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卷第四

ABC_IT_K1459_T_004
040_0591_a_01L불모반야바달밀다원집요의석론 제4권
040_0591_a_01L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卷第四


삼보존(三寶尊) 지음
040_0591_a_02L三寶尊菩薩造
대역룡(大域龍) 본론(本論) 지음
040_0591_a_03L大域龍菩薩造本論
시호(施護) 한역
040_0591_a_04L西天譯經三藏朝奉大夫試光祿卿傳法大師
賜紫沙門臣施護 等奉 詔譯


다시 또 이 가운데 세존께서 설하신 정리(正理)를 나타낸다. 그 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040_0591_a_05L復次此中顯示世尊所說正理如彼頌言

이치에 맞는 말은 정성(淨性)이며
또한 그렇기에 얻을 수 없으니
성(性)과 무성(無性)의 차이 등
갖가지 성이 분명히 나타난다.
040_0591_a_07L如理言淨性
亦然不可得
性無性違等
種種性定見

여기에서 '이치에 맞는 말' 등이라고 한 것은, 이른바 수염분별(隨染分別)로, 지(智)로써 모든 산란을 대치(對治)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치에 따른 말이라 하는 것이며, 세존께서는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바로 설하신다. 송에서 '정성(淨性)'이라 말한 것은 곧 이치에 따른 자성이니, 청정광명하여 그 청정하지 못한 모든 산란을 능히 대치한다. 송에서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은 곧 취집(聚集)의 뜻으로, 이 일성(一性)등의 성이 취집되어 있는 것은 그 양을 가히 알 수 없다. '이치에 맞는 말'이란 곧 여량(如量)의 뜻이니, 체는 곧 무이(無二)의 지(智)로서 그것을 능히 대치한다. 이것을 결정이라 한다.
040_0591_a_09L此云如理言等者謂隨染分別以智對治諸有散亂是故如理之言世尊於般若波羅蜜多中正說頌言淨性謂卽如理自性淸淨光明而能對治彼不淸淨諸有散亂頌言亦然卽聚集義此一性等性所有聚集量不可得如理之言卽如量義體卽無二之智彼能對治此爲決定

묻노니 여기에서 또 어떠한 양을 가히 얻지 못하는가?
040_0591_a_17L此復何等量不可得
040_0591_b_02L답하노니여기에서 설하는 비량(比量)은 불가득인 까닭이다. 모든 자수(自受)는 타상(他相)이 증가하는 것이 아니니, 낙(樂) 등의 자수와 같다. 만약 논의 안립을 말하면, 곧 여실한 지는 자성이 얻는 바와 서로 어긋난다. 타상이 증가하면 자수는 성립하지 않는다. 양을 대치하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그 소지(所知)는 청(靑) 등의 상이 아니다. 일다(一多)의 성이 다르며 분별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결정관찰한다. 자수를 성취하여 행하는 동정[悲愍]은 곧 외문소조(外門所照)의 현성(現性)이 아니다. 타상(他相)을 위해 유증동란(有增動亂)하는 것이 아니다.
040_0591_a_18L此說比量不可得所有自受非他相所增如樂等自若言論安立卽如實智自性所得相違他相有增自受不成對治量故此中非彼所知靑等相一多性異分別故是故決定觀察自受成就行悲愍卽非外門所照現性不爲他相有增動亂
왜냐 하면 청(靑) 등의 모든 상은 승의제 가운데 실성이 없는 까닭이다. 여기에는 오직 지가 있어 여실히 완전하게 안다. 여기에는 과실이 없다. 만약 외사(外事)에 있어 그 자수와 같다면 이와 같은 뜻으로써 안립하는 바가 있다. 곧 뜻과 같지 않아 여기에는 과실이 있게 되니, 더욱이 결정하여 견변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낙(樂) 등의 수(受)는 바깥의 여러 처에 있어서는 성이 없는 까닭이다. 또한 이처(異處)가 아니며 살펴서 헤아리는 바가 있다. 이 중 낙 등의 수는 낙 등의 자성의 수이며, 낙 등의 상(相)의 수는 아니다. 이렇게 설한 바는 곧 주관과 객관의 2상의 지(智)를 떠난다. 이것은 별도로 달리 있는 바가 아니다.
040_0591_b_03L何以故所有靑等諸相勝義諦中無實性故此唯有智如實了知此無過失若於外事如其自受以如是義有所安立卽不如義此有過失而非決定見邊成就何以故樂等受於外諸處無有性故亦非異處有所伺察此中樂等受卽樂等自性受非樂等相受此等所說卽離能取所取二相之智此非別異所有

묻노니 만약 지금 그 주관과 객관의 식이 없다면, 무엇이 후에 그 식성(識性)을 있게 하는 것인가?
040_0591_b_11L若今無彼能取所取識者云何於後有彼識性
답하노니 이 중에서 단지 주관과 객관의 상을 떠나는 것으로, 그 후식(後識)의 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어로 표시되지 않는다. 그 유(有)의 성만이 진실로 표시되며, 이치에 따라 화합한다. 이러한 까닭에 여기에 그 일체식을 설한다. 만약 비량지(比量智)가 이 가운데 화합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면, 어떠한 까닭에 그 무이의 상으로써 비유(非有) 2상(相)의 소행을 받아들이겠는가? 만약 2상이 있어 그 양을 성취하지 못하면, 그 2상으로써 더욱이 대애(對礙)가 된다. 토끼의 뿔에 집착하는 것과 같이 어찌 과실이 아니겠는가? 어떠한 까닭에 주관의 소리 중에 지의 상이 있다고 설하지 않는가? 그것은 결정코 성이 없기 때문이다.
040_0591_b_13L此中但離能取所取相彼後識相雖有而非語言表示彼有之性眞實表示如理和合是故此說彼一切識若比量智而非此中和合所成何以故以彼無二之相非有二相領受所行若有二相彼量不成彼二相而爲對礙如執兔角豈非過何以故非能取聲中說有智相彼決定無有性故
040_0591_c_02L그런데 그 식은 외의 청(靑) 등의 여러 상에 있어서 더욱이 대애(對礙)가 있음으로써 그 일다(一多)의 사찰(伺察)을 감임(堪任)하는 성이 있다. 진실의 뜻이 아니며, 더욱이 또한 식은 승의제를 떠나서 객관이 있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그 성 등의 낙취(樂取)는 결정코 지상(智相)의 체성을 갖는 바는 없다. 이것을 주관이라 하고, 이것을 객관이라 하며, 이것을 그 주관의 상은 없다고 설하는 것이다. 체와 업은 서로 낙취의 성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상(智相)이 자수(自受) 중에 주관의 소리를 설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지상은 없다. 서로 낙취하며 자리(自理)를 결정한다. 이와 같이 소생하는 성인 까닭에, 그 이러한 지상은 자수 가운데 올바로 안립하고, 그 설한 바와 같이 주관과 객관의 성을 떠난다. 이것을 설하여 무이, 즉 지상이라 한다. 자수는 현량(現量)을 성취하고, 일체의 진실이 현시, 화합한 것이 아니다. 만약 또 그 결정무분위성(決定無分位性)에 집착하면, 곧 무이의 지상 중에는 어지럽게 움직이게 된다. 종자가 따라서 생기지만 지상은 따르지 않으니, 무이가 나타나 소생한다.
040_0591_b_21L然以彼識於外靑等諸相而有對礙彼一多伺察有堪任性非眞實意而亦非識離勝義諦有所取故彼無性等樂取決定所有智相體性此爲能取此爲所取此說無彼能取之相以體及業互相樂取決定性故非智相自受中說能取聲亦無智相互相樂取決定自理如是如所生性故彼如是智相自受中而正安立如其所說離能取所取之性此說爲無二卽智相自受現量成就非一切眞實顯示和合若復執彼決定無分位性卽無二智相中有所動種子隨生不隨智相無二對現所
만약 무이의 상에 결정코 집착하면, 이 가운데 다시 집착 분별을 이루게 된다. 이것은 지상이 동법(同法) 가운데 더욱 성취를 얻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일체의(一切義) 가운데 훼방이 된다. 세속 및 승의성은 이와 같이 무소유의 뜻을 결정하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 중 뜻을 드러낸다는 것은 불(佛)이 설하신 지와 같으니, 이것이 바로 명(明)이며, 세속은 곧 무명이다. 혹은 명, 혹은 무명의 지가 여실히 별이의 종류인 것을 알면, 또한 생겨나는 바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그것들은 여실부전도(如實不顚倒)의 상이며, 곧 지명상(智明相)으로 대치가 되니, 마땅히 결정을 알아야 한다.
040_0591_c_12L若執決定無二之相此中還成執著分別非此智相同法之中而得成是故所有一切義中而成毀謗知世俗及勝義性決定如是無所有此中顯明義者如佛所說智卽是世俗卽無明若明若無明智如實知別異種類亦無所生是故彼等如實不顚倒相卽智明相而爲對治知決定
040_0592_a_02L만약 그 승의제 가운데 결정코 자성이 없는 것은 허공의 구름과 같으니, 그것은 대치가 아니며 그 모든 이치에 따라 대치한다. 진실의 소행과 상응을 얻는 까닭이다. 열의 자성이 차가운 물건을 대치하는 것과 같다. 이것은 부실의 뜻이며, 무명을 표시하는 것도 그와 같다. 여실의 뜻으로 설하면, 이 무이지(無二智) 자성의 인(因) 가운데는 다수가 있다. 만약 이 가운데 그 세속상을 결정해 유성(有性)을 헤아리는 자는 이것을 설할 수 없고, 그 소행 중에는 2상이 있다. 지는 실로 둘이 아니다.
040_0591_c_20L若彼勝義諦中決定無自性如虛空雲彼非對治以彼所有如理對治眞實所行得相應故如熱自性冷物對治此不實義表示無明亦以如實義說者此無二智自性因中有其多種若此中決定彼世俗相計有性者此不可說於所行中卽有二相智實無二

묻노니 만약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지는 곧 명(明)이며 세속은 곧 무명(無明)이라면, 이와 같은 말은 어찌 이 가운데 자어상위(自語相違)가 아니겠는가?
명의 자성은 세속의 유성과 다른 까닭이다.
040_0592_a_04L若如前言智卽是世俗卽無明者如是所說豈非此中自語相違邪以明自性異世俗有性故
답하노니 명의 무이상이 곧 승의성(勝義性)이다. 이와 같이 설하면 올바른 논리[正理]가 성취한다. 세속 소욕(所欲)의 영수(領受)에 대해서는 고사선인(古師仙人)들도 이 말 가운데 또한 이의(異義)가 있었다. 다른 곳에서 설한 바와 같으므로 여기에서는 다시 인용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송에서 '성과 무성의 차이 등'이라고 말한 것에서 '등'이라고 말한 것은 곧 섭수하여 모은다는 뜻으로, 앞에서 설한 것과 같은 것만은 아니다. 정리는 분별지를 떠나며, 산란을 대치한다.
040_0592_a_07L明之無二相卽是勝義性如是說正理成就若世俗所欲領受古師仙人於此語中亦有異義如餘處說此不復引此中如後正理頌言性無性違等所言者卽攝集義唯如前所說正理離分別智對治散
이 유성과 무성의 차이, 그것 또한 결정코 대치하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모든 갖가지 성 등과 같이, 무성의 자성은 분별지를 떠나는데, 이것이 곧 대치이다. 이 가운데 혹은 성(性), 혹은 상(相)은 지(智)의 힘으로 능히 올바른 뜻을 현시함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또 무엇인가? 승의제 가운데에는 모든 색이 없고, 일성(一性) 등이 생긴다. 만약 또 있는 바가 없으면, 곧 갖가지 성이 실로 나타난다. '실로[定]'라고 말한 이것은 결정코란 뜻이다. 곧 일성의 결정이다. 명력(明力)으로서인 까닭에 이와 같은 말을 한 것이다. 무엇이 이 가운데 그와 같은 설을 짓는 것인가? 그 까닭을 송으로 말한다.
040_0592_a_13L此有性無性相違當知彼亦決定對治謂如所有種種性等無性自性離分別智卽是對治當知此中若性若相由智力能顯示正義彼復云何勝義諦中無有諸色一性等生若復無所有卽種種性定見所言定者是決定義卽一性決定以明力故作如是說云何此中作如是說所以頌言

이 색은 오직 이름뿐이라고 설하니
진실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그 자성을 분별하고
수용하여 곧 마땅히 그쳐야 한다.
040_0592_a_20L說此色唯名
眞實無自性
彼自性分別
容受卽當止
040_0592_b_02L
여기에서 '오직 이름뿐' 등의 말을 한 것은, 이른바 곧 이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세존께서 설하신 이 색은 오직 이름뿐이라는 뜻이다. '오직 이름뿐'이란 곧 유상(唯想)이다. 이러한 까닭에 진실의 승의제 가운데 안립하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색온의 상은 무자성의 공으로, 이른바 이러한 인에 의하는 까닭에 곧 '자성을 분별하고' 여기에서 '수용하는' 것이다. 분별하는 바는 이른바 견(堅)과 강성(强性) 등의 경계(境界)의 자성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 분별의 증상(增相)이 있고, 곧 이와 같은 자성의 분별을 일으킨다. 이와 같이 모든 자성의 분별을 다수 수용하는 까닭에 여기에 모두 그친다. '그친다'는 것은 지견(止遣)이다. 이와 같은 말은 모두 자성분별산란을 그친다는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다 주제 가운데 또 앞에서의 뜻의 과실을 없애고자 하는 까닭에 송을 설하여 말한다.
040_0592_a_22L此言唯名等者謂卽此般若波羅蜜多中世尊所說此色唯名唯名卽唯想是故眞實勝義諦中有所安然色蘊相無自性空謂由如是因卽自性分別於此容受所分別者謂堅强性等境界自性是故有此分別增相乃起如是自性分別如是所有自性分別容受多種故此皆止謂止遣如是等說皆止自性分別散此般若波羅蜜多本母中復爲前義遣除過失故說頌言

색 및 색의 자성이
공인 것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그 자성의 구상(俱相)을
분별하는 것을 여기에서 지견한다.
040_0592_b_10L色及色自性
空如先所說
彼自性俱相
分別此止遣


이 '앞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등의 말에서 '설한다'는 것은, 이른바 언설이니, 앞에 있는 저 말씀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뜻이다. 고로 앞의 송에서 '색 및 색의 자성'이라 말하였다. 이것들이 공인 까닭에, 저기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여 그 자성의 구상분별을 없앤 것이다. 앞에서 '색'이라 말한 것은 곧 이 색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의 2상이다. 이 자상과 공상 및 색의 자성, 이것들은 모두 공(空)이다. 대종(大種) 등의 구상 속에서 분별의 증상을 일으키는데 그 자성이 구상분별을 대치한다.
040_0592_b_12L此言如先說等者謂言說謂卽如先所有彼說何所說邪故上頌言及色自性此中空故彼如是說遣彼自性俱相分別上言卽是色之自共二相此自共相及色自性是等皆空於大種等俱相之中起分別增彼自性俱相分別對治
040_0592_c_02L
묻노니 이것과 앞의 제3의 지견과 구상분별의 내용은 무엇인가?
답하노니 앞에서 설한 구상분별의 산란은 그 가운데 색과 색자성의 둘을 가지는 까닭이다. 이 가운데 구상을 지견하는 것은 단지 그 자상과 공상을 그치게 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그 내용은 무엇인가? 이른바 이 가운데에는 견ㆍ강성 등의 상의 차별이 있다. 이것을 구상이라 말하는데 그런 까닭에 이것을 지견한다. 이것은 단지 지견하는 것만이 아니고, 이와 같이 분별하여 나머지 모든 분별산란을 또한 다시 지견한다. 또 다음 송에서 말한다.
040_0592_b_19L此與前第三止遣俱相分別行相云何前所說俱相分別散亂者彼中色及色自性二俱有故此中止遣俱相者但爲止其自共相故行相云何所謂此中堅强性等相差別而有是謂此中俱相故此止遣此亦非唯止遣如是分別餘諸分別散亂亦復止遣次頌言

불생불멸 등
모든 법을 관하되
불(佛)의 말씀이 흩어져 달라진다면
그것이 차별이며 분별이다.
040_0592_c_04L不生不滅等
所有諸法觀
佛言若散異
彼差別分別

여기에서 '불생' 등이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곧 이와 같이 세존께서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이와 같이 설하셨기 때문이다. 모든 법을 관하는 것이 '불생불멸'이다. 이러한 까닭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만약 '산이'로 안처(安處)가 있으면, 이것은 곧 '차별분별'이다. 만약 색 등을 차별하여 생멸의 상을 보면 이것이 곧 이와 같이 색의 자성을 차별분별하는 것이니, 마땅히 떠나야 한다. 이것이 곧 차별분별산란을 지견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와 같이 설하고, 또다시 후의 모든 산란을 지견하고자 하는 까닭에 송을 설한다.
040_0592_c_06L此言不生等者謂卽如是世尊於般若波羅蜜多中作如是說觀於諸法不生不滅是故如是言若有散異安此卽差別分別若見色等差別生滅之相卽此如是色之自性差別分別此中當離是卽止遣差別分別散此如是說亦復止遣後諸散亂以頌言

헛되고 거짓된 명언(名言) 등은
그 법을 만약 분별하면
소리[聲]와 뜻[義]의 둘이 합해지지 않으면
그것은 자성의 뜻이 아니다.
040_0592_c_14L虛假名言等
彼法若分別
聲義二非合
彼非自性意
040_0593_a_02L
여기에서 '헛되고 거짓된' 등이라는 말은 곧 반야바라밀다 주제의 가르침 가운데 화합을 표시한 것이다. 이른바 헛되고 거짓되다는 이름은 곧 상분별(想分別)의 설로, 후의 반야바라밀다 주제의 가르침에서와 같이 화회별별(和會別別)이다. 이와 같은 법은 분별의 소리이며, 모든 어언법구(語言法句)의 뜻 등 그것은 분별의 구상(俱相)이다. 이러한 까닭에 소리와 뜻의 2종은 자성이 화합한 것이 아니다. 더욱이 세존의 최승의요도 아니며, 또한 다른 의요(義樂)도 아니다. 만약 분별공교(分別工巧)에 있어서 조작(造作)하면, 그는 또 외의(外義)에 취착하는 것이다. 곧 모든 어리석은 자는 어지럽게 움직임에 안립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행은 더욱이 이 가운데 조금이라도 가히 얻는 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외의에 집착함으로써 말의 뜻이 안립하지 않는 까닭에 어리석은 자는 어지럽게 움직임의 문을 연다.
040_0592_c_16L此言虛假等者卽般若波羅蜜多本母教中和合表示謂虛假名卽想分說如後般若波羅蜜多本母教中和會別別如是法此分別之聲所有語言法句義等彼分別俱相是故聲義二種非自性和合而非世尊最勝意樂亦非他意樂若於分別工巧造彼復外義取著卽諸愚者安立動如是所行而非此中有少義可得以外義執著非語義安立開諸愚者動亂之門
이 가운데 이 상을 지견하고 행하는 바에 따른다. 곧 소리와 뜻에 있어서는 조금도 가히 얻는 바가 없다. 그것은 이와 같이 이름에 따라 분별하기 때문에 실(實)이 아닌 까닭이다. 만약 설하는 대상[事相]을 이름과 같이 분별하면, 곧 의요(意樂)가 아니다. 그러한 인에 의하는 까닭에 이 가운데 일체는 이름과 같이 상(想)에 분별ㆍ화합하지만 실이 아니다. 그 설하는 대상이 있는 까닭에 세존의 최승의요가 아니다. 왜냐 하면, 만약 이름과 같이 뜻에 있어서 분별하면 곧 명의(名義)에 있어서 증광하는 바가 있게 되니, 바깥 일[外事] 중에 실로 말하는 주체와 대상의 성이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이름과 같이 뜻에 있어서도 분별산란을 지견한다.
040_0593_a_04L此中止遣是相所行隨轉卽於聲義無少可得以彼如是如名分別不實有故若於所說事相如名分別卽非意樂由彼因故此中一切如名如想分別和合不實有彼所說事相故非世尊最勝意樂何以故如名於義分別卽於名義有所增廣於外事中無實能說所說性故如是止遣如名於義分別散亂

묻노니 무엇이 분별인가?
답하노니 이른바 명분별(名分別)이다. 그 명 또한 설하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040_0593_a_12L何等分別邪謂名分別彼名亦復無有說是故頌言

반야바라밀
불보살도 또한 그러하니
여기서 설하는 것은 오직 이름으로
실의(實義)의 분별을 떠난다.
040_0593_a_14L般若波羅蜜
佛菩薩亦然
此所說唯名
離實義分別

여기에서 '반야바라밀' 등이라 말한 것은 이른바 이름이 뜻을 떠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의 실의(實義)와 자성의 분별을 세존께서 언설하시는 까닭이다. 이 지견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말하기를 "반야바라밀과 불보살도 또한 그러하다"고 한 것인데, 이것은 오직 이름뿐이다. 반야바라밀다 중에 어느 곳에 실로 자성이 있다고 설하는가? 이른바 여래가 이와 같이 말한 것에 연유한다. 이름의 소리를 설하는 것도 또한 무자성이다. 이 가운데 각기 달리 불보살의 이름을 표시한다. 무이지 가운데 있어 이것을 지견하는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은 또 어떠한 원인인가?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040_0593_a_16L此言般若波羅蜜等者謂名離於義如是名之實義自性分別世尊說言故此止遣何所說邪是故頌言般若波羅蜜佛菩薩亦然此旣唯名般若波羅蜜多中何處容說有實自性由如來如是言故說名之聲亦無自此中所有各別表示佛菩薩名知於無二智中非此止遣此復何因是故頌言
040_0593_b_02L
모든 소리와 뜻을 그치니
이는 지견하는 일이 아니며
이와 같이 나머지 일도 알아서
말 가운데 뜻을 결정한다.
040_0593_b_02L所有聲義止
此非事止遣
如是餘亦知
語中義決定

여기에서 '있는 바' 등이라 말한 것은, 이른바 있는 바의 소리와 뜻의 2종이다. 여기에 지견을 설한다. 송에서 '이것을 지견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무이지는 이 가운데 대상[事相]의 작용을 그치는 것이 아니고 더욱이 그 무언(無言)의 성은 가히 설할 수 없는 까닭이다.
040_0593_b_04L此言所有等者謂卽所有聲義二種此說止遣頌言此非事止遣謂無二智不止此中事相作用然彼無言之性不可說故

묻노니 지금 설하는 바의 뜻, 이것이 올바른 논리[正理]라고 한다면 나머지 것은 무엇인가?
송에서 답하기를 '이와 같이 나머지 일도 안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란 곧 이와 같이 처음부터 설한 이 뜻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나머지'란 나머지 종류의 말에서도 또한 그러함을 완전히 아는 것이다. 이른바 이 뜻을 완전히 알고 결정하는 것이다. 이 뜻을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여실히 널리 설하며, 부전도의(不顚倒義)를 성취하는 것이다. 진실로 일체의 명성(名性)이란 실로 가히 얻을 수 없음을 완전히 알아야 한다. 이 뜻으로 시설하여 밝힌 것이다. 또 다음 송에서 말한다.
040_0593_b_08L今所說義是爲正餘處云何頌自荅言如是餘亦知如是謂卽如是從初所說是義決謂所餘種類語中亦然了知謂了知此義決定此中意者謂於般若波羅蜜多中如實宣說不顚倒義成就眞實了知一切名性正不可得以此語義施設表示復次頌言

이것이 무소득인 것은 옳으니
일체의 이름을 진실로 알고
뜻과 같이[如義] 성(性)은 이와 같이
그 소리를 지견하지 않는다.
040_0593_b_15L此無所得正
一切名實知
如義性如是
不止遣彼聲

여기에서 '이것이 무소득인 것' 등으로 말한 것은, 이른바 뜻 그대로[如義]의 성을 말한다. 그것은 있는 바가 없고, 불가득인 까닭이다. 이것을 설하여 '옳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설한 것인가? 송에서 스스로 가리켜 '일체의 이름'이라 말했다.
040_0593_b_17L此言此無所得等者謂如義之性無所有不可得故此說爲正此何所說邪頌自指言一切名
040_0593_c_02L
묻노니 누가 능히 실로 아는가?
답하노니 곧 일체지이다. '실로'란 부전도(不顚倒)의 뜻이다. '안다'란 완전히 아는 것을 말한다. 곧 진실로 아는 까닭이다. 송에서 '그 소리를 지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른바 만약 소리와 뜻의 2종이라면, 그 실의의 성질은 설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 소리를 지견하지 않는다. 이른바 문지(聞智)로 취하는 소리를 가지고서는 가히 지견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결정최승의 의요인 동정어린 행위는 남김없이 장애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뜻의 이름에 있어서 분별산란을 지견한다. 이와 같은 뜻은 진실의요를 설한 순서와 같다. 어느 논의 송에서 말한다.
040_0593_b_20L何人能實卽一切智者不顚倒義了知卽眞實知故頌言不止遣彼聲謂若聲義二種彼實義性說不可以是因故不止彼聲謂以聞智所取之聲不可止故如是當知決定最勝意樂悲愍所行悉無鄣礙如是止遣如義於名分別散亂如是等義眞實意樂說已如順有論頌言

있는 바 일체의 이름에는
각기 그 제법을 설한 것이 있으나
그러나 그 설한 바는 실제 있는 것이 아니라
곧 일체법은 동법성(同法性)이다.
040_0593_c_05L所有所有一切名
彼彼諸法有所說
而彼所說非實有
卽一切法同法性

있는 바 그 이름의 성질은 공(空)이며
이름 불려지는 주체[能名]의 이름은 없으니
그러므로 일체법에는 본래 이름이 없으며
이름을 강제로 세워 표시한다.
040_0593_c_07L所有彼名名性空
能名之名無所有
而一切法本無名
立以强名而表示

일체는 오직 이름뿐임을 알아야 하니
일체는 상(想) 중에 거짓 안립한 것이며
그 차별하여 부르는 이름의 대상[所聚]에
그 이름이 없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040_0593_c_09L一切唯名此當知
一切想中假安立
彼所聚名差別性
當知彼名無所有

존자 수보리가 물은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소리와 뜻의 둘을 어떻게 결정하고 지견하는가? 그러므로 송에서 주석하여 말한다.
040_0593_c_11L如尊者須菩提所問般若波羅蜜多決定止遣聲義二邪故頌釋言

수보리여, 두 가지를 떠나야 하니
소리와 소리의 뜻이 그것이며
보살에게는 이름이 없으니
나는 이것을 보아 설하는 것이다.
040_0593_c_13L須菩提二離
聲聲義如是
菩薩無有名
我見此有說

여기에서 '수보리' 등이라 말한 것은, 이른바 수보리는 소리와 뜻의 두 종류가 그 안립을 떠나는 것을 완전히 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소리란 말하는 자의 소리이며, 소리의 뜻이란 말해진 것에 나타나는 뜻이다. '보살에게는 이름이 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보살이란 이름이 있지 않고, 가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반야바라밀다 중에 있어서 곧 설한 바가 있었다. 이 뜻은 두 종류의 분별성을 결정하는 최승의요 가운데 헛되거나 거짓된 소리나 별도의 다른 성을 멀리 떠나는 것이다. 이 가운데 결정의 말은 앞의 뜻을 나타낸다. 이러한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040_0593_c_15L此言須菩提等者謂須菩提了知聲義二種離其安立此中意者聲謂說者之聲聲義謂所說之義云何菩薩無有名以菩薩名無所有不可見故須菩提於般若波羅蜜多中乃有所此中意者決定二種分別性最勝意樂中遠離虛假聲別異之性此中決定語言向義表示是故頌言

반야바라밀은
말의 무결정(無決定)에서 생기니
살펴 헤아리는 것은 오직 지자(智者)이며
이 뜻은 미묘한 지혜[微妙慧]이다.
040_0593_c_23L般若波羅蜜
語無決定生
伺察唯智者
此義微妙慧
040_0594_a_02L
이 '반야바라밀' 등이라고 말한 것에서, '무(無)'란 무소유이다. 곧 반야바라밀다 중에는 화합하여 말이 결정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설한 바도 없고, 희론(戱論)도 없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일체의 말과 글로써 설한 바가 앞의 뜻을 결정한다. 이 앞의 뜻이란 무엇인가?
040_0594_a_02L此言般若波羅蜜等者無謂無所有卽般若波羅蜜多中彼和合語決定無所有無所說無戲論如是應知一切語言中所說決定向義云何是向
이른바 곧 앞에서 설한 바와 같은 뜻이다. 그것이 해석문(解釋門)이다. 송에서 “살펴서 헤아리는 것은 오직 지자이며, 이 뜻은 미묘한 지혜이다”라고 말한 것에서, '살펴서 헤아린다'는 것은 세밀하게 헤아리며 주의 깊게 살피는 것이다. '이 뜻'이란 곧 32품의 모든 소리 가운데 총체적으로 결정하여 설한 것이다. 송에서 '지자'라고 한 것은 곧 지자의 지혜[智]이니, 능히 그 뜻을 알 수 있다. '미묘혜'란 필경미묘청정의 지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이른바 곧 이 지는 일체경계 중에 있어서 붙지도 않으며 부서지지도 않는다. 더욱이 반야바라밀다는 그 소리 가운데에 들리는 바가 있는 까닭에,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해 그 까닭에 송에서 말한다.
040_0594_a_07L謂卽如前如所說義彼解釋門伺察唯智者此義微妙慧伺察謂細伺審察此義卽三十二品諸有聲中摠說決定頌言智者卽智者之智能知語義微妙慧卽畢竟微妙淸淨之智行相云何謂卽此智於一切境界中無著無壞而般若波羅蜜多於響聲中有所聞故爲表示此義所以頌言

만약 별도의 뜻을 분별하면
이어지는 뜻을 제거하여 버리게 되어
반야바라밀
그 언설은 메아리와 같으리라.
040_0594_a_15L若別義分別
相續義除遣
般若波羅蜜
彼言說如響
040_0594_b_02L
여기에서 '상속의 뜻'이라 말한 것은 이른바 가거나 혹은 나타나거나 상속, 조작한다는 뜻이다. '제거하여 버린다'는 것은 던져버린다[棄捨]는 뜻이다. 이른바 이와 같은 뜻에 있어서 집착을 버린다는 것이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다로서 혹은 보거나 혹은 듣거나 그 설하는 바가 있는 것은 모두 소리와 같기 때문이다. 또 금빛이 색상에 대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이러한 뜻인 까닭에 가거나 혹은 나타나거나 상속 조작하여 분별하는 바가 있고 집착하는 바가 있으니, 모두 마땅히 버려야 한다. 이 반야바라밀다 중에 일체 설해진 것은 모두 소리와 같다. 이것이 뜻의 총략(總略)이다. 다시 또 이 뜻을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어느 송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040_0594_a_17L此言相續義謂若往若現相續造作之義除遣棄捨義謂於如是義棄捨執著何以故以般若波羅蜜多若見若聞彼有所說皆如響聲又如金光對現色相以是義故若往若現相續造作有所分別有所執著皆應棄捨由此般若波羅蜜多中一切所說皆如響聲是義摠略復次爲欲顯明斯義如有頌云

모든 여러 가르침을 버려서는 안 되며
또 마땅히 훼방을 일으켜서도 안 되니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에 머물며
그 진실을 더욱이 밝혀 설해야 한다.
040_0594_b_03L所有諸教勿厭捨
亦復不應生毀謗
見如實已住眞實
以彼眞實而表說

지금 이 뜻 가운데 총략을 나타내어 송으로 말한다.
040_0594_b_05L今此義中摠略所成表示頌言

총괄과 생략[摠略]의 이와 같은 뜻은
반야 등에 의지하니
이와 같은 뜻은 순환하면서
또 다른 뜻에 의지한다.
040_0594_b_06L摠略如是義
般若等依止
如是義循環
復別義依止

여기에서 '총괄과 생략의 이와 같은 뜻' 등의 말은 『십만송반야바라밀다』의 총괄과 생략이 모두 이와 같다는 뜻이다. 모두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고 상속하여 32품에 총략이 포섭되는 까닭이다. 이와 같이 마땅히 알아야 한다. 후에 증광하는 것은 없다. 송에서 '이와 같은 뜻은 순환하여'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이와 같은 뜻에 있어서 한결같이 중복ㆍ순환ㆍ연핵(硏覈:실상을 조사하여 자세하게 밝힘)하는 것이다.
040_0594_b_08L此言摠略如是等所有十萬頌般若波羅蜜多摠略一切如是等義依止此般若波羅蜜多相續三十二品摠略攝故如是當知後無增廣如是義循環謂於如是義一向重復循環硏覈

묻노니 어떠한 뜻을 연핵하는 것인가?
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다른 뜻에 의지한다'고 말하였다. 이 '다른 뜻'이란 말은 곧 별의(別義)를 물어 논란하는 것이고 묻는다는 것은 분별, 차별하여 묻는 것이다. 논란이란 의거하는 바가 있는 것이니, 이른바 보리분법(菩提分法)이나 불(佛)의 공덕온(功德蘊) 등의 법에서 이와 같이 중복ㆍ순환ㆍ연핵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면, 총략이라 한 것의 별의는 근거를 갖는 까닭이다. 곧 32품이 각각 별도로 자성에 포섭되어 순환한다. 지금 이 『팔천송반야바라밀다』의 일체 문의(文義)를 남김없이 주석하여 생기는 복취(福聚)는 필경 광대하며, 그것을 모두 다 회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송에서 설하여 말한다.
040_0594_b_14L硏覈何等義邪自荅言別義依止此中所說別義之卽問難別義問謂分別差別問難有所依據謂菩提分法佛功德蘊此法中如是重復循環硏覈若如是摠略所說所成別義有依據故卽三十二品各別自性收攝循環今此所釋八千頌般若波羅蜜多一切文義普盡所釋所生福聚畢竟廣大悉用迴向故頌說言

반야바라밀은
실로 8천 송에 포섭되며
그 얻어지는 복온(福蘊)은
모두 반야로부터 생긴다.
040_0594_b_23L般若波羅蜜
正攝八千頌
彼所得福蘊
皆從般若生
040_0594_c_02L
여기에서 '반야바라밀은 실로 8천 송에 포섭되며'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이 『팔천송반야바라밀다』 중에서 설해진 자성이다. '8천'이란 수량을 두루 포섭하는 것이다. 이 수량 가운데 뜻을 모두 모아 이미 주석했다. 송에서 '실로'라고 말한 것은 전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올바른 가르침 가운데 무엇이 생기는 것인가? 송에서 스스로 답하기를 '그 얻어지는 복온'이라 했다. '얻어진다'는 것은 획득의 의미이다.
040_0594_c_02L此言般若波羅蜜正攝八千頌此八千頌般若波羅蜜多中所說自八千此之數量普攝如是數量中義摠聚已釋頌言不顚倒義彼正教中何所生邪頌自荅言彼所得福蘊者獲義
이와 같이 청정으로 이루어진 복취는 모두 반야바라밀다로부터 출생한다. 반야바라밀다로부터 출생하는 까닭에 얻어지는 복취는 깊고 광대하다. 이 깊고 광대한 복취로서 두루 일체세간에 회향하여 남김없이 모두 반야바라밀다의 필경의 승묘청정한 지혜를 얻게 하며, 이 무허망(無虛妄)ㆍ승제일의(勝第一義)ㆍ제정구(諸正句) 가운데 이치에 맞게 살펴서 헤아린다. 내가 짓는 주석이나 생기는 복취, 지금 여기에서 뜻을 설하는 것은 일체세간이 두루 남김 없이 청정을 얻게끔 하기 위함이다. 송에서 말한다.
040_0594_c_08L如是淸淨所成福皆從般若波羅蜜多出生以般若波羅蜜多出生故所得福聚甚深廣以是所得深廣福聚普用迴向一切世閒悉令獲得般若波羅蜜多畢竟勝妙淸淨之智於是無虛妄勝第一義諸正句中如理伺察我此所造解釋之文所生福聚今此說意者令一切世閒悉得淸淨頌曰

석가사자(釋迦師子)와 모든 비구는
모두 이와 같이 복이 높고 뛰어나니
여기서 설한 바의 뜻은 세간을 이롭게 하며
뛰어난 복(福)인 까닭에 진실에 머물게 한다.
040_0594_c_16L釋迦師子諸苾芻
所有如是福高勝
此所說意利世閒
由勝福故住眞實
佛母般若波羅蜜多圓集要義釋論
卷第四
甲辰歲高麗國大藏都監奉勅彫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