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金剛三昧經論卷中

ABC_IT_K1501_T_002
045_0081_a_01L금강삼매경론 중권
045_0081_a_01L金剛三昧經論卷中


신라국 사문 원효 지음
번역
045_0081_a_02L新羅國沙門 元曉 述


3. 무생행품(無生行品)
045_0081_a_03L旡生行品
045_0081_b_01L
【論】 보살은 관행(觀行)이 성취되었을 때 스스로 마음 관찰할 줄을 알고 이치[理]에 따라 수행하므로 마음을 일으키는 일[生心]이 있는 것도 아니며, 마음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고 또 행(行)이 있는 것도 아니며 행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만 증익으로 치우친 견해[增益邊]1)를 떠나기 위해서 임시로 ‘무생(無生)’이라고 하였으니, 유생(有生)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무생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손감으로 치우친 견해[損減邊]2)를 떠나기 위해서 임시로 ‘행(行)’이라고 한 것이니, 유행(有行)의 행이 있는 것은 아니나 무행(無行)의 행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무생행품(無生行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經】 그 때 심왕보살(心王菩薩)이 삼계(三界)를 벗어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모아 합장하고 게송으로 여쭈었다.
【論】 관행(觀行)에 대하여 따로 설명[別顯]하는 여섯 개의 품 중에 제1품은 모든 경계의 모습[境相]을 버리고 무상관(無相觀)을 설명한 것인데, 앞서 끝마쳤다. 여기서부터는 제2품으로 그 일어나는 마음을 없애, 무생행(無生行)이 어떤 것인가를 밝힌 부분이다. 이에 해당하는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내용 설명[正說]이고, 둘째는 설명에 대한 찬탄[讚說]이며, 셋째는 설명을 듣고 얻는 이익[聞說得益]이다.
첫째 정설(正說)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반복해서 문답한 것(往復問答)이고, 둘째는 반대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徵問答]이며, 셋째는 보살이 이해한 것[菩薩領解]이며, 넷째는 여래가 결론을 맺는 것[如來述成]이다.
첫째 반복해서 문답한 가운데 여섯 부분이 있다. 첫 번째는 질문[問], 두 번째는 대답[答], 세 번째는 따져 물음[難],3) 네 번째는 부정[拒],4) 다섯 번째는 다시 요청함[請], 여섯 번째는 해석[釋]이다.
처음의 질문도 둘로 나뉘는데, 먼저 앞 부분에는 경전을 기술하는 사람의 일반적인 서문이 있다. ‘심왕보살(心王菩薩)’이란 체(體)에 따라서 이름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심왕에는 크게 두 가지 뜻이 있으니 하나는 8식(識)의 마음이 모든 심수(心數)를 총괄적으로 제어하므로 심왕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일심(一心)의 법이 모든 덕[衆德]을 총괄적으로 포섭하므로 심왕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이 보살이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 하나의 심왕[一心王]을 증득했기 때문에 (증득한 심왕의) 체를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지금 이 품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무생행(無生行)이므로 심왕보살이 물은 것이다.
‘삼계(三界)를 벗어난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설법’이란, 들은 법(法)을 꺼내서 문제를 제기하는 발단으로 삼은 것인데, 들은 것이란 앞 품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는 우선 뒤의 것을 들면서 앞의 것을 반복하였으니, 즉 마지막(전품) 송(頌)에서 ‘초연히 삼계를 벗어나되……일승으로 성취한 것이로다’라고 한 문장이다.

【經】 여래께서 설하신 뜻은
세간을 벗어나 모습[相]이 없어
가히 모든 중생들에게
다 유루(有漏)를 끊게 하시네.

번뇌를 끊어 심(心)과 아(我)가 공하니
이는 생함이 없음일진대
생함이 없거늘 어찌하여
무생인(無生忍)이 있겠나이까?

【論】 이 두 게송은 질문[問辭]이다. 그 가운데 첫 송은 앞에서 설한 내용을 이해한 것을 노래한 것으로서, 위의 반(半)은 전에 말한 ‘일미법인[一味之法印]’을 이해한 것이요, 아래의 반은 ‘일승소성[一乘之所成]’을 이해한 것이다. 다음 1송은 의문을 일으킨 것인데, 그 중 위의 반은 무생의 뜻[無生義]을 물은 것이고, 아래의 반은 무생의 이치를 확실히 아는 것[無生忍]에 대해 물은 것이다. 이미 생이 없다면 그것을 아는 마음[忍心]도 없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經】 그 때 부처님께서 심왕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으며 모든 행(行)도 생겨남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무생(無生)의 행(行)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 무생인(無生忍)을 얻는다고 한다면 허망(虛妄)하다고 할 것이다.”
【論】 이것은 두 번째5) 답(答)하신 것이다. 답하신 뜻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무생인(無生忍)의 모습[相]을 제시하고, 다음에 얻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과실을 밝힌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란, 법이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사실을 통달하는 것이다. 이는 선정[定]ㆍ지혜[慧]와 모든 행(行)도 역시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생겨남이 없는 곳에서는 안다[忍]고 할 만한 행(行)이 있지 않으므로 ‘무생의 행이라고 할 것도 없다[非無生行]’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가운데에서 안다고 하는 행이 얻어진다면 이는 머묾도 없고[無住]ㆍ행함도 없는[無行] 참된 앎[眞忍]에 위배되므로 ‘허망하다’고 하였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생인(無生忍)을 얻는 것이 허망(虛妄)하다고 하시니 얻음도 없고 아는 것도 없다면 허망이 아니겠나이다.”
【論】 세 번째는 따져 묻는 것[難]이다. 묻는 의도는 이렇다. ‘만약 얻음과 앎이 있는 것을 허망하다고 한다면, 얻음이 없고 앎이 없는 것은 허망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허망과 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무소득(無所得)을 공부하는 대승의 수행자들이 이와 같이 헤아리면서 자신들은 허망하지 않다고 여기므로 그들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하여 이런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고 하면 그것은 얻음이 있는 것이다. 얻음이 있으면 머묾이 있는 것이니[有得有住:다른 본에는 ‘有得有忍’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생김이 있는 것이다. 얻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과 얻을 법(法)이 있다는 것은 모두가 허망이 된다.”
【論】 네 번째는 부정하는 것[拒]이다. 그 중에 둘이 있다. ‘아니다[不]’라고 한 것은 직접적인 거부이고, ‘어째서 그런가?[何以故]’ 이하는 부정하는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부정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無得無忍]’고 하는 저들의 생각이 비록 ‘얻음도 있고 앎도 있다[有得有忍]’할 때의 유(有)는 아니라 할지라도 ‘얻음도 없고 앎도 없다’는 무(無)를 얻는 것이다. 이미 무를 얻었다면 마음이 무에 머물고, 마음이 이미 머무름이 있으면 이는 생겨남이 있게 되는 것이다. 얻은 것이 있음[有所得]에 대해 마음이 생하므로 결국 무생무득(無生無得)에 위배된다. 그러므로 ‘모두 허망이 된다’고 하였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앎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無忍無生] 마음이라도 허망하지 않은 것이란 어떤 것입니까?”
【論】 다섯 번째는 간청[請]이다. 논란을 제기하였으나 더 물을 길은 없고 생각은 더 나아갈 수 없으므로 우러러 여쭈어 더 이끌어 주시기를 청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앎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마음이란, 형체[形段]가 없는 마음이다. 마치 불의 성질이 나무 속에 있으나 정해진 처소가 없듯이. 그것이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름과 글자가 있을 뿐 그 성질은 얻을 수가 없다. 이런 이치를 밝히기 위하여 이름을 빌어서 말할 뿐, 그 이름도 성립할 수 없다. 마음의 특성[相]도 그러하여 그것이 있는 처소를 볼 수 없으니, 이렇게 마음을 파악한다면 그것이 생겨남이 없는 마음이다.”
【論】 이 아래는 여섯 번째로 해석[釋]이다. 그 가운데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얻음이 없다는 도리를 밝히고[開無得道理], 둘째는 생멸이 없는 도리를 보여주고[示無生道理], 셋째는 틀린 생각을 예시하고[擧非], 넷째는 바른 견해를 밝혔다[明示].
얻음이 없다는 도리를 밝힌 것에도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주장[法]과 비유[喩]와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여 종합한 것[合]이다.
먼저 ‘앎이 없고 생겨남이 없는 마음[無忍無生心]’이란 바로 법인(法忍)에 있는 마음을 다시 한번 거론한 것이다.
‘형체가 없는 마음[心無形段]’이란 마음에 얻는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형(形)은 바탕[體]을 말하고 단(段)은 분위[分]를 말한다. 모든 연(緣)에서 마음의 바탕이나 분위를 찾아보아도 붙어 있거나 떠나 있거나 도무지 얻어지는 것이 없다. 이러한 도리에서 형단(形段)이 없다고 한 것이지, 색(色)을 말할 때 형단(形段)의 상이 없다고 하는 것과는 다르다. 비유에서 ‘불의 성질이 나무 속에 있으나’라는 말은 ‘아는 마음[忍心]이 이치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와 같은 뜻이다.
‘정해진 처소가 없듯이’라고 한 것은 이 나무 속을 보면 모든 극미[極微]가 있으나 그 중에 전혀 불의 성질이 있는 처소를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이치 중에는 갠지스강의 모래알 같이 많은 법문이 있으나 그 속에서 아무리 마음을 찾아보아도 영원히 그 소재가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 성질이 정해진 처소를 갖지 않는다는 도리는 부처가 세상에 있건 없건 어느 때나 법성이 항상 그러한 까닭에 ‘결정된 성품’이라고 하였다. 불의 성질이란 이름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건져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의 성질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 나무 속에는 불의 성질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도리를 밝히려고 ‘불의 성질’이란 이름을 말한 것이나, 이 이름을 아무리 두드리고 쪼개 보아도 다만 글자가 있을 뿐이다. 모든 글자를 다 찾아 돌아다녀보아도 불의 성질은 얻어지지 않는다, ‘아는 마음[忍心]’이란 이름과 특성[相]도 똑같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에 ‘마음의 특성도 그러하다’고 한 것이다.
확실한 앎[忍]을 얻은 보살이 마음이 이와 같은 줄을 알면, 어떻게 그 속에서 취하는 마음이 생기겠는가? 그러므로 ‘그것이 생겨남이 없는 마음[則無生心]’이라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 마음의 본성[性]과 특성[相]은 아마륵(阿摩勒) 열매와 같아서 본래부터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에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자기와 다른 것이 합쳐지는 데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생겨나는 원인을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일도 없는 것이다.[不因生無生:다른 본에는 ‘不因生不無生’으로 되어 있다.]
어째서 그런가? 연(緣)이 바뀌고 또 바뀌기 때문이다. 연이 일어났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니 숨고 나타나는 것이 다 모양이 없다. 근본 이치는 적멸(寂滅)하여 소재하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볼 수 없으니 결정된 성품이기 때문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인 생겨남이 없는 도리를 밝힌 부분[示無生道理]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먼저는 비유[喩]이고 다음은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이다. 유(喩) 가운데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네 가지 부정[四不]을 설명하고 나중에는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드러낸다.
‘네 가지 부정’이란 무엇인가? 연(緣)을 의지하기 때문에 자기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며, 제 씨앗이기 때문에 남에게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므로 자타가 합해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며, 작용이 있으므로 생겨남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자기가 없기 때문에 자기로부터 생긴다할 수 없으며, 이미 생겼을 때는 이미 있기 때문에 자기가 생겨날 필요가 없다. 자기에게서 생겨난다는 것이 이미 성립되지 않는데, 누구를 가리켜 남[他]이 있다고 하겠는가? 자기도 남도 이미 없는데 어찌 ‘합쳐지는 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원인이 있어서 생긴다 하는 것도 이미 되지 않는 말이니, 하물며 원인 없이 생길 수 있을까? 이런 방식으로 생겨남을 찾아보아도 전혀 찾아질 수 없다. ‘생겨나는 원인을 말미암지 않고 생겨나는 일도 없는 것이다’라고 한 것은 원인 없이 생기는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즉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생겼다고 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다음으로 숨은 의심을 풀어 주는 것이다. 의문을 품은 사람은 세 번째 부정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란 무엇을 말하는가? 열매[果]가 생기는 데는 씨앗이 직접적인 원인[親因]이 되고, 흙과 물 같은 것이 간접적인 계기[疎緣]가 되어 이 둘이 합쳐진 까닭에 열매가 생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합쳐지는 데서 생기는 것도 아니다[不共生]’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그러므로 어째서 그런가 하고 물었다.
‘연이 바뀌고 또 바뀌기 때문[緣代謝故]’이란 저 두 가지 연[親因ㆍ疎緣]이 잠시도 머물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바뀐다는 뜻이다. 머무는 시간이 이미 없다면 공용(功用)이 없다. 공용이 없으므로 합쳐서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 게송에서도 ‘제행(諸行)이 모두 찰나라서 머무름이 없거늘 하물며 작용이 있으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뀌고 또 바뀌는 것’을 따져보면 생겨나는 일도 없고 소멸하는 일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이미 잠시도 머무름이 없다면 생겨남이 없는 것이고, 생겨남이 없으므로 소멸도 없는 것이니, ‘연이 일어났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연이 바뀌었다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따져들어가 보면 숨고 나타나는 일이 다 없는 것이다. 숨었을 때는 씨앗으로 흙 속에 있고, 나타날 때는 싹과 줄기로서 땅 위에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근본 이치는 적멸하다’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의 뿌리와 줄기의 이치를 따져서 열매가 생기는 원인을 구하여도 결국 일어남이 없으므로 ‘적멸(寂滅)하여 소재하는 곳이 없으며 머무는 곳도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결정된 성품[決定性]이기 때문이다. 결정성의 의미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經】 “이 결정성은 또한 같은 것도 아니고[不一], 다른 것도 아니며[不異], 아주 끊어진 것도 아니고[不斷], 언제나 계속되는 것도 아니며[不常],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不入], 나오는 것도 아니며[不出], 생기는 것도 아니고[不生], 또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不滅]. 모두 네 가지 비방[四謗]을 떠나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으니, 생함이 없는 심성(心性)도 그렇다. 어찌 생겨난다, 생겨나지 않는다, 확실한 앎이 있다, 확실한 앎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論】 다음은 여덟 가지 부정[八不]을 밝힌 것이다. 법이 원래 그러함을 앞의 네 가지로만 밝힌 것이 아니라 같으냐, 다르냐[一異] 하는 등 여덟 가지 견해를 모두 끊어준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열매[菓]와 씨[種]가 하나가 아닌 것은 그 모양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다르지도 않으니, 씨를 떠나서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또 씨와 열매는 단절되어 있지도 않다[不斷]. 열매가 씨를 이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항상한 것도 아니니[不常], 열매가 생기면 씨는 없어지기 때문이다. 씨는 열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니 열매가 맺었을 때는 씨가 없기 때문이다. 열매는 씨 밖으로 나온 것도 아니니 씨일 때는 열매가 없기 때문이다. 들어가지도 나오지도 않으므로 생겨남이 없다. 언제나 지속되는 것도 아니고 단절되어 버리는 것도 아니므로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으므로 없다[無]고 말할 수 없고, 생기지 않으므로 있다[有]고 말할 수 없다.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멀리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고도 말할 수 없고, 또 중간에 해당되지도 않으니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非有非無]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네 가지 비방[四謗]을 떠나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다’고 하였다.
아마륵(阿摩勒) 열매가 말로 표현할 길이 끊겼듯이, 법을 확실히 아는 마음[法忍之心]도 이와 다를 것이 없으므로 ‘생함이 없는 심성(心性)도 그렇다’고 한 것이다.
【經】 “만일 마음에 얻음이 있느니 머무름이 있느니, 또는 그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반야[어떤 본에는 ‘반야’라는 두 글자가 없다]를 얻지 못한 자로서 긴 밤을 지내는 사람과 같다.”
【論】 이것은 세 번째로 틀린 생각을 예시[擧非]한 대목이다. 어떤 사람이 ‘무생을 확실히 아는 마음[無生忍心]은 심체(心體)를 가지고 있으며 무생(無生)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든가, 또는 ‘생겨남이 없는 이치를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는 심성(心性)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는 망집(妄執)으로서 보리와 반야를 가로막는다. 이 대목은 청정한 성품으로서의 깨달음[性淨菩提]과 그것을 증득하는 지혜[能證般若]를 얻지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보리는 ‘처음 일어난 보리[始起菩提]를 뜻하며, 반야는 보리의 원인을 뜻하는데, 깨달음의 원인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긴 밤’에 비유하였다. 무시이래의 망상은 큰 꿈이기 때문이다.
【經】 “심성을 명확히 분별하는 자는 심성이 한결같다[如]는 사실과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아니,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無生行]이다.”
【論】 이것은 네 번째로 바른 생각을 드러내는[顯是:明是] 것이다. ‘심성을 명확히 분별하는 자’란 자기 마음으로 자신의 심성(心性)을 잘 아는 자이다. 경에서도 ‘만약 대상을 취하는 작의[能取作意]를 가지고 반대로 대상을 취하는 그 작의를 통달한다면 이야말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평등하고 평등해져서 무루(無漏)의 지혜가 생기고 성제(聖諦)를 통달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심성이 한결같다는 사실을 안다’고 한 것은 스스로 관찰하는 마음을 안다는 뜻인데, 그 체의 성품[體性]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안다’고 한 것은, 아는 작용[能知用]도 그렇다는 것이니, 작용의 성품[用性]이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음의 체와 용이 평등하여 생겨남도 멸함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음을 관찰한다. 이런 이유로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是無生行]’이라고 하였다.
위에서 네 가지 부정[四不]으로 무생(無生)을 밝힌 것은 무생의 이치를 드러내는 것으로서, 이치란 범부와 성인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한편 여기서 한결같음[如]을 아는 것으로 무생(無生)을 밝힌 것은 무생의 행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행이란 성인에게만 해당한다. 성인에게만 있는 행은 이치와 일미(一味)이며, 공통하는 이치는 지혜와 평등하니 평등한 일미이기 때문에 성인도 달리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공통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으므로 성인도 같게 할 수가 없다.
‘같게 할 수 없다[不能同’]는 것은 같지만 다른 것이요, ‘달리 할 수 없다[不能異]’는 것은 다르지만 같다는 뜻이다. ‘같음[同]’이란 다른 데서 같은 것을 알아내는 일이요, ‘다름[異]’이란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히는 것이다. ‘같은 데서 다른 것을 밝힌다’는 것은 같은 것을 나누어서 다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또 ‘다른 데서 같은 것을 알아낸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녹여서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실로 같음이란 다른 것들을 녹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같음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다름이란 같은 것을 나누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름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다만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같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요, 같다고 할 수는 없으므로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도, 둘도 아니요 별개도 아니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만일 마음이 본래부터 한결같아[如] 행(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모든 행이 생겨나지 않으며, 생겨나는 행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생겨나지 않고 행도 없으니 이것이 무생행(無生行)이 아니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로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6)인데 여기에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행을 들어 이치를 논란한 것[擧行難理]이고, 둘째는 증득한 것이 있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말씀[反詰有證]이고, 셋째는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證], 넷째는 얻은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 것[反詰有得], 다섯째는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得], 여섯째는 증득한 것이 없다고 진술한 것[述無證得], 일곱째는 의심나는 곳을 다시 진술한 것[更陳所疑], 여덟째는 그 의심을 결단해 준 것[決其所疑]이다.
위 경문은 첫 번째로서 행을 들어 이치를 논란한 대목이다. ‘만일 마음이 본래부터 한결같아서 행(行)에 대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행무생(行無生)의 뜻을 거론한 것이다. 즉 앞에서 ‘심성이 한결같다[如]는 사실과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는 사실을 아니, 그것이 바로 생겨남이 없는 행[無生行]이다’라고 한 대목으로서, 생멸하는 행에 마음이 생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는 무생행(無生行)의 상(相)을 직접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모든 행이 생겨나지 않는다’ 함은 이치가 생함이 없음[理無生]을 들어 말한 것으로서, 즉 모든 중생의 5음(陰)의 모든 행(行)은 본래 생겨나는 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생겨나는 행도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한 것은 이치의 무생이 행의 무생과 다름을 밝힌 것이다. 말하자면 생겨난 행이란 그대로가 공(空)이라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지, 이치를 깨달아 마음을 없애서 생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겨나지도 않고 행도 없으니’라고 한 것은 이치의 무생과 행의 무생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묻는 자의 뜻은 이렇다. 생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심행(心行)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무생인(無生忍)의 경우, 분별이 없기 때문에 무생행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생인(無生忍)을 증득하지 못하는 범부가 아무도 없어야 할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무생(無生)으로써 무생행(無生行)을 증득하였느냐?”
【論】 이것은 두 번째로, 증득한 것이 있느냐고 따지듯이 묻는 말씀[反詰有證]이다. 묻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네가 무생인을 관하려고 들어갔을 때 모든 행이 무생이라는 이치에 의하여 무생이라는 행을 얻었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반문하여 따지는 이유는, 저 보살이 이무생(理無生)은 행무생(行無生)과 다르다고 생각하여 ‘이무생이 행무생과 마찬가지냐’고 따져 묻기 때문에 ‘네가 관(觀)에 들었을 때 이(理)와 행(行)이 달라서 능(能)과 소(所)가 있더냐’고 반문하신 것이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아닙니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생멸이 없는 행이란 본성[性]과 모양[相]이 공적하여 봄도 없고 들음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으며,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으며, 앎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는데 어떻게 증득할 수 있겠나이까? 증득했다고 한다면 쟁론(諍論)이 되리니, 다툼도 없고 논함도 없어야 무생의 행이 될 것입니다.”
【論】 이것은 세 번째로, 증득이 없음을 부처님께 답한 것[奉答無證]인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증득이 없음을 밝히고[明無證], 둘째는 잘못된 생각을 들고[擧非], 셋째는 바른 생각을 드러냈다[顯是]. 첫째 가운데도 둘이 있는데 처음에는 간단히 요지를 표하고 다음에는 풀이를 하였다.
‘생멸이 없는 행이란 본성과 모양이 공적하다’고 한 것은 총괄적으로 요지를 내세운 말이다. ‘본성이 공적하다’는 것은 마음의 체성을 관찰해보면 나고 죽는 모양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즉 앞에서 ‘심성(心性)이 한결같음을 알면’이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모양이 공적하다’는 것은 마음의 아는 작용을 관찰해보니 작용하는 모양[用相]도 역시 한결같다는 뜻이다. 즉 앞에서 ‘그것을 아는 성품 역시 한결같다’라고 한 구절에 해당한다.
이어서 열 가지 무[十無]로서 요지가 되는 첫 구를 풀이한다.
‘봄도 없고 들음도 없다’ 함은 심성의 희이[希夷]7)를 말한 것이다. 이(夷)하기 때문에 색(色)을 끊었으므로 상(像)을 통해 표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희(希)하기 때문에 소리를 끊었으므로 교(敎)를 통해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 함은 공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밝히고, 또 생기는 것을 쫓아 버리지만 잃을 것이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없음[四無]은 성품이 공적함[性空寂]을 풀이한 것이다.
‘말함도 없고 설함도 없다’ 함은 심과 행이 이미 고요하여 언설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며, ‘앎도 없고 모양도 없다’ 함은 심과 행이 적멸하여 2분(分)8)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다’ 함은 이미 분별이 없으므로 성품이라고 취할 만한 것도 없고, 모양이라고 버릴 만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상 여섯 가지 없음[六無]은 모양이 공적함[相空寂]을 풀이한 것이다.
무생행 중에 있다면 이렇게 공적한데 어떻게 거기서 취하고 증득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답할 때 앞에서 제기했던 논란이 논란으로서 성립되지 않음을 스스로 알게 되었다. 잘못을 들어 옳은 것을 나타내었으니 따져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느냐?”
【論】 이것은 네 번째로, 얻은 것이 있느냐고 반문한 것[反詰有得]이다. 보살이 아직 아뇩보리를 얻지 못했는데 여래께서 무슨 까닭으로 ‘너는 그것을 얻었느냐’고 물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이에 대한 해답은 이렇다. 보살이 아직 구경보리(究竟菩提)는 얻지 못하였으나 초지(初地)의 보리는 이미 증득했다. 『법화론(法華論)』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8생(生)에서 1생(生)까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자는 초지의 보리를 증득한다. 그러므로 삼계의 분단생사(分段生死)를 떠나서 분수에 따라 진여불성을 볼 수 있는데, 이를 가리켜 보리를 얻었다고 하는 것이지 여래의 방편을 완전히 만족한 열반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이는 진여불성에 의하여 보리라고 한 것이며, 그것을 증득해서 보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고 표현했다. 경에서 “모든 법의 성품이 공한 것, 이것이 보리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이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나이다. 왜냐하면 보리의 성품 중에는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으며,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으며, 분별도 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별이 없는 가운데 청정한 성품이 있고, 그 성품에는 섞여 들어감이 없으며, 언설도 없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닙니다. 따를만한 모든 법행도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행(法行)은 처소를 보지 않으니 결정성이기 때문입니다. 얻음이나 얻지 못함이 본래 없는데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나이까?”
【論】 이것은 다섯 번째로, 얻은 것이 없다고 부처님께 대답한 것[仰報無得]인데 언표[標]와 해석[釋]과 결론[結]의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해석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얻을 대상인 보리에는 얻을 성품[所得性]이 없음을 밝히고, 나중에는 얻은 모든 행에는 얻는다는 생각[能得相]이 없음을 나타냈다.
처음에 ‘보리의 성품’이라고 말한 것은, 진여(眞如)의 성품(性)이 텅 비어 걸림이 없고 그 성품이 어둠의 가림을 떠나 있기 때문에 ‘보리’라고 이름 붙인 것이다. 그 중에는 간직할 참된 성품이 본래 없고, 없앨 망상도 본래 없으므로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본각은 사려로 구성한 깨달음[思構之覺]을 멀리 떠났고, 홀연[率爾]9)히 앎도 없기 때문에 ‘깨달음도 없고 앎도 없다’고 하였다.
이미 분별하는 견(見)이 없고, 행의 대상이 되는 상(相)도 떠나 있으므로 ‘분별과 상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이유로 혹(惑)의 상에 의해 탁(濁)해지지 않으며, 본성(本性)이 더러움을 떠났으므로 ‘청정한 성품’이라고 하였다. 종(縱)으로는 생멸(生滅)이 섞여 들어오지 않으며, 횡(橫)으로는 능소(能所)가 뒤섞이지 않으므로 ‘성품에는 섞여 들어감이 없다’고 하였다.
‘언설도 없다’란, 말이라는 도구[能言]와 말이 지시하는 바[所言]가 다 끊어졌기 때문이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라’고 한 것은 비록 여여함이 있지는 않지만 여여함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앎도 아니고 모름도 아니다’라고 한 것은 본각(本覺)이 아니며 불각(不覺)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의 성품은 이와 같이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따를 만한 모든 법행’ 이하는 얻음을 가능케 하는 행[能得行]이 없음을 나타내는데, 전품(前品)에서 ‘6도(度)의 행(行)이 실다운 궤범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 대목에서와 같은 뜻으로 쓰였기 때문에 ‘따를 만한 법[可法]이라고 한 것이다.‘(법행도)그렇습니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무득(無得)이라 한 의미와 같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이다.
‘모든 법행[一切法行]’이란 6도(度) 등의 행을 말한다. ‘처소를 보지 않음[不見處所]’이란 득(得)과 실(失), 각(覺)과 지(知), 나아가 유(有)와 무(無), 지(知)와 부지(不知) 등 행할 만한 처소를 보지 않기 때문에 보리와 평등하고, 평등하기 때문에 본래 유능득(有能得)과 불능득(不能得)이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하는 얻을 수 없는 이치를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구절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네가 말한 대로 모든 심행은 무상(無相)에 불과하니, 체(體)가 고요하고 생겨남이 없다.”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번째로, 여래의 설명[如來述成]인데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는 설명[正述]이고, 둘째는 틀린 견해를 지적한 것[擧非]이며, 셋째는 옳은 견해를 밝힌 것[顯是]이다.
정술 중에도 셋이 있는데 처음에는 통틀어 서술했고[摠述], 다음에는 따로따로 서술하였으며[別述], 뒤에는 다시 결론을 맺었다[結成].
‘그렇다, 그렇다[如是如是]’한 데서 앞의 ‘그렇다’는 (무생을) 증득하지 못했다[無證]고 한 대목을, 뒤의 ‘그렇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다[無得]고 한 대목을 두고 한 말씀이다.
‘모든’ 이하는 두 번째인 별술(別述)이다. 먼저 무생(無生)을 말하고 뒤에는 적멸(寂滅)을 말한다. 무생이란 무생의 행[無生行]이니, 능증(能證)과 능득(能得)이 없음을 말한다. 적멸이란 적멸의 이치[寂滅理]이니 소증(所證)과 소득(所得)이 없음을 말한다.
처음에 말한 ‘모든 심행’이란 출세간의 무분별지(無分別智)와 상응하는 모든 심행을 말하는데, 어떤 모양도 취하지 않고 모양 없는 곳을 깨달아 합치[證會]하기 때문에 ‘무상(無相)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모든 심행은) 공적(空寂)을 체(體)로 하여 전혀 생함이 없기 때문에 ‘체가 고요하고 생함이 없다’고 하였다.
【經】 “식(識)마다[可有識識:어떤 본에는 ‘所有諸識’이라고 되어 있다] 모두 그러하다. 어째서 그런가? 눈[眼]과 안촉(眼觸)이 모두 공적하고 식도 공적하여 움직이는 모양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모양도 없으며, 안으로 3수(受)가 없어 3수도 적멸하기 때문이다. 귀[耳]ㆍ코[鼻]ㆍ혀[舌]ㆍ몸[身]과 심(心)과 의(意)와 의식(意識), 그리고 말나식(末那識) 아리야식(阿梨耶識)도 그와 같아 모두 생기지 않으니 적멸심이며 무생심이다.”
【論】 이것은 두 번째인 (別述을 無生과 寂滅 둘로 나눈 가운데) 적멸의 의미를 설명한 것으로서, 모든 세간의 여덟 가지 식이 공적함을 말한 것이다. 이 중에도 둘이 있으니 하나는 앞의 내용에 예를 든 것이고, 둘은 자세한 해석이다.
맨 앞에 ‘식마다[識識] 모두 그러하다’고 한 것은, 존재하는 세간의 8식(識)을 모두 포함한다는 뜻으로서, ‘곳곳에서’라는 표현이 모든 곳을 다 포함하는 예와 같다. ‘그러하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공적한 마음이 ‘세간을 벗어난 마음이란 생기지 않는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둘째인 자세한 해석이다. ‘눈[眼]’은 안근(眼根)을 말하고, ‘안촉(眼觸)’은 즉 변행(遍行)10) 중의 촉(觸)을 말하는데, 세 가지가 화합[三和]11)하는 데서 생긴다. 셋을 화합하게 하면서도 그것들은 흩어져 공(空)이 되므로 그것을 밝히기 위해 한 예를 든 것이다.
‘식도 공적하다’ 함은 안촉이 이미 공하므로 안식(眼識)도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속 이어지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으며, 또한 한 찰나도 옮기고 움직이지 않는 적이 없다. 그러므로 ‘움직이는 모양도 없고 움직이지 않는 모양도 없다’고 하였다.
‘안으로 3수(受)12)가 없다’고 한 것은 3수가 생겨나지만 그것들이 본래 적멸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음에 관한 모든 법수(法數) 중에서 촉(觸)과 수(受)가 가깝고 다른 것에 비해 두드러진 공능을 가지므로 이 둘을 들어서 나머지 법들을 다 포함해버린 것이다.
‘귀ㆍ코ㆍ혀ㆍ몸’이란 귀[耳]ㆍ이촉(耳觸)ㆍ이식(耳識) 등을 말한다.
‘심(心)ㆍ의(意)ㆍ의식(意識)’이란 제6식을 말한다. 미래로 보아서 심이라 부르고, 과거로 보아서 의라고 부르고, 현재로 보아서 의식이라고 부른다. 수전문(隨轉門)13)에 의해서 이 세 가지 이름을 들어 3세가 모두 공적함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말나식과 아리야식은 제7ㆍ제8식을 말하는데, 모두 안식과 같아서 역시 생기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자세히 해석하는 문장이다.
다음에 ‘적멸심(寂滅心)’이란, 바로 위에 나오는 ‘8식이 공적하다’는 내용을 결론짓는 말이고, ‘무생심(無生心)’이란 저 앞의 ‘체(體)가 고요하고 생겨남이 없다’는 말을 결론지은 것이다.
【經】 “만약 적멸심을 일으키거나 무생심을 일으키면 이는 유생행(有生行)이지 무생행(無生行)이 아니므로 안으로 3수(受)14)와 3행(行)15)과 3계(戒)가 생긴다.”
【論】 이는 (如來述成을 正述, 擧非, 顯是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로 틀린 견해를 지적한 것[擧非]이다. 얻을 바가 있다고 여기면서 대승을 공부하는 이가 여덟 가지 식이 공적하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적멸에 위배되므로 ‘적멸심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세간을 벗어난 마음이 무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심(心)이 생겨 형상이 없는 이치를 증득하였다고 생각하므로 ‘무생심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다만 이것은 세간에서 유전(流轉)하는 행이라서 출세간의 무생인행[無生忍行]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는 유생행…’이라고 하였다.
‘3행(行)’이란 신(身)ㆍ구(口)ㆍ의(意)로 짓는 일이며, 선(善)과 불선(不善)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3계(3戒)’란 신ㆍ구ㆍ의가 그치는 것[止]이며 오직 선에만 해당한다. 이 세 가지 행(行)과 세 가지 계를 일으키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3유(有)에 태어나 3수(受)를 모두 다 받는다. 이와 같이 끊임없이 돌고 돌면서 벗어나지 못한다.
【經】 “만약 생겨나는 마음을 적멸케 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힘씀[功]도 없고 작용[用]도 없으며, 적멸의 상을 증득하지 않으며, 증득이 없다는 데[無證]도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모든 곳에 머물지 않는다. 이렇게 형상이 없음을 총지(總持)하면 3수(受)가 없다. 3수 등의 세 가지가 다 적멸한지라, 청정하여 머묾도 없고, 삼매(三昧)에도 들지 않고, 좌선(坐禪)에도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무생(無生)이며 무행(無行)이다.”
【論】 이것은 세 번째로, 옳은 견해를 밝힌 것[顯是]이다. ‘만약 생겨나는 마음을 적멸케 하여 생겨나지 않게 하면’이란 앞의 ‘만약 적멸심을 일으키고’란 구절과 반대로, 생하는 모든 마음을 버려서 생함을 취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음이 항상 적멸하여 힘씀도 없고 작용도 없음’이란 앞서 ‘만약 무생심을 일으키면’이란 구절과 반대로, 생기고 소멸하고 일어나고 움직이는 모든 모습을 떠나 있으며, 작의(作意)ㆍ분별(分別)ㆍ공용(功用)도 없다는 말이다. ‘적멸의 상을 증득하지 않음’이란 일어나는 마음은 떨어버렸다 할지라도 적멸의 상을 머물러두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 ‘증득이 없다는 데도 머무르지 않음’이란 적멸의 모습을 취함이 없다고 할지라도 증득이 없는 잘못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그렇게 말했다.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모든 곳에 머무르지 않음’이란 머무름과 집착의 잘못을 전체적으로 밝힌 것이니, 머물 만한 곳이 어디든 다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머물 만한 소지가 있는 곳’이란, 일어남을 버리면 적멸에 머물 소지가 있고, 유증(有證)을 버리면 무증(無證)에 머물 소지가 있는데, 이와 같이 머물 만한 곳에 모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형상이 없음을 총지함’이란 공덕을 다 구족했음을 총괄해서 나타낸 것이니, 무생심이 모든 행덕(行德)을 간직하여 차별 없는 일미(一味)의 상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3수 등의 세 가지가 없다’고 한 것은 앞에서 ‘안으로 3수 등이 생기고’란 구절의 반대로, 유전하는 인과의 모습을 멀리 떠났기 때문이다. ‘다 적멸한지라’한 것은 3수(受) 등이 본래 공(空)함을 통달했기 때문이다. ‘청정하여 머묾도 없다’ 함은 통달한 마음도 공에 머무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삼매에도 들지 않는다’ 함은 선정에 들려는 세간의 마음을 없앴기 때문이다. ‘좌선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선(禪)의 고요함에 머무르려는 세간의 마음도 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생겨나는 마음이 없으며, 또한 분별하는 행(行)도 없으므로 ‘무생이며 무행이다’라고 하였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선(禪)은 움직임을 거두어 모든 환상과 혼란을 가라앉히는 것인데 어찌하여 선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論】 이것은 일곱 번째로,16) 의심나는 곳을 다시 진술한 것[陳疑,更陳所疑]이다. 의심하는 뜻은 이렇다. ‘모든 선정(禪定)은 들떠 동요하는 생각을 거두고 산란한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출세간 무생행의 마음에서는 선정에도 들어가 머물지 않는다는 것인가? 선을 행하지 않는다면 필시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의심이 있으므로 말이 난 김에 그렇게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선(禪)이라고 하면 그것은 움직임[動]이니, 움직이지도 않고 선정을 닦지도 않아야 이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으니 선을 생한다는 상을 떠난 것이다.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는 것이니 선에 머문다는 움직임을 떠난 것이다. 선의 본성에는 움직임과 고요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 무생(無生)과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는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의지하여 머무는 일이 없으며, 마음도 동요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혜이기 때문에 무생의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얻는다.”
【論】 이것은 여덟 번째로 의심을 결단해준 것[決疑,決其所疑]이다.
‘선이라고 하면 그것은 움직임이다’라고 말한 것은, 세간의 선은 비록 산란한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계의 모양을 취하는데, 모양을 취하는 마음이 생기면 움직임이 생기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와 같이 움직임을 일으키는 선(禪)을 떠나야 비로소 이정(理定)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이 무생선(無生禪)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정(理定)은 그 본성이 생겨나거나 움직임이 없는 것이므로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다’고 하셨다. 생겨남이 없을 뿐만 아니라, 고요함에 머무는 일도 없으므로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다’고 하셨다.
생겨남이 있으면 그것은 모습이요, 머무르고 집착함이 있으면 그것은 움직임인데, 여기서는 이것과 반대되므로 ‘선을 생한다는 상을 떠난 것’, ‘선에 머문다는 움직임을 떠난 것’이라고 하였다.
위의 모든 구(句)들은 이정의 특성[理定相]을 밝히고 있다.
‘선의 본성에 …을 알면[知禪性]’ 이하는 이(理)와 지(智)의 특성을 설명한다. 하나의 체(體)를 가지고 두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선의 본성에는 움직임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이란 선의 본성은 생겨남이 없음을 안다는 뜻이다. ‘선의 본성에는 고요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이란 선의 본성은 머묾이 없음을 안다는 뜻이다.
‘무생(無生)을 얻는다’ 함은 이치[理]의 무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는다’ 함은 행(行)의 무생을 얻는다는 말이다. ‘그것 역시 의지하여 머무는 일이 없다’ 함은 무생을 아는 지혜는 이치에 의하여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니 능(能)과 소(所)를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도 동요하지 않는다’ 함은 이치에 의지해 머무르지는 않지만 마음을 일으켜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혜로 피안에 도달하므로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이상 여덟 대목이 합해서 두 번째인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이 된다.
【經】 심왕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생반야(無生般若)는 어느 곳에든 머묾이 없으며, 모든 곳에서 떠남도 없으며, 마음에는 머무는 곳도 없으며, 머물려는 마음도 없어서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나이다. 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무나니,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라면 무생의 머묾이라 하겠습니다.
존자시여, 심무생행(心無生行)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한 것 속에서는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
【論】 이는 세 번째인 보살이 이해하는 대목[菩薩領解]이다.
‘어느 곳에든[一切處]’이란 진(眞)이다, 속(俗)이다, 동(動)이다, 적(寂)이다 하는 모든 곳을 가리킨다. ‘머묾이 없다’ 함은 일체에서 얻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떠남도 없다’ 함은 일체에서 얻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저 일체란 다 그런 것도 아니지만,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는 머무는 곳도 없다’ 함은 머무는 대상[所]으로서의 처소가 없다는 뜻이요, ‘머무르려는 마음도 없다’ 함은 머무는 주체[能]로서의 마음이 없다는 뜻이다. ‘머묾도 없고 마음도 없다’ 함은 앞의 두 구절을 합쳐서 머무는 곳과 머무는 마음이 없으므로 하는 말이다.
‘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문다’ 함은 무생(無生)ㆍ무주(無住)의 마음이 없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이와 같이 머무는 마음’이란 앞에서 ‘어느 곳에든 머묾이 없으며 모든 곳에서 떠남도 없다’한 대목을 결론지은 말이니, ‘떠남이 없다’는 뜻을 가지고 머문다는 의미를 가설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무생의 머묾이라 하겠습니다’ 함은 ‘마음에 머무는 곳도 없으며……마음이 생겨남 없이 머무나니’라고 한 대목을 결론지은 말이니, 머묾이 머묾 없음이고, 머묾 없음이 머묾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심무생행은 불가사의하다’고 한 것은 언설(言說)을 여의고 사려(思慮)를 벗어나 끊었기 때문이다. ‘불가사의한 것 속에서는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라고 한 것은 말을 떠났고, 말 떠남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이언(離言)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이요, 이언을 여의었기 때문에 또 말할 수가 있다고 한 것이다.
‘말할 수 있다[可說]’ 함은 그렇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말할 수 없다[不可說]’ 함은 그렇기만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총괄적으로 ‘말할 수 있기도 하고 말할 수 없기도 하다[可不可說]고 하였다.
언설(言說)에는 가(可)ㆍ불가(不可)가 있다고 함과 같이 사유에도 가ㆍ불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다만 여기에서는 한 가지만을 들어서 숨겨진 다른 쪽까지도 드러낸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論】 이것은 (正說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네 번째로, 여래가 결론을 맺는 대목[述成,如來述成]이다.
보살이 앞에서 이해한 것이 도리에 계합할 뿐만 아니라, 위로는 부처님 말씀에 들어맞았으므로 부처님께서 ‘그렇다, 그렇다’하고 반복하셨다.
장행(長行)으로 된 정설(正說)은 이상으로 끝났다.
【經】 심왕보살이 이런 말씀을 듣고 이제껏 없었던 일이라고 감탄하면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17) 게송으로 찬탄한 부분[以偈讚說]이다. 여기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서문(序文)이요, 다음이 게송이다. ‘이런 말씀을 듣고’란 이 품(品)에 전체에 나온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뜻이다.

【經】 큰 지혜를 구족하신 세존께서
생함이 없는 법을 널리 설하셨으니
이제껏 듣지 못한 것을 들었사옵고
아직 설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설하셨네.

【論】 이 아래 세 개의 송(頌)은 따로 송(頌)한 글이 아니고 다만 총괄적으로 찬탄한 것이다. 여기에 법(法)ㆍ비유[喩]ㆍ비유를 법에 대입시킴[合]ㆍ결론[結]의 네 부분이 있다.
첫 번째 송은 법(法)을 말씀해 주신 것을 찬탄한 것이다.
‘아직 설하지 않았던 것을 이제 설하셨다’ 함은 비록 앞에서 광범하게 설명하였지만 지금 이 경에서는 말은 간략하나 의미는 풍부하고, 글은 간추려 있지만 이치는 자세하므로 이와 같은 묘한 법을 일찍이 설한 적이 없었기에 하는 말이다.

【經】 마치 맑은 감로가
간혹 한번 나타나듯이
만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우며
듣기 또한 어려워라.

위 없는 좋은 복밭이며
최상의 훌륭한 약이어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지금 우리를 위해 말씀하셨네.

【論】 앞에서부터 두 구는 두 번째인 비유이다. ‘감로’란 불사(不死)의 약이니, 이 경이 사람들을 생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줌을 비유한 것이다. 다음의 네 구는 세 번째인 비유를 법에 대입시킨 부분[合]이다. ‘위 없는 좋은 복밭’이란 법을 듣는[能聞] 사람들을 찬탄한 것이다. 그리고 최상의 훌륭한 약이란 들은[所聞] 법을 말한 것이다. 아래의 두 구는 네 번째인 결론[結]에 해당한다.
【經】 그 때 대중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모두 무생(無生)과 무생반야(無生般若)를 얻었다.
【論】 이것은 세 번째, 당시 대중이 이익 얻음[時衆得益]을 밝힌 것이다. 초지에 들기 전[地前]의 범부가 이 품을 듣고 초지(初地)의 무생인(無生忍)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045_0081_a_04L 論曰菩薩觀行成就之時知自觀心順理修行非有生心非旡生心亦非有行亦非旡行爲離增益邊故假說爲旡生不於有生生心不於旡生生心故爲離損減邊亦假說爲行雖非有有行之而非旡旡行之行故是故立名旡生行品 經曰爾時心王菩薩聞佛說法出三界外不可思議從座而起叉手合掌以偈問曰 論曰別顯觀行有六分第一遣諸境相顯旡相觀竟在於前此下第二泯其生心明旡生行就文有三一者正說二者讚說第三明聞說得益初正說中有其四分一者往復問二者反徵問荅三者菩薩領解四者如來述成中有六一問二荅三難四拒五請六釋初中有二經家序心王菩薩者從體立名然心王之義略有二一者八識之心御諸心數故名心王二者一心之法摠御衆德故名心王今此菩薩入旡生行證一心王故從所體以立名也今此品中明旡生行所以心王菩薩發問出三界外不可思議者是出所聞之法以爲發問之本其所聞者謂前品說今且擧後以攝其前最後頌言超然出三界乃至所成故 經曰如來所說義 出世旡有相 可有一切生皆得盡有漏 斷結空心我 是卽旡有生云何旡有生 而有旡生忍論曰此二頌是問辭於中初頌領前所說上半領前一味法印下半領次一乘#所成後一頌正發問於中上半牒旡生義下半問旡生忍旣旡有生應旡忍心 經曰爾時佛告心王菩薩言善男子旡生法忍法本旡生諸行旡生非旡生行得旡生忍卽爲虛妄論曰是第二荅荅意有二先示旡生忍相後顯有得過失旡生法忍者達法本旡生是則定慧諸行亦旡有生非於旡生有能忍行故言非旡生行於中有得能忍之行則乖眞忍旡住旡行故言卽爲虛妄心王菩薩言尊者得旡生忍卽爲虛妄旡得旡忍應非虛妄 論曰是第三難難意而言若謂有得有忍是虛妄者則謂旡得旡忍應非虛妄反虛妄故學大乘旡所得者作如是計自謂非妄爲顯彼妄故作是難 經曰佛言何以故旡得旡忍是則有得有得有住是則有生有生於得有所得法竝爲虛妄論曰是第四拒於中有二不者直拒何以故下第二釋拒拒意而言若彼意謂旡得旡忍則雖不得有得有忍之有而猶得其旡得旡忍之旡旣得於旡者心住於旡心旣有住卽是有生謂有心生於有所得亦違於旡生旡得是故說言竝爲虛妄 經曰王菩薩言尊者云何旡忍旡生心而非虛妄論曰是第五請追難路窮意不能詣故須仰諮請爲將導經曰佛言旡忍旡生心者心旡形段猶如火性雖處木中其在旡所決定性故但名但字性不可得欲詮其理假說爲名名不可得心相亦爾不見處所知心如是則旡生心 論曰此下第六爲釋於中有四開旡得道理次示旡生道理三者擧非四者明是中有三謂法初言旡忍旡生心者是牒正在法忍之心言心旡形段者顯心旡所得形之言體段之言分就諸緣中求心體分若卽若離皆旡所得由是道理故旡形段非謂旡色形段相也喩中火性雖處木中者喩於忍心雖處理中其在旡所者就此木中有諸極微於中都旡火性所在如是理中有恒沙法於中求心永旡所在如是火性旡處道理有佛旡佛法性常爾故言決定性故火性名下義不可得是火性雖不可得而其木中非旡火性欲詮此理說火性名推析此名但有諸字轉求諸字皆旡所得心名相當知亦爾故次合言心相亦爾得忍菩薩知心如是何得於中能取心生以之故言則旡生心經曰善男子是心性相又如阿摩勒菓本不自生從他生不共生不因生旡生何以故緣代謝故緣起非生緣謝非滅隱顯旡相根理寂滅在旡有處不見所住決定性故 論曰此下第二明旡生理於中有先喩次合喩中有二先明四不後顯八不言四不待緣故不自生自種故不他生旡作故不共生用故不旡生又復未生時旡自故不從自生已生時已有故不須自生自旣不成待誰有他自他旣旡得有共有因而生旣不可得何況得有旡因而生是求生皆旡所得言不因生旡生者明不旡因而生謂不能生因旡而果得生也何以故下次釋伏疑者意曰三不可爾第三云何意謂菓生種子爲親因地水爲疏緣此二共合故有菓生云何而言不共生是故問言何以故也緣代謝故者明彼二緣先代後謝不得暫停停時旣旡則旡功用功用旡故俱不生果如偈說言諸行皆剎那住尚旡況用故又求代謝旡生旡滅所以然者旣旡暫住則旡有生生旡有故則旡有滅故言緣起非生緣謝非滅如是推求顯皆旡隱者種子在土下故顯者芽莖出地上故理寂滅者推其樹根及樹幹理求生菓因畢竟旡起故言寂滅在旡有處不見所住所以然者決定性故決定性義如前所說 經曰是決定性亦不一不異不斷不常不入不出不生不滅離諸四謗言語道斷#旡生心性亦復如是云何說生不生有忍旡忍次明八不非直法爾唯前四不亦乃具絕一異等八所以然者菓種不一其相不同故而亦不異離種旡菓故又種菓不斷菓續種生故而亦不常菓生種滅故種不入菓菓時旡種故#菓不出種種時旡菓故不入不出故不生不常不斷故不滅不滅故不可說旡#不生故不可說有遠離二邊故不可說爲亦有亦不當一中故不可說非有非旡故言離諸四謗語道斷阿摩勒菓如是絕言法忍之心亦不異此言旡生心性亦如是等也 經曰若有說心有得有及以見者卽爲不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般若是爲長夜 論曰此是第三擧非謂有說言旡生忍心心體可得住於旡生及與能見旡生理者不了心直是妄執能障菩提及其般若是明不得性淨菩提能證般若又菩提者始起菩提言般若者菩提之不得覺因故爲長夜旡始妄想是大夢故 經曰了別心性者知心性如是性亦如是旡生行 論曰此是第四顯是言了別心性者卽以自心了自心性如經言若能以其能取作意還能通達能取作意是方乃能緣所緣平等平等旡漏智生通達聖諦故知心性如者知自觀心體性平等故是性亦如者是能知用用性平等故如是觀心體用平等旡生旡滅旡始旡終以之故言是旡生行上明四不之旡生者顯旡生理理通凡聖今明知如之旡生者明旡生行行別在聖在聖之行與理一味遍通之理與智平等平等一味故聖人所不能異也有通有別故聖人所不能同也不能同者卽同而異也不能異者卽異而同也同者辨同於異異者明異於同明異於同者分同爲異也辨同於異者非銷異爲同也良由同非銷異故不可說是同異非分同故不可說是異但以不可說異故可得說是同不可說同故可得說是異說與不說旡二旡別矣 經曰心王菩薩言尊者心若本如旡生於行諸行旡生生行不生不生旡行卽旡生行也 論曰此下第二反詰問荅於中有八一擧行難理二反詰有證三仰報旡證四反詰有得五仰報旡得六述旡證得七更陳所疑八決其所疑此卽第一擧行難理言心若本如旡生於行者擧前所說行旡生義謂卽前言知心性如是性亦如是旡生行謂旡生於生滅之行卽是正擧旡生行相言諸行旡生者擧理旡生謂諸衆生五陰諸行本來旡生生行不生者明理旡生異行旡生謂生起行卽空不生非由證理滅心不生言不生旡行者顯理不生類行旡生謂不生門亦旡心行如旡生忍旡分別行故應卽是旡生行耶若如是者一切凡夫莫不證得旡生忍矣 經曰佛言善男子汝以旡生而證旡生行 論曰此是第二反詰有證詰意而言汝於入觀旡生忍時以依諸行旡生之理而得旡生行耶所以如是反詰問者彼以理旡生別異行旡生而難理旡亦是行旡生故今詰言汝入觀時理行別異有能所耶 經曰心王菩薩言何以故如旡生行性相空寂旡見旡聞旡得旡失旡言旡說旡知旡相旡取旡捨云何取證若取證者卽爲諍論旡諍旡論乃旡生行 論曰此是第三奉荅旡證於中有三初明旡二者擧非三者顯是初中亦二前標後釋如旡生行性相空寂者是摠標句言性空寂謂觀心體性離生滅相卽前所說知心性如也相空寂者觀心知用用相亦如卽前是性亦如之謂也下以十旡釋此摠旡見旡聞者心性希夷夷故絕色非像所表希故絕聲非教所詮也旡得旡失者顯空而旡所得遣生而旡所失故如是四旡釋性空寂也旡言旡說者行旣寂不起言說故旡知旡相者心行寂滅遠離二分故旡取旡捨者旣旡分別旡性可取旡相可捨故如是六旡釋相空寂也旡生行中如是空寂云何於中而有取證作是荅時自知前難不成難也擧非顯攻卽可知 經曰佛言汝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耶 論曰此是第四反詰有得問曰菩薩未得阿耨菩提如來何故問汝得耶解云此雖未得究竟菩而已證得初地菩提如法華論曰八生乃至一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謂證初地菩提故以離三界中分段生死隨分能見眞如佛性名得菩提謂究竟滿足如來方便涅槃故案云是約眞如佛性說名菩提能證見故名得菩提如經言諸法性空卽是菩提此之謂也 經曰心王菩薩言尊者我旡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何以故菩提性中旡得旡失旡覺旡知旡分別相旡分別中卽淸淨性性旡閒雜旡有言說非有非旡非知非不知諸可法行亦復如何以故一切法行不見處所決定性故本旡有得不得云何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論曰此是第五仰報旡得於中有三謂標釋中有二先明所得菩提旡所得性後顯能得諸行旡能得相初中言菩提性者謂眞如性虛通旡礙性離闇弊故名菩提於中本旡眞性可存亦乃本旡妄想可亡故言旡得旡失如是本覺遠離思搆之覺亦亡率爾之知故言旡覺旡知旣旡分別之見亦離所行之相故言無分別相由如是故非惑所濁本性離染故言卽淸淨性縱非生滅所閒橫非能#所所雜故言性旡閒雜旡有言說者能言所言旡不絕故非有非旡者#雖非有如而非旡如故非知非不知者雖非本覺而非不覺故菩提性然旡可得義諸可法行已下次顯旡能得行如前品說六度之行旡非眞軌故言可法亦如是者同前旡得故一切法行者六度等行不見處所者見得失覺知乃至有旡知不知等所可行處故與菩提平等平等所以本旡有能得不能得也云何已下摠結旡得 經曰佛言如是如是如汝所言一切心行不過旡相體寂旡生 論曰此下第六如來述成於中有三一者正述二者擧非三者顯是初中亦三摠述別述後還結成初言如是如是者述前旡證後旡得一切已下第二別述先述旡生後述寂滅旡生者是旡生行述旡能證能得言寂滅者是寂滅述旡所證所得初言一切心行者所有出世旡分別智相應心行不取諸相證會旡相故言不過旡相體於空寂冥然旡生故言體寂旡生 經曰可有識識亦復如是何以故眼眼觸悉皆空寂識亦空寂有動不動相內旡三受三受寂滅耳鼻舌身心意意識及以末那阿梨耶亦復如是皆亦不生寂滅心及旡生心 論曰此是第二述寂滅義謂諸世閒八識空寂於中有二一者例前二者廣釋初言可有識識摠攝所有世閒八識如言處處攝一切處故亦如是空寂之理同前出世心之旡生故何以故下第二廣釋眼者眼根眼觸卽是遍行中觸依三和生令三和合欲明散空故偏擧之識亦空者眼觸旣空眼識不生故旡有相續遷動亦旡剎那不遷故言旡有動不動相言內旡三受者三受生起本來寂滅故諸心數中觸受相近有大勝能故擧此二通遣餘法也鼻舌身者謂耳耳觸耳識等也心意意識者是第六識未來名心過去名意現名意識依隨轉門擧此三爲顯三世皆空寂故末那梨耶第七第八皆同眼識故亦不生也廣釋文竟次言寂滅心者近結八識空寂之文及旡生心者遠結體寂旡生之文 經曰若生寂滅心若生旡生心是有生行非旡生行內生三受三行三戒 論曰此是第二擧非謂有所得乘學者不空八識違其寂滅故言生寂滅心不知出世心之旡生謂有心生證旡相理故言生旡生心是世閒流轉之行而乖出世旡生忍行故言是有生行等也言三行者身口意作通善不善言三戒者口意止唯取其善生此三行三戒爲因而生三有具受三受如是流轉不得解脫 經曰若寂滅生心不心常寂滅旡功旡用不證寂滅相亦不住於旡證可處旡住摠持旡相卽旡三受等三悉皆寂滅淸淨旡住不入三昧不住坐禪旡生旡行 論曰此是第三顯是言若寂滅生心不生者反前若生寂滅心句遣諸生心不取生故心常寂滅旡功旡用者反前若生旡生心句離諸生滅起動之相亦旡作意分別功用故不證寂滅相者雖遣生起之心不存寂滅相故亦不住於旡證者雖旡取寂滅相不墮旡證過故處旡住者摠明離住著過諸可住處皆旡所住故住處者若遣生起則可住寂滅若遣有證則可住旡如是可處皆旡住故摠持旡相者摠顯具功德旡生心持諸行德而同一味旡差別相故則旡三受等三者反前內生三受等句遠離流轉因果相故皆寂滅者達三受等本來空故淸淨旡住者能達之心旡住空故不入三昧者能亡世閒入定心故不住坐禪者亦遣世閒住禪靜故若能如是則旡生起之亦旡分別之行故言旡生旡行也經曰心王菩薩言禪能攝動定諸幻亂云何不禪 論曰此是第七陳疑疑意而言凡諸禪定能攝掉動之念令定散亂之心云何出世旡生行心亦不入住於禪定耶其不禪則應是動有如是疑故乘彼問也經曰菩薩禪卽是動不動不禪是旡生禪禪性旡生生禪相禪性旡住離住禪動知禪性旡有動靜卽得旡生旡生般若亦不依住心亦不動以是智故故得旡生般若波羅密 論曰此是第八決疑言禪卽是動者謂世閒禪雖非散亂而取境相取相心生生起動故能離如是生動之禪乃能得入理定故言是旡生禪如是理定性旡生動故言禪性旡生非直旡生亦旡住寂故言禪性旡住若有生則是相有住著則是動今卽反此故言離生禪相離住禪動上來諸句明理定相知禪性下顯理智相唯就一體義分爲二知禪性旡有動者知禪性旡生故旡有靜者知禪性旡住故卽得旡生者得理旡生故旡生般若者得行旡生故亦不依住者謂旡生智不依理住離能所故心亦不動者雖不依理住而非生心動故由如是智能到彼岸故言般若波羅密也上來八分合爲第二反詰問荅經曰心王菩薩言尊者旡生般若於一切處旡住於一切處旡離心旡住處旡處住心旡住旡心心旡生住如此住心卽旡生住尊者心旡生行不可思議不思議中可不可說論曰此是第三領一切處者一切眞俗動寂等處言旡住者於此一切旡所得故言旡離者於此一切旡所不得故所以然者彼一切處悉皆非然非不然故心旡住處者所住處故旡處住心者旡能住心故旡住旡心者前二句以旡有處有住之心故心旡生住者#不旡旡生旡住之心故如此住心者結前於一切處旡住乃至旡離旡離之義假說住故卽旡生住者結前心旡住處乃至心旡生住住卽旡住旡住卽住故心旡生行不可思議者離言絕慮故不思議中可不可說者以離言亦離離言故以離言故言不可說離離言故亦可得說言可說者非不然故不可說者非是然故故#摠說言可不可說如說言說有可不可當知其思亦有可不可但擧一邊影顯之耳 經曰佛言如是如是 論曰此是第四述成如前領解非直契當道亦乃仰稱佛說所以重言如是如是長行正說竟在於前 經曰心王菩薩聞如是言歎未曾有而說偈言 論曰此下第二以偈讚說於中有二先序聞如是言者聞此一品之內佛言也 經曰滿足大智尊 廣說旡生法 聞所未曾聞未說而今說論曰此下三頌非別頌文但是摠歎於中有四此是第一法說讚歎未說而今說者雖前廣說而今此經言略義豐文省理詳若斯之妙未先說故經曰猶如淨甘露 時時乃一出 難遇難思議聞者亦復難 旡上良福田 最上勝妙藥爲度衆生故 而今爲宣說論曰此下二句是第二喩言甘露者不死之藥以喩此經能出生死次有四句是第三合旡上良福田者歎能聞者最上勝妙藥者合所聞法下之二句第四結也 經曰爾時衆中聞說此已皆得旡生旡生般 論曰此是第三時衆得益地前凡夫聞說此品能得初地旡生忍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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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본각리품(本覺利品)
045_0087_b_01L本覺利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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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모든 유정(有情)이 아득한 때로부터 무명(無明)의 긴 밤에 들어서 망상의 깊은 꿈만 꾸고 있다. 보살이 관(觀)을 닦아 무생(無生)을 얻었을 때, 중생(衆生)이 본래 적정하여 단지 본각(本覺)뿐임을 통달한다. 그리하여 한결같은[一如] 침상에 누워 이 본각의 이익을 가지고 중생을 도와준다. 이 품은 이러한 도리(道理)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본각리품(本覺利品)」이라고 이름하였다.
【經】 그 때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일미진실(一味眞實)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법문을 듣고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아 집중하여 잘 듣고, 맑은 경지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論】 관행(觀行) 6품을 각각 밝힌 가운데18),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인 본각(本覺)의 이익을 밝힌 부분이다. 무생행(無生行)에 의지하여 본각을 알아야 일체 중생을 두루 교화하고 도움을 줄 수 있다. 이런 뜻에서 「무생행품」 다음에 이 품을 연설하셨다.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본각의 이익을 자세히 밝힌 부분[廣明本覺利益]이요, 둘째는 게송으로써 찬송한 부분[以偈讚頌]이며, 셋째는 그 때의 대중이 이익 얻었음[時衆得益]을 말한 것이다.
첫째에도 두 부분이 있다. 하나는 움직임을 통하여 고요함을 밝힌 것으로서, 본각의 이익이 무엇을 요점[宗]으로 삼는가를 간략히 지적한 부분[略標本利之宗]이다. 다른 하나는 미세한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현저한 데까지 본각의 이익이 지니는 뜻을 광범하게 설명한 부분[廣說本利之義]이다.
처음 약표(略標)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몸을 이동하는 일을 통해서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요, 둘째는 말씀을 주고받음으로써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요, 셋째는 빛을 내어 본각의 이익을 칭송한 부분이다.
먼저 ‘무주보살(無住菩薩)’이라 함은, 이 사람은 본각이 본래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통달했으나 그렇다고 적정(寂靜)에 머무르지도 않고 항상 두루 교화를 하기 때문에 그 성품[德]에 의해서 ‘무주(無住)’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머묾이 없는 덕이 본각의 이익에 합치하므로 이 사람을 통해 그 요지[宗]를 나타낸 것이다.
‘일미진실하고 불가사의하다’ 함은 앞 품에서 설명한, ‘마음에 생함이 없는 행은 불가사의하다’는 등의 이야기를 가리킨다.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았다’ 함은, 먼저 앉았던 자리는 부처님 자리에서 멀리 있었으나 앞 품의 말씀을 듣고 나서 가까운 곳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이는, 전에는 아직 심오한 법을 듣지 못하여 평범하고 어리석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부처님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본각의 이익을 얻어 불과(佛果) 가까이에 있게 되었음을 스스로 안다는 것을 표시한 것이다.
‘집중하여 잘 듣고, 맑은 경지에 들어가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함은, 이미 부처님 자리에 왔을 때 법을 듣는 데 생각을 집중하여 본래 맑고 깨끗한 자리에 들어가 본각(本覺)의 고요함을 따라 몸과 마음이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문장으로 본각에 들 때는 본래 움직임이 없음을 통달하여 얻을 것이 없음을 얻었음을 표시한 것이다.
【經】 그 때 부처님께서 무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디에서 왔으며 지금 어디에 이르렀는가?”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저는 근본 없는 데서 왔으며, 지금 근본이 없는 곳에 이르렀나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略標 중에) 두 번째로, 말을 주고 받음으로써 본각의 이익을 표시한 부분이다. 여기는 문(問)ㆍ답(答)ㆍ결론적인 설명[述成]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 두 번째 답하신 뜻은, 범부의 자리로부터 성인의 자리에 이르렀음을 밝힌 것이다. 성인의 자리에 도달하여 옛날과 지금을 돌이켜 보건대, 범부의 자리에 있던 옛날, 처음 믿음을 일으켜 닦아 나아갈 때는 자신의 마음이 본래 일어나거나 움직인 적이 없음을 스스로 믿었다[信]. 일어나고 움직이는 근거를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성인의 자리에 와서 무생(無生)을 얻었을 때는 자기 마음이 본래 생겨난 적이 없음을 체득해 알게 되었다[證]. 마음이 생기는 근거를 찾아보아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어디에서 온 본래의 기점이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지금 이른 곳도 본래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이미 근본[本]이 없음을 보였으니 끝[末]이 없음도 알아야 한다. 끝도 없고 근본도 없다는 것은 어디서 온 일도 없고 어디에 도달한 일도 없다는 뜻이다. 다만 부처님께서 물으신 말씀을 받들어 ‘온다’느니, ‘도달했다’느니 하는 말을 빌어 썼을 따름이다. 또 온다, 도달한다 함이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오고 도달하는 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온다, 도달한다 하는 표현을 빌어서 오고 도달함이 없음을 나타냈으니, 도달한 곳과 출발한 곳이 한결같이 근본이 없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본래 어디에서 온 것이 아니며, 지금 어디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 네가 얻은 본각(本覺)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니 이는 대보살마하살(大菩薩摩訶薩)이다.”
【論】 이 부분은 결론적인 설명[述成]인데, 설명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온 곳과 도달한 곳이 이미 근본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근본 자리가 없다는 점이 같다면 옴도 없고 도달함도 없다. 어째서 그런가? 온 곳이 도달한 곳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래 어디에서 온 일이 없다’고 하였다. 또 도달한 곳도 이미 온 곳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어디에 도달한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한편 온 곳이 이미 근본이 없으므로 오고 오지 않고 하는 일도 없다. 또 지금 도달한 곳도 근본이 없으므로 도달하고 도달하지 않고 하는 일도 없다. 온 일도 도달한 일도 이미 없다면 본래 고요함이다. 그러므로 ‘네가 얻은 본각의 이익은 불가사의하다’고 말씀하셨다. 이미 본각의 이익을 얻었다면, 자신을 이롭게 하는 동시에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보살마하살’이라고 하셨다.
【經】 큰 빛을 뿜어 대천세계를 두루 비추시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장하다 보살이여,
지혜가 원만하여
항상 본각의 이익으로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구나.

네 가지 몸가짐 어디서든지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물러
모든 중생들을 인도하여
오지 않고 가게만 하는구나.[다른 본에는 ‘去去’가 ‘不去’라고 되어 있다]

【論】 여기는 세 번째인 여래가 빛을 뿜어 보살을 칭찬한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경을 엮는 이가 서술한 부분이다. (뒤에는 게송이다.)
‘큰 빛을 뿜어 대천세계를 두루 비춘’ 이유는, 큰 지혜의 광명을 얻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세간의 어둠을 비춰 광명을 얻게 했기 때문이며, 여래께서 앞에서 하신 칭찬을 확증하기 위해서이다.
‘장하다, 보살이여’는 무주보살(無住菩薩)을 특별히 칭찬하신 것이다. ‘지혜가 원만하다’ 함은 알았다는 관념이 없고, 알지 못하는 것도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네 가지 몸가짐 어디서든지 항상 본각의 이익에 머문다’ 함은,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와서 여래 곁에 앉아’라고 한 앞 서문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말로 본각의 이익을 얻었음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오지 않고 가게만 한다’ 함은 고요하면서도 항상 교화하기 때문이다. ‘오지 않음’이란, 인도하고 교화하는데 따라 세간에서 벗어나 뒤로 물러서지 않게 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가게만 함’이란, 물러서지 않게 됨에 따라 미망의 세계에서 점점 벗어나 잘 가기[善逝]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經】 그 때 무주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무슨 이익을 운용해야 중생의 모든 정식(情識)을 전변하여 암마라(唵摩羅)에 들게 하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본각의 이익을 크게 略標와 廣說 둘로 나눠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 본각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演]이다. 그 중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직접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直廣]이고, 둘은 거듭 부연한 것[重演]이다. 처음의 직광에서도 먼저는 물음이고 다음은 대답이다.
‘무슨 이익을 운용해야’는, 교화하는 자가 이익을 운용하는 측면을 물은 것으로서 앞에서 ‘모든 중생을 인도하여’라고 한 구절에 대한 질문이다.
‘중생의 …를 전변하여…’라 함은 교화 받을 대상의 모든 식(識)을 전변하는 측면을 물은 것으로서 앞에서 ‘가게만 한다’라고 한 구절에 대한 질문이다.
‘모든 정식[一切情識]’이란 여덟 가지 식[八識]을 말한다.
‘암마라(唵摩羅)’란 제9식(第九識)을 말한다. 진제(眞諦) 삼장이 말한 9식의 의미는 이 글에서 나왔고, 해당 장(章: 아래 有得ㆍ無得의 집착을 떨어주는 부분)에서 설한 것과 같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일각(一覺)으로 모든 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한다. 어째서 그런가? 일체 중생의 본각도 항상 일각으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하여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하기 때문이며, 그 정식(情識)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결정된 본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論】 이 답은 본각이익의 뜻을 본격적으로 자세히 설명한 것[正廣:直廣]이다. 그 중에도 두 가지가 있는데 먼저는 제시[標]하고 다음에는 해석[釋]했다.
‘모든 여래께서는 항상 일각으로’라 함은 교화하는 자[能化]의 근본을 지적한 것이다. ‘모든 식을 전변시켜 암마라에 들게 한다’ 함은 교화의 대상[所化]이 어떻게 전변하는가를 지적한 것이다.
해석 가운데도 기본적인 풀이[正釋]와 더 나아간 풀이[轉釋] 둘이 있다. 정석 중에 ‘모든 중생의 본각’ 이란 앞에서 말한, ‘교화하는 자의 근본’인 일각(一覺)을 풀이한 것이니, 모든 중생이 동일한 본각(本覺)이므로 ‘일각’이라고 하였다. 모든 부처님께서 이를 체득하고 비로소 널리 교화하기 때문에 ‘항상 …으로[常以]’라고 하였다. 이 본각으로 다른 사람을 깨닫게 하기 때문에 ‘항상 일각으로 모든 중생을 깨닫게 한다’고 한 것이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 본각을 얻게 한다’ 함은, 교화의 대상[所化]이 어떻게 전변하는가 하는 구절을 풀이한 말이다. 본각은 바로 암마라식이다. ‘본각을 얻게 한다’는 것은 들어간다[入]는 뜻을 풀이한 것이니, 본각에 들어갈 때 여덟 가지 식이 모두 본래 적멸임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 깨달음이 끝까지 갔기[究竟] 때문에 모든 식이 생기지 않으므로 ‘모든 식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이 구절은 ‘모든 식을 전변시킨다’는 뜻을 정곡으로 풀이하였다. 이 문장은 두 가지 각인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을 한꺼번에 나타낸다. ‘모든 중생의 본각…’이라고 한 것은 본각 쪽이고, ‘정식(情識)이 공적하여 무생임을 깨닫게…’라고 한 것은 시각 쪽이니, 시각이 본각과 동일함을 나타낸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둘째의 전석(轉釋)인데, ‘깨달을 바가 적멸(寂滅)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始覺]’는 앞의 내용을 풀이한 것이다. 8식은 연(緣)을 따라 움직이고 바뀌는데, 결정한 성품을 찾아보면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그런 까닭에 ‘결정된 본성은 본래 움직임이 없다’고 하였으며, 본래 움직임이 없으므로 본래 적멸이라는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여덟 가지 식 중에 하나라도 다 대상[境]을 연(緣)하여 일어나니 어떻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둘째, 거듭 부연한 부분[重演]이다. 이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는 시각(始覺)에 관하여 연설하고 다음에는 본각(本覺)에 관하여 연설했다.
시각에 관한 설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식이 공적함[諸識空寂]을 연설하고, 둘째는 모든 식이 생겨남이 없음[諸識無生]을 연설한다. 전자는 시각으로 깨닫는 대상[所覺]을, 후자는 깨닫게 해주는 것[能覺]으로서의 시각을 말한다.
첫 번째에 여섯 차례의 문답이 있으며, 그것을 세 문답으로 구분한다. 하나는 앞의 두 문답인데, 공적하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다. 둘은 세 번째 문답인데, 같지 않다는 특성을 밝힌 것이다. 셋은 뒤의 세 문답인데, 다르지 않다는 특성을 밝힌 것이다.
처음 문답에서는 일어나거나 움직이는 일이 없음을 밝혔는데, 그 가운데 ‘그 중에 하나라도[可一]’라는 것은 일체(一切)를 의미하니, 즉 모든 중생이 가지고 있는 여덟 가지 식을 말한다. ‘다 대상[境]을 연(緣)하여 일어난다’ 함은 네 가지 연[四緣]19) 중에 우선 연연(緣緣:所緣緣)을 가지고 부동(不動)의 문제를 논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대상이 본래 공하고, 모든 식이 본래 공하다. 공하기 때문에 연(緣)의 본성이 없는데, 어찌 연으로 하여 생기겠는가?”
【論】 이는 대상의 연을 부정하여 식이 일어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대상이 공하다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何見:어떤 본에는 ‘如何有見’으로 되어 있고, 또 다른 본에는 ‘如何言見’으로 되어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다는 것이 허망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생겨남이 없고 모양도 없어 본래 자체의 이름을 붙일 수 없이 모두가 공적하기 때문이다. 모든 법의 특성도 마찬가지고 모든 중생의 몸도 마찬가지니, 몸이 있지 않은데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論】 이는 두 번째 문답으로서 본다는 것이 허망이고 허망이기 때문에 진공(眞空)임을 밝힌 것이다. 즉 경계가 공하기 때문에 경계가 있다고 보면 그것은 허망이요, 보는 것 역시 공하므로 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허망이라는 뜻이다.
해석 중에 전체적으로 밝힌 것[摠明]과 개별적으로 밝힌 것[別顯] 두 가지가 있다. 전체적으로 밝힌 것은 다음과 같다. 5음(陰)이니 18계(界)니 하는 현상[有]은 본래 ‘내가 색(色)이다’라는 식으로 이름 붙일 수 없는데, 다만 허망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색 등이라고 이름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 모두가 공적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개별적으로 밝힌[別顯] 중에 ‘모든 법의 특성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은 외계(外界)의 산이나 강 등 6진(塵)으로 된 법의 특성을 말한다. ‘모든 중생의 몸도 마찬가지’라고 한 것은, 내계(內界)의 색(色)이나 수(受) 등 5음(陰)으로 된 몸을 말한다. 그 몸 자체도 없는데 어찌 본다는 작용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대상이 공하며, 모든 몸이 공하며, 모든 식(識)이 공하다면 각(覺)도 공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각은 (도리를) 무너뜨리거나 깨뜨리지 않는다.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 공이 아니고 불공(不空)도 아니어서, 공ㆍ불공 따위가 없는 것이다.”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문답으로, 각(覺)과 불각(不覺)이 같지 않은 특성을 밝힌 것이다. 물음의 뜻은 다음과 같다.
‘각도 공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한 것은 연으로 생긴 식이 공하다면 연으로 생긴 각도 공해야 하리라는 뜻이다. 즉 식이 공하기 때문에 본다는 것도 허망하다면, 각도 공하다는 이유에서 허망이 되리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답하신 뜻은 다음과 같다. 모든 각은 도리(道理)를 깨뜨리지 않으므로 공이 되게 할 수 없으며, 한편 자성이 있지 않으므로 공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에는 공(空)ㆍ불공(不空)이 없다. 그러나 모든 식은 그렇지 않아서 망령되이 모든 법을 취하기 때문에 진리에 위반되니, 공이 되게 할 만하고 버릴 만한 것이다. 이렇게 같지 않으니 어찌 서로 비슷하겠느냐는 것이다.
‘결정한 성품’이란, 진여의 본성은 파괴할 수 없으니 본성이 그냥 그렇다는 것이다.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모양 있음을 취하므로써 공(空)을 훼손하지 않기 때문이다. ‘깨뜨리지 않는다’고 한 것은, 무성(無性)이라고 헛되이 생각하여 진(眞)을 손상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결정한 성품에서는 훼손이나 손상이 없다는 것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대상도 마찬가지로 공의 모습[空相]도 아니며, 공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대상이라고 할 저것들은 성품이 본래 결정되어 있는데, 그 결정성의 뿌리는 어느 곳에도 없다.”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각(覺)도 그처럼 어느 곳에도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각은 처소가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깨끗하여 각이 없다. 물질[物]도 처소가 없기 때문에 깨끗하고, 깨끗하여 색[色]도 없다.”
【論】 이 아래의 세 문답은 (각과 불각이) 다르지 않은 특성을 밝힌 것이다. 이 가운데 앞의 두 문답은 각(覺)과 경(境)이 같은 형태임을 설명하고, 뒤의 한 문답은 각과 식(識)이 같은 형태임을 나타낸다.
처음 가운데 앞의 것[제4 문답]은 대상과 각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무슨 말인가? 허망한 모든 경계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다. 있지 않다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면 공의 모습인들 어찌 있겠으며, 이미 공이 있지 않으니 어떻게 공이 없음을 얻겠는가? 그러므로 ‘공의 모습[空相]도 아니며, 공의 모습이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각과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답 중에 ‘성품이 본래 결정되어 있다’고 한 것은 본래 있지 않으므로 공의 모습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한 것은 공이 있지 않으므로 공이 없는 것도 아님을 밝힌 것이다.
다음 문답[제5 문답]은 각(覺)과 대상이 같음을 밝힌 것이다.
‘각도 그처럼’이라고 한 것은, 각도 연으로 생기는 것이라서 본성이 공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답 중에 ‘깨끗하여 각이 없다’ 함은 공한 도리를 깨달았음을 말하는데, 모든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깨끗하다’고 하였다. 각의 본성이 공하다면 공 가운데에는 각(覺)이 없다, 색(色)이 공한 가운데 색의 모습이 없듯이.
앞에서 대상이 각과 같음을 밝힌 것은 ‘대상이 공(空)도 아니고 불공(不空)도 아니’라는 이치를 바로 앞에서 말한 ‘각은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는 이치와 동치시킨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각이 경계와 같다는 것은 ‘각의 본성이 공하여 모양이 없다’는 이치를 ‘대상이 공하여 모양 없다’는 이치에 동치시킨 것이다. 두 글이 같지 않으니 그렇게 알아야 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마음[心]과 안식(眼識)도 그렇게 불가사의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안식도 그렇게 불가사의하다. 무슨 까닭인가? 색(色)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이름이 없는 것이라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눈[眼]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봄[見]이 없는 것이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마음[心]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는 것이라 일어나는 처소[起處]가 없고,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연(緣)도 요별(了別)도 없어서 성품[性]이 모두 공적하다.”
【論】 이 세 번째[제4 문답]는 식(識)이 각(覺)과 같음을 설명한 글이다. ‘마음과 안식’이란 안식 종자(種子)가 쌓이고 모여 있는 마음과 이 종자가 일으키는 안식을 말한다. 이 둘을 들어서 그 성질이 공(空)함을 표시하였고, 그 아래로는 네 가지 연[四緣]과 관련시켜 안식이 공함을 밝혔다.
‘색에는 처소가 없다’고 한 것은 색의 성품 자체가 공하기 때문이고, ‘청정하여 이름이 없다’고 한 것은 공(空) 중에는 색이 없기 때문이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함은 안근(眼根)에게 대상이 되어주지 않기 때문이니, 이는 소연연(所緣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눈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봄이 없다’ 함은, 눈의 성품이 공한 가운데는 안근(眼根)이 없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함은 색(色)이라는 대상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작용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증상연(增上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마음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다’는 것은 종자가 공한 가운데는 종자가 없기 때문이며, 네 가지 연[四緣] 가운데서 으뜸이 되므로 그렇게 말했다. ‘일어나는 처소도 없다’ 함은, 식을 직접적으로 일으키는 처소가 없기 때문이니, 이는 인연(因緣)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함은, 이미 세 가지 연이 없어서 안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연(緣)도 요별[別]도 없다’ 함은, 색(色)을 연(緣)하여 요별(了別)하는 식이 없기 때문이니 이는 등무간연(等無間緣)과 안식(眼識)이 공함을 밝힌 것이다. 연이란 앞 찰나에 사라진 연이고 요별이란 뒤 찰나에 생기는 분별인데 이 둘이 다 공하기 때문에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연과 식이 모두 공하기 때문에 총괄적으로 결론지어 ‘성질이 모두 공적하다’고 하셨다.
안식과 네 가지 연이 모두 공함을 설하신 것과 같이 (耳識ㆍ鼻識ㆍ舌識ㆍ身識 그리고) 의식(意識)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설하셨다. 즉 ‘법(法:의식의 대상)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이름이 없으므로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의(意)에도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보는 일이 없으므로 밖으로 나아감이 없다. 마음[心]에는 처소가 없으며 청정하여 위가 없는 것이라 일어나는 처소[起處]가 없고, 식(識)에도 처소가 없고 청정하여 움직임이 없다. 연(緣)도 요별(了別)도 없어서 성질[性]이 모두 공적하다.’
여기서 ‘의(意)’란 제7식을, ‘마음’이란 제8식을 말한다. 이는 8식이 모두 공적하며 따라서 모든 각(覺)의 공함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經】 “본성에는 각(覺)이 없으니 그것을 깨달으면 각이 된다. 선남자야,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식[諸識]이 (마음의 근원에) 들어간다. 어째서 그런가? 금강지(金剛智)의 경지에서 해탈도(解脫道)로 끊고, 끊고 난 후에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서 출입이 없게 되며, 마음의 처소가 없는 결정성의 자리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 경지는 밝은 유리(琉璃)같이 깨끗하고, 그 본성은 대지(大地)같이 항상 평등하고, 깨달아 묘하게 관찰하는 것이 지혜의 햇빛과 같으며,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성취되어 본각을 얻게 함이 법의 비를 크게 뿌리는 것과 같다. 이러한 지혜에 든 자는 부처의 지혜 경지에 든 것이며,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는 어떤 식(識)도 일어나지 않는다.”
【論】 이 대목은 (始覺을 ‘諸識空寂’과 ‘諸識不生’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는 가운데) 두 번째로, 모든 식이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즉 본래 무명(無明)에 따라 여러 가지 식이 생겨났지만 지금 시각(始覺)에 따라서 일심(一心)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니 마음의 근원에 되돌아왔을 때는 모든 식이 일어나지 않고 그 식들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시각이 원만함을 설명하고자 한 것이다.
이 중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간략히 대의를 말하고[略標] 다음에 자세히 풀이한다[廣釋]. 처음 대의를 말하는 것도 둘로 나뉘는데, 처음에 ‘본성에는 각(覺)이 없으니 그것을 깨달으면 각이 된다’ 함은 시각이 원만함을 표시한 것이며,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식[諸識]이 (마음의 근원에) 들어간다’ 함은 모든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표시한 것이다.
‘본성에는 각이 없다’ 함은 공한 성품[空性]에는 식(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시각도 없다는 뜻이다. 각(覺)도 없는 도리를 깨닫는 것이 시각의 지혜이므로 ‘깨달으면 각이 된다’고 하였다. ‘각이 없음을 깨달으면’이라 함은, 앞에서 말한 시각을 가리킨 것으로서 시각이 원만할 때 8식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각이 없음을 깨닫자마자 모든 식이 없어지기 때문이며, 궁극적인 곳을 깨닫자마자 마음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이 들어간다’고 하였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자세히 풀이한 부분인데 그 중에 둘이 있다. 먼저 원인이 만족하였음[因滿]을 밝히고 뒤에 결과가 원만함[果圓]을 나타냈다.
‘금강지의 경지[金剛智地]’란 등각위(等覺位)로서 시각의 인(因)이 만족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을 가리키니, 뜻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여기서는 각(覺)의 원인과 관련시켜 금강지(智)라고 부른 것이다.
‘해탈도로 끊는다’ 함은 생기지 않는 원인이 만족한 것을 가리키는데 여기에서 끊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태어나면서 얻은 무명주지[生得無明住地]를 대치하는 쪽으로 말한다면, 금강심(金剛心)이 무간도(無間道)가 되고, 묘각의 첫마음이 해탈도(解脫道)가 되니 무간도 때에는 무명(無明)과 더불어 같이 있다가 해탈도가 일어날 때 비로소 끊어버린다.
한편 모든 식의 분별하는 종자[諸識戱論種子]를 대치하는 쪽으로 말한다면, 그 앞의 마음이 무간도가 되어 그 종자와 같이 일어나고 같이 사라지고 하다가 마지막 일념인 금강유정이 바로 해탈도가 되어 이 때 종자를 끊어버린다. 지금은 그 종자를 끊는다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므로 ‘금강지의 자리에서 해탈도로 끊는다[金鋼解脫道斷]’고 하였다.
이 때 이숙식(異熟識)이 나타나는 것은 그 앞생각의 종자로부터 나온 것인데, 생겨나는 인과가 때를 같이 하지 않기 때문에 이숙이 된다. 그 뒤에 이숙식이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은 이 때 모든 종자를 이미 끊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해탈도로 끊는다’는 말이 바로 모든 식이 생기지 않는 원인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과의 원만함[果圓]을 나타낸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각(覺)이 원만함을 밝히고, 나중에는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나타낸다.
‘끊고 난 후에 머묾이 없는 경지에 들어간다’ 함은 금강지의 해탈도에서 종자를 끊고 난 즉시 머묾 없는 묘각(妙覺)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2제(諦) 바깥에서 홀로 무이(無二)에 있기 때문에 머무름이 없다[無住]고 하였다. 머무름이 없는 마음으로 진제(眞諦)와 속제(俗諦) 두 가지를 동시에 없앴기 때문에 속(俗)으로부터 나오든 진(眞)으로 들어가든 차이가 없다. 이미 출입이 없으므로 공(空)과 유(有)에 머물러 있지 않으니 그러므로 ‘마음의 처소가 없다’고 하였다.
처소가 없는[無在] 곳은 오직 일심(一心)이며, 일심의 체는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결정성의 자리[決定性地]’라고 하였다. 일심이 나타날 때 8식이 모두 전의(轉依)하므로 그 때 네 가지 지혜가 원만해진다. 어째서 그런가? 이 일심은 어둠을 떠나서 광명(光明)을 이루므로 밝고 깨끗하여 비추지 않는 영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경지는 밝은 유리 같이 깨끗하다’ 하였으니, 이는 대원경지(大圓鏡智)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이 일심은 멀리 두 가지 극단[二邊]을 떠나 자타(自他)에 통달하고 평등무이(平等無二)하다. 그러므로 ‘그 본성은 대지(大地)같이 항상 평등하다’고 하였으니, 이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일심(一心)은 관(觀)하는 것이 없으므로 모든 법문을 관찰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아 묘하게 관찰하는 것이 지혜의 햇빛과 같다’고 하였으니, 이는 묘관찰지(妙觀察智)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은 작위가 없으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에서 하지 못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이 성취되어 본각을 얻게 함이 법의 비를 크게 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비가 만물을 적셔 열매를 맺게 하는 것처럼, 이 지혜도 그와 같이 남을 이롭게 하는 일을 성취하고 본각을 얻게 하니, 이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의 뜻을 밝힌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지혜가 이미 원만하니 이는 시각(始覺)이 만족된 것이다.
‘이러한 지혜에 든 자…’ 이하는 이어서 모든 식(識)이 생기지 않음을 밝힌 부분이다. 이 네 가지 지혜를 얻으면 바로 묘각(妙覺)의 지위다. 그러므로 ‘부처의 지혜 경지에 든 것’이라고 하였다. 그 때는 이미 일심(一心)의 원천으로 되돌아갔으므로 8식의 모든 물결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지혜의 경지에 들어간 자에게는 어떤 식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상 두 부분으로 시각에 대한 설명을 마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일각(一覺)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四弘智地]는 모든 중생이 본래 다 갖추고 있는 각(覺)에서 나온 이익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이 몸 가운데 본래 그것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본각의 뜻을 연설한 부분이다. 그 중에 두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내용설명[正明]이고, 둘째는 집착을 놓아주는 것[遣著]이다. 내용설명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는 본각이 둘 아닌 이치[本覺無二之理]를 밝히고, 다음에는 장애를 제거하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除障入證之門]을 보여 준다. 본각이 둘이 아닌 도리에도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답이 있다.
‘일각의 성스러운 힘과 네 가지 넓은 지혜의 경지’라 함은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지혜의 뜻을 받아 가지고 한 말이다. 시각이 원만해지면 본각과 같아서 본각과 시각이 둘이 아니므로 ‘일각(一覺)’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며, 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므로 ‘성스러운 힘[聖力]’이라고 하였으며, 일각 안에 네 가지 큰 지혜가 다 갖추어져 있어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있으므로 ‘지혜의 경지[智地’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지혜는 일심(一心)의 양(量)과 같아서 모두 미치지 않음이 없기 때문에 ‘넓은 지혜[弘智]’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일각은 다름 아닌 법신(法身)이며, 법신은 곧 중생의 본각이므로 ‘모든 중생이 본래 다 갖추고 있는 각(覺)에서 나온 이익’이라고 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성덕(性德)을 본래 다 갖추고 중생의 마음을 훈습(熏習)하여 두 가지 일[二種業]을 하기 때문에 ‘본각의 이익[本利]’이라고 이름하였다. 본각이 둘이 아니라는 뜻에서, 법신 밖으로 나가는 중생이 단 하나도 없으므로 ‘이 몸 가운데 본래 그것을 완전하게 구족하고 있다’고 하였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중생은 본래 번뇌[漏]가 없고 모든 선한 이익의 근본을 지녔지만, 지금은 아직 항복시키지 못한 욕망의 가시[欲刺]가 있기 때문이다.”
【論】 아래는 대답인데 질문을 인정하고 설명하셨다. 본각 중에는 무량한 성덕(性德)이 있어서 3루(漏)에 의해 물들거나 동요하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본래 번뇌가 없다[本來無漏]’고 하였다.
이를 근본으로 하여 모든 선한 이익이 생기므로 ‘모든 선한 이익의 근본’이라고 하였다. 비록 본각은 있지만 객진(客塵)인 욕망의 가시에 덮여 있으므로 아직 스스로 본각(本覺)을 얻지 못했을 뿐이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아직 본각의 이익을 얻지 못하고 (번뇌를) 채집(採集)하는 중생이 있다면 어떻게 항복시키기 어려운 그것을 항복시킬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여서 작용하든 독단적으로 작용하든 아직 분별과 오염이 있으면 정신을 돌려서 공한 도리의 굴(窟)에 머물러 항복시키기 어려운 일을 항복시켜야 한다. 마장[魔]의 결박에서 벗어나면 툭 트인 곳[露地]에 초연히 앉아 모든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 것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로, 장애를 제거하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는 묻고 나중에는 답했다.
물음 가운데 ‘채집[採集]’이란 3유(有)의 욕심으로 생사라는 결과를 취하기 때문에 ‘줍는다[採]’ 하였고, 이 모든 번뇌가 마음과 상응하기 때문에 ‘모은다[集]’고 하였다. 이것들이 시작 없는 때부터 끊이지 않고 현행(現行)하므로 ‘항복시키기 어렵다[難伏]’고 말한다. 고쳐나가는 길이 겨우 생기기는 하였으나 그 힘이 미약하고 열등하기에 어떻게 항복시킬까, 이렇게 의심한 것이다.
답 중에 셋이 있으니 먼저 무엇을 조복해야 하는가를, 다음에 조복하는[能伏] 힘을, 끝으로 조복시켜 얻은 훌륭한 이익을 말한다.
‘모여서 작용하든 독단적으로 작용하든’이란, 중생의 심행에 거친 것과 미세한 것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니 어떤 때는 번뇌와 붙어 다니기 때문에 ‘모인다[集]’ 하고, 어떤 때는 미혹된 마음[惑心]을 떠나 행하므로 ‘독단적으로[獨]’라고 하였다. 번뇌를 떠났을 때도 아직은 법집(法執)이라는 분별이 있고, 번뇌와 함께 할 때는 번뇌에 물들므로 ‘분별과 오염’이라고 하였다.
다음으로는 조복하는 힘을 밝혔다. 이를테면 부처님의 경전에 의지하여 자기의 심신(心神)을 돌려서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몰아내고 두 가지 공(空)의 도리에 머물게 되므로 ‘정신을 돌려서 공한 도리의 굴에 머문다’고 하였다. 이러한 마음이 바야흐로 일어나 도리에 순응하므로 훌륭한 능력을 갖게 되지만, 저 미혹은 무시 이래로 도리를 거스르는 탓에 대적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항복시키기 어려운 것을 항복시킨다’고 하였다. 이는 지(地:十地)에 들어가기에 앞서 두 가지 장애[二障]를 없애는 것을 밝혔다. 이 조복의 길을 통해 끊는 길의 지위[斷道位]에 들어가서, 점차 종자를 뽑아내어 마침내 영영 아무것도 없게 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네 가지 마장[四魔]을 멀리 떠나므로 ‘마장의 결박에서 벗어난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조복시킴으로써 얻는 훌륭한 이익을 밝힌다. 이 이익에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보리의 과[菩提果]이고, 또 하나는 과과(果果)이다. ‘보리과’란 번뇌가 있는[有漏] 5음의 취락(聚落)을 훨씬 넘어서서 도량에 앉아 위없는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툭 트인 곳[露地]에 초연히 앉는다’고 하였다. ‘과과’란 위없는 깨달음으로 대열반을 증득하고 각(覺) 없음을 깨달아 모든 식이 다 (마음 근원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음(識陰)이 열반에 들 것이다’라고 하였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마음이 열반을 얻으면 짝이 없는 하나 뿐이라 언제나 열반에 머물 테니, 그것을 해탈이라 해야겠습니다.”
【論】 아래는 두 번째, 집착을 놓아주는[遣著] 부분인데 이 가운데 둘이 있다. 먼저 머묾이 없음을 밝혀 머묾이 있다는 집착을 버리게 하고, 뒤에는 얻을 것이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얻을 것이 있다는 집착을 제거한다. 먼저 가운데도 둘이 있는데 먼저 묻고 다음에 답한다.
물음 가운데 ‘하나뿐[獨一]’이란, 8식(識)이 전변할 때 일각(一覺)이 되기 때문이고, ‘짝이 없다’는 것은 사람ㆍ법이라는 두 집착을 여기서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짝이 없는 각(覺)은 항상 열반에 머무르고, 항상 머무는 지혜는 모든 결박에서 벗어나게 되리라고, 이런 식으로 집착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물음을 제기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항상 열반에 머문다면 그것은 열반에 결박되는 일이다. 어째서 그런가? 열반은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이며,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은 본래 열반이다. 열반이라는 각의 분량은 본각의 분량이며, 각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고 열반도 달라지지 않는다. 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고 열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각에는 본래 소멸함이 없고 열반에도 소멸함이 없다. 열반과 각이 본래 다름이 없으므로 열반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 열반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머묾이 있으랴?
선남자야, 깨달은 자는 열반에 머물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 중생의 때[垢]를 떠났기 때문이며, 본래 고요함이 없음을 깨달아 열반이라는 움직임[動]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경지에 머물면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없고, 따라서 출입하는 것도 없어서 암마라식(唵摩羅識)에 들어간다.”
【論】 이 대답에서는 머묾이 있다는 집착을 놓아주는데, 두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집착을 깨뜨림을 간략히 말하고 나중에 자세하게 도리를 나타낸다.
먼저 (간략히 말하는) 가운데 ‘항상 열반에 머문다면 그것은 열반에 결박되는 일’이라고 한 것은, 열반에 머무는 항상한 깨달음이 있다고 설정하면 그것이 바로 집착이라는 뜻이다. 열반에 묶여 있는데, 어떻게 항상 머묾을 해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자세하게 도리를 나타낸 말씀이다. 이치는 머묾이 없다. 그러므로 머묾이 있으면 이치에 어긋난다. 이치에 어긋나는 마음이 결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풀이하는 의도는 이와 같다. 그 중에 두 부분이 있는데 먼저 본각(本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밝히고 뒤에 시각(始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드러낸다.
먼저(본각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나타내는 가운데)에서는 다름이 없다[無異]는 뜻을 가지고 ‘얻을 것이 없고 머물 것이 없다’는 이치를 밝히는데, 이 ‘다름없음’의 의미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본래의 이치가 다름이 없다[本理無異]는 것으로서, ‘열반은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이며, 본각에서 나오는 이익은 본래 열반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열반이 곧 본각의 이익이며 이 본각의 이익이 본래 열반이라, 그것을 비로소 깨달을 때[始覺] 본각과 동일함을 밝힌 것이며, 다르지 않다[無異]는 이유로, 따라서 얻을 바도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각의 분량이 다름이 없다[覺分無異]20)는 것으로서, ‘열반이라는 각의 분량은 본각의 분량이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는 열반의 모든 덕이 다름 아닌 본각의 덕임을 밝힌 것이니, 다름이 없고 얻음이 없다는 이치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셋째는 동일한 맛으로서 다름이 없다[一味無異]는 것으로서 ‘각의 성품은 달라지지 않고 열반도 달라지지 않는다’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한 맛의 차별 없는 특성을 가진 각의 성품이 열반의 무차별성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넷째는 둘이 아닌 것으로서 다름이 없다[無二無異]는 것으로서, ‘각에는 본래 생겨남이 없고 열반에도 생겨남이 없으며, 각에는 본래 소멸함이 없고 열반에도 소멸함이 없다’라고 한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이것은 본래 생멸이 없는 본각이 열반의 생멸 없음과 같음을 밝힌 것이다.
이 네 가지 무이(無異)로 보건대, (열반과 각이) 도리상 본래 다르지 않으므로 ‘열반이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열반의 각을 얻을 자[能得]가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어서 ‘열반을 얻을 수 없는데’라고 함은, 열반이 얻어질[所得] 수 없음을 밝힌 것이다. 이미 능득ㆍ소득이 없으니 어찌 머무는 자[能住]와 머물 곳[所住]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말하기를 ‘어떻게 머묾이 있으랴’라고 하였으며, ‘항상 머문다’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다음에는 시각(始覺)을 들어 머묾이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제시해 놓고 다음에 해석한다.
여기서 ‘깨달은 자’란 시각을 말한다. 해석 부분에서 ‘본래 생겨남이 없음을 깨달아’라고 함은, 생사가 본래 생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까닭에 생사의 오염[垢]으로부터 떠났음을 말한다. ‘본래 고요함이 없음을 깨달아’라고 함은, 열반에 본래 적정함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까닭에 열반으로 들어가는 움직임에서도 떠났음을 말한다.
‘마음에 머무르는 것이 없다’ 함은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출입하는 것이 없다’ 함은, 속제(俗諦)를 유(有)로 보지도 않고, 진제(眞諦)를 공(空)으로 보지도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암마라식에 들어간다’ 함은, 일심의 체(體)는 양 극단[二邊]을 떠나 이 마음의 근원에 돌아가므로 ‘들어간다’고 표현하였다. 이렇게 머묾이 없어야 해탈할 수 있으므로, 열반에 머물면 결박[縛]을 벗어나지 못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암마라식(唵摩羅識)은 (깨달아) 들어가는 처소이니, 처소가 얻어진다면 이는 법을 얻는 것이겠습니다.”
【論】 이 아래는 (첫 번째 유주의 집착을 떨쳐준 것에 이어) 두 번째 유득(有得)의 집착을 떨쳐주는 것인데 여기도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첫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물음이요 다음에는 대답이다. ‘들어간다’는 앞의 말씀을 글자 그대로 뜻을 취하여, ‘무구식(無垢識)은 들어갈 곳이고, 들어갈 때는 증득하는 것이므로 얻는 것이 있지 않겠느냐’ 하는 의심이 생기므로 이런 물음을 던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비유를 들겠다. 여기 길 잃은 아들이 손에 돈을 쥐고도 돈이 있는 줄 모르고 시방세계를 돌아다니며 50년이나 보냈다. 가난하고 궁색하고 곤란하고 괴로워 전력을 다해 살길을 찾아 헤맸으나 몸 하나 지탱하기도 부족했다.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이런 정황을 보고 말하였다. ‘너는 손에 돈을 쥐고도 어째서 쓰지 못하느냐? 필요하면 마음대로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인데’ 하자 아들은 깨닫고서 돈을 찾아 매우 기뻐하며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길 잃은 아들아, 너는 좋아하지 말라. 얻은 돈은 본래 네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좋아할 게 어디 있느냐?’라고 하였다.”
【論】 이 답에서도 무득의 의미를 셋으로 밝히고 있다. 주장[法]ㆍ비유[喩]ㆍ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이다.
‘아니다’라고 한 것은 유득(有得)이 아님을 총괄적으로 말한 것이고,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무득(無得)을 드러내기 위하여 네 토막으로 비유를 든 것이다.
첫째는 길 잃은 아들이 돈을 가지고 있는 줄 모르고 떠돌아다니며 가난하게 고생한다는 비유이며, 둘째는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돈이 있음을 알려주고 충족하게 얻도록 한 비유이며, 셋째는 돈을 얻었다고 좋아하는 비유이며, 넷째는 그것은 새로 얻은 것이 아니라고 말한 비유이다.
첫째 토막에서 ‘길 잃은 아들’이란, 모든 중생이 제 마음의 근원을 잃고 있는데, 여래께서 대비심으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듯 하므로 길 잃고 방황하는 아들에 비유한 것이다. 『법화경』에 나오는 가난한 아들의 비유는 성문의 무리를 비유하는데 그쳤으나 여기에서 말한 길 잃은 아들은 모든 중생에게 다 통하는 비유이다.
‘손에 돈을 쥐고도’라는 비유는 온갖 망식(妄識)이 5박(縛)의 번뇌 때문에 집착과 분별을 일으켜 자기의 깨끗한 마음을 뒤덮어 그것이 있는지도 모르는 것을 말한다. ‘시방세계를 돌아다님’이란 5상(相)과 5사(事)를 두루 분별함을 말한다. ‘50년이나 보냈다’는 것은 5음(陰)을 받아 50악(惡)을 일으킨 까닭이다. ‘가난[貧]’이란 세간의 선(善)을 조금밖에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궁색[窮]’이란 도무지 출세간의 재산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곤란[困]’이란 세 가지 나쁜 길[三途] 중 어디에 떨어져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괴로움[苦]’이란 인간이나 천상의 생을 받아 가벼운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전력을 다해 살길을 찾아 헤맸다’ 함은, 세간의 낙을 구하여 복 받는 일에만 열중한다는 뜻이다. ‘몸을 지탱한다’ 함은 인간이나 천상의 낙을 받아 누린다는 뜻이다. ‘부족했다’ 함은, 세간의 낙을 받아 써보면 갈애(渴愛)만 더욱 늘어나고, 성한 날이 있으면 반드시 쇠할 날이 있어 옳은 이익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둘째 토막에서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보고’라 함은, 부처님께서는 일심의 근원에 돌아가, (중생을) 자기 몸과 같이 여기는 대비심으로 모든 중생을 위해 어진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이런 정황’이란 첫 번째 토막에서 말한 일이요, ‘아들에게 말했다’는 것은 중생을 위해 대승의 가르침을 설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너는 손에 돈을 쥐고도 어째서 쓰지 못하느냐?’고 하신 뜻은, 그에게 깨끗한 마음이 있으므로 믿고 이해해야 함을 보여주신 것이다. ‘필요하면 마음대로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인데’라고 함은, 깨끗한 마음을 쓴다면 본각의 훌륭한 이익과 법신의 혜명이 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셋째 토막에서 ‘그러자 아들은 깨닫고서’라고 한 것은 대승의 가르침을 듣고서 믿음과 이해가 생겼다는 뜻이니, 지전(地前)의 지위에 있음을 말한 것이다. ‘돈을 찾았다’ 함은 초지(初地), 즉 통달위(通達位)에 들어갔다는 뜻으로서, 불성(佛性)과 본각의 이익을 증득해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매우 기뻐했다’고 함은 후득지(後得智) 중에 이제 막 얻을 것이라는 생각에 지극한 기쁨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돈을 얻었다고 말하였다’는 것은 관(觀)에서 나와서는 또 바른 생각을 놓쳐서 새어나옴[漏]이 있는 마음속에 있으므로 법집(法執)을 일으켜 얻은 바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넷째 토막에서 ‘얻은 돈은 본래 네 것이다’라고 함은, 증득한 본각의 이익이 본래 너에게 속한 것이지 이제야 비로소 있게 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 것이다. ‘네가 얻은 것이 아닌데 좋아할 게 어디 있느냐?’ 함은, 이미 본래 너에게 속해 있었고 지금 새로 얻은 것이 아니니, 얻었다 하는 마음에 사로잡혀서는 안 됨을 가르친 것이다. ‘너는 좋아하지 말라’고 한 것은 얻은 바가 있다고 분별하여 마음속으로 집착하고 기뻐함을 막아준 것이다.
【經】 “선남자야, 암마라(唵摩羅)도 이와 같아서, 본래 나가는 모양이 없고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옛적에 미혹했었다 하여 없던 것도 아니고, 지금 깨달았다고 하여 들어가는 것[入]도 아니다.”
【論】 세 번째는 비유를 주장에 대입하는 부분[合]인데 이 중에 전체적인 대입[總合]과 개별적인 대입[別合]이 있다. 총합 중에 ‘암마라(唵摩羅)’란 여기 말로는 ‘때가 없다[無垢]’는 뜻이다. 본각은 본래 깨끗한 것이라 그 성품이 바뀌거나 변함이 없다, 저 황금 돈[金錢]의 성품이 바뀜이 없듯이. 또 황금에는 네 가지 뜻이 있다. 본각에 있는 상ㆍ낙ㆍ아ㆍ정(常樂我淨)21)을 비유한 것으로, 네 토막에 나오는 ‘돈’에 공통적으로 해당한다.
별합(別合)에도 네 구절이 있다.
‘본래 나가는 모양이 없다’ 함은 첫 토막 중 ‘손에 돈을 쥐고 있다’고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지금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함은 셋째 토막에서 ‘돈을 얻었다’고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옛적에 미혹했었다 하여 없던 것도 아니고’란, 둘째 토막에서 ‘네가 돈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어찌하여 쓰지 않는가?’ 한 구절에 대입한 것이다. 이는 지난날에는 잘 몰랐기 때문에 쓰지 못했으나 손에 쥐고 있었으므로 없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깨달았다고 하여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함은 넷째 토막에서 ‘이것은 본래 네 것이지 네가 얻은 것이 아니다’한 말에 대입한 것이다. 본래부터 있던 물건이라 자기 마음 바깥으로 나가 있지 않음을 이제야 깨달았으니, 본래 밖으로 나가 있던 것이 아닌데, 어찌 들어갈 수가 있겠는가? 들어감이 있지 않으므로 얻음도 있지 않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이 길을 잃고 있음을 알았는데 어찌하여 50년 동안 시방세계를 헤매면서 가난하고 궁색하고 곤란하고 괴롭게 두었다가 이제야 알려주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0년을 지냈다는 것은 한 생각이 움직였다는 뜻이고, 시방세계를 헤맸다는 것은 끝없이 망상으로 돌아다녔다는 뜻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의문 나는 점을 거듭 없애준 부분이다.22) 세 번의 문답으로 차례차례 의문을 풀어간다. 첫 번째 문답에서는 비유로 던진 의문에 대하여 법(法)으로 대답하였다.
‘50년 동안’이란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 것이요, ‘시방세계를 헤맴’이란 끝없이 망상으로 돌아다녔음을 비유한 것이다. 이는 일념을 일으키는 동안 갖가지 법에 대해 망령되게 생각하는 것이요,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을 보고 그 아버지가 일깨워 준 것이다.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각성을 할 수가 있었고, 망념이 다했을 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게 되었으니, 돈을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는 경우와 같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사실을 알려준 것인데, 오랜 시간이 경과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념에 50악(惡)이 갖추어져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50년을 지냈다는 비유로 말하였다.
답한 뜻은 이와 같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무명의 힘 때문에 4상(相)을 일으키고 4상과 무명이 합쳐지는 힘 때문에 일심을 움직여 생겨나고[生]ㆍ머물고[住]ㆍ달라지고[異]ㆍ소멸한다[滅]. 일심이 일단 움직이면 이 4상을 동반하게 되므로 ‘한 생각이 움직인다’고 하였다. “자성이 청정한 마음이 무명의 바람 때문에 움직인다…”라고 한 『기신론』의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자세한 내용은 『기신론』「별기(別記)」에 설명되어 있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어찌하여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념의 마음이 움직이면 5음(陰)이 동시에 생기고, 5음이 생기는 데서 50악이 갖추어진다.”
【論】 여기는 두 번째 문답으로 두 번째 의문을 없애준 것으로서, 고쳐야 할 악(惡)을 나타냈다. 일념(一念)의 4상(相)이 모든 생사를 포섭하므로 5음을 갖추고 50악이 있게 된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의도에서 이 문답을 시설했다. 어떻게 5음이 50악을 갖추는가? 식음(識陰)에 여덟 가지가 있으니, 이는 8식(識)을 말한다. 수(受)ㆍ상(想)의 2음(陰)에 각각 여덟이 있어 16이 된다. 행음(行陰)에는 아홉 가지가 있으니, 여덟은 상응(相應)23)이고, 하나는 불상응(不相應)24)이다. 이에 색음(色陰) 열일곱 을 합하면 50이 된다. ‘색음 열일곱’이란 능동적으로 만드는 주체가 되는 4대(大)와 만들어진 객체가 되는 13을 합친 것이다. ‘13’이란 5근(根)과 5진(塵)과 법에 속하는 세 가지 색[三種色]을 말한다. 즉 『현양론[顯揚聖敎說』에서 말한 율의색(律義色)과 불율의색(不律義色)과 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의 셋을 말한다. 우선 한 면에서 50가지를 세웠는데, 이와 같은 50가지는 순전한 악(惡)으로서, 모두 다 유전하는 것이라 열반에 위배되므로 저 열반의 순전한 선(善)과는 반대가 되기 때문에 50가지를 말한다.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끝없는 망상[遍計]으로 시방을 헤매는 것이 일념의 마음에서 생겨 50악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니, 어떻게 하면 그 중생들로 하여금 일념을 일으키지 않게 하오리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 마음을 안정시켜 금강지(金剛地)에 머물러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남이 없게 하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할 것이니 이것이 일념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論】 여기는 세 번째 문답으로 셋째 의심을 떨쳐주는 부분으로서 고쳐 나가는 길을 밝힌 것이다. ‘저 중생들로 하여금’이란 10신(信) 이전의 모든 중생을 말한다. ‘마음을 안정시켜’라 함은 10주(住)를 넘어서면 마음이 편안히 3공(空)에 머물러 결코 물러서지 않게 되는데, 이를 ‘안정시킨다[安坐]’고 하였다. ‘금강지에 머물러’라 함은, 초지(初地) 이상의 경지에서 법신을 증득하여 금강과 같이 무너지는 모든 것들을 떠나므로 그렇게 말하였다. ‘생각을 고요히 하여 일어남이 없게 함’이란 등각위(等覺位) 중에서 동요하는 망념이 본래 적정한 것임을 깨달아 다시는 망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함’이란 묘각위(妙覺泣)에 도달하여, 일심의 원천은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고, 또 본래 동요하는 망념이 없고 시작과 끝이 없음을 볼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일어남도 사라짐도 없으므로 ‘항상’이라 하였고, 동요하는 망념이 없으므로 ‘편안하다’ 하였고, 시작도 끝도 없으므로 ‘태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수행하여 구경각(究竟覺)을 얻으면 생겨났다 사라졌다 하는 망념의 네 가지 모양[四相]이 없다. 그러므로 일념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뜻을 드러내기 위하여 『기신론』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초발의보살(初發意菩薩)들은 생각이 달라지는 특성[異相]을 깨달아서 생각에 이상(異相)이 없으니, 거칠게 분별하고 집착하는 특성[麤分別執着相]을 버리므로 이를 상사각(相似覺:가까이 간 깨달음)이라 한다. 법신보살(法身菩薩)들은 생각이 머무는 특성[住相]을 깨달아 생각에 주상(住相)이 없으니 분별하는 거친 생각의 특성을 떠났으므로 수분각(隨分覺:능력에 맞게 부분적으로 깨달음)이라 한다. 보살지(菩薩地)를 다 넘어섰을 경우 방편이 완성되고 일념이 상응하여 마음이 처음 일어남을 깨달아서 마음에 처음 일어나는 상[初相]이 없다. 미세한 생각마저 멀리 떠나므로 심성을 볼 수 있어 마음이 상주(常住)하게 되니 이를 구경각(究竟覺)이라고 부른다.”
나는 위 문장을 이렇게 본다. 여기서 ‘심성을 볼 수 있으며 마음이 상주한다’고 한 말이 『금강삼매경』의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할 것이다[心常安泰]’라는 문구를 풀이한 것이다. 나머지 다른 문구들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해온 것에 준하여 해석하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큰 단원은 본각에 대하여 부연한 것이다.25)
【經】 무주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면 그것이 본각의 이익입니다. 그 본각의 이익은 움직임이 없고 항상하여 없지 않으며,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며, 없지도 않지만 각이 있지도 않습니다.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이며 본래의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란 것은 청정하여 오염되지 않으며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으니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인 (보살이)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領解]과 네 번째인 (부처님이) 결론짓는 부분[述成]이다.26)
‘불가사의’라고 한 것은 부처님의 깊은 말씀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고 찬탄한 말이다. 그 아래는 이해한 내용을 개별적으로 서술한 것이다. 여기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 말을 이해하고 나중에 뜻을 이해한 것이다.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깨달아 그 마음이 편안하고 태연하다’ 함은, 앞에서 ‘생각이 고요해져서 일어남이 없으면 마음이 항상 편안하고 태연하다’고 한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서 시각(始覺)이 궁극에 다다른 경지를 말한다. 아래 뜻을 이해한 데서 ‘그것이 본각의 이익’이라 함은,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은 뜻을 잘 이해한 것이다.
논[起信論]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념(無念)을 얻으면 심상(心相)의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을 알게 되니, 이는 무념(無念)과 동등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각이라고 다를 것이 없으니, 생ㆍ주ㆍ이ㆍ멸의 네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므로 본래 평등하여 동일한 각(覺)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실제로 시각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는 말은, 이 경의 ‘그것이 본각의 이익’이라고 한 문구를 해석한 것이다. ‘네 가지 모습이 동시에 있어 모두 자체로 존립하지 않으므로 본래 평등하다’고 한 말은, 이 경의 ‘그 본각의 이익에는 움직임이 없다’고 한 문구를 해석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시각(始覺)은 다를 바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하여 없지 않게’ 된다. ‘항상하다’는 것은 곧 ‘없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항상’이라고 말했으나 딱히 있다[有]는 것은 아니므로 ‘있는 것도 아니지만 없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시각(始覺)이 있다[有]는 말이 타당하지 않다면, 그렇기 때문에 각(覺)이 없지는 않다 할지라도 각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각이) 없지도 않으며 각이 있지도 않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무각(無覺)의 도리를 깨달아 알면 시각이 본각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되므로 ‘깨달음이 없음을 깨달아 아는 것이 본래의 이익이며 본래의 깨달음’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끝까지 깨달아[究竟覺] 안다는 것은 무명(無明)의 뒤덮임을 멀리 벗어난 상태이므로 ‘청정하여 오염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청정하다는 것은 본래 밝기 때문이며,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오염 상태를 이제는 떠나기 때문이다. 생ㆍ주ㆍ이ㆍ멸을 영원히 떠났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달라지지 않는다’하였으니,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생(生)과 주(住)가 없기 때문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異)와 멸(滅)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제(眞諦)와 같고 법성(法性)과 같으므로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에’라고 한 것이다. 이미 한결같이 평등하여 언설(言說)을 떠나고 사려[慮]를 초월했으므로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앞에서 이미 부사의(不思議)라고 말했는데 여기에서 중복한 이유는 불가사의한 그것에 대해서도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그렇다’고 하신 것은 네 번째인 결론[述成]에 해당한다. 앞에서 (보살이) 듣고 이해[領解]한 내용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經】 무주보살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이제껏 없던 일을 얻어 게송으로 아뢰었다.

높으신 대각(大覺) 세존께서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설하시니
무념과 무생의 마음이 되어서
마음이 항상 생하여 소멸하지 않네.
일각(一覺)인 본각(本覺)의 이익으로
본각 지닌 모든 자들을 이롭게 하니
저 돈을 얻은 사람과 같아서
얻은 것이 얻은 것이 아니어라.

【論】 이는 두 번째인 게송으로 찬양하는 부분이다.27) 게송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 두 구절은 설하신 분을 전체적으로 찬양한 것이고, 다음 네 구절은 앞에서 설해주신 법을 찬양한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은 비유를 노래한 것이다.
‘중생들에게 무념법을 설하시니’란 모든 중생이 무념법을 이루고 구경각을 이룸을 설하신 것을 말한다.
‘무념과 무생의 마음이 되어서’라고 한 것은 나고 죽는 생각이 없어서 무생의 마음을 성취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마음이 항상하여 소멸하지 않네’라 함은 앞에 설하신 글을 노래로 간추린 것으로서 경문 중에 ‘마음이 항상 편안하여……항상하여 없지 않다’ 한 부분에 해당한다. ‘생(生)’이란 있다[在]는 뜻이요, ‘멸(滅)’이란 없다[無]는 뜻이다. ‘일각인 본각의 이익으로 본각을 지닌 모든 자들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본각을 지니고 있지 않은 중생은 하나도 없으므로 ‘본각을 지닌 모든 자’라 하였다.
맨 아래 두 구절은 앞에서 든 네 토막의 비유를 총괄적으로 노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經】 그 때 대중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본각의 이익인 반야바라밀을 얻었다.
【論】 이는 세 번째로 법을 듣고 이익 얻음을 나타낸 것이다. 말씀하신 뜻에 따라 제각기 이익을 얻었다는 뜻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본각의 이익을 얻은 것과 시각의 반야는 평등하고 다름이 없다.
045_0087_b_02L論曰一切有情旡始已來入旡明長夜作妄想大夢菩薩修觀獲旡生時通達衆生本來寂直是本覺臥一如牀以是本利利益衆生此品顯是道理故名本覺利品 經曰爾時旡住菩薩聞佛所說一味眞實不可思議從遠近來親如來座專念諦聽入淸白處身心不動 論曰別明觀行六分之此下第三明本覺利依旡生行能會本覺方得普化饒益一切由是義故次演說之就文有三一者廣明本覺利益二者以偈讚頌三者時衆得益初中有二一者因動明靜略標本利之宗二者從微至著廣說本利之義初中有三一者寄身移動以標本利者因言往復以標本利三者放光讚頌本利初中言旡住菩薩者此人雖達本覺本旡起動而不住寂靜恒起普化依德立號名曰旡住旡住之德契合本利因此人以表其宗言一味眞實不可思議者則前品說心旡生行不可思議等也從遠近來親如來座其先座處去佛座遠聞前品已遷至近處表其先時未聞深法位在凡愚去佛果遠今聞佛說得本覺自知當得佛果在近也專念諦聽入淸白處身心不動者已近佛座時專念於諦聽入本淸淨明白之隨本覺靜身心不動因此卽表入本覺時達本旡得旡所得也 經曰爾時佛告旡住菩薩言汝從何來今至何所旡住菩薩言尊者我從旡本來今至旡本所 論曰此下第二因言往復於中有三述成第二荅意明從凡位來至聖位至聖位時尋古今古在凡位始發趣時自信己心本旡起動起動之本不可得故今至聖位得旡生時證知自心本來旡生生起之本旡所得故故知始從旡本處來今所至處亦旡本所旣擧旡本當知旡末旡末旡本者來旡至矣但仰順佛問之辭假寄來至之言雖復不有來至而非都旡來至故故因來至顯旡來至至所來處同旡本故 經曰佛言汝本不從來今亦不至汝得本利不可思議是大菩薩摩訶薩 論曰是述成述成意言來處至處旣同旡本旡本處同則旡來至所以然者來處不異於至處故本旡從來處旣同於來處故今旡所至又復來處旣旡本故旡來不來今所至處亦旡本故旡至不至旣旡來旡至本來寂靜故言汝得本利不可思議旣得本利自利利他故言是大菩薩摩訶薩也 經曰卽放大光遍照大千界而說偈言大哉菩薩 智慧滿足 常以本利 利益衆生於四威儀 常住本利 導諸群庶 不來去去論曰此下第三如來放光表讚菩薩於中有二先經家序所以放大光明照大千界者爲表得大智慧光明照世閒闇令得光明故證成如來前所讚故大哉菩薩者別讚旡住菩薩智慧滿足者以旡所知旡所不知故於四威儀常住本利者如前所序從遠近來親如來座因此示現本覺利故不來去去者寂而恒化故言不來者隨所導化令得出世不退還故言去去者隨得不退展轉出離而善逝故 經曰爾時住菩薩而白佛言尊者以何利轉而轉衆生一切情識入唵摩羅 論曰此下第二廣演本利之義於中有二一者直廣二者重演初直廣中先問後荅以何利轉者是問能化轉利義前導諸之句而轉衆生等者是問所化轉諸識義問前去去之句一切情識卽是八識唵摩羅者是第九識眞諦三藏九識之義依是文起如彼章說 經曰佛言諸佛如來常以一而轉諸識入唵摩羅何以故一切衆生本覺常以一覺覺諸衆生令彼衆生皆得本覺覺諸情識空寂旡生何以故決定本性本旡有動 論曰是荅正廣本利之義於中有二先標後釋諸佛如來常以一覺是標能化之本而轉諸識入唵摩羅者是標所化之轉釋中有二正釋轉釋正釋中言一切衆生本覺釋前能化之本一覺一切衆生同一本覺故言一諸佛體此乃能普化故言常以以此本覺令他覺故言常以一覺覺諸衆生令彼衆生皆得本覺者是釋所化轉入之句本覺正是唵摩羅識得本覺者是釋入義入本覺時覺諸八識本來寂滅覺究竟故諸識不生故言諸識寂滅旡生是句正釋轉諸識句此文具顯本始二覺謂一切衆生本覺等者是本覺覺諸情識寂滅旡生者是始覺義是顯始覺卽同本覺也何以故下第二轉釋釋前始覺所覺寂滅諸八識隨緣動轉而求定性皆旡所得故言決定本性本旡有動本旡動故本寂滅也 經曰旡住菩薩可一八識皆緣境起如何不動 論曰此下第二重演於中有二先演始覺後演本覺初中亦二一演諸識空寂二演諸識旡生前是始覺之所覺後是能覺之始覺初中卽有六番問荅於中有三一者前二問荅正明空寂#二者第三問荅明不同相三者後三問荅明不異相此初問荅明旡起動言可一者一切之謂謂一切衆生所有八識皆緣境起者四緣之中且擧緣緣以難不動 經曰佛言一切境本空一切識本空空旡緣性如何緣起 論曰且遣境緣顯識旡起 經曰旡住菩薩言一切境空如何見佛言見卽爲妄何以故一切萬有旡生旡相本不自名悉皆空寂一切法相亦復如是一切衆生身亦如是身尚不有云何見 論曰此下第二問荅明見是妄妄故眞空謂境空故見有境卽是妄見亦空故計有見亦是妄釋中有二摠明別顯摠明者陰界等有本不自名我爲色等但由妄心名爲色等是故一切悉皆空寂也別顯中言一切法相亦如是者謂外山河等六塵法相一切衆生身亦如是者內色受等五陰之身身體尚旡何有見用故 經曰旡住菩薩言一切境一切身空一切識空覺亦應空佛言可一覺者毀不壞決定性非空非不空旡空不空 論曰此下第三番明覺不覺之不同相問意言覺亦應空者緣生識旣空從緣起覺亦空識旣空故其見是妄亦空故其覺亦妄也佛荅意言一切覺者不壞道理故非可空不存自性亦非不空是故覺中旡空不空諸識不爾妄取諸法違反眞理可空可遣如是不同何得相類也決定性者謂眞如性不可破壞性自爾言不毀者不取有相以傷空故言不壞者不計旡以損眞故謂不毀壞於決定性也 經曰旡住菩薩言諸境亦然#非空相非旡空相佛言如是彼可境性本決定決定性根旡有處所旡住菩薩言覺亦如是旡有處所佛言如是覺旡處故淸淨淸淨旡覺物旡處故淸淨淸淨旡色 論曰此下三番明不異於中前二番明覺與境同相後一問荅顯覺與識同相初中前番明境同覺謂諸妄境本來不有旣旡其有何有空相旣非#有空何得旡空故言非空相非旡空相以此而言則不異覺荅中言性本決定者本不有故非空相旡有處所者明非有空故非旡空後番問荅明覺同境覺亦如是者覺亦緣生本性空故荅中言淸淨旡覺者覺空之理離一切相故曰淸淨覺性旣空空中旡覺如色空中旡色相故前明境同覺者以境非空非不空義同於前覺非空非不空義今明覺同境者以覺性空旡相之理同於境空旡相之義二文不同應如是知 經曰旡住菩薩言心眼識亦復如是不可思議佛言心眼識亦復如是不可思議何以故色旡處所淸淨旡名不入於內旡處所淸淨旡見不出於外心旡處所淸淨旡上有起處識旡處所淸淨旡動旡有緣別性皆空寂論曰此第三番明識同覺心眼識者謂眼識種子積集之心及此種子所起眼識略擧此二標其性空就四緣明眼識空色旡處所者色性自空故淸淨旡名者空中旡色故不入於內者不與眼根作境界故是明所緣緣空也眼旡處所淸淨旡見者眼性空中旡眼根故不出於外者旡能行於色境界故是明增上緣空也心旡處所淸淨旡上者種子空中旡種子四緣之內爲上首故旡有起處者旡親起識之處所故是明因緣空也識旡處所淸淨旡動者旣旡三緣眼識不起故旡有緣別者以旡緣色了別識故明等旡閒緣及眼識空緣者前滅之緣別者後生了此二皆空故言旡有如是四緣及識皆空故摠結性皆空寂如說眼識四緣皆空乃至意識應如是謂法旡處所淸淨旡名不入於內意旡處所淸淨旡見不出於外心旡處所淸淨旡上旡有起處識旡處所淸淨旡動旡有緣別性#皆空寂此中意者是第七識此中心者是第八識是明八識皆悉空寂所以同於一切覺空也 經曰性旡有覺覺則爲覺男子覺知旡覺諸識則入何以故金剛智地解脫道斷已入旡住地旡有出入心處旡在決定性地其地淸淨如淨瑠璃性常平等如彼大地覺妙觀察如慧日光利成得本如大法雨入是智者是入佛智地智地者諸識不生 論曰是第二明諸識不生欲明本隨旡明諸識生起今隨始覺還歸心源歸心源時諸識不起識不起故始覺圓滿於中有二略標廣釋標中亦二初言性旡有覺覺卽爲覺者是標始覺圓滿章覺知旡覺諸識則入者是標諸識不生章言性旡有覺者謂空性中非但旡識亦旡始覺覺知旡覺之理則爲始覺之智故言覺則爲覺言覺知旡覺者牒前始覺始覺圓時八識不起隨覺旡覺旡諸識故隨覺究竟歸心源故故言諸識則入何以故下釋中有二先明因滿後顯果圓金剛智地者謂等覺位始覺因滿金剛喩定義如前說今約覺因名金剛智脫道斷者不生因滿然此中斷有其二義若對生得旡明住地卽金剛心爲旡閒道妙覺初心爲解脫道旡閒道時與旡明俱解脫道起方能正斷若對諸識戲論種子則其前心爲旡間道與彼種子俱起俱滅最後一念金剛喩定是解脫道正斷種子今約斷其種子義門故言金剛解脫道斷此時現有異熟識者由其前念種子所生生起因果不同時故此後異熟不更生者此時已斷一切種故故知此言解脫道斷正是諸識不生之因次顯其果於中有二先明覺圓滿後顯識不生初中言斷已入旡住地者金剛解脫斷種子已卽入妙覺旡住之地二諦之外獨在旡二故言旡住旡住之心雙泯二諦故旡出俗入眞之異旣旡出入不在空有故言心處旡在旡在之處唯是一心一心之體本來寂靜故言決定性地一心顯時八識皆轉故於是時四智圓滿所以然者卽此一心離闇成明明白淸淨旡影不照故言其地淸淨如淨瑠璃是顯大圓鏡智之義卽此一心遠離二邊通達自他平等旡二故言性常平等如彼大地是顯平等性智之義如是一心旡所觀故於諸法門旡不觀察故言覺妙觀察如慧日光是明妙觀察智之義如是一心旡所作故於利他事旡所不作故言利成得本如大法雨雨潤萬物令成菓實此智亦爾利他事成令得本覺是明成所作智之義四智旣圓是始覺滿入是智者已下次顯諸識不生得是四智正是妙覺之位故言是入佛智地是時旣歸一心之源八識諸浪不更起動故入智地者諸識不生也上來二分演始覺竟 經曰旡住菩薩言如來所說一覺聖力四弘智地卽一切生本根覺利何以故一切衆生卽此身中本來滿足 論曰此下第二演本覺義於中有二一者正明二者遣著初中亦二先明本覺旡二之理後示除障入證之門初中亦二先問後荅問中言一覺聖力四弘智地者領次前說四智之義始覺圓滿卽同本覺本始旡二故名一覺旡所不爲故言聖力一覺之內具四大智持諸功德故言智地如是四智同一心量皆旡不周故名弘智如是一覺卽是法身法身卽是衆生本覺故言卽一切生本根覺利本來具有旡量性德熏衆生心作二種業故名本利由是本覺旡二義故旡一衆生出法身外故言卽此身中本來滿足 經曰佛言如是何以故一切衆生本來旡漏諸善利本今有欲刺爲未降伏 論曰荅述許所問明本覺中旡量性德不爲三漏之所染故言本來旡漏以此爲本生諸善利故言諸善利雖有本覺而由客塵欲刺所覆故今未得自本覺 經曰旡住菩薩言若有衆生未得本利猶有採云何降伏難伏佛言若集若獨行分別及與染神住空窟降伏難調伏解脫魔所縛超然露地坐陰槃涅槃 論曰此下第二示其除障入證之門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採集者明三有欲取生死果故言採此諸煩惱與心相應故言集從旡始來現行不絕故言難伏治道方生其力微劣云何能伏如是疑也荅中有三先出所伏次明能伏後顯降伏所得勝利若集若獨行者衆生心行麤細不定或時煩惱相應故集或時離惑心行故獨#離煩惱時猶有法執分別煩惱俱時卽爲煩惱所染故言分別及與染次明能伏謂依佛經迴其心神遣人法相住二空故言迴神住空窟此心方起而順道理故有勝能彼惑旡始而逆道理故不能敵故言降伏難調伏明地前伏除二障由是伏道入斷道位漸拔種子乃至永盡永盡之時遠離四魔故言解脫魔所縛次明降伏所得勝利勝利有二謂菩提果及與果果菩提果者超出有漏五陰聚落坐於道場得旡上覺故言超然露地坐言果果者以旡上覺證大涅槃覺知旡覺諸識皆入故言識陰般涅槃也 經曰旡住菩薩心得涅槃獨一旡伴常住涅槃應當解脫 論曰此下第二遣著於中有二先明旡住以遣有住之著後示旡得以除有得之執初中有二先問後荅問中獨一者八識轉時成一覺故言旡伴者人法二執斯遠離故旡伴之覺常住於涅槃常住之智解脫一切縛有作是執故作是問也 經曰佛言常住涅槃是涅槃縛何以故涅槃本覺利利本涅槃涅槃覺分卽本覺分覺性不異涅槃旡異覺本旡生涅槃旡生覺本旡滅涅槃旡滅涅槃本故旡得涅槃涅槃旡得云何有住善男子覺者不住涅槃何以故覺本旡生離衆生垢覺本旡寂離涅槃動住如是地心旡所住旡有出入入唵摩羅 論曰是荅正遣有住之執中有二初略破執後廣顯理初中言常住涅槃是涅槃縛者設有常覺住於涅槃卽是執著縛於涅槃何常住是解脫耶何以故下廣顯道理理旡住故有住違理違理之心非縛是何釋意如是於中有二約本覺以明旡住後約始覺以顯旡住初中約旡異以明旡得旡住此旡異義有其四種一者本理旡如經涅槃本覺利利本涅槃故是明涅槃是本覺此本覺利是本涅槃其始覺者卽同本覺所以旡異故旡得也二者覺分旡異如經涅槃覺分卽本覺是明涅槃衆德卽是本覺之德旡異旡得如前說三者一味旡異如經覺性不異涅槃旡異是明覺性一味旡差別相卽是涅槃之旡差別四者旡二旡如經覺本旡生涅槃旡生覺本旡滅涅槃旡滅明本覺本無生滅卽是涅槃之旡生滅由是四種旡異道理本無異故旡得涅槃是明旡能淂涅槃覺言涅槃旡得者是明涅槃旡所得義旣旡能得所得何有能住所住以之故言云何有住卽顯常住不應道理次約始覺以明旡住先標後釋言覺者者謂始覺者釋中言覺本旡生者覺知生死本來旡生所以離著生死之垢也言覺本旡寂者覺知涅槃本旡寂所以離入涅槃之動心旡所住者不住生死及涅槃故旡有出入者不見俗有及眞空故入唵摩羅者一心之體離二邊故歸此心源故名爲入如是旡住方得解脫故住涅槃不離縛也 經曰旡住菩薩言唵摩羅識是有入處處#有所得是得法也 論曰下第二遣有得執於中有四一者正明旡得二者重遣疑情三者領解四者述成初中有二先問後荅前入言如言取義謂旡垢識有所入處入時證得有所得有作是疑故作是問 經曰佛言不何以故譬如迷子手執金錢而不知有遊行十方經五十年貧窮困苦專事求索而以養身而不充足其父見子有如是事而謂子言汝執金錢何不取用隨意所須皆得充足其子醒已而得金錢心大歡喜而謂得錢其父謂言迷子汝勿欣懌所得金錢是汝本物汝非有得云何可喜 論曰是荅正明旡得之義於中有三謂法合初言不者摠非有得何以故下喩顯旡於中有四種喩一者迷子不知有金錢遊行貧苦二者其父示子有金錢令得充足喩三者喜得金錢喩四者告非有得喩初喩中言迷子者謂諸衆生迷自心源如來大悲如視一子故喩迷子法華窮子局喩聲聞此中迷子通喩群生手執金錢者喩諸妄識五縛煩惱執著分別覆自淨心不知有故遊行十方者遍計五相及五事故經五十年者受五陰生五十惡故貧者少有世閒善故窮者都旡出世財故或墮三途受劇苦故苦者或生人天受輕苦故事求索者求世閒樂作福業故而以養身者受人天樂而受用故而不充足者受世閒樂彌增渴愛盛必有衰旡義利故第二喩中其父見子者佛歸心源同體大悲爲諸衆生作慈父故有如是事者有如初喩所說事故而謂子言者爲衆生說大乘教故汝執金錢何不取用者示有淨心應信解故隨意所須皆得充足者若用淨心本覺勝利法身慧命得圓滿故三喩中其子醒已者聞大乘教而生信解位在地前而得金錢者得入初地正通達位證見佛性本覺利故心大歡喜者後得智中念當現得生極喜故謂得錢者出觀失念有漏心中故起法執謂有得故第四喩中所得金錢是汝本物者示其所證本覺之本來屬汝非始有故汝非有得云何可喜者旣本屬汝非今始得不宜於得生著心故汝勿欣懌者其分別謂有所得於中生著而欣懌故 經曰善男唵摩羅者亦復如是本旡出相今則非入昔迷故非旡今覺故非入 論曰是第三合於中有二㧾合別合摠合中言唵摩羅者此云旡垢本覺本淨性旡改轉似彼金錢性旡改故又金有四義喩本覺中常樂我淨通合四喩中金錢也別合中有四句本旡出相者合初喩中手執金錢故今卽非入者合第三喩而得金錢昔迷故非旡者合第二喩汝執金錢何不取用是昔迷故不用而手執故非旡也今覺故非入合第四喩是汝本物汝非有得今覺本物不出自旣本不出何得有入非有入故非有得也 經曰旡住菩薩言彼父知其子迷云何經五十年十方遊歷貧窮困苦方始告言佛言經五十年一念心動十方遊歷遠行遍計 論曰此下重遣疑情三番問荅次第遣疑此初番者問依喩疑荅就法遣荅意而言經五十年喩於一念心動十方遊歷喩於遠行遍計斯則一念之頃遍計諸法卽於此念其父告言告言之時卽得醒悟念究竟時得旡所得如覺金錢而旡所得所以父告非爲經久但爲顯一念具五十惡故喩中說經五十年耳荅意如是是義云何謂由旡明力而起四相四相旡明和合力故能動一心生住異一心旣動帶此四相是故說名一念心動如起信論云自性淸淨心因旡明風動乃至廣說於中委悉如彼記說 經曰旡住菩薩言云何一念心動佛言一念心動五陰具生五陰生中具五十惡 論曰第二番遣第二疑顯所治惡欲明一念四相攝諸生死故具五陰有五十惡云何五陰具五十惡謂識陰有八卽是八識受想二陰隨識各八行陰有九八是相應一不相應色陰十七合爲五十言十七者能造四大所造十三謂五根五塵法處所攝有三種色顯揚說謂律儀色不律儀色及定自在所生色故就一門立爲五十如是五十是眞實惡皆是流轉違涅槃故對彼涅槃眞實善故 經曰旡住菩薩言行遍計遊歷十方一念心生具五十惡云何令彼衆生旡生一念佛言令彼衆生安坐心神住金剛地念旡起心#常安泰卽旡一念 論曰是第三番遣第三疑明能治道令彼衆生者十信已前一切衆生故安坐心神者十住已去安心三空決定不退名安坐住金剛地者初地已上證得法身離諸滅壞如金剛故#靜念旡起者等覺位中覺其動念本來寂靜令不起故心常安泰者至妙覺位得見心源旡起旡滅本旡動念旡始旡終旡起滅故常旡動念故安旡始終故旡不泰然如是修行得究竟覺卽旡生死一念四相以之故言卽旡一念爲顯是義故起信論說言初發意菩薩等覺於念異念旡異相以捨麤分別執著相故名相似覺如法身菩薩等覺於念住念旡住以離分別麤念相故名隨分覺如菩薩地盡滿足方便一念相應覺心初起心旡初相以遠離微細念得見心性心卽常住名究竟覺案云此中得見心性心卽常住卽釋此經心常安泰之句餘句准釋如前應知上來大分演本覺竟 經曰旡住菩薩言可思議覺念不生其心安泰卽本覺利利旡有動常在不旡旡有不旡不旡不覺覺知旡覺本利本覺者淸淨旡染不變不易決定性故不可思議佛言是 論曰此是第三領解第四述成不可思議者摠領歎深下別領解於中有二先領言句後領義理覺念不生其心安泰者領前靜念旡起心常安泰之此是始覺之究竟處下領義理云卽本覺利者旡始覺異本覺義如論說云若得旡念者卽知心相生住異滅以旡念等故而實旡有始覺之異以四相俱時而有皆旡自立本來平等同一覺故案云實旡始覺之異者是釋經中卽本覺利之句四相俱時而有皆旡自立本來平等者是釋經中利旡有動如是始覺覺知旡異故以能得常在不旡言常在者直謂不旡然此中言常而旡當有故言旡有不旡旣旡當於有始覺故雖不旡覺而不有覺故言不旡不覺覺如是旡覺道理卽知始覺不異本覺故覺知旡覺本利本覺如是究竟覺知之者遠離旡明所覆故淨旡染淸淨者本來淨故旡染者今離染故永旡生住異滅故不變不易不易者旡生住故不變者旡異滅故若如是者卽同眞際等於法性故言決定性故旣同平等離言絕慮故言不可思議前已言不思議今重言不思議者亦不可思議於不可思議故佛言如是者第四述成文如前所領解不違道理故旡住菩薩聞是語已得未曾有而說偈言尊者大覺尊 說生旡念法 旡念旡生心心常生不滅 一覺本覺利 利諸本覺者如彼得金錢 所得卽非得論曰此是第二以偈讚頌頌中有三初之二句摠讚能說次有四句頌前法說後有二句頌彼喩說初言說生旡念法者說諸衆生成旡念法究竟覺故旡念旡生心者旡生死念成旡生心故言心常生不滅者略頌演文彼言心常安泰乃至常在不旡故生之言滅之言旡故一覺本覺利利諸本覺者者彼諸衆生旡旡本覺是故說言諸本覺者下之二句頌前四喩摠頌可知 經曰爾時大衆聞說是語皆得本覺利般若波羅密 論曰此是第三聞法得利隨所說隨得利故得本覺利始覺般若平等旡異如前說


5. 입실제품(入實際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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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실제(實際)’란 허망[虛]을 떠났다는 말이며 궁극[究竟]이라는 뜻이다. 환(幻)을 떠난 궁극이기 때문에 ‘실제’라 하며, 가르침[敎]에 의지하여 이치[理]를 닦아 이치에 들어가고 행(行)에 들어가기 때문에 ‘들어간다[入]’고 하였다. 그러나 ‘실제’는 정해진 범위가 없는 것[無際]으로 범위를 삼고, 이입(二入)은 들어감이 없는 들어감이므로 「입실제품」이라고 하였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들은 본각의 이익에 깊이 들어가므로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
【論】 관행(觀行)을 여섯 부분28)으로 나누어 개별적으로 설명[別顯]하는 중 세 번째인 ‘본각에 의하여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依本利物]’ 부분을 마쳤다.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인 허망에서 실제에 들어가는 부분[從虛入實]이다. 한편 앞품까지 심생멸문(心生滅門)을 밝혔다면, 지금 이 품에서는 심진여문(心眞如門)을 드러낸다.
글에 네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간략히 대의를 표한 것[略標大意], 둘째는 도리를 자세히 밝힌 것[廣顯道理], 셋째는 사리불이 이해한 것[身子領解], 넷째는 그 때 모인 무리들이 이익을 얻은 것[時衆得益]이다.
첫째에 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들어가게 하는 방편(方便)을 열어 보인 것이요, 뒤에는 들어 갈 실제(實際)를 보여준 것이다. 방편을 열어 보인 데에도 총체적인 표방과 개별적인 설명이 있는데, 이 글은 총체적으로 표방하여 대의(大意)에 들어가게 한 것이다.
【經】 “때아닌 후세에 진여를 그대로 설법하면 때와 이익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다. 혹은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 같지도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게 설해야 한다. 갖가지 욕정[情]과 지견[智] 가진 자들을 이끌어 살반야(薩般若:一切智)의 바다에 흘러들게 해야 하며, 제도 받을 중생들이 저 헛된 바람을 잡지 않고 모두 한 맛의 신비한 구멍[一味神孔:다른 여러 본에는 一味神乳로 되어 있다]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
【論】 여기서부터는 개별적으로 방편을 열어 보인 부분이다. 이 가운데도 네 가지 방편이 있다. 하나는 때를 아는 방편이고, 둘은 근기를 아는 방편이며, 셋은 끌어들이는 방편이고, 넷은 벗어나게 하는 방편이다.
‘때를 아는 방편[知時方便]’은 ‘때아닌 후세에 진여를 그대로 설법하면 때와 이익이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후세[後]’에 세 가지 뜻이 있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정법이 사라진 후, 다섯 시기로 되어 있는 500세 중 마지막 500세를 말한다. ‘때가 아니[非時]’라 한 것은, 충분히 성숙하지 못한 때, 쉽게 깨닫지 못하는 때, 이견(異見)이 성하게 일어나 서로 비난하는 때이다. 이렇게 때아닌 때에 진여를 단도직입적으로 설법하면 시절에 맞지 않아서 이로울 것이 없다. 때와 이익이 함께하지 못하므로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때를 아는 방편이다.
‘근기를 아는 방편[識機方便]’이란 ‘혹은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 같지도 다르지도 않게, 상응하게 설해야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하며’란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는 쪽으로만 설한다면 그들의 삿된 집착을 움직이지 못할 것이고, 그렇다고 상대의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쪽으로만 설한다면 그들에게 바른 믿음을 일으켜주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에게 올바른 신심을 얻게 하고 본래 가졌던 삿된 집착을 제거해 주려면,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기도 하면서 설해야 한다.
또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치에 따라서만 설하면 상대방의 뜻에 맞지 않기 때문에 바른 믿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이치에 따라 설하지 않는다면 도리에 위배될 터이니 어찌 바른 이해를 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믿음과 이해를 주려면 상대의 마음에 따라주면서 설하기도 하고 따라주지 않으면서 설하기도 해야 한다.
만일 이견(異見)이 엇갈려 쟁론이 한창일 때 유견(有見)에 일치하게 설하면 공견(空見)과는 달라질 것이며, 반대로 공집(空執)에 일치하게 설하면 유집(有執)과 다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쪽으로 설하든 다른 쪽으로 설하든 더욱 쟁론만 조장하게 된다. 또 양쪽을 동일하다고 본다면 자체 안에서 모순을 일으켜 싸우게 되고, 반대로 양쪽을 다르다고 본다면 양쪽 모두와 말다툼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게 설해야 한다.
‘같지도 않게’라 함은 말 그대로 하면 모두 다 허용하지 않는 것이고, ‘다르지도 않게’라 함은 속뜻으로 말하자면 허용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다르지 않으므로 상대방의 마음[情]에 거슬리지 않고, 같지 않으므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상대방의 마음에 대해서도, 도리에 대해서도 어긋나지 않으므로 ‘상응하게 설한다[相應如說]’고 하였다. 여기서 ‘여(如)’는 ‘이(而)’의 뜻이다.
‘끌어들이는 방편[引入方便]’이란 ‘갖가지 욕정[情]과 지견[智] 가진 자들을 이끌어 일체지의 바다에 흘러들게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갖가지 정’이란 크고 작은 욕정의 차별을 말하고 ‘갖가지 지’란 공(空)이다, 유(有)다 하는 지견의 차별을 말한다. 이러한 무리들을 이끌어 모두 도(道)의 흐름에 따라 일각(一覺)인 일체지(一切智)의 바다, 즉 무상보리의 깊고 넓은 이치에 들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마치 온갖 냇물이 함께 바다에 흘러 들어가면 깊고 넓은 큰 바다에서 한 맛이 되는 것과 같으므로 ‘끌어들이는 방편’이라고 한다.
‘벗어나게 하는 방편[出離方便]’이란 ‘제도 받을 중생들이 저 헛된 바람을 잡지[挹] 않고 모두 한맛의 신비한 구멍을 바라보게[庶] 해야 한다’고 한 경문을 가리킨다. ‘읍(挹)’은 ‘짐[斟]’과 같으며 취하여 받아들인다[取納]는 뜻이다. ‘헛된 바람’이란 허공에 떠도는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듯이 모든 경계가 모든 식(識)의 파랑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제도되는 중생이 이 경계의 바람을 붙들고 있었으므로 이제까지는 일어난 모든 식의 파도에 전전하다가 이제는 그것을 취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식의 파도가 그쳐 고요해진 것이다. ‘서(庶)’란 ‘서기(庶幾)’라는 말로 희망한다는 뜻이다. ‘신비한 구멍[神孔]’이란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신선의 굴은 아무 할 일 없이 한적하고 고요하여 장생할 수 있는 곳으로 생사가 없는 대열반(大涅槃)의 집을 비유한 것이다. 원만하고 공적하고 평등하므로 ‘한맛[一味]’이라 하였다. 중생들로 하여금 큰 열반을 희구하고 모든 식의 파도를 멈추어 유전(流轉)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에 ‘출리방편’이라고 한다.
【經】 “세간은 세간이 아니며, 머묾도 처소가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니, 5공(空)에 나오고 들어가면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법은 공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법의 성품은 없지 않기 때문이다[法性非無:어떤 본에는 ‘性非有無’로 되어 있다]. 없지 않음이 없지 않고, 없지 않은 그것이 있지도 않으니 결정된 성질이 없어서 유ㆍ무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있다, 없다를 따지는 범부나 2승(乘)의 지혜로는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거니와 보살들의 경우 이 이익을 알면 보리를 얻는다.”
【論】 이것은 (첫 번째 들어가게 하는 방편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들어갈 도리[所入道理:실제]를 밝힌 부분인데 여기에도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한 설명한 것[略明]이고, 둘째는 거듭 해석한 것[重釋], 셋째는 편견과 집착이 옳지 않음을 나타낸 것[偏執不當], 넷째는 통달한 자에게는 훌륭한 이익이 있다는 것[達者勝利]을 말한다.
첫째 간략한 설명 중에 ‘세간은 세간이 아니며’라 함은 세간의 5법(法)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머묾도 처소가 있어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함은 열반에 상주한다는 것도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행(觀行)을 닦는 사람이 5공(空)을 통달할 때 유(有)에서 나와 공(空)에 들어가기 때문에 ‘나오고 들어가면서’라고 하였다. 공을 들어갔을 때 공성(空性)을 취하지 않고, 공을 취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을 버리지도 않으므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고 하였다.
이미 5공에 들어갔다면 어째서 취하지 않는다고 하며, 취함이 없다면 어째서 버리지 않는다고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둘째로 거듭 해석하였는데, ‘모든 법은 공한 양상을 보이지만 그 법의 성품은 없지 않다’는 경문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공에 들어감을 설하는데, 없지 않음이 없지 않고, 없지 않은 그것이 있지도 않으므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없지 않다’는 것은 법성의 이치[理]가 토끼 뿔과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없지 않은 그것’이란 관행자가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버리지 않은 것은 이치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또 ‘있지도 않다’고 한 것은 관행자가 간직[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간직하지 않는 것은 이치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법성은 이와 같이 결정적으로 있다, 없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통달한 사람은 양쪽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결정된 성질이 없어서, 유ㆍ무 어느 쪽에도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도리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
(편견과 집착이 옳지 않음을 나타낸) 셋째 중에서 ‘있다, 없다를 따지는 범부나 2승의 지혜로는’이란 범부는 유(有)를 긍정하고 공(空)을 등지며, 2승은 유(有)를 등지고 공적한 것만 따라감을 말한다. 이와 같이 유ㆍ무를 떠나지 못한 지혜를 가지고 안온한 법성을 헤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아니거니와[非]’라고 하였다.
(통달한 자에게는 훌륭한 이익이 있다고 한) 넷째 가운데 ‘모든 보살’이란 지전보살(地前菩薩)을 일컫는다. 법성(法性)이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님을 아는 자는 처음 발심한 때 정각(正覺)을 이루기 때문에 ‘보리를 얻는다’고 잘라 말했다. 즉 발심을 해서 법성을 알았을 바로 그 때 무상보리(無上菩提)를 얻는다는 것인데, 이러한 뜻은 『화엄경』 「발심공덕품(發心功德品)」에 나와 있다. 위의 모든 문장에서는 언제나 ‘결정한 성품’을 말해 왔는데 여기서는 어째서 ‘결정된 성품이 없음’을 말하는가?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무결정성’이라는 사실이 개정될 수 없기 때문이다.
【經】 그 때 대중 가운데 대력(大力)이라는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5공(空)에 출입하면서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고 사실대로[如如:어떤 본에는 ‘如佛’이라 되어 있다]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5공에서 취하거나 버리지 않는 것입니까?”
【論】 이 아래는 (대의를 간략히 나타낸 데 이어) 두 번째로 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인데 네 가지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이요, 둘째는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이요, 셋째는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이요, 넷째는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이다.
첫째 부분도 넷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5공(空)을 밝히고, 둘은 3공(空)을 설명하고, 셋은 공이 곧 진(眞)임을 밝히고, 넷은 진이 여(如)임을 밝혔다.
첫 번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묻는 사람은 대력(大力)보살이다. 이 사람은 실제(實際)의 법문에 들어가 법계에 두루하여 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대자재(大自在)를 얻었으므로 ‘큰 힘을 가진 자[大力]’라고 하였다. 이런 이유에서 (실제를 드러내는) 이 부분에서 등장한 것이다. ‘사실대로[如如]’라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 여여한 이치[如理]에 들어맞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앞의 여(如)는 맞는다[當]는 뜻이요, 뒤의 여(如)는 도리를 가리킨다. 먼저는 이해한 내용을 말하고, 뒤에는 물음을 제기한다. 물음에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오공법문(五空法門)을 묻고, 둘째는 취하거나 버림이 없다는 뜻[無取捨義]을 물었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5공(空)이란 3유(有)29)가 공이며, 6도(道)의 그림자가 공이며, 법상(法相)이 공이며, 명상(名相)이 공이며, 심식(心識)의 뜻이 공임을 말한다.
보살아, 이와 같은 공(空)들은 공이면서도 공에 머무르지 않으며, 공에 공상(空相)이 없다. 상(相)이 없는 법이니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버리겠는가? 취함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면 3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다.”
【論】 차례대로 앞의 두 물음에 답한 말씀이다. 5공으로 세 가지 진여를 나타낸다. 그 세 가지란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요, 둘째는 실상진여(實相眞如)요, 셋째는 유식진여(唯識眞如)이다. 이 뜻은 『현양론(顯揚論:顯揚聖敎論)』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 중에 앞의 두 가지 공은 앞의 두 가지 진여이며, 뒤의 세 가지 공은 세 번째 진여이다. 무슨 뜻인가?
처음에 ‘3유가 공’이라 함은 3유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삼계에 유전하는데, 삼계의 유전에는 전후의 성질이 없고 찰나에도 머묾이 없어서 공이며 무소득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유전진여문(流轉眞如門)이다.
두 번째 ‘6도의 그림자가 공’이라 함은 선업과 악업이 각각 2품(品)이므로 6도(道)의 과보가 본체와 비슷하게 그림자를 나타내지만, 그림자는 본체를 떠난 적이 없는 것처럼 공이며 무소득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실상진여문(實相眞如門)이다.
뒤의 세 가지는 유식진여문(唯識眞如門)이다. 앞의 둘은 취하는 대상인 뜻과 이름을 버리는 것으로서, 뜻과 이름은 서로 객체만 되고 실제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공무소득)이며, 마지막 하나는 취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으로서, 능(能)과 소(所)는 상대하여 독립하지 못하기 때문(에 공무소득)이라는 것이다. 유식의 도리는 가장 들어가기 힘들다. 그러므로 세 가지 공으로 나누어 설명하여 능ㆍ소를 버리게 했으니, 능소가 공하기 때문에 무분별이 된다.
‘보살아’ 이하의 답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와 같은 공들’이란, 5공(空) 전체를 들어 공의 이치[理]와 지혜[智]를 설명한 것이다. ‘공이면서도 공에 머무르지 않음’이란 공의 지혜는 머묾이 없어 이치와 평등하기 때문이다. ‘공에 공상이 없다’고 한 것은 공의 이치는 모양이 없어 지혜와 평등하기 때문이다. 이치와 지혜는 평등하여 주관[能]과 객관[所]의 모양이 없으니 어떻게 거기에 취하거나 버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 경지에 들어가면 3공(空)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취함이 없는 경지’란 10지(地)를 말한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무엇이 3공(空)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공이란 공상도 공이며[空相亦空], 공공도 공이며[空空亦空], 소공도 공임[所空亦空]을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은 공들은 3상(相)에 머무르지 않으므로 진실이 없지 않으니,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져 불가사의하다.”
【論】 이 하나의 문답은 3공(空)30)을 밝힌 것이다. ‘공상도 공’이라 한 데서, ‘공상(空相)’이란 속(俗)을 버리고 진(眞)을 드러내는 것으로서 평등한 모양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공하다’는 것이니,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한 것이다. 이러한 공공(空空)의 뜻은 순금을 녹여 장엄구를 만드는 데 비유할 수 있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하고, 옳기도 하고 그르기도 한 것을 공공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하는 속제(俗諦)의 차별상을 설명한 것으로서 공공의 뜻이다. 평등한 공에 대해서도 공이라 하여 세속의 차별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 차별을 ‘공공’이라 한다.
‘공공도 공’이라고 한 데서 ‘공공’이란 속제(俗諦) 차별을 말한다. 그런데 ‘(그것)도 공하다’는 것이니, 즉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한 것이다. 이는 장엄구를 다시 금덩어리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다.
‘소공도 공’이라고 함은, 첫 번째 공(空)에서는 공에 의해 속제가 드러났고, 두 번째 공에서는 공에 의해 진제가 드러났는데 이 두 가지가 둘이 아니므로 ‘(그것)도 공’이라고 하였다. 이는 일제(一諦)에 융합하여 하나인 법계[一法界]를 드러낸 것이다. 일법계란 일심(一心)을 말한다. 그러나 (3공 중) 첫째 공문(空門:空相亦空)에서 버린 속(俗)은 소집상(所執相)이고, 둘째 공문(空門:空空亦空)에서 융합한 속(俗)은 의타상(依他相)이다. 속제에 두 가지 상이 있기 때문에 버리는 것과 융합하는 것이 하나가 아니다.
또한 첫째 공문에서 속(俗)을 버림으로써 드러난 진(眞)과 둘째 공문에서 속을 융합함으로써 드러난 진, 이 두 가지 문의 진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것이다. 오직 진실 한 종류인 원성실성(圓成實成)이다. 그러므로 버리든 융합하든 드러난 것은 하나다. 셋째의 공은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니며, 둘도 아니고 하나도 아니다.
또 이 3공(空) 중에 첫째 공은 속제중도(俗諦中道)를 드러내고, 둘째 공은 진제중도(眞諦中道)를, 셋째 공은 진도 아니고 속도 아닌 무변(無邊) 무중(無中)한 중도(中道)의 의미를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공들’이란 3공(空) 전체를 들어 말한 것인데, 속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진제의 상에도 머물지 않고, 그것이 둘이 아니라는 상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에 ‘3상(相)에 머무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물지 않음으로써 철저하게 진실을 드러내기 때문에 ‘진실(眞實)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진실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문자나 언어로 나타낼 길이 끊어졌다’고 하였으며, 길이 끊어졌다[道斷]는 말도 붙일 수 없으므로 ‘불가사의(不可思議)’라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진실이 없지 않다면 (진실이 없지 않다는) 그 상은 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로31), 공(空)에 진(眞)이 없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이 있지도 않음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묻고 뒤에 답했다.
묻는 의도는 이렇다. ‘보통 유ㆍ무라고 할 때는 반드시 상대적인 것이다. 있지 않으면 반드시 없는 것이고, 없지 않으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이치가 없지 않다고 했다면 진실한 이치가 있어야 한다.’
공부하는 이들이 대부분 늘 이렇게 생각하므로 저들의 고집을 떨쳐주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없음[無]이 없음에 머물지 않고, 없지 않다[不無] 해서 있음[有]도 아니다.[不無不有:어떤 본에는 ‘有不住有’로 되어 있다] 있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 없지 않는 모습이라 해서 있음에 머물지도 않으니, 유ㆍ무로는 이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아, 이름과 뜻이 없는 모습은 불가사의하다. 왜냐하면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이름이 없지 않고,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뜻은 뜻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論】 답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음에 대한 답[正答]이고, 둘은 그 심오함을 찬탄한 것[歎深]이다.
먼저 ‘없음이 없음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진실이 없지 않다[不無眞實]’고 한 구절 중에서 무(無)라는 이름이 무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없지 않다[不無]’는 이름 때문에 있음이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런 이유로, ‘없지 않다 해서 있음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명칭을 붙일 수 없는 데다 명칭을 붙인 것이라서 ‘있다’는 의미[義]에 들어맞는 것은 아님을 설명한 것이다.
‘있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없음에 머물지도 않고’라 함은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했다 할지라도 진무(眞無)라는 법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없지 않는 모습이라 해서 있음에 머물지도 않는다’ 함은,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했다 할지라도 속유(俗有)의 모습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속(眞俗)이 유무(有無)에 머물지 않기 때문에 진실무이(眞實無二)의 이치가 없지 않고, 진속(眞俗)에 2제(諦)가 없지 않기 때문에 진실무이의 이치가 있지도 않다. 그러므로 ‘유무로는 이치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으니, 뜻없는 뜻[無義之義]을 밝힌 것이지, 이름 있는 이름[有名之名]을 가리키지 않는다.
‘보살아’ 이하는 둘째, 심오함을 찬탄한 것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하나는 직접 찬탄한 것이고, 또 하나는 찬탄을 해석한 것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은 이름이 없지 않다’한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름은 ‘뜻 있는 뜻’에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이름’을 가지고 ‘뜻 없는 뜻’에 맞춘 까닭에 ‘이름이 없지 않다’고 한 것이다. ‘뜻을 헤아릴 수 없는 뜻은 뜻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한 것은 부처님께서 체득하신 이치는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을 일컫는 것이 아니므로 ‘뜻 없는 뜻’을 가지고 ‘이름 없는 이름’을 일컫는 까닭에 ‘뜻이 없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름과 뜻이 있지는 않지만 이름과 뜻이 없지도 않으므로 불가사의한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진실의 여여[如]한 모습이며, 여래의 여여한 모습입니다. 여여하지만 여여에 머물지 않으니, 여여에는 여여라는 모습이 없으니, 모습에 여여함이 없으므로 여래 아닌 것도 아닙니다. 중생의 심상(心相)이라 할 때 그 상 역시 여래라면,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 진(眞)에 여(如)함이 있지 않지만 여하지 않음도 없다는 뜻을 밝힌 부분인데, 이 가운데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물음에도 둘이 있으니 처음에는 도리를 내세우고 나중에는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如是名義]’이란 앞에서 말한 불가사의한 이름과 뜻의 특성을 말하는데, 이 이름과 뜻이 뒤바뀌는 일도 없고 변천되는 일도 없이 일치하므로 ‘진실’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주관과 객관[能所]을 멀리 떠나 한 맛으로 평등하기 때문에 ‘여여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이름과 뜻은 평등하고 여여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니 모든 여래가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여래의 여여한 모습’이라고 하였다.
‘여여하되 여여함에 머물지 않는다[如不住如]’고 한 것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라는 이름이 여여함이 없는 여여함이란 뜻에 해당함을 밝힌 것이다. ‘여여에는 여여라는 모습이 없으니, 모습에 여여함이 없으므로[如無如相相無如故]’라 함은, 여여의 모습이 없는 여여의 모습은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의 이름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일치하여 능소(能所)가 평등하므로 이름이건 뜻이건 ‘여래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모습에 여여함이 없다’고 한 것은 여여한 모습에는 여여함이 없다는 것으로, 여여의 모습은 바로 무상(無相)을 상(相)으로 한다. 그러므로 ‘여여에 여여라는 모습이 없다[如無如相]’ 함은 여여의 무상(無相)이 있지 않음을, ‘모습에 여여함이 없다[相無如]’ 함은 무상의 여여함이 있지 않음을 밝힌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여의 체상(體相)이 있는 것은 아니나 없지도 않으니, 여여의 체상은 이와 같이 여여의 상이 없는 여여의 상이라야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여의 이름이 된다.
‘중생의 심상(心相)이라 할 때 그 상 역시 여래’라 함은 모든 중생의 분별심상(分別心相)은 그 상이 상이 아니어서 평등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그 상 역시 여래라는 뜻이다. 여기까지는 (물음 중에) 평등한 도리를 내세운 부분이다.
다음으로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한 구절은 의심나는 바를 질문한 부분이다. 중생의 심상(心相)이 이미 여래라면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다른 경계가 없다’ 함은 무분별(無分別)을 말한다. 무분별이기 때문에 당연히 염오가 없을 테고, 염오가 없다면 삼계(三界)가 없어야 한다. 이런 의심이 났기 때문에 이 물음을 던진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에 물들기 때문에 삼계(三界)라 하고 삼계의 마음을 가리켜 ‘다른 경계’라 하니, 이 경계는 허망한 것이다. 마음에서 변화되어 생기는 것이므로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 다른 경계도 없다.”
【論】 이것은 의심에 대한 답인데 앞은 인정하는 말이고[與] 뒤는 부정하는 말이다[奪]. 자성(自性)이 청정하여 본래 물듦이 없는 쪽을 들어 말했기 때문에 인정하는 말이라 했고, 외부에 의해 물들어 다른 경계가 있게 되었다는 쪽을 들어 말했기 때문에 부정하는 말이라 하였다.
‘자성이 청정하다’고 한 것은 『보성론(寶性論)』에서 경을 인용하여 “선심(善心)도 생각마다 없어져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고, 불선심(不善心)도 생각마다 없어져 머물지 않으므로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 번뇌가 마음에 닿지[觸] 못하고 마음도 번뇌에 닿지 못하는데, 어떻게 법에 닿지 않고서 마음을 물들일 수 있겠는가…” 하고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으니, 이는 물들었지만 물들지 않는 측면을 나타낸 것[染而不染門]이다.
‘외부에 의해 물들었다[隨他染]’ 함은 『부인경(夫人經:勝鬘經)』에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은 알기 어려우며, 저 마음이 번뇌 때문에 물드는 것도 알기 어렵다” 한 말씀과 같으니, 이는 물들지 않았지만 물든 측면을 나타낸 것[不染而染門]이다.
‘마음이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함은 자성이 청정한 마음과 본각의 이치에는 모든 경계와 더러움이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경계에 물들기 때문’ 아래는 물음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먼저 불각(不覺)이 경계에 물들었음을 밝히고 나중에 불각(不覺)에 상대해서 시각(始覺)을 간략히 보여준다.
불각(不覺)을 밝힌 중에 ‘경계에 물들기 때문에 삼계(三界)라 한다’ 함은 주지번뇌(住地煩惱)에 크게 욕애주지(欲愛住地)ㆍ색애주지(色愛住地)ㆍ유애주지(有愛住地) 세 가지가 있어서 이를 근거지[住地]로 하여 삼계에 대한 애착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삼계에 대한 애착 때문에 삼계심이 생기며, 이 망심(妄心)을 바탕으로 허상의 경계[虛境]를 변화시켜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마음에서 변화되어 생긴다’고 하였다.
다음은 시각(始覺)을 밝힌 것이다. ‘마음에 허망함이 없으면’이라고 한 것은 이치에 의해서 관행(觀行)을 닦으면 망심(妄心)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경계도 없다’ 함은 망령되게 지어내던 경계도 마음 따라 없어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말한 네 가지 문[門:五空, 三空, 空是眞, 眞是如]이 모두 (廣顯道理의 넷 중) 첫 번째, 실제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顯實際義]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마음이 깨끗한 데 있어서 모든 경계가 생기지 않는다면, 이 마음이 깨끗할 때는 삼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보살아, 마음이 경계를 일으키지 않으면 경계가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이는 모든 경계는 오직 보여진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이 허상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보이는 것이 없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趣入義]인데 여기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향해 들어간다는 뜻을 전체적으로 밝혔으며[摠明趣入], 둘째는 취입의 뜻을 개별적으로 드러냈으며[別顯趣入], 셋째는 취입이 잘못을 떠났음[入之離過]을, 넷째는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 것이다.
첫째의 총명취입에도 둘이 있다. 먼저 묻고 다음에 답했다. 물음에 ‘이 마음이 깨끗할 때는 삼계가 없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함은 초지(初地) 이상이 본래 청정함을 증득해서 보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당연히 삼계가 멸해 없어진다는 것이다. 삼계의 사상(事相)은 초지나 제8지(第八地)에서 없어지게 되고, 삼계의 자성(自性)은 등각위(等覺位)에서 없어지게 되고, 삼계의 습기 (習氣)는 묘각위(妙覺位)에서야 없어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답에서 전체적으로 인정하는 뜻으로 ‘그렇다’고 하였다. 삼계가 없어질 때는 심(心)과 경(境)이 서로를 생성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오직 마음의 허망한 견(見)이 경계를 변화시켜 조작하는 것이니, 마음에 망령됨이 없을 때는 경계를 변화시켜 조작하지 않고, 경계가 없으므로 마음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經】 “보살아, 안에 중생이 없고 3성(性)이 공적하면 자기라는 무리도 없고 남이라는 무리도 없으며 …… 두 가지 들어감[二入]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로움을 얻으면 삼계가 없다.”
【論】 이 아래는 둘째, 취입의 의미를 개별적으로 밝힌 부분인데, 여기에도 둘이 있다. 하나는 수(數)를 들어 전체적으로 보여준 것이요, 둘은 문답을 통해 개별적으로 설명한 것인데 위 문장은 전자에 해당한다.
첫 대목에 ‘안에 중생이 없다’ 함은 10주위(住位)에서 안으로 인공(人空)을 얻었기 때문이며, ‘3성(性)이 공적하다’ 함은 10행위(行位)에서 안으로 법공(法空)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기라는 중생도 없고 남이라는 중생도 없다’ 함은 10회향위(廻向位)에서 평등한 공(空)함을 얻어 자타(自他)와 인법(人法)의 무리에 대한 집착을 두루 버리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리[衆]’란, 중생을 중이라 부르기도 하고, 5음(陰)의 법 역시 5중(衆)이라 한다. 이는 공(空)에 가깝지만[相似] 아직 진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다. ‘…두 가지로 들어감’이란 지전(地前)ㆍ지상(地上)이 들어가는 수(數)를 통틀어 열거한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2입(入)에도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마음이 본래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찌 들어감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2입(入)이란 첫째는 이입(理入)이고, 둘째는 행입(行入)이다. 이입(理入)이란 무엇인가?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覺觀)에 집중하여 머물고,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 금강심(金剛心)의 경지에 굳게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적정무위(寂靜無爲)하여 분별이 없으면 이를 이입(理入)이라고 한다.”
【論】 여기서부터는 문답을 통해 두 가지 들어감[二入:理入ㆍ行入]을 개별적으로 밝힌 부분이다. 물음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묻고 나중에 논란한다. 답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먼저 답하고 나중에 정리[通]한다. 답에도 세 부분이 있는데, 첫째는 수를 표시하고, 둘째는 이름을 열거하고, 셋째는 그 특성을 차례로 설명한다.
여기서 ‘이입(理入)’이란 이치[理]에 순응하여 믿고 이해하나 아직 증행(證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입’이라 하며, 지전(地前)의 지위에 해당한다. ‘행입(行入)’이란 이치를 증득하고 수행하여 무생행(無生行)에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하며 지상(地上)의 지위에 해당한다.
이입(理入)에 관한 글은 네 구절로 나뉜다. ‘중생이 진성(眞性)과 다르지 않지만 같지도 않고 (같고 다른 두 가지가) 함께 있는 것도 아닌데 다만 객진(客塵)으로 가려져 있음을 깊이 믿고’까지는 10신(信)의 들어감을 말한다. 이 중에 ‘같지 않다[不一]’ 함은 중생의 모습이 참된 성품과 다르지 않으나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고,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不共]’ 함은 (중생과 진성이) 하나인 동시에 다르기도 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둘째 구절 ‘가지도 않고 오지도 않고 각관에 집중하여 머물고[不去不來凝住覺觀]’는 10주(住)의 들어감을 말한다. (10주의 수행자는) 중생이 공(空)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오거나 가지 않는다. 인공(人空)을 관찰하는 문에서 그 마음이 고요히 머물러 불성(佛性)이 가거나 오지 않음을 관찰하여 깨닫기 때문이다.
셋째 구절 ‘불성(佛性)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님을 자세히 살피고’는 10행(行)의 들어감을 말한다. 그들은 이미 법공(法空)을 얻고, 법공문(法空門)에 의하여 불성(佛性)에는 법상(法相)이 있지도 않고 공성(空性)이 없지도 않음을 자세히 관찰하기 때문이다.
넷째 구절 ‘자기도 없고 남도 없어서 범부와 성자가 둘이 아님을 알고’는 10회향위(廻向位)의 이입(理入)을 말한다. 이미 자타(自他)에 평등한 공(空)을 얻었으므로 마음이 금강과 같아져서 물러서지 않고 굳게 머문다. 『범망경(梵網經)』에서는 10금강(金剛)이라 하고, 『인왕경 (仁王經)』에서는 10견심(堅心)이라 하는데 이것이 10회향의 다른 이름이다.
【經】 “행입(行入)이란 마음이 어디로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고,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으며, 있는 곳에서 고요히 염(念)하되 구함이 없으며, 바람이 북치듯 하더라도 대지같이 움직이지 않고,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 중생을 제도하되 생함도 모양도 없으며, 취하거나 버리지 않음을 말한다.”
【論】 ‘행입(行入)’이란 지상(地上)의 수행자가 깨달아 들어가는[證入] 행을 말한다.
‘마음이 어디에도 기울거나 의지하지 않는다[心不傾倚]’ 함은 여리지(如理智)에서 나오는 마음은 반연하는 일이 없는데, 반연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영상이 흘러가거나 바뀜이 없다’ 함은 여리(如理)한 경계는 3제(際)를 떠나 있으므로 유전변화하는 경계의 상(像)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세간의 모든 복락(福樂)에서부터 심지어 보리대열반(菩提大涅槃)의 과(果)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도 원하고 바라는 것이 없고, 평등함을 통달하여 이것저것을 가리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계의 바람이 북처럼 두들겨 와도 움직임이 없으니 이것이 자리행(自利行)에 들어가는 것이다.
‘마음[心]과 나[我]를 버리고 떠나서’ 이하는 다른 사람을 들어가게 하는 행을 말한다. 2공(空)을 증득함으로써 인상(人相)과 법상(法相)을 떠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구할 능력을 갖는다. 마음에 생하는 바가 없고 경계의 모습도 없지만 그렇다고 적멸(寂滅)의 성품을 취하지도 않아서 항상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취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행[自利ㆍ利他]을 행입(行入)이라 한다.
【經】 “보살아, 마음에 출입하는 일이 없고, 출입하는 그 마음도 없어서 들어감이 없는 데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
【論】 이것은 (첫 번째로 답을 제시하고 나서) 두 번째, 질문자의 논란을 정리하는 부분이다. 이치를 증득한 마음은 생멸을 멀리 떠나 있으므로 시작도 끝도 없는 까닭에 ‘마음에 출입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출입이 이미 없어졌다면 당연히 과거에 출입하던 마음도 없을 것이므로 ‘출입하는 그 마음도 없다’고 하였다. 전에 출입하던 마음을 떠나서 출입하지 않는 이 마음에 들어왔으므로 ‘들어감이 없는 데 들어가기 때문에 행입이라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제기된 논란이 잘 정리가 되었다.
【經】 “보살아, 이와 같이 들어가는 법은 그 법상(法相)이 공(空)하지 않다. 공하지 않은 법은 법이 헛되게 버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없지 않은 이 법은 공덕(功德)을 갖추고 있으며,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닌, 원래가 청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행입이 잘못을 떠나 있음을 나타낸 부분[能入離過]인데,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간략한 설명이고, 다음은 자세한 해석인데, 위 문장은 간략한 설명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법’이란 출입이 없는 법, 즉 실제(實際)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이는 없지 않은 법은 능소(能所)가 평등하여 모든 잘못과 허물[過患]을 떠나 있고 모든 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라’ 함은 마음과 경계가 평등하여 능소(能所)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원래가 청정하다’ 함은 시작도 끝도 없고 모든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마음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닌, 원래 청정한 법이란 어떤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공(空)하고 여(如)한 법은 심식(心識)의 법이 아니며, 마음이 부려서 생긴 법[心使所有:심소유법]도 아니며, 공상(空相)을 가진 법도 아니며, 색상(色相)을 가진 법도 아니며,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心不相應法]도 아니며, 마음의 무위와 상응하는 법도 아니다.[非心無爲相應法:어떤 본에는 ‘非心有爲不相應法 非心無爲是相應法’이라고 되어 있다] 나타난 영상도 아니고 드러내 보여진[顯示] 것도 아니며, 자성(自性)도 아니고 차별(差別)도 아니며, 이름[名]도 아니고 상의(相義)도 아니다. 그 까닭은 여여[如]하기 때문이다.
여여하지 않은 법이라 해서 여여함 없는 것도 아니며, 어떤 유(有)든지 여여함이 없지 않아서 여여한 있음이 아닌 것 없다. 왜냐하면 뿌리라는 법과 나뭇결이라는 법은 나뭇결도 아니고 뿌리도 아니어서, 모든 쟁론(諍論)을 떠나 있어 그 모습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보살아, 보살아, 이와 같은 청정한 법은 생(生)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며, 멸(滅)이 멸하게 할 수 있는 멸이 아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32), 잘못을 떠났음을 자세히 해석한 부분이다. 먼저 묻고 다음에 답하고, 세 번째로 이해하고 네 번째로 결론을 맺는다. 답을 둘로 나누어 말하는데, 먼저 ‘마음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라’고 한 구절을 해석하고, 나중에 ‘원래 청정하다’고 한 구절을 해석하였다.
첫 구절의 해석도 둘로 나뉘는데 처음에는 들어가는 법[入法]이 모든 마음의 영상을 떠났음을 밝히고, 나중에는 마음의 영상이 여리(如理)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혔다.
‘공하고 여한 법[空如之法]’이란 실제(實際)에 들어갔을 때 모든 모양을 멀리 떠남을 공(空)이라고 하고, 능(能)ㆍ소(所)가 평등함을 여(如)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들어가는 법이 모든 마음의 영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마음의 영상에 대략 여섯 쌍[六雙]의 차별이 있다. 첫째 심(心)과 심소(心所)가 한 쌍이요, 둘째 허공(虛空)과 색(色)이 한 쌍이요, 셋째 불상응행(不相應行)과 모든 무위(無爲)가 한 쌍이요, 넷째 영상(影像)과 본질(本質)이 한 쌍이요, 다섯째 자성(自性)과 차별(差別)이 한 쌍이요, 여섯째 명언(名言)과 상의(相義)가 한 쌍이다.
이 여섯 쌍 중에서 첫 번째 한 쌍은 능연(能緣)인 마음의 종류에 속하고, 나중의 다섯 쌍은 소연(所緣)인 영상의 종류에 속한다. 이 여섯 쌍에서 떠나므로 마음도 영상도 아니라고 하였는데, 이 순서대로 여섯 쌍의 구절이 있다.
‘심식의 법이 아니라’ 함은 [입(入)이] 8식(識)의 마음[心]을 떠났기 때문이고, ‘마음이 부려서 생긴 법도 아니라’ 함은 6위(位)의 심소유법(心所有法)을 떠났기 때문이다.
‘공상을 가진 법도 아니라’ 함은 색상(無色)이 없는 허공법(虛空法)을 떠났기 때문이고 ‘색상을 가진 법도 아니라’ 함은 현색(顯色)33)ㆍ형색(形色)34)ㆍ표색(表色)35)의 세 가지 색(色)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과 상응하지 않는 법도 아니라’ 함은 스물네 가지 불상응행[二十四不相應行]36)을 떠났기 때문이고, ‘심무위와 상응하는 법도 아니라’ 함은 일곱 가지 무위법(無爲法)을 떠났기 때문이다. 마음에 의해 나타난 것이므로 ‘심무위(心無爲)’라 하고, 세 가지 무위(無爲)의 모습과 상응하는 법이기 때문에 ‘상응법’이라고 한다. 또한 이 법이 세 가지 진여법(眞如法)을 떠났다는 것은 증문(證門)에 들어서면 세 가지 구별이 없기 때문이다.
‘나타난 영상도 아니라’ 함은 방편관(方便觀)으로 현현(顯現)하는 본법(本法)과 동분(同分)인 영상(影像)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드러내 보여진 것도 아니라’ 함은 영상(影像)이 현시하는 본질의 법인 내용[骨鎖] 등을 떠나 있기 때문이다.
‘자성도 아니라’ 함은 색의 자성이나 심의 자성 따위를 떠났기 때문이며, ‘차별도 아니라’ 함은 무상(無常) 등의 차별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름도 아니라’ 함은 지시하는 기능[能詮]을 갖는 명(名)ㆍ구(句)ㆍ문(文)의 상을 떠났기 때문이며, ‘상의(相義)도 아니라’ 함은 이름이 지시하는 개념[所詮]과 그 이름에 해당하는 의미[義]를 떠났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 여섯 쌍의 모습을 떠난 자는 능(能)ㆍ소(所)가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여여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여여하지 않은 법’ 이하는 두 번째, 마음과 영상의 법이 여리(如理)하지 않음이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여여하지 않은 법’이란 앞에서 아니라고 한 여섯 쌍의 법상(法相)을 말한다. ‘여여함이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여여한 이치는 두루 통하기 때문이다. ‘어떤 유든지 여여함이 없지 않다’ 함은 어떤 유상(有相)의 법도 여리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여여한 있음이 아닌 것이 없다’ 함은 설사 여여함이 없는 법이 있다면 그것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미 여여 아닌 법이 아니므로 있다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하는 있음이 아닌 뜻을 해석한 것이다. ‘뿌리[根]’란 나무 뿌리를 말하며, 종자(種子)를 비유한다. ‘나뭇결[理]’이란 목리(木理)를 말하며, 나타난 법을 비유한다. 앞에서 암라과(唵羅果)의 비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모든 쟁론을 떠나 그 상을 보지 않는다’ 함은 각혜(覺慧)로 구해도 얻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마음도 아니고 그림자도 아님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법’ 이하는 이어서 원래 청정하다는 뜻을 자세히 해석한 부분이다.
‘생(生)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라’ 함은, 생상(生相)을 떠났으므로 자체가 생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로 멸상(滅相)을 떠났으므로 자체가 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법은 유위상(有爲相)을 떠나 있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원래 청정하다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이와 같은 법의 모습은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어디에 매인 것도 아니고 무엇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며,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며,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는 모습도 아니고 가는 모습도 아니므로 불가사의하옵니다.”
【論】 다음은 세 번째, 이해했음[領解]을 나타낸 부분이다.
‘합하여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마음도 아니고 마음의 작용[心所]도 아니라는 뜻이니, 마음과 마음의 작용이 개별적인 체(體)로서 상응하기 때문이다.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자성(自性)도 아니고 차별(差別)도 아니라는 뜻이니, 이 두 가지는 따로 두 개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어디에 매인 것도 아니라’ 함은 이름도 아니고 뜻도 아니라는 뜻이니, 이름과 뜻이 서로에게 객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동반하는 것도 아니라’ 함은 영상이나 본질이 아니라는 뜻이니, 영상과 본질이 서로 무리를 이루어 짝이 되기 때문이다.
‘모이는 것도 아니고 흩어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공(空)도 아니고 색(色)도 아니라는 뜻이니, 모이고 쌓이는 것은 색이 되고 흩어져 파괴되는 것은 공(空)이 되기 때문이다.
‘생기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 함은 불상응(不相應)도 아니고 무위(無爲)도 아니라는 뜻이니, 불상응행(不相應行)은 생기는 것이고 모든 무위법(無爲法)은 멸(滅)에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여섯 쌍을 떠났다는 뜻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오는 모습도 아니라’ 함은 생이 생겨나게 할 수 있는 생이 아니기 때문이며, ‘가는 모습도 아니라’ 함은 멸이 멸하게 할 수 있는 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뒤에 말한 ‘원래 청정하다’는 뜻을 이해했다는 말이다.
처음에 ‘불가사의하옵니다’는 여여 아닌 여여[非如之如]가 마음과 언설을 떠났기 때문에 한 말이고, 뒤에 ‘불가사의하옵니다’는 마음을 떠난 마음[離心之心] 역시 그 둘을 떠났기 때문에 한 말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불가사의하다. 불가사의한 마음이라 할 때 그 마음 역시 그러하니, 어째서 그런가? 여여함[如]이 마음과 다르지 않으니,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다.”
【論】 이것은 넷째, 결론을 맺는[述成] 부분이다. 두 번 불가사의하다고 한 말을 차례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이라고 한 것은 증득[證]에 들어간 마음을 말하는데, 무심(無心)의 마음으로 들어가지 않는 그곳에 들어가기 때문에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여여함이 마음과 다르지 않다’ 함은 앞의 부사의를 풀이한 것이고, ‘마음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이라’ 함은 뒤의 부사의를 해석한 것이다.
【經】 “중생과 불성(佛性)은 하나도 아니며 별개도 아니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이다. 성품과 모습[性相]이 본래 여여하니,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로37)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 부분이다. 이것도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불성이 하나다, 다르다 하는 양 극단[一異邊]을 떠나 있음을 밝힌 것이고, 둘째는 여여(如如)가 있다, 없다 하는 양 극단[有無邊]을 떠나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 부분에서도 처음에는 간략하게 설명하고[略明] 뒤에 자세히 풀이하였다[廣顯].
간략한 설명에 둘이 있다. 먼저 하나다, 별개다 함을 떠나 있음을 말하고, 뒤에는 별개임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다. 하나다ㆍ별개다를 떠나 있다는 것은 중생과 불성이 하나가 아니지만 다르지도 않음을 말한다.
‘불성’이란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말한다. 『열반경(涅槃經)』에서는 “불성이란 제일의공(第一義空)을 이름한다” 하였는데, 만약 그것을 하나[一]다, 별개[異]다 한다면 모두 잘못이 되기 때문이다.
‘중생의 성품은 본래 생멸이 없고……’ 한 데서부터는 별개임을 떠났다는 뜻을 풀이한 구절인데, 하나가 아니라는 뜻은 보기가 쉬우므로 이 구절은 사람들에게 불성이 별개가 아님을 밝힌 것이다.
‘생멸의 성품은 그 성품이 본래 열반’이라 함은 생사(生死)가 열반과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성품과 모습[性相]이 본래 여여하니, 여여함은 움직임이 없기 때문’이라 함은 중생의 인성(人性)과 생멸의 법상이 본래 여여하기 때문에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經】 “모든 법상(法相)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라 일어남이 없다. 일어나는 상의 본성은 여여한데, 여여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 인연의 성질과 형상[性相]은 그 특성이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고, 연과 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연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 연을 따르는 모든 법은 미혹한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며, 그 나타난 현상은 본래가 생긴 것이 아니니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마음도 법의 이치와 같아서 자체가 공하여 없는 것이다. 저 공왕(空王:허공)이 본래 머무는 곳이 없으나 범부의 마음이 망령되게 분별하여 (있다고)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불성이 극단을 떠나 있음을)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이다. 여기서는 다름[異邊]을 떠났다는 쪽에 치우쳐 많은 설명을 붙이고 있다.
모든 법상(法相)은 연(緣)을 따라 생기고, 모든 과법(果法)도 연을 따라 있게 된다. 이는 생하는 일이 없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일어나는 상의 본성이 여여한데, 여여한 것은 움직임이 없다’고 하였다.
이 아래의 문장에서는 일으키는 작용을 갖는 모든 연[能起諸綠]도 공하다는 사실을 밝혔다. ‘인연의 성질과 형상은 그 특성이 본래 공하여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은 종자(種子)가 되는 인연(因緣)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고, ‘연과 연은 공하고 공하므로 연이 일어나는 일이 없다’라고 한 것은 소연연(所緣緣)의 법이 하나가 아니고 많지만 모두 공하다는 뜻에서 공공(空空)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무엇을 일으키는 작용을 하는 연(綠)이 없다.
‘연을 따르는 모든 법은 미혹한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라 함은 증상연(增上椽)과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오직 마음에서 허망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 역시 공하다고 한 것이다. ‘그 나타난 현상은 본래가 생긴 것이 아니니 연(緣)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함은 2공(空)을 결론지은 것이다. 연(綠)이 나타내는 과(果)는 본래 생겨난 것이 아니며, 일으키는 작용을 갖는 모든 연이 본래 없기 때문이다.
‘마음도 법의 이치와 같아서 자체가 공하여 없는 것’이라 함은 앞에서 설한 인과(因果)는 취해진 법[所取法]인데, 취해질 법이 없으므로 취하는 마음[能取心]도 공(空)하다는 것이다. 취해진 법의 공한 도리를 설한 것과 같이 취하는 마음의 본체[心體]도 이와 같다. 지금까지는 내용을 설명하였고[法], 다음에는 비유[喩]를 들고 있다.
‘공왕(空王)’이라 한 데서 공(空)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명암(明暗)의 색(色)인 공계(空界)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허공법(虛空法), 즉 공왕(空王)을 말하는데, 모든 색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다. 마치 왕이 모든 백성의 의지처가 되는 것과 같으므로 허공을 공왕(空王)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공왕은 본래 머무는 곳이 없으나 범부의 마음으로 망령되게 분별을 하여 여기가 허공이요, 저기가 허공이라고 하니 이것은 망견(妄見)일 따름이지 사실은 여기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기에 있는 것도 아니다. 인과의 모든 법도 마찬가지로 망심으로 취한 것이므로, 인(因)도 없고 과(果)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비유는 변계소집(遍計所執)에 의해 있게 된 인과(因果)를 가지고 망견처(妄見處)를 설명한 것이다.
【經】 “여여함의 상은 본래 있고 없고 한 것이 아니다. 있다, 없다 하는 개념[相]은 오직 심식(心識)을 보는 것이다. 보살아, (이 상은) 마음의 성품과 같이[如之心性:어떤 본에는 ‘如是心法’이라고 되어 있다] 자체가 없지도 않고 자체가 있지도 않아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보살아,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여(眞如)의 법은 아무 상도 없는 텅 빈 것이라서 2승(乘)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論】 여기에서는 (불성이 一異의 극단을 떠났음을 밝힌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로, 여여(如如)한 법이 있다, 없다[有無]는 극단을 떠났음을 밝혔는데, 다음 네 부분으로 나뉜다.
첫 구절은 여여함이 양 극단을 떠났음을 직접적으로 밝힌 것이고, 다음 구절은 유변(有邊)이 망념임을 뒤집어서 지적한 것이고, 셋째는 마음이 양 극단을 떠나 있음을 예로 들고, 넷째는 여여함이 언설을 떠났다는 사실을 환기시킨 것이다.
셋째 부분에 있는 ‘마음의 성품과 같이’란 일심의 체성과 같다는 것이다. ‘자체가 없지도 않다’ 함은 토끼 뿔과 같이 자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극단을 떠났음을 말한다. ‘자체가 있지도 않다’ 함은 쇠뿔과 같이 자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극단을 떠났음을 말한다. 이는 다른 상이 없기 때문에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있지 않다는 말을 할 뿐이다.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 함은 있지 않음[不有]이 곧 없지 않음[不無]이요, 없지 않음이 곧 있지 않음이니, 이런 뜻에서 다시 합쳐서 설명한 것이다. 일심(一心)의 법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것과 같이 여여(如如)한 이치도 이와 같으므로 구절의 첫머리에 ‘마음과 같이[如心]’라고 하였다.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은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고 한 이하는 넷째 구절로서, 여여(如如)함이 언설(言說)을 떠난 도리임을 환기시킨 부분이다. ‘없으면서도 없지 않은 상’이란 첫 구절 중 ‘본래 있고 없고 한 것이 아니라’고 한 것을 설명하는데, 여러 가지 말들을 붙일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2승(乘)이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함은 심(尋)과 사(伺) 두 가지가 작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ㆍ사의 두 법은 언어의 길인데, 이 두 가지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언설의 경지가 아니라고 하였다.
【經】 “허공경계(虛空境界)를 안팎의 수행자들은 헤아릴 수 없고, 6행(行)을 닦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論】 여기서부터는 대단원38) 중에 세 번째,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趣入階位]이다.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는데 첫째는 향해 들어가는 곳이 매우 깊음을 밝혔고[明所入甚深], 둘째는 향해 들어가는 자의 지위와 행을 들었으며[擧能入位行], 셋째는 계위를 개별적으로 나타냈고[別顯階位], 넷째는 들어가는 마음을 밝혔다[覈明入心].
‘허공경계’란 텅 비어 넓고 형상이 없는 여여(如如)한 법을 ‘허공’이라고 하였다. ‘안팎의 수행자들은 헤아릴 수 없다[內外不測]’ 함은 내도(內道:불교)의 28성인[二十八聖]과 외도(外道)의 아흔다섯 종류, 이러한 부류의 범인과 성인들은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향해 들어가는 자의 지위와 행을 든) 두 번째 중에 ‘6행을 닦는 사람이라야 알 수 있다’ 함은 2입(入)에 들어가는 보살의 계위를 든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무엇이 6행(行)인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10신행(信行)이고, 둘째는 10주행(住行), 셋째는 10행행 (行行), 넷째는 10회향행(廻向行), 다섯째는 10지행(地行), 여섯째는 등각행(等覺行)인데, 이렇게 행하는 사람만이 이를 알 수 있다.”
【論】 여기서는 (세 번째로) 계위를 개별적으로 밝히는데, 과위(果位)는 논하지 않고 행위(行位)만을 드러냈기 때문에 묘각지(妙覺地)는 취하지 않았다. 이 6행(行) 중 앞의 네 계위는 이입(理入)의 순서를, 다음 두 계위는 행입(行入)의 차별을 말한다. 이에 대한 간단한 설명은 『본업경(本業經)』에 있고, 자세한 설명은 화엄교(華嚴敎)에 나온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실제(實際)인 본각의 이익[覺利]은 출입(出入)이 없는데 어떤 법, 어떤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실제의 법이란 한계를 갖지 않는 법을 말한다. 그러므로 한계 없는 그 마음이 실제에 들어간다.”
【論】 이는 (네 번째로 실제에) 들어가는 마음을 밝힌 부분이다.
질문에서 ‘실제인 본각의 이익은 출입이 없다’ 함은 뒤의 두 계위에서 두 가지 이익행을 얻고 이치와 딱 들어맞아 출입이 없다는 뜻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법, 어떤 마음으로 실제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라고 한 것은 들어가는 자[能入]의 심법(心法)을 정곡으로 묻는 말이다.
답에서 ‘실제의 법이란 한계를 갖지 않는 법을 말한다’ 함은 들어갈 법이 원래 한계가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시간적으로[縱]으로 말하자면 실제의 법은 3세(世)의 시간을 떠나 있기 때문에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러므로 전후가 없다[前後無際]. 공간적[橫]으로 말하자면 실제의 법은 여섯 가지 방위와 장소[동ㆍ서ㆍ남ㆍ북ㆍ상ㆍ하]를 떠나 있기 때문에 중간이나 가장자리가 없으며, 그러므로 여기와 저기가 없다[彼此無際]. 떠나지 않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끝없이 깊다[甚深無際]. 두루하지 않은 곳이 없기 때문에 끝없이 넓다[廣大無際]. 이 네 가지를 갖추었다는 뜻에서 ‘무제(無際)’라고 한다.
들어가는 마음[能入心]도 이 네 가지 뜻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실제(實際:所)에 들어가지 않는 바가 없다. 실제가 능ㆍ소의 양 극단을 떠나 있으므로 마음도 능ㆍ소의 끝[際]을 떠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들어감이 없어야 들어갈 수가 있으니 이런 의미에서 불가사의하다는 것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끝없는[無際] 마음에서 나온 지혜는 그 지혜가 한계가 없고[無涯], 한계없는 마음은 마음이 자재(自在)하니, 자재한 지혜라야만 실제(實際)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 범부처럼 빈약한 마음을 가진 중생은 그 마음이 매우 숨가쁘니, 무슨 법으로 다스려야 굳은 마음을 가져 실제에 들어갈 수 있게 하겠습니까?”
【論】 여기서부터는 (실제에 들어가는 階位를 밝힌 세 번째에 이어) 들어가는 방편을 밝힌 네 번째 부분이다. 들어가는 방편이란, 10지(地)에 들기 전 네 계위[四位:10신ㆍ10주ㆍ10행ㆍ10회향)에서 닦는 이입문(理入門) 안의 방편관(方便觀)을 말한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들어가는 방편[能入方便]을 설명하고, 뒤에 방편의 훌륭한 이익[方便勝利]을 나타낸다. 앞의 능입방편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먼저 간략하게 말하고, 나중에 자세히 다룬다.
앞의 간략한 설명에도 두 부분이 있어서 먼저 질문이 나오는데, 질문 중에도 둘이 있어 첫째는 앞의 내용을 이해했음을 나타냈고, 둘째는 뒤의 내용을 물은 것이다.
앞의 이해한 내용 중에 ‘끝없음[無際]’이란 마음의 체[心體]가 끝이 없기 때문이고, ‘한계가 없음[無涯]’이란 지혜의 작용이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저들의 마음이 숨가쁜 이유는 안팎의 번뇌[使]39)와 거기 딸린 번뇌[隨使:隨煩惱]가 끊임없이 흘러서[流注]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루듯 하고, 하늘 바람이 바다에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켜 큰 용을 놀라게 하듯 하기 때문이니, 크게 놀라는 그 마음 때문에 숨가쁜 일이 많아지는 것이다.
보살아, 저 중생들에게 셋을 간직하고 하나를 지키게[存三守一]하여 여래선(如來禪)에 들어가게 하면 선정 때문에 마음에 숨가쁨이 없을 것이다.”
【論】 답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고쳐야 할 장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나중에 치료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숨가쁜[喘] 마음’이란 마음이 놀라고 불안하면 들고나는 호흡이 급하고 빨라지는 것을 말하는데, 6식(識)이 멈추지 않고 들떠 움직이는 것을 비유한다.
‘안팎의 번뇌[使]’란 말나식(未那識)의 네 번뇌[四使]40)는 안으로 자아(自我)를 반연하고, 의식(意識)의 여섯 번뇌[六使]41)는 밖으로 모든 대상[諸境]을 반연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거기 딸린 번뇌가 끊임없이 흘러내림’이란 분노[忿]ㆍ한스러움[恨] 등 소수번뇌(小隨煩惱)와 가라앉음[昏沈]ㆍ들뜸[掉擧] 등 대수번뇌(大隨煩惱)와 부끄러운 줄 모르는[無漸愧] 중수번뇌(中隨煩惱)가 저 번뇌[使]와 함께 따라 흘러서[等流] 현식(現識)에 모여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물방울이 모여 바다를 이룬다’ 함은 근본번뇌[本使]와 수번뇌[隨惑]의 모든 현행(現行)이 본식(本識)을 훈습하여 깊고 넓게 쌓이고 모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다.
‘하늘 바람이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킨다’ 함은 업력(業力)을 받아서[感] 6진경계(塵境界)가 자동적으로 현행하기 때문에 ‘하늘바람’이라 하였고, 이 하늘바람이 수면(隨眠)42)의 바다를 두들겨 7식(識)의 물결을 일게 하기 때문에 ‘북 치듯이 물결을 일으킨다’고 하였다.
‘큰 용이 놀라듯하다’ 함은 무명주지(無明住地)의 힘이 가장 커서 본식(本識)에 잠재된 수면(隨眠)의 바다 밑에 머물러 있으므로 이를 ‘큰 용’이라 하였고, 이와 같은 무명이 적정(寂靜)을 위반하여 거칠게 동요하는 마음을 항상 자라나게 하기 때문에 ‘놀라게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모든 인연 때문에 마음을 매우 숨가쁘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고쳐야 할 장애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는 부분이었고, 이 이하는 고쳐 나가는 방편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셋을 간직하게 한다’ 함은 하늘바람[六塵境界]을 막는 방편을 가리킨다. ‘하나를 지키게 한다’ 함은 큰 용[無明住地]을 항복시키는 방편을 말한다. ‘여래선에 들게 한다’ 함은 바로 숨가쁜 병을 고치는 방편을 말한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무엇을 가리켜 셋을 간직하고[存三] 하나를 지켜[守一] 여래선에 들어간다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셋을 간직한다는 것은 세 가지 해탈[三解脫]을 간직한다는 뜻이고, 하나를 지킨다는 것은 일심의 여여함[一心如]을 지킨다는 말이다. 여래선에 든다는 것은 이치로써 마음의 여여함을 관찰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이 실제(實際)에 들어가는 것이다.”
【論】 이 아래는 (能入方便을 略明과 廣顯으로 나눈 가운데) 방편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인데, 세 개의 문답이 있다. 첫 번째 문답에서는 수(數)를 들어 전체적인 설명을 하였다.
‘일심의 여여함을 지킨다’ 한 데서 일심법(一心法) 중에 두 가지 문(門)이 있는데, 지금은 우선 큰 용과 같은 무명(無明)의 세력을 항복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그 중에서 심진여문(心眞如門)을 지키는 것을 이야기한다. 무명이 바로 일심의 여여함을 미혹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지킨다’ 함은 들어갈 때는 일여(一如)의 경지를 고요히 지키고, 나올 때는 일미(一味)의 마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를 지킴[守一]이라고 한 것이다.
이는 『본업경(本業經)』 「십행(十行)」중에 말씀하신 다음의 내용과 같다. “열 가지는 자재하게 큰 법륜(法輸)을 굴리는 것으로서, 보살의 3보를 말한다. 그 때 보살이 제일중도(第一中道)의 지혜를 각보(覺寶)로 삼고, 모든 법이 생겨나거나 움직임이 없음을 법칙으로 하는 것을 법보(法寶)로 삼고, 언제나 6도(道)를 다니면서 6도중생과 화합하는 것을 승보(憎寶)라 한다. 모든 중생을 부처의 바다로 흘러 들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ㆍ현재ㆍ미래[三時] 어느 때든 중도일미(中道一味)를 잃지 않는 것이 이 관(觀)에서 일심진여를 지키는 작용인데, 이 관행은 10행위(行位)에 있는 자들이 닦는다. 다른 부분[門]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할 것이므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겠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3해탈법(解脫法)이란 어떤 일이며, 이관삼매(理觀三昧)는 무슨 법으로부터 들어가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3해탈이란 허공해탈(虛空解脫)과 금강해탈(金剛解脫)과 반야해탈(般若解脫)이며, 이관심(理觀心)이란 마음이 청정한 이치와 동일하게 되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존용(存用)이며, 그것을 어떻게 관해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님을 두고 존삼의 작용[存用]이라 한다. 내행(內行)이나 외행(外行)에 출입하는 일이 둘이 아니되, 하나의 상에도 머물지 않아서 마음에 얻거나 잃음이 없으니,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곳에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가는 것을 관(觀)한다고 한다.”
【論】 (첫 번째 문답으로 數를 들어 전체적인 설명을 한 데 이어서) 이 두 문답은 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別顯觀行]이다.
‘3해탈’이란 세 가지 지혜[三慧]로 여덟 가지 해탈[八解脫]을 포괄하기 때문에 해탈이라 한다. 『본업경(本業經)』 「십주품(十住品)」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여섯은 모든 부처님이 지켜주는 것이니 이른바 8해탈관(解脫觀)이다. 안의 가상[內仮]과 밖의 가상[外仮] 두 가지 상이 성립할 수 없음을 문혜(聞慧)를 통해서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첫 번째 해탈이다. 안으로는 5음법(陰法)과 밖으로는 일체법(一切法)이 성립할 수 없음을 사혜(思慧)를 통해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두 번째 해탈이다. 6관(觀)을 다 갖추어 색계의 5음이 공함을 수혜(修慧)를 통해 터득하기 때문인데, 이것이 세 번째 해탈이다. 4공(空)의 5음과 멸정관(滅定觀)이 모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섯 해탈[五解脫]이라 하니 여여한 상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해석한다.
8해탈관은 두 가지 면[二門]으로 요약된다. 이 중에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측면[事相]에서 본다면 (여덟 가지가) 모두 수혜관(修慧觀)에 속하는데, 이는 다른 데서 설하는 바와 같이 2승(乘)에게도 공통되는 관이다. 한편 3혜(慧)의 측면에서 본다면 인(人)과 법(法)이 공(空)함을 관하는 것이니, 이는 대승(大乘)의 관법으로서 지금 이 경에서 설하는 내용이다.
첫 번째 해탈은 안에 색상(色相)을 두고 밖으로 색(色) 등을 관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안으로 색 등 5음법의 형상을 둔 채로 내아(內我)가 공함을 관하는 한편, 밖으로 색 등을 둔 채 중생이 공함을 관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에는 들어가기가 쉬우며 문혜(聞慧)로 얻어진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안의 형상ㆍ바깥의 형상 두 가지가 성립할 수 없음을 문혜를 통해 터득한다’고 하였다. 색(色) 등을 버리지 않은 채 공(空)을 관하는 것이, 허공이 색상을 버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므로 이를 허공해탈(虛空解脫)이라 한다.
두 번째 해탈은 안으로 색상을 두지 않고 밖으로 색 등을 관하는 것이다. 안으로는 색 등 5음법의 형상을 버리고, 밖으로는 모든 산하(山河) 등이 공하여 욕계(欲界)의 법은 무엇이든 공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관한다. 이 공(空)은 이해하기 힘들며 사혜(思慧)로 관한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안으로는 5음법(陰法)과 밖으로는 일체법(一切法)이 성립할 수 없음을 사혜(思慧)를 통해 터득한다’고 하였다. 안팎의 모든 법을 추적하고 분석하여 깨뜨리는 것이 금강(金剛)이 모든 색법(色法)을 깨뜨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이를 금강해탈(金剛解脫)이라 한다.
나머지 여섯 해탈[後六解脫]은 모두 수혜(修慧)로 얻는다. 위 두 세계[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법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에 『본업경』에서 ‘수혜의 6관(觀)’이라 하였으며, 모두 수혜를 통해 선정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총괄적으로 반야해탈(般若解脫)이라 한다.
이 가운데 여섯 가지 차별상(差別相)이 있는데 세 번째를 정해탈(淨解脫)이라고 부른다. 색계(色界)의 5음(陰)이 빛나고 깨끗하고 고요함을 몸으로 증득[身作證]하여 모두 다 공한 것임을 관하기 때문에 정해탈이라 하는데, 자기 스스로 안에서 증득한다는 뜻에서 ‘몸으로 증득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본업경』에서 ‘색계의 5음이 공함을 구족한 것이니, 세 번째 해탈이다’라고 하였다. 네 번째는 공처해탈(空處解說)이라 하는데 공처의 5음이 공함을 관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비상해탈(非想解脫)도 마찬가지이며, 멸정법(滅定法)도 얻어지지 않음을 관하므로 멸진해탈(滅盡解脫)이라 한다. 이상은 모두 버려야할 대상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므로 『본업경』에서 ‘4공(空)의 5음(陰)과 멸정관(滅正觀)이 모두 성립할 수 없기 때문에 다섯 해탈[五解脫]이라 하니 여여한 상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지혜로 인(人)ㆍ법(法)이 공함을 관하여 두 집착[二執:人執ㆍ法執]과 현행하는 두 속박[二縛:相應縛ㆍ能緣縛]을 항복시켜 떠나게 하므로 해탈이라고 부른다. 안팎의 모든 가법(仮法)을 이미 버렸으므로 천풍(天風)의 요동, 즉 모든 경계를 막을 수 있다.43)
다음에는 이관(理觀) 중에 나오는 구절을 보기로 한다.
‘마음이 청정한 이치와 동일하게 되어서 옳다, 그르다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란 형상 없는[無相] 이치를 따르기 때문에 마음에 분별이 없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마음과 현상으로 드러난 일이 둘이 아님을 존용이라 한다’ 함은 존삼(存三)의 작용이 가지는 탁월한 능력을 가리킨다. 존삼의 작용을 아직 얻지 못한 자라면 마음을 고요히 하여 공(空)을 관한다 할지라도 현상[事]에 닥치면 정념을 잃는다. 아(我)와 아소(我所)를 취하고, 마음에 맞고 경계와 거슬리는 경계에 집착하여 천풍에 움직이게 되고, 마음과 현상이 각각 다르게 된다. 반면 3해탈(解脫)을 능숙하게 잘 닦는 자라면 관(觀)에서 나와 현상에 맞닥뜨리더라도 관을 닦은 힘이 아직 남아있어서[存] 나다, 남이다 하는 형상을 취하지 않으며 좋다, 나쁘다 하는 경계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풍의 두들김에 흔들리지 않고, 들어가고 나오는 차별을 동시에 잊어버리며, 마음과 현상이 둘이 아니게 된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존삼의 작용’이라고 한다.
이 관법은 10신위(信位)에서 닦는데, 존용(存用)이 이루어지는 것은 10주위(住位)에서다. 『본업경』 10주위 중 이 관법을 설명한 내용과 같다.
‘내행(內行)……’ 이하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관(觀)의 상(相)을 밝히는 내용이다. ‘내행’이란 관에 들어가 적조(寂照)함을 보는 행이고, ‘외행’이란 관에서 나와 중생을 교화하는 행이다. ‘둘이 아니다’ 함은 나오거나 들어가거나 중도(中道)를 잃지 않기 때문이다.
『본업경』 10향(向)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열 번째, 자재(白在)한 지혜를 가지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니, 이를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라고 한다. 반야(般若)로써 중도에 처하여 모든 법이 둘 아님을 관찰하고 통달하며, 그 지혜가 점점 성숙하여 성인의 지위에 들어가므로 ‘제일의제에 근접한 관[相似第一義諦觀]이라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중도제일의제관은 아니다……”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하나의 상에도 머물지 않는다[不住一相]’ 함은 2제관(二諦觀)을 닦기 때문이고, ‘마음에 얻거나 잃음이 없다[心無得失]’ 함은 평등관(平等觀)을 닦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방편관에 의지하므로 초지(初地)의 법류(法流)에 진입한다. 그러므로 ‘하나이면서도 하나가 아닌 곳에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간다’고 하였다.
『본업경』에서는 3관(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仮)로부터 공(空)에 들어가는 것을 2제관이라 하고, 공으로부터 가에 들어가는 것을 평등관이라 하는데, 이 두 가지 관은 방편도(方便道)이다. 이 두 가지 공관(空觀)으로 중도제일의제관에 들어가니, 2제(諦)를 동시에 비추어 마음마다 적멸하여 초지 법류(法流)에 진입(進入)한다……” 하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해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 중에서 ‘2제관’이란 속(俗)을 버리고 진(眞)을 관하는 것이므로 정체지(正體智)의 방편이고, ‘평등관’이란 진을 융(融)하여 속(俗)을 관하는 것이므로 후득지(後得智)의 방편이다. 속이 허깨비 같음을 관하여 얻거나 잃음을 취하지 않으며, 옳거나 그름이 없으므로 평등이라 한다.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이란 초지의 다른 이름이다. 어째서 그런가? 초지가 바로 10지라서 일시에 10중법계(重法界)에 바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또한 10지가 바로 초지라서 완성된 그대로 초문(初門)에게 들어갈 곳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진실로 10지가 초지라는 뜻에서 ‘하나’라 했고, 초지가 10지라는 뜻에서 ‘하나가 아니라’고 했으니, 그러므로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이라 하였다. 두 가지 방편에 의하여 그 마음을 깨끗이 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이지만 하나가 아닌 곳에 흘러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정한 마음이 흘러 들어간다[淨心流入]’고 하였다. 여기서는 첫 관과 마지막 관만을 자세히 이야기했으나 중간의 한 관은 이에 준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보살아, 이런 사람은 두 개의 형상에 머물지 않으니, 출가(出家)하지 않았더라도 재가(在家)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법복(法服)이 없고,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44)를 다 갖추지 않고, 포살(布薩)45)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기 마음에서 무위(無爲)의 자자(自恣)를 하여 성인의 과위[聖果]를 얻는다. (이런 사람은) 2승(乘)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는데, 뒤에 가서 지(地)를 다 채우면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방편의 뛰어난 이익[方便勝利]을 설명한 부분이다.46) 그 중에 다음과 같이 넷이 있다. 과를 얻는 뛰어난 이익[得果勝利]ㆍ공양을 얻는 뛰어난 이익[得供勝利]ㆍ허물이 없는 뛰어난 이익[無患勝利]ㆍ머묾이 없는 뛰어난 이익[無住勝利]이다.
첫째 득과승리에도 네 가지 뛰어난 이익이 있다.
하나는 ‘극단을 떠난 데서 오는 뛰어난 이익[離邊勝利]’인데 도(道)ㆍ속(俗) 어느 편의 모습에도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경(經)에서 ‘이런 사람은 두 개의 형상에 머물지 않으니, 출가(出家)하지 않았더라도 재가(在家)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둘은 ‘자재하게 되는 뛰어난 이익[自在勝利]’인데 교문(敎門)의 계율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마음으로 도리를 결판하여, 아무 하는 일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경에서 ‘법복(法服)이 없고……성인의 과위를 얻는다’고 하였다.
셋은 ‘도에 들어가는 뛰어난 이익[入道勝利]’인데 경에서 ‘2승(乘)에 머물지 않고 보살도(菩薩道)에 들어간다’고 하였다.
넷은 ‘과를 얻는 뛰어난 이익[得果勝利]’인데 경에서 ‘뒤에 가서 지(地)를 다 채우면 부처의 깨달음을 이룰 것이다’라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나이다. 이런 사람은 출가한 것이 아니면서도 출가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 여래의 옷을 입고 보리좌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심지어 사문들도 마땅히 존경하고 공양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 하면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이 삼계(三界)를 일으키고, 여래의 옷을 입고서 법공(法空)의 자리에 들고, 보리좌에 앉아 정각(正覺) 일지(一地)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나[二我]를 초월했거늘 어찌 사문이라 해서 존경하고 공양하지 않겠는가?”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득공승리(得供勝利)인데, 세 가지 훌륭한 덕[勝德]을 얻어서 복전(福田)이 될 만하고, 모든 도인[道]과 속인[俗]에게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이 글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보살이 복전(福田)임을 밝히고, 다음에는 2승(乘)은 볼 수 없음을 나타내고, 끝으로 보살만이 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처음에서는 세 가지 복전이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열반의 집에 들어가 마음이 삼계를 일으킨다’ 함은 3해탈(解脫)로서, 존삼(存三)의 작용[用]을 말한다. 삼계가 공적(空寂)한 것을 ‘열반의 집’이라 하니, 안심하고 몸을 맡겨 살 수 있는 깨끗한 곳이므로 하는 말이다. 3해탈관으로 삼계가 공(空)한 곳에 들어갔으나 깨달음에 빠지지 않고 세속의 마음을 다시 일으켜 삼계를 빠짐없이 교화하므로 ‘마음이 삼계를 일으킨다’고 하였다. 삼계에 대한 마음을 일으키지만 물들거나 집착하지 않으므로 이것이 존용(存用)이다.
‘여래의 옷을 입고 법공의 자리에 들어간다’ 함은 일심의 여여함을 지키는[守一] 관이다. 삼계를 두루 다니며 널리 교화할 때 인욕(忍尋)의 옷을 입고 지치거나 싫증을 내지 않으며, 법공(法空)에 귀환해 들어가 일심의 여여함을 지키는 것을 말한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말한 “유화(柔和)와 인욕(忍辱)의 옷”과 같은 맥락이다.
‘보리좌에 앉아 정각일지에 올라간다’ 함은 여래선(如來禪)인 이관(理觀)의 마음을 말한다. 즉 법공에 앉아 방편을 더욱 닦아서 초지에 올라 정각의 진실관을 수행하는 것이다. 『법화경』에서 “모든 법이 공함을 자리로 삼는다”고 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3위(位)는 모두 2공(空)을 관하여, 인아(人我)ㆍ법아(法我)의 두 집착을 눌러 없앴기 때문에 ‘마음이 두 가지 나[二我]를 초월했다’고 하였다. 두 가지 나를 초월했으므로 번뇌를 끊는 덕[斷德]이 구족하고, 3관(觀)을 닦았기 때문에 지혜의 덕[智德]이 겸비된다. 그러므로 도인과 속인의 복전이 될 만하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일지(一地)와 공의 바다[空海]를 2승을 닦는 사람은 보지 못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저 2승을 닦는 사람은 삼매(三昧)에 맛들여 거기에 집착하고 삼매의 몸을 얻으므로, 저 공해와 일지에 마치 술병난 사람처럼 정신 없이 취해 깨어나지 못한 채 수겁(數劫)이 지난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다가 술기운이 가시고 나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 행을 닦은 뒤에야 불신(佛身)을 얻는다.”
【論】 이 대목은 2승(乘)은 볼 수 없음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나중에 대답한다.
질문 중에 ‘일지(一地)’란 오르는 지위(地位)를 말하는데, 10지(地)가 곧 초지(初地)이므로 ‘일지’라고 하였다. ‘공해(空海)’란 앞서 말한 바 3관(觀)을 통해 들어가는 공이 매우 깊고 넓고 크므로 ‘바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란 2승은 보지 못한다는 물음을 긍정하신 말씀이다. 그 다음은 2승이 보지 못하는 이유를 풀이한 말씀이다.
‘삼매에 맛들여 거기에 집착한다’ 함은 고요한 선정(禪定)을 좋아해서 이에 집착하고 적정(寂靜)으로만 향하는 것이다. ‘삼매의 몸을 얻음’이란 어떤 것인가? 즐겨 쫓아가는 바에 따라 멸심정(滅心定)에 들어가고, 열반에 들어가서 몸과 마음을 식어버린 재처럼 없애고[灰身滅智], 몸과 마음이 멸한 곳에 멸정(滅定)의 체(體)가 생겨 심과 심법을 막는데, 이런 것을 두고 삼매신(三昧身)을 얻는다고 한다. 고요함을 즐기는 훈습(薰習)이 본식(本識) 안에 있어서 이것 때문에 술병 난 사람이 술에 취해 깨어나지 못하듯이 공해와 일지(一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수겁(數劫)이 지난 뒤에도 깨어나지 못하다가’라 함은 수다원(須陀洹)47)의 지위에 있는 사람은 8만 겁을 머물고……아라한(阿羅漢)은 2만 겁을 머물고 벽지불48)은 만 겁 동안 열반에 머물러 깨닫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이를 전체적으로 표현하여 ‘수겁이 지난 뒤에도’라고 하였다.
‘술기운이 가시고 나서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이 행을 닦는다’ 함은 즐겨 애착하고 훈습(薰習)하는 정도가 두터우냐 가벼우냐에 따라 그 애착의 기운이 차차 없어져 다시 마음을 일으키게 되며, 마음을 일으켰을 때 마음을 돌려 대승에 들어가 그제야 앞서 말한 3종관행(種觀行)을 닦는다는 것이다. 『능가경 (楞伽經)』 게송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술에 취한 사람이 술기운이 가신 뒤에야 부처의 위없는 몸이 다름 아닌 내 진법신(眞法身)임을 깨닫는 것과 같다(이하 생략).”
【經】 “그런 사람은 천제(闡提)49)를 버리고 곧 6행(行)에 들어가고, 닦아 나아가는 곳에서 한 생각 깨끗한 마음으로 마침내 명백해지며, 금강지혜의 힘으로 아비발치(阿鞞跋致)50)에 들어가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니 그 자비가 다함이 없다.”
【論】 이 부분에서는 (2승이 보지 못하는 데 반해, 보살은 볼 수 있음을 밝히는데) 보살종성(菩薩種性)을 가진 사람이 천제의 믿지 못하는 장애를 버림으로써 6행의 첫 단계인 10신(信)에 들어가고, 닦아 나아가는 곳[修行地]에서 한 생각 깨끗한 마음을 발하는데, 그것이 10주(住)의 초발심(初發心)이다. ‘마침내 명백해짐’이란 10행위(行位)에서 모든 행위가 밝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금강지혜의 힘’이란 10회향(廻過)의 견고한 지력(智力)을 말한다. ‘아비발치’ 초지(初地) 이상에서 참되게 증득[眞證]해서 물러남이 없기 때문이다.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케 하니 그 자비가 다함이 없다’ 함은 전위(前位)에서 이타행(利他行)을 하기 때문이니, 2승(乘)이 하지 못하는 것과 구별하기 위해 하신 말씀이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이런 사람은 마땅히 계(戒)를 고수하지 않을 것이니 저 사문을 공경하는 일이 없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를 설하는 자는 선(善)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며, 바다에 파도가 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사람의 마음자리는 8식(識)의 바다가 맑아지고, 9식(識)의 흐름이 맑아져서 바람이 움직일 수 없고 파도가 일지 않는다.
계의 성품은 공한 것이므로 이를 지키는 자는 미혹되고 전도된 자라 하겠다. 그러나 저 사람에게는 제7식(第七識)과 제6식(第六識)이 생기지 않아서 모든 번뇌가 사라져 조용하며, 3불(佛)을 떠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하며, 3무상(無相) 가운데 마음 따라 깊이 들어가서 3보를 존경하고 위의(威儀)를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보살아, 저 어진 사람은 세간의 움직이는 법에도 머물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법에도 머물지 않으며,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有:삼계)의 마음을 없앤다.”
【論】 이것은 세 번째, 허물을 떠난 뛰어난 이익[離患勝利]을 설명한 부분으로서, 인과(因果)를 잘못 이해하는 범부의 허물을 떠난 것을 말한다.
‘계를 지키지 않을 것’이라 함은 앞서 (得果勝利를 설명한 부분에서) ‘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를 다 갖추지 않았더라도…’라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이다. ‘저 사문을 공경하는 일이 없겠다’ 함은 계를 지키지 않으므로 계를 지키는 이를 공경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앞의 물음을 허용하고, 다음에는 뒤의 물음을 부정한다.
‘계를 설하는 자’란 남을 위해 계를 설하는 사람으로, 성문(聲聞)들을 가리킨다. 자기가 계 지키는 것을 자랑삼아 파계한 다른 사람을 멸시하기 때문에 ‘선하지 못하고 교만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람은 모든 법이 공(空)함을 아직 알지 못하기 때문에 수면(隨眠)의 바다 위에 7식(識)의 물결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바다에 파도가 인다’고 하였다. 이는 계를 지킨다는 사람의 과실을 보여준 것이다.
‘저 사람의 마음자리’란 보살의 마음을 가리킨다. 모든 법이 공함을 증득하여 대지(大地)에 들어가므로 제8식 내의 두 가지 집착[能取ㆍ所取]과 분별기(分別起)51)의 번뇌[隨眠]가 모두 없어지는 까닭에 ‘8식의 바다가 맑아진다[澂]’고 하였다. 징(澂)은 징(澄)이다. 분별 없는 지혜로서 본각에 깨달아 들어가서 지(地)마다 증장하여 모든 더러움을 떠나기 때문에 ‘9식의 흐름이 맑다’고 하였으니, 본각(本覺)이 바로 제9식이기 때문이다. 마음에 분별이 없어서 경계에 휘둘리지 않기 때문에 ‘바람이 움직일 수 없다’고 하였으며, 바람이 움직이지 못하므로 물든 제7식(第七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파도가 일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사람은 이미 모든 법이 공함을 증득하고, 일곱 가지 계성(戒性)52)이 모두 공적(空寂)함을 통달했기 때문에 ‘계의 성품은 공한 것’이라 하였다. 그런데 성문(聖聞)은 법공을 통달하지 못하여 계성(戒性)이 있다고 집착하고는 자신이 잘 지킨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지키는 자는 미혹되고 전도되었다’고 하였다. 여기까지는 첫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계를 지키지 않는 것이 과실(過失)이 아님을 밝힌 것이며, ‘저 사람’ 이하는 이어서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답으로 교만함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제7식과 제6식이 생기지 않는다’ 함은, 말라식[제7식]의 네 가지 미혹53)이 현행하지 않기 때문이며, 견혹(見惑)의 종자가 이미 끊어져서 없기 때문이다. ‘모든 번뇌가 사라져 조용함[諸集滅定]’이란 생기식(生起識:前六識)의 모든 심(心)과 심소(心所) 등의 쌓임이 다 없어지고 이정(理定)에 들었기 때문이다.
‘3불을 떠나지 않고 보리심을 발한다’ 함은 발심한 이래로 두루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여래장불(如來藏佛)이 바로 모든 중생이라 여기고 저 발심에 의해 그들을 업신여기거나 교만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 가지 무상[三無相]에 마음이 순응하여 깊이 들어간다’ 함은 행입(行入)을 얻었을 때 무명(無明)의 뿌리를 뽑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 말한 3해탈(解脫) 중에서 일심법(一心法)에 순응하여 깊이 들어간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3보를 깊이 존경하는 것이니, 형상으로 된 부처[佛]와 종이나 천에 쓰여진 법(法)과 네 종류의 수행자[僧] 등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 그러므로 ‘사문을 공경하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으니, 3불에 의하여 발심했기 때문에 교만의 뿌리인 무명의 씨앗을 뽑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원인[因]의 잘못됨을 떠남에 대해 밝혔고, 이제부터는 과보[果]의 잘못됨을 떠남에 대해 밝힌다.
‘세간의 움직이는 법에도 머물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 법에도 머물지 않는다’한 데서, ‘움직이는 법’이란 욕계의 인천(人天)이 누리는 부와 쾌락을 말하는데, 산심(散心)으로 닦아 얻은 선한 과보[善果]이기 때문이다. ‘움직이지 않는 법’이란 색계와 무색계의 적정(寂靜)의 과(果)를 말하는데, 정심(定心)으로 닦아 얻은 선한 과보이기 때문이다. 그 둘에 다 집착하지 않으므로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3공취에 들어간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점점 더 증입(增入)하기 때문에 취(聚)라고 하였으며, 집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생겨나지도 않게 하니, 이런 이유에서 ‘3유(有)의 마음을 없앤다’고 하였다.
【經】 대력보살이 아뢰었다.
“저 어진 사람은 과만족덕불(果滿足德佛)과 여래장불(如來藏佛)과 형상불(形像佛), 이러한 부처님 앞에서 보리심을 내서 3취계(聚戒)에 들어갔지만 그러한 관념[相]에 머물지 않으며, 3유심(有心)을 멸하였지만 고요한 자리에 기거하지 않으며, 제도할 중생을 버리지 않고 고르지 못한 땅에 들어가니 불가사의하나이다.”
【論】 이는 네 번째, 머묾이 없는 뛰어난 이익을[無住勝利] 설명한 부분이다. 이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위에 말한 내용을 이해했음을 밝히고 뒤에 머물지 않음을 밝힌다. 이해했음을 밝힌 데도 두 구가 있으니 먼저는 ‘3불을 떠나지 않는다’는 구절을 이해한 내용이다.
‘과만족덕불’이란 시각(始覺)이 완성[究竟]되어 만 가지 덕이 원만하기 때문이다. ‘여래장불’이란 모든 중생이 본래 본각(本覺)이기 때문이다. ‘형상불’이란 금ㆍ은ㆍ진흙ㆍ나무 등으로 세존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인과(因果)와 이사(理事)에 빠지는 것이 없다.
‘3취계에 들어갔지만 그러한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앞에서 계의 성품이 공하다고 한 말씀을 이해한 것으로서, 계(戒)에 들어가는 네 가지 연이 계상(戒相)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3취계(聚戒)의 네 가지 연은 다음 품에서 설명할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머묾 없는 뛰어난 이익을 본격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3공취(空聚)에 들어가 3유심(有心)을 없앴지만 고요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6도(度)의 저 숨가쁜 중생들이 살고 있는 곳을 두루 왕래하니 이곳을 ‘고르지 못한 땅’이라고 하였다. 미혹(迷惑)을 남겨둔 채 업(業)에 얽매이지 않고 그 땅에 생(生)을 받으므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미혹을 남겨둔다는 말은, 소승의 수행자들처럼 그것을 빨리 없애는 것이 아니라 3무수대겁 동안에 점차로 미혹을 없애 보리를 얻을 때에 가서야 다 없어진다는 뜻이지, 금강지 이상에서 한결같이 끊지 않는 경지를 두고 ‘남겨둔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經】 그 사리불(舍利佛)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나서서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반야(船若)의 바다가 구족하건만
열반의 성(城)에 머물지 않는다네.
마치 저 아름다운 연꽃이
높은 언덕에 나지 않듯이.

모든 부처님, 한량없는 세월 동안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고서
세간을 제도한 후에야 부처 되시니
마치 연꽃이 진흙에서 피듯 하네.

저 6행(行)의 경지들은
보살이 닦는 것이요
저 3공취(空聚)는
보리로 가는 곧은 길[直道]이어라.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54), 사리불이 말씀을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身子領解]인데, 소승들에게 큰마음[大心:대승심]을 내게 하기 때문(에 사리불이 등장한 것)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것이고, 또 하나는 결론짓는 말[述成]이다.
첫 번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앞의 세 게송은 이제껏 설하신 내용을 찬탄한 구절이고, 뒤의 두 게송은 자기의 발심을 진술한 것이다. 앞 세 게송도 셋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앞 두 게송으로 무주도(無住道)를 찬탄한 것이고, 그 다음 두 구절은 6행위(行位)를 찬탄한 것이고, 마지막 두 구절은 3공취(空聚)를 찬탄한 것이다.
첫 번째 가운데 ‘반야의 바다가 구족하다’ 함은 3해탈(解脫)이 3혜(慧)를 구족하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열반의 성에 머무르지 않는다’ 함은 삼계의 마음을 멸하되 고요한 곳에 살지 않기 때문에 한 말이다. ‘높은 언덕에 나지 않는다’ 함은, 저 2승(乘)들은 번뇌의 진흙에서 벗어났지만 8만 겁을 발심(發心)하지 않기 때문이다.
‘온갖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이생[二二生]55) 중에 속히 번뇌를 끊어 없애버리는 2승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연꽃이 진흙에서 피듯이’라 함은 미혹이 남아 있음으로써 고르지 못한 땅에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남김없이 보살행을 닦아서 그것으로 보리의 열매를 증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6행(行)과 3취(聚)를 말했으니 문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나 이제 부처님 설하신 대로
머물지 않는 데 머무네.
왔던 곳에 또 다시 와서
모든 행을 갖춘 뒤에야 나가리다.

또 저 중생들로 하여금
나처럼 둘 없이 하나가 되게 하여
앞에 온 자나 뒤에 올 자나
모두 다 정각(正覺)에 오르게 하리.

【論】 여기는 사리불이 자기의 발심을 진술한 부분이다. 그 중에 첫 두 구절은 지금 발심하는 자리를 말한 것이요, 이어지는 반 게송과 한 게송은 그 후의 수행을 표시한 것이다.
‘나 이제 머물지 않는 데 머문다’ 함은 지금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큰마음을 일으킨 것이 고요한 자리에 머물지 않는 마음에 머문 것이기에 그렇게 말했다.
‘왔던 곳에 또 다시 왔다’ 함은 시작이 없는 때부터 유전(流轉)해 온 곳에서 내가 이미 떠났다가 지금 다시 와서 3계(界)에 들어와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뜻한다. 변제정(邊際定)56)의 힘으로 받은 몸을 연장하여 알맞은 곳에 나타내 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모든 행을 갖춘 뒤에야 나가리다’ 함은 보살의 모든 행(行)을 구족한 후에 이 몸을 벗어나 불신(佛身)을 얻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앞에 온 자’는 과거의 선근(善根)이 이미 성숙한 자를 말한다. ‘뒤에 올 자’는 미래세에 가서야 성숙할 사람을 말한다. 미래가 다할 때까지 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經】 그 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불가사의로다. 네가 이 다음에 보살도(菩薩道)를 이루어 한량없는 중생들을 생사의 바다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論】 (첫 번째 사리불의 이해에 이어) 두 번째, 부처님께서 사리불의 말을 인정하면서 끝맺음을 하신 부분이다.
【經】 그 때 대중이 모두 보리를 깨닫고 소승의 무리들이 5공(空)의 바다에 들어갔다.
【論】 이 부분은 네 번째, 당시 대중이 이익 얻었음을 밝힌 부분이다.
‘대중(大衆)’이란 대승(大乘)의 무리를 말한다. ‘보리를 깨달았다’ 함은 일지(一地)의 보리심에 깨달아 들어갔다는 말이다. ‘소승의 무리들……’이란 성문(聲聞)의 무리가 세 가지 진여(眞如)의 문(門)에 들어갔음을 말한다.
045_0096_a_06L 論曰言實際者離虛之稱究竟之義幻究竟故名實際依教修理理入行入故名爲入然實際以旡際爲際二入是旡入之入故名入實際品經曰於是如來作如是言諸菩薩等本利深入可度衆生 論曰別明觀行六分之中第三依本利物分此下第四從虛入實又前品明心生滅門今此品顯心眞如門就文有四一者略標大意二者廣顯道三者身子領解四者時衆得益初中有二先開令入方便後示所入實際開方便中摠標別開此文摠標令入大意 經曰若後非時應如說法時利不俱順不順說非同非異相應如說引諸情智流入薩般若海旡令可衆挹彼虛風悉令彼庶一味神孔此是第二別開方便於中卽開四種方便一者知時方便二者識機方便三者引入方便四者出離方便知時方便者如經若後非時應如說法時利不俱後有三義佛滅度後故正法滅後故五重五百中後五百歲故言非時者非純熟時故非易悟時故見盛興相非時故若於如是非時直應眞如說法當彼時旡所利益時利不竝故言不俱是爲知時方便識機方便者如經順不順說非同非異相應如說順不順說者若直順彼心說則不動邪執設唯不順說者則不起正信爲欲令彼得正信心除本邪執須或順或不順說又復直順理說不起正信乖彼意故不順理說豈生正解違道理故爲得信解故順不順說也若諸異見諍論興時若同有見而說則異空見若同空執而說則異有執所同所異彌興其諍又復兩同彼二則自內相諍若異彼二則與二相諍是故非同非異而說非同者如言而取皆不許故異者得意而言旡不許故由非異故不違彼情由非同故不違道理於情於理相望不違故言相應如說如者而也引入方便者如經引諸情智流入薩般若海故諸情者大小情欲差別故諸智者空有知見差別故引接此輩皆順道流令入一覺一切智海旡上菩提深廣義故如百川流同入大海大海深廣同一味故如是名爲引入方便出離方便者如經旡令可衆挹彼虛風悉令彼庶一味神孔故挹者斟也是取納義言虛風者謂遊空風能起#諸浪喩諸境界動諸識浪可度衆生挹境界風故從前來諸識浪轉今旡令挹識浪靜息也庶者庶幾是希望義言神孔者神仚窟遠離城邑旡事閑靜長生之處喩大涅槃不死之宅圓寂平等故名一味令彼衆生希大涅槃諸識浪出離流轉如是名爲出離方便 經曰世閒非世住非住處五空出入旡有取捨何以故諸法空相法性非旡非旡不旡不旡不有旡決定性不住有非彼有旡凡聖之智而能測隱諸菩薩等若知是卽得菩提 論曰是示所入道理於中有四一者略明二者重釋三者偏執不當四者達者勝利初中言世閒非世者世閒五法旡所有故住非住處者住涅槃旡所得故修觀行者達五空時出有入空故言出入入空之時不取空性雖不取空而不捨空之故言旡有取捨旣入五空何故不取若旡取者如何不捨爲荅是問故第二釋諸法空相法性非旡說入空非旡不旡不旡不有故旡取捨言非旡者法性理不同兔角故言不旡者謂觀行者而不遣故不遣之者非旡理故言不有者謂觀行者亦不存故不存之者非有理故法性如是非定有旡是故達者不住二邊故言旡決定性不住有旡由是道理故旡取捨第三中言非彼有旡凡聖之智者凡夫存有而背於二空乘背有而趣空寂如是不離有旡之智而能測量安隱法性者旡有是處故言非也第四中言諸菩薩者地前菩薩若知法性不有不旡者初發心時便成正覺是故切言卽得菩提謂卽發心知法性時是時卽得旡上菩提是義出華嚴經發心功德品也上來諸文每言決定性故何故此中乃言旡決定性是不相違所以然者旡決定義旡改定故爾時衆中有一菩薩名曰大力卽從座起前白佛尊者如如所說五空出入旡有取捨云何五空而不取捨 論曰此下第二廣顯道理於中卽以四門分別一顯實際義二明趣入義三開入之階位四示入之方便初中亦四一名五空二明三空三明空是四明眞是如初中有二先問後荅問者名大力者此人得入實際法門遍周法界旡所不爲得大自在故名大力故於是門開發顯揚言如如者佛所說言契當如理故前如是當義後如是道理先領後問其二義一問五空法門二問旡取捨義 經曰佛言菩薩五空者三有是空六道影是空法相是空名相是空心識義是空菩薩如是等空空不住空空旡空旡相之法有何取捨入旡取地卽入三空 論曰如其次第荅前二問五空卽顯三種眞如何等爲三一流轉眞如二實相眞如三唯識眞如是義具如顯揚論說此中前二空卽前二眞如後三空是第三眞是義云何初三有是空者由三有愛流轉三界界流轉旡前後性剎那旡住空旡所得卽是流轉眞如門也第二六道影是空者由善惡業各二品故道果報似本現影影旡離本空旡所得卽是實相眞如門也後三唯識眞如門者前二是遣所取義名義互客不成實故後一是遣能取心識能所相待不獨立故唯識道理最難可入故開三空遣其能所所空故得旡分別菩薩已下荅第二問如是等空者摠擧五空辨其理智空不住空者空智旡住與理平等故空旡空相者空理旡相與智平等故理智平等旡能所相何容取捨於其間哉所以入中卽入三空旡取地者謂十地也 經曰大力菩薩言云何三空佛言三空者空相亦空空空亦空所空亦空如是等空不住三相不旡眞實文言道斷不可思議 論曰此一問荅是明二空空相亦空者空相卽是遣俗顯平等之相亦空卽是融眞爲俗空空之義如銷眞金作莊嚴具如涅槃經言是有是旡是名空空是是非是是名空空是明俗諦有旡是非差別之相是空空義空於平等空顯俗差別故故此差別名爲空空空空亦空者空空卽是俗諦差別亦空還是融俗爲眞也如銷嚴具還爲金缾第三中言所空亦空者初空中空所顯俗第二空中空所顯眞此二旡二故言亦空是融一諦顯一法界#一法界者所謂一心初空門內所遣俗者是所執相第二空中所融俗者是依他相俗有二種相故所遣所融非一也又初門內遣俗所顯之眞第二空中融俗所顯之眞此二門眞唯一旡二眞唯一種圓成實性所以遣融所顯唯第三空者非眞非俗非二非一又此三空初空顯俗諦中道次空顯眞諦中道第三空顯非眞非俗旡邊旡中之中道義言如是等空者摠擧三空不住俗不住眞相亦不住於旡二之相故言不住三相是不住究竟顯實故言不旡眞實雖不旡實而非有由如是故文言道斷道斷之言亦不可寄故亦說言不可思議 經曰大力菩薩言不旡眞實是相應 論曰此下第三明空不旡眞而不有眞義先問後荅問意而言凡言有旡必也相對不有必旡不旡卽有若言不旡眞實之理則應是有眞實之理凡諸學者每作是計爲遣彼執故作是問 經曰佛言不住旡不旡不有不有之法不卽住旡不旡之相不卽住有非以有旡而詮得理菩薩旡名義相不可思何以故旡名之名不旡於名旡義之義不旡於義論曰荅中有二一者正荅二者歎深初中言旡不住旡者先言不旡眞實句中謂旡之名不住旡義是故不旡之名亦不當於有義以之故言不旡不有是明旡名之名不當有義之義不有之法不卽住旡者融俗爲眞而不守眞旡之法故不旡之相不卽住有雖融眞爲俗而不守俗有之相故以眞俗不住有旡故不旡眞實旡二之理眞俗不旡二諦故不有眞實旡二之理故言非以有旡而詮得理是明旡義之義不稱有名之名菩薩已下第二歎深於中有二歎釋歎旡名之名不旡於名者佛所說名不當有義之義故爲旡名之名而當旡義之義故言不旡於名旡義之義不旡於義者佛所體義不稱有名之名爲旡義之義而稱旡名之名故言不旡於義也是不有名義而亦不旡名義由是道理不可思議也經曰大力菩薩言如是名義眞實如相如來如相不住如如旡如相相旡如故非不如來衆生心相相亦如來衆生之心應旡別境 論曰此下第四明眞不有如而旡不如義於中有二先問後荅問中亦二先立道理後問所疑言如是名義者如前所說不可思議之名義相名義相稱旡倒旡變故名眞實如是名義遠離能所一味平等故名如相如是名義平等如相諸佛如來所體故言如來如相如不住如者明旡名之如名當於旡如之如義如旡如相相旡如故者旡如相之如相稱於旡名之如名如是稱當能所平等故若名若義非不如來也相旡如者如相旡如相正是旡相爲相當知如旡如相是明不有如之旡相相旡如者是明不有旡相之如如之體相雖是不有而亦不旡如之體相如是旡如相之如相方稱旡名之如名也衆生心相相亦如來者謂諸衆生分別心相相卽非相旡不平等是故彼相亦是如來上來正立平等道理次言衆生之心應旡別境者問所疑衆生心相旣是如來則衆生心應旡別境別境者卽旡分別旡分別故應旡染污旡染污故旡三界有作是疑故作是問 經曰佛言如是衆生之心實旡別境何以故心本淨故理旡穢故以染塵名爲三界三界之心名爲別境是境虛妄從心化心若旡妄卽旡別境 論曰是荅所疑先與後奪與者就自性淨本旡染故奪者約隨他染有別境故自性淨者如寶性論引經說言善心念念滅不住煩惱所染不善心念念滅不住非煩惱所染煩惱不觸心心不觸煩惱云何不觸法而能得染心乃至廣說故卽是染而不染門也隨他染者夫人經言自性淸淨心難可了知彼心爲煩惱所染亦難可了知是不染而染門也心本淨故理旡穢故者自性淨心本覺之理非諸塵穢之所入故以染塵下奪其所問於中先顯不覺染塵後對不覺略示始覺不覺中以染塵故名爲三界者住地煩惱略有三種謂欲愛住地色愛住地有愛住地以此住地起三界愛三界愛故三界心生由是妄心變作虛境以之故言從心化生次明始覺心若旡妄者依理觀行妄心不生故卽旡別境者妄作境界隨心滅故上來四門合爲第一廣實際義 經曰大力菩薩言心若在淨諸境不此心淨時應旡三界佛言如是菩薩心不生境不生心何以故所見諸境唯所見心心不幻化卽旡所見 論曰此下第二廣趣入義於中有四一者摠明趣入二者別顯趣入三者入之離過四者入之離初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此心淨時應旡三界初地已上證見本淨故隨所應得三界滅旡三界事相者或於初地或第八地而得滅旡三界自性者等覺位中而得滅旡#三界習氣至妙覺位方得滅旡此義具如二障章說荅中摠許故言如是三界滅旡時#心境不相生所以然者唯心妄見變作境界心旡妄時則不作境境界旡故不生心也 經曰菩薩內旡衆生三性空寂則旡己衆亦旡他衆乃至二入不生心得如是利卽旡三界 論曰此下第二別明趣入於中有二一者摠摽擧數二者問荅別顯此是初文內旡衆生者謂十住位得內人空故三性空寂十行位中得內法空故則旡己衆亦旡他衆者迴向位得平等空遍遣自他人法衆故所言衆者生名衆五陰之法亦名五衆故是相似空未得眞證乃至二入者通擧地前地上入數 經曰大力菩薩云何二入不生於心心本不生云何有入佛言入者一謂理入二謂行入理入者深信衆生不異眞性不一不共但以客塵之所翳障不去不來凝住覺諦觀佛性不有不旡旡己旡他凡聖不二金剛心堅住不移寂靜旡爲旡有分別是名理入 論曰此下問荅別顯問中有二先問後難荅中亦二先荅後通荅中有三牒數列名次第辨相此中理入者理信解未得證行故名理入位在地前行入者證理修行入旡生行故名行入位在地上理入文中有其四句深信已下乃至翳障是十信入不一者謂衆生相不異眞性而非一故不共者非亦一亦異故第二句言不去不來凝住覺觀者是十住入悟衆生空故不來去於人空門靜住其心覺察佛性旡去來故三句言諦觀佛性不有不旡者是十行入已得法空依法空門諦觀佛性不有法相不旡空性故第四句言旡己旡他凡聖不二等者是明十迴向位理入已得自他平等空故心如金剛堅住不退梵網經中十金剛仁王經中名十堅心是十迴向之異名也經曰行入者心不傾倚影旡流易於所有處靜念旡風鼓不動猶如大地捐離心我救度衆生旡生旡相不取不捨 論曰是明地上證入之行心不傾倚如理智心不攀緣故攀緣之心不生起故影旡流易者如理之境離三際故流變境像不復現故所有一切世間福樂乃至菩提大涅槃果於是一切皆旡願求通達平等旡此彼故故非境界風所鼓動是明自利行入捐離己下令他入行以證二空離人法相能普遍救度一切雖心旡生亦旡境相而不取其寂滅之性恒不捨於一切衆生以之故言不取不捨如是二行名爲行入 經曰菩薩心旡出入旡出入入不入故故名爲入 論曰此是第二通彼所難證理之心遠離生滅旡始旡終故心旡出入旡出入亦旡昔日出入之心故旡出入心去昔有出入心入此不出入心故言入不入故故名爲入如是前難得善通也 經曰菩薩如是入法法相不空不空之法不虛棄何以故不旡之法具足功德非心非影法爾淸淨 論曰此下第三能入離過於中有二明廣釋此卽略明如是入法者謂入實際旡出入法是不旡法能所平等離諸過患具諸功德非心非影心境平等離能所故法爾淸淨者旡始旡終離諸相故 經曰大力菩薩言云何非心非影法爾淸淨佛言空如之法非心識法非心使所有法非空相法非色相法非心不相應法非心旡爲相應法非所現非所顯示非自性非差別非名非相義何以故故非如之法亦旡旡如旡有旡如非旡如有何以故根理之法非理非根離諸諍論不見其相菩薩如是淨法非生之所生生非滅之所滅滅 論曰此下第一廣釋離過先問次荅三領四述荅中有二先釋非心非影之句後釋法爾淸淨之句初中亦二先明入法離諸心影後明心影旡非如理初中言空如之法入實際時遠離諸相曰空能所平等曰如如是入法離諸心影心影差別略有六雙一者心及心所爲二者虛空與色爲雙三者不相應行及諸旡爲爲四者影像及與本質爲雙五者自性差別爲雙者名言及與相義爲雙此六雙中初之一雙能緣心後五雙者所緣影類離此六雙故非心影如其次第有六雙句非心識法者以離八識心故非心使所有法者以離六位心所有法故非空相法者離旡色相虛空法故非色相法者離顯形表三種色故非心不相應法者離二十四不相應行故非心旡爲相應法者離餘七種旡爲法故依心所顯故名心旡爲三種旡爲之相相應法故名相應法亦離三種眞如法入證門中旡三別故非所現影者離方便觀之所顯現本法同分之影像故非所顯示者亦離影像之所顯示本質之法骨鎖等故非自性者離色心等之自性故非差別者離旡常等差別相故非名者離名句文能詮相故非相義者離名所詮相當名之義故何故離此六雙相者能所平等旡差別故故言如故非如之法已下第二明心影法旡不如理非如法者謂前所非六雙法相亦旡旡如者如理遍通故旡有旡如者旡一有相之法而旡如理者故非旡如有者設有旡如之法可得爲有旣非非如之法不得爲有何以故下釋非有義根者樹根喩於種子理者理喩於現法如前菴羅果喩中說離諸諍論不見其相者覺慧求之旡所得故上來二分廣非心影如是淨法已下次廣法爾淸淨非生之所生生者離生相體非生故下句亦爾離滅相故體非滅故如是淨法離有爲相旡生旡滅旡始旡終由是義故法爾淸淨也 經曰大力菩薩言不可思議如是法相不合不獨成不羈不伴不聚散不生滅亦旡來相及以去相不可思議 論曰此是第三領解不合成者心非心所心與心所別體相應故不獨成者非自性非差別是二義別旡二體故不羈者非名非義故義互爲客故不伴者非影質故影質相類而爲伴故不聚散者非空非色故聚集爲色散壞爲空故不生滅者非不相應非旡爲故不相應行是生起故諸旡爲法滅所顯故此領前說離六雙義亦旡來相者生之所生生故及以去相者非滅之所滅滅故是領後說法爾淸淨初言不可思議者非如之如離心言後言不可思議者離心之心亦離二故 經曰佛言如是不可思議不思議心心亦如是何以故不異心心本如故 論曰此是第四述成如其次第述彼二種不思議句所言心者謂入證心旡心之心入於不入故不思議如不異心者釋前不思議心本如故者釋後不思議也 經曰衆生佛性不一不異衆生之性本旡生滅生滅之性性本涅槃#性相本如如旡動故 論曰此下第四所入離邊於中有二明佛性離一異邊後顯如如離有旡邊初中有二明廣顯此卽略明此中亦二先離一異後釋離異一異者謂衆生與佛性不一亦不異故言佛性者如佛性如涅槃經言佛性者名第一義空故若一若異皆有過故衆生之性本旡生滅者此下釋離異不一之義易可見故此句明人不異佛性生滅之性性本涅槃者是明生死不異涅槃故性相本如如旡動故者衆生人性生滅法相本來是如故不異也經曰一切法相從緣旡起起相性如如旡所動因緣性相相本空旡緣緣空空旡有緣起一切緣法惑心妄見現本不生緣本旡故心如法理自體空旡如彼空王本旡住處凡夫之心妄分別見 論曰此下第二廣顯此中唯廣離異邊義一切法相從緣所生切果法從緣有故卽旡生起起相性如如旡所動也下明能起諸緣亦空因緣性相相本空旡者種子因緣旡所有故緣緣空空旡有緣起者所緣緣法非一衆多莫不皆空故曰空空是故旡緣之能起也一切緣法惑心妄見者謂增上緣等旡間緣唯心妄見故亦空也現本不生緣本旡故者結成二空緣所現果本來不生能起諸緣本來旡故心如法理自體空旡前說因果是所取法所取法旡故能取心亦空如說所取法空道理能取心體亦如是故上來法說下引譬喩言空王者空有二一者空界謂明暗色二者空王謂虛空法爲一切色之所依故如王爲諸民之所依故說虛空名爲空王如是空王本旡住處而凡夫心妄計分別此處虛空彼處虛空唯是妄見旡此旡彼因果諸法當知亦爾妄心所取旡因旡果是約遍計所執因果而作是喩妄見處故 經曰如如之相本不有旡有旡之相見唯心識菩薩如心之性不旡自體自體不有不有不旡菩薩旡不旡相非言說何以故眞如之法虛曠旡相非二所及 論曰是第二明如如法離有旡邊於中有四初句正明如如離邊次句反擧有邊是妄三者引心離邊爲例者還明如如離言第三中言如心之性者猶如一心之體性也不旡自體者謂離旡自體邊如兔角故體不有者謂離有自體邊如牛角故非謂他相旡故不有故言自體不有而已不有不旡者不有卽是不旡不旡卽是不有由是義故更合明也如一心法不有不旡如如之理亦同是說是故句首曰如心也旡不旡相非言說地已下第四還明如如離言道理旡不旡相者明初句中本不有旡非諸言談安足處故二所及者非尋伺二之所行故尋伺二法是語言足非此二所行故非言說之地也 經曰虛空境界內外不測六行之士乃能知之 論曰此下大分第三入之階位於中有四一明所入甚深二擧能入位行三者別顯階位四者覈明入心初中言虛空境界者謂如如之法虛曠旡相故名虛空內外不測者謂內道中二十八聖及外道中九十五種此等凡聖不能測量也第二中言六行之士乃能知之者是擧菩薩二入階位也 經曰大力菩薩言云何六行願爲說佛言一者十信行二者十住行三者十行行四者十迴向行五者十地行六者等覺行#如是行者乃能知之 論曰此是第三別顯階位唯顯行位除其果所以不取妙覺之地此六行中前四位是理入階後二位者行入差別於中略義在本業經廣分別義出華嚴教 經曰大力菩薩言實際覺利旡有出何等法心得入實際佛言實際之法法旡有際際之心則入實際 論曰此是第四覈明入心問中言實際覺利旡有出入者擧後二位得二利行與理相稱旡出入義何等法心得入實際者正問於中能入心法荅中言實際之法法旡有際者擧所入法爾旡際縱旡前後際旡始旡終故離三世時故橫旡此彼際旡中旡邊故離六方所故甚深旡際旡邊不離故廣大旡際旡所不遍故具此四義故言旡際入之心亦具四義故於實際旡所不入當知實際離能所邊心亦如是離能所際卽旡其入乃能得入謂不可思議義也 經曰大力菩薩言旡際心智其智旡涯旡涯之心心得自在自在之智得入實際彼凡夫軟心衆生其心多喘以何法御令得堅心入實際 論曰此下大分第四入之方便入方便者位在地前四位理入門內方便觀也於中有二先明能入方便後顯方便勝利初中亦二先略後廣略中先問問中亦二一領於前二問於後領中言旡際者心體旡際故旡涯者智用旡涯故 經曰佛言菩薩彼心喘者以內外使隨使流注滴瀝成海天風鼓浪大龍驚駭驚駭之心故令多喘菩薩令彼衆生存三守一入如來禪以禪定故心則旡喘 論曰荅中有先出所治障相後示能治方便初中言心喘者心不安其出入息急速曰喘以喩六識掉動不停外使者末那四使內緣自我故意識六使外緣諸境隨使流注者謂忿恨等小隨煩惱其沈掉等大隨煩惱及旡慚愧中隨煩惱隨使等流集注現識故瀝成海者本使隨惑一切現行皆熏本識積集深廣天風鼓浪者業力所感六塵境界任運現行故名天風鼓隨眠海起七識浪故曰鼓浪大龍驚駭者明住地其力最大住在本識隨眠海底故名大龍是旡明違反寂靜常能增長麤動之心故曰驚駭是諸緣令心多喘此是令知所治障相自下示其能治方便存三者能遮天風方便守一者能伏大龍方便入如來禪者正治多喘之方便也 經曰大力菩薩言何謂存三守一入如來禪佛言存三者存三解守一者守一心如入如來禪者理觀心如入如是卽入實際 論曰此下第二廣顯方便有三問荅#此初番中擧數摠標守一心如者一心法中有二種今先守其心眞如門爲伏旡明大龍勢故旡明正迷一心如故此中守者入時靜守一如之境出時不失一味之心故言守一如本業經十行中言十爲自在轉大法輪故所謂菩薩三寶菩薩爾時於第一中道智爲覺寶一切法旡生動與則爲法寶常行六道與六道衆生和合名僧寶轉一切衆生流入佛海故案云三時不失中道一味卽是此觀守一之用此觀在於十行位也餘門後顯此中不論 經曰大力菩薩言三解脫法是何等事理觀三昧從何法入佛言三解脫者虛空解脫金剛解脫般若解脫理觀心者心如理淨旡可不心大力菩薩言云何存用云何觀佛言心事不二是名存用內行外行出入不二住一相心旡得失一不一地淨心流入是名觀之論曰此二問荅別顯觀行初荅中言三解脫者則是三慧攝八解脫故名解脫如本業經十住中言六爲諸佛所護所謂八解脫觀聞慧得內假外假二相不可得故一解脫思慧內五陰法外一切法不可得故二解脫脩慧六觀具足色界五陰空三解脫四空五陰及滅定觀皆不可得故五解脫如相故案云八解脫觀略有二門若就事相唯脩慧觀是共二乘如餘處說若就三慧觀人法空是大乘觀如此文說初解脫者內有色相外觀色等謂內存色等五陰法相觀內我空外存色等觀衆生空是空易入聞慧所得故言聞慧得內假外假二相不可得故不遣色等以觀空故有似虛空不遣色相故說是爲虛空解脫第二解脫者內旡色相外觀色等內遣色等五陰法相觀一切山河等空欲界諸法旡所不空是空難解思慧所觀故言思慧內五陰法外一切法不可得故求析破內外諸法如似金剛破諸色法是故名爲金剛解脫後六解脫皆是修慧觀上二界一切法空言修慧六觀皆是脩慧依定所發是故摠名般若解於中六種差別相者第三名淨解脫身作證色界五陰光潔寂靜觀悉空故名淨解脫自內所證名身作證故言具足色界五陰空三解脫第四名空處解觀空處五陰空故乃至非想解脫亦爾觀滅定法亦不可得故名滅盡解脫皆從所遣以立其名故言四空五陰及滅定觀皆不可得故五解脫如相故是三慧觀人法空伏離二執現行二縛故名解脫遣內外一切假法能遮諸境天風吹鼓也理觀中言心如理淨旡可不心者順理旡相心旡分別故後荅中言心事不二是名存用者是名存三之用勝能若人未得存三之用靜心觀空涉事失念取我我所着違順境天風所動心事各異若能熟修三解脫者出觀涉事觀勢猶存不取我他之相不着好惡之境由是不爲天風所鼓入出同忘心事不二如是乃名存三之用也是觀始修在十信位存用得成在十住位本業經十住位中立此觀故內行已下荅第二問以明觀相內行者入觀寂照行外行者出觀化物行出若入不失中道故言不二如本業經十向中言以自在慧化一切衆生所謂中道第一義諦般若處中而觀達一切法而旡二其慧轉轉入聖地故名相似第一義諦觀而非眞中道第一義諦觀乃至廣說不住一相者二諦觀故心旡得失者平等觀故此二種方便觀故進入初地法流水中故言一不一地淨心流入如彼經言三觀者從假名入空二諦觀從空入假名平等觀是二觀方便道因是二空觀得入中道第一義諦觀雙照二諦心心寂滅進入初地法流水中乃至廣說案云此中二諦觀者遣俗觀眞卽是正體智之方便平等觀者融眞觀俗卽是後得智之方便觀俗如幻不取得失旡適旡莫故名平言一不一地者初地之異名所以然者初地卽是十地一時頓入十重法界故十地卽是初地直以遍滿爲初門入故良由十地卽初地故名一初地卽十地故不一是故名爲一不一地依二方便以淨其心由是流入一不一地以之故言淨心流入此中唯廣初後二觀中間一觀准可知故 經曰菩薩如是之人不在二相雖不出家不住在家故雖旡法服不具持波羅提木叉戒不入布薩能以自心旡爲自恣而獲聖果不住二乘入菩薩道後當滿地成佛菩提論曰此下大分第二方便勝利於中有四一者得果勝利二者得供勝利三者旡患勝利四者旡住勝利此卽第一得果勝利初中亦有四種勝利一者離邊勝利不墮道俗二邊相故如經如是之人不在二相雖不出家不住在家故二者自在勝利不爲教門戒律所制能以自心決判道理蕭然旡爲而旡不爲故如經雖旡法服乃至而獲聖果故三者入道勝利不住二乘入菩薩道故四者得果勝利如經後當滿地成佛菩提故 經曰大力菩薩言不可思議是之人非出家非不出家何以故入涅槃宅着如來坐菩提座如是之人乃至沙門宜應敬養佛言何以故入涅槃宅心起三界着如來衣入法空處坐菩提座登正覺一地如是之人心超二我何況沙門而不敬養 論曰此下第二得供勝利得三勝德堪作福田一切道俗所應供故就文有三先明菩薩福田次顯二乘不見後顯菩薩能見初中卽現三種福田入涅槃宅心起三界者是三解脫存三之用界空寂名涅槃宅安心拪託之淨處故三解脫觀入三界空而不取證還起俗心普化三界故言心起三起三界心而不染着卽是存用着如來衣入法空卽是守一心如之觀謂涉三界普化之時着忍辱衣而不疲倦還入法空守一心如如法華經言柔和忍辱衣故坐菩提座登正覺一地者是如來禪理觀之心謂坐法空進修方便得登初地正覺眞觀如法華經言諸法空爲座故如是三位皆觀二空人我法我二執伏滅故言心超二我超二我故斷德具足三觀故智德亦備故能堪作道俗福田也 經曰力菩薩言如彼一地及與空海二乘之人爲不見也佛言如是彼二乘人味着三昧得三昧身於彼空海一地如得酒病惛醉不醒乃至數劫猶不得覺酒消始悟方脩是行後得佛身 論曰此下第二二乘不於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一地者謂所登地地卽初地名爲一地空海者謂前三觀所入之空深廣大故名爲海荅中言如是者許不見也下釋二乘不見所由味着三昧者樂着靜定而趣寂故得三昧身者如所樂趣入滅心定因入涅槃灰身滅智心滅處滅定體生遮心心法如是名爲得三昧身故樂寂熏習在本識中因是不悟空海一地如得酒病惛醉不醒乃至數劫猶不覺者須陁洹人八萬劫住乃至羅漢二萬劫住辟支佛者十千劫住住於涅槃而不覺悟今摠相說乃至數劫酒消始悟方脩是行隨其樂着熏習厚薄着氣消息得還起心起心之迴心入大方脩如前三種觀行如楞伽經頌曰如惛醉人酒消然後悟得佛旡上體是我眞法身至廣說 經曰如彼人者從捨闡提卽入六行於行地所一念淨心決定明白金剛智力阿鞞跋致度脫衆生慈悲旡盡 論曰是明菩薩種性之人從捨闡提不信之障卽入六行之初十信於脩行地之所卽發一念淨心卽是十住之初發心決定明白者謂十行位衆行明淨故金剛智力者謂十迴向堅固智力阿鞞跋致者謂初地已上眞證旡退故度脫衆生慈悲旡盡者卽於前位利他行故爲別二乘不能行 經曰大力菩薩言如是之人應不持戒於彼沙門應不敬仰佛言爲說戒者不善慢故海波浪故彼心地八識海澂九識流淨風不能動波浪不起戒性等空持者迷倒如彼之人七六不生諸集滅定不離三佛而發菩提三旡相中順心玄入深敬三寶不失威儀於彼沙門不旡恭敬菩薩彼仁者不住世間動不動法入三空聚滅三有心 論曰此是第三離患勝利謂離凡夫因果患故於中先問應不持戒者如前說言不具持波羅提木叉戒故於彼沙門應不敬仰者旣不持戒故不須敬持戒者故荅中有二先許前問次奪後問初中言爲說戒者者所爲說戒之卽是諸聲聞也恃自持戒懱諸破戒故言不善慢是人未得諸法空故隨眠海中七識浪轉故言海波浪故是擧持戒之人過失如彼心地者謂菩薩心證諸法空入大地故第八識內二執隨眠分別起者皆已滅盡故言八識海澂澂者澄也旡分別智證入本覺地地增長離諸雜染#故言九識流淨本覺正是第九識故心旡分別非境所動故風不能動不能動故染七不生故言波浪不起是人旣證一切法空支戒性達皆空寂故言戒性等空而聲聞人不達法執有戒性恃自能持故言持者迷倒是荅初問明不持戒而非過失如彼已下次荅後問以明旡慢六不生者末那四惑不現行故見惑種子已斷滅故諸集滅定者諸生起識心心所集皆滅盡已入理定不離三佛而發菩提者明發心來普敬心生如來藏佛是諸衆生依彼發心不輕慢故三旡相中順心玄入者得行入時拔旡明根如前所說三解脫中順一心法而深入故由是義故深敬三寶謂形像佛素等法四種僧等旡所不敬故於沙門不旡恭敬依三佛而發心故拔憍慢根旡明種故上來明其離諸因患自下顯其離諸果患不住世間動不動法者欲界#人天富樂之果名爲動法散善果故色旡色界寂靜之果名不動法定善果故於彼不着故曰不住入三空聚者如前所說展轉增入故名爲聚非直不亦令不生以之故言滅三有心經曰大力菩薩言彼仁者於果滿足德佛如來藏佛形像佛如是佛所而發菩提心入三聚戒不住其相滅三有心不居寂地不捨可衆入不調地不可思議 論曰此是第四旡住勝利於中有二先領上說後顯旡住領中二句領不離三佛之句果滿足德佛者始覺究竟萬德圓滿故如來藏佛者一切衆生本來本覺故形像佛者金銅泥木能表尊像故因果理事旡所遺故入三聚戒不住其相者是領前戒性等空之句入戒四緣不着戒相故三聚四緣後品當說自下正顯旡住勝利雖復入三空聚滅三有心而不住寂地普涉六度多喘衆生所居之處名不調地由所留惑依不繫業於彼受生故名爲入言留惑者謂不速盡如小乘人於三旡數大劫時中漸次而斷得菩提時方滅盡故謂金剛已還一向不斷故名爲留 經曰爾時舍利弗從座而起前說偈言具足般若海 不住涅槃城 如彼妙蓮華高原非所出 諸佛旡量劫 不捨諸煩惱度世然後得 如泥華所出 如彼六行地菩薩之所脩 如彼三空聚 菩提之直道論曰此下第三身子領解爲令小衆發大心故於中有二一者領解二者述成初中亦二在前三頌頌前所說其後二領陳自發心初中有三一前二頌頌旡住道次有二句頌六行位後之二句頌三空聚初中言具足般若海者謂三解脫具三慧故不住涅槃城滅三有心不居寂地故高原非所出者如彼二乘離煩惱泥八萬劫等不發心故不捨諸煩惱者不如二乘二二生中速斷盡故如泥華所出者由所留惑入不調地於中具脩菩薩行故因是能證菩提果故云行三聚在文可知 經曰我今住不住 如佛之所說 來所還復來具足然後出 復令諸衆生 如我一旡二前來後來者 悉令登正覺論曰此是第二陳#自發心於中有二初之二句陳今發心之位後一頌半表其後脩之行我今住不住者今聞佛說已發大心卽住不住寂地之心故來所還復來者旡始流轉之來之處我先所離今還復來來入三界度衆生故邊際定力延所受身隨其所宜示現故具足然後出者具足菩薩一切行後出離此身得佛身故言前來者過去善根已成熟者也言後來者於未來世方成熟者也窮未來際不休息故經曰爾時佛告舍利弗言不可思議汝當於後成菩薩道旡量衆生超生死海 論曰第二述成印其所 經曰爾時大衆皆悟菩提諸小衆等入五空海論曰此是大分第四時衆得益言大衆者是大乘衆悟菩提者悟入一地菩提心故諸小衆者謂聲聞衆得入三種眞如門故金剛三昧經論卷中
  1. 1)무엇을 보탤 줄만 아는 치우친 생각.
  2. 2)무엇을 없애고 줄일 줄만 아는 치우친 생각.
  3. 3)논란함.
  4. 4)부처님께서 단호히 아니라고 거부함.
  5. 5)정설(正說)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반복해서 묻고 답하는 부분[往復問答]이 그 첫 번째인데, 그것을 다시 문(問), 답(答), 난(難), 거(拒), 청(請), 석(釋)의 여섯으로 나누었다. 위 경문은 이 중 두 번째로 ‘답’에 해당한다는 말이다.
  6. 6)「무생행품(無生行品)」을 셋으로 나눈 가운데 첫 번째가 내용설명[正說]인데,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반복해서 문답한 것(往復問答)이고, 둘째는 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徵問答]이며, 셋째는 보살이 이해한 것[菩薩領解]이며, 넷째는 여래가 결론을 맺는 것[如來述成]이다.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에 해당한다.
  7. 7)『노자(老子)』 14장에 “보아도 보이지 않는 것을 이라 하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을 희라 한다[視之不見名曰夷 聽之不聞名曰希]”고 하였다.
  8. 8)능지(能知)ㆍ소지(所知)의 2분(分)을 말함.
  9. 9)홀연의 뜻, 홀연이 생기는 망상의 앎[知].
  10. 10)특정한 대상에 한하지 않고 두루 활동하는 마음 작용. 8식 중에 어느 식이 일어나도 반드시 그와 함께 일어나는 마음 작용. 작의(作意)ㆍ촉(觸)ㆍ수(受)ㆍ상(想)ㆍ사(思)의 다섯 가지[五遍行]가 있음.
  11. 11)근(根)ㆍ경(境)ㆍ식(識)을 말함.
  12. 12)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사수(捨受)의 세 가지 감각작용.
  13. 13)실상의 진리를 그대로 드러내는 진실문(眞實門)에 비해서, 경우에 맞게 방편으로 시설한 법문을 수전문(隨轉門)이라 함.
  14. 14)신(身)ㆍ구(口)ㆍ의(意)의 삼업행.
  15. 15)신ㆍ구ㆍ의의 악업을 끊는 삼계(三戒).
  16. 16)반대 입장에서 따지고 문답한 것[反詰問答]에 擧行難理, 反詰有證, 仰報無證, 反詰有得, 仰報無得, 述無證得, 更陳所疑, 決其所疑 여덟 가지가 있는 중에 위 경문은 일곱 번째에 해당한다.
  17. 17)「무생행품」의 본문을 ‘정설(正說)’, ‘찬설(讚說)’, ‘문설득익(聞說得益)’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에 해당한다.
  18. 18)정설분(正說分)은 관행을 6품으로 각각 밝히는 부분[別顯觀行]과 총지(摠持) 한 품으로 의심을 풀어주는 부분[摠遣疑情]으로 나뉜다. 별현은 「무상법품(無相法品)」 「무생행품(無生行品)」, 「본각리품(本覺利品)」, 「입실제품(入實際品)」, 「진성공품(眞性空品)」, 「여래장품(如來藏品)」으로 나뉜다.
  19. 19)첫째 인연(因緣), 둘째 등무간연(等無間緣), 셋째 소연연(所緣緣), 넷째 증상연(增上緣)을 말함.
  20. 20)각(覺)의 속성 또는 각의 공덕, 각의 덕과 같은 뜻이다.
  21. 21)열반의 4덕(德) ①상(常): 생멸변천이 없는 열반의 덕 ②낙(樂) : 생사의 고통을 여의어 무위안락한 덕 ③아(我): 망집의 아를 버린 자재(自在)한 진아(眞我) ④정(淨): 번뇌의 더러움을 떠난 청정한 덕.
  22. 22)머물 곳이 있다는 집착을 놓아주고 나서 얻을 것이 있다는 집착[有得執]을 놓아주는데, 후자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에 해당한다.
  23. 23)마음이 일어날 때 동반하여 일어나는 법.
  24. 24)마음에 동반해서 일어나지 않는 법. 색법이나 심법에 속하지 않는 법.
  25. 25)본각의 이익을 직접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直廣]과 부연설명하는 부분[重演]으로 나누어 설명하는 중, 중연을 다시 둘로 나누어 시각(始覺)을 먼저 설명했고 이제까지 본각(本覺)을 설명했다.
  26. 26)유주(有住)의 집착을 떨쳐준 것에 이어 유득(有得)의 집착을 떨쳐주는 데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얻을 것이 없다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밝힌 부분이고, 둘째는 의심을 거듭 제거한 말씀이며, 셋째는 이해했음을 나타낸 말씀이고, 넷째는 결론짓는 말씀이다.
  27. 27)「본각리품(本覺利品)」을 크게 본각의 이익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明本覺利益], 게송으로 찬탄하는 부분[以偈讚頌], 당시 대중이 이익 얻음을 밝히는 부분[時衆得益]의 셋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를 말한다.
  28. 28)이 경의 정설분(正說分)은 「별현관행(別顯觀行)」과 「총지일품(摠持一品)」으로 크게 나뉘는데, 별현에는 6품이 있다. 첫째 ‘무상법품(無相法品)’에서 무상관(無相觀)을 밝히고, 둘째 ‘무생행품(無生行品)’에서 무생행을, 셋째 ‘본각리품(本覺利品)’에서 본각에 의하여 중생을 이롭게 함[依本利物]을, 넷째 ‘입실제품(入寶際品)’에서 허망에서 실제로 들어가게 함[從虛入實]을, 다섯째 ‘진성공품(眞性空品)’에서 모든 행이 참된 성품인 공에서 나왔음[一切行出眞性空]을, 여섯째 ‘여래장품(如來藏品)’에서 무량한 방편으로 여래장에 들어감[無量門入如來藏]을 밝혔다. 이 여섯 가지 품으로 관(觀)과 행(行)을 다 설명한다.
  29. 29)욕(欲)ㆍ색(色)ㆍ무색(無色)의 삼계(三界)이다.
  30. 30)원문에는 ‘2공(空)’으로 되어 있으나 앞 뒤 내용으로 보아 ‘3공(空)’으로 번역한다.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에도 ‘다른 본에는 3공으로 되어 있다’고 교감 주가 달려 있다.
  31. 31)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을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 넷으로 나누었다. 그 중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도 5공(空)을 밝히고, 3공(空)을 설명하고, 공이 곧 진(眞)임을 밝히고, 진이 여(如)임을 밝히는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위 경문부터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32. 32)원문에는 ‘제일(第一)’이라 되어 있으나 내용으로 보아 ‘제이(第二)’로 번역한다. 앞서 나온 문단이 약명(略明)에 해당하며 여기서부터가 광석(廣釋)이다.
  33. 33)색채. 즉 청ㆍ황ㆍ적ㆍ백 등 12종이 있다.
  34. 34)모양. 즉 장ㆍ단ㆍ방ㆍ원ㆍ고ㆍ하 등 8종이 있다.
  35. 35)작색(作色)이라고도 함. 볼 수 있고 남에게 나타내어 보일 수 있는 우리들의 모든 동작ㆍ행동이다.
  36. 36)비색비심불상응행법(非色非心不相應行法), 불상응행법ㆍ불상응법이라고도 한다. 물질도 아니고 정신도 아니며, 심왕(心王)과 상응하는 심소(心所)도 아닌 일종의 보편개념을 말한다. 구사종에서는 14종, 유식종에서는 다음 24종으로 나눈다. 득(得), 무상정(無想定),멸진정(滅盡定),무상이숙(無想異熟),명근(命根),중동분(衆同分),생(生),노(老),주(住),무상(無常),명신(名身),구신(句身),문신(文身),이생성(異生性),유전(流轉),정이(定異),상응(相應),세속(勢速),차제(次第),시(時),방(方),수(數),화합(和合),불화합(不和合).
  37. 37)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는[廣趣入義] 네 부분 중에 첫째는 향해 들어간다는 뜻을 전체적으로 밝힘[摠明趣入], 둘째는 취입의 뜻을 개별적으로 드러냄[別顯趣入], 셋째는 취입이 잘못을 떠났음[入之離過], 넷째는 취입이 극단을 떠났음[入之離邊]을 말한다. 여기서부터가 네 번째에 해당한다.
  38. 38)입실제(入實際)의 도리를 자세히 설명한 부분[廣顯道理]을 크게 넷으로 나누었다. 실제의 의미를 드러낸 부분[顯實際義], 향해 들어가는 의미를 밝힌 부분[明趣入義], 향해 들어가는 계위를 밝힌 부분[開入之階位],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보여준 부분[示入之方便]인데,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39. 39)중생의 마음을 마구 부려[使] 산란하게 한다는 뜻으로 번뇌를 ‘사’라고 한다.
  40. 40)아치(我痴)ㆍ아애(我愛)ㆍ아만(我慢)ㆍ아견(我見)을 가리킨다.
  41. 41)전6식(前六識)을 가리킴.
  42. 42)마음에 잠재된 번뇌. 중생을 따라다닌다는 뜻에서 수(隨)라 하고, 중생을 각성 상태가 아닌 잠든 상태로 만든다는 뜻에서 면(眠)이라 한다.
  43. 43)고쳐야 할 장애의 양상[所治障相]을 설명한 저 앞의 내용에 의하면, 업력(業力)을 받아서[感] 6진경계(塵境界)가 자동적으로 현행함을 ‘하늘바람[天風]’이라 하였고, 이 하늘바람이 수면(隨眠)의 바다를 두들겨 7식(識)의 물결을 일게 하기 때문에 요동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존삼(存三)이라는 방편을 통해 하늘바람[六塵境界]을 막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韓佛全 645中 참조)
  44. 44)Prátimo의 음역(音譯)으로 스님들이 포살 때마다 실천여부를 검토하는 계율이다.
  45. 45)Posadha의 음역으로 반월(半月)마다 스님들이 모여 계경(戒經)을 설하고, 죄가 있으면 참회하여 선을 기르고 악을 없게 하는 의식이다.
  46. 46)실제(實際)에 향해 들어감을 넷으로 나눈 가운데 네 번째가 들어가는 방편[入之方便]인데, 이를 다시 들어가게 하는 방편[能入方便]을 설명하는 부분과 방편의 뛰어난 이익[方便勝利]을 설명하는 부분으로 나누었다.
  47. 47)소승의 성과(聖果) 4위(位) 중의 하나이다.
  48. 48)연각(綠覺)ㆍ독각(獨覺)이라 번역, 자연변화의 외연(外綠)을 보고 느껴 혼자 깨달음을 얻은 이이다.
  49. 49)Icchanta의 음역으로 성불할 성품이 없는 사람. 다시 말해서 구제 받을 수 없는 종자를 말한다.
  50. 50)Avinivartaniya의 음역으로 불퇴전(不退轉)ㆍ불퇴위(不退位)라 번역. 반드시 성불이 결정된 위치로써 다시는 보살위에서 타락하지 않는 계위(階位)이다.
  51. 51)선천적으로 받은 것[俱生起]이 아니라 잘못된 학습에 의해 일어나는 번뇌를 분별기(分別起)라 한다. 근본번뇌 중 의(疑),사견(邪見),견취견(見取見),계금취견(戒禁取見)이 여기에 속하며, 아ㆍ법 2공(空)을 증득할 때 끊어진다.
  52. 52)살생ㆍ도둑질ㆍ사음의 세 가지 신업(身業)과 욕ㆍ이간질ㆍ꾸미는 말ㆍ거짓말의 네 가지 구업(口業)을 방지하는 계의 성품.
  53. 53)아치(我痴)ㆍ아애(我愛)ㆍ아만(我慢)ㆍ아견(我見)이다.
  54. 54)「입실제품(入實際品)」은 크게 네 단원으로 나뉜다. 첫째는 대의를 간략히 내세우고[略標大意], 둘째는 실제의 도리를 자세히 밝히고[廣顯道理], 셋째는 그 도리를 사리자가 이해했음을 나타내고[身子領解], 넷째는 당시 대중들이 이익 얻음을 밝힌다[時衆得益]. 여기서부터가 세 번째에 해당한다.
  55. 55)성문(聲聞)의 자량위(資糧位)ㆍ가행위(加行位)와 연각(緣覺)의 자량위ㆍ가행위.
  56. 56)색계의 제4 정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