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金剛三昧經論卷下

ABC_IT_K1501_T_003
045_0109_b_01L금강삼매경론 하권
045_0109_b_01L金剛三昧經論卷下


신라국 사문 원효 지음
번역
045_0109_b_02L新羅國沙門 元曉 述


6. 진성공품(眞性空品)
045_0109_b_03L眞性空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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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진여(眞如)의 법(法)이 모든 공덕과 행덕을 갖추어 그것으로 본성(本性)을 삼기 때문에 ‘진성(眞性)’이라 하였고, 이러한 진성이 모든 명상(名相)을 끊었으므로 그런 뜻에서 ‘진성공(眞性空)’이라 하였다.
한편 이 진성은 모양을 떠났고 성품을 떠났다. 모양을 떠났다는 것은 허망한 모양[妄相]을 떠났다는 뜻이며, 성품을 떠났다는 것은 참 성품[眞性]을 떠났다는 말이다. 허망한 상을 떠났으므로 허망한 상이 공하고, 참 성품을 떠났으므로 참 성품도 공하니, 이런 이유에서 ‘진성공’이라 하였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두 가지 뜻을 나타내려 하기 때문에 이 뜻에 의거하여 품의 명칭을 세웠다.
【經】 그 때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보살도를 닦는 데는 명상(名相)이 없고 삼취계(三聚戒)에도 위의(威儀)가 없다면 어떻게, (보살도와 삼취계를) 받아 지니고 그것을 중생들을 위해 설할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자비로 저희를 위하여 부디 설명해 주소서.”
【論】 관행을 개별적으로 밝히는 데[別明觀行] 여섯 단원이 있다. 그 중 네 번째인 허망을 버리고 실제에 들어감[遣虛入實]을 설명한 단원이 앞 장에서 끝났고, 여기서부터는 다섯 번째로 모든 성행(聖行)이 진성공(眞性空)에서 나옴을 밝힌다. 이 품(品)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총명한 근기들을 위해 많은 글로 자세히 설명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둔한 근기들을 위해 적은 글로 간략히 요점을 설명한 것이다. 앞의 자세한 설명에도 여섯 단원이 있다.
첫째는 삼취계(三聚戒:攝律儀戒ㆍ攝善法戒ㆍ攝衆生戒)가 진성으로부터 성립된 것임을 밝혔고, 둘째는 도품행(道品行:三十七助道品, 뒤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覺을 얻는 데 도움이 되는 덕목)이 진성(眞性)에서 성립됨을, 셋째는 여래의 가르침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넷째는 보살의 지위가 본각의 이익에서 나온 것임을, 다섯째는 대반야(大般若)가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 것임을, 여섯째는 큰 선정(大禪定)이 모든 명수(名數)를 넘어선 것임을 밝혔다.
삼취계를 다루는 첫째 단원은 질문ㆍ대답ㆍ설명을 청함ㆍ설명ㆍ이해의 다섯 대목으로 나뉜다.
‘보살도를 닦는 데 명상이 없다’ 함은 모든 행을 통틀어 거론한 것이며, ‘삼취계에 위의가 없다’ 함은 계행(戒行)만 별도로 지적한 것이다. 전품(前品)에서 ‘삼취계에 들어가지만 들어갔다는 관념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 말씀과 같은 맥락이니 이것이 바로 삼계(三戒)이다.
그런데 명상도 위의도 없다면, 무슨 수로 그것을 자신이 받아 지니고, 어떻게 남에게 말해줄 수 있겠는가? 사리불이 대승의 길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수행을 시작할 때, 계(戒)를 근본으로 삼았으므로 계(戒)ㆍ정(定)ㆍ혜(慧) 3학 중에서 첫 행인 계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사리불은 여기 말로 ‘몸에서 난 아들[身子]’이라는 뜻인데, 지금 이 품(品)에서는 모든 수행 방법이 ‘법의 몸[法身]’으로부터 나왔음을 설명하기 위해 ‘몸에서 난 아들’을 등장시켜 묻게 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를 위해 설명할 테니, 이제 잘 들어라. 선남자야, 선법(善法)과 불선법(不善法)은 마음으로부터 변화하여 생겨나고, 모든 경계는 의언(意言)이 분별하는 것이니 그것을 한곳에 제어하면 모든 연(緣)이 다 끊겨 없어진다.
어째서 그런가? 선남자야, 하나인 근본이 일어나지 않고 세 가지 작용이 벌어지지 않아서 여여한 도리에 머물면, 6도(道)의 문이 닫히고 네 가지 연(緣)이 일여(一如)에 순응하여 3계(戒)가 갖추어진다.”
【論】 이 부분은 (첫 번째 질문에 이어) 두 번째, 부처님의 간략한 대답이다. 여기에 두 부분이 있는데, 먼저 답하고 나중에 물음을 정리한다.
‘선법과 불선법은 마음으로부터 변화하여 생겨난다’ 함은 원인이 되는 3업(業:身ㆍ口ㆍ意)의 행위가 모두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경계는 의언(意言)이 분별하는 것’이라 함은 결과로 받는 지옥ㆍ아귀ㆍ축생ㆍ수라ㆍ사람ㆍ하늘 등 여섯 갈래가 예외 없이 의(意)에서 변화되어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이 어지럽게 움직여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변화로 원인ㆍ결과를 지어내서 고통의 바다에 유전한다. 그러므로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고자 한다면 보살도(菩薩道)를 닦아 일여한 곳에 마음을 제어하면, 온갖 인연이 다 끊겨 없어진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름도 상도 없는 길을 닦는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이다. 전체적인 설명을 했지만 개별적인 수행들[別行]에 대해서는 듣지 못하고 있으므로 ‘어째서 그런가?’하고 다시 문제를 제기하였다.
‘하나인 근본이 일어나지 않는다’ 함은 삼계(三戒)의 근본은 하나인 본각[一本覺]인데, 그것이 본래 적정하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세 가지 작용이 벌어지지 않는다’ 함은 3계(戒)의 작용이 이미 본각에 의존하여 성립된 것이기에 그 작용은 위의로서 벌어진 상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벌이고 짓고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인 본각에 순응하여 머무는데, 이런 뜻에서 ‘여여(如如)한 도리에 머문다’고 하였다. 이미 여여한 도리에 머물러 존재[有:三界]의 원인을 제거했으므로 ‘6도의 문이 닫혔다’고 하였다.
일여(一如)한 도리에는 네 가지 연[四緣]의 힘이 갖추어져 있어 일여에 순응하여 삼계(三戒)가 갖추어진다. 그러므로 ‘네 가지 연이 일여에 순응하여 삼계가 갖추어진다’고 하였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어떻게 네 가지 연이 일여에 순응하여 3취계(聚戒)가 갖추어지게 됩니까?”
【論】 이는 세 번째, (자세한 설명을) 거듭 청한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가지 연이란 첫째는 택멸하는 힘[擇滅力]으로 취하는 연이니 섭율의계(攝律儀戒)이고, 둘째는 본각의 이익인 정근(淨根:선근)의 힘이 모여서 일어나는 연이니 섭선법계(攝善法戒)이고, 셋째는 본각지혜인 대비(大悲)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섭중생계(攝衆生戒)이고, 넷째는 일각(一覺)의 통달하는 지혜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여여에 순응해 머무는 것이다. 이것을 4연(緣)이라고 한다.
선남자여,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인연의 힘은 현상[事相]에 머물지 않으나 그렇다고 공용(功用)이 없지 않으며, 한곳에 고착해 있지 않으므로 그 특정한 모습을 찾아낼 수 없다.
선남자야, 이 한 가지가 6행(行)을 다 포함하고 있으니 이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지혜의 바다라고 할 것이다.”
【論】 이는 네 번째,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계(戒)의 인연을 밝혀 물음에 답한 것[正答]이고, 둘째는 말이 난 김에 (네 가지 연의 작용력이) 모든 행(行)을 다 포함한다는 사실까지 드러낸 것이다.
물음에 답한 부분에서 ‘네 가지 연[四緣]’이란 일심(一心)ㆍ본각(本覺)의 이익 중에 네 가지 힘의 작용을 갖추어 3계(戒)의 연이 되는 것을 말한다. 첫째는 멸의 의지(依止)가 되는 연이고, 둘째는 생(生)의 의지가 되는 연이고, 셋째는 섭(攝)의 의지가 되는 연이고, 넷째는 떠남[離]의 의지가 되는 연이다.
‘멸(滅)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모든 번뇌와는 성질이 다른 고요한 공덕이 있어서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율의계[攝律儀戒]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생(生)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모든 선근과 성질이 일치하는 선한 공덕이 있어서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선법계(攝善法戒)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섭(攝)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대비(大悲)를 이루는 성질이 있어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는데, 이것을 연으로 하여 섭중생계(攝衆生界)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떠남[離]의 의지’란 본각 중에는 반야(般若)를 이루는 성질이 있어서 모든 현상을 버리고 떠나는데, 이것을 인연으로 3취계로 하여금 모든 현상을 버리고 여여(如如)에 순응하여 머물도록 한다는 것이다.
앞의 셋은 개별적인 의의를 가진 연[別緣]이고, 뒤의 하나는 공통적인 의의를 가진 연[通緣]이다. 보살이 발심하여 3계를 받을 때, 본각의 이익에 순응하여 수지(受持)하기 때문에 이 네 가지 연[四緣]으로 3계를 갖추는 것이다.
첫째 ‘택멸하는 힘으로 취하는 연’이라 함은 본래 번뇌의 계박(繫縛)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본각이 그 자체로 택멸해탈(擇滅解脫)1)을 이루어 별해탈계(別解脫戒)2)를 취하는 작용을 갖는다는 것이다. 마치 자석이 바늘을 끌어당기듯이 일부러 생각을 내지 않더라도 힘과 작용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도리도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둘째 ‘본각의 이익인 정근의 힘이 모여서 일어나는 연’이라 함은 본래 깨끗한 공덕을 지닌 본각이 모든 행덕[行德]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다. 이 근본의 힘 때문에 모든 선법(善法)을 일으켜 모여 일으킨 선법의 연(緣)이 되니 이 연으로 섭선법계(攝善法戒)가 성립됨을 말한 것이다.
대의(大意)는 이상과 같고 다음에는 문장을 따라서 설명해 가겠다.
셋째 ‘본각지혜인 대비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섭중생계’라 함은 본각 중에는 세속을 두루 비추는 지혜, 즉 대비(大悲)가 있어서 항상 중생들에게 사랑의 비를 뿌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연(緣)으로 섭중생계(攝衆生戒)가 성립하므로 그렇게 말한다.
‘일각의 통달하는 지혜의 힘으로 생기는 연이니 여여에 순응해 머묾’이라 함은 본각 중에는 본성을 통찰하는 지혜[照通性智]가 있어서 3취계(聚戒)로 하여금 여여에 순응하여 머물게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연은 체(體)가 법계(法界)에 두루 미치고, 작용이 만행(萬行)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큰 힘’이라고 한다. 큰 힘을 가지고 있지만 동일한 맛이라서 온갖 명상과 차별된 작용을 떠났다. 그러므로 ‘현상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상은 없다고 할지라도 뛰어난 기능[勝能]이 있어서 출세간의 모든 수행공덕을 다 포괄하므로 ‘공용이 없지 않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건대 본각에만 있고 세속의 법 중에는 이러한 면이 없기 때문에 ‘한 곳을 떠나면 구(求)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상 3취계의 연(緣)을 각각 밝혔다. 다음으로는 그것이 만행(萬行)을 다 포괄함을 밝힌다. 10신(信)에서 시작하여 등각(等覺)까지 이 6위(位)에 있는 모든 행(行)은 일각(一覺)에 포함되므로, ‘이 한 가지가 6행(行)을 다 포함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보살만 이 본각에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도 한결같이 이 바다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이는 부처님의 깨달으신 모든 지혜의 바다’라고 하였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현상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공용이 없지 않다면, 이 법(法)은 진공(眞空)이라서 상(常)ㆍ낙(樂)ㆍ아(我)ㆍ정(淨)하니 두 가지 아[二我]를 넘어선 대반열반(大般涅槃)이며, 그 마음이 걸리는 데가 없을 터이니 이것이 큰 힘이 있는 관법[觀]이겠나이다.”
【論】 여기는 다섯 번째, (사리불이 말씀을 듣고) 이해한 것을 밝힌 부분이다. 이 중에 둘이 있다. 먼저는 순응할 일여(一如)란 법신이며, 그것이 네 가지 덕[四德:常ㆍ樂ㆍ我ㆍ淨]을 다 갖추고 있어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관념을 넘어선, 대열반임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일여(一如)에 순응해 가는 마음이 일여를 따라 모든 얽매임을 벗어났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는 크게 자재한 힘임을 이해했다는 것이다.
【經】 “그리고 이 각(覺)을 관(觀)하는 데는 37도품법(道品法)을 다 갖추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37도품법을 다 갖춘다. 어째서 그런가?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覺)ㆍ8정도(正道) 등은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여서 다 똑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각각 다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명칭과 수[名數] 때문에 이름과 글자를 붙이는 것이지 그 법은 얻지 못한다. 얻지 못하는 법은 한 가지 뜻으로서 문자로는 나타낼 수 없다.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은[無文之相:어떤 본에는 ‘無文之義’로 되어 있다]진실한 공성(空性)이다. 공한 성품의 뜻은 실제와 다름없이 여여(如如)하며, 여여한 도리는 모든 법을 다 갖추고 있다. 선남자야, 여여한 도리에 머무는 자는 3고(苦)의 바다를 건넌다.”
【論】 이는 두 번째 큰 단원, 도품행(道品行)이 진성(眞性)으로부터 성립됨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대답이 있다.
물음에서 ‘이 각을 관하는 가운데[是觀覺中]’라 함은 순응하는 관[能順觀]과 순응할 본각[所順本覺]이니, 능(能)과 소(所)가 평등한 관(觀)과 각(覺) 가운데 37도품행이 갖추어져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답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 인정하고 다음에 해석한다. ‘어째서 그런가?’ 이하는 두 번째인 해석 부분인데 그 중에 또 둘이 있다. 직접 해석하는 말씀과 거듭 설명하는 말씀이다.
처음에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라고 한 것은 37품(品)으로 나열된 명목들의 의미는 오직 하나인 관각(觀覺)으로서 둘이 아닌 법이기 때문이다. ‘다 똑같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각각 다른 것도 아니다’ 함은 관과 각이 같은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다른 것도 아니라는 뜻인데, 다르지 않다는 측면[不異門]에서 ‘뜻은 하나’라고 하였다.
‘명칭과 수 때문에’ 이하는 거듭 설명한 말씀이다. 넷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다르다는 뜻을 떨쳐주고, 둘째는 하나라는 뜻을 드러내고, 셋째는 하나의 뜻에 모든 법이 갖추어져 있음을 밝히고, 넷째는 하나의 뜻이 모든 잘못과 허물[過患]을 떠났음을 밝혔다.
첫째 설명 중에서 ‘명칭과 수[名數] 때문에 이름과 글자를 붙이는 것이지 그 법은 얻지 못한다’ 함은, 세간에서 닦는 도품행(道品行)의 법은 명칭과 수자를 따르기 때문에 37가지가 있으나, 보살의 각혜(覺慧)로 그 명목들을 찾아보면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설명 중에서 ‘얻지 못하는 법은 한 가지 뜻으로서 문자로는 나타낼 수 없다’ 함은, 저 별개의 법을 구하여 얻어지지 않을 때, 이 법은 일미(一味)라서 모든 말과 문자를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셋째 설명 중에 ‘문자로 나타낼 수 없는 모양은 진실한 공성’이라 함은 별개의 법으로 성립할 수 없는 능관심(能觀心)이 모든 말과 문자를 끊고 차별상(差別相)을 떠났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공한 성품의 뜻은 실제와 다름없이 여여(如如)하다’ 함은 이 능관심이 실상(實相)인 여여(如如)의 도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형상을 떠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본각(本覺)의 여여한 도리는 마치 금을 불려 아름다운 형상을 만들듯이, 도품 등의 법[道品等法]을 닦아 이루는 법을 다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여여한 도리는 모든 법을 다 갖춘다’고 하였다.
이미 여여한 도리에 머물러 모든 공덕을 다 갖추었다면 잡되게 물든 과실(過失)을 이미 떠나 있다. 그러므로 ‘여여한 도리에 머무는 자는 3고(苦)의 바다를 건넌다’고 하였다. 이것이 (거듭 설명한 부분 중) 네 번째, (하나의 뜻이) 모든 잘못과 허물을 떠났음을 말한 것이다.
이제 도품(道品)의 의미를 간략하게 네 구절로 분별하여 설명하겠다.
첫째, 37법을 10법으로 포괄한다.
둘째, 10법을 4법으로 포괄한다.
셋째, 4법을 한 뜻으로 포괄한다.
넷째, 한 뜻에 37법이 다 갖추어져 있음을 밝힌다.
1. 37법을 10법으로 포괄한다는 것은, ‘37품은 10법을 근본으로 한다……(이하 생략)’는 『대지도론(大智度論)』의 설에 의거한다. 여기서는 열 가지를 전개하여 서른일곱 가지를 세우는데, 그 법의 체[法體]를 논하자면 오직 열 가지뿐이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계(戒)ㆍ사(思)ㆍ수(受)ㆍ염(念)ㆍ정(定)ㆍ혜(慧)ㆍ신(信)ㆍ근(勤)ㆍ안(安)ㆍ사(捨)이다. 어떻게 이 열 가지가 서른일곱 가지로 전개되는가? 계(戒)에 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 셋이 있고, 사(思)의 종류에는 정사유(正思惟) 하나를 세우고, 수(受)에 희각분(喜覺分) 하나를 세우고, 염(念)에는 염근(念根)ㆍ염력(念力)ㆍ염각(念覺)ㆍ정념(正念)의 네 가지를 전개하고, 정(定)은 네 가지 여의족[四如意足]ㆍ정근(定根)ㆍ정력(定力)ㆍ정각(正覺)ㆍ정정(正定)의 여덟 가지로 전개하고, 혜(惠)도 네 가지 염처[四念處]ㆍ혜근(惠根)ㆍ혜력(惠力)ㆍ택법각분(擇法覺分)ㆍ정견(正見)의 여덟 가지로 전개하고, 근(勤)에도 네 가지 정근[四正勤]ㆍ정진근(精進勤)ㆍ정진력(情進力)ㆍ정진각분(情進覺分)ㆍ정정진(正精進)의 여덟 가지를 세우고, 신(信)에는 신근(信根)ㆍ신력(信力) 둘을 세우고, 안(安)과 사(捨)에 각각 하나씩 의각분(倚覺分)과 사각분(捨覺分)을 세운다.
045_0109_b_04L 論曰眞如之法具諸功德與諸行德而作本性故言眞性如是眞性絕諸名相以之故言性空也又此眞性離相離性離相者離妄相離性者離眞性離妄相故妄相空也離眞性故眞性亦空之故言眞性空也今此品中顯是二義故依是義立品名也 經曰爾時舍利弗而白佛言尊者修菩薩旡有名相三戒旡儀云何攝受爲衆生說願佛慈悲爲我宣說 論曰別明觀行有六分中第四遣虛入實分竟此下第五明諸聖行出眞性空就此品中大分有二一爲利根者多文廣說二爲鈍根者少文略攝前廣說中卽有六分一者明三聚戒從眞性成二者明道品行從眞性立三者明如來教當如理說四者明菩薩位從本利出五者明大般若絕諸因緣六者明大禪定超諸名數初三戒中文有五分一問二荅三請四說五者領解此卽初問言修菩薩道旡名相者通擧諸行三戒旡儀者別牒戒行如前品言入三聚戒不住其相是卽三戒旡相旡儀云何自攝受及爲他說耶此舍利弗旣始入大初發修行以戒爲本故問三學之中初行又此身子從身而生今此品中說諸行法從法身生故寄身子而發問也佛言善男子汝今諦聽爲汝宣說善男子善不善法從心化生一切境界意言分別制之一處衆緣斷何以故善男子一本不起三用旡施住於如理道門杜四緣如順三戒具足 論曰此是第二略荅於中有二先荅通問善不善法從心化生者三業因行皆是心作故一切境界意言分別者六道果境旡非意變故由心亂動不能制故變作因果流轉苦海是故欲度苦海修菩薩道制心一如衆緣斷滅所以菩薩修旡名相何以故下次荅別問雖復摠說未聞別行所以更問何以故也一本不起者三戒之本是一本覺本來寂靜故曰不起三用旡施者旣依本覺成三戒用用離威儀施作相故旡施作故順住一本故言住於如理旣住如理消除有因故言六道門杜於一如理具四緣力能順一如卽具三戒故言四緣如順三戒具足 經曰舍利弗言云何四緣如順三戒具足 論曰此是第三重請 經曰佛言四緣者一謂作擇滅力取緣攝律儀戒二謂本利淨根力集起緣攝善法戒三謂本慧大悲力緣攝衆生戒謂一覺通智力緣順於如住是謂四緣善男子如是四大緣力不住事相不旡功用離於一處卽不可求善男子如是一事通攝六行是佛菩提薩般若海論曰此是第四廣說於中有二一者正荅明戒因緣二者乘顯攝一切行初中言四緣者謂於一心本覺利中具四力用作三戒緣一滅依止緣二生依止緣三攝依止緣四離依止緣滅依止者謂本覺中性功德與諸煩惱自性相違以是緣成攝律儀戒生依止者謂本覺中性善功德與諸善根自性相順以是緣成攝善法戒攝依止者謂本覺中性成大悲自性不捨一切衆生以是緣成攝衆生戒離依止者謂本覺中性成般若自性捨離一切事相以是因緣令三聚戒捨離事相順如而住前三別緣後一通緣菩薩發心受三戒時順本覺利而受持故以是四緣具足三戒大意如是次消其文一謂作擇滅力取緣者覺本離煩惱繫縛擧體而作擇滅解脫有力能取別解脫戒如似磁石引取於鍼雖旡作意而有力用知此中道理亦爾二謂本利淨根力所集起緣者本覺本來性淨功德與諸行德而作根本由此根力起諸善法爲所集起善法之緣卽此緣成攝善法戒三謂本慧大悲力緣攝衆生戒者謂本覺中照俗之慧卽是大悲恒潤衆生以是緣成攝衆生戒四謂一覺通智力緣順於如住者謂本覺中照通性智令三聚戒皆順如住如是四緣體遍法界用攝萬行故言大力雖有大力而同一味離諸名相差別事用故言不住事相雖旡事相而有勝能能攝出世一切行德故言不旡功用由如是故只是本覺於俗法中旡如是義故言離於一處卽不可求上來別明三聚戒緣自下明其通攝萬行始從十信乃至等覺如是六位所有諸行皆是一覺之所攝成故言一事通攝六行非但菩薩歸此本覺諸佛圓智同歸此海故言是佛菩提薩般若海 經曰舍利弗言不住事相不旡功是法眞空常樂我淨超於二我大般涅槃其心不繫是大力觀 論曰此是第五領解於中有二先領所順一如卽是法身具足四德超人法相是大涅槃後領能順如心隨如離繫而旡不爲大自在力是觀覺中應具三十七道品法佛言如是具三十七道品法何以故四念處四正勤四如意足五根七覺八正道等多名一義不一不異以名數故名但字法不可得不得之法一義旡文旡文之相眞實空性空性之義如實如如如如之理具一切法男子住如理者過三苦海 論曰此是大分第二明道品行從眞性立於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是觀覺中者是能順觀所順本覺能所平等觀覺之中具三十七道品行荅中有二先許後釋何以故下是第二釋於中有二直釋重顯初中言多名一義者十七品所目之義唯一觀覺旡二法故不一不異者觀覺不一而不異故約不異門故言一義以名數故已下重顯於中有四先遣異義次顯一義三明一義具一切法四明一義離諸過患初中言以名數故但名但字法不可得者謂世閒修道品行法隨名數故有三十七菩薩覺慧求所目義三十七法皆不可得第二中言不得之法一義旡文者求彼別法不得之時是法一味絕諸文言故第三中言旡文之相眞實空性者不得別法之能觀心絕諸文言離差別相空性之義如實如如者此能觀心離諸相義不異實相如如之理故如是本覺如如之理卽具修成道品等法猶如鑄金具相好像故言如如之理具一切旣住如理具諸功德卽離一切雜染過失故言住如理者過三苦海此是第四離諸過患也此中略明道品之義於中卽以四句分別一攝三十七以爲十二攝十法以爲四法三攝四法以爲一義四明一義具三十七初攝三十七以爲十法者智度論云十七品十法爲本乃至廣說當知開十立三十七其法體唯有十法何等爲十謂戒與慧云何開十爲三十七開戒爲三正語業命#思數立一謂正思惟受亦立一謂喜覺分開念爲四念力念覺正念開定爲八謂四如意足定根定力正定亦立八謂四念處慧根慧力擇法覺分及與正見亦立八謂四正勤精進根精進力精進覺分及正精進信中立二信根信力捨各一謂倚覺分及捨覺分
이를 정리해보면 다섯 부류가 있다.
첫째 정(定)ㆍ혜(慧)ㆍ근(勤) 세 종류는 여덟 가지로 전개된다. 그 스물 네 가지가 이 세 종류에 소속된다. 둘째 염(念) 한 종류는 네 가지로 전개된다. 저 네 가지가 모두 일념(一念)에 포섭된다. 셋째 계(戒) 한 종류는 세 가지로 전개되는데, 세 가지로 되어 있지만 일계(一戒)에 포섭된다. 넷째 신(信) 한 종류는 두 가지로 전개된다. 신이 신근과 신력 둘을 포함한다. 다섯째 사(思)ㆍ수(受)ㆍ안(安)ㆍ사(捨) 네 종류는 하나를 세웠는데, 각각 자성(自性)에 소속된다. 이와 같이 10법이 37법을 포섭한다.
2. 십법이 네 가지에 포섭된다는 것은 이렇다. 첫째는 계(戒)인데, 색법(色法)에 속하며, 밖으로 드러나는 것[表色]과 드러나지 않는 것[無表色]이 있다. 둘째는 사(思)와 수(受)인데, 변행심소(遍行心所)에 속한다. 셋째는 염(念)ㆍ정(定)ㆍ혜(慧)인데, 별경심소(別境心所)에 속한다. 넷째는 신(信) 등 넷인데, 선심소(善心所)에 속한다.
045_0112_a_03L摠而言之有其五例一者開八有三謂定慧勤彼二十四此三所攝二者開四有一謂念所以彼四一念所攝三者開三有一謂戒所以彼三一戒所攝四者開二有一謂信信攝彼二五者立一有四各攝自性如是十法攝三十七二攝十法爲四種者第一戒者色法所攝謂表無表第二思受遍行心所所攝第三念定慧別境心所所攝第四信等四善心所所攝
3. 네 가지 법을 한 가지 뜻에 포섭한다는 것은 이렇다. 각혜(覺慧)로써 이와 같은 네 가지 법을 추구해 보건대, 첫 색법(色法)은 그것이 방분(方分)을 갖건 아니건 다 얻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뒤 세 가지 마음 작용을 보건대, 그것이 시분(時分)을 갖건 아니건 모두 얻어지지 않는다. 이것들이 아예 없는 법[無法]은 아니라 해도 얻어질 법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평등한 한 맛[平等一味]이다. 그러므로 네 가지 법이 한 뜻인 줄 알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이름은 많으나 뜻은 하나’라고 하였다.
045_0112_a_10L三攝四法爲一義者覺慧推求是四法初一色法有方旡方俱旡所得後三心所時旡時皆不可得是則雖非旡法而不得有可得之平等一味當知四法直是一義以之故言多名一
4. 한 뜻에 37법이 다 갖추어져 있다는 것은 이렇다. 능(能)과 소(所)가 평등한 일미의 뜻으로 몸 등이 공(空)함을 관(觀)하면 4념처(念處)이며, 모든 게으름을 여의면 4정근(正勤)이며, 흩어진 생각들이 고요해지고 사라지면 여의족(如意足)이며, 불신(不信) 등을 벗어나면 5근(根)ㆍ5력(力)이며, 무명(無明) 등을 없애면 7각분(覺分)이며, 여덟 가지 그릇된 법[八邪法]을 떠나면 이것이 8정도(正道)이다.
045_0112_a_15L四明一義具三十七者能所平等一味之義觀身等空是四念處離諸懈怠是四正勤散慮寂滅是如意足離不信等卽是根力滅旡明等卽七覺分離八邪法卽八正道
045_0112_b_01L이와 같이 모든 잡된 물듦을 멀리 떠나 한 뜻에 무량한 공덕이 구족되므로 ‘이 각(覺)을 관(觀)하는 데는 37도품의 법이 다 갖추어져 있으리이다’라고 하였으며, 또 ‘여여(如如)한 도리는 모든 법을 갖추었다’고 하였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만법은 다 글[文]이고 말[言]인데, 글과 말은 특성상 뜻[義]이 될 수 없습니다. 여실(如實)한 뜻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지금 여래께서는 어떻게 설법하시나이까?”
【論】 여기서부터는 큰 단원 세 번째,3) 부처님의 말씀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물음이 있고 다음에 답이 있다.
질문 중에 ‘만법’이란 세간의 언설(言說)로 세운[安立] 법을 말한다. 말이라는 법은 도대체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문자이고 말일 뿐, 뜻이 될 수는 없다. 모든 법의 참 뜻은 언설을 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금 부처님께서 설법하시는 것이 만약 글이고 말이라면, 여기에는 참 뜻이 없을 것이며, 참 뜻이 있다면 그것은 글이나 말이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설법하시겠나이까?’ 하고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너와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니, 이런 이유로 설한다.
나의 말은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이지 문자가 아니며[非文], 중생들의 말은 글로 된 말[文語]이지 뜻이 아니다[非義].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말은 다 공허하고, 공허한 말은 뜻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으니, 뜻을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 헛말이 된다.
뜻과 일치하는 말은 그 실상이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고, 공이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아서 두 가지 상을 떠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와 같이 중간에 떨어져 있지 않는 법은 세 가지 상[三相]을 떠나 있으므로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없으니, 여여(如如)한 그대로 설한 것이다.
진여(眞如)는 유를 없애지 않는다. 무에서 유를 없애지 않기 때문이다. 진여는 무를 있게 하지 않는다. 유 가운데 무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有)ㆍ무(無)가 있지 않으니, 유ㆍ무가 있지 않음을 설하기 때문에 진여도 있지 않다. 진여는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는 없게 하지도 않으니, 여여(如如)하게 설한다.”
【論】 두 번째로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부처님께서 설하시는 이유를 말씀하시고 다음에 글과 뜻이 다름을 나타내신다.
먼저 (이유를 말씀하신 중에) ‘너와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이라 한 데서 ‘너’는 사리불을, ‘중생’은 모든 범부를 가리킨다. 이들에게 무위(無爲)를 설하면 법체(法體)가 있다고 생각하고, 유위(有爲)를 설하면 법상(法相)을 일으키게 된다. 이와 같이 있다고 생각하거나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언설로는 참 뜻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나는 그러한 언설과는 달리 설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말씀을 통해 가르치는 이유다.
다음에는 글과 뜻이 다름을 드러내는 말씀인데, 먼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標] 뒤에 그 두 가지를 풀이한다[釋].
먼저 두 가지를 표한 가운데 ‘뜻을 담은 말이지 문자가 아니라’ 함은 말이 단지 공허한 문자[空文]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참뜻[實義]에 합당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며, ‘글로 된 말이지 뜻이 아니라’ 함은 말이 참뜻과 상관없이 공허한 문자에 그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다음으로 풀이하는 주에는 먼저 뒤에 나오는 문장들을 풀이하였다.
‘다 공허하다’ 함은 공허한 문자만 있고 참뜻이 없으므로 하신 말씀이니, 이는 ‘글로 된 말[文語]’을 풀이한 것이다. ‘뜻에 대해 말해주는 바가 없다’ 함은 여실(如實)한 뜻에 대해 밝히거나 이야기해주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니, ‘뜻이 아니다’한 말을 풀이한 것이다. 그 뒤는 결론인데, ‘모두 헛말이 된다’ 함은 개념[想]에 어긋나지는 않지만 뜻[義]에 어긋나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다. 예컨대 본 것을 못 보았다고 말하고, 못 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뜻과 일치하는 말……’ 이하는 다음으로 앞에 나오는 문장들을 풀이한 것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는데 먼저 내용을 풀이하고[正釋], 다음에는 거듭 설명한다[重顯]. 내용을 풀이한 중에서도 먼저 ‘(단지) 문자가 아니라[非文]’한 부분을 해석하고 나중에 ‘뜻을 담은 말[義語]’이라 한 부분을 해석한다.
단지 문자가 아님을 해석한다는 것은, 아예 없는 공허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공허한 문자가 아니기 때문에 뜻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뜻을 나타내는 말을 해석한다는 것은, 뜻이 말에 맞기 때문이며 말이 뜻과 같기 때문이다.
처음 해석 가운데 ‘그 실상이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다’ 함은 진여(眞如)의 실상도 공하다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공상 역시 공하다’고 한 뜻과 같으므로 ‘실상이 공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실상의 도리가 없지 않기 때문에 ‘공하지 않다’고 하였다. 실상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실상이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공이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 함은, 진공(眞空)의 이치가 실상이라는 말이다. 공이 실재한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그 진공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실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공이 없는 것은 아니나 공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뜻과 일치하는 말은 두 가지 상을 떠나 있으나 그렇다고 그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 함은, ‘공하지 않은 말’은 공상(空相)을 떠나 있고, ‘실상이 없는 말’은 실상을 떠나 있으므로 ‘두 가지 상을 떠났다’ 하였고, 그러나 공상과 실상의 둘 사이에 그 둘이 아닌 중간의 것을 세우지 않으므로 ‘중간에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양 극단[二邊]을 떠났고 중간에 떨어지지도 않으므로 ‘세 가지 상을 떠났다’고 하였다.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닿는 곳은 이 세 가지 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이 말씀은 이 세 가지[三相]를 멀리 떠나 그 중도에 일치해 있다. 생각과 말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어디에 있는지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말이 끊긴 뜻에 묘하게 일치하므로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문자’와는 같지 않다. 이상은 ‘비문(非文)’을 풀이한 내용이다.
‘여여하게 설하는 그대로 여이다[如如如說]’ 함은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풀이한 것이다. 맨 앞의 ‘여(如)’는 ‘일치한다’는 말이고, 그 다음 ‘여여(如如)’는 ‘의리(義理)’를 뜻한다. 즉 앞서 세 가지 모양을 멀리 떠난 말씀은 여여한 의리에 꼭 들어맞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의 설법은 뜻을 나타내지 못하는 범부의 말과는 달리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진여는 …를 없애지 않는다[如無]’ 이하는 두 번째, 거듭 설명하시는 부분이다. 먼저 비문[非文]을 설명하고 뒤에 의어(義語)를 설명해낸다.
먼저 (비문을 설명한 중에) ‘진여는 유를 없애지 않는다. 무에서 유를 없앨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함은 진여의 도리는 유(有)가 아니지만 그 진여가 본래적으로 유를 없게 한다는 것은 아님을 말한다. 즉 무법 중에서 유법을 없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는 본래 유(有)가 아닌데, 어떤 유를 없애서 무(無)에 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실상은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다’고 한 말과 들어맞는다.
‘진여는 무를 있게 하지 않는다. 유 가운데 무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함은 진여의 도리는 무(無)가 아니지만 그 진여가 근본적으로 그 무를 있게 했다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즉 유법 중에서 무법을 있게 했다는 것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진여는 본래 무(無)가 아닌데, 어떤 무를 있게 해서 유에 떨어지겠는가? 그러므로 ‘공은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 말과 부합한다.
‘유ㆍ무가 있지 않다’ 함은 진여에는 유와 무가 없으므로 유가 있지 않으며, 진여에는 무와 유가 없으므로 무가 있지 않다는 말이다. 두 가지가 이미 있지 않은데, 어떻게 중간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세 가지 상을 떠났다’는 말에 부합한다. 여(如)의 뜻이 이미 그러하다면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에 부합하므로 부처님의 말씀은 실로 공허한 문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비문(非文)’이란 말을 거듭 해석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명칭과 말이 이와 같이 도리에 맞으므로 후득지(後得智)에서 그러한 명칭을 가지고 진여를 사유하면 진여의 이체(理體)를 직접 관할 수 있기 때문에 4구(句) 중 구구(俱句)에 해당한다.
둘째로,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거듭 설명한 중에 ‘유ㆍ무가 있지 않음을 설하기 때문에 진여도 있지 않다’ 함은 부처님의 말씀이 이미 유ㆍ무가 있지 않다고 설한 것이기 때문에 진여의 이치에는 유무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유(有)가 있지 않다는 것은 진여를 있게 하지 않기 때문이며, 무(無)가 있지 않다는 것은 진여를 없게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는 ‘진여를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를 없게 하지도 않는다’고 한 말에 부합한다. 그러므로 ‘진여는 있게 하지도 않고, 진여는 없게 하지도 않으니, 여여(如如)하게 설한다’고 하였으며, 앞에서도 ‘여여 그대로 설한다[如如如說]’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뜻을 나타내는 말[義語]’을 거듭 해석하였다.
이상으로 여섯 부분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부처님의 언교가 진여의 도리에 부합함을 밝힌) 부분이 끝났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모든 중생이 일천제(一闡提)에서 시작하니, 천제의 마음이 어떤 등급의 지위[位]에 머물러야 여래(如來)와 여래의 실상에 이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제의 마음에서 여래와 여래의 실상까지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문다.”
【論】 이하는 대단원의 네 번째, 보살 위(位)가 본각(本覺)의 이익에서 나옴을 밝힌 부분이다. 그 가운데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는 대답하였다. 대답에 셋이 있으니 첫째는 수를 들어 전체를 밝힌 부분이며, 둘째는 따로따로 풀이한 부분이며, 셋째는 총괄적인 설명이다. 위 문장은 수를 들어 전체를 밝힌 부분에 해당한다. 다섯 지위[五等位]에서 ‘등(等)’은 계급을 말한다.
‘일천제에서 시작한다’ 함은 아직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을 내기 전에 있는 사람을 모두 천제(闡提)라고 부르는데, 대승(大乘)의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천제에도 크게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대원(大願)을 발한 일천제로서 항상 열반(涅槃)에 들어가지 못한 자이며, 다른 하나는 큰 믿음이 없는 일천제이다. 큰 믿음이 없는 일천제에도 둘이 있다. 첫째는 별일천제(別一闡提)로서 큰 사견(邪見)을 일으켜 선근(善根)을 끊어버린 자이며, 둘째는 통일천제(通一闡提)로서 아직 대승심을 내지 못해 큰 믿음이 없는 자에서부터 2승(乘)의 4과(果)를 얻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제의 위(位)에 들어간다.
지금 이 글에서는 마지막 경우를 두고 말하기 때문에 ‘천제의 마음에서 여래와 여래의 실상까지 다섯 등급의 지위에 머문다’고 하였다. 아직 10신(信)에 들지 않은 자는 모두 천제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우선 5위(位)의 수준[分齊]를 설명한다.
첫째는 신위(信位)니, 10신행(信行)에 있다. 비록 불퇴전(不退轉)은 아니라 할지라도 큰마음을 일으킨 자들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이들을 ‘신상보살(信相菩薩)’이라고 하였다.
둘째는 사위(思位)니, 30심(心)에 있다. 모든 법이 식일 뿐[唯識]이라는 도리를 사유하지만 이들 모두 아직은 무분별의 수행을 참으로 증득하지는 못한 자들이다.
셋째는 수위(修位)니, 10지행(地行)에 있다. 진증(眞證)을 얻어 열 가지 장애를 대치(對治)하며 닦는 자들이다.
넷째는 행위(行位)니, 등각행(等覺行)에 있다. 인행(因行)은 만족되었으나 아직 과지(果地)에 이르지 못한 자들이다.
다섯째는 사위(捨位)니, 묘각지(妙覺地)에 있다. 적멸(寂滅)을 취하지 않고 대비(大悲)로써 두루 교화[普化]하는 자들이다.
5등위(等位)를 건립하는 까닭은 퇴위(退位)냐 불퇴위냐, 증위(證位)냐 부증위냐, 등위(等位)냐 미등위냐, 인이 다 찬 지위냐[因滿位], 과가 완성된 지위냐[果圓位]의 차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데, 이 순서대로 5등위를 세운 것이다. 대의(大意)는 이와 같고 이어서 경문을 풀이하겠다.
【經】 “첫째는 신위(信位)다. 이 몸 안에 진여의 종자가 망심(妄心)에 가려져 있으나 망심을 버리고 떠나면 맑은 마음이 깨끗해짐을 믿고, 모든 경계가 의언(意言)의 분별임을 아는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따로따로 풀이한 부분[別解]이다. 첫 번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믿음[信]을, 다음에는 이해[解]를 다룬다. 먼저 믿음을 설명하는데 소위 세 가지 불성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이 몸 안에 진여의 씨앗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자기 본성에 머무는 불성을 믿는 것이다. ‘진여(眞如)’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을 뜻하며, 종자(種子)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더할 나위 없이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無上正等覺이라고 한역함)를 뜻한다. 자신의 본성인 깨끗한 마음은 본래 법이 그렇기 때문에 ‘진여’라 하며, 3신(身:法身ㆍ報身ㆍ化身)의 결과를 초래하는 바로 그 원인이 되기 때문에 ‘종자(種子)’라 한다. 그러나 아직 발심하여 머무는 지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자기 본성에 머문다’고 하였다. 자성이 아직 모든 장애를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망심(妄心)에 가려져 있다’고 하였다.
‘망심을 버리고 떠나면’이란 이 믿음이 불성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10신(信)의 지위에서 등각(等覺)까지 점차 불신(不信)ㆍ무지(無知) 등의 장애를 벗어남에 따라 거칠고 망령된 분별심을 버리기 때문이다. ‘맑은 마음이 깨끗해짐을 믿는다’ 함은 이 믿음으로 불성을 얻는 데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도(道)에 도달한 후 모든 때[垢]를 떠나 자성인 맑은 마음이 깨끗하고 희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위 구절의 신(信)자가 아래 두 구(句)에까지 걸린다.
‘모든 경계가 의언의 분별’이라 함은 이미 세 가지의 불성을 믿는다면 유식의 도리까지 알 것이라는 뜻이다. 마음으로 취한 모든 경계가 오직 의언(意言)으로 분별해서 지어낸 것이라서, 분별을 떠난다면 있다할 것이 없음을 아는 것이다.
【經】 “둘째는 사위(思位)다. 사(思)란 모든 경계가 오직 의언(意言)일 뿐이라, 의언으로 분별하여 의에 따라 나타나 보여지는 경계가 내 본식(本識)이 아님을 관찰하는 것이며, 이 본식은 법(法)도 의(義)도 아니고 소취(所取)도 능취(能取)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
【論】 이는 사위(思位)를 설명한 것인데, 역시 두 구가 있다. 먼저 무상심사관(無相尋思觀)을 밝히고, 다음에 무생여실지(無生如實智)를 드러낸다.
처음에 나오는 ‘관찰[觀]’이란 사량관찰(思量觀察)을 말한다. ‘오직 의언일 뿐’이라 함은 인식되어진 바깥 경계[所取外境]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를 따라 나타난다’고 한 것은 바깥 경계로 나타난 상분(相分)이 견분(見分)을 떠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내 본식이 아니라[非我本識]’ 함은 식(識)을 떠나고 나면 바깥에 보여진 경계는 이미 나의 식[我識]이 아니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본식(本識)이란 제6식을 말하는데, 3유(有)의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제바보살(提婆菩薩)은 게송에서, ‘의식(意識)은 3유(有)의 근본이요, 모든 경계는 그 원인이니, 만일 경계가 없는 것임을 본다면, 3유의 종자도 자연히 사라진다’고 설하였다. 여기까지는 무상심사(無相尋思)와 여실지(如實智)를 전체적으로 설명하였고, 아래로는 그 무생도리(無生道理)를 밝힌다.
‘이 본식은 법(法)도 의(義)도 아니고 소취(所取)도 능취(能取)도 아님을 아는 것이다’라고 한 데서, ‘법도 아니고 의도 아님을 안다’ 함은 설명하는 공능을 가진 법[非能詮法]도 아니고, 설명의 대상이 되는 뜻[非所詮義]도 아니라는 것이다. 명칭과 뜻이 서로가 서로에게 객(客)이 될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 ‘소취도 아니며 능취도 아님을 안다’ 함은 인식된 대상[所取塵]이 이미 없으므로 인식하는 것[能取]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인식하는 쪽은 인식의 대상을 상대로 해야 하는데, 이미 상대될 것이 없어서 상대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생심사(無生尋思)와 여실지(如實智)를 전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처음 10해(解)로부터 그 위 세제일법(世第一法)에 이르기까지는 심사(尋思)와 여실한 지혜의 관(觀)을 닦는다. 이 중에도 수혜(修慧)의 관찰이 있기는 하나 아직 사찰분별(思察分別)을 완전히 떠나지 못했기 때문에 사위(思位)라는 이름에 통합하였다.
【經】 “셋째는 수위(修位)다. 수(修)란 항상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데, 일으키는 것과 일으켜지는 것이 동시에 행해진다. 먼저 지혜로 인도하여 모든 장애나 어려움을 물리치고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論】 이는 수위(修位)를 설명하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먼저 수상(修相)을 밝히고 뒤에 수인(修因)을 드러낸다. 여기서 수상이란 정체지(正體智)를 말한다.
지(止)와 관(觀)이 동시에 운행되어[雙運] 다시는 출입이 없으므로 ‘항상 일으킨다’고 하였다. ‘일으키는 것[能起]’이라 함은 지(止)가 일으키는 공능을 갖는다는 뜻인데 관(觀)을 일으키기 때문에 한 말이다. 다음에 나오는 ‘일으켜지는 것[起]’이란 일으킴의 대상이 되는 관을 말하는데, 지와 관이 분리되지 않으므로 ‘동시’라고 하였다. 상(相)을 그치고[止] 진여[如]를 관(觀)하는 일이 반드시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상이 닦는 모습[修相]을 설명한 말이다.
이어서 수인(修因)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지관(止觀)을 동시에 운용하여 닦아갈 수 있는 이유는 먼저 가행지(加行智)를 써서 모든 장애를 물리치기 때문이다. ‘지혜로 인도한다’ 함은 가행지를 말하는데, 의언(意言)으로 분별하여 명칭과 말을 떠나지 못하므로 ‘지혜로 인도한다’고 하였다. 7지(地) 이하의 모든 보살지(菩薩地) 중에는 다 가행(加行)이 있어 먼저 숨어 있던 장애를 눌러 버리기 때문이다.
‘모든 장애나 어려움을 물리친다’는 것은 거칠고 무거운 장애를 덜어내고 제압한다는 말이며,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은 현행의 번뇌를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經】 “넷째는 행위(行位)다. 행(行)이란 모든 수행 지위를 떠나 마음에 취하고 버림이 없는 아주 맑은 근본 이익이며, 마음의 동요가 없이 여여한, 결정된 참 성품 그대로의 대반열반(大般涅槃)이어서 그 성품이 공(空)하고 큰 것이다.”
【論】 이는 등각위(等覺位)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도 두 구(句)가 있다. 먼저 계위의 상태를 밝힌 뒤에 그 행을 밝힌다.
‘모든 수행지위를 떠났다’ 함은 행(行)이 10지(地)를 넘어섰기 때문이며, ‘마음에 취하고 버림이 없다’는 것은 이해한 바가 부처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계위를 등각행(等覺行)이라 하였다. 그 뒤 결론적으로 ‘지극히 맑은 근본 이익’이라 한 것은 본각의 마음을 가리키는데, 그 인(因)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였다.
다음으로 행(行)을 밝힌 데서 ‘마음의 동요가 없이 여여한, 결정된 참 성품’이라 함은 이 지위에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대반열반이어서 그 성품이 공하고 크다’ 함은 적멸무위(寂滅無爲)이며, 한 모습[일상]이자 모습이 없기[無相] 때문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이를 ‘금강삼매에 들면 한 모습이자 모습이 없으며 적멸무위(寂滅無爲)하니 무구지(無垢智)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經】 “다섯째는 사위(捨位)다. 사(捨)란 공성[性空]에 머물지 않고 바른 지혜[正智]가 흘러 변하는 것이며, 대비(大悲)의 여여한 상인데 그 상이 여여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며, 삼먁삼보리(三藐三菩提)에도 마음을 비워 증득하는 일조차 없는 것을 말한다. 마음에 끝[邊際]이 없어 처소를 볼 수가 없으니 이것이 여래에 이른 것이다.”
【論】 이는 불지(佛地)를 설명한 부분으로 여기에도 두 구가 있다. 먼저 사(捨)의 뜻을 밝힌다. 즉 세 가지 뜻을 가지고 저 버리는[捨]상태를 나타낸다.
‘성품이 공하다는 데 머물지 않는다’ 함은 지혜가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몸과 마음을 꺼진 재처럼 하는[灰身滅智]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이다. 여량지(如量智)4)가 계속 흘러나와 근(根)을 따라 변역(變易)하여 불사(佛事)를 짓기 때문이다.
‘대비의 한결같은 모양은 그 여한 모습에도 머묾이 없는 것’이란 무연대비(無緣大悲)는 인아(人我)와 법아(法我)의 차별된 모양을 취하지 않으므로 ‘여여한 상’이라 하였고, 한번도 쉬지 않고 6도중생을 건네 주므로 ‘그 상이 여여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하였다.
삼먁은 정(正)을, 삼(三)은 등(等)을, 보리는 각(覺)을 뜻한다. 합해서 말하자면 삼먁삼보리는 정등각(正等覺), 즉 원만하기 비할 데 없는 깨달음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머무는 일이 없으므로 ‘마음을 비워 증득하는 일이 없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뜻 중에서 앞의 둘은 열반(涅般)에 머물지 않는다는 뜻에서 버린다[捨] 하였고, 뒤의 하나는 보리(菩提)를 취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버린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사위(捨位)의 상태를 밝힌 부분이다.
‘마음에 끝이 없다’는 것은, 일심(一心)의 원천에 돌아가면 마음의 체(體)가 두루해지는데, 시방에 두루하므로 끝이 없고[邊], 3세에 두루하므로 끝이 없다[際]고 하였다. 3세에 뻗어있으나 예와 지금의 차이가 없으며, 시방에 미치지만 여기와 저기의 차이가 없으므로 ‘처소를 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궁극의 과(果)는 다른 것과는 함께 하지 않고, 오직 여여함을 타고 가는 자만이 도달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여래에 이른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5등위(等位)를 각각 설명한 부분이다.
【經】 “선남자야, 다섯 계위가 하나의 각[一覺]이며,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들어가니, 중생을 교화하려면 그 근본 자리[本處]를 따라야 할 것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전체적인 설명인데, 이 중에 둘이 있다. 하나는 본각에서 오는 것임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문답을 주고받으며 거듭 설명한 부분인데 위 경문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5위(位)의 모든 행이 본각을 떠나지 않아서 다 본각의 이익으로부터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으며, 행(行)이 성립될 때 앞에서부터 뒤로 들어가므로 ‘들어간다[入]’고 하였다. ‘들어간다’는 것은 자리(自利)를 말하고 ‘교화한다’는 것은 이타(利他)를 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행(行)이 다 본처(本處)를 따른다는 것이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그 근본자리에 따르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근본이라는 것이 본래 없으니 없는 곳에 처하여 공한 실제에 들어가 보리심을 내서 원만해지면 성도(聖道)를 이룬다. 어째서 그런가? 선남자야, 손으로 허공(虛空)을 잡는 것과 같아서, 잡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잡을 수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論】 여기는 문답을 통해 거듭 설명하신 부분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법(法)을 말하고 다음에는 비유를 들었다. 법(法)에 네 구절이 있다. 첫 두 구는 본처(本處)가 무처(無處)임을 밝히고, 나중의 두 구는 인과(因果)가 따라서 이루어짐을 나타냈다. ‘어째서 그런가?’는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어째서’라 함은 만약 본래 무처(無處)라면 들어갈 수가 없어야 하겠고, 들어갈 수가 있다면 본처(本處)가 없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런 의심을 떨쳐주기 위해서 비유를 들어 해석하였다.
‘손으로 허공을 잡는다’ 한 데서 ‘손으로 잡는다’ 함은 능입(能入)의 행(行)을 비유하고, ‘허공’은 소입(所入)의 본각을 비유한다. ‘잡을 수 없다’ 함은 허공은 아무 형상이 없어서 쥘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잡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함은 쥔 손아귀 안에 허공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본각의 이익도 이와 같아서 본래 근본자리라는 성품이 없기 때문에 얻을 수 없는 것이며, 근본이 없는 본각은 없지 않으므로 얻을 수 없는 것도 아니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불사(佛事)를 일으키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하니, 이 염(念)은 본래 적멸(寂滅)이요, 적멸은 여여한 것입니다. 모든 덕을 지니고 만법을 망라하여 둘이 아닌 채로 원융(圓融)하니 불가사의합니다. 그러므로 이 법이 곧 마하반야바라밀(摩訶般若波羅蜜)이어서, 매우 신비한 주문[大神呪]이며 매우 밝은 주문[大明呪]이며 가장 밝은 주문[無上明呪]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등한 주문[無等等呪]임을 알겠나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큰 단원 다섯 번째, 대반야(大般若)가 원융무이(圓融無二)하다는 사실을 설명한 부분이다. 둘로 나뉘는데 먼저 사리불이 여쭙는 부분이고, 다음에 여래께서 결론적인 대답을 하신 부분이다. 첫째 중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먼저 본각의 이익이 원융(圓融)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했음을 말하고, 다음에 그것이 대반야바라밀다임을 나타낸다.
‘불사를 일으키기에 앞서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한다’ 함이 부처님의 말씀을 이해한 부분이다. 말을 펼쳐서 불사를 하고자 할 때는 언제나 먼저 본각의 이익을 취하니, 생사의 염(念)은 본래 적멸하고, 이러한 적멸은 다름 아닌 여여한 도리이며, 이 도리 중에는 본각과 시각(始覺)의 모든 덕이 다 들어있을 뿐만 아니라 생사의 온갖 법이 다 망라되어 있어 원융무이하므로 매우 깊고 불가사의한 것이다.
(다음으로 그것이 대반야바라밀다임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그 안에 한량없는 공덕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것은 오직 본각과 시각(始覺)이 다를 바 없이 평등한 체(體)라는 뜻에서 ‘마하반야(摩訶般若)’라고 하며, 이와 같은 반야는 그 근원과 본성을 끝까지 다한 것이므로 ‘바라밀(波羅蜜:到)’이라 한다.
바라밀[到]을 구별해보면 두 가지가 있다. 즉 등각위(等覺位)에서는 만행(萬行)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기 때문이며, 묘각위(妙覺位)에서는 만덕(萬德)의 피안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등각위(等覺位)에서도 크게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큰 신력(神力)으로 세 가지 마[三魔:煩惱魔ㆍ五陰魔ㆍ天魔]로부터 오는 원한을 항복시키는 것이니, 경문에서 ‘매우 신비한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밝게 비추는 힘으로 4안(眼:肉眼ㆍ天眼ㆍ慧眼ㆍ法眼)의 대상을 두루 관찰하는 것이니, 경문에서 ‘매우 밝은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묘각위(妙覺位)에도 역시 두 가지 바라밀이 있다. 첫째는 4지(智:大圓鏡智ㆍ成所作智ㆍ妙觀察智ㆍ平等性智)가 구족하고 5안이 원만하여 법계를 남김없이 비추어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는 것이니, 경문에서 ‘가장 밝은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부처의 3신(身)이 드러내는 무상보리(無上菩提)는 무엇과도 동등하지 않으며 어떤 부처라도 차이가 없는 것이니, 경문에서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동등한 주문’이라고 한 부분이 이에 해당한다.
주문[呪]이란 도(禱)이다. 세간의 신주(神呪)에도 큰 위력이 있어서 주문을 외우고 신에게 빌면 오지 않는 복(福)이 없고, 물리치지 못할 화(禍)도 없다. 이 마하반야바라밀도 마찬가지로 앞에서 말한 네 가지 덕을 다 갖추어 큰 신력이 있으므로 안으로는 모든 덕이 다 갖추어지며, 밖으로는 모든 환란이 다 없어진다.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명구(名句)를 외우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ㆍ신(神)을 우러러 바라는 바대로 성취되지 않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이를 주(呪)라고 한다. 제석천(帝釋天)이 이 명구를 외우고 아수라의 군대를 물리친 사례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렇다. 진여(眞如)는 공(空)한 성품이다. 성품이 공한 그 지혜의 불로 모든 번뇌를 태워 없애 평등하고 평등하니, 등각(等覺)의 3지(地)와 묘각(妙覺)의 3신(身)이 9식(識) 중에 아무 영상(影像)없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論】 여기서부터는 (사리불이 여쭙는 말에 이어 두 번째로) 여래께서 결론적으로 답하신 부분이다. 여기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인 설명[總述], 둘째는 개별적인 설명[別述], 셋째 전체적인 결론[總成]이다.
‘그렇다, 그렇다’라는 말씀이 총술(總述)이다.
별술(別述)에도 둘이 있는데, 먼저 인(因)이 원만한 경지에 도달함을 말하고 나중에 과(果)가 원만한 경지에 도달함을 말했다. 전자가 등각삼지(等覺三地)를 드러낸 부분이다. 무엇을 등각삼지라 하는가?
첫째는 백겁위(百劫位)요, 둘째는 천겁위(千劫位)요, 셋째는 만겁위(萬劫位)이다. 『본업경(本業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불자(佛子)야, 마니영락(摩尼瓔珞)이라는 이름은 등각성(等覺性) 안의 한 사람으로서 금강혜보살(金剛慧菩薩)을 지칭한다. 이 보살은 정적정(頂寂定)에 머물러 큰 원력으로 수명이 백 겁이 될 때까지 천삼매(千三昧)를 닦고 나서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들어간다. 거기서 모든 법성(法性)과 2제(諦)ㆍ1제(諦)와 1합상(合相)과 동일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천 겁의 수명 동안 머물러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배우고……결국에는 부처님이 가신 곳에 들어가 부처님 도량에 앉고 3마(魔)를 넘어선다. 그리고는 다시 만 겁의 수명 동안 머물러 변화신으로 성불(成佛)하는 모습을 보이고…… 옛날의 모든 부처님과 똑같이 언제나 중도(中道)를 행하고, 대락무위(大樂無爲)를 누리게 되니 생멸(生滅)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 이 경에서 ‘진여는 공한 성품’이라고 한 것이 『본업경』에서 말한 첫 번째, ‘일합상(一合相)과 동일하게 되었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즉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과 동일하게 되었으니, 2제(諦)5)가 1제(諦)로 원융(圓融)된 것인데, 이 1제가 바로 1합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두고 ‘진여공성(眞如空性)’이라고 하였다.
‘성품이 공한 그 지혜의 불로 모든 번뇌를 태워 없앤다’ 함은 『본업경』에서 말한 두 번째, ‘3마(魔)를 넘어선다’는 부분과 일치한다. ‘모든 번뇌[諸結]를 없앤다’는 것은 번뇌마(煩惱魔)를 없애는 것이다. 번뇌를 없애므로 음마(陰魔)에 매이지 않고, 이 두 가지 마를 없애므로 천마(天魔)가 자연히 항복하여 불가사의한 변역사마(變易死魔)6)만이 있을 뿐이다.
‘평등하고 평등하다’ 함은 『본업경』에서 말한 세 번째, ‘언제나 중도(中道)를 행한다’고 한 부분과 일치한다. 두 극단에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평등하다 하였고, 항상 행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거듭 평등하다고 하였다.
‘등각의 삼지[等覺三地]’란 앞의 3지를 망라한 것인데 이 가운데 앞의 둘은 대신주(大神呪)를 말하고, 셋째는 대명주(大明呪)를 말한 것이다.
‘묘각(妙覺)’ 이하는 원만한 과(果)에 도달했음을 밝힌 것이다. ‘3신(身)’이란 법신(法身)ㆍ응신(應身)ㆍ화신(化身)이다. 모든 부처님이 3신이라는 동일한 길을 가기 때문이니, 이는 무등등주(無等等呪)란 구(句)를 기술한 것이다. ‘9식(識) 중에 아무 영상 없이 밝고 깨끗하게 드러난다’ 함은 무상명주(無上明呪)란 구를 기술한 것이다.
앞 등각위(等覺位)에서는 아직도 생멸(生滅)이 있고 아직 심원(心源)을 끝까지 드러내지 못했으므로 제8식(第八識)에 있었다가 지금 묘각(妙覺)에 이르러서는 생멸을 영원히 떠나 본각 일심(一心)의 근원에 완전히 돌아갔으므로 밝고 깨끗한 제9식(第九識)에 들어간 것이다.
한편 앞의 인위(因位)에서는 연(緣)을 필요로 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의 영상(影像)의 상이 나타나게 마련이지만 지금 마음의 근원에 돌아와서는 그 본질(本質)을 체득하므로 모든 영상의 상이 다 끊겨 버린다. 그러므로 ‘아무 영상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본업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불자(佛子)야, 수정(水精)과 영락(瓔珞)이 안팎으로 투명하고 맑듯이, 묘각은 언제나 밝고 맑은 데 머무니 그것을 일체지(一切智)의 경지라고 한다. 항상 중도(中道)에 처하고 모든 법에서 4마(魔)를 넘어서며,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라서 모든 상이 다하고, 단번에 이해하고 크게 깨달아 변화신을 끝까지 다하고 신령함을 체득하여 2신(身)으로 항상 머물면서 인연 있는 이를 교화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영락경』에서 법성신(法性身)과 응화신(應化身) 2신(身)을 세운 이유는, 법신(法身)이 나머지 다른 2신(身)을 합하여 1신(身)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경에서는 이것을 둘로 나눠놓았기 때문에 3신(身)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3신과 2신이 평등하고 평등하다. 여기까지 해서 도피안(到彼岸)에 대해 개별적으로 설명[別述]하였다.
【經】 “선남자야, 이 법은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니 지(智)가 스스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고요한 것도 아니니, 작용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다. 뜻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니[義非有無:어떤 본에는 ‘非有非無’라고 되어 있다], 공상(空相)도 공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그 중생들이 이 뜻을 보고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 뜻에 들어온 자는 여래를 본다.”
【論】 여기는 (如來述成 중 세 번째) 둘이 아닌 원융한 이치를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부분[摠成]이다.
위에서는 얕은 데서 깊은 데로 들어가는 측면에서 이야기하여 인(因)이 가득 차면 과(果)가 원만해지는 차별을 밝혔다. 그런데 하나의 법이 둘이 아니라는 측면에서 이야기한다면, 인(因)과 과(果)가 둘이 아니고 마음[心]과 경계[境]에 차별이 없다. 인과 과가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인이 아니’라 하였고, 마음과 경계가 차별이 없기 때문에 ‘과가 아니’라 하였다. 그 까닭은 앞에서 말했듯이, 인과 과, 심과 경이 오직 하나인 원지(圓智) 자체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체가 작용할 뿐이라면 무엇이 인(因)이 되고, 무엇이 연(緣)이 되랴. 또 이 지혜의 작용이 등각위에 있으면 조적혜(照寂慧)라고 하니, 아직 생멸하는 동상(動相)을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며, 묘각위에 이르면 적조혜(寂照慧)라고 부르니, 이미 제9식에 돌아와서 궁극적으로 고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둘이 아니라는 측면을 말하는 것이라, 먼저 동(動)함이 있는 것도 아니고, 후에 고요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고요함과 움직임의 작용은 그 성품이 공(空)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성품이 공하다는 것은 없다는 것이니,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기 때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그렇다 치고,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은 어째서 그런가? 공상(空相)도 공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원융불이(圓融不二)를 설명했다.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이하는 이 이치에 들어가기를 권한 말씀이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여래의 뜻을 관(觀)하면 어떤 흐름에도 머물지 않고, 4선(禪)7)을 떠나 유정천[有頂]을 넘어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어째서 그런가? 모든 법은 명칭과 수[名數]인데, 4선도 마찬가지다. 여래를 보는 자라면 여래의 마음이 자재(自在)하여 항상 멸진처에 있으면서 나오는 일도 들어가는 일도 없이 안팎이 평등함을 보기 때문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여섯 번째 대단원, 대선정(大禪定)이 모든 이름과 수(數)를 초월했음을 밝힌 부분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대답이다.
질문 중에 ‘어떤 흐름에도’라고 한 것은 3유(有:欲有ㆍ色有ㆍ無色有)를 말하는데, 잠시도 멈추지 않고 왔다 갔다 유전(流轉)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유정(有頂)’이란 비상처(非想處)를 말하는데 3유의 정상[三有頂]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답은 둘로 나뉘는데, 물은 뜻을 전면적으로 인정한 부분[總許]과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別成]이다. 별성 중에도 간략한 설명과 자세한 해석 두 부분이 있다. 간략한 설명에도 두 구(句)가 있으니 먼저 세간의 선[世間禪]은 명수(名數)를 떠나지 못했음을 밝히고, 나중에 출세간의 선[出世禪]은 명수를 초월했음을 드러낸다.
‘여래를 보는 자’란 앞에서 말했듯이 여래의 관(觀)에 들어가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여래의 마음은 자재하다’ 함은 여래의 마음이 모든 결박에서 떠나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항상 멸진처에 있다’ 함은 심법(心法)과 심수법(心數法)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오는 일도 들어가는 일도 없다’ 함은 마음의 체(體)는 이치 그대로[如]라 일어나거나 멸함이 없기 때문이다. 나오거나 들어가지 않을 수 있게 된 사람은 내적인 마음[內心]과 바깥 경계[外境]를 평등하게 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간략한 설명이다.
【經】 “선남자야, 저런 모든 선관(禪觀)들은 다 옛날 생각에 사로잡힌 선정인데[皆爲故想定:다른 본에는 ‘皆爲想空定’이라고 되어 있다], 이 여여(如如)함은 다시 저런 선정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어째서 그런가? 여여함으로 여실(如實)함을 관하면 관상(觀相)과 여상(如相)을 보지 않아서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니 적멸이 곧 여(如)의 뜻이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저런 선정은 동(動)이지, 선(禪)이 아니다. 어째서 그런가? 선의 본성은 온갖 동요를 떠났으므로 물들이는 것[能染]도 아니고 물든 것[所染]도 아니며, 마음법도 아니고 영상도 아니어서 모든 분별을 떠나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觀)하는 선정이라야 선이라 할 수 있다.”
【論】 여기서부터는 자세한 해석이다.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상을 대치하여 상을 떠남을 밝히고, 둘째 움직임을 대치하여 움직임을 떠남을 드러내고, 셋째 의미를 결론짓고, 넷째 명칭을 결론짓는다.
첫째 상 떠남을 밝힌 가운데서는 먼저 여러 가지 선(禪)이 취하는 상에 대해 열거하는데, ‘저런 모든 선관(禪觀)’이란 세간의 여덟 가지 선[八禪]8)을 말한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선정’이라 함은 옛날 집착을 떠나지 못해서 무시 이래의 망상으로 갖가지 상(相)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 아래는 상 떠남을 밝힌 것이다. ‘이 여여함은 다시 저런 선정으로 복귀하지 않는다’ 함은 여래에 들어가는 관(觀)은 능(能)과 소(所)가 평등해서 여(如)라고 하기 때문이다.
‘여여함으로 여실함을 관한다’ 함은 평등한 지혜로 여실에 통달하기 때문에 한 말이다. ‘관상(觀相)과 여상(如相)을 보지 않는다’ 함은 평등한 일미(一味)이기 때문에 관하는[能觀] 지(智)와 관의 대상[所觀]인 여(如)의 차별상을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미 능(能)과 소(所)를 잊었기 때문에 견분과 상분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모든 상이 이미 적멸하다’고 하였다. 적멸하여 달라지는 일이 없으므로 이것이 여의 뜻이 된다.
‘옛 생각에 사로잡힌 저런 선정……’ 이하는 (두 번째로) 동(動)을 대치하여 동을 떠남을 드러낸 부분이다. 먼저 그 동함을 제시한다. 세간의 선(禪)은 상을 취하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므로 동요하는 생각[念]이며, 동념은 고요한 것이 아니므로 참된 선이 아니다.
그 아래는 참된 선이 동(動)하는 모든 상을 떠났음을 나타낸다. ‘물들이는 것도 아니라’ 함은 동요하는 생각이 아니기 때문에 물들이는 작용[能染]이 없다는 뜻이다. ‘물든 것도 아니라’ 함은 본래 고요하기 때문에 동요에 의해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법이 아니라’ 함은 연하는[能緣] 마음 법[心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상이 아니라’ 함은 나타난[所現] 영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뜻에 의해 모든 동요를 떠나는 것이다.
‘모든 분별을 떠나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란 세 번째로 의미를 결론짓는 말이다. ‘분별을 떠난다’ 함은 상을 떠난다는 뜻을 결론지은 것이니, 분별을 떠남으로 해서 모양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의란 뜻이기 때문’이라 함은 동함을 떠난다는 뜻을 매듭지은 말이다. 본래 고요하므로 일어나거나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하는 선정이라야 선이라 할 수 있다’ 함은 넷째로 이름을 매듭짓는 말이다. 선은 정려(靜慮)를 가리키는 명칭이기 때문에, 상을 떠나고 동함을 떠나야 비로소 선(禪)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저 세간의 선정을 선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편의상 붙이는 이름이지 참된 선[眞禪]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진성공품[一品]을 둘로 나눈 가운데에 하나가 날카로운 근기[利根]들을 위해 긴 글로 자세히 설명한 부분이다. 그것을 여섯 단원으로 나누었는데 여기까지 해서 마쳤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옵니다. 여래는 항상 여실로써 중생을 교화하시는데, 이와 같이 실의(實義)는 글이 길고 뜻이 풍부하여 근기가 날카로운 중생은 닦을 수 있지만 근기가 둔한 중생은 뜻을 두기 어렵습니다. 어떤 방편으로 저 둔근기 중생들을 이 깨달음[諦]에 들게 하리까?”
【論】 여기서부터가 두 번째, 둔한 근기들을 위해 짧게 간추려서 말씀하신 부분이다. 그런데 날카로운 근기와 둔한 근기, 자세한 설명과 간략한 설명의 두 가지 문이 있다.
탐구하여 이해하는 쪽으로 논한다면 이근은 간략한 설명에, 둔근은 자세한 설명에 맞는다. 날카로운 사람은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알기 때문이고, 둔한 사람은 열을 들어야만 열을 알기 때문이다. 한편 말을 가지고 이해하는 쪽으로 따진다면 이근은 자세한 설명에, 둔근은 간략한 설명에 맞는다. 날카로운 사람은 많이 듣고 많이 이해하기 때문이며, 둔한 사람은 적은 분량을 외워서 모두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글의 의도는 후자에 있다.
위 글은 다섯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질문이고, 둘째는 대답이고, 셋째는 청(請)이고, 넷째는 설명이며, 다섯째는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이익을 얻음을 나타낸다.
위 경문은 첫 번째에 해당한다.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으니 처음에는 부처님이 앞에서 설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나타내고, 나중에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두다[措]’라는 것은 ‘마음을 둔다[存意]’는 뜻이다. 둔한 근기는 재주가 편협해서 긴 글과 넓은 뜻에는 뜻을 두기가 어렵기 때문에 한 말이다.
【經】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둔근기 중생에게 4구(句)로 된 게송 하나를 받아 지니게 하면 실제(實諦)에 들어가리니, 모든 불법이 이 한[一:다른 본에는 ‘四’로 되어 있다]게송에 다 들어 있다.”
【論】 이는 대답이다. 여래의 말솜씨[辯才]는 걸림 없고 자재하기 때문에 게송 하나에 모든 불법을 다 포함하니, 불법의 요지가 이 네 구 안에 있다.
둔근기에게 게송 하나를 독송하고 지니게 하여 항상 잊지 않고 생각하게 하면…… 마침내 모든 불법을 빠짐없이 알게 될 것이니, 이것을 여래의 선교방편(善巧方便)이라고 한다.
【經】 사리불이 아뢰었다.
“무엇이 네 구로 된 게송입니까? 부디 저희를 위해 설해 주소서.”
【論】 세 번째, 청(請)하는 부분이다.
【經】 이에 존자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인연으로 생긴 것[因緣所生義]
그것은 생이 아니라 멸이며[是義滅非生]
모든 생멸을 없애는 것[滅諸生滅義]
그것은 멸이 아니라 생이라네[是義生非滅].”

【論】 네 번째 (사리불의 청에 대해) 설명한 부분이다. 이 네 구의 뜻에는 각각 설명한 것[別]과 전체적인 설명[總]이 있으니, 전자는 2문(門)9)의 의미를 밝힌 것이고, 후자는 일심법(一心法)을 드러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심이문(一心二門) 안에는 포함되지 않은 불법이란 하나도 없다. 무슨 뜻인가? 앞의 두 구는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하여 평등의 의미를 나타냈고, 뒤의 두 구는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하여 차별문(差別門)을 나타냈다는 말이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진과 속이 둘이 아니지만 하나를 고수하지 않는다. 둘이 아니기 때문에 일심(一心)이 되고, 하나를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체를 둘로 들었으니, 이런 것을 일심이문(一心二門)이라고 한다. 대의(大意)는 이와 같다.
이어서 글을 해석한다.
‘인연으로 생긴 것’이란 속제(俗諦)의 모든 법을 들어 한 말이다. ‘그것은 멸이다’ 함은 속(俗)을 진(眞)으로 융합한 것이니, 생긴 것이란 본래 적멸(寂滅)하기 때문이다. ‘생이 아니라’ 함은, 생하는 그것이 바로 멸(滅)의 이유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 생은 생이 아니기 때문에 생긴 것을 찾아보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생긴 것이란 적멸이다.
‘모든 생멸을 없애는 것’이란 진제(眞諦)의 적멸한 법을 들어 말한 것이다. ‘그것은 생이라’ 함은 진(眞)을 속(俗)으로 융합한 것이니, 적멸한 법은 연(綠)을 따라 생겨나기 때문이다. ‘멸이 아니라’ 함은 적멸이 생(生)의 이유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 적멸은 적멸이 아니기 때문에 적멸한 것을 찾아보아도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적멸은 연(緣)을 따라 생긴 것이다.
적멸이 곧 생이란 생기지 않는 생함이다. 생긴 것이 곧 멸이란 멸하지 않는 멸함이다. 불멸의 멸이기 때문에 멸이 생이며, 불생의 생이기 때문에 생이 적멸이다.
종합해 본다면 생이 곧 적멸이지만 멸을 고수하지 않으며, 멸이 곧 생이지만 생에 머무르지 않는다. 생과 멸이 둘이 아니고, 동(動)과 적(寂)이 따로 없으니, 이런 것을 일심법(一心法)이라고 한다. 사실 둘이 아니나 그렇다고 하나를 지키는 것도 아니어서 전체가 연(緣)을 따라 일어나 움직이고, 전체가 연을 따라 적멸함을 말한다. 이러한 도리로 말미암아 생이 곧 적멸이고, 적멸이 곧 생이라서, 막힘도 걸림도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별개도 아니다.
이상으로 한 게송의 전체적인 뜻과 각 구절의 뜻을 설명하였다.
【經】 그 때 대중들이 이 게송을 듣고 모두 매우 기뻐하여 멸(滅)과 생(生)을 터득했다. 멸과 생의 반야(船若)는 성품이 공한 지혜의 바다였다.
【論】 이는 다섯째,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대중들이 이익을 얻는 대목으로서,전체적인 뜻과 각각의 뜻이 담고 있는 도리를 이해했음을 나타낸다.
‘멸(滅)’은 ‘생긴 것이란 적멸’이라는 앞 두 구를 이해했기 때문이고, 이어서 ‘생(生)’은 ‘적멸이 (연을 따라) 생한다’ 한 뒤 두 구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는 두 가지 뜻을 이해했음을 밝힌 말이다.
‘멸과 생의 반야’라 함은 두 가지 이해를 얻었다는 말인데, 이는 별문(別門)에 의하여 이익을 얻은 것이다. ‘성품이 공한 지혜의 바다’란 총괄적으로 관(觀)하건대, 멸하는 것이나 생하는 것이나 자기 성품을 고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성이 공(空)한 지혜는 끝없이 깊고 넓으므로 이를 ‘성품이 공(空)한 지혜의 바다’라고 이름 붙였다. 이것은 총문(摠門)에 의하여 이익을 얻은 것이다.
045_0112_a_18L如是遠離一切雜染一義具足旡量功德故言是觀覺中應具三十七道品法又言如如之理具一切法 經曰舍利弗言一切萬法皆悉文文言之相卽非爲義如實之義不可言說今者如來云何說法 論曰此下大分第三明佛言教稱如理說先問後荅問中言一切萬法者世間言說所安立法如言之法皆旡所得故唯文言卽非爲義諸法實義絕諸言說今佛說法若是文言卽旡實義若有實義應非文言是故問言云何說法 經曰佛言說法者以汝衆生在生說故說不可說#是故說之所說者義語非文衆生說者文語非義非義語者悉空旡空旡之言旡言於義不言義者皆是妄語義語者實空不空空實不實離於二相中閒不中中之法離於三相不見處所如如如說如旡旡有旡有於旡如旡有旡有旡於有有旡不在說不在故不在於如如不有如不旡如說 論曰是第二荅於中有二先是佛說之由後顯文義之異初中言以汝衆生在生說故者汝謂身子衆生卽是一切凡夫說於旡爲卽在法體說於有爲卽生法相如是在生之說不可說於實義我異彼說是故說之是爲佛說言教之由次顯文義不同相中先標二章後釋二章標中義語非文者語當實義故非直空文故文語非義語止空文故不關實義故第二釋中先釋後章皆悉空旡者直有空文而旡實義故是釋文語也言於義者旡詮談於如實之義故是釋非義也下摠結言皆是妄語者雖非違想而違義故猶如不見言見見言不見等語如義已下次釋前章於中有二重顯初中亦二先釋非文後釋義語釋非文者非空旡非空文故非旡義故釋義語者義合語故如義故初釋中言實空不空者謂說眞如實相亦空如前說言空相亦空故言實空而不亡其實相之理言不空雖非有實而非旡實故空實不實者謂說眞空之理是實故言空實而不存其眞空之理故不實雖非旡空而非有空故離於二相中間不中者不空之語離於空相不實之語離於實相故言離於二相然空實二相之間不存非二之中故言中間不旣離二邊亦不墮中故言離於三相心言行處不過三相然此佛語遠離三相卽於其中心言路絕故言不見處所如是妙契絕言之義所以不同旡義之此釋非文也如如如說者是釋義語上一如是契下二如是義理如前遠離三相之語契當如如義理而說所以佛說乃是義語不同凡語之非義也旡已下第二重顯先顯非文後顯義語初中言如旡旡有旡有於旡者謂眞如理雖非是有而如本旡令旡其有謂令旡有法於旡法中所以然者如本非有旡於何有而墮旡耶是故合於實空不空之語也旡有旡有旡於有者謂眞如理雖非是旡而如本旡令有其旡謂令有旡法於有法中所以然者如本非有於何旡而墮有耶是故合於空實不實之語旡不在者如旡有旡故有不在如旡旡有故旡不在二旣不在何得有中卽合離於三相之語如義旣爾合於義語是故佛語實非空文如是重顯非文釋也佛說名言#如是當理故後得智帶如是名思惟眞如卽得親觀眞如理體故在四句之中俱句也第二重顯義語中言說不在故不在於如者佛語旣說有旡不在故不在有旡於眞如理有不在者不有如故不在者不旡如故則當不有如不旡如而說故言如不有如不旡如說是故前言如如如說如是重顯義語之釋六分之中第三分竟 經曰舍利弗言一切衆生從一闡提闡提之心住何等位得至如來如來實相佛言從闡提心乃至如來如來實相住五等位論曰此下大分第四明菩薩位從本利出於中有二先問次荅荅中有三一者擧數摠標二者別解三者摠明此卽摠摽五等位者等之言階從闡提心者發旡上菩提心前皆名闡提以旡大乘決定信故一闡提略有二種一者發大願一闡提謂常不入涅槃者故二者旡大信一闡提此亦有二一者別一闡謂起大邪見斷善根者故二者通一闡提謂未發大心旡大信者乃至二乘四果皆入此闡提位今此文中約此最後故言從一闡提心乃至如來有五等未入十信者皆名闡提故此中先明五位分齊一信位在十信行雖未不退發大心故本業經名信相菩薩第二思位在三十心思量諸法唯識道理齊未眞證旡分別修故第三修位者在十地行得眞證修對治十障故第四行位者在等覺行因行已滿未至果地故第五捨位者在妙覺地不取寂滅大悲普化故所以建立五等位者謂顯退不退位差別故不證位差別故等未等位差別故因滿位差別故圓位差別故如其次第立五等位也大意如是次釋其文 經曰一者信位信此身中眞如種子爲妄所捨離妄心淨心淸白知諸境界意言分別 論曰此下第二別釋初中有二先信後解初明信者所謂信有三種佛性信此身中眞如種子者信住自性佛性眞如正是第一義空種子卽是阿耨菩提中道種自性淨心本來法然故名眞如與三身果而作正故名種子未發心住名住自性未出諸障爲妄所翳也言捨離妄心者是信引出佛性從十信位乃至等覺漸出不信旡知等障隨捨麤妄分別心故言淨心淸白者是信至得佛性謂至道後離一切垢自性淨心顯現淸白故上句信字貫下二句故知諸境界意言分別者旣信三種佛性亦知唯識道理故心所取一切境界唯是意言分別所作若離分別旡所有故 經曰二者思位思者觀諸境界唯是意言意言分別隨意顯現所見境界非我本識知此本識非法非義非所取非能取 論曰此明思位亦有二先明旡相尋思觀後顯旡生如實智初言觀者量觀察唯是意言者所取外境旡所有故隨意顯現似外相分不離見故非我本識者離識已外所見境界旣非我識故旡所有此中言本識者謂第六識三有本故如提婆菩薩所說頌言意識三有本諸塵是其因若見塵非有有種自然滅上來通顯旡相尋思及如實智自下明其旡生道理知此本識非法非義者非能詮法非所詮義知名與義互爲客故非所取非能取者所取塵旣旡能取不成故能取之義必待所取旣旡所待卽旡能待故此是通顯旡生尋思及如實智#始從十解已上乃至世第一法修此尋思如實智觀於中亦有修慧觀察而皆未離思察分別所以通名爲思位也 經曰三者修位修者常起能起修同時先以智導排諸障難出離蓋纏 論曰明修位亦有二句先明修相後顯修因言修相者正體智止觀雙運更旡出入故言常起言能起者止能起能起觀故次言起者謂所起觀止觀不離故曰同時止相觀如必同時故是明修相次顯其因以得此雙運修者由先加行排諸障故言智導者謂加行智意言分別不離名言故名智導七地已還一切地中皆有加行在先伏障故排諸障難者損伏麤重故出離蓋纏者不起現纏故 經曰四者行位行者離諸行地心旡取捨極淨根利不動心如決定實大般涅槃唯性空大 論曰是等覺位亦有二句先明位狀後顯其行初中言離諸行地者行過十地心旡取捨者解與佛同故故說此位名等覺行摠結言極淨根利者謂本覺心顯成滿因故次明行中言不動心如決定實性者此位得入金剛三昧故大般涅槃唯性空大者寂滅旡爲一相旡相故如本業經言入金剛三昧一相旡相寂滅旡爲名旡垢地 經曰五者捨位捨者不住性空正智流易大悲如相相不住如三藐三菩提虛心不證心旡邊際見處所是至如來 論曰此明佛地亦有二句先明捨義卽以三義顯其捨相不住性空正智流易者住涅槃灰身滅智智不滅故量智續流隨根變易佛事故大悲如相相不住如者旡緣大悲不取人法差別之相故曰如相恒涉六道未曾停息故言相不住如三藐曰正三者云等菩提言覺摠而言之謂正等覺卽是圓滿旡上菩提於中旡住虛心不證此三義中前二不住涅槃#故捨後一不取菩提故捨次明位狀心旡邊際者歸一心源心體周遍遍十方故旡周三世故旡際雖周三世而旡古今之殊#雖遍十方而旡此彼之處以之故言不見處所如是極果不與他共唯乘如者之所來至以之故言是至如來來別明五等位竟 經曰善男子五位一覺從本利若化衆生從其本處 論曰此下第二摠明於中有二一者直明從本二者往復重顯此是初門五位諸行不離本覺莫不皆從本利而成成行之時從前入後故名爲入入者自利化者利他如是二行皆從本處也 經曰舍利弗言云何從其本處佛言本來旡本處於旡處空際入實發菩提而滿成聖道何以善男子如手執彼空不得非不得 論曰此是重荅中有二先法後喩法中四句前二句明本處旡後二句顯從成因果何以故者擧疑發起何者本旡處應旡得入若得入者非旡本處爲遣是疑引喩釋手執彼空者手執喩能入之行虛空喩所入之本不得者虛空旡形可握故非不得者握內不旡虛空故本利亦爾本來旡本處性故不可得旡本之本不旡故非不可得也 經曰舍利弗言如尊所說在事之先取以本利是念寂滅寂滅是如摠持諸德該羅萬法圓融不二不可思議當知是法卽是摩訶般若波羅密是大神呪是大明呪是旡上明呪是旡等等呪 論曰此下第五明大般若圓融旡二於中有二一者身子仰諮二者如來述成初中亦二先領佛說本利圓融後顯卽是大般若度言在事之先取以本利者是領佛言凡欲發言作佛事時每先取其本覺之利是生死念本來寂滅如是寂滅卽是如理理中摠攝本始諸德亦乃該羅生死萬法圓融不二是故甚深不可思議此中雖具旡量功德其體唯是本覺始覺平等旡二故言卽是摩訶般若如是般若窮源盡性故言波羅密別而言之有二種到在等覺位到萬行之彼岸故在妙覺時到萬德之彼岸故等覺位略有二到一者有大神力降伏三魔之怨經是大神呪故二者有大明照遍察四眼之境如經是大明呪故妙覺位中亦有二到一者四智具足眼圓滿照窮法界更旡可加如經是旡上明呪故者三身所顯旡上菩提更旡與等諸佛旡差如經是旡等等呪故呪者禱也如世神呪有大威力誦呪禱神福旡不招禍旡不卻今此摩訶般若波羅密亦復如是具前四德有大神力內卽旡德不備外卽旡患不離若至誠心誦此名句仰禱諸佛菩薩神人隨所求願旡不成辦由是義故說名爲呪如天帝釋誦此名句卻修羅軍之事此中應說 經曰佛言如是如眞如空性性空智火燒滅諸結平等平等等覺三妙覺三身於九識中皎然明淨旡有諸影 論曰此下如來述成於中有三先摠述次別述後卽摠成摠述成者如是如是故別中亦二先述到因滿義述到果圓義初中卽顯等覺三地何等名爲等覺三一者百劫位二者千劫位三者萬劫位如本業經佛子摩尼瓔珞字者等覺性中一人其名金剛慧菩薩住頂寂定以大願力住壽百劫修千三昧已入金剛三昧同一切法性二諦一諦一合相復住壽千劫學佛威儀乃至入佛行處坐佛道場超度三魔住壽萬劫化現成佛乃至現同古昔諸佛常行中道大樂旡爲而生滅爲異故今此文言眞如空性者是第一同一合相謂同一切有旡諸法卽二諦法同融一諦一諦卽是一合相故如是名爲眞如空性也性空智火燒滅諸結者卽是第二超度三魔滅諸結滅煩惱魔滅煩惱故陰魔不繫滅二魔故天魔自但有不思議變易死魔耳平等平等者卽是第三常行中道不墮二邊故曰平等爲顯常行故重言平等覺三地者摠前三地此中前二述大神呪其第三地述大明呪也妙覺已下明到圓果言三身者名法身二者應身三者化身一切諸佛三身道同述旡等等呪句也於九識中皎然明淨旡有諸影者是述旡上明呪之句前等覺位猶有生滅未盡心源故在八識今到妙覺永離生滅窮歸本覺一心之源故入第九識中明淨又前因位有仰緣義所以其心影像相現今歸心源體彼本質由是諸影一切相盡以之故言旡有諸影如本業經言佛子水精瓔珞內外明徹妙覺常住湛然明淨名一切智地常處中道一切法上越過四魔非有非旡一切相盡頓解大覺窮化體神二身常住爲化有緣案云彼經立二身者一法性身二應化法身合餘二身爲一身故今此經中開此爲二故說三身三之與二平等平等上來別述到彼岸義 經曰善男子是法非因非緣智自用非動非靜用性空故義非有旡空相空故善男子若化衆生令彼衆生觀入是義入是義者是見如來論曰此是摠成圓融不二上約從淺入深之門以顯因滿果圓差別若就一法不二之門卽因果不二心境旡別因果不二故言非因心境旡別故曰非緣以然者如前所說因果心境者唯一圓智之自用故旣唯自用何因何緣也又此智用在等覺位名照寂未離生滅之動相故至妙覺位名寂照慧已歸第九識究竟靜故然今就其不二之門非先有動非後有寂寂動之用用性空故若就此義性空是旡旡動靜故是亦不然故言非有非旡非有可爾云何非旡空相亦空故如是述成圓融不二若化已下勸入是義 經曰舍利弗言如來義觀不住諸流應離四禪而超有頂佛言如是何以故一切法名數四禪亦如是若見如來者如來心自在常在滅盡處不出亦不入內外平等故 論曰此下大分第六明大禪定超諸名數於中有二先問後荅問中言諸流者所謂三有往還流轉旡休息故有頂者謂非想處三有頂荅中有二摠許別成別中亦二略明廣釋略中二先明世閒禪不離名數後顯出世禪超彼名數#若見如來者如前所說入如來觀故如來心自在者如來心離諸縛故常在滅盡處者心心數法不生起不出亦不入者心體如理旡起滅故所以能得不出入者內心外境平等觀故略明文竟 經曰善男如彼諸禪觀皆爲故想定是如非復彼何以故如觀如實不見觀如相諸相已寂滅寂滅卽如義彼想禪定是動非是禪何以故禪性離諸動非染非所染非法非影離諸分別本義義故善男子如是觀定乃名爲禪 論曰此是第二廣釋於中有四一者對相以明離相二者對動以顯離動三者結義四者結名初中先擧諸禪取相諸禪觀者世間八禪言故想者不離古執旡始妄想取諸相故下顯離相是如非復彼者入如來觀能所平等名爲如故以如觀如實者平等之智達如實故不見觀如相者不見能觀之智所觀之如差別之相平等一味故旣忘能所見相不起故言諸相已寂滅寂滅旡異故卽是如義也如彼已下對動顯離動先擧其動謂世閒禪取相心卽是動念動念非靜故非眞禪也下顯眞禪離諸動相言非染者謂非能染非動念故非所染者非動所染本來靜故言非法者非能緣心法故非影者所現影像故由是義故離諸動也離諸分別本義義故者第三結義離分別者結離相義由離分別不取相故本義義者結離動義由本來靜不起動故如是觀定乃名爲禪者第四結名離相離動乃得禪名是靜慮之稱故彼世閒定名爲禪者是假號禪非眞禪故是一品內有二分中爲利根者多文廣說六分之文竟在於前 經曰舍利弗言不可思議如來常以如實而化衆生如是實義多文廣義利根衆生可修之鈍根衆生難以措意云何方便令彼鈍根得入是諦 論曰此下第二爲鈍根者少文略攝然利鈍廣略有二種門若論探解利略鈍廣利者聞一以知十故鈍者聞十方解十故若齊言解利廣鈍略者多聞而多解故鈍者誦少而摠持故今此文意約此後門文中有五一問二荅三請四說五者大衆聞說得益此卽初文於中有二先領前說後問所疑者存意多文廣義鈍根狹才難以存意 經曰佛言令彼鈍根受持一四句偈卽入實諦一切佛法攝在一偈中 論曰此是第二荅如來辯才旡㝵自在故說一偈攝諸佛法佛法之要在此四句令鈍根者誦持一偈常念思惟乃至遍知一切佛法是名如來善巧方便 經曰舍利弗言云何一四句偈願爲說之論曰是第三請 經曰於是尊者而說偈言因緣所生義 是義滅非生 滅諸生滅義是義生非滅論曰是第四說此四句義有別有摠別則明二門義摠卽顯一心法如是一心二門之內一切佛法旡所不攝是義云何前之二句融俗爲眞顯平等義下之二句融眞爲俗顯差別門摠而言之眞俗旡二而不守一由旡二故卽是一心不守一故擧體爲二如是名爲一心二門大意如是次釋其文因緣所生義者是擧一切世諦諸法是義滅者融俗爲眞謂所生義本來寂滅故言非生者顯其生義是滅之由由其生卽非生故求其生義卽不成故是故生義卽寂滅滅諸生滅義者是擧眞諦寂滅之法是義生者眞爲俗謂寂滅法從緣生起故言非滅者顯其寂滅是生之由由其寂滅非寂滅故求寂滅義不可得故是故寂滅從緣生也寂滅是生者不生之生也生義是滅者不滅之滅也不滅之滅故滅卽爲生也不生之生故生卽寂滅也合而言之生卽寂滅而不守滅卽爲生而不住生生滅不二動寂旡別如是名爲一心之法雖實不二而不守一擧體隨緣生動擧體隨緣寂滅由是道理生是寂滅寂滅是生旡障旡㝵不一不異是謂一偈摠別之義 經曰爾時大衆聞說是偈僉大歡喜皆得滅生滅生般若性空智海論曰此是第五聞說得益卽顯得解摠別道理所言滅者得上二句生義滅故次言生者得下二句滅義生故是明得二義滅生般若者是顯得二解是依別門而得利也性空智海者摠而觀之若滅若生不守自性自性空智深廣旡邊如是名爲性空智海是依摠門而得益也

7. 여래장품(如來藏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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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진(眞)과 속(俗)이 둘이 아닌 일실(一實)의 법은 모든 부처님께서 돌아가는 곳이므로 여래장(如來藏)이라 한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무량한 법과 모든 행이 이 여래장 속에 귀속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들어갈 곳[所入]을 기준으로 품 이름을 붙였다.
【經】 그 때 범행장자(梵行長者)가 본제(本際)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아뢰었다.
“존자시여, 생함의 이치는 멸하지 않으며, 멸함의 뜻은 생하지 않으니 이러한 여여함의 뜻이 바로 부처님의 보리입니다. 보리의 성품은 분별이 없으며[無分別], 그 무분별지(無分別智)는 분별이 무궁하니, 무궁한 상은 오직 분별이 멸한 것입니다. 이런 이치의 특성은 불가사의하니, 불가사의한 데라야 분별이 없나이다.”
【論】 관행(觀行)을 여섯으로 구분하여 각각 설명하는 중에 바로 앞 품에서는 모든 행이 진성공(眞性空)에서 나왔다는 것까지 설명했다.10) 이제 여섯 번째로는 무량한 법이 여래장에 들어감을 밝힌다. 이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모든 법과 모든 행이 한결같이 한곳으로 들어감을 설명한 부분이고, 둘째는 들어가는 행[入行]과 들어간 지[入智]의 인과(因果)의 차별을 나타낸 부분이다.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모든 법이 하나인 실제의 뜻에 들어감을 밝혔고, 둘째는 모든 행이 하나인 불도에 들어감을 밝혔다.
첫째에도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질문, 둘째는 대답, 셋째는 말씀을 듣고 이해함, 넷째는 결론적인 서술이다. 질문 중에도 두 부분이 있다. 먼저 앞에서 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표시하고 다음에 의심나는 곳을 묻는다.
이 물음을 던진 범행장자(梵行長者)는 속인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한 맛[一味]에 머물러 있기에 이 한 맛으로 모든 맛을 다 포괄하고 있는 사람이다. 모든 맛, 즉 더럽고 먼지 묻고 속된 모든 것을 다 거쳤으면서도, 한 맛인 범정행(梵靜行)11) 잃지 않은 자이다. 여기서는 이런 의미를 나타내려고 그 사람을 등장시켜 묻게 한 것이다.
‘본제(本際)에서 일어났다’ 함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서 본제에 들어갔다가 이제 묻기 위해 거기서 나왔다는 말이다.
‘생함의 이치는 멸하지 않는다’ 함은 전 품의 게송 뒷부분에서 ‘그것은 멸이 아니라 생이라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했다는 표시이고, ‘멸함의 이치는 생하지 않는다’ 함은 게송 앞부분에서 ‘그것은 생이 아니라 멸이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했다는 표시이다.
‘이러한 여여함의 뜻’이란 게송 전체의 뜻, 즉 불멸(不滅)과 불생(不生)이 둘이 아니라는 뜻을 알아들었기 때문에 한 말이고, 이와 같이 둘이 아닌 뜻을 모든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보리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각(覺)은 나누거나[分] 구별하지[別] 않기 때문에 둘이 아닌 데 순응하므로 ‘무분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분별이 없는 거기서라야 분별하지 않음이 없으므로 ‘무분별지는 분별이 무궁하다’고 하였다. 분별이 무궁한 이유는 다만 모든 분별을 없앴기 때문이니 ‘무궁한 상은 오직 분별이 멸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이치의 특성은 언설을 떠나고 사려(思慮)를 초월했기 때문에 불가사의(不可思議)하고, 불가사의한 가운데 생각과 말을 초월하므로 분별이 없다. 이렇게 해서 앞에서 설한 게송의 의미를 이해했음을 표시하였다.
【經】 “존자시여, 일체의 법수(法數)가 한량없고 끝이 없으나 끝없는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인 한 성품이니, 오직 이 한 성품[一性]에 머문다는 것은 어떤 일입니까?”
【論】 이는 의심나는 바를 묻는 말씀이다. 소승교(小乘敎)에는 8만(萬)의 법온(法蘊:교법의 묶음)이 있고, 한 묶음[蘊]의 양(量)에 백을 열 번 곱한 만큼의 수가 있다. 그러나 지금 대승교(大乘敎)에는 8만뿐이 아니므로 ‘법수가 한량없고 끝이 없다’고 하였다. 끝없는 교법(敎法)으로 나타내는 이치는 다른 갈래가 없는, 오직 하나이며 실제인 뜻[唯一實義]이다. 교법은 많으나 오직 한 가지 성품에 머문다는 점을 매우 알기 어려우므로 그 일을 묻는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불가사의하다. 내가 갖가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미혹한 사람을 위해서 방편도(方便道)를 쓰기 때문이나 모든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에서 나온 하나의 지혜[一實義智]이다. 어째서 그런가? 비유컨대 한 도시에 사방으로 대문이 열려 있는 경우, 이 네 개의 대문이 모두 하나의 도시로 통하듯이 저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들어가는 갖가지 맛의 법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論】 답 중에는 주장[法]ㆍ비유[喩]ㆍ비유를 법에 종합함[合] 셋이 있다.
‘내가 갖가지 법을 설하는 이유’란 삼승교(三乘敎)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미혹한 사람을 위해서’란 아직 일미(一味)에 통달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 설한다는 뜻이다. ‘방편도를 쓰기 때문’이란 모두 일미(一味)에 들어가게 하는 방편이라는 뜻이니 정관(正觀)에 들 때는 언설의 교법(敎法)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법상(法相)은 실제의 이치에서 나온 하나의 지혜[一實義智]’라 함은 모든 교법에 의해 들어가는 곳의 모습은 오직 하나의 실제인 정관(正觀)의 지혜이기 때문이다.
비유 중에 ‘한 도시’란 하나인 실제의 이치다. ‘사방으로 대문이 열려 있다’ 함은, 네 가지 교(敎), 즉 삼승교(三乘敎)와 일승교(一乘敎)를 비유한 것이다. ‘네 개의 대문이 모두 하나의 도시로 통한다’ 함은 네 가지 가르침에 의하여 모두 하나의 실제에 돌아가기 때문이다. ‘저 중생들의 마음에 따라 들어간다’고 한 것은 근기(根機)의 얕고 깊은 정도에 따라서 한 교[一敎]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한 도시를 하나의 실제에 비유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백성이 들어갈 곳이며 모든 중생이 돌아갈 곳이기 때문이다.
비유를 법에 맞추는 부분[合]에서 ‘갖가지 법’이란 ‘사방의 대문’에 해당하고, ‘맛’이란 들어가는 갈래의 맛이니 ‘한 도시’에 해당한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법이 그러하다면, 제가 한 맛[一味]에 머물면 모든 맛을 포함할 수 있겠나이다.”
【論】 이는 세 번째, 이해했음을 나타낸[領解]부분이다.
‘모든 맛을 포함한다’ 함은 모든 교[敎]의 맛을 포섭하여 일실(一實)로 귀결하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한 맛인 참뜻은 그 맛이[어떤 본에는 ‘味’ 자가 없다] 하나의 큰 바다와 같아서 들어오지 않는 물줄기가 없기 때문이다. 장자야, 모든 법의 맛은 마치 여러 갈래 물줄기와 같아서 이름과 수량이 다르지만 그 물임에는 차이가 없다. 큰 바다에 머물면 온갖 물줄기가 다 포함되듯이 한맛[一味]에 머물면 모든 맛을 다 포함한다.”
【論】 이는 결론적인 서술[述成]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하나는 전체적인 서술[總述]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인 서술[別成]이다. 별성 중에도 법(法)ㆍ유(喩)ㆍ합(合)의 셋이 있다. 합 중에는 둘이 있으니, 첫째는 ‘모든 물줄기’에 배대시킨 부분인데, 먼저 법(法)에 배대한 다음 비유를 다시 들었다. 둘째로는 ‘온갖 물줄기가 다 포함된다’한 데 배대시킨 부분인데, 먼저 비유를 들고나서 법에 맞추어 결론짓는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모든 법이 한 맛이라면 어째서 3승(乘)의 도(道)가 있으며 그 지혜에 차이가 있나이까?”
【論】 이하는 두 번째, 모든 행(行)이 하나인 불도[一佛道]에 들어옴을 밝힌 부분이다. 먼저 묻고 다음에 대답하는데, 이 문장은 차이를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자야, 강(江)ㆍ하(河)ㆍ회(淮)ㆍ해(海)에는 크기가 다르고 깊이가 달라서 이름에 차이가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물이 강 속에 있으면 강수(江水)라 부르고, 물이 회(淮) 중에 있으면 회수(淮水)라 부르고, 물이 하(河) 중에 있으면 하수(河水)라 부르나, 이들이 바다에 있으면 모두에다 바닷물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법도 이와 같아서 진여(眞如)에 있을 때 모두에다 불도(佛道)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論】 두 번째로, 답에는 비유가 있고, 비유를 법에 맞추는 부분이 있다.
‘강하회(江河淮)’란 3승의 행(行)을 비유하고, ‘바다’는 불도를 비유한다. ‘크기의 차이’란 3승의 마음을 비유하니 넓고 좁음이 같지 않기 때문이며, ‘깊이의 차이’란 3승의 지혜를 비유하니 우열에 차이가 있기 때문인데, 이 두 가지 뜻에 따라 이름이 다르다. ‘바다에 있으면 모두에다 바닷물이라는 단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함은 저 3승이 다 같이 10지(地)의 법공진여(法空眞如)에 들어오면 3승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오직 불도라고만 부르는 일을 비유한다.
3승으로 차별된 행(行)이 모두 지전(地前)의 방편도(方便道)에서 있으나 마침내 진여를 정관(正觀)하는 경지에 다 들어가므로 삼승이 별도로 들어가는 귀착점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모든 교법(敎法)이 한 맛에 다같이 들어가는 것과 같다. 어디가 비유이고 어디가 비유를 법과 맞춘 문장인지는 본문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經】 “장자야, 하나의 불도(佛道)에 머물면 3행(行)에 통달한다.”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어떤 것을 3행이라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첫째는 일에 따라 취하는 행[隨事取行]이고, 둘째는 식에 따라 취하는 행[隨識取行]이고, 셋째는 여여에 따라 취하는 행[隨如取行]이다.”
【論】 이하는 두 번째12) 들어가는 행[入行]과 들어간 지혜[入智]의 인과차별(因果差別)을 드러낸 부분이다. 그 중에 네 부분이 있다.
첫째는 입행차별(入行差別)이요, 둘째는 입지차별(入智差別)이요, 셋째는 입인사용(入因事用)이며, 넷째는 입과상주(入果常住)이다.
첫째에도 세 부분이 있으니 첫째는 전체적인 표방[摠標], 둘째는 질문, 셋째는 대답이다.
‘하나인 불도에 머문다’ 함은 초지(初地) 이상을 불도에 머문다고 한다. 세 가지 지혜를 갖추고 세 가지 행에 통달하기 때문이다.
답에는 개별적인 설명[別明]과 전체적인 해석[摠釋] 둘로 나뉜다.
개별적인 설명 중에, ‘일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4제(諦)와 12연기(綠起)에 의해 인과의 일에 따라서 도품행(道品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식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모든 중생은 오직 하나인 마음이 짓는 것이므로 유식의 도리에 따라 4섭행(攝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여여함에 따라 취하는 행’이란 모든 법(法)이 다 평등하므로 평등한 여여(如如)를 따라서 6도행(度行)을 취한다는 것이다. 행(行)을 마음에 포섭하기 때문에 취한다는 것이지, 능(能)ㆍ소(所)를 분별하는 취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經】 “장자야, 이와 같은 3행(行)은 많은 문(門)을 다 포섭하니, 어떤 법문(法門)도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 이런 행(行)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空相)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렇게 들어간 자는 여래(如來)에 들어갔다고 하겠다. 여래에 들어간 자는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이다[入如來者 入入不入:어떤 본에는 ‘入如來藏者 入不入故’라고 되어 있다].”
【論】 이는 3행(行)을 전체적으로 해석하는[總釋] 말씀이다.
수사행(隨事行)이란 소승문(小乘門)과 공통되는 행이고, 수식행(隨識行)이란 대승문(大乘門)에만 있는 행인데 이 둘은 다 차별문(差別門)이다. 세 번째는 평등문(平等門)이다. 이와 같은 도리(道理)로 ‘많은 문을 다 포섭한다’고 하였다.
또 도품행(道品行)은 생사에 머물지 않는 문이며, 4섭행(攝行)은 열반(涅槃)에 머물지 않는 문이며, 수여도행(隨如度行)은 평등하여 둘이 아닌 문이기 때문에 ‘어떤 법문도 여기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행(行)에 들어가는 자는 공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함은 비록 여여에 따라 행을 하지만 항상 일에 따르고 식에 따라서 행하기 때문에 공상(空相)을 취하여 적멸(寂滅)에 머물지 않는다. ‘여래에 들어갔다고 하겠다’는 것은 일에 따르고 식에 따르지만 항상 여여에 따라 평등행(平等行)을 취하기 때문에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할 만하다.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入入不入]’이라 함은 그 들어가는 마음이 들어가지 않음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능입(能入)과 소입(所入)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으므로 ‘들어가지 않음[不入]’이라고 하였다. 능소가 별개로 있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하나도 아니므로 관심(觀心)의 측면에서 임시로 ‘들어가는 마음’이라고 이름 붙여 본 것이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마음은 들어간다는 관념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에 ‘그 들어감이 들어가지 않는 곳에 들어간 것’이라 하였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여래장(如來藏)에 들어가는 일은 마치 싹[苗]이 열매[實]를 맺는 것과 같아서, 들어가는 처소가 없이 본래 뿌리의 이로운 힘에 의해서 이익이 성취되어 본래 것을 얻으니, 본래의 실제[本實際]를 이루었을 때 그 지혜가 어느 정도 되나이까?”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들어가는 지혜의 차별[入智差別]을 설명한 부분이다. 먼저 질문하고 다음에 대답했다. 물음 중에도 먼저 앞에서 하신 말씀을 이해했음을 표시한 다음에 의심나는 것을 묻는다.
‘싹이 열매를 맺음과 같다’라고 한 것은 흡사 곡식의 싹이 이삭이 되어 열릴 때 들어가는 자[能入者]도 없고, 들어가는 곳[所入處]도 없다는 것이다. 여래장(如來識)에 드는 것도 그런 줄 알아야 한다. 싹은 본각(本覺)의 이익을 비유하고 열매는 본각을 얻음을 비유하니 들어가는 때가 평등하여 들어가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지혜가 무궁하나 간략히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여여함을 따르는 정지(定智), 둘째는 방편으로 꺾어 부수는 부정지(不定智), 셋째는 전각(電覺)13)을 제거하는[除電覺:어떤 본에는 ‘慧除電覺’이라고 되어 있다] 열반지(涅槃地), 넷째는 실제에 들어가 도를 구족한 구경지(究竟智)다.
장자야, 이와 같은 네 가지 큰 일의 작용은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다. 이는 큰 다리며 큰 나루니,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이 지혜를 써야 한다.”
【論】 이것은 두 번째인 대답인데, 여기에 세 가지가 있다. 즉 전체적인 표방[摠標], 개별적인 해석[別釋], 전체적인 설명[摠明]이다.
총표(摠標) 중에서 ‘그 지혜가 무궁하다’ 함은 통달한 바가 끝없기 때문에 그 지혜도 무궁하다는 말인데, 비슷한 것끼리 묶어 상대적으로 대략 분류해서 말하기 때문에 단지 넷이 된 것이다.
별현(別顯) 중에 ‘정지(定智)’란 평등성지(平等性智)다. 정관(正觀)에만 있고 방편을 짓지 않기 때문에 정지라고 한다. 말나식[末那識]14)의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을 대치(對治)하고 평등을 관(觀)함을 따르기 때문에 ‘여여함을 따른다[隨如]’고 하였다.
‘부정지(不定智)’란 묘관찰지(妙觀察智)다. 제6식에 있으면서 방편을 써서 진취(進取)하기 때문에 ‘부정’이라 하였고, 방편도(方便道)를 닦을 때 이름이나 일[名事] 등의 상(相)을 추적하여 꺾어 부수므로 ‘꺾어 부순다[摧破]고 하였다. 이 지혜는 사실상 방편관(方便觀)ㆍ정관(正觀)에 다 통하나 다만 정지(定智)와 구별하기 위해서 하나는 생략하고 방편만을 들었을 뿐이다.
‘열반지(涅槃智)’란 성소작지(成所作智)다. 8상(相)을 나타내어 불사(佛事)를 하는데, 그 마지막 모습을 들어서 열반지라고 부른다. 5식(識)을 없애 이 지혜를 얻으니, 그런 뜻에서 ‘전각을 없앤다[除電覺]’고도 한다. 전각(電覺)이란 5식(識)이 번개처럼 일어났다 사라졌다 하기 때문에 붙인 말이다.
‘구경지(究竟智)’란 대원경지(大圓鏡智)다. 마지막 지위[究竟位]에서만 이 지혜를 얻기 때문에 ‘구경’이라 하는데, 끝까지 밝히지 못한 경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인 실제의 이치에 들어가기 때문에 ‘실제에 들어간다[入實]’ 하였으며, 나타나지 않는 경계가 없으므로 ‘도를 구족한다[具足道]’고 하였다.
다음 총명(摠明) 중에서 ‘네 가지 큰 일의 작용[四大事用]’이라 함은 작용이 미치지 않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이 설하신 것’이란 모든 부처님의 길[道]이 같기 때문이다. ‘큰 다리’란 이 네 가지 지혜로 3승(乘)의 사람들을 태우고 1승(乘)의 피안(彼岸)에 도달하게 하기 때문이다. ‘큰 나루’란 이 네 가지 지혜를 써서 6도(道)를 두루 거쳐가며 세간을 벗어나는 길을 보여 주고, 애욕의 강을 건너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화하려는 자는 이 지혜를 써야 한다는 것이다.
【經】 “장자야, 이 대용(大用)을 쓰는 데도 세 가지 큰 일이 있다. 첫째 세 가지 삼매에서는 안팎[內識ㆍ外境]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 것이며, 둘째 대의과(大義科)에서는 도리를 따라 택멸(擇滅)하는 것이며, 셋째 여여한 혜(慧)와 정(定)에서는 자비로 양쪽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보리를 성취시킨다. 이 일을 행하지 않으면 저 네 가지 지혜의 바다로 들어갈 수 없으며, 모든 큰 마구니[大魔]가 틈을 타게 될 것이다. 장자야, 너희들 대중은 성불할 때까지 잠시도 놓치지 말고 항상 닦고 익혀야 한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들어가는 원인이 되는 일과 작용[入因事用]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이를 둘로 구분한다. 하나는 장행(長行)이고, 다른 하나는 중송(重頌)이다. 장행 중에도 세 부분이 있다. 간략한 설명[略明], 거듭 설명함[重顯], 이해했음을 나타냄[領解]이다. 처음 중에도 전체적으로 표방함[摠標], 개별적으로 해석함[別解], 종합해서 밝힘[合明], 결론을 맺으면서 수행을 권함[結勸] 네 부분이 있다.
‘이 대용을 쓰라’고 한 것은 앞에서 설한 네 가지 지혜의 대용(大用)을 가리키는 말인데, 지상(地上)에서 불과(佛果)의 지위까지 해당한다.
‘세 가지 큰 일’이란 능히 네 가지 지혜를 성취하는 일에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지전(地前)의 4위(四位:信ㆍ住ㆍ行ㆍ廻向)에서 닦는 행(行)이다. 이 세 가지 일[三事]은 정(定)과 혜(慧)와 정ㆍ혜가 함께 행해지는 일이며 대비(大悲)를 체(體)로 한다.
먼저 ‘정(定)’이란 세 가지 삼매를 말하는데, 여기에는 서로 다른 많은 설이 있다. 혹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이라고도 하고, 혹은 무작(無作)ㆍ무상(無相)ㆍ공공(空空)이라고도 하며, 또 혹은 공(空)ㆍ무작(無作)ㆍ무상(無相)이라고도 하는데, 편의에 따라 세운 것이라 서로 걸릴 것이 없다. 혹 3해탈(解脫)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오직 무루(無漏)에만 해당하고, 세 가지 삼매라고 부르는 경우는 유루(有漏)에도 통한다.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아래 글에서 설명하겠다.
‘안팎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다’ 함은 내식(內識)15)과 외경(外境)16)이 함께 나타나면서 선택적으로 맞고 안 맞음을 취함으로써 모든 선근(善根)을 서로 빼앗지만, 지금은 모두가 공(空)임을 통달하여 서로 빼앗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대의과에서는 도리를 따라 택멸한다’ 함은 4대(大)와 3법문(法門:陰ㆍ界ㆍ入)에 대해서는 도리[理]에 따라 간택(簡擇:틀린 것을 배제하고 옳은 것을 선택함)하여 모든 상(相)을 깨부숨으로써 본식(本識)의 희론종자(戱論種子:虛妄分別)를 눌러 없앤 것이다. 앞의 삼삼매(三三昧)는 현행(現行)의 번뇌[纏]을 누르는 데 비해, 여기서 말하는 간택의 지혜는 종자(種子)를 누르는 것이니, 이렇게 해서 마침내 4지(智)를 이룰 때 종자를 뽑아내고 8식(識)을 (지혜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여여한 혜와 정에서는 자비로 양쪽을 이롭게 한다’ 함은 앞의 혜(慧)와 정(定)이 모두 여여(如如)한 도리에 따르기 때문에 여여한 혜, 여여한 정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 중에 또 대비(大悲)를 닦는 일이 상응(相應)하여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양쪽을 이롭게 한다[俱利]’고 하였다. 왜냐하면 만일 대비를 떠나 정과 혜만을 닦으면 2승(乘)의 경지에 떨어지고 보살도(菩薩道)에는 지장을 주기 때문이다. 또 가령 자비만 일으키고 정ㆍ혜를 닦지 않으면 범부(凡夫)의 고질[患]에 떨어져 보살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를 닦아 양쪽에 치우침을 떠나서 보살도를 닦아야 무상각(無上覺)을 이룬다.(여기까지가 두 번째인 別解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이 보리를 성취시킨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를 함께 행하지 않는 자는 생사에 머물고 열반에 집착하여 4지(智)의 대해(大海)에 흘러 들어갈 수 없으므로, 네 가지 마[四魔]가 틈을 타 들어올 수 있다. 이는 셋째로 합명(合明:총표와 별해를 합하여 설명함)에 해당하고, 그 다음 나오는 문장(“장자야, 너희들 대중 ……”)이 수행을 권하는 내용[勸修]으로서 네 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무엇을 세 가지 삼매라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삼매란 이른바 공삼매(空三昧)와 무작삼매(無作三昧)와 무상삼매(無相三昧)다.”
【論】 여기서부터는 거듭 설명하는 부분[重顯]인데, 두 개의 문답으로 앞의 두 문(門)을 설명하였다. 위 경문은 첫 문을 밝힌 것인데, 이 세 가지 차별에 대략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체용상(體用相)이고, 둘째는 심인과(心因果)이고, 셋째는 식견상(識見相)이다.
‘체용상’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법이 이 세 가지 법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인데, 그 체가 공하므로 공삼매를 세우고, 작용하는 바가 없으므로 무작삼매를 세우고 형상이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세운다.
‘심인과’를 말하는 이유는 인과로 일어나는 것은 심행(心行)에서 일어나기 때문인데, 심행이 공하므로 공삼매를 세우고, 모든 인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무작삼매를 세우고, 모든 과(果)를 얻을 수가 없으므로 무상삼매를 세운다.
‘식견상’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식[諸識] 자체가 공한 까닭에 공삼매를 세우고, 견분(見分)을 제거하는 까닭에 무작삼매를 세우고, 상분(相分)을 제거하는 까닭에 무상삼매를 세운다. 이는 제3문(第三門)으로 앞에서 ‘안팎이 서로를 빼앗지 않는다[內外不相奪]’고 한 글에 맞춘 것이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무엇을 대의과(大ㆍ義ㆍ科)라고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大)란 4대(大)를 말하고, 의(義)란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을 말하고, 과(科)란 본식(本識)을 말하니 이것을 대ㆍ의ㆍ과라고 한다.”
【論】 이는 두 번째 문(門)을 설명한 것이다. 4대를 따로 세운 이유는 처음 닦아 갈 때 먼저 거친 경계를 가려내기 위해서이다. 모든 법 중에 안의 지체(支體) 등과 밖의 산하(山河) 등 색법(色法)이 가장 거칠다. 이런 법들이 4대를 떠나 있지 않음을 관(觀)하며, 이 4대가 방분(方分)을 갖건 아니건 간에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4대를 얻을 수 없다고 관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려내고[簡擇] 난 뒤에 미세한 뜻을 관찰한다. ‘미세한 뜻[義]’이란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말하는데,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과 중간 것이 있다. 간략하게 묶어보면 다섯[五蘊]이고, 자세하게 관찰해 보면 열여덟[十八界]이고, 간략한 것과 자세한 것의 중간으로는 12입(入)을 관하는데, 이 모든 것이 얻어질 수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다음에 ‘등(等)’이란, 그 밖의 다른 법문인 12지(支) 등을 가리킨다. 이렇게 간택하여 관찰하는 힘 때문에 본식(本識) 안에 있는 무시(無始) 이래의 희론명언종자(戱論名言種子)17)를 덜어내고 누른다[損伏]. 처음에는 덜고 누르고 하다가 마침내는 끊어 없애므로[斷滅], 앞에서 도에 따라서 택멸한다[隨道擇滅]’고 하였다.
【經】 범행장자가 아뢰었다.
“불가사의합니다. 이런 지혜의 일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함으로써 삼계(三界)의 경지를 넘어서나 열반에도 머물지 않고 보살도에 들어가게 합니다. 이런 법상은 분별이기 때문에 생멸하는 법이니, 분별을 떠나면 법이 멸하지 않을 것입니다.”
【論】 이는 세 번째, 이해했음을 나타낸[領解] 부분인데 여기에 둘이 있다. 먼저는 관행(觀行)을 이해한 것이고, 다음은 경계(境界)를 이해한 것이다.
‘이런 지혜의 일’이란 이 세 가지가 4지(智)를 성취하는 일과 작용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이롭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한다’ 함은 앞의 둘[定ㆍ慧]은 자기를 이롭게 하고, 세 번째 것[大悲]은 남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다.
‘삼계의 경지를 넘어선다’ 함은 앞의 둘, 즉 정(定)과 혜(慧)가 범부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이다.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세 번째의 대비(大悲)는 2승(乘)의 경우와 다르기 때문에 저 극단을 떠나서 보살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런……’ 이하는 저 경계를 이해했다는 말이다. 처음에 정(定)의 경계가 모든 식의 견분과 상분임을 알고, 다음에 지혜의 경계가 대(大)ㆍ의(義)ㆍ과(科)의 법임을 안다. 이런 모든 법상(法相)은 모두 생멸하는 법이니, 망분별(妄分別)로 말미암아 마음의 바다를 동요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래 고요한 것이라서 분별을 떠난다면 빌미가 될 것이 없으니, 무엇을 근거로 생멸(生滅)을 하겠는가? 그러므로 ‘법이 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분별로부터 생기고
다시 분별을 따라 없어지므로
모든 분별법을 없애면
이 법은 생멸이 아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入因事用을 長行과 重頌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인 중송이다. 이 중에 두 부분이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간략히 펴신 게송이고, 둘째는 장자가 자세히 연설한 게송이다.
지금 이 게송에서 말씀하신 ‘법’이란 일심법을 가리킨다. 허망한 분별이 마음바다를 요동시키기 때문에 생하거나 멸하는 모든 모습이 예외 없이 분별에 의해 일어나지만, 만약 본각(本覺)의 본래 고요한 쪽으로 본다면 모든 분별을 떠나 있으므로 이 법은 생하거나 멸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본래부터 모든 분별을 멸해서 생멸할 만한 원인이 없으므로 생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생(生)과 멸(滅)의 관계를 모두 분별이 지어낸 것으로 본다면, 다음과 같은 『유가론(瑜伽論)』의 설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는가? 『유가론』 「사소성지(思所成地)」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남을 멸(滅)하는 작용도 없고, 스스로 멸하는 작용도 없다. 묻겠다. ‘그렇다면 갖가지 연[衆緣]이 있어서 생하고 갖가지 연이 있어서 멸하는가?’ 대답한다. ‘갖가지 연이 있으므로 생겼고, 생겨나서는 저절로 없어진다.’”
두 설이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연관지을 수 있는가? 나는 이렇게 이해한다. 『유가론』에서는 인연(因緣) 도리를, 이 경에서는 유식(唯識) 도리를 설명한 것이므로 두 가지 설에 모두 일리가 있다.
【經】 그 때 범행장자가 게송을 듣고 매우 기뻐서 그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말하였다.

모든 법은 본래 적멸이요
적멸 또한 생함이 없나이다.
생멸하는 이 모든 법
그 법은 무생(無生)이 아닙니다.

저것은 이것과 함께하지 않나니
단(斷)ㆍ상(常)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양쪽을 떠났으며
하나에 머물지도 않나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장자가 자세히 펼친 게송이다. 여덟 수로 되어 있는데 (의미상) 다섯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두 송[1,2]은 앞 내용을 직접적으로 펼친 것이고, 둘째 두 송[3,4]은 그릇된 이해[邪解]들을 깨주는 것이고, 셋째 한 송[5]은 자신이 정확히 이해했음을 나타내는 것이고, 넷째 두 송[6,7]은 정설(正說)해 주신 분에게 경례를 하는 것이고, 다섯째 마지막 한 송[8]은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을 말씀해주십사 청한 것이다.
이 게송은 앞 내용을 직접적으로 펼친 첫 번째에 해당하는데, 여기에도 세 부분이 있다. 첫째 두 구는 앞에서 부처님께서 간략히 펼친 게송 중 뒷부분을 읊은 것이고, 둘째 두 구는 그 앞부분을 읊은 것이다. 셋째 한 송은 이 두 가지 뜻을 전체적으로 연설한 것이다.
첫째에서 ‘모든 법은 본래 적멸’이란 음(陰)ㆍ계(界) 등의 법이 본래 적멸하다는 뜻이다. ‘적멸 또한 생함이 없다’ 함은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할 뿐만 아니라, 적멸하다는 도리 역시 생함이 없다는 말이다.
둘째에서 ‘생멸하는 이 모든 법’이란 음ㆍ계 등 세속법을 말한다. ‘그 법은 무생이 아니다’ 함은 분별을 따라 동(動)하여 일어남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진(眞)과 속(俗)이 하나가 아니라는 쪽에서 동(動)과 정(靜)이 뒤섞이지 않는다는 뜻을 나타낸다.
셋째에서 ‘저것은 이것과 함께하지 않는다’ 함은 생겨남 없는 저 적멸법은 이 생멸법과 함께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단ㆍ상에 빠지기 때문’이란, 저 적멸법이 이 생멸법과 함께한다고 주장한다면, 생멸하는 이 법은 단멸에 치우치게 되고[斷邊], 상적(常寂)한 저 법은 상주에 치우치게 된다[常邊]. 이는 2승(乘)의 잘못[過]과 같아서 중도(中道)에 위반되므로 ‘단ㆍ상에 빠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한 게송의 의미는 단과 상의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므로 ‘이것은 둘을 떠났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동정이 없는 것은 아니므로 ‘하나에 머물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하나에 머물지도 않는 이유는, 일실(一實)인 일심(一心)의 성품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을 떠난 이유는 전체가 움직이고 전체가 고요하여 두 개의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불가사의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經】 법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 모양은 모륜(毛輸)18)과 같을 것이며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으니
모두 다 허망한 것입니다.

법이 없다고 본다면
이 법은 허공과 같으니
해가 없다하는 장님의 뒤바뀐 견해라
법을 거북 털과 같다고 하는 격입니다.

【論】 두 송은 둘째, 그릇된 이해들을 깨뜨려주는 말이다.
그릇된 이해가 매우 많지만 크게는 두 가지가 있다. 매우 깊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는 문자 그대로를 뜻이라 착각하고 스스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이런 이들은 교화하기 어렵다. 첫째 큰 잘못은, 동정무이(動靜無二)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은 하나다, 즉 일실(一實)한 일심(一心)이다’라고 생각하여 2제(諦)의 도리를 비방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둘째 큰 잘못은 공(空)과 유(有) 2문(門)이 있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일실(一實)이 있는 게 하니라 2법(法)이 있다’고 생각하여 무이중도(無二中道)를 비방하고 배격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그릇된 이해는 약을 먹고 오히려 병에 걸리는 것과 같다. 고치기 어려우므로 지금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밝힌다. 이 두 게송에서 차례로 그것을 설명한다.
‘법에 하나가 있다고 주장한다’ 함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하나의 실제[一實]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자기 생각대로 하나의 법[一法]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송했다. ‘그 모양은 모륜과 같을 것’이란 그 사람이 생각하는 일실법의 모습이 눈병 난 사람에게 보이는 모륜(毛輪)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아지랑이를 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함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보고 물이라 생각하여 쫓아 달려가는 것이 미혹과 전도일 뿐인데, 일심(一心)이 있다는 생각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모두 다 허망한 것’이라 함은 목마른 사슴이 아지랑이를 물로 보는 것과 눈병 난 사람이 모륜을 보는 것과 배우는 이가 하나를 있다고 생각하는 등 이런 견해들이 똑같이 허망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견해[無見]를 깨뜨린다.
‘법이 없다고 본다’ 함은 앞에서 말했듯이 2제(諦)는 있고 일심법(一心法)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법은 허공과 같다’ 함은 그가 생각하는 일심이 공의 이치와 같을 것이며, 그 공리 밖에는 본래 일실(一實)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한 말이다.
‘해가 없다하는 장님의 뒤바뀐 견해’란 태어날 때부터 눈 멀고 가난한 거지라서 한번도 햇빛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는 해가 있다고 알려 주어도 없다고 하면서 해가 있음을 믿지 않는 것이다. 이는 전도(顚倒)일 뿐이다. 저들도 마찬가지로 본래 공(空)과 유(有)만 배우고 무이중도(無二中道)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 말해주는 사람이 있을지라도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해를 중도(中道)에 비유한 이유는 둥근 해는 원만한 데다 큰 빛이 있어서 눈 먼 사람말고는 다 보기 때문이다. 일심(一心)도 이와 같아서 결함 없이 두루 원만하고 본각과 시각의 큰 빛이 있으므로, 믿지 않는 자 말고는 다 들어간다.
‘법을 거북 털과 같다고 하는 격’이란, 없다는 견해에 빠진 자가 일심법을 두고 ‘이름일 뿐 체가 없다’고 하는 것이 마치 거북이 털이 있다고 하는 격이라, 해가 없다고 하는 장님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經】 제가 이제 부처님 말씀을 듣고
법을 2견(見)으로 알지도 않고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아서
머묾 없음에서 이해합니다.

【論】 이 게송은 셋째로 자기 자신이 정확히 이해했음을 표시한 것이다.
‘법을 2견(見)으로 알지 않는다’ 함은 중도(中道)의 법은 있다, 없다는 견해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는 말이다. 즉 앞 두 번째에서 ‘해가 없다’고 한 전도견을 떠난 것이다.
‘중간에 의지해 머물지도 않는다’ 함은 양 극단을 떠났다고는 하지만 중도인 일실(一實)에 머무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잘못된 견해를 깨뜨려주는 가운데) 첫 번째[8수 중 제3, 제4] 게송에서 비유로 든 눈병 난 사람과 목마른 사슴의 허망을 떠났다는 것이다. 이렇게 두 극단에 떨어지는 과실(過失)을 떠났으므로 ‘머물 바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밝혀진 머묾 없는 이치를 이해하였다. 그러므로 ‘머묾 없음에서 이해합니다’라고 하였다.

【經】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 다 머묾 없음을 따르니
저도 머묾 없는 곳[無住處]을 따라
이곳에서 여래께 예배드립니다.

허공같이 동요하지 않는 지혜이신
여래의 모습에 예배하나이다.
어느 곳에도 집착 없으신 분
머묾 없는 그 몸에 예배하나이다.

【論】 이 게송은 네 번째로, 설해 주신 분에게 예배를 하는 부분인데 그 중에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설법해 주신 분에게 경례하는 앞의 한 송이고, 둘째는 설법하신 분의 지혜에 경례하는 다음 두 구이고, 셋째는 설법해 주신 분의 몸에 경례하는 마지막 두 구이다.
첫째 설해 주신 분에게 경례하는 부분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은 모두 다 머묾 없음을 따른다’ 함은, 부처님의 교법이 머묾 없음에 순종(順從)하기 때문이다. ‘저도 머묾 없는 곳을 따라 이곳에서 여래께 예배드립니다’ 함은 가르침을 듣고 무주처(無住處)에 순종하게 되어, 가장 존중받을 만한 분이 여래임을 더 잘 알게 되었기 때문에, 설하신 분께 이 무주처(無住處)에서 예배하는 것이다. 이 중에 ‘무주(無住)’라고 한 것은 2제(諦)에 머물지 않으면서도 중간에도 있지 않고, 중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양 극단을 떠난 것을 말하니, 이런 것을 무주처라고 한다.
두 번째(설법하신 분의 지혜에 경례하는 부분)에서 ‘여래의 모습’이란, 상호(相好)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동지(不動智)를 말한다. ‘허공 같이’라 함은 여래의 지혜는 한량없고 끝없어 허공계(虛空界)와 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한 말이다. ‘동요하지 않는다’ 함은 끝없는 3세(世)에 두루 통달했다는 뜻이다. 시간에는 흐름이 있으나 지혜의 작용은 이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 번째(설법해 주신 분의 몸에 경례하는 부분)에서 ‘집착 없다[不着]’ 함은 법신(法身)이 두 가지 극단을 떠났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도……없으신’이라 함은 중간에 머무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묾 없는 그 몸에 예배하나이다’라고 하였다.

【經】 저는 그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오니
모든 여래께서는 부디
저를 위해 상법(常法)을 설해 주소서.

【論】 이는 다섯 번째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묻는 대목이다. 그 중 앞부분에서는 항상 여래를 뵙는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고, 뒷부분에서는 상법(常法)을 말씀해주십사 청하였다.
스스로 말한 부분은 자기가 모든 극단을 떠나 머묾 없는 지혜를 얻었으므로 하나하나의 미진(微塵) 중에 항상 시방세계의 무량한 부처를 뵈오며, 시방세계의 모든 미진 중에서 무량한 부처를 보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 어느 곳에서나 항상 모든 여래를 뵈오니’라고 하였다.
“일미진(一微塵) 중에 두루 무량한 부처님을 뵈옵고, 그 일미진 중에서와 같이 일체진(一切塵) 중에서도 그러하다”고 한 『화엄경』의 말씀과 같다. 그러므로 이런 힘이 있어야 상법(常法)을 들을 만하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실 상법을 듣고자 한 것이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아, 너희들은 잘 들어라. 너희들을 위하여 상법을 설하리라.”
【論】 여기서부터는 네 번째19), 입과상법(入果常法)인데, 이 중에 셋이 있다. 첫째는 여래께서 설하는 부분, 둘째는 장자가 부연하는 부분, 셋째는 대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이다. 첫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말해주겠다고 허락하는 부분과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위 문장은 허락에 해당한다.
【經】 “선남자야, 상법(常法)은 상법이 아니어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이치[諦]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로 나타난 것도 아니어서, 모든 망집(妄執)과 단견(斷見)의 경계를 떠났다. 이 법은 무상(無常)이 아니므로 모든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을 떠난 것이다. 모든 식(識)을 투철하게 보면 상(常)이 되나니, 이 식(識)은 항상 적멸하며, 적멸이라는 그것도 적멸하다.”
【論】 이 아래는 내용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상과(常果)를 설명하고, 다음에 상인(常因)을 보여 준다. 먼저 상과를 설명하는 가운데 두 구절은 법상(法常)과 불상(佛常)을 말하고 있다.
처음 중에 ‘상법은 상법이 아니라’ 함은, 부처님이 스승으로 삼는 법신의 체(體)는 생멸상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라 하고, 상주성(常住性)을 떠나 있으므로 ‘상법이 아니라’ 하였다.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문자로 나타낼 수 있는 것도 아니라’ 함은 설명하는[能詮] 명언(名言)을 끊었기 때문이고, ‘이치[諦]도 아니고 해탈도 아니라’ 함은 설명될[所詮] 실의(實義)를 초월했기 때문이다. ‘없는 것도 아니고 경계로 나타난 것도 아니어서 모든 망집(妄執)과 단견(斷見)의 경계[際]를 떠났다’ 함은 아예 없는 것[畢竟無:토끼 뿔 같은 것)도 아니며, 경계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경계가 있지 않으므로 망집의 경계를 떠났으나, 무가 아니므로 단견의 경계를 떠난 것이다. ‘제(際)’는 경계의 다른 이름이다.
‘이 법은 무상이 아니므로 모든 상견과 단견을 떠난 것이라’ 함은 무상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단견을 떠났으나, 이 법 때문에 모든 상견을 떠난다. 상견이 취한 바는 이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법상(法常)을 밝혔다. 다음에는 불상(佛常)을 드러낸 부분이다.
‘모든 식을 투철하게 보면 상(常)이 된다’ 함은 그 상법을 남김없이 보아서 완전히 보았을 때 모든 식(識)이 항상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에서는 무명을 따라 본래 고요한 마음이 동요했지만 지금 투철히 봄에 따라서 본래의 고요함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식은 항상 적멸하며’란 모든 식은 본래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생멸이 없기 때문에 성(性)이 항상 적멸하다는 뜻이다. 지금 똑똑히 보아서 그와 같은 적멸한 식(識)이 영원히 없앴으므로 ‘적멸이라는 그것도 적멸하다’고 하였다. 그 까닭은 저 적멸식(寂滅識)이 무상한 법이므로 저것을 없앨 때 항상함을 얻기 때문이다. 이하 「총지품(總持品)」에 이르기까지 이 뜻을 설명하게 될 것이다.
또 본래 적멸한 이 성품은 항상성[常性]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그것도 적멸하다’고 하였다.
【經】 “선남자야, 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는 마음을 적멸하게 하지 않으니 마음이 항상 적멸하기 때문이다. 적멸을 얻은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되게 관한다.”
【論】 (常果를 설명한 데 이어서) 여기서부터는 상인(常因)을 보여주는 글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개별적인 설명[別明]과 전체적인 결론[摠結]이다. 별명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는 진증관(眞證觀)이고, 둘째는 방편관(方便觀)이다.
첫째 중에 ‘법이 적멸한 줄 아는 자’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모든 법이 본래 적멸함을 알기 때문이다. 일어남이 없음을 이미 알기 때문에 마음을 없애지 않는다. 마음을 멸하지 않는다는 것은 항상 적멸하기 때문인데, 이는 알아야 할 것[所知]이 적멸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적멸을 얻은 자는 마음이 항상 참되게 관한다’ 함은 증득하는 마음[能證心]이 상주(常住)하여 증득할 도리[所證理]에 순응하므로 생멸하는 모양을 떠나 항상 진조관(眞照觀)을 잃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經】 “(적멸을 얻은 자는) 모든 명색(名色)이 다름 아닌 어리석은 마음임을 안다. 어리석은 마음의 분별로 모든 법을 분별하므로 명색말고는 다른 것이 없음을 안다는 것이다. 법(法)이 이런 줄 알아서 문자와 언어를 따르지 않으며, 모든 마음을 오직 뜻[義]에 두어서 나[我]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論】 둘째로 방편관을 밝힌 가운데도 둘이 있다. 먼저 유식(唯識)의 심(尋) ㆍ사(思)를 설명하고, 다음에 그 여실(如實)한 지혜를 나타낸다.
첫째 중에 ‘명색말고는 다른 것이 없다’한 데서 명(名)은 4온(蘊)을 말하고, 색(色)은 색온(色蘊)인데, 모든 불상응[不相應行法]은 다 임시로 세운 것[仮立]이라서 이 명색을 떠나서는 별도의 체(體)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유위(有爲)의 사태들은 다 명과 색에 속한다. 이런 모든 법은 오직 한마음이 만든 것이므로 마음을 떠나면 경계도 없고, 경계를 떠나면 마음도 없다. 이러한 것을 유식(唯識)의 심사(尋思)라 한다.
『화엄경』에서는 이 뜻을 이렇게 말한다. “마음은 화가처럼 갖가지 5음(陰)을 그려낸다. 일체 세간 중에 어느 것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이 없다. 마음이 그렇듯 부처도 그렇고, 부처가 그렇듯 중생도 그러하여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여기까지 심사(尋思)를 설명하였다. 다음에는 여실지(如實智)를 나타낸다.
‘법이 이런 줄 알아서 문자와 언어를 따르지 않는다’ 함은 명언(名言)의 심사(尋思)로 이끌어지는 여실지이고, ‘모든 마음을 뜻에 두어서 나라고 분별하지 않는다’ 함은 뜻[義]의 심사로 이끌어지는 여실지이다. 인아(人我)ㆍ법아(法我) 두 가지가 모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방편관을 닦는 중에) 그것들을 분별하지 않는다.
【經】 “나라는 것이 가명(仮名)임을 알면 적멸을 얻을 것이며, 적멸을 얻으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얻을 것이다.”
【論】 이는 두 번째, 앞 두 가지를 전체적으로 결론지은 부분이다. 앞의 방편관(方便觀)으로 진관(眞觀)을 얻는 것을 결론짓고, 또 진관으로 보리과(菩提果)를 얻음을 결론지은 것이다.
【經】 그 때 범행장자가 이 말씀을 듣고 게송으로 말하였다.

명상(名相)과 분별사(分別事)
그리고 법(法)이 셋이 되며
진여(眞如)와 정묘지(正妙智)가
저것과 다섯을 이루나이다.

제가 지금 알기로 이 법들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에 묶인 것이라
생멸하는 길에 들어 있으므로
이는 단(斷)이며 상(常)이 아니오나
여래께서 말씀하신 공(空)한 법은
단견과 상견을 멀리 떠났나이다.

【論】 이 글은 (入果常法을 如來說, 長者演, 大衆得益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로 장자가 연설한 부분이다. 도합 여덟 송(頌)으로 되어 있는데, 세 가지 뜻으로 나뉜다. 첫 두 송 반은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뜻을 가름한 것이며, 다음 다섯 송은 양 극단에 치우친 집착을 깨뜨린 것이며, 마지막 두 구는 무이관(無二觀)을 나타낸 것이다.
처음 가운데 둘이 있으니 앞의 두 송은 양 극단에 떨어진 교리를 밝힌 것이 고, 뒤의 두 구는 양 극단을 떠난 교리를 나타낸 것이다.
처음 가운데 ‘명상(名相)’은 명(名)과 구(句)와 자(字)를 말한다. 구(句)란 명(名)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며, 자(字)란 명(名)이 의지하는 것인데, 모두 명(名)을 나타내주므로 ‘명상’이라고 통칭한 것이다. ‘분별사’란 모든 유루(有漏)의 마음과 마음이 만들어내는 법의 사건[心法事]을 말한다. ‘그리고 법’이란 앞의 둘을 제외한 모든 법상으로서, 명구(名句)로 나타내지거나 분별의 연(緣)이 되는 것이다. 즉 10색처(色處)와 법처(法處) 중의 색과 불상응 등 모든 법상을 말한다. 이 세 가지는 같은 부류지만 잡염상(雜染相)을 밝히기 위해 셋으로 나누어 따로따로 설명하였다.
‘진여(眞如)’란 정지(正智)의 경계를, ‘정묘지(正妙智)’란 근본지(根本智)와 후득지(後得智)를 말한다. ‘저것과’는 ‘저 앞의 셋과’라는 말이니, 이 뒤의 둘과 저 앞의 셋을 합하여 다섯 가지[五事]가 된다. 이는 삼승교(三乘敎)의 교문(敎門)에서 말한 법상(法相)을 열거한 것이다.
‘제가 지금 알기로는 이 법들은 단견과 상견에 묶인 것이라’ 함은 저 교문에서 말한 다섯 가지가 단견과 상견의 집착에서 떠나지 못했음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저 네 가지 법[진여를 제외한 나머지]은 생멸하는 모양을 띠고 있어 단견(斷見)으로 집착하는 경지를 떠나지 못하고, 진여법은 상주하는 성품이라고 하여 상견(常見)으로 취하는 경지를 떠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생멸하는 길에 들어있다’고 하였다. ‘이는 단이며 상이 아니라’ 함은, 앞의 셋과 정지(正智)의 법은 다 4상(相:生ㆍ住ㆍ異ㆍ滅)을 띠고 있어 생멸의 길에 들어가므로 상변(常邊)과는 다른 단변(斷邊)임을 구별하고, 그럼으로써 진여(眞如)가 언제나 있다고 하는 길[常有道]에 들어가므로 단변과 다른 상변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공한 법은 단견과 상견을 멀리 떠났나이다’ 함은 일승(一乘)의 교설인 3공(空)의 법이 단ㆍ상 두 극단에 치우친 과실을 멀리 떠나 있음을 밝힌 것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에서 말했듯이 공상(空相)도 공하고, 공공(空空) 역시 공하고, 소공(所空)도 공하다는 이러한 3공은 진(眞)ㆍ속(俗)을 파괴하지 않고 그렇다고 진ㆍ속을 존립시키지도 않으며, 동(動)ㆍ정(靜)을 떠났으나 중간에 머물지도 않아서 단변과 상변을 멀리 떠나 있기 때문이다.

【經】 인연은 없는 것이라 나지 않으니
나지 않으므로 멸하지도 않나이다.
인연을 유(有)라고 고집하는 것은
허공에서 꽃을 따려는 격이며
석녀(石女)에게 아이를 기대하는 격이라
결국 얻을 수 없으리이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양 극단에 치우친 집착을 깨뜨리는 말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첫째 네 송은 유변(有邊)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둘째 한 송은 공변(空邊)에 대한 집착을 없애는 대목이다.
첫째에도 둘이 있으니 앞의 두 송 반은 저 유(有)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뒤의 한 송 반은 저 진공(眞空)을 나타낸 것이다. 첫째 가운데 또 둘이 있으니 처음 한 송 반은 인연(因緣)에 대한 집착을 깨뜨리고, 다음 한 송은 나머지 세 가지 연[三緣]을 깨뜨린 것이다.
처음 가운데 ‘인연은 없는 것이라 나지 않는다’ 함은 무슨 뜻인가? 본식(本識) 중의 모든 종자는 이숙식(異熟識)과 붙어있든[卽] 떨어져 있든[離] 다 얻을 수 없다. 붙어 있다면 이숙(異熟)과 같을 것이며, 떠나 있다면 토끼 뿔과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붙어 있지도 않고 떠나 있지도 않다고 해도 역시 있는 것이 아니니, 병(甁)이나 집 등과 같이 단지 이름만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도리로 생(生)함도 멸(滅)함도 없는 것이지만 3승(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자들은 실제로 인연종자가 있다고 고집한다. 이들은 허공에서 꽃을 따려고 하거나 석녀(石女)에게 아이 낳기를 기대하는 어리석은 자들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인연’을 영원히 얻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이 중에 허공에서 꽃을 따려한다는 것은 물든 종자를 따서 없애려 함을 비유하고, 석녀에게 아이를 바란다는 것은 깨끗한 종자를 얻어서 기르려 함을 비유한다.

【經】 모든 인연을 취하는 일에서 떠나고
다른 것[他]을 따라서 멸하지도 않으며
자체인 의(義)와 대(大)에서 나온 것도 아니니
여(如)에 의하기 때문에 실(實)을 얻습니다.

【論】 이는 나머지 세 가지 연을 깨뜨린 것이다. 모든 종자의 인연이 있다는 생각은 떠났으나 다른 세 가지 연(緣)으로부터 생긴다고 생각하면서 집착을 하면 그것도 도리에 맞지 않는다. 경(經)에서 “타(他)에 따라서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말한 ‘타(他)’란 증상연(增上緣)과 소연연(所緣緣)을 가리킨다.
가령 눈[眼]에 의지하고 색(色)을 연하여 안식(眼識)이 생길 때, 이러한 눈과 색은 식과 동시적이기는 하지만 식성[識]이 아니기 때문에 이를 ‘타(他)’라고 한다. 등무간연(等無間緣)은 비록 식의 부류이기는 하지만 체(體)가 이미 없으므로 멸(滅)이라고 한다. ‘타(他)’니 ‘멸(滅)’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자성(自性)이 없다. 그러므로 식(識)은 저것들을 따라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다음으로 ‘자체인 의와 대에서 나온 것도 아니라[及於己義大]’라 함은 무슨 뜻인가? 다음과 같이 잘못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온(蘊)ㆍ계(界) 등의 법은 미래세 중에 각각 자기 체(體)가 있으나 아직 생기지 않았을 뿐이다. 이 자기 체로부터 현재세에 생겨나는 것이다”라고.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막기 위하여, 자체의 의(義)와 대(大)를 따라 나오는 것도 아니라고 한 것이다. 위 구절에 나오는 ‘따르지 않는다[不從]’는 말이 여기까지 걸린다. 여기서 말하는 ‘의(義)’는 음(陰)ㆍ계(界)ㆍ입(入)을, 대(大)란 4대(大)를 말한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법들이 본래 자체(自體)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므로 ‘자체인 의와 대[己義大]’라고 하였다.
‘여에 의하기 때문에 실을 얻는다’ 함은 (범행장자) 자신이 여여한 도리에 의해 유에 대한 모든 집착을 깨뜨렸기 때문에 실의(實義)를 얻었다는 뜻이다.

【經】 그러므로 진여의 법은
항상 자재하고 여여(如如)하지만
온갖 모든 만법은
여여가 아닌 식(識)이 변화해낸 것이라
식을 떠나면 그 법이 공(空)하므로
공한 곳으로부터 설하나이다.

【論】 이는 진공법(眞空法)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는 앞에서 유(有)에 집착하는 것 모두가 허망하여 그것을 깨뜨리는 자만이 실(實)을 얻기 때문에 한 말이다. 진여는 움직이지 않으므로 망법(妄法)이 성립되지 않는다.
‘식이 변화해낸’이란 식(識)이 이리저리 생각해내는[計] 것을 말한다. 그렇게 생각해낸 상[所計相]은 이치상[理]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망정[情]에 따라 있는 것이기에 ‘변화해낸 것[所化]’이라고 한다. 모든 법은 진여가 아니라 식이 변화해낸 것이기 때문에, 식을 떠난 법은 공(空)하고 무소유(無所有)하므로, 체가 공한 곳으로부터 진여를 설한다고 하였다.

【經】 생멸하는 모든 법을 멸하고
열반에 머물지만
대비(大悲)가 그것을 빼앗아
열반이 사라져 머물지 않게 하고

【論】 앞글에서 이미 유(有)에 대한 범부(凡夫)의 집착을 깨뜨렸으므로 이번 게송에서는 공(空)에 머무는 2승(乘)의 집착을 빼앗는다. 2승을 닦는 사람들은 육신과 지혜가 생멸하는 모든 법을 없애버리고 열반에 들어 8만겁(萬劫)을 거기 머물고, 내지 10천겁(千劫)을 머문다. 모든 부처님의 동체대비(同體大悲)로 저들의 열반을 빼앗아 마음을 다시 일으키게 하니, 마음을 일으킬 때 열반이 사라진다. 마치 큰 상인이 환술로 지어낸 성[化城]을 없애고 다시는 그 안에 머물지 않듯이. 그들이 무심(無心)일 때는 바로 깨뜨릴 수가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들이 저들의 열반을 빼앗음을 나타냈다. 그렇게 하여 아직 들어가지 못한 자들의 뜻을 막았다.
여기까지 해서 유(有)ㆍ무(無) 극단에 떨어지는 것을 깨뜨리는 말씀이 끝났다.

【經】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전변하여
여래장(如來藏)에 들게 하나이다.

【論】 이는 셋째로 무이관(無二觀)을 보여준 것이다. 이미 범성(凡聖)이 가지는 두 극단에 대한 집착을 없앴으므로 이번에는 저 범성(凡聖) 두 부류들을 능(能)ㆍ소(所)가 평등한 관(觀)에 들게 한 것이다. 위의 여덟 송이 장자(長者)가 연설한 부분이다.
【經】 그 때 대중이 이러한 뜻을 듣고 모두 정명(正命)을 얻어 여래와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論】 이는 (入果常法을 셋으로 나눈 가운데) 세 번째, 대중이 이익을 얻는 부분[大衆得益]이다.
‘정명을 얻었다’ 함은 유ㆍ무의 극단을 떠나고 중도(中道)의 바른 혜명[正慧命]을 얻었기 때문이다. ‘여래에 들어갔다’ 함은 이미 부분적으로 여래의 지혜[如來智]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래장의 바다에 들어갔다’ 함은 본각의 깊고 넓은 뜻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045_0119_a_10L 論曰眞俗旡二一實之法諸佛所歸名如來藏今此品中明旡量法及一切行莫不歸入如來藏中故就所入以立名也 經曰爾時梵行長者從本際起而白佛言尊者生義不滅滅義不生如是如義卽佛菩提菩提之性卽旡分別旡分別智分別旡窮旡窮之相唯分別滅如是義相不可思議不思議中乃旡分別 論曰別明觀行有六分中顯一切行出眞性空竟在於前此下第六明旡量法入如來就文有二一明諸法諸行同入一處二顯入行入智因果差別初中亦二先明諸法入一實義後明諸行入一佛道初中有四一問二荅三領四述問中有先領前說後問所疑此中問者名梵行者是人形雖俗儀心住一味以是一味攝一切味雖涉諸味之穢塵俗不失一味之梵淨行此中顯如是義所以令其發問從本際起者聞佛所說卽入本際今欲發問從彼而起生義不滅者是領下半是義生非滅故義不生者是領上半是義滅非生故如是如義者領一偈不滅不生旡二義故如是旡二義諸佛所覺故言卽佛菩提覺順旡二不分不別故言卽旡分由其旡所分別乃能旡不分別故言旡分別智分別旡窮所以分別旡窮者只由滅諸分別故言旡窮之相唯分別滅如是義相離言絕慮故不思議#不思議中心言絕故乃旡分別如是領前所說偈義尊者一切法數旡量旡邊旡邊法相一實義性住一性其事云何 論曰此是正問所疑小乘教有八萬法蘊一蘊之量十百之數今大乘教不唯八萬言法數旡量旡邊旡邊教法所詮義相更旡異趣唯一實義教法衆多唯住一性甚難可解其事云何經曰佛言長者不可思議我說諸法爲迷者故方便道故一切法相一實義智何以故譬如一市開四大是四門中皆歸一市如彼衆庶隨意所入種種法亦復如是 論曰是第二荅於中有三謂法初法說言我說諸法者謂三乘教及一乘教爲迷者故者爲未達一味者說故方便道故者皆入一味之方便故入正觀時不須言教故一切法相一實義智因諸教法所入之相唯一實義正觀智故喩中言一市者喩一實義開四門者喩四種教謂三乘教及一乘教是四門中皆歸一市者依四教者皆歸一實如彼衆庶隨意所入者隨根淺深隨入一教故以一市喩一實者爲是百姓之所入故爲諸衆生之所歸故合中言種種法者合於四門次言味者謂所趣味合於一市 經曰梵行長者言法若如是我住一味應攝一切諸味 論曰此是第三領解攝諸味攝諸教味歸一實故 經曰佛言如是如是何以一味實義味如一大海一切衆流旡有不入長者一切法味猶彼衆流名數雖殊其水不異若住大海卽括衆流住於一味卽攝諸味 論曰此是第四述於中有二摠述別成別中有三謂法合中有一者合彼衆流先以法合後卽牒喩二者合括衆先擧其喩後以法合 經曰梵行長者言諸法一云何三乘道其智有異 論曰此下第二明一切行入一佛道先問後荅此是問異 經曰佛言長者譬如江河淮海大小異故深淺殊故名文別故水在江中名爲江水水在淮中名爲淮水水在河中名爲河水俱在海中唯名海水法亦如是俱在眞如唯名佛道 論曰是第二荅有喩有合初中江河淮者三乘行海喩佛道大小異者喩三乘心寬狹不同淺殊者喩三乘智優劣有異隨前二義其名各別在海中唯名海水者喩其三乘同入十地法空眞如唯名佛道沒三乘名當知三乘差別行者皆在地前方便道中莫不終入眞如正觀所以三乘終旡別歸如諸教法同入一味合喩之言在文可見 經曰住一佛道卽達三行梵行長者言云何三行佛言一隨事取行二隨識取行三隨如取行 論曰此下大分第二入行入智因果差別於中有四一者入行差別二者入智差別三者入因事用四者入果常住初中有三一者摠摽住一佛道者初地已上名住佛具三種智達三行故二者問三者荅荅中有二摠釋別明中言隨事取行者謂依四諦十二緣起隨因果事取道品行故隨識取行者謂諸衆生唯一心作隨唯識理取四攝行故隨如取行者謂一切法悉皆平等隨平等如取六度行故攝行屬心故名爲非謂能所分別之取 經曰長者如是三行摠攝衆門一切法門旡不此入入是行者不生空相如是入者可謂入如來入如來者入入不入 論曰此是摠釋三行隨事行者共小乘門隨識行者獨大乘門此二是差別門第三是平等門由是道理摠攝衆門又道品行不住生死門其四攝行不住涅槃門隨如度行平等旡二門故一切法門旡不此入入是行者不生空相者雖隨如行而恒隨事隨識行故不取空相而住寂滅也可謂入如來者雖隨事識而恒隨如取平等行故可謂能入如來藏海也入入不入者其入心於不入故能入所入平等無別故曰不入旡別異而亦非一故約觀心假名入心如是入心不存入相故入其入於不入也 經曰梵行長者言可思議入如來藏如苗成實旡有入處本根利力成得本得本實際其智幾何 論曰此下第二入智差別先問後荅問中有二先領前說後問所疑如苗成實者如似穀苗成穗實時旡能入者旡所入處如來藏當知亦爾苗喩本利實喩得本入時平等旡所入處故 經曰佛言其智旡窮略而言之其智有何者爲四一者定智所謂隨如二者不定智所謂方便摧破三者涅槃智所謂除電覺四者究竟智謂入實具足道長者如是四大事用過去諸佛所說是大橋梁是大津濟若化衆生應用是智 論曰第二荅於中有三所謂摠摽別釋摠明摠標中言智旡窮者所達旡邊故其智亦旡窮但以義類相對摠略而說有四而已別顯中言定智者平等性智唯在正觀不作方便故名定智對治末那我我所執隨觀平等故曰隨如不定智者妙觀察智在第六識方便進取故名不定方便道時推求摧破名事等相曰摧破此智實通方便正觀但爲別定智故略擧方便耳涅槃智者成所作智能現八相而作佛事擧最後相名涅槃智除滅五識而得此智以是義故名除電覺電覺者謂五識乍起乍滅如電光故究竟智者大圓鏡智唯究竟位得此智故於一切境旡不窮故入一實義故名入實旡境不現名具足道摠明中言四大事用者用旡不周故諸佛所說者諸佛道同故大橋梁者以是四智載三乘人令到一乘之彼岸故大津濟者用此四智遍涉六道示出世道度愛河故是故化者應用是智也 經曰長者用是大用復有三大事一者於三三昧內外不相奪二者於大義科隨道擇滅三者於如慧定以悲俱利如是三事成就菩提不行是事卽不能流入彼四智海爲諸大魔所得其便長者汝等大衆乃至成佛常當修習勿令暫失論曰此下第三入因事用於中有二長行重頌初中有三略明重顯三者領解初中有四一者摠摽二者別解三者合明四者結勸摠標中言用是大用者前所說四智大用位在地上乃至佛果復有三事者能成四智之事有三此在地前四位中行此三事者初定次慧第三定慧俱行大悲爲體初言定者卽三三昧此有多門左右異說或言空旡相旡願或言旡旡相空空或言空旡作旡相隨宜安立皆旡障㝵或名三解脫唯在旡漏故或名三三昧亦通有漏故於中別義下文當說而言內外不相奪者內識外境共相現發取違順相奪諸善根今達皆空不令奪故於大義科隨道擇滅者謂於四大及三法門隨理簡摧破諸相伏滅本識戲論種子前三三昧伏其現此簡擇慧損伏種子由是遂成四智之時能拔種子得轉八識故於如慧定以悲俱利者前慧及定皆順如理是故說名於如慧定於中亦修大悲相應自利利他故言俱利所以然者若離大悲直修定慧二乘地障菩薩道設唯起悲不修定慧墮凡夫患非菩薩道故修三事遠離二邊修菩薩道成旡上覺言如是三事成就菩提若不俱行此三事者卽住生死及着涅槃不能流入四智大海卽爲四魔所得便此是合明下卽勸修爲第四門也 經曰梵行長者言云何三三昧佛言三三昧者所謂空三昧旡作三昧旡相三昧如是三昧 論曰此是第二重顯二問荅顯前二門此顯初門是三差別略有三義體用相故二心因果故三識見相故體用相者凡一切法莫過此三法體空故立空三昧旡作用故旡作三昧旡相狀故旡相三昧心因果者因果所起興於心行心行空故立空三昧諸因旡所有故立旡作三諸果不可得故立旡相三昧識見相者諸識自體空故立空三昧遣見分故立旡作三昧遣相分故立旡相三昧是第三門順前內外不相奪文 經曰行長者言云何於大義科佛言大謂四大義謂陰界入等科謂本識是爲於大義科 論曰是顯第二門所以四大而別立者爲顯初修先擇麤境謂諸法中色法最麤內支體等外山河等觀是等法不離四大觀是四大皆不可得有方旡方俱不成故如是簡擇次觀微細義謂陰界入略廣中故略攝觀五廣觀十八略廣中間觀十二入觀察一切皆不可得次言等者謂餘法門十二支等如是簡擇觀察力故卽能損伏本識之內旡始戲論名言種子始時損伏乃至斷滅所以前言隨道擇滅 經曰梵行長者言不可思議如是智事自利利人過三界地不住涅槃入菩薩道如是法相是生滅法以分別故若離分別法應不滅 論曰此是第三領解於中有二先領觀行解境界如是智事者如是三種能成四智之事用故自利利人者前二自利第三利人故過三界地者二定慧異凡夫故不住涅槃者第三大悲異二乘故離彼二邊入菩薩道也如是已下解彼境界謂初定境諸識見相次智境界大義科法如是法相皆生滅所以然者由妄分別動心海故本來靜門若離分別旡其所因何由生滅以之故言法應不滅 經曰爾時如來欲宣此義而說偈言法從分別生 還從分別滅 滅諸分別法是法非生滅論曰此下第二以偈重頌於中有二一者如來略宣二者長者廣演今此頌中所言法者謂一心法若妄分別動心海故若生若滅一切諸相莫不皆從分別所作若就本覺本來靜門離諸分別故是法非生滅謂從本來滅諸分別旡生滅因故非生滅若使生之與滅皆從分別之所作者瑜伽所說#云何而通如彼思所成地中云旡滅他用旡自滅用如衆緣有故亦衆緣有故滅耶衆緣有故生生已自然滅是相違云何和會解云因緣道理如彼論說#唯識道理如此經說所以二說皆有道理 經曰爾時梵行長者聞說是偈心大欣懌欲宣其義而說偈言諸法本寂滅 寂滅亦旡生 是諸生滅法是法非旡生 彼卽不共此 爲有斷常故此卽離於二 亦不在一住論曰此下長者廣頌有八行偈卽爲五分一者二頌正演前義二者二頌破諸邪解三者一頌申己正取四者二頌禮正說者五者一頌請說未聞此卽第一正演前偈於中有三一者二句演彼下半二者二句演彼上半三者一頌摠演二義初言諸法本寂滅者謂陰界等法本來寂滅故寂滅亦旡生者非但諸法本來寂滅寂滅之理亦旡生故第二中言是諸生滅法者謂陰界等世俗法故是法非旡生者從分別動有生起故是就眞俗非一之門以顯動靜不雜亂義第三中言彼卽不共此者謂彼寂滅旡生之法不與此生滅法共竝故爲有斷常故者若彼與此共竝有者此法生滅卽有斷邊彼法常寂卽有常邊同二乘過乖中道故然佛所說一偈之義不墮斷常故此卽離於二不旡動靜故亦不在一住不在一住者不守一實一心性故離於二者擧體動靜非二法故當知是事不可思議 經曰若說法有一 是相如毛輪 如焰水迷倒爲諸虛妄故 若見於法無 是法同於空如盲旡日倒 說法如龜毛論曰此是第二破諸邪解邪解雖多大邪有二依甚深教如言取義自謂究竟難可化故一者聞佛所說動靜旡二便謂是一一實一心由是誹撥二諦道理二者聞佛所說空有二門計有二法而旡一實由此誹撥旡二中道是二邪解服藥成病甚難可治今顯彼過此二頌中次第顯之初言若說法有一者謂如前說計有一實如自所計說有一法故是相如毛輪謂彼所計一實法相如目曀者所見毛輪故如焰水迷倒者謂如渴鹿見焰謂水馳走而求直是迷倒計有一心亦如是故爲諸虛妄故者渴鹿見水曀者見輪學士計一如是諸計齊虛妄故次破旡見若見於法旡者謂如前說計有二諦旡一心法故是法同於空者彼計一心同於空理空理之外本旡一實故如盲旡日倒者謂如生盲貧窮乞兒本未曾見日輪光明其有目者爲說有日盲者謂旡不信有日直是顚倒彼計亦爾由彼本來唯學空有而未曾聞旡二中道雖有說者不信受故所以日輪喩於中道者輪圓滿有大光明唯除盲者旡不見故一心亦爾圓旡缺有本始覺大光明照除不信者旡不入故法如龜毛者彼旡見者說一心法但名旡體猶如龜不異盲人謂旡日輪也 經曰我今聞佛說 知法非二見 亦不依中住故從旡住取論曰此是第三自申正取知法非二見者知中道法非有旡解之所見故卽離第二旡日之倒亦不依中住者雖離二邊不存中道一實而住卽離第一輪水之妄如是離彼二邊過失故從佛教旡住之詮領解所詮旡住之旨故言故從旡住取也 經曰如來所說法 悉從於旡住 我從旡住處是處禮如來 敬禮如來相 等空不動智不着旡處所 敬禮旡住身論曰此是第四禮能說者於中有三一者一頌禮能說者二者二句禮能說智三者二句禮能說身初中如來所說法悉從於旡住者謂佛教法順從旡住我從旡住處是處禮如來者依教得從於旡住處彌知如來最可尊重故於是處禮能說者此中言旡住者不住二諦亦不在中雖不在中而離二邊如是名爲旡住處也第二中言如來相者不以相好爲如來相以不動智爲如來相言等空者謂如來智旡量旡邊等虛空界旡所不遍故言不動者遍達一切旡邊三世世有遷流智用不移故第三中言不着者身離二邊故旡處所者中間旡所住故故言敬禮旡住身也 經曰我於一切處 常見諸如來 唯願諸如來爲我說常法論曰此是第五問所未聞於中上半自申常對下之二句請說常法自申意者我離諸邊得旡住智故一一微塵之中常見十方旡量諸佛十方世界諸微塵中旡處不見旡量諸佛故言一切處常見諸如來如華嚴經言於一微塵中普見旡量佛如一微塵中一切塵亦然故有如是力堪聞常法所以願聞說常法也 經曰爾時如來而作是言諸善男子汝等諦爲汝衆等說於常法 論曰此下第四入果常法於中有三一如來說二長者演其第三者大衆得益初中有二許說正說此卽許說 經曰善男子常法非常法非說亦非字非諦非解脫非旡非境界離諸妄斷際是法非旡常離諸常斷見了見識爲常是識常寂滅寂滅亦寂滅 論曰此下第二正說於中有先說常果後示常因初中二句法常佛常初中言常法非常法者謂佛所師法身之體離生滅相故曰常法離常住性故非常法非說亦非字者絕能詮名言故非諦非解脫者超所詮實義故非旡非境界離諸妄斷際者非畢竟旡亦非有境非有境故離妄執境而非旡故離斷見境際者境界之異名也是法非旡常離諸常斷見者非旡常故離諸斷見而是法故離諸常見常見所取非是法故已明法常次顯佛常#了見識爲常者於彼常法究竟了見了見之時諸識爲常所以然者前隨旡明動本靜心今隨了見歸本靜故是識常寂滅者諸識本來旡生旡滅旡生滅故性常寂滅今了見時永滅如是寂滅之識故言寂滅亦寂滅也所以然者彼寂滅識是旡常法所以滅彼乃得常故至下摠持品是義當顯又此本來寂滅之性不守常性故言亦寂滅 經曰善男子知法寂滅不寂滅心心常寂滅得寂滅者心常眞觀 論曰此下第二示其常因於中有二別明摠結別中亦二先眞證觀後方便觀初中言知法寂滅者者初地已上知一切法本來寂滅故旣知旡起故不滅心不滅心者常寂滅故是顯所知之寂滅也得寂滅者心常眞觀者是明能證之心常住隨所證理離生滅相恒不失眞照觀故 經曰知諸名色唯是癡心癡心分別分別諸法更旡異事出於名色知法如是不隨文語心心於義不分別我 論曰是第二明其方便於中有二先明唯識尋思後顯其如實智初中言更旡異事出於名色者名謂四蘊色是色蘊諸不相應皆假建立離此名色更旡別體故諸有爲之事皆爲名色所攝如是諸法唯心所作離心旡境離境旡如是名爲唯識尋思如華嚴經言心如工畫師畫種種五陰一切世閒中旡法而不造如心佛亦爾佛衆生然心佛及衆生是三旡差別故已明尋思顯如實智知法如是不隨文語者是名尋思所引如實智故心心於義不分別我者是義尋思所引如實智故人法二我皆旡有義所以於中不分別故知我假名卽得寂滅若得寂滅卽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論曰此是第二摠結前二結前方便而得眞觀又結眞觀得菩提果 經曰爾時長者梵行聞說是語而說偈言名相分別事 及法名爲三 眞如正妙智及彼成於五 我今知是法 斷常之所繫入於生滅道 是斷非是常 如來說空法遠離於斷常論曰此下第二長者演說於中八頌卽有三意初二頌半判佛教意次有五頌破二邊執最後二句亦旡二觀初中有二前二頌明墮二邊教後二句顯離二邊教初中言名相者謂名句字句是名所成字#是名所資皆能表名合爲名相也分別事者謂諸有漏心心法事言及法者謂除前二所有法相名句所詮分別所緣謂十色處及法處中色不相應等諸法相也是三一類明雜染相所以別說名爲三也言眞如者謂正智境正妙智者本後二智言及彼者及彼前三此二及彼三合成於五事是擧三乘教門法相我今知是法斷常之所繫者明彼教門所說五事不離斷常二見所着所以然者彼四種法帶生滅相不離斷見所着之境其眞如法是常住性不離常見所取之境故入於生滅道是斷非是常者別明前三及正智法皆帶四相入生滅道直是斷邊異於常邊卽顯眞如入常有道直是常邊異斷邊也如來說空法遠離於斷常者明一乘教說三空法遠離斷常二邊過失所以然者如前所說空相亦空空空亦空所空亦空如是三空不壞眞俗不存眞俗雖離動靜不住中閒所以遠離斷常邊也經曰因緣旡不生 不生故不滅 因緣執爲有如採空中華 猶取石女子 畢竟不可得論曰此下第二破二邊執於中有二一者四頌破有邊執二者一頌奪空邊着初中有二前二頌半破其有執後一頌半示彼眞空初中亦二初一頌半破因緣執次有一頌破餘三緣初中言因緣旡不生者本識中一切種子與異熟識若卽若離皆不可得如異熟離猶兔角不卽不離亦旡所有如甁舍等有名故由是道理旡生旡滅而依三乘言教學者執實有因緣種子不異愚者欲採空華亦如欲取石女之子同彼因緣永不可得此中空華喩於染種採滅故石女兒者喩於淨種爲取養故 經曰離諸因緣取 亦不從他滅 及於己義大依如故得實論曰此是破餘三緣若有離諸種子因緣取餘三緣計從彼生作如是執亦不應理如經亦不從他滅故此言他者謂增上緣及所緣緣如眼識生依眼緣色如是眼色與識俱時而非識性故名爲他等旡閒緣雖是識類而體已滅故名爲滅若他若滅皆旡自性是故識生亦不從彼次言及於己義大者復有計言蘊界等法未來世中各有己體而未生現從此己體而生現在爲遮此計故言亦不從及於己義大上句不從之言貫於此下句故此言義者謂陰界入大者四大如前說故計此等法本有自體以之故言己義大也依如故得實者謂我能破諸有執者依如理破故得實義 經曰是故眞如法 常自在如如 一切諸萬法不如識所化 離識法卽空 故從空處說論曰此是第二示眞空法言是故者是前執有皆是虛妄其能破者得實之故眞如不動妄法不成也所化者謂識所計彼所計相理旡所有直從情有故名所化諸法非如識所化故離識之法空旡所有故我從空處說如 經曰滅諸生滅法 而住於涅槃 大悲之所奪涅槃滅不住論曰上文已破凡夫執有此頌亦奪二乘住空謂二乘人滅諸身智生滅之法入於涅槃於中八萬劫住乃至十千劫住而由諸佛同體大悲奪彼涅槃令還起心起心之時涅槃卽滅如大商主滅其化城是故於中不復住也彼旡心時不得正破直顯諸佛奪彼涅槃因是遮彼未入者志上來已破有旡二邊經曰轉所取能取 入於如來藏論曰此是第三示旡二觀已破凡聖二邊之執故轉彼凡聖二衆令入能所平等之觀上來八頌長者演也 經曰爾時大衆聞說是義皆得正命入於如如來藏海 論曰此是第三大衆得益得正命者離有旡邊而得中道正慧命故入如來者已入如來智之分故入如來藏海者入於本覺深廣義故


8. 총지품(摠持品)
045_0127_b_07L摠持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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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論】 이 품(品)에서는 앞의 여러 품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하여 요점을 잃지 않고 다 지니게[摠持] 하기 때문에 「총지품(總持品)」이라 하였다.
또 지장보살(地藏菩薩)이 이미 문의다라니(文義陀羅尼)를 얻었으므로 모든 품(品)에 나온 글 뜻을 총지하고, 대중이 의심 낸 곳을 기억하여 차례로 물어서 모든 의심을 잘 해결해주므로, 묻는 이를 기준으로 이 품을 ‘「총지품」’이라 하였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대중 가운데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이르러 합장하고 꿇어앉아 부처님께 여쭈었다.
“존자(尊者)시여, 제가 보기에 대중들은 마음에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의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여래께서 의심을 제거해주시려 하니, 제가 대중을 위해 의심나는 대로 묻겠습니다. 부처님의 자비로 불쌍히 여겨 부디 허락하소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아, 네가 이렇게 중생을 구제하려고 하니, 이것은 대비(大悲)로써 그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라 불가사의하다. 너는 자세히 물어라. 너를 위해 말해주겠다.”
【論】 정설분(正說分)을 크게 둘로 나누었고, 그 중 하나인 각각의 관행을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부분[別明觀行]이 앞에서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정설분 중 두 번째로 모든 의문을 총괄적으로 해결하는 부분[摠決諸疑]이다.
이 중에도 넷이 있는데 청하는 부분[請], 허락하는 부분[許], 의심을 해결하는 부분[決], 이해하는 부분[領]이다. 위 경문에 나오는 문답은 청함과 허락함이다. 여기서 청하는 사람은 지장보살이다. 이 사람은 이미 동체대비(同體大悲)를 얻었으므로, 대지[地]가 초목을 키우듯 모든 중생의 선근(善根)을 다 키우고 자라게 한다. 다라니로써 모든 공덕을 간직하고, 큰 보배 창고[藏]에 진귀한 보배가 끝없듯이 모든 중생에게 끝없이 은혜를 베푼다. 이러한 두 가지 뜻을 따서 그의 이름을 ‘지장(地藏)’이라 한다. 지금 이 품(品)에서는 모든 의혹을 해결하여 온갖 믿음과 이해를 생기게 하고, 의심을 풀고 번뇌를 끊는 모든 보배를 꺼내서 법을 구하는 대중에게 베풀므로 뜻이 그의 이름과 맞기 때문에 그가 등장해서 청하고 물은 것이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은 어찌하여 연(緣)으로 생기지 않습니까?”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설하셨다.

만약 법이 연으로 생긴 것이라면
연을 떠나서는 법이 없으리라.
법의 자성이 없는데 어떻게
연(緣)이 법을 생할 수 있으랴.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갖가지 의심을 정면으로 결단하는 부분이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6품(品)에서 일어난 여섯 가지 의심을 역순으로 결단하고, 둘째는 한 품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의심을 순서대로 결단한다.
첫째 가운데 또 둘이 있으니, 첫째는 따로 결단하는 것이고, 둘째는 전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처음 따로 결단하는 중에서는 여섯 품의 여섯 가지 의심을 따로따로 결단하는데, 뒤에서부터 앞으로 점차 거슬러 올라가는 차례로 한다. 지금 이 문답은 「여래장품」에서 일어나는 의문을 결단한 것이다.
「여래장품」에서 ‘인연은 없는 것이라 생기지 않으니, 생기지 않으므로 멸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생기게 하는 인연이 있다고 집착하여, 그 과(果)가 어떻게 인연으로 생긴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는 이가 있으므로, (지장보살이) 저들의 의심에 따라 연생(綠生)에 관하여 물은 것이다. 여래께서는 한 게송으로 이 의심을 바로 결단했다.
이 게송 중 위의 반은 그들의 본래 고집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아래 반에서는 그 여세를 타고 연으로 생긴다는[緣生] 견해를 깨뜨렸다. 그렇게 하신 의도는 연(緣)이 법(法)을 생(生)하지 않는다고 하면, 토끼 뿔 같은 무법(無法)을 기대하겠기에, 이와 같은 비량(比量)으로 저들의 의심을 결단해준 것이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법이 만약 생기지 않는다면 어찌하여 법을 설하되 그 법이 마음에서 생긴다고 하십니까?”
이에 존자(尊者)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마음에서 생긴 이 법,
이 법은 능취와 소취이니
취(醉)한 눈에 보이는 헛꽃과 같아라.
이 법도 그러하여 저것과는 같지 않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진성공품(眞性空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결단한 것이다. 「진성공품」에서 “내가 법을 설하는 이유는 너희 중생이 있다거나 일어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내가 법을 설한다”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저 글에 의하면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실 때, 설하는 그 법이 부처님의 마음에서 생기고 있는데, 어찌하여 법이 무생(無生)이라고 하시는가?”라는 의문을 낼 수가 있다. 이러한 의문을 제거하기 위하여 게송을 말씀하셨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의심을 단도직입적으로 떨쳐주는 부분[直遣]이고, 둘째는 거듭 결단해주는 부분[重決]이다. 첫 게송은 직견이다.
‘마음에서 생긴 이 법, 이 법은 능취와 소취’라 함은 지금 너희들이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긴 법’이란, 마치 술 취한 눈에 보이는 헛꽃과 같이, 단지 망심(妄心)이 취하는 것[能取]과 그 대상[所取]이라는 것이다.
‘이 법도 그러하여 저것과는 같지 않다’ 함은 너희가 생각하는 ‘마음에서 생긴 법’은 저 헛꽃과 같은데, 이 법도 그러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법이 아니며, 너희가 생각하는 생함[生]과 같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의도는 너희가 생각하는 법은 헛꽃과 같이 (망심에 의해) 취해진 바이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반면, 내가 설하는 법은 말과 생각이 끊어져서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다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히는 데 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법이 그렇다면 그 법은 상대가 없을 것이며[無待], 상대가 없는 법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겠나이다.”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설하셨다.

법에는 본래 유무(有無)가 없고
자타(自他)도 그러하다.
시작도 아니요, 또한 끝도 아니며
성패(成敗)가 머무르지 않느니라.

【論】 이는 (첫 번째 直遣에 이어) 두 번째 거듭 결단해주는 부분[重決]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따져 묻고[難], 다음에 의심을 결단[決]한다.
따져 묻는 의도는 ‘부처님께서 설하신 언교(言敎)의 법이 소취(所取)가 아니기 때문에 헛꽃과는 달리 아예 없는 것[畢竟無]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법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 상대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진여(眞如)와 같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서 이 게(偈)를 설하셨다. 게송의 뜻은 다음과 같다. ‘내가 설한 법은 명언(名言)을 끊었으므로 그 법에 본래 있고 없음, 자기와 남, 시작과 끝이 없다. 이루어짐에나 무너짐에나 머물지 않는데, 어떻게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는 논란하는 자가 든 이유[因]가 자기주장을 증명하는 데 맞지 않는 오류[相違過]를 범했음을 드러낸다. 무슨 말인가? 법에는 이루어짐과 무너짐이 없다. 상대가 없기 때문이다. 소취가 없는 것과 같이, 또는 진여와 같이. 이와 같은 도리로 저 논란은 성립되지 않는다. 논란이 성립되지 않으므로 의 심했던 바가 해결되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의 모습은 본래 열반이며, 열반과 공상(空相)도 그러하여 이러한 법들이 없으니 그 법이 여여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러한 법이 없으니 그 법이 여여하다.”
【論】 여기서부터는 세 번째, 「입실제품(入實際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하는 글이다. 「입실제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대력보살(大力菩薩)이 “중생의 심상(心相)은 여래(如來)와 같으므로 중생의 마음에는 다른 경계가 없을 것입니다” 하자 부처님께서 답하셨다. “그렇다. 중생의 마음에는 실로 다른 경계가 없다. 왜냐하면 마음이 본래 깨끗하기 때문이며, 이치에는 더러움이 없기 때문이다” 혹 이 글을 보고 이런 의심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다. ‘본래 깨끗한 마음이란 바로 이치와 같다[如理]. 본래 청정한 자성열반(自性涅槃)이거늘, 열반을 또 공하여 없게 만든다면 그것은 그릇된 무[邪無]가 될 것이다’라고. 이러한 의심을 몰아내기 위해 모두 여여하다고 말씀하셨다.
글에 네 부분이 있다. 묻고[問], 허락하고[許], 이해하고[領解], 결론짓는[述成] 부분이다. 첫째, 묻는 의도는 다음과 같다. ‘공(空)의 이치로 본다면 모든 법의 모양은 본래 청정한 열반이다. 다시 열반과 그 공한 모양을 융합하면 열반과 공(空)의 차별이 없어져 일미법이므로 이 법은 여여한 것이리라’ 이렇게 고집하는 것에 반론을 펴기 위해 물음을 던진 것이다. 둘째, 답에서는 물은 그대로라고 허락을 하신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나이다. 이와 같이 여여한 모양은 함께하는 것[共]도 함께하지 않는 것[不共]도 아니며, 뜻으로 취한 것[意取]과 업으로 취한 것[業取]이 모두 공적(空寂)하며, 공적한 마음법은 구취(俱取)ㆍ불구취(不俱取)도 적멸할 것입니다.”
【論】 이는 셋째로 지장보살이 이해한 부분인데, 숨은 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한 말이다. 혹시 앞 설명을 듣고 이렇게 따질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본래 열반(涅槃)이 이미 일여(一如)한데, 만약 열반과 그 공상(空相)을 융합하면 제2의 여(如)가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여(如)가 함께하는가, 함께하지 않는가? 함께 한다면 두 개가 병립하므로 여여한 이치가 아닐 것이며, 함께하지 않는다면 오직 하나의 여(如)이기 때문에 공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라고.
이런 논란을 제거하기 위해 ‘함께 하는 것도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함은 두 가지 여[二如]가 없기 때문이며,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 함은 둘 다 없애기 위해서이다. 없앤 것은 둘이지만 없앤 곳은 둘이 없다. 그러므로 저들의 논란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뜻으로 취한 것과 업으로 취한 것이 모두 공적하다’함은 둘 다 없앴으나 없앤 곳은 둘이 없음을 드러내는 구절이다. ‘뜻으로 취함[意取]’이란 열반을 가리킨다. 적멸을 연하는 마음으로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업으로 취함[業取]’이란 생사를 말한다. 모든 번뇌의 업으로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공하니, 공적하여 둘이 없다.
‘공적한 마음법은 구취(俱取)ㆍ불구취(不俱取)도 적멸할 것이라’ 함은, 일심법 역시 그 하나를 고수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생사와 열반은 공적하여 둘이 없으니 둘 없는 곳이 바로 일심법이다. 일심법에 의지하여 두 가지 문이 있다. 그러나 두 문을 동시에 취한다면 둘은 하나가 아니기 때문에 심(心)을 얻을 수 없다. 두 문을 폐기하여 다 취하지 않는다 해도 무(無)는 심이 아니기 때문에 심을 얻을 수 없다. 이런 뜻에서 둘 없는 마음법은 동시에 취하는 것과 동시에 취하지 않는 것에서도 적멸하다.
【經】 이 때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공적한 모든 법,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으니
저 마음이 공하지 않을 때
마음이 있지 않음을 얻는다.

【論】 이는 네 번째, 여래가 결론짓는 부분이다.
‘공적한 모든 법’이란 생사와 열반의 모든 공적한 법을 말한다. ‘이 법은 적멸하나 공하지 않다’ 함은 둘 아닌 심법은 아예 없는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법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공하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바로 그 때 마음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앞서 ‘구취와 불구취가 모두 적멸일 것이라’한 말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다.
【經】 이 때 지장보살이 말하였다.
“이 법은 3제(諦)가 아니니 색이 공하고 심도 적멸합니다. 이 법[색법ㆍ심법]이 본래 적멸해 있을 때 이 법[본각]도 적멸할 것입니다.”
그러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은 본래 자성(自性)이 없고
저것(본각)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니
이런 곳에는
저런 것이 있지 않네.

【論】 이는 네 번째 결단으로서 「본각리품(本覺利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풀어준 부분이다. 「본각리품」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주보살(無住菩薩)이 “모든 경계가 공하며, 모든 몸이 공하며, 모든 식(識)이 공하다면 각(覺)도 공해야 할 것입니다”하자, 부처님께서 “일각(一覺)이라고 할 만한 것은 훼손되거나 무너지지 않는다. 결정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공도 아니고 공 아닌 것도 아니어서, 공이다 불공이다 할 것이 없다”라고 하셨다. 이 글을 빌미로 거기에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일심 역시 있는 것이 아니라서 적멸하다면, 어째서 앞에서는 일각은 무너지지 않기 때문에 색(色)과 심(心)의 공한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는가?’라고. 여기서는 이렇게 의심할 소지가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을 던져 본 것이다.
‘이 법은 3제가 아니라’ 함은 앞 게송에서 ‘일심법은 색ㆍ심과 같은 식으로 공한 것이 아니라’고 했기 때문에 3제(諦)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삼제의 문(門)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색제(色諦)와 심제(心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이다. 둘째는 유제(有諦)와 무제(無諦)와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이다. 셋째는 이 품(品) 중 뒤의 글에서 설한 것과 같다.
지금 묻는 뜻은 이 세 가지 중 첫째 문에 의거하고 있다.
‘색이 공하고 심도 적멸하다’ 함은 이 법[一心法]이 이미 3제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색상(色相)이 본래 공하고 심(心)도 적멸(寂滅)이므로 이 색법과 심법이 본래 적멸할 때 일심법도 마땅히 적멸과 같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의 게송에서 ‘마음이 있지 않다’고 했으므로 곧 앞에서 말한 ‘공과 같지 않다’고 한 것은 헛된 말이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의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물리치기 위해 이 게송에서는 그것과 같지 않음을 밝혔다.
‘법은 본래 자성이 없다’ 함은 색법(色法)과 심법(心法)이 본래 자성이 없다는 말이다. ‘저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라 함은 저 본각(本覺)의 마음으로 말미암아 생긴 것이란 뜻이다. 생긴 색과 심은 차별상(差別相)인데 저 본각의 마음은 형상과 성품을 떠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차별된 곳에는 저렇게 형상을 떠난 일각(一覺)이 있지 않다. 따라서 이 색과 심의 차별상을 공(空)하게 할 때, 형상을 떠난 일각마저 같이 쫓아버릴 수는 없다. 이러한 도리로 보건대 앞에서 한 말은 헛말이 아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면 어째서 동일하지 않나이까?”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법이 머무는 곳은 아무데도 없으며
상(相)과 수(數)는 공하므로 없는 것이다.
명(名)과 설(說), 이 두 가지와 법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이니라.

【論】 이것은 다섯 번째, 「무생행품(無生行品)」에서 일어난 의심을 해결한 것이다. 「무생행품」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연(緣)이 일어난다[起]고 해서 생하는 것도 아니고, 연이 없어진다[謝]고 해서 멸하는 것도 아니다. 존재가 처소를 갖는 것이 아니라서 머무는 것을 보지 못하니, 결정성(決定性)이기 때문이다. 이 결정성은 동일한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다.” 이 글을 보고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색(色)ㆍ심(心) 등의 법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니 평등하고 결정한 실성(實性)이다. 이는 횡적으로 색ㆍ심의 차이가 없고, 종적으로 생ㆍ멸의 구별이 없음을 의미한다. 차이가 없고 구별이 없다면 일미(一味)로서 다르지 않다는 것은 마땅하겠지만 어째서 동일하지 않다고 하느냐?’하는 의심이다.
송(頌)에서는 이에 대하여 동일하지 않다는 뜻을 나타낸다.
‘법이 머무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함은 모든 법의 머묾과 머무는 곳이 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相)과 수(數)는 공하므로 없는 것’이라 함은 색심(色心) 등의 상(相)과 일이(一異) 등의 수(數)가 다 공하므로 없다는 것이다. 상과 수가 이미 없는데 어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또 색(色)이 없으므로 심상(心相)도 없다. 이미 다른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가? 그런데 ‘명(名)과 설(說) 두 가지와 설한 법이 있다’는 것은 취하는[能取] 망심(妄心)이 취한 것[所取]이지 여실한 뜻[實義]에서 하나니, 둘이니 하는 것이 아니다. ‘명(名)과 설(說)’이라 한 데서 명(名)은 설명하는 기능[詮用]으로서 의식(意識)이 취하는 것이며, 설(說)은 말소리[語聲]로서 이식(耳識)이 요별하는 것이다. 하나라고 하자니 이 두 가지가 있고, 그 가운데 설명되는[所詮] 법도 있다. 이와 같은 수(數)는 망심(妄心)이 취하는 것이지 저 실의(實義)에 이러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그 가운데 일미(一味)가 있겠는가?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모든 법상(法相)은 양쪽 언덕[二岸]에 머물지 않으며, 중류(中流)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심식(心識)도 그러하다면 어째서 모든 경계가 식으로부터 생긴다고 하겠습니까? 만약 식이 무언가를 생겨나게 한다면 이 식도 무언가로부터 생겨난 것일텐데 어떻게 무생(無生)의 식이 무언가를 생겨나게도 하고 무엇으로부터 생겨나기도 하겠습니까?”
이에 존자께서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소생(所生)과 능생(能生) 두 가지는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라
모두 본래 이름뿐이요 자성(自性)이 없으니
있다고 취(取)하면 헛꽃이나 허깨비니라.

식(識)이 생기기 전에는
경계도 그 때는 생기지 않고
경계가 생기기 전에는
그 때는 식 역시 멸해 있다.

저 두 가지 다 본래 없는 것이라
있게 하지 못하며 생하게 하지 못한다.
생함이 없으니 식도 없는데
어떻게 경계가 그것을 따라 있으랴.

【論】 이것은 여섯 번째 「무상법품(無相法品)」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해결한 부분이다. 그 품(品)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무엇이 생멸려지(生滅慮知)의 모양입니까?” 라는 물음에 대하여 부처님께서 “이치에는 가부(可不)가 없다. 만약 가부가 있다면 갖가지 망념[念]이 생기는 것이니, 천사만려(千思萬慮)가 바로 생멸(生滅)의 모양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지금 이 뒤의 말을 근거로 저 말에 이런 의심을 낼 수 있다. ‘만약 식(識)이 가부의 경계를 생기게 하고 경계의 모양이 다시 여러 가지 망념의 식을 생기게 한다면, 심식(心識)에 생멸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양쪽 언덕에 머물지 않는다고 하는가? 모든 심식이 생함도 멸함도 없다면 어떻게 모든 식(識)이 경계를 생기게 하는가?’ 이러한 의심에서 위와 같이 물은 것이다.
‘양쪽 언덕에 머물지 않는다’ 함은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기 때문이다. ‘중류에도 머물지 않는다’ 함은 하나도 아니기 때문이다. 심식(心識)도 이와 같아서 생하고 멸함이 없는데, 어떻게 식에서 생겨나는 가부의 경계가 있다 하겠는가? 만약 식이 경계를 생기게 한다면 식도 경계로부터 생겨날텐데, 어떻게 무생(無生)의 식이 (경계를) 생기게 하고 (경계로부터) 생겨나겠는가? 이러한 의심을 내쫓기 위하여 세 게송을 설하셨다. 이 세 게송은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한 게송은 그 도리를 보여주는 것이요, 나중의 두 게송은 형상이 집착을 생기게 하는 것을 깨뜨리는 것이다.
‘이 둘은 능연과 소연이라’ 함은 ‘식(識)은 능생(能生)이고, 경계는 소생(所生)’이라는 너희들의 생각은 망심에서 취한[妄取]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다 본래 이름 뿐이요, 자성이 없다. 그러므로 그것을 있다고 집착한다면 헛꽃이나 환상을 실제로 있다고 집착하는 격이다. 그러므로 생겨남이 없고 멸함이 없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집착을 깨뜨리는 가운데 ‘식(識)이 생기기 전에는 경계도 생기지 않고’라 함은 능생(能生)의 식이 아직 있지 않을 때는 소생(所生)의 경계도 그 때는 생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경계가 생기기 전에는 그 때는 식 역시 멸해 있다’ 함은 능생의 경계가 아직 있지 않을 때는 그 소생의 식도 그 때는 멸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멸(滅)이란 적멸(寂滅)로서 본래 없음을 뜻한다.
‘저 두 가지 다 본래 없는 것이라 있게 하지 못하며[不有] 생하게 하지 못한다[無有]’ 함은 저 두 가지 능생이 본래 다 없는 것이라, 이미 무언가를 생기게 할 능력[能生]이 없다면 있게 하지 못하는 것이므로 ‘불유(不有)’라 하였고, 있게 하지 못하므로 다음 찰나에 생기게 함이 없으니 그러므로 ‘무유(無有)’라 하였다. ‘생함이 없으니 식도 없다’ 함은 생기게 한다는 이치가 이미 없는데 어떻게 식이 있을 수 있느냐는 뜻이다. 식이 없으므로 경계가 그것을 따라서 있지 않다.
이 중에는 두 가지 논증식[比量]이 있다. 하나는 이렇다. ‘식은 생하지 않는다. 생겨나게 하는 공능[能生]이 없기 때문이다. 불탄 종자[燋種]와 같이.’ 또 하나는 이렇다. ‘경계는 일어나지 않는다. 근거[所從]가 없기 때문이다. 거북 털과 같이.’
이상 여섯 대목은 의심들을 따로따로 해결한 부분이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법상(法相)은 이와 같이 안팎이 다 공(空)하며, 경(境)ㆍ지(智) 두 가지 허다한 것들은 본래 적멸합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실상(實相)의 진공(眞空)은 그와 같은 법들이 모인 것이 아니겠습니다.”
【論】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 설법의 내용을 총괄적으로 확정짓는 부분[摠定所說]이다. 위 여섯 가지 의문의 해결이 병(病)이 아니라 약임을 총괄적으로 판정한 것이다. 이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정하고, 다음에 그것이 약이라는 사실을 확정한다. 앞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는 (지장보살이) 자세히 묻는 부분이고 다음은 (여래께서)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부분이다.
‘법상은 이와 같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씀하신 여섯 부분의 법상을 전체적으로 이해했음을 나타낸다. ‘안팎’이라 한 이유는 식(識)은 안이고 경계는 밖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 허다한 것들’이란 경계와 지혜가 매우 많기 때문이다. ‘모인 것이 아니라[非集]’ 함은 잡되고 물든 생사의 질환을 모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공(空)에 집착하여 도리어 여러 가지 환난을 모아 놓은 것과도 같지 않기 때문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여실(如實)한 법은 무색(無色)이며, 무주(無住)이며, 소집(所集)이 아니며, 능집(能集)도 아니며, 의(義)가 아니며, 대[大:어떤 본에는 ‘文’으로 되어 있다]도 아니며, 하나의 근본인 과법[科法:어떤 본에는 ‘科’가 ‘利’로 되어 있다]이며, 깊은 공덕의 더미[聚]이다.”
【論】 이는 여래께서 확정적으로 인정하는 부분[定許]이다. 유(有)에 집착하는 병을 내지 않기 때문에 ‘무색’이라 하였고, 악취공에 집착하는 환란을 떠났기 때문에 ‘무주’라 하였다. 고제(苦諦)가 공하기 때문에 ‘소집(所集)이 아니라’ 하였고, 집제(集諦)가 공하기 때문에 ‘능집(能集)이 아니라’ 하였다.
음(陰)ㆍ계(界) 등의 차별된 뜻을 떠났기 때문에 ‘의가 아니라[非義]’ 하였고, 지ㆍ수ㆍ화ㆍ풍(地水火風) 등 지어내는 상[能造相]을 떠났기 때문에 ‘대가 아니라[非大]’ 하였다.
‘하나의 근본인 과법[一本科法]’이란 하나의 본각[一本覺]을 말한다. 이것을 뿌리로 삼아 모든 작용과 모든 공덕을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科)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잡염(雜染)의 과로서 모든 본식(本識)을 말하니 그 뜻은 위에서 설한 것과 같고, 둘째는 순정(純淨)의 과로서 하나의 본각을 말하니 이 글에서 설한 것과 같다.
저 본식 중에는 모든 잡염의 종자가 쌓여 있고, 이 본각 중에는 오직 매우 깊은 성품의 공덕 더미만 있다. 형상과 성품을 떠났으므로 ‘깊다’ 하고, 갠지스강의 모래알보다도 많기 때문에 ‘더미’라 하였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불가사의하고 불가사의한 더미입니다. 제7식과 제5식이 생하지 않으며, 제8식과 제6식이 적멸하며, 제9식의 상(相)이 공하여 없습니다. 유(有)도 공하여 있지 않고 무(無)도 공하여 있지 않으니, 존자께서 설하신 대로 법(法)과 의(義)가 모두 공하나이다.
공에 들어가 행이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업(業)을 잃지는 않으며, 아(我)와 아소(我所), 능ㆍ소의 신견(身見)이 없고 안팎의 번뇌가 모두 다 고요하며, 따라서 바라는 마음 또한 그칩니다. 이러한 이관(理觀)은 혜(慧)와 정(定)이 진실하고 여여하니, 존자께서 항상 설하신 이러한 공법(空法)은 좋은 약이 되겠습니니다.”
【論】 이 부분은 이 법이 약(藥)이 된다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보살이 자세히 묻고, 다음에 여래께서 그 물은 뜻을 승인하신다.
물음은 셋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앞에서 말한 깊은 공덕의 더미[深功德聚]를 이해한 것이고, 둘째는 이어서 이관(理觀)에 깊이 들어감을 밝힌 것이고, 셋째는 양약(良藥)의 훌륭한 효능[德]을 묻는 것이다. 첫째 부분도 총표(摠標)와 별현(別顯), 그리고 다시 총결하는 부분[摠結]의 셋으로 나뉜다.
‘불가사의한 더미’는 형상을 떠나고 성품을 떠난 공덕을 총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별현(別顯) 중에서는 먼저 모습을 떠났음을 밝히고 나중에 성품을 떠났음을 드러낸다.
먼저 (모습 떠났음을 밝히는) 가운데 ‘제7식과 제5식이 생하지 않는다’ 함은 두 가지 지말적인 식[末識]이 공함을 합해서 말한 것이다. 항상 작용하는 식[恒行識] 중에서는 제7식이 지말이 되고, 항상 작용하지 않는 식[不恒行] 중에서는 전5식이 지말이 되기 때문이다. ‘제6식과 제8식이 적멸하다’ 함은 두 가지 본식(本識)이 고요함을 합해서 설명한 것이다. 항행식 중에서는 제8식이 근본이 되고 불항행식 중에서는 제6식이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성품을 떠났음을 드러낸다. ‘제9식의 상이 공하여 없다’ 함은 제9식의 상 또한 자성(自性)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유도 공하여 있지 않다’ 함은 모습 떠났음을 거듭 말한 것이다. 상(相)을 갖는 여덟 가지 식[八識]의 법이 공하여 있다고 할 것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무도 공하여 있지 않다’ 함은 성품을 떠났음을 거듭 설명한 것이다. 모습을 갖지 않는 제9식의 성품이 공하여 있다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일심(一心)이 이와 같이 형상을 떠났고 성품을 떠났으므로 무량한 공덕의 더미가 되니 이러한 것을 두고 부사의취(不思議聚)라고 부른다.
‘존자께서 설하신 대로 법과 의가 모두 공하다’ 함은 셋째로 모습과 성품을 떠났음을 전체적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다음에는 이관(理觀)을 밝히는데 이 중에 둘이 있다. 하나는 개별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또 하나는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부분이다. 별명 가운데 3 구가 있다.
‘공에 들어가 행이 없으나 그렇다고 모든 업(業)을 잃지는 않는다’ 함은 공삼매(空三昧)를 말한다. 이관으로 공(空)에 들어가 능ㆍ소의 작용이 없다. 능ㆍ소가 없기는 하지만 6바라밀 등의 업(業)을 잃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음에는 무상삼매(無相三昧)를 밝힌다. ‘아와 아소, 능소의 신견이 없다’ 함은 견(見)에 속한 모든 번뇌의 모습을 떠나고, 아상과 아소상이 지니는 능견(能見)ㆍ소견(所見)의 모습을 떠났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안팎의 번뇌가 모두 다 고요하다’ 함은 애(愛)에 속한 모든 결사(結使)의 모습을 떠났음을 말한다. 안쪽으로 얽어매는[結] 모든 번뇌와 바깥쪽으로 부려먹는[使] 모든 번뇌 등 삼계 번뇌의 모습들이 공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였다. 이를 ‘무상삼매’라고 부른다.
‘따라서 바라는 마음 또한 그친다’ 함은 무원삼매(無願三昧)를 설명한 것이다. 삼계의 법이 모두 적정(寂靜)하기 때문에 원하고 구하는 마음이 자연히 영구하게 멈춰버린다. 이런 것을 ‘무원삼매’라고 한다.
‘이러한 이관(理觀)은 혜와 정이 진실하고 여여하다’ 함은 전체적으로 결론짓는 구절이다. 앞에서 본 세 가지 삼매는 모두 이관으로서, 지(止)와 관(觀)에 치우침이 없으며, 능ㆍ소가 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존자께서 항상 설하신 이러한 공법은 좋은 약입니다’ 함은 셋째 자세히 여쭙는 말이다. 이와 같은 공법(空法)은 모든 공덕을 갖추어 모든 번뇌[結使]를 치료하는 것이므로 양약이 되지 않겠나이까 하고 묻는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공하기 때문이다. 공성(空性)이 생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생함이 없으며, 공성이 멸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멸함이 없으며, 공성이 머묾이 없으므로 마음 또한 머묾이 없으며, 공성이 작위가 없으므로[無爲] 마음도 작위가 없다. 공(空)하여 출입이 없어서 모든 득실(得失)을 떠났으며,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이 모두 다 없는 것이다. 마음이 여여하여 집착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 보살아, 내가 여러 가지 공(空)을 설하는 것은 갖가지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論】 이는 여래께서 확정하고 허락하는 부분인데, 여기에도 셋이 있다. 첫째는 전체적으로 허락한 부분[摠許](이고, 둘째는 개별적으로 허락한 부분[別許], 셋째는 의심을 결단하여 확정하는 부분[決定])이다.
‘공하기 때문’이란 양약(良藥)이 되는 것은 오직 공이기 때문이며, 유(有)는 병을 낳기 때문이다.
‘공성(空性)……’ 이하는 둘째 별허(別許)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다. 먼저 ‘공’이라는 양약을 먹었기 때문에 유전(流轉)하는 좋지 않은 결과를 떠남을 밝히고, 다음에는 ‘공’이라는 양약을 먹었기 때문에 집착이라는 원인의 병을 치료함을 밝힌다.
처음 중에 ‘공성이 생함이 없으므로 마음이 항상 생함이 없다’ 함은 공에 들어간 마음은 공과 같아서 생함이 없기 때문이다. 또 멸함 없음을 따라서 마음이 항상 멸함이 없으니, 생멸은 바로 무상(無常)의 뜻이기 때문에 저 둘을 뒤집어서 상(常)이라고 하였다.
‘마음 또한 머묾이 없다’ 함은 처음과 끝의 모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중간에 머무는 모양도 없다는 말이니, 이는 3상(相)을 떠났음을 따로따로 설명한 것이다. ‘마음도 작위가 없다’ 함은 저 세 가지 유위상(有爲相)을 떠났음을 총괄적으로 밝힌 것이다. 이는 공이라는 약을 먹고 덧없다고 생각하는 병[無常病]을 고침을 밝힌 것이다.
다음에는 집착하는 병도 떠났음을 밝히는 대목이다. ‘출입이 없다’ 함은 출관(出觀)과 입관(入觀)의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득실을 떠났다’ 함은 새 것을 얻고 낡은 것을 잃었다는 생각을 떠났다는 말이다.
‘마음이 여여하여 집착하지 않음도 이와 같다’ 함은 관하는 마음도 공의 이치와 같아서 출입득실(出入得失)의 모양을 취하지 않으며, 음(陰)ㆍ계(界)ㆍ입(入) 등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는 공이라는 약을 먹고 집착하는 병을 떠났음을 밝힌 것이다.
‘내가 여러 가지 공(空)을 설하는 것은 갖가지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서’라고 한 구절은 셋째, 결론지어 확정하는 부분이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공의 이치는 둘이 아니지만 다섯 가지, 세 가지 등으로 공을 말하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유(有)에 집착하는 병을 깨뜨리기 위해서이다. 병이 여러 가지이므로 공을 설할 때도 그에 따라 많은 공을 설한 것이다.
또 이치는 실로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건만, 다만 유(有)를 깨뜨리기 위해 억지로 공(空)이라 하였다. 이는 공이라는 말에 공성(空性)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뜻을 가지고 모든 공에 대한 가르침을 결론짓는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아지랑이가 물이 아님을 알듯이 유(有)가 실(實)이 아님을 알고, (나무 안에) 화성(火性)의 왕[王:다른 본에는 ‘生’이라고 되어 있다]이 있음을 알듯이 실(實)이 비무(非無)임을 안다면, 이와 같이 관(觀)하는 자를 지혜로운 자라 하겠나이까?”
【論】 여섯 품(品)에 걸친 여섯 가지 의문을 역순[逆]으로 해결하는 중에 의심을 각각 풀어주고[別決] 전체적으로 확정짓는[摠定] 부분까지가 앞에서 끝났다.
여기서부터는 두 번째로, 한 품(品)에서 일어난 세 가지 의문을 순서대로 제거해 가는 부분이다. 이 중에 세 부분이 있다. 즉 「여래장품」 하나에서 세 가지 의문이 일어나므로 차례로 그것을 없애가기 때문이다.
첫째 의문은 이렇다. 저 범행장자(梵行長者)가 게송에서 “법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지랑이를 물로 본 것과 같이 미혹에서 일어난 뒤바뀐 생각이다”라고 한 것과 “법을 없다고 본다면, 그것은 장님이 해가 없다고 하는 것과 같은 뒤바뀐 생각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하여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장자는 속인이니 이와 같은 판단이 망견(妄見)이 되나이까, 진지(眞知)가 되나이까?’하는 것이다. 이같이 의심하여 믿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므로 그런 이의 의심을 쫓아버리기 위해 (지장보살이)그 일을 들어 물은 것이다. 아지랑이와 물의 비유는 앞에서 이미 설명했다.
‘실이 무가 아님을 안다[知實非無]’ 함은 일실(一實)의 뜻과 성[義性]이 무(無)가 아님을 안다는 것이다. 그가 ‘실(實)이 없다고 제멋대로 생각하는 자는, 마치 해가 없다고 잘못 아는 장님과 같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장자가 실(實)이 없지 않음을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없지 않다는 뜻을 화성(火性)의 왕에 비유한다. 나무 속에 불[火大]의 성품이 있는데, 나무를 쪼개고 나누어서 찾아보아도 불의 모습은 없다. 그러나 실은 나무 속에 화성이 없지 않아 비벼서 구하면 불이 반드시 나타난다. 일심(一心)도 그와 같아서 모든 모양을 분석해보아도 심성(心性)을 얻을 수가 없으나 사실은 모든 법 중에 마음이 없지 않으니 도를 닦아 찾아보면 일심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불의 성품은 모습을 감추고 있으나 세력이 커서 마치 나라의 주인과 같으므로 ‘왕’이라고 하였다. 양 극단을 떠난 장자의 이러한 관(觀)이 지혜로운가 하고 물은 것이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참된 관[眞觀]으로 하나의 적멸을 관하기 때문이다.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을 동등하게 공(空)으로 취(取)하니, 공을 닦으므로 언제나 놓치지 않고 부처를 보며, 부처를 보기 때문에 3류(流)를 따라가지 않는다.”
【論】 부처님의 대답에도 둘이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결정 내리는 부분[直決]과 이유를 해석하는 부분[釋決]이다.
‘그렇다’한 것은 그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결정을 내린 말이며, ‘왜냐 하면’ 이하는 지혜로운 이유를 풀이한 것이다. 그 중에도 둘이 있다. 간략한 해석[略釋]과 자세한 설명[廣演]이다.
처음 (略釋) 가운데 ‘하나의 적멸을 관한다’ 함은 일심법이 적멸하다는 뜻을 관(觀)하기 때문이다. ‘모양 있는 것과 모양 없는 것을 동등하게 공으로 취한다’ 함은 모양이 있는 속(俗)과 모양이 없는 진(眞)을 동등하게 존립시키지 않아서 하나로 융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空)을 닦아 불심(佛心)에 어김없이 따르므로 한번도 놓친 적 없이 항상 불신(佛身)을 본다. 그러므로 ‘놓치지 않고 부처를 본다’고 하였다.
항상 부처를 보기 때문에 더욱 공관(空觀)이 늘고, 공관이 늘어나면 갖가지 유(有)와는 위배되므로 ‘3류를 따라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3류(流)’란 삼계(三界)의 번뇌를 다 포섭한 것으로, 욕류(欲流)ㆍ유류(有流)ㆍ무명류(無明流)를 말한다. 그 뜻은 일반적인 설과 같다.
【經】 “대승(大乘) 중에 3해탈(解脫)의 도(道)는 하나의 체(體)로서 자성이 없다.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며, 공이므로 모양도 없으며, 모양이 없으므로 작위도 없으며, 작위가 없으므로 구함도 없고, 구함이 없으므로 바람도 없다. 이 업(業) 때문에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을 뵙기 때문에 미래에 정토(淨土)에 태어난다.
보살아, 이 깊은 법에서 3화(化)를 부지런히 닦으면 혜(慧)와 정(定)이 원만히 이루어져 삼계(三界)를 초월한다.”
【論】 이것은 둘째, 자세한 설명[廣演]인데, 여기에도 두 가지가 있다. 먼저 3해탈도(解脫道)를 닦아 얻는 훌륭한 이익[勝利]을 밝히고, 다음에는 3화(化)를 부지런히 닦아 얻는 훌륭한 이익을 드러낸다.
‘하나의 체로서 자성이 없다[一體無性]’ 함은 저 소승(小乘)의 3해탈문이 각각 다른 체(體)를 가지며 자성이 있는 데 반해, 대승보살의 관행(觀行)은 하나의 체임을 드러낸 것이다. 마음을 관(觀)하여 자성이 없다는 사실을 증득했을 때 뜻에 따라 세 가지 해탈을 가설할 뿐이다. 그 체성(體性)을 잊었다는 뜻에서 공해탈(空解脫)을 세우고, 체상(體相)을 잊었다는 뜻에서 무상해탈(無相解脫)을 세우고, 체용(體用)을 잊었다는 뜻에서 무작해탈(無作解脫)을 세우니 이것을 무원해탈(無願解脫)이라고도 한다.
오직 하나인 무분별관(無分別觀)으로 모든 법의 체성(體性)ㆍ체상(體相) ㆍ체용(體用)을 버리게 하지 않는 바 없으며, 융합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나타내기 위해 3해탈문을 건립한다.
‘이 업 때문에 마음이 깨끗하다’ 함은 모든 체ㆍ상ㆍ용을 잊은 까닭에 관(觀)에서 나와 세속에 관여하는 마음을 정화하여 물듦과 집착을 떠난다는 뜻이다. 이렇듯 물들고 집착함을 떠난 마음이면 보불(報佛)20)을 볼 수 있고, 보불을 보게 되므로 정토(淨土)에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을 3해탈도의 뛰어난 이익이라고 한다.
‘이 깊은 법에서 3화를 부지런히 닦는다’ 함은 공법(空法)에 있어서 3공(空)을 부지런히 닦는다는 말이다. 무엇이 3화인가? 공상도 공함[空相亦空]을 닦는 것이 그 첫째 화[一化]요, 공공도 공함[空空亦空]을 닦는 것이 둘째 화[二化]요, 공해진 것도 공함[所空亦空]을 닦는 것이 셋째 화[三化]이다. 닦는다는 뜻은 앞에서 이미 설명했으므로 따로 논하지 않는다. 3화를 부지런히 닦아 가면 일심(一心)을 통달하고, 일심을 통달하기 때문에 혜(慧)와 정(定)이 원만히 이루어진다. 원만히 이루어진 경지에서 삼계를 벗어나니, 이것이 3화를 부지런히 닦아 얻는 뛰어난 이익이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무생무멸(無生無滅)은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다 없어지고 나면 적멸이 항상할 터이며, 항상하므로 끊기지 않을 것입니다. 끊기지 않는 이 법은 삼계의 모든 움직이는 법과 움직이지 않는 법을 떠나 있습니다.
유위법(有爲法)을 불구덩이 피하듯 하려면 어떤 법에 의지하여 스스로를 꾸짖고[呵責] 저 일문(一門)으로 들어가야 하나이까?”
【論】 여기서부터는 「여래장품(如來藏品)」에서 일어나는 둘째 의문에 대한 해명이다. 그 품(品)에서 “식(識)을 확실히 보면 그것은 항상하다. 이 식이 항상 적멸하니, 적멸한 그것 또한 적멸하다”고 하였는데, 이 글을 근거로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그와 같이 항상 머무는 적멸의 법은 비록 기뻐하고 즐길 만하지만, 이것은 잘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중생의 마음은 거칠고 얕아서 조복(調伏)하기 힘든데 어떻게 마음을 길들여 그 문으로 향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을 빙자하여 (지장보살이) 이런 물음을 던진 것이다.
질문은 둘로 나뉜다. 처음은 과(果)가 멀다는 것을 표시하고 다음은 들어가는 인(因)을 물었다.
‘무생무멸은 무상한 것’이란 앞에서 말한 ‘식(識)이 항상 적멸하다’고 한 말을 이해한 것이다. 본래 적멸하기 때문에 생함도 멸함도 없다. 그러나 본래 항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상(無常)이 된다.
‘이 생멸을 멸하여 생멸이 다 없어지고 나면 적멸이 항상하다’고 함은 앞에서 말한 ‘적멸한 그것도 적멸하다’는 말을 이해한 것이며, 또 ‘식(識)을 확실히 보면 그것은 항상하다’고 한 말을 이해한 것이다.
‘유위법……’ 이하는 저 일문(一門)으로 향해 들어가는 방편을 물은 말이다. 앞에서도 방편정관(方便正觀)을 설하긴 했으나 간략하기 때문에 다시 자세히 설해주시기를 청하였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아, 세 가지 큰 일[三大事]에서 자기 마음을 꾸짖어야 하고, 세 가지 큰 진리[三大諦]에 그 행(行)을 들어가게 해야 한다.”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세 가지 일에서 자기 마음을 꾸짖는 것입니까? 또 어떻게 하는 것이 세 가지 진리에 하나의 행[一行]을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 가지 일이란 첫째 인(因)을 말하고, 둘째 과(果)를 말하며, 셋째 식(識)을 말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일은 본래부터 공하여 없는 것이라서 나[我]의 진아(眞我)가 아닌데, 어찌하여 이에 대하여 좋아하고 물든 마음을 일으키겠는가?
이 세 가지 일을 관할 때,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 고해(苦海)에 표류한다고 보아서, 이와 같은 일로 항상 스스로를 꾸짖는다. 세 가지 진리란 무엇인가? 첫째는 보리의 길로서, 불평등한 진리가 아닌 평등한 진리다. 둘째는 삿된 지혜로 얻는 진리가 아니라 크게 깨달은 바른 지혜로 얻는 진리다. 셋째는 잡된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가 아니라 혜(慧)와 정(定)이 다르지 않은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다. 이와 같은 3제(諦)로 불도를 닦아 가면 그 사람은 이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다. 정각의 지혜를 얻고서 크고 지극한 자비[大極慈)를 흘려 보내니 자리(自利)ㆍ이타(利他)가 다 갖추어져 부처의 깨달음을 성취한다.”
【論】 이 글은 네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째는 물음이고, 다음은 답이고, 셋째는 청(請)이고, 넷째는 설명[說]이다. 이 마지막 설명 부분에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呵厭方便]을 말하고 다음에 향해 들어가는 방편[趣入方便]을 보여 준다.
이 첫 번째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을 설하는 가운데 ‘인(因)’이란 5계(戒)와 10선(善)의 인을 말하고, ‘과(果)’란 인간ㆍ천신들이 누리는 부유하고 즐거운 과를 말하고, 식(識)이란 이 인과를 간직하는 것, 즉 본식(本識)을 말한다. 중생은 이 본식을 자기의 내아[內我]라고 착각하고 있으나, 이것의 성품은 공하기 때문에 ‘나’가 아니다. 무아(無我)의 도리라야 비로소 그것이 참된 나[眞我]이다. 그러므로 나 아닌 것에 대하여 애착하고 물들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일을 관할 때, 매달려 바람에 나부끼고’라 함은 네 가지 얽매임[四繫] 때문에 이정(理定)에 지장을 줌으로써 저 세 가지 일[因 ㆍ果ㆍ識]들을 고해(苦海)로 표류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 네 가지 얽매임[四繫]이란 무엇인가? 『대법론(對法論)』「제품(諦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계에 네 가지가 있다. 탐욕신계(貪慾身繫)ㆍ진에신계(瞋恚身繫)ㆍ계금취신계(戒禁取身繫)ㆍ차실집취신계(此實執取身繫)21)로, 정의성신(定意性身)을 장애하므로 계(繫)라고 한다. 어째서 그런가? 그것 때문에 정심(定心)의 자성신(自性身)을 장애하기 때문에 계(繫)라고 한 것이지, 색신(色身)에 장애를 주어서가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산란하게 하는 네 가지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재물(財物) 등을 탐애(貪愛)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둘째, 싸움질과 옳지 못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셋째, 수도할 때 행하기 어려운 계금(戒禁)으로 고뇌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넷째, 바른 이치를 따르지 않고 경계를 추구(推求)하는 것이 원인이 되어 마음이 산란해진다. 저마다 달리 보기 때문에 그 인식할 대상에 대하여 바른 이치대로 보지 않고, 갖가지로 헤아려 망령되게 집착을 일으켜 이것만이 진(眞)이고, 다른 것들은 다 어리석고 망령된 것이라고 여긴다. 이런 이유로 마음이 산란하고 동요한다. 무엇에 대해서 산란하고 동요하는가? 정심(定心)의 여실한 지견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일로 항상 스스로를 꾸짖는다’ 함은 네 가지 계박에 휘말려 있음을 가책하고, 세 가지[因ㆍ果ㆍ識]에 표류하는 일에 염증을 내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해서 꾸짖고 싫어하는 방편[呵厭方便]을 설명했다.
그렇다면 향해 들어가는 방편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 가지 진리[三諦]를 자세히 깨닫는 데 있다.
‘첫째는 보리의 길[道]로서, 불평등한 진리가 아닌 평등한 진리다’ 함은 무슨 뜻인가?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자성이 맑은 보리[性正菩提]는 크게 통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도(道)’라 하였고, 모든 중생이 이 성품과 같아서 궁극적인 이 길로 들어가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불평등이 아닌 평등’이라고 하였다. 이는 2승(乘)들이 따로따로 향해 들어가는 일을 대치(對治)한 것이다.
‘둘째는 삿된 지혜로 얻는 진리가 아니라 크게 깨달은 바른 지혜로 얻는 진리’라 함은, 일체지(一切智)인 대각(大覺)의 과(果)는 오직 평등을 증득하는 바른 지혜로 얻는 것이지, 명제(冥諦)나 대유(大有)22) 등을 사유하는 삿된 지혜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모든 외도(外道)의 고집을 대치한 것이다.
‘셋째는 잡된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가 아니라 혜(慧)와 정(定)이 다르지 않은 행으로 들어가는 진리’라 함은 바른 지혜를 얻어 평등에 들어갈 때 혜(慧)와 정(定)이 원융하여 별개의 행상(行相)이 없어야 비로소 평등제(平等諦)에 참되게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는 세간에서 분별하듯 심왕(心王)과 심수(心數)를 별개의 체로 보고 정과 혜(慧)의 다른 행으로 보는 것과는 다르다. 이러한 잡행은 참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증득하지 못하고서 증득했다고 여기는 증상만(增上慢)에 사로잡힌 세간의 관행(觀行)을 대치(對治)한다.
이와 같은 세 가지를 통틀어 진리[諦]라고 부르는 이유는 자세히 살펴 깨달아 가는 관(觀)으로 보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다른 집착들을 두루 대치해야만 유일한 부처님의 길을 바로 닦아 간다. 그러므로 ‘3제로 불도를 닦아간다’고 하였다.
다음에는 도를 닦아 얻어진 과(果)를 드러낸다.
‘그 사람은 이 법에서 바른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일이 없다’ 함은 자리(自利)인 지덕(智德)의 과(果)를 드러낸 것으로, 3법(法)에서 불도(佛道)를 닦으면 정각(正覺)의 열매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정각의 지혜를 얻고서 크고 지극한 자비[大極慈)를 흘려 보낸다’ 함은 이타(利他)인 은덕(恩德)의 과를 나타낸 것으로, 크고 지극한 무연(無緣)의 자비를 두루 흘려 보내 법계에 가득 차게 하여 이익을 주지 못함이 없기 때문이다.
‘자리와 이타가 다 갖추어져 부처의 깨달음을 성취한다’ 함은 앞의 둘을 묶어서 결론지은 것이다. 자리와 이타의 두 이익이 원만하여 등각(等覺)을 이루기 때문이다.
【經】 지장보살이 아뢰었다.
“존자시여, 이와 같은 법은 인과 연이 없습니다. 연이라는 법이 없다면 인도 일어나지 않을텐데 어떻게 움직이지 않는 법[不動法]으로 여래(如來)에 드나이까?[入:어떤 본에는 ‘得入’으로 되어 있다]”
【論】 이 부분은 「여래장품」에서 생긴 세 번째 의문을 제거한 것이다.
저 품의 게송 끝머리에 ‘소취(所取)와 능취(能取)를 전변하여 여래장에 들어간다’고 했었는데, 그 말을 붙들고 이런 의심을 일으킬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깨달음의 길이란 평등한 진리로서 여래장을 뜻한다. 이는 인과 연의 힘을 빌리지 않는 것인데 어찌하여 저 품에서는 능취와 소취를 전변하는 것을 원인으로 하여 여래장법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가?’ 이렇게 의심을 내므로 (지장보살이) 그렇게 물었다.
‘인과 연이 없다’ 함은 평등하기 때문에 인연을 따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또 평등하므로 나머지 연(緣)이 없고, 나머지 연이 없으므로 인(因)이 일어날 수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일어남도 움직임도 없는 저 법에 인연을 가지고 여래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인의 힘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인과 연을 의지하므로 부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經】 그 때 여래께서 이 뜻을 펴고자 게송으로 설하셨다.

모든 법의 모양은
성품이 공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이 법은 지금 이 때 있는 것이나
이 때 일어나지 않는 것이니라.

법에는 다른 때가 없으니
다른 때에 일어나지 않고
법에는 동(動)ㆍ부동(不動)이 없어서
성품이 공적(空寂)하므로 적멸이니라.

성품이 공하여 적멸한 때
이 법이 이 때 나타나나니
모양을 떠났으므로 고요히[寂靜] 머물며
적정에 머물기 때문에 연(緣)을 따르지 않는다.

【論】 이 아래는 여래께서 정면으로 의심을 결단(決斷)한 부분이다. 여기서는 평등하고 부동하지만 득입(得入)할 수 있다는 뜻을 설명하신다.
여덟 수의 게송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세 게송은 약설(略說)이고, 뒤의 다섯 게송은 광선(廣宣)이다.
약설 중에도 둘이 있으니, 앞 두23) 게송은 부동(不動)의 뜻을 밝히고, 뒤 한 게 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드러낸다.
앞의 것에도 표(標)ㆍ석(釋)ㆍ결(結)의 세 부분이 있다. 첫 두 구는 부동의 뜻을 표방한 것이요, 다음의 네 구는 부동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이 법은 지금 이 때 있는 것이나 이 때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 한 데서 ‘이 때[是時]’란 ‘이 시간[此世]’, 즉 현재를 말한다. 그런데 이 현재라는 시간은 언제나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를 분석해서 제거하면 중간(中間)이 없다. 마치 빛과 그늘[光陰]을 제거하면 중간처(中間處)가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 때’에 일어남이란 있을 수가 없다.
‘법에는 다른 때가 없으니, 다른 때에 일어나지 않는다’ 한 데서 ‘다른 때’란 소위 과거와 미래를 말한다. 미래는 아직 있지 않으므로 일어남이 없고, 과거는 이미 없으므로 일어남이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런 이치에서 법(法)에는 일어나고 움직이는 일이 없다. 생하고 일어나는 움직임이 이미 없으므로, 영원히 머물며 움직이지 않음도 당연히 없다. 그러므로 ‘법에는 움직임도 움직이지 않음도 없어서, 성품이 공적하므로 적멸하다’고 하였다.
이 두 구는 부동(不動)의 뜻을 매듭지은 것이다.
다음 한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밝힌 것이다.
‘성품이 공하여 적멸한 때’란 성품이 공하여 적멸하다는 사실을 확실히 보았을 때라는 말이다. 부동(不動)의 법이 이 때 나타나는데, 마음에 나타나므로 득입(得入)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위의 반은 ‘득입’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법(法)이 모든 상(相)을 떠나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모든 상을 떠났으므로 적정(寂靜)한 채로 머물며, 적정에 머물기 때문에 항상 연(緣)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들어감이 있다고는 하지만 연을 떠났다는 뜻을 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아래 반은 연을 떠나 있다는 의미를 밝히고 있다.

【經】 연(緣)에 의해 일어난 모든 법
이 법에는 연(緣)이 생기지 않으니
인연은 생멸이라 머묾이 없으며
생멸하는 성품은 공적하기 때문이다.

연의 성품은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며
그 연은 본래 연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法)의 일어남은 연 때문이 아니며
연이 일어나지 않음도 그러하다네.

인연으로 생긴 법
이 법은 인연이니
인연으로 생멸의 모습을 나타내나
그것은 생멸이 없다네.

【論】 이 아래는 (略說에 이어) 두 번째 자세히 설명하는 부분[廣宣]인데, 이 중에도 둘이 있다. 앞 세 게송은 부동(不動)의 뜻을 자세히 설명하고, 그 다음 두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편다.
처음에도 둘이 있으니 앞 두 게송은 근본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가지고 부동의 뜻을 나타내고, 뒤 한 게송은 지말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가지고 부동의 뜻을 나타낸다.
처음에도 셋이 있으니 표방ㆍ해석ㆍ결론이다. ‘연(緣)에 의해 일어난 모든 법, 이 법에는 연(緣)이 생기지 않는다’ 함은, 여러 가지 과법(果法)에는 그 연(緣)이 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다음의 네 구는 생하지 않는다는 뜻을 해석한 것이다.
‘인연은 생멸이라 머묾이 없다’ 함은 모든 인연은 생멸하여 머물지 않는 것이므로 과(果)를 낳는 공능이 없다는 뜻이다. ‘생멸하는 성품은 공적하기 때문’이라 함은 머물지 않기 때문에 생멸이 없으니, 성품이 공적하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역시 과를 낳지 않는다는 뜻이다.
‘연의 성품은 능연과 소연’이라 한 데서, 인연의 종자(種子)가 숨어 있는 것을 ‘성품’이라고 한다. 증상연(增上緣)의 근(根)이 경계를 대하는 공능을 가지므로 그것을 ‘능연(能緣)’이라 하고, 연이 되는 경계[所緣境界]는 근의 대상[所對]이기 때문에 ‘소연(所緣)’이라고 한다.
차제연(次第緣:等無間緣)은 법의 소멸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종자인 성품의 연(緣)과 그 능ㆍ소의 두 연은 모두 본연(本緣)이 일어난 것이므로, ‘그 연은 본래 연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근본이 되는 모든 연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생멸하며, 그 자성이 공(空)하기 때문에 과법을 생하는 작용이 없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뜻에서 연에는 생겨남이 없다는 뜻을 말한다.
‘그러므로 법이 일어남은 연 때문이 아니라’ 함은 과법(果法)의 일어남이 연에서 생기는 것이 아님을 결론짓는 말이다. ‘연이 일어나지 않음도 그러하다’ 함은 연이 일어남 없는 것도 그 과법과 동일함을 결론짓는 말이다.
다음 한 게송은 지말을 따져보아도 얻어지지 않음을 들어 부동(不動)을 나타낸 부분이다. ‘인연으로 생긴 법, 이 법은 인연이니’란 모든 과법도 인연이 된다는 사실을 밝힌 말이니, 뒤에 생하는 법에 대하여 연(緣)이 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과법이 이미 인연이 되고 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생멸하는 성품이 공하다’. 그러므로 ‘인연으로 생멸하는 모습을 나타내나, 그것은 생멸이 없다’고 하였다.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할[略說] 때는 과법(果法)이 공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냈고, 지금 자세히 설명하는[廣宣] 데서는 인연설(因緣說)을 가지고 모든 법의 인과(因果)가 부동한 것이 곧 평등한 보리의 길이며, 이 법 말고 따로 구할 깨달음이 있지 않음을 밝히려 하였다. 이것이 이 게송의 대의(大意)이다.
조법사(肇法師:僧肇)가 이렇게 말하였다. “도(道)가 먼 것인가? 일마다 진(眞)이다. 성(聖)이 먼 것인가? 체득하면 신(神)이로다.”

【經】 저 여여의 진실한 모습은
본래 출몰(出沒)이 없건만
모든 법이 이 때에
스스로 출몰을 내느니라.

그러므로 지극히 청정한 근본은
본래 여러 힘에 기인하지 않나니
나중에 얻을 그 자리에서는
얻는다 해도 본래 얻은 것을 얻느니라.

【論】 (不動의 뜻을 밝힌 데 이어) 이 두 게송은 득입(得入)의 뜻을 편 것이다. 그 중에 셋이 있으니, 첫째 한 송은 움직임이 있는 저 모든 법에 대하여 진여(眞如)의 부동함을 나타낸 것이고, 둘째 그 다음 두 구는 움직이지 않는 근본이 모든 연을 상대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고, 셋째 마지막 두 구는 연(緣)을 떠난 법에 득입(得入)의 의미가 있음을 설명한 것이다.
‘나중에 얻을 그 자리[後得處]’란 도를 닦은 뒤에 얻는 지위를 말한다. 앞에서 간략하게 설명한 가운데 ‘적멸시’라 한 것을 여기서는 ‘후득지처(後得之處)’로 표현한 것이다. 이미 적멸이라면 어찌 장소와 때가 있겠는가만, 때와 장소를 떠났기 때문에 ‘때와 곳’이라는 개념을 빌려서 설명했을 뿐이다.
‘얻는다 해도 본래 얻은 것을 얻는다’ 함은 시각(始覺)이 완성[究竟]되었다는 뜻에서 ‘얻었다[得]’고 하였는데, 이는 능득(能得)을 말한다. 시각이 완성되면 본각(本覺)과 같아지는데, 이런 이유에서 ‘본래 얻은 것[本得]을 얻는다’고 하였다.
여기까지가 세 번째 의심을 해결하는 부분이었다.

【經】 그 때 지장보살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이 즐거워졌다. 모든 대중들도 의문을 품는 자가 없었는데, 대중의 이런 마음을 알고나서 지장보살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대중들이 품은 의심을 내 알았기에
정성껏 간절히 물었더니
여래께서 자비로운 선심으로
남김없이 분별해주시어

이 두 무리들 모두가
다들 분명히 알아들었네.
내가 이제 확실히 안 곳에서
모든 중생을 빠짐없이 교화하여

매우 자비로우신 부처님 같이
본원(本願)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에서
번뇌 속에 머물고자 하네.

【論】 이는 네 번째, 지장보살이 이해했음을 나타낸 부분[領解]이다. 이 세 송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앞의 한 송 반은 앞에서 의문을 해결한 이익에 관해 매듭짓고, 다음의 한 송 반은 나중에 널리 교화할 행(行)에 대해 말한 것이다.
‘중생을 외아들처럼 여기는 경지[一子地]’란 초지(初地) 이상에서 일체 중생이 평등함을 이미 깨달았으므로 그 중생들을 외아들 보듯이 한다는 뜻이다. 이를 가리켜 청정증상의락(淸淨增上意樂)이라고 하는데, 비유적인 표현으로 그 마음을 ‘외아들같이 여기는 경지’라고 한 것이다.
‘번뇌 속에 머문다’ 함은 보살은 모든 법의 평등함을 얻었다고는 할지라도 방편의 힘을 쓰기 때문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모든 번뇌와 수면(隨眠)을 버리고 열반에 들어가면 본원(本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유가론(瑜伽論)』 삼마혜다(三摩呬多) 결택분(決擇分) 중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멸진등지(滅盡等至)24)는 무루(無漏)라고 해야 한다. 번뇌와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응하지 않으므로 연할 대상이 없다. 모든 번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원행지(遠行地)에 들어온 보살만 빼고는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이생(異生)들도 행할 수 없다. 보살은 출세간법을 일으켜 현실로 앞에 나타나게 하나 방편선교(方便善巧)의 힘 때문에 번뇌를 버리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서 ‘버리지 않는다[不捨]’고 한 것은 아라한처럼 완전히 버리는 것과는 다르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했지, 전혀 버리지 않는다는 뜻에서 그렇게 말한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장장(二障章)에서 설한 것과 같다.
버리지 않기 때문에 ‘번뇌에 머문다’고 하였으니, 그럼으로써 열반에 들지 않고 시방세계를 두루 교화하기 때문이다.
이 한 권의 경을 크게 (서분ㆍ정설분ㆍ유통분)셋으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인 정설분(正說分)이 여기서 끝났다.

【經】 이 때 여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불가사의하니 항상 대비[大悲:어떤 본에는 ‘大慈’라고 되어 있다]로 중생의 고통을 뽑아 준다. 이 경전의 법을 간직하고 이 보살의 이름을 외우는 중생은 나쁜 길에 떨어지지 않고 모든 장애와 곤란이 다 없어질 것이다. 다른 잡념 없이 오로지 이 경만 염(念)하며 법대로 닦고 익히는 중생이 있다면, 그 때 보살이 항상 몸을 변화로 나타내서 잠시도 버리지 않고 끝까지 그를 위해 법을 설하고 그를 보호하여, 위없이 바르고 온전한 깨달음[阿耨多羅三藐三善提]을 속히 얻게 할 것이다.”
【論】 이 아래는 세 번째, 유통분(流通分)이다. 그 중에 여섯 부분이 있다.
첫째는 사람을 칭찬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대중에게 권유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셋째는 이름을 세워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넷째는 수지(受持)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참회로 유통하게 하는 것이고, 여섯째는 받들어 행함으로써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위 경문은 첫째로 사람을 칭찬하여 유통하게 한 부분인데, 이 경을 유통하게 하는 보살에게 네 가지 훌륭한 공덕이 있음을 칭찬한다. 대비(大悲)로 일체중생을 빠짐없이 교화하는 공덕, 이 경을 간직하는 자를 별도로 도와 주는 공덕, 몸을 변화시켜 설법하는 공덕, 궁극적인 결과를 얻게 하는 공덕이다.
【經】 “너희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려거든 모두 이와 같은 대승(大乘)의 결정된 요의(了義)를 닦고 익히게 해야 한다.”
【論】 이는 두 번째, 대중들에게 권유하여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한 ‘결정된 요의’란 가장 깊고, 가장 궁극적이어서 이보다 더할 수 없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한 말이다.
【經】 그 때 아난(阿難)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아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께서 설하신 대승의 복 더미는 결정코 모든 번뇌를 끊어버리며, 무생(無生)의 본각(本覺) 이익은 불가사의합니다. 이와 같은 법을 무슨 경이라 이름해야 하며, 이 경을 수지(受持:마음속에 이해하고 새김)하면 얼마만한 복(福)을 얻나이까? 부처님의 자비로 저희를 위해 부디 말씀해 주소서.”
【論】 이는 세 번째, 이름을 세워 유통하게 한 것이다. 먼저 묻고 뒤에 대답했다. 물음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이해한 것을 나타내고[領解], 나중에 물음을 던진다.
이해한 중에서는 이 경이 가지는 네 가지 훌륭한 공능을 밝힌다. 첫째는 이 경을 간직하는 자로 하여금 무량한 복을 얻게 하는 것이니, 경에서 ‘대승의 복 더미’라고 하였다. 둘째는 이 경을 간직하는 자로 하여금 모든 번뇌를 영원히 끊어버리게 하는 것이니, 경에서 ‘결정코 모든 번뇌를 끊는다’고 하였다. 셋째는 밝히신 취지가 바로 본각(本覺)의 이익이라는 것이니, 경에서 ‘무생의 본각 이익‘이라고 하였다. 넷째는 밝히신 가르침이 사량(思量)하기 어렵다는 것이니 경에서 ‘불가사의’라고 하였다.
다음으로 물음 가운데서는 두 가지 일을 물었다. 먼저 경의 요점[經要]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여 경(經)의 이름을 물었고, 다음에 복을 구해 이 경을 수지하였고 이 경을 지녀 얻는 복을 물었다.
【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경의 이름은 불가사의하니, 과거 모든 부처님께서 보호하시는 것이며,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 이 경을 지니는 중생이 있다면 그는 다른 모든 경에서 바라고 찾을 것이 없다.
이 경전의 법은 많은 법을 총지(摠持)하며, 모든 경의 요점[要]을 다 포함하니, 이 모든 경의 법 중에서 법의 계종(繫宗)25)이 된다. 이 경의 이름을 『섭대승경(攝大乘經)』이라고 하며, 또 『금강삼매(金剛三昧)』, 『무량의종(無量義宗)』이라고 부른다.”
【論】 여기서부터는 대답인데, 여기에도 두 부분이 있다. 차례로 두 가지 물음에 대답한다. 첫 번째 대답에 또 둘이 있으니 먼저 이름과 뜻을 찬탄하고, 다음에 이름을 세운다.
명의(名義)를 찬양한 가운데도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총괄적으로 이름을 찬탄하고 다음에 개별적으로 의미를 설명한다.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能入……]’ 이하는 개별적으로 의미를 설명한 것인데, 세 가지 뜻을 밝힌다.
‘모든 것을 아는 여래의 지혜바다에 들게 한다……바라고 찾을 것이 없다’ 함은 ‘금강삼매’라는 이름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다. 깨뜨리지 않는 법이 없고, 끝까지 밝히지 않는 이치가 없으므로 여래의 지해[智海]로 들어가게 하고 이 밖에 더 희망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 경전의 법은 많은 법을 총지하며, 모든 경의 요점을 포함한다’고 한 것은 ‘섭대승경(攝大乘經)’이란 이름의 뜻을 나타낸다. ‘법의 계종’이라고 한 것은 ‘무량의종(無量義宗)’이란 이름의 뜻을 나타낸다.
이 두 이름의 뜻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앞의 것이 모든 경의 뜻을 광범하게 포함한다는 뜻을 밝힌 데 비해, 뒤의 것은 모든 경이 종주[宗]로 삼는 극치임을 밝혔다.
다음에 세 가지 이름을 들었으니, 그 중 자세한 것은 앞의 2문(門) 중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하였다.

【經】 “이 경전을 수지(受持)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수지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공덕은 허공같이 끝이 없고 불가사의하니, 내가 부탁하는 것이 바로 이 경전이다.”
【論】 이는 두 번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이 중에 네 가지 훌륭한 덕을 밝힌다.
첫째는 이 경은 모든 부처의 마음을 포함한다는 뜻에서, 부처를 수지하는 뛰어난 덕[持佛勝德]을 갖는다. 경에서는 ‘백천의 모든 부처님을 수지한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둘째는 이 경이 넓고 큰 뛰어난 덕[廣大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끝이 없다’고 하였다. 셋째는 매우 깊은 뛰어난 덕[甚深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불가사의하다’고 하였다. 넷째는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뛰어난 덕[無比勝德]을 갖는다는 것이니, 경에서 ‘바로 이 경전’이라고 하였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어떤 마음으로 행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이 경을 수지(受持)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마음에 얻고 잃는 것이 없고, 항상 범행(梵行)을 닦으며, 희론(戱論)에 대해서도 항상 맑은 마음을 즐기며, 마을에 들어가도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으며, 또 집안에 머물러 살아도 3유(有)에 집착하지 않는다.”
【論】 여기서부터는 수지(受持)하므로써 유통하게 하는 것이니, 그 중에 둘이 있다. 첫째는 수지하는 일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부분이고, 둘째는 문답을 통해서 거듭 설명한 부분이다.
첫 번째 것에도 둘이 있으니, 먼저 묻고 뒤에 답한다.
물음 중에 두 가지가 있으니, 먼저 경을 수지하는 사람의 심행(心行)에 관해 묻고 나중에 경을 수지하는 사람의 복리(福利)에 관하여 묻는다.
답 중에서는 차례로 이 두 가지 물음에 대답을 해 가는데, 첫 번째 답 가운데서는 다섯 가지 심행(心行)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첫째로 (이 경을 수지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장단점[長短]을 보지 않기 때문에 마음속에 얻고 잃음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안으로 상(相)을 여읜 깨끗한 행을 닦기 때문에 항상 청정한 행을 닦는다는 것이다. 셋째로는 동(動)에 있으면서도 부동(不動)하기 때문에 항상 고요한 마음을 즐긴다는 것이다. 넷째로는 산란한 경계에 들어갔어도 산란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이 항상 정에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로는 탁한 곳에 거처하면서도 물들지 않기 때문에 3유(有)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經】 “이 사람에게는 현세(現世)에 다섯 가지 복(福)이 있다. 첫째는 대중에게 존경을 받으며, 둘째는 육신이 횡액을 당하거나 요절하지 않으며, 셋째는 그릇된 논의에 잘 대답할 줄 알며, 넷째는 기꺼이 중생을 제도하고, 다섯째로는 성도(聖道)에 들 수 있다. 이런 사람이 이 경을 수지한다.”
【論】 이는 둘째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앞에서 든 다섯 가지 심행(心行)에 따라서 이 다섯 가지 복을 얻는다.
첫째는 (이 경을 수지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장단점을 보지 않기 때문에 대중의 존경을 받는다. 둘째는 항상 상을 떠난 행을 닦기 때문에 몸이 횡액을 당하거나 요절하지 않는다. 셋째는 고요한 마음을 즐기기 때문에 그릇된 논리에 대하여 답변을 잘한다. 넷째는 산란한 곳에 들어가서도 항상 선정에 있기 때문에 중생들을 즐겨 제도한다. 다섯째는 3유(有)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성도(聖道)에 들어간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그런 사람은 중생들을 제도할 때 공양을 받을 수 있습니까?[得受供不:어떤 본에는 ‘供’ 아래 ‘養’이 붙어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사람은 중생에게 큰 복전(福田)이 되며, 언제나 큰 지혜를 발휘하며, 방편[權]과 진실[實]을 함께 연설하니, 이들은 4의승(依僧)26)으로서 모든 공양(供養) 뿐만 아니라 머리와 눈과 골수와 뇌수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도 다 받을 수 있거늘, 어찌 옷이나 밥을 받을 수 없겠는가?
선남자야, 이런 사람은 너희의 선지식이며, 너희의 교량(橋梁)이거늘 어찌하여 범부가 되어 공양하지 않으랴.”
【論】 이 아래는 문답을 통해 거듭 밝힌 부분이다. 그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 복전의 체(體)가 무엇인가를 밝혔고, 다음에 복(福)을 낳는 능력에 관하여 말했다. 이 부분은 첫 번째 대답이다.
‘4의승(依憎)’에서 첫째의 의지할 대상[第一依]은 번뇌성(煩惱性)을 갖춘 지전(地前)의 지위를 말하고, 나머지 3의(依)는 지상(地上)의 지위를 말하니, 『열반경(涅槃經)』에서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이 경을 수지하는 저 사람에게 공양하면, 그 사람은 얼마나 되는 복을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성(城) 안을 가득 채울 만큼의 금은으로 보시하는 자가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이 경에서 네 글귀로 된 게송 하나를 수지(受持)한 그 사람에게 공양하는 것 [供養是人:어떤 본에는 ‘供養是人’ 대신에 ‘不可思議’가 들어가 있다]보다는 못하다.”
【論】 이는 두 번째, 경을 수지하는 자가 많은 복을 생기게 한다는 사실을 밝힌 부분이다. 성 안을 가득 채운 금은으로 경을 수지하지 않는 자에게 보시하여 얻는 복(福)은 밥 한 끼와 옷 한 벌로 이 네 글귀로 된 게송 하나를 수지하는 이에게 공양하여 얻는 복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經】 “선남자야, 모든 중생들에게 이 경을 수지하게 한다면, 마음이 항상 선정에 있어서 본심(本心)을 잃지 않을 것이다. 본심을 잃는다면 참회할 것이니, 참회의 법은 맑고 시원하다[淸凉].”
【論】 이 아래는 참회하므로써 이 경을 유통하게 하는 부분[懺悔流通]이다. 이 중에 둘이 있는데, 먼저 참회의 공덕을 찬양하고, 둘째로는 문답을 통해 거듭 밝힌다. 참회의 공덕을 말한 가운데 ‘청량(淸凉)’이라고 한 것은 불선(不善)의 원인이 되는 혼침과 탁함을 없앴기 때문에 ‘맑다[淸]’ 하였고, 생사의 결과인 뜨거운 고뇌를 떠났으므로 ‘시원하다[凉]’고 하였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먼저 지은 죄를 참회하면 그것은 과거(過去)에 들어가지 않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깜깜한 방에 등불이 밝게 켜지면 어둠이 즉시 사라지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앞에서 지은 모든 죄들을 뉘우친다고 해서 그것들이 과거에 들어갔다고 말하지 말라.”
【論】 이 아래는 두 번째, 문답을 통해 거듭 설명하는 부분[往復重顯]이다. 여기에 두 차례의 문답이 있다. 첫 번째는 참회의 도리를 드러냈고, 두 번째는 참회하는 행법(行法)을 나타낸 것이다.
이 중에서 질문한 뜻은 앞서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을 참회라고 한다면, 앞서 지은 죄는 과거 속에 들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뜻이다. ‘먼저’라는 것은 과거에 들어갔으므로 지금이 아니다. 그렇다면 죄가 없는데 어떻게 참회가 있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답에서 ‘그렇다’ 하신 것은 이와 같이 앞에서 저지른 죄가 과거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없는 것[無]에 대해 참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째서 그런가? 앞서 지은 죄는 본식(本識)에 훈습(熏習)되고, 그 종자(種子)가 항상 흘러서 현재에 이른다. 이러한 이치로 보아 그것은 과거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지금 참회하여 다스리는 능력이 생기면 그 죄의 종자를 현재에 흘러 내려오지 않게 할 수 있다. 마치 등불이 켜지자 캄캄한 방의 어둠이 이내 사라지듯이, 그 죄의 종자가 현재에 이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 때야 비로소 과거에 들어가게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지은 죄를 참회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앞서 있었던 것을 앞서 있었던 것이 아니게 할 수는 없으므로 참회로는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먼저 있었던 것을 지금에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을 뿐인데, 나타나지 않게 하는 것이 참회의 행이다.
이는 번뇌를 끊는다[斷結]는 뜻과는 다르다. 번뇌를 끊는 것은 생멸도(生滅道)라는 면에서, 아직 생기지 않은 것을 현재에까지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여기서 말하는 참회는 상속도(相續道)라는 면에서, 앞서 있었던 것을 현재에 이르지 않게 하는 것이다. 또한 번뇌를 끊는 것이 종자를 영구히 끊어버린다는 뜻인데 비해, 앞서 지은 죄를 뉘우치는 것은 종자의 커지고 강해지는 기능을 덜어내고 눌러서 현재에 이르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거에 들어갔다’고 하였다.
【經】 아난이 여쭈었다.
“어떻게 하는 것을 참회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실관(眞實觀)에 들어가는 것이다. 한번 이 관(觀)에 들 때 모든 죄가 사라지고 모든 나쁜 길을 떠나 정토(淨士)에 태어나서 속히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이루게 된다.”
【論】 이는 둘째, 참회하는 법[行法]이다. 답 중에 둘이 있으니 먼저는 행법(行法)을 설명하고 나중에 참회로 얻는 훌륭한 이익을 보여 준다.
‘이 경의 가르침에 따라서 진실관에 든다’ 함은 금강삼매(金剛三昧)의 가르침[敎旨]에 의해 모든 법상(法相)을 깨뜨리는 것을 진실에 든다고 하였다. 이는 지전(地前)보살이 닦는 상사진관(相似眞觀)이다.
‘한번 이 관에 들 때 모든 죄가 사라진다’ 함은 모든 죄장(罪障)이 망상(妄想)으로부터 생겼으나 이제 모든 상을 깨뜨리고 진실관(眞實觀)에 들어가서 모든 망상경계를 단번에 깨뜨리므로 모든 죄가 싹 없어진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훌륭한 이익에 관하여 설명한 것인데 여기에 두 구가 있다.
‘모든 나쁜 길을 떠나 정토에 태어난다’ 함은 화보(華報)27)를 얻는다는 뜻이고,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善提)를 이루게 된다’ 함은 과보(果報)를 성취한다는 뜻이다.
【經】 부처님께서 이 경을 설하시자 아난과 여러 보살과 사부대중(四部大衆)들은 매우 기뻐하면서 마음에 확신을 얻어,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며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다.
【論】 이는 받들어 행함으로써 유통하는 부분인데, 여기에 네 구가 있다. 법을 듣고 기뻤기 때문에 ‘매우 기뻐했다’ 하였고, 모든 의혹을 떠났기 때문에 ‘마음에 확신을 얻었다’ 하였고, 법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에 ‘부처님 발에 이마를 대고 절하였다’ 하였고, 행할 때 더욱 기쁘기 때문에 ‘기쁜 마음으로 받들어 행하였다’고 하였다.
매우 깊고 미묘한 금강의 가르침
이제 받들어 믿고 간략히 기술하오니
이 선근[善] 법계에 두루하여
모든 중생 남김없이 이롭게 하여지이다.
045_0127_b_08L 論曰此中決前諸品中疑摠持要義而不忘失故從所爲名曰摠持又地藏菩薩已得文義陁羅尼故摠持諸品所有文義及憶大衆起疑之處第發問善決諸疑故從能問名曰摠持 經曰爾時地藏菩薩從衆中起至于佛前合掌胡跪而白佛言尊者我觀大衆心有疑事猶未得決今者如來欲爲除疑我今爲衆隨疑所問願佛慈悲垂哀聽許佛言菩薩摩訶薩汝能如是救度衆生是大悲愍不可思汝當廣問爲汝宣說 論曰正說之內大分有二別明觀行竟在於前此下第二摠決諸疑就文有四初請次許三決四領此問與荅是請及許此能請者名地藏者是人已得同體大悲生長一切衆生善根猶如大地生諸草木以陁羅尼持諸功德惠施一切而旡窮盡如大寶藏珍寶旡盡由是二義名爲地藏今此品中決諸疑惑生諸信解出諸決斷之寶以施求法之衆義當其名故能請問 經曰地藏菩薩言一切諸法云何不緣生爾時如來欲宣此義而說偈言若法緣所生 離緣可旡法 云何法性旡而緣可生法論曰此下第三正決諸疑於中有二一者六品六疑卻次而決二者一品三疑順次而遣初中亦二一者別決二者摠定初別決中別決六疑從後向前漸卻而決今此問荅決如來藏品中起疑彼言因緣旡不不生故不滅於中執有能生因緣而疑其果何不緣生故乘彼疑以問緣生如來一頌正決是疑於中上半定彼本執下半乘彼破其緣生此意正立緣不生法望旡法故如望兔角由是比量彼疑決矣爾時地藏菩薩言法若旡生云何說法法從心生於是尊者而說偈言是心所生法 是法能所取 如醉眼空華是法然非彼論曰此下第二決眞性空品中起疑彼言我說法者以汝衆生在生說故是故說之依此疑云若依彼文佛有說法其所說法從佛心生云何而言法旡生耶爲遣此疑卽有二重一者直遣二者重決此卽直遣言是心所生法是法能所取者今汝所計心所生法直是妄心能取所取如醉酒眼所見空華是法然非彼者是汝所計心所生法如彼空華是法亦然非彼所說法同汝所計生此意正明汝所計法空旡所有是所取故猶如空華我所說法離言絕慮所取能取皆不可言 經曰爾時地藏菩薩言法若如是法卽旡待旡待之法法應自成於是尊者而說偈言法本旡有旡 自他亦復爾 不始亦不終成敗卽不住論曰此是第二重決於中有二先難#後決是難意云若佛所說言教之法非所取故不如空華畢竟旡者是卽此法應自然成以旡待故猶如眞如爲決此難故說是偈是偈意言我所說法絕名言故本旡有旡自他始終若成若敗卽不得住云何得言自然成耶是顯彼因有相違過謂法旡成敗以旡待故如旡所又如眞如由是道理彼難不成難不成故所疑決 經曰爾時地藏菩薩言一切諸法相卽本涅槃涅槃及空相亦如是旡是等法是法應如佛言旡如是法是法是如 論曰此下第三決入實際品中起彼言大力菩薩言衆生心相相亦如來衆生之心應旡別境佛言如是衆生之心實旡別境何以故本淨故理旡穢故有依是文作是念言本淨之心正是如理本來淸淨自性涅槃#若使涅槃亦空旡者是邪旡不爲如理爲遣是疑故說皆如就文有四次許三領四述初問意言若以空義一切諸法相卽是本來淸淨涅槃復融涅槃及其空相卽旡涅槃及空差別是一味法是法應如反彼所執故作是問第二荅中許如所問 經曰地藏菩薩言不可思議如是如相非共不共意取業取卽皆空寂空寂心法俱不俱取亦應寂滅 論曰此是第三領解爲遣伏難有聞前說作是難言本來涅槃旣是一如若融涅槃及其空相是第二如如是二如爲共不共若言共卽非如理有二竝故若不共者卽不更空唯一如爲遣是難故言非共不共非共者旡二如故非不共者有雙遣故所遣雖雙遣處旡二故彼所難皆不應理意取業取卽皆空寂者是顯雙遣遣處旡二意取者所謂涅槃緣寂滅心之所取故言業取者是生死諸煩惱業之所取故此二皆空空寂旡二寂心法俱不俱取亦應寂滅者明一心法亦不守一生死涅槃空寂旡二旡二之處是一心法依一心法有二種門然俱取二門卽不得心二非一故若癈二門不俱而取亦不得心旡非心故由是義故旡二心法俱不俱取亦應寂滅 經曰於是尊者而說偈言一切空寂法 是法寂不空 彼心不空時是得心不有論曰此是第四如來述成一切空寂法者生死涅槃一切空寂之法是法寂不空者旡二之心法非都旡法故雖非旡法而不是有是故解心不空之時是時得知心之不有所以前說俱不俱取皆應寂滅者違道理也 經曰爾時地藏菩薩言是法非三諦空心亦滅是法本滅時是法應是滅於是尊者而說偈言法本旡自性 由彼之所生 不於如是處而有彼如是論曰此是第四決本覺利品中起疑彼言旡住菩薩一切境空一切身空一切識空覺亦應空佛言一覺者不毀不壞決定性非空非不空旡空不空此述文於彼生疑云若是一心亦不是有故寂滅者何故前說一覺不壞故不同彼色心之空今乘是疑故作是問是法非三諦者卽前頌說是一心法非色心空故非三諦然三諦門略有三種一者色諦心諦第一義諦二者有諦旡諦中道第一義諦三者如此品中後文所說今此問意且依初門色空心亦滅者是法旣非三諦攝故色相本空心亦寂滅是色心本寂滅時是一心法應同寂滅卽前偈言心不有故是卽前說不同空者徒爲虛談如是疑也頌中對此明其不同法本旡自性者色心之法本旡自性由彼之所生者由彼本覺之心所生所生色心是差別相彼本覺心離相離性不於如是差別之處而有如彼離相一覺是故空此色心差別相時不得同遣離相一覺由是道理前非虛說經曰爾時地藏菩薩言一切諸法旡生旡滅云何不一於是尊者而說偈言法住處旡在 相數空故旡 名說二與法是卽能所取論曰此是第五決無生行品中起疑彼言緣起非生緣謝非滅在旡有處不見所住決定性故是決定性不一不異有依彼文而起疑云色心等法旡生旡滅卽是平等決定實性是卽橫旡色心之差縱旡生滅之別旡差旡別應是一味不異可爾云何不一頌中對此顯不一義法住處旡在者諸法之住及所住處皆旡所有故相數空故旡者色心等相一異等數悉空故旡也相數旣旡那得有一又旡色故卽旡心相旣非異者如何是一而有名說之二及有所說法者是卽能取妄心所取非如實義有一二等言名說者名是詮用識所取說是語聲耳識所了若言是一卽有此二於中亦有所詮之法如是等數妄心所取非彼實義有如是數云何於中存一味耶 經曰地藏菩薩言一切諸法相不住於二岸亦不住中心識亦如是云何諸境界從識之所生若識能有生是識亦從生云何旡生識能生有所生於是尊者而說偈言所生能生二 是二能所緣 俱本名自旡取有空華幻 識生於未時 境不是時生於境生未時 是時識亦滅 彼卽本俱旡亦不有旡有 旡生識亦旡 云何境從有論曰此是第六決旡相法品中起疑彼言云何生滅慮知相佛言理旡可不若有可不卽生諸念千思萬慮是生滅相今依後說還疑彼文若識能生可不之境相還生諸念之識卽是心識有生有滅云何而言不住二岸若諸心識旡生旡滅云何諸識能生境乘如是疑發如是問不住二岸者旡生旡滅故住中流者而不是一故心識旣爾旡生旡滅云何可不境界從識之所生耶若識能生境識亦從境生何旡生識能生有所生爲遣此疑故說三頌三頌之文卽判爲二初之一頌示其道理後之二頌破相生初中言是二能所緣者謂汝所計識是能生境是所生直是妄取能緣所緣俱是本來但名旡自若取爲有如取空華及取幻象以爲實有是故不異旡生旡滅破中言識生於未時境不是時生者明識能生未有之時所生境界于時不生也於境生未時是時識亦滅者明境能生未有之時其所生識于時亦滅滅者寂滅謂本來旡也彼卽本俱旡亦不有旡有者彼二能生本來俱旡旣旡能生亦不令有故曰不有不令有故後時旡生故言旡有也旡生識亦旡者旡生義何得有識識旡有故境不從有此中卽有二種比量一識不生旡能生故如望燋種二境不起所從故如從龜毛上來六分別決疑竟 經曰爾時地藏菩薩言法相如是內外俱空境智二衆本來寂如來所說實相眞空如是之法卽非集也 論曰此下第二摠定所說摠定六決非病是藥於中有二先定非病後定是藥初中亦二審問定許問中言相如是者摠領前說六分法相言內外者識內境外言二衆者境智衆多故言非集者非集生死雜染患故非如惡取空還集諸患故 經曰佛言如是實之法旡色旡住非所集非能集非義非大一本科法深功德聚論曰此是如來定許言旡色者不生着有之病故旡住者亦離惡取空患故非所集者諦空故非能集者集諦空故非義者離陰界等差別義故非大者離地水等能造相故一本科法者是一本覺以是爲根能生諸行及諸功德故然科有二種一者雜染之科謂諸本識義如上說二者純淨之科謂一本覺如此文說彼本識中積集一切雜染種子此本覺中唯有甚深性功德聚離相離性故名爲深過恒沙數故名爲聚 經曰地藏菩薩言不可思議不思議聚七五不生八六寂滅九相空旡有空旡有旡空無有如尊所說法義皆空入空旡行不失諸業旡我我所能所身見內外結使悉皆寂靜故願亦息如是理觀慧定眞如尊者常說寔如空法卽良藥也論曰此下第二審定是藥於中亦二先菩薩審問中有三一者領前深功德聚二者乘顯深入理觀者審問良藥勝德初中亦三摠摽別顯後還摠結思議聚者摠標離相離性功德別顯之中先明離相後顯離性初中言七五不生者合明二種末識之空恒行識中第七是末不恒行中五識爲末故八六寂滅者合明二種本識之寂恒行識中第八是本不恒行中第六爲本故次顯離性九相空旡者第九識相亦不守性故有空旡有者重成離相八識有相之法空旡所有故旡空旡有者重成離性九識旡相之性空旡所有故一心如是離相離性卽是旡量功德之如是名爲不思議聚如尊所說法義皆空者第三摠結離相離性也次明理觀於中有二別明摠結明之中卽有三句入空旡行不失諸業者是空三昧謂理觀入空而旡能所之行雖旡能所不失六度等業故次明旡相三昧旡我我所能所身見者是離屬見諸煩惱相離我我所相能見所見相故內外結使悉皆寂靜者是離屬愛諸結使相內門諸結外門諸使三界煩惱諸相空故如是名爲旡相三昧故願亦息者是明旡願三昧由三界法皆寂靜故願求之心自然永息如是名爲旡願三昧也如是理觀慧定眞如者是摠結句如前三種皆是理觀止觀旡偏能所旡二故尊者常說寔如空法卽良藥也者第三審問如是空法具諸功德治諸結使是故應卽爲良藥耶經曰佛言如是何以故空故空性旡生心常旡生性旡滅心常旡滅空性旡住心亦旡住空性旡爲亦旡爲空旡出入離諸得失陰界入等皆悉亦旡如不着亦復如是菩薩我說諸空破諸有故 論曰此是如來定許於中有三一者摠許言空故者所以爲良藥者只由空故有卽生病故空性已下第二別於中有二先明服空藥故離流轉之果患後顯服空藥故治取着之因病初中言空性旡生心常旡生入空之心同空旡生故又隨旡滅心常旡滅生滅正是旡常之義故翻彼二名爲常也心亦旡住者但旡初後相亦旡中間住相此是別明離三相也亦旡爲者摠顯離彼三有爲相是明服空離旡常病次明亦離取着之病旡出入者旡有出觀入觀之異離得失者亦離得新失古之相心如不着亦如是者能觀之心亦如空理不取出入得失之相不着陰界入等之法是明服空離取着病也我說諸空破諸有故者第三結定就實而言空理旡二而說五三等諸空者爲破諸人着有病故隨病衆多說空亦爾又復理實非空不空但爲破有强說爲空非空言下存空性也以是二意結諸空教 經曰地藏菩薩言尊者知有非實如陽焰水知實非旡如火性王如是觀者是人智耶 論曰六品六疑卻次而決別決摠定竟在於前此下第二一品三疑順次而遣於中有三如來藏一品之中復起三疑次第遣故第一疑者彼梵行長者頌言若說法有一如焰水迷倒又言若見於法旡如盲旡日倒有依彼說而生疑云長者俗人如是判說爲妄見耶爲眞智耶作如是疑不肯信爲遣彼疑擧彼事問焰水之喩如前已說知實非旡者能知一實義性非旡彼說計旡實者如盲旡日故是知長者知實非旡非旡之義如火性王謂如木中有火大性分析求之不得火相而實不無木中火性鑽而求之火必現故一心亦爾分析諸相不得心性而實不旡諸法中心修道求之一心顯故如是火性相隱勢大如似國主故名王也長者如是離二邊觀是人智耶如是問也 經曰佛言如是何以故是人眞觀觀一寂滅相與不相等#以空取以修空故不失見佛以見佛故不順三流 論曰此下如來決於中有二直決釋決言如是者決是人智何以故下釋其是智於中有二略釋廣演初中言觀一寂滅觀一心法寂滅義故相與不相等#以空取者觀有相俗與旡相眞等不存故融爲一故如是修空正順佛心故常見佛身未曾失時故言不失見佛以常見佛彌增空觀空觀增進違逆諸有故言不順三流流具攝三界煩惱謂欲流有流及旡明流是謂三流義如常說 經曰於大乘中三解脫道一體旡性以其旡性故空空故旡相旡相故旡作旡作故旡求旡求故旡願以是業故淨心以心淨故見佛以見佛故當生淨土菩薩於是深法三化勤修慧定圓成卽超三界 論曰此是第二廣演於中有二先明三解脫道勝利後顯三化勤修勝利初中言一體旡性者彼小乘三解脫門別體有性故顯大乘菩薩觀行一觀心證旡性時隨義假說立三解脫約其忘體性義立空解脫忘卽體相義門立旡相解脫忘卽體用義門立旡作解脫亦名旡願解脫爲顯唯一旡分別觀#於一切法體性相用旡所不遣旡所不融是故建立三解脫門以是業故淨心者以忘一切體相用故能淨出觀涉俗之心離諸染着離染著心能見報佛見報佛故得生淨土是爲三解脫道勝利也於是深法三化勤修者謂於空法勤修三空何者空相亦空是一化修#空空亦空是二化修所空亦空是三化修#義如前說故不別論三化勤修卽達一心達一心故慧定圓成圓成之地卽超三界是爲三化勤修勝利 經曰地藏菩薩言如來所說旡生無滅卽是旡滅是生滅生滅滅已寂滅爲常常故不斷是不斷法離諸三界動不動法於有爲法如避火坑依何等法而自呵責入彼一門 論曰此下遣其如來藏品之第二疑彼言了見識爲常是識常寂滅寂滅亦寂有依彼文而生疑云如是常住之寂滅法雖可欣樂而是希夷衆生之心麤淺難調如何調心得趣彼乘如是疑作如是問問中有二初擧果遠後問入初中言旡生旡滅卽是旡常者卽領前言是識常寂滅本來寂滅故是旡生旡滅而本非常故是旡常滅是生滅生滅滅已寂滅爲常者卽領前言寂滅亦寂滅又言了見識爲常於有爲法已下第二正問趣入彼門方便前雖有說方便正觀而略說故更請廣說 經曰佛言菩薩於三大事呵責其心於三大諦而入其行地藏菩薩言云何三事而責其心云何三諦而入一行佛言三事者一謂因二謂果三謂識如是三事從本空旡非我眞我云何於是而生愛染是三事爲繫所飄飄流苦海以如是事常自呵責三諦者一謂菩提之道是平等諦非不等諦二謂大覺正智得諦非邪智得諦三謂慧定旡異行入諦非雜行入諦以是三諦而修佛道是人於是法旡不得正覺得正覺智流大極慈己他俱利成佛菩提論曰是文有四初問次荅三請四說說中有二先說呵厭方便後示趣入方便初中言因者五戒十善之果者人天富樂之果識者能持因果卽是本識生計此爲自內我而是性空故非是我旡我之理方是眞我故於非我不應愛染觀是三事爲繫所飄者謂由四繫障理定心令是三事飄流苦海故何等名爲四繫如對法論諦品中云繫有四種謂貪欲身繫瞋恚身繫戒禁取身繫此實執取身繫以能障礙定意性身故名爲繫所以者何由此能障定心自性之故名爲繫非障色身何以故能爲四種心亂因故謂由貪愛財物等爲因令心散亂於鬪諍事不正行爲因令心散亂於難行戒禁苦惱爲因令心散亂如正理推求境界爲因令心散亂由彼依止各別見於所知境不如正理種種推度妄生執著謂唯此眞餘竝愚妄由此爲因令心散動於何散動謂於定心如實智見故以如是事常自呵責者呵責能飄四繫而厭所流三事故已說呵厭方便云何趣入方便所謂審諦於三諦故一謂菩提之道是平等諦非不等諦者謂佛所證性淨菩提旡不通泰故名爲道切有情皆同此性旡一不歸是究竟道故言平等不平等是卽對治二乘別趣也二謂大覺正智得諦非邪智得諦者謂一切智大覺之果唯證平等正智所得非緣冥諦大有等境邪智所得是卽對治諸外道執也三謂慧定旡異行入諦非雜行入諦者謂得正智入平等時慧定圓融旡別行相方是眞入於平等諦非如世間分別之心王數別體定慧異行如是雜行非眞入故是卽對治世閒觀行未證謂證增上慢者如是三種通名諦者審諦之觀所觀境故遍治如是三種異執乃能正修於一佛道故言以是三諦而修佛道次顯修道所得之果是人於是法旡不得正覺者是顯自利智德之果於是三法而修佛道有不獲正覺果故得正覺智流大極慈者是顯利他恩德之果普流大極旡緣之慈遍周法界旡不利故己他俱利成佛菩提者摠結前二二利圓滿成等覺 經曰地藏菩薩言尊者如是之法卽旡因緣旡緣法因卽不起云何不動法入如來 論曰此下遣彼如來藏品第三之疑如彼品頌末言轉所取能取入於如來藏有依此說而疑彼云此中菩提之道平等之諦卽是如來藏不待因緣力云何彼轉能所之因而能得入如來藏法有作是疑故乘彼問卽旡因緣者由平等故不從因緣又平等故卽旡餘緣緣旡故因不能起云何於彼旡起動法而用因緣得入如來若用因力之所入者卽待因緣非不動故經曰爾時如來欲宣此義而說偈言一切諸法相 性空旡不動 是法於是時不於是時起 法旡有異時 不於異時起法旡動不動 性空故寂滅 性空寂滅時是法是時現 離相故寂住 寂住故不緣論曰此下如來正決所疑宣其平等不動而有得入之義八行頌中卽有二分前三略說後五廣宣略中有二前三頌明不動之義後一頌顯得入之義初中有三謂標謂初二句標不動義次有四句釋不動義是法於是時不於是時起者是時者謂此世世者是現在現在之時永旡暫住細除已未卽旡中如除光陰旡中間處故於是時不得有起法旡有異時不於異時起者言異時者所謂過未未來未有故旡起義過去已旡亦旡起義由是道理法旡起動旣旡生起之動亦旡恒住不動故言法旡動不動性空故寂滅是二句者結不動義次有一頌明得入義性空寂滅時者了見性空寂滅之時不動之法是時顯現顯現於心故言得入如是上半明得入義然此顯法離一切相離諸相故寂靜而住住寂靜故恒不從緣是故雖有入不廢離緣義如是下半顯離緣義 經曰是諸緣起法 是法緣不生 因緣生滅旡生滅性空寂 緣性能所緣 是緣本緣起故法起非緣 緣旡起亦爾 因緣所生法是法是因緣 因緣生滅相 彼卽旡生滅論曰此下第二廣宣於中有二是前三頌廣不動義其後二頌宣得入義初中亦二謂前二頌推本旡得以顯不動後之一頌逐末旡得以顯不動初中有三謂標初言是諸緣起法是法緣不生者標諸果法其緣不生次有四句釋不生義因緣生滅旡者諸因緣生滅不住故旡生果之功能也生滅性空寂以不住故卽旡生滅性空寂故亦不生果緣性能所緣者因緣種子冥伏名性增上緣根能對境界名能緣所緣境界根所對故名爲所緣次第緣法滅故不論如是種子性緣幷其能所二緣皆是本緣之所起故故言是緣本緣起是卽其本諸緣亦同前說滅性空故旡生用由是三義緣旡生義故法起非緣結果法起非緣所生緣旡起亦爾者結緣旡起亦同其果次有一頌逐末旡得以顯不動因緣所生法是法是因緣者明諸果法亦爲因緣望後生法而作緣故是諸果法旣爲因緣卽同前說生滅性空故言因緣生滅相彼卽旡生滅前略說時直顯果空故廣時就因緣說欲顯諸法因果不動卽是平等菩提之道非此法外別求菩提是謂此偈之大意也如肇法師言道遠乎哉觸事而眞聖遠乎哉體之卽神矣經曰彼如眞實相 本不於出沒 諸法於是時自生於出沒 是故極淨本 本不因衆力卽於後得處 得得於本得論曰此二頌是宣得入義於中有三一者一頌對諸有動顯如不動二者二句明不動本不待衆緣三者二句明離緣法有得入義後得處者謂道後處前略說中言寂滅時卽是此言後得之處旣是寂滅何有處時但離時處故寄之時處耳得得於本得者始覺究竟故名爲得是能得故始覺究竟還同本覺以之故言得於本得上來第三決疑分竟 經曰爾時藏菩薩聞佛所說心地快然時諸衆等旡有疑者衆心已而說偈言我知衆心疑 所以殷固問 如來大慈善分別旡有餘 是諸二衆等 皆悉得明了我今於了處 普化諸衆生 如佛之大悲不捨於本願 故於一子地 而住於煩惱論曰此是第四領解此三頌中卽有二分前一頌半結前決疑之利後一頌半申後普化之行一子地者初地已上已證一切衆生平等視諸衆生如視一子是名淸淨增上意樂寄喩表心名一子地而住於煩惱者菩薩雖得諸法平等而以方便力不捨煩惱捨一切煩惱隨眠便入涅槃違本願故如瑜伽論摩呬多決擇中云滅盡等至當言旡漏由與煩惱不相應故非相應故旡所緣故非諸煩惱之所生故出世閒一切異生不能行故唯除已入遠地菩薩薩雖能起出世法令現在前然由方便善巧力故捨煩惱案云此中言不捨者非究竟捨如羅漢等曰不捨非全不捨故言不捨於中委悉如二障章說由不捨故言住煩惱由是不入涅槃普化十方界故此一卷經有三分中第二正說竟在於前也 經曰爾時如來而告衆言是菩薩者不可思議恒以大悲拔衆生苦若有衆生持是經法持是菩薩名卽不墮於惡趣一切障難皆悉除滅若有衆生旡餘雜念念是經如法修習爾時菩薩常作化身而爲說法擁護是人終不暫捨令是人等速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論曰此下第三名流通分於中有六一者讚人流通二者勸衆流通三者立名流通四者受持流五者懺悔流通六者奉行流通此卽第一讚人流讚能流通是經菩薩四種勝德一者大悲普化一切功德二者別益持是經者功德三者化身說法功四者令得極果功德 經曰汝等菩薩若化衆生皆令修習如是大乘決定了義 論曰此是第二勸衆流通決定了義者爲顯最深最極不可以加矣經曰爾時阿難從座而起前白佛言如來所說大乘福聚決定斷結旡生覺利不可思議如是之法名爲何經受持是經得幾所福願佛慈悲爲我宣說此下第三立名流通先問後荅問中亦二先領後問領中卽顯是經四種勝能一能令持者得旡量福如經大乘福聚故二能令持者永斷諸結如經決定斷結故三者所詮之旨是本覺利如經旡生覺利故四者能詮之教難可思量如經不可思議故次問中問二事先問經名爲知經要故後問持福求福持經 經曰佛言善男子是經名者不可思議過去諸佛之所護念能入如來一切智海若有衆生持是經者卽於一切經中旡所希求是經典法摠持衆法攝諸經要是諸經法法之繫宗是經名者名攝大乘經又名金剛三昧又名旡量義宗 論曰此下荅中有二其次第荅二問故初中亦二先讚名義後正立名中亦二先摠歎名後別顯義能入已下是別顯義顯三義能入如來智海乃至旡所希求者是顯金剛三昧之名之義旡法不壞旡理不窮由是令入如來智海過是更旡所希望故是經典法摠持衆法攝諸經要者是顯攝大乘經之名之義是諸經法法之繫宗者是顯旡量義宗之名之義是二名義有何差別前明廣攝衆經之義後顯衆經所宗之極次立三名於中委悉者文前二門中已廣說也 經曰若有人受持是經典者卽名受持百千諸佛如是功德如虛空旡有邊際不可思議我所囑累唯是經典論曰此是荅第二問於中卽顯四種勝德一者持佛勝德是經能攝諸佛心故如經受持百千諸佛故者廣大勝德如經旡有邊際故三者甚深勝德如經不可思議故四者旡比勝德如經唯是經典故阿難言云何心行云何人者受持是經佛言善男受持是經者是人心旡得失常修梵行若於戲論常樂淨心入於聚落心常在定若處居家不著三有論曰此下第四受持流通於中有二一者正明受持二者往復重顯初中亦二先問後荅問中有二先問受持經者心行後問受持經者福利荅中次第荅此二問初中卽明五種心行一心旡得失者不觀他人之長短故二常修梵行者內修離相之淨行故三常樂靜心者在動不動故四心常在定者入散不散故五不著三有者居染不染故 經曰是人現世有五種福一者衆所尊敬二者身不橫夭三者辯荅邪論四者樂度衆生五者能入聖道如是人者受持是經論曰此是荅第二問隨前五行得此五福衆所尊敬由其不觀衆之長短故身不橫夭者由其常修離相行故辯荅邪論者樂靜心故樂度衆生者入散常定故能入聖道者不著三有故 經曰阿難言如彼人者度諸衆生得受供不佛言如是人者能爲衆生作大福田常行大智權實俱演是四依僧於諸供養乃至頭目髓腦亦皆得受何況衣食而不得受善男如是人者是汝知識是汝橋梁何況凡夫而不供 論曰此下往復重顯於中有二先明福田之體後顯生福之能此卽初也四依僧者第一依是具煩惱性位在地前其餘三依位在地上如涅槃經之所廣說 經曰阿難言於彼人所受持是經供養是人得幾所福佛言若復有人持以滿城金銀而以布施不如於是人所受持是經一四句偈供養是人此是第二明持經者能生多福以滿城金銀施不持經者所得之福不如一餐一衣供養持此一四句偈之所得福故 經曰善男子令諸衆生持是經者心常在定不失本心若失本心卽當懺悔懺悔之法是爲淸涼 論曰此下第五懺悔流通於中有二讚懺悔功德二者往復重顯初中言淸涼者滅不善因沈濁故淸離生死果熱惱故涼 經曰阿難言悔先罪不入於過去也佛言如是猶如暗室若遇明暗卽滅矣善男子旡說悔先所有諸罪而以爲說入於過去 論曰此下第二往復重顯於中卽有二番問荅初番顯其懺悔道理後番顯其懺悔行法中問意言懺悔先罪名懺悔者先罪不入於過去耶若先非今故入過去者云何於旡罪而有懺悔耶中言如是者如是先罪不入過去故不於旡而有懺所以然者先所作罪熏於本識種子恒流在於現由是道理未入過去且今懺悔能治生時令彼罪種不流現在如燈生時室暗方滅罪種不至於今現故時方說令入過去而旡說悔先所有罪者先所有者非悔所及不能令彼非先有故但其先有令不至現不至現者由悔所爲此與斷結之義異者彼約生滅道故令未生者不至現在此就相續道故令先有者不至現在又斷結者永斷種子悔先罪者損伏種子增强之用不至現在故約此義說入過去也 經曰阿難云何名爲懺悔佛言依此經教入眞實觀一入觀諸罪悉滅離諸惡趣當生淨土速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 論曰此是第二懺悔行法荅中有二明行法後示勝利#初中言依此經教入眞實觀者依金剛三昧教旨破諸法相名入眞實此是地前相似眞觀一入觀時諸罪悉滅者一切罪障從妄想生今破諸相入眞實觀頓破一切妄想境界所以諸罪一時悉滅次顯勝利卽有二句離諸惡趣當生淨土是明華報速成阿耨多羅三藐三菩提者是示果 經曰佛說是經已爾時阿難及諸菩薩四部大衆皆大歡喜心得決定頂禮佛足歡喜奉行 論曰此是第六奉行流通於中四句皆大歡喜者聞法歡喜故心得決定者離諸疑惑故頂禮佛足者重法敬人故歡喜奉行者行時轉喜故甚深且微金剛教 今承仰信略記述願此善根遍法界 普利一切旡遺缺金剛三昧經論卷下
045_0139_b_01L엎드려 바라옵니다. 임금의 복덕은 끝이 없고 태자의 궁궐에는 경사스러움이 모이며, 재앙의 티끌은 영원히 가라앉고, 조정과 재야는 태평한 세상이 되옵소서. 진양공(晉陽公 : 崔怡)의 복은 그 깊이 바다와 같고, 수명은 그 높이가 큰 산과 같기를 바라옵니다. 다음으로 바랍니다. 부디 홀어머니께서 부처님의 충실한 제가가 되고, 아픔의 신음이 변하여 노래가 되며, 영원히 그 수명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경판을 새기고 인출하여 유포하며 거듭 생각해보니, 이 경(經)은 용궁[虯宮]으로부터 나와서,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시 바랍니다. 부디 법계(法界)에 두루 미쳐 중생[含生]이 생생하여 질병의 신음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포태(胞胎)에 머물지 않고 항상 여러 부처님의 정묘국토(淨妙國土)에서 노니소서.
갑진년(고종 31, 1244) 8월 초 5일 우바새(優婆塞) 정안(鄭晏)이 지음.
당 신라국 황룡사 사문 원효전
대송좌가(大宋左街) 천수사(天壽寺) 통혜대사(通慧大師) 사자체영(賜紫替寧) 봉친찬(奉勅撰)
승려 원효는 성이 설(薛) 씨이고, 동해(凍害) 상주(湘州) 사람이다. 어린 나이에 영광스럽게 입법(入法)하여, 스승을 따라 가르침을 받았다. 노니는 곳이 일정치 않았으며, 의미의 경계를 과감하게 격파하고 문장의 짜임새를 용감하게 가로질러, 우뚝하고 굳세게 전진하여 앞을 막는 것이 없었다. 삼학(三學)1)에 정통하여 신라에서 만인을 대적할 만하다고 하였다. 정밀한 의해(義解)가 신의 경지에 들어간 것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의상법사와 당나라에 들어가려고 하였으니, 현장삼장의 자은사 문하를 흠모한 것이다. 그 인연이 어그러지자 마음을 쉬고 노닐었다. 오래지 않아, 말을 내뱉는 것이 도리에서 어긋나고 행적을 보이는 것이 어그러져, 거사와 함께 주막과 사창가를 드나들고, 지공(誌公) 스님처럼 금칼과 쇠지팡이를 가지고 다녔다. 혹은 소(疏)를 지어 잡화(雜華)를 강설하거나 거문고를 연주하며 사당에서 즐기기도 하고, 여염집에서 잠을 자거나 산이나 강가에서 좌선하기도 하였다. 뜻대로 형편에 따르니 도무지 일정한 법식이 없었다. 이때 국왕이 백좌인왕경대회(百座仁王經大會)를 열어 덕이 높은 승려를 두루 찾았다. 본 고을에서 그가 명망이 있다고 천거하였으나, 다른 승려들이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왕에게 참소하였으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의 머리에 악성종기가 났는데 의원도 효험이 없었다. 왕과 왕자, 신하들이 산천의 영험한 사당에서 기도하며,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 무당이 말하였다.
“만일 사람을 보내어 다른 나라에 가서 약을 구한다면, 병이 나을 것입니다.”
왕이 곧 사자를 보내어 바다 건너 당나라에 들어가 그 의술을 구해오도록 하였다. 넓고 깊은 바다에서 홀연히 한 노인이 나타나, 파도에서 뛰쳐나와 배에 올라 타고는 사자를 맞이하여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장엄하고 화려한 궁전을 보고, 용왕을 알현하였다. 왕의 이름은 금해(鈐海)이다. 용왕이 사신에게 말하였다.
“그대 나라의 왕비는 청제(靑帝)의 셋째 딸이다. 우리 궁전에는 예전부터 금강삼매경이 있었으니, 이에 한 각(覺)이 원만히 통하여 보살행을 보인 것이다. 지금 왕비의 병에 의탁하여 증상연(增上緣)1)을 맺고, 이 경을 보내어 그대의 나라에 널리 퍼트리고자 한다.”
이에 30장쯤 되는 중첩되고 흩어진 경을 사자에게 주면서 다시 말하였다.
“이 경전이 바다를 건너는 도중에 마사(魔事)를 당할까 두렵다.”
왕이 사람을 시켜 사자의 장딴지를 칼로 찢게 하여, 그 안에 경전을 넣고 밀랍종이로 봉하였다. 약을 발라주자 장딴지가 예전과 같았다. 용왕이 말하였다.
“대안성자(大安聖者)에게 차례를 매겨 경을 엮도록 하고, 원효법사에게 청하여 소를 짓고 경을 강설하고 풀이하게 한다면, 왕비의 병이 낫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설산의 아가타약의 효력도 이보다 뛰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용왕이 전송하여 바다밖으로 나오니, 드디어 배에 올라 귀국하였다.
이에 왕이 듣고 기뻐하며, 곧 대안성자를 먼저 불러서 차례대로 엮게하였다. 대안성자는 예측할 수 없는 인물로, 형색과 차림새가 특이하였다. 항상 저잣거리에서 구리로 만든 발을 두들기며 ‘크게 편안하시오, 크게 편안하시오’라고 외쳤기 때문에 대안(大安)이라고 부른 것이다. 왕이 대안에게 명하자, 대안이 말하였다.
“그저 경전만 가지고 오십시오. 왕궁에는 들어가길 원하지 않습니다.”
대안이 경전을 받아 배열하여 여덟 품(品)으로 만드니, 모두 부처님의 뜻에 들어맞았다. 대안이 말하였다.
“속히 원효에게 보내어 강하도록 하십시오. 다른 사람은 안됩니다.”
원효가 이 경을 받은 것은 바로 본래 태어난 곳인 상주에 있을 때였다. 사자에게 말하였다.
“이 경은 본각과 시각의 두 가지 깨달음을 종지로 삼으니, 나를 위하여 소가 끄는 수레를 준비하여 주십시오.”
책상을 두 뿔의 사이에 두고 붓과 벼루를 놓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소가 끄는 수레에서 소(疏)를 지어 5권을 만들었다. 왕이 요청한 기한에 황룡사에서 강설하기로 하였으나, 이때 박덕한 무리가 새로 지은 소(疏)를 훔쳐가 버렸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사흘을 연기하고, 다시 소(疏)를 적어 3권을 만들었으니, 이를 약소(略疏)라고 하였다.
왕과 신하, 승려, 속인들이 구름떼처럼 법당을 에워쌌다. 원효가 곧 설법을 함에 위의(威儀)가 있고 엉클어진 것을 풀이해주니 법식으로 삼을 만했다. 사람들이 칭찬하고 찬양하며 손가락을 부딪치니 그 소리가 하늘에 들끓었다. 원효가 다시 소리높여 말하하였다.
“지난번 백 개의 서까래를 고를 때에는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오늘 하나의 마룻대를 놓는 곳에는 오직 나 홀로 가능하구나.”
이때 모든 이름난 대덕들이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엎드려 참회하였다.
처음 원효가 행적을 보인 것은 항상함이 없었으며, 사람을 교화하는 것도 일정하지 않았다. 혹 소반을 던져 대중에게 구하기도 하고, 물을 뿜어 불을 끄기도 하며, 여러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거나, 모든 곳에서 입멸할 것을 알리기도 하였으니, 또한 배도(盃度)와 지공(誌公)의 부류가 아니겠는가? 해성(解性)을 살펴보면 밝지 않은 것이 없다. 소는 광본(廣本)과 약본(略本)이 있으니 모두 본토에서 유행하였다. 약본은 중국에 유입되어, 후에 번경삼장(翻經三藏)이 이것을 고쳐 ‘논(論)’이라고 하였다.
덧붙여서 말하였다.
“해룡(海龍)의 궁전은 어디에서 경본을 지니고 있었는가?”
통에서 말하였다.
“경에서 ‘용왕의 궁전에는 칠보탑이 있어, 모든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깊은 교의(敎義)가 별도로 칠보상자에 가득히 담겨 있으니, 십이인연과 총지와 삼매 등이다.’라고 하였다. 진실로 이 경을 합하여 세간에 유행시켜, 다시 대안과 원효스님의 신이함을 드러내었으니, 이에 왕비의 병을 가르침을 일으키는 큰 실마리로 삼은 것이다.”
045_0139_a_10L伏爲 寶祚無疆儲闈凝慶氛塵永寢朝野昇平晉陽公福海等濬壽嶽齊高次願孀親洎及佛奴變呻爲謳嚮年有永鏤板印施重念 此經出自虯宮起因於疾病更願普及法界含生生生不聞疾病之音不處胞胎常遊諸佛淨妙國土爾甲辰八月初五日婆塞鄭 晏誌唐新羅國黃龍寺沙門元曉傳大宋左街天壽寺通慧大師賜紫 替寧奉勅撰釋元曉姓薛氏東海湘州人也丱䰂之年惠然入法#隨師稟業遊處無恒勇擊義圍雄橫文陣仡仡然桓然進無前卻蓋三學之淹通彼上謂之萬人之敵精義入神爲若此也嘗與湘法師入唐慕奘三藏慈恩之門厥緣旣差息心遊往無何發言狂悖示迹乖同居士入酒肆倡家若誌公持金刀鐵錫或製疏以講雜華或撫琴以樂祠宇或閭閻寓宿或山水坐意隨機都無定檢國王置百座仁王經大會徧搜碩德本州以名望擧進之諸德惡其爲人譖王不納居無何王之夫人腦嬰癰腫醫工絕驗王及王臣屬禱諸山川靈祠無所不至有巫覡言日茍遣人往他國求藥是疾方瘳王乃發使泛海入唐募其醫術溟漲之中忽見一翁由波濤躍出登舟邀使人入海睹宮殿嚴麗見龍王王名鈐海謂使者日汝國夫人是靑帝第三女也我宮中先有金剛三昧經一覺圓通示菩薩行也今託仗夫人之病爲增上緣欲附此經出彼國流布耳於是將三十來紙重沓散付授使人復日此經度海中恐罹魔事王令持刀裂使人腨腸而內于中用蠟紙纏縢以藥傳之其腨如故龍王言可令大安聖者銓次綴縫請元曉法師造疏講釋之夫人疾愈無疑假使雪山阿伽陁藥力亦不能過是王送出海面遂登舟歸國時王聞而歡乃先召大安聖者𪍒次焉大安者不測之人也服特異恒在市廛擊銅鉢唱言大安大安之聲故號之也王命安安云伹將經來不願入王宮閾安得經排耒成八品皆合佛意安曰速將付元曉講餘人則曉受斯經正在本生湘州也謂使人曰此經以本始二覺爲宗爲我備角乘將案几在兩角之閒置其筆硯始終於牛車造疏成五卷王請剋日於黃龍寺敷演時有薄徒竊盜新疏以事白王延于三日重錄成三卷號爲略疏#洎乎王臣道俗雲擁法堂曉乃宣有儀解紛可則稱揚彈指聲沸于空曉復唱言曰昔日採百椽時雖不預會今朝橫一棟處唯我獨能時諸名德俯顏慚色伏膺懺悔焉初曉示迹無恒人不定或擲盤而救衆或潠水而撲焚或數處現形或六方告滅亦盃度誌公之倫歟其於解性覽無不明矣疏有廣略二本俱行本土略本流入中華後有翻經三藏改之爲論焉 系日海龍之宮自何而有經本耶通曰經云龍王宮殿中有七寶塔諸佛所說諸深義別有七寶篋滿中盛之謂十二因緣摠持三昧等良以此經合行世閒復顯大安曉公神異乃使未人之疾爲起教之大端者也出大宋高僧傳第四卷
  1. 1)각(覺)의 속성 또는 각의 공덕, 각의 덕과 같은 뜻이다.
  2. 2)바라제목차계(波羅提木叉戒), 즉 출가 승려들이 반월(半月)마다 설계하며 수도할 때 기준이 되는 계(戒).
  3. 3)진성이 공하다는 도리를 설명하는 여섯 대단원 중에 첫째는 3취계(聚戒)가 진성으로부터 성립된 것임을 밝혔고, 둘째는 37조도품(助道品)이 진성(眞性)에서 성립됨을, 셋째는 여래의 가르침이 여여한 도리에 일치함을, 넷째는 보살의 지위가 본각의 이익에서 나온 것임을, 다섯째는 대반야(大般若)가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 것임을, 여섯째는 큰 선정(大禪定)이 모든 명수(名數)를 넘어선 것임을 밝혔다.
  4. 4)여리지(如理智)의 상대로써 속제지(俗諦智)를 말함. 현상계의 수량과 차별에 응하여 그 차별상을 명백히 아는 불(佛), 또는 보살의 지혜.
  5. 5)속제(俗諦)와 진제(眞諦). 불요의(不了義)와 요의제(了義諦), 세속제(世俗諦)와 제일의제(第一義諦). 연기의 현실을 아는 것과 그 실상을 아는 것과의 두 가지 길.
  6. 6)업에 의해 몸을 받는[業生身] 중생의 생사를 분단생사(分段生死)라고 하는 데 비해, 마음먹은 대로[意生身] 중생을 위해 몸을 바꿔 태어나는 보살의 생사를 변역생사(變易生死)라고 한다.
  7. 7)4선(禪):색계사선(色界四禪)으로서 초선(初禪)ㆍ제2선(第二禪)ㆍ제3선(第三禪)ㆍ제4선(第四禪)을 말한다.
  8. 8)앞의 4선(禪)과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ㆍ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ㆍ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ㆍ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말한다.
  9. 9)생멸(生滅)과 진여(眞如), 속(俗)과 진(眞)의 이문.
  10. 10)별현관행(別顯觀行)을 「무상법품(無相法品)」, 「무생행품(無生行品)」, 「본각리품(本覺利品)」, 「입실제품(入實際品)」, 「진성공품(眞性空品)」, 「여래장품(如來藏品)」 여섯으로 나누었다.
  11. 11)범정행(梵靜行):성(聖)의 경지를 넘어서는 완벽한 수도의 경지를 말함.
  12. 12)「여래장품」을 크게, 제법과 제행이 동일하게 한곳에 들어감을 밝힌 부분[明諸法諸行同入一處]과 들어가는 행과 들어가는 지혜의 인과차별을 드러낸 부분[顯入行入智因果差別] 둘로 나눈 가운데 두 번째이다.
  13. 13)5식(識)이 전광(電光)과 같이 일어남을 말함.
  14. 14)마나스식 즉, 제7식이라고도 하며 의(意)라고도 부른다.
  15. 15)자기 주관을 이루는 모든 식(識).
  16. 16)주관적 의식의 대상이 되는 바깥 경계.
  17. 17)명언(名言)에 의한 훈습(熏習)으로 생기는 종자(種子). 일체법이 생하는 직접적인 인연이 됨.
  18. 18)눈병 난 사람에게 보이는 헛것. 가느다란 털이 바퀴모양처럼 어른거리듯 하므로 이렇게 표현함.
  19. 19)무량한 법이 여래장에 들어감을 설하는 『여래장품(如來藏品)』은 크게 제법과 제행이 한곳에 들어감을 밝히는 대목[諸法諸行同入一處]과 들어가는 행과 들어가는 지혜의 인과차별을 밝히는 대목[入行入智因果差別]으로 나뉜다. 후자는 다시 입행차별(入行差別), 입지차별(入智差別), 입인사용(入因事用), 입과상법(入果常法)의 넷으로 나뉜다.
  20. 20)보신물(報身佛) 즉, 훌륭한 수행의 과보로 얻는 불신.
  21. 21)아견신박(我見身縛)과 같음. 나라는 실체가 있어서 변하지 않는다고 집착하는 그릇된 견해.
  22. 22)명제(冥諦)는 수론(數論)외도가 주장하는 만물의 근원. 대유(大有)는 승론(勝論)외도가 주장하는 총상(總相).
  23. 23)원문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나 다른 본에 ‘二’로 되어 있다. 앞 뒤 내용을 살펴 ‘二’로 번역한다.
  24. 24)등지는 삼매(三昧)의 다른 이름. 멸진등지는 멸진정(滅盡定)을 말함.
  25. 25)모든 종지(宗旨)를 다 연결한 것이라는 뜻.
  26. 26)중생에게 의지가 되는 네 부류의 수행자라는 뜻에서 4의승이라 한다. 첫째는 3현과 4선근위, 둘째는 수다원과 사다함, 셋째는 아나함, 넷째는 아라한.
  27. 27)열매를 맺기 전에 꽃이 피듯, 내세의 과보를 받기 전에 현세에서 받는 고락.
  28. 1)불교 승려가 닦아야 할 이른바 계(戒)ㆍ정(定)ㆍ혜(慧)의 공부를 말하는데, 계는 계율(戒律), 정은 선정(禪定), 혜는 이를 통해서 발휘되는 지혜(智慧)를 뜻한다.
  29. 1)삼연(三緣)의 하나로, 중생이 평생 동안 염불을 하면, 부처가 그들이 지은 죄를 모두 없애주고 그들이 죽을 때 보살들과 함께 와서 맞아가는 일을 이른다.