖數萬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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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을 마치자 가상으로 하여금 읽게 하였고, 그것을 듣고 나서 합장하며 대단히 기뻐하였다. 그리고 또 문인들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되었으니 몸을 버리고자 하오. 인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이게 해 주시오.”
그리고 의복과 자금을 희사하여 다시 불상을 만들게 하고, 아울러 승려들에게 행도(行道)를 청하였다. 23일에는 재를 베풀고 보시하였다. - 032_0728_a_09L錄訖,令嘉尚宣讀,聞已合掌喜慶。又告門人曰:“吾無常期至,意欲捨墮,宜命有緣摠集。”於是罄捨衣資,更令造像,幷請僧行道。至二十三日,設齋䞋施。
- 이날 또 소공(塑工)인 송법지(宋法智)에게 명하여 가수전(嘉壽殿)에다 보리상골(菩提像骨)을 세우게 하였다. 그리고 사중(寺中)의 대중들과 역경의 대덕들과 아울러 문도들과 함께 환희하며 다음과 같이 이별의 말을 했다.
- 032_0728_a_13L其日又命塑工宋法智於嘉壽殿豎菩提像骨已,因從寺衆及翻經大德幷門徒等乞歡喜辭別,云:
- “나의 이 독신(毒身)은 매우 깊은 병에 걸렸소. 할 일도 끝났으니 오래 머물 이유도 없소. 내가 닦은 복혜(福慧)는 중생들에게 회향하여 보시[廻施]하려 하오. 나는 여러 중생들과 함께 도리천(忉利天) 미륵의 권속으로 태어나서 자존(慈尊)을 받들어 모시다가, 부처님이 하생(下生)하실 때 역시 따라 내려와서 널리 불사(佛事)를 짓고 이에 무상보리(無上菩提)에 이르기를 바라오.”
- 032_0728_a_16L“玄奘此毒身深可厭患,所作事畢,無宜久住,願以所修福慧迴施有情,共諸有情同生睹史多天彌勒內眷屬中奉事慈尊,佛下生時亦願隨下廣作佛事,乃至無上菩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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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28_b_01L말을 마치고 나서 고요히 정념(正念)10)에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입으로 이렇게 독송하였다.
“색온(色蘊)은 불가득(不可得)이고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역시 불가득이다. 안계(眼界)는 불가득이고 나아가 의계(意界) 역시 불가득이다. 안식계(眼識界)는 불가득이고 나아가 의식계(意識界) 역시 불가득이다. 무명(無明)은 불가득이고 나아가 노사(老死) 역시 불가득이다. 또는 보리(菩提)도 불가득이고, 불가득 역시 불가득이니라.” - 032_0728_a_20L辭訖,因默正念,時復口中誦。“色蘊不可得,受想行識亦不可得;眼界不可得,乃至意界亦不可得;眼識界不可得,乃至意識界亦不可得,無明不可得,乃至老死亦不可得;乃至菩提不可得,不可得亦不可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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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입으로 게송을 설하여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무 미륵(彌勒) 여래 응공 정등각이시여, 원컨대 함식(含識)과 더불어 속히 자애로운 얼굴[慈顔]을 받들게 하소서. 나무미륵여래의 처소에 계시는 대중들이여, 원컨대 이 목숨을 버리고 나면 반드시 그곳에 태어나게 하소서.” - 032_0728_b_03L復口說偈,教傍人云:“南無彌勒如來、應、正等覺,願與含識速奉慈顏,南無彌勒如來所居內衆,願捨命已,必生其中。”
- 그때 절의 주지인 혜덕(慧德)은 꿈에, 천구(千軀)의 금불상[金像]이 동쪽에서 내려와서 역경원으로 들어가고, 향화(香花)가 하늘에 가득한 것을 보았다.
- 032_0728_b_06L時寺主慧德又夢見有千軀金像從東方來,下入翻經院,香花滿空。
- 2월 4일 밤중에 간호하고 있던 승려 명장(明藏) 선사는 길이가 1장(丈)이나 되는 하얀 연꽃[白蓮華]을 각각 들고 있는 두 사람을 보았다. 연꽃은 작은 수레바퀴 같은 모양이었고 꽃잎은 세 겹으로 되어 있었으며 잎의 길이는 1척 남짓하며 광택이 나고 매우 아름다웠다. 두 사람이 법사 앞에 이르자 꽃을 든 사람이 말했다.
- 032_0728_b_08L至二月四日夜半,瞻病僧明藏禪師見有二人各長一丈許,共捧一白蓮華如小車輪,花有三重,葉長尺餘,光淨可愛,將至法師前。擎花人云:
- “법사께서 무시이래(無始以來)로 가지고 있던 번뇌와 유정(有情)이 갖는 모든 악업(惡業)들은 지금의 이 작은 병으로 인하여 다 소멸되었습니다. 마땅히 기뻐할 일입니다.”
- 032_0728_b_12L“師從無始已來所有損惱有情諸有惡業,因今小疾竝得消除,應生欣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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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는 돌아다보며 합장한 채 한참동안 있더니, 드디어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받친 다음 왼손을 펴서 왼쪽 다리에 올리고 두 다리를 펴서 포갠 다음 오른쪽으로 누웠다.
그리고 목숨을 마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았다. - 032_0728_b_14L法師顧視,合掌良久,遂以右手而自支頭,次以左手申左䏶上,舒足重壘右脅而臥,迄至命終,竟不迴轉,不飮不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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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밤중에 제자 대승광(大乘光) 등이 물었다.
“화상께서는 반드시 미륵보살의 내원(內院)11)에 환생하신다고 믿으십니까?”
법사가 대답했다.
“환생할 것이다.” - 032_0728_b_17L至五日夜半,弟子光等問:“和上決定得生彌勒內院不?”法師報云:“得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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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치고 나자 호흡이 점점 약해지더니 잠깐 사이에 운명하였다. 옆에서 모시던 사람들은 법사가 운명한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다가, 코에 솜을 대보고 나서야[屬纊] 비로소 알게 되었다.
법사의 몸은 발끝에서부터 점점 차가워졌으나 끝까지 정수리는 따뜻하였다. 얼굴빛은 적백(赤白)이었으며 기쁨이 가득한 얼굴은 평소보다 아름다웠다. 49일[七七日]이 지나도 모습에 전혀 변화가 없었고 또한 다른 기운도 없었다. 정향(定香)과 혜향(慧香)의 장엄과 계향(戒香)의 도움을 입지 않고서야 누가 능히 이렇게 되겠는가. - 032_0728_b_19L言訖,喘息漸微。少閒神逝,侍人不覺,屬纊方知,從足向上漸冷,最後頂暖,顏色赤白,怡悅勝常,過七七日竟無改變,亦無異氣。自非定慧莊嚴,戒香資被,孰能致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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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28_c_01L자은사에는 명혜(明慧)라고 하는 승려가 있었는데, 업행(業行)에 열심히 정진하여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염송(念誦)하고 경행(經行)하기를 한시도 게을리 하지 않는 자였다.
그런데 법사가 운명하던 날 밤에 그가 밤중에 불당(佛堂)을 돌며 행도(行道)를 하고 있었는데, 북쪽에 흰 무지개 네 줄기가 걸쳐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무지개는 북에서 남쪽을 향해 정수(井宿)12)를 꿰뚫고 곧바로 자은사의 탑원(塔院)까지 이르렀는데, 맑고 깨끗한 광채가 분명하였다. - 032_0728_b_23L又慈恩寺僧明慧業行精苦,初中後夜念誦經行,無時懈廢,於法師亡夜夜半後,旋遶佛堂行道,見北方有白虹四道從北亘南貫井宿,直至慈恩塔院,皎潔分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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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음속으로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까 괴이하게 여기다가, 옛날 여래께서 멸도(滅道)하실 때 흰 무지개 12줄기가 서방에서 곧바로 태미(太微)13)를 관통하였고, 바로 그때 대성(大聖)께서 천화(遷化)하셨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렇다면 지금 이러한 형상이 나타난 것은 옥화궁의 법사께서 운명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날이 밝자 그는 대중들에게 자신이 본 것을 말했고, 대중들은 모두 이상하게 생각했다. - 032_0728_c_04L心怪所以。卽念往昔如來滅度,有白虹十二道從西方直貫太微,於是大聖遷化。今有此相,將非玉華法師有無常事耶?天曉向衆說其所見,衆咸怪之。
- 9일 아침, 법사의 입적 사실이 드디어 서울[京師]에 알려졌다. 백홍(白虹)의 무지개가 나타났던 현상이 딱 들어맞게 되자,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그 감응에 감탄하였다.
- 032_0728_c_08L至九日旦,無常事果,達於京師符虹現之象,聞者嗟其感異。
- 법사의 키는 7척 남짓하고 몸은 붉은 빛을 띤 하얀 색이었으며 눈과 눈썹이 뚜렷했다. 단정하고 엄숙한 모습은 마치 조각상[塑像] 같았고 아름답고 우아하기가 꼭 그림 같았다. 음성은 맑게 멀리 퍼졌으며 말투는 우아하고 청아하여 듣는 사람이 싫증을 내지 않았다.
- 032_0728_c_10L法師形長七尺板,身赤白色,眉目疏朗,端嚴若塑,美麗如畫。音詞淸遠,言談雅亮,聽者無厭。
- 혹 대중 속에 있거나 손님을 대할 때에는 반나절을 줄곧 앉아 있어도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었다. 복장은 늘 가사[乾陀]14)를 입고 있었는데, 꼭 세모시[細氈]로 만들어 입었다. 걸어가는 모습은 유유자적했으며 항상 똑바로 보고 곁눈질하지 않았다. 도도한 모습은 마치 큰 강이 대지 위를 흐르는 것 같고, 환한 모습은 연꽃이 물 위에 피어난 것 같았다.
- 032_0728_c_12L或處徒衆,或對嘉賓,一坐半日,身不傾搖。服尚乾陁,裁唯細㲲,修廣適中,行步雍容,直前而視,輒不顧眄。滔滔焉若大江之紀地,灼灼焉類芙蕖之在水。
- 거기에다 시종일관 계율로써 단정하고 깨끗한 모범을 보였으며,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계율[浮囊]15)을 보호하는 이상이며 계를 지키는 견고함은 계초(繫草)를 뛰어넘었다. 성품은 간명(簡明)하고 온화함을 좋아했으며 사람 사귀고 놀러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한 번 도량(道場)에 들어가면 조정의 명이 아니면 외출하지 않았다.
- 032_0728_c_17L加以戒範端凝,始終如一,愛惜之志過護浮囊,持戒之堅超逾繫草。性愛怡簡,不好交遊,一入道場,非朝命不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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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가 입적한 후의 일이었다.
서명사(西明寺)의 상좌인 도선 율사(道宣律師)는 신(神)을 감동시킬 만한 덕(德)이 있는 자였는데, 그가 건봉(乾封) 연간(666~667)에 신이 나타난 것을 보았다. 신은 이렇게 말했다. - 032_0728_c_20L法師亡後,西明寺上座道宣律師有感神之德,至乾封年中見有神現,自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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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29_a_01L“제자는 위장군제천(韋將軍諸天)의 아들로서 귀신의 우두머리입니다. 여래께서 열반에 드시려 할 때에 제자에게 섬부주(贍部洲)의 불법을 잘 보호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 무렵에 율사께서 계행(戒行)이 청엄(淸嚴)하고 마음은 율부(律部)에 두어서, 사방에서 의문을 가진 사람이 찾아와서 자문을 받고 해결하곤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계율의 경중(輕重)을 제정할 때에 잘못된 부분이 있어서 율사의 수명이 점점 단축되고 있었습니다. 글의 기록[文記]이 올바르지 않으면 후인(後人)을 그르치게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찾아와서 율사에게 부처님의 뜻[佛意]을 보이는 것입니다.” - 032_0728_c_22L“弟子是韋將軍諸天之子,主領鬼神。如來欲入涅槃,勅弟子護持贍部遺法,比見師戒行淸嚴,留心律部,四方有疑皆來諮決,所制輕重,時有乖錯。師年壽漸促,文記不正,便誤後人,以是故來示師佛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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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는 도선이 꺼내놓은 계율을 베껴놓은 것[律抄]과 의식(儀式)의 경중(輕重)이 치우치거나 잘못된 곳을 지적하면서 다 개정하도록 했다.
도선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움과 희비가 엇갈리는 가운데, 경율론(經律論) 등에서 여러 가지 의문 나는 점을 물었다. 그 신은 모두 그것을 해결해 주었다. 또 도선은 옛날부터 법을 전해 내려온 여러 승려들의 덕의 고하를 물었고, 아울러 또 현장 법사에 대해서 물었더니 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 032_0729_a_04L因指宣所出律抄及輕重儀僻謬之處,皆令改正。宣聞之悚慄悲喜,因問經、律、論等種種疑妨,神皆爲決之。又問古來傳法之僧德位高下,幷亦問法師。神答曰:
- “예로부터 여러 법사[諸師]들의 지해(知解)와 수행에는 서로 장단점이 있어서, 일괄적으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현장 법사 한 사람만은 9생(生) 이래로 복(福)과 혜(慧)의 양업(兩業)을 갖추어 닦았고, 태어나는 곳마다 많이 듣고 배워 박식하며 총명하고 지혜롭고 말재주[辯才]가 있었으니, 섬부주(贍部洲)의 지나국(脂那國)에서 항상 제일인자였습니다. 복덕 또한 그러했습니다.
- 032_0729_a_09L“自古諸師解行互有短長而不一準,且如奘師一人,九生已來備修福慧兩業,生生之中多聞博洽,聰慧辯才,於贍部洲脂那國常爲第一,福德亦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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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번역한 글은 내용과 문체가 다 완벽하며 범본(梵本) 원본과 다른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 선업(善業)의 힘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도사다천(覩史多天)의 자씨(慈氏)의 내중(內衆)으로 태어났으니, 법을 듣고 깨달아서 다시는 인간으로 내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미륵을 따르며 법을 듣고 깨달아서 성인(聖人)이 되었습니다.” - 032_0729_a_13L其所翻譯,文質相兼,無違梵本。由善業力,今見生睹史多天慈氏內衆,聞法悟解,更不來人閒,旣從彌勒問法悟解得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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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은 신의 말을 듣고는 이별하고 돌아왔다. 도선은 이 이야기를 기록한 수기를 여러 권 저술하였는데, 현재 서명사(西明寺)에 소장되어 있다.
그 수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법사의 높은 재주와 아름다운 덕은 영명한 신[神明]이나 알아주는 것이지, 어찌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 032_0729_a_16L宣受神語已,辭別而還。宣因錄入著記數卷。見在西明寺藏矣。據此而言,自非法師高才懿德,乃神明知之,豈凡情所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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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가 병석에 있을 때였다. 역경을 검교(檢校)하는 사인(使人) 허현(許玄)이 그 해 2월 3일에 황제께 이렇게 아뢰었다.
“법사는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그만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 032_0729_a_20L法師病時,撿挍翻經使人許玄備,以其年二月三日奏云:“法師因損足得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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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29_b_01L2월 7일에 황제는 중어부(中御府)16)에 조칙을 내렸다.
“의사를 보내고 약을 가지고 가서 간병하도록 하라.”
그래서 유사(有司)는 즉시 공봉의인(供奉醫人) 장덕지(張德志)와 정도(程桃)를 파견하여 약을 가지고 급히 가도록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르렀을 때는 법사가 이미 입적했으므로 의약이 소용없었다.
이때 방주(坊州)17) 자사(刺使) 두사륜(竇師倫)이 황제에게 아뢰었다.
“법사가 이미 작고하셨습니다.” - 032_0729_a_22L至其月七日,勅中御府宜遣醫人將藥往看。所司卽差供奉醫人張德志、程桃捧將藥急赴。比至,法師已終,醫藥不及。時坊州刺史竇師倫奏法師已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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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이 말을 듣고 슬피 통곡하고 마음 아파하며, 법사를 위해 수일 동안 조회(朝會)를 파하면서 말했다.
“짐은 나라의 보배를 잃었도다.”
당시 문무백관들 중에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황제 역시 말을 마치고는 오열하면서 슬픔을 이기지 못하였다. - 032_0729_b_03L帝聞之哀慟傷感,爲之罷朝曰:“朕失國寶矣!”時文武百寮莫不悲哽流涕,帝言已嗚噎,悲不能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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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다음날 다시 군신들에게 말했다.
“애석하도다. 짐(朕)은 나라 안에서 법사 한 사람을 잃은 것이지만, 불교도의 입장에서 볼 때는 대들보가 부러진 것이니, 4생(生)의 윤회에서 이끌어줄 스승[導師]을 잃은 것이다. 또한 망망한 고통이 바다[苦海]에서 갑자기 커다란 배가 가라앉고, 어두운 방이 아직 밝기 전에 횃불이 꺼져버린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 032_0729_b_06L帝翊日又謂群臣曰:“惜哉!朕國內失奘師一人,可謂釋衆梁摧矣,四生無導矣。亦何異於苦海方闊,舟楫遽沈,暗室猶昏,燈炬斯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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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말을 마치고 나서 오열을 금하지 못했다.
그달 26일 황제가 조칙을 내렸다.
“두사륜이 상주한 바에 의하면 옥화사의 승려 현장 법사는 이미 입적하였다. 장사(葬事)에 필요한 것은 모두 관에서 지급하도록 하라.” - 032_0729_b_10L帝言已,嗚咽不止。至其月二十六日,下勅曰:“竇師倫所奏玉華寺僧玄奘法師旣亡,葬事所須竝令官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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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에 또 조칙을 내렸다.
“옥화사의 현장 법사는 이미 입적하였으니, 그가 하던 경전 번역 사업을 중지하도록 하라. 이미 번역이 완성된 것은 구례(舊例)에 따라 관에서 베껴 쓰도록 하라. 또 나머지 번역이 되지 않은 것은 모두 자은사에서 맡아서 보관하되, 잘 지켜 손실이 없게 하라. 현장의 제자나 함께 역경하던 승려로서 원래 옥화사의 승려가 아닌 자는 각기 본사(本寺)로 돌아가도록 하라.” - 032_0729_b_13L至三月六日,又有勅曰:“玉華寺奘法師旣亡,其翻經之事且停。已翻成者,准舊例官爲抄寫;自餘未翻者,摠付慈恩寺守掌,勿令損失。其玄奘弟子及同翻經僧,先非玉華寺僧者,宜各放還本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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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에 또 조칙이 있었다.
“입적한 옥화사의 승려 현장 법사의 장례일에는 경성(京城)의 승니(僧尼)들은 번개(幡蓋)를 만들어 묘소에까지 호송하도록 하라.”
법사는 도(道)가 깊고 덕이 높아서 황제가 평소에도 대단히 사랑했기 때문에 입적한 뒤에도 거듭거듭 은혜를 내린 것이니, 옛사람에게 찾아보아도 이러한 일은 없었다. - 032_0729_b_19L至三月十五日,又有 勅曰:“故玉華寺僧玄奘法師葬日,宜聽京城僧尼造幡蓋送至墓所。”法師道茂德高,爲明時痛惜故,於亡後重疊降恩,求之古人無比此也。
- 032_0729_c_01L이에 문인들은 법사가 유언으로 남긴 명[遺命]에 따라 거적으로 상여를 만들고, 신성한 널[神柩]을 받들고 경성으로 돌아와 자은사의 역경당(譯經堂) 안에 안치하였다. 제자 수백 명이 천지를 진동시키듯이 슬피 울부짖었으며, 경성의 승려들과 속인[道俗]들도 매일 수백천 명씩 달려와서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
- 032_0729_c_01L於是門人遵其遺命,以籧篨爲輿,奉神柩還京,安置慈恩翻經堂內。弟子數百哀號動地,京城道俗奔赴哭泣,日數百千。
- 4월 14일, 산수(滻水)18)의 동쪽에서 장사를 지내기로 하였다. 도성 안의 승니와 많은 관민들이 다 함께 장송(葬送)의 의식에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다. 소개(素蓋)와 백당(白幢)과 니원장여(泥洹帳轝)19)와 금관(金棺)과 은곽(銀槨)과 사라수(娑羅樹)20) 등 5백여 가지를 길거리에 펼쳐 놓으니 마치 구름에 이어지고 하늘에 닿은 듯했으며, 구슬픈 호가(胡笳)21)의 가락은 온 우주에 가득 울려 퍼졌다. 그리고 경읍(京邑)과 5백 리 내의 여러 고을에서 모여든 장송(葬送)자가 백여 만이나 되었다. 비록 장례는 이처럼 호화롭고 엄정하였으나, 법사의 신구(神柩)는 거적으로 만든 본여(本轝)에 실려 있었다.
- 032_0729_c_04L以四月十四日將葬滻之東,都內僧尼及諸士庶共造殯送之儀,素蓋、白幢、泥洹帳輿、金棺、銀椁、娑羅樹等五百餘事,布之街衢,連雲接漢,悲笳悽挽,響帀穹宇,而京邑及諸州五百里內送者百餘萬人。雖復喪事華整,而法師神柩仍在蘧篨本輿。
- 동시(東市)의 견상조합(絹商組合)에서는 비단 3천 필을 써서 니원여(泥洹轝)를 만들고 꽃과 노리개[花珮]로 장엄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매우 절묘하고 아름다운 상여에다 법사의 신구를 안치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문도들은 법사의 본뜻을 손상시킬까 두려워하여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 032_0729_c_10L東市絹行用繒三千疋結作泥洹輿,兼以花珮莊嚴,極爲殊妙,請安神柩。門徒等恐虧師素志,不許。
- 그래서 법사의 3의(衣)22)와 국가에서 내려준 백금(百金)의 납가사를 앞세우고, 거적으로 만든 상여는 그 뒤를 따랐다. 이 광경을 보는 자는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날 임시 막사에서 숙박한 승속(僧俗)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15일 아침 안장(安葬)한 다음 곧 묘소에서 재를 지내고 해산하였다.
- 032_0729_c_13L乃以法師三衣及國家所施百金之納置以前行,蘧篨輿次其後,觀者莫不流淚哽塞。是日緇素宿於帳所者三萬餘人。十五日旦,掩坎訖,卽於墓所設齋而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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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천지는 색이 변했고 새와 짐승도 슬피 울었다. 동물의 감동도 그러한데 사람으로서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애욕의 강물[愛河]은 아직도 망망한데 자비의 배[慈舟]가 갑자기 가라앉았고, 긴긴 밤은 아직 어두운데 지혜의 등불이 먼저 꺼져버렸구나.”
법사를 사모하는 통한은 마치 사람이 눈을 잃어버린 것과 같았으니, 어찌 단지 산이 허물어지거나 나무가 넘어지는 것에 비할 정도였겠는가.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 032_0729_c_17L是時天地變色,鳥獸鳴哀,物感旣然,則人悲可悉。皆言愛河尚淼,慈舟遽沈,永夜猶昏,慧燈先滅,攀戀之痛如亡眼目,不直比之山頹木壞而已。惜哉!
- 032_0730_a_01L총장(總章) 2년(669) 4월 8일에 조칙이 내려와, 법사의 묘를 번천(樊川)23)의 북원(北原)으로 이장하고 거기에다 탑우(塔宇)를 건립토록 하였다. 이전의 묘소는 서울 교외[京郊]에 너무 가까워서 궁궐[禁中]에서도 보기가 쉬웠기 때문에 혹시라도 성려(聖慮)를 상하게 할까 봐 묘소를 옮긴 것이라고 한다. 이장하는 의식 때에도 문도들이 슬퍼하는 감정과 동행한 승려들의 비통해 하는 마음은 초상 때보다도 더 애절하였다. 아, 슬프다.
- 032_0729_c_21L至總章二年四月八日,有勅徙葬法師於樊川北原,營建塔宇。蓋以舊所密邇京郊,禁中多見,時傷聖慮,故改卜焉。至於遷殯之儀,門徒哀感,行侶悲慟,切彼往初。嗚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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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혜립(釋慧立)은 다음과 같이 논하였다.
“대저 밤하늘의 별과 달은 서쪽의 밝은 햇빛을 이어 받았고, 삼강(三江)과 구하(九河)24)는 동해(東海)의 큰 바다를 돕고 있다.
서로 돕고 의지하는 도(道)는 물상(物像)에 있어서도 그러하거늘, 법을 이어 계승하는 풍교(風敎)가 인간에게라고 다를 바가 있겠는가. - 032_0730_a_03L釋慧立論曰:觀夫夜星霄月繼西日之明,三江九河助東溟之大,相資之道在物旣然,傳襲之風於人豈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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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法王]께서 빛을 감추어 열반하신 뒤에 아난(阿難)이 불경을 결집(結集)한 이래로, 천 년의 세월이 흘렀고 시대는 10대를 지났다.
그 사이 성현이 간간히 나타났고 영특하고 예지가 있는 사람도 번갈아 태어나서, 각자 웅대한 계획을 품고 모두 최상의 지혜[上智]를 간직한 채 불법을 짊어지고 천인(天人)을 다스려왔다. - 032_0730_a_06L自法王潛輝之後,阿難結集已來,歲越千年,時逾十代。聖賢間出,英睿遞生,各韞雄圖,俱包上智,負荷遺法,控御天人。
- 도(道)로 회오리바람을 막았고 신(神)으로 해악(海岳)을 기울게 하였으니, 혹은 손가락을 펼치면 고액(膏液)이 흐르기도 하였고 때로는 다른 실(室)에서 기이한 광명[奇光]을 빛나게 한 일도 있었으며, 혹은 시체를 줄지어서[連尸] 천마(天魔)를 항복받았고 혹은 한 번 마주하여 시주(時主)를 돌리기도 하였다. 또 혹은 변방의 사찰[邊刹]에서 법을 통하려고 풍파를 무릅쓰고 험한 길에 나서기도 하고, 혹은 자신을 비워서 사물에 응하려고 식량을 구하러 사지(死地)에 나가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현진(玄津)이 넘쳐나게 하였고 은혜로 구제함이 한량없었다.
- 032_0730_a_10L道制風飆,神傾海嶽。或舒指而流膏液,或異室而朗奇光,或連尸以伏天魔;或一對而迴時主。或願通法於邊剎,冒風波於嶮塗;或虛己以應物,求裹糧而行死地。終令玄津溢瀁,惠濟無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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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이미 전등(傳燈)에 이익 되게 했으니 참으로 부촉(付囑)하기에 합당한 이들이었다. 전대의 책을 고찰해 보면 과연 그렇지 않던가. 그러나 법의 근원은 밝히기가 어려운데 지금 다시 현장 법사를 만나 그것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오직 법사는 별에서 영(靈)을 내리고 산악의 기를 타고 났기에, 재주는 동호(東胡)의 화살보다 날카롭고 명예는 남방의 금보다도 아름다웠다. 바른 지조는 무리 가운데 뛰어나고 향기로움은 홀로 우뚝하여, 4생(生)을 자신의 임무로 삼고 정법(正法) 세우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겼다. - 032_0730_a_15L旣益傳燈,寔符付囑,考之前冊,可不然哉!而淸源不窮,今復遇法師嗣承之矣。惟法師星像降靈,山嶽騰氣,才過東箭,譽美南金,雅操不群,堅芳獨拔。以四生爲己任,建正法爲身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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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태는 높고 높은 숭산(嵩山)과 화산(華山)이 창공을 이고 솟은 듯하며, 밝고 밝은 산호와 옥구슬[琅玕]이 맑은 바다에 비치는 듯하였다.
그런데다 총명하고 준수한 기운이 자연히 드러났고, 도를 즐기고 영화를 가볍게 여기는 것은 천성(天性)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견문이 넓고 많이 아는 깊이는 도항(道恒)이나 승조(僧肇)25)보다도 더 높고 앞섰으며, 현오(玄奧)하고 세밀한 공(功)은 도생(道生)이나 도융(道融)26)보다도 심원하였다. - 032_0730_a_20L巍巍乎似嵩華之負穹蒼,皎皎焉若琅玕之映澄海。而聰機俊骨,發於自然,味道輕榮,率由天性。至夫多識洽聞之奧冠恒肇而逾高,詳玄造微之功跨生融而更遠。
- 032_0730_b_01L 크고도 넓어라, 법사는 실로 법을 이어서 융숭하게 하는 신령한 그릇이었다. 부처님께서 말법(末法)의 세상에 다시 빛을 비추시려고 이렇게 밝은 덕을 가진 사람을 탄생시킨 것이리라.
- 032_0730_b_01L滔淊乎,蕩蕩乎,實紹隆之神器也。將使像化重光於頹季之期。故誕茲明德者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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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는 고금의 대덕들이 경론을 선양함에 있어 비록 성교(聖敎)에 의거했다고는 하지만, 전거(典據)하는 원문과 인용하는 내용이 같지 않아서 이미 오래전부터 논쟁이 분분하게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아뢰야식[黎耶]27)의 시보비보(是報非報), 화인(化人)28)의 유심무심(有心無心), 화합포수(和合怖數)의 무리들, 가르침을 듣고 훈습하는 일[聞熏]이 멸하는지 멸하지 않는지[滅不滅] 등과 같은 백여 과(科)와 삼장(三藏) 4함(含)의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뿌리[盤根], 대소양종(大小兩宗)의 감건(鉗鍵) 같은 것으로, 이는 선현(先賢)들이 해결하지 못했고 지금의 철인(哲人)도 함께 의심하고 있다는 것이다. - 032_0730_b_04L法師以今古大德,闡揚經、論,雖復俱依聖教,而引據不同,諍論紛然,其來自久。至如黎耶是報非報,化人有心無心,和合怖數之徒,聞熏滅不滅等,百有餘科,竝三藏四含之盤根,大小兩宗之鉗鍵,先賢之所不決,今哲之所共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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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사도 역시 이런 글들을 보면 주저하게 되고 그 뜻에 만족하지 못해 개연히 탄식하여 말하곤 하였다.
“중국의 경론은 거의가 법문(法門)의 지엽일 뿐이며 근원이 되지 못한다. 여러 법사들이 비록 각기 이단(異端)을 일으켰지만 마음의 의심은 없앨 수는 없었다.
결국에는 반드시 주머니[囊] 속의 큰 근본[大本]을 묶어놓고 정(定)을 인도[祇▼(亘+示)]에서 구해야 할 것이다.” - 032_0730_b_10L法師亦躊躕此文,怏怏斯旨,慨然嘆曰:‘此地經、論,蓋法門枝葉,未是根源。諸師雖各起異端,而情疑莫遣,終須括囊大本,取定於祇桓耳。’
- 이런 연유로 장한 기상[壯志]을 품고 마음을 멀리 나라 밖으로 달리다가, 정관(貞觀) 3년 가을 8월에 드디어 맹세하고 짐을 꾸려 옷소매를 떨치며 떠났던 것이다. 그리고 중천축(中天竺)의 나란타사(那爛陀寺)에 이르러 시라발타(尸羅跋陀)29)라고 하는 대법사를 만났던 것이다. 그 법사는 계현(戒賢)이라고도 하는데, 그는 대승과 소승의 양종을 체득했으며 신통하게 꿰뚫어 보는 능력[神鑒]이 심원하고, 널리 삼장에 통달했으며 4베다에도 능했다.
- 032_0730_b_14L由是壯志發懷,馳心遐外。以貞觀三年秋八月立誓裝束,拂衣而去。到中天竺那爛陁寺,逢大法師名尸羅跋陁,此曰戒賢。其人體二居宗,神鑑奧遠,博閑三藏,善四韋陁。
- 그 중에서도 『십칠지론(十七地論)』에 특히 정통했는데, 이 논은 모든 경의 핵심이었기 때문에 항상 이것만 강의하고 있었다. 이 논은 원래 미륵보살이 지은 것으로 『섭대승론(攝大乘論)』의 근간인 논인데, 이것이 바로 법사가 출발하면서 보기를 기원했던 논이었다.
- 032_0730_b_18L於『十七地論』最爲精熟,以此論該冠衆經,亦偏常宣講,元是彌勒菩薩所造,卽『攝大乘』之根系,是法師發軔之所祈者。
- 인도의 16대국에서 이 논에 귀종(歸宗)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며, 강의를 받는 학도들이 항상 만 명이 넘었다. 법사는 그곳에 가서 이것을 배우면서, 한편으로는 무한히 기뻐하며 늦게 만난 것을 안타까워했다.
- 032_0730_b_21L十六大國靡不歸宗,稟義學徒恒有萬許。法師旣往修造,一面盡歡,以爲相遇之晚。
- 032_0730_c_01L이렇게 법사는 계현 법사에게 심복하며 가르침을 받고 겸하여 의심나는 곳을 물어서 해결하였는데, 일단 한 번 훑어보고 덮은 것은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것은 마치 큰 바닷물[濛氾]30)이 모든 강물의 지류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았고, 또 맹저(孟諸)31)가 구름을 삼켜버리는 것과 같았다.
- 032_0730_c_01L於是伏膺聽受,兼諮決所疑,一遍便覆,無所遺忘。譬濛氾之納群流,若孟諸之呑雲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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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계현 법사도 이런 사람은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감탄하면서 말하곤 하였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이름을 듣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이렇게 함께 현의(玄義)를 이야기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 032_0730_c_03L彼師嗟怪,嘆未曾有,云:‘若斯人者,聞名尚難,豈謂此時共談玄耳。’
- 법사는 이로부터 명성이 총령(蔥嶺)32) 서쪽에까지 떨쳤고 소문은 8국으로 퍼져갔다. 그래서 인도의 모든 고승들과 영웅호걸들이 법사의 이름을 듣고 오랫동안 준비하여 먼 길을 함께 와서 어려운 문제를 질문하였다.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마치 기러기떼나 고기떼가 모여들 듯하여 마차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서로 논쟁하는 말이 구름이 모여 비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 032_0730_c_05L法師從是聲振蔥西,名流八國,彼諸先達英傑聞之,皆宿搆重關,共來難詰,鴈行魚累,轂駕肩隨,其竝論之詞,雲屯雨至。
- 그러나 법사는 태연한 자세로 변론하고 해석하였는데, 모두 상대방 속으로 들어가서 상대방의 칼과 창을 쥐고 그 상대방의 방패를 공격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신을 잃고 복종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모두들 “이 분은 하늘이 내린 재주를 타고 났기 때문에 상대할 수가 없다”고 칭송하였다.
- 032_0730_c_08L法師從容辯釋,皆入其室,操其戈,取其牟、擊其盾,莫不人人喪轍,解頤虔伏,稱爲此公天縱之才,難酬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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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일왕(戒日王) 등도 법사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여 팔꿈치로 기어가서 발에 입 맞추고 진기한 음식을 공양하였다.
강석을 파한 뒤에는 법사는 다시 범서(梵書)와 여러 경론을 배웠다. - 032_0730_c_11L戒日王等見之抃喜,皆肘步嗚足,傾珍供養。罷席之後,更學梵書,幷諸經、論。
- 여래(如來)께서 평생 동안 설법하신 말씀, 기사굴산[耆山]에서 설한 방등(方等)33)의 가르침, 녹원(鹿苑)34)의 소승[半字]35)의 글[文]에서부터 후에 나온 성인[後聖]인 마명(馬鳴)과 용수(龍樹)와 무착(無着)과 천친(天親) 등이 저술한 여러 글, 그리고 회산주부(灰山住部)36) 등과 같은 18이집(異執)37)의 종(宗)이나 5부의 다른 길[五部殊塗]38)의 끝까지 모두 배웠다.
- 032_0730_c_13L自如來一代所說,耆山方等之教,鹿苑半字之文,爰至後聖馬鳴、龍樹、無著、天親諸所製作,及灰山住等十八異執之宗,五部殊塗之致。
- 이런 것을 모두 찾아서 잘 연구하여 그 뜻에 통달했으며, 그 원전도 얻었다. 아울러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의 유적과 열반[泥洹]하신 견고림(堅固林)39), 마왕을 항복 시킨 보리수[菩提樹]40), 가로숭고(迦路崇高)의 탑, 나게타국에서 그림자를 머무신 산[那揭留影山] 등을 모두 직접 예배하고 신령하고 신기한 모습을 빠짐없이 살펴보았다.
- 032_0730_c_17L竝搜羅硏究,達其旨、得其文。幷佛處世之迹,如泥洹堅固之林,降魔菩提之樹,迦路崇高之塔,那揭留影之山,皆躬申禮敬,備睹靈奇,亦無遺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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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31_a_01L법사는 마음으로 기약한 것이 이미 이루어졌고 보고 배우고자 하였던 것도 두루 다 마쳤으므로, 본토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그래서 마침내 대소승의 법의 가르침[法敎] 6백여 부를 베껴 책으로 만들고, 또 불상 7구(軀)와 사리 1백여 개를 가지고, 정관 19년 봄 1월 25일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승려들과 속인들이 모두 달려 나와 영접하였는데, 온 장안이 떠들썩하여 상가도 문을 닫았을 정도였다. - 032_0730_c_21L法師心期旣滿,學覽復周,將旋本土,遂繕寫大小乘法教六百餘部,請像七軀,舍利百有餘粒,以今唐十九年春正月二十五日還至長安。道俗奔迎,傾都罷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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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 연기가 걷히고 안개가 회오리치며 풍광은 아름답고 맑은 바람이 불었으며, 보장(寶帳)은 거리에 넘치고 화당(花幢)은 해를 덮었다. 경사스런 구름이 아름다운 빛을 하늘에 무성하게 드리웠고, 서사(庶士)들이 길거리에서 칭송하는 소리는 지축을 흔드는 듯했다. 사악한 바람[邪風]은 갑자기 걷히고 혜일(慧日)이 빛나는 중에 더욱 밝았다.
비록 세존이 도리천(忉利天)에서 이 세상[閻浮]41)에 내려오시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날도 역시 천 년에 한 번 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웠다. - 032_0731_a_02L是時也,煙收霧卷,景麗風淸,寶帳盈衢,花幢揜日。慶雲垂彩於天表,郁郁紛紛;庶士詠讚於通莊,轟轟隱隱。邪風於焉頓戢,慧日赫以重明。雖不逢世尊從忉利之下閻浮,此亦足爲千載之休美也。
- 법사의 이 인도 여행은 수만 리를 가는 노정으로, 온갖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살을 에는 추위와 얼음으로 뒤덮인 산길을 지나고, 물결 높은 격랑의 골짜기도 지났으며, 독하게 매운 흑풍[厲毒黑風]의 기세도 견디며 야수와 맹수의 무리를 지나기도 하였다. 또 법현(法顯)이 동행자를 잃어버렸던 마을과 지엄(智嚴)이 친구만 남기고 죽은 자리, 반초(班超)42)도 밟아보지 못하고 장언(章彦)도 가보지 못한 곳을 법사는 외롭게 홀로 갔다. 그러면서도 평탄한 길을 가듯이 무사하였다.
- 032_0731_a_07L法師此行經塗數萬,備歷艱危。至如涸陰沍寒之山,飛波激浪之壑,厲毒黑風之氣,狻猊貙豻之群,竝法顯失侶之鄕,智嚴遺伴之地,班超之所不踐,章亥之所未遊。法師孑爾孤征,坦然無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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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당(唐)의 풍교를 팔하(八河)의 밖까지 펼치고 중국의 풍화(風化)를 오천축(五天竺)에 떨쳐서, 먼 지방의 제후와 왕들로 하여금 마음을 당조(唐朝)로 달리게 했으며 먼 변방의 추장들도 당조를 우러러보게 하였다.
이것은 비록 법사의 불출세의 공이기도 하지만, 또한 성조(聖朝)의 국운이 번창하여 감응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 032_0731_a_12L扇唐風於八河之外,揚國化於五竺之閒,使乎遐域侯王馳心輦轂,遠方酋長係仰天衢,雖法師不世之功,抑亦聖朝運昌感通之力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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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황제는 용도(龍圖)43)를 쥐고 역(曆)을 편찬하시고 적복부(赤伏符)44)에 응하여 군림하셨다. 그리고 고래나 돼지 같은 악인을 없애어 백성을 구제하시고 구름을 몰아내어 일월을 밝혔으며, 네 간방[四維]45)의 기둥을 바로 세워 푸른 바다[滄海]가 거꾸로 흐르는 것[橫流]을 그치게 하셨다.
그리하여 거듭 천하[乾坤]를 세워서 다시 나라를 건립하셨다. 따라서 그 9공(功)46)은 우하(虞夏)47)를 포섭하시고 7덕(德)은 조조(曹操)48)와 유비(劉備)보다 앞섰다. - 032_0731_a_16L 皇帝握龍圖而纂曆,應赤伏以君臨,戮鯨豕以濟群生,盪雲霓而光日月。正四維之絕柱,息滄海之撗流,重立乾坤,再施鎔造。九功包於虞、夏,七德冠於曹、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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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다는 잔잔하고 강물은 맑으며 나라는 태평하고 해마다 풍년이 드니, 먼 나라들도 순종하지 않는 나라가 없고 이웃나라도 평화스럽지 않은 나라가 없게 되었다. 천지의 운행이 순조로워 만물이 잘 자라니 사람과 신이 경축하고 기뻐하였다.
게다가 밝고 아름답고 올바름을 더하여 3선(善)49)의 뜻이 융성하게 하니 황제의 신하들은 충성스럽고 부지런하여 태평성대를 칭송하는 노래[良哉之歌] 소리만 드높았다. - 032_0731_a_20L海晏河淸,時和歲阜,遠無不順,邇無不安,天成地平,人慶神悅。加以重明麗正,三善之義克隆;宰輔忠勤,良哉之歌斯允。
- 032_0731_b_01L이미 황제의 공은 무궁하여 여러 해에 걸쳐 두텁게 쌓였고, 덕은 하늘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자줏빛 지초[紫芝]가 옥계단[玉階]에서 꽃을 피우고, 화과(華果)의 꽃봉오리는 붉은 누각[朱閣]에 열렸다.
- 032_0731_b_01L旣而功窮厚載,德感上玄,紫芝含秀於玉階,華果結英於朱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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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서주(西州)의 석서(石瑞)와 송현(松縣)의 곤부(琨符)는 성주(聖主)께서 천년(千年)을 기약하는 터전이며, 여러 임금이 차례로 계승하는 업(業)을 나타내는 것이다.
봉황의 터럭[鳳毛] 같은 재주 있는 문장이나 상과불전(上果佛田)의 글은 만고(萬古) 세월을 지나오면서 듣지도 못했던 것인데, 우리 황조(皇朝)에 와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것이 어찌 영명(靈明)하게 덕을 돕고 현천(玄天)의 권속을 복되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032_0731_b_02L又如西州石瑞,松縣琨符,紀聖主千年之期,顯 儲君副承之業。鳳毛才子之句,上果佛田之文,歷萬古而不開,當我皇而始出。豈非明靈輔德,玄天福眷者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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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또 마음을 불법[眞際]에 두시어 성(城)의 해자까지 5승(乘)50)으로 두르며, 생각은 취령(鷲嶺)의 모습을 찾아 달리시고 마음은 제하(提河)51)에서의 설법에 두셨다.
그러므로 유형(遺形)과 감발(紺髮)이 찬란한 빛을 내며 훌륭한 모습으로 오시게 하셨고, 뛰어난 경전과 고승이 서로 빛을 발하여 연달아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비의 구름[慈雲]이 육합(六合)52)에 퍼지고 법고(法鼓)는 삼천 세계에 울리며, 천화(天花)는 바람과 함께 흩날리고 비취빛 안개는 향연(香烟)과 함께 자욱이 피어오르게 되었다. - 032_0731_b_07L加復遊心眞際,城塹五乘,追思鷲嶺之容,佇想提河之說,故使遺形紺髮,煥彩來儀,勝典高僧,相輝而至。慈雲布於六合,法鼓振於三千,天花將景風共飛,翠霧與香煙同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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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세속에 흠뻑 물들었던 선비들도 피안(彼岸)을 바라보며 기약하는 자가 생겼고, 청허(淸虛)하고 현묘한 이치[玄]를 아는 빈객도 3공(空)을 돌아보는 것이 멀지 않게 되었다.
이른바 나침판이 길을 가리키면 미혹된 중생들이 방향을 알게 되고, 질풍이 숲을 엄습하여 수많은 퉁소 소리가 스스로 울리는 것과도 같은 일이다.
법사의 성대한 덕[盛德]이야말로 나침판과 같이 때로는 질풍과도 같이 때를 만났던 것이었다. - 032_0731_b_12L於是溺俗沈流之士,望涯岸而有期,淸虛蹈玄之賓,顧三空而非遠。所謂司南啓路衆惑知方,商飆襲林而群籟自嚮。法師盛德也如彼,逢時也如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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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어찌 축법아(竺法雅)53)와 불도징(佛圖澄)이 도를 생각하면서 석륵(石勒)54)과 석호(石虎)55) 같은 흉악한 사람을 섬기고, 도안(道安)과 구마라집(鳩摩羅什)이 경을 전하면서 부견(符堅)과 요흥(姚興)의 참람(僭濫)하는 역사에 기여한 것과 같다 하겠는가.
이들과 법사의 깊이를 비교한다면 길바닥에 괸 물과 강호(江湖) 만큼이나 차이가 있고, 명암(明闇)을 말한다면 아침 햇빛과 반딧불의 차이 같은 것이다. - 032_0731_b_16L豈同雅、澄懷道,遇二石之兇殘,安、什傳經,値符、姚之僞曆。挍之深淺,卽行潦之類江湖,方之明闇,乃朝陽之與螢曜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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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위 문제(魏文帝)는 종 모양의 옥[鐘玦]을 얻고는 부(賦)를 받들어 찬양하였고, 가규(賈逵)56)는 신기한 참새[神雀]57)를 보고 송(頌)을 바쳐서 기이함을 논하였다.
금수와 같은 미천한 것들에게도 옛사람들은 오히려 노래를 읊어 찬양했는데, 하물며 법사와 같이 불후의 신령한 공덕[神功]을 남기고 대들보와 같이 큰 업[大業]을 이루신 분을 이 태평한 시대에 어찌 묵살하고 기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032_0731_b_19L昔鍾玦旣至,魏文奉賦以讚揚;神雀斯呈,賈逵獻頌而論異。在禽物之微賤,古人猶且詠歌,況法師不朽之神功,棟梁之大業,豈可緘默於明時而無稱述者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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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31_c_01L나 혜립(慧立)은 배움이 선현(先賢)에 부끄럽고 덕도 선달(先達)에 미치지 못하면서 막무가내로 상법 시대의 교화[像化]58)에 함께 끼어 물들면서 외람되이 말진(末塵)59)을 더럽혔지만, 법사를 흠모하는 마음만은 보통사람의 마음보다 백 배나 더하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의 힘이 모자라고 어리석으면서도 감히 이 전기를 기술하는 것이다. 법사의 맑고 높은 절개와 지조, 명망(名望)의 아름다움, 그리고 앞에도 없었고 뒤로도 없을 빛나는 종적에 대해서는 별도로 여러 명필들에게 맡기고자 한다. 여기에서 자세하게 다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현명한 군자들은 나의 뜻을 거두어주시고 웃지 말기를 바란다.” - 032_0731_b_23L立學愧往賢,德非先達,直以同沾像化,叨廁末塵,欣慕之懷,百於恒品,所以力課庸愚,輒申斯傳。其淸徽令望之美,絕後光前之蹤,別當分諸鴻筆,非此所能覶縷也。冀明鑑君子收意而不哂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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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贊)
중생[生靈]의 감응이 끊어져[感絶]
대성(大聖)께서 천신(遷神)60)하시니
그를 능히 이어서 계승할 자는
오직 철인(哲人)뿐이었네. -
032_0731_c_05L贊曰:生靈感絕,
大聖遷神,
其能繼紹,
唯乎哲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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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명(馬鳴)이 선창(先唱)하고
제바(提婆)가 뒤에 기술하니
해가 여기에 숨는 듯
밝은 달이 막 솟아올랐네. -
032_0731_c_07L馬鳴先唱,
提婆後申,
如日斯隱,
朗月方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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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목(穆穆)하신 법사는
진실로 곧은 어른[貞士]이시라
천인(天人)보다도 뛰어나서
티끌 세상에 매이지 않았네. -
032_0731_c_08L穆矣法師,
諒爲貞士,
迥秀天人,
不羈塵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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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그윽한 뜻 다 밝히고
학문의 이치를 연구하니
깨끗하기 밝은 구슬 같고
향기로움은 혜초 같고 지초 같았네[蕙芷]. -
032_0731_c_09L窮玄之奧,
究儒之理,
潔若明珠,
芬同蕙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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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에서 빠진 곳을 애석히 여기고
뜻이 잘못 된 것을 의심하여
목숨 바쳐 배우고 구하기 위해
위태롭고 험한 길을 걸었었네. -
032_0731_c_10L悼經之闕,
疑義之錯,
委命詢求,
𣣋危踐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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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고 넓은 기품(氣品)이여
굳은 의지의 그 정성이여
아름다움을 서역[西州]에 떨치고
돌아와 동각(東閣)에 공(功)을 세웠네. -
032_0731_c_11L恢恢器宇,
赳赳誠恪,
振美西州,
歸功東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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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행해지는 세상을 만났으니
때는 오직 우리 황조(皇朝)라
거듭 옥경(玉鏡)을 걸으시고
다시 주낭(珠囊)을 다스리셨네. -
032_0731_c_12L屬逢有道,
時唯我 皇,
重懸玉鏡,
再理珠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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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승(乘)은 이미 열리고
10지(地) 또한 선양하니
그 혜일(慧日)로 하여금
더욱 그윽하고 다시 빛나게 하셨네. -
032_0731_c_14L三乘旣闡,
『十地』兼楊,
俾夫慧日,
幽而更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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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용렬한 이 몸이
다행히 진말(塵末)에 참예하니
오랫동안 적만한 집[蓬門]61)이었을 뿐
아무런 꾸밈도 감싸는 것도 없었네. -
032_0731_c_15L粤余庸眇,
幸參塵末,
長自蓬門,
靡彫靡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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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높은 산[高山]을 우러르다
푸른 물길[淸流]이 말랐으니
원하건대 더위잡고 의지하기를
저 칡덩굴과 같게 하소서. -
032_0731_c_16L高山斯仰,
淸流是渴,
願得攀依,
比之藤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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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석언종(釋彦悰)은 이와 같이 붙여서 기술[箋述]하였다.
“내가 보건대 불교가 동쪽으로 건너온 이래로 영준(英俊)하고 현명한 사람들로서 집을 떠나 출가 입도(入道)한 자가 만여 명이나 된다. 그 중에서 능히 선(善)을 겸비한 사람은 드물고, 한두 가지의 아름다움을 갖춘 사람이 있기는 하였다. 하지만 보고 들은 모습과 말씀을 널리 듣고 열심히 이해하며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 도를 중히 여겨서 절역(絶域)의 먼 곳으로 갔던 사람, 정조(貞操)는 소나무 대나무보다도 강하고 우아한 의지는 쇠와 돌보다 굳어서 많은 영웅의 생각을 바로잡고 성주(聖主)의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사람은 오직 삼장법사뿐이었다. - 032_0731_c_17L釋彦悰箋述曰:“余觀佛教東度已來,英俊賢明,捨家入道者萬計,其中罕能兼善,一二美者有焉至若。視聽貌言,洽聞强識,輕生重道,絕域遐征,貞操勁松筠,雅志陵金石,群雄革慮,聖主迴光者,於三藏備之矣。
- 032_0732_a_01L그런데 또 들으니 삼장은 한여름에도 몸에 땀이 흐르지 않았으며, 심한 추위에도 얼굴색이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 엎드리지도 않았고 기지개도 펴지 않았으며, 하품도 하지 않고 재채기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것만으로 그의 지위를 밝히는 것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또 어느 현인 어느 성인이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
- 032_0732_a_01L抑又聞之,三藏當盛暑之辰,體無霑液,祁寒之際,貌不慘悽,又不夭不申,不欠不啑,斯蓋未詳其地位,何賢聖之可挌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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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북궁(北宮)에서 병이 났을 때에는 부처님의 경사스런 징조[慶兆]가 연달아 보였고, 임종하는 날에도 얼굴에 기쁨의 빛이 가득했던 것 역시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다.
임종 뒤 1개월 남짓 지난 후에 어떤 사람이 전단말향(栴檀末香)62)을 가지고 와서 서국(西國)의 법에 따라 삼장의 몸에 바르기를 청했다고 한다. 대중들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그 사람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말했다.
“제자는 따로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 불허하신다면 유해(遺骸)의 상태라도 기록해서 나라에 보고해야 하겠습니다.”
대중들은 그의 말을 따랐다. - 032_0732_a_05L又北宮現疾之時,徵慶繁縟,將終之日,色貌敷愉,亦難得而測也。及終後月餘日,有人齎栴檀末香至,請依西國法以塗三藏身,衆咸莫之許。其人作色曰:“弟子別奉進止,師等若不許,請錄狀以聞。”衆從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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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관(棺)을 열고 염의(殮衣)를 걷어내었을 때 사람들은 이상한 향내를 맡았는데 연꽃 향기와 같았다. 그래서 서로 놀라워하며 말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아까 그 사람은 법사의 염의를 벗겨내고 오직 속옷만을 남겨 놓았는데, 대중들이 삼장법사를 보니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의 모습과 같았다. 모두가 울부짖으며 함께 바라보고 있는데, 아까 그 사람은 향을 바르고 염의를 입히고 관을 덮고 나서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대중들은 그가 천인(天人)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 032_0732_a_10L及開棺發殮已,人覺異香等蓮花之氣,互相驚問。皆云若茲。向人除倂殮衣,唯留襯服,衆睹三藏貌如生人,皆號絕共視。向人塗香服殮蓋棺已,俄失所在,衆疑天人焉。
- 나는 삼장법사가 일찍부터 품었던 뜻을 생각하며 가까운 발자취를 더듬어보니, 마하살타(摩訶薩埵)63)가 아니라면 누가 그렇게 하겠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도반들이 항상 법사를 경모하고 우러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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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_0732_a_15L余考三藏夙心,稽其近迹,自非摩訶薩埵其孰若之乎?粤我同儔,幸希景仰,勖哉!”
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卷第十
乙巳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雕造
- 1)도관(道觀)과 사찰을 말한다.
- 2)본래는 문 위에서 문고리를 거는 용도로 쓰이던 동물 머리 모양의 물건인데, 후에는 문고리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 3)양(梁 나라의 무제(武帝)가 수도인 건강(建康)에 세운 사찰로, 521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527년에 완성하였다. 무제(武帝)가 행행(行幸)하여 사신(捨身)하고 공양을 열심히 하였으며 『열반경(涅槃經)』 등을 친강(親講)하는가 하면, 우란분(盂蘭盆)을 여는 등 국력을 다해 불사(佛事)를 행하였다.
- 4)중국 남북조 시대에 낙양(洛陽)에 있던 큰 절로, 북위가 멸망할 때 소실되었다.
- 5)인도의 수량 단위이다.
- 6)6바라밀다(波羅蜜多)를 말한다.
- 7)북위(北魏) 때에 두었던 승관(僧官)의 명칭으로, 절의 사무를 관장하는 소임을 말한다. 현재 유나(維那)는 선가에서 포살, 즉 계행(戒行)과 율의(律儀)를 관장하는 승려를 부르는 명칭으로 쓰인다.
- 8)당대(唐代)에 조회에서 알현할 때에 인진(引進)을 담당하던 관리이다.
- 9)중국 신강성(新彊省) 지방에 있던 옛 나라 이름이다.
- 10)8정도의 하나로, 바른 상념을 항상 생각하여 잊지 않는 것, 항상 마음에 두는 것, 정견(正見) 등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 11)도솔천(兜率天)에 있는 2원(院) 가운데 하나이다. 도솔천은 욕계(欲界)의 6천(天) 가운데 네 번 째 하늘이다. 그 안에는 내원(內院)과 외원(外院)의 두 궁실이 있다. 내원(內院)은 선법당(善法堂)이라고 부르는데, 대신(大神) 뇌도발제(牢度跋提)가 지은 것이다. 미륵보살 최후신(最後身)이 머무는 곳으로, 미륵보살이 여기에서 항상 여러 하늘을 위해 설법하신다. 『관미륵상생도솔천경(觀彌勒上生兜率天經)』에 나온다.
- 12)이십팔수의 스물두째 별자리로, 동정(東井), 혹은 정(井)이라고도 한다.
- 13)별자리의 이름이다. 북극을 중심으로 천체(天體)를 크게 자미원(紫微垣) 태미원(太微垣) 천시원(天市垣)의 세 구역으로 나누었는데, 태미원은 그 삼원(三垣) 중의 상원(上垣)이다.
- 14)건타(健陀)ㆍ건타(乾馱)ㆍ건달(健達)이라고도 쓴다. 번역하면 적색(赤色)ㆍ황색(黃色) 등의 뜻이 된다. 즉 가사(袈裟)의 색을 가리키며, 가사를 가리키기도 한다.
- 15)바다를 건너는 사람이 빠지지 아니하도록 물 위에 띄우는 큰 주머니라는 뜻으로 불법의 계율을 이르는 말이다.
- 16)황제의 일상 사무와 의식주행(衣食住行) 등을 관장하는 관서이다.
- 17)중국 섬서성(陝西省) 중부의 황릉(黃陵), 의군(宜君) 일대이다.
- 18)중국 장안의 동쪽 15리에 있는 강이름이다.
- 19)니원은 니르바나의 음역으로, 니르바나는 열반(涅槃)의 원음이다. 따라서 니원장여는 상여를 말하는 것이다.
- 20)사라(娑羅)는 범어 śāla의 음역으로, 견고(堅固)ㆍ고원(高遠)의 뜻이다. 사라수(沙羅樹)ㆍ사라수(薩羅樹)ㆍ소련수(蘇連樹)라고도 쓴다.
- 21)고대의 취주(吹奏) 악기의 일종이다. 한대(漢代)에 북쪽 변방 지역과 서역 일대에서 유행하던 악기로, 한과 위(魏) 때에 고취악(鼓吹樂) 가운데 중요한 악기였다. 애초에 호인(胡人)들이 갈대 잎을 말아서 불어서 연주하였기에 호가라는 이름이 붙었다.
- 22)불법에 가사(袈裟)가 세 가지가 있는데, 이것을 3의(衣)라 한다.
- 23)중국 섬서성 장안의 남쪽 50리에 있다.
- 24)황하(黃河)를 말한다. 우왕(禹王)이 아홉 갈래로 흐르고 있던 구하를 치수하였다.
- 25)중국 진(晉) 나라 때 구마라집(鳩摩羅什) 하에서 인도 용수계(龍樹系)의 대승불교를 공부한 승려이다. 그가 남긴 논문집 『조론(肇論)』은 대승의 공(空) 사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 것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
- 26)도생(道生)ㆍ승조(僧肇)ㆍ승예(僧叡)와 함께 집문사철(什門四哲) 가운데 하나이다.
- 27)아려야식(阿黎耶識), 즉 아뢰야식(阿賴耶識)을 말한다. 8식(識)의 하나로, 모든 법의 근본이 되는 식이라는 점에서 본식(本識)이라고도 한다. 선(善)ㆍ악(惡)의 행업에 따라 아뢰야식의 과상(果相)이 달라지기 때문에 과보식(果報識) 또는 이숙식(異熟識)이라고 한다.
- 28)환술(幻術)을 부리는 사람, 즉 마술사를 말한다. 한편 불교에서는 부처를, 도교에서는 신선을 화인이라 한다.
- 29)범어로는 Śīlabhadra이다. 시라발타라(尸羅跋陀羅)라고 음역한다. 계현 법사를 말한다.
- 30)해가 지는 곳을 뜻하는 말로 서해 바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 31)중국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늪[藪澤] 이름이다.
- 32)티베트 파미르(Pamirs) 고원(高原)을 말한다.
- 33)대승경전의 총칭이다.
- 34)석가세존이 성도한 지 삼칠일(三七日)만에 처음으로 법륜(法輪)을 굴리어 아야교진여(阿若憍陳如) 등 다섯 비구(比丘)를 제도한 녹야원(鹿野苑)을 말한다. 『잡아함경(雜阿含經)』 23권에 나온다.
- 35)법을 설하는 것으로 말할 때, 세법(世法)을 말하는 것을 반(半)으로 보고, 출세법(出世法)을 만(滿)이라 한다. 또 출세법(出世法) 중에서 말할 때에는 소승(小乘)을 반(半)이라 하고, 대승(大乘)을 만(滿)이라 한다. 따라서 반자는 소승이며 대승은 만자(滿字)인 것이다.
- 36)고구리가(高俱梨柯)로 음역한다. 소승 20부(部)의 하나이다.
- 37)집착하여 잡고 있는 견해가 바른 이치에 어긋나는 것을 가리킨다. 외도(外道)가 자신의 몸이 진짜로 있다고 집착하는 것 따위이다.
- 38)5부율(部律)을 말한다. 불타가 입멸하고 백 년 쯤 지났을 때에, 부법장(付法藏)의 제5조인 우바국다(優婆毛匊多) 아래에 담무덕(曇無德) 등의 다섯 제자가 있었다. 이 다섯 제자가 동시에 율장에서 5부의 파를 나누어 나갔는데, 이것을 5부율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전한 율전은 모두 소승율(小乘律)에 속한다.
- 39)사라쌍수(娑羅樹林)를 말한다. 사라(娑羅)는 범어로는 śāla, 파리어로는 sāla인데, 의역하면 견고(堅固)의 뜻이 된다.
- 40)각수(覺樹)ㆍ도수(道樹)ㆍ도량수(道場樹)ㆍ사유수(思惟樹)ㆍ불수(佛樹)라고도 부른다. 석존께서 중인도 마게타국(摩揭陀國) 가야성(伽耶城) 남쪽 보리수 아래에서 무상정각(無上正覺)을 증득하였다.
- 41)염부제(閻浮提)를 말한다. 수미사주(須彌四洲)의 하나로서 수미산 남쪽 바다 가운데 있다는 땅이름이다. 염부나무가 무성한 곳으로, 후세에는 인간 세상의 총칭, 곧 현세의 의미로 불렸다.
- 42)서기 32년에서 102년까지 생존한 인물로, 자는 중승이며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이다. 동한(東漢) 반표(班彪)의 아들이며 반고의 아우이다. 큰 뜻을 품고 명제 때에 서역으로 사신을 가서 50여 개국을 복원하여 서역도호(西域都護)로 임명되고, 또 정원후(定遠侯)에 봉해졌다.
- 43)신룡(神龍)이 황하(黃河)에서 등에 지고 나온 그림을 말하는데, 이는 즉 태평 시대의 상서로운 징조를 말하는 것이다. 복희씨(伏羲氏)가 그렸다는 하도(河圖)를 말한다.
- 44)하늘이 내린 붉은 색의 부절을 말한다.
- 45)건(乾:서북)ㆍ곤(坤:서남)ㆍ간(艮:동북)ㆍ손(巽:동남) 등 사방의 간방(間方)을 말한다.
- 46)6부(府)와 3사(事)를 합한 아홉 가지 일을 말하는데, 6부는 수(水)ㆍ화(火)ㆍ금(金)ㆍ목(木)ㆍ토(土)ㆍ곡(糓)이고, 3사는 정덕(正德)ㆍ이용(利用)ㆍ후생(厚生)이다. 『서경』 「대우모(大禹謨)」에 나온다.
- 47)순(舜) 임금과 탕왕(湯王)의 시대를 말한다.
- 48)조조(曹操, 155-220)는 중국 삼국시대 위왕조(魏王朝)를 세운 장군이다. 황건란(黃巾亂) 평정에 공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 헌제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략(武略)을 휘둘렀다. 화북(華北)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는데, 208년 손권(孫權)ㆍ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적벽(赤壁)에서 싸워 대패, 이후도 그 세력이 강남(江南)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같은 해 승상(丞相), 213년 위공(魏公), 216년 위왕(魏王)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220년 정월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두 아들 조비(曹丕)ㆍ조식(曹植)과 함께 시부(詩賦)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 49)『예기』에 나오는 세자에 관한 교훈으로서 부자ㆍ군신ㆍ장유의 도리를 말하는데, 세자는 이 3선을 다 하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 50)사람을 태워서 각기 그 과지(果地)에 이르게 하는 교법을 승이라고 한다. 1승에서 5승까지의 구별이 있다. 인승(人乘)ㆍ천승(天乘)ㆍ성문승(聲聞乘)ㆍ연각승(緣覺乘)ㆍ보살승(菩薩乘)의 5승을 말한다. 5승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51)중인도 말하길국에 있는 발제하(跋提河)를 말한다.
- 52)하늘과 땅, 그리고 동서남북을 말한다. 세상 전체라는 뜻이다.
- 53)진대(晉代)의 승려로 중국 하북(河北) 하간(河間) 사람이다. 생몰년은 확실하지 않으나, 도안(道安)과 함께 불도징(佛圖澄)을 섬겼다. 어려서는 유학에 뛰어났으나 장년이 되어서는 불가의 의리에 정통하였기에 많은 관리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청했다고 한다. 외전과 불경을 번갈아 비교하며 강설하기를 잘 하였고, 도안과 법태(法汰)와 함께 경전의 문제를 풀고 종요(宗要)를 정리하였다. 『양고승전(梁高僧傳)』 4권에 나온다.
- 54)석륵(273-332)은 갈족(猲族) 출신으로 후조(後趙)의 창시자이다.
- 55)5호16국(五胡十六國) 후조(後趙)의 제3세 황제로, 석륵(石勒)의 종자(從子)이다. 자는 계룡(季龍)이다. 용감하고 전쟁에 뛰어났기에 석륵의 총애를 받았다. 석륵이 죽은 후에 아들 홍(弘)이 왕위에 오르자 호(虎)를 재상으로 삼고 위왕(魏王)으로 봉했다. 연희(延熙) 원년(334)에 호(虎)가 홍(弘)을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대조천왕(大趙天王)이라고 하며 업(鄴)에 도읍을 정했다. 나라 밖으로는 멀리 정벌을 일삼았고 나라 안에서는 크게 토목공사를 벌였으며, 조세와 부역이 심해서 백성들이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문화적인 면에서는 석륵의 뒤를 이어 불도징(佛圖澄)을 귀하게 섬기면서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하였기에 화북(華北) 지역에 불교가 융성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영화(永和) 5년에 재위 15년 만에 죽었다.
- 56)동한(東漢), 서기 30년에서 101년까지 생존한 인물로, 자는 경백(景伯)이며 부풍(扶風) 평릉(平陵) 사람이다. 5경(經) 및 『좌전(左傳)』에 통달하였고, 겸하여 5가(家)의 「곡량(穀梁)」의 설에도 정통하였다. 영평(永平) 연간에 『좌씨전해고(左氏傳解詁)』 30편과 『국어해고(國語解詁)』 21편을 조정에 바치니, 명제(明帝)는 그 설을 중히 여겨 써서 비관(秘館)에 사장하게 하고 명하여 반고(班固)와 함께 비서(秘書)를 고교(考校)하게 하였다.
- 57)한(漢) 나라 선제(宣帝) 때에 천하가 태평하여 신작(神雀)과 황룡이 나타났다.
- 58)상법시대(像法時代)의 교화라는 뜻에서 상화(像化)라고 하였다. 불교는 불타가 입멸하고 5백 년이 지난 후에 중국에 전해졌는데, 그 때가 마침 상법시대(像法時代)였다. 그러므로 당시 불교의 교화를 상화(像化)라고 부르는 것이다.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 「서(序)」에 나온다.
- 59)후진(後塵)과 같은 말이다. 다른 사람의 뒤에 서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 60)신주(神主)의 패위(牌位)를 옮기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불타의 열반을 뜻한다.
- 61)쑥으로 지붕을 인 문이라는 뜻인 봉문(蓬門)은 가난한 사람이나 숨어 사는 사람의 집을 이르는 말이다. 봉호(蓬戶)라고도 한다.
- 62)전단(栴檀)은 향기가 많이 나는 나무로, 불상(佛像)을 새기거나 불단(佛壇)을 만드는 데 쓰인다. 말향이란 가루향을 말한다.
- 63)범어 mahāsattva, 파리어 mahāsatta로, 보살이나 대사(大士)의 통칭이다. 줄여서 마하살(摩訶薩)이라고 한다. mahā는 의역하면 작대(作大)가 되고 sattva는 유정(有情), 중생의 뜻이 된다. 그러므로 마하살타는 곧 대유정(大有情)ㆍ대중생(大衆生)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