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卷第三

ABC_IT_K1459_T_003
040_0586_b_01L불모반야바라밀다원집요의석론 제3권
040_0586_b_01L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卷第三


삼보존(三寶尊) 지음
040_0586_b_02L三寶尊菩薩造
대역룡(大域龍) 본론(本論) 지음
040_0586_b_03L大域龍菩薩造本論
시호(施護) 한역
040_0586_b_04L西天譯經三藏朝奉大夫試光祿卿傳法大師
賜紫沙門臣 施護等奉 詔譯


'네 가지 청정'이라 말하는 것은 첫째는 자성청정(自性淸淨), 둘째는 이구청정(離垢淸淨), 셋째는 소연청정(所緣淸淨), 넷째는 평등청정(平等淸淨)이다.
040_0586_b_05L所言四種淸淨者自性淸淨垢淸淨所緣淸淨平等淸淨
첫번째 자성청정이란, 곧 무차별한 무이(無二)의 지(智)이다. 특징이 어떠한 것이 자성인가 하면, 본성이 헛되거나 거짓되지 않은 것이니, 곧 진아성(眞我性)이다. 자성 가운데 이와 같은 상이 있으면, 마니보(摩尼寶)에 비추어져 나타나 화합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일체중생은 곧 여래장이며, 그 일체법과 선서(善逝) 등은 더욱이 무자성이다. 이와 같이 설한 것이 곧 자성청정이다.
040_0586_b_07L自性淸淨者卽是無差別無二之智行相云何自性者謂本性不虛假眞我性於自性中有如是相如摩尼寶映現和合如佛所言一切衆生卽如來藏彼一切法與善逝等而無自此如是說卽自性淸淨
둘째 이구청정의 이구란, 곧 모든 번뇌[垢染]를 떠난 것으로 청정의 뜻이니, 이미 앞에서 주석한 바와 같다. 특징은 무엇인가? 이른바 행위는 모든 유(有)를 대치하고, 관력(觀力)에 따라 상응하여 무이의 지가 생겨난다. 이 작용[所作]은 이미 세존 증상(增上)의 의요사(意樂事) 등에 있는 바이다. 곧 그것은 실제의 진여법계이다.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이 이구청정이다.
040_0586_b_13L二離垢淸淨者離垢者卽離諸垢染淸淨之義已如前釋行相云何謂所行對治諸有觀力隨生相應無二之智此所作所有世尊增上意樂事等卽彼實際眞如法界此如是說卽離垢淸淨
셋째 소연청정에서 소연이란, 곧 모든 남김 없는 반야바라밀다 등의 뜻으로 일체 소연경계의 작용이다. 또 그 소득성 혹은 소성성(所成性) 또한 이 대상[所緣]이다. 이 소연 중에 있어서 청정을 얻는 것이다. 청정의 뜻은 앞에서 주석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이 곧 소연청정이다.
040_0586_b_18L三所緣淸淨者所緣者謂卽所有普盡般若波羅蜜多義等一切所緣境界作用又彼所得性或所成性亦是所緣於是所緣中而得淸淨淸淨之義已如前釋此如是說卽所緣淸淨
040_0586_c_02L넷째 평등청정의 평등이란 균등하여 차별이 없다는 뜻이다. 곧 이 평등미묘ㆍ청정법계ㆍ대법광명의 그 평등성을 곧 평등이라 이름 한다. 이 평등 가운데에서 청정을 얻는다. 청정의 뜻은 이미 앞에서 주석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이 곧 평등청정이다.
040_0586_b_23L四平等淸淨者平等者齊等無差義卽是平等微妙淸淨法界大法光明彼平等性乃名平等於是平等中而得淸淨淸淨之義已如前釋此如是卽平等淸淨
이와 같이 총체적으로 네 가지 평등을 설한 것이 곧 원성자성(圓成自性)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가 모든 것의 특징을 설한다. 이와 같은 말의 뜻, 이 이와 같은 것들이 화합하고 나서 헛되거나 거짓된 법을 떠나는 것이다. 그 까닭에 송에서 '반야바라밀'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곧 모든 반야바라밀다, 모든 설의 뜻, 자성은 곧 불세존이 일체 이와 같이 마땅히 세 가지 상에 의지해 설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040_0586_c_06L如是摠說四種淸淨卽圓成自性是故說此般若波羅蜜多諸有行相如是言義此如是等和合作已離虛假法所以頌言般若波羅蜜此中云何謂卽所有般若波羅蜜多諸有所說言義自性謂佛世尊一切如是當知皆依三種相說
의타 등의 자성을 떠나 달리 성립하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속에서 설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이른바 만약 환영이나 비유 등의 견변을 설하고 나면, 곧 이 그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설하는 것과 더욱이 다름이 없다. 만약 의타기성을 설한다면, 곧 이것은 환영이나 비유 등의 견변이다. 왜냐하면 또 달리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다른 곳에서도 또한 그렇게 알아야 한다. 또 이 가운데 만약 지문(止門)의 모든 특징을 설하면, 곧 이것은 그 변계성을 설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만약 변계성을 설한다면 곧 지문을 설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이 법은 없는 까닭이다.
040_0586_c_12L非離依他等自性別有所成義此中所說行相云何謂若幻喩等見邊說已是說彼依他起性而無別異若依他起性說者卽是幻喩等見邊何以故無復有法故如是餘處亦然應知次此中若說止門所有行相卽是說彼徧計之性而無別異若徧計性說卽是所說止門何以故此法無故

묻노니 원성실성 가운데에는 무엇이 가히 그 언설문(言說門)으로서 있어야 하는가? 그 법 가운데에는 성(性)이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그 소생의 분위(分位)에 따라 곧 이와 같은 설의 분위는 더욱이 실(實)이 없다.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040_0586_c_20L圓成實性中云何可有彼言說門以彼法中無有性故如是隨其所生分位卽彼如是所說分位而亦無實所以頌言
040_0587_a_02L
열 가지 분별산란을
다스려[對治] 다음과 같이 말하니
이 세 가지를 알고 나면
혹은 나아가고[卽] 혹은 설을 떠난다.
040_0586_c_24L十分別散亂
對治如次說
此三種知已
若卽若離說

이 '열 가지 분별산란을 다스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등의 말은 곧 열 가지의 분별산란에 대하여 지금 차례로 그 대치를 설한 것이다. 곧 상위대치(相違對治) 및 능소대치(能所對治)이다. '세 가지'라 말한 것은 변계ㆍ의타ㆍ원성실성으로, 이와 같은 세 가지는 그 차례가 같다. '알고 나면'이란 완전히 알고 나서란 뜻이다. '혹은 나아가고 혹은 설을 떠난다'고 말하는 것은, 반야바라밀다교 가운데에 나아감이 있고 떠남이 있는 까닭이다. 이 총체적인 뜻은 만약 이와 같이 완전히 알고 나면, 그 변계ㆍ의타 등은 모든 대상[事相]과 혹은 나아가거나 혹은 떠나며, 그 하나하나의 상은 그 설한 바와 같이 드러나 나타난다는 것이다.
040_0587_a_03L此言十分別散亂對治如次說等者謂卽所有十種分別散亂今此次第說彼對治卽相違對治及能所對治所言三種謂徧計依他圓成實性如是三種如其次第知已謂了知所言若卽若離說謂般若波羅蜜多教中有卽有離故此中摠意如是了知已彼徧計依他等所有諸事相或卽或離彼一一相如其所說顯明開示

묻노니 이 가운데 무엇이 변계 등과 즉하거나 떠나거나 하는 것인가?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040_0587_a_13L此中云何若卽若離說徧計等所以頌言

처음처럼 원성(圓成)과
의타(依他)와 변계(徧計)를 말하니
무상분별색(無相分別色)은
그 산란을 지견(止遣)한다.
040_0587_a_14L如初語圓成
依他及徧計
無相分別色
彼散亂止遣
040_0587_b_02L
이 '첫 말과 같은' 등의 말에서 '같은'이란 법을 가리킨다. 이것은 이른바 이와 같은 8천송반야교 중의 최초의 말이다. 그 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수보리여, 너의 요설(樂說)에 따라 모든 보살마하살에게 반야바라밀다를 마땅히 일으켜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다를 출생시키는 것과 같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말이 곧 최초의 말이다. 이 말은 그 원성ㆍ의타ㆍ변계의 3성에 의지해 설하는 것이다. 설의 상과 같이 곧 원성의 성 등은 자색(自色)의 상과 같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와 같이 자색의 상 가운데 색의 무상분별산란을 일으키면, 세존은 여기에 있어서 남김없이 모두 지견한다.
040_0587_a_16L此言如初語等者者指法謂此如是八千頌般若教中最初語言如彼經云須菩提隨汝樂說諸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多應當發起如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多出生等此如是語卽最初語此語依彼圓成依他徧計三性而說如所說相卽圓成性自色相非無若於如是自色相中起色無相分別散亂者世尊於此皆悉止遣

묻노니 다시 또 이 뜻을 어떻게 완전히 아는가?
復次此義云何了知
답하노니 그 최초의 말 중에서와 같이 세 가지 뜻에 의지해 설한다. 그 말은 지금 이 가운데에서 간략히 그 뜻만 가리킨다. 경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의 출생 등과 같다"에서 '출'이란 곧 출리의 뜻이며 또 출생의 뜻, 혹은 무상도(無上道)를 얻는다는 뜻이다.
040_0587_b_03L彼最初語中依三種義說所有彼語今於此中略指其義如彼經云如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多出生等者卽出離義又出生義或得無上道
요점을 말하면 갖가지 뜻의 경계가 되니,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은 이로부터 일체의 뜻이 출생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또 능히 칭찬 등의 일을 출생시키니, 이른바 불보살 등이 지니는 칭찬이다. 그 칭찬하는 모습은 앞에서 이미 설한 것과 같다. 또 "수보리여, 너의 언설에 따라 모든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는 모든 경계의 일에 마땅히 일어나야 한다"라는 경의 말과도 같다. '요설'이라 말하는 것은 이른바 요설의 혜를 얻거나 요설의 광명을 얻는 까닭에 이름 하여 요설이라 한다. 이와 같은 일단의 경문은 곧 의타기성이 설하는 대상이다.
040_0587_b_08L以要言之或爲種種義界此如是由此出生一切義故此中復能出生稱讚等事謂佛菩薩等所有稱讚彼稱讚相如前已說又如經言須菩隨汝樂說諸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多應當發起諸境界事所言謂得樂說慧及得樂說光明名樂說此如是等一段經文卽依他起性所說事相
만약 그 경과 같이 수보리로부터 출생 등에 이르는 전단(全段)의 경문 중에 만약 그 실의가 설해진다면 즉 이것은 그 변계성에 의지해 설하는 것이다. 또 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다의 출생 등과 같다'는 이 일단의 경문은 곧 원성실성 소설의 사상이다. 이 말의 총체적인 뜻은 이 원인에 의하는 까닭에 세 가지 뜻에 의지해 반야바라밀다를 널리 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설하는 바는 나아감이 있고 떠남이 있다. 또다시 송으로 말한다.
040_0587_b_16L若如彼經從須菩提乃至出生等全段經文其中若有說彼實義卽是依彼徧計性說又如經如菩薩摩訶薩般若波羅蜜多出生等此一段經文卽圓成實性所說事相此中摠意由此因故依三種義宣說般若波羅蜜多是故所說有卽有離復次頌言

저 부처와 또한 보리와
설자(說者) 등을 보지 않아도
궁극에 이르러
이 변계성을 지견하는 것을 안다.
040_0587_b_23L彼佛亦菩提
不見說者等
至了畢此知
止遣徧計性
040_0587_c_02L
여기에서 '그'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그 인(因)이다. 이것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어리석은 자는 반야바라밀다교 가운데에 있어서 구의(句義)에 취착해 실이라 집착하여 주관과 객관의 모든 변계를 일으키며, 그 까닭에 이것을 지견한다.
040_0587_c_02L此言者謂卽彼因此中云何謂諸愚者於般若波羅蜜多教中取著句執實能知所知起諸徧計故此止

묻노니 어떠한 법이 능히 지견하는가?
답하노니 지법(止法)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何法能止邪止法應知

묻노니 누가 이것을 설하는가?
040_0587_c_06L人是說者
송에서는 답하기를 '그 불과 또 보리, 설자 등을 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무엇인가? 응하는 바에 맞게 말의 뜻을 편안하게 수립하며, 완전히 깨달을 수 있는 자가 부처인 까닭이다. '보리'란 번뇌와 소지의 2장(二障)을 떠나는 지혜이다. '등'이란 곧 보살과 성문을 균등히 포섭하는 것이다. '설자'라고 말한 것은 곧 부처 등을 가리킨다. 이른바 만약 온 등의 자성 가운데 있어서 전도와 변계가 있다고 한다면, 불은 그를 위해 지견법을 설하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곧 그 설자가 있다. 송에서 '보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치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040_0587_c_07L頌自荅言彼佛亦菩提見說者等此中云何謂如所應安立句義能覺了者卽是佛故菩提離煩惱所知二鄣之智卽等攝菩薩聲聞所言者卽是佛等謂若有於蘊等自性中顚倒徧計者佛爲說彼止遣法故此中如是卽有彼說者頌言不見如理應知

묻노니 더욱이 그 설한 바는 무엇이 그 분한(分限)인가?
040_0587_c_14L而彼所說何等是其分限
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궁극에 이르러'라고 말했다. 이른바 이 반야바라밀다교 가운데에 처음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두루 아는 것이다. 이것이 분한이다. 송에서 '변계성을 지견한다'고 말한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설한 불 및 보리를 보지 않는다는 등의 뜻이다. 이것 모두를 지견한다. 유상분별의 변계성인 까닭이다.
040_0587_c_15L頌自荅言至了畢此般若波羅蜜多教中自初至末而悉周畢是爲分限頌言止遣徧計性謂此所說佛及菩提不見等義是止遣有相分別徧計性故

묻노니 무엇이 이 가운데서 변계성을 지견하고, 원성실성은 지견하지 않는 것인가?
송에서는 말한다.
040_0587_c_19L云何此中但止徧計性不止圓成邪頌自通言

자성은 그 색이 공한데
모양을 갖춤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별도의 말 가운데
알고 나면 그것에 머물게 된다.
040_0587_c_21L自性空彼色
俱相何所有
此別異語中
了知已彼止
040_0588_a_02L
이 '자성' 등의 말에서 '자성'이란 곧 본성의 뜻이다. '그 색을 공으로 한다'는 것은 이른바 색의 자성이 공이란 것이다. 만약 그 지상(智相)이 색이 있다고 본다면 곧 소취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모든 색에 실이 있다고 변계하면, 그것은 대애(對礙)가 된다. 모양을 갖춤 가운데 더욱이 증상(增相)이 있다. 다시 분별과 소분별의 상을 이룬다. 그것은 어떻게 있는가? 그 까닭을 송에서 '모양을 갖춤이 어디에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모양을 갖춤'이란 두 가지를 갖춘 상이다. 이른바 색의 자성은 승의제 가운데 있어서 대상의 분위(分位)가 없다. 비유하면 사람의 뿔과 같으니, 그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40_0587_c_23L此言自性等者自性者卽本性義彼色謂色自性空若彼智相見有色故卽有所取如是一切計色有實彼爲對礙於俱相中而有增相還成分別所分別相其云何有所以頌言俱相何所有俱相者卽二俱相謂色自性於勝義諦中無所取分位譬如人角其義應知
이러한 까닭에 단지 변계만을 없애고, 원성은 없애지 못한다. 왜냐 하면 승의제는 비유성(非有性)인 까닭이다. 송에서 '이 별도의 말 가운데 요지를 끝내면 그것에 머문다'고 말한 것에서 '이'란 인(因)의 뜻이고 '요지'란 분명히 이해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그 별도의 말 가운데 있어서 완전히 알고 나면, 곧 능히 멀리 떠난다는 것이다. '그것에 머문다'고 말한 것에서 '머문다'는 것은 지견이다. 이른바 곧 모든 변계를 없애는 것이다. 이것을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모두 구상분별산란을 지견한 후에 마땅히 훼방분별산란을 지견한다. 그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040_0588_a_08L是故但止徧計不止圓成何以故勝義諦中非有性故此別異語中了知已彼止因義了知者解了義謂由於彼別異語中善了知已卽能遠離所言彼止謂止遣謂卽止彼所有徧計如是等當知皆是止遣俱相分別散亂後當止遣毀謗分別散亂如彼頌

이는 불공(不空)인 까닭에 공하니
이와 같이 말씀을 설한 것은
모든 훼방과 분별로
일체의 설이 모두 그치기 때문이다.
040_0588_a_16L此不空故空
如是語所說
諸毀謗分別
一切說皆止
040_0588_b_02L
여기에서 '불공인 까닭에 공하다'는 등의 말은, 이른바 불세존께서 반야바라밀다 주제[本母] 가운데 이와 같이 불공인 까닭에 공이라고 널리 설하셨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을 설한 바는'이라는 말은 이와 같은 말을 설하는 까닭을 말하는 것이다. '말한 바'란 무엇인가? 이른바 불공인 까닭에 공이란 공성을 떠나는 까닭이다. '모든 훼방분별로'라고 말한 것은 만약 이 불공인 까닭에 공인 것 중에서 공의 자성을 취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곧 훼방분별이라서 지금 남김없이 지견한다는 말이다. '일체의 설은 모두 그친다'고 말한 것에서 '일체'란 이른바 일체처ㆍ일체종류이다. '설'이란 언설을 말한다. 말하자면 불세존은 이 가운데서 단지 변계의 분별을 지견하는 것만이 아니라, 일체처에 있어서 공에 집착하는 말도 남김없이 모두 지견한다. 또 다음 송에서 말한다.
040_0588_a_18L所言此不空故空等者謂佛世尊於般若波羅蜜多本母中宣說如是不空故空所言如是語所說謂卽說此如是語故所說云何所謂不空故空性離故所言諸毀謗分別有於此不空故空中取空自性者卽毀謗分別今悉止遣所言一切說皆止一切者謂一切處一切種類謂言說謂佛世尊不但此中止遣徧計分別於一切處執空之言皆悉止遣復次頌言

환(幻)과 같이 또한 그러한 불(佛)
그는 또한 꿈과 같이 그러하니
이와 같이 다음의 것을 안다면
지(智)의 어변(語邊)은 결정된다.
040_0588_b_06L如幻亦然佛
彼如夢亦然
如是如次知
智語邊決定

여기에서 '환과 같이 또한 그러한 불 그는 꿈과 같이 또한 그러하다' 등의 말은, 이 설도 또한 훼방분별을 지견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환과 같다'는 것은 환영이나 비유의 법으로써인 까닭에 환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무엇이 환과 같은가? 이른바 곧 '불'인 까닭이다. '또한 그러하다'는 것은 상속을 설한다는 뜻이다. '꿈과 같이 또한 그러하다'는 것은 이른바 곧 그 불 또한 꿈과 같고, 이 가운데 만약 부처가 말을 설하는 바가 있으면, 이것은 모두 무이지를 설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더욱이 그 자성과 이생(異生) 등은 상속하여 있는 까닭이다. 단지 무명의 환 등에 덮인 까닭이며, 더욱이 모든 어리석은 자는 곧 자상(自相에 감추어져 나타나지 않는다. 송에서 '이와 같이 다음과 같이 안다면, 지(智)의 어변(語邊)은 결정된다'고 말한 것은 이른바 이와 같은 설은 그 차례와 같이 이치에 따라 알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은 완전히 안다는 것이다.
040_0588_b_08L此言如幻亦然佛彼如夢亦然等者當知此說亦是止遣毀謗分別如幻以幻喩法故名如幻何者如幻卽佛故亦然相續說義如夢亦然謂卽彼佛亦復如夢此中若有說佛之言當知皆是說無二智而彼自性與異生等相續有故但爲無明幻等之所覆故而諸愚者乃於自相隱而不現頌言如是如次知智語邊決謂如是所說如其次第如理而謂了知

묻노니 누가 능히 아는 것인가?
송에서 답하기를 '지(智)'라고 말했다. '지'란 곧 지자(智者)이다.
040_0588_b_19L何人能知頌荅言卽智者

묻노니 무엇이 이 어변을 결정하는 것인가?
답하노니 이른바 일체법이 환과 같은 것이다.
040_0588_b_20L何等是語邊決定謂一切法如幻

묻노니 이 중 훼방분별을 지견하는데, 이와 같이 알고 나서 후에 다시 또 어떻게 개시(開示)되는 바가 있는가?
그 까닭을 송에서 말한다.
040_0588_b_21L此中止遣毀謗分如是知已後復云何有所開示以頌言

모든 동등(同等)의 소작(所作)을
여기에서는 불(佛)을 환과 같다고 설하니
환영이나 비유 등의 말 등은
이것을 의타성이라 말한다.
040_0588_b_23L諸同等所作
此說佛如幻
幻喩等言等
此說依他性
040_0588_c_02L
이 '모든 동등의 소작, 여기에 불을 환과 같다' 등이라고 말한 것에서, '동소작(同所作)'이라는 것은 이른바 그 환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뜻은 일체처의 무이지 가운데 생겨나는 바가 없는 것은 그 모든 동등의 소작설과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모든 환 등은 유성(有性)인 까닭이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부처도 또한 자성이 있다.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불을 환과 같다고 설한다'고 말했다. 송에서 '환영이나 비유 등의 말 등은 이것을 의타성이라 설한다'고 말한 것에서 '말 등'이란 꿈 등을 고루 포섭한다. 또 '말 등'이라는 것은 곧 인(因)의 뜻이다. '설'은 언설이다.
040_0588_c_02L此言諸同等所作此說佛如幻等者同所作謂同其幻此中意者若一切處無二智中無所生者彼諸同等所作說不相應何所以邪以諸幻等皆有性故此中如是佛亦有性是故頌言說佛如幻頌言幻喩等言等說依他性上言等攝夢等卽是因義謂言說
만약 환유 등의 말을 설하는 것은 곧 그 의타기성을 설하는 것이다. 이 의타기성은 불이 설한 바인 까닭이다. '의타'란 다른 것에 의속(依屬)하는 까닭에 의타라 이름 한다. 여기에서 의타라 하는 것은 곧 무명 자체로서 이것들의 분위는 의지하는 바가 있다. 곧 이 환과 같다고 설하고, 불도 또한 그러하다. 이러한 까닭에 일체종이며, 일체 무성(無性)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자성으로서 청정한 까닭이다. 그것들 환유나 불 등의 설도 일체 모두 그러하다. 이와 같은 설에 만약 훼방분별이 있으면, 그것은 여래장이 아니며, 일체중생은 무이지가 아니다. 왜냐 하면 일체유(一切有) 가운데 훼방분별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루어져야 할 뜻이 모두 이루어지지 않고, 또한 화합하지 않는다.
040_0588_c_10L若說幻喩等言卽是說彼依他起性此依他性佛所說故依他者謂依屬於他名依他此依他者卽無明自體此等分位有所依止卽此如幻說佛亦然是故應知非一切種一切無性以自性淸淨故彼等幻喩佛等所說一切皆然如是等說若有毀謗分別者非如來藏一切衆生非無二智何以於一切有中毀謗分別故由如是於所成義而悉不成亦不和合

묻노니 만약 승의제 가운데에 무이의 지가 곧 이 여래라고 한다면, 무엇이 이 가운데 이생지(異生智)를 설하는 것인가?
이 의심을 깨뜨리기 위하여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040_0588_c_20L若勝義諦中無二之智卽是如來者云何此中說異生智邪爲破此疑以頌言

모든 이생지(異生智)처럼
그 자성이 청정하고
그러므로 불언(佛言)이라 설하며
보살도 또한 불(佛)과 같다.
040_0588_c_23L若諸異生智
彼自性淸淨
故說彼佛言
菩薩亦如佛
040_0589_a_02L
여기에서 '만약 모든 이생지처럼 그 자성이 청정하면'이라고 말한 것은, 곧 모든 이생의 본성이 청정하면 그 체(體)는 곧 자성청정의 지라는 것이다. '그것을 불언이라 설한다'고 말한 것은, 그 불은 여실히 무이지를 설하는 까닭에 여기에서 이생지를 설하는데, 또한 동등하다.
040_0589_a_02L此言若諸異生智彼自性淸淨諸異生本性淸淨體卽自性淸淨之所云說彼佛言謂說彼佛如實無二智故此說異生智亦復同等

묻노니 소행상(所行相) 가운데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은 무엇인가?
송에서 답하기를 '보살도 또한 불과 같다'고 말했다. 무이지가 생겨나는 바는 이와 같은 뜻인 까닭에, 이러한 까닭에 보살도 또한 불과 같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과 보살은 차별이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040_0589_a_06L若以所行相中如是說者其復何如頌自荅言菩薩亦如佛以無二智所生如是義故是故菩薩亦卽如佛此因故佛及菩薩說無別異

묻노니 혹은 이생, 혹은 제불(諸佛)이 여실지(如實智) 가운데 있어서 생겨나는 바가 있다면, 앞에서 얻는 바가 없다고 말한 것은 무엇인가?
송에서는 말한다.
040_0589_a_10L若異若諸佛於如實智中有所生者何前言無所得邪頌自通言

자성은 자색(自色)을 덮고
그것은 무명의 인(因)이 만드니
환과 같이 다르게 나타나며
과(果)를 꿈과 같이 버린다.
040_0589_a_12L自性自色覆
彼無明因作
如幻別異現
果如夢棄捨

여기에서 '자성은 자색을 덮으며, 그것은 무명의 인이 만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모든 이생의 화합에는 자식(自識)과 자성(自性)의 둘은 없다는 것이다. 그 무명이 인이 되어 짓는 것 때문에 아(我)ㆍ아소(我所)가 생겨난다. 아는 자성을 말하며, 아소는 자색을 말한다. 자색으로 덮여 있고, 다르게 나타나는 바인 까닭에 두 가지 상이 생겨난다. 이 상은 둘이 없으며, 또한 실이 없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송에서 '환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이 환과 같은 무자성 가운데에 실물(實物)의 성을 취한다. 더욱이 그 대상과 무이지는 대애가 된다.
040_0589_a_14L此言自性自色覆彼無明因作諸異生和合自識自性無二由彼無明爲因所作起我我所我謂自性所謂自色以自色覆故別異所現故起二相是相無二亦無有實此復何頌言如幻於是如幻無自性中取實物性而彼所取與無二智而爲對

묻노니 만약 이 무이지의 자성과 이생지의 자성이 평등이라고 설한다면, 왜 이생의 식 가운데에는 나타나지 않는가?
040_0589_a_22L若此無二智自性與異生智自性平等說者何故異生識中無所出
040_0589_b_02L답하노니 주체와 대상의 전도성으로 감추어져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여래의 식 가운데는 일체시에 있어서 항상 나타나는 바로 이것이 청정성인 까닭이다.
040_0589_a_24L以能取所取顚倒之性所隱覆然如來識中於一切時常所出現以淸淨性故

묻노니 만약 모든 이생이 청정한 가운데 과(果)가 없이 진실로 나타난다면, 곧 일체시에 무명에 집착한 것은 무엇인가?
040_0589_b_03L若諸異生淸淨性中而無有果眞實出現者卽一切時無明堅著其復云何
묻노니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이 의문을 깨뜨려 말하기를 '과를 꿈과 같이 버린다'고 하였다. '버린다'는 것은 취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뜻은 자성청정지가 있는 곳에 과성(果性)이 없는 것은 아니며, 단지 무명에 감추어져 있는 까닭에 문(聞)ㆍ사(思) 등의 혜와 같이 화합, 소작한다는 말이다. 그 얻어지는 과도 더욱이 실의가 없다. 이것도 또한 그러하다. 꿈속의 과는 깨어나면 실의가 없으니, 상을 가히 나타낼 수 없는 것과 같다. 화합하여 만들고, 얻는 바와 유사하지만, 얻고 나면 버린다. 이것을 결정이라 설하며, 이것을 정리(正理)라 한다. 또다시 송에서 말한다.
040_0589_b_05L是故頌文破此疑果如夢棄捨棄捨者卽不取著義此中意者所有自性淸淨智中非無果性但爲無明所隱覆故如聞思等慧和合所作其所得果而無實義中亦然如夢中果覺無實義無相可雖和合而作似有所得得已棄捨此說決定是爲正理復次頌言

무이(無二) 별이(別異)를 설함에
과(果) 등은 실로 훼방이 되니
훼방에서 모든 분별이 생기며
그 훼방이 이것을 설한다.
040_0589_b_12L無二別異說
果等定毀謗
毀謗諸分別
彼毀謗此說

여기에서 '무이 별이를 설한다' 등의 말은, 이른바 모든 어리석은 자가 무이지 가운데에 별이하게 나타내는 바로, 전도견을 일으켜 2종의 경계상에 집착한다는 것이다. 송에서 '과 등은 실로 훼방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과 등'이란 과 등과 같은 경계가 진여의 상 가운데에 결정적으로 훼방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것을 지견한다. 송에서 '훼방에서 모든 분별이 생기며'란 이른바 훼방하는 까닭에 모든 분별을 일으키는 것이다. 더욱이 그 훼방과 모든 분별 등을 지금 남김없이 지견한다. 송에서 '이것을 설한다'는 것은 지견하기 위함이다.
040_0589_b_14L此言無二別異說等者謂諸愚夫於無二智中別異所現起顚倒見著於二種境界之相頌言果等定毀謗果等者謂於果等境界眞如相中決定毀謗今此止遣頌言毀謗諸分別等者謂毀謗故起諸分別而彼毀謗諸分別等今悉止遣頌言此說止遣故
040_0589_c_02L 지금 여기에서 불공인 까닭에 공이라고 설하는 것은 그 헛되거나 거짓된 설을 버리게 하고자 함인 까닭이다. 이 가운데 색이 공인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이 가운데 일성(一性)의 분별이 나타나는 바가 있다. 이것은 또 무엇인가? 이른바 반야바라밀다 주제 중의 설이다. 만약 색이 공이라면, 곧 색이 아니다. 이와 같이 화합하여 설하는 것을 지견하고자 함인 까닭이다. 일성의 분별은 결정적인 말이라는 의미이다. 그 까닭을 송에서 말한다.
040_0589_b_22L今此說言不空故空爲令棄捨彼虛假說應知此中色卽是空次此中一性分別有所起現此復云謂般若波羅蜜多本母中說若色空卽非色作此如是和合所說爲令止遣一性分別決定語義所以頌言

색(色)과 공(空)은 화합이 아니니
그것은 서로 어긋나 장애가 되며
색이 없으면 공의 이름도 없으나
색의 상은 스스로 화합한다.
040_0589_c_04L色空非和合
彼互相違礙
無色無空名
色相自和合

여기에서 '색과 공은 화합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색과 공은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화합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040_0589_c_06L此言色空非和合謂色與空不和合故不和合者不相應義

묻노니 어떠한 까닭에 화합하지 않는가?
040_0589_c_08L何故不和合
송에서 답하기를 '그것은 서로 어긋나며 장애가 된다'고 말한 것이다. 이른바 색과 공의 둘은 서로 해를 끼치는 까닭이다. 서로 다르다고 하는 내용은 무엇인가? 송에서 '색이 없으면, 공의 이름도 없다'고 말한 것이다. 이른바 만약 색이 없으면, 곧 공도 없다. 무자성인 까닭이다. 비유하면 허공의 연꽃과 같다. 그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송에서 '이름'이라 말한 것은 곧 인가(印可)의 뜻이다. 이것은 자성이 없다고 설하는 것을 인가하는 까닭이다. 송에서 '색의 상은 스스로 화합한다'고 말한 것은, 이른바 청ㆍ황ㆍ적ㆍ백 등의 색상과 그리고 스스로 화합한다는 말이다. 이 총체적인 뜻은 그 유자성과 무자성의 두 가지가 결정적으로 서로 어긋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송에서 말한다.
040_0589_c_09L頌自荅言彼互相違礙謂色二互相害故相違行相此中云何無色無空名謂若無色卽無空無自性故譬如虛空蓮華其義應知頌言者卽印可義印可此說無自性故頌言色相自和合謂靑白衆色之相而自和合此中摠意有自性及無自性應知二種決定相復次頌言

이 일성(一性)의 분별은
종종성(種種性)을 맞아 다스리니
공은 그 색과 다르지 않은데
그 공이 어디에 있겠는가?
040_0589_c_17L此一性分別
對治種種性
空不異彼色
彼空何所有
040_0590_a_02L
'이 일성의 분별' 등의 말에서 '이것'이란 인(因)의 뜻이니, 이 원인에 의하는 까닭이다. 이른바 곧 일성의 분별을 대치, 지견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러한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교 가운데 설한 것으로, 색은 공이며 곧 색이 아니다. 이 가운데 이와 같이 일성분별을 지견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그 까닭에 송에서 '공은 그 색과 다르지 않은데, 그 공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했다. 앞의 송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종종성을 대치한다'는 것은 곧 종종성 가운데 분별[所分別]이 있는 것을 지견하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반야바라밀다 주제 가운데에 이와 같은 설을 짓는다. 이른바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 이 이와 같은 말은 무엇을 짓는 바인가? 공으로써 색을 장애하는 까닭이다.
040_0589_c_19L所言此一性分別等者者因義是因故謂卽表示對治止遣一性分是故此般若波羅蜜多教中所說若色空卽非色此中如是爲令止遣一性分別故所以頌言空不異彼色彼空何所有如上頌言對治種種性謂卽止遣種種性中有所分別故此般若波羅蜜多本母中作如是所謂空不異色此如是語云何所以空礙色故

묻노니 무엇을 그치는 것인가?
답하노니 종종성의 분별을 지견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 어떠한 원인인가?
이른바 그 공은 색온의 상과 다르지 않다.
색은 어디에 있는가?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서 색은 이 공이라고 설한다. 공을 떠나서는 조그마한 색도 가히 얻어지는 바가 없다. 왜냐 하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한 것은 종종성의 분별산란을 남김없이 지견하기 위함이다.
040_0590_a_06L何所止邪止遣種種性分別此復何因所謂彼空不異色蘊之相色何所有是故此說色卽是空離空無有少色可得以無所有故如是所說悉爲止遣種種性分別散亂

묻노니 여기에 또 어떠한 인(因)으로 공을 떠나 색이 없다고 하는가?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040_0590_a_11L此復何因離空無色所以頌言

이 무실(無實)이 나타나는 곳이
그 무명(無明)이 일어나는 곳이며
이 무실이 능히 드러나는
그것이 무명을 설하는 까닭이다.
040_0590_a_12L此無實所現
彼無明所起
此無實能表
彼說無明故

이 '무실이 나타난다' 등의 말에서 '무실'이란 무소유를 말한다. 이것이 나타나 대애(對礙)가 된다. 송에서 '그 무명이 일어나는 곳이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소유하는 색, 그 색의 자성에 집착하는 것이다. 무명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집착하는 것은 개장(蓋障)의 뜻이다. 만약 이와 같이 부실(不實)이 나타나는 속에서 유성(有性)에 취착하는 것이 개장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가운데 증상(增上)의 뜻으로 공은 색과 다르지 않다고 설한다.
040_0590_a_14L所言此無實所現等者無實者謂無所有此所出現而爲對礙頌言彼無明所起謂所有色彼色自性有所執著無明所起執著者蓋鄣義若於如是不實所現中取著有性者是爲蓋鄣是故此中增上意說空不異色
040_0590_b_02L
묻노니 모든 이생의 자성청정지 그 가운데 어찌하여 무명을 설하는가?
답하기를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이 의심을 깨뜨리기 위하여 '이 무실이 능히 나타나니 그것이 무명을 설하는 까닭이다'라고 말했다. '무실'이란 실재가 아니라는 말뜻이 있고, '나타난다'는 것은 곧 완전히 나타나는 것이다. '능히'란 능력(能力)을 말한다. 무실인 까닭에 능히 나타내는 바가 아니다. 이 총체적인 뜻은 무명을 설하는 까닭에 승의제가 아닌 것이다. 또다시 송에서 말한다.
040_0590_a_20L所有諸異生自性淸淨智云何彼中說無明言是故頌文破此疑無實能表彼說無明故無實者謂不實句義卽表了謂力能爲無實非所能表此中摠意說無明故非勝義諦復次頌言

여기 이처럼 색을 설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이니
무이(無二)의 이(二)는 이처럼
두 가지 분별(分別)을 대치(對治)한다.
040_0590_b_03L此如是說色
般若波羅蜜
無二二如是
二分別對治

이 '이와 같이 색을 설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이다.' 등의 말은, 이른바 이 반야바라밀다에서 설한 색이란 뜻이다. 곧 자성청정지이며, 더욱이 능히 주관과 객관으로 감추는 성질을 없앤다. 반야 중에서 설한 것은 곧 혜의 힘에 의한 까닭이다.
040_0590_b_05L所言此如是說色般若波羅蜜等者謂此般若波羅蜜多所說色義卽自性淸淨智而能遣除能取所取隱覆性故般若中所說者卽慧力故

묻노니 만약 무명상이 분별을 일으키면, 그것은 무엇으로써 대치하는가?
040_0590_b_09L無明相分別起現彼以何對治
송에서 답하기를 '무이(無二)의 이(二)는 이와 같고, 두 가지 분별을 대치한다'고 말했다. 이 뜻은 만약 이와 같은 두 가지 유(有)가 나타나면, 곧 승의상 가운데 무이의 자성청정지로써 대치를 한다는 것이다. 곧 그 유성과 무성의 2분별상을 대치하며, 그 문ㆍ사ㆍ수ㆍ혜의 화합으로써 대치한다. 이와 같이 그 2상을 대치한다.
040_0590_b_10L頌自荅言無二二如是二分別對治此中意者若彼如是二有所現卽以勝義相中無二自性淸淨之智而爲對治卽對治彼有性無性二分別相復由聞思修慧和合對治如是對治彼二相已
이와 같은 뜻은 곧 진실로 이치에 따라 대치하는 것이다. 광야에서 그 아지랑이를 보고 헛되이 물의 생각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그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여래의 최상진실을 완전히 아는 까닭이다. 반야바라밀다 주제 가운데 여실하게 설한다. 또 다음의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설하는 열 가지의 분별산란은 모두 무분별지로써 대치한다.
040_0590_b_16L此如是義是卽眞實如理對治如曠野中見其陽焰妄生水想其義應知此中如是如來最上眞實了知於般若波羅蜜多本母中如實而復次當知此般若波羅蜜多中所說十種分別散亂皆以無分別智而爲對治

묻노니 만약 이와 같다면 왜 총섭하여 단지 두 가지 분별대치만을 설하는가? 이것은 어찌 과실이 아닌가?
답하노니이것은 또한 과실이 아니다. 이른바 이와 같이 둘 중에 있어서 더욱이 능히 안온하게 포섭하며, 또한 능히 나머지 모든 분별을 지견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 뜻은 두 가지를 총섭한다.
040_0590_b_22L若如是者何故摠攝但說二種分別對治豈非過失邪此亦無過謂卽如是於此二中而能隱攝亦能止遣餘諸分別是故此意摠攝二種
040_0590_c_02L
묻노니 만약 이 두 가지가 이미 능히 나머지 분별을 안온하게 포섭한다면, 왜 세존께서는 또 다수의 분별산란을 설하셨는가?
가하노니이 뜻은 단지 중생의 뜻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뜻은 스스로 화합한다. 잠시 이 논을 마친다.
040_0590_c_03L又問若此二種已能隱攝餘分別者何故世尊復說多種分別散亂此中意者但爲衆生意差別故義自和合且止斯論
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卷第三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