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宗鏡錄卷第九十七 茂

ABC_IT_K1499_T_097
044_0519_a_01L종경록 제97권


연수 지음
송성수 번역


부처님의 교법은 이미 분명해졌으므로 조사의 뜻을 진술해야겠다. 불승(佛乘)을 통달한 이는 모두가 분명한 이치[了義]와 상응할 것이니, 마치 법화경(法華經)에 이르되, 이런 사람은 생각하고 헤아리고 말하는 바가 있으면 모두가 이는 불법이라 진실하지 아니함이 없다”고 함과 같다. 역시 이것은 먼저의 불경 가운데서 설명한 바다.
제1 비바시불(毘婆尸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몸은 모양이 없는 것 에서 받아 난지라
마치 요술에서 모든 형상 나옴과 같나니
요술로 된 사람의 심식(心識)은 본래가 없으므로
죄와 복은 다 ≺공≻하여 머무는 데가 없네.

제2 시기불(尸棄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모든 선법(善法)을 일으켜도 본래가 환상이요
모든 악업(惡業) 지어도 역시 환상이며
몸은 무더기 거품이요 마음은 바람 같나니
환상에서 나온 근본 없는 것이라 진실한 성품도 없네.

제3 비사부불(毘舍浮佛)의 게송은 다음과 같다.

4대(大)를 빌려서 몸을 삼았고
마음은 본래 생김 없고 대경으로 인해 있는 것
앞의 대경 없으면 마음 또한 없나니
죄와 복은 환상 같아 일어나다 소멸하네.

제4 구류손불(拘留孫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몸에 진실 없다고 봄이 부처님의 보심이요
마음이 환상 같다고 앎이 부처님의 앎이니
몸과 마음의 본래 성품이 ≺공≻한 줄 알게 되면
이 사람은 부처님과 무엇이 다르랴.

제5 구나함모니불(拘那含牟尼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부처님은 몸을 보지 않고 부처인 줄만 아나니
만일 실로 앎이 있으면 따로 부처는 없다
지혜로운 이 죄의 성품이 ≺공≻한 줄 능히 알고
탄연(坦然)하여 생사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6 가섭불(迦葉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모든 중생의 성품이 청정하여서
본래부터 생김 없고 소멸할 것 없나니
곧 이 몸과 마음은 환상으로 생긴 것
허깨비 가운데엔 죄와 복이 없네.

제7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의 게송에서 말했다.

허깨비는 원인 없고 또한 생김 없으며
모두가 곧 자연인데 이렇게 보이나니
모든 법은 모두가 허깨비로 생긴 것
허깨비라 생김 없고 두려워할 것 없네.

다시 마하가섭(摩訶迦葉)에게 말씀하기를 “나에게 있는 청정한 법 눈과 열반의 묘한 마음이며 참 모습과 모양이 없는 미묘한 바른 법을 너에게 부촉(付囑)하노니, 끊어짐이 없게 하라. 그리고, 다음과 같은 나의 게송을 들으라고 했다.

법은 본래 법이라는 법이 없으며
법이 없는 법 역시 법인 것이니
이제 없는 법을 부촉할 때에
법과 법이 어찌 일찍이 법이랴.

서천(西天)의 제1 조(祖) 마하가섭이 법을 전한 게송에서 말했다.

법과 법은 본래가 없는 것이요
없는 법도 법이 아님이 없나니
어찌 하나의 법 가운데서
법이 있고 법이 되지 않음이 있으랴.

제2조 아난(阿難)이 법을 전한 게송은 다음과 같다.

본래는 있는 법을 부촉하고서
부촉하고 나서는 없는 법이라 하나니
저마다 스스로가 깨쳐야 하고
깨치고 나면 없는 법도 없는 것이다.

제3조 상나화수(商那和修)가 법을 전한 게송에서 말했다.

법도 아니고 마음도 아니어서
마음도 없고 법도 없나니
이 마음과 법을 말할 때
이 법은 마음과 법이 아니다.

제4조 우바국다 존자(優波毱多尊者)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은 스스로 본래의 마음이요
본래의 마음에는 법이 있는 것 아니니
법이 있고 본래의 마음이 있다면
마음도 아니고 본래의 법도 아니다.

제5조 제다가(提多迦)는 향중(香衆)이라고도 이름하였는데, 처음 우바국다에게로 가서 출가할 적에 존자는 물었다. “마음을 위해 출가하는 것이냐, 몸을 위해 출가하는 것이냐.” 향중이 말했다. “≺나≻가 와서 출가하는 것이요 몸과 마음을 위해서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자께서 말씀하시되, “몸과 마음을 위하지 않는다면 다시 누가 출가하는 것이냐.” 향중이 말하되 “무릇 출가란 ≺나≻가 없기 때문이요 ≺나≻가 없기 때문에 곧 마음은 생멸하지 아니하며 마음이 생멸하지 아니하면 곧 항상하고 이미 항상하기 때문에 부처 또한 항상하나니, 마음에는 형상이 없고 그 본체 또한 그러합니다.
존자는 말했다. “너는 마음을 크게 깨쳐 스스로 밝아지면 불법에 의지하여 그 가운데서 항하 모래만큼 많은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본래의 법인 마음을 통달하면
법도 없고 법이 아님이 없나니
깨치고 나면 깨치지 못한 것과 똑같아서
마음도 없고 법도 없게 된다.
제6조 미차가(彌遮迦)가 법을 부촉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마음이 없고 얻을 것도 없으며
얻는다 말하여도 법이라 하지 않나니
만일 마음이 마음이 아님을 알면
비로소 마음과 마음의 법을 알리라.

제7조 바수밀(婆須密)이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은 허공의지경과 같고
허공만큼의 법을 보이는 것이니
허공임을 증득하게 되는 때에는
옳음도 없고 그른 법도 없네.

제8조 불타난제(佛陁難提)가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허공에는 안과 바깥이 없으며
마음의 법 또한 그와 같나니
만일 허공을 분명히 알면
바로 진여의 이치를 통달하리라.

제9조 복타밀다(伏馱密多)존자가 다음과 같이 불타난제 존자에게 게송으로 물었다.

부모는 나와 친한 이가 아니며
누가 가장 친한 이가 됩니까
모든 부처님은 나의 도가 아니며
무엇이 으뜸가는 도가 됩니까.

게송으로 대답했다.

너의 말은 마음과 친하는지라
부모로서는 비할 것 아니며
너의 행(行)은 도와 계합되는데
부처님들 마음이 바로 그것이다.

바깥에서 구하는 것 모양 있는 부처라
너와는 서로가 비슷하지 않나니
너의 본래 마음 알고자 하면
합한 것도 아니고 어려운 것도 아니다.

이로 인하여 도를 깨쳤다.
법을 부촉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진리에는 본래 이름이 없되
이름으로 인하여 진리가 드러나고
진실한 법을 받고 얻게 되면
참됨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제10조 협(脇)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된 체성은 저절로 진실하며
진실로 인하여 도리 있다 말하나니
진실한 법을 알아 얻으면
가는 것도 없고 그치는 것도 없다.

제11조 부나야사(富那夜奢)는, 어느 때 협존자가 어떤 나무 아래서 손으로 나무 아래의 땅을 가리키면서 대중들에게 말했다. “이 땅이 만일 변하여 금빛이 되면 당연히 성인이 있어서 이 모임에 들어올 것이다”고 했는데, 말하고 얼마되지 않아서 잠깐만에 금빛으로 되었으므로, 존자는 손을 들면서 모임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야사가 말했다. “나의 마음은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에 머물러 있었던가.” “나의 마음은 그친 것이 아닙니다.” “그대는 일정하지 아니한가.” “모든 부처님 역시 그러합니다.” “그대는 모든 부처님이 아니니라.” “모든 부처님 역시 아닙니다”고 했다.
그때, 야사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찬탄하였다.

스님께선 금빛의 땅에 앉으셔서
언제나 진실한 이치 말씀하셨으며
광명을 돌이켜서 저를 비추어
3마지(摩地)에 들게 하셨나이다.

또 법을 전한 게송에서 말했다.

미혹[迷]ㆍ깨침[悟]은 마치 숨음과 드러남 같고
밝음ㆍ어둠은 서로 여의지 아니한다
이제 숨음과 드러남의 법을 부촉하노니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제12조 마명(馬鳴)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숨음ㆍ드러남이 곧 본래의 법이요
밝음ㆍ어둠은 원래 둘이 아니다
이제 깨쳐 마친 법을 부촉하노니
취할 것도 아니고 버릴 것도 아니니라.

제13조 비라(毘羅)존자도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숨은 법도 아니고 드러난 법도 아닌 것
이것을 참된 실제(實際)라 하나니
이 숨음ㆍ드러남의 법을 깨치면
어리석은 것도 아니고 지혜로운 것도 아니다.

제14조 용수(龍樹)존자가 교화를 위해 남인도(南印度)에 갔더니, 그 나라 사람들은 대개가 복업을 닦으면서 부처의 도리는 알지 못했고 조그마한 변론(辯論)만을 행하면서 큰 지혜는 갖추지 못했었는데, 그들은 불성(佛性)에 대해서 물었다.
‘보시로 우리들은 복업을 구하는 것이요 불성을 아는 것이 아니니, 당신이 불성을 아신다면 우리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했으므로, 스님은 말했다. “그대들이 도를 배우고자 하면 먼저 아만(我慢)을 없애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어야 불성을 얻느니라.”
대중들이 말하였다. “불성은 큽니까, 작습니까.” “그대들이 알 바도 아니며, 크고 작은 것으로 말할 것도 아닙니다. 만일 크거나 작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곧 크고 작은 것이요 불성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조그마한 변론을 버리고 큰 바다로 돌아가고 싶습니다”고 하자, 용수는 곧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대중들에게 기이한 모습을 나타내며 몸을 달과 같이 하였으므로 자리 위에서는 설법하는 소리만 들릴 뿐 그 형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 대중 속에 제바(提婆)라고 하는 장자가 있다가 대중들에게 말하였다. “이 상서를 아십니까.” 그 대중들은 말하였다. “큰 성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고 했다.
그때, 제바의 마음 근본은 일찍부터 청정했으므로 역시 그 모양을 보고서 잠자코 계합되었는지라, 대중에게 말하였다. “스님께서 불성의 이치를 나타낸 것이요 스님의 몸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양 없는 삼매[無相三昧]는 형상이 마치 만월(滿月)과 같은 것이어서 불성의 이치입니다”고 했다.
말을 마치자마자, 스님은 본래의 몸을 자리 위에 나타내면서 게송으로 말했다.
몸으로 만월의 형상을 나타내서
부처님들 체성을 표시한 것이니
법을 설하면서 그 형상이 없었음은
변론으로써 함이요 소리와 빛깔은 아니니라.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숨음ㆍ드러남의 법을 밝히기 위해
바야흐로 해탈의 도리를 설했나니
법에서는 마음이 증득되지 않는지라
성냄도 없고 기쁨도 없느니라.

다음은 제15조 가나제바(迦那提)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이다.

본래 법을 전할 사람에 대하여
그를 위해 해탈의 도리 설한 것이니
법에서는 실로 증득함이 없는지라
마지막도 없고 시작도 없느니라.

제16조 나후라(羅睺羅)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법에서는 실로 증득함이 없는지라
취하지도 아니하고
여의지도 않나니
법은 있고 없는 모양이 아니거늘
안과 바깥이 어떻게 일어나랴.

제17조 승가난제(僧迦難提)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 자리는 본래 생김이 없어
종자로 인하여 연(緣)을 좇아 일어난다
연ㆍ종자는 서로가 방해하지 않으며
꽃과 열매 또한 다시 그러하니라.

제18조 가야사다(伽倻舍多)는, 처음에 제17조 승가난제가 그의 집에 갔더니 갑자기 한 아들이 손에 구리 거울을 가지고서 스님에게 온 것을 보고, 존자는 물었다.
“너는 잘 모르는구나. 아주 어린아이로 보이는데 ‘나는 백 살이오’ 하고 대답하니, 그것은 도리가 아니로다.” 그 아들이 대답했다. “나는 도리를 알지는 못하며, 꼭 백 살입니다.” “너는 좋은 근기로다.” “부처님의 게송에서 이르되

만일 사람이 백 살을 살면서
부처님들 근기를 알지 못하면
설령 하루를 살면서도
결단하여 알게 됨만 못하느니라

고 했습니다”고 했다.
이때, 존자는 공경하면서 이는 성인인 줄 깊이 알고서는 또 물었다. “네가 가진 이 거울은 무엇을 비유하고 있느냐.” 하자, 그때에 동자는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모든 부처님의 크고 둥근 거울은
안팎에 흠이나 흐림이 없으므로
두 사람이 똑같이 볼 수가 있으며
마음과 눈이 모두 비슷합니다.

부모는 그 아들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마침내 출가를 허락했으므로, 존자는 거느리고 유람하며 교화하다가 어떤 옛 절에 가서 계(戒)를 받게 하고 이름을 가야사다라고 지었다.
그 불전 위에 달린 구리 방울이 바람에 흔들려 소리가 났으므로 존자는 물었다. “저것은 바람이 우느냐, 방울이 우느냐, 구리가 우느냐.” 그는 대답했다. ‘저의 마음이 울 뿐이요 바람이나 구리나 방울에서가 아닙니다.” “바람이나 구리나 방울이 아니고 나의 마음이란 그 누구인고.” “두 가지 모두가 고요하나 3매야(昧耶)는 아닙니다.” “장하도다. 참된 비구여, 모든 부처님의 이치를 잘도 알았구나. 모든 법의 요의(要義)를 잘도 말하도다. 진실한 이치를 잘도 알았도다”고 했다.
또 말했다. “내 이제 이 법안장(法眼藏)을 너에게 부촉하노니, 너는 나의 게송을 받고 교화해야 하느니라”고 하고, 게송으로 말했다.

마음 자리는 본래 생김이 없어
종자로 인하여 연을 좇아 일어난다
연ㆍ종자는 서로가 방해하지 않으며
꽃과 열매 또한 다시 그러하니라.

가야사다는 구마라다(鳩摩羅多)에게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자가 있고 마음 자리 있어서
인(因)과 연(緣)이 능히 싹을 내나니
연에서는 서로가 장애하지 아니하여
생겨야 하면 생기고 생기지 아니한다.

제19조 구마라다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성품 위에선 본래 생김이 없지만
대경 위해 사람의 설명을 구하나니
법에서는 이미 얻음이 없거늘
어찌하여 결단과 결단하지 않음을 품으랴.

제20조 사야다(闍夜多)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은 다음과 같다.

말끝에서 생김이 없음에 계합되면
법계의 성품과 같아지나니
만일 이렇게 이해할 수 있으면
현상[事]과 본체[理]를 통달하여 마친다.

제21조 바수반두(婆修槃頭)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거품ㆍ환상은 같아서 장애가 없거늘
어떻게 깨쳐서 알지 않으랴
법을 통달하면 그 안에 있어서
지금도 아니고 옛도 아니니라.

제22조 마나라(摩挐羅)가 학륵(鶴勒)존자에게 법을 전하는 게송을 부촉한 뒤에, 곧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18변(變)을 짓고 나서 도로 본래 자리로 돌아와 손으로 땅을 가리키면서 변화로 하나의 샘이 되게 하고는 게송으로 말했다.

마음 자리는 청정한 샘이며
용은 온갖 것을 적셔주나니
땅으로부터 솟아 나와서는
10방(方)에 두루 차며 구제하느니라.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은 온갖 경계 따라 굴리고
굴리는 곳 실로 그윽하나니
흐름을 따르면서 성품임을 인정하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느니라.

제23조 학륵존자가 법을 부촉하고 나서, 곧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솟구쳐 허공에서 18변을 지은 뒤에 도로 본래 자리로 돌아와서 고요히 멸도(滅度)하였다. 그러므로 그때의 대중들은 사리를 나누어 저마다 탑을 세우려고 화장을 한 뒤에 사리를 나누려 하자, 그때에 존자는 몸을 나타내면서 게송으로 설했다.

하나의 법이 온갖 법이요
온갖 법은 하나의 법으로 포섭하는 것
나의 몸은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온갖 탑에 다 나누랴.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 말했다.

심성임을 인정하게 되는 때에는
불가사의라고 말할 수 있나니
또렷또렷하면서도 얻는 바가 없고
얻는 때엔 안다고 말하지 않느니라.

제24조 사자(師子)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지견(知見)이라고 바로 말을 할 적에
지견은 모두가 마음이니
그 마음이 곧 지견인 것이요
지견이 곧 지금까지니라.
제25조 바사다(婆舍多)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성인은 지견을 말하였지만
경계에 당하면 이것 아님이 없다
나는 이제 참된 성품을 깨친지라
도(道)도 없고 또한 진리도 없다.

제26조 불여밀다(不如密多)존자의 법을 전하는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 성품은 마음 자리에 간직해 있되
머리도 없고 또한 꼬리도 없나니
인연에 응(應)하면서 중생을 교화하되
방편을 지혜라 부르느니라.

제27조 반야다라(般若多羅)존자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 자리는 모든 종자를 내되
현상[事]으로 인하고 또 본체[理]로 인하나니
결과 차면 보리가 원만하여져서
꽃이 피고 세계가 생기느니라.

서천(西天)의 바라제(波羅提)존자는 이견왕(異見王)을 교화하기 위해 신통력을 나타내어 구름을 타고 그 왕의 궁전 앞에 가 닿자, 그때 대왕은 구름을 탄 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삿된 것을 위해서입니까, 바른 일을 위해서입니까.” 바라제존자가 대답했다. “나는 삿되거나 바른 것이 아니면서 바르고 삿된 일에 왔습니다. 대왕이 만일 바르다면 나는 삿되거나 바름이 없습니다.”
왕이 또 물었다. “어떤 이가 부처님입니까.” 바라제가 대답했다. “성품을 보면 바로 부처님입니다.” “스님은 성품을 보셨습니까.” “나는 불성을 보았습니다.” “성품은 어디에 있습니까.” “성품은 작용함에 있습니다.” “이 무슨 작용이기에 지금은 보이지 않습니까.” ‘지금에도 작용을 나타내건마는 왕 자신이 알지 못합니다.“ ”스님은 이미 보신 것이라 작용이 있다 하시지만 나의 처소에서도 작용하고 있습니까.“ ”왕이 만일 작용한다면 눈앞의 것이 모두가 그것이지만 왕이 만일 작용하지 않으시면 그 본체도 보기 어렵습니다.“ 왕이 가로되 ”만일 작용하게 되면 몇 군데서 출현하는 것입니까.“ 스님이 말씀하시되 ”만일 작용이 출현된 때는 그 여덟 군데가 있습니다.”고 하고, 구름 끝에 우뚝 서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태(胎) 안에 있을 때는 몸이라 하고
세간에 있을 때는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을 때는 본다고 하고
귀에 있을 때는 듣는다고 한다.

코에 있을 때는 냄새를 알고
입에 있을 때는 말을 하며
손에 있을 때는 붙잡게 되고
다리에 있을 때는 걸으며 달린다.

두루 나타나면 다 함께 법계를 감싸고
거두어들이면 작은 티끌에서도 벗어나지 못하나니
아는 이는 불성임을 알되
모르는 이는 정혼(精魂)이라고 부른다

이 땅의 초조(初祖) 보리달마다라(菩提達磨多羅)는 남천축국(南天竺國)왕의 셋째 아들로서, 항상 진리를 논의하기를 좋아했고 마음으로는 중생을 생각하면서도 부처는 알지 못했다.
또 스스로 탄식하기를, “세간에는 형체가 있는 법이어서 알기가 쉽지만 부처와 마음의 법만은 알기가 어려운 것이구나”고 했다.
그때, 반야다라존자가 그의 나라에 이르렀더니 왕은 하나의 보배 구슬을 주었는데 그 구슬 광명이 찬란하게 빛나서 아주 아름다웠다.
존자는 보고 나서 그 구슬로써 시험하며 물었다. “이 보배 구슬은 큰 광명이 있어 물건을 능히 비추는데 다시 이 보다도 더 훌륭한 좋은 구슬이 있을까.”
보리다라는 말하였다. “그것은 세간의 보배라 아직 으뜸가는 것이 못되며 모든 빛 중에서는 지혜의 빛이 으뜸이 됩니다. 그것은 세간의 밝음이라 아직 으뜸가는 것이 못되며 모든 밝음 중에서는 마음의 밝음이 첫째입니다.
그 구슬에 있는 광명은 스스로를 비출 수가 없고 반드시 지혜 광명을 빌려서 지혜가 그것을 가려야 하며 그것을 가리고 나면 곧 그것이 구슬임을 알게 되고 그것이 구슬임을 알게 되면 곧 그것이 보배임이 밝혀집니다.
만일 그것이 보배임이 밝혀지면 보배는 스스로 보배가 되지 못하고, 만일 그것이 구슬임이 가려지면 구슬은 스스로 구슬이 되지 못합니다. 구슬이 스스로 구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지혜 구슬을 빌려서 세간의 구슬임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요, 보배가 스스로 보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반드시 법의 보배를 빌려서 세속의 보배임을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그 도(道)가 있으므로 그 보배가 이미 나타났으며, 중생에게도 도가 있는지라 마음의 보배 또한 그러합니다”고 했다.
존자는 기특하게 여겼고 그로 인하여 출가하여 도를 깨쳤으며 마침내는 교화를 위해 이 땅으로 왔었는데, 보지(寶誌)는 그가 부처의 심인(心印)을 전하기 위한 관음(觀音) 성인임을 알고 있었다.
스님은 안심(安心) 법문에서 이르되, “미혹했을 때는 사람이 법을 따르고 알았을 때는 법이 사람을 따르나니, 알면 의식[識]이 물질[色]을 포섭하되 헷갈리면 물질이 의식을 포섭한다. 다만 마음에 분별과 계교와 현량(現量)이 있는 것은 모두가 다 꿈일 뿐이며, 만일 마음이 고요히 사라져서 생각이 동요할 곳이 하나도 없음을 알면 그것을 바른 깨달음[正覺]이라 한다.
【문】어떻게 자기 마음으로 나타내는가.
【답】온갖 법이 있는 것을 보건대, 있는 것은 스스로 있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있는 것을 만든다. 온갖 법이 없는 것을 보건대, 없는 것은 스스로 없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없는 것을 만든다. 이리하여 온갖 법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이와 같아서 다 같이 이는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있는 것을 만들고 자기 마음으로 헤아려서 없는 것을 만든다.
또 만일 사람이 온갖 죄를 지었으면 스스로가 자기의 법왕(法王)을 보아야 곧 해탈하게 된다.
만일 일 위에서 알게 된 이면 기력이 씩씩하고, 일 가운데서 법을 본 이면 곧 처처에서 생각을 잃지 아니한다. 문자에서 아는 이면 기력이 허약하고, 일에 즉(卽)하고 법에 즉한 이면 깊이 그대의 갖가지 움직이는 일을 좇아 뛰고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하되 모두가 법계에서 나가지도 않고 법계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만일 법계로써 법계로 들어간다면 그것은 곧 어리석은 사람이니, 무릇 하는 일이 있어도 끝내 법계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왜냐 하면, 마음 자체가 바로 법계이기 때문이다.
【문】세간 사람들은 갖가지로 배우고 묻고 하거늘, 어찌하여 도를 얻지 못하는가.
【답】자기[己]를 보기 때문에 도를 얻지 못한다. 자기라 함은 ≺나≻[我]다. 도덕이 지극히 높은 사람은 괴로움을 만나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즐거움을 만나도 기뻐하지 않나니, 자기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괴로움과 즐거움을 모르는 이는 자기를 없애기 때문이요 허무(虛無)에 이르게 된다. 자기 자신도 오히려 없애거늘, 다시 무슨 물건이 있기에 없애지 않겠는가.
【문】모든 법이 이미 ≺공≻하였다면 누가 도를 닦는가.
【답】누가 있어서 도를 닦아야 되는가. 만일 누가 없다면 곧 도를 닦을 필요가 없다. ‘누구[阿誰]’한 역시 ,≺나≻다. 만일 ≺나≻가 없다면 물건을 만난다 해도 시비(是非)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시(是)란 나 스스로만 옳고 중생은 옳지 않다는 것이요, 비(非)란 나 스스로만 그르고 중생은 그르지 않다는 것이다.
곧 마음에 생각이 없으면 바로 불도에 통달한 것이니, 다른 물건에 소견을 일으키지 않으면 도에 통달했다고 한다. 다른 물건을 만나서 곧장 그 근원을 통달하여 알면 이 사람은 지혜 눈이 열린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물건에게 맡기고[任物] 자기에게 맡기지 않으므로[不任己] 곧 가지거나 버리거나 어기거나 좇음이 없지만, 어리석은 이는 자기에게 맡기고 물건에게 맡기지 않는지라 곧 가지고 버리고 어기고 좇음이 있다.
한 물건도 보지 않음을 도를 본다[見道]고 하고, 한 물건도 행하지 않음을 도를 행한다[行道]고 한다.
온갖 처소에서 처소가 없는 이것이 곧 법 처소[法處]이니 곧 짓는 곳은 짓는 곳이 없고 짓는 법이 없으면 곧 부처를 뵙는다.
만일 모양을 볼 때는 온갖 처소에서 귀신을 본다.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지만, 법을 관하기 때문에 해탈하게된다.
만일 기억과 분별을 보면 끓는 가마솥 물과 이글거리는 숯불에 타는 고통이 되는 일을 당하면서 실제로 나고 죽는 모양을 볼 것이요, 만일 법계의 성품을 보면 곧 열반의 성품인 것이니, 기억과 분별이 없는 이것이 곧 법계의 성품이다.
마음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로되 작용하면서 그만두지 않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 또 작용하면서도 항상 ≺공≻하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공≻하면서도 항상 작용하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했다.
또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내가 본래 이 당에 온 것은
법을 전해 미혹된 유정 구제함이니
한 송이 꽃에서 다섯 잎사귀가 나고
열매를 맺는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지라.

제2조 혜가(慧可) 대사가 이르되, “범부는 옛날이 이제와 다르다 하고 지금이 옛날과 다르다 한다. 또 4대(大)를 떠나서 다시 법신(法身)이 있다고 하나, 알고 난 때에는 지금 5음(陰)의 이 마음이 바로 원만하고 청정한 열반이니, 이 마음은 만행(萬行)을 완전히 갖추어 있으므로 바로 대종(大宗)이라 일컫는다”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본래 연(緣)으로 땅이 있고
땅의 종자로 인하여 꽃이 생기나니
본래에 종자가 없으면
꽃 또한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제3조 승찬(僧璨)대사가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꽃의 종자가 비록 땅으로 인하나
땅의 종자로부터 꽃이 생기나니
만일 사람이 종자를 뿌림이 없으면
꽃 종자는 모두 생김이 없느니라.

제4조 도신(道信) 대사는 이르되, “무릇 마음의 선정[定]을 알고자 하면, 똑바로 앉았을 때 앉아 있음을 아는 이 마음이며, 허망하게 일어남이 있음을 아는 이 마음이 허망하게 일어남이 없음을 아는 이 마음이고, 안팎이 없음을 아는 이 마음이다. 진리는 모두가 마음으로 돌아가며 마음이 이미 청정하여지면 청정함이 곧 본래의 성품이다. 안이나 바깥이 오직 한 마음일 뿐이요 이것이 지혜의 모양이며 분명히 알면서 동요하지 않는 마음을 제 성품의 선정이라고 한다”고 했다.
또 융(融) 대사에게 지시하며 이르되, “백천의 미묘한 문이 다 같이 방촌(方寸)으로 돌아가고 항하 모래만큼 많은 공덕이 모두 마음의 근원에 있다. 온갖 선정의 문과 온갖 지혜의 문과 온갖 수행의 문이 모두 다 두루 갖추어졌고 신통의 미묘한 작용도 다 같이 그대의 마음에 있다”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꽃의 종자는 나는 성품이 있되
땅으로 인하여 꽃은 나고 나나니
큰 연(緣)과 성품이 합치게 되면
나야 하면 나되 나지 않느니라.

제5조 홍인(弘忍) 대사가 이르되, “법의 요의를 알고자 하는가. 마음은 12부경(部經)의 근본이다. 오직 일승(乘)의 법이 있을 뿐이다. 일승이란 마음이 그것이다. 한 마음을 지키는 것만이 곧 심진여문(心眞如門l니, 온갖 법과 행은 자기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 마음 뿐임을 스스로가 알아야 하나니, 마음은 형색이 없다. 모든 조사(祖師)들은 이 마음으로써 마음을 전했을 뿐이니, 통달한 이가 인가(印可)하는 것이요 다시는 다른 법이 없다”고 했다.
또 이르되, “온갖 것은 마음으로 말미암으며 삿됨과 바름은 자기에게 있다. 한 물건도 생각지 않으면 이것이 곧 본래 마음이니, 지혜로만이 알 수 있는 것이요 다시는 다른 수행이 없다”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서 말했다.

유정들은 와서 씨를 뿌리고
땅으로 인하여 열매가 도로 생기지만
무정은 벌써 종자가 없는지라
성품도 없고 생김도 없다.

제6조 혜능(慧能) 대사가 이르되, ‘그대들 모든 사람의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니, 다시는 의심하지 말라. 마음 밖에 다시는 건립할 수 있는 하나의 법도 없나니, 이는 다 자기 마음에서 만 가지 법을 내는 것이다. 경에서 이르되, ’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긴다‘고 하였지만, 그 법은 둘이 없고 그 마음 또한 그러하다. 그 도(道)는 청정하여 모든 모양이 없나니, 그대들은 청정하고 ≺공≻한 그 마음을 관하지도 말라. 이 마음은 둘이 없고 가지거나 버릴 만한 것도 없으며, 가고 서고 앉고 눕는 것이 모두 하나의 곧장 마음이요 이것이 곧 정토(淨土)이니, 나의 말에 의지하는 이는 결정코 보리를 이루리라”고 했다.
법을 전하는 게송에서 말했다.

마음 자리는 모든 종자 포함되어서
널리 내리는 비에 모두 다 나나니
꽃의 뜻을 단번에 깨치고 나면
보리의 열매는 저절로 이룩되리라.

양(讓) 대사가 이르되, “온갖 만법은 다 마음으로부터 생긴다. 만일 마음 자리를 통달하게 되면 하는 일에 걸림이 없어지리니, 그대의 지금의 이 마음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이다. 달마(達磨)가 서쪽에서 와서 오직 한 마음의 법을 전했을 뿐이다. 3계(界)는 마음일 뿐이요 삼라만상도 하나의 법으로 인가한 바다. 무릇 보이는 빛깔은 다 자기 마음이며, 마음이 스스로 마음이 되지 못하고 빛깔로 인해서 마음인 것이다. 그대는 때를 따라 현상[事]에 즉(卽)하고 본체[理]에 즉하되 도무지 걸리는 바가 없어야 하리니, 보리도의 과위 역시 그와 같아서 마음으로부터 생기는 바라 곧 빛깔이라 하며, 빛깔의 ≺공≻함을 알기 때문에 생기되 곧 생기지 않느니라”고 했다.
마(馬) 대사가 물었다. “어떻게 뜻을 쓰면 선정의 모양 없는 삼매[無相三昧]에 계합됩니까.”
스님은 대답했다. “그대가 마음 자리 법문을 배우는 것은 마치 씨를 뿌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요(法要)를 말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서 내린 비와 이슬과 같나니, 그대의 연(緣)과 합하기 때문에 당연히 도(道)를 볼 것이니라.”
또 물었다. “화상께서는 ‘도를 본다’고 하시는데, 도는 빛깔이 아니거늘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스님은 대답했다. ‘마음 자리의 법 눈으로 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니, 모양 없는 삼매 역시 그러하니라.“
“이루어지거나 무너짐이 있습니까.”
‘만일 이 도에 계합되면 시작도 없고 마지막도 없으며, 이루어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모이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질지도 않고 짧지도 않다. 고요하지도 않고 어지럽지도 않으며,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 않나니, 만일 이렇게 알면 도라 하느니라.
그대는 나의 가르침을 받고 나의 게송을 들으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 자리는 모든 종자 포함되어
비와 이슬 만나면 모두 다 싹 트나니
삼매의 꽃은 모양이 없거늘
어찌 무너지고 이루어짐 있으랴.

길주(吉州) 사(思) 화상이 이르되, “지금 말하는 그것이 곧 그대의 마음이요 이 마음이 바로 부처며 이것이 참 모습[實相]이요 법신불이니라. 경에서 이르되, ”3아승기(阿僧祇)와 백천의 명호가 있다’고 했지만, 세계를 따르고 처소에 응하여 붙인 이름이다. 마치 빛깔을 따르는 마니주(摩尼珠)가 청색에 닿으면 청색으로 되고 황색에 닿으면 황색으로 됨과 같으나, 마니보는 본래대로의 빛깔이다. 마치 손가락이 제 손가락을 대지 못하고 칼이 제 칼을 베지 못하며 거울이 제 거울을 비추지 못함과 같나니, 형상 따라 나타나게 된 것이 저마다 같지 않으므로 붙인 이름에 낫고 못함도 같지 아니하다.
이 마음은 허공과 수명을 똑같이 한다. 만일 삼매의 문에 들면 삼매가 되지 아니함이 없고 만일 모양 없음의 문에 들면 그 모두가 모양이 없나니, 성립되는 것에 따라 모두 다 종문(宗門)이 된다. 말하고 울고 웃고 굽히고 펴고 숙이고 우러르고 함이 저마다 성품 바다에서 일어나는 바라 그 때문에 종(宗)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며, 상호(相好)있는 부처는 바로 인과(因果)의 부처요 곧 실상불(實相佛)의 가용(家用(가용)이다.
경에 이르되, ‘32상(相)과 80종호(種好)는 모두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고 했고, 또 이르되 ‘법 성품 집의 불길이다’고 했으며, 또 이르되 ‘법 성품의 공훈이다’고 했나니, 그 마음의 청정해짐에 따라 곧 불국토도 청정해지며 모든 생각이 생기면 생각 따라 결과를 얻는다.
물건에 응하면서 나타나므로 그를 일러 여(如)가 온다고 하고 따라 응하면서 가기 때문에 구할 것이 없나니, 온갖 때 안에 다시는 얻을 만한 법은 하나도 없고 이로부터 법을 얻되 얻음으로써 다시는 얻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법은 법을 알지 못하고 법은 법을 듣지 못하며, 평등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평등이라 평등으로써 다시는 평등을 행하지 않기 때문에 ‘혼자일 뿐이요 짝이 없다’고 한다.
헷갈렸을 적에는 깨침에서 헷갈리고 깨쳤을 적에는 헷갈림에서 깨친 것이므로, 헷갈림은 도리어 스스로 헷갈리고 깨침은 도리어 스스로 깨치는 것이니, 하나의 법도 마음으로부터 생기지 아니함이 없고 하나의 법도 마음으로부터 소멸하지 아니함이 없다. 그러므로, 헷갈림과 깨침은 모두 하나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하나의 티끌에 법계를 포함한다’고 했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란 것은, 참으로 본래의 성품이어서 모든 수량을 초월하였고 성인도 아니며 변재도 없나니, 변재로 말할 수 있는 바도 아니고 부처로서 만들 만한 것도 없으며 도(道)로써 수행할 만한 것도 없다.
경에서 이르되, ‘만일 여래가 항상 설법하지 않은 줄을 알면 이것을 다문(多聞)을 두루 갖추었다고 한다’고 했나니, 곧 자기 마음에 다문을 두루 갖추고 있다고 보기 때문에 초목에도 불성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한 마음이라 밥으로도 불사(佛事)를 짓는 것이요 옷으로도 불사를 짓는 것이다”고 했다.
그러므로, 숭산(嵩山) 안(安)화상은, 옛날 양(讓)화상과 탄연(坦然)선사가 형주(荊州) 옥천(玉泉)에 있으면 계율을 듣다가, 두 사람은 서로가 말하기를 “우리는 듣건대, 선종이 최상의 불승(佛乘)이라 하더라. 하필 이 조그마한 종(宗)에 국집하면서 큰 진리를 잃을 것이 있느냐”고 하고, 마침내 구름처럼 노닐며 선지(先知)에게 널리 물으면서 숭산 안화상의 처소까지 와서는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스님이 대답했다. “어찌하여 자기의 뜻은 묻지 않는가. 다른 사람의 뜻을 물어서 무엇을 하려는가.”
“어떤 것이 탄연의 뜻입니까.”
스님이 말씀하되, “그대는 은밀하게 작용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은밀한 작용입니까. 엎드려 지시를 청합니다.”
스님이 눈을 들면서 그들을 보자, 두 사람은 그때에 크게 깨쳤다.
굴다삼장(崛多三藏)이 행각하면서 태원(太原)의 정양현(定襄縣)에 이르러 마을을 지나다가 수(秀)대사의 제자가 풀을 엮어 암자를 지어 놓고 마음을 관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스님이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대답했다. “고요함[靜]을 자세히 보고[看] 있습니다.”
스님은 말했다. “자세히 보는 것은 어떤 사람이며, 고요하다는 것은 어떤 물건인가.”
그 납승(衲僧)은 대답이 없다가 물었다. “그 이치는 어떠한 것입니까. 스님께서 지시하여 주십시오.”
“어찌하여 스스로를 자세히 보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스스로를 고요히 하지 아니하는가.”
스님은 그의 근성(根性)이 더딘 것을 보고는 물었다. “그대의 스승은 누구신가.”
“수(秀)화상입니다.”
“그대의 스승은 이 법만을 가르쳐 주시던가. 따로 뜻이 있어서인가.”
“다만 저에게 고요함을 자세히 보라고만 가르쳐 주셨습니다.”
‘서천(西天)의 하열한 외도들이 익히던 법을 이 땅에서 선종으로 삼고 있구나. 크게 사람을 그르치고 있도다.“
그 납승은 삼장에게 물었다. “스승은 누구십니까.”
“육조니라” 하고 또 말했따. “바른 법은 듣기 어렵느니라. 그대는 어찌하여 그 곳으로 가지 아니하는고.”
그 납승은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곧 조계(曹鷄)로 가서 육조를 뵙고 위의일을 자세히 말하자, 육조는 말했다.
“진실로 굴다가 말한 바와 같도다. 그대는 어찌하여 스스로를 자세히 보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스스로를 고요히 하지 아니하는가. 누가 그대를 고요하게 하는고.” 하자, 그 말 끝에 크게 깨쳤다.
지책(智策)화상이 북쪽 땅을 행각하다가 우연히 5조(祖) 아래의 지황(智隍)선사가 20년 동안 선정 닦는 것을 만났으므로 물었다.
“여기 있으면서 무엇을 합니까.”
지황이 대답했다. “선정에 들어 있습니다.”
“선정에 들었다는 것은, 마음이 있어 들은 것입니까. 마음이 없이 들은 것입니까. 만일 마음이 있어 들었다면 곧 일체의 유정들은 모두 다 마음이 있으므로 역시 선정을 얻었다 해야 되겠고, 만일 마음이 없이 들었다면 일체의 무정(無情)들도 역시 선정을 얻었다 해야 될 것입니다.”
“나는 바로 선정에 들었을 때에는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아니합니다.”
“만일 있다 없다 하는 마음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항상한 선정이므로 다시는 난다 든다 함이 있지 않아야 합니다.”
지황은 대답이 없다가 물었다. “당신의 스승은 누구십니까.”
“육조십니다.”
“당신의 스승께서는 무슨 법으로 선정을 삼으십니까.”
“묘히 잔잔하고 뚜렷히 고요하여 체성과 작용이 여여(如如)하며 5음(陰)은 본래 ,≺공≻하고 6진(塵)은 있는 것이 아니며, 나오지도 않고 들지도 아니하며 안정하지도 않고 산란하지도 아니하며, 선의 성질은 머무름과 머무름을 여읨도 없는 선의 고요함이요 선의 성질은 생김과 생김을 여읨도 없는 선의 생각이어서 마치 허공과 같고 떠한 허공이라는 헤아림조차도 없습니다.”
지황은 이 설명을 듣고도 아직 의심이 쉬지 않으므로, 마침내 석장(錫杖)을 떨쳐 짚고 남쪽으로 가서 곧장 조계에 이르러 6조를 뵈었더니, 6조 역시 위와 같은 설명을 하자, 지황은 그 말 끝에 크게 깨쳤다.
남악(南嶽) 사(思) 대화상이 이르되, “만일 배운다면 먼저 마음을 통달해야 하고 마음을 만일 통달하게 되면 온갖 법이 일시에 다 통달해진다. 청정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도 청정하다는 생각이 나지 않고 ≺공≻하다고 말하는 것을 들어도 ≺공≻을 취하지 아니함은 마치 새가 공중에 날고 있는 것과 같아지나니, 만일 공중에서 있다고 하면 반드시 떨어지리라는 근심이 있기 때문이다. 머무름이 없는 이것이 본래 제 성품의 체성이요 고요하면서도 그 마음을 냄은 바로 비춤[照]의 작용이니, 곧 고요함 이것은 제 성품 선정이요 곧 비춤 이것은 제 성품 지혜이다.
곧 선정 이것은 지혜의 체성이요 곧 지혜 이것은 선정의 작용이며, 선정을 여의면 따로 지혜가 없고 지혜를 여의면 따로 선정이 없으며, 곧 선정일 때 그대로가 지혜요 지혜일 때 그대로가 선정이니, 곧 선정일 때는 선정이 없고 지혜일 때는 지혜가 없다. 왜냐 하면, 성품 스스로가 여(如)하기 때문이다.
마치 등불과 빛이 비록 두 가지 이름이 있기는 하나, 그 자체는 다르지 않아서 곧 등불이 빛이요 빛이 등불이며 등불을 여의고는 따로 빛이 없고 빛을 여의고는 따로 등불이 없다. 곧 등불이 빛의 체성이요 빛이 등불의 작용인 것과 같나니, 곧 선정과 지혜는 쌍으로 닦는 것이요 서로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고 했다.
우두 융(牛頭融)대사의 절관론(絶觀論)에서 “물었다. ‘어느 것이 마음인가.’
대답했다. ‘여섯 감관으로 관하는 바 모두가 다 같이 마음이다.’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마음은 고요히 사라진 것이다.’
‘어떤 것이 체성인가.’
‘마음이 체성이다.’
‘어떤 것이 종(宗)인가.’
‘마음이 종이다.’
‘어떤 것이 근본인가.’
‘마음이 근본이다.’
‘어떤 것이 선정과 지혜가 쌍으로 노니는 것인가.’
‘심성이 고요히 사라짐이 선정이 되고, 항상 고요히 사라짐을 앎이 지혜이다.’
‘어느 것이 지혜인가.’
‘경계에서 앎을 일으킴이 지혜이다.’
‘어떤 것이 경계인가.’
‘자신의 심성이 경계이다.’
‘어느 것이 펴는 것인가.’
‘비춤의 작용이 펴는 것이다.’
‘어느 것이 마르는 것인가.’
‘마음이 고요히 사라져서 가고 옴이 없으면 마르는 것이니, 펴면 법계에 가득히 노닐고 마르면 선정의 자국조차 찾기 어렵다.’
‘어느 것이 법계인가.’
‘겉도 얻을 수 없음을 법계라 한다’”고 했다.
법조(法照) 선사가 이르되, “경에서 ‘3아승기 백천의 명호는 모두가 여래의 이명(異名)이다’고 하셨지만, 곧 참 마음의 별칭(別稱)인 것이며, 또 경에서 이르되 ‘만법은 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아니한다’고 하셨는데, 바로 이런 뜻이다.
무릇 속박은 마음으로부터 속박되고 해탈은 마음으로부터 해탈되나니, 속박과 해탈은 마음으로부터요 그 밖의 일과는 상관이 없다. 뛰어난 기술은 오직 마음을 관함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 만일 한 마음의 문을 든다면 온갖 것이 한 마음일 뿐이요 만일 하나의 법이 마음이 아니라면 이 마음은 바깥에서 존재하므로 누가 마음 밖에 있으면서 따로 한 줄기를 제압할 이가 있을 수 있겠는가”고 했다.
범(梵)선사가 이르되, “만일 온갖 법이 모두 법임을 알면 곧 해탈하게 되나니, 눈이 법이요 빛깔이 법이다. 경에서 이르되, ‘법이 도리어 법과는 속박됨을 보지 못하고, 법이 도리어 법과는 해탈됨을 보지 못하느니라’고 했다”고 했다.
장(藏)선사가 이르되, “온갖 법에서 얻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곧 마음이 바로 도(道)라는 것이니, 눈은 온갖 빛깔을 얻지 못하고 귀는 온갖 소리를 얻지 못하느니라”고 했다.
연(緣)선사가 이르되, “마치 집 가운데에 큰 돌이 있어서 평소에 앉고 눕고 하다가 혹시 불상을 만들까 하였더니 마음에 불상이 된다는 생각 때문에 죄송해서 감히 앉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이것은 다 의식이라는 붓 끝으로 그려 만들어서 스스로가 서둘고 스스로가 두려워하는 것이요 돌 안에는 실로 죄와 복이란 것이 없다”고 했다.
안(安)선사가 이르되, “곧 마음 이것이 도(道)다. 왜냐 하면,곧장 생각하고 곧장 작용하는 것이요 다시는 ≺공≻이라고 관하지도 아니하며 방편을 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경에서 이르되, ‘곧장 보아도 보지 아니하고 곧장 생각해도 생각하지 아니하며 곧장 받아도 행하지 아니하고 곧장 말하여도 번거롭지 아니하다’고 했다”고 했다.
각(覺)선사가 이르되, ‘만일 마음이 속한 데가 없음을 깨치면 곧 도의 자취를 얻으리라. 눈은 온갖 빛깔을 보되 눈은 온갖 빛깔에 속하지 않았나니, 이것이 제 성품의 해탈이다. 경에서 이르되, ’온갖 법은 서로가 속하지 아니한다‘고 했기 때문이니, 마음과 온갖 법은 저마다 서로 알지 못하느니라“고 했다.
원적(圓寂)비구니가 이르되, “온갖 법은 마음일 뿐이요 상대가 없으며 곧 제 성품의 해탈이다. 경에서 이르되, ‘온갖 법은 눈과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법은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은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고 했다”고 했다.
요(堯)선사가 이르되, “심식의 성품을 환히 알면 자체가 항상 진리이니, 반연할 바[所緣]와 생각하는 곳이 불법 아님이 없다”고 했다.
낭(朗)선사가 이르되, “무릇 보이는 것 모두는 자기 마음에서 나타나니, 도(道)는 무슨 물건과 같기에 닦으려 하고 번뇌는 어떤 물건과 같기에 끊으려고 하는가”고 했다.
주(稠)선사가 이르되, “온갖 바깥 연(緣)은 일정한 모양이 없다는 것은 옳고 그름과 나고 없어짐이 한결같이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음에서다. 만일 자기 마음이 마음이 되지 않으면 누가 옳다 그르다 하고 꺼리겠는가. 주체와 객체가 모두 없으면 곧 모든 모양이 항상 고요하다”고 했다.
혜자(慧慈)선사가 이르되, “무릇 법 성품이란 것이 큰 도[大道]이다. 법 이것은 법의 몸이요 성품 이것은 깨닫는 성품이니, 곧 중생의 자연인 성품이다. 그러므로 금강반야(金剛般若)는 마치 큰 불 무더기와 같아서 삼매의 불길의 모든 누(累)도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늘 위와 하늘 아래서 나만이 홀로 높다’고 일컬은 것이다”고 했다.
혜만(慧滿)선사가 이르되, “모든 부처님이 마음을 말씀함은 마음 모양이 바로 허망한 법임을 알게 하심이니, 이제 마음의 모양을 거듭 보태는 것은 부처님의 뜻을 깊이 어기는 것이다. 또 논의(論義)를 더하는 것도 큰 진리에 자못 어긋나는 것이니, 언제나 4권(卷) 능가경(楞伽經)을 지니어 심요(心要)를 삼고 그 말씀을 따르고 행을 따르라”고 했다.
044_0519_a_01L宗鏡錄卷第九十七 茂慧日永明寺主智覺禪師 延壽 集夫佛教已明須陳祖意達佛乘者皆與了義相應如法華經云是人有所思惟籌量言說皆是佛法無不眞實亦是先佛經中所說第一毘婆尸佛偈云身從無相中受生由如幻出諸形像幻人心識本來無罪福皆空無所住 第二尸棄佛偈云起諸善法本是造諸惡業亦是幻身如聚沫心如風幻出無根無實性 第三毘舍浮佛偈云假借四大以爲身心本無生因境有前境若無心亦無罪福如幻起亦滅 第四拘留孫佛偈云見身無實是佛見了心如幻是佛了得身心本性空斯人與佛何殊別第五拘那舍牟尼佛偈云佛不見身知是佛若實有知別無佛智者能知罪性空坦然不懼於生死 第六迦葉佛偈云一切衆生性淸淨從本無生無可滅卽此身心是幻生化之中無罪福 第七釋迦牟尼佛偈云幻化無因亦無生皆卽自然見如是諸法無非自化生幻化無生無所畏復告摩訶迦葉吾有淸淨法眼涅槃妙心實相無相微妙正付囑於汝無令斷絕聽吾偈曰法本法無無法法亦法今付無法時法法何曾法西天第一祖摩訶迦葉傳法偈云法法本來無法無非法何於一法中有法有不法第二祖阿難傳法偈云本來付有法付了言無法各各須自悟悟了無無法 第三祖商那和修傳法偈云非法亦非心無心亦無說是心法時是法非心法 第四祖優波鞠多尊者傳法偈云心自本來心本心非有法有法有本心非心非本法 第五祖提多迦亦名香衆初投優波鞠多出家尊者問曰爲心出家耶身出家耶香衆曰我來出非爲身心而求利益尊者曰不爲身心復誰出家香衆曰夫出家者無我之故無我之卽心不生滅心不生滅卽是常旣是常故佛亦常心無形相其體亦爾尊者曰汝當大悟心自明朗依佛法中度恒沙衆付法偈云通達本法心無法無非法悟了同未悟無心得無法 第六祖彌遮迦付法偈云無心無可得說得不名法若了心非心始解心心 第七祖婆須蜜付法偈云心同虛空示等虛空法證得虛空時無是無非法第八祖佛陀難提付法偈云虛空無內外法亦如是若了虛空故是達眞如理第九祖伏馱蜜多尊者問佛陀難提尊者偈父母非我親誰爲最親者諸佛非我道爲最道者偈荅云汝言與心親父母非可比汝行與道合諸佛心卽是外求有相佛與汝不相似欲識汝本心非合亦非離因茲悟道付法偈云眞理本無名因名顯眞理受得眞實法非眞亦非僞 第十祖脅尊者傳法偈云眞體自然眞因眞說有理領得眞實法無行亦無止 第十一祖富那夜奢尊者於一樹下以手指樹下地告大衆曰地若變爲金色當有聖者而入此會言當未久須臾之頃以爲金色尊者擧手而見一人當會前立尊者曰汝從何來夜奢曰我心非尊者曰何處所住夜奢曰我心非止尊者汝不定耶夜奢曰諸佛亦然尊者曰汝非諸佛夜奢曰諸佛亦非爾時夜奢說偈讚曰師坐金色地常說眞實義迴光而照我令入三摩諦又傳法偈云迷悟如隱顯明暗不相今付隱顯法非一亦非二 第十二祖馬鳴尊者傳法偈云隱顯卽本法明暗元不今付悟了法非取亦非棄 第十三祖毘羅尊者傳法偈云非隱非顯法說是眞實悟此隱顯法非愚亦非智 第十四祖龍樹尊者行化到南印土彼國人多修福業不會佛理唯行小辯不具大智及問佛性布施我求福業非解佛性汝會佛性爲我說之師曰汝欲學道先除我慢生恭敬心方得佛性衆曰佛性大小師曰非汝所知非說大小若說大小卽是大小非佛性也彼衆曰我欲棄小辯歸于大海龍樹卽爲說法對大衆而現異相身如月輪當於座上唯聞說法不睹其形彼衆有一長者名曰提婆謂諸衆識此瑞不彼衆曰非其大聖誰能識也提婆心根宿淨亦見其相默然契會乃告衆曰師現佛性之義非師身者無相三昧如滿月佛性之義也語未訖師卽現本身座上說偈曰身現滿月相以表諸佛體說法無其形用辯非聲色又傳法偈云爲明隱顯法方說解脫理於法心不證無瞋亦無喜第十五祖迦那提婆尊者傳法偈云本對傳法人爲說解脫理於法實無證無終亦無始第十六祖羅睺羅尊者傳法偈云於法實無不取亦不離法非有無相內外云何起第十七祖僧迦難提尊者傳法偈云心地本無生因種從緣起緣種不相妨華果亦復爾第十八祖伽耶舍多初第十七祖僧伽難提因至其舍忽見一子手執銅鏡而至師所者曰子幾歲耶子曰我當百歲是時尊者見荅百歲覆問曰汝當無知看甚幼小吾百非其理也子曰我不會理正當百歲尊者子善機耶子曰佛偈云若人生百歲不會諸佛機未若生一日而得決了之尊者敬之深知是聖又徵問曰汝執此鏡意況如何爾時童子以偈荅曰諸佛大圓鏡內外無瑕兩人同得見心眼俱相似父母見子奇異遂捨出家尊者卽領遊化至一古寺而爲受名曰伽耶舍多於彼殿上有銅鈴被風搖尊者問曰彼風鳴耶彼鈴鳴耶彼銅鳴耶子曰我心鳴耳非風銅鈴尊者曰非風銅鈴我心誰耳子曰二俱寂靜非三昧耶尊者曰善哉眞比丘善會諸佛理善說諸法要善識眞實義又告曰我今將此法眼藏付囑於汝汝受吾偈當行化之偈曰心地本無生因種從緣起緣種不相妨華果亦復爾伽耶舍多後付鳩摩羅多傳法偈曰有種有心地因緣能發萌於緣不相礙當生生不生第十九祖鳩摩羅多尊者傳法偈云性上本無生爲對求人說於法旣無得何懷決不決第二十祖闍夜多尊者傳法偈云言下合無同於法界性若能如是解通達事理竟第二十一婆修槃頭尊者傳法偈云泡幻同無礙如何不了悟達法在其中非今亦非古第二十二祖摩挐羅付鶴勒尊者傳法偈後卽從座起踊身虛空作十八變訖卻歸本座以手指地化爲一泉而說偈言心地淸淨泉能潤於一切從地而涌出徧滿十方濟又傳法偈云心逐萬境轉轉處實能幽隨流認得無喜亦無憂 第二十三祖鶴勒尊者付法已竟卽從座起踊身虛空作十八變已卻歸本座寂然滅度爾時大衆欲分舍利各自起塔臨闍維訖欲分舍利爾時尊者現身說偈一法一切法一切一法攝吾身非有無何分一切塔又傳法偈云認得心性時可說不思議了了無所得得時不說知第二十四祖師子尊者傳法偈云正說知見知見俱是心當心卽知見知見卽于今第二十五祖婆舍多尊者傳法偈云聖人說知見當境無非是我今悟眞性無道亦無理第二十六祖不如密多尊者傳法偈云眞性心地藏無頭亦無尾應緣而化物方便呼爲 第二十七祖般若多羅尊者傳法偈心地生諸種因事復因理果滿菩提圓開世界起 西天波羅提尊者化異見王現神通力乘雲至王殿前爾時大王問乘雲者曰汝爲是邪汝爲是正波羅提尊者荅曰我非邪正而來正邪大王若正我無邪正又問曰何者是佛波羅提曰見性是佛王曰師見性不波羅提曰我見佛性王曰性在何波羅提曰性在作用王曰是何作用今不睹見波羅提曰今現作用王自不識王曰旣所見云有作用當於我處而有之不波羅提曰王若作用現前摠是王若不用體亦難王曰若當用之幾處出現師曰若出用時當有其八卓立雲端以偈告曰在胎曰身世名人在眼曰見在耳曰聞在鼻辯氣在口談論在手執捉在腳雲奔徧現俱該法界攝不出微塵識者知是佛性不識者喚作精 此土初祖菩提達磨多羅南天竺國王第三之子常好理論心念衆生而不識佛又自歎曰世有形法而易了之唯佛心法難有會者爾時般若多羅尊者至于其國王賜一寶珠其珠光明璨然殊妙尊者見已用珠試曰此寶珠者有大光明能照于物更有好珠能勝此不菩提多羅曰此是世寶未得爲於諸光中智光爲上此是世明未得爲上於諸明中心明第一其此珠者所有光明不能自照要假智光智辯於此旣辯此已卽知是珠旣知是珠卽明其寶若明其寶寶不自若辯其珠珠不自珠珠不自珠者要假智珠而辯世珠寶不自寶者要假法寶以明俗然則師有其道其寶旣現衆生有道心寶亦然尊者異之因出家悟道遂行化此土誌識是傳佛心印觀音聖人師述安心法門迷時人逐法解時法逐人解則識攝色則色攝識但有心分別計校自心現量者皆是夢若識心寂滅無一動念處是名正覺云何自心現見一切法有有自不有心計作有見一切法無無自不無自心計作乃至一切法亦如是竝是自心計作有心計作無又若人造一切罪自見己之法王卽得解脫若從事上得解者氣力壯從事中見法者卽處處不失念從文字解者氣力弱卽事卽法者深從汝種種運爲跳踉顚蹶悉不出法界亦不入法界若以界入界卽是癡凡有所施爲終不出法界心何以故心體是法界故世間人種種學問云何不得道由見己故不得道己者我也至人逢苦不遇樂不喜由不見己故所以不知苦樂者由亡己故得至虛無己自尚亡更有何物而不亡也諸法旣空阿誰修道有阿誰須修道若無阿誰卽不須修道阿誰者亦我也若無我者逢物不生是非是者我自是而物非是也非者我自非而物非非也卽心無心是爲通達佛道卽物不起見名爲達道逢物直達知其本原此人慧眼開智者任物不任卽無取捨違順愚者任己不任物卽有取捨違順不見一物名爲見道不行一物名爲行道卽一切處無處卽是法處卽作處無作無作法卽見佛若見相時則一切處見鬼取相故墮地獄觀法故得解脫若見憶想分卽受鑊湯爐炭等事現見生死相若見法界性卽涅槃性無憶想分別卽是法界性非色故非有用而不廢故非無又用而常空故非有空而常用故非無傳法偈云吾本來茲土傳法救迷情一華開五葉結果自然成第二祖可大師云凡夫謂古異今謂今異古復離四大更有法身解時卽今五陰心是圓淨涅槃此心具足萬行正稱大宗傳法偈云本來緣有地因地種華生本來無有種華亦不能生 第三祖璨大師傳法偈云華種雖因地從地種華生若無人下種華種盡無 第四祖道信大師云夫欲識心定者正坐時知坐是心知有妄起是心知無妄起是心知無內外是心理盡歸心心旣淸淨卽本性內外唯一心是智慧相明了無動心名自性定又示融大師云百千妙門同歸方恒沙功德摠在心原一切定門一切慧門一切行門悉皆具足神通妙用竝在汝心法偈云華種有生性因地華生生大緣與性當生生不生 第五祖弘忍大師云知法要心是十二部經之根本唯有一乘法一乘者一心是但守一心卽心眞如門一切法行不出自心唯心自知心無形色諸祖只是以心傳心達者印可更無別法又云一切由心邪正在己不思一物卽是本心唯智能知更無別行傳法偈云有情來下種因地果還生無情旣無種無性亦無生 第六祖慧能大師云汝等諸人自心是佛更莫狐疑心外更無一法而能建立皆是自心生萬種經云心生種種法生其法無二其心亦然其道淸淨無有諸相汝莫觀淨及空其心心無一無可取捨行住坐臥皆一直心卽是淨土依吾語者決定菩提傳法偈云心地含諸種普雨悉皆生頓悟華情已菩提果自成讓大師云一切萬法皆從心生若達心地所作無礙汝今此心卽是佛故達磨西來唯傳一心之法三界唯心森羅及萬像一法之所凡所見色皆是自心心不自心因色故心汝可隨時卽事卽理都無所礙菩提道果亦復如是從心所生卽名爲色知色空故生卽不生馬大師問曰如何用意合禪定無相三師曰汝若學心地法門猶如下種我說法譬如天澤汝緣合故當見于道馬大師又問曰和尚云見道道非色故云何能睹師曰心地法眼能見于道無相三昧亦復然矣大師曰有成壞不師曰若契此道無始無終不成不壞不聚不散不長不短不靜不亂急不緩若如是解當名爲道汝受吾教聽吾偈言心地含諸種遇澤悉皆萌三昧華無相何壞復何成 吉州思和尚云卽今語言卽是汝心此心是佛是實相法身佛經云三阿僧祇百千名號隨世界應處立名如隨色摩尼珠觸靑卽靑觸黃卽黃寶本色如指不自觸刀不自割鏡不自照隨像所現之處各各不同得名優劣不同此心與虛空齊壽若入三昧門無不是三昧若入無相門摠是無相隨立之處盡得宗門語言啼笑屈伸俯各從性海所發故得宗名相好之佛是因果佛卽實相佛家用經云三十二相八十種好皆從心想生亦云法性家焰又云法性功隨其心淨卽佛土淨諸念若生隨念得果應物而現謂之如來隨應而去故無所求一切時中更無一法可得自是得法不以得更是以法不知法法不聞法平等卽佛佛卽平等不以平等更行平等故云獨一無伴時迷於悟悟時悟於迷迷還自迷悟還自悟無有一法不從心生無有一法不從心滅以迷悟摠在一心故云一塵含法界非心非佛者眞爲本性過諸數量非聖無辯辯所不能言無佛可作無道可修經云若知如來常不說法是名具足多聞卽見自心具足多聞故草木有佛性者皆是一心飯食作佛事服作佛事故 嵩山安和尚昔讓和尚與坦然禪師在荊州玉泉聽律二人共相謂言我聞禪宗最上佛乘何必局此小宗而失大遂乃雲遊博問先知至嵩山安和尚處如何是祖師西來意旨師云何不問自家意他別人意旨作什麽如何是坦然意師云汝須密作用如何是密作用伏請指示師擧視之二人當時大悟 崛多三師因行至太原定襄縣歷村見秀大師弟子結草爲庵獨坐觀心師問作什麽對云師曰看者何人靜者何物其僧無對問此理如何乞師指示師曰何不自看何不自靜師見根性遲迴乃曰汝師是誰對云秀和尚師曰汝師只教此法爲當別有意旨云只教某看靜師曰西天下劣外道所習之法此土以爲禪宗也大悞人其僧問三藏師是誰六祖又云正法難聞汝何不往彼中其僧聞師示訓便往曹谿禮見六祖具陳上事誠如崛多所言汝何不自看何不自靜誰靜汝言下大悟 智策和尚遊行北地遇見五祖下智隍禪師二十年修定師問此間作什麽隍云入定師云入定者爲有心入也爲無心入也若有心入者卽一切有情悉皆有心亦合得定若言無心入者一切無亦合得定隍曰吾正入定之時不見有有無之心師曰若不見有有無之心卽是常定不應更有出入隍無對卻問汝師是誰汝師以何法爲禪定師曰妙湛圓寂用如如五陰本空六塵非有不出不入不定不亂禪性無住離住禪寂禪性無生離生禪心如虛空亦無虛空之量隍聞此說未息疑心遂振錫南行直往曹谿禮見六祖祖乃亦如上說隍於言下大悟 南嶽思大和尚云若言學者先須通心心若得通一切法一時盡通聞說淨不生淨念卽是本自淨說空不取空譬如鳥飛於空若住於空必有墮落之患無住是本自性體寂而生其心是照用卽寂是自性定卽照是自性慧卽定是慧體卽慧是定用離定無別慧離慧無別定卽定之時卽是慧卽慧之時卽是定卽定之時無有定卽慧之時無有慧何以故性自如如燈光雖有二名其體不別卽燈是光光是燈離燈無別光離光無別燈卽燈是光卽光是燈用卽定慧雙修不相去離牛頭融大師絕觀論問云何者是心六根所觀竝悉是心心若爲心寂滅何者爲體心爲體何者爲宗心爲宗者爲本心爲本若爲是定慧雙遊性寂滅爲定常解寂滅爲慧何者是智境起解是智何者是境自身心性爲境何者是舒照用爲舒何者爲卷心寂滅無去來爲卷舒則彌遊法界卷則足迹難尋何者是法界邊表不可得名爲法界法照禪師云經云三阿僧祇百千名號皆是如來異名卽眞心之別稱也又經云萬法不出一心此義是也夫縛從心縛解從心解解從心不關餘事出要之術唯有觀心乃至若擧一心門一切唯一心若一法非心則是心外有誰能在心外別制一條者梵禪師云若知一切法皆是法卽得解脫是法色是法經云不見法還與法作繫縛不見法還與法作解脫 藏禪師云於一切法無所得者卽心是道眼不得一切色不得一切聲 緣禪師云譬如家中有大石尋常坐臥或作佛像心作佛解畏罪不敢皆是意識筆頭畫作自忙自怕石中實無罪福 安禪師云直心是道何以故直念直用更不觀空亦不求方便經云直視不見直念不思直受不行直說不煩 覺禪師若悟心無所屬卽得道迹眼見一切色不屬一切色是自性解脫經云一切法不相屬故心與一切法各不相知 圓寂尼云一切法唯心無對卽自性解脫經云一切法不與眼作對何以故法不見法法不知法堯禪師云了心識性自體恒眞所緣念處無非佛法 朗禪師云凡有所見皆自心現道似何物而欲修之煩惱似何物而欲斷之稠禪師云一切外緣名無定相是非生滅一由自心若自心不心誰嫌是非能所俱無卽諸相恒寂 慧慈禪師云夫法性者大道法是法身性是覺性卽衆生自然性也以金剛般若如大火聚三昧焰焰諸累莫入故稱天上天下唯我獨尊 慧滿禪師云諸佛說心令知心相是虛妄法今乃重加心相深違佛意又增論議殊乖大理常齎四卷楞伽經以爲心要隨說隨行宗鏡錄卷第九十七音義他伹反平也安也 馱唐佐及又音陀字 脅虛業反胸脅也 挐女加反牽也倉案反 跳徒聊反躍也 踉呂張反跳踉 癲都年反病也居月反走也 嵩息弓反山高也 策楚革反謀也 隍胡光反祖雞反持也遺也戊申歲分司大藏都監開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